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9.11.03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아르케이아 하나님의 일곱영 영과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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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말씀으로서의)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내신 바, 묵상하며 경험하여 알고 사랑하고 누리며 따르기를 그토록 원하시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창조주하나님의 이름, 성품, 하나님의 길..곧 영광)......계명...율법...규례..법도 :: 인생으로 오사 이 땅을 걸으신 아드님이 아버지에 대해 그리하셨듯 전심으로 하나님의 계명/말씀을 묵상하여 주께 묻고 따르며, 깨우치고 가르치시는, 내주하시는 주 성령님을 사랑하며 따를 때에 성령께서 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온전히 저절로 이루시며, JC의 장성한 분량까지 하나님의 어떠하심(성분)/거룩, 믿음소망사랑안에 순종함의 순전/완전함과 성숙함을 이루심...믿는 이는 모두 경험한 바  하나님말씀과 구주JC(인생-죽음-부활)를 성령과 증거하는(증언하는 바의 참됨을 온 삶, 전존재로 증언하는) 증인

---십자가를 내가 지고...: 십자가에 예수 죽인 죄인(한편 손)으로서의 옛사람...구주의 십자가보혈-부활을 믿어 구속받은 자/하나님의 사랑받는 자, JC를 살아내며 증언하는 JC부활의 증인으로서 구원경륜의 완성 위해 보내신 바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이루기 위해 잃어버린 영혼구원하는 전도자인 새사람(다른 손)...이를 가능케 하는 십자가를 사는 삶...십자가에 (상황, 환경 등에 대한 )현실적 이성적 자각, 오감과 느낌(모든 불만족, 불안, 두려움)/모든 짐을  십자가밑에 내려놓고/못박고 시공을 초월하여 말씀하신, 말씀하시는 하나님, 쉼없이 일하시며, 나를 품어 안으시며, 무등 태우시며, 날개위에 업어 날아오르시는, 내게 동행하는 인도자/목자로서 인생에 참여하며 함께 누리며 즐기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의뢰하고 주님을 앙망하며 따라감....내가 여호와를 의뢰하고 적군의 담을 뛰어넘나이다...


**현존하는 만물의 제1원인은??!!  : 아르케이아(원료, 질료).로서의 하나님의뜻/의지와 그 분의 말씀 = 절대적인 참진리요 창조의 원동력과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붙드는 능력....아르케이아는 현시대에서는 상대적인 이념, 이데올로기를 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음.....엡6:12에서는 [정사]로 번역..


ajrchv(746, 아르케) ....태초, 시작 beginning, 원인 caus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아르케(Homer 이래)는 호머 이래로 헬라 철학에서 중요한 용어이다.

(a)  아르케는 '시작, 출발'을 의미한다. 시간에 있어서 아르케는 시간의 연속에서 새로운 시작의 시점(기점)을 나타낸다. 시작(아르케)에 대해 말할 때 그 종말(텔로스)도 고려되었다. 시작부터 그 일의 종말을 볼 수 있다. 시작은 무한(the infinite)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그 종말도 무한 안에 존재할 것이다.

(b)  아르케는 출발점, 원인, 모든 존재의 제일 원인, 모든 것의 기본 원리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탈레스(Tales)에게 있어서 이것은 물(water)이며, 아낙시만데르(Anaximander)에게 있어서는 무한대(infinity)이며, 아낙시메네스(Anaximenes)에게 있어서는 공기(air)였다. 점차적으로 아르케(arche)는 근원적인 원인으로부터 근원적 법칙들로 그 의미가 발전되었다. 이 근원적 법칙들이란 우주의 발전과 진보를 결정하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신(데오스)과 질료(質料)(휠레)가 아르카이(archai)였다.

(c)  아르케는 지위에 있어서 ① '통치권', ② '통치 영역', ③ '권세, 통치'를 의미한다(참조: D.Muller; G.Oelling).

2. 70인역본의 용법 

(a)  아르케는 70인역본에서 약 230회 이상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로쉬 어군의 역어로, '명령, 부대 명령'(삿 9:34; 삼상 11:11), '꼭대기'(렘 22:6), 명수(민 1:2), 근원(창 2:10), 열국 중 '우수함'(암 6:1), (달의) '시작'(왕상 21:9, 왕상 21:11)을 나타낸다.

(b)  아르케는 올람(먼 시간), 또는 케뎀(고대, 옛날의; 예를 들어 합 1:12; 시74:2; 미 5:2)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이렇게 사용될 때 시간에 있어서 먼 과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상태, 민족, 또는 세계의 시초까지도 의미한다. 이런 의미로 사용될 때 아르케의 의미는, 원초적 상태를 넘어, 기억될 수 있는 그 이전의 상태로부터, 시간 이전의 과거에까지 이르른다(사 37:26).

(c)  아르케는 단 9:21, 단 9:23 등에서 과정의 시작(히브리어 테힐라)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d)  아르케는 멤샬라(지배, 통치)의 역어로 사용되어 '다스림'이라는 요소가 특별히 명백하게 나타난다(창 1:16; 렘 34:1; 미 4:8).

(e)  아르케는 비교적 자주 '통치권, 권세, 권세의 위치'에 대해 사용되었다(창 40:13, 창 40:20이하; 대상 26:10; 마카베오사서 4:17; 느 9:17; 단 7장 등).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아르케는 신약성경에서 55회 나오며, 다음의 의미를 나타낸다.

(a)  아르케는 '시작, 개시'를 의미한다.

① 막 1:1에서 복음의 시작, 막 13:8에서 말세의 재난의 시작, 히 3:14에서 확신, 또는 믿음의 시작, 행 10:11에서 보자기의 시작 즉 귀퉁이를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시간을 초월하여 계신다. 따라서 시작도 끝도 없다. 그리스도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히 1:10).

아르케는 전치사(아프, 에스)와 함께 시간에 있어서 첫 시점을 나타내는데, 문맥으로 결정된다: 아르케는 예수님의 활동의 "처음"(눅 1:2; 요 15:27; 요 16:4)을 나타낸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믿음의 여부를 알고 계셨다(요 6:64); "처음부터" 바울의 생활은 그 자신의 민족 중에서 영위되었다(행 26:4). 요한은 교회가 "처음부터" 소유하였던 것, 곧 동일한 복음, 하나님의 동일한 말씀을 지적하며 그것이 새 계명이 아님을 지적한다(요일 2:7). 처음부터 들은 것을 그들 안에 거하게 하라고 했다(요일 2:24); 이것은 사랑의 메시지이며(요일 3:11; 요이 1:5)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함으로써 유효하게 되는 것이다(요이 1:6).

일부일처제는 창조 시초부터 정해진 것이다(마 19:4, 마 19:8; 막 10:6; 참조: 창 1:27). 막 13:19("이는 그 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조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과 벧후 3:4("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에서는 세상의 시초를 뒤돌아보고 있다.

행 11:15에서 '처음'은 예루살렘에서의 교회가 시작된 초기 시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빌 4:15에서 '시초에'는 바울의 선교 활동의 초기를 말하고 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⑤ 살후 2:13의 해석은 상당히 불확실하다. 이 구절은 독자들의 선택이 그들의 탄생 순간부터였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영원부터였다는 의미일까?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거짓말장이였으며 진리와는 관계가 없다. 따라서 마귀의 자녀는 단지 그 아비의 욕망만을 실행할 수 밖에 없다(요 8:44) 요일 3:8에 의하면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하였다.

(b)  아르케는 절대적 시초를 의미한다. 요 1:1은 시간 이전의 어떤 것을 암시한다. 곧 시간 내에서의 시작이 아닌 절대적 시작으로서, 하나님과 결부시켜서만이 언급될 수 있는 시작이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떠한 시간적 범주로도 진술할 수 없는 까닭이다. 로고스(Logos)는 엄밀한 의미에서 세상 이전에 선재하신 분이다. 따라서 세상과 함께 시작한 시간보다 먼저 존재하셨다.

요한일서에는 '태초(처음)부터 있는 것'(요일 1:1), '태초(처음)부터 계신 이'(요일 2:13 - 요일 2:14)라는 어구가 나오는데, 이는 영원토록 선재하시고 제자들이 지각할 수 있는 로고스(Logos)를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기에서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보여주시는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c)  그리스도 자신은 그밖의 모든 것 '이전에' 나신 모든 창조물의 장자이자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아르케이다(골 1:18). 아르케이신 그는 만물의 기준으로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그를 위하여 지음받았다(참조: 골 1:16b). 그는 또한 죽은 자로부터 맨 먼저 부활한 아르케이다.

계 3:14은 이와 매우 비슷한 의미로 그리스도를 아르케라고 칭한다(계 21:6; 계 22:13). 역사를 상대화시키는 종말론은 철학적인 용법과 어느 정도 관계를 가진다: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는 시간 이전과 이후에 존재하신다.

(d)  아르케 '권세, 지배력'에 대해 사용되었다.

① 눅 12:11에서 아르케는 세속적 또는 영적인 권세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눅 20:20에서 아르케는 로마의 행정 관리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에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딛 3:1에서 아르케, 곧 세속적 능력과 일반적 권세들((에 대한 순종을 요구한다: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

아르케는 초지상적 세력을 나타낸다. 엡 1:21에서 이들은 하나님께 대적하고, 최고 주권자를 가지고 있으며(참조: 엡 2:2), 다른 영역들, 예를들면, 종교적(참조: 고전 8:5), 성적(참조: 고전 6:15이하), 생명(참조: 고전 15:26), 사회적인 영역(엡 6:12; 참조: 엡 6장)을 지배하고, 천사들과 관련되어 있다(롬 8:38)....영적 분별이 필요하다

골 1:16은 이 절에 있어서 중요한 구절이다. 초자연적인 하늘의 존재들과 권능들(그중 일부는 아르카이[archai]이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화해의 행위는 전 우주를 포괄한다(골 1:20). 현재에도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아르케와 엑수시아(exousia)의 머리이시다(골 2:10; 참조: 빌 2:10이하). 그리스도께서는 자연과 역사 모두를 포함하는 세계의 통치자이시며 전 우주의 주님이시며 머리이시다. 이 관원들과 권세들은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전 2:8).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권세들의 무장을 해제시켰고 그들에게서 힘을 뺏으셨다(골 2:14이하). 그리스도는 부활로 말미암아 만주(萬主)와 정사들(아르카이, archai)과 권세들과, 지칭될 수 있는 모든 이름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승귀하셨다.

이방인을 기독교 신앙으로 부름의 비밀이, 교회를 통하여 하늘의 정사와 권세들에게 알려진 것이라는 사실은 충격적인 사상이다(엡 3:10). 이방인의 부름의 비밀은 영적 세계까지 뻗어나가는 우주적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은 교회의 선포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엡 6:12에서 아르카이(archai)는 기독교인들이 싸워야 하는, 마귀에 의해 지배되는 악령 세계의 일부이다. 롬 8:38에서 천사와 능력과 함께 나오는 아르카이(복수; 한글 개역에 권세들)는 현재 역사하고 있으나 신자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하늘의 또는 초자연적인 존재들의 특별한 부류를 뜻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확립을 가져오는 말세의 사건이 일어날 때,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아르케와 뒤나미스와 엑수시아(ejxousiva, 1849)를 멸하실 것이다(고전 15:24).

아르케는 유 1:6을 제외하고는 항상 엑수시아(ejxousiva, 1849)와 함께 사용되었다.

(참조: Walter Bauer; J.H.Thayer; G.Oelling; H.Bietenhard). 


복음의 우월성(롬 1:19-32)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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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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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장의 이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는 특별히 이방 세계들 두고 본 바를 적용하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Ⅰ. 그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었던 방법. 그들이 야곱과 이스라엘처럼 그의 율법을(시 147:20) 알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들 중에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다"(행 14:17).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19, 20절)

1. 그들이 명백히 알고 있던 것.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엔 아우토이스, 그들 중에) 보임이라." 그들 가운데 하나님 지식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 곧 절대자 누멘(Numen, 신)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던 자들이 있었다는 얘기다. 우리가 다 아는대로 피타고라스나 플라톤, 스토아 학파의 철학에는 이미 하나님 지식이 익혀 알려져 있다. "알 만한 것"이라는 말에는 알려질 수 없는 것도 많이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의 존재가 부분적으로 이해될 수는 있어도 완전히 이해될 수는 없다. 우리가 찾아 나선다고 해서 그를 발견할 수 있는 게 아니다(욥 11:7-9). 유한한 인간들이 무한한 존재를 완전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분을 영화롭게 하며 더불어 사는 우리의 위대한 목적을 다 할 수 있을 정도로는 알려져 있다는 점이다. 오묘한 일은 우리로서 넘나들어 볼 수 없지만 나타난 일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한 것이다(신 29:29).

2. 그들이 이것을 어디서 얻게 되었는가.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자연적인 일반 지식은 "빛들의 아버지"요 자연의 하나님이신 그분 자신에 의해서 그들의 마음에 새겨진 것이다. 신(神)의식과 신에 대한 태도는 인간 본성에 타고난 것이기에 인간과 금수의 차이를 이성보다 이 신 의식과 태도에서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3. 어떤 수단과 방법을 통해 그들이 가졌던 신지식과 생각이 확증되었는가. 다름 아닌 창조의 섭리를 통해서이다(20절).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1) 그들이 알고 있었던 것.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 물론 하나님이 감각의 대상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자신을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만물을 통해 알려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만물에는 역력히 드러나 있다. 그는 은밀하게 일하시지만(욥 23:8, 9; 시 139:15; 전 11:5) 그가 만드신 바는 나타내 보여 주시며 우리는 거기서 그의 능력과 신성 그리고 그밖에 자연의 빛으로 알 수 있는 기타 속성들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이 자연의 빛을 통해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알 수는 없지만(어떤 이들은 플라톤의 글에서 이걸 발견할 수 있다고 보는데) 그러나 우상 숭배와 신성을 구별할 정도의 신성은 알 수 있었다. 바로 이 진리를 그들이 불의로 가로막았다.

(2) 그들이 알 수 있던 방법. "그 만드신 만물에," 곧 스스로 만들 수도 없고 우연히 그렇게 질서정연한 조화를 이룰 수 없는, 따라서 꼭 제일 원인이나 이성적 동인(動因)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만물을 통해서이다. 이때 제일 원인이니 뭐니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영원한 능력의 하나님을 두고 하는 말들이다(시 19:1; 사 40:26; 행 17:24). 원래 명장(明匠)은 그 일 솜씨를 보아 알 수 있는 법이다. 만물의 다양성, 무수함, 질서, 아름다움, 조화, 특성, 기능, 그리고 합목적성, 이 모든 것은 창조주와 그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는다. 이렇게 해서 어두움에 빛이 비치게 되었다. 그것도 "창세로부터," 이 말을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① 그 하나는 이 능력과 신성이 거기로부터 추출된다고 생각되어지는 주체로 볼 수 있다. 이 진리를 증명하는 데는 온 세상의 피조물(크티시스 코스무)을 다 들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의 피조물은 인간을 두고 하는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다. 가장 뛰어난 피조물(크티시스 카이 엑소켄)이 마가복음 16장 15절에는 그저[크티시스]로만 표현되어 있다. 인간 신체의 형태와 구조, 특별히 인간 영혼의 우월한 능력과 기능은 창조주가 계시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으며 이 창조주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② 또는 이것을 알게 된 연대로 보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세상의 창조와 그 연대를 같이 한다. 이런 의미로 성경에서는 창세기로부터(아포 크티세오스 코스무, 1:20)라는 말이 가장 많이 쓰이고 잇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여러 개념은 최근에 와서야 갑자기 깨닫게 된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있어 온 오래된 진리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길이야말로 태초 이후로 있어 온 탄탄대로이다. 진리는 이미 오류의 기선을 지른지 오래다.

Ⅱ.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렇게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범하는 터무니 없는 우상 숭배(21-23, 25절). 성서의 빛을 가진 유대인들 마저도 얼마나 우상 숭배에 젖어 있었던가 하는 걸 생각한다면 이방인들의 경우에 있어서 자연적인 신인식이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 역시 이상한 노릇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육적감각의 구렁텅이에 빠져 든 타락한 인간상은 비참하기 그지없다.

1. 그들의 우상 숭배의 내적 원인(21, 22절).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었으며 또 알고 있었으면 그분을, 오직 그분만을 섬겨야 마땅하다는 게 분명한데도 그러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아무런 핑계가 있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타인에 비해 더 많이 알고 있었지만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핑계가 있을 수 없는 것은 매일반이다. 그들의 잘못은 이것이다.

(1) 그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 않았다. 그분에 대한 열정과 경외가 자신들의 신(新) 지식과 어깨를 같이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분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는 것은 천상천하에 무한자가 그분뿐이므로 그분만을 영화롭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영광돌리지 않고 잡다한 신전을 세웠다. 그분에게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영적인 예배로 그분을 섬긴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여러 모양의 형상으로 만들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 못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전혀 영광돌리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분을 피조물로 경배하는 것은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독하는 처사이다.

