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05.11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삿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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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2장 [214.나주의도움받고자][274. 나 행한 것 죄뿐이니] [280. 천부여 의지 없어서] [310.아 하나님의 은혜로]...나의영혼이잠잠히..내마음의한자리..


[시126:1-6...*1.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2.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3.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5.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1. 모세 성막(주전 1445년) 출 40장

모세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하늘의 성막의 모형을 따라 성막을 짓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언약궤를 만들어서 성막의 지성소에 안치하였다.

모세의 성막과 함께 언약궤는 거의 39년 동안 함께 하였다. 

2. 길갈(주전 1406 - 1400년) 수 4:19, 5:10

가나안 1차 정복 시기에 언약궤는 길갈에 안치되었다. 

3. 실로(주전 1400- 1075년) 삼상 4장

여호수아는 가나안 1차 정복기간이 끝날 무렵, 실로에 하나님의 성막을 지었고 그곳에 언약궤를 안치하였다.

거의 300년 동안 언약궤는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4. 에벤에셀 (주전 1075년, 7개월 사이) 삼상 4장

엘리가 대제사장인 시절에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속박을 받고 있었는데 그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블레셋과의 전쟁을 벌였다.

1차 아벡 전쟁에서 패하여 4천 군사가 죽었을 때 이스라엘 장로들이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오게 하였다.

하지만 2차 에벤에셀 전쟁에서 패하여서 군사 3만이 죽고 언약궤를 블레셋 군사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5. 아스돗 (주전 1075년, 7개월 사이) 삼상 5:1-8

블레셋 사람들이 에벤에셀 전투에서 언약궤를 빼앗아 자신들의 성읍인 아스돗에 가져와 그곳 다곤 신당에 언약궤를 함께 안치해 놓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곤 신상을 깨뜨려 버리셨으며 아스돗에 독종이 임하게 함으로서 아스돗 사람들이 언약궤를 가드 성읍으로 보냈다. 

6. 가드 (주전 1075년, 7개월 사이) 삼상 5:8-9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가드 성읍으로 옮겼으나 오히려 하나님께서 더욱 심한 독종으로 그곳 가드 성읍 사람들을 치심으로 그곳 사람들이 언약궤를 에그론 성읍으로 보냈다. 

7. 에그론 (주전 1075년, 7개월 사이) 삼상 5:10 - 6:12

하나님께서 에그론 성읍 사람들에게 더욱 큰 환난을 당하게 하였다.

에그론 성읍 사람들의 많은 사람들이 사망과 환난을 당하였고 죽지 않은 사람들은 독종에 의해 거의 죽음 상태에 이르렀다.

결국 언약궤로 인해 블레셋이 멸망할까를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보내기로 결단하고서 빈 수레에 언약궤를 실어 이스라엘 지경인 벧세메스로 언약궤를 돌려 보냈다.

언약궤가 블레셋 세 성읍에 거한 기간은 7개월이었다(삼상 6:1). 

8. 벧세메스 (주전 1075-1023년 사이) 삼상 6:13-21

레위 지파 사람들은 언약궤를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있는 큰 돌 위에 안치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를 들여다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70명이 죽임을 당하였다.

벧세메스 주민들은 서둘러 기럇여아림으로 언약궤를 보냈다.  벧세메스에서 언약궤가 얼마동안 머물렀는지 알 수 없다. 

언약궤가 블레셋의 아스돗에서부터 다윗성에 이르기까지 대략 75년이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성경은 블레셋 지경에서의 7개월과 기럇여아림의 20년과 오벧에돔의 집에서의 3개월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나머지 50년 이상의 세월 동안 어디에 안치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9. 기럇여아림 (주전 1023-1003년, 20년) 삼상 7:1-2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언약궤를 옮겨서 보관하였다. 기럇여아림에 언약궤가 20년 동안 안치되었다.

언약궤가 성전을 떠나 홀로 안치된지 거의 20년이 지나는 동안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언약궤를 성전에 안치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사무엘에 의해 이스라엘의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을 때 저들이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었다. 이 기간까지 이후부터 다윗성까지의 기간이 정확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 기간 동안에 사무엘이 백성을 통치하였으며 사울이 그 뒤를 이어 이스라엘 초대왕으로 통치하였던 기간(40년간)동안 언약궤가 어디에 안치되어 있었는지 불확실하다. 

10. 오벧에돔의 집 (주전 1003-1002년, 3개월) 삼하 6:10-12, 대상 13:13-14

다윗 왕이 백성 중 빼어난 무리 3만을 이끌고서 기럇여아림으로 올라가서 거기서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가져 올려고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올 때에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를 때 언약궤를 메었던 소들이 뜀으로 인해 웃사가 손을 들어 언약궤를 붙들자 하나님께서 지노하사 웃사를 치시고 죽게 하였다.

다윗 왕은 이를 크게 두려워하여 감히 그 날에 언약궤를 옮기지 못하고서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에 3개월 동안 안치하게 하였다. 

11. 다윗성 (주전 1003-1002년) 대상 15:1-28

다윗이 여부스 족으로부터 점령한 시온성을 다윗성이라 이름하고 그곳에 하나님의 장막을 치고서 언약궤를 장막 안에 안치하였다. 

12. 솔로몬 성전 (주전 959-958년) 왕상 6장, 대하 3:2

다윗의 뒤를 이어 솔로몬이 왕이 된 이후에 11년 8개월만에 성전을 짓는다(대략 6년 6개월 소요됨).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어서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로 안치했다.

솔로몬 성전에 안치된 언약궤는 남왕국이 바벨론에 의해 파괴된 때까지(주전 586년) 거의 300년동안 예루살렘에 안치되었다. 

