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8.05.17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시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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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88편]

*1.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2.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3.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4.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5.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6.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7.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

*8.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9.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10.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

*11.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12.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13.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14.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15.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

*16.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

*17.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18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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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저자의 영혼의 아픔(시 88:1-9)

이 시편과 다음 시편의 제명으로 보아 헤만은 전자의 필명이며, 에단은 후자의 집필자 이름인 것으로 보인다. 유다의 아들 세라에게는 이같은 이름을 가진 아들이 둘 있었다(대상 2:4, 6). 또 열왕기상 4장 31절에는 지혜로 유명한, 같은 이름의 두 사람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솔로몬의 지혜를 높여 말하기 위해 솔로몬은 “헤만과 에단보다 더 지혜로웠다”고 표현했다. 레위인들로서 시온의 노래에서 선창자의 역할을 맡았던 헤만과 에단이 이 시편들의 필자와 동일한 인물이었는지 우리는 확인할 길이 없으며, 이들 중 누가 시편 작자인지, 혹은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시편 작자가 아닌지 또한 확실히 알 수 없다. 노래하는 이들의 우두머리 중에 헤만이란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왕의 선견자 또는 선지자라 불렸다(대상 25:5). 아마 이 시편의 필자도 선견자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런 위로도 볼 수 없었고, 남들에게는 교훈을 주는 자요 위로를 주는 자였으되 스스로의 위로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시편의 맨 처음 말씀은 전편을 통해 유일한 위로의 말씀이요, 후원의 말씀이다. 시편 저자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라고는 암운과 어두움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하소연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을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시사해 준다. 즉, 그는 사태가 험악했지만 구원을 희구하고 있다. 또 그는 구원을 바라서 하나님께로 자기 눈을 돌리고, 그가 자기 구원의 장본인이 되도록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여기에서 대하게 되는 시편 저자는 다음과 같은 인물이다.

Ⅰ.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기도에 전념하는 사람으로서, 특히 이제는 고난 중에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지니라.” 그의 위로는 기도드리는 데에 있었다. 그의 불평은 자기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난이 여전하다는 데에 있었다.

1. 그는 기도에 매우 열심이었다.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며(1절), 당신을 굳게 붙잡으려는 자처럼, 또 자비가 내게 미치지 않을까봐, 긍휼을 놓칠까봐 성스러운 두려움을 품고서 자비라도 잡으려 드는 자처럼 주께 내 손을 펼쳤나이다”   (9절).

2. 그는 기도를 매우 빈번히 했고 꾸준히 했다. “나는 매일(9절), 아니, 주야로 주를 불렀습니다”(1절). 이와 같이 인간들은 항상 기도에 힘써야 하며, 기도의 힘을 잃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자들은 주야로 그에게 부르짖어야 하는 것이니, 아침 저녁으로 기도해야 하며, 매일 낮과 매일 밤을 기도로 시작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낮과 밤을 기도하는 가운데 보내기도 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항상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도 우리가 계속 기도를 드리는 순간마다 우리는 능률적으로 속히 기도를 해야 한다.

3. 그는 하나님을 향해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이 오기를 기대하며 염원했다(2절). “나의 기도로 하여금 주 앞에 상달되게 하시며, 주께 용납되도록 하시고, 바리새인들의 기도처럼 인간들 앞에 나타나지 말게 하소서.” 그는 인간들이 자기 기도에 귀 기울일 것을 원치 않고, “여호와여, 주의 귀를 나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소서.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의뢰하는 것은 그 점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좋으실 대로 그 기도에 어떤 대답이든 해주소서” 하고 바라고 있다.

