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2.08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은혜.복음의 의. 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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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vri"(5485, 카리스) 은혜 grace, 호의, 친절 favour.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카리스(Homer 이래)는 기본어이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a)  이 단어는 '사람들 중에 복리를 가져오는 것'을 의미하며, 카라(carav, 5479...반포/선포)는 이 복리에 대한 개인적 경험이나 표현을 의미한다.

(b)  이 단어는 (a)의 기본 의미에서 여러가지 의미가 파생되었으며, '은혜, 호의, 아름다움(미), 미덕, 사은, 감사, 사의, 친절, 즐거움, 호의의 표현, 돌봄, 감사의 빚, 보답'을 의미한다.

(c)  이 단어는 속격과 함께 사용될 때, '~을 위하여, ~에 대한 고려를 해서'를 의미한다.

(d)  아이스킬루스는 신들의 호의에 카리스를 사용했다. 플라톤의 문헌들에서 카리스는 '좋은 선물, 좋은 뜻, 호의, 기쁨, 기쁘게 하는 것, 감사' 등의 뜻을 가진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카리스는 70인역본에서 약 190회 나오며 여러 히브리어로 사용되었으며, 그 중 이 가장 자주 나오며(61회), 대개 '호의, 좋아함, 의향, 기호', 드물게 '매력, 아름다움, 애교'를 의미한다(시 45:2). 그리고 이 단어는 라촌(만족스러운 것, 사람들 사이에서, 잠 10:32; 사람이 하나님께 구하는 은총, 잠 11:27; 사람이 '하나님께 얻는 은총'), 헤세드(은총, 에 2:9; 에 2:17), 라함(우애감, 단 1:9; 동정, 창 43:14), 토브(선한 것, 잠 18:22), 게둘라(영예의 표시, 에 6:3)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카리스는 신약성경에서 15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누가의 기록.

① 카리스는 비종교적인 행 24:27; 행 25:3; 행 25:9 등에 나타나며, 좀 더 분명하게는 행 2:47; 행 4:33에 나타난다.

② 구약성경의 영향이 눅 1:30; 행 7:46; 행 7:10; 눅 2:40; 눅 2:52; 눅 6:32 이하의 종교적인 용법에서 나타난다.

③ 카리스는 눅 4:22; 행 14:3에서 복음의 특성을 설명해 준다.

이 단어는 행 6:8에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묘사한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행 11:23에서는 교회 성장에 있어서 카리스의 지도적인 역할을 볼 수 있다: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행 14:26; 행 15:40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한다.

행 15:11은 권고 형식의 본문에 나타나는 바울 사상의 표현이다: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b)  바울 서신.

① 카리스는 바울의 중심 개념으로서 인사말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롬 1:7; 살전 5:28 등).

바울에게 있어서는 카리스는 독특하게 구원 사건의 구조를 설명해 준다. 기본적인 사상은 값없이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초점은 카리스가 하나님의 속성이면서, 그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 구체화되고(갈 2:21) 복음으로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 은혜는 죄인들에게 나타났고(롬 3:23-24) 구원의 전부이며(고후 6:1) 모든 신자들이 받은 것이다(고전 1:4).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된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과 더불어 신자들은 오직 그 은혜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롬 3:24 이하). 이것은 구원의 방법으로서 율법의 행위를 배제하는 것이다(롬 4:16). 은혜는 칭의의 기반이며, 그것에서 나타나게 된다(롬 5:20-21). 그래서 은혜는 어떤 의미에서 일종의 상태이다(갈 5:2). 또한 은혜는 항상 선물이다. 은혜는 충분하다(고전 1:29). 우리는 더 요구하거나 더 얻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은혜에는 확신적 요소가 들어있기는 하나 거짓 확신이 아니므로 자랑할만한 여지가 없다(고전 1:29; 참조: 갈 5:4).

③ 죄를 극복하는데 있어서 은혜의 작용은 그 능력을 보여준다(롬 5:20-21). 은혜와 죄와는 구조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은혜는 숙명적인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하신 자들에게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롬 11:5-6). 은혜는 교회 안에서, 그 예로 바울의 모금에서(고후 8장)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은혜의 목적은 모든 선행을 하는데 있으며(고후 9:8), 그렇기 때문에 선행을 요구하는 것이지만(고후 6:1), 자원하여 순종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할 뿐이다. 은혜는 방종을 허용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이론이다. 바울은 롬 6:1에서 그런 단순한 생각을 책망하고 있다.

바울의 사도직은 롬 1:23 등에서 특별한 은혜이다. 사도직이 바울에게 주어진 것과(롬 12:3), 그것을 수행하는 것은 은혜였다(고후 1:12). 교회를 방문하는 것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은혜였다(고후 1:15).

⑤ 골 1:6에서 카리스는 복음을 뜻한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골 4:6에서 '매력'을 의미한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엡 1:6-7에서 카리스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호의"를 의미한다: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특히 엡 2:5 이하가 바울적 특색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엡 3:2; 엡 3:7-8도 마찬가지다. 엡 4:7; 엡 4:29에서 "주다"라는 단어와 함께 쓰는 것은 상투적인 표현이다.

⑥ 목회서신에서 카리스는 딤전 1:12에서 '감사'를 의미한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후 2:1에서 직분의 '은혜'를 나타낸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딤후 1:9에서 은혜가 나타났다는 본문을 통해서 은혜와 행위를 대조시키고 있다(참조: 딛 2:11).

딛 3:4 이하에서 선하심이나 자비 등의 용어가 같은 뜻을 가진 단어들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행위와의 대조를 보는데 이번에는 세례(침례)를 받는데서 나타난 은혜를 언급하고 있다(딛 3:5 이하).

딤전 1:14에서 믿음, 사랑, 그리고 소망 대신 은혜(카리스)를 둔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c)  히 4:16에서 카리스와 엘레오스(e[leo", 1656: 자비, 동정, 불쌍히 여김)를 사용한다(참조: 딤전 1:2). 그리스도는 은혜를 구현하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은혜를 받는다(히 7:25).

히 2:9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은혜로 고난 받으셨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히 10:29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또는 피)은 계약과 은혜를 결합하였다. 은혜와 제사에 쓰인 고기를 대조시키는 것은 히 13:9에서 계약에 대한 반대 명제를 언급한 것의 일부분이다.

히 12:15에서 우리가 은혜에서 떨어지지 말아야 할 것을 언급한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d)  베드로전서에서 고난은 은혜로 이해되고 있다(벧전 2:19-20). 벧후 3:18은 카리스를 그노시스(지식)에 관련시킨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약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e)  요한의 기록.

카리스는 요이 1:2과 계 1:4; 계 22:21의 인사말에 나온다.

요 1:14; 요 1:16-17에서 은혜는 율법과 반대되고, 진리와 완전함에 결합되어 나타나는 로고스의 계시의 결과를 언급한다. 그럼으로써 이 단어의 독특한 의미가 드러나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참조: H. -H. Esser; H. Conzel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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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말한 이 일도 내가 시행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이에 모세가 말하되 "구하옵나니, 주의 영광을 제게 보여 주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모든 자비를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출 33: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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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2580, 헨) 호의, 은총, 은혜, 매력, 아름다움

헨(명남)은 하난(@n"j; , 2603: 호의, 은혜를 베풀다, 자비하다)에서 유래했으며, '호의, 은혜, 은총, 매력,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의 총애를 받다' find favor in the eyes of라는 어구로 나오는 43회의 용례와 '주다' give라는 동사와 함께 나오는 7회의 용례, 그리고 '얻다' obtain라는 동사와 함께 나오는 3회의 용례(에 2:15, 에 2:17, 에 5:2)를 포함하여 69회 나온다. 따라서 이 단어가 독립적으로 사용된 예는 14회이다.

