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1.28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은혜.긍휼.야다.희년십자가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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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33]-----------

11.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12.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야다) 너도 내 앞에 은총(헨)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13.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헨...은혜)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라아) 내게 주를 알리시고(야다)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1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15.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16.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1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야다)

18.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아)

1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투브, 토브)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카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하난...be gracious to)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라함...show compassion on) [새번역]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의 모든 영광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할 것이다. 나는 주다.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NASB]출 33:19 And He said, "" I Myself will make all My goodness pass before you, and will proclaim the name of the LORD before you; and I will be gracious to whom I will be gracious, and will show compassion on whom I will show compassion.'' 

20.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추르) 위에 서라

22.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출34]--------------------

5.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카라..부르다, 소환/반포하다)

6.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라훔) 은혜롭고(한눈) 노하기를 더디하고(아레크) 인자(헤세드)와 진실(에메트)이 많은 하나님이라

7.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아온)과 과실(페샤)과 죄(하타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나카)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파카드)

8.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9.이르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하건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으소서

10.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네가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행하심을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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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j;(2603, 하난) 호의(은혜)를 베풀다, 자비롭다, 불쌍히 여기다 --불쌍히 여겨 은혜를 베품(회개시 사죄/축복 + 인도/동행..자신을 주심), 

1. 하난(동사)은 기본어근이며, '호의(은혜)를 베풀다, 자비(은혜)롭다, 불쌍히 여기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80회 나온다. 

(a)  칼형에서 '호의(은혜)를 베풀다, 자비롭다, 불쌍히 여기다'를 의미한다.

하난은 칼형으로 사용된 용례들 중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용례들, 즉 대략 41회 용례들이 여호와를 주어로 취한다. 청원의 말, '혼네니'(나에게 자비로우소서)는 시편에 19회 나온다. 시편기자는 여호와께 외로움(시 25:16, H17), 고통(시 31:9, H10), 죄과(시 51:1, H3)에 대하여 자기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간청한다. 죄과에 대해서 그가 구하는 은총은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고발을 말소시켜 달라는 것이다. 사 33:2을 참조하라.

여호와는 자비롭게 야곱에게 자녀를 주시고(창 33:5) 그를 번영하게 하셨다(창 33:11). 베냐민에게 내린 요셉의 축복(창 43:29)과 아론의 축복(민 6:25)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태도를 필요로 한다.

아모스(암 5:15)는 청중들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도록 의를 세우라고 촉구한다. 요컨대 여호와는 그가 선택한 사람들에게 자비롭게 행하신다는 점에 있어서 주권자이시다(출 33:19).

(b)  니팔형에서 '불쌍히 여기심을 받다, 동정의 대상이 되다'를 의미한다.

렘 22:23, "레바논에 거하여 백향목에 깃들이는 자여 여인의 해산하는 고통 같은 고통이 네게 임할 때에 너의 가련함이 얼마나 심하랴".

(c)  피엘형에서 '은혜(자비)롭게 하다'를 의미한다.

잠 26:25에서 말이 외적으로 친절하거나 동정적인 말에 대해 사용되었다.

(d)  포엘형에서 '자비를 베풀다, 불쌍히 여기다'를 의미한다(잠 14:21, 시 102:14).

(e)  호팔형에서 '은혜 받다(입다)'를 의미한다(사 26:10, 잠 21:10).

(f)  히트파엘형에서 '은혜(자비, 은총)를 구하다'를 의미한다.

히트파엘 어간은 약속의 땅을 보게 해 달라고 한 모세(신 3:23)와 성전 봉헌 때의 솔로몬(왕상 8:33, 왕상 8:47, 왕상 8:59, 왕상 9:3, 대하 6:24, 대하 6:37)과 시편기자(시 30:8 H9, 시 142:1 H2) 그리고, 야곱이 더불어 씨름한 천사에게 간구하는 것을 인용한 호세아(호 12:4 H5)가 하나님께 탄원할 때, 사용하였다. 빌닷에게서 하나님께 탄원하라는 충고를 받은 욥(욥 8:5)은 비록 자기가 의롭긴 하지만, 이 방법만이 그가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는 길일 것이라는 점을 시인한다(욥 9:15).

2. 하난(동사)은 기본어근이며, '싫다, 몹시 싫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욥 19:17에서 1회 나온다: "내 숨을 내 아내가 싫어하며 내 동포들도 혐의하는구나". (참조: E. YAMAUCHI;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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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7355, 라함) 깊이 사랑하다, 긍휼히 여기다, 자비롭다 --단장의 고통/연민+체휼+임마누엘(인도+동행+회복/누림)

라함(동사)는 라함(!j'r' , 7356)에서 유래했으며, '깊이 사랑하다, 긍휼히 여기다, 자비심을 갖다, 자비롭다'를 의미한다.

이 어근은 '자연적인' 유대에 뿌리를 둔 깊은 사랑(대개 윗사람이 아래 사람에 대해 갖는 사랑)을 가리킨다. 이 어근의 피엘형은 우리가 동정, 연민, 자비 등 여러가지로 알고 있는 깊은 내적 감정에 대해 사용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7회 나온다.

라함은 사람에게는 자주 사용되지 않는다(12회).

이 단어의 칼형은 단 한번만 사용되는데, 시편 기자가 여호와에 대한 그의 사랑을 고백할 때이다(시 18:1). 이 사랑의 깊이는 이 단어와 레헴/ 라함과의 결합에서 보여진다. 

이사야(사 49:15)가 젖먹이 아이에 대한 어미의 사랑을 언급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라. 이 단어는 또한 아버지의 사랑을 가리킬 수도 있다(시 103:13). 

이 동사는 인간이라는 사실로 인하여 서로를 향해 갖는 자비의 감정을 나타내며(렘 50:42), 이러한 자비의 감정은 어린 아이(사 13:18)나 다른 무력한 사람들로 인하여 가장 쉽게 일어난다. 이스라엘과 바벨론의 적들이 그들의 잔인한 행위를 볼 때 결여한 것은 무력한 자들에 대한 바로 이러한 자연스런 자비이다(사 13:18, 렘 6:2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적들에게 이러한 감정(동정심)을 느낄 수도 있다(왕상 8:50, 렘 42:12). 

실로 선지자들은(사 13:18) 바벨론(렘 21:7)과 하나님(렘 13:14)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가지 아니할 것(결여)을 기술할 때 후츠(어떤 사람으로부터 타인에게 흐르는 감정), 하말(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타인을 위하여 즉 그들의 어떤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하여 행동하게끔 하는 감정의 힘), 및 라함(어떤 '자연적인' 유대에 기초하는 깊은 내적 감정)을 결합한다.

이 어근은 하나님께 빈번히 사용된다. 이 어근은 두 개념을 통합한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이라고 부른 자들과 맺고 있는 강한 결속의 개념이다(시 103:13). 하나님께서는 아비가 자식들을 돌아보듯이 자기 백성들을 돌아보신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신다(참조: 미 7:17). 

두 번째 개념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하넨:은총)의 개념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그가 택하신 자이면 누구에게든지 은혜롭고 자비하시다고 하셨다(출 33:19).

하나님의 깊고 온화한 사랑에 부속하는 몇 가지 개념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의 개념(출 33:19)이고, 

둘째는 그의 백성들이 심판을 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때 그들을 향하여 베푸시는 자비와 용서이며(신 13:17), 또한 그의 회개하지 않는 백성들을 심판에서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자비와 은혜(왕하 13:23)의 개념이다. 따라서 이 속성은 부분적으로 종말론적 희망의 토대가 된다(참조: 사 14:1, 사 49:13, 사 54:7, 렘 12:15, 렘 33:26, 겔 34:25, 미 7:19, 슥 1:16). 

신명기(신 30:3)는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포로(exile)를 예언하면서 회개만이 하나님의 연민/애정에 찬 긍휼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주목할만 하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가 거두어 지고 바벨론의 손에 의한 가혹한 심판이 초래되는 것을 읽는다(사 9:17, 사 27:11, 호 2:4). 

바벨론 포로 동안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사랑과 온화한 자비로 백성들을 격려했으며(애 3:32) 그들로 겸손히 회개하게 하고 하나님께 아버지 같은 긍휼을 다시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하게 하였다(슥 1:12). 

부자 관계의 회복과 포로에서의 귀환은 이러한 동반하는 사랑의 돌보심을 증거한다(호 2:23).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포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따라(사 30:18)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하나님에 의해 끝나게 되었다고 한다(겔 39:25, 참조: E. J. Young, The Book of Isaiah, Ⅱ, p.353f.).

포로에서의 귀환에 대한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부자 관계가 결코 깨어지지 아니할 영원한 상태를 지향한다(호 2:23, 사 54:8, 사 54:10). 

라함의 푸알 완료 여성형 루하마는 명사로 사용되어 호세아의 음란한 아내 고멜의 딸에게 준 이름이며, 이스라엘의 상징적인 이름이다. 로루하마(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함, 호 1:6)라는 이름에 대신하여 준 두번째 이름이다(호 2:1). 이 네번째 아이(둘째 딸)의 이름 루하마는 이스라엘의 여호와께 대한 변화된 관계, 즉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뜻하는 상징적인 이름이다(호 1:10, 참조: 롬 9:25, 벧전 2:10). 


=========.아헤브=아가페사랑으로!!..하나님과 이웃 사랑하기===========

여호와의 강림(출 34:5-9)

모세가 산꼭대기에 올라가자마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만나 주셨다(5절). “여호와께서 강림하셨다.” 즉 어떤 가시적 표시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해 주었고 그의 영광을 나타내 주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강림은 하나님의 겸비를 뜻한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자를 관찰하시려고 하나님은 자신을 친히 낮추신 것이다(시 113:6).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 8:4)

하나님은 “구름 가운데” 강림하셨다. 아마 지금까지 이스라엘에 앞서갔던, 그리고 모세가 그 전날 장막 문에서 만났던 바로 그 구름 기둥이었을 것이다. 이 구름은 모세에게 경외심을 일으켰다. 가까이할 수 있는 친밀함이 있다 하여 그것을 경멸치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제자들도 “그들이 구름 안에 들어갔을 때에 두려워했다”(마 17:5, 6). 하나님께서 구름을 그의 처소로 삼는 것은 비록 당신에 대해 많이 알려 주셨지만, 아직도 많은 것이 가려져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Ⅰ.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선포하신 방법(6, 7절). 하나님이 그의 앞을 지나시며(intransitu) 선포하셨다. 한 자리에 고정된 하나님을 보는 것은 미래의 세계로 보류되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보는 최상의 것도 지나가는 덧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전날 모세에게 약속하셨던 것, 곧 당신의 영광을 지나가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실행하고 계신 것이다(33:22). 하나님은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셨다”(6절). 그럼으로써 자신을 나타내시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이름을 선포하셨을 때에는, 자존자와 자존자의 영광 중에서 자신을 알리신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와 선하심과 모든 자에 충족하심의 영광 속에서 당신을 계시하셨다.

