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8.06.11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십자가복음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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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10]*3.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For though we walk in the flesh, we do not war according to the flesh, *4.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하나님이 친히 증거하시는 바 십자가복음의 설득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for the weapons of our (spiritual)warfare are not of the flesh, but divinely powerful for the destruction of fortresses(strongholds of human reasoning). *5.하나님 <~을 참되게>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We are destroying speculations(그럴듯한 추측/이론적 가정, sophiscated false arguments 세련되고 정교하나 <생명관점에서 볼 떼>헛된 논점들)and every lofty thing raised up against the (true) knowledge of God, and we are taking every thought captive to the obedience of Christ...*17.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But HE WHO BOASTS IS TO BOAST IN THE LORD. *18.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For it is not he who commends himself that is approved, but he whom the Lord commends.


제목: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 

1.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고후10:3-4a) 

바울은 세상 떠나갈 시간이 되었을 때에, 이렇게 고백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딤후4:6-8)   

그리스도인에게는 믿음의 달려갈 길을 가면서 선한 싸움이 있다. 싸워야 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고, 죄와 그 배후에 있는 사탄과 육신과 세상이다. 싸워서 이기면 의의 면류관과 상급과 축복이 있다.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패배하고 그 노예가 되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피흘려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죄와는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 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법, 성령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죄는 인간의 모든 불행과 비극과 위기를 만드는 원인이다. 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한 채 교육과 정책과 프로그램으로 해결할려고 하지만, 그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인간은 날로 악해지고 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죄를,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죄의 노예가 되고, 포로가 되고 만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죄를 다스리지 못하면 인생은 비극과 불행과 사망으로 끝이 난다. 사람들이 짓는 죄들의 뿌리에는 원죄가 자리잡고 있다. 원죄를 먼저 처리해야 그 가지들인 죄들과 싸워 이길 수 있다. 아담이 물려준 원죄이지만 사람의 능력으로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하나님의 능력과 방법으로 처리해 주셨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3-24)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오셨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그 죄를 처리하셨다, 우리에게는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이 사실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하셨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원죄’(Sin)를 처리한 그리스도인들은, 의롭다 함을 받은 의인이 되어, 이제는 ‘죄들’(sins)과 싸워 이길 수 있게 하셨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죄를 지어도 정죄함이 없고 오직 징계가 있을 뿐이다. 

죄들과의 싸움은 육신에 따라 육신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기 전까지는 육신과 결합되어 육신으로 행한다. 그러나 육신에 따라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한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인은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않고 ‘성령에 따라’ 싸운다. 육신과 성령은 서로 거스리는 관계이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갈5:16-17) 

로마서도 육신을 따르는 것과 성령을 따르는 것이 다르고, 다른 결과를 낳는 것을 말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5-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만을 생각한다. 육체의 욕심을, 자신의 삶의 원리로 규범으로 목적으로 삼는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게 된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인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따르는 자는 성령의 일을 생각한다. 성령의 역사와 감화를 자신의 삶의 원리로 삼고, 성령이 쓰신 말씀을 자신의 행위의 규범으로 삼는다.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삼는다. 그래서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인 것이다.  그 엄청난 차이와 결과를 명심하고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영의 생각으로 살아야 한다. 내 인생에 삶의 활력과 평안이 없다면 육신의 생각으로 산 결과라고 보면 된다. 

선한 싸움을 싸울 때에도 성령으로 싸우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육신을 따라 육신으로 싸우는 악한 싸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육신적인 방식이나 육신적인 목적으로 싸운다면 그는 육신으로 싸우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명예와 영광이나 복수, 또는 자신들의 영토와 지배력을 확장하기 위해 싸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식으로 “육체에 따라 싸우지 않는다”. 우리의 목적이 영적인 것이기에, 우리의 수단도 영적인 것이다. 영적인 싸움을 위해 영적인 수단을 사용한다. 죄들은 물론이고, 사탄과 육신과 세상과 싸울 때에도 영적으로만 이길 수 있다. 

사람을 원수로 여기고 육신에 따라 육신의 방법으로 싸워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고 문제를 더욱 키울 뿐인 것을 우리는 경험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성경의 원리이고 해결의 실마리를 잡게 된다. 원수 갚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몫이다. 하나님은 원수와의 직면을 통해서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만드신 후에는 반드시 그 죄에 대한 심판을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드시기 위해 앗수르와 바벨론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만드신 후에는 앗수르와 바벨론의 죄악을 심판하시고 멸망시키셨다. 그러한 하나님의 방법이 우리 인생의 여정 속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으라. 

