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3.03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보수하시는 하나님 에스겔성전 평화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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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나케 : 매를 들어 치시는/벌하시는 하나님 (겔 7:9)//여호와 엘 게물로트 : 보수하시는/보복의 하나님 (렘51:56)


http://blog.daum.net/jk_park1128/199425  에스겔이 본 성전이 주는 意味 중의 둘 


시편 94편 [개역개정]

1.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

2.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

3.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

4.그들이 마구 지껄이며 오만하게 떠들며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 다 자만하나이다

5.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백성을 짓밟으며 주의 소유를 곤고하게 하며

6.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들을 살해하며

7.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하나이다

8.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

9.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10.뭇 백성을 징벌하시는 이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이가 징벌하지 아니하시랴

11.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12.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13.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을 피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

14,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

15.심판이 의로 돌아가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따르리로다

16.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행악자들을 치며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악행하는 자들을 칠까

17.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

18.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19.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20.율례를 빙자하고 재난을 꾸미는 악한 재판장이 어찌 주와 어울리리이까

21.그들이 모여 의인의 영혼을 치려 하며 무죄한 자를 정죄하여 피를 흘리려 하나

22.여호와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

23.그들의 죄악을 그들에게로 되돌리시며 그들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끊으시리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 그들을 끊으시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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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자에 대해(시 94:1-11)

Ⅰ. 하나님의 백성을 잔인하게 압제하는 자들에 대한 호소가 하나님께 나열되고 있다(1-2절). 이것은 그들에게 공포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의 학대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로 호소하는 까닭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대적들에게 복수해 주시도록 주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그런데 하나님이 속히 보수해 주시지 않겠는가?(눅 18:3, 7) 여기서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그들은 이 호소를 드리면서 자기들의 신앙을 격려하기 위해 하나님을 부르는 칭호: “여호와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세계를 판단하시는 주여!” 우리가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다.

(1) 그는 판단하시는 주이기 때문이다. 그는 재판관이시며, 최고의 재판관이시고, 오직 한 분이신 재판관이시다. 인간의 모든 판단은 그에게서 나온다. 법을 주시는 자는 그 법의 규칙을 따라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결을 내리신다. 그는 심판을 위해 자기 보좌를 예비하셨다. 그는 사직 당국자들을 임명하셔서 자기의 보수자가 되게 하셨다(롬 13:4). 그는 보수의 총책임자여서 모든 치안판사들은 그에게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보좌는 무죄한 피압박자의 영원한 피난처(법률 용어로 “최후의 의지수단”, dernier ressort)다. 그는 우주적 재판관이시다. 이 도시나 이 나라의 재판관이 아니라, 세계의 재판관 곧 “세계를 판단하시는 주”이시다. 그의 사법관할에서 면제받는 자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께 드리는 호소는 “그것이 법적으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coram non judice)는 이유로 반대당하지도 않는다.

(2) 하나님은 정당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릇된 자에게 복수할 권세를 가지신다. 그것은 그의 본성이고 속성이며 명예로, 여기에 나오는 칭호에도 암시되고 있다.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반복한 것은 강조를 위해서다. “하나님이여, 보수는 주께 속하나이다. 당신께서는 항상 힘이 정의를 이기도록 놔두시렵니까?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왜 우리가 직접 복수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좋은 이유다. 하나님은 “보수는 내게 속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특권을 빼앗고, 그의 보좌에 올라서려는 것은 대담하고 어처구니없는 망상이다(롬 2:19). 들키지 않으려고 은밀한 수단으로 행악하든지 아니면 제지받지 않으려고 강압적 수단으로 학대하든지간에 학대자들은 복수의 하나님이 계심을 경종으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들을 불러 따지실 것이다. 그리고 묵묵히 학대를 참으면서 의로운 재판관에게 맡기는 자들은 이로써 용기를 얻어야 한다.

2. 그들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1) 하나님께서 스스로 영화롭게 하사 자기 이름을 존귀하게 하시리라는 것. 악한 박해자들은 하나님이 철수하시고, 세계를 버리셨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여, 빛을 비추소서”(스스로 나타내소서). “저들에게 주가 계시다는 것과 주는 주께 정직한 자들을 위해 강함을 즉시 나타내신다는 것을 알리소서.” 원수들은 하나님 백성이 정복되었으므로 하나님도 정복당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주의 힘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당신 자신을 들어올리사 보이게 하시며, 경외 받게 하소서. 주의 이름이 짓밟히고 영락하지 않게 하소서.”

(2) 하나님께서 학대자들을 낮추시리라는 것. “교만한 자에게 상당한 형벌을 주소서. 그들의 모든 무례와 그들이 주의 백성에게 입힌 모든 피해에 대해 그들과 셈하소서.” 이 기도는 모든 강포의 자식들에게 공포감을 주는 예언이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공로대로 그들을 다루실 것이다.

Ⅱ. 압제자의 잔혹과 교만에 대해 하나님께 드리는 겸손한 호소와 충간(3-6절). 다음에서 그들이 호소하는 것은 무엇인지 관찰하자.

1. 그들이 호소하는 대적들의 특성. 그 원수들은 악하다. 그들은 “죄악을 행하는 자”이다. 그 원수들은 악하며 매우 나쁘다. 그래서 자기들을 부끄럽게 하고, 정죄하는 선의 소유자들을 미워한다. 무죄한 자에게 잔인하며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참으로 악하고, 또 극히 나쁜 죄악을 행하는 자이며, 모든 존귀와 미덕을 상실한 자다.

2. 그 원수들의 거만하고 야만적인 태도.

(1) 그들은 오만 무례해 자화자찬하기를 즐거워한다. 그들은 큰소리치며 건방지게 말한다. 그들은 뻐긴다. 마치 입과 손이 다 자기들 마음대로 움직이기라도 하는 듯이 의기양양하며, 자기들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 아무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 듯이 우쭐댄다. 그들은 하나님과 신앙을 참소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의기양양해하며 자부심이 강한 자들, 즉 스스로를 높여 말하는 자들은 남을 혹평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불경건한 죄인들이 하나님과 그의 진리, 그의 길과 백성에 대해 악평하지만, 그 모든 악평에 대해 계산할 날이 이를 것이다(유 15).

(2) 그들은 경건치 않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속한다는 이유로 멸망시키기를 기뻐한다(5절). “여호와여, 저희가 주의 백성을 파쇄하며, 그들의 회중과 재산과 가족과 개인을 다 산산조각 내어 온갖 수단을 다해 주의 기업을 괴롭히며 슬프게 하고 분쇄하며 망치고 뿌리째 뽑아버리나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의 기업이며 하나님을 인해 그들을 미워하고 그 파멸을 도모하는 자들이 있다.그러므로 우리가 교회를 위해 중보할 때에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휼륭한 간구이다. “주여, 이 교회는 주의 것입니다. 주께서는 거기에 소유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교회는 주의 기업입니다. 그래서 교회로부터는 이 세상에서 주가 받으시는 영광의 세(貰)가 나옵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이 악인들이 교회를 이처럼 짓밟도록 놔두시렵니까?”

(3) 그들은 비인도적이어서 스스로 도울 능력이 없는 자들을 학대함으로써 쾌감을 얻는다(6절). 그들은 과부와 나그네를 학대하고 가난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죽이기도 한다. 또 그들은 고아를 돌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먹이로 삼으며 살해하기도 한다. 약한 고아들은 때때로 그 생명이 그들의 손에 좌우된다. 그들은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를 피해로부터 보호해야 마땅함에도, 도리어 극히 많은 해를 끼친다.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고아나 과부를 돌보신다는 이유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인간의 자손이 이처럼 야만스러울 것이라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3. 박해의 계속에 관해 하나님께 드리는 온당한 호소가 나온다. “여호와여, 그들이 언제까지(두 번 반복됨), 이렇게 행동할 것입니까? 악인의 악이 언제 종식될 것입니까?”

Ⅲ. 박해자들에게서는 무신론의 주장이 나타나며, 그런 주장에 대한 충고가 여기 나온다.

