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9.03.16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영의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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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느낌-영의 감각]]...주예수님은 영, 혼, 몸 전 영역의 구주시다!!

보혈, 성령, 말씀으로 나를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Q -상한 감정과 느낌을 치유하시며, 생각/상상/지식과 기억까지도 새롭게 하시며, 무궁한 사랑의 주님 임재, 주와 하나되어 연합함의 신비를 열어 알게 하시고, 내 영을 맑고 밝고 명료하며 깃털처럼 가볍고 부드럽고 따스하며 늘 새롭고 민감하며 활기차게 하시며,  내 마음을 열락의 찬송으로 채우시네

...연합한 영의 비정상적 느낌과 정상적인 느낌을 알아야 한다...

...더.불.어.막,중.메.침(더러움, 불안정, 어두움, 막힘, 중압감, 메마름, 침체)를 이해하고, 넘치는 사랑, 생명과 평안의 온전함, 영적 부담감 대신 무엇인가 잘못된 느낌이나 거리낌이 생기며, 평강이 손상입은 느낌일 때 점검해 보자,...

...이에 더하여 이미 알고 있는 세상과 사탄으로부터 주어진 혼의 여러 감정들, 거절감-부족감-고립감-수치감-두려움-분노에대해 하나님의 처방이요 하나님의 패러다임인 완전한 용납받는 자-주영광의 풍성부요충만으로부터 공급받는자-임마누엘안에 거하는 자-기쁨과 사랑받는 자로 여기며 인정하심-완전한 신뢰와 안전이심-너그러움과 용납의 사람으로 거듭납을 선포하고 그 안에 머무르도록 하자


성령님과 연합한 영의 정상적인 느낌을 잘 배워 이해하여 분별의 도구로 삼자....  원수의 기만술책을 분별하여 합당하게 대적, 분쇄하라... 성령님을 통해 아버지와 함께 이땅을 거니시고 십자가죽음에까지 자신을 대속의 산제물로 내어주시고 부활, 승천하사 보좌에 앉아 계신 JC의 승리를 현실에서 실지로 누리자....[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 성령과 연합한 한영으로서 범사에 성령님의 마음을 알고 그분을 따라 사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약3:17-18]**17.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18.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KJV)**17.But the wisdom that is from above is first pure, then peaceable, gentle, and easy to be intreated, full of mercy and good fruits, without partiality, and without hypocrisy. **18.And the fruit of righteousness is sown in peace of them that make peace. ==(AMP)**17 But the wisdom from above is first pure [morally and spiritually undefiled], then peace-loving [courteous, considerate], gentle, reasonable [and willing to listen], full of compassion and good fruits. It is unwavering, without [self-righteous] hypocrisy [and self-serving guile]. **18 And the seed whose fruit is righteousness (spiritual maturity) is sown in peace by those who make peace [by actively encouraging goodwill between individuals].


거듭난 영의 느낌은 하나로 연합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주와 합한자는 한 영이니라 

[[성령의 임재에 대한 영적 민감함-영적 지각-견고한 심지/지속성-열정-자원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 자유함-맑고 밝고 분명-명료함-진리말씀으로 분별/소통, 안정/편안-생기충만-달콤상쾌함-명랑, 부드럽고-섬세함-가볍고 포근함-온화/다정다감/자상함/너그러움/긍휼/겸손-공감/균형,  신뢰/일편단심-경청/이해/배려/위로/격려/세움-잘배우는 열린 마음-자원하는 헌신-감사,

... 하나님의 초월적 아가페사랑과 열정, 곧 다함없는 사랑-기쁨-화평안에 있는, 오래참음-자비-양선-신실-온유/겸손-절제의 근원이신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것임.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양심의 느낌이 우리의 영의 느낌이 됨

영의 느낌을 따르는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는 그리스도인은 많지 않다. 많은 기독교 서적이 있지만 영의 느낌에 관해 말하는 책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비록 영의 느낌(the feeling of the spirit)이란 용어는 신약에서 발견할 수 없지만 성경의 계시에 따르면 그러한 것이 있다.

「느낌」이란 단어는 에베소서 4장 19절에서 사용되는데, 이 구절은 이방인들이 느낌 없는 자가 되는 것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중국어 화합본 성경에는 이 「느낌」이란 단어가 「양심」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것은 구원받기 전에 우리의 영의 느낌은 양심의 느낌이기 때문이다. 양심의 느낌이 무감각해지는 것은 모든 양심의 느낌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양심이 디모데 전서 4장 2절의 「양심에 화인 맞은」 것처럼 마비된 것이다. 달리 말해서, 양심이 그 감각을 잃어버린 것이다.


==구원받은 후의 영의 느낌은 생명과 평안임

로마서 8장에서는 「느낌」이란 말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말은 사실 그곳에 나와 있다. 6절 하반절은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말한다. 생명과 평안은 영의 느낌들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생명과 평안이 있음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들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6절 상반절은 『육에 둔 생각은 사망이라』고 말한다. 사망은 불안함을 포함한다. 사망은 사람으로 불안함을 느끼게 한다. 각 그리스도인 안에는 이 두 가지 현상-생명과 평강, 사망과 불안함-이 있다. 

어떤 사람을 현재의 그가 되게 하는 것은 그의 마음 안에 있는 생각들이다

만일 우리의 생각(생각의 지향, 마음의 지향)을 영에 둔다면 우리는 분명 속에 생명을 가질 것이다.((=그분의 입술에서 나온 모든 말씀의 능력을 실지로 살아내는 주의 사랑하시는 자와 하나됨, 그 무한한 사랑과 열정의 통로됨을 경험함으로 인한 생명증대의 기쁨과 화평, 충만, 만족, 담대함, 감사 찬양이 터져 나오는 것 경험케 됨 [과연 참으로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생명을 가질 때 우리는 (거리낌이나 불안-염려-근심 없는) 편안함을 느낀다.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평안이다.(골3:15..그리스도의 평강이 머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우리의 생각이 항상 육에 있다면 우리는 분명 불안함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사망의 징후와 표시이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이런 종류의 체험을 가졌을 것이라고 믿는다.

(구태여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영화 보러 가는 것에 대해 생각했을 때 우리는 다소 들떠 있기도 했었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인 지금, 우리가 영화를 보러 가는 것에 대해 생각할 때 때때로 속에 불안함(이나 불편함, 또는 거리낌)이 일어남을 느낄 수도 있는데,  말하자면, 이것이 일종의 사망의 느낌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느껴지지만..  만약 꼭 함께 가겠다고 다른 이들과 미리 약속했다면 주께 나아가 말씀드리고 그 곳과 그곳에서의 시간이 생명의 장소와 시간이 되도록 주님의 보호와 동행을 요청하고 그래도 편안치 못한 느낌이 더욱 강해진다면 다른 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서 비록 그들이 어떤 오해를 하더라도 가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이 성령께 순복하는 합당한 태도일 것이다....그런데) 그 거리낌/불안감을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것을 반복하고 그 결과 무덤덤해 진다면 그것은 우리의 영이 죽게 됨을 나타낸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합당한 느낌을 잃어버리게 될 수 있다. 만일 이때 우리가 주님께 돌이켜 『주여, 나를 용서하소서 나는 당신 앞에 평온해지기 원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때 우리는 속에서 안정될 것이다. 이것이 평안이다. 평안은 생명의 현상이다.


사망의 현상은 다양하다. 일단 우리가 속에서 죽게 되면, 우리는 즉시 불안함과 공허함을 느낄 것이다. 일단 우리가 공허함을 느끼면, 우리는 두려워하고 움츠러들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약해질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의 총계가 사망이다. 사망은 위의 것의 총체이다.


또한 생명의 현상도 다양하다. 우리 안에 평안이 있다면, 그것이 생명이다. 이 생명 안에 기쁨과 만족과 충만과 담대함이 있다. 이 모든 것이 생명의 현상이다. 


사망은 약함의 절정이요 총체이다. 생명은 강함의 총체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생명과 사망의 「온도계」이다. 우리 속에 약함이 있을 때 사망이 들어온 것이다. 우리 안에 평안이 있을 때 생명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새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수십 년 동안 구원받아 온 사람들에게도 그러하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새로운, 회복된 영적존재의 구조를 꼭 염두에 두라....사람은 흙으로 조성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당신의 생명=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심으로써 영의 활동에 따라 혼이 제대로 작동하는 산 혼이 되었고 이를 적절히 표현하기 위해 바로 영적 존재로서 혼을 가지며 몸에 거한다는 말로 나타내었다...마음(HEART)는 영spirit과 혼soul로 조성되며, 직감-양심-영교의 기능을 가진 영은 생명의 성령과 연합하여 그분의 주되심따라 인도되며 순복할 때에 그분으로 충만케 되며 바로 그러할 때 비로소 산혼 Living soul이다....혼은 지성(생각<마음자리>-지식-기억-상상-지헤)-감성<느낌-감각의 오욕칠정>-의지의 기능을 가진다....영은 주와, 혼은 세상과 관계하는 통로이다]]....HEART 마음(중심)는 personality 성품, 인격의 형태로 표현된다...결국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성령님과 연합하여) 나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로 사는 이는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을 드러낸다


생각은 우리 혼의 주된 부분이고 우리 혼은 우리 자아이기 때문에 자아의 생각이 우리 존재를 대표한다. (영광의 몸을 입기까지는, 믿는이가  비록 거듭났다 해도, 참으로 혼의 파쇄를 원한다 해도 아직까지는 그 혼이 아직 십자가로 파쇄되어 철저히 처리된 상태가 아니기에,  옛습관대로 행하는 데에 더 익숙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거듭난 우리는 영안에 깨어 있지 못하면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혼적 존재로 살게 되고, 몸의 휴식을 위한 계획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나 관광 여행 등--을 고려할 때, 무심코 옛습관따라 행함으로써 우리 안에 어쩌면 사망의 싹이 움트기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생각을 이제 육에서 영으로 돌이켜 주께 나아가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거나 주님이름을 부름으로써 주님과의 교통안으로 들어간다면, 또한 영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결정하고 주 임재따라 실행한다면, 그와는 정반대로 우리 안에 생명의 영으로 충만함을 가지고 판단, 결정하며 살게 된다.


