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4.17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행21.밀레도의작별_고스/로도/바다라_두로(7일체류)_돌레마이(1일체류)_가이사랴(빌립_수일체류, 아가보의 예언)_예루살렘도착[야고보와장로들, 정결례, 성전에서체포됨, 천부장의 구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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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21장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다...다시는 보지 못할 바, 주 앞에서 (원수-->하나된 형제로) 관계 회복 과정을 하나하나 밟아가고 있다...영적 상상력 동원할 필요가 있는 부위!!

1.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아포스파오..강제로 떼어놓다..(언약궤 수레를 끌고 벧세메스 향해 가는 어미소가 새끼를 버려두고 울며 떠나는 장면처럼!!] 배를 타고 바로 고스(작은섬, 아스클레피우스 신전 위치, 히포크라테스의 고향, 경치-기후-온천-와인, 의료-의학연구지로 유명..밀레도 남방68km)로 가서 이튿날 로도(큰섬, 휴양지,  예술-수사학-웅변, 재판-법학 연구지로 유명, 고스 남방75km)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도에서 동편으로 85km 떨어진, 밤빌리아에속한 루기아 지방의 항구도시..수륙운송/해상무역 중계항, 애굽-로마간 곡물 운반 선박 계류-휴양지, 바다라에서 두로까지는 640km /대개 5일간 걸렸음)로 (그냥 바로 )가서

2.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찾아 발견하다] 타고 가다가

3.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베니게의 큰 두 도시는 시돈과 두로, 그 중에서]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예루살렘에서 상대적으로 가까이 위치한, 베니게-구브로-사마리아에 대한 사도 바울의 회심전의 지난날 우행으로 인해 사화 필요성 느껴 눌림 있던 중(특별한 배려/방문으로) 빚진 마음 갚기 -- 믿는이 사이에 "합당하게 겸손함으로의 지난날의 과오를 솔직담백하게 + 애통함으로써 인정하고 참되게/진정성 가지고 사화함 통한 화목/화평/평안/평강의 하나됨이 그토록 중요했다!! -그때 성령 감동 충만이 바로 그곳을 뒤덮었다@@... [행11:19-21..*19.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행15:1-3.. *1.(1차전도여행후)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제자들을 찾아[=아뉴리스코. :: 일부러 탐문하여 하나하나 다 찾아내다]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두로의]그 제자들[상호간에 화해/화목의 서로 하나됨의 교제 중에 충만히 임하신 바]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계속해서 말리며 강권(이는 인간적 감정따름인 것임을 분명히 그의 영으로 분별함으로써!! 주께서 예비하신 그의 길을 과감히 나아간다!!)]하더라

5.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진심에서 우러난 용서 구함의 사과 + 진정한 용서 통한 화목/화평 이룸 있는 바로 거기서!!...여기에 [다음세대를 포함한 온세대 예배의 회복]이 처음 나타나고 있다!!

6.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예배하는 가정 + 다음세대 회복] 돌아가니라 .. [두로에서는]바울의 calling도, 또한 동행 자원자도 없었음

7.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프톨레마이오스=악고]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최초의 이방인 전도자...행8장 기록 이후 30년 지난시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마지막 만남이라 여기고 (스데반의 일에 대해) 진신에서 우러난 용서 구함의 사화-하나됨의 교제 위해] 머무르니라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초기 교회시대 때는-결혼했을지라도, [남편과 각방 쓰기로 약속하고] 주께 정절드리기로 서약한 여인도 처녀로 여겨졌음) 예언하는 자라

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유대땅의 임할 기근 예언했었음]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빌립과 네 딸들+아가보)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파라칼레오 :::그런데, 그 내용은 실상 "주 뜻 =십자가의 길" 거역함을 권함이었다)...주 뜻 이루려 "예루살렘" 동행을 자청하여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함 아니라!!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 하니

......**각오 覺悟(깨달을 각, 깨달을 오) --1.해야 할 일이나 닥쳐올 일에 대하여 단단히 마음을 작정하는 것. "∼를 다지다" 2.도리를 깨쳐 아는 것. = 각오하다/지상명령 삼아 일심으로 경주(명심+감수+작정)하다=헤토이모스에코 = 헤토이모스(기꺼이/이미)+에코(가지다/소유하다/작정하다/보지하다) ...[주가보이신생명의길나주님과함께]

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바울은 이미 고린도에서 [기근 닥친 예루살렘교회에 마게도냐교회들의 구제 연보 전달할 겸 선교 보고할 겸 방문예정이었던바] 성령께서 보여 알게 해 주신 감동으로"예루살렘으로 갔다가 로마도 봐야 하리라" 지시 받은바 말하고 있었고, 드로아-앗소 사이를 홀로 도보로 걸으며 주께 여쭈어 확인받은 터였다고 봐야 하리라...**Q 뜻하심에 대해(=코끼리 전체를 파악함), 여기 저기 방문하는곳마다 성령 감동 받은 이들은 ((환난/투옥/매임-형고/태장-처형 당할 것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주고 있으나(이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함이다), 이미 주로부터 받은바 사명 완수 위해!! (Q의 예비하신 바 경륜 = 지고지선-최상의 뜻 이룸 위해..하늘소망 가지고) 결코 흔들리지 않고 뚜벅뚜벅 걷고 있음을 보라..

......▶ 행19:21-22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에베소에서의 선교 사역을 언급하고 있는 중간 부분에 삽입된 기사로 바울의 앞으로의 선교 계획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바울은 3차 선교여행 중 에베소에 약 3년간 머물면서 궁극적 선교 목표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21절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이 일’이란 두란노 서원에서 2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던 일을 말합니다. 바울은 두란노 서원에서 자신이 작정한 시간이 다 되었음을 언급하면서, 앞으로의 선교 계획을 말합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고, 그 이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계획을 세웁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는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한 곳으로 마게도냐에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교회가 있고, 아가야에는 ‘고린도, 아덴’교회가 있는 곳입니다. 그 곳에 세워진 교회들을 순회하며 그 곳 성도들을 믿음으로 굳건하게 하는 것이 바울의 3차 선교여행의 목적입니다.

그 선교여행 중 에베소에서 약 3년의 시간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며, 특별히 두란노 서원에서 제자들을 따로 세워 2년간 가르치게 됩니다. 그 사이에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들이 나타나 에베소에서 마술하는 사람들이 은 오만에 해당하는 책을 다 태우는 일들이 벌어지게 되고, 그 일로 복음이 더욱 확장 되어 아시아에 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복음을 듣게 되고, 우리가 잘 아는 골로새, 히에라볼리, 라오디게아,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지역에 교회들이 세워지게 됩니다.

이런 일련의 선교 여행 과정을 거쳐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고자 하는데, 1, 2차 선교여행 후에도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선교 보고를 한 것처럼, 3차 선교여행 보고 하려는 의도와 더불어 또 한 가지 예루살렘에 가고자 하는 것은 바울이 3차 선교여행 할 당시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기근이 심하여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의 교회를 순회하면서 다시 한 번 말씀으로 믿음으로 굳건하게 세울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연보를 모아서 가려는 계획을 가진 것입니다. [로마서15:25-26 ‘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그리고 궁극적으로 바울이 가고자 하는 곳이 로마입니다.

●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바울은 왜 로마를 보아야 한다고 했을까요? 로마서 15장을 보면 바울은 로마를 넘어 가고자 하는 곳이 있는데 오늘날 스페인인 ‘서바나’입니다. [로마서15: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로마서15:28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바울은 왜 서바나로 가려고 했을까요?

로마는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습니다. 바울이 선교 여행을 한 곳을 살펴보면 사방팔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드는 항구 도시나 상업적 중심 도시가 대부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가 그랬고, 데살로니가가 그랬고, 고린도가 그랬고, 아덴이 그랬고, 에베소가 그랬습니다. 그렇다고 중심 도시에만 갔는가? 아닙니다. 이고니온 같은 산악 지대에도 복음을 들고 갔습니다. 그런 바울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곳은 당시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였을 겁니다.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면 세계 각국에서 오는 사람들을 통하여 복음이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갈 것을 꿈꾸었을 겁니다. 그리고 바울이 마지막까지 가고자 한 곳이 서바나였는데, 서바나는 당시 지리적 세계관으로는 땅 끝입니다.

▶ 15세기에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 스페인 동전에 새겨진 글귀가 ‘네 플루스 울트라’, 이 말은 ‘저 너머에는 없다.’라는 뜻으로 대서양 너머에는 땅이 없다는 뜻입니다. 15세기에도 이런 지리적 세계관이었는데, 바울이 살던 1세기 때의 지리적 세계관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당시의 땅 끝은 서바나 곧 스페인이었고, 주님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기에 바울은 궁극적으로 로마를 거쳐 서바나로 가려는 선교의 궁극적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자신의 선교 계획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실행의 일부분으로 오늘 본문 22절이 말합니다.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먼저 마게도냐로 보내고, 바울은 에베소에 얼마 동안 더 머물러 있습니다. 그 이유를 고린도전서 16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9.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고전16:8-9)] 에베소에서는 5월에 아데미(Artemis) 대축제와 올림픽과 같은 경기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이 축제로 인해 많은 에베소가 있는 이오니아 지역의 사람들이 에베소로 몰려왔었습니다. 바울은 5월 말까지 에베소에 머물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에베소에서의 선교사역을 마무리 하려던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이후의 데메드리오 사건(행19:23-41)으로 인해 에베소를 떠납니다.

●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주님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의 선교 비전을 봅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고 그 후에 로마도 보리라.’ 그러나 우리가 사도행전을 계속 읽어 가다보면 바울이 로마를 향하여 가는 발걸음은 1, 2, 3차 선교여행의 모습처럼 자유로운 신분이 아닌,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으러 가는 죄인의 신분으로 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인 사도행전 28장은 바울이 로마에서 가택 연금 상태에서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28:30-31)] 

분명한 것은 바울은 그러한 모습을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바울의 현실은 로마에서 가택 연금 상태에서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그렇게 꿈꾸던 서바나에는 갔을까? 바울은 로마에서 AD 61-63년 1차 투옥과 AD 66-67년 2차 투옥 사이에 서바나를 방문했을 것으로 신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남아 있는 기록들은 없습니다. 바울은 네로 황제 시대에 참수형으로 생애를 마감합니다.

▶ 바울의 선교사역을 보면 모든 것들이 자신이 꿈꾸고 계획하던 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1차 선교여행도 그랬고, 2차 선교여행도 그랬고, 3차 선교여행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로마여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바울이 생각하고, 계획했던 모든 것들이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목표하는 선교여행의 방법이 바울이 생각하는 방법이 아닌 주님의 계획하신 방법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을 보면 떠오르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잠언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20:24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시편 37:23 ‘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예레미야 10:23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 이러한 우리의 인생의 모습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펼쳐 주시는 인생의 모습에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야고보서5:13의 말씀처럼 ‘고난당하는 자는 기도’하며, ‘즐거워하는 자는 찬송’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전도서 7장에서 [‘13.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7:13-14)]고 말씀하므로 하나님을 더욱 더 믿음으로 붙들고 살 것을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속의 바울의 모습을 우리에게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펼쳐 주시는 일들에 믿음으로 반응하고, 순종함으로 나아가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일들이 항상 이루어지길 늘 기도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나지금은비록 땅을 벗하며 살지라도]

15.  ○(일심으로 주 바라며 예루살렘행에 동행-자원-동반자 나오기를 기대하며 기다려주는바) 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16.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헬라파유대인..예루살렘교회 초기에 영접한 제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바울이 야고보를 방문하다

17.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나손의 집 식구+바울이 복음에 호의적인 예루살렘교회 형제들)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무엇보다도 Q이 하신 일(겉보기에는 그 자신에게 순경이든 역경이든간에)  참되게 증거함에 있어서!! 증거하는 이의 [죄/고난 상황에 대한]무용담/자화자찬 늘어놓음 아니라 자기로 깨닫게 하신바 살아계신 Q, 그분의 열심이 친히 행하셨음/행하고 계심 말해야 하기에!!, 그 자신은 십자가로 넘김의 겸손-친절-온유가 중요)

20.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들은 바울에 대해 그동안 추궁코자 별렀던바일 수도 있고-한편으로는 바울을 보호하려 함이겠으나, 바울로서는 "주 안에서 하나됨 위해" 양보하는 마음으로 순종함!!]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율법의 열심당원들이 예루살렘교회를 주도하고 있다)

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바울의 복음 전파 반대하는, [(Q경륜 모르기에!!, 성전제사를 그토록 열심으로 준수해 왔던 조상들이 겪어야 헸던 바벨론유수에 대해 이해/해석/해결 안되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어서 이방인들에 대한 적대감 충만 + 절대적 율법 조문 준수를 강조함으로써 성전과 율법조문 준수를 자기도 모르게 Q의 복음보다 더 중요시 함으로써 우상시 해 왔던바, 바울이 제시한 복음 전파로 갑자기 이방인에게도 Q 나라에 들어갈 길이 열렸다 함을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곁길로 나아간 율법 열심당이 주장하며 씌우고 있는 바 그 거짓 프레임 !!) 

.......**불안감 느끼는 사람은 정보를 더 많이 얻어서 정말 그러한가/어떤 해결책이 있는가 판단하려 하나, **[고정관념과 거짓된 프레임에 호도됨 인해] 분노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럴듯한 가짜/가상뉴스를 그냥 맹목적으로 믿어버리며 이를 검증해 보지도 않고 즉각 다른이들에게 전파함으로써 (충동적/집단적 행동을 하게 함)

22.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소동을 일으킬지 모르니, 그 예방책으로서]

23.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나실인의 서원..그 기한 끝나면 만기 신고하고 정결례 행하고 머리깎게 하였음]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세상적인 열심당원들의 눈치 보며 "그들 앞에서 ~체 연기하자" 제안하고 있음]

......여기에 드려지는 희생 제물로는, 번제물로 일년 된 수양 하나, 속죄 제물로 일년 된 어린 암양 하나, 화목제로 수양 하나, 그 외에 무교병 과자 등(제3일, 제7일 두번 드리게 함)

......비록 (바울에게 계시해 주신 Q의 경륜으로 볼 때는) 율법의 제의법은 분명히 폐하여진 것이기는 분명하였지만, 아직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는 율법을 따른 제의법 자체가 크게 중시되고 있었던 바!!... 믿음의 분량이 각각 다름으로 인한 것으로 여기며(이 부분에 대한 깨우치심을 주께 맡겨드리고)!! 불필요한 분쟁 발생가능성을 고려해서 (그들과의 하나됨 중시함 나타내려!! 그들을 얻기 위해, 그들의 요구대로) 존중해서 따라 결례를 행하고 있다!! --하나이신 주 앞에서 행하라!! 단, 비본질적인 것이라면!! (유연하게 행동하라) 질서 존중해주라!!

25.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이미 다 아는 사실을!!, 마치 선심 쓴 것처럼!! 육을 따라 생색내고 있다!!-->깨끗케 하시려는 성령의 열심으로 인해 크나큰 대가지불케 됨 명심하라)

26.  [(고정관념 아직 바뀌지 못한 상대방의 입장에서서 숙고함 = 역지사지!!, 그러려면 다소 큰 비용이 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 없이 모교회 장로들의 요청을 그대로 순순이 따라 행하고 있는바]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이 결례를 행한 것은 과연 옳은 선택이었나?(행21:17~26)

1. 다메섹 체험 이후 바울의 생애 가운데 최대의 흠이라고 여겨지는 부분은 무엇인가?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 전파에 힘쓰게 된다. 그런데 그의 생애에 흠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두 번은 흠이 보인다. 첫 번째는 2차 전도여행을 출발하기 직전 마가 요한을 동행자로 데려가는 문제로 바나바와 피차 싸웠다는 것이다(행15:39). 양보해 줄 수도 있었을텐데, 그는 끝내 바나바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혈기 분노의 영이 아직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둘째는 3차 전도여행 후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유대인들 앞에서 결례를 행했다는 것이다(행21:26). 이것은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바울이 다시 정결법을 지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 바울은 왜 결례(정결예식)를 행한 것인가?

  바울은 왜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예루살렘교회의 수장이요 예수님의 친동생인 야고보를 만나 선교 보고를 한 후에 왜 결례를 행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야고보의 제안이 있었기 때문이다(행21:23~24). 왜냐하면 바울에 대해서 유대인들에게는 좋지 않은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울이 이방 지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첫째, 모세의 율법을 반대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둘째, 그들의 자식들에게 할례를 받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셋째, 유대인의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행21:21).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는 약간 다르다. 첫째, 바울은 율법을 배반(배교, 변절)하라고 하지 않았다. 다만 바울은 율법의 한계를 지적했고 율법의 기능을 지적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율법이 가리키고 있는 그리스도께로 모두 나오라고 한 것이다. 둘째, 디아스포라 헬라파 유대인들의 자식에게 할례를 받지 말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알려진 기록에 의하면,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편지만 남겼을 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편지를 남긴 것 같지는 않기 때문에, 과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지침을 내렸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유대인의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했는지도 사실 정확히 알 수 없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야고보는 들은 소문을 가지고 바울을 우려하여 바울로 하여금 율법 폐기론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달라고 한 것이다. 

3. 바울이 결례를 행한 것은 그동안 바울이 전했던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베드로가 할례자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것처럼,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그런데 그렇게 복음을 전할 때에도 먼저는 디아스포라(흩어진)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먼저 전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가 오셨고 그분이 예수님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율법을 더 이상 지키지 말라고 했는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가 이방인들에게는 율법 가운데 도덕법은 폐기되지 않았어도 의식법들(할례법, 안식일법, 절기법, 제사법, 음식법, 정결법)은 폐기된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방인들은 더 이상 의식법들을 준수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는 야고보의 말을 듣고 정결법을 시행한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그가 전해 온 것과는 다른 방향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다시 의식법을 준수하고 있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4. 바울이 정결례를 행한 것은 과연 옳은 선택이었을까? 

  그렇다면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야고보의 제안을 따라 정결례를 행하고 그것도 다른 네 명의 사람들 정결례 비용도 대주면서 정결의식을 행한 것은 과연 옳은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는가? 얼핏 보기에는 율법과 복음의 경륜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미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복음 안으로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정결례를 행한 것은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정결례를 행한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왜 정결예식을 행한 그 이유를 다 들여다볼 수는 없겠지만 그의 복음 전파 원칙에 따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 3가지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는 교회의 권위를 존중하기 위해 정결예식을 행한 것이다. 

사실 예루살렘교회에는 이방인 그리스도들인이 없었다. 전부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뿐이었다. 그런데 이들도 또한 주님의 백성이요 구원받은 자들이 아닌가?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복음 전파 노선과는 약간 달랐지만 그들을 형제로 생각하고 그들의 제안을 수용했던 것이다. 이는 예루살렘교회의 대표자들이었던 70명의 장로들의 결의를 겸손히 수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그는 최소한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오해와 의심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정결예식을 행한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진짜 문제는 오리지널 유대인들이다. 그런데 유대인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예루살렘에 수만 명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바울이 율법을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오해와 의심을 종식시키기 위해 바울은 기꺼이 정결예식을 행한 것이다. 

