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삿12장 [455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212 '겸손히 주를 섬길 때']
===입다와 에브라임 사람들....입다는 사람들이 세웠고, 기드온은 Q이 세우신 사람...(에브라임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 차이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 삿7장 참조!! ......성령따라, 말씀안에서 살아가는 가정과 교회만이 영적 이스라엘, 주님의 교회 지체들인 주님의 백성, 영적 후사 산출-갱신의 중심.....급격한 충동적 분노, 체벌과 폭력 아닌, 잘 들어주고, 타이르고 끈질긴 설득과 상호소통, 기도와 축복으로 [지혜로운 언행의 길로 나아가는] 유순함-온유함으로 주님 마음따르는, 시대를 읽는 지혜를 발휘하는 참 리더가 되게 하라.. 1.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오호라, [에브라임이!!.."자기는 언제라도 대접받아야 한다"는 그 교만함으로..--그가 경외하고 믿는다는 그 Q이 아버지 아니고, 그 예수님이 그의 주인이 아닌것!] 헷-아모리-가나안 족속처럼 되었다니...임자 만난 셈일까?? 2.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 3. 나는 너희가 도와 주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겨 주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 내게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니라 4.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으며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무찔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5. 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보다 앞서 요단 강 나루턱을 장악하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하건대 나를 건너가게 하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6. 그에게 이르기를 쉽볼렛이라 발음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그렇게 바로 말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강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동족애 상실로 인해 동족상잔 비극 시작))..기드온 때는 숙곳과 브니엘 주민 <주께 묻지 않고 임의대로??!!> 학대-->그의 아비멜렉에 의해 아들 70 살해당함, 입다 때에는 에브라임 4만2천 학살, 레위인의 첩 강간살인 결과로 베냐민 지파가 나머지 지파에 의해 거의 멸절 수준까지 이르게 됨을 본다.. 7.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육 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에 있는 그의 성읍에 장사되었더라 ===사사 입산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사사인가...소사사 들, <옷니엘, 에훗, 삼갈, 돌라, 엘론을 제외한 소사사들> 길르앗 야일, 베들레헴 입산, 비라돈 압돈의 행적에 대해서는 긍정적 시야와 부정적 평가가<명성/자리보전 몰두-육신의 자녀 다산 축복??(일부다처가 아니었음)==>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 공존하고 있음....특히 기드온 처럼, 그들은 자녀들이 많았다.. 8. ○그 뒤를 이어 베들레헴(스불론 땅 베들레헴 가능성이 더 큼...유다 베들레헴은 베들레헴 에브라다로 불렸음)의 입산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그가 한 일은 없고 다만 해외 이방과의 혼맥 결속 통한 정략적 안보만 추구 9. 그가 아들 삼십 명과 딸 삼십 명을 두었더니 그가 딸들을 밖으로 시집 보냈고 아들들을 위하여는 밖에서 여자 삼십 명을 데려왔더라(=지파간 결혼인가, 불신 이방의 외국인과의 결혼인가??...불신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칠 년이라. 10. 입산이 죽으매 베들레헴에 장사되었더라 11. ○그 뒤를 이어 스불론 사람 엘론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더라....다스리기만 했다. 12. 스불론 사람 엘론이 죽으매 스불론 땅 아얄론에 장사되었더라 ===사사 압돈 13. ○그 뒤를 이어 비라돈(에브라임 땅 비라돈) 사람 힐렐(=할랄..찬양)의 아들 압돈(=아바드..노예, 노예적인)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14. 그에게 아들 사십 명과 손자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칠십 마리를 탔더라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팔 년이라...권력과 부를 세습시켰음....Q과의 수직적 관계가 깨지면 수평적 관계가 당연히 깨어짐..결국 외부의 힘을 빌어서 사익 보호..치우치는 권력과 부의 세습만을 도모케 됨 15.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죽으매 에브라임 땅 아말렉 사람(그 당시까지도 거의 아말렉인들의 소유지였음을 시사)의 산지 비라돈에 장사되었더라 ---------- KJV]제12장 1. And the men of Ephraim gathered themselves together, and went northward, and said unto Jephthah, Wherefore passedst thou over to fight against the children of Ammon, and didst not call us to go with thee? we will burn thine house upon thee with fire. 2. And Jephthah said unto them, I and my people were at great strife with the children of Ammon; and when I called you, ye delivered me not out of their hands. 3. And when I saw that ye delivered me not, I put my life in my hands, and passed over against the children of Ammon, and the LORD delivered them into my hand: wherefore then are ye come up unto me this day, to fight against me? 4. Then Jephthah gathered together all the men of Gilead, and fought with Ephraim: and the men of Gilead smote Ephraim, because they said, Ye Gileadites are fugitives of Ephraim among the Ephraimites, and among the Manassites. 5. And the Gileadites took the passages of Jordan before the Ephraimites: and it was so, that when those Ephraimites which were escaped said, Let me go over; that the men of Gilead said unto him, Art thou an Ephraimite? If he said, Nay; 6. Then said they unto him, Say now Shibboleth: and he said Sibboleth: for he could not frame to pronounce it right. Then they took him, and slew him at the passages of Jordan: and there fell at that time of the Ephraimites forty and two thousand. 7. And Jephthah judged Israel six years. Then died Jephthah the Gileadite, and was buried in one of the cities of Gilead. 8. And after him Ibzan of Bethlehem judged Israel. 9. And he had thirty sons, and thirty daughters, whom he sent abroad, and took in thirty daughters from abroad for his sons. And he judged Israel seven years. 10. Then died Ibzan, and was buried at Bethlehem. 11. And after him Elon, a Zebulonite, judged Israel; and he judged Israel ten years. 12. And Elon the Zebulonite died, and was buried in Aijalon in the country of Zebulun. 13. And after him Abdon the son of Hillel, a Pirathonite, judged Israel. 14. And he had forty sons and thirty nephews, that rode on threescore and ten ass colts: and he judged Israel eight years. 15. And Abdon the son of Hillel the Pirathonite died, and was buried in Pirathon in the land of Ephraim, in the mount of the Amalekites. ----- [사사기 12:8-15 ...] 8.그 뒤를 이어 베들레헴의 입산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9.그가 아들 삼십 명과 딸 삼십 명을 두었더니 그가 딸들을 밖으로 시집 보냈고 아들들을 위하여는 밖에서 여자 삼십 명을 데려왔더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칠 년이라 10.입산이 죽으매 베들레헴에 장사되었더라 11.그 뒤를 이어 스불론 사람 엘론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더라 12.스불론 사람 엘론이 죽으매 스불론 땅 아얄론에 장사되었더라 13.그 뒤를 이어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14.그에게 아들 사십 명과 손자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칠십 마리를 탔더라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팔 년이라 15.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죽으매 에브라임 땅 아말렉 사람의 산지 비라돈에 장사되었더라.... ----------- 입다에 이어 세명의 소사사들이 등장합니다. 입산과 엘론과 압돈입니다. 성경은 이들에 대해 아주 단편적인 소개만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입산은 베들레헴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누구이며 어디 지파 사람인지에 대한 소개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누구를 소개할 때의 전형적인 패턴이 아닙니다. 이것을 알려면,... 그는 아들 삼십과 딸 삼십 명을 두었습니다. 딸들은 밖으로 시집을 보냈고 아들들은 밖에서 아내를 얻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먼저 그에게 자녀가 60명이 있었다는 것은 여러명의 아내를 두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에서 상당한 재력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밖에서 며느리들을 데리고 오고, 딸들을 밖으로 시집을 보냈다는 것은 정략적 결혼을 시켰을 가능성을 말합니다. 이웃 지파 중에서 재력과 권력이 있는 집안과 사돈을 맺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재력가 집안의 딸들이 권력의 핵심층 인사의 자녀들과 결혼시키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60명의 자녀들을 통하여 당시 사회적 권력층과 네트워크를 구성했다고 한다면 그의 권력은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막강한 권력이었음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 사사는 엘론입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소개가 별게 없습니다. 10년 동안 다스렸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다음은 압돈입니다. 그에 대한 소개는 이렇습니다. 아들 40명과 손자 30명이 있었다....마찬가지로 그도 아내를 여러 명 두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을 통하여 아들 40명을 낳은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선 손자 30명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다 어린나귀를 탔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어린나귀를 탔다는 것은 오늘날로 하면 고급 승용차 한 대씩 타고 다녔다는 의미입니다. 아들에 이어 손자까지 이러한 풍요함과 안정을 누렸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러한 내용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로 당시의 이스라엘 사회가 추구한 가치가 무엇이었는가를 보여줍니다....그들은 가나안 사람들과 마찬가지고 권력과 부와 쾌락을 추구하였음을 보여줍니다....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인간적 수단들을 사용하였음을 보여줍니다....쉽게 말하면 그들은 더 이상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가나안 사람들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사 즉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그렇게 살았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것을 목적으로 삼고 살았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신명기 17장을 보겠습니다. “14.