| >>2023-6/14 존 파이퍼 "믿는 것 넘어 하나님을 가장 소중한 보물로 생각하라" [기독일보 지민호 기자] 한국에도 잘 알려진 베들레헴 침례교회 존 파이퍼 목사가 "하나님을 내 삶 최고의 보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단순히 '칭의'(justification)와 '의'(righteousness)를 위한 구원자를 넘어, 내 삶의 가장 소중한 보물 말이다. 존 파이퍼 목사는 28일 자신의 기독교 블로그 디자이어링갓(DesiringGod)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 구원을 얻었는가 아니면 기뻐함으로 구원을 얻었는가?"(Are we saved by belief in God or delight in God?)란 글을 올렸다. 파이퍼 목사는 이 글을 통해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죄를 사하시고 의롭게 하시는 '구원자'로만 볼 것이 아니라 했다. 그는 그러한 '믿음'을 기반으로 그것을 넘어, 하나님에게 가장 높은 가치를 두고 내 삶의 가장 소중한 보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쉬운 예로 파이퍼 목사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보다 일 혹은 건강 등의 가치에 더 몰두할 경우,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가 이뤄지기 어렵다고 했다. 기독교인들은 "거듭났다" "의롭게 됐다" 천국에 갈 수 있다" "영생을 누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예수보다 다른 귀한 무언가를 갖고 있다면, "어떤 성경을 읽어서 그러냐"고 되물었다. 성경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다는 의미다. 파이퍼 목사는 이것이 기독교인들에게 "완벽한 믿음을 가져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했다. 이는 기독교인의 매일 삶 가운데 예수를 첫 보배로 두라는 의미로, 그럴 때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가 이뤄질 수 있다는 이야기라고 했다. ----------- <영적 독서=렉티오 디비나(Lectio Divina Caritas)란 > ....진정한 의미 ((아버지께 사랑 드림-누림-하나 됨으로 내어드리기))의 관상 기도를 위해서라면!! 그대는 영 안에서 진실로 진실로 깨어나야, 깨어 있어야 한다!! 결코 잊지말라.. 관상적 기도(이는 진정 Q 사랑하여 하나 됨, 곧 그분을 알고 사랑하여 따르며 섬김-맡겨드림-누림의 기도이기에 "관상 기도"라고 고유한 명칭을 쓰고 있음)를 아무 데나 [관상]이라 말하면서 일반화하여 타 종교인들과의 종교적 영역에서의 세계종교 간의 영적/내적 통합 운운하며(이것이야말로 영적 간음이다!!) 곁길로 나아가게 만들려는 다양한 명상(?) 시도를 통해, 심지어!! [비그리스도인들과 같은 시간-같은 장소에서 명상을 통해] 동일한(?) 평정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자기도 모르게, (유대 신비주의, 바벨론적 신비주의, 또는 동양적 신비주의 등 다양한 유형을 교묘히 혼합해 놓은, 일종의 신비주의-영지주의 일파에 속하는) 뉴에이지 사조에 동조하고 있는 [일부 몰지각하다 못해] 극히 부주의한, 어리석은 언행에 대해 극도로 조심할 필요가 있음을 반드시 기억해 두라. .... [오직 적그리스도에 속하였는지를 분별할 포인트는 이미 경고하신 바 그대로!!] 주 예수님만이 Q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심 받은 절대유일무이한 대속 구주이심과, 그분의 유일무이한 영단번의 십자가 구속을 믿는 성도인지 여부이다!!.. 믿음을 통한 거듭남을 알지 못하는, 타 종교인(비그리스도인)들의 경험했다고 증언하고 싶어하는 바, 분명히 Q 없이 [자기 비움에 의해 속칭 그들끼리 조물주라고 불리우는 대상을 경험함이자, 더 나아가 심지어, 스스로 [나도 신이다!!]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황홀 경험 추구자들의 경험 가능한(결국 사탄과 일체 이룸을 그 목적으로 삼는)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유일무이한 길-진리-생명-빛-사랑-거룩-의이신 그리스도를 배제한, 그 어떤 형태이든지 [관상 수련]이라고 갖다 붙이는 함정을 잘 분별할 필요가 있다!! --그 근원은 히브리어의 하가다(Haggadah)에서 유래된 것으로 자유로이 성경의 본문을 사용하여 성경의 내적 의미를 발견코자 했던 예수님 시대의 경건한 성경공부의 전통으로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구절이 마음속에 녹아들고 삶이 변화될 때까지 그것을 반복적으로 읽고 암송하여 이로써 사람의 마음과 존재 전체에 변화가 일어나도록 하였다. -오늘날 렉티오 디비나(Lectio Divina=거룩한 독서, 영적독서)의 방법은 전통적으로 스콜라 방식으로,수도원에서 하는 방식과 또한 스콜라 신학에서 하는 방식과도 차이를 보인다. 스콜라 신학에서 하는 방식은 본문을 읽기(lectio)-묵상(meditatio)-토론(disputatio)-강연(praecatio)의 순서로 한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토론에 있다. 이 토론의 주안정은 객관적 지식을 위한 분석과 연구이다. 그러나 〈보통 렉티오 디비나라고 일컬어지는 방식의 스콜라식 성경읽기는 읽기(lectio)- 즉,본문의 메세지를 주의 깊게 분석하고 (때로 주석도 동원 된다) 본문중에서 그 중에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에 대한 깊은 묵상(meditatio)-(마음의)기도(oratio)-관상(contemplatio)의 단계로 읽게 된다.〉이 방식의 강조점은 묵상과 관상에 있다. 이 묵상과 관상을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하는 것이 (마음의) 기도이다. 그래서 렉티오 디비나를 의역할 때 말씀으로 기도하기 또는 기도로 말씀 읽기라고 해도 무관하다. 이 렉티오 디비나가 어떻게 관상으로 이어지는지를 실제적인 성경 구절을 통해 묵상하면서 실천해 보고자 한다. 수도원식의 영적독서는 묵상대신에, 마음에 주신 단어나 구절자체를 기록하여 지니면서 하루종일 읊조리고 음미하고 기도하고 그 안에서 쉼을 얻는 반추(ruminatio)가 그 특징을 이룬다. -영적독서의 궁극적 목적은 현존하셔서 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진실로 알고 그분에 합당하게 사랑하고자 함에 있다. 완전한 사랑 가운데에 계시면서 완전한 사랑으로 서로 섬기시는 사랑이신 삼일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랑가운데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존재론적으로 볼 때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관계는 물론 절대적으로 하나이다. 이세상에 살아계시는 동안 예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며 하나되어 순종함으로 친밀히 아셨던 아버지와의 깊고 친밀한 관계<=한 영됨>를 우리도 똑같이 알고 누리도록 성령께서 관상에로 초청하신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무릎위에 앉아 그분의 사랑과 위로와 치유하심과 힘주심의 사랑을 받을 수도 있고, 웃을 수도 공공연히 마음대로 울 수도 있고, 영혼몸을 온전히 그분께만 기울여 집중하여,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진실한 사랑으로 찬송과 송축함의 경배를 드릴수도 있다.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충만하신 하나님, 자신의 거룩하심과 지극한 사랑때문에 느끼시는 사람의 죄에 대한 모든 분노-아픔과 고통의 모든 쓰라림을, 스스로 동참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서 지워 버리신 그분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통회하여 돌아오는 모든 자를, 그들의 애통과 뉘우침을 동시에 체휼하시며, 무조건 예외 없이 받아 주시며 평강과 치유를 복락의 강수를 약속하셨다..!!! 모든 회개하는 삶의 전제조건은 하나님이, 맺으신 사랑의 언약에 대해 신실하시며 진실하시고, 사랑과 인자와 자비가 무궁하시며, 원인이 무엇이든지 자녀의 환난당함을 불쌍히 여겨 환난에 같이 동참하여 환난을 당하시며(사랑과 체휼-동참하시는 긍휼-사63:9-) 때로 넘어져서 그분의 명령을 어겼더라도 그것을 깨닫고 돌아와서 겸손하고 솔직하게 인정하며 고백하면 언제나 두손을 벌려 맞아주시고 위로하여 새롭게 하시는 ,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다려 주시며, 너그러이 용서하시는(관용) 아버지요, 치료하고 힘주시고, 먹이고 마시우며 돌보시며 성숙케하는 목자요, 깊은 경륜과 모략가운데서 우리 삶의 여정에 대해 계획한 모든 것을 다 성취하기까지 인도하여 이끄시며 우리의 삶의 모든 필요들과 우리의 목숨까지도 끝까지 완전히 책임지시는 주님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회개는 <하나님을 기뻐함이 너희의 힘이라>하신대로, 반드시 하나님을 기뻐하고 누림으로 이어져야 함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충분히 깨닫고 조명을 받아서 뉘우치되, 때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함에 대한 깊은 회한과 슬픔의 눈물과 통회의 눈물이 있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 어떤, 마음의 간구가 더불어 있을 때는 먹고 마시는 것조차 멈출 수도 있겠지만, 결코 다시는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지 않으리라, 다시는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고 얻을 자격이 내게는 결코 없다는 정죄감에 사로잡힘고 포로됨의 유혹의 함정-그로 인해 자기연민-자포자기-낙심과 우울-나태와 태만-죽고싶은 파괴적인 마음-정죄감의 악순환의 사이클로 들어가서는 결코 안된다. 