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4장 [516. 옳은 길 따르라 의의길을]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기업(1:9-14) ==>창조와 부활 안에서 먼저 나신 자(1:15-23) ==>Q의 경륜의 비밀(1:24-29....경륜은 청지기 직분으로서, 바울의 직분은 Q의 말씀을 완성<=거룩한 계시의 완성...이것은 합당한 교회 생활이 이루어짐 통해 Q을 표현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체험하고 그분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누리는 것>하는 청지기 직분) ==>Q의 비밀(2:1-7...이 비밀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요, 이 비밀의 목적은 교회를 산출하는 것...오직 Q은 교회 생활을 위하여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원치 않으심...주관적 그리스도의 부족(+그분에 대한 체험의 부족)-->온전한 교회 부족( +합당한 교회 생활의 부족 상태) ==>새사람의 구성 요소(3: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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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기업으로 누린 최종 결과가 그분을 새 사람의 구성성분과 구성 요소로서 체험하는 것임을 보여줌 --그리스도를 누릴 때마다 이 누림의 분명한 결과로서 교회 생활을 가져온다 함은 사실이지만,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기에 그러한가에 대한 참된 이해가 없다면 불완전한 말이 된다..---.즉, 그리스도는 좋은 땅으로 예표된 만유를 포함한 분으로서, 그분이 바로 만유의 실체(본질적 몸)이시요(이 때 만유는 그분의 그림자인데), 그리스도는 만유의 중심이자 둘레에 이르는 전체로서, 만유 위에, 만유 안에 만유를 관통하여 계시며 동시에 만유를 결합시키고 완전하게 붙드시는 분이시며, 그분에 의해 그분을 통해 그분을 위해 만물이 창조되었고 유지-운행되고 있다. 바로 이 그리스도가 성도들의 기업이 되시는데,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이러한 기업으로 참되게 알고 그렇게 누린다면 그 결과는 그리스도를 내용으로 하는 새 사람이 될 것이요, 결국 우리가 누리는 그리스도는 새 사람의 구성요소가 될 것이다. 또한 이 새 사람 안에서 <체험적으로 분명히 알게 되는 바> 그리스도는 만유시며 만유 안에 계신다.
..... 새 사람의 구성 요소인 그리스도를 살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강에 의해 통제되며(3:12-15), <그분의 평강의 근원은 그분이시며 그분의 말씀이기에>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시도록 할 필요가 있다.(3:16-17...이를 위해서, 왕이신 그분이 거하심을 위해 우리의 모든 속 부분<생각-감정-의지-마음-영>을 비워드림으로써 그분의 거처로 삼으시도록 함이 옳으며, 우리 존재 구석 구석까지 말씀이 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그리함으로써 평강의 선순환을 불러옴과 함께 그분의 밀씀은 속사람의 내용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평강은 다름 아니라 (엡2:15에서 언급한 바로 그 <자신의 십자가 상의 죽음의 효능의 역사하심을 통해 서로 다른 둘로 그분 안에서> 하나된 새 사람을 짓는, 화평케 하시는그리스도로서, 그 화평의 능력은 새 사람 즉 그 몸의 하나됨을 이룸을 가리킨다) 우리 안에서 중재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라도>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시도록 해야 한다.
그리함으로써, <출신이 서로 다른 배경에서 나온 지체들 간에 선호도와 의견의 다름으로 인해> 논쟁과 갈등이 일어나는 때는 그 언제라도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하여금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게 하고 청종함으로써 결말을 짓게 하는 것이 필요하며 가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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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2:20...*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마16:24, 25 ...*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 말씀들 안의 핵심을 올바로 꿰뚫어 알고 있어야 한다.... 천연적 이해를 따라서 적용하려고 하기 쉽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사는 것은 결코 천연적 이해를 따른 것이 아니다.
천연적 관념 안에서는 자아를 부인하고 육체의 방종을 억제하는 것에 대한 생각이 먼저 떠오르게 되지만, 거기에는 우리의 영 안에서 산 인격이 되시는 만유를 포함한 생명 주는 영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게 된다. ((그리스도를 사는 대신에 자아를 부인하거나 십자가를 지는 노력을 할 그 때 우리는 오히려 사실상 철학과 금욕주의에 의해 살게 됨을 명심하고 주의하라!!))
.....성육신-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과정을 거침으로써 이제 그리스도는 실제적으로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우리 영 안의 그 영이시다.
Q의 구원 안에는 우리의 노력이나 실천의 여지가 전혀 없다. Q의 구원은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의 문제이다. Q의 구원은 Q 한 분의 문제이다.
새 사람 안에는 문화나 개인적인 습관의 여지는 전혀 없음을 명심하라...
그리스도의 경륜 안에서 그분의 의도는 그리스도가 만유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과 인격,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인내와 우리의 거룩함과 우리의 친절이 되셔야 한다.
심지어 그리스도가 아내나 남편을 대하는 방법이 되셔야 한다. 순간 순간 우리의 일상 샐황에서 그리스도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되셔야 한다.
특정한 관습-문화-철학에 의해서 사는 대신에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를 살아야 한다.
Q의 갈망은 우리가 순간순간 그리스도를 살고 문화나 철학에 조금도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유일한 관습은 그리스도 자신의 산 인격이어야 한다.
.....자아를 부인하고 종교적 실천 따르는 방법으로 십자가를 지는 대신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산 인격이 우리 안에서 순간순간 사시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아내가 그대를 어렵게 할 때에 아무것도 하려 하지 말고 그 대신에 그리스도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리스도가 그대 안에 사시도록 하라.
---자아를 억누르는 것과 그리스도로 인해 사는 것과의 분명한 차이를 배워야 하리라...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신조나 실천의 삶이 아니라 산 인격이신 그리스도의 삶, 그리스도로 사는 삶, 그리스도를 살아감의 삶이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생활은 금욕주의나 자아 부인이나 소위 십자가를 지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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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권면
2.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니, 자연스레>기도를 계속하고(지속적으로-견실하게-열심히 힘써)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태만하지 않고 경계함으로써 환경의 조류따라 하류로 떠내려가지 않도록 힘쓰라.... 은혜가 새어나가도록 해서는 결코 안된다...매일 특정한 시간을 기도에 할애하라.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영적 싸움이자 전쟁의 연속이기에 깨어 있을 필요가 있다...때때로 기도에 대한 부담이나 그 어떤 필요를 느낄 수 없다 해도, 주께서 긍휼을 베푸사, 합당한 기도를 가르쳐 주시도록, 할 말을 넣어주시도록 솔직히 아뢰고 그분을 앙망하라..
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4.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5. 외인에게 대해서는 <주께 구한 바 주님 깨닫게 해 주신>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생명 공급 위해 열어주시는 기회를 붙잡음 통해, 시간을 구속하라>
6. 너희 말을 항상 은혜<=우리의 누림과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앙망함>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화목과 구원 베푸실 은혜의 주께서 그대의 입술을 통해 친히 말씀하고 표현하심 되게>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시간 낭비함 되지 않게 함이란(시간을 구속함은), 그 무엇보다도 <말씀 묵상과 꾸준한 기도 안에 있음 인해> 그분의 주 되심에 그분의 들로스인 자신을 열어드림 통해 그분으로 충만해지고 그분으로 적셔짐 안에 있을 때 가능하게 된다.... 그분과 하나됨으로 그분의 평강이 먼저 그대 안에서 모든 갈등 요인들을 해소하고 주장-중재하심이 되기 위해서는 평소 그분의 말씀으로 늘 채움 받고 기도 안에서 깨어 구함이 선결 요건인 바, 그리스도의 평강이 그대 마음을 주장하시는 그 때, 그분의 지혜가 그분을 합당히 표현해내도록 깨달음과 말할 기회를 주시며, 그 생명 공급의 기회가 열려졌음을 깨닫게 되는 그 때, 주님 인도따라 입을 연다면, 나오는 말마다 무억이든지 소금으로 고르게 한 은혜의 말이 될 것이다.