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 그 땅을 차지하고 거주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15.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16.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17.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여기보면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이방민족들처럼 왕을 세우고자 할 때, 물로 하나님께서 원했던 것은 왕을 세우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평등의 공동체를 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을 세우고자 한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이 따릅니다. 첫째, 여호와께서 택한 자를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평가기준과 사람의 평가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지만 사람은 외모를 보지요. 하나님은 비록 부족해도 순종하는 자를 찾으시지만 사람은 자신들에게 유익한 자를 세웁니다. 사사들이 세워질 때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능력이나 지혜를 자랑할 수 없는 연약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갔습니다. 그런데 입다는 어떠했습니까? 사람들이 세웠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여 입다를 지도자로 세운 것입니다. 어려움에 닥치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그가 어떠한 자인지 상관하지 않고 힘이 있으니까 세웁니다. 게다가 아비멜렉은 자기가 원해서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사사 또는 왕으로 세우는 역사는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삿9:6 “세겜의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서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라” 그런데 그 결과가 참혹했습니다. 아비멜렉은 형제 70명을 한 반석에서 죽였을 뿐만 아니라, 세겜에 반역하는 자들을 불에 태워 죽이는 잔인함을 보였습니다. 입다는 어떠한가요? 그도 사람들이 세운 사사입니다. 그는 자신의 딸을 번제물로 드리고 에브라임 지파의 군대 4만2천명을 죽입니다. 그렇다면 입다 이후에 등장하는 세명의 소사사들은 어떠한 사람인가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입산 엘론 압돈, 그들 역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세워진 지도자들이었던 것 이닌가 생각됩니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더라는 것입니다.....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결정들이 아니라 자기의 소견에 옳은대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사회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왕의 조건은 말을 많이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당시 말은 무력의 상징입니다. 오늘날로 하면 탱크를 많이 소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도 하지 말 것을 말합니다....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왕은 군사력이 강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군사력은 안보와 직결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많이 소유하지 말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강함은 하나님께로 부터만 나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사사들의 모습을 보면 스스로 힘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 없이 자신들의 의지와 노력을 통해 살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사들은 당시 이스라엘이 추구했던 삶의 목표였기 때문에 사사들을 통해 당시의 이스라엘 전체가 어떠한 분위기였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힘을 소유하기 시작하였습니다....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세 번째,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 또한 정략적 결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힘과 권력을 확보하고 그것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노력이 정략적 결혼입니다. 그런데 소사사들의 모습 속에서 아내들을 많이 두고, 자신의 자녀들까지도 정략적 결혼을 시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네 번째는 은과 금을 많이 쌓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적 부요함을 추구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왜일까요? 물질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압돈의 경우 자녀들과 손자들까지 나귀를 탔다는 것은 이런 면에서 부요함을 추구한 지도자의 타락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이 말씀에 비추어 보았을 때 기드온 이후에 모든 사사들이 타락했음을 의미합니다....하나님께서 세우지 않는 왕들은 결국 타락하게 됩니다....사람이 세운 지도자들은 결국 타락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왕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하나님 백성의 지도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신명기 17:18-20 18.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19.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20.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옆에 두고 늘 묵상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배우고 그 말씀을 지켜 순종하는 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이것이 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가? 결국 타락한다는 것입니다....그리고 그 끔찍한 결과는 우리는 기드온, 그리고 그의 아들 아비멜렉과 그 이후 소사사들의 이야기를 통해 보았던 것입니다.....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았거나 또는 무시했던 것입니다. 입산, 엘론, 압돈 ....그들은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고 풍요와 안정을 추구하며 살다가 죽었다...그렇게 보입니다. 사사기가 우리 가운데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결국 타락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의심이 많고 두려움이 많았던 기드온은 처음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였으나, 후에는 타락하여 돈과 권력을 추구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비멜렉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의 권력을 향한 집념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잔혹한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했기 때문입니다. 입다 역시, 스스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졌기에 그의 열심이나 순종의 모습은 가정과 공동체를 파괴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으로 알았을지는 모르지만,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사사 시대의 비극적 이야기가 바로 오늘 이 시대에 되풀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꼭 교회의 지도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그들의 타락은 결국 그들을 세운 사람들의 타락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지도자가 타락할 때 주변의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동조하거나 침묵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사기가 진행될수록 낙심하게 됩니다.....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누군가가 나와서 멋지게 승리하고 뿐만 아니라 거룩하고 신실한 삶을 통해 우리에게 모범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나 오히려 타락이 깊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이 땅에 그 누구도 우리의 힘과 의지와 소망이 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사람은, 그 누구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의지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요새가 되십니다. 시편 62편입니다. 1.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2.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3.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4.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셀라) 5.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6.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7.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8.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9.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10.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11.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12.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시기 바랍니다....하나님을 통해 힘과 부요함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래야 합니다.....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 변함이 없으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그 사랑과 인자하심이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흔들이는 요동하는 것들을 의지하면 그것들이 흔들릴 때 우리도 함께 흔들릴 것입니다....그러나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들은, 결코 요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 사사기 12장 (개요) 본 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입다와 에브라임 사람 간에 싸움이 벌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게 되었다(1-6). 그리고 입다의 통치에 대한 결말이 나와 있다(7). 2. 이스라엘의 다른 세 사사 곧 입산(8-10), 엘론(11, 12), 압돈(13-15)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나온다. ------------- 입다의 최후(삿 12:1-7) Ⅰ. 에브라임 사람들은 입다가 암몬 족속을 치러 갈 때 자기들에게는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1절) 그 승리와 전리품을 나누는 일에 동참할 수 없게 되었다는 조리에 맞지 않는 이유를 들어, 입다에게 시비를 걸었다. 교만은 분쟁의 근거다. 교만에서는 분쟁만이 생긴다. 그러므로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잠 27:4) 에브라임 사람들은 기드온에게도 똑같은 일로 싸움을 걸었다(8:1). 기드온은 입다와 마찬가지로 요단 건너편에 있는 므낫세 지파 출신이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둘 다 요셉의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다른 지파들보다 더욱 가까운 혈족 관계였으나 그 둘은 다른 지파들보다 더욱 서로를 질투하고 있었다. 야곱은 축복 때에 손을 바꿔 놓아 에브라임을 우위에 두었고, 그래서 나중에 그들은 열 지파의 나라를 기대하기까지 되었다. 