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5장 [339.내주님지신 십자가] [545.이눈에 아무증거 아니뵈어도] <나의안에거하라>
@@괴로울 때 기도하라, 고요하면 찬송하라, 외로우면 주를 보라(그 이름 부르라)@@
[[신체에 병든 기독신자, 병자의 치유를 위한 기도]]
.....교회의 장로들에게 고지하여 중재기도가 필요함을 요청하라
((여기에서 장로들이란, 늘 주 앞에서 행하며 섬기는 바, 형제자매를 위한 중재기도를 위해 준비된 자들 : 목회자나 지도자들...늘 주의이름으로 섬기며 행하며 주 이름에 합당하게 그분의 영광으로 사는 자들을 지칭한다!!...기름바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가 더 중요함을 잊지말라))
......병의 원인이 어떠하든지, 그 병의 발생 근원을 본인이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상관없이 가장 중요한 것은 병자의 소원과 주님의 소원이 상호연결됨, 곧 주께 합당한 거룩함의 회복이 최우선시 됨을 기억하라.
((신약의 의인은 "죄를 회개하고 보혈에 씻긴, 그리스도께 합당한 자"라는 것을 기억하라))
.....먼저 주 앞에 돌아보아 회개하고 사죄의 은총 받음이 첫째관문이다....
((.병고침을 위한 치유의 기도, 그 첫걸음은 상호간에 주 임재 앞에서 돌아보며 깨닫게 하심 따라 죄를 인정, 자발적 회개, 이로 인한 자복기도이다 :: 그 누구에게라도 빚진 것이 깨달아 지거든 갚아버릴 것을 결심-고백-실행하라)) ......병으로부터의 치유는 당장에, 또는 나중에 일어날 수도 있고 각사람에 대한 주님 계획따라 수명 다할 때까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기대보다 기도한 것보다 더욱 큰, 최상의 은혜 베푸실 것을 믿으라.
[사죄의 은총 안에 거하라,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하심을 마음에 품으라, 믿는 이의 치유는 그 어떤 수단을 통하더라도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라는 것을 결코 잊지말라!!]
((그리스도의 믿음 : 절대긍정-절대기쁨-절대확신과 신뢰의, 하나님의 참믿음 안으로 들어가라. 오직 바로 살아 생동하는, 발휘되는 참믿음으로 주와 동행하기를 힘쓰라))
......: 기도 드렸다면 이제부터는, 수한 다하기까지라도 끝까지 주안에 거하기-주안에서 자유하기를 실행하라, 기도드린 것을 결코 잊지말라, 포기하지도 말라, 그러나 각사람의 지고지선-최선-최상의 필요를 아시는 분 자체를 기대-앙망하며 동행하라, 인내와 믿음으로 그분을 끝까지 붙들도록 하라.
.....((병의 치유는 전적으로 주의 주되심에 겸손히 맡겨드리라)).
먼저 주 임재앞에서 그 어떤 거리낌이 있는 가를 살피고, 자기 죄를 해결하는 것이 최우선순위이다((하나님과 화해-->형제자매에게 합당하게 죄 고백/용서 구할 것)) -->믿음의 기도로 나아감((하나님이 원하시는 바, 바로 그것을 깨닫게 해 주시기를 구하라...바로 그것을, 귀 기울임 통해 주께서 주시기 원하시는 최상의 것을 구하라...병 낫는 것만이 최선은 아닐 수 있음에 주의하라)).....공급해 주시는 바 그리스도의 참 믿음안에 거하여 그분과 동행하라
===부한 자에게 주는 경고
1.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4.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6.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인내와 기도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12.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19.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20.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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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5 Amplified Bible
===Misuse of Riches
1 Come [quickly] now, you rich [who lack true faith and hoard and misuse your resources], weep and howl over the miseries [the woes, the judgments] that are coming upon you.
2 Your wealth has rotted and is ruined and your [fine] clothes have become moth-eaten.
3 Your gold and silver are corroded, and their corrosion will be a witness against you and will consume your flesh like fire. You have stored up your treasure in the last days [when it will do you no good].
4 Look! The wages that you have [fraudulently] withheld from the laborers who have mowed your fields are crying out [against you for vengeance]; and the cries of the harvesters have come to the ears of [a]the Lord of Sabaoth.
5 On the earth you have lived luxuriously and abandoned yourselves to soft living and led a life of wanton pleasure [self-indulgence, self-gratification]; you have fattened your hearts in a day of slaughter.
6 You have condemned and have put to death the righteous man; he offers you no resistance.
===Exhortation
7 So wait patiently, brothers and sisters, until the coming of the Lord. The farmer waits [expectantly] for the precious harvest from the land, being patient about it, until it receives the early and late rains.
8 You too, be patient; strengthen your hearts [keep them energized and firmly committed to God], because the coming of the Lord is near.
9 Do not complain against one another, believers, so that you will not be judged [for it]. Look! The Judge is standing [b]right at the door.
10 As an example, brothers and sisters, of suffering and patience, take the prophets who spoke in the name of the Lord [as His messengers and representatives].
11 You know we call those blessed [happy, spiritually prosperous, favored by God] who were steadfast and endured [difficult circumstances]. You have heard of the patient endurance of Job and you have seen the Lord’s outcome [how He richly blessed Job]. The Lord is full of compassion and is merciful.
12 But above all, my fellow believers, do not swear, either by heaven or by earth or with any other oath; but let your yes be [a truthful] yes, and your no be [a truthful] no, so that you may not fall under judgment.
13 Is anyone among you suffering? He must pray. Is anyone joyful? He is to sing praises [to God].
14 Is anyone among you sick? He must call for the elders (spiritual leaders) of the church and they are to pray over him, anointing him with [c]oil in the name of the Lord;
15 and the prayer of faith will restore the one who is sick, and the Lord will raise him up; and if he has committed sins, he will be forgiven.
16 Therefore, confess your sins to one another [your false steps, your offenses], and pray for one another, that you may be healed and restored. The heartfelt and persistent prayer of a righteous man (believer) can accomplish much [when put into action and made effective by God—it is dynamic and can have tremendous power].
17 Elijah was a man with a nature like ours [with the same physical, mental, and spiritual limitations and shortcomings], and he prayed [d]intensely for it not to rain, and it did not rain on the earth for three years and six months.
18 Then he prayed again, and the sky gave rain and the land produced its crops [as usual].
19 My brothers and sisters, if anyone among you strays from the truth and falls into error and [another] one turns him back [to God],
20 let the [latter] one know that the one who has turned a sinner from the error of his way will save that one’s soul from death and cover a multitude of sins [that is, obtain the pardon of the many sins committed by the one who has been restored].
===Footnotes
James 5:4 The Lord of Hosts; Sovereign God; Lord of the armies of heaven and earth.
James 5:9 Lit before.
James 5:14 The oil symbolizes the presence of God.
James 5:17 Lit with prayer, an idiom of emphasis derived from Hebr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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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5장 (개요)
5장에서 야고보는 가난한 자를 핍박하는 부자들에게 내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며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그들의 죄가 얼마나 크고 어리석은 것이며, 그들에게 임할 벌이 얼마나 비통한 것인지를 설명한다(1-6).
여기서는 모든 믿는 형제들에게 시련과 고난의 때에 인내할 것을 권고한다(7-11).
맹세하는 죄에 대한 경고(12).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와 번창할 때에 각각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권고(13).
병든 자들을 위한 기도와 기름을 바르는 것에 대한 기록(14,15).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로 자기의 죄를 고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할 것을 권하며, 기도의 능력을 보여 줌(16-18).
마지막으로 진리의 길에서 떠난 자들을 다시 돌아오도록 하기를 힘쓰라고 권고하였다(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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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에 대한 경고(약 5:1-11)
야고보는 먼저 [기독교 밖에 있는]죄인들에게 말하고 그후에 성도들에게 말하였다.
Ⅰ. 죄인들에게 하는 경고의 말씀. 야고보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동의하고 있음을 여기서 발견하게 된다.
"화있을진저 너희 부유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눅 6:24).
이 말씀은 모든 세상적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기독교 신앙을 고백한 자들에게가 아니라, 세상적이며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로서, 본문에 기록된 의인을 정죄하고 죽인 자들에게 대하여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그런 권력을 가지지 못했었다.
이 서신이 비록 충실한 유대인 기독자들을 위하여 쓰여졌고, 또 주로 그들에게 보내어졌다고는 하지만, 생략부호를 사용함으로 이방인 기독자는 물론 전통적 유대인까지도 포함하고 있음이 충분히 암시되어 있다 할 수 있다. 그들은 좀체로 쉽게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므로, 그들이 두고두고 읽을 수 있도록, 그럼으로써 참되게 돌이켜 회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글로 쓰여지게 되었다.
이 서신의 처음 인사말 가운데서 우리가 주의깊게 관찰해 보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 서신이 사도 바울의 서신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형제에게"란 말로써 시작되지 않고, 그저 평범하게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란 말로 시작된 것과 또 인사말을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라고 하지 않고, 그저 "문안"이라고만 한 점이다(1:1). 유대인들 중에서 먼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고, 그들 중 대부분이 복음을 믿었다. 그러나 부자들의 대다수가 기독교를 거부하고 불신앙으로 마음이 굳어졌으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박해하였다. 야고보는 이렇게 압제하고 불신하며 박해하는 부자들에게 1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1. 야고보는 먼저 [기독교 밖에 있는]죄인들, 특히 불신자로서 세상의 부자들, 그들에게 임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예고한다(1-3절).
그들은 비참한 불행을 당하게 될 것이며, 그들이 두려워했던 그 무서운 재난 속에서 그들은 통곡하게 될 것이다.