이 단어는 결코 정관사와 함께 나오거나 복수로 나오는 경우가 없으며, 이 단어가 인칭 접미사를 취하는 경우는 단 한번 창 39:21에서 뿐이다.

이 단어의 대다수의 용례들은 일반적이며 신학적인 중요성을 지니지 않는다. 동사 하난과는 달리 관심의 초점은 수여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의 수령자에게 있다. 이 동사와 그 파생어들이 번번히 나오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시편에서 헨은 오직 2회, 즉 시 84:11, "여호와께서 은혜를 주시며"와 신랑의 입술에 머금은 "은혜"에 대해 언급하는 시 45:2에 나올 뿐이다.

헨은 잠언에 13회 나오며, 종종 매력이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미학적인 의미를 지닌다.

노이바우어(Neubauer)가 역설하였듯이, 이 어구가 나오는 많은 구절들은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관계, 예를 들면 왕과 그의 신하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야곱이 창 32:5, 창 33:8, 창 33:10, 창 33:15에서 사실상 자기 자신을 에서의 가신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이 어구를 전문적인 어구라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이 어구는 이혼의 정당성에 관한 결정적인 구절, 신 24:1에서 발견되는데, 이 구절은 힐렐(Hillel) 학파와 샴마이(Shammai) 학파 사이의 논쟁의 근거가 되었다. 랍비 아키바(Akiba)는 "'만약 아내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만약 그가 그 아내보다 더 사랑하는 여자를 발견한다면", 자기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신학적 용법에서, 노아와 모세는 여호와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언급된다(창 6:8, 출 33:12). 요셉으로 전옥에서 은혜를 받게 하시고(창 39:21) 또 이스라엘인들로 애굽인들에게 은혜를 받게 하신(출 3:21, 출 11:3, 출 12:36) 이는 여호와이셨다.

민 11:15에서 모세는 여호와께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라고 말하고 있다.

슥 12:10에서 여호와는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의 거민들 위에 "헨과 타하누님의 심령"을 부어주시리라고 말씀하셨다. 타르굼은 "자비와 동정의 영"이라고 표기하며, 웅거(Unger)는 이것을 성령으로 간주한다.

슥 4:7에 나오는, 스룹바벨의 성전 완공 때에 외친 환호의 외침은 웅가르에 의해, "이것은 얼마나 은혜로운가(아름다운가)!" what gracefulness(beauty) it has!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셀린(Sellin)은 "잘한다, 잘한다!" Bravo, bravo! 라는 의미라고 주장하였다.

수많은 구절들에서 헨은 '매력' charm이나 호의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매력적인 인격'을 의미한다. 아히카르(Ahiqar)의 아람어 잠언에는 "사람의 매력은 그의 진실성에 있다"라는 어구가 나온다(ANET, no. 132, p. 429). 이런 호의를 만들어내는 것은 지혜의 배려이다. 즉 잠 3:4, 잠 13:15, 전 9:11, 전 10:12. 육체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이런 은혜와 매력을 지닌 여자(잠 11:16, 참조: 잠 11:22)는 존경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여자는, 단지 거짓된 매력과 헛된 아름다움만을 간직하고 있는 자와는 달리, 찬양을 받는다(잠 31:30). 나 3:4은 니느웨를 토밧 헨인 창부에 비유하는데, 이 히브리어 어구를 70인역본은 칼레 카이 에피카리스로 번역하며 불가타역본은 스페시오세 엣 그라테(speciosae et gratae)로 번역한다. 그 뜻은 '아름답고 즐거운'이다. NAB의 "아름답고 매력적인" fair and charming; NEB의 "아름답게 보이는" fair-seeming을 참조하라.

(참조: E. YAMAUCHI;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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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7355, 라함) 깊이 사랑하다, 긍휼히 여기다, 자비롭다

라함(동사)는 라함(!j'r' , 7356)에서 유래했으며, '깊이 사랑하다, 긍휼히 여기다, 자비심을 갖다, 자비롭다'를 의미한다.

이 어근은 '자연적인' 유대에 뿌리를 둔 깊은 사랑(대개 윗사람이 아래 사람에 대해 갖는 사랑)을 가리킨다. 이 어근의 피엘형은 우리가 동정, 연민, 자비 등 여러가지로 알고 있는 깊은 내적 감정에 대해 사용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7회 나온다.

라함은 사람에게는 자주 사용되지 않는다(12회).

이 단어의 칼형은 단 한번만 사용되는데, 시편 기자가 여호와에 대한 그의 사랑을 고백할 때이다(시 18:1). 이 사랑의 깊이는 이 단어와 레헴/ 라함과의 결합에서 보여진다. 이사야(사 49:15)가 젖먹이 아이에 대한 어미의 사랑을 언급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라. 이 단어는 또한 아버지의 사랑을 가리킬 수도 있다(시 103:13). 이 동사는 인간이라는 사실로 인하여 서로를 향해 갖는 자비의 감정을 나타내며(렘 50:42), 이러한 자비의 감정은 어린 아이(사 13:18)나 다른 무력한 사람들로 인하여 가장 쉽게 일어난다. 이스라엘과 바벨론의 적들이 그들의 잔인한 행위를 볼 때 결여한 것은 무력한 자들에 대한 바로 이러한 자연스런 자비이다(사 13:18, 렘 6:2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적들에게 이러한 감정(동정심)을 느낄 수도 있다(왕상 8:50, 렘 42:12). 실로 선지자들은(사 13:18) 바벨론(렘 21:7)과 하나님(렘 13:14)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가지 아니할 것(결여)을 기술할 때 후츠(어떤 사람으로부터 타인에게 흐르는 감정), 하말(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타인을 위하여 즉 그들의 어떤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하여 행동하게끔 하는 감정의 힘), 및 라함(어떤 '자연적인' 유대에 기초하는 깊은 내적 감정)을 결합한다.

이 어근은 하나님께 빈번히 사용된다. 이 어근은 두 개념을 통합한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이라고 부른 자들과 맺고 있는 강한 결속의 개념이다(시 103:13). 하나님께서는 아비가 자식들을 돌아보듯이 자기 백성들을 돌아보신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신다(참조: 미 7:17). 두 번째 개념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하넨:은총)의 개념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그가 택하신 자이면 누구에게든지 은혜롭고 자비하시다고 하셨다(출 33:19).

하나님의 깊고 온화한 사랑에 부속하는 몇 가지 개념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의 개념(출 33:19)이고, 둘째는 그의 백성들이 심판을 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때 그들을 향하여 베푸시는 자비와 용서이며(신 13:17), 또한 그의 회개하지 않는 백성들을 심판에서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자비와 은혜(왕하 13:23)의 개념이다. 따라서 이 속성은 부분적으로 종말론적 희망의 토대가 된다(참조: 사 14:1, 사 49:13, 사 54:7, 렘 12:15, 렘 33:26, 겔 34:25, 미 7:19, 슥 1:16). 신명기(신 30:3)는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포로(exile)를 예언하면서 회개만이 하나님의 애정에 찬 긍휼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주목할만 하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가 거두어 지고 바벨론의 손에 의한 가혹한 심판이 초래되는 것을 읽는다(사 9:17, 사 27:11, 호 2:4). 바벨론 포로 동안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사랑과 온화한 자비로 백성들을 격려했으며(애 3:32) 그들로 겸손히 회개하게 하고 하나님께 아버지 같은 긍휼을 다시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하게 하였다(슥 1:12). 부자 관계의 회복과 포로에서의 귀환은 이러한 동반하는 사랑의 돌보심을 증거한다(호 2:23).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포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따라(사 30:18)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하나님에 의해 끝나게 되었다고 한다(겔 39:25, 참조: E. J. Young, The Book of Isaiah, Ⅱ, p.353f.).

