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8.11.24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스티그마 팔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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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그마.....예수의 흔적, 그리스도신앙으로 살아감으로 인해 당하는 모든 고난의 표징....세상의 걸림돌, 거치는 것.......((믿는 모든 이들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혜, 주님의 선교의 완성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세우신 바, 진리, 방법이나 수단......세상이나 육에 속한 자들 관점과 입장에서는 때로 이해불가능하고 상식과 논리에 어긋나 보이기에 저급하고 열등하다 여겨서 배척하고 적대,조롱하며, 참그리스도인은 그들로부터 오해와 수치, 모욕,핍박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고전1:22, 233]*22.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3.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갈5:11]*11]*11.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롬9:32, 33]*32.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3.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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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avndalon(4625, 스칸달론)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 함정, 죄로 이끄는 유혹.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스칸달론은 '앞 뒤로 움직이는 것, 치는 것, 어떤 것에 가까이 가는 것, 덫을 놓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후에 '범죄, 처벌의 이유'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Secular pap).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스칸달론은 70인역본에서 약 20회 이상 나오며, 히브리어 모케쉬(미끼나 유혹물: 암 3:5; 비유적으로 사람을 파멸시키는 덫, 시 14:9; 삼상 18:21; 그를 죄짓게 하는 덫, 수 23:13; 삿 2:3; 삿 8:27; 시 106:36)와 미크숄(소경 앞의 장애물: 레 19:14; 비유적으로, 불행의 원인: 시 119:165; 또는 마음에 걸리는 것의 원인: 삼상 25:31)과 도피(과실, 흠, 결점, 비방하는 것, 시 50:20)와 케셀(어리석음, 시 49:13)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스칸달론은 신약성경에서 1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① 마 13:41에서는 판타 타 스칸달라("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를 "불법을 행하는 자들"과 동일시함으로 말미암아 의인화하는 것 같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종말론적인 경향을 지닌 구약성경의 말씀들을 인용하고 있다(습 1:3; 단 11:41). 이 스칸달라는 마귀에게서 난다(참조: 마 13:18 이하). 따라서 그들은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마 13:42). 저들은 디카이오이("의인들", 마 13:43), "천국의 아들들"(마 13:38)과 대조된다. 천국의 아들들의 존재는 인자에게 기원하며(마 13:37), 아버지 나라에 참여할 것이다(마 13:43). 스칸달라(대격, 복수)는 분명히 종말론적 악마의 모습으로 특징 지워지며, 그들 자신의 구원의 상실의 원인은 바로 그들 자신이다.

스칸달라는 죄짓도록 유혹함으로써 멸망을 자초하며, 악마나 그의 사자들과 더불어 함께 종말을 맞게 될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② 마 16:23에 따르면 베드로는 사단과 마찬가지로(참조: 마 4:10) 예수님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그에게 예정하신(마 4:22) 고난의 길을 피하도록 꾀하고자 시도함으로써, 예수님의 의인화된 시험(유혹)이 되었다.

여기에서 기초돌(고전 3:11)이면서, 거치는 반석(롬 9:33)이 되신 예수님 자신의 역할과 비슷한 역할을 부여 받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돌이 되었다. 베드로는 인간적인 생각을 하나님의 뜻에 대립시킴으로써, 사탄의 도구로 행동하였다. 십자가에 이르는 예수님의 길을 스칸달론으로 본 그 자신이 스칸달론, 즉 예수님을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나는 일을 하게 하는 의인화된 시험이 되었다.(참조: G. Stahlin).

③ 마 18:7,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교회 안에서 "소자", 아마도 '약한 자들'의 보호에 관한 문맥 안에서(참조: 마 18:6-10) 예수님은 '죄로 이끄는 시험'("실족케 하는 일") 때문에(마 18:7a)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난) 세상에 대하여 종말론적 경고("화가 있도다")를 발하신다. 비록 예수님은 그러한 '시험'("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음을 인정하시지만(마 18:7b) 결정적으로 그 '시험'을 초래하는 사람에게 종말론적 "화"를 선언하신다(마 18:7c). 스칸달론은 여기서 믿음을 저버리도록 하는 유혹(시험)에 대해 사용된다. 마 18:7과 유사한, 병행구 눅 17:1도 역시 그러한 시험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이 있게 하는 자는, 그를 이미 하나님의 심판 아래 두는 종말론적 "화"를 받는다.

「스칸달론은 영원한 파멸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매우 위험하다. 복음과 같이 스칸달론은 세상, 즉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며, 신적으로 불가피한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계획으로 통합된다. 왜냐하면 신앙에 대한 이러한 장애는 하나님을 위하거나 하나님을 반대하는 결단으로 이루어져 있는 역사의 망의 결정적인 가닥이기 때문이다.」(참조: G. Stahlin).

(b)  바울 서신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스칸달론으로 자주 언급한다.

① 그가 능변의 지혜로 복음을 전파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능력을 잃게 된다는 논제를 변증하는 과정에서(고전 1:17),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메시야에 대한 선포가 유대인에게는 스칸달론이 되어 종말론적 멸망으로 인도하고,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음(모리아, 고전 1:23)이 되어 역시 재앙을 가져옴을 보여준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십자가에 대한) 선포의 어리석음을(고전 1:21)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들 자신의 공적에 의거하지 않고(고전 1:22) (하나님에 의해) 부름받았음을 스스로 나타냄으로써- 십자가에 못박히신 메시야를,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자(고전 1:24; 참조: 고전 1:18b)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드는(고전 1:20d) 하나님의 지혜(고전 1:24)로 경험한다.

② 갈 5: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여기서 스칸달론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NASB)이나 '거리끼는 것'을 의미한다.

할례(율법)와 "십자가의 거치는 것"은 상충한다. 구원이 이르는 길로서 할례를 전하는 것은 십자가의 스칸달론을 제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에서 종말론적인 결정적인 능력을 제거하는 것이며, 모든 종류의 인간 스스로의 구원 방식에 대한 십자가 자체의 비판적 기능을 무력화 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참조: 고전 1:18-24).

③ 롬 9: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사 22:16; 사 8:14을 혼합 인용하는데, 이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 대신에(롬 9:30; 롬 9:32; 롬 9:33) 율법에 기초하여 의를 추구함으로서 이스라엘의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가 그 전면에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에게 믿음의 거부로 이끄는 "부딪히는 돌"(리도스 프로스콤마토스)인 이유요 '그들로 걸리게 하는 반석'("거치는 반석": 페트라 스칸달론)인 이유이다.

④ 벧전 2:8은 동일한 혼합 인용을 사용하여,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위한 그들의 결정을 굳게 유지하는 것을 강화하기 위하여 불신자들을 위협한다: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⑤ 롬 11:9,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여기서 시 68:23(70인역본)을 인용한다. 이 말씀에 따르면 희생 제사 제의는 유대인들에게 멸망의 '함정'(pitfall)이 될 것이다; "밥상"은 단순히 교제의 친교가 아니라(H. Schlier, Rom[HTKNT] 325) 오히려 이스라엘이 구원을 기대하는 대상을 가리킨다. 랍비 전승은 "밥상"을 속죄의 능력을 가진 제단으로 이해한다(참조: 또한 고전 10:21; 또 Muller 23-27).

⑥ 롬 14: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여기서 스칸달론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NASB)을 의미한다. 여기서 바울은 자기가 본래 참예하고 있는 "강한 자"에게(롬 14:14), 중언법 프로스콤마 헤 스칸달론("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또 롬 14:15 하반절(아폴륌마)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습관에 따라 먹음으로 말미암아 "약한" 자에게 믿음에 어떠한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로, 즉 걸려 넘어지게 하여 죄짓게 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훈계한다.

⑦ 롬 16:17에서도 스칸달론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여기서 스칸달라(복수)는 교회의 구성원들의 구원을 위태롭게 하는 거짓 교사들의 여러가지 사단의 활동이다. 이 거짓 교사들은 옳은 교훈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유혹하는 자들이다. 그러한 교사들은 또 교회의 일치와 존재 그 자체를 위협한다.

유사하게 계 2:14에서 스칸달론은 거짓 교훈의 맥락에서 믿음에 대해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올무")을 가리킨다.

⑧ 요일 2: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여기서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신자 안에는("빛의 영역 안에" 가 아님, contra R. Schnackenburg. 1-3 John [HTKNT] 115) '걸림이나 죄의 동기'가 없다. 즉 불신앙의 동기와, 따라서 구원의 상실의 동기가 없다.

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부적당함의 주제가 여기서 거론된다("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참조: 특히 요일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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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6: 12-18]*12.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유혹하는 교사들의 특징(갈 6:11-18)

지금까지 복음의 뼈대를 논함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 말씀에 일치하는 행동을 하도록 설득하기에 진력한 사도는 본문을 통하여 서신의 결론을 지으려는 태도를 보여 준다. 그리고 그는 이 사실을 그들에게 전하면서 그들에 대한 그의 존경의 특별한 표시를 친필로 큰 글자로 썼다. 그리고 이로써 그가 이 서신을 다른 서신들을 쓸 때 흔히 그렇게 하였듯이 필생을 시켜서 쓰게 하고 뒤에 그의 이름만 서명한 것이 아님을 그들에게 알린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그의 사랑이 너무나 컸으므로 또한 거짓 교사들이 저희에게 심어 준 나쁜 영향에서 저들을 정상화시키려는 그의 관심이 너무도 컸으므로 그는 이들 교사들이 참 모습을 그들에게 다시 보여 주고 그와 대조적으로 자신의 성품과 행위가 어떠한가 다시 보여 주고 그와 대조적으로 자신의 성품과 행위가 어떠한가를 설명하고 또 이들 교사들과 자기를 비교함으로 그들이 그가 가르친 교훈을 떠나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가를 보다 쉽게 인식시킬 수 있게 되기까지는 붓을 놓지 못함을 본문에서 보게 된다.