만일 우리가 평안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속에서 죽게 되었음을 안다. 반대로, 우리가 평안을 가진다면, 우리 안에 생명을 가졌음을 안다. 우리가 평안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전적으로 느낌의 문제이다. 느낌을 설명하는 것은 참 어렵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느낌을 가진다.

예를 들어 만일 당신이 손으로 팔을 만지면, 팔은 느낌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 시체를 만진다면 그것은 차가와서 어떤 느낌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만일 내가 당신의 손을 만지면, 나의 손가락이 당신의 느낌을 자극하고, 당신의 손에 있는 느낌과 나의 손가락에 있는 느낌이 서로 반응하기 때문에 나는 당신의 손이 살아 있는 것임을 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당신의 손이 살아 있음을 안다. 만일 아무런 느낌이 없다면 그 손은 죽은 것이다.


거듭난 영의 느낌은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다. 우리의 영은 우리 존재 중 가장 살아 있는 부분이다. 또한 영의 느낌을 가장 예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느낌은 성령님과 믿는이의, 두 영의 연합으로부터 온 연합된 영의 느낌이다. 이 영은 우리의 영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이 함께 연합되었다. 그러므로 이 영의 느낌은 매우 예리하고 섬세하다.


우리의 거듭난 영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으로 인해 매우 섬세하고 온유하게 되었다. 

한 방면에서 하나님의 영은 능력의 영이고, 다른 방면에서 그분은 생명의 영이다. 그분은 밖으로는 능력의 영이고 안으로는 생명의 영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성령의 이 두 방면을 말하기 위해 두 가지 상징을 사용한다. 성경은 능력의 영에 관해 말할 때 독수리를 그 영의 상징으로 사용하며, 생명의 영에 관해 말할 때는 비둘기를 상징으로 사용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속박의 땅으로부터 그들을 자기의 날개에 업어 옮기는 큰 독수리같다고 말씀하셨다(출 19:4). 이것은 하나님의 영의 능력 방면을 언급한다. 

신약에서 주 예수님이 침례받고 물에서 나오셨을 때.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그분 위에 내려왔다(마 3:16). 이것은 하나님의 영의 생명 방면을 언급한다. 그러한 분으로서 하나님의 영은 매우 섬세하고 온유하고 평온하시다. 그분은 큰소리를 내거나 소란스럽게 하거나 울부짖거나 고함치지 않으신다. 그분은 매우 섬세하고 온유하고 평온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경우 그분의 임재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구원받았다고 믿으며 성령이 여러분 안에 계심을 안다. 그러나 여러분은 어떻게 아는가? 교리로인가, 체험에 의해서인가? 만일 여러분이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교리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우리의 체험에 따른 것이라면 『우리는 영의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영으로 느낍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은 구원받기 전에 그의 영 안에 이미 약간의 느낌을 가지고 있다. 만일 한 아이가 어머니에게서 사탕 몇 개를 훔친다면, 평강을 느낄 수 없고 어머니로부터 숨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그의 양심 안에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가 자랄수록 그의 양심의 느낌은 무시되어지고 점차적으로 무뎌질 것이다. 어떤 이는 심지어 대담하게도 강도질이나 살인을 하는 극한에 이를 것이다. 그 단계에서도 여전히 이들은 속에서 불안함을 느낄 것이다.


구원받았을 때 우리의 영은 거듭났고 느낌은 회복되었다. 이제 성령님은 믿는이의 마음중심=영=안에서 우리 영의 느낌을 강화하고 계시다. 신약의 원칙은 성육신의 원칙, 즉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다. 

그러나, 구원받았을 때 비록 우리 영의 느낌이 강화되었지만 (원수대적마귀를, 그 궤계와 책략을 파악하고 항상 이길만큼) 아직 충분한 정도로 극도로 강화되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은 구원받는 순간에 강하고 예민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는 아마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철저하게 자백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단지 하루나 이틀 혹은 일이 주 동안만 유지되었다. 결국에는 이런 느낌이 감소되게 되어 있다.(물론, 이 감소현상이 당연한 것은 아니기에 --시험에 들지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말씀하신다!!)

때때로 이런 느낌은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도대체 구원받았는지 어떤지를 의심할 정도로 그렇게 많이 감소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구원받는다면, 당신은 당신의 영 안에 전보다 더 많은 느낌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당신은 당신 속에 있는 영의 느낌이 아무리 섬세하고 온유하고 평온할지라도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음을 체험으로부터 말할 수 있다. 이 작고 세미한 느낌 안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임재를 가진다.


비록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었을지라도 그것은 구원받은 후의 느낌과는 많이 다르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은 자랑하기를 좋아한다. 모든 이들은 돋보이고 싶어한다.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경이로움을 준다. 그러나 때때로 그의 양심은 그것이 합당치 않음을 깨닫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에, 우리는 자랑하는 것이 합당치 않음을 느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깊은 존재 안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자랑하는 것이 합당치 않음을 알았을지 모르지만 부끄러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구원받은 후에, 우리는 자랑하는 것이 합당치 않음을 느낄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해 부끄럽게 느낀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들임을 증명한다. 많은 문제들에서 우리는 이 원칙을 시금석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 느낌은 우리가 가르침 받은 것이 아니라 타고난 것이다. 거듭날 때 우리 안으로 태어난 것이다. 구원받을 때, 우리는 확실히 우리 안에 제해질 수 없는 더해진 요소를 가진다. 이 요소는 하나님 자신이다. 그분이 우리 안으로 더해지신 것이다. 일단 우리가 이 요소를 우리 안에 가지면 우리 속의 느낌은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 


이것은 한 잔의 쓴 차(茶)에 비유될 수 있다. 설탕이 그 안에 더해지기 전에 그것은 쓰지만, 설탕이 그 안에 더해진 후에는 약간의 달콤함을 가진다. 차 안에 약간의 달콤함이 있는 한 이것은 설탕의 성분이 안에 있다는 증거이다.

마찬가지로 구원받기 전에 우리의 생명은 쓴 생명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비록 약간의 쓴 맛이 남아 있지만 쓴 맛 안에 달콤함이 있다. 이것은 우리 안에 다른 요소가 더해졌음을 증명한다. 하나님의 요소가 우리 영 안으로 더해졌으며, 이 요소가 어떤 느낌 곧 영의 느낌을 산출했다. 이것이 우리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Ⅰ. 영의 느낌이 생명의 느낌임

영이 느낌은 생명의 느낌이다. 이 생명은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다. 영이 생명이고 생명이 영이기 때문에 영의 느낌은 생명의 느낌이다. 모든 종류의 생명에는 느낌이 있다. 더 높은 생명은 더 높은 느낌을 가지며, 더 낮은 생명은 더 낮은 느낌을 갖는다. 강한 생명은 강한 느낌을 가지며, 약한 생명은 약한 느낌을 갖는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은 그 영이며, 이 영은 우리의 생명이다. 이 생명은 가장 높은 생명이므로 분명히 가장 많은 느낌을 갖는다. 구원받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모든 종류의 영적인 느낌으로 가득해야 한다. 우리는 느낌이 없어서는 안 된다.


Ⅱ. 영의 느낌은 생명의 법의 작용으로부터 오는 것임

영의 느낌은 우리 안에 있는 그 영의 움직임으로부터 나온다. 이 움직임은 기름을 바르는 것과 같다. 얼굴에 크림을 바르면 얼굴은 그것을 느낀다. 이와같이 우리의 영의 느낌은 우리 안에 있는 그 영의 움직임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이 빌립보서 2장 13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고 계신다고 말할 때의 그것이다. 더욱이 그분의 운행하심은 하나님의 법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의 작용이다. 이 법은 생명에 속하며 생명의 자연스런 기능이다. 조건들이 법의 요구에 맞는 한 그 법은 자동적으로 작용한다. 이 생명의 법이 우리 안에서 작용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영의 느낌을 준다.

