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2.11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아이테오 간구기도. 헤른후트 기도서
첨부파일 :

>>아이테오, 간구의 기도((자녀의 지고지선의 유익을 위해 이미 오래전에 구하는 자에게 무조건적으로 아버지께서 주시기로 예정된 바로 그것을 구함))

'아이테오'는 히브리어로서 "강요하다, 간청하다, 떼를 쓰다" 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하셨다.

갈급한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철없는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떼를 쓰듯, 염치불구하고 떼를 쓰듯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셨다.

히브리어와 영어는 한글 성경보다 더 풍부한 해석이 있기에 궁금하여, 주석성경도 찾아보고 인터넷을 검색해 보기도 하였다.

  또 한 가지 해석을 보니, 이 단어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알아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반드시 주시겠다고 약속하는 '그것'을 주시는 것이라고 되어있다.  여기에서 그것이란 '나의 원함이 아닌 하나님의 원함'이라는 것에 촛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성도가 유일하게 반드시 구해야 할 기도, 진리의 말씀을 구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하나님의 원하시는 기도가 아닌 내가 구하는 기도가 대부분이다.

그러한 기도도  '구한다'는 의미에서는 똑같이 통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좀 더 엄밀히 나누어 본다면 나의 원함, 나의 필요를 구하는 기도는 ((어찌 보면)) 같은 구함의 기도라 하더라도 '에로타오'로 구분된다.

똑같은 묻다, 원하다, 간청하다, 탄원하다, 기도하다의 의미인데 왜 히브리어에서는 이렇게 구분하여 사용하였을까.

'에로타오'는 구함의 대상이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아닌 이 땅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기도로 구분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한 구함이고 기도이기 때문에 같은 '구함' 이라도 그 의미는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탄원하고 떼를 쓰고 간청하는 기도를 한다 할지라도 이 땅의 필요만을 위한 에로타오의 기도는 ((때때로 이타적, 영적 관점에서 실행될 여지가 있다 해도...대개는 기도자 개인의 육적 관점에서 보기에 최선을 구하게 되므로)) 자기의 원함만을 위한, 자기의 필요충족만을 위한 (이기적인) 기도가 될 수 밖에 없고 그것은 세상의 것만을 추구하는 악한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달은 성도라면 이제는 기도의 차원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그 백성들에게 반드시 주시겠다고 하신 '아이테오'의 기도를 [먼저]해야 할 것이다. 주님이 약속한 성령 그것에는 모든 불의와 악과 불법을 이길 힘과 능력이 들어있다.  아이테오를 가장한 에로타오가 아니라 과감히 에로타오를 버리고 아이테오의 기도를 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말하여 이르기를..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말라...이는 다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라...공중에 나는새를 보라..들의 백합화를 보라...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구하라 주실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려지리니..구하는 자에게 (가장)좋은 것(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나의 육신과 이 세상의 것들을 구하며 마치 주님의 것을 구하는 것인양 기도 해 온 이중성과 가증함에 대하여 회개하는 시간이었다.

이 땅의 저차원을 구하는 기도가 아닌 하늘의 신령한 것을 구하는 '아이테오'의 기도를 고별설교를 하시면서 유언처럼 마지막 말씀으로 남기신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게 되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우리는 얼마나 정욕적인 기도에 물들어 있었는지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땅의 것을 구할 때 마다, 땅의 기도로 넘칠 때마다 "그것 말고, 그 것 말고, 딸아  내가 네게 주겠다고 약속한 하늘의 것을 구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음성이 들리는 듯 하다.


>>예수님의 신성(神聖)에 관하여 (7) - 하나님께 빌었던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엘파소한인침례교회 이상환 목사


