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2.26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시25..gl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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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5편 [개역개정]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1.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나사...마음의 눈, 머리를 들다...머리를 들어올리다'. 선한 양심, 확신, 호의, 혹은 용납의 표시로서 '얼굴을 들다'(삼하 2:22).)

2.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바타흐...의지, 의뢰하다)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3.주를 바라는(카와...앙망하다, 기대하다, 기다리다, 바라다, 소망하다)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4.여호와여 주의 도(데레크.. 길, 행위-행동방식, 태도)를 내게 보이시고(야다....알리다, 알아차리다, 분별하다, 경험하여 알다...경험지식은 참된 생명지식 : 디아트) 주의 길(오라흐...행로)을 내게 가르치소서(라마드...가르쳐 바르게 하고 능숙하게 훈련시키다)

5.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다라크..인도) 교훈하소서(라마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카와)

6.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라함)과 인자하심(헤세드)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7.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투브..토브[선대하다]의 명사형) 하옵소서

8.여호와는 선하시고(토브) 정직하시니(야사르.. 올곧고 정직한)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9.온유한 자(아나우...하나님과 동행함에 있어서 참된관계, 곧 모세처럼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의뢰하고 사랑하며 Good&Big God으로 높여드리며 동행함의  참되고 마땅한 겸손을 배우게 하는]고난의 의미를 깨달아 알고 순복하는 유순한 자)를 정의로(미슈파트)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10.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헤세드)와 진리(에메트)로다 

11.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

12.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13.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14.여호와의 친밀하심(소드...  은밀한 조언과 비밀)이 그를 경외하는(야레...하나님말씀따라 그분의 영광에 티끌만치 손상없이, 합당하도록 삼가 존숭하며, 전존재 기울여 사랑하며 섬김)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베리트)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야다...이세상에 보냄받은 사명자로서 지성소의 그 누림은 진리 말씀인 매일양식-주의 영광과 그 성품으로 변화ㅡ 빼어닮음-부활생명과 사랑안에 몰입. 무한충만..나아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며 어린양의 인도따라 어디로든지 가는 친밀한 동행...예배, 섬김, 전도, 양육, 중보의 사명자)

15.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16.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17.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18.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19.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

20.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21.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22.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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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5장 (개요)

이 시편은 하나님을 열렬하게 사모하는 마음과 그의 은총과 은혜로 향하는 거룩한 열망의 분출, 그리고 그의 약속에 대한 살아 있는 믿음의 행위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그 속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배울 수 있다.

1. 기도란 무엇인가?(1, 15).

2.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은, 죄의 용서(6-7, 18), 의무의 길에 대한 지시(4-5), 하나님의 은총(16), 고통으로부터의 구원(17-18), 대적으로부터의 보호(20-21), 하나님 교회의 구원(22)을 위한 것이다.

3. 우리가 기도로 탄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확신(2-3, 5, 20-21)과, 우리의 환난과 대적들의 악의(17, 19), 우리의 신실함에(21) 관한 것이다.

4. 우리가 기도 속에서 우리 자신을 격려해야 하는 귀중한 약속은 인도와 교훈(8-9, 12), 언약의 혜택(10), 하나님과의 교제로 인한 즐거움(13-14)에 대한 것이다.

이 시편을 노래함으로써 우리는 그 여러 구절들을 우리 자신에게 쉽게 적용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주 고통당하고 항상 죄를 지으며, 그것을 은혜의 보좌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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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대한 확신(시 25:1-7)

여기에서 우리는 다윗의 하나님께로 향한 열망과 의지에 대한 고백을 읽을 수 있다. 그는 흔히 그의 시편들을 이런 고백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자신을 이런 고백이 이루어지도록 스스로 몰두하기 위한 것이었다.

Ⅰ. 그는 하나님께로 향한 그의 열망을 고백하고 있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1절). 앞의 시편에서,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는”(4절) 것을 선한 사람의 성품으로 보았다. 그리고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도록” 문들은 머리를 들도록 요청되었다(7절). 이런 성품, 이런 요청에 대해 다윗은 여기에서 “주여, 나의 영혼이 허탄한 것을 우러러보지 않고,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하고 대답하고 있다. 하나님을 경배함에, 우리의 영혼은 주를 우러러보아야 한다. 기도는 영혼이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의 눈은 하나님을 주목해야 하고, 우리의 영혼은 몰두되어야 한다. 너의 마음을 위로 듦으로써(sursum corda)라는 표현은 옛날에는 예배에 대한 권유로서 사용되었다. 세상과 세상 것에 대한 거룩한 경멸과 함께, 확고한 생각과 적극적인 믿음으로써 우리는 우리 앞에 하나님을 모셔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소망을 우리 행복의 근원이신 그에게 두도록 하자.

Ⅱ. 그는 그가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으며, 또한 그 의지로 인한 혜택과 위로를 간청하고 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나이다”(2절). 그의 양심은 그가 그 자신이나 어떤 피조물도 신뢰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이나 그의 능력이나 약속을 미덥지 않게 여긴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자기 믿음을 이렇게 고백함으로써 스스로 즐거워하고 있다.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그는 마음 편하고 매우 만족스러우며, 재앙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탄원하는 하나님은 자기에게 의지함으로써 자기를 영예롭게 하는 자들을 돕는 것을 영예로 여기신다. 사람들이 신뢰하고 있는 것은 그 결과가 증명하듯이 그들에게 기쁜 것이 되거나 수치스러운 것이 된다. 이제 다윗은 여기서 믿음의 지시 아래 진심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간구하고 있다.

1. 수치가 그의 몫이 되지 않기를 간구하고 있다. “주께 대한 나의 신뢰를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내가 어떤 강한 두려움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결국에 가서 주를 의지한 것을 실망하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주여, 내가 주께 맡긴 것을 지켜주옵소서.” 우리의 하나님을 지주로서 의지한다면 우리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안에서 개가를 부른다면, 우리의 대적들은 우리가 두려움으로 위축되거나 결국에 가서 소망이 약해지는 때에도 우리를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2. 수치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의 몫이 되지 않기를 간구하고 있다. 모든 성도들은 적당하고 귀중한 믿음을 얻었다. 그러므로 결국 그와 같은 성공을 거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교제는 서로를 위한 기도에 의해서라도 유지되어야 한다.

더구나 참된 성도들은 모든 성도들을 위해 간구할 것이다. 믿음의 봉사로 하나님을 섬기고 믿음의 소망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는 아무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3. 수치가 범죄자의 몫이 되기를 간구하고 있다. 무고히 또는 (단어 그대로) “헛되이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1) 그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범죄한다. 그들은 아무런 까닭 없이, 즉 하나님 안에 있는 불의나 그가 그들을 서운하게 하심을 전혀 발견하지 못하면서도 하나님과 그들의 의무에 그리고(어떤 사람들의 견해대로) 다윗과 그의 정부에 반항한다. 사람이 죄에 쉽게 유혹될수록 그것에 의한 타락은 더욱 심하다. 죄를 위해 죄를 범하는 자들이 가장 악한 범죄자들이다.

(2)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들의 행위가 무익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헛된 것을 계획하는 그들은 곧 수치를 당할 것이다.

Ⅲ.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의무의 길을 지시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4-5절). 그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가르쳐주시기를 거듭 간청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는 자였다. 그러나 아무리 총명하고 통찰력이 깊은 자라도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있고, 또 그것을 열망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항상 배워야 한다. 여기서 다음을 주목하라.

1. 그는 무엇을 배우기를 바랐는가? “훌륭한 말이나 훌륭한 이론이 아니라, 주의 도와 주의 길과 주의 진리를 내게 가르치소서. 주께서 나를 향해 걸으시는 길, 즉 모든 인자와 진리가 되는(10절) 길과 주께서 내가 당신께로 향해 걸어가기를 원하시는 길을 가르쳐주소서.” 자기의 의무를 깨닫는 자들, 그리고 그들이 “행해야 할 선한 일을” 아는 자들이(전 2:3) 가장 훌륭한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도와 그의 진리는 똑같은 것이다. 즉 거룩한 율법은 모두 거룩한 진리 위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규례의 길은 진리의 길이다(119:30). 그런데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이시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2. 이를 위해 하나님께 열망했던 것은 무엇인가?

(1)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자신의 의무에 대해 밝히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었다.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게 가르치소서.” 미심쩍은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주시기를 진심으로 간구해야 한다.

(2)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그곳으로 향하게 해주시고, 그 속에서 그를 강하게 해주시는 그것이었다. “나를 지도하시고, 그렇게 함으로써 나를 가르치소서.” 이것은 눈이 어두운 사람이 그의 길을 잘못 가지 않도록 인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프고 연약하며 힘없는 자가 그의 길을 가도록 부축해 주고 중간에서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인도하는 것과도 같다. 하나님께서 기꺼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붙들어주셔야만 천국의 길로 갈 수 있다.

3. 그가 탄원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 대한 그의 큰 기대.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목표로 택하고, 그를 구원의 하나님으로 삼는 자들은 그에게 담대히 나아가 그 목표로 이르는 길을 지시해 주시도록 청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면, 그는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하실 것이다. 구원을 주시는 교훈을 주실 것이다.

(2) 하나님께 대한 그의 꾸준한 봉사.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종이 그가 하루 종일 섬기는 주인에게서가 아니면 그 누구에게서 지시를 바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의무를 행하고자 하는 결심을 품고 그것을 알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시해 주시리라는 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Ⅳ. 그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에 호소하고 있다. 그 자신의 어떤 공로도 내세우지 않고서 오직 거기에만 매달리고 있다(6절).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을 기억하옵소서. 그리고 그 긍휼을 위해 나를 지도하시고 가르쳐주시옵소서.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부터 있었기 때문이니이다.”

1. “주는 항상 자비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긍휼을 보이시는 것이 주의 이름이며, 주의 본질과 특성입니다.”

2. “긍휼에 관한 주의 뜻과 계획도 영원부터 있었습니다. 긍휼의 그릇은 만물이 있기 전에 영광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3. “일반적으로 교회에 대해서, 그리고 특별히 나에 대해서 주님이 보여주신 긍휼의 여러 사례들은 일찍이 옛날부터 있었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를 어렸을 때부터 가르치셨사오니 지금도 가르치소서.”

Ⅴ. 그는 그의 죄가 사함받기를 특별히 갈구하고 있다(7절). “내 소시의 죄를 기억하지 마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기억하시고(6절) 나를 변호하소서. 그리고 내 죄를 기억하시어 나를 꾸짖지는 마옵소서.”

1. 여기에서 그는 암시적으로 죄를 자백하고 있다. 즉 그의 소시적의 죄를 열거하고 있다. 우리는 어렸을 때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오랜 후에라도 회개하고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세월이 죄책을 사라지게 만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이든 사람들은 사악한 쾌락을 슬퍼해야 하며, 그들이 젊었을 때의 사악한 즐거움을 가슴 아파해야 한다. 그는 그의 죄를 더욱 무겁게 느끼면서 그것을 자기의 “허물”이라고 부르고 있다. 율법을 범하는 것이 죄이므로, 율법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할수록 죄는 우리에게 더욱 엄청나게 악한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2. 긍휼을 특별히 간구하고 있다.