영의 느낌은 우리가 기도할 때 가장 살아 있고 가장 예민하고 가장 강하다. 이것은 우리가 달릴 때 더 빨라지는 피의 순환과 같다. 우리가 기도하며 주님과 교통을 가질 때, 안에 있는 그 영의 작용이 증가되어 안에 있는 영의 느낌이 더 예민해진다.


Ⅲ. 영의 느낌은 섬세하고 온유하며 평온함

영의 느낌은 섬세하고 온유하고 평온하다. 만일 우리가 영의 느낌을 감지하기 원한다면 평온해지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조급한 성질을 갖고 있다면 영의 느낌을 감지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분이 더 섬세하고 온유하고 평온할수록 여러분의 영의 느낌은 더욱더 분명해질 것이다.


Ⅳ. 영의 느낌은 사망과 불안함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생명과 평안임

영의 느낌은 사망과 불안함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생명과 평안이다. 

생명은 만족과 성취와 강건함과 활기와 신선함을 포함한다. 이것들은 모두 생명의 현상이다. 사망은 공허함과 불만족과 약함과 우울과 낡음을 포함한다. 생명의 일반적인 현상은 평안이고, 사망의 일반적인 현상은 불안함이다. 만일 당신이 만족하고 충만하고 강하고 생기 있고 신선하다면 당신은 확실히 편안함과 평안을 느낄 것이다. 만일 당신이 불만족하고 약하고 우울하고 낡았다면 틀림없이 불안함을 느낄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가 영 안에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우리로 알게 하는 느낌을 준다. 우리가 영 안에 있다면, 우리는 생명과 평강을 가질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영 안에 있지 않고 육 안에 있다면, 우리는 사망과 불안함을 가질 것이다.


Ⅴ. 영의 느낌은 강하고 맑은 생각이 필요함

영의 느낌은 강하고 맑은 생각에 의해 조화될 필요가 있다. 만일 당신이 영 안에서 강해지기 원한다면 강한 의지/견고한 심지를 가져야 한다. 만일 당신이 맑은 영을 갖기 원한다면, 맑은 생각/진리말씀에 적셔진 생각을 가져야 한다. 당신의 의지가 강하고 당신의 생각이 맑을 때 당신의 영은 평온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바람이 부는 대로 향방 없이 표류하는 키 없는 배처럼 우유부단한 사람이라면, 당신의 영의 느낌은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항상 상상 속에서 헤매인다면, 당신의 생각은 맑지 않을 것이고 당신의 영의 느낌은 예민하지 못할 것이다. 마치 당신은 투명해야 하지만 온갖 종류의 페인트가 묻어서 투명도를 잃어버린 유리 조각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영의 느낌은 강하고 맑은 생각이 필요하다.


Ⅵ. 갑작스런 느낌들은 기다리며 관망함 통한 확인이 필요하며 지속적인 느낌들이 보다 믿을 만함

우리 안의 갑작스런 느낌들은 신뢰할 수 없으며 기다림이 요구된다. 여러분은 기도하는 동안 여러분이 틀림없이 기적을 행할 수 있고 어떤 병자를 위해 기도하고 안수하여 그가 치유될 것이라는 갑작스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혹은 여러분이 오늘밤 문을 두드리러 갈 때 방문하는 첫번째 집에서 온 가족이 침례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런 종류의 갑작스런 생각들이 기도하는 동안이나 잠잘 때 낮 시간에 자주 들어올 수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상태에 관하여 분명하지 않아서 갑작스레 떠 오르는 생각이나 느낌들에 의해 조종되어 고려함이 없이 일들을 행한다. 그러한 생각은 대부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유혹하는 악한 자로부터 온 것이다. 그는 돌을 떡으로 변하게 하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도록 주 예수님을 유혹했다(마 4:3-9). 영 안에 사는 우리는 영의 느낌을 따라야 한다. 우리는 일을 할 때 갑작스런 느낌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갑작스런 느낌들은 대개 육의 상상이나 사단의 맹렬한 화전으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갑작스런 느낌들을 기다리며 관망해 보아야 한다. 영의 참된 느낌은 분명히 지속적이며, 지속적인 느낌만이 신뢰할 수 있다.


Ⅶ. 영의 느낌을 따르는 것은 그 영의 기름바름을 순종하는 것임

영의 느낌은 생명의 법의 작용에서 올 뿐 아니라 실제로 영의 느낌은 그 영의 기름바름이다. 그 영 자신이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기름바르는 연고이다. 이 기름바름이 영의 느낌을 낳는다. 만일 우리가 그 영의 기름바름에 순종하면, 우리는 영의 느낌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영의 느낌을 따를 때, 우리는 영을 따라 행하고 있는 것이다.


Ⅷ. 한담과 원망과 논쟁의 말들은 영의 느낌을 소멸시킴

야고보서 3장 2절은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한 잠언 10장 19절은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말한다.

이 구절들은 우리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 준다. 한담이나 수다나 원망이나 시비는 영의 느낌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 14)고 말한다. 

원망은 감정에서 오고, 시비는 생각으로부터 온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원망은 자매들에게 더 많고 시비는 형제들에게 더 많다. 감정에서 온 것이든 생각에서 온 것이든 그것들은 혼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이 영 안에 살고 있지 않을 때 그는 혼 안에 살고 있으며 원망하거나 시비할 것이다. 교회 생활에서 만일 우리가 이 모든 소극적인 것들을 없애기 원한다면, 우리는 영의 느낌을 따라야 한다. 나는 우리 가운데 원망이나 시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영의 느낌과 영의 느낌을 따르는 것만이 있기 바란다.


===영의 법칙들

영의 지각(=성령의 생각)을 아는 것이 영을 좇아 행하는 첫째 조건이다.. 믿는이는 연합한 영의 지각(=영적 직감과 느낌을 사용하여 알게되는 성령의 마음의 소원)을 알고 혼(여기에서는 아직 완전함에 이르지 못한, 옛자아를 말하고 있음)의 느낌과 분별하기를(이해하고 인식하는 총명의 기름부음을 통해) 배워야 한다. 만일 믿는이가 영의 지각과 혼의 느낌을 분별할 줄 모른다면 영의 요구를 따라 행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굶주림을 느낄 때에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춥다고 느낄 때에는 무언가를 입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지각은 어떤 필요와 요구를 나타내 준다. 사람은 자신의 육신에 있는 지각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만 물질적인 것들로 그 필요를 채우게 된다. 그러므로 믿는이는 반드시 영의 지각이 어떤 것인가와 영의 각종 지각의 의미와 그 지각들이 요구하는 것들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 요구를 합당하게 채울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오직 믿는이가 이렇게 할 때만이 영을 좇아 행할 수 있다.


영의 법칙에 대하여 믿는이가 마땅히 알아야 할 몇 가지 사항/영적 법칙들이 있다. 

믿는이가 영의 법칙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영의 지각의 중요성을 모르기 때문에 영에서 나온 어떤 것의 의미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에서 나온 많은 것들을 영적인 것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결국 일상 생활에서 영이 가져야 할 위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가 영에 직감/직관과 교통과 양심의 기능이 있다는 것을 안 후에 우리는 영을 좇아 행할 수 있기 위하여 또한 이 기능들의 활동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성령으로 충만한 믿는이의 영에는 많은 살아 있는 활동이 있는 법이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상관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그만큼 피해를 보고 손해를 입게 된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영의 활동의 정상성을 살피는 습관을 갖는 것이다. 믿는이는 두뇌의 활동보다 영의 활동을 더욱 알아야 한다.  ((아래에서 정상적 상태와 비정상적 상태를 함께 기술한다))


---영의 중압감(근심의 짐에 억눌려 자유를 제한받음..우겨쌈의 느낌) 이해하고 처리하기

우리의 영은 극히 자유스러운 상태로 보존되어야 한다. 

항상 짐이 없고 하늘을 나르는듯한 영을 가진 사람만이 생명을 자라게 하고 사역에 장애가 없을 수 있다. 그러므로 믿는이는 영의 중압감이 무엇인가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많은 때에 사람은 천근(斤)의 중압감이 마음에 있는 듯이 자신의 영에 압박과 묶임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압감의 유래를 연구해 보아도 어떤 이유를 찾아내지 못한다. 이러한 중압감은 대부분이 갑작스럽게 임한 것이고 부지불식 간에 돌연히 몰래 들어온 것이다. 이러한 압박감은 믿는이를 성령과 동역하지 못하고 영의 기능을 상실케 하도록 그의 기쁨과 경쾌함을 약탈하기 위하여 대적이 사용하는 수단이다. 

만일 믿는이가 이러한 압박감의 근원과 영에 압박을 느끼는 그 의미를 모른다면 그는 자기의 영이 즉각적으로 정상 상태로 회복할 수 있도록 이 중압감을 처리하지 못한다.

그런데 믿는이는 자신의 이러한 느낌의 유래를 이상히 여기거나, 그것을 천연적이거나 우발적인 것으로 생각하거나 조금도 상관치 않고 영에 압박을 그냥 내버려 둔다. 많은 때에 믿는이들은 이러한 중압감을 상관치 않고 임의로 계속 사역하기 때문에 갈수록 점점 괴로움이 더하여 자주 대적이 사용하는 압박감에 의해 희롱을 당하게 된다.

