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10.15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왕하3.이스라엘과모압의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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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제3장이스라엘과 모압의 전쟁

1.  유다의 여호사밧 왕 열여덟째 해에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을 열두 해 동안 다스리니라

2.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의 부모와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그의 아버지가 만든 바알의 주상을 없이하였음이라

3.  그러나 그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를 따라 행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4.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

5.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 왕이 이스라엘 왕을 배반한지라

6.  그 때에 여호람 왕이 사마리아에서 나가 온 이스라엘을 둘러보고

7.  또 가서 유다의 왕 여호사밧에게 사신을 보내 이르되 모압 왕이 나를 배반하였으니 당신은 나와 함께 가서 모압을 치시겠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올라가리이다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으니이다 하는지라

8.  여호람이 이르되 우리가 어느 길로 올라가리이까 하니 그가 대답하되 에돔 광야 길로니이다 하니라

9.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과 에돔 왕이 가더니 길을 둘러 간 지 칠 일에 군사와 따라가는 가축을 먹일 물이 없는지라

10.  이스라엘 왕이 이르되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는도다 하니

11.  여호사밧이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하는지라 이스라엘 왕의 신하들 중의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2.  여호사밧이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있도다 하는지라 이에 이스라엘 왕과 여호사밧과 에돔 왕이 그에게로 내려가니라

13.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로 가소서 하니 이스라엘 왕이 그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나이다 하니라

14.  엘리사가 이르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만일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얼굴을 봄이 아니면 그 앞에서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

15.  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의 손이 엘리사 위에 있더니

16.  그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

17.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너희가 바람도 보지 못하고 비도 보지 못하되 이 골짜기에 물이 가득하여 너희와 너희 가축과 짐승이 마시리라 하셨나이다

18.  이것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작은 일이라 여호와께서 모압 사람도 당신의 손에 넘기시리니

19.  당신들이 모든 견고한 성읍과 모든 아름다운 성읍을 치고 모든 좋은 나무를 베고 모든 샘을 메우고 돌로 모든 좋은 밭을 헐리이다 하더니

20.  아침이 되어 소제 드릴 때에 물이 에돔 쪽에서부터 흘러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

21.  ○모압의 모든 사람은 왕들이 올라와서 자기를 치려 한다 함을 듣고 갑옷 입을 만한 자로부터 그 이상이 다 모여 그 경계에 서 있더라

22.  아침에 모압 사람이 일찍이 일어나서 해가 물에 비치므로 맞은편 물이 붉어 피와 같음을 보고

23.  이르되 이는 피라 틀림없이 저 왕들이 싸워 서로 죽인 것이로다 모압 사람들아 이제 노략하러 가자 하고

24.  이스라엘 진에 이르니 이스라엘 사람이 일어나 모압 사람을 쳐서 그들 앞에서 도망하게 하고 그 지경에 들어가며 모압 사람을 치고

25.  그 성읍들을 쳐서 헐고 각기 돌을 던져 모든 좋은 밭에 가득하게 하고 모든 샘을 메우고 모든 좋은 나무를 베고 길하레셋의 돌들은 남기고 물매꾼이 두루 다니며 치니라

26.  모압 왕이 전세가 극렬하여 당하기 어려움을 보고 칼찬 군사 칠백 명을 거느리고 돌파하여 지나서 에돔 왕에게로 가고자 하되 가지 못하고

27.  이에 자기 왕위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데려와 성 위에서 번제를 드린지라 이스라엘에게 크게 격노함이 임하매 그들이 떠나 각기 고국으로 돌아갔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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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엘리사가 관계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공적(公的) 일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1.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의 일반적 성격(1-3).

2. 여호람과 그의 연합군이 개입하게 되는 모압과의 전쟁(4-8).

3. 동맹군이 모압 원정에서 처한 곤경과, 곤경 속에서 저들은 엘리사와 상의하고, 엘리사는 그들에게 평화의 응답을 줌(9-19).

4. 이 전쟁의 영광스러운 결과(20-25)와 동맹을 퇴각시키기 위해 모압 왕이 취한 야만적 방법(26, 27).

