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눅7:19-35]== 19.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20.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21.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2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23.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24.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27.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28.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29.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31.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32.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33.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34.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35.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 예수께 보낸 세례 요한의 메시지(눅 7:19-35) 세례 요한에게 관한 이 모든 담화는 요한이 사람을 보내서 예수가 메시야인지 아닌지 물은 데서 발생하였다. 우리는 본문의 기사를 역시 마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마 11:2-19) Ⅰ. 여기에는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께 보낸 메시지와 그리스도가 요한에게 내린 답변이 나온다. 다음을 관찰하자. 1. 우리가 그리스도께 관해 물어봐야 할 큰 일은 그가 죄인을 구속하고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는지의 여부이다(19, 20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주 즉 기름 부으신 구주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음을 확실히 믿는다. 이 예수가 약속된 바로 그 메시야라면 우리는 그를 영접하고 딴 이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계속 메시야에게 대한 대망을 품고 그를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2. 세례 요한 자신의 신앙 내지는 적어도 그 제자들의 신앙은 이 일에 대한 확증을 받고 싶어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때까지 아직 자신이 참 그리스도임을 공적으로 선언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았던 자기 제자들에게도 그것을 말하지 못하도록 명령하셨다. 그가 그리스도라는 증명은 그의 부활로 완성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때까지 함구령을 내리신 것이다. 유대 교회의 유력자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를 그 조상 다윗의 왕좌에 앉힐 기미가 보이는 이익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권세라든가 장엄이라든가 하는 따위는 그의 주변에서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메시야가 권력과 위엄 속에서 출현하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므로 "오실 메시야가 당신이오이까?"하고 물었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그들은 예수께서 메시야가 아니더라도 딴 누구를 기다리라고 자기들에게 지시해 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3. 예수께서는 자신의 칭찬과 자신의 정체에 대한 판정과 증명을 자기의 행한 일에 다 맡겨 버리셨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있었다. 마침 그 시에 그는 많은 기적적 치료를 행하셨다. "마침 그 시"란 말은 아마 그들이 예수와 단 한 시간 동안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리라.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잠시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행하셨는가 ! 예수께서는 신체적인 질병과 고통을 많이 고치셨고 악귀들린 자, 정신적으로 광증이나 우울증에 빠진 자들도 많이 고치셨으며 많은 소경도 보게 하였다. 그는 많은 치료를 베푸셨으므로 속임수로 의심할 만한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나자 예수께서는 그들더러 요한에게 가서 보고 들은 것을 고하라고 명하셨다. 예수님과 요한의 제자들도, 일반 백성이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많으랴?"고 말했듯이(요 7:31), 쉽사리 주장할 수 있었다. 그들이 본 이 기적들은 예수의 사명에 대한 확증인 동시에 설명이기도 했다. 메시야가 오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세상을 치료하고 흑암에 앉은 자에게 빚과 광명을 주며 악령을 억제하고 정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예수께서 백성의 신체에다 바로 이 일들을 행하고 계심을 본다. 그러므로 너희는 바로 이 사람이 백성의 영혼에다 그런 일을 행하려 오신 분이라고 결론짓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너희는 다른 이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자연계의 이런 기적에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는 은혜계의 기적까지 첨가시키신다(22절). 그들이 알기로는 이 일은 메시야가 할 일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메시야란 가난한(또는 겸비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며(사 61:1),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의 생명(또는 영혼)을 구하게 하려고(시 72:13)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너희는 메시야의 특성과 그가 오시는 그 의도에 보다 완전히 부합된 다른 이를 기다릴 수 있을지 없을지 스스로 판단하라"고 말씀하신다. 4. 예수께서는 자기가 메시야라는 증거가 이토록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백성이 자기에게 편견을 품을 우려가 있다는 암시를 그들에게 주신다(23절).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23절). 현세에서는 우리는 심리(審理)와 유예의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런 상태라면 충분한 변론과 이의 제기가 있다는 것은 어색하지 않은 일이다. 진리의 탐구에 정직하고 무사공평하며 진리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자에게 진리를 확증시켜 줄 만한 충분한 변론이 있듯이, 부주의하고 세상적이며 육욕적인 자에게 진리를 흐리게 하기에 충분한 반대도 있는 것이다. 나사렛에서 받으신 교육이라든가 그의 갈릴리 거주라든가 비천한 그의 가족과 친척들, 그의 빈궁, 보잘 것 없는 추종자들 등등, 이런 것들은 많은 자에게 거침돌이 되었다. 그가 행하신 모든 기적으로도 이런 장애물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이런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런 자는 지혜롭고 겸손하고 마음씨 고운 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거침돌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셨다는 표시이다. 그런 자는 참으로 복될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Ⅱ.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세례 요한에게 대해 던지신 극찬이 나온다. 요한의 사자들이 있을 때에는 찬사를 늘어놓지 않으시다가 그들이 떠난 후에(24절) 칭찬을 아끼시지 않으신 것은 백성들에게 요한의 사역으로 그들이 이익을 누렸고 그의 투옥으로 그 혜택을 상실하게 됐다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이제 자기들이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었는지 깊이 생각해야 했다. 그토록 많은 말과 그토록 크고도 전반적인 놀라움을 불러 일으켰던 그는 과연 누구였는지 그들은 이제 고찰해야 했다. 그리스도가 "자 ! 내가 너희에게 말해 주리라"고 말씀하신다. 1. 그는 확고부동하고 "시종일관한" 자였고 끈기 있고 지조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었다. 