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12.03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시134.주야온종일주임재안에서섬김.FromToWithByOf.YHWH,마음뜻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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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시134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마음-뜻-성품/정성>>(((지성=지각=이해+깨달음/성찰각성. 성찰각성/통회+감동감성공감/교통+뜻/의지적합일결단추구실행=참된성찰각성))지혜-총명-명철[지식/기억/정보의 살아 생동함이 중요,,,,,집중-신중/상황이해추리분석/깨달음선악통찰/최선우선순위분별/해결방안도출선택제시]((감성))느낌감정공감교통((의지))뜻한바열정일심전력추구달성


1.  보라 밤에(라일) 여호와의 성전에(바이트) 서 있는(아마드)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에베드) 여호와를 송축하라(바라크)

2.  성소를(코데쉬) 향하여 너희 손을(야드) 들고(나사) 여호와를 송축하라

3.  천지를 지으신(아사)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바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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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B]시134

1.  {A Song of Ascents.} Behold, bless the LORD, all servants of the LORD, Who serve by night in the house of the LORD!

2.  Lift up your hands to the sanctuary, And bless the LORD.

3.  May the LORD bless you from Zion, He who made heaven and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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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 Greetings of Night Watchers. A Song of [a]Ascents. 134 

1. Behold, bless and praise the Lord, all servants of the Lord (priests, Levites), Who stand and serve by night in the house of the Lord. ((주목하십시요...밤에 주의 집에 서서 섬기는 주님의 모든 종들이여, <일심으로 주야로 주께 집중하여 교통하며>주를 송축하며 찬송하십시다))

2 Lift up your hands to the sanctuary And bless the Lord.((성소를 향하여 <전존재 기울여 중심으로>두손 들고 주를 송축하십시다))

3 May the Lord bless you from Zion, He who made heaven and earth.((천지를 지으신 주께서 <친히>시온으로부터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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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편은 15편의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중 마지막이다. 만일 그들이 성전에서 예배드릴 때 모두 함께 어떤 시간에 노래를 불렀다면 이 시편은 그중에서 결론으로 적합하게 지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편의 목적이 낮의 예식을 끝내고 밤에 자기들의 일과를 계속하는 성직자들을 고무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시편이 대화체로 쓰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1. 여호와의 집을 지키기 위해서 밤을 새우는 제사장 또는 레위인들이 지키는 동안에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지 않고, 예배의 행위를 하는 데에 그들의 시간을 보내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1-2).

2. 이와 같이 하나님을 송축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대제사장 혹은 파수대장을 권면하며, 하나님께 기도한다. 또는 예배를 드린 자들이 서로 권면해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3).

우리는 이 시편을 노래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스스로 감동되어야 하며, 그에게서 오는 자비와 은총을 소망하도록 자신을 격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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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송축하라고 부름(시 134:1-3)


이 시편은 우리에게 두 가지 축복에 대해서 교훈을 주고 있다.


Ⅰ. 우리가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 즉 그를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도록 가르침을 받고 있다(1-2절).


1. 그것을 행하는 것은 “레위인”에 대한 요청이다. 그들은 직책상 거룩한 일을 사역하기 위해 임명된 “여호와의 종들”이었다. 그들은 성소에서 수고하며, 여호와의 집의 책임을 담당했다(민 3:6 등). 그들 중 몇 사람은 “밤에 여호와의 집에 서서” 성전의 거룩한 것과 값진 것들이 모독되거나 약탈당하지 않도록 지켰다. 법궤가 휘장 안에 있었기 때문에 감시가 더욱 필요했다. 또한 제단과 촛대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수고했다. 아마도 그것은 소수의 열심 있고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익숙해 있던 것 같다. 우리는 “주야로 성전을 떠나지 아니한” 사람에 대해 성서에서 읽는다(눅 2:37). 이제 그들은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부르심을 받는다. 이처럼 그들은 일을 하면서 깨어 있고 거룩한 활동을 위해 시간을 바쳐야 한다. 우리의 시간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보다 더 좋게 어떻게 보낼 수 있겠는가? 경건한 묵상과 절규로 시간의 공간을 채우는 것이 최선의 책임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하나님과의 대화는 가장 적합하며, 합당한 요구가 된다. “여호와의 집에” 섰는 자들은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기억해야 하며, 경건과 거룩한 활동이 그 집에 어울린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송축케 하라.” 그들 모두가 또는 각자가 마음을 올리는 표시로 그렇게 하라. “거룩하게 너희의 손을 들라”(하몬드 박사는 이렇게 풀이한다). 또는 성별해 손을 들라. “성소에서” 손을 들 때, 그것이 합당하게 된다. 그들이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손을 씻으라고 명령받을 때, 그들은 거기에서 기도와 찬양 가운데 “거룩한 손을 들라”고 가르침을 받는다.


2.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제사장이요 레위인으로서 그렇게 행하라고 부르심을 받고 있다(사 66:21). 우리는 “여호와의 종들”이다. 우리는 그의 집과 그의 성소에 거처와 이름을 갖고 있다. 우리는 그 앞에 성직자로 선다. 밤에도 우리는 그의 눈 아래 있으며, 그에게 가까이 한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송축하라.” 반복해 그를 송축하라. 그의 영광과 인자하심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라. 기도하고 찬양하고 맹세할 때, 우리의 “손을 들자.” 근면과 즐거움과 마음의 고결함으로 우리의 일을 행하자. 이러한 권면은 주로 명령적 주의를 환기시키는 “보라!”라는 말로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현존에 참여했을 때 여러분을 돌아보라. 그리고 그에 따라서 행동하라.


Ⅱ.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선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갈구하도록 가르침을 받고 있다(3절). 파수꾼들이 그들의 대장을 축복한 것이나 레위인들이 대제사장을 축복한 것, 그들의 우두머리가 누구였든(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 그것이 단수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또는 축복이 한 사람에 의해 많은 사람들에게 선포되었다든지 하는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은 배울 수 있다.

1. 우리는 여호와의 축복받는 것보다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줄 그 이상의 것을 간구할 필요가 없다. 그가 축복하는 자들은 실제로 복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2. 시온으로부터 오는 축복, 영적인 축복, 즉 하나님과의 교제의 축복, 언약의 축복이 가장 좋은 축복이다. 우리는 그것을 열심히 구해야 한다.

3. 우리가 축복을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가 “천지를 지으신” 분이시며, 따라서 그의 처분대로 하늘과 땅의 모든 축복의 근원을 갖고 계심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4. 우리는 이러한 축복들을 우리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간구해야 한다. “여호와께서는 나를 축복하실 뿐만 아니라 너도 축복하신다.” 그렇게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충만함은 우리에게는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넉넉함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선한 의지를 입증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권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빎을 받는다”고 할지라도(히 7:7), 낮은 자는 높은 자를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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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Il'(3915, 라일) 밤 nigth

라일(명남)은 어원이 불분명하며, '밤 night'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40회 나온다.

구약성경은 어두움과 밤이 하나님에 의해서 준비되었다: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4-5, 시 74:16). 밤 동안 하나님께서는 깨어서 삼림의 짐승들을 위하여 먹을 것을 마련하시며(시 104:20-22), 사람을 염병으로부터 보호하신다(시 91:5-6). 실로, 낮과 밤의 교체와 일정한 주기는 제각기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결과이며(창 8:22, 렘 33:20, 렘 33:25), 따라서 각기 연속되는 낮과 밤은 아브라함 및 다윗과 맺은 또 다른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렘 33:21-26).

하나님에게 있어서 밤은 낮처럼 밝다(시 139:11-12).

가장 기억에 남는 밤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노예상태로부터 구원하신 날의 밤이다(출 11:4, 출 12:12, 출 12:29). 그것은 해마다 유월절에 상기된다. 이런 연관성 속에서 삼상 30:12의 사흘 밤낮은 교훈적이다. 삼상 30:13은 "오늘이 사흘째이니이다". 이 표현은 72시간이 지났다는 확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날 수로 사흘이 포함될 때 적용하는 상용어구라고 결론지어질 수 있다(참조: 주 여호와의 밤낮사흘).

다른 곳에서 밤은 시련, 울부짖음, 고난,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의 시간으로 나타난다(사 30:29, 욥 7:3, 시 6:6, 시 77:2, 사 26:9, 시 1:2, 시 42:8, 시 77:6, 시 88:1, 시 99:2, 시 119:55).(참조: W. C. KAISER;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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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yIB'(1004, 바이트) 집, 가정 house

바이트(명남)는 기본어이며, '집, 가정 house'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050회 나오며 '집' house, 혹은 '건물' building, '가정' home, '가족' household, '땅' land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 명사는 아람어 성서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다른 셈어에 동족어를 가지고 있다.

(a)  바이트는 어떤 종류의 재료로 만든 고정된, 세워진 구조물을 나타낸다. 이것은 '영구적인 거처'로서, 대개 장막과 구별된다(삼하 16:21, 참조: 삼하 16:22). 이 단어는 방 한 개의 거처에도 적용될 수 있다: "가로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창 19:2).

바이트는 또한 일시적인 '장막'(booth)이나 초가(but)와는 구별된다: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house)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booths)을 지은고로..."(창 33:17).

시 132:3에서 이 단어는 '생활 거처'를 뜻하며 '장막' tent(직역하면 '내 집의 천막')과 직접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 "내가 실로 나의 거하는 장막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며"(시 132:3). 이와 비슷한 용법이 대상 9:23에 나온다(직역하며 '천막 집' the tent house): "저희와 그 자손이 그 반열을 좇아 여호와의 전 곧 성막문을 지켰는데".

(b)  바이트는 많은 구절들에서(특히 이 단어가 '하나님'이란 말과 결합되어 사용될 때) 예배의 장소, 혹은 '성소'를 나타낸다: "너희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찌니라..."(출 23:19).

다른 구절에서 이 명사는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을 의미한다: "또 전의 벽 곧 성소와 지성소의 벽에 돌아가며 다락들을 건축하되..."(왕상 6:5). 때로 이 단어는 비록 상세하게 정의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런 의미를 지닌다(참조: 겔 41:7).

(c)  바이트는 방이나 가옥의 부속물을 의미한다: "전국 각 도에 관리를 명령하여 아리따운 처녀를 다 도성 수산으로 모아 후궁(harem, 직역하면 '여인들의 집')으로 들여..."(에 2:3). 이와 관련하여 바이트는 건물의 내부 혹은 바깥쪽에 반대되는 어떤 다른 구조물을 나타내기도 한다: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창 6:14, 성경의 처음 용례).

(d)  바이트는 종종 어떤 것이나 사람이 거하거나 안식하는 장소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지하세계(음부[sheol])는 '집'으로 불리운다: "내 소망이 음부에 내 집을 삼음에 있어서 침상을 흑암에 베풀고"(욥 17:13). '영원한 집'은 무덤이다: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전 12:5). '집'은 느 2:3에서처럼 '무덤'과 함께 사용될 때 '장소'를 의미할 수도 있다: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열조의 묘실있는 성읍이 어찌하여 황무하고".

(e)  바이트는 삿 3:20에서 용기(NASB, '상자' box)를 의미한다.

왕상 18:32의 '두 종자의 집' house of two seeds(한글개역 -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 만한 도랑")은 곡식 종자를 담는 용기를 가리킨다: "제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만한 도랑(직역하면, ~의 집들)을 만들고". '널판들의 띠' house of bars는 받침대를 의미한다: "그 널판들은 금으로 싸고 그 널판들의 장소(places, 직역하면, 집들 houses)들을 위하여(한글개역 - "널판들의 띠를 꿸) 금고리를 만들고..."(출 26:29). 이와 유사한 것으로 잠 8:2에 나오는 두 길의 교차로, 즉 '두 길의 장소' places('집' house, 한글개역 - "사거리")를 참조하라. 스텝지대(steppe)가 '짐승들의 집'으로 칭해진다: "...내가 들로 그 집을, 짠 땅으로 그 사는 처소(짐승들의 집)를 삼았느니라"(욥 39:6).

(f)  바이트는 가끔 한 집에 사는 사람들, 즉 '가족' household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창 7:1). 수 7:14에서 이 단어는 '가족' family을 의미한다: "...여호와께 뽑힌 지파는 그 족속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족속은 그 가족대로(직역하면, 집 혹은 단일한 거처에 사는 사람들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며"(수 7:14). 이 명사는 이와 유사한 의미에서 '자손'을 의미한다: "레위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었더니"(출 2:1). 이 단어는 '확대 가족', 심지어 주어진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더라"(삼하 2:4).

그러나 창 50:4에서 바이트는 '왕궁' 또는 왕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house)에 말하여...". '왕궁'과 '자손'이란 개념이 삼상 20:16에서는 결합되어 있다: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삼상 20:16).

(g)  바이트는 몇몇 구절들에서 '영토' 또는 '나라'를 뜻한다: "나팔을 네 입에 댈찌어다 대적이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호 8:1, 호 9:15, 슥 9:8).

(참조: NEDO;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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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5975, 아마드) 서 있다, 위치를 취하다, 머무르다, 지탱하다

아마드(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서 있다, 위치를 취하다, 머무르다, 멈춰서다, 지탱하다, 견디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00회 이상 나온다.(참조: BDB; HE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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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5650, 에베드) 노예 slave, 종 servant

에베드(명남)는 아바드(db'[; , 5647: 일하다, 섬기다)에서 유래했으며, '노예 slave, 종 servant'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800회 나온다.

(a)  에베드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노예'이긴 하지만 이스라엘에서 노예 신분은 그렇게까지 넌더리 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노예 신분도 여러 권리들을 지니고 있었고 종종 신뢰할 만한 지위도 소유했기 때문이다. 동료 이스라엘인은 그의 뜻에 거스려 무기한으로 노예로 삼을 수 없으며 그 기간은 6년으로 제한되었다(출 21:2). 심지어 노예를 그 주인의 금전으로 기술하는 매우 항의를 많이 받고 있는 출 21:20-21의 서술도 하나의 '실리적인 사상'이 아니라 오히려 주인에 의한 육체적 학대를 통제하는데 기여하였다.

악한 의도가 있었음이 증명되는 경우(출 21:14)나 종이 죽는 경우(출 21:20)에는 언제든지 그 주인은 형벌을 면할 수 없었다. 만약 주인의 의도가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경우 상해를 당한 노예는 최소한 자유를 얻으며(출 21:26-27) 주인은 대부금을 잃는다(출 21:21).

또한 창 24장 이하, 창 41:12(참조: 창 15:2)에 언급된 종의 영예로운 위치를 주목하라.

(b)  왕의 신하들은 왕의 모든 봉신들(vassal kings, 삼하 10:19)및 속국들(대상 18:2, 대상 18:6, 대상 18:13)과 마찬가지로 그의 종들이다(창 21:25, 출 7:28). 관리들("신하" 삼상 19:1), 공무원들("시신", 왕하 22:12), 사절들("신하들", 민 22:18)을 포함하여 왕에 대한 직무를 맡은 모든 자들도 역시 왕의 종들이다(창 40:20).

(c)  '종'이라는 용어는 종종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공손하고 겸손한 말로 사용되었다(창 33:5). 이것은 "당신의 개 같은 종" 등등과 같은 표현에서처럼 극단적일 수도 있다(왕하 8:13, 삼하 9:8). 텔 엘 아마르나 서판들(Tell el Amarna tablets)과 라기쉬(Lachish) 서신들 2, 5, 6번을 참조하라. "당신의 종" 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자주 사용되었다(출 4:10, 시 19:12, 시 19:14, 시 109:28).

(d)  '종'이라는 용어의 가장 중요한 용법은 메시야를 지칭하는 것인데, 이 용어는 메시야에 대한 구약성경의 가르침을 나타내는 가장 두드러진 인격적, 전문적 용어이다. 메시야에 대하여 중심적인 가르침을 주는 구절들은 이사야의 마지막 27장들(즉 사 39-66장)에서 발견된다. 거기에서 이 단어는 단수로 20회(사 39-53장), 복수로 11회(사 54-66장) 나타난다.

(e)  단수로 쓰인 20회 용례 중 12회와 복수로 쓰인 11회의 용례에서 종은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킨다. 단수가 나타나는 구절들로는 사 41:8-10, 사 42:18-19, 사 43:9-10, 사 44:1-3, 사 44:21, 사 45:4, 사 48:20, 아마도 사 49:3이고 복수가 나타나는 구절은 사 54:17, 사 56:6, 사 63:17, 사 65:8-9, 사 65:13-15, 사 66:14이다. 윌리스 비처(Willis Beecher)가 상기시켜주는 바와 같이 이것은 단순한 인종집단으로서의 종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다른 무엇을 나타낸다. 이것은 또한 아브라함 및 다윗과 맺은 약속(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원주민이든 주민으로 받아들여진 자들이든 상관없이 이 약속에 참여하는 민족인 이스라엘과 영적인 이스라엘 둘 다를 가리킨다.