(1) 그가 죄책에서 방면될 수 있도록 긍휼을 간구하고 있다. “내 소시의 죄를 기억지 마소서. 내게 불리하게 그것을 기억하시거나, 그것으로 책망하시고 판단하시지 마소서.”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실 때는 그 죄를 “더이상 기억하지 아니하신다”고 일컬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곧 완전한 사면을 의미한다.

(2) 그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용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를 기억하소서. 나를 영원히 기억하시고, 나를 구하시기 위해 알맞은 때 오소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고 은총을 부어주시는 것보다 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고자 할 필요가 없다. 그의 탄원은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의 선하심으로 인하여 하옵소서” 하는 것이었다. 죄의 사함과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유익을 위해 우리가 탄원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며, 그의 인자하심이지 우리 자신의 공로는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과 보잘것없음을 깨닫는 자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풍족함에 만족하는 자로서 항상 이런 탄원에 의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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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선하심과 인자하심(시 25:8-14)

여기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다윗의 기도와 혼합되어 있다. 많은 탄원들이 이 시편의 앞부분에 있었으며, 우리는 뒷부분에서도 많은 탄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 이 시편의 중간 부분에서 그는 약속들을 묵상하고 생동하는 믿음으로써 이 위안의 젖을 먹으며 흡족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말해 주고, 기도 속에 믿음과 소망을 갖도록 우리를 격려해 주는 기도의 가장 훌륭한 초석일 뿐만 아니라, 기도에 대한 현재의 응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약속에 따라 기도하기로 하자. 그러면 그 약속은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풀이될 수 있다. 그 약속이 이행될 것이므로 우리는 그 기도가 청종되고 있다고 믿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약속 중간 부분에서 약간 돌연스럽게 끼어든 것 같고 7절 다음에 넣어야 할 것 같은 하나의 청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나의 죄악을 사하소서” 하는 말이다(11절). 죄의 사함을 구하는 기도는 결코 무례하지 않다. 우리의 모든 행동에는 죄가 섞여 있으므로 우리는 모든 예배 속에 이런 기도를 섞어야 한다. 그는 이중의 탄원으로써 이 청원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전자의 것은 매우 타당하다.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왜냐하면 주께서 주의 영광을 위해, 약속을 위해, 주님 자신을 위해 허물을 도말하심으로써 주의 이름이 은혜롭고 인자하심을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사 43:25). 그러나 후자의 것은 매우 놀랍다─“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사하소서. 죄악이 중대할수록 거룩한 긍휼은 그것을 용서하심으로 인해 더욱 찬미될 것입니다.” 큰 죄를 용서하는 것─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는 것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이다(출 34:7). “그것이 중대하므로 무한하신 긍휼이 그것의 사함을 중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파멸할 것이며, 영원히 파멸할 것입니다. 그것은 중대합니다. 나는 그것을 그렇게 봅니다.” 우리가 우리 죄의 극악함을 알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더 잘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죄를 자백할 때에 우리는 그것을 무겁게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우리는 이 구절 속에 나타난 위대하고 귀한 약속을 관찰하고, 또 다음 사항을 살펴보도록 하자.

Ⅰ. 이 약속들은 누구에게 속해 있으며, 누가 그 혜택을 기대할 수 있는가?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약속에 의한 어떤 유익을 바랄 수 있을까? 바랄 수 있다(8절). 하나님께서 그들이 비록 죄인들일지라도 그들을 교훈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또 그것을 위해 죄인들을 가르치시고,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이 약속들은 비록 죄인이었고 빗나갔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에게 확실한 약속이 된다.

1. 즉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들에게(10절). 그의 계율을 자기들의 규율로, 그리고 그의 약속을 자기들의 분깃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또 하나님을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삼았고 거기에 의지하고, 그들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었으므로 거기에 따라 살아가는 그런 자들에게 확실한 약속이다. 비록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그들이 때로 계명을 어길지라도 잘못했을 때는 언제나 진심으로 회개함으로써, 그들의 하나님이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 의해 꾸준히 신봉함으로써, 그들은 그 언약을 지키고 깨뜨리지 않는다.

2.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12절, 그리고 다시 14절). 그의 위엄을 경외하고, 경외감을 갖고 그를 섬기며, 즐거이 그의 권위에 굴복하고 그에게 순종하며, 그의 진노를 무서워하고 그를 거역하기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확실한 약속이다.

Ⅱ. 이런 약속들은 무엇에 근거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에 의해 어떤 격려를 받아야 하는가? 여기에 모든 약속들을 비준하고 확증하는 두 가지 사항들이 있다.

1. 하나님 성품의 완전함. 우리는 약속을 세우신 자의 성품으로써 그 약속들을 평가한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할 수 있으니, 이는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가 그의 말씀과 같이 훌륭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매우 온유하시므로 우리를 속이실 수 없으며, 매우 진실되시므로 그의 약속을 깨뜨리실 수 없다. “약속하신 이는 신실하시며”, 그것을 행하실 것이다. 그는 약속을 세우실 때 선하셨으므로 실행하실 때에도 의로우실 것이다.

2. 그가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모든 것이 그의 성품의 완전함과 부합됨. “여호와의 모든 길은(즉 그의 모든 약속과 섭리는) 인자와 진리로다”(10절). 그것은 그 자신과 같이 선하고 정직하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언제나 그의 목적의 인자와 그의 약속의 진리에 따라 다루신다. 그가 행하시는 모든 것은 사랑으로부터, 언약의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들은 그 속에서 그의 긍휼이 나타나고, 그의 말씀이 이루어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선한 백성들이 어떤 환난으로 단련을 받든지간에 “여호와의 모든 길은 인자와 진리”이고, 그들의 여행이 끝날 때는 사실이 그러함이 드러나리라는 것이 그들에게 말할 수 없이 풍족한 만족감을 준다.

Ⅲ. 이 약속들은 어떤 것인가?

1. 하나님께서 그들을 의무의 길로 가르치시고 지시하실 것이다. 이것이 매우 강조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나를 지도하소서”(4-5절) 하는 다윗의 기도에 대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의 상황에 알맞은 그 약속들 위에 대부분의 우리 생각을 집중시키고, 믿음을 행해야 한다.

(1) 그는 “그 도로 죄인을 교훈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인이므로 교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스스로가 죄인임을 알고 교훈받기를 원할 때,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께 화해하는 길과 양심에 참된 평화가 깃드는 길, 그리고 영생으로 이르는 길을 가르치실 것이다. 그는 그의 복음을 통해 이 도를 만인에게 알리시며, 그의 성령을 통해 회개하고 그 길을 구하는 죄인들을 인도하시고 총명을 허락하신다. 마귀는 사람의 눈을 가리고 그들을 지옥으로 이끄나, 하나님은 사람의 눈을 밝히시고 그들 앞에 있는 것들을 참된 빛 가운데 드러나게 하시어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신다.

(2) “온유한 자를 지도하신다.” 그들 스스로를 천하고 낮게 여기는 자들, 그들 스스로를 믿지 않고 교훈받기를 원하며 거룩한 인도하심에 따르기를 정직하게 결심하는 자들, 이런 온유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가르치실 것이다. “여호와여, 당신의 종들이 듣사오니 말씀하옵소서.” 이런 자들을 그는 “공의로”, 즉 기록된 말씀의 법으로 지도하실 것이다. 그는 죄와 의무에 관련되어 있는 실제적인 것으로써 그들을 지도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흠 없는 양심을 지킬 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는(어떤 사람들의 견해대로) 사려 깊게 행하실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사정에 맞게 처리하심을 뜻한다. 따라서 죄인들을 지혜와 온유와 동정을 품고 가르치실 것이며, 그들이 지탱해 나갈 수 있도록 가르치실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실 것이다. 모든 선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를 자기들의 도로 삼으며, 그것을 배우기를 원한다. 그런 자들은 그 가르침을 받고, 그 도로 인도될 것이다.

(3)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가 택할 길을 가르치시리로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거나 선한 사람들이 택할 길을 가르치실 것이다. 그것은 모두 한 가지 길로 일치된다. 왜냐하면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그를 기쁘게 하는 것들을 택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올바른 길을 택한다면 그 선택을 지시하시는 그가 우리의 걸음을 지도하시고, 그 속에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우리가 지혜롭게 택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롭게 행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실 것이다.

2. 하나님은 그들을 편하게 만드실 것이다. “저의 영혼은 편안히 거하고 선하심 속에 머무르리로다”(13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에 전념하고, 스스로를 복종시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그들 자신이 잘못을 범하지 않는 한 편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별케 된 자들, 더욱이 하나님의 평화에 의해 위로를 받는 자들은 편안히 거할 것이다. 심지어 몸이 아프고 고통 속에 누워 있을 때라도 영혼은 하나님 안에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에게로 돌아와 안식처인 그의 안에서 쉴 것이다. 많은 것들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나 은혜의 언약은 그 모든 불안을 진압시키고 우리를 편하게 한다.

3. 그는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에게 이 세상에서 유익한 것을 충족하게 주실 것이다.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우리의 영혼에 대한 관심 다음의 것은 자손에 대한 관심이며, 하나님은 정직한 자의 후손들을 위해 복을 저장해 두신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땅을 상속할 것이며, 그것에 대한 권한과 즐거움을 가질 것이고, 그들의 자손들은 죽을 때의 그들의 기도로 인해 더 잘 지낼 것이다.

4.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와의 친밀한 교제를 허락하실 것이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나이다”(14절). 그들은 그의 말씀을 깨닫는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알” 것이기 때문이다(요 17:17). 진리를 사랑해 받아들이고 그 능력을 체험하는 자들은 그 비밀을 가장 잘 깨닫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그의 섭리의 의미를 더욱 잘 알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행하시는가를 안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 그는 아브라함을 그렇게 부르셨듯이, 그들을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부르신다. 그들은 은혜로운 영혼이 아버지와 맺은, 그리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맺은 언약의 축복과 그 교제의 즐거움을 경험에 의해 안다. 그의 모든 성도들은 이런 영광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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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탄원(시 25:15-22)

약속을 묵상함으로써 격려를 얻은 다윗은 여기에서 다시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있다. 그리고 이 시편을 시작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의지와 그를 향한 열망을 고백하면서 끝맺고 있다.

Ⅰ. 그는 그가 당하고 있는 환난의 상태를 하나님 앞에 펼쳐놓고 있다. 그는 발이 그물에 단단히 걸려 있었으므로 혼자의 힘으로는 그의 곤경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15절). 그는 “외롭고 괴로웠다”(16절). 괴로움을 당하는 자는 일반적으로 외롭다. 그럴 때에 그들의 친구는 그들을 버리며, 그들은 혼자 앉아서 잠잠케 된다(애 3:28). 다윗은 그 자신이 “외롭고 고독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그의 종이나 군병들을 의지하지 않고 피조물로부터는 어떤 도움이나 구조도 바라지 않으면서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했기 때문이다. 많은 환난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마음의 근심이 많아”(17절) 그는 더욱더 우울하고 마음이 괴로워졌다.

