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7.28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시38.병상=Q훈육.Q께성결.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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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38==환난/곤고[간고/질고]의 때..나위해고난당하신JC경험!!..버려짐(거부고수두분)육적느낌대적/Q훈육.올바른이해+인정+회개+믿음의반응.Q이름부름앙망안김승리취함!.죄성/육을 다루고처리하며 제하시는 아파하시는Q의손[참된사랑=사랑+공의=징치하는사랑]..시공초월/진실무망/영생지존-전지전능Q.응시앙망/거누소기.경배동행..항기쉬기범감-성예범악평너(살전5:18-24)...덕목들::승리/지혜/겸손...내것일세(신망애--[샘솟는]사기[충만한]화인[넘쳐나는]자양충[내것일세]온절..성결/화평, 관용/양순, 긍휼/지선, 진실/정직..[구세주의보혈로써항상이기네])...십자가그늘아래415.주의십자가보혈로250.죄에서자유를얻게함은268.오신실하신주393.이세상의친구들394.자비하신예수여395.어린양들아399.험한시험물속에서400.주의친절한405...얼마나아프실까.나약해있을때에도.모든상황속에서.힘들고지쳐.주여호와를앙망하는자.주여나의참소망을.오나의자비로운주여.감사해요주님의사랑.감사해시험이닥쳐올때에.감사해요깨닫지.주님다시오실때까지.여호와께돌아가


*1.여호와여 주의 노하심으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하심으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2.주의 화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3.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4.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5.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

*6.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7.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8.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9.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10.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11.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12.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음모를 꾸미오나

*13.나는 못 듣는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말 못하는 자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14.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내 입에는 반박할 말이 없나이다

*15.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16.내가 말하기를 두렵건대 그들이 나 때문에 기뻐하며 내가 실족할 때에 나를 향하여 스스로 교만할까 하였나이다

*17.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18.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19.내 원수가 활발하며 강하고 부당하게 나를 미워하는 자가 많으며

*20.또 악으로 선을 대신하는 자들이 내가 선을 따른다는 것 때문에 나를 대적하나이다

*21.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22.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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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주님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님의 진노로 나를 벌하지 말아 주십시오.

아, 주님의 화살이 나를 꿰뚫으며, 주님의 손이 나를 짓누릅니다.

주님께서 노하시므로, 나의 살에는 성한 곳이 없습니다.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나의 뼈에도 성한 데가 없습니다.

내 죄의 벌이 나를 짓누르니, 이 무거운 짐을 내가 더는 견딜 수 없습니다.

내 몸의 상처가 곪아터져 악취를 내니 이 모두가 나의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더 떨어질 데 없이 무너져 내린 이 몸, 온종일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니, 이 몸에 성한 데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 몸이 이토록 쇠약하여 이지러졌기에, 가슴이 미어지도록 신음하며 울부짖습니다.

아, 주님, 나의 모든 탄원, 주님께서 다 아십니다. 나의 모든 탄식, 주님 앞에 숨길 수 없습니다.

심장은 거칠게 뛰고, 기력은 다 빠지고, 눈조차 빛을 잃고 말았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와 친구들이 내 상처를 바라보곤 비켜섭니다. 가족들마저 나를 멀리합니다.

내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올무를 놓고, 내 불행을 바라는 자들이 악담을 퍼부으며, 온종일 해칠 일을 모의합니다.

그러나 나는 아예 귀머거리가 되어 듣지 않았고, 벙어리가 되어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나는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되었고, 입은 있어도, 항변할 말이 없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주님, 내가 기다린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에게 친히 대답하여 주실 분도 오직 주님이십니다.

내가 재난에 빠져 있을 때에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내 원수들이 나를 비웃지 못하게 하시고, 나의 발이 힘을 잃고 비틀거릴 때에도, 그들이 나를 보고 우쭐거리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나는 곧 쓰러질 것 같으며, 고통은 잠시도 나를 떠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나는 나의 잘못을 털어놓고, 나의 죄 때문에 괴로워하지만,

강력한 나의 원수들은 점점 많아지기만 하고, 나를 까닭 없이 미워하는 자들도 점점 불어나기만 합니다.

나의 선을 악으로 갚는 저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유익을 도모할 때, 오히려 나를 대적합니다.

주님, 나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나의 하나님, 나를 멀리하지 말아 주십시오.

빨리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나를 구원하시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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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yer in Time of Discipline. A Psalm of David; to bring to remembrance.38 

1 O Lord, do not rebuke me in Your wrath, Nor discipline me in Your burning anger.

2 For Your arrows have sunk into me and penetrate deeply, And Your hand has pressed down on me and greatly disciplined me.

3 There is no soundness in my flesh because of Your indignation; There is no health in my bones because of my sin.

4 For my iniquities have gone over my head [like the waves of a flood]; As a heavy burden they weigh too much for me.

5 My wounds are loathsome and foul Because of my foolishness.

6 I am bent over and greatly bowed down; I go about mourning all day long.

7 For my sides are filled with burning, And there is no health in my flesh.

8 I am numb and greatly bruised [deadly cold and completely worn out]; I groan because of the disquiet and moaning of my heart.

9 Lord, all my desire is before You; And my sighing is not hidden from You.

10 My heart throbs violently, my strength fails me; And as for the light of my eyes, even that has also gone from me.

11 My loved ones and my friends stand aloof from my plague; And my neighbors stand far away.

12 Those who seek my life lay snares for me, And those who seek to injure me threaten mischievous things and destruction; They devise treachery all the day long.

