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8.10.25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둘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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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4 : 24, 26, 27]*24.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26.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27.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둘로스..종, 노예]--

2. 70인역본의 용법. 

70인역본에서 둘로스 어군은 대부분 어근 아바드와 그 파생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이 관계를 통해서 둘로스는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a)  둘로스 어군은 노예와 노예 상태를 강조적으로 의미한다. 이 단어는 노예의 일인 섬김, 곧 윗 사람의 철저한 통제 아래에서 억압적이고 강제적이거나 혹은 적어도 예속적인 모습을 띤 섬김의 자세를 강조한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의 종살이(출13:3; 14:5; 레26:45 등)를 나타낸다. 야곱은 라반에 대한 둘로스의 상태를 수락한다(창 29:18).

노예법에는 태어날 때부터 유대인인 노예의 처우와 석방 문제가 규정되어 있다. 그 종의 주인만이 이 일에 대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고, 그에 속해 있는 자는 이를 거역할 수 없었다(출 21:1-11; 레 25:35 이하; 신 15:12 이하). 다른 한편 유대인이 아닌 가나안인 노예는(레 25:44 이하) 주인의 나머지 가재 도구와 같은 가치를 지녔고 또한 그렇게 대우를 받았다.

(b)  둘로스 어군은 왕에 대한 신하의 관계 및 제한적인 섬김을 의미한다. 이 어군은 세력에 의해서, 때때로 자발적으로 의존하고 섬기지만 항상 종속과 구속을 겪는 관계를 나타낸다. 왕은 항상 그의 신하들의 절대적 통치자이며, 그들은 그 아래서 노예와 같은 것이다. 사울의 신하들은 그의 종들이다(삼상18 :5). 요압은 다윗의 둘로스이며 (삼하14:9 -10), 전 백성은 왕의 종이다(왕상12:7). 흥미로운 점은 예속된 자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이 용어들을 사용하는데 반해, 통치자들은 이 어군으로 그 관계를 묘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c)  이 어군은 하나님에 대한 종속과 섬김의 관계를 의미한다. 이 어군이 이 관계에 대해 사용될 때, 발전의 정점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은 또한 헬라 및 헬레니즘 개념과 가장 날카롭게 대립된다. 70인역본에서 종은 개별적인 행동에서 뿐만 아니라 총체적인 위임 임무에서 하나님에 대한 봉사를 뜻하는 가장 일반적인 용어이다. 이 단어는 또한 바알이나 다른 신들에 대한 봉사에 대해서도 사용되었지만(삿 10:6, 3), 선민들에게 있어서 옳은 유일한 것은 오로지 여호와만을 섬기는 것이다(삿 10:16; 시 2:11 등).  이런 이유로 종들이 모세(수 14:7), 여호수아(삿 2:8), 아브라함(시 106:42), 다윗(시 89:3), 그리고 야곱(이스라엘을 대표함,사48:20)과 같은 유명한 인물들에게 사용될 때, 명예의 칭호로 사용되었다. 둘류에인(예속하는 것)의 반대는 불순종이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둘로스는 신약성경에서 124회 나오며, 그 중에 30회는 바울 서신에, 30회는 마태복음에, 그리고 26회는 누가복음에 나온다.

(a)  일반적인 용법.

①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군의 일반적 용법에 대해 단지 조건부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이 단어가 종교적 문맥에서 나타나는 구절들을 제외하면, 비유와 비교, 특히 예수님의 비유에서 사용된다. 문자적 용법은 대부분 서신들에서만 발견되는데, 예를 들면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 주인에 대한 그리스도인 종들의 태도에 대한 언급(골 3:22 이하 등)이나 종들에 대한 그리스도인 주인들의 태도(골 4:1; 엡 6:8 이하)나 공동체 안에서 종들의 지위에 대한 언급에서 나타난다. 여기에서 이 용법은 전적으로 당시의 사회적 틀 안에서 사용되었다. 여기서 또한 이 단어군은 한편에서의 둘로스(종)의 전적인 헌신이 퀴리오스(주인)의 전적인 주장에 부합하는 절대적인 의존 관계를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이 절대적 의존 관계는 퀴리오스의 단순한 존재에 완전히 근거하며, 이 법적 근거를 넘어 어떤 특별한 종교적 혹은 도덕적 정당성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마 8:9; 눅 7:2 이하). 예수님의 비유는 이 주인과 종의 컴플렉스(complex)에 관하여 극도로 억제 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 곧 신자들의 책임의 무조건적임을 강조하려 할 때 둘로이(복수형)를 언급한다(마 24:45 이하; 눅 12:37 이하).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그의 인간과 관계에서 그가 만족시켜야 하는 어떤 전제 조건에 의해서도 제약받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를 원할 때 둘로이를 언급한다(마 18:23 이하; 마 25:14 이하; 병행구 눅 17:7 이하). 따라서 이 용어와 개념은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일의 상태를 묘사하고, 형벌을 자초하지 않으려면 받아야만 하는 결과를 묘사한다.

신약성경의 기록에 어디를 살펴보아도 주인과 종, 자유와 속박으로 구분하는 사회적인 구분에 반대하는 내용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자주 노예들은 책임과 지휘권의 자리에 임명되곤 하였다(마 24:45). 그러나 그 때에도 여전히 노예는 그의 주인에게 오로지 순종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마 8:9). 노예는 일을 해서 이익을 얻게 되거나 답례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그가 종으로서 해야 할 의무를 하고 있는 것이다(눅 17:7-10). 주인은 노예가 어떤 잘못된 죄를 저질렀을 경우, 노예에게 무한한 힘을 행사하여 그를 너그럽게 봐주거나(마 18:27) 가혹한 처벌을 하기도 하였다(마 18:34; 마 25:30). 반복하여 종들은 모든 일에서 그들의 주인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심지어 무자비한 주인에게도 복종해야 한다(벧전 2:18).

퀴리오스의 뜻과 위임(commission)과 나란히 우리(둘로스) 자신의 뜻이나 주도권(독자권)이 설 여지가 없다. 둘로스의 퀴리오스에 대한 관계적 배타성도 확증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마 6:24; 눅 16:13).