  셋째,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그것은 바울이 한 사람이라도 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같은 모양이 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정결예식을 행한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을 사랑했다. 차라리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을 구원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율법 수호자들로서, 율법을 최고의 권위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자신이 율법 파기론자처럼 보인다면 아무도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라도 마음의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자유자였지만 기꺼이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결례를 행한 것이다. 그가 자신의 복음 전파의 원칙을 고린도전서에 기록해 놓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고전9:20~22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  바울이 정결의식을 행한 것은 바울이 그것으로 인하여 자기 의를 이루어 자신을 구원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또한 유대교로 회귀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것에 어떤 효험이 있다고 믿었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단지 유대인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렇게 행한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을 증거하여,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행한 것이다. 

====유대인의 정결례=== 유월절2주전에 붉은 암송아지 도살한 그 위에 백향목-홍색실-우슬초를 함께 태워 재를 만들고 실로암에서 길어온 물을 섞어서 잿물 만듬....(정결례 행하는 7일동안은 성전에 머물러야함)..결례 필요함을 신고한지 제3일, 제7일에 우슬초 묶음으로 그 잿물을 찍어서 정결함 받을 자 위에 뿌림-- (그러면 심지어 시체와 접촉하게 되어 부정해짐으로써)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던 자들도 다시 정결을 회복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는[예물 드릴] 자격을 얻게 되어) 유월절을 지킬 수 있게 하는 것.(민 19장) ...

===바울이 잡히다

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오순절 지키러]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9.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31.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33.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34.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35.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36.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환난과 결박 예언 = 성령의 예방주사!!(담대하고 침착하게 맞이하고 통과할 수 있음) :: 감람산의 JC-->성전 바깥뜰에서 (열린 하늘의, 서 계신 JC 바라보며)돌에 맞아 죽어간 스데반, 바로 그 장소인 성전 바깥뜰에서 폭행당하고 두 쇠사슬로 매인 바울을 하나로 묶고 있음!!

===바울이 백성에게 말하다

37.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38.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39.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40.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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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s 21 Amplified Bible

===Paul Sails from Miletus

1 When we had torn ourselves away from them and set sail, we ran a straight course and came to Cos, and on the next day to Rhodes, and from there to Patara; 

2 and after finding a ship crossing over to Phoenicia, we went on board and set sail. 

3 After we came in sight of Cyprus, leaving it on our left (port side), we sailed on to Syria and put in at Tyre; for there the ship was to unload her cargo. 

4 After looking up the disciples [in Tyre], we stayed there [with them] seven days; and they kept telling Paul through the [Holy] Spirit [a]not to set foot in Jerusalem. 

5 When our days there came to an end, we left and proceeded on our journey, while all of the disciples, with their wives and children, escorted us on our way until we were outside the city. After kneeling down on the beach and praying, we told one another goodbye. 

6 Then we boarded the ship, and they returned to their homes.

7 When we had completed the voyage from Tyre, we landed [twenty miles to the south] at Ptolemais, and after greeting the [b]believers, we stayed with them for one day. 

8 On the next day we left and came to Caesarea, and we went to the house of Philip the evangelist, who was one of the seven [deacons], and stayed with him. 

9 He had four virgin daughters who had the gift of prophecy. 

10 As we were staying there for some time, a prophet named Agabus came down from Judea. 

11 And coming to [see] us, he took Paul’s [wide] [c]band (belt, sash) and bound his own feet and hands, and said, “This is what the Holy Spirit says: ‘In this same way the Jews in Jerusalem will bind the man who owns this band, and they will hand him over to the Gentiles (pagans).’” 

12 Now when we had heard this, both we and the local residents began pleading with Paul trying to persuade him not to go up to Jerusalem. 

13 Then Paul replied, “What are you doing, weeping and breaking my heart [like this]? For I am ready not only to be bound and imprisoned, but even to die at Jerusalem for the name of the Lord Jesus.” 

14 And since he would not be dissuaded, we stopped pleading and fell silent, saying, “The Lord’s will be done!”

===Paul at Jerusalem

15 After this we got ready and started on our way up to Jerusalem. 

16 Some of the disciples from Caesarea also came with us, taking us to [the house of] Mnason, a man from Cyprus, a disciple of long standing with whom we were to lodge.

17 When we arrived in Jerusalem, the [d]brothers and sisters welcomed us gladly. 

18 On the next day Paul went with us to [see] [e]James, and all the elders of the church were present. 

19 After greeting them, Paul began to give a detailed account of the things that God had done among the Gentiles through his ministry. 

20 And when they heard it, they began glorifying and praising God; and they said to him, “You see, brother, how many thousands of believers there are among the Jews, and they are all enthusiastic supporters of the Law [of Moses]. 

21 Now they have been told about you, that you are teaching all the Jews who are living among the Gentiles to turn away from [the Law of] Moses, advising them not to circumcise their children or to live according to the [Mosaic] customs. 

22 What then should be done? They will certainly hear that you have arrived. 

23 Therefore do just what we tell you. We have four men who have taken a vow; 

24 take these men and purify yourself along with them, and pay their expenses [for the temple offerings] so that they may shave their heads. Then everyone will know that there is nothing to the things they have been told about you, but that you yourself also follow and keep the Law. 

25 But with regard to the Gentiles who have believed [in Christ], we have sent them a letter with our decision that they should abstain from meat sacrificed to idols and from [consuming] blood and from [the meat of] what has been strangled and from sexual immorality.” 

26 Then Paul took the [four] men, and the next day he purified himself along with them [by submitting to the ritual]. He went into the temple to give notice of [the time] when the days of purification [ending each vow] would be fulfilled and the usual offering could be presented on behalf of each one.

===Paul Seized in the Temple

27 When the seven days [required to complete the ritual] were almost over, [some] Jews from [the province of] Asia [Minor], caught sight of him in the temple, and began to stir up the crowd, and they seized him, 

28 shouting, “Men of Israel, help us! This is the man who teaches all men everywhere against our people and the Law and this place. And besides, he has brought Greeks into the temple and has defiled this holy place.” 

29 For they had previously seen Trophimus the Ephesian in the city with Paul, and they assumed that he had brought the man into the temple [beyond the court of the Gentiles]. 

30 Then the whole city was provoked and confused, and the people rushed together. They seized Paul and dragged him out of the temple, and immediately the gates were closed. 

31 Now while they were trying to kill him, word came to the commander of the [Roman] garrison that all Jerusalem was in a state of upheaval. 

32 So he immediately took soldiers and centurions and ran down among them. When the people saw the commander and the soldiers, they stopped beating Paul. 

33 Then the commander came up and arrested Paul, and ordered that he be bound with two chains. Then he asked who he was and what he had done. 

34 But some in the crowd were shouting one thing and others something else; and since he could not determine the facts because of the uproar, he ordered that Paul be taken to the barracks [in the tower of Antonia]. 

35 When Paul got to the steps, he was carried by the soldiers because of the violence of the mob; 

36 for the majority of the people kept following them, shouting, “Away with him! [Kill him!]”

37 Just as Paul was about to be taken into the barracks, he asked the commander, “May I say something to you?” And the man replied, “Do you know Greek? 

38 Then you are not [as I assumed] the Egyptian who [f]some time ago stirred up a rebellion and led those 4,000 men of the Assassins out into the wilderness?” 

39 Paul said, “I am a Jew from [g]Tarsus in Cilicia (Mersin Province, Turkey), a citizen of no insignificant city; and I beg you, allow me to speak to the people.” 

40 When the commander had given him permission, Paul, standing on the steps, gestured with his hand to the people; and when there was a great hush, he spoke to them in the Hebrew dialect (Jewish Aramaic), saying,

===Footnotes

Acts 21:4 Clearly the disciples felt prompted by the Holy Spirit to tell Paul not to go to Jerusalem. But a question remains as to whether the Spirit was actually forbidding Paul to go, or only preparing him for what he would have to suffer in Jerusalem (cf v 11). Either explanation is possible, but many Bible scholars prefer the latter.

Acts 21:7 Lit brethren.

Acts 21:11 This was not a belt like men wear today, but a band (sash, girdle), about six inches wide, usually made of leather, worn on top of the outer garment. It was fastened around the midsection of the body and served as a kind of pocket or pouch to carry personal items such as a dagger, money or other necessary things.

Acts 21:17 Lit brethren.

Acts 21:18 The half brother of Jesus, author of the Letter of James and leader of the church in Jerusalem, not to be confused with James the Apostle (John’s brother).

Acts 21:38 Lit before these days.

 

Acts 21:39 A major city located at the crossing of several ancient trade routes, Tarsus (Tarsos, Tarsisi) was also known for its literary schools which rivaled those located in Athens and Alexand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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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1장 (개요)

우리는 지금까지 기쁜 마음으로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온 이방 나라들을 여행한 사실과 그리고 그로 인하여 많은 영혼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된 수확을 고찰하여 왔다. 

또한 바울이 극심한 박해를 당한 사실과 그럼에도 주님께서 이 모든 박해에서 그를 즉시 구출한 사실을 고찰하였다(딤후 3:11). 

이제 우리는 그가 예루살렘으로 간 사실과 거기서 마지막으로 구속된 사실을 고찰하고자 한다. 

바울의 섬김의 날은 이제 끝나고 남은 것은 이제 고통과 어두움의 날들만 남은 것같이 보인다. 

이같이 위대한 일꾼의 활동할 수 없게 된 것은 천만 유감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의 동료들이 하였던 것처럼 "주의 뜻대로 이루워지이다"라는 말로써 묵묵히 그 사실을 시인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바울이 감옥에 갇히고, 공개 법정에 서고 하는 것이 바울이 설교단에 서 있는 것과 같이 진실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이익을 위하여 섬기는 행위라는 사실을 믿고 또 믿어야 할 정당한 근거를 찾아야 한다. 이 장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 수 있다.

Ⅰ. 바울의 에베소로터 예루살렘에 인접한 항구인 가이사랴까지의 항해 여행과 도중에 그가 경유한 여러 곳에 대하여 기록되고 있다(1-7).

Ⅱ. 바울과 가이사랴의 그의 친구들 사이에서 일어난 의견 대립. 

그의 친구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하였으나 결국 그를 막을 수 없었다(8-14).

Ⅲ. 가이사랴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의 바울의 여행. 

예루살렘에 살고 있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그에 대한 친절한 환영(15-17).

Ⅳ. 그곳에 있는 형제들의 설득에 대한 바울의 순종. 

그들은 바울에게 할 수 있는 한 유대인들의 비위를 맞추어 그도 유대교에 대하여 서원한 사람인 것처럼 성전에 가서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제물을 드리라고 한다. 이렇게 함으로 그에 대하여 얘기되는 것과는 달리 바울이 모세의 의식이나 율례에 대한 적대자는 아니라는 것을 표시하라고 그들은 말하였다(18-26).

Ⅴ. 바울이 그들의 말대로 행한 것이 오히려 유대인들이 바울을 적대하는 구실로 변하고 만다. 

그들은 성전에서 범죄 행위를 하였다고 바울을 그곳에서 체포한다.

Ⅵ. 폭도들에 의해 끌려 가서 죽임을 당하게 된 위기를 바울은 천부장의 도움으로 간신히 모면함. 

천부장에 의하여 바울은 공정하고 법적인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천부장은 바울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자신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를 허락했다(31-40). 

그 후 바울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본서가 끝날 때까지 바울은 석방되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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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다

1.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5.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7.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바울의 가이사랴에로의 항해(행 21:1-7)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Ⅰ. 바울과 에베소 교인들의 작별이 얼마나 애석한 것이었던가.

"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라는 이 장 첫마디 속에서 암시되고 있다. 이 말은 그들이 마지 못해 헤어진 것을 뜻하고 있다. 작별이란 불가항력적인 것이었다. 

바울은 그들을 떠나기를 싫어하였고, 그들도 바울과 헤어지기를 싫어하였다. 그러나 다른 방도가 없었으므로 그들은 헤어져야만 했다. 

선한 사람이라도 죽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가능하면 그를 조금이라도 더 살아있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 그의 친구들과도 작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Ⅱ. 목적지까지의 순조로운 항해.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직행하여" 희랍의 유명한 섬인 "고스"에 고착했다. 

그 다음날 그들은 콜러서스 즉 아폴로 신의 거상(巨像) 때문에 유명해진 로도에 도착했으며, 그 다음에는 리시아(Lysia)의 수도요 유명한 항구인 "바다라"에 도착했다(1절). 그곳에서 그들은 다행스럽게도 그들이 가려는 곳으로 항해 중인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갔다"(2절). 

일이 순조로이 진행될 때 또는 우연한 사건이 우리가 하고자 하는 계획에 기여할 때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어야 하며, "우리의 갈 길을 잘 마치게 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다"고 감사함으로 말해야 한다. 

그들이 탄 배는 베니게(즉 두로)로 향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그 배의 편의를 제공받아 "배를 타고 두로에로 갔다." 

이 항해 도중에 그들은 "구브로" 섬을 "바라보았다." 이 섬은 바나바가 태어나고 자라난 곳이었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곳을 방문하지 않고,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행선하여 마침내 두로에 상륙했다." 

두로는 그 나라의 유명한 상업 중심지였었으나 바울이 상륙했던 당시에는 침체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아직 약간의 거래가 거기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거기서 배가 짐을 풀려 하였다"는 것과 또 짐을 푼 사실을 보아서 그렇다.

Ⅲ. 바울은 두로에 잠시 머물렀다. 

바울이 그곳에 상륙하였다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에 거의 다다른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가 예정했던 기간 안에 그의 나머지 여행을 바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1. "두로에서 바울은 제자들을 찾았다."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이었다. 같은 깃털을 가진 새들끼리 서로 모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거기 제자들이 살고 있는가를 물었고, 그들을 찾아 내어 그들과 사귀었다는 사실을 생각하여 보자. 

그리스도가 세상에 계실 때 그가 두로의 해안에 자주 가시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시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두로와 시돈이 고라신과 벳세다가 누린 것과 같은 혜택을 맛보기에는 적당치 않다고 생각하였다. 

비록 만일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면 그들이 고라신과 벳세다보다는 더 나아지리라는 것을 알기는 하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눅 10:13, 14). 

그러나 후에 복음을 전할 사람들이 많아지자 그리스도가 두로에까지 전파되었다. 그곳에도 제자들이 있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이 사실에 대하여 예언자들이 두로에 관하여 "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간직하거나 쌓아 두지 아니하리니"라고 예언한 것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사 23:18).

2. 바울은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렀다." 

그들은 바울에게 할 수 있는 그리하여 그들과 함께 있어 주기를 간청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칠 일을 체류하였고(20:6) 이곳 두로에서도 그렇게 많은 날을 머물렀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그들과 함께 "주일"을 지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 가운데서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갖기 위해서였다. 

선한 사람들은 어느 곳을 간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유익한 일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어느 곳에서 제자들과 만나더라도 우리는 그들에게 유익을 끼치든지 혹은 그들에게 도움을 받든지 하게 되는 것이다.

3. 두로의 제자들은 은사를 받았으므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당하게 될 고난을 성령에 의하여 예언하였다. 

"성령이 각 성에서 결박한 환란이 그를 기다린다"고 증거하였다(20:23). 

어떤 사건이 발생하려고 하면, 그 사건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제기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사건 전에 많은 예언을 하도록 함이 적합하다고 여기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넞에 예언하심으로써 주님은 사람들의 신앙을 해치는 대신에 그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하고자 하셨다. 

두로의 제자들, 그들이 바울의 고난을 예견하고 그러한 은총을 부여받은 것과 동시에 그들은 그에 대한 사랑과 교회, 특별히 이방인 교회를 위한 관심 때문에 바울에게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지 말라"고 간청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변경되게 되기를 희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만일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면, 그곳에서 그가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을 알았다. 그들은 다윗에게(만일 네가 그일라 사람들과 거한다면) "그들이 너를 붙이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바울에게 어려움이 닥칠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도록 하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이 계속 자유의 몸으로 있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들이 생각하고 또 그 결론에 따라 바울을 설득시켜 단념하게 하려고 한 것은 그들의 과오(fault)는 전혀 아니었으나, 그것은 실수(mistake)였다. 

왜냐하면 그가 시련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의 확장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바울로 인해 성도들과 제자들로 집중적으로 기도하게 하신 바 그의 예루살렘 방문여행의 안전을 위한 집요한 간구가 계속되었고 그것은 결국 바울의 경건과 진정한 영웅적 결단을 더욱 빛내 주는 결과를 낳았다.

4. 두로의 제자들은 비록 그들이 바울의 영향을 받은 개종자들은 아니었지만 많은 존경을 바울에게 표했다. 

그 이유는 그가 두로를 떠나려 할 때쯤 해서 그들의 교회 안에서의 바울의 유용함에 대하여 많은 얘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비록 바울을 사귈 수 있는 기회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바울이 어떤 위대한 사람이기나 한 것처럼 "처자"를 데리고 함께 와서 경건하게 그를 전송하고, 그의 축복을 간청하고, 뱃터까지 따라와서 그를 전송하였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우리들은 주님 안에서 우리를 치리하고 우리를 경계하는 우리의 사역자들을 존경해야 하고 "사랑으로 그들을 귀히 여길" 뿐 아니라 기회가 주어질 때는 모든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들에게 우리의 사랑과 존경을 표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위하여 수고하는 바, 주님 때문에 그리해야 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그들의 수고를 인하여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2) 우리들은 하나님이 특별히 존귀하게 쓰시는 자들을 특별히 존경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이 그들이 처한 세대 가운데서 특별히 들어 쓰시는 사람들이 있다.

(3) 훌륭한 인물들과 사역자들을 존경하도록 어린이들을 훈육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모습은 두로에서 두드러지게 보여지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을 바울에게 데려다가 그의 말을 듣게 하였고 그에게 존경을 포하고 또 그의 가르침과 기도에 의해 유익을 받게 하고자 하였다. 

예언자를 조롱한 벧엘의 우상 숭배자들의 자녀들에게는 분노의 저주가 주어졌었다. 그러나 사도를 존귀히 여긴 두로에 사는 제자들의 자녀들에게는 틀림 없이 축복이 주어졌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어린이들의 호산나 찬양을 기뻐 받으셨다.

(4) 우리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으로 선용하여 우리를 영혼을 유익하게 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바울을 멀리까지 따라가서 전송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이 바울과 좀 더 같이 있기 위하여 또한 그의 기도를 받기 위해서였다. 어떤 사람은 시편 45편 12절의 "두로의 딸이 예물을 드리고"라는 구절을 본문의 사실에 대한 예언이라고 간주한다. 

아마 우리 친구들이 해외 여행을 할 때 선물을 하듯이 그들도 헤어지면서 바울에게 선물을 준 것같이 보인다(28:10).

5. 그들은 바울과 에베소의 장로들이 그랬던 것처럼(20:36) 기도로 헤어졌다. 

이로써 바울은 우리들에게 언제나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본을 보여 주었고 또한 기도의 삶을 우리에게 규칙으로 가르쳐 주고 있다. 

본문에 보면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였다"고 하였다. 바울은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또한 모든 교회를 위해서 기도했다. 바울은 많이 기도한 동시에 대단히 능력있는 기도를 하였다. 

