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8.02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느1:1-11.돌파Q기도.금식.베라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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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1:1-11==교78.내주하나님넓고큰은혜는302.내기도하는그시간364....이땅의황무함을.내백성이겸비하여.주님앞에간구하였던.나의예배를받으소서...@@BC722북이스라엘, BC586남유다 멸망 --->BC538 고레스칙령/성전중건령에 따라 103명 모자란 5만명 1차 귀환[스룹바벨총독] 지휘로, .BC536성전기초 놓은 후 이웃의 방해로 건축 중단-->BC516 [학개-스가랴-스룹바벨,대제사장여호수아] 스룹바벨성전 완공((예레미아 29:10 예언 성취)) --->BC475, 에스더/부림절시작--->BC458 [에스라귀환]율법반포/교육/회개운동--->BC430 [포로4세대, 느혜미야, 총독으로 귀환:..예루살렘성벽/성문 완공]


*1.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2.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3.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4.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5.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6.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7.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8.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을 것이요

*9.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10.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11.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기도시작4개월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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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사 궁에 있는 느헤미야를 볼 수 있다.

1. 그는 유대 사람과 예루살렘의 형편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물어보았다(1, 2).

2. 그는 그들의 비참한 상황을 보고 받았다(3).

3. 이에 대해 그는 금식과 기도로 특별히 하나님께 간구했다(5-11).

이리하여 그는 그의 정책이 아니라 그의 경건심 때문에 요인으로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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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의 환난(느 1:1-4)

느헤미야가 어느 지파 사람인지는, 아무 데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만일 그가 제물을 드린 것(마카비서의 저자는 그렇게 말해 주고 있다. 마카비 1:18)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가 제사장이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Ⅰ. 바사 궁에서 느헤미야의 위치를 살펴보자. 우리는 그가 “수산 궁에”, 곧 바사의 왕궁에 있었다는―궁궐은 늘 수산에 있었다(1절)―“왕의 술관원”이었다(11절)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아마도 왕이나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을 시켜 자기들의 시중을 들게 하는 것을 하나의 당당한 위풍으로 간주했던 것 같다. 느헤미야는 왕실에서 이러한 직분을 맡고 있었으므로―바로의 궁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통치자로 적합했던 모세와 같이, 또한 사울의 궁에 있었던 다윗과 같이―그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일을 하기에 보다 나은 자질을 갖추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왕과 그 주위에 있는 자들과의 이점을 이용해서 자기 나라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포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왕실에서 자기가 얼마나 훌륭한 자리에 있었는가를 성급히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그가 “왕의 술관원”이었다는 것(이것은 영예롭고 유익한 신분이었을 뿐만 아니라 큰 신임을 얻고 있던 지위였다)은 본 장(本章)의 끝에 가서야 나오는데, 그것은 다음 이야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단지 “내가 수산 궁에 있었다”고만 밝혔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신을 낮추어 겸손히 하며 자기의 업적에 관한 이야기는 더디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다음과 같은 위안을 발견할 수 있다.

1.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을 때는, 결코 그 일을 할 도구가 모자라지는 않는다.

2. 하나님께서 그의 일에 사용하고자 정하신 자들에게는, 그 일을 하기에 적합한 자질과 소명을 하나님께서 주신다.

3. 하나님은 모든 곳에 그의 남은 자를 두신다. 우리는 아합의 집에 오바댜가 남은 것을 읽을 수 있으며, 가이사의 집안에 여러 성도들, 그리고 수산 궁에 믿음이 깊은 느헤미야가 남은 것을 읽을 수 있다.

4. 하나님은 때로 왕실을 양육장으로 만드실 수 있으며, 또 교회의 명분을 지원하고 보살피는 자들의 성소가 되도록 하시기도 하신다.