Ⅰ.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들을 유혹하려고 열심히 이들 교사들의 참 본성을 몇 가지로 세분하여 지시한다.

1. 그들은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다"(12절). 그들은 외적 신앙에 대단히 열심히 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참된 경건에 관하여서는 약간의 또는 거의 관심이 없으면서도 의식적인 율법의 예식들은 앞장 서서 지키는 척하였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지키도록 강요하였다. 사도가 그들에 대하여 다음 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스스로도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들이었다." 오만과 허영과 육적인 마음을 지닌 자들은 육체의 겉치레를 차리는 것밖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그들의 겉치례를 만족시킬 수 있는 신앙만으로 쉽게 만족해 한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을 거의 갖추지 못한 자들이 신앙을 과시하려고 가장 갈망하는 일은 흔히 있는 것이다.

2. 그들은 고난을 두려워하는 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고"이방 기독교인들에게 할례받을 것을 강요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행위는 율법에 대한 존경심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무사하게 잠드는 것과 그들의 세상적인 점들을 보존하기를 기꺼이 여겼고 신앙과 선할 양심이 난파되는 것은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목적하였던 것은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었고 그들 가운데서 자기들의 명성을 보존하는 일이었고 그들 가운데서 자기들의 명성을 보존하는 일이었고 바울과 다른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신실한 고백자들이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제시한 고난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3. 그들의 또 다른 특성은 그들이 편파적 인물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은 율법이 그들의 육적이고 이기적인 계획들을 돕는 한도를 넘어서까지 율법에 열심을 내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갈라디아의 교인들이 할례를 받으므로 "저희의 육체로 그들이 영광을 취하고 또 자기들이 그들을 자기들 편으로 만들었고 유대교로 개종하게 만들었다고" 자랑하고 싶어서였다. 그 증거로 그들은 갈라디아인들의 육체에 표시를 내고자 한 것이다. 이같이 그들은 신앙을 증진시키는 것처럼 하였으나 실상 신앙의 가장 큰적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편에 치우치는 것과 파당을 만드는 것 보다 신앙의 유익함을 파괴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Ⅱ. 한편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성품과 행실을 전하여 준다. 또는 그가 본문에서 자신의 믿음과 소망과 기쁨을 고백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특별히,

1. 그는 그의 으뜸가는 영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금하셨느니라"고 본문에서 말한다(14절) (역주: 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의미하는 것은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다. 또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구세주에 의한 구원의 교의를 의미한다. 이것이야말로 유대인들에게는 거치는 돌이요 희랍인들에게서는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유대적인 교사들도 비록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유대인들에게 순응하여 이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겼고 유대인들로부터의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다 모세의 율법 준수를 구원에 필요한 것으로 혼합시켰다. 그러나 바울은 이들과는 매우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불쾌히 생각하거나 부끄워하거나 그것을 소유하기를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영광스럽게 여겼다. 확실히 그는 그 밖의 것은 아무 것도 영광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십자가와 나란히 어떤 대상을 세워 놓고 그의 존경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을 거절하였고 대단히 혐오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 금하셨느니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의 모든 소망의 근거였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사도로서 전하고자 결심한 도리였다. 그가 십자가를 굳게 의지함으로 어떠한 시련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 시련을 감당할 뿐만 아니라 그 시련 안에서 오히려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참된 기독교인에게는 제일의 영광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십자가를 영광스럽게 여겨야 할 가장 큰 이유는 십자가에 우리의 모든 기쁨과 소망이 걸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기억하자.

2. 그는 세상에 대하여는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의하여 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하여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세상을 단념함으로 십자가의 능력과 효력을 경험하였다. 이것이 그가 십자가를 영광스럽게 여기는 주된 이유였다. 거짓 교사들은 세상적 성품을 지닌 인간들로서 그들의 주된 관심은 세속적인 데에 있었고 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목적으로 신앙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기질의 인물이었다. 그는 세상의 추파와 또한 노여움을 초월하였다.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는 죽은 사람처럼 무관심하였다. 이러한 마음의 자세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고자 애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를 성취하는 가장 좋은 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가까이 사귀는 것이다. 우리가 그를 높이 존경하면 할수록 우리는 세상을 하찮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우리의 사랑하는 구세주의 고난을 생각할수록 세상에 대한 사랑은 점차 사라질 것이다.

3. 그는 그의 신앙을 이해 관계를 따라 어떤 또는 저편에 치우치지 않고 건전한 기독교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하였다(15절). 당시에 기독교 가운데는 불행스러운 분열이 있었다. 할례와 무할례가 서로 갈리워지는 명목이 되었다(2:9, 12), 왜냐하면 유대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할례자 또는 할례를 받은 자들이라고 불리워졌기 때문이었다. 거짓 교사들은 할례에 대하여 매우 열성적이다. 그들은 할례가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라고까지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갖은 수단을 다 써서 이방 출신 그리스도인들을 할례를 받게 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있어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한결 더 열심이었다. 다른 사도들은 유대인들 가운데서는 할례받는 것을 묵인하였지만 결코 이방인들에게까지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거짓 교사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것을 바울은 하찮은 것으로 여겼다. 그는 할례를 이방의 개종자들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의 장래를 위하여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열성적으로 할례를 반대하였다. 그는 단순한 할례냐 무할례냐 하는 문제, 또는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이 유대인이냐 이방인이야 그들이 할례의 사용을 지지하냐 반대하느냐 하는 문제는 할례가 신앙의 중심적 위치로 차지하지 않는한 무시해도 좋은 문제들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즉 기독교 시대에서는 하나님께 사람이 용납되는데 "할례냐 무할례가 소용이 없고 오직 새로운 피조물이냐 아니냐"에 문제가 달린 것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본문에서 그는 할례가 참된 신앙은 할례를 받았느냐 무할례자이냐, 하는 데 있는 것도 또는 우리가 이 교파에 속하였느냐 저 교파에 속하였느냐 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느냐 하는 데 있는 문제다. 즉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느냐 또는 새로운 얼굴로 단장하였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영이 새로워졌느냐 또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우리 가운데 형성되었느냐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제일 관심을 가지시는 문제였다. 그러므로 사도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 만일 우리가 본문을 다른 곳의 말씀들과 비교한다면 우리를 하나님께 가장 용납되게 하며 그러기에 우리가 주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보다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다. 본문에 보면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라"고 하였고 5장 6절에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뿐이라" 하였으며 고린도전서 7장 19절에는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고 하였다. 이 말씀들은 통하여 나타나는 것은 참된 신앙의 본질이란 주 예수를 믿는 것과 하나님에게 헌신하는 생활을 하기 위하여 마음을 주며, 또 할 수 있게 하는 심령의 변화라고 하겠다. 이러한 내적이요, 생명이요, 실제적인 신앙이 없을 때는 외적 고백이나 특별한 명칭이 우리를 세워 줄 수 없으며 또 우리를 하나님에게 천거할 만한 힘도 없는 것이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이 참된 신앙을 자신이 경험하며 다른 사람들에게서 증진되어지기를 바란다면 이로써 그들이 자신의 종래의 입장(할례)을 포기하게 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전에 하였던 것처럼 자신의 종래의 입장(할례)을 강조하는 일은 말았어야 옳은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신앙의 역점을 하나님이 정하신 것, 즉 우리로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것들에 두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는 사도가 그러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본을 따르는 것이 지혜롭고 현명한 처사인 것이다. 사도는 신앙의 참된 관심의 대상이 무엇이며 자기가 중점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단순히 공허한 명칭이나 내용없는 고백이 아니라. 바르게 또 구원받을 수 있게 변화되는 것임을 보여 준 후 16절에서 이 원칙에 따라 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원한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본문에서 그가 말한 규례는 넓은 의미에서 신앙과 생활의 완전하고 흠 없는 규례인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또는 복음의 교훈이라고 볼 수도 있겠고 아니면 이 규례란 말은 그가 조금 전에 말하였던 새로운 피조물에 관한 말씀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 규례를 따라 행하는 사람들에게 그가 빈 축복 또는 그가 그들에게 준 소망과 전망은(소망과 전망이라고 한 것은 그의 본문을 표현한 형식이 기원으로도 또한 약속으로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강과 긍휼"이었다. 평강이라 함은 하나님과 또한 자신의 양심의 평강이요, 그들이 이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이 세상의 위로를 말한다. 긍휼이라 함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사랑과 호의로써 다른 모든 축복의 근원 또는 근거를 말하는 것이다. 이 평강과 긍휼은 그들 안에 이루어진 은혜로운 변화의 근거 위에 세워진다. 그들이 새로운 피조물로서 행동하고 삶과 소망을 복음의 규례에 의지하고, 또 다스림을 받는다면 그들을 긍휼과 평강을 확실한 것으로 신뢰할 수가 있다. 이 축복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몫이라고 그는 선언한다. 그가 이 말을 통하여 의미하는 것은 그들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말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들이야말로 참된 이스라엘 족속인 것이다. 그들이 비록 혈통으로는 이스라엘 참된 이스라엘 족속인 것이다. 그들이 비록 혈통으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아니더라도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 된 것이다. 이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상속자로서 그와 함께 똑같은 약속의 상속자가 되었고 따라서 본문에서 말씀되고 있는 평강과 긍휼을 얻을 자격을 부여받은 것이다. 유대인들과 유대적인 교사들은 이러한 축복을 할례받은 자들과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만 국한시켰다. 그러나 반대로 사도의 복음의 규례대로 행하는 사람들 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행하는 사람들 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선언한다. 즉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은 그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할례받은 자들이 아니라 복음의 규례대로 행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복음의 규례를 행하는 것이 평강과 긍휼을 얻는 참된 길인 것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규례대로 행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즉 그들 스스로 고안한 규례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그들에게 정하신 규례대로 행하는 사람이다.