13 But I, like a deaf man, do not hear; I am like a mute man who does not open his mouth.

14 Yes, I am like a man who does not hear, In whose mouth are no arguments.

15 For in You, O Lord, I hope; You will answer, O Lord my God.

16 For I pray, “May they not rejoice over me, Who, when my foot slips, would boast against me.”

17 For I am ready to fall; My sorrow is continually before me.

18 For I do confess my guilt and iniquity; I am filled with anxiety because of my sin.

19 But my [numerous] enemies are vigorous and strong, And those who hate me without cause are many.

20 They repay evil for good, they attack and try to kill me, Because I follow what is good.

21 Do not abandon me, O Lord; O my God, do not be far from me.

22 Make haste to help me, O Lord, my Salv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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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시의 하나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비탄과 호소로 가득 차 있다. 다윗의 죄악과 고통이 곧 비탄의 이유며, 그가 호소하는 내용이다. 그는 이때에 병 중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그로 하여금 자기 죄악을 회상하도록 해주었고, 그것으로 인해 스스로를 겸비케 하는 데에 보탬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그의 친구들에게서 버림을 받았고, 그의 원수들로부터는 핍박을 받았던 것 같다. 따라서 이 시편은 고난의 깊이와 재앙의 복잡성을 나타낸 시로 간주된다. 

1. 하나님의 불쾌하심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격노를 도발케 한 자신의 죄악에 대해(1-5).

2. 그의 신체적 질병에 대해(6-10).

3. 자기 친구들의 불친절에 대해(11).

4. 그의 원수들이 그에게 가한 상해에 대해. 그는 여기서 그들에 대한 자기의 선한 행동을 역설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대적한 자기의 죄악을 고백하고 있다(12-20). 끝으로 그는 하나님께 은혜롭게 임재하고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리면서 시편을 끝맺고 있다(21-22).

이 시편을 노래함에 우리는 죄악의 해로움을 깊이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설령 여기에 묘사된 것과 같은 괴로움을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언제 그와 같은 환난을 당할지 알 수 없으므로, 준비로서도 이 시편을 부르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우리 외의 사람들 중에도 그런 고난을 당하고 있는 자들이 있으니, 우리는 또한 동정으로서도 이 시편을 노래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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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에 대한 호소(시 38:1-11)

이 시편의 표제는 매우 살펴볼 만하다. 그것은 “기념케 하는” 시편이다. 시편 70편도 마찬가지로 고통의 날에 저작되었는데, 이와 같은 제호가 붙어 있다. 이것이 의도하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다.

==다윗 자신이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다윗이 병으로 고통을 받을 때 이 시편을 저작한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질병의 시절은 곧 죄악을 기억케 하고 상기하게 하는─하나님은 이를 위해 우리와 다투신 것이다─ 시기임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또 우리의 양심을 일깨워서 우리와 충실하게 그리고 분명히 소통하도록 해 우리의 죄악들을 우리 앞에 나열해 우리 스스로를 낮추게 하는 때다. “역경의 날에는 숙고하라.”

==혹은 이 시편이 그의 회복 후에 저작되었으며, 그가 고통 중에 가질 수 있었던 확신과 마음의 작용에 대한 기록으로서 이 시편을 설계한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이것은 그가 이 시편을 다시 볼 때마다 당시에 그가 받았던 인상을 회상해 보며, 그럼으로써 그것들을 새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히스기야가 병중에 있었을 때 쓴 저작도 이와 같은 의도를 지니고 있다.

....그 자신이 유의했던 동일한 일들을 타인들도 염두에 두도록 하기 위해 또 그들이 병중에서 고난을 당할 때에 무엇을 생각해야 하며, 무엇을 말해야 할지를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그가 생각했던 바와 같이 생각하게 하며, 그가 얘기했던 대로 말하게 하라.

Ⅰ. 그는 자기가 고난을 당하는 때에 하나님의 분노와 불쾌하심이 없도록 애원하고 있다(1절). “여호와여! 주의 진노로 나를 책하지 마소서.” 

....그는 병자의 재난을 위한 또 다른 기도에서도 이와 동일한 탄원으로 시작했다(6:1). 이 점은 그가 아주 명심하던 바였고, 우리도 또한 고난을 당하는 때에는 마땅히 마음에 두어야만 할 일이다. 주 하나님께서 아무리 우리를 책망하시고 징벌하신다 하더라도 그것이 분노와 불쾌로 행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고난과 불행을 당하는 중에 하나님의 진노와 불쾌를 입는다는 것은 약쑥이나 쓸개처럼 쓴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자 원하는 자들은 어떤 외적인 고통보다도 더한 그것을 입지 않도록 기도해야만 하며, 그 외부적 고통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유래하고, 또 그것과 일치할 때에는 어떤 고난이라도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 된다.

Ⅱ.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에 대해 불쾌히 여기시는 것 같은 인상을 받고, 그것을 심히 슬퍼한다(2절). “주의 살이 나를 찌르나이다.” 

