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8.10.22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성경적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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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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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경외함=야레,Yareh] 전지전능의, 지존, 영존, 불변, 무한하신, 거룩하신, 다함없는 사랑(선하심-인자하심-진실하심)의 창조주하나님을 참되게 체득하여 알며, 피조물로서 그분의 담지자된 자신은 그분 없이 스스로는 전적인 무요, 무가치함을 인정하고, 생생한 그분의 임재의식안에 살며, 거룩하신 그분을 절대적으로 믿어 의지하고 합당한 존경과 사랑을 드리며 순종하며 거리낌없는 친밀한 교제안에서 하나되어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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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10 : 12-13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한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구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시편 25:12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시편 25:14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시편 31:19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시편 33:18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시편 34:7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시편34 : 9-14

*9.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11.너희 자녀들아 와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12.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13.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14.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시편 85:9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

시편 103: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시편 103: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시편 103:17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그의 기적을 사람이 기억하게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도다

시편 112:1-2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시편 115:13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시편 128:1-4 

*1.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2.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안방에 있는 *3.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4.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시편 145:19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잠언 2:1-5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잠언 10:27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수명은 짧아지느니라

잠언 14:26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잠언 14: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잠언 15:3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잠언 16:6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잠언 19:2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느니라

잠언 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잠언 23:17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전도서 8:12-13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전도서 12:13-14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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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있어 지고지선의 영복이란 : 만복근원 창조주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바 곧 구주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것,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사랑과 순종으로 하나됨, 역사속에서 이 땅의 모든민족을 대상으로 JC의 십자가복음전파를 통해 [왕국과 구속프로그램]을 진행하심으로써 선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심정-뜻 알고 전존재 기울여 그분의 통로된 둘로스로서 참여-헌신-동행, 하나님나라와 그분의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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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6:24-26}Aaron’s Benediction((아론의 축복))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Then the Lord spoke to Moses, saying,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Speak to Aaron and his sons, saying, ‘This is the way you shall bless the Israelites. Say to them: 

*24 여호와는 네게 복(바라크)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The Lord bless you, and keep you [protect you, sustain you, and guard you];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The Lord make His face shine upon you [with favor], And be gracious to you [surrounding you with lovingkindness];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The Lord lift up His countenance (face) upon you [with divine approval], And give you peace [a tranquil heart and life].’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바라크)을 주리라 So Aaron and his sons shall put My name upon the children of Israel, and I will bless them.”


[바라크]측면...분복이란...수고하고 누리는 복... 육신의 수고가 있는가 하면(창 31:42, 전 1:3), 사랑의 수고(살전 1:3), 복음을 위한 수고(고전 15:37-38, 살후 3:8, 갈 5:6, 고후 11:33)도 있다.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동일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재물욕(=우상숭배)의 육신에 집착하여 세상에서 무엇인가 얻어내려고 스스로 분투노력함의 세상 수고가 아닌, 하나님임재의식 아래에서 (무엇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라)하신대로 마음-뜻-정성 기울여 충성 다하는 것...곧  하나님영광의 통로로서 그분 뜻 이룸을 위한 사랑의 수고, 복음을 위한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일에 수고하는 것을 태만히 해서는 안됨(렘 48:10). 하나님의 일에 수고하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 되지 않는다(고전 15:58). 성도의 분복은 정당한 수고로 받은 것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생활에 사용하며 자족의 행복을 누리는 것(빌 4:11)..... 많은 재물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재물이 있어도 화목한 것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잠 15:16-17, 17:1).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됨(딤전 6:6-8). 많은 재물은 도리어 사람을 찌르고(딤전 6:9-10), 그것을 의지하는 자는 망하게 되지만(시 49:6-10, 잠 11:28), 자족하고 하나님의 것에 감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재물과 부요, 근심이 없는 분복의 축복을 주신다(전 5:19, 10:22).........자기가 누리는 인생의 낙이 ‘수고의 대가’. 결코 인생의 행복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앙 속에서 은혜와 언약을 순종하고 지키는 가운데 복을 누린다는 것... 이 수고는 하나님이 인생에게 주신 노동의 축복(창 3:16-19). 일하면서 누리는 즐거움, 일 자체가 행복의 수단이 되는 것(행 6:37-38, 7:1, 9:10, 28, 대하 8:1-2).........세상에서 부귀와 영화, 존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낙을 누리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누리는 것은 ‘폐단’(전 6:1-2, 참고-사 22:13, 눅 12:19), 낙을 누리는 비결은 수고 속에서 누리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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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크, 하나님의 (주시는)복 1  시편 115:11-15

구약성경에는 복을 의미하는 두 가지의 단어가 나옵니다.

첫째는 ‘바라크(Barak)’입니다. 

창세기에 1:27-28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고 할 때 여기 나오는 복(福)자가 히브리어 원어로 바라크라는 단어입니다. 창세기 12:2에서도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여기서 나오는 복(福)이란 단어도 바라크라는 단어입니다. ((생육-번성-충만-정복-다스림/섬김 ....형통, 성공, 번영, 풍요, 창대, 장수))

둘째는 ‘에쉐르’ 입니다. 복이라는 두번째 단어는 에쉐르(Esher)입니다. ((Ezer은 연합, Eshel은 영생이란 뜻, 30미터 이상 뿌리내리는 바 영생(에셀)나무..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 심었고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에쉐르가 앞서고 그안에서 바라크가 (예정하신 하나님의 때에 주권적으로 주시겠지만) 하나님의 은택으로서 뒤따라 옵니다. 즉 에쉐르 없이는 바라크는 참 바라크가 아니며 일종의 [우상숭배요 기복]이 될 수 있음!!

시편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복 있는 사람”에서 복(福)이란 단어가 ‘에쉐르’ 입니다. 

히브리식 사고는 철저히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 시작과 끝이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헬라식 사고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사람을 더 많이 의식하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도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라 사람의 관점으로 성경을 들여다 봅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4:15절 이하에 한 주인이 큰 잔치를 베풀어서 사람들을 초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은 밭을 사서 밭을 돌봐야 되기 때문에 잔치에 참석 못한다고 합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소 10 마리를 사서 시험하러 가봐야 하기 때문에 잔치에 못 간다고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장가들어서 못 간다고 합니다. 그 말은 들은 주인은 크게 노하여 이 사람들은 내 잔치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히브리적 관점으로 생각하면,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먼저 찾고 그 앞에 나아가 예배드려야 합니다. 반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헬라식 관점을 가지면 사람이 중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마음보다 내 상황, 내 조건, 내 문제에 더 집중하며 눈에 보여지는 축복, 성공과 번영, 풍요, 창대에 집중되어서 이런 축복만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속신앙처럼 하나님과 나의 더 깊고 세밀한 관계에는 초점을 두지 않고 사람이 중심이 되어서 눈에 보이는 풍요, 번영, 창대를 구한다는 것입니다. 신약에 하나님의 일을 제일 감당 잘한 사람은 아마도 “사도바울” 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삶은 더 많은 풍요, 번영, 창대가 있어야 헐 곳 같은데...오히려 사도바울의 삶을 보면 정말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감옥에 들어가고 돌에 맞고 여러 가지 위협을 당하고 헐벗음, 굶주림 등등 이 땅에서 느낄 수 있는 고통 이란 고통은 다 당했습니다. 또한 사도바울은 많은 사람들의 질병을 고치고 기적과 이사를 나타내는데 하나님은 사도바울에게 질병을 줍니다. 사도바울이 그 질병을 없애달라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안 고쳐 줍니다.(마치 욥처럼...그래도 욥은 이 땅에서 회복된 바라크를 누렸지요....따라서, 바라크는 언제 어떻게 무엇이 자녀들에게 지고지선인지 완전하게 아시고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때에 베풀어질 것으로 보는게 합당할듯....사도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질 바라크, 그것을 주께서 주실, 예비된 의의 면류관/상급으로서 기대했습니다.. )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핵심적인 복이 무엇입니까? 그 해답은 시편 1:1-2절에 나와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쫒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와 같이 성경은 복을 상태가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고,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해야 할 것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 끊어야 할 것을 끊고, 가지 말아야 곳을 가지 않는 것, 그래서 내 삶에 떨어져 나가야 할 것이 떨어져 나가고 내 안에 채워져야 할 것이 채워지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이 복이란 단어는 히브리어 원어로 “에쉐르”란 단어입니다. 그 뜻은 “정로(正路)”로서 정로란 뜻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곧은 직선의 길이 놓여져 있는데 그 길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핵심적인 복입니다

▶ 예배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얻기 전에는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만을 철저히 섬겼습니다. 그런데 100세에 아들 이삭이 생기니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이삭이 끼어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십니다. 장차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질 모리아 산에 가서 하나님이 주신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이삭을 하나님께 드립니다.((바로 그 때, Q은 당신과 Abr사이에서는 이삭을 사실상 살았으나 죽은 자로 여기셨으며, Q은 Abr의 바로 그 실행을 Q을 합당하게 높이며 최우선시하여 Q과 동행함의 에쉐르/정로로 여기셨습니다!!)) 

