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9.12.06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JC학교.경건의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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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후 1:1-11==((영생=구원=샬롬=. 생명(조에)과 경건(JC를 살아냄)에 속한 모든 것을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으로 믿는 모든 이에게 주신 JC를 친밀히 참되게 알아가며(산 믿음을 발휘하여 JC께서 그리하셨듯이, 하나되어 내주하시는 JC, 곧 HS따라 행함), 또한 JC앎을 힘써 추구함으로써 성숙케 되는 믿음-덕-지식-절제-인내-경건-형제우애-사랑을 통해서 참여케 하시는 바 신성한 성품과 JC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이루라!!))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Simon Peter, a bond-servant and apostle (special messenger, personally chosen representative) of Jesus Christ, To those who have [b]received and possess [by God’s will] a precious faith of the [c]same kind as ours, by the righteousness of our God and Savior, Jesus Christ: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영생)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Grace and peace [that special sense of spiritual well-being] be multiplied to you in the [true, intimate] knowledge of God and of Jesus our Lord.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For His divine power has bestowed on us [absolutely] everything necessary for [a dynamic spiritual] life and godliness, through [d]true and personal knowledge of Him who called us by His own glory and excellence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For by these He has bestowed on us His precious and magnificent promises [of inexpressible value], so that by them you may escape from the immoral freedom that is in the world because of disreputable desire, and become sharers of the divine nature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For this very reason, applying your diligence [to the divine promises, make every effort] in [exercising] your faith to, [e]develop moral excellence, and in moral excellence, knowledge (insight, understanding)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and in your knowledge, self-control, and in your self-control, steadfastness, and in your steadfastness, godliness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and in your godliness, brotherly affection, and in your brotherly affection, [develop Christian] love [that is, learn to unselfishly seek the best for others and to do things for their benefit].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For as these qualities are yours and are increasing [in you as you grow toward spiritual maturity], they will keep you from being useless and unproductive in regard to the true knowledge and greater understanding of our Lord Jesus Christ.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For whoever lacks these qualities is blind—shortsighted [closing his spiritual eyes to the truth], having become oblivious to the fact that he was cleansed from his old sins.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Therefore, believers, be all the more diligent to make certain about His calling and choosing you [be sure that your behavior reflects and confirms your relationship with God]; for by [f]doing these things [actively developing these virtues], you will never stumble [in your spiritual growth and will live a life that leads others away from sin];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for in this way entry into the eternal kingdom of our Lord and Savior Jesus Christ will be abundantly provided to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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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vsti"(4102, 피스티스) 믿음 faith.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피스티스(Hes., Hdt.이래)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a)  피스티스는 '신뢰, 확신, 확실성, 확고한 확신'을 의미한다.

(b)  피스티스는 사람이 가지는 확신 뿐만 아니라 사람이 향유하는 확신, 즉 '신뢰할 수 있음, 의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차이가 있을지라도 확실성이나 신뢰성과 관련되어 있다.

(c)  피스티스는 신뢰의 가능성, 의지할 수 있는 것을 보장하는 '보증, 증명, 증거, 신실성'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피스티스는 70인역본에서 약 55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에무나(경고, 충실, 성실, 확고부동의 믿음)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피스티스는 신약성경에서 약 23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피스티스는 '신실성, 신뢰성'을 의미한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롬 3:3; 딛 2:10; 갈 5:22; 살후 1:48.

(b)  피스티스는 '엄숙한 약속, 서약'을 나타낸다: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딤전 5:12).

(c)  피스티스는 '증거, 보증'을 의미한다: 행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딤후 4:7.

(d)  피스티스는 '신뢰, 확신, 믿음'을 나타낸다.

① 하나님에 대하여, 막 11:22; 벧전 1:21; 히 6:1; 살전 1:8; 롬 4:5; 롬 4:9; 롬 4:11-롬 4:13; 롬 4:16; 롬 4:19이하 등.

② 그리스도에 대하여, 마 8:10; 마 9:2; 마 9:22; 마 9:29; 마 15:28; 막 2:5; 마 4:40; 마 5:34; 마 10:52; 눅 5:20; 눅 7:9; 눅 7:50; 눅 8:25; 눅 8:48; 눅 17:19; 눅 18:42. 롬 3:23; 롬 3:26; 갈 2:16; 갈 2:20; 갈 3:22; 엡 3:12; 빌 3:9; 약 2:1; 계 14:12.

(e)  피스티스는 '신앙의 내용, 교리'를 나타낸다: 유 1:3, 유 1:20; 롬 1:5; 갈 1:23; 갈 3:23이하; 딤전 1:19; 딤전 4:1, 딤전 4:6; 딤전 6:10; 딤후 2:18; 롬 12:6; 딤후 4:7.

(참조: Walter Bauer; A.Weiser; O.Mich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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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revth(703, 아레테) 덕 virtu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이레테(Homer 이래)는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a)  업적이나 타고난 재능, 또는 이 둘 모두에서 '탁월, 뛰어남'을 의미한다.

(b)  '남자다움'이나 용맹

(c)  명예와 관련해서 칭찬받을 만한 '공적'이나 '행사'.

(d)  철학에서 '미덕'(virtue )

(e)  신들의 '자기 선포'. 호머는 신들의 아레테와 신들의 권능의 시위의 아레테에 대하여 말하였다.

(f)  '명성'(참조: O.Bauermfeind).

2. 70인역본의 용법 

(a)  아레테는 70인역본에서 약 33회 나오며, 히브리어 테힐라(찬양할만한 행동, 여호와의 찬양, 사42:8,12; 43:21; 63:7)과 호드(위업, 영광, 합 3:3; 슥 6:13, 2회)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 예문들 중의 어느 한 곳에서도 이 단어를 역사상, 여호와의 사역(여호와의 사역은 특히 이사야서에서 두드러지게 묘사됨)과 관련된 구약적 개념과 다른 의미로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헬라적 개념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b)  아레테는 마카베오서들 특히 마카베오사서에서 자주 언급된다. 마카베오이서 6:31에서 엘리아잘(Eleazar)의 순교는, 그의 아레테(arete)를 기념하는 것이라고 지칭된다(참조: 마카베오사서 1:8,10). 마카베오사서에서 아레테는 종종 믿음에 대한 순교자들의 충절을 의미하는데 이 충절을 그들은 고난과 고문에도 불구하고 죽기까지 유지하였던 것이다(마카베오사서 7:22; 9:8,18; 10:10; 11:2; 17:12,17). 동시에 우리는 아레테에 대한 헬라적 개념을, 즉 담대함(마카베오이서 15:17), 용맹스러움(마카베오사서 17:23), 영리함(마카베오사서1:2), 또는 이성(마카베오사서 1:30) 등의 개념으로도 쓰인 예를 발견한다. 헬라적 영향은 솔로몬의 지혜서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니 곧 솔로몬의 지혜서 5:13에서 덕이 악과 대조되며, 또한 솔로몬의 지혜서 4:1에서는 덕이 불멸성과 함께 결합되어 있다. 솔로몬의 지혜서8:7에서는 4가지의 플라톤적 기본 미덕들이 지칭되고 있다

(참조: H.-G Lind; A.Ringwald).

3. 신약성경의 용법 

아레테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오며, 빌립보서와 베드로전후서에만 사용되었다.

(a)  아레테는 빌 4:8에서 인간의 미덕으로써 '탁월, 우수'를 의미한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바울은 '무엇에든지 참되며'라는 어구 등의 나열에서 이 단어를 '찬양(기림)'이라는 말 옆에 두는데, 만약 여기 나열된 것이 주로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다면, 바울이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의인이 삶과 죽음에서 유지해야만 하는 '탁월'(excellence)이다.

(b)  벧후 1:5에서 아레테는 미덕, 용기, 혹은 도덕적 능력을 의미한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이것은 그리스도교인의 의무를 행함에 있어서 부차적으로 얻어지는 용기이다. 또한 시험을 견디는 과정에서 발전되는 도덕적 능력이다(E.R.Fuhrman).

(c)  벧전 2:9에서 아레테는 하나님의 아레테이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은, 70인역본 사 43:21의 인용이므로 목적격 복수 아레타스(aretas)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바와 같이(위의 구약성경 1을 보라) 찬양할 만한 행동들(praiseworthy acts)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과거의 백성들과 또한 새로운 백성들에 의해 선포되어야 하는 것이다.

벧후 1:3에서도 하나님의 아레테를 나타낸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본문에서는 더 많은 헬라 사상들이 나타나는 것 같다. 이곳에서는 아레테와 함께 독사(영광)와 뒤나미스(능력)가 언급된다. 이곳에서 아레테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속성을 언급하는데 이 속성은 그 능력(뒤나메이스)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에게 은사들을 부여하였고, 그럼으로 인하여 그들은 4절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신의 성품(데이아스 퓌세오스), 즉 하나님의 완전하신 덕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참조: 마 5:48). 여기에 신의 성품과 인간의 성품의 관련성이 있다(참조: 행 17:28).

(참조: J.H.Thayer; R.P.Martin; H.-G.Lind; A.Ringwald; O.Bauernfe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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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nw'si"(1108, 그노시스) 지식 knowledg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그노시스는 기노스코(ginwvskw, 1097: 알게되다, 지각하다, 알다, 깨닫다)에서 유래했다.

(a)  그노시스는 '지식의 수단' means of knowing, '사고' thowght, '판단' Judgment, '의견' opinion을 의미한다.

(b)  그노시스는 에피스테메(ejpisthvmh: 이해, 지식)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목적을 나타내는 속격을 필요로 하며, 지식 자체보다는 아는 행위를 암시한다. 이 행위는 사물 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하여, 모든 지식(인식) 기관 및 방식, 예를 들면 보고 듣고 조사하고 경험함으로 말미암아 아는 모든 지식(인식)기관 및 방식을 포함한다. 그렇지만 지식은 절대로 눈에 의한 확인, 검증을 함축한다. 따라서 지배적인 개념은 객관적 관찰에 의한 지식의 개념이다. 이 개념은 헬라의 현실관(실재관)과 관련된다. 실재는 다양한 형태들과 형상들로, 즉 실재를 형태 지우는 여러 요소들과 원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참된 실체는 모든 변화 속에서도 변치 않는 무시적(timeless)인 실재이다. 이 참된 실체를 보거나 아는 사람들은 이것을 소유하고 통제한다. 그러므로 참된 것을 아는 지식은 인생에서 최고의 가능성을 가져다 준다. 아는 자들은 영원한 것에 참여한다. 따라서 그들은 플라톤이 생각한 것처럼 올바른 정치적 행위를 할 수 있거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바처럼 무사 무욕한 과학적 성찰의 이상을 성취할 수 있다.

