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1.07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요4장.참된이웃사랑.영적추수기.영과진리의 예배자.사마리아의 수가(세겜).갈릴리가나.두번째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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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요4장 ....지고지선-최상의 진복 = 오직 JC믿음으로 오는 구원영생복락거함교통누림동행 추구.. JC로 충만한 마음지키기=최우선순위 회복이 생명에 가장 중요..

===사마리아 여자와 말씀하시다

1.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퀴리오스..YHWH)) 아신지라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낮12시..정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아람어 메쉬하..히브리어 마쉬아흐...기름부음 받은자)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32.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5.  너희는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다

43.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44.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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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V]요4장

1.  The Pharisees heard that Jesus was gaining and baptizing more disciples than John,

2.  although in fact it was not Jesus who baptized, but his disciples.

3.  When the Lord learned of this, he left Judea and went back once more to Galilee.

4.  Now he had to go through Samaria.

5.  So he came to a town in Samaria called Sychar, near the plot of ground Jacob had given to his son Joseph.

6.  Jacob's well was there, and Jesus, tired as he was from the journey, sat down by the well. It was about the sixth hour.

7.  When a Samaritan woman came to draw water, Jesus said to her, "Will you give me a drink?"

8.  (His disciples had gone into the town to buy food.)

9.  The Samaritan woman said to him, "You are a Jew and I am a Samaritan woman. How can you ask me for a drink?" (For Jews do not associate with Samaritans.)

10.  Jesus answered her, "If you knew the gift of God and who it is that asks you for a drink, you would have asked him and he would have given you living water."

11.  "Sir," the woman said, "you have nothing to draw with and the well is deep. Where can you get this living water?

12.  Are you greater than our father Jacob, who gave us the well and drank from it himself, as did also his sons and his flocks and herds?"

13.  Jesus answered, "Everyone who drinks this water will be thirsty again,

14.  but whoever drinks the water I give him will never thirst. Indeed, the water I give him will become in him a spring of water welling up to eternal life."

15.  The woman said to him, "Sir, give me this water so that I won't get thirsty and have to keep coming here to draw water."

16.  He told her, "Go, call your husband and come back."

17.  "I have no husband," she replied. Jesus said to her, "You are right when you say you have no husband.

18.  The fact is, you have had five husbands, and the man you now have is not your husband. What you have just said is quite true."

19.  "Sir," the woman said, "I can see that you are a prophet.

20.  Our fathers worshiped on this mountain, but you Jews claim that the place where we must worship is in Jerusalem."

21.  Jesus declared, "Believe me, woman, a time is coming when you will worship the Father neither on this mountain nor in Jerusalem.

22.  You Samaritans worship what you do not know; we worship what we do know, for salvation is from the Jews.

23.  Yet a time is coming and has now come when the true worshipers will worship the Father in spirit and truth, for they are the kind of worshipers the Father seeks.

24.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25.  The woman said, "I know that Messiah" (called Christ) "is coming. When he comes, he will explain everything to us."

26.  Then Jesus declared, "I who speak to you am he."

27.  Just then his disciples returned and were surprised to find him talking with a woman. But no one asked, "What do you want?" or "Why are you talking with her?"

28.  Then, leaving her water jar, the woman went back to the town and said to the people,

29.  "Come, see a man who told me everything I ever did. Could this be the Christ?"

30.  They came out of the town and made their way toward him.

31.  Meanwhile his disciples urged him, "Rabbi, eat something."

32.  But he said to them, "I have food to eat that you know nothing about."

33.  Then his disciples said to each other, "Could someone have brought him food?"

34.  "My food," said Jesus, "is to do the will of him who sent me and to finish his work.

35.  Do you not say, 'Four months more and then the harvest?' I tell you, open your eyes and look at the fields! They are ripe for harvest.

36.  Even now the reaper draws his wages, even now he harvests the crop for eternal life, so that the sower and the reaper may be glad together.

37.  Thus the saying `One sows and another reaps' is true.

38.  I sent you to reap what you have not worked for. Others have done the hard work, and you have reaped the benefits of their labor."

39.  Many of the Samaritans from that town believed in him because of the woman's testimony, "He told me everything I ever did."

40.  So when the Samaritans came to him, they urged him to stay with them, and he stayed two days.

41.  And because of his words many more became believers.

42.  They said to the woman, "We no longer believe just because of what you said; now we have heard for ourselves, and we know that this man really is the Savior of the world."

43.  After the two days he left for Galilee.

44.  (Now Jesus himself had pointed out that a prophet has no honor in his own country.)

45.  When he arrived in Galilee, the Galileans welcomed him. They had seen all that he had done in Jerusalem at the Passover Feast, for they also had been there.

46.  Once more he visited Cana in Galilee, where he had turned the water into wine. And there was a certain royal official whose son lay sick at Capernaum.

47.  When this man heard that Jesus had arrived in Galilee from Judea, he went to him and begged him to come and heal his son, who was close to death.

48.  "Unless you people see miraculous signs and wonders," Jesus told him, "you will never believe."

49.  The royal official said, "Sir, come down before my child dies."

50.  Jesus replied, "You may go. Your son will live." The man took Jesus at his word and departed.

51.  While he was still on the way, his servants met him with the news that his boy was living.

52.  When he inquired as to the time when his son got better, they said to him, "The fever left him yesterday at the seventh hour."

53.  Then the father realized that this was the exact time at which Jesus had said to him, "Your son will live." So he and all his household believed.

54.  This was the second miraculous sign that Jesus performed, having come from Judea to Gal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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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4장 (개요)

이스라엘 땅의 영광이란 그 땅이 임마누엘의 땅이요(사8:8). 또한 그의 출생지요, 전도와 활동무대였다는 바로 그것이다. 우리 구주 당시 이 땅은 셋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북쪽은 갈릴리, 남쪽은 (예루살렘을 포함한)유대, 그리고 가운데 사마리아로 되어 있었다. 본 장(章)에서는 세 지역 모두에서 그리스도의 활동을 보게 된다.

** 유대를 떠나 사마리아를 거쳐서 갈릴리로 가려하심(1-3).

1. 사마리아에 당도(4-6).

2.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심(7-26).

3. 그 여인이 자기 마을에 그리스도를 알림(27-30).

4. 그 동안에 그리스도가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심(31-38).

5. 이 사건이 사마리아인에게 준 좋은 영향(39-42). 

6. 예수는 이틀간 유하신 후 사마리아를 떠나 갈릴리 가나로 이동하시고 거기에서 [가버나움에 있는]한 귀인의 아들을 [가나에서 말씀하사]치료하심(4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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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에서 갈릴리로(요 4:1-3)

이제 예수는 추수 때가 되기 넉 달 전에 유대를 떠나셨다(35절).

Ⅰ.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일반적인 말 뿐이다. 즉 그는 "제자들을 삼으셨다"는 것이다. 그의 목회는 성공적이었다. 물론 많은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제자를 삼는 것," 즉 사람들을 자기의 뜻에 맞게끔 적응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권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지, 태어날 때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모태신앙이라 말하지 말라!!."

Ⅱ. 그는 "제자를 삼으시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셨다." 그러나 사실은 제자들이 추종자들에게 세례를 준 것이었다(2절). 예수는 자기의 세례와 요한의 세례를 구분하고 싶지 않으셨음에 틀림없다. 요한은 모두 친히 세례를 주었었다. 그리고 JC는 자기 제자들을 존중하고 싶었다. 사실은 장래의 일을 위해 그들을 훈련시키기 위함이었다. -- JC는 자기의 종들이 행하는 일은 모두가 자기가 직접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밝히 보이신 셈이다.

Ⅲ. 예수는 "요한보다 더 많은 제자들이 있었고, 또 세례를 주었다." 