바벨론에 의해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는 언약궤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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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싶은 심정
저는 지금 울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먼저 내 마음을 점검하면서..)) 교회를 보면서, 또 이 나라의 상황을 보면서 울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세상에는 교회의 원수들이 판을 치고 있거든요. 교회의 원수들은 누구일까요?
교회의 4대 원수들
몇 년 전부터 현 시점에서 한국 교회의 4대 원수를 꼽자면 이단-이슬람, 이기주의-쾌락주의-상대주의 사조와 문화적 혼돈, 동성애-동성혼, 그리고 주체사상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주사파라고 알려진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있는데... 한편, 일부 국회의원들은 동성애/동성혼 합법화를 반복해서 시도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여러 성도들이 동성혼 합법화를 막기 위해 시위를 하고 있는 형국이고....동성애와 차별금지법을 막아내느라 정신이 없는 이 틈에 이단과 이슬람은 무슨 계략을 꾸미고 있는지 신경 쓸 여력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 밖의 원수들이고 교회 안에도 교회를 허무는 원수들이 많습니다. 
[아가2:15..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교회 내부의 4대 원수는 기복주의-신비주의-자유주의-다원주의 등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비성경적이고 반성경적인 사상은 교회를 안에서 갉아먹고 있습니다. 
바른 말씀을 가르치고 성도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 할 위치에 있는 이가 걸맞지 않게 돈과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습니다. 
두드러진 죄를 지어 세인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일이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습니다. 이럴 때는 내가 먼저...그리고 교회가 울어야 하는데 울지조차도 않는 것이 더욱 속상한 문제입니다.
울지 않는 한국교회
1907년에 대부흥 운동이 일어났을 때 성도들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일으키신 회개의 역사였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교회는 모이면 으레 울었습니다. 그런 분위기는 1980년대까지도 이어졌습니다. 많은 경우 설교의 마지막은 통성기도였습니다. 
설교자가 “회개하세요.”하고 내려가면 온 교회가 울며 회개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시대의 교회는 부흥했고 나라도 부강해졌습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이제 울지 않습니다. 가슴을 치지도 않습니다. 죄를 회개하지도 않습니다. 
정말로 울어야 하는 시대인데 눈물이 메말랐습니다. 아니 가슴이 메말랐습니다. 저부터 가슴이 메말랐습니다. 그래서 울고 싶습니다. 진정 저부터 울고 싶습니다. 저라도 울고 싶습니다. 울기만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울지도 않는다면 심각한 병입니다.
1999년, 뉴밀레니엄을 앞두고 100년 전, 평양 대부흥 운동을 다시 일으키자는 외침들이 많았습니다. “부흥” 혹은 “부흥2000” 등의 찬양도 유행했습니다.
하지만 부흥은 부흥 찬양을 뜨겁게 부른다고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부흥은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통회 자복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나마 지금은 그 뜨겁던 찬양의 열기도 식어버린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울어야 합니다. 지금 교회가 울지 않으면 울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질까 봐 두렵습니다. 
오늘 우리는 간절한 마음으로 “울게 하소서”라고 기도합시다.
이스라엘의 죄와 하나님의 책망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는 백성들이 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사기 2장에서 그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가 죽고 나자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두 가지 죄를 지었습니다. 
첫째는, 가나안을 정복하라는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그들의 죄를 본받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그 땅 백성들과 언약을 맺고 그들과 동화되었습니다.
(삿 2:2)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그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이스라엘의 죄를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정복하도록 도와주지 않겠으며 방벽을 거두심으로써 오히려 대적의 편에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그 가나안 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 우상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삿 2: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우리의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의 노력으로 이루어집니다. 만일 우리가 성화의 노력을 하지 않고 세상과 타협하면 결국 그 죄 때문에 괴롭게 되고 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보킴, 우는 자들
천사의 책망이 사람들에게 전해지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리를 높여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삿 2:4)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사람들은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래서 그 장소를 ‘우는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는 자들’은 히브리어로 ‘보킴(בֹּכִּים)’입니다. 
그들의 울음은 죄를 원통하게 여긴 회개의 울음이었습니다. 그 증거로 거기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삿 2:5)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그들이 제사는 번제와 속죄제였습니다. 번제는 헌신을 약속하는 예배입니다. 속죄제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간구하는 예배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회개와 눈물이 필요합니다. 죄를 원통히 여기고, 죄를 뉘우치고, 예수님을 의지하며, 죄 용서를 구하는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회복이 올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 자신의 죄와 한국교회의 죄와 우리 민족의 죄를 부둥켜안고 우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 울음이 씨앗이 되어 한국교회가 모두 보김(בֹּכִּים), 우는 자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 어느 교수님은 하나님께서는 내 신세를 한탄하면서 흘린 눈물도 다 기억해 주시더라고 고백했습니다. 
회개의 눈물이 아니어도 답답한 시대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서라도 울 수 있기 바랍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 주 나를 외면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회개는 시작일 뿐
보김에서 울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그 당시에는 소리를 높여 울었지만, 말씀 배우기 운동으로 연결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의 변화로 연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사시대는 영적인 암흑기가 되었습니다. 그 비참상은 10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삿 2:10)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이 말씀에는 슬픈 단어가 나오는데 ‘다른 세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 않으면 다음 세대가 다른 세대가 되어 버립니다. 
다른 세대가 되어버린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눈앞의 이익과 재미를 위해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다음 세대가 다른 세대로 전락한 이유는 그들이 말씀 지식이 얄팍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는 것은 회개의 시작일 뿐 완성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울었으면 반드시 말씀 공부로 이어져야 하고 그래야 순종하는 삶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말씀을 공부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 결과 다시 범죄하고 다시 고통당하는 상황이 반복될 것입니다. 
결국에는 우리 자손들이 믿음에서 떠나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자초하는 것입니다..((주님 탓 아니라, 스스로 떨어져 나감으로 인함입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
한번은 예수님이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농부가 뿌리는 씨앗 중에 일부가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그 씨앗은 싹을 틔웠으나 흙이 얇아서 말라 죽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이 돌밭에 떨어진 씨가 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우리의 믿음은 옥토에 떨어진 씨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흙이 얇아서 씨앗이 말라죽듯이 말씀 지식이 얄팍하면 우리 믿음이 고사합니다. 
그런데 돌밭은 자기를 바꿀 수 없지만 우리는 자신을 옥토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돌밭을 옥토로 바꾸려면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한 때 정말로 열심히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겨울 농한기가 되면 논바닥에 천막을 치고 야외에서 밥을 해 먹으면서 두 주간씩 성경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에게 <성경 기독교>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여러분의 성경책이 깨끗하면  영혼은 더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책이 너덜너덜해지면 그 반대로 영혼은 정결해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 성경책과 영혼 중에 어느 쪽을 깨끗하게 하시겠습니까? 영혼이 살기 위해서 제발 말씀을 읽고 배우시기 바랍니다.
세상 가치를 따라가지 말라
2절에 보면, 하나님은 분명히 그들과 언약을 맺지 말고 우상의 제단을 헐라고 하셨습니다.
언약을 맺지 말라는 말은 그들의 가치관, 사고방식, 생활방식을 따라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우상숭배자들이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입니다. 
만일 우상과 하나님을 함께 섬기겠닥 하면 한 여인이 두 남자를 사랑하겠다는 소리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가나안의 우상 제단을 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우상 제단을 헐지 않았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종교는 무교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무교를 배척하기보다 무교 위에 복음을 올려서 기복주의 신앙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 복은 현세적인 찰나적 (흥청망청 쾌락에 낭비하는)) 재물의 복이 아니라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속되는 주님 임재로 인해 누리는 바, 모든 차원과 영역,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요 운영자, 만물을 붙드시며 다스리시는 주님의 모든 풍성-부요-충만-Q경외함 안에서 진장한 정복과 다스림의, 그  지식과 지혜/총명/모략 재능과 권능이요, 천국의 영생과 복락입니다.
해결책은 회개와 말씀 운동
자, 그러면 해결책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그 해결책은 무려 400년이나 지나서야 나타났습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은 신앙생활도 망하고 나라도 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암흑기는 사무엘 시대에 끝났습니다.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우상을 버리고 미스바로 모여 회개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해결책입니다. 사무엘상 7:3~6을 찾아서 읽겠습니다.
[삼상7:3-6...*3.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4.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5.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6.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말씀이 사라지면 교회가 무너지고, 교회가 무너지면 나라가 함께 망합니다. 그것도 모르고 세상 세력은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 안팎의 원수들을 막아내지 못하면 교회와 나라가 함께 망할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까요?
보김을 넘어 미스바로
우리는 일단 보김을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통회하고 울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보김을 넘어 미스바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새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교회가 살고, 가정이 살고, 나라가 사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딤후 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말은 하나님께서 목사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또 성도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보김을 넘어 미스바까지 나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죄를 슬퍼하며 통회하시고 말씀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먹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목사가 여러분에게 억지로 성경을 읽게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성경을 사랑하고 배우기를 사모해야만 성경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억지로 가르치려면 부작용이 생깁니다.
어쩌면 여러분 자신도 여러분이 성경을 사랑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성경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는 이는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성령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성령님께서 먼저 회개의 영으로 오셔야 합니다. 또한, 진리의 영으로 오셔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며 찬송하고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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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흙, 먼지, 티끌... '아파르'(עפר)
아파르(명남)는 아파르( '아파르'(עפר) 6080: 티끌을 날리다)에서 유래했으며, '마른 흙, 먼지, 티끌'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09회 나온다.
---명사 아파르는 많은 문맥에서 문자적으로 '먼지, 푸석한 흙'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블레셋 사람들은 '푸석한 흙'으로 아브라함이 판 우물을 메웠다: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창 26:15).
성막 바닥의 티끌은 제사장이 취하여 거룩한 물에 넣어 간음죄를 판별하는 의식적 시험에서 마시는 약으로 사용되었다: "토기에 거룩한 물을 담고 성막 바닥의 티끌을 취하여 물에 넣고"(민 5:17). 
복수심에 불타는 시므이는 악의에 찬 저주를 하면서 다윗에게 티끌과 돌을 던졌다(삼하 16:13).
---슬픔과 애도의 표시로 머리에 티끌을 뿌리기도 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이스라엘이 아이성에서 패배했을 때 이러한 방법으로 비통을 표현했다(수 7:6, 겔 27:30, 애 2:10, 욥 2:12, 미 1:10, 티끌 속에서 뒹굶).
겸손과 자기 비하의 이러한 행동(종종 삼베옷을 입고)은 "지면의 티끌(흙)로 사람을 만드신"하나님에게의 의존을 나타낸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재료를 나타내는 대격). 
인간의 육체적 몸은 티끌(흙)에서 만들어졌고 따라서 육체적인 몸이 되돌아 가는 곳은 바로 이 티끌(흙)이다(창 3:19, 전 3:20, 전 12:7, 욥 4:19, 욥 8:19, 욥 10:9, 욥 34:15, 시 104:29). 
아마 이러한 용법 때문에 티끌은 때때로 바로 무덤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욥 7:21, 욥 17:16, 욥 40:13, 시 22:29, H30, 사 26:19).
---티끌(흙)은 땅(지구)의 표면을 가리키기도 하며(출 8:16-17, H12-13, 욥 19:25), 에레츠(땅, 지구)와 병행되어 나오기도 한다(예: 사 25:13, 사 26:5).
인간이 땅의 티끌에서 왔다는 사실은 창조 활동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상기시키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선하신 "생기"(breath of life)가 개입하지 않고서는 인간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형성된 예술 작품으로서 인간은 진흙으로 그를 만든 토기장이에게 찬양을 돌리고 순종해야 한다(사 29:16, 사 45:9, 사 64:8, H7, 렘 18:1-14, 참조: 롬 9:21).
하나님의 은혜로 티끌 인간이 산 인간이 되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인간의 겸허와 존엄성이 근거한다.
땅의 티끌의 풍부함 때문에 티끌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셀 수 없을만치 무수한 후손을 약속하실 때(창 13:16), 야곱에게 보답을 약속하실 때(창 28:14, 대하 1:9) 풍부함을 나타내는 비유로 이용된다.
---티끌은 너무나 흔하기 때문에 무가치함을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으로도 사용된다: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소경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흘리워서 티끌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찌라"(습 1:17, 슥 9:3, 욥 22:24). 
티끌은 가볍기 때문에 티끌은 흩어진 것을 나타내는 상징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아람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진멸하여 타작 마당의 티끌같이 되게 하고..."(왕하 13:7). (참조: R. B. ALLEN;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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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재를 쓴다는 말은 슬픔과 회개의 표시이다. 
구약의 사람들은 자신의 어려운 처지에 대한 슬픔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의 표시로 머리에 재를 쓰는 행동으로 자신의 마음을 나타냈다. 
때로는 재 외에도 흙이나 티끌(먼지)을 머리에 뒤집어쓰거나 옷을 찢는 것으로 슬픔과 회개를 표현하기도 했다.
왜 재를 머리에 쓰는 것이 슬픔과 회개의 표시일까? 그것은 재가 가진 상태와 용도 때문인 듯하다. 
재가 되는 것은 나무나 동물 등의 물질을 불에 태움으로 현재의 형태가 없어지고 전혀 새로운 상태로 변화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재는 나쁜 상황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성 싸움에서 패했을 때 여호수아는 장로들과 더불어 "머리에 티끌을 무릅 썼다"(수 7:6)는 것과 엘리의 아들들의 죽음을 엘리에게 전한 베냐민 사람은 "그 머리에 티끌을 무릅썼다"(삼상 4:12)는 것처럼 재를 쓰는 사람들은 현재의 불행한 슬픔의 상태를 나타냈고 다른 면으로는 자신들은 흙에서 온 인생들로 능력이 없는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는 겸손의 자세를 하나님 앞에 나타내는 것이다.
둘째, 재는 불순물이 제거된 청결한 상태이다. 
제물로 바쳐진 제물을 불태운 재를 머리에 쓰는 것으로 죄의 씻음을 받는 의식으로 사용했다. 히브리서 9장 13절을 보자.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이라고 한 내용에서 죄를 용서받는 예식의 일부가 되었던 것이다. 재는 이런 성경의 문화에서 뿐 아니라 일반 문화에서도 슬픔과 세척의 의미로 사용된 사례를 볼 수 있다.
우리 선조들도 소화가 안 될 때 재를 먹든지 목재를 불태워 만든 숯은 소독제로 사용하기도 한 것이나 물이 없는 사막지방에서는 모래 대신 재가 훌륭한 세척제로 사용된 것이다. 
그러므로 머리에 재를 쓴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슬픈 상태와 죄의 상황을 고백할 뿐 아니라 죄를 씻어달라는 소원의 표시이기도 하다.
화관을 쓴다는 말은 기쁨과 환희의 표시이다. 이 화관은 여자들이 머리에 쓰던 아름답고 화려한 관이다. 
이 화관은 머리에 쓰는 터번과 같은 모양으로 작은 모자를 쓴 머리 둘레에 화려한 색상의 손수건이나 숄을 감은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착용자의 기호에 따라 금은 장식과 보석들과 같은 값비싼 재료들을 덧붙이는 화려한 장식을 함으로 최고의 기쁨과 즐거움을 표시했다.
그러므로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한다"는 말은 애통이 끝나고 기쁨이 찾아오게 되면, 머리에서 재를 털어 버리고 그 자리에 화관을 써서 참된 희락의 마음을 갖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사야서 61장 3절을 보자.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겸허하게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은 죄의 노예였던 상태에서 벗어나 영적 자유와 구원을 누릴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을 보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재를 뒤집어쓰는 것' 뿐이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화관을 주어 위로와 기쁨을 주실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보김에 나타나다

1.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뜻 : 우는 자//애곡하는 자...실로?)으로 올라와 말하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2.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4.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5.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여호수아가 죽다

6.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들의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

7.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8.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9.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10.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리다

1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12.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13.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1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 넘기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15.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니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16.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노략자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으나

17.  그들이 그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며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길에서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더라

18.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들을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거늘

19.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그들의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2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령한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은즉

21.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22.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23.  여호와께서 그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사 그들을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셨으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 주지 아니하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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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V]제2장

1.  And an angel of the LORD came up from Gilgal to Bochim, and said, I made you to go up out of Egypt, and have brought you unto the land which I sware unto your fathers; and I said, I will never break my covenant with you.

2.  And ye shall make no league with the inhabitants of this land; ye shall throw down their altars: but ye have not obeyed my voice: why have ye done this?

3.  Wherefore I also said, I will not drive them out from before you; but they shall be as thorns in your sides, and their gods shall be a snare unto you.

4.  And it came to pass, when the angel of the LORD spake these words unto all the children of Israel, that the people lifted up their voice, and wept.

5.  And they called the name of that place Bochim: and they sacrificed there unto the LORD.

6.  And when Joshua had let the people go, the children of Israel went every man unto his inheritance to possess the land.

7.  And the people served the LORD all the days of Joshua, and all the days of the elders that outlived Joshua, who had seen all the great works of the LORD, that he did for Israel.