이 재난은 그들이 행복을 얻으려고 했던 바로 그 곳에서부터 시작되고 또 그들이 행한 모든 일로 인하여 이 재난은 철저한 파멸로써 그 완성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제 야고보는 그들로 하여금 당할 재난의 이유를 생각해 보며 그 재난의 중함을 깨달아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1절).
(1) "대단히 무서운 재난이 너희에게 임할 것을 너희가 알게 될 터인데, 그 재난은 도움이 되거나 위로될 만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모든 불행만을 가져다 주는 재난일 것이다. 즉 영원한 고통과 외적인 환난 그리고 마음의 불안, 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고통과 지옥의 고통 등이다. 너희는 너희들에게만 임하는 고통뿐 아니라, 온 고통을 맛볼 것인데 너희의 교회와 국가의 멸망이 가까워 올 것이다. 또 분노의 날이 임하고, 그날에 부가 인간에게 아무 도움이 못되고, 사악한 인간들은 모두 파멸될 것이다."
(2) 그들에게 임할 재난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을 울리고 통곡하기에 충분하다.
부자들은 (재물이 넉넉하니..)스스로에게 먹고 마시고 결혼하자고 말하기 쉽다.
회개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울고 회개하라"고 하지 않고(그는 권고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고 선포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울고 통곡하라. 왜냐하면 너희의 심판의 날에 오직 울며 통곡하고 이를 갊만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짐승같이 사는 자들은 짐승처럼 소리지르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함께 당하게 될 공통의 재난은 연락 가운데서 안일하고 관능적인 생활을 하는 부자들에게 가장 큰 비탄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들은 장착 임하게 될 재난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슬퍼하며 통곡하게 될 것이다.
(3) 부자들의 불행은 바로 지금 그들이 행복을 누리고 있는 그것으로부터 야기될 것이다.
"부패와 부식, 파멸"이 너희의 모든 아름다운 재물 위에 임할 것이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을 좀먹었으며"(2절)
지금 너희가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하고 있는 재물들이 앞으로 너희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상하게 할 것이다.
그것들은 너희에게 아무런 가치도 소용도 없게 될 것이고 오히려 많은 슬픔으로 너희의 가슴을 아프게 할 것이다.
(4)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3절).
성경에는 악한 인간들에 대한 증거를 나타내는 데에 무생물들이 사용된다.
하늘, 땅, 광야의 바위, 땅의 소산물, 그리고 본문에서의 부정한 수단으로 축적한 재물들의 녹과 해독이 불경한 부자들에 대한 경고로써 거론되었다.
부자들은 그들의 말년에 늙었을 때 풍부히 쓰기 위하여 재물을 쌍아 두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전리품이 될 재물과 결국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계시되는 날에 진노의 재물로 밝혀질 재물을 쌓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날 심판 중에 그들의 죄가 불과 같이 그들의 살을 먹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수천 명이 불에 타 죽었는데, 마지막 심판의 날에는 사탄과 그의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에 악한 자들이 던지움을 받을 것이다.
주님은 사악한 자들의 죄에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다음에는 제시되는 그들의 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자.
2. 야고보는 위에서 말한 재난을 가져오는 죄들이 무엇인가를 보여 준다.
그처럼 비참한 처지에 빠지게 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중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1) 이러한 사람들의 죄는 탐욕이다.
그들은 그들의 옷이 좀 먹을 때까지 간직해 두었고, 또한 금과 은을 녹슬 때까지 저장해 두었다.
이 재물들이 그 스스로를 부패시키고 소모시킬 원소를 자체 내에 끌어들여서 의복이 그 자체를 좀먹을 곰팡이를 기르고, 금과 은도 그 자체를 먹어 들어갈 녹을 기른다는 것이 아 재물들에게는 큰 치욕이지만, 그보다도 가장 큰 치욕은 이러한 재물들을 그처럼 부식되고 녹슬고 좀이 먹을 때까지 쌓아 둔 사람들에게 떨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물을 주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며, 또 재물로 선을 행하게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저비리고, 재물을 지나치게 사랑하거나 우리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불신함으로써 죄악된 방법으로 재물을 쌓아 둔다면, 이것은 아주 커다란 범죄 행위이며, 우리가 쌓아둔 재물에 슬어 있는 녹과 좀이 그 죄의 증거가 될 것이다.
(2) 그 다음으로 야고보가 기록하고 있는 죄는 억압에 관한 것이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4절).
재물을 소유한 자는 권력도 소유하게 되고 그후엔 자기의 밑에 있는 자들을 억압하여 그 힘을 남용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우리가 여기서 발견하는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노동력을 고용하고 있으며, 가난한 사람들이 품삯에 의지하고 있듯이 부자들도 이들의 노동력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어서 그들이 없으면 대단히 곤란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을 고려하지도 않은 채 부자들은 품꾼의 삯을 움켜쥔 채, 자기들에게 있는 권력을 사용하여 힘든 고용 계약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 계약조차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귀에까지 들리도록 소리지른 죄이다.
이런 경우에 하나님은 ‘퀴리우 사바오드’ ─ 즉 안식일의 주, 혹은 만군의 주라고 불리었는데,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방어할 힘이 없어서 보호되어야 하는 반면, 그들의 적은 많고 군사력이 강할 경우에 가끔 사용되었다.
모든 피조물을 섭리하시며 각 처소에 알맞게 모든 만물을 배치하시는 만군의 주께서 압제자의 냉혹함과 불의함으로 인하여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시며, 그의 수하에 있는 무리들(천사들, 심지어 사탄들, 폭풍우, 질병 등)을 명하여 부당하고 무자비하게 취급당한 그들의 잘못을 복수하게 할 것이다.
하기에, 그 누구라도 이 횡령과 탄압의 죄를 주의하고, 그러한 태도를 절대 나타내서는 안 된다.
(3) 여기에서 언급된 또 하나의 죄를 육욕과 관능에 빠지는 것이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5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즐거워 할 것을 금하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치 이제까지 그것 없이는 살지 못했던 것처럼 쾌락 속에서만 살려고 하는 것은 매우 자극적인 죄이다.
그리고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이 있어서 이 땅에 보냄받았으며]단지 순례자와 나그네로서 잠시 동안만 지낼 뿐이며, 영원을 위하여 준비하여야 할 이 땅에서 이처럼 쾌락만을 추구한다는 것은 관능적인 죄를 일층 더 심각하게 악화시키는 것이다.
사치스러움은 인간을 방종케 만든다(호 13:6 . 저희가 먹이운 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인하여 나를 잊었느니라).
방종과 사치는 일반적으로 대단히 많고 풍부함의 결과이다. 인간이 많은 재난을 소유한 채 육체적 관능적 쾌락에 빠지지 않기란 심히 어려운 일이다.
"너희가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고, 매일을 마치 제삿날이나 축제일처럼 살고 있다. 그러므로 너의 마음은 비대하여지고, 어리석고 우둔하며 교만해졌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요구와 고통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되고 말았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만일 사람들이 자기 가진 것 이상으로 낭비하며 살지 않는 한 즐겁게 사는 것이 무슨 해가 된다는 말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으로 자비롭고 경건한 행위를 풍성하게 베푸는 대신, 자기의 배로 하나님을 삼고, 이 모든 것을 배를 채우는 데만 사용하는 것이 인간에게 해가 되지 않겠는가? 자기 육신의 욕망을 즐겁게 함으로 자기 영혼이 필요로 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어찌 인간에게 해가 되지 않겠는가?
소돔성에 유황불에 떨어진 것과 여기에 기록된 대로 부자들이 울며 통곡해야 할 재난들을 가져오는 것은 분명히 무서운 악 때문임이 틀림없다.
교만과 게으름과 풍부한 나머지 썩어들어가고 있는 쌓인 양식들은 연락(宴樂)하고 방조하며 도살의 날에 마음을 살찌게 하는 것과 꼭 같은 것을 의미한다.
(4) 여기서 부자들이 책망 받는 또 다른 죄는 핍박이다.
"너희가 의인을[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6절).
옳은 자에 대한 핍박이 부자들의 죄악의 양을 가득히 채웠다. 그들은 재물을 얻기 위하여 가난한 자들을 매우 부당하게 억압하고 짓밟았다.
또한 재물을 얻은 후에는 사치와 환락의 길을 걸었고, 다른 사람들의 요구나 고통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게 되고 말았으며, 심지어 양심의 아무런 가책도 없이 그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했다. 그들은 합법적으로 행동하는 척하여, 죽이기 전에 [아무 연고없이]저들을 정죄하였다.
그들이 법의 무슨 조항을 적용하여 정죄하든지 간에, 불의한 박해는 하나님께서 피에 대한 조사를 하실 때에 대학살이나 노골적인 살인과 마찬가지라고 단정될 것이다.
여기서 다음을 관찰해 보자. [타락한 이 세상에서는]옳은 자들이 [아무 연고없이] 정죄받고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한편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그들이 고통을 당하며 박해자들의 불의한 선고에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굴복할 때, 이 모든 것이 고통당한 자에게는 영광으로 그리고 박해를 가한 자들에게는 불명예로써 하나님께서 기록하실 것이다.
이 사실은 심판이 문 앞에까지 와 있음을 알려주며, 따라서 우리는 압박 받은 자들의 인내에 대하여는 보상되고 압제자에게는 파멸을 가져다 주는 결산의 날이 올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죄인들에게 주는 말씀이다.