Ⅱ. 느헤미야는 본국에 남아 있는 유대인의 상황에 대해 따뜻하고 동정어린 문의를 했다(2절). 그의 친족이요 친구인 자 하나가 동행인들과 함께 우연히 왕궁으로 왔을 때, 그는 그들을 통해 포로로 사로잡혀간 자들과 그 사랑하는 성읍 예루살렘이 어떤 상황에 있는가를 물어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느헤미야 자신은 영예롭고 풍족한 가운데 편하게 살았다. 그러나 그는 그가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환난 중에 있는 그 형제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영으로(모세와 같이 행 7:23) “그들을 문안하고 그 형제들을 돌아보았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는 점이 그들에 대한 그의 사랑을 멀어지게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비록 그들을 볼 수 없다고 해서 관심마저 멀어질 수는 없었다).

1. 그가 출세하여 얻은 권세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비록 그가 훌륭한 사람이 되고, 높은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는 그의 형제들을 천하고 보잘것없는 자로 생각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가 그들과 같은 혈족관계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2. 감정이 그들과 다르고, 따라서 생활습관이 달랐지만, 그것이 그들에 대한 그의 사랑을 멀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비록 그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고(자유가 선포되었을 때, 마땅히 돌아갔어야 된다고 생각되지만) 궁정에 그대로 남아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돌아간 자들을 판단하거나 경멸하지 않았고, 또한 그들이 지각이 없다고 하여 책망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들에게 자상한 관심을 가졌고,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어떻게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줄 수 있는가를 알기 위해 “그들의 형편을 물었다”. “무슨 소식이 있는가?” 하고 묻는 것은 합당하고 좋은 일이다. 

....우리는 특히 교회와 믿음의 형편,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지내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묻는 의도는 아테네 사람들처럼 단지 이야깃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와 찬미를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가를 알기 위한 것이라야 한다.

Ⅲ. 그의 물음에 대한 답은, 유대인과 예루살렘의 형편에 대한 우울한 소식이었다(3절). 

그에게 대답을 들려 준 자는 하나니라는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에서 뛰어난”(7:2) 자로서 그는 예루살렘의 황폐케 된 상황을 이야기할 때 진실되게 말했을 뿐만 아니라 온화하게 말했을 것이다. 하나니가 이 때 이 궁으로 온 목적은, 곤궁을 당한 그들에게 어떤 호의와 원조를 요청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들려 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1. 그 거룩한 씨앗은 항상 이웃 나라들의 침입으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아” 비참하게 짓밟혔으며, “안락한 자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2. 그 거룩한 성읍이 침입을 받아 모두 파괴되었다. “예루살렘 성은” 갈대아 사람들이 부수어 놓았으므로 여전히 “훼파되었고 성문들도” 파괴되었다고 했다. 

....이것은 그 곳 거민들의 형편이 매우 가난하고 힘들며 매우 위험한 처지라는 것을 말해 준다. 왜냐하면 그들의 적은 언제나 그들을 먹이로 삼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전이 세워졌고 정부가 안정되었으며, 개혁의 사업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아직도 행해지지 않는 선한 사업이 한 가지가 있었다. 즉 아직도 부족한 점이 있었다. 하늘의 예루살렘 이편에 있는 모든 예루살렘에는 늘 어떤 결함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친구들의 도움과 봉사가 요청되는 것이다.

Ⅳ. 이것은 느헤미야에게 큰 슬픔과 근심을 가져다 주었다(4절).

1. 그는 “울고 슬퍼하였다.” 

그가 이처럼 슬픔에 빠진 것은, 그 소식을 들은 당시뿐만이 아니라 “수일 동안”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편히 살고 있다 하더라도, 교회에 황폐와 환난이 있으면 마땅히 우리는 슬퍼해야 한다.

2. 그는 금식하며 기도했다. 

공적으로 그렇게 할 기회는 없었지만, 은밀히 보시고 숨김없이 갚아 주시는 “하늘의 하나님 앞에서” 금식 기도를 했다. 그는 금식하고 기도함으로써,

(1) 그의 슬픔을 호소하고 눈물을 드려,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경건하게 슬퍼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경멸당하면, 하나님의 이름도 욕되게 된다. 따라서 느헤미야는 이 사건을 하나님께 아뢰었다.

(2) 그는 자기의 불평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그것을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자기의 슬픔을 달랠 수 있었고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있었다.