(2) 그들은 "감사치도 아니하고," 전반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받는 은총에 대해서도 감사할 줄 몰랐다.((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감사하지 않음/그 결과로 오는 점점 멀어져 가는 몰지각.)).몰지각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그분에게서 멀어져 가는 죄악이다. 특별히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기꺼이 계시해 주신 타고난 신지식에 대해서 감사치 않았다. 신지식과 은혜의 수단을 발전시켜 나가지 않는 것도 이것들을 달가와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는 게 마땅하다.

(3) 그들의 "생각이 허망하여"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있어서 그들의 사유에 있어서"(엔 토이스 디알로기스모이스), 곧 실체 추론에 있어서 "허망하게 되었다." 그들은 일반 지식은 풍부했지만(19절) 이것을 개별적인 상황에 응용하는 지혜가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 개념, 세계 창조, 인류의 기원, 그리고 최고선 등이 모든 것에 있어서 평범한 진리를 저버리고 천태만상의 공상을 가지고 갑론을박하게 되었다. 이상의 모든 것에 대한 여러 학파의 수다한 의견과 가설은 거의가 헛된 상상에 불과하다. 일단 진리가 내팽겨 쳐지면 수다한 잘못이 "무한정하게"(in infinitum) 증대하기 마련이다.

(4) 그리고 그들의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 마음의 우매와 사악은 이지적 능력과 기능을 흐리고 어둡게 한다. 의지와 마음의 타락과 부패만큼 이해력을 멍들게 하고 삐뚤어지게 하는 것도 없다.

(5)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었다(22절). 이 얘기는 철인들이나 지혜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좋지 않게 들릴 것이다. 가장 왕성한 상상력의 소유자들이 자기들의 틀에 하나님 개념을 짜 맞추려다 더 없이 터무니없고 엉뚱한 기만에 빠지고 말았으니, 이거야말로 자신들의 교만과 기만의 당연한 벌이 아닐 수 없다. 종교사적으로 볼 때 진짜 바보들은 가장 뛰어난 지식을 자랑하는 가장 세련된 민족들이었다. 야만인들은 해와 달을 경배하였는데 이것은 모든 우상 숭배 중에 가장 터무니없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교양을 갖추었다는 에집트인들은 황소와 양파를, 지혜에 뛰어난 희랍인들은 질병과 인간의 병마를, 가장 문명을 자랑하는 로마인들은 원귀(寃鬼)를 경배하였다. 오늘날도 미개한 아메리카 인디안들은 천둥을 경배하고 영리한 중국인들은 귀신을 섬기고 있다. 이처럼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고전 1:21) 지혜 있다고 자랑하는 것이 더욱 우매를 악화하듯이 지혜있다고 거만하게 굴며 속이는 것은 더 없는 우매를 조장할 뿐이다. 따라서 기독교로 개종한 철인들이 없으며 바울의 전도가 유식한 아테네 사람들에게서처럼 비방과 조롱을 산 일도 없다(행 17:18-32) - 스스로 지혜있다는 "속이"(파스콘테스 에이 나이, 1:22)지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평범한 진지로는 만족을 못하고 자기들은 그 위에서 논다고 생각하였으며 그러다가 돌이킬 수 없는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2. 그들의 우상 숭배의 외면적 행동(23-25절).

(1) 하나님 모양을 새긴 여러 가지 형상을 만들고 있으니(23절)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바꾸어"놓고 말았다(시 106:20; 렘 2:11 비교). 그들은 가장 추악한 짐승에게 신성을 부여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대표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므로 인간에게 최대의 영광을 베풀었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인간의 모양으로 만들어 하나님에게 최대의 치욕을 돌리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렇게도 엄히 경계하시던 본 뜻이요(신 4:15 이하), 이것이 바로 사도가 아덴 사람들의 우매를 지적해서 말한 그것이다(행 17:29). (사 40:18; 44:10 이하 비교) 이것이 곧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는"처사이다(25절). 그렇게 함으로 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치욕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그의 존재를 제대로 들어내지도 못했다. 우상이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영이신데 하나님에게 육체가 있는 것으로 거짓 꾸며대기 때문이다(렘 13:14; 호 7:1). 이 우상은 "거짓 스승"이다(합 2:18).

(2) 피조물에게 신의 영광을 돌리고 있으니 이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조물주를 제쳐 놓고, "피조물을 경배하고 섬기"(파라 톤 크티산타, 1:25)게 되었다. 그들에게도 초월자 신(Numen)이 있었으나 피조물을 경배하므로 결국에 가서는 그를 욕되게 한 것이다. 아니면 그들은 조물주 "이상으로" 별, 영웅, 귀신을 더 섬겼다고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가까이 할 수 없다거나 감히 예배할 수 없는 분이라는 생각에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결국 피조물을 섬겼다는 데 죄가 있지만 그 죄가 더 중요한 것은 조물주 이상으로 피조물을 섬겼다는데 있다. 이것이 이방 세계 전반의 죄악상이요 이것이 그들의 법률과 국가체제에 뒤범벅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따라서 그들 중에 신지식을 가지고 있던 지혜자들마저도 어리석게 다신론과 우상 숭배에 빠져 들고 말았으니 그들의 나머지 이웃 나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네카는 지금은 없어지고만 그의 '미신론'이라는 저서에서(어거스틴의 [신국]6권 10장에 있는대로) 이방 종교의 엄청난 부도덕과 불신앙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여러 가지 예를 드는 가운데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지혜자는 당연히 법으로 제정된 걸로 알고 신들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또 그는 이런 말을 한다. "고대 종교가 이렇게 집대성한 많은 무리의 신들을 우리가 경배하는 것은 물질 그 자체보다는 이들을 경배하는 것이 우리의 관습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이런 핀잔을 주고 있다. "그는 자기가 부당하다고 비난한 것을 경배하였으며 그는 자기가 부당하다고 증명한 것을 실행하였으며 오류 투성이라고 욕한 것을 경배하고 있다"고. 내가 여기서 이 말을 인용하는 것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다는 사도의 말을 이보다 더 잘 말해 주는게 없겠기 때문이다.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께 행한 모독을 지적하는 가운데 사도는 스스로 하나님을 칭송하고 있다.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하실 이로다. 아멘"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욕이 돌려지는 걸 듣거나 볼 때는 그때마다 하나님을 칭송하고 그에게 영광돌리는 기회를 삼도록 하는게 마땅하다. "영원히 찬송하실 이로다." 그의 이름에 어떠한 욕이 들려지건 말건, 그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그분은 지금도 영광을 받고 계시며 영원히 영광 받으실 것이다.

Ⅲ. 이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이것은 현세적인 심판이 아니라(우상 숭배에 젖은 나라가 세계 정복한 예는 많다) 영적인 심판으로 이들을 더없이 무분별하고 부자연스러운 쾌락에 그냥 내버려 두신 것이다. 곧 그가 그들을 "내어 버려 두셨다"(파레도켄 아우투스)는 말씀이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24, 26, 28절). 모든 심판 가운데서 영적인 심판만큼 더없이 쓰라리고 두려운 것도 없다.

1. 누가 그들을 내어 버렸는가. 그들의 우상 숭배에 대한 당연한 벌로써 하나님께서 의로운 심판을 베푸시는 가운데 이들을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고삐 풀린 말이 되어 제멋대로 놀게 내팽개쳐 두신 것이다. 은혜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오 인간에게 빚진 게 없는 그로서는 자기 원하는 대로 은혜를 줄 수도 거둘 수도 있다. 이렇게 내어 버려 두는 게 하나님의 적극적인 행동이냐 소극적인 행동이냐 하는 문제는 학자들이 따질 문제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핟. 곧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자신들의 마음의 정욕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시고 강력하게 그들을 기만하며 그들 앞에 사탄을 풀어 놓으신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거침돌을 놓으시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죄악의 장본인일 수 없고 오직 이 일에 있어서 무한히 의롭고 거룩하심은, 물론 이 포기에 따라 더 극악한 죄악이 따르지만 포기하도록 한 잘못은 사특한 인간의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환자가 고집불통이어서 처방대로 따르지 않고 장본인에게 해로운 걸 고의적으로 먹고 행한다면 이 때 의사가 그 환자를 절망적인 상태 그대로 내버려 둔다해서 욕을 먹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에 따라 오는 모든 증세도 의사 책임이 아니요, 병 그 자체와 환자의 어리석음과 고집에 그 책임이 돌아가기 마련이다.

2. 버림 받은 곳.

(1) "더러움과 부끄러운 욕심"(24, 26, 27절).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 보여 주는 자연적인 빛이 주는 보다 정교하고 순수한 경고를 무시하는 자들은 인간성을 보여 주는 더 조잡하고 빤히 들여다 보이는 감정도 상실하기 마련이다. 존귀한 인간이지만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으니 "멸망하는 짐승"보다 더 악독한 것이다(시 49:20). 하나님을 모독한 자들은 자기들 스스로를 모독하도록 내버려지고 만 것이다 자기 자신의 정욕의 노예로 전락된 노예보다 더 불쌍한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이러한 자들은 마치 애굽인들처럼 포악한 군주의 손에 붙여지고 만다(사 19:4). 그들의 더러움과 사악한 욕심의 특별한 예는 자연의 빛에 비춰 봐도 더 없이 명백한 부자연스런 정욕으로 솔론이나 제노같이 현인으로 통하는 자들도 저지르고 만 죄다. 하나님께서 지옥불을 하늘에서 퍼붓게끔 했던 소돔과 고모라의 처절한 죄악이 이방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실천되었을 뿐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인정받고 잇는 실정이었다. 아마 사도는 우상을 경배하는 가운데 행해지던 추악한 짓들을 두고 말하는 건지도 모른다. 더러운 신들에 대한 더러운 예배가 아닐 수 없다. 불결한 영은 그러한 봉사를 즐거워하기 마련이다. 이방 우상이 부활되어 귀신들 대신에 성자들을 채워 넣고 있는 로마 교회에도 이처럼 동일한 가증한 일들이 자행되고 교황의 재가를 받고 몇몇 추기경들은 이런 짓을 정당화하고 그대로 따르자고 한다는 얘길 듣고 있다. 동일한 영적 죄에 대한 동일한 재앙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본성에 있는 죄악이 얼마만인가를 보시라. 얼마나 가증스럽고 추악한 인간인가! 주여, 인간이 무엇입니까? 하는 다윗의 말마따나 제 스스로 내버려졌을 때 인간은 얼마나 추악한가! 인간성의 존귀와 품위를 보존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약의 은사를 우리가 맛본 게 그 얼마이던가! 이게 아니었더라면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음받은 인간은 악마보다 조금 못한 자리로 진즉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이다. 온 지구상의 심판관은 언제고 공정하며 죄악과 그 처벌이 고르게 일처리를 하신다.

(2) "상실한 마음"

①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 했다." 그들의 몰이해는 자신들의 고의적인 마음과 의지 때문이었다. 그들이 하나님 지식을 갖지 않은 것은 그들이 그걸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하나님 지식을 갖지 않은 것은 그들이 그걸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향락에 무관한 것은 그 어느 것도 알려들지도 행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게 바로 육적인 마음의 기질이다. 곧 자신들의 향락만이 최고 목적인 것이다. 화사하게 내리쬐는 햇살마냥 신지식이란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인데도 우리들의 지식창고에 하나님칸은 빼버리려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전능자여, 우리를 떠나소서"하는 자들이다(욥 21:14). 신지식이란 자신들의 욕정과 정반대 되는 것이기에 그걸 마음에 두길 꺼려하고 잇는 것이다. 그들의 지식 가운데("저희 마음에" 해당하는 항목)(엔 에피그노세이, 1:28)에 있어서 (그노시스, 1108)와 (에피그노시스, 1922)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전자는 그저 "지식"(앎)이란 뜻이요 후자는 "승인"이란 뜻을 갖는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를 인정하려 들지도 않았다.

② 진리를 부정하는 그들의 고의적인 마음에 해당하는 벌로써 하나님은 그들을 더없이 처참한 죄악 속에 내어버려 두셨으니 여기서 말하는 "상실한 마음"(에이스 아도키몬 눈, 1:28)이다. 곧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사리판단력에 제거된 상태이니 도덕적으로 오른손과 왼손도 구별할 수 없게 된 지경이다. 죄악의 진로의 종착역이 어디며 마침내 죄인이 빠지는 구렁텅이가 어디인가를 주의할 필요가 있다. 육신을 불태우는 욕정의 직행 코스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음심이 가득한 눈은 범죄를 그칠 물 모른다"(벧후 2:14). 이 상실한 마음이 바로 커튼 쳐진 양심이요 감각 없는 양심이다(엡 4:19). 우리의 판단이 일단 죄악과 일치해 버리면 이때 우리는 지옥의 문제에 가가 서 있는 셈이다. 처음에는 바로가 자신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였지만 후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 이처럼 고의적인 곧은 마음은 마땅히 천벌로써의 굳은 마음이 심판으로 따르기 마련이다. 곧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끔 내어버려 두시는 것이다. 이 구절은 사소한 죄목을 말하는 것 같지만 극악한 죄를 두고 말하고 있다. 이 죄들은 인간 성정에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바로 자연의 빛과 법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는 여기에 이방인들이 상실한 마음 그대로 내버려진 상태에서 저지르는 이상야릇한 죄목들을 들춰 내고 있다. 그처럼 가증할 수가 없고 자연의 도리와 인륜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상실한 마음만은 이 죄악과 어깨를 같이 하고 있다. 당시 도덕의식이 더없이 타락했던 로마 역사를 보면 여기 지목된 죄목들이 당시 시대를 휩쓸고 있었던 것 같다. 자그마치 스물 세 종류의 죄목과 군상들이 여기 언급되고 있다(29-31절). 바로 이곳이 악마의 자리이니 그의 이름은 군대요 이는 그 숫자가 많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해야 할 때는 온 세상이 개혁을 필요로 하는 바로 이때였다. 맨 먼저 첫 번째 돌에 새겨진 계명에 대한 죄악을 들 수 있으니 곧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이다. 바로 여기에 악마의 제 모습이 들어나 있으니 죄는 죄의 모양을 그대로 갖추는 것이다. 이성적인 피조물이 최고선을 싫어하며 의존하는 피조물이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멀리 하다니 감히 상상할 수 있는 노릇인가? 그렇지만 그게 실정이다. 어떠한 죄든 거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증오가 도사려 있다. 오직 그 정도에 따라서 남달리 더 공공연하게 하나님께 원수 노릇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로써 그들은 하나님 자신과 겨루는 나머지 마땅히 그의 보좌 앞에 바쳐야 할 면류관을 스스로 자기 머리에 쓰는 자들이다.

다음으로는 두 번째 돌에 새겨진 계명에 대한 죄를 보자. 이것이 특별히 언급되는 이유는 이 모든 것을 그들이 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불의에 대한 항목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것이 맨 먼저 언급되는 이유는 모든 죄는 그 자체가 불의이기 때문이다. 곧 마땅한 일을 하지 않고 보류하며 올바를 일을 곡해하는 일이다. 

다섯째 계명에 대한 죄를 보자. 이들은 "부모를 거역하는 자"일 뿐 아니라 "무정한 자"(아쉬네투스, 801) 곧 자기 자녀들에게도 매정하고 잔인했다는 얘기다. 한쪽일에 본분을 다하지 못할 때 다른 쪽 일에도 실패하기 마련이다. 부모를 거역하는 자녀는 마땅히 무정한 부모를 두기 마련이요 그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여섯째 계명에 대한 것은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악독, 능욕, 무자비"로 이 모두가 우리의 형제에 대한 증오 곧 마음의 살인에 대한 표현이다. 

일곱째 계명에 대한 것은 "추악"(간음)으로 앞서 불의에서 자세히 설명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고 있다. 

여덟째 계명에 대한 것으로는 "불의"와 "탐욕"이요

아홉째 계명에 대한 것은 "사기, 수근수근하는 자, 비방하는 자, 배약하는 자"이니 중상 모략이다.

여기에 "악을 도모하는 자"와 "우매한 자"라는 일반 원칙이 들어 있다. 곧 악한 일에는 재주꾼이지만 선한 일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것이다. 나쁜 일을 꾸며대는 데 있어 신중하고 약은 죄인일수록 그 죄는 그만큼 더 크기 마련이다. 그릇된 일을 저지르는 데는 그처럼 빠르면서 하나님에 대해선 우매하다니 정말로 철천지 바보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원죄를 생각할 때 바로 여기에 우리가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누구의 마음에건 본래부터 이러한 모든 죄의 씨와 알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맨 마지막으로 그는 이 모든 죄가 악화된 결말을 보여 주고 있다(32절).

1. 그들은 "하나님의 정하심(심판)을 알고 있었다."

