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9.11.18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창세기연대기.이단 탐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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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탐심((없는 것 얻고싶다))...욕심((있는 것 더 갖고 싶다)) 


===조상들과의 만남===

 ......: 창세기 연대기의 정확성과 족장들의 긴 수명 (Meeting the ancestors)

Russell Grigg

==당신은 노아의 아버지 라멕(Lamech)이[1] 아담(Adam)과 대화하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는가? 

”당신이 에덴 동산에서 금지된 과일을 먹기 전에 하나님과 지냈던 일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이와 같은 일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러한 일은 일어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창세기에 기록된 연대기에 의하면, 아담은 라멕이 56살 되던 때까지 죽지 않았다. [2] (아래 표를 보라).

아브라함이 셈(Shem)과 말하는 것을 어떨까? 

”저에게 당신과 당신의 형제였던 함, 야벳,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 노아가 방주를 지었던 일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말씀해 주세요. 하나님이 당신들께로 보내신 모든 동물들과 방주 안에서 1년여 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하나의 상상의 이야기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도 또한 일어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창세기에 기록된 연대기에 의하면 셈은 아브라함의 시대까지 살아있었다. [3, 4]

성경은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 족장들의 나이에 대해서 세심하게 기록하여 놓았다. 

메시야/언약 가계에 있는 각 인물들이 아이를 낳았을 당시 몇 세였는지, 그들이 몇 세를 살다가 죽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죽을 때에 아들의 나이는 몇 세였는지를 기록해 놓고 있다. [5, 6] 

그러므로 간단한 산술에 의해서, 각 족장들은 세계가 시작된 해(the Year of the World, 라틴어로 Anno Mundi, 약자로 ‘AM’으로 표시함)로부터 몇 년에 태어나고, 몇 년을 살다가, 몇 년에 죽었다는 것이 쉽게 그리고 정확하게 계산될 수 있다. 그리고 창세기 목록으로부터 어떠한 ‘간격(gap)’이 있을 가능성은 제거되어진다.

따라서 최초의 해(first year) 제 6 일에 창조된 아담은 AM 930 년에 죽었고, AM 874 년에 태어난 노아의 아버지 라멕의 시기까지 그의 후손들과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노아의 아들인 셈은 AM 1558 년에 태어나서 AM 2158 년에 죽었기 때문에, AM 2008 년에 태어난 아브라함을 포함하여 그때까지의 여러 후손들과 이야기할 수 있었다. [3]

마찬가지로, 창조 후의 노아 홍수가 일어난 날짜도 정확하게 정해질 수 있다. 창세기 7:6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세라”. 아래의 표로부터 우리는 노아가 AM 1056 년에 태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홍수는 600 년 후인 AM 1656 년에 발생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AM 2008년) 352 년 전이다.

셈(AM 2158 년에 죽음)과 에벨(Eber, 셈의 증손자, AM 2187 년에 죽음)은 둘 다 아브라함 시대까지 살아있었다는 것에 주목하라. 그 당시 족장 시대에서, 고대 이스라엘 민족(Israelites)이 셈족(Semites, 셈의 이름을 따라), 또는 히브리족(Hebrews, 에벨의 이름을 따라)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 어떤 간격이 있는가?

선의의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들 연대기에 간격이 있다고 말해왔다. 그들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성서적 시간 틀을 잡아 늘려서 부분적으로 세속적 지질학과 고고학과 화해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보여준 것과 같이, 창세기의 연대기에는 어떠한 간격도 없다. 그것들은 물샐 틈 없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기록은 정확한가?

창세기를 읽다보면 '...계보(대략, 사적, 후예)는 이러하니라 (These are the generations of ...., 히브리어로 toledoth = origins, ’history,’ 또는 ‘family history’) 라는 구절이 11번이나 나온다 (KJV) [7]. 이들 문장들은 모두 그들이 기술했던 사건들 다음에 오고 있다. 그리고 각 구분되어 기록된 사건들은 모두 거명된 개인들의 죽음 이후 보다는 죽음 이전에 발생했던 일들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문장 앞에 또는 머리말로 쓰여졌다기 보다는, 문장 뒤에 글을 마치는 서명으로 더 잘 어울린다. 

만약 이것이 그렇게 쓰여졌다면, 이것들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아담, 노아, 셈 등의 사람들 각자가 그들의 생애 동안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점토판들에 기록했을 수 있다 [8]. 그리고 그것들을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담, 셋, 노아, 셈.....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의 계보를 경유하여 물려주었다. 모세는 성령의 인도하심 하에, 이것들을 선택하고, 자신의 주석을 넣어 편집하여, 오늘날 우리가 창세기(Genesis)라고 알려진 책으로 편찬하였다 [9].  

조상대대로 물려온 많은 중첩된 사실들에 의해서 쓰여진 기록은,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한 어떠한 구두적인 설명(oral accounts) 보다는 훨씬 정확하게 기록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따라서 아담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단지 2명의 중개자, 즉 므두셀라(또는 아마도 라멕)와 셈만이 필요했다.

초기 족장들의 연대기에 대한 상세한 기술은 성경에 세 번 기록되어 있다. 즉, 창세기 5장과 11장, 역대상 1장, 그리고 누가복음 3장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계보에 대한 기술을 중요하게 여기셨음을 나타내고 있다 [10, 11, 12]. 유다서 1:14절에는 특별히 에녹은 아담의 칠세 손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 연대기는 신약성서의 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역사의 정확한 기록이라는 사실을 재강조해주고 있으며, 연대기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13].     

References and notes

1. Not to be confused with another Lamech, son of Methusael and descendant of Cain (Genesis 4:17–18). 

2. Adapted from McIntosh, A.C., Genesis for Today—Showing the relevance of the creation/evolution debate to today’s society, 2nd edition, Day One Publications, Epsom, UK, pp. 44–47, 2001. Note that Genesis for Today discusses other options for the dates of Abraham. 

3. Abram, mentioned first in Genesis 11:26, was the most important of the three sons born to Terah; he might or might not have been the first born, cf. Shem, Note 6. Abram left Haran at the age of 75 (Genesis 12:4), after the death of Terah (Acts 7:4) who died at age 205 (Genesis 11:32). This would mean that Abram was born when Terah was 130, i.e. in AM 2008.  

4. Abram’s name, which means ‘exalted father,’ was changed by God to Abraham, meaning ‘father of many,’ when Abram was 99 years old (Genesis 17:1,5). 

5. E.g. Genesis 5:3–6: ‘And Adam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a son in his own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And the days of Adam after he had begotten Seth were eight hundred years: and he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that Adam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And Seth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and begat Enos … ’. 

6. Of Noah’s three sons, born after Noah turned 500 (Genesis 5:32), although Shem (the son in the covenant line) is mentioned first, Japheth is described as the elder (Genesis 10:21), so presumably Japheth was born when Noah was 500; Ham is called the younger (Genesis 9:24). Genesis 11:10 says, ‘Shem was one hundred years old, and begat Arphaxad two years after the flood’; i.e. Shem was 100 in AM 1658, and so would have been born AM 1558, when Noah was 502. 

7. Genesis 2:4; 5:1; 6:9; 10:1; 11:10; 11:27; 25:12; 25:19; 36:1; 36:9; 37:2. 

8. Most of the events of Creation Week in Genesis 1 occurred before Adam was created, so must have been revealed by God, probably to Adam. 

