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2장..*우리함께기도해.
@@아브라함의 축복
....<창1: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TUQ의 형상따라 모양대로 TUQ<=JC> 얻은 사람, 그들로 Q이 지으신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심(창1:26)] --->[생육-번성-충만-정복-다스림] ==> 진복이자 만복 근원 주 Q<말씀 JC>을 얻고, Q의 거처/건축 <새 예루살렘> 그 가운데서 발견됨 + JC의 장성하신 분량의 충만에 이르며, , 공수동맹, 만유의 복된 아비, 진복이신 Q의 유통자 됨 ::: 이것을 이제 Abr통해 이루려 하심.
..영광의 하나님이여, 세키나의 영광으로 찾아가 주셔서 원수의 속임과 기만에 자기를 내어준바, 사로잡혀 옥에 갇혀 절망에 방치된 이들을 만나주소서...<주께서 목적하신 바 그 뜻하심 안으로 들어오도록 일깨워 주소서.. 친히 찾아오셔서, 방문하시는 그 은혜로 속임-기만당한 이들을 만나주소서, 그들 한사람한사람마다 주 만나뵙고 모든 오해-착각에서 벗어나 전존재를 주께 투신함의 참 생명길로 들어서게 하소서...주님으로 살게 하소서..>
**하나님의 [아브라함과 주님 믿음 인해 그의 후손된 믿는 이들을] 불러 내어 구원하심, 곧 믿는 이가 구원 받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목적 이룸을 위함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됨.
....믿는이를 불러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영원목적 이룸에 주의하는 믿는 이마다 그의 <삶의 현장 속에서 필요한>구원 이룸에 주의하시는 하나님을 항상 경험케 될 것.. ***
....에노스 에녹 노아 셈 에벨...아담족속이로되 예외적으로 주님 붙들고 살아간 이들처럼 영생하시는 분 모든 차원과 우주 만물의 창조주 주권적 섭리자 초월적 지혜자이신 여호와 이름 불러 제단 쌓으며 앙망 바라기 동행함 가운데 살아감 실행하는 자마다 부르시는 주님 음성 듣게 될 것이요 부르심 받은 족속 아브라함 족속 믿음의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불리게 될 것..진정한 의미에서, 유대인-이방인 차별 없이, 주님 부르심에 대해 믿음으로 <주 앞에선 단독자로> 반응함,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예수 이름으로 거듭남= 영적 할례] 거쳐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삶, 곧 날마다 나는 죽노라>의, 주 임재따라 그분 닮아가며 증거궤의 짝됨 지향하며 걷는, 새로운 생명 삶의 시작을 가지는 자라야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 후사임
12장
....(갈대아우르에서 영광의 하나님(셰키나로 나타나심....갈대아우르에서의 1차 부르심은, 아마도 사래와 결혼한 직후, 즉 <조상들의 경우를 따르면>35세경이었을 가능성이 있음)이 부르심 따라 하란으로 이동)..아비 데라 사후 2차 부르심 순종 시에 수반되는 [그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 내리심의 이른바 공수동맹 + 모든 족속에게 복이 되며 그의 이름이 창대케 됨] 축복 언약 주심
....명령따라, 5년간 체류했던 하란을 떠나(75세) 인도따라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가나안 땅 세겜 도착. 제단 쌓고 이동하여 벧엘과 아이 사이 언덕에서 제단 쌓고 장막을 침... 기근 임한 가나안을 <임의로> 떠나 인근 애굽 거류/바로 왕 앞에서 진실 말하기 첫 시험에 실패..그러나 주 앞에 면구스러운 전화위복 은총 주심 경험.
13장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복귀. 롯과 헤어짐. 헤브론 정착, 제단 쌓고 장막 침
14장
....84세, 가나안 이주 10년째 헤브론 거주 중. 가나안 남북4+5왕들의 전쟁 발발 참전 승리 + 롯 구출. 살렘왕 멜기세덱 통해 지존하신 여호와께 십일조 봉헌
15장
....84세, 횃불언약 맺으심.. 아브람에게, 지극히 큰 상급으로 자신을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선포. 후사 염려에 대해 친아들 주마 약속하심.. 약속 말씀 그대로 이루실 것 믿는 아브람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겨주심(당신의 합당한 짝으로 여기심...증거궤의 반쪽에 합당한 성화 이루실 것). 명령따라 드리는 희생제물 예배 중에 횃불 언약 곧 앞으로 친히 이루실 바, 애굽시내부터 유브라데강에 이르는 가나인 땅 후사에게 주실 것, 400년간 이방의 객으로 훈련 압제 받고 하나님의 인도따라 징치받은 그 나라로부터 당당히 떠나 4대만에 복귀할 것을 일러주심( 이것이 횃불언약, 횃불 모습으로 임하신 하나님 혼자 두조각으로 쪼개어 놓은 제물 사이를 통과하심 = 은혜의 편무계약, .....<언약 그 깊은 뜻 숙지-준수-체득하지 못한채> 아브람은 하갈 취함으로써 임의대로 행하여 주 임재 놓침. (구주 십자가 죽으심으로 그 대가 치르심)
16장
....2년 경과한 86세, 하갈에게서 이스마엘 출생
17장
....그후 13년지난 99세 <전능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명하심. 할례 언약 + 개명된 이름 받음. 이삭 약속 재확인 받음. 온가족 모든 남자마다 할례 행함.
18장
.....헤브론 마므레상수리수풀 아브라함의 장막 방문하신 하나님. 1년후 이삭 출생 약속 주심. 소돔 고모라 멸절심판 고지. 아브라함의 중보
19장
....소돔 고모라 멸망. 롯 구원 받음.
20장
....네게브 블레셋 그랄 왕 아비멜렉으로부터 진실 말하기 2차 시험 통과 실패 그러나 또 면구스런 전화위복 은총 주심 경험
21장
....100세 이삭 출생. 이스마엘 내어쫓음 브엘세바에서 아비멜렉과 상호불가침 조약 체결. 브엘세바에 에셀나무 심고 영생하시는 하나님이름 부름
22장
....모리아산에서 이삭 번제 드림 명령 순복 여호와 이레 증거 <네 씨가 대적의 문 얻으리라> 축복 언약 받음, 복귀 후 브엘세바에 거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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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경외함의 공과 배우기 = 지고지선의 창조주 영생자존하시는 하나님, 지존하신 대주재에 대한 합당한 두려움 +신뢰함 + 사랑함 + 순종함))
---하나님께서 영원히 생생하게 살아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이에게 상주시는 분이심을 확실히 믿고, 언약하신 바로 그대로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그 말씀따라, (전 존재를 맡겨드림으로써) 인도하며 안내하시는, 그분이 행하시는 길에 믿음으로 하나되어 순종함으로써 동행함
.....아브라함, 그는 부르심 받은 그 당시에는 참된 경외함 안에 있지 못했었음을 본다. 자기 생각과 느낌, 판단을 따랐고 그 결과 여러 번 잘못을 범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긍휼히 여겨 도와 일으키시며 기다려 주고 계심을, 그의 믿음이 성장성숙하기까지 변함 없이 긍휼로 기다려 주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은총 베풀기를 멈추지 않으심을 볼 수 있다..
.....보라, 아브라함은 처음엔 <갈대아 우르에서>주님의 부르심 받고 하란으로 이동하여 아비 데라 사후에 비로소 주님의 다시 말씀하심을 따라 가나안에 입성하였으나, 기근을 당한 가나안 환경이 여의치 않음을 보고 <주께 묻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가고 있다(그곳에서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속였고 들통남으로써 수치 당했다...물론, 주님은 개입하셔서 그에게 우양-나귀-낙타, 노비를 얻도록 배려해주신다).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올라온 후 그는 롯과 헤어져서 롯은 소돔 근처로 옮겨 갔고 그는 헤브론에 머무르고 있던 중 가나안 남북전쟁이 발발하게 되었고(롯을 되찾아 오기 위해, 그 전쟁에 참여하여 롯을 구출하게 되었다), 그후 보복을 두려워 하는 그를 주님이 찾아오셔서 친히 그의 방패이자 큰 상급 되심을 말씀하시고, 아브라함을 크게 창대케 하실 바, 그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횃불 언약을 맺어...84세 때> 친히 약속하셨지만, 아브라함은 <물론, 아들 주시겠다 함에 대해 주께 직접 사라를 통해 이루려는지에 대해 아브라함은 확인하지 못했지만,...하갈을 취하도록 사라에게 종용받는 그 때에라도 여쭈었어야 했었지만> 여쭈어 보지 않고 사라의 의견을 따라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얻게 되고,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그 이후 13년 지난 시점, 99세의 아브라함에게 다시 주님은 <엘 샤다이 하나님>으로서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는데, .<할례 언약> 맺으시면서, 사라가 낳아 줄 아들<그의 이름은 이삭이라고 분명히 명시하심>을 통해서 그 언약을 이어갈 것을 말씀하셨다.....바로 그해에 <소돔과 고모라>멸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의 장막에 들르시는 주님은 <롯이 사는 소돔과 고모라 지역을 위한> 아브라함의 중재를 그대로 가납하여 주셨고, 그 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오히려 <그의 심령이 느슨해져서>그랄로 내려가기를 선택하고 있었다.
....아브라함이 중재자로서 <롯 일가에 대해 중재한 후> 두번째로 자기 마음대로 행하여 블레셋 땅의 아비멜렉에게 내려갔을 때 조차도(아브라함이 두번째로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다....그 일이 또 들통 난 후에도, 주님은 아비멜렉으로 하여금 아브라함에게 은 천개를 주도록 하셨다) 오히려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그는 내 선지자라]고 까지 변호해 주고 계셨다.
