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1.01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시91..주를아는자.나는주께구했다.둘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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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91편 [개역개정]대한성서공회  

---[개정개역]-------------

1.지존자(엘엘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엘샤디이)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2.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창조주 삼위일체 하나님..엘로힘)이라 하리니

3.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4.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5.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6.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7.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8.오직 너는 똑똑히 보리니 악인들의 보응을 네가 보리로다

9.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10.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11.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13.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15.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16.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

-----[새번역]----------------------

1.가장 높으신 분의 보호를 받으면서 사는 너는, 전능하신 분의 그늘 아래 머무를 것이다.

2.나는 주님께 "주님은 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 내가 의지할 하나님"이라고 말하겠다.

3.정녕, 주님은 너를, 사냥꾼의 덫에서 빼내 주시고, 죽을 병에서 너를 건져 주실 것이다.

4.주님이 그의 깃으로 너를 덮어 주시고 너도 그의 날개 아래로 피할 것이니, 주님의 진실하심이 너를 지켜 주는 방패와 갑옷이 될 것이다.

5.그러므로 너는 밤에 찾아드는 공포를 두려워하지 않고, 낮에 날아드는 화살을 무서워하지 않을 것이다.

6.흑암을 틈타서 퍼지는 염병과 백주에 덮치는 재앙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7.네 왼쪽에서 천 명이 넘어지고, 네 오른쪽에서 만 명이 쓰러져도, 네게는 재앙이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다.

8.오직 너는 너의 눈으로 자세히 볼 것이니, 악인들이 보응을 받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9.네가 주님을 네 피난처로 삼았으니, 가장 높으신 분을 너의 거처로 삼았으니,

10.네게는 어떤 불행도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네 장막에는, 어떤 재앙도 가까이하지 못할 것이다.

11.그가 천사들에게 명하셔서 네가 가는 길마다 너를 지키게 하실 것이니,

12.너의 발이 돌부리에 부딪히지 않게 천사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줄 것이다.

13.네가 사자와 독사를 짓밟고 다니며, 사자 새끼와 살모사를 짓이기고 다닐 것이다.

14.(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가 나를 간절히 사랑하니, 내가 그를 건져 주겠다. 그가 나의 이름을 알고 있으니, 내가 그를 높여 주겠다.

15.그가 나를 부를 때에, 내가 응답하고, 그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내가 그와 함께 있겠다. 내가 그를 건져 주고, 그를 영화롭게 하겠다.

16.내가 그를 만족할 만큼 오래 살도록 하고 내 구원을 그에게 보여 주겠다."


--------[NASB]---------

1.He who dwells in the shelter of the Most High Will abide in the shadow of the Almighty.

2.I will say to the LORD, "My refuge and my fortress, My God, in whom I trust!"

3.For it is He who delivers you from the snare of the trapper And from the deadly pestilence.

4.He will cover you with His pinions, And under His wings you may seek refuge; His faithfulness is a shield and bulwark.

5.You will not be afraid of the terror by night, Or of the arrow that flies by day; 

6.Of the pestilence that stalks in darkness, Or of the destruction that lays waste at noon.

7.A thousand may fall at your side And ten thousand at your right hand, But it shall not approach you.

8.You will only look on with your eyes And see the recompense of the wicked.

9.For you have made the LORD, my refuge, Even the Most High, your dwelling place.

10.No evil will befall you, Nor will any plague come near your tent.

11.For He will give His angels charge concerning you, To guard you in all your ways.

12.They will bear you up in their hands, That you do not strike your foot against a stone.

13.You will tread upon the lion and cobra, The young lion and the serpent you will trample down.

14."Because he has loved Me, therefore I will deliver him; I will set him securely on high, because he has known My name.

15."He will call upon Me, and I will answer him; I will be with him in trouble; I will rescue him and honor him. 

16."With a long life I will satisfy him And let him see My salv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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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처되신 하나님(시 91:1-8)

Ⅰ.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하는 삶을 사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보호 아래서 안전하다. 그러므로 항상 마음의 안정과 거룩한 평온을 유지할 수 있다는 위대한 진리가 일반적인 말로 주장되고 있다(1절).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자기 보호자로 선택한 사람은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서 발견하며, 또 요구할 수 있다.

사람이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것은” 참된 신자의 특성이다. 그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그를 휴식처로 삼고, 거기서 쉰다. 그는 내적인 교통을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자기 마음의 임무로 삼아 하나님과 더불어 있는 것을 좋아하며, 하나님과 대화한다.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자의 특권이며 위로다. 하나님은 그들을 숨기시고, 그들과 그들을 방해하는 자(그것이 폭풍이거나 햇빛이거나 간에)의 중간에 서신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서 집을 가진다. 하나님은 영원히 그들의 피난처와 안식처가 될 것이다.

Ⅱ. 시인은 이것을 즐거이 그 자신에게 적용한다(2절). 다른 사람은 무엇이라고 하든, “나는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라고 하리라.” 이렇게 선택하고 믿는다. 다른 사람들은 우상을 그들의 피난처로 삼지만, 그는 진실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해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라고 한다. 다른 것은 그 어떤 것이나 거짓된 피난처이지만, 그는 실망시키지 아니할 피난처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나의 요새”요, “산성”이시기 때문이다. 우상 숭배자들은 그들의 신을 “마후심”, 곧 “크고 견고한 산성”이라고 부른다(단 11:39).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서 속는다. 여호와를 자기의 하나님으로, 자기의 요새로 삼는 사람들만이 안전하다. 그의 능력을 의심할 이유가 없으므로 당연히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는 말이 뒤따른다. 만일 여호와가 우리의 하나님이요, 우리의 피난처요, 우리의 요새가 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바랄 수 있다. 그는 변덕스럽지 않으시며, 거짓되지도 아니하시고, 약하지도 죽지도 아니하신다. 그는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그를 믿어서 실망될 위험이 없다. “우리는 우리가 신뢰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안다.”

Ⅲ. 그는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행하게 하기 위해 그들을 크게 고무한다. 그것은 자기가 위로를 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어쩌면 자기 경험 안에는 잘못된 생각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떤 속임수도 없으며, 또 있을 수도 없는 진실한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해 다른 사람을 크게 고무한다. “확실히 저가 너를 건지실 것임이로다.” 하나님을 자기들의 피난처로 삼아서 위로를 얻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원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그 약속이 있다.

1. 신자들은 그들이 현재 처해 있으며, 또한 그들에게 치명적인 긴급한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것이다(3절).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그것은 보이지 않게 놓여서 부주의한 먹이를 갑자기 잡는다― “극한 염병에서”―그것은 불의의 사람에게 엄습한다. 거기에는 방호물이 없다. 이 약속은 다음 것을 보호한다.

(1) 육체의 생명이다. 그것은 때때로 심하고, 대단히 가까이에 있는 위험으로부터의 구출에서 실현된다.

(2) 영적 생명이다. 이것은 새 사냥꾼의 올무와 같은 사단의 유혹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보호를 받는다. 또 “극한 염병”인 죄의 감염으로부터 보호받는다. 영혼을 영광스럽게 하려고 은혜를 주신 하나님은 그 영혼의 모든 영광을 방위하실 것이다.

2.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보호자가 되실 것이다(4절). “저가 너를 덮으실 것이다.” 그리고 “은밀히 감추실 것이다”(31:20). 그렇게 너를 안전히 지키신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보호하심에 다음과 같이 하신다.

(1) 가장 큰 포근함과 애정으로 보호하신다. 이는 다음 구절에서 암시된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라.” “그 날개 아래 병아리를 모으는 암탉”은 이를 암시한다(마 23:37). 암탉은 본능적으로 병아리를 보호하는데, 병아리들이 위험할 때 자기의 보호 아래로 부른다. 병아리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뿐 아니라, 소중히 여겨 따뜻하게 감싼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 돌보심을, 이에 비교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들은 병아리와 같이 도움 없이 쉽게 먹이가 되지만,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과 섭리의 그늘 아래 위탁되어야 한다. 이것은 참된 신앙으로 개종한 사람들에 관해 넌지시 말한 것이다(룻 2:12).

(2) 가장 큰 능력과 효력으로 보호하신다. 날개와 깃털은 가장 부드럽고 크게 펼쳐지기는 하지만, 약하고 뚫어지기 쉽다. 그러므로 다음 말씀이 추가된다. “그의 진실하심은 방패와 손방패가 되시느니라.” 이는 강한 방어물이다. 하나님은 암탉이 병아리를 지키는 것같이 그의 백성 지키기를 원하시고, 갑옷 입은 군인과 같이 능력이 있으시다.

3. 하나님은 그들을 악으로부터 보호할 뿐만 아니라, 악에 대한 공포로부터도 보호하신다(5-6절).

(1) 여기에서는 큰 위험이 가정되어 있다. 그에 대한 언급은 우리를 두려워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밤낮으로 우리는 위기에 노출되어 있다. 마음이 약해지기 쉬운 사람은 어느 시기에나 자기들이 안전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사실(私室)로, 우리의 잠자리로 물러나 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를 안전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밤에는 도둑과 강도와 바람으로 인한 공포가 있는 외에 공상과 상상으로 인한 공포가 있다. 그것은 때때로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 우리는 “밤의 공포”에 대해 읽는다(아 3:8). 또한 애굽인의 장자와 앗수르군을 죽인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이 있다. 우리가 우리의 몸으로 그 병균을 옮기는 한, 자물쇠도 빗장도 병을 막을 수는 없다. 확실히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는 낮에는 그렇게 크게 위험하지는 않다. 그러나 “낮에도” 또한 흐르는 “살”이 있는데, 그것은 보이지 않게 날아다닌다. 우리가 깨어 있고 주위에 모든 친구들이 있는 “백주에도 황폐케 하는 파멸”이 있다. 이렇듯 낮에라도 우리는 안전할 수 없고, 친구들이 우리를 안전하게 할 수도 없다. 다윗이 백성을 계수한 때문에 징벌하기 위해 염병이 보내졌는데, 그 염병이 황폐케 한 때는 낮이었다. 때때로 어떤 사람은 이 시편은 그때 씌어졌다고 생각한다.