그들은 바닷가에서 기도했다. 그것은 기도로 그들의 마지막 작별을 성별하고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였다. 

바다로 여행을 하고자 하는 자들은 그들이 해안을 떠날 때 하나님에게 기도로 자신들을 위탁하고 또한 그의 보호 아래 자신들을 맡겨야만 한다. 

또한 육지 여행을 떠나게 될 때에도 하나님의 섭리와 약속에 그들의 신앙을 굳건히 세워야 한다. 

그들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아마도 그들이 무릎 꿇고 기도한 곳에 돌이 많고 지저분한 곳일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였다. 

바울은 "사람들이 어디서나 기도하기를" 바랐다. 또 자신이 그렇게 하였다. 그리고 그가 기도할 때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버트(Mr. George Herbert)씨는 "무릎을 꿇는 것은 결코 비단 양말이 헤어지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6. 드디어 그들은 헤어졌다(6절). 

본문에 보면 우리가 뜨거운 포옹으로 서로 사랑과 슬픔을 나누면서 "작별한 후에 우리는 배에 오르고, 저희는 집으로 돌아가니라"고 하였다. 

그들은 만나면 헤어져야만 한다는 이 세상에 법칙을 진정 안타까와하였다. 즉 본문을 쉽게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여로를 앞에 두고 있는 우리들은 우리를 운반해 줄 배를 갖게 된 것을 감사하면서 승선하였다. 그리고 배를 탈 필요가 없는 자들은 그들이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이 사실은 "스블론은 나다님을 좋게 여기며 잇사갈은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긴다"(창 49:13-15)는 말씀과 상응됨을 볼 수 있다. 바울은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축복하면서 떠났고 그리고 그곳에 남은 사람들은 떠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Ⅳ. 그들의 돌레마이 도착. 

그곳은 두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7절). 본문에 보면 "우리가 돌레마이에 도착했다"고 하였다. 

혹자는 그곳이 아셀 지파의 경내로 소개되고  있는 "악고"와 같은 장소라고 생각한다(삿 1:31). 바울은 그곳에 상륙하기를 간청하였다. 

이는 그곳에서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의 상황을 알아 보며 그리고 그들을 향한 그의 선의를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비록 바울은 그들과 오래 머물러 있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그는 그들에게 아무런 존경도 표하지 않고 그곳을 지나갈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바울은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었다" 아마 그날이 주일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같이 비록 잠깐 체류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방문을 안하는 것보다 좋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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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아가보의 예언(행 21:8-14)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마침내 가이사랴에 도착하였다. 바울이 여기서 며칠 머물기로 작정하였다. 

그런데 이곳은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맨 처음 전파되었던 장소였고 또한 "성령이 이방인들에게 내린 곳이기도 하였다"(10:1, 44).

Ⅰ. "가이사랴에서" 바울과 그의 동료들을 영접한 사람에 대한 고찰. 

바울은 거의 여인숙에서 머무는 일이 없었다. 그가 가는 곳에는 어느 곳에나 그를 맞아 환영하는 친구들이나 또는 그러한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과 함께 항해하였던 사람들은 그 항해가 끝나자 각자의 임무에 따라서 헤어졌다. "화물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은 배가 짐을 부리는 곳에 머물러 있었다(3절). 또 어떤 사람들은 돌레마이에서 그들이 임무에 따라 하선하여 각자 흩어졌다. 그러나 바울의 동료들은 그를 따라 가이사랴에 도착하였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이 세상에 함께 여행하던 사람들은 죽음으로 서로 작별하게 된다. 그 때에 누가 바울의 동료였는지 아니었는지가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이제 가이사랴에서 어떠한 일이 있었는가를 살펴 보자.

1. 그들은 전도자 빌립에 의하여 영접을 받았다. 

우리는 그가 수년 전에 이디오피아의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고 가이사랴에 이르렀다는 사실까지를 전에 고찰하였었다(8:40). 

그리고 이제 이곳에서 다시 그를 발견하게 된다.

(1) 그는 원래 집사로서 구제를 위하여 뽑힌 일곱 중의 한 사람이었다(6:5).

(2) 그는 오랫 동안 복음 전도자로 일해 왔다. 

그 때에는 집사였지만 그는 사도들이 하였던 것과 같이 여기 저기를 다니며 교회들을 개척하고 또 물을 주어 가꾸었다. 

그리고 사도들과 같이 그 자신이 직접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를 얻는다"(딤전 3:13), "적은 일에 충성한 자에게는 많은 것를 맡기신다"고 하였는데 바로 빌립이 그러하였다.

(3) 그는 가이사랴에 집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 집은 바울과 그의 모든 동료들을 맞이할 수 있을 만한 규모의 집이었다. 

그는 바울과 동료들을 자기 집에 영접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에 보면 그들이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였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그들의 능력에 따라서 평신도가 되기도 하고 사역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해야 한다"(벧전 4:9).

2. 이 빌립이라는 사람에게는 "예언을 하는 네 딸이 있었다"(9절). 

이 사실은 그들도 다른 사람들이 하였던 것처럼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고난을 예언하였고 또 그에게 그곳에 가지 못하게 말렸으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그들은 바울 앞에 놓인 어려움을 얘기하면서 그에게 위안과 격려의 말을 예언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어쨌든 이곳에서의 예언의 사실들은 요엘 2장 28절에 기록된 예언 즉 성령이 모든 육체에 부어져서 그들의 "아들과 딸들이 예언을 할 것이라"는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보여 준다.

Ⅱ. 저명한 선지자에 의하여 바울의 고난이 명백하고 완벽하게 예언됨(10, 11절).

1.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가이사랴에서 여러 날 체류하였다. 

아마 고넬료도 그 때까지 그 곳에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빌립이 그들을 유숙시켰지만) 그는 그들에게 많은 친절을 베풀었을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그곳에 머물러 있기를 권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여행 초기에는 그렇게 갈 길을 서둘렀던 그가 여행이 끝날 즈음에 이르러서는 서둘지를 않았고 또 가이사랴에 어째서 그렇게 오래 머무르게 되었는가를 알 도리는 없다. 그러나 게으름을 피우기 위하여 그가 그곳에서는 혹은 다른 곳에서 체류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바울은 하루도 허비치 않고 날마다 계획에 의해 생활하였다.

2. "선지자 아가보가 유대로부터 가이사랴로 왔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우리가 전에도 고찰하였는데 그 때 그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안디옥으로 와서" "전파가 크게 흉년들 것"을 예언한 사람이었다(11:27, 28).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의 은사를 얼마나 다양하게 베푸시는가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바울에게는 사도로서의 말씀의 지혜와 지식을 주었으며 병고침의 은사를 주셨다. 

그리고 아가보와 빌립의 딸들에게는 바울에게 은사를 준 것 같은 성령을 통하여 예언의 은사를 주었다. 

그들은 장차의 일을 예언하였고 예언대로 모든 일은 이루어졌다(고전 12:8, 10 참조). 

구약 시대에는 가장 뛰어난 성령의 은사였던 선지자의 미래의 사건을 예언하는 은사가 신약 성서 시대에서는 다른 은사들에 의해서 차선의 은사로 여겨졌고 교회 안에서는 예언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 그렇게 중요한 인물들로 여겨지지 않았다. 

아마도 아가보가 가이사랴에 온 목적은 이러한 예언의 정보를 바울에게 제공하고자 그를 만나러 온 것같이 보인다.

3. 아가보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속박될 것을 예언하였다.

(1) 그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행하였던 것과 같이 상징으로써 예언한다. 

이러한 예언은 이사야(20:3)나 예레미야(13:1; 27:2), 에스겔(4:1; 12:3) 그리고 그 외 많은 예언자들이 그러한 상징으로 예언하였다. 

"아가보는 바울의 띠를 가져갔다." 그는 바울이 풀어 놓았던 것을 가져갔거나 아니면 바울로부터 풀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 띠로 먼저 "자신의 손을 묶고 그 다음 그의 발을 묶었다." 아니면 아마도 손과 발을 함께 묶었을 것이다. 이것은 예언을 확증하고 (즉 이미 보여진 것처럼 그 일은 확실히 실현될 것이라는 뜻이다) 또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행위를 통하여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 시도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듣기만 하는 것보다 우리가 직접 보는 것이 일반적으로 더 깊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2) 그는 그 상징을 설명하는 방법을 통하여 예언한다. 

"성령이 말씀하시되" 즉 예언의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의 임자를 결박하여" 그들이 바울이 섬기던 주님에게 하였듯이(마 20:18, 19) 또한 다른 곳의 유대인들이 로마의 통치자에게 그를 고소해서 그를 결박하려고 하였듯이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고 말한다. 

바울은 그에게 주어진 이 급박한 고난에 대한 경고를 자기로 그 고난에 대비하게 하고 또 그 고난이 닥쳤을 때 그 고난이 그를 놀라게 하거나 떨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였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시련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우리들에게 주신 일반적 경고를 우리는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받아들어야 하겠다.

Ⅲ.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설득하여 포기하게 하기 위한 친구들의 간절한 만류(12절). 

본문은 다음과 같이 이 사실을 전해 준다. "그 곳에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러한 경고가 자주 말해진 것을 듣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행하고자 하는 바울의 결심을 알고 있던 바울의 동료들과 나(누가)까지도 바울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고 그의 여정을 바꾸도록 눈물로 간청했다."

1. 본문에 바울에 대한 본받을 만한 애정과 교회 안에서의 바울의 커다란 유용성에서 비롯된 그를 존귀히 여기는 태도가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때로 매우 활동적인 위대한 사람들에게 과로하지 말도록 설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때로 용감한 훌륭한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너무 위험에 노출시키지 말도록 설득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

" 주는 우리의 몸을 위하여 오셨다." 그러기에 우리도 우리의 몸을 잘 간수해야 한다.

2. 그러나 이러한 사랑에서 비롯된 만류 가운데는 분명히 결함도 섞여 있을 수 있다. 

그들의 그러한 결점이 우리 모두에게서도 흔히 일어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특별히 바울의 동료들에게 이러한 결점이 있었다. 그들은 바울이 성령의 지시에 의하여 이 여행을 착수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바울이 어떠한 결심으로 전에도 이 같은 반대를 극복해 왔는가를 알고 있었다. 

대체로 고난이 멀리 있을 때 혹은 단지 그것에 대해 일반적인 경고만을 받았을 때에는 그 고난을 가볍게 볼 수 있지만 그 고난이 가까이 다가올 때는 몸을 도사리고 후퇴해 버리기 쉽다. 성경에 이르기를 "이제 이 일이 네게 임하매 네가 답답하여 하고 이 일이 네게 당하매 네가 놀라는구나"(욥 4:5)라고 하였다.

Ⅳ. 바울의 거룩한 용기와 두려움 없는 태도. 그는 그러한 태도로 자기의 결심을 고수했다(13절).

1. 바울은 그를 설복하려는 사람들을 나무란다. 

본문에서 우리는 서로 사랑함의 동기가 유발하는 분란을 대하게 된다. 각자의 서로에 대한 매우 진실되고 강한 애정이 본문에서 서로 맞부딪치고 있다. 

그들은 바울을 진정으로 사랑했으므로 그러기에 바울의 결심을 반대했다. 바울 또한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였다. 

그러기에 그의 여행을 반대하는 그들을 꾸짖는다.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그들은 베드로가 그와 같은 경우를 당했을 때 "주님 그리하지 마소서"라는 말로 그리스도를 만류해서 죄를 범하였듯이 바울을 만류하는 죄를 범하였다. 

그들의 그에 대한 눈물의 호소는 "바울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1) 그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유혹이었다. 

그들의 호소는 바울을 동요시켰고 그의 결심을 나약하게 하고 이완되게 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호소는 바울로 하여금 그의 방침을 바꿀까 하는 생각을 하게끔 하였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고난을 받도록 정해진 것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너희는 나를 북돋우고 격려해야 하며, 내게 용기를 줄 수 있는 말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너희의 눈물로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나를 낙망시키고 있구나. 너희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는가?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자의 십자가를 지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나더러 내 십자가를 피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냐?".

(2) 그들의 간곡한 만류는 그에게 괴로움을 주었다. 

자신의 양심에 대해 거리낌 없음이 그들을 만족하게 할 수 없었다. 바울은 매우 부드러운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 자신이 눈물의 사람이었고 또한 그의 친구들의 눈물에 대해서도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하였다. 그 눈물들은 그에게 강한 영향을 끼쳤다. 그 눈물 때문에 바울은 어떠한 일이라도 그들 말대로 따르고 싶은 심정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제 주님의 뜻 이룸위해 그의 눈물로 호소하는 친구들의 요구를 부인해야만 할 입장이었기에 그 눈물은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다. 

그들의 친절은 부담스러운 친절이었으며 그들의 동정은 고통을 주는 동정이었다. 그는 그들의 설복 때문에 괴로워하였으며 그들의 설복은 그의 슬픔에 고통까지 더하였다. 

우리의 친구들이 고난에로 부름을 받았을 때 그들을 위하여 슬퍼하는 것보다 [지고지선의 주님 앙망함 통해 주께 위탁하며]그들을 위로함으로써 그들에게 우리의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한다. 

물론 이 가이사랴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건의 세밀한 진행까지 미리 예측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현재 그토록 무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인 바울의 고난에 대한 윤곽만의 예고 때문에 그토록 슬퍼하지 않아도 되었으리라..

보라, 오히려 그의 예루살렘에서의 결박은 그들을 위해서는 유익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자 그는 그가 지금 있는 곳인 가이사랴로 보내졌다(23:33).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적어도 2년이나 머물러 있게 되었다(24:27). 

그는 죄수로서 잡혀 있기는 하였으나 24장 23절에서 나타나는 바대로 그의 친구들에게 자유로이 갈 수 있었고 그의 친구들도 그에게 올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또한, 가이사랴 교회는 더욱 그와 오래 사귈 수 있게 되었고 그가 자유로왔을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이상의 도움을 그가 갇혀 있기 때문에 그에게 줄 수 있었다. 어떤 일이 겉보기에 우리에게 불리하게 진행된다고 느껴지고 염려하는 일조차도 우리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인도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신뢰하는 하나님의 지고지선의 섭리를 따르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2. 바울은 그러한 모든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계속하겠다는 그의 결단을 되풀이하여 말한다. 

"너희가 어찌하여 우느냐? 나는 나에게 어떠한 고난이 준비되어 있든 그 고난을 당할 각오가 되어 있다. 나는 어떠한 일이 닥치더라도 가기로 확고하게 결정을 내렸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것을 반대한다고 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다. 나는 기꺼이 고난을 받으련다. 내가 기꺼이 고난을 받으려는데 너희는 왜 내가 고난을 받으려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냐? 내가 내 자신을 가장 잘 알고, 또 내 자신의 일을 결정하는 데 가장 정확하지 않겠는가? 만일 예고없이 고난이 닥친다면 그 고난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고난이 될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너희가 울 만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고난이 미리 예고되어 있지 않는가! 그러기에 나는 그 고난을 기꺼이 환영한다. 따라서 나의 고난을 너희가 두려운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나로서는 "이미 각오가 되어 있다" 

전쟁에 참전하는 병사와 같이 "나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나는 고난을 예상하며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충분히 고려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것은 나에게 놀라운 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사도가 되던 때 이미 내가 얼마나 고통을 당해야만 할 것인가에 대하여 계시를 받았노라"(9:16). 

"나는 떳떳한 양심과 하나님에 대한 굳은 신뢰와 또한 이 세상과 육신에 대한 거룩한 멸시와 그리스도에 대한 생동력 있는 믿음과 영생에 대한 기꺼운 희망에 의해 나는 그러한 고난을 맞을 각오를 하였다. 나는 우리가 음식을 장만하여 기다리던 친구들을 맞이하듯이 고난을 맞이할 뿐 아니라 그 속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1) 그의 결심이 얼마나 굳건했는가를 생각해 보자. 

"너희는 내가 예루살렘에서는 속박을 받아야만 할 것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이 고난을 내가 받는 것이 두려워 나로 하여금 그 고난을 피하게 하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건데 만일 하나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그의 뜻이라면 나의 자유뿐 아니라 나의 생명도 잃어버릴 각오를 하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우리들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 안에 온전히 설 수 있도록 대비하는 것이 지혜있는 태도이다.

(2)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고난과 죽음까지 기꺼이 맞이할 수 있게 하였는가를 살펴 보자. 

그것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였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섬기고 또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내놓고자 하였다.

Ⅴ. 바울의 결심에 대한 그의 친구들의 복종(14절).

1. 그들은 훌륭한 사람의 지혜에 복종했다.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자신들의 의견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저기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저희는 저희의 집요한 요구를 그쳤다." 

바울은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있었고, 그가 어떠한 일을 할 것인가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저희는 그 일을 바울이 하고자 하는 대로 맡겼다. 

그들은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비난하지 않았고 그가 경솔하다거나 외고집장이이고 괴퍅스럽고 부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는 비난하지도 않았다. 

사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은 그들이 바라는 대로 상대방이 행동하지 않으면 그를 쉽사리 정죄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바울이 그렇게 결심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고히 알게 하시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문제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설득당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에게 지나치게 강압하지 않는 것이 예의있는 태도이다.

2. 그들은 선한 하나님의 뜻에 복종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고 그들은 말하였다. 

그들은 바울의 결정을 단지 그의 고집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바울의 고난을 받으려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또한 그가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으로 받아들였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은 우리의 기도와 행동의 규범이 되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우리로 인내하게 하는 좌우명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그의 결심대로 따랐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을 보여 준다.

(1) 바울의 결심의 확고함을 보여 준다. 

그는 요지부동이었으며, 설복당하지 않았다. 이 사실 속에서 그들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바울에게 확고한 신념을 주신 분은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일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친구들이나 사역자들의 마음을 이렇게 또는 저렇게 변경케 하고자 하다가(그들이 우리가 원했던 것과는 전혀 다를 길로 갈 때에)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거기에 복종해야 한다.

(2) 바울이 고난에 대한 도전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들은 말한다. "만일 아무런 구출의 길이 없다고 할지라도 주 예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바울은 그 속박 속으로 뛰어들어갈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막기 위하여 우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하였다. 이제 우리는 그 일을 하나님에게 맡기자, 또한 이 일을 그리스도에게 맡기자. 아버지께서 모든 심판을 그리스도께 맡기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맡기자." 

우리가 고난이 다가오는 것을 볼 때 그리고 그 고난이 특별히 우리들의 사역자들을 침묵시키거나 그 고난이 그들을 우리들로부터 빼앗아 갈 때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우리는 말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지혜의 하나님이시므로 어떻게 하면 일이 유익하게 될 수 있는가를 알고 계신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의 거룩한 뜻을 기꺼이 따라야 한다." 

"주님의 뜻은 틀림 없이 이루어지고 만다. 거기에는 예외가 없다." 

말뿐만 아니라 우리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뜻은 그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요 그리고 그는 모든 일들을 그의 경륜에 따라서 행하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로 하여금 우리들에게 또 우리와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해 그가 보시기에 좋은 대로 행하시게 하자." 

고난이 다가올 때, 주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은 우리들의 비탄을 감소시킬 것이다. 