---그는 당시 요한이 활동했던 것보다 더 많이 했을 뿐만 아니라 요한이 일생 행한 것보다 더 많이 했다. 그리스도의 대화는 요한의 대화보다 더 신임을 받았다. 그의 표적들은 확신을 주고, 그의 치유행위는 많은 사람들을 끌었다. 

(((요한의 메세지의 주요내용은  임박한 진노의 심판을 준엄하게 경고하여 주께로 돌이키도록 하는 것이기에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권했기에 그의 어조는 야성 충만한 강한 책망의 어투였으리라//반면에 그리스도의 어조는 짐지고 수고함으로 인해 연약한 심령에 임하는 Q의 자비와 위로를 말하면서도 정곡을 찌르심으로써 회개함 통해 구원얻는 믿음을 선포하셨기에 부드럽고도 설득력이 더 강했으리라고 본다!!))

Ⅳ. 바리새인들이 이 소식을 들었다. 즉 그들은 예수가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준다는 소식을 들었다. 

-- 그것은 그들이 예수의 첫 공적인 활동에서부터 시기의 눈으로 보아와서, 그에 관한 행동을 일일이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 그들은 요한을 제거했다고 여기고(이 때에 요한은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스스로들 기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까지 요한이 활동했던 것보다 그들에게는 더 큰 고민거리인 예수가 나타났다. 또 다시 더 강력한 Q의 증인이 뒤이어 일어난 것이다.

2. 그들에게 염려가 되는 것은 예수가 제자들을 많이 얻었다(삼았다)는 것이다.  

-- 복음의 성공이란 그 대적자들에게는 분격을 일으키는 일이다. 어둠의 세력이 복음의 성공에 대하여 격분케 될 때는 참된 의미에서 좋은 징조로써 그 징조는 점점 커지게 된다.

Ⅴ. 우리 주 예수는 자기를 반대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이러한 소식이 들어갔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이 소식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숨겨진 계획과 의도가 노출되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나 누구도 "여호와께서 모를 만큼 깊이 자기들의 뜻을 숨길"(사 29:15) 수는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여기서 바로 "주님"(영문은 "여호와"와 같은 단어임-역주)이라 호칭되고 있다. 그는 이미 바리새인들이 들었다는 바로 그 말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은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예수가 당시에 벌써 "요한보다 많은 세례"를 주었으리라고 믿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튼 예수가 요한보다 더 골치거리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Ⅵ. 우리 주 예수는 유대를 떠나서 "다시 갈릴리로 가셨다."

1. 예수는 굉장히 핍박을 받을 것 분위기 때문에 급히 "유대를 떠났다." 

-- 그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분노는 핍박으로 나타났으며, 활동 초기에 사람의 아들인 예수를 망치려고 하는 것이 그들의 사악한 술책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음모를 피하려고 그리스도는 유대를 떠나서, 안심하고 활동할 수 있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갈릴리로 갔다. 이 지방에서는 그들의 시기의 눈초리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로써

(1) 하나님의 뜻이며, 구약의 예언들을 성취시킬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7:30). 

-- 그는 아직도 증거를 끝내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굴복시키지 않고, 위험 속에 노출시키지도 않았다.

(2) 유대에서의 전도로 그에게 모여든 제자들이 역경을 견뎌내기에는 아직 미약하므로 그들을 보호하고 싶었으리라.

(3) 여기에서 그는 자기 제자들에게 한 규칙을 제시했다.

-- "한 장소에서 사람들이 너희를 무고하게 핍박할 때는 다른 장소로 피하라." 

-- 주앞에서 돌아보았을 때 죄짓지 않고 무고한데도, 고난을 피할 수 있는 때에조차 [일부러]고난을 스스로 자초하는 바 애매한 고난안으로 우리를 부르지는 않으셨다는 점을 유의하자. 그러므로 [스스로 주앞에서 숙고해 보고] 주님이 함께 감당하자 하심이 아니라면, 자기의 신앙에 위배됨이 아니라면 자기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이것이 주님의 계획과 안배, 섭리따름이요 그분의 원하시는 바이다!!)) 자기의 거처를 기꺼이 옮길 수 있다. 

..((물론, 어떤 형태로라도 고난이 닥칠 때에는 인지하든 못하고 있든 상관없이 지나온 생활중에 범한 모든 죄에 대해 철저한 성찰과 회개가 필요하다...그러기에 기뻐하라!!)) 

-- 그리스도가 표적을 행사하지 않고 일반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법으로 자신과 제자들을 구한 것은, 자기의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는 사람들에게 피할 수 있는 방법과 격려를 주기 위해서이다.

2. 예수가 갈릴리로 가심은, 그 곳에서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곳에는 많은 친구들이 있는 반면 공공연한 적대자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가 지금 갈릴리로 가신 것은,

(1) 거기에서 전도한 세례요한으로 인해 JC를 맞이 할 마음들이 "예비되었기" 때문이다. 즉 헤롯의 관할 하에 있는 갈릴리는 세례요한이 사역을 하던중에 잡힌 최후의 장소이었다.

(2) 요한이 옥에 갇힘으로써 지금 그 장소는 JC가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 

-- 예수가 그전까지는 등불을 등경 아래 감추어 두셨던 바, 사람들의 생각이 요한과 자기 자신 때문에 나뉘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 및 유대로 가셨었지만, 이제 요한은 헤롯 안디바에 의해 투옥되었고 갈릴리지역은 복음전파 하기에 알맞게 예비된 좋은 토양이 되었다. 이와 같이 선한 일군들의 자유와 구속을 넘어서서, 그 모든 상황전개는 도리어 복음의 진보를 가져오고 있다.(빌 1:12). 

-- 안전을 찾기 위하여 그가 갈릴리로 간 것은 어떤 목적에서인가? ...요한을 핍박한 헤롯은 결코 예수의 반대자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여기에 대해서 켐니티어스(Chemnitius)는, "경건한 자들은, 세상에서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지만, 그들 자신은 피해 갈 사람이 없다. 그들에게는 피난처를 줄 자가 그리스도뿐이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주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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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의 우물(요 4:4-26)

그리스도가 갈릴리로 가실 때 사마리아에 이르러, 선한 일을 행하신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사마리아인들은 "혈통"과 "종교"에 있어서 "혼혈 유대인"으로 앗수르 왕이 열 지파를 포로로  잡은 후 그 곳에 이주시킨 식민들의 후손들이며, 이 후손들이 불모의 땅인 박토에 남았던 유대인과 이후에 돌아온 다른 많은 유대인들과 혼합되었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경쟁하려고 그리심산에 사원을 세우고, 오직 이스라엘 하나님에게만 예배했다. 

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는 큰 적개심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눅 9:53), 그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사마리아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큰 욕이라 생각했다. 유대인들이 번창하였을 때, 사마리안들은 그들과 같은 혈족임을 주장했으나(에 4:2), 유대인들이 쇠퇴되었을 때에는, 자기들이 메데와 파사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다(조세푸스의 고대사 lib 11:8; 12:7참조).

Ⅰ. 사마리아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보자. 

-- 그리스도는 자기 제자들에게 "사마리아의 어떤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고 이전에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마 10:5). 즉 거기서 복음을 전하거나 표적을 행하는 것을 금했다. 다시 말하면 그 곳에서 공적으로 전하지 말고, 어떠한 표적도 행하지 말라,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먼저) 가라는 것이었다. ((복음전파의 우선순위를 먼저 예류살렘과 유대에 두라는 뜻이었으리라)) 그런 견지에서 본다면 JC가 그 곳에서 사마리아인들에게 베풀었던 친절 행위는 "우연적"이었던 걸까?. 그것은 단지 "주인의 상에서" 우연히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에 불과했을지도 모르나 과연 그럴찌라도 배고픈 이에게는 감사해 마땅한 정찬이다.

1. 유대에서 갈릴리까지의 길에는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야 했다(4절). 