===끝 인사
7.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8. 내가 그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9.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12.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13.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언하노라
14.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5.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16.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17.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18.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내가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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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ssians 4 Amplified Bible
==Fellow Workers
1 Masters, [on your part] deal with your slaves justly and fairly, knowing that you also have a Master in heaven.
2 Be persistent and devoted to prayer, being alert and focused in your prayer life with an attitude of thanksgiving.
3 At the same time pray for us, too, that God will open a door [of opportunity] to us for the word, to proclaim the mystery of Christ, for which I have been imprisoned;
4 that I may make it clear [and speak boldly and unfold the mystery] in the way I should.
5 Conduct yourself with wisdom in your interactions with outsiders (non-believers), make the most of each opportunity [treating it as something precious].
6 Let your speech at all times be gracious and pleasant, seasoned with salt, so that you will know how to answer each one [who questions you].
7 As to all my affairs, [a]Tychicus, who is a much-loved brother and faithful assistant and fellow bond-servant in the Lord, will give you all the information.
8 I have sent him to you for this very purpose, that you may know how we are doing and that he may encourage your hearts;
9 and with him is [b]Onesimus, our faithful and beloved brother, who is one of you. They will let you know everything about the situation here [in Rome].
10 Aristarchus, my fellow prisoner, wishes to be remembered to you; as does Mark, the cousin of Barnabas (about whom you received instructions; if he comes to you, welcome him);
11 and from Jesus, who is called Justus. These are the only fellow workers for the kingdom of God who are from the circumcision (Jewish Christians), and they have proved to be an encouragement and a comfort to me.
12 Epaphras, who is one of you and a bond-servant of Christ Jesus, sends you greetings. [He is] always striving for you in his prayers, praying with genuine concern, [pleading] that you may [as people of character and courage] stand firm, [spiritually mature] and fully assured in all the will of God.
13 For I testify for him that he has worked strenuously for you and for the believers in Laodicea and those in Hierapolis.
14 Luke, the beloved physician, and Demas greet you.
15 Give my greetings to the [c]brothers and sisters at Laodicea, and to Nympha and the church that meets in her house.
16 When this letter has been read among you, see that it is read in the church of the Laodiceans; and also that you in turn read [d]my letter [that is coming to you] from Laodicea.
17 And say to Archippus, “See to it that you fulfill [carefully the duties of] the ministry which you have received in the Lord.”
18 I, Paul, write this greeting with my own hand. Remember my chains. May grace (God’s unmerited favor and blessing) be with you.
==Footnotes
Colossians 4:7 Tychicus probably delivered this letter to Colossae, as well as Paul’s letter to Ephesus, while traveling on the same journey.
Colossians 4:9 Onesimus was Philemon’s runaway slave who was converted to Christianity under Paul’s ministry.
Colossians 4:15 Lit brethren.
Colossians 4:16 Paul is most likely referring to the letter he wrote to the Ephesians (see note Eph 1:1) during this same time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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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4장 (개요)
본문의 내용을 살펴 보자.
Ⅰ. 전 장에 이어서 사도는 상전들의 의무에 대하여 계속 설명한다(1).
Ⅱ. 그는 기도의 의무를 다할 것을 권하며(2-4), 그리고 우리가 대화를 나눌 때 상대방에게 분별 있고 예절 바른 태도를 취할 것을 권고한다(5,6).
Ⅲ. 그는 자기의 몇몇 친구들에 대하여 언급함으로 본 서신을 끝 맺는다. 그는 자기 친구들에 대하여 훌륭한 자들임을 증거한다(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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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져야 할 상대적 의무(골 4:1)
사도는 종들에 대한 상전들의 의무를 계속 언급한다. 그리고 이 의무들은 전 장에 연결되는 것으로 전 장의 강론에 속하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공평이 그들에게 요구된다. 그러므로 본문에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라"(1절)고 하였다.
이 말은 엄격한 공의로 저들을 처리함은 물론이거니와 공정과 친절을 그들에게 베풀라는 말이다.
"그들에 대한 너희의 약속에 신실하고 너의 협약을 이행하라. 또한 그들의 마땅히 받아야 할 보수를 횡령하지 말며 품군의 삯을 속여 빼앗지 말라(약 5:4).
그들이 수행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그들에게 요구하지 말며 그들에게 무모한 짐을 지우려거나 그들 힘에 넘치는 짐을 지우지 말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며, 적당한 음식과 몸에 쓸 것을 공급하며 그리고 그들로 즐거움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또한 그들이 일을 가벼운 마음으로 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적절한 자유를 허락하라. 비록 그들이 천하고 낮은 직위에 고용되었고 너희와는 다른 지방 출신이요 다란 종교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런 것에 구속을 가하지 말라"는 말이다.
2. 종들에게 이렇게 대하여야 하는 근거. 이에 대하여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1절). 다른 자들의 상전인 너희도 자신의 상전을 모시고 있으며 그리고 주님의 종들인 것이다. 너희는 자신의 주가 아니며 너희 위에 계신 분에게 책임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너희 종을 취급하라. 너희는 종들과는 다른 입장에 있으나 역시 같은 주님에 대하여 종이며 결국은 동등하게 그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알아야 한다"(엡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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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주종간일 때]서로 지켜야 할 의무(골 4:2-4)
앞 구절들과 연관된다고 본다면 상전들이 종들과 함께 기도하되 매일 기도하며 또한 "기도를 항상 힘쓰는 것"이 상전들의 의무의 일부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공정하고 친절하게 종들을 대우할 뿐 아니라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대하여야 하며, 그들의 몸은 물론 그들의 영혼까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하겠다.
"너희의 성공에 관련하여 그들에게 관심을 지닐 뿐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는 것이 너희의 책임이고 너희가 관여해야 할 일이다." 또한 "항상 기도에 힘쓰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무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로 볼 때 본문은 다음과 같은 뜻을 지닌다.
"다른 일로 인해 [분주해 져서]기도를 중단함이 없도록 하라. 항기쉬기범감, 끊임없는 기도의 시간을 가지라.[마음에 항상 주님임재로 가득하시게 하라, 성령으로 숨 쉬며 호흡하며, 생각을 존재의 모든 시선을 주께 고정하여 그분의 공급하시는 생명 수액을 빨아들이라, 마땅한 의무에 마음을 쏟아 밀착시키라. 또한 이러한 자세를 끝까지 지속하라. 그리고 [임마누엘 주임재 자체로 인해 늘 감사 충만함으로써]기도에 깨어 있으라."
