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5.07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빌2.그리스도를 우리의 본_모형_실례로 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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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2장   [455.주님의마음을본받는자]...창조의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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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는 ((혼 안에 담긴 하나님, 곧!!)) Q의 경륜 체험의 실제의 어떠함을 말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그 비결..미셸(지혜) : (메쉬)멤-쉰 +라멛 = 미셸(주관하다)..Q을 실제 체험케 하는것은 기름부음 그 자체이지 그외의 다른것 결코 아니다.. 기름부음, 곧 운행하며 움직이시는 그 영!!, 그분이 친히 주인/주님 되시도록 = 주관하시도록 ((언제 어디서나 24시간 내내!!  시공 넘어서서 실행 가능하다!! 주님 이름 부르며 주시/주목/앙망/여쭘/기다림으로써!! 전존재 중심/마음을 열어드림이 관건!! = 예슈아 하-메시아를 "전부 다" 그리스도로 번역해버린 헬라어번역의 실수를 범해서는 안될지니.....결코 그리스도(케리스토스) 정도로 끝나버림이 아니다!! ... 그것은 단지 찬란한 햇빛을 내는 태양을 가려버림!!..희미한 희석에 불과하다....하-메시아흐는 완성된(모든 것 부어주심이니...영 안에 있음이요/그때 친히 온전히 그분자신을 그대안에 충만히 만들어 나가신다) 기름부음이다.. 하-메시아흐는 반드시 쉰까지 가야만+동시에 날로 새로와지고 성숙해지게 하신다.....이는 바로 인지-직감-교통/대화-하나 됨 앎에로 나아감이 된다...

[요일2:27...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기름부음 받으신 JC께서  그영이 되사 바로 <그영을 받은바> 내 안에 계시므로 JC의 기름부음 받음은 또한 내 것 된것을 반드시 믿음으로 붙들라!!...이미 창세기에서 말씀으로 기록하셨고, 또 십자가위에서 친히 말씀하신바 그대로!! <베레시트 그대로> 다 이루셨고-되어지신 분 그분이 우리를 (유한한 시간 안에서)당신자신처럼 만들어가고 계심.....그 기름부음의 실제적 접촉 실행이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 그 관건은 오로지 "영안에 있음 = JC를 머리삼음 = 주로 주 되시게 함(JC를 주님과 주인으로서 하나되어 경외함)"))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요15:4.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

.....@@이므라<말씀, 말>아마르(אָמַר) + 샤마르(שָׁמַר) :::::코람데오/주 앞에 선 존재로서 마음 중심을 지키는<샤마르-שָׁמַר>..(하나님께서)유심히 보다-부지런하며 성실하다-(약속의 말씀을)두려워 떨며 지키며-삼가며 조심하다-전심으로 예배와 섬김으로 누리다 = 생생한 실제로서 경험/체험--체득하다....(그 안에 알레프~쉰+눈이 들어 있는 진리 말씀 삶)... 이  샤마르 실행함으로 인해 [비록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날로 새로와지는도다]

.....@@케리스토스(히4:25) : 카프+레이시(주님을 머리삼음의 실제, 곧..영안에 들어감 인해 적용된 영)-요드(영의 사역)-싸멬(측정=기초/토대)-테트(Q을 새겨넣음)-바브(Q의 본성-인격)-싸멬(보좌에 도달=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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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그리스도를 본으로 취함과 그리스도를 밝힘 

*1)혼 안에서 연결되고 한 가지 것을 생각함(1-4) 

*2)그리스도를 본으로 취함(5-11) 

*3)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냄으로 그리스도를 밝힘(12-16) 

*4)믿음의 희생제물 위에 부어진 전제물(17-18) 

*5)사도가 믿는이들을 관심함(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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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쉬아흐는 왕, 대제사장, 예언자와 관련되는 단어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왕, 대제사장, 예언자의 직책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백성들 앞에서 임직식을 할 때 기름붓는데 이 기름부음 받은 자를 마쉬아흐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 이  단어에 대한 구약 용례의 빈도수를 보면 38번중 34번은 왕에게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시대적으로 대제사장 이후에 왕이 나왔으므로 왕이 나오고 나서는... 대제사장에게 있어서는 한 번도 마쉬아흐란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지도자에게 사용되었지만 특별히 그중에서도 이스라엘 왕국의 왕을 의미한다고 보면 거의 틀림없다........

한편, 왕국에 해당되는 단어는 히브리어 말쿠트(מַלְכוּת) 혹은 마믈라카(מַמְלָכָֽה)이다. 

여기서 나라로 번역된 히브리어 말쿠트(מַלְכוּת) 혹은 마믈라카(מַמְלָכָֽה)는 그 단어 안에 이미 왕이란 의미의 멜렠(מֶֽלֶךְ)이란 단어가 들어 있으므로 당연히 왕국으로 번역해야만 한다. 왕국이란 반드시 왕이 존재하는 나라를 의미한다.  또한, 나라란 뜻을 가진 원어는 따로 있다. ----히브리어의 고이(גוֹי).. 

고이는 주로 이방나라를 뜻하지만 때로는 이스라엘을 포함한 일반적인 나라를 뜻하기도 한다. 즉, 나라란 단어와 왕국이란 단어는 뜻이 많이 다르다. 나라란 단어는 왕국이란 단어보다 뜻이 포괄적이다.  따라서 원어 성경에서 말하는 말쿠트나 마믈라카나 바실레이아는 왕이 다스리는 왕국을 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간절히 바라던 소망, 그것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 곧 마쉬아흐가 이 땅에 와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바로 예수(예슈아)가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려 오던 그 마쉬아흐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던 눈에 보이는 이 땅의 마쉬아흐가 아니라 이 땅을 초월하는 하나님 왕국의 마쉬아흐 곧 왕이셨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인자를 누구라고 말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페트로)는 교회의 기초가 되는 신앙고백을 하였다. 그 신앙고백의 내용은 ‘당신께서는 그 마쉬아흐시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이다. [개역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주는’이라는 단어와 ‘당신은’이라는 단어는 의미가 다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말하면서 그 내용이 예수를 주로 고백한 내용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원문에 따르면 그 내용이 예슈아를 마쉬아흐로 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이다. 

이 신앙고백에서 예수를 마쉬아흐로 고백한 것이 무슨 의미일까? 앞에서 언급한 구약에서의 용례를 통하여 생각해보면 예수를 왕으로 고백한 것이다.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예슈아 마쉬아흐(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나온다.  이 계보가 의미하는 바는 [구속사적 관점으로 써내려간 --하나님이 보시는 바, 하나님 왕국의, 영적] 이스라엘 왕의 계보였고 예슈아 마쉬아흐께서 육신으로 동시에 영적으로도 왕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그토록 분명하게 가리킨다.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다른 나라의 통치 밑에 있으면서 그 백성들의 소망은 다시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되찾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 곧 마쉬아흐가 이 땅에 와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소망이었다. 바로 예슈아가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그 마쉬아흐이셨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던 눈에 보이는 이 땅의 마쉬아흐가 아니라 이 땅을 초월하는 하나님 왕국의 마쉬아흐 곧 왕이셨다. 침례자 요하난은 예슈아께서 마쉬아흐이신줄 알았지만 그 마쉬아흐가 왕으로서 하시는 일이 자신이 기대하던 일과는 달라서 다시 묻는다. 마태복음 11장 2-6절이다.

==요한(요하난)이 그 마쉬아흐(=기름부음)의 하신 일들을 감옥에서 듣고 그의 두 제자를 보내어 그에게 말하였다. “오실 그분이 바로 당신이십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우리가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예슈아)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듣고 보는 일을 요하난에게 가서 전하여라. (못봄)시각장애인들이 보고, (치우침)다리 저는 자들이 걸으며, (Q거역)한센병 환자들이 깨끗해지며, (말씀 안들림)못 듣는 자들이 들으며, (날마다 죽고 부활)죽은 자들이 일으켜지고, (진리 없음)가난한 자들이 복음을 듣게 된다. 나 때문에 넘어지지 않는 자는 행복하다(아쉬르...팔복 =베레시트).”==이를 듣고 요한은 기꺼이 목베임 당하고 있다(구약이 끝남을 의미)..주님이 머리되셔야 하기 때문, 그 직후에 오병이어 사건 나옴

그런 면에서 예슈아는 예슈아의 조상 다뷛과는 구별된다. 예수와 다윗은 같은 마쉬아흐 곧 왕이었지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면에서 다른 것이다. 

예수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나중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확정된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복음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복음은 두 가지를 말한다. 예수께서 마쉬아흐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베들헴에서 태어나셨을 때 여호와의 천사가 그 지역의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참으로 내가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복음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다윗 성에서 구원자가 너희에게 태어나셨으니 그는 주 마쉬아흐시다. (눅 2장 10-11절)”  ......

예수께서 태어나셨을 때 동쪽에서 박사들이 예루샬라임에 와서 ‘유다(예후다)인들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시느냐?’라고 말하였다. 헤롯 왕이 이 말을 듣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모아서 그 마쉬아흐가 어디서 태어나는지 물었다. 헤롯 왕이 물었던 이유는 자신이 왕인데 다른 왕이 태어난다고 하니까 자신의 왕 자리를 걱정하여 물었던 것이다.

침례자 요한(요하난)과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면서 ‘회개하라. 하나님 왕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한다. 하나님 왕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무엇일까? 

이것은 바로 하나님 왕국의 진짜 왕 곧 마쉬아흐가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선포하는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 왕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바로 하나님 왕국의 왕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이다. 물론 예수께서 바로 그 왕이시다. 사실상 예수의 공생애 사역을 자세히 보면 그 가르침은 하나님 왕국이었고 자신이 그 왕국의 왕 곧 마쉬아흐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결국, 이스라엘의 문제는 나라를 잃은 문제가 아니라 왕국에 대한 해석과 이해의 문제였다. 그 잘못된 해석과 이해의 문제는 인간의 죄와 부패함 때문이었다. 

따라서 회개하라는 말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라는 협소한 의미보다는 인간의 근원적인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라는 좀 더 의미가 광대한 말로 들어야 한다. 

그런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고는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도 없고 왕을 알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왕국을 본다는 말은 바로 하나님 왕국의 왕을 인식한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를 마쉬아흐로 고백한다는 말은 왕국에 대한 해석과 이해가 바르게 되었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도 결국 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대제사장에 의한 것이었다. 마타이 26장 64-66절이다.

===대제사장이 그에게 말하였다. “내가 네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게 하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 마쉬아흐인지 우리에게 말하여라.”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말하였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지금부터 그 인자가 능력의 오른편에 앉아 하늘의 구름과 함께 오는 것을 볼 것이다.”그러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말하였다. “신성 모독이다! 우리에게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보십시오, 지금 여러분은 그가 신성 모독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들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사형을 받을 만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한 신앙고백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정확하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마타이 16장 15-19절을 다시 한번 보자.

===15.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6.시몬(쉼온) 베드로( 페트로)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당신께서는 그 마쉬아흐시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17.예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 바요나(쉼온 바르요나)야, 네가 행복하다. 왜냐하면, 이를 네게 계시하신 분이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기 때문이다.” 18.나도 네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페트로)다. 이 바위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지으리니 스올(쉬올)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내가 하늘 왕국 열쇠들을 네게 주리니 무엇이든지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무엇이든지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복음에 대한 베드로( 페트로)의 정확한 이해와 해석은 이제 하나님 왕국의 열쇠를 받은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런 이해와 해석은 회개에서 비롯되며 이런 회개는 오직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계시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우리 육신을 환하게 비춰주셔서 그 실상을 명확하게 보고 알게 될 때 우리는 인간의 부패함과 연약함과 악함에 전율하며 절망하게 된다. 

그래서 전적으로 우리 육신 밖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분을 찾게 된다. 이것이 바로 회개이다. 

이런 맥락에서 복음서를 보면 복음서에서 말하는 핵심은 의외로 간단하다. 복음서는 예수(예슈아)가 바로 하나님 왕국의 왕이시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 왕국의 왕이신 예슈아 마쉬아흐께서 이스라엘에 오신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 왕국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그 왕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은 이 왕을 알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십자가의 죄패에는 ‘이 사람은 유대(예후다)인들의 왕 예수(예슈아)다.’라고 기록되었다.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로마 군인들을 통하여 예슈아께서 누구인지를 마지막까지 알리신 것이다. 예슈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왕의 패배로 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진행까지도 계획하셔서 부활을 통하여 예슈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보여주시고 참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 왕국으로 인도하시는 진짜 길을 만드셨다. 

우리 인간은 왕의 자리에 집착하는 기대와 싸움을 하였지만 이 세상에 오신 왕 마쉬아흐께서는 죽음의 권세 잡은 자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십자가의 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예슈아와 함께 우리도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하나님 왕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육신 안에서 사는 우리에게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기 육신과의 영적인 싸움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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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겸손

***>>빌립보서 2장 1절-4절 [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에서 “권면”은 헬라어 ‘파라클레시스’(paraklesis)를 번역한 말이다. 

이 말은 신약성서에 총 29회 사용되었는데, ‘위로’(consolation)의 뜻으로 14회, ‘권고, 진리 안에서 깨닫게 하심 바를 사랑과 관심-친절-배려-정중함으로써 간곡히 호소하여 최상의 선택을 권함’(exhortation)의 뜻으로 8회, ‘위안’(comfort)의 뜻으로 6회, ‘간청’(entreaty)의 뜻으로 1회 번역되었다.

......사도 요한은 ‘파라클레시스’와 어원이 같은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란 단어를 총 다섯 번(요 14:16, 26, 15:26, 16:7, 요일 2:1) 썼는데, 한글성경에서는 ‘보혜사’(개역개정, 표준새번역), ‘협조자’(공동번역), ‘보호자’(가톨릭성경), ‘대언자’(개역개정), ‘변호자’(바른)로, 영어성경에서는 ‘위로자’(KJV), ‘상담자’(NIV), ‘돕는 자’(NKJV, NASB), ‘옹호자’(TNIV, NRSV) 등으로 번역. 

.......‘권면’으로 번역된 ‘파라클레시스’와 ‘보혜사’로 번역된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는 모두 동사 ‘권면하다’와 ‘위로하다’로 번역되는 ‘파라칼레오’(parakaleo)에서 나온 명사들이다.   ‘파라칼레오’는 문자적으로 ‘곁으로(para) 부르다(kaleo)’는 뜻이다. 누군가를 곁으로 부르는 사람은 부름 받은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려는 인물이고, 누군가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람은 자기를 부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려는 인물이다.

