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6.11.30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시3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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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4편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1.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2.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3.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4.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5.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6.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7.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8.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9.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11.너희 자녀들아 와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12.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13.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14.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15.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16.여호와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를 향하사 그들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17.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18.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19.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20.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21.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벌을 받으리로다 

22.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찬양과 경외(시 34:1-10)

이 시편의 표제는 누가 이 시편을 썼으며, 이것이 기록되었을 때의 경위가 어떠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다윗은 사울의 격노로 인해 자신에게 무척 흥분하게 된 조국으로부터 도피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자 가급적이면 가까운 곳으로, 블레셋 땅에서 피난처를 구했다. 그곳에서도 그가 누구인지 본색이 곧 탄로나서 그는 왕 앞에 데려가지는데, 그 왕은 그 이야기에서 “아기스”(그의 고유한 이름)라고 불리며 본문에서는 “아비멜렉”(그의 칭호)이라고 칭해진다. 다윗은 자기가 간첩이나 음모를 품고 그리로 침투해 온 자로서 취급될까 염려해 스스로 정신이상자와 같이 가장해(그런 자들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하는 바며, 이는 사람이 천치 바보에 의해서도 자신들의 이성을 사용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도록 교훈받게 하기 위해서다) 아기스가 자기를 위험 인물로 인식하지 않고 형편없는 자로 방심하도록 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행위는 그가 바라던 효과를 보았다. 그는 이 책략에 의해서 만일 도망가지 않았다면 자기를 험악하게 다루었을 그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 우리는 다윗의 이 은폐 행위에 대해 그를 옳다고 인정할 수는 없다. 그가 자기의 본래 모습이 아닌 자로 위장했다는 것은 정직한 자답지 않은 짓이며, 게다가 우매한 자와 광인으로 가장했다는 것은 명예로운 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이 총명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총명하지 못한 자들을 희롱으로 흉내낸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그들의 경우를 우리의 경우로 만드실지도 모른다는 것을 망각하는 일이다.

== 그러나 우리는 그의 영혼의 태연자약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그가 자신의 처신을 바꾸었을 때에도 그 자신은 추호도 변하지 않았음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그와 같은 공포나 그와 같은 위험에 처해 있을 때에조차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마음은 아주 확고부동해, 그런 때에 이런 훌륭한 시편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안에는 평온하고도 침착한 심령의 흔적이 이 책 전체의 어떤 시편에 못지 않게 많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 시편에는 작문상 진기한 점도 있으니, 그 구성에서 각 행이 히브리어의 알파벳 순서대로 그 첫글자를 시작하고 있어 소위 알파벳식 시편이라고 불린다. 비록 자기 태도를 변절하도록 유혹받더라도 이와 같이 자신의 기분을 억제하며 시련 가운데서 자신의 은혜를 유지할 수 있는 자들은 복이 있다 할 것이다. 이 시편의 전반부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나온다.

Ⅰ. 다윗은 하나님을 찬미하겠다고 맹세하는 동시에 그렇게 하도록 스스로 고무하고 있다. 그가 자기 처신을 바꾼 것은 그의 과오였지만, 그가 위기를 모면하게 해준 것은 하나님의 자비였다. 그 자비는 너무나 컸으며, 하나님은 다윗이 거짓으로 행세한 그 죄과에 따라 그를 취급하지 아니하셨던 것이니, 우리는 매사에 감사를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1. 그는 하나님을 변함 없이 찬양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모든 경우에 “송축하리로다.” 그는 이 찬양의 의무에 대한 정해진 절기를 지키겠다고 하는 것과 그 일을 위한 모든 기회를 포착하며, 자기에게 소재로 제공되는 모든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자기의 찬미를 일신시킬 것을 결심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우리의 영원한 미래를 바치고자 희망한다면 우리의 시간을 이 일에 가능한 대로 많이 사용해야 마땅하다.

2. 그는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이처럼 그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자신의 감사를 고백하는 일에 자기가 얼마나 적극적이었으며, 타인들도 또한 그 의무를 인식하게 되기를 얼마나 열망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3.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나의 그에 대한 관계와 이익과, 그리고 기대감에서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로다.” 여호와를 자랑으로 삼는 일은 헛된 자랑이 아니다.