8.  And Joshua the son of Nun, the servant of the LORD, died, being an hundred and ten years old.

9.  And they buried him in the border of his inheritance in Timnathheres, in the mount of Ephraim, on the north side of the hill Gaash.

10.  And also all that generation were gathered unto their fathers: and there arose another generation after them, which knew not the LORD, nor yet the works which he had done for Israel.

11.  And the children of Israel did evil in the sight of the LORD, and served Baalim:

12.  And they forsook the LORD God of their fathers, which brought them out of the land of Egypt, and followed other gods, of the gods of the people that were round about them, and bowed themselves unto them, and provoked the LORD to anger.

13.  And they forsook the LORD, and served Baal and Ashtaroth.

14.  And the anger of the LORD was hot against Israel, and he delivered them into the hands of spoilers that spoiled them, and he sold them into the hands of their enemies round about, so that they could not any longer stand before their enemies.

15.  Whithersoever they went out, the hand of the LORD was against them for evil, as the LORD had said, and as the LORD had sworn unto them: and they were greatly distressed.

16.  Nevertheless the LORD raised up judges, which delivered them out of the hand of those that spoiled them.

17.  And yet they would not hearken unto their judges, but they went a whoring after other gods, and bowed themselves unto them: they turned quickly out of the way which their fathers walked in, obeying the commandments of the LORD; but they did not so.

18.  And when the LORD raised them up judges, then the LORD was with the judge, and delivered them out of the hand of their enemies all the days of the judge: for it repented the LORD because of their groanings by reason of them that oppressed them and vexed them.

19.  And it came to pass, when the judge was dead, that they returned, and corrupted themselves more than their fathers, in following other gods to serve them, and to bow down unto them; they ceased not from their own doings, nor from their stubborn way.

20.  And the anger of the LORD was hot against Israel; and he said, Because that this people hath transgressed my covenant which I commanded their fathers, and have not hearkened unto my voice;

21.  I also will not henceforth drive out any from before them of the nations which Joshua left when he died:

22.  That through them I may prove Israel, whether they will keep the way of the LORD to walk therein, as their fathers did keep it, or not.

23.  Therefore the LORD left those nations, without driving them out hastily; neither delivered he them into the hand of Josh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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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2장 (개요)

본 장에서 보게 될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이 사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신 특별한 메시지와 거기에 대한 그들의 인상(1-5).

2.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의 형편에 관한 일반적인 관념.

   (1)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사는 날 동안의 하나님에 대한 충성(6-10).

   (2) 그후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짐(11-13).

   (3)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14, 15).

   (4) 하나님의 긍휼과 그들에게 구원자를 세우심(16, 18).

   (5) 심판이 끝난 후 다시 그들이 우상 숭배로 타락함(17, 19).

   (6)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들에게 성공을 완전히 중단시키심(20-23).

이런 사실들은 본 장의 내용일 뿐 아니라 이 책 전체의 내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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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자의 책망(삿 2:1-5)

이스라엘은 그들을 행복의 길로 이끌고 또 보존시키기 위해 단 한 번 하늘로부터 보내진 율법을 소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언제든지 정도에서 이탈할 때에는 그 때마다 교훈과 책망을 주는 하늘로부터 오는 특별한 메시지를 가졌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특권이었다. 그들이 이미 읽을 수 있는 기록된 말씀 이외에도, “이것이 정로다”라고 그들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를 종종 들었다(사 30:21). 

하나님이 그렇게 이스라엘 민족을 대하시는 방법이 여기서 비로소 시작되고 있다. 그들이 모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자 예언자들의 말을 듣는지 안 듣는지 시험받게 된 것이다. 

본 장에서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앙에 냉담해졌을 때 선포되었던 각성을 촉구하는 설교를 보게 된다.

Ⅰ. 설교자는 선지자도 아니고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비느하스도 아니고 단지 “여호와의 사자(천사)”였다(1절). 

복음 사역자도 사실상 “교회들의 사자”라 불린다. 그러나 구약의 선지자들은 결코 여호와의 사자라고 불리지 않았다. 

의심할 바 없이 여기서 말하는 천사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사자였다. 

이런 특별한 사자들은 기드온과 삼손과 같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사들을 세우는 일에 기용되었음을 자주 본다. 

여기서도 사자들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는 선한 직능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보여 주기 위해 그들에게 보내진 한 사자가 있다. 

이스라엘인들로 하여금 죄와 고통에 빠지지 않도록 보내진 이 특별한 사자는, 눈에 보이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마음을 쏟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 메시지에 보다 큰 관심을 기울이고 마음을 쏟도록 명령하는 사명을 띠고 있었다. 

패트릭 주교는 이 사자가 어떤 피조된 천사가 아니라 “여호와의 군대의 대장, 즉 하나님 자신과 같은 분으로서 여호수아에게 나타난 사자처럼 언약의 천사”라는 분명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라이트푸트 박사는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아니고서야 그 누가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후에 그들에게 가나안 사람들과 혼합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훈계했다. 그러나 그들은 죽어가는 사람의 말을 유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한 천사처럼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 살아 계신 하나님 자신을 통해 그들에게 똑같은 경고를 되풀이한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종들은 멸시했을지라도 그 분의 아들은 존경할 것이다. 

여호수아의 이 사자는 길갈에서 올라왔다고 말하는데, 아마도 그는 지상 위를 걸어온 것이 아니고, 천사 가브리엘이 다니엘에게 왔듯이 하늘 공간을 빠르게 날아서 왔을 것이다. 

걸어왔든지 날아왔든지 간에 그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길갈로부터 온 것으로 보인다. 

길갈은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온 후 오랫동안 그들의 본진영이었고 거기서 할례의 언약이 새롭게 되었으므로(미 6:5), 그가 길갈로부터 옴으로써 그 모든 사실이 그들에게 기억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기억하는 것은 우리를 확고하게 해 주는 경고가 될 것이다(계 3:2, 3).

Ⅱ. 이 설교의 대상은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었다(4절). 

위대한 설교자의 위대한 대중! 그들은 어떤 중대한 원정을 앞두고 각 지파의 연합군을 파병하기 위해 회집되었든가 아니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여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회합 장소는 매년 세 번씩 함께 모이는 회막이 있는 실로가 되었음이 틀림없다. 

우리는 제도적인 제의식을 통해 하나님 앞에 참예할 때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회막 문에서 그 분의 선물 받기를 기대하게 된다. 

그 장소는 보김이라고 불렸는데(1절), 그 때의 필요에 따라서 이름이 붙여졌기 때문이다. 

모든 이스라엘인에게 책망과 경고가 필요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이 그들 모두에게 선포된 것이다.

Ⅲ. 그 설교는 짧지만 대단히 함축적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다음의 몇 가지 내용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1.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1절). 

하나님은 노예와 고역의 땅인 애굽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시고, 휴식과 자유와 풍요의 땅인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친절하셨고, 그들의 열조에게 하신 맹세에 신실하셨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그와 같은 실증을 보여 주셨다. 

그런데도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불신했다면 그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며, 그들을 돌보셨는데도 포기해 버렸다면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언약. 곧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당신의 특별한 백성으로 택하신 것은 임의로 저버리거나 다른 백성과 그 위치를 마음대로 바꾸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오직 하나님께만 충실하다면 그 분은 결코 변함없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그들과 맺은 언약은 그들 편에서 파괴하는 경우가 아니고는 결코 파괴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3. 하나님께서 타당하고 합리적인 요구를 그들에게 하셨다(2절).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세웠으므로 마땅히 하나님과 원수인 가나안 사람들과 영합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의 제단을 세웠으므로 가나안의 단은 헐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게 될 유혹에 빠지게 될 것이다.

4. 하나님이 가장 강하게 주장하신 바로 그 일에 대해 이스라엘이 어떻게 했는가? 

그들은 복종치 않았다. “너희는 이 하찮은 일에도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과 그 언약 안에서 이루어진 서로 간의 동맹을 멸시하고, 우상 숭배하는 가나안 사람들과 우호 관계를 맺어 하나님의 단과 마주 대해 이방 신단들을 세워도 그것을 묵과했던 것이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너희는 이런 잘못에 대해 어떤 합당한 설명을 할 수 있는가? 너희를 위해 무슨 변호를 할 수 있으며 무슨 변명을 갖다 댈 수 있느냐?” 

하나님과의 교제를 포기하고 어두움의 무익한 일들과 함께한 자들은 그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며 곧 다가올 심판의 날에 자신들을 위해 변명할 말을 전혀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5. 이 어리석음으로 인해 그들은 어떤 고통을 각오해야 했던가?(3절) 

그들 가운데 가나안 사람들을 용납해 둔 것은,

(1) 가나안인들에게 승리의 기회를 줄 것이다. 

“너희가 그들을 쫓아내지 아니하므로 나도 그들을 쫓아내지 아니하리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래서 그들의 죄가 그들의 벌이 되었다. 

그들이 욕심과 부패에 빠져 하나님의 은혜를 욕되게 상실해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서 떠나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우리가 악마에게 저항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악마를 우리의 발 아래 두실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2)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 괴로움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되어, 너희가 어디로 돌아눕든지 너희에게 상처를 주리라.”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과 동맹을 맺고 하나님께 도움을 기대하는 것은 자기 기만이다.

(3)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끊임없는 시험이 될 것이요, 그들을 죄로 이끄는 수단이 될 것이다. 

혹자는 “그들의 신들이(시리아역은 그들의 가증한 것들이라고 했다)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즉 너희는 비참하게도 그들에게 이끌리어 뒤얽히게 되고, 그것이 너희의 파멸이 될 것이다”라고 해석한다. 

죄에 접근하는 자들은 반드시 죄에 빠지게 되고 거기서 망하게 된다. 하나님은 흔히 사람들의 죄가 그들 스스로에게 형벌이 되게 하신다. 

하나님을 등지는 완고한 자들의 “앞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다.

Ⅳ. 이 설교의 성과는 대단히 주목할 만하다. 백성들은 “소리를 높여 울었다”(4절).

1. 천사는 그들의 죄에 대해서 말해 주었고, 그들은 그것으로 인한 슬픔을 나타냈다. 

그들은 죄의 고백의 소리를 높였고 자신들의 어리석음과 배은망덕에 대해 소리치며 울었는데, 그것은 수치를 느꼈음과 동시에 분노를 터뜨린 것이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들이 이성과 유익에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일을 해 왔기 때문이다.

2. 천사는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고 그들은 거기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냈다.

 그들은 소리 높여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어 달라고 기도했고, 그 진노의 두려움으로 인해 울었다. 

이 경고로 인해 완고히 굳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풀리게 되었다. 

그래서 그 말씀에 두려워 떨고 감히 내세울 말이 없게 되었다. 이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 말씀이 그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는 표가 되었다. 

눈물 없이 성경을 읽을 수 있다는 자들은 놀라운 죄인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충분하지 못했다. 

그들은 울었지만 개심해서 집으로 돌아가 모든 우상 숭배의 유물들과 그들 가운데 있는 우상 숭배자들을 파멸시켰다는 기사는 찾아볼 수 없다. 

많은 완악한 사람들은 그들이 새로운 모양을 입기 전에 먼저 말씀으로 녹아들고 만다. 그러나 이 전체적인 울음은,

(1) 그 장소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 주었다(5절). 

그들은 그 곳을 보김, 즉 우는 자들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것은 우리들의 종교적 회집에 붙일 수 있는 좋은 이름이다. 