Ⅱ. 그는 슬픔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어떤 이는 이 시편 저자를 그리스도의 표상으로 이해하는데, 이는 십자가 위에서 토로하신 그리스도의 호소나 그 이전에 때때로 하신 그의 탄원이 이 시편의 취지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는 부르짖는다(3절). “내 영혼은 곤란으로 가득하나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지금 내 마음이 고통스럽다”고 하셨으며, 이 시편 저자처럼 고뇌 중에서 “내 영혼이 심히 슬퍼 죽게 되었다”고 하셨다. 시편 저자도 “내 생명이 음부에 가깝나이다”라고 하고 있다. 헤만은 매우 지혜로운데다 또 매우 선량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사람인 동시에 노래부르는 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쾌활한 기질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는 마음에 슬픔이 가득한 자가 되어 고통으로 절망하기 일보 전에 놓여 있다. 내부의 고통은 고통 중에서도 가장 쓰라린 것이며, 때로는 가장 훌륭한 하나님의 성도와 하나님의 종들도 이같은 내적 번뇌로 심한 괴로움을 당한다. 인간의 심령은, 가장 위대한 자의 심령이라고 할지라도 자기의 취약함을 늘 견디어낸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니, 오히려 자기의 약점 아래서 쇠퇴하고 침체하게 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누가 상한 심령을 견디어낼 수 있는가?”

Ⅲ. 그는 자기 자신을 빈사의 지경에 이른 자로, 즉 슬픔으로 인해 이제 그 심장이 터질 지경에 이른 자로 간주했다(5절). “사망자(유령단체의 한 구성원) 중에 던지운 바 되었으며 살륙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같이 되었으니 아무도 죽은 자의 부패와 멸망을 돌아보지도 않으며 걱정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주께서도 그들을 더이상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죽은 몸들을 보호하지도 않으시며, 먹여 살리지도 않으셔서 그들은 부패되며 구더기의 먹이가 되고 맙니다. 그들은 주의 손으로부터 끊어진 자들입니다. 주의 손은 그들을 지지하시는 일과 그들을 도우려고 내어미시는 일에 사용되어 왔으나, 이제는 더이상 이런 기회가 없게 되었사오니, 그들은 당신의 손에서 끊어졌사옵고, 당신의 손으로 말미암아 끊어졌사옵니다”(“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음부에 있는 자에게는 자기 손을 펼치지 아니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욥 30:24). “주께서는 나를 가장 낮은 웅덩이 속에 두셨사오니, 내 처지와 내 심령을, 더 낮아질 수 없을 만큼 낮게 하시며, 어두움 속에, 깊은 곳에 두셨사오니(6절), 밑바닥에 떨어져 탈출할 길이 보이지 않음으로 해서 최악의 막다른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되었나이다.” 이와 같이, 선량한 자들도 큰 고난을 당할 수 있으며, 자기들의 곤경에 대해 그토록 우울한 걱정을 품을 수도 있고, 때로는 역경의 결과에 대해 그토록 암담한 결론을 내리기가 쉬운 것이니, 이는 우울의 힘과 약한 믿음 때문이다.

Ⅳ.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노여움에 대해 불평했으니, 그의 어려움과 괴로움에다 지독한 고초를 더한 것은 하나님의 노여움이었기 때문이다(7절).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만일 그가 자기의 불행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식별할 수 있었다면, 그 누르심을 가벼운 것으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게, 매우 억세게 그를 눌러 그는 거의 주저앉아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의 심령에 대한 이 분노의 억누름은 그에게 고통을 가하는 하나님의 “물결”이어서, 한 파도 다음에는 또 다른 파도가 밀려와 그에게 굽이쳤다. 그가 한 어두운 생각에서 채 깨어나기도 전에 또 다른 암담한 생각이 그를 억압했다. 이 파도들은 울부짖으며 맹렬히 그를 때렸으며, 그에게 고통을 가해 내리누르는 일에 사용된 하나님의 물결은 일부가 아니라 전부였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들조차 때로는 자신들이 진노의 자녀들이 아닌가 해서 불안해하는 수가 있으니, 어떤 외적인 고통도 그런 염려만큼 그들에게 큰 부담을 주지는 않는다.