(c)  그노시스의 영지주의의 용법.

그노시스에 대한 헬라니즘과 특별히 영지주의의 용법은 어느 정도 고전적 개념 발전에 뒤따르지만, 또한 구원에로 인도하는 은밀한 지식이 명상하는 신비 종교(mysteries)의 신앙과 그 지식이 초자연적 힘을 주는 마법 같은 것들에서 유래된다.

① 그노시스는 아는 행위 뿐만 아니라 지식 그 자체를 의미하며, 따라서 강조점은 일반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에 두고 있다. 하나님은 그노시스의 자명한 대상이며, 생성하는 다른 모든 것과 구별된다. 따라서 이 세상으로부터 돌아섬으로써만이, 즉 특별한 종류의 지식에 의해서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

② 영지주의의 지식은 누스(nou'", 3563)나 로고스(lovgo", 3056)의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카리스마(cavrisma, 5486)이다. 즉 이 지식은 무아경적 환상이나 신비한 환상에 의한 조명(illumination)이다. 이 지식은 소유할 수 없지만 이 지식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지식은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참된 영지주의에서 이 예비적 지식은 입교 훈련에 의해 얻게 되는 비교적(esoteric)지식이며, 가르침은 철학적 가르침보다는 입회자에 대한 가르침이다. 따라서 이 지식을 얻는데 요구되는 것은 과학적인 탐구보다는 믿음에 대해 듣는 것이다.

초기 단계에서 신성한 전승에 의해 주어지는 이 지식은 죽음 후에 영혼의 승천을 보증한다.

더 높은 단계에서 입회자의 신생(regeneration)은 효험 있는 신비한 신조와 같은 말을 들음으로 일어난다. 이 교의의 내용은 우주론과 인간론을 포함한다. 그런데 이것은 항상 구원에 이르게 하는 자아, 즉 빛의 세계에서 온 영혼으로서의 자아 - 이 자아는 물질에 얽혀 있기 때문에 이 물질 세계를 외면함으로써 그것의 참된 본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 에 대한 지식에 관한 것이다.

③ 영지주의의 지식은 신성의 부여를 수반한다. 이 지식은 죽음을 몰아내는 신적 능력이며, 마치 빛이나 생명과 동일시되는 어떤 마술적인 액체처럼 작용하며, 금욕적인 생활 방식에 의해 보장되는 영혼의 신비적 속성을 이루는 것이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그노시스는 70인역본에서 약 60회 나오며, 히브리어 다아트(1841: 지식)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그노시스는 그 창시자가 지식의 하나님이시며(대상 4:10; 지혜서 1:7; 마카베오이서 6:30; 사 40:14), 의인들이 소유하고 있으며(잠 24:26; 잠 16:8; 잠 2:6; 지혜서 7:17), 하나님의 현자나 종이 가르치는(사 53:11) 계시된 지식을 의미한다.

죄인들, 배교자들, 우상숭배자들은 이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잠 13:19).

이 지식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통찰을 의미하기도 한다(단 12:4). 이 지식은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하는 것이긴 하지만(시 139:6) 모든 피조물은 신자들에게 이 지식을 선포한다(시 92:2).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그노스시는 신약성경에서 29회 나오며, 바울 서신에 23회, 누가복음에 2회, 베드로서에 4회 사용되었다.

(a)  눅 1: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여기서 "구원을 알게 하리니"는 '구원의 지식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b)  눅 11:52, "화 있을찐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그노시스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관하여 알려진 것을 가리킨다.

(c)  그노시스는 고후 4:6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것이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d)  그노시스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 그리스도를 구주로서 아는 것이다.

①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② 벧후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e)  그노시스는 롬 11:33에서 하나님께 속하는 것을 아는 지식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f)  그노시스는 엡 3:19에서 그 자체로서 일반적인 '지성, 이해(력)을 의미한다: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g)  그노시스는 기독교에 대한 일반적 지식을 가리킨다.

① 롬 15:1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② 고전 1:5,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h)  그노시스는 보다 더 고등한 것에 속하는 기독교에 대한 더 깊고 완전하고 큰 지식을 가리킨다.

① 고전 12:8,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② 고전 13: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③ 고전 13: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④ 고전 14: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⑤ 고후 6: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⑥ 고후 8: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찌니라".

⑦ 고후 11:6,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i)  그노시스는 특히 그리스도에게 합당한 것과 합당치 않는 것들에 대한 지식을 가리킨다.

① 고전 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② 고전 8:7,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③ 고전 8:10; 고전 8:11,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j)  그노시스는 거짓 교사들이 자랑하는 그리스도교와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더 높은 지식을 가리킨다: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딤전 6:20).

(k)  그노시스는 올바른 삶에서 나타나는 영적 지혜를 가리킨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벧후 1:5).

(l)  그노시스는 다른 사람들과 교제에서 나타나는 영적 지혜를 가리킨다: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m)  그노시스는 객관적 지식, 즉 하나님의 일들과 사람의 의무에 관하여 알려진 것을 가리킨다.

① 롬 2:19,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② 골 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n)  그노시스와 소피아(4678: 지혜)가 함께 사용될 때, 전자는 그 자체로 고려되는 지식을, 후자는 행동에서 드러나는 지혜를 암시하는 것 같다: 롬 11:33; 고전 12:8; 골 2:3. 그노시스는 단순히 직관적인 것이고, 소피아는 추론적인 것이다. 또한 그노시스는 주로 진리에 대한 이해에 적용되고, 소피아에는 진리를 추론하는 능력과 그들의 관계를 추적하는 능력이 첨가된다.(Bp. Lghtft).

① 롬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② 고전 12:8,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③ 골 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Bultmann; E. D. Schmi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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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jgkravteia(1466, 엥크라테이아) 자제 self-control.

명사 엥크라테이아(Xen., Pla. 이래)는 엥크라테스(ejgkrathv", 1468: 강한, 지배하는, 억누르는, 자제하는)에서 유래했으며, '확고성'과 '자제'라는 어감을 지닌, 자신이나 어떤 것에 대한 '지배권'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성적 문제에 관련된 억제, 참을성, 견실이란 의미의 자제(self-control)도 의미한다.

소크라테스는 엥크라테이아를 윤리학에서 중요한 덕목의 하나로 처음으로 소개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이 개념을 채용했다. 플라톤에 있어서 엥크라테이아는 감각적 충동에 대한 통제력을 의미한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엥크라테이아가 인간 자유의 표시로써 간주되었다. 충동, 특히 성적 충동과 음식과 음주의 향락을 삼가는 것은 참된 인간이 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부분이다.

신-피타고라스 학파는 이원론적인 체계를 발전시켰는데 그들에 따르면, 육체는 영혼이 신에게 갈 수 있도록 금욕을 통하여 억제되어야 한다고 했다. 금욕주의는 고대 세계에서 사람들을 제의적인 예배에 적응하도록 함으로써 큰 역할을 하였다. 필로(Philo)는 엥크라테이아를 충동과 열정을 초월하는 덕이라고 격찬하였다(Spec. Leg.).

예수님 당시의 에세네파 사람들(Essenes)은 독신을 권장하였고, 여러가지 다른 방법으로 금욕하며 살았는데, 예를 들면 소유와 음식에 대한 금욕과 철야 등이다(Josephus, War).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엥크라테이아는 70인역본에서 외경에서 3회 나오며, '억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집회서 18:30; 8:21; 마카베오사서 5:34).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엥크라테이아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행 24: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바울은 행 24:24 이하에서 첫째로 '그리스도 안에 믿음'에 대하여 그 다음에 의와 '절제'에 대하여 말한다. 이 말씀에서 "절제"는 아마 불의 (간통)의 결과인 지방 행정 장관 벨릭스의 결혼을 암시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계속 언급하고 있는 금욕주의적 경향을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참조: 행 2:44 이하; 행 4:32).

(b)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바울은 엥크라테이아를 "성령의 열매"로 묘사한다. 여기에서 자제 혹은 절제는 분명히 간음(포르네이아), 불순, 방탕, 우상숭배(갈 5:19)에 반대되는 긍정적인 행동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는 수단인 엥크라테이아는 결코 우리들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들이 복음에 의탁함으로써 성령의 선물로 새로이 받아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의 엥크라테이아가 단지 성적 측면에만 관련되느냐 혹은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파악해야할 것은 바울이 성적 금욕주의에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적 금욕주의가 결코 이원론적으로 고정되지 않고(위의 고전 문헌) 본유적 가치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c)  벧후 1: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여기서 절제는 지식의 사용에 관여한다. 절제란 모든 행사를 적절(법)하게 행하는 내적이며 외적인 자기 조절을 의미한다(E. R. Fuhrman).

여기서 엥크라테이아를 금욕주의적 의미로 이해하면 안된다. 이 용어는 오히려 자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지닌다는 본래의 의미로 사용되어 있으나, 그러나 그 능력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자기 실현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벧후 1:5; 벧후 1:6)으로부터 오는 지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신자가 곤고를 방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인내를 위한 선결 조건이다.(H. Baltenswei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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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Jpomonhv(5281, 휘포모네) 견고히 섬, 인내.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휘포모네(ps. -pla.)는 휘포메노(uJpomevnw, 5278)에서 유래했으며,

(a)  '견고히 섬, 확고부동, 인내',

(b)  '기대, 기다림'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휘포모네는 70인역본에서 약 25회 나오며, 히브리어 미크웨(기대, 소망, 에스드라하 10:2; 렘 14:8; 렘 17:13), 티크와(소망, 시 9:19; 시 61:6; 시 70:5; 욥 14:19)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휘포모네는 신약성경에서 3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공관복음.