1. 무신론적 세상이 드러나고 있다(7절). “그들이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리라 하나이다.” 그들의 악의 부르짖음이 매우 크고 높더라도, 그들이 본능의 지식과 양심의 명령에 반역해 행동하면서도 대담하게 “여호와가 보지 못하리라. 그는 작은 잘못을 못 본 체할 뿐만 아니라, 큰 과오에도 눈감는다”고 말한다. 아니면, 그들은 자기들이 정의와 신앙의 구실 아래 너무나 감쪽같이 처리했으므로 살인이라 판단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비록 그 백성이 하나님께 영향력을 갖는다고 하나, 야곱의 하나님은 그 일을 정의나 자기 백성에게 배치되는 일로 간주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결코 그 일로 우리를 불러 따지지 않으실 것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통치를 부인하며, 자기 백성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을 희롱하고, 심판을 무시한다.

2. 그들은 터무니없이 어리석다고 경고 받는다. 사신 하나님 여호와가 보지 못하고, 야곱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피해를 주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자는 그 이름이 나발(Nabal)이어서 그에게는 미련함이 있다. 그럼에도 여기서 지당한 말로 타이르는 것은 그의 혼란을 방지하고 각성시키며 회심시키기 위해서다(8절). “백성 중 우준한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이성을 인도자로 삼으라.” 무신론자들은 비록 재사와 철현과 책략가로 자처하더라도 백성 중 참으로 우준한 자임을 명심하자. 만일 그들이 생각만 한다면 믿게 될 터였다. 하나님은 마치 오랜 시간이 걸려야 그들이 인간다운 인간이 되며, 깨달음과 깊음을 갖추게 될 것으로 생각하기라도 하듯 말씀하신다.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꼬. 우매자들아, 너희가 언제 지혜롭게 되어 하나님이 너희 모든 말과 행동을 보시며 생각하신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에 따라 하나님께 책임 있는 존재로서 말하고 행동하게 될 것인가?” 그들만큼 악한 자는 없지만, 그들을 교화시키고 개혁시키기 위한 수단이 사용되고 있으며, 그토록 야만적이고 미련한 자들도 없지만, 그들이 지혜롭게 될지 안 될지를 시험해 봐야 한다는 데 주목하자. 생명이 있는 동안 소망은 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그 공의를 의심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증명하기 위해 시편 저자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댄다.

(1) 창조의 업적(9절). 인체의 형성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동시에 하나님이 초월적으로 무한하게 완전한 분이시라는 것도 동시에 증명한다. “귀를 지으신(원의, “심으신”―역주)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귀는 나무가 땅에 심긴 것처럼 머리에 심어져 있다. 물론 그는 우리보다 더 많이, 더 잘 들을 수 있으실 것이다.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해부학자는 눈이 신체 중 어느 부분보다 기묘하게 만들어져 있음을 알며, 해부도로써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런 하나님께서 온전하지 못한 피조물에게 그 온전함을 주실 수 없으며, 주려고 아니하실 것인가?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① 자연계의 모든 능력은 자연의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출 4:11).

②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을 통해 하나님의 지식으로 크게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신체와 감각기관을 앎으로써 하나님을 인지할 수 있다.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있다면 하나님이야 말해 무엇하랴! 더욱이 우리는 우리의 영혼과 그 고귀한 기능을 앎으로써 하나님을 인지할 수 있다. 이방 신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처럼 눈과 귀를 갖고 계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보기도 하시고 듣기도 하신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시력과 청력을 하나님께로부터 얻으며, 그 사용에 대해서 하나님께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2) 섭리의 업적(10절). 다신교와 우상숭배에 대해 열방을 징벌하시는 자가 자기 백성의 무신론과 독신(瀆神)을 징치하지 않으시겠는가? 서로 학대하며 압제한다는 이유로 인간들을 징계하시는 분이, 그들을 교도하시지 않으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고백하며,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의 참 자녀 된 자들을 핍박하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데, 우리가 그의 징치 아래 있지 않을 것인가? 그는 열방의 왕으로서 주목하시는데, 하물며 야곱의 하나님으로서 눈여겨보시지 않으실 것인가? 하몬드 박사(Dr. Hammond)는 이에 대해 또 다른 견해를 그럴 듯하게 피력한다. “열방을 교훈하시는 자가 징치하지 아니하시랴! 즉, 열방에게 자기 법을 주시는 이가 그들을 자기 법대로 판단하지 않으실 것이며, 그 법의 위반에 대해 그들과 셈하지 아니하시랴? 법에 대한 심판이 없다면 그 법은 헛된 것이다.” 징치와 교훈이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틀림없다. 징치는 훈계를 목적으로 하며, 훈계는 징치와 동행하는 까닭이다.

(3) 은혜의 업적.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자가 알지 아니하시랴?”(KJV) 그는 자연의 하나님으로서 이성의 빛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은혜의 하나님으로서 계시의 빛도 주셨고, 참 지혜와 명철이 무엇인지도 사람에게 보여주셨다. 이렇게 하시는 분이 모르실 리가 있겠는가?(욥 28:23, 28) 시내의 흐름은 물 근원이 가득 차 있다는 증거다. 모든 지식이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라면, 하나님께 모든 지식이 있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한 일반적 교리로부터 시편 저자는 “여호와가 보지 못하리라. 그는 우리 행위를 인식하지 못하리라”고 말한 무신론자들을 논박할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조차 인식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고 있다(11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①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 특히 하나님이 악인의 악을 묵과하실 것이라는 인간의 생각을 아시며, 그런 생각이 헛되다는 것도 아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헛된 망상으로 죄 가운데서 자만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으신다.

②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생각을 아시며, 그 생각들이 대부분 헛됨을 아신다.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과 상상이 악하며, 끊임없이 악할 따름이란 것도 아신다. 심지어 선한 생각에조차 변덕과 불안정한 점이 있어서 허무하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특별히 우리 생각을 주목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생각을 엄하게 감시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생각은 하나님께 대한 말이며, 허무한 생각은 하나님을 노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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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받는 성도의 위로(시 94:12-23)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자에게 환난을 선고했으므로 여기서는 고난 당한 자들에게 안식을 확신시켜 준다(살후 1:6-7 참조). 그는 고난받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약속과 자신의 체험으로 위로의 말을 해준다.

Ⅰ.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하는 말. 하나님의 약속은 그들을 불행에서 건져낼 뿐만 아니라, 행복을 확보해 준다(2절). “주께서 징벌하시는 자는 복이 있다.” 시편 저자는 여기서 고난을 도구로 보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한다. 하나님의 손길은 환난에 다른 이름을 부여하며, 전혀 색다른 해석을 가한다. 원수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파쇄한다(5절). 그들이 노리는 것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진상은 하나님이 징계하신다는 것이다. 아비가 그 기뻐하는 자식을 징계하듯,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자기 백성을 징치하신다. 또 박해자들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막대기와 채찍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다”(사 10:5-7). 이제 여기서 약속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백성은 그 고난으로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징계하실 때는 교육하시는 때며, 이처럼 하나님의 훈련 아래 있는 자는 복이 있다. 하나님처럼 가르치는 자는 아무도 없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성도의 고난은 그들의 훈계와 개혁, 개선을 의도하는 아버지의 징벌이다.

(2) 섭리의 책망에 말씀의 가르침과 성령이 동반될 때는 그 사람이 복되다는 증거다. 그것은 곧 아들로 삼는다는 표지이며 성화시키는 수단인 까닭에서다. 우리는 징계 받을 때 교훈을 받기 위해 기도해야 하며, 섭리의 가장 좋은 강해자로서 하나님의 법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유익을 주는 것은 징계 그 자체가 아니라, 징계의 동반자이며 해설자인 교훈이다.

2. 그들은 자기들의 고난의 참 의미를 간파하게 될 것이다(13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에 평안을 주시리이다.”

(1) 역경의 날이 지나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평안이 있다. 환난의 날이 비록 많고 길지 모르나 때가 되면 끝이 날 것이며, 언제까지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환난을 보내시는 분은 평안도 보내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괴롭히신 기간대로 그들을 위로하시기 위해서다.

(2)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자기 백성을 가르치시는 것은 그들을 구원에 예비시키시며, 환난에 있는 그들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들을 개혁시킴으로써 구원을 받게 하며, 제 구실을 다한 후 환난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3. 그들은 자기들을 괴롭히던 자들의 파멸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약속된 일이다. 이 일은 그들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다.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또는 파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평안을 주시며, 박해자들에게는 화살을 마련하신다.