Ⅴ. 그의 고통을 더하게 한 것은 그의 친구들도 자기를 버리며, 낯선 자같이 행세했다는 점이었다. 우리가 고통 속에 있을 때 주위에 우리를 사랑하며, 동정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다소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그러나 이 선량한 자에게는 그런 자들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자기 친구들을 성실하지 못한 자, 의리 없는 자, 몰인정한 자라고 비난하지도, 책망하지도 않고, 이 고난에 관계하신 것은 하나님의 손길이란 점을 염두에 두고서 하나님께 호소를 드린다(8절). “주께서는” 나의 “친지들을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셨습니다.” 섭리는 그의 친구들을 데려가 버리셨고, 그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도록 하셨거나 아니면 그에게 쏟던 애정을 소원하게 만드셨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만큼만 우리에게 관계할 뿐이며, 더이상은 관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오랜 지기가 우리를 꺼려하며, 친절한 대우를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던 자들이 불친절한 자로 드러날 때는 우리가 다른 고난을 견디어낼 때와 마찬가지로 이 또한 참지 않을 수 없으며, 마찬가지의 인내로써 하나님의 뜻에 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욥 19:13 참조). 아니,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낯선 외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미워하기까지 했으니, 이는 그가 가난한 자가 되며 곤란을 당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자가 되게 하셨나이다. 그들은 나를 꺼려할 뿐만 아니라 싫어하기까지 하며, 멸시할 뿐만 아니라 혐오하기까지 하나이다.” 그토록 지혜로 이름을 날리던 헤만이 온 세상의 빈축을 사며, 아무런 즐거움도 없는 자로 무시당한다는 사실에서, 어떻게 해 이같은 시험이 있을 수 있는가, 의아롭게 여기지 말 것이다.

Ⅵ. 그는 자기의 경우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통탄할 수밖에 없는 일로 간주했다.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사오니 하나님의 진노에 사로잡힌, 꼼짝할 수 없는 포로이오며, 탈출할 수 있는 길도 열려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누워 있으며, 자기의 고통 속에 파묻혀 있으니, 이는 그가 이 곤경에서 헤어날 가망이라고는 도무지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그는 비탄을 금치 못한다(9절). “내 눈이 고통으로 인하여 슬퍼하나이다.” 때로 울어서 슬픔을 발산하면 고통스런 마음이 다소 후련해지는 때가 더러 있다. 그러나 울음으로 인해 기도가 막혀서는 안 된다. 우리는 눈물로 씨를 뿌려야 한다. “내 눈은 슬퍼하지만 나는 매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기도와 눈물을 병행시켜라. 그러면 그 둘은 함께 기뻐 받으시는 바가 될 것이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노라. 또 네 눈물도 보았노라.”


어찌하여 내 영혼을 버리시나이까(시 88:10-18)

이 문단에서 우리가 대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Ⅰ. 시편 저자는 자기가 현재 처해 있는 비참한 처지를 들어 하나님께 충간한다(10-12절). “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기적의 일을 베푸셔서 그들을 다시 일으키시겠나이까? 죽어 매장당한 자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아닙니다. 자기들 방에서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그들의 자손들에게 맡길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행하리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는 것만을 위해 어찌 그들이 부활해야 하며, 뭣 때문에 그들이 살아나야 한단 말입니까? 우리가 맨 처음 태어날 때 얻은 생명과 맨 나중 부활하여 얻을 것이라고 희망을 두는 생명은 물론 그와 같이 당신께 대한 찬양을 위해 사용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주의 백성에 대한 주의 인자하심이 무덤에서 선포될 것입니까? 즉, 거기 매장돼 누워 있는 자들에 의해서나 아니면 죽은 자들에게 선포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까? 그리고 당신의 약속에 대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가운데에서 말씀하실 수가 있습니까? 주의 기사가 흑암 중에 베풀어지거나 거기서 알려집니까? 사람들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며, 또 인간들 스스로도 기억되지 않는 망각의 땅에서, 즉 무덤에서 주의 의가 알려질 것입니까? 참으로 영혼은 떠나가더라도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을 선포할 수 있으나, 육체는 죽으면 그뿐입니다. 죽은 육체는 안락한 중에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며, 자기가 받은 은총에 답하여 찬송으로 되돌려드리지도 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시편 저자가 마치 하나님이 그를 도울 수도 없는 분이라고 생각하거나 도움을 주지 않으려던 분으로 생각하기라도 한 양 이 간언의 말씀들을 절망의 언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며, 더욱이 이 말씀들이 마지막 날에 있을,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불신앙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더더구나 안 된다. 그는 조속한 구원을 바라서 하나님께 이와 같이 탄원하고 있다. “여호와여, 당신께서는 선하시고 충실하시며 의로우십니다. 이와 같은 당신의 속성들은 나를 구원하실 때에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제게 대한 구원이 속히 이뤄지지 않을 때에는, 구원이 이른다고 하더라도 너무 늦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곧 죽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구원도 사후 약방문이 되어 내가 아무런 위안도 받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도 종종 이같이 탄원했다(욥 7:8, 10:21).