눅 21: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누가가 사용한 명사형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도 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엔 휘포모네) 결실하는 자니라"(눅 8:15; 참조: 마 13:23; 막 4:20). 이 비유에 대한 누가의 진술에만 휘포모네가 언급되어 있고, 반면 마가와 마태는 누가가 빠뜨린 풍성한 결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는 그의 복음서를 이방 세계에 소개한다는 성격에서 연유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비유는 열매 맺는 것을 방해하는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반면, 앞에 언급한 종말론적 강화는 시험과 환난에 연결시키고 있다. 즉 두 경우가 다 인내를 전제 조건으로 하고 있다. 한 경우에는 구원에 대하여, 한 경우에서는 말씀의 열매를 맺는 것에 대해서이다.

(b)  바울서신.

① 로마서에서 휘포모네가 나타난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을 영위하고자 한다면, 그에게는 휘포모네가 필요하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롬 2:7). 이 구절은 "선행 중의 꾸준한 인내"(NEB)라는 능동적 의미와 고난 중의 끈질긴 인내라는 수동적 개념, 이 양자 가운데서 어떠한 해석을 하더라도 무방하다(참조: M. Black).

롬 5장에서 바울은,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가 어떻게 하여 고난까지도 유익한 것으로 삼을 수 있는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참조: 롬 5:2) 즐거워한다. 나아가서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들리프세신)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들리프시스)은 인내(휘포모넨)를, 인내(휘포모네)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3 이하).

롬 8:25에서 소망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인내로써 기다린다는 특징을 띠고 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여기의 문맥상 배경은 피조물의 고통에 대한 언급이다(참조: 롬 8:23).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5).

②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인내의 문제를, 특히 교회를 위해 자신이 행하는 주의 일과 관련시켜 언급하였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 1:6). 고후 6:4과 고후 12:12은 바울 자신의 사도적 인내를 언급하고 있다.

③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위한 기도에서 인내를 언급한다: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 1:11).

④ 살전 1:3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소유한 '소망의 인내'가 하나님께 대한 바울의 특별한 감사의 원인으로서 작용한다. 살후 1:4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그들의 인내와 믿음에 대해 친히 자랑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살후 3:5에서 바울은 기도한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참조: 히 12:2 이하). 데살로니가인들은 그들의 주께서 보여 주신 인내를 가지도록 권면을 받고 있다. 주는 그들이 본받아야할 인내의 모범을 보이셨던 것이다.(L. Morris).

⑤ 목회 서신에서 인내는, 기독교 사역자들(딤전 6:11; 딤후 3:10)과 노인들(딛 2:2)에게 필요한 하나의 자질로서 묘사된다.

(c)  히브리서에서 휘포모네는 인내에 대한 권면에 나타난다(히 10:36; 히 12:1). 히브리서 기자는 지속적 인내를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 즉 지난날 세상의 소유물까지 손실하면서 참았으니 지금도 참을 것이며(히 10:32; 참조: 히 10:34),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하여" 참아야 한다(히 10:36). 징계는 하나님의 자녀됨의 증거이니 참아야 한다(히 12:7).

(d)  야고보도 시련이 믿음을 굳게 하고 인내를 강화하여 온전함에 이르게 한다고 증거한다(약 1:3-4). 욥은 그에 관한 훌륭한 예이다(참조: 약 5:10). 욥의 경우처럼 만일 신자들이 굳게 인내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약 1:11; 참조: 약 1:12; 마 5:12).

(e)  벧후 1:6에서는 일련의 미덕을 진술하는 가운데 휘포모네를 두번 언급하였다: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롬 5:3 이하, 그리고 약 1:3 이하와 유사한 면이 있는 구절이다.

(f)  요한계시록에서 인내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계 1:9) 밧모섬에 유배당한 요한 자신이 겪어야 했던 것이기도 했다(계 1:9). 성령께서는 두아디라와 에베소의 교회들에 대해, 그들의 인내를 칭찬하신다(계 2:2 이하; 계 2:19). 빌라델비아 교회 역시 유사한 위로의 말씀이 주어진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 3:10). 짐승과의 싸움을 위해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계 13:10).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참조: U. Falkenroth; C. Brown; F. Ha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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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jsevbeia(2150, 유세베이아) 경건, 신앙심 깊음, 하나님을 두려워함(경외함).

1. 고전 헬라어 문헌 

유세베스 어군의 단어들(유세베스, 유세베이아, 유세베오)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a)  이 단어군는 일반적으로 신들과 관련되어 있으며, 신들에게 대한 적절한 태도로서 '경건 piety'이란 의미를 지닌다.

(b)  신들과 신전들은 별도로 하고, 존경의 대상은 '죽은 자, 친척, 통치자, 재판관, 맹세, 율법, 선한 자' 등이 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신의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에 이 세 단어들은 끊임없이 신들과 관계를 가지게 된다.

(c)  플라톤은 선을 행함으로 신들을 섬기는 것을 경건으로 여기며,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경건을 제의적인 예배와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거기서도 자주 지식이나 내적 헌신의 태도를 요구하였다.

(d)  헬레니즘 시대에 특히 유세베이아의 주요 의미는 예배였지만 여전히 친족, 배우자 혹은 황제에 대한 존경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철학자들은 신들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을 참된 경건으로 보았다. 플루타르크에게 있어서 미신과 구별되는 참 경건은 신들이 보기에 선한 것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예배는 신과 동일시 될 수 있는 위대하고 고상한 것에 대한 존경을 의미한다. 이 때에 경건은 무조건적인 인격적 위탁이 아니라, 순수하고 숭고한 신성의 세계에 대한 경외, 제의적인 예배 그리고 질서에 대한 존경으로서의 덕인 것이다.

따라서 유세베이아는 유세베스(eujsebhv", 2152)에서 유래했으며, '경건, 신앙심 깊음, 하나님을 두려워함' 이란 의미를 지니며, 앞에서 보인 의미를 함축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유세베이아는 70인역에서 58회 나오며, 정경에서 야레(두려워하다)와 야레 예호와(여호와를 두려워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정경에서 '경외함'(잠 1:7; 사 33:6), "여호와를 경외함"(사 11:2)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유세베이아는 신약성경에서 15회, 사도행전, 목회서신, 베드로후서에만 나온다.

(a)  행 3:12에서 베드로는 "경건"을 "예수로 말미암마 난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2; 행 3:16).

(b)  목회서신에서 유세베이아는 기독교인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경건한 삶 또는 그 방식을 나타낸다.

딤전 3:16에 보면,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며, 그 비밀은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이다. [연합한 한 영으로 내주하시는, 살아계시는 JC를 살아냄!!]이제 신약성경의 경건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로 이해한다. 결과적으로 그 논리적 귀결로서 경건은 일련의 기독교적 미덕의 하나가 되었다(딤전 6:11).

유세베이아는 거짓 가르침과 관련되어 있는 생활 방식과는 대조적으로, 건전한 가르침과 조화되는 경건이다(딤전 6:3; 딛 1:1). 이것은 거짓 교사들이 그것으로 인해 책망받았던 바, 곧 명백히 잘못된 개념으로서의 공로에 의한 의와는 다른 것이다(딤전 4:7 이하; 딤전 6:5 이하; 딤후 3:5 ).

거짓 교사들은 일종의 유세베이아를 취하지만 그들의 삶이 경건으로 구성되지 않으며, 그들은 이득을 얻기 위해 경건을 이용한다(딤후 3:5; 딤전 6:5-딤전 6:6). 그래서 그들은 참된 경건의 유익을 놓쳐버리고 만다. 그리스도인의 유세베이아는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경건은 그리스도 사건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딤전 3:16).

그리스도인의 유세베이아는 외면적인 예배가 아니며 단순한 하나님 개념도, 미덕도, 이상도 아니다. 창조를 악한 것으로 여기며, 창조 질서를 소멸시키는 영지주의적 금욕주의와는 대조적으로, 신앙에서 생겨난 참 유세베이아는 하나님을 창조주이자 구세주로 존경하는 일상적인 행동을 포괄한다. 비록 이로 인하여 경건과 관련되어 있는 바로 그 하나님의 질서로 인하여 박해가 예상된다 하더라도 참 유세베이아는 유지되어야 한다.

유세베이아라는 용어는 저자가 유세베이아를 나타내는 생활 방식이, 이를 중히 여기는 비그리스도인들로부터 좋은 평을 들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같다. 이런 점에서 유세베이아는 내생에 뿐만 아니라 이생에서도 유익한 것이다(딤전 4:8).

(c)  벧후 3:11 이하에서 유세베이아는 꾸준히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으로 간주되며, 여기서 복수형은 경건한 행동을 전부 포괄한다.

벧후 1:3에 단수형이 나오며, 경건 생활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은사는 우리가 좀더 경건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내려 주신다. 이것은 하나님과  거룩한 것들로 더욱 더 나아가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벧후 1:6 - 벧후 1:7에서 자제는 약속에 대한 끊임없는 기다림에 이르게 되고, 이 기다림은 경건에, 그리고 이 경건은 차례로 형제 우애와 사랑에 이르게 된다.

(참조: W.Gunther; J.H.Thayer; W.Foer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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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adelfiva(5360, 필라델피아) 형제애 brotherly love

1. 고전 헬라어 문헌 및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필라델피아(Alexis. Lusian)는 필라델포스(filavdelfo", 5361: 형제를 사랑하는)에서 유래했으며, '형제에 대한 사랑, 형제애'를 의미한다. 70인 역본에서는 마카베오사서 13:23, 26에 나온다.

2.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필라델피아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오며,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형제들인 서로를 향하여 품는 사랑'을 가리킨다.

·롬 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살전 4:9,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히 13: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벧전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벧후 1: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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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gavph(26, 아가페) 사랑 love.

1. 성경 외의 용법. 

명사 아가페는 아가파오(ajgapavw, 25: 사랑하다)에서 유래한 후기 헬라어이며, 성경 외의 문헌에서는 단 한번 발견되는데, 바로 여신 이시스(Isis)에게 아가페라는 칭호가 붙여졌다(P.Oxy. 1380, 109; A. D. 2세기).