4. 그들은 비록 실패를 당하더라도 결코 버림당하지는 않을 것이다(14절). 하나님의 백성은 비록 고난받더라도 이 점을 확신해야 한다. 그들의 친구들은 어떤 행동을 하든지간에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며, 자기의 언약이나 돌보심 밖으로 내쫓지 않으신다. 그들은 그의 기업이기에 그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신다. 그는 그들에 대한 자기 권리나 소유권을 내놓지 않는다. 바울은 이 점을 위로로 삼았다(롬 11:1).

5. 사태는 비록 악화되어 있지만 그들은 바로잡을 것이며, 그들이 비록 정로에서 벗어나 있더라도 올바른 옛 길로 돌아갈 것이다(15절). “판단이 의로 돌아가리라. 무질서한 듯이 보이는 섭리도 교정될 것이다”(그러나 실제로 섭리가 무질서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판단, 즉 그의 통치는 때때로 의로부터 멀리 있는 듯이 보인다. 악인이 번영하는 반면 극히 착한 사람들이 무척 악한 대접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판단은 의로 돌아갈 것이다. 이 세상에서나 아니면 모든 것을 올바로 정리할 저 큰 날의 심판에서 다시 의로 돌아갈 것이다. 그때에는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그것을 좇을 것이다. 그들은 찬송과 온전한 만족심으로 따를 것이다. 그들은 번영하고 형통한 상태로 돌아갈 것이며, 미미한 데서 빛을 비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할 것이며, 적당한 애착심으로 그 모든 움직임을 주시할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를 따라 행할 것이다(호 11:10). 하몬드 박사는 이 사실이 괄목할 만하게 성취된 것은 맨 먼저 예루살렘이 멸망한 때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로마는 그 다음에 멸망했으며, 그로써 교회는 평안을 얻었다. 그때 “판단이 의로 돌아갔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자비와 인자와 은총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전에 짓밟혔던 만큼 많은 애호를 받은 것이다.

Ⅱ. 그 자신의 경험과 관찰에서 위로를 말한다.

1. 그와 그의 친구들은 잔인하고 방자한 인간들에게 압제를 받았다. 그들은 수중에 권세를 잡고, 그 권세로 선한 자들을 학대했다. 그들은 “행악자”이며,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었다(16절). 그들은 온갖 불경건과 부도덕에 투신했고, 악한 재판장이었다(“그들의 보좌는 악의 보좌였다”─KJV). 그들의 위엄은 죄악을 호도하는 데 이용되었고, 그들의 권세는 죄를 후원하고 그들의 악한 계책을 성사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행악자에게 공포가 되고 선행자에게는 보호와 칭찬이 되어야 할 재판장 자리가 불의의 자리와 악의 피난처가 된다는 것은 유감천만이다. 그것은 모략 회의로 잔해를 도모하며, 최고 권력으로 시행하고, 또 법으로 바꾸는 악의 보좌이다. 불의는 인간의 법이 대항해 와도 겁이 없으며, 법은 흔히 악을 효과적으로 억제하기에는 너무 무력한 것으로 판명된다. 더구나 악이 법의 비호를 받을 때는 얼마나 무례하며, 얼마나 해를 끼치는가! 악이 법에 의해 시행될 때는 더 나아지기는커녕 더 악화된다. 법대로 그 일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변명이 되지 않는다. 이 행악자들은 율례를 빙자하고 잔해를 도모했으므로 그 법의 시행을 위해 애를 쓴다. 그들은 모여 의인의 영혼을 치려 한다. 의인들은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행위를 감히 지키려 하지 않았다(미 6:16). 그러나 그들은 법을 위반한다는 이유로 무죄자를 정죄해 피를 흘리려 했다. 다니엘의 대적들의 예를 보자. 그들은 기도를 금지하는 불경건한 칙령을 얻어내었으나(단 6:7), 다니엘이 순종하지 않자 다니엘을 치려고 모였고(11절), 무죄한 그를 정죄해 사자에게 던졌다. 이와 같이, 인류의 가장 훌륭한 은인이 법과 정의란 미명 아래 가장 악한 행위자로 처단된 일은 비일비재하다.

2. 그들이 당하던 압제는 그들을 구박했고, 그들의 정신도 억압했다. 고난받는 성도는 설사 핍박받을 때 당황해 자신의 곤경을 느끼더라도 절망하지 말 일이다. 시편 저자도 마찬가지다. “내 혼이 벌써 적막 중에 처하였으리라”(17절). 그는 어쩔 줄 모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는 자기 생명이 끝날 줄로 생각하고, 적막한 땅, 곧 묘지에 내려갈 준비를 했다. 사도 바울도 같은 경우에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후 1:8-9)고 했다. 시편 저자는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18절). 나는 회복의 가망이 없고, 치유 불가능이다. 나는 엎드러지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언젠가 사울의 손에 망하리라. 내 소망도 끊어졌다. 나는 전처럼 내 믿음의 견고한 디딤돌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73:2 참조). 그는 자기 처지에 대해 복잡한 생각을 많이 했다. 그는 자신의 처지에서 어떻게 어떤 경로를 밟아야 할지,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많은 생각을 했다.

3. 그들은 이 궁지에서 구조와 도움을 모색했다.

(1) 그들은 주위에서 도움을 찾았으나 실망에 부딪혔다(16절). “누가 나를 위해 일어나서 행악자를 칠꼬? 내게 대한 사랑으로 나를 위해 나타날 친구가 있는가? 불의에 대한 경건한 분노심으로 나의 피해를 변호해 줄 정의감에 불타는 친구가 있는가?” 그는 돌아다보았지만 건져줄 자는 아무도 없었고, 후원할 자도 없었다. 압제자의 편에 권력이 있을 때 피압제자에게 위로자가 없고, 그들을 감히 인정하거나 좋은 말을 들려줄 자가 없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전 4:1). 사도 바울이 네로의 악한 보좌 앞에 끌려나갔을 때, 그를 위해 변명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딤후 4:16).

(2) 그들은 위로부터 도움을 기대했다(20절). 그들은 겸손히 하나님께 간했다. “여호와여, 악한 재판장이 어찌 주와 교제하리이까? 주께서는 악한 중에 있는 폭군을 비호하며, 후원하시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재판장의 자리가 정의의 보좌가 되고, 세운 본래 목적에 부응할 때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진다. 통치자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다스리며, 그들이 하나님 대신 다스릴 때 그들의 판단은 하나님의 판단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을 자기 사역자로 인정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그들에게 항거하며, 그들을 치려고 궐기하면 스스로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보좌가 악한 자리가 될 때에는 더 이상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한다. 공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불의의 후견자가 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비록 왕이나 권좌에 앉은 자들, 아니 다윗 집의 위에 앉은 이들의 불의라 해도 그렇다.

4.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구조와 구원을 얻었다. 하나님만이 그들의 구원자이셨다. 다른 친구들이 다 거절하고 실망시켰을 때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신실하고 강력한 친구가 되어주셨다. 그리고 고난받는 하나님의 모든 성도들에게는 그를 신뢰할 것이 권장되었다.

(1) 하나님은 절대절명의 순간에 도우신다(17절). “내가 거의 적막 중에 처할 찰나 여호와께서 나의 도움이 되셨고, 나를 살리셨으며, 내 마음을 소생시키셨다. 만일 내가 그를 신뢰하고, 그에게서 구원을 기대함으로써 그를 나의 도움으로 삼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내 영혼을 소유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산 까닭에 내 머리는 물 위로 나오게 되었고, 호흡을 하게 되었으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2) 하나님의 선하심은 쇠약해 가는 심령에게 큰 지주가 된다(18절). “여호와여, 죄와 파멸과 절망으로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나로 실족치 않게 하시며, 나를 높은 위에서 떨어뜨리려(62:4) 도모하는 자들의 궤계를 좌절시키셨나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 지탱을 위해 하나님의 권능뿐만 아니라, 그의 긍휼에도 은혜를 입고 있다. “주의 인자하심, 즉 주의 자비의 은사와 인자에 대한 나의 소망이 나를 붙들었나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좌우편을 돌아봐도 붙들어줄 자가 아무도 없을 때, 하나님의 우편 손이 그들을 떠받쳐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지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무력성을 의식하고, 자기 힘으로 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하나님께 나아와 인정하고, 우리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해야 한다.