Ⅱ. 그는 기도를 계속하겠다고 결심하는데, 구원이 지체됨으로 인해 더욱 그리했다(13절). “주께 나는 몇 번이고 부르짖었사오며, 그러는 행동 속에서 위로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계속해서 그렇게 행하겠나이다. 아침에 내 기도는 주를 가로막으리이다.” 비록 우리 기도가 즉각적인 응답을 얻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기도를 중단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에는 정한 때가 있고, 결국에 가면 그것이 말해 주며,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응답을 늦추심은 우리의 인내심과 기도의 투지력을 시험하시기 위함이다. 그는 자기의 심기가 활발히 움직이고, 하루의 일과가 산더미처럼 밀려들기 전인 아침 일찍이 하나님을 찾아야 하겠다고 결심한다─즉, 걱정으로 부대낀 뒤 슬픈 상념들이 밤의 정적 속에서 조용히 가라앉은 아침에 말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가 “내 기도는 주를 가로막을 것입니다” 하고 말할 수 있었던가? 이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먼저 깨어 기도하겠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일상적인 기도시간보다 일찍 일어나겠다고 하는 것, 즉 자기의 보통 기도시간에 “앞서서 행하겠다”(즉, 앞에 간다) 함을 의미한다.

우리의 역경이 크면 클수록 우리의 기도도 더욱더 간절해지고 진지해져야 한다. “내 기도가 주 앞에 스스로 모습을 나타내어 때를 늦추지 아니하고 당신과 함께할 것이며, 자비의 실마리가 풀리도록 촉진하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날이 새기도 전에 믿음과 기대로 자비를 향해 나아가리이다.” 하나님께서는 흔히 여러 가지 자비로써 우리의 기도와 기대를 인도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와 바람으로써 그의 자비보다 앞서 나아가자.

Ⅲ. 그는 자기가 하나님께 말씀드리고자 하는 일들을 그의 기도 안에 정해 둔다.

1. 그는 자기가 그때에 처해 있던 비천하고도 고통스런 상태에 대해 하나님께 겸손히 그 이유를 묻고자 한다(14절). “여호와여, 주께서는 어찌하여 내 영혼을 버리시나이까? 나를 포기한 자처럼 취급하실 만큼 당신에게 노여움이 일어나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 어찌해서 주께서 나와 다투시는지 내게 이유를 나타내어 보이소서.” 그는 왜 하나님께서 오래된 종을 버리시며, 하나님을 버리지 않기로 작정한 자를 왜 하나님은 버리셔야 하는지 궁금히 여기면서 말한다. “사람들이 나를 버리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지만, 여호와여, 당신은 당신의 은사와 소명을 주신 자에게 후회하지 않는 분이신데, 어찌해서 저를 버리십니까? 주께서는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숨기셔서, 내게 화를 내는 자같이 하시며, 나를 총애하는 마음이 없거나 당신이 내게 대한 은총을 갖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내게 알리려고 하는 자같이 하시나이까?”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시는 것보다 더 비탄스런 일은 없으며, 하나님께서 그 자녀의 영혼을 버리시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은 없다. 만약 태양에 구름이 끼어 있다면, 지구는 어떤 감옥이 될 것인가!

2.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자비를 베푸실 때까지는 전에 했던 하소연과 같은 호소를 겸손히 반복할 것이다. 그가 하나님께 자기의 불행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두 가지 일이다.

(1) 하나님께서 그에게 공포가 되셨다는 것. “나는 주의 두려움을 당하나이다”(15절). 그는 자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또 그 진노의 결과에 대한 염려로 계속 놀람을 당했다. 그는 하나님의 수중에 떨어지는 일과 하나님의 존전에 대죄해 자기 운명을 선고받음을 생각만 해도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는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하심과 그의 존엄무쌍하신 공포에 대한 염려로 식은땀을 흘리며, 사시나무 떨듯 했다. 하나님의 총애를 받도록 지정된 자들도 일시적으로는 그의 두렵게 하심을 당할 수 있다. 양자의 마음도 처음에는 두려움에 예속된 심정이다. 불쌍한 욥도 “자기를 치려고 열을 지은” 하나님의 공포에 대해 불평했다(욥 6:4). 여기에서 시편 저자는 자기 생각을 확연히 털어놓으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공포가, 곧 그의 “맹렬하신 진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해 준다. 그러한 두려움들이 그에게 입힌 무서운 흔적은 무엇이며, 그가 입은 상처는 얼마나 깊은 것인지 살펴보자.