▶ 성경적 예배는 내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구하고 예배를 통하여 받은 것은 이 땅을 강화 시키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끼어 있는 것들을 예배를 통하여 제거함으로써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이 곧게 뻗어 있는 길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내가 깊이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에쉐르‘란 단어에 또 다른 뜻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행복한자,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거리가 가깝다는 뜻입니다. 바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친밀한 교제와 앎(=야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내가 언제 어디에 있더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과 마음을 나눌 수 있고, 함께 하는 하나님을 호흡함을 통하여 어떤 환경, 상황, 조건, 문제 속에서도 하나님을 누림으로 내 안에 샬롬의 평강이 가득히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가정에 피바람이 일어나서 아들이 아들을 죽이고 아들이 자신의 아내를 범하고 아비는 다윗은 살기 위해서 버선발로 도망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시편 23:1-2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풀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만난 상황, 조건, 문제에 지배당하고 이런 것들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끼어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 호흡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핵심적인 복은 내가 하나님과 온전히 함께 함을 통하여 받은 복을 공동체로 흘러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됩니다. 즉 공동체적인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복으로 말미암아 내 주변 사람들이 살아나고 내 주변 사람들이 이 축복을 흘려 받아서 사람들이 세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신다”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막론하고 다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복이 히브리 원어로 바라크란 단어로 바라크의 복입니다. 이 본문말씀의 [완전한]복은 2가지 복(福) 즉, 핵심적인 복 에쉐르와 그로 인해 따라오는 부수적인 복 바라크 둘 다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靈)적인 복과 환경(環境)적인 복, 내 필요가 채워지고, 물질적으로, 환경적으로 풍요를 가져다주는 에쉐르의 복과 조금 더 환경적인 것에 무게를 두고 있는 바라크의 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복이 목적이 아니라 바라크 복을 주시는 만복근원되신 하나님을 삶 가운데서 경험하며 친밀한 교제로 동행해야 합니다. 이러한 에쉐르 + 바라크의 복을 삶 가운데서 받되 풍성히 받아 누리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다음 주에는 이 바라크의 복이 임하는 원리에 대해서 여러분들과 은혜 나누려고 합니다. 

==바라크, 하나님의 복 2  시편 115:11-15

오늘은 바라크의 하나님의 복 두번째 시간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핵심적인 복과 부수적인 복으로 나뉘어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Ⅰ. 성경에서 말하는 축복 - 에쉐르와 바라크 

1) 에쉐르의 복: 핵심적인 복은 시편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여기서 말씀하는 복이라는 단어가 ‘에쉐르’이고 이 뜻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정로(正路)의 길, 그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 있지 않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2) 바라크의 복: 복을 이야기 할 때 우리가 알아야 할 두번째 단어가 ‘바라크’란 단어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제일 먼저 하신 일은 복을 주셨습니다(창1:27-28). 여기서 복이란 단어가 바라크이며 이 복은 성경에서 말하는 2가지의 복 핵심적인 복, 부수적인 복 둘 다를 포함하고 있으며 좀 더 환경적인 복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Ⅱ. 바라크의 복을 받는 삶의 원리 

☞그러면 오늘은 이 바라크의 복이 어떻게 내 삶에 현실화 될 수 있는지, 이 바라크의 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그 원리에 대해서 이번 주에 하나, 다음 주에 두개를 추적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바라크의 복을 이미 예비하시고 그 바라크의 복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그 바라크의 복이 예비 되어 있을지라도 모든 사람이 (이 땅에서, 반드시) 받아 누리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늘 본문 시편 115:11-13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바라크의 복은 원래는 이스라엘 백성과 아론의 집에 주신다고 하셨고, 다시 하나님께서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누구에게든지 다 이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원리 : 하나님을 경외하라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바라크의 복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과 아론의 자손이 아니더라도 그가 만일 여호와를 경외한다면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바라크의 준비된 복을 그에게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바라크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면, 이 경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뜻하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경외(敬畏)라는 단어는 히브리 원어로 “야래”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크게 3가지, 첫번째는 “두려워하다”, 두번째는 “악에서 떠나다”, 세 번째는 “말씀을 내 삶에 남기다” 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을 ‘경외하다’는 ‘야래’라는 단어의 추적 첫번째 시간으로 ‘두려워하다’라는 뜻 속에 담겨진 뜻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경외하다의 ‘야래’의 뜻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다’라는 것인데, 그것은 막연히 두려워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야래란 단어를 조금 쉽게 풀이하면 “지금 여기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 하는 사람은 바로 “지금 여기에” 하나님께서 현재 임재하셨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느끼고 실감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도행전 2:43을 통해 그 “야래”의 의미를 살펴보면,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사람들이 두려워했다라고 보도합니다. 그 이유가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기적과 표적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즉 사도들이 설교 한번 하니 수 천명의 사람들이 통곡하며 회개하고 인생의 방향을 예수님을 향하여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나고, 또 사도들이 기도하니 앉은뱅이가 일어나가 병든 사람들이 고침 받고 귀신들린 사람들에게서 귀신이 쫓겨 나가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런 기적과 이사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차원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지금 여호와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지 않은 한 저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 일을 보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신다는 임재 의식”을 가졌기 때문에 두렵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야래입니다. =완전히 감찰하여 [모든 의도와 동기, 행위를]아시는 바, 24시간 하나님 임재 연습

▶ 그러면,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지금 여기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신다는 강력한 임재 의식 때문에 오늘 내가 무엇인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 이 생각-말-행동의 동기-의도를 살펴 아시며 듣고 계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내가 어떤 일을 하고 행동을 할 때, 내가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움직일 때, 하나님이 내가 말하고 움직이는 동선을 따라 그분이 지금 여기에 임재하여 나와 함께 하며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라는 하나님의 임재를 강력하게 의식해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생기는 그 두려움을 야래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특징은 시, 공간을 초월해서 바로 지금 이 시간, 지금 여기에 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생생하게 (실지로) 느끼고 의식하며 Q께 합당하게 오늘을 살아가는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야레]하는 사람입니다.

▶ 사도행전 2:44-45에는 “믿는“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유무통상(有無通常)라고 말씀합니다. 즉 자기 자신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구절을 보면 사도행전 4: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예배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으세요? 지금 사람들이 물건을 나누고, 자기 소유, 재산을 팔아서 사람들을 돕고, 매일 교회 모이기에 힘쓰고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내가 정말 하나님의 임재를 맛본 사람이라면 이제는 교회와 세상 삶이 분리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는 거룩한 척,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 하나님을 아는 척, 그리고 세상 나가면 세상 사람들과 섞여서 구분 안가는 삶이 아니라 이제는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세상에 나가서도 내가 언제 어디에 있던지 내 삶에 모든 터전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과 은혜를 나누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또 성전 안에서 머물러 있던 하나님의 임재가 지금 여기에가 내 삶에 모든 현장에서 지금 여기에로 나타날 때 그것이 바로 야래,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내 삶에 모든 터전에서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실감나게 느끼지 못하여 하나님을 경외 두려워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나 중심의 예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배의 목적이 하나님이여야 하는데, 예배의 목적이 나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예배의 목적이긴 한데 그것은 두번째고 첫번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지만 그 핵심 목적이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나, 나를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하나님의 온전한 임재 가운데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제대로 맛보지 못하니 그것이 내 삶 가운데로 이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야레 경외하는 삶이 없어지게 되고 또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바라크의 복은 나에게 현실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장은 나의 지금 급한 문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해결 될지는 모르지만 더 큰 복인 하나님의 바라크의 복을 받아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의 목적이 오직 하나님이 되는 여러분들 되기 바랍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33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이 나의 예배의 목적, 내 인생의 목적이 되면 하나님께서 바라크의 복으로 더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성령님이 베드로에게 환상 중에 이방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에게 가라고 말씀합니다. 고넬료 집에 가서 지금 말씀을 전해야 할 베드로는 어부출신의 무식한 사람, 가난한 사람이고, 말씀을 들어야 할 고넬료는 로마의 백부장, 정복민의 상류층 사람입니다. 이 당시 어마어마한 사람으로 고넬료와 베드로의 신분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 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0:24-25에 고넬료는 그의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과 함께 베드로를 기다리다 베드로가 오자 고넬료는그의 발 앞에 엎드려 절했다고 보도합니다. 여기서 ‘절하다’는 헬라어 원어 “프로섹쿠네센”()는 그 뜻이 “발 앞에 엎드려 발에 입 맞춤을 하다”입니다. 따라서 그냥 엎드려서 절한 것이 아니라 정복민의 백부장이 피정복민인 베드로의 발에 엎드려 입을 맞추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0: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 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여기서 “하나님 앞에 있다”는 헬라어 원어 “안오피온 투데오”()은 하나님의 얼굴을 뜻합니다. 그리고 “앞에 있나이다”라는 헬라어 원어가 “파래스맨”() 이란 단어로 “파루시아”란 단어에서 파생 된 재림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로마 백부장인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 있지만 하나님 얼굴 앞에 있는 것으로 고백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임재앞에 서 있는 사람이 야래의 사람,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 야래의 사람에게 바라크의 복으로 더하신다는 말씀합니다. 그래서 고넬료 가정에 이방인으로 최초로 성령세례가 임하는 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바라크의 복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하고 계신다는 강력한 임재의식을 가지고 성전 안에서만 그분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가정 속에서, 일터에서, 내 삶 모든 곳에서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는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가지고 신앙생활 할 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내리신 바라크의 복을 내리신 줄 믿습니다. 모든 성도님들께 지금 여기에 임재하신다는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바라크의 복을 받아 누리시기 소망합니다. 