-- 즉 "예수는 (최단시간에) 갈랄리로 가기 위해서는 사마리아를 거칠 수밖에 없었다." 그 경로를 피하려 하여 우회하려 한다면 요단강 동편에 인접된 매우 험한 길(베뢰아를 거쳐서 갈릴리로 우회하는 길)) 이외는 다른 길이 없다. 지금도 사악한 자와 불경건한자들이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섞여 있으므로, 믿는 우리들이 세상으로 나가려면, 때때로 그러한 장소를 거치는 것은 피할 수가 없는 일이다.(고전 5:10). 그러므로 우리들은 양손에 의의 갑옷이 필요하게 되며, 원수들이 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하며, 가능한한 그들과 접촉을 통하여 더럽힘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유혹 받는 장소에 들어가서는 안 되지만, 필요한 때에는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하더라도 그 때 우리들은 그들과 오래 동거해서는 안 되고 빨리 나와야 한다.

-- **어떤 성서학자들은 더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바, JC의 마음에 이미 그 곳에서 행할 선한 일 때문에 그가 사마리아를 거쳐갈 "필요가 있었다"고도 여긴다. 불쌍한 여자 한 사람을 개심시키고, 이에 더하여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 사마리아길을 일부러 택했다는 것이다. 진실로 이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계속 자리 잡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는 "이 길을 가야만 했다." **

-- 사마리아로 그리스도가 "지나가게"되었다는 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다행스러운 일이어서 JC가 그들을 부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내가 너에게 말하기를, 살라 하였느니라"(겔 16:6).

2. 그가 가던 길에 잠깐 쉬던 곳이 우연히 "사마리아 동네"였다.

(1) 그 장소의 묘사를 보자. 

-- 그 장소는 수가라 불리워졌는데 세겜이라는 이름으로, 구약에서 여러 번 나타난 바로 그 세겜으로 확인되었다. 이와 같이 오랜 기간을 통하여 옛지명은 흔히 퇴락하고 만다. 

-- 세겜이란 장소는 이스라엘 교회에서 첫 개종자를 낳았던 곳이며(창 34:24) 또 이제는 이스라엘 공동체 밖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첫 장소가 되었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의 관찰에 의하면, "아골 골짜기"가 그러한 것처럼, 이 마을을 통한 구주의 구원복음은 불행한 이방인들에게 "희망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호 2:15). 이곳은 아비멜렉이 왕이 된 곳이요 여로보암의 도읍지이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는 그 장소의 유구한 역사를 제시하기보다 오히려, 그곳과 야곱의 관계에 초점을 둔다. 그것이 왕들과의 관계보다 더 귀중했던 것이다.

① 야곱의 땅이 여기에 있는데,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에게 주었던 이 땅의 일부에 그의 뼈가 묻혀 있었다(창 48:22; 수 24:32). 

-- 그리스도가 행로에 곤하여 이 곳에서 쉬고 있을 때 선조들이 굳센신앙으로 얻은 바 좋은 평판을 야곱이 요셉에게 전수해 준 것을 묵상하였을 것이다. **성경학자 제롬도 가나안 땅에서 살기로 정하였었는데, 그것은 그 땅을 봄으로써 성서의 이야기를 깊이 간직할 수 있기 때문이라 했다.**

② 여기에 야곱의 우물이 있는데, 그 우물은 그가 팠거나 적어도 그 가족이 사용했던 것일 것이다. 구약 성서에서는 이 우물에 대한 이야기가 없지만, 전승에 의하면 이 우물은 야곱의 우물이다.

(2) 이 장소에 우리 주 예수의 모습을 보자. 즉 "행로에 곤하여 예수는 우물곁에 않아 있었다." 여기서 주 예수를 살펴보자.

① 도보 여행자들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피곤함을 심하게 겪으셨다. 

-- 그는 행로에 곤하여 있었다. 아직도 제6시밖에 안 되었고, 그의 하루 여행의 절반밖에 못 마쳤는데 벌써 피곤하여졌다. 그렇지 않다면 그 날의 제6시가 무더웠기 때문에 피곤하여졌는지 모른다. 우리는 여기서

첫째, 그는 "참 사람"으로서, 일반적으로 인간의 연약함을 그대로 당하셨다. 

....수고는 죄와 함께 왔으므로(창 3:19), 우리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으신 그리스도는 육체의 노곤함을 겪으셨다.

둘째, 그는 "가난한 사람"이었다. 

....아니면 말이나 수레를 타고서 여행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초라함과 고행의 실례로써, 우리들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낮추셨다. 그리고 그는 도보로 내내 여행하셨다. "종들은 말을 타고"가는데 "방백들은 종처럼 땅에 걸어 다니는도다"(전 10:7).

세째, 그는 튼튼한 신체를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허약한 "연약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의 제자들은 피곤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가 앉아서 한 발자욱도 더 이상 갈 수 없을 때에도, 어떤 어려움도 없이 그들은 동네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② 그는 일반적으로 여행자들이 취하는 휴식을 가졌다. 즉 "그는 곤하여 우물곁에 앉았다."

첫째, 그는 딱딱하고 찬 거친 장소인 우물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쉬려고 소파나 안락 의자를 가진 게 아니다.

둘째, 그는 이와 같이 불편한 자세로 앉았다. 즉 그는 개의치 않고 또는 여행으로 피곤해진 사람 그 모습 그대로 아무렇게나 앉아 있었다.

Ⅱ. 제사장들과의 예수의 논쟁, 그리고 산 위에서 있었던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의 대화가 침묵 속에 묻혀버리는 반면에,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이 대화를 네 개의 제목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그들은 "물에 대해서" 대화한다(7-15절).

(1) 이런 대화를 갖게 된 "주위 사정"이 주목되어 있다.

① "물을 길으러" 한 사마리아 여자가 왔다. 

....이것은 그 여자의 형편이 빈곤해서, 물을 길어 나르는 하인이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여자 자신이 생활을 이끌어가야 했다. 여기서 관찰해 보면

첫째, 참으로 하나님은 모든 처지에서의 정직하고 겸손한 근면에 주목하고 계심을 보여 주고 있다. 목자들이 양떼를 지키고 있을 때에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알려졌다.

둘째, 우리에게 아주 뜻밖으로 보여지는 사건들도 실은 신의 거룩한 섭리에 의하여 훌륭한 목적을 가지고 진행되는 일이다. ....이 여자가 우물가에서 그리스도와의 만난 사건은, 우리들에게 리브가, 라헬, 그리고 이드로의 딸의 이야기들을 다시 한 번 떠 올리게 한다. 이 여자들은 이삭, 야곱, 그리고 모세등 좋은 남편들을 만났는데, 이 만난 장소는 그들이 물을 구하러 우물에 왔을 때였다.

셋째, 개종(改宗)과 구원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예상밖의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예수는 찾지 않았던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된다.

②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다."여기서 하나의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첫째, 정의와 정직에 대해서이다. 

....바울처럼(살후 3:8)그리스도도 양식을 공짜로 먹지 않으셨다.

둘째, 매일 섭리에 의존했다. 

...."내일 일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 그리스도는 양식을 구하러 동네에 들어가지 않고, 제자들을 보냈다. 이 양식을 장만하는 동안, 예수는 그와 같이 하나의 선한 일을 했다. 자칫 공허하게 보내버릴 수 있는 한 순간들을 그와 같은 선행으로 채운다는 것, 그리고 부스러기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현명한 처사이다.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보라, 베드로는 비몽사몽에 빠졌었다(행 10:10). 