그것이 바로 속임의 명수요 사기꾼인 원수마귀가 원하는 것이다!!! 오히려 반대정신으로 행해야 한다. 사실, 성경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모든 금지명령들은 그것을 어겨 행하게 되면 하나님과 사람에게 대해 악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요, 모든 긍정명령들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행하면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더 고양시키고 더 큰 복락을 가져오기 때문이라는 전제를 항상 잊지 말자.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지키면 살> 명령이라고 말씀하신다. 타락하고 무력하며, 연약한 우리 모두는, 성령이 오시기전에는 그것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했으나,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 안에 오셔서 마음의 심비에 이 율례들을 새기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도우시는 인도하시는 성령은, 우리안에 내주하셔서 말씀하고 깨우쳐주시기에, 성령께 순종하면 그것을 은혜로 저절로 이루어 낼 수 있게 도와주신다.!!! 따라서 먼저 하나님을 알며 사랑함의 기도-관상에 대해 이해하고 렉티오 디비나에 접근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 <읽기-묵상-비췸/적용의 고백기도 : 하나님 (얼굴) 구하기>--이제 성경 창4:1-15을 묵상해보자. 첫째, 소리내어 읽기를 수차례 한다.(렉티오-10분) 이 단계에서는 읽을 때 소리를 내어서 읽는 것이 중요하다. 〈소리를 내어서 읽어야 비로소 귀가 듣게 된다. 어조와 높낮이를 달이 하면서 읽어보라. 눈으로 읽으면 당장에 성경구절을 머리가 분석하게 되지만 소리를 내어 읽으면서는 가능한 귀로 들으려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말씀을 읽는 것은 근원적으로는 말씀을 듣는 것이다. 소리를 내어서 읽으면서 통독을 한다. 통독을 하면서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한다. 전체의 내용을 분석적으로 명확하게 이해 할 필요 없이 이 구절들을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다는 느낌을 갖고 인정하라.〉 둘째 단계는 (마음에 날카롭게 부딪혀 오는 말씀에 동의하며, 실존적인 자신의 내면을 완전히 열어놓는) 묵상의 단계이다.(메디타티오-5분) 마음에 부딛혀 오는 단어나 구절에 집중하라. 여러번 되씹으면서 그 뜻을 반추하라. 다각도로 그것에 대한 느낌-생각-이미지를 성찰하여 정의해보라. 이 단계에서 절대 서두르지 말라. 주님께 의지하면서 천천히 천천히!!! 묵상은 한자어로 소리를 내지 않고 생각한다는 뜻이지만, 기독교 전통에서 말하는 묵상은 조금 다르다. 〈묵상이란 뜻의 라틴어 Meditatio의 어원인 med라는 어근에는 중얼거림이나 읊조림이라는 한 가지 뜻만 아니라 치료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즉 같은 소리를 반복적으로 중얼거려서 이 소리가 내면의 메아리로 바뀌게 되고, 내면에서 말씀이 메아리가 될 때 치료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뜻이다.〉그렇기 때문에 묵상의 단계에서 꼭 해야 할 것이 있다. 자기 내면을 말씀 앞에 충분히 드러내는 일이다. 말씀이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라면, 이는 내 모습을 그 거울에 보여서 성찰하라는 뜻이다. 말씀의 뜻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 자신의 모습을 말씀을 통해 발견하라는 뜻이다. 히4:13에 기록된 것처럼 말씀의 거울을 통해 내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는 일이 필요하다. <자기 내면을 말씀 앞에 내놓기 위해서는 말씀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 먼저 숙고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내면적인 성찰에 앞서서, 외적이고 객관적인 말씀의 해석이 먼저 필요하다. 〉 이 때는 때때로, 가능한한 주석서를 포함한, 당시의 상황을 알기 위한 모든 자료나 분석기법들을 동원하기도 하며,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적극적인 <이냐시오식 묵상>을 취할 수도 있다. <이냐시오식 묵상>이란 그 당시의 상황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분의 주위 모든 사람들을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는다고 상상력을 총동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 내게 말씀하시는 분의 눈을 바라본다. 세번째 단계인 기도, 곧 주님과의 대화-기도로 들어가는 것이다.(오라티오) 그분이 직접 말씀해 주시도록 이제 생각을 내어드리고 마음을 열어 기다린다. 강하게 일깨우고 깨우쳐 주시는 그분의 말씀에 대해 나는 무엇이라고 고백하며 말씀드릴 것인가? #창4:1-15절을 읽으면서 자기를 드러내는 일을 하기 위해 가인과 아벨의 심리적 분석을 먼저 해보자. 다음의 질문에 답을 해보라. 가인이 자신의 제사는 안 받아들여지고 아벨의 제사는 받아들여졌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혹자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물을 불태웠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는 성경에 없는 이야기이다. 〈구약의 사상에 의하면 제물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축복을 받았다는 뜻이다. 아벨의 산업은 날로 흥왕해지는데 반해 은연중에 경쟁심을 가지고 있던 형 가인의 산업은 별로 늘어나지 않은 모양이다. 속에 숨겨진 경쟁심을 가지고 있던 가인에게는 분노가 생겼다. 왜 하나님은 동생의 제물은 받으시고(축복하시고) 자신의 것은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분노가 생겼다.〉7절에 보면 하나님은 가인에게(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잘못된 점이 있음을 지적한다. 즉 〈가인은 어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모르고 오히려 자신 속에 있는 죄를 더 키우고 분노하고 마음의 도를 넘어 살인까지 하려고 한다.〉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이 시점에서 그 분노를 중단할 것을 지적하신다. 즉 마음 안에 숨겨진 죄를 다스리라고 권고하신다. 그러나 가인은 그 권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살아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게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그리스도와 연합한 한 영됨과 진리안에서) 예배할지니라(요4:23-24)> --보이지 않는 하나님 현존을 의식하면서 확신-신뢰-거룩한 사랑과 열정의 믿음으로(Coram Deo-Sola Fide) 그분께 나아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한 영과 진리안에서, 하나님이 제시하신 대로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드리는, 찬양의 제사 -감사의 제사- 선행과 나눔의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은 그것을 합당하다고 존중하시며 그 제사를 받으심으로써 참된 영적 예배자라고 몸소 증거하신다.(히 13:15-16, 벧전2:5) #〈여기서 다시 자기 내면을 이 말씀의 내용에 드러내는 묵상을 해보자.〉자기 모습을 살펴보아 자신의 현재의 모습이 가인에게 더 가까운지 아니면 아벨에게 더 가까운지를 생각한다. 만약 가인에게 더 가까운 모습이라면 어떤 점에서 가인과 같은지를 생각하라. 또한 지금 내게 말씀하시는, 권고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잠잠히 생각해 보라. <내 모습이 참으로 가인과 같은 마음의 상태라고 느껴지면 이때부터 성경 말씀은 더 이상 객관적인 문자가 아니라 살아서 직접적으로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된다. 내가 가인이 되는 순간,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진 내 얼굴에 가인의 얼굴이 겹쳐지는 순간, 나는 말씀을 매개로 하나님 앞에 직접적으로 서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모습이 가인과 동일시되지 않으면 자칫 잘못하면 가인의 이야기는 나와는 상관이 없는 남의 이야기가 된다.〉 〈내 얼굴에서 가인의 얼굴이 확인되면 이때부터는 자기가 깨닫는,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것, 숨겨진 죄와 분노와 경쟁심을 하나님 앞에 마음과 입으로 고백한다. 이 부분도 아주 중요하다. 마음으로는 자기 죄에 대해 인정하지만 차마 자기 입으로 말하기 어렵게 느껴진다. 주저하지 말고 입으로 자기 문제를 드러내어 말씀드려야 한다. 숨겨진 죄가 드러나고, 자기를 지배하던 경쟁심의 정체가 폭로되고, 이 경쟁심 때문에 동생 아벨을 죽이고자 하는 미움과 분노가 있음을 고백하게 되면, 비로소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대면함이 된다. 진정으로 자기 내면에 숨겨진 가인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고, 이를 자신도 인정하고 고백함에 이르면 더 이상 성경말씀이 단지 객관적인 글자나 분석을 통해서 해석해야 할 성경본문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이 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하면서 죄의 사죄와 내면의 아픔들이 치유되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치유할 것은 치유하시고, 책망하실 것은 책망하시고, 끊을 것을 끊도록 요구하신다. 