Ⅱ. 그는 타인들에게도 이 일에 자기와 합류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들이 그렇게 하리라고 기대하고 있다(2절). “곤고한 자가 이를, 즉 나의 구원과 내 감사를 듣고 선량한 자가 그토록 많은 긍휼을 보게 되고 선하신 하나님이 그토록 큰 영예를 받으심을 기뻐하리로다.” 겸손한 자들은 하나님의 자비, 즉 타인들과 자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위안으로 삼으며, 저들 자신의 공로와 능력은 추호도 신뢰하지 아니한다. 다윗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내리신 은총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심령도 기뻐 받으시리라는 것을 생각하기만 해도 즐거운 일이었다. 그는 다음 세 가지 일에서 우리 모두가 자기와 일치해 나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1. 하나님께 대한 크고도 고귀한 생각. 우리는 이 생각을 하나님을 찬미하고 그의 이름을 높이는 일로 표현해야 한다(3절). 우리가 실제의 하나님보다 더 크게 그를 더 높이 나타낼 수는 없다. 그러나 만약 그를 무한히 크신 자로, 가장 높은 자보다 더 높으신 분으로 찬양한다면 그는 자기에 대한 이 찬미와 높임을 평가하시고 기뻐하실 것이다. 이 일을 우리는 함께 행해야만 한다. 하나님께 대한 찬양은 일치 협력하는 협주에서 가장 훌륭한 소리가 울리는 것이다. 따라서 천상에서 천사들이 하듯 그와 같이 그를 찬미해야 한다. 모든 성도들이 그러하듯 하나님의 은총을 함께 나누는 자들은 그에 대한 찬양도 함께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고자 애쓸 뿐만 아니라, 그에 못지 아니하게 자비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일에서도 그들을 돕고자 해야만 마땅하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일을 함께해야 할 만한 다음과 같은 이유를 가지고 있다.

(1) 하나님께서는 쾌히 기도를 들어주시기 때문이다. 이 사실로 모든 성도는 위로를 받는다. 그는 어떤 자에게도 “나를 헛되이 찾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① 그분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발견한 다윗으로서는 그 사실을 손쉽게 제시할 것이다(4절). “내가 궁지에서 여호와께 구하매, 그의 은총을 간청하며 그의 조력을 요구하였더니 그가 내게 응답하시고 내 요구에 즉각 응하시며,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내가 두려워하던 죽음과, 그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파생되는 불안과 동요로부터 나를 구해 내셨도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역사하시는 그의 섭리에 의해서 전자를 행하시며 후자는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의 은혜를 통해 우리의 두려움을 잠잠케 하시고 우리 영혼의 동요를 잔잔케 하심으로써 이루신다. 이 양자 중 후자가 더 큰 자비니, 이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고통에 불과하지만, 그에 대한 우리의 불신앙적이고 의심 많은 두려움은 우리의 죄악인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그 두려움은 두려움의 대상 자체가 가지는 위력보다도 더 큰 고통을 우리에게 주는 수가 많다. 즉 공포를 품게 하는 것 자체는 단지 뼈와 살을 해칠 뿐이지만, 두려움은 영혼을 먹이로 삼으며, 우리를 자신의 영혼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축출해 버린다.

다윗의 기도는 그 자신의 두려움을 잠잠하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여호와께 구하고 그에게 자기 일을 맡겼으므로 그는 사건의 경과를 아주 태연하게 기다릴 수 있었다. 하지만 다윗은 위인이었고 유명한 인사였으니만큼 우리는 그가 받은 만큼의 은총을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은지도 모른다. 여지껏 “기도로써 그와 유사한 혜택을 입은 자가 어디 또 있었는가?” 하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자들은 많았다.

그 외에도 많은 자가 믿음과 기도로써 “하나님을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다”(5절). 놀랍게도 그 일은 재현되어 저들에게 위안을 주었다. 한나가 이를 입증한다. 그 여인이 기도를 드리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었다”(삼상 1:18)고 한다.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는 어두워지며 당혹감을 감출 길이 없고 어쩔 줄 모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볼 때는 그분으로부터 인도하시는 빛과 기쁨의 빛을 받게 되어 우리의 길은 평탄하고도 유쾌한 길이 된다. 본문에서 언급된 대로 하나님을 앙망한 이들은 저희의 기대로 고양되었고, 사건의 경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이 저희의 신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마도 이들도 또한 다윗 자신처럼 아주 저명한 인사들이었을 것이고, 그런 연고로 큰 은총을 받았거나 아니면 그 수효가 상당해 은총의 대상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었다.” 즉 그는 단 한 사람의 비천하고 미미한 존재로서 아무도 존경의 마음으로 바라보거나 관심을 갖고 돌보아주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윗이나 어떤 저명인사에 못지 않게 은혜의 보좌 앞으로 환영받았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송사와 기도를 인정하시며, 그를 “모든 환난에서 구하셨도다”(6절). 하나님은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리라”(102:17; 사 57:15 참조).

