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1.17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마음.봉사자.사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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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4]

20.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21.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22.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23.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24.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

25.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26.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27.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선을 행하는 길(잠 4:20-27)

앞에서 솔로몬은 악을 행치 말라고 우리에게 경고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어떻게 하면 훌륭히 행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범죄하게 되는 기회를 피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의무 수행의 방도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부단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그 말씀이 언제라도 우리에게 쓰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1. 지혜의 말씀은 우리 스스로를 규제하는 원리가 되어야 한다. 또 지혜의 말씀은 우리에게 의무와 위험을 경고해 주는 우리의 권고자가 되어야 한다.

(1) 따라서 우리는 그 말씀을 신속히 받아들여야 한다.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20절). 겸손히 그 말씀에 복종하며 부지런히 그것을 청취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깊게 듣는다는 것은 마음에 은혜의 역사와 시작됨을 알리는 좋은 징조이며 또한 은혜를 가져오는 좋은 수단이다. 말씀을 알고 싶어하는 자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의무를 행하겠다고 결심하게 되리라는 사실이다.

(2) 우리는 그 말씀을 조심스러이 보유해야 한다(21절).

우리는 그것을 규칙으로써 우리 앞에 두어야 한다.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라. 그것을 관찰하고 검토하여 무슨 일에서든지 그것에 맞추어라." 우리는 그것을 우리 안에 기거하도록 하며 하나의 지배 원리로 삼아서 그 영향력이 온 몸에 퍼지게 해야 한다. "네게 소중한 것인 양, 그리고 네가 잃어버릴까 하여 두려워하는 물건처럼 그것을 네 마음 속에 지키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 새기어 그 기록이 계속 남아 있도록 해야 한다.

2. 우리가 이처럼 지혜의 말씀을 중시해야 할 이유는 그것이 "생명 나무"처럼 우리에게 음식이 되고 약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계 22:2; 겔 47:12). 그것을 구하여 찾으며, 찾아서 지키는 자들은 그 안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 음식.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됨이니라"(22절).

영적 생명이 지혜의 도구인  말씀으로 시작되었듯이 바로 동일한 그 말씀에 의해 그 생명은 양육되며 계속 부양된다. 우리는 말씀 없이는 살 수 없으며, 믿음으로써 그 말씀을 먹고 살 수 있는 것이다.

(2) 약. 그것은 "저희 온 육체에 건강"이 된다. 즉 그것은 몸과 영혼을 포함한 전인(全人)에게 건강이 된다. 그것은 영과육을 아울러 좋은 상태로 유지시키는 데에 도움이 된다. 그것은 "모든 육체에 건강"이 된다(70인역은 그렇게 되어 있다). 말씀에는 이 병든 세상의 모든 질환을 치료하기에 충분한 것이 있다. 그것은 "저희 온 몸에 약"이 된다(이 말씀의 의미는 그렇다). 그것은 육신이라고 불리우는 저희를 썩게 하는 모든 것에 약이 된다. 또 말씀은 육에 가시 같은 저희의 모든 고통에도 약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우리의 영적인 모든 질병에 적절한 약이 있는 것이다.

Ⅱ. 우리는 우리 속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해 경계의 시선과 엄중한 손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23절).

1. 지혜를 얻고 보존하도록 하기 위해 지혜의 법이 요구하는 큰 의무가 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우리에게 이 영혼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그 영혼에 대해 우리에게 엄한 당부를 하셨다. 즉 남자나 여자나 "네 마음을 지키라. 네 심령을 조심하라"(신 4:9). 우리는 자신에 대해 거룩한 질투심을 계속 품지 않으면 안 되며 따라서 영혼의 모든 통로에 대해 엄중한 감시를 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마음을 가해와 피해로부터 지키며 죄로 더렵혀지지 않게, 고통으로 말미암아 동요를 받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 우리의 보석이나 우리의 포도밭처럼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한다. 범죄가 없는 양심을 견지하며 악한 생각을 들어오지 못 하도록 막아라. 선한 생각을 유지하라. 적당한 범위 안에서 정당한 대상에게 대한 애정을 품어라.

"모든 지킴으로써 그들을 지키라"(말 뜻은 그렇다). 사물을 지키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즉 조심하거나, 힘으로써 하거나 남의 도움을 요청해서 하는 수가 있는데 우리는 그런 모든 것을 다 사용하여 우리 마음을 지켜야 한다. 아무리 주의를 기울이고 온갖 것을 다 동원하더라도 오히려 부족하다. 마음은 그토록 부패하기 쉬운 것이다.(렘 17:19). 또는 "무릇6 지킬 만한 모든 것보다"(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라고 해석된다. 우리는 그 외의 어떤 것을 지킬 때보다 더욱 조심하고 부지런히 우리 마음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우리 눈을 지켜야 하며(욥 31:1) 우리 혀를 지켜야 하며(시 34:13) 우리 발을 지켜야 한다(전 5:1).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2. 이런 보살핌을 요구하는 것에 대한 충분한 이유는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나는" 때문이다. 잘 지켜진 마음에서는 생명의 근원이 유출될 것이며 선한 소산이 나와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타인들에게는 교훈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아 모든 생명의 행동은 마음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마음을 지키는 것은 나무를 훌륭하게 기르는 것이며 근원을 고치는 것이다. 우리 마음을 잘 지키는가 아니면 소홀히 버려두는가에 따라 우리의 생명이 규칙적으로 되든가 불규칙적으로 되든가, 안락한 삶이 되든가 불편한 삶이 되든가 결정될 것이다.

Ⅲ. 우리는 혀로 범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 입술의 문앞에 감시"를 세워두지 않으면 안 된다. "궤휼을 네 입에서 버리며 사곡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라"(24절). 우리 마음은 원래 부패한 것이므로 악한 표현이 쏟아져 나오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갖 악한 말에 대해 큰 두려움과 혐오감을 품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그것은 저주, 맹세, 거짓말, 중상모략, 말다툼, 음담패설, 횡설수설 등 "궤휼한 입과 사고한 입술"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이름인데, 이들은 이성이나 경건한 신앙의 규제를 받으려 아니하고 오히려 이 양자를 부인한다. 그래서 기형적으로 비뚫어지고 일그러진 입이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듯이 이런 말을 하는 입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흉하고 추한 것이다. 우리는 악한 못브을 한 모든 말을 삼가고 그런 말을 배울까봐 두려워하면서 혀로 범하는 온갖 모양의 죄를 끊임없이 감시와 확고한 결의로써 "우리에게서 버리지" 않으면 안되며 "우리로부터 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Ⅳ. 우리는 우리 눈과 계약을 맺지 않으면 안 된다.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앞을 곧게 살필지어다(25절). 네 눈을 고정되게 하며 이리저리 방황하게 하지 말라. 눈에 보이는 것마다 다 따라 다니지 말게 하라. 그렇게 될 때에는 네 눈이 선으로부터 벗어나 악의 유혹에 걸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헛된 것을 바라보는 일로부터 네 눈을 돌리라. 네 눈은 하나가 되게 하며 나뉘지 않게 하라. 네 뜻을 성실하고 균일하게 잡아 어떤 부수적 목적을 곁눈질 하지 말게 하라." 우리는 우리 주님께 눈을 고정시키고 그에게 우리 자신의 그렇다는 것을 입증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 시선을 우리의 목표 곧 "높은 데서 부르시는 상"에 못박고 우리의 눈을 전부 그쪽으로 향하자. oculum in metam-즉 눈은 목표에!

Ⅴ. 우리는 행하는 모든 일에서 사려깊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26절). "네 발의  행할 첩경을 헤아리며 그 길을 달아 보라(단어의 의미는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을 저울 한 쪽에 얹고 네가 행한 일이나  행하려고 하는 일을 다른 한 쪽에 얹어서 그 두 쪽이 평형을 이루는지 살펴 보아라. 네 길이 여호와 앞에서 선한지의 여부와 그 끝이 좋을런지의 여부를 검사함에 있어 한 눈금이라도 따지고 한치라도 관용하지 말라."

우리는 과거에 지나온 길을 살펴야 하며 우리가 행한 일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길, 즉 우리는 무엇을 행하고 있으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가 근신하여 행하고 있는가 하는 것도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우리 길의 의무가 무엇이며 어려운 점들은 무엇이고 유리한 점은 무엇이며 위험은 무엇인지 고찰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이는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무슨 일이든지 경솔히 행하지 말라."

Ⅵ. 우리는 견실성과 경각심, 그리고 일관성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26절).

그리하여 그길 안에서 두마음을 품은 사람처럼 불안정하지 않도록 하라. 두 길 사이에서 엉거주춤하니 서 있지 말고 평탄하고도 일관성 있는 순종의 길로 나아가라.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라(27절). 이 양편에는 다 잘못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사탄이 어느쪽 길이든 한 쪽으로 가도록 우리를 이끄는 데 성공한다면 그는 자기 목적을 이루는 셈이 된다.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는 데에 주의를 기울이라. 극단을 삼가라. 왜냐하면 거기에는 악이 있기 때문이다. 네 눈을 바로 보라. 이는 너로 하여금 중용의 도를 지킬 수 있도록 해 준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슬기 있는 자로 입증시키고자 하는 이들은 언제나 감시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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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B]잠 4:23 

Watch over your heart with all diligence, For from it flow the springs of life. 

[NRSV]잠 4:23 

Keep your heart with all vigilance, for from it flow the springs of life. 

[NKJV]잠 4:23 

Keep your heart with all diligence, For out of it spring the issues of life. 