(3) 그는 백성들의 위안을 위해, 그리고 그 자신이 그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방법을 알기 위해 올바른 간구를 드렸다. 대중을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선한 뜻을 지닌 자들은 제일 먼저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과 함께 그 일을 해 나가며 그들의 모든 계획을 하나님 앞에 고하도록 하자. 이것이 그들이 번영할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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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의 기도(느 1:5-11)

우리는 여기에서 느헤미야의 기도를 읽을 수 있다. 이 기도는 그가 주야로 종종 하나님께 드려오는 그 모든 기도가 연관된 기도이다. 그는 그동안 줄곧 예루살렘의 황폐를 슬퍼해 왔다. 또 그는 자기의 임군인 왕에게 예루살렘에 호의를 베풀어 달라고 탄원을 하려 하고 있다는 뜻을 말해 주는 것이다.

Ⅰ. 그는 하나님 앞에 굴복하여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면서, 하나님께 겸손하고 경건한 간구를 드렸다(5절). 이것은 다니엘의 태도와 매우 유사하다(9:4). 이것은 우리를 하나님 가까이로 이끌어 주며, 그와 동시에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

1.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는 그의 존귀와 영광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을 지녀야 된다는 것. 

....우리는 그가 하늘의 하나님이며, 우리보다 무한히 높으신 분이며, 우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는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으로서, 높은 곳과 낮은 세상에 있는 천사와 왕들의 모든 계율과 권능을 무한히 능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하나님 백성은 모두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그의 모든 적은 그의 강력한 진노를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조차도 그를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위로와 기쁨이 된다.

2. 그의 은총과 진리에 대한 거룩한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약속된 긍휼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베푸신다.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아무리 많은 긍휼을 베풀어도 지나치지 않는다.

Ⅱ. 그는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의 모든 기도와 자백을 들으시고 받아 주실 것을 요청하고 있다(6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단지 말로 하는 기도는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당신 앞에 기도하는 것(우리가 기도 속에서 참다운 기도를 드릴 때 그것은 속히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을 들으시옵소서. 또한 주의 눈을 여시사 간구한 자의 마음을 보시고 그것을 주님 앞에 두옵소서.” 

....하나님은 눈을 만드셨고 귀를 심으셨다. 그런데 그가 명확히 보시지 않겠는가? 그가 주의 깊게 들으시지 않겠는가?

Ⅲ. 그는 죄에 대해 참회의 자백을 했다. 이스라엘이 범죄했을 뿐만 아니라(이것을 시인한다는 것은 그에게 그리 굴욕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였나이다”(6절). 

....그는 이렇게 자백하면서 겸비해졌고, 스스로 수치를 감수했다. “우리가(그 중에서도 나와 나의 가족이)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였나이다”(7절). 죄를 자백할 때는 이 두 가지 일, 죄는 우리 자신을 타락시키며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임을 시인하자. 죄란 “하나님을 향하여 악을 행하고” ,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여 우리 마음을 타락시키는 것이다.

Ⅳ. 느헤미야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자비를 간구했다.

1.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옛부터 말씀해 오시던 것, 곧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처우 규칙을 호소했다. 

....그 규칙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기대를 걸 수 있는 규칙이었다(8, 9절). 하나님께서는, 만일 그들이 그와의 언약을 어기면 “그들을 열국 중에 흩을 것이며,” 그들에게 사로잡혀가는 환난이 올 것이라고 과연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 경고는 그들이 포로됨으로써 실현되었다. 처음에는 서로 그렇게 가깝게 연합되어 있었던 민족이 당시의 이스라엘의 백성들처럼 그렇게 멀리 흩어져버린 민족은 일찍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만일 그들이 “그에게로 돌아오면”(그들은 이제 우상 숭배를 버리고 성전 의식을 지키면서 돌아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을 다시 모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느헤미야는 이러한 말을 신명기 30장 1-5절 사이의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믿음과 소망에 근거를 두고 간구를 하는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시도록(영원한 마음을 지니신 하나님께서는 사실상 기억을 되살려 주는 사람이 필요없겠지만) 간청했다. “청컨대, 그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는 “나로 기억하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시인했다(7절). “우리는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하신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나 그는 청하기를 잊지 않았다(8절). “여호와여 주의 종 모세에게 명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언약을 흔히 명령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마음에 두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기억치 않으신다면, 우리는 파멸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로써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호소력은, “주께서 우리로 소망을 두게 하신 그 말씀”(시 119:49), 곧 하나님의 언약을 인용하는 것이다.

