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1장
눈을들어 영광의왕을보라 [347.허락하신새땅에] [524.갈길을밝히보이시니] [453.예수더알기원하네] 주님의나라와뜻이(나의사랑,너는어여쁘고참귀하다)..나의사랑나의어여쁜자야..때로는너희앞에.. 약한나로강하게.. 너의가는길에주의축복.주발앞에무릎꿇고..주안에우린하나 내게로부터눈을들어..네마음에근심있느냐..내안에사는이그리스도니..내모습이대로- 나의영혼이잠잠히- 우리에겐소원이하나있네- 주사랑이나를숨쉬게해- 시139편(나보다나를잘아시는주님)..세상을 구원하기위해 흘려야할 피가 필요하시다면..오하나님받으소서왕께드리는제사를..나의안에거하라..사랑하는나의아버지
....[[...왕이신 나의 하나님...다음세대로 하나님 경외함을 참되게 깨달아 알고 그로 인해 살도록 신앙의 전수가 그토록 중요하다!!...여호와가 영원 무궁히 유일무이한 참 왕이시나...<전심전력 다해 그분 알고 하나됨의 교통 안에 살아감으로 부종하며 따름으로써> 영존하시는 영원한 왕, 생생하게 살아계시며 친히 사랑으로 함께 하시며 이끌어 돌보며 먹이시며 교통하시는 임마누엘, 경외하올 분, 전지전능하신 창조주-대주재 유일무이한 영원하신 참 왕으로 높여 인정하지 않음 인해]]....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하나님의 갈망...오직 주님이 얻기를 원하시는 참 사람.... 이 땅에서 하나님의 거처인 유일무이한 그리스도 교회, 그분 영광의 반사-반영이자 영광을 살아내며 공급하는 그리스도의 몸이자 그분의 단체적 아내-신부, 신격이나 위격에서가 아니라 생명과 본성에서 거듭남으로써 진정한 하나님-사람 = 그리스도-사람 = 곧, 그리스도의 사람....이를 위하여 옛사람은 날마다 무시로 죽고 오직 그의 안에 내주하여 오셔서 사시는 부활 생명 능력 말씀의 영이신 날마다 매순간마다 새롭게 하시는 주 성령으로 사는, 그리스도로만 충만케 됨의 신진대사적 변화 이루며, 신격이나 위격에서가 아니라 생명과 본성에서 머리요 남편이신 그리스도로 살며 그분을 살아내며 말씀하시는 그분으로 말하며 그분과 하나로서 오직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사는 바로 그 사람 얻음에 있음을 명심할지니!!.....(사탄은 항상 위조-모조품으로 미혹-현혹할 바).....유한한 세상과 타락한 사람이 보기에 상대적인 승패, 선악, 그분을 위함으로 기쁘고 즐겁게 해드림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 결코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삶을 통해, 그 분 안에 하나 됨(발휘되는 생생한 산믿음으로 거함-교통-사랑-순종-누림) 이루며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함으로써 그분의 부탁하신 사명을 그리스도께서 친히 행하시도록 내주하시는 그분께 자신을 비워 내어드리는자로서 살아갈 때, 주님은 그분의 성령으로 기름 부으신바 바로 그분이 이 땅을 걸으시며 담당하신 선지자-제사장-왕적 직분에 합당한 섬김이로 살아감 친히 이루실 것...!!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모양을 따라 사람-우리를 창조하시고서, 우리가 생명나무가 표징하는 그분의 생명을 취하기 원하셨다. 그러기에 분명히 깨닫고 전심전력으로 추구할 바가 무엇인지를, 그 목표를 바라보아야 하리라...상대적 의미에서의 거룩함이나 영성, 즉 비교 우월-탁월-빼어남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절대적 어떠하심 그분께 꼭 그대로 꼭 들어맞는 하나님-사람, 생명나무가 표상하는 그분의 절대적 참생명을 취한, JC이름의 부활생명 성령으로 거듭난 참 믿는이의 영 안에 오셔서 내주하시며 공급하시는 바 그분의 생명과 본성으로 영원완전히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으로 변화되어가며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이르도록 하고 계심임을 진정 깨닫고 자신을 열어드림이 합당하다..
[막11:22-25...*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아들의 이름으로!!)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반드시 기억하심.. 주님의 때에!! 주님 보시기에 최선-최상으로 주심)받은 줄로 믿으라(믿어들어가서 하나됨으로 기다리고 대망함)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먼저 용서하고, 용서 구함 통해 마음 속의 모든 거리낌 제거하라--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맘을 주장하게 하고 성령을 따라 구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22 Jesus replied, “Have faith in God [constantly]. 23 I assure you and most solemnly say to you, whoever says to this mountain, ‘Be lifted up and thrown into the sea!’ and [f]does not doubt in his heart [in God’s unlimited power], but believes that what he says is going to take place, it will be done for him [in accordance with God’s will]. 24 For this reason I am telling you, whatever things you ask for in prayer [in accordance with God’s will], believe [with confident trust] that you have received them, and they will be given to you. 25 Whenever you [g]stand praying, if you have anything against anyone, forgive him [drop the issue, let it go], so that your Father who is in heaven will also forgive you your transgressions and wrongdoings [against Him and others]. 26 [h][But if you do not forgive, neither will your Father in heaven forgive your transgressions.”]]
....참소망, 티크와 = 하나님의 원하시는, 선하고 기뻐하고 온전하신 뜻 그대로 이룸 위한 참생명줄 그리스도와 하나됨 = 생명 주는 일곡/떡의 무한 공급, 생명 주는 삼겹줄 된 교회, 곧 개인적-단체적 그리스도의 몸이자 하나님 나라!!, 그리스도를 얻고 그 가운데 발견됨 이루는, 이땅의 하나님의 거처됨. ...그렇기에 참된 의미의 VISION이란!! 바로 이 궁극적 참소망을 찾아 발견하고 추구하며, 참 생명 그리스도 주 안에서 결합(연합)한 하나됨의 순종/동행함으로 주께 붙잡힌 바, 그것을 붙잡기 위해 끝까지 달려갈 바, 바로 그것이 비전(참된 통찰)이라 할 수 있다.. ....devine destiny = 한 새 사람, 그리스도의 몸, 이 땅에 두신 하나님의 거처됨. ..original design<개인을 향하신 Q의 계획..Q나라 이룸 위해 쓰실 분야/직능/역할> ::: Q을 앙망하면서 (일상 속에서 Q사랑-이웃 사랑의 일상 삶, 즉 그리스도께서 실지로 주인되어 사심 위해)성령께서 조명해 주심따라 주님 마음-생각-심정에 비춰 볼 때, 우선적으로 보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일깨우시는 바로 그것을, 철저히 이끄심따라 준비하라!!, 주님의 주인되어 이끄심따라 하나되어 행하라..
[TUQ의 하나됨=일치=히브리어..에하드(אחד)==>(내주하시는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따라)몸의 지체인 성도마다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일치 + 성도끼리 일치 =mingling, oneness] 스가랴 14장 9절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אחד)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אחד)이실 것이라” 요한복음 17장 21-23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도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완전한*온전한 연합.. ‘유일한’, ‘하나’ 등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하드’ (אחד)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숫자 1과는 다른 뜻을 담고 있습니다. ‘에하드’는 전혀 다른 것들이 완전하게 연합하여 하나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즉 에하드는 완전한 연합 혹은 완전한 하나됨을 뜻합니다. 빛과 어둠, 낮과 밤이 연합하고 하나가 되어 하루(에하드)가 됩니다.