....욥의 불평은(욥 7:4) 곧 다윗이 한 이 말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전능자의 화살은 하나님에 대한 공포를 의미하는데, 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그에게 열을 지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죄악을 인해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아주 우울하고도 무서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자기를 삼킬 열화 같은 분노와 심판 이외에는 아무것도 찾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화살은 과녁을 정확히 맞추시는 동시에, 그것이 명중한 곳에 어김없이 파고들어서, 하나님이 그 화살들을 뽑아내시고, 그가 공포로 입힌 상처를 위로로 싸매어주시기를 원하실 때까지는 꽉 박혀 있다. .....이것은 저주받은 자들의 영원한 불행이 될 것이니, 즉 하나님의 진노의 화살은 그들 안에 꽉 박혀서 상처를 치료할 길이 없을 것이다. “주의 손이, 주의 무거운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그래서 나는 그 아래 깔릴 지경입니다. 그것은 내 위에 굳세게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의 무게, 즉 그 분노의 권능을 누가 알겠나이까?” 하나님께서는 종종 다윗을 위해 그의 살을 쏘시고(18:14), 그의 손을 펴셨으나 이제는 다윗을 향해 그리하신다.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된다는 것은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위로의 계속은 너무나 불확실하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가 신체적 질병을 주는 것이라고 불평스레 호소하고 있다(3절).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그 질병의 혹독함은 그의 마음에 스며들었고, 그의 몸을 침범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화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마음의 불안을 유발시켰으며, 그로 인해 그는 군인의 용기와 제왕의 위엄과 이스라엘의 감미로운 시편 저자가 지니는 온갖 즐거운 기분을 잊어버리고 격렬하게 부르짖었다(8절). 하나님의 분노에 대한 의식만큼 선량한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니, 이는 하나님의 수중에 떨어진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나타내준다. 마음을 평온하게 유지하는 길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 두고 그를 거스를 일은 하나도 저지르지 않는 것뿐이다.

Ⅲ. 그는 그의 죄악이 자기의 모든 환난을 초래하고 도발하는 이유라고 고백하며, 다른 어떤 짐보다도 죄악의 짐 아래서 더욱 신음하고 있다(3절). 그는 그의 살이 성한 데가 없으며 뼈가 평안하지 못한 것을 호소하는데, 그는 그토록 크나큰 격동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주의 진노로 인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토록 맹렬히 타는 불을 지릅니다.” 그러나 다음 말에서 이 일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인정하고 모든 잘못을 자기에게 돌리고 있다. “그것은 내 죄로 인한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내 자신에게 돌립니다. 나의 불의가 나를 징계합니다.” 만약 우리의 환난이 하나님의 진노의 결실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탓으로 돌려야 한다. 그 일의 원인이 되는 것은 우리의 죄악이다. 우리는 안절부절하지 못하는가?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것도 죄악이다. 만일 우리의 영혼 속에 죄가 없다면 우리의 뼈의 고통도, 신체의 질병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선한 사람이 가장 크게 호소하고 있는 것은 바로 죄다.

1. 죄는 짐, 즉 한 무거운 짐이다(4절).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치니, 물에 빠져 가라앉아가는 사람에게 덮치는 교만한 물결 같고, 내 머리 위에 중한 짐같이 내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내가 버틸 수 없을 만큼 나를 내리누르나이다.” 죄악은 짐이며, 우리 안에 거하는 죄의 힘은 그 짐의 무거움이다(히 12:1). 죄는 모든 것을 방해하고 인간들이 위로 치솟고 앞으로 돌진하지 못하도록 억제한다. 모든 성도들은 죄를 그들에게 짐 지워진 사망의 몸(롬 7:4)이라고 호소하고 있다. 우리가 저지른 죄악의 행위는 짐, 곧 무거운 짐이다. 그것은 하나님께도 무거운 짐이 되며(그는 그 죄의 짐 아래에 눌려 있다. 암 2:13), 전 피조물에게도 무거운 짐이 되어 모두 죄 아래에서 신음하게 한다(롬 8:21-22). 죄는 맨 처음이든 맨 나중이든지간에 죄인 자신에게도 무거운 짐이 될 것이다. 그가 죄로 인해 마음에 찔림을 받고 수고하며 그 죄 밑에서 무겁게 짐을 지고 있을 때는 회개의 무거운 짐이 될 것이며, 죄가 그 죄인을 지옥의 밑바닥으로 가라앉히고 그곳에 그를 영원히 붙들어둘 때에는 파멸의 무거운 짐이 될 것이다. 그 죄는 그를 덮는 납 한 달란트가 될 것이다(슥 5:8). 죄인들은 불의를 품고 있다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위협도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이다.

2. 상처다. 즉 위중한 상처다(5절).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신체의 상처가 제대로 붕대를 감지 않고 돌보지 않아 냄새가 나며 화농하여 불결하게 되듯) 그것은 내 자신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죄악은 상처며(창 4:23), 그것도 고통스럽고 치명적인 상처다. 죄로 인한 우리의 상처는 흔히 간호도 치료도 해주지 않는 아주 나쁜 상태에 놓여 있게 되는데, 이는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는 죄인의 우매함 때문이다(32:3-4). 가벼운 상처도 태만히 내버려두면 악화되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사소한 죄도 등한시하고 회개하지 않은 채 버려두면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Ⅳ. 그는 자기의 고통으로 인해 탄식하며 자기의 비탄을 억누르지 못하고, 여호와 앞에서 그의 호소를 쏟아놓는다.

