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05.10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민23.발람의 예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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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23장  [484. 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


**패역은 troubles, 곧 백성들로 하여금 패역되게 하는 무정하고 악한 일들로서 심지어 허물보다 더 악함....Q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타락과 정죄의 속박에서 선택-구속-구원하여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기에] , 우리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교회 생활 안에서 패역이나 허물을 보지 않으신다!!(또한 왕 그리스도의 소리가 그 가운데 있기에 더욱 그러기에!!, 영광스럽다)


1.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기럇후솟 인근, 바알 산당이 있는 산 정상에) 제단 일곱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준비하소서 하매

2.  발락이 발람의 말대로 준비한 후에 발락과 발람이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리니라

....제단 쌓는 것은 Q 예배 방식이지만 일곱 단을 쌓음은 일종의 혼합이다...그리고 바알에게 드린 것인가 여호와께 드린 것인가 분명치 않다...이처럼 혼합적 경배는(다양한 우상과 형상들과 Q께 동시에 경배하는) 천주교에서 볼 수 있는데, 사실상 그것은 우상 숭배일 뿐이다...분명히 모호하게 바알에게 드려진 예물임에도 불구하고, Q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발람을 (Q이 주시는 말만 할 수 있도록 그의 입을 통제하심으로써) 다스리고 계셨다. 7-10절은 발람에게 주어진 Q의 영감에 따라 신언으로 말했던 비유를 구성한 것으로서, 사람의 생각은 결코 그러한 비유를 구성할 수 없다.

3.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나는 저리로 가리이다 여호와께서 혹시 오셔서 나를 만나시리니 그가 내게 지시하시는 것은 다 당신에게 알리리이다 하고 언덕길로 가니

4.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시는지라 발람이 아뢰되 내가 일곱 제단을 쌓고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렸나이다

5.  여호와께서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이르시되 발락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지니라

6.  그가 발락에게로 돌아간즉 발락과 모압의 모든 고관이 번제물 곁에 함께 섰더라

7.  발람이 예언을(원어적 측면에서 볼 때, "속담"이라기 보다는 "비유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전하여 말하되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쪽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속담, 격언, 비유담....lv;m;(4912, 마샬) 

마샬(명남)은 마샬(lv';m; , 4911)에서 유래했으며, '속담, 격언, 비유담'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38회 나온다.

---마샬을 단순히 '격언'으로 번역하는 것은 이 단어의 광범위한 영역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 단어에 대한 많은 역어에 의해 시사된다. 우리들은 격언을, 금언적인 진리의 내용을 지니는 짧고 함축적이며 풍자적인 말로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마샬은 광범위한 비유(따라서 70인역본은 종종 파라볼레로 번역함)의 동의어가 될 수 있다.(겔 17:2과 겔 2-24, 겔 20:49과 겔 45-49, 겔 24:3과 겔 3-14). 

---이 단어 마샬은 광범위한 교훈적인 이야기인 속담이라고도 언급할 수 있다(예: 잠 1:8-19). 한 개인(사물, 삼상 10:12, 욥, 욥 17:6) 혹은 사람들의 집단(이스라엘, 시 44:14)은 하나의 마샬로 기능할 수 있다. 이러한 결정적인 관계에서 삼상 10:12의 구절을 살펴보자: "그러므로 속담이 되어 가로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더라". 여기에서 포함된 것은 공개적인 본보기의 창작인데, 이 경우에는 하나의 실례, 즉 왕의 공적인 기괴한 행동이 문제가 된다. 따라서 '속담'은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마샬을 '말거리'로 번역하는 구절들을 살펴보자. 시 44:14, 시 69:11, 렘 24:9, 겔 14:8, 신 28:37, 왕상 9:7, 대하 7:20, 욥 17:6. 이러한 각 성구에 의하면 어떤 유형의 운명이 이스라엘 민족 혹은 개인에게 임하였거나 혹은 임할 것이다. 결과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중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마샬로 삼으신 것이다. 욥은 그의 위안자들과 동료들에 대하여 마샬이 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순한 경멸과 조롱 이상의 더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요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욥을 공적인 본보기, 즉 각 세대에 대한 객관적 교훈으로 삼으신다는 것이다: "보고 숙고하라, 그리고 내 심판 아래 있는 네 생명을 보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이와 유사하게 3회에 걸쳐 선지자들은 마샬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사야가 바벨론 왕에 대하여(사 14:4 이하), 미가가 자기 백성에 대하여(미 2:4), 비슷한 것으로서 하박국(합 2:6), 또한 발람의 이야기에서 그러한 구절을 추가할 수 있다: "발람이 노래(KJV는 이야기)를 지어"(민 23:7, 민 23:18, 민 24:3, 민 24:15, 민 24:20, 민 24:21, 민 24:23). 이와 같은 각 실례에서는 객관적 교훈이 있다. ---오만한 자들은 비천해진다. 저주를 받는 자들이 역전되어 축복 받는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하버트(A. S. Herbert)는 구약성경에서 '속담', 즉 마샬은 "명백히 인식할 수 있는 목적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원하는 것에서 구별되는 것으로 실제적인 이해를 신속하게 하고...듣는 자나 읽는 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 자신의 상황 혹은 자신의 행위에 관한 판단을 내리도록 하는 목적을 가리킨다. ...이 용법은 예수님의 비유에서 가장 뛰어난 표현법이 된다"라고 적절하게 언급하였다(Herbert, p. 196).(참조: R. D. CULVER; BDB). 

8.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

9.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Q의 특별히 빼어 낸 소유된 거룩한 백성이기에 뭇 열방들처럼 여기는 것을 금하셨음을 의미.