(3) 하나님의 위로는 곤고한 심령의 효과적인 치료제이다(19절). “내 속에 생각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나이다. 내 마음의 생각이 군중처럼 소란스럽고 혼잡할 때, 엎치락뒤치락 슬프고 애타고 소심한 많은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날 때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나이다. 주의 위안은 아주 적절한 때에 나의 불안한 생각을 잠잠하게 하며,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하나이다.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습니다.” 영혼이 우울한 생각으로 번뇌할 때, 세상의 위안물은 거의 아무런 즐거움도 주지 못한다. 무거운 마음에는 역겨운 노래가 될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는 영혼에 도달하며, 마음을 즐겁게 할 뿐 아니라, 평화도 가져다준다. 이 평화와 즐거움은 세상의 미소가 주지 못하고, 또한 세상의 찡그림이 빼앗아가지도 못한다.

5. 하나님은 이제나저제나 의로운 재판관으로서 정의의 수호자요 보호자시며, 악의 징벌자요 복수자이시다. 시편 저자는 이것을 경험했고 확신했다.

(1) 하나님은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주신다(22절). “나를 감히 보호해 줄 자 없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도 없을 때 여호와는 내 산성이셔서 환난의 재앙에서 나를 보존하시며, 파멸을 당치 않게 하신다. 그는 나의 피할 반석이셔서 그 틈 사이에 내가 숨을 수 있고, 그 꼭대기에 발을 딛고 서면 위험이 내게 다다를 수 없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피난처가 되신다. 그들은 하나님께로 도망할 수 있고, 그 안에서는 안전하다. 그는 그들이 피할 반석이시니, 반석처럼 강하고 견고해 난공불락이며, 움직이지 않으신다. 천연의 요새는 왕왕 인공적 요새를 능가한다.

(2) 그는 가해자와 회계하신다(23절). “그는 저희 죄악을 저희에게 돌리실 것이다.” 그는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신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그들의 악행과 악한 계획은 다 그들 자신에게 돌아온다. 또 그는 “저희의 악을 인해(또는 악 가운데서) 저희를 끊으시리라.” 하나님이 그 악으로 갚으신다면 그보다 불행한 자는 없다. 악은 악에 대한 기억 중에서 악인을 끊을 것이며, 악에 대한 보상 가운데서 그를 끊을 것이다. 시편 저자는 이에 대한 승리의 확신으로 이 시편을 끝맺고 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 저희를 끊으시로다. 우리를 편드시고, 자기 소유로 인정하시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와의 교제에서 끊으실 것이며, 따라서 그들을 완전히 비참하게 만드실 것이다. 그들의 위용과 권세도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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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우리 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복은 이른바 오복(五福)으로서 부귀(富貴) 장수(長壽) 강령(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입니다. 주로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복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시는 복 가운데 물질과 육체와 자손에 관한 것도 있습니다 (창13:14-16, 신28:1-14). 하지만 본문에서는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에 해당하는 '아쉬레 하이쉬'(האיש אשרי)는 직역하면 '사람의 복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본질적으로 가장 크고 가치있는 복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들'에 해당하는 '아쉬레'의 기본형 '에쉐르'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복'이라는 단어는 '바라크'와 '에쉐르'가 있습니다. '바라크'(ברך)는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과 육체와 자손에 관한 육신적인 복을 말하고, '에쉐르'(אשר)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영적인 복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복은 '에쉐르'(אשר)로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누리는 행복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복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쁨과 행복감을 주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질과 육체와 자손이 잘되는 것도 기쁨을 줍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크고 가치있는 기쁨과 행복감을 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얻는 기쁨과 행복감입니다.

1.악인의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1절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악인' '죄인' 오만한 자'는 모두 악인에 대한 동일한 의미의 다른 단어들을 나열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악인' '죄인' 오만한 자'는 윤리적인 기준이 아니라 신앙적인 기준에서 말한 것입니다. 성품이나 행동이 못된 나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드러난 자를 말합니다. 곧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고 자기 욕망과 방식대로 살아가는 세속적인 사람들을 말합니다. 곧 불신자를 말합니다.

  복은 소극적인 면에서 보면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악인은 생각하고 계획하고 도모하는 것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는 것입니다. 그런 악인들의 생각을 부러워하거나 추구하지 않는 것이 복입니다. 또한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행동하는 것마다 하나님 말씀을 거부하고 자기의 방식대로 하려 합니다. 그런 죄인들의 행동에 함께 동조하거나 동행하지 않는 것이 복입니다. 또한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입니다. 오만한 자는 하나님 말씀을 비웃고 조롱하며 자기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런 오만한 자들과 함께 패거리가 되어 함께 거하지 않는 것이 복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삶은 가치가 없고 결과가 비참해지기 때문입니다. 4절에 "악인들은~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고 했습니다. '겨'는 곡식에서 알맹이를 제거한 쭉정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농부가 곡식을 거두어 타작마당에서 곡식을 떱니다. 그리고 그 떤 곡식을 바람이 불 때 공중으로 날리면 알맹이는 땅에 떨어지고 겨는 바람에 날라 갑니다. 그렇게 해서 알맹이는 거둬 들이고 쭉정이는 모아 불을 지피는데 사용합니다. 악인은 그 인생이 참으로 무가치하고 비참합니다. 악인의 삶은 그 얻은 것으로 잠깐 기쁨을 얻기는 하지만 그 기쁨은 잠깐이고 불만족과 불평과 분노가 더 많아집니다. 그래서 사는 동안 평생에 행복감이 없습니다. 인생이 마칠 때에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그 남은 것을 다른 사람이 사용합니다. 가치있는 것을 전혀 하지 못해서 허무하게 죽고 맙니다. 죽은 후에 누구도 그의 인생을 가치있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은 다음에는 그렇게 없다고 주장했던 지옥 불에 떨어지고 맙니다 (마3:12, 25:31-46, 계20:11-15, 눅16:19-31).  

2.의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2절에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고 했습니다.

  복은 적극적인 면에서 보면 복은 적극적인 면에서 보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고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 말씀을 말합니다. 율법을 즐거워 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깨달아 즐거워 하는 것을 말하고,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적용하기 위해 되새김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에는 하나님의 뜻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이며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하시며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며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계시며 하나님이 어떻게 경륜하시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 우리가 어떻게 살면 행복을 얻을 수 있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딤후3:15-17). 그 하나님 말씀을 접하면서 그 의미를 깨닫게 되면 기쁨과 소망이 생깁니다. 그 말씀을 적용하기 위해 되새김질을 할 때 확신과 능력이 생깁니다 (시19:10). 

예) 에쉐르(אשר)-마카리오스(μακαρισμοs)-블레씽(blessing←bleed) ::하나님을 참되게/친밀하게 알고(소드 + 야다) 사랑하며 경험하여 누리며 동행하는 복

##여호와를 송축함 [참 예배 = 바라크 : 하나님 영광의 모든 것 누림의 복...참예배자는 여호와의 이름(그분의 모든 것)으로 상호 축복하는 권세가 있음] : (내게 오라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로, 오직 은혜로 정결케 하시는 십자가보혈 의지하여 주 이름 부르며 나아가 깨닫는 바 모든 죄악을 토설하여 버리고 누리는 자유의 기쁨 가운데서 주님 이름을 부르며 전존재 기울여) 무릎꿇고 기도, 무릎꿇고 경배, (진복이신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모든 것을 상급으로 주시는 바, 그 말씀으로 베푸사 당신의 모든 것을 그대로 누리게 하시는)축복을 받고 (산 믿음을 발휘하여 주신 바를 이루셨고 또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 기쁨으로 반응하여 누리는 바, 미리) 감사, 찬양(개인적 고백)/찬송(공동체적 고백)드림

  그 이유는 그 삶이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3절에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가뭄과 상관없이 뿌리가 물을 흡수하기 때문에 잎이 마르지 않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물을 흡수하여 잎을 푸르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일이 형통하게 이루어집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자는 하나님 말씀에서 계속 힘을 공급받기 때문에 그 삶 자체가 행복합니다. 삶에서 의인에게도 악인들과 마찬가지로 고난이 있고 어떤 면에서는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시34:19, 119:71, 살후1:5, 딤후3:1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자는 기쁨이 있고 그 말씀을 적용하는 데에 있어서도 행복을 얻게 됩니다. 그 행복감은 세상 어떤 기쁨과 비교할 수 없는 만족을 주며 고난으로 인한 고통을 뛰어 넘는 만족을 줍니다. 예) 몰핀(morphine)과 엘돌핀(endorphin)과 다이돌핀(didorphin). (욥23:10, 빌2:17-18, 4:12, 고후12:9-10, 고후6: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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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의 환상(10)(겔 43: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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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제단의 크기는 이러하니라 한 자는 팔꿈치에서부터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바닥 넓이가 더한 것이라 제단 밑받침의 높이는 한 척이요 그 사방 가장자리의 너비는 한 척이며 그 가로 둘린 턱의 너비는 한 뼘이니 이는 제단 밑받침이요

"And these are the measurements of the altar by cubits (the cubit being a cubit and a handbreadth): the base shall be a cubit and the width a cubit, and its border on its edge round about one span; and this shall be the height of the base of the altar.