(2) 선한 천사들이 우리를 돌보기 때문이다(7절). “여호와의 사자”, 수호천사가 마치 왕자를 호위하는 자들같이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이것을 천사들 중 하나의 호위병으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그 천사들은 마치 단 하나인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그들의 일을 한다. 하나님은 악령들의 위해와 권세로부터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선한 영들의 봉사를 이용하신다. 그리고 거룩한 천사들은 날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선한 직무를 우리에게 수행해 주고 있다. 비록 천사들이 본성의 품위와 기능에서 우리를 아주 월등히 능가하고 있지만─비록 그들이 우리가 상실해 버린 원초적 정직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상계에서 끊임없이 사역하고 하나님의 찬미에 종사하며 거기에서 항구적 안식과 지복을 향유할 권리가 있는 자들이지만─그들은 저희를 만드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생긴 인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낮추어 성도들에게 봉사하고 암흑의 권세와 대항해 성도들을 옹호하는 것이다. 천사들은 그들을 찾아갈 뿐만 아니라, 그들 주위에 포진해, 야곱이나(창 32:1) 엘리사의 경우에서처럼(왕하 6:17) 비록 눈에 띄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그들을 위해 활동하기도 한다. 모든 영광이 천사들의 하나님께 있으라!

2. 하나님이 인자하시고 선하신 분이라는 생각(8절).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하나님의 선은 그의 존재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그의 섭리와 은혜의 관대하심과 덕행까지도 내포하고 있다.

(1) 따라서 우리는 그가 은혜를 아낌없이 주시는 관대한 분이심을 맛보아야 하고, 우리에게 주시는 그의 모든 선물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음미해야 하며, 그런 것들의 맛과 감미로움을 평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난 음식처럼 음미해 보자.

(2) 우리는 그가 아름다우신 존재시라는 것을 보고, 그의 무한한 완전성을 상기해 기뻐해야 한다. 미각과 시각에 의해 발견과 만족 모두를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알라. 즉 그것을 주시해 그것이 주는 위로를 얻으라(벧전 2:3). 그는 인자하시어 그를 신뢰하는 자들을 모두 참으로 복되게 해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인자하심에 대해 확신을 갖고, 최악의 경우에도 그를 신뢰하도록 용기를 갖자.

3. 하나님을 찾고 봉사하며 그를 계속 경외하겠다고 하는 결의(9절).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우리가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맛보아 알게 될 때에는 그가 크신 분이며, 또한 크게 경외받아야 할 분이라는 사실도 망각해서는 아니 된다. 아니, 그의 선하심까지도 자녀가 가지는 존경과 경외의 고유한 대상이 된다. “그들은 여호와와 그의 인자하심을 경외하리다”(호 3:5). “여호와를 경외하라.” 즉 그를 경배하고 매사에 그에 대한 너희 의무를 인식하며, 자기 하나님께 구하는 백성과 같이 그를 두려워하되 피하지 말고 그를 경외하되 그를 구하라(10절). 또한 스스로 그에게 말을 걸며, 그에게 너희 자신을 맡겨라.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를 찾도록 격려하기 위해, 그렇게 행하는 자들은 이 빈약한 세상에서조차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라”는 것이 본문에서 약속되고 있다(히브리어로는 “저들은 모든 선한 것들에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모든 좋은 것들을 다 소유하게 될 것이므로 무엇이든 부족하다 해 불평할 이유가 조금도 없게 될 것이다. 저 다른 세계의 사물에 대해 그들은 영적 생명을 지탱하기에 충분한 은혜를 받을 것이다(84:11; 고후 12:9). 또한 이 세상의 생활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손길로부터 그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받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로서 저들을 편리한 음식으로 먹여주실 것이다. 저들이 그보다 더한 위안물을 원하더라도 무한하신 지혜자가 유익하다고 보시는 한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며, 부족한 것이 있다면 다른 것으로 보충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어 그가 주시기를 거부하는 것 없이 그들이 만족할 수 있도록 하실 것이며, 그러고 나면 그들에게는 그것이 필요하지 않게 된다(신 3:26). 바울은 모든 것을 가졌고 풍부했으니 이는 그가 자족했기 때문이다(빌 4:11, 18). 만사에 충분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은 부족함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충분히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리게 된다.” 이런 사자들과 같이 일반섭리에 의존해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갖는 그런 만족은 없을 것이다. 자기 스스로를 신뢰하고 자기 자신의 손이 그들에게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궁핍을 느끼게 될 것이나(왜냐하면 “빵이 항상 지혜로운 자에게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 신뢰를 두고 그를 열심히 찾는 자들은 틀림없이 먹을 것을 공급받을 것이다. 게걸스레 자기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잡아먹는 자들은 궁핍을 당할 것이나,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평온하게 일에 열중하고, 자신의 일에 전념하는 자들은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담백한 마음의 야곱은 교활한 사냥꾼 에서가 굶어죽게 되었던 때에도 팥죽을 넉넉하게 가지고 있었다.