[NIV]잠 4:23 

Above all else, guard your heart, for it is the wellspring of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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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61:1-11]---하나님의 봉사자 =하나님의 둘로스 =사랑안에서 서로 둘로스됨 실행---
1.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4.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옛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5.외인은 서서 너희 양 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6.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
7.너희가 수치 대신에 보상을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몫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그들의 땅에서 갑절이나 얻고 영원한 기쁨이 있으리라
8.무릇 나 여호와는 정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라
9.그들의 자손을 뭇 나라 가운데에, 그들의 후손을 만민 가운데에 알리리니 무릇 이를 보는 자가 그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
10.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11.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 주 여호와께서 공의와 찬송을 모든 나라 앞에 솟아나게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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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v;(8334, 샤라트) 섬기다, 봉사하다.... 온전함 위해 하나님앞에서 하나님을 섬김/선포/대리/중재/가르침 + 사랑의 둘로스 됨 살아감
샤라트(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섬기다, 봉사하다 minister, serv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97회 나오며, 피엘형으로만 사용되었으며, 용례 중 20회는 분사 메샤레트로 나오는데 '사역자 minister'라는 뜻의 명사로 사용된다.
샤라트의 용법은 자연적으로 ① 중요한 인물, 보통 통치자에게 드려지는 개인적 섬김. ② 제사장과 같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이 있는 자들 편에서 행하는 예배의 사역이라는 두 범주로 분류된다.
샤라트가 시사해 주는 종의 높은 지위 및 그가 주인과 맺고 있는 특별한 관계를 창 39:4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요셉은 보디발의 재산에 관한 모든 업무를 이양받고 있다. 창 39:8과 창 39:9에서 요셉은 보디발이 가중의 제반 소유를 간섭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요셉의 관할에 맡기고 자기 아내를 제외한 그 어떤 것도 그에게 허락하지 않은 것이 없었던 것이다. 대하 22:8에서 아하시야왕의 조카들은 아하시야를 섬기는 자들로 나온다. 이 사람들은 분명히 하인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에 2:2에서 왕의 시신들은 왕의 주의를 끌고 왕이 따르게 될 의견을 제시할만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 엘리사의 사환은 메샤레트(섬기는 자 minister)로 지칭되었다(왕하 4:43, 왕하 6:15). 엘리사 자신도 처음 선지자로 부름받았을 때 엘리야와 이러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왕상 19:21). 여호수아는 모세의 제일 조수였다(출 24:13, 출 33:11, 수 1:1). 엘리사의 경우처럼 그도 나중에 자기의 전 주인의 지위를 계승하였다.
둘째 범주는 주로, 성막에서 그리고 나중에 성전에서 봉사하였던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을 포괄하고 있다(한 구절, 시 103:21에서는 천군들이 그와 같이 지칭된다). 수많은 구절에서 그들의 봉사가 특히 성소와 관련되어 있다. 예컨대 출 28:35은 성소에서의 아론의 사역을 말하며 출 28:43은 아론의 아들들이 제단에서 섬긴다고 언급하였다(참조: 욜 1:13). 레위인들도 그와 같이 지칭되었다. 대상 6:17과 대상 16:4, 대상 16:37은 노래와 예배와 찬양에 있어서의 그들의 사역에 대해 말한다. 삼상 2:11, 삼상 2:18과 삼상 3:1에서 사무엘은 엘리의 조수로 성막에서 섬기는 일을 한다.
제사장의 특별한 지위가 단지 의식이나 예식상의 지위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다.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대표하는 장중한 책임을 지니고 있었고 바로 그들의 사역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나아갔던 것이다. 그들이 또한 백성들 앞에서는 하나님의 공적 대리자라는 위치에 있었다. 그 자격으로 그들은 개인 간의 분쟁을 수습하였다(신 2:15). 그리고 신 17:12에서 하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종 제사장에게 청종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라고 명하신다.
시 101:6은 하나님 존전에 거하며 그를 섬길 자는 그 앞에서 흠없이 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요절이다. 이것은 명백히 단순한 의식상의 정결 그 이상을 뜻한다. 마침내 한 지파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 국가가 하나님의 제사장들로서 그를 섬길 것이며(사 61:6) 그리하여 "제사장 나라"로서의 그들의 소명을 완수하게 될 것이다(출 19:6). 그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이 특권 계급에 가입된다는 사실이 사 56:6-9에서 예기되고 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이 겸손하게 자신들을 비천한 종으로 인지하는 한편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고 그를 섬길 것이라는 사실이다.(H. J. Austel)(참조: BDB; TDNT;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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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의 직분(사 61:1-3)
성서의 가장 좋은 해설자가 이 구절의 설명을 가장 훌륭히 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사렛에 있는 유대인 회당에서 이 말씀을 읽으신 우리 주 예수 자신이 그 말씀을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켜 말씀하시기를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눅 4:17, 18, 21)고 하셨다. 또 그의 말씀을 듣던 자들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을 기이히 여기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 이사야가 권세와 지시를 받아 바벨론의 유대인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셨듯이 하나님의 사자인 그리스도께서는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안식년을 선포하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듣게 된다.
Ⅰ. 그리스도는 이 일을 선포하는데 알맞는 사람이며, 자격을 갖춘 사람이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다" (1절).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또한 그것을 그들에게 말하도록 자극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스도께는 성령이 항상 그 위에 머무르셨다. 선지자와 꼭 같이 그에게도 모략과 지혜의 신에 머물렀다(사 11:1-3). 그가 자신의 예언자적 직분을 수행하게 되었을 때 그에게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고(마 3:16) 그는 이 성령을 자신의 사역자들에게 주셨다. 즉 그는 이 기쁜 소식을 전파하라고 사명을 주어 보내시면서 "성령을 받으라" 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인준하셨다.
Ⅱ. 그리스도는 이 일에 임명되고 성직을 부여받은 분이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신" 때문이다(1절). 하나님께서는 어떤 봉사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부르셨으며, 그에게 무엇을 주셨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고 엄숙한 도구로서 그리스도에게 이런 위대한 직책을 맡기셨다. 그것은 마치 옛날 왕들이나 제사장들이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그들의 직분을 부여받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구속자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 라 불리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즐거움의 기름으로 그에게 부어 그의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기 때문이다(시 45:7). "그는 나를 보내셨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보냄을 받지 않고는 오시지 않는다. 주 예수께서는 능력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았다. "아버지께서 그를 보내셨고, 그에게 명령을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천국의 영장과 증명이 부착된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큰 만족이 된다. 그의 가르치심은 그의 것이 아니라, 구분을 보내신 하나님의 것이다.
Ⅲ. 그리스도가 기름부음을 받고, 성직을 받은 것은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인가?
1. 그는 선포자가 되어야만 했으며, 선지자의 직분을 실행해야만 했다. 그는 자기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선한 뜻을 매우 기뻐하여 기꺼이 그 선포자가 되려고 했고 그럼으로써 복음의 사역이 존귀케 되며 성도의 신앙은 확고하게 되고 용기를 얻게 되었다. 그는 겸비한 자와 회개자 즉 겸손하고 마음이 가난한자에게 아름다운 소식(복음의 의미도 그렇다)을 전파해야 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구속자의 복음은 정말로 기쁜 소식이 될 것이며, 순수한 복음이 될 것이다. 또한 그 복음은 "믿음으로 가득 찬 말씀이요,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가치가 있는 말씀인" 것이다(딤전 1:15). 가난한자들이 대게 복음을 가장 잘 받는 자들이다(약 2:5). 복음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이익이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고 말씀하셨을 때는 그런 자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파하신 것이다.
2. 그는 치료자가 되어야만 했다. 그는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다(1절). 고통받는 사지를 편안하게 하고 피흘리는 상처를 싸매서 다시 유착하게 하듯 그리스도께서는 치료하신다. 죄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죄의식과 진노의 두려움 속에서 겸손하게 된 사람들은, 그들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고 두려움을 없애 줄 어떤 것을 그리스도의 복음 속에서 얻는다. 완전한 통회의 아픔을 경험했던 자들만이 하나님의 진심과 위로의 기쁨을 기대할 수 있다.
3. 그는 구원자가 되어야만 한다. 그는 전파하는 선지자로서 보냄을 받았으며, 병을 고치는 제사장으로서 보냄을 받았고, 왕으로서 다음과 같은 종류의 포고문을 선포하기 위해 보냄을 받았다.
(1) 그의 친구들에게 대한 화평의 선포. 그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할 것이다" (1절). 그것은 그 당시 바사 제국을 건설한 "고레스가" 포로 상태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향했던 것과 같았다. 또한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할 것이다" (1절). 죄를 지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에 묶이고 율법의 포로들이 되었으며, 그 죄로 인하여 팔려감을 당했고, 마침내는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빚을 갚기 위하여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키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신다. 하나님께서는 만족하여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셨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간청하고 의지한다면 그리고 우리 자신과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고맙고 친절한 느낌 속에서 그분에게 마땅히 해야만 하는 모든 것을 한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의 용서를 청구할 수도 있고, 위로를 받을 수도 있다. 지금 "우리를 정죄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죄가 지배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탄의 세력 속에 있게 되었고 죄 아래 팔린 몸이 되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을 정복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 그분께서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사탄을 없이 하시며 사탄이 하는 일을 파괴하셨다(히 2:14)는 것을 알려 주신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죄의 멍에를 꺾어버리며 우리 목에 매인 줄을 풀어 버릴 수 있을만큼 충분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바로 그때 우리는 "정말로 자유로울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들을 비참한 포로 상태에서 건져 주실 뿐만 아니라 모든 무거운 짐을 면제해 주시고, 시민으로서의 품위를 높여 주실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선포이다. 그 소리는 안식년을 알리는 나팔 소리와 같을 것이다. 그 나팔 소리는 대사령의 해를 선포했다(레 25:9, 40). 본문은 이를 암시하여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 (또는 여호와의 열납하시는 해)이라고 칭한다. 바로 그 때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시는 때인 것이다. 그것은 모든 해방의 근원이다. 또는 그것이 "여호와의 날" 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그것이 그의 자유로운 은혜를 선포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림으로 열납할 만한 해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 해는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가져오며 그들 자신의 영혼의 능력과 필요성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날이기 때문이다.
(2) 그의 원수들에게 대한 선전 포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원수갚는 날" 이 있다는 것을 선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복수하신다.
① 하나님께서는 죄, 사탄, 죽음, 지옥, 이런 모든 암흑의 권세를 멸절하여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이런 모든 것에게 승리하셨다. 그는 그것들을 멸망시키고 약하게 하고 부끄럽게 하고 밝히 드러내어 하나님과 인간에게 입혔던 모든 피해에 대해 그들에게 복수하셨다(골 2:15).
② 이런 아름다운 제의를 끝까지 거부하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은 복수하실 것이다. 그들은 사로 잡힌 가운데 방치될 뿐만 아니라 원수로 취급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왔다(막 16:16). 어디서든지 간에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구원의 날을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여호와의 해" 가 선포될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믿지 않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않는" 사람들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복수의 날을 선포하신다" (살후 1:8).
4. 그는 위로자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는 선포자, 병고치는 자, 구원자, 위로하는 자인 것이다. 그는 "애통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다. 그러므로 애통으로 위로받고자 원하는 자는 세상을 찾지 말고 그를 찾아야 한다. 그들에게 그것을 공급해 주신다. 그는 성령으로써 그들을 위로하신다. 그들의 아픔과 슬픔이 무엇이든 간에 그에게는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위로는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들에게 확실히 임할 것이다. 그의 사시는 곳이 시온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따라 즉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여 슬피우는 자들에게 임한다. 비록 그들 스스로가 고통 중에 있진 않을지라도 시온의 재난과 황폐 때문에 슬피우는 자들과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동정의 눈물을 흘리는 자들에게 위로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의 눈물을 담을 "병" 을 가지고 계신다(시 56:8).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애통하는 자들을 위하여 위로를 준비하고 계신다. "시온에서 나오는 축복이 영적 축복인 것" 과 같이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들은" 거룩한 애도자이다. 그들은 슬픔을 은혜의 보좌 앞에 가져와 한나와 같이 그것들을 여호와 앞에 쏟는 자들이다(왜냐하면 시온에는 속죄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으로 이것들을 약속하셨고 성령으로 그들에게 부어 주실 것이다(3절). 그 성령은 그들로 슬픔을 견디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애가를 찬양으로 바꾸는 위로를 주실 것이다. 그 분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주실 것이다.
(1) "재를 대신하여 아름다움(화관)을 주실 것이다" (3절). 크게 슬퍼할 때면 그들은 으레 재 속에서 딩굴었다. 그러나 그들은 티끌에서 일으킴을 받을 뿐만 아니라 즐겁게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경건하면서도 쾌활한 모습이 바로 아름다움이며, 그 신앙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이다. 원문에는 우아한 "재담" 이 나온다. 즉 그는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pheer ----즉 화관(원의:아름다움)을 주어 epher ---- 즉 재를 대신할 것이다. 그는 마치 글자를 바꾸는 것 만큼이나 쉽게 그리고 빨리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놓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면 그것은 곧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2) "희락의 기름" 은 슬픔을 대신하여 얼굴을 빛나게 한다. 울음은 얼굴을 흉하게 하는 것이며 사랑스럽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이 "즐거운 기름" 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받는다. 그러나 그리스도 자신은 "기쁨의 기름" 을 받아 동료들보다 승하게 되었다(히 1:9).
(3) "찬송의 옷" (3절)은 감사절에 입는 아름다운 옷 따위를 말하는데 이 옷이 슬픔과 어두움과 근심을 대신한다. 그들은 슬픈 마음을 그들 스스로 간직하고 있었다. 시온의 애도자들은 남몰래 운다. 그들은 기쁨으로 옷을 입어 다른 사람들 보기에 좋았다. 하나님께서는 기쁨의 기름을 주시는 곳에 찬송의 옷도 아울러 주신다. 하나님께로서 오는 위안들은 마음을 정해 주고, 마음을 확대시켜 주며, 하나님께 감사하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얻을 때면 꼭 그에게 영광과 찬송을 돌려야 한다.
5. 그는 심는 자가 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묘목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이러한 모든 것을 행하실 것이다. 또한 그들의 상처를 치료해 줄 것이다. 또한 그들의 상처를 치료해 줄 것이며, 속박에서 그들을 건져 주실 것이다. 또한 그들의 슬픔을 위로해 주실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심으신, 의의 나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그런 사람들이 될 것이며 그러한 사람들로 인정받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포도원을 꾸미는 자며, 또한 "하나님께서 심은" 나무 가지들로서, 영광으로 나타날 것이다(60:21).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모든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시는 일이며, 그분을 섬기는 방법은 "여호와의 집에 심겨지고" 또한 "하나님의 성전에서 자라" 고 있는 살아있는 나무와 같다. 그분은 이러한 모든 것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헌신과 모범적인 대화로 그분에게 영광을 돌릴 것이다.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이다." 또한 어떤 사람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비취는 하나님의 은총과 그 백성 안에서 비취는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에게 찬양을 돌릴 수 있게 된다. 그분은 영원토록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을 분이시다."
교회의 번성 (1)(사 61:4-9)
여기에는 포로에서 돌아온 뒤 고토에 재정착하는 유대인들에게 주시는 약속이 나오고 있다. 이 약속들은 확대하여 복음 교회에 적용된다. 은혜를 통하여 영적 노예 신분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모든 신자에게도 적용된다.
Ⅰ. 그들의 집들은 재건될 것이라고 약속되고 있다(4절). 그들의 성읍은 오랫동안 황폐했던 곳에서 다시 쌓여질 것이다. 그래서 다시 사용하기에 알맞도록 될 것이다.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로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重修)할 것" 이다(4절). 과거에 결코 다시 쌓을 수 없으리라고 염려하던 것이 높이 쌓여질 것이다. 세상에 기독교를 설립하는 것은 자연 종교의 부패를 고쳐 쌓는 것이며 여러 세대를 걸쳐 인류에게 비난받아 온 황폐된 경건과 정직을 쌓는 일이다. 성별받지 않은 영혼은 폐허된 집과 같고 성벽이 무너진 성읍과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과 은혜의 권능으로 그것은 복구되고 다시 질서정연하게 되며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거소가 되게 되었다. 포로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이것을 행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영광된 전으로 세우고 땅 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데 이바지함으로써 그를 섬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예 속의 집에서 구출된 까닭이다.