--> 아가파오(ajgapavw, 25)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아가페는 70인역본에서 19회 나오며 아하바(160: 사랑)의 역어로 사용되어 연애(삼하 13:5), 남녀의 사랑(렘 2:2)에 대하여 주로 사용되었으며, 아가서에서 주로 나타난다(아 2:4 이하; 3:5, 10; 5:8; 7:6; 8:4 이하).

70인역본이 의미가 복잡한 에로스보다는 오히려 보다 단순한 단어인 아가페를 사용하는 것도, 인간의 모든 사상, 감정, 행위 그리고 예배가 하나님의 선행 작용에 대한 하나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아가페는 신약성경에서 116회 나오며, '사랑, 애정, 호의, 자비심'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아가페는 인간의 사랑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① 고전 8:1; 고전 13:4-고전 13:8; 빌 1:9; 롬 13:10; 마 24:12; 롬 12:9; 고후 6:6; 딤전 1:5; 요일 4:16; 고전 13:1-고전 13:3; 빌 2:2; 고전 14:1; 딤전 6:11; 딤후 2:22; 골 3:14; 벧후 1:7; 골 1:8; 살전 1:3; 고후 8:8; 히 10:24; 빌 2:1; 벧전 5:14; 몬 1:7; 롬 14:5; 엡 5:2; 골 4:21; 엡 4:15; 고전 16:14; 엡 3:17; 엡 4:2; 골 2:2; 살전 5:13; 엡 4:16; 갈 5:13; 갈 5:6; 몬 1:9; 살전 3:6; 살전 5:8; 딤전 1:14; 딤후 1:13; 몬 1:5; 엡 6:23; 딤전 2:15; 딤전 4:12; 딤전 6:11; 딤후 2:22; 딤후 3:10; 딛 2:2; 계 2:19; 고전 13:13; 골 1:4 이하; 살전 1:3; 살전 5:8; 딤후 1:7; 롬 12:9; 고전 6:6; 벧전 4:8; 갈 5:22; 롬 15:30; 골 1:8; 살후 2:10; 엡 1:15; 골 1:4; 살전 3:12; 살후 1:3; 고후 2:4; 고후 2:8; 벧전 4:8; 요 13:35; 고후 8:7; 고전 15:24.

② 하나님을 향한 사랑. 눅 11:42; 요 5:42; 요일 2:15; 요일 3:17; 요일 4:12; 요일 5:3; 살후 3:5; 고후 7:1; 히 6:10.

(b)  아가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요일 4:9; 요일 4:16; 롬 5:8; 요일 3:1; 엡 1:4이하; 엡 2:4; 고후 13:13; 요일 4:7; 고후 13:11; 요일 4:8; 요 15:9; 요 15:10; 요 15:13; 롬 8:35; 고후 5:14; 엡 3:19.

②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 요 15:10; 요 17:26; 골 1:13.

(c)  아가페는 초대교회에서, 친교의 입맞춤이라는 형태로 표현되었다. 이 입맞춤은 회중 예배시, 하나의 정규적 순서였었다(예: 롬 16:16; "거룩하게 입 맞춤으로"[엔 휠레마티 하기오]). 벧전 5:14에서 "사랑의 입맞춤"(엔 휠레마티 아가페스)이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사실상 이 의식(rite)의 상세한 사항들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d)  유 1:12에서 복수 아가파이스는 "애찬"(love-feasts)을 의미한다: "저희는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의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이 애찬은 '초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예배와 관련하여 형제적인 사랑을 북돋우고 표현하기 위해' 함께한 식사를 말한다. 이단자들은 애찬에 참석하는 것을 자기네의 탐욕과 부도덕을 증진시키는 기회로 삼았으며, 심지어 고린도 교회는 이단자들로 인하여 분열되어 파당이 생기고 술취한 자들의 난장판이 되기도 하였다(고전 11:17-고전 11:22).(D. R. Rose).

[아가페는 초대 교회 의식들 중의 하나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단지 암시적으로 나타나 있을 뿐이다. 고전 11:17이하는 성찬식이 평상의 식사와 함께, 후에 "애찬"(love feast, 아가페)이 주의 만찬 자체로부터 분리되었으며, 그 본연의 위치에서 거행되었다(참조: 유 12; 벧후 2:13; Ign. Smy. 8:3; Clem. Alex., Paedogogus 2, 1).

그 차이점은, 설교가 행해지는 예배나 성찬식 예배의 중심이 기쁨에 찬 신앙의 선포였던 반면, 공동 식사의 주요한 의의는 그들이 아가페 속에서 함께 나눈 특별한 친교의 실시에 있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분명히 이와 같은 예배는 신도들이 사회적 자선 행위를 통해 자기들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참조: 행 6:1이하).

(W. Gunther; H.-G. Link, TBZNT)]

(e)  아가페의 헬라어 의미는 대등한 사람들간의 존경과 호의이다. 기독교의 아가페는 하나님과 그의 자비 앞에서는 모두 똑같이 가치없음을 자각함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사랑(caritas)의 정신에 의해 형제들에 대한 태도와 교제가 결정된다. 따라서 이 새로운 형제애는 에로스로 인해 타락하고, 승화된 에로스에 의해 스스로를 초월하려고 헛되이 시도하는 세상 안에서 성장하여 간다. 바꾸어 말하면 바라지 않고 주는 사랑을 아는 교회가 성장한다. 감각과 초감각이 혼합된 신비적 사교들이 아 뮈스테리아 아가페스(사랑의 비밀)의 맑고 깨끗함 앞에 굴복한다.(E. Stauffer).

초대 교회에서 형제들과 자매들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던 여러가지 이름들은, 아가페(agape)에 기초를 둔 이 새 공동체가 그들 스스로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이해했다는 증거이다.(W. Gunther, H.-G. Link).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 Stauffer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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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h'si"(2821, 클레시스) 부름 Calling.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클레시스는 칼레오(kalevw, 2564: 부르다, 일컫다)에서 유래했으며,

(a)  '이름을 지음'이나 '이름',

(b)  더욱 일반적으로 '초대'나 '초청'(Xen., Sym P.),

(c)  '부름' 공인된 전령에 의한 공적 호출(군사 또는 시의회 등), 그리고 집단이나 개인이 부르는 것(Homer, Od.),

(d)  종교적 의미에서 '부름'(Epict. Diss.)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클레시스는 70인역본에서 3회 나오며, 렘 31:6에서만 히브리어 카라(7121)를 번역하여 '초청하는 부름'을 나타낸다. 클레시스는 또한 마카베오삼서 5:14에서 초대(행위)라는 의미로, 유딧 12:10에서 사람을 식사에 초대하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클레시스는 신약성경에서 11회 나오며, 바울 서신에서 9회, 히브리서와 베드로후서에서 각각 1회 사용되었다.

(a)  롬 11:29에서 하나님의 클레시스는 하나님의 부름이나 소명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b)  고전 1:26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의 부름을 숙고하라고 한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하나님은 지혜있는 자나 강한 자들 대신에 어리석고 연약한 자들을 "선택하신다"(고전 1:27).

(c)  고전 7:20에서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의 부름받은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는 요구를 받는다: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그들의 부름은 세속적인 '소명'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 안에서 부름을 받았으며, 그들의 클레시스는 하나님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고전 7:22 이하).

(d)  엡 1:18에서 부르심의 소망이란 신자가 부름을 받는 소망을 의미한다: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참조: 엡 4:4).

(e)  엡 4:1은 부름에 합당한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f)  엡 4:4에서 부르심의 한 소망을 공유한 부름을 언급한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g)  빌 3:14에서 부르심의 상에 대해 언급한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이 부름은 그리스도에 입각하여 하나님에 의해 하늘에서 부르는 부름이다.

(h)  살후 1:11에서 하나님의 부름에 합당하게 되는 것에 대해 언급한다: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그 부르심에 합당한"이란 표현이 하나님께서 자기가 명하여 받게 한 그 부름에 합당하다고, 그러므로 그 부름에서 약속된 복을 얻기에 합당하다고, 선언하는 자에 대해 사용된다.

(i)  딤후 1:9에서 거룩한 부르심에 대해 언급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거룩한 부름이란 표현에서 단순히 이름만의 거룩이나 하나님의 지고한 거룩으로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거룩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씀의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죄에서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죄악과 권세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신자의 편에서는 온전한 헌신을 드리는 경험이며, 하나님 편에서는 믿는 자들에게 온전한 내적 정결을 이루어주는 생명의 전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주도권을 쥐시고 죄로 죽은 우리를 일으키시며 거룩으로 인도하신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역시 성령의 중재적 사역에 의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래서 비록 우리들 편의 자유로운 응답이 구원의 요인이긴 하여도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개심의 기적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속하는 일이다. 우리들의 구원은 결국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는다(참조: J. G. Gould).

(j)  히 3:1에서 하늘의 부르심에 대해 말한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이 부름은 하늘로부터 오는 부름이며, 하늘을 향할 것을 호소하는 부름이다(A. T. Robertson).

벧후 1:10은 신자의 부름과 선택을 확실히 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 두 가지만 부르심과 택하심은 모두 대격 단수로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 각 신자들은 그 부르심과 선택을 분명히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권고를 받는다. 신앙의 원리는 반드시 신앙의 진보를 가져오며 이 양자 모두는 우리가 약속된 하나님의 신앙의 왕국에 들어갈 것이라는 믿음의 전망을 계속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여기서 자기 자신의 영혼의 영원한 복락을 무시하는 자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무시할 수 없는 견인의 원리가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만일 네가 이런 것을 행한다면..."의 인간적인 조건은 하나님의 약속과 만나야 하며 이렇게 함으로써 "실족하지 않으리라"는 약속은 성취된다(A. T. Robertson; E. R. Fuhrman).

(참조: K. L. Schmidt; L. Coen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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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jkloghv(1589, 에클로게) 선택, 선택되어진 것.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에클로게(Pla., PTebt.)는 에클레고(ejklevgw, 1586; 골라내다, 선택하다)에서 유래했다.

(a)  이 단어는 '선택' seletion이란 능동적 의미가 두드려진다. 예를 들면 통치자들, 관리들, 즉 특별한 직책을 가진 공직자들의 선택에 대해 사용되었다(Plato). 그 강조점은 선택의 결과에 있지 않고 선택의 행위에 있으며, 선택의 근거는 특별한 목적을 위한 적합성이다. 선택의 원칙이 첨가되는데, 출생, 업적, 수입 등이다. 그러나 때때로 그 관계가 명백할 때는 선택의 원칙을 고려하지 않는다.