그들이 하나님과 밀접히 지내고 의무에 충실했다면 노랫소리만이 그들 회중에서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죄와 어리석음으로 인해 그들은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에 거기에는 울음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2) 그 설교는 엄숙한 희생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단이 있는 실로에 모였기 때문에(이것은 상상이지만) 거기서 여호와께 희생을 드렸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고 그 분의 은총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그들 자신을 바친다는 표시로, 또한 이 희생으로 말미암아 언약을 세우기 위해 희생 제물을 드렸다. 

그러나 이야기의 결과에 비추어 볼 때, 우상 숭배의 뿌리는 너무나 깊이 박혀 다 뽑힐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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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삿 2:6-23)

이 본문의 시작은 여호수아의 통치 기간과 그의 죽음과 매장에서 그 백성이 보여 준 아름다운 일들에 대해 이미 나왔던 이야기의 단순한 반복이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나오는 내용의 길잡이로 나와 있을 뿐이다. 본 장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과 패역을 말해 주고 있다. 

그 사자는 가나안 사람들과 그들의 우상들이 이스라엘에게 올무가 되리라고 예언했다. 

이제 이 역사가(신명기 저자)는 그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 주고, 그것을 더욱 분명히 나타내기 위해 그 앞에 있었던 몇 가지를 회고하며 다음 사실에 관해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가나안 땅에서의 행복한 정착에 대해. 여호수아는 각기 땅을 분배해 주고 조용하고 안전하게 소유하도록 백성들을 해산시켰다(6절). 

그는 모든 족속에게뿐 아니라 모든 개인도 각자 그 자신의 축복으로 받은 기업으로 돌아가게 했다.

-- 그들은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계속해서 두려워하고 믿었다(7절). 

그들이 하나님께 충성하기로 한 그 선한 결심을 가지고 그들의 기업이 되는 땅으로 돌아가는 동안은 그랬다. 

즉 그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 주고 좋은 교훈을 주며 그들 가운데 잠식해 들어오는 부패를 책망해 주고 막아 주는 선한 지도자들이 있는 동안, 또 하나님이 그들을 가나안으로 이끄실 때 그들을 위해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나게 하는 그런 지도자들이 있는 동안은 그 선한 결심을 잘 지켜 나갔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기사들을 목격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눈을 믿게 되었고, 자기들을 위해서 그토록 영광스러운 현현을 보이신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이유를 충분히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 세대는 보지 못했기 때문에 믿지 않았다.

-- 그 백성들의 종교적 문제에 결정적 타격을 준 여호수아의 죽음과 장례에 대해(8, 9절). 그들은 여호수아에게 입은 은혜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의 죽음에 존경을 표했다. 

그래서 그를 딤낫 헤레스에 장례 지냈다. 본 장에는 여호수아서와는 달리―거기서는 딤낫 세라로 불렸다―불리고 있는 것이다. 

헤레스란 태양을 의미하는데, 어떤 사람은 이것은 그의 무덤 위에 있는 한 상징이며, 그것 때문에 태양이란 이름을 붙이게 되었고, 태양처럼 끊임없이 빛나는 그의 말을 기억해 붙였다고도 한다. 

몇몇 유래들은 그렇게 말하지만, 나는 당시 사람들이 태양을 숭배하는 경향이 강했음을 염두에 두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 불명예를 돌릴 위험이 있었다고 본다. 

또한 여호수아에게 영예를 돌리기 위해 태양의 상이 허락될 수 있었을까도 적잖게 의문이 간다.

-- 새로운 세대가 태어남에 대해(10절).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당시의 모든 세대는 죽고 그들의 아름다운 교훈과 본보기들도 그들과 함께 장사되어 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이스라엘 자손들이 나왔으며 온갖 교육적 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의 종교에 대해 별다른 인식도 없고 관심도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나타내신 바 그대로 그 분을 알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그들이 여호와를 바르게 알았더라면 그 분을 저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완전히 세상일에 심취했다. 그래서 세상일에 뜻을 두었고, 안일과 사치로 육신의 소욕에 이끌려 참되신 하나님과 그 분의 거룩한 종교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너무나 용이하게 거짓 신들과 가증스러운 미신으로 치우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사 시대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여러 가지 일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전해 주게 되었고, 동일한 내용을 동일한 순서로 반복했던 것이다.

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저버렸고, 오직 그 분께만 돌려야 할 경배와 영광을 가나안 족속들의 쓰레기 같은 잡신들에게 돌리게 되었다. 

“너 하늘아, 이 일을 인하여 놀랄지어다. 오, 땅이여.” 

그렇게 잘 먹여 주고 잘 교훈한 하나님, 능력이 무한하시고 흠없이 순결하시며 다함 없는 아름다움을 가지셨고 다른 경쟁자에 대해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길거리에 흔한 나무나 돌과 같은 물건과 바꿀 수 있겠는가?(렘 2:11, 12) 이렇게 어리석고 배은망덕하고 패역한 예는 결코 없을 것이다.

그것이 여기에 어떻게 기술되어 있는지 살펴보자(11-13절). 

전반적으로 보면, 그들은 그 이상 더 악한 것이 있을 수 없는 그런 악을 행했다. 

즉 하나님을 격노케 하고 그들 자신들에게도 더 나쁜 것이 없을 정도의 악을 행했으며, 그 악행을 “여호와의 목전에서” 행했다. 모든 악이 그의 앞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보다 다른 신을 섬기는 죄를 특별히 주목하신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 그들은 “여호와를 버렸다”(12, 13절). 

이것은 예레미야 2장 13절에 나타난 2대 악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언약으로 여호와와 결합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마치 아내가 그 남편을 속이고 떠남같이”(3:20) 하나님을 저버렸다. 

시리아역은 이것을, “그들은 여호와 예배를 저버렸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하나님 예배를 저버린 자들은 결과적으로 하나님 자신까지도 저버린다는 것이다. 

여호와는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이요, 그들은 여호와의 집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섬겨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은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셨고” “그들의 굴레를 풀어 주셨다”는 점에서 역시 마땅히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사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상을 더욱 악화시켰던 것이다.

2. 그들은 참되신 하나님을 저버리고서 “하나님이 없다”(시 14:1)라고 하는 어리석은 무신론자가 된 것이 아니라 다른 신들을 섬겼다. 

이스라엘은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특별한 선민이 되는 영예를 가졌고, 존귀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들 자신의 특권에 비해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들은 남신과 여신 곧 바알과 아스다롯을 비롯해 태양과 달, 즉 주피터와 주노를 향해 단을 세웠다. 

바알림은 주(主)들을 의미하며 아스다롯은 축복받은 자들을 의미한다. 이 양자는 둘 다 복수(復數)를 나타내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이 한 분이신 여호와를 버렸을 때 많은 신과 많은 주인(lords)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무엇으로 신을 삼든지 간에, 그 신들을 섬겼고 그들에게 영광을 돌렸으며 은혜 받기를 구했던 것이다.

Ⅱ.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것으로 말미암아 노를 발하셨고,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 넘겨주었다(14, 15절). 

그 분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요 자신의 명예로운 이름에 진실하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진노하셨다. 

그들의 패역을 벌하기 위해 하나님이 취하신 방법은, 유혹자들을 통해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 충성했더라면 위대하고 행복하게 되었을 것이지만, 하나님을 저버림으로써 그만큼 더욱 비참하고 비천하게 되었던 것이다.

1. 승리의 행운은 그들을 저버렸다. 

그들이 하나님을 저버린 후에는 전에 그들이 손에 칼을 들 때마다 정복이 확실했던 만큼 이제는 패전이 분명했다. 

그전에는 적들이 그들 앞에 나서지 못했고 그들이 가는 곳은 어디에서나 여호와의 손이 보호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이 냉담해졌을 때, 하나님은 당신의 은총을 도말하셨다. 

그래서 그들의 성공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원수들을 더 이상 몰아낼 수 없게 되었다(3절). 

그 땅을 사수하는 데 급급하게 되었다. 그들이 완전히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되자, 그들을 치는 전쟁이 즉시 일어났고, “더 이상 그들의 적을 당해 낼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일단 알고 고백했다가 다시금 저버린 자들보다는 오히려 당신을 전혀 알지 못한 자들에게 성공을 주시려 한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다”(사 63:10).

2. 그러자 힘의 균형도 깨져 그들에게 불리하게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그들을 압제하거나 노략질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 넘기셨다. 

우리가 팔아 버린 물건을 처분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은 아낌없이 그들을 넘겨주셨을 뿐 아니라 반역할 때는 당신 자신의 특별한 선민까지도 그냥 두시지 않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보존하기 위해 사려 깊게 그 일을 단행하셨다. 

배신으로 인한 하나님의 영광의 침해에 대한 보상은 어떤 고난을 통해서도 다 갚을 수 없는 빚진 자들(마 18:25)이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팔아버리셨다. 그들의 형벌이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1) 그들이 행한 바대로 보응받았다. 그들은 그들 주변에 있는 민족들 중 가장 비천한 민족들의 신들까지도 섬겼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 주위에 있는 민족들의 왕들, 즉 가장 비천한 왕들까지도 섬기게 했다. 바보의 동료가 된 모든 자는 마땅히 모든 동료에 의해 바보로 여겨지는 법이다.

(2)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어떻게 응답되었나? 

언약을 맺은 그들 앞에는 축복과 생명과 더불어 저주와 죽음을 두겠다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고 맹세하신 것과 같이, 하늘의 손은 그들을 저버렸다.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발견한 자들은 또한 그 분이 경고에도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능히 추론해 낼 수 있을 것이다.

Ⅲ.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은 비록 그들이 자기들의 죄와 어리석음으로 인해 곤고를 당할지라도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어 구원하셨다. 

그들이 당하는 고통은 그들의 죄에 대한 벌이요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이지만, 그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고통 중에서 구원함을 받았다(16-18절). 

여기서 다음의 사실들을 살펴볼 수 있다.

1. 구원의 길로 그들을 인도하심. 

그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서 온 것으로, 그 근거는 하나님 안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뉘우친 것이” 아니라(17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들 중 많은 사람은 회개하지 않고 죄를 계속 범했다) “그들이 괴로워함으로써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신음은 그들의 죄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이 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서 영원히 멸망받아야 마땅하며, 오늘날은 하나님의 인내의 날이요 우리에게는 시련의 날이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진노를 다 발하시지는 않음이 사실이다. 

공의로 볼 때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렸어야 했지만, 긍휼하심으로 인해 하나님은 그런 일을 행하실 수 없었다.

2. 그들의 구원의 도구.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로부터 천사들을 보내지 않으셨고, 그들의 조력을 위해 어떤 외국의 세력도 끌어들이지 않으시고, 때에 따라서 그들 중에서 사사들을 세우셨다. 

하나님은 사사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어 부르셨으니, 이스라엘을 개혁하고 구원해야 할 사명과 놀라운 성공으로 관 씌우신 위대한 사명으로 부르신 자들이 있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세우셨을 때 “그들과 함께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자들이 되었다. 다음의 사실들을 관찰해 보자.

(1) 교회가 타락하고 곤고를 당할 때에, 하나님은 교회를 거기서 구원하시고 모든 것을 바르게 세울 어떤 사람을 찾으신다.

(2) 공적인 사명에 유용한 사람을 시기에 합당하게 일으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그 분은 사람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주시고, 그들에게 행동하고 모험할 수 있는 기백을 주신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들 국가에 주시는 모든 축복은 하나님의 선물로 간주되어야 한다.