포로에서의 귀환에 대한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부자 관계가 결코 깨어지지 아니할 영원한 상태를 지향한다(호 2:23, 사 54:8, 사 54:10).

라함의 푸알 완료 여성형 루하마는 명사로 사용되어 호세아의 음란한 아내 고멜의 딸에게 준 이름이며, 이스라엘의 상징적인 이름이다. 로루하마(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함, 호 1:6)라는 이름에 대신하여 준 두번째 이름이다(호 2:1). 이 네번째 아이(둘째 딸)의 이름 루하마는 이스라엘의 여호와께 대한 변화된 관계, 즉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뜻하는 상징적인 이름이다(호 1:10, 참조: 롬 9:25, 벧전 2:10). 


--[롬1]------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JC 믿는, JC를 생명, 구주로 삼아 믿어 들어가는 믿음)으로 믿음(JC 살아내는, JC와 함께 사는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8.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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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에 대한 바울의 강론(롬 1:16-18)

바울은 본장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그의 주제인 칭의 문제를 광범위하게 다루며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 이방 세계의 비참한 상태를 묘사하고 잇다. 그의 수사적 변화는 아주 적절한 것으로 마치 웅변가의 그것과 같다. 

로마로 말하면 스스로 지혜있다는 자들에 의해서 복음이 배척을 받고 있는 곳인데도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기에 그는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고 있다. 

바울같은 사람 정도면 복음을 부끄러워할 만도 하다. 특별히 그것이 나무에 매달린 자의 복음이요, 그 내용으로 말하면 너무 평범한 것이라서 학자들 간에 거들떠 볼 일고의 가치도 없으며 그 복음을 고백한다는 자들이 모두 천박하고 볼품없는 사람들이요 가는 곳곳마다 반대를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지만 바울은 이것을 자기의 것으로 삼는 데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다. 바울이야말로 복음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은 신자일 뿐 아니라 복음에 수치스러운 존재가 아닌 신자라고 말할 수 있겠다. 복음의 우월성과 본질을 간파한 담대한 신앙 고백의 이유가 본 주제의 서론을 장식하고 있다.

Ⅰ. 주제(16, 17절). 복음의 우월성은 그것이 우리에게 계시해 준다는 점에 있다.

1. 복음의 목적은 믿는 자의 구원. 그것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복음이 육의 눈에는 제 아무리 천박해 보이고 추태롭게 보여도 바울이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이 모든 믿는 자의 구원을 이루기" 때문이다. 

복음이야말로 "구원의 길"(행 16:17)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며 구원이 우리에게 양도되어 우리의 것이 되도록 하는 위대한 승낙이다. 그러나

(1)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 능력이 없이는  복음은 한갖 사문(死文)에 불과하다. 그리스도께서 병자를 치유하는 데 있어 말씀에 능력이 동반되었듯이 복음의 계시는 곧 "여호와의 팔"(사 53:1)의 계시이다.

(2) 그것은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믿음만이 우리를 복음의 구원과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요 그밖에 사람들에게는 감취어진 것이다. 아무리 잘 처방된 약이라도 환자가 먹지 않으면 그만이다

 -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 맨 먼저 대접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나 사도들의 경우에 있어서 마찬가지다. "너희에게 먼저"(행 3:26)였으나 그들의 거절로 사도들은 이방인들에게로 향하고 만다(행 13:46).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은 동일한 입장에 서 있으니 곧 양자가 동일하게 구원자 없이 비참한 상태인가 하면, 양자 모두가 동일하게 구언자에게 언제고 환영받는 존재이다(골 3:11). 이러한 이론은 지금까지 선민으로 자처하면서 이방 세계를 멸시해 오던 유대인에게서는 뜻밖의 얘기였다. 그러나 대망의 메시야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일 뿐 아니라 "이방을 비추는 빛"이시다.

2. 그 방법으로 계시된 신자의 칭의(17절). "복음에는" 

곧 바울이 그렇게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있다. 

우리의 비참과 멸망은 우리 죄악의 소득이요 결과인 만큼 우리가 구원의 길을 모색하려면 칭의의 길을 먼저 알아야하는데 복음이 바로 이 일을 해 주고 있다. 복음이 의의 길을 터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이요 우리는 죄많은 죄인인 만큼 그분 앞에 나서려면 우리가 걸치고 나타날 수 있는 의가 있어야 마땅한데 이 의가 왕되신 메시야게서 드러나고(단 9:24), "복음에 나타나"있다. 곧 이 "의"는 우리의 죄악과 관계없이 주어지는 화해와 영접의 은혜로운 방편이다. 이 복음의 의를 가리켜

(1) 하나님의 의라고 부른다. 곧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요, 하나님의 인준을 받은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딱 잘라 말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행위의 공로에서 연유하는 온갖 의에 대한 구실을 배제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영원한 가치를 지닌 대속에서 오는 하나님되시는 그리스도의 의, 바로 그것일 뿐이다.

(2) 그것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곧 계시하는 하나님의 성실(faithfulness)로부터 받아들이는 인간의 믿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식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타락 이전의 아담의 경우에서처럼 하나님께 의지하는 믿음과 교통으로부터 중보자에게 의지하는 믿음과 이에 따르는 하나님과의 교통에 이르기까지 하는 식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또는 우리가 의로운 상태에 놓이게 되는 첫 번 믿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식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 경우에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이란 바로 세례문답 강령에도 있듯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여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또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접붙이는 믿음으로부터 우리의 원둥치가 되는 그에게서 우리의 공로를 취하는 믿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식으로도 볼 수 있다. 이 두 의미가 다음에 나타나 있다. "의인은 믿음으로"라는 말에는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이 있다는 말이요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말에는 우리를 지탱하는 믿음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의"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시작이나 과정에 있어서 믿음이 전부다. 또 반대로 "믿음에서 행위로"하는 식일 수도 없다. 마치 믿음으로 의로운 상태에 놓이고 행위로 말미암아 그 상태에 계속 머무는 것처럼 말이다. 철두철미하게 "영광으로부터 영광에 이르"듯이 믿음으로부터 믿음에 이르는 것이다(고후 3:18). 그것은 증대하는 믿음이요, 계속 나아가는 믿음이요, 인내하는 믿음이니 이 믿음은 전진하여 나아가는 가운데 불신앙의 뿌리를 잠식해 버리고 마는 믿음이다. 이것이 새롭고 신기한 이론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 그는 신약에 종종 인용되는 유명한 구약 성구를 인용하고 있다(합 2:4).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함을 입은 인간은 이 믿음을 통해 은혜와 영광의 생활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 때 하박국 선지자는 조망대 위에 올라가 특별한 계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1절) 이 계시는 외관상 지연되는 것 같지만 때가 차면 약속된 메시야가 틀림 없이 나타날 것이라는 내용이 었다. 이것이 거기서는 "묵시"(환상)로 불리지만, 다른 데서는 "약속"으로 불리운다. 또한 과거와 마찬가지로 다가오는 장래에도 "의인은 믿음에 의해서 살 것이다"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복음의 의가 바로 이것이니 곧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믿음으로부터 이미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약의 믿음에 이르는 의다.