이 과정에서 기도가 저절로 생긴다. 감사할 것은 감사하게 되고 간구할 것은 간구하게 되고, 결단할 것은 결단하게 된다. 가인과 같이 마음속에 숨겨진 경쟁의 패배로 인해 아픔에 대해 치유하시는 하나님께 간구하게 된다. 이 아픔의 원인이 경쟁에서 지게 된 것이고, 경쟁에서 지게 된 것의 원인의 하나님이라고 속에서 분노하던 것에 대한 죄를 고백하는 기도를 하게 된다. 가인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내 기도의 제목이 분명해진 셈이다.〉 〈이 때 주의해야 할 일이 하나있다. 묵상을 통해 내 자신을 분명하게 보고도 기도의 깊이로 들어가지 않을 수가 있다는 점이다. 머리로 내 죄악과 잘못을 알지만, 그리고 가슴으로 내가 가인과 같다고 느끼지만 참회의 기도로 더 깊이 들어가지 않거나, 이 죄악을 인정하지 않고, 말하지 않을 수가 있다는 점이다. 머뭇거리지 말라. 머뭇거릴 때 심령의 아주 깊은 차원에서 심리적인 합리화-정당화-미화의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가 발동될 수 있다는 점에 정말 주의를 해야 한다.〉내 잘못이 인정되면 그 어떤 경우에도 변명이나 핑계가 있어서는 안 된다. 사랑의 아버지께 절대적으로 내가 잘못했다고 고백해야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하면 그 상황 뒤로 내 죄는 숨어들어 간다. 〈자복의 고백기도로 내 죄악의 아픔을 쏟아놓아 그 분께 말하고 나면 더 이상 내가 할 일이 없어진다. 이제부터는 깨우쳐 주시는 성령께 감사로 동의하면서 양자됨을 인정하며 언제나 친밀한 사랑으로 품에 안아주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본다. 이제는 사랑의 아버지께서 하실 일만 남았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도록 잠잠히 기다리라. 놀랍게 안아주심을 누릴지어다!!!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아 누릴지어다!!! 오 안아주심의 황홀함이여... 이 고백기도 까지는 지성의 기도라고 얘기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제 후로는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기도인 마음의 기도로 넘어간다. 마음의 기도의 단계에서 우리의 지성은 한계에 도달한다. 말을 하려 해도 마음의 것을 표현하기에는 말문이 막히고 또 표현해도 실재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개입하는 곳이 바로 여기다. 우리는 성령으로부터 양자의 영을 받아 그 영을 통해 아바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롬8:17-26) 내게 사죄를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나를 그분의 매혹으로 끌어 당겨서 그분의 가슴에 안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권고하시는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지만 동시에 한량없는 사랑 그 자체이시다. 이제는 믿음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품어주시며 안아주시며 위로하시는 그분의 품에 겸손히 안겨서 그 사랑을 생각하며 음미하라. 〉이제는 내게 말씀하신 바로 그 하나님께 사랑과 감사로 집중해야 한다. 그분에 대한 고백이 짧은 단어로 이루어진 기도가 되게 하라. 그리고 먼저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그 품에 안기며 그 기도에 집중하라. 자세를 곧게 하고 숨을 고르며, 마침내 기도가 침묵이 되게 하라. ***<마음의 기도>방언기도(우리의 입술과 혀를 순종함으로 성령께 드려 성령께서 중보하시게 함)를 포함한 마음을 쏫아놓음의 내적기도와 향심기도로 하나님 찾기--마음의 기도는 성령의 기도이다. 이 단계에 이르러 우리는 우리가 아닌 성령께서 우리의 입술을 통하여 기도하심을 알게 된다. 믿음의 선배들은 다음과 같이 주님께 내부 깊은 곳에서부터 부르짖으면서 성령님을 초청하며 나아갔다. *아바 아버지, 저는 온전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바 아버지, 마음의 기도를 성령의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아바 아버지, 사랑의 불을 붙여주시고, 마음의 고통을 드러내 주소서. *아바 아버지, 제 마음을 두들겨 주소서, 주님의 능력으로 저를 깨뜨리고 때리고 태워서 새롭게 하소서... 진정으로 성령께 귀와 눈을 입술과 입과 혀를 완전히 의탁하고 그분이 인도 하심에 따라 자유롭게 그분의 임재하심 아래 전존재를 의탁한다.. 방언기도나 신음, 깊은 침묵의 내적기도, 때때로 무아경에로의 입신(성령의 강력한 임재에 의해 의식이 소실되거나 전신탈력으로 조용히 쓰러짐, 평강과 안정가운데에 드러누움 등..대개의 경우 신유가 동반된다..), 거룩한 웃음 등..은 마음의 기도의 다양한 형태 중의 하나이다. 영과 영이 통하고 마음과 마음이 만난다... 묵상을 통하여 우리의 죄악과 연약함을 그분께 아뢰고, 그분의 전적인 사유하심의 은총을 온 존재로 받아들이며, 마음을 사랑하는 그분께 기도로 열어드린 우리는 묵상과 마음의 기도사이에서 때로는 오랫동안 서성일 수 있지만 마침내는 마음의 기도로 들어가게 되고 점차적으로 고백이 단순화 되어짐을 체험한다. 지적인 추리와 사고가 점점 줄어 들고 마음은, 보혈로 말미암는 담대함을 입고 단순하게 솟아나는 그분에 대한 신뢰, 사랑과 열망으로 점점 가득하게 되며 친밀한 내적 대화로 변화하며 하나님을 아주 가깝게, 그러나 아직은 너무 멀게 느끼면서 우리의 마음의 갈망이 홍수로도 끌 수 없는 사랑으로 변하여 타오르며 자발적으로 그분을 소리쳐 부르거나 마음의 불신앙과 자신의 자격없음과 무가치함을 깨닫고서 치유와 자비를 청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은밀해진다. ##<향심기도>-마음의 기도와 관상을 이어주는 고리로 자연스럽게 추천되는 것이 예수기도로 대표되는 짧은, 향심기도=집중기도=구심기도(Centering Prayer)의 형테이다. 실은 이때부터 관상기도가 시작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 향심기도를 수용적 수득적(Receptive Acquired) 관상이라 하며 이것은 믿는 이 편에서 사랑에의 초대로 부르신 하나님께, 성령님께 동의하며 그분과 함께 예수보혈을 의지하여 예수이름으로 단순한 믿음과 사랑으로 자신을 열어드리며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함은 단순히 그분의 사랑에로 자신을 열어드림에 다름아니다. 한편 진정한 관상을 주부적(Infused)관상이라 하며 그것은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오직 우리를 맞으러 나오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와 장소와 방법으로 원하시는 사람에게 주어지며 이 때 사랑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은밀한 신비를 드러내신다. 등을 곧게 하고 편한 자세로 눈을 살며시 감고 호흡을 고르면서, 아주 짧은, 사랑에 잠겨 있는 채로, 사랑하는 그분 자신을 간구하는 기도를(예- 주예수여, 자비를 ..아바아버지.. 하나님) 호흡에 맞추어 천천히 반복함으로써, 오직 신뢰와 믿음으로 호흡보다 가까이 계신 그분께 집중함으로 시작하여 마침내 침묵에까지 나아가, 사랑과 믿음으로 그분 품에서 우리의 모든 생각들을 내려 놓고 - 마침내는 그분을 응시하는 우리의 인식조차도 내려 놓고-그분께 일치함으로 그안에서 쉬는 데까지, 관상에까지 나아가야한다. 일상적 사고인 욕조의 물을 빼기 위해서는 사고에의 집착이란 마개만 제거하면 된다. 예수보혈과 그이름을 의지하고 사랑이신 그분만을 단순히 집중하여 바라보고 모든 일상의 사고에의 집착을 그만두고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두라. 그 때 관상기도로 들어가게 된다. --어쩌면 바로 이것을 위해 우리는 렉티오 디비나가 필요한 것이다...상당한 기간 동안 오직, 어두컴컴하기만 하다고 느껴지더라도 그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자궁안에 있다. 이윽고 때가 되면 자궁밖으로 나와 밝은 깨달음과 광명한 그분 자체를 보게 되리라. 또한 신뢰가운데에 먼저 어두컴컴한 그 품안에 거하라. 불꺼진 영화관안에서처럼, 때가 되어 익숙해지고 주께서 영안을 열어주시면 영적실재와 실체들을 볼 수 있게 되리라. 단지 어떤 경우에라도 절대 포기하지않도록 하라 ***<문 두드림 기도>--하나님의 마음을 두드려 그분을 얻기, 이 기도는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 알아드리기의 정화이다. 하늘보좌에 계시며, 만유에 충만하시며 동시에 우리의 영의 가장 깊은 곳에 은밀하게 내주하고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나아가 행하는 집중어린 응시요 경청에 다름 아니다. 이미 모든 믿는 이는 예수님의 품안에 있고,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 품안에 있다. 즉 믿는 우리는 이미 아버지하나님의 품안에 있으며 성령하나님은 연약한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 성품이 얼른얼른(?) 제대로 자라서, 그리고 철저히 예수님 판박이가 되도록 만들고 싶어서 안달이 나셨다!!! 이 사실을 어린 아이처럼 단순하게 신뢰하면서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일깨우고 격려하시는 성령님께 동의하면서 믿음을 도와달라고 도움을 요청하고, 마치 아빠나 엄마가 안아주기를 바라는 어린 아이처럼, 마음의 두 손을 들고 팔을 벌려서 나를 안아달라고 사랑의 아버지께 나의 몸과 영혼의 의지와 마음의 눈을 집중시키는 것, 그것이 전부이다. 