다윗의 집안에 대한 반란이 일어난 후 에브라임 지파는 그 나라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약속된 영예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므낫세에게 잠시라도 영광스러운 일이 있으면 그것을 몹시 싫어했다. 서로 사랑하고 화목해야 할 친족들끼리 싸움과 불화를 일으킨다는 것은 매우 불쌍한 일이다.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잠 18:19).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에게 품은 분노는, 1. 이치에 맞지도 않고 부당한 것이었다. 그들이 들고 나온 이유는 “어찌하여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는 그럴듯한 것이었다. 그러나 입다를 우두머리로 세운 것은 에브라임 사람들이 아니라 길르앗 사람들이었으므로, 그는 에브라임 사람들을 요청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았다. 만일 입다가 그들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 싸움에서 졌다면 당연히 책망을 받을 만했다. 그러나 그 싸움에서 암몬 사람들이 항복하고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되어 일이 잘 끝났으므로, 비록 입다가 그들의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책망받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2. 그것은 잔인하고 포악스러웠다. 그들은 요단을 건너서 길르앗에 있는 미스바까지 와서 소란을 피웠다. 거기는 입다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입다의 집을 불사르기 전에는 결코 자기들의 분노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소리쳤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창 49:7). 타당한 근거도 없는 분노가 오히려 더 격렬하게 나타난다. 사실 순리대로 생각하면 입다는 이스라엘의 적을 물리쳤으니 마땅히 그에게 축하하러 와야 했으며, 그가 행한 훌륭한 일에 대해 모든 지파는 감사를 표해야 했다. 때로 우리가 훌륭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대가를 받지 못했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이제 입다가 그의 딸을 잃는 재난을 당하게 되었으니, 그들은 그를 조위하고 위로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야비한 자들은 고통을 겪고 있는 자를 괴롭힘으로써 낙을 삼는다. 이 세상에서는, 한 재난의 끝이 또 다른 재난의 시작이 되는 수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갑옷을 벗는 자같이 자랑치” 않아야 한다(왕상 20:11). Ⅱ. 입다는 그 자신을 열심히 해명했다. 그러나 그는 기드온처럼 그들의 화를 누그러뜨리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므로, 에브라임 사람들은 기드온에게 그랬던 것보다 더욱 포악스러워졌다. 기드온처럼 온화하고 조용한 성품을 지니고 있지 않았던 입다는 그들이 노여움을 품든지 말든지 상관치 않고, 1. 그 자신의 정당성을 해명했다(2, 3절). 입다는 그들이 자신과 다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혔다. (1) 그가 그 싸움에 나간 것은 자신의 명예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암몬 사람들로 인해 몹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그의 나라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2) 비록 입다는 그럴 필요도 없었고 존경을 표할 책임도 없었지만, 그가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함께 싸워 줄 것을 요청했을 때 그들은 거절했다. “내가 너희를 불렀으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하였도다”(2절). 그들이 입다를 책망한 이유가 진실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다툴 만한 타당한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도리어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도움을 청했을 때 그들이 그것을 거절했다는 것은, 그가 충분히 책잡을 만한 일이다. 이처럼 많은 죄를 범한 자가 소란스럽게 결백한 자를 책망하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3) 그 전쟁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입다에게 화를 내기보다는 오히려 그를 동정해야 했다. “나는 내 생명을 돌아보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나는 극히 미약한 군대를 이끌고 싸워야 했으므로 이 극심한 위험 속에 내 생명을 걸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들이 부러워하는 이 영예는 정말 귀하게 얻어진 것이었으므로, 결코 시기해서는 안 되었다. 그들 가운데 싸움을 위해 그렇게 멀리 떠나려는 자는 아마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4) 입다는 그 영광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모두 하나님께 돌렸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붙이셨도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위해 즐겨 나를 쓰셨거늘, 너희들이 왜 그것을 성내느냐? 너희는 나로 더불어 싸울 만한 이유를 갖고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보잘것없는 나를 쓰셨으니, 너희들이 나를 시기하는 것은 실상 하나님과 싸우는 것이 아니냐?” 2. 입다는 기드온처럼 그들을 달래지는 못했지만, 그의 정당한 대답을 듣고도 그들이 분노를 거두지 않았을 때, 그는 이스라엘 사사의 권세로 칼을 뽑아 그들의 무례함을 징벌하고 그 자신을 방어하려고 했다. (1) 에브라임 사람들은 입다뿐만 아니라 그를 옹호하는 그의 이웃이나 친구들과 싸웠으며, 추악한 말로 그들을 욕했다(4절). 에브라임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그들을 경멸했다. “요단 건너편에 살고 있는 너희 길르앗 사람들은 에브라임에서 도망해 온 자들이다. 너희는 요셉의 지파들 중 쓰레기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 에브라임은 그 우두머리이며, 이것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사람들이 모두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 너희들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너희 이웃들은 너희가 쓰레기보다 못한 자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너희 형제로부터 도망해 온 부랑자들로 이 구석까지 굴러 들어왔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 길르앗 사람들은 틀림없는 이스라엘 백성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입다를 세워 암몬을 쳤으므로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보다도 이 때에 더욱 높이 평가해 주어야만 하지만, 그들은 길르앗 사람들을 야비하고 부당하게 “도망한 자”라고 불렀다. 사람이나 나라를 비난하는 것은 나쁜 일이며, 더욱이 표면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다고 하여 그들을 얕잡아 이야기하는 것은 더욱 나쁜 일이다. 분쟁은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비참한 결과를 가져온다. 또한 남을 헐뜯고 야비하게 칭하는 것은 커다란 재앙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혀는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며”(약 3:6)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혀를 그릇 사용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시 64:8). 만일 에브라임 사람들이 그들을 “도망한 자”라고 부르지 않았다면, 이렇게 큰 유혈극은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했다”(잠 15:1). 이것이 커다란 화근의 원인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2) 에브라임 사람들의 모욕은 길르앗 사람들의 피를 치솟게 했으며, 그들의 우두머리인 입다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분노를 위해서도 꼭 복수를 해야 했다. ① 길르앗 사람들은 에브라임 사람들을 들로 몰아내어(4절), 무례한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는 그들을 쳐 죽이고 패주시켰다. ② 그들은 또한 도망하는 자들을 쳐 죽여 완전히 보복했다(5, 6절). 에브라임 사람들보다도 요단의 지리에 밝은 길르앗 사람들은 그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단단히 방어하고, 그들로 하여금 강을 건너도록 유인해 쳐 죽이도록 명했다. 여기서 길르앗 사람들은, 첫째로, 에브라임 사람들을 멸하는 데 매우 가혹했다.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은 것”으로도(고후 2:6) 충분했다. 그러므로 에브라임 사람들이 들판에서 패주할 때 도망하는 자들까지 가혹하게 쳐 죽일 필요는 없었다. 언제까지 칼로 피를 흘릴 것인가? 입다의 이런 행위가 칭찬받을 만한 것이었는지 나로서는 모르겠다. 아마도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의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둘째로, 그들은 빈틈이 없어서 끝까지 에브라임 사람들을 가려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은 언어를 사용했지만 히브리 문자 <단어없음>(쉰)을 <단어없음>(사멕)처럼 발음하는 그 지방 특유의 사투리를 썼는데 다른 지방 사람에게는 이상하게 들리는 이 발음을 결코 고칠 수가 없었다. 사람은 모방에 의해 언어를 배운다. 그러므로 처음에 sh 발음 대신 s 발음을 사용하던 자들의―그 발음이 더 간결해서든지 더 고상하게 들려서든지 간에―자식들은 그들을 따라 같은 식으로 발음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봐서 에브라임 사람을 구별할 수 있었다. 우리들도 발음을 보고 사람들의 출신 지역을 알아맞힐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너도 갈릴리 사람이라. 네 소리가 너를 표명한다”(마 26:69, 73). 이처럼 에브라임 사람들도 발각되었다. 만일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 사람이라 생각되는 자를 만났으나 그들이 그것을 부인하면 십볼렛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도록 했다. 그것을 씹볼렛이라 말하면 그가 에브라임 사람임이 틀림없으니, 즉시 죽여버리도록 했다. 십볼렛은 강 또는 냇가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십볼렛, 즉 강을 건너게 해 달라고 부탁하라.” 이렇게 해서 잡혀 죽은 에브라임 사람 수는 4만 2천이었다(6절). 그래서 그 지파의 폭동은 진압되었다. 3. 이 교만하고 성내기 잘하는 에브라임 사람을 벌한 사건 속에서,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볼 수 있다. (1) 에브라임 사람들은 그들 지파의 명예에 큰 자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또한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그들의 나라를 부끄러워해야 했던가!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고 물음을 당했을 때, 그들은 그 어느 지파의 사람들보다도 더욱 그것을 숨기려 했다. (2) 그들은 분에 차서 요단을 건너와 입다의 집을 불사르겠다고 위협했지만, 이제 그들은 비겁하게 몸을 움츠려 요단으로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영영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3) 그들은 길르앗 사람이 이렇게 먼 곳에 자리잡게 된 불운을 비웃었으나 이제는 그들이 십볼렛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결점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4) 그들은 길르앗 사람들을 “도망한 자”라고 조롱한 그대로 자신들이 정말 도망하는 자들이 되고 말았다. 역설적이게도 원래 히브리어로 “도망한 자”라는 단어는(5절) 도망하는 에브라임 사람을 일컫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부당하게 비난을 퍼붓는 자들은 고스란히 그 비난을 되돌려받게 될 것이다. Ⅲ. 여기서 입다의 통치는 끝나게 된다. 그는 단 6년 동안만 이스라엘의 사사를 지내고 죽었다(7절). 아마도 그는 딸의 죽음을 너무 상심해 빨리 죽게 되었는지도 모르며, 그것을 매우 애통하게 여기며 죽어 갔을 것이다. --------- 입다의 후계자들(삿 12:8-15) 우리는 이제 이스라엘의 사사 세 사람의 짧은 통치 경력을 훑어 보게 된다. 첫 번째 사사는 7년, 두 번째는 10년, 세 번째는 8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진다”(잠 28:2). 그래서 선한 사람들이 미처 일을 해내기도 전에 물러나게 된다. Ⅰ. 베들레헴의 입산은, 성경에서 단 한 번만 언급된(수 19:15) 스불론 태생의 사람이 아니라, 다윗의 성읍인 유다 베들레헴 출신일 것이다. 그는 단지 7년만을 사사로 지냈으나, 그가 결혼해 낳은 자식들의 수로 미루어보아 오래 살았던 것 같다. 