무엇보다도 죄책감이 그를 가장 괴롭혔다. 그의 심령을 상하게 하고, 그의 외적인 고통을 더욱 무겁게 느끼게 해준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곤고와 환난” 가운데 있었다(18절). 그를 핍박하는(그를 미워하는) 대적들은 많았고 사악했으며, 매우 야비했다. 그들은 그를 심히 미워했다(19절). 그리스도의 대적들과 그의 교회의 박해자들도 이런 자들과 같았다.

Ⅱ. 그는 이런 환난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했음을 나타내고 있다(15절).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하나이다.” 우상 숭배자들은 그들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신들을 위했고, 항상 그들의 우상을 바라보았다(사 17:7-8).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우러러보아야 한다. 그는 성령이시기 때문이다(슥 9:1). 그에 대한 우리의 묵상은 달콤해야 하며, 그를 항상 우리 앞에 모셔야 한다. 우리의 모든 길에서 그를 인정해야 하고, 그에게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처럼 우리는 의식 속에서뿐만 아니라 섭리 속에서도, 예배의 행위 속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다윗은 환난 가운데서도 이것으로부터 위로를 얻었다. 그의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시리라는 것을, (어떤 사람들의 풀이대로) 하나님께서 그를 마음의 타락에서, (또 어떤 사람들의 풀이대로) 그를 치려는 그의 대적들의 모략에서 구하시리라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항상 눈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자들은 오랫동안 발이 그물에 걸려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 의지한다는 그의 고백을 반복하고 있다(20절)─“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 그리고 그에 대한 기대를 거듭 고백하고 있다(21절)─”내가 주를 바라보나이다.” 이처럼 주님의 구원을 소망하고 조용히 기다리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Ⅲ. 그는 하나님의 위안과 도움을 간절히 간구하고 있다.

1. 그 자신을 위해.

(1) 그가 어떻게 간구하고 있는가를 보라.

① 죄의 사면을 위해 간구하고 있다.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18절). 그것이 그의 가장 큰 짐이었고, 또한 다른 고통들을 초래한 원인이었다. 그는 그의 소시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7절), 두드러지게 큰 어떤 죄악을(어떤 사람들은 이를 우리아 문제로 지은 죄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용서해 주실 것을(11절) 간청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주여, 내 모든 것을 사하소서. 모든 죄악을 제하소서” 하고 기도하고 있다.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하옵소서.” 그의 환난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참작해 주시는 것 이상은 그가 요청하지 않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의 죄에 관해서는 완전한 용서 이상의 것을 요청하고 있다.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우리가 환난에 처할 때는 언제든지 환난이 제거되는 것보다 죄를 용서받는 것에 대해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② 또한 그의 비탄을 바로 잡기 위해서 간구하고 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그로부터 물러가신 것과 그의 죄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린 죄책감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주여, 내게 돌이키소서”(16절) 하고 간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로 돌아오신다면, 누가 우리에게서 돌아서도 상관이 없다. 그의 상황은 고통스러웠고, 그것에 관해 그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 “나를 곤란에서 끌어내소서. 내 구원의 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 길을 발견하시거나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의 대적들은 악의에 가득 차 있었다. 그에 관해 그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 “내 영혼을 지켜 그들의 손에 떨어지지 않게 해주소서. 혹은 그들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2) 이 탄원들을 강력히 청원하기 위해 네 가지 사실을 언급하고 있으며, 그 자신과 그것들을 하나님께서 고려해 주실 것을 간청하고 있다.

① 그는 하나님의 긍휼을 청하고 있다.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룬 자들도 무한하신 긍휼의 하나님과 관련을 맺지 않는다면 멸망할 것이다.

② 그의 재앙, 고통, 곤고와 환난, 특히 마음의 괴로움을 호소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그로 하여금 거룩한 긍휼을 간구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③ 그의 대적들의 죄악을 탄원하고 있다. “여호와여, 그들이 얼마나 잔인한가를 살피시고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소서.”

④ 그 자신의 성실함을 탄원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유죄임을 스스로 인정했고, 하나님에 대해 죄를 범했음을 자인했으나, 그는 그의 적들에 대해서는 어떤 잘못도 범하지 않았다는 양심의 증거를 갖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그를 심히 미워했을 때에도 그에게 위로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그를 보호해” 줄 수 있기를 간구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그의 “성실과 정직”이 지속되는 것보다 더 오래 안전케 되기를 기대하지 않았고, 그가 그것을 지속시키는 한 결코 자신의 안전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신실함은 최악의 사태에서도 우리의 가장 훌륭한 보루가 된다. 성실과 정직은 세상의 재물과 영화보다도 더 잘 사람을 보호해 준다. 이는 우리에게 천국을 마련해 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실을 보호해 주실 것을 간구해야 하고, 그 다음 그가 보호해 주시리라 함을 확신해야 한다.

