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7장....[338.내주를 가까이하게함은] [249.주사랑하는자다찬송할 때에][340.어지러운세상중에 ] [339.내주님지신십자가]
...이스라엘144000명, [대환난 중 보호받기 위해] 인침받는 광경---곧 이어, 삼층천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는, <각 나라-족속-백성-방언에서 나온>, 흰옷입고 종려나무 가지 들고 찬양하는, 아무도 셀 수 없는 구속 받은 무리들((12장 이후의 삽입설명부에서 상술하고 있는 내용들을 볼 때, 사내아이, 수확의 첫열매로 드려진, 초기의 이기는 자들의 <6째 인 떼심 직전의 [비밀한]휴거로 보는 것이 타달할 것으로 보임))
**6째 인과 (7째인에 속한) 처음 1.2.3.4 나팔 울림은 단지 대환난의 고통에 대한 서막에 불과할 뿐이다. 대 환난은 이른 바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하려고 장차 온세상에 임박할 시험(3:10)인지도 모른다..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이 때를 면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하기에 만일 그대가 시험의 때를 면하려 한다면 이땅에서 들림받을 준비를 합당하게 갖추어야 한다....우리는 주님의 재림이나 성도들의 휴거에 대해 그저 농담 삼아서 <가볍게> 말하는 일이 결코 없어야 한다. 순수한 말씀에 따라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환난 전에 휴거되길 진정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합당한 성숙에 도달됨으로써 그분이 우리를 데려 가실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대환난이 개시되는 그 시점에 그대는 어디에 있기를 원하는가..우리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선택된 자들에 속한 <인침 받은> 표시를 가지고 있지 않음에 유의하라..하늘에 속한 Q의 백성들이기에 Q께서는 우리를 대환난 전에 휴거시키기를 원하시고 <대환난 기간 동안> 땅위에 남겨두실 의도가 없으시다는 것을 잊지말자....그런데, 그 휴거의 필수조건은 <반드시 합당한 성숙에 도달함>이며, 이런 면에서 본다면, Q이 이스라엘 백성을 다루시는 방법은 믿는이들을 다루시는 방법과는 전혀 다름에 주의하라.
**<이마에 Q의 인침 받음, 또는 동시에 초기의 이기는 자(=사내 아이, 수확의 첫열매, 그리스도의 군대이자 Q의 누림)로 대환난 전에 들림받음에 합당한 자로 여겨짐>의 영적 의미를 고찰해 본다면,..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 받음, 곧 Q의 것이라 하는 표식 주심, 곧 그리스도의 흔적(Q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 JC의 새 이름) 가진, Q 성전의 기념기둥 삼으심] =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와의 합일<일치>, 곧 <"날마다 나는 죽노라"의 고백 안에서!!> [빌라델비아 교회 지체들 처럼] 구주를 계시하심따라 참되게 믿고, <생각 안에 구주 말씀 묵상으로 가득 채워져서 그의 행함 안에서 구주의 행하심이 자연스레 그리고 참되게 나타나는 바> 말씀-성령을 따라 동행함 통해 그분을 체득하고 그분의 어떠하심을(성령의 9가지 열매 + 성결과 의 /겸손과 관용/일편단심의 절개) 닮아감 이룸이요 일편단심 그분을 사랑하기에 전적으로 그분께 순복함이 그 존재적 특징일 것!!
[계3:10] *10.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0.Because thou hast kept the word of my patience, I also will keep thee from the hour of temptation, which shall come upon all the world, to try them that dwell upon the earth.
#7장 : 계시록의 첫 삽입구
,,,시점은, 여섯째 인 떼심과 일곱째 인 떼심 사이(7째 인 뗌 직후 일곱 나팔 울림이 오는데, 후반부 5-6-7째의 세 나팔 울림은 대 환난을 구성함).
...일곱째 인 떼심 직전에 Q은 그분이 보존하시고자 하는 이스라엘 12지파 144000명에게 보호의 인을 치심. 바로 뒤이어서 하늘 보좌 앞에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찬양드리는 휴거된 무리들이 등장함...<아마도 다섯째 인~여섯째 인 떼심 사이에 사내아이-첫 수확의 열매인 초기의 이기는 자들의 [하늘 보좌에로의] 비밀한 휴거가 미리 있게 될 것을, 다섯째 인 떼심으로 등장한 제단 밑 순교자들의 탄원에 대한 대답 가운데 이미 시사하셨었음>
...Q은 그분의 두 백성들-대환난에서 보호되도록 인침 받은 이스라엘 민족<이들은 대 환난을 통과해야 할 것>과 구속받아 삶속에서 고난통해 연단되어 휴거된 초기의 이기는 성도들-을 특별히 보존하시려 함을 드러내신다. 그 뿐만 아니라, 특별히 사내아이에 속한 휴거된 이들, 곧 삶속의 큰 환난을 죽기까지 일편단심으로 견뎌내며 살아낸 그들의 증거하는 말을 통해서, 또한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과 함께 전쟁을 치루도록 하심으로써 승리하여 하늘로부터 마귀와 그 수하들을 축출하려 하심이다.
...여섯째 인 떼심으로 인해 <그 이전에는 결코 보지 못했던> 초자연적인 재앙, 곧 땅의 지진<산과 섬들의 위치 이동> 및 해-달이 손상 입고 별들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이 말리는 현상 등 큰 초자연적 천재지변이 발생되는데, 이 여섯째 인 떼심 인한 초자연적 재앙들은 바로 뒤이어 전개 되는 일곱째 인 떼심을 통해 (곧 이어 하늘 성전에서는 천사[실은 그리스도!!]가 금 향로에 성도들의 기도(순교자들의 탄원도 포함됨)와 더불어 향 곧<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함께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 뒤이어 JC가 보좌 앞 금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음으로 인해 우뢰-지진-음성이 동반됨). 그 직후에 따라 전개될 <일곱째 인 떼심 안에 포함되는 바> 일곱 나팔 울림이(그 중 후반부의 5,6,7째 나팔 울림은 본격적 대환난이다.) 곧 들이닥치게 될 것을 알리는 사전 경고라 할 수 있다.
##[창29,30](레아)르시레유-(빌하)단납-(실바)갓아잇스-(라헬)요베 ==>[계7]유-르-갓-아-납-므-시-레-잇-스-요-베((유르가-아나므(무)-시레이-스요베))
@영적 이스라엘로 나타나는 바..14만사천인의 영적/지파적 특성들(단, 에브라임이 빠졌다!!...요셉, 레위가 들어간다.....그러나 므낫세-요셉의 두 몫 누림은 주님의 축복 그대로 여전하다. 한편 겔48장에 따르면, 신천신지에서 예루살렘 성읍의 12문에는 단 지파의 문은 있지만 여전히 에브라임 지파의 문은 없다. 에브라임 대신에 요셉 지파의 문이 여전히 있음을 본다..상하2만5천척/좌우2만5천척<그 가운데 예루살렘 성읍이 위치하며, 그 좌우는 제사장에게 주어지는 바>의 레위지파에 속한 땅을 중심으로 북쪽<하맛경계>에서부터 <남쪽 애굽시내> 지경안에서의 땅 분배는, <각 지파마다 상하 1만척, 좌우 2만5천척씩으로 나눔>, 북에서 남으로 볼 때, 단-아셀-납달리-므낫세-에브라임-르우벤-유다-[레위]-베냐민-시므온--잇사달-스불론-갓 순서로 주어짐으로, 에브라임은 요셉 지파의 문을 통해 출입하게 될 것을 의미함)
:::완전한, 열정적인, 초월적인 사랑-생명-빛이신 Q의 어떠하심 계시 그대로, 붙들어 믿고 붙잡고 신뢰하며 타협없이 생명삼아 섬기는, 회개하며 돌이키고 삼가며, 자기 희생의 사랑 끝까지 실천하는 목자-왕(찬송 중) ==>Q의 돌아보심 감사함 그 안에서, 돌보며 인도함==> 연합한 한 마음된 무리로서 대적 돌파/승리 ==>열납하시는 Q, 영광스런 그분 누림의 기쁨안에서 동행동거동주함으로써 그 축복 공급 ==>자유케 하는 생명 능력의 복음 전파, 즉시 민첩한 실행 통해 항상 이김 ==> 옛 상처 기억들을 극복/변화된 새로운 영적 존재/치유자 실감 ==>Q 말씀따라 반응-교통-응답받음==>Q과, 형제들과 진정한 헌신/섬김의 연합한 유기적 공동체 섬기며 이룸==>참 안식 안에서 주와 교통함 통해 합당한 때를 따라 진퇴를 분별하며 섬김/봉사 ==>늘 주안에 거함/나아감 준비, 선교하시는Q 동참 ==>참된 영적 나실인들, 구원받는 이들 낳음을 날로 더함 ==> 이들과 함께 동행하시는 전능 Q의 오른손의 능력됨 체득함
유다<찬송. 왕권. 목자>--르우벤<돌봄, 권고>-갓<연합된 무리로서 돌파/승리>
-아셀<풍성. 족함/영광, 열납/기쁨(희락), 축복/공급>-납달리<항상 이김 : 자유/부활생명 누림/전파..민첩>-므낫세<과거 상처 기억 극복/잊음, 새 존재/영적 변화-치유>
-시므온<응답받음/반응>-레위<연합, 헌신, 말씀..교사, 제사장>-잇사갈<대가/보상, 안식 누림-섬김/봉사...시세를 앎>
-스불론<거함, 진취성, 선교>-요셉<더함, 헌신된 나실인>-베냐민<동행, 능력>
@[삿17:31, 32].. "단 자손이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더라"....Q이 정해주신 기업/제자리를 떠나갔고, 간음죄-유상숭배로 <앗수르에 의해> 진멸, 몰락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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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지파는 분배받은 땅을 정복하지 못하자 다섯명의 용맹한 용사들에게 다른 땅을 정탐하라고 명합니다.
마침 그들이 유숙한 곳이 미가의 집이고 그곳에서 제사장을 만납니다.
그들은 레위인에게 자신들의 길을 여호와께 물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자 레위인은 묻지도 않고 형통할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다섯 정탐꾼들은 라이스라는 곳을 정탐하고 돌아가서 그곳을 치고 차지하여 살자고 합니다.
이에 단 지파는 600명의 군사들을 데리고 그 땅을 치러 갑니다.
가는 중에 단지파는 미가의 집에 들어가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을 훔쳐서 가고 제사장도 데리고 갑니다.
자신의 집의 우상을 훔쳐간 것을 뒤늦게 알게 된 미가는 쫓아와서 내놓으라고 하지만 단지파 사람들은 으름장을 놓으며 미가에게 겁을 주어 돌려 보냅니다.
단지파는 결국 라이스라는 곳을 점령하여 살지만 결국 자기들을 위해 새긴 신상을 세웠고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우상을 섬기게 되는 계기를 만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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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스 : 메롬호수 북쪽, 납달리 북단 지역과 므낫세 북단(요단동편) 지역 사이...**단 지역에서 북동쪽에 헬몬산이 위치...헬몬산과 단 지역 사이에는 가이사랴 빌립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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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1절 말씀 "단 자손이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더라"....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으면 단지파와 같이 우상을 지파 한 가운데 가지고 들어오게 된다고 사사기는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에는 단지파의 세가지 잘못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단지파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을 믿음으로 차지하지 못하자 하나님의 음성보다는 레위인의 말에 더 귀를 기울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얻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쉽고 평안한 땅을 찾아 헤맵니다.
셋째, 하나님이 만들지 말라고 하신 우상을 자신들을 위해 세웁니다. 그것도 남의 것을 훔치고 윽박질러 뺏어버립니다.
이스라엘에 우상을 가지고 들어온 것입니다.
레위인 역시 올바른 믿음이 없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세우심을 받지 않고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제사장 노릇을 하게 됩니다. 그가 바로 모세의 손자 게르솜의 아들 요나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귀히 쓰임 받던 모세의 믿음이 두세대를 넘기지 못하고 우상 숭배의 늪에 빠지고 말게 된 것입니다.
이로부터 몇백년 후 단지파는 앗수르의 공격으로 인해 지파 자체가 없어져 버립니다.
요한계시록 7장 인치심을 받은 십사만 사천명의 지파에서도 단지파의 이름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백성들은 그 이름 조차도 남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맡겨진 사역지를 위해 어려워도 기도하며 나아갑시다.
가정이든지 직장이든지 샘터이든지 어느곳이든지 우리 삶에 주어진 삶의 영역은 바로 사역지입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분배받은 땅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그 곳의 악의 세력을 정복하고 그곳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있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기도를 게을리할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에브라임과 사마리아의 영적 의미
[사7:9]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28:1]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면류관
[렘4:15]단에서 소리를 선포하며 에브라임산에서 재앙을 공포하는도다
[호4:17]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
[호5:5]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그와 함께 넘어지리라
[호7:8]에브라임이 여러 민족 가운데 혼합되니 그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호13:1]에브라임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떨었도다 그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 바알로 말미암아 범죄하므로 망하였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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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가볼리(Deca-Polis) : 요단 동편, 갈릴리호수 동부-남부에갈친 지역의 빌라델비아, 거라사, 스구도볼리,벨라, 가다라, 디온, 카나타, 라파나, 힙포, 다메섹의 10 성읍을 지칭..로마의 폼페이우스에 의해 정복된 이후 상업과 방어를 위한 동맹체로 통합된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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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피어난 하나님 나라의 왕 메시아 소망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 그 이후, 분열 왕국 중에서 북이스라엘이 기원전 722년에 먼저 앗수르 제국에게 멸망당했다.