(b)  이 단어는 파피루스와 비문들에서 '찾아냄' seeking, '골라냄, 선택함' selecting을 의미한다(밭, 신랑, 선물에 대해 사용되었다).

(c)  이 단어는 '선택되어진 것'이란 수동적 의미를 지닌다(Polyb.).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에클로게는 70인역본에서 사 22:7(아굴라역), 사 37:24(삼마쿠역, 테오도숀역)에만 나온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에클로게는 신약성경에서 7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사도행전.

행 9:15에서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바울이 택함을 받은 도구라고 말씀하신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바울이 선택된 것은 이방인들, 왕들, 이스라엘의 자녀들에 대한 사도적 임무를 위한 것이다.

(b)  바울 서신.

① 롬 9:11에서 바울은 에클로게를 족장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사용한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바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로써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은채 남아 있다는 의심에 답변한다(롬 9:6 이하). 성경이 이것을 증거한다. 이스마엘이 아니라 꼭 이삭이 약속을 받은 자였으며(롬 9:7-9; 참조: 창 21장),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택의 자유로운 행동은 장자 에서보다 야곱을 사랑한 것에 나타난다(롬 9:10-13; 참조: 창 25:23; 말 1:2 이하). 택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롬 9:11)이 이삭의 아들들의 출생 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으며, 그들의 행위와 무관하게 구원 역사에서 그들의 역할을 정한다. 이것은 개인의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긍휼히 여기시거나 강퍅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유는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구원의 새로운 공동체의 부르심에서도 나타난다(롬 9:14-29).

② 롬 11:5에서 에클로게는 이스라엘 전체에서 신실한 남은 자를 택하시는 은혜로운 선택을 나타낸다. 이스라엘이 불신앙으로 지은 죄에도 불구하고(롬 9:30-롬 10:21) 하나님께서는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 즉 선택하신 백성(롬 11:2)을 버리지 아니하셨다. 일찍이 엘리야 때에 그랬듯이(왕상 19:10; 왕상 19:14; 왕상 19:18),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 11:5).

그리고 롬 11:7에 의하면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에게서 '택하심'을 본다. 그런데 이 택하심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은 이스라엘의 완악해짐조차도 구원 역사에 의미를 가진다: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롬 11:11).

이스라엘의 선택은 종결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방 기독교가 감람나무 이스라엘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롬 11:17-24). 그러므로 언젠가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롬 11:26).

③ 롬 11:28에서 에클로게는 족장들 안에서 백성 전체를 선택한 것을 나타낸다: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된 자요(RSV는 '하나님의'를 부가함)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일지라도 당분간 하나님과 또한 하나님의 메시지의 대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당분간 이 모두가 버림을 받은 것으로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목적을 거부하는 이 기간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을 넓히는데 이바지하는 것이다. 이 말은(당분간)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은총을 나타내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④ 데살로니가전서의 서두에서 그리스도인의 선택에 대한 믿음은 우주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역사와 관련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이방 세계에서 온 데살로니가교인들의 믿음으로 인해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이) 형제들"의 택하심에 감사한다(살전 1:4). 이 택하심은 성령의 역사를 수반한 사도의 설교에서 분명해지며(살전 1:5; 참조: 갈 2:8; 갈 3:2-5; 고전 2:4 등),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쁘게 받음에서 증명된다(살전 1:6-10; 살전 1:2 이하).

(c)  베드로 서신.

벧후 1: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여기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공동체의 선택과 부름을 언급하고, 구원을 '신뢰'한다.

베드로후서는 구원을 "선의 본성"(벧후 1:4)에 참예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따라서 베드로후서는 한편으로는 "부르심과 택하심"(벧후 1:10)을 입은 자들이 그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기울여야 할 윤리적 노력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에클로게라는 용어와 연관하여 종말론적 관점을 유지한다. 베드로후서는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을 택하심의 시련에서 찾는다(벧후 1:10 하반절; 벧후 1:11).

신자들은 택하심을 확고히 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 진지하게 행해야 한다. 이것은 결연한 정결화, 능력을 활용하는 열심, 하나님과 그의 약속들에 대한 경험을 포함한다(참조: 벧후 1:3 이하).

(참조: J. Eckert; G. Schrenk; L. Coen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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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whv(2222, 조에) 생명 lif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조에(Homer 이래)는 '생명(life)'을 의미한다.

(a)  조에는 헬라에서 유기적 존재들, 동물, 사람, 식물의 물리적 생명력을 의미한다. 생명은 물건이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을 특징 지우는 생명성(vitality)이다.

각 개개인 뿐만 아니라 전 우주까지도 살아있는 유기체, 또는 영혼을 갖고 있는 세계로 생각되었다.

(b)  헬라인들은 세 번째의 성분, 곧 이성 Reason, 정신 mind, 이해력 understanding(nou'", 3563)이 인간의 생명을 특징 지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마(sw'ma, 4983)와 또한 다소간 프쉬케(yuchv, 5590)가 자연적 생명을 구성하는 반면 누스(nou'", 3563)는 외부로부터 인간 생명으로 들어가 이 생명을 자연적 생명, 즉 동물의 생명 이상으로 향상시키고 여러 가지 양자택일을 할 수 있는 하나의 존재의 유형을 생산해내는 신적 요소인 것이다.

(c)  만약 신의 조에가 누스와 관련되어 있다면, 이것은 조에가 자연의 생명력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초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최고 가능성은 또한 누스이며, 누스는 육체와 분리될 수는 없지만, 육체와 구별함으로써만이 그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따라서, 참된 인간의 조에는 사람이 그것을 통해 몸과 혼을 결합함으로 조온이 되는 조에가 아니다. 프쉬케는 물질에 있어서 생명력의 원리이지만, 이것은 또한 물질과 대조되는 것인 인간의 자아(selfhood)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조에는 자연의 현상으로서의 생명이지만 또한 특별히 인간의 생명이기도 하다. 이 인간의 생명의 가능성은 유기적인 본질에서 성취되지 않으며 이것은 종(species)의 영속화를 넘어선 의미를 지닌다. 인간의 생명은 그 자체의 운명을 가지며, 행복과 불행을 알고, 그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명은 그것에 고유한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2. 70인역본의 용법 

조에는 70인역본에서 약 260회 나오며, 거의 대부분 히브리어 하이('살아있는' 것)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조에는 무엇보다도 생명의 길이나 질병, 죽음과 구별되는 생명력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때리시고 치료하시는 생명과 역사의 주인이시다. 후에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참조: 마카베오사서 18:18). 고대의 비문들은 지상의 생명에 대해 언급을 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조에는 신약성경에서 13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조에는 자연적 생명을 나타낸다.

① 조에는 자연적 죽음과 구별되는 자연적 생명을 가리킨다.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고전 3: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② 눅 16:25에서 '살아있는 동안'을 묘사한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눅 12:15; 행 8:33에서도 마찬가지이다.

③ 고전 15:19에서 이 세상에서 '삶을' 표현한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딤전 4:8에서도 같은 의미를 가지며, "내 생"과 대조되어 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④ 약 4:14에서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생명을 묘사한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⑤ 히 7:3에서 '생'의 끝을 묘사한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⑥ 계 11:11에서 '생'기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참조: 창 6:17; 창7:15).

(b)  조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초자연적 생명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이 생명은 신자들이 미래에 받을 것이지만, 이 땅에서 지금 향유하는 것이다.

① 요일 5:20에서 하나님은 참 생명, 곧 영생이시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요 5:26a에서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요 12:50에 의하면 하나님의 명령은 영생이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② 요 5:26b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셨다.

요 1:14에서 "그 안에 생명이 있다". 요일 5:11에서도 이를 증거한다. 그는 "생명의 주"이시며(행 3:15), "생명의 말씀"이시다(요 1:1). "이 생명이 인간에게 나타내시게 된 것이다"(요일 1:2). 그는 "생명의 떡"이다(요 6:35; 요 6:48; 요 6:33). 그는 단순히 "생명"이란 말로 표현되었다(요 11:25; 요 14:16). 그는 "우리의 생명"이시다(골 3:4). 그 안에 있는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며(요 1:4b) 따라서 사람들은 그를 따름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빛을 얻는다(요 8:12).

(c)  조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얻는 신자들의 생명을 나타낸다.

① 이 생명은 은혜와 거룩의 생명이다.

롬 6:4에서 우리는 "세례(침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된다.

엡 4:18에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들을 묘사한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② 이 생명은 구원과 영광의 생명이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며(딤후 1:1), 그의 말씀과 복음의 전도로 말미암아 효력을 발한다, 요 6:68; 요 6:63; 행 5:20; 빌 2:16; 딤후 1:10; 고후 4:12. 사도들은 복음의 전도로, 사람들을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게" 한다(고후 2:16).

③ 성령은 생명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신다, 롬 8:2; 롬 8:6; 롬 8:10; 요 6:63.

④ 그리스도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계명(엔톨레)도 생명에 이르게 한다, 롬 7:10.

⑤ 이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로 간주되었다, 딤후 1:1에서 "썩지 아니할 것"과 함께, 벧후 1:3에서 "경건"과 함께, 롬 8:6에서 "평안"과 함께 나타난다.

⑥ 진실로 생명의 에클레시아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생명, 곧 은혜의 선물의 상속자들이다, 벧전 3:7.

⑦ 이 생명은 그들이 육체로 거하는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 있다, 골 3:3.

⑧ 그의 생명을 상실 당한 자는 누구든지 영광의 생명에서 제외된다. 행 11:18; 행 13:46; 행 13:48.