1. 그는 마음이 혼란해지고 양심이 고통스러워서 자기 자신의 심령이 편치 못했다. 상처받은 심령을 누가 견딜 수 있겠는가? 그는 “아프고” 찌그러졌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녔다”(6절). 그는 언제나 생각에 잠겼고 우울했으며, 이것은 그에게 무거운 부담을 지워주었고, 그 자신의 공포가 되었다. 그의 심령은 기진맥진했고 심히 상했으며, 그의 마음은 불안했다(8절).

이 점에서 고난을 당하던 다윗은 그리스도께 대한 예표였으니, 그리스도는 그의 고뇌 중에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도다”(막 14:34)라고 부르짖으셨던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의 어떤 고통보다도 더 쓰라린 고통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고통을 부과하시고 싶어하시든지간에, 그가 우리에게 이성의 사용과 양심의 평화를 간직하게 해주시는 한 우리는 불평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2. 그는 병이 들었고 신체가 약했다. 그의 허리는 역겨운 병으로 가득했으니, 모종의 혹이나 종양이나 염증으로 꽉 차 있었을 것이다(혹자는 히스기야의 부스럼과 같은 역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살에 성한 곳이 없었고”, 욥과 같이 온몸이 만신창이로 되었다.

(1) 우리가 지니고 다니는 이 몸들이 얼마나 초라한 것이며, 또 지독한 질병에 얼마나 쉽사리 넘어가버리는지를 살펴보자. 또 신체에 활기를 부여해 주는 영혼에 어떤 질병이 생기면─그것은 마치 구름과 걸림돌처럼─ 우리의 신체는 얼마나 쉽게 고통과 슬픔을 겪게 되는지를 기억하자.

(2) 인간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훌륭한 자들의 몸이라고 하더라도 타인들의 신체가 가지는 것과 똑같은 질병의 씨앗을 가지고 있으며, 동일한 재난에 걸리기 쉽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다윗 자신도 비록 그토록 위대한 군주였고, 성자였을망정 가장 지독한 질병을 면하지는 못했다. 그의 육체조차도 성한 데가 없었다. 아마 그는 우리아의 일로 인한 그의 범죄 후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자신이 가졌던 육체적 욕망 때문에 그 육체에 따끔한 보복을 받았던 것이다. 언제라도 우리가 몸에 병이 났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서 또 우리 몸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명예를 더럽히게 되는지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그는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다”(8절). 그의 “심장이 뛰고” 끊임없이 뛰고 있었다(10절). 그의 “기력”과 사지는 “쇠하여” 그의 뜻대로 움직여주지도 않았다. 그의 “눈의 빛도 그를 떠났으니”, 그것은 너무 많이 울었거나 눈의 분비물로 인한 염증으로 그렇거나, 아니면 아마 그의 의기소침과 자주 되풀이되는 졸도로 말미암아 그랬을 것이다. 병은 가장 강력한 신체와 가장 굳건한 심령이라도 무기력하게 하는 것이다. 다윗은 용맹과 혁혁한 공훈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신체적 질병과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게 해 그와 다투시자, 그의 머리는 깎이고 마음은 쇠해 물과 같이 연약해졌다. 그러므로 아무리 강한 자라도 자신의 강한 힘을 자만하지 말며, 누구든지 고뇌가 아무리 멀리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깔보지 말아야 한다.

3. 그의 친구들이 그에게 불친절했다(11절). “나의 사랑하는 자들”(그의 환락의 날에 그와 더불어 희희낙락해하던 자들)이 이제는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섰나이다.” 그들은 비탄에 잠긴 그를 동정하고자 하지 않았고, 그의 호소가 들리는 곳에 오려고조차 하지 않았으며, 마치 제사장과 레위인처럼(눅 10:31-32) “피하여 지나가버렸다.” 혈연으로 맺어진 그의 친척들까지도 멀리 떨어져서 있었다. 우리가 인간에게 신뢰를 둘 만한 이유란 얼마나 희박한 것이며,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친절을 기대하다가 실망하게 될지 아닐지 궁금히 여길 필요조차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역경은 우정을 시험하며, 귀한 친구와 천한 친구를 구별해 준다. 하늘나라에 있는 친구를 확실히 믿는 것은 우리의 지혜니, 그는 우리의 상처를 멀리하지 않으실 것이며, 어떤 시련이나 고통도 우리를 그의 사랑으로부터 떼내지 못할 것이다.

환난 중의 다윗은 번민하시던 그리스도께 대한 예표였으니,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는 기진맥진하셨으며 심히 상하셨으나, 그의 친구들과 친척들은 그를 내버리고 멀리 서서 쳐다보고만 있었다.

Ⅴ. 호소하는 중에 그는 하나님께서 은혜롭게도 그의 비탄과 기도를 수리해 주셨다는 것을 인지하고 위안을 얻는다(9절). “여호와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나이다. 주께서는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며 내가 갖고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나이다. 나의 탄식이 주의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주께서는 내가 신음하므로 지고 있는 중한 짐을 아시며, 내가 소리내어 갈망하는 복을 아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롬 8:26-27), 그 탄식은 그에게 숨겨지지 않는 것이다. 이 시편을 노래하고 간구함으로써, 우리는 어떤 무거운 짐이 우리 심령에 지워져 있다고 하더라도 신앙으로써 그것을 하나님께 던져버리고 우리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일임시켜야 하며,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편안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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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극복한 고난(시 38:12-22)

이 문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다윗은 자기 대적들의 능력과 악의에 대해 불평하는데, 그 원수들은 그의 신체의 쇠약과 마음의 혼란을 틈타서 그에게 모욕을 가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해를 가할 기회를 엿보기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그들을 대적해 할 말이 너무나 많았으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왜 자기를 위해 나타나주셔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로서 겸손하게 제시할 따름이다. 시편 25편 19절의 경우도 그러하다. “내 원수를 보소서.”