2.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22절). 다윗은 당시에 환난 가운데 있었지만,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않고 있다. 모든 환난은 하나님이 주신 이스라엘의 몫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한 사람이 그 전체 집단보다도 더 클 수 있겠는가? 다윗의 고통은 컸으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구해 주시기를 매우 간절히 간구했다. 그러나 그는 그때에도 하나님의 교회가 당한 환난을 잊지 않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은혜의 보좌로 가져갈 자신의 일이 매우 많더라도 항상 공공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선한 사람들은 교회가 환난과 위험 속에 있는 한 그 자신이 안전할지라도 위로를 얻지 못한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드디어 다윗에게 안식을 주실 것이고, 따라서 이스라엘을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들로부터 편안케 해주시리라는 예언이다. 또한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고(130:8), 환난에서 구속하시기 위해 메시야가 합당한 때에 보내어진다는 예언이다. 이것은 또한 미래상태의 행복을 언급하고 있다. 하늘에서, 하늘에서만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모든 환난에서 완전히 구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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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f'B;(982, 바타흐) 믿다, 신뢰하다, 의지하다, 안심하다, 안전하다.....trust in,  confide in(전존재의 영역에서 비밀한 일, 느낌, 감정까지 공유, 도움, 보살핌을 보장받을 수 있음)
바타흐(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믿다, 신뢰하다, 의지하다, 확신하다', 여기서 '안심하다, 염려 없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의 기본적인 개념은 '확고부동' firmness이나 '견고함' solidity과 관련있는 것 같다. 어쨌든 히브리어에서 바타흐는 신뢰할 만한 것이나 사람이 있다는데서 오는 행복감과 안도감을 나타낸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20회 나오며, 칼형과 히필형으로만 사용되었다.
..[사26:3, 4] 3.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4.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70인역본이 바타흐를 결코 피스튜오(4100: ~을 믿다 believe in)로 번역하지 않고 엘피조(1679: 소망하다, 기대하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다), 엘피스(1680: 소망, 기대), 아스팔레이아(803: 견고함, 안전함, 확실성)으로 번역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바타흐가 "믿음"에 포함된 계시에 대한 완전히 지적이고 의지적인 반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거나 확실하다고 느끼는 감정을 강조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 같다. 따라서 바타흐 어군은 '안전감'이나 '염려 없는 평온'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바타흐는 인간 관계에 사용될 때는 불안정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이웃과 함께 "마음 편히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쉽게 믿고 쉽게 속는 것으로 인하여 상처 받는 한편, 그들의 무방비한 태도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비난 받았다(참조: 세겜인들의 거짓된 안전대, 레위와 시므온의 잔인성, 창 34:25, 이스라엘의 거짓된 안전대, 곡의 잔인성, 겔 38:10-11). 잠 3:29은 믿고 있는 이웃을 속이는 것에 대해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의뢰한데서 오는 이런 확신감의 타당성을 다른 어떤 종류의 어리석은 안심과 대조 시킨다. 이런 모든 신뢰가 치욕과 수치로 끝날 것인데 반해(시 31:14, H15),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사람들은 원수에게서 구출되며(시 22:4, H5), 그들의 기도가 응답 받으며(대상 5:20), 그들이 똑바른 길로 가며(잠 3:5),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시 16:9, 시 33:21), 마음의 평안을 깨닫고 공포가 없어질 것임(시 4:8, H9, 사 26:3)은 분명하다. 그래서 여호와를 신뢰하라고 거듭 권고하고 있다(잠 16:20, 사 30:15, 렘 17:7).
바타흐는 가장 많이 사용되는 시편들(전부 181회 중 50회 사용)에서 대부분 일관성 있게 하나님을 믿는 것의 가치를 표현하고 있다. 이 구절들은 또한 소망의 근거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의 공적이나 일종의 "오는 말에 가는 말"(tit-for-tat)과 같은 그러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헤세드와 그의 확고한 신실하심과, 그의 자비로우신 애정에 있음을 지적해 준다.
겔 33:13은 어느 누구도 감히 생명의 소망을 자기 자신의 의로움에 기반을 둘 수 없음을 분명하게 말해주며, 렘 7:4, 렘 7:8, 렘 7:14은 신성한 문구(신근)와 건물을 믿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영생의 선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있다고 선포하는 신약성경을 예시해 준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소망은 일종의 불평하는 바람이 아니라 확신하는 기대이다. 그칠새 없는 근심이 통례였던 이방 종교들과는 달리 히브리 종교는 신뢰성과 확실성이 주된 성품이신 한 분 하나님을 알았다(신 33:28, 삼상 12:11, 시 27:3). 근심과 확신 사이의 이런 대조는, 이교도가 기교 없이는 결코 남아있지 못하고 이것을 통해서 자기가 스스로의 운명을 어느 정도 지배했다고 느낀데 반해, 경건한 히브리인은 개인적인 수단 없이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알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상기할 때, 훨씬 두드러진다. 변덕스러운 신들, 복수심에 불타는 악마, 그리고 불가사의한 마력의 바다에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인자하고 믿을 만한 하나님께 철저하게 의존하는 것이 더 낫다. 
인간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다스림과 하나님의 완전한 신뢰성을 고려해 볼 때 인간이 하나님이 아닌 어떤 다른 것을 신뢰한다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든 해악으로부터 자동적으로 보호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기를 거부한다고 해서 반드시 가난과 박탈의 길로 들어서는 것도 아니다. 욥은 위로자들의 부드러운 확신에 대해, 어느 정도 통렬하게 비꼬면서 이런 분명한 모순을 지적하였다(욥 12:6, 욥 24:23). 그렇지만 욥도 고통가운데서 다른 어떤 안전의 근원도 결국에는 무가치해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욥 31:24, 욥 39:11, 사 50:10).
구약성경은 이런 거짓 안전의 근원을 어느 정도 상세하게 고찰하여, 하나님게 대한 소망의 탁월함과 대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거짓된 안전의 근원에는 인간(시 118:8, 시 146:3, 잠 25:19, 렘 17:5), 악(사 47:10), 폭력과 압제(시 55:23, H24, 시 62:10, H11, 사 30:12), 부(시 49:6, H7, 시 52:7, H9, 잠 11:28), 우상(시 31:6, H7, 시 115:8, 사 42:17, 합 2:18), 군사력(신 28:52, 시 44:6, H7 사 31:1, 렘 5:17, 호 10:13), 종교(렘 7:4, 렘 7:8, 렘 7:14), 자기 자신의 의로움(겔 33:13, 호 10:13), 이방인들과의 동맹(사 36:4 이하, 겔 29:16)이 포함된다. 특별히 성경은, 그런 만족의 보잘것없는 근거를 결코 평가하지 않고서 이런 만족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경멸한다(사 32:9-11, 겔 30:9, 암 6:1).
아마도 바타흐를 둘러싼 핵심 문제가 짧은 범위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곳은 왕하 18장 왕하 19장일 것이다. 여기에서 앗수르왕 랍사게는 하나님을 믿는 히스기야의 믿음의 가치에 도전하는데 이 믿음은 충분히 입증된다. 이 단어는 이 곳과 병행구절들에 20회 나온다(사 36-37장, 대하 32장). 인간관계에서는 단 하나의 믿음의 영역이 권고된다. 즉 현숙한 성품을 가진 아내를 믿는 남편(잠 31:11, NIV)에 대해서이다.(참조: J. N. Oswalt;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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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yriB](1285, 베리트) 언약, 계약, 협정
베리트(명여)는 '언약, 계약, 조약, 협정, 법령, 서약, 동맹'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80회 이상 나온다.
(a)  베리트는 다양한 종류의 협약을 뜻하는 일반적 구약성경 용어이다.
이러한 협약들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들이 포함된다. 법적 효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삼상 20:8) 두 친구 간의 계약(삼상 18:3) 자신들의 권익 범위(창 21:22 이하, 창 26:26 이하, 왕상 5:12, MT 5:26), 또는 화평 조건을(왕상 20:34) 정하는 두 주권자 간의 계약, 그 백성들까지도 포함하는 두 왕 사이의 계약, 두 부족이 언약을 맺기도 하였다(수 15:9). 이 단어는 이스라엘과 그 종들 사이의 계약에 대해서도 사용된다(렘 38:8 이하).(역자주. 이 히브리어의 본래 의미는 그것이 왕과 종의 소유자들 간의 계약이었다는 것이다).
왕이 자신의 신하들과 계약을 맺을 때(왕하 11:4[역자주. 이 계약은 아마도 여호야다와 호위병 사이의 개인적 협약이었을 것이다]), 또는 계약에 의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었을 때(삼상 11:1) 그 상황은 약간 달랐다. 아브넬이 다윗과 맺은 계약은(삼하 3:12 이하) 아브넬 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도 다윗의 백성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다(삼하 3:21).(J. Guhrt)
국가간의, 혹은 개인간의 조약이나 협정으로서의 언약은 쌍방이 평등한가 아니면 한쪽이 다른 쪽보다 우월한가를 근거로 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창 14:13에서 아브라함과 아모리인들은 평등하게 조약을 체결하였지만, (여호수아 통치 하의) 이스라엘과 기브온인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수 9장). 여기에서는 언약의 맹세적인 면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제시된다. 비록 기브온의 종자들이 거짓말한데 대한 벌을 받긴 했지만(수 9:22-23),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그들을 보호해 주어야할 의무를 여전히 지고있었다. 훨씬 후에, 사울이 맹세한 언약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을 때, 그의 가족들은 벌을 받았다(삼하 21장).
두 집안이나 국가들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었다는 표로써, 스텔라(돌)를 세우는 것은 일반적인 관례였다(참조: 야곱과 라반, 창 31:44-47). 양측은 모두 이 언약이 변경될 수 없음을 나타내주는 증인으로 하나님을 끌어들인다. 더구나 시나이 언약의 경우에서처럼, 야곱과 라반은 산에서 희생 제사를 드렸고 공동식사를 나누었다(창 31:54-55). 이런 조약을 보증해 주는 다른 표시들로, 예를들면 두 왕족 사이의 결혼 같은 것이 있다(왕상 9:16). 그렇지만 언약의 말, 즉 약속과 규정의 형태로 되어있는 이 말들을 철자화하고, 증언하고 서명하고 봉인한 기록 문서가 언약 체결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이었다. 이런 언약 문서들은 많이 있다(참조: D. R. Hillers, Covenant: The History of a Biblical Idea, Baltimore, 1969). 베흠(Behm)은 '법적으로 보증된 평화나 개인적인 충성에 대한 보증으로서 언약보다 더 확고하게 보증해주는 것은 없다'고 결론 짓는다(TDNT, Ⅱ, 115, 참조: 암 1:9).
혈연을 제외하고는, 언약이 고대 세계의 백성들이 서로간에 보다 넓은 관계를 이루는 길이었다(Treaty and Covenant, D. J. McCarthy, Rome, 1963, 175).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에 관한 기록들은 구약성경에서의 두 개인들 사이의 맹약에 대한 아주 분명한 언급이다(삼상 18:3, 삼상 20:8, 삼상 23:18). 이것은 여호와께서 그 계약을 증언해주시고 법적인 절차를 보호해주시기 때문에 '여호와의 언약'으로 언급되었다.
