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12.30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요1:19-51.증거자세례요한-5제자들의 증거
첨부파일 :

개역개정] 요1:19-51 

세례 요한의 증언

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4.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25.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28.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요한의 두 제자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시다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표준새번역 요1:91-51---

세례자 요한의 증언

19.  ○유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내서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어 보게 하였을 때에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였다.

20.  그는 거절하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하고 고백하였다.

21.  그들이 다시 요한에게 "그러면, 당신은 누구요? 엘리야요?" 하고 물으니, 그는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당신은 예언자요?" 하고 물으니, 요한은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

22.  또 그들이 말하였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할 말을 좀 해주시오. 당신은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23.  요한이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24.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그들이 또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면, 어찌하여 세례를 주시오?"

26.  요한이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이가 한 분 서 계시오.

27.  그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 만한 자격조차 없소."

28.  이것은,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다.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아라

29.  ○이튿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한 분이 오실 터인데, 그분은 나보다 먼저 계시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다'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분을 두고 한 말입니다.

31.  나도 이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이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32.  요한이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령은 이분 위에 머물렀습니다.

33.  나도 이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서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아라' 하셨습니다.

34.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첫 제자들

35.  ○다음날 요한이 다시 자기 제자 두 사람과 같이 서 있다가,

36.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서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하고 말하였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하는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다.

38.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랍비'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고 대답하시니, 그들이 따라가서, 예수께서 묵고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을 그분과 함께 지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이다.

41.  ○이 사람은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42.  그런 다음에, 시몬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게바'는 베드로라는 말이다.)

빌립과 나다나엘이 부르심을 받다

43.  ○다음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떠나려고 하셨다. 그 때에 빌립을 만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44.  빌립은 벳새다 사람으로,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고을 사람이었다.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나서, 말하였다. "모세가 율법책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습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46.  나다나엘이 그에게 말하기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니, 빌립은 그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48.  나다나엘이 예수께 물었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49.  나다나엘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50.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다고 해서 믿느냐?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네가 볼 것이다."

51.  예수께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NASB 요1:19-51-------

19.  And this is the witness of John, when the Jews sent to him priests and Levites from Jerusalem to ask him, "Who are you?"

20.  And he confessed, and did not deny, and he confessed, "I am not the Christ."

21.  And they asked him, "What then? Are you Elijah?" And he *said, "I am not." "Are you the Prophet?" And he answered, "No."

22.  They said then to him, "Who are you, so that we may give an answer to those who sent us? What do you say about yourself?"

23.  He said, "I am A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MAKE STRAIGHT THE WAY OF THE LORD,' as Isaiah the prophet said."

24.  Now they had been sent from the Pharisees.

25.  And they asked him, and said to him, "Why then are you baptizing, if you are not the Christ, nor Elijah, nor the Prophet?"

26.  John answered them saying, "I baptize in water, [but] among you stands One whom you do not know.

27.  "[It is] He who comes after me, the thong of whose sandal I am not worthy to untie."

28.  These things took place in Bethany beyond the Jordan, where John was baptizing.

29.  The next day he *saw Jesus coming to him, and *said, "Behold, the Lamb of God who takes away the sin of the world!

30.  "This is He on behalf of whom I said, 'After me comes a Man who has a higher rank than I, for He existed before me.'

31.  "And I did not recognize Him, but in order that He might be manifested to Israel, I came baptizing in water."

32.  And John bore witness saying, "I have beheld the Spirit descending as a dove out of heaven, and He remained upon Him.

33.  "And I did not recognize Him, but He who sent me to baptize in water said to me, 'He upon whom you see the Spirit descending and remaining upon Him, this is the one who baptizes in the Holy Spirit.'

34.  "And I have seen, and have borne witness that this is the Son of God."

35.  Again the next day John was standing with two of his disciples,

36.  and he looked upon Jesus as He walked, and *said, "Behold, the Lamb of God!"

37.  And the two disciples heard him speak, and they followed Jesus.

38.  And Jesus turned, and beheld them following, and *said to them, "What do you seek?" And they said to Him, "Rabbi (which translated means Teacher), where are You staying?"

39.  He *said to them, "Come, and you will see." They came therefore and saw where He was staying; and they stayed with Him that day, for it was about the tenth hour.

40.  One of the two who heard John [speak,] and followed Him, was Andrew, Simon Peter's brother.

41.  He *found first his own brother Simon, and *said to him, "We have found the Messiah" (which translated means Christ).

42.  He brought him to Jesus. Jesus looked at him, and said, "You are Simon the son of John; you shall be called Cephas" (which is translated Peter).

43.  The next day He purposed to go forth into Galilee, and He *found Philip. And Jesus *said to him, "Follow Me."

44.  Now Philip was from Bethsaida, of the city of Andrew and Peter.

45.  Philip *found Nathanael and *said to him, "We have found Him of whom Moses in the Law and [also] the Prophets wrote, Jesus of Nazareth, the son of Joseph."

46.  And Nathanael *said to him, "Can any good thing come out of Nazareth?" Philip *said to him, "Come and see."

47.  Jesus saw Nathanael coming to Him, and *said of him, "Behold, an Israelite indeed, in whom is no guile!"

48.  Nathanael *said to Him, "How do You know me?" Jesus answered and said to him, "Before Philip called you, when you were under the fig tree, I saw you."

49.  Nathanael answered Him, "Rabbi, You are the Son of God; You are the King of Israel."

50.  Jesus answered and said to him, "Because I said to you that I saw you under the fig tree, do you believe? You shall see greater things than these."

51.  And He *said to him, "Truly, truly, I say to you, you shall see the heavens opened, and the angels of God ascending and descending on the Son of Man."

=======

세례 요한의 증언(2)(요 1:19-28)

여기에 요한의 증언이 있다. 이것은 자기를 시험하러 예루살렘에서 보낸 사자들에게 한 것이다.

Ⅰ. 요한에게 파송한 자들과 파송 된 자들은 누구인가?

1. 우선 사람을 보낸 자들은 누구인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로서, 유명한 산헤드린, 혹은 최고 재판관들이었으며, 유대교를 대표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종교에 관계되는 모든 문제들과 종교에 관계되는 모든 무리들을 심리하는 역할을 한다. 

...그들은 지식의 원천이요, 유대교회의 리더로서 성경에 의하여 메시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을만큼 시대를 잘 분별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자기들의 인도자로서 그리스도를 즉시 알아볼 수 있어야 했고, 받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알고 받드는 대신에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요한과 "문답하려고" 사자들을 보냈다. 세속적 지식, 위엄,  권한 등 외적 체면은 사람의 마음으로 하여금 거룩한 빛을 영접하려는 겸손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다.

2. 그들이 보낸 사자들은 누구인가?

(1)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로서, 아마도 그 공의회의 회원들일 것이며, 현명하고, 중대하고 권위 있는 자들이다. 

...세례 요한도 아론 자손의 제사장이므로, 제사장 이외에 어떤 사람에게도 시험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케"해야 한다고 요한의 직무를 예언한 예언이 있었다.(말 3:3). 그러나 그들은 요한과 그의 개혁을 시기했다.

(2) 그들은 "바리새인으로서," 교만하고 독선적인 자들이며, 자기들은 회개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자기들의 일에 대하여 회개하라고 가르치는 자에게는 참을 수가 없는 자들이다.

Ⅱ. 그들이 보낸  사자들의 임무는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요한과 "그의 세례"에 대해서 심문하는 것이다. 그들은 (공의회 저리에 참석하도록) 요한을 부르러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아마도 "무리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요한이 머물러 있는 곳의 무리들이 분노할까봐 겁이 났거나, 또는 자기들 주변의 민중도 그를 잘 알게 될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을 무리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그 사자들은 요한에게 질문했다.

1. 그것은 자기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려고 해서이다. 

...아덴 사람들이 호기심 때문에 바울의 교리에 관하여 물은 것처럼(행 17:19, 20) 그들도 물었다. 그들은 대단한 자만심을 가지고 있어서, 회개의 교리가 그들에게는 이상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그를 심문한다는 것은 곧 자기들을 "위대하게" 보이게 하리라 생각했음직 하다.

2. 그들은 요한의 교리에서 어떤 구실을 발견한다면, 그를 "억누르고" 잠잠케 하려는 의도를 가졌다. 

...그들은 커가는 그의 인기를 시기했으며, 그의 전도가 그들이 오랫동안 영향받아 왔던 모세의 율법과 일치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생각하고 기대해 왔던 메시야 왕국의 건설에도 빗나갔기 때문이었다.

Ⅲ. 요한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세례에 대한 답변과 설명을 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 했다.

1. 그 자신에 설명을 보자. 그들은 "네가 누구냐?"하고 요한에게 물었다. 

...요한의 차림은 놀라왔다. 그는 자기 자신을 나타낼 때까지 광야에 살았다. 그의 정신, 외침, 그리고 교리는 이제까지 존경을 받던 그들에게 도전하는 무엇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결코 유혹자 처럼 하지 않았고, 자기 자신을 위대한 사도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는 "위대하게 보이기" 보다는 "선한 일을 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정식으로 심문 받기까지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하려 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낮추어 말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로서 요한은 자기의 업적들을 자기의 업적들을 자기의 입으로 사랑하지 아니했다. 요한은 그들의 심문에 대답하고 있다.

(1) 소극적인 면에서 보자. 요한은 자기가 사람들이 기대하는 만큼의 위대한 선지자가 아니라 했다. 

...하나님의 신실한 증인들은 불공평한 경멸에 대해서 보다는 지나친 존경에 대해서 더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 바울은 자기를 지나치게 평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그저 바울이오"하고 타일렀다. 또 그를 과소평가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자기의 육체는 연약하다고 했다. 그는 자기를 신으로 부르는 자가 있을 때 자기의 옷을 찢었다.

① 요한은 자기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다(20절). 즉 "그는 나는" 지금 당신들이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했다."

...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그리스도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서역자들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특권을 침해해서는 안되며, 자기 자신들을 그렇게 높여서도 안 된다. 사역자들은 그리스도가 아니므로, 하나님의 주신 특권을 지나치게 뽐내서도 안 되며, 다른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주장하려 해서도 안 된다. 그들은 결코 스스로 은혜와 평화를 창조하지 못한다. 즉 그들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며, 회개나 중생이나 위안을 주지 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요한에 대해서 그 말이 얼마나 강조되고 있는가를 유의하라. 여기 원문은 "그는 부인하지 않고, 고백했다"고 했다. 즉, 그는 자기의 단언에 대해 열렬히, 그리고 항구여일하게 나아갔음을 뜻한다. ---교만해지려는 유혹,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명예를 취하려는 유혹은 많은 열정과 솔직성을 가지고 거절해야 한다. ...요한은 자기가 메시야로 인정되었을 때, 그것을 묵인하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애매성의 여지도 없이 솔직하고 엄숙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이 표현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말은 아니다. 자신을 낮추어 보잘 것 없이 여기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린다. 그러나 자신을 부인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상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사람이다.

② 그는 자기가 엘리야임도 부정한다(21절). 