(창세기 1장 5절) 남자와 여자가 연합하여 한(에하드) 몸이 됩니다.(창세기 2장 24절) 하나님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출애굽기 13장 21절)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전혀 다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는 도구라는 점에서 동일(에하드)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의 죽음과 다시 사심은 전혀 다르지만 온전히 하나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도 헛된 것이고 십자가가 없다면 부활도 없습니다. >>삼위일체 ...아버지 안에 아들과 성령이, 아들 안에 아버지와 성령이, 성령 안에 아버지와 아들이 초월적 완전하심으로 하나됨-상호 내재 교통하심(페리코레시스+코이노니아 .. perichoresis. koinonia. ㅡmingling, oneness) 에하드의 뜻에 비추어 스가랴 14장 9절을 다시 번역하면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완전한 연합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은 완전한 하나됨이실 것이다’가 됩니다. 종말의 때에 알려질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에하드’(완전한 하나됨 혹은 완전한 연합)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과 성령이 모두 다른 인격을 가지셨지만 완전히 연합된 한 분(에하드)이십니다. 이 비밀을 이해할 수 없어서 유대인들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에하드’이심을 숫자 1로 이해했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과 존재양식을 드러내고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자요 구원자요 통치자이심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에하드)이니라’(요한복음10장30절)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마지막 기도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완전히 연합한 하나(에하드)임을 선언하고, 이 ‘에하드’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소원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에하드’라는 주님의 말씀에는 생명을 바쳐 아버지를 사랑한 아들 예수님의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생명을 바침으로 아버지와의 완전한 연합을 성취하신 그 아들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지성소는 <새예루살렘성도 그러하듯> 정방형 구조.. 언약궤는 장광고가 2.5-1.5-1.5규빗)...TUQ, 신랑 그리스도, 그 영 - 거듭난 한 새 사람인 신부 교회..아버지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그분만이 아버지께 나아가 하나됨 이루는 그 문이요 길이며, JC 영접함으로 아버지께 하나되어 들어감 이루게 됨..그리스도의 영이요 동시에 아버지의 영이신 성령님은 믿는 이마다 세상에 보냄 받은 <하나님과 화목케 함의 복음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대사>를 살도록 하심 주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이 완전한 연합, 완전한 사랑이 주님과 우리 사이에, 그리고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는 주님과의 완전한 연합을 성취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한 하나됨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 완전한 연합(에하드)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세상에 증명하기 원하십니다. >>생명을 버리는 사랑...세상을 구원하기위해 흘려야할 피가 필요하시다면.. 완전한 연합, 완전한 하나됨은 오직 생명을 버리는 사랑을 실천할 때 성취됩니다.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생명을 다해 형제를 사랑할 때, 주님과의 완전한 연합이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인들의 완전한 하나됨이 성취됩니다. 하나님이 한 분(에하드)이라는 것은 단순한 교리가 아닙니다. 에하드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에 가장 중요한 존재양식입니다. 에하드는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존재양식입니다. 에하드는 독생자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기 원하시는 아버지의 사랑, 자신의 생명을 바쳐 아버지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신 그 아들 예수의 무한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에하드(완전한 연합)은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생명을 다해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이 참임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 야하드, 에하드 ‘야하드’는 ‘함께’라는 뜻이고 이 말과 어근이 같은 ‘에하드’는 ‘하나’라는 뜻, ..- 야하드. 주로 부사로 쓰이는데 ‘함께’, ‘모두’, ‘동시에’ 등을 의미한다.... ==함께, 모두 야하드는 주로 부사로 쓰이는 말로서, ‘함께’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므로 모든 피조물이 함께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시편은 “강들은 손뼉 치고 산들도 야하드(함께) 환호하여라”(시98:8)고 노래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만민에게 보편적으로 내린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은 “천한 사람도 귀한 사람도 부유한 자도 가난한 자도 야하드(다 함께) 들어라”(시49:3)고 노래한다. 야하드는 긍정적 맥락에만 쓰이는 말이 아니다. 곤경과 비탄에 빠진 사람은 “저를 미워하는 자들이 야햐드(다 함께) 저를 거슬러 수군대며 저에게 해로운 일을 꾸밉니다”(시41:8)고 주님께 호소했다. 함께하는 것은 모두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하드는 ‘모두’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자면 “진정 사람이란 숨결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야하드(모두) 저울판 위에 올려놓아도 숨결보다 가볍다”(시62:10). 이사야 예언자는 유명한 포도밭 노래에서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있으면 그것을 쳐 없애려고 달려들어 야하드(모조리) 불태워 버린다”(사27:4)는 주님의 경고를 전한다. ==나란히, 똑같이, 더불어 야하드에서 파생된 말로 야흐다우가 있다. 우리말로 하면 ‘서로 함께’ 정도로 직역할 수 있는 말인데, 다양한 의미로 자주 쓰이는 말이다. 군사적 리더십에 뛰어난 다윗은 모든 군인들에게 정의롭게 분배해야 한다는 의미로 야흐다우라는 말을 썼다. 그는 “싸우러 나갔던 사람의 몫이나 뒤에 남아 물건을 지킨 사람의 몫이나 다 야흐다우해야(똑같아야) 하오”(삼상30:24)라고 말했다. - 야흐다우. 야하드에서 파생한 말로 ‘야흐다우’에 가깝게 발음하며, ‘서로 함께’ 정도로 직역할 수 있다. 보라색 윗첨자 e는 거의 발음되지 않는다. 달레트(d) 안의 하늘색 점은 일부 자음(bgdkpt)으로 음절이 시작한다는 표시이므로(약한 다게쉬), d를 겹쳐 쓰지 않는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아브라함의 일가는 주님의 은총으로 재산이 많이 불어났다. “그래서 그 땅은 그들이 야흐다우(함께) 살기에는 너무 좁았다”(창13:6). 결국 그는 조카 롯과 땅을 나누었다. 주님의 사랑을 담뿍 받은 아브라함의 가족이 땅을 나눈 것은 남북 분단과 무척 대조된다. (남북 분단과정은 가난과 고난을 동반하지 않았는가.)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뛰노는 모티프로 유명한 ‘메시아와 평화의 왕국’ 노래(사11장)는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묵상하기 좋은 본문이다. 