Ⅱ. 다음으로 우리는 성도들에게 주는 말씀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목회자들이 목회를 할 때에 즐겨 사용하는 바, 죄인들을 책망하고 성도들은 격려하는 이 같은 방법론에 대해 멸시하며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야고보가 여기서 보여준 이런 방식의 설교를 발견하고 고찰해 봄으로써, 우리는 이 방식이 죄인들을 책망하며 성도들을 격려하는 데와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분별하며 권고하는 [어쩌면]최선의 방법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사악하고 옳은 자를 억압하는 부자들에 관하여 주신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의 고난받는 백성들을 위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므로 길이 참으라.
하나님께서 사악한 자들에게 그 같은 재난을 내리실 때에 너희는 너희의 의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으며 너희가 받을 가장 큰 격려가 어디로부터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1. 너희의 의무에 충실하라. "길이 참으라"(7절). "마음을 굳게 하라"(8절).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9절). 이 세 가지 표현의 의미를 잘 생각하여 보라.
(1) "길이 참으라"는 말씀은 고난을 참고 투덜거리지 말며, 해받음을 참고 복수하지 말라는 것이다. [[일절 오래참음으로 기다려 주라-도중에 포기하지 말라, 중보하라]]
또한 비록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즉시 어떤 징표로써 나타나시지 않는다 하여도 그의 섭리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 징표는 약속된 시기에 나타날 것이다. 마지막 때에 말하여지고 거짓이 아님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까지 이 징표를 기다리라.
그것은 잠시 후의 일이며 오실 그분은 반드시 오실 것이고, 결코 지체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고난의 때를 지나도록 길이 참으라."
여기서 사용된 ‘마크로뒤메사테’(3114)란 말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우리의 맡은 말은 일을 다 완수했을 때, 상을 받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인내는 어떤 철학자들이 가르치는 도덕적인 인내와 마찬가지로 필연적인 것에 대한 단순한 순종이 아니고, 미래의 영광스러운 보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지혜와 뜻 안에서 겸손히 묵종하는 것이다.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7절). 이 말씀은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배워야 할 과제이므로 8절에서 반복하여 말씀되고 있다.
"너희도 길이 참고."
(2) "마음을 굳게 하라(8절)".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즉 너희 믿음은 흔들림이 없이 굳세고, 너희 선행은 피곤함이 없이 꾸준히 지속되며, 모든 고난과 유혹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하늘의 뜻을 따르기로 한 너희의 결심은 변하지 말아야 한다.
악인이 번영하는 반면 선한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 일은 모든 세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이 큰 시련이었다. 다윗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시 73:2, 3).
사도 야고보가 이 서신을 쓰고 있는 대상인 그리스도인들 중 어떤 이들을 아마 다윗과 같이 곧 쓰러질지도 모를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음을 굳게 하라고 권고되었다. 믿음과 인내는 마음을 굳게 해 준다.
(3) "서로 원망하지 말라"(9절). ‘메 스테나제테’ ─ 즉 서로 대적하여 으르렁거리지 말라이다.
즉, "[믿는 이는 각자가 주 임재앞에서 스스로를 책임져야 할 바, 참생명 받은 단독자임을 명심하라..오직 주께서 각각 다르게, 그리고 독특하게 가장 알맞게 이끄실 것을 의심하지 말라, 각사람의 오리지날 디자인과 데스티니를 이루시도록 주를 송축함으로써 각사람을 축복하라...믿는 이로서 너희 상호간에 대해 <마귀에게 틈을 내 줄 수 있는, 하나됨을 깨뜨릴 수 있는> 모든 원망-불평을 깨어 경계함으로써 불식시키고 주앞에 내려놓으라...이는 결코 주께 합당하지 않으니!!...<여기에 더하여> 너희에게 닥친 일에 대하여 투덜거리는 불평으로 또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불신-의심하는 불평이나 너희에게 고난을 가져다 주는 것에 대한 복수심에 가득차서 넘쳐나는 들끓는 불평, 그뿐만 아니라, 너희 재난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잘 지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시기나 미움으로 인하여 솟아오르는 불평등하게 대우받는 것 아닌가 하는 세상적 느낌을 허용함으로써 야기될 수 있는 바, 너희들 서로간에 불화가 생기지 않게 하라. 너희들 자신이 불안해지거나, 위에서와 같이 불평함으로 서로간에 거북한 사이가 되거나 가슴 아픈 사이가 되지 않도록 <손해 본다 해도 주를 바람으로써 감수하고 양보하라!!> 세심하게 먼저 배려하며 주께서 맡기신 것을 주 뜻따라 내어주며 심고 관용하라, 조금도 성도간에 그 틈 생기는 것을 허용하지 말라."
맨톤 박사는 말하기를, "여기서 야고보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서로 해를 가하거나 원한 맺는 행동을 한 것에 대한 것으로써, 그들은 할례당과 무할례당으로 나뉘고 피차간에 서로 가슴 아픈 일들과 불평할 일들을 만들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부유한 압제자들의 억압으로 인하여서만 한숨을 지은 것이 아니고 그들이 함께 거룩한 신앙을 고백한 형제들이 [세인들과 다름없이 서로에게] 가하는 해로 인하여 한숨을 지었다."
사방에 공동의 적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똑같이 고난의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은 서로간에 관심을 가지고 동정하고 도와주되, 괴로움을 주며 원망하는 일이 없도록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들의 원수에게 임할 심판이 그들 위에도 떨어질 것이다.
이같은 원한 관계가 만연되면 될수록 그들 자신이 자기들에게 임할 심판을 더욱더 가까이로 끌어오는 것이다.
2.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함으로써 <마귀에게 틈을 주지않음 통해> 서로간에 원한을 사지 않는 그리스도인들마다에게 주는 격려는 무엇인지 살펴 보라.
(1) 농부의 예를 보자.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바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7절) 너희가 땅에 옥수수 씨를 뿌렸으면, 너희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위하여 여러 달을 기다리며 너희 수고의 결실을 거둘 때까지 이 비가 계속되기를 바랄 것이다. 이것은 바로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행복을 구할 때에 잠시의 폭풍우를 견딜 것과 끝까지 참을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2) "너희가 기다릴 시간이 얼마나 짧은가를 생각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8절).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서 계시니라(9절). 조급하지 말며 서로 싸우지 말라. 모든 사람을 공의 앞에 세우시고, 악한 자를 벌하며 선한 자를 상 주실 위대한 심판자께서 가까이에 계시다. 그분은 문 밖에서 문을 막 두드리고 계신 분으로서 너희에게 생각되어야 한다."
((호흡보다 의식보다 더 가까우시며, 가까이 계시사 너희 몸을 성전 삼으사 너희 존재안에 충만히 임재하여 계시며 모든 의식과 무의식속에 하나되어 계심을 묵상하고 그분의 감동따라 생각하고 행하라..그분의 임재의식을 결코 놓치지 말고 그분과 동행하라))
야고보가 이 서신을 기록할 때, 악한 유대인들을 벌하실 주님의 오심은 매우 가까웠다고 생각되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인내와 그 밖의 덕들이 특별히 주목되고 시련을 당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심판자로서 곧 강림하시리라는 확신이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해야 했다.
세상을 심판하려 오실 심판자의 강림은 이 서신이 기록되던 때보다 20세기 이상 더 가까워진 셈이다. 그러므로 이 권면의 말씀은 우리에게 더욱 큰 영향을 주어야 한다.
(3) 심판자께서 오실 때 우리가 심판 받으리라는 위험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앞에 놓여진 의무에 관심을 가지게 해 준다.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9절).
조급함과 불만은 우리를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 위에 서게 하며, 우리의 투덜거리며 불신하고 미워하면서 서로 불평하고 원망하는 행동은 우리에게 상상 이상의 큰 재난들을 가져다 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죄를 피하며 시련 중에서 길이 참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4) 우리에게 선지자들이 본보기를 보고 인내의 용기를 얻으라고 권고한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을 본을 삼으라"(10절).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큰 영광과 은총을 받을 선지자들은 가장 큰 고난을 받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주시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선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몹쓸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고난을 기꺼이 용납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고난의 당하는 가장 큰 본이 되었던 사람들이 동시에 인내의 가장 좋은 본이 되었다는 것이다. 시련은 인내심을 일으킨다.
여기서 야고보는 주께 충성하는 자의 공통된 자세로써 그 예를 든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11절)
우리는 본서 1장 2-12절에서 의롭고 오래 참으며 고통 당하는 자가 가장 복있는 사람인 것을 본다.
(5) 욥도 고난 당한 자들을 격려하기 위한 본보기로 제시되었다.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11절)
욥의 경우에서 여러 가지 종류의 불행의 예와 그 슬픔을 본다. 그러나 욥은 그 모든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고, 그의 영혼은 꾸준히 인내하며 겸손하였다.
그 결과로 그는 마침내 무엇을 얻었는가? 진실로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가장 자비하기고 긍휼히 여기는 자이신 것을 분명히 입증하는 그러한 일들을 성취하시고 또 욥에게 가져다 주셨는가!"
고난을 참는 최선의 길은 그 고난의 마지막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그의 목적에 합치될 때 그 고난을 지체없이 끝나게 해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심은 그의 백성이 당하는 모든 고통과 환난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동정심은 그 백성들이 고난을 받는 동안에 발동되고 후에 그 보상으로 나타난다.
끝날에 면류관을 받을 것을 믿는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을 섬기며 우리의 시련을 참고 견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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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세에 대한 경고(약 5:12-20)
이 서신을 이제 끝맺으면서 저자는 아주 재빠르게 한 가지 한 가지를 열거하며 지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여러 가지의 것들이 이 얼마 안 되는 구절들 속에서 한꺼번에 주장되고 있다.