...유대인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엘리야 같은 사람을 기대했다. 그래서 그들과 같이 거하며, 자기들에게 위대한 일들을 약속해 주기를 바랬다. 요한의 성격, 교리, 그리고 세계를 보고 또한 엘리야가 승천한 바로 그 지점에서 내려 온 사람으로 여긴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요한은 역시 이런 존경을 부인한다. 그러나 그는 실상은 참으로 엘리야의 이름으로 예언된 자이다.(말 4:5).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온 자이며(눅 1:17), 또 "오리라 한 엘리야" 이다(마 11:14). 그러나 한편 그는 엘리야가 아니다. 엘리야가 왔으나 그들은 "그를 알지 못했다"(마 17:12). 그래서 그는 자기를 엘리야로서 스스로 알리지는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결코 약속한 일이 없는 그런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③ 그는 자기가 "선지자"임을 부인했다.

첫째, 그는 모세가 말했던 "주께서 자기 형제들 위에 세우실" 그런 선지자가 아니었다. -- 만약 그들이 이렇게 생각했다면, 그들은 질문할 필요도 없다. 그 이유는, 그런 선지자는 바로 메시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은 이미 자기는 바로 그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다.

둘째, 그는 사무엘과 엘리야 같은 또는 공적인 사건에 끼어 들어 자기들을 로마의 명예로부터 구원해 주리라 기다리는 그런 선지자도 아니었다.

셋째, 그는 선지자들처럼 꿈이나 환상에 의한 선지자가 아니라 계시를 지닌 선지자였다. -- 그래서 그의 전도와 사명은 다른 한 선지자라고 말했다면 그의 말은 유리하게 인정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역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말을 조심을 하여 사람들이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2) 긍정적 측면에서 보자. 

...그에게 온 자들은 적극적인 답변을 요구했다. "무슨 권위"로 일하는지를 알려 했다(22절). "누군지 말하라. 우리는 너를 믿고 세례를 받진 않지만, 우리를 보낸 자에게 대답을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니라." 보낸이들에게조차 요한은 신실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일부러 애매한 답을 하리라 생각지는 않았다. 분명하고 뚜렷한 답을 하리라고 생각했다.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 그래서 요한은 그렇게 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 여기서 다음을 관찰하자.

① 요한은 성서의 구절을 인용해, 자기에서 성서가 이루어졌음을 나타냈으며, 또 자기 임무가 신의 권위에 의하여 인정된 것임을 말했다. --성서가 말하는 사역자의 사명은 고귀한 소명을 받은 사람에 의해 수행되며, 하나님 말씀만이 그렇게 만든다.

② 요한은 대답으로써 매우 보잘 것 없고 겸손한 그리고 자기 부정의 표현을 하고 있다. --그는 자기를 낮추어, 자신의 관작이 아니라 의무와 의존에 의해 수행함을 나타내며, 단지 소리에 불과한 것처럼 나는 그저 "광야의 소리"라고 말한다.

③ 요한은 자기에게 경청하도록 하고, 감명을 주고 깨우칠 수 있도록 설명했다. -- 그는 "소리"이다.(사 40:3 참조). 또 경성의 소리이며 지시하는 소리이다. 진정,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소리요 매개자이다. 바울과 아볼로도 단지 전달자들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첫째, 요한은 한 "인간의" 소리였다는 점이다. --사람들을 천둥소리와 큰 나팔소리처럼 자기들을 두렵게 하는 소리로써 율법을 받을 준비를 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나타나신 때처럼 (왕상 19:12) 복음은 인간의 목소리로, "조용하고 작은 음성"으로 들을 준비를 해야 했다.

둘째, 그는 "외치는 자"의 소리였다.

a.. 그의 "진지함"과 "집요함"이 사람들을 회개토록 부르고 있다. -- 즉 여유를 주지 않고 큰 소리고 외치었다. 사역자들은 진지함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열정을 가지고 가르쳐야 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그것에 먼저 자신들이 감화를 받아야한다.

b. 그가 가르치는 교리는 아주 "공개적이다." -- 그는 "외치는" 소리로써 모든 사람들이 듣고 주목할 수 있었다.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잠 8:1)

셋째, 목소리가 외치는 곳은 "광야이다." 

...광야는 조용하고 고적한 장소로써, 세상의 소음이나 분주한 일이 없는 곳이다. 세속적인 일의 시끄러움에서 떠날수록 우리는 그만큼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넷째, 그의 외침은 "주의 길을 곧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말은 이런 뜻이다.

(a) 하나님의 길에 대해 사람들의 잘못을 "바로 잡는다"는 것이다. -- 주의 길은 확실히 바르나, 율법을 왜곡해서 해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굽게 만들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본래의 법칙으로 돌아오도록 요구하고 있다.

(b) 그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사람들이 영접하고 즐길 수 있도록 예비하러 왔다. -- 즉 왕자나 위대한 사람을 위해 "방을 예비하는" 선발자(先發者)들과 같은 격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 우리는 그분을 영접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면 영광의 왕이 들어가실 것이다.(시 24:7).

2. "세례"에 관한 그의 증언을 보자.

(1) 그것에 관한 사자들의 질문을 보자.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니면,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25절).

① 그들도 세례가 거룩한 의식이나 행사로써 적절하게 사용되어야 할 줄로 알고 있었다. 

...유대 교회에서는 세례를 할례와 더불어 개종자의 입단식으로써, 죄로 더럽혀진 이전의 상태에서 씻음을 받는 표시로 행하고 있었다. -- 이러한 의식은 기독교 교회에서 사용됨으로써, 더 잘 어울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새로운 것을 즐겨 사용하진 않으셨다. 그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② 사자들은 세례가 메시야의 도래 때에 사용될 것이라 기대했는데, 그 이유는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며"(슥 13:1), "맑은 물이 뿌려지리라"(겔 36:25)라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 엘리야, 그리고 "바로 그 예언자"는 죄로 "더러워진 세상을 깨끗케 하실 것이다.

③ 그러므로 사자들은 요한이 어떠한 권위로 세례를 베푸는지를 알려했다. 

...그가 엘리야 혹은 그 예언자가 아니라는 자기 부인은 사자들에게 더 질문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네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 사람의 겸손이 오히려 그를 거역하고 또 나쁜 편견을 조성한다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마귀가 우리를 교만으로 유혹하고 우리를 죄인으로 선고해 우리의 교만한 사상을 이용당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우리를 멸시하려고 우리 자신의 겸손한 사상을 이용하는 것이 더 낫다.

(2) 거기에 대한 요한의 설명을 보자(26,27절).

① 요한은 자기 자신을 외형적인 세례를 주는 사역자라고만 나타냈다. -- "나는 물로 세례를 주는게 전부이다. 나는 육의 눈으로 보이는 것 이상이 아니다. 나는 세례 요한이란 이름 이외에 다른 이름이 없으며, 물이 상징하는 성령의 은사는 줄 수 없다."  ::: 바울은 아무도 자기를 지나치게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했다(고후 12:6). 세례 요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인 체해서는 안 된다.

② 그는 자기보다 더 위대한 사람을 그들에게 지시했다. 

-- "나는 단지 물로 세례를 주며, 그것을 나의 최선의 사명으로 여긴다. 나는 단지 내 뒤에 오시는 분을 안내할 따름이며, 그분에게 사람들을 넘겨 줄 뿐이다."  ::: 그리스도의 사역자의 위대한 역할이란 바로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에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사역자들은 자기 자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야 한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전했던 복음을 그대로 일반인들에게 전해야 한다. "내가 전하려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15절). 

-- 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였다. 그의 증언은 한결같이 변함이 없었다. 산헤드린의 대제사장들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요한을 시기했으나,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에게 자기를 능가할 사람이 문에 서 있다고 말했다.

첫째, 요한은 이 때에 "사람들 중에 있는" 그리스도를 이야기했다. -- 즉 "여러분 중에 한 사람이 있는데, 여러분들은 그분을 알지 못합니다." 이 때 그리스도는 무리들 사이에서 계셨으며, 그들 중의 한 사람처럼 보여졌다. 여기서 이 점을 살피자. .....이 세상 안에는 참다운 가치가 숨겨져 있다. 여기서 이 점을 살피자. 이 세상 안에는 참다운 가치가 숨겨져 있다. 즉 참다운 탁월성은 흔히 가려져 있다. 성도들은 하나님이 "숨겨놓은 자들"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잘 모르고 있다." .....또한 하나님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가까이 계신다. "주님이 바로 곁에 계셨지만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기다리던 메시야가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에, 혹은 저기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둘째, 그는 그리스도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 "그분이 내 뒤에 오시지만 나보다 먼저 택하심을 받았다." 이 말에 이어서 그는 "나는 그의 신들에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러므로 나는 그와 같이 이름 불리우기에도 적합치 못하겠노라. 그러므로 나는 그와 같이 이름 불리우기에도 적합치 못하며, 너무 위대하므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명도 나는 감당할 수 없다"(삼상 25:41). ::: 그리스도의 중요성을 아는 자들은 그에 대한 봉사, 심지어 가장 낮은 문지기까지도 영광으로 알고 있다(시 84:10 참조). 만약에 요한과 같은 위대한 사람이 가까이 계시는 그리스도의 위엄을 감당치 못한다고 말하면, 우리 자신들은 얼마나 무가치하랴!

... 이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생각해 보자. 메시야가 그들 가까이에 접근하고 있다는 외침에, 그들은 메시야가 누구이며, 어디 있는지를 들었을 법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게다가 이 사자들은 (사실상) 요한을 방해하러 왔기 때문에, 그에게서 어떠한 교훈도 거절했다. 그래서 그들의 무지는 "고의적인"것이 되었다. 그리스도를 알 수 있었으나 알지 못했다.

... 마지막으로, 이러한 것이 행하여 진 장소에 주목된다. 이 장소는 "요단강 건너편의 베다니"이다(28절). 베다니는 "과객의 집, 고통받는자들의 집"이란 뜻이 있다. (어떤 사람은 이 장소가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요단강을 건너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는 바로 그 장소로 추측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길이 열려 복음이 들어간 곳이다. 그래서 이 장소에서 요단을 건너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아주 멀다.(???) -- 아마도 요한이 그 장소를 택한 것은 예루살렘에서 거의 방해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아모스 선지도 법정에서 먼(!!!) 이 지역에서 외쳤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그의 평화"에 속한 길을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요한은 자기가 세례를 주고 있는 바로 그 장소에서 증거 했고 그의 세례를 받으러 온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 했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른다 할 수 없었다.

----------

예수의 등장(요 1:29-36)

이 구절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으로서, 요한이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이 증언을 했다. 이 때, 그리스도는 세례를 받고 즉시 광야로 가서 시험을 받았다. 거기서 그리스도는 40일 동안 시험받으시고 요한에게 오셨는데, 요한은 "자기에게로 나아오시는 예수를 보았다." -- 시험을 이기신 그리스도가 전도하며 세례를 주고 있는 요한에게 즉시 돌아왔다. ::: 그리스도가 아주 모범으로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격려가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있다.

1. 우리가 "어려운" 시험 상태에 있을 때는, 규례(의식)와 밀접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야"한다(시 73:17). 

-- 사탄과의 싸움은 우리로 성도들과 더욱 밀접한 친교를 갖게 하는데 그것은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더 낫기 때문이다.