먼저 이쪽으로, 그 다음에는 저쪽으로 바람이 불 때마다 바뀌는 그런 갈대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갈대처럼 변덕스럽지 아니하고 반석처럼 견고하였다. 만일 그가 갈대처럼 헤롯에게 굴복하고 궁중의 환심을 샀더라면 그는 그곳의 총아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일 중 어느 것에도 동요되지 않았다"(흠정역, 행 20:24). 2. 그는 견줄 데 없는 "자기 부정"의 사람이었다. 그는 금욕과 세상 멸시의 큰 표본이었다. 그는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 아니었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도 아니었다(25절). 반대로 그는 광야에서 지냈으며 의욕과 식생활은 그것에 준하였다. 그는 신체를 장식하고 그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신 몸을 억제하고 복종시켰다. 3. 그는 "선지자"였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그의 사명과 지시를 받았다. 그가 받은 사명은 인간에게 속하거나 인간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나면서부터 제사장이었지만 아무도 그점을 주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선지자로서의 영광이 그의 제사장 된 존귀를 가리웠던 때문이다. 아니, 그는 선지자보다 나은 자였다(26절). 그는 선지자보다 훨씬 나은 자였고 구약의 어떤 선지자보다 나은 자였으니, 구약 선지자들은 그리스도를 멀리 있는 자로 말했지만 요한은 그를 문밖에 계신 분으로 말했던 때문이다. 4. 그는 메시야의 향도관이자 선구자였고 그 자신도 구약에 예언된 인물이었다. "보라. 내가 사자를 네 앞에 보내리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할 것이다"(말 3:1).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보내시기 전에 그의 오심을 알리셔서 백성들로 그를 영접할 준비를 갖추도록 하시기 위해 그의 사자를 보내셨던 것이다. 세속적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현세적 군왕의 특성을 띠고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였다. 만일 메시야가 그런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었다면 그의 사자도 화려한 장군의 차림이나 기치를 든 전령의 호화스런 모습으로 나타났을 터였다. 그러나 그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앞서 보내진 사자가 마음과 생활의 회개 그리고 개선을 선포하면서 나타났다는 것은, 그리스도 왕국의 영적 성질에 대한 충분하고도 분명한 전조가 된다. 이와 같이 맞아들인 그 나라는 확실히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었던 것이다. 5. 이런 점에서 그는 너무나 위대하여 실로 그보다 더 큰 선지자는 없었다. 선지자들은 여자가 넣은 자 중에 지극히 큰 자였고 왕궁 귀족보다 더 존귀한 자였다. 그러나 요한은 "모든 선지자 중에서 가장 큰 자"였다. 세례 요한이 전파와 세례에 착수했을 때 그 나라는 얼마나 귀중한 자가 그 안에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28절). 주께로 말미암아 그의 일에 "숙달되고 신실하도록" 자비를 얻은 복음의 사역자는 지극히 작은 자였다. 복음의 사도들이나 복음을 처음 전파한 이들은 극히 초라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보다 훌륭한 통지 가운데 고용된 자들이기에 세례 요한보다 명예로운 직분을 맡은 자였다. 어린양을 따르는 자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라도 자기보다 앞서 간 극히 큰 자를 훨씬 능가한다. 그러므로 복음 시대에 살고 있는 자는 책임질 일이 더욱 더 많다. Ⅲ.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그 세대의 사람들에게 지당한 힐난을 하신다. 그들은 세례 요한의 사역이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역사하심에도 불구하고 감화를 받지 않은 세대였다. 1.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세례 요한이 선포하고 세례를 주는 동안에 어떤 경멸을 받았는지 설명하신다. (1) 요한에게 존경을 나타내 자들은 평민층에 불과했다. 상류계급의 인사들의 눈에는 이들 하층민이 요한에게 명예라기보다 수치로 비쳤다(29절). 백성은 참으로 속된 무리로서 그들에게 대해서는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 7:49)라고 하였다. 세리들은 일반적으로 품행이 나쁘거나 부도덕한 자로 간주되었으므로 세평이 좋지 않은 자였다. 이런 자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고 그의 제자가 된 것이다. 이들은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서 영광스런 기념비적 존재가 되긴 했으나 세상 사람의 눈에 요한을 큰 자로 비치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와 개심으로 하나님을 의롭다고 인정하였다. 그들은 세례 요한 같은 자를 메시야의 사자로 임명하신 하나님의 행위와 지혜를 의롭다고 하였다. 그들은 이로써 그것이 최상의 방법이란 것을 나타내었다. 그 일이 남들에게는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자기들에게는 헛되지 않기 때문이다. (2) 교회와 국가의 큰 자들, 곧 요한에게 이 세상적인 신망을 다소 보내려 했던 그 정중한 정치가들은 요한에게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온갖 굴욕을 퍼부었다. 실로 그들은 세례 요한의 말을 들었지만 "그에게 세례를 받지 않았다"(30절). 경건한 신앙과 기도로 명성이 자자하던 바리새인들과, 학식 특히 성서에 대한 지식으로 유명하던 율법사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헛되이 받았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으려 한 것이다. 그들 사자를 보내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유익을 주려는 친절한 의도를 지니셨고 그로써 그들의 구원을 도모하셨다. 그들이 만일 하나님의 의도에 응하였더라면 그것은 자기들 스스로를 위한 것이 됐을 것이고 또 영원히 자기들을 위하게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의도를 거부하였고, 그것에 응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것은 그들 스스로를 거스르는 일이었고 멸망을 재촉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메시야의 왕국에 적합하도록 해 줄 규율을 거절함으로써 자기들에게 주려고 의도된 이익을 그르쳤고 하나님의 은혜까지도 상실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문에 빗장을 걸었고, 스스로를 메시야의 나라에 차단시켜 버렸다. 그들은 자신을 그 나라에서 배제 시켰을 뿐더러 남까지도 방해하고 가로막았다. 2. 그는 그 세대 사람들의 이상한 패역성을 설명하신다. 그들은 요한이나 예수께 험담을 퍼부었고 편견을 품었다. (1)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해 취하신 방법을 단지 조롱의 대상으로만 삼았다.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31절) 이것은 이런 말씀이다. 이들의 불합리성을 충분히 나타내려면 내가 무엇을 생각 할 수 있을까? 이들은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과 같다. 장터의 아이들은 진지한 일에는 전혀 마음을 쓰지 않고 할 수 있으면 놀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유익을 주시려고 온갖 방법을 다 취해 보신다. 그러나 그들은 장터의 아이들처럼 하나님께서 마치 장난이라도 하고 계시는 듯이 그 모든 조치를 농담으로 일축해버리며 하나의 구경거리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많은 자들이 이 때문에 파멸을 당한다. 그들은 결코 자기 영혼의 일에 성실하다고 확신할 수 없는 자들이다. 산헤드린에 앉아 있던 노인들도 단지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과 같을 뿐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아이들의 놀이에 무심하듯 영원한 평강에 속하는 일에 관심하지 않았다. 눈멀고 경건치 못한 세상의 어리석음과 헛됨은 얼마나 놀라운가 ! 주님께서는 안심하고 있는 그들을 일깨우신다. (2) 그들은 트집잡을 일을 이모저모로 계속 찾아냈다. ① 세례 요한은 과묵하고 근엄한 사람이었으며 고독하게 지낸 적이 많았다. 그는 겸허하고 착실하고 극기하는 자였기에 그런 자로 경모 받아야 마땅했고 사상가나 명상가로서 그의 말은 경청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칭찬이 되어야 할 이런 점이 도리어 그의 비난으로 변해 버렸다. "세례 요한이 와서 남들처럼 자유롭고, 풍성하고 즐겁게 먹고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그가 귀신들렸다고 한다"(33절)고 예수는 말씀하신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무덤 사이에 거처하던 귀신들린 자만큼 광포하진 않으나 그와 같이 침울하고 귀신 든 자라고 말하였다. ② 우기 주 예수께서는 보다 자유롭고 개방적 처신을 하셨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셨다"(34절). 