....가나안으로 복귀하여 얼마 되지 않은 그 바로 다음 해, 이삭을 얻었고 약 13여년이 지나 브엘세바로 옮겨서 에셀 나무를 심고 이삭과 함께 머무르면서 하나님 경외함의 공과를 연습-실행하기를 배우는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모리아 산에서 드리라는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모리아산에 이르러 제물로 이삭을 드림 중에 <예비해 두신>주님의 어린 양을 대신 드리게 되었고, <여호와 이레....주님의 산에서 주께서 그분의 어린 양 대속의 구주를 보이실 것, 그로 인하여 주님의 영원한 거처를 건축하실 것>을 체험케 되었다,
....그의 하나님 경외함은 이제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데려 올 때 정점에 도달했음을 보여 주는데<그와 하나되어 계신 영생하시는 하나님 신뢰함 그 바탕 위에, 주께 감동된 마음에서 우러난 바 하나님 경외함 인해 주께 합당한, 발휘하는 살아 생동하는 믿음의 결정>따라 주님을 신뢰함으로 엘리에셀에게 분명한 가이드를 주어 <하란에> 보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다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의 대략적인 나이를 추정... 그가 부름을 받은 곳은 갈대아 우르, 출발하였을 때 그는 결혼한 상태였음.(창11:31)... 창11:10-26까지의 내용을 적용해 보면 족장들은 거의 30세를 전후해서 결혼했다고 여겨짐....하나님께서 부모의 권위에서 독립에 대하여 정해 놓은 시기에 대한 말씀을 적용해서(아담과 이브를 만들면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라고 하신 말씀의 근거로) 볼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처음 부름 받았을 때를 늦게 잡아 35 세쯤....가나안에 가기까지 소요된 시간은 거의 40년이란 세월 .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살아계신 하나님이 친히 (안내자요, 여행 지도 되시며, 동시에) 아브라함을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친히] 옮기시는 분임<행7:4...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Q을 영광의 Q으로 스데반은 말한다, 즉 영광은 Q의 표현이자 나타나심인데, 그분 자신이 친히 그 어떠하심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 그를 Q 그분 자신으로 완전히 적셔주셨다는 것....그 결과는 Q을 믿는 믿음을 창출하였다>!!
....사람은 창조후 타락되었고, 아담의 타락은 한 먄으로는 죄와 죄들은, 다른 면으로는 저주를 불러왔다. 이 저주로 인해 창3장 이후 인류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되는데 이 사실을 가인에게서 볼 수 있고 가인의 후예는 더 추락했으며 결국 사람은 바벨에서 분열-혼돈될 정도로 타락헀다. 타락한 사람은 죄와 관련되었고 저주 아래 놓여졌다. 그런데, 창12장3절에 이르면(스데반은 Q을 영광의 Q으로 부르고 있다) 영광의 Q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행7:2) 아담으로 인해 죄와 저주를 받았지만,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우리는 Q의 약속을 받았다. 갈3:17절에 의하면 약속과 언약(창15장의 횃불언약)을 다 말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갈3:8에서는 창12:3에서의 Q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곧 아브라함에게 전해진 복음이었다고 말한다. 그 약속의 말씀이 복음 전파였다. 더구나 창15장에서 실증된 언약은 복음의 확증이었다. 더 나아가서 확증된 이 언약은 참17장에서 할례의 표로 실증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까지는) 아직 이루어지지는 않고 있었다. ((창15장에서 Q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에 내려가서 사백년 동안(이스마엘이 5세된 이삭을 희롱할 때부터 유월절 출애굽까지 기간을 애굽 치하의 박해 기간, 한편 아브라함의 가나안 입성부터 시내산에서 율법 수여까지 기간 430년 간을 방랑 생활로 묘사하고 있다)
....출19장 전에는 Q이 그들에게 율법을 주어 지키게 하실 의도를 가지셨다는 표시를 전혀 볼 수 없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기 전, 출19장에서 나오는 시내산 주위의에는 즐겁고 안온한 분위기였다.. 그 가운데 즐겁고 다정한 어조로 이스라엘 백성을 흡족하고 사랑스레 보시면서 Q은 출19:4-6에 나오듯이(내 사랑하는 백성들아...[바로 이렇게 나를 기뻐하고 마음 열어 교통함 안에서] 너희가 내말을 잘 듣고 순종하고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특별한 소유-제사장 나라-거룩한 백성이 될거다)라 다정스레 말하고 계셨는데, (분위기 파악을 잘 못한 그 어느누군가(?)의 실수로 보고 싶지만..) 분명히 돌연 튀어 나온 반응은 "우리가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였고, 그후 분위기는 갑자기 반전되어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무섭고 떨리는 분위기로 바뀌어버렸다. 이로 인해 겁 먹은 백성들은 그들을 대신해서 모세에게 대표로 Q을 만나라고 했고 이런 상황과 분위기에서 십계명 돌판((율법...즉, "범법함을 인하여 주신 것"이다!!!))이 주어졌다.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출24장에서 모세-아론-나답-아비후-70장로들을 시내산 꼭대기로 초청하시고 마주 대하여 식사교제를 함께 하셨다. 이 때 Q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는데, [그들이 이스라엘의 Q을 보니 그 발 아래는 청옥을 편 듯 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고 이어서 모세에게 장막의 식양을 보이고 계신다. ...율법을 주신 후에는 백성들은 제물이 있는 제단, 장막과 제사장 직분을 통해서라야 Q을 접촉하게 되었다.
....율법 주심은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돌아보고 거기에 드러나는대로 장막과 제사장과 제단-제물을 거쳐 주께 나아 와 그분을 누릴 수 있게 하려 하심이었다.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복은 실상, 지고지선-참생명이신 주님 자신이심..하기에 주님 자신 주시겠다 하신 것, 아브라함은 그분을 그대로 빼어닮은 그분의 소유- 담지자-그릇-통로.. 또한 주님이 친히<자신을 씨로 (대대로 참생명의 후손들에게) 주시려는 바> 네 씨(JC) 통해 이룬 바, 네 씨 가진 큰 민족 인해!!]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의 공급-유통자로서]복[=베라카...어원은 바라크(=무릎꿇고 예배하다...실지로 완전히 체험되고 경험하여 누림 인해..)]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공수동맹체] 땅의 모든 족속이(유대인, 이방인 할 것 없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아브라함에게 주신 주님의 축복 말씀은 결코 지금까지도 유효하며, 폐해진 것이 결코 아님을 유의하라..그러기에, 개인이나 그 어떤 단체, 나라들의 유대인들에 대한 태도는, 3. And I will bless those who bless you, And the one who curses you I will curse. And in you all the families of the earth shall be blessed.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는..복수형>,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단수형>..개인이든 단체든 가릴 것 없이 주님이 직접 복과 저주로 다스리시겠다 하셨다!!]...히틀러를 보라!!..미국을 비교해 보라....창12:2,3절은 아브라함에게 전해주신 복음 자체임, 더 나아가서, 말씀 순종의 본을 보여 준 아브라함을 통해 그 복이 (아브라함의 의 씨, 곧 (가나안 땅과 아브라함의 그 씨(네 자손)는 그리스도로 표상됨) 아브라함의 믿음을 잇는 모든 영적 후사들에게 연결되어) 전파되고 그 혜택 바로 그대로 적용 받게 해 주신 바, 그리스도를 믿는 개개인마다에게 보장해 주신, 복음 혜택의 약속 그 자체인 것!!(원칙 : 하늘은 땅을 위하고, 땅은 사람을 위하며, 사람은 하나님을 위함....그리스도는 그 안에 만유를 포함하시는 분임)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보라..당시 그에게는 말씀하시는 하나님 <주 이름 부름 안에서 전심으로 주님 임재 공급 받음, 곧 하가 통해 자신을 공급하시는> 그 하나님의 비가시적 임재가 바로 방향이요 지도였다]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라함의 담대함 결여, 머뭇거림, 지체로 인한 대가지불]을 주의하라.(예수님의 제자들도 머뭇거렸었다!!).....:: 첫번째 ((갈대아 우르에서...<영광의 하나님이 친히 부르신 바, 아브라함을 부르심에 반대했을 가능성 있는>아브라함의 형 장남 하란<=메마름>은 갈대아우르에서 죽는다..하란은 갈대아우르에서 유브라데강변따라 북쪽으로 805km지점, 적어도15일 걸리는, 유브라데를 건너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그런데 도무지 강을 앞에 두고도!! 결코 건너려 하지 않고 있었다!! )) ...(고향<본토>)-친척을 떠나...행7:3..) ---<머뭇거림>--[하여, 큰 자극제로서 복음의 약속 주시며, 친히 두번째 부르심((하란에서....<아마 주도권이 당시 데라에게 있었던듯 함>데라<=행동 느린, 지체/지연하는자>가 하란에서 죽는다.)) ...본토-친척, 여기에다 덧붙이시는 바, 아비 집을 떠나라!! 하셨다[너 홀로, 아내와 함께 철저히 <주 임재 앞의>단독자로 행해야 한다..롯<가림, 덮음, 수건> 조차도 같이 동행해서는 곤란하다고 분명히 그러나 넌지시 일러주셨다(사람이 보기에는 아브람은 벌써75세..그를 돕는 손길이 필요하다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또 하나의 수렁이다(그러나, 경이로우신 주님은 이에 대해서도 따로 준비한 계획이 있으셨다]..창12:1) ***유브라데강 하류 갈대아우르(수메르)--->유브라데 중하류 바벨론(바벨론)-->하란(앗수르, 유브라데와 티그리스 두 강 사이의 메소보다미아 지역 중간에 해당) ==>유브라데 강을 건너야만 아람(수리아)의 다메섹을 지나서 가나안 땅 세겜에 이를 수 있음..***
6. 아브람이 그 땅[가나안 땅의 북쪽경계,....북쪽 경계는 단/유브라데강~남쪽 경계는 브엘라해로이/애굽시내]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오직 주님 임재따라 걸어간 바]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보라, 바로 이 다시!! 나타나심이 주님 인침의 증거이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임재 안의 예배와 교통]....[유브라데 강을 건넌, 아브라함이 도착한 바, 올바른 곳은 세겜...그곳 도착전에는 주 나타나심 없었으니, 바로 오늘날의 교회이다!!...여기에서 주님은 모습을 다시 나타내시고, 비로소 <지시할 땅이 아니라> 바로 이 땅(그리스도, 교회, 왕국)을 네게 주리라고 확약하신다!!] ..세겜(강함 주는 어깨) 모레(지식 주고 보여주는 가정교사) 상수리나무(안식처, 강함 + 그늘 제공)....바로 그곳, 세겜에서 아브라함은 <바벨탑 쌓은 이들이 목적한 바, 자기 이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주님 이름 부르기 위해, 주 이름 부르시는 자마다에게 주 임재의 친근하면서도 친밀한 나타나심 안에서 더 깊고, 더 완전하고, 더 풍성하고, 더 친근한 교통 유지케 하시는 분을 위해> 단을 쌓았다...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명령 순종에만 전심을 기울여야 함.. 맞닥뜨리는 환경 상황 처지는 늘 언제나 변하게 하실 바이나, 주님 친히 주장하심 통해 능히 이기게 하시며 생명 말씀의 사람 주님께 합당한 짝으로 변화시켜 나가시리라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가다 <447 이세상끝날까지>
...진정 주님으로 살기 바라는 그대여.. 둘 중 하나만을 그대 배필로 택해야 한다면.. 암양 라헬인가 암소 레아인가 그대 취사 선택의 최우선 기준은 무엇인가.(육인가, 영인가). 누가 그대의 막벨라에 함께 있게 되기를 바라는가
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곤란한 상황 전개되는 그 시점마다 배워야 할 교훈 준비해 두셨음을 기억하라...주 바라기!! HS과 하나된 영으로 행하라...짐짓 추정 말라..오로지 평강 안에 걸으라..(두려운 상황 닥치더라도 주님 품 안에 안겨 그 임재따라 행하면 됨을 절대 신뢰/절대긍정/절대기쁨의 믿음으로 견지하며 붙들라)
11.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3.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14.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15.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16.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이미 아내를 팔아 넘긴 것이나 다름없다!!