(f)  또한 몇몇 구절에서 종은 실제 이스라엘과 구별되며 이스라엘에 대하여 선교사명을 띠고 있다(사 49:1-9, 사 42:1-7, 사 50:4-10, 사 52:13-15, 사 53:1-12). 이 종은 종으로서의 이스라엘과 동일시되어야 하면서도 그들에 대하여 사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동시에 구별되어야 한다(사 49:5-6에서 분명히 진술되어 있다. 참조: 사 49:3). 분명히 이 종은 그 이름을 그들 나라와 민족에게 남기어 그 동일한 이름이 그들 나라와 민족 양자 모두를 가리키게 하는, 이름의 시조가 되는 영웅들과 반대된다. 여기에서 그 집단의 핵심적인 일원은 처음보다 오히려 마지막에 온다. 그 집단에는 프란츠 멜리취(Franz Delitzsch)의 설명에서 맨 밑바닥은 모든 이스라엘 민족을 나타내고(사 42:19), 중간은 영적인 이스라엘, 즉 본토 신자들과 양자로 받아들여진 신자들(사 41:8-10)을 나타내고, 꼭대기는 메시야, 즉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피라미드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는 세 집단 간에 통합적 연대성이 있다.

또 다른 견해는 이 구절들에서 두 명의 종, 즉 사 42:19, 사 49:3 등에 나오는 소경인 실패한 종 이스라엘과 사 42:1과 사 49:5, 사 50:10, 사 52:13과 사 53:11에 나오는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종 메시야를 본다.

이 용어를 언약의 백성에게 적용시키는 선지자로 이사야 외에도 있다. 렘 30:10, 렘 46:27-28, 겔 28:25, 겔 37:25을 또한 보라. 이 단어는 렘 33:21-22, 렘 33:26, 겔 34:23-24, 겔 37:24-25에서 다윗, 약속의 메시야에게 적용되며, 학 2:23에서는 다윗의 후손 스룹바벨에게 적용된다. 특별히 흥미로운 점은 이 단어가 메시야적 칭호인 '가지' branch("순", 슥 3:8)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g)  다른 종교적 용법들로서 이 단어는 모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 worshipers(모든 셈족 사람들이 예를 들면 "바알의 종", 마르둑 등과 같이 그들의 거짓 신들을 가리킬 때도 흔히 사용하는 표현이다), 성전에 있거나 성전에서 봉사하는 모든 종들,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여호수아, 갈렙, 다윗, 히스기야, 엘리야김, 스룹바벨과 같은 하나님의 종들로서의 독특하고 유일한 역할로 그들의 여호와를 섬긴 자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또한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칭호인 "나의 종들", 혹은 "그의 종들" 혹은 "당신의 종들"이라는 표현이 24회 나온다.(참조: W. C. KAISER;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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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1288, 바라크) 무릎을 꿇다, 축복하다, 복을 주다, 찬양하다

바라크(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무릎을 꿇다, 축복하다(복을 주다), 찬양하다'를 뜻하며, 다른 의미로는 주로 하나님에 대하여 '저주하다, 욕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왕상 21:10, 왕상 21:13, 욥 1:11, 욥 2:5). 기본적으로 바라크는 '유익한 능력을 부여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구약성경에서 '축복한다'는 것은 '성공, 번영, 생산, 장수 등을 위한 능력을 부여한다'를 의미한다. 이 의미는 부여하는 과정과 부여 받는 상태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진정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다. 또한 바라크의 의미를 보면 무릎을 꿇는 것과 축복이나 복을 받는 것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1)  무릎을 꿇는 것, 곧 기도하는 것은 축복을 받는 비결이다.

대하 6:13(참조: 왕상 8:14, 왕상 8:54)을 보면 솔로몬은 성전 봉헌에서 놋대 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의 복은 백성들이 예배가 끝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갈 때 그들에게 내려졌다. 이렇게 하여 이 복은 그들의 일상 생활에 실현된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이삭의 신부를 구해오라는 주인의 부탁을 받고 메소포타미아 나홀의 성에 이르러 낙타를 그 성밖 우물 곁에 무릎을 꿇게 하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 종의 기도로 주인과 종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삭의 좋은 신부감을 얻는 복을 받은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열심히 기도하자.

(2)  무릎을 꿇는, 곧 여호와를 경배하는 것은 복을 받는 비결이다.

시 95:6이하에서 시인은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을 듣기를 원하노라"(빌 2:10, 빌 2:11)라고 말했다.

시인은 시 115:2이하에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무론 대소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라고 노래했다.

(3)  신앙 공동체는 자기가 받은 복에 대하여 여호와를 찬양함으로서, 곧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라는 외침으로 응답했다.

시 28:6, 시 28:7에서 다윗은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노래했다.

여러분 바라크라는 말을 기억하라.

바라크 -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다.

바라크 -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것이다.

바라크 -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이다.

바라크 - 받는 복을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이다.(참조: H. -G. LINK; 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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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d,qo(6944, 코데쉬) 분리됨, 거룩함, 신성함

코데쉬(명남)는 카다쉬(vd'q; , 6942)에서 유래했으며, '분리됨, 거룩함, 신성함'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470회 나온다.

명사 코데쉬는 '거룩함'의 개념을 내포한다. 즉 이것은 거룩한 영역에 속하는 사물, 따라서 범속한 것과는 구별되는 사물의 본질적 특성이다. 이러한 구분이 레 10:10과 겔 22:26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여기에서 코데쉬가 홀(불경스러운, 세속적인, 범속한)의 반의어로 등장한 것이다.

"거룩한"이라는 단어가 '두려운 신비'(mysterium tremendum)를 시사한다는 오토(R. Otto, 참고문헌을 보라)의 견해는 일리가 있다. 즉 그것은 어느 정도의 경외를 가지고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이 단어는 신격과 거의 같은 동의어로 사용될 수 있다. "그의 거룩한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이다.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내실을 거룩한 곳들 중의 거룩한 곳이라 부른다. 곧 지성소라는 뜻이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은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을 그의 능력의 신비성과 관련시킬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선하고 전혀 악이 없는 그의 속성에로도 귀착 시킨다. 그러므로 거룩한 객체들은 제의적 불결성이 전혀 없는 객체들이며, 이러한 제의적 불결성은 도덕적 불결성도 의미한다. 이 거룩한 객체들은 단순히 바쳐졌을 뿐만 아니라 선한 것에로 바쳐졌으며 악한 것과 분리되었다는 뜻이다. 제사 의식상으로, 더럽히는 것으로부터 인간을 분리시킨다는 것은 진정 영적 도덕적 성결을 의미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는 말씀이 구약성경으로부터 신약에 인용되었다(벧전 1:16, 레 19:1, 레 20:7 등등).

그리고 소위 성결 법전이라는 것은 윤리적 색체가 강하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며 하나님의 모습을 반향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을 윤리적으로 거룩한 분으로 계시하면서, 하나님 자신을 닮은 거룩한 속성에로 인간을 부르고 계신다(ISBE, "Holiness").

이스라엘 종교의 기본 요소 중 하나는 신성의 영역과 범속의 영역 간의 상호 불가침적 구별을 유지시키는 것이었다(민 18:32).

고유적으로 거룩한 것, 또한 하나님의 법률이나 종교 의식에 의해 거룩하다고 명명된 대상은 범속한 것으로 취급하면 안되었다.

안식일은 거룩하였다. 그리고 그 날과 관련된 금지 사항들은, 그날의 독특한 성격을 유지시켜 주고 그 날이 범속한 날로 취급되지 못하도록 지켜주는 역할을 하였다(출 16:23-26, 사 58:13, 사 58:14).

제사장들에게는 그 거룩한 신분을 더럽히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특별 제한이 가해졌다(레 21:6이하).

성교는 구약성경에서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러나 성교는 레위기 율법상의 불결 상태를 초래하는 한 요소였으며(레 15:18) 이로써 거룩한 것과의 접촉이 금지되었다(삼상 21:4). 이와 동일한 원리가 화목 제물(레 19:5-8), 거룩한 기름(출 30:32-33), 그리고 거룩한 향(출 30:37)에도 적용되었다.

하나님께 드린 것은 '거룩한' 영역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레 5:15-16에서 "성물"이라 불리는 레위기적 예배의 여러 요소들 즉 그 땅의 소산물(레 19:24), 사유 재산(레 27:28), 군사 행동으로써 획득한 전리품(수 6:19) 등이 이에 포함되었다. 오직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는 희생 제물은 '거룩하다'고 명명되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제사장직에 의해 묘사된 바로서 거룩한 영역에 절대적으로 바쳐진 것이기 때문이다(레 19:18).

거룩한 영역이 불완전한 요소들을 소유한 세계와는 개념상 구별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역의 완전 무결성이 엄격히 유지되는 한 거룩한 영역도 그 불완전의 세계 내에서 적용할 수 있었다. "거룩함" holy의 완전 무결성 유지는 이스라엘 종교의 한 기능이었다. 거룩한 하나님은 규례와 율례라는 맥락 내에서 구속적 사랑을 가지고 인간에게 접근하였으며 이러한 규례와 율례들은 하나님의 본질적 특성인 성결의 순수성을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레위기적 제도가 성립되기 이전에도 이 원리가 인지되고 있었다(출 3:5을 보라).

제사 의식 역시 거기에 참여한 자들에게 거룩함을 부여했다. 이 점은 구속의 개념에 있어서 본질적 요소였다. 왜냐하면 정의를 내리건대 거룩함이란 죄악적이고 속된 모든 것으로부터의 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이 거룩하기(v/dq; , 6918) 때문에 인간을 거룩함에로 부르신다(레 19:2, 참조: 벧전 1:15).

그의 거룩한 속성 때문에 하나님은 필멸적(必滅的) 인생들의 연약하고 불완전한 요소들을 초월해 계시며 따라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출 15:11-12). 거룩한 자들만이 하나님의 성산에 거할 수 있다(시 15:1이하). 하나님은 본래 거룩하시며 도덕적 불완전으로부터 떠나 계시기 때문에 그의 약속에 그가 신실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시 33:21). 자기 백성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그리고 에덴의 저주에 비롯된 불완전성으로부터 피조물을 구속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함을 궁극적으로 나타내겠다는 약속이,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본질적으로 내재해 있다(롬 8:18-23).(참조: T. E. MCCOMISKEY;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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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3027, 야드) 손 hand

야드(명여)는 기본어근이며, '손 hand'을 의미하며, 여러 가지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600회 이상 나온다.

야드의 기본적인 의미는 '사람의 의지의 기능들을 수행하기 위해 사용된 팔의 끝부분'이다.

이 용어는 문자적으로 좋든 나쁘든(창 4:11), 일반적인 일의 기능을 행하는 사람의 손에 대해 사용된다(창 5:29). 동해보복법("손에는 손")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받은 신체 부위에 해당하는 신체부위를 파괴하는 형벌이다(참조: Harris, R. L., Man-God's Eternal Creation, Moody, 1971, pp. 117-18).

"손"이란 말이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방법이 여러 가지라는 사실은 신학적으로 의미심장하다. 이런 관용어들은 손의 용도가 넓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어떤 사람의 손 안으로(혹은 아래에)"라는 어구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책임, 돌봄 그리고 지배를 포함하는 권한을 나타낸다. 사람은 이런 권한의 보호하에 있을 수 있다. 아마르나 서신에 나오는 가나안인들의 어휘 바-디-우(ba-di-u)는 '그의 손안에' in his hand를 의미한다. 인간은 다른 창조물을 "그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창 9:2). 하갈에 대한 사라의 권한(창 16:6, 창 16:9), 보디발의 집에 대한 요셉의 권한(창 39:3-8), 이스라엘에 대한 모세와 아론의 권한(민 33:1), 그리고 아람에 대한 다윗의 권한(대상 18:3), 이 모든 것은 이 어구로 표현된다. 여호와는 우리의 생명에 대한 권한을 갖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그의 돌보심, 주권, 그리고 심판에 맡겨둔다(시 31:5, 시 31:15, H6, 16, 삼하 24:14). 더구나 이 관용어는 어떤 사람이 '자기 손안으로 인도될 때 그에 대한 승리'를 묘사한다. 반대로, 구원은 '어떤 사람의 손 밖으로 인도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종종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원수들을 '이스라엘의 손 안으로 인도할' 것이며(창 49:8, 수 6:2) 이스라엘을 '원수들의 손 밖으로 인도하리라'고(출 3:8) 약속하였다. 도피성은 피의 보수자의 '손에서부터' 무고한 살해자의 '구출'을 제공해 주었다(민 35:15).

손은 '능력' power이나 '힘' strength을 상징한다(신 8:17). 신 32:36은 "그들의 손이 가버렸다"고 말함으로써, 이스라엘의 힘의 상실을 묘사하였다. 모세의 손은 애굽에 대항한 재앙에서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맹렬하게 사용되었다(출 10:12-15).

이 은유의 가장 두드러진 용법은 이 은유가 하나님의 능력을 전달한 것이다. 야드는 하나님의 전능 하심의 상징이다(대하 20:6, 시 89:21). 대상 29:12은 여호와의 손에 능력과 힘이 있다고 선언한다(참조: 시 89:13, H 14). 그의 손은 '짧지'(혹은 '약하지')(사 59:1) 않고 강하다.

하나님의 손은 천지 창조, 통치(사 48:13)를,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손은 구원과 해방을, 이스라엘의 적들에게는 파멸과 멸망을 나타낸다(출 7:4, 출 9:3, 삼상 7:13).

그의 능력에 대한 두드러진 증거는 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신 것이었다(출 13:3-16, 민 33:3). 모든 세상은 이 사건을 통해서 여호와의 능력을 목격했다(수 4:24). 하나님의 손은 진리와 정의를 행하시며(시 111:7), 의인들을 지지하고 인도한다(시 37:24, 시 139:10). 하나님의 손은 그의 의로운 형벌(삼하 5:6, 삼하 5:11), 그의 자애적 돌봄(스 7:6, 욥 5:18, 시 145:16, 사 49:16), 그의 보호(사 51:16)를 표현한다.

그는 언제나 우리를 위해서 손을 들어올린다(시 10:12). 그 당연한 결과로서의 개념은 어떤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에 관한 것이다. '손이 미치다'나 '손이 있다'는 어떤 일을 하거나 얻을 수 있는 능력을 나타낸다(레 14:21-32).

야드는 '소유'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소유'는 손의 일반적인 기능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손에'라는 어구는 종종 이런 의미를 함축하곤 한다. 이스마엘 사람들은 요셉을 그들의 소유물로 취했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창 39:1). 여호와께서는 자기가 다윗 왕국을 그의 아들의 손에서 취하시겠다고 선언하였다(왕상 11:12, 왕상 11:31-35).

야드는 '복종'이란 의미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복종은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의 수하에 두다'라는 문구로 표현된다. 대상 29:24에서 "...여러 아들이 솔로몬 왕에게 복종하니"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여러 아들이 그들 자신을 솔로몬 왕의 수하에 두니'이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에게 반역하지 말고 그에게 '복종하라'고 권면하였다.

야드는 기호와 상징 언어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손을 펴거나 들어 올리는 것은 서너 가지의 행위와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첫째, 기도, 겸손한 탄원을 나타낸다(시 28:2, 대하 6:12 이하).

둘째, 주기적으로 공식적인 축복을 수반했다(레 9:22).

셋째, 맹세할 때 손을 들어 올린다. 아브람이 전쟁 전리품을 취하지 않겠다고 맹세할 때, 그는 소돔 왕에게 자기 손을 들어 올렸다. 맹세를 나타내는 또 다른 방법은 아브람의 종이 아브람의 명령에 충실할 것을 맹세하면서 행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넓적다리 아래에 손을 넣는 것이었다(창 24:2, 창 24:9). 성경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서원은 하나님께서 신인동형론적으로 행하신 것들이다. 성경에서 이것을 수반하는 징표로서 가장 기억할만한 맹세는 아브람에게서 한 민족을 세워 이 민족, 즉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계를 축복하시겠다고 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영원한 언약적 약속이다(창 12:1-3, 참조: 출 6:8, 민 14:30). 하나님은 또한 자기 백성의 피를 보수하시겠다고 맹세했다(신 32:40).

'손을 대는 것'은 4가지의 기본적인 의미를 지닌다.

첫째, 이 어구는 죽이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창 37:22, 창 37:27).

둘째, 이 단어는 축복의 의식적인 의례에서 사용되었다(참조: 창 48:17).

셋째, 특별한 직무나 일을 위임할 때는 대개 손을 대는 것이 수반되었다(참조: 모세가 여호수아를 취임 시킨 사건과 행 13:1-3).

넷째, 대속이라는 중요한 신학적 개념은 언제나 희생 짐승에 손을 대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염소에 손을 댐으로써, 민족의 죄를 염소("대속물")에게 전이 시켰다. 각 사람들은 이런 표현을 사용하여 자기들의 죄가 희생 짐승에게 전이되어 그 짐승들이 그 죄를 짊어졌다고 묘사하였다(출 29:10-19, 레 1:4). 마침내 이런 비유적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일에서 성취되었다(골 2:14).