===바라크 하나님의 복 3     시편 115:11-15 

오늘은 “바라크, 하나님의 복” 세번째 시간이자, 바라크의 복 마지막 시간입니다. 2주에 걸쳐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핵심적인 복과 부수적인 복을 말씀 드렸습니다.  핵심적인 복은 에세르란 단어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정로(正路)의 길, 곧은 길이 있고 그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 있지 않아서 내가 어떤 환경, 상황, 문제, 조건 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호흡함을 통하여 샬롬의 평안이 가득차 있고 하늘의 의와 희락과 화평을 누리는 것 그래서 이 땅에 무엇도 나를 묶고 메지 못하는 것을 핵심적인 복(=에쉐르)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부수적인 복은 우리 삶과 환경 가운데 내 인생의 필요와 물질이 채워지고 이 땅의 풍요와 번성과 창대한의 복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바라크의 복은 성경에서 말하는 핵심적인 복, 부수적인 복이 다 있지만 이 땅의 풍요, 번성, 창대 부수적인 복에 더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이 바라크의 복이 내 삶에 현실화 되는 원리 한 가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이 바라크의 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경외 “야래”라는 뜻은 ‘두려워하다’입니다. 이 두려움은 “지금 여기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감찰/임재하고 계신다는 강력한 임재의식으로 말미암아 느끼는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내가 교회 안에서 느끼는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 삶 가운데에서도 동일한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가지고 살아 갈 때 바라크의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 그러면 오늘은 이 임하는 2번째, 3번째 원리를 추적하며 은혜 나누기를 원합니다. ‘경외’, ‘야래’라는 단어에는 “두려워하다”라는 뜻 외에도 “악에서 떠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II. 바라크의 복 두 번째 원리 “악에서 떠나다” 입니다

바라크의  복 두 번째 원리는 “악에서 떠나다”라는 의미입니다. 『잠언 3:7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잠언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잠언 16:6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여기서 “여호와를 경외하다” 라는 단어가 “야래”이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고, 악에서 떠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악(惡)이란 단어는 히브리 원어로 “기준을 상실했다”, “기준을 잃었다”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악은 기준이 없다”는 뜻입니다.(=자행자제...삶의 모든 기준이 되는 Q말씀의 핵심은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을 호흡함=영원한 참생명 은혜 JC와 동행함, 곧 사랑과 화평)

☞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선(善)과 악(惡)의 그들의 삶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은 선민(選民)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삶의 기준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입니다. 우리는 보통 악인이라고 하면 사람에게 나쁜 짓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성경에서 말하는 악인은 어떤 일을 할 때에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 생각, 자기 뜻, 자기 경험, 또 내 상황, 내 조건” 등이 되거나 혹은 아예 기준이 없이 여기 저기에 휩쓸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오늘 어떠한 환경, 상황, 문제, 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절대))기준으로 삼아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야래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1) 느헤미아 7:4 “그 성읍은 광대하고 그 주민은 적으며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하였습니라” 이 말씀은 예루살렘 당시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는데, 예루살렘 성읍은 굉장히 크고 그 주민은 적다라고 합니다. 느헤미아가 예루살렘성벽을 다시 재건하려고 했던 시점은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진지 이미 140년이 지났고 바벨론의 포로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온 지 90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로 귀환후도 예루살렘에서 살기를 꺼려했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다른 나라에서 이스라엘을 쳐들어 와서 공격하면 제일 먼저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치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리고 당시 예루살렘이 완전 폐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벽재건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아는 사람들이 살기를 꺼려하는 이곳에 예루살렘 성벽을 매우 크게 만듭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 성읍 거리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거기에서 뛰놀리라”(슥 8:5)을 받은 스가랴 선지자가 예루살렘에 사람들이 가득히 모이는 엄청난 부흥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때 지금 상황을 보고 결정하지 않고 스가랴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 삼았습니다. 이와 같이 느헤미아가 현재 상황, 형편, 조건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삼아 나아갈 때, 하나님이 그에게 바라크의 복을 주시며 이스라엘 회복의 부흥의 통로로 사용하셨습니다.

 (2) 느헤미아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보면서 또 중요한 한 가지를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아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때 방해하는 세력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도비야와 산발랏입니다. 이스라엘을 무너뜨려 놨는데 다시 이스라엘이 세워져서 힘을 갖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몇번이고 느헤미아를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합니다. 느헤미아 6장에 보면 스마야 선지자가 “지금 도비야와 산발랏이 너를 죽이러 온다, 그러니 성소에 있는 외소(外所)라는 곳에 숨어라, 이곳은 이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아는 죽어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합니다(느 6:11). 그 이유는 민수기 18장 말씀을 근거로 “외소에는 들어가는 것은 제사장만 들어가는 것으로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 생명이 위급해고 절박해도 나는 내가 만난 상황, 형편, 처지, 문제를 기준 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 야래의 사람,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내 인생에 생명의 위급하고 절박하고 급박한 상황이 올지라도 그 위기 속에서도 내 환경과 상황과 조건과 문제, 처지를 기준삼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하여 결단하는 사람입니다. 느헤미아가 그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 삼을 때 하나님께서 느헤미아의 생명 뿐 만니라 성벽 재건을 52일 만에 성공적으로 할 수 있도록 그의 삶에 바라크의 축복을 더해 주신 것입니다. 

III.  3번째 하나님의 바라크 복이 임하는 원리는 “말씀을 ((순종함으로써))내 삶에 남기는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은 창세기 22:12에 “여호와의 사자가 이르시되 이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드릴 것을 명령하셨을 때, 100세에 얻은 독자 아들 이삭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모리아 산에서 드릴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향하여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노라”라고 말씀 하십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경외가 “야래”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무엇을 보시고 너는 나를 경외한다고 말씀 하셨을까요? 아브라함은 도무지 이해되지도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 그 말씀을 붙잡고 순종함으로 모리아산에 가서 그 아들 이삭을 주님 앞에 드리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삶의 걸음과 발자국에 남는 것을 보고 Q은 "이제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참되게)알았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야래의 삶, 경외의 삶입니다. 