이스라엘의 군주제는 백성들과 왕 사이에 맺은 언약적 관계로 인하여, 그처럼 이른 시기에는 세계에서 그 유례가 없었던 일종의 입헌 군주제가 되었다(삼하 3:21, 삼하 5:3, 대상 11:3).
이러한 모든 언약의 절차들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관계를 명확하게 말해주는 문화적인 배경을 제공해 준다.(E. B. Smick)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 하나님과 노아(창 6:18), 아브라함(왕하 13:23), 또는 다윗과의 언약(렘 33:21)도 유사하다. 이곳에서 언약은 분명히 그들의 후손에게로 연장되고(창 9:8 이하, 창 15:18, 삼하 7:12-16), 이스라엘과의 언약이 된다(출 6:4 이하). 그러나 렘 50:5에 나오는 언약도 이스라엘과 그들의 하나님과의 언약으로 해석될 수 있다. 겔 16:8은 예루살렘과의 언약에 대해 말한다. 언어학적으로라면 70인역본은 (a)의 예들에서 '쉰데케'를 사용했을 것이다(위의 고전 헬라어 문헌을 참조하라). 그러나 후자의 경우들에서 베리트는 많은 것들에 대한 처분권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창 9:12, 창 17:7 이하, 렘 31:31-34 등). 곧 70인역본의 번역 '디아데케'는 충분한 뜻을 갖고 있다. 반면에 여호와의 주야와의 약정(렘 33:25) 그리고 예루살렘과 사망과의 계약(사 28:14-18) 같은 예외적인 용법들이 있다.
초기의 학자들은 세속적인 계약과 종교적 언약을 구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모두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는 언약 개념의 다양성은 이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더욱이 가장 세속적인 언약은 이것이 하나님에 의해 증거되었음을 전제로 하는 반면(창 31:44-50, 삼상 23:18), 가장 종교적인 언약들에서 여호와께서는 여전히 언약을 맺는 제왕과 비교된다. 구약에 있어서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의 구별은 생각할 수 없다.
(b)  이 상황은 많은 사람들이 다른 개념들이 그로부터 발전된 원초적이며 명백한 언약 사상이 있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했다. 현대적 연구는 네 가지 해답을 내놓았다.
① 페더센(J. Pedersen)은 원래 언약의 두 가지 측면이 동등하게 존재하였다고 생각했다.
② 반면에 베그리히(J. Begrich)는 언약이 보다 강한 자들이 보다 약한 자들에게 주었던 어떤 것으로 출발하였다고 주장했다.
③ 멘덴할(G. E. Mendenhall)은 헷 족속의 종주권 조약에서 종교적이며 역사적인 배경을 발견하였고 그와 같은 조약 요소가 언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고 추론하였다.
④ 노트(M. Noth)는 최근에 발견된 본문들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이 본문들은 이 언약이 양자 사이에 있는 제 삼자에 의해 중개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요소들 중의 어떤 것이 최초의 것이라든가 또는 어떤 요소가 후에 생겨났다든가하는 것을 증명하기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언약과 백성들의 언약은 출 34장에 언급되며 개인적인 언약과 왕의 언약은 삼하 3장에서 언급된다. 현재로서는 우리가 언약의 원형을 결정할 수 없다.
(c)  이 모든 개념들은 하나의 술어 베리트에 의해 표현되었으므로 유대인들은 그 개념들 뒤에 존재하는 어떤 일치점을 느꼈던 것이 분명하다. 비록 언약 당사자들의 관계, 또는 언약 협정의 내용들이 이것을 규정하지 않았으나 언약을 맺음에 있어서 통상적인 규범이 있었음이 나타나고 있다(Baltzer, 참고문헌을 보라). 이러한 의식에는 6가지의 극히 중대한 요소들이 있었다.
① 당사자들의 이름들을 언급하는 전문,
② 언약에 들어가는 자들의 관계에 대한 서문적 이력,
③ 당사자들의 미래 관계에 대한 기초적 공술,
④ 새관계에 대한 세부 설명들,
⑤ 증인의 직무를 말하기 위해 양측에 의해 예배되는 각각의 신들에 대한 기원,
⑥ 저주와 축복의 선언.
발처(Baltzer)는 쿰란 문서까지 그리고 신약성경 속으로 또한 신약성경의 범위를 넘어서기까지 철저하게 이 윤곽을 추적했다. 이것은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언약 개념이 이스라엘의 민족적 실존에서와 마찬가지로 성경적 사상에서도 근본 요소임을 보여준다.
(d)  우리가 언약의 입장에서 이들에 접근할 때 우리는 구약성경 전통의 매우 다양한 요소들이 어떻게 함께 속하여 있는가를 보게 된다. 전문(前文)은 여호와께서 자신을 소개하는 방법을 암시한다(참조: 출 20:2, 언약의 관용문구에 나오는 바와 같이 과거 사건들의 개관이 따른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자신의 역사에 대한 독특한 관심의 근원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와 관계된 여호와의 역사로 나타나며 이로써 언약의 역사와 구원사가 형성된다. 세번째 부분은 이사야서에서 구원의 선포, 하나님의 신실함과 화평의 약속으로서 그 아주 명확하게 표현된 그 사상을 반영한다(사 54:10, 사 55:3). 이 약속은 백성의 불순종에 의해서도 취소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이 필히 이를 수행하는 것으로 선언하셨고 모든 임의성을 부인하셨다. '그러므로 이 기초는 복음을 위해 놓여진 것이다'(G. Quell, TDNT Ⅱ 123). 이 언약들과 렘 31장의 언약들을(예를 들어) 시내산 언약의 관용적 문구와 비교할 때 우리는 위의 (c) ④에서 언급된 세부 사항들을, 공로에 대한 보상이 따르는 제일 처음으로 이행되어야 할 조건으로 이해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인상은 레 26:15 이하와 신 31:20과 같은 구절에 의해 주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가능하게 된 새 생활의 법규들이다(참조: 창 9:9, 창 15:13-16, 렘 31:31). 신 26장에 나오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에 대한 숙고와 율법은 이 새 생활을 위한 가르침으로서 함께 속한 것이다.
(e)  언약 당사자들의 관계는 헤세드(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로 표현한다(RSV steadfast love, 불변의 사랑, NEB love 사랑, loyalty 성실, 충성, constancy 불변성). 삼상 20:8은 이것을, 보호하는 행동으로서 이해한다. 사람이 언약을 기억함은 행동으로 그 자체를 표현한다(시 103:17 이하). 쌍방 즉 여호와 언약의 백성은 단지 일개인으로서 대표되는데 베리트 안에서 서로를 직면한다. 곧 이들은 능동적이며 실제적인 협력 관계 안에 있으며(Pedersen), 그리하여 쌍방은 언약의 식사를 함께 나눈다(창 31:54, 출 24:9 이하). 이것이 당사자들의 →친교(Fellowship를 강화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것은 언약과 그 갱신이 순수하게 제식적 행동들이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이 제식의 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거의 부정될 수 없다(시 50편). 이것은 특히 세겜의 경우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수 8:30-35, 수 23:24). 옛날에 그곳에서 예배되었던 바알 베리트(Baal-berith), 또는 엘 베리트(El-berith)에 대한 관계는 전혀 만족하게 설명된 적이 없다(삿 8:33, 삿 9:4, 삿 9:46).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은 첫째로 언약 백성의 여러 부족들의 일상 생활에 속한다. 이러한 언약은 꾸준히 제식과 분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은 신명기에서 그 언약 신학 및 생활의 세속화와 함께 나타나는 듯하다. 이 제식들은 본래적인 영원한 언약의 지속성을 보장할 수 없었다. 이 언약의 창설자이신 여호와께서만이 언약의 지속성과 또한 언약의 참된 의미에 있어서의 제식을 함께 보장할 수 있으셨다. 오직 여호와께서만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깨어진 언약을 갱신할 수 있으셨다.
이 사실 때문에 많은 선지서들에서 언약의 사상이 순종에 대한 요구를 위해 사실상 사라진다. 이사야서의 초기 부분들은 분명히 의도적으로 언약 개념을 거의 완전하게 회피하였다. 사 24:5, 사 33:8은 예외들이며 보다 일찍이 언급된 사망과의 언약 역시 예외이다(사 28:15, 사 28:18). 호세아는 아마도 언약의 법적 특성에 대한 일방적 강조의 위험성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결혼에 대한 상징으로 하나님과 자신의 백성과의 관계를 묘사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베리트가 호 6:7, 호 8:1에서는 깨어진 것으로만 언급된다. 호 10:4, 호 12:1에서 베리트는 인간의 협약들을 언급한다. 예레미야는 깨어진 언약을 대신하는 완전히 새로운 언약에 대한 자신의 기대를 강조한다. 지속성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직 여호와에 의해서만 창조된다. 성령을 통하여 인간 심령에 하나님의 직접 역사하심이 순종에 대한 명령에 대신한다는 점에 있어서 그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것은 단절이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보여 주며 또한 신약을 위한 길을 예비한다.
([편집자주] 그러나 본질적인 연속성이 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는 율법의 폐지에 대해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 이곳에는 구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것과 동일한 언약의 신적 확정이 있다[위의 4를 보라]. 언약 관계는 다음과 같은 약속에서 요약된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참조: 출 6:7, 레 26:12, 렘 7:23, 렘 11:4, 렘 30:22, 렘 32:38, 고후 6:16, 히 8:10, 계 21:3].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이 관계는 율법을 무시함으로써가 아니라 율법의 보다 더 개인적인 적용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다).
(f)  구약성경의 전형적 표현인 카라트 베리트(언약을 자르다, 즉 언약을 맺다)는 아마 창 15:9 이하와 렘 34:18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역자주] 이것은 사용된 유일한 표현이 아니며 또한 언약을 맺음을 나타냄에 있어서 본질적이었던 것도 아닌듯하다). 이 구절은 70인역본에서는 디아데켄 디아티데마이(디아데케를 세우다)로 표현된다. 디아데케라는 술어에 대한 헬라식 이해는 더 이상 언약이 동등한 권리를 소유한 쌍방간의 협정이 아니었다. 디아데케에 대한 헬라식 이해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형태로만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임의적인 신적 행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나 70인역본은, 포로 후에 자주 나오는, '언약을 정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히브리 표현 '헤킴 베리트'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 묵시서들은 이 표현을 더욱 발전시킨다. 필로는 유언 사상에 대한 우화적 주석을 산출하였다. 랍비들은 언약을 하나의 절대적인 법 개념으로 제한하였다.
쿰란 공동체는 언약에 큰 중요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새 언약의 약속(렘 31:31-34)이 자신들 가운데에서 성취된 것으로 생각하였고 스스로를 '다메섹 땅의 새 언약'으로 칭했다(CD 6:19). 시내산 언약이 모든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면 쿰란 언약자들은 스스로 거룩한 남은 자들, 구원 시대의 순수하고 종말론적인 공동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새로운 가입자들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그들은 엄격한 규칙들을 적용하였고 이 공동체를 특징지었던 '언약 율법들(즉 이 공동체가 해석하였던 것으로서의 율법)'에 전적으로 헌신해야 했다. 이 종파의 언약에 대한 종말론적 사고는 그들을 특히 랍비들과 구별하였다. 랍비들은 언약을 할례와 동등시하였고 그 보존이 모세 율법의 엄격한 준수에 의해 보장되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나아가서는 렘 31:31-34의 성취를 미래적인 것으로만 기대하였다([역자주] 새 언약이 탈무드적 유대주의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것은 사실상 아마 쿰란과 유대 기독교에 대한 논박 때문이었을 것이다). (J. Guh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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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25:14]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NKJV]시 25:14 The secret of the LORD is with those who fear Him, And He will show them His covenant. //[NIV]시 25:14 The LORD confides in those who fear him; he makes his covenant known to them. //[NASB]시 25:14 The secret of the LORD is for those who fear Him, And He will make them know His covenant. //[NRSV]시 25:14 The friendship of the LORD is for those who fear him, and he makes his covenant known to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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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17:5-11]]