2. 그는 그들이 옛날에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호소했다. “주께서 손수 멀리 떨어지게 한 바로 그들은, 주님과 언약 맺은 주의 종이요 주의 백성이옵니다(10절). 주는 주의 숙적으로 하여금 주께서 맹세하신 종들을 짓밟고 억압하게 하시나이까? 만일 주께서 주의 백성을 위해 나서지 않으신다면 누가 나서겠나이까?”(63:19 참조) 

....그들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증거로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러한 성품을 주셨다(11절). 즉 “그들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옵니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을 뿐 아니라, 진실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고 있나이다. 그들은 이제 주의 뜻대로 오직 주만을 섬기고 있으며, 주께서 주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는 모든 것에서 주께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사옵니다. 그들은 이제 이렇게 행하기를 기뻐합니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해 주고 있다.

(1)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선한 의지가 있다. “그들은 그들의 의무를 행하기 위해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비록 여러 면에서 부족은 하더라도 그들은 의무 이행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2) 그들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가운데서 만족하고 있다. “그들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였으므로, 그들의 의무를 행할 뿐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행했나이다.” ....진실로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은혜롭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러한 염원은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3. 그는 이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셨던 위대한 일들을 들어 탄원하고 있다(10절). “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으로 구속하신 종들입니다. 주의 권능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하오니 주께서 그들을 구속하시어 그들의 구속을 완전하게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편이 되시어 그 적으로 하여금 넘겨다보게 하지 마옵소서."

....끝으로,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그가 지금 하고 있는, 또한 하나님이 열어보여주시는 바 그 감동따라 행하려는 모든 일을 형통하게 하시고 왕과의 일에 은총을 내려 주실 것을 특별히 탄원함으로써 기도를 마치고 있다. 그 왕을 “이 사람”이라고 부른 것은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단지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라도 스스로 그러함을 알아야 하며(시 9:20), 다른 사람들도 그들은 사람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주께서 사람을 두려워하신다면, 주는 누구이옵니까?”

....그가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고 간구한 것은 왕의 은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왕에게 말할 바로 그 때 임마누엘하나님의 친히 역사하심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바로 그 형통케 하시는 은혜, 곧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시는 은총을 깨닫는 참기쁨 누리기 바란다는 뜻이었다. 사람들에게서 오는 호의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흘러나온 것이라는 것을 성령감동가운데 인지하게 될 때, 사람에게서 온 그 호의가 마음에 진정한 기쁨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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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x(6684, 춤) 금식하다 fast....춤(동사)은 기본어근이며, '금식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1회 나오며, 칼형으로만 사용되었다(아래 성구사전을 보라).

1. 고대에서 금식은 모든 종교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금식은 일정한 기간 동안 음식물 섭취를 삼가는 것이다. 그리고 특별히 '금지된' 음식물을 완전히 또는 영원히 먹지 않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처음에 금식은 로마인들보다는 헬라인들 사이에 더 넓게 행해졌지만, 전 고대 세계로 확산되었다.

금식의 동기는 무엇이었는가? 고대 세계의 이방 종교에서 그 동기는 귀신들에 대한 두려움과, 금식이 신과 만나거나 교제를 준비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신의 영향을 올바르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금식은 신비 종교들에서 초심자들의 입회 의식에 속하는 것이었다. 마술에서와 신탁을 받을 때, 금식은 종종 그것을 성취하는데 필요한 준비 과정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사람이 죽고 난 후에 금식하는 관례는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애곡하며 금식하는 것은 귀신의 침해를 두려워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죽은 자의 혼이 아직 가까이 있는 동안 먹고 마시게 되면 악마가 틈탈 위험이 있다.

애굽의 제사장들은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금식했다. 금식은 또한 황홀경의 계시에 이르는 길을 열어준다.