아마도 그는 그 가족들의 번성과 타국과의 많은 결탁으로 공덕을 더 높이 쌓아올렸을 것이며, 입다처럼 사람들에게 뽑혀서든지 아니면 기드온처럼 직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하나님의 사업을 수행했을 것이다. 그의 특별한 점으로는, 1. 그가 모두 60명에 달하는 자손들을 가져 대가족을 이루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처럼 그는 베들레헴을 번성시켰으며, 그가 태어난 바로 그 성읍은, “하늘의 별”과 같은 영적인 씨앗을 배태하기로 되어 있는 곳이었다. 2. 그는 아들 30명과 딸 30명을 두었다. 자식을 둘 가진 자도 아들과 딸을 하나씩 두기 힘든데, 이렇게 많은 자손들 가운데서도 슬기로운 선견지명으로 아들딸의 비율을 똑같이 하여, 이 땅 위에 후손들을 번창시킬 수 있는 남녀의 수를 적합하게 해 놓았다. 3. 그는 자식들을 모두 결혼시키는 것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딸들은 타국으로 시집 보냈다. 즉 그는 통속 라틴어 해석대로, “그들을 위해 남편들을 마련해 주었다”(et maritis dedit). 또한 그는 그 교환으로, 그리고 그의 이익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아들들을 위하여는 타국에서 여자 삼십을 데려왔다.” 유대인들은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해 주어야 할 일 세 가지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들로 하여금 율법을 읽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며, 그에게 일거리를 마련해 주어야 하고, 또 아내를 구해 주어야 한다. 입산의 가족과 그의 바로 윗선조인 입다 사이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입산은 60명의 자식을 모두 결혼시켰지만, 입다는 무남독녀로도 그 딸을 죽여 버렸거나 아니면 결혼하지 않은 채로 일생을 마치게 했다. 사람이 번성하거나 멸하는 것은 모두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이다. Ⅱ. 그 다음에는 가나안 북쪽에 있는 스불론 사람 엘론이 사사가 되어 법을 다스려 잘못된 것들을 시정했다. 그는 10년간 이스라엘을 축복되게 다스리고 죽었다(10:11, 12). 라이트푸트는 엘론이 다스리기 시작한 때에 블레셋 사람들의 40년간의 속박이 이미 시작되었고(18:1), 그 때 즈음해서 삼손이 태어나게 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아마도 그는 북쪽에서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은 가끔 국경을 넘겨다 보며 침입할 기회를 노렸는지도 모른다. Ⅲ. 엘론에 이어 에브라임의 압돈이 사사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서 여호수아 시대 이래로 별 주목을 끌지 못하던 에브라임 사람들이 명성을 다시 얻기 시작했다. 아비멜렉으로 인해 세겜 사람들은 에브라임 지파에 상당한 수치가 되었다. 압돈은 많은 후손들로도 유명했다(14절). 그는 아들 40명과 손자 30명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그들이 다 성장할 때까지 살았다. 그리고 그 후손들은 사사로서 그리고 관직에서 일하는 자로서 혹은 뛰어난 인물로서 인정을 받아 모두 어린 나귀 70필을 탈 정도였다. 그가 이렇게 손자들까지도 볼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흐뭇한 일이라 하겠으나, 이스라엘의 평화를 보지 못했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을 침입해 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전례대로(왕하 23:17) 사사들 기념비를 세워 그들이 행한 업적을 확고히 해두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사도 바울도 다윗에 대해 “그의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행 2:29) 하고 말한 적이 있다. 또한 그들은 사사들이 묻힌 것을 영예롭게 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으나, 이것은 오히려 세속적인 영광을 높이 평가하려는 것이었으며, 그런 자만은 헛된 것이었다. 이스라엘에게 신적인 존재였던 사사들은 이렇게 평범하게 죽어 갔으며, 그들의 모든 명예는 먼지로 화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사사들의 일은 특별히 언급되어 있으면서,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의 일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더욱이 대제사장 비느하스(20:28)에서 엘리에 이르기까지 무려 250여 년 동안 계속된 그들의 일이나 업적은 나타나 있지 않으며, 단지 몇몇 훌륭한 제사장들의 이름만 열거되어 있을 뿐이다(대상 6:4-7; 스 7:3-5). 그렇다면 모세의 율법에서 영광스럽게 소개되고 비유되던 제사장들의 강력한 탁월성이 왜 이렇게 장기간 드러나지 않았는가? 그것은 제사장들의 직책이 하나의 상징이며, 그것에 의해 표상되는 원형인 영원한 제사장,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넘치는 영광에 비해 그들의 것은 극히 미약한 것이기 때문이다(고후 3:10). -----------호크마 =====12:1 북으로 가서 - 이의 원어 '야아보르 차포나'(* )는 '북쪽으로 건너서' 또는 '사본으로 건너서'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차포나'의 명사형인 원어'차폰'(* )은 '북쪽'을 의미하기도 하고 고유 명사로서 '사본'(Zaphon)이라는 도시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KJV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역 성경들과 공동번역은'차포나'를 '사본으로'라고 번역했다(RSV, NIV, Ling Bible). 이것은 '사본으로'(* , 에이스 세피나)라고 번역한 70인역(LXX)의 전통을 따른 번역임에 틀림없다. 한편 '사본'은 갓 지파의 땅인 숙곳(Succoth)근처에 위치해 있다(수13:27). 이곳은 미스바(11:34)와도 별로 멀어지지 않은 곳이니 본절을 '사본으로 가서'로 번역해도 큰 무리는 없다(Wycliffe, Pulpit Commentary, Keil & DelitzschCommentary, Vo1.2,p.396).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같 때에 - 에브라임 사람들은 사사 기드온에게 했던대로 압제자를 쫓아낸 입다에게도 시비를 걸어왔다(8:1). 여기서 에브라임 사람들은 입다의 승리와 온 길르앗의 머리로서(11:11) 받는 그의 명성을 시기했다(Goslinga). 다시 말해 그들은 기드온의 경우에서와 같이 이스라엘 사회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자하는 욕망에서 그에게 시비를 걸었던 것이다. 우리가 반드시 불로 너와 네 집을 사르리라 -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와 싸워 그가 길르앗의 우두머리로 군림하지 못하도록 멸하겠다는 의미이다. 특히 '불'이란 말은 기드온의 막내 아들 요담의 우화에서도 '싸움'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9:15), 성경전체에서는 종종 '징계'의 의미로 사용되었다(1:8; 수 6:24; 7:25; 8:19; 11:9,11). 아무튼 본절은 당시 에브라임 지파의 타락된 모습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그들은 마치 대적을 진멸하려고 나서는 원정군인양 무리를 지어 먼길을 행군해 왔을 뿐 아니라입다에게 다짜고짜로 잔혹한 협박을 가하였던 것이다. =====12:2 내가 너희를 부르되 - 11장에서는 입다가 암몬 자손과 싸우기 전 에브라임 지파를 소집했다는 말이 없다. 그렇지만 이에 대해 혹자는 에브라임 지파가 암몬과의 싸움에 소집통고를 받았으나 입다가 전군대의 지휘관이 되었으므로 이에 협조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Keil, Hervey). 항상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주도권을 잡고자 했던에브라임 지파의 성격으로 보아 이러한 해석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주장이다.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하므로 - 사실상 입다는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이러한 변명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 이유는 (1) 암몬 자손과의 싸움은 암몬자손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받고 있던 요단 동편 지파들에 의해 주도되어야 했으며,(2) 반드시 입다가 에브라임 지파에게 도움을 호소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다는 에브라임 사람들의 잘못을 확실하게 지적해 주기 위해서 본절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Matthew Henry). 한편 본절은 의미상 '너희는 내가 바라던 도움을 제공하려고 하지 않았다'로 해석될 수 있다(Living Bible). =====12:3 내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 입다와 암존족 간의 전쟁이 매우 치열했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이처럼 입다는 여유있게 전쟁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대신 그는 사력(死力)을 다해 싸워야만 했다. 따라서 그가 얻은 승리와 영예는 고된 싸움 끝에 얻는 정말로 값진 것이었다. 그런데도 입다는 겸손히 그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렸다. 이는 손끝하나 움직이지 않고서도 입다의 영광을 시기한 에브라임 지파와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손에 붙이셨거늘 - 입다는 그의 승리에 대한 근본 원인을 여호와 하나님께 돌림으로써 에브라임 사람들의 질투심이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말은 입다가 그들의 입을 막는 최후의 진술로서 매우 적절했다. =====12:4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 아마도 길르앗 사람들은 암몬족과의 전쟁이 끝난 직후 제각기 고향으로 흩어졌을 것이다(11:32-34). 따라서 입다가 에브라임 지파의 도전을 응징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그들을 소집하는 일이 필요하였을 것이다(Wycliffe). 너희 길르앗 사람은...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 본질은 (1)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 지파에서 도망친 분파주의자 또는 망명자들이라는 의미와, (2) 길르앗 사람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땅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근거없는 트집으로서 길르앗 사람들을 무시한 처사이므로 길르앗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길르앗 사람들은 므낫세 지파의 한 분파로서 마길의 아들 길르앗의 후손이지(민 26:29) 결코 에브라임 지파에서 떨어져 나온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모욕적인 언사(言辭)를 받은 길르앗 사람들은 대동 단결하여 에브라임 지파를 단호히 응징하였던 것이다(5,6절). =====12:5 요단 나투턱 - '나루턱'은 나룻배가 들어와서 닿는 곳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절에 사용된 원어 '아바라'(* )는 배로 건너는 나루(ferry)가 아니라 수심이 얕아 배 없이 건널 수 있는 곳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일종의 여울(ford)과 같은 곳이다. 당시 갈릴리 호수에서 사해로 흘러 들어가는 요단 강은 그 폭이 27m가량, 깊이가 1-3m가량이었다. 따라서 얕은 곳은 배 없이도 충분히 걸어서 건널 수 있었다.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 - 이에 해당하는 '페리테 에프라임'(* )은 '에브라임으로부터 도망하는 자'란 의미로서 4절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와 같은 말이다.그래서 혹자는 이와 관련 에브라임 사람들이 길르앗 사람들에게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라고 말한 것으로 추정한다(Gosinga, Hervey). 그러나 만일 그렇게 되면 길르앗 사람들이 나루턱을 건너 에브라임 지파 땅으로 도망치려는 사람이 아닌 단순히 에브라임에서 도망친 사람들을 처치했다는 결론이 나온다(6절). 그러므로 위와 같은 해석은 적절하지 않다. 따라서 저자는 길르앗 사람을 '도망자'로 비난했던 에브라임 사람들(4절)이 그들의 비난과는 반대로 도리어 자기들이 도망자가 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본절과 같은 말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12:6 십볼렛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쉽볼렛'(* )은 '시내' 또는 '곡식 이삭'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요단 강의 여울목에서 발생된 사건과 관련이 있으므로 '시내'란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1.2,p.397). 씹볼렛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십볼렛'(* )은 특정한 의미가 없다. 혹자는 이것이 '무거운 짐'을 뜻할 것으로 추정하기도하나 분명치 않다. 여기서는 단지 에브라임 사람들이 시내의 의미인 십볼렛'을 발음할 때 '쉰'(* )을 발음하지 못하고 '사멕'(* )으로 발음한 것일 뿐이다(Keil & Delitzsch, Matthew Henry). 이와 같은 동일어에 대한 발음상의 차이는 이스라엘의 경우에서 뿐 아니라 다른나라에서도 발견된다. 