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18.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19.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20.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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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ram Journeys to Egypt.12.
1 Now [in Haran] the Lord had said to Abram, “Go away from your country, And from your relatives And from your father’s house, To the land which I will show you;
2 And [a]I will make you a great nation, And I will bless you [abundantly], And make your name great (exalted, distinguished); And you shall be a blessing [a source of great good to others];
3 And I will bless (do good for, benefit) those who bless you, And I will curse [that is, subject to My wrath and judgment] the one who curses (despises, dishonors, has contempt for) you. And in you all the families (nations) of the earth will be blessed.”
4 So Abram departed [in faithful obedience] as the Lord had directed him; and Lot [his nephew] left with him. Abram was seventy-five years old when he left Haran.
5 Abram took Sarai his wife and Lot his nephew, and all their possessions which they had acquired, and the people (servants) which they had acquired in Haran, and they set out to go to the land of Canaan. When they came to the land of Canaan,
6 Abram passed through the land as far as the site of Shechem, to the [great] terebinth (oak) tree of Moreh. Now the [b]Canaanites were in the land at that time.
7 Then the Lord appeared to Abram and said, “I will give this land to your descendants.” So Abram built an altar there to [honor] the Lord who had appeared to him.
8 Then he moved on from there to the mountain on the east of Bethel, and pitched his tent, with Bethel on the west and Ai on the east; and there he built an altar to the Lord and called on the name of the Lord [in worship through prayer, praise, and thanksgiving].
9 Then Abram journeyed on, continuing toward the Negev (the South country of Judah).
10 Now there was a famine in the land; and Abram went down into Egypt to live temporarily, for the famine in the land was oppressive and severe.
11 And when he was about to enter Egypt, he said to Sarai his wife, “Listen: I know that you are [c]a beautiful woman;
12 so when the Egyptians see you, they will say, ‘This is his wife’; and they will kill me [to acquire you], but they will let you live.
13 Please tell them that you are [d]my sister so that things will go well for me for your sake, and my life will be spared because of you.”
14 And when Abram entered Egypt, the Egyptians saw that Sarai was very beautiful.
15 Pharaoh’s princes (officials) also saw her and praised her to Pharaoh; and the woman was taken [for the purpose of marriage] into Pharaoh’s house (harem).
16 Therefore Pharaoh treated Abram well for her sake; he acquired sheep, oxen, male and female donkeys, male and female servants, and camels.
17 But the Lord punished Pharaoh and his household with severe plagues because of Sarai, Abram’s wife.
18 Then Pharaoh called Abram and said, “What is this that you have done to me? Why did you not tell me that she was your wife?
19 Why did you say, ‘She is my sister,’ so that I took her as my wife? Now then, here is your wife; take her and go!”
20 So Pharaoh commanded his men concerning him; and they escorted him on his way, with his wife and all that he had.
===Footnotes
Genesis 12:2 These verses (2, 3) give the basic outline of God’s covenant with Abraham.
Genesis 12:6 I.e. the descendants of Ham’s son who was cursed by Noah.
Genesis 12:11 Sarai was about sixty-five years old at this time.
Genesis 12:13 Sarai was Abraham’s half sister. They had the same father, but different mothers (Gen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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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2장 (개요)
전 장에서는 아브람의 가계와 그 가족들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 여기에서 성령께서 아브람의 역사 가운데 임하심으로써, 이후로는 아브람과 그의 후예들이 대체로 거룩한 역사의 유일한 주제가 된다. 본 장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나타나 있다.
1.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가나안 땅으로 부르심(1-3).
2. 이 소명에 대한 아브람의 순종(4, 5).
3. 가나안 땅에 들어감(6-9).
4. 그의 애굽 여행과 거기에서 당한 사건, 아브람의 도피와 실수(10-13), 사래의 위험과 방면(14-20).
__마4:18,22 갈3:8 고후4:6 모든 참된 부르심의 경험은 영광의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셔서 나타나 보여 주시는 바 개인적 삶의 정황 가운데서 위치 각도 방향 점검해 보도록 일깨워 진정한 삶 곧 그분으로 살도록 구원해 내고 임마누엘 말씀따라 결정하며 살아가도록 관계 맺으심 사건인 것을 명심하라 그 달콤한 경험을 기억하라 참 그리스도인마다에게는 그리스도 만남 경험이 누구나 있으나 그렇지 않은 거짓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교리만 있을뿐임에 주의하라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최소 한 번은 그의 영의 깊은 곳 가운데서 살아계신 영으로 말씀하시는 예수님 만남 경험이 반드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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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의 소명(창 12:1-3)
여기서는 아브람이 그의 본토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는 소명을 받는 사건을 볼 수 있다. 이는 그것을 통해 그의 믿음과 순종을 시험해 보기 위함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또 장차 계획된 특별한 일과 은총을 위해 그를 구별하려고 계획된 일이었다.
이 소명의 전후 사정은 사도행전 7장 2절에 있는 스데반의 말에서 다소 도움을 얻을 수 있다. 거기에서는 다음 사실을 배울 수 있다.
--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 같은 소명을 주시기 위해서 나타나셨다.
이사실은, 아브람으로 하여금 이 소명의 권위를 조금도 의심할 수 없도록 현저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후에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서로간의 교제를 세우고자 하는 이 같은 최초의 교통에서는 하나님께서 “영광의 하나님으로서” 그에게 나타나시사 말씀하셨다.
-- 이 소명은 그가 하란에 거하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주셨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갈대아 우르에서 이르시니”라고 읽는 것이 옳다. 스데반이 이에 관해 이야기한 바와 같다(행 7:4). “아브람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약 5년간이나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새로운 명령을 다시 주셔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가나안 땅으로 옮기셨다.
어떤 이는 생각하기를, 하란은 갈대아 지방 안에 있어서 역시 아브람의 본토의 일부나 다름이 없었다는 것이다. 또 거기에 5년간이나 머물렀으므로 아브람은 그 곳을 자기의 본토라고 부르기 시작하다가, 그 곳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이 아님을 알게 될 때까지는 자기의 근거를 두고자 했다고 한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긍휼함을 준비하여, 우리가 가나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안식을 취하려는 것을 그냥 묵과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선한 역사가 이룩되고, 우리 영혼이 오직 하나님의 품안에서만 편히 쉬게 되기까지 계속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금 부르실 것이다. 소명 그 자체에는 다음과 같은 계율과 약속이 내포되어 있다.
Ⅰ. 시험해 보시는 계율이 있다. “너는 너의 본토를 떠나라”(1절).
1. 이 같은 계율로써, 그가 자신의 본토와 절친한 벗들을 사랑하고 있는지, 또는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그런 온갖 것을 저버릴 수 있을 것인지를 시험해 보신 것이다.
그의 본향은 우상 숭배로 변모해 버린 지 오래며, 그의 친척들과 아버지의 집이 그에게는 끊임없는 유혹이었다.
또 그들에게 물들 위험 없이는 그들과 계속 교제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너는 떠나라”(레크(3212)-레카, Vade tibi), 급히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지 말라”(19:17)고 하셨다. 죄 많은 상황 속에 있는 자들은 가능한 한 급히 서둘러서 그 곳을 벗어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겠다.
(어떤 이는 이 구절을) “너희 스스로를 위해 떠나라”고 해석하니, 이는 곧 “너희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떠나라는 뜻이다.
자신의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자는 그 같은 변화로 인해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것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잠 9:12).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이 같은 명령은 신실한 아브람의 모든 영적 자손들을 하나님과의 언약으로 인도하는 복음과 일치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본능적인 욕심은 하나님의 은총에게 양보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귀한 것이고, 친척들은 더욱 귀중하며, 아버지의 집은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긴 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마땅히 미워해야 한다(눅 14:26). 다시 말해서 우리가 그런 것들을 그리스도보다는 덜 사랑해야 하며, 그와 비교할 때에는 미워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것 중 어느 것이라도 그리스도와 경쟁 대상이 될 때에는, 언제나 그것은 뒤로 미루고 예수의 뜻과 그 영광을 택해야 한다.