그러나 금식과 고대의 윤리 사이에는 관련성이 거의 없었다.

2. 이스라엘에서 금식의 형태와 목적은 다양하다.

금식은 하나님과의 친교를 위한 준비로 행하였다. 곧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 전에 금식했고(출 34:28, 신 9:9), 다니엘도 환상을 보기 전에 금식하였다(단 9:3).

금식은 큰 근심으로 괴로움을 당할 때 개인적으로 행하여졌다(삼하 12:16-23, 왕상 21:27, 시 35:13, 시 69:10).

금식은 전쟁과 멸망의 위험이 임박해졌을 때(삿 20:26, 대하 20:3, 에 4:16, 욘 3:4-10, 유딧 4:9, 유딧 4:13), 메뚜기 재앙 때(욜 1장, 욜 2장), 포로지에서 돌아왔을 때(스 8:21-23), 속죄제의 때(느 9:1), 그리고 끝으로 죽은 자를 애도할 때(삼하 1:12) 국가적으로 시행되었다.

금식에는 기도가 수반되었으며(렘 14:11, 렘 14:12, 느 1:4, 스 8:21, 스 8:23), 특별히 회개의 기도가 따른다(삼상 7:6).

금식하는 사람은 애곡하는 자의 자세를 종종 취한다(참조: 왕상 21:27).

금식은 보통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된다(삿 20:26, 삼상 14:24, 삼하 1:12). 그렇지만 에 4:16에는 금식이 3일간 계속되었다.

시 109:24에 보면, 고발할 때의 금식의 고통은 동시에 탄원자가 당하는 내적 고통의 반영이다.

성경에 유일하게 언급되는 제의 금식은 속죄일에 행하는 금식이다(레 6:29, 레 6:30, 레 23:27-32, 민 29:7) (참조: F. S. Rothenberg).

후에 이스라엘이 종교 체제가 수립됨에 따라, 포로 후에는 연 4회의 금식의 때가 정해졌다(슥 8:19). 즉,

(1)  느부갓네살에 의한 예루살렘의 포위가 시작된 바벨론 달력 10월 10일(태양력 12-1월 해당)(왕하 25:1).

(2)  예루살렘이 함락된 4월 9일(태양력 6-7월)(왕하 52:6 이하).

(3)  성전이 파괴된 5월 7일(태양력 7-8월)(왕하 25:8 이하).

(4)  그달랴가 살해된 7월 2일(태양력 9-10월)(렘 41:1과 슥 8:19비교)의 넷이었다.

3.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스라엘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겸허한 자세에 대한 표현으로서의 금식의 심오한 의미는 사라져 갔다. 점차 금식은 경건한 공적으로 간주되었다(유딧 8:6, 토빗 12:8).

예수님 당시의 자신들의 종교에 열심이었던 사람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매주 이틀씩의 금식일을 지키라는 요구를 받았다(참조: SBⅡ 242이하). 요한의 제자들도 이와 같은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참조: 막 2:18).

금식이 형식화하여 하나님을 위해서라기보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사람에게 과시하는 것을(슥 7:5) 목적으로 하는 경향이 있어서 선지자들은 경고하여, 금식은 진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기도와 이웃에 대한 사랑의 행위가 동반되어야 할 것을 말했다(참조: 사 58:3-12, 렘 14:12).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사람이 자기를 괴롭게 하는 일로서가 아니라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일로서(사 58:5, 사 58:7, 사 58:10),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슥 8:19)라야 할 것을 보여준다(참조: 성서대사전 이성호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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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d:y:(3034, 야다).... 던지다/쏘다, 감사/찬양/고백하다.  [자신을 말씀앞에 비춰보아 자복하며 시인하다...참되게 평가하여 말하다]...동음이의어로서 [친밀히 알고 경험하다]의 야다가 있음....야다(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던지다, 내던지다 throw, cast'를 의미한다. 좋은 것을 던져 줄 수도 있고, 나쁘거나 불필요한 것을 던져 버릴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44회 나오며, 칼형에서 '쏘다'(화살, 렘 50:14), 피엘형에서 '던지다'(애 3:53), 히필형에서 '감사하다, 찬양하다, 고백하다', 히트파엘형에서 '고백하다, 감사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야다의 기본적인 의미는 '죄, 하나님의 품성과 역사, 혹은 인간의 특성을 시인하다 혹은 고백하다'이다. 이 동사와 그 동의어 할랄의 기본적인 차이는 후자의 용어가 '갈채하다, 자랑하다', 혹은 어떤 대상을 '기뻐하다'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야다는 좋든 나쁘든 어떤 사실에 대한 '인정'과 '선언'을 강조한다. 70인역본은 일반적으로 야다를 엑소몰로게오로 번역한다.