이제 율법의 제2판을 출판하시려는 하나님께서는 이 선포를 그 서문으로 삼으신 것이다. 율법, 특히 구제하는 율법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금송아지를 숭배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했다는 사실이 막 조인되었다. 하나님은 이 선언을 통해, 하나님의 용서는 “오직 그 자신의 선의로만”(ex mero motu) 되는 것이요, 인간들의 공덕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시려 한 것이다.

이름의 선포는 하나님의 자비의 우주적인 크기를 나타낸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만 선하실 뿐 아니라 모두에게 선하시다. 모든 사람이 이 사실을 알게 하자.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귀 있는 모든 자에게 들려주고 알리고 또 믿게 하자.

1. 우리가 관계하는 하나님은 위대한 하나님이시다. 그는 주 여호와이시다. 그는 스스로 존재하시고 모든 존재자의 근거가 되신다. 그러므로 그는 여호와-엘, 곧 “여호와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모든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다. 이것은 그의 자비를 나타내 보이시는 접두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까지도 진지하고 거룩한 경의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말하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그 자비에 의지하도록 우리를 고무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는 약하고 허약하고 거짓되고 변하기 쉬운 인간이 주는 자비가 아니라 곧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자비다. 그러므로 그것은 확실한 최상의 자비니 우리가 믿어 의지해야 하며 경멸할 수 없는 것이다.

2. 그는 선하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위대하심과 선하심은 서로를 드러내고 서로를 강조한다. 그의 위대하심에 대해 무서워 떨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얼마나 자비하신 분인가를 알려 주신다. 또한 그의 자비를 기화로 이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를 알려 주신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잘 알게 하고 깨닫게 하며, 그의 선하심이 그의 영광인 동시에 그의 즐거움이란 것을 보여 주는 많은 말이 쌓여 있다. 그러나 불필요한 동어 반복은 없다.

(1) 하나님은 “자비하시다.” 이것은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애틋한 사랑을 뜻한다. 이 말이 제일 앞에 놓여 있다. 그것은 자비의 대상이 되는 타락한 인간을 향해 베푸시는 모든 실례 중에서 제일 앞에 서 있는 수레바퀴이기 때문이다(삿 10:16; 사 63:9).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지독하다고 생각하거나 우리 형제들에 대해 완고한 마음을 버려야겠다.

(2)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이것은 값없음과 친절하심을 말한다. 즉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을 사랑하고 계실 뿐 아니라 그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에게 유익을 즐겨 베푸신다. 그들 속에 있는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인자한 뜻에 따라 행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자비는 은혜로우시되 값없는 은혜다. 이것은 우리가 긍휼한 마음과 정중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교훈해 준다(벧전 3:8).

(3)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신다.” 이것은 때로 죄인들에게 악행을 범할 기회를 주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한 지류다. 즉 이스라엘의 악함이 그러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했고, 또 경험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신다. 즉 오래 참고 견디신다. 정의의 집행을 연기하신다. 그는 은혜롭게 기다리시며 긍휼의 기간을 연장하신다.

(4) 하나님은 “인자와 진실이 많으시다.” 이것은 풍성한 인자하심, 즉 우리가 마땅히 받을 바 이상으로, 우리의 생각과 그 미치는 한계 이상으로 풍성한 인자하심을 뜻한다. 긍휼의 샘은 언제나 차고 넘치며, 긍휼의 하수가 언제나 흐르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과 각 개인에게 넉넉하며, 영원히 넉넉한 긍휼이 있다. 이것은 약속된 인자하심, 곧 인자와 진리가 함께 있음을 뜻한다. 또한 약속된 인자와 그것을 보증하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의미한다. 그는 인자하실 뿐만 아니라, 약속을 주시사 우리에게 인자에 대한 기대를 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 수밖에 없는 것이다.

(5) 하나님은 “인자를 천 대까지” 베푸신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미를 나타낸다.

① 긍휼이 수천 명의 사람에게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그가 갑에게 은혜를 베풀고 또 을에게 은혜를 베풀어도 긍휼은 결코 다함이 없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아져도 역시 넉넉히 베풀 수 있는 긍휼을 가지고 계신다.

② 긍휼이 수천 세대, 곧 세상 끝날에 오는 사람들에게까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6) 하나님은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신다.” 용서하는 긍휼이 특기된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확대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며,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열어 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그는 최근에 극히 의미심장한 증거를 나타냈던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종류의 죄악을 용서하신다. 곧 “악과 과실과 죄”다. 용서하심도 다양하다. 또한 그에게는 “풍성한 구속이 있다”(시 130:7).

3. 그는 공정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는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용서치 않으신다”(7절). 혹자는 이 구절을 진노를 경감하신다는 뜻으로 읽고 있다. 그가 공허케 할 때도, 그는 완전히 황폐케 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즉 “하나님은 구제책이 없는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몰고 가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읽는 바와 같이, 마치 그들의 죄를 알아채지 못했다는 듯이 그 죄를 묵과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혹은 참회하지 않고 계속 범하는 죄는 용서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그의 정의에 어떤 보상이 없이, 그리고 그의 통치에 대한 영예를 입증하지 않고는 죄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2) 그는 “아비의 악을 자손에게까지 보응하신다”(8절). 모든 영혼이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은 공정하게 처리하실 것이다. 피로 물든 죄에는 악성(惡性)이 있다. 그는 때때로 그렇게 보응하시되, 특별히 우상 숭배자들의 형벌에 대해 그렇게 행하실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를 증오하시고 분노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신다”(시 103:9). 다만 3, 4대까지만 보응하신다. 그러나 “인자를 천 대까지 베푸신다.” 이것이 영원토록 하나님의 이름이 될 것이며, 모든 세대에게 이렇게 기억될 것이다.

Ⅱ. 모세는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에 관해, 그리고 당신의 은총과 긍휼에 관해 선언하신 것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소서”라고 했던 요구에 넉넉한 응답으로 받아들였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모세가 다시 하나님의 뒷모습을 보기 위해 바위틈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모세는 이것으로 만족하여 더이상의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도마에게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라”고 말씀하셨지만 그가 그렇게 했다는 기록을 볼 수 없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당신의 이름을 선포하시자, 모세는 “이제 넉넉합니다. 나는 하늘나라로 갈 때까지는 더 이상의 것을 기대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가 본 것을 말로 기술하기에는 합당한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사실에 귀를 기울여 보자.

1. 그 사건이 모세에게 어떤 감명을 주었는가? 모세는 급히 땅에 엎드렸다고 했다(8절).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1)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겸손한 존경과 찬미이며, 하나님이 선포하신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린 것이다(시 29:2).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까지도 깊은 존경과 거룩한 두려움으로 추앙해야 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이 친히 보이신 그 현상에 대해 즐거움과 감사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를 구체적 실례로 경험했을 때뿐만 아니라, 인자를 베풀겠다는 말씀의 선포만 듣고도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금도 은혜로우시며 앞으로도 은혜로우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알리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3) 이 선언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지에 대해 거룩한 복종심을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은 물론 그의 정의에도 찬성하고,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 자신을 친히 선포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와 지도하심에 따르겠다는 각오의 표현이다. 이 하나님이 영원히 영원히 우리의 하나님이 되게 하자.

2. 모세는 그 사건을 어떻게 활용했는가? 모세는 즉시 그것을 기도의 터전으로 삼았다(9절). 그래서 그것은 진지한 애정이 깃든 기도가 되었다.

(1) 모세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셨던 하나님의 임재를 구했다. “기도하오니, 주는 우리 중에서 행하옵소서. 당신의 임재만이 우리의 안전과 승리의 전부이옵니다.”

(2) 죄의 용서를 구했다. “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우리 가운데 주께서 계시기를 바랄 수 없나이다.”

(3) 선민의 특권을 기도했다. “우리로 주의 기업을 삼으소서. 주께서 특별히 보살피시고 권념하시며 기뻐하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것이요, 모세에게 확신을 준 것이지만, 모세는 그것들을 위해 기도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허락하심의 신빙성을 의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을 인준해 주시기를 열망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기도를 물리치기 위함이 아니라 기도하도록 지도하고 격려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다. 은혜를 통해 희망을 갖게 되고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도 계속 용서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자신들의 용서가 다시 새로워지도록 기도해야 하며, 더더욱 그들의 영혼에 그것이 분명해지기를 바라는 기도를 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많이 보면 볼수록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한 수치는 더욱 커지고 죄에 대한 관심은 더욱 진해진다.

하나님은 선포의 마지막에서 “그 죄를 자손에게까지 보응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여기서 그 화가 면제되기를 탄원한다. “여호와여, 저들뿐만 아니라 저들의 자녀들까지 용서하시사, 당신과 그들이 맺은 계약 관계가 우리 후손에게까지 미치게 하며, 그들의 유업이 되게 하소서!” 이와 같이 참으로 공적인 정신을 가진 모세와 같은 사람은 자녀들과 장차 태어날 후손들을 위해서까지 중보의 기도를 드린다.