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아담..죄된 인간) 믿으며(바타흐...신뢰) 육신(바사르..혈육)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수르...돌아섬)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아라르...모든 유익/혜택/선함에서 제외됨)//나 주가 말한다. 나 주에게서 마음을 멀리하고, 오히려 사람을 의지하며,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NASB]렘 17:5 Thus says the LORD, "" Cursed is the man who trusts in mankind And makes flesh his strength, And whose heart turns away from the LORD. /[NRSV]렘 17:5 Thus says the LORD: Cursed are those who trust in mere mortals and make mere flesh their strength, whose hearts turn away from the LORD. /[NKJV]렘 17:5 Thus says the LORD: "Cursed is the man who trusts in man And makes flesh his strength, Whose heart departs from the LORD. /[NIV]렘 17:5 This is what the LORD says: "Cursed is the one who trusts in man, who depends on flesh for his strength and whose heart turns away from the LORD. /[BBE]렘 17:5 This is what the Lord has said: Cursed is the man who puts his faith in man, and makes flesh his arm, and whose heart is turned away from the Lord. 
6.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토브...하나님 자신과 그의 모든 것/지고지선의 진복) 오는 것을 보지(살펴보고 경험하여 누림)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그는 황야에서 자라는 가시덤불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소금기가 많아서 사람이 살 수도 없는 땅, 메마른 사막에서 살게 될 것이다//[NASB]렘 17:6 ""For he will be like a bush in the desert And will not see when prosperity comes, But will live in stony wastes in the wilderness, A land of salt without inhabitant. /[NRSV]렘 17:6 They shall be like a shrub in the desert, and shall not see when relief comes. They shall live in the parched places of the wilderness, in an uninhabited salt land. /[NKJV]렘 17:6 For he shall be like a shrub in the desert, And shall not see when good comes, But shall inhabit the parched places in the wilderness, In a salt land which is not inhabited. /[NIV]렘 17:6 He will be like a bush in the wastelands; he will not see prosperity when it comes. He will dwell in the parched places of the desert, in a salt land where no one lives. /[BBE]렘 17:6 For he will be like the brushwood in the upland, and will not see when good comes; but his living-place will be in the dry places in the waste land, in a salt and unpeopled land. 
7.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미브타흐..신뢰. 확신) 여호와를 의뢰하는(바타흐...확신/신뢰/의지/순종함//안심/평안누림)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바라크...무릎꿇고 기도-경배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 자신과 그의 모든 것 부어주심인 지고지선의 진복을 감사찬양안에 거함)//그러나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 [NASB]렘 17:7 "" Blessed is the man who trusts in the LORD And whose trust is the LORD. /[NRSV]렘 17:7 Blessed are those who trust in the LORD, whose trust is the LORD. /[NKJV]렘 17:7 "Blessed is the man who trusts in the LORD, And whose hope is the LORD. /[NIV]렘 17:7 "But blessed is the man who trusts in the LORD, whose confidence is in him. /[BBE]렘 17:7 A blessing is on the man who puts his faith in the Lord, and whose hope the Lord is. 
8.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뿌리를 개울가로 뻗으니, 잎이 언제나 푸르므로, 무더위가 닥쳐와도 걱정이 없고, 가뭄이 심해도, 걱정이 없다. 그 나무는 언제나 열매를 맺는다.// [NASB]렘 17:8 ""For he will be like a tree planted by the water, That extends its roots by a stream And will not fear when the heat comes; But its leaves will be green, And it will not be anxious in a year of drought Nor cease to yield fruit. /[NRSV]렘 17:8 They shall be like a tree planted by water, sending out its roots by the stream. It shall not fear when heat comes, and its leaves shall stay green; in the year of drought it is not anxious, and it does not cease to bear fruit. /[NKJV]렘 17:8 For he shall be like a tree planted by the waters, Which spreads out its roots by the river, And will not fear when heat comes; But its leaf will be green, And will not be anxious in the year of drought, Nor will cease from yielding fruit. /[NIV]렘 17:8 He will be like a tree planted by the water that sends out its roots by the stream. It does not fear when heat comes; its leaves are always green. It has no worries in a year of drought and never fails to bear fruit." /[BBE]렘 17:8 For he will be like a tree planted by the waters, pushing out its roots by the stream; he will have no fear when the heat comes, but his leaf will be green; in a dry year he will have no care, and will go on giving fruit. 
9.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레브...내부인간/속사람. 정신과 심지)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 [NASB]렘 17:9 ""The heart is more deceitful than all else And is desperately sick; Who can understand it? /[NRSV]렘 17:9 The heart is devious above all else; it is perverse--who can understand it? /[NKJV]렘 17:9 "The heart is deceitful above all things, And desperately wicked; Who can know it? /[NIV]렘 17:9 The heart is deceitful above all things and beyond cure. Who can understand it? /[BBE]렘 17:9 The heart is a twisted thing, not to be searched out by man: who is able to have knowledge of it? 
10.나 여호와는 심장을(레브......속사람, 중심, 영혼, 인격과 지성-감성-의지/욕망) 살피며 폐부를(킬야...콩팥/신장으로 봄...한자어로 볼 때 폐의 부속기로서 생명호흡의 근원지...즉, 속사람의 가장 깊은 내적 동기, 감정과 애정(사랑, 희락, 화평), 심지(일편단심)의 자리...신장과 폐는 간과 함께 끊임없이 신체의 독소해독과 배출을 담당....마음의 할례, 곧 구주예수 믿는 믿음통해서만 십자가보혈로 끊임없이 씻김받아 깨끗케 될 때 속사람이 생명충만-건강함이 유지됨...비록 그 어떠함을 겉으로는 알 수 없으나 믿는 이가 하나님 신뢰함으로써 한 영되신 HS따라 살 때 사랑의 계명 그 안에 온전히 이루시며 그 속사람이 JC형상 빼어닮아 가게 하며 내주하시는 주님의 임재 충만을 나타내고 드러내심)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데레크...길, 태도/행동방식) 그의 행실대로(마알랄...실행 ///페리...열매) 보응하나니//"각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심장을 감찰하며, 각 사람의 행실과 행동에 따라 보상하는 이는 바로 나 주다//[NASB]렘 17:10 ""I, the LORD, search the heart, I test the mind, Even to give to each man according to his ways, According to the results of his deeds. /[NRSV]렘 17:10 I the LORD test the mind and search the heart, to give to all according to their ways, according to the fruit of their doings. /[NKJV]렘 17:10 I, the LORD, search the heart, I test the mind, Even to give every man according to his ways, According to the fruit of his doings. /[NIV]렘 17:10 "I the LORD search the heart and examine the mind, to reward a man according to his conduct, according to what his deeds deserve." /[BBE]렘 17:10 I the Lord am the searcher of the heart, the tester of the thoughts, so that I may give to every man the reward of his ways, in keeping with the fruit of his doings.  
11.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불의로 재산을 모은 사람은 자기가 낳지 않은 알을 품는 자고새와 같아서, 인생의 한창때에 그 재산을 잃을 것이며, 말년에는 어리석은 사람의 신세가 될 것이다.// [NASB]렘 17:10 ""I, the LORD, search the heart, I test the mind, Even to give to each man according to his ways, According to the results of his deeds. /[NRSV]렘 17:10 I the LORD test the mind and search the heart, to give to all according to their ways, according to the fruit of their doings. /[NKJV]렘 17:10 I, the LORD, search the heart, I test the mind, Even to give every man according to his ways, According to the fruit of his doings. /[NIV]렘 17:10 "I the LORD search the heart and examine the mind, to reward a man according to his conduct, according to what his deeds deserve." /[BBE]렘 17:10 I the Lord am the searcher of the heart, the tester of the thoughts, so that I may give to every man the reward of his ways, in keeping with the fruit of his doings. 