10.  야곱의 티끌을 누가 능히 세며 이스라엘 사분의 일을 누가 능히 셀꼬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 하매

......티끌 같은 야곱이 이제는 셀 수 없이, 헤아릴 수 없이 증가하여 그 누구라도 그의 1/4조차 셀 수 없으리라고 증가된 축복을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으며, 발람은 그것을 보게 해 주신 Q께 축복과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있고, 진정코 주께서 의인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11.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그대가 어찌 내게 이같이 행하느냐 나의 원수를 저주하라고 그대를 데려왔거늘 그대가 오히려 축복하였도다

12.  발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이까

===발람의 두 번째 예언

13.  ○발락이 말하되 나와 함께 그들을 달리 볼 곳으로 가자 거기서는 그들을 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끝만 보리니 거기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라 하고

14.  소빔 들로 인도하여 비스가 꼭대기에 이르러 일곱 제단을 쌓고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리니

15.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내가 저기서 여호와를 만나뵐 동안에 여기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하니라

16.  여호와께서 발람에게 임하사 그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이르시되 발락에게로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지니라

17.  발람이 가서 본즉 발락이 번제물 곁에 섰고 모압 고관들이 함께 있더라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

18.  발람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발락이여 일어나 들을지어다 십볼의 아들이여 내게 자세히 들으라

19.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20.  내가 축복할 것을 받았으니 그가 주신 복을 내가 돌이키지 않으리라

21.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Q이 [이스라엘을] 보시는 신성한 관점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Q의 관점은 우리의 관점과 분명히 다르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의 결점에 대해 말할 때마다 극도로 주의해야 한다)..비록 일견해서 보기엔 어떤 성도에게 결점이 많아 보인다 해도 Q의 관점에 따르면 이 성도는 완전하다

....Q의 백성은 두 방면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 그들 자신 안에서의 신분과 Q의 구속 안에서의 신분인데, Q의 구속 안에서 어떻게 보시는 가, 이것이 주님이 보시는 참된 우리 신분의 실상이다. 즉, 우리 자신들 안에서는 비록 많은 결점이 있으나(그래서 위축되고 무능-무력-연약-무지무각해 보이지만), Q의 구속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결점이라곤 하나도 없다 하심이다.

.....잊지말라, 그러므로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Q이 우리를 보실 때에는 그분은 우리 자신안의 우리의 어떠함을 따라 보시는 것이 아니라(그것은 아예 잊어버리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어떠함을 따라 보시는 것이다. Q은 믿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넣으셨다(고전 1:30) 그분이 그리하셨기에 우리를 보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보신다는 것이요, 우리에 대한 Q의 관점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전혀 아무런 허물도 없다는 것이다.  교회 생활에 대한 Q의 관점도 원칙은 동일하다. 우리의 관점에 따르면 교회 생활은 아주 형편 없게 보일 수 있지만 Q의 관점에 따르면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우리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 영광스러운 교회 생활!] 교회 생활은 더할 나위 없이 영광스럽다..Q께서는 교회 안에서 허믈을 보지 아니하신다!! 

.... 왕의 소리, 곧 ((친히 상호 교통하시며 돌보시는 목자로서)) 그리스도의 소리가 그들 중에 있음이다!!

22.  [전능의 창조자]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의 힘이 들소와 같도다

23.  [그러므로]야곱을 해할 점술<마법.enchantment..omen)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divination)이 없도다 이 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진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냐 하리로다

@@허물<점술.사술.(거짓 예고)> : omen...헛됨, 거짓, 사악, 불행, 고통.....@w

아웬(명남)은 '공허, 헛됨, 우상, 거짓말, 속임, 사악, 부정, 고통, 불행, 역행' 등을 의미한다.

아벤(명남)은 본래 두 국면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사악한데로 나아가는 고생을 강조하는 것, 다른 하나는 우상 숭배로 나아가는 헛됨을 강조하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85회 나오며 다음을 의미한다.

(a)  아웬은 '공허 emptiness, 헛됨 vanity, 우상'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아웬은 '텅빈, 헛된 것', 특히 '우상의 헛됨'에 대해 사용되었다. 

슥 10:2에서 "대저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또한 사 41:29에서는 우상들이 그들의 예배자들을 속인다고 한다: "과연 그들은 다 헛되며 그들의 행사는 공허하며 그들의 부어 만든 우상은 바람이요 허탄한 것 뿐이니라".

그리고 삼상 15:23에서는 우상숭배와 연관된 모든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심지어 사 66:3에서는 우상 자체에 대해서 사용되었다: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그러므로 호세아서에서 우상을 섬기는 도성인 베트엘("하나님의 집")은 경멸적으로 베드아웬("우상의 집")으로 불리운다. 벧엘을 나타내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인 "벧아웬"(호 5:8, 호 10:5, 호 10:8, 암 1:5, 겔 30:17)이란 어구에서 우상숭배를 나타내는 명칭이 되었다(호 5:8, 호 10:5, 호 10:8, 암 1:5, 겔 30:17). 암 5:5에서는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 즉 '아무것도 아닌 것, 헛된 것'이 될 것이라고 한다.

(b)  아웬은 말의 헛됨, '거짓, 사기, 속임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시 36:4, 잠 17:4).

이 단어는 잠 6:12, 잠 6:18, 잠 19:28, 잠 22:8, 사 29:20, 슥 10:2에서 '속임수, 사기, 거짓'을 뜻하는 표준적인 히브리어 단어들의 의미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c)  아웬은 '사악' wickedness, '부정, 죄악' iniquity(민 23:21, 욥 36:21, 사 1:13), '악인'(욥 22:15, 욥 34:36), '행악자'(욥 31:3, 욥 34:8, 욥 34:22, 잠 11:7)에 대해 사용되었다.

(d)  아웬은 '불행, 고통, 역경, 재난(앙)'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죄는 범죄자가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야기시키는 '고통과 슬픔'의 고되고도 지치게 하는 짐이다. 이런 의미는 시 90:10에 나온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RSV는 고생) 뿐이요". 또한 이와 유사한 의미가 잠 22:8에 나온다: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니 그 분노의 기세가 쇠하리라". 시 55:4에서는 "저들이 나에게 재앙을 던졌다"고 한다.

나의 슬픔의 아들(베노니) (창 35:18), "슬픔의 떡"(호 9:4), 그리고 시 90:10, 욥 15:35, 합 3:7 등에서 불행과 고통을 나타낸다.(참조: Gesenius; TWOT). 