그런데, 예수님은 당시에 있었던 것처럼(마 6:24과 눅 16:13)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있음을 전제로 말씀하고 계신다. 이 때 두 주인은 그 종을 동일하게 소유하고 있으며, 따라서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런 상황은 있을 수 있었으며 실제 있었다. 사실로, 한 주인에게서는 자유하였으나 다른 주인에게서는 그렇지 못하여 반은 자유인이고 반은 노예 상태인 종들이 있었다. 물론 이러한 관계에서 한 종이 두 주인에게 똑같은 헌신을 보이는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주인들이 원하는 바와 관심사가 매우 폭넓게 변할 경우에 특히 그러하다. 예수님은 이것을 예수님 당시의 언어와 그의 백성의 언어로 표현하셨다. 즉 종이 한 주인을 사랑하고 다른 주인을 미워할, 다시 말하면 덜 충성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한 주인 혹은 다른 주인에 대한 배타적 봉사라는 의미에서 (실제로는)종됨의 파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님은 재물과의 관계를 끊지 않은 채 하나님의 둘로스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시도는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배타적인 봉사와 의무라는 의미에서 둘레이아(douleiva, 1397: 종살이)를 행하는 것에 힘을 집중시키지 않고서 둘류에인이 암시하는 바를 행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진 사람을 공격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둘로스에 대한 묘사는 고전적인 것이긴 하지만 멸시하고 경멸하는 식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이 점에 있어서 신약성경은 헬라 세계와 구별될 뿐만 아니라 유대교와도 차이가 있다. 노예에 대한 재판은 항상 물질적이며, 그 재판이 엄격할 때도 그렇다(마 18:32; 마 25:26; 마 25:30; 눅 19:20). 둘로스는 단지 노예라는 이유로 결코 멸시 당하거나 거부 당하지 않는다.((아브라함의 종, 다메섹사람 엘리에셀!!...한 때, 아브라함의 상속자로 여길 정도로 귀히 여겼다...때때로 아들보다 더 나은 측면이 있는 종의 예:잠언....창15:2, 24장에서는 그의 순종과 겸양을 본다....**(주인과 주인의 가솔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평생 주인과 동거하며 섬기겠노라 자원하고 맹세함으로 스스로 문설주에) 귀 뚫은 종 : 출21:5, 신15:16))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관습상 노예는 헬라 세계에서와 같이 보다 낮은 계급 인간에 속했다. 법률로써 (가나안 족속)노예들은 부동산으로 분류되었으며, 법적 권리를 가지지 못하고 자신의 재산을 소유할 수 없었다. 심지어 가족까지도 자기에게 속하지 않았다. 노예는 주인의 재산이었으며, 주인은 결혼시 마음에 드는 노예를 선물로 줄 수 있었다. 이것은 제의적 영역에서 노예는 제한된 범위에서만 제의적 의무와 권리를 지녔음을 의미했다. 이 점에서 노예는 (아내에 대해서도 그러했지만) 천한 계급에 속했다. 노예의 제의적 복종은 따라서 강력히 강조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노예는 윤리적으로 열등하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제한적 정도로만 법률로 보장했다. 그들은 자연히 자손을 가지지 못했으며 따라서 그들의 태생을 제어할 가능성이 없었다......노예에 대한 대우는 이러한 평가(estimation)에 상응한다. 노예는 가재(家財)였으므로 주인은 원하는대로 노예를 다룰 수 있었다. 아무도 그 주인을 저지할 수 없었다. 심지어 주인이 노예의 신체를 훼손했을 때도 오직 증언할 목격자가 있을 경우에 법의 요구에 따라 해방시키는 것으로 그만이었다(출 21:26 이하). 랍비의 비유담에서도 종들에 대한 이러한 태도가 분명히 나타나 있는데 중요한 문제이다. 때때로 성난 주인이 식탁에서 시중드는 종에게 잔을 내던지거나 종의 따귀를 갈기는 경우도 있다. 그 이유는 종이 최선을 다하더라도 주인이 의도하는 바대로 정확한 의미에서 명령을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랍비에서 "노예, 종"이라는 말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공격할 수 있는 최악의 모욕 중에 하나이다. 이웃을 종이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파문 당할 수도 있었다. 종과 주인과의 특별히 좋은 관계를 보여주는 몇몇 언급이 있다면(Ber., 2, 7), 이것들은 단순히 법률의 현실에서 나타나는 어두운 모습을 확실히 해줄 뿐이다.

③ 종들이 기독교 공동체 속으로 (차별당함없이)통합된 방식은 예수님과 신약성경이 노예에 대해 생각하고 언급한 태도와 일치한다. 예가 자유의 기회를 얻었을 때 최종적 분석에서 노예이든 자유인이든 차이가 없음을 인정할지라도(고전 7:21) 그는 기쁘게 그 자유를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종들은 모든 신자들과 함께 공동체의 생활을 형성하는 법에 능동적,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이 법은 사랑의 법으로서, 공동체의 모든 성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동일한 관계에 서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차원에서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런데 이 법은 일단 적용되면 결국에는 반드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노예 제도의 폐지 및 종말을 가져온다. 만일 노예 제도를 폐지하려는 운동이 없다면, 다시 말하면 노예 신분이라는 사회적 현실 안에서 신약성경이 보여준 관심의 상대적 결여는 근본적으로 초기 기독교 삶의 내세관이나 종말론적 긴장의 상황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죄와 마찬가지로 구속도 기존의 사회 구조 안에서 일어나므로, 최우선 순위는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에 일치할 수 있는 삶을 성취하는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런 삶은 적당한 때에 기존 사회 구조를 전복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공동으로 참여하는 교제는 사회적인 구별을 상대화하기 때문이다. 좀 더 설명을 한다면 예수님의 구속 행위는 지위와 태생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똑같이 예수님의 구속 행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동은 개개인에게 있어서 그가 처하여 살아가는 실재적인 관계 내에서만이 중요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그가 오로지 신약성경에서 하마르티아(죄)라고 하는 것을 범하는 이 실재적인 관계 내에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 죄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실재적인 불순종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선포의 목적은 예수님의 행위로 말미암아 개인의 상태의 통제(control)이며, 개개인 자신의 시간과 장소에서 이 행위에 일치하는 태도와 행위를 낳는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위한 노예의 우선 목적은 자유의 획득이 아니다. 노예상태에 머물러 있더라도 그는 예수님께서 위하여 죽으신 모든 사람들 같이 절대적으로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이다(고후 5:15; 롬 4:17 이하 등).

그렇지만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다른 사회적 구조 안에서 살아가는 관계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관계와 함께, 각각의 개개 그리스도인에게 부여된 은사와 임무에 종속되어 있다면 주인과 종과의 차이는 양자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함께 참여함으로 생기는 교제와 비교할 때 단지 상대적 의미만을 지닐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 한편으로는 가정 생활에서 취한 개념의 견지에서 주인/ 종 관계를 정리하고(아델포스, 몬 1:16),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관계가 주인과 종의 관계에 우선함으로 후자 곧 주인과 종의 관계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일부분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엡 6:5 이하; 골 3:22 이하; 골 4:1; 딤전 6:1; 딛 2:9; 벧전 2:18 이하). 우리는 또 왜 신약성경이 상대방(노예의 주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닐 때에도 똑같은 규칙을 적용하시는지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의무는 인간의 책무들과 상관없이 적용되어서, 이러한 모든 책무를 그대로 채택하여 그 책무들을 신적인 통치로 처리하고 적합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왜 자유를 결코 요구하지는 않으나 자유가 허용될 때는 감사함으로 받아야 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외적인 자유도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 자유의 가치는 그리스도와 교제가 가져다 주는 것과 비교할 때, 또 자아와 삶을 해치는 모든 조건들로부터의 자유와 비교할 때, 하나님과 그의 뜻을 위한 자유-이 자유는 그리스도가 주시는 선물이다-와 비교할 때 단지 상대적일 뿐이다(참조: 고전 7:22).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믿음의 자유는 피상적으로는 스토아 철학자가 외적 환경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것과 유사하지만 세가지 점에서 그것과 다르다. 믿음의 자유는 (1) 우월감이 없다. (2) 이것은 노예와 주인을 형제가 되게 만드는 어떤 행동(그에 따른 결단)에 근거한다. 그리고 (3) 이 행동은 양자 모두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과 부활이다.