....또 그가 식사하러 동네에 들어가는 것보다, 그에게 식사를 가져오는 것이 더 개인적으로 쉴 수 있고, 더 경제적이고 소박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의 돈주머니는 빈약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가진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훌륭한 가장(家長)다움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즉 적어도 가능한한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줬다. 그리스도는 마치 그 동네에 있는 최고의 여관에서처럼 우물가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여기서 우리는 분위기에 따라서 처신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 장소에서 그리스도는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 이 여자와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증거 했다.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몰려드는 무리들에게 그는 종종 가르쳤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는 단 한 사람인 여자, 그것도 초라하고 처음 보는 사마리아인에게 겸손히 눈높이를 낮추어 가르치고 계신다. 그 가르침이란 비록 "한 영혼"이지만, 사망에서 생명으로의 구원이란 영광스러운 성취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남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는 것이 좋을지 보여 주신 것이다.

(2) 이 대화의 내용을 알아보자.

① 예수는 물긷는 여자에게 공손한 요구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물 좀 주십시오." 우리들을 구원하시려고 보잘 것 없는 자처럼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가 이곳에서는 무명의 구걸자가 되셨다. 그러므로 결핍 상태에 처한 자나 우물을 팔 수 없는 자들은 구걸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 

...그리스도가 물을 요구했다. 그것은 그가 물이 필요하고 그 물을 길어 올릴 수 있는 그 여자의 도움이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그 여자와 더 대화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기꺼이 그런 비천한자들을 포용하도록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스도는 계속해서 비천한 자들에게 구걸해서 여기에서와 같이 그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생수를 주셔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신다.

② 어쨌든 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는 이 여자는 아직도 그의 요구를 순순히 수긍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유대인의 기질로써는 물조차 자기에게 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9절). "어째서입니까?"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반목이 있어 왔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의 적이었으며(에 4:1), 어떠한 경우이든지 그들은 서로에게 대해 해로웠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저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또 기록된 율법으로, 그리고 이 율법에 의한 상급과 하급 재판소의 이름으로 그들은 축출되고 저주 대상이 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나 사마리아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음식물조차 먹지 않는데, 그것은 마치 "그들이 돼지고기를 먹는 것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이 말은 "랍비 탄쿰"(Rabbi Tanchum)에서 라이트푸트 박사가 인용한 말이다. 그 어떤 시비거리보다 종교에 대한 시비는 일반적으로 가장 화해하기 어려운 시비이다.***  인간들은 서로 관련되도록 만들어졌다. 그런데 사람이 서로 다른 성전에서 예배드리기 때문에, 종교는 자선과 자비, 그리고 공동의 예의를 위한 것임을 부정한다면 사람들은 비인간적이고, 냉소적이며 비판적으로 될 것이다.

즉시 이 여자는 유대인의 거만과 사악함을 떠 올리며 그리스도를 박대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합니까?" 

...그의 옷차림이나 말씨 혹은 그 둘 다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유대인인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는데, 그는 다른 유대인과는 달리 사마리아인에게 대해서 함부로 모욕하며 설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스럽게 느껴졌다. 모든 면에 있어서 온전한 사람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그의 동료들처럼(슥 3:8) 놀라울 만한 사람들이다. 이 여자는 두 가지의 일에 놀랐다.

첫째, 유대인인 그가 매우 친절하게 부탁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마리아인에게 신세를 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더라도 그 고난을 견디는 것이 유대인들의 명예이였기 때문이다. 그가 유대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그의 굴욕의 일부로써 당시 유대는 로마에 예속된, 좋지 못한 상태에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서도 부도덕한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었다. 빌라도가 경멸조로 "네가 유대인인가?"라고 물은 것처럼...하지만JC는 세상의 평판에 개의치 않으셨다. 

-- 여기서 그는 일반적인 타락의 조류를 거슬러서 헤쳐나가는 하나의 모범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비록 우리 사회의 풍조, 또는 우리 집단의 기질이 꽤나 까다롭고 좋지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선함과 친절함을 지녀야 한다. 이 여자는 그리스도가 다른 유대인들처럼 자기를 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개인을 집단의 일반적인 잘못으로 취급하는 것은 부당하다. 예외가 없는 규칙은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그 여자는 사마리아 사람인 자기에게서 이런 친절을 받을 것으로 그가 기대했다는 것에 대해서 놀라움을 나타내고 있다. 

..."유대인인 당신이 사마리아인 저와는 상종하지 않는데 어째서 제가 당신과 상종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시비는 복수와 보복에 의해서 끝없이 만연되어지고 있었다.

③ 그리스도는 이 여자에게 거룩한 것들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서 말하기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다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다"(10절)고 했다. 여기서 관찰해 보면,

첫째, 그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생긴 적대감을 그 여자에게 포기토록 했으며, 적대감정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떤 차별들을 제거하는 최선의 방책이란 피차 논쟁의 여지가 있는 모든 경우들을 무시하고 피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이 여자를 개심시키는데, 그것은 사마리아인의 예배 의식이 "종파분리적이다"라고(실제로 그렇다 하더라도) 알려 줌으로써가 아니라, 그 여자 자신의 무지와 부도덕, 그리고 구세주의 필요성을 나타내 줌으로써이다.

둘째, 그는 지금 이 때가 그 여자에게 아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기회(지금까지 그 여자가 알고 있었던 기회보다 더 좋은 기회)라는 것을 이해시키고 있었다. 

...이 여자는 때의 징조들을 식별할 수 있었던 유대인들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이 여자에게 지금이 은혜의 때라는 것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은혜의 때란 그리스도가 이 여자를 만난 때였다.

a. 그 여자에게 암시하기를, 지금 모르고 있지만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을 알았다면," 즉 그 다음 말이 설명해 주듯, "네게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너는 주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너는 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물을 주었을 것이다"는 것이다. 그 여자는 그를 한 유대인으로서, 초라하고 피곤에 지친 여행자로만 알았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외모 이상의 더 중요한 것을 그 여자가 알도록 했다.

(a)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선물 즉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가장 풍요한 징표이며, 우리의 모든 선에 대한 가장 풍요한 보화이다. 

...이 선물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요구할 수 있는 "빛이 아니며, 그가 우리에게 다시 요구할 "차관(借款)"이 아니라, 하나의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다(3:16).

(b) 하나님이 이런 선물을 우리에게 주었다는 것은 우리가 받는 말할 수 없을 정도의 특권이다. 즉 우리에게만 그 선물이 주어지는 기회가 허락되었다. 

..."하나님의 선물인 그가 지금 당신 앞에 있으며 너와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너에게 물을 달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선물이 당신에게 간청하고 계시다."

(c) 비록 그리스도가 우리 앞에 있어서 그의 복음으로 우리에게 (네 마음을 나에게 다오))간청하지만 아직도 그를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복음 안에서 "물을 달라"고 이야기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다. 이들은 자기들에게 말하고 있는 사람이 진짜 주님 YHWH/퀴리오스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b.그는 그 여자가 자기를 알아보았다면, 무엇인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즉 그와 같이 무례하고 경솔한 대답을 하지 않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결코 그 여자는 그를 모욕하기는커녕 그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너는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다."

(a) 그리스도에 의하여 어떤 유익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유익을 구해야 하며, 그 유익에 대한 기도는 진실되어야 한다.

(b)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진 사람은 그를 찾아야 하며, 만약 그를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를 알지 못하는 것이 된다(시 9:10).

(c) 지식을 얻을 수단이 결핍된 자들에게 그 수단이 주어지면 어떠한 일이 발생할지를 그리스도는 잘 알고 계신다(마 11:21).

c. 그는 그 여자가 자기에게 청원했다면 그 여자를 위해서 자기가 어떤 것을 해 줄 수 있다고 확신시키고 있다. 

...즉 "그가 네게(네가 그를 꾸짖은 것처럼 너를 꾸짖지 않고) 생수를 주었으리라." 이러한 생수란 성령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우물 밑바닥에 있는 그런 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즉 "흐르는" 물과 같다.

(a) 성령의 은혜는 "생수"와 같다(7:38 참조). 