(2) 죄와 죄악에 대한 온갖 기회는 물리쳐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나쁜 교우 관계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온갖 죄악의 우상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정결을 해치지 않고는 지켜 나가지 못할 것이 있을 때에는, 가장 아끼던 것이라도 기꺼이 버려야 한다.
오른 눈이 우리를 죄악으로 이끌면 그것을 빼어 버리고라도(마 5:29)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자 결심하는 자는 행악자들의 사회를 떠나야 한다(시 119:115; 행 2:40).
(3) 이 세상과 그 가운데서 누리는 우리의 온갖 기쁨을 거룩한 냉정과 경멸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을 우리의 본향, 우리의 집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나그네 숙소로 생각해야 하며, 따라서 세상에 집착하지 말고 살아야 하고 그 애착에서 떠나야 한다.
2. 이 계율은 그가 지금 눈으로 보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본토를 떠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은 내가 너에게 주고자 하는 땅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이라고만 말씀하신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에게 그것이 어떤 땅이라든가 또는 어떤 종류의 땅이라는 것도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
대체로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 본토를 떠나는 일로 전혀 손해 보지 않을 것이라는 특별한 보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따랐던 것이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들은 신뢰로써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고 우리는 보이지 않는 일을 위해서 보이는 것들을 버려야 하며, 현재의 고난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영광의 소망 가운데서 달게 받아야 마땅하다(롬 8:18).
이는 “우리가 장차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요일 3:2).
더욱이 장차 나타날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지시하고자 하신 땅으로 부르시어 그의 눈으로는 언제나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도록 가르치고자 하셨을 때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던 것 이상이기 때문이다.
Ⅱ. 크나큰 힘이 되는 약속이 있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도 이것은 부요하고도 굉장히 크고 귀한 약속의 복합체라고 하겠다. 모든 하나님의 계율이란 순종하는 자에 대해서는 약속을 수반하고 있음을 명심하자.
그가 친히 명령자로서 우리에게 그 이름을 알리고자 하실 때는 역시 상을 주시는 자로서의 이름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그 명령을 복종하면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이다. 여기에는 여섯 가지 약속이 있다.
1.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그의 백성으로부터 빼내었을 때, 다른 한 백성의 머리가 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로 하여금 선한 감람나무의 뿌리가 되게 하시기 위해 들감람나무 가지에서 잘라 내셨다. 다음과 같은 약속이다.
(1) 아브람의 짐을 덜어 주는 큰 위안이었다.
그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의 궁핍과 필요에 따라 은총으로 채워 주시는 방법을 알고 계시다는 점을 주목하자. 모든 상처에 대한 처방약을 갖고 계시는 분이 가장 아픈 상처를 위해서 먼저 한 처방을 마련해 주신 것이다.
(2) 이 약속은 아브람의 믿음에 큰 시험이 되었다.
그의 아내는 오랫동안 임신을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만일 그가 믿는다면, 희망할 수 없는 일을 믿는 것이었다. 그의 믿음은 순전히 “단지 돌로부터도 아브람의 자녀가 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는” 그 능력 위에 서 있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깊이 명심할 것이 세 가지 있다.
① 하나님께서 민족을 이루신다. 즉 그로 말미암아 민족이 “순식간에 났으며”(사 66:8), 또 “민족들을 건설하고 심으리라”(렘 18:9)고 말씀하신다.
② 어떤 민족이 크게 부강하게 되었다면, 그것을 크게 일으키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③ 하나님께서는 마른 땅에서도 큰 민족을 세우실 수 있으며,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게” 하실 수 있다(사 60:22).
2. “내가 복을 내리리라” 하셨다.
이는 특별히 아담과 노아를 축복하셨던 것과 같이 열매 맺고 번성하게 하는 축복을 함께한 것이든지, 또는 총괄적으로 “내가 상하의 근원을 막론하고 온갖 형태의 복을 내리리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그리하면 너의 조상의 축복보다 더한 아버지의 복을 내리리라”는 것이리라. 순종하고 믿는 자는 분명히 축복을 상속받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3.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자기의 본토를 떠남으로써 그는 그 곳에서는 이름을 상실했다. “그러나 그것은 염려 말고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그 곳에서 지금까지 얻을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는 자식이 없었는데, 어떻게 그 이름을 얻을 수 있을까 하고 두려워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또 그같이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하셨다. 다음을 명심하자.
(1) 하나님은 명예의 근원이시며, 온갖 번영은 그로부터 유래된다(삼상 2:8).
(2) 순종하며 믿는 자들의 이름은 반드시 축복받고 크게 된다. 우리 선진들이 믿음으로 얻었던 바가 가장 훌륭한 증거다(히 11:2).
4.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1) 룻기 4장 11절에서와 같이 “너의 행복은 온갖 행복의 본보기가 되어, 자기의 친구들을 축복하려는 자는 단지 저들을 아브람과 같이 되게 해 줍시사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된다”는 뜻이다. 순종하며 믿는 자들과 하나님의 교제는 지극히 인자하고 은혜로워 우리 자신이나 친구들이 보다 나은 다른 교제를 원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하나님을 우리의 벗으로 가지는 것은 충족한 축복이 되기 때문이다.
(2) “너의 삶이 네가 가는 곳에 복이 되리라”는 뜻이다. 선한 사람들은 그 나라의 축복이며, 그같이 된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큰 영예요 행복이라는 사실을 주목하자.
5.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
이것은 하나님과 아브람 사이에 맹약, 곧 공수동맹의 형태를 삼으셨다는 것이다.
아브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대의를 지지했고, 또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일에 관여하겠다고 약속하셨다.
(1)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친구에 대해서는 친구가 되고, 아브람에게 보이는 친절을 하나님 자신에게 베푼 친절로 받아들여 거기에 따라 보답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위해 어떤 형태로나 역사하셔서, 어느 누구도 잃어버리는 자가 되지 않도록 돌보시며, 단 한 잔의 냉수까지도 보답해 주신다.
(2) 하나님은 아브람의 원수들과는 맞서 싸우겠다고 약속하셨다. 아브람에게도 그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무고한 저주가 아브람을 해칠 수 없는 반면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저주가 그들을 뒤따라 멸하실 수 있다(민 24:9).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해야 할 이유이다. 하나님이 “저들을 저주하신 것으로” 족하기 때문이다(시 38:13-15).
6.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이것은 나머지 모든 약속의 최후를 장식하는 약속이었다. 이것은 메시아를 가리키고 있다. 메시아에게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예와 아멘이 되기” 때문이다(고후 1:20).
다음을 주목하자.
(1)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큰 축복이요, 이제껏 이 세상이 누린 바 가장 놀라운 축복이다.
또 그는 한 가정의 축복이니, 그로 말미암아 구원이 그 집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눅 19:9). 우리가 우리 가정의 축복을 헤아릴 때에는 온갖 축복 중의 첫 축복으로서 그리스도를 맨 먼저 세워야 한다. 이 땅 위의 많은 가정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낯선 자들인데, 어떻게 모든 가정이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받을 것인가? 그 해답은 다음과 같다.
① 모든 복 받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복 받기 때문이다(행 4:12).
② 어떤 가정이든 간에 그를 믿는 모든 자는 그 안에서 축복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③ 이 세상의 모든 가정 중의 어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축복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④ 이 땅 위의 모든 가족들이 그리스도를 인하여 함께 받는 축복이 있으니, 복음의 구원은 공통적 구원이기 때문이다(유 1:3).
(2) 그리스도와 관계 맺는 것은 큰 영광이다.
이것은 바로 아브람의 이름을 위대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는 것보다도, 메시아가 그에게서 계승되어 오게 되었고 따라서 자연히 아브람이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 더 큰 영광이 되었다. 은혜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지극히 큰 영광이 될 것이다(마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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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의 가나안 도착(창 12:4-5)
Ⅰ. 아브람의 이주. “이에 아브람이 떠났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자기 본향, 즉 처음에는 우르, 나중에는 하란을 떠났다. 그는 하늘의 환상에 대해 불순종하지 않았다.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고(갈 1:15, 16), 명령받은 대로 행했다. 그의 순종은 지체함이 없는 신속한 것이었으며, 아무 이의 없이 달게 받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히 11:8). 그러나 누구를 따르며 누구의 지시를 따라가는지는 알고 있었다. 이같이 하여 하나님은 그를 불러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셨다”(사 41:2).
Ⅱ. 그가 이동할 때의 나이. 그는 “75세였다.”
그런 나이에는 오히려 안정과 휴식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그같이 연로한 나이에 세상을 다시 시작하게 하시니, 그는 복종할 뿐이었다. 여기에 회심의 실례가 있다.
Ⅲ. 그와 동행한 일행과 가지고 간 짐.
1. 그는 자기 아내, 조카 롯과 동행했다.
그것은 강제로나 그들의 뜻을 무시하고 한 처사가 아니라, 설득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의 아내 사래는 그와 함께 가기를 바랐음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서로 결합케 하셨으니, 아무것도 그들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자기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으나, 아브람이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듯이, 사래도 역시 아브람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다. 아브람으로서는 그 여로에 그 같은 반려자, 즉 돕는 배필을 가졌다고 하는 것이 지극히 다행한 일이었다. 부부가 함께하늘나라의 길을 가는 데 합의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안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주목하자.
그의 혈족인 롯 역시 그의 아버지가 사망한 후 자기의 보호자가 되었던 아브람의 선한 모범에 감화를 받아, 그와 함께 가기로 했다. 가나안으로 가는 자는 홀로 갈 필요가 없음을 기억하자. 좁은 길을 찾는 이가 거의 없다손 치더라도 하나님께 감사드릴 것은, 그래도 몇몇 사람들은 그 길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저들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자들과 동행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지혜가 된다(슥 8:23).
2. 그들은 모든 동산(動産)을 함께 가지고 갔다.
즉 “그들이 모은 모든 소유”와 이동할 수 있는 물건들을 가지고 갔다.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어서였다.