결국은 많은 때에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고자 하지만 그는 그러한 중압감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지 못하게 되고 이러한 압박 하에 영의 직감은 아주 우둔하게 변해 버린다. 그러므로 사탄과 그의 악령들은 믿는이의 영에 압박을 가하고 자유하지 못하도록 전력을 다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얼마나 많은 경우에 믿는이들은 이 중압감이 사탄으로부터 온 것임을 모르고 혹 안다 하더라도 그것을 거절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지....만일 믿는이에게 이러한 중압감이 있다면 결국 실패하고 만다. 만일 아침에 이러한 중압감이 있는데에도 즉시 제거하지 않는다면 온 종일 실패하고 만다. 

자유의 영이 승리의 근본이다. 우리에게 아무 근심이 없는 영을 가지고 있어야만이 대적과 싸울 수 있고 하나님의 생명을 살아 나타낼 수 있다. 만일 영 안에 압박이 있다면 믿는이는 분별력을 잃게 되고 하나님의 참된 인도도 잃게 된다. 일단 사람의 영이 압박을 받으면 생각은 이에 영향을 받게 된다. 생각이 작용하지 못할 때에 모든 것이 멈추게 되거나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영 안에 압박감이 있을 때에 혹은 무게를 느낄 때에 즉시 처리하는 것이다. 결코 내버려 두는 태도를 취하지 말라. 당신이 중압감을 그냥 내버려 둔다면 그 중압감은 당신에게 고통을 안겨다 줄 것이다. 또한 이 중압감은 점점 심해질 것이다.

만일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것을 제거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습관이 되어서 그것을 제거할 생각도 갖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될 때에 부지불식 간에 이러한 중압감은 당신의 생명의 일부가 된다. 이렇게 될 때 영적인 것들은 당신에게 골치 아픈 것들이 되고 영적 노정에서 진보하기가 어려워진다.

만일 당신이 한번 처리하지 않는다면 다음에 중압감은 더 쉽게 당신에게 임할 것이다. 

그것을 처리하는 방법은 즉시 수중의 일을 멈추고 영의 지각의 요구를 멸시치 않는 것이다.(요구를 멸시하는자는 경멸당하게 된다) 즉시 의지로 중압감을 거절하고 영으로 거절하며 그것을 입으로 선포해야 한다. 어떤 때에는 목청을 높여 JC께서 이루신 승리로 인하여 민는이 모두는 이미이긴자임을, 이 중압감을 반대하는 말을 외쳐야 한다. 어떤 때는 영의 힘으로 하는 기도로 거절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이 우리 영 안에 압박감을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중압감의 근원을 또한 더불어 반드시 제거하는 것도 필수적인 수속(手續)/수순이다. 만일 그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중압감은 계속 남아 있게 된다. 그러므로 대적의 공작을 거절할 때에 대적이 공격하는 이유까지도 거절해야 한다. 이럴 때에 당신은 그가 강탈해간 위치를 되찾을 수 있다.

만일 당신이 영적 분별력을 발휘해 본다면 당신은 당신이 실패한 이유가 어떤 때, 어떤 일에서 하나님과 동역하지 않기 때문인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동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적이 중압감으로 당신을 압제할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이러한 지위는 필히 회복되어야 한다. 우리는 대적이 우리의 실패로 인해 일하는 그 근원을 거절해야 한다. 이것은 대적을 도망가게 할 것이다.


---영의 봉쇄감(넘치던 생명흐름이 막힌 느낌) 이해하고 처리하기

영은 자신을 표현할 기관으로서 혼과 몸이 필요하다. 영은 주부로서 그를 위해 일하고 그의 뜻을 성취해줄 하인과 종들이 필요하다. 영은 전류로서 필라멘트가 있어야 그 빛을 표현할 수 있다. 만일 혼과 몸이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고 악령의 공격을 받는다면 영은 봉쇄되어 출구를 얻지 못하게 된다.

원수는 영의 욕구를 알기 때문에 그는 자주 믿는이의 혼과 몸 안에 역사하여 혼과 몸의 본래 기능을 멈추게 한다. 이러므로 영이 필요로 하는 표현 기관을 갖지 못하게 하고 영이 승리하는 지위를 박탈해 간다. 이러한 때에 사람의 생각은 공격을 받아 분란하게 되고, 감정은 외로움과 괴로움을 느끼며, 의지는 살아 있지 못하고 피곤하게 느껴 능동적으로 온 존재를 다스릴 수 없게 된다. 몸은 어쩌면 아주 피곤을 느끼고 혹은 조금 게을러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만일 믿는이가 자기의 혼과 몸이 이러한 공격을 받은 후에 즉각적으로 그것을 대적하고 처리하지 않는다면 그의 영은 봉쇄되어 대적과 산 방식으로 싸울 수 없게 되고 또한 자신의 승리의 진지(陣地)를 보존할 수 없게 된다.


일단 영이 봉쇄되면 믿는이는 활발한 태도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는 조금 수줍어 하게 되고 자신을 감추며 대중 앞에서 무엇을 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다. 그는 승리의 진지(陣地) 후방으로 물러나기를 좋아하고 「나타나기를 싫어하게」 된다. 혹 그는 이것을 자신의 깨달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지로는 그의 영이 봉쇄된 것임을 모른다.


성경을 읽을 때에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기도할 때에는 할 말이 없어져 버린다. 그는 자신의 모든 영적인 일과 체험에 대해 아무런 흥미가 없어져 버린다. 어떤 때는 그것을 재미 있는 것이라고 느낀다. 전달하러 갈 때 그는 조금도 효력을 느끼지 못하고 공식대로 일을 하는 것같이 느낀다. 만일 이러한 봉쇄된 상태가 계속 지속된다면(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통해서 혹은 그 사람 자신의 기도로 그 중에서 구원받지 않은 한) 나중에 대적의 더 심한 공격을 받게 되고 숨이 막히고 불통함을 느낀다. 만일 믿는이에게 지식이 없다면 이것을 이상히 여길 것이다.


더 일반적인 상황은 사람들이 그 근원과 원인을 연구하지 않고 포기하고 방임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실제로 말하자면 모든 영성의 체험과 느낌은 다 원인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주의깊게 살펴서 이러한 것들을 우리 안에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체험의 원인은 바로 영이 봉쇄되었기 때문이다. 영 밖의 혼과 몸이 닫혀서 결국 영은 표현할 길이 없게 된다. 

사탄은 영을 봉쇄하여 암실(暗室)에 가두고 혼이 영의 인도를 받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영의 봉쇄가 제거될 때 믿는이는 공기가 통하듯 과거의 가벼운 상태를 회복하게 된다.

이러한 때에 믿는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의 의지를 사용하여 소리 높여 말하는 것이다. 

사탄을 대적하는 말을 하는 것인데 큰 소리로 십자가의 승리와 대적의 실패를 선포함으로 자기의 혼과 몸 안에 있는 대적의 역사에 전일(전심으로, 일심으로)하게 대항해야 한다.

우리의 의지는 이러한 선포 뒤에서 모든 봉쇄를 강력하게 거절해야 한다. 부르짖는 기도가 그 중의 한 방법이다. 많은 때에 기도는 영을 열게 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럴 때에는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요한다. 이때의 기도는 대적의 모든 공격을 이기기 위해 주 예수의 승리한 이름을 부르는 것이 가장 좋다. 또한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힘껏 밖으로 뚫고 나올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다.


---영의 피해(과민반응/불안정감, 너그러움 상실과 숨겨진 교만)... 인지하고 처리하기

믿는이의 영은 악한 영의 독(毒)을 먹을 수 있다. 이것은 곧 대적의 화전(火箭)이다. 그는 직접적으로 그의 화전(火箭)을 믿는이의 영 안으로 쏘아 넣을 수 있다. 

사탄은 근심과 걱정, 슬픔과 괴로움과 마음 아픔을 믿는이의 영에 심고 믿는이로 하여금 『영 안에 슬프게 한다』(삼상 1:15). 그러나 『영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잠 18:14).


그러므로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믿는이가 슬픔을 느낄 때에 그는 그 슬픔이 자신으로 인한 것이고 그것은 아주 천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뿐 그 슬픔의 근원을 살피지 않고 조금도 대적하지 않고 아무 소리 없이 아무 의심도 없이 자기에게 임한 모든 것을 받아 들인다. 이것이 가장 위험한 일임을 기억하자. 우리는 결코 어떤 사상이나 느낌을 함부로 우리 안으로 받아 들이지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영을 좇아 행하려 한다면 반드시 범사에 깨어서 우리의 사상과 느낌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살펴야 한다.


어떤 때에 사탄은 우리의 영을 강팍하고 온유하지도 않고 불순종하며 비좁고 이기적이게 만든다. 이것은 우리의 영이 성령과 동역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믿는이의 사랑(의 너그러움/관용/용납)을 잃게 한다. 또한 온유한 인품과 남을 동정하는 것과 남의 약함을 체휼하는 마음을 잃게 한다. 이럴 때 그는 성령이 그를 크게 쓰지 못하게 한다. 이는 그가 이미 주님의 관대하심을 잃어버리고 자기를 어떤 한계 안에 묶어버렸기 때문이다.