그러나 모세는 이상한 탄원을 드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기 때문이니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가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라고 하셨다. 모세는 말한다.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와 함께하여 주옵소서. 그들이 악하면 악할수록, 그들을 좀더 훌륭한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임재와 은총이 더욱 필요합니다.” 모세는 그들이 너무나 목이 곧아, 자기로서는 그들을 다스릴 수 있는 충분한 인내와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우리 가운데 행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그들에게는 결코 경외심이 없을 것이니이다. 당신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니(호 11:9) 저들을 용서하시고 참을 수 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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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jr"(7349, 라훔) 자비로운, 동정심이 있는

라훔(형용사)은 라함(!j'r; , 7355)에서 유래했으며, '긍휼히 여기는, 자비로운, 동정심이 있는'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3회 나온다.

형용사 라훔은 하나님께만 사용되며(시 112:4은 아마도 예외인듯함) 하나님의 속성들 중의 하나를 표현한다(출 34:6, 신 4:31, 대하 30:9, 느 9:17, 시 78:38, 시 86:15, 시 103:8, 시 111:4, 시 145:8, 욜 2:2, 욘 4:2). 즉 하나님이 라함(!j'r; , 7355)에서 나타내는 것을 라훔(!Wjr" , 7349)에서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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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750, 아레크) 노하기를 더디하는, 긴 long

아레크(형용사)는 구문형태의 에레크(&r,a,)로만 나오며, 독립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이 단어는 '긴' long을 의미하며, '참을성 많은' longsuffering, '노나 분노를 더디내는' 이라는 의미로 번역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5회 나오는데, 하나님에 대해 10회(출 34:6, 민 14:18, 느 9:17, 시 56:15, 시 103:8, 시 145:8, 렘 15:15, 욜 2:13, 욘 4:2, 나 1:3), 인간에 대해 4회(잠 14:29, 잠 15:18, 잠 16:32, 전 7:8), 새의 날개폭에 대해 1회(겔 17:3) 사용되었다.

(a)  이 단어는 하나님이나 사람에 대해 사용될 때

① 주로 압파임(!pa')과 함께 사용되었으며, 이 경우 '노나 분노를 더디내는'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신다]"(출 34:6, 민 14:18, 시 86:15, 등)라고 말할 때, 이것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은 코가 길다'로 표기된다. 그가 화낼 때, 그의 코는 붉어져서 달아 오른다. 아마도 현대어에서 이 관용어들이 아직도 그 어원과 관련을 맺고 있는지, 그리고 이 관용어들이 단순히 오래 참다와 화내다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자비로울 때, 그의 코는 길어지게 된다. 그의 코는 너무나 길어서 완전하게 태워버리기까지는 영원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V. P. Hamilton).

② 루아흐(영)와 함께 사용되었을 때 '참을성이 많은 마음'을 나타낸다(전 7:8).

(b)  이 단어는 겔 17:3에서 날개 깃이 '긴' 것을 나타낸다: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채색이 구비하고 날개가 크고 깃이 길고 털이 숱한 큰 독수리가 레바논에 이르러 백향목 높은 가지를 취하되:.(참조: BDB;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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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eje(2617, 헤세드) 친절, 인자, 자비, 자애

1. 헤세드(명남)는 하사드(ds'j; , 2616)에서 유래했으며, '친절, 인자, 자비, 자애'를 의미한다.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40회 나온다.

2. 헤세드(명남)는 하사드(ds'j; , 2616)에서 유래했으며, '책망, 비난, 수치, 치욕'을 의미한다.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회 나온다(레 20:17, 잠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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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a,(571, 에메트) 신실, 성실, 확실함, 진리

에메트(명여)는 아만(@m'a; , 539)에서 유래했으며, '신실(성), 성실(성), 충실함, 확고함, 확실함, 진리, 진실'을 의미한다. 에메트는 헬라어 알레디아에 해당한다.

구약성경에서 에메트는 126회 나오며, 다음의 의미를 나타낸다.

(a)  에메트와 의미

에메트는 아멘, 곧 확고한, 확실한, 신실한 것으로 생각되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진실한 것을 의미한다. 인격에 대해 사용될 때 그것은 때때로 주로 그의 말, 행동, 사상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을 표현한다. 이쉬 에메트는 그의 행위가 진리의 규범에 지배를 받는 사람이며, 그러므로 성실한 사람이다. 하나님께 적용될 때, 특별히 그의 신실성에 대해 사용된다. 이 단어는 '확고하다'를 뜻하는 어근 'mn에서 파생된 것으로 학자들은 이해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구약성경 학자들은 히브리 저술가들이 말하는 '진리'란 의미상 '불변성'(stability), '확고함'(firmness) 혹은 '확실성'(reliability)이란 개념을 시사해주는 '신실성'(faithfulness)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예프센(Jepsen) 기록을 요약해서 말한다면, '에메트는 신뢰할만한 것으로 입증되어야 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영어로 이 개념을 전달하는 데에는 'Reliability'(확실성)가 가장 포괄적인 단어일 것이다. 에메트는 다른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고 했다. 예프센은 이것을 인간의 진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적용시키는 것으로 말을 맺는다. 진리의 하나님으로서 "여호와는 ... 그의 말씀과 사역 안에서 우리가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TDOT Ⅰ313).

이런 견해를 근거로 하여 구약성경에서 진리는 단순히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성에 근거한 것이라는 주장이 종종 있어 왔다. 만일 이 견해를 받아 들인다면, 이것은 진리에 대한 히브리적 개념과 헬라적 개념 사이의 근본적으로 분명한 대조를 보여주는 요인이 될 것이다. 볼트만(R. Bultmann)은 쉽사리 알레데이아의 헬라어 용법이 셈어적 용법과 대조된다고 말한다(TDNT Ⅰ238). 이 이론에 따르면, 고전 헬라어에서 알레데이아는 단순한 현상과 대조되는 '진리'(truth)를 의미하는데 반해, 히브리어에서 이에 병행되는 단어는 '불변성'(stability) 혹은 '신실성'(faithfulness)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런 대조가 어느 점에서는 타당성을 지니는 반면, 이 주장들이 조심스럽게 한정되지 않을 경우에는 잘못될 수도 있고, 지나치게 단순화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에메트는 그 사용된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나타낸다. 에메트가 에메트로 간주되고, 에메트에 의해 지적되는 독특한 사실들을 항상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우에 이 단어는 법률적 영역을 넘어가는 불확정한 일반적인 타당성이나 정당성을 지적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진실이나 사실(reality)로 인정하기를 항상 요구하는 사실(facts), 신과 인간의 질서에 일치하여, 존중을 받는 정상 상태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유사하게 미쉬파트(fP;v]mi , 4941: 공의, 심판)의 체다카(hq;d;x] , 6666: 의), 샬롬(!/lv; , 7965: 완전, 평화)과 같은 관련 용어에 반영되어 있다. 그 의미와 일치하여 그것은 전혀 일반적으로 진리나 진실(truth)로, 심지어 정상적 개념으로서 '진실성'(veracity)으로 번역할 수 있다.

(b)  에메트의 법률적 용법.

에메트는 기본적으로 가장 확실히 법률 용어에서 '사실상의 과정이나 인과의 진실을 묘사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 22:20에 "그 일이 참되어(에메트)..."라는 표현에서 앞의 경우와 같이 "그 일이 비방거리에 근거하지 않고 확실한 사실들, 곧 진실에 근거한다면"이란 의미를 읽는다.

삿 9:16(삿 9:19)의 "너희의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라는 말에서 에메트는 의와 관련되며, 그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따지고 있는 것이다.

삿 9:15에서는 "참으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메트가 사물에 적용되는 경우에 법률 용어의 비유적 용법을 보게 된다.

창 24:48에 "바른 길"이 데레크 에메트, 즉 제시되는 많은 길들 중에 확실히 성공하는 길이다.

렘 23:28의 "내 말을 받는 자(선지자)는 성실함으로(에메트) 내 말을 말할 것이라"는 말에서, 에메트는 그 자체 꿈으로가 아니라 실제적 역사(operation, 렘 23:29)를 나타내는 사실(a fact)을 가리킨다. 단 8:26에서(이상이 확실하니) 에메트는 그 계시가 실제로 일어날 명백한 것임을 확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사 59:14, 사 59:15에서 진실이 부족하다는 불평은 사 59:13 상반절에 "배반하는 것"에 관한 언급이 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 이스라엘의 불신실성에 대한 언급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좀 더 세밀하게 검토해 보면, 불평의 참된 원인은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마찬가지로 예레미야도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혀로 거짓말 하기를 가르친다"고 불평하였다(렘 9:5). 틀림없이 이런 일 때문에 결국 어느 누구도 자기 형제를 신뢰할 수 없는 것 같다(렘 9:4). 그러나 여기에서 주요 문제는 거짓말 그 자체이다.

스가랴도 이와 같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을 베풀고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특별히 에메트의 개념에 있는 평결(judical finding)과 재판의 기준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

시편의 세 구절들에서 진리는, 많은 학자들이 오로지 헬라 문헌에서만 발견된다고 주장하는 거의 그런 의미에서, 은폐(concealment)와 대조하여 나온다. 시 43:3에서 기자는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라고 기도한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계실 것을 바라는 기도가 아니라 "간사한 자"(시 43:1)의 유혹적인 말에 직면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건의 진상을 보여주기를 원하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그는 진리와 빛을 필요로 한다. 진리란 그를 어둠에서부터 벗어나게 하여 사건들이 있었던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시 45:4에서 왕은 진리의 옹호자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염두에 둔 것은 왕의 확실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의심스럽고, 부정하고, 공정치 못하거나 거짓된 것은 무엇이든지 기꺼이 다 드러낼 그의 마음 자세이다. 왕의 고통 당하는 자들의 고통의 원인을 공공연하게 드러냄으로써 그들을 옹호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시 51:6의 "중심에 진실함을"이라는 유명한 언급은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앤더슨(A. A. Anderson)은 여기에서 에메트가 '신실성'(faithfulness)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Psalms, Ⅰ, 396). 그러나 이 개념은 시편 기자가 충실함을 간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기만으로부터의 해방을 간구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인 것 같다. 이 시편의 주제는 고백이며,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보신 그대로 사건들의 상태의 진실됨을 시인하는 것이다. 이 해석은, 만일 우리가 "중심"(inward parts)을 계시의 필요와 관련되어 있는 "덮여 있는 것"을 의미하고(E. A. Leslie, The Psalms, 1949, 400), 이 시편의 주제를 여호와께서 공정하시다라는 것으로 이해한다면(S. Mowinckel, The Psalms in Isreal's Worship, 1967,Ⅰ, 214), 훨씬 더 적합할 것이다.