9. The Lord Jesus Himself and the Gospel writers said that the Law was given by Moses (Mark 10:3; Luke 24:27; John 1:17), and the uniform tradition of the Jewish scribes and early Christian fathers, and the conclusion of conservative scholars to the present day, is that Moses wrote Genesis. See Grigg, R., Did Moses really write Genesis? Creation 20(4):43–46, 1998. 

10. Cf. the importance of repetition of incident in Genesis 41:32 and Acts 10:9–16; 11:10. 

11. For a discussion of the mention of Cainan in Luke 3:36, see Cainan: How do you explain the difference between Luke 3:36 and Gen. 11:12~

12. For a discussion on how many people there were pre- and post-Flood, seeBatten, D., Where are all the people? Creation 23(3):52–55, 2001. 

13. The key to understanding any portion of the Bible is to ascertain the purpose of the writer of that part. A straightforward reading of these three records indicates that the writers intended to give a complete genealogical record from Adam to Abram/Abraham (and on to the kings of Judah in 1 Chronicles, and on to the Lord Jesus Christ in Luke 3). See Biblical genealog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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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긴 수명(long lifespans)===

많은 사람들은 창세기 앞부분의 족장들의 긴 수명은 역사적인 것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

1) 그들이 역사적이지 않다고 제시할 만한 근거가 본문에 전혀 없다.

2) 그들 숫자의 자릿수는 수메르인의 기록에 의해서 지지 된다 [1]. 

3) 숫자들을 기록하는(단어로 하는) 히브리인의 방법은 필사 오류로 보기에는 너무 어렵다.

4) 한 해(year)가 실제는 한 달(month)을 의미한다는 제안이 있었다. 그래서 예를 들어 므두셀라는 80세에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국한한 가정은 본문의 다른 곳에서 지지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다른 일부 족장들은 어린이였을 때 아버지가 되어버린다. 

5) 여러 내부적인 일관성이 있다. 죽을 때의 나이로부터, 므두셀라는 정확하게 홍수가 나던 해에 죽은 것으로 계산 되어진다 [2]. 그러나 만약 (오류가 있는) 70인역(Septuagint)을 사용한다면, 그의 죽음은 홍수 후 14 년이 되어진다. 그러나 므두셀라는 노아의 방주에 타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은 내부적으로 모순이 된다. 극적인 수명 단축이 홍수 이후부터 시작되어진다. 이것은 전 세계적인 격변적 영향과 인구수와 일치되어진다. 

6) 긴 수명에 대한 어떠한 생물학적 장벽이 없다. 그리고 연속적인 수명 저하(decline)에 대한 유전적 설명(환경적인 요소들을 더하여)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중이다 [3].

References and notes

1. The ages of their pre-Flood kings seem astronomical. However, when one realizes that the Sumerians used a number base of sixty (not ten), presumably when transcribing from historical pre-Flood records, the ages come into good alignment with the patriarchal lifespans of Genesis. See López, R., The antediluvian patriarchs and the Sumerian King List, CEN Tech. J. 12(3):347–357, 1998. 

2. Some commentators argue that the name Methuselah comes from the roots muth (= death) and shalach (= bring or send forth), thus his name means ‘his death shall bring’—a prophetic reference to the Flood judgment. If so, then it is fitting that he was the longest-lived person in the Bible, a symbol of God’s immense patience and longsuffering. 

3. Wieland, C., Living for 900 years?, Creation 20(4):10–13, 1998 and Decreased lifespans: have we been looking in the right place? CEN Tech. J. 8(2):138–141, 1994.

창조과학회에서 옮겨옴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936

===노아의 홍수는 언제쯤 일어났는가? ===

: 노아 홍수의 발생 시기에 대한 연대기적 계산 (The Date of Noah’s Flood)

J. Osgood

   노아 홍수(Noah's Flood)가 정확하게 언제  일어났었느냐는 질문에 대해 오랜 기간 학자들로부터 다양한 대답들이 있어왔다. 그 날짜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존재하는 문서로부터 증거를 얻는 것이다. 노아의 홍수에 관한 많은 민족들의 문서들과 역사들이 있지만, 가장 상세한 묘사는 성경(Biblical text)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노아의 홍수가 언제 일어났는지를 말해줄 수 있는 충분한 연대학적 자료들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그리고 언제 일어났는 지와 하나님께서 이 지구에 행하신 심판의 본질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도록 기록되어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성경의 연대나 날짜를 측정하는 기술은 대부분 하나의 신비(mystery)이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그 같은 날짜를 찾아낼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내가 사용할 시작점(starting points)이나 가정들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나는 성경에 있는 날짜들에 관한 정보가 사실임을 가정하거나 믿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작해 볼 수가 없다). 나는 그 정보가 신뢰할만하며, 성경 기자가 속이기 위해 제시한 것이 아니라고 가정해야만 한다. (이 가정은 검사되어지기 이전의 어떠한 역사적 문서에 대해서도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만약 내가 원본 안에서 명백한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면, 나는 그 모순이 원본보다는 나의 이해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가정할 것이다. 세 번째로, 나는 성경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계시하신 말씀이므로, 그것은 정확하고 그러므로 성경 외에서 유래한 진정한 역사적 정보와 충돌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성경의 한 부분에서 나온 정보를 이용하는 최선의 방법은 성경 기자가 그것을 사용했던 방법으로, 또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언급되어진 방법으로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가정할 것이다.

이제 우리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우리들이 존재하는 현재로부터 노아 홍수 사이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 갔는지에 대한 정보들을 찾아보도록 하자. 출발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시점을 취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대략 1984년 전에(이 글은 1981년도에 쓰여졌음) 태어났다는 것에 대해 반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노아 홍수를 과거의 사건으로 언급했기 때문에, 우리를 2,000년 이전의 시간으로 데려갈 자료가 필요하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신뢰할만한 확실성을 가질 수 있는 다음 날짜는 BC 967년(또는 2,948년 전)이다. 이것은 솔로몬이 성전의 건축을 시작한 날짜(열왕기상 6:1)이다. 왜 이 사건이 BC 967년에 일어났는가에 대한 상세한 증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필자는 에드윈 틸레(Edwin Thiele) 교수의 ‘히브리 왕들의 신비로운 숫자들(The Mysterious Numbers of the Hebrew King)‘ 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의 작업은 고대 앗시리아 문화의 연대기와 성경적 기록이 모두 그 날짜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열왕기상 6:1절에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이집트)을 떠난 때부터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시작할 때까지 480여 년이 걸렸다(부록 1 참조)는 기록도 그 날짜를 알 수 있는 데에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출애굽은 대략 1981 + 967 + 480년 전(부록 2를 보라), 다시 말하면 3428년 전, 또는 BC 1447 ± 1년에 일어났다. 왜 ± 1년 인가? 연대학자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족보나 연대기를 비교해본 바에 따르면, 주목할만한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이들 리스트들은 전부 년 단위로 사용되어졌다는 것이다 (예로 창세기 11장). 만약 어떤 사람이 44세에 그의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되었다면, 그는 어쩌면 45세에 가까운 44세 일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그는 12달 기간 중에서 여전히 44세인 것이다. 이것은 리스트에 올라있는 각 사람이나 사건들에 있어서 12개월, 또는 1년의 오차 한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노아의 홍수를 출애굽 이전에 있었던 하나의 중요한 시점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출애굽 이전으로 우리를 데려갈 자료들을 검사해 보자.

