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2.11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에로타오 기도. 헤른후트 기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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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신성(神聖)에 관하여 (7) - 하나님께 빌었던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엘파소한인침례교회 이상환 목사


문제 제기: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을 잘 보면 예수님의 신성에 의문을 던지게 하는 문장들이 보입니다.  9절의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이라는 문장과 15절의 "내가 비옵는 것은..." 이라는 문장, 그리고 20절의 "내가 비옵는 것은..."이라는 문장에 들어있는 "빌다"는 단어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빌다"는 의미는 '손 아랫 사람이 손 윗 사람에게 구하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단어가 성부 하나님께 구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에 사용되었다는 것은 그 분의 신성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하는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구절을 놓칠리 없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이슬람 교도들, 여호와의 증인과 몰몬교도들은 "예수는 하나님보다는 낮은 영적 존재다," "예수는 인간일 뿐이다"는 주장을 이 구절들을 기반삼아 논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증을 접한 기독교인들은 '그러게 말이야...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면 왜 성부께 비셨지?  그분께서 하나님이시라면 성부 하나님께 비실 수 없잖아?  에이...  그냥 믿자.'는 식으로 넘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뒤로 물러나기 전에 먼저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 여러 번 사용된 "빌다"는 단어의 의미를 조명해 보는 것입니다.  만약 이 단어가 우리가 사용하는 "빌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스트레이트 펀치를 한 대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스트레이트 펀치를 한 대 날리는 것이지요.  지금부터 저는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빌다"는 단어를 언어학적으로 조명하며 문제를 풀도록 하겠습니다.

"빌다"는 뜻: "빌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아이테오(αἰτέω)와 에로타오(ἐρωτάω)입니다.  

우리 말 성경은 이 두 단어를 "빌다"로 번역했지만, 두 단어 사이에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여집합이 존재합니다.  아이테오는 우리가 생각하는 "빌다"의 개념으로 '손 아랫 사람이 손 윗사람에게 구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피조물이 창조자에게 구하다,' '종이 주인에게 구하다,' '없는 자가 있는 자에게 구하다,' '힘이 없는 자가 힘이 있는 자에게 빌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반면에 에로타오는 이러한 뉘앙스로 쓰이지 않습니다.  그대신 '동등한 자격을 지닌 사람이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요구하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이 단어는 '한 왕이 다른 왕에게 요구하다,' '이 집 주인이 저 집 주인에게 요구하다,' '한 랍비가 다른 랍비에게 요구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에로타오에는 "빌다"의 개념이 전혀 없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단어의 개념을 유념한 후 요한복음 17장으로 가봅시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단어:  요 17:9, 15, 20에는 예수님께서 성부께 비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빌다"로 번역된 헬라어가 아이타오일까요 에로타오일까요?  전부 다 에로타오입니다.  손 아랫 사람이 손 윗사람에게 구걸하는 아이테오가 아니라, 동등하고 대등한 위치에서 요구하는 에로타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고 대등한 위치에서 요구하신 것입니다.  왜죠?  성부께서 하나님이신 것 처럼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총제적 증언:  놀랍게도 성경은 이러한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에로타오와 아이타오의 차이를 구별하여 사용했습니다.  몇 개의 중요한 구절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요 16:26의 일부분입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요구하겠다..."

이 구절 속에는 "구하다"는 단어가 두 번 등장합니다.  한 번은 인간이 하나님께 구하는 모습을 나타낼 때 쓰였고, 또 한 번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구하시는 모습을 나타낼 때 쓰였습니다.  같은 단어가 두 개의 다른 상황에 쓰인 것이지요.  그러나 헬라어 성경을 보면 두 단어가 다른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번 볼까요?

"ἐν ἐκείνῃ τῇ ἡμέρᾳ ἐν τῷ ὀνόματί μου αἰτήσεσθε, καὶ οὐ λέγω ὑμῖν ὅτι ἐγὼ ἐρωτήσω τὸν πατέρα περὶ ὑμῶν·"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빌 것이요(아이테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게 요구하겠다(에로타오)..."

인간이 하나님께 구하는 모습은 아이테오로 쓰였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는 모습은 에로타오로 쓰였습니다.  피조물인 인간들은 창조자와 동등하고 대등한 위치에 있지 않은지라 아이테오로 빈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창조자와 동등하고 대등하신 하나님이신지라 에로타오로 요구하신 것입니다. 요 14:16도 마찬가지입니다.

"κἀγὼ ἐρωτήσω τὸν πατέρα καὶ ἄλλον παράκλητον δώσει ὑμῖν, ἵνα μεθʼ ὑμῶν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ᾖ"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에로타오)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이 구절에 있는 "구하다"도 에로타오에서 번역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고 대등한 위치에 계신지라 당당히 요구하신 것입니다.