고난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을 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들의 두려움을 멈추게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고난에 대하여 "아멘 뜻대로 이루소서"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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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16.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바울이 야고보를 방문하다

17.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20.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22.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23.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25.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26.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행 21:15-26)

Ⅰ. 바울의 가이사랴로부터 예루살렘으로의 여행과 그를 수행한 동료들.

1. 그들은 "행장을 준비하였다." 

그들의 가방과 짐을 챙겼다. 그들은 마치 가난한 여행자나 군인들처럼 자신의 짐을 직접 운반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사실 갈아  입을 의복도 거의 없었다. 나의 재산은 내 몸둥이  하나이다는 말이 그대로 그들에게 적용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마게도냐와 아가야에서 모금한 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들이 바울로 하여금 다른 길로 가도록 설득했다면 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그와 동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한다고 하여 그들은 "그렇다면 당신 혼자서 가시오"하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예루살렘에 가시고자 하실 때 도마가 했던 것같이 "우리도 가서 그와 같이 죽기로 하자"(요 11:16)는 각오로 그를 따랐다. 그들이 바울과 동고동락하려는 결심은 잇대가 다윗과 함께 동고동락하려고 각오한 것과 다름 없었다. 잇대는 "진실로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무론 생사하고 종도 그곳에 있겠나이다"(삼하 15:21)라고 말하였었다. 

바울의 담대함이 그들 역시 담대하게 만들었다.

2. 가이사랴의 제자들 몇 사람이 바울 일행과 함께 동행하였다. 

그들이 이같이 훌륭한 바울과 좀 더 같이 있고 싶어서 그와 동행하였는지 혹은 그들이 할 수 있다면  바울에게 봉사할 기회를 얻거나 또는 그가 당할 고난을 방지하거나 적어도 고난 속에 처한 그를 보살피려는 목적으로 그와 동행하였는지는 본문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바울에게 허용된 자유의 시간이 단축되고 있음을 알고 그들은 더욱 바울과 대화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엘리사도 엘리야가 승천할 때가 눈 앞에 다가온 것을 알았을 때 더욱 가까이 그를 따라갔던 것이다.

3. 그들은 예루살렘에 자신의 집을 가지고 있는 정직한 노신사 한 사람을 그들과 함께 데리고 갔다. 

그 사람은 기꺼이 바울과 그의 일행들을 자기 집에 유숙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에 "우리가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16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유하려 함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그와 같이 많은 무리의 사람들을 유숙시키고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여관은 상류 계층의 사람들에게 제공되었다. 또한 당시에는 자기 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방을 빌려 주는 것을 꺼림직하게 여기었다. 그러나 나손은 바울과 그의 동료들을 그의 유숙자로 맞이했다. 

비록 나손은 장차 바울에게 고난이 닥칠 것이라는 것을 들었고, 또 그러한 위대한 사람들에게도 역시 고난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울을 맞아드렸다. 이 나손은 "오랜 제자" 곧 "처음부터의 제자"라고 불리우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가 그리스도의 칠십인의 제자들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오순절 성령의 임한 후 처음 개종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라고도 하며, 혹은 구브로에 복음이 전파되었를 때 처음 개종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13:14). 

어떻든 간에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지 오래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랜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영예로운 일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또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오랫 동안 꾸준히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다랄 수 있었고 굳건히 신앙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으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점 신중해지며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것 역시 영예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는 이러한 오랜 제자들과 사귀기를 즐겨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많은 연륜이 우리에게 지혜를 가르쳐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Ⅱ. 예루살렘에서의 바울에 대한 환영.

1. 그곳에 있는 많은 형제들이 "바울을 기꺼이 영접했다"(17절).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왔다는 것을 알고 곧 나손의 집인 그의 숙소로 찾아 와서 그의 무사한 도착을 축하하고 또한 그를 만나게 되어서 기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를 그들의 집으로 초대했다. 그들은 이 같은 저명한 그리스도의 종과 사귈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우리는 만일 바울이 우리들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그를 기꺼이 영접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를 우리가 원하지 않는다고 할 때 그를 기꺼이 받아들일지는 의문이다.

2. 그들은 집회소를 찾아가서 거기서 야고보와 교회 장로들을 만나 보았다(18절). 

본문은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해 준다. "그 이튿날 바울은 야고보에게로 들어갔다. 그는 그의 동료인 우리들도 데리고 갔다. 그것은 우리를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야고보는 당시에 예루살렘에 거주한 유일한 사도였던 것같이 보인다. 나머지 사도들은 다른 곳에 복음을 전도하기 위하여 각각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루살렘에 한 명의 사도를 상주시키고자 계획하였다. 예루살렘에 거하는 사도는 정해진 것은 아니었고 경우에 따라서 교체되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도 한 명을 상주시킨 이유는 예루살렘이 각처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야고보가 그 곳에 있었다. 그리고 여러 상시 교회의 사역자들인 장로들도 말씀을 전하고 교회를 치리하기 위하여 그곳에 모여 있었다. 

바울은 그들 모두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경의를 표시하고 그들의 안부를 물었으며 그들과 우정의 교제를 나누었다. 바울이 "그들에게 문안했다." 즉 다시 말하면 바울은 그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고 하나님께 그들을 축복해 주시기를 간구했다. 

문안의 의의는 사실 상대방의 구원을 기구하는 데 있다. 상호간의 문안이나 기원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갖추어야 하는 예의이다. 이러한 문안은 그들 상호간의 애정과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일치된 사랑을 표시하는 것이다.

Ⅲ. 그들에게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행한 정도 사업에 대하여 설명하였고, 그들은 그것을 만족하게 여겼다.

1. 바울은 그가 갔던 여러 지방에서의 복음의 성공에 대하여 그들에게 이야기했다.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왕국이 확장되어가는 것을 듣는 것을 매우 기꺼워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였다"(19절). 

바울이 얼마나 겸손하게 말하였는가를 생각해 보자. 그는 그가 어떠한 일을 하였는가를 말하지 않고(그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섬김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떠한 일을 하셨는가를 말하였다. 그는 그 일을 한 것은 "내가 아니고, 나와 함께 하였던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말한다. 

그는 심고 물을 주었다. 그러나 성장하게 한 것은 하나님이었다. 그는 이 모든 일을 상세하게 그들에게 전했다. 그 이유는 그가 거둔 복음의 성공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같이 다윗도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위하여 어떠한 일을 행하셨는가를 말하였다(시 66:16). 바울이 본문에서 그의 손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는가를 말하였듯이 말이다. 

이 둘은 다같이 그들의 친구들이 이러한 얘기를 듣고 함께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기 위해 그러한 말을 하였다.

2. 그들은 그것을 듣고 하나님을 찬양했다(20절). 

그러므로 본문에 "너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였다. 바울은 이 모든 일을 이룬 것이 하나님이라고 말하였다. 또 그들은 하나님에게 모든 찬양을 돌리었다. 그들은 바울에게 찬사를 돌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의 주님께서 그에게 "잘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라고 말씀하시도록 주님께 양보하였다. 

다만 그들은 그의 은혜가 이방인들에게까지 확신된 데 대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영광을 돌렸다. 

죄인들의 회개는 천사들이 그것을 기뻐하고 찬양하듯 우리들의 기쁨과 찬양도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바울을 어느 누구보다 광범위하게 쓰심으로 그를 영예롭게 하셨다. 그럼에도 그들은 바울을 시기하지 않았다. 또한 그 평판이 높아가는 것도 질투하지 않았다. 그와는 정반대로 이로 인하여 이로 인해 그들은 "주를 찬양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이 성공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이외에 그가 일을 좀더 즐겁게 계속할 수 있도록 그를 칭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찬양을 받는 것이 곧 바울의 기쁨이었기 때문이었다.

Ⅳ. 예루살렘 교회의 야고보와 장로들의 바울에 대한 요청 또는 충고. 

그들은 그에게 그가 제의법을 지킨다는 것을 과시하고 또한 성전에게 공개적으로 나타나 희생 재물을 바침으로 믿는 유대인들을 만족시켜 주기를 요구하였다. 제의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제의법은 이방인 개종자들에게는 결코 강요될 수 없는 것이었지만(거짓 교사들은 그것을 강요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복음을 파괴하려고 하였다) 그 법을 준수하는 분위기 가운데서 성장한 사람들에게는 만일 그들이 그것을 통하여 의롭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지는 않는다면 그것을 지키는 것이 죄가 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율법은 죽은 것이었으나 아직 매장되지는 않았다. 또한 율법은 죽었으나 남에게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러한 행위가 죄가 되지 않으므로 바울이 그것에 순응하는 것이 신중한 처사라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그들이 바울에게 한 조언은 그에게 권위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사랑에 의해 주어진 것이었다.

1. 그들은 바울이 그곳에 있는 많은 유대 개종자들을 고려해 주기를 바랐다. 

이에 대하여 본문은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라고 전해 주고 있다. 

그들은 바울을 형제라고 불렀다. 그것은 그들이 바울을 복음 사역에 있어서 그들과 함께 위임받은 자로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들은 할례를 받은 자들의 사도였고 바울은 이방인 사도였으며, 또한 그들은 율법 준봉자였고 바울은 율법 준봉자가 아니었지만 그들은 서로 형제로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당신이 이제 우리 회중과 함께 저러기 지내게 되었으니 그들의 수효가 얼마나 되는지 보아야 한다. 그들은 수만 명이나 된다"고 그에게 말하였다. 

본문은 우리에게 유대인이 수천 명이 아니라 수만 명 개종했다고 전해 주고 있다. 복음에 대해 가장 편견이 심했던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은총이 사탄의 가장 강한 요새까지 파괴시켜 버릴  수 있음을 나타낸다. 

초기의 신도의 수는 백 이십 명에 불과했으나 이제는 수만 명에 달라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작은 출발을 경멸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처음 시작은 조그마하지만 하나님이 마지막에는 엄청나게 크게 증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하나님이 그의 백성 유대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왜냐하면 그들 가운데도 남은 자가 있었고 선택된 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롬 11:1, 5, 7). 그들은 "믿는 자 수만 명이 있다"고 하였다. 

바울이 이방인 가운데서 개종자들이 많았음을 그들에게 설명할 때 그들에게 기쁨이 되었듯이 유대인들 가운데서 거둔 복음의 성공에 대한 그들의 설명은 바울에게 기쁨이 되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유대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바라고 기도한 것은 "그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여달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2. 그들은 믿음을 갖게 된 유대인들이 아직도 지니고 있는 연약함을 바울에게 알렸다. 

그들은 그때까지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본문에 보면 그들 모두 "다 율법에 열심있는 자"라고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진정한 메시야로서 믿었다. 또한 그들은 그의 의(義)를 의지하였고 그의 통치에 복종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모세의 율법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을 알았고 또한 율법의 제도에 청종함으로 주어지는 영적인 유익이 있음도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과 결별하거나 차츰 율법과 냉각된 관계를 가져야 될 것으로 생각지 아니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그리스도께서도 "율법 아래서 태어 나셨으며" 또 율법을 지키셨다는 것을 그들이 계속 율법을 지켜야 할 이유라고 여긴 것 같다(사실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키신 것은 율법에서부터 우리를 놓여나게 하시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사실 본체가 오셨는데도 그림자를 사랑한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자유롭게 하셨는데도 구속의 멍에에 그들의 몸을 들이대고 있는 것은 그들의 커다란 약점이었고 실수였다.

(1) 그러나 우리들이 그들을 통하여 배울 것이 있다. 

교육과 관습의 힘, 특히 제의법이 지닌 힘이 대단하다는 사실이다.

(2) 교육과 관습이 지닌 힘을 고려하여 그러한 사람들을 관대하게 대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이 믿게 된 유대인들을 배척하거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부인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율법을 위하고 뿐만 아니라 그것에 열심이긴 하였지만 그것은 그들의 관습일 뿐으로 그들이 그 율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율법에 대한 열심은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그들이 그것 안에서 성장했고 그것을 지키는 자들 가운데서 살아 왔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은 납득될 수 있는 것이었다.

3. 그들은 바울에게 율법에 대해 이토록 열심인 유대인들이 그에게 악감정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시켰다(21절). 

바울 자신은 그리스도의 어떤 종들보다 충실한 종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당신이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준수하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것과 뿐만 아니라 이방에 있는 유대인들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고 하였다는 것을 저희가 들었다(그들은 이러한 얘기만을 듣고 당신에 대한 선입견을 지니게 되었다). 사실 그들은 이러한 규례를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이방 나라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준수해야만 할 것으로 여겨 왔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당신이 교회의 절기나 금식을 준수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성귀함(聖句函)도 지니지 못하게 하였고 또 불결한 음식을 금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바울이 모세의 율법의 폐기를 설교하였고, 율법에 의하여 의롭게 될 수 없으므로 우리가 더 이상 율법을 준행하는 일에 매어 있을 필요는 없다고 그들에게 가르친 것은 사실이었다.

(2) 그러나 바울이 그들에게 모세를 배반하라고 가르쳤다는 것은 거짓이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전한 신앙은 율법을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율법을 지킴으로써) 그리스도와 회개와 신앙을 전했다. 이것들을 위하여 율법은 대단히 유익한 것이라고 그는 말하였다. 그러나 바울에게 가르침을 받은 이방인들 가운데 있던 유대인들은 바울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또한 "모세는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몽학 선생"이라는 그의 가르침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았다. 또한 믿는 유대인들까지도 바울이 모세의 적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대단히 의식하였던 것 같은데 그런 이유들로 그들도 바울에 대하여 매우 격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 참석하고 있던 유대인들의 사역자들과 장로들은 그를 사랑하였고 존경하였으며, 그가 행한 일을 인정하고 또한 그를 형제라고 불렀다. 

그러나 일반 신도들로 바울에 대하여 쉽사리 호의를 가지게 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왜냐하면 판단력이 모자란 사람들이 더 비판적이기 마련이며, 머리가 나쁜 사람들이 쉽게 흥분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그들이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그래서 식별할 수 없었다. 이러한 무지 때문에 그들은 도매로 바울의 가르침를 정죄하였던 것이다.

4.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이 어떤 고전적인 행동을 통하여 그가 예루살렘에 왔다는 것과 그에 대한 비난이 허위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또 자신이 율법이 행하는 것을 보여 주므로 그가 사람들에게 모세를 버리라고 가르치지도 않았으며, 유대 교회의 관습을 파괴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를 바랐다.

(1) 그들은 이러한 종류의 어떤 조치가 취해져야만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무슨 조치를 취할 것인가?" 유명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그들의 출입(出入)이 선의에서든 악의에서이든 주목되고 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한다는 것은 불편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당신이 온 사실을 들으면 틀림 없이 함께 몰려 올 것이다(역주:한글 개역과는 다소 틀림). 그들은 우리들이 그들 모두를 불러다 당신을 형제로서 우리 가운데서 말씀 전하는 것을 그들이 허용해야 할 것인지를 조언 받고자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 스스로가 자진해서 함께 모여와 당신의 말을 듣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바울이 사람들에게 모세를 배신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리므로 그들을 만족시킬 어떤 조치가 취해져야 했던 것이다. 그곳의 야고보와 또한 장로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그러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① 바울 자신을 위해서였다. 

즉 그의 오명을 제거하고 그 같이 훌륭한 인물이 어떠한 오해를 받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또한 그렇게 유용한 사람이 그의 유능함에 장애가 되는 그러한 불리한 상황 아래서 수고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② 믿는 유대인들을 위해서였다. 

즉 그들이 그렇게 훌륭한 사람에 대해 계속 편견을 지니지 않게 하기 위하여 또한 그들의 편견에 의해서 그의 사역을 통해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상실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③ 그들 자신을 위해서였다. 

그들은 바울을 보호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책임 아래 있는 자들이 우를 범하므로 그들 자신이 비난을 듣지 않기 위해서였다.

(2) 그들은 바울이 자신이 결백을 입증할 수 있는 좋은 안을 제출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이러한 경우에는 우리들의 충고를 들으라.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는데 그들은 믿음을 가지게 된 유대인들로서 우리 교회의 교인이다. 그리고 그들은 서원한 사람 곧 일정 기간 동안 나실인으로 서원을 한 자들이었다. 이제 그들의 서원 기간이 만료가 되었다(23절). 그러기에 그들은 율법에 따라서 제물을 드려야 한다. 그 때에 그들은 그들의 봉헌한 머리를 깎고 번제물로 수양 하나와 속죄 제물로 어린 암양 하나와 화목 제물로 수양 하나와 기타 그들에게 정해진 제물들을 드리게 될 것이다(민 6:13-20). 이러한 예식은 서약의 동시에 만료된 여러 사람들이 함께 행하여 왔다. 이같이 함께 하는 이유는 예식을 신속히 진행시키기 위해서 또는 예식을 보다 위엄있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런데 바울 당신도 최근에까지 율법을 좇아 나실인의 서원을 하였고 또 그 기간이 만료된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거하는 사람들의 관습에 따라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밀지 않았는가(18:18). 그러니 이제 당신이 조금 더 양보하여 이 네 사람이 나실인의 희생 제물을 드리는 데 같이 참석함이 어떻겠는가? 율법에 따라 그들과 함께 정결 예식을 행하라. 그들과 함께 예식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이 엄숙한 예식을 위하여 그들이 희생 제물을 사는 비용을 담당하고 함께 희생 제사에 참석하라"고 말한다. 

그들은 이 일이 비난자들의 입을 효과적으로 닫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바울에 관한 보고가 거짓이었음을 확신하게 될 것이고, 바울은 얘기되는 것과는 같지 않은 사람으로 유대인들에게 모세를 반대하라고 가르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확신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뿐만 아니라 바울 자신이 철저한 유대인으로 규모있게 행하며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사람들이 확신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모든 일들이 잘 될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5. 그들은 그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것이 이방인 개종자들을 위하여 최근에 만들어진 교령에 결코 위배되지 않으며 또한 그들이 이것을 계기로 이방인들에게 허용된 자유를 조금이라도 훼손하고자 기도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25절). 

그러므로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를 믿는 이방인들에게는 그러한 어떠한 것도 준수하지 말라고 결의하여 편지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의를 굳게 지킬 것이다. 우리는 결코 그들을 제의법에 의하여 얽어 매지 않을 것이며 다만 그들이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은 것과 운행을 피할 것만을 지켜 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그들이 유대인의 희생제나 결례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들의 어떠한 예식이나 의식에도 매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바울이 개종한 이방인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열성적인가를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특별히 그들의 결의를 지킬 것을 선언한 것이다. 이같이 그들의 제의는 신중을 기해 제출된 것이었다.

Ⅴ. 바울은 그들의 제안에 동조한다. 

바울은 기꺼이 이 문제에 따르기로 수긍함으로써 그들을 만족시켰다. 비록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하는 설득에는 굴복하지 않았지만 그가 그곳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자들과 같이 행해 달라는 부탁은 수락하였다(26절). 

그들이 충고한 대로 "바울은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였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변론하면서 말했듯이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24:18) "성전에 들어갔다." 그는 제사장들에게 결례의 날이 만료된 것을 알리고 제사장들이 각자에게 희생 제물을 드릴 시간을 정해 주기를 바라서 그곳에 온 열렬한 유대인들과 같이 조용히 성전에 들어갔다. 

