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449, 70, 366]
[마9:27-31] *27. 예수께서 거기에서[회당장 야이로의 집]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29.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31.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27. As Jesus went on from there, two blind men followed Him, screaming loudly, “Have mercy and compassion on us, [c]Son of David (Messiah)!” *28. When He went into the house, the blind men came up to Him, and Jesus said to them, “Do you believe [with a deep, abiding trust] that I am able to do this?” They said to Him, “Yes, Lord.” *29. Then He touched their eyes, saying, “According to your faith [your trust and confidence in My power and My ability to heal] it will be done to you.” *30. And their eyes were opened. And Jesus [d]sternly warned them: “See that no one knows this!” *31. But they went out and spread the news about Him throughout that whole distri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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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두 소경을 보게 하심(27-31).
그리스도는 생명과 마찬가지로 빛의 근원이시다.
또한 죽은 자를 일으키심에 의하여 그는 자신이 맨 처음에 "사람에게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셨던" 바로 그분임을 보여 주었으며 마찬가지로 소경을 눈뜨게 하심에 의해 그 자신이 맨 처음에 "흑암 속에 빛을 비추라"고 명령하셨던 바로 그분임을 보여 주셨다.
여기에서 살펴볼 것은,
1. 그리스도에게 대한 눈먼 사람의 끈질긴 인사.
그는 회당장의 집에서 그 자신의 거처로 가고 있었으며, 이 "소경"은 거지들이 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소리지르면서 "그를 따랐다"(27절).
매우 쉽사리 그리고 효과적으로 병을 고친 의사는 더 많은 환자를 가지게 될 것이다.
다른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안과 의사로도 명성이 높아지게 된다.
(1) 이 눈먼 소경이 그리스도에게 붙인 칭호.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허리에서 메시야가 올 것이라는 약속은 잘 알려져 있었으며, 따라서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으로 불려졌다.
이 당시에는 그가 나타나시리라는 일반적인 기대가 사실임을 알았고, 인정했으며, 가버나움 거리에서 그것을 선포하였다.
이것은 그를 거절했고 반대했던 대 제사장과 바리새인의 어리석음과 죄를 더욱 심하게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이적들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믿음은 들음에서 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육체적인 눈을 빼앗긴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지혜자와 영리한 사람에게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그러한 일들을 분별할 수 있도록 밝히 이해할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될 수 있다.
(2) 그들의 간구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이었다.
"다윗의 자손"은 "자비스러우며"(시 72:12, 13), 또한 "우리 하나님의 긍휼"(눅 1:78) 이 그에게서 비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의 필요성과 짐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의 자비"에 참여하는 것 외의 다른 공급과 지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가 우리를 치유하시든 안하시든, 그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자비의 특별한 본보기와 방법들에 관하여 우리는 안전하게 그리고 현명하게 그리스도의 지혜에 의뢰해야 한다.
그들은 각자가 따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하지 않고 다 함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구원을 위해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은 똑 같은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어울리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함께 고난받는 자는 함께 기도하는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것이 흡족하다.
(3) 이러한 요구를 하는 상황.
"그들은 그를 따라 가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스도는 맨 처음 그들에 대해 주목하시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의 신앙이 어떤가를 시험하시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언제나 첫마디에 오지 않았을 때 그들의 기도를 재촉하고 그의 치유를 보다 가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가르치려고 하시기 위함이다. 또한 비록 그 응답이 즉시 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의 기도가 무시되거나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기도의 단계와 출발에 있어서까지 그것을 기다리며 섭리를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거리에서 공개적으로 그들을 고치지 않은 것은 그가 이 치유를 은밀히 하시려고 하였기 때문이다(30절).
"그가 [그분이 머무르시는]집으로 들어가시매" 소경들은 그곳에까지 "따라 왔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그리스도의 문은 언제나 믿고 끈질긴 간구자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가 물러가기를 원하였을 때 그를 따라 집안으로 밀어닥치는 것은 무례한 행동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매우 온유하시므로 그들이 담대했다기 보다는 잘 영접하였다.
2. 그리스도께서 이 경우에 그들에게 요구한 신앙 고백.
그들이 자비를 위해 그리스도에게 나아왔을 때, 그는 그들에게 "내가 능히 이 일 할 죽을 믿느냐?"고 물으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신앙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큰 조건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긍휼"을 받으려는 자는 모름지기 그리스도의 "능력"을 굳게 믿어야 한다. 우리는 그가 우리를 위해 해 주시기를 원하는 것을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확증해야만 하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랐다. 소리지르면서 그를 따라왔다. 그러나 큰 질문은, "너희가 믿느냐?"이다. 자연은 열정을 일으킬 수 있지만 신앙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은혜뿐이다. 영적인 축복은 단지 신앙에 의해 얻어질 수 있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의 직무와 또한 그의 자비에서 그들의 신앙을 암시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의 능력을 믿는 신앙 고백을 요구하고 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는 그에게서 유익을 얻으려고 소원하는 모든 자들에 의해 그에게 합당한 그의 능력의 영광을 가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중풍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일으킨 것과 같이 이 은혜를 베풀 줄을, 눈먼 자를 눈뜨게 할 줄을 믿느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신앙의 실행에서 특별한 것, 뭔가 위급할 때 하나님의 능력과 선의(善意) 그리고 일반적인 약속에 의탁하는 것은 좋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내가 선지자로서 그것을 위해 하나님을 설득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내 자신의 능력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는 줄 믿느냐?"