우리의 의무에 대한 훈계(시 34:11-22)

다윗은 이 시편의 후반부에서 소자, 즉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는 자신이 군인이었고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해 어린이의 교육은 자기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지 않았다. 비록 그의 머릿속은 근심 걱정으로 꽉 차 있었고, 그의 손에는 할 일이 잔뜩 쌓여 있던 때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린 사람에게 그 자신의 경험에서 나오는 좋은 권고를 베풀 심정과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그 당시 자기 자녀라든가, 적어도 교육을 받을 자격이 있는 성장한 자녀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신적 영감에 의해서 그는 자기 백성의 자녀들을 훈계하고 있다. 나이가 든 자들은 설령 그가 저들을 도와주시려고 하더라도(32:8)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고자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연한 가지들이 더 잘 휘고 어린이들과 젊은 사람들이 더 다루기 쉬워 잘 순종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들의 회중을 불러모으고 있다(11절). “오라, 너희 소자들아. 이제 배움의 연령에 다다른 너희는 너희가 평생토록 의지하고 살 지식을 쌓아야 한다. 어리석고 무지하며 배움의 필요성이 있는 너희 어린이들아, 오라!” 그는 특히 훈계와 교육에 태만한 부모들의 자녀들을 가르치고자 하고 있는 것 같다. 자녀들을 교육시킬 능력이 없는 부모들의 자녀를 교육시켜 준다는 것은 자녀에게 줄 빵을 가지고 있지 못한 부모의 자녀를 먹여살리는 만큼 큰 자선이 된다.

== 그러면 그가 그들에게서 기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내게 들으라. 너희의 놀이는 그만두고, 너희 장난감도 내버려두고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라. 내게 귀를 기울일 뿐만 아니라 나를 주목하고 순종하여라.”

==그가 그들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 종교의 모든 의무를 포함한다. 다윗은 유명한 음악가요 정치가며 군인이었지만, 그는 아이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수금타기나 칼이나 창쓰는 법과 활쏘는 법을 가르쳐주겠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국가 정책에 관한 금과옥조를 가르쳐주겠다”고 말하지 아니하고, “내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경외함을 가르쳐주겠는데 이것은 모든 기술과 학문보다 나으며,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보다 나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점이야말로 우리 스스로가 익히고 동시에 우리 자녀에게도 가르치고자 힘써야 하는 점이다.

Ⅰ. 그는 우리 모두가 행복을 지향할 것을 필요조건으로 삼고 있다(12절). “생명을 사모하는 사람이 누구뇨?” 즉 이 구절 다음에 나오는 바와 같이 장수할 뿐만 아니라 안락한 호시절을 누리고 싶어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생명을 구성하는 것은 존재(being)가 아니라 복리(well-being)다(Non est vivere, sed valere, vita)”. “장수하여 즐거운 생을 누리고 싶어하는 자가 누구냐?”하는 질문이 제기되고 있는데, 그 대답은 간단하다. 즉 “원하지 않을 자 누구이겠는가?” 이 말은 시간이나 이 현세 너머를 내다보고 하는 말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땅 위에서의 인간 생활이란 기껏해야 단지 소수의 날들로 구성된 것에 불과하며, 게다가 그 얼마 되지 아니한 날들도 고통으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영원토록 행복하기를 원하는 자, 천상의 날들만큼 장수하기를 바라며, 순수하고 완전한 복이 있는 저 세계에서 좋은 것을 보고자 하는 자는 어떤 자인가?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선한 것을 믿음과 소망으로써 바라보고 곧 그것을 누리고자 하는 이는 누구인가? 누가 하고자 하는가? 통탄스럽게도 그것을 생각하는 자는 극히 적다. “누가 우리에게 어떤 좋은 것을 보여주겠느냐?”고 묻는 이는 많으나, “영생을 상속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하고 묻는 이는 드물다. 그러나 이 질문은 그런 자가 약간이라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Ⅱ. 그는 이 세계와 앞으로 올 세계에서 행복으로 이르는 진정한 유일의 길을 규정하고 있다(13-14절). 이 세상을 안락하게 통과해 이 세상을 떠나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선한 양심을 고수하는 데에 계속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1. 우리 혀에 재갈을 물릴 줄 알아야 하고 우리가 하는 말에 조심해, 실언함으로써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하거나 우리 이웃을 손상시키는 일이 없어야 한다. “네 혀를 악에서, 궤사한 말에서 금하라.” 기독교란 종교에서 이것은 매우 크게 유용한 일이어서 “만약 누구라도 말로 범죄치 아니하면 그와 같은 자는 온전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종교는 이 점이 없이는 제 길을 제대로 갈 수 없는 것으로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그의 종교는 헛되다”고 선언된다.