Ⅰ. 맹세하는 죄에 대하여 경고되었다.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12절).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아주 제한적인 의미로 이해하여 "너희를 비난하며 모든 악한 말을 하는 너희의 박해자들에게 맹세하지 말라. 그들이 너희를 해하는 것 때문에 감정에 사로잡혀 쉽게 맹세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맹세는 여기서 물론 금하고 있으며 박해자들이 가한 해 때문에 알지도 못하고 걱정으로 맹세하는 죄를 범한 사람들도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의 경고는 이러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또 다른 종류의 맹세에까지 그 범위를 넓혀 적용된다.
어떤 사람들은 ‘프로 판톤’ - 즉 모든 것 앞에라고 번역했다. 그래서 본문에서 의미는 그들이 일반 대화에 있어서 언급하는 모든 것 앞에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결코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했다.
모든 습관적인 맹세 또한 분명히 금지되고 있으며, 그러한 맹세는 성서에 의하여 매우 중한 죄로써 취급되었다.
불경한 맹세가 유대인 사이에서 보통 습관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 서신이 외국에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보내졌다는 사실에서(이미 고찰한 바와 같이) 우리는 이 권고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내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맹세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오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혐의를 받고 그 협의를 벗기 위하여 반증할 때에 최후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저주와 맹세를 한 것에서 볼 때, 그들은 감히 맹세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이 정립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 지적된 다른 여러 죄와 함께 함부로 맹세하는 죄도 저질렀을 것이다.
그런데 후대에 와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며 그리스도인다운 특권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중에서까지 이 맹세하는 죄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참으로 밉살스러운 맹세와 저주가 오늘날 모든 신중한 그리스도인들의 귀와 마음을 매일 상케 한다. 야고보는 여기서 말하기를,
1.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12절)라고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맹세하는 일을 경시하며 신성을 모독하는 맹세를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왜 여기서 무엇보다도 맹세하는 일이 금지되고 있는가?
(1) 왜냐하면 맹세는 가장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명예에 대한 공격이며, 그의 이름과 권위에 대한 최대의 멸시이기 때문이다.
(2) 이 죄는 모든 죄 중에서 가장 적은 유혹을 받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무엇을 주거나, 쾌락 또는 명심을 얻게 하지도 않고, 오직 죄 속에 빠져 방종함이며, 하나님께 대하여 불필요하게 적대감정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다.
"주의 원수들이 헛되이 주의 이름을 칭하나이다"(시 139:20).
아무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들을 부르는 척하거나, 예배 행위로써 때때로 하나님을 찬양할지라도, 맹세는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원수라는 증거가 된다.
(3) 맹세가 사람에게 버릇이 되어버리면 그것을 떼어버리기가 가장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맹세로 무엇보다도 경계되어야 한다.
(4)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만약 네가 하나님의 이름 모독하며 또 때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회롱한다면, 너의 고통 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네게 지주가 되어 주기를 어떻게 바랄 수 있겠느냐?
(박스터의 생각) "이러한 모든 것이 필요한 맹세를 금하는 것은 아니고, 마땅히 필요한 맹세에 대해서는 거기에 적합한 존경심을 가지고 할 것을 확실히 해두는 것이다."
또한 "맹세의 참된 본질은, 우리가 어떤 의심할 것 없는 것에 대하여 단언하기 위해서 어떤 위대한 것의 명성을 들어 우리의 말로서 표현하는 것이지, (보통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나 다른 심판자에 대한 호소가 아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하늘과 땅으로 맹세하거나 또는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그 밖의 맹세들이 실제로 행하여지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맹세를 하되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하지 않으면 무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점점 하나님을 욕보이되 피조물이 마치 하나인 것처럼 그것에 맹세했고 마침내는 피조물이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반면에,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들어 모독적으로 맹세하던 자들이, 이제는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을 같은 위치에 놓고 생각하게 되었다.
2.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다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정함을 면하라"(12절).
즉 너희는 너희의 뜻을 분명히 말해야 할 기회가 왔을 때에, 분명하게 예! 하거나 아니요! 함으로 충분하다.
또한 너희가 한 말에 확신을 가지며 진실하여 너희가 무슨 잘못으로 의심받을 만한 여유를 주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는 이미 말한 것이나 경솔한 맹세로써 약속한 것들 때문에 되돌이켜 정죄함을 받지 않게 될 것이며, 너희 자신을 정당화시키려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인간을 맹세하도록 이끄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서 의심받는 법이다.
너희가 진실하는 것과 너희의 한 말을 너희가 확신한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너희의 말할 때 맹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너희는 셋째 계명에 분명하게 첨부된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주 여호와를 망녕되이 일컫는 자를 주께서 죄없다 아니하시리라."
Ⅱ.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적합하게 행동해야 할 것을 배운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13절).
이 세상에서 우리의 환경은 여러 가지이다. 우리의 지혜는 환경에 알맞게 순응해야 하며, 번영할 때든지 고난을 당할 때든지 항상 우리 자신에게 맞게 활동되어야 한다.
때로 우리는 슬프고, 때로는 유쾌할 것이다. 하나님은 한 가지 환경을 또다른 환경과 대치시킴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명하신 여러 가지 의무를 좀더 잘 관찰 할 수 있게 하셨고, 우리의 감정과 사랑에 새겨진 깊은 인상의 우리의 헌신에 도움이 되게 하셨다.
환난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며, 번영은 우리를 찬양으로 충만케 해야 한다. 고난의 때에만 기도하거나, 즐거운 때에만 노래하게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의무는 수행되는 과정에서 특별한 유익을 가져다 주며, 또 적적한 때에 최고의 행복을 목표로 하여 수행되어야 한다.
1. 환난의 때에는 기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일이다.
괴로움을 당한 사람은 다른 이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는 만큼 스스로 기도해야 한다. 고난의 때는 기도하는 때이어야 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며, 우리는 좀더 일찍 주를 찾아 나서게 될 것이다.
평소에 하나님께 대하여 무관심하던 사람들도 하나님에 대하여 질문하게 될 것이다.
영혼이 그때에 가장 겸손해지고 굳은 마음이 깨지고 부드러워진다. 회개하는 겸손한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기도는 가장 하나님께서 가장 즐겨 받으시는 것이다.
재난은 자연히 불평을 유발하는데, 우리가 누구관대 하나님께 불평할 수 있는가?
고난 속에서 신앙과 소망을 훈련함이 필요하다. 그런데 기도는 바로 이러한 은혜들을 우리가 얻고 또 키워 나갈 수 있는 약속된 방법이다.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13절).
2. 즐겁고 번영하는 때에 찬송하는 것은 가장 적합하며 알맞은 일이다.
원래는 ‘프살레토’─즉 노래하다라고만 되었는데, 이것은 가사를 붙이지 않고 노래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초대 교회 시대의 몇 가지 글에서(특히 풀리니의 편지나 터툴리안의 글들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중에 찬송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성서에서 혹은 그 밖의 개인적 명상에서 취한 것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골로새인들과 에베소인들에게 서로 시와 찬양과 영적 노래로 화답하라고 권고한 것은 성서에 속에 있는 것들로써, 다윗의 시편은 특히 히브리 말로 슈림, 테힐림, 미쯔모림으로 구별되었는데, 이것들이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찬송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기쁨중에 부르는 이 찬송은 복음의 지시하는 바요, 그 기쁨은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기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찬송은 어떤 사람이 즐겁고 번영할 때에 그 기쁨을 나타내는 한 방법으로써 사용되어야 한다고 여기에 제시되었다.
거룩한 기쁨은 공공 집회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족들 사이에서나 혼자 고요히 있을 때에도 맛볼 수 있다.
우리의 찬송이 주님께 드리는 진심의 노래가 되도록 하자.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헌신을 기뻐하실 것이 틀림없다.
Ⅲ. 병든 자들에게 주는 특별한 교훈과 이 교훈을 따르는 자에게 약속한 치료와 사유의 은혜를 볼 수 있다. 병자가 있는데 그가 원한다면,
1. "장로들을 청하라." ‘프레스뷔테루스 엑클레시아스’─즉 장로들 또는 목자들을 의미한다(14,15절).
목사를 청하고 그들의 도움과 기도를 바라는 것은 병든 자들에게 주어진 의무이다.
2. 목사들의 의무는 그들이 청함 받았을 때 병든 자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는 것이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지니라"(14절).
목사들은 병든 자의 상황에 맞도록 기도해야 하며 중재 또한 재난을 당한 자들을 위한 중재 기도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형편에 적합해야 한다.
3. 기적적인 치료가 이루어지도록 그들은 병든 자에게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발랐다.
주석자들은 대개 기름을 바르는 의식을 지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가진 의식으로만 생각하여 기적이 일어난 다음에는 이 의식도 중단하였다고 한다.
마가복음에서 우리는 주의 제자들이 많은 병든 자들에게 기름을 바르고 치료했다는 기록을 보라(막 4:13).
그리고 주후 200년경의 교회에서 이런 의식이 실행되었다는 기록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치료의 은사는 이때에도 계속되었는데, 이런 기적의 은사가 그친 다음에는 이 의식도 중단되었다.
그런데 카톨릭 교도들은 소위 "중부성사"라고 하여 이것을 의식화 해 버렸다. 그들은 사도들처럼 병을 고치는데 그 의식을 사용하지 않고, 임종시에 사용하도록 정해 버렸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그들 교회를 규정 속에서 성서의 가르침을 위반하듯이, 이 의식에 대해서도 성서를 위반하여 이 의식이 죽음의 순간에 실시되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보라, 주의 제자가 기름을 바른 것은 병고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카톨릭교는 그들의 기름 바름이 죄의 잔재를 추방하여 영혼으로 하여금 세상의 힘과 더욱 잘 싸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카톨릭 교도들은 그들이 이러한 의식을 계속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다는 것을 볼 수 있는 현상으로 증명하지 못하게 때문에 신도들에게 보이지 않는 결과가 더욱 훌륭한 것이라고 믿게 만든다.