(2) 이 규례대로 행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아직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3) 그러나 이 규례대로 살려고 신실하게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은 평강과 긍휼이 그들에게 주어질 것을 확신해도 좋다는 사실이다. 복음의 규례를 행하는 것이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또한 다른 사람들과 평강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또한 우리는 현재에 하나님의 돌보심을 확신할 수 있듯이 장차 그로부터 긍휼을 입을 것을 확신해야 할 것이다.

4. 그는 그리스도와 기독교를 위하여 박해도 기꺼이 감수하고자 한다고 하였다(17절). 그리스도의 십자가 또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구원자에 의한 구원의 교리가 그가 주로 영광스럽게 생각한 것이었듯이 이제 그는 이 진리를 배반한다거나 이 진리가 부식되는 것을 참고 견디기 보다는 온갖 곤경도 기꺼이 감수하고자 한다. 우리가 본 것처럼(12절) 거짓 교사들은 박해를 두려워하였다. 이것이 그들로 할례에 열심을 내게 한 큰 이유였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박해는 관심 밖이었다. 그는 자기가 직면한 어떠한 종류의 상해 앞에서도 동요되지 아니하였고 "그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그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였다"(행 20:24). 그는 벌써 그리스도를 인하여 많은 상처를 입었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몸에 주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하였다. 곧 그의 예수에 대한 변함없는 따름과 예수에게 받은 복음의 교훈 때문에 원수들의 박해를 받아 생긴 상흔이었다. 이로 보아 그가 복음의 진리와 중요함을 확고하게 믿었고, 또 거짓 교사들이 그에 대하여 잘못 선전하였듯이 그를 할례 예찬자라고 하기에는 전혀 그가 할례와 무관한 것이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그는 사도로서의 그의 권위에 적절한 또한 그가 그들에 대하여 지니고 있는 깊은 관심에 합당한 온화함과 분노를 띠고 그 누구도 그에 가르친 교훈이나 권위를 반박함으로 또는 그에게 행한 것과 같은 비난과 중상에 의하여 그를 괴롭힐 수 없음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가 말한 것과 그가 고통당한 것으로부터 그들의 옳지 못함과 악의가 드러났고 또한 그들을 지지하거나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매우 부당한 것임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사람들이 진리를 따르려면 이 진리에 완전히 매료되어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고난받는 것도 기꺼워할 정도에까지 이르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2) 자기들이 신앙 고백할 수도 없고 뿐만 아니라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도 없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떠맡기려 하는 태도는 부당하다는 사실이다.

Ⅲ.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를 굳건하게 하고 정상으로 회복시키기 위하여 기록하고자 작정하였던 내용을 다 기록한 후 그의 사도적 직권에 의한 축복을 함으로 본 서신을 끝맺는다(18절). 그는 그들을 그의 형제들이라고 부른다. 이로써 그는 그가 그들에게서 받았던 부당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하여 그가 품고 있었던 부드러운 사랑과 위대한 겸손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라는 매우 진지하고 사랑에 넘치는 기도로써 작별 인사를 대신한다. 매우 진지하고 사랑에 넘치는 기도로써 작별 인사를 대신한다. 이 인사는 로마서 16장 20, 40절, 고린도전서 16장 23절에서 볼 수 있듯이 사도의 관례적인 송별 기원이다. 이 기원을 통하여 그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그 특별한 역사(役事)로 그리고 지각할 수 있는 증거로 맛본 것과, 그로부터 그들이 도중에 인도되어짐을 받고 그 증거로 맛본 것과, 그로부터 그들이 도중에 인도되어짐을 받고 그리고  그들의 임무 수행함에 있어서 그들을 강건케 할 수 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정로를 걷게 하며 인생의 모든 시련과 죽음에 직면하면서도 용기와 위로를 줄 수 있는 모든 은혜를 받을 것을 기원하였다. 이러한 은혜를 본문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부른 것은 합당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만이 은혜를 구입한 유일한 분이요, 또 지정된 은혜의 분배자이시기 때문이다. 이를 갈라디아 교회들이 자신들에게는 위험스러운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대단히 불명예스러운 견해와 행위에 이끌려 갔으므로 이러한 은혜를 몰수당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사도는 그들에 대한 지극한 관심으로 또한 이 은혜가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았으므로 그들을 위하여 간절하게 은혜를 갈망한다. 진실로 이 은혜가 그들의 영혼에 함께 해야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 은혜의 영향력을 그들의 영혼에 연속적으로 경험해야 할 것이며, 그 은혜를 통하여 신앙 생활을 함에 있어서 진실하고 올바르게 할 마음을 공급받아야 하겠고 또 그러한 능력을 공급받아야 했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하여 행복하게 된 것 이상의 것을 바랄 필요는 없다. 사도는 이들 교인들을 위하여 이 은혜를 간구하였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가 얻기 위하여 주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그리고 갈라디아 교인들과 우리를 그 은혜에 대한 소망을 갖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그는 "아멘"으로 본 서신을 끝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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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산업혁명 인재상

하워드 가드너(하버드대학교 교수) ‘미래 마인드’----- 미래 사회에 핵심 인재는 다섯 가지 마음을 갖춘 인물.

== 특정학문이나 기술 등에 통달한 ‘훈련 마인드’, 

== 다양한 정보 속에서 필요한 정보를 선택하고 이를 가공할 수 있는 ‘통합 마인드’, 

== 새로운 문제를 찾아내고 해결책을 만들어내는 ‘창조 마인드’, 

== 다양한 구성원들 사이에서 조화와 배려를 실천하는 ‘존경 마인드’ 

== 조직과 생활에서 도덕성을 실천하는 ‘윤리 마인드’. 

--------앞으로는 딱딱한 기술과 정보를 습득하는 지적 능력 보다 비인지 분야에서의 정서적인 역량이 중요해진다는 뜻이었다.

===[도전정신-->주인의식-->전문성--->융복합능력--->창의성--->도덕성]====

***도덕성(인간미-정직-신뢰-무흠무결-원칙 준수...기업가정신과 성취동기, 자아실현욕구를 기반)

***창의성(상상력-창의/독창성-인식전환/가치창출)

***실천능력/도전정신/실험정신(문제점 발견/해결능력...개척/도전/과감한 시도/위험감수/변화선도)

***전문성(컴퓨팅사고력-지능정보기술력-특수분야 다양한 자원 활용능력)

***융복합능력/전문성바탕(최고-전문-IT활용능력-자기개발-프로-실력-탁월성)

***협업능력(협력-동료애-배려-팀웍-공동체의식//열정-주인의식) 

***소통력/커뮤니케이션(글로벌 마인드/역량-열린사고-국제적 소양-어학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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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C(Creativity창의성, Critical Thinking/Debate비판능력, Comm Skill소통능력, Collaboration협업능력) + 4[ Convergence/Fusion융복합능력 + ICT정보통신이용능력 +challenge실행능력 +Morality도덕성]

도전합창실토소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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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개요)

이 장(章)(5장)과 다음에 오는 두 장(6, 7장)은 산 위에서 행해진 저 유명한 산상 설교이다. 이 설교는 우리 주님이 복음서 가운데서 행하신 설교 중 가장 길고 완전히 연속된 설교이다. 산상 설교는 실제적인 설교이다. 이곳에는 기독교인이 믿어야 할 신조에 대하여 많이 취급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행해야 될 사항에 대해 전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설교를 이런 것으로 시작하였었다. 왜냐하면 사람이 그의 뜻을 행하려면 그 교훈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1, 2절에서 이 설교가 행해진 상황이 설명된 후, 곧 이어 설교가 나오는데 그 의도는 우리의 머리를 관념으로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을 지도하고 통제하기 위함이다.

Ⅰ. 그는 축복을 목표(end)로서 제안하며, 또한 가히 역설이라고 불리워질 수 있는 팔복(3-12)에서, 축복 받을 자격이 있는 자들(헛된 세상의 견해와는 매우 다름)의 특성을 제시한다.

Ⅱ. 그는 그 방법(way)으로서 의무를 명령하고 있으며, 그 의무의 일정한 규칙을 우리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1. 그들의 신분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도록 명령하고 있다 ─ 그들은 땅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다(13-16).

2. 그들이 해야 할 것을 이해하도록 명령하고 있다 ─ 그들은 도덕법에 의해 지배되는 자들이다.