이 때, 마침내 완전한 사랑자체이시며 <나를 사랑하기를 배우고 내 사랑안에 거하라, 나를 알라><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나를 사랑하는 자가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려지리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너희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으로 줄줄 알거든 하물며 천부께서 구하는 이에게 좋은 것(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은밀한 평강 중에, 순전한 믿음으로 사랑스럽게 주께로 집중하며 올려드리는 우리의 영혼을 반가이 맞아 주셔서 그 영혼을 잠잠한 사랑으로 충만케 하시며 품어주시고 안아주시며 한량없는 평강과 하늘안식을 주신다. 참으로 하나님 임재의 체험, 더 나아가 그보다 오히려 인식의 문제이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계심을 (롬8:26)인정하고 그분께 순복하는 의지로 동의하면서 성령께 몰입되어 올려 드리는 하나님에 대한 애정어린 정신 집중이며 가장 높은 형태의 기도로서, 이 때 우리는 그 품안에서 쉬고, 우리안에 내재하여 계신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주 삼라만상에 충만하신 하나님 자신께, 온전하신 그분의 뜻대로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신다... 내 호흡보다 , 내 심장의 고동소리보다 가까이 계신 성령께 나를 대신하여 기도해 주시기를 의탁하고, 성령님의 주 되심을 동의하면서 나를 내려놓고 , 예수 보혈을 의지하여 예수 이름으로 존재의 근원되시는 아버지의 보좌에 나아가고, 바로 그 삼위하나님의 보좌가 하늘에, 그리고 동시에 내 영의 중심에 있음을 믿음으로 인정하며, 고요히 나를 감싸 안으심을 느끼며 사랑과 신뢰의 마음으로 내 영의 중심에 계신 사랑의 하나님을 응시하는 것이다. 마치 태초로 돌아가 그분의 품에 안긴 것처럼- 태중의 아기가 엄마의 자궁 안에서 잠들어 쉬는 것처럼- 믿는 우리는 그분 안에서 쉰다. 온전한 만족, 기쁨, 평강, 사랑의 안식!!! 거기에서 모든 인간 존재의 기본욕구(생존/안정의 욕구, 사랑/존중의 욕구, 힘/통제의 욕구)의 결핍이 충족되어지고, 원죄로 인해서 유발된, 욕구 불만과 결핍감으로 인해 생겨난 마귀의 흔적-거짓 자아-은 해체된다. 거기에서는 <말>대신에 하나님의 첫 언어인 <침묵>만이 흐르고, 우리는 <행함>이 아닌 그저 <머무름-거함>의 존재양식 속으로 들어 간다. 무념-무상-무시간성의 응시와 침묵이 전부인 그분의 품안에 고요히 잠기는 머무름. 강 위의 떠다니는 (생각인) 배에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배들은 그냥 흘려 보내고 (존재의 근원되신 주님인)강 자체를 사랑과 신뢰로 응시함...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우리의 마음과 가슴을 들어 올려 그냥 그 너머로 넘어가서 절대 신비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몸과 영혼의 전존재를 열어드리는 것이다. 그분과의 신뢰로 충만한 사랑의 교제와 더불어 우리에게 또 하나의 은총이 주어진다. 실은 하나님의 현존이, 마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주변에 항상 존재하는 공기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는데도 불행히, 믿는 우리들 대부분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나님 현존의 내적 체험을 통해서, 내주하시며 충만한 사랑이신 그분을 사랑하고 아는 데서 더 나아가 동시에 우주 삼라만상에 충만하신 그분을 어디에서나 체험하는 데로 나아감... 바울 사도는 믿음과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의 것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것으로 하려면 그리스도의 초대에 대한 우리의 겸손히 그리고 기꺼이 열어드림의 감수성이 발전해야만 한다.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때, 주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서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평안함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또 나의 짐은 가벼움이니라>하신대로 아버지 품안에 안겨 하늘 안식을 맛보고 누리며 하나님은 우리 대신에, 우리의 시련의 광야를 포함한 모든 삶의 고단한 싸움을 대신 싸워 그 승리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신다. (원수 눈 앞에서 우리 앞에 영광의 승리로 인한 잔치상을 베풀어 주신다) 우리는 그분의 무등을 타며, 그분의 얼굴을 꼬집으며 수염을(?)잡고 흔들며 그 팔의 그네를 타고 확인하며 즐거워하며, 경이로움에 소리치기도 하며 기쁨과 환희로 노래하고 춤추며,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젖어들고 깊이 사랑하며 그분께 취한다...진정한 의미에서 참으로<그분은 우리의 얻음이 되신다!!!> ...이 때,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믿는 우리의 영적 체력과 모든 성품이 어느덧 주예수를 닮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되며 그것은 성령의 열매와 성령의 은사로 나타나고, 주변의 다른 이들도 눈치를 채기 시작한다. ... 영적인 비상에 비상을 이루어 가는 충만함..이윽고...십자가에 달리도록 내어주신 그토록 사랑하시는 성자 예수님을 통해 찢어지는 슬픔과 애통의 고난을 성령님과 함께 당하셨고, 지금도 잃어버린 자녀들에 대해 사랑과 긍휼(체휼), 눈물, 오랜 기다림의 찢어지는 애통의 마음을 가지고 계시며, 또한 인간의 원죄로 인해 썩어짐에 종노릇 하도록 하게 하신 모든 피조물의 고난(또는 세계 고난)에 체휼하시며 동참하시는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을 알아드리고,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우리의 생명이요, 새 인격으로 연합하여 하나되신 주예수님과 똑같은 기도로, 성령님과 함께, 사랑의 아버지께 동의하며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대속적으로 중보하기 시작한다. <....내가 여기 있사오니, ..주님처럼 썩어져 죽어 생명 낳는 밀알 되기 원하오니 나를 보내소서...> 모략의 하나님께서는 그분께 사랑과 순종의 의지로 헌신하는 믿는 우리를 통해 아담을 속여서 주권을 강탈한 마귀로부터 세상을 다시 주께로 회복시키시기로 작정하셨다... 주예수께서는 작은 그리스도요, 세상에 보냄을 받는 제자된 믿는 우리 모두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믿음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이 땅에서 믿음으로 발휘하기 바라셨다. 그 믿음은 능력의 하나님을 얻음에서만 가능하다. 이제 비로소 그 크신 능력의 하나님을 얻은 우리는, 이 땅에 나아가서도 예수이름의 권세가 갖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초자연적인 능력과 기적을 예수 이름으로 일으키며, 자연 현상을 다스리며,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며, 불구된 것을 회복시키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의 기사를- 이 땅에 끌어내려 나타냄으로써 복음의 말씀을 입증하며 미망과 미혹에 사로잡힌 이들로 자신의 비참과 참혹한 상태를 깨우쳐 통회하며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지상대명령을 성령님과 함께 온전히 수행할 수 있다.... 우리는 거기에 흠뻑 젖어 들어가고 우리의 순간순간이 드디어 이제는 그 어떤 우리를 심히 혼란케 하는 외부자극에 대해서도 거짓자아의 거짓행복프로그램의 정서대로 반응하지 않고(이것이 원수마귀가 원하는 것이다) 내가 연합되어 있는 예수님-곧 참자아의 영의 중심에 계신 그분-을 느끼며 사랑이신 그분의 느낌대로-참자아의 느낌에 따라 반응하게 되는데, 그것은 내주하게 하신 성령님을 통해 믿는 우리에게 언제나 한량없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함에 다름아니다. 드디어 <살아계신 주께서 나를 통해 그분의 일상을 사신다>는 이 진리를 체득한다..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몇 가지 유익을 말해보자. 첫째 하나님의 사랑이다. 가인의 경우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얻었다. 그 어떤 악한 죄도 용서 못 받을 죄는 없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 가슴을 열면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안기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기독교에서 참회이든 회개이든 정죄와 심판에서 끝나는 것은 옳지 않다. 관상의 끝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이 느껴지고 경험되게 되어있다. 또한 본래적으로 아무도 도중에 막는 것-거짓자아-가 없다면 사람의 의지는 무한한 사랑으로 향하고 사람의 마음은 무한한 진리로 향하도록 되어 있다. 더불어 이 거짓자아가 묵상중에 깨트려진다. 이 일을 성령께서 이루어 주신다. 둘째 묵상의 기도는 오로지 그 목적이 하나님과의 교제에만 있다. 교제안에 사람이 실제적으로 구하는 간구와 청원이 들어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제의 깊이에서 보면 교제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하나님의 현존의 내적체험을 통해 모든 사람, 사건, 자연들 속에 계신 그분을 감지하는 능력이 작동되기 시작하며 드디어 때로는 외적인 것들 속에서도, 일반기도속에서도 하나님과의 일치를 즐기는 체험을 하게 된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온전히 휴식하고 영적전투를 벌이지 않는 위치에 우리를 데려다 주신다. 은밀한 기름부으심을 통해 우리가 지각 못하는 심적 수준에서 우리의 연약한 성질로 인해 생긴 모든 상처를 치유해 주신다. 마치 그것은 마취중에 수술받고 깨어난 환자가 수술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모르고 깨어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과 같다. --가인에 관한 말씀의 묵상을 통해 가인과 같이 표(창4:15)를 받게 되는 것이다. 〈 --렉티오 디비나의 영성이 많은 설교를 하면서 오히려 영적으로 지친 목회자들과 사랑의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자 하는 성도들을 새롭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묵상을 중심으로 말씀을 읽게 되면 기도의 하나님-내 안에서 기도하시는 하나님 경험을 누구나 할 수 있고, 이제는 남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만을 다루게 되기 때문이다.