2. "영예로운" 승리 때문에 "의식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 그리스도는 시험을 이긴 후 천사들이 수종을 들었지만, 결구 전도하고 세례를 베푸는 요한에게로 돌아 왔다. 우리가 하는 이쪽에 속해 있는 한,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특별히 받았다 하더라도 여전히 은혜와 위로를 받는 일반적인 방법에 가까워져서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이제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두 증언"이 나타나는데, 이 두 증언이 "하나로 일치"된다.

Ⅰ.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나온 첫 날, 그에 대한 요한의 증거가 있다. 즉 요한이 자기 앞에 있는 그리스도에 관해 증언한 4가지가 있다.

1.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29절)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런 것을 배운다.

(1)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그는 인간의 죄 때문에 보상되어지고,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려는 큰 희생 재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제사의 희생물로 쓰이는 어린양이 자기 자신이라고 암시했다. 왜냐하면 어린양은 온유의 상징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는 자기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같이 되어야 하고(사 53:7), 나아가 특별히 다음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① 아침저녁으로 매일 드리는 "날마다의 희생 제물"인 "어린 양"이다(출 29:38). --이것은 영원한 속죄를 증거 해 주는 그리스도의 예형이다.

② "유월절의 어린 양"을 가리킨다. -- 그것은 문설주에 그의 피를 뿌리고, 이스라엘인들을 멸망시키는 천사들로부터 구했던 양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월절 양이다(고전 5:7).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하나님이 그를 세우셨고(롬 3:25), 하나님에게 바쳐졌고(17:19), 하나님에게 인정받았다. 그를 하나님이 기뻐하셨다. 속죄제로 드릴 염소를 뽑는 제비를 "주님(여호와)의 제비"라고 했다(레 15:8, 9). 그래서 죄의 대속물인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불리 우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어린 양"인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져다 버린다"는 것이다. 

... 그리스도는 자신을 희생함으로(히 9:26), 죄를 제거하려고 나타나신 것이며, 그것이 사명이었다. 세례 요한은 죄의 용서를 받도록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했다. 비록 우리의 회개가 죄에 대하여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죄의 용서가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 의하여 가능하며, 또한 회개를 통하여 우리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있다. 우리가 주목하는 근거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것 뿐 이다.

① 그리스도는 "죄를 짊어지신다." --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증보자인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거룩성을 침해하고 인간의 행복을 파괴하는 죄를 짊어지신다. 그가 오신 것은

첫째, 그의 죽으심으로써 죄를 제거하며 인간이 처해 있는 심판을 거두게 하시고, 박탈된 권리를 회복시키며, 그의 배상 행위로서 회개하고 순종하며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려는 것이다.

둘째, 은혜의 영으로 죄의 권세를 물리침으로써 죄가 우리를 주관치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롬 6:14).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우리 피 속에 있는 죄들을 깨끗이 씻기를 바라고 있다. 즉 그는 우리를 "의롭게"하시며 동시에 "성화 시킨다." 그는 죄를 짊어지신다. ...곧 그는 세상에서 죄를 져다 버리고 계신다. - ‘호 아이론’ - 이것은 한 번이 아니라 계속적인 제거를 뜻한다. 그 짊어지심은 그의 계속적인 활동이고 임무이며, 시간이 끝나기 전에는 끝날 줄 모르는 "시간의 임무"이다. 하늘에서 그의 계속적인 피의 중재와, 땅에서 그의 계속적인 은혜의 감화를 통하여 그는 항상 죄를 져다 버리고 계신다.

② 그는 "세상 죄"를 짊어지시고 있다. -- 그는 어느 나라나 국가, 그리고 어느 언어를 가지고 있든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용서를 하나님에게 구하고 있다. 율법의 제사는 이스라엘의 조에 대한 이스라엘만의 보상이지만, 하나님의 어린양은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화해 제물이다(요일 2:2 참조). ::: 이것은 우리들의 신앙에 용기를 준다. 만일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짊어지신다면, 나의 죄를 짊어지시지 않겠는가? 그리스도는 자기 능력을 죄가 범람하는 중심 부분에 거누고서, 그 뿌리를 꺾으시며, "온 세상에" 편만한 "사악함"을 물리치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화해하셨다.

③ 그는 "죄를 친히 담당하신다." -- 그는 "세상 죄를 담당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난외에는 그런 뜻으로 되어 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죄를 담당하였다." 따라서 "우리에게서" 죄를 가져간다. 희생 염소가 자기 머리에 이스라엘의 죄를 담당하듯이(레 16:21),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지셨다." ::: 하나님은 엣 세상의 죄를 제거하셨던 식으로, 역시 죄인을 제거시킴으로써 죄를 제거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없애는 방법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죄"를 자기 아들에게 부담시킴으로써 죄인들을 살려두시고 계신다.

3) 믿음의 눈으로, 세상 죄를 담당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 죄를 담당하는 그리스도를 보면 죄를 미워하게 되고, 죄에 대항하는 새로운 결심이 일어나게 된다. 하나님의 어린양이 친히 죄를 제거하러 오셨으니, 이제는 죄인 스스로 죄를 제거하려는 그런 목적의 금식에 매달리지 말자. 그는 우리의 죄나 죄로 물든 우리 자신을 친히 제거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죄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신"(계 1:5)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도록 하자.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무엇을 제거한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우리의 죄가 사라진다면 우리는 거기에 감사해야지 불평할 이유가 없다.

2. 요한이 전에 말했던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30,31절). 

...요한은 예수께서 서 계신 곳을 가리키면서, "내 뒤에 오신다고 했던 사람이 이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1) 요한은 가장 영예로운 예언자였다. 

...많은 예언자들은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말했지만, 요한은 이미 그분이 오신 것을 알았다. "이 사람이 그다." "지금" 내가 그를 보며, "가까이서" 보았다(민 24:17). 현재의 믿음과 장차의 기다림과는 차이가 있다. 현재 우리는 보지 않은 사람을 사랑한다. 그러나 장차에는 우리의 영혼이 사랑하는 그분을 볼 것이며, 그분과 이야기할 것이다. 내가 말하던 사람, "나의 그리스도," "나의 전부," "내가 사랑하는 이," "내 친구"가 이 사람이다.

(2) 요한은 그리스도를 "사람"이라 했다. 

...자기 뒤에 "한 사람이" 올 것이라 했다. 곧 "강한 사람," "남자"다운 사람, "하나님의 오른 팔과 같은 사람"이다.

(3) 그는 자기가 전에 말한 것을 인용한다. "내가 말했던 그가 이 사람이다." 

... 그리스도의 가장 고귀한 점을 이야기했던 사람들은 그것들을 철회해야 될 이유를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그만큼 그를 더 존경하게 된다. 요한은 여전히 자신을 비천하게 여기고 그리스도를 높이고 있다. 그리스도가 어떤 외적인 화려함이나 위엄스런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요한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내가 말한 그가 이분이며, 나 이전에 택함을 받았다"라고 담대히 말했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그를 말하지 않았던들 지금까지 요한이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하던 그가 이렇게 매우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4) 그는 이러한 예수와 어떤 사건의 공모나 동맹이 없었다고 했다. "나는 그를 모른다." 

... 비록 서로(엘리사벳은 동정녀 마리아와 사촌간이다) 어떤 인척 관계는 있다 하더라도, 서로 사이에는 전혀 친분이 없었다. 즉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오는 것을 볼 때까지는 예수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다. 서로의 삶의 양식이 달랐다. 즉 요한은 대부분을 광야에서 그리고 고적한 데서 보냈으며, 예수는 나사렛에서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지냈다. 그들 서로간에 연락이나 대화가 전혀 없었다. 이것은 서로간의 개인적 어떤, 계획이나 모의에 의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늘의 지시나 처분에 따라 진행되었을 것이다. ::: 여기서 요한은 모든 공모의 관련성을 부인할 뿐 아니라, 일체의 편파성도 부정한다. 그는 예수를 친구로서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서로 사이에 우정이나 친밀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요한에게 낯선 사람이기 때문에 편견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예수가 정말 낯선 사람이기 때문에 "하늘에서 주신" 바가 아니면 그에 대해서 어떠한 일도 알 수 없을 것이다(3:27).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 그들이 보지 못했던 사람을 "믿고" 고백하는 자는 복이 있다.

(5) 요한의 전도와 세례의 중요한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 그는 자기가 주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그를 드러내려 함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여기서 다음을 주목하자.

① 예수를 만나 본 일이 없었지만, 요한은 그를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 하늘의 즐거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분명히 알려지리라는 사실만은 알 수 있다.

② 요한은 세부적인 것에 대해서 아직도 미궁에 있지만, 그리스도임을 나타내야 한다는 일반적인 확신만을 가지고도 결의를 가지고 일을 수행했다. -- 보이지 않는 일의 실재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우리는 의무를 능히 이행할 수 있다.

③ 하나님은 점차적으로 자기 백성에게 자신을 드러낸다. -- 처음에는, 요한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가 분명하게 드러내리라는 사실밖에 몰랐다. 그런 확신으로 세례를 주었다. 그런데 그가 그를 보게 되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보지 않는 것을 멀지 않아서 보게 될 것이다.

④ 말씀과 규례(의식)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해서 보다 분명하게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는 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다.

⑤ 물로 주는 세례가 우리의 부패와 타락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길목이 된다.

3. 이는 "성령이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임하신" 그 사람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증언을 확실케 하기 위하여, 그는 세례에서 나타나는 이상한 현상을 하나님이 그리스도 사명의 놀랄 만한 증거가 되었다. 이제 그것을 더 살펴보자.

(1) 세례 요한은 비둘기같이 임하는 성령의 증거를 보았다. 그는 "기록을 가졌다." 

...그 사실을 하나의 이야기처럼 말한 것이 아니라, 열정과 단호함을 가지고 아주 확고하게 목격자로서 증거하고 있다. 그는 이 사실을 맹세했다. 즉 "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성령을 보았다." 요한은 직접 성령을 표상하는 비둘기를 보았다. 이제 그 성령이 그리스도에게 머물러, 그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 그리스도는 왕관이 내려졌거나 그의 형체가 변화됨으로써가 아니라 비둘기 같은 성령이 내려옴으로써 세상 죄를 지고 갈 분 임이 알려 지셨다. 이와 같이 제자들의 첫 증언도 성령이 임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은혜"에 의해서 드러난다. 하나님 자녀로서 영광은 장차 주어지게 된다. 여기서 다음을 주목하자.

① 성령이 "하늘로부터" 내려 왔다. -- 선하고 완전한 선물은 모두 "하늘에서" 온다

② "비둘기같이" 임했다. -- 순종과 온화함, 그리고 온순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가 "가르치기에 적합함"을 나타낸다. 또 비둘기는 평화를 나타내는 감람나무 잎사귀를 가져 왔다.(창 8:11).

③ 예언된 것처럼 그리스도에게 임한 성령은 "그에게 남아 있다"(사 11:2). -- 성령은 그에게 삼손처럼 때때로가 아니고(삿 13:25) "내내" 계신다. 그에게는 성령이 "측량할 수 없도록" 주어졌다. 즉 그에게는 항상 성령이 계셔서, 어느 때고 일할 수 있었다.

(2) 요한은 증거를 아주 확실하게 해야 했다. 

... 요한은 그가 하나님의 다들이란 사실을 예측에서가 아니고 순전히 임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알았다. 그것은 "지정된" 약속이었다. "나는 그를 몰랐으나 전에 나에게 말씀하신 그가 표적이 나타나면 그리스도인 줄을 알라고 했다"(33절). 그는 이 계시가 없었더라면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몰랐을 것이다.