손을 채운다는 것은 직분을 맡기는 것을 나타낸다(출 29:9-35, 출 16:32, 민 3:3). 성직 수임은 '손을 채우다'라는 관용어로 묘사되었다. 출 29:9에서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위임하여 거룩하게 할찌니라"는 문자적으로 '아론의 손과 그 아들들의 손을 채우게 하라'이다. 일부 학자들은 손을 채운다는 말은 손이 가득 차 있어 다른 일을 할 여지가 없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 이 어구가 주로 제사장들의 성직 수임 때에 사용되었으므로, 희생 제물의 몫을 취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손을 뻗친다'는 것은 두 가지 개념을 전하는데 하나는 어떤 대상을 "공격하는 것"을 나타낸다(수 8:19, 수 8:26). 다른 하나는 여호와에 대한 시편 기자의 열망을 묘사한다(시 143:6).

손으로 머리를 싸는 것은 슬픔을 나타낸다(렘 2:37).

손뼉을 치는 것은(그 감정에 따라) '불쾌, 격렬한 흥분'(민 24:10), '기쁨'(시 47:1, 겔 25:6), '악의에 찬 기쁨'(겔 6:11)을 나타낸다.

손을 얹는 것은 능력의 전달(왕하 13:16)이나 죄의 전가(레 1:4, 레 8:22 등)를 나타낸다.

'어떤 사람이 손을 어떤 일에 두다'라는 어구는 그 사람이 관여하고 있는 "일"과 활동을 나타낸다(신 2:7, 신 30:9).

'손을 강화하는 것'은 어떤 사람을 돕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다윗을 돕는 요나단, 삼상 23:16).

강퍅한 반역은 "높은 손"이란 어구로 묘사된다(민 15:30). 반대로, 이와 똑같은 표현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해내신 하나님의 강한 구출을 나타내었다(출 14:8).

'손을 흔드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와 파괴를 상징했다(사 10:32, 사 19:16). 마찬가지로 모욕도 이런 상징으로 묘사되었다(습 2:15).

손을 씻는 행위는, 정결하게 하는 것과 관련된 계명들을 지키기 위해 행해졌을 뿐 아니라 결백의 확증 및 깨끗한 양심을 나타내기 위해 시행되었다(신 21:6, 시 26:6, 참조: 욥 17:9, 시 24:4, 마 27:24). 의식적 정화는 '손을 씻는 것'으로 묘사되었다(레 5:11), 이것은 그 사람을 의식적으로 의롭게 만들어준다(삼하 22:21).

손의 기호(출 13:9, 출 13:16, 신 6:8, 신 11:18)는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계명들을 끊임없이 기억하기 위한 하나의 생생하고도 영구적인 수단이었다.

'손을 여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 주는 것이었다(신 15:8, 신 15:11). 반면에 '손을 닫는 것'은 주지 않는 것이었다(신 15:7). 하나님은 모든 생물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서 그의 손을 여신다(신 145:16).

'자기 손을 늦추는'(자기 손을 움츠리는) 사람은 '포기하는' 사람이다(수 10:6), 게으론 자는 "자기 손을 그릇에 묻는다"(잠 19:24). 침묵은 손으로 입을 막는 것이다(잠 30:32).

흥미 있는 것은 '손'이 '법령' ordinance(스 3:10)이나, 아마도 언약을 세우기 위해 혹은 종교적 기념으로 사용된 '기념물' monument(참조: 하솔에 있는 의식적 석비)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삼상 15:12, 사 56:5). 율법이 삶의 중심임을 이스라엘인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율법은 상징적으로 그들의 손에 두어졌다(신 6:8). 법령과 하나님의 말씀을 제공하는 수단은 '~의 손으로' by the hand of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아마도 손을 결합한다는 것 때문에, 야드가 부어 만든 바다의 바퀴들의 '축' axles(왕상 7:32-33)과 성막이나 성전의 판지를 고정하기 위한 '지주' stays(장부 tenons)라는 의미로 사용되게 된 것 같다(출 26:17-19, 왕상 7:35-36). 옆에 늘어뜨린 손으로 말미암아 야드가 '측면' side, '해안' coast, 혹은 '경계' border라는 뜻으로 사용되게 된 것 같다(출 2:5, 민 2:17, 민 34:3). 손을 펼치는 것은 '공간' space을 의미했으며(창 34:21), '손'은 또한 '부분' part이나 '시간' time을 의미했다(창 43:34, 창 47:24).

(참조: R. H. Alexander; BDB; DN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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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n:(5375, 나사) 들어올리다, 가지고 가다

나사(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들어올리다, 나르다, 가지고 가다, 취하여 가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650회 나오며, 칼형이 600여회, 나머지는 니팔, 피엘, 히필, 히트파엘형으로 사용되었다.

1. 칼형은 기본적으로 세가지 각기 다른 의미, 즉 ① '들어올리다' to lift up, ② '가져가다, 나르다' to bear, carry, '지탱하다' support, ③ '취하다' to take, '제거하다' take away를 나타낸다.

(a)  '들어올리다' to lift up라는 의미는 문자적으로, 그리고 비유적으로 여러 어구에서 사용된다. 즉 맹세할 때(신 32:40, 겔 20:5, 겔 20:6, 겔 20:15 등), 폭력을 행할 때(삼하 18:28), 신호로서(사 49:22), 형벌을 가할 때(시 10:12), '손을 들어올린다'. 그리고 명예를 회복시킬 때(창 40:13, 창 40:20), 즐거움과 독립심을 보일 때(욥 10:15, 슥 2:4, 시 83:3), 그리고 성문의 상인방들(lintels)을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으로서(시 24:7, 시 24:9), '머리를 들어올리다'. 선한 양심, 확신, 호의, 혹은 용납의 표시로서 '얼굴을 들다'(삼하 2:22). 종종 '바라보다', 혹은 '보다'라는 동사 앞에서 종종 중복적으로(창 13:10, 창 13:14), 사람에 대한 사랑이나 욕망 때문에(창 39:7), 하나님을 향하여(시 123:1), 그리고 우상에게(겔 18:6, 겔 18:12, 겔 18:15) '눈을 들다'. 또한 '울고 외치다'를 뜻하는 동사 앞에 중복적으로(창 27:38, 삼상 30:4), 그리고 즐거워하는 것을 나타낼 때(사 24:14) '소리를 높이다'. 여호와의 이름(출 20:7), 기도(렘 7:16, 렘 11:14), 노래(민 23:7), 비난(시 15:3)과 같은 것을 '목소리로(어떤 것을) 높인다', 마음이 '사람을 들어올림'으로써 행동을 유발시키거나(출 35:21, 출 35:26, "마음에 감동을 받아", 출 36:2) 오만과 교만(왕하 14:10)을 야기시킨다.

이상 세가지 중요한 의미 중에서 첫번째 의미가 이 단어를 죄와 연결시키는 것은 또한 들어올린다, 집어올린다라는 범주에서이다. 사람은 성막을 더럽힘으로써(출 28:43, 민 18:22), 이웃을 미워함으로써(레 19:17), 동물의 시체를 만짐으로써(레 22:9), 혹은 여호와의 성물을 더럽힘으로써(민 18:32) 부정과 죄를 집어올릴 수 있다. 즉 초래할 수 있다, 혹은 물들 수 있다.

(b)  '지다, 가지고 가다, 나르다'라는 두번째 의미의 범주는 특히 죄 혹은 죄의 형벌을 지는 것에 대해 사용된다. 예컨대 가인은 "내 형벌이 내가 질 수 있는 것보다 더 크다"(한글개역,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창 4:13)라고 불평한다. "그가 그의 죄를 질 것이다"라는 표현이 빈번히 나온다(레 5:1, 레 5:17, 레 7:18, 민 5:31, 민 14:34 등). 이것은 대표나 대리(레 10:17)에 의해 다른 사람의 죄를 진다는 개념이나 속죄양(레 16:22)의 개념에 쉽게 이르른다. 사 53:11의 어근 사발(짐을 지다)은 사 53:4에서처럼 다음 구절에 나오는 나사(지다), 즉 "종이 많은 사람의 죄를 지다"와 병행된다. 이러한 짐(debits = 차변들)은 세상 생활을 영향하는 현세적 근거에 의해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넘어갈 수 있다(민 14:31, 민 14:33).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주장해 온 바대로 이것을 계속적이고 필수적인 사태로, 특히 영원토록 숙명적으로 적용하는 잘못을 범했다(겔 18:19-20). 왜냐하면 신 24:16에서는 그 반대가 분명히 진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c)  세번째로 이 단어는 제거함, 용서, 혹은 죄, 불의, 범죄의 용서를 강조한다. 이러한 죄를 제거하는 행동은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로 열거될 정도로 특징적이다(출 34:7, 민 14:18, 미 7:18). 종종 나사의 이러한 형태는, 예를 들면 요셉의 형제들의 심부름꾼(창 50:17), 바로(출 10:17),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세(출 32:32, 민 14:19), 나봇을 위하여 아비가일 (삼상 25:28), 사무엘에게 사울(삼상 15:25)이 드리는 중보 기도에서 사용된다. 이것은 또한 여호수아가 임종을 앞두고 한 말에서도 사용된다(수 24:19). 이 의미의 대표적인 표현은 의심할 여지 없이 시 32:1, 시 32:5에서도 발견된다. 죄는 제거될 수 있기 때문에 용서되고 잊혀질 수 있다.

2. 이 세가지 기본적인 의미의 범주들의 수동적, 강조적, 재귀적, 사역적 개념들은 레 22:16에서 사람으로 죄를 지게 하다라는 뜻으로 히필형으로 나오는 그러한 이례적인 용례를 제외하고 죄의 교리에 적용되지 않는 열거된 다른 어간들에서 종종 보여진다.

(참조: W. C. KAISER;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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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c;[;(6213, 아사) 일하다, 행하다, 만들다, 형성하다, 이루다

아사(동사)는 기본 어근이며, '일하다, 행하다, 만들다, 형성하다, 이루다'를 뜻하며, 그 기본 의미는 '행하다, 만들다'이다. 이 단어는 많은 표현에서 항상 동일한 기본 개념을 지닌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630회 나오며, 칼형, 니팔형, 푸알형으로 사용되었다.

(a)  아사는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서 매우 자주 나타나며, 이는 중요하고도 매우 흥미롭다.

바라(ar:B: , 1254)는 칼형에서 (1) 관련된 대상의 개시, (2)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 (3) 창조된 대상의 완전한 새로움, (4) 무에서 창조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아사는 의미의 영역이 훨씬 넓으며, 어떤 특수한 어감을 거의 지니지 않은 채 대상의 형성을 주로 나타낸다. 아사는 자주 바라와 상호 교대로 사용되어 단순히 창조 과정에서 관련된 대상들을 조성하거나 만드는 행동을 나타내는 반면에 바라는 그 물체에 대한 창시를 강조한다(참조: 창 1:1).

창 1:7에서 하나님께서 '창공(궁창)이 있으라'고 명령하셨으면 창공은 만들어질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공을 만드셨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것은 창공이 있으라는 명령이 창공이 실존하기에 불충분함으로 보충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진 이후 그것이 실현되기까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계속적으로 발휘되었음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성령의 역사를 감지할 수 있다.

아사는 하나님께 사용되면 흔히 역사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활동을 강조한다. 이러한 문맥들은 구약성경 신학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 즉 하나님은 초월적이실 뿐만 아니라 역사 안에 내재하셔서 그의 주권적인 목적을 이루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모세는 애굽에서의 하나님의 크신 행사들을 회상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백성들에게 상기시킬 수 있었다(신 29:1). 하나님께서 여러 민족들에게 행사신 일은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심을 증거해 준다(수 23:3). 솔로몬은 봉헌 기도에서 하나님께서 "행동하실" 것을 간청한다(왕상 8:39). 아사는 종종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대해 사용되어(수 24:17, 시 98:1, 사 25:1)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내재하심에 관하여 크게 강조함을 다시 증명한다.

아사는 구약성경의 그 밖의 곳에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여러 측면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시 86:9, 시 95:5, 시 96:5).

(b)  아사는 윤리적인 의무의 개념으로 종종 사용된다. 언약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행하라'는 명령을 자주 받는다(출 23:22, 레 19:37, 신 6:18, 등). 이 개념이 나타나는 무수한 문장은 하나님께 윤리적으로 응답하는 것의 중요성을 입증해 준다. 여기에서 응답은 단순한 정신적인 추상적 개념을 넘어선 것이며, 논증할 수 있는 행동에서 분명이 증거되는 순종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아사는 선악간에 행하는 것(창 3:14, 창 20:10, 왕하 12:3, 왕하 14:13, 왕하 8:18, 왕하 8:27, 신 16:12, 신 30:8, 민 15:39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사는 죄, 잘못에 대해 사용될 때 '저지르다, 범하다'라는 의미를 지니며(호 6:9), '~에 대하여 행동하다'(슥 1:6), 그리고 충고를 따른다는 의미에서 '따르다'(삼하 17:23)를 뜻한다.