그러나 이 의식이 성경에 씌인 목적과는 반대로 쓰이는 것보다는 아주 없애 버리는 것이 한결 더 나을 것이다.
어떤 개신교들은 기름 바르는 것이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허락되고 승인된 것이지 관습적인 것이 되도록 허락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야고보의 말에 의하면, 이 의식은 [기름 바를 안수기도자가 주 앞에서 먼저 병자에 대해 도고하는 동안 주님이 깨닫게 하신 바] 치료되리라는 믿음이 있을 때에는 제한없이 허락된 듯하다.
또 어떤 개신교도들은 이 의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주장한다. 즉 이 의식은 사도들이 시대에도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이 의식이 어느 시대에나 완전히 중단되지는 않아야 하고, 기름을 바르는 자들이나 기름 바름을 입은 자들에게 특별한 믿음이 있는 경우에는, 특별한 축복이 병든 자에게 행해지는 이 의식에 수반되어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러 주장과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다만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관찰함과 동시에 꼭 명심하고 염두에 두어 실행해야 할 한가지 변함없는 사실은 병든 자의 구원은 기름바름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믿음의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15절) 따라서,
4. 병든 자를 위한 기도는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주 이름 부름으로써 공급해 주시는 바 그리스도의 전능한 믿음에 자신을 맡겨드림으로써. 살아 생동하는-발휘되는] 산 믿음에서 시작되며 계속해서 끝까지 이 믿음이 동반되어야 한다. ....기도하는 자나 기도 받는 자가 다같이 [동일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병들었을 때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기도는 냉정하며 판에 박힌 평범한 기도가 아니라 믿음의 기도이다.
5. 기도의 성취에 대하여 살펴 보자.
주님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며, 또 기도 받는 사람이 구원에 적합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그에게 맡길 만한 일이 아직도 있을 때에 그를 치료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15절)는 것은, 병이 어떤 특별한 죄의 대가로 보내졌어도 그 죄는 사함을 받고 그 표식으로써 병도 치료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병들어 약한 사람에게 가서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권하시고, 만일 이를 어길 때에는 더욱 큰 불행이 생길 것이라고 하신 것을 보면, 이는 어떤 특별한 죄가 그 병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병들었을 때,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가장 큰 일은 바로 회개하여야 할 죄를 세심하게 살펴보고 합당하게 죄의 용서를 비는 것이다.
죄는 병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찌르는 가시이기도 하다. 죄가 용서되면, 고통은 은총 속에서 사라지거나 아니면, 그 고통 속에서도 은총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병의 치료가 죄의 용서받음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히스기야처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사 38:17)라고 말할 것이다.
너희는 몸이 아프고 고통스러울 때 "주여 나에게 평안을 주시고, 내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라고 대개 기도한다.
그러나 그런 때의 너희의 기도는 그렇게 말씀드리기보다는 오히려 "주여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Ⅳ.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서로 고하며 병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16절)는 권고를 받는다.
어떤 주석자들은 이 구절을 14절과 연결하여 생각한다.
따라서, 병든 자들이 목사들을 청하여 기도해 주기를 간구할 때,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목사에게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 자기들의 병의 원인이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한 보복적인 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또 하나님께 그 죄의 용서를 빌지 아니하고서는 병이 치료됨을 바랄 수 없다고 생각될 때,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고하여 목사들이 그를 위하여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바로 알게 해 주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렇지만 16절에 서술된 죄의 고백은 그리스도인들 상호간에 있어야 할 고백이고, 카톨릭 교인들이 하는 것처럼 신부에게 하는 고백은 아니다.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에게 해를 입혔을 때에는 그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상대방에게 그 불의한 행동의 잘못됨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사람들이 서로 죄 짓도록 유혹했거나, 동일한 악행을 공모했지만, 서로 자기 자신의 책임이라고 자처하고 회개하도록 서로를 돋우어 주어야 한다.
죄가 공동의 성질을 띄고 있고 대중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는, 공중 앞에서 그 죄를 고백하여 그것에 관계될 모든 사람들에게 그 고백이 미치도록 하여야 한다.
때로는 덕망 있는 성직자들이나 항상 기도하는 친구들에게 죄를 고백함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은혜와 용서를 탄원하여 우리를 돕게 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때에 야고보가 우리에게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하라고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이나 우리들 서로에게 잘못한 것 그 자체만이라 제한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일단 우리의 고백이 우리와 다툰 친구와 화해하는데 필요하거나 또는 어떤 이에게 잘못한 일에 대한 배상으로써, 그리고 우리의 양심에 가책을 받으며 영혼을 고요하고 편안하게 만드는데 필요한 한도 내에서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은 옳다.
때로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자신의 연약함과 결점을 고백하는 것도 유익한 일이다.
이때에 그들은 서로 친밀해지고 정다워지며 또한 서로간에 지은 죄와 알력에 대한 용서를 비는 기도로써 서로 도울 수 있게 된다.
그런 까닭으로 서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자들은 모두 함께 기도해야 하며, 또한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13절은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를 위하여 기도할 것을 가르치고 있고,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또 14절은 목사들의 기도를 받으라고 권하고 있으며, 16절은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모든 종류의 기도를 다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는다(목회적, 사회적 그리고 개인의 비밀 기도).
Ⅴ. 기도의 위대한 유익과 효력이 여기에 선포되고 입증되었다.
"의인의 간구는 ((자기를 위한 기도이든 남을 위한 기도이든 간에))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16절).
이에 대한 증거로써 엘리야를 들 수 있다(17,18절).
기도하는 자는 의로운 자이어야 하는데, 이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의롭다는 것이 아니라(엘리야도 완전한 의인이 아니고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음) 복음의 의미에서 의롭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죄로써 알려진 것은 결코 하나도 사모하거나 시인하지 않는 사람이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로다"(시 66:18).
더 나아가서, 기도 자체가 열렬하고 내용이 충실하며 정성 들여진 기도여야 한다. 그것은 마치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께 쏟아 놓는 것이어야 하며, 꾸밈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이러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즉 우리 자신에게 유익하며 우리의 이웃에게도 유익을 줄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받아 주실 것을 확실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역사하실 만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을 친구로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엘리야의 기도가 성취된 것을 예로 들어서 기도의 능력이 여기에 증거 되었다.
엘리야가 우리와 성경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엘리야의 기도가 성취된 것에도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엘리야는 아주 열정적이고 선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매우 위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결점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감정을 혼란을 일으켰던 사람이었다.
기도할 때에 우리는 인간의 결점이나 장점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엘리야를 본받아 열심히 기도하고 엘리야가 기도한 바로 그러한 기도를 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의 내용을 말하는 것으로써는 불충분하고, 간절히 [목숨 걸고, 전심으로]기도 드려야 한다.
우리의 생각을 고정시키고 우리의 소망을 견고하게 하며 열심을 내어 바랄 뿐만 아니라 실행에 옮겨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며 간구할 때 우리는 힘있게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하나님께서 우상을 섬기고 박해를 일삼는 그 나라에 대한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셔서,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 즉 하늘이 비를 주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늘을 열고 닫는 열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예가 요한 계시록 11장 6절 암시되어 있는데, 두 증인이 하늘을 닫고 비가 오지 못하게 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하였다.
이같은 기도의 특별한 능력이 기록된 것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즉시 기도하고 또 열심히 기도하도록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야고보의 그 어느 자손에게도 "나의 얼굴을 헛되이 찾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만일 엘리야가 기도로써 그처럼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었다면, 의롭지 못한 사람의 기도는 공허감으로 되돌아오고 말 것이다.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많은 기적으로 응답하시지는 않을지몰라도, 많은 은혜로써 응답되고 있으리라는 것은 틀림 없다.
Ⅵ. 이 서신은 우리가 현재에서 다른 사람들의 회심과 구원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다하라고 권고함으로써 끝을 맺고 있다(19,20절).
어떤 주석자들은 이 구절들을 해석하기를 야고보가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결점과 잘못을 매우 노골적으로 혹독하게 질책한 것에 대한 사과의 말이라고 한다.
야고보는 그가 유대인의 잘못을 고쳐 주는데 크게 관심을 쏟는 이유를 확실히 보여 준다.
즉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영혼을 구하고 많은 죄를 덮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을 야고보가 진리를 떠난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내용으로만 제한해서는 안 되고, 또한 이와 비슷한 종류의 또다른 연속적인 노력으로만 생각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잘못을 저지른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여 그로 하여금 또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게 하면, 잘못을 저지른 자를 돌아서게 한 그 사람은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는 도구인 것이다."
여기서 야고보가 형제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아직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들로 생각되었다.
자기에겐 과실이 없다고 자랑하거나 자신의 과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지혜롭다거나 경건한 사람의 표정이 될 수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을 범하면, 그 사람이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잘못한 것을 말해 주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반면에 그들의 아주 보잘 것 없고 가난한 사람일 때에 그들을 좀더 지혜롭고 훌륭하게 행동하도록 격려하는 일을 꺼려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들을 진리, 즉 복음(가장 위대한 규칙이며 진리의 표준)을 떠나면, 그것이 생각에서이든지 실제 생활에서이든지 간에 그들이 이 규칙에로 되돌아 오도록 너희의 모든 노력을 다 하여야 한다. 판단의 잘못과 생활에서의 실수는 항상 서로 조화를 이루어 나간다.
실제적인 모든 실수의 근저에는 어떤 교의상의 오류가 있게 마련이다. 습관적으로 나쁜 사람이란 있을 수 없고, 다만 어떤 좇지 않은 원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을 돌이키는 방법은 그들의 과오를 줄이는 것이며, 그들을 끌고 다녔던 악으로부터 그들의 교화시키는 것이다.