(2) 그러나 여기에는, 위험한 가운데도 신자들에게는 위대한 안전이 약속되어 있다. “너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은 그의 은혜로 가장 큰 위험 중에서 동요하는 의심스러운 공포로부터(그 공포는 고통을 가져온다) 너를 지키실 것이다. 지혜는 너를 우발적인 두려움에서 지킬 것이며, 믿음은 너를 과도한 두려움에서 지킬 것이다. 너는, 화살이 너를 맞출 수는 있지만 너를 상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화살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육체의 생명을 가져간다고 할지라도 영적 생명의 침해로부터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그것은 영을 완전하게 함이 될 것이다.” 신자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화살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그 끝은 빗나가며, 그 독은 제거된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것은 또한 지명하신 곳을 맞추며, 다른 곳은 맞추지 아니한다. 모든 탄알은 명령을 받는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뜻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그대로 된다.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4. 그들은 총괄적인 재앙 속에서도 특별한 방법으로 보호를 받는다(7절). 죽음이 승리하고 다닐 때, 질병이 분노해 병으로 천만 사람이 엎드러질 때, 또는 전쟁에서 칼날로 엎드러질 때, “네 곁에서, 네 우편에서” 엎드러질 그때에라도, 그들의 엎드러지는 모습이 너를 두려워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할지라도, 만일 그들이 염병으로 엎드러진다면 그 엎드러짐이 네게 너무도 가까워 네가 감염될 수 있을지라도, 죽음은 “네게 가까이 오지 못하며”, “죽음의 공포가 네게 가까이 오지 못한다.” 보편적으로 타락한 때 순결을 지키는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황폐시키는 경우에도 그들의 안전을 하나님께 위탁할 수 있다. 대중이 우리 주변에서 죽을 때, 그로 인해 우리도 죽음을 준비하도록 일깨워질 수밖에 없는 때에라도, 우리는 “놀라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죽기를 무서워해” 일생을 종노릇하는 것처럼, 죽음의 공포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 된다(히 2:15). 피 뿌림으로 1천 사람이 엎드러질 때에도 이스라엘의 장자는 안전하게 했다.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루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경고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만족하게 보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준 약속이다(8절).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이는 아마도 염병으로 말미암은 애굽 장자들의 멸망에 대한 언급일 것이다. 그것은 압박하는 자들에 대한 벌이자 압박 받는 자들의 방면(放免)이었다. 이때 이스라엘은 그들이 상하지도 아니하고 손상되지도 아니함을 보았다. 죄인에 대한 저주가 심화될 때에 죄인들은 직접 의인에 대한 보상을 볼 것이다(눅 13:28). 그와 같이 성도들이 그들의 눈으로 악한 자의 멸망을 보는 것은 성도들의 구원을 더욱 귀중하게 하는 것이 된다(59:10; 사 66:24).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복(시 91:9-16)

여기서는 앞의 약속들과 같은 취지를 가진 약속들이 계속된다. 이 약속들은 특별히 크고 귀중하다.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확실하다.

Ⅰ. 시인은 그 자신의 경험으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보호를 보증한다. 그리고 그가 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우리가 그것을 의존할 수 있다. 다음을 관찰하자.

1. 이 약속들로부터 유익과 위로를 받을 사람들의 특성. 그 내용은 1절과 거의 같다. 그들은 “지존자”를 “거처”로 삼는 자들이다(9절). 그들은 계속 하나님과 같이 있으며, 그 안에서 안식하는 사람들, 그의 이름을 성전과 강한 망루로 삼는 사람들이며, 사랑 안에,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그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안에 거주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우리의 거처로서 그 안에서 우리의 삶을 살며, 그와 더불어 대화하고, 그를 기뻐하며, 그에게 의존하는 것도 우리의 의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안에 거주하는 것이 우리의 특권이 된다. 우리는 법의 억류나 양심의 부르짖음, 장애나 간섭함 없이 우리 거처에 받아들여지며 그에게도 환영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안에서 완전한 평강으로 지켜질 것이다(사 26:3).

우리로 여호와를 우리의 거처로 삼도록 고무하기 위해, 시인은 그가 그렇게 행함으로써 얻은 위로를 암시한다. “네가 너의 거처로 삼은 그분은 나의 피난처이시다. 나는 그가 견고하고 믿음직스러움을 발견했다. 그의 안에는 너와 나 두 사람 모두를 위한 충분한 방이 있으며, 충분한 은신처가 있다.”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아서”, 사람들이 서로 밀칠 필요가 없다.

그 지존자를 거처로 삼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확실한 약속이 있다.

(1) 그들에게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나 그들을 상하지 아니한다.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근심이나 고통이 네게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 안에는 진정한 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오며, 너를 성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를 상하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고, 너를 유익하게 하려고 오는 것이다. “현재는” 그것이 “기쁘지 않고 슬퍼 보이지만”, 결국은 네가 좋게 되어 나옴으로 너 자신이 “화가 네게 미치지” 않았다고 고백할 것이다. 그것은 그 화가 단순한 화가 아니고 그 안에 선이 혼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그것으로 말미암아 선이 생산된다. 아니, 너의 인격뿐만 아니라 너의 거처까지도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을 것이다. “재앙이 네게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너를 해하거나 또는 어떤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 “선인에게는 어떠한 화도 미치지 못한다”(Nihil accidere bono viro mali potest, 철학자 세네카).

(2) 빛의 천사가 그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11-12절). 이것은 귀중한 약속이며, 성도들의 위로요, 명예를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시험한 마귀가 인용하여 남용했다고 해서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마 4:6).

① 성도들에 관해 천사들에게 주어진 명령을 보자. 천사들의 주이신 하나님은 그들을 존재하게 하고, 그들에게 법을 주셨다. 그들의 소유자시며, 자기에게 봉사하게 하기 위해 그들을 지으신 하나님은, 교회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모든 각각의 신자들을 위해, “그 사자(천사)들을 명하실 것이다.” 그 천사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킨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그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이다. 이것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돌보심을 표시한다. 그 명령은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되어 있다. 여기에 그 약속의 제한이 있다. 그들은 “너의 길에 너를 지킬 것이다.” 그것은 “네가 너의 본분의 길을 지키는 한”이다. 그 길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보호 밖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마귀는 이 말씀이 크게 자기를 반대하는 말씀임을 알기 때문에 유혹을 강요하기 위해 이 말씀을 인용할 때 이 부분을 빠뜨렸다. 그러나 그 약속의 범위를 보라.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는” 것이다. 분명한 위험이 없는 곳에서까지도 우리는 그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가장 위급한 위험이 있는 곳에서도 그들은 우리의 길을 지킬 것이다. 성도들이 가는 곳은 어디나 천사들이 그들과 함께 있도록 명령을 받는다. 종들이 어린아이들과 함께 있도록 명령을 받는 것과 같다.

② 이 명령에 따라서 천사들이 성도들에 관해 행하는 돌봄을 보자.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큰 능력과 큰 사랑을 표시한다. 그들은 위험에서 성도들을 돌볼 수 있다. 그들은 간호사들이 자기 품속에서 어린아이를 돌보는 것과 같이 모든 친절과 사랑으로 성도들을 붙든다. 이것은 우리의 무력함과 그들은 우리에게 도움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들은 그들의 섬김에 겸손해한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도록”, 죄와 고난에 걸려 성도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성도들의 발을 지킨다.

③ 그들에게 정복될 어두움의 권세(13절)가 있다.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리라.” 악마는 우는 사자, 옛 뱀, 붉은 용으로 불린다. 그러므로 사도는 이 약속을 언급한 것같이 보인다(롬 16: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그리스도는 사단의 머리를 깨뜨리고, 영적 원수들을 결딴내셨다(골 2:15). 그를 통해 우리는 정복자보다도 더 나은 자가 된다. 왜냐하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불렀듯이, 그리스도가 정복당한 원수들의 목에 우리의 발을 올려놓으라고 초청하시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고 특별히 뱀을 집을 수 있도록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모든 기적적인 능력 안에서 충분히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막 16:18). 또 이것은 굶주린 짐승으로부터 우리가 보존되는 하나님의 섭리에 적용될 수도 있다(“들짐승이 너와 화친할 것임이라.” 욥 5:23).

Ⅱ. 그는 하나님께서 친히 성도들을 향해 위로의 말씀을 하시게 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저장하신 자비를 선포하시게 한다(14-16절). 어떤 사람들은, 성도들과 관련해 천사들에게 주어진 명령으로서 시인이 천사들에게 이것을 말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을 보호하라. 그들은 나를 사랑하며, 나는 그들에게 애정에 찬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 이 약속들이 해당된다. 그들은 세 가지 성격으로써 묘사된다.

(1)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본성을 충분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 자신을 알리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이름을 친숙하게 알지 않으면 안 된다.

(2)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가 사랑할 유일하고 적합한 대상으로 알아, 하나님에게 그의 사랑을 두며, 그의 사랑을 어느 다른 경쟁자에게로 결단코 옮기지 아니할 결심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그들의 사랑을 고정시킨다.

(3) 그들은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들이다. 기도로써 하나님과 계속 교통을 유지하며, 어려운 경우에는 직접 하나님께 문의한다.

2.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하신 약속들을 보자.

(1) 하나님은 머지 않아 그들을 고난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내가 저를 건지리라”(14-15절). 이는 이중의 구원을 표시한다. 삶과 죽음에서의 구원, 즉 고난 가운데서 구원하는 것과 고난에 들지 않게 구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능력과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정도를 조화시킨다면, 즉 하나님이 고난 중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키신다면, 그리고 고난으로 인한 우리의 죽음을 면제하신다면, 그때 이 약속은 성취된다(34:19; 딤후 3:11, 4:18을 보라).

(2) 그러는 동안에 그는 “환난 때” 성도들과 “함께”하실 것이다(15절). 하나님이 그들의 고난을 즉시 끝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는 은혜를 받는다. 하나님은 그들의 슬픔에 유의하시고, 그들의 영혼이 역경 중에 있음을 아신다. 그의 말씀과 영으로 그들을 은혜로 방문하실 것이고, 그들과 대화하실 것이며, 그들이 하는 일에 참여할 것이고, 그들을 지지하고 위로하실 것이며,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신성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고난 중에서도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 현존의 증거를 확실하게 한다.

(3)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다.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나는 기도의 영을 그에게 부을 것이다. 그리고는 약속들에 따라서 내가 응답하리라 (85:8). 때에 적합한 구원을 가지고 오는 섭리에 따른 응답, 그들의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하는 은혜에 따른 응답(138:3)을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충만한 은혜로 하나님은 바울에게 응답하셨다(고후 12:9)

(4) 하나님은 그들을 높이시고, 고귀하게 하실 것이다. 환난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폭풍우가 없는 지역으로, 파도 위에 솟은 바위로, “내가 저를 높이리라”(사 33:16).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한 경멸과 무관심을 가지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내려다보며, 또한 거룩한 야망과 관심을 가지고 저 세상에 있는 것들을 올려다본다. 그러면 그들은 높여질 것이다. “내가 그를 영화롭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고 교통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영화를 두시는 그런 사람들은, 그리고 그들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쓰려고 의도하시는 그런 사람들은 참으로 영화롭다(요 12:26).

(5) 그들은 이 세상에서 충만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16절).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리라.”

① 그들은 충분히 오래 살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 보냄 받은 목적에 따른 일을 끝마치기까지, 그리고 하늘나라를 위한 준비가 갖추어지기까지 이 세상에서 삶을 계속할 것이다. 그것은 충분히 길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 또는 자기에 대해 하실 일이 없으신데, 누가 하루인들 더 살기를 원할 것인가?