Ⅱ. 이 주제의 증명. 

곧 유대인이나 이방인아 할 것없이 하나님앞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의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어느 쪽도 떳떳이 내세울 자신들의 의가 없다는 것이다. 칭의는 믿음이 아니면 행위를 통해서라야 하는데 바울은 그것이 행위로는 불가능한 이유를 유대인과 이방인의 행위를 들어가며 설명한 뒤에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3:20, 28). 

사도는 유능한 외과의사가 상처를 싸매기 전에 환부를 샅샅이 뒤지듯이 먼저 죄와 진노 문제를 확신시켜 놓은 다음에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로써 복음은 더욱 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저주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볼 수 있어야 의롭게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하다는 걸 알게 된다. 전반적으로(18절)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있다. 자연의 빛과 율법의 빛 모두가 죄에서부터 죄에 이르는 하나님의 진노를 들어내 보여 주고 있다. 복음이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하나님의 의롭게 하는 의를 들어내 보여주는 것은 우리에게 복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따르는 대조법이 흥미롭다.

1. 인간의 죄악성 묘사. 그는 이것을 "경건치 않음과 불의"라는 큼직한 두 가지로 간추리고 있으니 곧 첫째 돌판의 율법에 대한 불경건과 둘째 돌판의 율법에 대한 불의다.

2. 이 죄악성의 근원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 데 있다. 곧 하나님의 존재와 선악간의 차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는 있으면서도 그들은 불의로 진리를 막도 있었다. 곧 다 알고 있으면서도 뻔뻔스레 악행을 저질렀다는 얘기다. 이들은 진리를 포로나 죄수마냥 감금하여 이것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막는 자들이다. 그렇게 안하면 도리어 진리가 그 영향력을 발휘하겠기 때문이다. 불의하고 사악한 마음은 좋은 진리가 묻혀 있는 쓰레기장이나 다름없다. "믿음과 사랑으로써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는 일이야말로 모든 신앙의 뿌리요(딤후 1:13) 그것을 불의로 막는 일은 모든 죄악의 뿌리가 아닐 수 없다.

3. 이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하심. "하나님의 진노가……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이방인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기록된 말씀에나 하나님의 모든 섭리에 죄인들에 대한 심판이 행사되고 있으니 이 심판은 난 데 없이 땅에서 솟아난 것도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무슨 제2의 원인 때문도 아니요, 하늘에서부터 계시되어진 것이다. 또는 "하늘로부터의 분노가 계시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이것은 우리들 인간의 분노가 아니라 "하늘로부터의 분노"인 만큼 더더욱 참혹하고 불가피한 것이다.

----[공의, 의, 하나님의 의]-----------

체데크(명남)는 '올바름, 공의, 공정, 의로움'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20회 나온다(레 19:15, 레 19:36, 신 33:19, 욥 6:29, 시 35:27, 시 37:6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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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kaiosuvnh(1343, 디카이오쉬네) 의로움, 의

명사 디카이오쉬네(Theognis. Hdt. 이래)는 디카이오스(divkaio", 1342: 의로운)에서 유래했으며, 의로운 사람의 덕, 자질, 상태를 나타낸다. 70인역본에서 히브리 체테크(올바름, 공정함, 의로움)의 역어로 자주, 헤세드(선함, 친절, 긍휼)의 역어로 드물게 사용되었다.

명사 디카이오쉬네는 신약성경에서 9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넓은 의미에서, '그의 의무를 이행하는 자의 상태, 의로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조건'

① 일반적으로: "의의 말씀", 인간이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 받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길(way)에 관한 교훈, 히 5:13;

"의의 왕", 하나님께서 시인하신 왕, 그의 백성을 하나님께 용납되게 하는 왕, 히 7:2;

② '삶의 성실, 미덕, 순결, 정직, 생각, 느낌, 행동이 올바름': 마 3:15; 마 5:6, 마 5:10; 마 6:20; 마 6:1; 행 13:10; 행 24:25; 롬 6:13, 롬 6:16, 롬 6:18-20; 롬 8:10; 고후 6:7, 고후 6:14; 고후 11:15; 엡 5:9; 엡 6:14; 빌 1:11; 딤전 6:11; 딤후 2:22; 딤후 3:16; 딤후 4:8; 딛 3:5; 히 1:9; 히 12:11; 약 3:18; 벧전 3:14; 벧후 2:5, 벧후 2:21; 벧후 3:13,

"의의 도로", 의의 길로 행하는, 즉 정직한, 의로운 사람, 마 21:32;

"그의 의를 구하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 마 6:33; 약 1:20;

'자선'에서 나타나는 의에 대해: 고후 9:9.

"의와 성결"로 연결되어 나오는 경우, - 눅 1:75; 엡 4:24, - 전자는 인간에게 향한 옳은 행동을, 후자는 하나님께 향한 경건을 나타낸다.

의를 행하는 것, 의롭게 사는 것: 요일 2:29; 요일 3:7; 요일 3:10.

의를 행하는 것, 행 10:35; 히 11:33; 의를 위해 사는 것, 의를 위해 생명을 바치다, 벧전 2:24;

옳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완전하게 수행하다, 마 3:15.

디카이오쉬네가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할 때는, 그의 완전 무결한 도덕성, 고결성, 죄 없으심을 나타낸다: 요 16:8, 요 16:10;

하나님에게 사용될 때는 그의 '거룩성'을 나타낸다: 롬 3:5, 롬 3:25이하.

③ 바울 문헌에서 헤 디카이오쉬네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며 유대인과 유대 기독교인의 견해에 대립된다.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특히 다음의 사실들이 주목되어야 한다: 한 민족으로서의 유대인과 그들 가운데서 기도교도로 개종하게 된 매우 많은 유대인들은, 모세 율법의 요구사항에 부합하는 행위를 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다 - 마치 공로의 방식으로 - 고 생각하며, 또한 그리하여 영원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율법은 그 가르침 모두에 완전히 복종할 것을 요구하며, 그러한 복종을 이행하지 않는 자들을 정죄한다(갈 3:10, 갈 3:12). 이런 식의 복종은 유대인도 이방인도(롬 1:24-롬11:1) 그 누구도 이행할 수가 없다(롬 3:10) - 이방인에게는 모세 율법 대신 그들의 마음에 새겨진 타고난 올바른 법이 있다(롬 2:14이하).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 즉 그의 독생자 그리스도를 인간의 죄를 속하는 희생제물로 죽게 내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그의 은총과 선한 뜻을 입증하셨고, 그리하여 인간이 마치 죄를 짓지 않은 양 구원을 소망할 수 있게 한 그 사랑을 선포한다. 그러나 이 소망을 얻는 길은 오로지 믿음을 통하는 것 뿐이라고 가르친다. 이 믿음으로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고 보증된 하나님의 그 은총을 전유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믿음을 인간에게 디카이오쉬네로 간주하여 주는 것이다; 디카이오쉬네는 '한 죄인이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은총을 받아들이는 그 믿음을 통하여 그 죄인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 용납(열납)될 수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이런 의미에서 디카이오쉬네는 롬 4:5이하, 롬 4:11; 롬 5:17, 롬 5:21; 롬 9:30이하; 롬 14:17; 고전 1:30; 갈 5:5에서 수식어구 없이 사용된다. 하나님으로 인한 의,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신 것, 롬 1:17; 롬 3:21; 롬 10:3.