그리스도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도를 해야 하며 다른 일들로부터 가장 방해를 적게 받으며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기도에 전념할 수 있으며 기도할 적절한 심경을 지닐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도하되 "감사함으로" 혹은 받은 긍휼에 대한 진지한 감사로 해야 한다. 감사는 모든 기도에서 필수 부분이 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3절)고 하였다.
사람들은 특별히 그들의 목회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며 은혜의 보좌에 나갈 때마다 항상 그들을 마음에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는 "너희가 너희 자신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나를 잊지 말라"고 부탁한다(엡 6:19; 살전 5:25; 히 13:18).
사도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실 것을"위해 기도하라고 부탁한다. 즉 복음을 전파할 기회를 주시도록 간구하라고 부탁한다. 즉 복음을 전파할 기회를 주시도록 간구하라는 말씀을 기도하며(그러므로 그는 다른 곳에서 "내가 큰 일을 할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고전 16:9), 혹은 "나에게 능력과 용기를 주셔서 나로 자유롭고 신실함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여 달라"는 말씀이라고도 하겠다.
에베소서 6장 19절에서도 그는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의 입을 담대히 벌리게 하옵소서. 이를 위하여 내가 또 메임을 얻었나이다"라고 기도하였다. 즉 그리스도가 제일 중요한 주제인 복음의 가장 깊은 가르침을 쉽게 전할 수 읶도록 구하라는 말이며(그는 이것을 "복음의 비밀"이라고 부른다... 엡 6:19), 아니면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게 해달라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이 복음을 그는 "만세로부터 감추어진 비밀"(골 1:26) 그리고 "그리스도의 비밀"(엡 3:4)이라고 부른다. 이를 위하여 그는 지금 갇혀 있다.
악의에 찬 유대인들의 난폭한 반대로 로마에서 죄수가 되었지만, 그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그가 자기의 사명을 수행하면서 낙담하게 되거나 고통으로 일을 피하지 아니하도록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부탁한다.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도록 위하여 기도하라(4절). 또한 나로 이 비밀에 관하여 전혀 들어 본 일이 없는 자들에게 이 비밀을 알게 하여 내가 마땅히 행할 말로 그것을 그들이 이해하기 쉽게 전할 수 있도록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다.
그는 1장에서 그가 골로새 교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바 그 내용을 특별히 말하였었다. 이제 그는 그들에게 그를 위하여 어떻게 기도해 줄 것인지를 말한다.
바울은 일반 사람이 그렇듯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자기를 위한 그들의 기도를 부탁함에 있어서 그는 무엇을 구할 지를 하늘로부터 배우기를 원하였다. 가장 훌륭하고 가장 뛰어난 그리스도인들이라 해도 보다 못한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여전히 필요로 하기에 그들에게 기도를 청하는 것을 부끄러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또한 좋은 설교가 일수록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의 문을 주시어 그들은 마땅히 말할 바를 말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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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져야 할 의무(골 4:5-6)
나아가서 사도는 그들에게 그들이 사귀고 있는 모든 사람들 즉 그리스도 교회에 속하지 않은 자들 곧, 이방 세계에 속한 사람들에 대하여 분별있고 예절바른 행동을 취할 것을 권고한다(5절). 즉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라"고 권고한다.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그들과의 모든 교제에 있어서 그들로부터 그 어떤 해함을 받지 않도록 신중하며 또한 그들의 어떤 습관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하라. 왜냐하면 악한 자와 사귐은 좋은 행실을 타락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아무 해를 끼치지 말며 또는 그들의 기독교신앙에 대한 편견을 더 깊게 만들거나 그들이 신앙을 싫어하도록 자극하지 말라.
그들에게 너희가 할 수 있는 모든 선한 일들을 행하라. 그리고 가장 좋은 수단을 총동원하여 적절한 시기를 택하여 그들에게 신앙을 권고하라는 말이다.
또한 "세월을 아끼라"고 하였다. 즉 "선을 행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활용하고 의무를 수행하는데 너희 시간을 최대로 선용하라"는 말씀이다(근면하며 시간을 아끼는 태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준다).
혹은 "그들에게 너희를 대적할 유리한 고지를 허용하지 않고 네 자신이 그들의 적의와 악의 앞에 노출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신중하게 행하라"는 말씀이다.
에베소서에서도 "조심히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이는 때가 악함이라"고 하였다(엡 5:15, 16). 즉 때가 위험한 시기요 고난과 환난의 때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밖에 있는 자들과 같이 안에 있는 자들에 대해서도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 하라(6절). 너희 모든 말을 그리스도인답게 또 너희의 신앙 고백에 맞게 즉 품위있고 분별력 있고 때에 맞도록 하라"고 권고한다. 비록 우리 말이 항상 [충만한]은혜로부터 나오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은혜가 거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를 앙망함으로써 그리]해야 한다.
우리 말이 평범한 것들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경건의 분위기가 있어야 하며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인다워야 한다. 즉 "소금으로 고르게 함과" 같아야 한다.
은혜는 우리의 담화를 고르게 하며 그것을 풍미있게 만들며 그리고 그것을 부패로부터 방지하는 소금이다. 또한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6절)고 하였다.
말이란 모름지기 이 사람에게 적절하였다고 다른 사람에게도 적절하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잠 26:4, 5).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대답을 주기 위하여 특별히 우리의 신앙에 대한 반대자들의 반대와 질문들에 답하기 위하여 많은 지혜와 은혜를 필요로 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정당성과 잘못이 없음에도 때때로 왜 그런지를 제시함으로 저들의 비난과 중상이 터무니 없는 것임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도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벧전 3:15)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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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람들에 대한 안부(골 4:7-18)
이 서신의 마지막에 사도는 그의 몇몇 친구들에 대하여 언급함으로써 그들의 이름이 기록으로 남겨지는 명예를 얻게 된다.
그 증거들은 복음이 전하여지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얘기될 것이며 세상의 끝날까지 남을 것이다.
Ⅰ. 두기고에 관하여(7절). 이 편지를 전한 것은 두기고 였다.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현재의 자기 상태에 관하여 편지에 언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두기고가 그것을 직접 충분하게 세세히 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이 그가 잘 지낸다는 소식을 들고 기뻐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교회가 선한 사역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처지에 대해 듣기를 열망하는 것을 당연한 일이다.
그는 두기고를 "사랑하는 형제요 신실한 일군"으로 본문에서 말한다. 바울은 비록 위대한 사도였지만 신실한 사역자를 자랑스러운 형제로 여긴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나 신실함을 참으로 사랑스러운 요소이다. 그런 사람에게 우리는 애정과 존경을 표하게 된다.
또한 그를 "주 안에서는 함께 된 종"이라고 하였다.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의 종들이다. 그리고 사역자들은 서로에게 종으로서 한 동료인 것이다.
그들은 다른 위치에 있고 섬김의 능력도 다르지만 그러나 그들은 한 주님을 모신다. 사역자들이 서로 자기를 낮추며 사랑하게 될 때 그리고 올바른 방법에 의해 서로의 명예를 높이고 칭찬할 때 그것은 복음의 사역을 아름답게 하고 능력있게 해준다.
바울이 그들에게 자기 사정을 말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그들의 소식을 듣기 위하여 그를 보냈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저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낸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8절)고 말한다.
그는 그들이 그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기를 바라고 또한 자기도 그들로부터 소식을 듣기를 바랐다. 또 그들이 그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듯이 그도 그들에 대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있다고 믿었다. 같은 그리스도인들끼리 인생의 고난과 역경 아래서 서로 관심을 갖는 것은 큰 위로가 된다.