그는 바리새인이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줄 아셨지만 그들에게 가셔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려고 하셨다. 그는 세리가 자기에게 명예가 되지 않는 줄 아시면서도 그들과 식사를 함께 하셨다. 이 양자에게 선을 베푸시려는 바램에서 그는 그들과 흉허물없이 사귀셨다. 이 사실에서 나타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매우 상이한 기질과 성미를 소유할 수도 있으며 매우 다른 전도 방식과 생활 방식을 가질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은 다 선하고 유용하다는 것이다. 각 사람에게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심은 그로써 유익하게 하려하심이다(고전 12:4-7 참조).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 스스로 모든 모든 딴 사람의 표준으로 내세워서는 안되며 자기들과 꼭 같이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거 했고 그리스도는 그를 칭찬하셨다. 그렇지만 그들은 사는 방식에 있어서 서로 반대였다. 그러나 이 두 분의 공동의 적은 이 두 분을 다 비난했던 것이다. 세례 요한이 와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고 하여 그를 미친 자라고 표현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우리 주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먹고 마신다고 하여 예수님을 그 품행이 타락된 자로 몰아쳤던 것이다. 그들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예수를 혹평하였다. 악의를 품은 자는 결코 좋게 말하는 법이 없다. 악인들의 원한을 살펴 보라. 그들은 복음의 전파자와 고백자들이라면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 극히 나쁘게 해석하지 않는가 ! 그들은 이로써 복음과 복음 전파자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멸망시키고 있는 것이다. 3.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택함 받은 남은 무리의 구원으로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라고 설명하신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35절). 지혜에 몰두하는 자가 있는데 그들은 "지혜의 자녀"가 된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혜의 안내와 통치에 복종하게 될 것이며, 자기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취하는 방법으로서도 지혜를 옳다고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런 방법이 그들에게는 유효할 것이며 이로써 그 방법이 잘 선택됐다는 것도 나타날 것이다. 지혜의 자녀들은 이 점에 있어서 전부가 다 이의 없다. 그들은 모두가 다 지혜의 하나님께 취하시는 은혜의 방법에 만족하며 일부 사람들에게 조소를 당한다고 하여 그것을 더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눅7:36-50]===== 36.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49.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 바리새인의 집에 계신 그리스도(눅 7:36-50) 이 기사의 내용이 언제 어디서 발생한 일인지는 미상이다. 누가복음 기자는 그 서술에 있어 딴 복음서 기자들보다 시간적 순서를 중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본문 기사는 그리스도께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을 받으심에 즈음하여 나오는데 이것은 그가 그들과 함께 교제하신 것이 오직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이며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라는 걸 나타낸다. 게다가 그리스도께서 자기 가까이에 용납하신 자들은 개선되었거나 그럴 가망이 많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그리스도께 이토록 큰사랑을 나타내 보인 이 여인이 누구였는지는 나오지 않으나 흔히는 막달라 마리아라고들 한다. 그러나 본인은 그럴만한 근거를 성서 안에서 찾아보지 못하였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리스도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신 여자로 묘사되어 있다(눅 8:2; 막 16:9). 그러나 여기에는 그런 말이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가 아닐 가능성이 많다. 이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Ⅰ. 한 바리새인이 그리스도께 정중한 환대를 베풀었고 그리스도께서는 은혜롭게도 그 대접을 받아들이셨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셨다"(36절). 그가 예수님을 초대한 이유는 그런 귀빈을 자기 식탁에 모시면 그의 명예가 될 것으로 생각한 때문이거나 아니면 그와 동석하면 자기와 자기 가족과 친구들에게 즐거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바리새인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를 선지자로 인하려 들지 않았던 때문이다(39절). 그러나 우리의 주 예수께서는 그의 초대를 응락하시고 그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셨다. 이렇게 하신 것은 그들에게 유익을 주시려는 소망에서 세리들과 자유롭게 동석하셨듯이 바리새인들과도 꼭 같이 자유롭게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 대해 편견을 품은 자들을 가르치고 설득하기에 충분한 지혜와 은혜가 있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깊이 그런 자들과의 교제에 과감히 진입할 수 있다. Ⅱ. 그리스도가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불쌍한 죄인이 회개하면서 그에게 큰 경의를 표하였다. 그 동네에는 죄인인 한 여자가 있었다. 그 여인은 이방인이었고 창기였으며 불명예스런 여인이었다. 아마 그런 여인으로 알려졌을 것이다. 그 여인은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악한 인생 행로에서 돌이킨 자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 왔다. 그녀는 다른 식으로 감사드릴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발을 씻기고 약간의 향유를 그 발에 부었다. 그녀는 그럴 목적으로 이 향유를 갖고 왔던 것이다. 당시 식탁에 앉는 방식은 발을 부분적으로 뒤에다 놓는 식이었다. 이 여인은 예수를 정면으로 보지 못하고 그의 뒤로 와서 여종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여종의 직분은 손님의 발을 씻기고(삼상 25:41). 향유를 준비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선한 여인이 어떤 일을 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1. 죄에 대한 그녀의 깊은 희오. 그 여인은 그리스도 뒤에서 울며 서 있었다. 그 여인의 눈은 죄의 입구와 출구였었으나 이제는 눈물의 근원이 되었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졌다. 그 얼굴은 과거에는 아마 화장으로 뒤덮여 있었을 것이다. 전에는 예쁘게 닿아 단장을 했던 그녀의 머리털이 이제는 수건으로 되었다. 우리는 그녀가 전에는 죄 때문에 슬퍼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리스도가 계신 곳으로 올 기회를 얻게 되자 그 상처의 출현은 새로운 것이었으며 그녀의 슬픔도 새로운 것이었다. 침회자가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아오는 모든 순간에 저들의 경건한 근심과 죄악에 대한 수치감을 새로이 한다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일이다. 그 때에는 그가 평화를 회복하게 된다(겔 16:63). 2. 주 예수께 대한 그녀의 강한 애정. 그녀의 사랑이 많다는 것은 우리 주 예수께서 주목하신 점이었다(42, 47절). 그녀가 그의 발을 씻긴 것은 극히 보잘 것 없는 직분이라도 주님만 영예롭게 해 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승복하겠다는 표시였다. 아니, 그녀는 그리스도의 발을 눈물 곧 기쁨의 눈물로 그의 발을 닦았다. 그녀는 자기가 구세주에게 그토록 가까이 있다는 걸 깨닫고는 도취경에 빠져있었다. 