(c)  아사는 어떤 것을 만들다(출 20:4, 신 9:12, 창 3:21), 전쟁하다(창 14:2, 수 11:8, 신 20:12, 신 20:20), 친절하게 대하다(삿 1:24), 신실함을 보여주다(창 32:10), 제물을 드리다(출 10:25), 어리석게 행동하다(신 22:21), 희생제물을 드리다(출 10:25), 유월절을 지키다(출 12:48), 복수하다(삿 11:3), 식물이 열매를 맺다(창 1:11), 음식을 준비하다(창 18:7 이하), 직무를 행하다(왕하 17:32), 화해하다(사 27:5), 제사장들을 세우다(왕상 12:31, 왕상 13:33), 사용하다(삼상 8:16), 보내다(전 6:12) 등을 의미하거나 그런 의미를 구성한다.(참조: T. E. Mccomiskey; BDB; 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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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눅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눅10: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네가 어떻게 읽느냐
네가 어떻게 읽느냐
< 하나님 사랑>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개정)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개역)
1) 마음- (히)레바브- heart
2) 뜻-(성품-개역) (히)네페쉬- soul
3) 힘-(히)메오드-might
* 사랑-(히)아하브 Love
[마태복음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1) 마음- 카르디아(헬) heart
2) 목숨- 퓌시케(헬) soul
3) 뜻- 디나노이나(헬) mind
* 사랑-(헬)아가페/아가파오-love
[마가복음 12:3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1) 마음- 카르디아(헬) heart
2) 목숨-퓌시케(헬) soul
3) 뜻-디나노이나(헬) mind
4) 힘- 이스퀴스 strength
[마가복음 12:33]
(서기관이 이르되)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1) 마음- 카르디아(헬) heart
2) 지혜-슈네슈스 understanding
3) 힘- 이스퀴스 strength
[누가복음 10:27]
(율법교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1) 마음- 카르디아(헬) heart
2) 목숨-퓌시케(헬) soul
3) 힘- 이스퀴스 strength
4) 뜻-디나노이나(헬) mind
[신4:29]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
[신10:12]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신11:13]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신13:3]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신26:16]오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령하시나니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
[신30:2]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신30:6]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네게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네게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신30:9]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수22:5]오직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명령과 율법을 반드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하고
[왕상2:4]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
[왕하23:3] (요시야)왕이 단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따르기로 하니라
[왕하23:25]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대상22:19]이제 너희는 마음과 뜻을 바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라 그리고 일어나서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하나님 성전의 기물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에 들이게 하라 하였더라
[대하15:12]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대하15:15]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그들을 만나 주시고 그들의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
[대하34:31]왕이 자기 처소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레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
< 이웃사랑>
[레위기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마태복음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롬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롬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갈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약2: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요일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4: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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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le(3824, 레바브) 내부인간, 마음, 정신, 의지
레바브(명남)는 레브(ble , 3820)와 동일하며, '내부 인간, 마음, 정신, 이해력, 의지'를 의미한다.→ 3820 레브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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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e (3820, 레브)내부 인간, 마음, 정신, 의지
레브(명남)는 레바브(bb;le , 3824)의 한 형태이며, '내부인간, 마음 heart, 정신 mind, 이해력 understanding, 의지 will'를 의미한다.
레브의 실제적인 의미는 내부기관과 유사 신체기관을 말한다. 그러나 추상적인 의미에서 "마음"은 인간내부의 총체 혹은 영적인 본질에 대한 가장 풍부한 성경 용어가 되고 있다. 성경 문학에서 이 단어는 성경에서 실제로 인간의 모든 영적인 기능이 "마음"에서 기인되기 때문에 기능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용어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영적인 인격 기능에 대한 가장 빈번한 용례이다.
본 항목에서 3820레브와 3824레바브를 다룬다.
구약성경에서 레브는 약 600회, 레바브는 약 250회 나온다.
율법서, 예언서, 시편은 종종 '마음'에 대해 언급한다. 이 단어의 어근은 아카드어, 앗시리아어, 이집트어, 우가릿어, 아람어, 아랍어, 후기 성경 히브리어에도 나온다. 상응하는 아람어 명사는 다니엘서에 7회 나온다.
'마음' heart은 창 6:5의 사람에 관한 언급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창 6:6에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레브( )가 사용되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레브는 몸의 기관을 가리키기도 한다: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 판결 흉패를 '가슴' heart에 붙여..."(출 28:29), "요압이...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압살롬의 '심장' heart을 찌르니..."(삼하 18:14), "내 '심장' heart이 뛰고..."(시 38:10).
레브는 어떤 것의 내부나 한가운데를 가리키기도 한다: "...큰 물이 바다 '가운데' in the heart 엉기니이다"(출 15:8), "...그 산에 불이 붙어 화염이 충천하고..."(신 4:11, KJV는 '하늘 한가운데' in the midest of heaven, RSV는 to the heart of heaven),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잠 23:34).
레바브는 신 30:14에서와 같이 겉 사람과 대조되는 속 사람에 대하여 사용될 수도 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으리라"(신 30:14, 참조: 욜 2:13),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레바브는 종종 강조를 위해 '영혼' soul과 함께 사용되기도 한다: "또 마음을 다하고 '영혼' soul(한글개역 -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대하 15:12,참ㅁ조: 대하 15:15).
네페쉬(영혼, 생명, 자아)는 KJV에서 15회, '마음'으로 번역된다. 모든 경우에 이 단어는 '속사람'을 나타낸다: "대저 그 마음(네페쉬)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 23:7).
레브는그 사람 자체 혹은 그 사람의 인격에 대해 사용되기도 한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기를..."(창 17:17),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라"(전 1:16).
레브는 또한 이런 의미로 하나님에 대해서 사용된다: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렘 3:15).
욕망, 성벽, 의지의 자리를 '마음'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출 7:14),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는 그것을 가져다가..."(출 35:5, 참조: 출 35:21, 출 35:29),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시 86:12).
레브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 의미로 사용된다: "정녕히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렘 32:4).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어울릴 때 그들은 동의한다고 한다: "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그러하냐"(왕하 10:15). 대하 24:4의 "요아스가 여호와의 전을 중수할 뜻을 두고..."에서 '뜻을 두고'는 히브리어로 '마음에 품다'라는 뜻이다.
'마음'은 감정의 자리로 생각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출 4:14, 참조: 삼상 2:1). 그래서 즐거운 마음(삿 16:25), 겁내는 마음(사 35:4), 떨리는 마음(삼상 4:13)들이 있다.
'마음'은 지식과 지혜의 자리로 간주되며 '정신, 지성'의 동의어로 생각되기도 한다. '마음'이 '알다'라는 동사와 함께 나올 때 종종 이런 의미를 나타낸다: "너는...마음에 생각하고..."(신 8:5, NASB는 '너는...마음으로 알고'), "그러나 깨닫는(아는) 마음과...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 29:4, KJV, RSV, 'mind').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참조: 왕상 4:29). 기억은 마음의 활동이다: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욥 22:22).
'마음'은 양심과 도덕적 특성의자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와 우리 주위의 세상의 계시에 어떻게 응답하는가? 욥이 대답한다: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욥 27:6). 이에 반하여, "다윗이...그 마음에 자책하고"(삼하 24:10). 마음은 인간 행위의 근원이다: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창 20:5, 참조: 창 20:6). 다윗은 '정직한 마음'으로 행하였고 히스기야는 '전심'으로 행했다.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한"(시 24:4)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레브는 반항과 교만의 자리를 나타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 8:21)고 말씀하셨다. 두로왕도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다: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도다..."(겔 28:2). 그들은 모두 "죄가 마음 판에 새겨진"(렘 17:1) 유다와 같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지배하신다. 인간의 자연 그대로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놓여 있다: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그러므로 죄인들은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시 51:10),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시 86:11). 또한 다윗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대상 29:17)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승인을 구한다: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시 62:2).
'마음'은 인간의 내적인 존재, 곧 그 자신을 대표한다. 마음은 그 자체로서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다(잠 4:4). 사람의 모든 생각, 욕망, 말, 행동들은 그의 내부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렘 17:9). 사람이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 행하기를 계속할 때, 그의 '마음'은 점점 더 완고해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여(마음의 부정함을 제거시켜) 그들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도록 하실 것이다(신 30:6).(참조: NEDOT;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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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Ko(3605, 콜) 모두, 전체, 완전함
콜(명남)은 칼랄(ll'K; , 3634: 완전하게 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모두 all, 전체, 완전함 the whole'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5,000회 이상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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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p,n<(5315, 네페쉬) 숨쉬는 존재, 영혼, 생명 등
네페쉬(명여)는 '숨쉬다, 원기를 회복하다'를 뜻하는 동사 나파쉬(vp'n: , 5314)에서 유래한 명사이며, '숨쉬는 것이나 호흡하는 존재(피조물), 영혼, 생명' 등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750회 나온다.
(a)  네페쉬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간에 육체를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어떤 경우에서(창 36:6) 소마(몸 body)로 번역되어질 수 있다. 네페쉬가 프쉬케로 번역되어 지면 프쉬케는 '넓은 의미에 있어서 인간의 생명적인 것을 의미하며'(G.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1, 1962, 153), 다른 말로는 살아 있는 것을 뜻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살아 있는 혼'이라는 말을 읽게 된다(창 1:20, RSV, living creatures). 죽어가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밖으로 불어내거나(AV 'gives up the ghost' 영혼을 포기한다. 참조: 렘 15:9), 혹은 영혼을 쏟아 붓는다(애 2:12). 영혼은 죽는 자에게서 떠난다(창 35:18). 그러나 영혼(즉 생명)은 육체로 되돌아 올 수 있다(왕상 17:21). '영혼은 영혼으로'라는 것은 '생명은 생명으로'라는 것을 의미한다(출 21:23). 생명의 좌소로서의 피(Blood)는 실질적으로 '네페쉬'나 프쉬케와 동일할 수 있다(창 9:4 이하, 레 17:11, 레 17:14, 신 12:23). (G. Harder).
(b)  "생물"(네페쉬 하이야)는 창 1:20에서 물에 사는 생명체 피조물에 대해 창 1:24에서는 땅에 사는 동물에 대해, 창 2:7에서는 사람(개역: "생령")에 대해, 창 9:10에서는 새들과 땅에 사는 동물에 대해, 창 9:16에서는 사람과 동물에 사용되었다. 동일한 용어가 '모든 생물', 그리고 '사람'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런 경우에 네페쉬 하이야라는 용어는 생명을 가지고 호흡하는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일 용어 '네페쉬 하이야'가 모든 생물에 사용되었다고 해서 모든 생물이 우리 인간과 같은 혼이나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분명히 네페쉬의 기능과 능력에 있어서 곤충과 물고기의 네페쉬와 소, 말 등의 네페쉬와 사람의 네페쉬가 다른 것이다. 기계의 가치와 능력에 따라 장착되는 동력이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있다.
특히 인간적 존재는 본래부터 충동, 욕구, 소망, 의지를 포함하기 때문에 네페쉬는 그런 의미들로도 사용되었으며, 한 개인의 생명을 의미한다. 소생시키고 회복시키는 대상으로서 네페쉬는 영혼(soul)이라는 개념과 생명 life이라는 개념을 모두 포함한다(R. V. Harris의 구약원어사전).
동물의 네페쉬와 사람의 네페쉬가 다른 것은 우선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대한 기사가 밝혀준다. 사람은 창조될 때 동물들과는 달리 생명의 숨(니셰마트 하임, 생명의 숨)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다. 그래서 '네페쉬 하이야'가 된 것이다. 이는 사람의 네페쉬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과 창조 의지에 의해 창조된 동물의 네페쉬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의 네페쉬와 동물의 네페쉬의 차이를 밝혀주는 또 하나의 성구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전 3:19-21을 보면 "19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것이 헛됨이로다 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 누가 알랴"
전 3:19에서 단지 한 사건, 즉 죽음이 사람과 짐승에게 똑 같이 찾아온다는 것, 전 3:20에서 '단 한 곳으로 간다는 것은 일종의 무덤을 가리킨다.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인간이건 짐승이건 간에 예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전 3:21에서 사람의 네페쉬와 동물의 네페쉬가 돌아가는 곳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전도서에서는 루아흐[영]가 사용되었지만 문맥상 네페쉬[혼]를 의미한다). 일부 학자들이 전 3:21을 회의적으로 해석하지만 매우 분명하고 명확한 어투로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간다'고 말한다. 이 사실을 누가 알겠는가? 오직 하나님 선만이 아신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자는 이 사실을 안다. 그러면 솔로몬도 알고 있었다.
(c)  네페쉬는 자아 생명의 민감한 부분으로서 감정, 사랑(Cant. 1:7), 갈망(시 63:1), 기쁨(시 86:4)의 좌소를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 것을 더 숙고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영혼'은 그 생명의 운동과 감정의 여러가지 표현을 나타낸다. 영혼은 인간의 내적 능력을 결합한 요소이다. 따라서 "너의 영혼을 다하여"라는 말이 성립된다(신 13:3). 영혼의 내부에서 음식에 대한 욕망(신 12:20, 신 12:21), 육체의 욕망(렘 2:24), 살인과 복수에 대한 갈망(시 27:12)이 거주하고 있다. 영혼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즉 그것은 울고(시 119:28), 눈물을 흘리며(욥 30:16), "오래" 참는다(욥 6:11). 그러나 지식과 이해(시 139:14), 생각(삼상 20:4)과 기억(애 3:20)도 마찬가지로 영혼에 자리잡고 있다. "영혼"은 전 인격 곧 인간의 전 자아의 총체이다. 따라서 "영혼"은 의미상 "나 자신" 또는 "네 자신"과 동일시 될 수 있을 정도이다(삼상 18:1). 창 2:7에서 네페쉬는 '사람' person, 혹은 '존재' being를 의미한다.
살아있는 피조물 역시 혼(soul)으로 묘사되어 질 수 있다. 집합적 의미에서의 살아있는 모든 것, 곧 모든 생물들(레 11:10). 율법에서 영혼(soul)이라는 말은 특별한 법규와 관련된 당사자를 의미한다(레 4:2, 레 5:1, 레 5:2, 레 5:4, 레 5:15). 사람들을 계수할 때 영혼들(souls)이라고 계수한다(출 1:5, 신 10:22). 구약성경이 죽은 사람을 가리켜 그 사람의 영혼이라 말하며 따라서 이러한 표현으로써 죽은 시체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영혼이 몸과는 별개라는 개념 또는 죽을 때 영혼이 몸에서 분리된다는 개념에 구약성경이 전혀 친숙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해 주고 있다(민 6:6). (G. Ha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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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om](3966, 메오드) 힘, 굉장히, 매우, 대단히
메오드(명남)는 '많음, 힘, 풍부'를 의미하며, 부사적으로 '굉장히, 엄청나게, 매우, 대단히'라는 의미를 지닌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300회 나오며, 주로 부사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명사로는 드물게 사용되었다.
(a)  명사로는 '힘 force, might'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신 6:5, 왕하 23:25).
(b)  부사적으로 '굉장히, 엄청나게, 크게, 매우, 대단히, 많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창 1:31, 창 4:6, 창 7:18, 창 7:19, 창 27:33, 창 17:2, 창 17:6, 창 17:20, 출 1:7 등).
(참조: BDB; HE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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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hea;(157, 아헤브) 사랑하다 love, 좋아하다 like, 사랑스러운 lovely