어떤 때에 대적은 믿는이에게 남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 영을 준다. 이것은 믿는이가 가장 해를 받기 쉬운 점이다. 거의 모든 영적인 믿는이가 타락한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이렇게 남의 흠만을 잡고 복수하려는 것은 영적인 생명을 가장 심하게 해치는 독소이다. 믿는이는 이러한 것에 의해 독을 먹었어도 그것에 대해 분명치 않고 다만 그것이 자신의 미움이므로 제거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사탄에게서 온 것임을 모른다.

어떤 때에 사탄은 믿는이의 영을 비좁게/분열되게 만든다. 그는 믿는이로 남과 선을 긋고 갈라지게 한다. 만일 믿는이가 교회가 한 몸이라는 관점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작은 단체」를 주로 삼는다면 이것은 그의 영이 이미 위축되고 비좁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난다.


영적인 믿는이는 곧 하나님의 일을 자기 일로 삼고 온 교회를 마음 속에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만일 그의 영이 열린다면 생명의 강수는 어디나 흐르게 될 것이다. 그 반면에 그의 영이 비좁아진다면 그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자신의 유용성을 감소시키게 된다. 만일 믿는이의 영이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포용할 정도로 넓지 못한다면 그의 영은 이미 독을 먹은 것이다.


어떤 때 사탄은 믿는이의 영을 교만하게 만든다. 이럴 때 믿는이는 자기를 높이고 존귀하다고 생각한다. 대적은 믿는이로 자기 자신이 볼 품 없는 사람이 아닌 아주 중요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일에서 자기 자신은 적지 않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게 한다. 이러한 영 또한 믿는이가 넘어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영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악한 영은 바로 이러한 것들 혹은 다른 독소를 믿는이의 영 안에 주입한다. 만일 믿는이가 즉각적으로 이것들을 대적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즉시 「육체의 일」이 될 것이다. 만일 믿는이가 영 안에 사는 법을 알았다면 그것들은 최초에 독이 있는 씨앗에 불과할 뿐 육체의 일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믿는이가 그것들을 대적하지 않고 받아 들였다면-혹 부지불식간에-얼마 안 되어서 그것들은 육체의 죄로 변해 버릴 것이다.

영 안의 독소를 제거하지 않을 때 그 독소는 즉시 영 안의 죄로 변한다. 영 안의 죄는 어떤 죄보다 더욱 심각하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가라사대 너희는 무슨 영으로 말하는지도 모르는구나』(눅 9:54-55). 우리가 어떤 영을 품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많은 때에 우리는 우리의 영이 사탄에 의해 선동(煽動)되었는데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영이 틀렸을 때에 모든 것이 틀린 것이다.

이 두 제자의 체험에서 우리는 잘못된 영이 말에서 제일 잘 표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말이 표현하는 것은 목소리보다 더 많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어떤 경우 말은 틀리지 않았지만 그 성조(聲調)/어조가 잘못되었다. 만일 우리가 승리하려면 우리의 말의 성조를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영이 악한 영에 의해 만진 바 될 때 우리는 즉시 온유함을 잃게 된다. 강팍한 음성과 강포한 음성과 귀를 따갑게 하는 음성은 다 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러한 음성은 그 소리를 말한 사람이 이미 사탄의 독소에 의해 선동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는 평상시 어떻게 말하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 정죄의 뜻을 갖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의 말이 참되다 하더라도 그 말 뒤에 비평과 정죄와 분노와 시기하고 미워하는 영이 잠재되어 있을 수가 있다. 우리는 마땅히 사랑 안에서 참된 말을 해야 한다. 만일 우리의 영이 청결하고 온유하다면 우리는 참된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말 속에 정죄하는 영이 있다면 우리는 죄를 범한 것이다. 죄는 어떤 행위만이 아닌 어떤 상태인 것이다. 모든 일 배후에 있는 영이 제일 중요하다. 많은 때에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일하면서도 죄를 범할 수 있다. 일은 진행하더라도 그 배후에 불성실과 싫어하는 것과 원망하는 영이 숨어 있을 수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영을 달콤하고 온유한 상태에 보존해 두어야 한다. 우리의 영은 순전하고 전일(일심전력기울임...일편단심)해야 한다. 우리는 잘못된 영을 죄로 여기는가? 우리는 원수가 우리의 영을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영이 원수의 독을 먹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이러한 죄를 제할 정도로 겸손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의 어조가 높아질 때 우리는 영으로 말을 멈추고 계속 말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말하는 사람에게 즉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리는 같은 말과 청결한 말을 하기 원합니다. 우리는 원수를 반대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형제에게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에는 죄가 남아 있게 된다.


믿는이는 자기의 영이 원수에 의해 선동되지 않도록 자기 영을 보존하기를 배워야 한다. 또한 어떻게 자기의 영이 달콤하고 온화하게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평상시에 우리는 원수의 화전(火箭)을 멸하기 위해 일찍이 믿음의 방패를 가져야 한다. 이 뜻은 원수의 공격에 대항하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앙망하기 위해 살아 있는 믿음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의 방패이지 축출기(逐出機)가 아니다. 믿음은 화전을 끄기 위한 것이지 화전을 빼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만일 믿는이가 화전을 맞았다면 즉시 화전의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즉각적으로 대적하는 태도를 취해야 하고 대적에게서 온 모든 것을 거절해야 하며 하나님께 정결케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영의 침체(무기력감), 그 뿌리를 인식하고 처리하기

이 「영의 침체」가 발생하는 이유는 대개가 믿는이가 (성령의 빛비췸에 따르지 않고 스스로 독자적으로) 자기 속을 들여다 보는데에서 기인한다(그것은 교만이다). 혹시나 혼 생명이 작용하여 아직 영적 생명으로 대치되지 않았기에 결국 모든 실망스런 결과는 자신 때문이고 외부 흑암의 세력의 침투나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경배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며 스스로 자책하여 넘어지게 된다.

(해결책은 당연히 있다. 믿는이의 영이 하늘보좌애 계신 그리스도를 향해 마음눈을 들어야 한다)... 밖으로 향하지 않고 속(자기내면)을 향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은 즉시 멈추게 되고 한 동안 지난 후에-만일 믿는이가 즉시 속을 들여다 보는 것을 처리하지 않으면-영은 혼에 의해 감싸지게(포위되게) 된다. 때로 이 영이 혼에 의해 침체되고 침잠케 되는 근본적 이유는 다름이 아닌 믿는이가 악한 영에 속았기 때문이다.


악한 영은 몸의 감각과 여러 가지 기이하고 즐거운 체험을 믿는이에게 준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 체험을 주께서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느끼시면 주께서 반기시는 때에 일시적으로 주님이 친히 주실 수도 있다...JC께서 아버지께 기도하셨듯이 그 기대를 포기하지는 말라..그러나 그것을 주시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다...떨기나무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영광에 대한 모세의 경험처럼...하지만 그것은 믿음으로 하늘보좌에 계신 JC를 바라보며 이 땅에서 성령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나라를 확장해 나가도록 격려하기 위해서임을 잊지말라!!...[여기가 좋사오니..라고 3제자들이 말할 때, 주님은 아니, 이제, 여기를 떠나자, 산을 내려가자] 말씀하신다.....모세는 믿음을 발휘하여 보자에 계신 하나님을 앙망하며 광야 장막안에서 기도로 나아가 친히 밝히 말씀하시는 영광으로 적셔져서 변화되어 갔다)  

만일 믿는이가 살펴보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부지불식간에 이러한 감각 세계에서 생활하게 되고 이로 인해 영이 혼의 위치에 떨어지게 된다. 때로 믿는이는 그리스도가 계신 곳을 모르기 때문에 속아서 영을 하락시킨다. 성령이 믿는이의 영 안에 거하는 것은 곧 보좌에 앉은 그리스도를 믿는이에게 나타내시는 것이다.


사도행전과 에베소서와 히브리서는 현재 그리스도가 하늘의 위치에 계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믿는이의 영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 그러나 무지함으로 믿는이는 자기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으려고 한다. 그는 자기 속에 있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려 해보지만 이것은 그들의 영을 구름 위로 높이 치솟지 못하게 하며 침체되어 혼의 영역 안으로 떨어지게 한다.

총괄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작용들은 믿는이로 생활가운데서 영 안에 살기 보다 (혼의)느낌 안에 살게 한다. 


믿는이는 자신이 아직 영에 속하지 않았을 때에는 아직 실제적으로 영 안에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대적은 가장(假裝)된 것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영 안에서 성령의 능력이 옮겨 부어짐을 체험한 후에 그의 앞에는 전에 몰랐던 별천지가 놓이게 된다. 위험은 바로 이 때이다. 사탄의 역사는 믿는이로 영 안에서 살지 못하게 하는데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에게 크나큰 손실을 주기 때문이다. 사탄의 방법은 바로 혼과 몸의 감각/느낌을 이용하여 믿는이를 매혹하고 속이며 그것을 믿는이에게 누림이 되는 영적 체험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많은 믿는이들이 비록 영적인 생명 안에 들어갔지만 영의 법칙들을 모르기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 


사탄은 여러 가지 몸의 느낌과 초자연적인 체험을 믿는이에게 준다. 만일 믿는이가 외부로부터 온 초자연적인 것들이나 감각상의 영적 체험을 의지한다면 이것은 믿는이의 영 안에 영적인 생명이 저지를 당하게 된다. 이것이 믿는이로 밖의 혼이나 몸 안에 살게 하고 이로 인해 (가장 깊은 곳에 있는)영의 하나님과의 동역을 잃게 한다. 이렇게 될 때 사람의 혼과 몸은 다시 새로이 높이 치솟고 세력을 얻게 되고 최종적으로는 영이 완전히 침체하게 된다.