비록 분열했을지라도 하나님께 선택된 백성이라는 믿음과 자부심을 갖고 있던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큰 충격이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충격이 엄습했다. 하지만 열왕기서 저자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이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애굽의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규례와 이스라엘 여러 왕이 세운 율례를 행하였음이라”(왕하 17:7-8).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그들이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여러 성읍에 거주하니라”(왕하 17:24).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는 피정복민에 대해서 이주 정책을 실행했다.
즉 북이스라엘 사람은 이방 지역으로 옮기고, 다른 이방 민족은 북이스라엘로 옮기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방 민족과 결혼하지 말라고 엄하게 반대하셨던 혼혈이 생기고 말았다(출 34:15-16; 신 7:3-4).
북이스라엘로 이주된 이방인들이 자신들이 섬기던 우상을 가져와 섬겨서 땅을 더럽히자 하나님은 사자를 보내서 몇 사람을 죽이셨다.
이에 놀란 앗수르 왕이 잡혀 간 제사장을 불러다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방법을 가르쳤지만, 그들이 전적으로 하나님만 섬긴 것은 아니었다.
북이스라엘 땅으로 이주된 포로민들은 저마다 섬기는 우상을 가져와서 섬겼으며, 여호와도 그 신들 중 하나로 섬겼다(왕하 17:24-41).
이주된 이방인들은 그 땅에 남아 있던 북이스라엘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혼인을 하게 되었다.
이방인들과의 결혼을 통한 혼혈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었기 때문에 훗날 신약 시대에 북이스라엘을 나타내는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무시를 당하게 되었다. 심지어 신약 시대의 유대인들 중 경건을 자처하는 자들은 사마리아 땅을 지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과 결혼하여 혼혈을 이룸으로 그 땅이 더럽혀졌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 성에 들어가서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오신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신 것은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요 4장).
한편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지 130여 년이 지난 후 남유다 역시 바벨론에게 멸망당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세 차례 예루살렘을 공격했고, 그 결과 남유다는 시드기야 왕 때인 BC 586년에 멸망당하고 말았다.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근본적인 원인은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시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다른 신을 섬긴 것이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멸망의 원인을 이렇게 말한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바벨론은 세 차례 남유다를 공격하면서 남유다의 유력한 사람들, 즉 귀족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 등을 포로로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 남유다에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만 남아서 황폐하고 비참한 삶을 살았다.
가나안에 남은 유다인들의 피폐한 삶을 대해서 에스겔은 이렇게 말한다.
“인자야 이 이스라엘의 이 황폐한 땅에 거주하는 자들이 말하여 이르기를 아브라함은 오직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기업으로 얻었나니 우리가 많은즉 더욱 이 땅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 되느니라 하는도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고기를 피째 먹으며 너희 우상들에게 눈을 들며 피를 흘리니 그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될까 보냐 너희가 칼을 믿어 가증한 일을 행하며 각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니 그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될까 보냐 하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황무지에 있는 자는 칼에 엎드러뜨리고 들에 있는 자는 들짐승에게 넘겨 먹히게 하고 산성과 굴에 있는 자는 전염병에 죽게 하리라 내가 그 땅이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하고 그 권능의 교만을 그치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산들이 황폐하여 지나갈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그들이 행한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그 땅을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하면 그때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하라”(겔 33:24-29).
바벨론으로 끌려간 소위 지도층의 유다인들은 그곳에서 공동체를 형성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지켰다.
다니엘 선지자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포로로 끌려간 일부 유다인들은 바벨론 제국의 높은 관리가 되었으며, 그곳에서 정착된 삶을 누렸다. 그렇다고 해서 바벨론의 유다인들에게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바벨론에 성전이 없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성전은 유다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지식인들과 귀족들은 그곳에서 성전 대신에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지성이 충만한 공동체를 형성했다.
그들은 율법, 곧 성경 사본을 만들고 해석했다. 오늘날에도 애독되고 있는 탈무드도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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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스라엘의 멸망]
기원전 732년, 이스라엘의 베가는 아람의 왕 르신과 동맹을 맺어 예루살렘을 위협하는데, 이 때 당시 유다 왕국의 왕이었던 아하스는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아하스의 공물을 받은 디글랏빌레셀은[17] 다메섹, 이스라엘, 아람을 병합하는데 성공하게 되며,.[18] 이 때 길르앗에 거주하던 르우벤, 갓, 므낫세 지파 사람들도 또한 함께 앗수르에 의해 끌려가서 하부르강[터키 남동쪽 지역에 있는 강] 유역에 정착하게 된다.
이외에도 납달리 지파의 전지역, 에브라임 지파의 야노아까지도 점령한다. 이 때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앗수르로 끌려간다.[19]
북이스라엘는 얼마 남지 않은 영토를 유지하다가, 기원전 720년 앗수르의 침공을 받아 완전히 멸망하고 남은 사람들마저도 모두 끌려간다.
앗수르는 사마리아를 3년간 포위하는 동안 살만에셀 5세가 죽고 사르곤 2세가 즉위하는데, 사르곤 2세는 자기 자신을 사마리아의 정복자로 기록했다. 이 때 27,280명이 앗수르로 호송되었다. [산헤립은 사르곤2세의 아들임]..
이렇게 호송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부르강 유역과 메디아 땅에 정착하여 엑바타나 등에 유대인 공동체를 형성한다.
토비트는 이 때 니느웨로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앗수르에 의한 북이스라엘 유민의 강제이주]
이렇게 앗수르로 강제이주된 지파들을 잃어버린 열 지파로 부른다. 남쪽에는 유다 왕국이 남아 유다 지파, 시므온 지파, 베냐민 지파, 그리고 일부 레위 지파가 이스라엘 민족의 뿌리를 유지해 나간다.
유다 왕국은 기원전 586년에 신바빌로니아 제국[느부갓네살]의 침공을 받아 멸망한다.
[사마리아인의 관점] 사마리아인들은 앗수르에 의해 이주된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 중 소수에 불과하며, 여전히 북이스라엘 지역에 많은 이스라엘 민족이 남아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일부 학자들은 단지 1/5만이 압송되었다고 추정하기도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유다 왕국으로 건너가기도 해서 예루살렘의 인구수가 5배나 증가했다고도 말하며, 그 결과 예루살렘은 새로운 성벽을 건설하고, 히스기야왕은 앗수르의 침입을 대비하여 기혼샘을 새로 팠다고 주장한다.[20]:221
또한 역대기하 30장에서도 이스라엘 지역에 에브라임, 므낫세,, 아셀, 잇사갈, 스불론 지파의 많은 사람들이 정체성을 유지한 채로 남아있었음을 암시한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북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후에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봅니다.
과연 그럴까요? ...다른 견해도 있음을 기억해 둡시다....공과를 잘 분별하여 명심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Q의 긍휼!!입니다...단 지파는 Q이 정해주신 기업/제자리를 떠나갔고, 살인-영적 간음-우상숭배로 몰락했습니다, 에브라임은 그의 기업에 머물렀었습니다!!...물론 두 지파 모두 지독한 영적 간음을 통해 사탄의 주구 노릇 했음은 사실입니다))
[창세기 48:19], ‘19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 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 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창48:19)
....므낫세는 한 족속을 이룰 것이라 했는데 에브라임에게는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했습니다.‘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이 말은 매우 놀랍고 중요한 예언인데 히브리어로 ‘멜로 하고이’라는 것입니다.
‘멜로’는 ‘충만’을 의미하고 ‘하고이’는 ‘여러 민족들(the all nations)’, 곧 성경에서 ‘이방’을 가리키는 말 입니다.
왜 하나님은 므낫세보다 에브라임을 더 축복하셨을까, 왜 야곱과 모세는 므낫세보다 에브라임을 더 축복하였을까?
에브라임이란 뜻은 이방인의 충만이란 뜻인데 사도 바울도 로마서 11:25 ‘이방인의 충만’이란 말을 언급했습니다.
[로마서 11:25] *1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하나님의 신비, 곧 ‘감추인 비밀’이 ‘이방인의 충만(멜로 하고이)’이 있기까지 유대인들이 ‘어리석음’ 가운데 갇혀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비밀이고 그 하나님 나라의 경륜입니다.
사복음서에 ‘건너 편’에 있는 헬라의 도시들을 ‘데가볼리(decaspolis)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헬라어로 ‘10개의 도시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지역이 흥미로운 것은 그 곳에 <멸망당한>북 이스라엘 10지파들, 즉 ‘에브라임’들이 흩어져 살았다는 그 영적 의미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10’이라는 숫자는 ‘충만수’ 입니다.
북이스라엘 10지파를 통칭 에브라임이라 부른 것도 ‘이방의 충만’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릴리에서 이방 전역에 걸쳐 흩어져 버린 ‘에브라임’은 열방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 온 백성들을 상징한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미 에브라임은 이방 가운데 번성할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정해졌던 것입니다.
북이스라엘 10지파가 이방 지역에로 흩어져 간 것을 단순한 죄악으로 인한 심판 측면으로만 보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의 경륜을 오해함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이미 ‘시초부터 종말을 말씀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그것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수 천년 전에 이미 말씀하신 그것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경륜과 안배’입니다.
##대제사장 에봇의 어깨 견대(12지파 이름 새김) 와 가슴 흉패(12지파 보석 물림)의 바탕 보석은 모두 호마노[=줄마노=홍옥수...풍성/족함, 열납/기쁨(희락), 영광+축복/공급을 의미]였음 ((에덴 동산에는 베델리엄(나무 수지에서 나온 진주인데, 만나와 같은 색깔)과 호마노가 산출되었음))
[[12지파 광야 행군 기치, 순서]].....계시록7장 <인침 받아 대환난 중 보호받게 됨 통해 이겨내는>12지파 이름에는 단, 에브라임 지파가 빠지고 요셉, 레위가 들어감...그러나 므낫세-요셉의 두 몫 누림은 주님의 축복 그대로 여전하다.
***[호마노=홍옥수 :: 대제사장의 견대(12지파 이름들 새김) + 판결흉패 바탕]***
<제1대...동>홍보석(紅寶石 sardius =루비(Ruby)[유다..:: 찬송,왕권/열심.] ---황옥(黃玉 =토파즈(Topaz...:: 관용)[잇사갈] ---녹주옥/취옥(綠柱玉 = 에메랄드(emerald::역동의파도/인내 )[스불론]
---[언약궤]--
<제2대...남>석류석(石榴石turquoise = 홍옥 Carbuncle:: 번성/양선)[르우벤]---남보석(藍寶石 sapphire::일편단심/견인)[시므온]---홍마노(紅瑪瑙 sardonyx, diamond:: 충성)[갓]
<제3대...서>호박(琥珀, jacinth:: 번성/양선)[에브라임]---백마노(白瑪瑙, agate:: 극복<잊음>/겸손)[므낫세]---자수정(紫水晶, amethyst :: 온유)[베냐민]
<제4대...북>녹보석(綠寶石 chrysolite, berryl :: 승리, 정복/정의와 공의)[단]---호마노(홍옥수, onyx :: 열납/기쁨, 영광과 축복)[아셀]---벽옥(碧玉 jasper :: 믿음)[납달리]
===새 예루살렘성 규모(부피)는[지구의 100의 1정도의 크기]==
***새 예루살렘의 열두 진주문
......정욕과 탐심은 우상숭배 ==> 에브라임 지파, 단 지파 : 결국, 영적 간음으로 인해<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여 [새 예루살렘을 명백히 드러내는] 계시록에서는 [천년왕국 참여 위한 인침받음에서는]지워지는 바((신천신지 시대의 새 예루살렘과 땅의 분배에서늕 에브라임이 회복됨을 보게 됨)), 이 모델은 종교적 바벨론-물질적 바벨론이 적그리스도에게 버림 받고 <영영히>멸절당하는 영적 교훈의 모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택하신 이들을 끝까지 자기 소유로 만드심을 증거한는 것이기도 함>
......새 예루살렘에 참여하는, 인침받은 12지파에서 [에브라임 지파]가 탈락되고 대신 요셉지파가 새 예루살렘 성문에 참여함, 한편, 계21장의 <새 예루살렘>에 대한 모델로서 겔48장의 <12지파 땅 분배와 [예루살렘 성읍의 문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중앙에 레위 지파<질투하시는 Q을 위한 참된 열심, 곧 일편단심의 결단 실행으로 [형제들을 미혹하는] 간음죄 범한 형제 처단 --이를 통해 영구히 제사장 기업으로 지정됨>가 그 중앙에 있고 그 북쪽에 7지파의 분배 받은 땅들, 레위지파 아래쪽에 5지파의 분배 받은 땅들이 명기되고 있는데, 땅의 누림에는 요셉대신 에브라임이 들어가고, 예루살렘 문 이름에는 요셉이 대신 들어감.....이들, 곧 새로운 이스라엘 12지파는 새 예루살렘의 열두 진주문을 이루며, 열두 진주문 위에 각각 그 이름을 기록하고 있음
***새 예루살렘 성곽의 12기초석
==건축물의 기초인 주초석, 즉 뿌리가 되는 기반이 되는 극도로 단단한 세로기둥들로서, 그 어떤 지진이나 천재지변에도 결코 흔들림 없어야 하고, 건축물의 크기에 따라 기초석의 크기도 결정되어야 하며. 먼저 주초가 세워진 후에라야 그 위에 건물이 지어지게 됨
.....12사도의 이름은(가룟유다 대신 맛디아가 가입함) 새 예루살렘의 열두 기초석 위에 새겨지며,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약속 그대로임] 새 예루살렘 기초석들은 12개의 보석으로 이루어지지만, 전체적인 모습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빛깔, 곧 벽옥 빛을 띄게 됨.