2.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싸운다.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우리는 죄를 이길 수도, 세상을 이길 수도 없다. 우리의 육신을 이길 수도 없고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사탄을 이길 수도 없다. 세상도 사람도 그 속에 견고한 진들이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고 하나님의 법인 양심을 주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과 양심의 법을 어기고 죄를 지음으로 사람과 세상을 죄로 물들게 했다. 사람 속에는 이성이 왕으로 자리잡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자 하는 견고한 진이 있다. 사람의 자아와 자존심과 보복감정과 복수심을 보면 그 진이 얼마나 견고한지 알 수 있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그 고집하며 성질하며 완고함과 교만함하며 그것이 견고한 진이다. 몸에 벤 어린 시절이 견고한 진이 되어 남은 일생을 집요하게 끌고 간다. 아들은 아버지의 성품과 삶을 닮고, 딸은 어머니의 성품과 삶을 그대로 닮는다. 대를 이어서 내려가는 가족문화는 그 어떠한 능력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견고한 진이다.  

세상도 그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니까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문명과 교육의 이름 아래 세상의 철학과 지혜와 초등학문들의 견고한 진 위에 세워져 있다. 그 견고한 진으로 하나님을 대항하고 하나님의 법을 대적한다.     

세상의 철학과 초등학문을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바리새인의 누룩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바리새인은 말씀의 원리는 버리고 껍데기만 지키기 위해 말씀을 율법화한다. 사두개인은 말씀을 세상 지혜로 해석하고 합리화하고 교회를 세상화한다.   

거짓 선지자들과 그들의 미혹에 넘어가는 것은 그들의 견고한 진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진리를 싫어하고 불의를 좋아하면 하나님은 그 심판으로 미혹의 역사를 보내어 거짓 것을 믿게 하신다.  

우리가 오늘 읽은 세 절의 말씀에 ‘무너뜨린다’는 단어가 세 번이나 나온다. 무너뜨려야 할 것은, 견고한 진이요, 모든 이론이요, 모든 지식이요, 모든 생각이다. 사람의 철학과 세상의 지혜로 형성된 견고한 진이 무너뜨림을 받아야 하나님의 성전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다.    

의지하던 기왕의 견고한 진들을 무너뜨려야만 새로운 건물을 세울 수 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것이 구원이다. 새 사람을 입을려면 옛 사람의 견고한 진들을 무너뜨려야 한다. 무엇으로? 사람이 세운 것을 사람이 무너뜨릴 수 없다.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무너뜨릴 수 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역사하실 때 사람 속 견고한 진들을 무너뜨릴 수 있다. 견고한 진이 무너져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은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인 것이다.  

기독교 2천년 역사는 사람의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건물을 세우는 역사였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역사가 계속될 것이다. 교회는 오직 그 목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오순절날 임한 성령이 다시 임하고, 거듭나고 회심하는 역사가 교회 가운데 일어나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부흥이다. 사람들을 끌어다 많이 모아 놓는 것이 부흥이 아니다. 그것은 강도의 소굴이요, 장사하는 백화점일 뿐이다.  성도와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성령의 부으심을 위해,  교회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간구해 한다. 견고한 진이 패하고 새 건물이 흥하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말이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눅2:34)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견고한 진들이 무너지고,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역사가 부흥으로 일어나야 한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 다시 일으켜 세워지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지고 천국을 살고 영원한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3. 모든 이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한다.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10:4-5) 

인간의 견고한 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모든 이론이요,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이 지식이요, 모든 생각이다. 하나님 아는 것이 성경이지요, 성경을 대적하여 높아진 지식들이다. 

인간의 모든 생각이, 자기의 옳은 소견이, 모든 이론과 높아진 지식을 낳는다. 모든 이론과 지식은 다시 생각을 낳고 순환하게 된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생각들이 다 육신의 생각이요 그 생각들이 사망을 가져온다. 사망은 인간의 어둠과 혼란과 공허를 총칭하는 말이다. 우울증과 불안과 절망도 포함한다. 성령이 오시고 말씀으로 살아야 생명을 얻고 평안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육신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 속에 세상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것이 바로 무너뜨려야 하는 견고한 진인 것을 알고,  성령과 말씀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으로 갈아 입어야 한다. 