Ⅱ. 얼마 전까지도 압제자들을 위해서 수고하고, 그들의 처분대로 맡기던 종들이 이제는 오히려 자기들의 일을 할 종들이 있으며, 무엇이나 명령하면 하는 종들을 가지게 되었다. 그 종들은 성도들이 아니라, 땅끝까지 성도들의 양떼를 치는 외인들이며, 이방인들이다. 그들은 아벨, 가인, 아담의 일터인 동산을 가꿀 것이다. "외인은 서서 너희 양떼를 칠 것이다" (5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모든 이 세상사에 대해 거룩한 무관심을 품으며 마치 없는자같이 애매하게 (고전 7:30), 비록 우리의 손은 그 일에 이용되고 있더라도 우리의 마음은 그들의 일에 얽혀들지 않으며 오로지 하나님과 그의 봉사를 위해 예비될 때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 지기가 될 것이다" (5절).
Ⅲ. 그들은 포로에서 해방될 뿐만 아니라, 아주 애호를 받아 영광스러운 일을 맡게 될 것이다. "이방인들이 너희 양떼를 치는 동안에 너희는 성소를 맡게 될 것이다. 너희는 주인의 노예라는 이름대신에 높고 거룩히 불리우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다" (6절). 그 당시 제사장은 군주의 귀족이었고 그래서 히브리어로 제사장은 그런 이름으로 불리웠다. "너희는 레위인처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고 불리울 것이다" (6절).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해방시키는 자들로 일하게 하신다는 데 유의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원수의 손에서 건지사 그들로 자기를 섬기게 하신다(눅 1:74, 75; 시 116:16). 그러나 하나님께 봉사하는 일은 완전한 자유다. 아니, 그것은 가장 큰 영광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지셨을 때 그들을 자기의 "제사장 나라" 로 삼으셨다(출 19:6). 복음 교회는 "왕 같은 제사장" 이다(벧전 2:9).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들을 왕들과 제사장으로 삼았다. 그들은 "여호와의 제사장들이라 불리기" 위해서는 이마에다 "여호와께 성결" 이라고 기록하고 신앙 생활과 모든 언행 심사에서 그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만 한다.
Ⅳ. 이방 개종자들의 재물과 명예는 교회의 이익과 신망에 이바지할 것이다. 이방 사람들이 교회로 인도될 것이다. 과거에 이방인이었던 자들이 앞으로는 "성도들과 똑 같은 동료 시민들" 이 될 것이다. 그들은 자기 소유 전부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께 대한 봉사에 사용할 것이다. 제사장들과 여호와의 봉사자들은 그것으로 인해 이익을 얻을 것이다.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이익을 위해 힘쓴다는 것은 모든 선한 신자들에게 위로와 격려는 물론 커다란 강화와 자극이 될 것이다.
1. 그들은 열방의 재물을 먹을 것이다. 그들이 그 재물들을 폭력을 써서 빼앗은 것이 아니라, "제단에 바치는 예물" 로서 그들에게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제공된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장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이 예물로 안락하게 살았다. 본문은 "너희가 열방의 제물을 쌓거나 소중히 간직하리라" 고 말하지 않고 "너희가 그것을 먹으리라" 고 말한다. 왜냐하면 재물을 사용하고 또한 그 재물로써 선한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기 때문이다.
2. "그들은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다" (6절). 개종한 이방인의 과거 명예 즉 개종하기 전 그들의 고귀한 신분, 학식, 미덕, 지위 권세는 그들이 가입한 교회의 명성으로 변할 것이다. 개종한 뒤의 명예가 무엇이든간에 그들의 거룩한 열심, 엄격한 행위, 유용함, 인내심, 하나님의 은총으로 나타나게 된 복된 변화 등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큰 기여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들은 그것으로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다.
Ⅴ. 그들은 가슴속에 풍부한 위로와 만족을 가질 것이다(7절). 유대인들은 의심할 나위도 없이 귀환 후에 이런 특권을 받았다. 그들은 새 세계에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자유와 재산과 끊임없이 새롭게 피어나는 기쁨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았다. 하물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자녀에게 영화로운 자유를 허락하실 때는 그 기쁨이 어떠하겠는가! 특히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진 특권이 몸의 부활로 완성될 때에는 더 더욱 그렇다.
1. 그들은 자기들의 분깃을 기뻐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소유를 다시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보다 나은 선물인 위로를 얻을 것이며, 그로 인하여 마음이 즐거울 것이다(전 3:13). 성전은 말할 것도 없고 귀환한 유대인들의 집들이 포로 이전보다 훨씬 보잘 것 없었을지언정 그들은 그것들을 보고 즐거울 것이며, 감사할 것이다. 그것은 고토 즉 거룩한 땅 임마누엘의 땅에 있는 분깃이다. 땅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땅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것이 이방 나라에 있는 이방 사람들 것이라고 알아 왔기 때문에 더욱 더 그 분깃을 기뻐할 것이다. 하나님과 천국을 자기 분깃으로 소유하는 사람들은 가치있는 분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만하며 즐거워할 만한 이유가 있다.
2. "영원한 기쁨이 그들에게 있을 것이다" (7절). 즉 그 백성들의 즐거운 상태는 포로 기간보다 훨씬 더 오래 계속 될 것이다. 그러나 유대 민족의 즐거움은 무척 감소되었고 빈번히 방해를 받았으며, 너무 빨리 종결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신자의 영적 즐거움과 천국에서 소망하는 그들의 영원한 기쁨에서 이 약 속의 성취를 찾아야 한다.
3. 그들이 포로의 땅에서 겪었던 치욕과 고통을 대신하여 그들에게 두 배로 아니 그 이상의 기쁨으로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수치 대신에 두 배의 영광을 얻을 것이며, 너희가 잃어버린 것 대신에 너의 땅에 두 배나 많은 재물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7절).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과 너희의 위로가 너희가 받은 모든 손실에 대해 풍성한 배상을 할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 로서 뿐만 아니라, "장자" 로서 상속을 받을 것이다(출 4:22). 그러므로 두 배의 분깃을 받을 권리가 있다. 포로로 있을 때의 불행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들은 마음속에 자기들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배나 받았다고 말했듯이,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의 불행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들은 마음속에 자기들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배나 받았다고 말했듯이,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의 즐거움도 대단히 컸기 때문에 그들은 마음속으로 "그 모든 수치에 대하여 배의 즐거움을 받았다고 할 것이다" (40:2). 전자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배상에 대해 적용될 수 있으니 곧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죄를 인하여 그리스도께 배로 받으셨던 것이다. 후자는 천국의 완전한 기쁨에 적용될 수 있으니 곧 우리는 우리의 모든 봉사와 고난을 인하여 배 이상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욥의 경우는 이것을 설명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을 주셨던 것이다(욥 42:10).
Ⅵ.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충실한 안내자가 될 것이며, 그들과 계약을 맺으실 것이다. "나는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줄 것이다" (8절). 하나님께서는 섭리로 그의 진리의 말씀에 따라 그들의 일들을 가장 좋은 곳으로 지시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을 진정한 번영의 길로 안내할 것이고, 성실한 정책에 의해 인도할 것이다. 그는 은혜로 말미암아 선한 백성들의 일들을 옳은 길로 지시하실 것이다. 또한 행복에 이르는 진실한 길로 인도할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진실을 행하도록 지시하실 것이며, 그들이 자기를 기뻐하도록 지시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에 진실함을 원하신다" (시 51:6). 만약 우리가 진리 속에서 우리의 일을 행한다면 "그분은 우리와 영원한 계약을 맺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앞에서 행하는 정직한 자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되어 주시는 때문이다. 이 약속과 그 앞 약속(너희가 수치 대신에 배나 얻으리라)의 이유로써 "나 여호와는 공의를 사랑하노라" 는 말씀이 나온다. 그분은 공의가 사람들 사이 즉 위정자와 백성, 이웃과 이웃 사이에 베풀어지는 것을 좋아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불의를 미워하신다. 압제자나 핍박자가 자기 백성을 억울하게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기뻐 아니하신다. 이는 그들이 자기 백성들을 그릇 대한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나쁘고 영원한 평등의 규칙을 어겼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들이 공의를 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공평을 좋아하시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자들을 고쳐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을 처벌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대하여 질투하실 뿐만 아니라, 정의를 위해서도 질투하시기 때문에 그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신원해 주신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는 번제를 드리기 위하여 노략질한 것을 싫어하신다." 그분은 자기 백성들이 불의를 행하는 것을 미워하신다. 그의 백성들은 그들이 가진 것을 가지고 번제를 드려 그를 존귀케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불의한 제물을 드릴 때 더욱 더 미워하신다. 만약 그분께서 자신에게 드리는 번제물이 강탈한 것일 때 미워한다면, 우상에세 번제를 드리는 번제물이 강탈한 것일 때 더욱 더 미워하시리라. 그 백성들이 자기 신분을 강탈했을 뿐만 아니라, 그분도 그 번제물을 강탈당했을 때 더욱 더 싫어하신다. 의식 예배가 도덕적 교훈의 위반을 보상하지 못하며 "그것이 제사를 위한 것" 이라거나 "그것이 고르반 즉 하나님께 대한 예물" 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의 강도짓이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크게 보탬이 되는 진리이다. 순종은 제사보다 낫고 수 천 마리의 양을 드리는 것보다 공의를 행하고 자비를 행하는 것이 낫다. 아니, 이런 위선으로 뒤덮인 강탈은 하나님께 미움받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로운 하나님을 불의의 수호신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것을 이방인의 출입을 거절한 유대인들의 거절 이유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도덕적으로 너무나 부패했고 박하와 회향의 십일조는 드리면서도 공의와 자비를 베푸는 데는 무관심했기 때문이다(마 23:23). 그런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사랑하시고 공평을 주장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번제를 위한 강탈물과 강탈물을 위한 번제 역시 싫어하신다. 바리새인은 과부의 집을 보다 그럴듯하게 삼키기 위해 기도를 길게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불의로 강탈하는 것을 미워한다." 즉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원수들이 부당하게 그들을 약탈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싫어하셨으므로 그들과 이에 대해 셈하실 것이다.
Ⅶ.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자손들에게 축복을 주실 것이다(이제 여호와의 축복받은 자이며, 그들의 직업을 계승하는 자이며, 교회의 자손인). 사람의 자녀들이 "대대로 주를 전할 것이다" (시 22:30).
1. 그들은 유명해질 것이며, 그들의 이웃들이 그들을 알아 볼 것이다. "그들은 열방 중에 알려질 것이다" (9절). 그들은 스스로가 진지하고, 신중하고, 겸손하고, 행동에 즐거움을 가짐으로써 열방들과 스스로 구별될 것이다. 특히 형제애로써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줄 알 것이다. 그들은 이와 같이 자신들을 구별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고귀하게 보이도록 하실 것이며 그들을 그 시대의 축복이 되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도구로 삼으시며 그 은혜의 확실한 증거를 그들에게 주심으로써, 그들을 탁월하게 하시며,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게 하실 것이다. 경건한 부모들의 자녀들은 그렇게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사랑을 해야 할 것이다. 그 자녀들을 관찰하는 모든 사람들은 좋은 교육의 성과들을 볼 것이며, 그들을 위해서 한 기도의 응답도 볼 것이다. 바로 그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 속의 성취로써 자기들을 알리실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정직한 세대는 복을 받을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이로써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보는 자는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볼 것이며, 사람들은 그들이 여호와께 복받았고 복받고 있는 자손이라고 인정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둘 다 해당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축복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주목하라. 어떤 선한 것이든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열매로서 인정받아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 인해 영광을 받으셔야만 한다.
교회의 번성 (2)(사 61:10-11)
어떤 사람은 이 부분을 선지자가 예루살렘의 이름으로 부른 기쁨과 찬송의 노래라고 생각한다. 선지자가 이전 약속들의 성취로 인하여 예루살렘이 행복한 환경으로 전환한 것을 축하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복음의 은혜를 즐거워하며 신약 교회의 이름으로 노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양자를 다 받아들이되 전자를 후자의 예표로 생각할 수 있다.
Ⅰ.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룩한 즐거움을 가지고 서로 즐거워하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1. 이 선한 일이 시작될 때 교회는 "의와 구원의 옷" 으로 입힐 것이다(10절). "내 영혼이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즐거워하리라."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들은 크게 기뻐할 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삼을 때 우리는 커다란 기쁨 속에서 곤경에 빠질까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가장 첫 번째 복음의 노래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이라" (눅 1:46, 47). 이 즐거움에는 마땅한 찬송 제목이 있으며 왜 즐거움이 하나님에게서 종결되어야 하는지 온갖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구원과 의는 소개되고 완성되며 교회는 구원과 의의 옷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위하여 역사하셨던 구원과, 그들을 위해 나타내 보인 하나님의 의와, 그들 사이에 나타난 그러한 개혁은 마치 그들이 예복이나 결혼복을 입고 있는 듯이 그들을 모든 현인들의 눈에 영광스럽게 보이도록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정말로 크고 영원한 구원으로써 교회를 옷 입히셨다. 또한 의로 옷 입힘으로써 교회는 의롭다 인정을 받고 거룩하게 되었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계 19:8). 구원과 의는 함께 다닌다. 오직 그들만이 후에 구원의 옷으로 입혀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의의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옷들은 제사장들의 옷처럼 화려하고 훌륭한 옷이다. 그 옷으로써 "신랑은 단장한다" (10절). 그것은 태양의 밝음에 비유된다. "그는 완전히 단장을 하고 그의 방으로부터 나오는 신랑과 같다" (시 19:5). 의의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아름다움은 이와 같으니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되고, 성령께서 거룩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그들에게서 새롭게 되었다. 그들은 신부처럼 단장되어 하나님께 맞아들여지고 그와 언약을 맺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고용된 제사장으로서 옷입혀졌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었다.
2. 이 선한 사업의 진행과 계속에서(11절) 그 날은 당장에는 영광스러우나 곧 지나가 버리는 개선 일과 다르다. 축제일과도 다르다. 교회가 의와 구원으로써 입는 옷은 영속적인 옷이다(사 23:18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와 구원으로 옷입힘으로써 교회는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다. 장차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이 발생할 것과 원방에까지 퍼질 것을 생각하고 교회는 기뻐하는 것이다.
(1) 의와 찬송들은 해마다 산출되는 땅의 소산물처럼 장차 올 세대를 위해 발생하게 할 것이다. 어떤 땅이든지 해마다 "새싹을 내며," 해가 돌아오면 파릇파릇한 풀을 내고, 계절이 되면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같이 주 여호와께서 은혜의 언약으로 발생하게 하실 의와 찬송은 지당하며 영구불변하며 강렬하며 인류에게 혜택을 입힐 것이다. "주 여호와께서는 의와 찬송을 열방 앞에 발생하게 하실 것이다" (11절). 전과 같이 은혜의 계약에 따라, 신의 섭리의 계약에 따라 "의와 찬송을 발할 것이다." 약속된 축복이 무엇인가를 보라. 의로써 옷입혀졌던 사람들은 자기들을 옷입히신 분에게 "찬송을 나타낼 것이다." 이슬 같은 하나님의 은총 아래서 의와 찬송이 솟아날 것이다. 이런 축복들이 시들어 버리고 나타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겨울이 교회에 찾아오는 때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뿌리는 흔들리지 않고 고착되어 있어서 봄철이 되면 의로운 태양의 소생시키는 영광이 다가옴으로써 그들은 다시 번창하게 될 것이다.
(2) 의와 찬송은 멀리 퍼질 것이며, 모든 "열방 앞에서 발생할 것이다" (11절). 큰 구원이 온 세상에 선포되고 전파될 것이며,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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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koniva(1248, 디아코니아) 봉사, 직무, 집사의 직무...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을 존귀히 여기며 생명-사랑 공급 위해 맡은 바(복음선포-섬김-도움 그 모든 것)를 겸손과 사랑으로 섬기는 둘로스 
1. 일반 헬라어 문헌과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디아코니아는 디아코네오(diakonevw, 1247: 봉사하다, 섬기다)에서 유래했으며, 봉사하는(섬기는) 활동, 곧 '봉사'를 의미한다. 일반 헬라어와 70인역본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나온다. 그러나 디아코니아는 외경에서 오직 두 번 중요하지 않은 경우에 사용되었다(1Maccabees 11:58; Esther 6:3,5).
2. 신약성경의 용법 
디아코니아는 신약성경에서 34회 나타난다, 이 단어는 사도행전에는 흔히 나타나고 바울 서신에는 매우 자주 나타나는데, 복음서에는 눅 10:40을 제외하고는 나타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서
(a)  이 단어는 '식사의 시중을 드는 것'(waiting at table), 더 넓은 의미로 '육신의 식물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눅 10:40). 초대 교회에서 '식사 관리'는 행 6:1에서 '디아코니아 카데메리네'(개역: 매일 구제), 즉 매일 급식이라고 하였다.
(b)  이 단어는 진정한 '사랑의 봉사 수행'(discharge of service)에 대하여 사용된다. 스데반의 집은 성도 섬기는 일에서 그 대표적인 예이다(고전 16:15). 계 2:19에서도 이 '사랑의 봉사'를 의미하며, 사업, 사랑, 믿음, 인내와 연결되어 있다. 이 개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결정적 요점은 초대 기독교회가 공동체의 교화를 위한 모든 중요한 활동을 디아코니아로 알고 묘사하였다는 사실이다(엡 4:1l - 엡 4:12).
고전 12:4이하에 의하면, 여러 가지 직임(디아이레세이스 디아코니온)과 여러 가지 역사(디아이레세이스 에넬게마톤)에 부합하는 여러 가지 은사(디아이레세이스 카리스마톤)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서로 다른 봉사들은 모두 같은 주께 바쳐진다. 그들 각자에게 있어 신자는 그의 형제요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그는 은혜의 선물로 그에게 맡긴 봉사를 할 책임이 있다.
일반적으로 고전 12:28에 언급된 안틸렙시스(ajntivlhyi", 484: 돕는 것)는 이러한 봉사 행위의 내용, 즉 공동체를 돌보고 도우는 활동을 형성해야 한다.
롬 12:7에서 디아코니아는 프롭헤테이아(예언)와 디다스칼리아(가르침) 사이에 온다.
그러나 행 6:4에서는 말씀의 전파까지도 바로 디아코니아, 즉 생명의 떡으로서의 복음의 제공으로 묘사되어 있다. 전도자의 참된 봉사는 그의 형제들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며, 따라서 그는 화목케 하는 말씀을 그들에게 전파함으로 말미암아 텐 디아코니안 테스 카탈라게스(화목케 하는 직책[봉사])를 다해야 한다(고후 5:18이하).