② 그들은 그것을 충분히 길게 생각한다. 하나님은 그의 은혜로 그들을 이 세상에서 떠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원하도록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젊어서 죽을지도 모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이 차서 죽는다. 즉, “삶이 충족하다”(Satur dierum). 악하고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한다. 아니, 긴 생애로도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주시오, 주시오!” 하며 부르짖는다. 그러나 그의 보물과 마음이 저 세상에 있는 사람은 충족하다. 그는 항상 살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6) 그들은 저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가질 것이다. 이것이 행운의 면류관이다. “나의 구원을 보이리라. 그에게 메시야(어떤 사람이 말하듯)를 보이리라.” 착하고 늙은 시므온은 그때 오래 살아서 만족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나이다.” 구약의 성도들에게는 비록 멀리 있으나 그리스도의 날을 보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었다. 그 말씀은 더 좋은 나라, 하늘에 있는 조상들이 원하고 찾은 나라에 관해 더욱 언급한 것인 듯싶다. 하나님은 그에게 그가 축복 받은 상태(천국의 삶)가 되는 것을 보이실 것이다. 그 상태는 우리가 여기서 희미한 거울을 통해 보는 것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이 보게 되는, 최고의 행복한 상태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그로 하여금 그것을 기대하게 하실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모든 약속들이 근원적으로 그리스도를 지시한다고, 그리고 그의 부활과 승천에서 성취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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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탁했다]]..I asked to God. -  작자 미상 (미국 뉴욕의 신체장애자 회관에 적힌 시)

나는 신에게 나를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도록/나는 하나님께 기도했네.... 내 야망 모두 이룰 수 있는 강함을 구했더니....

하지만 신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도록./...나를 약하게 하셔서 겸손으로 사는 것을 배우게 하셨고

나는 신에게 건강을 부택했다. 더 큰 일을 할 수있도록./... 나를 통해 주께서 더 큰 일-위대한 일 이루시도록 건강 주시기를 구했더니

하지만 신은 내게 허약함을 주었다. 더 의미있는 일을 하도록./...육체의 연약함 가운데서도 더 의미있는 일을 하게 하셨고

나는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행복할 수 있도록./...행복 위해 부유케 하시기를 구했더니

하지만 난 가난을 선물받았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가난을 통해 지혜로 사는 자 되게 하셨고

나는 재능을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찬사 받는 자 되도록 재능을 달라 구했더니

하지만 난 열등감을 선물받았다. 신의 필요성을 느끼도록./...나의 부족함의 자각 통해 전능하신 주님 의지하며 살게 하셨고

나는 신에게 모든 것을 부탁했다. 삶을 누릴 수 있도록./...주께서 나를 통해 누리실 바 인생에 필요한 그 모든 것들을 구했더니

하지만 신은 내게 삶을 선물했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도록./... 그 모든 것을 참되게 누릴 수 있는 생명 자체를 내게 주셨다네.

나는 내가 부탁한 것을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내게 필요한 모든 걸 선물받았다./...구한 것 그대로 받은 것은 없으나 내 모든 참된 필요를 다 받았다네

나는 작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신은 내 무언의 기도를 다 들어 주셨다./..미약한 나로되, 내 모든 기도를 다 들어 주셨으니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나는 가장 축복받은 자이다./... 나는 모든 이들 중에서 가장 복된 자가 아니겠는가.

I asked God to make me stronger. So that I can do everything I want.

But God made me weak. Learn to be humble.

I set my health on God. So that you can do something bigger

But God gave me weakness. To do something more meaningful.

I asked to be rich. To be happy 

But I received poverty. To be a wise person

I asked for talent. So that people can be praised.

But I received a sense of inferiority. I feel the need of God.

I asked God everything. So that you can enjoy life

But God gave me life. So that you can enjoy everything

I did not receive anything I asked for I received everything I needed.

I am a small person God has listened to all my prayers. 

Of all people I am the most blessed.

=======[[무익한 종이라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의무>을 한 것뿐이라..눅17:10]]=====

약한 나로 강하게, 난 지극히 작은 자, 천부여 의지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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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7장 ]]

1.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3.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5.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7.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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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족케 함에 대하여(눅 17:1-10)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받는다.

Ⅰ. "실족케 함"은 "큰 죄"이다. 그리고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이것을 피하고 조심스럽게 주의해야 한다(1, 2절). 사람의 왜곡됨과 비꼬인 성미를 생각할 때 우리는 실족케 하는 것이 필연적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실족케 하는 일에서까지도 그의 선한 사업을 수행하시며, 악에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현명하신 계획과 목적을 기대할 수는 있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것을 적절하게 대비하는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실족케 하는 자에게는 큰 화가 있으리라"(12절). 그의 운명은 어두워질 것이다. 그의 운명은 중죄를 지어 바다에 던지워질 운명에 처한 죄인의 비참함보다 더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연자맷돌보다 더 무거운 죄책의 짐 아래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주는 다음과 같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1. 박해자에게, 그들은 그리스도의 "작은 자들 중"의 하나에게라도 말이나 행동으로라도 해를 끼치며, 그것 때문에 해받은 이들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에 낙심하고, 그 의무를 다함에 용기를 잃는다. 즉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를 떠나 표류할 수도 있는 위험에 처한다.

2. 유혹자에게. 그들은 그리스도의 진리와 그 의식을 타락시키고 그래서 "제자들의 마음을 괴롭게 한다." 그들이야말로, "실족케 함을 가져오는" 자들이다.

3. 말로만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달고 추잡한 생활을 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고, 마음을 슬프게 만드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통해 실족이 온다. 그것은 그들의 죄책과 벌을 조금도 감하거나 경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Ⅱ. "남이 자기에게 저지른 죄를 용서하는 것"은 하나의 "큰 의무"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그러한 죄를 짓지나 않을까를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한다(3절). 본문의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이 가장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으로 앞의 구절에서 언급한 자들을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확실히 교역자들은 교인들을 낙심하게 할 언행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그들은 주의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고 혹 교인들을 낙심시키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으로 늘 깊이 생각한 후에 말하고 행동해야만 한다.

둘째는 후에 나오는 자신에게 잘못을 범한 형제에게 같이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고 경고로 볼 수 있다. 즉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곧 어떤 해를 입혔거나 재산의 손해를 입혔거든 격노하여 말을 함부로 내뱉거나 거칠게 복수를 선언하지 말라. 이런 때는 특히 혹 실언을 하지나 않을까 하여 조심하라"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좀 더 상세히 고찰해 보자.

1. 사람이 너에게 잘못했을 때에는 그를 경계할 만한 처지라면 경계하라는 말씀이다. 분노는 억지로 참을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나타낼 것이다. 그에게 잘못된 점을 말해 주되 어떤 점에서 그가 잘못했으며 너에게 잘못한 일이 무엇임을 말해 줄 것이다. 아무도 네가 그를 오해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너는 할 수 있는 대로 이해하려고 힘 쓸 것이다), 네가 그를 오해했다거나 그가 고의로 한 짓이 아니고 단지 실수였다는 것을 깨닫고, 오히려 그를 오해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용서를 빌게 될지도 모른다(수 22:30, 31 참조).

2. 그가 잘못을 뉘우쳤을 때는 그를 용서할 것이며, 그와 완전히 화해하라는 말이다.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손상 받은 것을 잊어버리고, 다시는 생각하지 말며, 그것으로 너무 책망하지 말지어다. 

그가 뉘우치지 않더라도, 그에게 원한을 품지 말 것이며,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적어도 내가 회개하노라고도 말하지 않으면, 전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고 친숙하게 지내야만 된다고는 말할 수 없다. 

만일 그가 큰 죄를 범했으면 그가 속해 있는 그리스도교 사회에 대한 범죄자로서 엄숙하면서도 온순하게 훈계하고, 그가 자기의 죄를 회개하면 다시 우정으로 친교를 맺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용서라고 말했다(고후 2:7).

3. 사람이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면 그 때마다 몇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이다(4절). 사람이 너무도 조심성이 없거나 너무도 염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더라도 하루에 일곱 번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와서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더라도 그러한 죄를 다시 안 짓겠노라는 약속을 받고, 다시 "너는 용서하라." 잘못을 범하는 것이 인간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관용의 정신을 가져서 모든 사람을 가장 좋은 사람으로 만들기에 힘쓰며, 모든 사람을 안심하고 대하기에 힘쓰며, 사람들의 잘못을 가볍게 보며 사람들을 성나게 하지 말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용서하는 본을 보이기에 힘쓰도록 할 것이다.

Ⅲ. 우리 모두에게 요긴한 것은 믿음이 더 강해지는 것이다. 이 은혜가 자라면 다른 모든 은사도 더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훈을 굳게 믿을수록, 또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 안심하고 의지할수록 모든 일을 믿음으로 더욱 잘해나갈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1. 제자들이 그리스도께 말씀드린 것이 자기들의 믿음을 굳세게 해 줌을 시사한 것이다(5절). 제자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의 왕국의 국무총리라도 된 듯 했지만 자기들의 믿음이 약하고 부족함을 깨닫고, 그 믿음을 보다 좋게 해 주실 그리스도의 은혜의 필요성을 느끼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고 여쭈며, 믿음의 부족함을 완전케하여 줍시라고 간청했다. 곧 미음을 갈망함이 더 강하고, 믿음을 의지함이 더 견고하고 변치 않으며, 믿음의 헌신이 보다 온전하고 확고하며 믿음의 기쁨을 더 누릴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간청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가 간절히 원할 바는 우리의 믿음이 더해질 것이며 이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될 일이다. 어떤 사람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과실을 용서하는 의무를 강조하셨을 때에 제자들이 주님께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 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이런 어려운 의무를 감당할 수 없겠나이다" 하고 기도를 드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자비심을 믿으면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는 가장 큰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이 기도를 드린 것은 다른 경우, 곧 제자들이 이적을 행하는 중에 어려움을 당했을 때로써, 그 간구함을 들으시고 제자들의 믿음이 약함을 꾸짖으셨다고 생각한다(마 17:16 이하 참조). 주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을 고치기보다는 먼저 그들 자신이 고침을 받는 은혜를 위하여 기도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르짖기를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였다.

2.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참 믿음의 놀라운 능력을 가르쳐 주셨다(6절).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다면, 겨자씨처럼 아주 작은 믿음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좋았을 것이나 너희 믿음을 도저히 있다고 말할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 혹은 너희가 동물의 정신을 바짝 들게 만드는 겨자처럼 그렇게 다른 모든 은혜에 대해서도 예민하고 적극성을 띠어, 겨자씨와 같은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었다면" (겨자씨는 그래서 중풍병에 약으로 쓰인다) "너희는 지금 너희가 하고 있는 일 이상의 놀라운 일을 능히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너희가 전파하는 말씀을 위하여 하는 일이라면 못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설사 그것이 "나무를" 땅에서 뽑아 "바다에 옮기우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마 17:20 참조). "하나님과 함께라면 불가능한 일이 없으며" 또한 "그것을 믿는 자에게도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다."

Ⅳ. 그리스도의 사업에 있어서 무슨 일을 하든지 아주 겸손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총애를 받을 만하다든지 또는 주님께 빚을 지우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제자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많은 일을 했지만 그것으로써 주님을 자기들의 빚장이로 생각하지 않았다.