2. 우리가 하는 모든 말에서 정직하고 신실해야 하며, 일구이언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말은 우리의 의사를 그대로 나타내어야 하며, 우리의 입술은 하나님이나 사람에게 궤사를 말하지 않아야 한다.

3. 우리의 모든 죄악을 내버리고, 우리가 그 죄악들과는 더이상 관계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악을 버리고”, 악한 행위와 사악한 행위자로부터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타인들이 범하는 죄악과 우리 스스로 이전에 빠져들었던 악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4. 우리가 세상에 해를 입히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우리는 유용하게 되도록 연구하고 어떤 목적을 향해서 살아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악에서 벗어나야 할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기도” 해야 하는 것이니, 즉 우리 스스로를 위해, 특히 우리 자신의 영혼을 위해 선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영혼을 잘 사용하고, 그것에게 훌륭한 보고를 구비시켜 줌으로써 저 다른 세상에 적합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또 우리는 능력이 닿고 기회가 허락하는 대로 남들에게도 선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5. 쇠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혼란과 모든 악행을 초래케 하는 투쟁과 분쟁보다 더 상반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므로(사랑은 율법과 복음, 은혜와 영광의 요약이다) 우리는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즉 우리는 평화로운 기질을 나타내야 하고, 평화를 이루는 일들을 연구해 보아야 하며, 화평을 깨뜨리거나 해를 끼칠 일은 그 어떤 것도 저질러서는 아니 된다. 만일 평화가 우리에게서 도망쳐 가는 것같이 보이면 우리는 그것을 추격해야 한다. 즉 “모든 자와 더불어 화평을 따라가며”, 화평을 보존하고 회복하기 위해서 어떤 수고나 경비도 아까워하지 말아라. 평화를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부인하기를 꺼려하지 말아라. 생명과 선에 이르는 방향을 지시해 주는 이들 훌륭한 말씀은 신약 속에 전사(轉寫)되어 우리 복음의 의무 중의 일부가 되었다(벧전 3:10-11).

아마도 다윗은 궤사를 말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경고해 주면서 그 자신의 행동을 위장했던 그 죄악을 돌이켜 생각해 보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릇되게 행동한 바에 대해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들은 이와 같이 타인들에게도 행동을 조심하라고 경고해 준다.

Ⅲ.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서 받는 경건한 자의 행복과 하나님의 불쾌하심 아래서 받는 악인의 비참한 상태를 우리 앞에 제시함으로써 이런 지시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우리 앞에는 생명과 사망, 선과 악, 축복과 저주가 명백히 정해져 있으며, 우리는 생명을 택해 살 수 있다(사 3:10-11 참조).

1.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저들이 아무리 제멋대로 자신을 축복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좋지 못할 것이다.”

(1)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적하시니 그들은 비참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자기 죄로 말미암아 조물주를 자신의 원수, 즉 파멸자로 삼는 사람의 사정은 슬플 것이다.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들을 대하시도다”(16절).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고 일컬어지는데(렘 18:17), 이는 그들이 그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여기 본문에서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그들에게 대항하여 대하신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그들이 그를 대항해 싸웠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가장 교만하고 무례한 죄인이라도 그 얼굴로 위압하실 수가 있으시며, 얼굴을 찡그리심으로써 그들을 지옥으로 처넣으실 수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2) 저들 앞에는 파멸이 있다. 만일 하나님이 그들을 대항하신다면 물론 이 파멸이 그들을 따를 것이니, 왜냐하면 그는 죽이실 수도 있고 지옥으로 던지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① 산 자의 땅도 그들의 처소나 그들 소유는 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로 그들을 대적하실 때에는 그가 이 땅에서 저들을 끊으려 하실 뿐만 아니라, “저희의 자취를 끊으려 하시는” 것이다. 그들이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그들을 미천한 가운데에 묻어두실 것이며, 그들이 죽으면 망각 속에 매장시켜 버리실 것이다. 그는 그들의 후손도 뿌리째 뽑아버리실 것이니, 그들이 그 자손들에 의해서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저희의 행적 위에 치욕을 쏟아내리실 것인데, 그것은 그들이 영광스럽게 생각했고, 그것들로 인해 자기들이 기념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명예를 제외하고는 어떤 지속적 존귀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② 그들의 사망에는 심한 고통이 있을 것이다.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다”(21절). 그들의 죽음은 비참하다. 설사 그들이 영락한 침상이나 존귀한 침상에서 임종하더라도 그들의 죽음은 틀림없이 처참할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죽음이란 그 안에 저주를 가지고 있으며, 공포 중의 왕, 즉 죽음의 신이다. 저들에게 사망은 단지 악에 불과한 것이다.