(1) 곧 그들은 율법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심판은 다른게 아니라 자신이 의롭기 때문에 그의 공의가 뭘 요구하며 어느 것이 옳다고 인정하시는가 하는 문제다.

(2) 그들은 그 처벌도 알고 있었다. 곧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는 걸 "알고 있던 자들이다. 다름 아닌 영원한 죽음이 여기에 따른다는 걸 그들의 양심은 똑바로 지적해 주건만 그들은 이 외골길로 거침없이 치닫고 말았다. 알면서 지은 죄, 특별히 하나님의 심판을 알면서(약 4:17) 지은 죄의 결과는 무섭다. 칼날을 향해 몸을 내던지는 만용이다. 이미 마음이 굳어져 있으며 죄구렁텅이에 발이 고정되어 있다는 얘기다.

2. 이들은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하는 자들이다. 본인이 당하는 시험에 못이겨 더러운 식욕을 한껏 채우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 남들의 죄를 보고 기뻐하는 짓은 죄악 그 자체를 위한 죄악의 사랑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건 바로 악마의 왕국과 그 이익을 위해 연합전선을 펴는 처사다(쉬뉴도큐신, 1:32). 곧 자신들이 죄를 범할 뿐 아니라 그걸 변호하고 정당화하며 남들도 똑같은 일을 저지르게 북돋아 주는 것이다. 타인의 죄와 동조하고 그걸 흐뭇해 하는 가운데 우리의 죄악의 짐은 더더욱 무거워 가기 마련이다.

이제 이 모든 점을 고려해 볼 때 그처럼 죄로 타락해 있던 이방 세계가 자신들의 어떠한 행위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정리))==========

 "그 만드신 만물에," 곧 스스로 만들 수도 없고 우연히 그렇게 질서정연한 조화를 이룰 수 없는, 따라서 꼭 제일 원인이나 이성적 동인(動因)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만물을 통해서이다. 이때 제일 원인이니 뭐니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영원한 능력의 하나님을 두고 하는 말들이다(시 19:1; 사 40:26; 행 17:24). 원래 명장(明匠)은 그 일 솜씨를 보아 알 수 있는 법이다. 만물의 다양성, 무수함, 질서, 아름다움, 조화, 특성, 기능, 그리고 합목적성, 이 모든 것은 창조주와 그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는다. 이렇게 해서 어두움에 빛이 비치게 되었다. 그것도 "창세로부터," 이 말을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이 감각의 대상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자신을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만물을 통해 알려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만물에는 역력히 드러나 있다. 그는 은밀하게 일하시지만(욥 23:8, 9; 시 139:15; 전 11:5) 그가 만드신 바는 나타내 보여 주시며 우리는 거기서 그의 능력과 신성 그리고 그밖에 자연의 빛으로 알 수 있는 기타 속성들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이 자연의 빛을 통해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알 수는 없지만(어떤 이들은 플라톤의 글에서 이걸 발견할 수 있다고 보는데) 그러나 우상 숭배와 신성을 구별할 정도의 신성은 알 수 있었다...... 바로 이 진리를 그들이 불의로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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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10장]

1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2 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3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뒤나토스...깁보르이신 하나님))이라 모든 이론((로기조마이...인간의 이성/추론적 사유결과인 철학까지 포함))을 무너뜨리며

5 하나님 아는 것((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사상들))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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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그는 복음의 능력과 비방자를 처벌할 능력를 주장했다.

1. 그의 전도의 능력을 말한다(3,5절). 다음을 관찰하자.

(1) 사역의 일은 육체의 싸움이 아니고 영적인 목표를 가지고 영적 원수와 싸우는 영적인 싸움이다. 비록 사역자들이 육체 중 에서 행하고 혹은 몸 안에서 살지만, 일상의 일에서 다른 사람과 같이 행동하지만, 그러나 그들의 일과 싸움에 있어서는 육으로 행하거나 육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하면 안 된다. 이 육은 감정과 정욕과 함께 십자가에 장사되어야 한다. 죽어지고 억제되어야 한다.

(2) 복음의 교리와 교회의 훈련은 이 싸움의 무기이다. 이 무기는 육적이 아니다. 외부적인 힘은 복음의 방법이 아니다. 진리의 능력과 지혜의 온유함으로 하는 강력한 설득력이다. 양심으로 박해에 대항하는 것이다. 양심은 하나님께만 책임을 가진다. 사람은 무력이 아니고 하나님과 자기의 의무에 설복되어야 한다. 우리의 싸움의 무기는 힘이 있고 강력하다. 진리의 증거는 확신을 주며 설득력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온다. 하나님의 제도이며 축복이다. 모든 반대가 그의 승리하는 복음 앞에서는 거꾸러진다.  다음을 관찰할 수 있다.

① 죄의 권세와 인간의 마음에 있는 사탄에 의하여 복음에 반대하는 것이 무엇이냐. 무지와 편견과 정욕이 어떤 인간에 있어서는 사탄의 보류이다. 헛된 생각과 육적인 추리와 붙잡은 생각과 교만한 마음이 어떤 영혼에 있어서는 사탄의 성곽이다. 즉 "하나님이 아는 것을 대적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악마는 사람들이 복음에 순종하는 것을 막고 인간의 마음을 점령하여 자기의 소유로 만든다.

②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하는 정복. 이 사탄의 성곽은 복음에 의하여 무너진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파괴된다. 다음을 주목하자. 영혼의 중생은 사탄의 정복이다. 

2. 불순종자를 특별한 방법으로 벌할 수 있는 바울의 권리가 주장된다(6절). 사도는 그리스도의 왕국의 수상이며 그의 군대의 사령관이다.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권세와 권력을 지금 가지고 있다. 바울은 개인적인 복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에 불순종하는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질서를 파괴하는 자들의 처벌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비록 사도가 온유와 겸손을 보였지만 그의 권위를 버린 것이 아니었다. 순종하는 자를 칭찬하나 다른 사람은 심한 책망을 받을 것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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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곱영..여호와 경외함, 곧 주의 길 행함을 통해 하나님의 뜻 이룸 이루시는 성령님(주 영), 그 안에 담겨진 6가지 방면]]====

[사11:1-5]]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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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hm;k]j;(2451, 호크마) ...지혜 wisdom..<개인적 감상/통찰 ::: 지고지선최상의 진복이신 하나님 누림을 가능케 하는, 길-진리-생명의 참되신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하고, 친밀히 깨달아 알며 사랑하며 믿고 살아내며 누림을 가능케 하며, 그분의 심정/경륜을 알기에, 그분의 길로 따라 함께 걸으며 주님 뜻 이룸을 추구하는 이에게 제시하며 일깨우시는 바, 하나님 경외함을 알게하는, 영원히 살아 생동하는 진리말씀 적용의 실제>

호크마(명여)는 하캄(!k'j; , 2449: 지혜롭다)에서 유래했으며, '지혜 wisdom'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50회 나온다.

호크마의 용법은 인간 경험의 전 영역을 망라하고 있다. 지혜는 전쟁 전략의 실행(사 10:13)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의 옷을 만드는 데 있어서의 전문적 작업의 기술에서(출 28:3), 금속 작업의 기술에서 보인다(출 31:3-6). 지혜는 이스라엘과 이방의(겔 28:4-5) 정부 지도자들과 국가 관리들의 우두머리들에게 요구된다(신 34:9, 삼하 14:20). 메시야는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역할에서 지혜와 통찰력을 증거할 것이다(사 11:2).

지혜는 영민으로 표현된다. 드고아의 여인은 그 도시의 안전을 위한 그녀의 영특한 청원으로 그 도시의 유혈 사태를 피했다(삼하 20:22). 영리한 사람은 자신의 재능을 자랑치 않는다(렘 9:22). 타조가 자신의 이기적 우둔한 방법으로 행할 때 그는 영리함의 결핍의 특성을 나타낸다(욥 39:17). 영리함의 재능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불경건한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다(사 47:10).

신중함은 지혜의 일면으로서 지혜로이 말하며(시 37:30, 잠 10:31) 조심스럽게 시간을 사용하는(시 90:12)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이다. 생의 실질적인 사건에서 이와 같은 유형의 지혜는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비롯된다(사 33:6).

모든 지혜의 근원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공명정대하신 인격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의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배경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의 지혜로 하나님은 구름을 세시고(욥 38:37) 땅을 세우시며(잠 3:19) 세상을 만드셨다(렘 10:12). 하나님에게서 발견되는 지혜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간주된다(욥 12:13).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만이 지혜를 알고 계신다(욥 28:20, 욥 28:23).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사고로 발견되지 않는다. 하나님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최상의 도덕적, 윤리적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이러한 지혜를 제공해 주실 수 있다(잠 2:6, 욥 11:6).

잠언에 언급되어 있는 그런 유형의 지혜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를 의인화하여 그 지혜를 하나님의 본질로 보며 지혜를 별개의 존재로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지혜는 모든 만물보다 먼저 있었다(잠 8:22-31). 지혜는 집을 세우며, 지혜는 자기에게 귀를 귀울이는 자에게 줄 상을 준비한다(잠 9:1이하). 지혜는 심지어 대중이 모이는 장소에서 가르친다(잠 1:20, 잠 8:1, 잠 8:6, 잠 8:11-12). 지혜의 가르침을 배우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을 받으며(잠 1:2), 자연인들은 지혜롭게 되며, 정치인들도 지혜롭게 되며, 지혜로부터 풍성함을 받는 자들은 영예와 부의 왕관을 쓴다(잠 8:1-21).

지혜의 이와 같은 의인화는 독특한 것이다. 고대 근동에는 지혜의 재능을 소유한 것으로 생각되는 신들과 여신들이 있었으나 어떤 것도 지혜라는 명칭으로 존재한 것 같지는 않다. 구약성경은 지혜를 결코 여호와와 독립된 하나의 신으로 간주하여 묘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잠언 8장에서 몇몇 그러한 표현들이 나오기는 한다. 이와 같은 표현들은 종종 그리스도에 대한 예시로 간주되고 있다. 지혜는 이제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닌 형태를 지니게 되는 정도로까지 의인화되기에 이르렀다. 지혜는 하나님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지혜는 하나님에 속한 것이다. 즉 지혜는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이다. 지혜는 신약성경의 살아있는 말씀 속에서 인격적인 존재가 된다. 그러나 지혜는 로고스(Logos) 그 자체는 아니다(Dilitzsch, proverbs, p. 183). 지혜는 잠 1-9장에서 여인으로 의인화되고 있는데 이것은 그 명사가 여성이라는 사실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설명된다. 따라서 지혜있는 여인은 죄를 의인화한 어리석은 여인에 대조되고 있다. 잠 9:4-6과 잠 9:16-18의 계획된 대조를 살펴보라. 지혜에 대한 이와 같은 의인화는 이런 장들 밖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지혜는 사람을 지혜롭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혜의 시작이기 때문이다(욥 28:28). 사람에게 있어서 참된 지혜는 거룩한 자를 아는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사람은 경청하는 귀로 하나님의 지혜에 귀기울여야만 한다(잠 2:2). 사실상 내적인 행복은 사람이 열심히 찾음으로(잠 2:4) 이러한 지혜를 얻을 때 비로소 찾아온다(잠 3:13). 그런데 지혜는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잠 2:5). 회의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지혜를 결코 발견할 수 없으며, 생의 온전한 의미를 알 수 없다(잠 14:6 이하). 욥 28장의 위대한 시에서 이와 같은 특별한 성경적 의미의 지혜는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신뢰하고 죄를 피하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WBC, pp. 553-54의 R. L. Harris, "Proverbs"에서 죄의 어리석음에 대조하여 도덕적 지혜를 언급한 호크마에 대한 강조를 참고하라). (L. Goldberg)(참조: BDB; HELOT;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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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명]hn;yBi(998, 비나) ...이해, 이해력, 통찰력 <개인적 감상 :: 계시/명철understanding//통찰력insight>

비나(명여)는 빈(@yBi , 995)에서 유래했으며, '이해, 이해력, 통찰력'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38회 나온다.

(a)  비나는 '이해하는 행위'에 대해 사용되었다. 비나는 이스라엘이 결코 다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방 언어를 접하지 않으리라는 예언(사 33:19)이나,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이 질문한 모든 문제를 이해하였다는 언명(단 1:20)에서처럼, '이해'를 의미한다.

렘 23:20, 단 8:15, 단 9:22, 단 10:1에서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b)  비나는 '이해'의 능력에 대해 사용되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이해력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잠 3:5). 인간은 사사로운 이해(지혜)를 버리고 큰 부를 얻으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잠 23:4). 죄나 부정에 연루된 사람들은 지각이 없는 사람들이다(사 27:11). 사람들은 부지런히 이 이해력을 구하라는 권고를 받는다(잠 4:5, 잠 4:7, 잠 16:16). 욥은 이해력(통찰력)에 대해 언급한다(욥 20:3, 욥 39:26).

(c)  비나는 지식의 대상에 대해 사용되었다. 욥은 이해력(명철)의 장소에 대해 물었으며(욥 28:12, 욥 28:20) 그 다음에 부분적으로 이 질문에 대해 악에서 떠나는 것이 명철이라고 답했다(욥 28:28, 여기에서 지혜, 호크마와 비나는 아주 비슷한 동의어로 나온다). 지혜서는 인간이 이해(명철)의 길로 가야하며(잠 9:6) 거룩한 분에 대한 지식이 곧 명철이라고(잠 9:10) 충고한다.

신 4:6, 대상 22:12, 욥 34:16, 욥 38:36, 욥 39:17, 잠 23:23, 사 11:2, 사 29:14, 대상 12:32, 대하 2:11, 대하 2:12, 욥 38:4, 잠 1:2, 잠 4:1, 사 29:24에서도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다.

(d)  비나는 의인화된 이해력(총명)에 대해 사용되었다(잠 2:3, 잠 7:4, 잠 8:14). 전 24:9, 전 24:23에서도 이러한 의인화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영의 역할은 전적인 타자(other)로서의 하나님과, (나타나는) 세상 사이를 중개해 주는 것이다. 지혜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실재의 어떤 국면인가 아니면 이것은 시를 사용하는 데서 의인화된 추상적인 원리인가에 관한 물음이 제기되어 왔다. 하나님의 말씀 개념은,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며 세상을 존재케 하는 지혜에서 신비적으로 구체화 되었다. (참조: L. Goldberg;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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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략]hx;[e(6098, 에차) ...충고, 조언, 의논((계획/도모 달성에 대한))

에차(명여)는 야아츠($['y: , 3289)에서 유래했으며, '충고, 조언, 의논, 결의'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88회 나온다.

르호보암은 노인들의 충고를 거절했다(왕상 12:8, 왕상 12:13). 하나님의 백성의 최고 관리자로서, 모세는 이런 조언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압살롬이 후새의 나쁜 조언과 반대된 아히도벨의 좋은 조언을 거부한 것은 좋은 예이다(삼하 17장). 조언자인 이드로는 신중하게 생각해낸 계획과 함께 그것을 이행할 절차까지도 제공해 주었다.

왕하 18:20에서 "내가 싸울만한 계교와 용력이 있다"고 한 히스기야의 주장에 대한 랍사게의 조롱은 전쟁을 위한, 이 경우에는 방어하기 위한 계획을 검토하는, 흔히 있는 심사숙고를 반영해 준다.

시 33:10은 하나님의 "도모(에차)와 심사"와 일치하지 않는, 열방과 백성들이 행하는 도모와 심사(히브리어 마하샤바: 생각 thought, 고안, 방책 device, 계획 plan, 목적 purpose)에 대해 언급한다(사 8:10, 사 30:1).

구약성경은 "여호와의 도모"를 사람들과 열방들의 도모와 반대되는 것으로 언급한다. 시 33:10 이하는 이런 사상을 가장 분명하게 나타내 준다: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고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하시도다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인간들의 계획을 헛되게 하실 때 보이신 하나님의 지배적인 능력이다. 아히도벨의 도모는 이에 대한 적절한 예이다. 삼하 15:31에서 다윗은 여호와께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한다. 이로써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계획하는 것을 주권적으로 처리한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더구나 삼하 17:14에서 영감받은 저자는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조언대신 후새의 조언을 선택했다는 기록 뒤에 신학적인 주석을 하고 있다: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 느 4:15을 참조하라.

여호와의 도모는 영원하다. 즉 "영영히 선다." 하나님의 도모와 심사의 영속적인 특성은 하나님 자신의 불변성에 기초하고 있다. "그의 마음의 심사"는 주 우리 하나님께 속한 "은밀한 것들"과 같을 것이다. 그의 영원한 법령의 성취를 보증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다. 이사야는 이런 사상을 아름답게 통합한다: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직역하면 나의 의도를 실행하는 사람, 즉 고레스)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사 46:9-11).