그리고 잠언에서 진리와 거짓말(혹은 속임수) 사이의 대조를 배경으로하여 에메트가 사용된다. 지혜가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잠 8:7)라고 말할 때, 그 요지는 지혜가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을 기만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혜는 교육과 지식을 통해서 그에게 모든 것을 드러낼 것이다. 잠 22:21에서는 진리가 참된 대답이 행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즉 그곳에 거짓이나 허위가 없도록 하기 위해 드러내어 진다.

(c)  에메트의 종교적 용법.

① 법률적 영역에서 중요한 다른 표현과 같이, 진리의 개념은 특별히 구약성경의 종교적 용어에 그 자리를 잡고 있다. 에메트의 종교적 용법은 항상 비유적으로 이해하지 아니하지만, 종교적 이해(통찰)에서 생겨날 수도 있다. 어쨌든 많은 경우에 그것은 법률적 용법에 의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종교적 사실을 오로지 의미한다. 때때로 사법적으로 의인으로 묘사된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태도를 명백한 진리의 사실에 근거하며, 진리가 하나님 자신의 행위와 말씀 안에 있는 토대인 것 같이 진리를 행한다. 하나님의 진실함은 인간의 진실함을 요구한다(시 51:6). 여호와의 성산에 거하기에 합당한 자는 그 마음에 에메트("진실")를 말하는 자이며(시 15:2),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생의 질서라는 의미에서 진리에 전념하는 마음을 가진 자이다. 이 마음은 사회 생활에서 실제적으로 표현된다(참조: 겔 18:8).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한다(참조: 18:9). 하나님은 그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라고 명하신다(왕상 2:4).

호세아가 호 4:1에서 이 땅에 진실(에메트)이 없다고 불평할 때, 진실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즉 생의 모든 영역에서 진실함은 하나님의 뜻을 틀림없이 아는데서 성장하고, 이러한 앎은 그것에 관한한 진실함의 실현이라는 것이다.

지혜 문학에서 문맥은 셰켈(허위, 거짓)이나 아울라(불의)와 대조시키므로, 진실의 개념을 강조하는 한편(말 2:6, 잠 11:18, 렘 9:4, 참조: 잠 12:19), 악과 대조는 더욱 명확히 종교적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느 9:33): "우리의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는 진실히(에메트: 신실하게) 행하셨음이니이다."

② 에메트는 자주 신실성이란 의미로 특히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시 31:5에서 하나님을 "진리의 하나님"으로 부른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으로서 일반적으로 의인과 사람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으실만 하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으로서 항상 신실하게(에메트) 대하신다. 하나님은 영원히 진실함의 규범을 지키신다(시 146:6).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진리를 확립하고 그 자체 진리인 법, 곧 진정한 율법(토로트 에메트)을 수여하셨다(느 9:13).(참조: Quell).

에메트는 보통 "내가 주의 에메트를 찬양하리이다"(시 71:22)와 같은 특징적인 구절들에서 '신실성'이란 의미로 나온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영원히 지속된다(시 117:2). 앤더슨(A. A. Anderson)은 시 119:43에 나오는 "진리의 말씀"이란 어구조차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에 관한 기록이란 의미로 해석했다(The Book of Psalms). 시 30:9에서 하나님의 에메트에 대한 증거의 개념이 훨씬 더 두드러지게 나오는데, 스올(Sheol)이 하나님의 신실성을 선언하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신자에게 하나님의 신실성을 새롭게 증거해 줄 계속적인 경험이 중단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그들에게는 그들이 호소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기 때문이다(시 30:9, 참조: 사 38:18).

③ 에메트가 '신실성'(faithfulness)이란 의미로 사용될 때 자주 헤세드(변함없는 사랑)와 병행되어 나오다. 이런 경우에 에메트가 '신실성'을 의미하는 문맥과 '진리와 진실'을 의미하는 문맥을 구별해야 한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에게 헤세드와 에메트를 보여주기를 브두엘과 라반에게 요청하는 대목에서(창 24:49), 이 두 단어의 의미를 '충성'(loyalty)과 '성실'(fidelity)로 볼 수 있겠지만 개역 표준 성서(RSV)에 따라 정직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다라는 의미의 "deal loyally and truly"(충성스럽고 진실하게 대하다)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같은 장(창 24장)의 앞 부분에 나오는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맨처음 만나는 대목에서 엘리에셀을 "헤세드와 에메트를 끊이지 않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 뜻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약속에 충실하고 신실했다는 것이다(창 24:27). 창 32:10에서 야곱은 아주 똑같은 방식으로 그가 하나님의 모든 신실하심(에메트)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창 32:10).

그 특징은 시편에서 찬양과 기도가 모두 하나님의 신실성을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에메트의 용법 중 반수 이상이 이런 의미를 지닌다. 시편 기자가 "여호와의 모든 길은 ... 인자와 진리로다"(시 25:10)라고 외칠 때,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가 언약에 대한 충성으로 특징 지워지기 때문에 아주 신뢰할 만하다고 증거하는 것이다(M. Dahood). 에메트가 시 57:3, 시 57:10, 시 61:7, 시 69:13, 시 108:4, 시 115:1에서 헤세드와 결합되어 나올 때, "신실성"(faithfulness)이 에메트의 의미로 나온다. 흠정역 성서에 나타나 있듯이, 이런 의미에서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난다"(시 85:10)라고 번역된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은 그의 신실성에 대한 하나의 표현으로 명시된다. 그리고 알레데이아는 '충실, 성실'을 뜻하는 에무나(시 88:11-49), '신실한, 신뢰하는'을 뜻하는 에문(시 12:1, 시 31:24), '확실한, 진실한'을 뜻하는 야칩(byXiy' , 3330; 단 2:8), '정직한'을 뜻하는 야샬(rv'y: , 3474; 욥 23:7), '완전, 성실'을 뜻하는 톰(!To , 8537, 잠 28:6), '진실'을 뜻하는 케쇼트(f/vq] , 7187; 단 2:47), '진실로'를 뜻하는 옴나(욥 9:2, 욥 19:4), 우림(신 33:8)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④ 우리가 에메트가 사용된 여러가지 측면들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매우 많은 문맥들에서 진리가 단순히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말씀으로만 아니라 행위로 자기의 진리를 드러내시며, 이 진리는 사실상 그의 백성의 체험 속에서 입증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진리에 대한 존중을 추상적인 이론으로가 아니라 그들의 이웃에 대한, 그리고 그들의 구두상의 상업적 거래에 대한 일상적인 증언으로 나타낸다.

시 119:142에서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단순한 실존적인 진리 이상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신자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보여줄 등이요 빛이다(시 119:105). 여기에서 그는 사실상 그와 관련될 때의 사건의 진상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내발 ... 내길").

⑤ 이러한 진리는 신뢰할 만하며 또한 확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통찰이 오로지 신학적 기초 위에서만 도달되는 것이 아니다. 확실히 신자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에메트, 헤세드, 에무나)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그에게 의지할 것이다. 그러나 에메트의 이런 특별한 용법이 이 단어의 모든 용례들의 배후에 있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인들은 다른 사람들도 인정했던 논리적 진리, 곧 참된 말은 그것이 실제와 일치하기 때문에 믿을만하다는 점, 그리고 진리의 하나님에게 있어서나 진실한 사람에게 있어서 언행이 일치한다는 점을 인정하였다(참조: 수 24:14, 시 145:18). 진리를 말과 행동의 일치로 보는 개념이 신약성경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참조: R. Butman; A. C. Thisel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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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71, 아온) 불법, 부정, 죄악, 죄의 벌

아온(명남)은 아와(hw:[; , 5753)에서 유래했으며, '불법, 부정, 죄악, 사악, 유죄, 죄의 벌(징계)'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30회 나온다.

명사 아온은 집합명사이다. 예컨대 하나님은 아모리인의 범죄, 타락에 대해 말씀하신다: "아모리 족속의 죄악(단수)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창 15:16).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에게 당신은 "내 죄(단수)를 생각나게"하려고 왔다고 불평한다(왕상 17:18). 따라서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은 관용구에서 나타난다. '아온을 지다'(창 4:13, 출 34:7, 호 14:3, 시 85:3), '아온을 제거하다(히필형)'(슥 3:4), '아온을 갚다'(출 20:5) 등. 이러한 '전체'라는 개념은 집단의 죄뿐만 아니라 개인의 죄와 연관하여서도 나타난다.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복수)를 지고"(레 16:22);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단수)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더욱이 위의 언급들이 가리켜주는 바와 같이 이 단어는 행위 및 행위의 결과, 범죄 및 범죄의 형벌 모두를 나타낸다. 양 개념이 모두 나타나지만 때로는 행위('죄')에 초점이 주어지고, 또 때로는 범죄의 결과('형벌')에, 때로는 행위와 그 결과 사이의 상황('죄의식' guilt)에 초점이 주어진다. 형벌을 요하는 범죄에 초점이 주어지는 실례: "이 '죄악' sin이 너희로 마치 무너지게 된 높은 담이 불쑥 나와 경각간에 홀연히 무너짐 같게 하리라"(사 30:13, 참조: 겔 18:30, 겔 44:12, 호 5:5, 욥 31:11, 욥 31:28). 형벌에 강조점이 주어지는 예: "일어나라...그렇지 않으면 네가 성읍의 '형벌' 가운데서 소멸되리라"(참조: 렘 51:7, 시 39:12, 시 106:43, 욥 13:26, 욥 19:29, 스 9:7). '죄의식'(guilt)에 강조점이 주어지는 예: "이 '죄악'을 내게로 돌리시고"(삼상 25:24). 다른 많은 실례들에 대해서는 아래를 보라.

'행위로서의 죄'라는 의미와 '형벌'이라는 의미 사이의 현저한 양면적 의미는 구약성경의 사상에서 죄와 그 형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경향과 같이 근본적으로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구약성경에서 인간의 행동과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은 기본적인 하나님의 질서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전제된다. 이러한 연관성은 "삶에 대한 종합적인 견해"라고 불리워졌다(Von Rad, G).