우리의 많은 고난과 연단도 견고한 진들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 주리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면서 하나님은 기어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게 하신다. 예수를 만나기 전 품고 살았던 모든 이론 모든 지식 모든 생각을 사로잡고 무너뜨려야 한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복종하게 해야 한다. 성령의 생각이 기록된 것이 바로 성경이다. 성경을 항상 묵상하면서, 우리 안에서 오늘도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따라 나도 힘을 다해 수고를 해야 견고한 진을 무너뜨릴 수 있다.  우리도 해산의 수고를 해야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룰 수 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서 가나안 땅이 사사시대 암흑의 땅으로 변했다. 우리 인생도 그 소견대로 살면 암흑의 땅으로 변하고 만다. 그 소견이 바로 무너뜨려야 할 견고한 진인 것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너뜨리자. 

몸에 밴 어린 시절의 견고한 진이 우리의 감정을 지배하고 의지를 지배한다. 오직 어떠한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의 무기를 삼아야 한다. 견고한 진을 만들고 있는 모든 생각, 모든 이론, 모든 지식을 무너뜨리고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자. 죄들과 사탄과 세상과 육신은 힘을 잃고 굴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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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말씀/증거(=참된 증언, 정명, testimony..그분의 영광의 무게 그대로를 반영..성령으로 말씀하신 Q 말씀을 믿고 묵상함으로써 마음에 간직하며 이를 이루시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 전지전능하신 Q스스로<말씀과 그 역사하심으로> 계시하신바 그분의 어떠하심따라 말씀하심 ==>언약하시는 Q ==>율법(=법...토라/가르침..좁게는 모세5경) 그안에 들어 있는 것이..계명<근간이 되는 지시, 명령>....율례(계명의 상세보충...사회적 규범)...법도 (법령과 제도...정책/절차법).....여기에 판단/심판이 더해진 것이 규례(=미쉬파트=캐논..ordinance.)...이것을 주심은 Q을 믿는 모든이들이 Q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들의 모든 것으로서 Q과 그의 나라를 극도로 온전히 누리는 것이 Q의 깊은 갈망임을 드러냄 : 바로 그 말씀 안에 <길, 진리, 생명이신>하나님의 어떠하심이 반영되고 있음에 주의하라... 그분을 앙망하는 산 믿음을 발휘하여 그분의 이름을 전심으로 불러 추구하며 그 말씀을 묵상할 때 그 말씀 열어보이사 깨닫게 하시며 그 영광 맛보아 누리게 하시며 친히 도우사 그것을 주도적으로 믿는 이 안에 이루어 가시는 분, ...그분을 신뢰하며 의지하며 그 말씀따라 행할 때 그분의 어떠하심과 갈망 알고 그분의 뜻따라 그분의 영광 그대로를 가감없이 온전히 드러내며 전파하고 공급하는 합당한 헌신의 삶.... 지고지선의 삶을 살 수 있음...말씀이신 Q, 말씀하시는 Q, 성령안에서 그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전존재가 적셔지고 점유되고 채워 충만케 되고 변화되고 그 안에 있는 영과 생명으로 새겨지고 조성되어 믿는 이의 삶 전체가 그 말씀에 의해 주도되고 배어나며 그 향내를 풍기는 삶 사는 것이 Q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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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생명의 부활로 거듭남안에 있는 자의 Q 말씀 추구의 당연함]......성령안에서 하나님의 말씀 묵상함으로 그 안의 영과 생명의 진수를 먹고 마시며 하나님을 매일의 생명양식과 음료로 누림으로써 그분의 어떠하심으로 조성되어 가며  하나님께 합당한 찬양드림이 마땅함..... 성령인도따라 주와 함께 동헹하는 보배로운 산 믿음 발휘하며 기꺼이 하나님을 얻기 위해 대가를 지불함의 연단중에도 온전한 구원의 소망으로 인해 오히려 즐거워 하는 자

시편 119편은 독일어역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찬양과 사랑 및 그 말씀의 능력과 활용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황금 입문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러한 본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제로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잘 표출되어 있는 시이며 시편 분류상 지혜시에 속한다.