에차는 70인역본에서 불레(boule)로 번역되는데,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신학적 의의를 충분히 지닌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참조, 행 2:23, 행 4:28, 행 5:38-39, 행 20:27, 엡 1:11, 여기에서 "그 마음의 원"은 하나님의 뜻이 변경될 수 없는 운명을 나타낸다. 참조: 히 6:17, "그 뜻이 변치 않음").

인류학적, 도덕적 결론들은 신학적 개념화에서 생겨난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변덕스러움을 "모략이 없는", 즉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를 따르지 않는 백성이기 때문인 것으로 예상한다(신 32:28). 욥은 자기가 지식의 부족으로 이치(counsel)에 어두웠다고 고백한다(욥 42:3, 참조: 욥 38:2). 잠 1:25, 잠 1:30에는 "교훈"을 거부하고 멸시하여 자기 자신에게 도리어 해를 가져온다고 언급되어 있으나 잠 12:15에는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는다고 언급한다.

잠 19:20-21로부터 우리는 경건한 사람들이 경청하도록 권고받은 조언은 "인간의 마음에 있는" 많은 "계획들"과 대조되는 "여호와의 조언"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시 1:1의 복받은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 사람이다. 더구나 시 32:8에서 시편 기자는 "내가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야아츠)"(시 73:24)라는 확신과 함께 여호와의 교훈과 가르침에 의해 격려받는다.

두 개의 기독론적 구절들은 이와 관련하여 연구되어야 한다. 이사야가 주장하는 유다의 유일한 소망은 4개의 복합된 이름으로 특징지어진 메시야의 인격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데, 그중 첫번째 이름은 "기묘자"이다(사 9:6). 어깨에 정사를 메고 올 아이는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불가사의한 계획과 목적과 모사와 법령을 가진 분이시다. 더구나 우리는 사 11:2에서 "모략"은 하나님 자신인 성령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뛰어난 상담자로 계시된다(P. R. Gilchrist).(참조: BDB; HE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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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hr;WbG](1369, 게브라) ...힘, 권력, 세력, 권능

게브라(명여)는 가바르(rb'G; , 1396)에서 유래했으며, '힘 strength, 권력, 세력, 권능 might'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6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말(욥 39:19, 시 147:10), 악어(욥 41:4), 해(삿 5:31), 사람의 몸(시 90:10, 전 9:16, 전 10:17)의 힘.

(b)  용사의 힘, 용감[맹](삿 8:21, 잠 8:14, 사 3:25, 사 28:6, 사 30:15, 렘 23:10, 렘 49:35, 렘 51:30, 겔 32:29, 겔 32:30, 미 3:8, 미 7:16), 호전적인 외침의 소리(출 32:18), 왕하 18:20, 사 11:2, 사 36:5, 왕들의 권세(왕상 15:23, 왕하 10:34, 왕하 20:20, 왕상 16:5, 왕상 16:27, 왕상 22:46 등).

(c)  하나님의 능력(욥 26:14, 시 21:14, 시 54:1, 시 65:6, 시 66:7 등), 하나님의 강력한 행사(신 3:24, 시 20:7, 시 71:16, 시 106:2, 시 145:4, 시 145:12, 시 150:2, 사 63:15).(참조: BDB; HE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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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t['D'(1847, 다아트) ...지식, 이해[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경험적 지식...추구하여 앎]

다아트(명여)는 야다([d'y: , 3045: 알다, 이해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참된 통찰력이란 의미를 지닌 '지식, 이해, 지혜'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93회 나오며, 지혜문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잠언 41회, 욥기 10회, 전도서 9회).

(a)  다아트는 '지식', 특히 인격적이며 경험적인 지식에 대해 사용된다. 다아트는 장막과 성전을 짓는데 필요한 것과 같은 기술상의 지식이나 재능이다(출 31:3, 출 35:31, 왕상 7:14).

(b)  다아트는 '지식, 지각'에 대해 사용된다(시 119:66). 무심코 저질러진 행위(신 4:42, 신 19:4, 수 20:3, 수 20:5, 벨리다아트)와 잘못된 견해는 모두 "지식이 없는 것"(로 다아트, 잠 19:2)이다.

(c)  다아트는 도덕적 인식에 대해 사용된다. 에덴 동산에 있는 나무 중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창 2:9, 창 2:17). 선악과로 지식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얻은 지식이 아니다.

(d)  다아트는 하나님이 소유한 지식에 대해 사용된다(욥 10:7, 시 139:6, 잠 3:20). 그에게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시 139:1-8). 그는 인간에게 그것을 가르치신다(시 94:10, 시 119:66, 잠 2:6).

(e)  다아트는 헛된(비 실용적) 지식에 대해 사용되었다: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어찌 동풍으로 그 품에 채우겠느냐"(욥 15:2).

(f)  다아트는 '통찰력, 총명, 이해, 지혜'에 대해 사용된다(욥 13:2, 욥 33:3, 욥 34:35, 잠 8:9, 잠 8:10, 잠 10:14, 잠 11:9, 잠 18:15, 잠 22:17, 잠 29:7, 사 32:4, 사 53:11, 렘 10:14, 렘 51:17, 욥 35:16, 욥 36:12, 욥 38:2, 욥 42:3, 잠 19:2, 잠 17:27, 사 44:19, 잠 24:4, 잠 1:4, 잠 5:2, 잠 19:25, 잠 22:20, 잠 12:1, 잠 19:27, 잠 23:12, 말 2:7, 잠 14:6, 전 1:16, 전 1:18, 전 2:21, 전 2:26, 전 7:12, 전 9:10, 잠 21:11, 잠 22:17, 사 33:6, 사 44:25, 사 47:10, 단 1:4).

(g)  다아트는 최고 높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 사용되었다(여기에 f의 의미를 포함한다). 이 개념은 호세아서에서 특히 두드러진다(호 4:1, 호 4:6, 호 6:6, 잠 2:5).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참된 종교에 대한 묘사로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르앗 야훼[yir'at YHWH])과 병행되어 나온다(사 11:2, 사 58:2, 렘 22:16).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잠 1:7).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은 그를 고백하고 그에게 복종한다. 공평과 의리를 행하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렘 22:15-16). 다른 한편, 하나님을 모르는 것에는 욕설, 거짓말, 살인, 도적질, 간음 행위, 그리고 모든 유대를 끊어 버리는 일이 존재한다(호 4:1-2). 이런 것은 백성에게 파멸을 가져올 것이다(호 4:6, 사 5:13). 하나님은 자기를 아는 것을 제사보다 더 기뻐하신다(호 6:6). 메시야 시대에 대한 선지자들의 견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지구를 뒤덮는 때에 관한 것이다(합 2:14, 사 11:9). (참조: BDB;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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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외함]ha;r]yI(3374, 이르아) ...공포, 두려움, 경외

이르아(명여)는 야레(arey: , 3373: 두려워하다, 경외하다)에서 유래했으며, '공포, 두려움, 경외'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5회 나온다.

(a)  이르아는 '공포, 두려움'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공포나 두려움의 감정을 나타낸다(시 55:6, 겔 30:13, 사 7:25). 뱃사람들이 요나의 일로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였다(욘 1:10, 욘 1:16). 이 공포는 하나님에 의해 사람의 마음에 있게 된다: "오늘부터 내가 천하 만민으로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명성을 듣고 떨며 너로 인하여 근심하리라 하셨느니라"(신 2:25). 하나님이 두려움의 대상이 될 때 경외나 존경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시 2:11).

(b)  이르아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경외'에 대해 사용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나 존경의 태도는 참 지혜의 토대이다(욥 28:28, 시 110:10, 잠 9:10, 잠 15:33). 게다가 이 문구는 잠언의 주제가 된다. 이 문구는 잠 1:7에서 사용되며, 잠 9:10과 다른 12구절들에서 거듭 사용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요(잠 8:13), 삶의 토대요(잠 14:27), 생명에 이르게 하며(잠 19:23), 그리고 장수하게 한다(잠 10:27).

수많은 구절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 두려움을 경건이나 의로운 생활과 결부시킨다.

이 두려움은 신실/진실/거룩한 삶을 야기시킨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렘 32:40).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나그네들을 돌보는데에 이르게 된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창 20:11).

공의로 다스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바위가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삼하 23:3).

전능하신 분에 대한 두려움은 친구의 친절을 억제하지 않는다: "피곤한 자 곧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를 그 벗이 불쌍히 여길 것이어늘"(욥 6:14).

동료 유대인들에 대한 경제적 폐해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었다(느 5:9).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들을 악에서 돌아서게 한다: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잠 16:6).

(참조: A. BOWLING; BDB; TD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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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싸움(엡 6: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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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19.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0.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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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갈 길을 꾸준히 걸을 것과 그리스도인의 싸움에서 용기를 가질 것을 권고한 말씀이다. 인생이란 하나의 전투가 아닌가? 확실히 그렇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 생활의 일상적인 재난과 더불어 늘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더욱 큰 싸움이 아닌가? 정말로 싸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둠의 권세에 대항하고, 우리를 하나님과 하늘나라로부터 떼어 놓고자 하는 많은 적들과 싸워야 하는 까닭이다. 우리는 대적해 싸워야 할 원수가 있으며, 우리가 그것으로 자신을 다스려야 하는 전투의 규칙들을 가지고 있다. 본문에 보면 "종말로 형제들아"(10절)라고 하였다. 이 말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병사로서 너희 사명과 의무를 위하여 스스로 할 일이 남아 있다"는 의미 말씀이다. 병사에게는 강한 마음과 훌륭한 무기로 무장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예수의 병사가 되려면 다음 조건을 구비해야 한다.

Ⅰ. 그들은 자기들이 굳센 마음을 지니고 있는가 살펴 보아야 한다. 이 내용이 본문에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의 힘으로 강건하여지고"(10절)라는 말씀 속에 표현 되어 있다. 하늘 나라로 가는 길을 싸워야 할 많은 싸움을 가지고 있고 가는 곳마다 검으로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에 부딪칠 사람들은 대단히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강건하여져야 한다." 섬김에 있어서도 강해야 하며, 고통에 대하여서도 강해야 하고, 싸움에서도 강해야 한다. 만약 병사가 아무리 외적으로는 잘 무장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적으로 굳센 마음을 결여하고 있다면 그의 좋은 무장이 그를 지키는데 하등의 도움도 못될 것이다. 영적인 능력과 용기는 우리의 영적인 싸움에서 대단히 필요한 것임을 기억하자. 또한 주 안에서 강건하여지라 했다. 즉 그를 위하여 강건해지라는 말이요, 또는 주의 능력으로 강하여지라는 말이다. 우리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우리의 본래적인 용기란 완전한 겁쟁이의 용기와 같은 정도일 뿐이요,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은 철저한 약함과 방불한 것이다. 다만 우리의 모든 풍성함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그러므로 그의 능력 안에서 우리는 전진을 계속해야 한다. 임무와 싸움을 수행함에 있어서 우리로 할 수 없는 것을 가능케 하는 하늘로부터 오는 도움을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하심과 그의 능력의 전능하심에 의지함으로 용기를 얻어 유혹에 항거할 수 있는 것이다.

Ⅱ. 그들은 잘 무장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11절)고 하였다. 즉 "사탄의 유혹과 책략을 물리치기 위하여 모든 무기와 온갖 적절한 방어책을 사용하라.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모든 은혜 즉 전신갑주를 얻고 또 자꾸 입어 봄으로 전신을 무장하여 적에게 노출되고 벗어진 부분이 없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참된 은혜를 지닌 것을 스스로 입증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모든 은혜 즉 전신갑주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은혜는 하나님의 갑주라고 불리운다. 왜냐하면 은혜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수여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난의 때를 당하여 견뎌낼 수 있는 갑주를 스스로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하나님의 갑주 이외에는 우리를 지켜 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갑주는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입어야 한다. 즉 우리는 은혜를 간구해야만 하며 또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를 사용하여야 하며 때가 오면 그 은혜로 역사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완전히 무장하여야 하는 까닭은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인 것이다." 즉 ·····무력 또는 거짓을 통한 모든 공격과, 우리에게 씌우는 협잡과. 우리를 위해 파놓은 모든 함정과 우리를 대적하려는 모든 음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을 이기고 쳐부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바울은 이 문제를 다음 같이 확대하여 설명한다.

1. 우리가 대적할 적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우리가 위험한지도 알 수 있으며 전신갑주를 입어야 할 필요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 원수는 누구인가. 그것은 어둠의 모든 권세와 사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12월)고 본문에 말씀되어 있다. 우리가 위하여 예비해야 하는 싸움은 평범한 인간들도 이루어진 적이 아니다. 즉 "혈과 육"으로 이루어진 인간 또는 단순히 우리 자신의 타락한 본성에 대적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다스리는 권한을 쥐고 있는 여러 가지 종류의 사탄에 대항하는 것이다.

(1) 우리는 교묘한 적 곧 간계와 책략을 사용하는 원수와 겨루어야 한다(11절). 사탄은 불안정한 영혼을 속이는 수천가지의 방법을 알고 있다. 이 간교함 때문에 사탄은 뱀이라고 불리우며, 또 유혹하는 기술을 습득하였으므로 옛 뱀이라고 칭해지고 있다.

(2) 사탄은 강한 원수이다. 그들은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 세계의 지배자"들이다. 그들은 수없이 많고 활동적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도 어두움 가운데 있는 이방의 나라를 가운데서 다스린다. 이 세상의 어두운 부분들을 사탄의 왕국이 자리잡은 곳이다. 실로 그들은 아직도 죄와 무지의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왕권을 찬탈하여 지배하는 자들이다. 사탄의 나라는 어두움의 왕국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나라는 빛의 왕국이다.

(3) 그들은 영적인 원수들이다. 이를 가리켜 본문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고 하였다. 사악한 영들을 말한다. 악마는 하나의 영이다. 그러나 사악한 영이다. 우리의 위험은 우리의 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 또한 우리가 그들을 알아 챌 수 없는 곳에서 그들이 우리를 공격하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다. 또 마귀들은 사악한 영들이다. 그들은 영적인 악함과 교만과 질투와 편견으로 주로 성도들을 괴롭히며, 성도들에게 대적한다. 이러한 원수들은 "하늘에" 또는 높은 곳에 있다고 하였다. 또는 땅과 별 사이에 있는 공중에 자리잡고 있다는 말이다. 마귀가 우리를 공격하는 장소가 바로 공중인 것이다. 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라고 하겠다. 즉 "우리가 하늘나라의 처소 그리고 하늘에 속한 것들을 놓고 마귀와 씨름한다"는 말로 볼수 있겠다. 어떤 고대 교부는 그렇게 해석하였다. 우리의 원수는 우리를 하늘나라로 가지 못하게 하며, 하늘나라의 축복을 받지 못하도록 하며, 하늘나라와 교통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한다. 그들은 우리의 영혼에 속한 것들을 중점으로 공격하고,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늘나라의 모습을 마멸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도 믿음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쳐부셔야 할 영적인 원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우리는 우리의 위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2. 우리의 의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우리의 원수에 대적하여 견고히 서있는 것이다.

(1) 우리는 "대적하여야 한다"(13절). 우리는 사탄의 유혹과 공격에 굽히지 말고 대적해야 한다. 사탄이 "우리를 대적하여 섰다"고 말씀되었다(대상 21:1). 만약 사탄이 우리를 대적하여 섰다면 우리도 그를 대적해서 서야만 한다. 우리는 사탄에 대적하기 위하여 방책을 세우고 주의를 게을리 말아야 한다. 사탄은 사악한 자이며 그의 나라는 죄의 왕국이다. 사탄에 대적하는 것은 곧 죄에 대적하여 싸우는 것이다. 이는 "악한 날" 곧 유혹의 날과 심한 고통의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인 것이다."

(2) 우리는 굳게 서야 한다. 본문에 "이는 모든 일을 행한후에 서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사탄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해야 한다. 사탄을 대적하라. 그러면 그는 도망가리라. 그러나 우리가 등을 돌리면 그는 버티어 설 것이다. 우리가 만약 우리의 입장과 우리의 지도자와 갑옷을 불신한다면 사탄에게 이점을 안겨 주는 결과가 된다. 우리의 현재의 사명은 악마의 공격에 대적하고 그것을 저지하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병사에게 맡겨진 이 모든 일을 수행하면 우리의 싸움을 잘 이루어질 것이요, 마침내는 승리하게 될 것이다.

(3) 우리는 무장을 하고 서야 한다. 이 사실이 본문에는 특별히 상세히 취급되었다. 여기에 완전무장한 그리스도인이 있다. 그의 무장은 하나님이 주신 무장이다. 고로 " 하나님의 전신 갑주" 또는 "빛의 갑옷"(롬 13:12), "의의 병기"라고 했다(고후 6:7). 사도는 이 무장에 대하여 방어용과 공격용으로 나누어 상세히 설명하였다. 그것은 전쟁용 각반과 흉배, 신발(또는 군화), 방패, 투구와 검이다. 여기에 있는 것들 가운데 등을 보호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주의하도록 하자. 따라서 만약 우리가 돌아선다면 우리는 적에게 자신을 노출시키게 될 것이다.