(1) 그는 율법을 일반적으로 시인하고, 그것을 우리의 규율로 삼을 것을 추천하고 있다(17-20).

(2) 그는 여러 가지 오류를 구체적으로 수정하고, 나아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그릇되게 해석하였던 강퍅하고 조잡한 부패(악습)를 개혁하고 있다. 또한 반드시 설명되거나 주장되어야 했던 여러 부분들에 대해 확실한 해석을 내리고 있다(20). 특별히 여기에는,

(1) 살인을 급하고 있는 제6계명에 대한 설명과(21-26),

(2) 간음을 금하는 제7계명에 대한 설명과(27-32),

(3) 제3계명에 대한 설명과(33-37),

(4) 복수의 법에 대한 설명(38-42),

(5) 형제 사랑의 법에 대한 설명(43-48)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율법이 영적인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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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마 5:1-2)

여기에는 이 설교의 일반적인 개요가 기록되어 있다.

Ⅰ. "설교자"는 설교자들의 왕이시오, 그의 교회의 위대한 예언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이셨으니, 그는 "세상의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 예언자들과 세례 요한은 "능력 있게" 설교를 하였으나, 그리스도는 "이들을 훨씬 능가하였다." 그는 영원하신 지혜자로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으며," 그의 뜻을 완전히 아셨다(요 1:18). 우리는 앞 장 바로 끝 부분에서 볼 수 있었던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병 고치심은 이 산상 설교를 위해 준비한 것이며, 또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신적 능력과 선을 행하신 자로부터 가르침을 받도록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아마도 이 설교는 그가 갈릴리에서 두루 말씀하셨던 설교들을 요약하거나 열거한 것인 듯 하다. 그의 설교 본문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다. 이 설교는 그 본문의 전반부로서 판단과 실천에서 "회개하거나 개혁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 준다. 그는 여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말 3:7)라는 질문에 답하여, "어떻게 할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그는 이 본문의 후반부에 대하여 설교하였는데, 그때에 그는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천국이 무엇과 같은가를(13:)보여 주었다.

Ⅱ. 이 산상 설교를 하신 "장소"는 갈릴리에 있는 산이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우리 주 예수님은 잘 갖추어진 곳에서 설교하시지 못하였다. 즉 그에게는 설교하기에 편리한 장소가 없었으며, 더욱이 "그의 머리를 둘 곳도 없으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온갖 지위와 명예, 안락을 누렸지만 그들은 율법을 그릇되게 와전시켰다. 그러나 진리의 위대한 스승이신 우리 주님은 광야에로 내몰아졌으며, "산"보다 더 좋은 강단을 찾을 수 없었다. 이 산은 "거룩한 산"이나 "시온 산"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평범한 산이었다. 이러한 산에서 설교하신 것은 구약의 율법 시대에서와 같이 어떤 장소만이 특별히 거룩하지는 않으며, 만일 그것이 적절하고 편리한 곳이라면 "어디서나" 기도하고 전파해야만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해석하셨던 이 설교를 산에서 하신 것은 율법이 "산"에서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것은 기독교 율법의 엄숙한 선포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차이는 있다. 즉 "율법이 주어졌을 때" 주님은 "산"위에 "내려 오셨으나," 지금은 "올라 가셨다." 그 때에는 "천둥과 번개로" 말씀하셨으나 지금은 고요하고 조용한 소리로 말씀하셨다. 그 때에는 사람들이 멀리 떨어져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지금은 가까이 오도록 초청을 받고 있다. 아, 이 얼마나 축복스러운 변화인가! 만일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이 확실히 그의 영광이라면 복음의 영광은 모든 것을 능가하는 영광이다. 왜냐하면 "은혜와 진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기" 때문이다(고후 3:7; 히 12:16 등). "그들이 열국 백성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 갈릴리의 두 지파인 스볼론과 잇사갈에 대해 예언되었으며, 또한 우리는 이 "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리는 법을 배우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 산은 "여호와의 산"이었고 여기에서 그는 우리에게 "그의 길을 가르치셨다."

Ⅲ. "청중"은 그에게 나아왔던 제자들이었다. 마가복음 31장 3절 누가복음 6장 1절에 보면 그의 부르심을 받고 나아온 제자들이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병만을 고치려고 그를 따랐던 사람들과는 달리 사랑하는 마음과 배우려는 열의를 가지고 그를 따랐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기꺼이 가르침을 받으려고 했고(그는 온유한 자에게 그의 길을 가르친 것이다), 또한 그가 가르치신 것(이것은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다)을 알려고 했고 또한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 일들에 대해 분명하고 확실한 지식을 가져야만 했다. 이 설교에 기술된 의무들은 천국의 은전(恩典)을 받으려는 희망을 가지고 "그곳에 들어가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 성실히 수행되었다. 그러나 비록 이 설교가 제자들에게 행해진 것이라 할지라도 역시 "많은 무리들"도 청종하였다. 왜냐하면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랐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시내 산에서와 같이"(출 19:12) 백성들을 멀리 떨어지게 했던 일은 이 "산"에서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에게 말씀드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가 이 설교를 말씀하신 것은 "무리들"을 목표로 삼았다. 그가 기적들을 행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무리들이 그에게로 모여들었을 때 그는 그렇게 많은 무리들에게 가르칠 절호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많은 물고기가 있는 곳에 얼마를 잡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복음의 그물을 던지는 것은 신실한 교역자들에게 좋은 격려가 된다. "무리들"의 광경은 설교자로 하여금 생기를 북돋아 주는데 이것은 그 자신이 칭찬을 얻으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을 주려는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라야 한다.

Ⅳ. 그의 설교의 "엄숙성"은 "앉으시니"란 말에 암시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종종 이야기체로 많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설교는 고정된 설교였다(카디산토스 아우투, 그가 앉으시니). 그는 청중들이 가장 잘 들을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하였다. 그는 심판자가 입법자처럼 앉으셨다. 이것은 진지하고 침착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이 언급되고 청종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가 "앉으신"것은 "성경 말씀이 성취되려고 하기 위함이며"(말 3:3), "그는 연단사(금이나 은 등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처럼 앉아서 "찌꺼기, 즉 레위의 후손들의 부패한 교훈들을 정결케 하실 것이다. "그는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다"(시 9:4). 왜냐하면 "그가 말씀하셨던 말씀이 우리를 심판할 것이기" 때문이다.

"입을 열어"란 구절은 욥기 3장 1절에서와 같이 히브리적인 완곡어법(婉曲語法)에 지니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이 설교의 엄숙성을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즉 모인 군중에 너무도 많았으므로 그는 목청을 돋우어 평상시보다 더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그의 종들과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으며, "그들의 입을 여셨다"(겔 3:27; 24:27; 33:22). 그러나 이제 그는 그 자신이 직접 "입을 열어," 자유스럽게 "권세 있는 자와 같이" 말씀하셨다. 고대 교부들 중의 한 사람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즉 그리스도는 "입을 여시지 않고"가르치신 경우가 허다하다. 다시 말하면 그의 거룩하고 모범이 되는 생활로 "가르치신 것이다." 아니, 그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함으로써" 가르치셨으나 이제는 "그의 입을 열고 가르치심으로써" 성경이 말씀한 예언이 이루어졌던 것이다(잠 8:1, 2, 6). 지혜가 부르짖지 아니하느냐?─높은 곳의 꼭대기에서 부르짖지 아니하느냐? 또한 "그의 입술을 여는 것은 바른 일들이 될 것이다." 그는 약속을 따라서 그들을 가르치셨으니(사 54:13),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는 "학자의 혀"와(사 50:4) "주 여호와의 신"을 가지셨다(사 61:1). "그가 그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그들이 마땅히 미워해야 할 악과 그들이 마땅히 거처해야 할 선이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사색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성향과 우리의 대화의 경향을 조절하기 위한 것이다. 복음의 때는 개혁(개심)의 때이다(히 9:10). 복음으로 우리는 개심 되어야 하며, 선하고 나아져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진리"는 "경건함에 속한 진리"이다(딛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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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마 5:3-12)

그리스도는 그의 설교를 축복의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우대하신 대제사장"으로서, "축복된 멜기세덱"으로서,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축복 받을" 자로서(창 12:3), "우리를 축복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기(행 3:26)" 때문이다. 그는 우리를 위해 축복을 마련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축복을 부어 주시고 선언하시기 위해 오셨으며, 또한 여기에서 그는 그것을 "권세 있는 자와 같이," "축복(심지어 영원한 생명까지도)을 명령하실 수 있는" 자와 같이 하시며, 그 축복은 선한 사람에게 거듭 약속되었다. 그가 그들에게 행복을 선포하신 사실이 그들을 실제로 행복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가 축복하신 자들은 참으로 복되기 때문이다. 구약은 저주로 끝마쳤으나(말 4:6), 복음은 축복으로 시작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축복을 물려받기 위하여 지금까지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여기에서 진술하고 있는 각(各) 축복은 이중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

첫째, 참으로 행복한 자로 간주되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들의 특성은 무엇인가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둘째, 그런 특성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진 약속된 그 참 행복은 무엇인가를 보이고 있다. 그것의 실현은 그들을 참으로 행복하게 만들 것이다.