동사는 세 가지의 기본적인 방법으로 사용된다.

첫째, 이 단어는 개인적으로든 국가적으로든 죄의 시인 혹은 고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기본적인 개념은 시 32:5에 묘사되어 있는 다윗의 개인적인 고백에서 분명하게 관찰되었다. 여기에서 시적인 병행구는 고백이 죄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께 알리는 것이었음을 설명해 준다. 죄에 대한 고백이 하나님께 행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국가적인 고백의 개략은 속죄일 의식에서 발견된다. 이때 대제사장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죄를 고백하면서, 자기의 손을 염소의 머리 위에 두어 상징적으로 민족의 죄를 염소에게 전가 시켰다(레 16:21). 힛파엘형은 이 동사가 국가적인 죄의 고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될 때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이 어간은 또한 이스라엘 죄의 대 고백이 다니엘(단 9:4, 단 9:20), 에스라(스 10:1), 느헤미야(느 1:6), 그리고 바벨론 포로기 동안과 그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느 9:2-3)들에 의해 행해졌을 때에도 사용되었다. 국가적인 죄의 고백은 일반적으로 공적인 것이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앞에서 우리의 죄를 시인하여(참조: 요일 1:9), 자기와의 본래의 관계를 유지하기를 매우 원하신다.

둘째, 야다는 하나님의 속성과 그의 일에 대한 인간의 공적인 선포나 선언(고백)을 나타내기 위해 주로 사용되었다. 이 개념은 찬양의 의미의 핵심에 있다. 찬양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그리고 그가 무엇을 행하는가에 대한 고백이거나 선언이다. 이 용어는 영역본들에서 가장 자주 '감사하다' thank로 번역되지만, 베스터만(Westermann)에 의하면, 이 번역이 실제적으로 적당한 번역은 아니라고 한다. 즉 구약성경에서 ...아직까지 '감사하다' thank만을 의미하는 동사는 없었다. 일반적으로 '감사하다' thank로 번역되는 호다는 구약성경에서 사람들 사이의 감사에 대한 표현을 뜻하는 말로는 단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처음부터 이 호다는 하나님과 인간에게 똑같이 사용될 수 있는 우리의 언어 '감사하다' thank와 일치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들 사이에 일어나는 어떤 것으로서의 우리의 '감사하다'가 가장 분명하게 발견되는 구약성경의 구절들에서 사용된 동사는 베레크이다. 이 동사는 '찬양하다' praise의 기본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축복하다' bless를 의미한다.

이런 사실에 비춰볼 때, 구약성경은 감사하는 것에 대한 독립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는 찬양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찬양의 한 방식이다(Westermann, Claus, The Praise of God in the Psalms, Richmond; John Knox Press, 1965, pp. 26-27).

이 용어의 가장 좋은 역어는 '고백' confession이다. 왜냐하면 시편(참조: 시 89:5, H6, 시 105장, 시 106장, 시 145장)과 그 외의 곳(참조: 대상 29:13)에서 충분히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속성과 일을 고백하거나 선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다는 '찬양하다' praise를 뜻하는 주요 단어들 중의 하나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인들의 시에서 언제나 할랄(찬양하다) ,자마르(악기로 찬양하다) 룸(높이다), 자카르(기억하다), 카밧(찬양하다), 그리고 나갓(선언하다)과 같은 찬양 용어들과 병행되어 나온다. 감사는 찬양 뒤에 온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속성과 일을 선언할 때, 이런 것들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찬양은 대개 감사로 이어진다.