이 단어가 함축적으로 사용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상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낸다, 롬 10:4;

추상적인 것으로 구체적인 것을 나타내는 용법에서는,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신 자들을 뜻한다. 고후 5:2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롬 3:22; "믿음으로 된 의", 믿음으로 얻어지는, 믿음에서 나타나는 의, 롬 4:11, 롬 4:13; "하나님께로서 난 의", 즉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의, 하나님으로 인하는 의, 빌 3:9(내가 가진 의는 믿음에 기초한 의라는 것이다).

"믿음에서 난 의", 롬 9:30; 롬 10:6; "내가 가진 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 빌 3:9; "믿음을 좇는 의", 롬 9:30; 롬 10:6; "내가 가진 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 빌 3:9; "믿음을 쫓는 의", 믿음에 따르는, 믿음에 합당한, 히 11:7(그러나 히브리서에서의 '믿음'의 개념은 바울 문헌에서보다 더 폭 넓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가 없이는 의가 존재할 수 없는 분으로서, 의의 창시자로서로 불리운다, 고전 1:30.

"의를 이루기 위하여", 결과로서 의에 이르기 위하여, 의를 얻기 위하여, 롬 10:4, 롬 10:10.

믿음은 사람에게 의로 간주된다, 즉 의는 믿음에서 기인하고, 믿음에서 인정된다: 롬 4:3, 롬 4:6, 롬 4:9, 롬 4:22; 갈 3:6; 약 2:23.

"의의 직분", 고후 3:9. 믿음에서 생겨난 "의", 즉 율법 순종의 결과로 생각되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상태와 반대된다, 롬 5:5이하;

율법에 의존하는, 즉 율법에 대한 가상적 복종에 의존하는 의, 빌 3:6;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위로 스스로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의, 롬 10:3; 빌 3:9;

(b)  더 접근된 의미에서 '공의, 정의', 혹은 '각 개인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시는 미덕',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에게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공평하게 부여하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이라고 한다. 벧후 1:1.

법률상의 정의, 롬 9:28; "공의로 심판", 행 17:31; 계 19:11.(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공변, 정의]----------

fP;v]mi(4941, 미쉬파트) 심판, 재판, 공의, 법령 등

미쉬파트(명남)는 샤퍄트(fp;v; , 8199: 재판하다, 다스리다)에서 유래했으며, '심판, 재판 judgment, 공정, 공의 justice, 법령 ordinance, 관습 custom, 방식 manner'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400회 이상 나온다.

미쉬파트는 분명히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나 하나님이 전체 피조물을 다스리는 것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가장 중요한 사상이 무엇인지를 나타내준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사용된 미쉬파트가 거의 400여회 '심판' judgment으로 번역되고 또한 그런 의미로 사용되었다손 치더라도 이 번역은 입법, 사법, 행정적 기능과 정부에서 기능들이 뚜렷이 분리된 오늘날의 새로운 통치 방식을 고려해 볼 때 현대의 우리에겐 종종 불완전한 번역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다스리다, 통치하다'를 의미하며 정부의 모든 기능들을 가리키는 일반동사 샤파트(이 단어에서 미쉬파트가 파생됨)가 사법적 기능만을 잘못 국한하여 가리키는 것이다. 반면에 동사와 명사 모두는 이 모든 기능들을 포함한다.

성경에서 나타나는 모든 용례를 분석하면 적어도 13가지 관련 용법들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비슷한 의미의 영역을 지닌 단 하나의 영어 단어로 번역한다면 명확한 핵심 사상은 반드시 justice라는 단어로 표현될 것이다. 심지어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매우 강력하게 규칙적으로 번역하는 RSV도 미쉬파트를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새롭게 번역했다("주의 판단"[시 72:1]과 "공의로"[시 72:2]를 대조하라). 명사 미쉬파트는 다음과 같은 일반적 혹은 종교적 통치의 거의 모든 측면을 지칭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

(a)  일반적인 재판장 앞에 가져온 소송 사건을 판결하는 행위. BDB는 출 21:31에서부터 출발하여 204개의 실례를 제공한다 - RSV와 NASB는 출 21:31을 이에 대한 실례로 간주하지 않고, 달리 번역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 용례들은 매우 분명한 것들이다(신 25:1, 수 20:6 등).

(b)  소송 사건을 판결하는 장소. 보다 희귀한 이 용법의 분명한 예는 왕상 7:7이다(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c)  소송의 과정은 미쉬파트라고 불리운다. 의미1과 의미2 사이에 구분하기가 어려운 의심스러운 실례가 많이 있다. 한가지 예는 사 3:14이다. '소송' litigation이라는 단어는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용례를 번역하기에 적합한 단어일 것이다. 가장 명백한 용례는 뒤따르는 명사와 함께 임(im)을 사용한다. "그러그러한 심판"(욥 22:4, 시 143:2).

(d)  소송 사건(즉 관원에게 가져온 특수한 소송 사건). 예를 들면 솔로몬은 그가 "미쉬파트를 들을" 수 있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했다 - 여기서 미쉬파트는 그 앞에 가져온 송사를 뜻한다(왕상 3:11, ASV marg). 이 실례는 인정할 수 없다 하더라도(RSV) 욥기에 나오는 아라크티 미쉬파트("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욥 13:18)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왕상 8:59도 보라. 이러한 용법은 명사 리브의 용법과 비슷하다.

(e)  법정 재판관의 선고 혹은 판결. 이 의미는 매우 일반적인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판결' judgment이라는 단어가 미쉬파트의 역어로 많이 사용되는데, 이는 매우 옳다(왕상 20:40). 렘 26:11, 렘 26:16에서 "죽음이 합당하니"라는 표현은 미쉬파트 마우웨트를 번역한 것이며, 분명히 사형 선고를 의미한다.

(f)  심판의 때. 분명한 예는 시 1:5, 전 12:14이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미쉬파트로 가져 올 것이다"(한글개역,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심판하시리라")에서 미쉬파트는 위에 제시한 것과 매우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BDB는 일반적인 '심판의 집행'이 앞의 실례를 포함하여 일단의 구절들에서 미쉬파트가 지니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앞에서 인용한 예는 공의의 개념 혹은 성질과 관련하여 분류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아 보인다.

이상의 모든 실례는 미쉬파트가 통치의 사법적인 면을 나타내는 주된 예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권위라고 생각하는 것과 매우 유사한 의미로 이 단어가 사용되는 용법은 다음과 같다.

(g)  주권(sovereignty), 궁극적인 권위 혹은 권리라는 의미에서의 통치의 법적 근거. 오늘날 사람들은 이것을 조직과 인간의 본질("자연권")에서 찾곤 한다. 그러나 히브리 성경은 이렇게 가르친다.

① '모든 권위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런데 미쉬파트라고 지칭되는 것이 바로 이 권위이다. '미쉬파트(재판)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신 1:17).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전체 미쉬파트는(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 하나님의 창조물인 각 개인은 양도할 수 없는 미쉬파팀(권리 rights)을 가지고 있다(참조: R. D. Culver, Toward a Biblical View of Civil Government, 1974).