***새 예루살렘의 건축 재료들
....[정금]은 <신성한 본성>을 가진 재료를,
....[보석]은<그 영의 변화시키는 역사>에 의해 산출된 재료를,
....[진주]는, 친히 죽음의 물 안에 들어오셔서 [이물질로서 모래인] 우리들을 품으심으로써 그로 인해 깊은 상처 받으심, 당신의 생명의 진액 분비를 통해 그것을 감싸 안아 극복하시며 [동시에 모래였던 우리는 그 영에 의해 신진대사적 변화를 입어 그분의 어떠하심을 빼어닮음으로서] 산출하신 바 새 예루살렘의 문들을 위해 산출하신 재료임....참고>> 베델리엄 = 나무 수지(향기 나는 나무의 진액)으로 만들어진 진주로서[진주 조개에서 산출되어 나온 진주와 모양과 색깔이 매우 흡사하다], 베델리엄의 눈은 흰색이었으며 만나는 깟(고수풀의 일종)씨와 같았는데, 그 눈은 베델리엄의 눈과 같다고 기록됨(민11:7, 창2:10-12)
[새 예루살렘성 12기초석].... https://dongtanms.kr/78922
*1>벽옥,jasper *2> 남보석, sapphire *3> 옥수,chalcedony
*4>녹보석/비취, emerald, *5>홍마노,sardonyx *6>홍보석/홍옥수, carnelian,
*7>황보석/감람석,chrysolite *8>녹옥/녹주석,beryl *9>담황옥/황옥,topaz
*10>비취옥/녹옥수,chrysoprase *11>청옥, jacinth, *12>자수정,amethyst
----성결/의의 섬김--겸손/양순/관용/용납--일편단심<초지일관/절개>+성령의 9열매-------
((요한계시록21장 12-23절))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진주>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니 *14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15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 자를 가졌더라 *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2)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한 스다디온은 약 192미터임] *17 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3)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헬, 페기스] *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보석으로 된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21 그 열두 문(gates)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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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기초석은 열두 개의 보석으로 이루어졌는데 각각 보석들은 특별한 영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팔복,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의 특성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들의 영적인 의미가 열두 보석 안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이 열두 보석이 상징하는 마음을 종합하면 완전한 사랑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마음이요, 주님의 마음의 어떠함입니다.
------<팔복 ::: 심령의 가난함--<죄를>애통함--마음의 온유함--의에 주리고 목마름---긍휼히 여김--마음의 청결함--화평케 함--의를 위해 박해 감수함> <사랑의 (실천적)특성들 :::: 오래참음--온유함--시기/자랑/교만/무례히 행함/자기 유익 구함/성냄/악한 것 생각함/불의를 기뻐함이 없음--진리와 함께 기뻐함--모든 것 참으며/믿으며/바라며/견딤> <성령의 9 열매들 ::: 사랑--희락--화평--오래참음--자비--양선--충성--온유--절제>------
새 예루살렘의 기초석이 열두 가지 보석으로 이루어진 것은 그 안에 들어간 사람들의 마음의 어떠함을 나타냅니다.
이들은 이 땅에서 연단 받는 과정 속에서 열두 보석 하나하나에 담긴 마음을 이루었습니다.
어느 한 분야도 부족하지 않은 온전한 마음, 완전한 사랑을 이룬 사람이라야 새 예루살렘에 합당함을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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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벽옥
1. 영적인 믿음을 의미하는 '벽옥'
첫 번째 기초석은 '벽옥'입니다. 천국 새예루살렘 성벽의 재료도 벽옥이라 했는데, 성벽의 재료로서 벽옥이 상징하는 믿음은 '믿음의 5단계,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기초석으로써 벽옥이 상징하는 믿음은 '영적인 믿음'을 나타냅니다. 영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중심에서 온전히 믿는 것입니다.
영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한 번 믿은 것을 변함없이 믿고, 하나님 말씀을 변함없이 믿기에 항상 순종의 행함이 따릅니다. 반대로, 육적인 믿음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이론과 지식에 맞는 것만 믿습니다. 육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처음엔 믿는다 했으나 응답이 오지 않으면 계속 그것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고 한두 번 하다가 그만두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말씀을 변함없이 믿고 온전한 순종의 행함을 보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으로부터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축복의 말씀을 받고 믿음으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납니다. 그러나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한 채 세월이 흘러 급기야 자신과 아내 사라도 나이 많아(경수가 끊어져)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해지지 않았고 약속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견고해진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롬 4:19-20).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믿은 아브라함은 결국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보석 같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더욱 찬란하게 한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한 것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합니다. 독자 이삭을 통해 무수한 후손을 주시겠다 약속하신 하나님 말씀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삭을 번제로 드린다 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을 확고하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22장 12절에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에 전혀 손색이 없음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어 그 믿음의 열매는 육으로도 풍성히 맺혔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기에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영적인 믿음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자기 생각에 맞지 않아도, 그대로 행하면 자신에게 불이익이 올 것 같아도 온전히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이처럼 참 믿음을 내보이는 자녀들에게 반드시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자녀들이 믿고 의지한 하나님 말씀이 참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예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하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양의 고기를 잡게 해 주셨고, 바다에 가서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자 성전세로 낼 동전을 구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믿음은, 사람의 힘과 지혜로는 불가능한 일도 얼마든지 가능케 하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믿음이 새 예루살렘의 열두 기초석 중 첫 번째를 차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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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남보석
2. 곧음과 절개를 의미하는 "남보석"
두 번째 기초석은 "남보석"입니다. 남보석은 일명 사파이어라고 불리는 투명한 남색의 보석입니다. 남보석에 담긴 영의 마음은 "곧음과 절개"입니다.바로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한번 뜻을 정했으면 세상의 어떤 유혹이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결코 흔들리지 않는 진실 자체의 마음입니다.
남보석과 같은 진실의 빛이 마음에서부터 곧게 뻗어 나온 대표적인 인물은 다니엘과 세 친구입니다. 다니엘은 왕의 명령이라도 그것이 하나님 뜻에 어긋날 때에는 결코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사자 굴에 던져질 것을 알았지만 한 번 정한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다니엘의 믿음과 절개를 매우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천사를 보내 사자의 입을 봉하심으로 다니엘이 조금도 상하지 않게 지켜 주신 것입니다.
다니엘 3장에는 다니엘의 세 친구가 어떻게 믿음의 절개를 지켰는지 나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상에게 절하라는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 붙잡혔습니다. 참 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며 하나님만이 경배받으실 분이시기에 그들은 결코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우상에게도 절하지 말라" 율법에 명시하셨으니,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으로라도 우상에게 절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곧고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타협하지 않습니다.
또한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질 상황에서도 전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살기등등한 왕의 위협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담대히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다니엘 3:17-18에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한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잃을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의는 저버릴 수 없다는 이들의 마음에서 초연하면서도 곧고, 짙푸른 남보석의 빛깔처럼 숭고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생명을 걸고 의를 지킨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풀무불에 던져진 이들이 머리털 하나 그슬리지 않을 정도로 지켜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그 결과 왕도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더욱 높임 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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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옥수
3. 결백과 희생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옥수"
새 예루살렘 성벽에 있는 세 번째 기초석은 "옥수"입니다. "옥수"는 회색, 청색, 적색을 띠는 것 등도 있지만, 보통 "반투명한 백색"을 띠고 있습니다. 옥수가 상징하는 영적인 마음은 "결백"과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결백(潔白)"하다는 것은 행동이나 마음씨가 깨끗하고 아무런 허물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허물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랑, 이것이 바로 옥수에 담긴 영의 마음입니다. 물론 썩어 없어질 육의 것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희생적인 사랑"이란, 내 것을 다 내어주되 돌아올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오직 주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줄 때 미련을 갖지 않으며 아낌없이 다 내주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 희생하면서 나중에 이만큼 돌려받으리라 계산하는 부모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해 자녀가 훌륭하게 성장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모도 자녀가 성인이 되면 대부분 무언가를 바랍니다. 자신들의 기대치만큼 자녀들이 해 주지 않을 때에는 서운해하기도 하고,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게 이렇게 하는가?" 하면서 노여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바라는 것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자녀를 사랑하여 희생한 듯 했지만, 변질되는 육의 사랑을 주었을 뿐입니다. 육의 사랑은 상대를 위해 희생한 만큼 자신도 상대에게 받기를 원하며, 자신이 기대한 만큼 받지 못하면 섭섭함을 느낍니다.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상대가 야속해 지고 미워져서 점점 상처받고 아파하다가 결국은 허무함만 남습니다.
이처럼 희생이 결여된 육의 사랑은 차라리 아니함만 못하기도 합니다. 정말 상대를 위해 희생한다면, 진리 안에서 내 것을 다 내주더라도 돌아올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돌아올 것을 기대하면서 주는 것은 이미 희생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아무 허물이 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러한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은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룻입니다. 룻은 모압 지방에 살았던 여인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아니지만 흉년을 피해 이스라엘에서 이주해 온 나오미의 아들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모압 지방으로 이주해 결혼한 나오미의 두 아들이 모두 죽고 맙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에 흉년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며느리들에게는 그들을 위해 친정인 모압 지방에 남을 것을 권합니다. 한 며느리는 처음에는 사양했지만, 결국에는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라가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아무 연고도 없는 낯선 곳이고, 시어머니는 나이가 많아 전적으로 룻이 섬겨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어머니를 잘 섬기면 받을 수 있는 유산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 옛말에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친부모라 해도, 아무 대가없이 계속 자신을 희생하는 자녀를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룻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과 같은 시어머니를 위해 희생적인 사랑을 합니다. 이러한 룻의 희생적 사랑은 단지 인간의 도리를 좇은 차원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롯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 믿음 안에서 나온 영적 사랑을 한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좇아 이스라엘에 도착한 후에도 참으로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열심히 들에 나가 일하고 얻어온 양식으로 정성껏 시어머니를 섬겼습니다. 이러한 룻의 진심어린 선행은 자연히 그곳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결국 룻은 시어머니의 친족 중 기업 무를 자인 보아스를 통해 많은 복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희생하고 낮추면 자신의 존재가치가 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희생하거나 자신을 낮추지 못하곤 합니다. 그러나 아무 허물없는 깨끗한 마음, 즉 어떤 사심도 없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드러납니다. 그 마음 안의 선과 사랑이 영적인 빛으로 다른 사람에게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희생적인 사랑의 빛을 셋째 기초석인 "옥수"의 빛깔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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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녹보석
4. 의와 푸름, 정의롭고 깨끗함을 의미하는 "녹보석"
새 예루살렘 성벽에 있는 네 번째 기초석은 '녹보석'입니다. 녹보석은 '에메랄드'라고 불리는 초록빛 보석입니다. 녹보석이 상징하는 영적인 마음은 '의와 푸름', '정의롭고 깨끗함'입니다. 이는 에베소서 5장 9절에 나오는 '빛의 열매'의 빛깔과 같습니다. 곧,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함께 어우러진 빛깔이 바로 녹보석의 영적인 빛깔과 같다는 뜻입니다. 선(善)과 의(義)와 진실이 함께 어우러져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의가 성립됩니다. 선만 있고 의가 결여되어서도 안 되고, 의만 있고 선이 결여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선과 의가 진실해야 합니다. 진실은 참이며, 참은 변함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과 의가 있어도 진실함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처럼 선과 의와 진실함이 함께 어우러진 참된 의의 빛을 낸 성경상의 인물에는 다윗이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 이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된 사람입니다. 사울 왕 당시,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울 때 다윗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적장 골리앗을 물리치고 승리합니다. 이 일을 통해 다윗이 백성의 사랑을 받자, 이를 시기한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선하고 의로우며 진실하게 사울을 대했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자신을 죽이려 하는 사울을 피해 오랜 시간 도망 다녔고,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을 때에도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다윗과 함께한 장수들이 사울을 죽이려 했지만, 다윗이 만류했습니다.