1. “그들은 매우 원한에 차 있으며 잔인합니다. 그들은 나를 해하려 하나이다. 아니, 내 생명을 찾고 있나이다(12절). 여호와의 모든 선량한 자들이 보기에 그토록 귀중한 생명은 마치 몰수당할 물건이나 공안에 해를 끼친 것인 양 저희가 노리는 표적이 되었나이다.” 뱀의 자손이 여인의 자손에 대해 가지는 적의는 그러하다. 뱀에게서 난 자손은 발꿈치밖에 물 수 없으나 그 머리가 상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갈증을 내며 찾는 것은 성도의 피다.

2. “그들은 아주 간교하고 교묘합니다. 저희는 올무를 놓고 궤계를 도모하며, 이 일을 쉬지도 않고 지칠 줄 모르게 합니다. 저희는 종일토록 그 일을 행합니다. 그들은 서로 괴악한 일을 말하며, 내게 화가 될 수 있는 일에 대해 제안할 것을 누구나가 다 하나 둘씩은 가지고 있습니다.” 궤계에 의해 은폐되고 수행되는 재해를 올무라고 부르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3. “그들은 아주 오만불손하고 못되었습니다. 내가 실족할 때에, 내가 어떤 곤란에 빠질 때에 혹은 내가 어떤 실수라도 저지르게 되고 실언이라도 하게 되는 때에나 한 걸음이라도 잘못 내딛는 때에 저들은 나를 향하여 망자존대(妄自尊大)합니다. 그들은 내 실수를 즐거워하며, 그런 실수로 내 세력이 파산하기를, 그리고 만약 내가 실족이라도 한다면 영락없이 넘어져서 파멸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4. “그들은 부정직할 뿐만 아니라 매우 배은망덕합니다. 저희가 무리하게 나를 미워합니다(19절). 나는 그들에게 한번도 그릇된 일을 행하지 않았고, 악의를 품은 적조차도 없었으며, 그들이 화낼 만한 말을 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저희는 악으로 선을 갚나이다(20절). 많은 친절을 그들에게 베풀었으니, 이로 인해 나는 친절한 답례를 기대함직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나이다”(109:4). 악인들의 마음에는 악 자체를 위해서 선함에 대한 그토록 고질적인 적의가 개재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선으로부터 직접 혜택을 받으면서도 선을 증오한다.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자들의 기도조차 혐오하며, 자기들과 평화로이 지내고자 하는 자들의 화평을 싫어한다. 어떤 정중한 대우도 고맙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화를 내는 자들은 참으로 아주 고약한 성질을 가진 자인 것이다.

5. “그들은 매우 불경건하며, 악마와 같습니다. 저희는 내가 단지 선을 좇는 연고로 나를 대적하나이다.” 그들은 그가 자기들에게 인자했다는 이유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그의 헌신과 순종 때문에도 그를 증오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을 띠고 있는 모든 것을 미워했기 때문에 그 또한 미워했다. 우리는 설령 잘 행한 것으로 인해 부당한 수난을 당하더라도 그 일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그런 일은 최초부터 있었다. 가인은 아벨의 행위가 의로웠기 때문에 그를 살해했던 것이다. 또 우리는 그 일을 가혹하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는 것이니, 이는 그 일이 항상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상급은 그만큼 더 클 것이기 때문이다.

6. “그들은 수가 많으며 강력합니다. 그들은 활발하며 강하고 무수하나이다(10절).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3:1)

거룩한 다윗은 약하고 쇠했다. 그의 심장은 헐떡였고, 그 힘은 빠졌다. 그는 침울했고 마음이 슬펐으며, 자기 친구들의 핍박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반면에 그의 악한 원수들은 강하고 활기에 차 있으며, 또한 무수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면적인 상황에 의거해 인간의 성격을 판단할 수 있다고 자부하지 말자. 아무도 자기 앞에 놓여 있는 모든 것으로도 사랑이나 미움을 알아낼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래도 다윗은 그가 자기의 원수들에 대해 호소하는 다른 시편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그리스도를 지목하는 것 같다. 그리스도의 박해자들도 여기에 묘사된 것과 아주 흡사하게 모든 명예와 미덕과는 완전히 담을 쌓은 자들이었던 것이다. 먼저 인간성의 제1원리조차 벗어 던져버리고, 그것의 가장 성스런 약속마저 파기해 버리는 그런 자들 이외에는 기독교를 미워할 자가 아무도 없다.

Ⅱ. 그는 자기에게 가해지는 모든 피해와 냉대 속에서도 안도감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화평스럽고도 경건한 처신을 곰곰이 돌이켜 생각해 보고 있다. 우리의 원수들이 우리에게 진정한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때는 오직 그들이 우리를 자극해 범죄케 하는 때(느 6:13)와 그들이 우리를 이겨 우리 자신의 영혼을 우리가 소유하지 못하게 만들고, 하나님과 우리의 의무로부터 우리를 추방시킬 때뿐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런 해를 예방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저들의 불붙은 화살도 꺼버리고, 그 위해로부터 안전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순전함과 화평을 계속 굳게 고수한다면 누가 우리를 해칠 수 있겠는가? 다윗은 여기에서 이 일을 해내었다.