① 진리와 신실성이 우리의 허리띠이다(14절). 구약에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되기를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하였다(사 11:5). 그리스도가 띠신 허리띠는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띠어야 할 띠이다. 하나님은 내면의 진리 즉 성실성을 요구하신다. 진리가 우리의 허리의 힘이 된다. 허리띠는 다른 갑옷의 위에 띠는 것으로 제일 먼저 언급하였다. 신실함이 없는 신앙이란 있을 수 없다. 어떤 이는 허리띠를 복음의 진리에 대한 교훈으로 이해한다. 복음의 교훈은 허리에 매는 띠처럼 우리 가까이 붙어 있어야 한다(렘 13:11). 이것은 허리띠가 우리의 몸에서 하는 역할과 같이 방자함과 방탕에서 우리를 보호하여 준다. 이 진리는 그리스도인으로의 병사의 허리띠이다. 이것으로 띠를 띠지 않을 때, 그는 축복받지 못한다.

② 의가 우리 가슴의 흉배가 되어야 한다. 흉배는 우리의 제일 중요한 급소를 보호하고 방패는 가슴을 지켜 준다.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은 하나님의 진노의 화살에서 우리를 보호하는 흉배가 된다. 또한 우리에게 뿌리를 내린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은 사탄이 우리를 넘어뜨리고자 하는 공격으로부터 우리의 가슴을 보호하는 흉배가 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8절에 이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입으라"고 하였다. 믿음과 사랑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은혜를 포함시킨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사랑으로 형제와 연합하는 까닭이다. 믿음과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부지런히 살피게 하며, 모든 의와 진리와 사랑의 사명을 행함으로 인간에 대한 의로운 행동을 부지런히 행하게 한다.

③ 결심은 우리의 발의 신발과 같다. 그러므로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의 신고"(15절)라고 말씀하였다. 구두 또는 동제(銅製) 신발은 군인이 갖출 장비 중에 중요한 부분이다(삼상 17:6).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적의 진군을 저지하기 위해 길에 몰래 뿌려 놓곤 해서 걸리게 하는 덫이나 날카로운 송곳으로부터 발이 보호된다.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이란 말씀은 복음에 집착하고 복음을 준수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마음의 자세를 이르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길가운데서 만날지도 모르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길을 감에 있어서 여러 가지 어려움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길을 감에 있어서 착실히 나아가도록 하게 해 줄 것이다. 그것은 "평안의 복음"이라고 규정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든 종류의 평안 곧 하나님과 우리 자신과, 타인들과 더불어 평안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또한 본문은 복음을 받아 드리려는 준비 단계로써 즉 회개를 뜻한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신을 신어야 한다. 왜냐하면 회개 생활의 삶으로써만 우리는 죄의 유혹과 우리의 대적의 계획에 대적하여 무장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휘트비(Whitby) 박사는 이 말씀의 뜻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너희가 싸움을 예비하고자 하면 평화의 복음으로 신을 신고 복음이 요청하는 평화롭고 조용한 마음을 갖도록 노력하라. 쉽게 노하지 말며 논쟁하고자 하지말라. 모든 사람들에게 오래 참음과 상냥함을 나타내라. 이것은 마치 동제(銅製) 신은 병사가 덫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것과 같이 너희를 많은 유혹과 박해로부터 보호하여 줄 것이다."

④ 믿음이 우리의 방패가 되어야 한다. 본문에 "이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16절)고 하였다. 믿음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더 필요한 것이다. 믿음은 유혹의 때를 당했을 때 모든 것 가운데서 전부가 된다. 흉배는 심장만을 보호한다. 그러나 방패로는 사방을 다 방어할 수 있다. "믿음이야말로 우리로 세상을 이기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과 진노에 대한 진리의 말씀에 정통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이야 말로 유혹을 물리치는데 크나큰 도움이 된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요,  바라는 것들의 실상임"을 생각하자. 이 말씀은 우리의 목적을 위하여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구원의 유익을 받아들이며 그로부터 은혜를 입는 것은 어디나 방어할 수 있는 방패와 같다. 우리의 원수 마귀는 본문에서 "악한자"라고 불리운다. 마귀는 그 자신이 악하므로 우리로 하여금 악하게 만들고자 애쓴다. 그의 유혹을 "화전"이라고 불렀는데 그 까닭은 날쌔고 예측할 수 없는 신속함과 그것들이 인간의 영혼 깊은 상처를 입히기 때문이다. "화전"이라 함은 독묻은 화살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으로 상처를 입으면 그 부분에 불이 붙는 것처럼 독이 퍼지는 것과 마찬가지 뜻이다. 영혼을 지옥의 불에 잡아 넣는 격렬한 유혹은 사탄이 우리에게 쏘는 화전이다. 믿음은 이러한 화전을 막는 방패이다. 이 방패로 화전을 받아내면 그것들은 효력을 잃어버린다. 그 화전이 우리를 맞히지 못할 것이며, 우리를 상케하지도 못할 것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행하고, 그 말씀대로 살며 그 은혜를 활용할 때 유혹의 화전은 맥을 못추고 말 것이다.

⑤ 구원이 우리의 투구가 되어야 한다(17절). 즉 이 말은 "소망"의 대상이 구원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8절을 보라. 투구는 머리를 보호한다. 기초가 잘 닦여지고 잘 설립된 구원에 대한 좋은 희망은 우리의 영혼을 성결케 하며, 사탄에 의해 그것이 더렵혀지지 않도록 영혼을 지켜 줄 것이다. 사탄은 우리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도록 지켜 준다.

⑥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이다. 검은 병사에게 대단히 필요하고 유용한 도구의 하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싸움을 싸우고 또 그 싸움에서 승리를 이룩하는데 대단히 필요하고 유용하다. 그것은 "성령의 검"이라고 불리운다. 왜냐하면 이 검은 성려의 만드신 것으로 양쪽에 날이 날카로운 검보다 더 힘이 있고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골리앗의 검이 당대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것이었듯이 성령의 검도 그러하다. 이 검을 가지고 우리는 대적자들을 공격해야 한다. 성서를 잘 아는 것은 유혹을 격퇴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그리스도께서도 "기록된 바"로 시작된 말씀 인용으로 사탄의 유혹의 물리치셨다. 마태복음 4장 4,6,7,10절을 보라. 이 검은 마음 속에 숨어 있으면서 죄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여(시 119:11)주고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여러 가지 정욕과 더러움을 정화하고 근절하여 준다.

⑦ 기도는 우리의 기독교적인 무장 가운데서 혁대장식 구실을 한다(18절). 이 모든 은혜들을 기도로 한데 묶어야 한다. 왜냐하면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협조를 간구함으로 이들 영적인 원수들을 막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도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때와 장소를 따라 이루어져야 할 신앙의 다른 의무들이 있고 각자의 정황에 따라 행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는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여러가지 형편에 따라 기도해야 하며 우리 자신 또는 다른 사람의 필요에 따라 자주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에 항상 마음을 두어야 하며 다른 여러가지 의무를 행하며 동시에 절규하는 간구를 행해야 할 것이다. 비록 정해지고 엄격한 기도가 때때로 수행하기에 곤란한 경우가 있을지라도(다른 의무들을 그 시간에 수행해야 되기 때문에) 경건한 절규는 결코 무용하지는 않다. 우리는 "모든 기도와 간구로" 즉 온갖 일을 당할 때마다 기도해야만 한다. 공적 기도, 개인적인 기도, 은밀한 기도, 통성 기도, 단독 기도, 규칙적인 기도, 돌발적인 기도, 참회 기도, 자비에 대한 간구 기도, 은총에 대한 감사 기도등 온갖 종류의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성령안에서"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영혼은 기도의 의무에 충실해야 하며, 이 의무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령의 은혜에 의해서만 수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깨어서 있어야" 한다. 즉 기도하는 일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며 또 우리의 기도의 의무를, 감당하기 위하여 모든 기회를 이용하고 모든 사건을 활용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의 의무를 행하기 위하여 우리 마음의 모든 동작을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 얼굴을 찾으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의 마음이 그 말씀을 따라야 한다(시 27:8). 우리는 간구하되 "항상"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한 기도를 계속해야 한다. 우리는 특별한 기도의 기회도 마련해야 한다. 특별히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기도할 시간이 있을 때, 또 우리의 입장이 기도를 필요로 하고 있을 때, 그렇게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현재의 실망이나 패배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간구를 지속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를 위하여" 구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각 지체가 되는 까닭이다. 이 세상에서 성도란 흔치 아니하고 또 만족할 만한 생활을 누리는 사람도 흔치 않다. 그들은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한다. 그들은 기도를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도는 이제 에베소서의 결론 부분을 도입한다.

-----((영과 진리))--------------

[요4:]

23.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But the hour cometh, and now is, when the true worshippers shall worship the Father in spirit and in truth: for the Father seeketh such to worship him.

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God is a Spirit: and they that worship him must worship him in spirit and in truth.

[요17:17]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Sanctify them through thy truth: thy word is truth.

[시119 : 160]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이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들은 영원하리이다 Thy word is true from the beginning: and every one of thy righteous judgments endureth for 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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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eu'ma(4151, 프뉴마) ....바람, 호흡, 생명, 영, 성령.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프뉴마(Aeschyl., Hdt. 이래)는 프네오(pnevw, 4154: 바람이 '불다', 숨쉬다)에서 유래했으며, 다음의 의미를 지닌다.

(a)  '바람'. 이 단어의 어근은 공기의 기류로서의 역할을 하는 활력을 의미한다. 이 어근의 의미를 근거로 하여 프뉴마는 첫째로 바람을 의미한다. 이 바람은 폭풍, 일반적인 바람, 미풍, 심지어는 수증기일 수도 있다. 바람은 기후, 건강, 성격에 영향을 미치며, 자연적인 것으로도 간주되고 신적인 것으로도 간주된다.

(b)  '호흡'. 프뉴마는 숨을 쉬는 호흡을 의미한다. 여기서 호흡은 콧김을 내뿜는 것에서부터 헐떡이는 호흡에 이르기까지를 포함한다. 프뉴마는 시적으로 사용될 때는 피리 등을 불므로 인간의 호흡이 내는 소리를 의미한다.

(c)  '생명'. 호흡은 생명의 표시이다. 프뉴마는 생명의 호흡이라는 개념에 의해 생명이나 생물을 의미한다.

(d)  '영혼'. 프뉴마는 생명의 원리로서 프쉬케(yuchv, 5590: 영혼)와 매우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프뉴마는 생명을 지니고 있을 때는 몸 안에 제약되어 있고, 마지막 숨과 더불어 몸을 떠나 천상의 영역으로 돌아간다.

(e)  전이된 의미로 '영'. 프뉴마는 전이된 의미로 상호간의 관계에서 오가는 영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된다. 따라서 이 단어는 한 성읍의 정신이나, 신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영향력이나, 다양한 형태의 자극을 의미하기도 한다.

(f)  예언적인 '영'. 예언과 예언적인 시에서 프뉴마는 자극시키고 열심을 내게 하며, 채워주고, 영감을 주는 영이다(참조: 제사장들, 시인들, 선지자들). 프뉴마는 또한 고상한 웅변술의 언어, 연사의 사로잡는 힘 등을 가리킬 수도 있다.

(g)  신적인 '영'. 근본적이며 통제할 수 없는 프뉴마는 신적인 것으로 생각한다(예: 종교 음악에서). 그러나 헬라 세계에는 인격적인 성령의 개념이 없다. 신적인 영은 내재적인 것이다.

(h)  신과 '영'. 스토아주의에서 프뉴마는 우주적 능력이나 실체이다. 따라서 프뉴마는 신 자체의 존재나 현현을 의미한다.

(i)  프뉴마의 의미의 비헬라적 발달. 유대교의 영향과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아 프뉴마는 두 가지 의미로 발전되었다. 한편으로 프뉴마는 자연으로부터 단절되어, 적극적인 우주론적 또는 구원론적 영이나 신으로 의인화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프뉴마는 주술사들이 선하게 또는 악하게 조작하는 악마적인 주술적 세력을 뜻하게 되었다.

2.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프뉴마는 신약성경에서 379회 나오며,

(a)  '바람', (b)  '숨, 호흡, 생기', (c)  '영, 영혼', 육체에 생기를 불어 넣는 생명의 원리.

(d)  '육체를 떠난 인간의 영혼', (e)  '인간보다 높고 하나님보다 낮은 영', (f)  '귀신이나 더러운 영', (g)  '성령'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참조: F. Hauk;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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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lhvqeia(225, 알레데이아) 진리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알레데이아(Homer 이래)는 어원적으로 '가리워져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보여지거나, 지적되거나 표현된 정도(범위)의 상태나 사태, 그것도 이러한 보임과 지적과 표현에서 나타내지거나 그 자체 사실 그대로 나타낸 정도의 상태나 사태를 지적하며, 물론 그것은 숨겨지거나 위조되거나 왜곡되거나 생략되거나 은폐될 수도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알레데이아는 사건의 진상(full or real stale of affairs)을 의미한다. 이것은

(a)  사법에서 여러가지 진술에 대항하여 지지될 수 있는 사건의 진상,

(b)  역사에서 신화와 완전히 구별되는 실재적 사건,

(c)  철학에서 절대적 의미의 참된 것 등을 의미한다(R. Bultmann).

그러므로 알레데이아는 일반적으로 거짓이나 거짓말에 반대되는 '진실'을 의미한다.

2.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 

(a)  에메트와 의미와 그 역어 알레데이아.

알레데이아에 상당하는 히브리어는 에메트이다. 구약성경에서 에메트는 126회 나오는데, 85회 알레데이아로 번역되었다.

에메트는 아멘, 곧 확고한, 확실한, 신실한 것으로 생각되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진실한 것을 의미한다. 인격에 대해 사용될 때 그것은 때때로 주로 그의 말, 행동, 사상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을 표현한다. 이쉬 에메트는 그의 행위가 진리의 규범에 지배를 받는 사람이며, 그러므로 성실한 사람이다. 하나님께 적용될 때, 특별히 그의 신실성에 대해 사용된다. 이 단어는 '확고하다'를 뜻하는 어근 'mn에서 파생된 것으로 학자들은 이해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구약성경 학자들은 히브리 저술가들이 말하는 '진리'란 의미상 '불변성'(stability), '확고함'(firmness) 혹은 '확실성'(reliability)이란 개념을 시사해주는 '신실성'(faithfulness)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예프센(Jepsen) 기록을 요약해서 말한다면, '에메트는 신뢰할만한 것으로 입증되어야 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영어로 이 개념을 전달하는 데에는 'Reliability'(확실성)가 가장 포괄적인 단어일 것이다. 에메트는 다른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고 했다. 예프센은 이것을 인간의 진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적용시키는 것으로 말을 맺는다. 진리의 하나님으로서 "여호와는 ... 그의 말씀과 사역 안에서 우리가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TDOT Ⅰ313).

이런 견해를 근거로 하여 구약성경에서 진리는 단순히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성에 근거한 것이라는 주장이 종종 있어 왔다. 만일 이 견해를 받아 들인다면, 이것은 진리에 대한 히브리적 개념과 헬라적 개념 사이의 근본적으로 분명한 대조를 보여주는 요인이 될 것이다. 볼트만(R. Bultmann)은 쉽사리 알레데이아의 헬라어 용법이 셈어적 용법과 대조된다고 말한다(TDNT Ⅰ238). 이 이론에 따르면, 고전 헬라어에서 알레데이아는 단순한 현상과 대조되는 '진리'(truth)를 의미하는데 반해, 히브리어에서 이에 병행되는 단어는 '불변성'(stability) 혹은 '신실성'(faithfulness)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런 대조가 어느 점에서는 타당성을 지니는 반면, 이 주장들이 조심스럽게 한정되지 않을 경우에는 잘못될 수도 있고, 지나치게 단순화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에메트는 그 사용된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나타낸다. 에메트가 에메트로 간주되고, 에메트에 의해 지적되는 독특한 사실들을 항상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우에 이 단어는 법률적 영역을 넘어가는 불확정한 일반적인 타당성이나 정당성을 지적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진실이나 사실(reality)로 인정하기를 항상 요구하는 사실(facts), 신과 인간의 질서에 일치하여, 존중을 받는 정상 상태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유사하게 미쉬파트(4941: 공의, 심판)의(6666: 의), 샬롬(7965: 완전, 평화)과 같은 관련 용어에 반영되어 있다. 그 의미와 일치하여 그것은 전혀 일반적으로 진리나 진실(truth)로, 심지어 정상적 개념으로서 '진실성'(veracity)으로 번역할 수 있다. 요약하면 알레데이아는 70인역본에서 히브리어 에메트의 의미를 따라, '신실(성), 성실(성), 충실, 진리나 진실, 확실한, 정직한, 진실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b)  에메트/ 알레데이아의 법률적 용법.