그런데 본시의 저자가 누군지, 그리고 언제 지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물론 본시의 저자와 저작 시기에 대하여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혹자는 본시 가운데서 발견되는 탁월한 문체와 말씀에 대한 깊은 신뢰가 담긴 내용 등으로 보아 시편의 대표적 저자인 다윗이 지은 것으로 본다. 그리고 본시 가운데 다윗의 인생 가운데 처한 위기 상황을 암시하는 듯한 내용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19, 23, 46, 141, 161 절) 다윗이 사울에게 쫓김을 받을 때나 압살롬의 반역시 지은 것으로 그 저작 시기나 배경을 구체화시키기도 한다. 

또 다른 이들은 본시 전반에 흐르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시인의 애절한 열정을 근거로 하여 포로기 이후 시대에 활동했으며 율법에 능통하였던 학사 에스라의 저작으로 보기도 하고 혹은 경건한 신앙 회복 운동이 일어났던 마카비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기까지 한다. 그러나 본시에는 저자나 저작 시기와 관련된 결정적 내용이 제시되지 않으므로 이러한 모든 견해는 추정에 불과할 뿐이다. 

한편 이러한 본시는 분량이나 중요성, 그리고 그 구성 등과 관련해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지닌다. 

1. 먼저 본시는 그 길이가 성경에서 가장 길 뿐만 아니라 신구약 성경 전체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다. 이러한 본시는 이 땅에서의 인생의 축복과 영원한 생명에의 소망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을 둔 것임을 다중적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집대성인 성경 전체의 축약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본시가 신구약 성경 전체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다는 것은 성경의 원저자이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결과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 다음으로 본시는 비록 지혜시로 분류되고는 있지만 시편에서 사용하고 있는 거의 모든 문학적 형식 곧 찬양, 애가, 기도 및 간구, 지혜, 호소 등의 요소가 나타나는 종합시라는 점에서와 인간이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희비애락(喜悲哀樂)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3. 또한 형식적인 면에서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구성된 답관체시라는 점에서도 독특하다. 답관체(路冠體, acrostic)란 문자적으로 ‘머리를 밟아가는 체’라는 뜻으로, 한 시의 행(行)이나 연(聯)의 첫 머리에 알파벳 순서로 된 단어가 규칙적으로 등장하도록 시를 지어 결국 시의 각 행이나 연의 첫 머리가 모든 알파벳을 순서대로 망라하게 되는 정형시(定型詩)의 한 형식을 말한다. 이러한 답관체시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알파벳을 규칙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시를 읽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 아울러 시어들이 정형에 맞도록 절제되고 조화됨으로써 균제미도 수반한 시문학 형식이다. 특히 이러한 답관체시는 알파벳이 연속하여 나오는 것과 관련해 자연적으로 규칙적인 운율, 특히 두운이 형성되는데 이는 독자들에게 시를 쉽게 외우고 또 노래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시편에는 이러한 답관체시가 본시를 포함하여 모두 아홉 편 등장한다(9, 10, 25, 34, 37, 111, 112, 145편). 이들 아홉 편의 답관체 시들 가운데 본시를 제외한 다른 시들은 알파뱃 전체를 망라하지 않거나 일부가 중복되는 불완전한 답관체시이다. 이에 반하여 본시는 매우 정교한 짜임새를 보여주는 완벽한 답관체시이다. 

즉 본시는 총 176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덟 절을 한 연(聯)으로 하여 팔진법(Octonary)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본시는 전체 22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연으로부터 마지막 22연까지는 히브리어 알파뱃의 순서를 따르고 있고, 한 연에 속하는 여덟 절 곧 한 연의 각 행의 초성(初聲)은 모두 해당 연의 알파벳을 취하고 있다. 이처럼 짜임새 있는 본시의 구성은 그야말로 답관체시의 전형이 무엇이며 그 극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본시의 구성과 내용에 대해 혹자는 “오랫동안 조용한 시간에 한뜸한뜸 수를 놓듯이, 마치 숙련된 장인이 여가를 즐기면서 만든 작품과 같다”라고 평하였는데(C.S. Lewis) 이는 본시가 얼마나 탁월하고도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풍성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4. 이외에도 119편은 전체 176절 가운데 84.90.122.132절 단 네 절을 제외한 나머지의 모든 절에서 ‘율법’과 관련된 단어가 사용된다는 특징을 지니는데 이는 전체의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단일 주제로 관통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본시의 핵심 주제인 하나님의 말씀을 지칭하는 표현을 시인은 여덟 개의 용어를 벌어 사용한다. '법’, ‘법도’, '율례’, ‘계명’, ‘말씀(따바르)’, ‘규례’, ‘말씀(이므라)', ‘증거’가 그것이다. 혹자들은 이 단어들의 의미를 예리하게 구분해 내고 각 단어 사용의 패턴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인이 이들 각 용어를 구분해서 썼음을 보여주는 특별한 패턴은 발견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는 저자가 히브리 알파벳을 모두 사용하는 답관체 형식에 덧붙여서 히브리어 가운데 ‘말씀’을 가리키는 모든 단어를 망라하여 사용함으로써 본시의 주제인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성을 한층 더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특별히 이렇게 여덟 개의 용어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본시에서 단지 개념적인 것이나 특정한 규칙, 규정 등의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본시에서는 역동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순종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바른 관계와 관련되어 이러한 내용이 제시된다(40:6 ; 50:23 ; 51:16,17 ; 141:2). 즉 본시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후대의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당시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인간을 속박하고 옭아매는 규정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가운데 깊이 뿌리를 내린 것으로 사람의 삶이나 신앙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사랑, 신뢰, 의지함, 순종함과 같은 인격적 관계와 관련된 것으로 소개되고 강조되는 것이다. 