이것은 각 지방의 특징적인 발음이 전통적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 나라에서도 표준말 '의'가 어떤지방에서는 '어'로, 또 어떤 지방에서는 '으이'로 발음되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 요단 나루턱에서 이 정도의에브라임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것이며 여러 차례의 간헐적(間歇的)인 혈전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의 출애굽 당시 첫번째 인구 조사에서 에브라임 지파의 장정 수는 45,000명이었다(민 1:33). 그리고 2차 조사에서는그보다 줄어든 32,500명이었다(민 26:37). 따라서 그 이후부터 입다 당시까지 300여년이 흐르는 동안(11:26) 각 지파마다 인구가 많이 증가했을 것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에브라임의 장정 42,000명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에브라임 지파에 있어서는 매우 큰 타격이었을 것이다. =====12:7 입다가...길르앗 한 성읍에 장사되었더라 - 본절의 서술 형식은 다른 '소사사들'(Minor Judges)의 생애에 대한 서술 형식과 꼭 같다. 그 형식이란 곧 사사로서의 통치기간, 죽음, 매장지 등의 순서이다(10:2,5; 12:10,12,15). 한편 본절에서 '길르앗 한 성읍'으로 번역되어 있는 구절은 각 번역서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즉 공동 번역은 이를 '길르앗에 있는 자기의 성읍 미스바'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RSV는 '길르앗에 있는 그의 성읍'(his city in Gilead)으로, 70인역(LXX)의 한 사본은 '그의 성읍 길르앗에서'(* , 엔 테 폴레이 아우투 갈라드)로 각기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히브리 원문의 애매 모호함 때문이다. 즉 원문 '베아레길르앗'(* )은 '길르앗의 그 도시들에서'란 뜻이다. 여기서 '그 도시들'이란 복수형이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입다의 주요 활동 무대가 미스바였고 또한 그의 고향 역시 그곳이었던 점에 의거할 때(11:9,34) 길르앗이 장사(葬事)된 '길르앗 한 성읍'은 '미스바'일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12:8 베들레헴 입산 -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은 유다 지파의 베들레헴과 스불론 지파의 베들레헴이 있으므로(수 19:5) 어떤 지파의 성읍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본절의 베들레헴을 유다 지파의 베들레헴으로 주장하지만 특별한 근거가 없다(Keil & Delitzsch, Pulpit Commentary). 일반적으로 유다 지파의베들레헴은 '유다 베들레헴'(17:7,9) 또는 '베들레헴 에브라다'(미 5:2)로 불리워졌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사 대부분은 북부 지파의 출신들이었다. 본서 서론 '이스라엘의 사사들' 참조. 이로 미루어 보아 본절의 베들레헴은 스불론 지파에 속한 베들레헴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므깃도에서 약 18km정도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한편 이곳 출신 입산(Ibzan) 역시 돌라(10:1,2), 야일(10:3-5), 엘론(8-10절), 압돈(11,12절)과 더불어 두드러진 공적이 없는 이스라엘의 '소사사'였다. =====12:9 그가 아들 삼십과 딸 삼십을 두었더니 - 입산은 입다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11:34) 기드온이나(8:30,31) 야일과 같이(10:4) 자녀를 많이 두었다. 이것은 입산이 누리는 부와 권세를 상징해 준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자식을 여호와에서 주신 기업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시 127:3). 타국으로 시집보내었고 - '타국으로'에 해당하는 '하후차'(* )는 '외국'이라는 뜻과 함께 단순히 '바깥'(outside)이라는 의미도 지닌다(B.D.B). 입산은 사사였으므로 자기의 아들과 딸을 위해 이방인과 교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타국'이란 말은 '다른 가문' 또는 '다른 지파'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공동 번역은 이를 '일가 아닌 사람들에게'로 번역했으며, 대부분의 영역 성경도 '그의가문 밖으로'(outside his clan)라고 번역했다(RSV, NIV, Living Bible). 아들들을 위하여는 타국에서 - 여기서 우리는 입산이 자기의 아들과 딸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른 지파 사람들과 결혼시킨 것은 의도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그는 각 지파간의 유대 관계를 강화시키고자 자신의 아들과 딸을 다른 지파 사람들의 아들과, 딸과 정략적으로 결혼시켰을 것이다. =====12:10 입산이...베들레헴에 징사되었더라 - 이처럼 묘지를 고인(故人)이 생전에 거주하던 거지나 고향, 연고지 근처에 마련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한 일반적 관습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후 요셉의 뼈가 애굽에서부터 고향땅 세겜으로 돌아온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이다(수 24:32). ======12:11 스블론 사람 엘론 - 엘론에 대한 기록은 사사들의 사적(事蹟) 중 가장 간단하다. 아까 사사 입다 이후에서 사사 압돈까지(13절) 이스라엘에는 특별히 큰 대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도 사사들은 이스라엘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그 때문에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호와 종교가 계속적으로 유지되었던 것 같다. =====12:12 스불론 땅 아알론 - 단 지파의 땅인 아얄론과는(수 10:12; 19:42) 분명히 구별되는 곳이다. 이 아얄론(* )은 히브리어 자음만으로는 사사 엘론(* )과 같은 철자를 지니고 있다. 때문에 70인역(LXX)과 공동번역은 아예 '아얄론'을 '엘론'으로 번역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이곳은 사사 엘론이 건축한 성읍일 가능성이 크다. 한편 혹자들은 이곳을 오늘날의 야룬(Jalun)과 동일시 하지만(Keil, Hervey)확실한 근거가 없다. 추측컨대 갈릴리 호수 서쪽 15km 지점에 있는 오늘날의 '텔 엘부메'(Tell el-Butmeh)가 바로 이 '아얄론'이 아닌가 사료된다. =====12:13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 - '비라돈'은 에브라임 지파의 땅 중 아말렉 산지에 위치하고 있다(15절; 5:14). 이곳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정하듯이 마카비 서와 요세푸스의 글에 나오는 '파라톤'(* )과 같은 곳이다. 오늘날에는 '파라타'(Farata)로 알려져 있는데(Keil, goslinga, Hervey, Cundall) 현재 세겜 서남쪽 약10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이다. 한편 압돈(Abdon)은 입산이나 엘론과 달리 그의 신분이'힐렐(Hillel)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아마 이는 베냐민 지파의 계보에 나오는 '압돈'(대상 8:23,30; 9:36)과는 구별하기 위함인 듯하다. =====12:14 압돈이 사사로서 누린 부와 권위는 '아들 사십과 손자 삼십' 그리고 '어린 나귀 칠십 필'이란 내용 속에 잘 암시되어 있다. 왜냐하면 어린 나귀를 탄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높은 지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5:10; 10:4. 주석 참조. =====12:15 에브라임 땅 아말렉 사람의 산지 - 5:14에 이어 본절에서도 아말렉 족속이 에브라임 땅과 연관되어 언급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에브라임 땅은 과거에 아말렉 족속이 거주하던 곳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사사 시대 초기에 유목민인 아말렉 족속 중 소수의 무리가 남쪽에서부터 이동해 와 에브라임 산지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 같다. 아무튼 본절은 에브라임 땅이 아말렉 사람들과 어떠한 식으로든 관련이 있음을 시사해 준다. -------------- 전장(前章)에서 우리는 사사 입다가 암몬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건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본장에서는 암몬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입다를 에브라임 사람들이 시기하는 장면이 나온다(1-3절). 그리하여 급기야 동족 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 발발하는데 에브라임 지파가 크게 패함으로서(4-6절) 이스라엘은 다시 안정을 찾는다(7-15절). 한편 이러한 본장의 중심 테마는 이스라엘의 구원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암몬과의 전재에서 승리한 것이 누구로 인한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에브라임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한 인간적 영웅인 입다로부터 났으며 자신들이 그 전쟁에서 승리한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고 전리품을 공유하지 못한 데 대해 분개하였다. 에브라임 지파의 이러한 사고 방식은 자기 지파에 대한 지나친 우월감과 교만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기드온 당시에도 이와 동일한 시비를 제기했었다(8:1, 2) 그러나 기드온과 마찬가지로 입다는 이스라엘의 구원과 전쟁의 승리는 여호와에게서 기인한 것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3절). 그리고 에브라임 사람들의 사고 방식은 곧 구원과 승리의 참원인이신 여호와께 대한 불신과 대항이었는바 입다는 비록 동족이라 할지라도 승리의 참원인이신 여호와께 대한 불신과 대항이었는바 입다는 비록 동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불신하고 민족의 화합을 깨뜨린 그들 교만한 무리들을 대항하여 싸웠다. 그 결과 참된 구원의 원인을 깨닫지 못한 에브라임 지파는 42,000명이나 되는 자망자를 내고 대패할 수 밖에 없었다(6절). 반면에 자신의 영웅적 행위를 자랑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여호와만이 참된 구세주 되심을 믿었던 입다와 길르앗 사람들은 약 32년여 동안 평안을 누리게 되었으니 곧 입다에 이어 입산, 엘론, 압돈에 이르기까지 평안은 계속돠었다(7-15절). 이상에서 우리는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여 다 구원과 평안을 얻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믿음 위에 굳게 서야만 구원 얻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에브라임 지파와 같은 교만에 사로잡혀 행여 믿음의 본분을 그르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특히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본래 이방인으로서 믿음의 반열에 선 자들이니 하나님께서 지긍하던 원 가지도 아끼지 않으셨던 점을 기억하여 결단코 영적 교만의 자리에 이르러서는 아니될 것이다(롬 11:13-21). 1. 에브라임 사람들의 시비(12:1-7)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가 암몬 족속을 치러갈 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는 것을 빌미로 하여 시비를 제기하는 장면이다(1-3절). 그리하여 이스라엘에 내분이 일어나고 급기야 피비린내 나는 동족간의 전쟁을 치루는 장면이다(4-7절).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1) 자기 욕심에 근거한 시기심이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몰아넣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에브라임 사람들은 함께 전쟁에 참여하여 힘써야 할 때에는 뒷전에서 방관만 하다가(2절) 입다와 길르앗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영광스러운 결과에 개해서는 시기하였다. 그리하여 싸움을 걸어왔는데 오히려 42,000명이라는 막개한 인명 피해만을 보고 말았다. 이와 관련 욥기 저자는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고 했다(욥 5:2). 그리고 사도 바울도 시기와 분쟁은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하는 것이라고 전제하면서(고전 3:3) 이러한 불신앙적 행위는 반드시 책망과 징벌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교훈했다. (2) 남을 욕하고 멸시하면 자신도 또한 멸시당하고 욕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본문을 보면 에브라임 사람들은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라고 비난하지만 도리어 자신들이 '도망자'의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4, 5절). 