히 1:14에 보면 이 점에서 천사들은 하나의 모델이다: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봉사는 복음(Gospel)으로 지향한다. 고후 3:7 - 고후 3:9에서 율법을 지키려는 모든 노력은 디아코니아 투 다나투(개역: 죽게하는 직분), 디아코니아 테스 카타크리세오스(개역: 정죄의 직분)이며, 한편 복음에 대한 믿음은 디아코니아 투 프뉴마토스(개역: 영의 직분), 디아코니아 테스 디카이오쉬네스(개역: 의의 직분)이다. 바울이 새로 만든 이런 문구는 기독교의 봉사(service)의 개념의 변증적 긴장 상태를 나타낸다.
(c)  이 단어는 공동체에서 '어떤 직무나 의무의 수행'에 대해 사용된다. 사도의 직분(롬 11:13; 고후 4:1; 고후 6:3이하; 고후 11:8; 행 1:17; 행 1:25; 행 20:24; 행 21:19; 딤전 1:12), 복음 전도의 직무(딤후 4:11)나 마가와 같은 동역자들의 활동(딤후 4:11)은 봉사로서 '어떤 의무나 직무 수행'이다.
골 4:17에서 바울이 아킵보에게 권면한 봉사 활동은 비록 아킵보가 집사인지 아닌지 불확실하지만, 직무상의 활동이다.
(d)  이 단어는 '모금'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예루살렘을 위한 모금은 디아코니아로 묘사되었다. 사도의 강조하는 바는 이것이 단순히 외형적인 일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사랑의 참된 행동이라는 것이다(롬 15:31이하; 고후 8:1-고후 8:6; 고후 9:1; 고후 9:12이하; 참조: 행 11:29이하; 행 12:25)(참조: Beyer, TDNT).
* 식사 대접(행 6:1)을 포함한 공동 식사 친교가 신약성경의 디아코니아를 이해하는데 기본적 요소가 된다. 각 개인의 집에서 '떡을 떼는 것'에 대해, 부자가 가난한 자를 돌보았던 애찬(참조:고전 11:17 - 고전 11:34)에 대해, 그리고 디아코니아에 전념했던 스데반의 집과 같은 가정 교회들(고전 16:15)에 대해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힘과 소유물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용한 이와같은 봉사는 친교를 지켜 주는 기본적 요소로 볼 수 있다(고후 9:13; 참조: 행 5:4; 고후 9:7). 이 봉사 사역은 또한 지교회로부터 도움을 필요로 하는 타 교회로 확장되었다(행 11:29; 행 12:25; 고후 8:3이하; 고후 9:1 - 고후 9:5). 주고 받은 물질적, 영적 디아코니아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인식에서 이루어진다(고후 8:9; 고후 9:12 - 고후 9:15).
금전과 소유물 뿐만 아니라 몸과 생명까지도 포함하는(고후 8:5) 이 봉사 사역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수단이 된다(엡 4:12).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카리스마적 은사들을 디아코니아(봉사들 services)라 부르는데, 이것들은 전 유기체의 일부인 것이다(고전 12:5; 개역: 직임).
디아코니아는 개개의 특별한 영적 은사(Gift, 롬 12:7 =카리스마)에 대해서도 사용되며(롬 12:7), 또한 집사 역시 여러 봉사자들 중의 한 부류인 것이다.
바울은 디아코니아의 개념을 더욱 더 확대시켰다. 그는 사도들의 디아코니아에서 표현된 구원의 전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 중에서와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디아코니아를 보았다.
구약성경에 이미 하나님의 디아코니아가 존재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율법으로 표현되었으며, 따라서 사망과 정죄로 표현되었다(고후 3:7; 고후 3:9).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영의 봉사'(개역: 직분), '의의 봉사, 화해의 봉사'가 시작되었다(고후 3:8이하). 그리고 이 봉사 사역은 사도들에게 위임되었으며,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자들로서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선언한다(고후 5:18이하). 따라서 디아코니아라는 용어는 복음 선포 사역에 대한 전문 술어로 사용될 수 있다(롬 11:13; 고후 4:1; 참조: 딤후 4:5).
나아가서는 교회 전체가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하나의 몸이다(엡 4:1 - 엡 4:16). 그 구성원들은 곧 "일군들"이며, 교회는 주의 재림을 위하여 준비하는 직원들(functions)이다. (참조: K. Hess, DN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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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제사를 드리라(롬 12:1-21)
이제 앞서 개요에서 말한대로 사도의 권고를 살펴 보자.
Ⅰ.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임무. 경건이 무엇인가?
1. 그것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요. 그렇게 해서 기초를 튼튼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후 8:5). 이것이 여기서는 우리의 모든 임무와 순종의 원천으로 강조되고 있다(1, 2절). 인간은 몸과 혼으로 이루어졌다(창 2:7; 전 12:7).
(1) 우리는 몸을 그에게 드려야 한다(1절). "몸은……주를 위해 있는 것이며 주는 몸을 위해 계십니다"(고전 6:13, 14 , 새번역). 이 권고는 아주 열정적으로 시작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그로 말하면 뛰어난 사도이지만 미천하기 짝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형제"라고 부르고 있으니 그만큼 애정과 관심을 표명하는 말이다. 그는 간청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이 복음의 방식이다.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간구하노니"(고후 5:20). 그는 권위를 가지고 명령할 수도 있지만 사랑 때문에 간청하고 있다(몬 5:8, 9) "가난한 자는 간절한 말로 구하여도"(잠 18:23). 이렇게 말하는 것은 권고를 완곡하게 말하므로 좀 더 기분좋게 먹혀 들어가도록 하려는 뜻에서다 사람들은 좀더 친절하게 말을 하면 쉽게 먹혀 들어가고 끌어당기는 것보다 앞서 가게 하는 게 더 쉽다.
① 의무에 대한 강조. 그것은 우리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것으로 율법시대에 제단에서 하나님 앞에 바치기로 준비된 제물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너희 몸", 네 온 몸이다. 여기에 몸이란 말이 나오는 것은 율법시대에 짐승의 몸이 제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고전 6:20). 이것은 우리의 몸과 우리의 영혼을 한꺼번에 말하는 것이다. 제물은 제사장이 잡아 제사 드리지만 가져다 바치는 것은 그 제물의 임자다. 이 제물 임자는 그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음으로 자기의 모든 권리, 자격, 그리고 관계를 하나님께 일임한다. 여기서 제사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법에 따라 가져다 바치는 모든 것을 총칭하는 말이다(벧전 2:5 참조). 그리스도께서 그의 특유한 제사드림에 있어서 그랬듯이 우리는 성전이요 제사장이요 제물이다. 구약시대에는 속죄 제물도 있었고 화목 제물도 있었다. 단번에 수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제물로 바쳐진 그리스도야말로 유일한 속죄 제물이다. 그러나 우리의 제사장인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바쳐진 우리 인격과 행동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는 화목 제물과 같은 것이다. 바친다는 말에는 자발적인 행위의 뜻이 포함되어 있는데 의지가 몸과 지체에 대해서 행사하는 독단적인 절대적 힘을 다 행사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자유 의사에 따르는 제물이어야 한다. 네 몸이라 했지 네 짐승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저 율법 시대의 제물은 그것이 그리스도에게서 힘을 받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에게서 끝난다. 하나님에게 드린다는 건 이 몸과 함께 저지른 죄를 피할 뿐 아니라 그 몸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 영혼의 종으로 사용하라는 얘기다. 그것은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요(고전 6:20). 즉각적으로 예배하는 데 우리 몸이 참여하는 것이요, 우리의 특수한 임무에 근면하게 집착하는 것이요, 또 부름을 받으면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을 위한 고통을 자원해서 받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몸의 지체를 의의 도구로 드리는 것이다(6:13). 물론 육체의 단련 그 자체에만은 별 유익이 없지만 그것은 하나님에게 우리의 영혼을 드린 증거요 소산이다.
첫째, 우리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리다. 율법 시대처럼 죽여서 드리지 말라는 얘기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지 않고도 자기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삼을 수 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드려진 몸은 산 제물이다. 산 제사라는 말은 죽어 있어서 먹을 수도 없고 더욱이 제물로 드리기엔 부적당한 제물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신 14:21). 또 그것이 반대로 의미하는 것은 "제물은 도살되어야 했지만 그러나 너희는 제물로 드리고도 살아 남을 수 있다"는 얘기다. 피제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야만적인 이방인들은 자기 우상에게 자녀를 죽여서 바쳤으나 하나님은 그런 제사를 원치 않으시고 자비를 원하신다. "산"제사란 영적 생명의 의중에 따른다는 뜻이 담겨 있다. 몸으로 하여금 산제물이 되게끔 하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 영혼 속에 살이 계시는 그리스도다(갈 2:20). 거룩한 사랑은 제물이 되는 걸 마다하지 않고 우리의 본분에 생기를 북돋아 준다(6:13 참조). "살아 있는" 곧 하나님께 사는 것이다(5:11).
둘째, 우리의 몸이 거룩해야 한다. 제물에는 그것이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기에 상대적인 거룩이 있다. 그러나 이것 말고 우리 마음과 생활이 통째로 강직하며 마음과 몸이 하나님의 성품과 뜻에 일치하는 데서 찾을 수 있는 그러한 진정한 거룩이 뒤따라야 한다. 우리의 몸은 죄와 불결의 도구로 사용되어서도 안되지만 한 걸음 더 나가 성전의 그릇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바쳐져 거룩하듯이 하나님께 구별되어지고 거룩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거룩의 주체는 영혼이다. 그러나 성화된 영혼은 그것이 생기를 불어 넣어 주는 몸에 거룩을 가져다 준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 거룩한 것이다. 몸의 행동이 거룩하면 그 몸도 거룩한 것이다. 이 몸은 "성령의 전"(고전 6:19)이니 만큼 "몸을 성결하게 간직하라"(살전 4:4, 5).
② 이것을 강경히 뒷받침하는 이론. 이것은 세 가지다.
첫째, 하나님의 자비를 곰곰이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라." 하나님의 자비를 두고"(디아 톤 오이크티르몬 투 데우, 12:1) : 이 얼마나 애정이 넘치는 요청인가! 우리는 거기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더없이 설득력이 넘치는 힘찬 논증이다. 하나님에게 있는 자비가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자비가 있다. 곧 샘에 있는 자비와 물길에 흐르는 자비니 이 양자가 다 여기 말하는데 포함되어 있지만 그러나 특별히 그것은 복음의 자비이니(9장에 있는대로) 유대인들이 불신앙으로 잃고 이방인에게 넘겨 준 그 자비요(엡 3:4-6)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자비다(사 55:3). 하나님은 자비로운 하나님인 만큼 우리의 몸을 그에게 드리도록 하자. 그는 이걸 사랑으로 써 주실 것이요 무한 동정의 하나님이기에 또 우리의 체질도 알고 계신다. 우리가 매일매일 그의 자비의 열매, 특별히 몸에 대한 자비의 열매를 그분으로부터 받아 먹고 있을 정도로 그는 우리 몸을 만드셨고 유지하시며 되사셔서 거기에 큰 영광으로 덮어 씌우셨다. 우리가 소멸되지 않는 것 곧 우리 영혼이 생명에 붙어 잇는 것은 여호와의 자비 덕분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위대한 자비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뿐 아니라 그의 영혼까지도 우리의 죄를 위해 제물로 삼으셨다는 데서 찾을 수 있으니 곧 그 자신을 우릴 위해 주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내 맡기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여호와께 뭘 드려야할까 하고 곰곰히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을 드릴 것인가? 우리 자신을 이 모든 은총의 감사 제물로 드리자. 우리의 현재, 우리의 소유, 우리의 능력 모두를 말이다. 사실 그것은 풍성하게 받은 것에 비하면 너무도 하잘 것 없는 반환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가진 것 전부이기에,
둘째,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하나님께서 받아들일 만한)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수고하는 모든 목적은 여호와에게 인정을 받고(고후 5:9) 우리의 인격과 행동으로 그를 기쁘시게 해 드리는 데 있다. 이제 이 산 제물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시는 것이요 악한 자의 제물은, 그게 제아무리 살쪄 있고 값이 나가도 여호와에게 가증스런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뭘 받아 주신다는 것 부터가 하나님의 위대한 자기 비하인 만큼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만을 즐겁게 하려고 욕심부릴 수는 없다.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만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유용하게 쓰여질 수 없다.
셋째, 그것은 우리의 "합당한 예배"(reasonable worship)이다. 이 예배에는 이성의 행동이 따른다. 몸을 바치는 것은 영혼이기 때문이다. 맹목적인 헌신, 곧 몸을 길러 준 어머니와 유모를 무시하는 그러한 헌신은, 눈이 달렸으나 보지 못하는 저 쓰레기 같은 우상에게나 합당한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영으로 섬겨야 하고 이해하면서 섬겨야 한다. 여기에 찬성하는 이성은 이 세상에 꽉 차 있다. 여기에 반대하는 이성이란 생겨 날 수도 없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reason) 하자"(사 1:18). 하나님은 우리에게 턱 없이 힘들거나 부당한(unreasonable) 일을 더 맡기시는 게 아니라 올바른 이성의 원칙에 전적으로 일치하는 일을 맡기신다. "너희의 영적 예배"는 "말씀에 입각한 너희의 예배"(텐 로기켄 라트레이안 휘몬)라고 읽을 수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한 예배에 있어서 몸을 제외시키지 않는다. 기록된 말씀에 입각한 예배라야만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실 만한 예배인 것이다. 이것이 복음 예배요 그 이유(reason)를 쉽게 댈 수 있는 예배이니 우리가 거기에서 자신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성적인 피조물로서의 우리를 상대하고 계신 만큼 우리 또한 그런 신분에서 당신과 상대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몸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2) 마음이 그에게 적합하도록 새로워져야 한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곧 너희 속에 구원의 변화가 일어나 그것이 진행되도록 하라." 회개와 성화는 마음의 갱신이니 영혼의 겉모양의 변화가 아니라 영혼의 속의 변화다. 그것은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혼으로 만드는 것이요, 새로운 경향과 성향, 새로운 호감과 반감, 이해의 확대, 양심의 누그러짐, 사고의 강직성, 하나님께 머리 숙인 의지, 영적이요 천성적인 애착, 이 모든 것이니 현재의 사람은 과거의 사람이 아니요 만사가 옛 것은 지나가고 새롭게 되는 것이며 새로운 원칙, 새로운 준칙, 새로운 목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마음은 우리를 다스리는 주된 부문이다. 따라서 마음의 갱신이야말로 전 인간의 갱신이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생명의 근원"이 나오기 때문이다(잠 4:23). 갈수록 죄에 대해서는 죽고 그만큼 갈수록 의에 대해서는 사는 성화의 과정은 그것이 영광 가운데 완성될 때까지 이 갱신 작업을 진척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변화"다. 그것은 마치 새로운 모양과 모습을 덧입는 것과 같다. "변화되어라"(메타모르푸스데, 12:2). 이 단어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덧 입으셔서 그의 얼굴이 태양처럼 빛나게 하던 변화와 같은 단어다(마 17:2). 그리고 동일한 단어가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라"(고후 3:18)는 말에서도 똑같이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는 이 변화가 우리의 임무로 강조되고 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 자력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보다는 이 세상을 새롭게 하는 편이 훨씬 쉬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다(겔 11:19; 36:26, 27). 그러나 "너희는 변화를 받으라," 곧 "하나님께서 그걸 위해 구비해 놓은 방법을 사용하라". 우리를 돌아서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요 그럴 때만이 우리는 돌아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행위가 돌아가게끔 해"둬야 한다(호 5:4). "네 영혼이 복된 영의 변화시키는 감화력을 받아 이 모든 은혜의 방편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시라." 새로운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면 우리는 그것을 덧  입고(엡 4:24) 완성을 향해 전진해 나가야 한다. 몇 가지 더 살펴볼 게 있다.
① 이 갱신에 있어서 우리가 피해야 할 원수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세상과의 일치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주님의 제자와 신자들은 모두 이 세상과는 불일치자가 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 따라 "네 모습을 갖추지 말라"(메 쉬스케마티제스데, 12:2). 이 세상 물정은 변하는 것이요 그 유행은 한때뿐이니 거기에 일치해서는 안된다. 또한 육신의 정욕이나 눈의 정욕에 일치하지도 말라. 우리는 죄악에 빠져 있는 이 세상의 인간들을 본받아서도 안되며 "이 세상 풍속"(엡 2:2)을 따라서도 안 되니 다수를 따라 악을 저지르지 말라는 얘기다(출 23:2). 설령 죄인들이 우리를 유혹한다 해도 우리는 거기에 동조하지 말고 우리의 입장에서 그들에게 증거해야 한다. 아니 그 자체로서는 무관해 보이고 죄스러워 보이지 않는 일이라도 우리는 세상의 습관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 잘못하다간 세상이 우리의 최고 준칙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세상의 총애를 우리의 최고 목표로 삼아서도 안 된다. 참된 기독교는 소박한 외고집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우리는 지나치게 무례하고 무뚝뚝한 정도까지 나가지 않도록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자연의 빛과 세상 나라들의 습관이 우리의 지침이 될 수 있으나 앞서 말한 경우에 있어서는 복음의 준칙이 모순된 준칙이 아니라 방향제시의 준칙 구실을 한다.
② 우리가 힘써야 할 이 갱신의 효과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뜻이란 우리의 임무에 관한 계시된 뜻이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전반적인 하나님의 뜻이니 곧 우리의 성화요 천사들처럼 우리도 행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는 바로 그 뜻이다. 특별히 그것은 말세에 당신의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신약에 계시된 대로의 뜻이다.
첫째, 하나님의 뜻은 "선하고, 받아들일 만하며(acceptable), 완전하다." 이 셋은 율법의 뛰어난 특징이다. 그것은 선하다(미 6:8). 그것은 선과 악을 영원히 구별하는 데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선하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선하다. 어떤 사람은 그 자체로서 선하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선하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복음의 율법이 "선치 못한 율례"(겔 20:25)로 이뤄진 의식 율법과 구별되어 선하다고 얘기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것은 받아들일 만한 것이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것이다. 그의 은총을 최고 목표로 획득하는 유일한 길은 그의 뜻을 유일 준칙으로 삼고 거기에 일치하는 것이다. 그것은 덧붙일래야 덧붙일 게 없는 완전한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된 뜻은 신앙과실제의 충분한 규범으로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람을 완전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철저히 선한 일에 몰두하게 하는 모든 요소가 다 갖춰져 있다(딤후 3:16, 17).
둘째,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곧 그것을 판단할 줄 알고 인정할 줄 아는 것이요 그것을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요 그것에 일치하는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의 우월성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선한 것을"(빌 1:10) 분별하는 것이니 여기에 사용된 ‘도키마제인(12:2)은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다른 걸 "시험해 본다"는 의미가 있다. 그것은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 있어서 재빨리 이해하는 것"이다(사 11:3).
셋째, 마음의 갱신으로 변화를 받은 자들만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가장 잘 분별할 수 있다.  은혜의 산 원칙은 그것이 하나님의 일에 관해서 비뚤어진 판단을 갖지 않고 바로 튼튼히 서 있는 한 영혼 속에 살아 있다. 그것이 영혼으로 하여금 신의 의지에 계시를 받아들이고 영접하게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인지 알리라"(요 7:17)고 약속이 되어 있다.
2. 이것이 다 되면, 복음의 모든 순종 양식에 따라 그를 섬기는 것이다. 여기에 "주를 섬기라"(11, 12절)는 대목이 들어와야 한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에게 드리는 건 그를 섬기기 위함이 아니고 다른 목적이 또 있겠는가? "내가 그에게 속한다"(Whose I am)면 (행 27:23), "내가 그를 섬긴다"(Whom I serve)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종교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뜻이다. 어떻게?