(b)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둘로이(종들)로서의 기독교인들.

① 둘로스 데우라는 관용구는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적게 사용되며, 토 데오 둘류오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의 둘류오(douleuvw, 1398)에 대한 대부분의 언급은 신약성경 기독론이라는 견고한 기초 위에서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언급된다. 둘로스 데우라는 표현은 거의 항상 하나님과 관련하여 구약성경의 의인에 대한 용법과 결합하여, 혹은 인용문에서 나온다. 둘레(douvlh, 1399)도 마찬가지다(참조: 눅 1:38; 눅 1:48; 행 2:18).

특별히 계 1:1; 계 2:20; 계 7:3; 계 10:7; 계 19:2; 계 19:5; 계 22:3; 계 22:6에서 항상 그렇게 사용되었다. 계 15:3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종(둘로이 투 테온)이란 칭호를 받았으며, 계 10:7(참조: 행 4:29)에서도 선지자들을 하나님의 종들(둘로이 투 테온)이라고 부른 것이다. 행 16:17에서도 동일한 용법이 사용되었는데,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종은 바울과 그의 동료들을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렀다. 벧전 2:16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여기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이기 때문이다.

약 1:1과 딛 1:1에서 '하나님의 종'이라는 묘사는 특별한 주목을 요하며, 어쨌든 보통 유대인의 용법 이상 나아간다. 여기서 그 문구가 선지자들을 하나님의 종이라는 칭호를 의식적으로 채용하여 직함으로 전용한 것인지 혹은 하나님께 절대적인 의탁에 대한 개인적 고백인지 결정하기 어렵다.

초기 교회에서 이 문구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호칭으로 점차 사용되어 새로운 생명을 획득한다(참조: 2Cl., 20, 1; Herm. m., 5, 2, 1; 6, 2, 4; 8, 10 등).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이 과정을 가속시켰다. 첫째는 그리스도교가 참 이스라엘이라는 사상의 일반적 용인이었고, 둘째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둘로스라기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상이었다. 이 사상은 예수님과의 어떤 있을 법한 경쟁을 일축해 버렸다. 그러나 이 과정에 곧바로 기여한 또 하나의 사실은 이 전체적인 발전과 함께 공로의 사상이 둘로스 데우 어구와 결합하여 또 다시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진지하게 시도한 사람들에게만이 이 호칭이 적용될 수 있었고 그들만이 이 호칭을 주장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문구가 신중하게 취해질 때,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된 혹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닌 자기 헌신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인 것은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둘로이(종들)이고, 따라서 그들의 생명이 부활하여 승귀하신 주님께 바쳐진다는 사상이다. 특별히 바울은 이런 사상을 대표한다.

모든 곳에서 인간들은 신자가 되기 전에 둘로이였다고 가정한다. 이 가정은 둘레이아(douleiva, 1397: 종살이)가 다른 사람의 뜻에 복종하는 것을 암시한다는 통찰에 기초한다. 이 경우에 자발적이든 강요이든 엘류데리아(eJlivssw, 1667: 자유)는 상실되고 둘로스의 상황을 이루는 의존의 상태가 된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롬 6:16). 인간들이 그리스도를 떠나서 종노릇한다(둘레이아)고 바울이 생각하는 대상은 하마르티아(롬 6:6 이하), 아카다르시아, 아노미아(롬 6:19), 에피뒤미아(딛 3:3),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갈 4:8), "이 세상 초등학문"(갈 4:3; 갈 4:9) 따위와 심지어 유대교의 노모스(롬 7:1 이하 등)이다. 이것은 그들이 자유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이런 세력들에 지배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휘파코에("순종")가 완전한 둘레이아(종살이, 노예 상태)가 되는 것은 이 상태에서 인간의 삶이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다"(참조: 롬 7:5)는 사실에 의해 알 수 있다. 인간 스스로가 자기 삶의 결과를 더 이상 결정하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말씀의 발전이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예수님은 그의 구원하는 사역 곧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런 둘레이아(douleiva, 1397: 종살이, 예속)로부터 그들을 구출하여 해방시킨다. 이 구원은 노모스(율법)의 종살이로부터 구속인 것이다(갈 3:13: "그리스도께서...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갈 4:4 이하: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따라서 그들은 아들의 신분과 그에 따른 자유를 얻는다(갈 4:5 이하; 롬 8:15; 롬 8:23). 그러나 아들됨은 자율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들됨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이 새로운 상태는 새로운 섬김이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헌신은 당연히 구속(redemption)의 목적(goal)으로부터 결과하며 그것은 자율(autonomy) 보다 오히려 순종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사역을 수행했을 때 그는 구속된 자를 자기 소유로 삼고, 그들에게 그들의 삶을 이룰 목적과 방향을 제시해 주신 것이다. 이러한 헌신은 어원학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이렇게 의무가 있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둘로이로 부름으로 표현되어진다(고전 7:22; 엡 6:6; 참조: 롬 14:18; 롬 16:18; 골 3:25). 이 용어는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상태가 의(롬 6:19), 거룩(살전 3:13), 새 생명(롬 6:4), 사랑과 자기 희생에서 완성됨을 우리에게 보여준다.-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안에 암시되어 있다. 특히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 외에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길도, 그를 기쁘시게 하는 섬김에 이르는 길도 없으며, 따라서 그의 역사와 말씀에 의하여 그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주관하고, 그리하여 일상적인 일련의 삶 속에서 인간의 전 행실을 주관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한 가지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관계에 대해 둘류오 등을 사용할 때, 이 용법은 항상 무엇이 발생했다는 고백과 주어진 사실들의 결과를 가장 개인적 차원에서 받아들일 각오를 암시한다. 따라서 인간 편에서 둘류오(douleuvw, 1398: 종이다)는 그리스도편에서의 아고라조(ajgoravzw, 59: 사다, 구속하다)에 상응한다. 여기서 후자는 그리스도의 행동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결과하는 태도를 묘사한다. 그리스도가 가져다 주는 것은 오로지 인간이 그리스도께 자신을 결속시킨다면(마치 실로 땅에 고정된 풍선의 견고한 자유함처럼) 오직 그것만으로 알 수 있는 자유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일단 이해하고 나면 요한복음의 몇몇 구절들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들은 처음 언뜻 보기에 다소 모순이 있는 것 같은 바울의 진술들과 병행함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요 8:35 이하에서 죄에서 자유를 가져오시사 하나님의 오이키아(oijkiva, 3614: 집, 거처)에 영원한 자리를 가져다 주시는 분으로서의 예수님은 부여 받는 것이 얼마나 위대하고 안전한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아들(Son)로 불리운다. 그러나 특별히 요 15:15에서 예수님이 그의 죽으심과 관련하여 말씀하시고 계심을 생각해야 한다: [요15:12-15]*12.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친구라 하였노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기의 소유를 둘레이아의 상태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완전한 친교로 이끄시고 계시는 것을 명백히 하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또한 그와의 친교는 그의 소유가 그가 그들에게 명령하는 것을 행해야 하며(요 15:14), 순종하지 않으면 그 친교가 깨짐을 암시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신다. 간단히 말하면 요한이 아들이 가져오는 자유에 대해 언급할 때(요 8:34 이하)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로이가 아니라 친구들이라고 부른다고 언급할 때(요 15:15) 아무런 모순이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수님께서 명하신 바를 행하는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③ 둘로스 크리스투(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문구는 바울의 기록에서와 같이, 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후서의 인사말에서 자기 호칭으로 사용될 때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고 바울이 동역자 에바브라를 둘로스 크리스투로 묘사하는 골 4:12에서도 그렇다.