1.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종이다(사도들과 성직자들은 특별한 종임). 그러므로 주님의 존귀를 위해서는 우리의 최선을 다할 의무가 있다. 우리의 모든 정력과 시간을 주님을 위하여 써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종인 우리는 모든 시간이 맡겨 주신 의무를 감당하는 일로 채워져 있으며,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의 종류가 서로 다르므로 우리는 맡겨진 일을 끝을 내고, 다른 일을 맡겨 주시기를 기다릴 것이다. 들에서 밭을 갈거나 가축을 먹이던 종이 밤에 집에 오더라도 역시 할 일이 있다. 식탁에서 수종 들어야한다(7, 8절). 우리가 종교적 대화의 임무를 띠고 있을 때에 헌신을 하는 일은 면제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사업을 하고 있을 때에는 역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실 일을 기다리며 계속해서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3. 여기에서 우리의 주요한 관심사는 우리에게 관련된 의무를 이행하는 일이며, 그것을 우리 주님께 맡겨서 주님께서 언제 또한 어떻게 적당하다고 생각하실 때에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도록 할 것이다. 종은 주인이 "와 앉아서 먹으라"고 말할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 날에 할 일을 다 끝내면 그 시간이 바로 먹을 때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완수하는데 정신을 쓰자. 그리고 그 일을 잘하도록 하자. 그러면 적당한 시간이 되면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4. 우리보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섬김을 받으심이 마땅하다.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그 후에 너는 먹고 마시라." 그리스도인들은 의심해서 말하기를 자기들이 마땅히 드려야 할 그리스도의 사랑의 영광을 주님께 드릴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직도 그 즐거움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영광을 가지시도록 하고, 주님께 찬양을 돌릴 것이다. 그 다음에 사랑의 위로 중에 먹고 마신다. 이러는 중에 잔치가 벌어진다.

5. 그리스도의 종은 주님의 분부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 "띠를 띠고," 헝클어지고 거치장스러운 일을 떠나서 오직 자기의 할 일에만 계속하여 밀고 나가야 한다. 곧 마음의 띠를 띠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잔치를 준비할 때 곧 주님께서 잡수실 것을 예비할 때에는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띠를 띠어야 한다. 이것은 종이 할 일이며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강요하시지는 않는다. 주님은 섬기는 자로서 제자들과 함께 계셨다. 다른 주인들처럼 나라를 취하러 오시지 않았고,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고, 당신의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을 보여 주려고 오셨다.

6. 그리스도의 종들이 주님을 위하여 한 봉사를 주님의 사례를 받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주님께서 그 일로 인하여 신세를 지셨다고 생각하실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우리가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공을 세운 것이 못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는 것은 우리가 봉사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의 빚진 자되게 한 까닭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친히 빚진 자가 되시겠다고 언약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할 일이지 우리의 공로를 내세워서 청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7. 어떤 일을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든지, 혹 그것이 다른 사람들이 한 일보다 더 많다하더라도 우리가 의무를 이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주님께서 명하신 일을 다했다고 하더라도 여러 가지 일에 있어서 부족한 것뿐이며 의무 이상으로 한 것이 없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신 첫째 되는 큰 계명을 지키는 것뿐이다. 이 계명에 가장 중요한 것이 다 들어 있다. 

8. 그리스도의 가장 충성된 종은 (세상사람들이 볼 때) 가장 훌륭한 봉사를 하고 있을 때라도 (스스로 섬겨 일하시는 하나님의 눈에 비추어 볼 때 여전히)자기는 무익한 종이라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자신의 무익함 인정함을 벗어나서, 자화자찬함으로써 원수마귀가 빠진 그 함정에 스스로 빠지지 말지니...그 어떤 교회나 성도, 사역자들도 하나님의 절대적 관점에서 본다면 여전히 무익한 종인 것이다!!....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사랑이요 섬김을 받는 자 임에는 틀림없다)... 물론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을 묻어버리고 아주 흑암 속으로 빠져버리는 그런 무익한 종은 아니지만 ((한 번 곰곰히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께 대한 (최선을 다 할지라도) 자신의 봉사가 특별한 이익을 드리는 것이 결코 못됨을 생각할 때는 (단지) 무익한 종이라 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선함이 하나님 그분께 미칠 수는 없는 것이며, 또한 우리의 의로움도 하나님 그분께 도움이 될 수 없다(시 16:2; 욥 22:2; 35:7). 그러므로 우리의 봉사가 (하나님을) 빚진 자를 만들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엄밀히 보자면 우리의 봉사를)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봉사가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무엇하나도) 보탬을 드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유익한 일이라 함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없이도 즐거워하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없이는 즐거울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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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lo"(1401, 둘로스) 노예, 종 slav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둘로스는 데오(devw: 묶다)에서, 아니면 델로(delw: 올가미에 걸다, 생포하다)에서 유래했으며(참조: Vanicek p.322), '노예, 종'을 의미한다. 둘로스에는 자기 자신이 자율을 파기하고 다른 사람의 뜻에 자기의 뜻을 복종시킨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둘로스는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의 의지에 내맡긴 자로서, 자기 자신에 속해 있지 아니하고 어떤 다른 사람에 속해 있는 것이다. 대체로 노예의 삶은 집안일이나 공무에서 노동과 봉사가 강요되는 삶이었다.

헬라인들은 자유에 대한 의식이 강하다. 개인의 존엄이 자유로 되어 있다. 따라서 속박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고 있다. 국가에 봉사할 수 있지만,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것이다. 노예 상태는 경멸 받고 거부당한다. 이것은 왜 헬라인들이 정치적인 독립을 얻기 위해 그토록 격렬하게 싸웠는지를 설명해 준다.

플라톤에 의하면 자유라는 이상은 궤변가들의 제멋대로의 결정에 반작용하는 것이라고 규정되었다: 그는 자주 도시 국가의 유지를 보증하기 위해서 노모스(율법)를 제창하였다. 둘류에인 토이스 노모이스("법에 복종하다")라는 구절에서만 둘로스 어군은 호의적이고도 명예로운 의미로 나타난다. 법은 인류의 목적을 나타내므로 법에 예속한다는 것은 결코 인격을 손상시키는 일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노예 상태에 대해 마찬가지로 경멸하였다. 그에게 있어 노예는 국가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거나 국가에 참된 봉사를 하지 못한다.

스토아 학파는 봉사에 대해 광범위한 견해를 가진다. 스토아 학파의 현자는 공동체를 섬기는 모든 의미가 면제되었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이웃을 섬기는 자유로운 종이 되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에게 대해 자유하면서도 모든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으로 매여있다. 그렇지만 스토아 학파는 결코 자신을 둘로스 데우(하나님의 종)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는 둘로스의 정반대인 바실류스(왕) 및 데스포테스(노예의 주인)로서 세상을 살아간다. 이것은 현자의 특징이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의 속박의 형태가 무엇이든지 간에 노예들이다(참조: 에픽테투스, 플루타르크, 그리고 필로).

헬라 종교에서 신들과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제우스(Zeus)를 신과 인간의 아버지로 삼는 가족적 관계이다.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무릎 꿇는 것은 지하에 사는 신들 앞에서 무릎 꿇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종교적인 의식의 여하한 역할도 하지 못하며 여기에서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만 그렇게 한다. 예배자들은 둘로스라기 보다는 오히려 필로스(친구)이다. 따라서 신들을 섬기는 것이나 신들 앞에서의 삶을 둘레이아(douleiva, 1397: 노예 상태)로 묘사한다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신들에 대한 예배의 목적도 사실 모든 내적이고도 외적인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 이 둘로스 어군이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종교적 의미를 얻은 것은 근동의 종교들이 새로운 신봉자들을 얻고, 그래서 하나님 및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헬라인의 견해가 변화됨으로 인한 것이다. 유일하게 분명한 예외들은 유리피데스(Euripides)의 작품에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디오니소스(Dionysus)에게 복종gkf 필요성, 혹은 오레스테스(Orestes)가 신들의 노예가 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하는 것과 같은 특별한 경우들이다.

2. 70인역본의 용법. 

70인역본에서 둘로스 어군은 대부분 어근 아바드와 그 파생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이 관계를 통해서 둘로스는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a)  둘로스 어군은 노예와 노예 상태를 강조적으로 의미한다. 이 단어는 노예의 일인 섬김, 곧 윗 사람의 철저한 통제 아래에서 억압적이고 강제적이거나 혹은 적어도 예속적인 모습을 띤 섬김의 자세를 강조한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의 종살이(출13:3; 14:5; 레26:45 등)를 나타낸다. 야곱은 라반에 대한 둘로스의 상태를 수락한다(창 29:18).

노예법에는 태어날 때부터 유대인인 노예의 처우와 석방 문제가 규정되어 있다. 그 종의 주인만이 이 일에 대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고, 그에 속해 있는 자는 이를 거역할 수 없었다(출 21:1-11; 레 25:35 이하; 신 15:12 이하). 다른 한편 유대인이 아닌 가나안인 노예는(레 25:44 이하) 주인의 나머지 가재 도구와 같은 가치를 지녔고 또한 그렇게 대우를 받았다.

(b)  둘로스 어군은 왕에 대한 신하의 관계 및 제한적인 섬김을 의미한다. 이 어군은 세력에 의해서, 때때로 자발적으로 의존하고 섬기지만 항상 종속과 구속을 겪는 관계를 나타낸다. 왕은 항상 그의 신하들의 절대적 통치자이며, 그들은 그 아래서 노예와 같은 것이다. 사울의 신하들은 그의 종들이다(삼상18 :5). 요압은 다윗의 둘로스이며 (삼하14:9 -10), 전 백성은 왕의 종이다(왕상12:7). 흥미로운 점은 예속된 자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이 용어들을 사용하는데 반해, 통치자들은 이 어군으로 그 관계를 묘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c)  이 어군은 하나님에 대한 종속과 섬김의 관계를 의미한다. 이 어군이 이 관계에 대해 사용될 때, 발전의 정점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은 또한 헬라 및 헬레니즘 개념과 가장 날카롭게 대립된다. 70인역본에서 종은 개별적인 행동에서 뿐만 아니라 총체적인 위임 임무에서 하나님에 대한 봉사를 뜻하는 가장 일반적인 용어이다. 이 단어는 또한 바알이나 다른 신들에 대한 봉사에 대해서도 사용되었지만(삿 10:6, 3), 선민들에게 있어서 옳은 유일한 것은 오로지 여호와만을 섬기는 것이다(삿 10:16; 시 2:11 등).  이런 이유로 종들이 모세(수 14:7), 여호수아(삿 2:8), 아브라함(시 106:42), 다윗(시 89:3), 그리고 야곱(이스라엘을 대표함,사48:20)과 같은 유명한 인물들에게 사용될 때, 명예의 칭호로 사용되었다. 둘류에인(예속하는 것)의 반대는 불순종이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둘로스는 신약성경에서 124회 나오며, 그 중에 30회는 바울 서신에, 30회는 마태복음에, 그리고 26회는 누가복음에 나온다.

(a)  일반적인 용법.