바울(Paul)은 고등교육을 받은 유대인이며, 히브리어에 능통하고, 유대인의 종교와 모세의 기록에 대해 박식하였다. 그는 서기 연대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는 때에,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썼었다. (갈라디아서 3:17). 그는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시고 430년 후에 (부록 3을 보라), 이스라엘인들이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다고 기술하고 있다.

사도행전 7:4절과 창세기 12:1-4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셨을 때 그의 나이 75세 였고, 같은 해 그의 아버지 데라는 205세였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데라가 130세 였을 때 태어났다 (창세기 11:26-33). (부록 4를 보라).

창세기 11:10-26절의 족보에 대한 서술은 부자 관계의 서술이고, 아브라함부터 노아의 아들인 셈까지 연계되어 있다. 그 서술은 사람들의 이름으로 나열되어 있다. 그들의 탄생 시점에 아버지의 나이가 기록되어 있고, 그들 아버지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이러한 연대기는 잃어버리는 세대를 가지지 않는다. 즉 간격이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셈의 100살이 되는 해(창세기 11:10)와 아브라함(창세기 11:26)사이에서 언급되는 숫자를 합계하면 350년을 구할 수 있다. 9 사람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으므로 350 ± 9년이 되는 것이다. (9는 각 사람마다 1년의 오차 상한치). 창세기 11:10절에서 셈의 나이 100살은 홍수 2년 후임을 알 수 있다.

노아의 홍수는 언제 일어났는가? AD 0까지 1981년에, 더하기 솔로몬의 성전 건축 시기까지 967년, 더하기 출애굽이 끝나는 시기까지 480년, 더하기 아브라함과의 언약까지 430년, 더하기 아브라함의 나이 75년,  더하기 셈의 나이 100세까지의 350년, 더하기 홍수까지 2년을 더하면 계산되어질 수 있다. 성경적인 자료에 의하면, 홍수는 BC 2304 ± 11년에 일어난 것이다.

이 날짜는 노아의 홍수를 지역적인 것으로, 또는 신화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성경적 연대기를 비현대적이고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세속적인 고고학과 충돌한다. BC 2304년에 전 지구적인 대격변적인 홍수가 있었다는 것은 고고학에 의해서 발견되어지는 모든 문명들이 지난 4285년(1981년 기준으로) 안으로 맞춰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실에 대한 중요성은 이후의 글에서 다뤄질 것이다. (더 많은 정보를 위해서는 TJ 2 (1986), pp. 56-87 과 TJ 3(1988), pp. 96-136를 참조하라)

부록 1

출애굽기 12:6절에 의하면, 출애굽은 첫 달(Abib)의 제 14일에 시작되어졌다. 열왕기상 6:1절에 언급된 480년의 기간은 이 월(Zif) 이 일에 끝났다 (열왕기상 6:37, 역대하 3:1-2절을 보라). 이것으로 이 기간은 480년 19일이 된다.

부록 2

일부의 사람들은 이 기간이 훨씬 더 길었을 것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개개인의 연대학적 서술은 480 년보다 훨씬 더 많이 합산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랜 연대학(long chronology)으로서 알려져 있는 것을 발생시켰다. 여기에서 480년이라는 기간은 단지 '하나님의 신정(God’s theocracy)‘ 기간으로서만 간주되어진 것만 합산되어졌다는 것이다. 즉 불복종의 기간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불복종한 시기는 계산하지 않으셨다는 가정에 의존한다. 오랜 연대학은 불복종에 대한 임의적이고 일관성이 없는 정의를 필요로 한다. 예를 들면 광야생활 40년은 대게 계산되어지지 않는다. 반면에 아비멜렉(사사기 9장)의 3년은 계산되어진다. 열왕기상 6:1절의 서술은 왕조의 기록에 의해서 이루어진 기록과 일치하는 서술로서 문자 그대로 해석되어져야만 한다. 그것은 이 기간에 일어났던 사건들이 펼쳐지면서 경과된 시간에 대한 문자적인 기간으로 주어졌다.

부록 3

대부분의 영어 독자들은 이 430 년이 일어난 때와 관련하여 충돌하는 것으로서 출애굽기 12:40절과 갈라디아서 3:17절을 간주할 것이다. 그러한 하나의 어려움은 영어의 사고 방식에 그 원인이 있다. 그것을 설명해 보겠다.     

바울은 요세푸스(Josephus)와 같은 다른 유대 학자들처럼 출애굽기 12:40절과 매우 친근한 훈련된 히브리 학자였다 (Antiquities, 15장, 2쪽을 보라). 이 학자들 둘 다 모두 출애굽기에 언급된 430 년이라는 기간은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고 출애굽을 하는 사이에 해당하는 기간으로 언급되어졌다는 것을 주저 없이 쓰고 있었다. 만약 당신이 어떠한 다른 확인을 필요로 한다면, 계산기를 가지고 이 430년에 관한 출애굽기에 있는 다른 증거들을 나와 함께 추적해 보자.  

출애굽기 6장에서, 모세는 아므람의 아들(20절)로서 기록되어 있다. 아므람은 137세에 죽었고, 고핫의 아들이었다 (18절). 고핫은 133세에 죽었고, 레위의 아들이었다 (16절). 레위는 137세에 죽었고, 이스라엘(야곱)의 아들이었다. 모세는 그의 나이 80세에 출애굽을 하였다(출애굽기 7:7).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최대 모세(80), 아므람(137), 고핫(133), 레위(137)를 더한 기간, 또는 487년 동안 애굽에서 살았다. 그러나 이 487년 이라는 계산은 부정확함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레위는 애굽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애굽에서는 레위의 전 생애인 137년 보다 적은 기간 동안을 보냈었다. 얼마나 더 적었을까?

창세기 41:46절에,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나이가 30세 였다. 이 대면 이후로 7년의 풍년과 7년의 흉년이 있었다 (창세기 45:6).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왔을 때는 기근이 시작된지 두 해 째로서 요셉의 나이가 적어도 39세 였다. 레위는 아마도 요셉보다 10살 정도 더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창세기 29장, 30장). 그러므로 레위가 애굽으로 왔을 때 그의 나이는 대략 49세 정도였을 것이다. 487년 이라는 수치에서 49년을 빼면 438년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이 수치는 아직도 꽤 큼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목록에 올라있는 가족들 모두가 각 아버지들이 죽은 해에 아들들을 가졌을 것 같지 않다. 얼마나 더 커졌을까?

아브라함의 죽음으로부터 상세하게 조사를 시작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을 때의 나이가 75세 였다 (창세기 12:1-4). 그리고 그의 아들 이삭이 태어났을 때 나이가 100세 였다 (창세기 21:5). 이삭은 그의 아들 야곱이 태어났을 때 60세 였다 (창세기 25:26). 그리고 야곱은 그가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130세 였다 (창세기 47:9).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은 후로부터 최대 25 + 60 + 130년, 또는 215 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이 대략적으로 430년에서 215년을 뺀 기간, 즉 215년 간을 애굽에서 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울이 갈라디아서 3:17절에서, 그리고 요세푸스가 출애굽기 12:4절에서 이해했던 것이다. 성경을 사용하는 원리는 성경의 기자들이 그것을 사용했던 방법임을 기억하라.    