1. 이것은 맹목적이고 육욕적인 세상의 파멸적인 오해들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축복은 사람들이 얻으려고 갈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시 4:6).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목적을 오해하고 행복에 대해 그릇된 개념을 품고 있다. 그 때문에 그들이 잘못된 길에 빠지는 것은 그리 이상할 것이 없다(당연하다). 즉 그들은 스스로 미혹된 길로 들어서며, 비참을 자초하는 것이다. 흔히 "복된 사람"이란 세상에서 부요하고 위대하고 영예스러운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환락 속에서 나날을 보내며 쾌락 속에서 해를 넘기는 자들을 "복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살찐 것을 먹고 달콤한 것을 마시며 고자세로 으시대거나 머리를 조아려 경배하는 사람을 "복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의도나 목적, 목표도 이와 같다. 그들은 "탐리하는 자를 축복하며"(시 10:3), 그들은 "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이 근본적인 오류를 고치시고 새로운 전제를 제시하고 축복과 복된 사람(이것은 편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역설적으로 보이며 구원의 조명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진리와 확실성의 규율과 교훈─이것으로 우리는 머지않아 심판을 받아야 한다─이 된다)에 대한 전혀 다른 개념을 우리들에게 제시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것이 그리스도의 교훈의 시작이 된다면 기독자의 행위의 시작은 그의 행복의 척도를 그러한 격언에 취하는 것이 되어야만 하며 이에 따라서 그의 행동을 지도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

2. 이것은 그의 복음이 은사와 은혜, 안락과 유용성에서 탁월하게 뛰어난 자들만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시킴으로써 복음을 받는 연약하고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 실망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이 하나님께 대하여 올바른자,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그 나라의 영예와 특권에서 보면 행복하였다.

3. 그것은 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초대하고 그의 법을 그들의 마음속에 새기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축복을 사람들이 해산할 마지막 무렵에 말씀하시지 않고 그가 더 계속하려는 설교에 대해 그들로 하여금 준비케 하려고 맨 처음에 말씀하신 것은, 율법의 축복과 저주가 선포되었던 그리심산과 에발산(신 27:12 등)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기억하게 함이다. "거기에서는" 저주가 표현되었고 축복은 암시되었으나, "여기에서는" 축복이 표현되었고 저주는 암시되었다. 이 양자에서 "생명과 죽음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 그러나 율법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죽음의 지배로 나타났으나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좋은 것만을 소유하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내는 생명의 섭리로 나타나 있다. 또한 그의 손으로 행하신(마 4:23, 24) 은혜스러운 치료를 보고 이제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스러운 말씀"을 들었던 자들은 그가 시종일관하였고 사랑과 친절을 베풀었다고 말할 것이다.

4.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협정에 대한 항목들을 설정하고 종합하기 위한 것이다. 신적 계시의 범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과 우리가 그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한다. 여기에 설명된 것보다 더 적은 말로 완전히 설명된 곳은 하나도 없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믿어야 될 복음이다. 이 특성들과 일치되지 않거나 이 약속에 의거하지 않은 것은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행복으로 인도하는 길이 여기에 알려져 있으며 "큰길"(대로, 사 35:8)을 이루고 있다. 또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이것은, 우리가 그에게서, 그에 의해서, 씨와 열매, 곧 요구된 은혜와 약속된 영광을 모두 받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의 손을 통합이 없이는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사이를 아무 것도 지나갈 수 없다.

우리 주님은 여기에서 복된 사람이 가지는 여덟 가지 특성을 우리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기독자의 주요한 은혜들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들 각 부분은 현재의 축복을 선포하고 있다. 즉 "~자는 복이 있나니"이다. 또한 각 부분에는 미래적인 축복이 약속되어 있으며, 이것은 위탁된 은혜와 의무의 특질을 알맞게 하기 위하여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러면 과연 복 있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그 대답은 다음과 같다.

Ⅰ. "심령이 가난자 자"는 복이 있다(3절). 겁 많은 심령(poorspiritedness, 역주:심령이 가난한 - poor in spirit와 비슷한 단어로 구성되어 있음)은 사람들을 축복 받는 것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므로 죄와 덫 ─ 비겁과 천박한 두려움, 정욕에 대한 자발적인 굴복이 된다. 그러2나 여기서의 심령의 가난은 영혼의 은혜스로운 성벽이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지기 위하여 자신을 비우게 되는 것이다.

1. "심령이 가난한"이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다면 기꺼이 세상적인 부귀를 비울 수 있는 완전히 가난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이 낮은 조건일 때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조건에 적응시키는 것이다. 세상에는 가난하지만 영적으로는 교만하고 불평하며 운명을 탓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빈곤에 자신을 적응시켜야 하며, "비천에 처할 줄도"(빌 4:12) 알아야만 한다. 우리에게 가난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에 만족해야 하며 그 불편은 계속적으로 참아야 하며,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해야 하며, 그것을 최선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 그것은 모든 세상적인 부귀에 무관심하는 것이며, 우리의 마음을 그것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번영하는 상태에서 우리에게 닥쳐올 손실들과 실망을 즐겁게 참는 것이다. 그것은 특별히 가난을 서약하지만 국가들의 부귀를 독점하는 로마 교회에 있는 자들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제공한 것을 팽개쳐 버림으로써 교만과 위선으로 자신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세상에서는 부요하다고 할지라도 "심령은 가난"해야만 하며, 즉 가난한자의 위치에까지 낮아져서 그들의 연약함을 스스로 체험하면서 그들을 동정해야만 한다. 우리는 가난을 기대하고 준비해야만 한다. 과도하게 두려워하거나 그것을 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가난이 특별히 선한 양심을 지키기 위해 우리들에게 임할 때 우리는 그것을 환영해야만 한다(히 10:34). 욥은 "심령이 가난한 자"였으므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취해갔을 때"도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2. "심령이 가난한"이란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 겸손하고 비천한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지, 무엇을 가지든지, 하든지 자신을 비천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구약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는 자나 교만한 자와는 반대되는 겸손하고 자신을 부정하는 사람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의견으로 어린아이와 같으며 연약하고 어리석고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것이다(18:4; 19:14).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했으나 그들은 자신이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였다(계 3:17). 즉 그들은 "정신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심령은 부요"하였던 것이다. 한편 바울은 은사와 은혜면에서 있어서 매우 탁월하여 "정신적으로는" 부요하였지만 "심령은 가난하였으며," 자신을 "사도들 중 가장 작은 자"나 모든 성도들 중 제일 못난 자, 그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자로 여겼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지극히 멸시하는 자로 보며, 남을 가치 있게 여기며, 자신을 그들보다 낮은 자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선을 행하기에는 값싸고 비열하고 보잘 것 없는 자로 기꺼이 자처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위대하시며 우리는 비천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며, 그는 거룩하시고 우리는 죄스러우며 그는 모든 것이고 우리는 하등의 보잘 것 없는, 아무 것도 아닌 자로 여기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그 앞에서, 그의 능력있는 손 아래에서 겸손히 낮추는 것이다.

3. "심령이 가난한"이란 우리 자신의 의로움과 능력은 결코 신뢰하지 않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창의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의지할 수 있으며, 우리의 성화를 위해 그리스도의 영광과 은혜를 의존할 수 있는 것이다. 세리가 가난한 죄인에게 긍휼을 부르짖었던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곧 이 "심령의 가난"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가난하다고 불러야만 한다. 왜냐하면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부족하며, 언제나 하나님의 문에서 구걸하며, 언제나 그의 집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1) 이 심령의 가난은 기독자의 은혜들 중에서 맨 처음에 두어졌다. 철학자들은 겸손(비천)을 그들 중의 덕 중의 하나로 취급하지도 않았지만 그리스도는 그것을 맨 처음에 두고 있다.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그의 학교에서 처음으로 배우는 과목이며, 심령의 가난은 첫째 복이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다. 그 밖의 모든 축복들의 기초는 겸손(비천)에 놓여져 있다. 높이 세우려는 자는 낮게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영혼으로 들어가는 복음적 은혜를 위한 맨 처음의 두드러진 준비이다. 그것은 씨를 받아드리는 데 알맞는 토양을 마련하는 것이다. "피곤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이며,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쉼을 얻게 될 것이다.

(2) 그들은 "복이 있다." 그들은 현재 이 세상에서도 그러하다. 하나님은 그들을 은혜 스럽게 여기신다. 그들은 그의 작은 자이며 그들의 천사들을 가지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더욱 더 은혜를 주시며, 그들은 최고의 안전한 생을 영위하며 편안함을 가지며, 그 어떤 것도 그들을 잘못되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교만한 영혼은 언제나 불안하다.

(3)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라." "은혜"의 왕국은 이와 같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만이 "가난한 자의 모임"(시 74:19)이라고 불리우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원이 되기에 적합하다. "영광"의 왕국은 그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이와 같이 그들 자신에 겸손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낮추실 때 그에게 응하는 자는 이와 같이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 크고 높은 심령들은 "세상의 왕국"의 영광을 취하지만 겸손하고 온유하고 순종하는 영혼들은 "하늘의 왕국"을 얻는다. 비록 부자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부귀를 가지고 선을 베푸는 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하늘 나라"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장차 올 때를 위하여" 좋은 담보물을 이와 같이 쌓아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행을 할 수 있는 자금을 가지지 않는 가난한 자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물론 동일한 행복이 유용하게 부요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충분히 가난한 자들에게 약속되어 있다. 만일 내가 만족하게 그를 위하여 돈을 쓸 수 없으며 부족하다면 그것도 보상받게 될 것이다. 또한 그때에 우리는 좋은 주인을 섬기지 않는가?