둘로스 이에수 크리스투(예수 그리스도의 종)라는 문구를 자신의 칭호로 사용할 때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구속(redemption)으로 해석하는 것에 의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이 문구는 먼저 이 문구를 사용하는 자가 그리스도의 주장(claim)에 복종하는 것을 암시하고 따라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연합하는 것을 암시한다.

바울의 목적은 교회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로서, 지정받은 자리에서 그의 직무를 이행하는 자로서 교회의 덕을 세우고자 한다. 그렇지만 모든 곳에서 이 문구가 강조하는 바는 단순히 예수님의 구원 행동에 대한 고백 뿐만 아니라 이 문구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주인 자신의 권세를 지닌 특별한 직분을 시사하기도 한다. 이것은 약 1:1에서 가장 분명히 나타난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또한 갈1:10에서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라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라는 표현을 확인할 수 있다. 안드로포이스 아레스케인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분명히 바울이 기쁘게 하기 위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권위를 소홀히 하는 것, 따라서 그 권위와의 불화를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이 권위는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위임에 의해 일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주장을 나타내고, 오로지 그리스도에게만 전심전력해야 하며, 당연히 그의 둘로이로 불리운다.

바울의 기록에서는 둘로스 이에수 크리스투(예수 그리스도의 종)는 아포스톨로스 이에수 크리스투(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와 나란히 병행된다. 후자는 외부 사람들을 향한 그 중요성과 일에 따라 바울의 직분을 묘사한다면 전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와, 따라서 그 결정적 기초, 곧 그리스도께서 세상으로부터 바울을 얻어서 그를 그의 소유로 삼은 사실로 되어 있는 기초에 따라 바울의 직분을 묘사한 것이다.

벧후1:1에서는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 결합형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라고 되어 있다.

(c)  둘로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① 예수님은 최후 만찬이 있던 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요13:1이하). 이 사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바 그의 직무는 권세나 영광을 구하기보다 그의 존재가 둘로스로서 섬기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 주신다.

우리가 발을 씻기는 것이 종의 의무 중 하나요, 그것도 유대인 노예보다 비유대인 노예의 의무((가장 비천함 자인하는))임을 깨닫지 못하면 이 장면, 혹은 예수님의 의도를 적절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섬김을 수행함에 있어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직무를 이행해야만 하는 둘로스의 신분에 두신다. 비록 마데테스(제자)가 디다스칼로스(선생)에게 행해야 할 의무는 종이 상전에게 행해야 할 의무와 매우 흡사하였다 하더라도 심지어 제자들도 예수님에게 행해야 할 의무가 없는 그러한 봉사를 이와 같이 제자들에게 베풂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의 임무가 포함한 겸양과 희생의 정도를 보여주셨다. 그의 위엄을 고려할 때 오로지 종의 상징적 지위만이 제자들의 눈을 열기에 적합했고, 예수님의 직무에 관한 그들의 환상(illusions)에서 그들을 지킬 수 있었다.

동시에 이 사건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사도로서 살아가는 그들 자신의 삶의 의미를 계시해 주었다. 한 사람의 사도는 그 사람 자신으로서 존재한다는 규칙에 비추어 예수님은 그들을 그가 취하신 것과 동일한 지위에 묶었다. 이 원칙 대신에 예수님께서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요 13:16)라고 하셨다면, 이것은 그 사건과 그것의 중요성에 의해 생겨난 그 상황에 일치하여 표명된, 기초가 되는 사상을 단순히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그 사건의 요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서 눈여겨 본 태도를 바로잡기 위함이다. 따라서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워진 상호 봉사의 의무 및 공동체 안에서와 공동체를 위한 봉사의 의무의 영구한 기초를 구성한다. 따라서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사실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 사실에 기초하여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권면할 수 있는 것이다(갈 5:13).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은 자유는 그 자체 참되고 진정한 자유를 보여준다. 그 자유 안에서 우리는 둘로스의 경우이며, 둘로스의 경우가 당연히 되어야 하는 것과 같이 자기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 의해 유발되는 봉사와 겸손의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② 빌 2:7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어구 "종의 형체"(몰페 둘루)는 한편으로 몰페 데우("하나님의 본체")와, 다른 한편으로 본문의 마지막에서 예수님에게 부여된 퀴리오스라는 칭호와 대조되어 그 중요성을 가진다. 따라서 이 문구는 그리스도에게 있어 성육신이 그의 본래의 권세와 영광과 관련하여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그것은 그의 비움(케노시스)의 위대함을 표현한다. 둘로스의 용법에 따르면 몰페 둘루(종의 형체)는 예수님의 케노시스의 길에서 사람의 모양이 가능한 가장 낮은 지점까지 내려가는 것임을 보여준다. 둘로스보다 더 크게 퀴리오스 혹은 데오스와 대조할 수 있는 용어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맥상 그 표현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인간이 됨에 있어서 스스로 취한 것에 대한 묘사이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요 13:1 이하의 발을 씻기는 것의 저변에 놓인 의미와 일치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상을 통하여 볼 때 관용구 몰페 둘루를 설명하기 위해 이사야 53장의 에베드 예호와(여호와의 종)를 상기할 필요가 없다.

또한 순종과-공동체와 관련하여-겸손(빌 2:3; 빌 2:8) 같은 단어들이 몰페 둘루의 내용을 표현하고 포괄하기에 정말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디아코네오(섬기다)라는 용어도 역시 마찬가지다. 댓구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바울은 여기서 태도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새 상황, 그의 새 존재 방식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전의 상황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른 것이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의 태도와 행동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라고 묘사되었다. 이 차이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여 본문 전체를 바울의 권면(빌 2:1-5)에 종속시킨다. 반면 빌 2:6 이하는 사실상 순전히 케리그마적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로서 권면의 재료의 도입을 위한 기초를 제공한다. 자연히 예수님에 관한 메시지의 거부를 스칸달론(skavndalon, 4625: 함정, 걸림돌) 및 모리아(mwriva, 3472: 어리석음)로 이끄는 것은 예수님의 몰페 둘루이다(참조: K. H. Rengstorf).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상을 입으셨을 때, 그는 죄와 율법 그리고 사방에 종속되어 있는 인간과 완전히 결속되신 것이다. 종으로서 예수님은 노모스(novmo", 3551) 아래에 있으며(갈 4:4)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다(갈 3:13). 그는 "죄있는 육신의 모양"(롬 8:3)과 같은 형상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스스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히 2:15) 인간들의 형제가 되셨다. 정확히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을 가장 심원한 자기 비하로 묘사한 것이 바로 종의 형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종의 형상으로, 자신을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을 위해, 자신의 죽으심의 대가로서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인간을 구속하신다. 성례전적인 해방이라는 비유가 여기에서는 주인의 변화의 개념과 연합되었다. 믿는 자들은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8; 참조: 롬 6:22). 어떤 가상의 자립이라는 둘레에서 엘류데리아(자유 freedom)로의 해방은 결국 새로운 자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해방 받는 자는 "신앙의 순종"을 위하여 자유케 된 것이다. 신앙에 순종함으로써 인간은 주님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 종으로 나타난다(롬 12:11; 롬 14:18; 골 3:24; 참조: 살전 1:9; 롬 7:6). 그러나 이러한 주인과 종의 새로운 관계는 "무서워 하는 종의 영(프뉴마 둘레이아스)"에 의하여 주도된 것이 아니다. 믿는 자들은 "양자의 영(프뉴마 휘오데시아스)"을 받은 것이다(롬 8:15).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들의 자유는 "육체의 기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자들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도록 부름을 받았다(갈 5:13). 이렇듯 이웃에게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일은 종의 형상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다(참조: 빌 2:1-4의 권고, 이는 빌 2:5 이하와 인과 관계에 있음). (참조: R. Tue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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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송축하라고 부름(시 134:1-3).....이 시편은 우리에게 두 가지 축복에 대해서 교훈을 주고 있다.