.......권면의 목적은 협조자, 보호자, 위로자, 상담자, 돕는 자, 옹호자 등이 도움을 받는 이에게 “알아듣도록 [임재하시는 주님 이끄심 따라 잘 경청하고, 주께서 그의 마음에 열어주사 깨닫게 하시는 진리 말씀을 진실한 마음으로 다정하게 말하되, 참되게 깨달아 알아 듣도록, 그리고 주께 직접 나아가 여쭙도록] 권(exhort)하고 격려(encourage)하여 힘쓰게(exert oneself for) 하고,” 진리 안에서 올바른 길을 제시하되, 진정 겸손히!! 온유한 심령으로, 마음을 안돈시켜 진리를 깨닫는 바 올바른 길 선택할 수 있도록, 위로의 말로 권위(勸慰)하여 안정을 되찾도록 하고, 궁극적으로 권면의 목표는 권면 받는 사람이 구원을 받게 하며. 참 진리 안에 거하도록 하는데 있다. 권면의 내용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예언과 설교가 가장 대표적이다. 성경은 이 권면의 내용을 담고 있는 글로써 하나님의 백성에게 회개와 회복을 선포하고, 신실한 믿음과 인내를 촉구한다. 

권면의 방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여 한다. 올바른 권면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보여준 본을 따라 자기 권리와 자유를 제한하고, 자기 낮춤과 동일시에서 행하는 권면, 헌신적이고 이타적인 권면, 세상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며 사람을 살리는 권면, 어둠이 빛 되고 혼돈이 안정 되며 죽음이 생명 되게 하는 권면이다. 

이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권면은 세상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며 사람을 살려내 결과적으로 구원에 도달하게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베푸는 위로(paramythion)

“사랑의 무슨 위로나”에서 “위로”는 헬라어 ‘파라뮈디온’(paramythion)을 번역한 말이다. ‘파라뮈디온’은 헬라어 동사 ‘위로하다,’ ‘권고하다,’ ‘편안하게 하다’로 번역되는 ‘파라뮈데오마이’(paramytheomai)에서 나온 명사이다. ‘파라뮈데오마이’는 문자적으로 ‘곁에서(para) 말하다(mytheomai)’ 또는 ‘누군가에게 친근한 방식으로 말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파생된 의미가 ‘권고하다’(admonish)와 ‘위로하다’(console)이다. 여기서 ‘권고하다’는 촉구하다, 격려하다, 설득하다, 납득시키다 등의 뉘앙스를 갖고 있다. 또 ‘위로하다’는 응원하다, 기운 나게 하다, 누그러뜨리다, 해결하다, 진정시키다, 만족시키다, 보상하다 등의 뉘앙스를 갖고 있다.

‘권면’으로 번역된 ‘파라클레시스’와 “위로”로 번역된 ‘파라뮈디온’이 모두 권고와 위로의 뜻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차이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본문에서 ‘권면’이 ‘위로’보다 먼저 언급된 것에서 보듯이, 동사 자체로만 보면, ‘권고하다’와 ‘위로하다’로 번역되는 ‘파라뮈데오마이’가 ‘권면하다’와 ‘위로하다’로 번역되는 ‘파라칼레오’의 보조적인 동사이다. 게다가 ‘권면하다’와 ‘위로하다’로 번역되는 ‘파라칼레오’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나 종말론적이고 궁극적인 구원에서 오는 위로에 쓰인 반면에 ‘권고하다’와 ‘위로하다’로 번역되는 ‘파라뮈데오마이’는 언제나 이 세상에서 이뤄지는 사랑의 위로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나누는 위로에 쓰였다. 이런 몇 가지 차이점들을 감안해 볼 때, 개정개역성경에서 ‘권면’으로 번역된 ‘파라클레시스’(paraklesis)가 ‘위로’로 번역된 ‘파라뮈디온’보다는 훨씬 더 중요한 명사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본문에서 “사랑의 무슨 위로”라고 말한 것은 세상이 주는 것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위로, 곧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나누는 위로(comfort from his love, NIV)를 뜻한 것이다.

---성령의 교제(koinonia)와 긍휼(sphlangchnon)과 자비(oiktirmos)

“성령의 무슨 교제”에서 ‘교제’로 번역된 헬라어 ‘코이노니아’(koinonia)는 ‘~를 공유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교제가 소유격으로 성령님에게 묶일 때는 성령님이 주도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나누는 교제를 뜻하거나 그리스도인들이 주도적으로 성령님 안에서 나누는 교제를 뜻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님의 예표는 구름기둥에 있다. 바울은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벗어나 홍해를 건넌 후 광야생활에 접어들었을 때부터 그들을 가나안 땅에로 인도하여 드린 구름기둥을 성령님의 모형과 그림자로 보았다. 히브리인들은 구름기둥이 움직이거나 정지하는 행동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같은 마음과 같은 행동을 취하였고, 구름기둥이 정지하는 곳에서 행진을 멈추고 텐트를 쳤으며,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텐트를 정리한 후 행진에 나섰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을 믿고 죄를 회개하고 신앙을 고백하고 침례를 받은 후 교회생활에 들어선 때로부터 그들을 하늘 가나안 땅에로 인도하여 드릴 성령님을 선물로 받는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신”(고전 12:13) 한 몸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써 각자의 역할을 일사분란하게 수행하면서 하늘 가나안땅에로 행진하는 행위를 일컬어 성령님의 교제라고 말하였다.

“긍휼과 자비”에서 ‘긍휼’로 번역된 헬라어 ‘스플랑크논’(sphlangchnon)은 ‘심장’, ‘마음’, ‘사랑’을 뜻하고, ‘자비’로 번역된 헬라어 ‘오이크틸모스’(oiktirmos)는 ‘연민’, ‘동정’, ‘불쌍히 여김’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권면과 위로와 교제와 긍휼과 자비는 모두 보혜사이신 성삼위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어야 하고, 그 열매는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않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여야" 한다.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만약에 진실로 그렇게 여긴다면]

2.  마음을 같이하여[=그리스도만을 추구하여 주관적으로 알고 체득한 바 나눔 위해]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상호 간에 불일치의 근원인, 혼적]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둘로스의 겸비/겸허를 보이신)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빌2:7-8), 바로 그분의]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또한 혼의 구주이신 그 영께서 성도의 혼(생각-감정-의지)조차 그리스도의 성분과 요소, 그 어떠함으로 신진대사적으로 변화되게 하시리니.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사도에게 있어서 진정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것은 !!, [성도들이 그렇게 여기는바]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 어떤 격려나 위안, 성령 안에서 그 어떤 사랑의 위로나 교통, 긍휼이나 자비가 있든지 간에[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아는 것과 체험함에 있어서]주 임재 안에서 깨닫게 하신 바를 나눔, 곧 생명 나눔을 통해 같은 생각과 같은 사랑으로 혼 안에서 성도들이 서로 연결되고 한 가지 뜻 품는 것이요[상호간에 불일치가 없으려면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 온 존재의 중심과 전부가 되셔야 하고, 우리의 생각은 그리스도에 대한 탁월한 지식과 체험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야 함], 그리스도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관한 (복음 전파와 그 외의 일들에 있어서도) 이기적인 야심이나 헛된 영광 바램으로써 하지 말고 오직 마음을 겸손히 하여 서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겨주며, 자기의 장점도 귀하지만 다른 사람의 장점도 귀하게 여겨주는 것이라 말한다. 

..[오직 말씀과 성령따라 교회의 머리되신 주 바라기를 실행함으로써 [교회의 지체 각자에게  마음의 소원을 주사 행케 하시는 주 뜻 따라 행하되, 소통과 교통 통해 기꺼이 동참 협력함을 기억하고]친히 공급하시는 힘과 능력으로 , 상호 친절-자비- 겸손-온유-용납-용서-기다려 줌 통해 상호 이해/배려-격려-세움-상호 섬김의 종 됨을 실행하되 오직 주안에서 같은 (아가페적 , 곧 아가파오-필레오-스테르고를 모두 포함한 전적으로 내어주는 이타적, 자기희생적 그리스도의 부어주신 바 된 사랑) 사랑으로 한 마음-한 뜻으로 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힘씀....말씀 인도자를 ((오직 극도로 그리스도를 더욱더 자유로이 앙망하며 큰 사랑과 기쁨 안에 늘 있도록)) 축복하라, 신뢰하라, 순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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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키  예히 레바브켐 키르바드 하마쉬아흐 야후슈아  6..아세르 아프(호흡) 키 하야(그 상태로 나타남) 비데무트(모양) 하엘로힘 로(공급-체득) 하샤브(형상) 로(공급-체득) 하솰랄(밤을 거쳐서 구별된 제자 산출) 헤요토(본성과 인격이 하나님의 본성과 똑같아짐...옛사람 끝냄 인해) 솨베(형상::샤바) 렐로힘  7.키(왜냐하면) 임(목양하심)-하페쉬트(하나님의 실제 그릇됨 산출) 에트(알렙-타브까지 하나님의 속성)-에체모(하나님 본체와 똑같아짐) 바이레바쉬(의도 그대로) 데무트(모양 이룸) 에베드(경영하다) 바예히 도메(되다) 라베네이 아담(라베네이 아담 = 인자/사람) 바이마체(기둥 세움) 베트쿠나토(베레시트 그대로 서로 연결) 케벤 아담  8. 바아쉐펠 에트-네페쇼(혼에 하나님 본성이 나타남) 바이카나(옮겨짐-가나안 만듦) 아드-마베타 아드-미타트(증인/증거됨에 이르도록) 하첼리바(체레브=십자가...를 통해)  9.알 켄(세우다) 하게비호(합당하게) 하엘로힘 메오드 바이텐 로(공급-체득) 셈 니알라(뛰어난 이름) 알-콜(동심합의)-셈  10. 아세르 베셈  야후슈아 티케라 콜-베레크(무릎 꿇다/감사-찬양하다...복되다) 아세르 바샤마임 우바아레츠 우미타하트 라아레츠  11. 베콜 라숀 토데 키 아돈 야후슈아  바마쉬아흐 라케보드 엘로힘 하아브 12. 라켄 하비바이 카아세르 쉐마이템 리 베콜 에트 켄 로 비흐요티 에첼르켐 빌르바드 엘라 오드 요테르 아타 케세아니 라호크 미켐 티그우 리트슈아트 니페쑈테이켐 베이르아 우비르아다]

그대의 가족 구성원이 세상이 보기에"성품 좋고 스펙 다 갖추었고 재산도 넉넉하니 .. 다 가졌다"는 평 듣는가..?? 그것은 그야말로 구원 없어어도 된다는 사탄의 사탕발림이니!! 역발상이 중요하다.. 비록, 혼-몸에 병든 상태라 해도!!...살아계신 말씀, 주님에 대한 갈급함=말씀에 대한 굶주림/"결핍감"만이 그 (누구도 측량못할) 거룩한 누림!!..없이는 살맛 안나고, 주님 이름 부름으로 그분 임재 앞에 엎드리면 그냥 만족이라....이것을 성령안에서 영으로 전함이 중요하다...((민감한 영 주시기를!!)   @@영혼의 파수꾼<נָצַר-나차르> @@억압/고통/독방/코너/협착한곳...메차르/메차림/메차라임 המצרים  @@메짐마..'영혼의 영적/정신적/전인적 사고능력/분별력/이해력/근신함(מְזִמָּה. 메짐마...진리말씀으로 다루사 그릇 만드심의 실제)'..(긍정적 의미, 주임재안에서 열어주신바) 근신/계획/도모/조언/권고/풍언/의논(또는-자의적/부정적의미로- 궤휼/계교/꾀/사상) 

[[하늘에 속한 3가지 지혜]] <호크마> <트부나/테부나> <다아트> ....@@ 호크마 = 지혜 חכמה = 사건/문제 해결 능력.....슬기/실천력/실천지혜 :: Q 생명진리말씀이 넘치도록 채움/거함-흘러넘치도록 운행/작동으로 말미암는 실천적 현명함...동사형은 "하캄"  @@테부나..תְבוּנָה : 총명/명철/분별/지각/통달/통찰/깨달음(막막한 상황 가운데서 감정동요없이 말씀 가운데서 Q기쁘신 뜻 찾아 분별/수용/적용/선택하는, 관통/파악하여 빛 가운데 찾아냄의 지혜)... 이끄시며 움직이시는 Q을 알아채는 능력 =  비나. בִּינָה...  ((동사형은 "빈."))  @@다아트 דַּעַת: Q 말씀을 절대규준 삼아 삶속에서 실제적 체험 통해 체득한바 Q의 기쁘신 뜻 분별/실행하는 분별 지식(명확한 인식 통한 판단)  

@@[임마누엘 인한 참생명의 형통 = 찰라흐..צלח.]..하나님의 [이미 다 이루고 마련해 놓으신바] 로드맵 따름/수용/적용(영적신부가 그의 머리삼은 신랑JC에게 이끌려 한걸음씩 나아가듯) ..오직 하나님의 임재가 형통<찰라흐-צלח...יצליח׃>의 시작..[413.내평생에가는길] 속이지말라..하-샬라-티    השאלתי   /  שָׁלָה 샬라..속이다/잘못 인도(오도)하다  תַשְׁלֶ֖ה [[히브이어 부정부사 두 종류 사용법 미완료동사와 함께 ~말라, 뜻으로 사용]] אל תכזב  @@사카브(..וישכב ..살리기 위해 끌어안아 흔들다....전심으로 통회한자만이 믿음으로 행할바 생명의 성령을 전이 가능하다) @@가하르(.ויגהר...구부리다---몸 위에 덮어서 온기로 데워주다) 

@@라메드...말씀 가르침/배움으로 인해  진리말씀으로 구별됨 이루다(그분을 빼어닮은자 만들다--실제로 그분 살도록 만들다..).. 