어근 하타(죄)도 마찬가지의 기본적인 '종합적' 개념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민 32:23을 보라: "너희가 만일 그 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나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두 번째 나타나는 이 어근의 명사형은 행위에 대한 '형벌'을 나타낸다(참조: 민 12:11). 따라서 죄는 개인과 혹은 공동체를 멸망시키는 피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며 근절되어야만 한다(B. K. W.).

아온은 분명히 하나님의 성품의 특성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행동의 특성도 아니고(출 20:5, 출 20:6, 출 34:7), 인간의 속성과 행동(그러한 행동에 수반하는 결과를 포함하여)의 저항할 수 없는 특성이다.

아온은 삼상 20:1, 삼상 20:8, 삼하 3:8, 느 4:5, 시 51:2에서 여러 종류의 시민 생활 혹은 사회적(규칙) 위반을 지칭하고, 수 22:17, 삼상 3:13-14에서는 제의적인 (규율) 위반을 가리킨다. 이 용어는 집합 명사 혹은 유사 추상명사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과거의 범죄의 총합을 나타내는데, 이에 대한 실례는 너무 많아서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민 14:34, 삼상 25:24, 삼하 22:24, 왕상 17:18, 스 9:6, 욥 13-26장, 사 1:4, 렘 11:10가 그 예이다.

어떤 구절에서는 아온의 성질과 내적 근원에 강조점이 주어진다.

욥 15:4-5에서 아온은 하나님 경외하기를 폐하는 것 등과 관련되어 있다.

반면에 시 78:37-38에서 아온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확고 부동하지 않음과 결합되어 있으며 렘 14:10에서는 그들이 이렇게 방황하기를 좋아하였다 라는 진술과 관련되어 있다.

아온은 간음(민 5:31) 및 우상 숭배(호 5:5, 렘 16:10-11)와 관련된다. 이러한 은유에서는 위반하는 행동과 그 결과인 더럽힘 모두가 묘사된다.

아온의 다른 결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소외(alienation, 레 26:40, 사 59:2, 사 1:4), 그리고 부정(시 51:2, H4)으로 나타난다.

죄책감(guilt)은 내적 인간에 대한 아온의 주요한 결과다. 이 요소는 과거 범죄에 대한 총합을 나타내는 아온의 기능과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BDB는 죄책감의 요소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실례를 30여회 이상 열거한다(p. 731).

아온은 그 결과가 내적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는 외에도 가문, 지파, 이스라엘 민족, 열방 및 자연에도 영향을 끼친다. 가문에 대하여, 친숙한 진술은 출 20:5, 신 5:9에서 발견된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은 가문이나 지파의 개개인들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내리는 벌로 집중할 수 있다(레 5:17, 레 18:25, 민 5:31, 삼상 25:24, 삼하 14:9, 시 106:43, 렘 36:31). 아온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형벌을 면할 수 없게 한다(레 26:39, 스 9:7, 스 9:13, 시 107:17과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에 있는 많은 실례). 어떤 의미에서,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그들 임무의 거룩과 성소의 거룩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형벌의 위험을 떠 맡았다(출 28:38, 출 28:43, 레 22:16, 민 18;1, 민 18:23).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 그 재난은 이스라엘 민족의 아온의 결과로 인식되었다(애 4:6, 애 4:13, 애 4:22, 겔 39:23, 단 9:13, 단 9:16).

아온에 반드시 형벌이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형벌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인간의 탄원 기도와 하나님의 구원 선포는 아온을 벗어날 길을 보여준다.

인간은 아온을 깨닫고 고백해야 한다(창 44:16, 레 16:21, 느 9:2, 시 32:5, 시 38:18, H19). 그리고 하나님께 죄 사함을 구해야 한다(출 34:9, 민 14:19, 욥 7:21, 시 25:11). 인간은 또한 그의 생활 방식을 변화시켜야 한다(겔 18:30, 겔 36:31). 형벌을 대신 받을 대체물이 제공된다(레 16:22, 사 53:5-6, 사 53:11, 겔 4:4-6).

가장 중요한 것은 아온을 제거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이다. 이것은 약속되고 실제로 선포된다(민 14:18, 시 65:3, H4, 시 78:38, 시 103:3, 잠 16:6, 사 6:7, 렘 32:18, 단 9:24, 미 7:18-19, 슥 3:4, 슥 3:9, 참조: 다윗의 입맞춤에 의한 용서의 행동, 삼하 14:32). 세 군데에서는 하나님의 깨끗케 하시는 행동이 강조되어 있다(시 51:4, 렘 33:8, 겔 36:33).(참조: C. SCHULTZ;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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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P,(6588, 페샤) 반역, 범죄, 죄

페샤(명남)는 파샤([v'P; , 6586)에서 유래했으며, '반역 rebellion, 위반, 범죄, 죄 transgression'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93회 나온다.

명사 페샤는 하나님의 권위를 거부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아모스의 첫 두 장에 나오는 고발에서 페샤는 비이스라엘인들에 의해 타국 백성들에게 행해지지만 대개는 히브리 백성이 하나님의 권위와 언약에 대해 페샤를 범한 자들로 등장한다.

몇몇 시편과 잠언 그리고 에스겔의 소수 용례에서는 이 죄를 범함에 있어서 공동체 대신 개인이 강조되고 있다. 예레미야애가는 예루살렘을 세 차례 의인화시켜 말하며 이사야는 땅(땅의 거주자를 상징하는 의미에서)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곳들에도 페샤가 포함되어 있다.

비종교적인 것을 다룬 몇몇 문맥에서 이 용어는 타인들의 인권 및 재산권에 대한 침해를 가리킨다(창 31:36, 창 50:17, 삼상 24:11, 삼상 25:28). 종교적 문맥에서 이 용어는 다산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 행위에 참여한 것이나(사 57:4)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적극적 핍박(시 5:10, H11, 시 59:3, H4), 거짓을 말하는 일(잠 12:13, 잠 17:9) 등을 의미하였다. 주로 페샤는 하나님의 율법과 언약에 대한 반역을 가리키며 따라서 이 용어는 잘못된 행위들의 총재와 파괴된 관계를 나타내는 집합 명사가 된다.

이러한 종류의 죄에 대한 척도는 하나님 자신의 성품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하나님이 없을 때 페샤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구절들에서는 하나님과 그에 대한 인간의 반역을 두드러지게 대조시키며 특히 불화를 시정하려는 그의 염원을 강조하고 있다(출 34:7, 민 14:18, 수 24:19, 왕상 8:50, 잠 19:11, 미 7:18).

페샤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간격을 조성할 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 내부에 왜곡을 산출한다. 예컨데 자기 행동을 숨기려는 경향(욥 34:6), 기만성(잠 28:24), 무정함(시 36:1, H2), 병약함(시 107:17), 호전성(잠 17:19), 노예 의식(잠 12:13), 쉽게 성냄(잠 29:22), 외식적 예배(사 58:1), 오욕 관념(겔 14:11) 등이 그것이다. 한 용례에서는 페샤가 무겁게 눌러 뭉개는 짐으로 서술되었다(사 24:20).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반역을 종식시키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형벌로 끝내거나 관계의 갱신으로 나갈 수도 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첫 단계는 그의 백성을 책망하고 그들의 죄를 반역이라고 드러내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된 몇몇 요절에는 욥 36:9, 미 3:8 등이 있다. 자기의 종을 통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위험에 대해 그들을 경고하시며(시 89:32, H33, 암 3:14) 그들을 경고하시며(시 89:32, H33, 암 3:14) 그들의 범죄가 형벌을 받는 원인이라고 강력히 규정하신다(겔 39:24, 미 1:13, 단 8:12-13).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상기의 관련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다른 어떤 행동 방식을 추구하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지적해 주고 있다. 즉 그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를 원한다는 사실이다. 속죄일 의식에서 그는 속죄 염소를 마련하셨으며(레 16:16, 레 16:21) 사 53:5, 사 53:8에서는 고난의 종을 통한 구속을 약속하셨다. 자기 종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사죄를 약속하신다(욥 7:21, 사 43:25, 겔 18:22, 겔 37:23). 하나님은 또한 인간의 선택 역할도 분명하게 드러내신다(겔 33:12, 참조: 욥 8:4).

하나님이 실제로 용서를 해주기 전에 인간은 경고와 더불어 모종의 행동을 취하라는 촉구를 받는다(겔 18:30-31). 이때 그 사람은 개인적으로 자기의 반역과 그것의 필연적 구성 요소인 우상 숭배를 종식시켜야 한다(겔 18:28, 겔 37:23).

몇몇 탄원의 기도를 살펴볼 때 기도하는 자가 죄를 자각하고 있으며(사 59:12) 죄를 자백하고 있다는 사실이(시 51:3, 겔 33:10) 드러난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인간의 노력이 구원을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기도자들은 또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간절히 탄원하였던 것이다(욥 13:23, 욥 14:17, 시 19:13, 시 25:7, 시 51:1). 무엇보다도 가장 은혜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자기 백성을 용서하시고 구속하셨다는 증거가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시 32:1, 시 65:3, 잠 19:11, 사 43:25, 사 44:22, 사 53:5, 사 59:20).

하나의 국가이자 개개인으로서의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심판 행위와 그의 구원 행위를 알고 있었다. 인간의 반역은 심판의 원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자비는 그들의 구원의 기초였다.(Gelin, Albert)(참조: G. H. Livwgs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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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f;j}(2401, 하타아) 죄 sin, 속죄제 sin-offering

하타아(명여)는 헤트(af]je , 2399)의 여성형이며, '죄 sin, 속죄제 sin-offering'를 의미한다.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9회 나온다.

(a)  하타아는 '죄'를 의미한다. 주로 큰 죄라는 어구로 사용되었다(창 20:9, 출 32:21, 출 32:30, 출 32:31, 왕하 17:21).

죄가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으나(시 32:1), 악한 자의 기도는 그가 심판을 받을 때 죄가 된다(시 109:7).

(b)  하타아는 '속죄제'를 의미한다.