(1) 우리는 그 일에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세상 일도 있지만 우리의 특수한 소명이 주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살전 4:11). 그러나 여기서 부지런하라는 말은 주님을 섬기는 일, 곧 우리 아버지의 일(눅 2:49)을 뜻하는 것 같다.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입증하려는 자들은 신앙을 자기 업무로 삼아야 한다. 그걸 택해서 배우고 거기에 몰두하며 그걸 최고 업무로 사랑하고 거기에 머물러 살며 그것에 따라 사는 것이다. 일단 그걸 우리의 일로 삼았으면 우리는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안일을 바라지 말아야 하고 그게 우리 자신의 다른 일과 중복이 되면 그걸 먼저 택할 줄 알아야 한다. 신앙에 있어서 게으른 달음질은 없다. 게으른 종들은 악한 종들로 간주될 것이다.
(2) 우리는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한다. 하나님은 영으로(1:9; 요 4:24), 성령의 감화 아래, 섬겨야 한다. 우리가 신앙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린다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영이 행하시는 대로 우리의 영이 섬길 때 가능한 얘기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일에는 영의 열심히 있어야 한다. 이것이 거룩한 열심이요, 뜨거움이요 열정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혼뿐 아니라 우리의 온 마음과 모든 혼을 다해 섬기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제물에 불을 붙여 하늘나라에까지 가지고 가서 향내나는 제사로 드리는 거룩한 불이다. "주를 섬기라"(토 퀴리오 둘류온테스)을 "시간을 섬기라"(토 퀴리오 둘류온테스, TR)으로 번역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기회를 선용하여 지금 주어진 은혜의 때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라는 뜻이다.
(3)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하나님은 그에 대한 우리의 소망과 신뢰로 말미암아 예배를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신다. 특별히 우리가 그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며 그 신뢰 가운데 자족할 때 그러하다. 이것은 곧 그 실제에 대한 큰 확신과 소망하는 위대한 선에 대한 존경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 "환난 중에 참으며" 하나님은 그가 우리를 일하라고 부르실 때 그를 위해 일할 뿐 아니라 고난을 받으라고 부르실 때는 잠잠히 앉아 있으므로 해서 영광을 받으신다. 그의 뜻과 영광을 주목하고 그를 위해 참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자들은 환난 중에 인내하기 마련이다. 모든 외형적인 압박 중에도 영혼을 붙들어 주는 것은 우리 앞에 놓여진 기쁨을 믿음으로 내다보는 그것이다.
(5) "기도에 항상 힘쓰며" 기도는 소망과 인내의 친구요 우리는 기도 가운데 주님을 섬긴다. 본문의 의미에는 기도의 열정과 인내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이 기도 임무에 있어서 냉담해서도 안될 뿐 아니라 그것을 싫증내서도 안 된다(눅 18:1, 살전 5:17; 엡 6:18; 골 4:2). 이것은 하나님을 중히 영기는 우리의 임무다.
Ⅱ. 우리 자신에 관한 태도. 이것은 온건이다.
1. 우리 자신에 대한 온건한 평가(3절). 이것은 아주 엄숙한 서론으로 시작되고 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말하노니," 그것은 이 본분의 필연성과 탁월성을 이해할 수 있게 했던 지혜의 은혜요, 이런 말을 감히 강조하고 명령할 수 있었던 권위를 준 사도직의 은혜다. "나는 그것을 말할 수 있게 임명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한다. 내가 말하는 것을 너희는 부정하지 말라"는 식이다. 이것은 그 사람들에게 뿐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하는 말이다. 교만이란 우리 모두가 천성으로 타고난 죄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경계하고 여기에 무장을 갖춰야 한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과대 평가, 우리의 판단, 능력, 인격, 그리고 실천에 대한 과대평가를 삼가야겠다. 스스로 기만에 빠진 나머지 자신의 지혜나 업적을 너무 추켜 세운 나머지 스스로 위대한 척해서는 안 된다(갈 6:3). 물론 우리 자신이 죄의 종과 세상의 품팔이가 되기에는 너무 귀한 존재이기에 이 점에 있어서는 마땅히 스스로를 높이 평가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능력, 은사, 받은 은혜에 대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대로만 생각할 것이지 그 이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의심스러운 논쟁에 있어서 너무 자만해서도 안 되며 능력 밖으로 뻐기는 것도 안되며 우리들과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그들을 판단하고 정죄해서도 안 되며 육신으로 자랑을 삼으려 해도 안 된다. 이것은 우리자신에 대한 온건한 평가에서만 얻어지는 열매다.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읽을 수도 있다. "어느 인간도 그가 마땅히 지혜로워야 할 그 이상으로 지혜로워서는 안 되고 온건해야 한다"고 말이다. 우리는 우리 머리 이상의 것에 신경을 써서는 안되고(시 131:1, 2), 우리가 보지 않은 것을 넘나들려 해서도 안되며(골 2:18), 우리 분야가 아닌 비밀한 것들을 기웃거려서도 안 되며(신 29:29) 기록된 것 이상으로 더 지혜롭기를 탐해서도 안 된다. 지식 가운데는 금단의 열매를 잡으려고 손을 뻗치며 뽐내는 지식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삼가고 온건하게 하는 지식을 쫓도록 하며 마음을 바로잡고 생활을 새롭게 하도록 해야겠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우리의 위치와 자리에서 남의 은사와 직분을 넘나들지 않도록 하는 온건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더 없이 귀한 영적 은사를 행사하는 데 있어서 이 온건하고 겸손한 배려를 우리는 본받아야겠다(고후 10:13-15). "스스로 지혜있는체 말라"(16절)는 권고도 이러한 의미에서 해석할 것이다. 지혜가 있는 것은 좋지만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쁘다. 스스로 지혜있다고 생각하는 우물안 개구리는 실로 바보 이상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모세는 그의 얼굴이 광채를 발하고 있었지만 그걸 모르고 있었으니 이거야말로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 자신, 자신의 능력, 및 업적에 대해 온건한 평갈을 가져야할 이유를 다음으로 살펴보자.
(1) 우리에게 있는 좋은 것은 그게 뭐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눠 주신"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선하고 온전한 은사는 "위로부터……내려 오기"(약 1:17)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는 것 가운데 위로부터 받지 않은게 뭣인가? 받은 거라면 자랑할 이유가 뭔가?(고전 5:7) 이 세상에서 제 아무리 선하고 제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날마다 만들어 놓는 것 이상이 아니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마치 우리 손으로 그것을 얻은 것처럼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얻었더라? 하는 식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친절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걸 주셨더라? 하는 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어떠한 선이든 그걸 행할 힘을 주시는 이는 그분이요 그분 안에서만 우리의 전 충족성이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사를 일정한 분량에 따라 나눠 주시기 때문이다. 곧 "믿음의 분량대로"다. 영적 은사의 분량을 가리켜 믿음의 분량이라고 부르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후자는 기본적인 은혜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거나 우리가 행하는 선은 그것이 믿음에 기초한 것이요 믿음에서 흘러 나오는 것일 때만이 바른 것이요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다. 이제 이 믿음과 그에 따르는 다른 특별 은사는 무한한 지혜(Infinite Wisdom)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여기는 대로 분량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받으실 때 분량에 관계없이 받으셨지만(요 3:34) 성도들은 분량에 따라 받는다(엡 4:7). 분량에 관계없이 무한한 은사를 지니셨던 그리스도께서도 겸비하고 온유하셨는데 모자라서 안타까와하는 우리가 교만하고 우쭐댈 것인가?
(3) 하나님께서는 은사를 우리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 주셨기 때문이다.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우리만이 성령을 독점하고 우리만이 영적 은사를 독점할 수 있는 특허권을 가졌다면 스스로 교만해 할 그럴싸한 핑계가 있는 셈이 될 것이지만 그러나 남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걸 다 받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분의 덕으로 사는 성도들 모두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한(common) 아버지요 그리스도는 한(common)뿌리다. 따라서 우리만 하늘의 총애를 받는 백성이요 지혜가 우리에게서 끝나는 것마냥 우리 자신을 추켜세우며 남을 멸시하는 건 잘못이다. 이것을 그는 몸의 지체를 들어 비교하며 설명하고 있다(고전 12:12; 엡 4:16 에서처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4, 5절).
①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니 그분은 이 몸의 머리요 그들의 통일성의 중심이다. 신자들은 이 세상에 되는 대로 무질서하게 나딩구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함께 짜여 있다. 그것은 그들이 한(one common) 성령에 의해서 한 머리에 연합되고 생기를 얻기 때문이다.
② 각각 신자는 이 몸의 지체 곧 구성원으로서 머리로부터 생명과 영을 받는 가운데 전체와 유대를 갖는다. 몸에 있어서 어떤 지체는 다른 지체에 비해 더 크고 더 유용하며 각자는 그 분량에 따라 머리로부터 영을 받을 뿐이다. 새끼 손가락에게 다리에게 필요한 영양이 돌아간다면 얼마나 해괴망칙하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전체가 아니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부품이요 지체에 지나지 않는다.
③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라"(4절) 각자의 위치와 업무가 할당되어 있다. 눈의 직분은 보는 것이요 손의 직분은 일하는 것……등등이다. 신비적인 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더러는 이런 일에 자격이 주어지고 부름을 받으며 또 더러는 저런 일에 적합하도록 되어 있으며 부름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연방제국에 있어서 권세자나 사역자들이나 백성은 각각의 직분을 따로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서로의 직분 행사에 있어서 남을 간섭하고 충돌해서는 안 된다.
④ 각 지체는 전체와 다른 각 지체의 유익과 혜택을 위해 각자의 위치와 임무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일 뿐 아니라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5절). 우리는 서로 상호 관계에 놓여 있으므로 서로를 위해 최선의 유익을 끼치도록 해야 하며 서로의 공통된 혜택을 위해 힘을 합해 행동해야 한다(고전 12:14 이하에 이것이 잘 설명되어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업적에 속아넘어가 우쭐댈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받은 것이요 그것도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유익을 위해서 받은 것뿐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에 대한 온건한 용법. 한편으로 우리의 가진 자질을 뽐내서도 안 되지만 또한 우리는 이것을 매장해서도 안된다. 겸손이니 자기 부정이니 하는 구실로 타인의 유익을 위해 우리 자신을 사용하는 일에 있어서 게을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겠습니다" 하는 식이 아니라 "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은혜의 힘을 입어 최대한의 노력을 아끼지 않겠습니다"하는 식이어야겠다. 사도는 여기서 교회의 제도적인 직분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각자는 이것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각자의 위치와 업무를 알고서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덕을 세우는 일에 맞도록 각자 임무를 다 해야 할 것이다. "받은 은사가"있으면 이걸 사용하도록 하자. 목회 업무의 권위와 능력도 하나님의 은사다. "은사가 각각 다르니," 당장의 목적은 달라도 이 모든 것의 최종적인 목적은 하나다. "은혜대로"(카리스마타 카타 텐 카린, 12:6),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은사의 원천이요 본 고장이다. 직분을 주고 사람에게 자격을 구비케하며 그럴 마음이 있게 하는 것 곧 하고저하는 의지와 행동을 주는 것은 은혜다. 초대 교회에 방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 신유의 은사와 같은 예외적인 은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사도는 여기서 일상적인 은사를 두고 말하고 있다(고전 12:4; 딤전 4:14; 벧전 4:10). 일곱 가지의 개별적인 은사가 나열되고 있는데(6-8절) 이것은 당시 초대 교회의 현명한 구성원 대다수의 각각 뚜렷한 직능이었던 것 같다. 우선 예언과 섬기는 일이라는 두 가지로 이것을 대변할 수 있으니 예언은 감독의 임무요 섬기는 일은 집사의 임무로 당시 상설 직분은 이 둘뿐이었다(빌 1:1). 그러나 이들 각자의 임무는 그것이 보다 효과적으로 시행되기 위해서 일반의 동의와 찬성에 의해 할당되고 구별되었을 것이요 그래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온갖 사람의 일은 아무의 일도 아니기 때문이요(every body's work is nobody's work), 일인일무(a man of one business, vir unius negotii)라야 그 일이 신속히 처리되기 때문이다. 이래서 다윗도 레위인들을 따로 구별했었다(대상 23:4, 5). 지혜로운 처사였다. 따라서 나머지 다섯은 이 둘로 축소할 수 있다.
(1) "예언."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하자. 이것은 앞일을 내다보는 예외적인 은사로서가 아니라 말씀을 전파하는 일상적인 직분으로서 주어진 것이다. 예언이 이런 의미로 지적된 곳은 많다(고전 9:1-3 ; 및 이하 11:4; 살전 5:20). 구약의 예언자들의 임무는 장차 일을 미리 알려 주는 것뿐 아니라 백성들에게 죄와 임무를 알려 주는 것, 그들이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되생각나게 하는 인물의 역할도 했다. 이처럼 복음 전파자들은 말씀에 계시가 허용하는 한도에서 장차 일을 예언하는 예언자라고 볼 수 있다. 말씀 전파는 인간의 영원한 상태를 두고 말하는 것인 만큼 미래의 상태를 직접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말씀을 전파하는 자는 "믿음의 분수대로"(카타 텐 아날로기안 피스테오스)하는 것이 마땅하다. 곧
① 우리의 예언의 태도에 있어서 그것은 믿음의 은혜의 분량에 일치해야 한다. 그는 이미 각자에게 나눠진 믿음의 분량이란 말을 했다(3절). 전파한 자는 그가 가진 모든 신앙을 총동원해야 할 것이요 무엇보다도 그가 전파하는 진리를 자신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도록 해야겠다. 사람들이 믿음이 없으면 잘 듣지 못하듯이 전파하는 자도 믿음이 없으면 잘 전파할 수 없다. 먼저 믿고 다음에 말하라(시 116:10; 4:13). 믿음의 분수라는 말을 살펴 보자. 이 말은 모두가 믿음을 가진 건 아니지만 우리말고도 많은 사람이 이것을 가지고 있는 만큼 우리 말고 남들도 가르치는 지식과 능력의 몫을 차지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대에게 믿음이 있는가? 그대 자신이 간직하라. 그걸로 타인을 재는 척도로 삼진 말아라. 그대가 가진 믿음은 오직 일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기억하라."
② 우리의 예언의 본질에 있어서 그것은 믿음의 교의에 따라야 한다. 곧 신 구약에 계시된 그대로여야 한다. 성경에는 일괄적으로 명백하게 가르치는 주요진리(prime axiomata)가 있는데 이것이 복음전파의 시금석이요, 이것에 따라(우리는 예언을 멸시하지도 말아야 하지만) "모든 것을 분간하여 좋은 것을 굳게 잡아야"한다(살전 5:20, 21 , 새번역). 보다 애매한 진리는 보다 명백한 진리에 의해 검토를 받아야 하며 그것이 신앙의 유추에 합치하는 것으로 판단될 때만이 받아들여져야 한다. 진리가 진리를 거스려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복음 전파자들이 아주 경계해야 할 점이 있다. 곧 건전한 교의를 건전한 말씀의 모양에 따라 전파하는 것이다(딛 2:8; 딤후 1:13). 예언하는 일이 기교나 논리, 수사학의 규칙에 따를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믿음의 분수에 따라야 하는 건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은 믿음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제 예언하는 사람이 특별히 생각해야 하는 두 가지 일이 있는데 그것은 가르치는 일과 권고하는 일로서 한 사람이 동시에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한 사람이 이걸 하면 저걸 생각하고 저걸 하면 이걸 마음에 두도록 해야할 것이다. 만약에 교회 사역자들의 일치된 의견에 따라 이것이 구별되어, 한 사람은 가르치고 다른 한 사람은 권고하는 일을 분담하게 된다면 각자는 믿음의 분수에 맞게 하도록 유의해야 할 것이다.
첫째,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에 정성을 다 해야겠다. 가르치는 것은 실제 응용에 관계없이 복음 진리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 입증하는 것이다. "목사와 교사"는 동일 직분이지만 각자의 업무는 다르다. 가르치는 기능을 가지고 그 분양의 일을 시작한 사람은 거기에 집착하도록 해야겠다. 그것은 훌륭한 은사인만큼 그걸 사용하고 거기에 마음을 쏟도록 하자.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고 일에 거하도록 하라"(호 디다스콘 엔 테 디다스카리아)하는 식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 일에 고정되어 열심을 다하라는 뜻이요 각자의 임무에 충실하여 그것이 자기의 요소인 것처럼 그 속에 있으라는 뜻이다. 디모데전서 4장 15, 16절에 보면 "이 일에 머물러 있으며" "이 일을 계속하라"는 두 말로 구분되어 설명되어 있다.
둘째, "권면하"는 자는 "권면"에 힘써야겠다. 그 자신을 거기에 송두리째 드리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이 교사의 일이라면 이것은 목사의 일이다. 곧 복음 진리와 규칙을 사람들의 상황과 처지에 보다 밀접하게 적용시켜 그들에게 보다 실제적인 것을 강조시켜 주는 것이다.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는 정교한 사람들이, 권면하는 일에 있어서는 냉담하고 미숙한 경우가 많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전자는 보다 더 예리한 머리를, 후자는 보다 더 따뜻한 마음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 은사가 분명하게 구별된 곳에서는 이 일을 구분하는 것이 덕이 된다. 우리가 어떠한 일을 하건 이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우리의 업무에 충실한다는 것은 그 일에 우리의 최선의 시간과 생각을 거기에 바치는 것이요 그것을 위해 모든 기회를 다 포착하는 것이요 그걸 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잘하도록 힘쓰는 것이다.
(2) "섬기는 일." 사람이 "집사의 직분"(디아코니안, 1248), 곧 목사와 교사의 보필의 임무를 받았으면 그 임무를 잘 수행해야겠다. 가령 교구위원, 장노, 빈민 감독자 같은 경우가 그것이며 초대 교회에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고 아는 바 이상으로 이 임무를 강조했으며 신경을 썼다. 여기에는 교회의 타 엑소(1854) 곧 "하나님의 전 바깥 일"(느 11:16)에 관계되는 모든 직분이 다 포함된다. "식탁을 시중드는 일"(행 6:2)이란 말도 있다. 이렇게 섬기는 일이 맡겨진 자는 성실과 근면을 다해 그 일에 충실해야겠다.
①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교회의 구제 직분을 맡은 자들은 돈을 모아서 빈민의 필요에 따라 그걸 분배했다. 이들은 그 일을 "후하게"(엔 아플로테티) 그리고 성실하게 해야 한다. 자기들이 받은 것을 자기 용도에 쓰거나 엉뚱한 목적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해 가며 분배해서도 안 되고 가난한 자에게 괴팍하게 굴며 그들을 옭아 매려는 목적으로 해서도 안 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에게 유익을 끼쳐 드리는 이외의 목적을 두지 말고 모든 정성과 성실을 다해야 할 뿐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모든 구제행위 전반에 적용하고 있다. 가진 자는 주되 풍성하고 후하게 주라(고후 8:2; 9:13). 하나님은 즐거이 후하게 주는 자를 사랑하신다.
②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아마 그는 목사들을 도와 그들의 손, 눈, 입이 되어 교회 기강을 바로잡던 자들이나 회중 가운데서 이 다스리는 일에 전념하던 사역자들을 두고 말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말씀과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자들이 다스린다는 대목이 성경에 있기 때문이다(딤전 5:17). 이런 사람들은 이 일을 근면하게 해내야 할 것이다. 이 말에는 뭐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가 하는 걸 발견해서 잘못가는 자들을 바로잡고 넘어진 자들을 훈계하고 계도하며 교회를 순결하게 지키는 일에 있어서 정성을 다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러한 신뢰를 다 이행하는 데 있어서 충성스럽다는 말을 들으려면 여간 힘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될 뿐 아니라 이 일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기회든 그냥 지나치게 해서도 안 된다.
③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어떤 사람은 이것을 일반적인 의미에서 자비를 베푸는 일로 본다. 자비를 베풀되 거기에서 즐거움을 찾으라. 하나님은 즐거이 바치는 자를 사랑하신다, 하는 식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교회의 특수 직분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싶다. 곧 병든 자와 손님을 접대하는 일을 맡은 자들이다. 이런 일은 대개 교회의 일군들인 과부들이 맡아 했으니 곧 여집사들이다(딤전 5:9, 10). 물론 다른 사람들도 여집사로 임명받은 게 사실이다.  이제 이 일을 즐거움으로 하라는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일을 맡은 자들의 즐거운 표정이야 말로 수혜자들에게 큰 위로와 기쁨이 아닐 수 없다.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즐거운 표정과 친절한 말씨로 잽싸게 행동하는 걸 그들에게 보여 줘야 하는 것이다. 병들고 상처입은 자들, 일반적으로 불행한 자들을 상대로 일하는 자들을 인내할 뿐 아니라 즐거워하는 가운데 그들에게 이 일이 더욱 즐겁고 부담없게 해주며,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록 해야겠다.