영이 침체될 때에 사람은 영의 지각을 감지 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많은 영적인 믿는이가 때때로 자신의 영이 없어진 것같다고 느끼는 이유이다. 혼과 몸이 차지하는 위치가 너무 광범위하고 또 사람이 지각에 의해 살기 때문에 사람의 혼과 몸은 모든 압박과 고난과 싸움을 느끼게 된다. 이럴 때에 사람의 감각이 영의 역사를 대치하게 되고 영의 지각은 혼과 몸의 강력한 느낌 안에 매몰된다. 그 결과 영적인 생활과 일은 완전히 중단된다. 만일 이러한 상태를 오랫동안 내버려 둔다면 완전히 타락하여 악한 영에 들릴 것이다.


러므로 영의 지각을 해치는 것은 모두 거절해야 한다. 광적인 웃음이나 슬픈 울음, 몸의 각종 열렬한 표현을 막론하고 이 모든 것을 거절해야 한다. 몸은 온전히 안정된 상태가 유지되어야 한다. 초자연적인 것을 감지하는 것이나 지나치게 천연적인 사물을 감지하는 것도 허락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의 생각이 영을 좇아 행하지 않고 육신을 좇아 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영의 미세한 지각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일을 한 가지도 허락해서는 안 된다. 일단 영이 침체되면 혼은 영을 포위하고 다스리려고 하기 때문에 믿는이는 자기의 영이 자신 속에 머물러 있지 않고 밖으로 향하게 하기를 배워야 한다. 


믿는이는 자기의 영이 밖을 향하여 사탄을 공격하지 않을 때에 도리어 사탄의 공격을 받아 영이 침체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직 믿는이의 영이 밖으로 흘러 나갈 때만이 성령은 유출된 사람의 영을 통해 그분 자신의 생명을 흘러 보낼 수 있다.

믿는이가 자기 속을 들여다 볼 때 자기의 영은 침체하게 되고 성령의 「넘쳐 흐름」은 즉시 저지를 당하게 된다. 

성령이 하나님의 생명을 유출시키기 위해서는 믿는이의 영이 필요하다. 만일 믿는이가 자기 속을 들여다 봄으로 영을 침체하게 한다면 성령의 생명은 외부로 흘러나가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믿는이는 자기의 영이 무엇 때문에 침체되고, 어떻게 해야 자기 영을 원래 위치로 회복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믿는이는 자기 영의 능력이 새어나가는 것을 보는 자기의 영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고 즉시 회복할 길을 찾아야 한다.


--영의 부담((영적 부담감)) 이해하고 하나님께 순복하기

영의 부담은 영의 중압감과 차이가 있다. 영의 중압감은 사탄에게서 온 것으로서 믿는이를 괴롭게 하고 억압한다. 

영의 부담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서 그분의 뜻을 나타내고 믿는이의 (함께 기도함 통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쁘시고 온전하신 뜻-참 뜻을 깨닫기 위한)동역을 얻어야 한다. 


영의 중압감은 압박을 주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기 때문에 아무런 쓸모가 없고 아무런 결과도 낳지 못한다. 

영 안의 부담은 하나님이 주신 짐으로서 그분으로 인해 (1) 일하거나 (2) 중보기도 하거나 (3) 메시지를 전하게 한다. 이러한 부담은 목적과 이유가 있고 이익이 있다. 믿는이는 영의 부담과 영의 중압감을 구분하기를 배워야 한다.


사탄은 믿는이에게 무엇을 짊어지라고 하지 않는다. 그는 믿는이의 영을 포위하여 어떤 중량으로 믿는이를 억압한다. 사탄이 주는 중압감은 믿는이의 영에 속박을 주고 생각이 작용하지 못하게 한다. 짐을 지는 사람은 부담을 지기만 하는 반면에 사탄의 억압을 당하는 사람은 온 몸이 묶임을 당한다. 흑암의 권세가 임할 때에 믿는이의 몸은 즉시 자유함을 잃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부담은 이것과 다르다. 하나님의 짐이 아무리 「무겁다」하더라도 기도하지 못할 정도가 되지 않는다. 기도의 자유함은 결코 어떠한 부담 하에도 상실되지 않는다. 그러나 원수가 집어 넣어준 중압감은 믿는이로 기도 안의 자유함을 잃어버리게 한다. 또한 기도로 싸우고 대적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 중압감을 제거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부담은 우리가 기도하기만 하면 짐을 벗은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원수의 중압감은 이렇지 않다.


또한 영의 중압감은 은밀히 기어 들어온 것이고 영의 부담은 영 안에서 성령이 역사한 결과이다. 영의 중압감은 아주 고통스러운 것으로 믿는이의 생명이 억압을 당하게 하나 영의 부담은 아주 즐거운 것-물론 육체는 아주 즐겁다고 여기지 않는다-이다. 그러나 만일 이 영의 부담을 거절하고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고통을 느끼게 된다. 이는 이것이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마 11:30 참고).

모든 진실된 사역은 거의가 먼저 영 안에 부담으로 시작된다(따라서 영 안에서 부담감이 사라졌다면 주님 앞에서 점검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하고 그분을 위해 말하거나 누구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게 하려고 우리 영 안에 어떤 부담을 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영의 법칙을 안다면 우리는 우리의 수중(手中)의 일을 임의로 계속함으로 영 안에 짐을 더욱 무겁게 하지 않을 것이다. 혹은 시일이 오래 됨으로 이 부담에 대한 느낌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이 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 보도록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 할 것이다. 이 부담의 의미를 이해한 후에 우리는 우리가 아는 대로 행해야 한다. 일이 성사된 후에는 이 부담은 필경 우리를 떠날 것이다.


믿는이의 영은 평상시 늘 아무 압박이 없이 자유로워야만이 하나님에게서 부담을 받을 수 있다. 이는 오직 자유한 영만이 성령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무거운 짐으로 가득한 영은 직감/영적직관의 예민도를 잃었기 때문에 좋은 그릇이 될 수 없다. 

많은 때 믿는이는 하나님에게서 부담을 받고서 그 부담의 요구대로 행하지 않으므로 그의 영은 그 부담으로 인해 수일 동안 고통을 느끼고 또한 하나님이 주신 부담을 줄일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기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힘입으며 생각을 사용하여 이 부담의 의미를 살펴 아는 것이다.

많은 때에 영 안의 부담은 기도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골 4:12). 사실상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부담(능력)을 넘어설 수 없다. 부담이 없이 계속 기도하는 것은 결코 효력을 볼 수 없다. 그런 기도는 자아의 뜻에서 나온 것이다.

영 안의 기도의 부담은 오직 기도함으로 가볍게 할 수 있다. 모든 부담이 이와 같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에 어떤 일을 짊어지라고 했을 때 오직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일을 이행-기도, 그분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것 등으로-해야만이 영 안에 부담이 덜어질 수 있다. 

영 안에 이러한 기도의 부담이 있기에 우리가 성령 안에서 기도하게 되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는 기도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영 안에 기도의 부담이 있을 때에 기도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그러한 부담을 제하고 거기서 해방받을 길이 없다. 

그 일을 성사시켜야만이 즉시 부담이 제거된다.


적지 않는 때 믿는이들은 그들의 영 안에 쌓인 기도의 부담이 너무 무겁기에 기도를 시작할 때에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기도라고 느낀다. 그러나 기도하면 할수록 믿는이는 자기의 영 안에서 계속 아멘 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영에 부담이 되는 것이 완전히 우리에게서 내려질 때까지 최선을 다해 기도 안에서 그것을 말해낼 필요가 있다. 생명과 우리의 모든 것을 기도 안에서 표현하면 할수록 우리는 평안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 안에서도 늘 있는 한 가지 시험은 바로 부담이 다 털어지기도 전에 우리가 기도를 멈추는 것이다. 믿는이는 대개 영 안에 약간 상쾌함을 느낄 때 그의 기도를 이미 마쳤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영적인 일의 시작인줄이야!  만일 이 때에 다른 일로 돌이킨다면 영적인 일은 손상을 입게 된다.