①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군의 일반적 용법에 대해 단지 조건부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이 단어가 종교적 문맥에서 나타나는 구절들을 제외하면, 비유와 비교, 특히 예수님의 비유에서 사용된다. 문자적 용법은 대부분 서신들에서만 발견되는데, 예를 들면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 주인에 대한 그리스도인 종들의 태도에 대한 언급(골 3:22 이하 등)이나 종들에 대한 그리스도인 주인들의 태도(골 4:1; 엡 6:8 이하)나 공동체 안에서 종들의 지위에 대한 언급에서 나타난다. 여기에서 이 용법은 전적으로 당시의 사회적 틀 안에서 사용되었다. 여기서 또한 이 단어군은 한편에서의 둘로스(종)의 전적인 헌신이 퀴리오스(주인)의 전적인 주장에 부합하는 절대적인 의존 관계를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이 절대적 의존 관계는 퀴리오스의 단순한 존재에 완전히 근거하며, 이 법적 근거를 넘어 어떤 특별한 종교적 혹은 도덕적 정당성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마 8:9; 눅 7:2 이하). 예수님의 비유는 이 주인과 종의 컴플렉스(complex)에 관하여 극도로 억제 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 곧 신자들의 책임의 무조건적임을 강조하려 할 때 둘로이(복수)를 언급한다(마 24:45 이하; 눅 12:37 이하).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그의 인간과 관계에서 그가 만족시켜야 하는 어떤 전제 조건에 의해서도 제약받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를 원할 때 둘로이를 언급한다(마 18:23 이하; 마 25:14 이하; 병행구 눅 17:7 이하). 따라서 이 용어와 개념은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일의 상태를 묘사하고, 형벌을 자초하지 않으려면 받아야만 하는 결과를 묘사한다.

신약성경의 기록에 어디를 살펴보아도 주인과 종, 자유와 속박으로 구분하는 사회적인 구분에 반대하는 내용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자주 노예들은 책임과 지휘권의 자리에 임명되곤 하였다(마 24:45). 그러나 노예는 그의 주인에게 오로지 순종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마 8:9). 노예는 일을 해서 이익을 얻게 되거나 답례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그가 종으로서 해야 할 의무를 하고 있는 것이다(눅 17:7-10). 주인은 노예가 어떤 잘못된 죄를 저질렀을 경우, 노예에게 무한한 힘을 행사하여 그를 너그럽게 봐주거나(마 18:27) 가혹한 처벌을 하기도 하였다(마 18:34; 마 25:30). 반복하여 종들은 모든 일에서 그들의 주인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심지어 무자비한 주인에게도 복종해야 한다(벧전 2:18).

퀴리오스의 뜻과 위임(commission)과 나란히 우리 자신의 뜻이나 주도권(독자권)이 설 여지가 없다. 퀴리오스에 대한 관계의 배타성도 확증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마 6:24; 눅 16:13).


마 6:24과 눅 16:13은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 때 두 주인은 그 종을 동일하게 소유하고 있으며, 따라서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런 상황은 있을 수 있었으며 실제 있었다. 사실로, 한 주인에게서는 자유하였으나 다른 주인에게서는 그렇지 못하여 반은 자유인이고 반은 노예 상태인 종들이 있었다. 물론 이러한 관계에서 한 종이 두 주인에게 똑같은 헌신을 보이는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주인들이 원하는 바와 관심사가 매우 폭넓게 변할 경우에 특히 그러하다. 예수님은 이것을 예수님 당시의 언어와 그의 백성의 언어로 표현하셨다. 즉 종이 한 주인을 사랑하고 다른 주인을 미워할, 다시 말하면 덜 충성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한 주인 혹은 다른 주인에 대한 배타적 봉사라는 의미에서 종됨의 파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님은 재물과의 관계를 끊지 않은 채 하나님의 둘로스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시도는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배타적인 봉사와 의무라는 의미에서 둘레이아(douleiva, 1397: 종살이)를 행하는 것에 힘을 집중시키지 않고서 둘류에인이 암시하는 바를 행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진 사람을 공격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② 신약성경에서 둘로스에 대한 묘사는 고전적인 것이긴 하지만 멸시하고 경멸하는 식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이 점에 있어서 신약성경은 헬라 세계와 구별될 뿐만 아니라 유대교와도 차이가 있다. 노예에 대한 재판은 항상 물질적이며, 그 재판이 엄격할 때도 그렇다(마 18:32; 마 25:26; 마 25:30; 눅 19:20). 둘로스는 단지 노예라는 이유로 결코 멸시 당하거나 거부 당하지 않는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에게 노예는 헬라 세계에서와 같이 보다 낮은 차원의 인간에 속했다. 법률로써 (가나안 족속)노예들은 부동산으로 분류되었으며, 법적 권리를 가지지 못하고 자신의 재산을 소유할 수 없었다. 심지어 가족까지도 자기에게 속하지 않았다. 노예는 주인의 재산이었으며, 주인은 결혼시 마음에 드는 노예를 선물로 줄 수 있었다. 이것은 제의적 영역에서 노예는 제한된 범위에서만 제의적 의무를 지녔음을 의미했다. 이 점에서 노예는 아내와 같았다. 노예의 제의적 복종은 따라서 강력히 강조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노예는 윤리적으로 열등하였으며 제한적 정도까지만 법률에 예속했다. 그들은 자연히 자손을 가지지 못했으며 따라서 그들의 태생을 제어할 가능성이 없었다.

노예에 대한 대우는 이러한 평가(estimation)에 상응한다. 노예는 가재(家財)였으므로 주인은 원하는대로 노예를 다룰 수 있었다. 아무도 그 주인을 저지할 수 없었다. 심지어 주인이 노예의 신체를 훼손했을 때도 오직 증언할 목격자가 있을 경우에 법의 요구에 따라 해방시키는 것으로 그만이었다(출 21:26 이하). 랍비의 비유담에서도 종들에 대한 이러한 태도가 분명히 나타나 있는데 중요한 문제이다. 때때로 성난 주인이 식탁에서 시중드는 종에게 잔을 내던지거나 종의 따귀를 갈기는 경우도 있다. 그 이유는 종이 최선을 다하더라도 주인이 의도하는 바대로 정확한 의미에서 명령을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랍비에서 "노예, 종"이라는 말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공격할 수 있는 최악의 모욕 중에 하나이다. 이웃을 종이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파문 당할 수도 있었다. 종과 주인과의 특별히 좋은 관계를 보여주는 몇몇 언급이 있다면(Ber., 2, 7), 이것들은 단순히 법률의 현실에서 나타나는 어두운 모습을 확실히 해줄 뿐이다.

③ 종들이 기독교 공동체 속으로 (차별없이)통합된 방식은 예수님과 신약성경이 노예에 대해 생각하고 언급한 태도와 일치한다. 노예 신분이 기독교 입장에서 거부되지 않는다면 이것을 이루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노예가 자유의 기회를 얻었을 때 최종적 분석에서 노예이든 자유인이든 차이가 없음을 인정할지라도(고전 7:21) 그는 기쁘게 그 자유를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종들은 모든 신자들과 함께 공동체의 생활을 형성하는 법에 능동적,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이 법은 사랑의 법으로서, 공동체의 모든 성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동일한 관계에 서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차원에서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런데 이 법은 일단 적용되면 결국에는 반드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노예 제도의 폐지 및 종말을 가져온다. 만일 노예 제도를 폐지하려는 운동이 없다면, 다시 말하면 노예 신분이라는 사회적 현실 안에서 신약성경이 보여준 관심의 상대적 결여는 근본적으로 초기 기독교 삶의 내세관이나 종말론적 긴장의 상황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죄와 마찬가지로 구속도 기존의 사회 구조 안에서 일어나므로, 최우선 순위는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에 일치할 수 있는 삶을 성취하는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런 삶은 적당한 때에 기존 사회 구조를 전복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공동으로 참여하는 교제는 사회적인 구별을 상대화하기 때문이다. 좀 더 설명을 한다면 예수님의 구속 행위는 지위와 태생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똑같이 예수님의 구속 행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동은 개개인에게 있어서 그가 처하여 살아가는 실재적인 관계 내에서만이 중요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그가 오로지 신약성경에서 하마르티아(죄)라고 하는 것을 범하는 이 실재적인 관계 내에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 죄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실재적인 불순종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선포의 목적은 예수님의 행위로 말미암아 개인의 상태의 통제(control)이며, 개개인 자신의 시간과 장소에서 이 행위에 일치하는 태도와 행위를 낳는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위한 노예의 우선 목적은 자유의 획득이 아니다. 노예로서 그는 예수님께서 위하여 죽으신 모든 사람들 같이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이다(고후 5:15; 롬 4:17 이하 등).

그렇지만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다른 사회적 구조 안에서 살아가는 관계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관계와 함께, 각각의 개개 그리스도인에게 부여된 은사와 임무에 종속되어 있다면 주인과 종과의 차이는 양자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함께 참여함으로 생기는 교제와 비교할 때 단지 상대적 의미만을 지닐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 한편으로는 가정 생활에서 취한 개념의 견지에서 주인/ 종 관계를 정리하고(아델포스, 몬 1:16),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관계가 주인과 종의 관계에 우선함으로 후자 곧 주인과 종의 관계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일부분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엡 6:5 이하; 골 3:22 이하; 골 4:1; 딤전 6:1; 딛 2:9; 벧전 2:18 이하). 우리는 또 왜 신약성경이 상대방이 그리스도인이 아닐 때에도 똑같은 규칙을 적용하시는지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의무는 인간의 책무들과 상관없이 적용되어서, 이러한 모든 책무를 그대로 채택하여 그 책무들을 신적인 통치로 처리하고 적합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왜 자유를 결코 요구하지는 않으나 자유가 허용될 때는 감사함으로 받아야 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외적인 자유도 가치있다. 그러나 그 자유의 가치는 그리스도와 교제가 가져다 주는 것과 비교할 때, 또 자아와 삶을 해치는 모든 조건들로부터의 자유와 비교할 때, 하나님과 그의 뜻을 위한 자유-이 자유는 그리스도가 주시는 선물이다-와 비교할 때 단지 상대적이다(참조: 고전 7:22).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믿음의 자유는 피상적으로는 스토아 철학자가 외적 환경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것과 유사하지만 세가지 점에서 그것과 다르다. 믿음의 자유는 (1) 우월감이 없다. (2) 이것은 노예와 주인을 형제가 되게 만드는 어떤 행동에 근거한다. 그리고 (3) 이 행동은 양자 모두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과 부활이다.

(b)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둘로이(종들)로서의 기독교인들.

① 둘로스 데우라는 관용구는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적게 사용되며, 토 데오 둘류오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의 둘류오(douleuvw, 1398)에 대한 대부분의 언급은 신약성경 기독론이라는 견고한 기초 위에서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언급된다. 둘로스 데우라는 표현은 거의 항상 하나님과 관련하여 구약성경의 의인에 대한 용법과 결합하여, 혹은 인용문에서 나온다. 둘레(douvlh, 1399)도 마찬가지다(참조: 눅 1:38; 눅 1:48; 행 2:18).