14.이 땅에 닿은 밑받침 면에서 아래층의 높이는 두 척이요 그 가장자리의 너비는 한 척이며 이 아래층 면에서 이 층의 높이는 네 척이요 그 가장자리의 너비는 한 척이며

"From the base on the ground to the lower ledge shall be two cubits and the width one cubit; and from the smaller ledge to the larger ledge shall be four cubits and the width one cubit.

15.그 번제단 위층의 높이는 네 척이며 그 번제하는 바닥에서 솟은 뿔이 넷이며

"The altar hearth shall be four cubits; and from the altar hearth shall extend upwards four horns.

16.그 번제하는 바닥의 길이는 열두 척이요 너비도 열두 척이니 네모 반듯하고

"Now the altar hearth shall be twelve cubits long by twelve wide, square in its four sides.

17.그 아래층의 길이는 열네 척이요 너비는 열네 척이니 네모 반듯하고 그 밑받침에 둘린 턱의 너비는 반 척이며 그 가장자리의 너비는 한 척이니라 그 층계는 동쪽을 향하게 할지니라

"The ledge shall be fourteen cubits long by fourteen wide in its four sides, the border around it shall be half a cubit and its base shall be a cubit round about; and its steps shall face the east."

1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 제단을 만드는 날에 그 위에 번제를 드리며 피를 뿌리는 규례는 이러하니라

And He said to me, "Son of man, thus says the Lord GOD, 'These are the statutes for the altar on the day it is built, to offer burnt offerings on it and to sprinkle blood on it.

19.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를 가까이 하여 내게 수종드는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에게 너는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를 주어 속죄제물을 삼되

'You shall give to the Levitical priests who are from the offspring of Zadok, who draw near to Me to minister to Me,' declares the Lord GOD, 'a young bull for a sin offering.

20.네가 그 피를 가져다가 제단의 네 뿔과 아래층 네 모퉁이와 사방 가장자리에 발라 속죄하여 제단을 정결하게 하고

'You shall take some of its blood and put it on its four horns and on the four corners of the ledge and on the border round about; thus you shall cleanse it and make atonement for it.

21.그 속죄제물의 수송아지를 가져다가 성전의 정한 처소 곧 성소 밖에서 불사를지며

'You shall also take the bull for the sin offering, and it shall be burned in the appointed place of the house, outside the sanctuary.

22.다음 날에는 흠 없는 숫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삼아 드려서 그 제단을 정결하게 하기를 수송아지로 정결하게 함과 같이 하고

'On the second day you shall offer a male goat without blemish for a sin offering, and they shall cleanse the altar as they cleansed it with the bull.

23.정결하게 하기를 마친 후에는 흠 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와 떼 가운데에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를 드리되

'When you have finished cleansing it, you shall present a young bull without blemish and a ram without blemish from the flock.

24.나 여호와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나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이며

'You shall present them before the LORD, and the priests shall throw salt on them, and they shall offer them up as a burnt offering to the LORD.

25.칠 일 동안은 매일 염소 한 마리를 갖추어 속죄제물을 삼고 또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와 떼 가운데에서 숫양 한 마리를 흠 없는 것으로 갖출 것이며 

'For seven days you shall prepare daily a goat for a sin offering; also a young bull and a ram from the flock, without blemish, shall be prepared.

26.이같이 칠 일 동안 제단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려 정결하게 하며 드릴 것이요

'For seven days they shall make atonement for the altar and purify it; so shall they consecrate it.

27.이 모든 날이 찬 후 제팔일과 그 다음에는 제사장이 제단 위에서 너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즐겁게 받으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When they have completed the days, it shall be that on the eighth day and onward, the priests shall offer your burnt offerings on the altar, and your peace offerings; and I will accept you,' declares the Lord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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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신비한 성전의 제단에 관한 말씀이며 그 뜻 또한 신비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제단이시기 때문이다. 포로에서 돌아온 후, 유대인들은 성전을 짓기 오래 전부터 제단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성전 안에 있는 제단을 말한다.

Ⅰ. 제단의 척수(13절). 그 꼭대기는 6야드 정방형이며 밑부분은 7야드 정방형이었다. 높이는 4야드 반이었다. 밑에는 선반 혹은 "밑받침" 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땅에서 1야드 떨어졌는데 그 위가 제사장이 올라서는 곳이었다. 그 위로 2야드 높은 곳에서는 또 다른 제사장이 서는 곳인데, 각각 반 야드 넓이로 떨어져 있었다. 양편에는 선반이 있었는데, 제사장들이 든든히 서도록 되어 있었다. 희생 제물은 전에 언급한 제단에서 잡도록 되어 있었다(40:39). 그 제단의 낮은 곳에서는 희생 제물을 태우고 위의 제단에 올려놓았다. 이렇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서 우리는 서로서로 도와야 할 것이다.

Ⅱ. 그 제단의 규례를 보자. 여기에는 다음에 관한 지시가 나와있다.

1. 먼저 그 제단을 봉헌하는 식에 대한 규례이다. "일곱 날" 이 그 봉헌식에 필요했다. 그리고 그 제단 위에다 매일같이 희생을 드려야 했다. 특히 "속죄 제물" 로 염소를 드리되(25절), 첫날에 드리는 어린 수송아지의 "속죄 제물" 외에 드려야 했다(19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위대한 속죄 제물이 되셨음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우리의 인격이나 우리의 행위로는 죄를 사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이외에는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피를 제단에 흘리는 것 이외에는 죄사함 받을 길이 없다(히 9:12). 또한 그 제단에서는 "수송아지" 와 어린양이 "번제 제물" 로 바쳐졌다(24절).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계획된 것이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예배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을 주목해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살아 있는 제물로 삼아야 할 것이며, 우리의 경건함을 영적 제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제단의 봉헌식을 여기서는 "정결케 하는 식" 이라 했다(20,26절). 우리의 제단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깨끗이 하여야 할 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제물로 드렸다(요 18:19).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의 제단을 모두 바치고, 그 위에 항상 거룩한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면, 세상에 대한 사랑이나 육의 욕망으로부터 우리 마음이 정결케 됨을 알게 될 것이다.

출애굽기 29장에서 기록되어 있는 봉헌식과 여기에 나온 봉헌식 사이에 몇 가지 다른 점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의식법이 얼마나 변하기 쉬운 것인가를 설명하여 준다. 또한 그 의식법은 그리스도의 시대에는 변화되어야 할 것이었다. 율법에 따르면 모든 희생물은 소금을 뿌려야만 하고(레 2:13) 특별히 "제사장이 제물 위에 소금을 쳐야" 했다(24절). "은총" 이 바로 우리의 신앙적인 행위에 뿌려져야 할 "소금" 이다. 영원한 언약은 "소금의 언약" 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패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해 예비된 "영광" 은 변하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는다. "은혜" 는 우리의 마음 가운데 숨어 있는 "소금" 이다. 그러므로 역시 "변하지 아니한다."

2. 봉헌하고 나서 그 사용법에 관한 지시가 나와 있다. "그 모든 날이 찬 후 제8일과 그 다음에는 "제사장이 제단 위에 번제와 감사제를 드려야 한다(27절).