@@패역<복술..저주>..divination(전조.예언)...수고, 노동, 고생, 해악, 재해...lm;[;(5999, 아말) 

아말(명남, 여)은 아말(lm'[; , 5998)에서 유래했으며, '수고 toil, 노동, 일 labor, 고생 trouble, 해악, 재해 mischief'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54회 나온다.

명사 아말은 노동과 수고의 불쾌한 요소와 관계가 있다. 

KJV에서 이 단어를 번역하는데 사용된 다양한 동의어들은 이 단어의 부정적 색채를 암시해준다. 

이러한 것은 이 명사로 표현되는 불만이라는 의미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부정적 요소는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아말과 함께 중언법 및 대구법으로 사용됨으로써 부연된다. 야곤(고통 torment, 슬픔 sorrow) 렘 20:18, 카아스(성나게 함 provocation) 시 10:14, 오니(불행 misery) 신 26:7, 아원(고생 trouble) 시 90:10, 샤우(무가치함 worthlessness) 욥 7:3, 쇼드(멸망 destruction) 잠 24:2, 라(악 evil) 합 1:13 등등. 

24.  이 백성이 [그 어떠한 전쟁이라도 임전에 있어서 늘 항상 당연히!!]암사자 같이 일어나고 수사자 같이 일어나서 움킨 것을 먹으며 죽인 피를 마시기 전에는 눕지 아니하리로다 하매

25.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그들을 저주하지도 말고 축복하지도 말라

26.  발람이 발락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은 내가 그대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지 아니하더이까

===발람의 세 번째 예언

27.  ○발락이 발람에게 또 이르되 오라 내가 너를 다른 곳으로 인도하리니 네가 거기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기를 하나님이 혹시 기뻐하시리라 하고

28.  발락이 발람을 인도하여 광야가 내려다 보이는 브올 산 꼭대기에 이르니

.....비스가 산이 속한 아바림 산맥의 산들 중 하나로서 진영 전체가 아니라 (시야가 가려져서) 그중의 일부만 보이는 곳...비스가 산 북서쪽에 위치

29.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일곱 제단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준비하소서

30.  발락이 발람의 말대로 행하여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리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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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hen Balaam said to Balak, "Build seven altars for me here, and prepare seven bulls and seven rams for me here."

2.  And Balak did just as Balaam had spoken, and Balak and Balaam offered up a bull and a ram on each altar.

3.  Then Balaam said to Balak, "Stand beside your burnt offering, and I will go; perhaps the LORD will come to meet me, and whatever He shows me I will tell you." So he went to a bare hill.

4.  Now God met Balaam, and he said to Him, "I have set up the seven altars, and I have offered up a bull and a ram on each altar."

5.  Then the LORD put a word in Balaam's mouth and said, "Return to Balak, and you shall speak thus."

6.  So he returned to him, and behold, he was standing beside his burnt offering, he and all the leaders of Moab.

7.  And he took up his discourse and said, "From Aram Balak has brought me, Moab's king from the mountains of the East, 'Come curse Jacob for me, And come, denounce Israel!'

8.  "How shall I curse, whom God has not cursed? And how can I denounce, whom the LORD has not denounced?

9.  "As I see him from the top of the rocks, And I look at him from the hills; Behold, a people [who] dwells apart, And shall not be reckoned among the nations.

10.  "Who can count the dust of Jacob, Or number the fourth part of Israel? Let me die the death of the upright, And let my end be like his!"

11.  Then Balak said to Balaam, "What have you done to me? I took you to curse my enemies, but behold, you have actually blessed them!"

12.  And he answered and said, "Must I not be careful to speak what the LORD puts in my mouth?"

13.  Then Balak said to him, "Please come with me to another place from where you may see them, although you will only see the extreme end of them, and will not see all of them; and curse them for me from there."

14.  So he took him to the field of Zophim, to the top of Pisgah, and built seven altars and offered a bull and a ram on [each] altar.

15.  And he said to Balak, "Stand here beside your burnt offering, while I myself meet [the] [LORD] yonder."

16.  Then the LORD met Balaam and put a word in his mouth and said, " Return to Balak, and thus you shall speak. "

17.  And he came to him, and behold, he was standing beside his burnt offering, and the leaders of Moab with him. And Balak said to him, "What has the LORD spoken?"

18.  Then he took up his discourse and said, "Arise, O Balak, and hear; Give ear to me, O son of Zippor!

19.  "God is not a man, that He should lie, Nor a son of man, that He should repent; Has He said, and will He not do it? Or has He spoken, and will He not make it good?

20.  "Behold, I have received [a command] to bless; When He has blessed, then I cannot revoke it.

21.  "He has not observed misfortune in Jacob; Nor has He seen trouble in Israel; The LORD his God is with him, And the shout of a king is among them.

22.  "God brings them out of Egypt, He is for them like the horns of the wild ox.

23.  "For there is no omen against Jacob, Nor is there any divination against Israel; At the proper time it shall be said to Jacob And to Israel, what God has done.

24.  "Behold, a people rises like a lioness, And as a lion it lifts itself; It shall not lie down until it devours the prey, And drinks the blood of the slain."

25.  Then Balak said to Balaam, "Do not curse them at all nor bless them at all!"

26.  But Balaam answered and said to Balak, "Did I not tell you, 'Whatever the LORD speaks, that I must do'?"

27.  Then Balak said to Balaam, "Please come, I will take you to another place; perhaps it will be agreeable with God that you curse them for me from there."

28.  So Balak took Balaam to the top of Peor which overlooks the wasteland.

29.  And Balaam said to Balak, "Build seven altars for me here and prepare seven bulls and seven rams for me here." 

30.  And Balak did just as Balaam had said, and offered up a bull and a ram on [each] al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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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23장 (개요)

이 장에는 발락과 발람이 이스라엘을 해하고자 노력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모세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그것을 전혀 알지도 못했으며, 또 그 올가미를 쳐부술 방법도 몰랐던 것 같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지켜 주시며,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은 그들의 중재나 계략이 없이도 능히 그들의 시도를 좌절시킬 수 있으시다.

1.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하는 첫 번째 시도.