그분은 그녀 자신의 영혼이 사랑하던 분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의 입술에 입맞춤하기에 너무나 무가치한 자처럼 그의 발에 입맞추었다. 사랑하는 자는 입맞춤을 열망한다(아 1:2). 그것은 애정의 입맞춤인 동시에 경모의 입맞춤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그의 명예에만 완전히 몰두하는 자답게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겼다. 그녀의 눈에서는 그의 발을 씻길 물이 나올 것이며 그녀의 머리털은 그의 발을 닦는 수건이 될 터였다. 그녀는 그의 발에 향유를 부었으니 이로써 그가 메시야 곧 기름부음을 받은 자임을 인정한 셈이다. 그녀가 그의 발에 기름을 부은 것은 즐거움의 기름으로(히 1:9) 그의 머리에 부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동의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라면 누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극진한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Ⅲ. 그 바리새인은 그리스도께서 이 불쌍한 회개자가 표한 경의를 용납하셨다고 하여 그에게 못마땅한 생각을 품었다. "그 바리새인은 (자기 생각을 그리스도께서 아신다는 걸 거의 생각지 못하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이 여인이 죄인이요, 이방인 여인이며 소문이 좋지 못한 여자인 줄 알 만큼 지식이 많고 따라서 그토록 자기에게 가까이 오는 걸 용납하지 않을 만큼 성결하였으리라"고 하였다. "그런 품성을 가진 자가 선지자라 할 수 있는가? 그의 마음은 그걸 보고도 동요치 않는가?" 하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교만하고 편협한 정신의 소유자는 타인도 자기들처럼 거만하고 비판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가 매우 쉽다는 것을 살피자. 만일 그녀가 시몬 자신을 만졌다면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사 65:5)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말했어야 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Ⅳ.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에게 행한 일로 그녀를 옳다고 인정하시며 그녀의 행위를 용납한 자신도 의롭게 여기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바리새인이 마음에 이르는 것을 아시고 그에 대한 답을 주셨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40절). 그리스도께서는 시몬의 식탁에서 친절한 접대를 받았다. 그럼에도 그에게 잘못이 있음을 보시자 그를 책망하셨고 그의 죄를 용납하시고자 아니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반대하실 일이 있는 자에게 이르실 말이 있는 것이다. 이는 그의 영이 꾸짖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몬은 기꺼이 그에게 귀를 기울이려 한다. "선생님 말씀하소서"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예수를 선지자라고 믿을 수 없었다(그는 선지자만큼 엄하고 정확하지 못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생님이란 칭호를 예수께 바칠 수 있었다. 그는 주여 주여 하고 부르짖으면서 주가 이르신 일은 행치 않는 자들 중에 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그 바리새인에게 답변하는 가운데 이렇게 이치를 따져 설득하신다. 즉 이 여인이 죄인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그녀는 사함 받은 죄인이었다. 이것은 그녀의 회개를 전제로 한다. 그녀가 그리스도께 행한 것은 구주께 대한 큰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녀의 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함을 받은 것이다. 그토록 큰 죄인이었던 그녀가 사함을 얻었다면 딴 사람들보다 구주를 더 사랑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이다. 그녀는 남들보다 자기 사랑에 대해 더 큰 증거를 보여야 했던 것이다. 만일 이것이 그녀의 사랑의 결실이었고 자기 죄가 용서함을 얻었다는 의식에서 발로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열납하시는 것이 도리에 맞는 일이었고 바리새인이 그 일에 역정을 내는 것은 부당한 일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더 나아가서 딴 것도 의도하신다. 그 바리새인은 예수께서 선지자인지 아닌지를 의심하였다. 아니, 그는 사실상 그 점을 부인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선지자 이상 가는 존재임을 나타내신다. 그는 땅에서 죄를 사할 권세가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런 분께서 회개하여 사함 받은 죄인이 애정과 감사의 고백을 해서 마땅하다. 그의 대답 가운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게 된다. 1. 예수께서는 비유로써 시몬에게 이 여인이 죄사함을 받았을 때 보다 큰사랑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과 보다 큰사랑을 받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신다(41-43절). 어떤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다 게으른 자였는데 하나는 다른 한 사람보다 그에게 열 배나 더 많이 빚을 지고 있었다. 그 빚 진 사람은 아주 마음 가볍게 그 두 사람의 빚을 다 탕감해 주고 법에 걸어 고소하지도 않았으며 그들과 그 자식들을 팔도록 명령하지도 않았으며, 그들을 고문하는 자에게 내어 주지도 않았다. 그러자 빚진 그 두 사람은 자기들이 받은 큰 호의를 깨달았다. 그러니 이 중 어느 사람이 그를 가장 사랑하겠는가? 이 얘기가 바로 바리새인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비유였다. 이에 그 바리새인은 "틀림없이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이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바리새인의 판단은 옳았다. 여기서 우리는 빚진 자와 준 자 사이의 도리를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탕감을 받고 또 탕감 받기를 희망하는 것과 같이 탕감을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1) 빚진 자가 만일 갚을 게 있으면 빚을 준 자에게 그걸 변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의 모든 빚을 다 갚기 전에는 어떤 사람도 자기 소유라고 생각할 것이라곤 없으며 자기 소유라고 해도 편안히 누릴 수가 없다. (2)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 가운데서 그 빚진 자로 하여금 부채를 상환할 수 없도록 만드셨다면 빚을 준 자는 그 채무자에게 엄하지 말아야 한다. 극단적으로 냉엄한 법에 의지할 게 아니라 그의 빚을 거저 탕감해 주어야 한다. Summum jus est summa injuria ─ 즉 가혹하게까지 적용되는 법은 정당성을 잃게 된다. 무자비한 채주는 마태복음의 비유(18:23 이하)를 읽고 전율해야 할 것이다. 자비함을 보이지 않는 자들은 자비가 없는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3) 자기 채권자가 자비롭다는 것을 깨달은 빚진 자는 그에게 아주 고마워해야 마땅하다. 그가 달리 보상할 수가 없는 경우라면 그 채권자를 사랑하기도 해야 마땅하다. 일부 성실치 못한 채무자는 자기들 때문에 손해를 입는 채권자에게 고마워 하기는 커녕 원한을 품는다. 채권자가 불평을 한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채무자들은 채권자에게 좋은 말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손해를 입는 입장에서 보면 불평할 자유가 있는 법이다. 이 비유는 창조주(Creator) 하나님을 채권자(Creditor)으로 묘사하고 있고(또는 오히려 주 예수자신을 그런 사람으로 말하는지 모른다. 죄인들은 채무자로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배울 수 있다. ① 죄는 빚이며 죄인들은 전능자 하나님께 빚진 자이다. 우리는 피조물로서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 빚은 율법의 교훈에 대한 순종의 빚이다. 그걸 갚지 못했으므로 우리는 죄인으로서 벌을 받기 쉽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물어야 할 임대료를 내지 않았다. 아니 우리는 주 여호와의 물품을 써버림으로써 빚진 자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에게 입힌 피해와 그에게 대한 우리 의무의 불이행을 들어 우리를 고발하신다. ② 어떤 자들은 죄로 말미암아 남들보다 그 부채가 더 많다. "하나는 오 백 데나리온을 빚졌고, 다른 하나는 오 십 데나리온을졌다." 