동사 아헤브는 '사랑하다, 좋아하다'를 의미하며, 그 의미의 강도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무한한 애정에서부터 게으른 대식가의 육체적인 식욕에까지 이른다. 이 동사는 칼 어간의 모든 법(mood)과 니팔 분사형, 그리고 피엘 분사형으로 나온다. 16회의 피엘형은 강의적인 것이 아니라 대개 부정한 '연인' lover을 가리킨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00회 이상 나온다.
구약성경에서 사랑은 그 사람을 강요하여 그가 좋게, 또는 올바르게 평가하거나 인정하는 사물이나 사람에게로 이끌어 가는 자발적인 힘이다. 사람은 이 사랑의 힘에 제어를 받아 자기 자신을 주거나 혹은 사랑의 원인이 되는 대상을 확고히 붙잡거나 혹은 즐거움을 주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사랑은 내적 인격에 심은 영혼의 불가해한 힘이다. 사람이 사랑의 대상을 올바로 인정하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한다(신 6:5). 사랑과 미움은 생의 양극이다(전 3:8, 전 9:6). 사랑은 인간 상호간의 사랑, 하나님의 인간과의 사랑, 사물에 대한 사랑 등을 나타낸다.
(a)  이 단어는 남녀의 사랑에 대해 사용되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하나님과 관계, 그리고 남녀의 성적 관계를 시사해 준다. 이 남녀의 사랑은 이성(sexes) 상호간의 생명력 넘치는 충동을 의미한다. 선지자 예레미야(렘 2:25)나 호세아(호 3:1, 호 4:18), 그리고 에스겔(겔 16:37)은 사랑의 성적(sexual) 측면을 매우 진하게 묘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단어는 남녀의 연애나 열애(창 29:18이하, 창 34:3, 삿 16:4), 합법적인 부부의 행복한 사랑(창 24:67, 삼상 1:5)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창조의 기사는 성의 구별과 부부간의 사랑이 생을 풍요하게 하는 은사임을 설득력 있게 이해시켜 준다(창 2:18이하).
「그러나 이 사랑은 성적 사랑의 범위를 포함하지만 그것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헌신적 사랑과 생활의 충실함이 합쳐져 있다. 구약의 초기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사랑은 일부다처나 일처다부 사상과 부합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은 충실(참조: 창 20:13, 삿 14:16, 삿 16:4-5, 겔 16:8, 겔 23:17, 호 3:1), 상호의존(참조: 창 24:67), 책임(참조: 삼하 13:1, 삼하 13:4, 삼하 13:15)과 같은 인간 사랑의 다른 측면을 제외하고 성적인 것에 집중하는 위험을 이해시켜 준다(The interpertreter's D.B).」
더 나아가서 아가서는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라고 열정적인 사랑의 강력한 힘을 찬양까지 한다. 이 노래는 성적(남녀) 사랑의 기이함과 적극적인 힘을 찬양하지만 그 찬양에는 그 사랑이 근거를 두고 있는 상호의존과 신앙심(헌신)을 강조하고 있다(참조: 아 2:16, 아 3:1-8, 아 7:10, 아 8:6-7). 아가서에서 사랑을 묘사할 때 거의 대부분 아헵(아가파오)과 아하바(아가페)를 사용했다. 그러나 여자가 남자를 부른 칭호는 도드(d/D , 1730, 사랑하는 자)를 사용했다.
이러한 사랑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암논과 다말의 이야기는 성충동의 야수성, 즉 대상자와 성적 관계를 가지려는 무절제한 요구를 보여준다(삼하 13:1-22). 사랑은 성애 또는 성욕적인 영역에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근원, 곧 마귀로부터 기인한 원시적 힘인 미움을 부인함으로 맞서는 적극적인 능력이다. 이 이야기는 이 두 가지 충동의 야수성도 투명하게 보여준다(삼하 13:1-22). 결혼이나 부부 생활은 상대에 대한 사랑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 삼손의 신부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치 아니하는도다"라는 히스테릭한 말에서(삿 14:16, 참조: 삿 16:15, 창 29:31, 창 29:33) 동일한 요소가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심지어 법까지도 사랑과 미움의 성욕적 증상에 관여하고 있다(신 21:15이하, 신 22:31이하, 신 24:1이하).
아헤브가 '사랑의 행위를 하다'(일반적으로 이것은 야다<알다>나 샤카브<~와 함께 눕다>로 표현된다)라는 뜻을 가지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그러나 왕상 11:1에서 이 단어는 이러한 부가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참조, 렘 2:25).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바를 기록할 때, 이러한 의미를 사용하였다: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호 3:1). 이 단어의 이런 의미는, 이 동사가 사역동사의 어간(분사로서)으로 나올 때 현저하게 나타난다.
(b)  이 단어는 부모와 자식, 가족간의 사랑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사랑했으며(창 22:2), 리브가는 아들 야곱을 사랑했다(창 25:28). 야곱은 요셉과 베냐민을 사랑했다(창 37:3, 창 44:20). 잠언은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경계하느니라"고 했다(잠 13:24).
또한 이 단어는 며느리의 시어머니를 향한 사랑과 같은 가족간의 사랑을 표현한다(룻 4:15).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은 어느 곳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부모를 존중하고 존경하며 또 부모에게 복종해야 한다.
「참고 - 창 47:29에 보면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인애(헤세드: 친절, 자비)란 단어를 사용하여 자기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기를 요청했다. 이것이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족속이나 가족의 유대는 이스라엘에서 매우 강하였다. 그러므로 '근친' 관계의 중요한 요소인 사랑에 대하여 놀랄 일이 아니다. 그것은 룻 3:10에서 이성 곧 남녀 사랑과 관련되어 있다. 그곳에서 인애(헤세드: 친절, 자비)는 남녀 사랑의 개시와 가까운 친족에 대한 충실, 이 둘을 포함하고 있다.」
성경은 가족적 사랑이 너무 선택적일 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다(창 25:28). 그 결과로 야곱과 에서가 서로 반목하고 미워하게 되었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편애로 인하여 다른 아들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하게 되었다(창 37:4). 배타적인 사랑은 증오가 들어올 수 있는 지점이 될 수 있다. 이는 사랑이 헌신적일 뿐만 아니라 책임을 다 해야 하기 때문이다.
(c)  아헤브은 때때로 종이 그 주인의 지배하에 남아 있기를 원하는 주인에 대한 특별하고도 강한 애착심을 나타낸다. 출 21:5에 보면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라고 한다. 아마 여기에는 가족애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아들이 그의 아버지를 사랑하듯이 종이 그의 주인을 사랑한다(신 15:16). 이러한 의미가 강조되는 구절로는 삼상 16:21이 있는데 여기에는 사울이 다윗을 크게 사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을 사랑하고(삼상 18:16) 심히 존경하게 되어 그의 모든 행동들을 경탄으로 바라보았다.
(d)  이 단어는 친구의 특별한 애착을 나타낸다. 다윗과 요나단 사이의 사랑은(삼상 18:1, 삼상 18:3, 삼상 20:17) 여인의 사랑보다 더 깊은 우정의 차원이었다 -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삼하 1:26).
(e)  아헵은 정치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솔로몬이 기름 부음을 받고 그 부친을 이어 왕이 되었다 함을 두로 왕 히람이 듣고 그 신복을 솔로몬에게 보내었으니 이는 히람이 평일에 다윗을 사랑하였음이라"(왕상 5:1). 다윗에 대한 히람의 "사랑"은 두 사람 사이의 국제적인 우호 관계나 화해 정책을 예증하는 것이다. 후자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그것이 그가 지극히 충성스러웠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f)  더 나아가 이 사랑은 사회적 공동 생활의 근본과 규범으로 나타난다 -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 19:18). 이러한 면에서 사랑은 이웃을 위한, 그리고 이웃을 향한 헌신이며, 이웃을 형제로서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웃이 당연히 받아야 할 대우를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특히 외국인(레 19:34)과 가난한 자(레 25:35)와 고아의 권리와 관련된 사회적 법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이웃 사랑은 단순한 친절이나 호의로 해석할 수 없다. 이것은 편협한 배타주의를 배제한다. - 바로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웃이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적(enemy)으로 생각되는 것 같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의미한다.
그 이유로 신 22:1-4이 동포를 도울 의무를 부과하는 것인 반면, 출 23:4-5은 특별히 이 의무를 적대적인 사람에게 적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웃은 동료일 수도 있고 적일 수도 있으므로, 그는 사랑의 대상이지 법적 제한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개인은 법적 개인보다 우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형태에서 출 23:4이하의 요구와 아마도 한층 더 높은 수준인 잠 25:21에 있는 기본적 진술("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은 원수를 향한 성향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으나 한 특별한 방식의 행위의 의무를 지우는 것으로서,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적으로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요셉은 그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선으로 악을 갚는 그런 실례를 보여준다(창 50:19).
물론 구약성경에는 이러한 원수를 사랑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시 109편과 잠 14:20 및 적대 국가들에게 향한 일반적인 태도는 이에 대한 예증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해 부과된 윤리적인 요구의 고결함은 여전히 존재한다.
(g)  이 단어는 구체적인 것이나 추상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기름(잠 21:17), 은과 풍부(전 5:10), 뇌물(사 1:23)을 사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악(시 52:3-5), 사망(잠 8:3), 허사(시 4:2-3), 거짓 맹세(슥 8:17)를 사랑했다. 또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시 119:47), 율법(시 119:97), 증거(시 119:119), 법(119:159), 그리고 그들은 선(암 5:15), 진실과 화평(슥 8:19), 구원(시 40:16-17)을 사랑했다.
(h)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기를 "사랑하라"고 명하셨다(신 6:5). 그리고 시편에는 이 계명에 대한 순종의 증거들이 포함되어 있다(시 116:1, 시 145:20). 반대로 하나님은 사람들, 특히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신 4:37, 사 43:4, 말 1:2). 주님은 또한 시온의 문들(시 87:2), 정의와 공의(시 33:5), 성전(말 2:11)과 같은 것들을 "사랑하신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한다(수 22:5). 예레미야는 이 백성이 방황하기를 좋아한다고 질책하였다(렘 14:10).
(i)  이 분사형들은 종종 '친구' friend로 변역되곤 한다. 대하 20:7에 보면, 아브라함은 주의 "벗"이라고 한다.
(j)  위에서 지적하였듯이 피엘형 분사를 번역한 영어 단어 "lover" (연인)는 종종 매춘을 암시하는 경멸적인 뜻을 함축하고 있다. 선지자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등은 이스라엘의 부정한 관계를 언급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한다. 호 2:7, 호 9:12, 겔 16:33, 겔 16:36-37, 렘 22:20, 렘 22:22, 렘 30:14, 애 1:19, 슥 13:6 등).(참조: R. L. Alden; Nelson's ED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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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diva(2588, 카르디아) 마음 heart.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카르디아(Homer 이래로)는 '마음'을 의미하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본래 생리학적으로, 사람이나 짐승의 신체의 중심기관으로서의 마음에 대하여 사용되었다(Homer, Aesch., Plat., Aristoph. 등)
(b)  비유적으로 도덕적, 지적 생명의 자리로서의 마음, 즉
① 감정과 열정의 자리(분노, 용기나 비겁, 기쁨이나 슬픔, 사랑과 미움 같은 것을 나타낸다),
② 생각이나 상상력의 자리,
③ 의지와 결심의 자리를 의미한다.
(c)  또 다른 비유적 용법으로, 자연에 관한 특별한 의미로 사용될 때 '나무의 심'과 '식물의 종자' the seed of plants 였다. 또한 카르디아는 핵심 즉(인간, 동물, 식물의) 가장 깊숙한 부분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도 지녔다.
이 단어는 더 이상 단순히 신체의 중심부를 지칭하는 말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의 지적, 영적 중심부를 지칭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카르디아는 70인역본에서 약 800회 이상 나오며, 주로 마음을 뜻하는 레브와 레밥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70인역본에서 카르디아는 감정적인 생활, 지적인 생활, 의지적인 생활 및 종교적 생활을 포괄한 인간 생활의 중심이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카르디아는 신약성경에서 148회 나오며, 공관복음서에 47회, 요한복음에 6회, 사도행전에 17회, 바울서신에 52회, 공동서신에 13회, 히브리서에 10회, 계시록에 3회 사용되었다.
(a)  카르디아가 신체의 중심기관이며, 육체적 활력의 자리라는 사상은 눅 21:3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행 14:17의 시적 표현("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과 약 5:5에만 나타난다:"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참조: 삼상 21:7; 시 101:5; 시 103:15).
(b)  카르디아는 인간의 내부 생명과 영혼의 모든 힘과 기능의 근원과 자리이다.
① 카르디아는 느낌과 감정, 욕망, 정욕의 자리이다. 기쁨(행 2:26; 요 16:22; 행 14:17), 고통과 슬픔(요 16:6; 요 14:1; 요 14:27; 롬 9:2; 고후 2:4; 행 2:27; 행 7:54; 행 21:13; 눅 4:18), 사랑(고후 7:3; 고후 6:11; 빌 1:7), 욕망(롬 10:1; 눅 24:32), 정욕(약 3:14; 마 5:28; 마 6:21 등).
② 카르디아는 이해와 사고와 반성의 자리이다.
마 12:34(과 병행구),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라"
막 7:21(과 병행구),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눅 1: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눅 2: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눅 9:47,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행 8:22,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고전 2: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눅 2:19; 눅 2:51,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마 9: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막 11: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마 24:48(과 병행구),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롬 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계 18:7,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눅 24: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③ 카르디아는 의지와 결정의 자리이다.
고후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행 11:23,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전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전 7:37, "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눅 21:14,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행 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계 17:17,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행 5: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골 4:8, "내가 저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낸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엡 6:22,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따라서 카르디아는 인간의 외부와 대조하여 인간의 내부 전체를 대표한다.
살전 2: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고후 5: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막 7:6(과 병행구),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 15: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롬 10:8, "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고후 6:11,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롬 2: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행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행 4:32,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골 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요일 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벧전 3:4,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④ 카르디아는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종교적 중심지이며, 종교적 생활의 뿌리이며 도덕적 행위를 결정하는 곳이다(예: 눅 16:15; 롬 5:5; 롬 8:27; 엡 3:17; 히 8:10; 벧후 1:19; 죄인의 마음, 막 7:21; 요 12:40; 엡 4:18; 약 1:26; 구속받은 자의 마음, 마 11:29; 딤전 1:5; 살전 3:13; 골 3:22; 벧전 3:15; 약 4:8, 등).
(c)  "땅의 내부"라는 의미는 마 12:40에서 나온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참조: Walter Bauer ; T.Sorg ; J.Be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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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chv(5590, 프쉬케) 영혼, 목숨, 생명.
명사 프쉬케(Homer 이래)는 프쉬코(yuvcw, 5594: 숨쉬다, 바람 불다)에서 유래했으며, 70인역본에서 매우 많이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네페쉬, 때로는 레브와 레바브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영혼, 목숨, 생명'을 의미하며, 다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지상의 외적, 육체적, '생명',
①'목숨, 생명력, 영혼(soul)', 계 8:7; 눅 12:20; 행 2:20; 계 6:9; 계 20:4.
② '지상의 목숨, 생명', 마 2:20; 롬 11:3; 마 20:28; 막 10:45; 요 10:11; 요 10:15; 요 10:17; 요일 1:3; 빌 2:30; 계 12:11; 행 20:24; 행 27:10; 롬 16:4 등.
(b)  지상의 인간의 내적 생명의 좌소와 중심으로서 '영혼, 혼'.
① 사치스런 생활의 '욕구', 눅 12:19; 계 18:14.
② 감정과 정서, 마 26:38; 막 14:44; 요 12:27; 눅 1:46; 눅 2:35; 요 10:24; 행 14:2; 행 14:22; 롬 2:9; 살전 2:8; 히 12:30; 벧후 2:8 등.
(c)  지상 생활을 초월하는 생명의 좌소와 중심인 '영, 영혼',
① '하나님에 의해 제공되는 도움들을 올바로 사용함으로 자기의 가장 높은 목표에 도달하여 영원한 지복을 획득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 그러한 한도 내에서의, (인간) 영혼',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계획된 도덕적 존재로서 간주되는 영혼': 요삼 1:2;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히 13:17;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 벧전 2:11; "영혼의 감독되신", 벧전 2:25; 약 1:21;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약 5:20; "영혼의 구원", 벧전 1:9; 벧전 1:22; 벧전 4:19.
② '육체와는 다르며 죽음에 의해서도 해체되지 않는 본질로서의 영혼': 마 10:28; 육체로부터 해방된 영혼, 육체에서 이탈된 영혼, 행 2:31; 계 6:9; 계 20:4.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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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vnoia(1271, 디아노이아) 생각, 마음, 이해력.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디아노이아(Aeschyl., Hdt. 이래)는 디아(diav, 1223)와 노에오(noevw, 3539: 지각하다, 생각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생각'이라는 기본적 의미를 가지며,
(a)  '한 기능으로서의 생각, 생각하는 행위'(Plat. Soph.),
(b)  '생각하는 능력, 이해력, 사유 의식'(Demor. Fr.), '정신, 영혼',
(c)  '사고방식, 성벽(격)'(Plat. Tim.),
(d)  사고 행위의 결과로서 '생각, 사상, 의견, 판단',(Hdt., Plat., Plut.),