아합 왕가가 멸망의 운명에 처하게 된다. 또한 본 장에서 보면, 앞에서 보다 이스라엘의 성격과 조건이 나아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고된 파멸은 그리 멀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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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람의 통치(왕하 3:1-5)

아합의 아들이며, 아하시야의 동생인 여호람이 이스라엘의 왕좌에 올랐다. 또한 그는 나쁜 사람에 지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에 관한 두 가지의 존경할 만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Ⅰ. 그는 자기 아비의 우상을 제거했다. 그는 여러 가지 일에서 악을 행했으나, 자기의 아버지인 아합이나 그의 어미 이세벨과 같지는 않았다(2절). 비록 그가 악했지만, 솔로몬이 전도서 7장 17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악하거나 “극도로 사악하지는” 않았다. 여호사밧은 아합가와의 제휴로 말미암아 자기 가계를 개악(改惡)시켰지만, 아합가를 개선하는 데는 어떤 역할을 했으리라. 여호람은 자기 아버지와 형제가 바알을 숭배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았고,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현명하게 교훈 삼았다. 또한 “바알의 우상을 제거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만 섬기기로 하고, 그의 선지자들과 상의했다. 지금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그 사실이 아합가의 멸망을 예방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멸망은 “그의 시대에” 닥쳤고, 그는 그 가족 가운데서도 가장 나은 자였지만, 그 멸망은 바로 그 위에 닥쳤던 것이다(9:24). 왜냐하면 죄악의 그릇이 바로 그 때에 다 찼기 때문이다. 여호람의 종교 개혁은 없었던 것과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1. “그의 아버지가 만든” 바알 우상을 제거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일은 여호사밧에 대한 답례로 행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여호사밧은 여호람의 형과 제휴하지 않았듯이 그와도 제휴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왕상 22:49). 그러나 그는 백성 가운데 있는 바알 숭배를 없애지는 않았다. 그러기에 후에 예후는 바알 숭배가 만연한 것을 발견했다(10:19). 그의 집안을 개혁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그는 당연히 자기의 권력을 자기 국가의 개혁을 위해 사용해야 했을 것이다.

2. 그는 우상을 제거하고도, 바로 여로보암의 정책적인 죄(3절)인 송아지 숭배를 계속 고수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떠나지 않았다.” 이것은 바로 두 지파(유다 왕국) 사이의 경계를 지탱해 주는 국가적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참으로 기꺼이 죄를 뉘우치거나 개혁하지 않고, 다만 저들에게 손해를 주는 죄만 버렸고, 이득이 되는 죄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애착을 가졌던 것이다.

3. 그는 단지 바알 우상을 “제거했을” 뿐이며, 반드시 그래야만 했던 대로, 그 우상을 산산이 파괴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당분간만 치워 두면, 또 다른 때에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세벨은 국가를 이유로 내밀히 그녀의 바알을 섬기는 일에 만족했던 것이다.

Ⅱ. 그는 자기 형의 실점을 만회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그가 이스라엘인의 종교에 대해 아버지보다도 나은 견식을 지니고 있었듯이, 그의 형보다도 왕의 정신의 더 좋은 면을 소유했던 것이다. 모압은 아합의 사망 직후(1:1) 이스라엘에 대해 반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아하시야는 그들을 징계하거나, 복원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못했다. 그는 다만 대책을 강구하고, 그들과의 싸움의 수고와 위험을 감수하여 모험을 감행하기보다는 나약하게 자기의 이권을 그들에게 달려 보냈다. 여기서 그의 어리석음과 비겁과 공익에 대한 무관심은 더욱 나쁜 일이었다. 왜냐하면 모압 왕이 주는 공물은 이스라엘 궁정의 상당한 수입원, 곧 “10만 마리의 양과 10만 마리의 거세된 양”이었기 때문이다(4절). 당시 왕의 부는 돈보다 가축에 있었으며, 솔로몬이 통찰한 것처럼 “왕위는 영원히 계속되지 못하는” 것이므로(잠 27:23, 24), 저들이 “양떼의 형편을 아는 것”도 그들에 못지 않은 중요한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세금을 돈으로 지불하기보다는 그 땅의 특산물로 지불했는데, 이것이 군주에게 유익이 되었든지 아니든지 간에, 신하들에게는 용이한 것이었다. 모압의 반항은 이스라엘에게 큰 손실이었음에도 아하시야는 나태와 안이 속에 있었다. 그의 집 다락이 그에게 치명상을 주었듯이(1:2), 그들의 높은 곳(신당)도 그에게 치명상을 줄 수 있었다. 궁정의 난간이 무너진 사건은 아하시야의 왕좌에 보다 활동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을 앉혀 놓았고, 그는 적어도 자기 영토를 보존하기 위한 일침을 가해 보지도 않고서 고스란히 모압 통치권을 잃고 싶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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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압 원정(왕하 3:6-19)