사무엘상 24장 6절에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 해도,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운 사울을 임의로 해치지 않았습니다. 사울을 죽이고 살리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월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다윗의 마음을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다윗의 의로움은 선(善)과 함께 나왔습니다. 사울은 자신을 죽이려고 했지만 다윗은 사울의 생명을 지켜 줬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오히려 선한 말과 행실로 갚았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선과 의는 참이었고 진실 자체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에 이와 비슷한 상황이 일어났을 때에도 다윗은 똑같이 선을 행했습니다. 사울이 다시 다윗을 죽이려 했지만 다윗은 또 다시 그를 살려 준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선과 의를 변함없이 나타내 보였습니다. 만약 다윗이 처음에 사울을 죽였다면 고생도 덜 하고 더 빨리 왕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과의 신뢰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육으로는 어려움을 당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의 편을 택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으면 그 이후로는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차원도 달라집니다. 다윗이 직접 사울을 해하지 않았어도 사울은 이방인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다윗은 하나님의 보장하신 대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또한 다윗이 왕이 된 후에도 강성한 나라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오늘날에까지도 이스라엘 역대 최고의 왕으로 꼽힙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근본 이유는 녹보석처럼 푸르게 빛나는 다윗의 정의롭고 깨끗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에스더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정의롭고 깨끗한 마음을 지닌 인물입니다. 에스더는 유다인으로 바사 제국의 왕후가 된 여인입니다. 그런데 바사 제국의 신하 하만의 계교로 유다 민족이 멸절 위기에 처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에스더는 자신에게 화(禍)가 미치지 않도록 뒤로 물러나 혼자만 살 길을 찾지 않았습니다. 살아도 자기 민족과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으리라는 마음을 먹고,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 3일 동안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께 간구하고 왕에게 담대히 나갔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대 반전의 역사를 이뤄 주셨습니다. 유다 민족을 멸절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고, 유다 민족을 멸절시키려 한 원수 하만 족속과 적들을 멸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끝까지 의를 저버리지 않는 마음은 하나님께서도 절대 저버리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의로 하나님께 인정받는다면, 어떤 큰 문제도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 순간을 넘기지 못하여 큰 축복과 응답의 기회를 놓쳐 버립니다. 자신에게 불리한 순간이 되면 마음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의를 지키려던 마음이 약해져 타협하거나, 심지어 불의한 길을 택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을 소망하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결코 자신의 유익을 위해 악인의 꾀를 좇아서는 안 됩니다. 소나무는 겨울철 매서운 찬바람 속에서도 홀로 푸르른 빛을 발합니다. 이처럼, 술수와 거짓이 난무한 이 세상에서 녹보석 같이 푸른 정의의 빛을 내는 모든 성도님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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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홍마노
5. 충성을 의미하는 "홍마노"
'홍마노'는 보통 '붉은 줄무늬 마노'로 불리는데, 이것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은 '충성'입니다. 만일 어떤 분야에서 자신이 맡은 것만 딱 해놓고 손을 뗀다면, 이것은 충성이라 할 수 없습니다. 급여를 받는 일꾼이 자기 업무를 잘 감당하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마땅히 자기가 해야 할 바를 한 것일 뿐입니다. 자신의 업무는 물론 시키지 않은 일까지도 마음을 쏟아 성실하게 이뤄 낼 때, 비로소 충성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가장이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돈을 버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는 것일 뿐, 충성하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머니와 아내로서, 또는 자녀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는 것을 충성이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충성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충성이 그가 속한 모든 곳에서 이뤄질 때, 온 집에 충성한다고 인정하십니다.
이러한 영적인 충성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의로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의로운 마음이란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원하는 마음, 교회가 부흥하고 발전하기를 원하는 마음, 직장이 번창하기를 원하는 마음, 가족이 행복하기를 원하는 마음 등과 같이, 나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도 잘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의로운 마음과 함께 나를 희생하는 마음이 있을 때라야 충성하는 행함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부흥하든 말든 나만 잘 믿으면 되지'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교회를 위해 희생하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충성을 찾아볼 수가 없고, 하나님께서도 의롭다 하시지 않습니다. 반면, '이처럼 복된 소식을 나만 알고 믿을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 '우리 교회가 더 부흥하고 발전하도록 해야겠다' 하는 의로운 마음을 가지고 희생하는 사람은 영혼 구원과 교회를 위해 충성하게 됩니다. 특별한 사명이 없어도 열심히 전도하며, 누가 시키지 않아도 부지런히 심방합니다. 열심히 영혼들을 돌아보며 사랑과 정성을 다하고, 자신에게 써야 할 물질까지 영혼들을 위해 쓰기도 합니다. 이처럼 의로운 마음 위에 희생하는 마음이 더해질 때 충성이 나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 그 이상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당하는 것, 이것이 충성입니다.
이러한 충성이 온 집에 충성이 되기 위해서는 선(善)한 마음이 더해져야 합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한 군데만 치우치지 않습니다. 마음에 선이 임하면 예전에는 몰랐거나 소홀했던 분야가 마음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서너 가지 사명을 맡으면, 각각의 사명에 따라 나름대로 경중을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 일반 회원으로 몸담고 있는 모임이나 사명보다, 자신이 머리인 모임이나 사명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우선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여러 사명을 맡았더라도 그 모든 분야에 충성합니다. '나는 A모임의 머리니까 B모임에 못 가도 이해해 주겠지' 생각하면서, 자신이 B모임에 못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B모임의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해 주느냐, 안 해 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B모임에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마음속의 선을 통해 느끼면서, 설령 B모임에 가지 못한다 해도 B모임의 일원으로서 충분한 도리를 하려고 노력하며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이는 마음에 쌓인 선의 분량에 따라 달라집니다. 마음에 선함이 적으면 자신이 소홀한 분야가 마음에 걸리지도 않습니다.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선한 사람은 마음에 걸리는 일은 그냥 무시하거나 지나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선인 줄 알면서 행하지 않고 있으면 스스로 견디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이 악을 발할 때 시원한 것처럼, 선한 사람은 선을 행해야만 시원하고 마음이 평안합니다. 그래서 선한 사람은 자연히 온 집에 충성할 수 있습니다. 직장과 가정에서도 자신이 마땅히 할 바를 하지 않으면 금방 마음에 걸림이 생기므로 이유를 대거나 핑계거리를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많은 직책을 맡은 여장년 성도님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다 보면, 상대적으로 남편과 자녀들을 위한 시간은 줄어들게 됩니다. 선한 마음으로 온 집에 충성하는 분이라면, 이럴 때에도 가족에게 베푸는 사랑은 줄어들지 않게 합니다. 비록 가족을 위해 보내는 시간은 줄었다 해도, 아내로서, 엄마로서 해야 할 일을 소홀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 일로 얼마나 바쁜지 알죠? 그러니 잘 못해도 이해해 주세요." 하면서 그냥 넘기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줄어든 만큼 더 진하고 뜨거운 사랑으로 남편과 자녀들을 섬기고 보살펴 주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내가 더 마음을 쓰자' 생각하며 항상 최선을 다해 정성껏 주변을 돌아봅니다. 그러면 가족과 주변 사람들도 점점 그 마음의 진실한 향을 맡게 되고, 선과 사랑도 느끼게 됩니다. 오히려 이해하고 도와주려 하게 되면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한 마음으로 온 집에 충성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 대해 민수기 12장 7절에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애굽에서 종 노릇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큰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애굽의 백성을 죽이고 도망쳐 나왔기 때문에 돌아갔다가 붙잡히면 어떤 형벌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을 치다가 갑자기 이렇게 큰 사명을 맡을 자신감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맡는 것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명에 순종하여 충성하는 마음으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은 장정만 60만 명으로서, 어린이와 노인, 여자까지 합하면 200만 명이 훨씬 넘었습니다. 이 많은 백성들은 마치 철없는 어린 아이처럼 툭하면 모세에게 불평했고, 때론 대들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끝까지 믿음과 사랑으로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한 번은, 백성들이 큰 죄를 범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멸하고 모세의 자손으로 큰 나라를 이루겠다 하셨습니다. 이때 모세는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어도 이렇게 되었으니 나도 어쩔 수 없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자신이 잘못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 회개하며 용서를 구했고,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간절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출애굽기 32장 31-32절에 기록된 대로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한 것입니다. 이처럼 모세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고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충성의 마음을 '홍마노'라는 보석의 빛깔로 나타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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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홍보석
6. 열심을 의미하는 "홍보석"
'홍보석'은 홍옥수나 루비처럼 진한 붉은 빛이 나는 보석입니다. 저는 1982년도에 교회 개척을 위해 기도하다가 환상으로 천국의 홍보석을 본 적이 있는데, 핏빛처럼 아주 붉으면서도 매우 투명했습니다. 당시 주님께서는 제 손에 홍보석을 쥐어 주시면서 "때가 이르면 네가 이 뜻을 알리라" 말씀하셨는데, 계시록 강해를 풀어 받던 1989년에 이르러 그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홍보석에 담긴 영적인 의미는 '열심'으로서, 뜨겁게 사명을 감당한 자, 정성을 다한 자에게 주신다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홍보석에는 '열심과 정성',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한 열정적인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홍보석과 같은 뜨거운 열정으로 하나님 나라에 헌신한 대표적인 성경의 인물은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로 그 생명이 끝날 때까지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행함을 보였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아 1차, 2차, 3차에 걸친 전도 여행을 통해 많은 영혼을 구원하며 여러 교회를 세웠고, 로마에서 순교 당하던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걸었던 길은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에 기록된 것처럼 매우 고되고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위험을 겪으면서 여러 번 죽을 뻔 했고, 유대인들에게 끊임없는 훼방과 핍박도 받았습니다. 사람으로서 견디기 힘든 수많은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에서도, 사도 바울은 그 길을 택한 것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어렵다, 잠시만 쉬고 싶다' 생각하지도 않았고, 마음이 요동하거나 두려워 떤 적도 없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8-29절에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고백한 대로, 자신보다는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염려할 뿐이었습니다.
영혼 구원에 대한 사도 바울의 뜨거움이 얼마나 컸는지는 로마서 9장 3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한 것입니다. 여기서 '골육의 친척'이란 혈연으로 이루어진 사람들만이 아니라, 사도 바울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을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이 구원될 수만 있다면 자신은 지옥에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영혼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뜨겁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열심이 얼마나 컸었는지 알 수 있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영혼 구원을 위해 열심과 정성을 다하는 마음을 홍보석의 붉은 빛으로 비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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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황옥
7. 자비를 의미하는 "황옥"
새 예루살렘 성벽에 있는 일곱 번째 기초석은 '황옥'입니다. '황옥'은 영어로 'Chrysolite(크리솔라이트 : 귀감람석)'인데, 올리브빛을 내는 'Olivine'(올리빈 : 감람석)도 황옥에 해당합니다. 황옥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은 '자비(慈悲)'입니다. 자비의 사전적인 의미는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풀어주신 영적인 뜻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능히 이해하는 마음', '사람으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능히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진리 안에서' 이해하고 용서한다는 것은 '선으로 이해하고 사랑으로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선으로 이해할 수 있고 사랑으로 포용할 수 있는 마음, 그것이 황옥이 상징하는 '자비'의 영적인 의미입니다. 이러한 자비가 마음에 임한 사람은 편견이 없습니다. '누구는 이래서 좋고, 누구는 저래서 싫다' 하지 않습니다. 싫은 사람도 없고, 미운 사람도 없습니다. 걸리거나 불편한 사람도 없고, 당연히 원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좋게 생각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명백히 드러난 큰 죄를 지은 사람을 대할 때도 긍휼히 대합니다. 이처럼 죄는 미워하되 그 사람은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것을 이해해 주며 포용하여 포근히 감싸주는 마음이 바로 자비입니다.
이러한 자비가 가장 크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마음에는 열두 보석의 마음이 모두 임해 있는데, 그중 자비에 해당하는 마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반하고 팔아넘길 사람이란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배척하거나 멀리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으로도 싫어하거나 미워하지 않으셨고,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킬 기회를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에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셨던 것처럼, 오히려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능히 용서하는 마음이 바로 자비입니다.
초대교회 스데반 집사에게도 이 같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악한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 60절에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마음에는 어떤 미움도 없었고,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자비의 열매가 온전히 맺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아름다운 자비의 마음을 황옥이라는 보석의 빛깔로 나타내셨습니다. 여러분도 모든 사람을 이해하며 포용하고 선대할 수 있는 마음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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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녹옥
8. 오래 참음을 의미하는 "녹옥"
'녹옥'은 영어로 'Beryl(베릴 : 녹주석)'이라고 하는 연한 청록색의 보석입니다. '녹옥'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해 범사에 '오래 참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오래 참음'이란 힘들게 억지로 눌러 참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악물고 참기도 하고, 주먹을 불끈 쥐고 몸을 부르르 떨면서 참기도 합니다. 분노, 혈기, 원망, 탄식, 미움 등이 마음에서부터 올라오지만, 표현하지 않으려고 눌러 참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오래 참음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악이 없고 오직 선만 가득하여 '참음'이라는 단어 자체도 필요 없는 마음,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오래 참음'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기록된 성령의 열매 중의 오래 참음이나, 사랑장이라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에 기록된 오래 참음도 모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차원의 오래 참음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개인적으로 상대를 사랑하기 위해 참는 것'인 반면, 성령의 열매 중의 오래 참음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하나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해 범사에 오래 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의 오래 참음이 사랑장의 오래 참음을 포함하는 더 큰 의미의 오래 참음입니다.