^^아인스월드(Ainsworth)는 민수기 6장 18절에 대한 마모니대스(Maimonides. 역주:이 사람은 유대인 철학자로 12세기에 활동한 인물이다)의 글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에게는 나실인의 의무의 절반만을 이행하게 해달라든가 또는 나실인으로서의 서원이 끝난 후 머리털을 미는 것을 절반만 밀겠다고 하면 그는 나실인이 바칠 제물의 절반만을 가져다가 그 제물을 드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제 바울은 나실인의 결례를 행하였다. 그는 그가 서원했던 대로 나실인의 희생물을 봉헌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이 나실인의 율례를 철저히 이행하여 성전에서 일주일 동안 금식 기도를 한 후 제물을 드리고자 계획하고 있었고 바로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그가 제사장에게 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 볼 문제는 야고보와 장로들이 바울에게 한 이 충고가 과연 정당한 것인지와 또는 바울이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 과연 잘한 것인지를 살펴 보자.

1. 어떤 사람들은 이번의 바울의 처사는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가 이같이 함으로 유대인들을 제의법에 더욱 집착하게 만들었고 한편 그들을 자유롭게 한 그리스도의 자유 위에 굳건히 서 있었던 사람들을 실망시켰다고 본다. 이같이 주장하는 사람들은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은 자신들이 유대인 개종자들의 이러한 잘못을 묵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못하여, 그들은 바울을 감언이설로 현혹하여 개종한 유대인들의 잘못된 행위에 동조하게 하였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들은 야고보와 그곳 장로들이 바울에게 믿는 유대인들이 율법에 대하여 얼마나 열성적인가를 말하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놀라운 은사를 부여해 주신 바울에게 이들 믿는 유대인들이 범하는 잘못을 깨우쳐 주고 또한 그들이 그리스도와 결혼함으로 율법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수고스럽지만 깨우쳐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 옳은 처사였다고 생각한다(롬 7:4). 

그러나 그들이 바울에게 강요하여 유대인들의 제의를 따르게 해서 오히려 이들 유대인들의 잘못에 타당성을 부여한 것은 하나님은 은혜에서 나온 처사이기 보다 인간의 지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긴다. 

확실히 바울은 그들이 그에게 가르쳐 준 것보다 스스로 어떻게 해야할지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이들은 생각한다.

2.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 충고는 신중하고 유익한 것이었으며 바울이 그들의 제안을 수락한 것은 그러한 상황에 있어서는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을 얻고자 함이다"(고전 9:20)라는 것이 바울이 공언한 그의 생활 좌우명이었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디모데에게 할례를 하였다. 비록 바울이 일관되게 제의법을 준수하지는 않았지만 선을 행하기 위한 기회를 얻기 위해서 그리고 또한 그가 융통성이 있는가를 보여 주기 위하여, 바울은 가끔 성전에 가서 희생제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신앙을 훼손시키는 자들은 저지되어야 하지만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에게는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바울의 저들에 대한 동조는 그에게 오히려 나쁜 결과를 가져다 주었음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유대인들을 격분시키지 않고 진정시키기를 바라서 행한 행위가 오히려 그들을 격분시키고 그를 고난에 처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어려움을 당했다고 해서 그의 행위를 잘못되었다고 보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못 된다. 

바울은 잘 처신하였으나 그럼에도 그 때문에 고난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지혜의 하나님이 그들로 바울에게 조언하게 하고 또 바울을 그 조언에 따르게 하시므로 인간이 의도한 것보다 더 좋은 목적을 위해 쓰시고자 섭리하신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들의 율법에 대한 열성으로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기독교에 대하여 좋게 보이고자 한 것이, 믿는 유대인들이 보는 앞에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야만스럽게 대하는 것을 보고 제의법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같이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이 확실한 변론이나 감동적인 강론보다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생각이 얼마나 헛되며 그것은 오직 기독교에 해를 끼치는 것밖에는 아무런 유익도 없음을 보았다. 비열한 동조보다는 고결함과 굳굳함이 우리를 더욱 잘 지켜 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야고보와 장로들이 바울에게 당할 고난이 클 것을 생각하여 그에게 조인을 준 것이 오히려 바울을 시련 속으로 몰아 넣은 것을 교훈삼아 우리는 우리의 주변 사람에게 그들의 심정과는 반대되는 어떤 의견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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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잡히다

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9.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31.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33.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34.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35.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36.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바울이 백성에게 말하다

37.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38.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39.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40.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예루살렘에서의 폭동(행 21:27-40)

사도행전은 그의 체포의 결과를 우리에게 전해 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체포된 후에 바울은 한 법정에서 다른 법정으로 옮겨지든가 또는 이 감옥, 저 감옥으로 옮겨진 후 거기 방임되어 있던가 하고 최종 재판을 받거나 보석으로 풀려나지 않은 채 본서는 끝나고 말기 때문이다. 

고난이 시작되는 것을 처음 접할 때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오래 계속될 것인가 혹은 어떻게 결말이 날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Ⅰ. 바울의 체포와 투옥.

1. 그는 성전 안에서 붙잡혔다. 그 날은 바울의 결례의 날로써 거기서 그는 경건한 결례 예식에 참여하고 있었다(27절). 

이전에는 바울은 성전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랫 동안 해외에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곳 사람들에게 낯선 사람이 되었다. 

그러기에 "그 이레가 거의 찰 때까지" 바울에 대하여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그는 발각되지 않았었다. 

성전은 성역이므로 그는 보호를 받는 거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성전 안에서 그가 드리는 희생물에다 그의 피를 섞기를 바라는 자들에 의하여 무력으로 체포되었다. 

사실 바울은 주님께서 성전을 떠나신 이후 성전을 가장 빛내 주는 사람으로서 환영되어져야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었다. 

이들 바울을 증오한 자들은 누구보다 성전에 대하여 열심있는 척하였지만 이같이 그들은 성전에서 바울을 체포하는 짓을 통해 스스로 성전을 더럽히는 일을 자행하였던 바, 후에는 다른 사람 아닌 로마 교회의 교권 집행자들에 의하여 (교회의 영예와 유익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더럽혀지는 것이다.

2. 바울을 고발한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아니라 아시아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흩어진 유대인들로서 바울을 가장 잘 알고 있었고 또 바울을 누구보다 증오하던 자들이었는데, 그들은 그들 스스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는 일은 좀처럼 드물었다. 

그들은 그들의 사적인 이익을 위하여 고의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먼 곳에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전을 위하여는 가장 열심있는 척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성전에 대한 평상시의 태만을 그것으로 보상하려는 것처럼 행동하였다. (이미 소아시아의 유대인들은 수차례 바울을 죽이려 했었다)

3. 그들이 사용한 방법. 

그들은 폭도들을 일으켜 그들로 바울에게 대항하도록 선동하였다. 그들은 대제사장에게 고소하지도 않았으며, 도시의 행정관에게도 고소하지 않았다(아마 그들은 그러한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다만 "모든 무리를 충동하였다." 

이들 무리들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선동되기 쉽고 또한 폭발하여 반드시 난동을 부리기 쉬운 상태에 있었다. 

이성이 결핍되어 주로 감정에 의해 지배되는 자들은 그리스도나 기독교에 대항하는 일에 이용되는 데 가장 적합한 자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인 박해자들을 사악한 자들이라고 기술하였을 뿐 아니라, 어리석고 몰지각한 자들이라고 서술하였다.

4. 이들 선동자들이 바울을 향해 소요를 부리도록 백성들을 선동한 말은 대중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매우 거짓되고 부당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너희가 만일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순수한 유대인의 혈통으로 태어났다면 그리고 너희 교회와 너희 나라를 위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제야말로 너희의 충정을 과시할 때가 온 것이다. 자 여기 우리 민족과 교회에 공통적으로 해로운 자를 체포하여 여러분의 충정을 나타내라"고 외쳤다. 

그들은 마치 "도적을 추격하듯이 그를 향하여 부르짖었고"(욥 30:5), 또는 미친  개처럼 소리쳤다. 

기독교의 적들은 그들이 기독교가 나쁜 것임을 입증할 수 없을 때는 옳고 그른 것은 불문에 붙이고 기독교에 오명을 뒤집어 싸우려고 광분하며 또한 격분과 발악을 통하여 그것을 전복시키려고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사실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마땅히 "그의 민족 이스라엘을 영화롭게 하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바울을 도와야 했었다. 그러나 선동적인 분위기가 그들로 이스라엘 사람답게 행동할 수 있도록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오직 그들은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의 편만을 도왔다. 

그들의 현재의 외침은 "도둑아 멈추어라." 혹은 이달리아의 "배신자야, 배신자야" 하는 부르짖음과 같았다. 정의가 결핍된 곳에서는 소요만이 일어날 뿐이다.

5. 그들은 바울이 해로운 가르침을 전파하고 악한 행실을 자행하였다고 고발하고 그의 가르침과 행위는 모세의 의식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고소한다.

(1) 그들은 바울이 나쁜 가르침을 가르쳤다고 말한다. 

그들은 바울 자신이 타락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들에게 표출하고 공표하였다고 고소한다. 

그들은 그가 이곳 예루살렘에서는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다른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같은 교훈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였다고 고소한다. 

그들이 그에게 죄를 씌우는 방법은 교묘하였다. 그들은 바울이 순회 전도자이므로 그의 해로운 가르침도 널리 전파된다고 하였다. 

그들은 "그가 있는 힘을 다하여 유대인들과 율법과 성전을 저주하고 그들의 믿는 종교를 이단적인 것이라고 전파하며 다닌다"고 말하였다.

① 그들은 바울이 유대인을 저주하였다고 비난한다. 

사실 바울은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동등하다는 것과 "할례받는 사람이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보다 이로울 것은 없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대하여는 그들이 벌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그들은 그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하여 한 말을 온 유대 민족을 적대하는 발언으로 해석하였다. 그들의 태도는 마치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곧 전 유대인을 대변한다는 식이었다. 

그러므로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욥 12:2)라고 한 욥의 친구들에 대한 비난은 이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지 않는 자들은 추방해 버리시지만 "그의 백성들을 추방하지 않으시는"분이신 것이다(롬 11:1). 

이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그의 백성이 아니었다(호 1:9). 그럼에도 그들은 그의 유일한 자손인 체 가장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교회의 이름을 위하여 가장 열성적인 것처럼 보이는 자들이 사실은 오직 이름만 걸고 있는 교인들일 경우가 허다하다.

② 그들은 바울이 율법을 정죄한다고 비난한다. 

그들은 바울의 복음은 율법의 목적이요 완성이라는 사람들에 대한 가르침을 율법을 거스르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의 가르침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세우는 것이었다(롬 3:31).

③ 그들은 그가 성전을 저주한다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바울이 사람들에게 어느 곳에서나 기도하라고 가르친 것과 그의 주님이 예언했던 유대 민족과 예루살렘, 그리고 성전의 파멸을 바울이 때때로 언급한 것을 그가 성전에 대하여 적대적인 행동을 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바울 자신이 전에는 이 "거룩한 곳을 적대하는 말을 한다"고 하여 스데반을 박해하고 처형하는 일에 앞장 섰었다. 그러나 이제 꼭 같은 이유로 해서 바울 자신이 고소를 당하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박해의 도구 노릇을 하던 그가 이제는 유대인들의 분노와 저주의 표적으로 세워진 것이다.

(2) 그들은 바울이 나쁜 행실을 자행하였다고 고발한다. 

이 거룩한 장소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악평을 하였다는 그들의 고소를 더욱 확고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은 바울 자신이 성전을 더럽혔다고 그에게 뒤집어 씌웠다. 또한 그들은 그가 공개적인 행동을 통하여 성전에 대한 그의 멸시를 남들에게도 보이고 또 그들로 그의 행동을 따르게 하고자 의도하였다고 고소하였다. 또한 그들은 그가 "성전" 즉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어떠한 구실에 의해서도 들어 올 수 없는 유대인의 뜰로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갔다"고 비난하였다. 

유대인의 뜰로 들어가는 문에는 헬라어와 라틴어로 "이방인은 여기 들어올 수 없음. 만약 들어오는 경우는 엄벌에 처함"이라는 경고가 쓰여져 있었다(Jowsph, Antiq, lib, xv Cap. 14). 

바울 자신은 유대인이었기에 유대인의 뜰에 들어갈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그의 봉헌에 함께 수종들고 있는 사람들이 없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방인인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를 그의 봉헌의 수종자라고 넘겨 짚었다. 사실 그들은 도로비모가 유대인의 뜰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다만 그들은 성내에서 그가 바울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들은 바울이 성내에서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있는 것만을 보고 바울과 함께 유대인의 뜰까지 들어간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성 안에서 드로비모가 그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그들은 바울이 그를 데리고 같이 성전 안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거짓이었다.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살펴 보자.

① 순진함만으로는 중상 모략과 거짓 비난을 막아 낼 수 없다는 점이다. 

정직하게 처신하고, 규칙에 따라 행동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전혀 알지도 못하고 결코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고소가 주어지는 것은 새삼스러운 사실은 아니다.

② "악인은 함정을 파고" 그들이 본문에서 그리하여 것과 같이, 그들의 거짓된 고소의 증거물을 찾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성내에서 한 이방인이 바울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그가 성전 안에서도 바울과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불합리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악한 사람들은 부당하고 근거없는 추론에 의하여 "땅 위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에게 가장 야만적인 행위를 한 자신들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③ 악의에 가득 찬 사람들은 현명하고 선한 사람들이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며 또 그들을 달래고자 하는 의도에서 행한 일을 오히려 역용하여 선량한 사람들을 해하려 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바울은 성전에 가는 행위를 통하여 자신을 그들에게 잘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조건으로 하여 바울을 고소하였다. 

만일 바울이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면 그들에 의해 그렇게 피해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방의 선의를 이같이 악용하는 것이야 말로 그들이 참으로 악한 사람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저희가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다"고 노래했던 것이다(시 109:4; 69:10).

Ⅱ. 사경에 처한 바울. 

그들은 수고롭게 대제사장이나 산헤드린 앞으로 바울을 데리고 가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회하는 길일 뿐이었다. 그들은 기소뿐만 아니라 처형까지 모두 일괄하여 부당한 방법으로 절차를 무시함으로써 진행코자 하였다. 

그들은 그의 죄를 증명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 바울을 공정한 재판에 붙이려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바울의 피에 그렇게 탐욕적으로 고갈되어 있었기에 정당한 법의 진행에 의해(그들이 설령 승소할 것을 확신하고 있다고 해도) 그에 대한 고소가 진행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인간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그러한 사람들이 하듯이 그들은 즉시 바울을 쳐 죽이겠다고 결정했다.

1. 모든 도시가 소란하게 되었다(30절). 

자신들은 비 거의 거룩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서도 이 거룩한 장소에 대하여는 강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던 무리들은 성전에서 소요가 일어나는 소리를 듣고 즉시 무장을 하고(마치 그 무기로 자기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려기나 하듯) 달려 나왔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하는 성전으로부터의 외침을 듣고는 "온 성이 들끓어 나왔다." 

그들은 마치 구약에서의 "하나님이여 열방이 주의 기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의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시 79:1)라는 호소가 다시 그들의 귀에 들리기나 한 것처럼 무서운 기세로 달려 나왔다. 

그들은 에베소인들이 바울이 아데미 신전에 대하여 적대 행위를 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에게 하였듯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그와 같은 열의를 나타냈다. 그 때(19:29) 에베소에서 일어난 정황에 대해서도 본서는 "온 성이 요란하여졌다"고 전해 주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불의한 방법으로 채색된 열심을 통하여 자신이 영광받은 것으로 여기시지 않는다. 또한 겉으로는 그를 위해 행하는 것처럼 하나 실상은 야만적이고 짐승적으로 행동하는 자들의 행위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지 않으신다.

2. 그들은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성전 안 뜰과 바깥 뜰 사이의 문을 닫았다. 혹은 그들은 바깥 뜰의 문을 닫았을 것이다. 그들은 바울을 사납게 성전 밖으로 끌고 나왔다.

(1) 그들은 그를 성전에서 끌어내므로 그에 대한 무서운 혐오감을 나타내었다. 

그들은 바울을 성전에서 처벌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으로, 또한 그를 성전에서 예배할 자격이 없는 자로 취급하였고 뿐만 아니라 그를 유대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도 간주하지 않았다. 그들은 같이 바울의 헌물이 추악한 것인 양 취급하였다.

(2) 그들은 성전을 존경하는 척했다. 

그들은 마치 선한 여호야다가 백부장들에게 아달랴를 "여호와의 전에서는 죽이지 말라"고 하였듯이 그렇게 행동했다(왕하 11:15). 이 악한 인간들의 어리석음이 어떠한 것이었는가 보자. 그들은 바울이 사람들이 마음을 성전에서 떠나게 한다고 하여 정죄하였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이 성전에서 매우 경건하게 예배를 하고 있으니까 그들은 바울을 끌어내 버린 것이다. 성전 관리인들이 문을 닫아버린 이유는 다음 두 이유 중 하나에서였을 것이다.

① 그것은 바울이 뒤로 물러나 제단의 뿔을 잡으므로 성소에 의지해 사람들의 분노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② 다른 가능성은 군중들이 성전 안으로 밀고 들어와 그들의 분노가 결국 거룩한 장소를 더럽히게 될까 하는 우려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들은 올바른 행위를 한 선한 사람을 살해하고자 하는 그러한 악한 일에 대하여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러한 일을 거룩한 장소에서 거룩한 시간에 자행한다는 데 대하여서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이 "절기를 피하여" 살해하려 그리한 것처럼 "성전에서 행하지 않는다면" 어떤 짓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3. 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하였다(31절).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을 40에 하나를 감한 매로써가 아니라 무수히 때려 죽일 작정으로(32절) 그를 때렸기 때문이다. 

유대 학자들은 몇 가지 경우에 있어서는 사적 처벌을 허용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처벌은 "반역자에 대한 처벌"이라고 불렀다. 

이제 바울은 사자 우리에 던져진 양같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손쉬운 먹이거리가 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도 그는 의심없이 "나는 결박을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13절) 말한 때와 같은 심정으로 장렬하게 죽을 자세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Ⅲ. 바울의 위기 모면. 그는 또 하나의 적(로마인)에 이하여 다른 적들(유대인)로부터 구출된다.

1. 소란에 대한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그리하여 이 폭동에 대한 소식은 그 성의 통치자인 "군대의 천부장"에게까지 들렸다. 그는 예루살렘에 주둔해 있었던 로마 군대의 지휘관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한 사람이 바울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안(公安)을 위하여 이 소요에 관한 정보를 천부장에게 고하였다. 

그는 반역적인 유대인들에 대하여 언제나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천부장은 바울의 친구들이 바울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바울을 구원하는 도구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2. 호민관 혹은 천부장은 그의 군대를 최대한 빠른 시간에 집결시켜 폭도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현장으로 달려 갔다. 

이에 대하여 본문에 "그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갔다"고 전해 주고 있다. 다른 절기와 마찬가지로 이번 절기에도 평상시보다 경계가 강화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천부장은 손쉽게 군사들을 소집하여 "군중들에게 급히 달려갔다." 