여호람은 권세를 손에 잡자마자, 모압을 진압하기 위해 칼을 잡았다. 왕관은 그 왕관을 쓰는 자들의 머리에 큰 염려와 위험을 가져오는 법이다. 명예를 얻자마자 전쟁에 돌입한 것이다.

Ⅰ.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과 유다 왕 여호사밧은 이 원정에 협조했다. 여호람은 군대를 징집했다(6절). 그리고 유다의 경건한 왕에게 다음과 같은 의견을 보냈다.

1. 그는 여호사밧을 설득하여 동맹자로 삼았다. “당신은 나와 함께 가서 모압을 치겠느뇨?” 그리하여 그는 여호사밧을 얻었다. “나는 올라가리라. 나도 당신과 한가지라”(7절). 유다와 이스라엘은 비록 불행히도 서로 분열되기는 했지만 아직은 공동의 적인 모압에 대응하여 단결할 수 있었다. 여호사밧은 이스라엘이 다윗가에서 반동해 나간 것을 책하지 않았다. 비록 그들의 충성을 요구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기도 했지만, 자기들에게 다시 복종하라는 조건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스라엘을 자매국으로 대우했다.

자기들 마음속에서 옛날의 상해를 결코 용서할 수 없고, 잊을 수도 없고, 예전에 자기들의 권리를 침해했던 사람들과 화합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평화와 힘을 위한 어떤 친구도 가질 수 없다. “처음에는 권위가 없던 것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권위를 얻게 된다”(Quod initio non vubuit tractu temporis invalescit).

2. 그는 여호사밧을 극진한 친구처럼 대하고 의논했다(8절). 그는 어떻게 모압 땅을 공략하는가에 대해 자신보다 지혜와 경험이 많은 여호사밧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에게 가장 가까운 길로 요단을 건너서 그들에게로 가면 안 되며, “에돔 광야를 통하여” 돌아서(에돔은 유다에게 공물을 바치는 나라다) 에돔 왕과 그의 군대를 대동하자고 했다. 둘이 하나보다 낫다면, 하물며 “삼겹 줄이 쉽게 끊어질 수” 있으랴! 여호사밧은 아합과 연합하여 값비싼 대가를 지불할 뻔했다. 그러나 그는 아합의 아들과 연합했다. 또한 이 원정도 그에게 손상을 줄 뻔했다.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같이하여 얻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Ⅱ. 이 원정에서 동맹군이 처하게 된 큰 곤경. 그들은 적군의 낯을 보기도 전에, 물 부족으로 말미암아 멸망의 위험 속에 빠졌다(9절). 그 곳은 자기들의 선조들이 물이 모자랐던 바로 그 광야이므로(민 20:2), 이 광야를 행군하기 전에 그러한 점을 고려해야만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 스스로의 몰지각으로 인해 곤경에 빠지도록 버려두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섭리의 지혜와 권능과 자비로 구원받게 될 때, 하나님께서 더 큰 영광을 받으실 수 있게 되었다. 물보다 싸고 흔한 것이 어디 있는가? 그것은 “들의 모든 짐승도 마시는” 것이다(시 104:11). 그러나 바로 그러한 물이 없어서 왕들과 군대들이 곤욕을 당하고 죽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왕은 현재의 곤경과 곧 닥칠 위험을 몹시 슬퍼했다. 그것은 그들이 곧 그들의 원수 모압 족속의 손에 떨어지게 되고, 기갈로 인해 병력이 약화되면 보다 쉽게 희생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10절). “이 왕들을 불러 모은” 것은 바로 이스라엘 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렇게 한 것은 바로 섭리자 하나님 자신이라고 빈정대고, 그것을 불친절로 생각하고 있다. 즉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았도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한다”(잠 19:3).