이것은 그가 "다윗의 자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에 대한 그들의 믿음에 해당될 것이다. 왜냐하면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이기 때문이다(시 146:8). 그는 "보는 눈"을 만드신다(출 4:11). 욥은 "소경"에 대한 눈이었다(욥 29:15). 다시 말하면 욥은 그들에게 눈대신이었으나(보는 바를 친절히 설명해 줌으로써) 소경에게 눈을 줄 수는 없었다.
여전히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로 네가 정말 믿느냐.." 그 질문은 여전히 믿는 우리에게 해당된다. 즉 그는 하늘에서의 공로와 중재의 능력에 의해, 그의 마음에서의 성령과 은혜의 능력에 의해 또한 세상에서의 그의 섭리와 통치의 능력에 의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할 줄을 우리가 정말로 믿는가?"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 것은 그것에 대해 우리 자신을 확증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에 맡기며 그것에서 격려 받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그들은 주저함이 없이 즉각적인 대답을 하고 있다. 그들은 말하기를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잠시동안 그들로 하여금 마음을 졸이게 하였으며, 단번에 그들을 돕지는 않으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정직하게 그의 연약성이 아닌 그의 지혜의 탓으로 돌렸다. 또한 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의 능력을 신뢰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의 능력에 놓여져 있는 자비의 보물은 "주를 두려워하는 자(신뢰하는 자)"를 위하여 놓여진다(시 31:9).
3.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치유.
"그는 저희 눈을 만지셨다"(29절).
그가 이렇게 하신 것은, 그가 지체하심으로써 시험하셨던 저희들의 신앙을 시험하고 또한 "안약을 눈에 바르는" 그 말씀에 수반된 은혜의 역사에 의해 눈먼 소경을 뜨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또한 그는 이 치유를 그들의 신앙에 근거하였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그들이 치유를 원하였을 때 그는 저희들의 신앙을 물으셨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28절) 그는 그들이 치유에 대한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묻기 위하여 그들의 재산을 묻지 않았다. 또한 그들을 치유함에 의하여 신임을 얻으려고 그들의 칭찬을 구하지 않으셨다. 단지 그들의 신앙만을 물으신 것이다.
이제 그들은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였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가 믿고 있다는 것을 안다. 너희가 믿는 능력이 너희를 위해 수행될 것이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1)이것은 그들의 신앙의 진지성에 대한 그의 지식과 또한 그것에 대한 그의 수납과 시인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희들의 믿음을 아시며 그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은 참된 신자에게 큰 위로가 된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것이 약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그들이 그것을 질문하려고 준비할지라도 그것은 그에게 알려진다.
(2) 이것은 그가 그들의 신앙이 필수적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만일 너희가 믿는다면, 너희가 온 목적을 이루라(취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 예수 그리스도에게 의탁하는 자는 "그들의 믿음대로" 처리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의 "추측"이나 "신앙 고백"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들의 믿음에 따라서(믿음대로)" 처리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신자는 하나님과 더불어 어떤 은혜를 얻으리라는 확신을 전혀 가질 수 없기에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주께서 주심으로 우리가 받는 바 그 위로는 우리의 신앙이 강한지 약한지에 따라서 밀물처럼 들어오든지 나가든지 하는 것이다. 참되게 믿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위로를 결코 제한 받지 않는다. 동시에 능력이 무한하신 그리스도는 결코 제한받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게도 구애되지 말자.
4. 그리스도는 그것을 은밀히 지킬 것을 분부하심.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30절). 그가 이 분부를 하신 것은,
(1) 그가 우리로 하여금 배우게 하시려는 마음의 겸손과 낮아짐의 본보기를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우리가 선행을 할 때 스스로나 타인의 칭찬을 구해서는 안 되며, 오직 겸손히 그 일을 하게 하신 바로 그 하나님께 영광돌림, 곧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만 한다. ...좀 더말하자면 우리는 자화자찬하거나 남에게 인정받고 알려지는 것보다는 오히려 진정 쓸모 있게 되는 것을 염려하고 추구해야 한다(잠 22:6; 25:27).
따라서 그리스도는 그가 명했던 규칙을 다시 확인하셨다. "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2)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그리스도는 그것을 은밀히 행함으로써 가버나움 사람들에 대한 그의 불쾌함을 나타내었는데) 그들은 그렇게 많은 이적을 보았으면서도 그를 믿지 않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JC의 역사를 전파해야만 하는 자들에 대한 침묵은 어떤 장소나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불신앙으로 완고한 마음들에 대한 확증의 수단을 거부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합당하다. 또한 빛에 대해 눈을 감아버리는 자들에게 빛을 감추는 것도 합당하다.
(3) 그는 그 자신의 안전을 위해 그것을 신중하게 하셨다.