Ⅱ.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4절). 이것은 또 다른 이상한 축복으로서 앞의 축복에 적절히 뒤따르고 있다. 가난한 자는 애통하는 데 익숙해 있으며, 가난한 자는 은혜스럽게 애통한다. 우리는 자칫하면 "즐거운 자"가 복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위대한 애통자이셨던 그리스도는 "애통하는 자"가 "복"되다고 말씀하신다. 축복과는 적대가 되는 애통, 즉 죄악스러운 애통도 있다. 그것은 "세상의 슬픔"이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사건에 대한 절망적인 울적함과 세속적인 사건에 대한 슬픈 고뇌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축복에 도움이 되는 이른바 자연스런 애통이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역사 한다. 그리고 그 축복은 우리의 애통의 원인인 그 고난을 성화 시켜 준다. 그러나 또한 은혜스러운 애통이 있는데, 이것은 축복을 받기에 적합한 것으로서 습성적인 진지함이며, 환락을 억제하는 마음, 실제적인 슬픔이다.

1. 우리 자신의 죄를 위한 참회의 애통. 이것은 "경건한 슬픔," 하나님께 속한 근심이며, 그리스도를 염두에 두고 죄에 대해 슬퍼하는 것이다(슥 12:10). 그들은 하나님의 애통하는 자들로서 회개의 생활을 하며 그들의 성품의 타락성과 실제적인 많은 범죄들과 자신들에게서 하나님이 물러서 버린 것에 대하여 애통한다. 또한 타인의 죄에 대해 애통하며, "그들의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운다"(겔 9:4).

2. 타인의 고통을 위해 동정하는 애통.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자들의 애통은 "경건한 대회를 인하여," "시온의 파괴를 인하여" 슬퍼하는 것이다(습 3:18; 시 137:1). 특히 그들은 "예루살렘"을 보면서 우신 그리스도와 같이 멸망하는 영혼들에 대해 동정심을 가지고 바라보며 그들에 대해 "애곡하는" 것이다.

이제 이 은혜스러운 애통자들은,

(1) "복이 있다." 헛되고 죄스러운 "웃음"을 짖지만 그 마음은 슬플 수 있는 것처럼 은혜스러운 애통은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진정한 즐거움, 은밀한 만족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복이 있는"것은 "슬픔의 사람"이었으며 종종 우셨다는 것 이외에는 웃으셨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그리스도와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헛된 환락을 수반하는 많은 유혹들에 대항할 수 있는 무장을 갖추고 있으며, 도장이 찍어진 용서와 정해진 평화의 위로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

(2) "저희는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비록 그들이 즉시 위로를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위로를 위하여 많은 준비가 되어 있다. 영광이 그들을 위해 심기워진다. 확실히 그들은 나사로(눅 16:25)와 같이 하늘에서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늘의 행복은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위로 받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기쁨"이며, 완전한 즐거움이며 영원한 만족이다." 그것은 이 "경건한 슬픔"에 의해 그들을 위해 준비된 자들에게 갑절이나 즐거운 것이 될 것이다. 천국은 참으로 애통하는 자들이 가는 천국이 될 것이다. 그것은 즐거움의 수확, 즉 눈물로 씨를 뿌린 것에 대한 댓가가 될 것이다(시 126:5, 6). 즐거움의 산은 우리들의 눈물의 골짜기를 통해 그 대로가 놓여있다(사 66:10 참조).

Ⅲ.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5절). 온유한 자란 고요히 자신을 하나님과 그의 말씀, 그의 홀(笏)에 복종하는 자며, 그의 지시를 따르고 그의 의도에 응하며, "모든 사람에게 온유"한 자이다(딛 3:2). 또한 그는 성내지 않고 그것을 자제하고 참을 수 있는 자며, 침착하거나 부드러운 답변을 하는 자며, 해야할 경우가 있을 때는 예의범절을 벗어나지 않고 그들의 불쾌함을 나타낼 수 있는 자며, 다른 사람이 뜨거울 때 차가와 질 수 있는 자이다. 또 그들이 다른 모든 것을 견지하기 어려운 때에라도 인내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꾸준히 견지하는 자이다. 온유한 자란 거의 성을 내지 않는 자이며, 또한 분을 낼지라도 쉽사리 그것을 가라앉히는 자이며, 자기의 원리를 지켜 한 번 복수하기보다는 오히려 스무 번 용서해 줄 수 있는 자이다.

이러한 온유한 자는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다고 이곳에 표현되어 있다.

1. 그들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된 예수님과 같기 때문이며, 특히 그들은 그에게서 배우고 있다(마 11:29). 그들은 진노의 주님이시지만 광포는 없으신 하나님 자신과 같다. 그들이 "복된 것"은, 그들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친구들과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최고로 안전하고 방해받지 않는 즐거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관계나 조건, 단체에도 어울리며, 살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2. "저희는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은 시편 37편 11절에서 인용된 것이다. 이것은 신약에서 현세적인 약속을 나타낸 거의 유일한 표현이다. 이 경건의 가지는 특별한 방법으로 "금생의 약속"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조롱 받고 모욕을 당하는 온유함은 이 세상에서도 우리의 건강과 부귀, 위안, 안전을 촉진하는 실제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온유하고" 침착한 자는 완고하고 난폭한 사람에 비하면 최고로 편안한 생을 살아가는 것으로 진술되고 있다. 혹은 "저희는(하늘 나라의 상징) 땅(가나안 땅, 원문은 "땅"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음)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늘 위의 모든 축복과 땅 아래 모든 축복은 온유한 자의 것이다.

Ⅳ.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6절). 어떤 사람은 이것을 이 세상에서의 외적인 가난과 낮은 상태에 처해 있음을 계속 말해 주는 실례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 처지는 사람8들로 하여금 손상과 피해를 입게 할 뿐 아니라 정당한 대우를 받으려 해도 소용없게 만든다. 그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압제자 편에서의 권력 때문이므로 그들은 의를 소유할 수 없다. 그들은 단지 평등한 것을 바라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들에 의해 부정되고 있다. 이것은 우울한 경우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선한 양심을 위하여 또한 선한 양심으로 이러한 어려움을 겪는다면 "복이 있다." 그들로 하여금 되어진 정의와 권리의 처지를 살피시고, 이윽고 압제자들로부터 가난한 자들을 구원해 내실 하나님을 바라고 희망을 가지게 하자(시 103:6). 압제를 끝까지 참고 견디며 그들의 송사를 하나님께 조용히 아뢰는 자들은 적절한 시기에 그가 그들에게 나타내어 보일 지혜와 친절에서 충분히 만족함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러한 욕구들은 은혜스러운 것으로서 모두가 영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영혼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며 신적 은혜의 선물들을 위해 자격을 부여한다.

1. "의"가 여기에서 모든 영적인 축복의 상징으로 나와 있다(시 24:5; 마 6:33 참조). 영적 축복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다. 또한 우리에게 그 의를 전가함으로 말미암아 전달되고 획득되며, 하나님의 신실함에 의해 확인된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그리스도를 가지는 것,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움"이 되는 것, "새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기 위하여 "의로움으로 새로워진 온전한 새 사람"을 입는 것, 그리스도와 그 약속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것이 곧 "의"이다.

2. 우리는 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또한 실제로 그것들을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찾듯이 먹고 마시는 것 이외에는 만족될 수 있으며, 비록 다른 것은 부족하여도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자와 같이 찾아야만 한다. 우리는 영적인 축복들을 진지하고 끈질기게 갈구해야 한다. "나에게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죽겠나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쓰레기요 찌꺼기요, 불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주시옵소서. 비록 내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다 할지라도 이것으로 족하겠나이다."

"주리고 목마른 것"은 종종 다시 일어나고 새로운 만족을 필요로 하는 욕구이다. 그러므로 이 거룩한 욕구는 어떤 일이 이루어진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용서가 행해지고 매일의 생생한 은혜의 공급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영혼은 마치 몸이 흡족한 음식을 요구하듯이 의(義)의 음식, 곧 그날에 필요한 일을 하기 위한 은혜의 음식이 필요한 것이다. "주리고 목마른 자"는 양식을 위해 수고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축복을 바라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지정된 수단을 사용하여 그것들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하몬드(Hammond) 박사는 실천 교리 문답서 에서 "주린 것과 목마른 것"을 구별하고 있다. 즉 "주림"이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음식을 바라는 욕구로서, "성화 시키는 의"이며, "목마름"이란 원기를 돋우기 위해 마실 것을 바라는 욕구로서 의롭게 하는 "의(義)"요, 우리가 용서받았다는 의식이다.

이와 같이 영적인 축복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그러한 욕구에 있어서 "복되며," 그러한 축복들로 "채움을 받게 될 것이다."