⑨ 특별히 요한복음에 따르면, 하나님의 생명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자는 생명(요일 5:12), 곧 영생을(요 6:40; 요 6:47) 소유하였고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 5:24; 요일 3:14).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영생은 사랑과(참조: 요 15:17), 기쁨(참조: 요 16:20-요 16:24) 안에서 그 모습을 나타낸다. 요일 3:14에 따르면 형제간의 사랑은 참 생명의 척도가 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에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비록 요한의 생명에 대한 견해에 많은 점들이 영지주의자들의 관점과 일치한다고 할지라도 요한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지주의자들은 영생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거의 도달하기 어려운 세계로 옮겨 버린 반면에 요한은 영생을 바로 현재로 가져오며 또한 그리스도의 말씀과 계명과 인격에 굳게 닻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요 17:3). 이 영생을 지금 이곳에서 소유하는 신자들은, 사망과 심판이 더 이상 생각할 요소들이 아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요 5:24; 요 11:25). 왜냐하면 영생은 그 안에 영원의 씨앗들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4:14; 요 6:27; 요 12:25).

(d)  조에는 종말의 복된 시대에서 누릴 생명에 대해 사용되었다: 요 3:15.

① 내세의 영생, 마 10:30; 눅 18:30; 막 19:29.

② 영생에 대한 질문, 막 10:17; 눅 18:18; 눅 10:25; 마 19:16이하.

③ 마지막 심판의 결과, 마 25:46; 롬 2:7; 마 7:14; 마 18:8이하; 막 9:43, 막 9:45; 롬 5:17이하, 롬 5:21; 롬 6:22이하.

④ 죽은 상태에서 나온 자들의 생명, 롬 11:15; 갈 6:8; 딤전 1:16; 딤전 6:12, 딤전 6:19; 벧전 3:10.

⑤ 이 생명은 참 생명으로 불리워진다, 딤전 6:19; 딛 1:2; 딛 3:7.

⑥ 생명 책, 빌 4:3; 계 3:5; 계 13:8; 계 17:8; 계 20:12, 계 20:15; 계 21:27.

⑦ 생명의 나무, 계 2:7; 계 22:2; 계 22:14; 계 22:19.

⑧ 생명의 면류관, 계 2:10.

⑨ 생명수, 계 21:6; 계 22:1; 계 22:17; 계 7:17.

(참조: Walter Bauer; H.G.Link; R.Bult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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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vri"(5485, 카리스) 은혜 grace, 호의, 친절 favour.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카리스(Homer 이래)는 기본어이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a)  이 단어는 '사람들 중에 복리를 가져오는 것'을 의미하며, 카라(carav, 5479)는 이 복리에 대한 개인적 경험이나 표현을 의미한다.

(b)  이 단어는 (a)의 기본 의미에서 여러가지 의미가 파생되었으며, '은혜, 호의, 아름다움(미), 미덕, 사은, 감사, 사의, 친절, 즐거움, 호의의 표현, 돌봄, 감사의 빚, 보답'을 의미한다.

(c)  이 단어는 속격과 함께 사용될 때, '~을 위하여, ~에 대한 고려를 해서'를 의미한다.

(d)  아이스킬루스는 신들의 호의에 카리스를 사용했다. 플라톤의 문헌들에서 카리스는 '좋은 선물, 좋은 뜻, 호의, 기쁨, 기쁘게 하는 것, 감사' 등의 뜻을 가진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카리스는 70인역본에서 약 190회 나오며 여러 히브리어로 사용되었으며, 그 중 헨이 가장 자주 나오며(61회), 대개 '호의, 좋아함, 의향, 기호', 드물게 '매력, 아름다움, 애교'를 의미한다(시 45:2). 그리고 이 단어는 라촌(만족스러운 것, 사람들 사이에서, 잠 10:32; 사람이 하나님께 구하는 은총, 잠 11:27; 사람이 '하나님께 얻는 은총'), 헤세드(은총, 에 2:9; 에 2:17), 라함(우애감, 단 1:9; 동정, 창 43:14), 토브(선한 것, 잠 18:22), 게둘라(영예의 표시, 에 6:3)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카리스는 신약성경에서 15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누가의 기록.

① 카리스는 비종교적인 행 24:27; 행 25:3; 행 25:9 등에 나타나며, 좀 더 분명하게는 행 2:47; 행 4:33에 나타난다.

② 구약성경의 영향이 눅 1:30; 행 7:46; 행 7:10; 눅 2:40; 눅 2:52; 눅 6:32 이하의 종교적인 용법에서 나타난다.

③ 카리스는 눅 4:22; 행 14:3에서 복음의 특성을 설명해 준다.

이 단어는 행 6:8에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묘사한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행 11:23에서는 교회 성장에 있어서 카리스의 지도적인 역할을 볼 수 있다: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행 14:26; 행 15:40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한다.

행 15:11은 권고 형식의 본문에 나타나는 바울 사상의 표현이다: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b)  바울 서신.

① 카리스는 바울의 중심 개념으로서 인사말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롬 1:7; 살전 5:28 등).

② 바울에게 있어서는 카리스는 독특하게 구원 사건의 구조를 설명해 준다. 기본적인 사상은 값없이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카리스가 하나님의 속성만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구체화되고(갈 2:21) 복음으로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 은혜는 죄인들에게 나타났고(롬 3:23-24) 구원의 전부이며(고후 6:1) 모든 신자들이 받은 것이다(고전 1:4).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된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과 더불어 신자들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롬 3:24 이하). 이것은 구원의 방법으로서 율법을 배제하는 것이다(롬 4:16). 은혜는 칭의의 기반이며, 그것에서 나타나게 된다(롬 5:20-21). 그래서 은혜는 어떤 의미에서 일종의 상태이다(갈 5:2). 또한 은혜는 항상 선물이다. 은혜는 충분하다(고전 1:29). 우리는 더 요구하거나 더 얻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은혜에는 확신적 요소가 들어있기는 하나 거짓 확신이 아니므로 자랑할만한 여지가 없다(고전 1:29; 참조: 갈 5:4).

③ 죄를 극복하는데 있어서 은혜의 작용은 그 능력을 보여준다(롬 5:20-21). 은혜와 죄와는 구조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은혜는 숙명적인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하신 자들에게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롬 11:5-6). 은혜는 교회 안에서, 보기로 바울의 모금에서(고후 8장)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은혜의 목적은 모든 선행을 하는데 있으며(고후 9:8), 그렇기 때문에 선행을 요구하는 것이지만(고후 6:1), 자원하여 순종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할 뿐이다. 은혜는 방종을 허용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이론이다. 바울은 롬 6:1에서 그런 단순한 생각을 책망하고 있다.

④ 바울의 사도직은 롬 1:23 등에서 특별한 은혜이다. 사도직이 바울에게 주어진 것과(롬 12:3), 그것을 수행하는 것은 은혜였다(고후 1:12). 교회를 방문하는 것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은혜였다(고후 1:15).

⑤ 골 1:6에서 카리스는 복음을 뜻한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골 4:6에서 '매력'을 의미한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엡 1:6-7에서 카리스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호의"를 의미한다: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특히 엡 2:5 이하가 바울적 특색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엡 3:2; 엡 3:7-8도 마찬가지다. 엡 4:7; 엡 4:29에서 "주다"라는 단어와 함께 쓰는 것은 상투적인 표현이다.

⑥ 목회서신에서 카리스는 딤전 1:12에서 '감사'를 의미한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후 2:1에서 직분의 '은혜'를 나타낸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딤후 1:9에서 은혜가 나타났다는 본문을 통해서 은혜와 행위를 대조시키고 있다(참조: 딛 2:11).

딛 3:4 이하에서 선하심이나 자비 등의 용어가 같은 뜻을 가진 단어들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행위와의 대조를 보는데 이번에는 세례(침례)를 받는데서 나타난 은혜를 언급하고 있다(딛 3:5 이하).

딤전 1:14에서 믿음, 사랑, 그리고 소망 대신 은혜(카리스)를 둔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c)  히 4:16에서 카리스와 엘레오스(e[leo", 1656: 자비, 동정, 불쌍히 여김)를 사용한다(참조: 딤전 1:2). 그리스도는 은혜를 구현하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은혜를 받는다(히 7:25).

히 2:9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은혜로 고난 받으셨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히 10:29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또는 피)은 계약과 은혜를 결합하였다. 은혜와 제사에 쓰인 고기를 대조시키는 것은 히 13:9에서 계약에 대한 반대 명제를 언급한 것의 일부분이다.

히 12:15에서 우리가 은혜에서 떨어지지 말아야 할 것을 언급한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d)  베드로전서에서 고난은 은혜로 이해되고 있다(벧전 2:19-20). 벧후 3:18은 카리스를 그노시스(지식)에 관련시킨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약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e)  요한의 기록.

카리스는 요이 1:2과 계 1:4; 계 22:21의 인사말에 나온다.

요 1:14; 요 1:16-17에서 은혜는 율법과 반대되고, 진리와 완전함에 결합되어 나타나는 로고스의 계시의 결과를 언급한다. 그럼으로써 이 단어의 독특한 의미가 드러나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

(참조: H. -H. Esser; H. Conzelmann). 

dovxa(1391, 독사) 광채, 영광, 영화, 명성.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독사(Homer이래)는 도케오(dokevw, 1380)에서 유래했으며, 기본 의미는 '생각하는 것, 의견'이다. 이것은 두 가지 형태를 취하는데, '나는 생각한다'라는 도케오의 의미에서 '내가 가지는 의견'을, '나는 ~라고 간주한다'라는 도케오의 의미에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가지는 의견'을 의미한다.

(a)  이 단어는

① '기대, 의견, 견해, 단순한 추측', 철학적 주의.

② 좋은 평판, '명성, 칭찬'.

③ '빛, 광채'를 의미한다.

(b)  이 단어는 요세푸스와 필로의 작품에서,

① '견해'나 '주의',

② '명예'나 '영광',

③ '장려' 그리고

④ '하나님의 광휘'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독사는 70인역본에서 400회 이상 나오며, 25개의 히브리어를 번역하며, 주로 카보드(영광)를 번역한다.

독사는 70인역본에서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카보드와 동일한 의미를 나타낸다. 독사는 '견해, 의견'(전 10:1; 집회서 8:14; 마카베오사서 5:17), '장려, 권능, 세상적 장엄'(사 17:4; 사 35:2; 학 2:3),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사 24:7이하; 사 29:3; 사 42:8),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사 2:10, 사 2:19, 사 2:21; 출 33:22; 시 102:15) 등을 의미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독사는 신약성경에서 167회 나오며, 한글개역 성경은 한번 '광채'로 번역하고, 모두 '영광'으로 번역했다.