그 바리새인은 빚이 덜한 자였지만 그도 역시 빚진 자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빚이 많은 자였다. 하나님은 그에게도 꾸어준 분이었다(눅 18:10, 11 참조). 이 여인은 추문과 악명이 높은 죄인으로서 큰 빚진 자였다. 어떤 죄인들은 그들 스스로 남보다 더 큰 채무자가 되고, 어떤 죄인들은 여러 가지 약화시키는 형편 때문에 남보다 더 큰 채무자가 된다. 즉 이를테면 그들은 극히 노골적으로 괘심한 범죄를 행한 자이며 더 큰 빚과 지식에 대적하여 범죄하고 보다 많은 확신과 경고, 보다 많은 자비와 은총의 방편에 거역하여 죄지은 자들이다. ③ 우리의 빚이 많든 적든 간에 그것은 우리가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을 초과하고 있다. "그들은 갚을 것이 없었고 타협할 근거를 아무 것도 갖지 못했다." 부채는 막대한데 우리가 지불할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은과 금은 우리 빚을 면제하지 못할 것이며, 희생 제물이나 제사로도, 일 천 마리의 수양으로도 그 빚을 갚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의로도 갚지 못할 빚이며, 장래에 회개하고 순종하더라도 갚지 못할 빚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매인 빚이며,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④ 인간의 부채가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조건 위에서 탕감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며, 솔직히 불쌍한 죄인을 용서해 주신다. 만일 우리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는 우리의 불의로 말미암아 파멸을 당하는 것이 없을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은혜롭고 자비하신 것으로 선포하셨고 기꺼이 탕감해 주시는 분으로 선언하셨다. 그의 아들은 회개하고 믿는 자들을 위해 사유하심을 갚아주고 사셨으므로 그의 복음은 빛의 탕감을 그들에게 약속하며 그의 성령은 그걸 인치고 보증하시며 그들에게 그 위로를 주신다. ⑤ 자기 죄를 사함 받은 자들은 자기를 사유해 주신 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이 용서받으면 받을수록 그들은 그를 더욱 더 많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회개하기 전에 더 큰 죄인이었으면 죄인이었을수록 그들은 나중에 더욱 더 훌륭한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도록 연구해야 하며 그들의 마음은 순종하는 데 더욱 많이 경주되어야 한다. 핍박하던 사울이 전도하는 바울로 되었을 때 그는 더욱 수고를 많이 하였다. 2. 그리스도께서는 이 비유를 자신에게 대한 그 바리새인과 죄인의 상이한 태도에다 적용하신다. 그 바리새인은 그리스도를 선지자로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그를 의인(義認)된 상태에 있는 자로 인정하시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적게 탕감함을 받긴 하였지만 탕감을 받은 자, 용서를 받은 자로 인정하려고 하시려는 듯하다. 그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는 가운데서 실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얼마간 표시한 셈이었지만, 이 불쌍한 여인이 보인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살펴보라"고 말씀하신다. 즉 "이 여인은 탕감함을 많이 받은 자이다. 네 판단대로 하자면 이 여인은 너보다 많이 사랑해야 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또 그런 것으로 나타났다. 네가 이 여자를 보느냐?(44절) 너는 이 여자를 멸시하지만 그녀는 내게 있어서 너보다 얼마나 더 친절한 친구인지 잘 생각해 보라. 그렇다면 내가 네 호의는 받아들이고 이 여인의 호의는 거절해야 하겠느냐?"라는 말씀이다. (1) "너는 내가 들어 왔을 때 내 발을 씻기기 위해 물대야를 들여오라는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내가 걸어서 피로하고 발이 더러워졌을 때 네가 물을 떠오라고 하여 내 말을 씻겨 주었더라면 그것은 나를 무척 상쾌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더 많은 일을 하였다. 그녀는 내 발을 눈물로 적셨다. 그 눈물은 내게 대한 애정의 눈물이요,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눈물이었다. 그녀는 나에 대한 큰사랑의 표시로 자기 머리털로써 내 발을 씻겼다." (2) "너는 내 볼에 입맞추지도 않았으나(이것은 친구에게 대한 진심의 애정어린 표현이다) 저는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함으로써(45절) 겸손하고 따뜻한 사랑을 나타냈다." (3) "너는 으례껏 내놓는 보통 기름도 내 머리에 부어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여인은 옥합에 든 보배로운 향유를 내 발에다 부었다(46절) 그녀는 이토록 너를 능가하였다." 일부 사람들이 열심 있는 기독교인의 종교적 수고와 지출을 두고 비난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진하여 그런 데까지 도달하기를 원치 않으며 값싸고 편안한 종교에 안주하려는 결심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의 험구를 침묵시키셨다. "내가 시몬 네게 이르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47절). 그리스도께서는 그 여인이 많은 죄를 범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시고 있다. "그러나 저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므로 저의 호의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내가 합당치 못한 것은 아니다. 저의 많은 죄가 사해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그는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그러므로 저의 사랑함이 많으니라"고 읽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의 취지로 보아 그녀의 사랑함이 많았다는 것은 죄사함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며 그녀가 그걸 위로로 깨달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으므로 그를 사랑한다. 그는 우리가 먼저 그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러나 너와 같이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네가 하듯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대한 바리새인의 사랑이 너무나 적어 정말 그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지 의심할 만하다는 것을 바리새인에게 시사하셨다. 결과적으로 바리새인의 죄는 비교적 적기는 하였으나 그 적은 죄의 사함을 정말 받았는지도 그가 의문시할 만하였다. 우리는 보다 큰 죄인이 회개하여 그리스도께 자비를 얻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원한을 갖거나 그리스도께 불평하게 되기가 쉽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는 대신에 그들의 본을 보고 자극을 받아 우리들 자신이 참으로 죄사함을 받았으며,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면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한다. 4. 그리스도께서는 그녀의 불안을 일소시키셨다. 그 여인은 아마 그 바리새인의 인정없는 처신에 풀이 꺾였을 것이지만 도망칠 정도로 낙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 그리스도께서는 그녀에게 "네 사함을 얻었느니라"고 말씀하셨다(48절). 우리가 죄에 대한 근심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많이 표명하면 할수록 우리 죄의 용서하심에 대한 증거를 더욱 분명히 갖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자. 우리가 우리를 위해 역사 하시는 은혜의 행위를 확실히 믿게 되는 것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는 은혜의 역사를 체험하게 됨으로써인 때문이다. 그 여인이 "네 죄 사함을 얻었다"는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듣고 해방되었을 때 그 여인은 자기 수고와 비용에 대한 보상을 아주 톡톡히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그녀가 다시 죄로 돌아가는 일에 대한 아주 효과적인 예방책이 되었다. (2) 그 자리에는 그리스도께서 죄를 용서하신다(49절)고 하시고 죄를 소멸한다고 선언하시데 대해 마음속으로 그리스도를 힐난한 자들이 있었다(마 9:3).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하신 말씀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으셨다. 