에메트는 기본적으로 가장 확실히 법률 용어에서 '사실상의 과정이나 인과의 진실을 묘사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 22:20에 "그 일이 참되어(에메트/ 알레데이아)..."라는 표현에서 앞의 경우와 같이 "그 일이 비방거리에 근거하지 않고 확실한 사실들, 곧 진실에 근거한다면"이란 의미를 읽는다.

삿 9:16(삿 9:19)의 "너희의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라는 말에서 에메트/ 알레데이아는 의와 관련되며, 그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따지고 있는 것이다.

삿 9:15에서는 "참으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메트가 사물에 적용되는 경우에 법률 용어의 비유적 용법을 보게 된다.

창 24:48에 "바른 길"이 데레크 에메트(알레데이아), 즉 제시되는 많은 길들 중에 확실히 성공하는 길이다.

렘 23:28의 "내 말을 받는 자(선지자)는 성실함으로(에메트/ 알레데이아) 내 말을 말할 것이라"는 말에서, 에메트는 그 자체 꿈으로가 아니라 실제적 역사(operation, 29절)를 나타내는 사실(a fact)을 가리킨다. 단 8:26에서(이상이 확실하니) 에메트/ 알레데이아는 그 계시가 실제로 일어날 명백한 것임을 확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사 59:14, 15에서 진실이 부족하다는 불평은 13절 상반절에 "배반하는 것"에 관한 언급이 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 이스라엘의 불신실성에 대한 언급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좀 더 세밀하게 검토해 보면, 불평의 참된 원인은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마찬가지로 예레미야도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혀로 거짓말 하기를 가르친다"고 불평하였다(렘 9:5). 틀림없이 이런 일 때문에 결국 어느 누구도 자기 형제를 신뢰할 수 없는 것 같다(4절). 그러나 여기에서 주요 문제는 거짓말 그 자체이다.

스가랴도 이와 같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을 베풀고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특별히 에메트/ 알레데이아의 개념에 있는 평결(judical finding)과 재판의 기준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

시편의 세 구절들에서 진리는, 많은 학자들이 오로지 헬라 문헌에서만 발견된다고 주장하는 거의 그런 의미에서, 은폐(concealment)와 대조하여 나온다. 시 43:3에서 기자는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라고 기도한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계실 것을 바라는 기도가 아니라 "간사한 자"(1절)의 유혹적인 말에 직면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건의 진상을 보여주기를 원하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그는 진리와 빛을 필요로 한다. 진리란 그를 어둠에서부터 벗어나게 하여 사건들이 있었던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시 45:4에서 왕은 진리의 옹호자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염두에 둔 것은 왕의 확실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의심스럽고, 부정하고, 공정치 못하거나 거짓된 것은 무엇이든지 기꺼이 다 드러낼 그의 마음 자세이다. 왕의 고통 당하는 자들의 고통의 원인을 공공연하게 드러냄으로써 그들을 옹호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시 51:6의 "중심에 진실함을"이라는 유명한 언급은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앤더슨(A. A. Anderson)은 여기에서 에메트가 '신실성'(faithfulness)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Psalms, Ⅰ, 396). 그러나 이 개념은 시편 기자가 충실함을 간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기만으로부터의 해방을 간구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인 것 같다. 이 시편의 주제는 고백이며,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보신 그대로 사건들의 상태의 진실됨을 시인하는 것이다. 이 해석은, 만일 우리가 "중심"(inward parts)을 계시의 필요와 관련되어 있는 "덮여 있는 것"을 의미하고(E. A. Leslie, The Psalms, 1949, 400), 이 시편의 주제를 여호와께서 공정하시다라는 것으로 이해한다면(S. Mowinckel, The Psalms in Isreal's Worship, 1967,Ⅰ, 214), 훨씬 더 적합할 것이다.

그리고 잠언에서 진리와 거짓말(혹은 속임수) 사이의 대조를 배경으로하여 에메트/ 알레데이아가 사용된다. 지혜가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잠 8:7)라고 말할 때, 그 요지는 지혜가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을 기만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혜는 교육과 지식을 통해서 그에게 모든 것을 드러낼 것이다. 잠 22:21에서는 진리가 참된 대답이 행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즉 그곳에 거짓이나 허위가 없도록 하기 위해 드러내어 진다.

(c)  에메트/ 알레데이아의 종교적 용법.

① 법률적 영역에서 중요한 다른 표현과 같이, 진리의 개념은 특별히 구약성경의 종교적 용어에 그 자리를 잡고 있다. 에메트의 종교적 용법은 항상 비유적으로 이해하지 아니하지만, 종교적 이해(통찰)에서 생겨날 수도 있다. 어쨌든 많은 경우에 그것은 법률적 용법에 의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종교적 사실을 오로지 의미한다. 때때로 사법적으로 의인으로 묘사된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태도를 명백한 진리의 사실에 근거하며, 진리가 하나님 자신의 행위와 말씀 안에 있는 토대인 것 같이 진리를 행한다. 하나님의 진실함은 인간의 진실함을 요구한다(시 51:6). 여호와의 성산에 거하기에 합당한 자는 그 마음에 에메트("진실")를 말하는 자이며(시 15:2),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생의 질서라는 의미에서 진리에 전념하는 마음을 가진 자이다. 이 마음은 사회 생활에서 실제적으로 표현된다(참조: 겔 18:8).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한다(참조: 18:9). 하나님은 그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라고 명하신다(왕상 2:4).

호세아가 호 4:1에서 이 땅에 진실(에메트)이 없다고 불평할 때, 진실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즉 생의 모든 영역에서 진실함은 하나님의 뜻을 틀림없이 아는데서 성장하고, 이러한 앎은 그것에 관한한 진실함의 실현이라는 것이다.

지혜 문학에서 문맥은 셰켈(허위, 거짓)이나 아울라(불의)와 대조시키므로, 진실의 개념을 강조하는 한편(말 2:6; 잠 11:18; 렘 9:4; 참조: 잠 12:19), 악과 대조는 더욱 명확히 종교적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느 9:33): "우리의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는 진실히(에메트: 신실하게) 행하셨음이니이다."

② 에메트는 자주 신실성이란 의미로 특히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시 31:5에서 하나님을 "진리의 하나님"으로 부른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으로서 일반적으로 의인과 사람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으실만 하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으로서 항상 신실하게(에메트) 대하신다. 하나님은 영원히 진실함의 규범을 지키신다(시 146:6).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진리를 확립하고 그 자체 진리인 법, 곧 진정한 율법(토로트 에메트)을 수여하셨다(느 9:13).(참조: Quell).

에메트는 보통 "내가 주의 에메트를 찬양하리이다"(시 71:22)와 같은 특징적인 구절들에서 '신실성'이란 의미로 나온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영원히 지속된다(시 117:2). 앤더슨(A. A. Anderson)은 시 119:43에 나오는 "진리의 말씀"이란 어구조차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에 관한 기록이란 의미로 해석했다(The Book of Psalms). 시 30:9에서 하나님의 에메트에 대한 증거의 개념이 훨씬 더 두드러지게 나오는데, 스올(Sheol)이 하나님의 신실성을 선언하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신자에게 하나님의 신실성을 새롭게 증거해 줄 계속적인 경험이 중단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그들에게는 그들이 호소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기 때문이다(시 30:9; 참조: 사 38:18).

③ 에메트가 '신실성'(faithfulness)이란 의미로 사용될 때 자주 헤세드(변함없는 사랑)와 병행되어 나오다. 이런 경우에 에메트가 '신실성'을 의미하는 문맥과 '진리와 진실'을 의미하는 문맥을 구별해야 한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에게 헤세드와 에메트를 보여주기를 브두엘과 라반에게 요청하는 대목에서(창 24:49), 이 두 단어의 의미를 '충성'(loyalty)과 '성실'(fidelity)로 볼 수 있겠지만 개역 표준 성서(RSV)에 따라 정직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다라는 의미의 "deal loyally and truly"(충성스럽고 진실하게 대하다)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같은 장(창 24장)의 앞 부분에 나오는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맨처음 만나는 대목에서 엘리에셀을 "헤세드와 에메트를 끊이지 않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 뜻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약속에 충실하고 신실했다는 것이다(창 24:27). 창 32:10에서 야곱은 아주 똑같은 방식으로 그가 하나님의 모든 신실하심(에메트)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창 32:10).

그 특징은 시편에서 찬양과 기도가 모두 하나님의 신실성을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에메트의 용법 중 반수 이상이 이런 의미를 지닌다. 시편 기자가 "여호와의 모든 길은 ... 인자와 진리로다"(시 25:10)라고 외칠 때,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가 언약에 대한 충성으로 특징 지워지기 때문에 아주 신뢰할 만하다고 증거하는 것이다(M. Dahood). 에메트가 시 57:3, 10; 61:7; 69:13; 108:4; 115:1에서 헤세드와 결합되어 나올 때, "신실성"(faithfulness)이 에메트의 의미로 나온다. 흠정역 성서에 나타나 있듯이, 이런 의미에서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난다"(시 85:10)라고 번역된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은 그의 신실성에 대한 하나의 표현으로 명시된다. 그리고 알레데이아는 '충실, 성실'을 뜻하는 에무나(시 88:11-49), '신실한, 신뢰하는'을 뜻하는 에문(시 12:1; 시 31:24), '확실한, 진실한'을 뜻하는 야칩(3330; 단 2:8), '정직한'을 뜻하는 야샬(3474; 욥 23:7), '완전, 성실'을 뜻하는 톰(8537, 잠 28:6), '진실'을 뜻하는 케쇼트(7187; 단 2:47), '진실로'를 뜻하는 옴나(욥 9:2; 19:4), 우림(신 33:8)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④ 우리가 에메트가 사용된 여러가지 측면들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매우 많은 문맥들에서 진리가 단순히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말씀으로만 아니라 행위로 자기의 진리를 드러내시며, 이 진리는 사실상 그의 백성의 체험 속에서 입증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진리에 대한 존중을 추상적인 이론으로가 아니라 그들의 이웃에 대한, 그리고 그들의 구두상의 상업적 거래에 대한 일상적인 증언으로 나타낸다.

시 119:142에서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단순한 실존적인 진리 이상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신자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보여줄 등이요 빛이다(105절). 여기에서 그는 사실상 그와 관련될 때의 사건의 진상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내발 ... 내길").

⑤ 이러한 진리는 신뢰할 만하며 또한 확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통찰이 오로지 신학적 기초 위에서만 도달되는 것이 아니다. 확실히 신자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에메트, 헤세드, 에무나)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그에게 의지할 것이다. 그러나 에메트의 이런 특별한 용법이 이 단어의 모든 용례들의 배후에 있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인들은 다른 사람들도 인정했던 논리적 진리, 곧 참된 말은 그것이 실제와 일치하기 때문에 믿을만하다는 점, 그리고 진리의 하나님에게 있어서나 진실한 사람에게 있어서 언행이 일치한다는 점을 인정하였다(참조: 수 24:14; 시 145:18). 진리를 말과 행동의 일치로 보는 개념이 신약성경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3. 알레데이아의 신약성경의 용법. 

신약성경에서 알레데이아는 109회 사용 중, 바울 서신과 요한의 기록에서만 9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a)  알레데이아는 "확실성과 힘을 지니는"(has certainty and force)"에 대해 사용되었다(에메트의 의미로).

① 타당한 규범. 알레데이아는 엡 4:21; 엡 4:22에서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이 진리는 지적 진리에 대한 단순히 이론적인 감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복음에서 나타날 때는 진리에의 위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와 만남으로써, 결국 삶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고, 이 변화를 통해서 신자들은 과거의 속임수에서 벗어나게 된다.

갈 2:5에서도 알레데이아는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함이라". 여기서 바울은 유대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문제가 된 것은 완전히 "복음의 진리"라고 선언하였다. 바울의 판단에 따르면, 복음을 더럽히도록 유혹하는 것은 곧 진리(타당한 규범)를 더럽히도록 유혹하는 것이요, 그 반대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유혹에 굴복한다는 것은 그 자신의 성실의 의미에서나 구원사에서의 현재 있는 그대로의 실제 상황이라는 의미에서도 진리 곧 타당한 규범을 부인하는 것이다.

갈 2:14에서 알레데이아 역시 같은 의미를 가진다: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게바는 복음의 타당한 규범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고후 13:8의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라는 바울의 언명에서 진리는 복음의 진리인 동시에, 더 나아가서 이 언명은 아마도 진리의 개방에 의해(그 결과야 어쨌든간에) 진리의 능력이 그리스도의 주의와 복음을 오직 보급시킬 수 있다는 사상을 전달하는 것이다. 진리는 타당한 규범이다. 하나님의 요구는 롬 2:8과 롬 2:19에서 알레데이아이다.

② 올바름, 정직. 알레데이아는 에메트와 같이 '올바름, 정직'이라는 보다 약한 의미를 가진다. '진리를 좇는 것(행하는 것)'이란 표현에서 나타난다(요 3:21; 요일 1:6). 유사하게 요이 1:4; 요삼 1:1 이하에서 "진리에 행하는 것"은 정직하게 행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같은 맥락을 따라 알레데이아는 아디키아(ajdikiva, 93: 불의)의 반대이다(고전 13:6; 롬 1:18). 이 단어는 또한 디카이오쉬네(dikaiosuvnh, 1343: 의)와 결합하며(엡 4:24; 엡 5:9; 엡 6:14), 아마도 때때로 그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약 3:14; 약 5:19).

(b)  알레데이아는 '진술의 사실'(truth of statement)에 대해 사용되었다. 행 26:25에서 바울은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고 하였다. 여기서 "참된 ... 말"(레마타 알레데이아스)은 환상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사실에 기초한 것이다. 엪 알레데이아스라는 문구는 일반적으로 '사실과 일치하여'나 '사실대로'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막 12:32; 눅 4:25; 눅 22:59에 나온다. 따라서 엪 알레데이아스를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 사건의 사실을 정확하게, 혹은 바르게 진술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눅 4:25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서 중요하다. 예레미아스는 주장하기를 이 문구는 예수님이 자기의 말씀을 강화하고 자기 권세를 나타내고 자기 메시지의 확실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하신 것이라고 한다(J. Jeremias, New Testament Theology).

(c)  알레데이아는 드러난 '사건의 실상이나 진상'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롬 1:18("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서 확신하는 것은 이 경우에서 알레데이아를 하나님의 요구하는 것으로나 의(디카이오쉬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롬 1:19의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는 말을 보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된 사실(revealed reality)"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롬 1:25("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단순히 프슈도스(yeu'do", 5579: 거짓, 허위), 즉 우상에 반대되는, 참된 또는 실질적인 하나님을 의미하지 않으면 위와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Bultman).

좀 더 설명하면, 바울은 알레데이아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자기 의지의 계시나 혹은 심지어 율법을 통해서든 어느 순간에는 창조를 통해서든 자기 존재의 계시를 나타낸다. 이런 용법은 로마서의 처음 두 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은 사악함으로 인하여 "진리를 막고"(롬 1:18),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꾼다(롬 1:25). 그러므로 진리에 순종치 않는 자에게는 진노가 있을 것이다(롬 2:8). 반대로 율법 그 자체는 지식과 진리의 구체화이다(롬 2:19)("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 여기서 문제가 되는 진리는 근본적으로 복음의 진리가 아니다. 바울은, 요한의 경우와 같이 사람들이 메시야를 알아볼 수 있는 지식을 받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창조주요 심판자이신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거부하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바울은 모든 이방 세계가 고의적으로 복음-진리를 거부하였다고 말하지 않고 이 세계가 창세로부터 하나님과 그의 주권적인 주장들에 대해서 고려될 수 있는 것, 즉 분명히 보여진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롬 1:20)을 고의적으로 은폐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된 사실'이다.

유사하게 알레데이아는 다음과 같은 전치사와 함께 '실제적으로(real)'를 의미한다. 골 1:6(엔 알레데이아)에서 실제적인 경험을, 행 10:27과 행 10:34(엪 알레데이아)에서 실제적인 행위를 표현한다. 한편 롬 2:2에서 카타 알레데이안을 '사실과 일치하여, 사실대로'를 의미하며, 롬 2:11에 프로소포렘프시아(편파적임, 불공정)와 반대되는 것이다.

요일 3:18에서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는 대조는 헬라에서는 흔한 표현이다. "행함과 진실함으로"는 '실제적 행위로'를 뜻한다.

또한 고전 헬라어의 표현 '진실을 말하다'는 70인역본에서 뿐만 아니라(대하 18:15; 잠 8:7), 신약성경에도 나온다. 막 5:33에서 알레데이아는 "사실"을 의미한다. 무리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만진 혈루증 앓는 여인은 "모든 사실"을 고하였다. 즉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사실을 말했다. 롬 9:1에서 참말을 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과 반대이며,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고후 12:6에서 참말을 하는 것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요 8:40; 요 8:45 이하; 요 16:7에서도 역시 '진리를 말하는 것'이 나오는데, 여기서 알레데이아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듣거나 본 사실들, 곧 하나님의 계시로 해석할 수 있다.