녹옥에 담긴 '오래 참음'은 이처럼 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인 성령의 열매 중의 '오래 참음'과 같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한 오래 참음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오래 참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이뤄지기까지 오래 참아야 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한 번 하신 말씀은 반드시 실행하시며, 변함이 없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어떤 약속을 받았다면 그것이 이뤄지기까지 오래 참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 편에서 하나님께 무엇을 구했다면 응답이 올 때까지 오래 참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 축복을 주어야 가장 좋을지까지도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마가복음 11장 24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끔 "나는 열심히 철야하고 금식도 했는데 응답을 못 받았어요" 불평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이는 농부가 씨를 심어놓고 곧바로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고 땅을 헤집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씨를 심었으면, 싹이 나고 자라나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까지 오래 참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농부는 좋은 열매를 얻기 위해 잡초를 뽑아 주고 해충을 막아주는 등 땀 흘리며 가꾸는 수고를 합니다. 이처럼 우리 편에서도 기도한 것을 하나님께 응답받기 위해 할 일이 있습니다. 믿음, 기쁨, 기도, 감사, 충성, 계명, 사랑이라는 일곱 영에 합당한 분량을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오래 참음의 시간은 온전한 응답을 받기 위한 시간임을 아셔서, 더욱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각자의 믿음에 맞춰 합당한 분량을 채우면 하나님께서는 지체 없이 응답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오래 참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4절 후반에 보면,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했습니다.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 속에서 어떤 상대라도 사랑하기 위해서는 오래 참음이 필요합니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믿어주고, 참아주며, 잘 될 것을 바라봐 주려면 오래 참아야 합니다. 내가 기대했던 것과 반대로 행동해도 그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어야 합니다. 이해해 주고, 감싸 주며, 용서해 주고, 양보해 주려면, 결국 오래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를 잘하는 분들을 보면, 이런 오래 참음이 많이 임해 있습니다. 전도 대상자가 나를 싫어해도, 심지어 욕하고 핍박을 해도 웃으면서 다가갑니다. 저 영혼이 구원받아야 한다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전도 대상자에게 선과 사랑 가운데 오래 참음의 본을 보이면, 결국 전도 대상자를 붙들고 있던 원수 마귀 사단이 견디지 못하고 떠나갑니다. 전도자가 끊임없이 선과 사랑으로 나아가니 그 빛으로 인해 어둠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도 대상자도 마음의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고, 결국 구원에도 이를 수 있습니다.
3) 자신의 마음을 개조하기 위한 오래 참음
'마음을 개조한다'는 것은 마음에서 비진리와 악을 뽑아내고 진리와 선을 심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을 개조할수록 믿음이 성장하는데, 갓난아이의 믿음에서 어린아이의 믿음으로, 이어서 청년의 믿음, 아비의 믿음으로 자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비의 믿음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자녀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개조하는 작업은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꼭 필요합니다.
이 작업은 밭을 개간하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돌을 골라내고, 잡초를 뽑아내고, 때에 따라 흙을 갈아엎어 줘야 합니다. 그래야 무엇을 심더라도 잘 자라서 열매를 맺는 좋은 밭이 됩니다. 사람의 마음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마음 안에서 악을 발견하여 벗어버리는 만큼 좋은 마음 밭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씨가 심겨질 때 금방 싹을 내고 잘 자라나 좋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또 밭을 개간할 때 힘쓰고 애쓰며 땀 흘리는 수고를 해야 하듯이, 마음을 개간할 때는 힘쓰고 애써 간절하게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의 능력을 받아 묵은 땅과 같은 육의 마음이 개간됩니다. 하지만 이 과정이 그리 쉽지만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힘들어하고 때론 낙심하며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래 참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신의 변화가 더디게 보일지라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의 사랑을 되새겨 보면서, 다시 힘을 내 마음 밭을 개간해 나가야 합니다. 아무 노력도 없이 '언젠가는 되겠지'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 밭을 온전히 개간했을 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바라보며 더욱 감사함으로 일궈 가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오래 참으면서 옥토 같은 마음을 가진 참 자녀로 변화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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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담황옥
9. 양선을 의미하는 "담황옥"
담황옥은 토파즈라 불리는 붉은 오렌지색의 투명한 보석입니다. 이 담황옥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은 '양선(良善)'입니다. 양선의 사전적 의미는 '어질고 착함'인데, 영적 의미에는 이보다 훨씬 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참고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도 양선이 있는데, 담황옥이 상징하는 양선과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하나인 양선은 영적 의미가 같습니다. 양선의 영적 의미는 '성령 안에서 선(善)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이와 비슷한 의미로, 세상에서는 '양심(良心)'이 있습니다. 옳고 그름이나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자기 나름의 기준으로서, 시대마다, 나라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러나 '양선'의 기준은 오직 하나입니다. 진리인 하나님 말씀, 오직 그것만이 변함없는 기준입니다. '내가 보기에 선'을 추구하는 마음은 영적 양선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과 이 선을 추구하는 마음이 바로 영적 양선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5절 전반에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낸다" 했습니다. 영적 양선이 임한 사람에게서는 자연스럽게 선이 배어 나오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선한 말과 선한 행실이 나옵니다. 향수를 뿌린 사람에게서 좋은 향기가 나듯이, 양선한 사람에게서 선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만 선을 추구하는 것은 양선이라 하지 않습니다. 선을 추구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선한 말과 행실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며 주변에 덕과 사랑을 베푸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양선입니다.
1) 진리 안에서의 선
하나님은 선이시기 때문에, 말씀인 성경도 선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담황옥의 빛깔, 곧 영적 양선의 빛깔이 유독 강하게 나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양선의 기준이 되는 '진리 안에서의 선'이 무엇인지 깨닫고, 자신의 양선의 분량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빌립보서 2장 1-4절에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했습니다. 이처럼, 주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비록 자기 생각과 맞지 않고 자기 성품에 맞지 않아도 마음을 같이해 주고 뜻을 합해 주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양선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알려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됩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그를 봤지만 그냥 피해서 가버렸고, 레위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제사장과 레위인이라면 하나님 말씀을 지식적으로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 곧 양선이 없으니 그냥 가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을 지나던 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 상처를 싸매 주고, 자기가 타고 있던 짐승에 그를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하고 떠나면서 만약 돈이 더 들면 자신이 돌아올 때 갚겠다는 약속까지 했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에게는 선을 좇아 행하는 양선이 마음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내 물질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택할 수 있는 마음이 바로 양선입니다.
다음으로, 마태복음 12장 19-20절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했는데, 바로 예수님의 양선에 대한 내용입니다. 양선한 사람은 들레지 않으며 아무와도 다투지 않습니다. 또한 겉모습에서도 양선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걸음걸이나 몸가짐, 언어 습관은 흠이 없고 교양을 갖춘 참으로 온전한 모습입니다. 이런 예수님 모습을 떠올리며 모든 몸가짐과 행실을 닮아 가시기 바랍니다. 잠언 22장 11절에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했습니다. 진리 안에서 선을 추구한다면 입술의 말도 달라지기 바랍니다.
2)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마음
마태복음 12장 20절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했습니다. 이는 '양선'을 표현한 가장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상한 갈대'란 '악한 세상에서 세파에 시달리고, 마음의 상처를 받아 그 심령이 상한 사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양선의 절정입니다.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마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심지'는 양초나 등잔불 등에서 불을 붙이기 위해 실이나 헝겊을 꼬아 꽂아 놓은 부분입니다. 심지가 꺼져 간다면 불씨는 남았어도 불꽃이 점점 시드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꺼져 가는 심지'란 '마음이 악으로 심히 물들어 영혼의 등불이 꺼져 가는 사람'이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마음'은 구원받을 가능성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다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신앙 안에서도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하여 시험 환난에 넘어져서 혼자서는 다시 교회에 나올 영적인 힘이 없는 사람입니다. 또는 아직 버리지 못한 육으로 인해 성도들에게 해를 끼치고 그 일이 민망하고 부끄러워 다시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지요. 신앙 안에서 먼저 되었으나 지금은 영적으로 나중 된 사람들 중에서도 자신도 사랑 받고 인정받기 위해 몸부림치는데 잘 안되니 때로는 속상하여 악을 발하는 사람입니다.
진정 양선한 사람이라면, 이런 사람들의 마음도 헤아리고 품을 줄 알아야 합니다. 흑백을 가리거나 옳고 그름을 논하여 상대를 꺾으려는 것은 양선이 아닙니다. 진실과 사랑으로 선대함으로써 악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고 감동을 주는 것이 진정한 양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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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비취옥
10. 절제를 의미하는 "비취옥"
비취옥은 옥수의 일종으로 반투명하며 청록색 빛이 나는 보석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숙함과 정결을 상징한다 하여 옛 여인들이 귀하게 여겼지요. 이러한 비취옥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은 '절제'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이 풍성하면 좋겠지만, 질서를 따라 아름답게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절제하지 못하고 과식하면 오히려 고통을 받습니다. 운동도 절제하지 못하고 과하게 하면 오히려 건강을 해칩니다. 이처럼 육적으로도 절제하지 못하면 그 후의 결과는 좋지 않습니다. 하물며 영을 추구하는 성도들이라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절제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디도서 1장 7-9절에 보면 교회의 감독된 자의 자격이 나오는데, '절제하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 안에서는 무엇을 하든지 진리로 분별하고 매사에 절제하면서 성령의 소욕을 좇아 해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고 행하면, 절제해야 할 때 절제할 수 있으므로 괜한 시험을 자초하지 않습니다. 또한 진리 안에서 곧장 바른 길을 가므로 형통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제치 못한 사람들은 일이 틀어지고 여러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영도 절제를 통해서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성령의 마지막 열매가 절제인 것도 절제가 모든 것을 적절히 조절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입니다. 기쁨도 절제해야 할 때가 있고, 사랑도 절제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성령 안에서도 마음에 온다고 해서 무조건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진리로 분별해 봐야 합니다. 절제의 열매가 부족한 사람은 성급히 굴다가 일을 망치거나 문제를 만들기도 하지만,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은 정확한 때를 맞출 줄 압니다. 이처럼, 영으로 들어간 사람에게도 절제는 꼭 필요한 열매입니다. 하물며 아직 육을 다 버리지 못한 사람에게는 더욱 절제의 열매가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뚜렷한 목적을 마음에 새기고, 이 세상에서 삼가 절제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세례 요한
믿음의 선진 가운데 절제된 삶을 보여준 인물로 세례 요한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 땅에 온 목적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함을 알고, 그것을 감당하기 전까지 세상과 완전히 구별되어 살았습니다. 홀로 광야에서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했으며, 메뚜기와 석청을 먹는 등 매우 절제된 삶을 유지했습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준비된 사람으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 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1장 11절 전반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나도 이제 절제된 삶을 위해 깊은 산속이나 외딴곳으로 가야겠다'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절제'하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 안에서 '마음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영으로 들어오기 전이라면 육신의 정욕을 철저히 절제하고 오직 성령의 소욕을 좇아야 합니다. 영으로 들어온 후에도 절제를 통해 때에 따라 영의 각 마음의 강약을 조절하여 전체적으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비취옥'의 빛깔은 바로 이런 절제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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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청옥
11. 청결함과 거룩함을 상징하는 "청옥"
새 예루살렘 성벽에 있는 열한 번째 기초석은 '청옥(Jacinth)'입니다.청옥은 청색을 띠는 투명한 보석으로서, '청결함'을 상징합니다. '청결'의 사전적인 의미는 '맑고 깨끗함'인데,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죄가 없는 상태', 즉 '어떤 흠도, 점도, 티도 없는 깨끗한 마음'을 청결하다고 인정하십니다.
마태복음 15장을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장로의 유전을 따라 먹기 전에 깨끗이 손을 씻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하고 꼬투리를 잡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시며 그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말씀합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5장 19, 20절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하시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청결이 무엇인지 깨우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손이나 몸을 청결히 하려면 물로 씻듯이, 마음을 청결하게 하려면 영적인 물로 씻어야 합니다. 영적인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히브리서 10장 22절에 보면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만큼 깨끗한 참 마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에 '버리라', '하지 말라' 하신 대로 순종하면, 점점 마음에서 비진리와 악이 씻겨 나갑니다. 또한 '하라', '지키라' 하신 말씀대로 순종하면, 세상 죄악에 다시 물들지 않도록 계속해서 맑은 물을 공급받아 늘 깨끗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청결한 사람에게는 복이 주어집니다.