Ⅱ. 오네시모에 관하여(9절). 그에 대하여 사도는 본문에서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시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두기고를 따라 로마에서 돌아왔다. 이 사람이 바로 바울이 매였을 때 낳은 자라(몬 1장).
그는 빌레몬의 종이었다. 그는 자기 주인의 봉사에 도망쳐서 간 곳인 로마에서 개종했다. 아마도 그는 여기서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돌려 보냄을 받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그 편지는 다시 그를 주인의 가정으로 천거하는 내용의 것이었을 것이다.
그가 이전에는 불쌍한 종이었고 나쁜 사람이었으나 그러나 이제 개종자가 되었으며 바울은 그를 신실하고 사랑하는 형제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전의 삶이 아무리 천하고 악하다 할지라도 그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러한 사실은 그들의 영적 관계에 있어서 하등의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같은 특권들에 참여하며 그리고 같은 존경을 받을 권리가 주어진다. 그러므로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고 말씀하셨고 또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고 말씀되고 있다.
어쩌면 본문의 내용은 그가 개종하고 빌레몬에게 돌아간 후의 일로써 이미 이 때에 그는 복음의 사역에 참여한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를 형제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Ⅲ. "함께 갇힌 자인 아리스다고"에 관하여. 섬김과 고난에 함께 한 자들은 그로 인하여 거룩한 사랑으로 서로 얽혀지게 되는 법이다.
바울은 자기와 함께 종된 자들과 함께 갇힌 자들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가졌다.
Ⅳ. "바나바의 생질 마가"에 관하여. 이는 마가 복음서를 쓴 이물과 동일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본문에서 사도는 "그가 너희에게 가면 그를 영접하라"(10절)고 한다. 바울은 바나바와 조카인 마가 때문에 바나바와 언쟁했었다.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려 가지 아니한 그 "마기를 데리고 가는 것을 옳지 않다"(행 15:38)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그는 마가대신 실라를 데려가고자 했다. 왜냐하면 마가는 그들을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 후 바나바 및 마가와 화해했을 뿐만 아니라 마가를 교회들에게 천거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도들은 그 누구라도 또한 뉘게 혐의가 있다 해도 그것이 그들에 대해 항상 거치는 것으로 기억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앙망하고 바라봄 통해 그분의 마음으로] 용서함은 물론 그 잘못을 잊어버리기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함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으라"(갈 6:1)고 하였다.
Ⅴ. 여기에는 예수라고 불리는 자가 나온다. 그의 이름은 히브리어의 여호수아에 해당되는 희랍어 이름이다. 그 예로써 "만일 여호수아(영문판에는 "예수"로 되어 있음)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다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히 4:8)는 말씀을 들을 수 있겠다. 그는 유스도라고 불리우는 자였다.
그러나 그가 구속자의 이름에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유스도라 하는 이름 대신 예수라는 이름으로 자기 이름을 바꾸었던 것 같다.
또는 그가 할례당에 속한 것으로 보아 예수는 그의 유대식 이름이고 그리고 유스도는 그의 로마식 혹은 라틴식 이름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들에 대하여 사도는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11절)고 말하였다.
바울이 성도들과 사역자들과의 교제에서 얼마나 위로를 받았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자. 한 사람은 그와 함께 종된 자였고 다름 사람은 그와 함께 갇힌 자이며 그리고 모든 사람은 그의 동역자들이었다. 이들은 자기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리고 다른 자들의 구원을 증진시키려고 노력하는 자들이었다.
선한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함께 일군된 자들과 함께 위로를 나눈다. 그들의 함께하는 친교와 교제는 그들의 받는 고난과 곤경 가운데 새로운 힘이 된다.
Ⅵ. 에바브로디도와 동일인인 에바브라에 관하여(12절).
본문에서 사도는 "너희 중의 하나이며 너희 교회 중의 하나인 그가 너희에게 문안한다. 그리고 너희에게 그의 관심을 전하며 그리고 너희에 대한 그의 최대의 사랑과 소원을 전한다. 저기 너희를 위하여 항상 애써 기도한다"고 술회하였다.
에바브라는 바울에게서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많이 기도해야 하는 것을 배웠다. 다음의 사실들을 생각해 보자.
1. 그가 그들은 위하여 기도한 태도, 그는 기도에 힘쓰되 간절하며 언제나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기도에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기도에 전력을 대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을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도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간절하고 열심인 기도, 승리하는 기도는 응답됨이 많이 법이다(약 5:16). "엘리아도 비오지 않기를 기도할 때 간절히 기도하였다"(약 5:17).
2. 그가 위하여 기도한 내용. 그것은 "너희가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있게 서기를 구한다"(12절)는 내용의 기도였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있게 서는 것을 우리가 우리 자신과 다름 사람 모두를 위하여 간절히 바라야 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게 서야 한다. 그의 교훈에 전적인 순종을 함으로 그리고 그의 섭리의 뜻에 즐거이 복종함으로 완전히 서야 한다.
그의 교훈에 전적인 순종을 함으로 그리고 우리는 불변함과 인내함으로 끝날까지 완전하고 온전하게 서야 된다.
사도는 에바브라가 그들에게 큰 열심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에 "내가 그를 증거한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 그가 너희를 위하여 행하는 모든 것이 너희가 잘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에서 비롯된 것임을 내가 그를 위하여 증명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의 열심은 그들 모두 즉 "라오디게아의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에 까지 미치고 있었다. 그는 그들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근방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이익을 위하여서도 큰 관심을 가졌다.
Ⅶ. 누가가 또한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누가를 "사랑받는 의원"이라고 부른다. 이 사람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기록한 그 사람이며 바울의 동역자였다.
그는 의사이면서 전도자 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가르치시기도 하시고 병을 고치기로 하였다.
그는 교회의 예언자임은 물론 위대한 의사이기도 하셨다. 누가, 그는 사랑받는 의사이었다. 누가는 특별히 그의 친구들의 사랑을 받는 자였다.
의학의 재능은 사역자에게 유용한 학식이다. 그리고 이 재능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보다 유용하고 귀하게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Ⅷ. 데마에 관하여.
본문이 기록된 것이 디모데 후서 이전에 기록되었는지 혹은 후에 기록되었는지 분명치가 않다.
디모데 후서에 보면(딤후 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며 나를 버렸다"고 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서신이 그 후에 쓰여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본문이 데마가 바울을 버렸지만, 그리스도를 아직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본다.
혹은 그가 바울을 버린 것은 잠시뿐이고 다시 원 위치로 돌아왔고 바울은 그를 용서하고 그를 형제로서 인정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 서신이 디모데 후서보다 앞서 기록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 주장이 보다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본서는 주후 62년에 후자는 66년에 기록된 것이다. 이 사실을 데마가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었음에도 후에 변절했다는 증거가 된다.
신앙 고백에 있어서 뛰어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명성을 얻은 많은 사람들도 끝에는 부끄럽게 배교자가 되고 마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러므로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니 이는 저희가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요일 2:19)고 말씀된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Ⅸ. 골로새에 인접해 있는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이 본문에서 언급한다.