물론, 잘못을 저지르는 형제에 대하여 우리가 반드시 힐책하고 공격해야 하며, 그들에게 치욕과 재난이 임하기를 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방법으로든지, 최선의 방법으로써]그들을 [주께로]돌이키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모든 노력으로도 그들을 돌이킬 수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의 핍박하고 파괴할 권력을 아무에게서도 부여받지 못했음을 잊지말라.
우리가 만일 어느 누구의 돌이킴에 있어 도움이 된다면, 이 돌이킴의 역사가 대체로 위력 있는 하나님의 역사이지만, 우리에게 그들을 돌이키는 일이 맡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죄인들의 회심을 위하여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에는, 그들을 회심시키고 변화시키도록 하나님의 은혜와 영이 임하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다른 사람은 회심시키는 일에 어떤 방법으로든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그들이 행한 일에 대한 결과로써 어떠한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현재에 큰 위로를 얻고, 마지막에는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다.
19절에서 "진리를 떠난"이라고 말해진 사람이 20절에서는 "미혹한 길에서"라고 묘사되어 있는데, 우리가 그들의 길을 고치고 수정하게 해 주지 않고는 단순히 그들의 생각만 바꿈으로써 그들의 회심시켰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회심이라는 것은, 죄인이 그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는 것이지, 이쪽 파에서 저쪽 파로 옮긴다든지, 또는 단순히 한 사상이나 사고방식에서 다른 사상이나 사고방식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는 그 영혼을 사방에서 구원하게 되는 것이다.
영혼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한 일은 분명히 훌륭한 평가를 얻을 것이다.
영혼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써, 여기서는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만 언급되었지만 그것은 바로 전인적인 구원을 포함하는 것이다.
즉, 영혼은 지옥에서 구원되고 몸은 무덤에서 일으켜 세워지며, 이 둘이 모두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된다.
그리고 나서 마음과 생명의 회심으로 인하여 허다한 죄가 덮여질 것이다.
성서에서 가장 위로가 되는 구절은 바로 이 구절이다. 우리가 여기서 배우게 되는 것은 우리의 죄가 많아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 할지라도, 그 모두가 덮여지고 용서되리라는 것이다. 우리의 죄가 따돌려지고 버림받게 되면, 심판 때에 다시 우리에게 나타나지 못한다.
인간이 그들의 원하는 대로 죄를 방어하고 그 굴레에서 벗어날 방도를 꾸미게 하라. 그것은 가장 효과적이고 최종적인 방법으로써 죄를 포기하는 것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의 의미를 가리켜, 회심이 허다한 죄를 방지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사실, 회심한 무리들에게 수많은 죄가 방지됐다는 것은 논쟁할 여지가 없을 진리이며, 이러한 현상은 그 무리들의 영향을 받게 되거나 함께 회심하게 될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체적으로 생각하여 볼 때, 죄인들을 회심시키는 일을 위하여 우리가 어떤 가능성 있는 관심을 가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가?
그것은 회심자들의 행복과 구원을 위한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많은 손해를 막으며, 죄가 세상에 퍼지고 난무하는 것을 막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를 위한 것이 되며, 마지막 날에 우리의 위안과 명성을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많은 죄인을 의인으로 돌아서게 한 사람들과 그러한 일에 협력할 사람들은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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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제 5장
=====5:1
@들으라 - '들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게 뉜'(* )은 내용의 중대성을 나타내기 위해 주의를 환기시키는 야고보의 표현이다(4:13). 야고보는 수신자들의 관심을 촉구하여 불의한 부자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 '임할'의 헬라어 '에페르코메나이스'(* )는 현재 중간태 분사로 미래에 있을 고난이 현재로 다가오는 예언의 의미로 사용되었다(Lenski, Mayor, Alford).
부한자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현재까지의 삶이 평안하였던 것처럼 미래에도 계속 평안하리라고 여기나 사실 그 평안은 그치고 하나님의 엄한 심판이 있을 것이다(Oesterly, Tasker).
그러기에 야고보는 부자들을 향해 울고 통곡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울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라우사테'(* )는 귀에 들리도록 우는 것을 나타내며 '통곡'에 해당하는 헬라어 '올롤뤼존테스'(* )는 심판의 선언에 대해 울부짖는 회개의 모습을 가리킨다(사 13:6;14:31;15:3;욜 1:5,13). 이것은 불의한 부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암시하며 동시에 부자들이 회개할 것을 시사한다(Calvin, Burdick, Lenski, Blue).
=====5: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 본문의 '재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플루토스'(* )는 부자들이 마음을 쏟고 있는 포괄적인 세상의 부요함을 뜻한다(Clark, Robertson). 또한 '옷'은 가지고 있는 재산 중의 일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그러한 '부와 옷'은 썩었고 좀먹었다.
'썩었고'의 헬라어 '세세펜'(* )과 '좀먹었으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세토브로타 게고넨'(* )은 예언적 완료형으로 부자들의 재물이 미래에서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이미 무가치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욥13:38;마 6:19,Blue,Mayor,Martin,Lenski). 즉 그들이 평생을 통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불의하게 추구했던 '부'는 이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기에 이미 아무런 가치를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5: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 '녹이 슬었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티오타이'(* )는 '...에게 대적하여'의 헬라어'카타'(* )와 '녹'을 의미하는 '이오스'(* )와의 합성어로 부자들의 부를 상징하는 금과 은이 무용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실제로 금과 은은 녹이 슬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몇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혹자는 '카티오타이'가 '녹이 슬다'는 뜻 이외에 거울이 더러워지면 잘 볼 수 없듯이 희미하게 더러워진 상태를 묘사한다고 주장한다(Mayor). (2) 혹자는 이를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재산이 무가치하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Ropes, Clark, Blue). 두 가지 견해 중 문맥상 후자가 타당하다. 즉 부자들은 탐욕스럽고 이기적이어서 그것들이 오래 방치되었음을 나타낸다(Burdick). 금과 은에 낀 녹은 부한 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돕거나 선한 일에 쓰지않고 무익하게 재산을 축적한 불의를 드러내는 증거가 된다.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 이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좀 먹고 녹이 슬었으니'와 비교하여 불이 더 빨리 녹게 한다는 것에 유의한다. 따라서 본문은 파멸의 급격한 진전을 묘사한다고 주장한다(Mayor, Blue). (2) 혹자는 본문의 '불'이 최후의 형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 불의한 재물에 대한 욕심은 '심판의 불을 모으는 것'과 같아서 본문은 분명한 형벌의 증거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왕하 9:36,Ropes, Westcott,Hort,Burdick,Gibson,Tasker). 부자들의 결과적인 모습을 지적하는 본문의 내용을 고려할 때 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 '말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스카타이스 헤메라이스'(* )는 문자적으로 '끝날들' 즉 메시야의 심판의 때를 의미한다(사 2:2;호 3:5;욜 3:1;암 8:11;딤후 3:1).
부자들은 영적인 일에 관심을 쏟아야 할 때에 물질에 우선적으로 마음을 빼앗겨서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추구하였기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5:4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 '주지 아니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퓌스테레메노스'(* )는 수동태에서 행위지를 나타내는 '아포'(* )와 '기만하다'는 의미를 가진 '휘스테레오'(*)의 합성어로 여러 가지 핑계로 속여서 품꾼들에게 삯을 주지 아니한 사실을 나타낸다. 이것은 부자들이 삯꾼들을 압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그들은 품꾼의 삯을 당일로 지불해야 했던 당시의 규례를 어겼던 것이다(레 19:13;신 24:15;말 3:5). 한편 '삯이 소리 지르며'는 정의를 위해 외치며 소리질러 회개를 촉구하던 구약 예언자들의 사상을 반영하는 표현이다(창18:20;19:13;출 3:7;신 24:15, Tasker, Manton). 이것은 부자들이 지불하지 않은 품꾼의 삯이 하나님 앞에서 부자들의 죄를 드러내는 증거가 됨을 시사한다.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 '만군의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우 사바오드'(* )는 '백성을 돕는 하늘의 군대'(삿 5:20;왕하 6:17)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위엄과 탁월한 권능을 나타내는 칭호이다(사 5:9;롬 9:29). 이것은 억울하게 착취를 당한 품꾼들의 탄식(歎息)이 전능한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아뢰어졌음을 시사한다(창 4:10;18:20;19:13, Clark, Martin, Mayor).
=====5: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 '사치하고'의 헬라어 '에트뤼페사테'(* )는 이기주의와 정욕을 위한 방탕한 생활을 의미하며 '연락하여'는 특별히 도덕적인 방탕을 가리킨다(딤전5:6). 이것은 일반적으로 물질이 풍부해지면 저지르게 되는 보편적인 죄악들을 시사한다(Manton, Mayor, Moo). 한편 '도살의 날'은 '땅에서'와 연결되어 '심판의 날'을 의미한다(사 34:6;겔 21:15,Tasker,Burdick,Moo). 부자들은 도살당할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자신을 살지우는 소나 양들과 같이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기억하기 보다는 현재의 삶 가운데 육신의 쾌락과 즐거움을 추구하였다(시 17:10).