왜냐하면 그러한 시기에 늦장을 부리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난동은 비대해지기 전인 처음에 저지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3. 바울을 때리고 있던 그들은 로마의 장군이 나타나자 매우 놀랐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동이 정당화될 수 없는 행동임을 알았기 때문이며, 서기장이 에베소인들에게 말하였듯이 이 날에 일어난 폭동에 대하여 소환을 당하고 문책될 위험에 처하였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로마인들의 세력에 의하여 그들의 행위를 중단하였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그의 분노에 대한 두려움에 의하여 그들의 그러한 행동을 억제했어야만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가끔 땅으로 하여금 여인을 돕게 하기도 하시며(계 12:16) 그리고 그의 백성에 대하여 애정이 없는 사람을 들어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기도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사실 로마 군대는 고난당하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측은히 여기는 정도에 불과했고 주된 관심은 공안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목자들은 그의 양을 지키기 위하여 개들까지도 이용한다. 이 말은 스트레소(streso)가 본문에 대하여 비유로 한 말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이 악한 무리들이 천부장을 보자마자 얼마나 놀랐는가를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심판의 보좌에 앉아 있는 임금이 형형한 눈으로 모는 악을 흩어버렸다"함과 같다.

4. 통치자는 바울을 보호한다. 

그는 바울을 구출했다. 그가 바울을 구출한 것은 그에 대한 관심, 즉 바울이 무죄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재판없이 사람이 죽음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정의를 위한 관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만일 그러한 폭동의 진행이 적절하게 진압되지 않거나, 그러한 격분한 군중들이 그들 자신의 힘을 의식하고 행동을 하게 된다면, 그러한 결과가 로마인들의 통치에 얼마나 위험스러운가를 알았기 때문에 바울을 구출하였다. 

그러므로 천부장은 폭도들의 손에서부터 바울을 끌어내어 법률의 보호 아래 두었다(33절). "그는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였다." 

그것은 그가 바울을 석방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그를 심문하기 위해서임을 보여 주어 군중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였다. 

군중들을 만족시키려는 의도로 그는 또한 바울에 대하여 사장 열성적인 사람들에게 "그가 누구며, 무슨 일을 하였느냐고 물었다." 

군중들의 손에서 바울을 강제로 빼앗은 천부장의 행위는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었지만, 후일에 그들은 천부장을 범법자로 고발하여 이르기를(24:7) "천부장 리시아가 와서 그를 우리 손에서 강제로 빼앗아 갔습니다"라고 하였던 것이다(역주:한글 개역에는 이 구절이 생략되어 있음. 그러므로 공동 번역을 인용하였음. 역자 주). 위의 인용문은 바로 이 사건을 가리킨 말로써 천부장이 벨릭스 총독에게 그 사건을 해명한 내용인 23장 27, 28절과 비교되는 내용이다 .

Ⅳ. 천부장이 바울에게 자신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를 제공함. 사람들은 잘하면 노도와 맞부딪쳐 싸울 수 있는 것이다. 

바울도 본문에서와 같이 함께 소란을 부리는 폭도들 가운데서 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1. 천부장은 무리들이 무슨 뜻으로 그러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천부장이 바울에 관해서 질문했을 때, 무리들은 아마 전에 그런 이름을 들어 본적도 없었던 것처럼 "어떤 이는 이 말로 어떤 이는 저 말로 부르짖었다." 그러기에 천부장이 그들의 심정을 안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도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기가 왜 지금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각자 전체의 의사를 전달하려는 듯이 법석을 떨었다. 

소란을 부리는 군중들을 통해 무언가 알아 내려고 하는 자들은 결국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알아 낼 수 없을 것이다. 

마치 바벨탑을 세우던 자들이 그들의 언어가 혼란하게 되자 상대방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한 이상으로 말이다.

2. 천부장은 군중들의 분노와 소동을 진압시킬 수 없었다. 

그러므로 천부장은 "그를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고 명하였다." 이 영문은 안토니아 탑으로서 로마 군사들의 파견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곳으로 성전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무리들의 소동이 극심하였으므로 병사들은 그를 안전하게 성의 소요 밖으로 끌어내오기 위하여 대단한 수고를 하였다(35절). 

더욱이 성으로 올라가는 "층대에 이르렀을 때는" 군인들이 강제로 바울을 그들의 손으로 떠받쳐 들고 그를 운반했다(그는 매우 체구가 작은 사람이었고 매우 허약했기 때문에 그 일을 쉽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백성들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무리들은 할 수 있다면 바울의 사지를 찢어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포악한 손을 뻗쳐 그를 움켜잡을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욕설과 비난을 퍼부으며 그를 뒤따랐다. "그들은 뒤따르며 그를 없이 하자고 외쳤다"(36절). 

가장 탁월한 사람과 사건이 군중의 아우성에 이하여 어떻게 가끔 무너져버리는가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 자신도 그런 대우를 받았다. 

무리들은 그리스도께서 지은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쳤었다. (어떤 교부는 본문의 "그를 없이 하자"는 말을 해석하기를) "그를 산 자들의 땅에서 제거하자. 그를 세상 밖으로 몰아 내자"라고 하였다.

3. 마침내 바울은 천부장에게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청하였다(37절). 

"바울은 영문으로 인도되고 있을 때에" 침착하고 조용하였고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온유와 존경으로 대하였다. 그러한 마음으로 바울은 천부장더러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뇨? 나의 박해자들은 내게 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에게 자신에 대하여 변명하고 싶은데 그렇게 한다고 위법이 되거나 잘못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물었다. 

얼마나 겸손하고 적절한 요청인가! 바울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하여야 하는가를 알고 있었으며, 실제적으로 여러 번 그의 상급자들에게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 지휘관에게 말할 수 있게 하여 줄 것을 겸손하게 간청한다. 

그리고 그에게 말하도록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뇨?"라고 요청한 것이다.

4. 천부장이 바울에게 품고 있었던 생각. 

그가 바울을 어떻게 생각했는가는 다음의 말에서 나타난다. "네가 헬라 말을 아나느냐? 나는 그대가 학식있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듣고 놀랐다. 그렇다면 네가 전에 난을 일으켰던 애굽인이 아니냐"라고 그는 물었다.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었으므로 그는 바울이 이 폭동의 계기가 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아마도 그의 주변에 있던 자 중에 누가 바울이 폭동의 원인이라고 천부장에게 말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훌륭한 사람들과 사역자들이 그들에 대한 많은 사람의 사실 무근한 오해를 인하여 파멸을 당하고 만다는 사실도 유의하자. 

그리고 이러한 오해를 시정하기는 대단히 어렵다는 사실도 유의하자. 최근 그곳 지방에서인가 예언자로 자처하는 애굽인에 의하여 주동이 된 반란이 있었던 것 같다. 요세푸스는 그 반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즉 "한 애굽인이 반란군을 일으키고 그들에게 올리브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의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여 줄 것과 그들이 폐허의 성을 입성할 것을 약속하였다"고 하였다. 

천부장은 본문에서 바울에게, "네가 난을 일으켜 사천의 자객 곧 불량배요, 산적이며, 강탈자요 목을 자르는 사람을 거느리고 광야로 갔던 사람이 아니냐"고 말한다. 당시의 유대의 혼란은 말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당시에 공안을 이같이 어지럽힐 수 있는 유(類)의 인물들이 무수하였다. 요세푸스는 이 사건의 결과에 대하여 "로마의 총독 벨릭스가 폭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동하여 그들 중 사백 명을 죽였으며 이백 명을 나포하였고 나머지는 흩어졌다"고 전해 준다(Antid. XX.6. De Belle Jud. ii. 12). 그리고 유세비우스도 그의 책에서 이 사건에 대하여 전해 주고 있다(Hist. ii. 20). 이 사건은 글라우디오 통치 13년 곧 본문의 소요가 일어나기 약 3년 전에 일어났었다. 이 폭동의 지도자는 도망해버린 것같이 보인다. 그러기에 천부장은 지금 대단한 비난을 받고 또 큰 소동까지 야기 시키며 탄핵을 당하고 있는 바울이 바로 그 애굽인이거나 당시의 애굽인 못지 않은 중범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오해에 의하여 훌륭한 사람들이 부당한 처우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유의하자.

5. 바울은 그가 과거에 어떠한 사람이었던가 하는 것을 말함으로써 그에 관한 천부장의 오해를 시정한다. 

그는 자신에 대하여 변명할 줄어들 모르는 애굽인과 같은 불량자나 깡패나 부랑배가 아니었다. 

"나는 애굽인이 아니라 순전한 유대인이라. 민족으로나 신앙에 있어서나 틀림 없는 유대인이다. 나는 길리기아 다소성의 시민으로 정직한 부모" 아래서 태어나 자유로이 교육을 받았다(다소는 학문의 도시였다). 더군다나 나는 "소읍이 아닌 곳의 시민이다"라고 말한다. 그가 다소의 시민임을 말하고자 한 것인지 로마의 시민임을 말하고자 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소나 로마나 다 같은 대 도시들이었다. 그리고 바울은 그 두 도시 모두의 자유시민이었다. 

비록 천부장이 바울에 대하여 그가 애굽인이 아니냐는 불쾌한 혐의를 품었지만 바울은 자신의 평온을 잃지 않고 또한 그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하여 또는 그가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분노를 촉발시키거나 노를 노로 갚지 않고 온순하게 천부장의 혐의를 부정하고 자신이 어떠한 사람임을 말하였다.

6. 그는 겸손하게 천부장에게 이제는 그의 죄수인 자신이 군중들에게 이야기할 것을 허락하도록 간청했다. 

바울은 자기가 그렇게 할 권리를 지녔음에도 당당한 자세로 그러한 청을 하지 않고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다는 뜻으로 자기를 낮추어 요청했다. 

그는 "나에게 백성에게 말할 기회를 허락해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사실 천부장이 그를 구한 것은 다른 의도에서가 아니라 정당한 사유를 알기 위해서였다. 이제 바울은 자신을 변명하기 위하여 심사숙고하여 그럴듯한 말을 꾸며 낼 필요가 없음을 보여 주기 위하여 천부장에게 즉시 자신을 변명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하였다. 

왜냐하면 바울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인위적인 것이 아닌 진리의 대도(大道) 아래 그의 실 모습을 비춰 보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정당한 입장만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천부장이 공정한 태도와 성실함으로 판결해 주기만을 바랐다.

7. 바울은 자신의 경위를 변론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또한 이 때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 그가 말해야 할 것을 지시해 주셨다(마 10:20). 이에 "천부장이 허락하였으므로"(40절) 이제 바울은 은총과 담대함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바울이 말할 수 있는 호의를 받은 것은(나는 바울이 호의를 입었다기 보다 그가 공정한 처우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보다 공정한 취급을 받은 것은 그의 동향인인 유대인들에게서가 아니라 천부장에 의해서였다. 

유대인들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천부장은 비록 호기심에서이기는 하였지만 그의 말을 듣고자 하였다. 이러한 허락이 떨어지자,

(1) 무리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바울은 층대 위에 섰다." 그는 삭개오와 같이 작은 키의 인물이었고 이 키 작음이 오히려 그로 하여금 담대히 자신의 생각을 말하게 하는 대 도움이 되었다. 

그가 선 강단은 좋은 여건이 아니라 참으로 어려운 입장에서 허용된 것이었지만 반면 복음을 전하는데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기도 하였다. 

비록 그가 선 강단이 에스라 선지자가 섰던 나무단과 같지는 않았지만 복음을 전하는 목적을 이루는 데는 충분한 것이었다. 

"거기서 그는 백성에게 손짓하여" 그가 그들에게 말할 것이 있으니 잠시 참고 조용하라고 하였다. 

그가 천부장의 허락을 받은 유리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앞에 서자 각 사람들은 옆 사람에게 조용하라고 소리쳤고 결국 조용하게 되었다. 

아마 천부장 또한 백성들을 조용하게 하기 위하여 그의 최선을 다하였던 것 같다. 만일 백성들을 귀 기울이도록 종용하게 하지 않는다면 결국 바울에게 말하도록 허용한 것도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한 변론이 주어질 때 잠잠할 것이 요청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진지하게 복음에 대한소식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2) 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그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러하였듯이 전지하고 또 능력있게 그가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고 있음을 선언하였다. 

그는 "히브리 방언으로" 유대인의 통속어로 말하였다. 히브리어는 바로 그들의 언어였다. 