   (1) 그 준비로서의 제사(1-3).

   (2)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내리신 정반대의 지시(4, 5).

   (3)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대신 축복하라고 강요당한다(7-10).

   (4) 발락의 커다란 실망(11, 12).

2. 똑같은 양상으로 이루어진 두 번째의 시도. 그러나 또 같은 방법으로 실패한다(13-26).

3. 세 번째 시도를 위한 준비(27-30). 그 실행은 다음 장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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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람의 첫 번째 신탁(민 23:1-12)

Ⅰ.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한 커다란 준비가 베풀어졌다. 

이러한 준비의 목적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저버리고 모압 편에 서시든지 아니면 중립적인 입장에 서시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오! 하나님께서 인간이 시키는 대로 하리라고 생각하는 미신의 어리석음이여! 

발람과 발락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마련하지 않은 제단과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을 매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신다”고 생각한 것 같다(시 50:13). 

거기에 아무런 믿음이나 순종이 없이 다만 제물만 바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무의미한 노릇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다른 어떤 지방의 토속신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제단의 수를 늘린 것은 그들이 선조들의 신앙에서 타락하여, 우상 숭배로 전락했다는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여러 개의 제단을 마련한 것은 여러 신들을 섬기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에브라임이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많이 만들었도다”(호 8:11). 

이처럼 “하나님을 알되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진”(롬 1:21)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성소와, 기름 부은 제단을 두신 이스라엘을 버리고 자기들에게 오시기를 염치없이 기대했다.

1. 발람이 왕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고 귀족들을 복종시킬 수 있는 것을 자랑하며, 교만에 빠진 것을 보라. 

이런 것은 스스로를 하나님과 경배받는 자의 자리에 올려놓는 악한 자의 정신이다. 

어떤 권위에서 발람은 이런 명령을 할 수 있었을까! 돌이나 뗏장을 가지고 (내가 지시하는 곳에) “일곱 단을” 쌓으라고 발람은 명령했다. 

이처럼 발람은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의 악의를 경건의 모양으로 숨겼다. 그러나 그의 제물은 “악한 뜻으로 드리는” 가증한 것이었다(잠 21:27). 

그가 목적하는 바는 의로운 제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불의한 삯으로 자기 자신을 부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2. 발락이 얼마나 아첨을 많이 했는가 보라. 

단은 즉시 세워졌고 그 제물도 최상의 것으로, 즉 수송아지 일곱과 숫양 일곱을 준비했다. 

발락은 또 “번제물 곁에 서소서” 하는 발람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으며, 그 명령에 화를 내지도 않았고, 또 그것이 고달프거나 견디기 어려운 것이라고 비방하지도 않았다.

Ⅱ. 모세가 전해 준 바에 의하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은 저주가 변하여 축복이 되게 하셨다(신 23:5).

1. 하나님은 발람의 입에 축복의 말씀을 담아 주셨다. 

제물이 타고 있는 동안 발람은 물러섰다. 그리고 그는 “홀로” 그 산당의 높은 곳에 있는 어두운 숲의 가장자리로 나왔다(3절). 

이처럼 발람은 홀로 있는 것이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데 좋은 기회를 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과 만나고 싶은 사람은 이 세상이나 세상의 일, 또는 세상과의 대화에서 물러나며, 홀로 있기를 즐겨하고, 홀로 있어도 결코 홀로 있다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하나님을 “규례대로 구하면”(대상 15:13)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라.

그러나 발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혹시 만나 주실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고 물러섰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범죄함을 알며, 하나님께서 나중에 화를 내서 자기를 만나시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처럼 의심을 품고 말을 했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혹시 오셔서 나를 만나시리라”(3절). 그러나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7). 

그는 겉으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가는 것처럼 꾸몄으나, 실제로는 사술(邪術)을 쓰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24:1 참조).

발람의 의도가 어떻든, 하나님은 그를 이용하여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발람에게 임하셨다”(4절).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리요?”(고후 6:14) 그것은 분명히 친밀한 사귐은 아니다. 

발람의 길은 여전히 사특한 길이었으며, 하나님은 여전히 그의 적대자였다. 

그러나 발락이 하나님의 신탁을 구하기 위해 발람을 선택했으므로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고백을 말하게 하셨으며,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적대하기 위해 무장하고 나선 용서할 수 없는 무리에게 보복하게 하신 것이다. 

아마 천사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임하신 것을 깨닫게 되자, 발람은 자기의 행한 바를 자랑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일곱 단을 베풀고 매 단에 수송아지 하나와 숫양 하나를 드렸나이다.” 발람이 어떻게 그것을 마련했는가? 그는 아무 것도 내놓은 것이 없다. 오직 발락이 모든 것을 내놓았다.

(1) 그런데도 그는 자기가 위대한 일이나 해 놓은 듯이 자랑했다. 

위선에서 나오는 거짓된 경건은 흔히 자랑을 하며, 헛된 영광을 나타낸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자랑하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간다(눅 18:11, 12).

(2) 그러므로 하나님도 이에 자기를 만족하게 해 주기 위해 자기가 원하는 바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셔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는 마치 하나님을 자기에게 빚진 자로 생각하며, 그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부릴 수 있는 듯이 생각하고 있다. 

또 발람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제물들 때문에 그에게 많은 신세를 졌으므로, 적어도 그 대가로 모압 왕을 위해 그 분의 이스라엘을 희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흔히 악인들은 그들이 경건한 모습만 보이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잘 돌보아 주시며, 특히 박해 시대의 커다란 비도덕적인 행실에 대해서도 눈감아 주실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데, 이는 스스로 속는 것이다(사 16: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록 그 제물이 가증한 것이긴 해도, 발람의 기대를 이용하여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는” 기회로 삼으셨다(5절). 

왜냐하면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오기 때문이다(잠 16:1). 

그리고 또 하나님은 “우리의 혀로 이길지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시 12:4)라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임을 보여 주기를 원하셨다. 

인간의 입을 지으신 분은 그것을 어떻게 조정하여, 당신 자신의 뜻을 섬길 수 있게 하실는지 알고 계신다. 