사실 이 노래에서 야흐다우는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야흐다우(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6절).” 그리고 “암소와 곰이 야흐다우(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7절). 하나님 나라는 모든 벽을 넘어 진정한 화해를 이루는 상태다. 그 나라에서는 자연계의 천적들마저 더불어 나란히 평화롭게 산다. 분단으로 고통받는 우리에게 희망의 말씀이 아닐 수 없다. ==하나, 첫째, 한마음 - 에하드. ‘하나’ 또는 ‘첫째’를 뜻하는 말이다. 구약성경에서 신학적으로 의미 있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야하드과 어근이 같은 에하드는 ‘하나’라는 숫자를 의미한다. 참되게 믿는 거듭난이로서 우리에게 에하드의 의미는 매우 크다. 이스라엘의 주님은 한 분이시니, 일찍이 모세는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나님은 에하드이신(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6:4)고 외쳤다. 에하드에는 ‘첫째’라는 뜻도 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에하드 날(첫날)이 지났다”(창1:5). 에하드와 야하드를 묵상하는 가운데 다윗의 일화가 인상 깊게 마음에 남는다. 사울이 죽고 다윗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대상11장), 여러 지파가 다윗에게 와서 충성을 맹세했다. 그 전까지 사울파와 다윗파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지만, 다윗은 모두를 아우르려고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이 좋은 마음으로 나를 도우러 왔다면, 나도 여러분과 야하드의 마음이(한마음이) 되겠습니다”(대상12:18). 서로 좋은 마음으로 돕다 보면 언젠가 에하드한 민족이 되지 않을까. 극단적 분단을 종식하고, 남북이 더불어 나란히 평화롭게 살게 해 달라고 한 분이신 주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 헨 (헬라어..일치/하나됨)(요한복음17:20-26).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20절). 예수님은 자신의 고별기도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밝히신다. 고별기도는 지금 현재 직접 고별기도를 듣고 있는 제자들 뿐 아니라, ‘미래의 제자들’을 향한 기도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제자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을 직접 만나 교제하며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어 제자가 된 사람들(보통 사도라 부른다)이 있고, 둘째,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예수는 그리스도다!)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된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후자에 해당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첫번째 부류의 사람들이나 두번째 부류의 사람들이나 동일하게 생각하신다. 이것은 제자됨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기도이자 말씀이다.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이라는 구절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제자의 말을 통해 제자를 삼는 것’이 기독교 전도의 방식이다. 나는 누구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나는 제자인가? 나는 제자로서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고, 나의 말을 통하여 누군가를 제자삼고 있는가?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제자됨에 대해서 진지하게 질문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말 한 마디, 그리고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깨닫게 된다. 주님은 ‘나(우리)’를 제자 삼으시고, 주님은 ‘나(우리)’를 통하여 또다른 제자를 탄생케 하신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기독교의 선교, 하나님 나라의 전파는 바로 ‘나(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어지는 기도는 제자들의 하나 됨에 대한 기도이다. 여기서 제자들이란 처음 제자들과 그 제자들에 의해서 제자될 이들을 말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시점에서, 현재의 제자들과 미래의 제자들의 하나 됨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하나 됨은 동시대의 제자들의 하나 됨 또한 말하는 것이다. 동시대의 제자들의 하나 됨이 없으면, 다음 세대의 제자들과의 하나 됨도 묘연해진다. 요한복음은 ‘헨’이라는 헬라어를 써서, 예수님의 ‘하나됨(일치)’의 기도를 펼쳐 보인다. 유대인 공동체인 에센 파의 쿰란 문헌에 보면 자신들의 공동체를 ‘야하드’라는 히브리어를 단어를 써서 표현한다. 여기서 히브리어 ‘야하드’는 헬라어의 ‘헨’이다. 우리 나라 말로는 ‘일치/하나됨’을 뜻한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공동체는 자신들 자체를 ‘헨’, 즉 ‘일치/하나됨’의 공동체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교회(Church)’라는 말에는 근본적으로 ‘일치/하나됨’의 뜻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21절에서 23절까지 이어지는 제자들의 ‘헨(일치/하나됨)’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는 3개의 기도 내용으로 구성된다. 예수님은 1) 제자들과 다음 세대 제자들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고, 2) 그들이 아버지와 아들 안에 거하도록 기도하며, 3)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 받은 분임을 세상이 믿도록 기도하신다. 즉, 1)과 2)를 통해 3)이 이루어지는 구조의 기도이다. 제자들이 하나되어 하나님 안에 거할 때,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논리이다. 우리는 이 복음의 논리를 반드시 숙지해야 한다. ‘헨(일치/하나됨)’이 왜 중요한가? 왜 우리는 ‘하나됨’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하는가? 우리가 일치할 때, 우리가 하나 될 때, 복음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복음이란 ‘예수가 그리스도다!’, 즉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다!’는 메시지의 전파이다. 이것이 우리의 선포(말씀)를 통하여, 그리고 우리의 ‘헨(일치/하나됨’을 통하여 세상에 전파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왜 ‘예수는 그리스도다’, ‘예수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다’라는 선포를 믿지 않을까? 왜 사람들은 우리처럼 제자가 되지 않을까? 물론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작용하겠지만, 무엇보다, 오늘 말씀에 근거해서 보면, 우리가 제자로서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 동시에, 우리가 제자로서 일치, 하나됨을 이루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독교회사를 공부해보면, 교회의 역사는 ‘분열의 역사’이기도 하다. 교회는 세포 활동이 왕성한 젊은이처럼, 엄청난 분열을 해왔고, 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면, 우리는 계속하여 최선을 다해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교단과 교단 간의 일치, 교회와 교회 간의 일치, 그리고 무엇보다, 한 교회 안에 있는 교회 구성원들(제자들) 간의 일치를 위해서 노력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헨(일치/하나됨)’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보통 우리는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 의견이 좀 다르더라도 상호 존중하고 인정하는 모습, 아니면, 함께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 또는 어떤 통일 기구를 만드는 것 정도를 생각한다. 