① 요한이 전도하며 세례를 베풀었던 확신의 근거들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최대의 만족으로써 증거 할 수 있었다.

...첫째, 그는 "보냄이 없이는" 전하지 않았다. 즉 하나님이 "세례를 베풀도록 그를 보냈다." 그는 자기가 정했던 것을 하늘로부터 보장받았다. 사역자로서의 부름이 명백하면 때때로 그의 사역이 성공치 못하더라도 확실한 위로가 있다.

...둘째, "시급함이 없이는" 전하지 않았다. 그가 "물로써 세례를" 주도록 보냄을 받았을 때,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줄" 사람을 지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러한 의향에서, 세례 요한은 우리에게 회개와 믿음을 주고 그를 기초로 해서 건물을 짓고 완성시킬 수 있는 그리스도를 영접토록 가르쳤다. ::: 밖으로 드러난 표적들이 봉사를 통해서 생명과 능력으로 나타난다. 사역자들은 귀에 말하지 말고 마음에다 말하라. 그러면 마른 뼈들이 생기를 얻을 것이다.

② 그가 메시야란 인물을 말하는데 사용한 말의 확실한 근거를 알아보자. 

... 하나님이 사울에 관해서 사무엘에게 지적했듯이 요한에게 전에 한 표적을 주었다. "성령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거든, 그 사람이 그다." 이 말은 어떠한 잘못도 예방할 뿐만 아니라 담대하게 증언토록 했다. 이러한 말이 요한에게 주어짐으로써 담대하게 되었을 때는 기대가 매우 컸었다. 그래서 그 예언이 정확하게 사건으로 나타났을 때, 그의 믿음은 그만큼 더 확고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을 우리로 믿도록 하기 위해 기록되어졌다.

4.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말이 요한의 증언의 결론이 되었다.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도다"(33절).

(1) 외쳐진 진리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하늘의 소리가 들리어 요한이 기록했는데, 그는 신의 능력을 가지고 성령으로 세례를 줄뿐만 아니라 신의 본성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마 16:16). 이것은 사도신경의 한 내용인데, 여기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2) 요한의 증거를 보자. "내가 보고 증거 하였다. 내가 지금 그 사실을 증거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보는 순간에 증거 했었다(기록했다)."

① 그는 증거 할 것을 보았다. -- "우리는 보고들을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20).

② 그는 본 것을 증거 했다. --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은 목격자들의 증언이다. 그래서 그만큼 더 신빙성이 있었다. "너희에게 전하려는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 1:16).

Ⅱ. 그 다음날에 그리스도에게 대해 요한이 한 증거가 있다(35,36절).

1. 요한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려고 모든 기회를 이용했다. 

... 요한은 무리로부터 떨어져 자기의 두 제자와 함께 서서 이야기하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았으나, 직접 그에게로 가지는 아니했다. ... 그것은 자기가 예수와 모의하고 있다는 최소한의 의심도 사람들에게 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즉 침착하게 그러면서 계속 눈길을 떼지 않았다.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려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때때로 그리고 부지런히 그리스도를 심사숙고해야 한다. ...요한은 전에 그리스도를 보았지만 지금은 그를 "주목"하고 있다(요일 1:1).

2. 그는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의 증언을 전날과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다. ... 그의 증언은 한결같고 계속적이며 모순이 없었다. 그의 말은 바울처럼 공과 사가 일치되었다(행 20:20, 21). ::: 사람들에게 들은 것을 반복하는게 좋다(빌 3:1). 훌륭한 사역자들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의 속죄 교훈을 특히 강조해야 한다. 특히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강조해야 한다.

3. 그는 자기와 같이 서 있던 두 제자들에게 이 교리를 특별히 주지시키고 있었다. ... 그는 기꺼이 자기 제자들을 그리스도에게 가도록 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자기 두 제자에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둘은 자기 두 제자를 그리스도에게 보내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 요한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제자들을 택했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위해서 제자들을 택했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섬기도록 했다(눅 1:17). 그는 그리스도의 세력이 점점 더 커지는 것 이외는 바라는 것이 없었다. -- 겸손하고 관용성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기꺼이 낮추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의 장점들을 주려고 한다.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진 명성이란 자기 자신을 다 내 주도록 헌신한다고 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5제자들 :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와 도마(요한?) ==>베드로 , 빌립==>나다나엘(바돌로매)--------

안드레와 베드로(요 1:37-42)

여기서 우리는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에게로의 전향하는 것을 본다. 그들 중의 하나가 제 3일에 택해지며, 그래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첫 열매가 된다. 교회의 처음 시작이 얼마나 초라했는지 보라. 또한 위대한 일들의 새벽이 어떠했는지 보라.

Ⅰ. 세례 요한의 제자인 안드레와 또 한 제자가 그리스도를 좇았다(37절). 

... 다른 한 제자는 이름이 나와 있지 않는데 21장 2절과 비교할 때 아마 도마인 것으로 보인다. 또 어떤 사람은 요한 자신으로 본다. 그는 이 복음서의 기록자이며, 그이 태도로 보아 자기의 이름을 굳이 밝히지 않는 것 같다(13:23; 20:3).

1. 그리스도를 좇는 두 제자의 즉각적인 태도를 보자. 

... 그들은 "요한에게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린양이란 사실을 듣고서" "예수를 좇았다." 아마도 그들은 그 전날도 같은 소리를 요한에게서 들었으나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그 다음날 예수를 좇은 것을 보면, 거기에는 같은 내용의 반복과 서적으로 개인적인 대화가 영향을 준 것 같다. 즉 요한으로부터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이야기로써 이 대화가 그리스도를 좇게 만들었을 것이다. ::: 현명하고 깨우치게 하는 정신으로 예수를 따르게 하는 가장 강하고 거의 사로잡을 듯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요한이지만, 예수만이 죄를 짊어지신다.

2. 친절하고 세심한 그리스도가 그들을 보았다(38절). 

...그들이 그의 뒤를 좇았을 때, 그는 그들을 알아보고 돌이켜 좇아오는 그들을 보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리스도는 자기에게로 오는 사람의 첫 행동과 하늘의 길을 걷는 첫 걸음을 먼저 알고 계신다는 점이다(사 64:5; 눅 15:20 참조). 그는 그들에게 지체하지 않고 먼저 이야기했다. 한 인간과 그리스도와의 사귐이란 이런 과정을 말한다. 시작하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그가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이런 질문은 자기에게 오는 사람의 대담함을 책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찾으러 오신 그리스도는 자기를 찾으러 온 어떤 사람을 책하려 하는게 아니라 반대로 수줍어하고 겸손해 하는 그들을 영접해서 자기의 친구로 삼으려는 것이다. "와서, 나에게 말하려는 것이 무엇이냐? 너의 청원이 무엇이냐? 너의 요구가 무엇이냐?라고 말씀하신다. :::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역자들은 겸손하고 온화해야 하며, 사람들이 묻도록 용기를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이 제자들에게 한 질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좇아 그의 거룩한 종교를 전파하려 할 때에 자신들에게 물어야 한다. "무엇을 구하느냐? 우리가 계획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사람들은 아직도 세상을 구하거나 자기를 구하거나 혹은 자신을 속이고 인간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찾고 있는 우리는 무엇을 구하는가? 선생, 통치자 혹은 화해자인가?" 만약 이 때의 우리 눈이 정직하다면 우리는 빛으로 충만하게 된다.

3. 그의 거처에 대한 그들의 가장 겸손한 물음을 보자. "랍비여 어디 계십니까?"

(1) 그를 "랍비"라 부름으로써, 그에게 가르침을 받겠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 여기서 랍비란 뜻은 선생 즉 가르치는 선생을 말한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박사들 혹은 학자들을 랍비라고 부른다. 그에게 있어서 랍비란 말은, 선생, 위대한 사람 등등 많은 뜻을 가진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랍비는 결코 그런 뜻이 아니라, 지혜와 지식의 원천으로써의 랍비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를 따른 이 둘이 그의 제자가 된 것처럼, 그를 따르려는 사람들은 그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요한은 이 두 제자에게 소개한 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자 랍비로서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다(계 5:9). ::: 우리가 그들에게 통치되고 가르침을 받는데 우리 자신을 맡기지 않는 한, 그는 우리의 죄들을 짊어지지 않을 것이다.

(2) 그의 거처를 묻는다는 것은 그와 더 친히 지기를 바라는 암시가 있다. 

...그리스도는 이 지방에서 하나의 낯선 사람이었으므로, 그들은 그가 기거하는 숙소를 알고 싶어했다. 그래서 가르침을 받고자 그가 정하는 알맞은 시간과 장소에 가려는 것이었다. 즉 알맞은 시기에 찾아가려는 것이다. --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들은 정중함과 좋은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또 한편으로 그들은 그와의 간단한 이야기보다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요했다. 그리스도와 어떤 친분을 가지려는 사람들은 부업이 아니라 주요 사업처럼 생각하고 나아가야 한다.

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그를 더 알려" 할 수밖에 없다.

② 그와의 "확고한 교제"를 원한다. -- 그들은 그의 곁에 앉아서 그의 교훈을 들으려 했다. 그는 그들에게 "와서 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향하는 좋은 바람이며, 그와의 친교를 장려하는 말이다.

(1) 그는 자기 처소로 그들을 초대한다. --우리가 그에게 더 가까이 접근할수록 그의 아름다움과 우월성을 볼 수 있다. 사기꾼들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멀리함으로 자기 세력을 유지하나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자기의 존경과 매력을 맡기고, "내가 거하는 초라한 숙소를 와서 보라.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에게 아부하여 그들을 랍비라고 부르는 자들처럼 그런 기대를 가지고 오지는 말라. 나를 따르려면 어떤 것을 생각해야 되는지 와서 보라"(마 8:20 참조)고 말씀하셨다.

(2) 그는 이 제자들에게 "즉시" 오라고 했다. -- 그들은 좀더 좋은 때에 그를 시중들려고 그의 거처를 물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즉시 와서 보라, 지금보다 더 나은 때가 결코 없다"고 말했다.

①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도 배우자.--사람들이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그들을 택하는 것이 최선이다. 즉 쇠는 달았을 때 쳐야 한다.

② 우리 자신에게 대해서도 배우자. -- 현재의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 현명하다. "보라, 지금이 은혜받을 때요, 구원의 날이다."(고후 6:2).

5. 기쁘고 감사에 넘쳐 그들이 초대를 수락했다. "그들은 그가 거처하는 곳을 가서 보았고," "그날을 그와 함께 거했다."

(1) 그들은 즉시 그와 동행해, "그의 거처를 가서 보았다." --은혜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은혜스러운 초청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즉 다윗처럼 한다(시 27:8). 그들은 그와 어떻게 기거할지를 묻지 않고 되어가는 대로했을 것이며, 그들이 알고 있는 최대로 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거처하고 있는 곳은 어디나 좋다.

(2) 그들은 "그 날을 그와 같이 기거한다"는 것을 매우 기뻐했다("주님, 여기가 좋사옵니다"). -- 그리고 그는 환영했다. 이 때가 제10시경이었다. 