(e)  비유적으로, '의지, 의도, 결정, 의향'(Hdt., Thuc., Plat.)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디아노이아는 70인역본에서 약 75회 나오며, 주로 '마음, 영혼, 의지'를 뜻하는 히브리어 레브(3820)와 레바브(3824)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스스로, 마음에서, 몰래, ~의 생각으로는'이란 개념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기도 하여 감정과 의지의 활동을 표현하는데 사용되게 되었다(사 35:4; 출 35:22). 이 단어는 또한 인간의 내적 생활 전체를 나타내기도 한다(창 8:21). 가끔 이 단어는 히브리어 마하샤보트(책략, 계획 plans, 단 11:25)와 또한 비나(지력, 이해, 단 9:22)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외경 문서들에서 디아노이아는 특별히 도덕적 의미에서 '정신, 마음, 지각, 성벽'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디아노이아의 인도자시다(Aristcas 238). 선하고 양심적인 순진한 마음은 속임을 당할 수도 있다(베냐민 언약 8:2; 유다의 언약 11:1). 필로(Philo)는 자기가 누스에 대하여 기술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디아노이아에 대해서도 기술하였다. 곧 그것은 인간 안에 있는 신적인 요소로서, 이 기관에 의해 하나님은 식별되고(Virt. 57) 인간은 불멸하는 존재가 되는 것(Op. Mund. 135)이라고 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디아노이아는 신약성경에서 1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디아노이아는 '정신, 영적 생명'을 의미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것이요"(막 12:30; 병행구 마 22:37; 눅 10:27).
(b)  디아노이아는 '이해력'이나 '정신적인 의식'을 의미한다.
① 히 8:10,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② 히 10:16,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c)  디아노이아는 눅 1:51에서 '사고 방식, 교만한 성벽'을 나타낸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d)  디아노이아는 엡 4:18에서 '영적, 도덕적 이해력'을 나타낸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e)  디아노이아는 골 1:21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성벽과 사고 방식'을 고려하고 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f)  디아노이아는 엡 2:3에서 '생각이나 충동적인 의지의 작용' 즉 악한 생각이나 의향에 대해 사용되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g)  벧전 1:13에서 디아노이아, 곧 마음과 영혼을 준비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찌어다".
(h)  디아노이아는 벧후 3:1에서 '순수한 성벽'을 나타낸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둘로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i)  요일 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여기서 디아노이아는 특별한 지식이나 자연 상태의 성품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향한 생각'을 가리키며, 이 생각은 하나님의 아들이 주신 것이다.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J. Be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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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jscuv"(2479, 이스퀴스) 힘 strength, power, 세력 might.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이스퀴스(Hesiod 이래)는 이스코(i[scw: 저지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생명체나 물건들이 지니고 있는 '힘' strength과 '능력' power을 의미한다.
헬라의 비극 문학에서 이 단어는 신들에게 사용되었지만 후기에는 별로 두드러지지 않게 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이스퀴스는 70인역본에서 약 330회 나오며, 30개의 히브리어의 역어로 사용되었고 주로 코아흐(능력 과시)를 번역한다.
이 단어는 사람의 육체적인 힘(수 8:3; 삿 16:5; 시 22:15; 시 31:10; 겔 30:21), 인간의 지적인 능력(잠 8:14)을 나타내며, 민 14:13에서는 특별히 신적인 능력을 뜻하는데 사용되었다. "애굽인 중에서 주의 능력으로 이 백성을 인도하여 내셨거들 그리하시면 그들이 듣고"(시 29:4; 시 147:5 등). 그래서 이것은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기도 한 것이다(미 3:8; 시 18:1; 시 29:11).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이스퀴스는 신약성경에서 1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이스퀴스는 막 12:30에서 인간의 능력을 가리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것이요"(병행구 막 12:33; 눅 10:27). 즉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b)  엡 6:10에서 주님의 능력은 그리스도인의 강건함의 근거라고 말한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c)  살후 1:9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광스런 능력 안에서 심판이 집행되리라고 한다: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d)  벧전 4:11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힘)은 그리스도인의 사역을 위해서도 발휘된다: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e)  계 5:12과 계 7:12의 송영에서 이 힘(능력)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참조: W. Grundamnn; G. Brau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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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vnesi"(4907, 쉬네시스) 이해력, 통찰력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쉬네시스(Homer. 이래)는 쉬니에미(sunivhmi, 4920: 함께 놓다, 모으다, 이해하다)에서 유래했으며,
(a)  '함께 달림, 함께 흐름, 합일, 합치'(강에 대해)
(b)  전이된 의미로 '지각, 이해력, 판단, 통찰력, 파악', 그리고 '자기인식'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쉬네시스는 70인역본에서 129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투브나(8394: 이해, 깨달음, 이해력, 지식, 출 31:3; 출 35:31; 욥 12:13; 시 49:4; 사 40:14)와 다아트(1847: 지식, 욥 15:2; 욥 21:22; 사 47:10; 사 53:11)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이해력이나 총명, 지식, 이해'등을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쉬네시스는 신약성경에서 7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막 12: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여기서 쉬네시스는 '사려 분별이나 이해하는 마음'을 나타낸다.
(b)  눅 2: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열 두살때의 예수님의 통찰력이 놀라움의 주제가 되고 있으며, 여기에서 통찰력이 하나님의 선물로 간주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c)  고전 1: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여기서는 자신들이 현명하다고 믿고 있는 자들의 오만함에 관하여 언급되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
(d)  바울의 후기 서신에서 통찰력을 선물로 본다: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7). 풍성한 이해력은 지혜, 지식의 모든 보화를 감추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이 비밀을 계시하심으로 주어진다(골 2:2 이하):우리는 엡 3:4를 비교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비의 요점은 에베소서의 사상의 넓은 문맥과 보조를 맞추어, 교회와 관계되고 있다. 이 서신들에서 이 단어의 어군이 지혜의 개념과 가깝다는 것은 다시금 분명해졌다(골 1:9; 골 2:2 참조: 엡 5:17).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J. Getz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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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o"(3650, 홀로스) 온 whole, 모든 all, 전체 totality.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홀로스(Pind. 이래)는 기본어이며, '전부의, 완전한, 온' whole, '모든, 모두의' all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형용사 홀로스는 70인역본에서 약 300회 나오며, 대부분 히브리어 콜(3606: 모든, 전체)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홀로스는 신약성경에서 109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홀로스는 동의어 파스(pa'", 3956)와 달리 관사 없이 사용되는 경우와 관사와 함께 사용되는 경우에 의미상의 차이는 나타나지 않는다(참조: 홀루스 오이쿠스: '집들을 온통', 딛 1:11; 헤 오이키아 아우투 홀레: '그 온 집', 요 4:53). 홀로스가 관사를 동반할 때는 거의 언제나 서술적으로 사용된다. 이 때 관사가 명사 앞에 위치하든 뒤에 위치하든 의미는 동일하다(참조: 홀레 헤 폴리스, 마 1:33; 헤 폴리스 홀레, 행 21:30: '온 성읍' The entire city).
(b)  홀로스는 다음 표현들에서 '천체' totality를 나타낸다.
① 특히 시간이나 공간을 나타내는 말과 함께: '온 밤'("밤이 맞도록", 눅 5:5), '온 종일'(마 20:6, "종일토록"; 롬 8:36; 롬 10:21), '일년 내내'(행 11:26; "일년간"; 행 28:30), 카드 홀레스 테스..., '온' in all...(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자주 나타남; 예를 들면, "온 유대", 눅 23:5; 행 9:31; 참조: 행 9:42; 눅 4:14; 눅 8:39), "온[거하는] 세상"(계 3:10; 계 12:9; 계 16:14), "전 세계"(롬 1:18, "온 세상"; 요일 2:2; 요일 5:19; 마 16:26 병행구에서 "온 천하"는 온 세상의 모든 재화들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② 사람들의 무리나 연합체, 기타 등등과 함께: "온 산헤드린"(마 26:59), "온 교회"(롬 16:23), "온 나라"(요 11:50, "온 민족"), 따라서 또한 "온 예루살렘"(행 21:31), "온 동네"(막 1:33 등, 여기서는 공간적 범위보다 거주민들을 나타낸다).
③ 사물에 대해서는 드물게 사용됨: "온 덩어리"(고전 5:6), "온 율법"(마 22:40; 갈 5:3).
④ 마태복음에서 구약성경 말씀이 이루어진 사건을 요약하는(마 1:22; 마 26:56) '이렇게 된 것은 다 ... 이루려 함이니라'는 문구에서 사용되었다.
(c)  홀로스가 신학적으로 중요성을 띠는 것은 여러 문맥에서 부분과 전체에 대한 표현으로 사용된 경우이다.
① 마 5:29 이하에서는 대조의 개념으로 나타난다. 눈이나 손을 잃는 것이 "온 몸"을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낫다.
② 바울은 고전 12:12-고전 12:27에서 이 용어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눈은 "온 몸"일 수 없다(홀루 토 소마, 고전 12:17). 그렇다면 조직("많은 지체들-한 몸")이 망가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③ 이와 유사한 예가 마 6:22 이하와 눅 11:34-36에서 발견된다: 건강한 눈은 "온 몸"을 밝게 하지만 병든 눈은 온 몸을 어둡게 만든다.
④ 야고보는 강한 윤리적 뉘앙스를 담은 일반 헬라 철학에서 발견되는 의미로 홀루 토 소마 문구를 사용한다. 말에 실수 하지 않는 자라면 능히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다(약 3:2 이하); 반대로 혀는 그 자체로는 '작은 지체'이지만 '온 몸'을 더럽힐 수 있다(약 3:5 이하).
⑤ 요한만이 관사 없는 홀로스를 서술적으로 사용하였다. 목욕한 자는 카다로스 홀로스, '전체가 깨끗하다', 즉 '완전히' 깨끗하다(요 13:10). 요 9:34에는 이와 대조되는 표현이 나온다: "'온전히'(홀로스) 죄가운데 나서". 요 7:23에서 예수님은 "전신"을 치유하신다: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 하느냐". "사람의 전신"(홀론 안드로푸)은 부분적인 처리인 할례에 대조가 된다.
요 19:23에서는 예수님과 옷과 관련하여 홀로스는 완전한 일체를 의미한다: 휘판 우 토스 디 홀루, "통으로 짠 것이니라"(한 조각으로 짠 것이니라).
⑥ 마지막으로 막 12:30과 병행구에서 홀로스는 70인역본의 용법에 따라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것도 의미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것이요". 문자적으로 이 구절은 '온 마음과 온 영혼...'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거듭 반복하여 사용하는 이 문구와 가장 흡사한 병행구절은 신 6:5이다.
(참조: W. Elliger;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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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gapavw(25, 아가파오) 사랑하다 lov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일반 헬라어는 영어와는 달리 '사랑하다'를 의미하는 단어가 여러 종류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들은 필레오(filevw, 5368), 스테르고(stevrgw), 에라오(ejravw), 아가파오(ajgapavw, 25) 등이다.
(a)  동사 필레오(filevw, 5368)는 사랑과 애정의 표현에 가장 널리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여러 파생어를 보면 이를 명백히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관심, 돌봄, 환대, 사물에 대한 애착 등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 필레오(filevw, 5368)을 보라.
(b)  동사 스테르고(stevrgw)는 드물게 나타나며, '사랑하다, 애정을 느끼다' 등을 의미하며, 특히 부모와 자식 간의 쌍방의 사랑을 나타내는데 자주 사용되었다.
스테르고는 또한, 통치자에 대한 국민의 사랑, 인간에 대한 수호신의 사랑, 주인에 대한 개들(dogs)의 사랑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남편과 아내의 사랑을 나타내는데는 별로 사용되지 않았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합성어 아스토르고스(a[storgo", 794, 롬 1:31; 딤후 3:3)와 필로스토르고스(filovstorgo", 5387, 롬 12:10)가 나타날 뿐이다.
(c)  동사 에라오(ejravw)와 명사 에로스(e[rw")는 신비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에라오는 '정열적으로 사랑하다, 욕구하다, 그리워 하다'를 의미한다. 에로스는 '정열적인 사랑'이란 의미를 지닌다.
에로스적인 사랑은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것)을 원하거나 갈망하거나 사랑하는 정열적인 사랑이다. 이 사랑은 남·여의 사랑, 또는 어떤 대상에 대한 갈망, 열망, 욕구를 나타낸다. 특별히 관능적이고 선정적인 양상을 띤다.
① 모든 시대에서 헬라인들은 육감(관능)적으로 즐거워하는, 하급 신(神), 곧 광란적인 에로스를 열렬히 찬양하는  것이다. 그들이 찬양하는 에로스 신(god)은 모든 것을 강제하지만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강요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헬라인이 에로스에서 추구하는 것은 도취(intoxicaion)와 황홀이며, 이것은 그에게는 신앙(종교 religion)이다. 그에게 있어서 반응은 하늘의 능력들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Soph, Ant 683이하). 그것은 인간성의 성취이다.
그렇지만 그 반응은 무아경적인 흥분(광란)으로 나타난다(한편 때때로 증오와 더불어 나타나기도 한다). 오로지 반응에 목적을 두고 완전히 감각 또는 감정적으로 몹시 흥분하는 에로스는 모든 인도적 인간성의 표준과 형태를 파괴한다. 관능적 환락(sensual ecstasy)은 중용(moderation)과 균형(proportion, 조화, 바른 관계 등)을 저 멀리 내버려두고 돌보지 않는다.
헬라의 비극작가들은(Soph, Ant. 781이하) 환락(ecstasy, 황홀)에 점점 빠지게하여 이성과 의지와 판단력을 상실하게 하는 에로스(사랑의 신의 이름은 역시 에로스이다)의 불가항력적인 힘을 알고서, 그것을 광신만큼 무서운 것으로 평가했다.
그것은 하나의 신(a god)이며 신들보다 능한 것이다(Eur. Fr., 132, Nauck). 하늘과 땅의 모든 힘은 에로스의 한 최고의 힘과 비교하면 제 2급의 힘들이다. 그것의 전제적인 힘에 사로잡힌 자들에게는 어떠한 선택도, 의지도, 자유도 무시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지배를 받는데서 최고의 희열(행복)을 얻는다. 우리는 여기서 에로스의 어떤 신비한 힘을 찾아볼 수 있다.
② 이러한 에로스는 신비 종교들에서 더욱 무서운 것으로 나타났다. 이 관능적인 도취의 데모니즘(demonism)이 종교적 광신과 함께 행해지는 곳에는 반대로 신앙(religion) 자체가 이 황홀경(ecstasy)에서 경험의 최고점(절정)을 추구한다.
창조적 에로스는 다산을 기원하는 풍요제 의식들의 중심이며, 매춘(prostitution)은 큰 여신들의 신전에서 유행했다. 때때로 동양권에서 행해졌다. 그래서 색정적인 그림과 상징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신화에서 이야기한 신들과 사람들간의 성적 결합은 이러한 예찬(cultus)에서 그 현실적 실현에 도달했다. 이런 신전 혼인에서 그 신자들은 신들의 세계와 육체적인 결합을 경험한다. 신앙과 황홀은 종교적으로 변질된 에로티시즘(eroticism=호색)에서 함께 만나 결합한다. 이런 현상은 한국의 신비종파나 사이비종파에서 찾아볼 수 있다.
③ 헬라인들은 에로스를 더 신비적으로 이해했는데 그것에 의해 그들은 보통 사람이 지니는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 완전에 이르고자 노력했다.
헬라인들이 에로스에서 추구하는 도취는 필연적으로 관능적인 것이 아니다. 이미 헬라의 비전(mysteries)에서 때때로 신비주의에서 그렇게 한 것처럼 에로틱(erotic)의 개념들은 많은 방법으로 육감이나 관능 이상과의 만남에 대한 상징으로 영화된 것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에로스는 생의 최대의 성취와 향상의 전형(epitome)였다. 그에게 있어서 에로스는 이성의 작용(합리성)을 넘어 사람을 기뻐 날뛰게 하는 황홀이며, 자연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원천이며, 최종적으로 창조적 영감을 산출하는 것이다. 에로스를 타오르게 하는 육체적 아름다움은 모든 사랑하는 것에서 의도하고 찾는 선한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지표이며, 영원한 존재와 진정한 선을 가리키는 지표이다(Symp, 2,100이하). 그에게 있어서 에로스란 의와 감정 억제와 지혜의 습득을 위한 분투,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선의 구현이자, 불멸을 얻을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Symp. 200, 206; Phaedr. 237ff, 242ff). 플라톤은 결정적으로 에로스를 모든 육감(관능)적인 것보다 높인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이와 유사하게 에로스를 단순한 경험적인 것에서부터 자유케 하여 발전시켰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질서와 운동을 유지시키는 원초적 원리인 견인력으로서의 우주적 기능이다. 따라서 내적으로 세계를 전체적으로 유지시키고 있는 이 사랑은 더 이상 도취와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은 성격상 엄밀히 의지에서 나온 행동이다.
플로티누스(Plotinus)에게 있어서 진정한 에로스, 모든 사랑을 의미하는 것은 감각과 이성을 넘어 탁월함에 이르고, 모든 한계를 넘어 합치점에 이르는 영혼의 충동이다.
그 시대의 사회 생활에서 비밀 주신제(orgies)를 벌리는 에로스는 신들의 신화에 나오는 감정을 자극하거나 흥분시키는 체험들(사건)을 얻으려하고, 신전들에서 그러한 체험들에 이르게 한 것이다.
맥시무스(Maximus)는 인도적으로 발전시키었다. 플로티누스는 그것을 신비적으로 승화시키고 영화하여, 초자연적 지배자와 영적 결합을 하려는 신비적 열망으로 발전시키었다(Enneads).
초대교회의 시기에 그노시스(Gnosis)는 이런 접근법에 위치하여 자아 초월에 대한 인간 욕망이라는 특별한 경향을 나타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동일한 에로스, 인간 자신의 생활을 초월하는 것에 대한 자연적 충동이다. 여기서 에로틱한 종교의 원형은 관능적 도취이며, 최고 형태의 황홀이다.
에로스는 구약성경에서 잠 7:18("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과 잠 30:16("음부와 아이 배지 못하는 태), 이 두 곳에만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d)  그리고 아가파오와 아가페가 있다. 아가파오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충분히 설명한다.
2.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아가파오의 용법. 
동사 아가파오(ajgapavw, 25)에서 헬라인은 에로스의 이상한 힘이나 마력(magic)을 느끼지 못했으며, 필레오의 따뜻함이나 열정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 어원은 불확실하며, 그 의미는 근거가 약하고 가변적이다.
(a)  때때로 아가파오는 "어떤 것으로 만족하다"란 의미를 지닐 뿐이다.
(b)  때때로 외적 태도에서 이 동사는 "환영하다, 인사하다, 경의를 표(존경)하다"를 의미하며,
(c)  내적 태도에서 "어떤 것을 구하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을 요구하다"를 의미한다.
(d)  이 동사는 때때로 동료 끼리의 호의, 우정을, 혹은 때때로 동정을 의미하는데 사용되었다.
아가파오의 특별한 성격을 몇몇 실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을(~보다) 좋아하다, 선택하다, 다른 것보다 위에 한가지 선이나 목적을 두다, 다른 사람보다 한 사람을 더욱 높이 평가하다, 존중하다"를 의미한다.