그리고 에브라임 지파에 속하였음을 자랑으로 삼던 자들이 이제는 에브라임 지파임을 부끄럽게 여기고 스스로 에브라임 사람이 아니라고 부인하게 되었다(5절). 이와 관련, 잠언 25:8은 "너는 급거히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찌 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고 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고 하셨다. 그리고 그와 아울러 예수님께서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마 5:11)라는 축복의 말씀도 하셨다. (3) 성도의 선행으로 인한 영광은 스스로 자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이라는 것이다. 입다는 암몬 족속과의 싸움에서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싸워 승리하였으나 결코 승리의 영광을 자취(自取)하지 않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 그렇게 한 결과 그는 비천한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11:1) 도리어 뭇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길르앗의 우두머리로서의 영광을 당당히 누릴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빌 2:6-9) 주시기까지 이르렀다. 이와 같이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하나님의 세 가지 심판 - 본문에서 우리는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와 길르앗 사람들을 시기하여 그들을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로 인하여 길르앗과 에브라임 간에는 싸움이 발발하게 되고 엄청난 인명 피해를 보게 된다. 이렇듯 남을 비판하는 것은 예외없이 분쟁과 다툼의 원인이 된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산상 수훈에 "비판하지 말라:(마 7:1-5)고 명령하셨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선 기본적으로 준수해야 할 기독교 윤리 문제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혹자들은 기독교의 이신 칭의 (以信稱議) 교리(롬 1:17)를 지나치게 숭배한 나머지 이러한 기독교 윤리 문제를 등한시하므로 교회내에서나 사회 내에서 큰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은 한번 그리스도인이 되면 하나님의 심판따위는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는 신앙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성경이 가르치는 세 종류의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영원한 심판: 이것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양과 염소, 영생과 멸망을 결정하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이다(마 25:31-46). 이 심판은 세상 종말에 있을 것인데 주 에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결단코 벗어날 수 없는 심판이다(요 5:24). 따라서 이 심판의 정죄함에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롬 8:24). (2) 징계의 심판 : 이것은 종종 '판단'이라 불리워지는 심판으로서 하나님의 자녀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징벌이다. 예를 들면 고린도 전서 11:27-32에서 바울은 성찬식을 논하면서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판단은 그리스도인이 성도로서의 본분을 저버릴 때 하나님께서 가하시는 징계를 의미한다. 즉 이는 예수의 날에 얻을 구원의 유무에 상관없는(고전 5:5) 사랑하는 아들을 징계하시는 아비의 채찍과 같은 것이다(히 12:6). 그렇다고 해서 '아비의 사랑'이나 '채찍'이라는 말에 혼돈되어 이러한 심판을 가볍게 여긴다면 그건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징계가 성도에겐 필연적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하심 자체가 성도로 구별된 증거'인 것처럼 오해한 데서 비롯된 어리석은 생각이다. 성도로 구별됨의 증거는 징계받는 자체가 아니라 징계 후에 완성된 새로운 인격과 참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윤리적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심이라"(고전 11:32)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3) 보상의 심판 : 바울은 훗날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심판대 그리고 심판은 성도가 사후에 자신의 공력(功力)대로 받는 심판으로서(고전 3:13) 곧 선행의 정도에 따라 받는 보상의 심판을 가리킨다(고후 5:10, 11). 입다의 후계자들(12:8-15) 입다 사후 (7절) 이스라엘에 깃든 안정과 평화 및 당시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활동하던 입산(8-10절), 엘론(11, 12절), 압돈(13-15절)의 행적에 대하여 간략히 기술하고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입다의 시대와 입다의 후계자들의 시대는 상당히 대조를 이루고 있다. 즉 전자의 시대를 다윗 시대에 비할 수 있다면 후자의 시대는 솔로몬 시대에 비할 수 있다. 따라서 본문에 나타난 입다 후계자들의 시대, 즉 다시 말하면 평화의 시대에 나타난 특징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외침(外侵)이나 내분과 같은 전쟁이 없었다. 성경에서, 특히 사사 시대에 있어서 전쟁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이다. 왜냐하면 주로 전쟁은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 이후에 오는 평화는 종말 이후의 영원한 안식을 예표하는 것으로서(계 21:1-8) 성경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축복으로 간주했다. (2) 혼인 잔치가 빈번히 발생했다. 본문에서 입산은 아들 삼십과 딸 삼십을 혼인시켰음을 보게 된다(9절). 물론 아것이 정책이긴 하지만 이러한 혼인 정책을 평화 시대에만 있는 일이다. 예수님의 첫번째 이적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일어났는데 이것은 그분의 오심이 평화의 도래임을 상징하는 것이다(요 2:1-11).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신랑'으로 표현하시면서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마 9:15)라고 바리새인에게 반문하셨다. (3) 자손이 번성했다. 본문을 보면 입산에게는 아들자 삼십과 딸 삼십이 있었고 압돈에게는 아들 사십과 손자 삼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9, 14절). 사사들이 이렇게 많은 자손들을 거느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임이 틀림없다. 이에 대하여 시편 기자는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127:3)라고 노래했다. 또한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箭筒)에 가득찬 자는 복되도다"(시 27:4, 5)라고 노래했다. 그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도 "내가 네게 큰 복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창 22:17)라고 했다. 이것은 자손 번성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이 같은 평화의 시대에는 반드시 찾아오는 한 가지 위험이 있다. 이것은 곧 자칫 영적 긴장이 해이해져서 향락과 방탕 생활에 빠져들 우려가 많다는 점이다. 솔로몬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경우이며 다음 장(13장)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그대로 입증되고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러한 역사의 교훈을 깊이 되새김으로써 환경을 초월하여 늘 깨어 있는 신앙을 유지하여야 할 것이다(마 24:42 ; 벧전 5:8). === === [[BIBLIA 성경공부 시리즈 – 사사기 [9] 여덟번째 사사 입다]] ❖ 권력과 재산이 여호와 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여겼었던 시대 사유재산을 늘려가며 권력을 누렸던 야일의 시대의 끝물은 이전에는 열거된 적이 없는 많은 신들의 향연입니다. 바알 신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사람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겼다고 하는데요(삿 10:6). 모두가 복수로 ‘~들’이라고 하니,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신들을 섬겼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주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악을 저질렀다. 그들은 바알 신들과 아스다롯과 시리아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사람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고, 주님을 저버려, 더 이상 주님을 섬기지 않았다.”(삿 10:6) 이렇게 많은 신들을 섬겼다는 보도에는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의도한 바가 있습니다. 사사 야일이 처음부터 그렇게 탐욕스러운 사람은 아니었을 거예요. 분명히 처음은 하나님을 의지하던 믿음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높은 지위를 경험하면서 권력을 맛보고, 권력이 가져다주는 경제적인 부유함을 누리면서 점점 바뀌어진 것은 아닌가 합니다. 야일이 사사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의사결정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던 시대에 더 많은 부를 획득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사용했을까요?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삿 10:6에서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넌지시 실마리를 줍니다. 경제적인 면으로만 보았을대, 고대의 제사장이나 권력자들이 돈을 버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많은 제의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제의가 많을 수록 성전이나 제의를 드리는 장소로 더 많은 돈이 흘러들어 옵니다. 그런데 한분 여호와 하나님께만 제의를 드리면 매일 같이 드리는 상번제(출 29:38-46) 외에 사람들이 가져오는 매일 몇몇의 제사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들의 숫자가 많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많은 신들에게 하루에 한번씩만 제물을 바친다고 해도,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것보다 열 배 이상의 제의가 있을 것이고, 당연히 제사장의 몫이 들어나는 것은 물론이고, 이 때문에 돌아가는 경제적인 효과로 경제 권력층에 있는 이들도 더 많은 돈들을 함께 벌어들일 것입니다. 더 많은 돈의 맛을 보면 볼 수록 제의의 지도자들과 정치와 경제의 지도자들이 더욱 공고하게 결탁하게 됩니다. 그것이 사람의 욕심입니다. 그러다 보면,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를 이끄는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백성이라는 자기 정체성보다는 오히려 신들을 이용하는 이교도처럼 되어 버리겠지요. 그리고 그들의 통치 아래에서 백성들은 고통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사 야일의 때가 바로 그런 때였고, 그 야일의 시대를 이어받은 입다의 때는 그런 부조리들이 절정을 달하던 시대였습니다. 신들의 명단을 보건데, 이것은 단지 야일이 있었던 길르앗 만의 문제는 아니었나 봅니다. 페니키아 지역과 아람, 시돈과 모압, 암몬과 블레셋을 경계로 두고 있는 모든 지역에서 두루 이런 현상들이 있었던 것같아요. 결국 하나님은 그 이방의 우상들을 이용해서 자기 배를 불리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바램(?)대로 그들로부터 억압당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지도자들의 타락의 결과는 오롯이 백성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 잠시의 안정을 위해서 하나님을 포기했던 시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의 신들을 섬기는 또 다른 이유는 나라의 안정을 정치에서 찾으려는 데에서 비롯되기도 합니다. 국제 정치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다른 나라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그 나라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용하던 일반적인 방법이 그 나라의 신들을 자기 나라의 성전, 또는 제의의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자기 나라의 신과 함께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안전을 국제 외교에서 찾으려는 순간 이방 신들을 섬기는 우상 숭배를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것은 단지 그들에게 보여주는 요식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래, 그들의 새로운 문명의 이기(利器)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잠시 그들의 신들에게 아침 저녁으로 예배 드리는 척만 하자. 