부록 4

창세기 11:26절의 데라의 나이 70 살이라는 수치는 그의 첫째 아들인 나홀 또는 하란의 출생 시의 그의 나이이다.

출처: 창조과학회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754


===삼위일체 여호와하나님, ======================

===여호와의 증인 바로보기..1..삼위일체......박상도목사 ===

이즈음 교계에는 한국교회의 이단문제를 염려하는 소리가 분명 높아져 가고 있다. 이단 문제는 교회를 어지럽히고 성도를 미혹하고 가정을 파괴하는 등의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만 그보다 국 내외를 막론하고 선교의 큰 장애물이 되었다는 점이 더욱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이단에 대한 적극적 대안이 없다는 점이 한 사람의 목회자로, 더욱이 이단을 연구하는 한 사람으로 아쉽기만 하다. 

   이단이란 교리적으로 잘못된 것을 말한다. 비교적 이단은 윤리적 타락을 수반하는 것이 상례이나 혹 윤리적으로는 선하다고 하더라도 교리적으로 잘못될 때 분명 이단이다. 

   그런 점에서 이단이 보는 성경에 대한 자세는 좁게는 두 개, 넓게는 세 개라고 본다. 

- 좁게 보면 첫째는 성경계시 외에 자기계시를 가진 이단이요, 둘째는 성경계시만을 인정하는 이단이다. ...이중에서도 성경계시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을 크게 둘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하나는 실질적으로 자기계시를 가지고 있으나 표면적으로는 성경계시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과 다른 하나는 자기계시없이 오직 성경 해석적 입장만 달리할 뿐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이다.  그러나 통계상으로나 경험상으로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이 더 무서운 이단으로 밝혀졌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다름 아닌 여호와의 증인이다.  여호와의 증인은 일반인이라도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이단이다. 어제 오늘 생긴 이단이 아니기 때문이요 또한 수혈 거부, 집총 거부, 국기 배례 거부 등의 사건으로 많은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기성교인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해 마음 속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그들의 성경 연구가 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여호와의 증인의 성경 연구나 교리체계가 깊어서라기보다 그들의 성경연구가 지엽적이요, 편파적인 면에서 깊어 보이기 때문이며 기성교인들이 그들의 교리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두려움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비판적으로 살펴 보는 것은 저들의 성경 연구가 얼마나 지엽적,편파적이요 또 얼마나 형편없는 것이지 알게 하고 나아가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게 하는 한편 성경 연구의 마땅한 필요까지 새로이 느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고 보는 것이다.

 == 여호와의 증인이란?

   여호와의 증인이란 수혈거부, 군입대 거부, 집총 거부, 국기경례 거부, 학업거부 등등의 사건으로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반사회적이요, 반국가적인 단체로 인정받기에 충분한 명성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기쁜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아마겟돈 전쟁을 들어 보셨습니까?”라는 소리로 우리 문전을 노크하는 불청객으로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이란 1931년부터 교주인 촬스 테이지 럿셀(Charles Taze Russell)이 최초로 사용한 명칭인데 이 명칭에 대한 성경적 증거를 이사야 43:10의 “나의 증인”이란 말에서 찾고 있다. 이 집단의 현상학적 문제점도 많고 심각하지만 이 곳에서는 교리적인 면만 생각하기로 하겠다. 이들의 반성경적 교리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신관에서부터 시작하여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제점들이 있으나 우선 신론 중에서 삼위일체문제만 취급하겠다. 

 ==여호와 증인의 삼위일체론에 성경적 변증과 반박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삼위일체에 대해 잘 모르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삼위일체교리란 신앙의 실질적인 문제가 아니며 오직 이론적인 문제라고 여기고 있다. 신앙에 있어서 삼위일체를 믿는 것과 안 믿는 것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아닌 철학자 칸트마저도 삼위일체론은 실천적 의미가 없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모든 교리가 다 중요하지만 삼위일체교리만큼 중요한 것도 없으며 또한 신앙의 실제도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 여호와의 증인의 삼위일체에 대한 반박론 네 가지를 하나씩 열거하면서 왜 그들이 이단인가하는 점을 밝히고 또한 바른 삼위일체교리를 깨닫도록 하자. 

첫째 ;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말이 없다.

   물론 성경에 삼위일체란 말이 없다. 초대교회 교부인 터툴리안(Tertullian)이 삼위일체란 단어를 최초로 사용했다. 그러나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어도 삼위일체교리를 철학적으로 가장 완벽하게 변증한 사람은 그보다 앞선 아데나고라스(Athenagoras)라는 교부였다. 

   문제는 성경에 삼위일체란 말이 없는데 왜 삼위일체란 말을 쓰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여호와의 증인은 성경에 삼위일체란 말이 없는데 삼위일체란 말을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여호와의 증인의 잘못은 무엇인가? 성경에 없는 말을 쓰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성경에 없는 사상을 교리화할 때 잘못인 것이다. 성경에 그 단어가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사상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예컨대 혹 성경 속에 있는 단어를 사용할지라도 성경의 사상과 다른 의미에서 사용한다면 그것이 더 큰 잘못인 것이다. 성경에는 삼위일체 사상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삼위일체란 말이 없지만 삼위일체란 말을 쓰는 것이다. 만일 성경 속의 삼위일체사상을 더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다른 단어가 있다면 그 단어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한 여호와의 증인의 자가당착적 주장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사실 그들이 자신들을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하는데 성경을 살펴보면 그 어디에도 문자적으로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바로 그 단어는 없다는 점이다. 물론 저들은 이사야 43장 10절에 나오는 “나의 증인”이란 말씀을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자적으로는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것이다. 더욱이 여호와란 말의 히브리어도 너무나 오랫동안 읽지 않아서 “여호와”인지 “야훼”인지 “이흐후”인지 아직 정확히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위일체란 말이 성경에 없다고 하여 이 말을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은 자가당착적인 말인 것이다.하나더 실예를 들어 보자. 사실 그들이 자신들의 조직을 “통치체”라 부르는데 성경 어디에도 통치체란 말도 없는 것이다. 

   문제는 성경에 삼위일체사상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점이다. 비록 성경에는 삼위일체란 말이 없지만 삼위일체 사상은 충만한 것이다. 그래서 삼위일체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 삼위일체란 숫자적으로 모순된다. 

   여호와의 증인은 삼위일체교리를 사탄의 것이라 하며 기성교회는 이 사탄의 교리를 추종하는 바벨론의 일부라고 정죄한다. 그런데 이들이 삼위일체교리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우리의 삼위일체교리를 이들은 일신론으로 이해하여 공격할 때가 있고 또는 삼신론으로 이해하고 공격할 때가 있다. 

   예컨대 일신론 중에 대표적인 양태론(Modalism)을 삼위일체론으로 이해하여 성도들을 공격하는 것이다. 즉 삼위일체에 의하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곧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기도한 것이 아니냐고 공격하는 것이 상례이다. 지금까지 필자가 경험한바에 의하면 이 질문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정통 교회 교인을 공격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주제 중에 하나였다.그런데 이것은 우리 정통 교회가 주장하는 삼위일체 교리가 아니라 이미 이단으로 정죄된 사벨리우스가 주장한 양태론적 삼위일체 교리 임을 알아야 한다. 