Ⅲ. 우리 형제들에 대한 우리의 임무. 이에 대한 예가 간략한 권면속에 담겨 있다. 상호간의 임무에 대한 전부가 한 마디로 요약되고 있으니 곧 "사랑"이라는 멋있는 말이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임무의 기초이기에 사도는 이 말을 제일 먼저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제복이요 우리 종교의 위대한 법률이다. "사랑엔 거짓인 없나니," 입발림이나 형식이 아니라 실제로 사랑하라는 말이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요일 3:18). 올바른 사랑은 꾸밈이 없는 사랑이요 속임수를 쓰는 원수의 키스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반가이 맞아야 한다(고후 8:8).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 친구에게 신세지고 있는 사랑과, 원수에게 신세지고 있는 사랑이 있다. 그는 이 양자를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1. 우리 친구들에 대해서. 친구가 있는 자는 그 친구에게 친절하지 않을 수 없다. 크리스천들은 서로 사랑을 빚지고 있으며 이것을 갚아야 한다.
(1) 정다운 사랑(10절). "형제애(필로스토르고이)를 가지고 서로 사랑하라"(새번역). 이것은 사랑을 의미할 뿐 아니라 사랑하려는 마음의 준비이니 곧 샘에서 물이 흐르듯이 더 없이 순수하고 풍성하게 흐르는 사랑이다. 이것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같은 것이니 이거야말로 더 없이 부드럽고 더 없이 자연스런 사랑이다. 억지가 없고 마지 못해 하는 사랑이 아니다. 우리 상호간의 사랑도 그래야 하며 또 새로운 성품이 생겨 마음에 사랑의 법률이 기록될 때 이러한 사랑이 우러나오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더없이 겸손하고 공손하게 말과 행동으로 우리 자신을 나타내게 한다. "서로" 이것은 우리에게 사랑의 은혜를 입게 할 것이다. 곧 남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듯이 남들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도 그들의 임무다. 서로 사랑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세상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처럼 물을 뿌리는 자는 자기도 물뿌림을 받게 마련이다.
(2) 존경의 사랑. "존경하기를 서로먼저하며," 서로 잘났다고 싸울 것이 아니라 앞을 다퉈가며 남에게 그 높은 자리를 물려 주도록 하자. 이것이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 2:3)는 말씀으로 설명되어진다. 이것이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을 살피면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더욱 자신이 약하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형제들의 은사, 은혜, 업적을 먼저 알아내서 그것을 높이 평가하고 우리보다 그들이 칭찬받는 것을 더 즐거워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이 대목을 "존경하는 일에 있어서 서로 앞서 가며"(테 티메 알렐루스 프로에구메노이)하는 식으로 읽는 이들도 있다. 곧 존경을 받는 일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주는 일에 있어서 앞서라는 것이다. "너희 중에 누가 제일 먼저 남을 존경하며 기회 있을 때마다 네 형제에게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직분을 먼저 시행하는가 경주해 보시라. 더 없이 겸손하고 소로에게 유용하며 양보하는 정신을 네 모든 싸움의 중심으로 삼으라." 디도서 3장 14절도 마찬가지 의미다. "좋은 일에 앞서 가는 걸(프로이스타메노스, 12:8)배우게 하라." 우리가 남을 먼저 생각하고 우리보다 더 능력이 있고 자격이 있는 걸로 내세우는 게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이걸 핑계 삼아 그들이 다 할 것이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안일과 게으름에 빠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는 곧 이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11절)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3) 풍성한 사랑(13절).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우리 형제들의 궁핍은 실제적인 공급이 뒤따라야하고 그걸 할 능력이 우리 손에 있는데도 말로만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데서 그치면 조롱에 지나지 않는다.
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그들의 생명을 위해 쓸 것을 필요로 한다는 건 이상한 얘기가 아니다. 당시 초대 교회로 말하면 계속되는 박해 때문에 고통받는 성도들이 대부분 극심한 곤경에 처하게 되었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있다. 물론 이 세상의 것들이 최선에 것들은 아니다. 그게 최선의 것들이라면 하늘의 총아니 성도들에게 그걸 안 주실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② 따라서 가진 자들은 이것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그걸 "공급"할 의무가 있다. 배고픈 자들을 보고 영혼을 꺼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지갑을 꺼내는 게 옳은 일이다(약 2:15, 16; 요일 3:17). "나누다"(코이노눈테스, 12:13) 이 말은 우리 불쌍한 형제들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과 관련이 있으며 우리가 그들의 짐을 덜어 주는 것은 우리가 그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그들의 궁핍에 대한 동료 의식에서 나와야 마땅하다는 뜻이다. 빌립보 사람들이 바울에게 베푼 사랑을 그는 자신의 고통에의 동참이라고 부르고 있다(빌 4:14). 우리는 능력과 기회가 닿는 대로 궁핍한 자들을 도와, 짐을 덜어 줘야 할 뿐 아니라 그 성도들과 동거동락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우리들과 같은 묻사람에게 베풀어야 할 일반적인 사랑도 사랑이지만 특별히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빚진 사랑이 우리에게는 있다(갈 6:10). "더욱 믿음의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어떤 이들은 성도들의 "쓸 것"(타이스 크레이아이스, 12:13)이 아니라 그들의 "추억"을 나눠 가지는 것으로 본다. 우리는 믿음과 인내로 약속을 상속한 자들을 기념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추억을 값있게 하고 변호하며 향기롭게 할 빚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의로운 자들의 기억이 복되도다(잠 10:7)는 식으로 번역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이어 이 넘치는 사랑의 다른 면을 언급하고 있다.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자기 집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선을 행하러 돌아다니거나 박해 때문에 은신처를 찾아서 방랑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자들을 기꺼이 접대해야 한다.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여관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방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곳을 찾아들지 않았다. 아니 그럴 비용도 없었다. 따라서 이들을 부담 없이 친절하게 맞이하는 일이야말로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오늘날 캐캐묵은 지난 얘기가 아니라 기회 있는 대로 손님을 접대해야한다. 우리는 나그네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하는 얘기가 자비를 얻는 자들의 자비로운 증거로 제사되어 있다. "손님접대를 추구하며"(텐 필록세니안 디오곤테스, 12:13), 이 말은 우리가 자비를 보여 주는 기회를 포착할 뿐 아니라 그걸 찾아야 한다는 얘기다. 천막문에 앉아 있던 아브라함과(창 18:1) 소돔성 어귀에 앉아 있던 롯은(창 19:1) 여행자를 기다려 접대하는 가운데 자기도 모르게 천사를 대접하였다(히 13:2)
(4) 동조적인 사랑(15절).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신비적인 몸의 지체 사이에 오가는 사랑이 있을 때 거기에는 이런 동료의식이 따르기 마련이다(고전 12:26 참조). 참된 사랑은 서로의 슬픔과 기쁨을 우리의 것으로 삼도록 가르쳐 준다. 이 세상에는 시련 때문에 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받은 은혜를 감사해 즐거워하는 사람들이(에스라 시대처럼, 스 3:12, 13)뒤섞여 있다. 따라서 여기에 형제애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동료애가 필요하다. 이 말은 죄악의 기쁨이나 탄식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정당하고 합당한 기쁨과 슬픔에만 참여하라는 것이요, 잘되는 사람을 시기할 것이 아니라 그들과 더불어 즐거워하라는 것이요, 남들의 우리가 갖지 못한 성공과 위로를 맘껏 반가워해 주라는 것이요,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을 멸시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우리도 육신을 가지고 있듯이 그들을 즉시 도와 주라는 것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처럼 행하는 것이니 그는 "그 종들의 형통을 기뻐하시며"(시 35:27),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신"(사 63:9)분이다.
(5) 통일된 사랑. "서로 마음을 같이 하고"(16절), 곧 할 수만 있으면 생각을 같이 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애정을 같이 하라는 말이다. 서로 치고 받고 물고 늘어질 게 아니라 모두 하나가되어 평화의 노끈으로 성령의 통일성을 지키도록 힘쓰라는 것이다(빌 2:2; 3:15, 16; 고전 1:10). 이 대목을 네가 네 자신에게 원하는 만큼 남에게도 "동일한 유익을 원해주는 것"(토 아우토 알렐루스 프로눈테스)으로 번역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이 우리 형제를 우리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니 우리 자신처럼 남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6) 공손한 사랑. "높은 것을 마음에 두지 말고 낮은 사람들에게 공손하고"(16절, 흠정역), 참된 사랑은 천한 것을 가리지 않는다(엡 4:1, 2; 빌 2:3).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형제애를 가르쳐 주시려고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는데(요 13:5, 14, 34) 그것은 서로 올바로 사랑하려면 서로의 유익을 위해 제 아무리 천박한 직분의 친절이라도 서슴지 않아야 한다는 걸 우리에게 시사해 주시는 것이다. 사랑은 공손하게 만드는 은혜다. 즉 권세와 사랑은 서로 잘 부합하지 않기 마련이다.
① "높은 것을 마음에 두지 말라." 우리는 명예와 대접받는 일을 너무 욕심내서도 안 되고 이 세상의 영화와 위엄을 무리하게 과대평가해서도, 그걸 무리하게 바라서도 안 되고 거룩한 멸시를 보내야 한다. 다윗이 출세의 가도를 달릴 때 그의 영혼은 겸비하였다(시 131:1).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만국의 제왕 위에 군림하며(계 17:18) 영화의 절정기에 있던 로마에 살던 사람들로서는 자기들이 더 잘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거룩한 씨앗에도 이러한 누룩이 먹혀 들어가고 있다는 걸 유의할 필요가 있겠다.  마치 도시 사람들이 시골 사람들을 업수이 여기듯이 로마 교우들도 다른 교우들을 업수이 여길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래서 사도는 종종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다(11:20 비교). 이들은 궁정 가까이 살았으며 그 호사로움과 위용을 익히 알고 있던 사람들이다. "그렇지만,"하고 그는 말한다."그걸 마음에 두지 말라. 거기에 빠지지 말라"고.
② "낮은 사람들에게 공손하라"(토이스 타페이노이스 쉬나파고메노이, 12:16)
첫쨰, "낮은 사람들에게"라는 말을 우리는 "천한 것들"로 보고 거기에 공손하라는 뜻으로 새길 수도 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처한 상황이 가련하고 천해도, 우리의 쾌락이 거칠어지고 줄어들어도, 우리의 직업이 천하고 멸시를 받아도 우리는 여기에 마음을 두고 여기에 자족할 수 있어야겠다. 그래서 난외에는 "천한 것들로 만족하라"는 게 삽입되어 있다. 그게 어느 자리건 하나님께서 당신의 섭리 가운데 우리를 놓아 두신 그 곳에 만족하도록 하자. 우리는 죄를 제외하고는 어느 것이든 달갑게 여길 줄 알아야겠다. 그게 우리의 몫이라면 천박한 습관에 머리를 굽힐 줄도 알고 가련한 생활에 자족할 줄도 알며 허름한 옷도 걸칠 줄 알며 불편한 숙식도 참아내고 불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니 우리는 우리의 옛 타락한 성품이 높은 데로 올라갈 때 우리의 새로운 성품의 힘에 휩쓸려 낮은 데로 갈 수 있어야 한다. 천한 데도 자족할 수 있어야겠다. 우리는 높은 데보다 낮고 천한 것을 우리의 바램으로 삼도록 해야 한다.
둘째, 이제 우리는 앞서 번역한 대로 이것을 "낮은 사람들에게 공손하라"는 쪽으로 의미를 돌려보자.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천하고 낮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다면 이들과 어울려 같이 지내야 한다. 다윗은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이런 자들을 친구로 삼아 지냈다(시 119:63).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도 이런 자들을 찾아 천상천하를 마다 않으시고 찾아 오셨는데 우리가 뭐라고 이들과 지내는 걸 수치로 여기겠는가. 참된 사랑은 누더기나 진홍색 예복을 기리지 않는 데서 그 진가가 드러난다. 진주는 그게 수렁에 딩굴어도 진주인 것이다. 이 공손에 위배되는 걸 성경은 꾸중하고 있다(약 2:1-4). "공손하라." 곧 그들의 유익을 위해 네 자신을 그들에게 맞추라. 바울이 그러했다(고전 9:19). 어떤 이들은 이 단어가 여행자들의 용어라고 한다. 곧 발이 빠르고 튼튼한 사람들이 앞서 가다가도 힘이 없고 약한 자들을 생각해서 발검음을 멈추고 그들과 보조를 맞춘다는 얘기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동료 여행자들에게 온정을 베풀어야 한다. 이것을 더욱 고무하기 위해 그는 곧 이어 "스스로 지혜있는 체 말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3절도 마찬가지다. 우리 자신 속에 속임수가 있는 한 우리는 남에게 공손할 길이 없다. 그래서, 이런 말이 따르고 있다.  "네 혼자  지혜롭지 말아라"(메 기네스테 프로니모이 파르 헤아우토이스, 12:16). 네 자신의 지혜면 충분한 걸로 생각하고 남들을 멸시하거나 그들이 네게 필요 없는 걸로 여기지 말라(잠 3:7). "네가 가진 것을 남과 나눠 갖는 것을 부끄러워 말라. 우리는 서로 지체로서 서로 의지하고 있으므로 네 혼자 지혜롭지 말아라. 네가 가진 지혜라는 상품은 서로 주고 받는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다."
(7)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 사랑(18절). 지위나 직업의 거리 때문에 친밀하게 지낼 수 없는 사람들과도 우리는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 서로 해를 끼치지 말고 불쾌감을 주지 말며 다툼거리를 주거나 만들지 말아야 한다. 이처럼 우리는 평화를 유지해야 하고 그게 깨지면 꿰매도록 노력해야 한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순결하고 평화롭다. 이 권고가 어떤 형식을 취하고 있는가 보라.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을 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네 힘 닿는데 까지)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네 힘 닿는데까지 "화평을 쫓으라"(히 12:14). "힘써 지키라"(엡 4:3). "할 수 있거든" 평화롭게 되는 방향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노력하라. "할 수 있거든." 우리가 하나님과 양심을 거스리지 않고서는 평화를 지킬 수 없다는 판단이 섰을 때는 그건 불가능한 것이다. Id possumus quod jure possumus 즉 비난을 사지 않고 가능한 것이 가능한 것이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첫째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롭다(약 3:17). 순결이 없는 평화는 악마의 궁정의 평화다. "너희로서는"(네 힘이 닿는 데까지는) 우리는 우리의 입장만을 말할 수밖에 없다. 예레미야처럼 불가피하게 "다툼의 사람"(렘 15:10)으로 휘말려 들어 욕먹는 건 할 수 없다. 우리로서는 평화를 유지하는 데 있어 우리편에 결점만 없도록 하면 그만이다.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저희는 싸우려 하는도다"(시 120:7).
2. 우리 원수들에 대해서.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원수가 되었으므로 이들은 이제 서로 원수가 되기 쉽다. 사랑의 중심부가 일단 탈취되고 나면 그에 따른 전선(戰線)은 좌충우돌하기 마련이다. 누구보다도 신앙인들은 그 웃음이 결코 그리스도의 미소와 일치할 수 없는 세상에서 많은 원수를 만나게 마련이다. 이제 이 마당에서 기독교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원수에 대한 행동 강령은 승리와 지배만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준칙과 방법과는 시종일관 그 양상을 달리 하는 것으로 오직 내면적인 평화와 만족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가 못되길 빌고 우리에게 불행을 가져다 주려고 온갖 계략을 다 꾸며대는 우리의 원수가 누구이든 우리의 준칙은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유익을 끼치도록 하는 것이다.
(1) 그들을 해롭히지 말 것(17절).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이것은 야만적인 보복으로 위로부터의 일이나 자기 앞서 벌어진 일을 의식하지 못하는 짐승들에게나 어울리는 짓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류가, 혹자의 생각대로, 악한 상태에서 태어났다면 이러한 보복이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배우지 않았으니 그분은 그의 원수들을 위해 모든 걸 아끼지 않으신 분이요(마 5:45) 더욱이 그리스도를 이런 식으로 배우지 않았으니 그분은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모든 걸 아끼지 않으셨으며(5:8, 10 절). 아무런 이유 없이 자기를 증오하는 세상을 그처럼 사랑하신 분이다. "아무에게도, 곧 유대인에게나 헬라인 어느 누구에게도," 그대 친구였던 자에게 그러지 말 것은 악으로 갚으므로 분명히 그를 잃고 말기 때문이요, 그대 원수였던 자에게 그러지 말 것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므로 혹시 그를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의미에서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19절)는 말이 뒤따르고 있다. 왜 본장의 다른 권고와는 달리 이 대목에 와서는 누그러진 태도로, 사랑하는 자들아, 하고 나오는가? 그것은 분명히 화가 나는 것을 분개한 나머지 이글이글 타오르는 심정을 진정시키려는 뜻에서다. 그들을 누그러뜨리려는 생각에서다. 그 어느 것이든 사랑이 풍기는 것은 붉은 피를 맑게 하며 폭풍을 가라 앉히며 난폭한 열기를 식히고 만다. 마음 상한 형제와 화해하려는 생각이 있는가? 사랑하는 형제여, 하고 시작하시라. 이러한 온화한 말씨가 분노를 돌이키는데 주효할 수도 있다.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말라." 누가 네게 해를 끼친다고 해서 그에게 똑같은 해나 불편을 돌려 주려고 생각도 말고 힘쓰지 말라. 권세자가 범법자를 처벌하므로 그 범법자를 공정하게 대하는 것이나 범법자에게 올바르고 정당한 법을 적용하여 그를 처단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 않지만 분노나 악의에서 나오는 이 개별적 복수는 금지되어 있다. 그것이 또 마땅한 것은 우리는 우리의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없는 판단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에 정당방위를 하다가 잘못을 저질렀는데 권세자가 공공의 질서와 평화 유지라는 관심에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감정이나 분노로 일처리를 한다면 이러한 처사도, 그게 제아무리 정당해 보일 망정, 이러한 금지된 개인적 보복이라는 죄목에 떨어지고 만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법이 얼마나 엄격한가를 보라(마 5:38-40). 우리 스스로 보복하는 걸 금할 뿐 아니라 법률이 허용하는 것이라도 보복적인 색채가 있는 판단은 바라지도 말고 목마르게 기다리지도 말도록 못박고 있다. 그야말로 타락한 성품으로서는 힘든 교훈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다음 몇 가지를 덧붙이고 있다.
① 이것에 대한 치유책. "진노하심에 맡기라." 이것은 우리의 분노에 맡기라는 뜻이 아니라 악마에게 맡기라는 뜻이다(엡 4:26, 27). 할 수 있는 한 우리는 이것을 저지하고 죽이며 숨통을 틀어 막고 억눌러야 한다.
첫째, 우리 원수의 진노에 맡기는 걸로 보자. "원수의 진노에 자리를 물려 주라. 곧 굴복하는 정신을 기르라. 분노를 분노로 갚지 말고 사랑으로 갚으라. 공순이 큰 허물을 경하게 하느니라(전 10:4). 공격과 상처를 마치 양털 뭉치가 돌팔매 맞듯이 받거라. 돌이 날아오면 물러 서되 되받아 튕기지 않고 앞으로 더 나아가지도 않는 양털처럼." 우리 구주의 처방을 들어 보자.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한 번 당한 걸 어떻게 갚을 길이 없나하고 속썩이지 말고 또 한 번 당할 준비를 갖추고 있으라는 얘기다. 일단 어떤 사람의 감정이 치솟아 있고 그 물결이 세차면 그걸 잘못 건드려 더 광포하고 부풀게 하느니 보다는 그냥 화풀이를 다 하게 내버려 두라. 남들이 화를 내면 잠잠히 있는 것이 복수 않는 길이요 올바른 처사다.
둘째,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이걸 하나님의 진노로 본다. "이 하나님의 진노에 맡겨 그에게 심판의 보좌에 앉아 네 원수를 상대하시게 하거라."
② 이에 대한 이유.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신 32:35). 하나님은 주권적 왕이시오 올바른 심판이시니 공의 문제는 그분에게 달린 것이다. 왜냐하면 무한한 지혜의 하나님이시기에 그분 앞에서 모든 행동이 정확한 저울 눈금에 의해서 측정되며 무한한 순결의 하나님이 시기에 그는 죄를 미워하시고 죄악을 용납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이중에 일부 권력을 그는 인간 권세자들에게 맡기셨다(창 9:6; 롬 13:4).
③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우리는 하나님을 소망하고 신뢰하므로 그를 예배하고 따라서 그들의 법적인 처벌은 하나님의 처벌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스스로 보복하지 말아야 할 좋은 이유다.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첫째, 우리는 그 일을 안해도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그의 일을 그의 손에서 빼앗아 행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에 들어 서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그의 일을 그의 손에서 빼앗아 행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에 들어 서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는 그 일을 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겸손하게 그분에게 맡겨 두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에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면 우리에게도 앙갚음을 해 오실 것이다. "내가 듣지 못한 것은 당신께서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시 38:14, 15).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는 데 우리가 들을 필요가 뭔가?