[[엘로힘=여호와=루하]] <엘로힘אֱלֹהִים 의>요드=생명 사역 <여호와 יהוה 의>바브=인격/본성의 연합(시작)  <루하 ךוח 의>바브=주님을 머리삼은바 (나는 완전히 처리되어 죽고, 발아한 생명으로서) 그분과 완전한 연합 완성으로 하나된 영원생명 ...에트(את...Q의 속성) 에쳄(עצם...아인-체데-멤 나무...Q의 생명나무와 똑같이 만드심) 미슈파트 מִשְׁפָּט.(멤-쉰-페이-테트) =사사기/판관기.. 주관하사 넣어주심의 사역(미슈)으로써 입을 열어 말함 그대로 새겨넣음 **임(알렙-멤으로 이루어진 단어 : 창1:1-1:2까지 그대로 넣어주심) ==> 벤-아담(Q 아들...인자)만드심...Q께 이끄시는 분 JC.. 에트-네페쉬!!...굴복된자라야 복되다..=바라크!!  견해와 의견의 차이...견해는 취소 가능(속상함 없음), 그러나, 의견은 의지/억지로 관철되도록 강력하게 고집/제의함이니 거절시 속상하게됨..(자의적으로 행함이다)

 

((하나님을 앎이 알레프, 생명나무, 그분을 먹고 소화-흡수-동화되는 것이 베이트(그분 자신, 성전됨) -그분만 따라가면(김멜 = 하나이신 JC 그분 자신을 살아감...주님은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진리-생명, 그 지도/내비이심)!!, 오직 주님 붙들어 하나됨/신뢰하고 감사하며 발휘하는 믿음으로!! 상호 거함이 구원 목적인바, 주님 보시는 헌신 개념은 = 카프-요드(키) [그분이 공급하신바 구원의 선물, 즉 해방-자유-기쁨을 더욱더 누림 배우며, 곧 그분의 주권 안에 거함/주님이 주관하시도록 나를 맡겨드림으로써 이끄시는 주와 매 걸음마다 같이함.....자의적인 일하기를 바라심이 아니라..(속박되어 부담되서는 결코 안됨)] 거듭난 내 마음 드림 = 이것이!! JC의 마음(양심 포함) 품음 , 이것을 헌신으로 보고 계심... 억지 회개 강요가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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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다름아니라, 이것이 참된 의미의 헌신이다!!..해방-기쁨-자유, :: 점점 자유로워지는!! 진리말씀, 그 안에 거하라..결코 속지말라...그냥 그분 자신을, 조건없이--회개??--NO, 그것조차 내려 놓고!! "(선악분별 그 자체가 종교이니, 오직 생명삶 선택하라...윤리-도덕-선행으로 미화하는자 따라가지말고 = 미혹/현혹되지말고" ..다만 맡겨드리라(=메쉬!! =멤-쉰)- :: 유일무이하신 절대적 참된 길진리생명이신 그분이 들어와 친히 일하시도록 허락해드리라, 그냥 그분을 기뻐하고 누리라...מָשַׁח 일하시는 그분이 그대안에서 친히 일하시도록!!, 그분자신을 만드시도록!! 그분의 손안에, 그분의 주권안에 <오직 앙망하며 감사하는>믿음으로 들어가라 --이것은 아들된 자마다의 당당한 권리이다!! --생명나무 먹고 Q아는 것이 알레프이다!!..그분이 되라..성전이 되고(베이트) 예수를, 그분을 삶으로 살아내야한다 그분을 살라(김멜)...한걸음 한걸음마다 그분 동행할때!! 그분이 아버지 앞에 서게하는바 지도요 네비게이션이다...Q의 목적은 내주하시는 예수를 삶이니..그 비결은 오직 매순간 JC를 직감-인지-교통-하나됨의 누림-그 충만 넘침!!]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양심을 포함한 지정의)이니

.....[빌2:5...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5.  Let this mind be in you, which was also in Christ Jesus:  5 Let the same mind be in you that was[a] in Christ Jesus,] ..오직 성령 충만/넘침/기뻐하심/누림 안에서!!.. 마음(mind : 생각-감정-의지) + 광의적 마음 = + 태도attitude/자세posture- 지향목표target/열정passion/전심전력full capacity-추구pursue/seek- 실행 carry out/완수execute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주 예수님은 Q과 동등하셨지만 Q과 동등하심을 붙잡아서 놓지않고 보류해야 할 보배로 여기지 않으셨음 Q의 모습[=Q의 존재의 표현, 곧 위격의 본질 및 본성과 부합함]을 내려놓으심으로써 자신을 비우셔서 노예의 모습을 가지셨음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주님은 육체를 가지실 때 Q의 본성을 바꾸지 않으셨음, 다만 그분의 외적 모습을 노예의 모습으로 바꾸신 것임 이는 본질이 아니라 상태의 바뀜을 의미함.. Q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신격의 존재의 내적 실재를 의미하며 사람들과 같은 모양은 그분의 인성의 외적인 겉모양을 가리킴. 그분은 사람들 보기에 외적으로 한 사람으로 나타나셨지만, Q으로서 그분은 내적으로 신격의 존재의 실재를 가지셨음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낮추심은 자신을 비우심 보다 더 전진된 단계임]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리스도께서 사람들과 같은 모양이 되시어 인성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 그분은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셨음

....하나님의 권위아래 [온유-겸손/겸비/비하의 극치를 보이신 종으로서 전적 복종하셨음]

....운행하시는 Q은 생명 말씀을 통하여 본을 이루어 내시고 구원을 우리 일상생활에 적용하심,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분을 살며, 그분을 우리의 본으로 취하게 됨.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이름"은 그의 인격과 그가 가진 [권위]와 일 행함에 있어서 그의 존재 전체의 범위와 요소를 그 안에 표현함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주라 시인함]이란, 주님을 부르거나,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롬10:9-10, 12-13)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살라

.....그리스도의 받으실 바 면류관 됨의 삶, 참생명 JC, 곧 빛과 소금의 흠결없는 삶을 살기.

.....***궁극적 결말에 이르기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두 가지 방면에서  매일의 구원을 이루어야 함 *1>(주 이름을 부름으로써 주어지는, CJ의 그 영의 넘치는 공급 인해) 특정 상황, 특정한 일로부터의 구원, *2> 여기에 더하여 (믿는 우리가 매일의 일반적 상황에서 직면하는 평범한 일들에서 구원받음인데) 믿는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는  Q, 곧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에서 나오는 실지적 구원이자 매일의 구원이자 순간순간의 구원임...살아 있는 인격이신 구주를 날마다의 삶 가운데 믿고 살고 체험하며 누림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신 그리스도를, 마땅한 순종의 본으로 취함으로써 "그러나 나의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주께]복종하여 두렵고[=내적 동기 ...Q경외함으로 사랑-믿음-소망의 믿음 살핌/점검] 떨림으로[=외적 태도...감찰/돌아보시는 Q 앞에서 정결함] 너희 [매일의]구원을 [궁극적 결말에 이르기까지]이루라

....살아 있는 인격이신 구주를 날마다의 삶 가운데 믿고 살고 체험하며 누림.....그 주된 요소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생명이신 그리스도(빌2:5-8)와 높아지신 그리스도(빌2:9-11)

....빌1장의 구원은 JC의 영의 넘치는 공급으로 말미암는(특정한 상황에서 직면하게 돠는 특별한 일에서의) 구원이지만, 여기에서의 구원은 (계속적인 구원, 일상생활 가운데 일반적 상황에서 직면하는 평범한 일들에서 구원받음인데)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는 Q, 곧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에서 나오며 실지적 구원이자 매일의 구원이자 순간순간의 구원임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날마다의 구원과 궁극적 구원 결말..그분의 선하신 기쁨은 우리 구원의 최고 정점 도달에 있음] 위하여 너희에게 [오직 주님 뜻대로 순종하여 이루고자 하는]소원을 두고 [주 이름 부르는 이마다에게 친히 생명-사랑 공급 하사 사랑겨운, 붙좇는  믿음으로 순종함에 이르도록, 활력을 주사]행하게 하시나니

....Q의 운행하심은 우리 영에서 시작되어 생각-감정-의지에까지 확산되고 더 나아가 우리 몸의 행함으로 나타나게 하심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하신 말씀에서 보듯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황이 어쩌면 오늘날 그대의 상황, 또는 우리 교회의 상황이 아닌가 점검해 보자. 거듭난 우리 영에 주님이 내주하여 계시기는 하지만 아직 마음 영역에 있어서 문이랄 수 있는 [혼의 생각]  안에는 (들어 오시도록 문을 열어드리지 않음 인해...허락해 주어야만 들어오시는, 한없이 신사적인 분이시다!!) 들어가지 못하시고 문만 계속 두드리고 계신 상황은 아닌가 점검해 보아야 하리라.. 그후에는 각자에게 보이신 말씀을 "말하라"하심 따라 말하여 만류하였으되 "바울에게 친히 (예루살렘행이 [어찌 전개될 지 모르지만] 주님의 선교 확장에 있어서 최선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직접 말씀하신 주님을 신뢰하고, 오직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하고 축복하고 예루살렘으로 보낸 형제들을 눈여겨 보라!!..

14.  모든 일을 원망(murmuring)과 시비(disputing, questioning)가 없이 하라

......영광의 주님, 그분이 친히 섭리하고 계심을, 그분의 뜻-계획-경륜 분배의 일하심의 최적의 때를 따라 행하고 계심을 인정-찬양-사랑-순종하라(형제들 간에 각자에게 일깨우시는 바, 주 임재 안에서 살펴보아 가지게 된 의견마다 너그러이 용납함으로 경청함, 곧 사랑과 신뢰 안에서 믿음으로 소통함이 중요하다....그러나, 최종 결정은 말씀 인도자에게 맡기라.. 특히 자기가 친히 낳고 돌보는 영혼마다 자기 스스로가 주님 앞에 최종 결산할 자라고 느끼며 [말씀을 맡은 이들, 말씀으로 먹이며] 인도하는 자들을 더욱 존중하고 신뢰하는 것이 마땅하다!!)..

[히13:17-19....*17.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19.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17 Obey your [spiritual] leaders and submit to them [recognizing their authority over you], for they are keeping watch over your souls and continually guarding your spiritual welfare as those who will give an account [of their stewardship of you]. Let them do this with joy and not with grief and groans, for this would be of no benefit to you.  18 Keep praying for us, for we are convinced that we have a good conscience, seeking to conduct ourselves honorably [that is, with moral courage and personal integrity] in all things. 19 And I urge all of you to pray earnestly, so that I may be restored to you soon.]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19.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20.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21.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23.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24.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26.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27.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28.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29.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30.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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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pians 2  Amplified Bible

==Be Like Christ

1 Therefore if there is any encouragement and comfort in Christ [as there certainly is in abundance], if there is any consolation of love, if there is any fellowship [that we share] in the Spirit, if [there is] any [great depth of] affection and compassion, 

2 make my joy complete by being of the same mind, having the same [a]love [toward one another], knit together in spirit, intent on one purpose [and living a life that reflects your faith and spreads the gospel—the good news regarding salvation through faith in Christ]. 

3 Do nothing from selfishness or empty conceit [through factional motives, or strife], but with [an attitude of] humility [being neither arrogant nor self-righteous], regard others as more important than yourselves. 

4 Do not merely look out for your own personal interests, but also for the interests of others. 

5 Have this same attitude in yourselves which was in Christ Jesus [look to Him as your example in selfless humility], 

6 who, although He existed in the form and unchanging essence of God [as One with Him, possessing the fullness of all the divine attributes—the entire nature of deity], did not regard equality with God a thing to be grasped or asserted [as if He did not already possess it, or was afraid of losing it]; 

7 but emptied Himself [without renouncing or diminishing His deity, but only temporarily giving up the outward expression of divine equality and His rightful dignity] by assuming the form of a bond-servant, and being made in the likeness of men [He became completely human but was without sin, being fully God and fully man]. 

8 After He was found in [terms of His] outward appearance as a man [for a divinely-appointed time], He humbled Himself [still further] by becoming obedient [to the Father] to the point of death, even death on a cross. 

9 For this reason also [because He obeyed and so completely humbled Himself], God has highly exalted Him and bestowed on Him the name which is above every name, 

10 so that at the name of Jesus [b]every knee shall bow [in submission], of those who are in heaven and on earth and under the earth, 

11 and that every tongue will confess and openly acknowledge that Jesus Christ is Lord (sovereign God), to the glory of God the Father.

12 So then, my dear ones, just as you have always obeyed [my instructions with enthusiasm], not only in my presence, but now much more in my absence, 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 [that is, cultivate it, bring it to full effect, actively pursue spiritual maturity] with awe-inspired fear and trembling [using serious caution and critical self-evaluation to avoid anything that might offend God or discredit the name of Christ]. 

13 For it is [not your strength, but it is] [c]God who is effectively at work in you, both to will and to work [that is, strengthening, energizing, and creating in you the longing and the ability to fulfill your purpose] for His good pleasure.

14 Do everything without murmuring or questioning [the providence of God], 

15 so that you may prove yourselves to be blameless and guileless, innocent and uncontaminated, children of God without blemish in the midst of a [morally] crooked and [spiritually] perverted generation, among whom you are seen as bright lights [beacons shining out clearly] in the world [of darkness], 

16 holding out and offering to everyone the word of life, so that in the day of Christ I will have reason to rejoice greatly because I did not run [my race] in vain nor labor without result. 

17 But even if I am being poured out as a [d]drink offering on the sacrifice and service of your faith [for preaching the message of salvation], still I rejoice and share my joy with you all. 

18 You too, rejoice in the same way and share your joy with me.

==Timothy and Epaphroditus

19 But I hope in the Lord Jesus to send Timothy to you soon, so that I may also be encouraged by learning news about you. 

20 For I have no one else [like him who is] so kindred a spirit who will be genuinely concerned for your [spiritual] welfare. 

21 For the others [who deserted me after my arrest] all seek [to advance] their own interests, not those of Jesus Christ. 

22 But you know of Timothy’s tested worth and his proven character, that he has served with me to advance the gospel like a son serving with his father. 

23 Therefore, I hope [that it is His will] to send him immediately, just as soon as I see how [e]my case turns out; 

24 and I trust [confidently] in the Lord that soon I also will be coming to you. 

25 However, I thought it necessary to send back to you Epaphroditus, [who has been] my brother and companion and fellow soldier, who was also sent as your messenger to take care of my needs. 

26 For he has been longing [f]for all of you and was distressed because you had heard that he was sick. 

27 He certainly was sick and close to death. But God had mercy on him, and not only on him but also on me, so that I would not have sorrow upon sorrow. 

28 So I have sent him all the more eagerly so that when you see him again you may rejoice and I may be less concerned about you. 

29 Welcome him home in the Lord with great joy, and appreciate and honor men like him; 

30 because he came close to death for the work of Christ, risking his life to complete what was lacking in your service to me [which distance prevented you from rendering personally].