Ⅲ. 여호사밧은 이 긴급사태에서 하나님의 조언을 구하자는 좋은 제안을 했다(11절). 그들이 지금 있는 곳은 “자기들의 선조들이 자기들에게 말해 주던 그 기사(奇事)”를 일깨워 줄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곧 이스라엘인들에게 때맞게 물을 공급하기 위해 바위로부터 물이 나왔던 장소다. 아마 그러한 회상이 여호사밧으로 하여금, 모세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 여호와의 선지자가 없는가?” 하고 물어보게끔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아마 이것에 대해서는 그가 더욱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저들을 이 광야를 거쳐서 원정길에 나서게 한 것은 바로 그의 충고였기 때문이다(8절). 그 때 여호사밧이 여호와를 찾은 것은 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리로 오기 전에 그렇게 했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곤경은 예방될 수 있었을 것이다. 능숙한 사람들도 때로는 태만하고 망각하는 수가 있으며, 심지어 필요한 곤경이 자기들을 역경 속으로 몰아넣을 때까지 자기들의 본분을 잊는 것이다.

Ⅳ. 엘리사가 그들과 합의할 수 있는 적절한 인물로 추천되어 있음을 발견했다(11절).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은 의아스럽게 생각된다.

1. 엘리사가 이와 같은 지루한 원정에 하나의 지원자로서, 또 아무런 감시도 받지 않고, 그리고 또 전혀 어떤 영예로운 지위를 가지지도 않은 채 참가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전쟁의 제사장”(신 20:2)이라거나 작전 참모로서 그 전쟁에 따라간 것이 아니었다. 또 왕들 중 아무도 자기의 대열 속에 그와 같은 보석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들의 수행원 가운데 그렇게 좋은 전우가 있다는 것도 모르는, 그런 애매한 처지에 엘리사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추측건대, 엘리사는 그 전쟁에 가담하여 “이스라엘의 수레와 그 마부”로서, 하늘로부터의 특별한 지시를 받았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미리 축복을 베풀어 주시고, 그들에게 그의 말씀을 주신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들 자신의 어떤 공로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염려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과 영을 더욱 더 염려해 주신다. 그렇지 않다면, 만사는 더욱 악화되는 수가 많다.

2. 이스라엘 왕의 종―그 자신은 알지도 못했지만―은 엘리사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종은, 오바댜가 여호람의 아버지 아합 왕 때 그러했듯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였을 것이다. 엘리사는 열왕에게 알리지 않았으나, 그렇게 경건한 자들에게는 자기를 알렸던 것이다.

그 종이 엘리사에 대해 한 이야기는, 그 사람이야말로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람”, 곧 엘리야의 종이었다는 사실이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가 손을 씻을 때에 그에게 수종을 들던 자라는 점이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섬기는 것을 배워야 한다.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먼저 낮아지라.

Ⅴ. 엘리사에게 탄원한 왕들의 간청을 살펴보자. 그들이 직접 엘리사의 숙소로 내려갔다. 여호사밧은 여호와의 말씀과 함께 사는 선지자에 대해 존경심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자기를 낮추어 그 선지자를 직접 방문했다. 즉 다른 부하들을 시켜서 물어오게 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두 왕도 자기들이 당한 곤경 때문에 그 선지자에게 간청을 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었다. 자기 자신을 낮추는 자는 이처럼 높아졌다. 그리하여 그 세 왕은 이 선지자의 방 문을 두드리고 그의 협조를 빌게 되었다(계 3:9 참조).