『침묵과의 만남』- 칼 라너 <나의 일상생활 속에 계신 하나님> 오, 주여, 저의 일상생활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당신을 빼둔 채 많은 일로 가득 찬 길고 지루했던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온유하신 하나님, 이런 우리의 일상생활을 한번 보십시오.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생활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우리 인간들을 보십시오. 당신의 사랑의 긍휼로 제 영혼을 보시고, 끌려가는 도망자들의 끝없는 행렬로 붐비는 도로, 헤아릴 수 없는 사소한 일들과 의미 없는 대화와 행위, 안일한 호기심과 우스꽝스러운 가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앞으로 밀려가는 고속도로를 보십시오. 당신과 당신의 완벽한 진실 앞에 설 때, 제 정신은 마치 전 세계에서 몰려온 고물 장수들이 이 세상의 비속한 부를 팔기 위해 모여든 시장터 같지 않습니까? 그 정신은 저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저속한 장신구를 불안하게 밀려드는 군중에게 진열하는 시끄러운 장터 같지 않습니까? <내 영혼의 창고> 제가 '철학자' 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초등학생 시절에, 저는 영혼이 모든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오, 하나님, 고상하게 들렸던 그 말의 의미가 어떻게 이렇게 바뀌어 버렸습니까! 트럭이 아무런 계획이나 구분 없이 짐을 옳기고, 어설프게 징을 쌓고, 결국 꼭대기부터 바닥까지 시시하고 진부하고 무의미한 일상의 잡동사니로 가득 차게 되는 거대한 창고가 되어버린 제 영혼은 지금 얼마나 변했는지요! 사랑하는 하나님, 제 삶이 이런 모양으로 계속된다면 저는 어떻게 됩니까? 모든 짐이 갑자기 창고에서 쓸어버려질 때 저에게는 어떤 일이 생기겠습니까? 제가 죽는 그 순간에 제 기분은 어떻겠습니까? 그때는 더는 '일상' 이 없겠지요. 그때 저는 지금 이 세상에서 일상을 가득 채우는 모든 것들로부터 갑자기 버림받게 되겠지요? <마지막 소출은 무엇인가?> 그리고 오직 저 외에는 아무것도 없게 된 그때 저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평생 동안 저는 평범한 일상, 일과 행위, 공허한 소리와 의미 있는 분노로 가득 찬 사막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죽음의 그 묵직한 무게가 제 삶을 내리누르고 저 모든 날과 세월로부터 참되고 지속적인 내용물을 쥐어짜 버리는 때에, 마지막 소출은 무엇입니까? 그 마지막 부름의 시간에, 시시하게 소비해 버린 세속적 삶에 대한 모든 환상을 대신할 깨달음이 제게 찾아 올 때, 오 하나님, 진실하지 못했던 제 삶이 그나마 거둔 참된 소출은 당신의 은혜로 빛나고 생명력 있게 된 몇 번의 축복된 순간이 전부일 것입니다. 이것도 아마 당신이 제게 지금까지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아마도 그때 저는, 나의 매일의 일상을 채우는 중고 물품들 사이로 당신의 은혜가 내 삶의 어두운 구석으로 몰래 들어오신 그 몇 번의 소중한 순간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의 유배로부터의 탈출> 이러한 못나고 따분한 말을 어떻게 하면 회복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만족스러운 한 가지 일과 당신을 향해 저의 방향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이 일상의 감옥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탈출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께서 저를 구속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저의 진정한 삶이 당신을 향해 방향이 정해져야 함을 인식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저는 이미 유배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세속적인 일상의 무게 아래 질식당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을 때, 저는 이미 유치한 일상의 관심사에 깊이 사로잡혀 있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저의 창조주가 아니십니까? 당신이 저를 인간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까? 인간은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 자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당신의 무한함을 갈망하는 존재가 아닙니까? 인간은 저 멀리 떨어진 당신의 별을 향해 달려가고 싶은 욕구에 굴복하고, 이 세상의 모든 고속도로와 갓길을 달리면서까지 추적을 계속합니다. 그러나 결국 인간은 당신의 별이 여전히 그 고요한 질서에 따라 움직이고 있으며, 여전히 멀리 있음을 알게 되는 존재가 아닙니까? <무엇이 나를 구원해 줄 것인가?> 내가 카투르지오 수사(Carthusian)가 되어 하루 종일 당신의 거룩한 임재에 대해 침묵으로 찬미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알기로 하으로써 저의 일상으로부터 탈출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저의 문제를 해결해 줄까요? 그것이 정말 저를 이러한 일상의 구렁텅이에서 구원해 줄까요? 그렇지 못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저 거룩한 행위로도 이 세상의 영혼에서 나는 썩은 먼지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제단에서 보낸 시간들이나 제 기도서에 있는 모든 공적 기도문을 외우는데 보낸 시간들에 대해 생각해 보면, 내 삶을 이렇게 한심하게 만든 책임은 바로 나에게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이 세상의 일들 때문에 저의 나날들이 진부하고 무의미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제 스스로 그러한 구덩이를 판 것입니다. 저 자신의 태도를 통해서 거룩한 사건들을 따분한 일상의 우울함과 지루함으로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나의 나날들이 나를 지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반대인 것입니다. <당신에게 가는 길> 바로 그런 이유로 저는, 당신에게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은 내 일상적인 생활의 한가운데를 질러가는 길임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만약 다른 길로 당신께 도망가려 한다면, 저는 사실 저 자신을 뒤에 남겨 둔 채 가는 것이 되며.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아무런 결과도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일상생활을 통해 당신께로 가는 길이 있습니까? 이 길이 당신으로부터 오히려 더 멀리 인도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것은 나를 말없는 하나님인 당신이 사시지 않는 곳인 세속적 행위의 공허한 소음 속에 더욱 깊이 빠뜨리는 것은 아닙니까? 어린 '정신과 마음에는 그렇게도 중요하게 보였던 뜨거운 행위에 우리는 점차 싫증이 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도덕적인 철학가들이 말하는 '지루한 인생(taedium vitae)' 과 성경에서 야곱의 열두 아들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경험하는 삶에 대한 포만감도 점점 더 저의 운명이 되어 갈 것입니다. 저의 일상은 자동적으로 삶의 무거운 우울 속으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일상은 이 세속적 공허함의 다른 쪽인 당신께로 나를 간접적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알 수 있습니다. 이교도들도 그 사실을 알지 않습니까? 제 일상이 당신께로 인도하는 길이 이 길입니까? 일상의 삶이 그 진정한 얼굴을 제게 내보였기 때문에, 결국 모든 것은 허무하고 비참한 것이라 인정하며 당신의 임재로 나아가는 것입니까? 그것은 당신께로 가는 길이 아니라 절망으로 가는 길 아닙니까? 