그리고 바울 그들에게 문안을 한다. 그리고 이 편지가 라오디게의 교회에서 읽혀지도록(16절) 이 서신을 복사하며 거기로 보내어 하중 가운데서 읽혀지도록(16절) 이 사신을 복사하며 거리로 보내어 회중 가운데서 읽혀지도록 하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다른 서신을 이 때에 라오디게아로 보내었고 그리고 그 편지를 라오디게아로부터 골로새로 보내어서 그들의 교회에서 그것이 읽혀지도록 부탁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사도는 본문에서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16절)고 하였던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 서신은 유실되어서 경전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으리라. 왜냐하면 사도들이 섰던 모든 편지들은 우리 주님의 행위들과 말씀들보다 더욱 보존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 할 줄 아노라"(요 1:15)고 말하였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본문에서 말하는 서신이 에베소에 보내어진 편지로써 현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Ⅹ. 눔바는 골로새에서 살았던 자로서 그의 집을 교회로 제공하였던 사람으로 언급된다(15절).
즉 그의 집은 여러 가지 예배를 매일 행하는 경건한 가정이었든가 혹은 회중들의 일부가 거기에서 만났던 곳이었을 것이다.
당시 교인들은 허락된 공적 예배 장소들은 허용받지 못했었고 또 그들은 그들의 원수들을 두려워하여 부득이 개인 가정에 모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요한은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였다"(요 20:19)고 전해 주고 있다.
사도도 또한 자신의 "우거하는 집과 셋집에서" 설교했음을 보아도 이 사실은 분명해진다(행 28:23, 30).
전자의 의미에서 보면 눔바가 모범적인 신앙인이었음이 강조되며 후자의 의미에서 보면 눔바의 열심과 공공 정신이 강조된다고 하겠다.
XI. 아킵보에 관하여.
그는 골로새에 있는 그들 사역자들 중의 하나이었다. 아킵보에서는 "그의 일을 주의하여 성취하기 위하여" 사역자로서 주어진 직분을 늘 잊지 말라는 경고를 그들에게 대신 전하라고 사도는 부탁한다. 즉 사역의 모든 분야에 대하여 부지런하며 면밀히 행함으로 끝까지 사역을 감당하라는 말이다.
사역자들은 그들의 사역의 주요목적을 늘 염두에 둠으로 사역에 한 분야에서라도 서툴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괴롭힘이 없이 일을 감당해야 한다.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우리가 받은 사명은 대단히 영예로운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 안에서 받은 것이며" 그리고 그의 약속과 명령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2) 이 사명을 받은 자들은 그것을 성취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또는 그 의무를 충실히 행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주의 사업을 태만히 행하는 자들은" 그들의 신뢰를 저버리는 자들로 마침내는 슬픈 변명을 늘어놓은 자리에 처하게 될 것이다.
(3) 교인들은 그들의 사역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의무에 관하여 유념하게 하며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 그들에게 자극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아킵보에게 그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17절)고 말한다. 이 말은 거만과 속임수로 하라는 말이 아니라 예모있게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라는 말이다.
XII. 자신에 관하여(18). 그는 본문에서 "나 바울이 문안하노니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고 말한다.
그는 서신을 대개 대필시켰지만 그는 이 부분은 자신의 손으로 친히 기록한다. 그는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고 말한다.
그는 이 말을 "내가 갇힌 것을 기억하고 내게 부양할 것을 보내라"는 뜻에서 한 말이 아니고 다만 "내가 이방인들의 사도로서 매인 것을 기억하고 이것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너희 믿음을 굳게 하라"는 뜻에서 이 말을 하였다.
본문은 본 서신의 권고에 무게를 더한다. 그는 에베소서에서는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엡 4:1)고 직접 말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렇게 끝맺는다.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은혜와 모든 선하심, 그리고 그것의 축복된 열매들과 결과들이 너희와 함께 있을지며 그리고 너희 몫이 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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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제 4장
=====4:1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 본절은 앞장 끝에 계속하여 "상전들"이 노예들을 취급하는데 관한 도덕적 책임("의와 공평")을 진술한다. '
"의와 공평"은 도덕적 총괄적 명사이다. 여기에 반대되는 악행의 실례를 들면, (1)그들에게 필수(必修)의 생활비를 적당히 주지 않는 잔인한 행위(약 5:4)나, (2) 그들에게 자유를 주지 않는 것 같은 비인도적(非人道的)행위를 의미할 것이다. 이런 죄는 그 때에 위에 있는 자가 아래 있는 자에게 대하여 흔히 범하는 것이었다.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 이 문구는 종의 주인들이 그 노비를 천대하지 말고 의와 공평으로 대우해야 할 이유를 보여준다. 주인들도 장차 그들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인즉, 어찌 그 노예 취급에 있어서 의와 공평을 무시할 수 있으랴?(눅 12:46-48; 고전 7:22 참조)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 (눅 18:1;롬 12:12;헵6:18; 살전5:17;벧전 4:7참조). "항상" 기도하라 함은, (1)어떤 특정(特定)의 소원을 가지고 그것을 위하여 심령으로 부단히 기구(祈求)하는 동시에, (2)일정한 시간을 내어 그 소원 이룸을 간절히 구하기만 하면 이와 같이 힘쓰게 될 것이다.
기도의 주 목적이 사고(事故)를 만날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구함이라면, 사고가 생긴 그 때에만 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도의 주요 목적은 그것이 아니다. 기도는 영적 생명력을 섭취하는 방편(方便)의 하나로서 잠시라도 정지하면 안되는 것이니, 마치 우리 육신의 호흡을 일시라도 정지해서는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성경 읽는 것을 음식에 비유한다면, 기도는 호흡에 비유할 수 있다.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 이 문구는 위에 훈시된 항상 기도함에 관한 두 가지 긴요한 주의 요점을 말한다. (1)항상 기도을 힘쓰는 자는 간구에만 몰두하고 감사를 잊어버리기 쉽다. 미래의 축복을 갈망하는 것만이 기도의 목적이 아니고, 과거에 받은 축복을 기억하여 감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잠잠하신 때에도 우리는 역시 감사해야 된다. 아버지의 잠잠하심도 자식의 유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2) 항상 기도함에 있어서의 또 한가지 주의 요점은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 항상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라도 신자들도 낙심하거나 피곤을 느끼는 시험에 빠질 우려가 있다. 하나님께서 어떤 때에 신자의 기도를 응답하시지 않는 이유는, 기도자의 유익을 위하여 응답의 시기를 먼 장래의 어느 때로 정하신 까닭이겠고, 혹은 그런 기도의 응답은 그 기도자에게 무익한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밖에 다른 선한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이처럼 오묘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자는 혹시 기도 응답을 못받는 때에라도 결코 실망이나 영적 피곤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도리어 전보다 한층 더 자신의 불비 여부를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기도하기를 시작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한번 더 각성한 태도로 기도를 계속할 것이다. 그런즉 이상의 논조(論調)로 보아서 항상 감사함으로 각성하는 자라야 기도를 계속 실행할 수 있다.