흑자는 요한이 로마의 계산에 따라서 그 때를 아침 10시로 모았으며, 그들은 그와 밤까지 머물렀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유대인의 계산에 따라서 말한 것으로 보고, 그 때가 오후 4시이며, 그들이 그날 밤부터 다음날까지 기거했다고 말한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보낸 그 다음 날이 안식일이며, 안식일 전날에는 집에 갈 수 없으므로 지체하고 있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에, 우리의 영적인 이익과 도움이 되는 만큼 우리는 안식일을 어떻게 해서든 지켜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살아있는 신앙, 사랑, 헌신의 활동으로 그리스도와 친교 하는 그들의 안식일을 보낸 축복 받은 자들이다. 참으로 안식일은 "인자(人子)의 날," 즉 주의 날이다.

Ⅱ. 안드레는 그의 형제 베드로를 예수에게 데려 갔다. 

...만일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처음이라면 카토릭 교도들은 그 사실에 대하여 소란을 피웠을 것이다. 베드로는 참으로 은혜 안에서 후에 더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안드레가 먼저 그리스도와 친분을 가지는 영예를 획득했으며, 베드로를 그리스도에게 데려 가는 도구 역할을 했다.

1. 안드레게 베드로에게 준 "정보"를 보자.

(1) 안드레가 베드로를 "찾았다." 

..."안드레가 먼저 그의 형제 시몬 베드로를 찾았다." 즉 베드로를 두루 찾았다. 시몬은 안드레와 함께 요한의 설교와 세례에 따라 다녔으므로 안드레는 시몬을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알고 있었다. 아마도 안드레와 함께 있었던 다른 제자들은 같은 시간에 그의 친구를 찾으러 밖에 나갔을 것이다. 안드레는 "먼저" 요한을 만나려고 왔던 시몬을 만났으나, 그의 기대는 예수를 만나는 것이었다.

(2) 안드레는 자기들의 경험을 시몬에게 말했다. "우리는 메시야를 보았다." 다음을 주시하자.

① 안드레는 겸손하게도, 그리스도를 만난 영광을 자랑하지 않고 "내가 그분을 찾았다"가 아니라, "우리가 같이 그분을 찾았다"라고 말했다.

② 안드레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말한다. -- 우리는 가치가 있는 진주와 참다운 보물을 찾았다. 그래서 그는 마치 문둥이들이 외치듯이(왕하 7:9)외쳤다.

③ 안드레는 알아듣기 쉽게 말하고 있다. -- 우리는 메시야를 만났고, 그분은 이제까지 들은 그 이상의 사람이다. 요한은 "그가 하나님의 어린양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했다. 안드레는 그 말을 구약 성서와 비교하면서, 그분은 때가 찼기 때문에 온 아버지께서 보내라고 약속하신 그 메시야이다라고 단정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안드레는 "하나님의 증거를 명상함으로써," 이제까지 "그의 선생"인 요한이 말한 것보다 더 확실하게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시 119:99).

(3) 안드레는 "시몬을 예수에게 데려갔다." -- 안드레는 자신이 설명하지 않고, 근원이신 예수에게로 데려가 그를 소개했다.

① "자기" 형제를 진실로 사랑한 하나의 모범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친척들에게 영적인 행복을 찾아 주려는 특별한 관심을 경주해야 됨을 배운다. 우리와 그들의 관계가 그들의 영혼이 잘 될 수 있는 기회를 보태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② 그것은 안드레가 그날 그리스도와 대화한 결과이다. 은혜로써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최선의 증거는 앞으로 우리의 생활이 거룩해지고 유용성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안드레는 "예수와 함께 있었고," 그래서 그의 얼굴이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충만한 것을 알았다. 은혜를 맛보면서 그는 자기의 형제들도 같이 맛볼 수 있을 때까지는 편안할 수가 없었다. "참다운 은혜는 독점을 싫어하며 한 조각이지만 혼자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한다."

2. 예수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준 "환대"를 보자. 그의 형제 안드레의 권유로 온 베드로를 예수는 환영했다(42절).

(1) 그리스도가 베드로의 이름을 불렀다. -- "예수가 베드로를 보고, 말하기를 네가 요나의 아들 시몬이로다 하니라."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몰랐을 것이 분명하다.

① 그렇다면 첫 눈에 어떤 물음도 없이 그리스도가 그의 이름과 그의 아버지 이름을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전능함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 "주님은 자기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처지를 알고 계신다."

② 그러나 시몬은 보잘 것 없는 하찮은 사람인데도 그리스도가 꾸밈없고 친절하게 그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하강적인 은혜와 호의의 한 예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 하나님이 모세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호의를 나타내는 한 예이다(출 33:17) ....혹자는 이름의 특징을 주목한다. "시몬"은 "복종적"이란 뜻이요, "요나"는 "비둘기"란 뜻이다. 비둘기같이 복종적인 정신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데 필요한 자질이다.

(2) 그는 베드로에게 "게바"라는 이름을 주었다.

① 이름을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총애"를 뜻하는 것이다. 또 새 이름은 어떤 관작을 나타내기도 한다(계 2:17; 사 62:2). -- 이러한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리스도는 그의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가문의 수치를 씻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제자로 택하셨다.

②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뜻하는 이름이다. "너를 게바(번역하면 반석)라 하리라." -- 베드로는 천성이 딱딱하고 완고하고, 그리고 단호했던 것이 그리스도가 그를 "게바"(반석)라 부른 까닭은 나중에 경험할 바 (주를 부인함의) 중요한 실패를 겪지 않도록 하려 함과 동시에 그런 실패를 맛보았다 해도 오히려 돌이켜서 굳게 주님을 붙들어 믿음을 확고히 하며, 동시에 그의 "형제들에게 힘을 주고 지지하며," 다른 형제들에게 도움이 됨으로써 참으로 "게바"(반석)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에게 오는 사람들은 주님께 융합되어 하나의 반석처럼 단단히 그리고 천천히 그러면서도 확고하게 결합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되어질 수 있다. "한결같이 굳세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를 반석처럼 만들 것이다...이것은 베드로가 (카톨릭에서 주장하듯)곧 교회의 유일무이한 기초라는 뜻이 아님에 주의하라...야고보와 요한은 일명 보아너게=우뢰의 아들들,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 불렸지만 그들이 그 이름으로 불리는 유일한 사람이 아닌 것을 잊지 말라.

--------

빌립과 나다나엘(요 1:43-51)

우리는 이 대목에서 빌립과 나다나엘의 소명을 볼 수 있다.

Ⅰ. 그리스도에 의한 부름에 즉시 응하는 빌립. ...*43.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는 안드레처럼 요한이나 베드로에 의해서 그리스도에게 인도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직접적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해서 선택한 사람들을 부르신다. 그러나 그 방법이 다양하지만, 그 방법에 얽매이지 않는다.

1. 빌립은 예수께서 먼저 발견하고 불렀다. 

...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찾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는 우리들을 찾으셨다. "빌립(원뜻 : 말을 좋아하는 자)"이란 이름은 원래 희랍말이며, 이방인들 사이에서 많이 상용되었는데, 이 때의 유대 교회는 쇠퇴되어 이방인들과 닮아가는 중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의 이름을 바꾸도록 하지 않았다.

2. 그는 "다음 날" 부름 받았다. 

... 그리스도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시는지를 보라. 하나님을 위해 일할 때는 한 날도 낭비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성령을 받기 전에는 하루에 한 두 사람씩을 불렀으나 성령을 받은 후에는 실제로 하루에 수천 사람들을 불러서 일을 성취시키신다(14:12).

3. 예수가 (주도적으로 친히 빌립을 찾아 부르려고 !!) "갈릴리로 가시고자 하셨다."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은 누구나 어느 곳에 있든지 찾으시며, 잃지 않는다.

4. 빌립은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수반된 그리스도의 권능에 의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다. -- 진실한 기독교인의 태도를 보라. 이 태도란 "그리스도를 따르고," 자기 자신을 그의 말씀과 행동에 복종시키며, 그의 전도에 참여하고, 그가 가는 길에 뒤따라 가는 것이다. 또 말씀을 실행되게 하는 은혜의 효능을 보라. 그것은 "그의 권능의 자랑이다."

5.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다(44절). -- 이런 훌륭한 제자들이 고향 벳새다에서 존경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 동네에 영광을 주었다. 벳새다는 "그물의 집"을 뜻하는데, 대부분 어부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택했으며, 그들은 특별한 은사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학식은 특별히 필요치 않게 되었다. 벳세다는 사악한 장소로서(마 11:21), 아직도 남아 있음은 은총에 의하여서이다.

Ⅱ. 나다나엘은 빌립에 의하여 그리스도에게 인도되었다. 그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있다.

1. 흔히 초심자들에게 볼 수 있듯이 연약하나 경건한 열성을 나타내는 빌립과 나다나엘을 관통하는 것은 단지 "시온으로 가는 길을 묻는 물음"이다.

(1)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준 기쁜 소식을 보자(45절), ...*45.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 전에 안드레처럼 빌립도 그리스도에 관한 어떤 지식을 가지고서 그가 구세주라는 사실을 분명히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빌립은 비록 그리스도와는 처음 사귀지만 나다나엘을 인도하려고 하였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는 최선의 기회가 주어졌을 떼에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는 것이다(행 20:35). 우리도 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야 한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만났다"(45절). 여기서 주목해 보자.

① 빌립이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사귐에서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가? "우리가 자주 이야기했고 오랫동안 바랬고, 기다렸던 그이가 결국에는 왔고, 우리가 그를 발견하고 찾았도다!"

② 빌립이 구약 성서를 잘 알고 있어서, 복음의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그래서 더 쉽게 이해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유익이 되었던가! "모세와 예언자들이 기록했던 그를" 그는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구약 성서에 기록된 사실은 부분적이고 몇 번에 걸쳐서, "거국한 계시들"의 책에서 베껴 쓴 것이다. 거기에는 여인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 실로, 모세와 같은 예언자, 다윗의 자손, 임마누엘, 인자(人子)순, 메시야, 왕 등으로 그에 관해 영광스럽게 기록되어 있다. 빌립은 이러한 사실들을 잘 알았기 때문에 즉시 그리스도로 영접했다.

③ 빌립이 범한 실수와 약점을 보자. -- 그는 그리스도를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다. 그러나 실상 그는 "베들레헴" 출신이었다. 그리고 "요셉의 아들"이라 했다. 그러나 단지 그렇게 추정될 뿐이었다. 초심자들은 오류를 범하기가 쉽다. 그러나 그것을 분명히 하는 말도 잘못이다. 사실은 그들이 찾기 전에 그리스도가 먼저 그들을 찾았기 때문이다. 빌립은 아직도 바울처럼,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을 (빌 3:12) 알지 못했다.

(2) 이에 반대한 나다나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절)

① 그의 "신중"은 칭찬할 만하다. -- 그는 듣은 것들을 가벼이 수락하지 않고 일단 시험해 본다. 속담에 "돌다리도 두들겨 보라"는 말이 있다.