[베스터만은 한 주요 요지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렇지만 그의 말이 모든 세부적인 것들에 다 필요한지는 의심스러울 것이다. 만약 때로 감사가 찬양에 포함된다면, 특히 이 어근의 기본적인 의미가 BDB가 시사한 바처럼, '인정하다' acknowledge일 때, 어떤 행동이나 일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야다가 사용되는 실례들이 감사하다라는 우리의 개념과 동일시될 수 있을 것이다(R. L. H)].

찬양은 일반적으로 여호와나 그의 이름을 그 대상으로 취한다(시 97:12, 시 99:3, 시 136:1-3, 시 136:26).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만이 하나님을 찬양하였다(사 38:18-19, 시 6:5, H6, 시 30:9, H10, 시 88:10, H11). 찬양의 수창자(首唱者)에는 의로운 개인들(시 140:13, H14), 이스라엘 백성(시 106:47), 열방들(시 45:17, H18), 지상의 모든 왕들(시 138:4), 하늘들(시 89:5, H6), 사람의 노(시 76:10, H 11)와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위대한 속성과 그의 기적적인 역사들을 고백했다. 여호와에 대한 찬양은 공적인 것으로, 열방들 사이에서(삼하 22:50),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 회합에서(시 35:18) 발견되었다. 개인이나 백성이 와서 여호와를 찬양할 때, 그들은 종종 악기를 수반하여(대하 5:13, 시 33:2, 시 43:4), 말이나 노래로써, 구두로 찬양하였다(시 109:30, 시 28:7). 이런 찬양은 일반적으로, 다윗이 엄격하게 여호와의 인격에 대한 찬양과 고백으로 경축하는 임무를 맡긴 그런 레위인들(대상 16:4)의 지시하에 성막(혹은 성전)에서 행해졌다(시 100:4, 시 122:4). 이것은 매일 아침과 저녁에 성막에서 수행되어야 했던 예배의 주요 측면이었다(대상 23:30). 이 찬양은 여호와의 옳은 길(여호와의 의)에 따라(시 7:17, H18)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시 119:7) 전심으로 행해져야 했다(시 86:12, 시 111:1). 이런 찬양은 계속적으로 - 영원히 - 행해져야 했다(시 30:12, H13). 

셋째, 야다는 또한 어떤 사람에 관한 어떤 진실을 고백하는, 즉 사람에 대한 사람의 칭찬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었다(시 49:18, H19). '찬양' praise을 의미하는 "유다"라는 이름은 이 어근에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유다의 형제들이 그를 찬양(혹은 고백)하였기 때문이다(창 29:35).(참조: R. H. Alexander;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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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P;(6419, 팔랄) 중재하다, 기도하다

팔랄(동사)은 기본어근이며, '중재하다, 개입하다, 기도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84회 나오며, 피엘형과 히트파엘형으로 사용되었다.

팔랄은 대부분 히트파엘형으로 사용되었다(예외: 창 48:11, 삼상 2:25, 시 106:30, 겔 16:52). 이 어근 히트파엘형의 번역어는 '기도하다'가 된다. 그 배후에 있어 어의상의 발전은 뒤에 논의될 것이다.

구약성경에는 '기도'를 의미하는 전문 술어가 풍부하다. 기도 또는 기도하다를 뜻하는 히브리 단어가 최소한 12개는 존재한다. 그러나 '기도'의 뜻으로 쉽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상용어는 테필라 및 그와 관련된 동사 팔랄이다. 팔랄의 어원에 대해서는 수많은 학설이 제시되었다. 19세기에 벨하우젠(Wellhausen)은 이를 아랍어 팔라(falla: 검 끝을 뾰족하게 만들다)와 관련시켜 팔랄이 '자신을 베다 또는 자해하다'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이것은 예배 중에 광란 상태에서 자해 행위를 하는 이교도의 풍습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행위는 율법에서 금지되었다(신 14:1).

두번째 설도 역시 히브리어 팔랄과 아랍어 팔라(falla)를 관련시키지만 양자 간의 관련성을 일반적 의미 '깨뜨리다, 베다'에서 찾고 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의미가 연속적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베다-나누다-비교하다-구분하다-판단을 내리다(Ap. Thomas).