(e)  알레데이아는 '믿거나 의지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① 신뢰성이나 신뢰할만함, 롬 3:3 이하; 롬 15:8.

② 성실, 진실, 진심. 알레데이아는 '거짓말, 은폐, 속임수'와 반대되는 '진실' truth이라는 의미를 지니거나 '성실' sincerity의 의미로 나온다. 마 22:15 이하(막 12:14)에서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을 올가미에 걸리게 하려고 다음과 같은 말로 이 질문을 시작한다: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알레데스) 참으로써(엔 알레데이아)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여기에서 요점은 예수님이 그 말을 함으로써 얻어질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진리를 감추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그는 자기 견해를 피력하는데 정직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고후 7:14("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 우리의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고후 11:10("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에도 나타난다. 따라서 그것은 고전 5:8에서 에일릭리니아(명확, 순수, 성실)와 연결되어 있으며, 빌 1:18에서 프롭하시스(편파적임, 불공정)와 반대된다. 때때로 헨디아디스의 형태로 친족어와 관계되어 있다: "믿음과 진리"(딤후 2:7). 요이 1:1과 요삼 1:1에서 이 용법이 사용되었다: "참으로 사랑하는 자",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를 가리킨다.

(f)  알레데이아는 복음, '참된 가르침 또는 믿음'에 대해 사용되었다.

① 고후 13:8: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여기서 알레데이아는 (a)①의 의미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다른 복음(에테론 유앙겔리온)(참조: 고후 11:4)과 대립되는 참된 교리를 의미한다.

② 이런 이유로 고후 4:2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반적으로 그의 활약으로분명히 나타낸 알레데이아로 부르기도 한다("진리의 나타냄"). 이 경우에 알레데이아는 앞에 나온 말 로고스 투 데우("하나님의 말씀")의 개념을 포함시킨다(참조: 고후 2:14; 골 4:3 이하; 딛 1:3).

③ 갈 5:7에서 바울은 마치 "복음을 순종치" 아니했다고 말한 것처럼(참조: 롬 10:16). "진리를 순종치" 않는 것에 대해 말한다.

④ 벧전 1:22에 의하면 기독교의 믿음은 "진리를 순종함"이라고 할 수 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참조: 벧전 1:21 이하).

⑤ 또한 복음의 설교(전도)는 진리의 말씀이다(고후 6:7; 골 1:5; 엡 1:13 등).

⑥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진리를 아는데 이르는 것"이며(딤전 2:4; 딤후 3:7; 딤전 4:3; 히 10:26; 요이 1:1).

⑦ 살후 2:10-살후 2:12에서는 알레데이아는 "거짓"(yeu'do", 5579)과 "불의"(ajdikiva, 93)라고 불리는 적그리스도의 계시에 대립되는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⑧ 딤전 3:15에서 에클레시아(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 묘사된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⑨ 벧후 1:12에서 알레데이아는 단순히 기독교 신앙이다.

⑩ 알레데이아가 '참된 가르침'이라는 것은 특히 그릇된 교훈과 반대된다.

딤전 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딤후 2:18,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딤후 3: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알레데이아는 순종할 의향에 의해 결정되는 피스티스의 개념처럼 "권위있는 교훈"이다.

딤후 4: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딛 1:14,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g)  알레데이아는 또한 "진짜임", "하나님의 실체", "계시"를 의미한다.

① 계 8:44에서 신적 능력으로서의 알레데이아와 반신적인(anti-divine) 것으로서의 프슈도스(거짓)가 대조되어 있다. 알레데이아와 프슈도스는 인간 존재의 본질이라기보다는 진정한 가능성들로 이해된다. 이것은 말씀과 말씀의 경청에 대한 생각에 의해 결정되는 계시에 의해 보존되므로, 우리는 또 다시 진정한 존재의 가능성을 지닌다. 알레데이아는 하나님의 실체,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짐으로, 즉 죄로 말미암아 구성된 인간 존재와는 반대되고 가까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실체이며, 계시는 하나님과 조화되지 않는 존재가 도달할 수 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기적 사건이다. 계시에서 그의 고유한 존재의 참된 가능성이 그에게 드러나며, 그 때, 그와 만나는 계시의 말씀에 직면하여 그는 항복할 것을 결심한다. 그러므로 알레데이아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성이나 비교(esoteric)의 지시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정신적인 각오와 연습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순종하는 믿음 속에서 일어난다.

② 요 8:44에서 하나님의 실체와 반신적 실체 간의 대조가 나타난다: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그러나 이것은 간접적으로 알레데이아가 생명을 주며, 알레데이아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은 것은 죽음으로 인도된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 말씀은 또한 알레데이아가 있을 때에 알레데이아는 그 자체가 구체적인 행위를 이루는 결정적인 힘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 뒤따르는 말씀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은 "거짓말" 또는 "허위"라는 첫 번째의 잠정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그 문맥은 명백히 첫째, 신성한 실체와 악마적인 실체가 모두 말로 표현되었다는 것과, 둘째, 이들 실체들이 존재의 활동 방식인으로서의 현실이라는 것, 또는 역으로 하나님의 또는 악마적인 실체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의 모든 활동 방식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요일 1:8과 요일 2:4에서 하나님의 계시된 실체로 인한 존재의 결정이 지적되어 있다: "진리가 그 속에 있지"(않다). 이것은 또한 그러한 결정이 구체적인 행위로 그 자체를 나타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③ 이런 이유로 요한복음에는 특유의 다의성(ambiguity)이 생겨난다. 예수님께서 알레데이아를 말씀하실 때에 이것은 첫 번째로 "진리를 말하다"라는 표면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또한 "말씀으로 계시하다"를 의미한다(요 8:40; 요 8:45; 요 8:46, 반대의 개념인 프슈도스[yeu'do", 5579] 대신에 더 일반적인 하마르티아[aJmartiva, 266]가 사용된 곳, 특히 요 8:47, 알레데이아 대신 하나님의 말씀[타 레마타 투 데우]이 쓰여진 곳).

④ 이 단어가 세례(침례) 요한에 대해 말해질 때 같은 이중의 의미가 나타난다: 그가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요 5:33). 그것은 요 18:37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여기서 빌라도의 질문이 그 말씀을 강조하고 계속되는 말씀에서 알레데이아가 스스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실체라는 것과 그것의 이해는 자유로운 존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실체로 말미암은 존재의 결정에 기초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⑤ 계시로서 알레데이아는 기노스케인(아는 것, 요 8:32; 요이 1:1, 요일 2:21)의 대상이다. 첫번째로 표현되는 것은 이해될 수 있는 말씀(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과 같은 계시의 결정적인 능력의 특성이다.

알레데이아는 본질적으로 질문한 사실의 표면적인 진실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것을 일반적이고 표면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크게 오해하는 것이다. 엘류데리아(ejleuqeriva, 1657: 자유)가 인간 의지의 자유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참조: 요 8:34), 의미하는 바는 일반적인 지식이 아니라 계시에 대한 지식이다.

요 17:17; 요 17:19의 진리도 마찬가지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즉 아버지에 의해 예수님께 위탁된 선언),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하려 함이니이다"(요 17:19). 계시의 말씀은 말 또는 사상의 집합체도 아니고, 구체적인 마주침으로 성취되는 말씀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예수님 개인과 그의 역사에서 성취하신 사건들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해 드러난다(요 17:17-요 17:19). 그는 단순히 그의 말씀에 의한 전달로서가 아니라 알레데이아를 위하여 자신을 거룩하게 함으로 알레데이아를 가져오므로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러므로 계시는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수단인 동시에 목적(조에: 생명)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신성이 나타날 때에 진정으로 받아들여진다. 하나님께서 계시로 나타나신다는 것은 요 1:14; 요 1:17에 나오는데, 거기서 "독생자의 영광"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으로, 즉 하나님의 실체는 그것 안에 나타난다고 묘사되었다.

⑥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에 대한 요구(요 4:23 이하)를 같은 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요한에게는 알레데이아 뿐만 아니라 프뉴마도 인간과 완전히 구별되는 신성의 본질과 출현의 영역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참된 예배는 영성과 의인화된(anthropomor- phic) 개념이 제거된 하나님의 개념에 기초한 순수한 지식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본질 즉 프뉴마에 의해 결정될 때에 일어난다. 알레데이아가 더해진다면 이것은 그러한 예배는 오직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계시(요 4:25)에 의해 결정될 때에, 따라서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신 계시자(요 1:18; 요 14:6)에 의해 결정될 때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⑦ 세상을 떠나시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는 요 14:17; 요 15:26; 요 16:13에서 "진리의 영"이라고 해석되며, 이것이 요한복음이 이 공동체에 주어진 "성령"의 전통적인 개념을 이해하도록 의도한 방식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참조: 특히 막 13:11; 행 1:8). 바로 그분 자신이 요 14:16에서 보혜사라는 용어를 선택하신다. 프뉴마 테스 알레데이아("진리의 영")가 단순히 하나님의 성령만을 의미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 알레데이아 만큼이나 하기오스에 의해서도 표시되기 때문이다(참조: 요 17:17-요 17:19). 그러나 그 단어가 프뉴마에 대해 말할 때에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요 16:13)는 우리에게 요한에게 하나님의 진리는 항상 계시 안에서 작용하므로, "진리의 영"으로서 역사하시는 파라클레토스(보혜사)의 역할은 공동체에서 계속 역사하는 계시로 묘사되고, 요일 5:6에서 증거하시는 프뉴마는 바로 알레데이아와 같다. 같은 의미로 요일 4:6에서 "미혹의 영"과 대조되는 "진리의 영"에대한 언급이 있으며, 어떤 것이 하나님에 속한 것인지 아니면 불경한 세력에 속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기준은 실제적인 행위, 즉 공동체 안에서 선포된 말씀을 듣는가 또는 안듣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레데이아는, 그것이 선포된 한은, 옳은 교리이며 프슈도스(거짓, 거짓말)는 잘못된 것이다(요일 2:21). 한편 요삼 1:3의 알레데이아가 계시에 의하여 결정되는 삶의 방식을 나타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요일 1:6의 "진리를 행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과 반대되는 삶의 방식(-->242)을 나타낸다. 참으로 요삼 1:12에서 어떤 사람이 "뭇 사람에게" 가졌다는 증거는 "진리에게도"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계시는 공동체를 결정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요삼 1:8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공동체가 훈계,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함이니라"로 그것의 구체적인 기독교적인 행위에 동기를 부여한다. 이 결정이 개개의 신자들을 결속시킨다. 그 때문에 요한이서의 저자는 편지의 표현을 사용하여 그의 지도자들에 대해서 말한다: "1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2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요이 1:1-요이 1:3).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Bultman; A. C. Thisel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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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19: 30]내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들을 내 앞에 두었나이다 I have chosen the way of truth: thy judgments have I laid before me.

hn:Wma?(530, 에무나) 성실함

...에무나(명여)는 아만(@m'a; , 539: 지지하다, 신실하다)에서 유래했으며, 견고함, 확고부동, 신실함, 충실, 성실'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0회 나온다.

70인역본에서는 이 용어를 알레데이아(진실, 신뢰, 정직, 진리)와 피스토스(신뢰, 신실성, 신빙성, 안식 신뢰, 신앙)로 번역했으며 KJV는 '신실'faithfulness, '진리'truth, '직무이행'setffice, '신실함'faithfulness, '신실한'faithful 등으로 번역한다.

(a)  에무나는 '견고함, 확고함'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안정하다 stady)"(출 17:12).

(b)  에무나는 '신실성'을 의미한다.

기본적으로 이 단어는 하나님 자신에게 사용되어(신 32:4) 그의 완전한 신실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 단어는 자주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에 열거되곤 한다(삼상 26:23, 시 36:5[H 6], 시 40:10[H 11], 애 3:23). 이 단어는 하나님의 행사(시 33:4); 그리고 그의 말씀(시 119:86, 시 143:1)을 나타낸다.

애무나는 또한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보증받는 사람들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신실함을 기대 하신다(잠 12:22, 대하 19:9). 실로, 이런 신실성이나 믿음의 생활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들의 특징이다(합 2:4).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사람으로 하여금 참되고 신실한 길을 취하게 한다(시 119:30).

이로부터 우리는 신자에게 위임되어 그의 의무(신실한 책임, 대상 9:22, 대하 31:15, 등)나 직무가 된 의무 개념도 볼 수 있다(참조: J. B. Scott).

(c)  에무나는 체데크(공의 righteousness, 참조, 사 11:5), 헤세드(hesed: 인자 loving kindness, 참조: NASB, 시 98:3), 미쉬파트(공의 justice, 참조: 렘 5:1)의 동의어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헤세드(사랑)로 가장 잘 묘사된다. 그러나 동의어인 에무나도 매우 적합한 단어이다. 호세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하나의 결혼으로 묘사했으며,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성'을 말하고 있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 2:19-20)

이 구절에서 '의, 심판(공의), 은총, 자비, 진실함'이란 단어들은, 에무나의 동의어들이 하나님의 '신실성'과 '사랑'을 표현하는 언약적 용어들이라는 결론을 확증해준다. 언약과 약속들에 대한 보증은 하나님의 성품에 의해 확립되는 것이다: 그는 '신실'하시다.

사람의 행동(잠 12:22)과 말(잠 12:17)은 하나님과 더불어 자신의 은총 받은 상태를 반영시켜야 한다. 결혼 관계에 있어서 '신실성'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다. 부부관계가 안정되기 위하여 두 당사자는 서로 '신실'하게 대해야 할 것이다.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지' 못했음을 다음과 같이 책망한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렘 5:1; 참조, 사 59:4, 렘 7:28, 렘 9:3).

(d)  신실성은 메시야 시대에 이루어질 것이다(사 11:5). 이 선지자적 기대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는 것은, 그의 동시대인들이 그에게서 하나님의 자비(참조: 헤세드)와 진리(참조: 에무나)를 목격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요한이 이 두개의 용어를 병행시킨 사실은 의의가 깊다. 이 두 용어는 구약성경에서도 함께 발견된다. (참조: NED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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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39:23]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Search me, O God, and know my heart: try me, and know my thoughts: 24.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And see if there be any wicked way in me, and lead me in the way everlasting.

[신 6: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And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ine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might.

bb;le(3824, 레바브) 내부인간, 마음, 정신, 의지....레바브(명남)는 레브(ble , 3820)와 동일하며, '내부 인간, 마음, 정신, 이해력, 의지'를 의미한다. → 3820 레브를 보라. 

ble(3820, 레브) 내부 인간, 마음, 정신, 의지

레브(명남)는 레바브(bb;le , 3824)의 한 형태이며, '내부인간, 마음 heart, 정신 mind, 이해력 understanding, 의지 will'를 의미한다.

레브의 실제적인 의미는 내부기관과 유사 신체기관을 말한다. 그러나 추상적인 의미에서 "마음"은 인간내부의 총체 혹은 영적인 본질에 대한 가장 풍부한 성경 용어가 되고 있다. 성경 문학에서 이 단어는 성경에서 실제로 인간의 모든 영적인 기능이 "마음"에서 기인되기 때문에 기능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용어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영적인 인격 기능에 대한 가장 빈번한 용례이다.

본 항목에서 3820레브와 3824레바브를 다룬다.

구약성경에서 레브는 약 600회, 레바브는 약 250회 나온다.

율법서, 예언서, 시편은 종종 '마음'에 대해 언급한다. 이 단어의 어근은 아카드어, 앗시리아어, 이집트어, 우가릿어, 아람어, 아랍어, 후기 성경 히브리어에도 나온다. 상응하는 아람어 명사는 다니엘서에 7회 나온다.

'마음' heart은 창 6:5의 사람에 관한 언급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창 6:6에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레브( )가 사용되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레브는 몸의 기관을 가리키기도 한다: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 판결 흉패를 '가슴' heart에 붙여..."(출 28:29), "요압이...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압살롬의 '심장' heart을 찌르니..."(삼하 18:14), "내 '심장' heart이 뛰고..."(시 38:10).

레브는 어떤 것의 내부나 한가운데를 가리키기도 한다: "...큰 물이 바다 '가운데' in the heart 엉기니이다"(출 15:8), "...그 산에 불이 붙어 화염이 충천하고..."(신 4:11, KJV는 '하늘 한가운데' in the midest of heaven, RSV는 to the heart of heaven),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잠 23:34).

레바브는 신 30:14에서와 같이 겉 사람과 대조되는 속 사람에 대하여 사용될 수도 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으리라"(신 30:14, 참조: 욜 2:13),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레바브는 종종 강조를 위해 '영혼' soul과 함께 사용되기도 한다: "또 마음을 다하고 '영혼' soul(한글개역 -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대하 15:12, 참ㅁ조: 대하 15:15).