② 그러나 그의 이의제기는 주님에 대한 무지에서 발생했다. -- 만일 그가 나사렛에서는 어떤 선한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면, 그것은 신의 은총에 대한 그의 무지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장소의 우열이나 또는 사람 자신의 어리석음과 심술궂은 관찰에 기인함과 같다. 만일 메시야 즉 위대한 일이 나사렛에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면 이제까지의 그의 생각은 옳다(율법에서 모세의 기록을 보면, 메시야는 유대에서 나올 것이며, 예언자들은 그가 태어날 장소를 베들레헴으로 정했다). 그러나 이때의 나다나엘은 이 "사실"을 몰랐다. 이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를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분에게로 데려 가게 되는 실수가 벌어졌다. -- 여기서 주의할 점은 가르치는 자의 실수가 가끔 듣는 자에게 편견을 줄 수가 있다는 점이다.

(3) 나다나엘의 이의에 대한 빌립의 간단한 대답은 "와서 보라"이다.

① 그가 만족할 만한 대답을 주지 못한 것은 그의 "연약함" 때문이다. -- 그러나 그것은 초심자에게 있어서는 흔한 경우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만족시키는 방법은 잘 알고 있지만, 만만찮은 상대의 트집을 침묵시키는 방법에는 자신 있다고 말할 수가 없다.

② 그가 직접 그 이의에 답할 수 없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것, "와서 보라"하고 대답한 것은 그의 "지혜"와 열성이었다. -- 더 이상 논의해도 해결할 수 없는 것과 싸우지 말자. 우리가 가서 그리스도와 이야기하면 이런 어려움 모두가 즉시 사라질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의심스러운 논쟁으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어리석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보다 나은 시간 활용과 보다 좋은 목적을 위해서는 경건과 헌신의 훈련이 필요하다. "와서 보라." "가서 보라"는 것이 아니다. "오라. 그러면 내가 함께 가겠다"이다(사 2:3 참조). 빌립과 나다나엘의 이러한 대화에서

첫째,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사건의 시비곡직에는 전혀 관계없이 어떤 이국적인 분위기 때문에 종교를 적대시하는 불합리한 편견에 사로잡혀서 신앙의 길을 떠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둘째, 무조건 종교를 적대시하는 자들의 편견을 제거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직접 시험해서 시비를 가리게 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기 전에 미리 대답을 하지 말자.

2. 나다나엘과 우리 주 예수 사이에 되어진 일을 보자. 나다나엘은 와서 "보았으며," 그러한 행동이 무익하지가 않았다.

(1) 우리 주 예수는 나다나엘의 순전성을 영예롭게 증언하셨다. 

...예수는 그가 오는 것을 보시고 호의 있는 태도로 그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를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라고 하셨다.

① 그를 "칭찬했다." -- 예수의 칭찬은 아첨이나 자신이 선한 호의를 과시하는 게 아니고, "겸손한" 사람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생각이 좁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은 나다나엘의 진실함을 의심했을 것이다. 이런 태도에서 그리스도를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나다나엘은 어떤 사람보다도 그리스도를 반대했지만, 여기서 그리스도는 그를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갈릴리의 이름 없는 한 마을, "가나에서 어떤 선한 일이 날 수 있겠는가?"(21:2) 그러나 예수는 빌립을 논박하지 않았다. 그는 나다나엘에게 호의를 보이셨다. ::: 이것은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할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용기를 주며, 또한 무조건 우리에게 하찮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위엄 있게 말하도록 우리를 가르치시며, 또 그들에게 적당한 칭찬을 하도록 해 주신다.

② 그의 "순전함"에 대한 그리스도의 칭찬을 보자.

첫째,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 사람의 참됨을 아는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우리는 "최상을 바랄" 뿐이다. 명목상으로는 그 민족 전체가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서 난 사람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롬 9:6),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있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이다. ...에서의 교활성에 반(反)하여, 나다나엘의 순전함을 가진 사람이 이스라엘의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는 그의 혈통과 정신에 있어서도 야곱의 참 자손이 되어진다.

-- 이스라엘 신앙의 진실한 고백자라야 한다. 그가 고백하는 종교에 신실하며 그렇게 살아 왔다. 즉 그는 정말 선하게 보였으며, 그의 행위는 평화에서 나왔다. 그는 "내면적으로도" 유대인(롬 2:29)인 진정한 유대인이다. 그래서 역시 기독교인이기도 한다.

둘째, 그는 "간사함이 없는," 즉 참 이스라엘의 특성을 지녔다. 

-- 참 기독교인의 한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에게 간사함이 없는 사람으로 속임이나 음모가 없는 진실한 사람이며, 또 하나님에게 간사함이 없음이란, 자기의 죄를 진정으로 통회함과, 하나님과 진실한 계약을 맺음이며, 마음에 "간사가 없음"(시 32:2)을 뜻한다. 이는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간사함"이 없다는 것이다. 비록 그가 여러 가지 일에 있어서 어리석고 미련할지 모르지만, 잘못함이 없으며, 하나님을 멀리하는 부도덕함이 없다. 즉 그에게도 비록 결점은 있지만, 범죄라 인정할 만한 사실은 없었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면, 우리들은 그의 가르침을 알게 되고, 그를 정말 좋아하게 된다." "그를 찬양하라. 즉 바라 보라. 그러면 놀라게 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으로 유대 교회와 유대인들이 물이 들어, 그들의 종교가 타락되어 형식화 되거나 국가 정책화되었다. 그러나 참 이스라엘인은 욥처럼(욥 1:8), 신의 은혜에 놀라와 "경외하는 자"이다.

(2) 나다나엘은 자기가 이전에 행했던 신앙 생활을 그리스도가 아심으로 인해서 그의 전능함에 매우 놀랐다.

① 여기에서 나다나엘의 겸손이 나타난다. -- 즉 그는 그리스도의 세심한 주의에 당황했는데 이 당황에서 그리스도는 그를 기꺼이 맞아 들였다. "나같이 무가치한 자를 어찌 아십니까? 주 여호와여, 내가 무엇입니까?"(삼하 7:8) 이 태도가 그의 진실함을 나타내는 하나의 증거이다. 그는 그가 접한 놀라운 사실은 알지 못했지만, 그 놀라움에 빠져 들어 갔다. 그리스도는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를 잘 안다. 사람들은 표정을 보고서 사람들의 현재의 마음을 알 수 없지만, 그리스도 앞에서는 모든 것들이 드러내지고 열려진다(히 4:12, 13). 그리스도가 우리를 알고 있는가? 이제 그리스도를 알아보자.

②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그에게 좀 더 "나타내셨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내가 너를 보았다."

첫째, 그리스도는 자기가 그를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줌으로써, 자기의 신성을 드러내고 있다. -- 사람과 더불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런 능력을 가지시고 그리스도는 여러 경우에 자기 자신이 하나님임을 나타내신다. 메시야에 관해서는, 그가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한채 아니하고" "공의와 정직으로 판단하신다"(사 11:2, 3)고 예언되어 있었다. 이 예언이 여기서 했다(딤후 2:19 을 참조).

둘째, 빌립이 그를 부르기 전에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 -- 이런 말은 그의 특별한 친절을 표시하고 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기 이전에, 그리스도가 먼저 나다나엘을 주목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점을 알기 전에 먼저 그가 사람들을 알고 계신다(사 45:4; 갈 4:9 참조). ::: 나다나엘이 ((명상괴 기도, 교제가운데서 주님께 무엇인가 말씀드리기 위해 특별히))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어떤 사람도 너를 볼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 때 너를 보고 있었다." 들에서 이삭이 명상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처럼 무화과나무 아래서 나다나엘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즉 어쩌면 그 장소에서 그는 주님과 깨뜨릴 수 없는 계약을 맺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은밀히 보고 그의 행위에 따라서 그에게 공개적으로 보답했다.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있다"는 것은 정신의 "안정과 침착을 나타내며,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더 가까워질 수 있다(미 4:4; 슥 3:10 참고). 이 점에서 나다나엘은 참 이스라엘인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처럼 하나님하고 씨름했으며(창 32:24), 위선자처럼 거리의 모퉁이에서 기도하지 아니하고 무화과나무 아래서 기도했다.

(3) 나다나엘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충만한 확증을 얻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는 고백에 나타나 있다(49절). 즉 간단히 말하면 당신이 정말 메시야입니다라는 뜻이다.

① 확고한 마음으로 믿는 그의 신앙을 보라. -- 비록 그가 그리스도에 대한 몇 가지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모든 편견들이 사라졌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살아 있는 신앙 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편견들이 사라진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가 바로 으뜸 선이며, 따라서 그 예수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② 아주 "꺼리낌 없는" 그의 고백을 보라. -- 그의 고백은 우리 주 예수에 대한 경모의 형식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다.

... 첫째, 그는 그리스도를 "랍비"라 부름으로써,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직능을 고백했다. 이 랍비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흔히 가르치는 자들에게 부여하는 이름이다. 그리스도는 위대한 랍비로서,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 둘째, 그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시 2:7 에서 일컬어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으로써 그의 신성과 사명을 인정하고 있다. 비록 그가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지만 신의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나다니엘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있었다.

... 세째, 그는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시며, 그 왕을 우리들은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습니다"고 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다. 여기서 나다나엘은 자신이 이스라엘 왕을 즉시 받아들여서 그에게 복종하는 참 이스라엘인임을 증명하고 있다.

(4) 그리스도는 나다나엘의 희망과 기대를 보다 큰 어떤 것으로 들어올리신다(50,51절). 

....그리스도는 개심자(改心者)에게 매우 친절하셔서, 비록 그들이 약하지만, 그들의 선한 출발을 격려해 주신다(마 12:20).

① 그리스도는 나다나엘의 준비된 믿음을 보시고 그를 칭찬하신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고 해서 믿느냐?" 그리스도의 지혜에서 나타난 결과에 그는 감탄했다. 즉 이것은 나다나엘이 사전에 준비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에 대한 존경과 그의 은혜는, 그가 첫 설교를 듣고 마음이 사로잡혀졌음을 보아서 그만큼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② 그리스도는 그에게 더 위대한 증거를 약속했으며, 그가 처음에 가졌던 믿음을 더 굳게 가지도록 하셨다.

...첫째, 일반적인 것을 보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즉 내가 메시야임에 대한 더 확고한 증거들을 보리라." 이것은 그리스도의 기적으로, 그의 부활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지니고 있는 것을 선용하면 할수록 그에게 더 좋은 것이 주어지게 된다. 복음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은, 그 복음에 대한 증거를 더욱 알게 되며, 그 믿음에 대한 결과를 점점 더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발견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기꺼이 그의 백성이 된다는 것으로써, 세상에서 이름을 떨치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갖는 것이다. 즉 아직은 보이지 않는 영광을 갖는다는 것이다.

...둘째, 세부적으로 보자. "너만이 아니라 너희들, 제자들 모두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이 말은 무화과나무 밑에 앉아 있는 나다나엘에게만 말한 것이라고는 볼 수는 없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라"는 서두가 있는데, 이 말은 집중된 주의력과 의심할 바 없는 완전한 동의를 요구하고 있다. 비록 유대인들이 흔히 기도의 끝에 이 말을 사용하곤 하며, 또 때로는 두 변씩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리스도 이외는 어떤 사람도 이 말을 문장의 처음에 사용하지 않았다. 이 말은 하나의 엄숙한 단언이다. 그리스도는 "아멘"이시요(계 3:14), 여기서도 "나는 아멘이요, 아멘으로써" 너희에게 이른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나, 신실한 증인"으로서.......하는 식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의 말씀 의에 우리의 확신이 세워졌을 때 드러난다. 이제 그리스도가 확신하는 말을 살펴보면, 지금으로부터, 혹은 잠깐 동안, 혹은 멀지 않아, 혹은 장차, "너희들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a. 여기서 그리스도가 스스로를 "인자(人子)"라 지칭하고 있다. -- 이 지칭은 복음서에서 그리스도께서 흔히 자기를 지칭하는 칭호이다. 나다나엘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라 부르고 있지만, 그는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칭하고 있다.