문제 제기: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을 잘 보면 예수님의 신성에 의문을 던지게 하는 문장들이 보입니다.  9절의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이라는 문장과 15절의 "내가 비옵는 것은..." 이라는 문장, 그리고 20절의 "내가 비옵는 것은..."이라는 문장에 들어있는 "빌다"는 단어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빌다"는 의미는 '손 아랫 사람이 손 윗 사람에게 구하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단어가 성부 하나님께 구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에 사용되었다는 것은 그 분의 신성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하는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구절을 놓칠리 없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이슬람 교도들, 여호와의 증인과 몰몬교도들은 "예수는 하나님보다는 낮은 영적 존재다," "예수는 인간일 뿐이다"는 주장을 이 구절들을 기반삼아 논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증을 접한 기독교인들은 '그러게 말이야...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면 왜 성부께 비셨지?  그분께서 하나님이시라면 성부 하나님께 비실 수 없잖아?  에이...  그냥 믿자.'는 식으로 넘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뒤로 물러나기 전에 먼저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 여러 번 사용된 "빌다"는 단어의 의미를 조명해 보는 것입니다.  만약 이 단어가 우리가 사용하는 "빌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스트레이트 펀치를 한 대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스트레이트 펀치를 한 대 날리는 것이지요.  지금부터 저는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빌다"는 단어를 언어학적으로 조명하며 문제를 풀도록 하겠습니다.

"빌다"는 뜻: "빌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아이테오(αἰτέω)와 에로타오(ἐρωτάω)입니다.  

우리 말 성경은 이 두 단어를 "빌다"로 번역했지만, 두 단어 사이에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여집합이 존재합니다.  아이테오는 우리가 생각하는 "빌다"의 개념으로 '손 아랫 사람이 손 윗사람에게 구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피조물이 창조자에게 구하다,' '종이 주인에게 구하다,' '없는 자가 있는 자에게 구하다,' '힘이 없는 자가 힘이 있는 자에게 빌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여기에서는  아버지가 믿는 모든  자들의  지고지선의  진복을  위해  미리 준비하신  것  곧  진리의  성령과 더불어 주실 말씀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에로타오는 이러한 뉘앙스로 쓰이지 않습니다.  그대신 '동등한 자격을 지닌 사람이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요구하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이 단어는 '한 왕이 다른 왕에게 요구하다,' '이 집 주인이 저 집 주인에게 요구하다,' '한 랍비가 다른 랍비에게 요구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에로타오에는 "빌다"의 개념이 전혀 없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단어의 개념을 유념한 후 요한복음 17장으로 가봅시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단어:  요 17:9, 15, 20에는 예수님께서 성부께 비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빌다"로 번역된 헬라어가 아이타오일까요 에로타오일까요?  전부 다 에로타오입니다.  손 아랫 사람이 손 윗사람에게 구걸하는 아이테오가 아니라, 동등하고 대등한 위치에서 요구하는 에로타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고 대등한 위치에서 요구하신 것입니다.  왜죠?  성부께서 하나님이신 것 처럼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총제적 증언:  놀랍게도 성경은 이러한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에로타오와 아이타오의 차이를 구별하여 사용했습니다.  몇 개의 중요한 구절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요 16:26의 일부분입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요구하겠다..."

이 구절 속에는 "구하다"는 단어가 두 번 등장합니다.  한 번은 인간이 하나님께 구하는 모습을 나타낼 때 쓰였고, 또 한 번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구하시는 모습을 나타낼 때 쓰였습니다.  같은 단어가 두 개의 다른 상황에 쓰인 것이지요.  그러나 헬라어 성경을 보면 두 단어가 다른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번 볼까요?

"ἐν ἐκείνῃ τῇ ἡμέρᾳ ἐν τῷ ὀνόματί μου αἰτήσεσθε, καὶ οὐ λέγω ὑμῖν ὅτι ἐγὼ ἐρωτήσω τὸν πατέρα περὶ ὑμῶν·"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빌 것이요(아이테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게 요구하겠다(에로타오)..."

인간이 하나님께 구하는 모습은 아이테오로 쓰였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는 모습은 에로타오로 쓰였습니다.  피조물인 인간들은 창조자와 동등하고 대등한 위치에 있지 않은지라 아이테오로 빈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창조자와 동등하고 대등하신 하나님이신지라 에로타오로 요구하신 것입니다. 요 14:16도 마찬가지입니다.

"κἀγὼ ἐρωτήσω τὸν πατέρα καὶ ἄλλον παράκλητον δώσει ὑμῖν, ἵνα μεθʼ ὑμῶν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ᾖ"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에로타오)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이 구절에 있는 "구하다"도 에로타오에서 번역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고 대등한 위치에 계신지라 당당히 요구하신 것입니다.