(1)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의 처분에 온전히 맡겨 버렸고, 귀중한 것을 조금도 남겨 두려 하지 않았으며, 소유물은 훌륭한 기초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철저히 모험을 했던 것이다.
(2) 어디든 그들이 가는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위해서, 그리고 그들 가정에 양식을 충당하는 데 필요한 것을 스스로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기로 약속하셨다 하여 자기 소유물을 버리고 만다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소행이지 결코 신뢰하는 행위는 아닌 것이다.
(3) 그들이 되돌아가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발자국마저도 뒤에 남기지 않았으니, 이는 발자국 때문에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지”(히 11:15)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3. 그들은 자기들과 함께 “그들이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갔다.
(1) 그들은 가장인 아브람이 돈을 주고 사들였던 종들을 뜻한다. 그것은 그들의 소유의 한 부분이었으나 “사람들”이라 불리고 있다. 이것은 주인들로 하여금 그 가련한 종들도 영혼의 소유자라는 사실, 즉 주인들이 마땅히 돌보아 주어야 하고 그들의 편익을 위해 음식을 마련해 주어야 마땅한 귀중한 영혼의 소유자들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함이었다.
(2) 또 그들이 돌이키게 했던 개종자들을 일컫는다. 그들은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참례하게 되었고, 또 가나안까지도 함께 가게 된 사람들이니, 곧 (어느 랍비가 표현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보좌의 날개 아래 모은” 영혼들이다.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자들은, 남들도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함을 명심하자. 이런 영혼들을 저들이 “얻었노라”고 이르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들일 수만 있다면 스스로 진정한 획득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
Ⅳ. 그들은 여행 목적지에 즐거이 도착했다.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그들은 전에도 그리하고자 했다(11:31). 그러나 미처 다다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여행을 계속하고, 또 하나님의 인자하신 손길이 그들 위에 임하여 가나안 땅에 도달하게 되었다. 거기서 새로운 계시가 임함으로써 그곳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시하고 약속하신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여행 도중에 겪었던 많은 고난으로 인해서 의욕이 꺾이지도 않았고, 오직 “재촉하여 전진하였다.” 다음을 기억하자.
1. 아직 앞에 있는 것에 도착하지는 못했어도, 하늘나라를 향해 떠난 자들은 끝까지 참고 견뎌야 한다.
2.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우리가 맡은 바 일을 다하고 겸손하게 그의 섭리를 따르는 일은 분명히 성공할 것이며, 결국에는 안위로 끝맺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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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의 헌신(창 12:6-9)
어떤 이는, 아브람에게는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특별한 부름이 있었으니, 그곳에 이르렀을 때는 어떤 놀라운 일이 벌어져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하여 가능한 모든 영예와 존경의 표적을 가지고 아브람이 소개되어야 하며, 가나안의 왕은 즉시 그에게 왕위를 양도하고 충성을 맹세하여 신하가 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가 그 땅에 오는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조금도 사람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는 그가 약속의 땅에 들어와 있을 때까지도, 하나님은 그를 믿음으로 살게 하시고, 가나안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다음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Ⅰ. 당도한 땅에서 그는 별로 안위를 얻지 못했다. 그 이유는,
1. 그가 그 땅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그 땅에 가나안 사람이 가득하고, 그들이 그 땅을 소유하고 있음을 아브람은 알았다. 그들은 아마 사악한 이웃이요 악한 지주들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브람은 그들의 허락 없이는 자기의 장막을 칠 땅조차도 차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저주받은 가나안 사람들이 축복받은 아브람보다 훨씬 더 좋은 환경에 처해 있었던 것 같다.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보다 땅을 더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자.
2. 그는 거기서 정착할 곳이 없었다.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6절) “산으로 옮겨”(8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다”(9절).
여기서 다음을 살필 수 있다.
(1) 때때로 불안한 상태에 놓이고, 그 거주지를 옮기지 않을 수 없게 되는 때가 있는 것이 선한 사람들의 운명이기도 하다. 경건했던 다윗도 유리하며 방황했다(시 56:8).
(2)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이동으로 인해 갖가지 조건에 처하게 된다. 아브람은 처음에는 평지에 머물렀고(6절), 다음에는 산에서 묵었다(8절). 하나님은 서로 대립되는 것을 나란히 놓아두신다.
(3) 모든 선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요 거류자라고 생각해야 하며, 또 믿음을 가짐으로써 이 세상은 타국인 것같이 생각하여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아브람 역시 그같이 처신했다(히 11:8-14).
(4) 우리가 여기 현세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나그네길에 있으나,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자처럼 있는 힘을 다해 계속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Ⅱ. 그러나 그는 자기가 따랐던 하나님에게서 큰 위안을 찾았다.
가나안 땅에서 그들과 맺은 교제에서는 조금도 만족을 얻을 수 없었으나, 그를 그곳으로 이끄시고 그를 떠나지 않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통해서는 큰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하나님과의 교통은 말씀과 기도로 유지된다. 이로 인해, 그리고 그런 섭리에 따라서 아브람과 하나님과의 친교는 그의 순례지에서 계속되었다.
1. 하나님께서 그에게 인자한 위로의 말씀을 주셨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다음을 주목하자.
(1) 어떤 장소나 조건에서든 인생을 은혜롭게 찾아주시는 하나님의 위안으로부터 우리를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브람은 가나안 사람들 사이에서는 안정되지 못한 거류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거기서 자기에게 생명을 주고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대적자들이 우리와 우리의 장막을, 그리고 우리와 우리의 제단 사이를 떼어놓을 수는 있어도, 결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이간할 수는 없다.
(2) 더욱이 본분에 충실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설사 그들을 친구 가운데서 이끌어 낸다고 하더라도 은혜를 주셔서 그런 손실을 보충해 주신다.
(3)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계율을 성실하게 지키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만족을 주신다.
또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응하기 위해 자기의 귀중한 것을 버리거나 잃는 자는, 그 대신에 다른 보다 나은 것으로 풍성하게 받을 것이 분명하다. 아브람은 그의 “본토”를 버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 그럼 내가 이 땅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신다(마 19:29).
(4)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과 은총을 자기 백성들에게 점차적으로 계시하신다.
전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 땅을 “지시하겠다”고 약속하셨고, 지금 그 땅을 그에게 “준다”고 약속하시니, 은혜가 성장하듯이 위로함도 성장한다.
(5)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을 소유한다는 것은 위안을 받는 일이다. 그것은 섭리로써만이 아니라 약속으로써도 된다.
(6) 자녀에 대한 자비는 그 부모에게도 자비가 된다. “내가 그것을 줄 것이나, 네게가 아니라 너의 자손에게니라.”
그것은 그의 자손들이 장차 받을 은사인데, 아브람도 역시 장래 향유할 보다 나은 본향으로서 자신에게 주시는 은사로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것이 그 한 형태였다. 왜냐하면 그는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히 11:16).
2. 아브람은 자기가 세운 의식을 통해 하나님을 섬겼다. 즉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해 그 곳에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7, 8절).
(1) 이것은 특별한 기회에 이룩된 것이라고 생각해야겠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 때 거기서 그는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제단을 쌓았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오심에 보답했고, 하늘과 교제를 맺었다. 그는 결코 실패하는 일이 없어야겠다고 결심한 자처럼 했다. 그는 자기를 은혜롭게 방문하고 약속을 주신 하나님의 자비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한 자신의 신뢰와 확신을 입증했다. 적극적으로 믿는 자는 아직 성취되지 않은 약속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고, 아직 나타나지는 않았다 해도 그에게 나타나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제단을 쌓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2) 그가 어느 곳으로 옮겨가든지, 이것은 변함없는 의식(儀式)으로 지켰다.
아브람은 가나안에 당도하자, 자신은 비록 거기에서 이방인이요 거류자에 불과하지만 자기 가정을 통해 즉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의식을 세우고 지켰다.
그는 장막을 치는 곳은 어디든 거기서 하나님을 향한 제단을 쌓았으며, 그 제단은 기도로써 성별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신앙의 의식적인 부분, 곧 제물을 드리는 일을 잊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하나님을 사모하는 당연한 의무와 그 이름 부르는 일, 곧 하나님께서 지극히 기뻐하시는 영적인 제물을 드리는 일을 유념했다. 그는 여호와의 이름에 관한 것을 전파했으니, 곧 참된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믿음에 대한 지식을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은”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또한 계속해서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신실한 아브람의 자녀임을 자처하고 그의 축복을 상속하고자 하는 자는 거룩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 특히 가정에서 아브람과 같이 성실하게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안 됨을 깊이 명심하자. 가정예배 방법은 상당히 오래되어 조금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모든 옛 성도들이 이 방법을 사용했다. 아브람에게는 부유함과 큰 가족이 있었고, 이제 불안정하게 원수들의 한가운데 있었으나, 그는 장막을 치는 모든 곳에서 제단을 쌓았다. 우리도 어디를 가든지 우리의 믿음을 함께 지니고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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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으로 이주한 아브람(창 12:10-13)
Ⅰ. 가나안 땅에는 기근이 있었다. 그것은 “심한 기근”이었다.
그 비옥하던 땅이 황무지로 변해 버렸다. 거기에 살고 있던 가나안 사람들의 부정함을 벌하시기 위함이었을 뿐 아니라, 그 곳에 체류하던 아브람의 믿음을 연단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매우 쓰라린 시련이었으며, 아브람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가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1. “주려 죽게” 하려고 끌고 왔다는 불평을 하는 자손들과 마찬가지로(출 16:3), 여기까지 자기를 이끌어 내신 하나님께 대하여 아브람이 뭐라고 말할 것인가를 시험했다.
지극히 강한 믿음이 없이는 결코 그 같은 하나님의 처사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2. 약속의 땅에 관한 생각을 시험하기 위함이다.