==Footnotes

Philippians 2:2 The key to understanding this and other statements about love is to know that this love (the Greek word agape) is not so much a matter of emotion as it is of doing things for the benefit of another person, that is, having an unselfish concern for another and a willingness to seek the best for another.

Philippians 2:10 All intelligent beings in the universe, whether saved or unsaved, whether in spirit or as mortal mankind, will acknowledge Him.

Philippians 2:13 God supports the believer, but it is the believer’s responsibility to do what he has been called by God to do.

Philippians 2:17 The drink offering (wine) was required as part of the sacrificial system of the old covenant.

Philippians 2:23 Lit things go with me. This letter to the Philippians was written near the end of Paul’s two-year period of imprisonment in Rome. This was the first of his two Roman imprisonments. At this time he was under house arrest and was living in his own rented home. About five years after his release he was imprisoned again. Emperor Nero was actively persecuting the Christians during this period, so Paul was held in the Mamertine dungeon (Tullianum). Shortly before his execution Paul wrote his second and final letter to Timothy from his cell in Rome. 

Philippians 2:26 One early ms reads to see you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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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2장 (개요)

사도는 몇 가지 의무들에 대하여 본장에서 계속 권고 한다. 먼저 그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본을 예로 들면서 다음의 교훈을 하였다. 

#같은 마음과 겸비한 마음을 가질 것(1-11), 

#그리스도인의 행로(行路)에서 부지런하고 진실할 것(12,13),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의 신앙 고백을 몇가지 적절한 은혜로 돋보이게 할 것(14-18), 

그리고 나서 그는 특별히 주의할 점을 제시하고 그리고 두 선한 사역자 즉 그들에게 보내고자 바울이 계획한 디모데와 에바브라디도를 천거함으로 본장을 종결 짓는다(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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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겸비와 그의 영광(빌 2:1-11)

사도는 전장(前場)에서 못다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대한 권고를 본장에서 계속한다. 

여기에서 그는 그들에게 간청하기를 겸비와 사랑의 위대한 분이신 주 예수를 본받아 같은 마음과 겸비한 마음을 갖기를 권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을 살펴 보자.

Ⅰ. 우리에게 강조하는 바 위대한 복음의 교훈에 대해 살펴 보자.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왕국의 법도이며, 그 학교의 교과목이며 그의 가정의 제복(制服)이다. 

이 사랑을 그는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는 것"으로써 표현하였다(2절). 

우리가 같은 사랑을 가질 때 우리는 같은 마음을 품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견해에는 차이가 있더라도 사랑에 있어서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항상 그들의 능력에 속한 것으로 언제나 그들의 의무이며 그들로 심판을 극복하게 하는 가장 좋은 길이다. 

또 "같은 사랑을 가지라"고 하였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우리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표현하도록 요구되는 "같은 사랑"은 다른 사람들도 그 사랑을 우리에게 표시하라는 요구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상호적인 사랑이어야 한다. 사랑하라. 그러면 너희가 사랑을 받을 것이다. 

또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으라" 하였다. 서로 괴롭히거나 방해하거나 혹은 서로 다른 이익을 추구하지 말고 일치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에 하나가 되고, 여러 가지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그 가운데서 성령의 통일을 보존하라는 말이다.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1. 의무에 대한 사도의 애절한 간청. 

그는 그들에게 매우 끈질기게 간청한다. 우리의 의무를 다함은 우리의 성실성에 대한 증거이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보존과 교화를 위한 필수적인 매개체인 것이다. 형제애를 가져야 하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1)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위로를 경험하였다면, 형제애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를 경험한 일이 있는가?  서로 사랑으로써 그 경험을 입증하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찾은 아름다운 맛은 우리의 영혼을 유쾌하게 해 준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위안을 기대하는가?  만일 우리가 실망을 맛보지 않으려면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를 얻지 못한다면 달리 어디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에게 관심이 있는 자들은 그의 안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그것은 강하고 영원한 위안이다(히 6:8; 살후 2:16). 그러므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2) "사랑의 위로"를 경험하였으면 형제애를 가져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의 사랑 가운데서 또 하나님께 향한 너희의 사랑 가운데서, 혹은 우리에게 향한 너희의 형제들이 사랑 가운데서 위로를 맛보았다면 이 모든 것을 생각하여 같은 마음을 품으라. 만일 너희가 그 위로를 얻었다면, 또는 너희가 그것을 얻고자 한다면 또한 너희가 실제로 사랑의 은혜가 위로의 은사임을 믿는다면 그 사랑으로 풍성케 하라"는 말이다.

(3) "성령의 교제"를 가졌다면 형제애를 가져야 된다고 말한다. 

즉 "만일 성령에 의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교제같은 것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또“한 분 같은 성령에" 의하여 그들이 생기를 받고 활력을 받음으로 성도들 사이에 교제 있다면 너희는 같은 마음을 품으라. 이는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같은 마음을 지님이 우리로 "우리의 하나님과 형제간의 교제를 보존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는 말이다.

(4) 너희를 향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긍휼이나 자비"가 있다면 형제애를 가져야 한다. 

"만일 너희가 너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 은혜를 기대한다면 너희가 먼저 서로 긍휼을 베풀라. 만일 그리스도의 추종자들 가운데 자비를 베풀어야 할 경우가 있다면 또한 만일 성결하게 된 모든 자들에게는 거룩한 연민의 성향이 있다면, 이 자비와 연민을 형제애로서 표현하라"는 말이다. 

이러한 사도의 논증은 매우 설득력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증이라면 가장 난폭한 자도 유순하게 할 수 있으며 가장 완악한 마음을 가진 자도 수그러지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5) 형제애를 베풀라는 또다른 근거는 이를 행함으로 사도 자신에게 위로가 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도는 "너희는 나의 기쁨을 채우라"고 하였다. 

교우들이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을 보는 것이 사역자들의 기쁨이다. 

그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은혜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끌어 오는 도구 역할을 해 왔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만일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여함으로써 어떤 은혜를 얻었다면, 만일 너희가 그 안에서 어떤 위안을 얻었다면 혹은 그것에 의해서 유익을 얻었다면 복음을 너희에게 전해 준 너희의 가난한 사역자들의 기쁨을 채우라."

2. 그는 형제애를 증진시킬 몇 가지 방법들을 제시한다.

(1)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3절). 

그리스도인의 사랑에는 교만과 분냄보다 더 큰 원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형제들을 불쾌하게 할 일들을 한다면 이것은 그들에게 싸움을 거는 것이 되고 만다. 만일 우리가 교만에 빠져 무슨 일을 한다면 형제들에게 허영을 자랑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 모두가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파괴하여 비 그리스도인적인 불씨를 일으키는 것들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원수됨을 폐하기 위해 오시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적대감이 없도록 해야한다.

(2)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다"(3절). 

그리고 우리 자신의 결점에는 엄격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판단에서는 자비해야 하며, 우리 자신의 결함과 약점들을 살피기에는 재빠르되 다른 사람들의 결점에 대해서는 관대히 용납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선한 우리 안에 있는 그것보다 낫게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의 무가치성과 불완전성을 가장 잘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3)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호기심과 비난하는 태도를 혹은 다른 사람들의 일에 쓸데없이 간섭하는 자세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다운 사랑과 동정으로 그들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각각 자기 일을 돌아 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4절)고 하였다. 

이기적인 정신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파괴한다. 우리는 자신의 영예와 평안과 안전을 위하여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명예, 평안, 안전을 위하여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자신과 같이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야 하며 그리고 그의 일을 자신의 일로 여겨야 한다.

Ⅱ. 여기에 우리가 본받아야 할 복음적 생활관이 제시된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고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5절)라고 하였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음으로 은혜를 입고자 한다면 우리는 또한 그의 생활을 모방해야 한다. 

고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그의 사람이 아니다"(롬 8:9)고 하였다. 이제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살펴 보자. 

그는 뛰어나게 겸손하셨다. 이것이 우리가 특별히 그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다. 그는 "나를 배우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 11:29)라고 말씀했다. 만일 우리가 마음이 겸손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품은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품고자 한다면 우리가 겸비한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 예수와 동일한 정신과 동일한 보조로 걸어야 한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고난과 죽음을 받기까지 스스로 낮아지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고 그리고 우리의 구속에 대한 값을 치르기 위하여서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본을 보임으로 우리가 그의 발걸음을 따라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본문에서 주 예수의 두 가지 본성과 두 가지 입장을 볼 수 있었다. 

사도는 주 예수와 그리고 그의 안에 있는 마음에 대하여 말할 기회를 얻게 되자 이를 이용하여 예수의 인격을 상술하고 그에 대해 특별한 해석을 하려고 함을 보게 된다. 주 예수는 기쁨을 주는 주제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사역자들이 다른 말들을 하다가 그에 대하여 말하게 될 때 주제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주 예수는 그 어느 경우에나 어울리는 주제인 것이다.

1. 여기에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이 있다. 즉 그의 신성과 그의 인간성이다.

(1) 그의 신성.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다"(6절).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유일하신 독생자로서 신성에 참여하셨다. 이 말씀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요한복음 1장 1절과 일치한다. 본문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씀과(골 1:15)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히 1:3)이라는 말씀과 동일한 취지의 말씀이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는 것을 도적질이라고 여기지 아니하셨다"(역주: 본문에 대해서는 희랍어 ‘아르파그몬’(725)을 능동적 의미로 해석하느냐 수동적 의미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그 하나는 능동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의미로 취하는 것을 도적질로 여기지 않으셨다." 즉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기존 사실로 인정하셨다는 말이 된다. AV 영역판은 이에 의거하고 있다. 

그러나 수동적으로 해석하면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해도 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는 뜻을 갖게 되며 한글 개역과 공동 번역은 이에 준하고 있다. 

본서의 저자는 원칙적으로 흠정판 번역을 따라서 본문을 주석하고 있으나 뒤에서는 같은 본문을 수동적 뜻을 지닌 것으로도 해석한다. N.B.C 주석 참조). 

즉 그는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권리를 침입하였다거나 다른 분의 권한이라고 간주되는 것을 침입하였다는 자책을 느끼시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나와 나의 아버지는 하나이라"(요 10:30)고 말한다. 

단순한 인간 혹은 스스로를 "아버지와 하나"라고 공언한다면 이는 최고의 강도질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강탈하는 것이다. 이것은 헌물들과 십일조를 강탈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하나님됨을 즉 본질을 강탈하는 것이라고 하겠다(말 3:8). 

어떤 이들은 ‘엔 모르페 데우 휘파르콘’-즉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다는 말씀을 구약에서 족장들과 유대인들에게 신의 위엄있는 영광으로 나타나시는 모습과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구약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나타남은 종종 "영광"과 "쉐기나"(Shechinah)로 불리운다. ‘모르페’란 말은 70인역(LXX)과 신약 성서에서 본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마가복음 16장 12절에 보면 ‘엔 에테라 모르페’(“다른 모양으로”)-즉 그가 두 제자들에게 다른 형체로 나타나셨다 했고 또 마태복음 17장 2절에는 ‘메테모르포데’-즉 그가(그들 앞에서)변형되었다(마 17:2)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고 하였다(역주:여기서도 해석되기 때문에 한글 개역을 그대로 인용했음) 그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나는 것을 욕심스럽게 붙잡으려 하지도 않았고 그것을 턱없이 탐내거나 취하러 하지 않았다. 

그는 지상에 있는 동안 그의 이전의 장엄한 외양을 포기하였다. 이것이 ‘우크 아르파그몬 헤게사토’(2:6)이란 말씀이 지닌 뜻으로 생각된다.

(2) 그의 인성. "그는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7,8절). 

그는 실제로 그리고 참으로 사람이었고. "우리의 혈육을 입으시고" 인간의 본성과 관습을 지니시고 나타나셨다. 더구나 그는 자원하여 인간의 본성을 취하였다. 그것은 그 자신의 행위였고  그리고 그 자신의 동의에 의해서 그리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인간 본성을 입은 것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입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로써 그는 "자신을 비우시고" 즉 천상의 그리고 그의 이전의 존귀와 영광된 모습을 벗어버리고 인간 본성의 누더기를 입으셨다. "그는 범사에 우리와 같이 되셨다"(히 2:17)

2. 그의 두 가지 상태 즉 겸비와 높임이 본문에 기록되고 있다.

(1) 그의 겸비. 

그는 인간의 형상과 모습을 취하셨을 뿐아니라 종의 형제 즉 천한 인간의 모습을 취하셨다. 

그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그의 종일 뿐 아니라 그가 인간들에 대한 사역자가 되시었으며 그리고 그들 가운데 천한 종의 몸을 입으시고 봉사하셨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만일 주 예수가 인간이 되려고 하셨다면 그는 왕자가 되어 그리고 영광 중에 찬란하게 나타났어야 옳았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그와는 정반대로 "그의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7절). 그는 미천하게 자랐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일시적인 아버지와 잠시 일을 함께 했던 것 같다. 그의 전생애는 겸비와 천함과 빈곤과 불명예의 삶이었다. 그는 머리 둘 곳도 없었으며 남의 도움을 받아 살았고, "슬픔의 사람이었고, 비탄에 익숙한 사람이었고" 외적인 거드름을 피우시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과 구별될 무슨 표식도 없었다. 그의 생의 비천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최고의 겸비는 십자가에서의 그의 죽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8절)고 하였다. 

그는 고난을 받았을 뿐 아니라, 능동적으로 자원해서 복종하였다. 그는 중재자로서 스스로 이룬 법에 복종했고 그리고 그 법에 따라 죽음을 감수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생명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 10:18). 그리고 그는 "율법 아래 태어나셨다"(갈 4:4)고 하였다. 

그의 죽으심의 태도가 강조되고 있다. 그의 죽으심에 온갖 겸비함이 빠짐없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었다." 

이 죽음은 저주 받은 죽음(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는다)이었다. 또한 이 죽음은 몸에 가장 신경이 예민한 부분(손과 발)에 못을 박아 십자가에 그 온 체중을 실어야 하는 고통에 가득 찬 죽음이었고 자유민의 죽음이 아니라 행악자의 노예의 죽음이었으며 공중의 구경거리로써의 죽음이었다. 

축복받은 예수께서는 이 정도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셨다.