(1) 누가 제단에서 제물을 드리는가? "사독의 자손 제사장" 이다(19절). 그 지파는 솔로몬에 의하여 아비아달의 가문을 대신 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하셨다. 그의 이름은 "의로움" 을 나타내 준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이신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제사장이 된 의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2) 어떻게 준비하는가? (26절) 그들은 "자신을 성별하고" 하나님께 봉헌한 예물을 손에 준비해야 한다. 

(3) 그후에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내가 너희를 즐겁게 받으리라" (27절).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을 용납하시고 우리의 제사가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더 다른 일이 필요치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바친 사람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여 주실 것이다. 중보자를 통하여 먼저 그들의 인격을, 다음에 그들의 행위를 하나님께서 받아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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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물 환상(겔 47:1-12)


1.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

2.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꺾여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오른쪽에서 스며 나오더라

3.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쪽으로 나아가며 천 척을 측량한 후에 내게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4.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5.다시 천 척을 측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6.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 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7.내가 돌아가니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11.그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12.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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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의 환상 중에서 이 부분은 신비하고 영적인 해석이 필요한 것이 분명하므로, 다른 환상도 역시 신비적이며 영적인 의미를 가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희생 제물을 씻고, 성전을 깨끗이 하기 위하여 성전 안으로 파이프를 통하여 공급하던 물에는 이 환상을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14장 8절의 예언도 이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것은 예루살렘으로부터 "흘러나와서" "그 반은 앞의 바다로 흘러가고, 나머지 받은 뒤의 바다로 흘러가는 생수에" 관한 것이었다. 또한 요한이 본 흘러가는 생명수의 강에 대한 환상도 이것을 암시할 것이다(계 22:1). 그것은 완전한 은혜로 말미암아 얻는 영광과 기쁨을 설명하는 듯하다. 또한 거룩함이 시작되는 기쁨과 은사를 설명하여 준다. 

대부분의 주석자들은 이 물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상징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것은 먼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근처의 나라로 퍼져가고, 거기에 동반되는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복음의 덕으로 인하여 널리 퍼지고, 신비하고도 복된 열매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에스겔은 그 집 주위를 돌고 또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물에 대하여서는 뜻을 깨닫지 못하였다. 하나님께서 에스겔과 그 백성들의 마음 가운데 그 뜻을 즉시 깨닫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그 뜻을 점차적으로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음의 것을 볼 수 있다.

Ⅰ. 이 물의 불어남을 보자. 에스겔은 그 샘의 근원을 좇아갈 수는 없었으나, 그 샘의 출처는 먼저 그에게 보여 주셨다.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1절)고 했다. 또 "물이 우편에서 스며 나오더라" (2절) 고 했는데, 이는 "시온으로부터, 즉 율법과 주님의 말씀이 먼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됨을 의미한다(사 2:3). 

거기서 성령이 사도들 위에 부어졌고, 그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아서 이 물을 모든 나라에 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성전에서 먼저 그들이 "이 생명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였다(행 5:20). 그들은 복음을 모든 나라에 전해야 하였지만,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야" 하였다(눅 24:47).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곧 성전이시며 문이 되신다. 그분으로부터 생명의 물이 흘러나오며, 그분이 계신 앞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은 "솟아오르는 셈물" 이다(요 4:14). 그에게 "생수를 "마시게 됨은 그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요 7:38, 39). 

이 물은 위에서가 아니라 문지방 밑에서 나온다 했다. 신자의 삶의 근원이 곧 신비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 물이 "전의 우편에서" 나온 것은 복음의 축복은 오른손의 축복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고 본다. 그것은 또한 지혜의 문에서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용기가 될 것이다. 곧 다윗과 같이 하나님 전의 문지방에 눕고자 하는 자들은 위로와 은혜의 샘가에 눕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입구는 빛과 생명을 주시기 때문이다. 다윗이 시온을 찬양하여 이르기를 "내 모든 생은 네 안에 있다" 고 하였다(시 119:130; 87:7). 

또 그 물이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렸다" 고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거룩한 하늘 나라의 신령한 축복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은 위대하신 제단 그리스도를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샘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수로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고자의 장막" 의 성소, 곧 우리 하나님의 도성을 즐겁게 하는 강이 흘러나온다(시 46:4).

Ⅱ. 이 물이 점점 불어가며, 진행해 나가는 과정을 보자. 물은 "동으로 흐르고" (3절), "동방을 향하여 흘러 내려가서 바다에 이른다" (8절). 그것이 물이 흐르는 방향이다. 

에스겔과 그의 안내인은 물을 따라서, 거룩한 산으로부터 내려 왔다. "일천 규빗" 을 내려온 후에, 그들은 그 물을 건넜다. 그 깊이를 재어보니, "발목에까지" 이르렀다(3절). 그런 후에 건너편 강둑을 따라 "일천 규빗" 을 더 내려 온 후 물을 건넜다. 그 깊이를 재어보니 "무릎에까지 올라왔다" (4절). 또 "일천 규빗" 을 따라 내려와서 세 번째로 물을 건넜더니, "그 물의 깊이는 허리에까지 올라왔다." 다시 일천 규빗을 따라 내려온 후 네 번째로 그 물을 건너려고 하였더니, "그 물이 불어서" 건널 수 없는 깊이가 되었다. 지상에서, 또는 지하에서 흐르는 물이 합류된 것이다. 그래서 "헤엄을 쳐야 될 물," 그냥은 "건널 수 없는" 물이 되었다(5절). 여기에서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다.

1. 성소의 물은 강물과 같이 흐르는 물이며, 연못의 물처럼 고여 있는 물이 아니다. 복음은 처음 전하여진 후 점점 더 퍼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영의 은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능동적인 법칙이다. Plusuttra - 즉 계속 앞으로, 완전에 이를 때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2. 그 강은 불어나는 물이었다. 그 강이 끊임없이 흘러감에 따라 점점 더 차고 넘치게 될 것이다. 복음의 교회는 맨 처음에는 대단히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마치도 작게 솟아오르는 샘과 같았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발목에 이르고 무릎에 차게 되는 것이다. 

조그만 겨자씨가 날마다 자라서 마침내는 커다란 나무가 되는 것과 같다. 성령의 은사는 발휘할수록 점점 불어나는 것이다. 진실이 있는 곳에서는 은혜가 자라며, 아침이 밝아오는 것처럼 점점 더 빛이 밝아지다가 마침내는 완전한 낮이 되는 것과 같다.

3. 그 물 줄기를 따라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유익한 것이다. 이 지상에서 복음이 전하여진 과정을 살펴보자. 마음 가운데 은혜의 사업이 증대하여감을 살펴 보라. 축복의 성령이 하시는 일을 유의하고 성령과 함께 걸으며 에스겔과 같이 거룩한 안내자와 함께 동행하여야 한다.

4. 하나님의 사업을 자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서 그 깊이를 재어보면, 그 물의 표면을 바라볼 뿐 아니라 할 수 있는 한 그 바닥까지 꿰뚫어 보아야 할 것이다. 때로는 파보기도 하고, 때로는 잠수하기도 하여 하늘 나라의 비밀을 알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마치도 그 모든 것을 완전히 알려고 탐하는 사람과 같이 애써야 할 것이다.

5.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려 한다면, 처음에는 그물이 발목밖에 차지 않은 것처럼 그것이 대단히 이해하기 쉬운 것임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좀더 깊이 연구한다면, 그 물은 무릎이나 허리에까지 이르고,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더욱 더 깊이 내려가면 물은 너무나 창일하여서 우리가 건널 수 없는 깊이가 되며, 우리가 그 바닥을 찾아낼 수가 없을 것이다. 바울과 같이 물가에 앉아서 그 깊음을 사모하여야 할 것이다(롬 11:33). 