즉 그 땅을 주시는 은사를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또는 여기에 나타나 있는 바대로 그 땅이 “그 거민을 삼키게”(민 13:32) 된 그런 때, 버리고 온 자기의 본토가 오히려 값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나 않은지를 시험함이다. 또한 그를 가나안까지 이끌어오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 곳에서 안보하시리라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니고 있는지, 또한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할 때에도 하나님을 자기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기뻐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것이었다(합 3:17, 18).
(1) 강한 믿음은 여러 시험으로 연단되어서, 그것이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된다”(벧전 1:6, 7).
(2) 하나님은 때때로 아직 신앙이 작은 초심자를 큰 어려움으로 시험하신다.
(3) 의무를 다하고 복된 길에 있는 자라고 할지라도 큰 역경과 실망에 봉착할 수 있다.
Ⅱ. 이런 기근의 시기에 처해 아브람은 애굽으로 이동했다.
한 곳에 기근이 있을 때 다른 한 곳에는 풍성함이 있게 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
위대한 공동체의 지체들인 우리는 상호간에 “나는 네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애굽 땅에 양식이 있게 하셨다. 아브람은 그 기회를 분별 있게 이용했다.
그러므로 고난에 처해 있을 때 우리를 안보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방법을 이용하되(먼저 주님 인도하심 구하라..그 인도따르기를 배우라)..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하고 믿지 않는 것이 된다. 즉 소용없는 이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여기서 아브람에 대해 특별히 주목할 것은, 그가 이런 경우에도 자기가 떠나온 본토로 돌아가자고 제의하지도 않았고, 그 곳을 향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의 본향은 가나안의 북쪽에 위치했으며, 그는 잠시라도 가나안을 떠날 필요가 있을 때는 그와 정반대 방향에 위치한 애굽으로 가기로 했으니, 이는 그가 떠나온 곳을 다시는 돌아보지도 않으려는 것이다(히 11:15, 16). 더 나아가, 그가 애굽으로 내려간 목적은 잠시 체류하고자 함이었지 거기에 정착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것을 주시해야 한다.
1. 비록 하나님의 섭리로 우리가 나쁜 곳에 처하는 일이 있다고 해도, 필요 이상으로 오래 지체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안정하지 않을 곳에서는 잠깐 체류하는 것이 좋다.
2. 선한 자도, 그가 이 세상에 속해 있을 동안에는 어디를 가든지 거류자에 지나지 않는다.
Ⅲ. <그러나...짐짓 추정따른 염려와 두려움으로!!>자기 아내를 부인하고 그녀를 자기 누이로 꾸밈으로써 아브람이 <진실 그대로 말하지 않음을 택하는> 큰 실수를 범했다.
성경의 말씀은 가장 축복받은 성도들의 비행에 관해서도 공평하게 기록해 놓았다. 이는 우리가 모방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경고를 주기 위함이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1. 그의 실수는 사래와 자기의 관계를 속인 일이다.
또 그것을 모호하게 말하고, 자기 아내와 모든 시종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쳤을 것이다. 그의 말은 물론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었다(20:12).
그러나 속이려는 [소극적]의도가 들어 있었다. 더욱이 그는 진실을 속임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진실을 부정하게 되고 그 아내와 애굽 사람들로 하여금 죄에 빠지게 하고 말았다.
2. 이 사건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어느 애굽 사람이 사래의 미모에 매혹되지 않을까 하는 질투 섞인 그의 소심한 생각이었다(애굽 여인은 그런 미모를 가질 수 없었다).
만일 아브람이 그녀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알게 되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처치해 버릴 것이며, 그들이 그녀와 결혼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브람은 그들이 간음보다도 극악한 살인죄를 범하리라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간음을 또한 그렇게 극악한 죄로 여겼고, 결혼이란 거룩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아무런 합당한 이유 없이 “그들이 나를 죽이리라”고 속단했던 것이다.
두려움은 인간을 함정으로 끌고 가며,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 때문에 죄짓는 자리에 끌린다는 것을 명심하자(눅 12:4, 5).
아브람의 미덕 중 가장 탁월한 것은 곧 그 믿음이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이미!!> 두 번이나 저에게 나타나신” 후까지도(왕상 11:9)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불신과 의혹 때문에 이렇게 넘어지고 만 것이다. 오, 슬프다! 삼나무가 흔들리니 버들가지는 어찌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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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부인한 아브람(창 12:14-20)
Ⅰ. 사래가 애굽 왕에게 정절을 빼앗길 위험에 빠졌다.
틀림없이 죄악의 위험이 우리가 처하는 가장 큰 위험이다. “바로의 대신들도(오히려 그의 뚜쟁이들이라 하겠다) 그를 보고”, 또 그녀가 얼마나 아리따운가를 알아보고는, “그녀를 바로 앞에 칭찬하였으나”, 이는 참으로 그녀를 칭찬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즉 그녀의 미덕과 정절과 믿음, 그리고 경건(이런 것들은 그들의 눈에는 아무런 미덕도 아니었다)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아리따움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것이 사람을 사로잡기에 넉넉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왕에게 천거하여, 에스더가 아하수에로의 왕궁으로 이끌려 간 것같이(에 2:8), 이제 그녀는 바로의 왕궁으로 끌려갔다. 이는 그녀를 왕의 침상에 들이기 위함이었다.
이 사건의 원인은 그녀의 미모(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유혹의 함정이기도 하다)와 아브람의 애매한 언사 때문이었다.
이렇게 모호한 말로 남을 속이는 일이 때로는 큰 죄악에 이르는 입구가 되기도 한다. 사래가 이런 위험에 처해 있는동안, 아브람은 그녀로 인해서 보다 잘 지내고 있었다.
바로는 그에게 양과 소 등을 주었으니(16절), 이는 그의 동의를 얻고 자기 누이라고 했던 그녀를 보다 쉽게 설득하기 위함이었다.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올 때는 이 같은 일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욱이 그가 자기의 아내를 부인할 줄이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한 것에서 선을 이끌어 내셨다.
이같이 하여, 죄인의 부귀는 어떻게 보면 의로운 자를 위해 축적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Ⅱ. 사래가 위험에서 방면되었다.
우리가 자신의 죄악과 어리석음으로 자초했고, 또 약속으로도 해방될 수 없을 듯한 그런 난국과 고통에서 하나님께서는 여러 차례 특전을 베푸사 우리를 구해 내셨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곧 멸망했을 것이다. 아니, 훨씬 이전에 멸망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공과에 따라 우리를 다루지 않으신다.
1.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징벌하셔서 그의 죄악이 깊어지는 것을 막았다.
죄의 길에 있는 우리를 저지하여 효과적으로 우리의 본분으로 인도해 주시고, 특히 우리가 잘못 취하고 보류해 두었던 것을 회복시켜서 본분으로 인도하시는 것은 복된 응징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바로뿐만 아니라 그의 집에도 재앙이 내렸으니, 아마 사래를 바로에게 천거한 대신들에게 특히 그러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살피자.
죄악과 짝이 되었던 자는 마땅히 형벌에 있어서도 짝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정욕에 일익을 담당하는 자는 그 재앙도 함께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바로가 받은 재앙이 어떤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재앙은, 자기들이 재앙받는 것은 죄로 인함임을 고백하게 할 수 있는 것이었거나, 또는 그 가운데 그런 재앙을 받는 데 대한 어떤 설명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2. 바로가 아브람을 힐책하고 정중히 그를 놓아 주었다.
(1) 힐책은 조용했으나 당연한 것이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이 얼마나 온당치 못한 일인가! 현명하고 선한 사람에게 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은 일인가!
신앙을 고백하는 자가 부정을 행하고 성실하지 못한 일을 행하며, 특히 거짓말을 한다면, 이런 힐책을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또 이런 힐책을 하는 자들에게 감사해야 마땅하다. 우리는 여호와의 예언자가 이방인인 한 선장에게서 꾸지람과 비난을 들은 것을 볼 수 있다(욘 1:16).
바로는 그에게 이유를 물었다.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이는 그가 만일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녀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지 않았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당연한 이유 이상으로 남을 의심하는 것이 선한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잘못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하겠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 사람들이 보다 큰 미덕과 영예와 양심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는 때가 있다.
자신이 예상했던 바보다는 바로가 선량했다는 것을 알게 된 아브람과 같이, 그런 실망을 당하는 것은 우리에게 즐거운 일임이 분명하다.
사랑은 최선의 것을 희망하라고 우리에게 일러준다.
(2) 그 석방은 친절하고도 지극히 관대한 것이었다. 그는 아브람의 아내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고 돌려주었다.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19절).
죄악을 예방하고자 하는 자는 유혹을 멀리해야 하며, 또한 죄악의 길을 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유의하자.
그는 아브람도 편안히 놓아주었다. 아브람은 자기를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실 아브람은 그것을 특별히 염려했었다.
때로 우리는 즉시 사실무근인 것으로 드러나고 말 공포로 인해 당황하고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하자.
흔히 아무 두려울 것이 없는 데서도 두려워하는 수가 있다. 사실상 아무런 위험이 없을 때도 우리는 “멸하려고 예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사 51:13). 처음에 사실대로 이야기했더라면 아브람의 위신이나 안위를 위해서도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정직이 최선의 정책”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했다”(20절)고 했으니, 다음과 같다.
① 어떤 일이 있어도 아브람을 해치지 말라고 부하들에게 명했다.
권력자들은 자기들이 남에게 아무 피해를 입히지 않는 것으로 족하게 여겨서는 안 되며, 그 종들이나 주위에 있는 자들도 남을 해하는 일을 삼가도록 억제해야 함을 유의하자.
② 기근이 끝나고 아브람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호의를 베풀어 안전하게 그 나라를 떠나도록 인도하라고 명령했다.
아마 바로는 재앙 속에서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을 것이다(17절). 또 그 재앙을 통해서 아브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자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런 재앙이 재발할 것을 두려워하여 자기 나라에서 아브람이 어떤 피해도 입지 않도록 특별히 배려를 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해하면 위험에 빠진다는 것을 알게 하심으로써, 그 백성들에게 유익한 친구들을 세워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스도의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실족케 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마 18:6).