(2) 그의 높임.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이셨다"(9절). 그의 높임은 그의 겸비에 대한 보상이었다. 그가 자신을 추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높이셨다. 높이시되 그는 ‘휘페륍소센’-즉 지극히 그를 높이셨다. 최고의 높이에까지 올리셨다. 

하나님은 예수의 전 인격 즉 신성은 물론 인성까지도 높이셨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의 형체는 물론 하나님의 형체를 입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의 높임은 그의 신성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떤 새로운 영광을 부여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의 권리를 되찾은 것, 또는 "그가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그 영광"(요 17:5)을 다시 회복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아버지 자신이 높임을 받으신 것이라고 거론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아버지 자신이 높임이 신성과 관련되기는 하지만 정작 높임을 받는 것은 그의 인성이었고 그것만이 높임이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의 높임은 본문에 영예와 권세로 구성된다. 

먼저 그의 영예로움을 관찰해 보자. "그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지신다." 그것은 모든 피조물 즉 인간과 천사들보다 높은 존귀의 명칭이다. 

다음 그의 권세에 대해 생각해 보자. "모든 무릎을 그에게 꿇게 하셨다."  즉 온 피조물이 그에게 복종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고로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땅 아래 있는 것들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 즉 산 자와 죽은 자 모두가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말이다. 복종하되 "예수의 이름에" 복종한다. 이것은 공허한 말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 이름에 모든 자가 엄숙한 경의를 표현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해야 한다." 

즉 모든 민족이 각기 자기 언어로 높임을 받은 구속자의 우주적 왕국에 대해 공개적으로 시인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있는 자들"이 그에게 무릎을 꿇는다(마 28:18). 

그리스도의 왕국의 광활함을 생각해 보고 지나가자. 그것은 하늘과 땅에 그리고 그곳들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 즉 인간은 물론 천사들에게 그리고 산자는 물론 죽은 자에게까지 미친다. 이로써 "아버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이 곧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시는 것"(요 5:23)이 그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게 주어지는 존경은 무엇이든 결국 아버지의 존귀가 된다. 고로"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마 10:40)"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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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적인 신앙에 대한 권고(1)(빌 2:12-13)

Ⅰ. 그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길을 감에 있어서 근면과 진지성을 지닐 것을 그들에게 권고한다. 

그러므로 "너희 구원은 이루라"(12절)고 한다. 곧 우리 영혼의 구원(벧전 1:9)과 우리의 영원한 구원(히 5:9)을 이루라는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죄가 우리에게 가져 왔고 우리를 거기에 들어가게 한 모든 악으로부터의 구원이 포함되며 우리의 완전하고 궁극적인 행복에 필요한 모든 것과 모든 선의 소유가 포함한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무엇보다 우리의 관심이 되어야 할 것은 우리의 영혼의 안녕을 확립하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것들이야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우리의 최선의 이익에 관심을 갖자. 그것은 우리 자신의 구원 즉 우리 자신의 영혼의 구원이다. 

우리의 최대의 관심사는 다름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벅차다. 그리고 비록 할 수 있는 한에서 우리가 전체적인 구원을 이루도록 힘써야 하겠지만 그러난 우리가 자신의 구원을 어떤 이유에서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카테르가제스데’-즉 우리의 구원을 이룰 것이 요구되고 있다. "이루라"는 말은 어떤 일을 "철저히 해내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참된 수고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우리는 우리를 구원에로 이끌어 주는 모든 방법을 사용함에 있어 근면해야 하겠다는 사실이다. 

구원에 필요한 것을 때때로 함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이룰 뿐만 아니라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함으로써 또 끝까지 견딤으로 우리의 구원을 성취해야 한다.

구원은 우리가 염두에 두고 마음을 쏟아야 할 중대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최고의 배려와 근면이 없이는 구원을 성취할 수 없다 

그는 "두려움과 떨림으로"라고 덧붙인다. 즉 매우 주의 깊게 그리고 신중하게 구원을 성취하라는 말이다. 

"너희가 구원에 미치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으로 지내야 한다. 최선을 다하여 신앙의 제반 의무를 주의 깊게 행하며 너희가 도달할 모든 유익함에 행여 미치지 못할까 두려움을 품도록 하라'(히 4:1)는 뜻이다. 두려움은 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며 보호해 주기 때문이다.

Ⅱ. 그는 그들에게 늘 복음에 복종할 자세를 갖춤으로 구원을 이룰 것을 촉구한다. 

그러므로 그는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함으로"(12절)라고 말한다. 

즉 너희가 항상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때마다 기꺼이 그것에 순응하여 왔었다. 내가 있을 때는 물론이고 내가 없을 때에도 그리하였었다. 또한 "너희는 더욱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너의 영혼을 돌보며 그리스도에 대한 표면적인 약간의 존경하는 태도보다 그로 하여금 너희를 지배하게 하라"는 뜻의 말씀이다. 

그들은 사도가 있을 때에 두려워했을 뿐 아니라. 그가 없을 때에 더욱 그렇게 하였다. 

이에 대하여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 그러니 너희는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가 일하시니 너희도 일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최선을 다 하도록 우리를 격려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일하시므로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은혜를 내려 주시며 우리의 신실한 노력을 도울 준비를 갖추고 계신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비록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데 있어서 우리의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나아가고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의 은혜는 우리의 본성에 적합한 방식으로 그리고 우리의 노력과 일치하여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단순히 우리의 잘못을 묵인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에 활기를 띠게 하고 더욱 열심을 내도록 하여 준다. 그러기에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자. 이는 그가 너희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우리의 모든 행함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의 역사에 의존한다. 

"태만과 부주의에 의해 하나님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 이는 너희가 그를 격노케 함으로 그가 도움을 거두어 버리시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요 또한 너희의 모든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두려움으로 일하라. 이는 그가 그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의 일을 할 마음을 우리에게 일으키는 것과 행하게 하는 것이 모두는 하나님의 주시는 재능이다. 

선한 것에 뜻을 두게 하는 것을 행할 수 있게 하며 그리고 우리의 정한 도리에 따라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고로 이르기를 "주께서 우리 모든 일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라"라고 하였다(사 26:12). 또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라고 하였다. 

우리에게 아무런 힘도 없는 것 같이 또한 우리 안에는 아무 공로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없이 행동할 수 없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 권리를 주장할 수 없고 그리고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척해서도 안 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 때문에 그는 우리 안에서 그의 선한 사업을 이루셨다. 그리고 그는 그의 피조물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으시고 다만 그가 은혜로 약속한 자들에게만이 책임을 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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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적인 신앙에 대한 권고(2)(빌 2:14-18)

본문 가운데서 사도는 여러 가지 예를 들어서 그들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고백에 다가 거기에 알맞은 적절한 성품과 행위를 더할 것을 권고한다.

1. 하나님의 명령에 즐거이 복종함으로써(14절) 그렇게 하라고 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모든 일 즉 여러 가지의 의무를 원망이 없이 하라. 그리고 너희 의무를 행하되 흠이 없이 행하라. 너희 일을 상념하며 그것으로 인하여 쟁론하지 말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명령은 사람들에게 복종하라고 주어진 것이지 그것을 대상으로 쟁론하라고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의 명령에 대한 우리의 복종은 우리의 신앙을 돋보이게 하며 또한 우리가 선한 주인을 섬긴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그 결과 그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며 우리의 복종에 대한 보상으로 그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2. 서로 사랑과 평화를 베풀므로써 그렇게 하라고 한다. 

"시비가 없이 즉 서로 다투는일이나 논쟁함이 없이 모든 일을 행하라. 이는 종종 진리의 빛과 신앙의 생명이 열띤 논쟁의 분위기 가운데서 상실되게 때문이다.

3. 모든 사람들에 대한 흠없는 생활을 함으로써(15절) 그렇게 하라고 한다. 

"탓할 것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너희가 흠없고 순전하도록 하라. 그래서 너희가 말이나 행실에 있어서 어느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말아야 하며 불쾌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순전할 뿐 아니라 흠 없도록 노력해야 된다. 또한 남에게 해롭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러한 혐의조차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흠없고 신실하라"는 말씀을 어떤 사람은 인간에게 흠이 없고, 하나님께 대하여 신실하라는 말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함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흠없고 순전한 자들이 되며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어 특권을 부여 받는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인간들의 아들들과는 달라야 한다. 그는 ‘아모마’-즉 흠이 없어야 한다. 모무스(Momys: 역자주-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조롱, 비난의 신)는 헤시오드(Hesiod)와 루시안(Lucian)에 의해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희랍인들이 불평의 신으로 섬기고 있는 신이었다. 자신은 내버려 두고 모든 사람과 모든 일마다 흠을 찾아내며 다녔다. 이 신의 명칭에서 다른 사람들을 혹평하며 다른 사람들의 한 일을 엄하게 비평하는 자들을 "모미(Momi)"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도가 본문에서 "흠잡힐 데가 없이 하라"고 한 말의 뜻은 "모무스(Momus)까지도 흠을 잡지 못하도록 그리고 가장 혹독한 비평가도 너를 비난하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행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늘을 목적삼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 노력해야 할 뿐만 아니라 흠없이 거기에 이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한 데메드리오와 같이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로 증거를 받아야 한다"(요삼 12장). 또한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라고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 즉 이는 이방인들 그리고 외부에 있는 자들 가운데서라는 뜻이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참 신앙이 없는 곳에서는 어그러짐과 거스림밖에 기대할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생활하는 가운데 같이 지내는 자들이 어그러지고 거스릴수록, 그들이 공연히 헐뜯으려고 할수록 우리는 더욱 조심하여 흠없고 순전하도록 해야 한다. 

아브라함과 롯은 다투지 말아야만 옳았다. "왜냐하면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그 땅에 거(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창 13:7). 

또한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빛이시며 그리고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가운데 있는 빛들이다. 하나님이 어디서든 착한 사람을 세우실 때 그는 그를 그곳에 빛으로 세우신 것이다. 또한 본문을 명령법적으로 읽혀질 수도 있다. 즉 "세상에서 너희가 그들 가운데 빛으로 나타나라"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 

이 말씀을 마태복음 5장 16절의 "너희 빛을 그와 같이 사람들 앞에 비치게 하라"는 내용과 비교해 보라.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에 대해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노력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자기 자신을 내보일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신실한 것은 물론 빛을 발해야 한다. 즉 "생명의 말씀을 밝혀야 한다"(16절). 

복음이 생명의 말씀이라고 불려지는 것은 생명을 밝히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저를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다"(딤후 1:10)고 하였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잡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밝히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또한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그것을 굳게 잡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것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촛대가 주위의 모든 것을 유익하게 만드는 촛불을 지탱하여 그것으로 빛을 발하게 천체들처럼 세상을 밝혀야 한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것이 "그의 자랑거리라고"말한다. 고로 본문에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 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즉 너희의 견고함 뿐 아니라 너희의 유용함으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한다. 

그는 그들로 그의 고통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하려고 하였다.  "그가 헛되이 달리지 아니하였고 그리고 헛되이 수고하지도 않았음"(16절)을 알리려 하였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목양의 사명은 우리에게 전력을 투신할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기울여도 목양을 위해 달리며 수고하는 데 충분하지 못하다. 

달리는 일은 온 힘을 다 기울여야 하는 것이며 또한 계속적으로 돌진해야 하는 일이다. 또한 수고는 꾸준함과 대단한 열심을 요하는 것을 뜻한다.

(2) 사역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헛되이 달리지 아니하고 그리고 헛되이 수고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처럼 큰 기쁨은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날에 그들의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그들로 인하여 회개한 자들이 그들의 면류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곳에서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니라"(살전 2:19, 20)고 말하였다. 

사도는 만족스럽게 그들을 위하여 달리는 일과 수고를 했을 뿐 아니라 또한 그가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고난받을 각오까지 되었음을 보여 준다(17절). 

그러므로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계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라"고 하였다. 

만일 그가 교회의 존귀와 교회의 육성과 그리고 인간들의 영혼의 안녕을 증진시킬 수 있다면 자신이 행복한 것으로 여겼다. 

비록 이로 인해 그가 고난을 당할 뿐 아니라 그의 생명을 내어 놓게 되더라고 그는 기뻐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의 믿음을 돕기 위하여 기꺼이 그들의 제단에 희생 제물이 될 수도 있었다. 

바울은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그의 피를 흘리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는데 우리가 교회를 위해 약간의 고통을 받는다고 그것을 많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그가 그의 생명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그 수고를 우리가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가? 

그러므로 그는 "만일 내가 관계에 드리는 포도주처럼 드려지고 부음이 되어야 한다면"(딤후 4:6)(스펜도마이) "나는 그렇게 드려질 준비가 되었노라"고 하였다. 그의 가르침을 자기의 피로써 인치는 것을 기뻐할 수 있었다(18절). 또한 그는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권한다.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넘치는 기쁨을 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고 훌륭한 사역자들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들은 그들의 사역자들과 함께 그들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충분한 자격이 있는 것이다. 

만일 사역자가 그 회중들을 사랑하고 자신이 기꺼이 그들의 안녕을 위하여 바치며 또 바치어지고 있다면 그 회중들은 그 사역자를 사랑하고 그리고 "그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이유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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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칭찬(빌 2:19-30)

바울은 두 선한 사역자들에게 대해 특별히 언급한다. 비록 그는 자신이 위대한 사도였고 "그들 모두 보다 더욱 많이 수고를 했지만" 그러나 그는 자기보다 훨씬 못한 그들에 관하여 온갖 좋은 말과 천사를 아끼지 않았다.

Ⅰ. 그는 디모데에 관하여 말한다. 

그는 디모데를 빌립보 사람들에게 보내고자 작정하고 있었고 그는 가서 자기들의 처지를 빌립보에 통지하게 되어 있었다. 

바울의 교회들에 대한 염려를 보자. 그리고 그가 그들의 잘 해나가고 있음을 통하여 위로를 받는 모습을 보자. 

그는 오랫 동안 그들에 대하여 소식을 듣지 못했으므로 괴로워했다. 하여, 그는 디모데를 보내어 교회 사정을 살펴 보고 그에게 소식을 가져오게 하려고 하였다. 그가 그를 보내려 한 것은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20절) 때문이었다. 