그러한 것도 일치/하나됨을 위한 방안일 수 있으나, 본문에서 말하는 일치/하나됨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매우 독특한 교리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다. 우리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우리의 이성을 무력화시키는 교리가 아니다. 이것은 신비이자, 우리 교회(제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몸소 보여주시는 매우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모델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신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21절).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은 ‘상호내주/내재(페리코레시스)’라고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상태의 생명 교통을 가리켜 ‘교제(코이노니아)’라고 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교제/교통한다는 것,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완전-온전-순전함의 개방성 안에서 서로를 알고-사랑하고, 서로 인정/기뻐함 안에서 전적으로 내어줌으로 순종한다는 뜻이요, 그것은 오로지 성령께서 이루시는 바이다. '교제’란 먼저 주 안에서 거듭난 바 주와 하나됨 통해 그 안에서 머물며 그 전제하에 성령을 통해 새롭게 함 받은 상호간에 사랑과 섬김으로 자기를 내어줌의 관계를 끝까지 영원히 지속하며 더욱 더 새롭게 ‘알아가는 것’을 말한다.... 알지 못하면, 우리는 사랑하지 못한다. 사랑하지 못하면 인정하지 못한다.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서로에게 얼마나 무관심한가? 서로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얼마나 교제가 없는가? 자기 자신을 내보이려 하지 않고, 다른 이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서로를 잘 모르니,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지 못한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난 그분의 참제자라면, 무엇이 두려워 성령 안에서 교제 나누는 것을 피하는가? 참제자는 교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교제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우리가 제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요즘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러한 두려움이 팽배하다. 서로 알아가려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가 너무도 부족하다. 두려움 때문이다. 감출 것이 많아서 그런 것인가? 사도행전에 보면, 제자들의 아름다운 교제가 나온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3-47). 제자들은 아무 것도 감추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들의 재산까지도 감추지 않았다. 모두 내어 놓고, 나누었다. 서로를 깊이 아니까, 사랑하게 되고, 서로를 인정하게 되니, 자기의 것(개인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삶의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 하나님 안에서 공적인 삶을 살았다. 이렇게 일치와 하나됨을 이루었더니, 오늘의 말씀처럼, 사람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그를 믿는 사람들이 날마다 늘어났다.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요즘, 기독교는 위기에 처해있다. 많은 이들이 ‘교회가 죽어간다’고 안타까워 한다. 왜 현대의 교회는 죽어갈까? 한 마디로 ‘헨(일치/하나됨)’이 없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몸소 보여주신 ‘교제’가 우리 안에 없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만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려져 혼이 떠나니 …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행 5:1-5). 이후에, 아나니아의 죽음과 같은 죽음이 아내 삽비라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감춘다’는 것은 그 안에 교제가 없다는 뜻이다. 감춘다는 것은 일치와 하나됨을 이루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거기에 ‘죽음’ 밖에 무엇이 더 있겠는가. 감춘다는 것, 일치와 하나됨이 없다는 것, 교제가 없다는 것은 생명이 없다는 뜻이다. 죽음 밖에 없다는 뜻이다. 서로를 알아가지 않으니, 사랑이 없고, 사랑이 없으니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그렇다 보니, 거기에는 생명이 없고 죽음만 남게 된다. 우리는 제자인가? 어떠한 제자인가? 말씀 선포와 하나됨을 통해 생명을 이 세상에 가져오는 제자인가? 아니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교제를 벗어난 ‘감춤’을 통해 생명을 잃어버리고 죽음을 가져오는 세속적인 사람인가?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 어머니의 마음으로 제자들을 위해 간구하신 ‘헨(일치/하나됨)’의 기도를 마음 깊이 새겨듣는 역사가 일어나길 소망한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계시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슨 수로 우리가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세상이 알도록 전하겠는가?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우리가 일치할 때, 우리가 하나 될 때,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가 서로를 알아갈 때, 서로 사랑할 때, 서로 인정할 때,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 되신 것’처럼 우리가 그러한 ‘교제’ 안에 있을 때, 복음이 전해질 것이다. 우리는 제자인가? 그렇다면 무엇이 두려워서 서로를 감추는가? 그럴 필요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서로 더 깊이 알아가자. 서로 더 깊이 사랑하자. 서로 더 깊이 인정하자. 그것 자체가 ‘교회'이다. 그런 교회를 세워 나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된 일이요, 우리에게 또한 영광이다. -------- ===페리코레시스===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앙 고백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삼위일체는 고백일 뿐 삶의 구조나 방식으로 작용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현실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은 자유주의가 일어나면서 역사 속에 묻힐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교회와 세상에 자기 계시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역사 속 경륜 안에서 삼위일체의 교리는 보존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학적 발전을 이루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뭔가 조심스럽고 이해를 잘못하면 이단이 될 것 같거나 혹은 아예 삼위일체에 대해서 무관심한 신앙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을 본다면 삼위일체를 뵙는다.”