특별히 계 1:1; 계 2:20; 계 7:3; 계 10:7; 계 19:2; 계 19:5; 계 22:3; 계 22:6에서 항상 그렇게 사용되었다. 계 15:3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종(둘로이 투 테온)이란 칭호를 받았으며, 계 10:7(참조: 행 4:29)에서도 선지자들을 하나님의 종들(둘로이 투 테온)이라고 부른 것이다. 행 16:17에서도 동일한 용법이 사용되었는데,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종은 바울과 그의 동료들을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렀다. 벧전 2:16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여기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이기 때문이다.

약 1:1과 딛 1:1에서 '하나님의 종'이라는 묘사는 특별한 주목을 요하며, 어쨌든 보통 유대인의 용법 이상 나아간다. 여기서 그 문구가 선지자들을 하나님의 종이라는 칭호를 의식적으로 채용하여 직함으로 전용한 것인지 혹은 하나님께 절대적인 의탁에 대한 개인적 고백인지 결정하기 어렵다.

초기 교회에서 이 문구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호칭으로 점차 사용되어 새로운 생명을 획득한다(참조: 2Cl., 20, 1; Herm. m., 5, 2, 1; 6, 2, 4; 8, 10 등).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이 과정을 가속시켰다. 첫째는 그리스도교가 참 이스라엘이라는 사상의 일반적 용인이었고, 둘째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둘로스라기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상이었다. 이 사상은 예수님과의 어떤 있을 법한 경쟁을 일축해 버렸다. 그러나 이 과정에 곧바로 기여한 또 하나의 사실은 이 전체적인 발전과 함께 공로의 사상이 둘로스 데우 어구와 결합하여 또 다시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진지하게 시도한 사람들에게만이 이 호칭이 적용될 수 있었고 그들만이 이 호칭을 주장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문구가 신중하게 취해질 때,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된 혹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닌 자기 헌신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②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인 것은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둘로이(종들)이고, 따라서 그들의 생명이 부활하여 승귀하신 주님께 바쳐진다는 사상이다. 특별히 바울은 이런 사상을 대표한다.

모든 곳에서 인간들은 신자가 되기 전에 둘로이였다고 가정한다. 이 가정은 둘레이아(douleiva, 1397: 종살이)가 다른 사람의 뜻에 복종하는 것을 암시한다는 통찰에 기초한다. 이 경우에 자발적이든 강요이든 엘류데리아(eJlivssw, 1667: 자유)는 상실되고 둘로스의 상황을 이루는 의존의 상태가 된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롬 6:16). 인간들이 그리스도를 떠나서 종노릇한다(둘레이아)고 바울이 생각하는 대상은 하마르티아(롬 6:6 이하), 아카다르시아, 아노미아(롬 6:19), 에피뒤미아(딛 3:3),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갈 4:8), "이 세상 초등학문"(갈 4:3; 갈 4:9) 따위와 심지어 유대교의 노모스(롬 7:1 이하 등)이다. 이것은 그들이 자유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이런 세력들에 지배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휘파코에("순종")가 완전한 둘레이아(종살이, 노예 상태)가 되는 것은 이 상태에서 인간의 삶이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다"(참조: 롬 7:5)는 사실에 의해 알 수 있다. 인간 스스로가 자기 삶의 결과를 더 이상 결정하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말씀의 발전이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예수님은 그의 구원하는 사역 곧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런 둘레이아(douleiva, 1397: 종살이, 예속)로부터 그들을 구출하여 해방시킨다. 이 구원은 노모스(율법)의 종살이로부터 구속인 것이다(갈 3:13: "그리스도께서...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갈 4:4 이하: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따라서 그들은 아들의 신분과 그에 따른 자유를 얻는다(갈 4:5 이하; 롬 8:15; 롬 8:23). 그러나 아들됨은 자율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들됨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이 새로운 상태는 새로운 섬김이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헌신은 당연히 구속(redemption)의 목적(goal)으로부터 결과하며 그것은 자율(autonomy) 보다 오히려 순종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사역을 수행했을 때 그는 구속된 자를 자기 소유로 삼고, 그들에게 그들의 삶을 이룰 목적과 방향을 제시해 주신 것이다. 이러한 헌신은 어원학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이렇게 의무가 있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둘로이로 부름으로 표현되어진다(고전 7:22; 엡 6:6; 참조: 롬 14:18; 롬 16:18; 골 3:25). 이 용어는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상태가 의(롬 6:19), 거룩(살전 3:13), 새 생명(롬 6:4), 사랑과 자기 희생에서 완성됨을 우리에게 보여준다.-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안에 암시되어 있다. 특히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 외에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길도, 그를 기쁘시게 하는 섬김에 이르는 길도 없으며, 따라서 그의 역사와 말씀에 의하여 그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주관하고, 그리하여 일상적인 일련의 삶 속에서 인간의 전 행실을 주관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한 가지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관계에 대해 둘류오 등을 사용할 때, 이 용법은 항상 무엇이 발생했다는 고백과 주어진 사실들의 결과를 가장 개인적 차원에서 받아들일 각오를 암시한다. 따라서 인간 편에서 둘류오(douleuvw, 1398: 종이다)는 그리스도편에서의 아고라조(ajgoravzw, 59: 사다, 구속하다)에 상응한다. 여기서 후자는 그리스도의 행동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결과하는 태도를 묘사한다. 그리스도가 가져다 주는 것은 오로지 인간이 그리스도께 자신을 결속시킨다면 오직 그것만으로 알 수 있는 자유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일단 이해하고 나면 요한복음의 몇몇 구절들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들은 처음 언뜻 보기에 다소 모순이 있는 것 같은 바울의 진술들과 병행함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요 8:35 이하에서 죄에서 자유를 가져오시사 하나님의 오이키아(oijkiva, 3614: 집, 거처)에 영원한 자리를 가져다 주시는 분으로서의 예수님은 부여 받는 것이 얼마나 위대하고 안전한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아들(Son)로 불리운다. 그러나 특별히 요 15:15에서 예수님이 그의 죽으심과 관련하여 말씀하시고 계심을 생각해야 한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친구라 하였노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기의 소유를 둘레이아의 상태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완전한 친교로 이끄시고 계시는 것을 명백히 하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또한 그와의 친교는 그의 소유가 그가 그들에게 명령하는 것을 행해야 하며(요 15:14), 순종하지 않으면 그 친교가 깨짐을 암시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신다. 간단히 말하면 요한이 아들이 가져오는 자유에 대해 언급할 때(요 8:34 이하)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로이가 아니라 친구들이라고 부른다고 언급할 때(요 15:15) 아무런 모순이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수님께서 명하신 바를 행하는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③ 둘로스 크리스투(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문구는 바울의 기록에서와 같이, 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후서의 인사말에서 자기 호칭으로 사용될 때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고 바울이 동역자 에바브라를 둘로스 크리스투로 묘사하는 골 4:12에서도 그렇다.

둘로스 이에수 크리스투(예수 그리스도의 종)라는 문구를 자신의 칭호로 사용할 때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구속(redemption)으로 해석하는 것에 의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이 문구는 먼저 이 문구를 사용하는 자가 그리스도의 주장(claim)에 복종하는 것을 암시하고 따라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연합하는 것을 암시한다.

바울의 목적은 교회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로서, 지정받은 자리에서 그의 직무를 이행하는 자로서 교회의 덕을 세우고자 한다. 그렇지만 모든 곳에서 이 문구가 강조하는 바는 단순히 예수님의 구원 행동에 대한 고백 뿐만 아니라 이 문구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주인 자신의 권세를 지닌 특별한 직분을 시사하기도 한다. 이것은 약 1:1에서 가장 분명히 나타난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또한 갈1:10에서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라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라는 표현을 확인할 수 있다. 안드로포이스 아레스케인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분명히 바울이 기쁘게 하기 위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권위를 소홀히 하는 것, 따라서 그 권위와의 불화를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이 권위는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위임에 의해 일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주장을 나타내고, 오로지 그리스도에게만 전심전력해야 하며, 당연히 그의 둘로이로 불리운다.

바울의 기록에서는 둘로스 이에수 크리스투(예수 그리스도의 종)는 아포스톨로스 이에수 크리스투(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와 나란히 병행된다. 후자는 외부 사람들을 향한 그 중요성과 일에 따라 바울의 직분을 묘사한다면 전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와, 따라서 그 결정적 기초, 곧 그리스도께서 세상으로부터 바울을 얻어서 그를 그의 소유로 삼은 사실로 되어 있는 기초에 따라 바울의 직분을 묘사한 것이다.

벧후1:1에서는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 결합형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라고 되어 있다.

(c)  둘로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① 예수님은 최후 만찬이 있던 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요13:1이하). 이 사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바 그의 직무는 권세나 영광을 구하기보다 그의 존재가 둘로스로서 섬기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 주신다.

우리가 발을 씻기는 것이 종의 의무 중 하나요, 그것도 유대인 노예보다 비유대인 노예의 의무임을 깨닫지 못하면 이 장면, 혹은 예수님의 의도를 적절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섬김을 수행함에 있어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직무를 이행해야만 하는 둘로스의 신분에 두신다. 비록 마데테스(제자)가 디다스칼로스(선생)에게 행해야 할 의무는 종이 상전에게 행해야 할 의무와 매우 흡사하였다 하더라도 심지어 제자들도 예수님에게 행해야 할 의무가 없는 그러한 봉사를 이와 같이 제자들에게 베풂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의 임무가 포함한 겸양과 희생의 정도를 보여주셨다. 그의 위엄을 고려할 때 오로지 종의 상징적 지위만이 제자들의 눈을 열기에 적합했고, 예수님의 직무에 관한 그들의 환상(illusions)에서 그들을 지킬 수 있었다.

동시에 이 사건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사도로서 살아가는 그들 자신의 삶의 의미를 계시해 주었다. 한 사람의 사도는 그 사람 자신으로서 존재한다는 규칙에 비추어 예수님은 그들을 그가 취하신 것과 동일한 지위에 묶었다. 이 원칙 대신에 예수님께서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요 13:16)라고 하셨다면, 이것은 그 사건과 그것의 중요성에 의해 생겨난 그 상황에 일치하여 표명된, 기초가 되는 사상을 단순히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그 사건의 요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서 눈여겨 본 태도를 바로잡기 위함이다. 따라서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워진 상호 봉사의 의무 및 공동체 안에서와 공동체를 위한 봉사의 의무의 영구한 기초를 구성한다. 따라서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사실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 사실에 기초하여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권면할 수 있는 것이다(갈 5:13).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은 자유는 그 자체 참되고 진정한 자유를 보여준다. 그 자유 안에서 우리는 둘로스의 경우이며, 둘로스의 경우가 당연히 되어야 하는 것과 같이 자기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 의해 유발되는 봉사와 겸손의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② 빌 2:7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어구 "종의 형체"(몰페 둘루)는 한편으로 몰페 데우("하나님의 본체")와, 다른 한편으로 본문의 마지막에서 예수님에게 부여된 퀴리오스라는 칭호와 대조되어 그 중요성을 가진다. 따라서 이 문구는 그리스도에게 있어 성육신이 그의 본래의 권세와 영광과 관련하여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그것은 그의 비움(케노시스)의 위대함을 표현한다. 둘로스의 용법에 따르면 몰페 둘루(종의 형체)는 예수님의 케노시스의 길에서 사람의 모양이 가능한 가장 낮은 지점까지 내려가는 것임을 보여준다. 둘로스보다 더 크게 퀴리오스 혹은 데오스와 대조할 수 있는 용어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맥상 그 표현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인간이 됨에 있어서 스스로 취한 것에 대한 묘사이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요 13:1 이하의 발을 씻기는 것의 저변에 놓인 의미와 일치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상을 통하여 볼 때 관용구 몰페 둘루를 설명하기 위해 이사야 53장의 에베드 예호와(여호와의 종)를 상기할 필요가 없다.