왜냐하면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고) 그가 전파되면 될수록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그의 인기가 백성들 가운데 더 해지는 것을 시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4) (*휘트비(Whitby) 박사는 그리스도께서 때로 그의 이적들을 감추시고 또한 후에 그의 변화에 대한 공포를 금지하신 이유에 대해 괄목할 만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제언했던 것처럼(요 6:15) 폭동과 선동에 의해 백성들에게 그의 왕국을 설립하려고 하는 시도를 일으킨 유대인들 가운데 널리 유포된 사악한 자만심에 빠지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후(이것은 그의 사명의 완전한 증명이었다) 그의 영적인 왕국이 설립되었을 때 그 위험은 끝이 났으며, 또한 그것들은 모든 국가에 선포되어야만 한다. (( 유대인들이 대망하는 그들의 메시야는 현세적인 왕이어야만 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이방인과 가다라인 가운데 행하였던 이적들도 선포되도록 명령되었으리라.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그 위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명예는 그림자와 같아서 다시 말하면 그것을 따르는 자들에게서는 도망가지만 그것(명예)에서 피하려는 자는 따르려 한다(31절).
"저희가 예수의 소문을 전파하니라." 이것은 신중의 행동이라기보다 열심의 행동이었다. 비록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예를 위해 진지한 의미에서 변호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특별한 분부를 거스려 행하여졌으므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주의히라!!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주께서 직접 베푸신 바, 은혜의 생생한 경험을 고백하며 전파한다고 할지라도, 그 고백과 전파하는 때와 장소가 정말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뜻에 의한 것인가를 신중히 살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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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마태 기적집의 9번째이며, 마태 특유의 것이다.
벳새다의 소경을 고치신 기사(막 8:22~26)와 실로암 못가의 소경을 고치신 기사(요 8:1~41)는 오늘의 것과 별개의 것이다.
그리고 마 20: 29~34절의 여리고의 소경을 고치신 기사가 오늘의 것과 유사한 면이 많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소경을 고치신 기사가 많은데, 일반적으로 유대인은 눈병환자가 많았다고 한다.
오늘의 말씀은 두 소경이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아 그들의 눈이 밝아지게 되었다는 매우 간단한 기사인데, 그 줄거리와 그 속에 담긴 진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예수께서 야이로의 집을 나와 자신의 집을 향해 가실 때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절규하며 따라왔다. “다윗의 자손이여”에는 구세주라는 별명이 포함되어 있다.
두 소경은 구세주가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천재일우의 기회로 잡고 전후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소리지르며 따라왔다.
불쌍히 여기소서: 물론 "눈이 밝아지게 하소서"라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웬일인지 뒤도 돌아다보지 않으시고 아무런 말씀도 없이 자기 집을 향하여 걸어 가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소경은 뒤따름을 멈추지 않고 계속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지르며 그의 뒤를 따랐다.
결국 예수님의 집까지 당도했다.
예수께서는 집에 들어가셨는데,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니 예수께서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라고 하셨다.
그들은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시니 그들의 눈이 즉시 밝아졌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결코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명령하셨으나 이를 온 땅에 퍼뜨렸다.
이 간단한 줄거리 속에 담겨있는 진리, 교훈을 살펴보고자 한다.
⑴ 너희 믿음대로 되라(Kata . th.n pi ,stin u`mw /n genhqh ,tw u`mi /n): 당신들의 신앙의 정도에 따라서 당신들에게 이루어져라
Kata .: ~ 따라, 응하여
그들에게 예수님의 능력이 어느 만큼 역사하느냐라는 것은 그들 쪽에 있는 신앙의 문제이다.
예수께는 무한한 량의 은혜의 물이 저장되어있고, 우리는 신앙의 관으로 이를 받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는 량은 우리의 관의 대소에 달려 있다.
예수께 있는 능력이 그들에게 어느 만큼 역사하느냐는 그들의 신앙에 달려있다는 것이다(마 13:58).--마 13:58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우리는 주님께 여러 가지를 간구하는데, 얻지 못하는 원인이 우리의 신앙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신앙의 관이 막혀있는데, 어떻게 받을 수 있겠는가? 관을 막는 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죄이며, 이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기주의, 상식이하의 행위, 자기 주장 등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아무리 구하고 구하여도 얻지 못한다. 주님께서 주시지 않으시려는 것이 아니므로 간구에 앞서 자신의 상태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이러한 자리에서는 철야로, 눈물로, 금식으로 계속 간구해도 얻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의 관의 상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진단받아서는 안 되며, 2,000년 역사를 가지고 모든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밝혀주는 성경말씀에서 진단받아야 한다.
특히 자칭 영력(靈力)을 받았다고 하는 자들을 조심해야 하며, 소위 예언한다고 하면서 무당들이 점치는 것 같은 내용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경우는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인간생활의 길흉을 예언으로 알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이다.
십자가, 부활, 재림의 신앙에 바로 선 인간생활의 길흉은 삶의 전체를 좌우하는 궁극적인 문제는 아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하나님의 뜻만이 관심의 초점이며, 설혹 문제가 된다 해도 성경말씀 속에서 만고에 통용되는 원리적인 진리를 가지고 풀어야 한다.
광야의 시험에서 예수님의 자세를 보라!