특히 9절의 문장구조를 보면 이러한 사실이 더욱더 확연히 들어납니다.  9절은 헬라어의 에고(ἐγὼ)라는 단어로 시작됩니다.  이는 1인칭 주격 대명사로써 "내가"라는 뜻입니다.  헬라어에는 주격 대명사를 쓸 일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사에 인칭 대명사가 녹아 들어가 있기 때문이지요.  쉽게 말하자면 동사로만 동사의 주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격 대명사가 쓰이는 경우는 주어를 강조할 때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한 후 9절을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일인칭 동사인 에로타오앞에 일인칭 주격 대명사 에고를 붙이셨습니다.  왜죠?  그럼으로써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 내가 당신과 동일한 위치에서 요구합니다'라는 사실을 계시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명약관화 (明若觀火): 이처럼 성경은 아이테오와 에로타오를 명확하게 구별하여 예수님과 인간의 차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요한복음 17장에 "빌다"로 잘못 번역된 구절을 갖고 예수님의 신성을 강등하거나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대등하고 동등한 위치가 아니기 때문에 에로타오적으로 요구할 수 없고, 오직 아이테오적으로만 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께 구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에로타오로 묘사하지 않고, 아이테오로만 묘사한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고 대등한 위치에 계신 하나님이신지라 그 분께서 성부 하나님께 구하는 모습은 단 한 번도 아이테오로 묘사하지 않고, 에로타오로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발견했던 웨렌 위어스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예수님께서 9, 15, 20절에서 '기도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쓰신 단어 '비옵나니'는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쓰인 '기도하다'라는 단어와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께서 쓰신 단어는 '동등한 상태로부터의 요구'라는 뜻이다. 여러분과 나는 하나님께 이 단어를 쓸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단어를 수 없이 사용하셨다.  왜인지 아는가?  그분은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결론: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께 

손 아랫 사람이 손 윗사람에게 구하는 것 처럼 빌지 않으셨습니다.

힘 없는 자가 힘 있는 자에게 구하는 것 처럼 빌지도 않으셨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자에게 구하는 것 처럼 빌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대신 ((오직 한량없이 친밀한 사랑의 교통안에서))같은 하나님으로써 대등하고 동등하게 요구하셨습니다.  그분은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

>>2010.12.18 헤른후트((=하나님의 품, 그분 임재의 오두막집, 피난처, 망대...L'abri)) 기도서, 본회퍼 그리고 나......홍주민 

왕상9: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기도와 네가 내 앞에서 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

헤른후트(Herrnhut), 우리말로 '주님이 보호하시는 곳'을 의미한다. 헤른후트 공동체 운동은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독일의 북동부에 위치한 한 자그마한 마을에서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니콜라우스 루트비히 폰 친첸도르프(1700-1760)에 의해 시작된 창조적인 디아코니아 공동체 운동이다. 섬김 공동체였던 초대교회를 이루고자 했던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드레스덴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중, 그의 일생을 변화시킨 모라비아 교도들을 만난다. 이들은 체코 프라하에서 종교개혁 운동을 하다가 1415년에 화형당한 얀 후스의 후예들이었다. 친첸도르프는 이들에게 자신의 사유지를 제공하여 정착하도록 하는데, 이들은 그곳을 '헤른후트'라 칭하고 1727년경 200여 명의 모라비아 이주자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시작한다. 

이들에게 아주 독특한 형식의 말씀 묵상집이 전해 내려오는데, 바로 헤른후트 기도서이다. 이 기도서는 'Die Losungen(로중)'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군사적인 용어로 '암호'라고 한다. 군인이 싸우러 나갈 때 암호는 적군과 대치 상황에서 아주 생명과 같은 것이다. 만약에 암호를 잘못 외우거나 모르면 생명의 위협을 가져올 수 있다. 

이 기도서의 첫 주창자인 친첸도르프는 헤른후트 공동체원들이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짧은 말씀이지만 생명과도 같은 소중한 말씀으로 영적 투쟁에서 승리할 것을 바라면서 로중 운동을 시작하였다.