 (2) 요나는 요나서 1:9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하고” 지금 요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하늘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으나 요나는 지금 다시스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요나는 결국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삶속에서 발자국, 발자국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순종함으로써]남기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향하여 “너는 나를 경하는 야래의 사람이다” 말씀하시며 바라크의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남겨지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져서 나를 부인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 그러면, 과연 누가 야래의 사람입니까? 누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까? 바로 매일 매일 십자가에서 죽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영의 말씀과 연합하고, 그 말씀을 남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제사장들을 향하여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헬라어 원어로 “히포크리모마이”란 단어로 그 뜻이 위선자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히포크리모마이라는 단어는 가면을 쓰던 연극배우를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당시 헬라 사람들은 책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고전이나 좋은 말들 유명한 말들을 극장에 가서 극장의 배우들이 멋진 대사를 할 때 그때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헬라 사람들이 가장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연극배우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연극 배우란 단어를 위선자라는 단어로 바꿔 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히포크리모마이를 누구를 향하여 사용하십니까? 당시, 대제사장, 제사장, 바리세인들에게, 지금으로 이야기하자면 교회 중직자들입니다. 너희가 무대에서는 멋진 대사를 읊어대고 선포할지라도 연극배우들이 내려오면 무대에서 말하고 보여준 삶대로 살지 않는 것처럼 ‘히포크리모마이’ 너희도 똑같이 그렇게 위선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내 삶의 현장에 발자국, 발자국 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남기지 못하면 “히포크리모마이” 위선자라라는 것입니다. 이 위선자의 삶이 점점 줄어들고 좁혀져서 너의 삶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연합을 이루고 통합을 이루어 그 말씀이 남게 된다면 너는 나를 야래 경외하는 자이고 너의 삶에 바라크의 축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내 자신을, 나 자신의 상태를 말씀으로 바로 드려다 봐야 변화와 성장과 성숙이 있습니다. 

<결론>  야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매 순간 순간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신다는 강력한 임재 의식을 가지고 두려워함으로 매 시간, 매 분, 매 초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들을 돌아보며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야래는 내 삶에 악을 떠나 내 삶에 나는 매일 매일 십자가에서 죽어짐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연합을 이루며 발걸음 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남길 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너는 나를 야래, 경외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며 그 발걸음, 발걸음에 하나님의 바라크의 축복을 남겨 주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님들의 이 땅에 남은 삶 가운데 풍성한 하나님의 바라크의 축복을 풍성히 받아 누리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복 4 에쉐르, 하나님의 복 1,     시편 1:1-3

  오늘은 복 씨리즈 4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3주에 걸쳐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복이 무엇인지 살펴 보았습니다. 

  오늘은  복 씨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우리의 인생의 승패, 흥망성쇠를 이루게 하는 핵심적인 복에 대해서 2주에 걸쳐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해 먼저 성경에서 말씀하는 핵심적인 복에 대해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시편 1:1-2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쫒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여기서 복(福)자라 “에쉐르’란 단어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가장 핵심적인 축복을 의미합니다. 그 뜻은 “정로(正路)”란 뜻으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하나도 없는 “곧게 뻗은 길”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하나님보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들을 주신 더 사랑해서 하나님이 주신 선물에 마음을 다 빼앗기게 되어  하나님과 나 사이를 막아 버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비록 지금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자리에 나와 있을 지라도 하나님을 제대로 호흡하지 못하게 되어 내 안에 하늘에 평강과 기쁨과 감사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막혀서 제대로 나에게 흘러 들어오지 못하게 됩니다. 

 ☞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요한삼서 1: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는 존재, 바로 “안에서 밖으로” 내 안에 가득 채워진 예수의 생명과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먼저 내 영혼이 잘되어지고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내 삶에 흘러 나와 내 삶을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의 자리로 만들게 되는 존재입니다.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의 조상으로 불렀을 때 창세기 12:1 -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시며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 하나님이 지신한 땅,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갑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축복의 땅이 (그당시) 어떤 상태였습니까?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고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창 12:10),  하나님이 명령한 그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기는 커녕 심각한 가뭄으로 인해 새빨갛게 타들어 가는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놓친 것이 있습니다. 이 놓친 부분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에도 자주 나타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 가운데 완성품, 좋은 환경, 아름다운 것을 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성품이 아니라 모든 축복의 근원인 하나님이란 재료를 주시고 안에서 밖으로 우리 안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밟는 모든 땅을 하나님의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가나안 땅으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모르고 지금 하나님이 명령하신 이 가나안 땅은 축복의 땅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눈에 좋아 보이는 그 당시 물과 풀이 풍성한 애굽 땅으로 내려가서 가기서 큰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핵심적인 에쉐르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축복 자체, 복의 근원인 하나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먼저는 내 영혼이 잘되고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내 삶 가운데 흘러나와 “안에서 밖” 내 삶을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축복의 삶으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무너집니까? 그 이유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핵심적인 축복, 바로 에쉐르의 축복, 하나님과 나 사이에 정로의 길, 곧은 길이 쭉 나있는데, 그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없어야 하는데 그 사이에 끼어 있는 것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하나님과 나 사이를 막는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을 막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배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얻기 전에는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길이 곧게 나있고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없는 에쉐르의 축복의 사람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100세 아들 이삭을 은혜의 선물로 주었더니 그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이삭이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정로의 길에 끼어든 존재/방해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합니까? 처음으로 예배의 장소를 지정해 주신 곳, 훗날 그곳에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진 모리아 산에 가서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끼어들어 있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이삭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나와서 한주를 살아갈 때 나도 모르게 하나님과 나 사이 정로의 길에 끼어들어 온 것을 제거해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 있는 것이 없는 정로의 길을 만들어 하나님을 온전히 호흡하며 하늘을 누리는 에세르의 축복의 사람이 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가득차 있는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어떤 문제의 자리를 만날지라도 그 자리를 내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 복의 근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축복의 자리를 만들며 세상에 묵고 메이고 세상에 질질 끌려 다니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의 아들, 딸 처럼, 만물의 영장처럼 세상을 호령하는 인생으로 나아가는 에쉐르의 축복의 삶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 그러면 이제는 본문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에쉐르 축복의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추적해 보겠습니다. 시편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시편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1)먼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쫒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악인이라는 히브루 원어의 단어는 “라샤”인데, 그 뜻은 “기준을 잃어 버린 사람”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악인은 어떤 나쁜 짖을 한 사람이 악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지 않는 사람을 향하여 악인, 라샤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일을 결정하고 할 때 나에게 이득이 있느냐 없느냐가 기준이 되어 살아간다면 하나님 앞에 나는 라샤,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어떠한 일을 할 때 말씀이 기준이 되어서 이것이 말씀의 방향인가 아닌가?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아닐까?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이 들어 나는 것일까 아닐까? 말씀이 기준이 되어 사는 사람이 에쉐르의 복있는, 하나님을 내 안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왜 시끄러울까요? 말씀이 기준이 되지 않고 내가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2)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쫒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꾀란 단어는 히브루 원어로 “에차”라는 단어이고 그 뜻은 충고 조언이란 뜻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의 조언과 충고를 듣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 아무리 오래 나와도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하고 결정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 복 없는 사람, 악인이고 또 그 조언을 받아 움직이는 사람도 복 없는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 우리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누가 이 교회의 리더가 되어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된 분들이 이 교회를 이끌어가야 합니다. 교회는 위에서 아래로 라는 위치의 원리를 잘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위에서 아래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성령의 충만함이 임하고 성령의 능력이 임하여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새 역사가 일어나고 하나님의 생명력 넘치는 일들이 나타나는 것 이것이 진짜 교회의 모습인 줄 믿습니다. 

☞ 오늘날 교회의 문제점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야 하는데 아래서 사람들의 힘을 모아서 위로 올라가려고 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사람들이 무엇인가 모여서 되는 것 같은데 나중에는 거기에 예수의 생명이 흐르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의 바벨탑 사건은 이러한 사실을 말씀합니다. 창세기 11:3-4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노아의 홍수 이후에 사람들이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아래서 위로, 사람들의 여론을 모으고 힘을 모아서 우리 함께 탑을 하늘까지 쌓자, 그래서 다시는 홍수가 일어나도 죽지 않게 하자. 새 역사를 만들어 보자.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11:7-9에 보면, 위에서 아래로 내려 온 것이 아니라 아래서 여론을 만들어, 힘을 모아서 아래서 위로 올라가니 아래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아니라 그들의 뜻과 계획이 기준이 되어 버립니다.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창세기 9: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 노아의 자손들이 그들의 생각과 뜻이 기준이 되어 버립니다.

☞ 여러분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핵심적인 에쉐르의 복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위에서 아래로 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내삶에 기준이 되어서 나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정, 남편과 아내, 자녀,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온전히 함께 하는 에쉐르, 복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여러분들 되기 바랍니다. 

===복 5 에쉐르, 하나님의 복 2  시편 1:1-3

오늘은 복 씨리즈 5번째 시간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한달 동안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복에 대해서 추적하며 은혜를 나눴습니다. 복에 대해서 다시 짧게 다시 정리 하자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2가지, 핵심적인 복과 부수적인 복입니다. 