Ⅵ. 엘리사가 그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1. 사악한 왕, 이스라엘 왕에 대해서는(13절) 아주 냉담했다.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로부터 당신이 어떻게 화평의 대답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평안할 때 위해 주고 지원해 주던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선지자에게로 가시오. 그들에게 당신의 곤경을 도와달라고 하시오.” 엘리사는 여호사밧과는 달리 이스라엘 왕의 부분적이고 형식적인 개혁에 속지 않았다. 그가 바알 상들을 치워 버리기는 했지만, 아직도 그에게 바알의 선지자들이 있었고, 아마 그들 중 몇몇은 이 전쟁에 참가했을 것이다. “가라. 그들에게로 가라. 세상과 육체가 당신을 다스렸으니, 그것들이 당신을 도우리라. 당신이 섬기는 신들에게로 가라(삿 10:14). 어찌하여 당신이 하나님을 구하는가?”(14:3)

엘리사는 그의 면전에서 그의 악에 대한 거룩한 분노를 토로했다. 즉 그는 진심으로 “그를 향하거나 보고도” 싶지 않다고 했다(14절).

왕으로서의 여호람은 존경을 받아야 하나, 악한 인간으로서의 그는 너무도 극악무도했으므로 정죄를 받아야 했다(사 15:4). 엘리사는 신하로서 그를 존경하고 싶었으나, 선지자로서는 왕에게도 그 자신의 악을 알게끔 해야 했다. 이와 같이 특별한 직임을 맡은 사람들에게는 (일반인들과는 달리) “너는 악하다”(욥 34:18)라고 왕에게 말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여호람은 이 냉담한 대우를 인내성 있게 받아들이는 큰 자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바알 선지자들에게서 말을 들으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현재의 상황을 매우 개탄하면서, 또 그 선지자가 이 사실에 동정 어린 배려를 해 주기를 바라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선지자에게 겸손한 탄원을 보내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기가 하나님께 합당치 못한 자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다른 왕들이 자기로 말미암아 죽게 되는 것을 바랄 수는 없었다.

2. 믿음이 깊은 유다 왕은 엘리사의 존경을 받았다. 엘리사는 “그의 낯을 보아서”, 바로 그 왕 때문에, 그 모두를 위해 “여호와께 간구”하고 싶어했다. 하나님의 은총과 그 선지자들의 호의를 받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악한 사람들도 때로는 그들이 신실한 사람들의 단체의 일원이거나 그들과 우의를 맺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좋은 대접을 받을 수가 있다.

3.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렸다. 여호람을 보았을 때는 다소 착잡하고 분개해 있었다. 엘리사는 범죄에 이를 정도로 화를 내지도 않았고 충고를 못 할 만큼 성을 내지도 않았다. 이제 당면한 문제에 대한 거룩한 열성 때문에 성령의 역사와 기도를 준비하기 위해서 그의 마음은 진정되었다. 기도는 아주 침착하고 안정된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노래하는 경건한 한 악사를 불러왔다. 다윗이 명령했던 바와 같이, 하나님의 찬송이 아름답게 들려지는 것을 들으면, 마음이 즐거워지고 안정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또 기도하는 데에 적합한 정신 상태를 되찾는 계기가 된다.

선지자 무리가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나왔던 기사를 우리는 볼 수 있다(삼상 10:5). 하나님과의 교제를 원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마음을 조용하고 냉철하게 보존해야 한다.

엘리사는 이제 거룩한 음악이 준 감동을 받아 새 기운을 얻어서 “여호와의 손이 그 위에 임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찾아오는 것은 왕 세 사람이 찾아오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이다.

4.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해서, 그들의 현재의 곤경은 잘 해결될 것이요, 영광스럽게 되리라는 확신을 주셨다.

(1) 그들에게 즉시 물이 공급될 것이라 했다(16, 17절). 엘리사는 그들의 신앙과 복종심을 시험하기 위해 “개천에 골짜기를 많이 파서” 물을 받을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는 자들은 그것을 받을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 마치 저들이 바가의 골짜기에서 행한 것처럼, 또한 샘까지 만들었던 것처럼, 비를 채울 수 있는 “못을 파야” 했다(시 84:6). 또 엘리사는 아직 “바람도 비도 없는데도, 물이 충분히 공급될 것”이라고 말하여 그들의 경이감을 더하게 했다. 엘리야는 기도로써 구름에서 물을 얻었으나, 엘리사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물을 끌어 내오는 것이다. 이 물의 시원(始原)은 나일 강의 근원처럼 비밀한 곳에 있었다. 하나님은 제2의 원인(자연)에 구애받지 않으신다. 대체로 하나님은 풍성한 비를 통해 “그(하나님)의 산업을 견고케 한다”(시 68:9). 그러나 여기서는 비 없이, 적어도 그 지역에는 비를 내리지 않고서 그 산업을 견고케 하셨다. 아마 이 때 “큰 깊음의 근원이 터졌을” 것이다. 그 기적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그 골짜기에만”(그런 것 같다) “물이 가득했다.” 그 밖의 다른 어느 곳에도 물은 고이지 않았다.