⑵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5:42)고 하신 예수님이신데, 이 기적에 의하면 두 소경이 부자유한 몸으로 따라오며 그렇게 간절히 간구하는데도 뒤도 돌아보시지 않고 한마디 말씀도 없이 그대로 걸음을 재촉하셨을까?
가다라의 귀신들린 자는 그가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는데도 고쳐주셨는데, 왜 이 두 소경에 대해서는 냉담한 태도를 취하셨는지 의아한 생각을 지니게 된다.
첫째로 이는 많은 사람 앞에서 기적을 행한다는 것은 종종 그 기적으로 인하여 그의 복음이 천박하게 받아드려 병적인 신자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위험성이 많기 때문으로 본다. 영적인 복음이 육체의 복음으로 타락할 수 있는 위험을 느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하신 후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말씀에서 엿볼 수 있다.
여기에 예수님의 복음이 타 종교와 나란히 놓을 수 없는 차원이 다른 존귀함이 있다.
육체의 병 고침만이 아니라 영혼의 병을 고치는 것, 사회의 병을 제거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의 깊은 곳에 뿌리박고 있는 죄를 깨끗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다. 예수님의 일생을 보면 이 사명을 위하여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었으며, 원리적으로는 광야의 시험에서도 이를 밝혀주고 있다.
물론 예수께서는 육신의 병을 경시하시지 않았다. 귀중한 시간과 힘을 이를 위해 쓰셨다.
소경이란 빛을 볼 수 없는 사람이다. 암흑에서 헤맬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 태양도 태양에서 반사하는 아름다운 무지개의 색깔도 모양도 볼 수 없다.
그러한 삶이 어떠한 삶인지 소경 아닌 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스럽고, 쇠사슬에 묶인 비참한 삶일 것이다.
빛은 주변에 가득 차 있는데, 이 빛 속에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들이 빛을 받아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데, 빛을 보지 못하는 삶의 비참이란 우리가 형용할 수 없다. 이러한 자들의 처절한 부르짖음에 대하여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예수께서 등을 돌리신 것은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언급한 바와 같이 육신의 소경의 비참은 우리의 상상을 넘는 것으로 여겨지나 영의 소경의 비참은 육의 소경의 비참과는 비교되지 않는 영원한 멸망에 이어지는 절대의 비참의 자리에 있다.
이 영원한 비참에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비통한 절규를 부르짖으신 근원적인 절대의 비참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끊어진 인간도 태양의 빛, 색깔, 모습을 보며, 인간생활의 희로애락을 느끼면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미고, 교육을 받고, 개인생활을 하고 집단생활을 하며 산다. 그들에게도 선한 마음, 선한 의지가 있으며, 도덕적인 생활에 애쓰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은 그 궁극(窮極)의 밑창에 깔려있는 영원한 멸망에 이어지는 절대의 암흑을 보지 못하고 산다. 이것이 영적인 소경이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육의 치료는 그것이 영혼의 치료에 동반되지 않을 때는 그것은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육만의 치료에 현혹되어 영적 치료가 방해를 받을 때는 이를 물리치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러한 태도를 취하신 것으로 본다.
둘째로 두 소경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서일 것으로 본다.
다만의 시험이 아니라 그 시험이 시련을 통하여 그들의 신앙이 높아져 마침내 영적인 고침의 자리에 합당한 자로 하시기 위해서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두 소경의 간절한 요구를 잘 아셨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영적 치유에 이르는 신앙에까지 아직 미치지 못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의 엘레겐의 신앙!!]
그들의 육안이 열림과 동시에 영안도 열리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열심이 영의 치유에 합당하기까지 이르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곧 고치시지 않은 데에 그의 지혜와 참 사랑이 있다.
그들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예수께서 즉석에서 고쳐주셨다면 그들의 육의 눈은 열려 빛을 볼 수 있게 되었어도 영안은 열리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소경보다 나을 것 없는 결과로 떨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30년 후, 50년 후 그 육안은 다시 감기게 되기 때문이다.
육안과 함께 영안이 열리는 기적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영안이야말로 두 소경을 영원히 감기는 일이 없는 하늘나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안이 열리면 비록 소경으로 있어도 이미 비참한 삶이 아니고, 복된 삶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2,000년 후의 금일 우리에게도 이 이치는 동일하다. 우리가 아무리 간구해도 곧 그 요구에 응하시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은 이에 실망하고 넘어져 그를 버리기까지 한다. 이는 인본주의의 신앙이며, 우상숭배의 신앙이다.
그러나 맹인과 같이 최후까지 간구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계속하면, 예수께서는 하나님보시기에 가장 “선한 때”에 들어주신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좋은 것이다. 신앙은 인내이다. 사랑은 인내이다(고전 13장). 그러므로 우리는 최후까지 인내하는 삶을 계속해야 한다.
셋째로 예수님은 두 소경에게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라고 물으셨고, 그들은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했다.
이 질문은 본질적으로는 놀라운 문답이다. 이는 "하나님의 전능, 예수님의 전능을 믿는 신앙이 있느냐"라는 말씀이다.
욥의 경우와 같이 사단이 주시하는 문답이 되는 것이다. 두 소경은 이 물음에 합격했다.