라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진술은 삼위일체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삶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성부를 사랑하는 분, 성자를 사랑받는 분, 성령을 사랑 그 자체라고 비유하며 이런 비유는 인간에게로 확대해서 인간의 영혼이 마음, 지식, 사랑 셋이면서도 한 영혼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물론 인간의 영혼에 대한 이해와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를 비유로 놓으면 양태론에 빠질 위험이 존재하며 현대 신학자들은 이렇게 이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관계로 이해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은 ‘관계’ 개념 없이는 삼위일체를 설명할 수 없게 만들었다. 관계란 사랑의 관계를 맺는 인격 간의 관계를 의미하며, 이 인격의 특징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삼위일체 간의 사랑의 관계를 우리 삶에 실천적으로 가져올 수 있다. 인격이 지닌 두 가지 특징을 이해함으로써 사랑의 실천으로서의 삼위일체적인 삶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는 삼위일체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페리코레시스며 둘째는 신성과 인성 간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그리스도의 위격적 연합 교리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이 사용한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는 둘레를 의미하는 페리(περι)와 주위를 맴돌며 춤을 춘다는 뜻을 지닌 코레시스(χώρησις)의 합성어로 상호 공재, 혹은 상호 침투로 번역된다. 직역을 하자면 “상호 간의 원형의 춤”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플라톤은 우주와 인간의 원형을 원구의 형태로 이해했다. 특히 티마이오스(Τίμαιος)에서 별들의 운행을 춤(choreia)으로 이해했고 완전한 세계에 대한 철학적 함축을 담고 있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체를 완전하며 불변하는 구체로 이해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개념을 차용했을 이 인격의 상호 침투 개념은 인간의 인격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아이가 무서운 꿈을 꾸고 엄마 품으로 올 때, 아이는 자기 내면의 무서움을 엄마에게 담아둔다. 엄마는 아이의 무서움을 담아주며 엄마와 아이의 인격은 서로를 모사하며 자기 동질성을 확보한다. 잠언에도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잠 27:19)고 말한다. 인격은 서로에게 비치는 거울 같으며 상대의 감정의 일부를 담아주기도 하며 건네기도 한다. 죄인인 인간 세계에서는 사랑이 아니라 주로 미움과 분노를 건네지만 원래 인격은 사랑을 건네며 받아두는 관계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위격적 연합 교리는 성자이신 그리스도의 인격이 사람의 몸과 영혼을 입으시므로 참 사람이 되시는 교리를 일컫는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과 영혼을 입으신 동안에도 여전히 그의 신성과 분리되지 않으신 채로 인성을 입으신다. 참 사람이자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으로는 피곤하셔서 뱃고물을 베고 주무셔야 했지만 동시에 신성으로는 풍랑이 이는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창조주의 권능을 보이신다. 이 둘이 모두 성자의 인격을 통해서 나타나며 인격은 이처럼 인간과 하나님의 본성이 밖으로 드러나는 통로이자 이성적이고 의지적인 주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삼위일체론은 물론 기독론에서도 인격은 통로의 개념을 지니고 있으며 그 통로는 우리 안의 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통로이기도 하며 우리 밖의 것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통로이기도 하다.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고 할 때, 이는 성령께서 우리 몸에 거하신다는 의미기도 하지만 우리 몸과 영혼의 본성이 밖으로 주체적으로 드러나는 인격과의 동거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사랑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동등한 관계여야 한다. 삼위께서 동등하시며 남녀가 동등하고 부부가 동등하며 고용주와 고용인이 동등하다. 그러나 동등한 관계에도 질서가 존재한다. 성부는 성자를 무한-신실하심으로 교통하며 사랑하시고 성자는 성부께 ((전적인 무한한 신뢰와 사랑으로)) 교통하며 순종하신다. 바로 그렇게!! 남편과 아내가 동등하나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한다. 고용주와 고용인이 동등하나 고용주는 인간적으로 사람답게 대우해야 하며 고용인은 고용 계약서의 법적 요구들에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돕는 자로서 서로의 삶의 일부가 된다. 인격은 본성으로부터 나오지만, 대상이 되는 인격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어린 아이를 부모의 인격적 반응을 통해 양육하지 않고 비디오나 TV에만 장기간 노출시키는 행위는 유사 자폐를 부른다는 연구도 있다. 단테는 신곡에서 천국과 지옥을 이렇게 비유했다. 각자의 숟가락이 있는데, 그 길이가 자기 입에 넣기는 불가하고 남에게 먹여줄 수만 있어서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곳은 천국이요 자기 필요를 채우는 곳은 지옥이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삶이란 서로의 짐을 담아내기도 하며 때로 내 어려움을 상대에게 담아주기를 요청하기도 하는 관계적 삶이다. 이것은 요청과 자발성에 의해서 이뤄져야 한다. 동등한 관계란 상대를 임의로 재단하지 않고 내 필요에 대해서 요청하고 상대의 필요에 대해서 물어보고 확인하며 요청이나 질문을 받았을 때, 자발성에 의해서 반응하거나 거절할 수 있는 관계여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책임을 다하고 서로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자발적으로 사랑하며, 인격을 통해서 상대의 일부를 내 존재 안의 일부분으로 담아두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게 공동체로서 우리는 산다. --- 여호와께 성결(슥 14:16-21) [슥14:16-21..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17. 땅에 있는 족속들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18.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비 내림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이방 나라들의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19. 애굽 사람이나 이방 나라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가 받을 벌이 그러하니라 20.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21.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그 날에는 말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20절).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고기를 삶으리라,상>(21절). ...구약과 신약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성결>에 대한 가르침. ..구약에서는 율법과 규례를 통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획했고, 신약에서는 마음의 성결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강조했다. ....