필자는 2007년과 2009년 여름, 헤른후트 공동체를 방문한 적이 있다. 첫 방문 때 우연히 이 로중을 만드는 이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들은 나에게 지난 300여 년 동안 매일을 위한 구약성서 구절을 제비뽑기하여 뽑아내는 제비 함을 보여 주었다. 그 안에는 1,800개의 번호가 적혀 있는 제비가 있었고 한쪽에는 번호와 성서 구절이 적혀 있는 문건이 있었다. 아주 인상적이었다. 300여 년 전부터 컴퓨터의 도움이 없이 이러한 작업이 진행되었다는 사실과 그 과정 속에서 성서 구절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경이로움을 자아냈다. 그들은 말하기를, 1년을 위해 뽑힌 제비는 다음 3년 동안 옆으로 놓이고 이 기간에는 이미 뽑힌 구절은 제외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이 뽑힌 말씀을 주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필자가 헤른후트 기도서를 접한 것은 십여 년 전 독일에 공부하러 갔던 유학 초년기였다. 독일에서는 서점에 다른 큐티 자료는 별로 없지만 이 기도서는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다. 처음으로 필자가 이 로중을 접한 것은 독일어를 배우는 기간 중 독일 기독학생회에 참여하여 모임에 정기적으로 나가게 되면서였다. 매주 월요일 저녁 시간에 마인츠 구시가지에 있는 모임 장소에서 모였는데, 그 모임에 참여하는 이들은 독일 학생들도 있었지만 외국 학생들이 많았다. 전 세계에서 몰려온 친구들과 어울려 독일어로 인사를 나누고 교제하는 것은 이국땅에서의 외로움과 불안감을 떨치게 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매번 모여서 말씀 묵상과 찬양을 하면서 접한 헤른후트 로중과의 만남이었다. 아주 짧은 말씀이지만 그 말씀을 읽고 돌아가면서 떠듬떠듬 자신의 가슴에 부딪힌 것을 독일어로 나누는 시간은 그 어떠한 설교보다도 더 강력한 메시지로 나를 휘감았다. 그때부터 가까이하게 된 로중은 이국땅에서 힘들었던 순간에 나를 무너지게 하는 힘들에 대항하는 '아주 작은 영적 무기'였다.

▲ 특히 행동하는 신학자로 20세기 후반에 개신교의 신학과 실천에 큰 영향을 끼친 디트리히 본회퍼는 헤른후트 기도서의 애독자였다.

이 로중은 슐라이에르마허, 본회퍼, 코트비츠, 비헤른 등 수많은 개신교인들에게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특히 행동하는 신학자로 20세기 후반에 개신교의 신학과 실천에 큰 영향을 끼친 디트리히 본회퍼는 헤른후트 기도서의 애독자였다. 본회퍼는 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했다가 발각돼 2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고 전쟁이 끝나기 직전 교수형에 숨진 인물이다. 그는 1933년 히틀러가 국가 사회주의를 주창하며 유대인 600만여 명을 학살하고 수천만 명의 희생자를 낸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쟁광인 히틀러에게 항거한 것이다. 그는 히틀러를 '적그리스도'로 보고 이에 저항하는 '고백교회' 운동을 하면서 신앙을 지켜 나갔다.

1939년 7월 미국 유니언 신학교 초빙교수로 있던 본회퍼는 당시 그의 심경을 그의 책 '공동의 삶(Gemeinsames Leben)'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헤른후트 기도서는 단순한 성경 말씀 구절에 그치지 않는다. 매일 주어지는 말씀은 우리에게 앞으로 나갈 길을 결정할 수 있게 한다." 본회퍼는 1939년 여름, 미국에서 기록한 일기문에 아주 분명한 필치로 자신이 미국에 계속 머물 것인지 아니면 독일로 돌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로중 말씀을 읽으며 고민하는 흔적이 나온다. 그러한 고심을 하는 가운데 로중의 한 말씀이 그를 강타한다. "주님은 은을 정련하고 깨끗하게 하신다." 말라기서의 이 한 말씀을 읽고 덧붙여 옆에 기록한다. "나는 나를 더 이상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주님은 나를 잘 알고 있다. 결국 모든 행동과 실천은 분명하게 될 것이다." 이 말씀과의 부딪침 이후, 본회퍼는 지체하지 않고 독일로 돌아온다. 그리고 저항 운동에 가담한 본회퍼는 1943년 4월 5일 체포되고, 1944년 전쟁이 끝나기 바로 직전에 교수형으로 처형된다.