그런데 천지를 꿰뚫어보시는 예수님 앞에서 이 물음에 합격할 현대 크리스천은 과연 얼마나 될까?
어느 주해자는 현대 크리스천의 특징은 전능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 있다고 하였다. 이는 과학주의 세계관에 오염되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의 전능, 하나님의 전능을 성경말씀 그대로 정말 믿는다면 개인이건, 교회이건 그 삶의 자세가 근본적인 혁신되어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 뜻에만 따르는 신본주의의 삶이 전개된다.
우리들 자신도 이 두 소경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네 믿습니다”고 대답할 수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기독교의 이름이래 우상 신앙에 불과하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소경은 인생의 불행 중에 불행이나 최대의 불행은 영의 맹인이다.
특히 좋은 눈을 갖고 있으면서 성부이신 하나님, 성자이신 하나님, 성령이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 최대의 불행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말씀을 보지 못하는 것, 봐도 바르게 보지 못하는 소경이 가장 불행한 것이다. 정말 귀한 것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자신의 눈은 지금까지 무엇을 보아 왔는가, 보고 있는가, 보려고 하는가?
간악한 이세상에는 보지 않아야 할 것으로만 가득 차있고, 보아야 할 것은 별로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으로 보고, 보지 않는 것에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무엇을 보고 보지 않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맹인이 오히려 행복하다. 물론 육신의 눈이 소중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우리의 건전한 영안 안에서 훌륭한 육의 눈을 가진 자의 행복은 말할 것도 없다. 어찌 눈 하나에 국한 되겠는가? 우리의 육신에 해당되는 일체가 그렇다,
우리의 재물 일체가 그렇다. 영에 지배된 혼, 혼에 지배된 몸으로 사는 삶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롬 8:28).
또한 이러한 사람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이다(마6:33). 이들은 어떠한 여건이 속에서도 참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이 성경이 보여주는 신앙의 삶, 크리스천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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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9:14-22]===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시다
*14.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매우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16.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17.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19.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21.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25.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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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벙어리 귀신에 들려 고통을 받고 있던 아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의 아들을 고치려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노력이 무용한 것을 보았습니다(즉, 예수님의 제자들의 노력으로는 그의 아들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거의 없거나, 아주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그의 아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라는 분부를 받았을 때, 그는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막 9:22)라고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그 아버지의 질문에는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If thou canst do any thing)이라는 말이 있어야 했습니다(주 1). 그러나 두려워 떨고 있는, 그 연약한 사람은 그 말을 틀린 곳에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능력에 관하여나 나의 하고자 하는 마음에 관련해서는 그말(if)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네가 믿을 수 있다면. (즉, 믿는 자에게는), 너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참고. 막 9:23).
이 말씀(막 9:23)을 듣고, 그 사람(아이의 아버지)의 신뢰는 강화되어서, 주님께 믿음의 증가를 위하여 겸손한 기도를 드렸습니다(주 2).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귀신은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는 명령으로 내쫓겼습니다(주 3).
이 사람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종종 약속에 어떤 조건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우리도 이 사람처럼 틀린 곳에 그 말을 늘 사용함으로써 실수를 하고 있습니다(즉, 예수님에게 이 말(if)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나를 도울 수 있다면; 만일 주님께서 시험을 이기도록 나에게 은혜를 주실 수 있다면; 만일 그 분이 나의 죄를 사하여 주실 수 있다면; 만일 그분이 나를 성공하게 할 수 있다면.(이 말들은 예수님께 대하여는 사용될 수 없습니다).
진리는 ("만일 주님이 무엇을 할 수 있다면"이 아니고) "만일 그대가 주님을 믿을 수 있다면" 주님은 하실 수 있고(can) 또 하실 것입니다(will).
만일 그대가 확신하면서 주님을 의지한다면, 그리스도께서 가능한 모든 것은 그대에게도 모두 가능할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 서고 하나님의 위엄으로 덧입혀집니다. 믿음 자신은 성령의 그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허리띠를 매면서, 하나님의 전능 안에서 행동하고, 도전하고, 고난을 견딜 힘이 됩니다. 믿는 자에게는 아무것도 능치 못할 것이 없습니다(즉,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무제한으로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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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said unto him, If thou canst believe." Mark 9:23
A certain man had a demoniac son, who was afflicted with a dumb spirit. The father, having seen the futility of the endeavours of the disciples to heal his child, had little or no faith in Christ, and therefore, when he was bidden to bring his son to him, he said to Jesus, "If thou canst do anything, have compassion on us, and help us." Now there was an "if" in the question, but the poor trembling father had put the "if" in the wrong place: Jesus Christ, therefore, without commanding him to retract the "if," kindly puts it in its legitimate position. "Nay, verily," he seemed to say, "there should be no if' about my power, nor concerning my willingness, the if' lies somewhere else." "If thou canst believe, all things are possible to him that believeth." The man's trust was strengthened, he offered a humble prayer for an increase of faith, and instantly Jesus spoke the word, and the devil was cast out, with an injunction never to return. There is a lesson here which we need to learn. We, like this man, often see that there is an "if" somewhere, but we are perpetually blundering by putting it in the wrong place. "If" Jesus can help me--"if" he can give me grace to overcome temptation--"if" he can give me pardon--"if" he can make me successful? Nay, "if" you can believe, he both can and will. You have misplaced your "if." If you can confidently trust, even as all things are possible to Christ, so shall all things be possible to you. Faith standeth in God's power, and is robed in God's majesty; it weareth the royal apparel, and rideth on the King's horse, for it is the grace which the King delighteth to honour. Girding itself with the glorious might of the all-working Spirit, it becomes, in the omnipotence of God, mighty to do, to dare, and to suffer. All things, without limit, are possible to him that believeth. My soul, canst thou believe thy Lord to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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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빌 4:11~13)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장 11∼13절))// *11. Not that I speak from [any personal] need, for I have learned to be content [and self-sufficient through Christ, satisfied to the point where I am not disturbed or uneasy] regardless of my circumstances. *12. I know how to get along and live humbly [in difficult times], and I also know how to enjoy abundance and live in prosperity. In any and every circumstance I have learned the secret [of facing life], whether well-fed or going hungry, whether having an abundance or being in need. *13. I can do all things [which He has called me to do] through Him who strengthens and empowers me [to fulfill His purpose—I am self-sufficient in Christ’s sufficiency; I am ready for anything and equal to anything through Him who infuses me with inner strength and confident peace.]