=====4: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 사도 바울은 여러번 자기를 위하여 기도하여 달라고 신자들에게 부탁하였다(롬 15:30; 고후1:11;엡6:19;살전 5:25;살후3:1-2). 이러므로 오늘날 신자들이 서로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사도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 사도가 그 교회에 자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부탁하는 목적은, 자기의 이 세상 생활의 안락이나 형통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 목적은 복음 전파를 위한 것이다. 여기 "전도할 문"이란 말은 헬라 원어에서 직역하면 한역의 각주와 같이 "말씀의 문"이다. 주석가들 중에서는 이것이 엡 6:19의 의미와 같이 말 할 수 있는 "입"을 가리킨다고 하나, 전도할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을 가리킨다는 학설이 더욱 유력하다(고전 16:9;고후 2:12).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 1:26해석 참조. 사도 바울은 오랫동안 감취었던("비밀"의 뜻)그 진리 곧, 복음을 참으로 알았다.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진리를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깨달은 그는(갈 1:15-16), 구원을 알지도 못하고 멸망으로 달음질하는 뭇 영혼들을 불쌍히 여겼다. 이 진리를 전하고자 하는 소원이 어찌 그 심령에 불타지 않았으랴? 더우기 그는 하나님에게서 모든 사람들을 구언해 내는 복음 전도의 큰 사명감 밑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전도할 기회만 찾았다(롬 1:14;고전9:16). 그가 옥중에서도 바라는 것은 어서 석방되어 자유로운 생활을 좀 누려보자는 것이 아니고, 오직 복음 전도의 기회만을 갈망하고(빌 2:24)있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옥중에서도 복음을 전하였다(행 28:30-31). 그렇기 때문에, 그는 복음이 달음질하듯이 속히 온 세계에 전파되기를 희망하는 때도 있었다(살후 3:1).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 바울이 로마옥에 갇힌 것은 복음을 위한 것이다.
=====4:4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 이것은 앞절에서 바울이 골로새교회에 부탁한 기도의 결과를 말해준다. 그의 부탁대로 골로새신자들이 그를 위하여 기도해 준다면 그의 선교는 잘 성취될 것이라고 한다.
"마땅히 할 말"은 '복음'이다. 복음은 바울이 마땅히 말해야만 될 것이다.그 이유는, (1) 하나님께서 바울을 붙잡아 그것을 전파하게 하신 까닭이다(고전 9:16), 마 28:19-20;행5:32참조. (2) 복음은 그리스도를 내용으로 한 말씀으로서 천상천하에 유일한 진리이므로 이것을 아는 인간은 누구나 그 진리를 전파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복음 이외에 구원의 길이 절대로 없다는 것을 아는 자는 그것을 남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다.
"비밀"(* )은 역시 복음을 가리킨다(1:26 해석 참조). 그런데 이 복음을 나타내는 방도는 사람의 지혜와 수단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도의 말과 같이(고전 2:1-2,4-5) 성령의 계시와 능력에 있는 것이다.(마11:25 참조). 그러므로 이것을 위해서는 하나님께 의뢰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따라서 바울은 교회의 기도 원조를 요청한 것이다.
=====4:5
사도는 교회의 할 바 책임으로서 기도를 권장하는 중, 특히 불신자들에게 전도할 기회가 있기를 기도하라 하고(2-4), 본절과 다음절에서는, 골로새교인들에게 불신자들 앞에서 지혜 있게 행함으로써 전도에 도움이 있기를 희망한다.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 여기 "외인"이란 말(* )은 불신자들을 가리킨다(고전 5:12-13;살전4:12;딤전 3:7).
신자가 불신자들 중에서 가질 행동 원리는 무엇보다 먼저 "지혜"인 것이다.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비판할 때에, 성경을 연구하는 정당한 순서를 밟지 않고 먼저 신자들의 행동과 신분(身分)을 살핀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그 행동과 처신에 있어서 성경 진리(지혜)를 살아냄을 실현해야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역시 그렇게 교훈하시면서 순결의 덕을 부가하여 훈시하셨으니, 곧, "보라 내가 너희를 보맴이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고 하셨다.
칼빈은 이 점에 있어서 불신자들 중에서 지혜로 행해야 될 이유 세 가지를 제시하였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신자가 불신자들 앞에서 어떤 실수하면, 그것으로 인하여 그들이 더욱 그리스도의 종교를 멀리하고 구원의 길에 들어서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런 실수는 작은 것 같으나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은 것"(레 19:14)과 마찬가지이다. (2) 그런 실수로 인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비방하게 한다. (3) 또 한가지 유의해야 될 것이 있으니, 그것은 신자가 불신자들 중애서 조심하지 아니하면 그만 그들과 융화되어 믿음에 손해를 받기 쉽다는 것이다(Calvin's Commentaries; Colossians, 1974, Eerdmans, p. 358).
@세월을 아끼라 - 이 문구(* )를 개역하면, "기회를 사서 간직하라"란 말이다. 곧, 빨리 흘러가고 마는 기회를 나 자신이 선한 노력과 희생의 댓가를 지불함으로써 속구(贖救)하여 내 것을 만들라는 말이다.
신자들은 불신자를 상대하는 시간을 의미 없이 흘러 보내지 않고 그 시간에 지혜롭게 행하면, 무언 중에라도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게 된다. 바로 그렇게 대가를 지불하고 매수(買收)해 둔 시간은 내세에 이르러 영원한 행복을 가져온다(눅 14:13-14,16:9 .엡 5:16해석 참조.)
=====4:6
본절은 신자가 불신자를 대할 때에 말을 선미(善美)하게 하기 위하여, 우선 교회안에서부터 신자들끼리 언사를 선미하게 하는 습관을 배양해야 될 것을 말한다.(엡4:29 참조.)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 - 여기 "은혜 가운데서"란 말(* )은 "은혜롭게"라고 개역함이 가하니, 신자는 언사를 '친절하게' 혹은 '인자하게' 표현하라는 것이다.
"소금으로 고루게 함"이란 부패하고 더러운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의미로서(엡 4:29), 소금을 방부제(防腐劑)로 보는 해석이다(마 5:13; 막 9:49-50; 눅 14:34-35).
@그리하면 - 곧, 교회 안에서 신자들끼리 언사를 친절하게 하면, 대외적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 벧전 3:15을 보면, 기독교에 관한 불신자의 질문에 대한 신자의 답변 태도는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하였다.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증인으로서 중대한 위치에 섰다는 것을 의식하는 태도이다. 이런 신중한 태도가 있는 자에게는 성령의 도우심이 있다.
=====4:7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라니 - "두기고"는 소아시아 사람인데 사도의 조력자(助事)로서 많이 수고한 사람이다(행 20:4;엡 6:21;딛 3:12).
두기고가 골로새에 가게 된것은, 그가 본 서신을 전달하는 동시에 사도 바울의 정황(情況)을 교회에 보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실한 일군이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 - 여기 "신실한"이란 말은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란 명칭에까지 언급하는 것이다. 곧, 두기고는 "일군"의 자격으로도 신실하고,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의 자격으로도 신실하다는 의미이다.
신실은 "하나님의 비밀" 곧, 복음을 맡은 사역자의 유일한 자격이다. 그러므로 고전 4:1-2은 말하기를,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신실)이니라"고 하였다. 주님의 일군의 신실은, (1) 복음에 신실함이니,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복음을 가감(加減)하지 않고 그대로 보고하여 전함이고(고후 2:17), (2) 인격 생활에 있어서 진실하여 거짓이 없는 것이고(고후 1:18-20), (3)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다가 고통과 난관을 당하여도 변절하지 않는 진실됨이다(엡 6:24).