Ⅰ. 우리가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 즉 그를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도록 가르침을 받고 있다(1-2절).

1. 그것을 행하는 것은 “레위인”에 대한 요청이다. 그들은 직책상 거룩한 일을 사역하기 위해 임명된 “여호와의 종들”이었다. 그들은 성소에서 수고하며, 여호와의 집의 책임을 담당했다(민 3:6 등). 그들 중 몇 사람은 “밤에 여호와의 집에 서서” 성전의 거룩한 것과 값진 것들이 모독되거나 약탈당하지 않도록 지켰다. 법궤가 휘장 안에 있었기 때문에 감시가 더욱 필요했다. 또한 제단과 촛대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수고했다. 아마도 그것은 소수의 열심 있고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익숙해 있던 것 같다. 우리는 “주야로 성전을 떠나지 아니한” 사람에 대해 성서에서 읽는다(눅 2:37). 이제 그들은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부르심을 받는다. 이처럼 그들은 일을 하면서 깨어 있고 거룩한 활동을 위해 시간을 바쳐야 한다. 우리의 시간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보다 더 좋게 어떻게 보낼 수 있겠는가? 경건한 묵상과 절규로 시간의 공간을 채우는 것이 최선의 책임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하나님과의 대화는 가장 적합하며, 합당한 요구가 된다. “여호와의 집에” 섰는 자들은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기억해야 하며, 경건과 거룩한 활동이 그 집에 어울린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송축케 하라.” 그들 모두가 또는 각자가 마음을 올리는 표시로 그렇게 하라. “거룩하게 너희의 손을 들라”(하몬드 박사는 이렇게 풀이한다). 또는 성별해 손을 들라. “성소에서” 손을 들 때, 그것이 합당하게 된다. 그들이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손을 씻으라고 명령받을 때, 그들은 거기에서 기도와 찬양 가운데 “거룩한 손을 들라”고 가르침을 받는다.

2.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제사장이요 레위인으로서 그렇게 행하라고 부르심을 받고 있다(사 66:21). 우리는 “여호와의 종들”이다. 우리는 그의 집과 그의 성소에 거처와 이름을 갖고 있다. 우리는 그 앞에 성직자로 선다. 밤에도 우리는 그의 눈 아래 있으며, 그에게 가까이 한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송축하라.” 반복해 그를 송축하라. 그의 영광과 인자하심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라. 기도하고 찬양하고 맹세할 때, 우리의 “손을 들자.” 근면과 즐거움과 마음의 고결함으로 우리의 일을 행하자. 이러한 권면은 주로 명령적 주의를 환기시키는 “보라!”라는 말로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현존에 참여했을 때 여러분을 돌아보라. 그리고 그에 따라서 행동하라.

Ⅱ.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선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갈구하도록 가르침을 받고 있다(3절). 파수꾼들이 그들의 대장을 축복한 것이나 레위인들이 대제사장을 축복한 것, 그들의 우두머리가 누구였든(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 그것이 단수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또는 축복이 한 사람에 의해 많은 사람들에게 선포되었다든지 하는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배울 수 있다.

1. 우리는 여호와의 축복받는 것보다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 줄 그 이상의 것을 간구할 필요가 없다. 그가 축복하는 자들은 실제로 복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2. 시온으로부터 오는 축복, 영적인 축복, 즉 하나님과의 교제의 축복, 언약의 축복이 가장 좋은 축복이다. 우리는 그것을 열심히 구해야 한다.

3. 우리가 축복을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가 “천지를 지으신” 분이시며, 따라서 그의 처분대로 하늘과 땅의 모든 축복의 근원을 갖고 계심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4. 우리는 이러한 축복들을 우리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간구해야 한다. “여호와께서는 나를 축복하실 뿐만 아니라 너도 축복하신다.” 그렇게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충만함은 우리에게는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넉넉함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선한 의지를 입증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권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빎을 받는다”고 할지라도(히 7:7), 낮은 자는 높은 자를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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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산되는 24시간 기도운동] (上) “하나님을 사랑…” 14년째 단 1초도 기도가 멈춘적 없다

입력 : 2013-04-02 17:24 美 캔자스시티 ‘국제기도의 집’ 가다

지난달 29일 새벽 2시(현지시간) 미국 캔자스시티 국제기도의집(IHOP-KC)에 있는 기도실(Prayer Room)에서 감동적인 장면을 보았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기도실 뒷면에 붙어 있는 세계지도의 한반도 부분을 두 손으로 감싸고 눈물로 기도하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최근 한반도 정세를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으로 보고 있다. 이런 가운데 머나먼 미국 캔자스시티 시골마을의 기도실에서 한반도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하는 여성’을 본 것이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뜨뜻한 것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지금의 ‘위험한 평화’가 이름모를 누군가가 드리는 간곡한 기도의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트랜스포메이션 월드가 주최한 70시간 연속기도회 참석차 방문한 캔자스시티 국제기도의집은 매일 24시간 연속 기도운동을 펼치는 곳으로 유명하다. 지금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 24시간 기도운동을 하는 ‘기도의 집’이 속속 세워지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원조 격이다. 1999년 9월 19일 캔자스시티에서 성공적인 목회를 펼치던 마이크 비클(59) 목사는 캔자스시티 공항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조그만 장소에서 20여명과 함께 매일 24시간, 주 7일, 일년 365일 하나님께 경배하며 기도하는 기도운동을 시작했다. 시편 27편 4절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을 근거(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로 비클 목사는 기도의집 운동을 펼쳤다. 