세번째로 히브리어 팔랄과 나팔이 '넘어지다' to fall를 의미하는 동일한 한 어간에서 발전된 것이라는 제언인데 이 경우에는 따라서 기도와 부복이 강조된다.

네번째 학설은 파생어들의 용법을 근거하여 '평가하다, 사정하다'라는 의미를 팔랄 속에서 찾은 것이다. 그렇다면 피엘형(본 항목 초두에서 언급된 4번의 용례)은 '간주하다, 생각하다, 판단하다'(창 48:11) 또는 '평가하게 하다'(겔 16:52, '네가 네 자매들을 위한 호의적 평가의 원인이 되었다', 즉 예루살렘이 심히 타락하여 소돔과 사마리아를 상대적으로 천사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를 의미하게 된다(Speiser)(겔 16:52의 한글개역: "네가 네 형과 아우를 '논단하였은즉'").

그렇다면 이 어근의 피엘형과 히트파엘형의 관계는 무엇이며 이 동사의 84회 용례 중 '기도하다' to pray를 의미하는 히트파엘형으로 80회가 사용되었는데 그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로 기도를 뜻하는 여러 히브리어 동사가 주로 힛트파엘형으로 발견된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왕상 8:33, "그들이 주께 빌며 간구하거든", 스 10:1,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 사 44:17,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전통적인 설명에 따르면 히트파엘형은 펠릴림(재판관들)과 관계가 있으며 까닭에 히트팔렐은 '재판관인 하나님께 호소하다'를 의미한다고 한다. 두번째 해석은 팔랄을 '깨뜨리다'로 생각하여 재귀형인 히트파엘형이 '자신을 깨뜨리다' 즉 '통회하다, 기도하다'를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이다(Goldmann). 셋째 학설을 살펴보면 피엘형 필렐의 의미인 '결정하다, 문제를 해결하다'에서부터 히트팔렐의 의미 '중개자로 행동하다'를 찾는 것이다(Ap-Thomas). 네번째 견해는 피엘형 필렐('평가하다, 사정하다')에서 히트팔렐(평가, 헤아림을 구하다, 기도하다)의 의미를 찾는 것인데, 이는 히브리어 히트파엘형의 구문론적 기능 가운데 하나가 단순 어간이 뜻하는 바를 구하고 찾는 것이라는 사항에 근거를 두고 있다(Speiser). 흥미롭게도 삼상 2:25에서는 팔랄의 피엘형과 히트파엘형이 나란히 놓여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중재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중재하겠느냐'(한글개역, 각각 "판결하시려니와", "간구하겠느냐"). 

동사와 명사 양자가 다 가장 빈도높게 사용된 것은 중재 기도를 가리키는 경우이다. 이러한 사실은 성전 봉헌식에서 백성들을 위해 드린 솔로몬의 기도가 가장 잘 예시해 준다(왕상 8장 그 대등장인 대하 6). 이 두 장에서만이 어근이 30회나 등장한다. 그 첫번 용례가 왕상 8:28로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참조: V. P. H. Hamil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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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앞에 간구했었던 한 가지 그것을 구하리니 
내 일생 주 전에 거하게 하소서
주의 아름다움 늘 바라보면서 내가 주님 전에서 주 찬양하리라
주의 아름다움 늘 바라보면서 내가 주님 전에서 주 찬양하리라
One thing have I desired of the Lord That will I seek after
That I may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All the days of my life
To behold the beauty The beauty of the Lord
To inquire in His temple The temple of the Lord 
....[출처] Maranatha Music - One Thing Have I Desi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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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님 당신은 내삶 구석구석까지 감찰하시며 나를 응원하시는분
내길을 밝혀서 영원한 생명의길로 인도하시며 나를 격려하시는분
크고 작은 갈등을 겪곤 하지만 항상 결국 당신을 선택합니다
나의 유일한 고백의 대상은 오직 아름다운 당신뿐입니다  "
나의 예배를 받으소서 홀로 영광 받으소서 주여 나의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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