또한 순종과-공동체와 관련하여-겸손(빌 2:3; 빌 2:8) 같은 단어들이 몰페 둘루의 내용을 표현하고 포괄하기에 정말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디아코네오(섬기다)라는 용어도 역시 마찬가지다. 댓구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바울은 여기서 태도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새 상황, 그의 새 존재 방식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전의 상황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른 것이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의 태도와 행동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라고 묘사되었다. 이 차이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여 본문 전체를 바울의 권면(빌 2:1-5)에 종속시킨다. 반면 빌 2:6 이하는 사실상 순전히 게리그마적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게리그마로서 권면의 재료의 도입을 위한 기초를 제공한다. 자연히 예수님에 관한 메시지의 거부를 스칸달론(skavndalon, 4625: 함정, 걸림돌) 및 모리아(mwriva, 3472: 어리석음)로 이끄는 것은 예수님의 몰페 둘루이다(참조: K. H. Rengstorf).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상을 입으셨을 때, 그는 죄와 율법 그리고 사방에 종속되어 있는 인간과 완전히 결속되신 것이다. 종으로서 예수님은 노모스(novmo", 3551) 아래에 있으며(갈 4:4)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다(갈 3:13). 그는 "죄있는 육신의 모양"(롬 8:3)과 같은 형상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스스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히 2:15) 인간들의 형제가 되셨다. 정확히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을 가장 심원한 자기 비하로 묘사한 것이 바로 종의 형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종의 형상으로, 자신을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을 위해, 자신의 죽으심의 대가로서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인간을 구속하신다. 성례전적인 해방이라는 비유가 여기에서는 주인의 변화의 개념과 연합되었다. 믿는 자들은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8; 참조: 롬 6:22). 어떤 가상의 자립이라는 둘레에서 엘류데리아(자유 freedom)로의 해방은 결국 새로운 자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해방 받는 자는 "신앙의 순종"을 위하여 자유케 된 것이다. 신앙에 순종함으로써 인간은 주님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 종으로 나타난다(롬 12:11; 롬 14:18; 골 3:24; 참조: 살전 1:9; 롬 7:6). 그러나 이러한 주인과 종의 새로운 관계는 "무서워 하는 종의 영(프뉴마 둘레이아스)"에 의하여 주도된 것이 아니다. 믿는 자들은 "양자의 영(프뉴마 휘오데시아스)"을 받은 것이다(롬 8:15).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들의 자유는 "육체의 기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자들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도록 부름을 받았다(갈 5:13). 이렇듯 이웃에게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일은 종의 형상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다(참조: 빌 2:1-4의 권고, 이는 빌 2:5 이하와 인과 관계에 있음). (참조: R. Tue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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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스런 보좌를 떠나 성육신하여 하나님의 둘로스로 인생을 살아내신, JC의 섬김-봉사/희생을 돌아봄 ::: 섬김(하나님의 마음으로 섬겨 도와 일으키며 마침내는 대속의 희생제물로 자신을 내어주려 오신 그분과 한 마음/한 뜻 품어 섬기며 배우며 동행함)--봉사/희생(소명을 주어 보내신, 맡기시며 동행하시는 분을 알며 사랑하며 섬김으로써 섬기도록 맡겨주신 형제자매들 각사람들도 모두 JC께서 지금도 예외없이 존귀히 여기며 섬기고 계심처럼, 즉 내주하시는 바로 그분이 친히 섬기심과 자신을 내어주심처럼 충심으로 합당한 섬김/희생을 이룸 : 바로 그렇게 주님을 나타내며 대표함/대리하는 것이 사역의 본질일 것......우리 모두는 머리되신 JC의 몸의 지체요, JC의 장성하신 분량의 충만에 이르기까지 자라가도록 하기 위해 서로 섬기는 자로 부르심 받은 존귀한 지체들이며....사랑으로 상호 섬김 위해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한 마음으로 행하며 한몸으로 부르심을 입은 종들이지만, 서로를 강제하는 주관자가 아님...유일한 주관자는 오직 그리스도뿐임...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연결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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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 당한 자들의 목자, 다윗................사무엘상 22:1-23

요절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지난 주일에는 광야에서 훈련을 받는 다윗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승승장구하던 다윗을 광야로 이끌어내어 인생의 밑바닥에 내팽겨 치셨습니다. 다윗은 너무 배가 고파서 제사장을 찾아가 거짓말을 하고 떡 몇 개를 얻었습니다. 또 믿음의 용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골리앗의 칼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사울이 두려워서 원수 블레셋 왕 아기스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를 알아보는 신하들로 인해 심히 두려워하여 미친 체하며 수염에 침을 흘리며 대문을 극적거리며 도망을 나왔습니다. 너무나 다윗답지 못한 모습들을 보면서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도 궁지에 몰리면 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다윗을 광야로 보내어 훈련하셨습니다. 배고픔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치열한 생존경쟁의 사회에서 처절하게 살아남는 법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그의 자존심을 꺾으시고 교만을 낮추셨습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정말로 티끌과 같은 존재에 불과함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런 힘든 과정을 통해서 다윗은 부르짖는 기도를 배우게 되었고, 하나님만이 피난처가 되심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사울에게 쫓기는 다윗과 다윗을 추격하는 사울의 모습이 대조되어 나옵니다. 다윗은 인생의 밑바닥에서 희망의 싹이 트는 모습이고, 사울은 인생의 꼭대기에서 추락해가는 모습입니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고 하는데 사울은 날개가 없는 것 같습니다. 다윗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외롭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에게는 사람들의 마음이 떠나고 혼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다윗의 마음을 찢어 넓히시고, 낮추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으로 훈련시키시는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I. 환난 당한 자의 목자가 된 다윗(1-5)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다윗은 간신히 가드를 빠져나와 아둘람 굴로 도망을 갔습니다. '아둘람'(Adullam)은 '피난처', '보호처'라는 뜻입니다. 이곳은 가나안족속의 성읍으로 가드 남동쪽에 있는 곳이었습니다(창 38:1,2; 수 15:35). 본래 유다 영토였으나 블레셋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성서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아둘람성 산중턱에서 약 400명 정도가 살기에 적합할 듯한 동굴 하나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다윗은 사울이 찾아올 수 없는 곳에 넓은 동굴을 발견하고 그 굴로 도망했습니다. 그러자 누가 찾아왔습니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왔습니다. 이들은 베들레헴에서 더 이상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대사회에서는 한 사람이 역모자로 몰리면 그와 온 집안 사람들을 멸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반역자가 나오면 9족을 멸했다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울 왕이 언제 그들을 죽일지 모르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서 다윗이 숨어 있는 아둘람 굴로 피신을 왔습니다. 이곳은 베들레헴에서 15km 정도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다윗은 7곱 명의 형들 가족이 있었고, 사촌들도 많았습니다. 나중에 다윗 왕국의 중요한 군대장관이었던 요압, 아비새, 아사헬과 같은 사람들이 다 다윗의 조카들이었습니다. 이들의 다윗에 대한 사랑과 충성심은 특심하였습니다. 이는 정말로 어려운 시절 다윗의 사랑과 섬김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족 친척들 외에 또 어떤 사람들이 몰려왔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환난 당한 모든 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사울의 학정에 시달리며 정치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견디다 못해 다윗을 찾아온 무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사울에게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다윗이 유일한 이스라엘의 희망임을 알고 찾아온 의식이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또 빚진 모든 자들이 찾아왔습니다. 경제적으로 고통을 당하던 사람들입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보니까 나라가 혼란하고 경제가 흔들렸습니다. 무거운 세금을 강요했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은 고리대금업자들에게 빚을 지고 갚을 길이 없어서 도망다니다가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고대사회에는 고리대금업자들의 착취가 심했습니다. 빚을 져 본 사람은 그 고통을 압니다. 빚은 정말 무섭습니다. 빚은 이자에 이자가 붙어서 갈수록 커집니다. 채권자들은 날마다 독촉합니다. 빚 때문에 재산이 넘어가고 살고 있는 집마저도 넘어갑니다. 논 밭을 빼앗기고 자식들까지 노예로 끌려갑니다. 이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빚 때문에 자살한 사람도 많습니다. 이처럼 경제적으로 억눌리고 고통을 당하고 있던 사람들이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다윗은 자기들을 착취하지 않고 먹는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찾아왔습니다.