믿는이는 결코 영적인 일은 다 기쁘고 상쾌한 것인 반면에 부담이 있는 것은 영적 체험을 잃게 된다고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영 안의 부담이 곧 참된 영적인 일이라는 점을 믿는이들이 모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고난을 받는 사람이야말로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사람이다. 소위 종일토록 감각에서의 쾌락과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짐을 지기를 두려워 하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사는 혼적인 사람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부담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 우리는 이제 자신이 타락했다거나 무엇을 잘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사탄은 믿는이들로부터 공격을 피하기 위해 믿는이들이 이러한 논조(論調)를 갖는 것을 가장 좋아 한다. 우리는 자신을 잘못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사탄의 말을 듣고 우리 자신이 어떤 부분에서 잘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사탄(마귀)은 더욱 우리를 참소하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참된 영적인 일은 바로 사탄을 향해 공격하고 믿는이들을 위해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다 즐거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자아에 대해 죽을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혼적인 사람 중에 참된 영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종일토록 즐거움을 느낀다고 해서 이것이 곧 믿는이가 신령하다는 증거는 아니다. 도리어 자기의 느낌을 주의하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전진하는 사람만이 신령한 사람이다.


믿는이가 영 안에 부담을 받아 원수와 싸울 때에 홀로 모든 인간 사회와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한적한 곳에 가서 원수와 싸울 때가 얼마나 되는지! 또한 싸움의 끝에는 얼굴에 웃음까지 잃을 때가 있다. 그러므로 믿는이는 주님이 그에게 주신 부담을 기뻐해야 한다.

믿는이는 반드시 영의 법칙을 알고 하나님과 동역할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그는 이러한 부담을 상관하지 않고 자신을 고통에 빠지게 하고 얼마 안 되서 그 부담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과 영광스러운 동역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영 안에 부담이 생길 때마다 우리는 즉시 기도 안에서 그 부담이 무엇을 위한 부담인지를 찾아내야 한다. 만일 싸우라는 부르심이라면 나가서 싸워야 한다. 만일 그것이 복음 전하라는 부르심이라면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만일 그것이 기도하라는 부르심이라면 기도해야 한다. 낡은 부담이 지나가고 새 부담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과 동역하기를 배워야 한다.


---영의 쇠퇴(메마름)...이해하고 처리하기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이 믿는이의 영 안에서 조수(潮水)처럼 쇠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알듯이 믿는이가 혼에 속할 때에 그들은 그들의 느낌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즐겁다고 느낄 때가 영성이 가장 높을 때라고 생각한다. 그 반면에 고갈되고 안식이 없다고 느낄 때가 영적 생명이 가장 낮을 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들의 느낌일 뿐 영적 생명의 실제적인 상태가 아니다.


영적 생명도 가라앉을 때가 있다. 이것은 혼의 감각과 다르다. 믿는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나서 그는 어느 한순간에 전과(충만할 때) 똑같을 수 있으나 얼마 못되어 점점-돌연적인 것이 아님-쇠퇴해진다. 감각의 쇠퇴와 실제적인 쇠퇴의 차이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전자는 대개가 돌연적인 것이고 후자는 대개가 점차적인 것-자기 영 안의 생명과 능력이 자기가 단번에 받은 것이었으나 이제는 점차적으로 쇠퇴했다고 느낀다-이다. 이것은 그의 영 안에 있어야 할 기쁨과 평강과 능력을 잃게 한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하루하루 그를 약화시킨다.


이럴 때에 믿는이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도 아무 맛이 없고 성경을 읽는 것도 흥미가 없으며 그의 마음에 감동을 줄만한 메시지나 구절도 없는 것같이 느끼고, 설사 그러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전과 같이 많지 않다. 기도도 고갈되고 무미건조하고 아무 의미가 없고 할 말이 없어진 것같이 되어 버렸다. 간증하기도 싫어지고 전과 같은 넘쳐 흐름이 없는 것 같이 되어 버린다. 생명도 전과 같이 강건하지 않고 그렇게 흥분되거나 가볍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게 되어 모든 것이 다 쇠퇴한 것 같이 되어 버렸다.


조수(潮水)에는 실지로 밀물과 썰물이 있다. 그런데 우리 영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도 이러한 오르락 내리락이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생명은 쇠퇴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영원히 넘쳐 흐른다. 하나님의 생명은 바다의 조수같이 밀물 썰물의 구분이 없고 영원히 흐르는 생수의 강과 같이 항구적으로 흐른다(요 7:38).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은 조수와 같이 어떤 때 반드시 쇠퇴할 필요가 없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영영 변하지 않으신다. 그분에게는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 영 안에 있는 생명은 쉬지 않고 흐르는 강수같이 넘쳐 흘러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믿는이가 자기 생명이 이미 쇠퇴해졌다고 느낀다면 이것은 자기의 생명이 쇠퇴한 것이 아니라 이 생명이 멈추고 흐르지 않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쇠퇴가 불필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결코 사탄에게 속아서 아직 육체 안에 사는 사람은 영원하고도 항구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은 생수의 강같아서 저지함이 없다면 영원하고도 항구적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믿는이가 항구적으로 넘쳐 흐르는 체험을 가질 수 있다면 쇠퇴함은 필수적인 것이 아닌 비정상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지금 문제는 영적 생명이 쇠퇴하는데 있지 않고 어떻게 그 생명이 넘쳐 흐르게 하느냐에 있다. 현재의 필요는 어떻게 해야 충만할 수 있느냐에 있지 않고 어떻게 해야 흐르게 하느냐에 있다. 생명의 근원이 아직 믿는이 안에 있기는 있지만 단지 현재 막혔을 뿐이다. 들어오는 입구는 문제가 없는데 나가는 출구가 막혀 있다. 바로 흐르지 않고 통하지 않기 때문에 생명의 강수가 다시 흘러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출구가 뚫린다면 생명의 강수는 변함없이 흐르게 된다.


그러므로 믿는이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생명이 아니라 더 많은 생명의 넘쳐 흐름이다. 믿는이가 자기 영 안에 있는 생명이 쇠퇴한 것같이 느껴질 때에는 어떤 부분이 막힌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사탄은 그것을 당신의 영성의 퇴보로 여기게 할 것이다. 주위의 사람들은 당신이 능력을 잃었다고 생각할 것이고 당신 자신은 당신이 무슨 큰 죄라도 지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사실 같이 보이지만 실지로 그렇지 않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일 때가 있으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많은 때 그렇게 된 것은 끝없는 강수를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과 동역하는 법과 하나님의 조건을 이행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어리석음이 가장 큰 원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믿는이는 즉시 기도하고 묵상하며 시험하고 연구하고 조심하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쇠퇴」한 원인을 계시해 주시도록 그분께 간구해야 한다. 당신은 살아 있는 방식으로 영적 생명이 항상 흐르게 하는 조건을 이행하지 않은 부분이 어디인지 그 「쇠퇴」한 이유를 찾아내야 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 참으로 쇠퇴했다는 것-이 단계는 또한 가장 중요한 것임-을 인정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살아 있는 방식으로 쇠퇴하게 된 이유를 찾아내야 한다. 사탄과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의 모든 가상(假想)이 믿을만하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때로는 참된 것일 수가 있기 때문에 역시 고려해볼 가치가 있다. 원인을 안 후에는 즉시 그 근원을 처리해야 한다. 영적 생명은 자동적으로 흘러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만일 당신이 영적 생명의 흐름을 저지하는 원인을 제거하지 않았다면 영적 생명은 흐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매번 영성의 「쇠퇴」가 있을 때마다 당신은 즉시 기도와 묵상 가운데서 그 원인을 연구해보고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는 법칙을 이해하고 원수의 공격을 대적하는 것은 이 생명으로 다시 넘쳐 흐르게 한다. 이럴 때에 이 생명은 원수의 모든 견고한 진을 파하기 위해 다시 흥분되어 전보다 더 힘 있게 된다.


---영의 실직(내적인 생명빛 비췸의 상실감)...이해하고 처리하기

사람의 영은 전등과 같다. 영이 성령을 접할 때에 빛으로 충만하게 된다. 그러나 일단 성령을 떠나면 즉시 흑암으로 덮여진다. 본래 사람의 영은 여호와의 등이었다(잠 20:27). 하나님의 (사람의 영을 만드신)목적은 영이 빛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었다.(그럼으로써 항상 말씀과 성령의 빛비췸 가운데 주의 길로 주와 동행하시기를 원하셨다)그러나 많은 때에 믿는이의 영은 흑암에 덮여 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은 사람의 영이 성령과의 접촉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는이의 영이 성령과 연결되어 있는가를 알아 보려면 이 영이 광명을 잃었는지를 보면 된다.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하나님의 성령은 사람의 영 안에 거하시고 사람이 성령과 동역하는 것도 그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람의 영이 비정상적이 되는 것은 마치 성령과의 연결을 잃고 빛 비춤을 잃은 것과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과 동역할 수 있도록 자기의 영을 건강하고 조용한 상태에 유지시키는 것이다. 사람의 영이 외부의 분란함에 영향을 받을 때에는 즉시 성령과 동역할 수 없고 흑암으로 변하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이상에서 말한 여러 가지 상태는 모두 영을 실직하여 성령과 동역하지 못하게 한다. 영이 실직할 때에 승리는 불가능한 일로 변해 버린다. 만일 믿는이가 아침 일찍 일어날 때에 자기 영이 없어진 것같이 느낀다면 원수는 이것은 어제 그가 일을 너무 많이 하고 육신의 피로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믿는이가 살피지 않는다면 그의 영이 실직하여 하루의 시험을 대적하고 하루의 일과를 마칠 힘이 없게 된다.