사도 바울의 일생은 고난과 어려움이 함께 했던 일생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는 온 소아시아와 유럽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는데, 말할 수 없는 박해가 뒤따랐습니다. 또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다 보니까 물질의 어려움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보아도 사도 바울이 낙심하여 탄식하고 원망, 불평했다는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감옥에 들어가서도 주님 앞에 감사하고 찬양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이 고난 가운데서도 승리의 삶을 살았던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비록 현실적으로 볼 때 문제도 있고, 어려움도 있고, 여러 가지 환난이 다가왔지만 예수님 안에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넉넉히 잘 감당하고 승리할 수 있었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능력 주시는 자, 곧 예수님 안에 거하면서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와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1. 범사에 만족하는 삶
빌립보서 4장 11절에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경우에도 [내주하시는 임마누엘 주님 누림으로써]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에게 임하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만난 다음 자기의 훌륭한 가문, 로마 시민권, 좋은 학벌, 산헤드린 공회에서 인정받는 위치에 있었던 것을 결코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이 모든 것을 다 분토와 같이 버리고 그의 삶을 주님 앞에 드렸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많은 핍박이 따랐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난이 그에게 다가왔지만, 그는 모든 형편에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면, 내가 스스로 만족하기만 하면 이미 모든 것을 얻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딤전 6:6∼8).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고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까?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감사하는 마음이 없고 늘 불평, 불만이 많은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행복은 오직 감사하는 마음과 만족한 마음을 가진 자에게 있습니다.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만족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더 큰 복을 내려 주십니다.
우리의 삶이 절대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문제가 있어도 감사하고, 절망 중에도 감사하고, 어려움 당할 때도 감사하고, 몸이 아플 때도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되게 하시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고, 질병이 변하여 건강이 되게 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2. 어떤 환경에도 적응하는 삶
사도 바울은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말씀합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 처했어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먹을 것이 없어도 감사하고, 먹을 것이 있어도 감사하고, 잘 돼도 감사하고, 일이 잘못돼도 감사합니다. 왜 감사할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셔서 영광을 받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어떤 환경에 처해도 감사할 줄 알아야 됩니다. 사도 바울은 수많은 고난을 당했음에도 어떠한 환경에든지 그 환경에 적응하여서 주님 앞에 감사, 찬양의 삶을 살았습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문제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어떤 약점이 있다고 해서 그 약점으로 인해 낙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도였고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지만,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육체를 찌르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그에게 간질병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가시는 아마도 그의 안질, 곧 눈병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그 가시가 무엇이든 그것은 바울에게 몹시도 큰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간절히 가시를 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세 번이나 간절히 간구했지만, 그 육체의 가시가 제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바울에게 이같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바울은 이때 가시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고통스럽게 생각을 하던 가시로 인해 자기에게 더 큰 은혜가 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는 억지로 그 가시의 고통을 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가시를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약함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약할 때 오히려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를 통해서 더욱더 온전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믿음으로 우리의 약함을 강함으로, 우리의 상처를 영광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자기 약함에 대해서 내가 약한 그 때에 주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신다는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약점이 있다고 약점을 바라보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약할 때, 여러분이 깨어졌을 때, 여러분이 낮아졌을 때 주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시고 놀라운 일을 이루어 주십니다.
환난도 없고, 가난도 없고, 실패도 없으면 좋겠지만 우리의 인생에는 항상 시련과 환난과 가난과 실패가 있습니다(시 90:10).