-- 이와 유사한 메시야의 축복이 구약에 약속되어졌다(사 12:3; 35:7; 44:3; 55:1; 슥 14:8). 성령의 은혜, 그리고 그의 위로들이 갈급한 영혼을 만족시킨다. 그런 영혼은 자신의 본성과 필요를 알고 있다.

(b)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요청하는 바 성령을 그들에게 줄 수 있으며, 줄 것이다. 그것은 그가 그들에게 약속한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④ 이 여자는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주겠다는 은혜의 통고를 거절하고 트집잡고 있다(11,12절). 

...이 여자는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또 한편으로는 당신이 우리의 조상 야곱보다 큽니까?"라고 반문하고 있다. 그가 비유적으로 말한 것을 이 여자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고 있었다. 이런 해석은 전에 니고데모도 마찬가지였다. 보이는 사물에만 크게 사로잡힌 자들이 영적인 것에 대해서 혼란된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보라. **어떤 사람들은 그 여자가 예수를 "선생님"으로 혹은 "주님"으로 부르는 것을 주의 깊게 본다. 그러나 지금 이 장면에서 그녀가 쓰고 있는 [주님]호칭은 별 의미가 없다. ((다만 진짜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난 후에는 감동 그 자체가 됨다!!)) 그냥 악의 없이 오히려 도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첫째, 이 여자는 자기 앞에 있는 이 우물에는 거의 물이 없기 때문에 자기에게 어떤 물을 공급해 줄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즉 이 여자는 말하기를 "주여, 이 우물에는 물 길을 그릇도 없고, 깊습니다"했다. 이 여자의 말에는, 땅에서 수증기를 만들어 올라오게 하는 그에게 물 긷는 도구가 필요 없다는 그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자기들 눈으로 뭔가를 확인하기 전에는 그리스도나 그의 약속을 믿으려 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도 우리와 같은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서, 두레박이 없으면 그가 물을 길을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이 여자는 경멸적으로 "당신은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습니까? 당신이 그것을 어디서 얻는지 나는 알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에게 나오는 자들을 위하여 주는 생수의 근원은 감추어져 있으며 아무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생명의 샘은 그리스도에게 감추어져 있다. 비록 그가 감추어 둔 장소를 우리가 모르지만 그는 우리를 위하여 풍족히 간직하고 계신다.

둘째, 이 여자는 앞에 놓여져 있는 이 우물보다 훨씬 더 나은 생수를 그가 공급해 준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있다. ...즉 "우리에게 우물을 준 우리의 조상 야곱보다 당신이 더 큽니까?"

a.. "야곱 자신과 그 아들들과 짐승이 이 우물에서 다 먹었다"는 전승은 사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a) 몸의 혈액순환처럼(전 1:7), 강물의 항구적인 유전(流轉)에 의하여, 그리고 심장의 고동처럼 아마도 바다에 있는 조수의 간만에서 오는 유전(流轉)에 의하여 여러 세대에 걸쳐 계속 샘물이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b) 족장 야곱의 검소함을 엇볼 수 있다. 그가 먹은 물은 이 우물의 물로서, 그와 자기 자녀들은 짐승들과 함께 이 물을 먹었다.

b.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이 여자가 몇 가지 일에 있어서는 모르고 있다.

(a) 야곱을 "조상"이라 부름에 있어서, 사마리아인들은 자기들을 야곱의 자손이라고 인정할 만한 어떤 권위가 있었는가? 

...그들은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 지방에 거주시킨 혼합된 무리의 혈통을 이어 받았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들이 관계 있는가? 그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의 주권을 "침입"해서, 그 땅을 부당하게 소유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스라엘의 혈통과 권위의 상속자들이 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억지는 참으로 어리석지 않은가!

(b) 모세가 만나를 준 것이 결코 아닌데,(6:32), 야곱이 생수를 준 것도 아닌데 그 우물을 야곱이 주었다고 생각하여 야곱의 "선물"로 주장함은 잘못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전달하는 "사자들"을 선물 "제공자"로 부르기가 쉬우며, 또한 앞으로 올 자를 잊고, 지나간 과거의 사람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야곱은 이 우물을 자기 아들들에게 주었지 지금의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교회의 적들은 교회의 특권들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독점까지도 한다.

(c) 이 여자는 그리스도를 야곱과 비교할 수 없는 인물로 착각하고 있다. 

...옛 사람을 지나치게 숭배한다는 것은, 지금 우리 시대의 선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바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도록 만들 위험이 늘 있게 된다.

⑤ 그리스도는 이런 트집에 대답하여, 그가 주는 "생수"는 야곱의 우물보다 훨씬 더 낫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13절,14절). 

...여자가 그릇되게 말하고 있지만, 그리스도는 여자를 저버리지 않고 가르치며 용기를 주고 있다.

첫째, 야곱의 우물물을 단지 "일시적인" 만족과 충족을 주어서,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를 것이다. 

...즉 이 물은 다른 물과 마찬가지이다. 당장의 목마름은 가라앉게 하지만, 다시 목마르게 되어 몇 시간 후에는 이제까지 먹었던 물을 또 필요로 하고 찾게 될 것이다." 이러한 암시는, 현 상태에서, 우리 신체의 허약성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물을 필요로 하고 계속해서 갈망하고 있다. 생명은 하나의 불, 하나의 등불과 같아서 계속적인 연료와 기름의 공급이 없으면 곧 꺼지고 만다. 자연의 열은 스스로 없어지게 된다.

...또 이 세상에서 불완전한 우리의 만족을 본다. 자연은 쉬임이 없으며,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만족이란 여전히 불완전하다. 우리가 마시는 물에서 어떤 만족을 얻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시 목마를 것이다. 어제의 먹고 마심이 오늘에 효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둘째, 그가 주는 생수를 나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14절). 

...그리스도의 선물은 이 세상에 있는 물건들과 비교하여 볼 때 훨씬 가치가 있다. 그것은 이 세상 물건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의 선물을 받는 자마다 복음의 영원한 만족을 얻을 것이다.

a. 그 사람은 "목마름"과 "결핍"이 없을 것이다. 

...이들은 "열망"은 하지만 "번민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목마름이란 단지 하나님에 대한 것뿐이다. 더욱 하나님을 갈망하지만, "절망적인" 목마름은 아니다.

b. 그리스도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이 되기 때문에 그는 결코 목마르지 않게 될 것이다. ...즉 자기 자신 안에 풍족과 만족의 샘을 가졌기 때문에 그는 결코 궁지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a) 샘이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에, 항상 준비"가 되어 있다. 

-- 그 안에 심어진 은혜의 원리는 그에게 만족을 주는 샘이다. 선한 사람은, 그리스도가 그의 마음속에 거하시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 된다. 그는 이 세상에서 만족을 찾으려고 방황할 필요가 없다. 그의 마음속에서 성령의 역사와 증거가 그에게 확고한 소망의 근원이 되고, 넘치는 기쁨의 샘이 된다.

(b) 생수가 그 안에 있기 때문에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 물길을 그릇을 손에 가지고 있는 사람은 우물이 바닥날 때까지는 목마르지 않겠지만, 곧 이 우물은 고갈되고 만다. 그렇지만 믿는 사람들은 그들 안에 생수가 넘쳐서 흐르고 있다. 그리스도가 자기의 휘하에 들어오는 자들에게 주는 거룩한 종교의 "원칙"과 "사랑"이란 이런 생수를 말한다.

[a] 생수가 솟아난다는 것은 강하고 쉼이 없는 은혜의 활동을 말하고 있다. 

-- 만일 선한 진리들이 고여 있는 물처럼, 우리의 마음속에 정체되어 있다면, 이 진리들은 우리가 받은 그 은혜의 목적에 응답을 못할 것이다. 만일 우리의 마음속에 좋은 보화가 있다면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틀림없다.