(2) 이 물 공급 사건은 승리의 전조가 되리라 했다(18절). “이것은 여호와의 보시기에 오히려 작은 일이라. 네가 멸망에서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승리하여 돌아갈 것이니라.” 하나님은 무자격자에게 값없이 주시듯,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또한 풍성히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요구와 기대를 능가하신다. 하나님의 은총의 이슬을 신실하게 구하는 이들은 그것을 얻을 것이며, 그것으로써 “정복자 이상”이 될 것이다.

저들에게는 그 반역국의 지배자가 될 것이 약속되었으며, 그 땅을 황무하게 할 것이요, 파멸시키라는 허락이 내렸다(19절). 율법은, 피점령지의 과일나무는 베지 말라는 금지령을 내리고 있다(신 20:19). 그러나 “공세를 바쳐야 할 자에게 공세를 바치지”(롬 13:7) 않는 자들을 굶어 죽게 하기 위해서, 그 땅의 과일을 빼앗는 것이 정당하고 필요한 지금으로서는, 과실나무를 찍어 버리는 것이 허락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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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압군 섬멸(왕하 3:20-27)

Ⅰ.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엘리사로 말미암아 약속한 것들, 곧 물과 승리가 하나님의 선물로 내려지는 사건을 보게 된다. 전자 곧 물 공급은 후자의 한 공약이었을 뿐 아니라, 그 방편이 되는 것이었다.

모든 물, 궁창 아래 있거나 위에 있는 모든 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일시에 풍부한 물을 보내셨다. 그런데 그 물은 그들에게 두 가지 역할을 다 했다.

1. 그 물은 죽음 일보 직전에 있던 그 동맹군들을 살려 냈다(20절). 그리고 괄목할 만한 일은, 이 구원이 명백한 시기에, 곧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시기, 예루살렘 제단 위에서는 “아침 소제가 드려지는 그 때”에 맞춰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엘리사는 그 때를 자기의 “기도 시간”으로 정했다(아마 “성전을 향해서” 기도했을 것이다. 그들이 “전장에 나가” 있든, 먼 곳에 나가 있든 그렇게 기도해야 되었다. 왕상 8:44). 이것은 그가 성전 예배와 교제를 가지고 있으며, 그 위대한 제사의 공로로 인해 기도가 응답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표시다.

오늘 우리로서는 특별히 기도하기에 좋은 어떤 시간을 정할 수 없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항상 우리 곁에 있고, 항상 그의 제사를 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인들이 무시하고 있던 날마다의 제사 시각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그 때를 자기의 시간으로 선택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다니엘의 기도도 바로 “아침 소제 때”에 응답하셨다(단 9:21). 하나님은 당신이 세우신 제도들을 인정하시기 때문이다.

2. 그 물은 적을 속였다. 적들은 이스라엘이 파멸하고 곧 승리할 줄로 알고 있었다.

모압군은 동맹군이 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갑옷 입을 만한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변방 지역에 배치했다. 거기서 그들은 에돔 광야를 거쳐 오는 동안 지칠 대로 지친 이스라엘 군대야 쉽사리 해치울 수 있다고 자만하면서, 그들에게 멋진 환영을 해 줄 작정이었다(21절). 그러나 보자.

(1) 그들은 자기들의 망상에 완전히 속고 말았다. 그들의 자기 기만의 단계를 살펴보자.

① 그들은 이스라엘군이 주둔해 있는 골짜기에 물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는 그것이 피라고 착각했다(22절). 이유는 그 계곡은 마른 골짜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비가 온 일도 없으므로) 도저히 그것이 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가 그 위에 비치었다. 아마 “하늘이 붉고 흐려 있어서” “그 날은 비가 올 듯한” 날씨였던 것 같다(마 16:3).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알았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그 물이 붉게 보였고, 그 환상은 “이것은 피로다” 하는 생각을 확신하게끔 만들어 버렸다. 이토록 하나님은 그들이 스스로 속도록 버려두셨다.