물론 일신론이나 삼신론 어느 한쪽이 더욱 합리적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비합리적으로 보이나 성서가 가르치는 것은 삼위일체론인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의 공격법은 1로 3을 공격하고 3으로 1을 공격한다. 여기에 대한 간단한 변증적 답을 제시해 보자.    삼위일체는 신비로운 교리임에 틀림이 없다. 칼빈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으므로 설명을 못하나 믿을 수밖에 없다고까지 말하였다. 

예수님의 양성문제의 신비를 보면 삼위의 신비를 함께 깨달을 수 있다. 예수님은 결코 반쪽잡이 신이거나 반쪽잡이 인간이 아니다. 분명히 한 인격 속에 온전하신 신이요, 또한 온전하신 인간이다. 그런데도 분명 두 인격이 아니다. 한 인격 속에 두 성품이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게 계신 것이다. 그렇다고 두 성품이 혼합되지도 않고 분리되지도 않고 남아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신비로운 일인가? 하나님의 삼위일체론 또한 세 하나님이 13쪽잡이 신도 아니요, 온전하신 신으로 삼위요 그러나 일체인 것이다. 이처럼 삼위일체 교리는 신비로운 것이다. 

셋째 ; 하나님은 전능하시나 예수님은 피조물로서 전능하신 분이 아니다. 

   그들은 아버지 하나님에게만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하고 예수님 하나님에는 대능자 하나님이라 한다. 이에 대해 그들이 주장하는 핵심성구 하나가 있다. 이것을 중심해서 변증해 보자.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다. 분명히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14절) 말씀은 예수님이요, 그 말씀 곧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아버지 하나님은 전능자(God)라 하였고 아들 하나님은 대능자(a god)라고 번역했다(신세계역). 그들의 설명인 즉 첫 번째 아버지 하나님에게는 헬라어에 정관사가 있고 두 번째 아들 하나님에는 정관사가 없다는 것이다. 왜 같은 하나님이면 예수님 하나님에는 정관사가 없느냐고 하여 헬라어 원문까지 들고 나오는 것이 헬라어를 모르는 여호와의 증인들에게까지 익혀진 수법이었다. 

   반증하여 보자. 과연 헬라어 정관사가 있으면 전능자 하나님이시요, 없으면 대능자 하나님인가? 아니다. 그들의 말대로 하면 요한복음 3:2의 니고데모가 말한 하나님은 분명 그들 말로 전능자 하나님이어야 할터인데 정관사가 없는 것이다(요 1:6,12,13 등에서도). 왜일까? 그런가 하면 반면에 요한복음 3:3의 하나님은 그들 말로 전능자 하나님이요 위의 3:2의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인데 여기에는 또 정관사가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정관사가 있으면 전능자요 없으면 대능자란 공식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보다도 더 결정적인 반증이 있다. 예수님에게는 정관사가 없느냐하는 점이다. 예수님 하나님에 정관사가 없다면 여호와의 증인의 말이 맞을 것이요 있다면 저들은 사탄의 자녀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주장대로 대능자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한 신약의 성구가 약 7개 정도 되는데 요한복음 1장을 재외하고는 한결같이 모두 정관사가 있다는 점이다(히 1:8, 요 20:28, 딛 2:13, 요일 5:20, 행 20:28, 롬 9:5). 필자는 지금까지 이 점을 알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을 만난 일이 없고 또한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여호와의 증인을 요단강 이 편에서 찾아본 일이 없다. 아버지 하나님에게 정관사가 있느냐 없느냐하는 문제보다 예수님 하나님에게 대부분 정관사가 있다는 사실은 여호와의 증인에게는 소스라치게 놀랄 일이요 또한 저들이 성경을 얼마나 부분적으로 보고 있는지를 설명해주는 단적인 실예이다.

   예수님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사 9:6), 창조주요(골 1:12-17), 처음과 나중이요(계 1:17, 2:8, 21:6, 22:13), 심판자요(딤후 4:1, 고후 5:10), 섭리자이시다(마 9:2-7). 아버지 하나님과 인격은 다르나 동일한 본질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들의 억지주장은 이사야 9:6에서 예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을 때 이는 전능자 하나님께 사용하는 “샤다이”란 단어가 아니라 대능자를 가리키는 “기보르”를 사용했다고 한다. 저 그렇다면 그들 말에 의하면 다음의 성구에서 보면 아버지 하나님에게 “기보르”를 사용했으니(렘 33:18, 느 9:32, 사 10:20-21, 신 19:7) 아버지 하나님도 대능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최삼경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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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증인 바로보기..2..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박상도목사  

교회는 이 천년 동안 이단의 공격을 받아 왔으며 이 일은 교회가 주님이 오시기까지 계속해서 져야 할 십자가라고 생각한다. 쥐만 없다면 창고에 쥐구멍이 뚫릴까 염려할 필요가 없듯이 이단만 없다면 이단 연구나 이단 규정만큼 불 필요하고도 무익한 십자가는 없을 것이다. 

  우리 문전을 노크하는 극성스런 불청객으로 소문난 여호와의 증인. 이들을 사뭇 두렵게 느끼는 성도마저 있으며 그들이 성경을 다 알기라도 하듯이 주어 섬기는 편파적인 성구 나열에 심지어 그들이 성경적으로 교리적으로는 잘못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성도들 마저 있는 듯하다. 지난 호에서부터 여호와의 증인의 신론으로 시작해서 그들 교리의 실체를 소개하고 비판함으로 우리가 믿는 역사적인 신앙에 대해 확신과 자부심을 불러일으키고 더욱 복음을 사랑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 먼저 그들이 정통 교인들을 공격할 때 공격목표 일호로 삼고 있는 삼위일체 교리 중에 자주 묻는 네 가지 명제가 있는데 세 가지를 지난 호에 소개했다. 첫째, 성경에 삼위일체란 말이 없다. 둘째, 삼위일체란 숫자적으로 모순된다. 셋째, 하나님은 전능자이시나 예수님은 피조물로 대능자라고 주장하는 저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지 비판하였다. 이제 그 네 번째 명제를 소개하고 비판하겠다. 

   넷째 ;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이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여호와, 하나님, 전능하신 주, 주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 등 많은 이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것을 부정하여 하나님의 본명이 여호와이며 다른 이름들은 직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직접 인용해 보자.

   “우리가 아는 사람으로서 이름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도 다른 신들과 구별되는 고유한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이름이 아닌가?”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대통령’, ‘왕’,‘판사’의 등과 같은 칭호이기 때문입니다.”(여호와의 증인, 우리는 지상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서울, 1987년, P.41).

   과연 그러한가? 두 가지로 나누어 변증해 보자 : 먼저는 예수님도 여호와요 둘째는 성령님도 여호와이시다. 

 == 예수님도 여호와이심을 증명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님도 여호와라는 말만 들어도 기절한 일이다. 그런데 그 동안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예수님도 여호와라는 이 교리보다 우리의 삼위일체 교리를 변증하기에 더 좋은 것이 없었으며 반면에 여호와의 증인의 반 삼위일체 교리를 공격하기에 더 좋은 것은 없었다. 