그는 마땅히 즉각적으로 자기의 몸이 영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것과 사람의 영이 마땅히 있고 강건하여 능히 몸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을 이해한 후에 그는 자기의 영이 현재 원수의 공격을 받고 있고 이미 실직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는 즉각적으로 원래 상태대로 회복시켜 달라고 주께 간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에 그는 실패하고 만다. 아침 일찍부터 우리의 영이 실직했다면 결코 그런 상태가 정오까지 지속되도록 내 버려 두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실패를 자초하는 길이다.


믿는이가 자기의 영이 실직하는 것을 알 때 즉각적으로 사탄의 모든 역사와 그렇게 역사한 원인을 거절해야 한다. 만일 이것이 원수의 공격에 지나지 않는다면 대적할 때 우리의 영은 자유함을 회복하게 된다. 만일 이 공격에 원인이 있다면(즉 믿는이가 그를 위해 여지를 남겨 두었기 때문이라는 뜻임) 마땅히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서 제거해야 한다. 이것은 믿는이의 과거 역사와 관련이 있다. 그는 사탄이 왜 자신의 영을 공격할 수 있는지, 자기 자신과 자신의 환경과 가정과 친척과 친구와 자녀와 사업 등을 일일이 기도해 보아야 한다.


만일 그가 어떤 일에 대해 기도할 때에 영 안에 불편한 것이 느껴진다면 그는 자기의 영이 공격받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이것을 제거해야 한다. 기도를 마친 후에 그는 자유함을 얻고 영도 그 기능을 회복하게 된다. 때로 영이 실직하는 이유는 믿는이가 자기의 영을 자유한 상태에 방임하고 통제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데서 기인한다. 결국 그는 정상적인 궤도에서 이탈된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는다』(고전 14:32)고 말한다. 「자기의 영을 좇는 사람」은 「우매한 선지자」(겔 13:3)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믿는이가 자기의 영이 너무 지나치거나 너무 못 미치지 않도록 의지를 사용해서 영을 통제하지 않고 성령과의 동역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영도 역시 실직하게 된다. 믿는이는 마땅히 사람의 영도 방종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잠언에 「거만한 영」(16:18)이라는 말씀이 있다.


사람의 영은 성령을 떠나서 단독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만일 믿는이가 성령께 순종하도록 자기의 영을 통제하지 않는다면 그의 영은 자유로이 행동하게 된다. 그러므로 믿는이는 자기의 영이 하나님의 궤도에서 이탈되지 않도록 안정됨 가운데에서의 하나님과의 교통을 잃으므로 하나님과 동역을 잃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때로 영의 실직은 믿는이의 영이 강팍하게 되는 데에서 기인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부드러운 영이 필요하다. 만일 영이 강팍하고 자신을 위하며 겸손히 순종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성령의 역사는 제재를 받게 된다. 성령을 의지하는 영만이 성령의 뜻을 성취할 수 있다.


믿는이는 반드시 제일 짧은 시간 내에 성령과 일치한 뜻을 따르려는 「자원하는 영」(출 35:21)을 가져야 한다. 믿는이의 영은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감지하여 즉각 반향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예민해야 한다. 만일 믿는이의 영이 약간 강팍해져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지 않을 수 없고 영 안에서 성령이 발한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믿는이는 자신의 영을 부드러운 상태에 보존하고 항상 영 안의 세미한 지각을 따라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도가 말한 『영을 근심케 하지 말라』(살전 5:17)의 의미이다.


영의 모든 역사와 감동과 지각을 믿는이는 마땅히 조심스럽게 추종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그의 영 안의 지각이 갈수록 예민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하나님도 이 가운데서 그분의 뜻을 알게 하실 수 있다.


영을 좇아 행하기 원한다면 믿는이는 마땅히 자기의 영이 언제 실직하여 성령과 동역하지 못하게 되는지와 무엇 때문에 실직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는 자기의 영이 항상 안정과 단순함 속에서 하나님과 교통하고, 평안함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접촉을 잃게 하는 원수와 자신에게서 나온 모든 분란함을 대적하도록 깨어 자기 영을 지켜야 한다.


===영의 상태를 인식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최상의 진복가운데로 들어올리기

총괄적으로 말해서 믿는이가 영의 모든 법칙을 알아야만이 영을 좇아 행할 수 있다. 만일 그가 깨어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동역을 잃어버린다면 그는 타락/하락한 것이다.(그러나 주를 앙망하며 그 이름 부르고, 회개할 때 회복가능하다). 

영의 법칙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영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다. 영의 상태를 살피는 이것이 바로 이상에서 말한 것들의 주된 부분이다.


믿는이는 자신의 영의 상태를 인식해야 한다. 그는 영의 정상적인 상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정상성을 잃은, 비정상적 영의 상태가 어떤가를 알아야 한다. 본래 영은 사람의 혼과 몸을 다스리는 가장 높은 위치에 처해 있으며 가장 능력 있어야 한다. 믿는이는 마땅히 자기의 영이 이러한 상태에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 그는 자기의 영이 싸움이나 환경 때문에 정상성을 잃고 손상 입은 상태가 아닌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


영의 상태는 다음 네 가지이다.

1) 영이 안정되고 강건하여 정상적인 위치에 처함 [안정되고 균형-조화로운 강건함]....성령님의 통제따라 전적으로 순복할 때 부어지는 안식, 재충전, 넘치는 공급으로 늘 새로운, 넘쳐나는 영적 생명의 활기 충만

2) 영의 상함 즉 침체됨을 뜻한다. [영적 침체]....치열한 영적 공격에 대해 깨어 기도하지 못함으로 인한 영적 에너지 소진, 냉담, 답답함, 무력감, 영적 기쁨과 평강 소실된 느낌

3) 영이 재촉함과 강요당함으로 지나치게 활동함.[영적 과로]....성령님이 아니라 혼의 요구에 따라 자행자제하여 과로함으로써 야기된 영적 피로, 무기력, 균형-안정감 상실..영적 무장 해제상태.

4) 영에 더러움이 있음(고후7:1). 즉 영에 문제가 있고 죄를 용납함. [영적 더러움]...강퍅함/불손종의 태도, 숨겨진 교만과 질투 등 영적인 죄를 은연중 허용함, 천연적 사랑/감정/세상의 가치와 사상을 허용함


믿는이는 최소한 영의 이 네 가지 상태를 알고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많은 때에 믿는이의 영은 깨어 있지 않거나 원수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일종의 「밀어댐」을 당하여 결국 그의 영은 가라앉게 된다. 이때에 믿는이는 하늘의 위치와 광명과 승리를 잃어버리고 냉담함과 답답함과 높이 치솟지 못한다는 것을 느낀다. 영은 슬픔이나 기타 수백 가지 원인 때문에 완전히 하락하여 날아갈듯한 기쁨을 잃어버리게 된다. 영이 이렇게 상처를 입으면 정상적인 수준 이하로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때때로 영도 재촉함을 당하여 정상적인 위치를 떠나 미친듯이 달릴 수가 있다. 믿는이는 혼의 자극으로 인해 뜨거워져서 결국은 영의 안정을 잃어버리게 된다. 때때로 믿는이는 「살아 있는 물체」를 좇으므로 「풀어진 영」을 갖게 된다. 지나친 웃음과 다른 종류의 원인도 다 영을 방임하고 수습하지 못하게 한다. 대적과의 오랜 싸움도 역시 영으로 지나치게 활동하게 한다. 사탄은 믿는이의 영이 그와 싸울 때에(혹은 그 후에) 그 싸움에 너무 시달려서 영의 냉철함을 잃고 쉬지 않고 활동하게 한다. 그는 기이한 기쁨이나 다른 것을 믿는이에게 줌으로써 믿는이의 영이 생각이나 의지의 통제를 떠나서 활동하게 한다. 이런 것에서 보호받지 못할 때에 믿는이는 실패하고 만다.

----때때로 우리의 영은 너무 낮거나 너무 높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더러움이 있다. 이러한 더러움은 때로 영의 강팍함과 불순종 등등의 영 안의 태도로 인한 것이다. 때로는 교만, 질투 등과 같은 영 안의 죄들이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천연적인 사랑과 감정과 사상 등의 혼의 작용이 섞어져 있기 때문이다. 영이 더렵혀질 때 정결케 될 필요가 있다(고후 7:1, 요일 1:9).

만일 믿는이가 영을 좇아 행하기 원한다면 자기의 영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자신의 영이 정상적인 위치에 있는지, 아니면 너무 낮거나 너무 높거나 더럽혀진 위치에 있는지를 식별해야 한다. 믿는이는 어떻게 성령의 수준에 이르도록 자신의 억압당한 영을 들어올리고, 어떻게 자기의 의지를 사용하여 지나치게 활동한 영을 제재하여 정상으로 되돌아오게 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또한 자신의 영이 하나님과 새로이 동역할 수 있도록 어떻게 더럽혀진 영을 정결케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원본 : 워치만 니 [영에 속한 사람, 영의 법칙들]--나름대로 부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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