지친 사람의 가슴이 이전에는 안식을 주었던 일들로부터 기쁨을 조금도 발견하지 못하고, 따분하고 공허할 때마다 그것을 이기기 위해 찾곤 하던 일상적인 삶의 단순한 일들이 이제는 그에게 아무 맛도 없게 되었을 때, 그것은 영광스러운 승리 아닙니까? <기쁨과 실망> 지치고 환멸을 느낀 마음이 젊고 행복한 마음보다 당신께 조금더 가까이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단순한 기쁨도, 일상적인 슬픔도 당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지 못할 때. 우리는 어디서 당신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까? 실로 우리의 매일의 기쁨은 당신을 잊게 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며, 우리의 매일의 실망 역시 그렇습니다. 이런 기쁨과 실망은 우리의 가슴을 너무나 아프고 씁쓸하게 만들어 우리는 당신을 찾기 위해 가졌던 기술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는 모든 일에서 당신을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기도할 때에도, 예배드릴 때에도, 조용한 방에서도, 심지어는 삶에 대한각성 조차도 이러한 위험에서 우리를 충분히 지켜 주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 신성한, 비일상적인 일들이 결국에는 우리의 일상에 속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일상은 내 인생의 일부분, 아니 삶의 전체임이 분명합니다. 매일이 '똑같은 나날' 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일상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이 나에게 필요한 유일한 한 가지인 나의 하나님을 앗아가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 발견하기> 그러나 만일 제가 모든 일 속에서 당신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제가 모든 것에서 당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만일 제가 도망하여 당신을 확실히 찾을 수 있는 곳을 당신이 하나도 주시지 않았다면, 만일 제가 하는 모든 일이 당신의 상실을 의미한다면, 저는 모든 곳 그리고 제가 하는 모든 일 속에서 당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는 전혀 당신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며 이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당신 없이 저는 존재하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모든 일에서 당신을 구해야 합니다. 매일이 '똑같은 나날' 이라면, 그 똑같은 나날은 당신의 날이며 매 시간은 당신의 은혜의 시간입니다. 모든 것은 '똑같은 나날'과 당신의 날을 합한 것입니다. 따라서 나의 하나님, 언제나 알아 왔던 진리를 새삼 이해합니다. 진리가 다시 제 마음 속에서 살아났으며, 이것은 이미 제 이성이 종종 제게 말해 준 사실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생명이 되지 못하는 이성의 진리는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끊임없이 찾아오신다> 저는 작지만 무척 소중한 한 구절을 적어 둔 자은 공책을 수시로 꺼내봐야 합니다. 그 글은 여러 해 전 루스브로윅이 쓴 것입니다. 저는 제 마음이 그 말을 이해하도록 그 글을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참으로 신실한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해 느꼈던 생각을 재발견할 때 언제나 저는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일상생활로 여러 해를 보낸 지금도 이 말을 여전히 사랑한다는 사실은 제게는 당신이 언젠가는 저의 평범한 행동도 축복해 줄것이라는 거룩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그리고 간접적으로 계속 찾아오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과 (안식의 기쁨 곧)즐거움 모두를 요구하시며 그 중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의해 방해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하게 하신다. 따라서 내적인(=영적인) 사람은 이 두 가지, 즉 일하는 행동을 하면서 그리고 또 안식을 취하면서 자신의 삶을 소유한다. 그리고 그는 행위와 기쁨에서 각각 완전한 일체다. 왜냐하면 그가 기쁘게 안식할 때 그는 완전히 하나님 안에 거하며, 그가 능동적으로 사랑할 때 그는 완전히 자기 자신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내적인 사람은 안식과 일 모두를 새롭게 하라는 하나님의 도전과 훈계를 끊임없이 받는다. 따라서 그는 의를 발견한다. 그래서 그는 진지한 사랑으로 말미암는 지속적인 일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간다. 더불어 그는 영원의 안식에 대한 참된 의미의 쾌락적인 성향을 통해 하나님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 거할 때 그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랑 안에서, 미덕과 의 안에서 모든 피조물에게나아간다. 그것이 바로 내적인 삶의 최고 단계다. 안식과 일을 하나의 동일한 행위로, (곧, 일하면서 동시에 하나님 안에 안식함을=평강과 기쁨, 안식 그 자체인 늘 임재하여 계신 하나님과 하나됨을 느끼며 젖어들어 그분을 사랑하고 섬김으로써 일함을) 더불어 소유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이런 의를 얻지 못한 사람이다. 의로운 사람은 내적 사색을 할 때 방해받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행위를 할 때만큼 사색을 할 때에도 쾌락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양면을 비추어 주는 이중 거울과 같다. 그의 영혼의 높은 부분에서는 하나님과 그의 모든 은사를 받는다. 그 영혼의 낮은 부분에서는 감각을 통해 유형적 이미지를 받아들인다. >> <똑같은 나날과 당신의 날> 똑같은 나날과 당신의 날을 같이 사는 법을 배워야겠습니다. 이 세상의 일에 나를 바칠 때, 모든 일에서 나를 당신에게 드리고, 유일하신 분인 당신을 소유하는 법을 배워야겠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오로지 하나님 당신을 통해서만 할 수 있습니다. 오직 당신의 도움으로만 저는 이 많고 다양한 일상적인 일 가운데서도 '내적인'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세상의 일과 함께하기 위해 나 자신 밖으로 나갈 때, 오직 당신을 통해서만 저는 당신과 함께 나 자신 속에 계속 거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세상 것들에게 빠지지 않도록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걱정도 아니며 비존재도 아니며, 심지어 죽음도 아닙니다. 근대 철학자도 그것은 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당신의 사랑만이 저를 구원해 줄 수 있고, 모든 일의 목적이며 힘이신 당신에 대한 사랑이 저를 구원해 줄 수 있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당신 자신에게까지도 충분하신 당신만이 만족이고 충족입니다. 오직 무한하신 하나님, 당신에 대한 사랑만이 모든 것의 심장을 뚫고, 동시에 그 모든 것을 초월하며 당신의 존재의 무한한 영역을 향해 높이 올라가, 세상의 모든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고 그것을 당신의 무한함을 찬양하는 찬송가로 바꾸어 줄 수 있습니다. <당신께 돌아오며> 당신 앞에서는 모든 복잡한 것이 하나가 됩니다. 당신 안에 있을 때 흩어졌던 모든 것이 모입니다. 당신의 사랑 안에 단순히 외적이던 모든 것이 다시 진실하고 진정한 것이 됩니다. 당신의 사랑 안에 하루의 자질구레한 일들로 인해 산만해졌던 내가 다시 당신의 연합, 영원한 생명의 전야로 귀향합니다. 제 일상을 일상으로 남겨 두면서 당신께로의 귀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이러한 사랑은 오직 당신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매일의 일상을 당신 앞에 내려놓으며 이제 당신께 제가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입니까? 제가 구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가장 평범하고 가장 숭고한 선물, 즉 당신의 사랑의 은혜입니다. 주님이시여, 이러한 은혜로 나의 가슴을 감동시켜 주소서. 제가 기쁨이나 슬픔으로 당신에게 손을 뻗으며 이 세상의 것을 달라고 할 때, 그것을 통해 창조자이시며 궁극적 고향인 당신을 알고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소서. 사랑 그 자체인 주님이시여 마침내 저의 나날이 텅 비어 당신의 영원한 생명 안에 거하는 하루하루가 될 수 있도록 사랑의 은혜를 부어 주소서. 당신을 주소서. #묵상을 위한 질문 1 - 매일이 지겹도록 똑 같은 나날로 느껴지는 것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이것을 섬김의 훈련과 어떻게 연관지을 수 있을까? #영성 훈련 1 - 매일의 일상생활을 하나님께 드리라 이것은 약속을 적은 수첩이나 달력에 대해 기도함으로 할 수도 있고 다른 방식으로도 할 수 있다. #말씀묵상 1 - 시편127:1-2