시 40:6,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참조: BDB;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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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j;(2603, 하난) 호의(은혜)를 베풀다, 자비롭다, 불쌍히 여기다

1. 하난(동사)은 기본어근이며, '호의(은혜)를 베풀다, 자비(은혜)롭다, 불쌍히 여기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80회 나온다.

(a)  칼형에서 '호의(은혜)를 베풀다, 자비롭다, 불쌍히 여기다'를 의미한다.

하난은 칼형으로 사용된 용례들 중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용례들, 즉 대략 41회 용례들이 여호와를 주어로 취한다. 청원의 말, '혼네니'(나에게 자비로우소서)는 시편에 19회 나온다. 시편기자는 여호와께 외로움(시 25:16, H17), 고통(시 31:9, H10), 죄과(시 51:1, H3)에 대하여 자기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간청한다. 죄과에 대해서 그가 구하는 은총은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고발을 말소시켜 달라는 것이다. 사 33:2을 참조하라.

여호와는 자비롭게 야곱에게 자녀를 주시고(창 33:5) 그를 번영하게 하셨다(창 33:11). 베냐민에게 내린 요셉의 축복(창 43:29)과 아론의 축복(민 6:25)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태도를 필요로 한다.

아모스(암 5:15)는 청중들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도록 의를 세우라고 촉구한다. 요컨대 여호와는 그가 선택한 사람들에게 자비롭게 행하신다는 점에 있어서 주권자이시다(출 33:19).

(b)  니팔형에서 '불쌍히 여기심을 받다, 동정의 대상이 되다'를 의미한다.

렘 22:23, "레바논에 거하여 백향목에 깃들이는 자여 여인의 해산하는 고통 같은 고통이 네게 임할 때에 너의 가련함이 얼마나 심하랴".

(c)  피엘형에서 '은혜(자비)롭게 하다'를 의미한다.

잠 26:25에서 말이 외적으로 친절하거나 동정적인 말에 대해 사용되었다.

(d)  포엘형에서 '자비를 베풀다, 불쌍히 여기다'를 의미한다(잠 14:21, 시 102:14).

(e)  호팔형에서 '은혜 받다(입다)'를 의미한다(사 26:10, 잠 21:10).

(f)  히트파엘형에서 '은혜(자비, 은총)를 구하다'를 의미한다.

히트파엘 어간은 약속의 땅을 보게 해 달라고 한 모세(신 3:23)와 성전 봉헌 때의 솔로몬(왕상 8:33, 왕상 8:47, 왕상 8:59, 왕상 9:3, 대하 6:24, 대하 6:37)과 시편기자(시 30:8 H9, 시 142:1 H2) 그리고, 야곱이 더불어 씨름한 천사에게 간구하는 것을 인용한 호세아(호 12:4 H5)가 하나님께 탄원할 때, 사용하였다. 빌닷에게서 하나님께 탄원하라는 충고를 받은 욥(욥 8:5)은 비록 자기가 의롭긴 하지만, 이 방법만이 그가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는 길일 것이라는 점을 시인한다(욥 9:15).

2. 하난(동사)은 기본어근이며, '싫다, 몹시 싫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욥 19:17에서 1회 나온다: "내 숨을 내 아내가 싫어하며 내 동포들도 혐의하는구나".(참조: E. YAMAUCHI;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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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7355, 라함) 깊이 사랑하다, 긍휼히 여기다, 자비롭다

라함(동사)는 라함(!j'r' , 7356)에서 유래했으며, '깊이 사랑하다, 긍휼히 여기다, 자비심을 갖다, 자비롭다'를 의미한다.

이 어근은 '자연적인' 유대에 뿌리를 둔 깊은 사랑(대개 윗사람이 아래 사람에 대해 갖는 사랑)을 가리킨다. 이 어근의 피엘형은 우리가 동정, 연민, 자비 등 여러가지로 알고 있는 깊은 내적 감정에 대해 사용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7회 나온다.

라함은 사람에게는 자주 사용되지 않는다(12회).

이 단어의 칼형은 단 한번만 사용되는데, 시편 기자가 여호와에 대한 그의 사랑을 고백할 때이다(시 18:1). 이 사랑의 깊이는 이 단어와 레헴/ 라함과의 결합에서 보여진다. 이사야(사 49:15)가 젖먹이 아이에 대한 어미의 사랑을 언급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라. 이 단어는 또한 아버지의 사랑을 가리킬 수도 있다(시 103:13). 이 동사는 인간이라는 사실로 인하여 서로를 향해 갖는 자비의 감정을 나타내며(렘 50:42), 이러한 자비의 감정은 어린 아이(사 13:18)나 다른 무력한 사람들로 인하여 가장 쉽게 일어난다. 이스라엘과 바벨론의 적들이 그들의 잔인한 행위를 볼 때 결여한 것은 무력한 자들에 대한 바로 이러한 자연스런 자비이다(사 13:18, 렘 6:2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적들에게 이러한 감정(동정심)을 느낄 수도 있다(왕상 8:50, 렘 42:12). 실로 선지자들은(사 13:18) 바벨론(렘 21:7)과 하나님(렘 13:14)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가지 아니할 것(결여)을 기술할 때 후츠(어떤 사람으로부터 타인에게 흐르는 감정), 하말(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타인을 위하여 즉 그들의 어떤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하여 행동하게끔 하는 감정의 힘), 및 라함(어떤 '자연적인' 유대에 기초하는 깊은 내적 감정)을 결합한다.

이 어근은 하나님께 빈번히 사용된다. 이 어근은 두 개념을 통합한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이라고 부른 자들과 맺고 있는 강한 결속의 개념이다(시 103:13). 하나님께서는 아비가 자식들을 돌아보듯이 자기 백성들을 돌아보신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신다(참조: 미 7:17). 두 번째 개념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하넨:은총)의 개념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그가 택하신 자이면 누구에게든지 은혜롭고 자비하시다고 하셨다(출 33:19).

하나님의 깊고 온화한 사랑에 부속하는 몇 가지 개념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의 개념(출 33:19)이고, 둘째는 그의 백성들이 심판을 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때 그들을 향하여 베푸시는 자비와 용서이며(신 13:17), 또한 그의 회개하지 않는 백성들을 심판에서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자비와 은혜(왕하 13:23)의 개념이다. 따라서 이 속성은 부분적으로 종말론적 희망의 토대가 된다(참조: 사 14:1, 사 49:13, 사 54:7, 렘 12:15, 렘 33:26, 겔 34:25, 미 7:19, 슥 1:16). 신명기(신 30:3)는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포로(exile)를 예언하면서 회개만이 하나님의 애정에 찬 긍휼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주목할만 하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가 거두어 지고 바벨론의 손에 의한 가혹한 심판이 초래되는 것을 읽는다(사 9:17, 사 27:11, 호 2:4). 바벨론 포로 동안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사랑과 온화한 자비로 백성들을 격려했으며(애 3:32) 그들로 겸손히 회개하게 하고 하나님께 아버지 같은 긍휼을 다시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하게 하였다(슥 1:12). 부자 관계의 회복과 포로에서의 귀환은 이러한 동반하는 사랑의 돌보심을 증거한다(호 2:23).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포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따라(사 30:18)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하나님에 의해 끝나게 되었다고 한다(겔 39:25, 참조: E. J. Young, The Book of Isaiah, Ⅱ, p.353f.).

포로에서의 귀환에 대한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부자 관계가 결코 깨어지지 아니할 영원한 상태를 지향한다(호 2:23, 사 54:8, 사 54:10).

라함의 푸알 완료 여성형 루하마는 명사로 사용되어 호세아의 음란한 아내 고멜의 딸에게 준 이름이며, 이스라엘의 상징적인 이름이다. 로루하마(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함, 호 1:6)라는 이름에 대신하여 준 두번째 이름이다(호 2:1). 이 네번째 아이(둘째 딸)의 이름 루하마는 이스라엘의 여호와께 대한 변화된 관계, 즉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뜻하는 상징적인 이름이다(호 1:10, 참조: 롬 9:25, 벧전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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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2580, 헨) 호의, 은총, 은혜, 매력, 아름다움

헨(명남)은 하난(@n"j; , 2603: 호의, 은혜를 베풀다, 자비하다)에서 유래했으며, '호의, 은혜, 은총, 매력,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의 총애를 받다' find favor in the eyes of라는 어구로 나오는 43회의 용례와 '주다' give라는 동사와 함께 나오는 7회의 용례, 그리고 '얻다' obtain라는 동사와 함께 나오는 3회의 용례(에 2:15, 에 2:17, 에 5:2)를 포함하여 69회 나온다. 따라서 이 단어가 독립적으로 사용된 예는 14회이다.

이 단어는 결코 정관사와 함께 나오거나 복수로 나오는 경우가 없으며, 이 단어가 인칭 접미사를 취하는 경우는 단 한번 창 39:21에서 뿐이다.

이 단어의 대다수의 용례들은 일반적이며 신학적인 중요성을 지니지 않는다. 동사 하난과는 달리 관심의 초점은 수여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의 수령자에게 있다. 이 동사와 그 파생어들이 번번히 나오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시편에서 헨은 오직 2회, 즉 시 84:11, "여호와께서 은혜를 주시며"와 신랑의 입술에 머금은 "은혜"에 대해 언급하는 시 45:2에 나올 뿐이다.

헨은 잠언에 13회 나오며, 종종 매력이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미학적인 의미를 지닌다.

노이바우어(Neubauer)가 역설하였듯이, 이 어구가 나오는 많은 구절들은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관계, 예를 들면 왕과 그의 신하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야곱이 창 32:5, 창 33:8, 창 33:10, 창 33:15에서 사실상 자기 자신을 에서의 가신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이 어구를 전문적인 어구라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이 어구는 이혼의 정당성에 관한 결정적인 구절, 신 24:1에서 발견되는데, 이 구절은 힐렐(Hillel) 학파와 샴마이(Shammai) 학파 사이의 논쟁의 근거가 되었다. 랍비 아키바(Akiba)는 "'만약 아내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만약 그가 그 아내보다 더 사랑하는 여자를 발견한다면", 자기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신학적 용법에서, 노아와 모세는 여호와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언급된다(창 6:8, 출 33:12). 요셉으로 전옥에서 은혜를 받게 하시고(창 39:21) 또 이스라엘인들로 애굽인들에게 은혜를 받게 하신(출 3:21, 출 11:3, 출 12:36) 이는 여호와이셨다.