(1) 핵심적인 복은 내 영혼이 하나님을 호흡하므로 내가 어떤 상황, 환경, 조건, 문제 속에서도 하늘에 샬롬의 평강이 내 안에 가득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어떤 무엇도 나를 묶고 메지 못하는 것을 향하여 핵심적인 복이라고 합니다. 

(2) 부수적인 복은 내 피부에 와 닿게 연출되는 이 땅의 풍요, 번성, 창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상태의 개념의 복, 내 사업장이 잘되는 상태, 돈이 많이 들어오는 상태, 자녀가 좋은 학교 들어가는 상태, 등등 보통 우리들이 추구하려고 하는 이 땅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것들을 향하여 부수적인 복이라고 했습니다. 이 두 가지 복을 다 포함하고 있는데 부수적인 복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복의 단어가 바로 ‘바라크’입니다. 이 바라크의 복이 임하는 원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 지난 주부터 성경에서 말씀하는 핵심적인 복 ‘에쉐르’는 시편 1:1절에서 말하는 복 있는 사람, 그 뜻이 ‘정로’(正路), 하나님과 나 사이에 곧은 길이 나 있어서 하나님을 온전히 호흡하는 것, 그래서 어떤 자리에 있든지, 어떤 사람과 함께 있든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호흡하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래서 예배란 하나님을 통해 이 땅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끼어서 하나님 사이를 막고 있는 이삭을 번제 단에 드린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과 나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을 빼내어 하나님을 온전히 호흡하여 하늘을 누리는 에쉐르의 축복의 사람이 만들어지는 시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1) 시편 1편 1절에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쫒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인”이라는 ‘라샤’ 라는 단어는 세상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쁜 짓을 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성경에서는 악인이란 “기준을 상실했다”는 뜻입니다. 어떤 기준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된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을 향하여 악인이라고 말씀합니다. “꾀”라는 ‘에차’라는 단어는 ‘조언’, ‘충고’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 삼지 않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 오늘은 시편 1:1절 나머지 말씀을 추적하며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살펴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시편 1:1에 복 있는 사람에 대해 “악인의 꾀를 쫓지 않고” 그 다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라고 정의합니다. 

(2)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죄인”의 히브리 원어는 ‘핫타’라는 단어로 이 뜻은 “조준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 인생이 하나님의 말씀의 과녁에 조준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의 사람이 죄인”입니다. 그러면 죄는 무엇일까요? 바로 핫타, 말씀에 조준 되어 있지 않는 상태를 죄라고 합니다. “길”은 히브리 원어로 ‘데레크’로 그 뜻은 “삶의 태도 방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조준 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방식, 방법, 수단을 따라가면 복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3) 그리고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오만”이란 ‘루츠’라는 단어로 그 뜻이 “조롱하다”, “경멸하다”, “비웃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을 조롱하고 경멸하고 비웃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루츠” 즉, 오만한 자는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주인 되어서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살아가는 자, 말씀이 기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준이 되어 사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자리”라는 히브리어 “모샤브”는 자리, 위치, 거주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인이 되지 않고 내가 주인 된 삶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 방법, 수단을 쫒아 사는 사람이 복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편 1절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쫒지 않고 죄인들에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이 말씀이 다 한 방향을 가르키며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Q을 인생의 참된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따라서 Q 말씀을 삶의 기준과 목표로 삼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패턴을 버리는 것이 에쉐르를 누리는 것이다는 것입니다. 

☞ 이 말을 조금 자세히 추적해 보겠습니다. 느헤미야 9:1-2 “그달 스무나흘 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릎 쓰며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고” 느헤미야 8장부터가 완전히 망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과 부흥의 핵심 원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가 시작되면 나타나는 증상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회개를 통하여 내 안을 깨끗이 청소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또 거룩한 성전이 되어져서 하나님이 우리와 온전히 함께 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느혜미야 9장은 우리 안에 부흥의 증상인 회개가 터져 나올 때 회개의 범위에 대해서 나로 부터 열조까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부모가 지은 죄 값을 우리가 받을까요? 않 받을까요?” 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이미 모든 죄와 사망에서 끊어짐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부모님의 죄값이 우리에게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18장에 보면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어서 입이 시다면 그 아들의 입이 시냐?”라고 물어 봅니다. 그 답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신 포도를 먹은 아버지 입만 시다”라고 말씀합니다. 아버지의 죄는 아버지가 그 죄 값을 치르고, 아들의 죄는 아들만이 그 죄의 값을 치른다고 말하며 조상들, 부모님들의 죄 값이 자손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고 정확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느혜미야 9장에 보면 하나님 안에서 내 안에 부흥의 새 역사가 일어날 때 나의 죄만 아니라 열조의 죄까지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복음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분명 예수님을 믿으면 그 보혈의 능력으로 죄가 끊어진다. 그리고 에스겔서에서도 열조의 죄 값은 나에게 오지 않는다라고 했는데 왜 내가 열조에 대해서까지 회개를 해야 할까요? 왜, 회개의 범위를 이렇게 정했을까요? 이 회개의 범위를 통하여 우리에게 던져주시는 영적인 원리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레위기 26:39 “너희 남은 자가 너희 대적의 땅에서 자기의 죄로 인하여 쇠잔하며 그 열조의 죄로 인하여 그 열조 같이 쇠잔하리라” 지금 레위기에서 너희의 각자, 개인의 죄로 인하여 너희가 망하게 되고 그뿐만 아니라 열조의 죄로 말미암아 너희도 망하게 된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레위기 26:39절 원어 성경으로 보면 해석이 조금 다릅니다. 원어 성경에 가장 가깝게 해석한 킹제임스 버젼에 보면, 여기에서는 우리가 망하는 이유가 조상들의 죄 때문이라고 되어 있지 않고 조상의 불법 가운데서 너희가 망한다고 되어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조상들의 죄로 말미암아 그 죄값이 너희에게까지 미쳐서 너희가 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조상과 부모님들이 하나님 앞에서 말씀대로 살지 못한 불법적 삶의 바로 그 태도/패턴이 영향을 미쳐서, 그 패턴 가운데 똑같이 내가 살아가게 되면 조상들이 망한 것처럼 나도 잘못된 그 삶의 방식 패턴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느혜미야를 통하여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부모의 죄로 말미암아 자손들이 그 죄값을 받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잘못된 불법, 삶의 방식의 패턴이 그대로 자손들에게 흘러가서 자손들이 그 패턴 가운데 살아가게 되어서 망하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로부터 조상의 열조까지 회개한다는 것은 이제는 내가 조상들의 잘못된 생활의 패턴을 따라가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회개기도를 통하여 조상의 잘못된 패턴을 끊어내며 그 모든 불법의 패턴에서 자유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느혜미야서 9장에 조상들이 지었던 죄의 패턴 3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첫 번째가 17-18절에 모세가 십계명 받으로 올라갔다 내려오지 않으니 금을 모아다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우상 숭배했던 죄를 지적합니다. 두번 째는 22-26에서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등지고 주의 선지자를 죽인 죄를 이야기 합니다. 세 번째는 사사시대의 사사기패턴을 말합니다. 사사기의 패턴은 하나님 안에서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다른 나라 손에 이스라엘 백성을 붙여서 힘들게 합니다. 그럴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간절히 부르짖고 회개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사를 보내서 다시 회복하게 합니다. 이러한 불법적 패턴이 반복되는 것이 사사기의 역사이자 패턴입니다. 