(3) 하나님은 부르신 자들을 인정하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임재를 허락하시며 항상 함께하실 것이다.

(4) 한 나라의 사사(재판자)들은 그 땅의 구원자들이다.

Ⅳ. 타락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그리고 철저히 개선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사사들에 의해서도 돌아서지 않았다(17-19절).

1. 사사들이 그들과 함께 있어 개혁사업에 활동하고 있는 동안에도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바로 그 때에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았고” 우상에 미쳤으며 완고히 치우쳐 타락했다. 

그들은 하나님과 혼인한 관계였지만 혼인 서약을 파기했으며, 이방 신들을 좇아 음란에 빠졌던 것이다. 

우상 숭배는 영적인 간음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부도덕하고 천박한 것이며 불성실한 것이다. 그들은 돌아서기에는 너무나 완고하며 오직 거기에 골몰해 있었다.

2. 개혁의 시기에 바른길로 가기 시작하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시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옛날과 같이 여전히 악해졌다. 

그들은 경건한 열조가 행하던 그 길에서 떠났다. 그것도 그들의 열조의 선한 전승과 그들 자신의 좋은 교육의 영향에서 새 출발을 한 바로 직후의 일이었다. 

경건한 조상을 가진 악한 자녀들이 그와 같이 행했으므로, 그들에게는 책임이 그만큼 클 것이다.

사사가 죽은 후에는 우상 숭배를 막고 있던 둑을 터 놓은 것과 같아서 우상 숭배의 홍수가 다시 넘쳐흘러 그들은 더욱 패괴해졌다. 

그래서 개혁을 지향하던 때보다 그 다음 세대가 더욱 악해진 것으로 생각되었다(19절). 

“그들이 그 열조보다 더욱 패괴하여,”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조상들을 능가했고, 속되고 불경한 의식을 창안했다. 

곧 그들은 개혁자들의 길과는 모순되는 길을 걸었다. 그들은 악한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않았다. 

가장 추악한 우상 숭배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가장 야만적인 자들에 대해서도 혐오를 가지지 않았으며, 그들의 완고한 길에서 한 걸음도 돌이키지 않았다. 

이미 알고 고백했던 하나님의 선한 길을 저버린 사람들은 흔히 죄에 대해 아주 대담하고 파격적이어서 그들의 심정은 극도로 완악해지게 된다.

Ⅴ.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결심은 그들 위에 계속 채찍이 머무르게 하셨다.

1. 그들의 죄는 가나안 족속들을 남겨 둔 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맺은 언약과 그들에게 준 계명을 멸시하고 파괴하면서 행한 일이었다(20절).

2. 그들의 벌은 그들이 남겨 두었다. 

그들이 살려 둔 가나안 족속이 자신들에 대한 채찍이 된 것이다.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여호수아의 손에 맡기시지는 않았다(23절). 

우리 주님께서도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셨으나”(골 2:15, 표준새번역) 처음부터 완전한 승리를 하시지는 않았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모든 것이 주님에게 굴복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 땅에 가나안 족속들이 남아 있었듯이, 교회에는 사탄의 세력이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여호수아는 영원히 살아 계시다. 마지막 심판 날에는 그 분의 완전한 정복이 있을 것이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는, 가나안 족속을 치는 일이 오랫동안 별로 진전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그들과 섞이게 되었고 그들과 친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그들을 추방하지 않으려 하셨다(21절). 

만일 그들이 자기들과 함께 거할 만큼 친밀한 자들이 있거든 그렇게 하도록 버려두라. 그리고 어떤 결과가 오는지 보게 하라. 하나님은 그들의 미혹을 결정하셨다(사 66:4).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부패한 욕심과 정욕을 좋아하며 거기에 빠지게 되고 그런 것들을 억제하기보다는 조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파멸에 이르는 죄의 세력에 그대로 버려두신다. 

“그리하여 그들의 운명은 파멸에 이르게 되며, 그것은 그들 자신이 택한 것이다.” 그들(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를 시험하기 위해 남겨진 자들이다(22절). 

그러나 또한 하나님이 그들을 아시기 위함이 아니고, 그들이 그들 자신을 알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를 시험하려고 한 것이었다.

(1) 가나안 족속들이 이스라엘 앞에 내놓은 우상 숭배에 대한 유혹을 그들이 이길 수 있나 없나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이 스스로는 이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신 7:4).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좋다. 내가 너희를 시험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시험한 결과 그 유혹자들의 매력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강력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이 얼마나 거짓되며 사악한지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우리는 슬픈 체험을 통해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참이었는지를 감지한 후에야 믿게 된다.

(2) 가나안 사람들이 야기시키는 괴로움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용해 그것을 통해 죄를 뉘우치고 겸손해져서 스스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가 본분을 다할 수 있는지 없는지, 또 가나안 사람들로부터 오는 계속적인 경고를 받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고 거역하기를 두려워하는지 아닌지 시험하기 위함이었다.

===호크마

====2:1

여호와의 사자가 갈길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 여기 이른바 "여호와의 사자"(* )는 실상 여호와 자신이시다. 

그것은, 그가 친히 "내가 너희를...내가...내가"라고 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이가 그 자신이심을 밝히신 말씀이 알려준다. 

그러므로 그는 여호와 자신으로서 구약 시대에 제시(提示)되신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말 3:1에는"언약의 사자"(*)라고 하였으며, 히 3:1에는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라고 하였다. 

"길갈"은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서 가나안의 산악지방을 정복할 동안 머물렀던 근거지이다. 그리고 "보김"은 "벧엘"에 대한 다른 이름이다. 

70인역(LXX)은 "보김"이란 땅 이름에 "벧엘"(* )이란 말을 첨부하였다. "보김"은 "벧엘"을 가리킨 것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무리가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5 절). 전에는 법궤가 길갈에 있었지만(수 5:9), 이 때에는 벧엘로 옮겨진 것이 사실이다(20:26-27). 

그러면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하신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는 "길갈"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할례(割禮)로 언약을 확고히 하신 그가(수 5:9, 13-15) 이제 "보김"에 나타나셨다는 뜻이다.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그가 그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대로(창 13:14-15) 그들을 인도하여 그 땅을 주신 것은, (1) 그의 진실성을 증명하며, (2) 그의 구원의 능력을 실증하며, (3) 그의 사랑을 보여준다(사 43:1-4). 그러므로 그는 절대로 믿을 만한 참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니만큼 그가 친히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내용(창 17:8)의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니,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의 자비는 무궁하시다. 애 3:22참조.

====2:2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 하나님께서 일찌기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민족과 "언약을 맺지 말라"고 경고하여 주셨다(출 23:32-33, 34:12, 16; 신 7:2; 수 23:12-13).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족속과 교류하며, 그들의 우상 숭배를 용납하는 의미에서 언약을 맺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도리어 그들은 가나안 족속들의 우상 제단을 파괴해야 된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이 가나안 족속의 제단을 파괴하려면 전쟁의 강한 정신이 요구된다. 

오늘날 기독자들이 이 세상의 그 무엇을 하나님처럼, 혹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그것이 그에게 우상이다. 

그들이 그것을 파괴하는 것도 전쟁하는 심리로만 할 수 있게 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피 흘리기까지 죄를 대적해야 된다고 가르친다(히 12:4). 

우리가 죄를 이기기 위하여는 희생, 용기, 결단, 수고, 또는 죽음까지라도 각오하는 심각한 전투적 노력이 있어야 한다.

=====2: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들과 언약을 세우는 경우에 하나님께서 다시는 그 민족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어 주시지 않겠다고 이미 경고하신 바 있었다(수 23:12-13). 

여기 이른 바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란 말은 그들이 죄를 용납한 결과로 당하게 될 화(禍)를 의미한다. 

기독자들도 죄와 싸우지 않는 때에 그 죄가 가시처럼 그들을 괴롭히며 덫처럼 그들을 잡아 거꾸러지게 만든다.

=====2:4,5

하나님("여호와의 사자")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지적하시고(2절), 그들이 그 불순종한 죄값으로 가나안에서 화를 당하게 되리라고 선포하실 때에 그들은 저희의 죄를 뉘우치고 큰 소리로 울었다. 

"여호와의 사자"라는 이는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권위로 임하신 영(靈)이시니 만큼 그들의 심령에 압도적으로 큰 충격을 주셨을 것이다. 

그러니 만큼 그들도 통회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곳 이름을 "보김"(* ), 곧 우는 자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으니, 그것은 그들의 죄악을 대속(代贖)하기 위한 속죄제(贖罪祭)였을 것이었다. 

그들이 통회(痛悔)한 것도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그의 말씀을 불순종한 저희의 죄악을 원통히 여기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린 것은 죄악 문제에 대한 해결책, 곧 하나님이 계시하여 주신 속죄의 제도에 순종한 신앙인 것이다. 

기독 신자들도 그들의 죄악 문제에 대하여 원통한 느낌을 가지는 것만으로 해결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믿음으로 만족한 회개를 이룬다. 

이스라엘이 여기서 회개하고 믿는 형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 믿음을 오래 동안 지속하지 못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와 같은 것은 예수님의 말씀하신 바 씨 뿌리는 비유에 있어서 돌밭에 뿌리운 씨의 나타남과 같은 것이다. 

곧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으므로 쉽게 말라버림과 같은 것이다(마 13:20-21). 

또한 가시떨기에 뿌리운 씨와 같다고도 할 수 있으니, 곧 말씀을 듣고 반응을 보이다가 세상 염려 때문에 결실하지 못함과 같은 것이다(마 13:22). 

참된 경건은 좋은 밭에 뿌리운 씨와 같아서 인내로 결실하는 것이다(눅 8:15).

=====2:6-10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와 또 하나님의 기적적 구원을 목도한 지도자들("장로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여호와를 잘 섬겨왔다. 

이 사실을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지도자들의 영향력이 교회에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영향력이란 것은 인간적인 어떤 힘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영적 운동은 하나님의 영력의 간섭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적 능력도 인간의 역사를 통하여서 실시되는 것이 사실이다. 

롬 10:17 에는 말하기를,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세우신 기관은 역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도하시며 다스리심에 있어서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용하시지 않고 천사들을 통하여 각 개인을 지도하신다면 더욱 더 효과적이 아닐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특별히 세워서 자기 백성을 위해 영적으로 더욱 유력하게 일하시는 방면이 있다. 

(1) 지도자를 모본으로 세워주셔서 그들의 신앙 생활이 구체화되도록 함이다. 

사람들은 자기와 같은 연약한 인간 존재가 하나님의 영력을 받아 구원 받는 것을 볼 때에 자기들도 그렇게 되고자 하는 용기를 얻는다. 

성경은 확실히 이 방면을 제시하여 준다. 곧, 성경이 우리에게 기도의 용기를 주기 위하여 말씀하기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고 하였다(약 5:17-18). 

(2)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우시는 또 한가지 이유는 사람들을 붙들어 주시기 위한 체휼(體恤) 때문이다. 

지도자의 눈물이 피지도자들의 눈물을 발생시키고, 지도자의 사랑의 수고가 지도를 받는 자들의 마음 속 깊이에 아름다둔 덕행의 동기를 발생시킨다. 

이것은 오직 인간인 지도자를 통로(通路)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천사들은 고난 당하는 일도 없고 눈물도 없다.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 (10 절 상반) 곧, 여호수아와 같은 시대의 사람들이 다 죽었다는 뜻이다. 