민 11:15에서 모세는 여호와께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라고 말하고 있다.

슥 12:10에서 여호와는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의 거민들 위에 "헨과 타하누님의 심령"을 부어주시리라고 말씀하셨다. 타르굼은 "자비와 동정의 영"이라고 표기하며, 웅거(Unger)는 이것을 성령으로 간주한다.

슥 4:7에 나오는, 스룹바벨의 성전 완공 때에 외친 환호의 외침은 웅가르에 의해, "이것은 얼마나 은혜로운가(아름다운가)!" what gracefulness(beauty) it has!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셀린(Sellin)은 "잘한다, 잘한다!" Bravo, bravo! 라는 의미라고 주장하였다.

수많은 구절들에서 헨은 '매력' charm이나 호의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매력적인 인격'을 의미한다. 아히카르(Ahiqar)의 아람어 잠언에는 "사람의 매력은 그의 진실성에 있다"라는 어구가 나온다(ANET, no. 132, p. 429). 이런 호의를 만들어내는 것은 지혜의 배려이다. 즉 잠 3:4, 잠 13:15, 전 9:11, 전 10:12. 육체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이런 은혜와 매력을 지닌 여자(잠 11:16, 참조: 잠 11:22)는 존경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여자는, 단지 거짓된 매력과 헛된 아름다움만을 간직하고 있는 자와는 달리, 찬양을 받는다(잠 31:30). 나 3:4은 니느웨를 토밧 헨인 창부에 비유하는데, 이 히브리어 어구를 70인역본은 칼레 카이 에피카리스로 번역하며 불가타역본은 스페시오세 엣 그라테(speciosae et gratae)로 번역한다. 그 뜻은 '아름답고 즐거운'이다. NAB의 "아름답고 매력적인" fair and charming; NEB의 "아름답게 보이는" fair-seeming을 참조하라.(참조: E. YAMAUCHI;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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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3045, 야다) 알다, 이해하다

야다(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알다 know, 이해하다 understand'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944회 나오며, 모든 어간에서 사물이나 사람 또는 상황등을 감각 기관으로 얻은 약간씩 차이 나는 여러 가지 지식을 나타낸다. 이미 알려진 것은 감각으로 나타나야 하며 그 자체는 그렇게 알려지게 되어있다. 그래서 우리는 듣는 것(듣다)과 보는 것(보다)에 관한 동사가 아는 것에 관한 동사와 병행되어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예: 출 16:6 이하, 신 33:9, 삼상 14:38, 사 41:20). 야다는 인간(창 18:19, 신 34:10)과 그의 길(사 48:8, 시 1:6, 시 37:18)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에 사용되었으며, 여기에서 지식은 심지어 탄생 이전에 시작된다(렘 1:5). 하나님은 또한 들새도 아신다(시 50:11).

야다는 또한 인간의 지식과 짐승의 지식에도 사용되었다(시 1:3).

야다는 구약성경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야다는 '알아채다, 인지하다, 경험하다, 관찰하다'를 의미한다(예: 창 3:7, 창 41:31, 삿 16:20, 전 8:5, 사 47:8, 호 5:3).

(b)  야다는 '구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선악을 아는 것'(창 3:5, 창 3:22)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이다. 좋고 흉한 것을 구별하는 것은 필요하다(삼상 19:36). 어린 아이는 왼손과 오른손을 구별하지 못하며(욘 4:11) 또 선과 악도 구별하지 못한다(사 7:15). 후자의 구절의 문맥과 사 8:4에 나오는 이와 비슷한 언명은 이 언급이, 어린 아이는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을 구별할 줄 모른다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 주는 것 같다.

좋고 흉한 것, 좌우와 같은 것에 대해 관찰하는 것은 결국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이 된다.

(c)  야다는 '배워서 알다' know by learning라는 의미를 지닌다(잠 30:3).

(d)  이 분사는 사냥(창 25:27), 학문(사 29:11-13), 애곡(암 5:16), 바다를 항해하는 일(대하 8:18),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일(삼상 16:16)에 능함을 묘사하는 어구에 나온다.

(e)  야다는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한다.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창 29:5, 출 1:8, 삼하 3:25). 푸알 분사형은 '친척'(왕하 10:11 등)과 '아는 사람'(욥 19:14, 룻 2:1 등)을 지칭한다.

(f)  야다는 '관계하다, 관심을 가지다'(시 1:6, 시 37:18, 시 119:79), '~와 관계를 맺고 싶다'(예: 신 33:9). 신학적인 문맥에서 자주 이 단어가 적절한 지식을 얻지 못해서 결국 관심의 결여를 초래하고 마는 것에 대한 문제로 나온다(예: 렘 8:7, 시 95:10).

(g)  야다는 '성적 관계를 가지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았다"고 하는 유명한 완곡 어법과 그 병행구들(창 4:1, 창 19:8, 민 31:17, 민 31:35, 삿 11:39, 삿 21:11, 왕상 1:4, 삼상 1:19)에서 남녀 쌍방의 성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남색(창 19:5, 삿 19:22)이나 강간(삿 19:25)과 같은 성적 도착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h)  야다는 '다른 사람과 인격적이며 친숙한 관계를 맺다'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름으로, 대면하여 모세를 아신다(출 33:17, 신 34:10).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이나(렘 1:5) 어떤 민족을(암 3:2) 아실 때 하나님께서 그를 선정하시거나 선택하신다(참조: 민 16:5 70인역본). 선택으로 이해되는 이 지식은 은혜롭고 자애로운 것이지만 이것은 인격적인 응답을 요구한다.

(i)  야다는 일반적인 문제에 대한 지식 외에도, 다른 신들을 아는 것이든(신 13:3, 신 13:7, 신 13:14) 여호와를 아는 것이든(삼상 2:12, 삼상 3:7) 간에,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렘 10:25) 선지자들에 의하면,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렘 4:22). 애굽의 재앙은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애굽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 보내졌다(출 10:2 등). 그는 그가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사 60:16) 그들을 파멸시키시고(겔 6:7) 회복시키실 것이다. 특히 선지자 에스겔은 위협할 때,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는 어구를 사용한다(겔 6:7, 겔 6:10, 겔 6:13, 겔 6:14, 겔 7:4, 겔 7:9, 겔 7:27 등).

(j)  요약하면 희랍인들이 초연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또한 사물의 형이상학적 본질에 사변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반해, 구약성경은 지식을 끊임없이 인격적인 만남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구약성경이 하나님과 창조에 관해서 언급한 것을 보고서, 우리가 이 언급들을 존재론적 추론으로 여겨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는 믿음의 선포로 간주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역사적 과거와 약속된 미래 즉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존재하고 있는 이 지상의 영역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찾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예배와 행동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과 요구를 식별할 수 있었던 것이다.(참조: E. D. Schmitz; Bult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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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Mercy ), 긍휼 ===

>>자비

무력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말한다. 인자(창 19:19), 은혜(창 20:13), 긍휼(마 9:13)과 같은 말이다.

구약에서 자비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여러 단어이다. 

히브리어 ‘라함’(ra?am)은 긍휼의 감정이며, 주로 ‘사랑’(love)으로 번역되었다. 또 ‘하난’(hanan)은 사랑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적극적인 도움이며, 종종 ‘은혜롭다’(to be gracious) 

또는 ‘자비를 베풀다’(to show mercy)로 번역되었다. 주로 ‘인애’로 번역된 ‘헤세드’(chesed)도 ‘자비’(대상 16:41)로 번역된 곳이 있다.

헬라어 ‘엘레오스’(eleos)는 고통에 의해 우러나오는 깊은 정서적 관심을 의미하며, 적극적인 도움을 준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성경에서 ‘엘레오스’를 사용하여 묘사되는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에 의해 마음이 깊이 움직이는 분이시며 우리를 그분과 원수 되게 하는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돕기를 선택하신 분이시다(약 5:11).

자비는 특별히 복음서와 신약의 서신서에 잘 나타난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자비를 간청할 때마다(마 9:27; 15:22; 17:15; 막 10:47-48; 눅 18:38-39) 예수님께서는 응답하시고 그 사람의 필요를 채우셨다. 예수님께서는 자비가 하나님의 성품의 기본이라고 가르치셨고(마 5:43-48 참조)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라고 선언하셨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의 과오 중 하나는 구약 율법의 세부사항을 강조하느라 그 뿌리가 되는 “의와 인과 신”(마 23:23; 12:7 참조)을 간과한 것이었다.

서신서들은 구원이 하나님의 자비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엡 2:4; 벧전 1:3). 

우리는 영적으로 무력하므로 구원을 얻기 위해 자신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자비를 온전히 의뢰해야 한다(롬9:16).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매일매일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해야 하며, 우리에게는 이런 권면이 주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 긍휼, 사랑, 인애를 참고하라.

----성도가 자비를 베풀어야 할 대상

이방인(레 19:34) 고아(슥 7:9-10) 과부(딤전 5:9-10) 성도(엡 4:32; 벧전 3:8) 이웃(롬 15:2) 

궁핍한 자(마 5:7; 요일 3:17-18) 약한 자(행 20:35) 우는 자(롬 12:15) 시험받는 자(갈 6:1-2)

적을 포함한 모든 사람(눅 6:34-35; 갈 6:10) 

>>긍휼

가엾게 여기는 마음....‘라함’(racham; 자궁)에서 나온 말이다.

이 단어는 ‘같은 태에서 나온 이들에 대한 감정’이라는 기본적인 의미에서 유래하여 ‘긍휼’, ‘자비’라는 의미로 발전했다. 젖을 빠는 아기에 대한 어머니의 반응(사 49:15),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서 가지는 반응(렘 31:20), 형제가 형제에 대해 기대하는 마음의 상태(암 1:11) 등을 나타내는 데 이 단어가 쓰였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감정 차원보다는 한걸음 더 나아가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이나 행위(출 33:19; 왕하 13:23; 시 102:13 등)로 드러났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죄에서 돌이켰을 때 주어지는 용서와 회복의 은혜를 표현할 때 쓰이기도 했다(사 14:1; 렘 12:15; 겔 39:25).