네페쉬(영혼, 생명, 자아)는 KJV에서 15회, '마음'으로 번역된다. 모든 경우에 이 단어는 '속사람'을 나타낸다: "대저 그 마음(네페쉬)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 23:7).

레브는 그 사람 자체 혹은 그 사람의 인격에 대해 사용되기도 한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기를..."(창 17:17),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라"(전 1:16).

레브는 또한 이런 의미로 하나님에 대해서 사용된다: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렘 3:15).

욕망, 성벽, 의지의 자리를 '마음'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출 7:14),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는 그것을 가져다가..."(출 35:5, 참조: 출 35:21, 출 35:29),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시 86:12).

레브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 의미로 사용된다: "정녕히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렘 32:4).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어울릴 때 그들은 동의한다고 한다: "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그러하냐"(왕하 10:15). 대하 24:4의 "요아스가 여호와의 전을 중수할 뜻을 두고..."에서 '뜻을 두고'는 히브리어로 '마음에 품다'라는 뜻이다.

'마음'은 감정의 자리로 생각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출 4:14, 참조: 삼상 2:1). 그래서 즐거운 마음(삿 16:25), 겁내는 마음(사 35:4), 떨리는 마음(삼상 4:13)들이 있다.

'마음'은 지식과 지혜의 자리로 간주되며 '정신, 지성'의 동의어로 생각되기도 한다. '마음'이 '알다'라는 동사와 함께 나올 때 종종 이런 의미를 나타낸다: "너는...마음에 생각하고..."(신 8:5, NASB는 '너는...마음으로 알고'), "그러나 깨닫는(아는) 마음과...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 29:4, KJV, RSV, 'mind').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참조: 왕상 4:29). 기억은 마음의 활동이다: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욥 22:22).

'마음'은 양심과 도덕적 특성의 자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와 우리 주위의 세상의 계시에 어떻게 응답하는가? 욥이 대답한다: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욥 27:6). 이에 반하여, "다윗이...그 마음에 자책하고"(삼하 24:10). 마음은 인간 행위의 근원이다: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창 20:5, 참조: 창 20:6). 다윗은 '정직한 마음'으로 행하였고 히스기야는 '전심'으로 행했다.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한"(시 24:4)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레브는 반항과 교만의 자리를 나타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 8:21)고 말씀하셨다. 두로왕도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다: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도다..."(겔 28:2). 그들은 모두 "죄가 마음 판에 새겨진"(렘 17:1) 유다와 같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지배하신다. 인간의 자연 그대로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놓여 있다: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그러므로 죄인들은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시 51:10),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시 86:11). 또한 다윗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대상 29:17)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승인을 구한다: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시 62:2).

'마음'은 인간의 내적인 존재, 곧 그 자신을 대표한다. 마음은 그 자체로서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다(잠 4:4). 사람의 모든 생각, 욕망, 말, 행동들은 그의 내부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렘 17:9). 사람이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 행하기를 계속할 때, 그의 '마음'은 점점 더 완고해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여(마음의 부정함을 제거시켜) 그들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도록 하실 것이다(신 30:6).(참조: NEDOT; TWOT). 

vp,n<(5315, 네페쉬) 숨쉬는 존재, 영혼, 생명 등

네페쉬(명여)는 '숨쉬다, 원기를 회복하다'를 뜻하는 동사 나파쉬(vp'n: , 5314)에서 유래한 명사이며, '숨쉬는 것이나 호흡하는 존재(피조물), 영혼, 생명' 등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750회 나온다.

(a)  네페쉬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간에 육체를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어떤 경우에서(창 36:6) 소마(몸 body)로 번역되어질 수 있다. 네페쉬가 프쉬케로 번역되어 지면 프쉬케는 '넓은 의미에 있어서 인간의 생명적인 것을 의미하며'(G.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1, 1962, 153), 다른 말로는 살아 있는 것을 뜻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살아 있는 혼'이라는 말을 읽게 된다(창 1:20, RSV, living creatures). 죽어가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밖으로 불어내거나(AV 'gives up the ghost' 영혼을 포기한다. 참조: 렘 15:9), 혹은 영혼을 쏟아 붓는다(애 2:12). 영혼은 죽는 자에게서 떠난다(창 35:18). 그러나 영혼(즉 생명)은 육체로 되돌아 올 수 있다(왕상 17:21). '영혼은 영혼으로'라는 것은 '생명은 생명으로'라는 것을 의미한다(출 21:23). 생명의 좌소로서의 피(Blood)는 실질적으로 '네페쉬'나 프쉬케와 동일할 수 있다(창 9:4 이하, 레 17:11, 레 17:14, 신 12:23). (G. Harder).

(b)  "생물"(네페쉬 하이야)는 창 1:20에서 물에 사는 생명체 피조물에 대해 창 1:24에서는 땅에 사는 동물에 대해, 창 2:7에서는 사람(개역: "생령")에 대해, 창 9:10에서는 새들과 땅에 사는 동물에 대해, 창 9:16에서는 사람과 동물에 사용되었다. 동일한 용어가 '모든 생물', 그리고 '사람'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런 경우에 네페쉬 하이야라는 용어는 생명을 가지고 호흡하는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일 용어 '네페쉬 하이야'가 모든 생물에 사용되었다고 해서 모든 생물이 우리 인간과 같은 혼이나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분명히 네페쉬의 기능과 능력에 있어서 곤충과 물고기의 네페쉬와 소, 말 등의 네페쉬와 사람의 네페쉬가 다른 것이다. 기계의 가치와 능력에 따라 장착되는 동력이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있다.

특히 인간적 존재는 본래부터 충동, 욕구, 소망, 의지를 포함하기 때문에 네페쉬는 그런 의미들로도 사용되었으며, 한 개인의 생명을 의미한다. 소생시키고 회복시키는 대상으로서 네페쉬는 영혼(soul)이라는 개념과 생명 life이라는 개념을 모두 포함한다(R. V. Harris의 구약원어사전).

동물의 네페쉬와 사람의 네페쉬가 다른 것은 우선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대한 기사가 밝혀준다. 사람은 창조될 때 동물들과는 달리 생명의 숨(니셰마트 하임, 생명의 숨)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다. 그래서 '네페쉬 하이야'가 된 것이다. 이는 사람의 네페쉬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과 창조 의지에 의해 창조된 동물의 네페쉬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의 네페쉬와 동물의 네페쉬의 차이를 밝혀주는 또 하나의 성구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전 3:19-21을 보면 "19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것이 헛됨이로다 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 누가 알랴"

전 3:19에서 단지 한 사건, 즉 죽음이 사람과 짐승에게 똑 같이 찾아온다는 것, 전 3:20에서 '단 한 곳으로 간다는 것은 일종의 무덤을 가리킨다.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인간이건 짐승이건 간에 예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전 3:21에서 사람의 네페쉬와 동물의 네페쉬가 돌아가는 곳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전도서에서는 루아흐[영]가 사용되었지만 문맥상 네페쉬[혼]를 의미한다). 일부 학자들이 전 3:21을 회의적으로 해석하지만 매우 분명하고 명확한 어투로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간다'고 말한다. 이 사실을 누가 알겠는가? 오직 하나님 선만이 아신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자는 이 사실을 안다. 그러면 솔로몬도 알고 있었다.

(c)  네페쉬는 자아 생명의 민감한 부분으로서 감정, 사랑(Cant. 1:7), 갈망(시 63:1), 기쁨(시 86:4)의 좌소를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 것을 더 숙고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영혼'은 그 생명의 운동과 감정의 여러가지 표현을 나타낸다. 영혼은 인간의 내적 능력을 결합한 요소이다. 따라서 "너의 영혼을 다하여"라는 말이 성립된다(신 13:3). 영혼의 내부에서 음식에 대한 욕망(신 12:20, 신 12:21), 육체의 욕망(렘 2:24), 살인과 복수에 대한 갈망(시 27:12)이 거주하고 있다. 영혼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즉 그것은 울고(시 119:28), 눈물을 흘리며(욥 30:16), "오래" 참는다(욥 6:11). 그러나 지식과 이해(시 139:14), 생각(삼상 20:4)과 기억(애 3:20)도 마찬가지로 영혼에 자리잡고 있다. "영혼"은 전 인격 곧 인간의 전 자아의 총체이다. 따라서 "영혼"은 의미상 "나 자신" 또는 "네 자신"과 동일시 될 수 있을 정도이다(삼상 18:1). 창 2:7에서 네페쉬는 '사람' person, 혹은 '존재' being를 의미한다.

살아있는 피조물 역시 혼(soul)으로 묘사되어 질 수 있다. 집합적 의미에서의 살아있는 모든 것, 곧 모든 생물들(레 11:10). 율법에서 영혼(soul)이라는 말은 특별한 법규와 관련된 당사자를 의미한다(레 4:2, 레 5:1, 레 5:2, 레 5:4, 레 5:15). 사람들을 계수할 때 영혼들(souls)이라고 계수한다(출 1:5, 신 10:22). 구약성경이 죽은 사람을 가리켜 그 사람의 영혼이라 말하며 따라서 이러한 표현으로써 죽은 시체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영혼이 몸과는 별개라는 개념 또는 죽을 때 영혼이 몸에서 분리된다는 개념에 구약성경이 전혀 친숙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해 주고 있다(민 6:6). (G. Harder) 

daom](3966, 메오드) 힘, 굉장히, 매우, 대단히

메오드(명남)는 '많음, 힘, 풍부'를 의미하며, 부사적으로 '굉장히, 엄청나게, 매우, 대단히'라는 의미를 지닌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300회 나오며, 주로 부사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명사로는 드물게 사용되었다.

(a)  명사로는 '힘 force, might'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신 6:5, 왕하 23:25).

(b)  부사적으로 '굉장히, 엄청나게, 크게, 매우, 대단히, 많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창 1:31, 창 4:6, 창 7:18, 창 7:19, 창 27:33, 창 17:2, 창 17:6, 창 17:20, 출 1:7 등). (참조: BDB; HE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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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에 대한 성경적 견해 ....전지전능 창조주 하나님의 (사람과 세상을 창조하신) 의지, 뜻, 목적

  ‘진리’라는 말은 헬라어 ‘알레데이아(ajlhvqeia)’를 번역한 말이며, 히브리어로는 ‘에메트(tma)’입니다. 에메트는 견고하고 변하지 않는 실체를 가리키는 말로서, 올바르고 정확하며 참되고 생래적인 목표(=구원 경륜)를 향해 움직이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1. 구약에서의 진리

  ‘진리’라는 말이 하나님께 대해 사용될 때(신 32:4; 대하 15:3), 이는 그의 본성 혹은 의지의 성질, 즉 일관성 및 불변성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의 의지의 참 본성이므로 하나님의 계명은 임의적 요구가 아니라 그 안에 진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느 9:13; 호 4:1). 에메트(tma)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표현이므로 하나님의 계명과 동의어가 되고, 따라서 다시 그 계명에 대한 인간의 적절한 반응인 진실과 동의어가 됩니다. 진리는 성실과 신실을 의미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종교적, 도덕적 삶의 전 분야를 의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신약에서의 진리

신약에서의 진리의 개념은 구약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신약에서 진리는 교리를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는 구원적 사실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의 ‘진리’ 

요한복음에서 사용된 진리(ajlhvqeia)는 구약의 에메트(tma)와 같은 개념입니다. 진리는 그 결과로 어떤 일을 행하게 되는 입증된 명제가 아니라, 신자들이 실행하는 성스러운 추진력입니다. 

  바울의 ‘진리’ 

“진리가 예수 안에 있다.”(엡 4:21)는 사도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실현된 것을 전제한 것으로, 여기서 ‘진리’란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뜻보다는 복음을 가리킵니다(갈 2:5, 14; 골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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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성character 과 성품 nature]
배론 토마스 바빙톤 맥콜레이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하는 행동을 보면그 사람의 품성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사전적인 의미로 품성(品性)은 ‘품격 과 성질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서’. 품성은 대개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인 말, 행동, 태도를 통해 표현되는 그 사람의 어떠함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마다 각각 다른 독특성을 갖고 태어나지만 환경과 문화, 전통 가운데 성장하면서 훈련되고 다듬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품성은 사람마다 갖는 독특한 성질 중에서 반복된 삶의 패턴 속에 비교적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특성 또는 경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 ‘품성’과 함께 ‘성품’이란 표현을 구분 없이 사용하기도 한다. 
성경에서는 ‘성품’이란 단어가 열여덟 번 사용되었다. 그 중 구약에서는 열일곱번 사용되었는데 주로 'soul' 때로 ‘spirit' 이란 단어로 사용되었다. 신약에는 단 한번 ‘성품’이란 단어가 베드로후서 1장 4절에 나오는데 ‘nature'라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또한 ’성품‘으로 사용된 헬라어 ‘휘시스(fuvsi")’는 신약성경 다른 곳에서 10번 정도 더 사용되었는데 다 ‘본래, 본성’ 등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즉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성품’은 변하지 않는 본질적으로 타고난 성향(본성)을 말할 때 사용되었다.
성경에서는 두 가지 ‘성품’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을 때 그들은 ‘의의 성품’을 가진 자였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므로 인간은 ‘죄의 성품’을 갖게 되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휘시스(fuvsi")]]]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3] ...그렇기 때문에 ‘성품’의 변화는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성품’의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만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의의 성품’이 회복되는 것이다. ‘의의 성품’을 가진 자의 존재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다(엡2:10). 
성경에서 ‘성품’은 존재론적이며 근본적인 변화를 표현할 때 사용한다. ‘품성’은 ‘성품’과 달리 사람과의 관계를 통하여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삶의 패턴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복하게 되었을 때 각 사람의 ‘품성’이 형성된다. 개인이 갖게 되는 ‘품성’은 환경과 문화, 전통에 영향을 받게 된다. 자녀에게 있어서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은 부모이다(혹은 가장 1차적으로 만난 사람들). 가장 1차적으로 영향을 주는 부모로부터 경험하게 되는 삶의 방식에 따라 반복하여 반응하면서 ‘품성’은 형성되어 간다. 더 나아가 성장하면서 자신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결단하므로 개인적인 ‘품성’은 구체화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품’과 ‘품성’은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에서는 “.... 신의 성품(성-의-진-선)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라고 표현하고 있다. 삼위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속성을 가지셨다. 또한 더 이상 품성을 훈련하고 계발해야 할 필요도 없으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품’이란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최고의 걸작으로 만드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본질적으로 최고의 존재로 디자인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감탄하셨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 나오는 ‘만드신’ - ‘포에마(poiema)'는 하나님의 작품이란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 단어에서 시(poem)'라는 단어가 나오게 되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 한 편의 시를 쓰듯이 모든 것을 쏟으셨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훼손된 우리의 내적 품성을 (JC를 빼어닮은 품성으로)재창조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시를 써 내려가듯 우리를 각각의 독특성에 맞게 빚어가고 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거듭난 자들을 본성적으로 ‘죄의 성품’에서 ‘의의 성품’으로 바꾸어 주셨지만 여전히 옛 사람의 습관과 삶의 방식은 바꾸어야 한다. 또한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로서 그에 걸맞은 관계적 삶의 표현으로 살아감을 원하시기때문에 우리의 ‘품성’을 사람들을 통하여 훈련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때 ‘성품’을 바꾸어 주시고, ‘성품’을 바꾸어 주신 후 각 사람의 환경과 문화, 전통 가운데 부모, 형제자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품성’을 훈련하시므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날마다 세미한 음성으로 관계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 말씀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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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1:16]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보좌, 왕좌...드로노스)들이나 주권(=퀴리오스...히브리어 아돈/마라...주인......힘/권위...지배력/영향력)들이나 통치자(=아르케, 정사, 통치권, 통치영역)들이나 권세(=엑수시아, 선택의 자유/권리, 통치력, 권력자)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For by him were all things created, that are in heaven, and that are in earth, visible and invisible, whether they be thrones, or dominions, or principalities, or powers: all things were created by him, and for him:
[딤전2장] 1.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I exhort therefore, that, first of all, supplications, prayers, intercessions, and giving of thanks, be made for all men;  2.임금(바실루스...왕...찬탈자가 아닌 합법적인 왕, 기본자질/덕목은 통치력의 근간인 이데아의 충만....이데아는 현상 세계 밖의 세상이며 이데아는 모든 사물의 원인이자 본질. 즉 참생명과 복됨에 대한  지식)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왕과 고관들...실제 통치자들))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For kings, and for all that are in authority; that we may lead a quiet and peaceable life in all godliness and honesty. 3.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For there is one God, and one mediator between God and men, the man Christ Jesus;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소조...하나님의 보호/보존안으로 들어감))을 받으며 진리((=알레데이아....에메트...하나님의 신실성..))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Who will have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unto the knowledge of the truth. 5.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For there is one God, and one mediator between God and men, the man Christ Jesus; 6.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Who gave himself a ransom for all, to be testified in du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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