=====[사26:20, 21]===============
20.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NASB]사 26:20 Come, my people, enter into your rooms And close your doors behind you; Hide for a little while Until indignation runs its course. /[NRSV]사 26:20 Come, my people, enter your chambers, and shut your doors behind you; hide yourselves for a little while until the wrath is past. /[NKJV]사 26:20 Come, my people, enter your chambers, And shut your doors behind you; Hide yourself, as it were, for a little moment, Until the indignation is past. /[NIV]사 26:20 Go, my people, enter your rooms and shut the doors behind you; hide yourselves for a little while until his wrath has passed by. 
21.보라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 당한 자를 다시는 덮지 아니하리라//[NASB]사 26:21 For behold, the LORD is about to come out from His place To punish the inhabitants of the earth for their iniquity; And the earth will reveal her bloodshed And will no longer cover her slain./[NRSV]사 26:21 For the LORD comes out from his place to punish the inhabitants of the earth for their iniquity; the earth will disclose the blood shed on it, and will no longer cover its slain. /[NKJV]사 26:21 For behold, the LORD comes out of His place To punish the inhabitants of the earth for their iniquity; The earth will also disclose her blood, And will no more cover her slain. /[NIV]사 26:21 See, the LORD is coming out of his dwelling to punish the people of the earth for their sins. The earth will disclose the blood shed upon her; she will conceal her slain no longer. 
=====[마6:5, 6]==================
5.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확실한 피난처(사 26:20-21)
위의 두 구절이 본장의 다른 부분을 잇는 노래에 속하지 않고, 새로운 내용으로 시작되고 있다. 따라서 본장의 결론이라기보다는 다음 장의 서론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본장의 결론이라기보다는 다음 장의 서론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는, 앞의 노래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의 비탄스러움을 원망하면서 하나님께 말씀 드렸는데,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원망에 대한 답을 드려 주시고 있다고 볼 수 있다.
Ⅰ. 즉 하나님은 그들을 그들의 밀실로 초대하신다(20절). "내 백성아 갈지어다. 나에게로 오라. 나와 함께 갈지어다" (그는 그가 친히 그들과 함께 동행하시려 하지 않는 곳으로는 그들을 부르지 아니하신다). "다른 사람들을 흩어지게 하는 폭풍이 너희들은 더욱 가까이 모이게 하라. 와서 네 밀실에 들어가라. 애굽 사람들이 우박을 맞았던 것처럼(출 9:21) 너희가 폭풍우를 만나지 않도록, 밖에 머물러 있지 말라."
1. "구별의 밀실로 갈지어다. 따로 떨어진 네 방으로 들어가고, 더 이상 바벨론 자손들과 섞이지 말라.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으라" (고후 6:17; 계 18:4). 만일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위해 경건한 자들을 따로 두셨다면, 그들도 스스로를 남과 구별해야 한다.
2. "방어의 밀실로 갈지어다. 그 속에서는 밀실의 은밀함이나 힘에 의해서 네가 최악의 사태에서도 안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이 곧 "그 장막의 은밀함" 이다(시 27:5). 그의 이름은 우리가 달려가 안전함을 얻을 수 있는 견고한 망대이다(잠 18:10).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이 밀실에 이르는 길을 찾고, 거기에 우리 자신을 숨겨야 한다. 즉 마음의 거룩한 안심과 평정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보호 아래 맡겨야 한다. 노아가 방주로 들어가듯이 갈지어다. 노아는 "그의 문을 닫았었다." 위급한 사태를 당할 때에는 - 그곳 시냇가에 숨었던 엘리야처럼 - 은퇴하여 숨는 것이 좋다.
3. "기도의 밀실로 갈지어다.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마 6:6). 하나님과 은밀히 사귀라.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너 자신을 살피고 네 자신의 마음과 교제하며 기도하라.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네 자신을 겸손케 하라." 환란과 위험의 시기에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숨겨야 한다. 즉, 우리는 우리를 숨기실 수 있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한다. 그러면 그는 우리를 하늘 아래나 하늘 속에 감추어 주실 것이다.
이스라엘은, 멸망시키는 천사가 애굽의 장자를 죽일 때에 문 안에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문설주의 피가 그들을 안전케 하지 못할 것이다. 라합과 그 가족들도 여리고가 멸망될 때 그렇게 해야 했다. 보이지 않는 자들이 가장 안전하다. Qui bene latuit, bene vixit - 즉 적당한 은둔을 구한 자가 가장 잘 살아온 자이다.
Ⅱ. 이사야 예언자는 그 환란이 고 끝나리라는 것, 즉 그들이 놀라움과 위험을 겪는 날이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단언하고 있다. "잠간 숨을지어다. 물질의 원자처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소의 시간 동안만 숨을지어다. 아니, 만일 네가 어떤 순간이 다른 어떤 순간보다 더 짧다고 상상할 수 있다면, 그 순간은 잠간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적은 잠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 시간이 끝나면, 그것은 네게 무(無)로 보일 것이다. 너는 그 시간이 빨리 지나간 사실에 놀랄 것이다. 너는 오랫동안 감금 상태에 있을 필요가 없으며 오래 숨어 있을 필요가 없다.
그 분노가 곧 지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즉 너를 향한 원수의 분노와 너로 하여금 도망하게 만든 그들의 핍박하는 권력과 분죄가 곧 지나갈 것이다. 악인이 일어서면, 사람이 숨는다. 이것은 곧 끝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끊으실 것이다. 그들의 힘을 꺾으시고 그들의 계획을 좌절시키고 너를 증대케할 길을 발견하실 것이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가 줄리앙 칙령에 의해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되자 그의 친구들이 그것을 크게 탄식했다. 그 때 그는 그들에게 용기를 갖도록 이렇게 권했다. Nubecula est que cito pertransibit - 즉 그것은 곧 사라질 한 점의 구름이다. 너희가 십일 동안 환란을 받으리라" 고 했다. 그것이 전부이다(계 2:10). 이 때문에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환란을 빛 즉 잠시동안만 있을 빛이라 부를 수 있게 된다.
Ⅲ. 이사야는 그들의 원수가 전쟁이나 핍박의 칼로써 그들에게 행한 모든 죄악에 대해 보복당하리라는 것을 그들에게 단언하고 있다(2절). 여호와께서 그들이 흘린 피로 인해 그들을 벌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1. 심판이 정해졌다. 이제 심판이 진행된다. "여호와께서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다." 그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혼란을 주실 것이다. 땅의 거민들 중에는 큰 죄악이 있다. 그들 모두가 그 죄악에 연합되어 있고,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 손을 맞잡는다 할지라도,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악인이 저 세상에서 받을 영원한 형벌 이외에, 이 세상에서도 잔인함과 압제와 학대에 대한 놀라운 형벌이 종종 있다.
사람의 분노가 지나가고, 이미 그들이 최악의 일을 행하고 났을 때에도,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를 각오하게 하라. 왜냐하면 "그(하나님)는 그 날(하나님의 날)이 오고 있음을 보시기" 때문이다(시 37:13).
하나님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사 벌하신다." 그는 놀라운 방법으로, 하늘로부터, 그의 권능의 창공으로부터 그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며 성소로부터 그의 은혜의 임재를 보이신다. 하나님은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신다." 전에는 하나님이 거기서 숨어 계신 것처럼 보였다. 왕좌에 앉기 위해서거나 출전하기 위해 나서는 왕처럼, 이제 하나님은 그의 지혜와 정의와 은밀한 계획에서 나온 결과인 어떤 위대한 일을 행할 것이다(슥 2:13).
혹자는 하나님의 처소란 곧 "자비의 자리" (한글 성경 - "속죄소")라는 사실을 주목한다. 하나님은 거기에 거하시기를 기뻐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벌하실 때는 그의 처소에서 나오신다. 왜냐하면 그는 죄인의 죽음을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2. 악명높은 증거를 통해 확증된 범죄가 있다.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밖으로 드러내리라." 무죄한 피, 물처럼 땅에 쏟아져 그 속으로 잦아들었던 성도들과 순교자의 피가 이제 밝히 드러나 해명을 요구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대해 엄밀히 조사하시고 그것을 흘린 자에게 마실 피를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은밀한 살인이나 그밖의 은밀한 죄악이 조만간에 발각될 것이다. 그리고 땅은 오랫동안 덮어 두었던 그 살해자를 더 이상 덮어놓지 않고, 살인자에 대한 증거로서 피를 내놓을 것이다.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호소한다고 했다(창 4:10, 11; 욥 20:27). 어둠 속에 묻힌 것같이 보였던 죄들도 복수의 날이 올 때는 다시 상기되고 호출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인내를 가지고 잠시 기다리자. 재판장께서 문앞에 서서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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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생활(마 6:5-8)
"기도"할 때 우리는 "구제"할 때보다 더 즉각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진지하여야 한다." 그것은 여기에 교훈되어 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5절), 이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이 "기도"하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 여기고 있다. 바울은 개종하자마자 "기도하였다." 너희는 기도하지 않고 살아 있는 기독자보다는 숨쉬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을 찾기가 더 쉬울 것이다. 기도가 없으면 은혜도 없다. "이제,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또한 저희가 행하는 대로 하지 말라"(2절). 수단과 행동에서 외식자와 같이 행하지 않으려는 자는 그들의 기분과 성향에서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되지 말아야 한다. 그는 누구를 지적하시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히 드러나 있다(마 23:13). 그리스도는 특히 여기에서 외식하는 자를 서기관과 바리새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기도할 때 두 가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것에 대해 여기에서 경고되고 있는데, 즉 헛된 영광(5, 6절)과 중언부언(7, 8절)이다.
Ⅰ. 우리는 "기도할 때 자만하거나 허영스러운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사람의 칭찬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1. "외식하는 자들의 방법과 행위"는 무엇이었는가? 그들이 기도하는 모든 행위는 그 주요 목적이 이웃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는 것이었고, 이로서 자신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그들이 기도할 때 "윗 쪽으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만일 그것이 정당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영혼이 올라가는 것이다), 그때에 그들의 눈은 그들의 미끼로서 이 세상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다음의 일을 살펴보자.
(1) 그들이 기도하기 위해 택했던 "장소"는 어떤 곳이었는가? 그들은 "회당"에서 기도하였다. 회당은 개인적인 기도를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공중적인 기도에는 실로 적합한 장소이다. 그들은 이로서 그들의 모인 장소를 영예롭게 하려는 것처럼 꾸몄지만, 실상은 자신들을 영화롭게 하려는 속셈을 가졌다. 그들은 "거리의 어귀," 즉 넓은 거리(단어의 의미가 그러하다)에서 종종 기도하였다. 그들은 마치 경건한 충동에 의해 서둘러 이쪽으로 온 것 같이 보였지만 실을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하기 위함이었다. 두 거리가 만나는 이곳에는 양쪽에서 함께 내다보일 뿐만 아니라 이곳을 돌아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들을 바라볼 수 있었으며, 또한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도 있었다.
(2) 그들이 기도할 때 사용했던 "자세." 그들은 서서 기도하였다. 이것은 합당하고 적절한 기도 자세였다(막 11:25 , "서서 기도할 때에"). 그러나 무릎을 끓는 것은 더 겸손하고 정중한 자세이다(눅 22:41; 행 7:60; 엡 3:14). 그들이 서서 기도하는 것은 교만과 자신감을 나타내려는 기미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눅 18:11). "바리새인들은 서서 기도하였다."
(3) 그들이 공공적인 장소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그만"은 두 가지 일에서 표현되고 있다.
① 그들은 거기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들은 그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려고 할 때 또한 그들을 주시하는 기회가 주어질 때 기도하기를 좋아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선행을 공개적으로 행해져야 할 경우가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보고 칭찬하게 될 경우가 있다. 그러나 범죄가 되고 위험스럽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좋아하고 기꺼이 하려고 할 때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만한 기질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②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거리에 서서 기도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칭찬과 갈채를 얻기 위하여 기도했으며, 또한 과부와 고아들의 재산을 자기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이와 같은 기도를 하였다(누가 이렇게 열심있게 기도하는 사람을 믿지 않을 것일까?). 더욱이 그들은 아무 스스럼없이 그것들을 마구 탈취하였을 것이다(마 23:13). 또한 실제로 그들은 백성을 노예로 삼기 위하여 자기들의 공공연한 음모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4) 이 모든 것의 "결과"는 "그들이 자기 상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봉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기대했던 모든 상을 다 받아 버린 것이다. 그것은 실로 보잘 것 없는 보상이다. 만일 우리의 주인이 "잘하였도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동료 하인에 대해 좋은 말을 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가 사람의 칭찬을 많이 들으면 들을수록 그만큼 하나님의 상은 적어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거리에서 기도했으며 또 그렇게 되었다. 그들에게 그 일을 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일 수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이 성실로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칭찬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사람이 아니며 그에게서 응답을 기대할 수도 없다. 그들은 우리의 재판장이 아니며, 우리와 똑 같은 먼지와 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 사이를 통과하는 것은 보이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회당에서 예배를 볼 때는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는 자들"(사 58:4)처럼 우리의 개인적인 기도를 두드러지게 하려는 모든 일을 피해야만 한다. 공중적인 장소는 개인적으로 경건한 기도를 드리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2. 이것에 반대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도"는 무엇인가? 겸손과 성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가장 큰 두 가지 교훈이다. "너는 기도할 때에‥‥하라"(6절). 특별히 네 스스로, 네 혼자서 기도하라. 개인적인 기도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이 반드시 필요로 하는 의무와 행위로 생각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자.
(1) 이에 관하여 여기에 주어진 명령(지시).
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하지 말고 그 대신에 "네 골방." 즉 개인적이고 외진 장소에 "들어가라." 이삭은 들판으로 갔고(창 24:63), 그리스도는 산으로 가셨으며, 베드로는 지붕 위로 올라갔다. 만일 그것이 목적에 부합된다면 기도는 하는 장소에 의해 응답 여부가 결정되지는 않는다. 은밀한 기도는 우리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그렇게 함으로써 겉치레를 피하기 위하여 외진 곳에서 수행된다. 또한 방해받지 않음으로써 산만해지지 않고 또한 들리지 않음으로써 보다 큰 자유를 활용하기 위하여 은밀한 곳에서 수행된다. 우리는 아무리 해도 남의 눈에 띄게 선행을 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리하여 남들의 칭찬을 받는 처지에 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자만심을 채우기 위해 그런 처지를 좋아한다면, 그것이 죄요 위험이 되는 것이다.
②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그 대신에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나에게, 나에게 기도하라"(슥 7:5, 6).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보다는 오히려 사람에게 기도하였다. 그들의 기도의 형식이 어떻든 간에 그 의도는 사람의 칭찬을 구걸하거나 그들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 기도하라. 그것으로 만족하라. 기꺼이 경청하고 응답하려고 하시며, 너를 동정하고 도와주며 구원해 주시려는 네 아버지이신 그에게 기도하라. 은밀한 곳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은밀한 기도를 할 때 우리는 모든 장소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 밖의 아무도 골방에 없을 때 거기에 계신다. 특히 네가 "그를 부를 때" 네 곁에 계시는 곳이 골방이다. "은밀한" 기도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께 그의 우주적인 존재의 영광을 돌리며(행 17:24), 그 위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2) 이에 대해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격려.