그는 이전에 중풍병자를 치유하시면서 죄사할 권세가 있으시다는 것을 증명하셨고, 따라서 험담에 개의치 않으려고 하셨다. 여기서는 그가 죄를 사하시는 일을 즐거워하신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자 하신다. 그것은 그의 기쁨이었다. 그는 참회하는 자에게 용서와 평안을 말하기를 즐겨하신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50절). 그녀가 자기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자기 죄의 사함에 대한 그녀의 위로를 확증하고 배가 하는 말씀이었다. 죄에 대한 근심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이 모든 표현은 믿음의 결과요 산물이었다. 그러므로 온갖 은혜의 믿음은 하나님을 극히 존귀하게 해드리듯, 모든 은혜의 주인공이신 그리스도는 믿음을 또한 존귀하게 하신다. 자기 믿음이 자기를 구원했다는 것을 아는 자들은 평안히 갈 수 있으며, 즐거워하면서 자기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눅8:1-3]====== 1.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2.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3.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 예수를 돕는 여인들(눅 8:1-3) 우리는 이런 내용을 엿볼 수 있다. Ⅰ. 그리스도의 "필생의 사업"은 무엇인가 ? ─ 그것은 "전도"였다. 그는 그 일에 있어서는 지칠 줄 몰랐다. 그리고 이 후에 ─ ‘엔 토 카덱세스’ ─ 적당한 "시기"와 방법을 택하여 선행에 힘썼다(1절). 그리스도는 자기 앞에 자기의 일을 갖다 놓고서는, 규칙적으로 그 일을 해 나간다. 그는 사업의 "순서" 또는 질서를 지켰다. 그래서 한 선행의 끝은 다른 한 선행의 시작이 되었다. 여기서는 이런 것을 관찰할 수 있다. 1. "어디서" 전도했는가 ? ─ 그는 "두루 다녔다" ─ ‘디오듀엔(1353)’ 말하자면 그는 "순회" 전도자였다. 어느 한 장소에서만 전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광선을 사방에 폈다. Circumibat ─ 즉 그는 순회 여행을 했다. 마치 사사의 한 사람처럼 일했다. 아마 "새로운" 곳일수록 자기의 전도가 더 잘 "받아들여지는" 것을 체험했을 것이다. 그는 "각 성(모든 도회지)을 두루" 다녔다. 어떤 성읍도 무시하지 않았다. 이로써 그는 자기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셨다. 그가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을 다녔듯이, 그 제자들은 지상의 모든 민족의 국경을 넘어야 한다. 그는 또한 "성읍"(도회지)에만 한정하지 않고, 평범한 시골민들이 사는 "촌"에도 갔다. 즉 "촌의 거민들에게도" 전도하신 것이다(사 5:11). 2. 그는 무엇을 전도했는가 ? ─ "그는 하나님의 나라의 기쁜 소식을 가르쳐 주었다." 즉 사람들 중에 지금 그 나라가 세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리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식은 "기쁜 소식"이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 온 소식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의 충성"을 기꺼이 하나님께 바치려는 모든 자들을 "기꺼이 자기의 보호하에" 두시려 하신다는 사실을 인생들에게 말해 주는 것이다. "개혁"과 "화해"의 희망이 있다는 사실은 이 세상에는 기쁜 소식이었다. 3. 그의 수행자들은 누구였는가? "열 둘이 그와 함께 했다." 즉 그리스도가 계실 때에는 그의 전도에 함께 한 것이 아니라. 이 후에 기회가 오면 무엇을 전하고 어떻게 전도하는지를 그에게서 배우는 일에 함께 했고, 그리스도 자신이 갈 수 없는 곳으로 보냄을 받음으로써 함께 하는 자들이었다. 그의 지혜를 들을 수 있었던 이러한 그의 종들은 참으로 행복했다. Ⅱ. 그는 생활에 "필요한 필수품을 어디서 조달했는가 ?" 그는 자기 친구들의 친절을 먹고살았다. 종종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동하면서 "자기들의 소유로 그를(한글은 복수-역주) 섬기던" "어떤 여인들"이 있었다(2, 3절). 그들 중 일부의 이름이 나와 있다. 그러나 그 밖에도 "많은 다른" 여인들이 있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감동되어 열심이었고, 그래서 "그것(가르침)을 장려하는" 것이 자기들의 "정당"한 의무라고 생각했고, 자기들의 그 은혜를 입었으므로 또 "자비"를 베풀어서 많은 다른 자들도 자기들처럼 그런 은혜를 입기를 비는 자들이었다. 1. 대부분의 지역에 "그리스도의 회심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의 권능과 자비의 기념비들이다. 그들은 "그에 의해서 악령과 질병을 고침 받은" 자들이다. 어떤 자들은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하며, 우울하게 지냈고, 또 어떤 자들은 몸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들 모두에게 유력한 치유자가 되어 주었다. 그는 그들의 몸과 영혼의 양편의 의원이시며, "그에게 고침을 받은" 자들은 어떻게 자기들이 "그에게 보답할까"를 연구해야 한다.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그를 수종들어야 하며, 그것이 곧 우리가 다시 악에 빠졌을 경우 도움을 쉽사리 받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분과 우리를 "구원해"주는 방편이 되었던 것, 곧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받들어야 한다. 2. 그 중의 한 연인이 "일곱 귀신에게서 해방된" 막달라 마리아였다. 부정확한 숫자가 있는가 하면, 정확한 숫자가 있다. 어떤 이들은 그녀가 "매우 사악했던" 여자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로 이 앞에서(7:37) 언급되었던 그 "죄인"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탈무드경의 어떤 저작자들은, 막달라 마리아는 "머리를 딴 마리아"란 뜻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녀의 부정함과 치욕된 시절을 나타내는 말이다. 왜냐하면 "머리를 땋는 것"은 "정숙한 단장"과는 반대되는 일이기 때문이다(딤전 2:9). 그러나 그녀가 과거에는 부정한 여인이었을지라도, 회개하고 개심 함으로써 그녀는 자비를 얻었고, 열심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것이다. 아무리 큰 죄인에게도 용서받을 희망은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또한 과거에 악했던 자들은 회심하고 나면, 그것에 반비례하여 더욱 열심히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또는 그녀는 "대단히 우울했던" 여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슬픔 마음"을 지녔던,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요, 나중에 그녀는 베다니로 이사간 것이다. 막달라란 말은 "우울한 마음"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일 가능성이 짙다. 그런데 그 막달라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무덤에까지 대동한 여인이다. 그리고 그녀가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절친한 친구요 총애를 받던 이 여인이 그 자리에 대동하지 아니했든가, 아니면 갔더라도 복음서 기자들이 그녀를 모르고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 어느 경우도 있을 법하다고 상상할 수 없다. 이것은 라이트푸트 박사의 거론이다. 그러나 이런 이론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즉 막달라 마리아가 "갈릴리서부터 예수를 따라 온 여인들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이다(마 27:55, 56). 반면에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는 베다니에 집을 가지고 있었다. 3. 그들 중 다른 하나는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이다. 그녀는 (혹자의 말에 의하면) 전에는 구사의 아내였으나 지금은 과부가 되었고, 좋은 여건 속에 살았다. 만일 지금도 구사의 아내라면, 우리는 그녀의 "남편"은, 비록 헤롯의 궁정에 기용되어 있었지만, 복음을 받아들였고, 자기 아내가 그리스도의 추종자가 되고 그리스도에게 재물로 봉사하는 자가 되는 것을 쾌히 허락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4. 또한 "자기들의 소유로 그리스도를 섬기는"자들이 많이 있었다. 이것은 우리 구주가 자신을 얼마나 낮추셨는가 함을 엿볼 수 있는 실례가 된다. 그는 그런 도움이 필요로 할만큼 비천한 데로 낮아지셨고, 그런 도움을 받아들이실 만큼 겸손하셨던 것이다. 그는 비록 부자였지만, 우리를 인하여 "그는 가난해졌다" 그래서 기부해 주는 자선금으로 살아나갔다. 하나님의 섭리가 궁핍으로 몰아넣었을 때, 어떤 자들이 이웃의 자선으로 살아나가게끔 되어 남의 신세를 진다고 하여 결코 그들을 조롱하지 말라. 