바울에게 디모데는 둘도 없는 적격자였다. 그들이 가르치는 자들의 영혼들에 대하여 세심한 정성으로 기울이는 많은 사역자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뛰어난 정신과 부드러운 마음의 소유자였던 디모데와 비교될 만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디모데를 가리켜 "너희 사정을 진실히(naturally) 생각할 자"라고 하였다(역주: 흠정판은 "진실히"를 "naturally"로 번역하였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우리의 의무가 우리에게 습관처럼 몸에서 우러나오게 될 때(naturally) 그것은 최상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디모데는 축복된 바울의 참된 생명산출 결과라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디모데 보조를 맞추어 걸었다. 본문에 "몸에서 우러나는"(naturally)이란 말은 "신실하게"라는 뜻으로 하는 척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기꺼운 마음과 고결한 입장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즉 그의 마음의 생각과 일치하는데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다음의 사실을 기억하자.

1. 그들의 회중의 형편을 돌보는 것과 그들의 안녕에 관심을 갖는 것이 사역자들의 의무라는 사실이다.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고후 12:14).

2. 참 마음으로 교우들을 돌보고 그들의 안녕에 관심을 갖는 사역자를 발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한 자는 그의 형제들 중에서 뛰어나고 구분된 자라고 하겠다. 이러한 자들이 귀하므로 바울은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한다"(21절)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 말을 다윗이 "모든 자가 거짓말하는 자다"(시 116:11)라고 말할 때에 고통스러웠던 것처럼 바울도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과연 초대 교회에서 그들의 회중의 형편을 돌 볼 자들을 그토록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당시의 사역자들 가운데 부패가 만연되어 있단 말인가?  

우리는 그렇게 이 말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사도는 보편적으로 볼 때 디모데만큼 교우들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자가 없다는 뜻에서 이 말을 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의 이익을 구하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경홀히 여기는 것은 매우 큰 죄이며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인들과 사역자들 가운데 흔히 있을 수 있는 사실이라는 것을 기억래 두기로 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명성과 안일과 안전을 진리와 거룩함 그리고 그의 의무보다 좋아하며, 그리고 그들 자신의 쾌락의 일들과 명성을 그리스도 왕국의 일들과 세상에서의 그의 존귀한 이익보다 더 좋아 한다. 그러나 디모데는 이러한 자들과 같지 않았다. 

고로 사도는 "너희가 그의 연단을 안다"(22절)고 말했다. 디모데는 고난을 받았으며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였고"(딤후 4:5) 그리고 그는 그에게 닥친 모든 일에 신실하였다. 그와 교분이 있는 모든 교회들에게 닥친 모든 일에 신실하였다. 

그와 교분이 있는 모든 교회들은 그의 연단을 알았다. 그는 명실상부한 선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로서 하나님께도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았다(롬 14:18). 

그러므로 사도는 "너희는 그의 이름과 그의 얼굴뿐 아니라 그의 진실됨을 안다. 그리고 너희의 섬김에서 그의 사랑과 충성을 경험을 했으며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음을 아노라"(22절)고 말한다. 

그는 바울이 말씀을 선포하던 많은 곳에서 그의 조역자로 수고를 하였고 그리고 자녀가 마땅히 아버지를 존경하듯이 그러한 태도로 그는 복음 안에서 그를 섬겼고 그리고 자녀가 아버지에게 드리는 사랑과 기쁨을 가지고 복음 안에서 그와 함께 수고하였다. 

그들의 동역은 한편은 대단한 존경으로 다른 한편은 대단한 온화함과 친절로써 서로를 대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이것은 같은 임무에 협동으로 수고하는 선배와 후배의 사역자들에게 귀감이 되는 본이다. 바울은 그를 곧 보낼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란다"(23절)고 그는 말하였다. 

당시 그는 죄수였기 때문에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사태의 추이에 따라서 그는 디모데를 보내려 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도 자신도 그들에게 가길 원했다(24절). 그러므로 "나도 속히 가기를 주안에서 확신하노라"고 말한다. 

그는 곧 자유롭게 되어 그들을 방문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바울은 자기가 자유롭기를 바랐다. 그것은 그가 쾌락을 보고자 함이 아니라 그가 선을 행하기를 원해서였다. 그는 자신의 자유에 대하여 "내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겸손히 의지하고 굴복하는 자세로 그들은 보게 될 희망과 확신을 표현하였다(행 18:21; 고전 4:29; 약 4:15; 히 6:3 을 참조)

Ⅱ. 에바브라디도에 관하여. 

"그는 그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그가 사랑하는 같은 그리스도의 형제이며 복음을 위한 사역과 고난에 함께 참여한 동지로 그와 같은 수고와 고난을 겪었고 또한 그들이 보낸 사자(使者)라"고 부른다. 

디모데는 빌립보인들이 그들의 교회에 관한 몇 가지 사건들에 대해 바울에게 물어보기 위하여 보낸 사람이었든지 또 바울이 그를 가리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고 한 것을 보아 그들이 바울에게 생활 필수품을 공급해 주기 위해 보낸 사람인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어찌 보면) 골로새서 4장 12절의 "에바브라"와 동일 인물인 것 같기도 하다. 에바브라디도는 자신도 그들에게 자기를 열렬히 원했고 바울도 그가 갈 수 있기를 원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1. 에바브라디도가 병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가 병든 것을 그들이 들었다"(27절)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 

질병은 선한 사람들이나 사역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재난이다. 

그런데 죽은 자를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질병을 치유하는 능력을 받은 사도가 왜 그를 치료해 주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행 20:10). 

아마도 이러한 능력은 다른 사람들에게 표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복음의 진리를 확증하기 위한 것이었고 따라서 신도들 상호간에 이를 이용할 당위성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또 한편, 복음서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정이 따르리니, 그들이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17, 18)고 하였다. 

그러나 아마도 그들의 임의로 그리고 언제든지 그 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던 것 같고 다만 이로 인하여 어떤 큰 목적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 또는 하나님이 적합하다고 보실 때 만이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조치는 측량할 수 없는 영을 가지신 그리스도다운 적절한 조치였다고 하겠다.

2. 빌립보 교인들은 그의 질병의 소식을 듣고 대단히 염려했다. 

그 소식을 듣고 에바브라디도가 아픈 만큼이나 그들도 심히 근심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를 특별히 존경하고 사랑한 것 같이 보이며 그 때문에 그들은 그를 사도에게 뽑아 보내기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3. 하나님은 그를 다소 회복시키시고 또 사역을 당분간 쉬도록 하는 것을 기뻐하셨다. 

그러므로 본문에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다"(27절)고 하였다. 사도는 그가 빌립보로 돌아가는 것이 에바브라디도나 다른 사람은 물론 자신에게도 큰 긍휼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비록 당시 교회가 특별한 은사들로 축복받았다 할지라도 그들은 질병 때문에 선한 사역자를 쉬게 하기로 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에바브라디도를 보내지 않아서 큰 손실이 주어지지나 않을까 염려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를 보내는 일을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 여겼다.

즉 "내가 투옥으로 당하는 슬픔에다가 그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당하지 않도록 그렇게 하신 것이다"는 말씀이다. 

또는 그가 말한 그의 근심이란 최근에 그와 함께 있던 훌륭한 사역자들이 죽어서 그가 맛보고 있는 상심을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고 게다가 에바브라디도까지 지금 죽으면 이것이 그에게는 새로운 슬픔이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근심 위에 근심을 더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4.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인들을 방문하기를 몹시 원하였다. 

그는 그가 병들었을 때, 그로 인하여 근심할 자들과 함께 위로를 나누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함이다(28절). 

즉 그가 얼마나 건강이 회복되었는가를 너희들을 직접 봄으로 그로 인하여 너희로 감사함과 기쁨을 맛볼 수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그들이 사랑하는 친구를 보게 함으로써 그들이 위로 받는 것을 통해 자기도 위로받는 것을 말한다.

5. 바울은 그들에게 그를 존경하고 사랑해 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29절)고 하였다. 

즉 "이같이 복음을 위한 사역에 열심이고 신실한 자를 귀하게 여기고 최상의 존경과 사랑을 베풀라. 진심어린 사랑과 좋은 말로 그에 대한 너희의 기쁨과 존경을 보여 주라"는 말이다. 그가 병에 걸린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가운데 있어진 일인 것으로 보여 진다. 

이 사실은 본문에서 사도가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었다"(30절)는 말씀을 통해 나타난다. 사도는 그가 가진 생명까지 아끼지 않았던 무분별함에 대해서 그를 꾸짖은 것이 아니라 그 이유로 그들이 그를 더욱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음 사실들을 명심하자.

(1)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고 그의 나라의 유익을 위해 진실한 마음을 품은 자들은 그를 섬기기 위하여 그리고 그의 교회의 육성을 증진시키는 일을 귀하게 여겨 자신들의 건강과 생명을 내어 놓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는 사실이다.

(2) 그들은 질병에서 거의 회복된 그를 기쁨으로 환영했다는 사실이다. 