1. 그는 자기의 성미를 억제했으며, 자기에게 가해진 그 어떤 모멸이나 자기에 대한 해로운 말이나 행동에도 초조해하거나 속상해한 적이 없었다(13-14절). “나는 귀먹은 자같이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나는 내게 던진 모욕을 눈여겨보지 않았고, 그것에 대하여 분개하지도 않았으며, 그 수모로 인해 동요되지도 않았습니다. 하물며 복수를 꾀한다거나 피해에 대한 응수를 꾀한다든가 하는 일은 더더욱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가해지는 불친절과 피해에 대해 주의를 덜 기울이면 덜 기울일수록 우리는 자신의 마음의 평온을 더욱더 많이 고려하게 된다. 귀머거리인 체한 그는 “입에 아무 변박함이 없는” 벙어리와 같았다. 그는 마치 자신을 격렬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고 자기의 원수들로 하여금 자기에 대해 더한층 화내도록 자극할 것이 두려워, 자신을 위해 변명할 말은 하나도 없는 것같이 침묵을 지켰다. 그는 그들과 서로 죄를 뒤집어씌우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당성을 변명하려고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의 필수적 방어가 공격으로 곡해될 것을 우려한 까닭이었다. 비록 그들이 그의 생명을 찾았고, 그의 침묵은 자기 죄에 대한 고백으로 오인될 수도 있었으나, 그는 벙어리와 같이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리의 원수들이 중구난방으로 요란할 때, 사태를 더 악화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침묵을 지키거나 거의 말하지 않는 편이 분별 있는 행동이다. 다윗은 그의 온화함으로 자기 원수들의 마음을 끌거나 부드러운 대답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노를 돌이키게 하기를 바랄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선을 악으로 갚을 정도로 아주 비열한 정신의 소유자들이었던 까닭이다. 그럼에도 그는 저희를 향해 이처럼 겸손히 행동했으니, 이것은 그가 자기 자신의 범죄를 방지하고 그 일을 회고해 보면서 위안을 얻기 위해서였다. 이 점에서도 다윗은 그리스도께 대한 예표였다. 그리스도는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으셨고, 욕설을 당하셨을 때도 욕설로 대꾸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이 두 가지 일은 우리에게 욕설을 욕설로 갚지 않도록 하라는 본을 보여준다.

2. 그는 신앙과 기도로써 그의 하나님께 가까이 접근했으며, 그 두 가지는 이런 피해 중에서도 그를 지탱시켜 주었고, 그들에 대한 그 자신의 분개심을 잠잠케 해주었다.

(1)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다(15절). “나는 입을 열지 않는 자 같았사오니, 이는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라는 까닭이로소이다. 나는 주께 의존하여 주께서 내 송사를 변호해 주시고 나의 무죄함을 밝히시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내 원수들을 잠잠케 하시고 수치를 당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사랑하던 자들과 친구들은 마땅히 그를 인정하고 그의 편에 서서 그를 위한 증인으로 나서야 했는데도 그를 떠나 물러났던 것이다(10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에게 희망을 걸기만 한다면 결코 우리에게 실망을 주지 않으실 친구이시다.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응락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는데 왜 내가 들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가 너희를 권고하신다”(벧전 5:7). 하나님이 또한 염려해 주시는데 왜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있느냐? “주께서 응락하시리다(어떤 사람은 이렇게 해석한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나이다.” 왜 우리가 치욕과 비방을 침묵과 인내로써 견디어내야 하는지에 대한 타당한 이유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해진 모든 잘못에 대한 증인이시며, 때가 되면 우리와 우리에게 악행을 한 자들에 대해서도 증인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잠하자. 만일 우리가 침묵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출두하시리라고 기대할 수가 있는데, 이것은 그 침묵이 우리가 그를 신뢰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스스로 처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그의 수중에서 빼앗으며, 우리를 위해 나선 그의 은덕을 몰수하는 셈이 된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수난을 당하셨을 때 위협의 말씀도 하지 않으셨으니, 이는 그가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자신을 부탁하셨기” 때문이다(벧전 2:23). 우리도 그렇게 함으로써 궁극에 가서는 아무것도 상실하지 않을 것이다. “주 하나님이 내게 응락하시리이다.”

(2) 그는 하나님께 요청했다(16절). 왜냐하면 “내가 말하기를 내 말을 들으소서(이것은 보충된 것이다) 하였나이다”. “내가 그렇게 말했습니다”(15절같이). “나는 저희가 내게 대하여 기뻐하지 않도록 당신을 바라오니, 이는 당신께서 들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저희가 나를 압도할 것이 염려되는 때에도 그것으로 내 위로를 삼았나이다.” 인간들이 거짓되며 불친절할 때에라도 우리가 자유롭게 찾아갈 수 있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큰 후원이 된다.

Ⅲ. 다윗은 여기에서 그 자신의 우행과 나약함을 비탄하고 있다.