오히려 그런 자들로 하여금 호의를 구하게 하고, 그 호의에 감사할 줄 알게 하자. 그리스도도 자기가 전도하러 들어간 도회지나 시골의 낮선 자들에게 부담을 지우기보다는, 차라리 자기가 알고 있는 친구들에게 자신과 자기의 제자들의 생계를 신세지는 편을 택하셨던 것이다. 말씀으로 교육을 받은 자들은 "자기들에게 각종 좋은 것으로 교육해 주는 자들에게 상호부조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이렇듯 아낌없고 활달한 자들은 자기들의 소유를 가지고 주님을 공경했다. 그리하여 저들은 자기들의 소유에 또한 축복을 가져왔던 것이다. ======[눅8:4-18]=== 4.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5.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6.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7.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9.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10.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1.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15.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16.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17.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18.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19.예수의 어머니와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로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20.어떤 이가 알리되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2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 씨 뿌림의 비유(눅 8:4-21) 앞 대목에서는 그리스도가 "전도"에 열심하고 있는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했다(1절). 이 대목은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듣는데 열심인 이야기부터 시작한다(4절). 그는 전도하시려고 "각성(各姓)에 들어가셨다." 그러므로 그가 자기들의 마을에 왔을 때 그곳 사람들은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보면 "각 동리에서 그에게로" 나아온 자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들은 그가 "자기들"에게 오기까지 기다리려고 하지 않았고, 또 그가 "자기들"을 떠나더라도 만족하다고 생각지 않던 자들이요, 그가 자기들에게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만나고," 자기들을 떠나려 할 때는 "그를 좇으려고"했던 자들이다. 또한 그는 "그에게도 나아온" 자들이 사는 그 마을에서 "나온" 자들에게로 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들도 있는가 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에게 나아올 만큼 열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요, 따라서 그는 지극히 겸손했으므로, 그는 친히 그들에게 나아가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를 찾지 아니한 자들 속에서 발견된다"고 했기 때문이다(사 45:1). 마치 큰 대회가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큰 무리를 이루었다"고 했다. 그물을 던져야 할 고기들이 풍부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배를" 준비했듯이, 그리스도는 즉각적으로 그들을 "가르치기를" 기뻐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Ⅰ. "씨 부리는 자"의 비유 속에서는 말씀을 듣는 데에 필요하고도 우수한 법칙과 주의사항이 있으며, 그 해설과 의미 활용이 나와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이미 두 번씩이나 자세히 살펴본 것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자, 1. 제자들은 그 의미에 대해서 "뜻을 물었다"(9절). 그들은 물었다. "이 비유의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듣는 말의 내연(內延)과 외연(外延)을 알려고 애써서, 지식에 잘못이나 결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2. 그리스도는 그 비유가 그들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지를 밝히 깨닫게 해 주심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의 심오성과 의미를 잘 알게 되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그런 것은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있던 사실이다. "그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느니라"(10절). 그리스도의 교훈을 받으려는 자들은, 자기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대한 특권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은 어둠 속에 버려져 있는 그런 때에 자기들에게 그 교훈의 뜻이 밝히 드러난다면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가 하는 것을 알아서 중히 여길 줄 알아야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비유"로서 끝나고 마는 바로 그것이 ─ 그래서 그들은 단지 "감탄할" 말이다 ─ 우리들에게는 "알기 쉬운 진리"로 드러난다면, 우리들이야말로 행복한 자들이요, 영원토록 자유로운 은총에 빚진 자들이다. 우리는 그러한 진리에 의해서 "비추임을 받고" "다스림을 받으며," 또한 그러한 형태로 우리는 지음을 받도록 "인도된다." (1)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씨"에 대해서는 "토양"과 같다. 마음은 그것을 받을 역량이 있다. 또 그 열매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씨가 거기에 뿌려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유익도 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씨"와 "토양"을 병행시키는 수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뿌려지지" 아니했다면, 우리가 성서 속에 "씨"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무슨 소용 있으랴? 그리고 그 씨앗이 뿌려지지 않았다면,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토양이 있은들 무슨 소용 있으랴? (2) "씨뿌림의 성공" 여부는 토양의 성질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즉 그 토양이 씨를 받아들일 준비가 갖추어져 있느냐 없느냐에 크게 좌우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됨됨이"에 따라서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도 되고 "죽음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향기도 된다." (3) 마귀는 미묘하고 짓궂은 원수다. 그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유익을 얻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자이다. 그는 "부주의한" 자들의 마음속에서 말씀을 빼앗아감으로써, "그들이 믿어 구원받게 되는 일이 없도록" 만든다(12절). 이러한 사실이 부가적으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① 우리는 "믿지" 않고는 "구원받지" 못한다. 복음의 말씀은 거기에 신앙이란 것이 혼합되지 않는 한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말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② 그러므로 마귀는 온갖 수단을 다하여 우리에게서 "믿음"을 앗아가려 하며,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들었을 때에도 그것을 믿지 못하게끔 만든다. 또는 그 말씀이 당장 우리에게 필요해진 때에, 잊어버리게 하거나 떠내려가게 만든다(히 2:1). 또는 다시 우리가 기억하게 되면, 우리 마음속에 그 말씀에 대한 나쁜 편견을 유발시키거나, 다른 데로 우리의 마음을 "돌린다." "우리가 믿어 구원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즉 우리가 믿어 "기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서 온갖 일을 다하면서, 마귀는 믿고 "떤다." (4) 하나님의 말씀이 "부주의하게" 들려지는 곳에는, 역시 말씀에 대한 "경멸"이 있게 되기가 일쑤이다. 