악인을 죽인다는 본절의 “악”은 의인의 고난들에 사용되는(19절) 어휘와 동일한 뜻이며, 동시에 단수라는 것은 하몬드 박사가 아주 잘 관찰한 사실이다. 즉 의인들의 고난들에 이 어휘가 사용된 것은 경건한 사람들에게 고난이 많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해를 끼치는 게 아니라 이로운 것으로,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악한 사람들은 그보다 더 적은 고난을 당하며, 더 적은 고난이, 단 하나의 고난이 그들에게 임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단 하나의 고난이 그들의 완전한 파멸을 가져올 것이다. 저주가 담긴 단 하나의 고난은 죽이고 살해하며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 안에 축복을 가진 많은 고난들은 해가 없으며, 오히려 도움이 되기까지 한다.

③ 황폐한 것이 저희의 영원한 기업으로 될 것이다. 스스로 사악한 이들은 흔히 의로운 자와 그들의 명예와 사물을 증오하며, 그들과 그들의 의로움에도 화해하지 못할 만큼 반감을 품는다. 그러나 그 악인들은 “황량할 것이며”(죄를 받을 것이며), 유죄판결을 받고 영원히 황폐케 될 것이고, 하나님과 모든 선한 천사들과 사람들에게서 영원히 버림받고 포기될 것이다. 그렇게 되는 자들은 참으로 황폐하다.

2. 그러나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사 3:10). 모든 선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과 보호 아래 있다. 우리는 본문에서 아주 다양한 사례와 다양한 표현 아래 이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1) 하나님은 선한 백성들을 특별히 주시하시며, 저희 눈을 여전히 주께 향하고 주께 대한 저들의 의무를 인식하고 있는 자들을 주목하고 계신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들을 지시하고 인도하며, 그들을 보호하고 지켜주신다. 아이를 무척 애지중지하는 부모는 그 자녀가 자기들의 시야에서 벗어나도록 내버려두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 중 어느 누구도 그의 시야에서 벗어날 자는 없으며, 그는 감시하는 동시에 인자한 관심으로 바라볼 뿐 아니라, 홀로 만족해하시면서 그들을 바라보신다.

(2) 그들은 그들의 기도에 대해 화평의 응답을 확신하고 있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은 기도하는 백성이며, 그들은 부르짖어 기도하는데, 이것은 매우 간곡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이 무슨 효과가 있는가? 물론 있다.

①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는 바를 주의하고 계신다(17절). 그들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신다. 그의 귀는 저희 기도를 향해 “열려 있어서”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고, 그것들을 기꺼이 기쁨으로써 영접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이래로 하나님은 계속 기도를 들어오셨으나, 그의 귀는 싫증내시지 아니한다. 그 외침에는 수사학도 들어 있지 않고 매력적인 것이 조금도 없으나, 하나님의 귀는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것이다. 마치 자애로운 어머니의 귀가 다른 이는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아니할 젖먹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같이 하나님의 귀는 그 외침에 열려 있다.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도다”(17절). 이것은 선한 사람들은 곤경에 처할 때 항상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간구를 들어주시어 항상 저희의 위로가 되심을 암시해 준다.

② 그는 우리가 말하는 것에 주의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 바로 곁에 준비하고 계신다(18절). “그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는도다.”

첫째,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을 가진다는 것은(즉 죄로 인해 겸손하며 자아를 배운다는 것은) 의인의 특성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실 것이다. 그들은 저희 자신의 안목으로도 비천한 자들이며, 자기 자신들의 장점이나 능력에 신뢰를 두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신뢰를 두는 자들이다.

둘째, 그런 자들은 자기들을 위로하고 후원해 주시는 하나님을 저들 가까이에 모시는데, 이는 심령이 정도 이상으로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또 그 심령이 하나님 앞에서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사 57:15 참조). 비록 하나님께서는 높으신 분이시며, 또 높은 곳에 거하고 계실지라도,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자들에게는 가까이 가셔서 그들이 그들의 무거운 짐 아래 빠져들지 않도록 구해 주실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가까이 하셔서 좋은 결과를 얻게 하실 것이다.