캔자스시티 국제기도의집의 모델이 된 것은 한국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기도운동이었다. 비클 목사는 82년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오산리기도원을 방문, 한국교회의 기도운동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기도운동을 이끈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를 지금도 영적 멘토로 생각할 정도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한국 방문 이후 그는 목회지에서 뜨거운 기도 사역을 펼쳤고 결국 국제기도의집을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20명으로 시작된 기도모임은 14년째인 지금 거대한 기도 무브먼트로 성장했다. 자비량으로 풀타임 사역하는 스태프만 1000여명이며 자체적으로 세운 아이합대학교(IHOPU)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1000여명의 학생들이 다니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기도운동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스태프들의 평균 연령은 26세. 연말에 열리는 ‘원띵(Onething) 집회’에는 2만5000여 젊은이들이 모여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드릴 것을 다짐한다. 국제기도의집 방문자 수도 매년 10만명에 달하고 매일 10만여명이 웹사이트를 통해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기도실의 기도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99년 이후 지금까지 이곳에서는 단 1초도 예배가 드려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국제기도의집에서 가장 강조하는 점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주장이다. 모든 예배와 프로그램이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회복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워커(Worker)보다는 러버(Lover)가 되라”는 것이 기도의집에 있는 이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 찬양은 기도실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다. 2시간마다 새로운 음악 팀이 올라와 예배를 인도한다. 미스티 에드워즈(34)는 국제기도의집을 대표하는 찬양 리더. 내는 음반마다 아이튠스 음원 판매 5위 안에 들 정도로 일반인에게까지 인기가 있다. 에드워즈는 인터뷰에서 “기도실에서 기도하다 보면 수만명의 청중 앞에서 찬양을 드리는 것보다 ‘오직 한 명의 관객’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찬양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늘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상당히 많은 한국인이 이곳을 방문하고 있으며 국제기도의집 주변에 살면서 기도운동에 참여하는 한국인들만도 약 200명이 된다. 국제기도의집 내에는 정식으로 한국인 사역부가 형성돼 자체적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인 사역부 대표 김재익 선교사는 “국제기도의집은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며 그분의 뜻을 구하는 기도운동의 장소”라면서 “이곳에 대한 편견과 오해도 적지 않은데 우리가 펼치는 것은 기도운동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평신도뿐 아니라 목회자와 선교사들도 이곳을 자주 방문한다. 미국 풀러신학교를 졸업하고 로스앤젤레스에서 목회하다 3년 전에 가족과 함께 캔자스시티로 이주한 이장욱 목사는 매일 밤 12시부터 새벽 6시까지 기도실에서 기도하고 있다. 그는 “먼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목회의 시작이라는 점을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됐다”면서 “이곳에서 기도하다 보면 영적 호흡이 뚫리는 것을 경험한다”고 말했다. 잠시 이곳을 찾았다 아예 중보기도 선교사로 평생 서원한 사람도 있다. 미국 버지니아에서 목회했던 양정호 목사와 부인 양소영 사모는 중보기도 선교사로 헌신, 한국교회와 열방을 위한 중보기도를 드리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과의 스토리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야기하다 보면 모두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회복하겠다”는 결심을 했고, ‘더 중요한 것을 위해 덜 중요한 것을 버리는’ 떠남을 감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곳 기도실에서는 전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가 드려진다. 시리아 난민 문제, 중국 교회의 부흥, 박해받는 크리스천들을 위한 중보, 이스라엘의 회복, 인신매매와 빈곤 문제 해결…. 한반도 평화와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기도는 이곳에서 빠짐없이 자주 드려지는 단골 기도 메뉴다. 국제기도의집에서는 기도만 드리는 것이 아니다. 기도의집 내에는 80여개의 사역 기구가 사회 정의와 나눔 사역에 참여하고 있다. 

기도의집 대표 비클 목사는 은사 사역자라기보다는 철저한 말씀 사역자였다. 그는 오랜 세월 하루 8시간씩 성경 연구와 묵상을 하고 있으며 특히 마틴 로이드 존스의 모든 책들을 ‘씹어 먹을 정도’로 섭렵했다. 이번 70시간 기도회 참석차 기도의집을 방문한 김상복 할렐루야교회 원로목사와 만난 자리에서는 존 스토트와 아더 핑크 등 복음주의권 목회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깊이 나눴다. 한국 합동교단 출신으로 7년 전부터 이곳에 와 있는 남모 목사는 “비클과 같이 깊이 있는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면서 “특히 그의 검소한 삶, 하나님께 집중하는 삶을 한국 목회자들이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기도실에서 잠잠히 머물면서 기자 역시 ‘한 사람의 관객’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함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방문해 하나님의 뜻을 구했던 강원도 태백의 ‘예수원’과 비슷했다. 분위기는 달랐지만. 

국제기도의집을 방문하면서 한국교회는 이곳을 자세히 모르거나 상당한 편견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제CCC와 YWAM 등이 공식적으로 협력하고 있으며 수많은 영적 리더들과 성도들이 이곳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들은 우리로부터 기도를 배웠다. 수많은 청년들을 기도의 자리로 오게 만든 그들로부터 이제 우리가 배울 점이 있다는 생각이다. 

캔자스시티=글·사진 이태형 선임기자 t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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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산되는 24시간 기도운동] (中) “한국교회 부흥은 오직 기도로 가능” 참여 확산

입력 : 2013-04-09 17:27....국내의 24시간 기도운동

24시간 기도운동은 미국 캔자스시티의 국제기도의 집에서만 드려지는 것이 아니다. 최근 10여년 동안 24시간 기도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확장됐다. 감신대 김영래 교수에 따르면 근래에 미국 해군사관학교, 독일 펑크음악페스티벌, 전쟁지역, 지하교회, 델리의 슬럼가, 파푸아뉴기니의 정글, 영국의 성당에서 24시간 기도가 이어졌다. 미국에서는 앨라배마주 헌츠빌에 있는 애즈버리 연합감리교회 등을 중심으로 한 스토어하우스(Storehouse·기도창고)라 불리는 기도 프로그램이 활성화되고 있다. 김 교수는 24시간 기도운동이 “미래교회의 강력한 트렌드가 될 것”이라면서 “이해보다는 경험을, 이성보다는 영성을 추구하는 미래 세대들은 24시간 기도운동을 영적으로 신앙을 형성시킬 최상의 기회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24시간 기도운동에 공감하며, 실제로 기도 사역에 헌신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최근 각 교회와 단체에서 이 운동을 펼치고 있는 목회자와 사역자들이 경기도 원당의 진행교회에 모였다. 진행교회에서는 ‘원띵하우스’란 이름의 24시간 기도의 집(Prayer House)이 있다. 이날 모인 인사들은 손종태(진행) 박동찬(일산광림) 손철구(홍익) 박호종(하베스트샬롬교회) 목사를 비롯해 중보기도사역자인 진희경씨.

손종태 목사는 2007년부터 성경 속 ‘다윗의 장막’과 같이 24시간 예배하며 온전히 하나님을 추구하는 원띵하우스를 시작했다. 박동찬 목사는 감리교의 차세대 리더 가운데 한 명. 서울 광림교회에서 김선도 원로목사를 도와 청년부 사역을 크게 일으켰다. 그는 1999년부터 2004년까지 광림교회 청년부원들과 함께 기도운동을 펼쳤다. 부흥을 사모하는 단체들의 모임인 ‘어게인 1907’모임과 2003년 6만5000여명이 모인 ‘더 콜’집회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박 목사는 기도운동이야말로 마지막 시대의 가장 효과적인 대안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2006년 일산광림교회 담임으로 부임한 그는 말씀과 기도운동을 접목시켰다. 박 목사의 지도아래 일산광림교회는 부흥을 경험, 현재 출석 성도들이 3300명에 이른다.