<「기도의 언어 배우기』- 조이스 허기트> 1.묵상이란 **(tip)묵상하기전에 먼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높여드리고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서 죄된 우리를 인정하며 거룩케하시는 보혈로 우리의 영의 양심을, 혼의 기억, 생각, 지성과 지혜 즉, 지성과 모든 느낌과 관능(육체적 욕구에 대한 충족의 감각), 감성들을 정결케 해주시기를 기도하고 말씀을 기록하신 성령님의 도움을 힘입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보여주시기를 기대하는 부드러우며 깨닫는, 잘 배우는 마음으로 자신의 전존재를 주님께 열어드림이 필요합니다. --묵상 이란 (일반적인 기도와 간구, 탄원과 중보외에) 또 다른 말이다. 사람들은 종종 기도에 대해 말할 때 사용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묵상을 요가나 동양의 명상, 또는 초월적 명상 같은 것과 혼동하면 안 된다. 기독교의 묵상은 그런 훈련들처럼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부분 즉 마음, 감정, 상상력, 창조성, 그리고 무엇보다 의지를 활발하게 하는 것이다. 안토니 블룸(Anthony Bloom) 대주교가 말하는 것처럼, 묵상이란 <하나님의 보호 아래 갖는 일종의 솔직한 생각>이다. 묵상은 성경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과는 다르다. 시편 기자가 묵상한 내용을 실천에 옮긴 기록을 보면 이를 분명히 알 수 있다.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시 63:6) >- 여기서 사용된 '묵상'이란 단어에는 '중얼거림' 또는 '지속적으로 속삭임' 이라는 뜻이 있다. <주시는 진리의 말씀을 집중하여 마음속으로 깊이 새기며 같은 단어를 계속 반복하여 말한다>는 뜻이다. 시편 119편에서 시편 기자는 묵상을 언급할 때 각각 다른 단어를 사용한다.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시 119:15). 방백들도 앉아 나를 훼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를 묵상하였나이다(시 119:23). 또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에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를 묵상하리이다(시 119 :48) >- 그가 이 구절들에서 사용한 단어에는 '즐겁게하다', '생각하다', '반추하다', '숙고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의 묵상은 비움이 아니라 채움이다. 이는 하나님을 경청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청, 즉 반추와 생각의 목적은 여러 가지 다른 것들 가운데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의 빛 가운데서 우리 자신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구약의 말씀으로 사탄의 은밀한 유혹을 분별하신 것과 같다. 우리는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상처받는 곳인 우리의 마음뿐 아니라 감정, 그리고 선택하고 결정을 내리는 곳인 우리의 의지에도 스며들 수 있게 해야 한다. 우리는 살아 계신 말씀 그 자체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묵상한다. 묵상을 통해서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 즉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열망이 그분을 대면하고, 경외심을 나타내고,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묵상을 배워야 할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의지(뜻)와 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2.묵상하는 법 우리는 'meditation' 이 <중얼거림, 속삭임, 반복적 성찰, 기억, 즐겁게 함, 숙고>와 같이 여러 단어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임을 알았다. 즉 주신 말씀을 숙고하여 얻은 진리가 심령에 와 닿을 때 입으로 중얼거리면서 그 진리에 모든 것을 집중하여 마음의 심비에 새기고 그 진리가 전 존재를 감싸안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 이런 숨은 의미들을 마음에 담고 말씀을 묵상하셨을 것이다. 그분은 구약의 말씀을 아주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를 삶의 여러 단계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연결지으실 수 있었다. 누가복음 4장을 보면 사탄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 하시려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세 번이나 시도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 번 모두 성경 말씀을 인용하심으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다.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리라(눅 4:5-8). >- 여기서 예수님은 신명기 6장 13절 말씀을 깊이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주신다 그리고 예수님이 사탄의 미묘한 흥정에 직면하셨을 때 이 말씀이 저절로 마음에 떠올라 자신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게 하신다. 말씀을 묵상하면 말씀은 우리 인격의 일부가 될 수 있다. 묵상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편 기자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는 것이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 46:10) > -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 하나님의 말씀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하는 압박의 요소들을 고요함 가운데서 떨쳐 낼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다. 밭을 잘 일구는 것이 농사를 잘 짓는 것과 직결되는 것처럼 고요함이 성경 읽기와 직결된다. 열매를 맺는 데 필수적인 요건이다. 우리가 이전에 연구했던 성경 본문이나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과 관련된 구절들을 읽을 때, 마음이 고요해진다면 한 절, 한 구절, 한 문장 혹은 한 글자가 우리에게 그려 주는 것을 (tip:성경에서 튀어 나와 머리 속으로 박혀 들어 오는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이 당신에게 일어나면 굳이 더 읽을 필요가 없다. 그때는 깊이 생각하기를 멈추고, 그 말씀을 보배같이 여겨서 가슴에 담아 마음 비석에 새기며, 두고두고 되새겨 이 말씀이 함축하고 있는 진리가 머리에서 가슴으로 흘러가도록 하면 된다. 우리의 모든 정신(이성)과 감각(감성)이 묵상을 돕는다. 마음의 지성은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상황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도록 돕는다. 마음의 기억은 우리가 과거에 배우고 경험한 하나님의 신실함과 속성을 떠올리게 해 준다. 마음의 상상력은 또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예언자들은 상상력으로 하나님이 위탁하신 통찰력을 묘사했고, 예수님도 상상력으로 그의 나라를 말씀하곤 하셨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신실한 목자와 중동 지방의 어느 가정 주부, 그리고 사랑 많은 아버지로 비유하셨다) 감정도 우리가 읽고 있는 본문에 담긴 하나님의 속성들을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3. 애정 어린 (하나님 사랑의)집중기도-- '묵상'과 '관상'은 종종 상호 교환할 수 있는 말로 쓰인다. 이해할 만하다. 비슷한 점들 때문에 이 두 기도를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묵상과 같이 관상도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손안으로 밀어 넣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태도나 인식,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과 상관이 있다. 관상도 묵상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는 것과 관계 있다. 그리고 관상도 우리의 심령을 비추는 하나님과 그분의 권능의 말씀에 우리 자신을 열 수 있도록 고요함을 요구한다. 그러나 묵상과 관상은 서로 다른 점이 있기에 구분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기도를 혼동하면 안 된다. 토마스 머턴(Thomas Melton)은 이에 대해 한마디로 말했다. <관상은 사랑의 완성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정의하는 것처럼 <관상은 애정 어린 관심이 깃든 기도, 애정 어린 집중 기도, 집중의 기술, 그리고 하나님과 그의 세계에 대한 애정 어린 집중>을 말한다. <관상이란 사랑 안에서 성장함에 대한 것이다. 만약 관상사역을 진지하게 여긴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주제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 사랑은 우리를 비롯한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을 향한 고갈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다‥‥관상이란 당신 존재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알고 사랑하는 것이다. -짐 보스트의 책, Coming to God에서 인용> 관상은 묵상보다 더 멀리 그리고 더 깊게 들어가는 것이다. 