신약에서는 긍휼에 해당되는 헬라어로서 ‘엘레오스’(eleos), ‘스프랑크논’(splagchnon) 등이 쓰였다. 긍휼은 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치유 속에 드러내신 예수님의 사역에서 잘 드러났다. 또 1만 달란트 빚진 종을 불쌍히 여긴 왕(마 18:23-35), 방탕한 생활을 하고 돌아온 아들을 측은하게 여기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 아버지(눅 15:11-32), 강도 만났던 자를 불쌍히 여겨 살려낸 사마리아인(눅 10:25-37) 등의 본문에서도 긍휼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또한 예수님은 세리,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비난하는 바리새인을 향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닌 긍휼이라고 하셨다. 이렇듯 긍휼은 정신은 외면한 채 형식만 중시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율법의 핵심으로 말씀하셨던 의(크리시스; krisis), 인(엘레오스; eleos), 신(피스티스; pistis) 중의 하나였다(마 23:23). 

바울은 병 치유의 근원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있음을 고백했으며(빌 2:27),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관련해서(롬 9:15; 11:30-32) 구원은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긍휼(엡 2:4; 딛 3:5)과 은혜(엡 2:7-8)로 인해 얻는 것임을 말했다.

성경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자들은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롬 12:8; 약 3:17). 또한 긍휼은 구제와 자선 등으로 나타나며 긍휼 베푸는 일은 심판 날 긍휼을 받는 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딤후 1:18; 유 21). 무정한 자, 무자비한 자에게 하나님은 심판을 내리실 것이기 때문이다(롬 1:29-32; 약 2:13). → 자비를 참고하라.

----긍휼을 베푼 사람들 : 성경에는 긍휼을 베풀었던 사람들이 여럿 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자신을 팔아넘겼던 형들을 용서했을 뿐 아니라 돕고자 했다(창 50:20-21).  모세는 양에게 물을 먹이려다가 목자들에게 쫓겨난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을 도와 주었으며(출 2:17)   보아스는 자기 밭에서 룻이 이삭을 줍도록 배려했다(룻 2:16).  또한 다윗은 왕이 된 후 요나단을 생각하여 그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었다(삼하 9:1-13). 이 외에도 기적과 회심을 체험한 빌립보 감옥의 간수는 바울과 실라의 상처를 돌봐 주었으며(행 16:33), 멜리데 섬의 토인들은 여행 도중 난파당한 바울 일행을 보살펴 주기도 했다(행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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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십자가복음과 성령내주하심을 선포/적용하고 누리며 살기==레위기 25:8~12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는 밭의 소출을 먹으리라​

----이 땅에 대언할 생기, 희년

우리로 생기를 대언하라 말씀하신 주님은, 우리의 외침을 더 분명한 선포가 되게 할 또 다른 키워드, ‘희년’을 주셨습니다. 

사실, ‘쥬빌리(Jubilee)’는 한번쯤 들어봤을 익숙한 성경 속 단어입니다. 그러나 한편 이 말을 불편해 하는 분들도 종종 계십니다. 개인이 아닌 국가가 토지를 소유해야 한다는 조지스트들이나 사회주의적 단체들이 ‘Jubilee’를 잘못 차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쥬빌리(Jubilee)’란 단어를 구속해야 합니다. ‘Jubilee’, 곧 ‘희년’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자유와 회복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오늘 본문 레위기 25장을 봅니다. 이스라엘 전역에서 나팔을 불며 시작되는 희년은 히브리어로 ‘요벨’이라 하는데, 이는 ‘나팔소리’, ‘가져오다’, ‘생기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일주일에 하루 안식일을 지킬 뿐 아니라 7년마다 1년씩 안식년을 갖는데, 그 안식년이 일곱 번째 오는 해, 즉 49번째 안식년이 올 때 그 다음 해인 50번째 해를 희년으로 선포합니다. 그리고 Jubilee에 행해야 하는 규례들을 따르는데, 이 때 노동을 금하는 안식과 토지의 반환, 종들의 속량 등이 행해집니다. 빚이 탕감되고, 묶인 자들이 자유케 되며, 이전의 것들이 새로워지는 은혜의 날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희년의 선포 –첫째, 안식

희년의 규례들 중, 첫 번째로 안식에 대해 나눕니다. 속죄일에 전국에서 뿔나팔을 불며 희년이 선포되면((속죄일을 반드시 경험해야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낳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 대해 창자가 끊어지는 애통함으로 불쌍히 여기사 회복시키시는 자비의 하나님이시며, 지고지선의 진복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의 모든 것을 누리는 참 회복과 누림가운데로 들어오기를 원하시므로...말씀하신 계명따라 곰곰이 돌아보고 전심으로 회개하고 결단하는 심령이 필수적입니다)), 이스라엘은 49번째 안식년에 이어 또 다시 노동을 하지 않는 안식의 일 년을 더 보내야 합니다. 

사람의 계산과 판단으로 이러한 안식의 시간을 생각한다면, 이는 위험천만한 행위입니다. 2년을 연달아 땅을 경작하지 않을뿐더러 희년이 지나고 다음 해가 왔을 때 파종을 시작해도 그 농작물이 수확되기까지 일년에 가까운 시간을 또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3년에 가까운 긴 시간을 소출 없이 버텨내야 하는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파종을 금하나 주리지 않을 것이라 약속하시며 믿음의 삶을 도전하십니다. 스스로 위험을 맞이하는 행위 속에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경험케 하시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진짜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의 의미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예배하는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예배하도록 택함 받은 이스라엘이 밭을 일구고 수확물을 쌓아가다가 정체성을 잊어갑니다. 이방 민족의 농경 사회에서나 보는 우상의 문화와 풍속에 젖어들다가 부르심을 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안식년에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십니다. 잃어버렸던 예배와 잊었던 율법들을 행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됨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 안식년은 예배의 해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해입니다. 우리에게 안식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취미생활입니까? 여행입니까? 잠입니까? 하나님을 만날 때 진정한 안식을 경험합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우리의 영혼과 육이 새로워지는 회복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임재안에서 우리는 부르심을 상기합니다. 소망을 회복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주를 예배함으로 새로운 출발선에 다시 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안식, 우리의 마음과 의지와 육체가 새롭게 되는 주 안의 안식입니다.

희년의 선포 –둘째, 토지 무르기

희년의 날에 지켜야 할 의무에 또한 토지 무르기가 있습니다. 본문 23~34절까지가 그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각 지파와 가문 별로 땅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레위지파를 제외한 모든 가족들이 땅의 분깃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며 그들 중에서 땅을 빼앗기는 자가 생겨납니다. 본문은 그렇게 땅을 빼앗긴 가난한 자, 또는 스스로 땅을 무를 수 없는 자들이 어떻게 땅을 찾아 올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그 어느 조건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자들에게 희년을 약속하십니다. 앞서 말한 어떤 방법들로도 땅을 무를 수 없던 자들에게 희년이 되면 아무런 조건 없이 하나님께서 원래 분배하셨던 땅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기억할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고백이 있습니다. 모든 땅의 소유가 하나님께 있듯이, 우리의 모든 소유도 여호와께 속하였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닌, 여호와 이십니다. 땅의 소유가 주께 있음을 고백하며 선포하는 이 위대한 희년의 행함을 토지 공개념으로 잘못 해석하고 차용하는 조지스트들은 명백한 오류를 범하였습니다. 

성경은 결코 토지가 정부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만이 땅과 하늘의 주 되십니다. 특별히 이 말씀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이 부어졌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주님의 것입니까?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소유가 여호와의 소유입니까? 그렇다면 희년에 잃었던 땅을 되찾아 주시는 여호와의 마음 안에서, 형통할 것을 믿으며 선포합시다. 기복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이유에서든, 땅을 빼앗기고 기업을 무를 수 없게 된 자들에게 그들의 것을 되찾아 주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희년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희년이 되면 여호와가 땅을 나누셨던 처음으로 되돌아가듯 우리의 모든 소유가 주께 속해 있음을 고백한다면, 희년의 축복을 취해야 합니다. 이것이 희년을 베푸시는 아버지의 마음이며, 성도가 회복할 은혜입니다.

희년의 선포 –셋째, 종의 속량

희년에 행하는 일, 세 번째로 종의 속량이 있습니다. 이는 본문 35절 이후로 이어지는 내용의 대부분에 해당됩니다. 팔려갔던 자들, 그래서 종 노릇을 하던 자들이 조건없이 놓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운 좋게도 종으로 팔린 지 하루 만에 희년을 맞이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수십년의 세월 동안 종의 삶을 살아가며 자유인으로 살던 기억들을 잊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종의 삶에 익숙해져서, 능동적인 의지는 꺾여 지고 스스로 선택하는 것을 두려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든, 희년이 선포되면 모두가 자유롭게 됩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와 함께, 매였던 삶에서 놓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기억하게 합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떠한 죄를 얼마나 지었던, 그리고 앞으로 어떠한 죄를 얼마나 질 것이던, 주님은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죄의 종 노릇하던 우리를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구속하셨습니다. 죄의 저주에 매여있던 우리를 자유케 하사 모든 결박에서 해방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은혜에 날마다 감사하는 심령이 있길 축복합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길 축원합니다.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벗어날 수 없던 종의 삶에서 자유를 선포하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할 때, 함께 주님을 따라가는 공동체 안에서 진정한 희년의 감격을 누릴 수 있습니다.

희년의 선포로 침노하는 하나님의 나라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구약의 희년은 신약으로 넘어와서 십자가와 성령으로 완성되는 예수님의 사역의 결과, 곧 하나님의 나라로 기록됩니다. 희년이 오면 이스라엘이 보았던 구속과 해방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에서 이미 희년이 선포되었음을 기억합시다. 우리를 구속하시고 모든 결박에서 자유케 하신 희년의 축복을 취하여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희년을 선포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나의 삶 뿐 아니라 이 나라와 열방에서 확장되는 것을 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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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4:7]

7.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벧전 5:6-10]

6.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7.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10.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11.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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