그런데 여기 "일군"이란 말과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란 말의 분별은 무엇인가? 전자는 특히 교역자의 사역을 염두에 둔 명칭이고, 후자는 그 교역자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언급하는 명칭이다. "일군"이란 말(* )은 어원적(語源的)으로 보자면 티끌 가운데로 통과 하는, 티끙을 무릅쓰며 일하는 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달음질하는 자를 의미하는 것이니(Trench), 그것은 노역(勞役)의 정황을 묘사하는 명칭이다. 그리고 바울이 두기고를 가리켜 자기와 함께 그리스도의 종된 자라고 한 것은, 두기고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알고 절대로 충성하고 순종하는 자였음을 가리킨다.
=====4:8
@내가 저를 특별히 너희에게로 보낸 것은 - 여기 "특별히"란 말이 헬라 원문에는 없는데 한역에는 그것을 보역(補譯)했다.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 이 문구는 어떤 사본들의 사구(砂丘)대로 (*)보아서는 "나로 너희 사정을 알게 하고"이니, 그것은 시내산사본(* )의 제 삼 교정본을 위시하여 기타 몇 사본들(C, K, L)의 사구(寫句)이다. 그러나 그 보다 권위 있는 사본들(A,B)에 의거한 한역(韓譯)은 이 부분의 문맥에 적합하니, (1)두기고가 골로새에 가는 것이 바울의 사정을 골로새 신자들에게 알려주려는 것이었음은 7절 초두에 밝히 말한 것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2) 9절 하반을 보더라도 그것이 그의 사명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Lightfoot, Van Leeuwen).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의 내정과 사생활은 다른 신자들에게 알려질 때에 유익을 끼친다. 그 이유는, 주님의 충성된 종의 이면(裡面)에는, 그 외부에 나타난 것 이상으로 모본할 만한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옥에 갇힌 생활의 이면은 모든 교회에 큰 감동과 격려(激勵)를 줄 것이다.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사도의 실정을 알고자 갈망하던 골로새 교회가 두기고에게서 그의 모든 정황을 청취(聽取)할 때에, 큰 위로(신앙을 격려하는 위로이고 단지 근심에서의 안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를 받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두기고를 통하여 그들을 위하는 바울의 관심이 얼마나 간절한 것을 알게 되는 까닭이다.
=====4:9
본절을 두기고의 동반자 오네시모에 대한 바울의 천거를 포함한다.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 (7절 하반 해석 참조)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 그는 빌레몬의 종으로 있다가 로마로 도피해 있던 중 바울을 만나 복음을 받고 주님께 돌아온 자이다.
빌레몬서를 보면, 바울이 오네시모를 가리켜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몬 1:10)라고 하였으니, 그를 귀중히 여기는 바울의 애정은 말할 것도 없다
"오네시모"(* )는 헬라어의 뜻으로는 '유익한'이란 의미이다. 방울이 이 형제를 사랑하여 빌레몬에게 부탁하면서 그 이름의 뜻을 음미해 말하기를,"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몬1:11)라고 하였다. (몬 1:10-18 참조.)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 곧, 골로새사람이란 말이다. "저희"는 위의 두 사람, 두기고와 오네시모를 가리킨다.
=====4: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 - 바울과 "함께 갇힌 이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에 거주하던 유대인으로서 (행 20:4), 바울과 함께 에베소의 소요(騷擾)를 겪은 후(행19:29), 같이 여행하고(행 20-14), 로마로 잡혀 가는 바울과 동행하는 자로 나타났다(행27:2). 이것을 보면, 그가 바울이 받는 환난에 동참한 때가 적지 않게 있었던 것이다. 평시의 동사(同事)도 막역(莫逆)의 친분을 의미하지만, 난시(亂視)의 동고(同苦)는 더욱 그러한 것이다.
@바나바의 생질 마가 - "생질"이라는 말은 남동생의 아들, 혹은 여동새의 아들을 가리키는데, 마가의 어머니는 바나바의 친 자매였다. "마가"는 "요한"이라고도 하는데 경건한 모친 슬하에서 생장하였고(행 12:12), 바나바와 바울의 제 1차 선교 여행에 수종들다가(행 13:5), 중도에 돌아왔으나(행 13:13), 후년에 베드로의 조사로 근무하기도 하고(벧전 5:13), 또한 바울의 조사로도 근무하였다(딤후 4:11). 사도행전 (행13:13, 15:37-40)을 보면,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참된 교역자가 그 사역 초두에 혹시 실패할지라도 그것이 그에게 영원히 치료되지 못할 상처가 될 것은 아니다. 바울이 과거에는 불만족하게 여기던 마가를 지금에 이르러서는 대서특필(大書特筆)하여 그를 추천한다. 그 이유는, 재 출발한 마가의 신앙생활이 장족 진보하여 성역에 충성하기 때문이다.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 여기 "명"은 마가를 특별히 존대하라는 사도 바울의 지령인데, 이 서신을 가지고 골로새로 가는 두기고와 오네시모 편으로 그 지령이 전달된 듯하다.
=====4: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 "유스도"는 로마의 이름으로서 '의인'(義人)을 의미하는바, 이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성경에 두 번 더 나타난다(행1:23,18:7). "유스도 예수"는 히브리 이름 "예수"에다가 "유스도"라는 로마 이름을 덧붙인 것이다.
@저희는 할례당이라 - 곧, 위의 세사람,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라 하는 예수"는 모두 다 순 유대인(할례 받은 자)들이란 말이다.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나 - 할례를 자랑하는 유대인 중 대다수는 반기독자(反基督者)들이고, 또 그들 중에 약간의 신자들이 있어도 그들은 유대주의에 강하기 때문에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를 등한히 하였다. 로마의 큰 도성에 유대인들이 많았으나, 복음을 위하여 옥고(獄苦)를 당하는 바울을 동정하는 자가 별로 없었고, 오직 위의 세 사람만이 바울을 도와 함께 역사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 복음을 반대하고 또 몰이해(沒理解)하는 유대인들 중에서도 위의 세 사람과 같은 동역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희귀한 일이었다. 이렇게 희귀한 일은 바울에게 특별한 위로를 주었다. 그것이야말로 사막에서 진주를 줍는 것 같은 기쁨이었을 것이다.
=====4:12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 - "에바브라"는 그리스도 예수께 절대로 순종하여 하나님만을 기쁘게 함을 본무(本務)로 하는 (갈1:10) 충성된 종이다. 그런데 그는 골로새에서 온 사람이다. (1:7 해석 참조.)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를 극히 사랑한 증거는 그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되 "항상"하였고, 또 "애써"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도할 "항상"한다 함은, 그 기구하는 제목이 일향(一向)떠나지 않고 그 중심에 있어, (1)무언 중에도 기구가 계속될 뿐 아니라, (2) 일정한 규례를 따라 밀실 혹은 집회석에서 기구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애써 기도"한다.함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까지 기도에 노력함이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그 모범이다. 그의 겟세마네기도를 보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고(히 5:7),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도록 애써 간구하셨고(눅22:44), 같은 기도를 중복하셨다(마 26:36-44).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계시하신 모든 교훈이다. 골로새신자들은 그것을 완전히 또는 확신 있게 알아야 견고하게 설 수 있다.