손철구 목사는 예장 통합 출신. 손 목사는 2500여명 출석의 홍익교회를 기도중심의 교회로 변모시키고 있다. 24시간 기도운동과 관련해 손 목사는 “전쟁에서는 지상전과 함께 공중전이 중요하다”면서 “강력한 기도운동은 공중전에서 승리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안”이라고 말했다. 그는 2년 전부터 금요예배시간에 성도들과 함께 기도운동에 대한 비전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는 “결국 목회자인 내가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면서 “24시간 기도운동은 시대적인 요청이라고 본다”고 언급했다.

박호종 목사가 담임하는 경기도 과천의 하베스트샬롬교회는 2009년 말부터 24시간 기도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 처음에는 24시간을 채우지 못했지만 점차 시간을 늘려 지난해부터는 24시간 내내 예배가 드려지고 있다. 기도하고 싶은 사람들은 누구나, 언제나 참여할 수 있다. 찬양을 위해 자체적으로 6개의 음악팀을 운영하고 있으며 하루평균 120∼150명 정도가 기도에 참여하고 있다. 박 목사는 “기도의 집을 시작하고서부터 교인들이 기도실을 영성생활의 심장으로 여기며 기도와 예배를 삶의 중심에 두는 등 24시간 기도운동에 유익한 점이 많다”고 말했다. 하베스트샬롬교회는 2년 전 박 목사가 정식 부임 한 이후에 250여명의 성도들이 950여명으로 증가하는 부흥을 경험했다. 박 목사는 “기도운동과 말씀운동을 철저하게 병행한 결과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선교단체에서 사역했던 진희경씨는 2004년 어게인1907 운동에 참여하면서 ‘일체의 이름을 내려놓고 연합하여 부흥을 위해 기도한다’는 모토에 공감, 24시간 기도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개인적으론 주님의 신부된 교회가 귀하게 단장되는 일에 부름 받았다”면서 “24시간 기도운동의 핵심은 예배자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기쁘게 반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침체에 빠진 한국교회의 부흥은 오직 기도를 통해서 가능하다면서 24시간 기도운동은 한국교회의 귀한 유산인 기도운동을 다시 점화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다윗은 시편 27편4절에서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고 고백했다. 손종태 목사는 “오직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로 들어갈 수 있다”면서 “다윗이 간절히 소망했던 그 한 가지 일(원띵)은 이 시대 우리 역시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말했다.

현재 손종태 목사를 중심으로 이 같은 기도운동에 동참하는 60여 국내외 단체와 교회들은 ‘274 얼라이언스(Alliance)’라는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274’는 시편 27편4절을 상징한다. 참가 그룹 중 40여개가 해외에서 기도운동을 펼치는 단체다. 274 얼라이언스 소속으로 T국에서 기도의 집 사역을 펼치고 있는 김혜정 선교사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든 이해관계를 내려놓고 연합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고 밝혔다.

손철구 목사는 “과거 한국교회에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예배당 내 장의자에서 자면서 밤새 기도하는 모습이 보편적이었지만 현재 그 같은 모습을 찾기 힘들어졌다”면서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해선 다시 기도의 운동이 불길같이 일어나야 한다”고 언급했다. 박동찬 목사는 “선교와 교회개척을 기도운동과 연계하는 것이 필요하며 건강한 24시간 기도운동에 대한 한국교회 전체의 공감대를 이루는 것도 절실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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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산되는 24시간 기도운동] (下) 균형·조화 이룬 ‘건강한 기도운동’ 한국교회 살린다

입력 : 2013-04-23 17:11/수정 : 2013-04-23 19:33.....신학·목회자들의 견해는…

24시간 기도운동이 확산되는 가운데 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쪽의 견해가 갈려 있다. 기도는 필요하지만 균형이 요구된다는 주장에는 모두가 동감한다. 동시에 균형과 신학적 검증이란 주장 사이에서 정작 필요한 기도의 불길이 꺼지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전 세계 종교 트렌드가 ‘머리의 영성’에서 ‘가슴의 영성’으로 변화되는 중에 균형이 있으며 교회 사역과 잘 접목된 24시간 기도운동은 시들어가는 한국 교회를 살리는 동력이 될 수 있다. 한국 교회에 건강한 기도운동이 착근되기를 바라며 신학자와 목회자의 견해를 들어본다.

김영래 감신대 교수… 지속적인 기도 통해 교회의 본질 회복

최근 전 세계적으로 24시간 기도운동이 교회의 새로운 흐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미주와 유럽, 호주와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24시간 기도운동은 지역의 교회와 신앙공동체를 변화시키고 있다. 이는 교회의 미래와 관련해 긍정적이고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특별히 새벽기도, 수요기도, 철야기도로 성장한 한국교회에 24시간 기도운동은 또 한번의 새로운 도약의 기회가 되고 있다.

왜 24시간 기도인가?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는 이사야 56장 7절 말씀에서 보듯이 교회가 하루 24시간, 일년 365일 지속적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와 더불어 지금 우리에게 24시간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이유가 있다. 우선 복잡하고 다변화되는 사회 속에서 24시간 기도는 개인의 사정과 필요에 따라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그리고 세계가 하나로 엮어지는 글로벌 시대의 교회는 24시간 열려진 기도의 통로를 통해 서로 소통하고 중보하는 기도공동체가 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교회는 24시간 기도를 통해 다양한 계층과 세대의 문제를 공유하고 함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이해와 협력의 목회를 할 수 있다. 이렇듯 24시간 기도는 교회가 위로는 하나님과, 옆으로는 이웃과의 관계를 영적으로 유지하는 생명선이 되는 것이다.

물론 24시간 기도운동에 대한 우려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찌 보면 영적으로 강력한 능력을 가진 기도가 유혹과 시험에 노출되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어떤 경우라도 성경적, 신학적 범주에서 벗어난 입장과 주장은 명확히 분별되어야 한다. 하지만 일부의 오류로 24시간 기도운동의 본질이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앤드루 머레이는 “어떤 이들은 단지 기도를 위해 기도하고, 어떤 이들을 하나님을 알기 위해 기도한다”고 했다.

이렇듯 24시간 기도운동은 기도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속되고 이웃을 사랑하고,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이를 이루기 위해 24시간 기도운동은 개교회의 목회 안으로 적극 수용되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룬 24시간 기도운동이 미래교회를 성장과 성숙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승구 합신대 교수…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한 방편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만일에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거나 영적으로 심각하게 병든 사람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기도하는 일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얻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주된 방편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여 우리의 인격과 사상과 감정이 변해야 한다. 기도 과정을 통해 우리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게 돼야 그것이 하나님과 교제로서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오래 기도한다고 해도 그것은 참된 기도가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 삶의 방식을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바꾸어 가시는 것이다. 이 점에 유의하면 ‘24시간 기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의 답이 쉽게 나올 수 있을 것이다.