자비로 말미암아 죽음의 고비를 넘기게 될 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비는 더 가치있는 것으로 부가되며 또한 우리는 그 자비를 더욱 증진시키고자 노력하게 된다.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큰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에바브라디도, 디도, 에바브라==
영어 킹제임스 성경으로 보면 이들은 전혀 다른 인물들입니다. 
에바브로디도(Epaphroditus)-'에바브로 디도'가 아님. 즉 에바브로 +디도가 아님. 
디도(Titus) - 철자에 유의할 것. Ditus가 아니라 Titus(타이터스, 티토)이다.
에바브라(Epaphras)  -*에바브로가 아니라 '에바브라스'이다.
1. 에바브로디도(Epaphroditus)는 빌립보의 사역자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는 자요 동료 군사요 또한 너희의 사자로서 내게 부족한 것들을 공급한 자인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였노라.](빌 2:25).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의 *사자였습니다. 
[오직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니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보낸 것들을 받았으므로 내가 풍족한데 이것은 달콤한 냄새의 향기요 받으실 만한 희생물이며 [하나님]을 매우 기쁘게 한 것이니라.](빌 4:18). *빌립보 교회는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바울의 필요를 공급했습니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가교 역할을 한 사람이 에바브로디도입니다. 에바브로 디도는 바울의 편지를 받아서 빌립보 교회로 가져왔는데 그것이 빌립보서입니다.
2. 디도(Titus).
디도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바울의 동역자로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입니다. 디도는 고린도와 크레테에서 사역했으며 바울의 고린도서를 고린도에 전달한 사람입니다. 디도는 사도 바울의 명령에 따라 그 지역에 장로들을 세우는 일을 했습니다. 
[그 뒤 십사 년이 지나서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도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라.](갈 2:1)
[그러나 나와 함께 있던 그리스 사람 디도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갈 2:3) 
3. '에바브라'로 기록된 사람은 '에바브라스'(Epaphras)로서 골로새 사역자입니다.
[또한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동료 종 에바브라에게 배웠는데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요,](골 1:7). **골로새 사람들은 '에바브라'에게 배웠습니다. 에바브라가 골로새의 사역자임을 보여 줍니다.
[너희에게 속한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종인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너희를 위해 항상 기도로 뜨겁게 수고하나니 이것은 너희가 [하나님]의 모든 뜻 안에서 완전하고 완벽하게 서게 하려 함이라.](골 4:12). *에바브라는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 항상 기도로 뜨겁게 수고하며, 그들을 세우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된 에바브라가 네게 문안하며](몬 1:23). *에바브라는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혔습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뿐만 아니라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Note. 에바브로디도와 에브브라를 동일 인물로 보는 견해는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디도는 전혀 다른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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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 Titus(인) Tivto"(5103, 티토스) 
티토스는 '공경하다'를 의미하며, 신약성경에 13회 나온다.
티토스/ 디도는 헬라인이며 바울의 동역자였다(고후 8:23; 갈 2:3).
바울이 그를 아끼고 사랑했다(고후 2:13; 고후 8:23; 딛 1:4).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바울과 동행했다(갈 2:1-3; 행 15:1; 행 15:2).
그는 바울이 고린도로 보내었으며(고후 8:6; 고후 8:16-22; 고후 12:17; 고후 12:18), 마게도냐에서 다시 바울을 만났다(고후 2:13; 고후 7:6; 고후 7:7).
그로 인하여 바울이 위로를 받았다(고후 7:13; 고후 7:14).
고린도 성도들에 대한 그의 사랑이 더욱 깊어갔다(고후 7:15).
바울이 그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두었으며(딛 1:5)  바울이 편지로 그가 그레데에서 할 일을 지시했다(딛 1:4).
그는 니고볼리에서 다시 바울과 함께 하였으며(딛 3:12) 그는 달마디아로 갔다(딤후 4:10).(참조: T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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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브로디도 Epaphraditus !Epafrovdito"(1891, 에파프로디토스) 
에파프로디토스는 '잘생긴, 매력적인'을 뜻하며, 한글 개역 성경에서 '에바브로디도'로 번역되었다.
에파프로디토스는 신약성경에서 빌립보서에 2회 나온다.
(a)  빌 2: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b)  빌 4: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에바브로디도는 로마에 있는 바울에게 헌금을 가져온 빌립보 교회의 일원이다.
그의 헬라 이름은 라틴어 베누스투스(Venustus, "비너스에 속한")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본래 유대인이 아님을 보여 준다. 그 이름은 헬라나 라틴 이름 중에 흔한 이름이다. 
에바브라(Epaphras)라는 축약형으로도 흔히 사용되었다. 그러나 골로새의 에바브라와 그를 동일시할 만한 증거는 없다(골 1:7; 4:12).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의 존경받는 교인이었다. 그가 관리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교회의 헌금을 바울에게 전달하도록 위임받았으며(빌 4:18) 그와 함께 머물면서 그를 도왔다(빌 2:25; 빌 2:30).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 대하여 그를 그들을 대신하여 바울을 섬기도록 보내어진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로마에서 위독한 병에 걸리게 되었다. 그의 병은 여행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으나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을 완수하려는"이라는 구절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로마에서 그의 사명을 감당하는데서 온 과로 때문일 가능성이 더 많다. 
에바브로디도가 천천히 회복이 된 후에 바울은 그를 고향으로 돌려 보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빌립보에서 자기를 걱정하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을 듣고 근심하였다.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에게 편지와 함께 그를 보내면서 "주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할 것을 부탁하였다.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로 묘사한 것을 보면 개인적으로 그를 매우 존중한 것을 알 수 있다.(참조: D. E. Hieb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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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브라 Epaphras(인) !Epafra'"(1889, 에파프라스) 
에파프라스는 에파프로디토스(!Epafrovdito")의 축소형이며, '매력적인'을 의미하며, 한글 개역 성경에서 '에바브라'로 번역되어 있다.
에파프라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바울 서신에만 사용되었다(골 1:7; 골 4:12; 몬 1:23).
에바브라는 골로새  태생의 사람이며 골로새 교회의 창시자로서 바울이 골로새서를 쓸 때 그와 함께 있었다(골 1:7, 8; 4:12, 13; 몬 23). 그를 빌립보 교회의 일원인 에바브로디도(빌 2:25; 4:18)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에바브라는 바울이 개종시킨 사람인 것같다. 바울의 대리자로서 그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하고 있는 동안에(행 19:10) 골로새(골 1:7 RSV)와 이웃 도시인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4:12, 13)에 복음을 전하였다. 
그가 로마에 있는 바울을 방문하였고, 루거스(Lycus) 계곡 교회의 상태에 대한 그의 보고를 받고 바울이 골로새서를 쓰게 되었다(골 1:7-9).
바울이 에바브라를 높이 평가한 것은 바울이 그에 대하여 "우리와 함께 종된 사랑하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군이요"(골 1:7), "그리스도 예수의 종"(4:12), 그리고 "나와 함께 갇힌 자"(몬 23)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마지막 구절은 아리스다고에도 적용되었기 때문에(골 4:10), 에바브라와 아리스다고가 번갈아서 자발적으로 바울과 함께 옥고를 치렀을 가능성이 있다.
에바브라의 훌륭한 인격은 바울이 루거스(Lycus)에 있는 교회들을 위하여 뜨겁게 중보기도하는 그를 칭찬하고 있는 데서도 일 수 있다(골 4:12, 13).(참조: H. S. Seek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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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제 2장
=====2:1
본절은 '에이'(* , '만약')로 시작하는 네 개의 조건문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안에서 지켜야 할 덕목을 나타낸다. 
이런 덕목은 신자 개인의 윤리적 고상함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살아갈 때에만 얻게 되는 것이다(Lenski).
(1) 무슨 권면이나 - 바울이 교회에 대해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한 것처럼(4:2;롬 12:1;15:30;16:17;고전 1:10;4:16;16:15;엡 4:1;살전 2:11,12;5:14) 그리스도인들도 서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권면해야 한다.
(2) 사랑에 무슨 위로나 -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리고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서로가 사랑으로 연약한 가운데 있는 형제를 위로해야 한다.
(3) 성령의 무슨 교제나 - '성령'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토스'(*)에 대해서 혹자는 관사의 부재(不在)를 이유로 '인간의 영' 혹은 '마음'이라고 해석하여 본절 '상호간의 조화' 혹은 '영적 교제'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uce,Hendriksen). 그러나 관사 없이도 성령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으며(롬 7:6;고전 2:4;갈3:3;5:16,18,25), 대개의 경우 '교제'는 영적 교제를 시사하기 때문에 '프뉴마토스'가 불필요하다. 따라서 본절의 '프뉴마토스'는 '성령'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본절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에 의해서 교회의 일원이 되었으므로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여 교제를 나누어야 함을 시사한다(Hawthorne).
(4)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 '긍휼'은 사랑에서 비롯된 '동정'이나 '애정'을 가리키며, '자비'는 '긍휼'에서 비롯된 의부적 표현이다(Martin). 그리스도인들은 연약한 자나 어려움에 빠진 자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2:2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 '마음을 같이 하여'의 헬라어 '토 아우토 프로네테'(* )는 문자적으로 '생각을 같이 하여'라는 의미이나 이것은 단순히 지적인 문제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의 '감정', '태도', '의지'를 같이함을 나타낸다(Meyer, Hawthorne).
바울은 '마음을 같이 하여'와 거의 동일한 의미의 '뜻을 합하며'와 '한 마음을 품어' 를 반복하여 빌립보 교인들 사이의 일치를 권면한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의 일치를 강조한 이유는 이교도의 핍박 하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일치가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Hendriksen) 빌립보 교회내의 분쟁과 불화를 종식시키기 위함이었다(Kent).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 바울은 본절에서 '일치'를 위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한다. 
소극적 측면에서 '일치'를 위해서는 '다툼과 허영'을 버려야 한다. '허영'의 헬라어 '케노독시안'(* )은 '케노스'(* , '내용 없는')와 '독사'(*, '영광')의 합성어로서 '내용없는 영광이나 자랑'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을 높이고 헛된 영광을 추구할 때 다툼이 일어나게 되어서 교회의 '불일치'를 초래하게 된다. 
한편 적극적 측면에서 일치를 위해서는 '겸손'해야 한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으로, 이 겸손을 통해서 사람 앞에서 '타인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을 이룰 수 있다(벧전 5:5,6; Martin). 당시에 '겸손'은 미덕이 아니라 노예 근성에서 비롯된 '굴욕'과 '비굴함'을 의미하였다(Lenski, Hawthorne).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셔서 '겸손의 본'을 보여주심으로(8절;요 13:1-20) '겸손'은 기독교 최대의 미덕이 되었다. 이런 '겸손'을 통해서 서로 섬김으로 '일치'를 이루게 된다.
=====2: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 '돌아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스코푼테스'(*)로 '목표 혹은 목적을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목표나 목적의 내용'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이것을 '이익'이나 '생활의 어려움'등으로 해석하여 '자기의 이익 뿐만 아니라 다른사람의 이익도 함께 생각하라'는 것으로 이해한다(Moffatt). (2)혹자는 이것을 '동료 그리스도인의 은사나 자질' 등으로 해석하여 '자기의 은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은사도 잘 관찰하여 그것을 본받아라'는 의미로 해석한다(Lightfoot). 두 가지 견해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내에서 자신의 이익과 은사를 살펴야 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과 은사를 잘 살펴서 서로를 포용하며 연합으로 '일치'를 이루게 된다(Kent, Martin, Muller).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본절은 앞에서 빌립보교회의 일치를 위해 '겸손'을 권면한 것에 대한 예증으로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전환절이다. 
그리스도는 궁극적인 모델로서 이 땅에 오셔서 '겸손'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인들에게 모델이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권면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자기를 부정하심으로 십자가를 지기까지 복종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서로가 겸손하고 자신을 부정할 때 다툼이나 허영은 사라지고 '교회의 일치'를 낳게 될 것이다(Martin, Kent, Hawthorne).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 '본체'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르페'(* )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외적인 형체와 영광이 동일시되며(출 16:10;24:15,16;레 9:6,23;민 12:8;14:10) 선재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함께 영광을 나누셨기 때문에(요 17:5;고후 4:4;골 1:15), '본체'를 '영광'으로 해석한다(Behm, Fitzmyer). 그러나 이 해석은 7절의 '종의 형체'(*, 모르펜 둘루)에서 나타나는 '고난당함'을 설명할 수 없다(Hendriksen, Hawthorne). 
(2) 혹자는 이것을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과 성품'으로 이해한다(Muller, Lightfoot, Kent, Hawthorne, Vincent).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 안에서 존재하신다'는 의미로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본질을 소유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본절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하나님과 동등됨'이 그리스도께서 장차 취하실 영광이지만 고난을 통과하기까지 유보하셨다고 해석한다(Martin, Stauffer). 
(2) 혹자는 본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나 시간과 공간에 제한받는 인간으로 오시기위해 자신의 영광을 포기하셨다고 해석한다(Muller, Hawthorne, Lightfoot). 두 가지 견해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이미 그의 영광은 하나님과 동등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의 본체로서 하나님과 동등하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동등됨을 포기하시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
=====2:7
@자기를 비어 - '자기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아우톤'(* )은 강조적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비어'의 헬라어 '에케노센'(* )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1) 그리스도 자신의 영광을 포기하였다(Plummer). (2) 독립적인 권위 행사를 포기하였다(Hendriksen). (3) 하나님의 대권적(大權的) 권능을 포기하였다(Lightfoot). (4) 존엄과 주권의 표지(標識)를 포기하였다(Calvin). (5) 하나님의 속성 즉 무소 부재, 전지 전능 등을 포기하였다(Forsyth, Mackintosh, Martin). 위의 견해들 중 세번째가 타당한 듯하다(Kent).
@종의 형체를 가져 -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종의 외적인 모습을 취하셨거나 종으로 가장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종의 본질적인 속성을 취하셔서 종이 되셨음을 의미한다(Hawthorne). '종'에 대해서 혹자는 사 52:13-53:12에 나타난 '야웨의 종'의 개념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Martin, J. Jeremias, Lohmeyer). 그러나 본절의 '종'은 11절에 나타난 고양된 그리스도이신 '주'와 대조적인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나타낸다(Renqstorf, Hawthorne).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하여 자신의 권리나 특권을 포기하여 죄 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음을 시사한다(막 10:45;눅 22:27).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 '같이' 의 헬라어 '호모이오마티'(* )는 '유사함'(similarity)이나 '동일함'(identity)을 강조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죄의 본성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다른 모든 인간들과 같이 되셨음을 시사한다(Kent, Lincol-n). 그리스도는 참인간이시다.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그리스도의 겸손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낮아지심에서 잘 드러난다.
영화로우신분께서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은 지극한 겸손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겸손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발적인 순종 가운데 십자가를 지시는데까지 나아간다. 그분은 본래 하나님과 동등되심에도 불구하고 동등됨을 포기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셨다(히 5:8). 이런 점에서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겸손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된다(Kent, Hawthorne).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 '지극히 높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립소센'(* )은 '휘페르'(* , '위로')와 '휩소스'(* ,'높은 곳')의 합성어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려지다'라는 의미이다(Kent).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겸손과 수치스러운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부활과 승귀(昇貴)를 통해 영광에 이르도록 높이셨음을 시사한다(Robertson, Hawthorne).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 바울은 이 이름이 구체적 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언급하지 않는다. 이 '이름'에 대해서 혹자는 '예수'라고 주장하며(De Wette),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Vincent). 그러나 문맥상 '이름'은 11절에 나오는 '주'를 가리킨다(Muller, Weiss, Martin, Kent).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전우주를 다스리시는 주권을 소유하신 '주'이심을 시사한다(Hawthorne).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시고 '주'라는 이름을주신 목적은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앞에 복종케 하여 주로 섬기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예수의 이름'은 앞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뛰어난 이름'과 동일한 것으로 '주'를 가리킨다(Lightfoot, Michael, Moule, Plummer). 그리스도께서 '주'(主)이시기 때문에 모든 만물이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한편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할 대상에 대해 세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즉 '하늘에 있는 자들'(*, 에푸라니온), '땅에 있는 자들'(* , 에피게이온) '땅 아래 있는 자들'(* , 카타크도니온)이다. 세 대상의 헬라어는 남성과 중성 둘 다로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혹자는 그것을 남성으로 이해해서 이성적(理性的)이며 생물적(生物的) 존재인 천사와 같은 초자연적 존재와 인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Kent, Muller, Martin). 이들은 '에푸라니온'이 천사들과 하늘에 있는 성도들, '에피게이온'이 땅에 살아있는 자들, '카타크도니온'이 사단의 무리와 지옥에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혹자는 중성으로 해석해서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를 주로 경배하며 복종해야 함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Lightfoot, Moule, Hawthorne). 이 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시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사본에 따라 다르게 사용된다. 어떤 사본에서는 제1부정과거 가정법인 '엑소몰로게세타이'(* )를 사용하여 '시인하였을 것이다'라는 의미로 기술한다(* ,B, P )다른 사본에서는 미래 직설법인 '엑소몰로게세타이'(* )를 사용하여 '시인할 것이다'라는 미래적 의미로 기술한다(A, C, D, Textus Receptus). 두 가지 경우 중 문맥상 전자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10절의 '꿇게 하시고'의 헬라어 '캄프세'(* )는 '캄프토'(* ,'굽히다')의 제1부정과거 가정법이기 때문이다(Kent, Hawthorne).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높이셔서 '주'라는 칭호를 주심으로 모든 만물로 하여금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주'라고 시인하게 하셨다. '주'에 대한 시인은 하나님 뜻의 성취를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Kent).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 '사랑하는 자들아'는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목양하는 자로서 친근감있게 부르는 호칭이다. 친근한 호칭과 더불어 바울은 본절에서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한다. 