(a)  독사는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나타낸다. 신약성경에서 독사의 용법은 일반 헬라어 용법보다 70인역본을 따른다. 이 단어는 '평판'과 '능력'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표현한다. 따라서 이 용어는 헬라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성서적 용어가 되었다.

신약성경에서 70인역본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 영예', '하나님의 장엄',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가견적 광채는 고전적인 것이 아니며, 단지 문맥에서 차이를 식별해야 한다. 그렇지만 항상 표현되는 것은, 비록 신현현의 가시적 요소를 여러 가지로 강조할지라도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다. 예를 들면,

행 7:2에서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본 "하나님의 영광",

눅 2:9의 크리스마스 기사에서 "주의 영광",

눅 9:31이하; 벧후 1:17의 변형에 대한 기사에서 "지극히 큰 영광",

행 22:11의 다메섹 도상의 경험 "그 빛의 광채",

계 15:8; 계 21:23의 하늘의 성전과 하늘의 도성에서 "하나님의 영광" 등이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이미 실재하는 것을 실제적 인정과 감사로 고백하거나(행 12:23; 롬 4:20; 계 16:9) 찬양하는 것(눅 2:14; 눅 19:38; 롬 11:36; 롬 16:27; 엡 3:21; 빌 4:20; 딤전 1:17; 계 4:9; 계 7:22 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송영은 에스틴(ejstivn)을 전제한다(갈 1:5; 벧전 4:11).

요한의 독특성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키는 용법과 인간이나 하나님이 부여해 주는 명예나 찬양에 대한 용법을 거의 순수하게 병행시킨다는 사실이다(요 12:41; 요 12:43).

(b)  독사는 예수님의 영광을 표현한다. 신약성경에서 독사를 하나님과 관련시킨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관련시킴으로써, 결정적인 단계를 취한다.

이 관계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표현되며,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의 전동력론(whole dynamism)은 독사의 용법에 반영되어 있다.

롬 6:4에서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영광에 의해 다시 살아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딤전 3:16에서는 영광 속으로 올리워진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행 7:55에서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의 오른 편에 계신 그를 보았다.

베드로전서에서 그의 "고난 후에 받으실 영광"(벧전 1:11)과 그에게 "영광을 주신 하나님"(벧전 1:21)에 대해 말한다.

히 13:21에 의하면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지는 것처럼 그에게 돌려진다. 그는 영광의 주님이시다(고전 2:8; 약 2:1)

종말론적인 소망(참조: 사 40:5)은 우리의 위대하신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나타남이다(딛 2:13; 벧전 4:13; 벧전 5:1; 막 13:26등). 이 언급들의 대부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며, 독사가 성육신한 예수님에 적용된 것은 매우 드물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이 단어는 재림(parousia)과 관계되어 있다(막 8:38; 막 10:37; 막 13:26과 병행구, 마 19:28; 마 25:31).

누가복음에서 독사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변모 기사에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탄생에 독사의 계시(눅 2:9)는 천사들의 출현과 같이 하늘나라에서 그의 오심을 지적한다. 요 17:5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 전 "하나님과 함께 가졌던 독사"를 언급한다.

요한복음에서, 오직 믿음으로 또한 성육신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다(요 1:14; 요 2:11; 요 11:40). 그리스도의 이 독사는 본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요 7:39; 참조: 요 12:23; 요 13:13; 요 16:14; 요 17:1, 5의 기도). 영광으로 들어간 것은 십자가에서이다(요 13:31). 여기에서 하나님의 독사가 고백되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 신자들이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은 이 수난의 빛에서이다.

(c)  독사는 신자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강조점은 하나님의 독사를 보는 것에 있다(참조: 레 9:6; 사 6:1; 사 35:2). 랍비들에게 있어서도 영원한 행복은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강조점은 참여에로 옮겨진다.

빌 3:21에서 부활 때에 몸은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영광의 몸으로 변모된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화롭게 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 영광에 참예할 것이다(골 3:4).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을 것이다(참조: 롬 8:17). 그리스도는 영광의 소망이다(골 1:27).

독사에의 참여는 그리스도에의 참여로 말미암는다. 영원한 영광이 우리의 부르심의 목적이다(벧전 5:4; 고전 5:10; 살전 2:12; 살후 2:14; 고후 4:17; 딤후 2:10). 여기에서부터 그 영광을 누리는 것이 신자의 목적의 하나이다(롬 5:2). 이 죄많은 시대에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한다(롬 8:18; 롬 8:21). 욕된 것으로 심겨진 것이 영광스런 것으로 다시 산다(고전 15:43). 그렇지만 미래의 영광은 그 근거를 하나님의 목적과 행동에 두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이미 영화롭게 되었다고 말해질 수 있다(참조: 롬 8:29 - 롬 8:30; 고전 2:7). 성령은 영광을 가져오는 새로운 것의 보증이다(참조: 엡 3:16; 벧전 4:14).

이것은 특히 고후 3:7이하에서 분명해진다. 여기에서 모세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새롭고 더 큰 영광과 대조시키며,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신자들이 어떻게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되는가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움직임은 현재의 영광에서부터 종말론적인 완전한 영광에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의 사역에 의해 실행된다. 왜냐하면 복음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고전 4:6).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17장에는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것이며(요 17:24), 그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되며(요 17:10), 그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을 그들에게 주신다(요 17:22)고 언급되어 있다.

(d)  독사는 천사들의 영광을 표현한다.

겔 9:3 등에서 그룹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고 유대교에서처럼 천사가 영광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히 9:5은 영광의 그룹에 대해 언급한다: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계 18:1은 천사의 영광에 대해 언급한다: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유다서와 베드로후서에서 천사들을 '독사이'라고 부른다. 유 1:8에서는 "영광", 벧후 2:10에서는 '영광있는 자들'로 번역했다.

(e)  독사는 인간 또는 세상 권세에 대하여 사용되었으며, '화려, 장대, 탁월' 등을 나타낸다. "천하 만국과 그 영광", 즉 그것들의 자원, 부, 그들 도성들의 장대함과 위대함, 그것들의 비옥한 땅, 그것들의 많은 인구(마 4:8; 눅 4:6), "땅의 왕들의 영광"(계 21:24), "만국의 영광"(계 21:26), 왕의 영광, 찬란한 의복 등(마 6:29; 눅 12:27), "육체의 영광"(벧전 1:24), "직분의 영광"(고후 3:8 - 고후 3:11), "여자는 남자의 영광"(고전 11:7), "땅에 속한 자의 영광"(고전 15:40), "해, 달, 별의 영광"(고전 15:41)을 나타낸다.

(참조: Walter Bauer; J.H.Thayer; S.Aalen; G.Kitt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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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vsi"(5449, 퓌시스) 자연 nature, 조건, 상태 condition, 종류 kind.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퓌시스(Homer 이래)는 퓌오(fuvw, 5453: 낳다, 생기다, 산출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어근 퓌(fu-)는 '존재' being, '현존' presence을 의미한다.

(a)  퓌시스는 '근원, 시작, 기원, 혈통, 가계'(Hdt.), 성인이나 어린이의 '혈통'(Aristot.), '원소들로부터 합성된 근본 물질'(Aristotle)을 의미한다.

(b)  퓌시스는 존재나 현존의 근본적 개념으로부터, '자연적 조건, 특성, 상태'(예: 공기, 피, 어떤 땅의 물리적인 특징들, Hdt. 2, 7); '외적 형태'나 모습(Hdt 8:38); '성질'이나 '성격'을 의미하게 되었다. 퓌시스가 양성 sexes(Diod. Plato, Leg.) 그리고 '성기'나 '성적 특성'(Diod. Sic., Hippocrates), '(인간의) 본성'(human)nature(Aristot.), 또는 신들(gods)의 존재의 불멸적-그리고 소멸적인 본성, 또한 개인의 체격, 또는 국가의 제도나 정체를 의미한다.(Isoc.)

(c)  더 나아가 퓌시스는 '피조물', 즉 '자연의 세계', 예를 들면, 바다에 사는 생물이나(Soph., Antigone 345), 자연 속에 존재하는 개개의 유(genera), 종(species)(Plato, Rep. 429d)을 나타낸다.

(d)  퓌시스는 '생성시키는 유효한 힘', 즉 식물을 출현시킨다거나 머리카락이 자라나게 하는 '마력'(Hippocrates)을 의미한다.

(e)  퓌시스는 또한 자연의 규칙적인 질서를 의미한다. 인간의 삶은, 자연과 법이라는 한 쌍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Dem., 25, 15). 이 질서는 생명의 타고난 본래의 목적을 결정한다(Plut.). 이처럼 자연, 운명, 필연성은 사람의 존재를 지배한다(Philodemus).

(f)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Stoics) 간에는 퓌시스가 우주의 한 신(a god)이 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퓌시스는 70인역본에서 12회 나오며, 히브리어 상당어 없이 사용되었다. 70인역본에서

(a)  퓌시스는 '자질, 성품'(마카베오사서 13:27), 자기의 자녀를 사랑하는 힘(마카베오사서 16:3), (물질적 물체와 관련하여) 불을 끄는 물의 속성(지혜서 19:20) 등과 같은 어떤 '특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b)  마카베오사서 5:25, 26에서 율법이 우리의 본성과 일치한다는데 대해 말하고 있다.

(c)  마카베오사서 15:25에서 퓌시스는 '자연의 규칙적인 질서', 마카베오삼서 3:29에서 '피조물', 즉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세계, 마카베오사서 1:20에서 '인간의 속성'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그러나 지혜서 7:20에서 퓌시스는 '살아있는 생물들의 종류'를 나타내었다. 자연은 또한 좋은 것들을 주는 자로서 묘사되었다. "진실로 순결한 즐거움들을 즐기지 않는 것은 어리석다. 그리고 자연의 혜택을 거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마카베오사서 5:8).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퓌시스는 신약성경에서 14회 나오며, 다으과 같이 사용되었다.

(a)  ① 갈 2: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여기에서 퓌세이 이우다이오이("본래 유대인이요") 문구에서 이 단어는 '혈통'이나 '계보, 태생'을 의미한다.