"완전"이란 말의 헬라 원어(* )를 직역하면 '성숙'(成熟)을 의미한다. 이 말은 여기서, 하나님의 계시해주신 모든 교훈들에 대한 그들의 지식이 양적으로 또는 질적으로 성숙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확신"(*)은 성숙한 지식의 결과일 것이다. 진리 지식이 성숙한 신자는 필연적으로 그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서기를" 이란 말(* )은 견고히 선다는 말이다. 기독교의 진리를 아는 지식이 성숙한 자는 확신을 소유하게 되고, 확신이 있는 자는 견고히 설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확신 있는 자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떤 교훈이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동요하지도 않는다. 골로새교회는 이단이 유행하는 위기(危機)에 있었으므로(2:4-23), 그 교회의 사역자인 에바브라(1:7)는 으례 이런 기도를 주님께 드렸을 것이다.
=====4:13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 2:1 해석 참조,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은 수고하는것.
"히에라볼리"라는 도시는 골로새의 동편에 있는 곳이다.
"많이 수고함"은 에바브라가 그들을 위하요 가지는 영적 노력을 가리킨다.
@내가 증거하노라 - 바울은 자기와 동역하는 자들을 높이 추천하기를 즐기는 사람이었다(1:7;고후 8:16-23; 빌 2:20-22, 25-26).
=====4:14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 "누가"는 사도 바울에게 가장 귀한 조사였다. 그는 바울과 함께 전도 여행의 대부분을 동반(同伴)한 자로서, 특히 옥중에서 바울의 임종시(臨終時)까지 시종한 사람이다. 딤후 4:11에는,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씌어 있다.
사도 요한이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제자가 되었던 것과 같이, 누가는 바울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제자가 되었다.
"데마"는 누가와 같이 나중까지 바울과 동고(同苦)하지는 못하고 이 세상을 사랑하여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이다(딤후 4:10). 우리가 그를 가리켜 배교한 사람이라고까지는 하기 어려우나, 그의 신앙이 후년에 이르러 약해졌다는 것은 명백히 알 수 있다.
=====4:15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 - "라오디게아"는 골로새에 가까운 곳이니만큼, 두 교회 사이의 우교(友交)는 친밀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골로새교회를 통하여 라오디게아 신자들에게 문안을 보낸다.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 어떤 사본들(A, C, * )에 의하면, "눔바와 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라고 하였다. "눔바"라는 인물이 여성인지 남성인지 알수 없다. "그들"은 눔바란 사람의 가족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웨스트코트와 홀트 두 사람은 한역이 취한 사본(B)의 사구(寫句)를 채택하였다. 그러면, 위의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은 눔바의 집에 모이는 교회와는 다른 교회일 것인가? 이 난제에 관하여 두 학설이 있다. (1) 동일한 교회라는 학설, 양자(兩者)가 실질에 있어서 같은 라오디게아교회를 가리키는데, 전자(前者)는 라오디게아의 신자들을 개별적으로 상대한 것이고, 후자(後者)는 그들을 하나의 회중으로 상대한 것이라고 한다. (2) 각기 다른 교회라는 학설. 전자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가리키고, 후자는 라오디게아 혹은 그 부근에 있는 작은 교회를 가리킨다고 한다.
"집에 있는 교회"는 어떤 신실한 신자의 집을 예배 장소로 정하고 그곳에 모이는 신자들의 단체이다. 행 12:12; 롬 16:5; 고전 1:19; 몬 1:2 참조. 이런 교회들 사이에는 경쟁이 없었을 것이며, 신자들은 외부적 시설보다 신앙의 장성을 위주하였을 것이다.
=====4:16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 바울은 본절에서 자기의 서신들을 각 교회가 윤독(輪讀)할 것을 권한다. 이것을 보면, 사도 서신들이 개교회에 국한된 사서(私書)가 아니고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를 위하여 정경적 문서(政經的文書)인 것이 분명하다.
"이 편지"란 것은 물론 골로새서를 가리킨다.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 이 문구에 대하여는 해석이 여러가지 있다. (1) 라오디게아교회가 바울에게 보냈던 편지라는 학설, 다시 말하면, 바울에게 보낸 라오디게아교회의 서신을 두기고와 오네시모편으로 골로새교회에 전송(傳送)하면서 부탁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소 억설인 것 같다. (2) 바울이 라오기게아를 심방하고 거기서 골로새에 발신(發信)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까? 이것이 문제이다. (골 2:1 참조.) (3) 바울이 옥중에서 라오디게아교회에 발송한 서신이라는 학설. 그렇다면, 현존의 신약성경에 "라오디게아서"란 서신이 없는 것이 문제이다. (4)에베소서가 바로 라오디게아서라는 학설. 이 추측도 할 만하다. 그 이유는, 첫째, 에베소서는 실로 에베소교회만 상대로 해서 발송된 것이 아니고, 소아시아의 모든 교회들을 상대로 한 까닭이다. 엡1:1의 "에베소에 있는"이란 말은 주요한 고대 사본들(* ,B)에는 없기 때문에, 그 서신은 어떤 개교회에 지정됨이 없는 윤독 서신(輪讀書信)으로 볼 수 있다. 이 윤독 서신은 조만간 소아시아 교회들 중의 하나인 라오디게아교회를 경유해서 골로새교회로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윤독 서신을 염두에 두고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고 한 것 같다. 둘째, 이 윤독 선신(에베소서)이 골로새서와 동일한 시기에 저작되어 동일한 인편에 송달(送達)된 것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겠다. 세째, 말시온(Marcion)은 2세기 중엽에 에베소서의 제호(題號)를 "라오디게아서"라고 했으니(Tertullian, Against Marcion 5:11,17), 그의 말도 어떤 신임할 만한 고대의 유전에 의종(依從)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4:17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 "아킵보"는 골로새 교회에서 주의 사역을 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몬 1:2 참조).
바울은 여기서 골로새 교회에 아킵보를 격려하라고 부탁한다. 사도가 직접 아킵보를 격려함보다 교회를 통하여 간접으로 권고하는 것을 보면, 사역자는 교회의 권위 아래 지배를 받는 자이고 교회를 지배하는 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은 주님께서 세우시고 주님께서 감독하시며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으로서, '거룩한 직분'이란 뜻이다. 그것을 맡은 자는 자행 자지(自行自止)할 수 없고 "삼가 이루"어야 한다. 교직자는 그 직무가 인간을 상대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상대한 것이니만큼, 성실히 그것을 수행해야 된다. "이루라"는 말은 그 맡은 책임들 중 하나라도 빼놓지 말고 원만하게 실행하라는 말이다(김후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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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 사도는 앞절까지 대서자(代書者)를 통하여 본서를 쓰다가 끝에 와서는 자필(自筆)로써 기록한다(살후 3:17).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 - 사도는 자기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옥중에 수금된 사실이 골로새신들에게 기억되기를 희망한다. 그것은 그가 골로새신자들에게 자기 개인에 대한 도움을 구하는 사욕이 아니다. 그들이 복음을 위하여 갇힌 바울의 고난을 기억함으로 모든 이단자들을 막을 마음이 강해질 것이다. 복음을 인하여 수난(受難)하는 자를 기억하는 신자는 그리스도와 그 복음에 더욱 충성할 동기를 얻게 된다.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이렇게 짧은 축도는 딤전6:21;딤후 4:22; 딛3:15에도 있고, 길게 구비한 축도는 고후 13:13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