특히 9절의 문장구조를 보면 이러한 사실이 더욱더 확연히 들어납니다.  9절은 헬라어의 에고(ἐγὼ)라는 단어로 시작됩니다.  이는 1인칭 주격 대명사로써 "내가"라는 뜻입니다.  헬라어에는 주격 대명사를 쓸 일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사에 인칭 대명사가 녹아 들어가 있기 때문이지요.  쉽게 말하자면 동사로만 동사의 주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격 대명사가 쓰이는 경우는 주어를 강조할 때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한 후 9절을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일인칭 동사인 에로타오앞에 일인칭 주격 대명사 에고를 붙이셨습니다.  왜죠?  그럼으로써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 내가 당신과 동일한 위치에서 요구합니다'라는 사실을 계시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명약관화 (明若觀火): 이처럼 성경은 아이테오와 에로타오를 명확하게 구별하여 예수님과 인간의 차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요한복음 17장에 "빌다"로 잘못 번역된 구절을 갖고 예수님의 신성을 강등하거나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대등하고 동등한 위치가 아니기 때문에 에로타오적으로 요구할 수 없고, 오직 아이테오적으로만 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께 구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에로타오로 묘사하지 않고, 아이테오로만 묘사한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고 대등한 위치에 계신 하나님이신지라 그 분께서 성부 하나님께 구하는 모습은 단 한 번도 아이테오로 묘사하지 않고, 에로타오로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발견했던 웨렌 위어스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예수님께서 9, 15, 20절에서 '기도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쓰신 단어 '비옵나니'는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쓰인 '기도하다'라는 단어와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께서 쓰신 단어는 '동등한 상태로부터의 요구'라는 뜻이다. 여러분과 나는 하나님께 이 단어를 쓸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단어를 수 없이 사용하셨다.  왜인지 아는가?  그분은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결론: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께 

손 아랫 사람이 손 윗사람에게 구하는 것 처럼 빌지 않으셨습니다.

힘 없는 자가 힘 있는 자에게 구하는 것 처럼 빌지도 않으셨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자에게 구하는 것 처럼 빌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대신 ((오직 한량없이 친밀한 사랑의 교통안에서))같은 하나님으로써 대등하고 동등하게 요구하셨습니다.  그분은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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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8 헤른후트((=하나님의 품, 그분 임재의 오두막집, 피난처, 망대...L'abri)) 기도서, 본회퍼 그리고 나......홍주민 

왕상9: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기도와 네가 내 앞에서 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

헤른후트(Herrnhut), 우리말로 '주님이 보호하시는 곳'을 의미한다. 헤른후트 공동체 운동은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독일의 북동부에 위치한 한 자그마한 마을에서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니콜라우스 루트비히 폰 친첸도르프(1700-1760)에 의해 시작된 창조적인 디아코니아 공동체 운동이다. 섬김 공동체였던 초대교회를 이루고자 했던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드레스덴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중, 그의 일생을 변화시킨 모라비아 교도들을 만난다. 이들은 체코 프라하에서 종교개혁 운동을 하다가 1415년에 화형당한 얀 후스의 후예들이었다. 친첸도르프는 이들에게 자신의 사유지를 제공하여 정착하도록 하는데, 이들은 그곳을 '헤른후트'라 칭하고 1727년경 200여 명의 모라비아 이주자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시작한다. 

이들에게 아주 독특한 형식의 말씀 묵상집이 전해 내려오는데, 바로 헤른후트 기도서이다. 이 기도서는 'Die Losungen(로중)'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군사적인 용어로 '암호'라고 한다. 군인이 싸우러 나갈 때 암호는 적군과 대치 상황에서 아주 생명과 같은 것이다. 만약에 암호를 잘못 외우거나 모르면 생명의 위협을 가져올 수 있다. 

이 기도서의 첫 주창자인 친첸도르프는 헤른후트 공동체원들이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짧은 말씀이지만 생명과도 같은 소중한 말씀으로 영적 투쟁에서 승리할 것을 바라면서 로중 운동을 시작하였다.

필자는 2007년과 2009년 여름, 헤른후트 공동체를 방문한 적이 있다. 첫 방문 때 우연히 이 로중을 만드는 이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들은 나에게 지난 300여 년 동안 매일을 위한 구약성서 구절을 제비뽑기하여 뽑아내는 제비 함을 보여 주었다. 그 안에는 1,800개의 번호가 적혀 있는 제비가 있었고 한쪽에는 번호와 성서 구절이 적혀 있는 문건이 있었다. 아주 인상적이었다. 300여 년 전부터 컴퓨터의 도움이 없이 이러한 작업이 진행되었다는 사실과 그 과정 속에서 성서 구절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경이로움을 자아냈다. 그들은 말하기를, 1년을 위해 뽑힌 제비는 다음 3년 동안 옆으로 놓이고 이 기간에는 이미 뽑힌 구절은 제외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이 뽑힌 말씀을 주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필자가 헤른후트 기도서를 접한 것은 십여 년 전 독일에 공부하러 갔던 유학 초년기였다. 독일에서는 서점에 다른 큐티 자료는 별로 없지만 이 기도서는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다. 처음으로 필자가 이 로중을 접한 것은 독일어를 배우는 기간 중 독일 기독학생회에 참여하여 모임에 정기적으로 나가게 되면서였다. 매주 월요일 저녁 시간에 마인츠 구시가지에 있는 모임 장소에서 모였는데, 그 모임에 참여하는 이들은 독일 학생들도 있었지만 외국 학생들이 많았다. 전 세계에서 몰려온 친구들과 어울려 독일어로 인사를 나누고 교제하는 것은 이국땅에서의 외로움과 불안감을 떨치게 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매번 모여서 말씀 묵상과 찬양을 하면서 접한 헤른후트 로중과의 만남이었다. 아주 짧은 말씀이지만 그 말씀을 읽고 돌아가면서 떠듬떠듬 자신의 가슴에 부딪힌 것을 독일어로 나누는 시간은 그 어떠한 설교보다도 더 강력한 메시지로 나를 휘감았다. 그때부터 가까이하게 된 로중은 이국땅에서 힘들었던 순간에 나를 무너지게 하는 힘들에 대항하는 '아주 작은 영적 무기'였다.