② 롬 2:27도 이와 일치한다: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여기에서 "본래 무할례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몸에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할례를 받지 못했던 이유는 혈통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바울은 그러한 사람이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고도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뜻을(본래?) 행한다고 말한다.

③ 롬 11: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카타 퓌신(본래 by nature, 자연적인 방법으로 in the natural way) 참 감람나무에 속한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다면 돌감람 나뭇가지(이방인인 그리스도인들) 역시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퓌시스의 이 용법이 이와 동일한 비유인 롬 11:24 에 한번 더 나타난다: 카타 퓌신(본래 by nature) 돌감람 나뭇가지가 그 돌감람나무에서 잘려, 파라 퓌신("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 나무에 접붙여졌다는 내용에 나온다. 바울의 논술은 소전제로부터 대전제를 향해 나아간다: 본래부터 참 감람나무에 속한 감람 나뭇가지들이 (다시) 그 원 참 감람 나무에 되접붙여질 가능성이 더 많지 않겠는가(롬 11:24). 바울은 여기에서 유대인과 비(非)유대인을 구별하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는 필로와 요세푸스의 용법과 같이 헬라 언어의 용법을 따르고 있다. 본질상 죄인들이며 제 1계명을 어긴 자들인 이방인들은 혈통적으로 진노의 자녀들(엡 2:3; 참조: 지혜서 13:1)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살리신 자들의 생활 속에서 끝이 난다(참조: 엡 2:5-10).

(b)  퓌시스는 '자연의 규칙적 질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롬 1:26에서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자들을 내버려 두셨으므로 그들은 남녀 간의 순리적인(퓌시켄) 성관계를 역리적으로(파라 퓌신) 바꾸었다("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러나 토라를 가지지는 못했으나 순리적 본성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율법이 퓌세이(본래 by nature) 요구하는 바를 이행하는 이방인들도 있다. 이는, 그들이 자연의 순리로부터 율법을 읽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생활과 행동이 나타내 보여주듯이, 자연의 순리가 이방인들의 내부에서 순리 그 자체를 실현시키는 힘이 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들의 행동은 바로 도덕의 법이 그들의 삶 속에서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이행하는 사람으로서의 이방인들은 자기 자신이 그들 자신에게 율법이 되며(롬 2:27), 그들 자신은 본래 자연적 순리의 보호 아래 지키게 되는 것이다.

롬 2:14-16에서도 '본성'에 관해 언급한다: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고전 11:14에서 긴 머리를 가지는 것이 남자에게는 욕이 되나, 여자에게는 영광이 된다는 사실을 본성이 가르친다.

(c)  벧후 1:4에서 신자를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참여자로 언급하고 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참조: 벧후 1:3; 벧후 1:8)된 결과이며 "택하심"(참조: 벧후 1:10)의 결과이다. 이 사상이 분명히 신성과 유사하게 변화한다는 사상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참여의 결과들이 실제적인 인간의 특성들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참으로 인간에게 한 가지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능력이다. 여기서의 가르침은 새로운 피조물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이나, 또는 중생에 관한 요한의 가르침과 일맥 상통한다. 요 3:3; 요 3:5의 중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의 성품에의 참여 및 생활 속에서 신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은,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참조: 벧후 1:11) 위한 선행 조건이다.

(d)  약 3:7에서 퓌시스는 2회 사용되었으며, 둘 다 "종류" kind라는 정확한 헬라어 의미를 나타낸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여기의 사상도 다시 자연의 규칙적 질서라는 개념과 일치한다. 이 구절의 요지는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8)는 사실을 대조하여 강조하는 데에 있다. (참조: G. Harder; H. Ko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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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jpivgnwsi"(1922, 에피그노시스) 지식 knowledge, 인식 recognition....벧후1:2..하나님과 우리주예수를 앎으로...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에피그노시스(Polyb., Plut. 등)는 '명확한 지식, 인식'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에피그노시스는 70인역본에서 8회 나오며, 오직 히브리어 다아트(1847: 지식)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지식'(왕상 7:14; 호 4:6), 특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나타낸다(잠 2:5; 호 4:1; 호 6:6 등).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에피그노시스는 신약성경에서 20회 나온다.

(a)  에피그노시스는 일관되게 구약성경에서의 의미, 즉 하나님을 아는 자의 행위에 영향을 끼치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인식으로서의 '지식' knowledge의 의미로 사용된다. 지적인 이해와 존재에 관한 인식은 그룹을 이룬다.

그러므로 롬 1:28은 본래 하나님에 대한 이론상의 지식(이방인들 편에서의)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는 것)에 대한 정확한 지식의 보존이나 거절에 관한 것이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빌 1:6에서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의 중보 기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믿음은 '에피그노시스 판토스 아가두'(모든 선한 것을 아는 지식)에서 증명된다. '토 아가돈'(선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의미한다.

빌 1:9에서 에피그노시스는 중보 기도에 나타난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b)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것은 의로운 행위로서 입증되는 것과의 관계는 골 1:9; 골 1:10 이하에서도 나타난다: "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에피그노시스는 델레마 데우(하나님의 뜻)로 향하게 된다. 의로운 행위에 "열매를 맺는 것과 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에피그노시스)으로 나아가게 된다(참조: 빌 1:10; 엡 1:17; 빌 1:9).

골 3:10도 역시 도덕적 문제와 관계가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과 의로운 행위로 그를 따르라는 요구와의 결합은 구약의 전제에 의해 결정된다.

골 2:2(골로새의 이단에 대항하는 주장)의 논의는 골 1:9에서처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으로 향하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참조: 골 1:26 이하)에 관한 것이다: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엡 4:13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그 지식의 내용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c)  목회서신에서 '에피그노시스 테스 알레데이아'("진리를 아는데", 즉 진리에 대한 지식)(참조: Dibelius)라는 문구는 거의 항상 그리스도교 신앙으로의 개종을 설명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①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② 딤후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찌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③ 딤후 3:7,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④ 딛 1: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⑤ 히 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⑥ 벧후 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알레데이아(진리)는 여기에서 "옳은 가르침"을 나타내며, 에피그노시스는 "매우 뚜렷하게 지적인 교리상의 강조점"을 지닌다(Schmitz 405).

(d)  벧후 2:20에서 에피그노시스는 아마도 기자가 그들에 대하여 반대하여 편지를 쓴 적대자들에 대한 표어이다: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히 10:26에서처럼 벧후 1:2 이하에서도 에피그노시스는 거의 그리스도교 신앙으로의 부르심에 대한 전문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 지식은 또한 의로운 행위로 증명되어야 한다(벧후 1:18; 벧후 2:20 이하; 롬 1:28). (참조: W. Hacken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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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1847, 다아트) 지식, 이해 사11:2 지식과 여호와를 경이하는 신..

다아트(명여)는 야다([d'y: , 3045: 알다, 이해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참된 통찰력이란 의미를 지닌 '지식, 이해, 지혜'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93회 나오며, 지혜문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잠언 41회, 욥기 10회, 전도서 9회).

(a)  다아트는 '지식', 특히 인격적이며 경험적인 지식에 대해 사용된다. 다아트는 장막과 성전을 짓는데 필요한 것과 같은 기술상의 지식이나 재능이다(출 31:3, 출 35:31, 왕상 7:14).

(b)  다아트는 '지식, 지각'에 대해 사용된다(시 119:66). 무심코 저질러진 행위(신 4:42, 신 19:4, 수 20:3, 수 20:5, 벨리다아트)와 잘못된 견해는 모두 "지식이 없는 것"(로 다아트, 잠 19:2)이다.

(c)  다아트는 도덕적 인식에 대해 사용된다. 에덴 동산에 있는 나무 중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창 2:9, 창 2:17). 선악과로 지식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얻은 지식이 아니다.

(d)  다아트는 하나님이 소유한 지식에 대해 사용된다(욥 10:7, 시 139:6, 잠 3:20). 그에게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시 139:1-8). 그는 인간에게 그것을 가르치신다(시 94:10, 시 119:66, 잠 2:6).

(e)  다아트는 헛된(비 실용적) 지식에 대해 사용되었다: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어찌 동풍으로 그 품에 채우겠느냐"(욥 15:2).

(f)  다아트는 '통찰력, 총명, 이해, 지혜'에 대해 사용된다(욥 13:2, 욥 33:3, 욥 34:35, 잠 8:9, 잠 8:10, 잠 10:14, 잠 11:9, 잠 18:15, 잠 22:17, 잠 29:7, 사 32:4, 사 53:11, 렘 10:14, 렘 51:17, 욥 35:16, 욥 36:12, 욥 38:2, 욥 42:3, 잠 19:2, 잠 17:27, 사 44:19, 잠 24:4, 잠 1:4, 잠 5:2, 잠 19:25, 잠 22:20, 잠 12:1, 잠 19:27, 잠 23:12, 말 2:7, 잠 14:6, 전 1:16, 전 1:18, 전 2:21, 전 2:26, 전 7:12, 전 9:10, 잠 21:11, 잠 22:17, 사 33:6, 사 44:25, 사 47:10, 단 1:4). 

(g)  다아트는 최고 높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 사용되었다(여기에 f의 의미를 포함한다). 이 개념은 호세아서에서 특히 두드러진다(호 4:1, 호 4:6, 호 6:6, 잠 2:5).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참된 종교에 대한 묘사로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르앗 야훼[yir'at YHWH])과 병행되어 나온다(사 11:2, 사 58:2, 렘 22:16).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잠 1:7).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은 그를 고백하고 그에게 복종한다. 공평과 의리를 행하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렘 22:15-16). 다른 한편, 하나님을 모르는 것에는 욕설, 거짓말, 살인, 도적질, 간음 행위, 그리고 모든 유대를 끊어 버리는 일이 존재한다(호 4:1-2). 이런 것은 백성에게 파멸을 가져올 것이다(호 4:6, 사 5:13). 하나님은 자기를 아는 것을 제사보다 더 기뻐하신다(호 6:6). 메시야 시대에 대한 선지자들의 견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지구를 뒤덮는 때에 관한 것이다(합 2:14, 사 11:9).(참조: BDB;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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