이 언어로 말하므로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임은 변개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나타냈고 뿐만 아니라 히브리어에 대한 불변의 경의를 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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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마==
사도행전 21장
1 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행선하여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ㅇ우리가 - '우리'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곳은 모두 네곳 (16:10-17;20:5-15;21:1-18;27:1-28:16) 으로 본 단락은 그 중 하나이다. 여기서 '우리'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견해의 차이가 있다. 혹자는 '우리'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바울, 누가, 드로비모, 아리스다고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바울과 헤어졌을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20:4에서 부로의 아들 소바더, 세군도, 가이오, 디모데, 두기고, 드로비모, 아리스다고에 대해 언급한 이후 지금까지 그들 중 누구와도 헤어졌다는 언급이 없다는 점과 헌금 전달자의 명단위에 열거된 이름 외에 다른 이름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들 외에도 다른 동행자들이 함께 했으리라 짐작된다(Haenchen).
ㅇ저희를 - '저희'는 밀레도의 회중들과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가리킨다(20:17,18).
ㅇ작별하고 - 헬라어 '아포스파스덴타스'는 동사 '아포스파오'의 제1부정과거 수동태 분사인데, 이 말은 어떤 사람 또는 물건으로부터의 분리를 뜻하는 '아포'와 '끌다', '당기다'의 뜻인 '스파오'의 합성어로 '찢어놓는다'는 의미로서 매우 어렵고도 아쉬운 이별의 장면을 묘사해 주고 있다. 이것은 교역자로서의 바울과 그로부터 양육을 받는 성도들 사이가 매우 친밀한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ㅇ고스 - 밀레도 남쪽 68km 지점에 있는 작고 비옥한 섬으로 명주, 솜, 고약의  산지로 유명하며 또한 전설적인 의학자인 히포크라테스의 고장으로 규모가 큰 의학교가 있었다.
ㅇ로도 - 이 지명은 '도데케네스'(Dodecanese) 제도 가운데 가장 큰 섬을 가리키며 더 구체적으로는 이섬의 북동쪽 끝에 위치한 도시를 가리킨다. 이곳은 소아시아 대륙에서 19.2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장미의 섬으로 불리울 만큼, 피부한 일조량으로 하여 장미가 만발하는 섬이다.  또한 이곳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라고 하는 태양의 상징 아폴로 신상이 크게 서 있는데 당시에는 넘어져 있었다.
ㅇ바다라 - 이곳은 소아시아의 남서 해안에 위치한 루시아의 도시였다. 당시 '바다라'는 수리아, 팔레스틴 및 애굽 동쪽연안의 지중해 항구들과 아시아, 마게도냐, 아가야의 항구들을 왕복하던 큰 배들의 정박지로서, 아름다운 항구 도시이자 거대한 상업 도시였다. 한편 한때 이곳에는 델피(Delphi)에 견줄만한 아폴로 신의 신탁소가 있었다.
2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ㅇ베니게로 건너가는 - 베니게는 팔레스틴 북쪽 두로나 시돈이 위치한 지역을 포괄하는 영역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제는 에게해를 완전히 빠져나와 지중해를 가로질러 두로에 이르는 항로에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이들은 바다라에서 두로로 직항(直航)하는 큰 배로 갈아탔을 것이다.
3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행선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가 짐을 풀려 함이러라
ㅇ구브로를 바라보고...왼편에 두고 - 구브로는 바다라와 두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지중 해상의 섬으로 과거에 바울과 바나바가 바보에서 바예수의 훼방을 물리친 바 있다(13:4-12). 바다라에서 두로 방향으로 항해를 하자면 이 구브로섬의 남단을 지나가게 되는데,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라는 표현은 이 항로를 따라 배가 움직여갔음을 말해주며 동시에 이 배가 순항하였음을 암시한다.
ㅇ수리아 - 이 지역은 팔레스틴 서북방의 지중해에 접한 지역으로 이 지역의 남쪽에 두로가 위치해 있다.
ㅇ행선하여 - 헬라어 '에플레오멘'은 '항해하다'의 뜻인 '플레오'의 미완료과거형으로서 구브로에 머무르지 않고 수리아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항해하였음을 시사한다.
ㅇ두로 - 이 도시는 바로 위에 위치한 시돈과 함께 베니게의 오랜 항구 도시이다. 대표적 이교 도시로 번영과 부패(腐敗)의 표본이었으며 늘 책망의 대상이었다(눅10:13). 이 두로는 바다라에서 닷새의 항해 거리에 있었다고 하는데(Chrysostom,Bruce), 이곳에 배가 정박한 것은 배의 짐을 내리기 위함이었다. 아마 이 짐은 과일이나 곡물이었을 것이다(Robertson).
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ㅇ제자들을 찾아 - 이 진술은 두로에도 기독교 신자들이 있었음을 말해주는데 언제, 어떤 경로로 이곳에 복음이 전파되었고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학자들은 11:19에 의거하여 스데반의 순교 후 각지로 흩어진 교인들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었을 것이라고 본다(Bruce, Lenski). 또한 이들 중에는 바울과 실라의 2차 전도 여행시 전한 말씀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도 포함될 것이다. 한편 본문의 '찾아'(아뉴론테스)는 '수색하여 발견하다'는 뜻을 내포하는데, 이는 두로에 있던 교인들과 바울의 만남이 사전에 약속된 것이 아니라 수소문의 결과로 인한 것이었으며 그곳에 있던 교인들의 수도 그리 많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5절 주석 참조).
ㅇ이레를 머물더니 - 바울 일행이 두로에 머문 것은 일주일 간이었다. 바울이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서두른 것에 비하면(20:16) 상당히 여유있는 행동으로 보이는데, 이는 바다라에서 출발한 배가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는 배가 아니라 지중해를 가로질러 가는 배였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많이 단축(短縮)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두로에 일주일간 머물러 있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의 일정에는 별로 차질이 없었을 것이다. 이는 그가 다른 배편을 찾지 않고 그냥 머물러 있었던 데서도 드러난다. 한편 바울 일행이 일주일간 머물러야 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리는데, 헨헨(Haenchen)에 의하면 바울 일행이 타고온 배는 두로가 종착지였기 때문에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의 배를 기다려야 했다고 보며, 이에 반해 벤트(Bent)나 람세이(Ramsay)에 의하면 바울 일행이 다른 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 배의 짐을 풀고 다시 싣는데 이레가 걸렸기 때문에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한다. 3절의 문맥상 배를 갈아탄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짐을 내리고 싣는 동안 기다려야 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
ㅇ성령의 감동으로 -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였고(19:21), 그의 의도와 행동은 성령의 인도를 받은 것이었다(20:22-24). 그런데 여기서는 두로의 성도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한다. 이것은 일견 성령의 역사가 모순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면 그러한 오해는 해소될 수 있다. 즉 본문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생겨난 결과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고난을 받게 되리라는 내용이지 바울로 하여금 예루살렘행을 중단토록 만류하라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만류한 것은 바울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성도들로서는 당연히 취할 수 있는 행동이었고 베드로가 예수의 수난 길을 만류(挽留)했던 일과도 일맥 상통한다(마 16:22). 오히려 성령께서는 바울의 예루살렘행이 고난의 길임을 재차 확인시켜준 것이며 바울은 그것에 대해 조금의 동요도 없이  성령의 지시하심을(20:22) 충실히 따를 뿐이었다.
5 이 여러 날을 지난 후 우리가 떠나갈쌔 저희가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ㅇ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 바울 일행이 이레를 머물고 떠나가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는데, 밀레도 해변에서 그곳의 성도들과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이별할 때에 비해서는 덜 애절하지만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다. 비록 일주일밖에 안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하나님과 성령안에서의 그들의 교제는 매우 강한 사랑과 신앙의 유대를 만들어냈다. 아내들과 아이들까지 모두 동행하여 바울을 전송하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인데 이것은 두로의 신앙 공동체가 상당히 소규모였으리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구절이다. 또한 이 구절은 사도 시대에 교회와 관련하여 어린이에 대한 언급이 처음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도 주목시된다(Vincent). 한편 '성문 밖'은 구체적으로 배가 정박하고 있는 부두를 가리키는 것같다.
ㅇ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 이 모습은 밀레도에서의 이별 장면과 동일하다(20:36). 서서 기도해도 무방할 터인데 사람들의 이목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기도하는 것은 그들의 진지한 신앙의 자세를 보여준다. 이러한 기도는 그들의 교제가 온전히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아마도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의 고난을 성령의 인도하심따라 잘 견디어 낼 수 있도록 그리고 두로의 성도들이 타락한 이방의 도시에서 신앙의 순결을 잘 지켜 나갈 수 있도록 한 목소리로 간구했을 것이다.
6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저희는 집으로 돌아가니라
ㅇ우리는 배에...저희는 집으로 - 누가는 이별의 장면을 세세한 부분까지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배에'라는 문구의 헬라어 표현에는 정관사 '토'가 첨가되어 있어 이 배가 처음 타고 온 배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배임을 말해준다.
7 두로로부터 수로를 다 행하여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ㅇ돌레마이 - 이 지역은 두로에서 가이사랴 방향으로 35km 지점에 위치한 소항구로 구약 시대에는 악고(Acco, 삿 1:31)라는 지명으로 불리어졌었다. '돌레마이'라는 이름은 아마 톨레미 2세(Ptolemy II, B.C. 285-246)를 기념하기 위하여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Bruce). 이 도시는 오늘날 아크레(Acre)로 불리어진다.
ㅇ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하루를 있다가 - 바울 일행은 돌레마이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는데, 그곳에서도 성도들을 방문하여 인사를 나누었다. 4절에서는 '제자들'이라고 표현한데 비하여 여기서는 '형제들'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친근감(親近感)을 더해준다. 이곳 돌레마이에 복음이 전해진 것 역시 두로와 같은 시기였으리라고 본다(Bruce).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ㅇ가이사랴 - 이 도시는 돌레마이에서 남쪽으로 50-60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로마 치하에서는 유대 지방의 행정 장관이 거주하는 정치적 수도였다. 이 도시는 헤롯에 의해 건설되고 아우구스투스(Augustus)를  높이기 위하여 '가이사랴'로 명명되었다(Robertson). 또한 이곳은 거대한 항구 도시로도 유명한데, 바울은 그의 선교 여행 중 이 도시를 세번째로 방문하는 셈이다. 한번은 예루살렘에서 다소로 여행하는 중에 방문했고(9:30) 두번째는 2차전도 여행 말기에 안디옥에서 돌아오는 길에 방문했으며(18:22) 지금이 그 세번째이다. 한편 여기에는 돌레마이에서 가이사랴까지 이르는 교통편(交通便)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 학자들 간에는 육상과 해상에 대한 견해가 갈리고 있다. 로버트슨(Robertson)같은 학자는 7절의 '수로를 다 행하여'라는 문구를 근거로 하여 해상을 통한 여행은 돌레마이에서 끝났으며 거기서부터 가이사랴까지는 육로로 여행했으리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이에 반해 브루스(Bruce), 렌스키(Lenski), 헨헨(Haenchen) 같은 학자들은 돌레마이에서 가이사랴까지의 거리가 50-60km에 이르므로 결코 걷기에 가깝지 않으며 더구나 가이사랴까지 가자면 갈멜산을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육로로 갔을 가능성이 없고 해상으로 이동했리라는 주장을 편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후자의 주장이 타당한 듯하다.
ㅇ빌립 - 이 사람에 대해서는 '일곱 집사 중 하나', '전도자'라는 호칭을 붙이고 있다. 그가 일곱 집사 중의 하나임은 6:1-5에 잘 나타나 있으며, 그를 또한 '전도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재정을 담당하는 본래의 기능을 넘어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렇지만 그에게 '전도자'라는 호칭을 붙인 것은 그와 '사도 빌립'을 구분하기 위함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Bruce). 이 빌립이 본서에 등장하기로는 스데반 사후 사마리아에서 가이사랴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하였다는 기록(8:5-40) 이후 여기가 처음이다. 브루스(Bruce)는 이 기간을 20년으로 잡기도 하는데, 하여튼 빌립은 8:40 이후 이곳 가이사랴에 정착하여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아마 이 곳에 기독교 공동체를 건설하였을 것이다(Haenchen).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ㅇ그에게 딸 넷이...처녀로 예언하는 자 - 빌립은 그 자신이 복음을 전파하는 은총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네 딸이 예언하는 은사를 받는 축복까지 누렸다. 여기서 '처녀'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를 가리키는 말로, 당시 교회에서 봉사하는 여자들은 대개 과부들이었던 점에 비추어 볼 때(딤전 5:9-15) 이례적(異例的)이라 하겠다. 아무튼 예언하는 은사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고전 12:4-27, 주제 강해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비교연구' 참조) 이를 방언의 은사보다 높이 평가했다(고전 14:1-33). 따라서 본문은 빌립의 딸들이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중요한 은사를 가지고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녀들의 예언 활동이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한편 아시아에 있는 히에폴라리스의 감독이었던 파피아스(Papias)의 말에 의하면, 빌립과 그의 딸들은 몇 년 후에 소아시아의  히에라블리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하는데 그 딸들 가운데 몇은 상당히 늙도록 생존하여 초기기독교 시대에 있었던 사건이나 인물들에 관한 자료들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여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Eusebius).
10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ㅇ여러 날 있더니...선지자 아가보 - 바울은 빌립의 집에서 상당 기간을 머물고 있는데 이는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는 마음에서 여행을 급히 서두른 결과 심신이 피로했으며 오순절까지는 시간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가이사랴에 머물면서 육신의 휴식과 아울러 예루살렘에서 해야 할 일들을 계획하고 고난에 대한 나름대로의 각오를 새로이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선지자 아가보는 과거에 몇몇선지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내려와 유대에 기근이 들 것을 예언하였었는데 그 예언이 A.D. 46년 글라우디오 때에 성취되었다는 기록이 있다(11:27, 28). 이 사람이 본문에 나오는 아가보와 동일 인물이라는 데에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한다(Robertson, Bruce, Lenski).
ㅇ유대로부터 내려와 - 이 표현은 로마제국의 식민지 지배 하에 있는 당시 상황의 관점에서 쓴 것이 아니라 옛날 유다의 관점이서 서술한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당시에는 가이사랴가 행정 구분상 유대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유대로부터 가이사랴로 내려왔다는 식의 문장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유대로부터'라는 표현의 실제 의미는 '예루살렘으로부터'로 보아야 한다(Haenchen).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ㅇ띠를...수족을 잡아매고 - 여기서 '띠'는 폭이 약간 넓고 길이가 길어 허리에 여러번 둘러감는 천을 가리키는 것으로, 가죽이나 비단으로 만들고 은실이나 금실로 수놓는 경우도 있었다(삼상 15:27;왕상 11:30). 아가보는 이 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손과발을 묶는 행위로써 예언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말로써가 아니라 행위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 행위는 구약의 예언자들에게서도 종종 발견되는 현상으로,자기의 새 옷을 찢어 솔로몬 왕국의 분열을 예언했던 아히야(왕상 11:29, 30), 벗은 몸과 발로 행하여  애굽인들이 앗수르인들에 포로로 끌려갈 것을 예언한 이사야(사20:2)와 같은 인물이 그러한 예에 해당한다(렘 13:1-11;27:2;겔 4:1-3 참조). 아가보의  예언의 구체적인 내용은 바울의 결박과 투옥을 가리킨다(30, 33절).
ㅇ성령이 말씀하시되 - 바울의 고난을 예언하는 아가보의 예언이 온전히 성령의 감동으로 되어졌음을 말해주는 이 장엄한 표현은, 구약성경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표현에 상응한다(민 14:28;왕하 9:26). 바울에게 닥칠 고난은 유대인들에 의해 도발(挑發)되어 이방인에게 넘겨진다는 점에서 예수의 수난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었다(막 10:33;15:1).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ㅇ우리가...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 두로에서와는 달리 이곳 가이사랴에서는 현지의 성도들 뿐만 아니라 바울을 수행했던 누가 일행도 합세하여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만류했었다. 그러나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만류하는 것은 결코 성령의 뜻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의 뜻이었다(4절 주석 참조). 여하튼 여기서는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만류하는 정도가 더욱 강화되고 있는데 공동번역에서는 '간곡히 전하였다'로 옮겨 그 분위기를 더욱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편 바울 주변에 있던 성도들이 그의 고난에 대한 예언을 듣고 그 행로를 만류하려 했던 점에 대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바울의 사역을 방해(妨害)하기 위함이었다고 해석해서는 안된다. 베드로 또한 예수의 수난에 대해 이와 유사한 행동을 보여준 경우가 있거니와(마 16:22), 지금의 경우도 바울에 대한 그들의 순수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ㅇ상하게 하느냐 - 헬라어 '쉰드뤼프톤테스'는 '두들겨 깨뜨린다'의 뜻을 갖는데, 이는 주위 사람들의 애정에 가득찬 눈물의 만류가 마치 바울의 마음을 부수어버릴 정도로 간곡했음을 나타낸다. 이 표현 속에는 성령의 일을 거역하게 하는 것에 대한 책망보다는 그들의 충정어린 애정을 마음 깊이 이해하고 있는 모습이 엿보인다.
ㅇ결박받을 뿐 아니라...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 성도들의 애정어린 만류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의 결의를 더욱 강하게 천명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께서 죽임을 당했던 바로 그 도시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죽임을 당하는 것도 피하지 않겠다고 한다. 바울이 이처럼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예루살렘에 가려고 했던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추측된다. 바울은 이방 교회의 성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해 주어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Bruce). 그는 이방 교회의 성금을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교회의 단합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판단하였음에 분명하다(롬 15:25-32). 예루살렘에는 유대계 신자들과 이방 신자들 사이에 소원(疏遠)한 관계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의 원만한 연합을 도모하고자 했다. 이러한 연합의 당위성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나를 막론하고 모두 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다는 말씀에서 나오는 것이며(갈 3:28), 이 진리를 바르게 깨달은 바울은 바로 이 연합을 위해 죽음까지도 무릅쓰려고 한 것이다.
14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ㅇ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 헬라어 구문 '메 페이도메누 아우투'는 '설득하다'는 의미를 갖는 '페이도'의 현재 수동태 분사의 문장으로 직역하면 '저가 설득되지 아니하므로'(when he would not be persuaded, KJV)가 된다. 아마 그들은 바울의 신변의 안전을 이유로,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수행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 많다는 식의 그럴듯한 명분(名分)으로 바울을 설득하여 그의 예루살렘행을 포기시키려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때가 아니라 '지금', 다른 곳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설득을 뿌리칠 수 있었다.
ㅇ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 바울을 설득하려던 사람들은 그의 의지를 꺾는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그에게 닥쳐올 불행을 넘어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있다. 본문은 바울을 설득하려던 사람들이 바울에 대한 잘못된 충정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한 신앙의 자세로 되돌아와 있음을 보여주는데, 허비(Hervey) 같은 학자는 이 문구가 주기도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를 응용한 것으로 보며, 브루스(Bruce)의 경우는 본문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를 상기시켜 준다고 보기도 한다.
15 이 여러 날 후에 행장을 준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쌔
ㅇ행장을 준비하여...올라갈새 - 드디어 바울의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이 시작되고 있다.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스큐아사메이노'는 신약에서 본절에만 나오는 희귀한 단어로 '짐을 꾸리다'(Robertson),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할 성금을 챙기다'(Bengel), '말의 안장을 꾸리다'(Ramsay)  등으로 해석된다. 이 해석들은 서로 모순되지 않으며 상호 보충적으로 취해질 수 있다.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는 100km이고 그 길을 도보로 가기에는 너무 피곤하다는 것, 그렇게 지친 상태로는 예루살렘에서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은 물론이고 특히 의사인 누가가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교통 수단은 말을 이용하였을 것이다(Ramsay).
16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유하려 함이라
ㅇ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 '오랜 제자'라는 표현은 나손이 기독교의 초기 공동체 즉 오순절의 120명의 제자 가운데(1:15)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Robertson, Haenchen, Bruce). 이럴 경우 바울은 그와 사전에 친분(親分)이 있었다고 보기 어려우며 가이사랴의 신도들이 소개하였으리라고 짐작된다.
한편 본절에서 '나손을 데리고 가니'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이 문구는 '나손의 집에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로 번역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공동번역,Bengel, Bruce, Meyer). 전자의 개역 성경 같은 번역을 주장하는 학자는 칼빈(Calvin), 베자(Beza), 빈센트(Vincent), 로버트슨(Robertson) 등으로 이 중 로버트슨은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나손의 집에서 묵어가기 위하여 그를 데리고 갔다고 본다. 이럴 경우 나손의 집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가이사랴와 예루살렘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중간에 묵어가기 위해 사람을 일부러 데리고 간다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중간에 쉬어가야할 경우 여인숙 같은 곳에서 묵어가면 되지 구태여 사람을 데려갈 필요는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후자의 견해는 나손의 집이 예루살렘에 있었고, 이방 기독교인들을 기꺼이 영접해 줄 것같지 않은 상황에서 거처(居處)를 제공해 줄 사람으로 나손을 생각했을 것이라고 한다(Bruce). 후자의 견해가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17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ㅇ형제들이...기꺼이 영접하거늘 - 가이사랴에서 함께 한 성도들을 포함한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그들을 기꺼이 환영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본문의 '형제들'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형제들'을 예루살렘의 기독교 공동체와 관련시켜서 바울이 예루살렘 공동체 전체로부터 환영을 받았다는 견해는(Overbeck)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18, 22절에 의하면 실제적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아직까지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온 것을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예루살렘 교회의 비공식적인 접대였다(Lake). 바울의 동료들과 친구들로 이루어진 사적인 모임을 말하고 있다(Jacquire). 예루살렘 공동체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의 성도들이 베푼 환대였다(Beyer). 이들은 헬라적 기독교인들이었다(Knopf). 
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ㅇ바울이 우리와 함께 - 여기서는 '우리'와 바울이 구분되어 표현된다. 이는 아마 바울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기 위함인 듯하다.
ㅇ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먼저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하고 할 수 있는 야고보를 방문하였다(12:17). 그런데 여기에 베드로나 요한, 그밖의 다른 사도들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 이는 그들이 전도나 다른 일을 위해서 출타중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Bruce, Lenski, Zahn). 야고보는 예루살렘 공동체의 수장(首長)으로서 교회 공동체를 지혜롭게 잘 지도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의 일반 유대인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Bruce).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일반 유대인들은 그에게 '의인 야고보'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다고 한다.