이 말씀은 “저희 입을 하늘에 두는”(시 73:9) 완악한 죄인들에게 무서움을 전해 준다. 하나님은 “저희의 혀가 저희를 해”하게 하실 수 있다(시 64:8). 

그리고 이 말씀은 언제든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그 분의 증인들에게는 위로의 말씀이 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거역하려던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셨다면, 더욱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 분의 백성들의 신앙을 북돋아 주기 위해 열심히 증거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많은 말씀을 주실 것이다. 동시에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실” 것이다(마 10:19).

2. 발람은 발락이 듣는 데서 축복의 말을 한다. 

발람은 발락이 “번제물 곁에 서서”(6절) 열심히 일이 성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께로부터 좋은 해답을 듣고자 하는 자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제물 곁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서 있어야 한다. 

발람은 이스라엘에게 저주를 기원하도록 부탁을 받고 이끌려 온 그 장소에 서서 노래를 지어 말을 했다. 그런데 그것은 축복의 노래였다(7절). 

그는 이스라엘의 안전과 행복과 축복을 노래했다.

(1) 발람은 이스라엘이 그의 독기 묻은 창이 도저히 미치지 못할 안전한 곳에 있다고 말했다.

① 발람은 그의 계획이 그들을 저주하고자 한 것이었으며, 그 때문에 발락이 자기를 불러 왔고, 자기도 왔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7절). 

그에게 전달된 소식은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는 것이었다. 

발락의 의도는 이스라엘이 싸움을 하고, 발람이 자기의 군사들을 축복하게 하고, 이스라엘의 멸망을 위해 예언하고 기도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② 발람은 그 계획이 실패했으며, 그는 도저히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자신의 무능을 고백했다. 

그는 이스라엘을 꾸짖을 수도, 저주할 수도 없었다.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8절). 

그러므로 그는 하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었다고 말해야 했을 것이다. 이것이 정당한 고백이다.

첫째, 다른 사람들은 그 가치를 인정해 주었으며, 자기 자신도 틀림없이 귀하게 여겼던 자신의 주술적인 능력에 대해서 그 무력함과 무가치함을 고백했다. 

그는 그 방면에서 매우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실패자임을 고백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술을 이용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레 19:31). 

하나님의 섭리는 이번 사건을 통해서, 그러한 복술의 무력함과 어리석음을 보여 줌으로 그 율법의 정당한 이유를 밝혀 준 셈이다. 

이제 그들은 애굽의 마술사들의 어리석음을 보았듯이 여기 동방의 유명한 마술사의 어리석음도 보게 되었다(사 47:12-14 참조).

둘째,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 있는 주권과 지배를 고백하는 것이었다. 

발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시키시는 일이 아니면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뜻을 지배하실 수 있으며 그의 생각을 거꾸로 돌려놓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안전은 감히 침범할 수 없다는 고백이었다.

a.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축복을 받았다. 

그들은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저주하지 않으셨다. 

비록 그들이 보잘것없는 비루한 존재로 떨어졌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무시하지 않으셨으며, 그들을 거절하지도, 버리지도 않으셨다.

b. 하나님의 호의를 받는 사람들은 지옥의 악의도 받고 있다. 뱀과 그 후손들은 그들에게 적의를 품고 있다.

c. 비록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들의 수가 그들보다 우세하더라도 결코 그들을 저주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대해 어떤 잘못을 저지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롬 8:39).

(2) 발람은 세 가지 면에서 그들에 대해 축복을 말했다.

① 발람은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민족들과 다른 그 특수성에서 오는 축복을 말했다.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라고 말했다(9절).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조잡하고 무질서한 오합지졸이며,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는 무리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들의 질서정연하게 꾸며진 진영을 보고 잘 훈련된 모습을 볼 때 매우 놀랐을 것이다. 

발람은 그들이 독특하게 사는 백성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 그렇게 살리라고 예견했고, 그들의 그러한 특수성은 그들의 무한한 영광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훌륭한 사람을 일컬어 우리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이웃에 있는 모든 나라와는 달랐다. 

그들은 신앙과 종교 의식에서뿐만 아니라, 음식과 의복과 일반 풍속에 있어서도 이 세상으로부터는 구분된, 그리고 그 속에 파묻히지 않은 백성으로서 모든 것이 달랐다. 

이스라엘의 원수들은 이것을 비난거리로 삼았지만, 사실 그것은 그들에 대한 칭찬이었다. 

그들이 “열방과 섞여서 그 행위를 배우기”까지는(시 106:35), 그들은 이러한 평판을 잃지 않고 있었다.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세상과 분리되며, 세상의 방식과 관습대로 살지 않아야 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며 동시에 명예가 된다. 

특별한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특별한 특권에서부터 오는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아마 발람은 이 점을 보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과 같은 수준에 머물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간 백성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따로 떼어 내어진 백성으로서 다른 모든 민족보다 존귀함을 받는다.

② 발람은 이스라엘의 막대한 숫자에서 오는 축복을 말했다. 

그 막대한 숫자는 그들의 명예요, 또한 그들의 힘을 나타내는 것이었다(10절). “야곱의 티끌을 뉘 능히 계산할꼬?” 

발락은 무엇보다도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 때문에 불안하고 초조했던 것이다. “모압이 심히 두려워하였으니 이스라엘 백성의 많음을 인함이라”(22:3).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숫자가 더 불어나리라는 발람의 예언을 통해 발락의 두려움과 초조를 더하게 해 주셨다. 

발락은 될수록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여 주면 그들에 대해 더 많은 분격을 터뜨리게 하고, 그 저주를 더욱 지독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발람을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 끝까지” 보여 주었던 것이다(22:41).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발람은 이스라엘의 많은 숫자에 대해 노하기는커녕 오히려 감탄했다. 

하나님의 백성과 깊이 사귀면 사귈수록 그들에 대해 더 훌륭한 평을 하게 된다. 발람은 그 숫자를 말하면서 특별히 다음과 같은 점에 관심을 모았다.