마태복음 5장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말씀한 대로,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할 수 있는 복이 주어집니다. 이는 최소한 3천층, 더 나아가 새 예루살렘에도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본다'는 진정한 의미는 단지 '본다'는 데 그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을 만나고, 도우심을 체험한다'는 의미까지 포함됩니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참으로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과 동행했지만, 청결한 마음을 이루어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던 인물로는 에녹이 있습니다. 창세기 5장 21~24절에 보면, 65세 때부터 300년 동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심으로 세상에 있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고, 산 채로 하늘로 옮겨진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5절에도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죄가 전혀 없는 깨끗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자, 이 땅에서도 늘 동행하시다가 살아 있는 채로 하늘로 올리신 것입니다. 그때 에녹의 나이는 365세였는데, 그 당시는 사람들이 900세 이상 살던 때이므로 오늘날의 나이로 환산해 보면 대략 30대 초중반입니다. 하나님께서 한창 젊은 나이에 그를 데려가신 이유는 그가 너무 사랑스러우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보다는 아름다운 천국에 있게 하시고, 하나님 곁에 더 가까이 두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에녹도 어느 날 갑자기 성결된 것은 아닙니다. 65세까지 나름대로 연단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5장 19절에 보면, 에녹의 아버지 야렛은 그를 낳은 후에도 8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습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많은 형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많은 형제들 중 누구와도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형제들보다 더 가지고자 하지 않았고 항상 양보해 주었으며, 자신이 더 인정받으려 하지 않았고 오직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습니다. 다른 형제가 더 사랑받는 것을 보아도 언짢아하지 않았습니다. 시기, 질투가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에녹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물론이고, 부모님에게도 항상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욕심이나 사사로운 감정도 없었으며,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뤄갔습니다. 이렇게 청결한 마음을 만들어 가면서 65세가 되었을 때, 마침내 에녹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수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와 동행해 주시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세상을 바라보지 않음은 물론, 세상 어떤 것보다 더욱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순종하며 형제들과도 우애가 깊었지만,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또한 하늘과 자연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즐겨했습니다. 잠언 8장 17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하신 말씀처럼, 에녹이 하나님을 심히 사모하며 찾고 갈망함으로 하나님께서 동행하신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어린아이를 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아이들의 깨끗함이 보는 사람에게도 전달되어 마음을 상쾌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그러합니다. 자꾸 보고 싶고, 함께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결한 마음을 이루어 아버지께서 보고 싶어 하시고 함께 있고 싶어 하는 자녀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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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자수정
12. 아름답고 온유함을 상징하는 "자정"
새 예루살렘 성벽에 있는 마지막 열두 번째 기초석은 자수정이라고도 불리는 '자정'입니다. 자정은 보랏빛을 내는 투명한 보석으로서, 그 빛이 고상하고 아름다워 예로부터 귀족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하나님께서도 자정이 상징하는 '온유'를 아름답다 하십니다. '온유'는 사랑장에도, 팔복에도,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도 나오는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맺히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사전에서는 '온유'를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 정의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여기시는 온유한 마음은 이런 면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온유한 마음은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큰 마음'으로서, 솜털같이 포근하고 부드러워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 모든 것을 선으로 이해해 주고 사랑으로 감싸 줄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입니다.
아무리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졌다 해도 그것이 마음속에만 있으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행함으로 선과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힘을 얻고 따뜻함을 느끼며, 마음의 쉼을 얻게 해 주는 '덕(德)'도 함께 필요한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선입관이나 편견을 가지고 상대를 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에게는 포근히 안길 수 있습니다. 마치 더운 여름 날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주는 큰 나무와 같아서, 편히 쉴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남편이 이처럼 큰 나무같이 크고 넓은 마음으로 온 가족을 포용한다면,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고 사랑할 것입니다. 아내 역시 솜털같이 부드러운 마음이라면, 남편은 편안함을 느끼고 쉼을 얻으며 더욱 아내를 사랑할 것입니다. 또한 이런 가정에서 자라는 자녀들은 포근한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힘을 얻으니 혹여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난다 해도 이를 잘 이겨내어 바르고 건강하게 성장합니다. 이처럼 영적인 온유를 이룬 사람을 통해, 주변의 영혼들은 쉼을 얻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영적으로 온유한 사람을 참으로 '아름답다'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합니다. 물질을 공급해 주기도 하고, 자신의 명예나 권세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육적인 방법으로 진심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잠시 자기 필요에 의해 도와주다가도 상황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온유한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자연히 깃들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었던 평안을 느끼고 힘을 얻으면서, 스스로 마음을 굽히고 들어와 그 안에 머물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에게는 많은 영혼이 깃들게 되는데, 이것이 곧 영적인 권세가 됩니다.
마태복음 5장 5절에 보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땅', 곧 '흙'으로 지어진 사람의 마음을 많이 얻는다는 표현으로써 많은 영혼을 품어 진리로 인도한 상급으로서 천국에서 넓은 땅을 받는다는 의미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민수기 12장 3절에 하나님께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2백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켰고, 광야에서 약 40년을 인도했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듯 수많은 백성들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한 것입니다.
이처럼 영혼들을 갈무리 하는 사명은 물론, 그 어떤 사명이라도 온유한 마음으로 감당하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각각 다른 환경에서 각각 다른 성품을 가지고 자라기 때문에, 똑같은 마음과 생각을 가진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세상 속에서 나를 비우고 다른 사람을 품을 줄 아는 온유한 마음은 더욱 아름답게 빛나는 것입니다.
===인치심을 받은 십사만 사천 명
1. 이 일[=여섯째 인 떼심 관련 초자연적 천재지변=지진, 산-섬 이동(지각변동/이동), 해(일식)와 달(bloody moon) 손상, 별들이 추락(유성 소나기), 하늘 말림 변화들]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일곱째 인 떼심에 속발되어 나타날, 점차 극렬해지는 보응 심판 수단>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2.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3.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4.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각 나라에서 온 무리
5. ○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6.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8.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종려가지=야자나무 가지, 바로 샘 곁에 자람 = 광야시절, 약속하신 그 대로 장막절의 누림<영원히 함께 거하사 친히 모든 공급-만족-누림이 되시는 Q>을 의미 ...이들은 우주적 교회의 일원이다..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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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elation 7 Amplified Bible
===An Interlude
1 After this I saw four angels stationed at the four corners of the earth, holding back the [a]four winds of the earth so that no wind would blow on the earth or on the sea or on any tree.
2 Then I saw another angel coming up from the rising of the sun, holding the seal of the living God; and with a loud voice he called out to the four angels to whom it was granted [to have authority and power] to harm the earth and the sea,
3 saying, “Do not harm the earth nor the sea nor the trees until we [b]seal (mark) the bond-servants of our God on their foreheads.”
===The 144,000
4 And I heard how many were sealed, a hundred and forty-four thousand; [twelve thousand] sealed from [c]every tribe of the sons of Israel:
5 Twelve thousand were sealed from the tribe of Judah, twelve thousand from the tribe of Reuben, twelve thousand from the tribe of Gad,
6 twelve thousand from the tribe of Asher, twelve thousand from the tribe of Naphtali, twelve thousand from the tribe of Manasseh,
7 twelve thousand from the tribe of Simeon, twelve thousand from the tribe of Levi, twelve thousand from the tribe of Issachar,
8 twelve thousand from the tribe of Zebulun, twelve thousand from the tribe of Joseph, and twelve thousand from the tribe of Benjamin were sealed (marked, redeemed, protected).
===A Multitude from the Tribulation
9 After these things I looked, and this is what I saw: a vast multitude which no one could count, [gathered] from every nation and from all the tribes and peoples and languages [of the earth], standing before the throne and before the Lamb (Christ), dressed in white robes, with [d]palm branches in their hands;
10 and in a loud voice they cried out, saying, “Salvation [belongs] to our God who is seated on the throne, and to the Lamb [our salvation is the Trinity’s to give, and to God the Trinity we owe our deliverance].”
11 And all the angels were standing around the throne and around the [twenty-four] elders and the four living creatures; and they fell to their faces before the throne and worshiped God,
12 saying, “Amen! Blessing and glory and majesty and wisdom and thanksgiving and honor and power and might belong to our God forever and ever. Amen.”
13 Then one of the elders responded, saying to me, “These who are dressed in the long white robes—who are they, and from where did they come?”
14 I said to him, “My lord, you know [the answer].” And he said to me, “These are the people who come out of the great tribulation (persecution), and they have washed their robes and made them white in the blood of the Lamb [because of His atoning sacrifice].
15 For this reason, they are [standing] before the throne of God; and they serve Him [in worship] day and night in His temple; and He who sits on the throne will [e]spread His tabernacle over them and shelter and protect them [with His presence].
16 They will hunger no longer, nor thirst anymore; nor will the sun [f]beat down on them, nor any [scorching] heat;
17 for the Lamb who is in the center of the throne will be their Shepherd, and He will guide them to springs of the waters of life; and God will wipe every tear from their eyes [giving them eternal comfort].”
===Footnotes
Revelation 7:1 The Jews and other ancient peoples were very observant of the four winds, that is, the winds that came from each point of the compass. It was said in the Talmud that if the winds ceased to blow, the world could not continue to exist.
Revelation 7:3 The seal indicates both ownership and protection by God.
Revelation 7:4 The tribe of Dan is omitted from the following passage without explanation. The tribe of Manasseh, Joseph’s older son, replaces Dan, so the count remains at twelve.
Revelation 7:9 I.e. symbols of victory and joy used on festive occasions.
Revelation 7:15 Lit pitch His tent.
Revelation 7:16 Lit f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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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7장 (개요)
본 장에 수록된 내용은 앞으로 있을 이 세상의 큰 재난을 예언하는 여섯째 인이 개봉된 후에 일어난 일들이다.
그리고 앞으로 있을 교회의 큰 혼란을 경고하는 일곱 나팔 소리들이 울러펴지기 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이 양자 사이에 있는 일종의 안위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큰 재난의 때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은혜와 위로가 간직되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Ⅰ. 바람을 붙잡아 두심(1-3).
Ⅱ. 하나님의 종들을 인치심(4-8).
Ⅲ. 천사들과 성도들이 이 일을 두고 찬양함(9-12).
Ⅳ. 그리스도께 충성하고 그를 위해 고난 당한 성도들이 누릴 영광과 축복에 대한 묘사(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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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환상(계 7:1-12)
Ⅰ. 여기서 우리는 바람을 붙잡아 두는 기사를 읽을 수 있다.
아마 여기서 바람이 의미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오도와 미혹의 바람, 즉 크게 잘못 인도할 종교적인 과오와 타락일 것이다. 때로 성령이 바람으로 비유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서로 엇갈려 불어오는 "사망의 바람", 곧 악한 영들을 암시하고 있다.
사방에서 불어닥칠 그 바람은 하나님의 동산과 포도원인 교회를 크게 해하며, 가지를 꺾어뜨리며 과일을 시들게 한다.
마귀는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마귀는 큰바람을 이용하여 욥의 맏아들의 집을 무너뜨렸다.
악은 바람과 같다. 뿌리 없는 자들을 흔들어 놓으며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엡 4:14).
1. 이것들은 "땅의 바람"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 바람들은 지면 가까이 에만 낮게 불기 때문이다. ...하늘은 언제나 맑고,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
2. 이 바람들은 "땅 네 모퉁이에 선" 네 천사들의 조정에 의해 제지당하고 있다.
이는 악한 영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작용할 수 없다는 것과 천사들은 교회의 원수들을 제지시킴으로 교회를 돕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3. 천사들이 바람을 제지하고 있는 기간은 어느 한 기간이며,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이다.
하나님은 시험과 유혹의 때에 그의 종들을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돌봐 주시며, 거기에 물들지 않도록 안전한 길을 마련해 놓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선 그들을 인치심 통해 든든하게 세워 주시고 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까지 그 성품이 자라도록 [시련을 통해] 그들을 단련하신다.
그들이 시련 받는 때도 여전히 모두 하나님의 품에, 장중에 있고, 주님 마음과 손바닥에 그들의 이름을 새겨 놓으셨다.
Ⅱ. 하나님이 종들에게 인치시는 것을 여기서 살펴보자.
1. 이 일은 천사 곧 "다른 천사"에게 맡겨졌다.
어떤 천사들이 사탄과 그의 부하들이 활동하지 못하도록 제지하고 있는 동안, 다른 천사들은 하나님의 충실한 종들을 가려내기 위해 그들에게 표시를 하는 일을 하기 위해 고용되었다.
2. 그들이 구별되는 방법은 그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인이 찍히는 것이다.
그 인이 이마에 찍히리만큼 그 자신도 알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뚜렷하게 공개된다.
그리고 그 표시로 말미암아 그들은 가장 흉악한 때에도 자비와 안전의 혜택을 받도록 구별되었다.
3. 인 맞은 자의 수를 살펴보자.
(1)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의 수는 각 지파마다 일만 이천이요, 도합은 "십 사만 사천" 명이다.
여기에 나오는 지파의 명단에 단 지파가 빠졌다. 아마 그들은 너무나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파의 순서도 바뀌었다. 아마 하나님께 대한 각 지파의 충성의 다소에 따라 작성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숫자가 예루살렘 멸망시에 살아남도록 자비를 입게 될 유대인들의 숫자를 나타내었다고 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 때가 이미 지나갔으므로 보다 더 넓게 그 숫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종말시에 남겨놓도록 선택한 자의 숫자에 해당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예루살렘의 붕괴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면(사실 붕괴되었다는 증거를 대기도 곤란하다) 이 숫자는 다만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우신 선택에 의해 그 백성 중에 남겨놓으시고자 하신 숫자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만 우리는 하나의 무제한적인 수를 나타내기 위해 제한된 수를 사용한 경우를 찾아 볼 수 있다.
(2) 이제 이어지는 광경을 보라, 다른 족속들 가운데서 구원받은 사람들에 관한 기사가 있다(9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이 구원받았다."
그들이 [이마에] 인을 맞았다는 말은 비록 없지만, 그들은 모든 족속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그의 교회로 인도하심을 받고, 보좌 앞에 서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보혈과 극진한 아버지의 사랑으로 인침받았으리라!!]
①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 가운데서 보다 이방인들 가운데서 더 많은 영혼들을 추수하실 것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사 54:1).
② 여호와께서는 누가 그의 사람인 것을 아시며, 위험한 시련의 때에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신다.
③ 하나님의 교회는 비록 사악한 세상과 비교해 볼 때 적은 무리에 불과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조직이다.