본회퍼에게 헤른후트 기도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필자도 그동안 이 작은 기도서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이 기도서의 매일의 말씀은 하루 동안 얼마 안 되는 말씀이지만 하루의 영의 양식으로 결코 부족하지 않다. 지난 300여 년 전부터 개신교 전통에서 가장 널리 활용되는 이 기도서가 51개 국어로 번역되어 지구상의 많은 이들이 동일한 말씀으로 힘을 얻고 있다. 필자는 헤른후트 기도서 2009년도 판부터 <말씀 그리고 하루>(한국디아코니아연구소)라는 제목으로 번역해 한국에 소개하고 있다. 필자는 이 작은 묵상 집을 통해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좀 더 깊이 있는 말씀에 닻을 내리고 살아가기를 소망해 본다. 더 나아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행동하는 말씀'인 디아코니아를 조용히, 섬기면서, 사랑하면서 실천해 나가기를 희망해 본다.

"주님은 올바른 길을 보여 주시고자 당신 앞에 계십니다.

주님은 악한 사람들의 흉계로부터 지켜 주시려고 당신 등 뒤에 계십니다.

주님은 아래로 추락할 때에 궁지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당신 밑에서 잡아 주십니다.

주님은 축복해 주시기 위해 당신 위에 계십니다(초대교회의 축복문)." 

이 기도문은 2010년 헤른후트 기도서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축복문이다. 어느덧 한 해가 기울고 있다. 이 한 해도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문처럼 주님의 은총 가운데서 늘 강건한 삶을 살게 하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새로운 한 해에도 변함없는 주님의 은총이 늘 함께하기를 소망해 본다.

=================

=====[[요14]]====

13.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아이테오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아이테오)) 내가 행하리라

15.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에로타오))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aijtevw(154, 아이테오) 구하다, 요구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아이테오(Homer 이래)는 원래 '어떤 것을 원하다, 자신의 몫으로 어떤 것을 요구하다'를 의미하며, 이로부터 '구하다, 요구하다' 등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아이테오는 70인역본에서 주로 히브리어 샤알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약 90회 중 57회). 샤알은 '구하다, 요구하다, 바라다, 요청하다'를 의미한다(신 10:12; 삿 5:25; 삼상 12:13 등).

이 단어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과 함께 사용되었는데, 기도라는 개념에 거의 가까우며 종종 기도의 응답에 대해 감사하는 것과 관련되어 사용된다(삼상 1:20; 시 105[104]:40; 21[20]:4 등).

히브리어 샤알은 '묻다'(창 24:57), 법적인 용어로 쓰일 때 '심문하다'(신 13:15), '~의 의견을 듣다, 조언을 구하다'(삿 18:5)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 요구가 매우 특수한 것일 경우에만 아이테오로 번역되었다(출 3:22; 수 14:12; 삿 5:25; 삼상 12:17). 예를 들면, 한나는 그녀 자신을 위하여 여호와께 아들을 얻게 해달라고 구하였고 엘리는 그녀에게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삼상 1:17)을 약속하였다. 이와 유사한 예로서 시편에서는, 이 동사가 기도의 응답에 대한 약속을 표현할 때마다 특수한 요청의 뒷 배경에 대하여 쓰인 것을 알 수 있다(시 2:8; 21:4; 27:4; 40:6; 78:18; 105:40; 참조: 사 7:11이하; 58:2; 잠 30:7).(H. Schonweiss)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아이테오는 신약성경에서 70회 사용되었으며, 복음서(마 14회, 막 9회, 눅 11회, 요 11회)와 사도행전(10회)에는 자주 나타나지만 서신들에는 드물게 나타나며, 목회서신, 히브리서, 요한계시록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아이테오는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요구하다'(demand), '요청하다'(request), '구하다'(ask)를 의미한다.