   다음의 질문은 여호와의 증인 연구의 대가 호모 덩컨 씨가 미국 뉴욕 브르클린에 있는 워치타워 본부에 직접 질문했던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사용해 본 결과 이만큼 여호와의 증인을 쓰러뜨리기에 더 날카로운 칼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사복음서 모두가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자임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을 먼저 살펴보자. 마태복음 3장 3절을 보면 다음과 같아.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같은 내용의 마가복음 1장 2-3절을 보자.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하라”라고 했다. 또한 같은 내용이 누가복음에도 있다.“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하라”(3:4) 끝으로 요한복음 1장 23절에는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 하니라”라고 했다. 

위의 성경을 보면 세례요한의 출현과 사명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에 대한 성취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사야서 어디에서 예언된 말씀인가? 이사야 40장 3절이다. 내용은 이렇다. “외치는 자의 소리요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는 말씀이다. 위의 말씀을 연구해 보면 여호와의 증인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엎을 수 있는 내용이 있다.

   하나씩 정리하며 예수님도 여호와라는 점을 증명해 보자.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육개월 먼저 태어났다. 태어난 목적은 예수님의 길을 평탄케 하기 위함이다. 성경에서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기 위하여 태어난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는 바로 세례요한이라고 명확히 말하고 있다. 그러니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는 세례 요한이요 ‘주의 길’, ‘그의 첩경’의 ‘주’와 ‘그’는 분명 누가 보아도 예수님이이다. 그런데 이 예언은 이사야 40장 3절의 성취인데 그곳에서는 ‘주의 길’을 ‘여호와의 길’이라고 했다는 점이다. 즉 신약의 ‘주’는 ‘예수’인데 그것은 구약 즉 이사야 40장 3절에 의하면 그 ‘주’는 ‘여호와’라고 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주 예수님은 곧 여호와임이 분명해졌다. 이 점을 여호와의 증인은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는가? 번역상의 문제라고 말하는 어리석은 여호와의 증인을 가끔 본다. 아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신세계 번역에서도 이사야 40장 3절을 “여호와의 길”이라고 번역했다는 점은 그들이 얼마나 성경을 편리주의적으로 인용하는 가를 말해준다. 신약의 ‘주’가 예수님이 아니라고 할 것인가? 세례요한에 대한 예언성취는 이사야 40장 3절의 예언성취가 아니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번역상의 문제라고 할 것인가?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 어떤 여호와의 증인의 궁색한 답변에 의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대능자로서 ‘주’가 되신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경우에 아들이 아버지의 명함을 이용할 수는 있을 것이다. 단 자신은 아버지가 아님을 말하고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고 있음을 밝히면서 말이다. 그렇지 않는 다면 사기꾼이 된다. 그것도 여호와의 증인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도 아닌데 더욱이 아버지 하나님만  여호와라고 주장하는 저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고 이 성경을 설명할 길이 없다.

   예수님도 여호와임을 다른 성구에 의해 하나 더 증명해 보자. 이사야서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을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했다. 이사야 44장 6절을 보자.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같은 내용이 4장 4절, 43장 10절, 48장 12절에도 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했다는 점이다. 요한계시록 2장 8절을 보자.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실 이가 가라사대”라고 했다. 같은 내용이 1장 17-18절, 21장 6절, 22장 13절에 나온다. 여호와의 증인에 의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처음이라면 예수님은 결코 처음이 될 수 없다. 창세기 1장1절의 태초나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는 같은 태초일 수밖에 없음과 같다.태초가 둘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처음이요 나중인 것처럼 예수님도 처음이요 나중이며 하나님이 여호와인 것처럼 예수님도 여호와이다. 

   이처럼 구약의 여호와와 신약의 예수님을 일치시킨 곳은 이외에도 얼마든지 있다. 로마서 10장 11절에 보면 “성경에 이르되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라고 되어 잇다. 즉 여기 “저”는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것을 “성경에 이르되”라는 말로 한 것을 보면 “구약에 이르되”란 말로서 구약 어디에서 인용한 말씀이다. 그런데 이 말씀이 인용된 구약은 이사야 49장 23절이다. “··· 네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라고 했는데 이곳에서는 수치를 당치 않게 하시는 분이 여호와라고 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보아도 예수님과 여호와 하나님은 일치되는 것이다.

== 성령님도 여호와임을

   여호와의 증인에게 예수님이 여호와라는 사실도 놀랄 일이지만 성령이 여호와라는 말은 더욱 놀랄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에 의하면 성령은 하나님이기는커녕 인격도 아니요 활동력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후에 비판하겠으나 여기에서는 성령도 여호와임을 성경적으로 증명해 보자. 

   히브리서 3장 7-8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 여기에 보면 분명 “성령이 이른 바와 같이”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구약 시편 95편 7-11절의 인용이다. 9절에 보면 “그 때에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며 나를 탐지하고 나의 행사를 보았도다”라고 되어 있다. 이 곳에서는 여호와인데 신약에서는 성령과 일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을 신약에서는 성령과 동일시하고 있는데 이 점을 역시 히브리서 10장 15절과 16절에서 보자.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라고 하였다. 본문은 마음에 두고 생각에 기록할 언약을 성령의 증거로 말하고 있는데 이 말씀이 인용된 곳은 예레미야 31장이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분명히 이 언약을 말씀하신 분은 여호와라고 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31-33절)

   이처럼 성령도 여호와시요 또한 예수님도 여호와이시다. 이 점을 동시에 같이 증명해 주는 성경 하나를 더 살펴보자. 이사야 6장을 가리켜 이사야의 소명장이라 한다. 내용인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셨는데 천사들이 하나님을 창화하는 모습이 있으며 이것을 보고 자신의 부정함을 느끼는 이사야에게 단에 핀 숯을 가지고 그의 부정한 입술을 정케하므로 담대히 나를 보내달라고 요청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9절)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을 신약에서 두번이나 인용하고 있다. 하나는 예수님과 연결시켰고 하나는 성령과 연결시켰다는 점이다. 요한복음 12장 39-41절을 보면 바로 이사야 6장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사야가 그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한말이라고(41절)하였으니 보좌에 앉은 여호와와 예수님을 일치시켰고, 또한 사도행전 28장 25-26절에 보면 같은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면서 역시 그 말씀을 성령의 말씀으로 소개하고 있으니(25절) 역시 여호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일치시켰다는 점이다.

   이제 정리해 보자. 구약의 여호와란 이름은 귀한 이름이요 어떤 이름보다 그 의미가 깊은 이름이다. 그러나 바로 그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을 신약에서 예수님 하나님과 성령님 하나님과 일치시키고 있다는 점은 삼위일체 하나님은 비록 인격은 세분이시지만 본질이 하나라는 증거이다. 잘못 생각하면 위의 말을 한 인격의 하나님께서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으로 이해하기 쉬운데 그런 뜻이 아니다. 신약의 예수님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과 일치(identify)시켰다는 것은 예수님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인격이란 말이다.