▲ 특히 행동하는 신학자로 20세기 후반에 개신교의 신학과 실천에 큰 영향을 끼친 디트리히 본회퍼는 헤른후트 기도서의 애독자였다.

이 로중은 슐라이에르마허, 본회퍼, 코트비츠, 비헤른 등 수많은 개신교인들에게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특히 행동하는 신학자로 20세기 후반에 개신교의 신학과 실천에 큰 영향을 끼친 디트리히 본회퍼는 헤른후트 기도서의 애독자였다. 본회퍼는 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했다가 발각돼 2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고 전쟁이 끝나기 직전 교수형에 숨진 인물이다. 그는 1933년 히틀러가 국가 사회주의를 주창하며 유대인 600만여 명을 학살하고 수천만 명의 희생자를 낸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쟁광인 히틀러에게 항거한 것이다. 그는 히틀러를 '적그리스도'로 보고 이에 저항하는 '고백교회' 운동을 하면서 신앙을 지켜 나갔다.

1939년 7월 미국 유니언 신학교 초빙교수로 있던 본회퍼는 당시 그의 심경을 그의 책 '공동의 삶(Gemeinsames Leben)'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헤른후트 기도서는 단순한 성경 말씀 구절에 그치지 않는다. 매일 주어지는 말씀은 우리에게 앞으로 나갈 길을 결정할 수 있게 한다." 본회퍼는 1939년 여름, 미국에서 기록한 일기문에 아주 분명한 필치로 자신이 미국에 계속 머물 것인지 아니면 독일로 돌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로중 말씀을 읽으며 고민하는 흔적이 나온다. 그러한 고심을 하는 가운데 로중의 한 말씀이 그를 강타한다. "주님은 은을 정련하고 깨끗하게 하신다." 말라기서의 이 한 말씀을 읽고 덧붙여 옆에 기록한다. "나는 나를 더 이상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주님은 나를 잘 알고 있다. 결국 모든 행동과 실천은 분명하게 될 것이다." 이 말씀과의 부딪침 이후, 본회퍼는 지체하지 않고 독일로 돌아온다. 그리고 저항 운동에 가담한 본회퍼는 1943년 4월 5일 체포되고, 1944년 전쟁이 끝나기 바로 직전에 교수형으로 처형된다.

본회퍼에게 헤른후트 기도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필자도 그동안 이 작은 기도서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이 기도서의 매일의 말씀은 하루 동안 얼마 안 되는 말씀이지만 하루의 영의 양식으로 결코 부족하지 않다. 지난 300여 년 전부터 개신교 전통에서 가장 널리 활용되는 이 기도서가 51개 국어로 번역되어 지구상의 많은 이들이 동일한 말씀으로 힘을 얻고 있다. 필자는 헤른후트 기도서 2009년도 판부터 <말씀 그리고 하루>(한국디아코니아연구소)라는 제목으로 번역해 한국에 소개하고 있다. 필자는 이 작은 묵상 집을 통해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좀 더 깊이 있는 말씀에 닻을 내리고 살아가기를 소망해 본다. 더 나아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행동하는 말씀'인 디아코니아를 조용히, 섬기면서, 사랑하면서 실천해 나가기를 희망해 본다.

"주님은 올바른 길을 보여 주시고자 당신 앞에 계십니다.

주님은 악한 사람들의 흉계로부터 지켜 주시려고 당신 등 뒤에 계십니다.

주님은 아래로 추락할 때에 궁지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당신 밑에서 잡아 주십니다.

주님은 축복해 주시기 위해 당신 위에 계십니다(초대교회의 축복문)." 

이 기도문은 2010년 헤른후트 기도서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축복문이다. 어느덧 한 해가 기울고 있다. 이 한 해도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문처럼 주님의 은총 가운데서 늘 강건한 삶을 살게 하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새로운 한 해에도 변함없는 주님의 은총이 늘 함께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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