그러나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절대로 잊지 말자.”라고 생각하며, 이웃 나라의 신들에게 형식적으로 예배 드렸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요식 행위 때문에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생기고, 그 이득을 극대화하려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호감을 줄 만한 멋진 제의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주변 나라들의 신들을 위한 제사가 정례화 되면서 점차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진심으로 그 우상들을 참 신인양 섬기게 되었습니다. 또 이방의 나라가 그러하듯, 특별한 상황과 장소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한 신들이 있는 양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고대 주변의 나라들과 같이 다신(多神)의 사회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선조인 아브라함이 다신 사회로부터 떠나 오직 한 분 여호와 하나님 만을 바라보며 가나안 땅에 정착한 것과는 정반대가 되어 버린 셈입니다. 가나안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던 땅을 둘러싸고 있는 당시의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더욱 절실하게 매달려해 해던 여호와 하나님을 잊은 채, 국제 외교라는 방법으로 일시적인 안정을 추구하던 이스라엘이 드디어 한계 상황에 도달했습니다. 그들의 도움은 공짜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새롭게 정착한 땅에서 살아가는 방법과 광야 생활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문명 세계의 모든 것들이 혁신적이고 아름다와 보였을지 모릅니다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에 해당하는 대가를 지불해야했습니다. ‘압제와 고통’ 그리고 ‘한분 하나님, 여호와를 향한 신앙의 포기’로 말이지요. ❖ 벌하는 하나님, 그러나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 결국 이스라엘 지파 가운데에서 요단 강 동쪽에 길르앗 지방에 살던 사람들은 18년 동안 암몬 사람들에게 억압을 당하였고, 암몬 사람들은 유다와 베냐민, 그리고 에브라임 지파를 치려고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본토까지 쳐들어 왔습니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걸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하나님은 이런 백성들의 아우성에 “너희가 선택한 신들에게나 가서 부르짖어라. 너희가 괴로울 때에 그들에게 가서 구원하여 달라고 해라.”며 퉁명스럽게 대답하셨습니다. 그제서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해야할 바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겠노라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들 가운데 있는 이방 신들을 다 없애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참 약하신 분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시고, 또 그들의 고통을 보시고는 가만 있으실 수 없으셨거든요. 그래서 다시 한번 이스라엘의 역사에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보같이 시시때때로 하나님을 잊고 다른 길로 걸어가는 우유부단하고 나약한 이스라엘의 편에서 함께 아파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늘 그러셨습니다. ❖ 누가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겠느냐? 암몬 사람들이 길르앗에 진을 쳤습니다. 이미 갓 지파의 땅 길르앗의 많은 지역이 암몬의 수중에 넘어가 버렸습니다. 이에 맞서서 이스라엘도 미스바에 진을 꾸렸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여서 길르앗 지방을 자치하고 살고 있는 갓 지파 사람들과 함께 회의를 합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을 벌일 때에는 나름대로 원칙이 있었습니다. 한 지파가 곤경에 처해서 전쟁을 치룰 때에는 이스라엘의 나머지 형제 지파들이 도와야합니다. 그러나, 그 지파의 지리와 지형은 그 지파가 가장 잘 알기 때문에 그 전쟁에서 지휘관으로 제일 앞장 서는 것은 도움을 요청한 그 지파의 지도자여야 합니다. 그런데 갓 지파 길르앗 사람 중에 아무도 이 전쟁에 선뜻 맨 앞에 서겠다는 사람이 없었나 봅니다. 그래서 제안을 했습니다. “누가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겠느냐? 그 사람이 길르앗에 사는 모든 사람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삿 10:18) 아직 당대는 갓 지파의 땅이었던 길르앗에 삼십 성읍을 차지하고 있는 야일의 아들들이 있었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 아들들은 다 어디에 갔을까요? 적어도 사사인 아버지 야일의 아래에서 길르앗 삽십 성읍의 머리들로 길르앗의 최대 맹주 역할을 자처하였다면, 길르앗을 전장으로 하는 전투의 맨 앞에서서 잃어버린 내 성읍을 다시 찾겠노라고 앞장 서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들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질 것이 분명한 전쟁이어서 그랬을까요? 성읍에서 자기들의 이권을 찾을 때에는 행복했을 그 아들들이 정작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가는 전쟁에서 목숨을 내 놓아야할 때에는 슬쩍 뒤로 빠지는 모습이 너무 얄밉습니다. 그래서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사람들과 길르앗 사람들이 삿 10:18처럼 말한 것입니다. ‘전쟁에 나가 싸워 이기면’도 아니라, 그저 맨 앞장 서서 싸우기로 하기만 해도 지파의 머리로 인정해 준다는 말에는 왠지 모를 씁쓸함이 있습니다. ❖ 입다, 창녀의 아들 입다는 길르앗이 창녀에게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 길르앗은 본처에게서도 여러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들은 아버지가 창녀에게서 낳아 데리고 들어온 아들인 입다를 꽤나 구박했던 모양입니다. 결국 입다에게 “너는 우리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인의 아들이므로, 우리 아버지의 유산을 이어받을 수 없다.”(삿 11:2)며 쫓아냈습니다. 이것은 그냥 쫓아낸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이어받을 수 없다는 것은 단지 경제적인 손해 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문으로부터 완전히 버림 받아, 사회적으로 보호 받을 만한 어떤 장치도 없다는 선언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가히 사형선고에 가까운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입다는 형제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길르앗 산지에서 살 수 없어서 골짜기를 건너 돕으로 도망가서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치 사울을 피하여 아둘람으로 도망간 다윗의 주변에 압제 받는 사람들,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모여들 듯, 입다의 주변에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들'(히. 아나쉼 레킴 אֲנָשִׁים רֵיקִים)이 모여들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번역하는데, 이 단어를 왜 ‘잡류'(개역개정), 또는 ‘건달패'(새번역)라고 번역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는 마치 입다처럼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들’, ‘박탈 당한 사람들’이 입다의 주변에 모여들었다고 말합니다.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에게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길르앗의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는 입다에게 지휘관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길르앗의 장로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이 나를 미워하여, 우리 아버지 집에서 나를 쫓아낼 때는 언제이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고 해서 나에게 올 때는 또 언제요?” 그러자 길르앗의 장로들이 입다에게 대답하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이오.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운다면, 당신은 모든 길르앗 사람의 통치자가 될 것이오.”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이 나를 데리고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울 때에, 주님께서 그들을 나에게 넘겨 주신다면, 과연 당신들은 나를 통치자로 받들겠소?” 그러자 길르앗의 장로들이 입다에게 다짐하였다. “주님께서 우리 사이의 증인이십니다. 당신이 말한 그대로 우리가 할 것입니다.”(삿 11:7-10) 이것이 길르앗의 장로들과 입다의 차이입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이 구절을 통해서 길르앗의 장로들과 입다가 가지고 있는 전쟁에 대한 큰 시각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길르앗의 장로들은 입다가 굉장한 용사이기 때문에 분명히 암몬과의 전장에서 이스라엘 군대의 맨 앞에 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입다에게 갔습니다(삿 11:1). 그들은 입다를 의지한 것입니다. 그러나 입다는 “주님께서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고 그들을 입다의 손에 넘겨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삿 11:9). 입다의 태생과 출신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시각,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야일의 아들들처럼, 그리고 길르앗의 합법적인 아들들처럼, 법적으로 아무리 적법한 결혼 관계에 의해서 태어난 아들들이라 할 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이 전쟁을 주인이시고, 그분이 싸우신다는 믿음이 없다면 참 이스라엘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권력과 경제력을 지키기에 급급해서 사람을 의지하고 모략을 의지하는 이방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것 가지고 있지 않지만, 아니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입다와 그의 친구들은 달랐습니다. 주님께서 싸우십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이것을 말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 역사를 아는 자가 여는 새 시대 입다(히. 이프타흐, יִפְתָּח ‘그가 열것이다’ 또는 ‘그가 자유케 할 것이다’)는 그 출생의 신분과 관계없이 이스라엘 백성으로서의 역사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한 분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따른다면 누구라도 사사가 될 수 있는 새 시대를 열었습니다. 입다가 암몬 왕에게 먼저 사자를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전쟁의 명분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암몬 왕이 대답하기를 아르논 강에서부터 얍복 강과 요단 강에 이르는 자기의 땅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점령하였으니, 그 땅을 도로 내 놓는 것이 순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 입다가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역사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시작합니다. 요점은 암몬 사람들이 역사를 잘못 알고 있다라는 겁니다. 가데스로부터 시작하는 출애굽의 여정에서 에돔과 모압의 영토를 지나가려고 하였으나, 에돔 왕이 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고, 모압의 왕도 이스라엘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며, 그래서 에돔과 모압 땅을 돌아서 모압 땅 동쪽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모압 땅에는 들어가지 않았다는 거지요. 