이와 같이 성경의 말씀도 성소에서 흘러내린 물과 같아서, 어느 곳에서는 어린양도 건너갈 수 있을 정도로 얕으며, 또 어떤 곳에는 코끼리라도 헤엄쳐야 될 깊은 곳이 있다. 에스겔과 같이 가장 쉬운 곳에서 시작하여, 과거에는 "이해하기에 너무 어둡고 어렵던" 곳을 떠나서 우리의 마음을 씻어야 할 것이다. 우리 앞에 있는 일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Ⅲ. 이 강의 확장 상태를 보자. "그 강은 동방을 향하여 흘러 내려갔다." 그러나 거기서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물이 "사막도 가고" "바다로 흘러내려" 가기도 했다. "동남편" 에 자리잡은 "사해" 로 흘러갔거나, "북동편" 에 자리잡은 디베랴 바다를 흘러들어 갔거나, "서편" 에 있는 대해로 흘러갔을 것이다. 이것은 복음이 유대와 은사마리아에 이르러 전하여짐을 의미한다. 그 후에 모든 나라와 대양의 작은 섬에 이르기까지 복음의 빛이 비추게 될 것이다. 복음의 소리는 이 세상 끝까지 울려 퍼진다. 복음의 적이 전능의 강물의 흐름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Ⅳ. 이 강은 병을 고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성소의 물은 어디로든지 자유로이 흘러 내려가며, 놀라운 소생의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바다로 흘러가는 동안 하나님의 심판의 본보기가 되는 소돔과 같은 유황의 호수일지라도 그 물이 소생시킬 것이다. 그 물은 달고 유쾌하며 건강에 좋은 것이다. 

이것은 복음에 의하여 오는 놀라운 축복의 변화를 의미한다. 성격과 조건이 모두 변화를 받는다. 사해로 흐르던 물이 동산의 샘으로 흐르게 된다. 진노의 자식들이 사랑의 자녀가 되고, 죄와 허물 가운데 죽게 된 자들이 소생할 것이다. 복음은 엘리사가 여리고의 샘물에 집어넣은 소금과 같이 모든 사람들을 고쳐 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의사로 이 세상에 온 것이며, 복음은 그분의 놀라운 약인 것이다. 모든 질병에 대한 치료의 힘이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이 강가에 오면 살 것이며(9절), 식물이나 동물이나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그 물은 "생명의 물" 이기 때문이다(계 22:1, 17).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복음을 주실 목적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죽은 죄인을 살아 있는 성도로 만드신다. 모든 것들은 그 물에 의하여 열매를 맺고 번성하여진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자세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스스로 죄 가운데 있음을 시인하고 죄의 수렁에서 고침을 받기 원하는 사람은 사랑을 받을 것이나, 자기가 의롭다 하며 치료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고침을 받지 못할 것이다. 똑같은 복음이 한 사람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구원의 말씀이며, 다른 사람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말씀이 될 것이다. 영원한 황무지에 "소금을 주게" 될 것이다(신 9:23). 

하나님의 은혜로써 물을 받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는 마음의 욕망이 무성하여 영원히 열매 맺지 못하는 땅으로 남게 될 것이다. "추악한 자는 그 추악함을 그대로 있게 하라." "그가 영원히 열매맺지 못하리라." 그들은 소금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의 징표가 될 것이다. 마치도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아 "소금 기둥" 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증거가 된 것과 같이 될 것이다.

Ⅴ. 이 강에는 대단히 많은 고기가 살게 될 것이다. 

모든 살아있는 서들이 여기에서 발견될 것이다. 여기서 살고 번성하며, 그 종류도 각색이고, 대단히 수가 많을 것이다.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아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9절), 그곳에는 각종 강에서 사는 고기가 살며, 그 종류가 많음이 바다의 고기와 같이 번성할 것이다. 

교회 안에 기독교인들이 대단히 많이 늘어나서, 청년과 번성하는 세대가 마치도 고기와 같이 많은 숫자로 증가될 것이다. 그 물은 먼저 고기를 풍성히 하며, 고기들은 물 속에서 살며, 물이 고기를 산출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신앙인은 진리의 말씀에 의하여 생기며, 그 말씀에 의하여 태어나는 것이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강이다. 그 강에 의하여 고기들이 살고, 그 물로부터 그들이 삶을 유지하며, 생명을 공급받는 것이다. 성소에서 나오는 물이 그들의 생의 근본이며, 그 물을 떠나면 땅 위에 올라온 고기와 같이 될 것이다. 다윗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목마르게 열망하였던 것이다. 또 물고기가 많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장소에, 그들이 "그물을 던질" 것이다. 

그 강가에는 어부가 설 것이다. "엔게이" (사해의 접경이 있다)에서 "에네 글라임" (사해에 접한 다른 한 도성)까지 그물치는 곳이 될 것이다. 사해가 이전에는 해롭고 유독한 곳이어서 피하는 장소였으나, 이제는 사람이 자주 가는 장소가 될 것이다. 복음의 은사는 적절하지 못하며 아무 유익이 없는 사람이나 장소까지도 하나님과 인간에게 유용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Ⅵ. 강의 양편에 서 있는 나무에 대하여 보자. "많은 나무가 이편과 저편에 서 있었다" (7절). 그것은 보기에 매우 탐스러운 것이었다. 이 나무 그늘 역시 고기잡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될 것이다.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수 있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이 부분을 인용하여 사도 요한은 계시록 22장 2절에서, 강 양편에 생명의 나무가 자라고, 달마다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는 모든 나라를 치료하는 약이 될 것이라고 했다. 기독교인이 바로 이런 나무가 될 것이라 했으며, 특히 그 사역자들은 "주께서 심은, 의의 나무" 가 될 것이다(사 51:3). 그들은 성소의 물(시 1:23), "흐르는 강가" 에 서서, 생명의 나무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졌고, 그 덕택으로 그들도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내린" 생명의 나무가 되는 것이다(골 2:7). 이 나무들은 그 종류가 대단히 많아, 은혜의 다양성과 모든 일을 하시는 성령에 속하여 있음을 나타내 준다. 그들은 강가에서 자라고 있다. 그들은 거룩한 율법을 지키며 그리스도의 공덕으로부터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들은 "열매를 맺는" 나무이다. 무화과나 올리브(감람) 나무처럼, 그 열매는 "하나님과 인간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한 (사 9:9) 것이다. "그 열매는 먹을 수 있다. "" 의인의 입술은 많은 사람을 먹이기" 때문이다. 또 그들의 의의 열매는 여러 가지 용도에 쓰인다. 그 나무들의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는데, 상처입고 염증을 일으킨 사람들을 위하여 쓰일 것이다. 선한 행위를 하는 기독교인은 생명 강가에 선 나무의 잎사귀와 같으며, 그들의 자비로운 행동은 그 나무의 열매와 같아서, 주위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다. 그들은 약한 자에게 힘을 주고 상처입은 가슴을 치료해 주는 것이다. 그들의 기쁨은 약과 같이 선을 행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위해서 뿐 아니라 타인들을 위하여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서 선과 유익함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잎사귀는 마르지 아니하고," 치료하는 힘을 잃지 않을 것이며, 그 뿌리에 생명을 가질 뿐 아니라 , 모든 가지 속에도 진액이 있을 것이다. 즉 그들의 고백이 "시들지 않고서 "(시 1:3), "그 열매가 끊이지 아니할 것이다. "또 그들은 실과를 맺는 능력을 잃지 않게 될 것이다. "이렇지는 어서도 열매를 내리니," "여호와는 정직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시 112:14, 15). 또 그들의 의의 열매의 상급이 영영히 있으리라. 그 날에도 그들은 행한 대로 열매를 맺을 것인데, "영생에 이르는 열매" 를 맺게 될 것이다. 영생은 실로 "끊이지 아니할" 열매이다. 그들은 "달마다 새로운 열매를 맺을" 것이며, 이 달에는 이런 것을, 다음 달에는 다른 것을 맺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사할 수 있는 새로운 일을 끊임없이 하게 될 것이다. 그들 각자가 달마다 다른 새로운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것은 풍성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또한 기후는 알맞고 항상 봄과 가을만이 계속될 것이다. 

이 특별한 열매는 "그들의 물이 성소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것이 아니며, 항상 끊임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다. "모든 순간에 물을" (사 27:3) 공급받으므로 풍성히 자라서 점점 더 번성해 갈 수 있는 것이다.