① 네 아버지는 "은밀한 중에 보신다." 아무도 너를 칭찬하지 않고 너를 바라보지 않을 때에도, 그의 눈은 너를 받아들이기 위해 너를 주시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다니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내가 보았노라"고 말씀하셨다(요 1:48). 그는 어떤 거리, 어떤 집에서 기도하는 바울을 보셨다(행 9:11). 하나님이 모르시는 비밀이나 일이 있을 수 없다. 그는 그것을 주목하고 계신다.
② 그는 "공개적으로 갚으실 것이다"(한글 성경과 다소 다름). 그들은 공개적으로 행한 자기 상을 받았다. 너는 그것을 은밀한 중에 행한 네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상"이라고 불리웠다. 그러나 "빛"으로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는다. 구걸에는 무슨 공로가 있을 수 있는가? 그 상은 공개될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영예스럽게 소유하게 될 것이다. 공개적인 상은 외식하는 자들이 즐겨하는 상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위해 기다리는 인내심을 가지지 못하였다. 때로 은밀한 기도는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대한 주목할 만한 응답에 의해 공개적으로 보상을 받기도 한다. 그것은 그들의 원수들의 양심에 하나님의 기도하는 사람들을 나타낸다. 어쨌든 큰 심판 날에는 공개적인 보상이 있을 것이며, 그때에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큰 중재자(간구자)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모든 동네 사람들 앞에서" 자기 상을 이미 받았으며, 그것은 "섬광이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상이다." 참된 기독자는 그들의 상을 "모든 세계"와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받게 될 것인데, 그 상은 "영광의 심히 중한 것"(큰 영광)이 될 것이다.
Ⅱ. 우리는 기도할 때 "중언부언"해서는 안 된다(7, 8절). 기도의 생명이 "영혼을 고양(高揚)시키며 마음을 쏟아 붓는 것"이기는 하지만 기도할 때는 말이 필요하며 특히 공동 기도에는 말을 해야 한다. 아마도 주님께서는 여기에서 특히 공동 기도에 대해 말씀
하신 것 같다. 왜냐하면 앞에서는 "너는 기도할 때에"라고 했지만 여기에서는 "너희가 기도할 때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다음에 뒤따라오는 주기도문은 공동 기도이다. 공동 기도를 할 때 다른 사람들의 입의 역할을 대신하는 자는 대개 말이나 표현에 있어서 겉치레를 하려는 시험을 받게 된다. 이것에 대해 여기에 경고되어 있다. 즉 혼자 있거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거나 "중언부언하지 말라." 바리새인들은 이것에 영향을 받아 "길게 기도하였으며"(마 23:14), 그들의 모든 관심사는 기도를 길게 하는 것이었다.
1. 여기에서 책망되고 정죄 된 "잘못"이 무엇인가? 그것은 기도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단지 입만을 놀려대는 것이며, 영혼의 예배가 아닌 입술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여기에서 두 가지 단어, 곧 "중언부언" (Battologva)과 "많은 말"(Poluvlogiva)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1) "중언부언" ─ 같은 말의 중복(tautology), 말을 더듬거림(battology), 마치 battus, sub illirmfjsep montibus erant, erant sub montiburmfjsep illis 등과 같이 아무런 뜻도 없이 제멋대로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인데, 이것은 바보가 군말을 지껄이는 것과 같다. 즉 "우매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자기 뒷일을 말 할 자가 누구이냐?"(전 10:14) 이것은 대화할 때 버릇없고 매스꺼운 말이다. 하물며 하나님과 이야기할 때는 얼마나 더 하겠느냐. 여기에서 정죄 되고 있는 것은 기도할 때 되풀이하는 모든 반복을 총칭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공연한 반복(중언부언)이다. 그리스도 자신도 일상적인 열심과 성의를 넘어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눅 22:44). 다니엘도 마찬가지였다(단 9:18, 19). 또한 같은 말을 매우 아름답게 반복한 곳도 있다(시 136:). 우리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일으키기 위해 같은 말을 사용할 수 있다.
교황제 옹호자들처럼 염주로 "아베 마리아"나 "우리 아버지"(paternosters)를 아무런 뜻도 없이 계속적으로 되풀이하는 미신적인 반복이나, 같은 일에 대해 무미건조하게 되풀이하여 언급하는 것, 단지 기도를 오래 끌며 기도하는 것, 실제로는 아무런 느낌도 없으면서 자신의 감정이나 애정을 과시해 보이려는 것 ─ 이러한 것들이 여기에 정죄 된 중언부언이다. 우리가 많이 말하려 할지라도 적절하게 많이 말할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과 모든 현명한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든다.
(2) "많이 말하는 것"은 기도할 때 장황하게 꾸미는 태도로서 자만이나 미신에서 비롯되며, 또한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 의해 알려지고 설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로서 어리석음과 무례함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들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오래 하는 기도가 모두 금지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온 밤을 새며 기도하셨다(눅 6:12). 솔로몬의 기도는 긴 기도였다. 우리의 용건이나 감정이 특별하다면 때로 오래할 필요가 있다. 마치 오래 기도해야만 하나님을 더 즐겁게 하며 효과가 있는 것처럼 오래 기도하는 것만이 여기에서 정죄되었을 따름이다. 정죄 되는 기도는 "많이 하는 기도"가 아니다. 아니, 우리는 "항상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그러나 많이 "말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오류는 우리가 단지 기도를 "말할 때" 범할 수 있으며, "기도할 때"는 범할 위험성이 없다. 이 경고는 솔로몬에 의해 표현되어 있는데, 즉 "말을 적게 하라"(전 5:2). 다시 말하면 사려 깊고 신중하게 말하라.
"너는 말씀을 가지라"(호 14:2). "말을 택하라"(욥 9:14). 또한 마음에 또한 처음 생각을 모두 말하지는 말라.
2. 이러한 기도를 하지 말라는 이유가 무엇인가?
(1) 이것은 "이방인들이 하는"방법이다.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神)을 예배하는 것같이 기독자가 그들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기독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이방인은 자연의 빛에 의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예배의 대상에 관한 그들의 상상에 있어서 헛되게 되어버렸으며, 그들이 예배하는 태도나 특히 여기에 있는 실예에서 그렇게 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전혀 그들과 같은 분으로 생각하였으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말한 것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또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도록 하기 위하여 그에게 많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마치 하나님은 연약하고 무지하며 간구하기가 매우 어려운 분인 것처럼 생각하였다. 그래서 바알의 제사장들은 아침부터 거의 저녁까지, "오 바알이여, 응답하소서. 오 바알이여, 응답하소서"라고 중언부언하면서 발악을 했다. 그들은 공연한 간구를 드렸다. 그러나 엘리야는 간단한 기도를 드림으로써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장작을 쌓은 것을 불사르게 하고 물을 말리게 하였다(왕상 18:26, 36). 기도할 때 아무리 입술을 놀린다 해도, 그것이 전부라면 헛수고가 되고 말 것이다.
(2) "네 방법을 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께서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이렇게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기도할 때 필요가 없다고 하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도에 의해 네가 그를 필요로 한다는 것과 그를 신뢰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또한 그의 약속을 간구하기를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의 사정을 털어놓으며 네 마음을 그 앞에 쏟아 놓아라. 그리고 그것을 그에게 남겨두라."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보자.
① 우리가 기도드리는 대상인 하나님은 창조와 계약에 의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그러므로 그에게 대한 우리의 요청은 용이하고 자연스러우며 꾸밈이 없어야 한다. 어린 자녀는 그들의 부모에게 어떤 것을 요구할 때 말을 길게 할 필요가 없다. "아빠, 아빠"하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사랑과 존경과 신뢰로서 그에게 다가가자. 그리고 그때에 그들은 많은 말들을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양자의 영에 의해 "아바, 아버지"라고 올바르게 말하라고 가르쳐지고 있다.
② 그는 우리 자신보다 우리의 처지와 필요를 더 잘 아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아신다." 그의 눈은 자기 백성의 필요를 관찰하시기 위해 세상의 이곳 저곳으로 움직이고 있다(대하 16:9). 또한 그는 종종 "우리가 부르기 전"에 응답하시며(사 65:24), "우리가 요구한 것 이상으로" 주신다(엡 3:20). 만일 그가 자기 백성에게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주시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그것이 그들에게 필요가 없거나 그들에게 좋지 않은 것임을 하나님께서 잘 아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보다 더 우리의 사정을 잘 판단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처지를 나타내는 데 말을 길게 하거나 많이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 말할 수 있는 것보다 그것을 더 잘 아신다. 그는 단지 그것을 "우리에게서" 아신다(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것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그에게 말씀드릴 때 우리는 그에게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나이다"(시 38:9)라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하거나 길게 하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지는 않으신다. 가장 능력 있는 간구는 "말할 수 없는 탄식"(롬 8:26)으로 하는 기도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명령을 내려서는 안 되며 요청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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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23:23, 24] 천지에 충만하신하나님 임재
2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내가 가까운 곳의 하나님이며, 먼 곳의 하나님은 아닌 줄 아느냐? 나 주의 말이다.///[NASB]렘 23:23 ""Am I a God who is near,'' declares the LORD, ""And not a God far off? [RSV]렘 23:23 "Am I a God at hand, says the LORD, and not a God afar off? /[NRSV]렘 23:23 Am I a God near by, says the LORD, and not a God far off? /[NKJV]렘 23:23 "Am I a God near at hand," says the LORD, "And not a God afar off? /[NIV]렘 23:23 "Am I only a God nearby," declares the LORD, "and not a God far away? /[BBE]렘 23:23 Am I only a God who is near, says the Lord, and not a God at a distance? 
2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사람이 제아무리 은밀한 곳에 숨는다고 하여도, 그는 내 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 주의 말이다. 내가 하늘과 땅 어디에나 있는 줄을 모르느냐?"///[NASB]렘 23:24 ""Can a man hide himself in hiding places So I do not see him?'' declares the LORD. "" Do I not fill the heavens and the earth?'' declares the LORD. /[NRSV]렘 23:24 Who can hide in secret places so that I cannot see them? says the LORD. Do I not fill heaven and earth? says the LORD. /[NKJV]렘 23:24 Can anyone hide himself in secret places, So I shall not see him?" says the LORD; "Do I not fill heaven and earth?" says the LORD. /[NIV]렘 23:24 Can anyone hide in secret places so that I cannot see him?" declares the LORD. "Do not I fill heaven and earth?" declares the LORD. /[BBE]렘 23:24 In what secret place may a man take cover without my seeing him? says the Lord. Is there any place in heaven or earth where I am not? says the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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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Glory) ....쉐키나((성도안에, 예배하는 성도 가운데, 성소에 거주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영광)), 카보드((지존자/창조주하나님의 지고지선-존귀와 권능)), 독사((하나님 형상/영광의 광채-어떠하심의 가시적 현현....예수그리스도))
신의 현현에서 나타난 광채 또는 빛남을 말한다. 하나님의 근본적인 성격 또는 그것의 현현을 말할 때 사용된다. KJV은 25개의 히브리 단어를 ‘영광’으로 번역하고 있다.
==구약에서의 영광: 히브리어 ‘카보드’(kabod)
카보드의 기본 의미는 ‘무겁다’인데, 문자적 의미로는 드물게 사용되고 오히려 비유적인 용법으로 더 많이 사용된다. ‘명예로운, 존경스러운, 영광스러운, 미화된’ 등이 일반적인 번역이다. 시편 49:16의 ‘영광’, 이사야 8:7의 ‘위력(능력, 권능)’, 그리고 빌립보서 2:29의 ‘존귀’는 영광의 근원이 된다. 인간은 하나님이 그의 형상으로 만드셨고 모든 생물을 다스릴 권리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영화와 존귀의 관(시 8:5)을 씌우셨기 때문에 그 중요함이 더 잘 나타난다. 
하나님에 대해 사용될 때 이 단어는 하나님에 대한 인상을 심어 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 단어는 그의 자기 현시를 지칭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역사하심에 나타난다(출 14:4; 29:43). 시편 19편은 하나님의 영광이 하늘의 보다 높은 영역들에 속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그러나 비록 하늘에 거하고 계시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만남의 장막으로 내려오신다. 출애굽기 40:34 이하에서 구름이 회막을 덮고 하나님의 영광이 회막의 내부를 가득 채웠으며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개인적인 환상들을 보았다(겔 1:4).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이름과도 결부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을 다른 신에게 주기를 거부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은 또한 시편 72:19; 57:5, 11; 이사야 66:18-19에서처럼 소망의 주제가 되기도 한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구원 행위와 관련된다(사 40:3). 이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영광이 되실 것이고(슥 2:8-9)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에 속하게 될 것이다(사 43:7).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에 대한 유일한 반응은 예배이다. 우리는 그분의 임재 앞에, 그리고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 인해 찬양해야 한다(대상 16:10, 28; 시 29:1). 
==신약에 나타난 영광 : 헬라어 ‘독사’(doxa)로 표현
....‘독사’(doxa)는 ‘의견’이라는 의미가 있으나 그런 의미로는 신약에서 사용되지 않았다. 
‘명예’ 혹은 ‘영광’은 누가복음 14:10, 고린도전서 11:15, 데살로니가전서 2:6 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광채’는 마태복음 4:8; 6:29과 요한계시록 21:24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고린도전서 11:7에서 ‘영광’ 혹은 ‘형상’이라는 의미가 발견되기도 한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명예, 광휘, 능력, 광채가 포함될 수 있기는 하지만 항상 표현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 양식이다. 가시적 현현이라는 요소를 여러 가지로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는 드러난다(눅 2:9; 9:31-32; 행 22:11; 계 15:8; 21:23).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은 이미 실재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행 12:23)이나 찬양하는 것(눅 2:14)을 의미한다.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으로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하나님의 영광이 변형된 모습으로 보이는 광채로 나타났다(눅 9:31; 32). 사복음서에서 영광은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격을 나타내는데 그의 공생애,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이다(요 17:22, 24; 롬 6:4). 요한복음 1:14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로 서술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영광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의 광채는 모든 사람을 비출 것이다(골 3:4; 딤후 1:6-10; 딛 2:13).
신약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말하고 있다. 즉 죄 때문에 우리의 인격과 행위가 하나님을 드러내는 데 실패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성도는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고 하면서 영광에 동참할 수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은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5:8). 즉 하나님은 성령이 거하는 사람들의 모든 삶과 행동에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현존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특성과 인격을 나타내실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믿음과 찬양으로 반응하며, 또한 지금 여기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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