☞ 그러면 첫 번째, 우상을 섬기는 것이 오늘날 무엇입니까?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 그것이 무엇이던지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을 등지고 선지자를 죽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내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아니고 내 생각, 내 뜻, 내 인생의 경험, 내 욕심, 내 계획이 주인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 선지자를 죽였다고 합니다. 선지자는 오늘날 주의 종들이요. 주의 종들을 향하여 말로 또 어떤 행동으로 부정을 쏟아 내고 불평, 불만, 원망으로 그들의 마음에 상처 입히고 공격하고 쓰러뜨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는 깊이 죄를 자각함으로써 오는 애통함 없이 무심코 같은 죄 습관적/반복적으로 짓는 불법적 패턴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가깝게는 부모님, 또 할머니, 할아버지가 하나님 앞에 잘못 살았던 패턴들을 우리가 모르고 따라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끊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회개하며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조상들과 부모님 세대에서 잘못 살아 왔던 불법의 패턴을 끊어내고 이제는 그 패턴대로 살지 않겠다는 것을 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와 우리의 후손을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부모님들!! 열조들의 죄의 삶의 패턴이 나에게 그리고 우리 자손에게 흘러서 “네가 그 잘못된 생활 방식 패턴 안에 있으면 열조가 망한 것처럼 네가 예수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너도 망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당신의 조상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이러한 것들은 반드시 끊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에쉐르의 복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오늘 그 불법의 삶의 패턴이 끊어지는 에쉐르의 복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 우리의 자녀들에게 세상적으로 볼 때, 조금 연약하고 부족하고 힘이 없어도, 물질적으로 풍요하지 않더라도 우리 엄마, 아빠는 기도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분이며 새벽을 깨우고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자녀들은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반드시 그 부모, 열조의 신앙의 패턴을 이어 받아 그 부모 때는 비록 조금 힘들어도 그 패턴 안에서 그 후손들은 하늘을 누리고 하늘의 복을 누리는 에쉐르의 복을 받는 성도님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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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천국백성이 누리는 바 하나님나라 누림의 복 

마태복음 팔복 마카리오스 산상수훈 산상설교....2015. 8. 10. 4:56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마카리오스, 복된 blessed, 행복한 happy)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카리오스- 복된, 축복된 blessed, 행운의 fortunate, 행복한 happy.

마카리조- 복되다고 부르다, 복되다고 생각하다 call or consider blessed, happy.

마카리스모스- 축복 blessing.

1. 고전 헬라어 문헌

1) 본래 마카르(makar)와 유사한 어형인 마카리오스(makarios)는 핀다르(Pindar)의 작품에서 제일 처음 사용되었으며, 그 의미는 '일상적인 염려와 걱정들로부터 자유한' 이다. 시적인 언어에서 이 단어는 신들의 상태와 또한 신들의 행복한 실존을 함께 나누는 자들의 상태를 나타낸다. 주전 4세기에 점차 이 의미는 상실되고 오늘날의 “행복한” happy과 같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단어가 되었고 따라서 시인들은 이 단어의 사용을 피했다(참조: Plato, Meno, 71a).

2) 이 단어가 마카리오스 호스[티스] makarios hos[tis]: ~한 자는 행복하다 happy is he who …라는 공식문구에서 마카리스모스(makarismos: 복, 축복 blessing)라는 형식화한 언어로 가장 자주 나온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수 세기에 걸쳐 시와 산문 모두에서 흔히 나오는 지복들(beatitudes)은 내용면에서 헬라인들의 슬픔과 고통, 열망과 이상을 반영한다”(F. Hauck, TDNT Ⅳ 363). 부모들은 자녀들에 대해서, 부자들은 그들의 부에 대해, 지혜로운 자들은 그들의 지식에 대해 축하를 받으며(Plato, Laws, 2, 660e), 경건한 자들은 그들의 내적인 복에 대해, 입문자들은 그들의 신의 체험에 대해(Homeric Hymn to Demeter 480), 죽은 자들은(장례식의 비문들에서) 사물들의 헛됨으로부터 그들의 탈출에 대해 축하를 받는다(Aesch., Persians 712).

3) 행복에 대한 여러 가지 헬라적 개념들은 동사 마카리조와 실명사 마카리스모스의 사용에서도 다시 나타난다. 마카리스모스는 축복된 선포라는 의미의 전문용어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 Rhet., A9 1367b 33)에 맨 처음으로 나온다.

2. 구약성경

1) 70인 역본에서 마카리오스(makarios)와 마카리조(makarizo:)는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에셰르(행복 happiness, 복리 well-being), 야샤르(행복을 선언하다 pronounce happy), 또는 아쉬레(~에 대한 복 well-being to)의 역어로 사용된다. 이 단어들의 의미는 행복에 대한 두드러진 열망과 이상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양식화된 축복들은(일반적으로 초기동방 문헌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의 초기 전승층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런 축복들은 “분사 또는 관계절에서 신중한 사람을 칭찬하는” 지혜문헌에서 맨 처음 발견된다(K. Koch, The Growth of the Biblical Tradition, 1967, 17).  

이것은 이 언급이 지상의 축복들(집회서 25:8; 창 30:13; 시 127:5), 번영(욥 29:10이하), 지혜로운 삶(잠 3:13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집회서 14:20)에 관한 것이든 하나님의 계명들을 이행하는 것(시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시 41:1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시 119:1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에 관한 것이든지 간에 관계없다. 

지혜 전승의 영향을 받은 이 시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복이 있다고 선언한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시 2:12; 시 34:8(9); 참조: 84:12(13); 사 30:18). “허물의 사함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이하).  여호와의 은총 가운데 있는 종교적인 행복과 창조주의 은사들을 통한 지상적 행복 사이의 연결이 지혜문학에서는 기본적인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 자신은 결코 마카리오스(makarios)로 칭해지지 않는다. 이 공식문구는 언제나 엄숙하게 복의 대상을 인간에게 돌린다. 이 말은 권위적이며 효능적인 단어인 축복(benediction, 헬라어 율로기아)과는 상당히 다르다. 축복이 제사장의 특권이었던 시대에, 평신도들은 마카리스모스(blessing)에 의지하였다.

2) 이스라엘 후기 시대에 이러한 종류의 보다 더 정교한 선언들과 또한 모든 계열의 이런 선언들조차 특히 묵시적인 본문들에서 발견된다(단 12:12 기다려서 일천 삼백 삼십 오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 토빗 13:14이하). 축복의 선언은 종종 상반된 일련의 재앙을 동반한다. 사실상 이 선언들은 종말론적 위로의 힘을 지닌다. “이것은 더 이상 하나님을 믿는다는 일반적인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종말이 오리라는 것 곧 종말론적 소망을 믿는 것이다”(Koch, op. cit., 17).

3) 헬라 유대교가 헬라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특히 필로의 작품에서 마카리오스 라는 단어를 사용한 데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필로에 의하면, 오직 신만이 축복에 이른다고 한다. 곧 신만이 축복을 받는다. 인간들은 단지 신적인 본성이 창조에 스며드는 한(=신성에 참여함)에 있어서만 이 축복에 참여할 수 있다. 다른 한편 랍비 유대교는 구약성경의 용법을 굳게 고수하였다. “너와 너를 낳은 자가 복이 있도다. 그들이 보는 눈이 복이 있도다”.  종말론적 축복은 그에게 있어서 생소하였다.

3. 신약성경

1) 신약성경에서 동사 마카리조는 오직 2회 나오며(눅 1:48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약 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명사 마카리스모스는 오직 3회 나온다(갈 4: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롬 4: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롬 4:9).  

다른 한편 마카리오스는 비교적 더 자주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이나 어떤 사물이 복이 있음을 선언하는 문맥에 나온다. 이 단어의 50회 실례 가운데에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각각 13회, 15회씩 나오며 바울서신에 7회, 요한복음, 베드로전서, 야고보서에는 오직 각각 2회, 그리고 요한계시록에는 7회 나온다.

신약성경에서 특별한 특징은 이 단어가 하나님 나라에 참여를 통해 오는 독특한 즐거움을 나타내는데 사용된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현대 교회의 부패하고 타락하고 세속화된 근본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기복주의적 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2) 문체상 신약성경의 선언들은 앞에 열거된 선언의 자리까지 포함하여 묵시적인 선언의 전통을 따른다. 히브리어 아쉬레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설교와 복음 기록에 나오는 종말론적 선언들은 3인칭으로 나타내어진다. 거의 균일하게 이 선언들은 축복을 돌리는 이유나 그에 대한 묘사와 함께 나온다(눅 1:45 등).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등).  누가복음에는 복의 선포와 함께 이와 상반되는 화(woes)가 선포된다.  눅 6:24(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3)  신약성경의 복은 종종 신성한 역설을 포함한다(마 5:3 이하; 눅 6:20-22; 벧전 3:14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벧전 4:14; 계 14:13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이러한 역설은  매우 초기 전승에서 분명히 산상수훈의 도입부를 이룬 놀라운 복의 경우에 특히 그러하다.  복에 대한 이 인상적인 형태에서 참 복은 스스로를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여기는 자들의 것이다.  팔복의 역설은 복에 대한  인간적인 관점을 하늘의 가치와 관점으로 바꾸어 놓는다.