(a)  아이테오는 '요구하다'를 의미한다.

① 아이테오의 대상이 아래 사람일 때, 그 의미는 '요구하다'(눅 1:63; 행 16:29)를 의미하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빌려준 물건이나 위탁해 준 것들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때, 혹은 그것에 대해 보고해 달라고 요구할 때에도 이와 같은 의미를 띤다(눅 12:48). 여기에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요구에 대해 말한다.

②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메시야 되시는 증거로서 표적을 요구하였다. 이 의미는 고전 1:22에서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의 요구 배후에 놓여있는 의미를 밝혀준다. 사람이 이런 태도를 취할 때 그는 사실상 자신을 하나님 위에 올려놓고 하나님에게 책임을 묻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그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셨던 것에 관련하여 하나님 자신이 옳음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③ 벧전 3:15에서 베드로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우리의 신앙에 대한 설명을 요구할 것이라고 말한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이라는 구절은 그 보고의 진실 및 신빙성에 대한 증거를 요구하거나 혹은 단순히 정보를 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 신약성경에서 '요구들'은 종종 종교적으로 적용되었다.

(b)  아이테오는 '요청(간청)하다'를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 아이테오는 세속적 의미와 종교적 의미에서 모두 이 용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능동태와 중간태 사이의 구별도 거의 없다.

① 세속적 용법으로는 거래, 계약(마 14:7; 막 6:24-막 6:25) 혹은 공적인 요구(마 27:20; 막 15:43; 눅 23:23; 행 9:2)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가 사람의 지위에 대해서는 거의 항상 윗사람에게 구하는 경우에 사용되었다.

아이테오는 오직 이 구절에서 '불쾌하다'라는 어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혹은 적어도 '다른 사람이 불유쾌하게 느낄 정도로 요구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힐(D. Hill)은 마 5:42에 나오는 두 개의 절이 병행절이며 또한 여기에서의 아이테오가 '꾸어달라고 요구하다'라는 뜻이라고 주장한다(참조: 출 22:25).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요청들까지도 제자들이 응답해야만 한다고 강조하신다(참조: 마 7:7; 마 7:8). 이 구절이 지니고 있는 윤리적인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주목해야 한다. 즉, 나는 내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을 극복하고 요청하고 있는 사람에게 마음과 손을 열어 펼친다. 왜냐하면 그 요청은 실로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그를 향해 열며 복종하라고 나를 부르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② 종교적인 용법에서, 즉 하나님에게 요청하는 것을 표현한 그 구절들에서 이 동사의 능동태형과 중간태형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이러한 차이는 때때로 약 4:2 이하를 근거로 하여 시도되었다. 능동태는 입술로 기도하는 것을 뜻하고 중간태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았다(Mayor, Exp., 525). 그러나 신약성경의 나머지 구절들에서 그런 차이는 나타나지 않는다(참조: 특별히, 요일 5:15; 요 16:24; 요 16:26; 마 21:22; 요 11:22).

③ 기도에는 확신이 요구된다.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표현한 구절들에서 하나님께서 그 구하는 것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마 6:8; 마 7:7; 마 7:11; 마 18:19; 마 21:22; 요 14:13 이하; 요 15:7; 요 15:16; 요 16:23 이하; 요 16:26; 요일 3:22; 요일 5:14 이하; 약 1:5). 이러한 확신은 모든 기도를 계속 살아있게 하는 것이며 이런 확신이 의심으로 인해 약해지거나 없어지게 되면 기도는 죽게 된다.

마 7:8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구하는 것을 들시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기본 원칙이라고 말씀하셨다: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이 원칙은 여기에서 그 명령의 기초이며 이에 따른 약속, 즉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의 토대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토대는 마 6:8; 요 15:16; 요 16:23; 요 16:26 이하; 골 1:9-골 1:12 및 특별히 마 7:9-마 7:11과 같은 구절들에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더 욱 하나님 자신의 아들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이시며, 따라서 자식들의 요청이 헛되게 됨을 허락치 않으시는 아버지이시므로 오직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그들에게 주신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구하는 자가 그의 요구가 응답 받는다는 것을 확신하는 이유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선함과 사랑에 대한 확신이 그 자신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듣고 보시고 동정으로 가득찬 마음을 갖고 계시는 살아있는 하나님이시라는 확신이다.