-----평화의 기도, 앗시시의 프란시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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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치의 줄리안]]16가지 ‘사랑의 계시’ 받고 교회에 은둔 기도의 삶
난 추석 연휴, 가까운 산에 올랐다. 골짜기를 타고 힘겹게 정상에 올라가니 청명한 가을 하늘이 손에 잡힐 듯 펼쳐졌다. 역시 높은 산은 깊은 골짜기가 만든 것이었다. 영성의 산도 그러한가? 그렇다. 무대처럼 드러난 영광의 역사 배후에는 반드시 기도의 깊은 골짜기가 있었다. 영국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헨리8세로 촉발된 교회 개혁이 오랜 고난과 핍박의 산고 끝에 청교도를 낳고 그 뿌리에서 미국이 태어났으며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퀘이커, 구세군, 스펄전, 웨일스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이 땅에 토마스와 존 로스의 선교의 발자취가 남겨진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골짜기에서 말없이 교회를 세운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 첫 번째가 노리치의 줄리안이다.
줄리안, 기도의 사람
줄리안은 1342년 12월, 영국 노리치 지방에서 태어났다. 노리치는 영국의 동부, 멀리 프랑스의 노르망디를 바라보는 항구도시다. 18세기 후반까지 영국 지방도시 중 가장 번성한 곳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남아 있는 30여개의 교회는 당시의 번영을 말해준다. 줄리안의 본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은둔하며 기도했던 교회가 줄리안교회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줄리안이 평생 기도했던 줄리안교회는 지금 어디 있을까? 줄리안교회는 현재 성공회 수녀회에서 기도처로 사용하고 있다. 1942년, 폭격으로 폐허가 된 교회를 성공회가 재건한 것이다. 낡은 교회의 담을 손으로 만졌다. 아직도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이 작은 교회에서 한 여성이 평생 기도하며 살았다니….
줄리안이 살았던 시대는 고통과 절망의 시대였다. ....십자군 전쟁으로 민생이 파탄되고 흑사병으로 유럽인 3분의 1이 죽었다.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1337∼1453), 농민혁명(1381) 등으로 유럽 전체가 혼란에 빠졌고 교황은 ‘아비뇽 유수’(1309∼1377)를 끝내고 막 로마로 돌아갔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넘치는가?(롬5:20)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이 일으킨 사람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같은 시대 독일 라인강에서 에크하르트, 요한 타울러, 헨리 수소, 토마스 아 켐피스 등이 활동했던 것을 우리는 안다. ....그리고 똑같은 시대 영국에서도 하나님은 기도의 사람들을 일으키셨다. 그들이 리처드 롤, 윌터 힐톤, 무명의 ‘무지의 구름’ 작가, 그리고 줄리안이다.
주님은 나의 기쁨, 나의 만족
평범했던 중세의 여성 줄리안이 은혜의 사람이 된 것은 어느 날 임한 하나님의 계시 때문이었다. 1373년 5월 13일, 서른한 살의 줄리안은 심하게 앓다가 하나님으로부터 16가지 계시를 받았다. 이것을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에 기록했다. 줄리안에게 임한 하나님의 계시의 중심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었다. 그가 본 16가지 계시 중 10가지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었고 나머지는 예수님의 말씀, 그 주변의 모습, 그리고 줄리안과의 대화였다. 
우리도 어느 날 기도하다가 환상 가운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본다면 어떻게 될까? 무엇보다 말할 수 없는 환희와 감격을 느낄 것이다. 줄리안이 그랬다. 
그는 놀라움과 감탄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앞에 눈물로 고백했다. “주님은 ‘내가 너를 위해 고난을 당한 것에 만족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나는 ‘그렇습니다. 선하신 주님, 당신께 감사드립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네가 만족한다면 나도 만족한다. 너를 위해 고난을 당한 것은 나에게는 기쁨이며 무한한 즐거움이다. 만일 더 많은 고통을 당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줄리안은 예수님이 고난은 그에게 즐거움이요 기쁨이요 무한한 행복이라고 한 말 속에서 세 가지 천국을 보았다. 천국은 ‘기쁨’ 곧 하나님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곳이요, ‘행복’ 곧 예수님이 영광 받는 곳이며, ‘무한한 즐거움’ 곧 성령님이 주시는 즐거움으로 충만한 곳이다. 아버지가 기뻐하시고, 아들이 영광을 받으시고, 성령이 즐거워하시는 곳. 그런데 그 천국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십자가를 보는 순간 이런 은혜가 임했다. “나는 당시 고통 속에 계신 예수님을 보았지만 고통 속에 계신 예수님을 나의 천국으로 선택했습니다. 예수님 외에 어떤 천국도 나를 만족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장차 내가 그곳에 있을 때에 예수님은 나의 기쁨이 되실 것입니다.”
세 가지 상처를 주옵소서
십자가의 예수님은 줄리안에게 예수님을 유일한 기쁨이요 만족으로 여기게 했다. 이제 더 이상 다른 기쁨, 다른 만족은 없었다. 기쁨은 동시에 통회와 영혼의 갈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세 가지 선물을 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는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을 깨닫는 것이요, 둘째는 서른 살에 육신의 병에 걸리게 해달라는 것이요, 셋째는 그가 세 가지 상처를 체험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레너드 스위트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사랑은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반응할 뿐이다.’ 작은 사랑은 갚을 수 있다. 그러나 너무 큰 사랑은 갚을 수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너무 커서 우리는 다만 그것을 바라볼 뿐이다.
줄리안도 십자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조금이라도 닮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세 가지 상처를 달라고 기도한다. “주여, 나에게 세 가지 상처를 주옵소서. 나의 죄를 (추:깨닫고)회개하는 통회의 상처를 주옵소서. 주님의 긍휼을 깨닫는 깨달음의 상처를 주옵소서.” 주님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것을 ‘상처’라고 불렀을까? 십자가에서 입은 예수님의 상처의 작은 부분이라도 그는 자기 몸에 직접 체험하고 싶었다. 결국 그는 이 모든 기도를 생전에 응답받았다.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
줄리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추: 한 영됨의 동행함, 그의 소유됨, 그 분을 모든 것으로 누림안에서 항상 타오르는 믿음-소망-사랑으로]붙잡았다는 점이다. 하나님에게 죄는 치명적인 것이다. 죄가 있어서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만일 죄가 없었다면 우리 모두는 깨끗했을 것이며, 우리를 처음 지으셨을 때의 하나님 모습을 닮았을 것이다.” 그러나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그 죄에 대한 역설적인 은혜를 베푸신다. 즉 “죄는([추]죄됨의 자각은...구주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참되게 알며 사랑하고 한영됨의 친밀함안에서 그분을 경외하며 동행하는 한 영됨의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추]모든 상황 환경을 돌아 볼 때, 더 이상 소망 없고 암담해 보여도) 그러나 ([추]선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주장하시며 이끌어 가시기에) 모든 것이 잘될 것이며, 모든 종류의 일들이 잘될 것이다.” 죄는 분명 나쁜 것이지만 “하나님은 죄가 [추: 초청하시는 하나님께 기꺼이 반응하며 나아가려는)인간에게 (추:뒤로 퇴축되게 하는)부끄러운 것이 되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추구하게 하는 동력이 되기에)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이다. “선하신 주님은 내가 제기할 수 있는 모든 질문과 의심에 대답하시면서, ‘나는 모든 것을 온전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으며, 모든 것을 온전하게 만들 것이다. 너는 친히 모든 종류의 것들이 온전하게 되는 것을 볼 것이다’는 위로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다. 고난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보좌에 앉으신(계4:2), 일찍이 죽임 당한 그리스도를(계5:6) 바라보아야 한다. 절망의 시대에 우리는 어떤 음성을 들어야 하는가? ‘모든 것이 잘될 것이며, 모든 종류의 일이 완전하게 될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그것이 우리의 힘이요 능력이다. <한신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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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하세요// 월일   일차  순서
03.01(061): 160  03.02(062): 162  03.03(063): 172  03.04(064): 178   03.05(065): 181   03.06(066): 183  03.07(067): 188   03.08(068): 192   03.09(069): 196
03.10(070): 200   03.11(071): 202  03.12(072): 203   03.13(073): 204(대상5)   03.14(074): 204(대상9)   03.15(075): 207   03.16(076): 211   03.17(077): 212
03.18(078): 213   03.19(079): 214   03.20(080): 215   03.21(081): 216   03.22(082): 217   03.23(083): 219 03.24(084): 220  03.25(085): 221(대하28)   
03.26(086): 221(대하36:21)   03.27(087): 227   03.28(088): 228  03.29(089): 230   03.30(090): 234  03.31(091):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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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1(092): 250  04.02(093): 252  04.03(094): 253  04.04(095): 254   04.05(096): 257 구약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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