실제에 있어서는 그 조직이 크며 앞으로도 더욱 확장되어 나갈 것이다.
Ⅲ. 천사들과 성도들이 이를 두고 부른 찬양을 들을 수 있다(9-12절).
1. 그 찬양은 유대의 남은 자들을 남겨 놓으신 것과 그들을 불신앙과 파멸에서 구원하여 주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돌리는 성도들의 찬양인데(내가 보기에), 그 성도들은 이방인 신자들인 것 같다.
유대의 교회는 이방인의 교회를 위해 그들이 믿기 전에 기도했고, 이방인의 교회는 다른 유대인들은 멸망당하는 판에 그래도 그 중에서 많은 유대인들을 남겨 주시는 은혜를 보이신 것을 인해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고 있는데, 여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1) 찬양하는 성도들의 자세에 대해 살펴보자.
그들은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 즉 창조자와 중보자 앞에 서서 찬양하였다.
종교적인 예배의 행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간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시에 하나님의 존전에 나간다는 자의식을 가져야 하며,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한다.
하나님의 보좌는 중보자가 없이는 죄인들이 감히 근접할 수 없는 곳이다.
(2) 그들의 복장에 대해 살펴보자.
그들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서서 찬양하였다.
그들은 칭의와 성결과 승리의 옷을 수여 받았으며, 흔히 정복자들이 개선식에 임할 때에 하듯이,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다.
이러한 영광스러운 모습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 갈 길을 마친" 하나님의 충성된 종들이 마지막으로 취하게 될 모습이다.
(3) 그들의 직분에 대하여 알아보자.
그들은 "큰 소리로 외치기를,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교회가 이 세계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세력이 확장되어지기를 바라는 "호산나" 소리 또는 하나님과 어린양에 대해 그들이 베풀어주신 위대한 구원에 대해 찬양을 돌리는 "할렐루야" 소리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찬양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로 관련지어졌다. 아버지는 구원을 계획하시고, 아들은 그 구원을 완성하시었다.
그 구원을 찬양하는 자들은 여호와와 어린양을 축복해야 하며, 또 그렇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를 공개적으로 할 것이며 영원히 그렇게 할 것이다.
2. 천사들의 찬양에 대하여(11,12절) 살펴보자.
(1) 그들이 서 있는 장소는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엎드려 있으며,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 그 주변에 서 있는 곳이다.
(2) 그들의 찬양의 자세는 매우 겸손하며 크신 외경을 나타내는 태도이다.
"그들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였다."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며, 아무 죄도 짓지 않았고, 또 언제나 하나님의 앞에 있던 천사들도 그들의 얼굴을 가리웠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 앞에서 그들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것을 보라!
그렇다면 우리 연약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출전에 나갈 때는 얼마나 더 겸허한 자세를 취해야 하며, 깊은 외경심을 품어야 하겠는가!
우리 역시 그의 앞에 엎드려야 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모든 찬양에는 영적인 외경심과 겸손한 태도가 모두 있어야 한다.
(3) 천사들의 찬양의 내용에 대해 알아보자.
그들의 찬양은 성도들의 찬양에 대해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이다.
하늘에서는 천사들과 성도들 사이에 온전한 조화가 이룩된다. 그리고 나서 천사들은 그들 자신들의 찬양을 덧붙다.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 지로다. 아멘."
① 그들은 모든 지혜와 능력과 힘이 하나님께로서 비롯되며, 모든 영광을 그가 받으셔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② 하나님은 찬송과 영광과 축복을 영원히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라고 그들은 선언하며, 또 그들은 "아멘"으로 이를 확언해 주고 있다.
우리 하늘의 일이 어떤 것인지 알며, 또 우리의 마음이 늘 그것을 바라며, 또 그런 생활에 훨씬 더 젖어 있기 위해서는 그런 찬양의 생활을 지금의 세상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더우기 저 세상에서 우리가 축복된 백성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찬양도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더욱 열심히 찬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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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이 누릴 영광과 축복(계 7:13-17)
여기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충성스럽게 섬겼으며, 그를 위해 고난 당한 성도들이 누릴 영광과 축복에 대한 묘사를 볼 수 있다.
Ⅰ. 장로들 중의 하나가 질문을 하였는데 이는 자기가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요한에게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다.
목사들은 교인들로부터, 더욱이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은 성도들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
하늘에 있는 매우 낮은 성도 하나가 이 세상에 있는 위대한 사도보다 아는 것이 더 많다.
그런데 그 질문을 두 가지로 하고 있다.
1.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냐는 것"과 또
2. "그들이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그것은 아가서 3장 6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냐"고 묻는 것과 같은 놀라움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여진다.
충성된 성도들은 우리의 주목과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주목해야" 한다.
Ⅱ. 사도의 응답은 그 자신의 무지로 전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며, 그 장로에게 알려 주기를 간청하는 것이었다.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 자는 그 자신의 무지를 나타내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말아야 하며, 누구든지 그것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자에게 그것을 배우고자 하는 소원을 감추지 말아야 한다.
Ⅲ. 승리의 종려 가지를 손에 들고 "흰옷을 입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많은 수의 순교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사도 요한은 듣게 되었다.
그리고 주의를 환기시키도록 일깨움을 받았다.
1. 그들은 전에 매우 천하고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들은 전에 큰 환난을 당했는데,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으며, 사탄의 유혹을 받았으며, 때로는 그들 자신들의 영혼이 괴로움을 당했으며, 물질이 궁핍하기도 했으며, 옥에 갇히기도 했으며, 목숨을 잃기도 했다.
하늘에 가는 길은 많은 환난 가운데를 통하고 있다. 그러나 환난이 아무리 심하다 할지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환난을 용케 참고 이기면, 하늘에서의 우리의 생활을 더 영광스럽게 만들어 준다.
2. 그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영광과 축복은 그들이 애써 준비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었다"(14절). 그것은 순교자 자신들의 피가 아니라, 어린양의 피이다.
어린양이 되어야 죄를 없이할 수 있으며, 인간의 영혼을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하고 정결하게 할 수 있다.
다른 피는 다만 얼룩지게 만들뿐이다. 성도들의 옷을 희고 깨끗하게 하는 것은 오직 어린양의 피뿐이다.
3. 그들이 누릴 축복이 다음과 같이 준비되어 있다.
(1) 그들은 매우 축복된 자리에 서 있다. "그들은 밤낮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다." 또 "그들 가운데 살고 있다." 그들은 충분한 기쁨 가운데 살고 있다.
(2) 그들은 하나님을 계속적으로 섬기는 직분으로 말미암아 축복을 누리고 있다.
그들에게는 약함도, 지루함도, 염려도 없다. 천국은 고통을 모르는 가운데 섬기는 곳이다.
게으름을 모르는 안식의 곳이다. 다시 말해서 기쁨이 충만한 안식을 찬양하는 곳이다.
(3)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불편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축복을 누리고 있다.
① 그들은 모든 궁핍으로부터 자유롭다.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한다." 모든 요구가 공급되며, 궁핍에서 오는 불안감이 사라졌다.
② 모든 질병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들은 이제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한다.
(4) 그들은 주 예수의 사랑과 인도하심 가운데서 축복을 누리고 있다.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신다."
예수께서 그들의 영혼을 새롭게 하고, 기쁘게 하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주시기 때문에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한다.
(5) 그들은 모든 슬픔으로부터 건짐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축복을 누리고 있다.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전에는 죄와 고통 때문에 슬픔을 당하고 많은 눈물을 흘렸으나, 하나님이 친히 부드러운 은혜의 손으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매 다시는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이 때 하나님은 눈물을 흘리는 사랑하는 자녀를 본 아버지처럼 그들을 대하사, 그들을 유도하여 주시며,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며,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신다.
이 때문에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슬픔을 감당할 수 있으며, 이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을 능히 이길 수 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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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제 7장
=====7:1
@이 일 후에. - 이는 환상의 새로운 국면의 시작으로 본장이 여섯째 인의 재앙과 일곱번째 인을 떼는(8:1) 그 사이에 일어나는 것임을 나타낸다.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 '네 천사'는 바람을 맡은 천사로서 이들은 자연계를 다스리는 천사들이다(Mounce),
한편 '땅 네 모퉁이'는 세상의 모든 곳에서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을 예언한 사 11:12의 '땅 사방에서'와 동일한 의미의 표현으로 온 세상을 가리킨다.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 '바람'은 파괴나 전쟁의 재앙을 상징한다(렘49:36-38;51:1). 그러기에 '땅의 사방의 바람'은 종말에 온 세상에 임할 커다란 재앙을 암시한다(왕상 19:11; 욥 1:19;21:18; 시 1:4;14:18; 단 2:35;7:2). 한편 '붙잡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라툰타스'(* )는 '단단히 붙잡다'는 의미를 가진 '크라테오'(* )의 현재 능동태 분사로 계속해서 재앙을 행사치 못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Charles).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 '불지 못하게 하더라' 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나 메 프네에 아네모스'(* )는 현재 능동태 가정법으로 '바람이 계속해서 불지 못하도록'이란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인치기까지 재난을 중지시킨 사실을 암시한다(2, 3절).
=====7:2
@또 보매 다른 천사가. - '다른 천사'에 대해서 혹자는 그리스도로 해석하나 (Walvoord, Ladd) 앞서 언급된 '네 천사'외에 또 다른 천사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Johnson, Mounce, Morris, 8:3 주석 참조). 본절에서 다른 천사의 역할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인을 쳐 보호 받도록 하는 것이다(3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 '살아 계신 하나님'이란 표현은 묵시 문학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으로 이교의 죽음은 우상에 반하여 창조자의 살아 계심을 부각시키는 표현이다(4:9, 10;15:7; 마 16:16;26:63; 히 3:12). 요한은 이 표현을 사용하여 비록 다른 천사가 하나님의 인을 친다 할지라도 그 주체는 하나님이심을 시사한다. 한편 '인'의 헬라어 '스프라기다'(* )는 자신의 문서나 노예, 혹은 소유물등에 소유권이나(엡 1:3), 보증(고전 1:22)을 나타내는 표시를 뜻한다. 이는 짐승의표와 대조를 이루어(13:16)인을 맞은 백성들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소유사 되며(14:1)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호나 안전을 보장받는 자임을 시사한다.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 '해 돋는 데로부터'의 헬라어 '아포아나톨레스 헬리우' (* )는 문자적으로 '동쪽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인을 가진 다른 천사가 동쪽에서 올라온다는 사실에 대한 해석은 다석 가지이다. (1) 혹자는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 문에서 올라온다는 예언의 성취로 해석한다(겔 43:4,Swete). (2) 혹자는 메시야가 동방에서 탄생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ibylline 3:652, Erbes, Lohmeyer). (3) 혹자는 '동쪽'이 묵시 문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일종의 자세한 묘사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Mounce). (4) 혹자는 예수의 탄생과 관련하여 동쪽에서 별을 보며 박사들이 온 사실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마 2:1,Barclay, Morris). (5) 혹자는 모든 생물에게 생명을 주는 태양이 동쪽에서 솟아오르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암시한다고 가리킨다(De Wette, Hengstenberg). 이러한 다양한 견해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는 어렵다.
=====7: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 '우리 하나님의 종들'에 대하여는 몇몇 해석이 있다. (1) 혹자는 '하나님의 종'들(1:1;2:20;19:2, 5;22:3,6)과 '우리 하나님'(10, 12;12:10;19:1, 5)을 합하여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engel). (2) 혹자는 하나님께 봉사함에 있어서 천사들과 비할 수 있는 존재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Robertson). 두 가지 견해 중 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장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인침을 통해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마에 '인침'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공개적으로 임할 마귀의 권세로 부터 하나님의 종들이 보호받는 것으로 해석한다(Charles, Clark). (2) 혹자는 이기는 자가 받게 될 흰 돌(2:17) 혹은 성전의 기둥으로 해석한다(Rist). (3) 혹자는 성령 혹은 초대교회 이후의 세례로 해석한다. 세 가지 견해중 첫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인'은 소유나 보호를 나타내는 것으로 (9:4;14:1;겔 9:1-7;딤후 2:19) 짐승의 미혹을 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 대상에서 벗어나 승리와 보호를 약속받는 것을 시사한다(13:7;16:2;20:4, Johnson).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 '해하지 말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아디케세테'(* )는 강한 부정 명령의 능동태 가정법으로 '해하기 시작하지 말아라'는 의미이다. 이는 인침을 받은 자는 짐승의 미혹에 기만당하지 않고 종말의 재앙에서 보호 받아 승리할 것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7:4
@내가 인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 '인맞은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에스프라기스메논'(* )은 완료 수동태 분사로 더이상 변함이 없는 완료된 수를 요한이 들었음을 나타낸다.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중에서. - '이스라엘'에 대한 해석은 본서에서 가장 난해한 해석 중의 하나로 일반적으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이스라엘을 문자적 의미로 취급하여 유대인 성도들로 해석한다(Bengel, Clarke, Walvoord). (2) 혹자는 '이스라엘' 을 문자적 의미가 아닌 영적 의미로 해석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 즉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한다(De Wette, Ladd, Johnson, Moffatt, Charles, Plummer,Vincent, Kiddle, Rist).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서에서 교회는 어린양의 신부로, 새 예루살렘 성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예수를 따를는 자를 참이스라엘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14:4;15:1ff. ;21:9-12). 더욱이 5-8절까지 언급된 12지파명도 구약성경에 나타난 12지파명과 다르다.