[b] "영원한 생명"이 솟아나고 있다. -- 이 말이 뜻하는 것으로, 

...첫째는 은혜로운 활동의 "목표"에 대한 것이다. ::성결된 사람은 그의 눈을 하늘에 두고, 영적인 삶의 결핍을 참지 못하며, 영원한 생명으로 도약한다. 

...둘째로 이러한 행동의 "항구성"이다. 즉 성취되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도약할 것이다. 

...셋째로 그들의 상급은 마지막에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는 것이다. 생수가 하늘로부터 솟아나 하늘로 흐르게 된다(전 1:7 참조). 이 생수가 야곱의 우물물보다 더 낫지 아니한가?

[c] 여자는(농담인지, 진담인지 말하기가 어렵지만) 이런 물을 달라고 진정 바라기 보다는, 어쩌면 그에게 도전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 내가 결코 다시 목마르지 않도록 이런 물을 내게 달라"고 간청하고 있다(15절). "나에게 이런 물을 주사, 다시 목마르지 않게 해 주십시오."

첫째, 어떤 성서학자는 이 여자가 그리스도는 단지 부질없는 말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조롱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이런 물을 자기에게 달라고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도전하는 바 "하나의 희귀한 발견입니다. 내가 결코 이곳으로 물 길으러 오지 않아도 된다면 더 많은 고통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나 다른 성서학자는 이 여자의 간청은 좋은 뜻이나, 연약하고 무지한 간청이라고 여기고 있다. 

...여자는 예수께서 매우 선하고 유용한 어떤 것을 나타냈다고 생각하고, 용기 있게 "아멘"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내게 주십시오. 누가 내게 선한 것을 줄 수 있겠습니까?" 

...불쌍한 노동자에게 있어서는 노동을 쉽게 하고, 줄이는 것도 큰 선이다. 악하고 무지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선물에 대하여 연약하고 동요하는 것이지만 갈망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또 사람들의 최선의 바람은 육적인 목적 이상을 보지 못하고 있다. "나에게 생수를 주십시오. 그러나 영원한 생명 때문이 아니라, 내가 이 우물에 오지 않아도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여자는 말했다.

2. 이 여자와의 다음 대화 주제는 "이 여자의 남편에 관한 것"이었다(16-18절). 

...어려운 주제들을 생략해서, 대화에 단절을 초래케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그리스도가 갑자기 남편에 관한 이 말을 시작한 것은 생수에 관한 대화를 뜻없이 그냥 단념하여 중단시키려는 것이 아니었다. 더 깊은 은혜의 치유를 위함이다. 은혜와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말한 것이 믿을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마음상태인 그 여자에게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데, 그 여자는 자신의 고단함의 근저에 깔려있는 것이 바로 상처입은 마음의 죄 문제때문임을 아직 채 깨닫지 못한 까닭에 은혜와 영생에 대한 깨달음이 열리지 않고 있는 것을 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수에 관한 그의 이야기를 보류하고, 그는 그 여자의 양심을 깨우치고, 죄의 상처를 열게 함으로써 그 여자는 은혜의 치유로 인한 진정한 자유와 영접하는 자에게 임하는 구원영생의 은혜를 더 쉽게 이해하게 되었다. 이것이 마음을 취급하는 방법이다. 

...사람들이 죄의 멍에로 "피곤하고 지쳐" 있기 때문에, 안식을 주려고 그리스도가 오셨다. 먼저 마음을 건드리고, 그 다음에 치유해야 된다. 이것이 영적 치유의 과정이다. 만약 우리가 이런 순서를 거치지 않는다면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1) 그리스도는 이 대화를 아주 신중하고 점잖게 시작하고 있다(16절).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① 그리스도가 여자에게 한 명령은 아주 훌륭한 이유가 있었다. 

..."네 남편을 불러 오라. 그러면 네가 모르고 있는 것들을 내가 가르치고, 깨닫게 해 주겠다." 여자들이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어보라"(고전 14:35). 그리고 남편들은 "지식의 사람으로" 아내와 동거하라(벧전 3:7). "너희 남편을 불러오라. 그도 너와 같이 배워야 한다. 그러면 너에게 생명의 은혜가 함께 상속되어 질 것이다. 네 남편을 불러 오라. 그러면 그는 우리 아이에 전해지는 것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보는 데에서 일들을 정직하게 처리하도록 그리고 어떤 것이 좋은 소식인지를 알도록 가르치곤 했다.

② 그 명령이 어떤 훌륭한 이유를 가진 것처럼, 그만큼 그의 좋은 의도도 숨어 있었다. 

...그것은 여자로 하여금 자기의 죄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견책을 할 때는 기술과 신중성이 요구되어진다. 즉 드고아의 여자처럼 둘러대어 말해야 한다(삼하 14:20).

(2) 여자는 아주 열심히 자기의 죄된 사실을 피하려고 했으나, 자기도 모르게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바로 자기의 잘못을 깨달았다. 

...여자는"나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여자의 이 말속에는 자기 남편에 대해서 말하기 조차 꺼려하며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 않다는 암시가 있었다. 더 계속되는 대화에서, 그 문제의 사실이 폭로되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려고, 이 여자는 자기 남편을 이 곳에 데려 오지 않으려 했다. 그러므로 "제발 다른 이야기를 해 쥐요.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여자는 남편도 없고, 처녀나 과부도 아니었다. 육의 생각은 아주 교묘해서 정죄 받기를 회피하고, 얽매이는 것을 싫어해서, 조심스럽게 허물을 감추려고 애쓴다.

(3) 우리 주 예수는 그 여자의 양심을 분명하게 깨우쳤다. 

...예수는 이 본문에 기록되어진 것보다 더 많이 이야기 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예수가 이제까지 자기가 행한 모든 일을 말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29절). 그러나 이 본문의 기록에는 그 여자의 남편에 대한 기록뿐이다.

① 이 여자의 과거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를 보자. 

..."네게 다섯 남편이 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리스도가 여자를 책망하려 한 것은 여자의 "불행"(많은 남편들을 매장한 것)이 아니라, 여자의 "죄"였다. 여자가 집을 뛰쳐나오고(법률가들이 말하는 애정 도피행각), 남편에게 쫓겨나고, 그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했거나, 혹은 여자의 불순종, 부정, 불충실한 행동으로 남편과의 이혼을 야기시켰거나, 혹은 법에 위반되는 부정직한 수단에 의하여 남편과 이혼했을 것이다. 마치 죄에 대한 이야기를 끝냄으로써 죄책도 끝나는 것처럼 생각하고 수치스런 관습을 경홀히 여기는 자들은 그리스도는 매사를 알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② 여자의 현재의 생활 상태를 심하게 꾸짖었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다." 여자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한 것이 아니거나 또는 이 남자에게 다른 아내가 있었을 것이다. 아마 과거의 남편 또는 남편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즉 간단히 말해서 "여자는 창녀로 지내고 있다." 

...그러나 이 여자의 행실에 대해서 그리스도가 얼마나 온화하게 말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여자를 창녀로 부르지 않고,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다"라고만 했다. 그리고 그 나머지의 말은 여자의 양심에 맡겼다. 책망이란 책망 받는 자들의 감정이 거의 상하지 않도록 할 때가 가장 효과가 있다.

③ 그러나 여기에서 그는 여자가 책임 전가와 회피의 수단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더 좋게 이해하려고 했다. 

..."남편이 없다고 한 네 말은 옳다."하고 최소한도로 돌이킬 수 있는 의도가 있었다. 참고로, 사람들을 돌이키도록 하려는 사람은 그들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선한 본성이 되찾아질 희망이 있게 된다. 반면 그들을 더욱 질책해서 악화시킨다면, 그들의 악한 성질이 더욱 악화될 것은 분명하다.

3. 대화의 다음 주제는 "예배의 장소"에 관한 것이다(19-24절).

(1) 예배의 장소와 관련하여 여자가 그리스도에게 제시한 양심의 소송을 보자(19,20절).