④ 간구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해야 한다. 요일 5:14-요일 5:16에서 기도와 하나님의 뜻 간의 관계를 밝히면서, 기도에 있어서 담대함과 그 효험을 얻는 방법을 제시한다(요일 3:21-요일 3:22).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그로부터 옳고 좋은 것을 구한다는 뜻이다(마 7:11). 누가는 이를 특별히 성령을 구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눅 11:13).

요 15:7에서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는 구절은 곧 우리의 존재가 예수님 그리고 그의 말씀에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어 우리의 요구가 분명히 그의 뜻에 일치함에서 생기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요일 3:22은 한층 더 윤리적인 면으로 진전되고 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이것은 우리의 요구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태도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기도 중에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함축적인 의미를 간략하게 요약하여 제시한다.

마 18:19 역시 하나님의 뜻과 관계 될 수 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제자들이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는 모든 이기적인 욕망을 버린 것임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기적인 기도는 그릇된 것이며, 하나님에게서 아무 것도 받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약 4:3; 막 10:35).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려져야 한다(요 14:13; 요 15:16; 요 16:23 이하).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께 접근을 허락 받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는 것은 마치 예수님 자신이 기도하였던 것처럼 기도하는 것이며, 성자가 우리에게 성부를 알려주셨던 대로 성부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 있어서 기도의 초점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의 기본 특징이 여기에 있으니, 기도는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을 위해 확보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는 기도이다(J.G.S.S. Thomson).

기도는 믿음으로 드려야 한다(마 21:22; 약 1:5 이하).

⑤ 예수님 자신의 요청이나 기도에 대해서는 아이테오가 아니라 에로타오(2065)나 데오마이(1209)가 사용되었음이 명백하다(참조: 요 14:16; 요 16:23-요 16:26; 눅 22:32). 그 이유는 아마도 아이테오가 자기 자신을 위한 요구, 혹은 구한다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거나 에로타오보다 덜 친근하기 때문인 것 같다.

(참조: G. Stahlin; TDNT; H. Schonweiss, DNTT). 

==========================

ejrwtavw(2065, 에로타오) 묻다 ask, 요청하다 request.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에로타오는 호머(Homer) 이래로 나타나며,

(a)  '묻다' ask, '문의하다' enquire, '정보를 구하다' seek information.

(b)  '요청하다' request, '요구하다' demand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에로타오는 70인역본에서 약 70회 나오며, 거의 샤알(7592: 묻다, 문의하다, 요구하다, 간청하다, 기도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주로 '묻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요청이나 간구하다'는 의미도 나타낸다(창 24:47, 57; 출 3:13; 수 4:6; 삿 4:20; 삼하 5:19; 대상 14:10; 느 1:2; 욥 12:7; 욥 42:4; 렘 6:16 등).

3. 신약성경의 용법. 

에로타오는 신약성경에서 63회 나오며, 사복음서에서 51회, 사도행전에 6회, 바울 서신에 4회, 요한 서신에 2회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고전 헬라어 용법에서처럼 사용되었다.

(a)  에로타오는 첫째로 '묻다 to ask', '질문하다 enquire', '정보를 구하다 to seek information'를 의미한다.

① 눅 22:68,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할 것이니라".

②마 19:17에서 예수님께서 젊은 부자 관원에게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고 말씀하신다.

③ 예수님 자신이 그의 제자들에게 이용할 수 있는 떡의 개수(막 8:5)와 그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마 16:13)에 대해 물으신다.

·막 8:5,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마 16: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하느냐".

④ 예수님은 그의 엑수시아(ejxousiva, 1849: 행할 힘, 권세)에 대해 그의 적대자들이 교활하게 질문했을 때, 그들에게 세례(침례) 요한의 엑수시아(ejxousiva, 1849)에 대해 역으로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라고 대답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마 21:24; 병행구 눅 20:3). 마치 그들이 예수님 자신의 말씀에 의해 납득될 준비가 되어 있고 그를 파괴시킬 길과 방법을 찾고 있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설명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가 역으로 하신 질문은 그들에게 애매한 대답을 피할 수 없도록 하여 그의 주장이 세례(침례) 요한의 그것이 했던 것보다도 더 그들이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한다.