(3) 저희는 하나님의 통치가 베푸는 특별한 보호를 받게 될 것이다(20절). “그는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시도다. 그의 영혼뿐만 아니라 그의 신체까지도, 일반적인 그의 신체만이 아니라 그 안의 모든 뼈까지도 지켜주신다.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상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를 상한 뼈까지 가지게 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다윗 자신도 그가 통회하는 마음을 가졌을 때 “꺾어진 뼈”가 “즐거워하게” 된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51:8, 17). 본문에서 그리스도께 관한 어떤 것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못할 터지만, 그런데도 이 구절은 그에게서 성취되었다고들 한다(요 19:36). 즉 병사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힌 두 강도의 다리는 꺾었으나 그의 다리는 꺾지 아니했던 때에 이 말씀이 이루어졌던 것이니, 그의 다리들은 유월절 양의 예표였을 뿐만 아니라, 이런 약속의 보호 아래(“그의 뼈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약속들은 그리스도에게서 실증되었고, 그를 통해 모든 인간들에게 확실한 것이 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선한 자는 꺾인 뼈를 갖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용의주도한 섭리에 의해 그런 재난은 놀랍도록 예방이 되며, 그런 그의 뼈의 보존은 이 약속의 결과다. 설령 그가 부러진 뼈를 갖게 된다 하더라도 조만간에 소생케 될 것이고, 적어도 부활시에는 온전해질 것이니 그때에는 연약함으로 심은 것이 강한 힘으로 거두어질 것이다.

(4) 저들은 저희 환난에서 구원받으며, 또 구원받게 될 것이다.

①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들 몫의 십자가를 갖도록 되어 있는데, 아마 그 고난은 타인들의 것보다도 훨씬 더 큰 몫일 것이다. 이 세상에서 그들은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이는 저들로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표본에 순응시키기 위한 것이다(19절). “의인의 고난은 많으니”, 그것을 다윗과 그의 고난들이 증언하고 있다(132:1). 의인들을 미워하는 자들은 끊임없이 해를 가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므로 바로잡아 주신다. 따라서 천국의 자비와 지옥의 악 사이에서 의인의 고난은 필히 많지 않으면 안 된다.

② 하나님은 저희를 구출하고 구원하셨다. “그는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저희를 건지시는도다”(17, 19절). 그는 그들을 구하시므로(18절), 그들이 환난에 빠질지라도 그들을 파멸케 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저희를 구출해 내심에 대한 이 약속이 설명되고 있다(22절).

첫째, 어떤 어려움이 그들 위에 임하든지간에 그 환난들은 저희의 더 좋은 부분을 다치지 못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음부의 권세와(49:15) 고난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구속하시리로다.” 그는 그들이 고난 중에서 저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유일의 일인 죄를 짓지 않도록 금하시고, 그들이 절망하고 자신의 영혼을 소유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지켜주신다.

둘째, 그 고난들이 저희의 영원한 축복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 신뢰를 두는 자는 아무도 황량하게 두지 아니하실 것이다.” 즉 그들은 반드시 위로를 받을 것이니,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단절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버리신 자 이외에는 아무도 황량하게 될 자가 없으며, 어느 누구도 지옥에 들어가기까지는 망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 된 자, 즉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그에게 영광 돌리는 일을 자기 일로 삼는 자,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들을 보호하고 보상하시는 그를 신뢰하고 하나님께 대해 선한 생각을 품음으로써 자기들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자들은 어떤 일이 자기들에게 생기든 편안해할 만한 이유를 가지는 것이다. 그들은 안전하고 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들을 노래부름에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하나님의 길을 확신하도록 하자. 또한 그에 대한 봉사에 활기를 띠며, 그가 자기에게 신실히 집착하는 모든 자들에게 특별한 배려를 베푸신다는 확신으로 말미암아 큰 용기를 얻도록 하자.


어느 누구고 하나의 섬이로되, 그러나 자기 홀로는 결코 온전한 것 아니어라.

사람은 모두 대륙의 한 조각,  본토의 일부분...

조수에 씻겨 물굽이땅 한줌 사라짐은 또한 그만큼 유럽 땅 줄어듬이요,

그대 친구의, 그대 자신의 농토 사라짐이어라.

생면부지인 어느 누군가의 죽음조차도 내 자신의 감소인 까닭은

나 자신이 인류라는 한 공동체에 연계되어 있기 때문.