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다 그에게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은 애매히 고통 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울 왕의 모습을 보면 심리학적으로 disorder,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악령에 잡히면 자기를 위해 수금을 타는 사람에게 창을 던져 죽이려고 하고, 청년 하나를 잡기 위해 온 3천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온 이스라엘을 이를 잡듯이 돌아다니는 편집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아들도 딸로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심리상태는 극도로 불안정햇습니다. 이런 사람이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원통한 일을 많이 당하겠습니까? 가장 원통한 일을 당한 사람은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까닭없이 자기를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사울과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남이야 상처받든지 말든지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사람이 아버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남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술만 마시면 폭군으로 변하여 온 가족을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넣기도 합니다. 자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원통한 일이 많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한이 많습니다. 그래서 화병이 생겼습니다. 화병은 우리나라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는 병입니다. 그래서 국제학술지에도 병명이 그냥 화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다윗이 숨어 있는 아둘람 굴에는 온갖 종류의 상처받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그 수가 400명이나 되었습니다. 소외되고 상처 많은 사람들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환난 당한 자들의 위로자가 되었습니다. 원통한 자들의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이 일이 쫓기는 다윗에게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이었겠습니까? 당시의 다윗의 심정을 잘 표현해 놓은 시편이 있습니다. 142편이니다. 다같이 찾아보겠습니다. 제목이 무엇입니까? “다윗이 아둘람 굴에 피해 있을 때에 지은 시”입니다. 이 시를 보면 다윗은 아둘람에서 어떤 기도를 드렸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원통함을 토로하고 우환을 진술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1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지은 마스길 곧 기도]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2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다윗은 부르짖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1절. '소리내어'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열정적으로 부르짖었다는 뜻입니다. 2절. "토로하다“는 말은 '쏟아붓다' 등의 뚯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모든 사정을 숨김없이 내놓고 간구했습니다. 원통함을 쏟아붓고, 근심 걱정을 그 앞에 다 진술하였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근심걱정이 많았겠습니까? 그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다 털어놓고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통한 일을 당하게 하신 것은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원통한 일을 당하지 않으면 부르짖는 기도가 안 나옵니다. 또 집안에 우환이 없으면 기도가 간절해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원통한 일을 당하거나 우환이 끊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하시는 뜻으로 영접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이 피난처이심을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아둘람 굴에 피했습니다. 아둘람이라는 이름도 피난처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아둘람 성은 가장 험한 곳에 위치한 동굴이었습니다. 사울이 찾아올 수 없는 안전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오,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5) 다윗은 피난처에 와 있으면서도 그곳이 피난처가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만이 피난처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요리조리 피한다고 환난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아무리 안전한 곳처럼 보여도 우리의 피난처가 되지 못합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이 시대에는 교회가 세상에서 상처받고 고통당하는 사람, 원통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아둘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목장이 아둘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받은 상처와 고통을 털어놓고, 위로 받을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원통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털어놓고 위로받고 힘을 얻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또 목장을 섬기는 분들은 그분들을 위해서 다윗처럼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우환을 주님 앞에 내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목장이나 교회도 완전하지는 못합니다. 그곳에서 어느 정도의 위로를 받고 쉼을 얻을 수 있지만 그곳이 피난처가 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진정한 아둘람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6절을 보십시오.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다윗은 승승장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비천하다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비천하다는 말은 '쇠약하다, 미약하다'는 뜻입니다. 자기는 미약한데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은 강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7) 자기를 옥에서 이끌어내사 주의 이름으로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이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라 다윗은 주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환난당한 자들을 영접해주고 품어주고 섬겨줌으로 그들을 동역자로 얻게 되었습니다. 후에 이들이 전투에 참여할 만한 용사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숫자는 얼마 안가서 결국 육백 명으로 불어났습니다(23:13; 25:13; 27:2; 30:9, 10). 이들이 다윗의 사랑과 섬김을 받고 성장하여 다윗 왕국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삼상 3-4절은 다윗이 부모님들을 모시고 모압 왕에게 가서 부탁하는 내용입니다. 아마도 그 부모님들이 너무 원로하여 다윗의 망명생활, 동굴 생활을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증조 할머니가 모압 여인 룻이었습니다. 이새의 할머니가 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모압 민족과 어느 정도 혈연적 연관성을 갖고 있었습니다(룻 4:13-22). 모압은 당시 사울 왕국과 적대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사울 왕에게 쫓기는 다윗을 도와줄 것을 기대했습니다(14:47). 그곳은 지리적으로 이스라엘과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압 왕이 다윗의 청을 받아들여주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부모님을 모시고 모압 왕에게 갔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망명생활이 끝나는 날가지 모압에서 평안히 거하도록 하였습니다. 다윗은 효자였습니다.

특히 3절에 보면 다윗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모압에 함께 있기를 청했습니다. 이 말을 보며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인도하실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아둘람 굴에 머물러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셨는데 블레셋 땅에 동굴 속에 숨어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5절을 보십시오.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갓은 사무엘의 선지학교 출신으로 사무엘의 명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전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갓이 와서 이 요새에 있지 말고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유다 땅은 어떤 땅입니까? 사울 왕이 삼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다윗을 죽이려고 찾아다니는 곳이 아닙니까? 그곳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은 호랑이 굴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접하고 순종하여 안전한 아둘람 굴을 나와서 유다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혼자만 들어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400명의 환난당한 자들을 데리고, 어중이떠중이들과 함께 들어가야 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안전만을 생각했다면 유다 땅에 다시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지자 갓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자가 이방 땅에 숨어 지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영접했습니다. 사울에게 쫓기는 것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시는 훈련이므로 이를 적극적으로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았습니다.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이 언약의 땅과 언약의 백성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울 왕에게 쫓기면서도 유다 땅에 거하며 외적의 침입을 받는 백성을 보호하고,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는 왕으로서 경륜을 쌓아야 했습니다. 그래야 백성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존경을 받는 왕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18:7, 28-30).그래서 다윗은 사울의 핍박을 믿음으로 감당하고자 결단하고 유다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일시적으로 아둘람에 피해 있는 것은 허락하셨지만 그곳에 계속 숨어 지내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다시 힘을 얻어 고난을 감당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만일 다윗이 아둘람굴에 계속 숨어지냈다면 골목대장은 될 수 있었지만 통일 이스라엘의 왕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은 피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고난을 감당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 고난을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정면으로 부딪치면서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우리의 인격이 성숙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의 내면이 넓어지고, 더 영성이 깊어지기를 바라십니다. 여러분이 현재 당하고 있는 원통함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가정에 끊이지 않는 우환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직면하고 있는 고난이 무엇입니까? 회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부딪히며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 모든 사람을 적으로 여기는 사울(6-19)

사울은 몇 년 동안 다윗을 찾으러 다녔지만 아둘람 굴에 숨어 있는 다윗을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다윗을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다시 이스라엘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그 때에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손에 단창을 들고 에셀 나무 아래에 앉았고 모든 신하들은 그의 곁에 섰더니” 당시 사울은 기브아 높은 곳에서 손에 단창을 들고 에셀나무 아래 앉아 있었고, 모든 신하들은 그의 곁에 서 있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어서 허탈하게 앉아 있는데 다윗이 유다 땅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사울은 이제야 다윗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에게 다시 한 번 자기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사울은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라고 했습니다. 이를 보면 당시 사울의 신하들은 주로 베냐민 지파 사람들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지파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의 영향력이 약화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를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이새의 아들이 베냐민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겠느냐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들에게 밭과 포도원을 주고 천부장이 되고 백부장이 되게 한 것을 자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때문에 그런 복을 누리게 되었으니 충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왕이 되면 베냐민 지파는 찬밥신세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자기 신하들에게도 섭섭한 마음이 많았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알리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하니” 사울의 말을 보면 “나”라는 말이 여덟 번이나 됩니다. 그는 “하나님”이라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자기가 나라의 중심이요, 우주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신하들이 다 공모하여 자기를 대적했다고 했습니다. 자기 아들 요나단이 다윗과 맹약을 하였는데도 고발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걱정해주고 슬퍼하는 사람도 하나도 없고, 자기 아들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자기를 치려하는 것을 알리는 사람도 없다고 한탄했습니다. 사울은 아무도 믿지 못했습니다. 자기 지파 사람들도 믿지 못했습니다. 자기 신하도 믿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들도 믿지 못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공모하여 자기를 대적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심한 불신과 두려움에 시달리며 피해망상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고독하였습니다. 슬펐습니다. 그럴수록 다윗에 대한 미움과 증오심이 불탔습니다. “다윗 그 놈만 없었다면, 이런 모든 일이 생기지 않았을텐데” 이런 생각이 들 때 마다 이를 갈며 다윗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때 도엑이 사울에게 제사장 아히멜렉을 고발했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의 신하 중에 섰더니 대답하여 이르되 이새의 아들이 놉에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 이른 것을 내가 보았는데 10 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그에게 음식도 주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더이다” 그는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과 공모하여 반역을 꾀한 것처럼 말을 하였습니다. 그는 권세 있는 왕에게 아부하여 무죄한 자를 참소했습니다. 사울은 당장에 아히멜렉을 체포하게 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제사장 아히멜렉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의 제사장들을 다 불렀습니다. 그에게 구데타 음모를 추궁하였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새의 아들과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여 그에게 떡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서 그에게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게 하려 하였느냐?”(13) 아히멜렉은 다윗의 무죄함을 증거했습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 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그는 왕의 사위도 되고, 왕의 호위대장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가 아니니이까? 내가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은 것이 오늘이 처음이니이까? 결단코 아니니이다. 원하건대 왕은 종과 종의 아비의 온 집에 아무것도 돌리지 마옵소서. 왕의 종은 이 모든 크고 작은 일에 관하여 아는 것이 없나이다.” 아비멜렉은 오진 진실만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의 말이 다윗을 변호하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나서 사형에 처했습니다. “아히멜렉아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요 너와 네 아비의 온 집도 그러하리라” 그날에 제사장 아히멜렉과 그 아비의 온 집, 곧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돌아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이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음이니라”(17) 율법에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재판이 성립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간신 도엑의 말만 듣고 사형판결을 내렸습니다. 모세의 유법에 의하면 반드시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합니다(신 19:15). 그러나 사울은 자기 자신이 곧 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하 중 아무도 여호와의 제사장을 죽이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에돔 사람 도엑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도엑은 어떻게 했습니까? 에돔 사람이 도엑이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쳐서 그날에 세마포 에봇을 입은 자 팔십오 명응ㄹ 죽였습니다(18). 또 19절을 보십시오.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도엑은 사울의 비호 아래 제사장 마을을 진멸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들을 잔혹하게 처형했습니다. 죄 없은 여자들과 아이들과 젖먹이까지 살해했습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었습니다(8:7). 제사장 아히멜렉은 좋은 일을 하고도 온 친족이 멸족을 당하는 원통한 일을 당했습니다.

사울이 왜 이렇게 잔학무도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왜 신하들도 믿지 못하고, 자기 아들도 믿지 못하고, 여호와의 제사장까지 죽이는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을까요? 왜 모든 사람을 대적으로 여겼을까요? 권력에 눈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권좌를 지키기 위하여 그는 포악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해질수록 그는 더욱 악수를 두게 되었습니다. 이는 리디바 대통령 가다피의 모습과 같습니다.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니까 백성들에게 미사일을 쏘고 수천 수만 명이라도 죽이고 자기의 권좌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가? 하수구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권력에 대한 집착이 사람을 괴팍하게 합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이 사람을 부패하게 만듭니다.

III.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다윗(20-23)

그런데 그들 중 한 사람,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탈출하여 사울이 제사장들을 죽인 사실을 다윗에게 이 사실을 전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말할 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버지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탓이로다” 그는 이 모든 사람의 죽음이 자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거짓말로 인해 많은 제사장들이 억울하게 죽은 것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불신의 죄악을 깊이 회개했을 것입니다. 자기를 도와준 죄로 온 가족이 몰살당한 제사장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좀 더 신중하지 못하였던 경솔함과 부주의함을 생각하며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훌륭한 점은 자신의 잘못을 즉시 시인하고 회개했다는 사실입니다.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도엑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사울을 미워하지도 않았습니다. “네 아버지의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은 나의 탓이로다.”고 하며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가끔, 회개한다고 하면서도 자꾸 변명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전적으로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괴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 억울하게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탓이로다고 하며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축복하시고 귀히 쓰십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 다윗은 하나님께서 지기를 안전하게 지켜 줄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아비아달을 안전하게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다윗은 아둘람 굴에서 환난 당한 자들과 빚 진 자들, 원통한 일을 당한 자들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목장이 아둘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에서 상처받는 사람들이 와서 쉼을 얻고 피난처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아둘람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내면에 사울과 같은 교만과 독선과 아집을 내려놓고 비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고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한단계 성장하는 디딤돌로 삼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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