이미 지금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 사이에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동시에 경험하며 때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다스리심을 경험하며 느끼지만 동시에 죄와 악한 세력들의 음모와 공격도 경험하며 살아가는 중에,. 하나님으로 인해 큰 기쁨과 평안도 맛보지만 동시에 현실과 이 세상이 주는 절망과 좌절도 당하며 살기에 한 순간도 영적인 긴장을 놓치지 않아야 하는 바,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되듯 나의 모든 것과 삶 전부가 거룩하기를...거룩한 것에 거룩하지 못한 것이 들어와 전부를 부패하게 만드는 일이 없어야 하기에 그렇게 이끄실 주를, 주만 바라보고 순종-사랑-감사로 동행하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 하리라>(21절,하)....하기에, 하나됨 안에서 사귀며 친밀한 주께 여쭈어 보고 주로부터 오지 않은 것마다, 꼬드기는 영마다 JC이름으로 대적하고 이미 십자가에서 "진멸=헤렘!!"되었음을 선포하기를 주저하지 말라, 십자가로 떠나라고 예수 이름으로 말하라..성결이란 [지금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 땅에서 천국의 거룩함을 미리 맛보는 [거듭난!!] 성도들만의 고유한 특권이다...그것을 명심하고 주장하라!!. 거듭난 그대 자신을 보혈로 새롭게 하고 새로이 주께 맡겨드리라...세상 사람들, 이방 족속들은 절대 성결할 수 없으나, 그대는 오직 긍휼-자비-일절 오래참음-너그러움/온유/친절/거룩-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선을 선택/추구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며 원수 갚음을 주께 맡겨드리며,,,거룩하신 [성령께서 이루고 계신 바, TUQ과의 하나됨/일치, 그 믿음 발휘하며 친밀한 교통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거룩을 추구하여 거룩하신 분으로 적셔짐 안에서 나타나게 하시는 "빛과 소금됨"의 생활/일터 선교사로 사는 삶이 자연스러워지기를 주께서 그토록 원하신다....성결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저절로 닮아 가게 하고 계심을 신뢰하라.... 여호와의 전에 이방사람들이 다시 있지 않듯이 [지금 오늘] , 구주와 하나됨 인해 이루시는 삶속에 임한 천국을 온전히 누리며 천국복음을 전파하도록 하신 바 ,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감이 중요함.. 그 나라는 거룩한 나라 성결한 세계이기 때문. -----Q의 말씀(정언명령) 그분 자신인 다바르, 이것을 붙들어 부종하여 생명 삼아(다바크, 믿어들어가 결합한 하나됨) 얻는 바 순결-순전-온전-완전-정직-진실로 (그분이 공급하시는 사랑과 믿음으로) 순종함의 하나됨(야하드, 에하드)에 의해서, 비로소 인생 광야(미드바르) 걷기는 지성소(드비르) 살기라는 것을 참되게 배우게 됨...말씀 Q, 그분과 하나됨의 진가 알기를(복음 받고 참되게 믿음) 거절하고 돌아섬, 자살 자초하여 떠남은 그 자체가 데베르(파멸케 하는 악질, 역병, 전염병, 재앙, 간수장)을 자초함인 것... ---------- [개역개정]제4장...[엡4:1-32...((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옛 사람과 새 사람))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하나님을 본받는 생활))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오히려 우리는 다음의 문제를 묻고자 한다: <인간적인>,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을 말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삼위일체론적으로 생각되어야 하는가? 반대로 십자가 사건이 간과될 때,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삼위일체론적으로 생각될 수 있는가?1 그러나 여기서 계속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삼위일체론적 사고가 필연적으로 성립되는 구체적 장소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고자 한다. [……] 삼위일체론의 장소는 <사고의 사고Denken des Denkens>가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이다. “직관 없는 개념은 빈 것이다.”(Kant) 삼위일체론적 하나님 개념의 직관은 예수의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인식의 형식적 원리는 삼위일체론이다.2 몰트만의 신학에서 십자가의 신학과 삼위일체론은 서로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십자가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수난이 세상의 모든 버림받은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삼위일체론은 이러한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의 내적 관계 안으로 끌어들여 그리스도의 수난 속에서 하나님이 세상과 함께 고통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즉, 십자가의 신학은 삼위일체론을 위한 근거이고, 삼위일체론은 십자가 신학을 위한 배경이다. “삼위일체론적 하나님 개념의 직관은 예수의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인식의 형식적 원리는 삼위일체론이다.” 따라서 두 논의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는 십자가의 신학을 통해 삼위일체론에 이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론을 통해 십자가의 신학을 더욱 풍성하게 묵상할 수 있다. “십자가의 신학이 삼위일체론이며, 삼위일체론은 십자가의 신학이 되어야 한다는 이 명제에 대하여 우리는 이제 음미하여 보고자 한다.”3 그리스도가 자기의 아버지라 불렀고, <가까이 오신 자>라고 버림받은 인간들에게 선포한 하나님, 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에 어떤 일이 십자가 위에서 일어났던가? 바울과 마가에 의하면 예수 자신이 바로 이 하나님, 곧 그의 아버지에 의하여 버림받았으며 버림받은 상태의 절규와 함께 죽었다.4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내어줌(아버지-아드님-성령이 상호 참여함 통해 영원유일무이한 -형언못할 버려짐/단절/고통 경험으로써 함께 이루신)”의 사건으로 이해한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셨다. 그는 모든 하나님 없는 자들을 위해, 곧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을 위해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께 버림받은 상태 속으로 보내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모든 버림받은 자들을 대변하여 하나님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가복음 15:34)라고 항의하였다. 그의 죽음은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같이 고상하지도, 유대 저항군 지도자들의 죽음 같이 영웅적이지도, 스토아학파 현자들의 죽음 같이 태연하지도, 초대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의 죽음 같은 경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가장 이른 시기의 그리스도교 전승들은 예수가 “매우 놀라고 괴로워하면서”(마가복음 14:33), “근심에 쌓여 죽을 지경인”(마가복음 14:34) 상태에서, “크게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면서”(히브리서 5:7), 발음이 불명료한 “큰 소리를 지르시고서”(마가복음 15:37) 죽었다고 증언한다.5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조차 예수의 죽음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십자가 사건을 어떻게든 미화하고자 시도하였을 정도였다(누가복음 23:45; 요한복음 19:30). 그러나 신약성서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의 형태로 죽임당한 예수에게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한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의롭다고 인정하셨다는 사실을 계시하기 때문이다. 1세기 유대교의 맥락에서 ‘죽은 자의 부활’이란 최후의 날에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벌어질 완전한 정의의 실현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역설적이게도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로서 죽임당한 예수를 의롭다고 선포하셨다. 