① 그것들은 그의 생명을 거의 취해가 버렸다. “내가 그것들에게 너무나 고통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이 단어는 그런 뜻이다), “혼령조차 버리게 되었나이다. 주의 두렵게 하심이 나를 끊었나이다”(16절). 저 영원한 단절이란 지옥은 무엇이냐? 저주받은 죄인들이 그 단절에 의해서 하나님과 모든 행복으로부터 영원히 끊어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두려움이 죄 많던 저희 양심을 죄며 먹이로 삼는 데가 아니냐?

② 그 두려움들은 그의 이성을 거의 못쓰도록 탈취해 가버렸다. “내가 주의 두렵게 하심을 당할 때에는 황망하였나이다.” 여호와의 두렵게 하는 일은 많은 자들과 몇몇 선량한 자들에게 이런 슬픈 효과를 자아냈으며, 그들은 이로 인해 그들 자신의 영혼을 전혀 소유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극히 애처로운 일로서 크나큰 동정심을 가지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③ 이 일은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나는 소시로부터 주의 두렵게 하심을 당하나이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우울증으로 고통을 당해 왔고, 슬픔이란 학교의 규율 아래 훈련을 받아왔다. 설사 우리의 날이 고통으로 시작하고, 슬픔의 날들이 오랫동안 계속되더라도 우리는 이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고생이 되더라도 인내로 이겨내자. 저명한 현자이자 선인이었던 헤만이 “소시적부터 곤란을 당하여 거의 죽게 되었고”, 하나님의 두렵게 하심을 당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은 젊을 때에 멍에를 멘다고 하는 것이 자기들에게 유익한 일임을 발견했고, 슬픔이 웃음보다 더 낫다고 하는 것을 깨달았다. 젊을 적에 많은 고생을 당하고 종종 빈사의 지경에 처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습관적인 진지성을 터득하게 되며, 세상을 멀리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은 평생토록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크게 쓰시기로 작정하는 자들에게도 때때로 이와 같은 종류의 훈련을 예비해 두신다.

④ 그의 고난은 이제 극에 달했고, 여느 때보다 더 악화되었다. 하나님의 두렵게 하시는 일이 이제 그의 주위에 둘러서 그는 사면팔방으로부터 각양각색의 고통에 공격당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라고는 바늘구멍 하나 없었다. 환난은 물이 범람하듯 그에게 덮쳐왔으며, 그것도 매일, 하루종일 습격해 왔다. 그에게는 휴식도 유예기간도 없었고, 숨쉴 틈도 없었으며, 잠깐 평정을 되찾는 시간도 없었다. 희망의 빛이라고는 전혀 비치지도 않았다. 이와 같은 것이 지혜가 뛰어나며, 아주 선량한 인간의 비참한 모습이었다. 그는 공포로 둘러싸여서 어떤 피난처도 찾을 수 없었고, 바람받이에서 누울 곳도 찾을 수 없었다.

(2)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친구도 그에게 위로가 되지 못했다는 것(18절). “주께서는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셨나이다.” 어떤 자는 죽었고, 어떤 이는 멀리 떨어져 있으며, 아마 대개는 몰인정했을 것이다. 종교의 위로 다음 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정과 사교에서 오는 위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친구가 없다는 것은(이생에 대해서는) 거의 위로가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다. 친구들이 있다가 없어진 자들에게는 재난이 더 한층 고통스런 것이 된다. 시편 저자는 이것이 그의 비애를 종결시키고, 이 우울한 일에 결정타를 가하는 것이기라도 한 양, 이 말씀으로 여기에서 자기의 호소를 끝맺는다. 만일 우리의 친구들이, 이산시키는 섭리로 인해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게 된다고 할 때, 아니 우리의 지기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암흑 속으로 옮겨지는 경우, 우리는 그 일을 쓰라린 고통으로 여길 만한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그 일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감지하고, 그에 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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