① 여자가 예배의 장소를 말한 유인(誘因). 

..."주여,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입니다." 여자는 예수가 책망한 사실이 진실임을 부정하지 않고, 묵묵히 책망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의 쓰라린 허물이 건드려졌을 때 격분하는 것처럼, 이 여자는 격분하지 않았으며,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가식이 있다고 그의 책망을 비난하지 않고, (드문 일이지만)자기의 잘못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고 여자는 한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첫째, 여자는 그에 대하여 존경을 가지고 말하며, 그를 "주님"으로 (참되게) 부르고 있었다. 

-- 이와 같이 우리도 우리와 신실하게 사귈 수 있는 사람을 존경해야 한다. 이것은 여자를 책망하는 그리스도의 은유함의 결과이다. 그는 여자에게 불쾌한 말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 말씨는 어떤 사람에게도 받아 보지 못한 온유함이었다.

둘째, 여자는 그를 한 사람의 선지자로 알고 있다. 

-- 즉 하늘 나라와 통하는 사람으로 여겼다. 사람의 마음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능력과 양심의 은밀한 죄까지도 정죄함은 그의 신적인 권위를 나타낼 수 있는 위대한 증거이다(고전 14:24, 25).

셋째, 자기에게 좀더 가르쳐 줄 것을 여자는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녀의 마음속은 이제 Q께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 예배하며 기도하고 싶은 마음의 열정으로 가득차게 되었음이 틀림없다!!))  

-- 책망하고 있는 자에게 대해 화내지 않으며, 또 그렇다고 책망자를 피하지도 않는 많은 사람들은 표현만 안할뿐이지 책망자를 실지로 내심 "두려워한다." 그로 인해 경원시 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 여자는 자기의 잘못을 제대로 그러나 연민의 마음으로 부드럽게 한 편 날카롭게 드러내어 지적해 주는 책망자와 오히려 기꺼이 더 이야기하기를 바라고 있다.

② "공적인 예배 장소"에 관해 여자가 제의한 내용을 보자. 

...어떤 자는 여자가 자기의 죄를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회피하려는 태도라고 여기고 있다. 종교의 논쟁은 흔히 열렬한 신앙심에 대한 큰 반감을 드러내곤 한다. 그러나 이 여자는 좋은 의도로 말한 것처럼 보인다. 

...여자는 (이제 제대로 깨닫고 마음깊이 회개하며 갈망하는 바)자기가 하나님에게 (참되게) 예배드려야만 하며, 그 예배가 올바로 드려지기를 갈망했다. 그러므로 선지자를 만나서 그의 가르침을 청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을 알 수 있는 모든 기회들을 이용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다. "가르치기에" 알맞은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는, "기꺼이 배우자." 또한 "좋은 대답"이 나올 수 있는 사람에게는 "좋은 질문"을 하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심지어 거짓 신을 섬길 만큼 어리석지만, 아무에게도 예배드리지 않는 짐승 같지는 않은 자들)의 예배를 하나님은 받으실 것이며, 그분에게 드리는 예배는 아주 중요한 일이라는 것에 서로 일치하고 있다. 예배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논쟁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가 난감한 것은,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예배의 "장소" 때문이다. 이 예배 장소에 대한 여자의 이야기를 보자.

첫째, 사마리아 사람들의 생각을 보자. 

-- "우리 조상들은" 동네와 우물이 가까운 "이 산에서 예배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성전은 산발랏이 건립했다. 그녀는 거기의 편들에서 다음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즉, 성전이 어느 곳에 있든, 그 장소는 거룩한 곳이다. 그러한 곳중 하나가 이 그리심산이다. 이 산은 하나님의 축복이 베풀어졌던 곳이다. 어떤 자는 이 곳에서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았고(창 10:6, 7). 야곱도 제단을 쌓았다고(창 33:18-20)여기고 있다. 또한 관습을 변호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이 이 산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여인은 그들의 유물과 전통 그리고 상속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온 전통을 받았다"는 말 자체가 무익하다. 

-- 그 여자는 "조상을" 자랑할 만한 근거가 거의 없다. 안티오커스가 유대인들을 탄압했을 때,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과 함께 고난받기를 두려워한 나머지 유대인들과의 모든 관계를 비난했을 뿐만 아니라, 이 성전을 쥬피터 올림푸스에게 바치자는 안티오커스에게 항복했기 때문이다(조세푸스의 고대사, 9권 12:7).

둘째, 유대인은 말하기를 예배드릴 장소가 예루살렘에 있다고 한다. 

--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의 오경을 정경으로 결정하며, 그것"만"을 경전으로 채택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선택할 장소가 자주 언급되지만, 그 곳의 이름은 아직 알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은 과거의 많은 영광들을 이미 잃었기 때문에 다른 장소에다 제단을 쌓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2) 예배의 장소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을 보자(21절). 

-- 가르침을 받으려고 그리스도에게 전념하는 사람들은, 그가 "온유하고 겸손하게" 가르친다는 것을 알게 된다.

① 여자가 예배의 장소에 대하여 물었을 때(21절), 그리스도는 예배 장소 문제 그것을 "하찮게" 여기고 있다. 

..."여자야, 네가 나를 선지자로 알고 있는 바,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하라. 하늘의 어떤 계시나, 뚜렷한 섭리에 의하여, 이 문제가 확정되는 때가 올 것으로도 생각하고 있으나, 내가 말하노니, 그 때가 가까이 왔고, 그것이 이제 매우 떠들석하게 했던 문제들이 순식간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리라." 

...우리도 한때는 크게 비중을 차지하던 일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냉정히 생각해야 한다. 사람들이 고심했던 바로 그 문제가 지나가 버리고 만다. "이 산에도 말고 예루살렘에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에게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첫째, 예배의 대상은 여전히 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으로 되어 있다. 

...이방인도, 유대인도, 또 사마리아인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생각에서 하나님을 예배한다.

...어느 시기에 가면 예배 장소에 대한 아주 미묘한 차이들이 없어질 것이다. 

...점차로 유대의 관습이 소멸되고, 복음주의적 국가가 건립되리라. "대체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며, 모두 "공통적인" 것으로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예배드리는 장소에 대해서는 어느 장소이든지 거의 무관심한 일로 여기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어느 장소(이 곳이나 저곳)에 매여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 아래서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율법 아래에서처럼 어느 장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기도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가능하다(딤전 2:8; 말 1:2). 이성을 통하여 우리는 어떤 예배의 장소가 "품위"가 있고 "편리한지"를 알 수 있지만, 신앙은 장소의 우열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거룩성과 알맞은 곳을 선택한다. 세워진 집이나 예배 처소 때문에 그곳에서의 예배를 우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장소가 문제가 안 되는 그런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모르는 처사이다. 성전 때문에 이름난 예루살렘이나 불경건으로 소문난 사마리아 산이나 마찬가지다.

② 그는 다른 일들 즉 예배 문제를 "강조하고" 있다. 

...예배 장소를 무시했을 때, 그것이 예배 자체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이완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교훈을 좀더 충분히 전하려는 기회를 얻으려고 했다. 첫째, 현재의 논쟁에서, 그는 사마리아인의 예배를 반대하고, 우대인의 예배를 지지하고 있었다(22절). 여기서 여자에게 말하기를

1. 사마리아인들은 확실히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했다. 

-- 즉 사마리아인들이 단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이 아니라(물론 예루살렘이 선택된 것은 아직 유효했었다). 그들의 예배가 목적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만일 그 예배가 올바로 되었다면, 예루살렘과의 이러한 분리는 "산당"에서의 예배처럼 묵인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도 못하는 것에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참 신(에 4:2; 왕하 17:32)에게 예배를 드리지만, 굉장한 무지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이방의 신들처럼의 하나님으로(왕하 17:27, 33) 또는 편파적인 하나님으로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하나님은 우주의 근거이시고 주재자로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무지"란 신앙심의 어머니가 되기는커녕 신앙심의 "살인자"이다. 하나님을 무지(無知)하게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눈먼 제물을 드리며, 그것이야말로 "바보들의 제사"이다.