② 재판장의 미쉬파트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이 사실은 왕되신 메시야의 엄연한 권위에 대하여 언급하는 시 72:1-2에서 가장 잘 예증된다. 물론 섭리의 교리가 이 개념의 기초가 된다(시 103:19, 참조: 롬 13:1 이하). 하나님의 이러한 우주적 통치와 지배는 렘 8:7의 미쉬파트가 전달하는 개념인 것 같다: "내 백성은 여호와의 율법(한글개역 "규례")을 알지 못하도다".

또한 통치의 입법적인 면과 관련되는 용법이 있다.

(h)  정의의 성격은 모든 옳은 인격적인 행정에 강조되어 있다.

① 이 공의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이다. 모든 참된 미쉬파트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며, 따라서 미쉬파트는 하나님의 요구를 수반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하나님의 미쉬파트에 대하여 말할 때, 자주 그러하듯이, 이 단어는 특별한 뉘앙스를 지닌다. 즉 이 때 미쉬파트는 하나님의 당연한 법령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당연한 요구(just claims)를 뜻한다. 주되신 하나님께서는 요구하실 수 있으며, 그는 요구하신다"(Koehler, OT Theology, pp. 205-206).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권리(정의, 권위, 등)가 그에게 있다(사 30:18, 참조: 창 18:25). 하나님은 이러한 의미에서 미쉬파트를 사랑하신다(시 37:28). 시 36:6)은 '주의 미쉬파트(단수형)는 큰 심연이다'라고 기록한다(한글개역,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② 공의로서의 미쉬파트, 즉 하나님의 속성에 뿌리 박혀 있는 의는 일반적인 인간의 속성이 되어야 하며 인간 중에서 사법적 과정의 특성이 되어야 한다(시 106:37). 지혜로운 자는 공의를 말하며(시 37:30) 공의를 생각한다(잠 12:5).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공의를 요구하신다(미 6:8). 의인은 공의를 즐거워하며(잠 21:15) 의로운 재판장은 재판할 때 공의를 사용한다(미 3:1, 참조: 잠 29:4).

(i)  미쉬파트는 또한 율법의 규정을 나타낸다 - 이 단어는 종종 호크(법령, 출 15:25)와 토라(율법, 사 42:4)와 대등하게 사용된다. 오경의 법령들은 미쉬파트이며(레 5:10, 레 9:16 등), 사실상 모세 율법의 각 규정들이 미쉬파트이다(신 33:10, 신 33:21, 시 119편에서 16회 사용됨).

(j)  방법, 설계도(출 26:30, 한글개역 "식양").

(k)  풍습(왕하 17:33, 한글개역 "풍속").

(l)   취해진 알맞은 크기(왕상 5:8). 이 세 가지 의미들(왕상 5:10, 왕상 5:11, 왕상 5:12)은 거의 표준적인 것들이 아니고 확대된 의미들이긴 하지만 역시 이 단어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m)  율법, 인간, 하나님 아래 어떤 사람의 권리는 미쉬파트라고 불리운다(신 18:3, 렘 32:7).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뜻에 관한 구약성경의 묘사에서 체테크 및 체다카와 자주 연관되는 이 개념은 성경의 세계관과 인생관에 대한 진정한 이해의 핵심을 이룬다.

주(註): 대제사장의 가슴에 붙인 흉패는 "판결 흉패"(출 28:15, 출 28:29-30)라고 불리우는데, 이렇게 불리운 이유는 우림과 둠밈이라는 보석을 통하여 주어지는 소위 어떠한 계시 때문이 아니라 그 흉패가 아론의 가슴을 덮었으며 "아론이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에 흉패가 그 가슴 위에 있게 되고, 따라서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판결(미쉬파트)을 항상 그 가슴 위에 두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론이 하나님 앞에서 관여된 바는 이스라엘의 칭의, 즉 범죄에 대한 사법적인 선고(위를 보라)였다. 예컨대 '실제 동양의 생활에서처럼 예언적인 환상에서 칭의의 선언은 종종 입고 있는 옷의 성질에 의해 표현되었다. 사 61:10은 이에 대한 좋은 실례다'. 또한 사 62:3, 계 3:5, 계 7:9, 계 19:14, 에 6:8-9, 에 6:12을 보라(A. C. Hervey, Smith's Dictionary of the Bible, Hackett ed., Ⅱ, pp. 1066-67).(참조: R. D. CULVER). 

----[호2:19-20]----------------

19.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체데크...창조주하나님의 절대적 의)와 정의(미쉬파트...판단)와 은총(헤세드...언약적 사랑 =인자)과 긍휼히 여김(라함....자비)으로 네게 장가 들며//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20.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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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eje(2617, 헤세드) 친절, 인자, 자비, 자애

1. 헤세드(명남)는 하사드(ds'j; , 2616)에서 유래했으며, '친절, 인자, 자비, 자애'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40회 나온다.

2. 헤세드(명남)는 하사드(ds'j; , 2616)에서 유래했으며, '책망, 비난, 수치, 치욕'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회 나온다(레 20:17, 잠 14:34). 

-----자비롭고 은혜롭고 ----------

!j'r'(7356, 라함) 불쌍히 여김, 동정, 자비

라함(명남)은 '불쌍히 여김, 동정, 자비'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라함(!j'r' , 7356)과 레헴(!j,r, , 7358)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라함은 사람의 감정의 자리(창 43:30)나 사람의 깊은 감정의 표현(왕상 3:26)을 가리킬 수 있기 때문이다(참조: J. Pedersen, Israel, 1936, pp.309, 525). 라함은 여러가지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애정에 찬 자비가 그의 주시는 사랑과 은총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따라서 하나님의 징벌이 인간의 분노보다 더 바람직하다(삼하 24:14). 하나님의 자비는 종종 그의 헤세드(사랑, 친절.....언약적 사랑) 및 헨(=카리스..카라..은혜, 공 없이 얻은 은혜....은혜로운 : 한눈)과 결합된다.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는 그의 사랑에 찬 자비와 대조된다(신 13:18, 슥 1:12, 시 77:9). 포로(특히 바벨론 포로, 단 9:18) 시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불쌍히 여김(대하 30:9)과 하나님의 응답(사 54:7)에 의지하여 회개하도록 촉구 받는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그의 고통을 덜어 줄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하며(시 51:1), 하나님의 온화한 자비와 은혜로 과분한 구원을 얻었다고 고백한다(시 103:4). 종말에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이며 깨어지지 아니하는 사랑과 보살핌이 입증될 것이다(호 2:19). 이스라엘이 회개할 때도 그러할 것이다(신 30:3, 사 55:7, 슥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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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로 들어가라 (2)(창 7:1-4)

[창7]

1.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And the LORD said unto Noah, Come thou and all thy house into the ark; for thee have I seen righteous before me in this generation.//Then the LORD said to Noah, "Enter the ark, you and all your household, for you alone I have seen to be righteous before Me in this time.

2.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Of every clean beast thou shalt take to thee by sevens, the male and his female: and of beasts that are not clean by two, the male and his female.//You shall take with you of every clean animal by sevens, a male and his female; and of the animals that are not clean two, a male and his female;

3.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Of fowls also of the air by sevens, the male and the female; to keep seed alive upon the face of all the earth.//also of the birds of the sky, by sevens, male and female, to keep offspring alive on the face of all the earth.