누가복음 6:20-22에서 복은 종말론적 위로가 보다 많이 이루어진다. 특별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 즉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미움받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을 약속받는다.  마태복음에서는 그들 자신의 도덕적· 종교적 행위의 요소가 보다 두드러지며 옳은 행실과 하늘의 보상 간의 관계가 강조된다. 사실상 복의 두 형태들 간에 실질적 차이점은 없다. 

예수님의 복은 경건한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이다. 그들은 비천하고 압제받는 자로(눅 6:20;  눅 1: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시 10:2; 시 14:6; 시 18:27), 영적 갈망으로 가득찬 자들로(눅 6:21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세상의 빈곤한 상태나 혹은 그들 자신의 불완전함 때문에 매우 불안한 자들(눅 6:21;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참조: 사 61: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로 묘사된다. 

반면 자의적이고 완고한 부자들과 경건을 가장한 거만하고 독선적인 자들이 여기에 대조되는 자들이다(참조: 눅 18:9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누가복음의 복에 부가하여 마태복음의 복은 또한 그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의 더 높은 법에 기꺼이 순응하는 자들을 언급한다: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마 5:7),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마 5:8), "화평케 하는 자의 복"(마 5:9). 여기서는 또한 유대인들이 가졌던 의인의 개념과 다소 대립되어 있다. 하나님 앞에서 중히 여김받는 것은 율법에 대한 차가운 지식이 아니라 단순한 동정심(마 25:31 이하)이며, 독선적인 외적 정결(마 23: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이 아니라 마음의 청결이다(시 24: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2인칭의 마지막 복(마 5:11,12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은 제자들이 핍박의 결과로 가장 영예로운 선지자들 가운데 포함되었다 라는 역설적인 복의 개념과 관련시킨다. 그들은 순교 가운데 굳건히 남아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상이 확실하다.

복은 정직한 자의 채워지지 않는 갈망과 함께 이제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들으며 경험하는 자들에게도 확대된다(마 13:16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또 진정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결정적인 계시를 만나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눅 1:45; 마 16:17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를 이의 없이 받아들이고(마 11: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그것에 대해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자들(요 20:29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에게도 복이 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눅 11:28). 예수님께서 인간 앞에 심판과 구원이라는 가공할 만한 이중적 운명을 놓아두셨은즉 영적으로 깨어있고(눅 12: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계 16:15),  충성하고(마 24:26; 눅 12:43),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요구를 이행함으로써(눅 14:14; 요 13: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하나님의 상을 발견한 자들에게 복을 내리신다. 

유사하게 굳건히 견디는 자들이 복되다 일컬음 받는다(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세상에서 그들의 인내가 영원한 구원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행하는 자들은 행하는 일에 복을 얻는다(약 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이 모든 구절들에서 미래의 영광의 빛이 의로운 자의 현재의 비참한 형국 위에 비춘다. 따라서 복은 그저 미래의 암시이거나 미래에 있을 위로인 것만은 아니다. 미래의 빛을 현재에서 본다. 

헬라 세계에서 심각한 불행을 모면한 사람을 행복하다고 말하듯이 예루살렘의 임박한 심판의 위협 하에서 자식이 없어 불행한 여인이 오히려 복되다고 불리운다(눅 23:29).  여인의 영광은 위대한 아들에 의해 가장 높임 받으므로, 메시야의 어머니가 복되다고 불리운다(눅 11:27; 행 20:35 그리스도인의 베풂은 이기적인 베풂과 비교할 때 복되다고 한다).

공관복음에는 많은 복들에 관하여 언급되어 있는 반면에 바울의 기록에는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바울의 기록에 나타나는 복은 특별한 금언의 형태를 지니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이 언급하는 얼마 안되는 복은 신학적으로는 중요성을 지닌다. 바울이 롬 4:7 이하에서 구약성경으로부터 취하는(시 32:1 이하)  행복은 "죄 사함을 받는 자들을 복되다"고 한다. 이것은 특별한 척도에서 구원의 복이다. 롬 14:22에서는 논란이 되는 윤리적 문제를 결단함에 있어서 자책의 이유가 없는 자들은 복되다고 한다. 고전 7:40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자가 복되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세상의 괴로움을 덜고 주께 더 전심으로 헌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에서는 복에 관하여 강하게 묘사한다. 계 14:13(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 계 16:15(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계 19:9(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

14가지 재앙과 함께 7가지 복이 열거되어 있으며, 모두 선포된 금언적 형태를 지니고, 영적싸움에 직면하여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공동체에게 복된 삶을 제시한다.  그 중 다섯 가지 복은 하늘로부터 더없이 확실한 권위로 선언된다(계 14:13; 계 16:15; 계 19:9; 계 22:7; 계 22:14). 요한계시록은 시종 하나님의 비밀에 대한 복된 계시를 획득하여 지키는 자들의 복이라는 골격을 유지한다(계 1:3이 계 22:7에 확증됨). 계 14:13에서는 지금 이후로, 즉 기독교에 대항한 최종적인 싸움의 시작부터 수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복되다고 한다. 재판정에 서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당하는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또 지상에서 사는 날 동안 깨어 근신하며(계 16:15) 이 세상의 모든 매혹적인 것들과 보화보다 하늘의 약속을 더 고귀하게 여기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복되다. 하나님께서 혼인 잔치에 청하신 자들은 복되다(계 19:9). 첫째 부활에 참예하고 둘째 사망을 피한 자들은 복되다(계 20:6). 이 마지막  행복은 법적 선언이다. 악한 자들은 내쫓긴바 되나, 완전한 거룩(죄사함)과 성화로 영원한 도성에 들어가기에 합당하다고 여김 받은 자들은 복되다.

(참조: F. Hauck).

결론

현대 교회가 추구하는 복과 성경에서 말하는 복이 얼마나 많이 다른지 느껴보라!   

이를 통해 교회가 어떻게 세속화되고 변질되어 가는지 통찰력을 가져라!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참 복(행복)을 갈망하고 추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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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73:28 (구약 855쪽)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히.토브)이라~"

<서언>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주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주고 싶은 것을 주는 동기이고,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주고 싶은 것을 주기 시작한 수단에 해당하는 것이고,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주고 싶어하는 것을 주는 성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라도 몸부림치며 그토록 주고 싶어하는 것은 행복입니다.

<본론>

     1. 행복은 최고의 기쁨 말합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본문에 나오는 '복'(福)은 히브리어로 '토브'(טוב)인데 이는 행복(幸福)이라는 단어로 많이 번역됩니다. 신명기10:13에 "내가 오늘 네 행복(토브)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고 했는데 여기에서 '행복'으로 번역된 단어가 '토브'입니다. '토브'는 형용사로서 '좋은' '선한' '기뻐하는' 등의 뜻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자신이 계획한 대로 만들어진 것을 보고 '심히 좋았더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매일 창조가 끝날 때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창세기1:31에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좋았더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토브'입니다. 보기에 좋았다는 것은 감상이나 평가의 의미로 좋았다는 것이 아니라 ((전심전력 기울여 계획한 일을 다 마친 다음에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 하나되어 공감하며 누리는 바, 안식-평강-감사 충만한)) 축하와 축제와 잔치의 가장 기쁜 상황을 말합니다. 영어의 셀러브레이션(celebration)인 것입니다. 사람이 가장 기쁘고 좋을 때 브라질 사람들은 '따봉~'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 예~' 호남사람들은 '아따 미쳐불겄구만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기분이 가장 좋아서 어쩔 줄 모를 정도로 행복할 때 감탄할 때를 표현한 단어가 '토브'인 것입니다.

  그것은 구속과 관련된 기쁨입니다. 신약 마태복음5:3-12에 보면 예수님이 산에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설교할 때 8가지 복에 대해 가르쳤는데 복이 있다는 것을 표현할 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복'은 히브리어로 '마카리오스'(μακαριοs)인데 이 단어는 구약의 토브와 같은 뜻으로서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본문의 마카리오스를 영어성경에서는 해피니스(happiness)가 아니라 블레씽(blessing)으로 번역했습니다.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블리드(bleed)라는 말에서 왔는데 그 단어는 '피를 흘리다'는 뜻입니다. 영어에서 '복'이라는 단어에 기본적으로 피와 관련한 단어를 사용한 이유가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짐승을 잡아 피로 제사를 드리므로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맺고 유지했습니다. 영국인들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것이 복 혹은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축복을 할 때 '갇 블레스 유'(God bless you)라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행복'이란 예수를 믿어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로마서4:6-8에 "~복(마카리오스)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마카리오스)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마카리오스)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2. 행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만들고 자유의지를 주어 세상의 모든 구조와 환경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토브를 누리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의 미혹을 받아 범죄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주신 질서와 원리와 환경을 거절했습니다. 육체의 죽음과 삶의 고통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토브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은 찾아가 부릅니다. 그럴 의무와 책임이 없지만 자기의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나는 너 없이 못살아' '나는 널 사랑해' '너를 반드시 구원하여 토브(마카리오스)를 누리게 할거야' 하고 여인의 후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보내 주어 그를 통해 구원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때가 되매 자기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왔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연약한 육체를 입고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의 대가를 대신 치렀습니다. 대신 고난 당하고 대신 죽었습니다. 그가 자기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는 죄와 그 모든 결과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그 구원받은 기쁨을 생활 가운데 적용시키십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그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게 합니다.  