그러나 가난과 시련과 환난과 실패가 있을지라도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절망 가운데에서도 오히려 감사의 삶을 살면, 그 절망이 변하여 놀라운 축복과 희망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주님께 감사하십시오(합 3:17∼18). 여러분이 어느 환경에도 감사할 줄 아는 믿음의 자세를 가지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일으켜 세워 주실 것입니다. 환경의 어려움을 초월하여 감사함으로 승리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3. 주 안에서 능력을 행하는 삶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괴로움과 궁핍과 심지어 죽음의 위협 속에서 자족하며 인내할 수 있었던 능력의 원천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가 그 많은 어려움과 문제와 고통과 궁핍함과 굶주림 속에서도 모든 일을 넉넉히 잘 감당할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주 안에서 모든 것을 감당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주 안에서’를 얼마나 강조했는지, 그의 서신에 160번 이상 이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 안에 구원이 있고, 보호가 있고, 능력이 있고,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늘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바라보았고 주님이 주시는 힘을 공급 받아 모든 환경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비천할 때 나의 비천함을 바라보면 낙심하기가 쉽습니다. 또 반대로 우리가 풍부할 때 나의 풍부함을 바라보면 교만하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여건과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도 주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모든 환경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바다 위를 잘 걸어갔습니다. 그러다가 풍랑이 일자 그는 파도를 바라보았고, 그 순간 베드로는 바다에 빠져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나아가면 우리는 풍랑 위를 걸어갈 수 있습니다. 절망의 풍랑 위를 걸어갈 수 있습니다. 질병의 풍랑 위를 걸어갈 수 있습니다. 고난의 풍랑 위를 걸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우리 삶 가운데 불가능이 없습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주님의 기적이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만을 바라보고 나아가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가 어떠한 어려움을 당해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고후 4:8∼10). 주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모든 어려움을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당한 고난이 너무나 커서 어디다 말도 못하고,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눈물 밖에 흘릴 수밖에 없는 그런 환경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없어도, 내 힘으로는 부족해도 주 안에서는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넉넉히 이기게 됩니다.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조금만 더 견디시고, 믿음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 거하며 주님의 능력을 믿고 나아갈 때 주님의 기적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절대로 원망, 불평하지 마십시오. 절망하지도 마십시오. 안된다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 안에서 그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하는 법을 배우고, 어두운 환경에 처해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신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믿음을 가지고 환경을 이기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귀한 축복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환경에 처했든지 스스로 그 곳에서 만족할 수 있게 하시고, 그 환경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주 안에서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주님의 귀한 일꾼들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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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0:46-52]] ==맹인 바디매오가 고침을 받다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Bartimaeus Receives His Sight
*46. Then they came to Jericho. And as He was leaving Jericho with His disciples and a large crowd, a blind beggar, Bartimaeus, the son of Timaeus, was sitting beside the road [as was his custom]. *47. When Bartimaeus heard that it was Jesus of Nazareth, he began to shout and say, “Jesus, [g]Son of David (Messiah), have mercy on me!” *48. Many sternly rebuked him, telling him to keep still and be quiet; but he kept on shouting out all the more, “Son of David (Messiah), have mercy on me!” *49. Jesus stopped and said, “Call him.” So they called the blind man, telling him, “Take courage, get up! He is calling for you.” *50. Throwing his cloak aside, he jumped up and came to Jesus. *51. And Jesus said, “What do you want Me to do for you?” The blind man said to Him, “Rabboni (my Master), let me regain my sight.” *52. Jesus said to him, “Go; your faith [and confident trust in My power] has made you well.” Immediately he regained his sight and began following Jesus on the 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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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디매오라는 한 소경 거지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예수님과 소경 바디매오입니다.
사실 바디매오는 “성경에 기록될만한” 존재감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는 소경에 불과했습니다. 사람들의 동정을 받으며 겨우 연명을 하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outsider”였습니다. 그가 어느 날 길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그를 기억해주지 않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미미한 사람이 예수님의 천국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 치료하신 여러 사람들 중 맨 마지막 사람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마가복음의 기록 내에서는 이 사건 이후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기록이 없습니다. 또 놀랍게도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치료하신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 이름이 언급된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는 사막의 먼지처럼 바람에 날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그는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항상 밝게 빛나며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또 많은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여리고라는 도시를 나가실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지고,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며,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33, 34).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약 15마일(24km) 정도 떨어져 있는 요단강 서쪽 편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고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이 도시에 들르신 예수님께서 이제 막 그곳을 떠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때 성문 밖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하고 있던 소경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크게 소리를 질러 말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은 바디매오에게 “조용히 해!” 하며 그를 꾸짖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바디매오는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디매오의 외침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저를 부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바디매오는 겉옷을 벗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바디매오와 예수님의 만남은 매우 드라마틱합니다. 이 만남은 가장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가장 낮고 비천한 자리에 앉아있는 바디매오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은 “예수님의 찾아오심”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바디매오가 살고 있는 여리고로 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여리고는 바다 표면보다도 250m나 낮아서,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한 사람 바디매오를 찾아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오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여리고는 기온이 따뜻하고 또 땅이 기름지고 물이 풍부하여 여러 농산물들의 주산지였습니다. 헤롯 대왕은 이곳에 자신의 겨울 궁전을 지어놓고 이용했으며 죽을 때도 그곳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살기가 좋은 곳이었겠지요? 아름다운 요단강가에, 종려나무 가지가 우거지고, 상인들로 붐비는 이 도시의 시끄럽고 활기찬 모습을 상상하노라면, 여리고는 예수님께서 찾아오실 필요가 없는, 풍요롭고 안락한 곳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46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여리고 방문은 매우 짧습니다.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하고는 곧 “예수께서 ……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라고 합니다. 마치 아무 볼 일이 없이 그냥 지나가는 길인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여리고를 들르신 것일까요? 이는 필시 바디매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를 만나서 그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그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어둠 가운데 앉아있는 그에게 빛을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바디매오는 “특별히 구원이 필요한 불쌍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앞을 볼 수도 없고, 또 다른 사람들의 동정을 의지해 사는 거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특별히 구원이 필요한 불쌍한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바디매오처럼 어둠 가운데 있으며,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의 은혜가 필요하며, 모든 사람이 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쳐야 하는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50:10,1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들어가며 너희의 피운 횃불 가운데로 들어갈지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슬픔 중에 누우리라.”