4.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For yet seven days, and I will cause it to rain upon the earth forty days and forty nights; and every living substance that I have made will I destroy from off the face of the earth.//For after seven more days, I will send rain on the earth forty days and forty nights; and I will blot out from the face of the land every living thing that I have made."

5.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And Noah did according unto all that the LORD commanded him.//Noah did according to all that the LORD had commanded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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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이제 곧 대홍수가 이르게 되므로, 안전한 지대로 노아와 그 가족을 은혜로이 부르셨다(1절).

1. 그 부르심은 매우 친절한 것이었다. 마치 다정한 아버지가 밤이나 폭풍우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그 자녀들을 집안으로 불러들이는 그런 친절이었다. “너와 네 온 집, 네가 거느리고 있는 작은 가족들은 방주로 들어가라.” 다음 사실을 살펴보도록 하자.

(1) 하나님께서 명령하실 때까지 노아는 방주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비록 그는 그 방주가 자신의 피난처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새로운 명령이 내려지기를 기다렸으며, 또한 그 명령을 받았다. 우리를 섭리하시는 자를 알고 하나님의 부름에 따르며,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는 모든 발걸음에 한 발 앞서서 가신다는 것을 아는 것은 지극히 큰 안위가 된다.

(2)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방주로 “들어가라”고 명하신 것이 아니라 “들어오라”고 하셨으니(KJV에는 “come”으로 되어 있음─역주) 이는 하나님께서 그와 동행하시고 (앞서 들어가셔서 점검, 미리 마련하시고) 그를 방주 속으로 인도하시며, 거기에서 그와 동행하며, (또한)때가 이르면 안전하게 밖으로 이끌어 내시겠다는 것을 암시하신 것이다. 우리가 어떤 곳에 있든지 지극히 바람직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이다. 이것이 온갖 형편과 처지에서도 가장 큰 즐거움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자. 노아의 방주는 (비록) 감옥과 같은 곳이었지만, 그의 피난처였을 뿐만 아니라 궁궐이 되게 한 것이 바로 그 사실이었다.

(3) 노아는 방주를 짓는 데 대단한 수고를 했으나 이제 그 안에서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게 되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행한 그 모든 일은 머지않아 우리의 즐거움이 될 것임을 확실히 알자.

(4) 노아뿐만 아니라 그의 온 집안, 즉 아내와 자녀들까지도 그와 함께 방주로 부르심을 받았다. 경건한 사람의 권속이 된다는 것은 지극히 유익하며, 또 그런 사람의 그늘에서 거하는 일은 안전하고도 즐거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자. 노아의 아들 중에 함이 있었는데, 그는 후에 악한 자임이 드러났지만 그래도 방주 안에서(안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암시해 주는 것이다.

① 사악한 자녀들도 때로는, 경건한 그들의 부모 때문에 보다 더 잘살게 되는 수가 있다.

이 땅에서는 가장 선한 사회 속에도 선과 악이 섞여 있다. 이것을 우리는 기이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노아의 가정에는 함 같은 존재가 있었고, 그리스도의 권속(JC는 따르는 제자들을 내 어머니, 내 누이, 형제, 곧 권속들이라 부르셨다!!) 중에는 유다가 있었다. 즉 인간 세계는 완전한 순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5) 노아에 대한 이 부르심은 가련한 죄인들을 부르는 복음의 부름의 한 모형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마련된 방주가 되시니 우리는 그 안에서만 죽음과 심판이 닥칠 때에 안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 노래의 후렴은 “오라, 오라”는 것이니 하나님의 말씀이 “오라” 하신다. 목사(전도자)가 이르기를 “오라”고 한다. 성령께서 이르시기를 “오라, 방주로 들어오라”고 하신다.

2. 이 초청의 이유는 노아의 완전함에 대한 영예로운 증언이다.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속기 쉬운 사람들 앞에 의를 보임으로써 경건의 본이 될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인간의 성품에 기만되지 않는 하나님에게 의를 인정받음으로써 경건의 권능이 되는 자들은 참으로 의로운 자다.

(2) “내가 너를 보았다”고 했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들을 그가 보아 아시며 기뻐하신다. 사악한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단 하나 의로운 노아를 알아보셨다. 그 많은 왕겨같이 쓸데없는 것 가운데서 단 하나의 낟알이라도 결코 잃어버리는 일이 없다.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아신다.

(3) 목격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곧 자기 백성의 성실함에 대한 증인이 되신다. 그것을 보시는 하나님은 천사들과 사람 앞에서 그것을 선포하시리니, 의롭게 될 수 있는 자비를 얻은 자들은 의롭다고 하는 증거도 얻게 될 것이다.

(4) 하나님께서는 악한 때와 장소에서도 선할 수 있는 자들을 특별히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노아는 현저하게 의로웠으니, 이는 그같이 사악하고 타락한 세대 속에서도 의로웠기 때문이다.

(5) 모든 사람이 악한 시기에도 스스로 자신의 순결함을 지키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재난을 당할 때 또한 안전하게 지키실 것이다. 남들과 함께 죄악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그들의 큰 재앙에도 동참하지 않을 것이다. 남보다 선한 자는 비록 이생에서라도 남들보다 안전할 것이니, 이것이 그들에게는 더 큰 복이 된다.

Ⅱ. 노아와 함께 방주에서 생존해야 될 금수에 관해서 반드시 지켜야 할 사항을 명령하셨다(2-3절). 이들 금수는 인간처럼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경고나 지시를 받을 능력이 없었다. 인간은 “땅의 짐승”보다도 훨씬 더 교화되었고 “지혜를 주시기를 공중의 새에게 주심보다 더하셨다”(욥 35:10). 즉 사람은 통찰력이라는 재능을 부여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들 금수들을 돌볼 책임이 있다. 그 모든 것은 인간의 지배하에 보호를 받아야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하나를 모두 지킬 수는 없다 하더라도 모든 종류를 세심하게 보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어떤 짐승의 족속, 곧 가장 하찮은 족속이라도 완전히 멸종되게 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다음 사실을 살피자.

1. 인간을 위하고, 그들의 안위와 유익을 생각하는 하나님의 배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노아 자신이 염려한 것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이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행복을 고려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 옛 세상이 지극히 역겨운 것임을 아셨고 또한 새로운 세상도 보다 나을 것이 없음을 아셨지만, 인간의 소용을 위해 짐승들을 보존케 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고전 9:9) 이 같은 염려는 오히려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2. 가장 무가치하고 별 유익이 없는 짐승까지도 방주에서 생존케 하셨다.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자비심은 가장 고귀하고 유용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가 지으신 모든 것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3. 그러나 부정한 것보다는 정결한 것을 더 많이 보존하신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1) 대체로 정결한 것이 사람에게 유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면 더 많이 보존되었고 지금까지도 번식되고 있다. 이 세상에는 사자 떼가 소 떼같이 많지 않으며, 호랑이 떼가 양의 무리들처럼 많게 하지 않으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할지어다.

(2) 정결한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정결한 것을 더 많이, 그 종류의 번식을 위해서는 세 쌍씩, 제물을 위해서는 일곱 쌍씩을 보존케 하셨다(8:20). 하나님은 이 땅에 속한 것을 한 주일의 비례와 같이 6대 1로 우리에게 주신다. 영적인 것은 모두가 다 그분을 위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고 그 분을 섬기는 일에 쓰이는 것은 특별히 축복받고 번성하게 된다.