다른 많은 구절 가운데서도 특히 시편 기자는 이 구절에 관해 105편 13-15절에서 “그들의 연고로 열왕을 꾸짖어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라”고 했다.
아마도 바로가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아브람은 애굽에 머물려는 유혹에 빠져서 약속의 땅을 잊어버리고 말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적대자들을 이용해, 이 세상이 그들의 안식처가 아니며, 따라서 그 곳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기억하게 하심을 유의하자.
끝으로, 애굽으로부터의 이 같은 아브람의 해방과 그 후 그 자손들의 해방과의 유사성을 살펴보자.
아브람이 기근의 시기에 애굽으로 간 때로부터 430년 후에, 그 자손들도 역시 기근을 당하여 거기에 갔으며,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림으로써 그를 끌어내심과 같이 그들에게도 그러했으며, 아브람이 바로에게 놓임받고 애굽 사람들의 노획물로 부유하게 된 것과 같이 그들도 그러했다.
그러므로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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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아브람을 부르심
창세기 1-11장은 인류의 초기 역사에 대해 간략히 서술하고, 12-50장은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에 대해 서술한다.
===1-9절, 아브람을 부르심
[1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이것을 하나님의 특별계시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연만물을 통해서도 자신의 존재와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시고 역사를 통해서도 자신의 공의의 통치를 나타내시지만, 특별한 경우에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성경책이다. 그러므로 그 내용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기준과 규범이 된다.
아브람과 그의 아버지 데라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나 제2의 고향인 하란은 우상숭배의 땅이었다(수 24:2).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며 그를 부르셨다. 그것은 그의 기쁘신 뜻에 따른 것이다.
그를 부르신 때는 그가 하란에 거하였을 때인 것 같다. 성경 다른 곳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내셨다고 말한다(창15:7; 느 9:7).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에게 어떤 암시를 주셨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그를 본격적으로 부르셨다. 하나님께서는 한 경건한 민족을 만들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모든 죄를 버리고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신 것은 분리의 시작이었다. 데라는 분리를 위한 과도기적 역할을 했다. 이제, 아브람에게 분리된 삶, 성별된 삶이 필요했다.
나이 든 친척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아브람이 죄악된 전통과 풍습을 완전히 떠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제, 그에게 새 가문의 시작이 필요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한 큰 민족을 만들기를 원하셨고 그들에게 한 땅을 주기를 원하셨다.
[2-3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베라카 )[복](KJV, NASB, NIV)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복을 약속하셨다. 그는 아브람으로 큰 민족을 이루고 그에게 복을 주어 그의 이름이 크게 되게 하고 그가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는 아브람을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실 것이며 땅의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해 복을 얻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해 복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은 창세기22:18에서와 이삭(창 26:4)과 야곱(창 28:14)에게서도 반복된다. 그것은 메시아 약속이라고 보인다.
그것은 구약시대에 아브라함과 다윗을 이어서 내려왔다. 메시아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실 뿐 아니라, 또한 다윗의 자손으로 예언되었다(렘 23:5; 겔 34:23;호 3:5).
신약성경 마태복음 1:1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음을 증거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다(요 5:39).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를 통해 구원의 복을 얻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값없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영생을 얻었고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을 얻은 것이다.
[4절]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75세였더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였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면 가고 가지 말라 하시면 가지 않는 것이 순종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향을 떠나라 명하실 때 떠났다.
그는 우상숭배의 삶을 청산하였다. 그는 세상과 구별된 삶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마땅한 삶이었다.
롯도 아브람과 함께 갔다. 롯이 아브람과 동행한 것을 보면, 그는 아브람의 영향으로 비교적 경건하였던 것 같다.
베드로후서 2:7-8은 롯을 의로운 자라고 증거한다.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75세이었고 아마 그의 부친 데라가 죽기 전이었을 것이다. 창세기 11:26은 데라가 70세에 아브람을 낳았다고 말하므로,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부친 데라는 145세이었을 것이다. 창세기 11:32에 데라가 205세까지 살고 하란에서 죽었다고 기록한 것은 창세기의 저자 모세가 역사를 기술할 때 데라에 대해 먼저 쓰고 그 다음에 아브람에 대해 쓰는 기술 방식 혹은 습관이었다.25)
[5-6절]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테레빈스나무]에 이르니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여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착했다.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라는 표현은 그가 하란에서 여러 해 동안 살았던 것을 증거한다.
그러나 그는 정들었던25) 모세는 후에 이스마엘의 죽음을 언급한 후 이삭에 대해(창 25:17, 20), 또 이삭의 죽음을 언급한 후 야곱에 대해 서술하였다(창 35:28; 37:2).
그의 모든 환경을 정리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는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목표는 분명하였고 그는 그 목표대로 그 땅에 들어갔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위해 예정하시고 그에게 지시하신 땅이었다.
그 땅은 창세기를 쓴 모세가 강조하고자 하는 땅이었다. 모세는 그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땅이며 이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갈 땅임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장은 가나안 땅을 여러 번 언급한다.
5절,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절,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창세기 11:31, “[데라가]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아브람은 가나안 땅 중부,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렀다. ‘상수리 나무’라는 원어(엘론 )는 테레빈스(terebinth) 나무라고 한다.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함의 아들 가나안(창 9:22)의 자손이다.
그들은 후에 그들의 죄 때문에 완전히 멸망할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다(창 15:16).
[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온 아브람에게 또 다시 나타나셨다.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특별한 방식으로 종종 나타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습으로 직접 나타나기도 하셨고, 구름이나 불 가운데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도 하셨고, 또 자신의 음성으로나 기적들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기도 하셨다.
이때는 아마 그가 직접 나타나신 것 같다. 하나님의 이런 직접 나타나심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시다(요 1:14; 14:9).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는 지구의 한 지역을 누구에게 주실 권한이 있으시다. 그는 온 세상의 창조자요 통치자요 주인이시므로(시 24:1) 그럴 권한이 있으시다.
출애굽기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느니라.” 신명기 10:14,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위해 단을 쌓았다.
‘단’이라 는 원어(미즈베아크 )는 ‘[짐승을] 잡아죽인다’(자바크 )는 말에서 나왔다. 그것은 ‘짐승을 죽여 제사를 드리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었다.
[8-9절]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네게브](NASB, NIV)으로 옮겨 갔더라.
아브람은 그곳에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거처를 정하고 장막을 쳤고 그곳에서도 하나님을 위해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은 노아가 홍수가 그친 후에 방주에서 나와 하나님께 단을 쌓고 번제를 드린 것과 같았다.
짐승 제사에는 하나님의 긍휼로 예비하실 속죄제물을 믿는 뜻이 있고 또 참된 헌신과 순종을 다짐하는 뜻도 있었다.
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예배와 기도의 삶, 곧 경건한 삶을 가리킨다.
그것은 셋의 아들 에노스의 삶이었고(창 4:26), 에녹의 삶이었고(창 5:22, 24), 또 노아의 삶이었다(창 6:9, 22).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오늘날 성경을 통해 말씀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의 저장소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기준이며 규범이다. 성경 외의 다른 계시를 구하거나 주장하는 것은 위험할 뿐 아니라 잘못이다. 성경 외의 하나님의 계시를 믿는 사람은 성경보다 하나님의 현재적 직접 계시에 무게를 두게 되고 그것은 마귀의 미혹에 떨어지는 길이다. 요한계시록 22: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누가복음 16:29, 31,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우리는 날마다 성경 읽기를 힘쓰고 성경을 듣고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상숭배의 세상을 떠나서 약속의 땅으로 가야 한다.
우리는 불경건하고 음란한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하고 부도덕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과 함께 멸망을 받고 지옥불에 던지울 것이다. 오늘날 약속의 땅은 세상에서는 교회이며, 또 죽은 후에 혹은 주의 재림 때에 들어갈 영광의 천국이다.
죄인들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어야 하며 영생을 얻어야 한다. 그러면 성령께서 그들 속에 오셔서 그들에게 참된 위로와 평안을 주시며 그들을 도우셔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하실 것이다. 구원 얻은 성도들의 세상에서의 삶은 날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육신의 죄성과 싸워 이기는 것이다. 이것이 성화(聖化)의 과정이다. 이것이 구원 얻은 성도들의 정상적인 삶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단을 쌓는 생활을 힘써야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하나님께 단을 쌓는 일을 힘썼다. 그것은 경건한 삶이며 예배하는 삶이다. 우리가 구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교회에 들어오고 천국을 소망하게 된 후,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힘쓰고 기도하며 찬송 부르고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들 중에 첫 번째로 가치 있고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을 우리의 삶의 첫 자리에 모시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가장 귀히 여기자.
===10-20절,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감
[10절]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인도하셔서 거하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였기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가 우거하려 하였다.
기근은 보통 하나님의 징벌로 온다. 아마 그 땅 거주민의 죄 때문에 기근이 왔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살던 아브람의 가족들에게도 타격이 왔다.
아브람은 사람의 일반적 생각을 따라 애굽으로 내려갔다. 애굽은 나일강 하류에 비옥한 땅이 많은 곳이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므로 아브람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거하라고 명하신 땅에 머물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적 염려와 지혜와 판단으로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것은 낭패의 길이었다.
사사시대에 엘리멜렉과 나오미도 비슷한 생각으로 흉년을 피해 유다 땅을 떠나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했다가 낭패했었다(룻기).
[11-12절]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아브람은 애굽에 가까이 왔을 때 한가지 걱정을 하게 되었다. 사람이 믿음으로 행하면 담대함과 평안이 있지만, 인간적인 생각과 판단으로 행할 때는 염려와 걱정이 생긴다. 아브람의 걱정은 죽음에 대한 걱정이었다.
그의 보기에 그 아내 사래는 아름다운 여인이었기 때문에, 아브람은 애굽 사람이 자기의 아름다운 아내를 보고 자기를 죽이고 자기 아내를 빼앗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낯선 땅에 우거할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생각과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고 그를 도우시고 지키실 것을 모르는 생각이었다.