⑤ 막 4:10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의 비유들의 의미를 묻는다: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 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

⑥ 행 1:6에서 제자들은 또한 그에게 언제 하나님의 왕국이 세워질 것인지 묻는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⑦ 눅 9:45에서 예수님의 고난에 관한 언급에 대해 [묻기도] 두려워 했다: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또 저희는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그러나 이 모든 절수들에서 에페로타오(ejperwtavw, 1905)도 마찬가지로 사용될 수 있다. 같은 뜻의 병행절들과 본문의 변형들은 그 단순형과 복합형이 마찬가지로 많이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한복음에 중요한 신학적 용법이 나오는데 그 용법의 거의 반이 요한복음에 나온다. 예수님의 떠나심에 대한는 문제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간의 관계에 있어서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다.

요 16:23에 의하면 미래의 구원의 일부는 제자들이 그에게 어떤 것도 더 물을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지식과 지각이 매우 특히 중심을 이루는 신학에서 질문은 단지 불완전을 함축할 수  있다. 이것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가장 깊은 수준에서의 그리스도와의 근본적인 친교에 의해서이다.

따라서 요 16:30은 마음을 아시는 자이시며, 그래서 그 마음을 말하기 전에라도 그의 백성의 질문을 아시는 예수님을 찬양하기 위해 말한 것이다(참조: 요 2:25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더 이상 질문할 필요가 없는 깊어진 그들의 주님과의 지식과 이해의 친교 속에서 제자들에게 새로이 주어지는 주님의 수난의 길의 의미에 대한 통찰력을 설명한 것이다.

여기에 요한복음에 종종 나오는 바와 같이(요 16:23) 미래의 바로 가까이에 서있는 현재의 구원의 또 하나의 단계가 있다. 묻는 것은 물론 아들과 아버지와의 완전한 친교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의 필요성이 강조된다(요 16:5). 그러나 그것은 그것 자체 너머에 있는 목적지로 인도해야 한다.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에로타오가 떠나심의 설교 외에는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요 9:2은 예외이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빈번하게 유대인 적대자들의 탐사하고 의심하는 논쟁적인 질문들에 대해 사용된다.

성구 참조

① 요 16: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완전하고도 온전한 하나님의 지식안에 있게 됨으로써)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② 요 16: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③ 요 16: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b)  어떤 종류의 요청에 대하여 '간청하다' to request, '요구하다' to demand를 의미한다.

행 1:6의 유일한 예외를 제외하면 복음서 밖에서는 이것이 이 단어의 주된 의미이다.

①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요청(마 15:23; 눅 4:38)과 빌라도에 대한 유대인들의 요청(요 19:31)을 다 나타낸다.

② 누가복음에서는 특히 식사 초대에 대해 사용된다(눅 7:36; 눅 11:37; 행 10:48; 행 18:20).

③ 많은 점에서 비슷한 데오마이(devomai, 1189)처럼 에로토 세는 "제발 청컨대" please(눅 14:18 이하)의 약화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종종 주장이나 열정(프로슈코마이, proseuvcomai, 4336)을 암시하는 아이테오(aijtevw, 154;Ⅰ, 191 이하)와 달리 에로타오는 겸손한 또는 예의 바른 참된 간청을 나타낸다.

④ 요한은 이 용어를 특히 하나님께 하는 '기도하다' to pray라는 의미를 지닌 청구에 대해 사용한다. 그러나 이 점에서 우리는 뉘앙스의 차이에 주의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요일 5:16의 단 하나의 예외를 제외하면, 거의 오로지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서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 홀로 아버지와 그러한 내적인 친교를 가지므로, 그 단어는 그에 대한 제자들의 간청(예를 들면, 요 4:31)과 그 분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청원이나 중보기도 모두에 대해 사용될 수 있다(요 16:23 상반절과 요 16:30에도 불구하고 요 16:26에도 역시). 

(참조: H. Green; G. T. D. Angel). 


이전글 : 은혜.복음의 의. 방주
다음글 : 바이어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