첫째, “야곱의 티끌”이라고 했다. 즉 그것은 야곱의 백성이란 뜻인데, 하나님께서 야곱의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편만하리라고 예언하신 말씀에서 온 것이다(창 28:14). 

이처럼 발람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신 약속이 성취된 것이라고 고백했으며, 그리고 그 약속은 앞으로도 계속 성취되리라는 것을 기대했다. 

하나님께서 능히 헤아릴 수 없다고 하신 야곱의 티끌을 헤아려 본 것이 다윗의 잘못이었을 것이다.

둘째, “이스라엘 사분지 일”이라고 했다. 그것은 네 개의 기치 아래 사방으로 전개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진영의 모양을 시사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매우 거대한 기구다.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마지막 큰 날에 모든 그의 백성이 그에게 모일 때 더욱 그 숫자가 말할 수 없이 많아질 것이다(계 7:9).

③ 발람은 이스라엘의 종말에 있어서의 축복을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과 계약을 맺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즉 그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 즉 이생에서의 자기의 보상이 그들과 같기를 원한다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뜻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마땅히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오는 것이라고 간주했다. 

의인도 죽어야 한다. 발람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한 것처럼, 우리도 마땅히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둘째, 발람은 계속해서 영혼의 불멸과, 죽음 너머에 있어서의 인간의 또 다른 상태를 가정했다. 

이것은 고대 사람들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믿고 있었다는 고상하고도 확실한 증거다. 왜냐하면 다른 세상에서의 행복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악인의 죽음보다 의인의 죽음이 바람직한 죽음이라고 기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인이나 악인의 죽음을 그 모양이나 환경에서는 아무런 구별을 찾지 못한다.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전 9:2).

셋째, 발람은 의인들이 살아 있을 때뿐만 아니라, 죽을 때의 축복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래서 그는 의인의 죽음이 다른 모든 사람의 죽음보다 바람직한 것이며, 나아가서 생명 자체보다도 더욱 바람직한 것이라고 했다. 

그의 소원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소원은 “내가 죽을 때 의인의 죽음과 같이 죽기를 원하노라” 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의 소원은 “나는 지금 의인의 죽음과 같은 상태에서 죽기를 원하며, 이 순간 나는 종말을 맞이하기를 원하노라” 하는 것이기도 했다. 

현재 발람이 서 있는 곳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얼마 되지 않아 모세가 죽을 모압의 한 산이 있다. 

그리하여 아마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발람이 원했던 것 같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하게 하기 위해 용감하게 그 산에 올라가도록, 발람의 입에 그러한 말씀을 주셨을 것이다.

넷째, 발람은 그의 확고한 결단보다는 하나의 종교적인 의견을 나타내 보였을 따름이다. 

많은 사람이 의인과 같은 죽음을 죽기는 원하면서도, 의인의 삶과 같은 삶을 참고 살아가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종말이 의인의 종말과 같은 것이 되기를 원하면서도 그들과 같은 길을 가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들은 하늘에서는 성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땅에서는 성자가 되지 못한다.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이는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잠 21:25). 

이 발람의 소원은 한갓 소원에 불과한 것이요, 결코 기도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소원도 다만 그 결과만을 기다리며, 그것을 위해 어떤 노력을 경주하지 않는 것이기에 헛된 소원일 따름이다. 

이처럼 그의 축복은 죽음이나 죽음 너머까지의 궁극적인 종말에 관해서 언급하는 축복이었다.

Ⅲ. 그 축복의 말씀에 뒤따른 다음과 같은 두 사람의 태도.

1. 발락은 몹시 조바심을 하고 애를 태웠다(11절). 

발락은 그의 제물을 차려놓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려 주실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응답이 자기 마음에 맞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발람에 대해 벌컥 화를 내고 달려들었다. 

그러한 응답이 순전히 발람의 뜻에서 나온 것인 양 “그대가 어찌 내게 이같이 행하느냐”고 힐난했다. “그대가 왜 나를 실망시키느냐”는 말투였다. 

때로 하나님은 하늘에 앉아 계시며, 교회의 원수들과 그리고 그들의 무력한 사술을 비웃으시며, 그들을 초조하게 만드신다.

2. 발람은 묵묵히 그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순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익살맞게도 그는 발락에 대해 그가 크게 깨닫기나 한 것처럼 선지자의 엄숙한 음성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이까?”(12절) 

이처럼 하나님은 그의 능력을 가지고 악한 선지자를 통해 악한 왕을 혼란에 떨어뜨리게 하기 위해 이러한 고백을 발설하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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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람의 두 번째 신탁(민 23:13-30)

Ⅰ.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하기 위한 두 번째 준비가 전과 같은 모양으로 마련되었다.

1. 그 장소가 달라졌다(13절). 

발락은 발람이 “바위 위에서” 전체 이스라엘의 진영을 보았기 때문에(9절) 그 아름다움에 반하게 되었거나, 아니면 공포에 질려서 감히 그들을 저주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발락은 발람을 다른 장소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부터는 이스라엘 진영의 일부분이 보일 뿐이며, 그들의 모습이 매우 형편없도록 보일 만한 그런 곳이었다. 

그리하여 거기 가면 틀림없이 발람이 저주의 불덩어리를 이스라엘을 향해 던질 수 있으리라고 믿어지는 곳이었다고 보인다. 

궤계를 써서 교회를 넘어뜨리고 쓰러뜨리려고 애쓰고 있는 교회의 원수들의 불안하고 초조한 모습을 보라. 그들은 그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진 애를 쓰며, 돌 하나라도 뒤집어놓지 않는 것이 없으며, 해 보지 않는 시도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선한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으며 얼마나 연구해 보았는가!

2. 다시금 제물이 마련되었다. 단을 새롭게 쌓았다. 모든 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렸다. 그리고 발락은 전과 같이 드린 제물 곁에 가까이 서 있었다(14, 15절). 

우리가 만일 발락이 저주를 내리게 하려고 열심이었던 것처럼, 축복을 얻기 위해 열심을 다한다면(물론 발락이 이스라엘에게 저주를 내리게 하려고 했지만 결국 자기 자신에게와 또 자기 백성에게 내리기는 했어도), 우리는 결코 신앙적인 의식을 위해 우리가 바쳐야 할 부담과 수고를 아낌없이 바칠 수 있을 것이다.