   위에서 살펴 본데로 여호와의 증인의 삼위일체론이 얼마나 비 성경적인가를 알 수 있다.,,,최삼경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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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증인 바로보기===..3..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박상도목사  

==그리스도의 육체부활 문제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님의 육체부활을 부정한다. 먼저 그들이 예수님의 육체부활을 부정하는 논리적 근거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어떤 것은 여호와의 증인의 사상을 소개하는 것만으로 넘어가고 필요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비판하겠다.

   첫째 : 예수님의 육체는 우리를 위한 희생물로서 단 한번 드려졌으므로 다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한다. 

   먼저 여호와의 증인의 주장을 살펴보자. “예수께서는 한때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라고 설명하신 일이 있습니다(요 6:51).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자기의 육체를 인류를 위한 희생물로 바치셨던 것입니다. 그 희생물은 얼마 동안이나 유효할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번 드려짐으로써 우리는 거룩한 자들이 되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히 10:10, 새번역).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자기의 육체를 바치셨으므로 결코 다시 그것을 취하실 수 없으며, 다시 한번 사람이 되실 수 없습니다.”(우리는 지상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1987. 위치타워. p.143)

   이 말로하면 예수님께서 한번 우리를 위하여 몸을 드렸으니 다시 또 인간의 몸으로 부활하실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육체부활을 부정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

   둘째 :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육체를 입으신 것은 과거의 천사들이 했던 바와 같이 육체를 입으셨다는 것이다.

   직접 인용해보자. “그러면 사도 ‘도마’가 예수의 옆구리 구멍에 손을 넣어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형주에서 못박히신 몸을 가지고 일으킴을 받으셨음을 증명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과거에 천사들이 했던 바와 같이 육체를 입어 물질화하신 것입니다. ‘도마’에게 자기가 누구인가를 확신시키기 위하여 그 분은 상처난 구멍이 있는 몸을 사용하셨던 것입니다(창 18:8, 히 13:2, Ibid, p.144).”

   세째 :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실 때 본 그대로 오시라고 한 것은 ‘같은 방법으로’온다는 말로써 세상 사람들은 모르게, 조용히 떠나셨듯이, 세상은 알지 못하게 온다는 말이라고 한다.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자.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40일간 제자들에게 몸으로 나타나셨다. 그 다음에 그 분은 하늘로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그곳에 있던 두 천사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같은 방법으로, 오시리라’고 사도들에게 말하지 않았는가?’(행 1:11) 그렇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몸이 아니라 ‘본 그대로’ 즉 ‘같은 방법으로’라고 말한 것에 유의하십시오. 그러면 예수께서 떠나신 방법은 어떠하였습니까? 일반 사람들은 모르게 조용히 떠나셨습니다. 사도들만이 그것을 알았습니다. 세상은 알지 못했습니다(Ibid, p.145).” ‘본 그대로 오시리라’는 말은 육체를 입은 예수께서 구름타고 가신 것처럼 육체를 입고 오시는 것이 아니고, 일반 사람은 모르게 조용히 떠나셨듯이 그렇게 조용히 오실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들이 성경을 얼마나 억지로 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은 사도행전 1장10-11절을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다.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되어있다.

   여호와의 증인의 말에 의하면 첫째는 “갈릴리 사람들아”라는 말을 해석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예수님의 제자들만이 거기 있었다면 “갈릴리 사람들아”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요, 둘째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이요, 셋째는 성경에 보면 좁은 의미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도들을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제자라고 한다는 점이다. 예컨데 마태복음 8장 21절에 보면 “제자 증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 제자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결코 아니다. 이는 누가복음 9장 59절에 보면 제자가 아니요 단지 잠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였음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사복음서 어디에서나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넷째는 15절에 보면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이 120명이였는데 승천을 본 사람들이였음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다섯째는 천사가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느냐”라는 말을 하고 이어서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한 것을 보면 너희가 하늘로 가시는 예수를 본 그대로 오신다는 말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은 것으로 여호와의 증인의 해석은 억지스럽다는 것이다. 그러고 끝으로 재림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다른 성경을 보면 여호와의 증인의 말처럼 아무도 모르게 몇 사람이 알게 오신다는 말이 잘못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벧후 3:9-17) 본문에는 재림문제에 대하여 나타날 이단문제까지 경계하고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넷째 : 승천하시는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게 올라가셨듯이 눈에 볼 수 없는 영체로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도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방법에 대한 성서의 설명을 고려해 보십시오.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사도 1:9).’ 이와 같이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하였을 때 그 분은 구름에 가려 사도들의 육안에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떠나시는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그 분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때 그분은 영체로 승천하신 것입니다(Ibid. pp.145-146).”

   다섯째 : 이를 위해 그들이 주로 사용하는 성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 :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였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고린도전서 15장 45절 :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리고 부활하신 후 예수님의 몸이 일정하지 않았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마리아는 그를 동산지기로 보았고(요 20:11-16),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도 그를 알지 못했고(눅 24:13-35), 디베랴 바다에서 기적적으로 고기를 잡게 해주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은 몰랐을 것(요 21:4-14)이라 하며, 단지 도마에게 보이신 것은 그 의심을 풀어주기 위해서 옛날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뿐이라고 한다(요 20:24-29).

  여호와의 증인들은 위의 다섯 가지의 내용으로 예수님의 육체부활을 그토록 부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영혼불멸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혼이란 곧 생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죽음은 생명이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어 없어진 예수님께서 다시 그 육체로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들의 교리에 큰 모순을 주는 것이다. 위의 말들을 읽어 볼 때 얼마나 성경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반증해 보자 위의 모든 해석을 뒤엎을 몇 개의 성구가 있다.

   요한복음 2:18-22 말씀이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말씀을 믿었더라” 여호와의 증인의 말에 의하면 예수께서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는 말은 거짓말이 된다. 육체부활을 하시지 않았고 영의 부활을 하셨다면 왜 예수님께서 “이는 성전된 자기 영을 가리켜 한 말이니라”고 하시지 않았을 까? 어차피 제자들이 이 말씀을 깨달은 것은 부활하신 후가 아닌가? 더욱이 육체부활이 아닌 영의 부활이라 한다면 예수께서 구태여 그것을 숨길 이유가 없으셨을 것이다. 다음의 성구는 그 점을 더욱 선명하게 증명한다. 