(a) 그것은 존귀의 절정에서도 그가 지니는 "겸손"을 나타내며

(b) 그의 신성과 마찬가지로 "인간성"을 가르치고 있다.

(c) 현재의 그의 굴욕을 시사하는 것으로써, 나다나엘로 외적인 영화 속에 나타나는 이스라엘 왕을 기대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b. 그러나 그리스도가 예언한 것은 놀랄 만한 사건들이다. -- "너희들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a) 어떤 사람은 특별한 사건을 지적함으로써 글자 그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

[a]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시현(視現)을 말한다. -- 이 시현은 글자 그대로 이루어졌으며,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그리스도의 변화 산상의 모습을 보았듯이 나다나엘이 어떤 영광스런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20:30), 어째서 기록하지 않았을까?

[b] 우리 주 예수에 대한 천사들의 많은 수종으로 이루어졌는데, 특히 그의 승천시 하늘 문이 열리며,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그를 영접하고 그에게 영광을 베풀었으며, 이 광경을 제자들이 보았을 때이다. --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의 사명의 위대한 증거였으며, 제자들의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였다(6:62).

[c]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 때는 하늘이 열릴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볼 것이며,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를 호위하는 것처럼 오르락 내리락할 것이고 사람들은 기도하는 그 날이 올 것이다(살전 1:10 참조).

(b) 또 어떤 사람들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어떤 상태나 일련의 사건들을 말함으로써 비유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a] 나다나엘은 그리스도의 표적들을 믿는다. -- 그것은 옛 예언자들처럼 그리스도도 자기에게 비밀스러운 일들을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는 하늘이 열리는 것처럼 옛 예언자들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놀랄 만한 표적들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마치 탁월한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 그의 지시를 계속적으로 수행하는 것처럼 그러한 능력이 인자에 의해서 구사되어질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즉시 그리스도는 표적을 행하셨다.(2:11).

[b] 그의 중재로, 즉 하늘과 땅 사이를 왕래하시는 복된 교제를 통하여, 제자들은 점점 신비 속에 들어가게 된다.

첫째, 중재자인 그리스도에 의하여 제자들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복 것이며, 우리들은 그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히 10:19, 20). 하늘이 열린 것을 우리는 신앙으로 바라보고 결국에는 들어가서 주의 영광을 보며, 그의 기쁨에 참여하게 된다.

둘째, 제자들은 인자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천사들을 복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거룩한 천사들과 교제를 나누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하늘과 땅이 화해되고 함께 합쳐진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야곱의 사닥다리와 같다(창 28:12). 그로 말미암아 천사들은 계속 성도들 주의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

Bhqaniva(963, 베다니아) 베다니 Bethany.

베다니아는 베트 아니야(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들의 집, 아나냐의 집)를 의미하며, 한글 개역 성경에서 "베다니"라고 번역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의 동쪽 3㎞의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감람산의 동쪽 경사면에 자리 잡고 있다. 

오늘날에도 베다니에는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고 있으며, 그 주민은 약 1,000명 정도이다. '엘-이지리예'(el-Aziriyeh), 즉 나사로의 마을로 알려져 있다.

베다니는 신약성경에서 11회 나오며, 사복음서에만 사용되었다.

(a)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오리쯤 되었으며(요 11:18),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가 살았고(요 11:1; 요 11:2), 나병 환자 시몬의 집이 있는 곳이다(마 26:6; 막 14:3).

(b)  예수님께서는 자주 베다니를 방문하고 거기서 유하기도 하셨다(마 21:17; 눅 10:38-눅 10:40; 요 11:1; 요 11:2; 요 12:1).

(c)  베다니에서 예수님은 죽어 무덤에 장사 지낸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다(요 11:42 이하).

(d)  예수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 잔치에 참석했을 때,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다(마 26:6-마 26:8; 막 14:3; 요 12:1-요 12:3).

(e)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에서 나귀를 취하여 타시고 입성하셨다(막 11:1-막 11:11).

(f)  예수님께서 베다니 근처에서 승천하셨다(눅 24:50; 눅 24:51).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

ajkolouqevw(190, 아콜루데오) 따르다, 뒤따르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아콜루데오(Homer 이래)는 켈류도스(kevleuqo", 길)에서 유래했으며,

(a)  문자적 의미로 '함께 가다, 동반하다, 뒤따라 가다, 따라가다'이며,

(b)  비유적 의미로는 '(추세나 의견)을 따르다, 동의하다, 순응하다'를 의미한다.

(c)  스토아 철학자들은 아콜루데오를 종교적, 철학적 의미로 사용했다. 이 단어는 현자가 세상 법칙에 따른다는 것을 언급하는데 사용되었다. 자연 혹은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철학적 삶의 기본 방향이다. 여기에서 따른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통합에 의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의 이면에는 이성적인 인간과 하나님과의 본유적 관계에 대한 헬라적 견해가 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아콜루데오는 70인역본에서 14회 나오며, 주로 할라크의 역어로 5회, 히브리어 상당어 없이 6회 사용되었다.

(a)  아콜루데오에 상당하는 히브리어는 민 22:20에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함께 가라"는 것 외에는 할라크 아하레(직역: 뒤따라 가다, 4회)로 나타난다.- 삼상 25:42에 아비가일이 다윗의 사자를 따라가는 것, 왕상 19:20에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르고 싶어한 것, 호 2:7에 이스라엘 백성이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가는 것, 사 45:14에 만방이 주를 따르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b)  구약성경에서 할라크 아하레라는 표현은 특별히 호세아, 예레미야, 신명기 기록에서 이교로의 변절에 전문 용어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그 독특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다른 신(神)들을 따라가는 것은 백성의 기본 죄이며, 모든 재난(심판)의 원인이다(삿 2:12; 신 4:3; 신 6:14; 왕상 21:26; 렘 11:10). 호세아에서 이 표현은 간음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정부를 따르고 남편을 잊어버렸다(호 1:2; 호 2:7; 호 2:13).

여호와를 따르는 것은 신명기에 나타나지만(신 1:36 등) 별다른 강조가 없다(왕상 18:21은 예외). 그 이유는 그것이 우상숭배와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렘 2:2의 광야에서 여호와를 좇는 것(출 13:21-22)에 대한 언급에서 결혼에 대한 개념이 고려되고 있다. '하나님의 길로 걷는다'는 표현이 애호되고 있다(신 5:30 등).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아콜루데오는 신약성경에서 90회 중 복음서에 80여회, 사도행전에 3회, 바울서신에 1회, 요한계시록에 6회 나타난다.

(a)  신약성경에서 따른다는 개념은 하나님께 결코 적용되지 않는다. 이 개념은 팔레스타인 용법에 의해 암시되지 않았으며 초기 기독교도 이 표현을 형성하는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전혀 새롭고 독특한 개념이 생도 관계를 뿌리로 하여 그 속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나님을 따른다는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관념에 익숙한 헬레니즘 영역으로 그리스도교가 들어갔을 때조차도 아콜루데오라는 동사와 따른다는 개념 전체는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실로 역사적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이 말들은 더 이상 어떤 다른 종교적 용법으로 전환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제자직에 엄격히 제한되어 사용된 아콜루데오의 특별한 용법은 통계상으로 분명하게 증명된다. 요한계시록에서 단 한번 사용된 경우를 제외하면 아콜루데인은 전적으로 사복음서에서만 발견된다. 이 용어는 어느 정도는 외적으로 따르는 것을 함축하는데, 예컨대 막 3:7과 병행구절, 마 8:10과 병행구절에서 무리가 예수님을 좇는 것과 마 8:19에서 좁은 의미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좇는다고 할 때이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제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는다(막 10:28; 막 1:18; 눅 5:11). 그러나 이것은 아콜루데인의 모든 다른 관계들을 끊는다는 의미에서의 자기 헌신을 의미함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마 8:22),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눅 9:61).

제자는 랍비의 생도가 행하는 바와 같이 행하되, 외적으로는 랍비의 생도와 똑같으나 내적으로는 예수님께 결속되어 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제자직의 의미를 여전히 가지면서 한편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내용과 표시를 획득한다.

이 용어의 신약성경의 용법의 배타성은 원시 기독교에게는 유일한 하나의 제자직만 있으며, 따라서 유일한 하나의 좇음, 즉 예수님과의 관계만이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막 2:14과 병행구절에서 아콜루데이 모이, "나를 좇으라"는 요구는 곧 메시야의 요구이다.

(b)  아콜루데인(따르는 것)은 메시야를 좇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 제자직은 본질적으로 종교적 선물이다. 아콜루데인은 예수님 안에 제공된 구원에 참예함을 의미한다. 눅 9:61 이하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만이 아콜루데인을 성취할 수 있다. 막 10:17; 막 10:21 및 병행구에서 아콜루데이 모이는 "영생"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요 8:12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동일한 사상이 계 14:4에서도 나타난다: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c)  하지만 아콜루데인은 또한 예수님의 운명에 함께 하는 것을 암시한다. 마 8:19 이하에서 아콜루데소 소이("좇으리이다")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이다. 막 8:34과 병행구절에서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하신다. 요 12:25-26에서도 동일한 관계를 찾아볼 수 있다. 이 구절들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는 바는, 어떤 의미에서 아콜루데인은 예수님의 본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의 구원을 누림으로 야기되는 메시야와 함께 하는 삶과 고난에 전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d)  이 용어의 은유적 용법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다음의 고찰에 의해 드러난다.

한편으로 전승은 확실히 본래부터 마 10:38; 눅 14:27과 같은 말씀들을 보유하고 있으며(마 10:38,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눅 14:27,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다른 한편으로 전승은 예수님과 함께 다닌다는 의미에서 아콜루데인을 행사하지 않는 제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매우 본래부터 나타낸다.

더욱 더 두드러진 것은 전승의 세번째 명백한 특징이다. 즉 이 단어와 예수님의 역사(history)의 구체적인 활동이 너무나 강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다른 명사도 이 제자직의 개념에 일치하여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신약성경에는 단지 능동적인 표현만이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이 용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행위이지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아콜루데인이라는 용어가 복음서에서만 사용되고, 또 사복음서 모두에서 그 용법상 일치점이 있으며, 복음서들이 이 용어가 의미하는 관계를 역사상의 예수님에게 국한시키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신약성경의 서신들에서는 다른 표현들이 높임 받으신 퀴리오스(kuvrio", 2962: 주, 주님) 및 그의 프뉴마(pneu'ma, 4151: 영)와의 관련을 강조하는 데에 사용된다.