3. 발람은 다시금 하나님께 나갔다. 하나님도 그를 두 번째 만나 주셨다. 그리고 다른 말씀을 그의 입에 넣어 주셨다. 

그런데 그 말씀은 지난번 주신 말씀과 반대되는 말씀이 아니라, 그 말씀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시는 말씀이었다(16, 17절).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헛되이 찾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면(사 45:19), 더욱더 “야곱의 자손 중 누구”에게나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실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누구나 틀림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발람과 같이, 그 분의 가르치심과 명령뿐만 아니라, 관대한 보상까지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발람이 돌아왔을 때, 발락은 어서 속히 어떤 소식을 가져오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여호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 좋은 소식이 있는가? 아니면 일이 잘될 희망이라도 있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할 때 우리의 물음이 되어야 한다(렘 23:35 참조).

Ⅱ. 하나님의 넘치는 능력은 두 번째도 저주의 말씀을 축복의 말씀으로 변화시켰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축복의 말씀은 첫 번째 축복의 말씀보다 훨씬 크고 강력한 것이며, 그 축복의 말씀을 바꾸어놓을 수 있는 가망을 완전히 배제시킬 만한 것이었다. 

발락이 애써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듣기를 원하기 때문에(17절), 이번에는 발람이 특별히 그를 지칭해서 “발락이여, 일어나 들을지어다”라고 말을 했다(18절). 

이 말씀은 발락이 비록 왕이지만, (한 마디라도 빠뜨리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여 경청하여야 하는 말씀이며) 두려움으로 들어야 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일어나 들을지어다”라고 말했다. 그의 후계자인 에글론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을 때 “좌석에서 일어났다”(삿 3:20).

1. 발람은 이 말씀 속에서 발락을 확실히 슬프게 하고, 실망시키는 두 가지 사실을 알려 주었다.

(1) 그가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①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아무 쓸데가 없는 것이며, 그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다.

첫째,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19절). 

인간의 마음은 쉽사리 변한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말을 어긴다. 인간은 후회를 잘하기 때문에 식언도 잘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결코 변함이 없으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결코 그의 약속을 취소하지 않으신다. 

발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바꾸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 일이 있다(8절). 

이어서 여기서는 하나님 자신이 당신의 뜻을 변화시키지 않으신다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불완전함이요, 하나님의 완전함이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히 6:18). 간혹 성경이 하나님께서 “돌이키셨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변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이 변했다는 뜻이다(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욥 23:13]). 하나님께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는 것은 위대한 진리다(약 1:7).

a. 발람은 발락에게 아래와 같이 반문했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적이 있어서 말씀하셨는데 당신의 섭리에 따라서 그것을 실천하지 않으시리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며, 약속하셨는데 어찌 그대로 이루지 않으시리요? 하나님께서는 변함이 없으신 분이며, 자기 자신의 말씀에 충실하신 분이 아니라고 우리가 어찌 감히 생각할 수 있으리요? 그의 모든 명령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며, 그의 모든 약속은 어길 수 없는 것이니이다.”

b. 발람은 이상과 같은 일반적인 원칙을 하나의 구체적인 사례에 적용시켰다(20절).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돌이킬 수 없도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씀은 다시 말하면 “나는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게 할 수 없나이다” 하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은 오래 전부터 축복받은 백성이요, 여호와께서 축복하신 자의 후손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이 그들 머리 위에 있다. 

그들은 축복의 약속 아래 태어났고, 가나안의 축복을 위해 태어났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진리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어기시고 당신 스스로를 속이시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그들에게 저주를 내릴 수 없다.

둘째, 이스라엘은 지금 당장 비난받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신다”(21절). 

야곱에게 전혀 허물이 없다거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못 보셨다는 것은 아니다. 

a. 다만 아직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며, 그들을 멸망시켜야 할 정도의 허물은 없다는 말이다. 

그들이 나쁘기는 하지만 그처럼 나쁘지는 않다는 것이다. 

b. 그들에게는 특히 허물과 죄가 된다는 우상 숭배의 망령됨이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는 금송아지 사건 이후 다시는 그런 일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다른 일로서는 잘못됨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려고 하지 않으셨다. 

발람은 죄 말고는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를 분리시키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 사이에 죄가 판을 치고 있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멸망시킬 저주를 내리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께 붙어 있는 한,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떤 해를 끼치지 않으신다. 우리가 죄로부터 떠나 있는 한, 우리는 해를 받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다른 뜻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이렇게 읽는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악을 행하는 것을 보고 계시지 않으며, 이스라엘에게 불행을 끼치는 것을 묵과하지 않으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그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지도 묵과하지도 않으시며, 이스라엘이 해를 입는 것을 보고 계시지 않고, 그들을 바르게 해 주시며, 그들의 억울함을 갚아 주신다”는 뜻으로 읽는다. 하나님은 그 분의 교회나 백성들이 당하는 위해(危害)를 그냥 보고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끼치는 해를 곧 당신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것으로 간주하시고 이를 갚아 주신다.

셋째, 야곱과 이스라엘의 힘을 감히 저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발람은 발락에게 그들과 겨루어 싸울 방도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a.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특별한 방식으로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그에게서 떠나려고 하지 않으신다.” 

b.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기뻐하며, 그 때문에 오는 승리를 노래하고 있다. “왕을 부르는 소리(또는 경고)가 그 중에 있도다.” 

승리와 성공을 확신하며 원수들을 향해 부르짖는 함성은 계속 하나님을 왕과 정복자로 여기고 그 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c.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은 은총을 체험했으며, 그들을 위해 작용하신 그의 능력을 힘입은 바가 많았다.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다”(22절). 

그 분의 능력은 막을 수도 제재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처럼 영광스럽게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틀림없이 영광스럽게 마치게 하실 것이다. 

d.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는 동안 이스라엘은 적대자들을 능히 대항해서 이길 수 있는 들소의 힘을 가질 수 있었다(24:8 참조). 