[13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아브람은 그런 상황에서 한가지 인간적 대책을 생각하여 아내에게 요청하였다.
‘원컨대’라는 표현은 아브람이 그 옛 시대에 평소에 아내에게 위협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고 인격적이고 사랑을 가지고 대했음을 보이는 것 같다.
그는 아내에게 사람들에게 “나는 그의 누이라”고 말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고 말했다.
그는 아내를 지켜줄 힘이 없었다. 그래서 쓸데없이 만용(蠻勇)을 부리지 않고 자기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인간적 지혜를 발휘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래가 그의 누이라는 말은 거짓말이다. 사래는 그의 누이였으나 지금은 그의 아내이다. 아브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거짓말을 한 것이다.
거짓말은 악이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 두려운 상황에서 거짓말을 했다. 그것은 경건한 아브람의 연약한 모습이었다.
[14절]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아브람의 예상대로 애굽 사람들은 그의 아내 사래의 심히 아름다움을 보았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났을 때 75세이었고(창 12:4) 아브람과 사래의 나이 차이가 10살이므로(창 17:17), 아브람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 사래의 나이는 65세 이상이었는데도 그 여자는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그의 창조 세계의 본래의 모습이다. 아름다움의 주된 한 요소는 조화로움이다.
사람의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그의 얼굴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오늘날의 아름다움은 음란함으로 더럽혀져 있다. 그러나 인간의 참된 아름다움은 인격성과 도덕성과 단정함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15절]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애굽 왕 바로는 대신들의 칭찬을 듣고 사래를 궁으로 취하여 들였다. 아브람은 하루아침에 아내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는 가나안 땅의 기근을 피하고 평안한 삶을 누리려고 애굽으로 내려갔지만, 그곳에서 아내를 빼앗기는 슬픔과 낭패를 당했던 것이다.
그는 믿음으로 행하는 대신에 인간적 지혜와 판단으로 행했을 때 큰 것을 잃어버렸다.
아브람의 슬픔과 낭패는 하나님의 징책이었다고 보인다. 그것은 마치 훗날에 엘리멕렉과 나오미 가족의 경우와 같았다.
룻기 1:3-5에 보면, 기근을 피해 약속의 땅을 떠나 모압으로 간 나오미는 그곳에서 남편을 잃었고 자신의 두 아들을 위해 며느리를 얻었으나 그곳에 거한 지 10년 즈음에 두 아들도 다 죽었고 두 며느리와 함께 남겨졌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라고 말했다(룻 1:13). 또 그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후 이웃 사람들에게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다”고 말했다(룻 1:21).
아브람은 처음부터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만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더라면,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진실했을 것이며 어려울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응답을 얻었을 것이다.
후에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을 받아 1,754명의 유대인들을 인도하여 파사 나라로부터 유대 땅으로 돌아오고자 했을 때 길에 대적들의 위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군대의 지원을 요청치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였고(스 8:21-23) 무사히 잘 도착하였다.
[16절]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애굽 왕 바로는 사래를 인해 아브람에게 후한 선물을 주었다.
비록 아내 대신 양과 소와 남녀 종들과 암수 나귀와 약대를 많이 얻었지만, 그것이 아브람에게 무슨 기쁨과 복이 되었겠는가?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아브람은 비로소 애굽으로 내려오려 했던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잘못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는 기근이 있었더라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머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1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사래 때문에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다. 그것은 아마 무서운 질병이었을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큰 재앙을 내리셨는가? 그것은 바로의 행위가 간음죄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신성하고 중요한 제도이며 그것을 어기는 것은 간음죄가 된다.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며 결혼 관계를 잘 지켜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혼을 미워하시며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말 2:16).
더욱이, 사래는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의 아내이며 남의 아내가 되어서는 안 될 자이었다.
[18-20절]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원문)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바로는 그 재앙이 사래 때문에 온 것을 깨달았다. 사람은 양심이 있어서 옳지 않은 일에 가책을 느낀다.
살인, 간음, 도적질이 죄악임을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은 양심 때문이다.
요나의 탄 배가 큰 풍랑을 만났을 때 선원들은 그 재앙이 누구 때문에 왔는지 알기를 원했다(욘 1:7).
헤롯 왕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려 하였고 또 그의 말을 들을 때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었다(막 6:20).
그들은 다 양심의 음성을 들은 것이었다.
바로가 양심적으로 두려워하고 사래를 돌려보낸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베푸신 크신 은혜이었고 긍휼하신 간섭과 도우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내를 빼앗겨 슬퍼하며 낙심했을 아브람을 위해 비상하게 개입하셨고 그를 도우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주권적으로 섭리하시며 선한 뜻을 이루신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했다(롬 8:28).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기근이 있다고 [지레 겁을 먹고 주께 여쭘 없이 육을 따라 함부로]애굽으로 내려가지 말자.
우리는 질병과 궁핍과 각가지 고난과 어려움이 있다고 세상으로 돌아가지 말자.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과 그의 말씀 안에 거하고 참된 교회 안에 거해야 한다. 그곳이 약속의 땅 가나안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평안과 기도 응답과 그의 보호하심이 있다. 우리는 고난 중에 낙망하여 세상으로 가지 말자.
둘째로, 우리는 목숨 때문에 거짓말하지 말자. [오로지 주 앞에서 진실함, 사람 앞에 정직함으로 대하기]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부활과 영생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굳게 믿고 범죄치 말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자.
주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0:28).
우리는 죽음을 겁내어 비굴하게 거짓말하지 말자.
셋째로,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실수하든지, 고의로 범죄하였든지, 그 어느때라도 속히!! 돌이킴으로써]하나님의 긍휼하신 섭리를 믿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실수를 용서하시고 그를 도우시고 구원하셨다.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말했다(시 23:4). 시편 91:1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라고 말했고, 시편 121:8은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롬 8:28) 하나님을 믿자.
===
****Q의 약속의 세 항목--아브라함으로 큰 민족 이루게 하시는 것,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는 것, 아브라함으로 땅의 모든 족속의 복이 되게 하시는 것....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전파된 복음이었으며...복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임을 나타내고 있음..(갈3:8)...마3:2를 보면, 복음 전파는 맨 처음이 바로 천국 도래 임박 일깨움으로, [회개하라, 천국(하늘 왕국)이 가까왔느니라]의 말씀으로 시작되며, 큰 민족은 다름 아니라 바로 왕국을 의미함..둘째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네게 복을 주어>..그 말씀은 그 영, 곧 하나님 자신을 주신다 하심이요...세째로,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 축복의 혜택자는 결국 아브라함이 경험하고 누린 바 하나님 그분 자신을 땅의 모든 족속이 얻고 경험하며 누리게 됨... 곧 하나님자신께서 모든 민족을 위한 누림이 되심을 의미한다.<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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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동기와 힘)--
*1.Q이 친히 나타나심 : <유일무이의 지존자>영광의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셔서..행7:2, 55-56...직접 생생하게 복음 전파 하심<아브라함은 큰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 Q이 친히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큰 민족을 형성하시려 하심...모든 민족 중 하나님을 믿는 자마다 아브라함의 복을 함께 받게 되리라..갈3:8>..(이것은 바로!!) 듣는 이마다 회개함 통해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고후4:6) 보게 하심인 것.
*2.Q이 친히 부르심(=듣는 이에게 직접 말씀하시며 교통하심) :
*3.Q의 약속하심(Q이 말씀하신 대부분은 그분의 약속...<너를 위한 땅을 (네가 한번도 가 보지 못한 그 땅을) 내가 예비해 두었다...나를 신뢰함으로써 바로 그 땅으로 떠나도록 하거라..너는 스스로 자신을 위해 이름 낼 필요가 없단다....내가 친히 너를 위해 모든 것 이루리라, 너를~하게 하리라),
....1)큰 민족 이루게 하려하심...Q이 약속하신 큰 민족의 범위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전체 + 신약의 참된 교회 + 내세의 천년왕국 + 영세의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구성된 하나님의 나라.(새 예루살렘이 그 안에 포함됨)>...[천년왕국에는 두 부분이 있다...과거와 현재의 이기는 자들마다 그리스도의 공동왕(co-king)으로서 천년왕국의 하늘에 속한 부분(=천국.kingdoms of heaven)에 있게 되고, 땅에 속한 부분은 메시야의 왕국으로서 장래의 유대인들로 구성될 것]
....2)부르신 자를 축복하시려고... 이 축복은 Q께서 사람에게 주고자 하시는 모든 것, 곧 Q자신이 이 시대와 다음 시대에 소유하신 모든 것을 포함한, 창조와 구속의 축복들임...갈3:14절로 볼 때, 이 축복은 결국 그 영(성령, 믿는이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영...곧 하나님 그분 자신)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3)부르심 받은 자로 하여금 땅의 모든 족속의 축복이 되게 하시려고.... 이제 아담 족속을 잠시동안 포기/단념하시고 부르심 받은 아브라함 족속에게로 아주 돌이켜버리신 것처럼 보였으나, 그분의 약속 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또한 아브라함에게서 아담의 모든 족속[=곧 피조된 모든 족속]에게로 또다시 한번 돌이키고 계신다(갈3:14)...즉, 역방향 전환이다!!.."나는 내 자신을 축복으로 네게 줄 뿐 아니라 너로 비참한 모든 아담족속에게 또한 참된 축복이 되게 하겠다. 다 함께 돌아가자"
===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먼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어짐이, 그 후에 다스리는 대표됨이 나오지만((즉, 원래 목적에서는 형상이 먼저이고 다스림이 나중이다!!))...타락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은 다스림의 대표됨 통해 (회게를 통해 돌아 오도록 하시려) 다스림을 먼저 베푸시고 이제 형상과 모양을 만들어 가신다..이 후에는 (회개한 심령에 부어지신 성령님 통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 이르도록 빚어가고 계신 바) 온전한 형상과 모양의 사람으로서 주님을 대표하며 다스리게 하시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