5. 아울러 본시는 그 기본 내용 구조면에서도 독특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즉 119편은 하나님의 계시, 곧 하나님의 말씀과 법을 향한 찬탄과 말씀에 대한 사랑과 순복의 열정(Enthusiasm) 토로 및 말씀에 의지한 구원의 간구(Petition)를 히브리어 알파벳의 순서에 따라 22중으로 열거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를 히브리어 알파벳 숫자대로 22중으로 열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하고도 전적인 순복의 열정을 나타낸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119편은 매연마다 하나님의 말씀과 법을 향한 찬탄과 말씀에 대한 사랑과 순복의 열정 토로 및 말씀에 의지한 구원의 간구를 반복 열거하고 있지만 그 강조의 주안점에 따라 다시 여덟 문단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16절 : 복과 행실의 기준인 말씀을 향한 사모와 순복의 열정 

17-48절 : 말씀을 사모하는 자가 말씀에 의지하여 올리는 간구들 

49-72절 : 나그네 길의 고난 중에도 변치 않는 말씀 사랑의 열정 

73-96절 : 말씀을 신뢰하는 자가 올리는 말씀의 실현으로서의 구원 간구 

97-120절 : 명철과 희락의 원천이요 심판의 기준인 말씀 사랑의 열정 

121-136절 : 말씀을 지키는 자로서 올리는 구원과 훈육의 간구 

137-160절 : 상황을 초극하는 말씀 사모의 열정 토로와 말씀에 의지한 소성의 간구 

161-176절 : 말씀을 경애하는 자로서의 열정과 확신 및 말씀을 통한 구원과 인도의 간구 

이상에서 보듯이 본시는 말씀에 대한 열정과 구원의 간구가 반복 순환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서도 1-136절까지의 여섯 문단에서는 말씀에 대한 열정과 구원의 간구가 한 문단 씩 교차적으로 삼중 반복 순환되는 특정을 보이고 있으며, 137-176절의 두 문단에서는 말씀에 대한 열정과 구원의 간구가 각 문단 안에서 반복 순환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본시는 그 형식과 구조, 그리고 내용적인 측면에서 볼 때 모든 시편 중에서 가장 탁월하여 히브리 시문학의 백미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을 향한 경건하고 열심 있는 갈망과 영혼의 내면적 울림이 상승 작용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에 적극 순종하고자하는 헌신의 마음을 갖게 한다. 결국 본시는 언약 백성에게 참다운 인생의 의미와 가치가 오직 하나님의 계시의 총체인 율법에 순종할 때 실현된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모든 구약 지혜 문학과 일맥 상통한다. 특히 본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단일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관점에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잠언과 유사한 형태의 지혜 문학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시 역시 여호와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요 역사의 주권자이신 바 그분과 그 말씀에 대한 바른 자세 여부가 선악의 기준이라는 도덕론 또는 인식론은 물론 여호와께 대한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인 인간의 자세가 전인격의 영복과 영벌을 역사적으로 또는 존재론적으로 결정하는 절대 유일의 기준이라는 사상을 기저에 깔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는 119편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 나아가 성경은 하나님 계시의 총체이자 인생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보고라는 사실과 모든 세대 모든 성도들의 인생 행로에 있어서 걸어가는 발의 등불이요 그 길을 비쳐주는 절대 유일의 빛임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0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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