이렇게 아가파오는 하나님이 어떤 특별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애호)에 대해 사용될 수 있다. 드물긴 하지만 이 단어가 신의 총애를 받은 사람에 대해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Dio. Chrys., 33:21) 분명히 에라오(ejravw)와는 달리, 재물이나 재산을 얻고자 하는 인간 자신의 욕망이 아닌, 타인을 위한 관대한 행위를 뜻하는 말이라 하겠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아하는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특별한 선물과 재물로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아가파오의 특성은 이 점에서 확실히 보이는 것이다. 에로스는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찾는 일반적인 세상적인 사랑이다. 아가파오는 분명히 그 대상을 선택하여 지키는 구별을 두는 사랑이다.
에로스는 그 대상에 대한 다소 불확정한 충동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아가파오는 그 주체에 의해 자유로이 결정된 결정적인 행동이다.
에로스는 그 최고의 의미로서, 인간의 위쪽으로 향하는 충동, 곧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에 대해 사용된다. 아가파오는 주로 하나님의 사랑, 보다 높은 자가 보다 낮은 자를 들어올리는, 보다 낮은 자를 다른 사람보다 위에 높이는 사랑이다.
에로스는 다른 것들에서 자신(의 생명)의 주림의 충족을 찾은 것이다. 아가파오는 때때로 "사랑을 베풀다"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주는 능동적 사랑이다.
이 동사는 무엇보다 형용사 아가페토스가 사용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아가페토스는 동사와 같은 의미의 뉴앙스를 지니고 있으며, 합당한 사물이나 친애하는 자에 대해 사용되며, 특히 부모의 온갖 사랑을 독차지하는 독자(only child)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가파오는 에라오이나 퓔레오과 교환적으로 사용되거나 결합될 때 그 의미나 개성이 여전히 유동적이며 애매하다. 이런 경우에 아가파오는 때때로 단순한 동의어로서 강조나 다양한 표현 때문에 다른 두 단어와 나란히 위치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플로티누스(Plotinus)에서 아가판은 자기를 (겸손히) 낮추는 사랑에 대해, 에란은 높이 올라가는 사랑에 대해 의식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호머로부터 플로티누스까지 에로스는 계속적으로 시인과 철학자들의 사색이나 연구의 주제가 되어온 반면에 아가파오는 거의 언제나 기본적인 토의 주제로도 나오지 않는다. 명사 아가페는 성경 외에서는 단 한번 여신 이시스(Isis)를 아가페라는 칭호로 부른 것이다.
우리가 살펴본 바 성경 헬라어 이전 문헌에서 아가파오의 특성을 알 수 있으며, 우리는 이 특성을 성경 헬라어 아가파오란 단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3.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 
구약성경에서 사랑을 뜻하는 중요한 히브리어 동사는 아헵이며, 그 역어로서 아가파오가 주로 사용되었다. 이 동사에서 유래한 명사 아하바의 역어로는 아가페가 주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사랑은 그 사람을 강요하여 그가 좋게, 또는 올바르게 평가하거나 인정하는 사물이나 사람에게로 이끌어 가는 자발적인 힘이다. 사람은 이 사랑의 힘에 제어를 받아 자기 자신을 주거나 혹은 사랑의 원인이 되는 대상을 확고히 붙잡거나 혹은 즐거움을 주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사랑은 내적 인격에 심은 영혼의 불가해한 힘이다.
사람이 사랑의 대상을 올바로 인정하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한다(신 6:5). 사랑과 미움은 생의 양극이다(전 3:8; 전 9:6).
사랑은 인간 상호간의 사랑, 하나님의 인간과의 사랑, 사물에 대한 사랑 등을 나타낸다.
(a)  이 단어는 남녀의 사랑에 대해 사용되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하나님과 관계, 그리고 남녀의 성적 관계를 시사해 준다. 이 남녀의 사랑은 이성(sexes) 상호간의 생명력 넘치는 충동을 의미한다. 선지자 예레미야(렘 2:25)나 호세아(호 3:1; 호 4:18), 그리고 에스겔(겔 16:37)은 사랑의 성적(sexual) 측면을 매우 진하게 묘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히 성욕 및 성행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남녀의 연애나 열애(창 29:18이하; 창 34:3; 삿 16:4), 합법적인 부부의 행복한 사랑(창 24:67; 삼상 1:5)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창조의 기사는 성의 구별과 부부간의 사랑이 생을 풍요하게 하는 은사임을 설득력있게 이해시켜 준다(창 2:18이하).
「그러나 이 사랑은 성적 사랑의 범위를 포함하지만 그것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헌신적 사랑과 생활의 충실함이 합쳐져 있다. 구약의 초기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사랑은 일부다처나 일처다부 사상과 부합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은 충실(참조: 창 20:13; 삿 14:16; 삿 16:4-5; 겔 16:8; 겔 23:17; 호 3:1), 상호의존(참조: 창 24:67), 책임(참조: 삼하 13:1, 4, 15)과 같은 인간 사랑의 다른 측면을 제외하고 성적인 것에 집중하는 위험을 이해시켜 준다(The interpertreter's D.B).」
더 나아가서 아가서는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라고 열정적인 사랑의 강력한 힘을 찬양까지 한다. 이 노래는 성적(남녀) 사랑의 기이함과 적극적인 힘을 찬양하지만 그 찬양에는 그 사랑이 근거를 두고 있는 상호의존과 신앙심(헌신)을 강조하고 있다(참조: 아 2:16; 3:1-8; 7:10; 8:6-7). 아가서에서 사랑을 묘사할 때 거의 대부분 아헤브(아가파오)와 아하바(아가페)를 사용했다. 그러나 여자가 남자를 부른 칭호는 도드(히 1730: 사랑하는 자)를 사용했다.
이러한 사랑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암논과 다말의 이야기는 성충동의 야수성, 즉 대상자와 성적 관계를 가지려는 무절제한 요구를 보여준다(삼하 13:1-22). 사랑은 성애 또는 성욕적인 영역에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근원, 곧 마귀로부터 기인한 원시적 힘인 미움을 부인함으로 맞서는 적극적인 능력이다. 이 이야기는 이 두가지 충동의 야수성도 투명하게 보여준다(삼하 13:1-22).
결혼이나 부부 생활은 상대에 대한 사랑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 삼손의 신부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치 아니하는도다"라는 히스테릭한 말에서(삿 14:16; 참조: 삿 16:15; 창 29:31, 33) 동일한 요소가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심지어 법까지도 사랑과 미움의 성욕적 증상에 관여하고 있다(신 21:15이하; 22:31이하; 24:1이하).
(b)  이 단어는 부모와 자식, 가족간의 사랑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사랑했으며(창 22:2), 리브가는 아들 야곱을 사랑했다(창 25:28). 야곱은 요셉과 베냐민을 사랑했다(창 37:3; 44:20). 잠언은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경계하느니라"고 했다(잠 13:24).
또한 이 단어는 며느리의 시어머니를 향한 사랑과 같은 가족간의 사랑을 표현한다(룻 4:15).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은 어느 곳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부모를 존중하고 존경하며 또 부모에게 복종해야 한다.
「참고-창 47:29에 보면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인애(헤세드: 친절, 자비; 70인역본  )란 단어를 사용하여 자기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기를 요청했다. 이것이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족속이나 가족의 유대는 이스라엘에서 매우 강하였다. 그러므로 '근친' 관계의 중요한 요소인 사랑에 대하여 놀랄 일이 아니다. 그것은 룻 3:10에서 이성 곧 남녀 사랑과 관련되어 있다. 그곳에서 인애(헤세드: 친절, 자비; 70인역본 ejleo")는 남녀 사랑의 개시와 가까운 친족에 대한 충실, 이 둘을 포함하고 있다.」
성경은 가족적 사랑이 너무 선택적일 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다(창 25:28). 그 결과로 야곱과 에서가 서로 반목하고 미워하게 되었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편애로 인하여 다른 아들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하게 되었다(창 37:4). 배타적인 사랑은 증오가 들어올 수 있는 지점이 될 수 있다. 이는 사랑이 헌신적일 뿐만 아니라 책임을 다 해야 하기 때문이다.
(c)  이 단어는 친구의 특별한 애착을 나타낸다. 다윗과 요나단 사이의 사랑은(삼상 18:1, 3; 20:17) 여인의 사랑보다 더 깊은 우정의 차원이었다-"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삼하 1:26).
(d)  더 나아가 이 사랑은 사회적 공동 생활의 근본과 규범으로 나타난다-"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 19:18). 이러한 면에서 사랑은 이웃을 위한, 그리고 이웃을 향한 헌신이며, 이웃을 형제로서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웃이 당연히 받아야할 대우를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특히 외국인(레 19:34)과 가난한 자(레 25:35)와 고아의 권리와 관련된 사회적 법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이웃 사랑은 단순한 친절이나 호의로 해석할 수 없다. 이것은 편협한 배타주의를 배제한다.-바로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웃이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적(enemy)으로 생각되는 것같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의미한다.
그 이유로 신 22:1-4이 동포를 도울 의무를 부과하는 것인 반면, 출 23:4-5은 특별히 이 의무를 적대적인 사람에게 적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웃은 동료일 수도 있고 적일 수도 있으므로, 그는 사랑의 대상이지 법적 제한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개인은 법적 개인보다 우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형태에서 출 23:4이하의 요구와 아마도 한층 더 높은 수준인 잠 25:21에 있는 기본적 진술("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은 원수를 향한 성향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으나 한 특별한 방식의 행위의 의무를 지우는 것으로서,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적으로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요셉은 그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선으로 악을 갚는 그런 실례를 보여준다(창 50:19).
물론 구약성경에는 이러한 원수를 사랑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시 109편과 잠 14:20 및 적대 국가들에게 향한 일반적인 태도는 이에 대한 예증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해 부과된 윤리적인 요구의 고결함은 여전히 존재한다.
(e)  이 단어는 구체적인 것이나 추상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기름(잠 21:17), 은과 풍부(전 5:10), 뇌물(사 1:23)을 사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악(시 52:3-5), 사망(잠 8:3), 허사(시 4:2-3), 거짓 맹세(슥 8:17)를 사랑했다. 또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시 119:47), 율법(시 119:97), 증거(시 119:119), 법(119:159), 그리고 그들은 선(암 5:15), 진실과 화평(슥 8:19), 구원(시 40:16-17)을 사랑했다.
4.신약성경에서 아가파오의 용법. 
동사 아가파오는 신약성경에서 143회 나오며, 요한의 기록(요한복음에 37회, 요한1-3서에 31회, 요한계시록에 4회)에 가장 자주 나타난다.
1. 공관복음의 용법.
(a)  예수님은 새로운 사랑을 요구하신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두 계명에 기초하고 있다(마 22:36-마 22:40; 병행구, 막 12:28-막 12:34). 이 두 명령은 신 6:5과 레 19:8을 결합시킨 것이다. 첫째 부분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명령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의식적으로 그의 백성의 도덕적 전통의 입장을 취하신다. 그러나 그가 요구하는 사랑은 오로지 모든 다른 계명을 그 사랑에 이르게 하고 모든 의가 그 표준을 그 안에서 찾는다는 것을 뜻하는 사랑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사랑은 의지와 행위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가 듣는 이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태도로 하나님을 위해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결단하고 준비되어 있기를 요구하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가능성을 근본적인 양자택일에 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인의 노예처럼 그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참조: 눅 17:7). 그것은 충실히 유순하게 그의 명령을 듣는 것이며, 스스로를 그의 지배 아래 두는 것이며, 다른 그 무엇보다도 이 통치의 실현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참조: 마 6:33). 한편 그것은 그의 전 존재의 근거를 하나님에게 두며, 전적인 신뢰로 그에게 매달리며, 모든 관심과 책임을 그에게 위탁하며, 그의 손에 의해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지도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는 모든 것은 미워하고 멸시하는 것이며, 다른 모든 인연과의 관계를 끊는것이며, 방해되는 모든 것을 잘라버리는 것이며(참조: 마 5:29이하), 오직 하나님과 묶는 것 이외의 모든 구속을 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세력, 즉 재물과 허영은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포기하거나 싸워야 하는 세력들이라고 특별히 언급하신다. 재물을 중히 여기고 부를 축적하려는 자는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믿음이 적은 불신자이다(마 6:24b; 마 6:30이하).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 대해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문자적으로 '사랑하는도다')"라고 화를 선언하신다(눅 11:43). 명성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양립할 수 없다.
또 하나 아직 이 사랑을 위협하는 세 번째 위험, 즉 박해에 대한 긴장이 있다. 제자직에는 고난이 수반된다. 아키바(Akiba) 같은 위대한 유대인 순교 신학자들처럼 예수님께서는 부득이 그의  ┻湧?당할 폭행과 고통과 모욕과 수난이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충성에 대한 중대한 불 시험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아시고 말씀하신다(참조: 마 10:17이하; 마 5:10이하). 큰 최후의 고통이 인간에게 다가올 때가 있다(참조: 마 5:29이하; 마 24:10이하; 마 24:12이하). 이 말씀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특성은 순수하고 단호하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강렬한 열정이며 모든 혼란과 권세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사랑하는 주님이 나타나실 때까지 굳게 인내하는 적은 무리들의 열정이다.
그리고 제자로서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된다(참조: 마 10:37이하; 마 25:31이하; 눅 6:22이하). 이와 같은 요구는 사랑이 직면해야 할 고난을 뜻한다. 사랑이란 고난을 통해서만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있다. 사랑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이를 희생시키게 하였다면, 그의 제자들에게도 분명 이 사실이 적용될 것이다.
(b)  다음에 예수님께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명령하신다: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9; 병행구 막 12:31).
이 둘째 부분인 이웃 사랑의 계명은 롬 13:9; 갈 5:14; 약 2:8에도 인용되어 있다. 문자적으로 '둘째는 그것과 같이 너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예수님께서 명하신 근본적인 큰 요구이다. 그것은 인류 속에서 새로운 실재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이 사랑 자체가 인간 상호간의 사랑의 기초이자 동기이다.
랍비 아키바(Akiba)는 이웃 사랑의 계명이 토라(Torah)의 기본 원리이며, 여타의 모든 것들이 이 속에 함축되어 있다고 하였다(참조: 마 22:36이하에 관한 SB I 900-8).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 이런 명령을 덧붙여서 실체화한 것은 신약성경의 특징이다.
예수님은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는 구약성경 및 유대인의 요구를 받아들이시지만 그러나 동포에 국한하는 이웃 사랑에 대한 제한을 단호하게 제거하신다. 그는 또한 이웃 사랑을 우리의 길에서 만나는 의지할 데 없는 사람에게 집중시킨다.
이웃 사랑에 대한 이해를 위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눅 10:29이하). 서기관은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가장 가까운 동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외국인에게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의 체계적인 목록을 제시함으로써 답변하지 않으신다(Philo, supra, 40). 또한 모든 사람들이 형제들이라고 하는 가장 멀리 있는 자들에 대한 별난 사랑을 칭찬함으로 대답하지도 않으신다. 그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이가 누구인가?"라고 역으로 질문하심으로 노미코스(nomikov", 3544)의 질문에 대답하신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중심에 두고 동심원을 그리는 이전의 그룹 짓기를 산산이 부수는 한편 유기적인 이웃의 개념을 내세우신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개념에 의해 당신이 중심에 있다는 새로운 그룹 짓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 체제는 모든 사람과 장소에 도식적으로 적용되는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절대적인 결합체로 구성된다. 그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둘레에 겹겹이 형성된다. "마침"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가장 가까이에 서 있는 자는 누구든지 똑같이 그에 대하여 이웃의 의무를 지닌다. 세 사람은 똑같이 강도들을 만나 고통하는 사람 가까이에 있다. 그들 중 누가 이웃의 의무를 이행하는가? 이방의 사마리아인이다. 왜인가? 보고 불쌍히 여긴 것이다. 마음이 최종적인 결정을 한다. 마음이 타인의 고통을 알아내는 자가 그의 이웃의 의무를 이행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다른 두 사람은 주저하였으므로 그들의 이웃으로서의 의무를 위반한다. 그러나 이 불쌍히 여김의 도입이 이웃 사랑에 있어서 감정의 낭비를 내포하지 않는다. 요구되는 것은 최대한 감정에 흐르지 않고, 가장 비감상적으로 도움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사마리아인은 매우 침착하게 가까운 앞날을 대비하면서 그 순간이 요구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행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허비하지도 않고 그 의무와 타인의 죄에 대하여 쓸데없이 말하지 않는 자비를 베푼 것이다. 그는 해야만 하는 것과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이 이야기에 피할 수 없는 절박함을 부여한다.
(c)  예수님은 의식적으로 유대의 전통과 대립하는 요구로서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하신다. 마 5:43이하와 눅 6:32이하의 간결한 말씀에서 그 요구에 대한 3중의 결정을 볼 수 있다.
첫째로 그것은 새 시대의 새 요구이다("옛 사람에게 말한 바...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마 5:21; 마 5:43).
둘째로 그것은 칭찬(카라스)을 지적한다("삼", "더하는 것",마 5:46 이하).
셋째로 그것은 "죄인들"(세리들, 이방인들, 마 5:46 이하)과 날카롭게 구별되는 "듣는 자들"에 적용된다(눅 6:27).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원수에 대한 사랑은 이 세상과 세대의 자녀들에 관하여, 그 미래가 그들에게 속한 하나님의 새 백성의 자녀들의 태도이다. 그들은 되돌려 받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며, 상환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곳에서 빌려주어야 하고, 제한없이 주어야 한다. 그들은 세상의 적의도 기꺼이 저항없이 희생적으로 감수해야 한다(눅 6:28). 참으로 그들은 그들을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해야 하며, 저주하는 자를 위해 축복해야 하고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눅 6:27 이하; 마 5:44). 이들 요구 중 몇몇에 대해서 랍비의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 완전하고 단호한 강령과 비교해 볼 때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옛 백성, 유대인 공동체의 순교자의 정신조차도, 아직 들어보지 못한 이 순교의 의지에는 훨씬 못 미친다. 여기서 한 새로운 중재가, 순교자의 과업, 즉 하나님을 미워하고 그의 신실한 백성을 멸하는 적대적인 세상을 위한 중재가 이루어진다.