이 비유에 보면,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밟혔다"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5절). 실상 고의적으로 말씀에 대해서 문을 닫아버리는 자들은 그 말씀을 자기들의 발로 짓밟는 자들이다. 그들은 "주의 계명을 경멸한다." (5) 말씀에 대해서 "다소"의 감명을 받았으나 "깊고" "지속적인" 감명을 받지 못한 자들은 시련의 시기가 오면 자기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만다. 그런 자들은 돌 위에 떨어진 씨앗과 같아서, 뿌리가 없다(13절). 이들은 "잠깐 동안은 믿으나," 그것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뭔가를 고백하고 약속하나, "시험의 때가 오면 그들은 넘어져서" 좋은 출발점을 이탈하게 된다. 세상의 미소나 짓궂은 장난에서 시험이 오게 되면 그들은 쉽사리 정복되고 만다. (6) "현생의 쾌락"은, 말씀이라는 좋은 씨앗에 대해서는 다른 요인들처럼 그 씨앗을 질식시켜 버릴, 위험하고 해로운 가시덤불과 같다. 이 말씀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데, 여기에 덧붙여 있는 것이다(14절). "현생의 염려에 휘말려 들지 않고," "재물의 유혹에" 넘어가지도 않았으며, 자기들은 그런 것에 대해서 죽은 자들임을 자랑하는 자들은 여전히 헛된 태만과 안일과 쾌락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늘과는 차단될 수가 있다. 감각의 환희는 영혼을 파멸시킬 수 있다. 아무리 합법적인 즐거움이라도 거기에 참석해 있는 자들의 즐거움이 바로 그러하다. (7) 단지 열매를 맺은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완전에 이른 결실을 해야"하는 것이다. 즉 완전히 성숙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전혀 열매가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결실치 못한" 것이라 한 말을 여기서는 "온전히 결실치 못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factum non dicitur quod non perseverat ─ 즉 견인(堅忍)이 일의 완성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8)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은 "정직하고 좋은 마음"을 말하여, 가르침과 계명을 받을 자세가 잘 된 마음이다(15절). 죄악 된 타락에 물들지 않은 마음, 하나님과 의무에 집중하고 있는 마음, 정직하고 부드러운 마음, "말씀을 듣고 떠는" 마음이 바로 착하고 좋은 마음이니, 그런 마음은 들은 것을 "이해하고"(마태복음에는 그렇다), 그것을 "받아들이며"(마가복음에는 그렇다), 그것을 "간직한다"(본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마치 토양이 씨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간직함과 같다. 또한 배가 음식물이나 약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간직도 하는 것과 같다. (9) 말씀을 잘 간직하는 곳에는, "인내로써" 결실을 보게 된다. 거기에는 "견디는" 인내와 또한 "기다리는" 인내가 모두 필요하다. 즉 "말씀 때문에" 일어나게 될 "소동"과 "박해"를 감수하는 인내, 유종의 미를 거두려고 지속하는 인내가 필요하다. (10)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듣는 가를 조심하게" 될 것이다(18절). 우리가 들은 말씀에서 유익을 얻게 됨을 방해할 만한 것을 조심하며, 듣는 우리의 마음을 살피고, 그 말씀이 우리를 배신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부주의하거나 가벼이 듣지 "않도록" 조심하고 어떤 경우에든지 우리가 들은 그 말씀에 대해서 나쁜 편견을 갖지 않도록 조심하자. 또한 우리가 일단 말씀을 들은 다음에는 우리의 정신 자세를 살펴서, 우리가 얻은 유익을 상실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Ⅱ. 말씀을 전파해야 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이미 들은 사람들에게 대한 요긴한 지시 사항이 있다. 1. "은사를 받은" 자들은 "그대로 섬겨야"한다. 복음의 경륜을 위탁받은 사역자들, 곧 말씀으로 유익을 얻었고, 그래서 남들에게로 그런 유익을 끼칠 자격을 구비하게 된 자들은 자기들이 "불이 켜진 등경"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사역자들은, 엄숙하게, 권위를 가지고 전도하고, 사람들은 형제애를 가지고 그들의 강론을 들어서, 그들의 불빛을 퍼지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등경"을 "그릇으로 덮어두거나" "침상 밑에 두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16절). 사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말씀을 제시함으로써" 이 세상의 등불이 되어야 한다. 그들의 등불은 사람들 앞에서 빛을 발해야 한다. 그들은 "선해야" 할 뿐 아니라 "선을 행해야" 한다. 2. 지금 당장은 "은밀히" 되었고, 보이지 않는 샘에서 솟아났던 일도 멀지않아 "드러나서 알려질 것"을 예상해야 한다(17절). 당신에게 "은밀하게" 맡겨진 일을 "당신 자신이" 밝히 드러내야 하리라. 왜냐하면, 당신의 조물주는 당신에게 당신의 재능을 묻어두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사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숨겨진 것이라도 "알게"하자, "당신이" 그것을 밝히지 않으면, 그것은 "당신을 고발하는" 것으로 드러나서 당신의 부정함을 입증하는 증인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3.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은사는,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과 형제들의 교화에 쓰느냐, 쓰지 않느냐에 따라서 우리에게 지속되든가 사라지든가 한다. "가진 자에게 주어지게 되리라"(18절). 은사를 가지고 그것으로 선행을 하는 자는 더욱 많이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재능을 묻어 두는" 자는 그것을 잃게 될 것이다. 가지지 않은 자에게서는 "그 가진 것까지" 빼앗을 것이다(마가복음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 즉 그가 "가진 줄로 알고 있는 것까지 빼앗긴다"는 것이다(누가복음은 이렇게 되어 있다). 잃어버리게 될 은총은 단지 은총으로 "보이는" 은총일 뿐 "참된" 은총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사람들이 "사용하지"않음은 단지 가진 "줄로 알기만"함과 같고, 종교의 허식은 결국 사라지고 빼앗기고 말 것이다. 그런 것들은 우리에게서 나갔다. 그것은 그것들이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요일 2:19). 우리가 은혜를 신실히 간직하는 것은 우리 속에 "일의 뿌리"가 있게 하는 것임을 알자(욥 19:28 참조). 즉 그것이 이미 가진 것을 잃지 아니하는 좋은 비결이다. Ⅲ. "실행하는 자"가 됨으로써, 특히 그리스도가 자기의 가장 가까운 인척보다도 실행자를 더욱 귀히 여김으로써 자기의 제자들에게 보여 준 본(19-21절)을 따라서, "말씀을" 신실하게 "듣는 자"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자들에게 커다란 격려의 말씀이 있다. 이 이야기는 앞에서 두 번이나 살펴본 것이다. 여기서는 이런 점을 관찰해 보자. 1. 많은 무리가 예수를 좇았다. 예수에게 시중드는 무리들이 많았으므로 가까이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항상 그렇게 많이 모여들었지만, 예수는 자기의 회중에게서 밀려나가려 하지는 않으셨다. 2. 그의 가까운 친척 중의 어떤 자들은 조금도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애쓰지 않았다. 제때에 왔더라면 쉽사리 가까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여 그를 "맞아들이는" 대산, "그를 보기도" 싫어하여 "밖에다" 세워 두었다. 아마 그들은 어리석은 두려움이 들어, 그가 말을 너무 많이 하지 않게 하려고, 방해하려는 생각만 했고, 그의 말이 중단되게 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친구들과 이야기하기보다는 자기의 일에 분주하기를 원하셨다. 그는 자기의 "모친과 형제"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고 자기의 전도를 중단하고자 하지는 않으셨다. 그 전도가 그의 "먹고 마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4.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은 자기의 가장 가깝고 귀중한 친척들이라는 사실을 쾌히 인정하셨다. 그런 자들은 그에게 있어서는 "어머니와 형제들"보다 더 중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