이 '구원을 이루라'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차원에서 본절을 이해한다(Muller, Kent). 본절의 권면은 칭의 이후에 오는 성화의 과정에서 신인협동(神人協同)의 차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미 구원의 확증은 얻었지만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구원의 증거들을 실증하며 살아가야 함을 시사한다고 한다. (2) 혹자는 '그리스도인의 연합적인 차원'에서 본절을 이해한다(Hawthorne, Martin, Michael, Gnilka, Collange). 바울은 4절에서 이미 개인적인 삶만 집착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돌보아 주라고 권면하고 있으며 본절 이하에서 개인적 구원의 문제를 생각한 종말론적인 분위기가 전혀 나타나지 않기에 교회 전체의 집합적, 공동체적 권면으로 볼 수 있다고 한(Hawthorne).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Lenski). 왜냐하면 '구원'에 있어서 '개인'과 '교회'는 분리할 수 없는 불가 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완성을 향해 계속해서 성숙해가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협력하여 나아가야 한다(엡 4:1-6).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 구원을 이루어가는 방법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전적으로 의지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명령에 늘 순종하는 것이다(Martin, Kent).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 '행하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르곤'(* )은 현재분사로 하나님께서 진정한 힘을 부여하시며 우리의 결심과 소원까지도 인도하시는 분임을 시사한다(Hendriksen). 그렇다고 해서 본절이 인간의 자유 의지나 책임적 선택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일의 계획과 성취에 있어서 그 모든것을 인도하시되 강제적인 방법이나 수단으로 하시지 않는다(Kent).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은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는다. 이것은 비록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의 신비일지 모르지만 바울이나 성경이 명백히 증거하는 교훈이다(Hawthorne , Lenski).
=====2: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 '원망'은 '투덜대는 불평'을 의미하며 '시비'는 '악의(惡意) 있는 논쟁'을 의미한다. 
결국 사소한 일을 가지고 '악의있는 마음으로 불평하는태도'를 가리킨다. 후자는 바울이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출 15-17;민 14-17)들을 염두에 두고 서로 유비(類比)시켜 기록한 것으로 추측한다(Kent).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그와 같은 추정을 내릴 만한 근거가 전혀없으며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권위를 빙자하여 하나님께 도전한 반면에 빌립보 교회의 문제는 순수히 교회 내부의 불화(2절)이기 때문이다(Hawthorne, Martin). 바울은 교회내에서 불평과 싸움이 없이 모든 일을 행하기를 권면한다.
=====2: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흠이 없고'는 타인에게 책망 받을 만한 일이 없는 것을 의미하며 '순전하여'는 이질적인 것이나 온전치 못한 것이 전혀 섞이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타인에게 책망받을 만한 일이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온전한 성품을 닮아서 세상에 빛을 나타내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 으로서 온 세상을 비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마5:14;엡 5:8).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빛을 드러내야 할 '세상'을 의미한다. 빌립보 교인들이 현재 살고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악과 연합한 타락한 세대이다(엡 6:12). 이러한 세상을 살아가는 빌립보 교인들의 사명은 흠이 없는 자로서 세상에 빛을 드러내는 것이다.
=====2: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 '밝혀'의 헬라어 '에페콘테스'(* )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단단히 붙들다'이며, 다른 하나는 '제시하다'이다. '에페콘테스'의 의미에 따라서 본절에 대한 해석도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1) 혹자는 본절을 앞절의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와 대조하여 '생명의 말씀을 단단히 붙들다'란 의미로 해석한다(Lightfoot, Moffatt) (2) 혹자는 '제시하다'는 의미를 받아들여 세상에 '생명의 말씀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uller, Lenski, hawthorne). 두 가지 견해는 서로 다른 견해가 아니다. 전자의 견해는 후자를 뒷받침해 준다.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의 말씀 즉 복음을 굳게 붙들지 않으면 그것을 세상에 밝히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Kent).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하려 함이라 - 빌립보 교인들이 생명의 말씀에 사로잡혀 말씀을 세상에 밝히 드러낼 때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해산의 수고를 하고 고난가운데 복음을 전파하여 열매를 맺은 것이 헛되지 않게 되며 '그리스도의 날' 즉 재림 때에 '자랑'이 된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그리스도인들 이 땅에서 애써 수고한 대가를 보상 받을 것이다(Kent).
=====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 '관제'는 고대 제사의 관습에서 포도주를 제물에 붓는 행위를 가리킨다. 바울은 이런 제사 행위를 연상시켜 자신의 순교를 암시한다. '관제로 드릴지라도'의 헬라어 '스펜도마이'(* )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현재 수동태로 보아서 가까운 미래의 의미를 포함하는 형태라고 해석하여 현재나 가까운 장래에 바울 자신이 순교당할 것을 예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Hendriksen, Martin). (2) 혹자는 현재 중간태로 보아서 바울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교의 제단에 드리려는 심정을 고백한 것이라고 주장한다(Lenski). 두가지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하다. 신약성경에서 '스펜도마이'는 두 번 나타나는데(17절;딤후 4:6) 모두가 수동태로 사용되고 있다(Kent). 따라서 본문은 바울 자신이 가까운 장래에 순교당할 것을 예견(豫見)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믿음의 제물과 봉사'의 헬라어 '테뒤시아 카이 레이투 르기아 테스 피스테오스'(*)에서 '제물과 봉사'는 하나의 관사 '테'(* )로 수식을 받고 있다. 이것은 '제물과 봉사'가 '희생적 봉사'를 의미하는 중언법적 표현임을 시사한다(Kent).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행하는 모든 희생적인 봉사위에 자신을 관제로 즉 순교로써 드린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한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음과 교회를 위한 바울의 헌신적인 열정을 시사한다(Muller).
=====2: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 본절은 바울 자신의 고난과 순교가 빌립보 교인에게 슬픔과 좌절보다는 기쁨과 소망이 되도록 하라는 권면이다. 
앞절과 본절에 '함께 기뻐하라'가 계속 나오므로 혹자는 17절의 '함께 기뻐하니'를 '축하하다'로 해석한다(Meyer, Lightfoot). 이미 빌립보 교인들이 기뻐할 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본절에서 두번씩이나 기뻐하라고 권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왜냐하면 관제로 순교를 당할 바울에게 '축하를 보낸다'는 것은 문맥에 맞지 않는 어색한 표현이기 때문이다(Kent, Muller).
=====2:19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 바울은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기를 희망한다. 디모데를 보내려는 목적은 '안위를 받기 위함'이다.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에 해당하는 헬라어'히나 카고 유프쉬코'(* )에서 '카고'(* , '나도 또한')는 '에고'(* , '나')와 강조형 용법의 '카이'(* , '또한')가 합성된 것으로 결국 바울이 디모데를 보내려 한 목적이 두 가지였음을 나타낸다. 
그 두가지 목적은 (1) 빌립보 교인에게 바울의 근황(近況)을 전하여서 빌립보 교인들을 위로하며 (2) 디모데가 바울에게 돌아왔을 때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소식을 들어서 바울 자신이 위로를 받는 것이다.
=====2:20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 '뜻을 같이 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소프쉬콘'(* )은 '이소스'(*, '동등한')와 '프쉬케'(* , '혼')의 합성어이다. '이소프쉬콘'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시 55:13의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를 칠십인역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다. 그 뜻은'친밀하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 주다'를 의미한다(RSV). 
(2) 문자적인 해석으로 '같은 심령을 가지다'를 의미한다. 
본절의 '이소프쉬콘'은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하다. 전자의 의미로 해석하면 바울 주위에 디모데를 제외하면 친밀하게 돌보는 자가 없음을 뜻하고 후자의 의미로 해석하면 바울의 생각과 뜻을 같이 하는자는 디모데 뿐임을 의미한다(Lenski). 한편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은 디모데가 빌립보 교회의 사정을 잘 알고 있어서 빌립보 교회를 잘 목양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Kent).
=====2:21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 본절에서 바울이 책망하고 있는 '자기 일을 구하는 자'가 구체적 으로 누구인지 분명치 않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사람을 파견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고 주변사람들에게 언급하였으나 주변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적인 문제와 유익만을 추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위해서 희생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책망을 하고 있다(Muller, Kent).
=====2:22
바울은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파견키로 한 후 빌립보 교인들에게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디모데를 천거한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 디모데는 바울이 제1차 전도 여행시 빌립보 지방에서 복음을 전할 때 바울을 만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바울의 믿음의 아들이 되었으며(행 16:3),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시 에베소의 소동으로 바울이 휘말려 있을 때 바울을 대신하여 빌립보 지역을 순회(巡廻)하며 심방하였고(행 19:22)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시 핍박을 피해온 바울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복음 전도에 동참하였다(행20:4). 빌립보 교인들은 이러한 디모데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 디모데는 주 안에서 바울의 신실한 아들이었다(고전4:17;딤전 1:2;딤후 1:2). 이것은 바울과 디모데 사이가 매우 친밀한 관계임을 시사한다(Hawthorne).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 디모데는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때부터 바울과 함께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며 복음 선포를 하였다(Kent, Hawthorne).
=====2:23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는 바울이 곧 재판을 받게 되리라고 예측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바울은 재판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안 후에 디모데를 빌립보에 보내겠다고 밝히고 있다(Martin, Kent). 혹자는 이 해석에 대해 반대한다(Hawthorne). 왜냐하면 성도들을 그토록 사랑하는 바울이 자기의 신상문제로 인해 교회의 화급한 문제를 제쳐두고 디모데 파송을 연기할 수 있겠는가 하는 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연기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내용이 언급되지 않기에 우리가 알수는 없으나 재판의 문제 때문에 연기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Hawthorne).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타당하지 못하다. 비록 판결의 내용이 지극히 불확실한 것은 사실이지만 바울이나 빌립보 교인 모두 결과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으며, '보아서'의 헬라어 '아피도'(* )가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 이 한 사실에 집중한다'는 의미로 바울의 관심이 재판 결과에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재판 결과를 알리기 위해 디모데를 잠시 지체(遲滯)시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해석이다(Lenski).
=====2:24
@나도 속히 가기를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 바울이 어떻게 풀려날 것을 확신했는지 분명치 않으나 그는 석방될 것을 확신하고 있다(1:25). 
석방에 대한 그의 확신은 '주안에서'이루어졌다. '주 안에서'라는 것은 바울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계획이 주권자이신 주의 계획과 바램에 따라 결정됨을 시사한다(고전 4:19). 본문은 바울 자신의 미래 문제가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 달려 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 철저히 의존하고 순종하는 삶 속에서 나온 고백이다(Hawthorne).
=====2: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 '에바브로디도'의 축약형은 '에바브라'이다.  
이 사람은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 언급된 '에바브라'와는 다른 인물로(골 1:7;4:12;몬 1:23), 골로새서에서 언급된 '에바브라'는 골로새 출신이고 본절의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출신이다(Muller). '에바브로디도'는 본서를 빌립보 교회에 전달한 자로서(Kent) 바울은 이를 다섯 가지 칭호로 부르고 있다.
@나의 형제요 - 에바브로디도는 바울과 함께 [동질적인] 동일한 신앙을 공유하며 하나님 가족의 일원으로서 깊은 애정을 나누는 자이다.
@함께 수고하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쉬네르곤'(* )으로서 '동역자'를 의미한다.'동역자'는 복음 증거를 위해 함께 수고하는 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에바브로디도가 바울과 함께 빌립보 교회를 세운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Martin,Hawthorne).
@함께 군사된 자요 - 이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대적자들과 계속해서 싸우는 일꾼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가 계속해서 고난당하였음을 암시한다(몬 1:2).
@너희 사자로 - '사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스톨론'(* )은 문자적으로 '사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에바브로디도'가 '보냄을 받은 자'임을 시사한다. 
에바브로디도는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권위'를 부여받고 보냄을 받은 자이다(Hawthorne).
@나의 쓸 것을 돕는 자 - '돕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이투르곤'(*)은 문자적으로 '봉사자'란 의미로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의 필요를 도와 주기 위해서 보낸 자이다.
=====2:26
본절은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려고 하는 두 가지 이유이다(Hawthorne, Muller).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 '간절히 사모하고'의 헬라어 '에피포돈'(*)은 강렬한 열망을 의미한다. 
'에피포톤'은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하는 마음과(1:8) 갓난 아이가 젖을 간절히 원하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벧전2:2). 이것은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교인들을 얼마나 간절히 사랑하고 보고 싶어했는지를 암시한다. 바울은 이런 에바브로디도의 열망 때문에 빌립보 교회로 보내려고 하였다.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 '심히 근심한지라'의 헬라어 '아데모논'(* )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겪는 심한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에바브로디도가 자신의 건강 문제로 빌립보 교회가 염려함을 듣고 자신의 건강 문제 보다는 교회에 대해 더 크게 염려함을 시사한다. 
한편 에바브로디도가 걸린 병에 대해서 혹자는 향수병과 과로라고 추측한다(Hawthorne). 또한 혹자는 바울의 시중에 따른 과로는 인정하나 향수병은 거부한다(Lenski). 왜냐하면 문맥상 바울의 석방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에바브로디도가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대하면서 향수병에 빠진다는 것은 타당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단순히 추측에 불과하며 분명히 알 수는 없다.
=====2:27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 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의 병세가 심각하여서 거의 죽게 될 뻔했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진술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에바브로디도의 병세가 심각했고 치유 과정이 큰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병세나 치유 과정에 대해서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바울의 관심이 병의 원인이나 치료 과정 보다는 병을 낫게 하신 하나님의 간섭 즉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다'는 것에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이 자신에게도 미쳤다고 진술한다. 이것은 바울이 주의 사역에 헌신한 종들을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에바브로디도의 치유로 말미암아 깊이 깨달았음을 의미한다(Hawthorne).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 에바브로디도의 회복은 단순히 하나님의일꾼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확신 이상을 바울에게 가져다 주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의 병세 악화가 빌립보 교인들을 엄청난 좌절과 실의에 빠지게 될 것을 인식하였다(Kent). 바울의 근심은 단순히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에바브로디도의 병세 악화나 사망이 초래할 빌립보 교인들의 충격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에바브로디도의 회복은 바울이 안고 있던 이중(二重)의 근심을 해결해 주었다.
=====2:28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 '보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펨프사'(*)는 서간체 부정과거로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의 편지와 함께 이미 떠났음을 보여준다. 한편 '더욱 급히'의 헬라어 '스푸다이오테로스'(*)는 '보다 급하게'를 의미하는 비교급으로 중병에서 회복된 지 얼마되지도 않은 에바브로디도를 급하게 보냈음을 시사한다. 
바울이 급하게 에바브로디도를 보낸 이유는 빌립보 교인들이 에바브로디도를 빨리 만나봄으로 근심과 좌절에서 벗어나서 다시 활기를 찾고 바울자신도 근심을 덜기 위함이다(Hawthorne, Hendriksen, Kent).
=====2:29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 여기서 '주 안에서'(* , 엔 퀴리오)가 무엇을 수식하느냐에 따라 본절의 의미가 달라진다. 
(1) 만약 동사 '영접하고'를 수식한다면 본절 '주께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시듯이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라'는 권면이 된다(롬 15:7). 
(2)만약 '모든 기쁨'을 수식한다면 본절 '주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고 있는 특성 중의 하나인 순수한 기쁨으로 영접하라'는 권면이 된다(롬 16:2). 
비록 강조하는 바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전체 문맥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주 안에서 한 형제된 동료 그리스도인을 기쁜 마음으로 존귀히 여기며 섬겨야 하기 때문이다(Hawthorne, Martin).
=====2:30
빌립보 교인들이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고 존귀히 여겨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 에바브로디도는 로마에 갇힌 바울을 돕기 위해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심지어 자신이 병들어 죽게 될 지경에 이르기까지 헌신하였다. 
'돌아보지 아니한'의 헬라어 '파라볼류사메노스'(* )는 본래 '도박사가 돈을 따기 위해 모험'을 하거나 '탐험가가 값진 것을 얻기 위해 생명을 거는 위험'을 의미한다.[닥쳐올 생명의 위기를 포함한 모든 리스크를 감수함]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자신의 조력자로 봉사하는 일이 이처럼 헌신적이었음을 빌립보 교회에게 전해주면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고 존귀히 대하라고 권면한다(Hawhorne, Hendriksen, Martin).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 '일'의 헬라어는 '레이투르기아스'(* ,'봉사' )로서 복음전파 사역 동참을 의미한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과 함께 동참해서 복음 선포 사역을 감당해야 했으나, 할 수 없음으로 대신 [그들의 대표로서] 에바브로디도를 보냈던 것이다(Martin, Kent). 그렇기 때문에 빌립보 교인들은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고 존귀히 여겨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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