Ⅲ. 임박한 대홍수에 대해 예고하셨다.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비를 내려”(4절).

1. “내가 그렇게 하는 데는 아직 7일 남았다.” 120년이 지난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7일의 여유를 더 허락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천천히 노하시며, 심판의 역사는 하나님이 별로 원치 않는 일임을 보이시기 위함이다. 또한 회개의 여유를 더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헛되었고, 이 7일이라는 날도 다른 모든 날처럼 헛되이 지나가 버렸다. 그들은 홍수가 닥쳐올 때까지 계속해서 태평하게 육욕에 젖어 있었다. 

2. “7일밖에 남지 않았다.” 노아는 심판이 가까웠다고 그들에게 알렸지만 그들은 회개를 미루어 두려는 유혹에 빠졌다. 이는 그 같은 일이 닥치기에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로부터 명령을 받아 그 때가 지금 문 앞에 이르렀다고 알렸다. 이제 단 일주일밖에는 여유가 없으며, 단 일주일 후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으며, 이것을 깨달아 이제 곧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지게 될 그들 자신의 화평에 속하는 것들을 살피라고 했다. 그러나 죽음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면서 건강이 있는 동안에 자신의 영혼에 무관심하고 소홀했던 자들은 죄악에 미혹되어 마음이 굳어졌기 때문에, 이제 그들의 죽음이 임박해 오는 것을 볼 수 있는 그 병든 날 7일 동안에도 흔히 방심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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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935, 보) 들어오(가)다, 가다, 오다

보(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들어오(가)다, 가다, 오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560회 나오며, 칼형, 히필형, 호팔형으로 사용되었다.

보(a/B , 935)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공간상의 움직임을 나타낸다. '들어가다'라는 의미는 창 7:7에 나오는데, 여기에는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로 "들어갔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 동사의 사역형 어간은 '들어가게 하다', 혹은 '데리고 들어오다(창 6:19, 한글개역 - "이끌어 들여")', 혹은 '이끌어 오다, 가져오다'(창 2:19, 이 단어의 최초의 용례)를 의미한다.

이 동사는 창 10:19의 '네가 소돔까지 갈 때'(KJV; "소돔을 지나" - 한글개역) 어구에서 더욱 독립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 동사는 '오다'라는 의미와 '돌아오다'라는 의미 둘 다로 사용될 수 있다.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은 가나안 땅으로 "왔다"(한글개역 - 땅에 "들어 갔다", 창 12:5).

한편 신 28:6에는 하나님께서 (아침에 일하러) '나가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경건한 자들을 축복하셨다고 언급되어 있다. 때때로 이 단어는 해가 '지는 것'을 나타낸다(창 15:13).

이 단어는 '조상에게 돌아간다'(창 15:15)는 의미에서 죽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른 특수한 용례는 '아내에게 들어가는 것' 혹은 '동거'(창 6:4)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또한 시간의 흐름에 대해 사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선지자들은 '다가오는' 심판의 날에 대해 말한다(삼상 2:31).

마지막으로 이 동사는 거짓 선지자가 그 말대로 이적과 같은 그런 사건을 '이루는' 것에 대해 사용되기도 하였다(신 13:2).

-----하나님이 '오신다'는 말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로, 하나님은 천사(삿 6:11)나 다른 육신을 입은 존재(참조, 창 18:14)를 통해 '오신다', 그는 꿈(창 20:3)이나 다른 실제적인 현현(출 20:20)을 통하여 인간에서 '나타나시어' 말씀하신다. 예를 들어 출애굽 동안에 하나님은 백성들 앞에 가는 구름과 불 속에서 '나타나셨다'(출 19:9).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자들이 그에게 합당하게 예배 드리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그들에게 '오신다'고 약속하신다(출 20:24). 블레셋인들은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께서 그곳에 '오셨다'고 느꼈다(삼상 4:7). 공식적인 예배와 관련된 용법은 시 24:7에 나온다. 여기에는 영광의 왕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시온의 문이 열리리라고 언급되어 있다. 또한 여호와께서 겔 43:2에 묘사되어 있는 새 성전으로 '돌아 오실'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오심'에 대한 일단의 예언적 묘사가 있다. 이 주제는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자기 백성들을 도우시려고 '오심'에 대한 찬송(참조, 신 33:2)에서 기원한 것 같다. 시편(예: 시 50:3)과 예언서(예: 사 30:27)에는 여호와께서 심판과 축복으로 '오신다'고 언급되어 있다 - 고대 근동 신화에서 차용한 시적인 어투이다(참조, 겔 1:4).

보(a/B , 935)는 또한 메시야의 '오심'을 언급하는데 사용된다. 슥 9:9에는 메시야 왕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고 묘사되어 있다. 어떤 구절은 특별히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는데, 실로가 오시기까지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하는 창 49:10이 그러하다. 또 다른 난해한 구절은 겔 21:27이다: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 동사 보를 사용한 매우 유명한 예언은 인자의 '도래'에 관한 것이다(단 7:13). 끝으로 마지막 날의 '도래'(암 8:2)와 여호와의 날의 '도래'(사 13:6)가 있다(넬슨의 구약해설). 

보(a/B , 935)는 공동체와 함께 기도하고 희생제사를 드리려고 성소에 오는 사람에 대해 사용되었다(신 12:5, 신 31:11, 삼하 7:18, 사 30:29, 렘 7:2, 렘 7:10, 시 5:7, H8, 시 42:2, H3). 제사장들이 이 거룩한 영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특별한 규정을 이행해야 했는데 반해(출 28:29이하, 출 29:30 등), 그곳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은 의로운 행동을 나타내야 한다(시 15편, 시 24편). 이방인들도 기도하러 올 수 있었으나(왕상 8:41), 환관은 제의 공동체에서 제외되었다(신 23:1, H2). 백성들이 성소에 올 때, 그들은 제사장들에게도 갔다(신 17:9). 그들은 또한 여호와께 물으러 선지자에게 갔다(예: 왕상 14:3, 왕상 14:5, 왕하 4:42, 겔 14:4, 겔 14:7).(참조: E. A. Martens).  

***정결한 짐승7쌍과 공중의 새 각각7쌍(무교병), 부정한 짐승 2쌍(유교병/구원의 증거자들), 나머지1쌍(노아와 YH...YH임재하심에 대한 믿음, 그것을 알게 하시는 주님, 영적 느낌 주시는 YH과 교통/누림으로 동행하며 성장성숙의 충만에 이르는 연습이 필요!!....JC증거자로 세상으로 보내지기 위해 준비되어야 함) 

***[[순결서약 예식을 생각함]]

결혼전 몸의 순결, 특히 청년의 때를 지나면서 주앞에 일심으로, 일편단심으로 자신의 몸을 의의 무기로 드리기 위해 몸의 순결을 지킴은 매우 큰 은혜로서 중요함(원수대적마귀의 참소에 대해 담대함 얻음...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이기에 하나님과 사람앞에 자랑하지 말고, 오히려 겸손하라!!...비례물시//음행의 유혹은 도망치는 것이 최상책!!)...한편, 어떤 경우이든지 (강제로든지, 자의적으로든지, 결혼전이든지 후이든지 상관없이) 몸의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 하더라도 고후5:17의 (토기장이 하나님)부활구주 믿는 믿음은 믿는 이를 [너는 바로 그 믿음으로 인해 재창조라!!]하시므로, 바로 그 믿음 통해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살아가는 은혜가  있음을 잊지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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