정통 학자들 중에서 이 문구를 내세(來世)과 관계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곧,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그세대 사람들이 죽어서 그 영혼으로 앞서 간 성도들이 가 있는 복된 세계로 들어갔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 (10절 중간) 이것을보면 인생은 올바른 영적 교육을 받아야 하나님을 알게 된다. 

신자의 가정에서 자라난 자녀들이라고 하여 그들이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거나 신앙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뿐 아니라 국가적, 또는 사회적 교육 기관이 참된 종교 교육을 보장하는 일도 매우 드물다. 

어떤 시대에 국가적으로 하나님을 잘 공경하도록 권장하는 일이 있게 되면 그 때에 부모된 자들이 자녀들에게 신앙 교육을 착실히 실시해야 된다. 

그렇게 못하면, 그 부모들이 별세한 뒤에 그들의 사회는 불신앙과 세속으로 타락할 수 밖에 없다. 

자녀들에게 신앙 교육을 실시함은 하나님의 명령이다(신 6:6-7; 시 78;5-8). 이 일에 대해서도 원천적으로 지도할 자는 교회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기 시대만 책임진 것이 아니고 장래 세대에 대해서도 책임지고 일해야 된다. 

딤후 2:2에 말하기를,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

=====2:11-13

이 부분에서는 이스라엘의 타락에 대하여 말한다. 

(1) 그들이 참된 신, 곧 그들을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살아 계신 여호와를 버렸음. 참되신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는, 선을 악이라 하고 빛을 어두움이라고 하는 강퍅한 행동이다. 

이렇게 행한 자는 하나님의 벌을 받아 마땅하다(사 5:20). (2) 그들이 다른민족들의 신(神)들을 따름.

곧, 그들이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 - 을 섬겼으니, "바알과 아스다롯" - 이었다. 

"바알"(* )은 소유주(owner)란 뜻인데 이스라엘주위에 있는 민족들이 섬기는(예컨대 베니게 족속들과 아람 족속들이 섬기는) 신이었다. 

그리고 "아스다롯"(* )은 역시 그들이 섬기는 여신(母性神)이었다. 그들이 이 두 가지 우상을 농신(農神-풍년 들게 하는 신)으로 섬겼다고 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어찌하여 그렇게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떠나서 이런 미신(迷信)으로 타락했던가? 이것은 우리로서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우리가 다음 몇가지 원인을 알 때에 이 의문이 풀린다. 

(1) 그들이 참되신 하나님에 대하여 효과적인 증거와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이 그 원인이었다(10절). 

인간은 특별히 종교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제시(提示)를 보수(保守)하지 않는 한(限), 어두운 미신에 빠지지 않을수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의 영혼이 조상 때부터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나(하나님을 떠난 것이 곧 죽음임) 어두워졌기 때문이다(엡 2:1). 

(2) 음란의 미혹에빠진 원인도 있었다(민 25:1-3). 겔 16:17, 20:30, 23:3참조. 

이 참조 귀절들에 지적된 말씀은 영적 음행, 곧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따름에 대한 비유적 언사이다. 

그때의 우상당(偶像堂)에는 창녀(娼女)가 배속되어 있어서 그 우상 숭배 행위의 한 순서로 음행도 들어 있었다.

=====2:14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날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사...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셨으므로 그들이 즉시 이방 세력에게 삼키웠다. 

이스라엘의 이와 같은 현상은 신약 교회의 예표가 되었던 것이다. 신약 교회도 하나님을 떠나면 속화(俗化)되는 법이다.

=====2:15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 "어디를 가든지"란 문구에 있어서 "가든지"란 말(* )은 전쟁터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왕하 18:7 ; 신 28:25 참조.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면 패전하게 되리라는 것은 일찌기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바이다. 신 28:15, 25 참조. 

본서의 저자는 이렇게 하나님의 계약신(契約神) 성격을 역설(力說)하여 하나님의 진실성을 지적한다. 

택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행사는 언제든지 먼저 예언하신 것을 그대로 성취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절대적 신앙의 대사응로 계시(啓示)되어 계신다. 누구든지 그를 믿지 않는 것은 발뒤꿈치로 송곳을 차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이다.

=====2:16,1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 그들의 지도자로 "사사"(士師)를 세워 주셨으나 그들이 극히 타락했을 때에는 사사의 지도도 순종하지 않았다. 

"사사"란 말의 히브리어(* )는 재판하는 자를 가리키지만(D.K. Budde, der Grundbegriff dafurist Recht schaffen), 

이는 일반 국가 행정에 속하는 재판장을 말함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공의를 나타내어 그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우신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말을 "사사"라고 번역함보다는 구원자란 뜻을 내포하는 "심판자"라고 함이 옳다고 생각된다.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쫓아" - (17절 상반)란 문구의 히브리어(*)는 "다른 신들을 쫓아 음란하여"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음란하여"란 말(* )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정절을 지키니 않았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다른 신을섬기는 자를 가리켜서 음란한자라고 하시는 이 말씀에서 우리가 깨달을 것이 있다.

(1) 참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 한 분이시니 만큼, 신자가 마땅히 섬겨야 할 분은 여호와 뿐이라는 것.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 한 분에게만 모든 것을 다 바쳐서 그만 섬겨야 된다(신 6:5). 

(2)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신자를 사랑하시되 마치 남편이 아내를 사랑함 같이 자기 자신을 주셨다는 것(엡 5:25). 

그러므로 그는 신자도 그렇게 전심 전력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시기를 원하신다. 

신자가 하나님을 그렇게 전심으로 사랑하지않을 때에 그는 질투하신다고 하였다(출 20:5). 이것은 신자에게 대한 그의 사랑이 불붙듯하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속히 치우쳐 - (17절 하반). 여기 "속히"(* )란 말은 우리의 주의를 끈다. 

얼마 전까지 하나님 여호와를 공경하던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속히 타락했을까 함이다.그러나 이 난제는 쉽게 해결된다. 

인류가 아담의 타락 후 이미 종교적으로는 타락되어있으니 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그 순간부터는 그의 부패성이 발동하게 된다. 

"치우쳐"란 말(* )은 배반함(turned aside)을 의미하는데, 이는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다른 신들을 쫓는 배신 행위를 가리킨다.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 - (17절 끝). 곧, 사사 당시의 이스라엘 자손즐이 그들의 신실했던 선조들처럼 행치 아니하였다는 뜻이다.

=====2:18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를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의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였으니 - 곧, 사사의 구원 능력의 근원이 하나님이신 사실을 지적한다. 

"사사를 세우실 때에는." -사사기의 이 말씀은, 그 백성을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중요한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그가 지도자를 세우시고 그를 통하여 일하시는 사실이다. 

우리는 지도자 없이도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어떤 일을 성취할 수 있음을 믿는다. 

그러나 보통으로는 하나님께서 교회에(사회에도) 지도자들을 세워주시고 그들을 통하여 역시하시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 -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신 동기에 대하여 가르친다. 

그가 사사를 세우신 동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기도 때문에 일어난 그의 긍휼이었다. "슬피 부르짖으므로." 곧, 그들이 애달프게 기도했다는 것이다. 

큰 죄인이라도 그 지은 죄를 진실히 회개하며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시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신다(호 6:6).

======2:19-21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지도자가 별세한 뒤에는 또 다시 우상을 섬기며 범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 (19절 끝)란 말씀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강퍅해진 사실을 특별히 지적한다. 

사람의 일반적 범죄는 성령을 근심케 하고(엡4:30), 그의 강퍅성은 벌을 초래한다.(창 6:5-7).

====2:22,23

이 부분에서는, 여호와께서 가나안 땅의 거민, 곧 여호수아가 죽을 때까지 남아 있던 그 족속들을 더 이상 쫓아내 주시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두시는 목적을 밝혀준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 (22절 하반)고 하였다. 여기 "시험"이란 말(* )은 시련(試鍊)을 의미한다. 

"시험하려 함이라"고  함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서 범죄할 때에 그 땅에 남아있는 가나안 족속으로 인하여 연단을 받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신약 시대에 잘 믿는 신자들의 주위에도 가시와 같이 괴롭게 하는 시험거리들을 남겨두신다. 

그가 그렇게 하시는 목적은 역시 그들을 시련하시려는데 있다. 신자들은 시련을 통하여 성화(聖化)되어 간다. 벧전1:6-7; 욥 23: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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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前章)에서 우리는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제 본장은 사사 시대에 들어가기 직전의 상황과  사사시대 전반에 걸쳐 되풀이되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범죄들을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측면에서 개괄적으로 조명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올바른 자세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본장은 사사기 전체의 역사적 배경을 소개하고 있는 전장(前章)과는 달리 타락과 압제와 구원으로 반복되는 이스라엘 역사의 신학적 해설을 담고  있는 장(章)으로서 사사기의 기록 목적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부분이라 하겠다.

본장의 핵심적인 개념은 '언약'(Covenant)으로 본장에서 '언약' 또는 '맹세'라는  단어가 5회 가량 언급되고 있다(1, 2 ,25, 20절).  

그리고 이러한 본장 전체는 고대  근동 지방의 '종주권 계약'(Sovereignty treaty)의 형식과 유사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바 곧 다음과 같다.  

(1) 군주되신 여호와가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고 실행하였음을 선포(1절), 

(2) 언약 규정의 선포와 그 규정을 어긴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지적(2절), 

(3) 규정된 형벌에 따른 저주의 선포(3절), 

(4) 봉신(封臣)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와 군주이신 여호와의 구원(4, 5절) 등이다.

이상에서처럼 이스라엘이 점차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리고 이그러진 길로 걸어가게 된 데에는 지도자의 죽음이 크게 작용하였다.  

즉 백성들은 여호수아를 비롯한 위대한 신앙인물, 역사의 산 증인들이 사라지자 점차 하나님과 그의 계명을 망각하게 된 것이다(6-10절).  

아무튼 이후 전개되는 사사 시대의 모든 역사는 이스라엘의 타락 - 하나님의 책망 - 백성의 회개 -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형식으로 반복된다(11-23절).  

따라서 본장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 언약적 관계의 견고성 : 

이러한 사실은 사사 시대의 초기에 이미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악함과 끊임없이 반복되는 그들의 죄악을 다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언약적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신 여호와의 신실성에서 발견할 수 있다.

 (2) 언약적 관계의 저변(低邊)에 깔려 있는 하나님의 자비하심 :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든지 회개하고 슬피 울며 간구하기만 하면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시고(18절) 구원자를 보내셨다는 데서 발견하게 된다.

 (3) 언약적 관계의 궁극적 종착역은 이스라엘이 구원이라는 사실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시고 징계하지만 그것은 이스라엘을 멸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시험 속에서 정금같이 단련되어 차원높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조차 사도 바울이 때가 차면 마침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되리라고 담대히 증거한 점에 의해서도  충분히  입증된다(롬  11:25,26).

1. 이스라엘을 책망하는 여호와의 사자(2:1-5)

가나안 정착 초기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떠나 가나안  백성들과 언약을 맺고 우상을 섬긴 사실(2, 3절) 때문에 여호와의 사자가 보김에 임재하여 그들을 책망하며 저주하는 장면이다(1절).  

그러자 백성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아 통회하며 하나님 앞에 새로이 제단을 쌓는 장면이다(4, 5절).  

그런데 이러한 본문은 다음과 같은 특성 때문에 사사기서 전체의 가장 중요한 대목이 된다.