   3. 행복은 모든 상황을 초월합니다. (행복은 어떤 능력이 있는가?)

  민수기 20장과 신명기 34장에 나오는 내용을 네러티브(narrative)적 요소를 가미하여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학대받는 애굽에서 구원하여 젖과 굴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기 위해 광야를 지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모세를 통해 광야에서 40년을 통과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힘들 때마다 모세를 원망하고 대적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거의 다 이르렀을 때 가데스 바네아(Kadesh-barnea)에서 또 마실 물이 없다고 원망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그들에 대해 화가 났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니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확신에 찬 모습으로 지팡이로 반석을 쳤습니다. 물이 펑펑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놓고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했는데 지팡이로 쳤다고 책망했습니다. 더욱이 화를 내면서 물을 내서 하나님의 의를 상실했다고 책망했습니다. 그 죄로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가 측은했으나 위로할 수 없을 정도로 어깨가 쳐져 있었습니다. 모세는 아무 말도 없이 가나안 땅이 보이는 느보(Nebo)산으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어깨에 손을 대고 '모세야 힘드냐. 분하냐. 억울하냐'고 물었습니다. 모세는 '아닙니다. 저는 광야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으로 만족합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힘든 상황들이 연속되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이 행복했습니다. 저에게는 지나온 동안 하나님이 함께 한 그 광야가 가나안이었습니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9장과 고린도후서 11장과 빌립보서 1장에 나오는 내용을 각색하면 이렇습니다. 바울은 유대교 신봉자로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닌 거짓선지자로 알고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여 결박하고 감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러다가 다메섹(Damascus)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빛이 너무 강렬해 그 앞에 엎드러져서 고개를 들거나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바울아 어찌 니가 나를 핍박하느냐'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바울은 그 자리에서 회심을 하고 세계 각처로 복음을 전하러 다닙니다. 사역을 하는 동안 먹을 것이 없었고 입을 것도 부족했고 편히 잠잘 곳도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핍박과 로마 정권의 박해로 붙잡혀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사람들이 죽었다고 성 밖에 버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예루살렘에서 붙잡혀 로마로 호송되어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동역자들도 다 떠난 뒤였고 돈은 다 떨어졌고 몸은 병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사하고 재판의 결과가 사형이 내려질지도 모르는 두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주님이 '바울아 힘드냐. 억울하냐. 후회되냐'라고 물었습니다. 바울은 '주님 아닙니다.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택하여 구원해준 것, 나를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소명과 기회주신 것, 성령의 능력으로 함께 해주어 복음의 열매 맺게 해 준 것으로 감사했습니다. 힘들긴 했지만 주님이 함께 해주시므로 주님을 위해 살아서 행복했습니다. 이제 죽는 것이 주님의 복음 사역에 유익이 된다면 그 또한 최고로 행복한 일입니다."고 했습니다.   

<결언>

  시편 23편은 우리가 잘 알고 외우고 다니는 성경입니다. 우리 찬송으로 불러봅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23:6에 "내 평생에 선하심(토브)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73:28에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토브)~"고 했습니다. 행복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행복의 매뉴얼은 성경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행복이 적용되고 성경 말씀대로 살 때 그 행복이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찬송가> 438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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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김형익 | 생명의말씀사

[하나님의 선하심]

피조물인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지고지선의 참된 복락(기쁨-환희 즐거움) 누림을 원하심....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 받으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는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대명제를 토대로 다시 써내려간 ‘4영리’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성경에 등장하는 개념일 뿐, 우리의 실제 삶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이 ‘오해’임을 저자는 증거하고 있다.

저자는 이 오해의 문제를 첫 문장부터 파고든다. “하나님께서 오해를 받고 계신다. 그것도 심각하게.” 

이러한 오해는 성경과 교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기독교는 어려워선 안 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어, 성도들은 상향도 하향도 아닌 ‘사향(死向)’평준화되고 있다. 성경과 교리에 대한 무지는 ‘구원’을 너무나 쉽고 당연한 것으로 만들었고, 결국 ‘복음’에 대한 무지와 무감각으로 이어져 오늘날 교회의 타락으로 이어졌다.

기독교를 ‘온갖 의무의 목록’ 쯤으로 여기는 오해는 더욱 심각하다. 

지옥에 갈까 두려워 하나님과 교회를 떠나지 못하는 신앙생활엔 자유함도 기쁨도 없기 때문. 그리고 예배나 헌금, 헌신과 봉사 등으로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한다’는 부담만 늘어난다. 이런 신앙생활은 정상적이지도 않고, 하나님의 뜻과도 무관하다. 저자는 이렇게 오해되고 축소된 하나님이야말로 ‘만들어진 신’이자 ‘우상’이라고 질타한다.

그렇다면 오해를 벗어나,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찾을 때이다. 수많은 성도들이 계속되는 고통과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선하심’ 사이에서 신앙의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데, 이 둘은 어느 지점에서 만날 수 있는가? 저자는 해결을 위해 우리의 출발점인 ‘천지창조’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세 전, 성부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서로를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계셨다(요 17:1·5, 잠 8:30-31). 그 완벽한 교제를 통해 하나님은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계셨다는 것.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도 여기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환경과 조건을 완벽히 조성하신 후, 6일째 ‘창조의 꽃’인 인간을 마지막에 만들어 동산에 거하게 하셨다. ‘에덴’은 그 이름부터 ‘기쁨·환희’를 뜻했다. 그리고 최초의 인간 아담이 외로움을 미처 느끼기도 전에 배필을 허락하셨다. 결국 하나님은 인간에게 ‘기쁨’을 주시고, 인간이 기쁨으로 드리는 찬송과 예배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천지창조의 목적은 결국 교리와 신조에 나온대로 ‘하나님의 영광’이지만, 이 영광은 당신만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쁨을 통해 현실화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최고 사명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기쁨으로 선을 베푸시는 것이 된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면’ 된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의 선하심이고, 이처럼 선하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닫고 사는 일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처사가 된다.

그렇게 은혜와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라면, 결코 이 ‘선하신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죄’에 대한 정의가 나온다. 즉 하나님의 각종 명령을 범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언제나 자신에게 최상(지고지선)의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을 의심하는 것이다. 결국 죄는 ‘불신’이고 ‘영적 독립선언’이다. ‘나에게 언제나 최상의 것만을 공급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최고로 모독하는 적극적 행위가 된다.

그래도 우리에게 풀리지 않는 숙제가 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믿어도 ‘선하심’은 믿지 못하는 것 아닌가? 저자는 여기서 ‘십자가’를 꺼낸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분이시나,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화목제물로 희생하심으로써 모든 죄를 심판하셨다는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사랑하심이 성취됐다. 하나님은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택한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심을 십자가를 통해 확증하셨다.

십자가에서 죄를 씻음 받았어도, 우리의 ‘고난’은 여전히 실재한다.((포도나무의 가지마다 풍성한 열매맺음 위해 농부는 그것을 최선 다해 가꾸고 전정해 준다)) 저자는 이에 대해 “이런 고난조차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영광”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하나님을 믿으면 더 이상 고난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도리어 독교 신앙의 역설은 ‘고난이 주는 복’이라고 말한다. 욥과 아브라함, 요셉과 다윗, 예수님과 바울처럼 성경 인물들도 많은 고난을 당했다. 그러나 무의미하지 않았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기쁨은 대부분 고난을 통한 복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을 행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받는 고난을 결코 낭비하시지 않는다. 당신이 만일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고난과 관련해 생각해야 할 문제일지 모른다. 이런 깨달음은 대개 모든 고난이 지난 후 알게 된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믿음을 믿어주시는 영광스러운 일이자 (사랑하는 자녀됨의) 특권이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일어나는 모든 고난은 영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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