@인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 - '십 사만 사천'이 누구를 나타내는가에 대한 견해는 세가지이다. (1) 혹자는 순교한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Kiddle,Caird). (2) 혹자는 '이스라엘'자르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십 사만 사천'도 문자적으로 인치심을 받고 보호함을 받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 해석한다(갈 6:16, Walvoord,Richardson). (3) 혹자는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십 사만 사천을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완성된 교회로 해석한다(롬 2:28, 29;9:6, 7, Alford, Swete, Beckwith,Vincent). 이 세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한편 144,000에 대한 상징적 숫자 해석은 (3 * 4)** 2 * 10 ** 3 = 144,000이다. 3은 하나님의 수이며 4는 땅의 수로서 곱한 수가 완전수인 12이며, 이 12의 제곱과 충만수 10의 세제곱이 곱해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충만함을 의미한다(Greijdanus, Lohmeyer, Ladd,Johnson).
=====7:5,6,7,8
@유다 지파 중에 인맞은 자가...일만 이천이라. - 요한은 인맞은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을 열거한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이름과 순서와 내용은 문자적인 의미보다는 영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Ladd, Lohmeyer, Hendriksen). 왜냐하면 12지파의 순서가 창세기나 에스겔서와 다를 뿐만 아니라 기록된 방식이 독특하여 영적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점에서 비롯된 본문의 특징은 다섯 가지이다. (1) 구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야곱의 장자인 르우벤이 먼저 등장하는 것과는 달리(창 35:22-26;신 33:5-25) 본문에서는 유다 지파가 가장 먼저 등장한다. 이는 유다 지파에서 메시야가 나신 것을 반영하고 있다(창 49:10;대상 5:2;히 7:13, 14, Johnson, Mounce, Morris). (2) 본문에서는 단 지파가 생략되어 있다. 이에 대해 혹자는 '단'(* )이 부주의로 '만'(* , man, '사람')으로 기록되었거나(Spitta, Bleek) 혹은 우상 숭배로 인해서 고의적으로 제외되었거나(창 49:17;삿 18:18, 19, 30;왕상 12:29, 30, Clarke), 아니면 렘 8:16을 확대 해석하여 단 지파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온다는 랍비들의 해석과 연관되어 제외되었다고 한다(Weiss, Charles, Alford, Walvoord). (3)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동시에 등장하지 않고 본문에서 에브라임은 생략되고 대신 요셉이 삽입되어 있다. 이는 에브라임도 단 지파와 마찬가지로 우상 숭배로 인해서 생략되었고(호 4:17) 단 지파의 생략으로 12숫자를 맞추기 위해 요셉이 삽입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Johnson, Mounce). (4) 레위 지파의 삽입이다. 요셉 지파가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로 나뉘어 12지파에 들어가고 레위 지파가 12지파에서 빠져 제사장 지파로서 신분이 격상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반면에 본문에서는 레위 지파가 삽입되어 혈통적 제사장 지파가 그리 중요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5) 모든 지파에 '중에 일만 이천'이 반복된다. 이는 12의 1,000배로 완전하고 큰 숫자임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동일하게 '...중에'(* , 에크)를 반복하여 인맞은 자들이 선택된 무리임을 암시해준다(Johnson).
=====7:9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은 앞서 언급된 십사만 사천과 본절 하반절에서 언급되는 '셀 수 없는 무리'를 연결하는 표현이다(5:9 주석 참조). 이렇게 요한이 중복적 으로 표현한 것은 144,000이라는 숫자가 영적인 의미의 수임을 암시함과 동시에 구원의 문이 모든 민족에게 열려져 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Morris).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 본문이 누구를 의미하는가에 대하여는 세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큰 무리'가 십 사만 사천이라는 수로 상징된 자들과 동일인이라고 해석한다(Beckwith, Morris, Eller). (2) 혹자는 십 사만 사천과 구별하여 십 사만 사천은 유대인을 가리키고 본문은 큰 환난 가운데서 구원받은 이방인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Lamp). (3) 혹자는 본문이 큰 환난 때 짐승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순교자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Kiddle, Moffatt). 세 가지 견해중 첫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 '흰 옷'은 정결과 승리를 상징하는 옷으로(3:4 주석 참조)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아 구속받았음을 나타낸다. '종려 가지'는 일반적으로 승리나 기쁨의 상징으로 사용된다(요 12:13, Trench, Vicent, Alford).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아 흰 옷을 입은 허다한 무리들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구속 하심에 대해 기쁨으로 찬양할 것이다.
=====7:10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 본문은 허다한 무리들의 찬양가(9절). '구원하심'의 헬라어 '소테리아'(* )는 허다한 무리 자신들의 업적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와 어린양의 구속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을 가리킨다(Caird, Weymouth). 허다한 무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신 하나님의 구속하심에 대해 찬양을 성부와 어린양에게 돌린다(5:13;19:1).
=====7: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 '주위'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클로'(* )는 문자적으로 '원형으로'라는 뜻으로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생물들을 옹위하는 모습을 묘사한다(5:11 주석 참조).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 '엎드려 얼굴을 대고' 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페산...에피 타 프로소파 아우톤'(*)은 경건한 예배의 행위를 나타낸다(4:10;5:14;11:16;19:4, 10;22:8, Charles).
=====7:12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 본문은 모든 천사가 구속된 자들의 찬양에 대해(10절) '아멘'으로 화답하고 인간에게 주어진 구원에 대해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으로 5:12절의 찬양과 대조를 이룬다. 5:12절의 찬양과 대조해보면 본문의 찬양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1) 5:12, 13의 찬미는 어린양에게 바쳐졌으나 본절은 하나님께 드려진다. (2) 찬양 내용 중에서 5:12의 '부'가 본절에서는 '감사'로 대치되어 있다. '감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것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구속하신 것에 대한 것이다. (3) 본문에 '세세토록'이란 말이 삽입되어 이 모든 것이 영원한 것임을 강조한다. (4) 본문에는 두 번의 '아멘'이 사용된다. 처음의 '아멘'은 큰 무리의 찬송에 대한 응답이며 마지막의 '아멘'은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영광스런 예배의 모습을 암시한다(5:12-14, Morris, Mounce,Lohmeyer).
=====7:13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 '장로 중에 하나'는 본서 가운데 나타나는 교회를 대표하는 장로들이 아니라 어떤 천상적인 존재인 듯하다(4:4 주석 참조, Johnson). 한편 '응답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크리데'(* )는 '아포크리노마이'(* ,'대답하다')의 부정과거 수동태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응답한 사실을 나타낸다. 이는 예언서에서 흔히 등장하는 문답 형식으로(렘 1:11;겔 37:3;슥 4:2, 4, 5) 질문없이 스스로 해석하고 답하는 히브리어 중복성(Hebrew redundancy)을 나타낸다(Swete).
=====7:14
@내가 가로되. -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레카'(* )는 완료 능동태로 생생한 증언을 나타낸다(Swete).
@내 주여. - 이는 천상적인 존재에 대한 경외심을 나타내는 표현이다(Vincent).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 '당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수'(* )는 강조적인 표현으로 '바로 당신'이란 의미이다. 이 말에는 자신의 무지에 대한 진지한 고백뿐 아니라 존경과 두려움의 감정이 내포되어 있다(Plummer, Swete).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 '큰 환난'의 내용에 대해서는 몇몇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모든 시대의 성도가 겪는 보편적인 환난으로 해석한다(Morris, Alford, Greijdanus, Niles). (2) 혹자는 종말에 겪을 바 대환난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3:10;단 12:1;막 13:19, Charles, Walvoord, Mounce). 두 가지 견해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큰 환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스 들리프세오스 테스 메갈레스'(*)에는 정관사 '테스'(* )가 사용되어 그것이 특정한 사건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어린양의 피에. -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 하이마티투 아르니우'(*)는 수단을 나타내는 여격 구문으로 그들의 사죄 받음이 인간의 공적에 의한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보혈의 속죄피로 말미암은 것임을 시사한다(사 1:18;히9:14;요일 1:7, Swete, Milligan). 한편 '씻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플뤼난'(*)과 '희게 하였느니라'의 헤라어 '엘류카난'(* )은 모두 부정과거 시제로 단회적인 행위를 나타낸다. 이는 그리스도의 희생 사역이 단회적이면서도 그 효력은 영원함을 나타낸다. 허다한 무리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서 깨끗함을 입고 구속받은 자들이다.
=====7:15
@그러므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투토'(* )는 문자적으로 '이것 때문에'라는 의미로, 본문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한 결과임을 나타낸다.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 본문은 어린양의 피로 구속함을 입은 자가 누리게 될 특권에 대한 진술이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담대함은 오직 어린양의 속죄의 피로 깨끗함을 받은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권리이다(히 10:19).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 본문은 21:22에 '성전이 없다'는 말씀과 상치되는 듯하다. 그러나 본절에서 17절까지는 21, 22장에 나오는 구속받은 자들과 연관된 것이기에(21:3, 4,6)본문의 성전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Johnson). 한편 '섬기며'의 헬라어 '라트류우신'(*)은 '봉사한다'는 의미를 가진 '라트류오'(* )에서 파생된 단어로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섬김은 물론 '제사장들의 특별한 제사적인 예배'를 의미한다(마 4:10;히 8:5). 이것은 본문에서 구속받은 성도들이 제사장의 중보나 제물의 필요없이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며 예배하며 섬길 수 있음을 의미한다(벧전 2:9). 그렇지만 섬김과 예배는 '밤낮'없이 행해진다. 왜냐하면 새 예루살렘 성에는 밤과 낮의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21:25;22:5). '밤낮'은 쉼이 없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상태를 나타낸다(20:10, Mounce). 구속받은 자들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 지속적으로 그를 경배하고 섬기게 된다.
@보좌에 않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 '장막을 치시리니' 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케노세이'(* )는 미래시상으로 이래에 함께 거하실 것을 나타낸다. 이는 광야에서 여러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있다(출 13:21;대하 7:1-3). 즉 본문은 하나님께 구속 받은 자들과 함께 거하셔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약속의 성취를 나타낸다(겔 37:27;슥2:10, Morris, Johnson, Mounce).
=====7:16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 본문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벧론 포로 상태에서 귀환할 때의 이사야의 진술을 반영한 것으로(사 49:10) 구속 받은 자들이 누릴 영원한 축복을 나타낸다. '주림과 목마름'은 단순히 육체적 빈곤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갈급의 상태를 나타낸다. 구속 받은 자들은 그러한 주림과 목마름이 더이상 없는 완전히 충족된 상태를 누리게 될것이다(마 5;6;요 6:35).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 '아무 뜨거운 기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 카우마'(* )는 '불에 타다'라는 의미를 가진 '카이오'(* )에서 파생된 단어로 고통스러운 열기를 말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고통이나(Morris) 혹은 넷째 대접의 재앙을 가리킨다(16:9, Mounce). 한편 '상하지 아니할지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데 메 페세'(* )는 '떨어지다'의 의미를 지닌'피프토'(* )의 부정관사 시상으로 강한 이중부정이다. 이는 구원받은 자들에게 지상에서와 같은 고통스러움이 경단코 없을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은 성도들이 전형적인 육체의 모든 고통에서 장차 해방될 것임을 시사한다(Mounce, Moffatt, Ford).
=====7: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 '보좌 가운데 계신'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보좌와 이십 사 장로들과의 중간 위치를 가리키나 위치적인 의미보다는 그리스도의 '중보자 직임'을 상징한다. 한편 '저희의 목자가 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마네이 아우투스'(* )는 '보살피다'는 의미의 '포이마이노'(* )에서 파생된 미래 능동태로 문자적으로 '그들을 보살피실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중보적 사역을 실제로 행하실 것을 약속해 준다(요 21:16;행 20:28;벧전 5:2, Swete, Ford).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 '생명수 샘으로'의 헬라어 '에피 조에스 페가스 휘다톤'(* )은 어순상 '생명의'(* , 조에스)를 강조한다. 이는 다함이 없는 생명의 근원을 시사한다(21:6;22:1, 7;요 4:12, 14:7:38). 하나님께서는 구속받을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 본문은 사 25:8을 반영한다.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의 해당하는 헬라어 '여살레이프 세이'(*)는 문자적으로 '...으로 부터 제거해 버리다'라는 의미의 미래 시상으로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셔서 구속 받은 자들을 고통과 아픔으로 부터 해방시켜 주실 것을 시사한다(21:4). 이것은 장차 구속받은 자들이 누릴 영원하며 절대적인 희락과 평강의 축복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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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동심원상 띠를 이루고 있는 옥수를 <마노>라 함.. : 동물 뼈 같은 모양의 단면상 무늬를 가진 옥(대체적으로 백-회-흑-갈-적갈-담청-녹색 바탕)...석영결정이 모여 미소 공극상을 보임,.... 암적색 바탕에 녹색-흰색 줄무늬가 나란히 배열된 것이 오닉스<호마노=줄마노>, 산화니켈때문에 녹색을 띠는 것을 크리소프레이스<녹옥수>, 프레이스는 탁한 녹색, 깨끗한 적색 옥수는 카르넬리언<홍옥수, 사르드/사르도닉스>라 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