 (1) 본문은 사사 시대 초기에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적 자세가 어떠했는가를 보여 준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버리고 가나안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며 우상을 섬겼다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하면 사사 시대의 출발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2절).

 (2) 본문은 초기 가나안 정착 과정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주민들을 진멸하지 못한 결과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즉 그들은 불신앙으로 인하여 가나안인들을 진멸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 속에 거하며 그들과 협약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가나안 역사는 우상 숭배와 죄악으로 얼룩지게 되었던 것이다.

 (3) 본문은 여호수아가 죽고, 가나안 정착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때에 처음으로 여호와의 사자가 등장하였으므로 보여 준다(1절).  

이것은 모든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사사 시대를 이끌어 가실 역사의 주체가 하나님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4) 본문은 이스라엘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 준다. 

만일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면 하나님의 책망이나 간섭도 없었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이방인들과 같이 저희를 더러움 속에 그대로 버려두셔서 역사 속에 도태되도록 하셨을  것이다(롬 1:24).  

그리고 결단코 어떠한 회개의 기회도 허락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물론 본문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시며 구원하셨다는 말은 없으나 전체  문맥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의 그들의 회개와 눈물의 제사를 받으시고  구원하셨음이  틀림없다.

 (5) 결국 본문은 죄 - 징계 - 간구 - 구원 - 망각 - 죄와 같은 사사기 역사의 악순환의 모형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애당초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인들을 진멸하면(신 7:2) 순종의 역사로 시작되었더라면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지고 찬란하며 영광된 역사로 점철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온 것처럼(롬 5:12) 출애굽 세대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죄악의 역사를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기고 구원의 방편을 모색하셨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즉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위하여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의 뿌리를 없애시고(롬 6:6) 다시는 그의 백성들이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시며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롬 8:1).

기독교의 구속적 본질(本質) 

- 본문을 보면 하나님과의 언약을 버리고 타락의 길을 막 시작하려는. 아니 이미 패역한 행위 속에서 사마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그들의 죄악을 책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의 구속적 본질을 발견하게 된다.  

기독교가 비기독교적인 여타 주장들을 물리치고 참 진리의 종교이며 구원의 종교임을 주장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먼저 죄악의 땅으로 내려 오셔서 인간들을 만나셨다는 사실이다.

불교가 선천적인 악과 생존의 비참함에서 구원받기 위하여 온갖 인간적인 행위와 구도(求道)가 삶을 요청하는 반면에 기독교는 인간 죄악 속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근본적이고 완전한 구원의 근거를 제공하신다.  그리고 모든 이방 종교가 본능적인 욕망들의 충족을 위하여 신(神) 아닌 피조물들을 빌미로 하여 구속의  가능성을 구가하나 그것은 늪속에서 허우적대다가 더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와 같이 불교가 땅곳에 구원의 가능성을 찾고 다른 이방 종교가 본능적인  욕망의 충족을 구원인 것으로 믿고 있으나 기독교는 그 구원의 가능성을 하늘에서 찾으며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발견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발견하자마자 인간의 죄악된 본질을 발견하게 되고 인간의 근본 저 밑에서부터 회개하므로 새로운 구원의 삶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타 종교가 고난과 구도의 종교라면 기독교는 기쁨과 행복의 종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마 9:13), 구원의 사도로 죄인을 찾아오신 하나님 안에서 이제는  영원히 정죄함없이(롬 8:1, 2) 빛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2. 여호수아의 세대와 그 이후 세대(2:6-10)

여호수아 생존시 경건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던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회고하는 장면으로서 이후 이스라엘이 타락과 실패의 역사를 거듭하게 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 주는 부분이다.  

즉 백성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의 가르침을 좇아 하나님을 경외하였었다(5-7절).  

그러나 여호수아도  결국 수한(壽限)이 다되어 열조에가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이후  태어난 이스라엘 새 세대는 점차 여호와 신잉에서 멀어져 가고 만 것이다(8-10절).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통해 그 이면에 가리워져 있는 이스라엘의 타락 원인을  충분히 추정해 볼 수 있는데 곧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하여 신정 국가를 세운 이흐부터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지도자는 명실 공히 모세와 여호수아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몰랐다는 사실이 그 첫째 원인이다.  사실 모세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을 위해 세움받은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이제 가나안에  입성한 이스라엘에게는 다른 인간적인 지도자가 필요없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그들의 지도자가 될 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여호수아와 같은 지도자를 구하므로 실패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이후에 그들이  하나님께 왕을 구하는 사건이 나오는데(삼상 12:12) 그 사건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2) 여호와가 행하신 일에 대한 교육의 부재가 둘째 원인이다.  

즉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본 자들은(7절) 마땅히 그 후대에게 하나님의 백성이자 천국(가나안) 시민으로서의 당연히 행할 바에 대해서 교육하여야 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결국 그 후손들은 실패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 교육의 중요성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즉 이미 택함받고 구원받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죄악된 세상과 접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철저한 신앙의 무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가르치는 것으로 공생애 3년을 다 보내셨고 그의 제자들도 무리들을 힘써 가르치며 전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던 것이다.

이적에 대한 사람들의 상반된 태도 

- 본문에는 하나님의 큰 이적과 역사를 몸소 체험하였던 자들이 일평생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며 경건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짐작케 해주는 구절이 나온다(7절).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권능과 의지 등을  드러내시는 이적(민 14:11-19 강해, 이적의 궁극적 목적)에 대해서는 이처럼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부정적 반응을 보이는 자들도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진리와 이적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대별될 수 있다.  이제 이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초자연적 이적을 목격해야만 하나님을 믿겠다는 태도 : 경험주의자들이나 실증주의자들이 주로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은 자신의 오관(五官)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사실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요 20:26, 27).   그러나  이적 체험에 주안점을 두는 신앙은 자칫하면 광신적 상태에 빠지기 쉬우며 이적이 사라지면 쉽게 신앙을 상실할 우려가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표적과 기사를 보아야만 믿는 자들을 책망하셨던 것이다(요 4:48).

 (2) 이적을 보고서도 믿지 않으려는 태도 : 이는 철저한 무신론자나 유물론자,  불가지론자 등에게서 발견되는 태도이다.  이들은 자연법에 근거한 사실적 증거들만을  신봉하고 있으므로 어떤 경우에도 신(神)의 개입을 허용치 않는다.  설령 그들 앞에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와서 진리를 증거할지라도 그들은 믿지 않는 것이다(눅6:31).

 (3) 이적을 보지 않고도 믿는 태도(요 20:29) : 이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발견되는 태도로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을 마음대로 조종하심과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을 믿는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은 이러한 자들에게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우시는 성령이 함께 계셔서 그들의 신앙을 이끄신다는  점이다.

사실 성령의 도움이 없다면 죄악으로 흐려진 인간의 영안만을 통해선  올바른  진리를 발견하기란 불가능하다(고전 2:11-14).

3. 이스라엘 타락과 하나님의 구원 역사(2:11-23)

여호수아 사후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삶의 양태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  주는 부분이다.  

즉 그들을 참된 신 여호와를 버린 대신 도리어    이방신을  좇았는데(11-13절) 그 결과 하나님의 징게의 채찍을 맞을 수 밖에 없었다(14, 15, 20-23절).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이스라엘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시시때때로 보내주신 구원자 사사들의 활동 덕분이었다(16-19절).  

이러한 본문은  여러  가지 의미를 던져 주는데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본성적으로 신을 숭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광야 생활과는  다른  안정된 정착 생활을 하게 된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버리고 말았다(13절).  

아마 그들은 가나안의 우수한 농경 문화를 잘 수용하여 경제적인 안정만 누릴 수 있다면 더 이상  여호와를 숭배하는 것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신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버린 무신론자가 되지는 못했다.  

오늘날의 부자들이 자기  배와  돈을 신(神)으로 섬기듯이 이스라엘은 농사 신인 바알을 그들의 신으로 섬기고 말았던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참 신을 배반하여 신 아닌 것들을 숭배할 수 있을지언정 본성  저 깊은 곳에 있는 신의 자리를 없앨 수는 없다.

 (2) 이스라엘의 구원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 판단해 볼 때 영원한 재앙 속에 버리워질 수 밖에 없고  그것은  또한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해야 할 당연한 징벌이었다(15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적들에게 압박과 고통을 받아 슬피 부르짖을 때에는 그 뜻을    돌이키시어 구원의 손길을 펴셨다(18절).  

마찬가지로 패역하기 이를 데 없는 죄인조차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주시기까지 한 것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며(롬 1:28) 허망한 생각들과 허탄한 신화들을 좇으므로(롬 1:23-25) 멸망의 길을  달려가나 오직 여호와의 사랑만이 구원의 근거가 되셔서 그들을 멸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항상 시험  가운데서  피할  길을  예비해  두신다는  것이다(고전10:13).  

여기서 '피할 길'이란 결국 회개의 기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항상 탕자의 아버지와 같이(눅 15:11-32) 당신 백성들이 회개하여 돌아올 것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 피할  길을 예비해 두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패역한 길 속에서 영원히 멸망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고대 근동의 신들 -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택한 민족이었으므로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러하지 아니하고 틈만  나면 주변의 여러 다양한 이방신들을 섬겼다.  

본문 중에도 그들이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다는 가사가 나오는데(12, 13절), 이제 당시 근동 지방에서 숭배되던 신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팔레스틴의 신들

     신       나 라         지 위           성경   구절

    바알     가나안       젊은 폭풍신        왕상 16:31 ; 18:18-46

    아스다롯     가나안       모신, 사랑, 다산   13절 ; 10:6 ; 삼상 12  10 ; 왕상 11:5

    그모스     모압          국가의 전쟁신     11:24 ; 민 21:29 ;   왕상 11:7, 33 ;   렘 48:7

    몰록     암몬          국가의 신        습 1:5 ; 렘 49:1 ; 왕상 (밀감, 밀곰)     11:5, 7, 33

    다곤     블레셋       국가의 곡물신     16:23 ; 삼상 5:2-7

    하늘황후     가나안       아스다롯과 동일   렘 7:18 ; 44:17-25

    기타     엘(가나안.만신전의 우두머리), 아나트(전쟁신), 모트(죽음의 신)

         모트(죽음의 신), 아다드(수리아의 폭풍신), 테습(힛타이트의 폭풍신), 한나한나(힛타이트의 모신), 아린나(힛타이트의   태양 여신)

  메소포타미아의 신들

    신         나 라          지 위            성경 구절

    므로닥     바벨론       젊은 폭풍신, 주신    렘 50:2

    벨         바벨론       태양의 신        사 46:1 ; 렘 50:2 ; 51:44

    느보     바벨론       므로닥의 아들     사 46:1

    담무스     수메르       젊은 폭풍신        겔 8:14

    기타     아누(만신전의 우두머리). 엔릴(폭풍의 신), 에아엔귀 (깊음의 신), 신[난다]    (달신), 이쉬할(다산신), 티아맛  (소금물의 신)

시험의 종류와 목적 

-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시험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22절).  

여기서 '시험하다'라는 뜻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사'(*      )는 '시도하다', '증명하다'(prove, test), '유혹하다'(tempt), '연단하다'(trial)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시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시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시험하시는 것은 당신의 백성들을 보다 차원 높은 신앙으로 인도하시려는 선한 목적이 있으나 인간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자신의 불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참된 신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의도이기 때문에 패역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행15:10 ; 고전 10:9).