그분은 온 세상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바로 그 십자가의 상태 속에 자신의 의를 드러내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는 예수와 함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항의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의, 곧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의이다. 그분의 의는 불의한 자들과 권리 없는 자들을 심판하는 의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자들을 의롭게 만드는 역설적인 의로서 ‘의롭게 하는 의(justitia justificans)’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버림받은 인간을 위한 구원과 해방이 어떻게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채 십자가에 달린 그분 안에 있을 수 있는가? 그러나 바울은 예수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을 그의 삶의 역사적 컨텍스트에서가 아니라 그의 부활의 종말론적 컨텍스트에서 인식하고 선포한다. 이리하여 <내어주셨다>의 의미를 철저하게 수정한다. 로마서 8장 31절과 32절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이제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 철저하게 벗어날 길 없이 그의 아버지 하나님과 아버지의 버림을 받은 예수 안에서 바울은 하나님 없고, 하나님의 버림받은 인간을 위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내어주시는 것을 인식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심으로써> 모든 하나님 없는 자들을 그는 아낀다.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아들을 버리고 그들을 위하여 내어주셨기 때문에, 하나님 없는 자들인 그들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버림받은 상태에로 아들을 내어주는 여기에 하나님 없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의롭다 인정하여 주며, 원수들을 용납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6 십자가의 신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하나님이 ‘하나님 없는 자들’과 연대하시는 분이라는 역설적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 없는 자들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즉, 자신의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의 행위는 하나님 없는 자들에게 구원과 해방을 가져다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더 이상 하나님이 도달할 수 없다고 여겨진 세상의 가장 버림받은 곳조차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절규를 들으시는 분은 바로 그 예수가 대표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하나님 없는 자들의 절규를 들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하나님 없는 자들의 편에 서 계시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이제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때 하나님은 하나님 없는 자들의 편에 서시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신다.” 그분은 인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신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열정(pathos)’은 자신의 사랑에서 기인하는 모든 고통을 감내하기를 꺼리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유대-그리스도교 신앙의 하나님의 가장 특징적인 면모가 있다.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의 최고실체 혹은 절대존재로서의 신이 흔히 ‘고통’과 같은 인간적 감정을 경험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된 반면, 유대-그리스도교 신앙의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분으로 증언된다. 즉, 인간이 고통받는 장소에는 언제나 하나님도 거기에 함께 계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고통받는 인간과 함께하기 위해 스스로 고통을 짊어진다. 그분의 사랑은 바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랑, 곧 자기 자신을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 앞에 개방시킬 수 있는 사랑이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시며, 그리하여 내어주시는 아버지가 되신다. 아들은 이 죽음에로 버림을 당하며, 그리하여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의 주가 되신다. 여기서 바울이 하나님 <자신의 아들>에 대하여 강조할 때 사용하는, 아끼지 않으신다는 말은 바로 하나님 자신에게도 해당되고 있다. 즉, 아들을 버림으로써 아버지께서는 그 자신을 버린다. 아들을 내어주심으로써 아버지께서는 그 자신을 내어주신다. 그러나 동일한 방법으로 내어주시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버림받은 상태 가운데서 죽음Sterben을 경험하지만, 죽음Tod 자체를 경험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고통은 생명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죽음을 <고통당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을 버리고 내어주시는 하나님 자신께서는 사랑의 무한한 아픔 속에서 아들의 죽음을 고통당하신다.7 십자가 위에서 예수와 그의 하나님과 아버지 사이에 일어난 것을 파악하기 위하여 우리는 삼위일체론적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아들은 죽음을 고통당하며,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고통당하신다. 여기서 아버지가 당하시는 아픔은 아들의 죽음만큼 큰 것이다. 아들이 당하는 아버지의 상실Vaterlosigkeit은 아버지께서 당하시는 아들의 상실Sohnlosgkeit과 상응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신다면, 아들의 죽음에서 그는 그의 아버지되심의 죽음Tod Seines Vaterseins을 고통당하시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삼위일체론은 하나의 유일신론적 배경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8 삼위일체론은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이 증언한 ‘하나님의 열정’과 ‘하나님의 고통’을 통해 이해된 십자가의 신학에 근거하고 있다. 즉, (1)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은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에 사랑으로 동참하는 분이라고 증언한다. (2)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을 향한 그분의 열정에서 기인하는 고통을 감내해낸다. (3)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세상의 모든 버림받은 자를 대표하여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로서 고통당하였다. (4)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부활시키어 그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의 편에 사랑으로 함께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셨다. 