이 말씀에 따르면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흑암 중에 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종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사는 자들입니다.
또 다른 종류의 사람들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스스로 횃불을 켜고 자신이 켜 놓은 그 불을 의지하여 사는 자들입니다.
바디매오는 전자에 속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 있지만,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이름을 부르며, 주님을 의지했습니다.
반면 여리고 성내의 사람들 대부분은 예수님을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로 볼 뿐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켜 놓은 “횃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면서 자신들이 빛 가운데 있다고 착각했으며 이로 인해 “세상의 빛”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방문하신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런 자들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요한복음 9:41)” 정말 불쌍한 사람은 어둠 속에 있는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아닙니다. 정말 불쌍한 자는 사람들이 켜놓은 세상의 거짓 빛에 속아서 자신이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세상의 빛 예수님”께서 지금 그의 앞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은 바디매오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이 그를 꾸짖으며 말렸지만 그는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은 매우 절박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놓치면 끝장이라는 그의 간절함은 아무도 제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순간에 바디매오에게 “보이는 것”은 오직 예수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들으시도록 온 힘을 다해서 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바디매오에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 오직 자신과 예수님 딱 둘만 있었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우리의 영적인 현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나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고 회복하는데 기초가 되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또는 “나는 무엇인가?”가 결정되는 것은 오직 “예수님”과 “나” 둘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입니다.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바디매오에게는 그에게 익숙한 소경 거지로서의 삶이 있습니다. 풍요로운 도시 여리고의 부유하고 낙천적인 사람들은 이 불쌍한 걸인에게 너그러웠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성문 앞의 목이 좋은 자리를 잘 지키기만 한다면 바디매오는 사람들의 자비심에 의지하여 평생 “앉아서” 편하게 먹고 마시는 여유로운 삶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그냥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며 조용히 지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디매오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본래 송충이도, 거지도, 소경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 모든 고상함과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어둠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이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인생 문제의 “유일한 당사자”가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는 필사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예수님을 붙들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을 “불쌍히 여기소서!”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긍휼이란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비참한 상태에 빠진 사람에게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선하심이며, 이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죄인 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붙들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과 전혀 다른 점이 여기 있습니다. 세상의 종교들은 “나의 선함”을 의지하여 신에게 나아가지만,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이것입니다: 사람은 절대적으로 타락해서 전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선하셔서 이런 죄인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푸십니다. 이 타락한 사람과 선하신 하나님을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끈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다른 방도는 전혀 없으며 있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붙들지 않고, 다른 것들, 곧 “나의 자랑”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시도는 오히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일으킬 뿐입니다.
로마서 11:32절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이 말씀은 참으로 신비롭기 그지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은 내가 은혜를 받을만한 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은혜를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불순종의 죄인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통한 마음으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치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긍휼만이 내가 의지할 유일한 끈임을 믿고 생명을 다해서 그 끈을 붙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앞에 나온 바디매오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이 말씀은 참으로 생명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소경 거지 바디매오에게 단 한 번도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의 앞에 놓인 그릇에 동전 몇 개를 던지는 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원하는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연한 듯 동전을 던지지 않으시고, 대신 그의 눈을 바라보시며 그에게 진지하게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바디매오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소경 바디매오에게 앞을 보는 것처럼 더 절실한 소원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디매오는 이 “간절히 원하지만 불가능한 마음의 소원”을 예수님께 고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의 믿음을 축복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의 믿음”이 그의 눈을 뜨게 하였으며 그를 구원하였다고 하십니다.
물론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한 것은 예수님의 그에 대한 긍휼입니다.
예수님의 긍휼은 한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한없는 사랑이 내 삶에 임하시도록 하는 것은 바로 “내 믿음”입니다. 곧 우리는 믿는 만큼 주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해보면 왜 여리고 성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그가 진리의 빛 가운데 예수님을 보고 또 자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바디매오만이 예수님께서 만나신 진정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매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인사를 나눕니다. “How are you?” 묻고 “I am fine, thank you!” 하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의미 없는 만남들과 대화들을 이어가며, 심지어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 마음이 참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잊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fine”하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는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생명처럼 빛처럼 간절히 필요한 자들입니다.
주께서 나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해 저기 서 계십니다. 내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를 기다리십니다. 내 마음의 깊은 소원을 들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동전 세 닢”이 아니라,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아무리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간절함과 담대함을 회복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