이 용어가 예외적으로 복음서 외에서 유일하게 사용된 계 14:4은 분명 마 10:38을 특정한 부류의 신자들에게 적용한 것이다. 여기서 그 개념에 주어진 분명한 새로운 내용은 마찬가지로 사도 시대에 '따른다'는 묘사가 예수님의 제자들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비록 사도행전은 바나바와 마가, 혹은 바울과 그의 집단(circle)의 경우처럼 스승과 제자(master-pupil) 관계에 친숙해 있었지만 어쨌든 다른 자료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식의 표현을 피한다.

(참조: G. Kittel; C. Blendinger; Walter Bauer; J. H. Thayer). 

---------

Bhqsai>dav(966, 베드사이다) 벳새다 Bethsaida(지)

베드사이다는 아람어 베트 차이야(고기잡이의 집), 또는 베트 차이야(어부의 집)의 음역이며, 한글 개역 성경에서 '벳새다'라고 음역했다.

(a)  벳새다는 갈릴리 북쪽 해변 요단강 근처의 마을이다. 플리니(Pliny)와 제롬(Jerome)은 이곳이 요단 동쪽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막 6:45에서 제자들은 요단 동편에서 벳새다로 보내진 것이다(참조: 요 6:17). 그렇다면 요단 서쪽의 두 번째 벳새다, 곧 '갈릴리 벳새다'로 주장되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옳지 않다. 벳새다가 요단강의 동편에 있었는지 서편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요세푸스의 기록이 분명하게 밝혀준다. 어촌인 벳새다는 생산물이 풍부한 이 호수 일대의 여러 성읍들의 지명일 수 있었다 요세푸스는 헤롯 빌립이 '게네사렛 호수에 위치한 벳새다 마을을 도시로 승격했으며, 이 도시를 시이저의 딸과 동일한 이름인 줄리어스(Julias)로 불렀다'고 기록했다. 요단강 서쪽 기슭의 줄리아스의 교외가 막 6:45과 가장 잘 어울린다.

만일 좀 더 일반적인 의미로 요단강의 동쪽과 갈릴리 바다의 북쪽에 이르는 갈릴리를 이해한다면 '갈릴리의 벳새다'(요 12:21)라는 표현은 분명해진다.

(b)  벳새다는 신약성경에서 7회 나오며, 사복음서에만 사용되었다.

① 벳새다는 예수님의 제자들인 안드레, 베드로, 빌립의 출신지이다(요 1:44; 요 12:21).

② 예수님은 벳새다에서 많은 권능을 행하셨다(마 11:21; 눅 10:13). 예수님은 이 곳에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시고(눅 9:10), 소경을 고쳐 주셨다(막 8:22-막 8:26).

③ 벳새다는 불신앙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통렬한 책망을 받았다: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마 11:21; 병행구, 눅 10:13).(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NBD; PEB; ISBE). 

---------

!Iwshvf(2501, 이오세프) 요셉 Joseph(인)

1. 구약성경 

이오세프는 히브리어 요세프(3130)의 음역이며, '하나님께서 더하실 것이다'를 의미하며(창 30:23), 한글 개역 성경에서 '요셉'이라고 음역했다

구약성경에서 네 명의 사람이 '요셉'이라는 나오는데, 이름으로 그 중 야곱의 아들만이 신약성경에 나타난다.

1. 야곱의 아들 요셉.

(a)  요셉은 라헬이 낳은 야곱의 11번째 아들이며(창 30:22-24),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며(창 39:6), 야곱의 총애를 받았다(창 27:3).

(b)  요셉은 야곱의 편애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고(창 37:4), 꿈을 꾸고(창 37:7, 9), 그 꿈 이야기를 형들에 말하고 그 때문에 형들에게 더욱 미움과 시기를 받았다(창 37:5-11).

(c)  요셉은 형들의 살해 음모(창 37:14-20)로 시작하여 대상들에게 팔려 가서(창 27:26-28) 애굽의 시위 대장 보디발에게 다시 팔렸다(창 37:36).

(d)  보디발의 집에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함으로(창 39:2-3), 요셉을 인하여 보디발의 집에 여호와의 복이 임하여 번영했다(창 39:5). 그래서 보디발이 소유를 다 요셉에게 일임했다(창 29:6).

(e)  그러나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자기를 욕보이려 했다는 무고로 옥에 갇히었다(창 39:17-20). 옥중에서도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으로 범사에 형통하고(창 39:21-23), 떡굽는 관원장과 술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고 석방의 때를 기다렸다(창 40:21-23).

(f)  요셉은 바로의 꿈을 계기로 하여 석방되어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대안을 제시했다(창 41:29-36). 그리하여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애굽 경제를 다스렸다(창 41:38-40; 창 41:46-49; 53-57). 사브낫바네아라는 이름을 얻었다(창 41:45).

(g)  요셉은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아내로 삼고(창 41:45),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낳았다(창 41:50-52).

(h)  요셉은 가나안 땅의 기근으로 인해 애굽에 곡식 사러 온 형을 만나고 야곱 족속을 애굽 고센 땅으로 이주시키었다(창 45:3-6). 야곱의 요셉은 축복하고 죽어 막베라 굴에 장사되었다(창 50:12-14).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끝까지 돌보아 주었다(창 50:19-21).

(i)  요셉은 백세에 애굽에서 임종했으나(창 50:26), 그 유골이 출애굽과 함께 나와 세겜에 이장되었다(창 20:25; 출 13:19; 수 24:32).

(j)  요셉의 인격과 신앙에 대해서는,

① 믿음의 사람이었고(창 50:20; 수 24:32).

② 과실에 대해 민감하고(창 37:2),

③ 마음이 친절하였고(창 40:7-8),

④ 성실성과 마음의 순수성을 지녔고(창 39:9, 11-12),

⑤ 겸손하였고(창 41:16),

⑥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였고(창 45:8),

⑦ 하나님의 신의 감동한 지혜를 소유했고(창 4:38-39),

⑧ 예언자적 기질을 가지었고(창 45:6; 출 13:19),

⑨ 감정이 풍부하고(창 43:30, 31),

⑩ 하나님의 도우심이 그와 함께 하셨고(창 39:2-3; 시 106:17-20),

⑪ 관용적인 사람이었다(창 50:19-21).

2. 아삽의 아들 요셉.

다윗 시대에 아삽의 수하에서 신령한 노래를 불렀다(대상 25:2).

3. 요야김 때의 스바냐 족속의 제사장(느 12:14).

4. 잇사갈 지파의 가나안 정탐군(민 13:7).

2. 신약성경. 

이오세프는 신약성경에서 34회 나오며, 주로 사복음서에 나타나며, 사도행전과 히브리서에 나타난다.

신약성경에서 8 사람이 요셉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등장한다.

1. 야곱의 아들 요셉.

(a)  요셉은 야곱의 편애 때문에 형들에게 마음과 시기를 받아 애굽을 끌려갔으나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다(행 7:9).

(b)  히 11:22에서 요셉의 믿음의 행위가 언급되어 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2. 다윗의 자손 요셉

(a)  그는 마리아의 남편이었다.

마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눅 1: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b)  그는 목수였다.

마 13: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막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c)  그는 나사렛에 거주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눅 2:4).

(d)  그는 의로운 자였다,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마 1:19).

(e)  그는 동거하기 전에 잉태한 약혼녀 마리아와 파혼할 것을 결심하였다,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마 1:18; 마 1:19).

(f)  그는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마리아를 데려왔다,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하니라 24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 1:20-마 1:21; 마 1:24-마 1:25).

(g)  그는 호적지의 구유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지켜보았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 되었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눅 2:4-눅 2:6).

(h)  그는 모세의 법대로 결례를 행했다, "22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 가니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함이더라"(눅 2:22-눅 2:24).

(i)  그는 꿈에 계시를 받고 가족과 함께 애굽으로 피신했다: "13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마 2:13-마 2:14).

(j)  그는 다시 계시를 받고 가족과 함께 나사렛으로 돌아왔다, "20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니라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이루려 함이러라"(마 2:20-마 2:21; 마 2:23).

(k)  그는 예수님의 섬김을 받았다, "50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눅 2:50-눅 2:51).

3. 아리마대 요셉.

(a)  그는 공회 의원이었다,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눅 23:50).

(b)  그는 예수님의 제자이며 부자였다.

①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마 27:57).

②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요 19:38).

(c)  그는 빌라도에게서 예수님의 시체를 인수했다,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눅 23:52).

(d)  그는 자기의 새 무덤에 장사했다, "53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54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눅 23:53-눅 23:54).

(e)  예수님을 장사할 때 니고데모의 도움을 받았다, "39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요 19:39-요 19:40).

4.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눅 3:24).

5. 위와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

"그 이상은 시므온이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요남이요 그 이상은 엘리아김이요"(눅 3:30).

6. 예수님의 동생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마 13:55).

7. 가룟 유다 대신에 사도로 추천을 받은 자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23 저희가 두 사람을 천하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행 1:22-행 1:23).

8. 바울의 동역자인 바나바의 본래 이름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행 4:36).(참조: ZTB). 

--------

oJravw(3708, 호라오) 보다 se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호라오(Homer 이래)는

(a)  '보다, 바라보다, 관찰하다, 지각하다'.

(b)  '상상하다, 경험하다, 출석하다, 참여하다'.

(c)  비유적 의미로 '이해하다, 인식하다, 고려하다, 주의하다'.

(d)  수동태로 '나타나다, 보이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호라오는 70인역본에서 매우 많이 나오며, 주로 라아와 그 다음으로 하자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보다, 깨닫게 하다'(창 27:1), '주목(주의)하다, 의식하다'(시 34:8), '알다, 경험하다'(신 11:2), '염려하다, 관심하다'(창 37:14; 사 5:12), '듣다'(렘 33:24), '이해하다'(삼상 12:17), '보이다' 등을 의미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호라오는 신약성경에서 449회 나오는데 호라오와 미래형 옾소마이가 110회, 부정과거형 에이돈이 336회 나온다.

(a)  눈으로 '보다, 주목하다'(마 28:7; 마 28:10; 막 16:7; 눅 16:23; 요 8:57; 요 9:37; 요 14:9; 요 6:16; 요일 4:20; 계 1:7 등), '보이다, 나타나다'(행 2:3; 계 11:19 등).

(b)  마음으로 '보다, 인지하다, 알다, 이해하다'(행 8:32; 골 2:18; 히 2:8; 약 2:24), '의식하다'(요삼 1:11).

(c)  '경험하다'(눅 3:6; 눅 17:22; 요 3:36 등).

(d)  '주의하다, 조심하다, 삼가다'(마 8:4; 마 18:10; 막 1:44; 살전 5:15; 마 16:6; 막 8:15 등).

(e)  '마음을 쓰다, 유의하다'(마 27:4; 행 18:15).

(f)  수동태로 '나타내다, 보이다'(눅 9:31; 천사들 눅 1:11; 눅 22:43; 행 7:30, 35; 하나님, 행 7:2; 죽은 자, 마 17:2; 막 9:4; 부활하신 예수님, 눅 24:34; 행 9:17; 행 13:31; 행 26:16; 고전 15:58; 딤전 3:16; 장차 재림하실 예수님, 히 9:28; 환상, 행 16:9; 계 11:19; 계 12:1, 3 등). 


이전글 : 요2.가나혼인잔치..공중영접-혼인잔치-7년환난-재림-아마겟돈-천년왕국모델
다음글 : 요3.그선한힘에 고요히감싸여...참고.사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