(2) 우리는 우리의 원수들을 해쳐서도 안 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할 수 있는 대로 그들에게 선을 베풀라는 게 우리의 신앙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기독교 특유의 계명이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는 것이다. 이제 이 사랑을 말과 행동으로 그들에게 보여 주라고 가르치고 있다.
① 말로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14절). 하나님의 백성은 권력과 독설의 박해를 늘상 받아 왔다. 그러나 그렇게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해 주라는 것이다. 그들을 "축복하라." 첫째, "그들을 칭찬하라. 그들에게 칭찬할 만한 점이나 장점이 있으면 그걸 들춰 얘기해 주라." 둘째, "그들의 위치에 따라 존경의 말씨를 사용할 것이지 욕설을 욕설로 독설을 독설로 대꾸하지 말라." 셋째, 우리는 그들에게 복수할 생각은 아예 말고 복을 빌어 줘야 한다. 그리고 넷째, 우리는 이 복을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야 한다. 그들을 위해 우리 손으로 뭘 해 줄 수 없다손 치더라도 그들을 위해 기도함으로 우리는 우리의 선의를 증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이걸 우리에게 준칙으로 주셨을 뿐 아니라 이걸 뒷받침하는 모범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이 말은 모든 면에 있어서 철두철미한 선의를 보이라는 말이다. 곧 "기도할 때는 그들을 축복하고 다른 때는 저주하라"는 게 아니라 "항상 그들을 축복하고 언제고 저주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의 축복을 받는 게 행복인 자들의 입에 저주란 어울리지 않는다.
② 행동으로(20절). "네 원수가 주리거든, 능력과 기회가 닿는 대로 적극적으로 친절을 베풀며 그의 유익을 가져 오도록 모든 사랑의 봉사를 아끼지 말라. 네 원수였다 해서 그만큼 소극적일 게 아니라 더욱 더 분발하라. 그래야 그걸로 네가 그를 정말 용서해줬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 될 것이다." 크랜머(Cranmer) 대주교는 사람이 자기의 친구가 되려면 자기에게 몹쓸 짓을 하면 된다고 말했다 한다. 물론 이것은 잠언 25장 21,22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걸 보면 구약도 이러한 진리에 있어서 동떨어지게 생소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여기서 "먼저"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우리는 원수들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그가 배고파하거든, 그를 모욕하는 나머지, 이 제사 하나님이 내 소원을 들어 주시고 그에게 앙갚음을 해 주시는구나, 하고 좋아하지 말라. 그의 궁핍을 두고 이런 식으로 뻐기지 말라. 대신 먹이라. 그가 네 도움을 필요로 하고 넌 그를 굶겨 죽이고 짓밟을 수 있을 그런 때 그를 먹이라(프소미제 아우톤, 12:20) - 그를 실컷 먹이라. 아니 조심스레 실컷 먹이라. 잘게 쪼개서 먹이라(trustulatimpasce). 우리가 마치 정성을 다해 환자나 어린 아이를 멋이듯 먹이라. 네 사랑을 표현하는 뜻에서 그렇게 하라.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화해와 우정의 표시로서 마시우라(포티제 아우톤). 그렇게 해서 그에 대한 너의 사랑을 확신시켜 주라." "다음으로" 왜 우리는 이걸 해야만 하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본다. "네 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곧 너는 다음 둘 중에 하나를 하는 것이다.
a. "그를 녹여 회개하고 친구가 되게 하여 너에 대한 감정을 누그러 뜨리는가"(이것은 쇠를 달굴 때 불을 그 아래만 놓은게 아니라 위에도 두는 데서 취한 비유다. 사울도 이처럼 다윗의 친절에 정복되고 말았다. 삼상 24:16; 26:21). "네가 그걸로 친구를 얻든가 네가 친절을 베풀어도 그런 효과가 안 온다면 그땐"
b. "그게 그의 정죄를 더욱 재촉할 뿐이요 너에 대한 그의 악의가 더욱 핑계할 수 없는 궁지에 몰리고 말 것이다. 이걸로 해서 너는 그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복수가 재빨리 오도록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에게 친절을 보인 본 의도가 이거였다는 게 아니라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그런 결과가 난다는 말이다. 이런 취지에서 마지막 절에 역설적인 권고가 따르고 있으니 이것은 누구나 쉽게 이해하는 것이다. 곧 모든 분쟁에 있어서 복수하는 자들은 정복당하는 자들이요 용서하는 자들은 정복자들이라는 위대한 진리다.
(a) "악에게 지지 말고, 어떠한 종류의 도발적인 악이든 널 뒤흔들어 놓아 안정을 잃고 네 사랑을 파괴하며 안달하게 하여 불미한 짓이나 앙갚음을 하게끔 네게 힘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라." 묵묵히 상처를 견딜 수 없는 자는 그것에 완전히 정복당한 자다.
(b) "선으로 악을 이기라. 널 해치는 자들을 인내와 친절로 압도하라. 최소한 네 평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든 아니면 그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든 너에 대한 그들의 못된 의도를 패배시켜라." 이러한 규칙을 마음에 간직한 자는 칼을 가진 자보다 훨씬 낫다.
3.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언급하지 않은 몇 가지 권면을 간추려 보자. 여기에는 그 자체로서 그것이 좋아서 그런 것과,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 그런 것이 있다.
(1) 그 자체로서 좋은 경우(9절).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시오"(새번역). 하나님은 우리에게 뭐가 선한 것인지 다 보여 주셨으며 그리스도인의 임무도 주어졌다. 여기에 반대되는 것이 악한 것이다.
① 우리는 악을 저지르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악한 것을 미워"해야 한다. 죄라면 이를 갈고 치를 떠는 천하없는 악으로, 우리 새 성품과 우리의 진정한 이익에 거슬리는 것으로 알고 싫어해야 한다. 이것은 죄의 모양이라도 모조리 싫어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으로 육신으로 점찍어진 의복이면 걸치지도 말아라.
② 우리는 선한 것을 행할 뿐 아니라 그걸 굳게 붙잡아야 한다. 이것은 선한 것에 대한 악착같은 선택, 그것에 대한 진지한 애착, 그리고 그것의 지속적인 유지를 뜻한다."저기에서 달리 유혹을 받거나 무서워 달아나지 않게 그걸 붙잡아라……이를, 곧 주님을 굳게 붙잡으라(행 11:23). 이것이 형제애의 교훈으로 첨가된 것은 이것이 형제애의 지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형제들을 사랑해야 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그들을 본받아 죄를 범하거나 우리 임무를 회피할 정도로 사랑하라는 것도 아니요 그것을 범하는 사람을 봐서 그 죄를 가볍게 보라는 것도 아니요 이 세상의 친구를 다 버려도 하나님과 우리의 본분을 굳게 잡으라는 뜻이다.
(2)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한 경우(17절).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것을 도모하라. 곧 그럴 뿐 아니라 너와 교제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 신앙을 추천할 수 있고 그런 분위기를 만들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세히 연구해 보라."(빌 4:8 참조). 이러한 사랑과 봉사의 행동은 특별히 사람들에게서 좋은 평판을 받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보탬이 되고 믿는 자들의 신용에 위로거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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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제가 개척해서 29년 동안 목회하던 강변교회에서 5년 6개월 전인 2008년 1월 13일에 은퇴한 후 그 다음 주일부터 매 주일 100명 이하의, 대부분의 경우 50명 이하의,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방문하며 설교하고 있는데 오늘은 100명 이상 되는 순천 원산교회에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주일 예배를 제직과 교사의 헌신 예배로 드린다는 말을 이영수 목사님으로부터 듣고 오늘 아침 “섬김과 봉사의 삶”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믿음도 중요하고 예배도 중요하고 성경공부도 중요하고 전도도 중요하고 목회도 중요하고 교회 성장도 중요하고 선교도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섬김과 봉사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섬기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막10:45). 예수님께서는 섬기시기 위해서 봉사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보고 서로 발을 씻기는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 사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병자들과 모든 죄인들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시는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사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다음부터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산다고 고백했습니다.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롬1:9).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롬15:25). 그리고 제물 되는 섬김과 봉사와 희생의 삶이 너무너무 귀중하고 기쁜 일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2:17).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고후12:15).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예배 드리면서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사는 것보다 더 귀중하고 더 아름답고 더 축복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실 집사의 직분은 구제를 힘쓰는 섬김과 봉사의 직분입니다. “집사” 즉 “deacon” 이라는 말의 뜻은 “섬김” 또는 “봉사”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들은 구제를 힘쓰고 섬김과 봉사의 사역을 하기 위해서 택함을 받았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행6:3). 여기 “이 일”이란 구제와 섬김과 봉사의 일입니다. 목사와 장로와 교사의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20:28).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엡4:11,12). 성경에 권사라는 말은 없지만 권사의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권사에 비할 수 있는 “참 과부”의 직분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서술했습니다. “참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로서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 것이요”(딤전5:9,10). 집사와 목사와 장로와 교사와 권사와 신자는 모두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베푸는 “섬김과 봉사의 삶”이 얼마나 귀중한 삶인지에 대해서 예수님의 삶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을 살펴보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사셨고 “섬김과 봉사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섬김과 봉사의 삶”과 “섬김과 봉사의 죽음”이라고 요약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영국의 세계적인 복음주의 지도자 존 스토트 박사님이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가장 잘 요약해서 묘사하는 성경 구절이 막10:45 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예수님은 “섬김의 삶”을 사셨고 “섬김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섬기러 왔노라” 라고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친히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주 받은 문둥병자 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대시면서 섬기셨고, 열병으로 앓아 누운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만지시면서 섬기셨고, 두 소경의 눈을 만지시면서 섬기셨고, 각색 병자들 위에 손을 얹고 병을 고치시면서 저들을 섬기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제자들을 섬기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을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 그리고 서로 높아지려고 다투는 제자들에게 낮아져서 섬기는 자가 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찌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찌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4-27).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낮아져야 하고 착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높은 자리와 높은 지위를 붙잡고 있는 사람은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자기 주장과 자기 고집이 강한 사람은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과 권위를 버리시고 친히 낮아지셨고 착해지셨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착해지심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신데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기 위해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착해지셨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행10:38). 착한 일을 행하려면 두루 다녀야 합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정양순 사모님은 경상도를 떠나 전라도로 가셨고,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은 평양을 떠나 제주도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노와 절망 가운데서 살아가던 한 여인에게 착한 일을 행하시기 위해 사마리아의 수가성으로 일부러 찾아가시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섬김과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섬김과 봉사의 삶”과 “섬김과 봉사의 죽음”이었습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도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았고 “섬김과 봉사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교만과 위선과 분노와 증오와 정죄의 극치로 달리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낮아짐과 섬김의 사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는 마음과 영혼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롬1:9). 사도 바울은 기근을 당하고 있는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서 구제 헌금을 모아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달려가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롬15:25). 그리고 자기 자신을 주인이라고 부르는 대신 “종”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롬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빌1:1). 사도 바울은 주님의 종이 된 이후 자기의 의지와 계획과 기질과 취미에 따라서 움직이지 않았고 주님의 의지와 계획과 지시에 따라서 움직였습니다. 마게도냐로 가라고 하면 마게도냐로 갔고 로마로 가라고 하면 로마로 갔습니다. 이방인 교회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라고 하면 이방인 교회를 위해서 고난을 당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방의 교회들을 위해서 매를 맞으라고 하면 매를 맞았고, 풍랑의 위험을 당하라고 하면 풍랑의 위험을 당했고, 순교의 죽음을 죽으라고 하면 순교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과 이방인 교회를 섬기면서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피를 흘리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기까지 했습니다. 섬기면 섬길수록 원망과 불평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생기고 기쁨이 또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고후12:10).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사도 바울은 진정한 기쁨이 소유나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주님 섬김과 성도들 섬김에서 오는 것을 발견하며 기뻐하고 또 기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편지를 쓸 때마다 섬김과 봉사의 삶이 너무너무 귀중한 것을 지적하면서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라고 권면하며 분부했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사도로, 선지자로, 복음 전하는 자로, 목사와 교사로 세우신 것은 성도를 온전케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심이라고 사도 바울이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섬김과 봉사를 귀중하게 여기면서 칭찬하고 또 칭찬했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8:1-5). 그리고 자기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봉사 위에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려도 기뻐하고 또 기뻐하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2:17,18). 사도 바울은 결국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 땅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자기의 몸을 사랑과 희생의 제물로 드리는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다가 “섬김과 봉사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셋째로, 빌립보 교회의 설립자인 루디아도 사도 바울을 따라서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루디아는 평범한 여자였습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옷감 장사를 하던 평범한 여자였습니다. 본래 고향은 두아디라였는데 옷감 장사를 더 잘 하기 위해서 두아디라를 떠나 마게도냐의 한 도시인 빌립보에 와서 살면서 자주 천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루디아는 고향을 떠나 외국에 와서 자주색 옷감 장사를 하면서도 신앙생활과 기도 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6:13에 보면 루디아가 빌립보에 와서 살면서도 안식일에 몇몇 여자들과 함께 빌립보 강변에 모여서 기도를 했다고 했습니다. 행16:14은 루디아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물론 사도행전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또는 ‘경외’하는 사람이란 말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고 믿음의 길로 조금 들어 온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믿음의 길로 조금 들어 온 루디아를 귀하게 보시고 빌립보와 마게도냐와 유럽 복음화의 선구자가 될 사람으로 지목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로 하여금 마게도냐의 빌립보로 가게 하셨고 거기서 루디아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섬세하고 오묘하고 놀랍습니다.
루디아는 사도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빌립보 강변에서 온 가족이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루디아는 결국 섬김과 봉사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루디아는 하나님을 섬기고 사도 바울을 섬기고 가족을 섬기고 빌립보 사람들을 섬기고 빌립보 교회를 섬기는 섬김과 봉사의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섬김의 첫 단계는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인데, 루디아는 사도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을 열어 청종했습니다. 섬김의 둘째 단계는 자기와 자기 집이 모두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는 일인데, 루디아는 자기와 자기 집이 모두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섬김의 셋째 단계는 손을 열고 지갑을 열고 집을 열어서 주님의 종들을 영접하는 일인데, 루디아는 손을 열고 지갑을 열고 집을 열어서 바울과 실라와 누가를 영접했습니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행16:15). 섬김의 넷째 단계는 자기 집을 완전히 열어 교회로 삼는 일인데, 루디아는 자기의 집을 완전히 열어 교회를 삼았습니다.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행16:40). 결국 루디아는 섬김과 봉사의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빌립보서의 두드러진 아름다운 주제가 ‘교제’와 ‘섬김’과 ‘기쁨’인데 그것은 루디아의 ‘교제’와 ‘섬김’과 ‘기쁨’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루디아는 섬김과 봉사의 삶의 모범을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강변교회에서 목회하면서 권사님들과 여 집사님들에게 루디아와 같은 섬김과 봉사의 사람들이 되라고 항상 권면하곤 했습니다.