(1) 그들은 그러한 욕구들에 있어서 "복되다." 비록 은혜의 모든 욕구가 은혜는 아니지만(거짓의, 의미한 욕구는 아니다) 이와 같은 욕구는 은혜이다. 그것은 "좋은" 어떤 것의 "증거"이며 "나은" 어떤 것의 "보증"이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원하는 욕구이며 그는 그 자신의 손의 일을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다. 따라서 만족케 하며 속이지 않는 올바른 대상에 희망을 건 사람이나 "땅에 티끌을 탐내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2) 그들은 그러한 축복들로 "채워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완전히 만족하도록 주실 것이다. "영혼을 채울 수" 있는 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며, 그의 은혜와 호의는 그 의로운 욕구에 어울리는 것이다. 또한 그는 그들 자신의 공허를 의식하고는 그런 자들에게 "은혜 위에 은혜로" 채워 주실 것이다. 그는 "주리는 자를 배불리시며"(눅 1:53), 그들을 "만족케 하신다"(렘 31:25). 하늘의 행복은 확실히 그 영혼을 채울 것이다. 그들의 의는 완전케 될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형상도 또한 완성될 것이다.

Ⅴ.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7절). 이것은 그 나머지와 같이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긍휼이 여기는 자는 현명한 사람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또한 부요한 자로도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을 "복되다"고 선포하신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비천 가운데 있는 사람을 동정하고 돕고 구제하려는 자애롭고 경건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다. 윤택하거나 인색하지 않는 수단(자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참으로 "긍휼히 여기는"자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고통을 꾸준히 참을 뿐만 아니라 기독자의 동정으로 우리 이웃의 고통에 동참해야만 한다. 긍휼은 나타내져야 하며(욥 6:14), "긍휼의 동정심"을 옷 입어야 한다. 이로써 고통 중에 신음하는 자들을 최선을 다하여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무지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가르쳐야 하며, 부주의한 자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경고해야 한다. 죄의 상태에 있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태로운 지경에서 건져내어야" 한다(역주. 슥 3:2). 우리는 우울하고 슬픔 가운데 있는 자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을 위로해야 한다(욥 16:5). 궁핍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의 쓸 것을 공급해 주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것을 거절한다면 그것이 어떤 구실이든지 우리는 "우리의 긍휼의 동정심을 닫아 버리는"것이다(약 1:15, 16; 요일 3:17).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줌으로써 네 영혼을 건져내라"(사 58:7, 10). 아니, "선한 사람은 그의 짐승에게도 자비스럽다."

이제 긍휼히 여기는 자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1. 그들은 "복이 있다." 구약 성서에도 이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시 41:1). 이로 비추어 볼 때 그들은 선이 그분이 영광인 하나님과 비슷하다. 그분이 "긍휼히 여기는 자"인 것처럼 "긍휼히 여김"으로서 우리는 어느 정도 "그 분이 완전하신 것 같이 완전하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이며, 우리 자신에게도 만족감을 줄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쓰이는 도구가 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즐거움 중의 하나는 "선행을 베푸는" 기쁨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는 이 말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즉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 , 복음서에서는 이 말씀을 찾아볼 수 없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2. "저희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즉 그들이 긍휼을 필요로 할 때 "사람의" 긍휼을 얻게 될 것이다(우리는 언제 급속히 친절을 필요로 할 때가 올지 모른다. 그러므로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님의" 긍휼을 얻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실 것이다"(시 18:25). 가장 자비하고 긍휼한 자는 "공로"가 있는 것처럼 꾸밀 수 없으며 긍휼을 행하는 일에 급히 서둘러야만 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의 "알뜰한" 긍휼(6:14), "공급하시는 긍휼"(잠 19:17), "생존케 하시는 긍휼"(시 41:2), 그날에 주의 긍휼(딤후 1:18)을 얻게 될 것이다. 아니, 그들은 "그들을 위해 예비된 나라를 물려받게 될 것이다"(마 25:34, 35). 한편 "긍휼을 나타내 보이지 않는 자"는 "긍휼없는 심판"(지옥불의 심판)을 받게 돌 것이다.

Ⅵ.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이것은 모든 복들 중에서 가장 포괄적인 복이다. 여기에는 성결과 행복이 완전하게 묘사되어 있고 병행되어 있다.

1. 여기에는 복된 자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특성"이 있다. 즉 그들은 "마음이 청결한 자"이다. 참된 종교는 청결한 마음에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내적으로 청결한 자는 그 자신이 "청결하고 깨끗한" 종교의 세력 아래에 있음을 나타내 보인다. 참된 기독교는 마음, 즉 "마음의 청결"에 놓여 있다. 즉 "마음의 악을 씻어버림"에 있다(렘 4:14). 우리는 하나님께 깨끗한 "손"뿐만 아니라 청결한 마음을 들어 올려야 한다(시 24:4, 5; 딤전 1:5). 마음은 "혼합"에 반대되는, "청결"해야한다. 즉 잘 하려고 노력하는 정직한 마음이어야 한다. 이 청결함이란 "부패"와 "불결"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섞인 것이 없는" 포도주와 "진흙탕 물이 섞이지 않는" 순수한 물과 같은 것이다. "육적인 정욕," 모든 불결한 생각과 욕망으로부터 마음을 "청결"하게 보존해야 한다. 또한 "세상적인 정욕"에서 청결하게 지켜야 한다. 탐욕은 "부정 이득"으로 불리운다. 또한 영육의 모든 더러움에서, "마음에서 나오고 사람을 더럽히는" 모든 것에서 청결하게 지켜야 한다. 마음은 "신앙으로 청결케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에게 정결한 처녀로 나타나며 보존되어야 한다. "내 속에 이러한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오 하나님!"

2. 여기에는 복된 자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위로"가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1) 하나님을 "보는 것"은 영혼의 행복의 완성이다. "그를 보는 것"은 우리가 신앙으로 현재 상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땅위에 있는 천국"이다. 또한 우리가 미래 상태에서 그를 보는 것은 "하늘에 있는 천국"이다. 그가 "계신 그대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더 이상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보지 않는 것, 또한 우리와 같이 그를 보며, 그를 보고 즐거워하는 것, 그를 보고 그와 같이 되며, 그 형상에 만족하는 것(시 17:15), 영원히 그를 보며 그를 결코 잊지 않는 것─이것이 천국의 행복이다.

(2)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행복은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만 약속되어 있다. "청결한 자"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볼 수" 없으며 불결한 자에게는 경사가 되지 못할 것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영상에서 불결한 영혼은 어떤 즐거움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가" 그들의 불법을 차마 간과할 수 없는 것처럼 "그들도" 그의 청결함을 방관할 수 없다. 또한 불결한 것은 하나도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청결한 자," 참으로 성화 된 자는 누구든지 그들에게 어울리는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으로만 만족할 수 있다. 신적 은혜는 항상 그것을 바라는 자에게 함께 할 것이다.

Ⅶ.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9절). 위로부터 온 지혜는 먼저 "청결"하고 그 다음에 "화평한 것"이다. 복된 자는 하나님께는 "청결하고," 사람들에게는 "화평한" 자이다. 왜냐하면 양자에 관련하여 양심은 "허물없이" 보존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1. "화평스러운 성벽"을 지닌 사람이다. "거짓말을 꾸미는 것"이 거짓에 탐닉된 것인 것처럼, "화평케 하는 것"은 화평에 대해 강하고 진지한 애정을 지니는 것이다. "나는 화평을 원하노라"(시 120:7). 화평케 하는 것은 평화를 사랑하고 바라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우리의 본령(本領)내에 있는 것이며 침착하기를 노력하는 것이다.

2. "화평스러운 친교"를 지닌 사람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부지런하게 친교가 깨어지지 않도록 화평을 유지하는 것이며, 만일 그것이 깨어졌을 때는 다시 화평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신이 화평의 제안에 귀를 기울이며 그것들을 타인에게 하려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형제와 이웃 사이의 거리감을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합치시켜 분쟁을 조정시키며, "갈라진 틈을 보수하는 자"이다. "화평케 하는 것"은 때로 "감사받지 못하는 일"이 될 때가 있다. 분쟁을 못하게 하는 것이 화평케 하는 자가 할 일이다. 또한 "양 편 뺨을 함께 맞는 것"이 그의 직무이다. 그러나 그것은 선한 직분이며 우리는 그 일을 하는 데 앞장서야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것은 최선을 다해 불화한 자들을 화목케 하고 그들의 직무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기독자의 사랑을 권면해야 하는 교역자에 대한 교훈으로 특별히 의도되었다고 한다.

(1) 이와 같은 사람들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화평을 유지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참으로 봉사함에 의해 그 자신이 충만한 즐거움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범죄 행위를 파괴"하고 "땅 위에 화평"을 선포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던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고 있다.

(2) "저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그러하다는 것은 그들 자신들에게 증거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아들로 삼을 것이며 거기에서 그들은 그를 닮게 될 것이다. 그는 화평의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은 화평의 왕이다. 양자의 성령은 화평의 성령이시다. 하나님은 그 자신이 우리 모두와 화목하신다고 선포하셨으므로 그는 서로에 대하여 적대하며 화해할 줄 모르는 자들을 그의 자녀로 삼지 않을 것이다.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면 화평을 깨뜨리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이로 보건데 그리스도는 불과 검, 형벌적인 율법으로 그의 종교가 전파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또한 완고한 성미나 난폭한 기질을 가진 사람을 그의 제자로 삼으려 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이 세상의 아들은 혼란한 틈을 타서 이득을 취하는 것(to fish in troubled waters)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화평케 하며 늘 평온함을 지니는 자이다.