그러기에 묻지 말지어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느냐고 

종은 그대 자신을 위해 울리므로.  --------존던<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by John Donne

No man is an island, Entire of itself.

Each is a piece of the continent, A part of the main.

If a clod be washed away by the sea,

Europe is the less. As well as if a promontory were.

As well as if a manner of thine own

Or of thine friend's were.

Each man's death diminishes me, For I am involved in mankind.

Therefore, send not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감상】

시인이며 목사인 존던이 살던 영국 그때, 그리고 그곳에서는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한다. 존 던이 살던 마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한 사람이 전염병으로 숨을 멈출 때마다 교회의 종을 울리게 했다고 한다.

존 던은 그 종이 울릴 때마다 이렇게 궁금해 했다. “종이 울렸구나, 누군가가 죽었나보다.”

그런데 어느 날 존던마저 전염병이 걸렸다. 그리고 병석에 누워 있던 중 그 종소리를 다시 듣게 되었다. 그 때 존던은 느꼈다. 저 종의 울림이 바로 자신을 위한 것이었음을. 그리고 저 위대한 시를 짓게 되었다.

.....그날 아이티에서 매우 커다란 종이 울렸다. 

.....우리 또한 대륙에 속한 한줌 모래땅이기에, 우리는 인류속에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그 종소리는 우리들을 위한 종소리이다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가를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마라)

.....존 던은 이글을 쓰면서 대단히 몸이 아팠다고 한다. 교구민 중에 누가 죽으면 교회는 조종을 울린다. 지금 다른 어떤 사람을 위해서 조종이 울리고 있는데 사실은 그 종은 본인을 위해서 울리고 있었으나 그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토로한다.

이 말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깨우쳐주려는(계몽하려는) 의미가 있다. 이 유명한 명상록은 그것이 쓰여 질 무렵의 Renaissance 시대의 두 가지의 본질적인 개념, 즉 Island와 Bell의 관념을 담고 있다.

여기에서 Island는 사람은 서로 고립되지 않고 서로 연결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No man is an island”는,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라고 번역돼 있으나 섬을 사람과 비유한 이 말엔 ‘사람은 결코 혼자 살 수 없으며 서로 돕고 사는 존재’라는 뜻이 담겨있다. 즉 사람이 혼자 사는 섬은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혼자 살 수 없다’(We cannot live alone)는 의미다. 여기 존 던은 ‘나’라는 존재를 결코 홀로만일 수 없는 섬으로 보았고 대륙의 일부분으로 보았다. 남이 죽으면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니라 내가 함께하는 대륙의 일부가 떨어져나가는 것으로 보았다. 인간은 혼자가 아닌 사회적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합당한>영광(돌림) == JC를 믿는 이인 나와 우리를 통로로 삼으시어, <영존하시는, 살아계신 전능의 하나님> 몸소 역사하심(일하심/행하심)을 나타내심으로써 약속말씀대로 그 일 이루신 하나님이 몸소 그분의 어떠하심(성품)을 드러내셨음을, 또는 하나님의 영광 보기를 갈망하는 우리에게 영존하시는 자신의 임재의 영광을 친히 나타내심으로써 우리가 그 영광 체험케 된 사실을 인정하며 , 하나님이 몸소 그분의 어떠하심(성품)을 그 일 통해 명명백백하게 드러내셨음을 깨달아 기뻐하고 기억하고 묵상하며 영영히 감사하며 증거함 

@@전도...그 무게(영광)...하나님의 어떠하심과 이루신 일을 복음(십자가의 도) 통해 전하고 JC를 믿게 함..==이것은 생명 JC를 나누는 일<하나님이 몸소 마음 힘 뜻 다해 하시듯, 바로 그렇게 전심전력다해 올인하시는 하나님께 통로로 올인하여 내어드림>...주께 합당하시도록 행하라..

@@세례 : JC로 옷입은 이들(그 DNA까지 예수님의 영적 DNA=생명씨앗=으로 성령에 의해 바뀌어 가는 이들)의 모임인 JC의 몸에 가입/참여함.....참생명JC를 나누며 공급하며 살기의 삶(All in One, One In All) 안으로 들어섬, JC로 사는 삶을 사는 자 됨을 공인함......인도자는 마땅히 먼저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과 극진하신 사랑, 세상에서 성도를 불러내신 그분의 뜻 밝히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가입함의  그 참된 의미를 밝히 드러내며,,,성도들의 마땅한 바 엡4장의 <사랑과 평강 안에서 생명 유통함으로 성장성숙하는 연합과 일치>즉, 돌봄-배려-이해-관심과 용납-온유와 겸손 실행함을 서로 부탁하기를 잊지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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