길르앗 산지의 남쪽에 해당하는 아르논과 얍복 사이의 땅은 당시 아모리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곳도 지나가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거절과 동시에 오히려 싸움을 걸어와서 아모리의 시혼과 그 군대를 무찌르고 그 영토를 차지하였다는 사실을 나열합니다. 즉, 현재 르우벤 지파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과 갓 지파의 일부가 살고 있는 길르앗 산지의 남쪽 지역은 당시 암몬의 땅이 아니라, 아모리의 땅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암몬과는 전쟁을 한 적이 없다(참조 신 2:19)! 그리고 그 지역을 벌써 삼백년이 되는 시간동안 르우벤과 갓 지파가 살고 있는데, 왜 갑자기 암몬의 왕이 그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냐?”는 것이 입다의 답변의 요지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정복 전쟁의 전통이 몇개가 있는데, 그 전통에 따라서 그 땅의 주인을 표시하는 방식과 그 땅의 당시 소유주에 대해서 조금 다른 견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기억하는 출애굽의 여정과 당시 요단 동편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던 왕국의 경계가 입다가 말한 바와 같고, 입다는 그 역사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암몬 왕이 내건 명분을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은 몰랐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일반적으로 전쟁을 시작할 때에는 나름대로 그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자기의 명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암몬 왕의 이 명분 역시 입다를 찾아가기 이전에 이미 암몬 사람들이 전쟁을 걸어올 때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아무도 암몬 사람들이 내건 이 전쟁의 명분이 가짜 뉴스라는 것을 지적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합법적인 이스라엘의 아들들이라고 자칭하며, 그 사회에서 권력과 명예를 누리고 경제적인 풍요를 즐겼던 그들은 정작 하나님의 역사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그저 어떻게 싸워 이길 수 있을까라? 어떻게 무력으로 저들을 제압할 수 있을까에만 모든 생각이 매몰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자신들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그렇게 권력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 법령과 율법이 정한 바에 따라서 그것에 문자적으로 묶여 살아가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난하며, 그들과 다른 자신들의 정통성을 자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 출생은 비천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을 붙잡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했습니다(삿 11:29). 하나님의 눈에는 이 사람이 나그네냐 아니냐, 그 태생이 합법적이었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로 불릴 만한 공동체를 이루는 조건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 믿음과 주인 되신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강제노역에 고통 받던 히브리인들을 자유케 하셨다는 역사 의식, 그리고 광야에서 그 공동체의 쓸 것을 준비하셨고, 전쟁 터에서 하나님이 싸우시고 이기셨던 그 역사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일 뿐입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입다의 연설을 통해서 정작 스스로 ‘정통’ 이스라엘이라고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 출애굽의 역사와 그 역사 속에서 주인되신 하나님에 대한 역사 의식이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알고 있었던 입다. 하나님이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입다. 그 여호와 하나님이 전쟁에서 직접 싸우시는 분이시며 이스라엘을 승리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입다는 한 지파의 머리(삿 10:18)에서 이제 사사가 되었습니다(삿 11:29). ❖ 입다의 말실수? 일장 연설 후에, 하나님의 영이 입다에게 임했습니다. 한 지파의 머리에서 이제는 사사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영이 임하고 암몬과 전쟁을 하러 나갈 때, 입다가 이렇게 서원합니다. “하나님이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신다면, 내가 암몬 자손을 이기고 무사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먼저 나를 맞으러 나오는 그 사람은 주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내가 번제물로 그를 드리겠습니다.”(삿 11:30-31)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람을 제물로 받으시는 분이실까요? 레위기에 보면, 제사의 법들이 나오고, 어떤 제물을 하나님께 드려야하는지에 대해서 세부적으로 규정을 해 놓았는데, 소, 양, 염소, 새, 곡식과 같은 제물은 나오지만, 사람은 없습니다. 입다의 이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제물로 받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시면 오해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정말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이집트를 비롯한 고대 서아시아 지역에서 동물로 대속하여 드리는 제사 이전에 사람을 제물로 삼아서 제사를 드렸던 흔적들이 있고, 성경에서도 이스라엘과 모압의 전쟁에서 모압 왕이 궁지에 몰렸을 때, 성벽에서 자기를 대신하여 왕이 될 장자를 죽여서 번제로 드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왕하 3:26-27). 그러나 이스라엘 공동체의 역사에서 사람을 제물로 드렸던 예가 있나요? 이스라엘 사람들도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고대 근동지역의 제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으로 드리는 제사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또한 고대 사회의 심상을 가지고 있는 고대의 사람들 이니까요. 여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예가 있습니다.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던 아브라함의 이야기 입니다(창 2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모리아 땅으로 데리고 가서 일러주는 산에서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제사로 드리는 것에 대해서 어떤 의심도 없었습니다. 늦은 나이에 허락하신 아들을 죽여야한다는 슬픔은 있을 지언정, 아브라함의 마음에 “왜 사람을 번제로 드리라고 그러시는 거지?”라는 질문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에서 살던 아브라함, 그리고 가나안의 문화에 익숙해진 아브라함에게 사람을 제사로 드리는 것이 놀랄 만한 일이기는 했어도, 남들이 하지 않는 완전 이상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만 확인하시고 이삭을 죽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산의 수풀 속에서 걸려 있던 숫 양 한마리를 보게 하시고, 이삭을 대신해서 그 숫양을 제물로 드리게 하였습니다. 창세기의 이 사건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이집트 및 고대 서아시아 지역의 제의와 여호와 하나님의 제의의 가장 큰 차이를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지적합니다. 이집트와 고대 서아시아 지역에서는 사람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비록 지리적으로는 그 안에 속해 있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제의의 정체성입니다. 아브라함도 그 문명과 문화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사람을 바치는 제사를 알고 있지만, 그 아브라함을 부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나는 그들과 다르다. 나는 우상들이 요구하는 사람을 바쳐 죽이는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던 이야기의 중심 메세지 중의 하나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법은 사람을 제물로 받지 않으십니다.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초태생은 다 하나님의 것이지요. 동물이든 사람이든 처음 태어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을 히브리어로 ‘라아도나이’ לַיהוָֹה 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말을 우리 말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돌리다’라고 번역을 해놓았습니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처음 태어난 것은 모두 ‘하나님께로 돌려야’합니다. 동물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서 ‘돌립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럴 수 없겠지요. 그래서 대속할 수 있게 했습니다(출 12:12-16). 출애굽기에서는 맏아들을 어떻게 대속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지만, 문맥상 어린 양과 같은 동물이나, 또는 돈으로하는 속전(레 27:1-25)을 하였을 겁니다. 입다의 서원을 기록하고 있는 히브리어 성경을 직역하면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אִם־נָת֥וֹן תִּתֵּ֛ן אֶת־בְּנֵ֥י עַמּ֖וֹן בְּיָדִֽי׃ וְהָיָ֣ה הַיּוֹצֵ֗א אֲשֶׁ֨ר יֵצֵ֜א מִדַּלְתֵ֤י בֵיתִי֙ לִקְרָאתִ֔י בְּשׁוּבִ֥י בְשָׁל֖וֹם מִבְּנֵ֣י עַמּ֑וֹן וְהָיָה֙ לַֽיהוָ֔ה וְהַעֲלִיתִ֖הוּ עוֹלָֽה׃ פ “만약 암몬 자손들을 내 손에 주신다면, 내가 암몬 자손들로부터 평안히 돌아올 때, 내 집의 문에서 나와서 나와 만나는 그를(그것을)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거나, 번제로 드리겠습니다.” 히브리어 접속사 ‘베’ וְ는 ‘그리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매우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자주 ‘그러나’, ‘또는’이라고 번역을 합니다. 입다의 서원은 만약 입다가 전쟁에서 이기고 평안 돌아올 때, 자기 집의 문에서 나와서 그와 만나는 것이 동물이라면 그것을 번제로 드리겠고, 사람이라면 그를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하나님에게 속하게’하겠다는지는 이 서원에서 입다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그 사람을 ‘하나님에게 속한 자’, ‘하나님의 것’으로 하겠다는 것이 입다의 서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한 입다가 하나님의 전쟁을 나가면서,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는 이방의 신들에게나 드리는 사람을 태워서 드리는 제사를 하겠다고 서원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겠지요? ❖ 내 처녀됨을 애곡하겠나이다 입다가 암몬 사람들을 크게 무찌르고 위풍당당하게 돌아왔습니다. 입다가 전장에서 서원한 약속을 가족들이 알 리가 없겠지요. 입다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집에서 무남독녀 외딸이 기뻐하며 나왔습니다. 소고를 잡고 춤을 추면서 아버지를 맞이 하였습니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사랑하는 외딸을 보는 순간 하나님과의 약속이 생각이 났습니다. 너무나 슬펐습니다. 그리고 딸에게 하나님과의 약속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딸이 더 담담하게 대답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입으로 주님께 서원하셨으니, 서원하신 말씀대로 저에게 하십시오. 이미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원수인 암몬 자손에게 복수하여 주셨습니다.”(삿 11:36) 그런데, 그 다음 말이 성경을 읽는 독자들을 헷갈리게 만듭니다. “한 가지만 저에게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두 달만 저에게 말미를 주십시오. 처녀로 죽는 이 몸, 친구들과 함께 산으로 가서 실컷 울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삿 11:37) 그러고는 이 장면을 38절에서 다시 설명해 줍니다. “딸은 친구들과 더불어 산으로 올라가서, 처녀로 죽는 것을 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