1. 그는 그가 부패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으며, 게다가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노골적으로 불평할 만큼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으며, 인간들이 자기에게 가한 상해로 말미암아 격정이 폭발할 1보 직전에 이르렀던 것이다. “내가 넘어지게 되었나이다.” 이 말씀은 시편 저자가 유사한 경우에(73:2) 했던 이같은 회상에 의해서 가장 잘 설명될 것이다.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거의 실족할 뻔하였나이다.” 여기서도 그렇다. “나는 넘어지게 되었고”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73:13) 하는 말이 막 나올 판이다. 그의 슬픔은 계속적이었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했으니(73:14), 근심은 그 앞에서 계속 떠나지 않았다. 그는 그 일을 곰곰이 생각하느라고 견딜 수가 없었고, 이는 그로 하여금 거의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넘어지게 만들었다. 이에 대한 두려움은 그를 하나님께 몰아갔다. “주께서 내 일을 변호하실 뿐만 아니라, 내가 죄 중에 빠져들지 않도록 방지해 주실 것을 바랍니다.” 하나님을 자기들 앞에 항상 모심으로써 자기들의 선 자리를 계속 보존하던 선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그 앞에 슬픔의 보따리를 끊임없이 풀어놓으면 곧 넘어져버리기 쉬운 것이다.

2. 그는 자신의 이전 죄악을 자신에게 불리한 것으로 기억해 내었으며, 그가 이런 환난들을 자초하고 하나님의 가호를 상실하게 된 것은 그 죄악들 때문이었음을 자백했다. 비록 사람 앞에서는 자신을 의롭다고 정당화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을 판단하고 정죄할 것이다(18절). “내 죄악을 고하고 은폐하지 않겠습니다. 내 죄를 슬퍼하오며, 그것을 사소한 일로 여기지 않겠습니다.” 이런 마음의 자세는 하나님의 섭리의 책망과 인간들의 비난 아래서도 그를 잠잠하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우리가 만약 죄에 대해 참다운 회개를 한다면, 그것은 고난 아래서도, 특별히 부당한 혹평 아래서도 우리가 침묵을 지킬 수 있도록 해준다. 회개에는 두 가지 일이 요구되고 있다.

(1) 죄의 고백. “내 죄악을 고하겠나이다. 총괄적으로 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내가 잘못 저지른 일들을 낱낱이 자백하기도 하겠습니다.” 우리는 자백에 의해 사태를 악화시키는 한이 있어도 우리 죄를 하나님 앞에서 거리낌없이, 완전히 아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우리 스스로에게 치욕을 씌워야 하는 것이다.

(2) 죄에 대한 통회. “내 죄를 슬퍼하겠나이다.” 죄는 슬픔을 초래할 것이다. 모든 진정한 참회자는 자기가 하나님께 끼친 불명예와 자기 자신에게 가한 악을 슬퍼한다. “나는 내 죄에 대하여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것이옵니다(어떤 사람은 이렇게 해석한다). 죄악이 나를 파멸시킬까봐 두려워하고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 염려할 것이옵니다.” 