묵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야기하고 생각하지만, 관상하는 사람은 모든 기도의 중심이시며 살아 있는 말씀이신 예수님께 침묵으로 집중한다. (tip:왜냐하면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을 사랑하여 합일, 연합-진정으로 하나됨에로 초청하시며 그럼으로써 사랑 자체이신 그분을 진정으로 알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안아주시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이신 하나님 그분 자체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사랑으로 자신의 전 존재를 열어드리고 전존재를 기울여 그분의 품에 안겨서 그분을 누리며 사랑이신 그분을 안다.) 사실 관상은 (묵상보다) 한 단계 더 들어간다. 관상은 단어나 상징이나 개념을 넘어 그것들이 말하는 실체에 다가가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사고와 단어와 정서를 넘어서서 절대 신비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가슴과 마음을 열어 드리는 것이다. 호흡보다 더 가까이 계시고 우리의 생각보다 더 가까이 계시며, 선택보다 더 가까이 계시고 우리의 의식 그 자체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우리 안에 계심을 믿음으로 알고 있는 그 하나님께 우리의 인식을 열어 드리는 것이다. 관상 기도는 우리가 동의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시작하셔서 거룩한 일치로 이끄시는 (우리를 내적으로 정화시켜 주는 과정) 관계이다. 4.관상하는 법 현대의 많은 사상들과 반대로, 관상은 우리의 마음을 비우는 것이나 달콤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이렇게 마음 비움 인해 "스스로가 신이 됨"의 경험에 이르려 하함의 편향성이 바로 뉴에이지에 연결되는 관상가들의 치우침이 되고 있다는 것 명심하여야 한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관상적 기도의 주된 목적은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에 불을 붙이는 것이다. 만약 이를 경험하고 싶다면 관상 기도를 위해 방해 받지 않는 시간을 따로 떼어놓아야 한다. 존 던(John Donne)의 비유를 빌리면, 문 앞에서 악기를 조율함으로' 그런 기도가 시작된다. 즉 우리가 기도의 자리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 마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tip:관상적 기도에 익숙해지면 언제 어디서나 그분의 사랑의 임재 가운데로 사랑의 단어를 통해 들어 갈 수 있다) 우리는 방을 청소한다든지,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운전하면서 관상기도를 할 수 있다. 관상적 기도는 행동이라기보다 마음과 정신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모든 기도에 들어 갈 때 처럼) 관상적 기도의 자리로 들어갈 때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긴장을 푸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긴장을 푸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긴장하는 이유들을 알아내는 것이다. 해야 할 일에 대한 부담이나 배우자 또는 직장 동료와 다툰 일과 같은 걱정들이 있을 수 있다. 이런 마음의 짐들을 하나님께 넘기기 전에는 관상적 기도를 할 수 없다. 이것들을 하나님께 넘길 때 우리는 혼돈이 없는 시간의 팽창 속에서 우리 자신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은 이런 시간 속에서 우리를 새롭게 만나주신다. 아마도 이것이 베드로가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벧전 5:7)>는 말씀으로 우리를 초청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눈이 녹아 지붕에서 흘러내리듯 긴장이 우리에게서 흘러 나가도록 하고 우리 마음의 짐을 주께 드린 후에는 다음 기도의 단계로 들어간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는 것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임재에 우리 자신을 맞추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고요함 가운데 그분의 임재를 느끼며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연다. 종종 기도는 침묵으로 바뀌고 그를 향한 깊은 열망으로 채워진다. 이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는 곳으로 인도한다. 우리는 우리가 기도의 자리에 오기 오래 전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찾고 계셨음을 깨닫게 된다. 거기서 하나님은 우리의 갈망에 응답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의 따뜻함에 잠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고 계심을 느낀다. 그분은 당신의 영으로 우리를 채우시고 새롭게 하신다. 우리는 삶에 대해 새로운 관점, 즉 그분의 관점을 갖게 된다. 우리는 그분의 가슴에 가까이 다가가 세상에 대한 그분의 마음을 느끼게 된다. 상처받은 세상을 향한 그분의 안타까움을 우리가 깨달을 때, 관상을 통한 중보기도가 우리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Tip : 사랑의 기도, 마음의 기도이다. 말들이 의미하는 것들이 진정으로 실제로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우리는 이 말을 초월해서 그분이 우리에게 현존하시고, 우리 안의 깊은 곳에 계시고, 우리는 그분의 현존 안에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말 자체는 하나의 종소리처럼 우리를 잠에서 깨워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의 현존을 의식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진리를 성찰하면서 달리는 기도에서 자연스럽게 더 나아가 내재하시는 그분의 현존에 깨어 머물면서 그분을 응시하는 것이다. 묵상은 그림을 그리는 활동이라고 비교할 수 있고 이제는 완성된 그림을 조용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화가가 묘사한 화가의 생각의 실체를 의식하고 알아들으면서 그림 전체를 바라보는 것이다. 상징들(말, 생각, 개념)을 초월해서 우리는 영적이고 참되고 영원하고 저항할 수 없이 압도적인 실체, 즉 우리의 아버지, 그분의 사랑하시는 아들, 그리고 그분들의 영이신 하나님 자신에게 들어가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이라는 실체는 분명한 개념이나 묘사의 영역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우리의 정신은 이 하나님을 볼 수도 파악할 수도 없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을 식별할 수 있고, 영은 이 사랑을 일깨우고 승복하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고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확인하고 맞아들일 수 있지만, 생각으로는 결코 그분을 알 수 없다.> 고 말했다. 주님께서는 자애로이 이 사랑을 돌려주실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주입해 주시는 것이니, 우리의 영혼을 성령의 사랑으로 불태워 주실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기도는 진정으로 관상적인 속성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구송기도는 절대로 단순히 말만 읽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묵상기도 역시 생각의 활동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영적인 실체, 우리 자신의 영의 실체,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의 실체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위로자로 주신 성령이 우리 안에 내재하신다는 사실을 자각하기로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성령기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며, 성령께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영적인 선물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 묵상 기도와 관상적 기도란 어떤 것인가? 기도에 대한 이 두 가지 접근법은 어떻게 다른가? #영성 훈련 1 - 글 쓰기는 영적 훈련을 위한 좋은 방법이다. 주제나 본문을 한가지 선택한 후 묵상 기도 시간을 가지라. 그런 다음 묵상한 내용을 써 보라. 글을 쓰는 동안 자신의 내적 상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말씀묵상 1 - 시편 119:12-16.23-24.33-3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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