Ⅷ.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이것은 모든 복들 중에서 가장 역설적인 복이며 기독교에 독특한 복이다. 따라서 이 복은 맨 나중에 놓여졌고 다른 복들과는 다르게 10절-12절에 더 확대시켜 강조하고 있다. 이 복은 바로의 꿈처럼 이중적이다. 왜냐하면 거의 신뢰될 수 없지만 "그 일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후반부에는 사람이 바꿔져 있다. "너희─곧 나의 제자들, 즉각적인 추종자들은 복이 있다. 덕에 있어서 뛰어난 너희는 이것과 더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너희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어려움과 고통을 당할 것을 생각해야 한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자.

1. 핍박받은 성도들의 경우가 언급됨. 그것은 어려운 경우이며, 매우 비참한 것이다.

(1) 그들은 맹수에게 쫓기듯이 핍박받았고 내쫓김을 당하였으며 학대를 받아야만 했다. 기독자는 마치 "이리의 머리를 가진 자"(사회에서 버림받은 법의 방치자처럼)가 되었는데 그를 발견하면 누구든지 죽일 수 있었다. 그들은 "만물의 찌꺼기"와 같이 버림을 받았다. 그들은 벌금형을 받았고, 투옥을 당하였고, 추방되고, 지위를 빼앗겼으며 모든 신분과 명예에서 쫓겨났다. 또한 매맞고 고문을 당하고 고통을 받았으며 언제나 도살한 양과 같이 취급되었다. 이것은 "의인 아벨"의 때로부터 거룩한 후손에 대항하는 뱀의 후손의 사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히 11:35).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기독자는 그 이상의 핍박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우리는 그것을 이상히 여겨서는 안 된다(요 3:13). 그는 우리에게 모본을 남겨 주셨다.

(2) 그들은 "거짓으로 그들을 거스려 하는 모든 악한 말로 대적"을 당하였다. 가증스러운 자로 묘사하기 위해 그들에게, 개별적 사람들에게, 총체적으로 의인의 세대에 별명과 비난의 칭호가 붙여졌다. 때로는 그들을 경시하고 업신여김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짓밟힘을 당하게 했으며, 때로 그들을 만만찮게 함으로써 강력하게 공격을 당하게 했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일로 힐문과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시 35:11; 렘 20:18; 행 17:6, 7). 그들에게 다른 불행을 끼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 자들도 이런 것은 할 수 있었다. 핍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은 그들에 대한 자신들의 야만적인 처신을 스스로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이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곰가죽으로 뒤집어쓰지만 않았더라면 그들은 이들을 괴롭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저들을 먼저 가장 나쁜 사람으로 말해놓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최악의 잔인한 처신을 그들에게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너희를 거스리고 핍박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성도들을 "거스리는 것"은 그들을 "핍박하는 것"이며, 머지 않아서 그들의 "강팍한 말"(유 15)과 "희롱"(히 11:36)은 심판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거짓으로 모든 악한 말을" 너희에게 할 것이다. 때로는 증인으로 "심판의 자리" 앞에서 때로는 "잔치석상에 위선적인 조롱자들과 함께" 비웃는 자의 자리에서 거짓으로 악한 말을 할 것이다. 그들은 "취한 자의 노래"이다. 때로는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한 것처럼 정면으로, 또한 예레미야의 원수들이 했던 것처럼 그들의 배후에서 훼방하고 거스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자들에 대해 부당하게 가해졌던 것처럼 그렇게 험악하고 무서운 악은 일찍이 없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3) 이 모든 것은 "의를 위함"이다.(10절). 또한 "나를 인함"이다(11절). "의를 위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는"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의(義)의 역사와 거의 밀접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의에 대한 원수는 그리스도의 원수이기도 하다. 그들은 "의를 위해"고난을 받으며, 그들의 양심을 거스려 범죄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고난을 받으며, 선행을 하기 위해 고난을 당한다. 박해자들이 어떤 구실을 붙이든 간에 그들의 적의를 품는 목표물은 바로 경건의 능력이다. 중상을 받고 미움과 박해를 당하는 것은 실제로 그리스도이다. "당신을 인하여 내가 비난을 견디었나이다"(시 69:9; 롬 8:36).

2. 고난받는 성도에 대한 위로가 주어져 있음.

(1) 그들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그들의 생애에서 "나쁜 것들"을 받으며(눅 16:25), 좋은 이유로 그것들을 받고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복이 있는" 것은 그것이 그들에게는 영예(행 5:41)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선을 베푸는 기회이며 또한 은혜의 특별한 위로와 찾아오심, 그의 임재를 체험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고후 1:5; 단 3:25; 롬 8:29, 36).

(2) 그들은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천국은 저희의 것이다." 그들은 현재 그것에 대한 확고한 칭호를 가지고 있으며 장차 경험할 것을 미리 맛보고 있는 것이며 머지 않아 그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고난들에는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상을 받을 만한 것이 없지만 여기에서는 "상"이 약속되어 있다(12절).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도다." 이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행한 것 이상으로 매우 큰 것이다. 그것은 "하늘에서" 이며, 미래적이며,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안전하게 보존되며, 위험이나 사기, 폭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은 그를 "위해" 버리는 자(비록 그것이 생명이라고 할지라도)들은 마침내 그에 "의해" 잃지 않는 것을 마련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천국은 마침내 우리가 살아나가는 인생 여정에서 직면한 모든 어려움을 충분히 보상해 줄 것이다.

온 시대에 걸쳐서 고난받는 성도들로 하여금 그 고난과 핍박을 견딜 수 있게 한 것은 "그들 앞에 놓여진 이 즐거움"이었다.

(3)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으니라(12절). 그들은 탁월성에 있어서 너희보다 뛰어나 있었으며, 또한 시간적으로도 너희 전에 있었으며 이는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약 5:10)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들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박해를 받았고 능욕을 당하였다. 너희는 너희 자신에 의한 방법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사야는 "여기2서 조금, 저기서 조금" 말한다.(사 28:10)고 조롱을 받았는가? 엘리사는 그의 대머리 때문이었는가? 모든 선지자들이 이렇게 취급되었는가? 그러므로 그것을 이상한 일이라고 놀라지 말라. 그것을 어려운 일이라고 불평하지 말라. 고난의 길이 다져진 길임을 아는 것은 위안이 되며, 이러한 지도자들은 뒤쫓아가는 것은 영광이다. 그들이 고난을 극복하는데 충분했던 은혜는 너희에게 불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 원수들은 옛적에 주님의 사자들을 조롱하였던 자들의 후손이요 계승자이다"(대하 36:16; 마 3:31; 행 7:52).

(4) 그러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12). 일반적인 고통 아래에서처럼 이러한 고난을 당했을 때 그저 참고 만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즐거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영예와 위엄, 즐거움과 유익이 그것의 고통과 수치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난받는 일에 "자만심"을 가져서는 안 되며(그것은 모든 것을 수포로 만든다), 바울과 같이 그것들을 "기쁨으로"당해야 한다(고후 12:10).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보다 "앞서 계시며," 우리 보다 "뒤에 계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므로써 그 고난들을 기쁨으로 감수해야 한다(벧전 4: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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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이어의 기적사건을 돌이켜 보라.....주님은 때로 [이 무리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말씀하심으로써 믿는 이를 시험해 보신다......그때, 빌립과 안드레의 행위를 ((믿음 차원에서))곰곰히 생각해 보라(요6:1-14).........이 기적에서 볼 수 있는 것 또 하나, 먹을 음식들이 맨 처음부터 쌓여진 더미에서 증가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분배함으로써 불어났다는 사실이다. 사렙다 과부의 기름이 그것을 퍼낼수록 증가한 것처럼 여기에 있는 떡도 쪼갤수록 증가되었다...... 이와 같이 은혜는 행동에 의해 증가되며, 또한 다른 것들이 못쓰게 되는 동안 영적인 은사들은 쓸 수 있도록 증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씨뿌리는 자에게 씨를 공급하시며, 또한 한꺼번에 축적이 된 씨를 증가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흩어 뿌려진 씨"(고후 9:10)를 증가시킨다..... 이와 같이 "흩어 뿌려지지만 증가가 되는 것이다." 즉 흩어진 만큼 증가가 되는 것이다......또한, 조지뮬러처럼 기도하기를 힘쓰라....어쩌면 그가 직접 일함으로써  매일 1500명 고아들을 고아들을 먹일 수도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대신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을 먹이실 수 있는 분, 친히 자신을 고아의 아버지라고  선포하신 분께  완전한 신뢰로 기도드렸고  그 기도는 열납되었다..
*하나님이 친히 이루시고 세우시리라......시131편을 기억하라 [*1.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내 스스로, 혼자 힘으로))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2.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3.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하나님 크기의 어떤 일을 진행하시려는 하나님께, 그 모든 것의 성취는 전적으로 무력한 내가 아니라 전지전능의 하나님 바로 그분께 달려있음을 말씀드리라, 또한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 혹시 하나님께서 지금 내가 바로 순종하여 실행하기를 원하시는 바가 있는지 여쭈어 보라.... 바로 그 지극히 작은 일을 주님의 도우심 힘입어 (주안에서 주로부터 주님에 의해 주와 함께 한걸음 한걸음 주 앙망하며 주 임재앞에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발휘하여) 주님이 손수 하시듯, 정성다해 세심하게 주님 주시는 지혜-지식-정성-힘을 다해 정성다해 세심하게 해내도록 하라... 마침내 그 분이 이루시는 큰 일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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