Ⅳ.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은혜로이 임재해 주시고, 그의 환난시에는 시기에 맞춰서 강력한 구조자가 되어주시기를 하나님께 아주 간곡히 기도드림으로써 끝을 맺고 있다(21-22절).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비록 내 친구들은 나를 버리고, 내가 당신께 버림을 당해 마땅할지라도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믿지 않는 마음은 주께서 멀어질 것을 곧잘 두려워하오니, 나를 멀리 하지도 마소서.” 고난 중에 있는 선인의 심령에는 하나님께서 분노로 자기를 버리시지나 않을까 하는 것보다 더 다급한 걱정은 없다. 그러므로 또한 그의 마음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보다도 더 충심으로 우러나오는 것은 없다. 즉 “여호와여! 나를 멀리 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왜냐하면 내가 멸망하게 되었사옵고 구원이 빨리 이르지 않는다면 나는 망신당할 위험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환난에 처하는 때에는 자기를 불러 요청할 수 있고, 또 재촉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탄원하고 있다. “주께서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섬기며, 나를 지탱해 주시도록 의지하는 신이십니다. 또한 주께서는 나의 구원이시니, 당신은 홀로 나를 건질 능력이 있으시고, 나를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나는 당신 한 분에게서만 구원을 기대할 수 있나이다.”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런 자는 이 시편을 노래하면서 이처럼 기도하고 주장하며 희망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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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로부터 난 지혜....본문 : 야고보서 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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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14.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16.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17.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18.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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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최고덕목들]신망애-->성령열매(사기화인자양충온절), 이 모든 성령역사를 꿰뜷는 공통덕목은 지혜/겸손(성결/화평-관용/양순-긍휼/지선-진실/정직)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최고의 덕목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아마도 사도 바울이 고전13:13에 쓴 것이 가장 좋은 답이 될 것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정말 이 세 가지가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 소망, 사랑 말고 또 그리스도인 또는 하나님의 백성의 덕목으로 꼽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다시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눈을 돌릴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갈5:22-23에서 그가 성령의 열매로 열거한 것들입니다. 곧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할 수 있을 다른 이름의 덕목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야고보는 오늘 본문에서 그것을 지혜라고 부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야고보가 말하는 지혜는 바울이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는 모든 것을 포괄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지혜는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드는 삶의 원리들을 총칭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오늘 본문에서 지혜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우연적이거나 즉흥적인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는 앞선 3:1에서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하며 이어서 성도들에게, 특히 선생이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말의 실수가 없어야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선생이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말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선생에게 또 필수적인 것이 지혜이기 때문에 야고보는 오늘 본문에서 지혜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말조심하는 것이나 지혜 있는 것이나 선생들에게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야고보는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지혜를 언급합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와 아래로부터 난 지혜입니다. 이 두 지혜를 대비시킴으로써 그는 참된 지혜가 무엇인지를 더욱 확실하게 가르치려 한 것입니다. 먼저 13절을 봅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야고보는 이 말로 먼저 오늘 본문에서의 논의의 화두를 던지며 자신의 사고의 핵심을 밝히는 것입니다. 상반절에서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하며 “지혜”와 “총명”을 짝지어 말한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뿐 아니라 행함”, “진리와 그 실천”이라는 그의 특유의 사고구조를 다시 한 번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반절은 달리 번역한다면 “그는 자기가 지혜와 총명이 있음을 선한 삶으로, 즉 지혜로부터 오는 겸손 가운데 행한 행위들로 보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고보가 말하는 지혜 있는 사람이란 겸손한 사람이고 겸손한 가운데 실제로 선을 행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지혜의 온유함”이라 한 것을 “지혜로부터 오는 겸손”이라고 바꿔본 것은 온유와 겸손은 거의 동의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나란히 쓰이는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지혜와 겸손이 함께 가는 것은 어리석음이 거만과 함께 가는 것과 같습니다.
---무릇 그리스도인들은 지혜롭고 총명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즉 겸손 가운데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특히 선생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더욱 분명히 그 본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 야고보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야고보는 간과하지 않습니다. 즉 경쟁심과 이기적인 야망이 지혜와 총명을 보여주려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동기에서 움직이는 사람은 자기 자랑을 하게 되어 있고 과장하며 더 나아가 거짓까지 동원하여 자기 자랑을 하게 되기 쉽습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고 귀신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며 공동체 안에서 혼란과 온갖 종류의 악한 일들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의 말을 들어봅니다. 본문 14-16절입니다: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15절의 “땅 위의 것”이란 천상의 것,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정욕의 것”이란 영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귀신의 것”이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그런 지혜를 가진 사람은 진정 지혜로운 사람도 아니고 총명한 사람도 아니며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자랑과 거짓말로 교인들을 현혹하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탄의 졸개에 불과한 자인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참으로 지혜와 총명이 있는 이들과 분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지혜와 총명이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다시 한 번 확실히 밝힙니다. 본문 17-18절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위로부터 난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는 지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늘 가까이 하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힘쓰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세상 학문이나 연구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결하다”는 것은 순수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하실 때의 그 청결함과 같은 뜻입니다. 지혜가 성결하다는 것은 참된 지혜를 가진 사람은 순수해지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순수한 사람만이 참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뜻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지혜는 화평케 한다고 합니다. 순수한 마음,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싸우지 않습니다. 싸울 줄 모릅니다. 싸울 수가 없습니다. 불순한 뜻이나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갈등과 불화와 분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지혜는 경쟁의식과 파당을 만들지 않습니다. 지식만 가진 사람들은 서로 잘났다고 다투고 싸우며 갈라질 수 있지만 지혜 있는 사람들은 일치를 이룹니다. 사실 야고보가 지혜 있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는 것이 바로 화평함일 것입니다.
---지혜는 또 관용합니다. 관용은 사려 깊고 동정심 많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또 싸우지 않고 화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혜는 또 양순합니다. 관용이 있는 곳에 항상 같이 있는 것이 양순함입니다. 양순함은 그저 물러터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꺼이 양보할 줄 아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뜻을 수용하고 그에 잘 맞춰줄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싸울 일이 없고 화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혜에는 또 긍휼함이 있습니다. 긍휼은 남의 잘못을 사랑으로 교정해주며 용서할 줄 아는 것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에 대해 너그러운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싸움이 날 수 없고 화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긍휼을 따로 언급하지 않고 선한 열매와 한 데 묶어 언급합니다.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한 것입니다. 그에게서 “긍휼”은 “선한 열매들”과 거의 같은 말이든가 두 말이 원인과 결과처럼 서로 아주 긴밀히 연결된 덕목들입니다. 긍휼하기 때문에 선한 열매들을 가득 맺는다는 것입니다. 긍휼은 남의 잘못을 사랑으로 교정해주며 용서할 줄 알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에 대해 너그럽기 때문에 자연히 이런저런 선한 열매들을 많이 맺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위로부터 온 지혜를 가진 이에게서 찾는 마지막 덕목은 편견과 거짓이 없는 것입니다. 순수한 사람에게는 자연히 편견과 거짓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편견과 거짓이 없는데 싸움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화평하게 하기 위해서도 편견과 거짓이 없음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혜에 속한 모든 성품은 공통적으로 화평과 관련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본문 마지막 절에서 화평에 관한 말로 지혜에 관한 그의 가르침을 마무리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예수님께서 일찍이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마5:9) 하셨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지혜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드는 것임을 우리는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지혜, 그것은 위로부터 난 지혜입니다.
---오늘날 온 세계는 끊이지 않는 갈등과 반목과 적대감과 테러로 인하여 너무나 불안하고 긴장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로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위로부터 난 지혜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온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데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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