따라서 (5) 그분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고통과 무관한 분이실 수 없다. 예수는 단순히 가치중립적인 존재로서 죽임당한 것이 아니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하신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 자신에게 있어서도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 감내해야만 하는 커다란 고통의 사건이었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문제는 십자가에서 단순히 인간 예수가 고통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 역시 고통받으셨다는 사실이다. 십자가의 신학이 증언하는 대로 예수의 죽음이 하나님 없는 자들의 고통에 참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겪으신 고통의 사건일 경우 ‘예수의 고통’과 ‘하나님의 고통’은 서로 긴밀한 내적 관계를 맺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의 고통과 하나님의 고통 사이의 관계가 단순히 ‘성부수난론적으로(theopaschitisch)’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입장은 바르트와 라너가 보여준 것처럼 자칫 ‘원초적 결단 가운데서 자신으로부터 나온 하나님’과 ‘이전부터 자기 자신 안에 계시고 악에 의해 접촉되지 않은 하나님’ 사이의 이분법적 구별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즉, 성부수난론적으로 이해된 십자가의 신학은 하나님이 골고다에서야 비로소 고통을 경험하셨을 뿐 태초에는 고통과 무관하게 순수하고 완벽한 상태 속에서 존재하시고 계셨다는 오해를 낳기 쉽다.9 그러나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이미 세상 속에서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일 수밖에 없다. 십자가 사건은 단순히 하나님의 바깥쪽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안쪽에 놓여 있다. 즉,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 이전부터의 사랑에 대한 성서적 증언을 받아들일 경우 우리는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십자가 사건을, 곧 고통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자기 안에 품고 계셨다고 이야기해야 한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인간 예수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 역시 고통을 경험하셨다는 사실을 신학적으로 올바르게 지적하는 작업이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 세상의 버림받은 자들과 연대하고자 하신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셨다는 성서의 증언을 진지하게 수용하기 위해서는 그분이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 고통당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수밖에 없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고통을 감내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을 겪은 만큼이나, 하나님 자신 역시 예수를 버리는 고통을 겪으셨다고 증언해야 한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상실’을 경험한 만큼이나, 하나님 자신 역시 십자가에서 ‘아들의 상실’을 경험하셨다고 증언해야 한다. “아들은 죽음을 고통당하며,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고통당하신다. 여기서 아버지가 당하시는 아픔은 아들의 죽음만큼 큰 것이다. 아들이 당하는 아버지의 상실Vaterlosigkeit은 아버지께서 당하시는 아들의 상실Sohnlosgkeit과 상응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신다면, 아들의 죽음에서 그는 그의 아버지되심의 죽음Tod Seines Vaterseins을 고통당하시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언제나 동시적으로 성립할 수밖에 없는 관계라는 점에서 ‘아버지의 상실’과 ‘아들의 상실’은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의하면 <내어주다>의 양식은 그 주어가 되는 그리스도에게도 해당된다. “……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 이 문장에 의하면 아버지만이 하나님의 버림받은 십자가의 죽음에로 예수를 내어주신 것이 아니라, 아들도 그 자신을 내어준다. 이것은 수난사에 대한 공관복음서의 기록과 상응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예수는 의식적으로 또 자발적으로 고난의 길을 택하였으며, 결탄코 하나의 악한, 불행스러운 운명과 같은 것으로 죽음을 당하였던 것은 아니다. 신학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바울에게서 나타나는 <내어주다>의 양식이 아버지에게 해당됨은 물론, 주어로서의 아들에게도 해당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사건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의 의지의 일치성이 여기에 표현되기 때문이며, 이 사실에 대하여 겟세마네 동산의 사건이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와 그의 하나님과 또 아버지 사이의 이 깊은 의지의 일치성은 그들의 가장 깊은 분리의 점에서, 곧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고 저주를 당한 예수의 죽음에서 표현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버림받은 상태는 물론 종말론적으로 내어주었다는 사실이 십자가의 죽음에 있어서 인식된다. 그렇다면 예수와 그의 아버지 사이에서 일어난 이 사건 속에는 분리된 상태 속에서의 결속성Gemeinschaft im Getrenntsein과 결속된 상태 속에서의 분리Getrenntsein in der Gemeinschaft가 존재하는 것이다.10 즉 하나님께서는 노하시고 선택하시며 버리시는 것처럼 또한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랑 <이시다ist>. 즉 그는 사랑 안에 실존하신다. 그는 자기 실존을 이 사랑의 사건 속에서 구성핫신다. 그러므로 고대의 조직신학적 개념을 따른다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아버지와 아들의 의지의 공통성Willensgemeinschaft과 관련하여 본질의 공통성Wesensgemeinschaft, 공통의 본질Homousie에 대하여 얘기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통일성은 본질의 동일성Wesensgleichheit뿐만 아니라, 십자가 사건의 모든 철저한 차이와 비동일성을 그 자신 속에 포함하고 있다. 십자가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아들의 버림받은 상태 속에서 가장 깊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11 십자가 사건에서 하나님과 예수는 가장 철저하게 분리되는 동시에 가장 철저하게 결합된다. 이러한 역설은 둘 사이에서 일어난 관계의 단절이 사실 그 둘 사이에서 이루어진 의지의 일치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한편으로, 둘은 깊은 차이와 비동일성 속에 놓인다. 예수는 더 이상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게 되고, 하나님 역시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불렀던 자를 상실하고 만다. 남아 있는 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는 절규와 그에 대한 깊은 침묵일 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둘은 완전한 일치성 속에서 하나가 된다. 예수는 세상의 버림받은 자들을 대변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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