ㅇ장로들 - 이 표현에 대해서도 학자들 간에 해석이 다양하다.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 교회의 모든 장로들이 다 모인 것이라고 본다(Lenski).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단에 대해, 브루스(Bruce)는 야고보가 그의 행정적 책임을 수행함에 있어서 일단의 동료 장로들과 함께 일했는데, 20절에서 나타나는 바 교인의 수가 수만 명(공동 번역에서는 '대단히 많습니다'로 표현되어 있다)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예루살렘에는 야고보를 의장으로 하고 70인의 장로로 구성된 일종의 나사렛 산헤드린(Nazarene  Sanhedrin)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야고보는 수석 장로이며 다른 장로들은 바울을 환영하는 자리에 초청된 야고보의 손님들이라고 본다(Robertson). 야고보를 제외한 사람들은 단지 입회인에 불과하다고 본다(Beg, Zahn). 자료들이 불충분하여 정확한 설명을 제시하는 것은 어려우며 단지 잠정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뿐인데, 아직 바울이 예루살렘에 온 것을 모르는 교인들이 상당히 있었다는 점을(22절) 감안할 때의 견해보다는 나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ㅇ봉사로 말미암아...고하니 - '봉사'(디아코니아)는 '종', '일꾼'을 뜻하는 '디아코노스'에서 파생된 말로 '사명'(20:24), 또는 '직분'(롬 11:13)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것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람들에 대한 봉사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그의 역할 가운데는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헌금 전달도 포함되었을 것인데, 본문에서 그 사항에 관해 언급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성금 전달은 누구나 다 아는 당연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따로 언급할 만한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Bauernfeind). 성금을 전달한 것에 대한 효과가 생각한 것보다 미미했기때문이라고 본다. 이에 대한 근거로는, 예루살렘의 교인들이 후에 바울을 위하여 유대인들에게나 로마 당국에 대해 한마디의 변호도 하지 않았다는 것과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오랫동안 투옥되었을 때 그에게 동정을 표시한 기록이 없다는 것을 제시한다(Furneaux). 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고 본다. 한편 바울은 자기가 이방 가운데서 사역한 일들을 세세히 증언하고 있는데, 그는 그 모든 일들의 주체(主體)가 하나님이라고 고백함으로써  겸손한 신앙의 자세를 나타낸다.
20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ㅇ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 이 문구는 야고보 및 장로들이 바울의 증언을 매우 호의적으로 들었음을 보여준다. 바울이 자기의 봉사 배후에는 하나님이 주체로 있었다고 증언했으므로(19절) 이들이 이야기를 경청한 후 바울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ㅇ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 누가는 야고보의 무리들이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기쁨에 넘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울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눈길들이  많음을 주지시키고 있다(22절). 그런데 '수만 명'이라는 표현은 '얼마나 많은'의 뜻을 가진 '포사이'와 '일만', 또는 '허다한 것', '무수한 것'을 뜻하는 '뮈리아데스'가 합하여진 것으로 학자들 간에는 이 표현을 문자적으로 취하여 이해하기도 하고(Lenski), 불특정한 다수를 과장적으로 서술하는 표현 양식이라고 이해하는 입장도 있다(Haenchen, Robertson). 아무튼 야고보의 이야기는 교인들의 수가 많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일에 관심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즉 이들은 소위 유대적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왔던 모세의 율법을 비롯한 각종 규례들을 소중히 여겨 지킨다는 것이다. 이들은 바울이 깨달은 바, 복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율법을 폐기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율법의 매임으로부터  자유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다음 절에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것처럼 율법에 매이지 않는 바울의 행위를 용납하지 못했다.
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ㅇ모세를 배반하고...지키지 말라 - 바울을 비방(誹謗)하는 소문이 어떻게 떠돌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열거된다. 이러한 소문의 진원지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을 것이고 그 중에서도 유대교적 전통에 철저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모세를 배반한다는 것은 모세가 전해준 율법을 무시한다는 말이고 이는 곧 하나님에 대한 배반을 뜻한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율법을 배반했다는 것은 악의에 찬 허위 사실이었다.
바울은 율법 자체를 부정한 바 없으며 오히려 그는 율법을 신령한 것으로 보았고(롬7:12) 율법의 긍정적인 역할도 인정하였다(갈 3:24). 다만 바울은 사람들이 율법 자체에 얽매여 스스로 의롭게 되려는 행위들을 배격(排擊)하였던 것이다(롬 10:3). 율법이 지향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형식주의 또는 완고한 유대주의에 매여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엡 2:15). 또한 바울이 할례를 금하였다는 것도 전혀 터무니 없는 허위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바울은 할례 그 자체에  대해서 어떤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았으나 하는 것도, 안하는 것도 무방하다고 했으며(고전7:18, 19;갈 5:6), 디모데에는 할례를 받도록 하기까지 하였기 때문이다. 진실이 이렇다 하더라도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들은 바대로 오해를 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며 이 오해를 해소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22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ㅇ어찌할꼬 - 야고보 및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바울의 신변에 대한 문제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사실은 이제 곧 다른 교인들에게 알려질 것이며 바울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자들이 거센 공격조로 나올 것은 불을 보듯 환한 일이었다.
23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ㅇ서원한 네 사람 - 서원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케'는 '기도하다', '원하다'의 의미를 갖는 '유코마이'에서 온 말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무엇을 하기 원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단순한 소원을 넘어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서약이기 때문에 매우 엄숙한 것이다. 서원에 관한 자료는 구약성경에 많이 있으나, 그 기원은 알 수 없다. 서원은 주로 나실인의 서원과 관계되는데, 부모에 의한 서원이나(삼상 1:11), 본인의 자유의사에 의한 서원이 있으며 서원의 기간은 영구적인 것이 있고(삿 13:7;삼상 1:11), 일정한 기간 동안만 하는 것이 있다(민 6:8, 12). 서원자는 서원한 것에 대해 반드시 신속하게 행해야 하며(신 23:23;시 15:4;전 5:4, 5), 남용하거나 경솔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잠 20:25;마 15:4-6). 또한 서원한 기간 동안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규범으로는 독주를 마시지 말고 머리를 깎지 말며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 본문에 나오는 네 명의 서원은 본인의 자유 의사에 의해 일정한 기간 동안만 하는 서원이라 여겨진다(Robertson). 서원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민 30:1-8 주제 강해 '서원과 맹세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24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ㅇ결례를 행하고...머리를 깎게 하라 - 결례를 행하라는 것은 서원한 자들처럼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서원 기간동안 지켜야 할 규범(23절 주석 참조)을 지키라는 의미이며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는 것은, 결례 기간이 끝나는 날에 머리를 깎고 희생예물을 드리는 때에 드는 경비(經費)를 부담하라는 말로 이해된다.  여기에 드려지는 희생 제물로는, 번제물로 일년 된 수양 하나, 속죄 제물로 일년 된 어린 암양 하나, 화목제로 수양 하나, 그 외에 무교병 과자 등이었으므로(민 6:1-21) 그 비용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이 비용을 바울에게 부담하라고 한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난한 서원자를 위하여 비용을 대신 부담하는 것은 매우 경건한 행위로 여겨졌다.
실제로 기록에 의하면 아그립바 I세가 가난한 나실인을 위해 이런 비용을 제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Jos, Ant., XIX, 6:1). 바울에게 이런 일을 하라는 것은 그의 재력으로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환심을 사라는 말이 아니라 그가 율법을 부정하지 않고 지키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어 그들의 오해와 노여움을 풀기 위함이었다.
25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ㅇ우상의 제물과...음행을 피할 것을 - 이 내용은 일찍이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방인 신자들의 신앙 생활을 위한 지침으로 결의되었던 것인데(15:20), 여기서 다시 한번 반복하여 상기(想起)시키고 있다. 본문의 내용이 결의될 때 바울도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15:1-20) 그 내용이 여기서 문자 그대로 반복되는 것은 다소 어색하다. 이에 대해 혹자는 본문의 내용이 주로 바울의 동료들에게 전달되기 위한 것으로 보거나 혹은 단지 독자들에게 당시의 상황을 상기시키기 위한 의도에서 삽입된 표현이라 간주하기도 한다(H. Marshall). 그러나 예루살렘 회의에서의 결정이 이방인 선교에 중심적 역할을 했던 바울의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 내려진 것이라고 볼 때 이번에는 율법 준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루살렘 신자들을 위하여 바울이 양보해 줄 것을 간접적으로 요청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도 있다.
26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의 만기 된것을 고하니라
ㅇ결례의 만기된 것을 고하니라 - 바울은 야고보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대로 행하였다. 본문의 상황은 바울 일행이 서원의 절차법에 따라 희생 제물을 바친 후 머리를 깎아 제단 불에 던져 태운 다음(민 6:13-18) 제사장에게 서원 기간이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보고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평가가 제기되었다. 바울의 행동은 율법주의자들과의 타협이며 그 결과는 실패였다고 본다(Furneaux, Calvin). 바울은 야고보의 제안에 순종한 것 뿐이라고 본다(Bengel,Wesley). 바울은 그의 설교 전략 즉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자에게는, 자신은 율법의 지배 아래 있지 아니하지만,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자 같이 된다는 원칙을 따라 행동한 것이라고 본다(고전 9:20, Meyer, Weiss,Knowling). 바울은 일찍이 예루살렘에 올때 고난이 있을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4,10-14절;20:23), 죽음까지도 각오하고 있었다(13절). 그런 바울이 신변의 위협을 느껴 율법과 타협하여 자신의 안전을 도모(圖謀)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ㅇ그 이레가 거의 차매 - 바울과 네 명의 서원자가 7일 간의 결례를 거의 마감할 무렵을 가리킨다.
ㅇ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 - 이들은 에베소에서 올라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왔던 것같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몰랐을 터인데 이들은 보자마자 바울을 즉시 알아보았고(바울은 3년간 에베소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더구나 이들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29절).
ㅇ무리를 충도하여 - '충동하다'의 헬라어 '슁케오'는 일찍이 에베소에서 이방 종교인들이 일으킨 소동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던  말로(19:23-41), 바울을 해하려는 이 무리들의 포악함을 시사한다.
ㅇ성전 - 이곳은 성전 영내의 '이스라엘의 뜰'(the Court of Israel)로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닌 유대인 남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ㅇ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 - 에베소에서 올라온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바울을 보자 흥분하여 소리를 질러 사람들을 부르며 바울을 고발하였다. 고발 내용은 그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신성한 율법과 그리고 하나님의 성소인 성전을 거스리는 내용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3요소에 대한 감정에 호소함으로써 분노를 촉발시키려 하였다.
ㅇ거룩한 곳을 더럽게 - '거룩한 곳'은 성전을 가리키고, '더럽게  하였다'(케코이노켄)는 '평범하게 만들다'의 뜻을 갖고 있는 '코이노'의 현재 완료형으로서 이방인을 성전의 '이스라엘의 뜰'에 데리고 들어옴으로써 거룩한 성전을 평범하게 만들었다는 의미가 된다. 완료형으로 되어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하는데 이는 더럽혀진 효과가 이미 시작되어 지속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성전에는 유대인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이스라엘의 뜰'과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바깥 뜰'(이방인의 뜰)이 구분되어 있어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뜰'에 절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이것은 로마 당국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종교적 금기(禁忌)였다. 만약 이방인이 이 금기를 어기고 '이스라엘의 뜰'에 들어갈 경우 죽음을 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런 불행을 예방하기 위해 양쪽 뜰을 가르는 울타리에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는데, 울타리를 넘어 침입해 들어가는 자는 사형에 처하게 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Bruce). 이런 절대 금기의 규율을 바울이 어기게 하였다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분노를 분출시키기에 충분했다.
29 이는 저희가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
ㅇ전에 - 이 표현이 지시하는 시점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제시된다.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훨씬 이전 즉 에베소에 있을 때를 가리킨다(Lenski).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의 어느 시점을 가리킨다(Bruce).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ㅇ드로비모...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 - 바울의 적대자들이 선동하기 위해 외친 소리가 사실의 목격에 근거하지 않고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다는 것이 설명되고 있다. 그들은 얼마 전에 바울과 드로비모가 예루살렘 시내에서 함께 있는 것을 목격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성전에서 바울을 보자 지레 짐작하기를 드로비모가 그를 따라 성전에 들어갔다고 본 것이다. 바울에 대한 적대감(敵對感) 더 나아가 바울을 해치려는 음모가 없이 이러한 오해가 있을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것은 순간적이고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그를 죽임으로써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의 사명을 중지시켜 유대인들의 민족적 우월감과 선민 의식을 보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계획된 행동으로 짐작된다. 사도로서 바울의 고난은 터무니없는 거짓 증인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예수의 수난을 뒤따르는 것이었다(막 14:55-59).
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ㅇ온 성이 소동하여 - 드디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흥분하기 시작하였고 적대자들의 의도는 일단 성공적이었다. '소동하여'(에키네데)는 폭력적인 행동과 격앙된 감정의 상태를 표현하는 동사 '키네오'의 제 1부정과거형으로서 24:5에서는 더둘로가 바울을 고발할 때 사용되기도 하였다.
ㅇ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곧 닫히더라 - 사태는 매우 과격하고도 비이성적인 방향으로 돌변하고 있다. 그들은 바울에게 단 한마디의 자기 변호도 허용하지 않고 성전밖으로 끌어내었다. 여기서 '끌고'(헤일콘)는 '헬코'의 미완료 과거 능동태로 바울을 사정없이 끌고 나가는 행위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문을 닫은 것은 유대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 사이에 있는 문을 닫은 것을 가리키며, 이것은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는 것이 완료되었음을 뜻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간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분노한 군중들이 성전으로 밀려 들어와 그곳에서 바울을 살해하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성전에서 살해 사건이 있게 되면 이는 곧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율법을 준수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들로서는 그런 일을 피하려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바울이 제단 뿔을 잡아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봉쇄하기 위함이었을것이다. 제단 뿔은 제단 가운데서도 가장 거룩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그 뿔을 잡고 있는 동안에는 살륙(殺戮)이 행해질 수 없다고 믿어져 왔다(왕상 1:50).
31 저희가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ㅇ죽이려 할 때에 - 바울을 끌어낸 무리들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러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는 장면이다. 최소한의 형식적 재판 절차도 없이 바울을 죽이려 하는 것은 그 무리들이 종교적 자존심의 손상에 대한 반발과 군중 심리적 흥분으로 극도로 포악해져 있음을 말해준다.
ㅇ군대의 천부장 - 바울이 연루되어 성전에서 발생한 소요는 민첩한 정보망을 통해 그 지역의 치안 책임자인 천부장에게  즉각 전달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오순절기간이었기 때문에 폭동이나 소요를 대비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의 움직임을 철저히 주시하던 터라 그 소식은 매우 신속하게 보고되었을 것이다. 천부장은 보통 1000여명의 병력을 통솔하는 로마군의 장교를 가리키며 이 부대의 구성은 보병 760명과 마병 240명으로 되어 있었다. 23:26에 의하면 이 천부장은 글라우디오 루시아(ClaudiusLysias)였다.
32 저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저희가 천부장과 군사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ㅇ군사들과 백부장들 - 이 군대의 군영(軍營)은 성전 북서쪽의 언덕 위에 세워진 안토니아 성에 있었다. 이들은 언제든지 신속하게 출동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므로 즉시 사건 현장에 도착하였을 것이다. 백부장이 대략 100명의 군대를 지휘하였고, '백부장들'로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최소한 200명 이상의 군대가 출동한 것이 된다(본서 서론 '로마의 행정 및 군대 제도' 참조).
ㅇ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 바울이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던 위기의 상황은 천부장과 그의 부하들의 출동으로 일단 모면되었다. 유대인들이 로마 군대가 출동했을때 바울을 죽이려던 행위를 중단하였던 것은 그들의 행위가 불법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당국의 재판에 의하지 않고는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다. 산헤드린에서 사형 판결을 내린 후에도 빌라도에게 다시 끌고가 재판을 받게 했던 예수의 경우도 그런 이유에서 였다(마26:66;27:1, 2).
33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누구며 무슨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ㅇ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 이것은 마치 한 피의자의 양팔에다 두 형사가 자기의 팔목과 피의자의 팔목에 수갑을 채우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당시에 군인들은 사건현장에 출동할 때 체포용 쇠사슬을 가지고 다녔고 죄수의 도주를 막기 위하여 자기와 함께 묶었다. 천부장이 폭력을 당하고 있던 바울을 묶으라고 명한 것은 일단 그가 죄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며(12:6), 군중들로부터 바울을 분리시킨 것은 그가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법의 절차에 따라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여튼 이렇게 해서 11절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볼 수 있다.
34 무리 가운데서 어떤이는 이 말로, 어떤이는 저 말로 부르짖거늘 천부장이 소동을 인하여 그 실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ㅇ무리 가운데서...부르짖거늘 - 천부장은 바울을 결박하게 한 후 무리들에게 바울의 신상과 그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물었다(33절). 그런데 무리들이 매우 소란스러운 가운데 여러가지 말을 했기 때문에 천부장은 그 사건의 실상을 알 수가 없었다. 여기서 '부르짖거늘'(에페포눈)이라는 단어는 예수를 재판할 때에 흥분한 군중들이 예수의 죽음을 요구하는 것을 묘사하는 데도 사용되었던 것으로 '큰 고함소리로 미친듯이 부르짖는 것'을 뜻한다(눅 23:21).
ㅇ영문 안으로 - 광적으로 흥분하여 외쳐대는 무리들의 소란은 사실을 알고자 하는 천부장의 의도를 좌절시켰다. 그리하여 천부장은 무리들의 흥분이 가라앉은 후에 심리(審理)를 하기 위하여 바울을 일단 영문 안으로 데리고 가도록 조치를 취했다. 여기서 영문은 군대의 주둔지인 안토니아 영문을 가리킨다.
35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포행을 인하여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ㅇ층대...들려가니 - 이 층대는 예루살렘 성전 바깥 뜰에서 안토니아 영안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을 가리킨다. 이 계단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무리들의 난폭함이 극에 달하여 로마군인들이 바울을 손으로 높이 들어올리고 가야 할 지경이었다. 어떤 학자는 바울이 '들려갔던' 이유를 걸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쇠약한 상태였기 때문이라고 보지만(E. Haenchen) 근거없는 추측일 따름이다.
36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 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ㅇ그를 없이 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 무리들의 포행이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이들은 연행되어 가는 바울을 향하여 '그 놈을 죽여라'(공동 번역)고 외치며 따라갔다. 한편 '따라감'의 헬라어 '에콜루데이'는 '아콜루데오' 의 미완료 과거 능동태로 되어 있어 무리들이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바울을 죽이라고 외쳐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행위는 여기선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고 있고(22:22;28:19),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예수의 수난 때에도 그러했다(눅 23:18;요 19:15).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의 조상들 또한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들을 죽였었다(눅 11:47, 48). 실로 이 백성은 역사를 '따라가면서' 하나님을 거역(拒逆)하여 '그를 죽여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37 바울을 데리고 영문으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더러 이르되 내가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뇨 가로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ㅇ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 로마 병사가 바울을 연행하여 영문(34절)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바울은 천부장에게 자신을 변호할 수 있게 해줄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물었다. 이때 바울은 헬라어로 이야기한 것으로 보이며, 천부장은 바울이 헬라어 할 줄 아는 것을 의외의 일로 생각하여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고 되물었다. 당시에 헬라어는'코이네'로 로마 제국권 내에서는 공통 언어였다. 그렇지만 이 말을 할줄 아는 사람은 어느 정도 교양을 갖춘 문화인에 국한되었다.
38 그러면 네가 이전에 난을 일으켜 사천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ㅇ난을 일으켜...애굽인 - 바울이 헬라어로 말하는 것을 듣는 순간 천부장은 한편 놀라면서 다른 한편, 그렇다면 바울이 과거에 난을 일으켰던 애굽인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였다. 천부장이 말하는 이 난(亂)은 역사가 요세푸스가 자세히 전해주고 있는데, 그의 기록에 의하면 A.D. 54년경 한 애굽인 거짓 선지자에 의해 예루살렘에 반란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스스로를 위대한 선지자로 자처한 이 애굽인은 추종자 3만여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와 광야와 감람산 등에 웅거하면서 예루살렘 성벽 파괴 및 로마군의 멸망을 예언하며 때가 되면 반란을 일으키려 했던 자였다. 본문에 나오는 사천  명은 그 가운데 자객으로 선별된 무리들로 보인다. 그러나 이 음모는, 로마 총독 벧릭스(Felix, A.D. 52-58)의 군대에 의해 일부는 죽임을 당하고 일부는 생포되고 이 애굽인 거짓 선지자는 감쪽같이 도망감으로 해서 좌절되었다. 그러니까 천부장의 질문은 바울이 바로 이 거짓 선지자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39 바울이 가로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성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ㅇ길리기아 다소 성 - 바울은 자신이 천부장이 말한 애굽인이 아니라 혈통은 유대인이며 출생지는 길리기아의 다소 성이라는 사실을 차분하게 말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식(拂拭)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출신지인 길리기아 다소성이 결코 작은 도시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다소는 헬레니즘의 중심지로 훌륭한 대학이 있는 문화적 수준이 높은 도시였다. 바울이 다소 출신이라는 사실을 뒷받침 해주는 것으로는 제롬(Zerome)의 기록이 있는데, 그에 의하면 바울의 부모들은 본래 갈릴리의 기스칼라(Gischala) 출신이었다. 그런데 주전 1세기 경에 로마군에 의해 북부 팔레스틴이 침탈을 당한 후에 바울의 부모들이 길리기아 다소로 이주해 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다소에서 태어난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 된다.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여 천부장의 의혹을 해소한 후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찾고 있다. 그는 사실 그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왔던 것이다(13절).
40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크게 종용히 한후에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여 가로되
ㅇ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히브리 방언으로 - 백성들에게 말할 수 있게 해달라는 바울의 요청은 받아들여졌고 바울은 자신과 복음에 대해 변증(辨證)하기 시작했다. 바울은 영문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계단 맨 윗부분에 쇠사슬로 그의 양팔을 결박한 채 함께 서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흥분한 무리들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하여 수백명의 로마 병사들이 서 있고 그 뒤편으로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흥분된 감정을 큰소리로 표출하고 있다. 이때 바울은 그의 양손을 들어올려 백성들을 조용히 시킨 다음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히브리 방언'은 구약성경 시대의 히브리어와는 다른 것로 포로기 이후 아람어화한 언어를 가리킨다. 당시에는 이 아람어가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이 상용하는 언어였기 때문에 바울이 이 언어로 말한 것은 원활한 의사 소통을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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