=====5:6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 '옳은 자'(* ,톤 디카이온)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옳은 자'에 '톤'이란 관사가 사용된 것과 본절 후반절의 표현을 근거로 해서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한다(사 53:7;마 26:63,Feuillet). (2) 혹자는 '의로운 자'가 야고보의 명칭이었고, 또한 몇 년이 못되어 순교한 사실을 근거로 하여 야고보 자신으로 보기도 한다(Bengel,Mayor, Dibelius). (3) 혹자는 관사 '톤'을 계층을 나타내는 단수의 총칭 용법으로 보아 의로운 계층의 사람 곧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Calvin, Ropes, Burdick, Lenski).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이제까지의 경고 대상은 부자였으며 그 부자가 억압했던 옳은 자는 문자적으로 가난한 자를 뜻한다. 그런데 그당시 대부분의 가난한 자는 바로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이다(2:5-7).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크 안티탓세타이 휘민'(* )은 수사학적 의문문을 통해서 무죄한 사람들의 연약성과 온유함을 나타냄과 동시에 저항하지 않는 의로운 자의 태도와 그들을 죽이는 불의한 자의 죄악성을 대조시켜 불의한 자들의 극악한 죄를 고발한다(Burdick, Manton, Tasker, Martin).
=====5:7
절,4:13)는 명령조와는 대조적으로 사랑이 어린 어투이다. 야고보는 다시금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권면을 하려 한다(1:2,19;2:1,14;3:1,12;4:11).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 '주의 강림'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스 파루시아스 투 퀴리우'(* )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심판자로 다시 오실 것을 반영한 종말의 사상을 나타낸다(마 24: 3,27 ,37,39;고전15:23;살전 2:19;3:13;4:15;5:23;살후 2:1,8;벧후 1:16;3:4;요일 2:28). 한편 '길이 참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크로뒤메사테'(* )는 '길다'는 의미를 가진 '마크로스'(* )와 '분노' 혹은 '성냄'을 의미하는 '뒤모스'(* )와의 합성어로 분냄을 강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압제나 박해 아래서 자신을 포기하거나 성급한 보복을 삼가하고 고통을 참고 자제하는 것을 시사한다(롬 2:4;벧전 3:20,Trench, Blue, Lightfoot, Martin, Manton).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 야고보는 모든 사람이 공감하는 농부의 경우를 예로 들어 앞서 언급한 인내의 필요성을 설명한다. '이른 비와 늦은 비'는 당시의 기후를 반영한 것으로 '이른비'는 10월에서 11월에 오는 비를 가리키며 '늦은 비'는 4월에서 5월간에 오는 추수 직전의 비를 말한다. 농부가 생명과도 같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주시리라는 약속을 굳게 믿어 기대하고 인내하는 것처럼(렘 5:24;욜 2:23;슥 10:1) 불의한 자들의 압제와 핍박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완성을 소망하며 심판하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려야 한다(빌 4:13).
=====5: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 '굳게 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테릭사테'(* )는 '받침','지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특히 70인역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싸울 때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받쳐 주고 지지하던 것을 가리킨다(출 17:12). 따라서 본문은 확실한 신앙에 온전히 서서 핍박 가운데서도 인내할 뿐만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내적인 자세를 견지해야 함을 시사한다(시 112:8;살후 3:13).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 본문은 의로운 자들이 인내하고 흔들리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사상은 신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심되는 사상 중의 하나이다(롬 13:11;고전 15:52;살전 4:15;요일 2:18 등).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는 그리스도인들이 열매 즉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때이며(7절) 동시에 온 세상에 대한 심판의 때이다. 한편 '가까우니라'는 재림과 심판의 시기에 대한 불확실성을 나타냄과 동시에 세상의 존속 기간이 영원과 비교할 때 짧은 시간임을 시사한다(시 90:4;벧후 3:8, Mayor, Manton).
=====5: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 '원망하지'의 헬라어'스테나제테'(* )는 현재 능동태 명령형으로 '신음하다'(롬8:23;고후 5:2,4) 또는 '탄식하다'는 의미이다. '스테나제테'는 금지를 나타내는 '메'(* )와 연결되어 '탄식'을 지속적으로 금지해야 함을 시사한다(Burdick, Robertson). 그리스도인들은 악한 동기에서 일어나는 불평과 핍박자들을 향한 원한의 탄식을 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온전히 기뻐하고(1:2) 그리스도를 소망해야 한다. 한편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나 메 크리데테'(* )는 단순과거 수동태 가정법으로 문자적으로는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하라'(마 7:1)는 의미이다. 이는 원망을 하는 자나 받는 자 모두 가 정죄를 받아 함께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강조 조건적 명령이다.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서 서 계시니라 - 본문은 8절의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는 권면을 보충하는 경고이다. 야고보는 이런 경고를 통해 심판의 임박성을 강조하여 수신자들의 경각심을 일깨운다(마 24:33;막 13:29;계 3:20, Manton, Burdick). 심판자이신 그리스도는 이미 심판하실 모든 준비를 갖추시고 문밖에 서서 기다리신다.
=====5: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 야고보는 본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특별한 직무를 맡았던 선지자들의 고난을 예로 들어 인내할 것을 권면한다. 원래 '이름'은 그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말한'은 예언자들이 주를 대신하여 주의 권위로 예언했음을 의미한다(Deissmann, Mayor). 이러한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는 물론 역사적 상황(狀況)을 해석하여 그 의미를 백성들에게 전달하였기 때문에 특별한 박해를 받았다.
고난과 박해속에서도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온 예언자들은 그리스도인들에 게 '고난'과 '인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본이 된다(요 13:15;히 4:11). 그리스도인들은 특수한 고난의 상황 가운데서 인내한 예언자들을 바라봄으로 현재의 고난에서의 위로를 받을 뿐만 아니라(마 5:12;23:34;행 7:52;히 11:33, Moo, Martin) 그 위로 가운데 인내해야만 한다.
=====5:11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 본문은 마 5:11의 산상 수훈을 반영한 것으로 1:12의 반복이다. 야고보는 인내의 분명한 결과인 축복을 언급함으로 인내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제시한다(단 12:12;마 5:10).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판단을 언급하려는 것으로 성경에서 가르치는 인내로 말미암는 축복을 일반화시킨다(Manton, Tasker).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면서 고난과 핍박 속에서 인내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다. 야고보는 이런 경우의 실례로 '욥'을 제시한다.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 '인내'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모넨'(* )은 보복하지 않는 자제의 인내를 의미하는 '마크로뒤미아'(* )와는(7-10절) 달리 '환경 가운데서 변치 않는 인내'(1:3;골 1:11)를 의미한다(Blue, Burdick). 욥은 순식간에 당한 고난과 어려움속에서도 신앙의 흔들림 없이 오직 하나님만을 기대한 인내의 본이다(욥1:21,22;2:10;12:2;13:4,5;16:2;19:25-27, Tasker, Adamson). 한편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인내의 가장 모범이 되시는 그리스도께 적용한다. 그래서 '결말'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해석한다(Augustine, Bede, Bassett). (2) 혹자는 주께서 욥을 통해 보여주신 결말, 곧 인내하는 욥에게 시련 전에 주었던 것보다 두 배로 크게 축복하신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욥 42:5,6,12-17, Tasker, Burdick, Manton, Martin).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야고보는 어려움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소망한 욥을 예로 제시한 후 인내의 결과인 욥의 결말 즉 갑절의 축복을 받은 사실을 언급함으로 수신자들로 하여금 인내토록 권면한다.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 '가장 자비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폴뤼스플랑크노스'(* )는 '많다'는 의미를 가진 '폴뤼스'(* )와 '가장 깊은 부분' 혹은 '감정의 자리'를 의미하는 '스프랑크논'(* )의 합성어로 '온 마음 전체'를 나타낸다(빌 2:1). 이것은 타인의 고난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동정'을 뜻한다. 또한 '긍휼'에 해당하는 '오이크티르몬'(* )은 '자비'와 구별없이 사용되나 그보다 더 특수한 경우에 쓰이는 말이다(눅 6:33).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고난에서든지 인내하는 자를 온전히 이해하셔서 함께 하시는 것은 물론 예비된 축복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시사한다(Vincent, Lenski, Blue, Gibson, Martin).
=====5:12
본절은 마 5:34-37에서 맹세를 금지한 산상수훈을 반영한 것으로 맹세 자체에 대한 금지보다는 무가치하게 맹세함으로 이웃을 속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범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말것을 강조한다.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 맹세하지 말고 - 야고보는 먼저 맹세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를 제시한다. 본문의 '맹세'는 사람의 생사를 결정짓는 중대한 순간의 법정적인 맹세가 아니라 삶에 있어서 무심코 남발하는 맹세를 의미한다(마 5:34-37, Burdick, Tadker, Martin). 한편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다른 것으로도'는 바라새인들의 모습을 반영한 것으로 신성모독이 아니라는 이유로 쉽게 남발했던 저들의 가벼운 맹세를 암시한다(마 5:33-36). 실제로 유대인들은 맹세를 과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맹세의 대상에 따라 등급을 정하고 경히 여겼다(마23:16-18). 야고보는 이렇듯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소망하지 못하여 오는 조급함속에서 '맹세'를 남발하는 행위를 하지 말 것을 강하게 권고한다.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 본문은 맹세에 대한 적극적 태도를 제시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적인 삶에서 긍정과 부정을 분명히 밝힘으로 거짓 맹세를 이용한 모든 외식(外飾)을 피하라는 권면이다(마 5:37, Manton, Tasker, Mayor). 즉 야고보는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짓되이 일컫는 참람된 죄악뿐만 아니라, 단순한 언어 생활에서도 무분별하고 주저없이 서약하는 모순과 위선을 피하라고 권면한다. 이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마 5:33-36)는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으로 마음의 거짓을 맹세로 은폐하는 위선을 조심하고 단지 진리에 대한 긍정과 부정을 분명히 드러냄으로 모순과 위선의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함을 의미한다(Ropes, Gibson, Moo).