24시간 기도는 ‘어떤 특정한 기도의 방식이 더 나은 것’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시사한다. 1시간 기도하는 것보다는 24시간 기도하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또한 혼자 24 시간 기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결국 24시간 릴레이 기도를 하자는 것이고, 이는 결국 특정한 장소에 계속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 배후의 생각이 무엇인지가 궁금하다. 만일에 조금이라도 그런 식으로 기도하면 우리가 원하는 바를 하나님이 더 잘 들어 주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24시간 기도는 잘못된 기도이고 없어져야 할 관행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진정 기도하는 사람, 즉 내 뜻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복속시키는 사람이 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해야 한다. 그 교제의 한 방편이 기도다. 이를 무시한 채 어떤 특정한 기도 방식이 우리를 얽어매 이런 방식으로 해야만 한다는 분위기가 확산되는 것, 더구나 그런 것이 신사도 운동이라는 이단적 운동과 연관되어 있을 때는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기도는 우리 일상(日常)의 한 부분으로 있는 것이 좋다. 특정한 시기에 그렇게 할 수는 있으나, 일상적으로 하루 종일을 기도만 하는 것을 과연 하나님께서 진정 기뻐하실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기도에 대한 여러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홍기영 창조교회 목사… 주님께 마음을 쏟아내는 기도 필요

기도의 부흥이 일어나고 있다. 24시간 쉬지 않고 기도하겠다는 공동체적 헌신은 듣기만 해도 감동이다. 그런데 우려의 소리도 들린다. 너무 신비적이고 개인적 계시가 그 기도운동을 주도한다는 경계의 목소리가 있다. 모호한 신비 체험이나, 개인적인 예언이 신앙생활을 끌고 갈 수 없다. 우리에게는 건강하고 뚜렷한 진리인 성경이 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삶이라는 폭넓은 자리에 놓여 있다. 나와는 다른 경험을 하는 사람이 있다. 한 몸에 서로 다른 지체가 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온 대로 발이 손더러 “너는 발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 은사의 차이를 ‘뿌리의 다름’으로 비판하는 것은 건강하지 않다.

목회를 하면서 발견한 것은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들이 환상이나 꿈을 잘 꾼다는 사실이다. 은혜 체험과 받은 은혜의 표현은 다른 영역이다. 믿음이 성숙하지 못하면 체험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한다. 진리의 말씀으로 훈련받지 않으면 자신의 체험이 자신을 파괴하기도 한다. 성경의 진리라는 견고한 기반에 서는 것이 안전하다.

하지만 바울과 같이 은사적 예언을 듣는 지혜(분별)도 필요하다. 바울은 "반드시 가야 할 예루살렘(마지막)방문에는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 하시는 성령감동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만난 사람들(두로의 제자들, 가이사랴의 빌립의 집을 방문한, 유대에서 내려온 아가보 등)로부터 “(성령의 감동받은 아가보--예루살렘에 가면 결박당하여 이방인에게 넘겨지리라/고난이 기다리고 있다)....그러니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 들어가지말라”는 말을 여러번 듣는다. 여기서 예언을 대하는 바울의 태도를 보게 된다, 바울은 다른이들이 성령으로 감동받아  나온 말과 그에 따른 조언자체를 절대시 하지는 않는다(행 20:22∼24). 바울은 예언의 말에 예언자의 인격이 담긴 것을 안다. 아가보는 물론 정확히 예언한다(행 21:11). 하지만 다른 이들은 사랑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들어가지 말라고)말린다(행 21:4).

분별하는 사람은 대상의 영적 상태를 사랑으로 살펴야 한다. 주께서 금지하신 비판과 우리에게 명하신 분별의 중요한 차이는 사랑의 섬김에 있다. 사랑을 잃은 가운데 낯선 차이를 이단시하면 오히려 이단에게 힘을 실어준다. 비판에 따른 상처가 단체를 이단으로 기울어지게 한 슬픈 경험이 역사에 있다.

기도하는 사람은 비판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물론 기도하는 것이 기도 안하는 것보다 안전하다. 문제가 있으면 주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해결된다. 소원 성취를 이루고 신비 체험을 얻어내려는 기도가 아니라 주님 앞에 나아가서 주님께 마음을 쏟아내는 기도 말이다. 균형은 잡아주려는 노력으로 세워지지 않는다. 섣부른 간섭은 오히려 균형을 잃게 한다. 진리를 밝고 맑게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차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름을 아름답게 증언하는 길에 균형이 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푯대를 바라보는 사람은 잠시 흔들리다가도 결국은 균형을 잡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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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과 기도 가운데, 내게 오소서, 보좌에 좌정하신 세키나, 거룩하신 영광의 Q

예비하신 <기도와 찬양의 분량>다 채우도록 기도와 찬양의 영 충만히 부어주소서

지고지선의 영복가운데 계신 하나님안에 한영되어 영원히 살며 사랑받는 둘로스, Q의 그 사랑으로 세상을 섬기게 하시려고  

아드님의 십자가와 부활 통해 새로이 거듭나게 하신 나로

오직 주와 한영됨 참되게 실행하게 하소서 

주여, 오직 생명의 말씀이신 주님 자신으로 채우사 나와 한 영되심을 입증하소서, 주만 나타나소서

말씀하게 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말하는 동안

나의 말함안에서 참으로 당신이 몸소 말씀하소서

나와 한 영되신 주께서 친히 당신의 말씀을 말하고 계심을 듣는 이 모두가 알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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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의 호흡하심인 주님말씀받기에 필요한 긍휼 베푸소서

생명의 떡으로 주신 바 그 말씀안의 영을 만지며 참생명으로 취하기를 구하나이다

주님말씀 앞에 떨며 서서 나의 죄됨(용서못함, 숨은 죄악, 오만, 자기주장, 자기확신)과 무지함, 산만함, 매너리즘을 고백하며 모든 영적수건을 내려 놓고 벗어버립니다

주님 말씀을 보혈로 씻긴 눈과 입, 마음으로 읽으며, 생각의 훈련 통해 이해한 바 그 말씀을 기억하고, 사랑과 신뢰로 귀히 여겨 간직하며, 의지를 동원하여 그 말씀에 집중 몰입하여 묵상하며 기도함으로써 영을 훈련함을 열어주소서

말씀과 함께 나의 전존재가 영안에 있게 하사 영생수 마심-빛비췸-생명공급-말씀이신 Q으로 적셔지고 점유되어 충만케 됨 이루소서

이로써 하나님나라의 능력인 새로운 힘 얻음-위로-격려-생명의 양분을 공급하시며 지켜보호하는 방패되신 Q을 경험하여 누림의 참기쁨안에 늘 살며

이로 인해 확장되는 바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님나라의 온전한 구원-영생-지복직관의 한 영됨 누림-부흥과 선교 이루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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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예수님, 내주하시는 생명의 성령님, 

주와 합한 내 영, 내 영의 생각은 생명, 

생명된 내 영의 생각따라 한 영됨 실행하는, 주께 드려진 산제사인 내 몸은 의의 병기, 

구속된 내 몸, 생명의 성령님 친히 소성케 하시며 온전케 하시리,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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