이런 것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 분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힘이다.

②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발람은 그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사술을 다해도 이스라엘을 해롭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했다(23절).

첫째, 발람은 자기가 실패한 것을 자인했다. 

야곱을 해할 사술이나 복술이 진정 있을 수 없다. 지옥의 저주는 하늘의 축복을 쫓아낼 수 없다. 

이러한 종류의 시도는 어떤 것이든지 간에 열매를 맺지 못하고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야곱이 가난하고 괴로움을 당하는 저(低)교회를 나타내고, 이스라엘은 번창하고 진보된 고(高)교회를 나타낸다고 본다. 

그러나 고교회건 저교회건, 교회의 친구가 많건 적건 모두가 하나의 교회가 된다. 

그리고 그 교회의 번창을 막을 무기는 없다. 하나님은 그 분의 교회를 반대하는 어둠의 세력들의 책략과 계획을 쉽사리 좌절시키며 실망시킬 수 있으며, 또 꼭 그렇게 하신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할 수 없다.

둘째, 발람은 이것이 앞으로도 계속 기억되리라는 것을 예견했다. 

그는 말하기를 “이 때에” 즉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는 말을 기억하고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뇨 하리로다”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신 일을 그 백성들을 위해 행하셨는가! 이것은 놀라움과 감사와 기쁨으로 말해질 것이며, 이웃 백성들에게 그들의 신이 그들을 이처럼 돌봐준 일이 있는가 묻는 도전과 함께 말해질 것이다. 

교회의 대적들의 악한 계획이 무너진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영원히 기억되어야 한다.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신 33:26). 

발람이 여기서 다른 이방의 모든 신보다 훨씬 뛰어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우월성에 대해서 말한 것을 모세가 기억하고 “대적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못하니 대적도(특히 발람은) 스스로 판단하도다”라고 말씀했을 것이다(신 32:31). 그러므로 발락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2) 발람은 발락에게 오히려 그들로부터 멸망당할 것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를 보여 주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웃 나라에 피를 흘리게 하는 백성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와 그의 나라가 피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다루기에 너무 큰 나라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그들의 계획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24절). 

보라, 그리고 두려워하라. 머리를 웅크린 사자와 같이 한동안 가까이 자리잡고 누워 있는 이 백성은 조만간 말로 하는 큰 “수사자같이 일어나서 움킨 것을 먹으며 죽인 피를 마시기 전에는 눕지 아니할”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얻을 승리를 발람이 예견하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은 지금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그 땅을 완전히 정복할 때까지 결코 그들의 싸움을 쉬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웃의 집이 불탈 때 그는 마땅히 자기의 집도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던 것이다.

2. 이 실패 뒤에 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1) 발락과 발람은 두 사람이 모두 그 바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① 발락은 이제 그의 마술사가 침묵하기를 원했다. 

발람이 그의 원하는 대로 말을 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차라리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기를 원하게 되었다. “그들을 저주하지도 말고 축복하지도 말라”(25절). “만일 그대가 그들을 저주할 수 없다면, 나는 그대가 그들을 축복하지 않기를 간청하노라. 만일 그대가 나의 군대를 도와주고 고무하여 줄 수 없다면, 그들을 반대하거나 낙담시키지 말라.” 

하나님은 그 분을 떠난 자들을 “많은 모략을 인하여” 피곤케 할 수 있으시다(사 47:13; 57:10).

② 발람은 여전히 자기가 위압당했다는 것을 시인하며, 이 일을 처음 시작할 때 한 말을 되풀이했다(22:38).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은 내가 그대로 하지 않을 수 없다”(26절).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 준다. 

첫째, 일반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길은 그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여러 가지 궁리가 있으나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강하게 작용한다. 

둘째, 좁은 의미에서 볼 때도, 교회를 해치려고 만들어진 무기가 맥을 못 추듯이, 교회를 송사하기 위해 일어난 해도 하나님은 정죄하신다(사 54:17).

(2) 하지만 그들은 또 다른 시도를 계획하기로 했다. 

그들은 그들의 실패가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앞으로 더욱 혼란이 온다고 할지라도 그 계획을 강행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 번째의 시도에 들어갔다.

① 그들은 장소를 옮겼다. 

발락은 드디어 그러한 실패가 발람의 잘못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전에는 발람을 나무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발람이 하나님께 얽매여 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도 그가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을 막지 못할 그런 곳으로 발람을 데려가기를 원했다(27절). 

발락과 발람은 이러한 일을 거듭하면서 점점 더 용기를 가지게 되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발람이 처음에는 가지 못하게 하셨다가, 두 번째는 가도록 허락해 주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처럼 거듭하는 동안 그들이 원하는 지점까지 이르리라고 보았을 것이다. 

이처럼 그들의 범한 죄가 신속히 벌을 받지 않게 되면 죄인들은 더욱더 악한 일을 하고자 열심이다.

발락이 이번에 발람을 데리고 간 장소는 브올 산 꼭대기다. 그 산은 그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다. 아마 그 곳에는 바알 신을 예배하는 곳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바알 브올이라고 일컬어졌다. 발락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이 장소를 택했다고 보인다. 

첫째, 그 곳은 바알의 거처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결코 모압의 신인 바알의 거처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와서 그들의 일을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둘째, 이 곳은 그의 신이 좋아하시는 곳인 만큼 여호와도 좋아하셔서 잘 생각해 주시리라고 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쓸데없는 생각을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생각은 전적으로 헛된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아람 사람들은 여호와가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고 생각했다(왕상 20:28).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곳에서보다 한곳에서 더욱 능력을 발휘하신다고 보는 견해다.

② 그들은 또다시 일곱 수송아지와 일곱 숫양을 일곱 단에 바치는 제사를 드렸다(29, 30절). 

그들은 그들의 희망이 이루어지리라는 약속을 받지 못했으면서도 이런 값비싼 제물을 참고 드렸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 바 환상이 마지막에는 꼭 실현되리라는 약속을 받은 우리는 그 실현이 더디다고 낙심하지 말고, 항상 기도해야 한다(눅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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