=====5: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 야고보는 본절에서 '고난'과 '기도'를 연결시켜 설명함으로 앞절에서 교훈한 헛된 맹세를 하는 자가 참된 기도를 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함과 동시에 고난 가운데서는 인내하면서 하나님을 소망하며 기도해야 함을 권면한다(빌 4:12,13). '기도할 것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프로슈케스도'(* )는 현재 능동태 시상으로 계속 기도할 것을 나타내어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에 처했을 때 불신자들의 삶의 방식과 전혀 다른 차원의 행동원리를 가져야 함을 시사한다(Robertson, Burdick, Calvin, Martin).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 본문의 '찬송할지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살레토'(* )는 '줄을 잡아 퉁긴다'는 의미를 가진 '프살로'(*)에서 유래한 말로 구약성경에서는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한다'는 의미로, 신약성경에서는 단순히 '마음으로 찬미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롬 15:9;고전14:15;엡 5:19). 일반적으로 고난당할 때에 기도하는 것은 쉬운 일이나 즐거워할 때에 는 방종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야고보는 즐거워하는 자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송을 드려야 함을 권면한다.
=====5: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 '병든 자'의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연약한 자 곧 연약한 믿음이나 양심을 소유한 자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롬 6:19;14:1;고전 8:9-12, Robertson, Blue, Manton). (2) 혹자는 신체적으로 질병에 걸린 자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Davids, Martin, Burdick, Adamson). 이러한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신체적으로 질병에 걸린 자에게 기름을 붓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교회의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교회의 '장로들'은 '감독'이나 '목사'와 동일한 명칭으로(행 15:6,22;20:17;21:18;빌 1:1;딛 1:5,7;벧전 5:1-4) 교회의 대표를 의미한다(Calvin, Burdick, Mayor, Robertson). 병든 자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청해서 같이 기도해야 하며, 교회 지도자들은 병든 자를 방문하여 위로하며 믿음의 기도를 해야 한다(살전 5:14).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 '기름을 바르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레이프산테스'(* )는 분사로서 문자적으로 '기름으로 문지르다'를 의미한다(Blue, Roertson, Burdick, Trench). 이렇게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는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사회에서의 공통적인 풍습으로서 의식적인 수단이라기 보다는 의술적인 수단에 가깝다(사 1:6;눅 10:34, Mayor, Ropes, Hayden, Manton, Tasker, Burdick). 한편 '기도할지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슈쿠사스도산'(*)은 헬라어 본문에서 주동사에 해당되는 것으로 본문의 강조점이 '알레이프산테스'(기름을 바르다)보다는 '프로슈크사스도산'에 있음을 시사한다(Burdick). 교회의 지도자들은 병자를 방문하여 치유의 방편으로 의술을 사용함과 동시에 병자의 나음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Manton, Tasker).
=====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 본절의 '기도'에는 '믿음의'라는 수식어구가 붙어 있는데 이는 병든 자를 치유하는 신유의 기적이 '믿음'을 요구하는 것임을 나타낸다. 비록 '기름'을 바르는 의학적인 치유 행위를 무시할 수 없다 할지라도 여기에는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 기도는 믿음으로 하여야 한다(1:6;마 9:22;막 9:29). 한편 '구원하시리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세이'(*)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신체적인 질병에서의 구원, 곧 질병의 치유를 가리킨다고 본다(Ropes, Oesterley, Manton, Burdick, Tasker). (2) 혹자는 죄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고 본다(VonZoden). (3) 혹자는 위의 두 견해를 모두 반영한 것으로 해석한다(Clarke). 세 가지 견해 중 첫번째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마 9:21;막 6:56). 왜냐하면 '주께서 일으키리라'는 진술은 침상에서 일어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칸 하마르티아스'(* )는 조건문으로 모든 병의 원인이 죄에 있지는 않다 할지라도 일부는 죄가 병의 원인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신28:22,27;막 2:5;요 5:14;9:2,Burdick). 또한 이러한 사실은 죄에 대한 징계의 수단으로 병을 주신다는 가능성을 암시한다(고전 11:30). 설사 병든자의 질병이 범죄함으로 인하여 생겨난 것이라 할지라도 믿음의 기도는 죄사함의 은혜를 유발하여 질병을 치유할 수 있다(막 2:5).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사죄(謝罪)의 권한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식하고 병든 자를 위해 믿음의 기도를 행하되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의뢰해야 한다.
=====5:16
@이러므로 - '이러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연결 접속사 '운'(* )은 앞절에서 언급한 내용의 결론을 유도한다.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 본절에서 야고보가 강조하는 바는 '죄를 서로 고하며','서로 기도하는 것'이다. '서로'는 상호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죄의 고백'이나 '치유를 위한 기도'가 상호간의 관계성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헬라어 '엑소몰로게이스데'(* )는 '밖으로'라는 의미를 지닌 '에크'(* )와 '자발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을 뜻하는 '호몰로게오'(* )의 합성어로 상호간의 죄의 고백이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어야 함을 시사한다. 이는 카톨릭에서 말하는 것처럼 고해성사의 근거라기 보다는 도리어 개신교의 만인제사장설의 근거가 된다(Robertson, Manton, Taylor).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 본문의 '의인'은 절대적으로 죄가 없는 의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가 많이 있어도 참되게 하나님께 회개하여 용서받은 자를 나타낸다(롬 3:10, Manton, Mayor, Burdick). 한편 '역사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르구메네'(* )는 두 가지 경우 즉 수동태나 중간태로 해석될 수 있다. 수동태일 경우 기도에 역사하는 주체가 성령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며 (갈 5:6;살후 2:7, Theophylact, Abbott, Oecumenius), 중간태일 경우는 기도 그 자체가 역사하는 주체임을 나타낸다(Alford, Robertson, Mayor, Lenski). 수동태일 경우 기도하는 행위자가 전적으로 배제되어 전후 문맥과 부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중간태로 해석함이 더 타당한 듯하다.
=====5:17,18
본문은 엘리야의 수많은 역사가운데서 비를 멈췄다가 오게 한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야고보는 엘리야의 기도가 자연의 현상까지 변동시킨 사실을 드러내어 기도가 역사하는 힘이 많다는 사실을 예증한다(왕상 17,18장).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 '성정이 같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모이오파데스'(* )는 '유사한'을 의미하는 '호모이오스'(*)와 '고난'을 뜻하는 '파도스'(* )의 합성어로 엘리야도 다른 일반 사람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괴로움을 가지고 있는 존재임을 나타낸다(왕상 17:11;19:3; 행 10:26, Vincent, Blue). 이는 엘리야가 위대한 선지자로서 초능력적인 자질을 소유하여 비를 그치고 내리게 하는 역사를 행한 것이 아님을 시사함과 동시에 평범한 사람과 동일하게 괴로움과 고통을 느끼는 인간적 존재인 것을 부각시켜 죄를 회개하여 용서함을 받은 의인은 엘리야와 같이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Burdick,Mayor, Moo).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 본문은 엘리야 선지자가 기도 응답을 받은 역사를 나타낸다. '간절히 기도한즉'에 해당하는 헬라어 구문 '프로슈케 프로세윅사토'(* )는 문자적으로 '기도로 기도했다'는 전형적 히브리식 표현법으로 강조 구문이다(창 2:17;눅 22:15;요 3:29;행4:17,Gibson, Tasker, Manton). 실제로 구약성경에는 엘리야가 기도할때 땅에 엎드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었다고 묘사되어 있다(왕상 17:1;18:42). 이러한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는 응답을 받아 비를 그치게도 하고 내리게도 하였다. 한편 본문에서는 한발(旱魃)의 기간에 대해 '삼 년 육 개월'이라 하나 왕상 18:1에는 '제 삼 년'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3년 6개월이 가뭄의 전체 기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왕상 17장에 기록된 사건들의 전체 시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 해결된다(눅 4:25).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야고보가 왕상의 내용을 직접, 간접으로 인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Lenski, Manton, Macknight).
=====5:19
@내 형제들아 - 이는 야고보가 자주 사용하는 호칭으로 수신자들에 대한 친근감을 나타낸다(1:2;2:1,5). 야고보는 본절에서 친근한 호칭으로 마지막 권면을 행하고 있다.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 '미혹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라네데'(* )는 '헤매다'라는(마 18:12) 의미의 '플라나오'(* )에서 유래한 말로 초대 교회 성도들의 신앙적 형태와 당시의 정황을 잘 묘사해 준다. 당시에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에도 유대교나, 이방의 신비 종교 혹은 이교철학으로 되돌아가는 자가 많았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처럼 구원의 길에서 떠나 방황하는 형제 자매들을 사랑으로 서로 권면하여 다시 돌아와 복음 안에 거할 수 있도록 하라고 권면한다(요일 2:26).
=====5:20
@너희가 알 것은 -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노스케토'(* )는 '알라'는 의미를 가진 '기노스코'(* )의 능동태 명령형으로 본절이 앞절의 조건절에 대한 귀결절로 강한 명령임을 나타낸다.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 '그 영혼'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미혹된 자를 돌아서게 하는 권고자의 영혼으로 해석한다(Erasmus, Hammond, Hoffmann). (2) 혹자는 미혹된 자의 영혼으로 해석한다(Calvin, Zahn, Mayor, Ropes, Manton). (3) 혹자는 잠 24:24,25을 근거로 하여 위에 언급한 두 가지 견해를 모두 내포한다고 해석한다(Luther). 세 가지 견해 중 두번째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구원을 받는 것은 타인을 미혹된 것에서 돌아오게 하는 인간적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미혹되어서 하나님을 떠난 자는 영적인 죽음의 상태에 있는 자였으나 하나님께 돌아옴으로 영적 죽음에서 구원을 얻어 영적 생명을 소유하게 된다(계 20:6, Manton, Burdic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