   누가복음 24:39의 말씀이다. ;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이 말씀이야말로 예수님의 육체부활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성구가 된다.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나는 있느니라”는 말은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영의 부활과 육체부활을 구별하고 있는 것이다. 영의 부활이 아닌 육체부활을 강조함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요한복음 20:5의 빈 무덤은 그들의 말처럼 하나님께서 모세의 몸을 옮기신 것처럼(신 34:5-6) 예수님의 몸도 옮기신 것이 아니라(Ibid, p.144) 그 몸이 부활하신 것이다. 모세의 몸을 옮기고도 그것을 기록했는데 예수님의 몸을 옮겼다는 그런 기록이 성경에 없지 않은가. 더욱이 9절 말씀에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한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란 말을 볼 때 더욱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간단히 그들이 말하는 위의 성구들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변증해 보자. 그들의 말처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육체를 입으신 것은 확신을 주기 위해 상처난 구멍이 있는 몸을 빌려 사용하셨다면 예수님은 사기꾼이 된다. 참을 거짓을 통해 증명하려 했다는 말이요, 그들의 말처럼 영의 부활이 참인데 육체를 입고 육체부활이 아닌 영의 부활을 증명하시어 반대로 육체부활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를 남기실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그들이 “본 그대로”란 말이 “같은 방법으로” 그것도 조용히 가심 같이 조용히 오시겠다는 말이 될 수 있는가? 조용히 가셨다는 말도 거짓이다. 그렇게 따지면 탄생하실 때는 승천하실 때보다 더 조용히 오셨지 않았는가? 오히려 승천시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보았지 않은가? 여호와의 증인들이 “구름에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행 1:9)는 말을 육안으로 보이지 않게 즉 영체로 떠나셨기 때문에 “보이지 않게 하더라”라고 한다면 “구름이 가리워” 라는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어차피 구름이 있든 없든 영체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알았다(요 20:15)는 점도, 그 당시 아직 어둠이 깔려있었다는 것을 무시하는 말이요, 마리아의 큰 슬픔 중에 있었다는 점도,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후 영광과 승리의 빛으로 변했다는 점도 무시하는 아전인수 격 해석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에게도(눅 24:13-35)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또한 자연적인 방법으로(옷이 달라졌거나, 대화에 열중하고, 서로 나란히 걷고 있었거나 하는) 자신을 숨길 수 있을 것이다. 디베랴에서도(요 21:1-14) 예수님과 제자들이 무려 오십 간(약 90m)쯤 떨어져 있었다는 점(8절)을 무시한 해석이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3:18이나 고리도전서 15:45의 내용을 잘 읽어보라. 베드로전서 3:18의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령으로 살리심을 받았다는 뜻으로 로마서 8:11은 이를 잘 증명해준다. 고린도전서 15:45의 아담은 산 영이 되었으며 마지막 아담이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는 말은 생명의 종류를 가르치는 것으로 첫 아담은 자연적인 생명이요 그리스도의 생명은 영의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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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증인 바로보기..4..성령의 인격성===

박상도목사 

여호와의 증인은 성령을 ‘활동력’ ‘감화력’이라고 주장한다. 성령의 하나님의 힘은 이전에 증명하였으니 이제 인격을 가지신 분임을 증명해 보겠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말에 의하면 잠언 8장과 9장에서 지혜는 인격이 안데 의인화시켜 말하고 있지 않느냐고 하며 성령도 인격이 아니데 의인화시켰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다음에 열거되는 성경 내용들은 그것이 단지 문학적인 의인화 용법인지 아니면 인격체로서의 속성인지는 쉽게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은 지정의를 가지셨다. 

인격이란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의 유전이나 인종적 문화적 배경도 아니다. 인격은 최소한 지성(요한복음14:26 ), 감정(이사야 63:10 ,에베소서 4:30 ), 의지(사도행전 16:7 ,고린도전서 12:11) 등의 자기인식, 타인과 구별하여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나'라고 말하는 능력을 포함하는 것이다.

  1. 성령은 지성을 가지고 계신다(고전 2:10-11)-성령은 아시되 그것도 전지하시다.

  2. 성령은 감정을 가지고 계신다(사 63:10, 롬 8:26, 엡 4:30, 8:26, 약 4:5)-인격이 안데 탄식하고 슬퍼하고 근심할 수 없다. 성령은 근심하고 슬퍼하고 탄식하셨다. 

  3. 성령은 의지를 가지고 계신다(요 16:12-14, 고전 12:11)-성령은 ‘뜻’과 ‘의지’를 가지고 활동하심은 인격자이심을 증명한다. 

===성령은 말씀하신다. 

  성령이 빌립에게 ‘병거로 가까이 가라’(행 8:29)고 했으며,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으며(행 10:19-20), 바울에게도 말씀하였다(행 20:22-23, 21:11). 이 점은 계시록에서도 성령이 교회를 향해 말씀하셨다(계 2:7, 11,17,29, 3:6, 13,23).

===성령은 하나님의 속성을 모두 가지고 계신다.

  1. 전능하시다(슥 4:6)

  2. 무소부재하시다(시 139:7-10)

  3. 진리이시다(요일 5:7)

  4. 생명이시다(롬 8:2)

  5. 사랑이시다(롬 5:5)

  6. 거룩하시다(시 63:10, 롬 1:4)

===성령은 기타 인격적 요소를 가지고 계신다.

  1. 기도하신다(롬 8:20)

  2. 증거하신다(요 15:26)

  3. 가르치신다(요 14:26, 16:12-14)

  4. 인도하신다(행 8:29, 16:6-7, 13:12, 롬 8:14)

  5. 욕을 당하신다(히 10:29)

  6. 훼방도 받으신다(마 12:31-32)

  7. 속임도 당하신다(행 3:5)

  이보다 더 명백한 성령의 인격성을 증명할 길이 있겠는가?

  우리 문 앞에 자주 나타나는 사탄에게 천하보다 소중한 영혼을 빼앗기지 않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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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증인 바로보기..5..구원관===  박상도목사 

==여호와의 증인들의 구원관 

구원에 대한 여호와의 증인 교리는 매우 복합적이다. 이들의 구원형태는 두 가지인데 즉 땅을 통치하는 왕들로써 지상에서 영생을 얻는 부류와 하늘나라에 가게 되는 극소수의 '여호와의 거룩한 영'을 가진 거듭난 사람들은 소망을 가진 자들이다. 또 구원의 방식에 있어서 그들은 매우 복합적으로 되어있다. 

우리는 인간의 죄에 대한 사함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으로 인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임을 강조하고 있으나(에베소서 2:8-10, 로마서 4:1-8, 갈라디아서 5:1-6, 빌립보서 3:1-9) 여호와의 증인은 죄 사함과 용서는, 다만 성화의 시작이므로 한평생 추구해야 하며, 또 용서는 단회적이므로 되돌아 오지 않는다. 성화는 일생동안 계속되어야 하는데 자기의 성화를 상실할 수도 있고, 계속적으로 지속되기 위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보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도록(디모데후서 2:20-21) 부끄러운 일과 부끄러운 일을 하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만 입으로 할 뿐이고 실제로는 믿음과 행실의 결합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 그들의 구원에 대한 주장은 

1) 인간의 지상생활을 통해 자원적 생활을 통하여 영생을 얻는다. 

2) 성별된 무리 즉 144,000명의 추구 구원 대상자를 말하여 이들은 개인의 헌신충성된 공로로 인하여 구원된다고 주장한다. ......이 성별된 무리의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동이라고 말하나 실은 1차적으로 144,000명만 하늘을 향한다면 그들 자신의 길을 스스로 노력하여 얻는다고 봄이 분명하다고 본다. 

3) 만인제사장 직분을 부인한다........ 성별된 무리만이(144,000)하늘 천국으로 불리움을 받고 다른 양들은(요한복음 10-16) 지상천국에서 살며 천년왕국이 지난후에 칭의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천국에 가지 못한 성도를 1급계층 무리라고 하며 그들 곧 '다른 영들'은 생명의 주 예수그리스도의 지상 자녀들이 되며 특수한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이다. (God Be Thue p9.163) 

4) 구원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가능한 길을 터놓았을 뿐 결국은 인간편의 순결적 헌신과 봉사로 말미암아 얻어진다고 한다........(자력 구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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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heffieldkoreanchurch.org/xe/s02_2/7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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