넷째로, 제주도 복음화의 선구자였던 이기풍 목사님의 사모님인 윤함애 사모님도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의 복음 사역 뒤에는 윤함애 사모님의 “섬김과 봉사의 삶”이 너무너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사실 선교는 유창한 설교나 심오한 신학강의나 놀라운 이적으로 이루어지기 보다는 사랑의 섬김과 사랑의 봉사로 이루어지는데 윤함애 사모님은 사랑의 섬김과 사랑의 봉사로 제주도 복음화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녀는 항상 머리맡에 약 상자와 성경책을 두고 자다가도 부르면 벌떡 일어나 제주도민들을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교인들 중 누가 운명하면 항상 달려가서 시체를 목욕시키고 얼굴에 화장을 해 준 다음 손수 만든 수의를 입히고 밤새 유가족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누가 아기를 낳으면 달려가서 아기를 받아주고 산모와 아기를 돌보아주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또한 그늘진 곳에서 울고 있는 영혼들을 사랑으로 돌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집은 항상 아침에는 거지 떼들로 낮에는 나병 환자들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손이 떨어진 나환자에게는 손수 밥을 떠서 먹여주었다고 합니다. 나환자들이 돌아간 뒤에도 그녀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윤함에 사모님은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아오는 동안 주님께서 사모님의 가슴에 채워주시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순수한 기쁨과 진정한 즐거움을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윤함애 사모님은 이기풍 목사님과 함께 제주도의 밤 하늘을 밝게 비춘 사랑과 섬김의 밝은 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섯째로, 손양원 목사님의 사모님인 정양순 사모님도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정양순 사모님의 하나님 섬김과 남편 섬김과 나환자들 섬김은 너무너무 귀하고 아름다운 섬김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하나님을 향한 순교적 신앙을 가지게 된 데는 정양순 사모님의 기도와 격려와 섬김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여수 경찰서에 수감된 지 10개월 후 손양원 전도사는 광주 형무소로 이송되었는데 이송되던 날 정양순 사모님은 자녀들을 데리고 여수 경찰서 앞에서 잠시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 짧은 만남의 순간 정양순 사모님은 남편의 신앙을 격려하는 단 한 마디의 말을 전했을 뿐이었습니다. 그의 딸 손동희 권사님은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어머니는 성경 한 구절을 손으로 가리키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보! 여기 이말 아시지요? 신사참배에 응하면 내 남편 될 자격 없습니다. 영혼 구원도 못 받습니다.' '염려 마오. 걱정 말고 기도나 해 주구려.' 형사가 걸어와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잠깐 동안의 상면, 그리고 또 다시 긴 이별 .... 아버지는 광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그때 어머니가 펼쳐 보인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 10절이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때는 내 나이 어리고 생각이 짧아 그 상황의 의미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없었지만, 어른이 되어 그때 일을 찬찬히 되짚어 볼 때마다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들곤 한다." 손양원 목사님도 후에 그 사실을 자녀들에게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네 어머니 신앙이 오늘날 나를 있게 했단다. 감옥에 있을 때도 네 어머니가 신앙의 보조를 맞춰 주었기에 이기고 돌아 올 수 있었던 거야. 신앙도 손발이 맞고 호흡이 맞아야 함께 정진할 수 있는 거지. 혼자서는 어렵단다. 아무렴, 대학 열 군데 나오면 뭐해. 믿음이 중요하지."
정양순 사모님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섬긴 분이었고 남편을 섬긴 분이었고 그리고 나환자들을 섬긴 분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2주일간 온갖 수모를 다 당하고 9월 28일 밤 11시쯤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당하여 48세에 순교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남편의 순교 소식을 접한 정양순 사모님은 남편의 시신 앞에서 비통해 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 당신 소원대로 됐군요. 평소 주기철 목사님을 그렇게도 부러워했는데.... 하나님, 감사합니다. 평생 동안 주의 일을 하게 하시고, 손양원 목사가 소원하던 순교를 허락해 주신 은혜,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정양순 사모님은 마지막까지 나환자들의 친구로 살다가 1977년 11월 26일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들이 있는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가 운명하기 전 가슴에 꼬깃꼬깃 간직했던 돈을 꺼내어 딸에게 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돈을 밀양교회에 전해 주어라.” 밀양교회는 건축 중에 있던 나환자 교회였습니다. 정양순 사모님은 슬픔과 아픔과 고통의 골짜기를 걸어가면서도 신앙의 절개를 지키면서 하나님 섬김과 남편 섬김과 나환자 섬김의 기쁨을 누리면서 산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양순 사모님은 손양원 목사님과 함께 여수와 순천의 밤 하늘을 밝게 비춘 사랑과 섬김의 밝은 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섯째로, “작은 예수”로 살던 장기려 박사님도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 섬김과 이웃 섬김으로 한 평생을 제물로 바친 장기려 박사님은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날 새벽 1시45분 경 8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때 한국의 언론들은 그 분을 가리켜 "한국의 슈바이쳐" 또는 "살아있는 작은 예수" 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장기려 박사님의 “섬김과 봉사의 삶”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곤 합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일평생 무소유로 가난하게 사신 분이었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따뜻하게 사신 분이었고, 그리고 예수님을 섬기며 충성스럽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말 보다는 감동적인 설교 보다는 실천적인 삶이 필요한 시대인데 장기려 박사님이야말로 사랑과 섬김과 봉사의 삶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신 분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일평생 무소유로 가난하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주님을 따라서 무소유와 가난의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개인은 물론 교회가 물질적 부요를 탐하는 것을 죄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교회가 건물을 크게 짓는다던가 외형적 확장에 우선적인 관심을 쓰는 것은 신앙의 본질일 수가 없다고 보았고 이런 경향을 자본주의적 맘몬이즘으로 물신주의로 이해했습니다. 한국사회가 잘 살아보자고 외치고 한국교회가 외적 성장에 골몰하고 있던 때인 1975년에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밀톤의 실낙원을 읽어보면 맘몬은 고층 건물을 잘 짓고, 물질 세계의 발전을 잘 일으키는 재능이 있는 마귀로 묘사되었다. 이것을 읽은 뒤부터는 고층건물을 보면 맘몬의 힘을 연상하게 된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딕건물 예배당도 나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지지 아니하고 사람의 예술품은 될지언정 맘몬의 재주인 듯한 느낌이 든다. 또 우리는 세상에서 권세와 지위와 명예 그리고 사업의 번영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축하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여 살던 사람들에게 내려주시는 선물이었던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맘몬과 타협해서 산 결과로 된 것이 아니었던가?”
장기려 박사님은 또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따뜻하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월남 후인 1951년 5월부터 부산에서 창고를 빌려 간이 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들과 전상자들을 무료로 돕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고 나중에는 고신의료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1969년부터 8천 여명의 간질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했다고 합니다. 그는 치료비가 없어 고민하는 환자들을 몰래 밤에 병원 뒷문을 열어주면서 집으로 돌려보내기 일쑤였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의 삶의 철학은 사랑 실천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지고선이다. 사랑은 도덕의 도덕이요 생명의 생명이다. 사랑의 철학은 생명철학의 일대 혁명이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 사랑은 영원한 것, 사랑은 생명 자체이다.” 장기려 박사님은 "사랑의 통일론"을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사랑 앞에는 어떤 이념도 한낱 쓰레기일 뿐 우리는 무력도, 경제력도 아닌 오직 사랑으로 통일을 성취해야 한다." 장기려 박사님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따뜻하게 사셨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무엇보다 예수님만을 섬기면서 충성스럽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1947년 김일성 대학 의과대학 교수 겸 부속병원 외과 과장으로 부임할 때 주일에는 일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부임했고, 그 학교와 병원에서 일할 때 주일을 지키면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는 1948년 8월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 하시던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장로로 장립 받은 후 평생 주님과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그분의 삶의 모토가 "예수를 본 받고 섬기자" 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칭송을 받거나 섬김을 받기를 싫어했고 오직 주님을 높이고 주님을 섬기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기 무덤에 "오직 주를 섬기고 간 사람" 이란 비문을 써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분은 "주님만을 섬기고 간 사람" 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한 평생 사모님과 자녀들을 평양에 남겨 두고 온 슬픔과 아픔을 가슴에 간직하고 슬프게 살았지만 주님만을 충성스럽게 섬기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사랑으로 섬기면서 그리고 천국을 바라보면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물질주의와 맘모니즘으로 어두워진 한국의 밤 하늘을 밝게 비춘 또 하나의 순수한 사랑과 순수한 섬김의 밝은 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값지고 가장 귀중한 것은 부귀영화나 성공이 아닙니다. 많은 물질이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자기의 세력을 과시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유명한 설교자와 유명한 목회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값지고 가장 귀중한 삶은 예수님과 사도 바울과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아서 주님과 교회와 모든 사람들을 낮은 자세로 그리고 착하고 따뜻한 손길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섬김과 봉사의 삶” 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사셨고 “섬김과 봉사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그런 삶을 살라고 분부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기적인고 정욕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인 죄인중의 죄인이지만 주님의 가르침과 사도 바울을 비롯한 신앙의 선배들의 “섬김과 봉사의 삶”을 본 받아서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려고 애를 써 오고 있습니다. 특히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나눔의 손길을 펴려고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사랑과 은혜를 부어주셔서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게 하시고 “섬김과 봉사의 기쁨”을 누리며 살다가 “섬김과 봉사의 죽음”을 죽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려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부음을 날마다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낮아져야 하고 겸손해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착해져야 하고 따뜻해 져야 하고 부드러워져야 할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손을 열고 지갑을 열고 집을 열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눈물을 지니고 함께 울어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추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섬김과 봉사의 삶”을 바로 살려면 하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처럼 손양원 목사님처럼 장기려 박사님처럼 하늘에 있는 아버지 집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순수한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사랑과 은혜를 부어주셔야 할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셔서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게 하시고 “섬김과 봉사의 기쁨”을 누리며 살다가 “섬김과 봉사의 죽음”의 죽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 프랜시스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여 나를 섬김의 도구로 써 주소서.” “주여 나를 봉사의 도구로 써 주소서.”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은 “섬김과 봉사”의 도구로 살다가 “섬김과 봉사”의 도구로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정양순 사모님은 “섬김과 봉사”의 도구로 살다가 “섬김과 봉사”의 도구로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에게도 그런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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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마적 리더십의 재조명
....'카리스마'는 하나님이 사명을 이루도록 주신 영적은사를 말합니다
카리스마적 리더십(Charismatic Leadership), 
너무나 잘 알려져 있지만, 너무도 잘못 알고 있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새롭게 조명하고 업그레이드시켜보려고 합니다.
'카리스마'(Charisma)는 헬라어로 성령의 은사를 말합니다. '카리스'(Charis)란 헬라어로 무상으로 주어진 선물, 은혜를 말합니다. 카리스마는 하나님이 이 땅에서 사명을 이루도록 부여해주신 영적은사와 달란트를 말합니다. 크리스천들에게만 주어진 특권과 의무를 동시에 내포한 리더십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터 와그너 박사는 그의 저서 <성령의 은사와 교회성장>에서 27가지의 성령의 은사(Charisma)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예언·섬기는 일·가르치는 일·권면·헌금·지도력·긍휼·지혜·지식·믿음·신유·기적·영 분별·방언·방언 통역·사도·서로 돕는 일·행정·복음전하는 일·목사·독신·자원하여 궁핍하게 되는 일·순교·대접하는 일이라고 언급합니다.
막스 베버는 이 '카리스마' 개념을 학문적·사회과학적 개념으로 확대 발전시켰습니다. 
사회체계를 유지하고 이끌어가는 데 있어, 카리스마적 리더십의 유형을 중요한 하나의 리더십 개념과, 리더십 유형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능력, 초자연적·초인간적 재능이나 힘을 말하며 그 말에 대한 절대적 신앙을 근거로 맺어지는 지배와 복종의 정당성 유형화에 이 개념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의 저서 <지배의 사회학>에서 지배의 유형을 법률에 의한 합법적 지배, 전통적 지배, 카리스마적 지배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리더십, 앞서 가는자·먼저 행하는 자
Leadership의 어원은 앵글로색슨의 고대어 레단(Ledan)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레단의 어근은 리탄(lithan)에서 왔습니다. 그 뜻은 '가다'(to go)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동적인 성격의 단어입니다. 그래서 리더는 '앞서 가는 자', '먼저 행하는 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버드대의 케네디 스쿨에서는 "리더십이란 도전적인 기회 속에서 비전을 명확히 세워 현실을 돌파해 나가기 위해 조직과 사회를 동원하는 활동을 일컫는다. 이러한 리더십은 학습에 의해서 육성된다. 즉 리더십이란 신비한 활동이 아니라 리더가 수행해야 할 업무와 업무실행능력에 대한 묘사를 총칭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조지 바나(George Barna)는 리더십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사회와 국가를 이끌어갈 영적리더십은 첫 번째, 사람을 이끌도록 하나님께서 부름 받은 자(소명). 두 번째, 예수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이끄는 자(성품). 세 번째, 리더십을 위해 기능적 능력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능력)"라고 합니다.
왜곡된 카리스마적 리더십
엄밀히 말하자면 성경을 벗어난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완전한 리더십이 분명하지만 인간의 죄성, 전적 부패성으로 인해 잘못된 형태로 리더십이 나타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기존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의 개념은 왜곡된 경우가 많습니다. 히틀러, 무솔리니, 한국의 군사정권은 정확히 규정하자면 파시즘, 반민주적 독재, 권위주의, 폭력, 억압, 이미지 연출이나 대중조작, 상징, 왜곡된 카리스마적 리더십이나 사술이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바른 의미에서 살펴보고 카리스마적 정치 리더를 들자면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 링컨보다 먼저 노예해방운동에 앞장섰던 '영국의 양심' 윌리엄 윌버포스, 학자이자 목사 직분을 거쳐 당대표에 이어 수상에 오른 네덜란드의 아브라함 카이퍼, 전후 독일을 복구하고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킨 독일의 아데나워 수상을 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철의 여성' 영국의 대처 수상입니다.
이들은 모두 확고한 신앙과 원칙으로 국가와 사람들을 섬기는 리더십을 발휘하였습니다. 기도·성경말씀·원칙중심·코칭·멘토링·십자가의 자기희생·인권과 평화·사랑·청지기·섬김이 카리스마적 리더십의 핵심가치입니다. 성경의 나침반, 성령의 레이더망을 통해서 휴먼 네트워크와 "The Kingdom of God"을 확장하는 것이 카리스마적 리더십의 목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리더십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은사(Charisma)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servant)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롬 12:6~8).
베드로는 리더십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각각 은사(Charisma)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성경의 진리는 인간의 신격화가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인됨을, 그리고 물질의 신격화가 아니라 물질이 인간과 하나님 앞에 종속되어야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초월한 제1의 이데올로기 입니다.
기독교는 칼 마르크스가 말한 인민의 아편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빛과 소금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바르게 자기의 정체성을 찾지 못한 현실적인 한계는 있지만, 성경은 분명히 스티븐 코비가 말한 '원칙중심의 리더십'보다 더 엄격하고 철저한 리더십의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 자본주의'를 언급하면서 미국이나 유럽의 경제발전의 원동력을 기독교적 가치로 보는 것입니다. 
한국은 이러한 정신이 빠진 채 수입된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천민자본주의적인 색채가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의한 정치, 사회적 양극화, 여기에 한 몫을 하는 교회의 자기성찰 부족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온전한 카리스마 리더십이었습니다. 
한편,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에 의지한 영적은사가 카리스마적 리더십의 요체입니다. 
영적인 수직적 양극화와 수평적 양극화를 지양하는 것이 전도와 선교요, 리더십의 원리로 보자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는 카리스마 리더십을 지향하는 카리스마적(Charismatic) 리더십을 추구함이 마땅합니다.
구태여 얘기해 보자면 꼭 그렇지는 않다해도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8가지 습관>에서 말한 IQ, EQ, PQ(신체지능), SQ(영적지능)와 함께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지혜와 능력을 통해서 발휘하는 리더십을 카리스마적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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