 한편 이상의 두 가지 시험 중 하나님의 시험은 목적에 따라 다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1) 회개를 목적으로 하는 시험 

: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정한 개인이나 민족들의 회개를 유도하기 위해 종종 시험하신다.  

이때 하나님께선 당신의 백성을 대적의 손에  내어놓아 곤경을 당하도록 하심으로 하나님을 떠난 삶에는 참 행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신다.  

그리고 이러한 시험을 위하여 열국이나 사단을 곧잘 도구로  사용하시는데 이렇게 사단으로 하여금 당신의 백성들을 시험하도록 허용하실지라도 하나님께선 결단코 당신 백성을 영원한 멸망의 죄악 속에 빠뜨리지는  않으신다.   여기서 우리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2) 신앙이나 인격의 성장을 목적으로 하는 시험

 :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인간의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정도를 알아보시기 위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시험하신다.  아브라함의 시험과 욥의 시험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창 22:1 ; 욥 1:6-22).    

이외에도 하나님께서는 온갖 미혹에 넘어지기 쉬운 인간들을 시험하심으로 매사에 믿음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연단하신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벧전 1:6)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히 4:15)  받으셨는데 이로 말미암아 시험받는 자들을 도우실 수가 있게 된 것이다(히 2:18).

 이상과 같이 하나님의 시험은 어떠한 형태이든 당신 백성을 사랑하시는 그분의  사랑에서 연유한다. 

따라서 성도들은 시험이 닥쳤을 때 먼저 절망할 것이 아니라 이  시험이 나의 회개를 요구하는지 아니면 신앙의 성장을 요구하는지를 잘 분별하여 믿음으로 대처하여야 할 것이다(고전 10:13).  

한편 이러한 '시험'에 대해서는 창  22:1-19  강해, '시험에 대한 이해'를 참조하라.

사사들의 입지(立地) 

-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의 종교적 암흑 시대라 칭할 수  있는 사사 시대에 하나님께서 순간순간 사사들을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케 하셨음을  알 수 있다(16절).    

여기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사들의 위치와 그들의 입지(立地)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사사들은 백성의 간택이 필요치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그때  그때 성령의 강동하심으로 부름을 받았으며(3:9 ; 6:34 ; 11:29 ; 13:25) 급박한 상황에 처한 이스라엘을 구원하도록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대리자였다.  

그래서 사사들은  대부분 전쟁에 능한 군대 지휘자로서 세움을 받은 것이다.  

물론 모세나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 세움을 받았으나 그들은 장로들과 온 이스라엘의 지지속에서 지도자로 활동했다.

 (2) 사사들의 활동 범위는 대부분 국지적(局地的)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임기도 단회적이었다.  

이들은 주로 자기 지파를 구원하는 데 그쳤기 때문에 동시대에 둘  이상의 사사들이 활동하기도 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종종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해서 그들을 '구원자들'(3:9, 15: ; 느 9:27)로 칭하기도 했다.

 (3) 사사들 중에는 도덕적으로 저급한 수준에 있는 사람도 있었다.  ::: (비록 그러하더라도!!) 주님 말씀을 가지고 대언하는 이들, 그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바에 대한  "세이경청"의 태도로 주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할 때<엘리제사장의  인간적인 흠에 대해, 그 어떤 비판 없이 사무엘은 오로지 <주님과 사람 앞에서, 마음 살피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최선 다해 주님 마음따라서만 묵묵히 그의 길을 걷되, 엘리제사장에게 듣는 바 그 말씀에 대해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참되게 경청-순종((=청종))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에훗은 암살자였으며(3:15-25). 야엘은 이스라엘의 배반자였다(4:17-21).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삼손도 블레셋 여인들과 부정한 관계에 있던 사람이었다(14장).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도덕적 약점과는 상관없이 그들을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을 태평하게 하셨는데(3:11, 30; 5;31)... 여기서 사사 시대 이스라엘의 참 인도자는 여호와뿐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4) 사사들이 임무는 대단히 광범위한 편이어서 때에 따라 재판관이나 행정관이 되기도 하고 선지자나 제사장의 직무를 맡기도 하였다.  

그래서 사사 시대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암울한 시기였긴 하나 사사들이 활동할 때는 도덕적으로나 정치적,  또는 영적으로 비교적 양호한 상태가 될 수 있었다.

 (5) 모세와 여호수아의 소명에서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수반했으나(출 3:1-4 ;  17  ;수 1:1-9) 사사 시대에는 어떠한 새로운 언약도 없었다.  

그 이유는 모세 언약의 핵심 요소인 가나안 입성이 성취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사 시대는 이스라엘 백성의 끊임없는 불순종의 삶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벌 이외에 어떤 새로운 계약의 요건이  성립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 볼 때 사사들은 구속사의 어떤  쟝르를  형성할만한 핵심적인 인물 이었다고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빈약한 입지(立地)는 오히려 하나님의 온전한 지배권을 더욱 부각시켜 준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사들 각 개인에 초점을 맞추어 구속사적인 의미를 발견하기 보다는 그들이 살았던  사사 시대가 갖는 구속사적인 과정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더욱 유익할 것이다.    

한편 이상과 같은 '사사'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3:7-11 강해, '이스라엘 구원자 사사'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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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2장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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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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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이 중요하다. 이유 없이 등장하지 않는다. 길갈은 이스라엘백성이 광야 40년, 애굽 400여년을 거쳐서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이다. ‘수레바퀴’라는 의미, 지난날의 어둠과 수치의 역사가 ‘굴러가다’라는 의미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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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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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책성 메시지를 담고 있다. 크게 두 가지다. 내가 가나안 땅에 들여보냈는데 왜 온전히 내쫓지 않고 그들의 제단을 허지 않았니?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왜 잊었나? 언약을 신뢰하지 않았나? 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느냐는 질책이다. 그 결과 두 가지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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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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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이 나를 신뢰하지 않고 내 말을 의지하지 않았으니까 나도 그들을 쫓아내지 않겠다. 대신 그 가나안 족속들이 역사 속에 오고 오는 후손들의 옆구리에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될 것이다. 무서운 다짐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던지신다. 이건 기분상의 문제를 넘어서서 어마어마한 재앙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은 어떠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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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5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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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김’은 히브리음 ‘보킴’과 비슷하다. ‘보김’은 ‘우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바카’의 분사형이다. ‘바카’는 ‘눈물’, 바카의 골짜기는 눈물의 골짜기, 통곡의 장소다. 얼마나 울었던지 지명이 바뀔 정도로 울었다. 원래 지명이 보킴이 아니라 하나의 별명이다. 그 지명에 얽힌 이야기 때문에 지명이 별명을 가질 때가 있다.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다. 두 가지 행동을 결론지을 수 있다. 첫째, 그 하나님의 준엄한 메시지를 듣고 많이 울고 눈물을 흘렸다. 두 번째는 제사를 드렸다. 이것만 딱 놓고 보면 그림이 좋다. 회개했나 싶다. 그런데 성경은 회개라고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울었고 또 한 번의 예배를 드린 것이다. 종교행위만 심화시킨 것이다.

감성에 기초한 신앙의 위험성이 그런 것이다. 성도들이 울 수 있다. 아파서 자책감에 회개차원에서 울 수 있다. 우는 것만으로 회개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성경에 그런 역사가 많다. 이스라엘 백성은 울보들이다. 늘 운다. 이는 팔복에서 말하는 애통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울었어도 회개는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근거는 이 이후의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의 신앙은 전혀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다. 그저 한바탕 울고 예배 한번 드린 것뿐이다. 부흥회 때 꼭 회개의 밤이 있어서 한 바탕 시원하게 운다. 정서적인 카타르시스가 된다. 그걸 회개로 착각한다. 속는 거다.

목욕탕 많고 집집마다 목욕시설이 많은 지금과 달리 예전에는 명절 전후로 목욕탕에 갔다. 몇 달 묵힌 때를 민다. 때가 둥둥 뜨면 조수가 잠자리채 같은 것으로 걷어 탁탁 털어낸다. 요즘은 그런 광경이 없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있었다. 그 물에 또 들어간다. 우리의 눈물과 예배와 회개는 그런 거다. 잠깐은 개운하다. 한 여름 내내 죄짓다가 가을에 한번 부흥회한다. 이게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의 패턴이었다.

보김 같은 기도회는 아무 의미가 없다. 회개란 모든 걸음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향해 원하시는 참된 회개의 그림이다. 그런데 이들은 한바탕 울고 끝났다. 이후에 3장, 4장, 5장, 20장 연속적으로 넘어지는 실패를 만난다. 20장에서도 또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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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10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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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지가 두 개다. 첫째 여호수아 시대 하나님의 큰일을 본 자는 하나님을 잘 섬겼다고 기록을 맺고 있다. 그 시대의 사람들도 다 조상들에게도 돌아갔다. 히브리어 모다(해석 자체가 모다), 이스라엘 장례문화는 굉장히 독특해서 굴에 매장을 한다. 굴 옆에눈 또 하나의 서브 굴이 있는데 거기에는 조상들의 뼈가 모아져 있다. 시신을 안장하고 세월이 지나면 육신은 부패하고 뼈만 남는다. 그 뼈를 거두어 거기다가 안치한다. 그게 조상들에게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광야세대가 다 지나갔다.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글자 하나가 문제다. ‘다음세대’여야 하는데 ‘다른 세대’가 일어났다. 다른 세대의 특징은 두 가지다. 여호와가 누구신지 알지 못했고, 그분이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구원의 일도 알지 못했다. 신앙교육의 부재를 고발하는 것이다. 지나간 세대가 다음세대들에게 하나님이 누군지 어떤 일을 하셨는지 가르치지 않았다. 이게 사사기 역사의 불행의 단초다.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다.

우리는 청년세대를 일으키는 주제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한 가지 속는 게 있다. 어린이 부서에 전혀 투자하지 않고 청년세대 외치는 건 자기기만이다. 마치 투자도 안 하고 거두려는 도둑놈 심보와 같다. 한국의 교회는 전 교회가 어린이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게 전제되지 않고 다음세대를 꿈꾸는 건 속는 거다. 골든타임 사실상 이미 놓쳤다. 지방에 교회학교 문 닫은 교회가 60% 넘는다. 아이들이 없다. 복음을 듣지 못한 아이들이 길거리에 널렸다. 저출산율 그거 다 핑계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아이 수를 봐야 한다. 사회에서 내놓은 통계타령만 하나 속는 거다. 늦었더라도 통계에 의지하지 말고 어린이교육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여기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어린이들 늘어나는 것은 자연증가다. 전도해서 늘어나야 하는데….

자연증가도 허걱대는 상황이다. 교육파트에 대해서 투자를 등한시하고 인식이 열어지지 않는 것은 큰일 날 사고다. 400년 가까운 어둠의 역사가 왜 시작되었는가? 광야세대가 다 지나고 다른 세대가 일어나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게 사사기의 역사다. 

 

청년들 만나 이야기해보면 안타깝다. 그렇게 신앙생활하고 헌신했다는데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모른다. 모르고 그냥 교회에서 봉사만 한 경우다. 그러니까 청년들이 허탈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가르쳐야 한다. 그리스도가 청년의 인격 속에 쩌릿하게 만나지는 순간 일생을 주님께 붙잡히는 축복의 통로가 된다. 뭐가 먼저냐? 그리스도를 제대로 만나는 일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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