이상주의자들은 항상 있어 왔다. 그러나 여기에서 환상이나 감상적인 생각없이 이웃 사랑의 이상을 현실 속에 전하신 자가 말씀하신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해야하고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와 같이 흔들리지 않는 진지한 어조와 현실 감각을 가지고 이 불가능한 요구들에 대해 말씀하신다. 항상 형제 사랑과 보다 좋은 세계에 대한 열광주의자들이 있어 왔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아시며 그러므로 오로지 사랑에 근거를 둔 세계 안에서 사는 삶을 요구하신다. 그는 냉철한 현실성과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하신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미움과 원수에 대한 유대인의 견해를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레 19:18에 대하여, 동족의 자손들에 대해 분노와 복수의 감정 같은 것은 금지되나 다른 백성들에 대해서는 금지되지 않는다고 해석하여, 시 139:19-22과 시 140:9-11과 같은 구절을 그들의 원수들을 미워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예수님은 사랑을 이웃에게 제한한 레 19:18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원수까지도 이웃 사랑의 대상에 포함시킨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원수들을 이전의 미움과는 대조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계명을 더 이상 확장시키지는 않았으며, 사랑에 관한 율법을 복음의 가르침 아래에 두었다. 이 복음의 가르침은 눅 10:29-눅 10:37에서 분명히 설명된다. '곤경에 처해 있는 자는 누구든지 항상 나의 이웃이다'는 진술은 '나의 이웃은 나에게 자비를 베푼 자이다'는 진술에 부속하고 뒤따른다(참조: 눅 10:37). 바르트는 그의 중요한 신학적 해설에서 내가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어리석은 짓임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전의 원수였던 사마리아인은 나에 대한 그의 자비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나의 이웃이 되었으며 따라서 나로 사랑으로 행하도록 도전(요구)하였기 때문이다(눅 10:37). 다른 말로 하면 사랑 받아본 경험이 도전을 앞서며, 복음이 명령을 앞선다. 그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이 비유의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의 모습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자비로운 구속(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d)  예수님께서 새로운 상황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그의 요구는 당연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사건인 하나님의 자비를 선포하신다. 그는 죄사함을 가져오시고,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 속에서 새롭고 넘치는 사랑이 흘러 나온다. 이러한 사랑은 모든 생명과 활동에 충만하여 그들을 지도한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새로운 관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서로간의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하였다(눅 6:36이하). 이것은 자비의 관계요 화해의 관계이다.
2) 바울 서신의 용법.
(a)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로 말미암아 창조되는 새로운 상황을 분명히 깨닫고 묘사한다. 이제 바로 동트는 새 시대에 대한 로마서의 주요한 논제는 하나님을 향한 선택된 자들의 사랑으로 시작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아가고 마침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아가페, 롬 8:39)에 대한 확신으로 끝맺는 하나의 찬양에서 절정에 달한다(롬 8:28; 롬 8:31이하). 이 확신은 세 가지 사실에 근거한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보내시고 이 사랑의 행위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롬 8:27), 곧 아들께서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십자가 위에서 성취되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사도를 부르시고 계속해서 그가 택하신 자들을 부르신다. 그의 사랑의 의지가 그들에게 향한다.
셋째, 하나님의 아가페를 우리의 마음에 널리 흐르게 하시며, 그리하여 그 사랑을 결정적으로 경험하게 되고 우리의 삶 속에서 현실된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활동을 하나님의 활동과 구분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었던 죄를 용서하시는 일을 하신 것과 같이,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동일한 것으로 여긴다(롬 8:37; 살후 2:16).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행위 속에서 계시되고 실행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아가페)을 확증하셨"다(롬 5:8).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건이 된다. 바울은 이런 변화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준동사형(verbal forms)으로 말하고, 항상 부정과거형으로 말한다(롬 8:37; 살후 2:16; 갈 2:20; 엡 2:4; 엡 5:2).
하나님의 사랑은 선택을 의미한다. 바울은 사랑함과 미워함, 택함과 거절함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대해 언급하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고(롬 9:13; 롬 9:25), 형식상의 병행절에서 아가페토이(사랑하심을 입은 자들)와 클레토이(부르심을 받는 자들)(롬 1:7) 또는 에클렉토이(택하신 자들)와 에가페메노이(사랑하신 자들)까지도 사용한다(롬 1:7; 골 1:12). 선택적인 사랑의 개념에 미리 예정하심(pre-temporal ordination)과 그리스도 사건의 표적(sign)에서 현재적(temporal) 부르심에 대한 두 가지 근본적인 사상이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엡 1:4이하[아가페]).
하나님께서 그의 크레스토테스(crhstovth", 5544: 선하심)와 아포토미아(ajpotomiva, 663: 엄위)에서 이제 죄인들의 무리로부터 구별된 선택받은 공동체는 하나님과의 영속적인 친교에서 사랑과 평화를 누린다.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은 살아있는 능력으로 일하고 계신다(롬 8:35; 고후 13:11이하). 사랑은 우리를 포로로 사로잡는다(고후 5:14).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다"(롬 5:5). 이 새롭고 살아있는 능력의 실체는 이들 바울의 말보다 더 설득력있게 표현될 수 없다.
바울 서신의 하나님의 아가페(ajgavph, 26)의 개념의 의미는 명백하다. 그것은 인간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와 이 세상의 구원을 지향하는 것(orientation)이다. 사랑의 행위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것이다. 아브라함 시대부터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백성을 미리 아셨다. 그는 아들을 보내시고 최종적으로 성령을 보내심으로 이 백성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이 성령은 갈라디아서의 위대한 마지막 부분(갈 5:2-갈 6:10)에 사랑의 성령으로 묘사된다(갈 5:22). 서신은 이렇게 역사의 행로를 남긴다.
(b)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의 목적은 새로운 인간이다. 그러나 이 목적은 인간과 인간의 사랑의 행위 없이는 성취되지 않는다. 모든 하나님의 행위는 창조이든지 구원이든지 간에 인간의 행위의 가능성과 필연성 둘 다를 전제로 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의지를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긴급한 부르심은 자유에로 부르심이다.
이 기본적인 법, 곧 예수님이 사건에서 가장 분명히 볼 수 있고, 바울에 의하면 모든 곳에서 하나님 행위와 인간의 행위 사이의 관계를 결정하는 이 기본적인 법은(참조: 빌 2:12이하), 하나님 사랑과 인간의 사랑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 사도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로 말씀하신다. 그가 관계를 세우신다. 이것은 롬 8장에 단호하게 주장되어 있다. 결단, 선택과 부르심은 확고하다. 그로부터 아가페라 불리는 모든 것이 생겨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사랑은 부름 받는 자에 쏟아 부어진 하늘로부터의 사랑에 대한 응답일 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근본적인 사랑의 행위, 그 자체와 같이 결단의 행위이다.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과 맺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물리치는 언약이 성취된다(롬 8:28; 참조: 롬 8:37).
바울은 고전 8:3에 똑같은 근본적인 관계를 재치있게 공식화시킨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
우리는 오직 그의 앞에서의 우리의 수동성의 크기만큼 하나님을 향하여 능동적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첫째로 어떤 참된 의미에서 우리를 의지가 있고 행동하는 인간이되게 하는 생명을 창조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을 사람에게 불러 일으키신다. 그러나 피스티스는 단지 작용을 시작하며, 진정한 실현은 디 아가페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갈 5:6).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자들에게 프뉴마를 부으신다(롬 5:5; 살전 2:13). 다시 한번, 인간은 수동적이다. 그러나 프뉴마는 사랑 안에서 행하는 최상의 활동을 위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자유는 사랑 안에서 그 자체를 억제하고 완성시킨다.
프뉴마가 그것에 의해 자유롭게 되는 아가페에 선행한다는 것은 갈 5:22에 고전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또 "성령의 사랑"(롬 15:30)과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골 1:8) 같은 결합에서 그리고 고전 4:21에 보다 세련되게 표현되어 있다.
프뉴마와 자유의 관계에 대해서는 롬 8:2에, 자유의 한계와 목적으로서의 아가페에 대해서는 갈 5:13에 나타나 있다. 사랑을 위해 해방됨으로 율법이 성취되고 초월되고 극복되며, 어떤 후퇴와 방해도 허용하지 않는 새로운 질서가 시작된다.
사랑의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은 부름받은 자가 그의 이웃에 대한 봉사로서 그의 삶을 사랑과 자유에 두는 것이다: "13 ...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갈 5:13-갈 5:14).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이하),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살전 3:12). 바울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명령에 집중하여 예수님과 같은 방법으로 그 명령을 확립한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관심은 형제 사랑에 집중되어 있다: (참조: 갈 6:10).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동포를 돕기 위해 준비되어 있음을 의미하던 이웃 사랑은 이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는 함께 시민된 자들을 위한 봉사를 의미한다. 그것은 형제간의 복지를 행위의 지배 원리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살전 4:9; 골 1:4; 몬 1:5; 엡 4:2; 엡 6:23; 골 3:19; 엡 5:25). 아가페토스와 아델포스는 서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는 용어가 된다(살전 2:8; 몬 1:16).
형제 사랑을 요구하는 우주적이고 역사적인 카이로스에 의해 형제 사랑이 결정적으로 한정된다(참조: 갈 6:10; 롬 13:11). 형제 사랑은 십자가와 텔로스 사이에서 이 결단의 시기에서 유일하게 적절하고 전진적인 태도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표적 아래 선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으심으로 인해 존재하게 된 공동체 안에서(빌 2:1이하; 골 3:14이하; 엡 5:2; 참조: 고전 8:11) 봉사와 희생, 용서와 이해(consideration), 도움과 동정, 그리고 쓰러진 자를 세우고 낙담한 자를 회복시키기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롬 12:9; 고전 13:4 이하; 참조: 갈 5:25 이하). 사도 자신의 최상의 가능한 목표는 교회의 선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아직 남은 고난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참조: 고후 6:3; 골 1:24 이하). 그러나 이것은 또한 바울에게 있어서 기본 원칙인 하나님과 인간의 행위 간의 근본적인 관계에 따라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행위에 대한 봉사로서 인간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가 결합한다.
사랑은 세우는 일을 한다(고전 8:1). 사랑은 장래의 일을 세운다. 아가페(ajgavph, 26)는 텔로스(tevlo", 5056)의 표적 아래에 있다. 이것은 고전 13장의 위대한 진리이다. 이런 이유로 사랑은("제일 좋은 길", 곧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는 하늘의 선물이며, 사랑은 믿음, 소망, 사랑이 이루는 삼각 구조의 중심에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둘 보다 위대하다. 믿음과 소망은 이 불완전한 세계(aeon)의 한계나 사건들을 견딘다. 사랑으로 인해 장래 세대의 능력은 이미 현재의 세계의 형태 속으로 침입한다. 예수님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서도 아가페는 이 죽음의 세계(aeon) 가운데서 미래가 가지는 유일한 생명의 힘이다.
3. 야고보서의 용법. 
(a)  약 1:12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b)  약 2:5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의 나라로 부르실만큼 선하다고 여기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자는 나의 형제들이며 그들이 비록 누추한 옷을 입고 온다할지라도 뒷자리에 앉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c)  약 2:8에서 사랑, 곧 이웃 사랑은 새 왕국의 최고의 '법'이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그러므로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범법자가 된다(참조: 약 2:9).
4. 베드로의 용법. 
(a)  벧전 1:8에서 성도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으나 사랑한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b)  벧전 1:22에서 진리로 영혼을 깨끗하게 하면 참으로 형제를 사랑할 수 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베드로는 벧전 2:17에서 "형제를 사랑하라"고 권고한다.
(c)  벧전 3:10에서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악을 떠나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d)  벧후 2:15에서 발람은 불의 삯을 사랑하다가 망했다: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5. 요한의 용법. 
바울에게 있어서 아가페는 미래의 원리(principle)이며, 요한에게 있어서 사랑은 현재의 우주적 위기에서 세워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세계의 원리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일 3:16; 요일 4:9 이하).
이 기본적인 사상에서 요한과 바울(롬 8:32)은 일치한다. 그러나 요한이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대한 사랑에 대해 항상 이야기하는 방식에는 다른 점이 있다(요 3:35; 요 10:17). 모든 사랑은 예수님께 집중된다. 그는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의 중재자이시다. 대조적으로 요한은 아버지에 대한 아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거의 말한 적이 없다(요 14:31). 그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그의 "친구들"로 주신 자들에 대한 아들의 사랑을 더욱 강하게 강조한다. 아들을 통해 아버지의 사랑이 인간의 세상에 이른다(요 17:23 이하; 요 14:21 이하; 요일 4:19; 요 11:5; 요 13:23). 이 사랑은 그의 죽음에 의해 성취되고 공표되었다. 아들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그의 목적을 이루신다(요 13:1; 요 15:13).
요한복음의 아가페는 매우 명백히 겸손한 사랑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한 단계 한 단계 이 세상으로 내려오는 천국의 실체이다. 그렇지만 이 천국의 실체는 계시와 도덕적 행위에 의한 승리를 성취한다. 따라서 요한은 바울이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명백하게 설명한 것을 이해하고 있다. 빛과 생명의 세계는 이 세상에서 사랑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요한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모두의 삶에서 아가페의 적극적인 특성을 강조할 수 있고 또 강조해야만 한다.
요한이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요 5:42; 요 8:42; 요 14:28)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고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형제에 대한 사랑에 의해 가리워 지도록 한 것은(요 13:34 이하; 요 14:15 이하; 요 21:15 이하; 요일 4:20) 극히 일부분이다. 형제 사랑, 아버지와 아들과 아들의 백성의 서클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공동체를 구성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공동체의 삶을 위한 궁극적인 실체이며 그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은 그 생활의 법이다(요 15:9 이하; 요일 2:10; 요일 3:10; 요일 4:11 이하).
요일 3:14에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않는 자는 사상에 거하느니라"고 한다. 요일 3:14; 요일 2:15 이하; 요 3:19에도 그렇다. 아가판은 어떤 목적어에 의해 한정되지 않은 채로 있으며, 단지 이 절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눅 7:47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는 단독으로 사용된 아가폰의 독립적인 배치는 요한일서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요일 3:18; 요일 4:7 이하; 요일 4:19). 이 사랑은 생생한 활동이며, 존재의 방식이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현실화이다. 사랑의 법이 모든 세부적인 요구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고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고상한 일관성으로 독자들 앞에 제시된다는 사실이 이것과 조화된다. 단지 때때로 사랑에 대한 요구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와 같은 표현에 의해 정확하게 정의된다(요일 3:18; 요이 1:1).
요한의 서신에서는 보다 일반적으로 훈계가, 여기에서 선택의 사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형제의 관계에 대해서는 매우 단순하게 적용되는 아가페테와 아가페토이라는 절박한 부르심에 의해 중단된다(요삼 1:5; 요일 4:7).
요한계시록에서 형제 사랑에 대한 요구(계 2:19)는 이 분열과 고통에서,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라도 하나님께 굳게 매달리라는 열정적인 부르심에 의해 완전히 가리워 진다. 여기에서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이해는 전적으로 그 시대의 필요에 의해서 새로운 생명에 닥친 수난에 대한 신학 사상에 의해 결정된다. 요한계시록의 시작 부분에 충성된 증인 "우리를 사랑하신 자"(토 아가폰티 헤마스)에 드리는 찬양이 나오고(계 1:5) 사랑하는 도시의 마지막 때의 상황의 변화(계 3:9; 계 20:9)와 하나님의 적들에 대한 위협과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는 책망(계 2:4)과 함께 죽기까지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계 12:1) 피스티스(믿음)와 아가페(사랑)를 지킨 자들의 영광이 뒤따른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는 때가 왔다(마 24:12).
6. 사도 시대 이후의 용법. 
초기의 신조는 몇가지 새로운 이상의 고취와 아울러 이 시대에 전수된다. 클레멘트일서 49-50은 지고의 사랑, 그리고 이 사랑이 공동체와 세상에 대해 가지는 실질적인 의의에 대해 계속적인 인식을 예증해준다. 아가페와 아가폰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기초적인 용어가 되었다. 에가페메노스(**)와 아가페토스(**)는 예수님에 대해 즐겨 사용되는 용어인데 때때로 휘오스(**)나 파이스(**)와 연결되어서 사용되기도 하고 때때로 독립적인 명칭, 사랑하는 아들(Only-Beloved)로 사용되기도 한다(벧후 1:17; Herms, 5, 2, 6; M. Pol., 14, 1; Dg., 8, 11; Barn., 3, 6 등).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하나님께 사랑받고 선택받은 자들이며, 그의 선하신 기쁨이 그들에게 머무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 아가페와 아가판은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을 요약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세상에 대한 경멸과 미움을 요구한다. 이러한 긴장 상태는 여기 유대교에서 경건과 하나님의 사랑의 최후의 표현으로 고귀하게 평가되는 순교를 초래할 수도 있다.
또 다른 형태로 하나님과 이 세상의 현상간의 긴장, 하늘의 사랑과 세상적 사랑 간의 긴장은 금욕주의로 이끌 수도 있다. 아가판은 훈련받은 또 때때로 절제하는 삶을 나타내는 용어, 또는 실제로 금욕의 훈련을 나타내는 용어가 된다. 순결한 아가페는 에로틱한 사랑보다 강하다. 그러나 아가페와 그 파생어들의 가장 일반적인 사용은 형제 사랑을 의미한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관한, 율법의 의미와 성취에 관한, 그리고 원수의 사랑에 관한 옛 말들은 크게 존중되고 적용된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경우에 형제들은 중요하다.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지치지 않고 봉사로 융화로 선으로 악을 이김으로 형제애적 친교의 의지를 강화시키기 위해 힘써야 한다(벧전 4:7 이하; ICI, 49이하; Barn, 1, 6). 아가페토스는 유행하는 인사말의 형식이다. 아가페는 식탁에서의 친교가 발전된 형제들의 애찬에 대한 전문적인 용어가 되었고 사회적인 의미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참조: E. Stauffer;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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