② 그들의 진영에 이렇게 피가 가득하다면, “그 왕들은 필경 쓰러졌을 것이며(이해 관계가 다른 동맹군들은 흔히 그럴 수 있다) 그들이 서로 쳐 죽였을 것이다(23절).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그들을 죽였겠느냐”라고 결론을 내렸다.

③ 그리고 “군사들이 서로 쳐 죽였다면, 이제 노획물을 나눠 가지는 것밖에는 우리로서는 할 일이 없도다. 모압 사람들아, 이제 노략하러 가자”라고 했다. 아마 그들 중 어떤 다혈질적인 사람들이 이러한 제안을 연속적으로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기들이 남들보다 더 현명하고 좋은 생각을 내었다고 자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렇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사실로 믿어 버리고 만 것이다. “우리는 흔히 소망을 현실로 믿기 쉽다”(Quod volumus facile credimus). 이와 같이 멸망을 당할 자들은 먼저 속임을 당하는 법이다(계 20:8). 그리고 스스로 속는 자들만큼 실제로 잘 속는 자들도 또 없다.

(2) 그리하여 그들은 기를 쓰고 자기들의 멸망을 재촉했다. 그들은 무작정 이스라엘 진영으로 나아갔다. 약탈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너무 늦은 후에야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스라엘군들은 엘리사에게서 승리를 확신케 해 주는 용기를 얻어 맹렬히 나아가 그들을 치고 본국으로 쫓았다(24절). 그러고는 그 땅까지도 황무하게 하고(25절), 도성들은 파괴하며, 전답을 못 쓰게 했고, 우물을 막고, 나무를 베어 넘겼다. 단지 왕성만은 남겨 두었다. 그러나 그 주위의 성곽은 크게 손상시켰다. 이것은 모압이 이스라엘을 거역하여 얻은 것이다. “하나님을 대하여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서도 잘 되기를 기대할 자가 있겠는가?”

Ⅱ. 본장 말미에는, 그 극한 상황을 보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1. 그는 대담하고 용맹스러운 일을 시도했다. 그는 7백 명을 뽑아서, 그들과 함께 에돔 왕의 참호 속으로 돌격하려 했다. 그는, 에돔 왕은 고용된 용병이니 자기가 맹공격을 하면 크게 저항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 곳을 탈주로로 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에돔 왕은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적수였다. 할 수 없이 모압 왕은 물러나게 되었다(26절).

2. 이 시도가 실패하자, 그는 잔인하고 야만스러운 짓을 했다. 그는 자기의 아들, 그것도 왕위를 물려받을 장자―그 아들은 그를 위해서나 그 백성들에게 가장 귀중한 존재였다―를 취하여 “성 위에서 그를 번제로 드렸다”(27절). 그가 의도한 것은 이런 것이었다.

(1) 자기의 신 그모스의 은총을 빈 것이다. 그 신은 마귀라, 피와 살인을 기뻐했고, 인류의 망발을 즐거워했다. 우상 숭배자들은 자기들에게 보다 귀중한 것이 그 신들에게도 더 잘 열납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제사를 드릴 때는 그 신들을 위해서 자녀들을 불살라 드렸던 것이다.

(2) 공격군을 공포에 걸리게 하여 퇴각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성 위에서” 그 짓을 한 것이다. 공격군들이 이것을 보고 모압 왕이 항복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온갖 발악을 다 불사한다는 결심을 알게 하며, 자기의 성과 생명을 얼마나 값비싸게 팔려고 하는지를 보여 주려는 심산이었다. 이리하여 그는 자기 부하들이 적군을 극도로 미워하고, 그들에게 분노하도록 만들려 했다. 실로 그것은 효과가 있었다. 결국 그가 비상수단을 다하여, “이스라엘에게 크게 통분함이 임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부드럽고 관대한 사람은,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남을 극도로 괴롭게 하거나 절망케 하는 짓은 행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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