2. 유대인들이 옳음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왜냐하면

(1) "우리는(유대인은) 예배드리는 대상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우리는 예배의 분명한 근거들을 가지고 드리고 있다. 그가 성서에서 자신을 드러낸 그대로이다. 성서에 의하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완전한" 지식이 아니지만 "확실한" 것이다) 얻은 사람들은, 자신들에게는 "만족스럽고," 하나님에게는 "열납 될" 수 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예배드리는 대상을 알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예배의 타락상들을 책망하고 있지만(마 15:9), 여기서는 예배 자체를 옹호하고 있다. 

-- 장소는 순결하고 순수하지가 않지만, 예배만은 "진실 될" 수 있다. 우리 주 예수 자신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에게는 알려지기를 기뻐하셨다. 우리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비록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그 아들은 자유한 아들이다), 겸비의 시절에는 "복종을 배우셨다."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라도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하찮게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도 그렇지가 않으셨다.

(2) "구원은 유대인들에게 속해 있다.

-- 때문에, 그들은 예배의 대상을 알고 있었으며,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모두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니고, 이방인들과 사마리안인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의의 역사하심을 알고 받아들이는 모든 자가 하나님께 열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한 구원의 저작자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하면 이스라엘인에게서 나오셨고, 그들에게 나타나셨으며(롬 9:5), 그들에게 먼저 보내어졌다.

영원한 구원의 수단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구원의 말씀(행 13:26)이 유대인에게서 나왔다." 

...그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전해졌고, 다시 그들을 통하여 다른 민족들에게 퍼졌다. 이 말씀이 그들로 하여금 헌신토록 하는 하나의 참다운 인도자였으며, 그들은 이 말씀에 따랐고, 그래서 그들이 예배하는 대상을 알게 되었다. 저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맡겨졌고(롬 3:2), "하나님의 예배"도 맡겨졌다(롬 9:4). 이와 같이 유대인들에게는 특권이 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이 그들과 견주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둘째, 그는 하나님만이 받으시고, 매우 기뻐하실 복음적인 예배를 설명하고 있다. 

-- 예배 장소에 "무관심"을 나타냄으로써, 근 필요하고 근본적인 것, 즉 우리가 "영과 진리로" 하나님에게 예배드려야 한다는 것(23,24절)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장소에 중점을 둔 게 아니라, 그에게 예배드리는 우리의 마음 상태에 중점을 두고 있다. 대수롭지 않은 종교 문제에 있어서 차이점들을 해소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보다 더 중요한 것에 열심을 내는 것이다. 날마다 "영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관심사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에게 드릴 예배의 장소가 거의 문제되지 않는다. 

-- 그리스도는 사마리아인 보다는 유대인의 예배를 분명히 좋게 보았으나, 여기에서 그는 그 예배의 불완전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 예배는 의식적(意識的)이었다(히 9:1, 10). 예배자들은 일반적으로 "속된"자들이며, 거룩한 예배의 내적인 부면에 대해서는 낯선 자들이었다. 우리는 마땅히 되어야 할 그 만큼은 못되지만 우리의 이웃들보다는 나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예배 "대상"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예배의 "태도"에 있어서도 옳아야 된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여기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제 관찰해 보자.

a. 이러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혁명, 아버지에게 예배할 때가 오는데, "그때가 지금이다." 

...즉 정해진 때로써, 그 때는 옛날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그러한 예배가 나타나는 때란 어김없이 정해져 있어서, 하나님의 계획들은 아주 정확하고 틀림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 "지속"의 시기가 한정되어 있다. 은혜 받을 때가 바로 지금이다(고후 6:2). 

...이 때가 넘치는 권능과 광채와 완전함으로 오고 있다. "현재"는 무르익지 않고, 어린아이의 상태와 같다. "그 완성의 때는 오고 있으며," 현재는 그 완성의 때를 준비하고 있다.

b. 복된 변화, 복음의 때에는 "참다운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에게 예배할 것이다." 

...피조물인 우리들은 "만물"의 아버지에게 예배해야 한다. 기독교인인 우리들은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에게 예배드려야 한다. 이제 변화가 올 것이다.

(a) 예배의 "성질"의 변화, 

-- 그리스도인들은 모세가 만든 의식의 관습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으로 고무되는 "영적인"예배를 드리게 된다.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예배의 방법은 합리적이고, 이지적이며, 구약의 예배를 어둡게 뒤덮고 있던 외적인 의식들과 제도들을 탈피했다. 이것이 유형적인 예배와는 대조되며, 진정한 예배라고 불리워진다. 

-- 율법적인 예배는 참 예배의 그림자이다(히 9:3, 24). 기독교로부터 유대주의에로 돌아가는 것은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끝나는" 자들이라고 했다(갈 3:3). 구약과 신약의 제도 사이의 차이란 이와 같다.

(b) 예배자들의 "기질"과 "성격"에 있어서 다르다. 

-- 진정한 예배자들은 위선자들과는 구별되는,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과 진리로" 하니님을 마땅히 예배할 수밖에 없고, 또한 할 것이다. 이것은 저들의 특성이듯(23절), 또한 저들의 의무 또한 할 것이다. 이것은 저들의 특성이듯(23절), 또한 저들의 의무24절)이다. "영과 진리로" 하나님에게 예배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예배하는 사람 모두에게 요청된다. 우리는

[a] "영으로" 하나님에게 예배해야 한다(빌 3:3). 

-- 우리는 그의 감동하심과 역사하심이 우리의 심령에 미치도록 하여, 능력과 도우심을 받도록 하나님의 영에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심령이 하니님을 섬기고, 봉사도록 해야 하며(롬 1:9), 확고한 사상과 열정적인 사랑으로써, 또한 우리 안에 있는 전부로써 그에게 예배해야 한다. 

-- 성령은 때때로 부패한 "육"에 반대되는 새로운 본성을 나타낸다. 우리가 "영으로" 하니님에게 예배한다는 것은 우리가 "은혜로" 그에게 예배한다는 것이다(히 12:28).

[b] "진리로" 즉 "신실로" 예배한다. 

--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요구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진실도 요구하신다(시 51:6). 우리는 형식보다는 능력에 유의해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에 목표를 두어야지, 인간들의 영광에 목표를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참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10:22).

세째, 하나님에게 이와 같이 예배해야 할 이유들을 암시하고 있다.

a. 복음의 시대에는, 그런 자들만이 참 예배자들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 복음이 영적으로 드리는 예배 방법을 수립하였으므로, 만일 그들이 "영과 진리로" 하나님에게 예배하지 않는 다면, 그들이 고백하는 복음이 진실이 아니며, 복음의 빛과 방법대로 않는 것이다.

b. "아버지가 그와 같이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a) 그와 같은 예배자들이 아주 희귀하며, 좀처럼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렘 30:21). 영으로 예배하는 길은 협소하다.

(b) 그와 같은 예배는 필요하며, 하늘의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바이다. 

-- Q게서 예배자들을 "조사하러" 오실 때는, 누가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는가?" 하는 것을 묻지 않고 "누가 영으로 예배를 드리는가?"하고 물을 것이다. 그것은 시금석이 될 것이다.

(c) 하나님은 그와 같은 예배와 그와 같은 예배자들을 아주 기뻐하시며, 영광스럽게 받으신다. ...."나는 그와 같은 예배자들을 아주 기뻐하시며, 영광스럽게 받으신다. "나는 그와 같은 것을 바라고 있다"(시 132:13, 14; 아 2:14).

(d) 그와 같이 예배자들의 남은 자들이 있었고, 마지막 날까지 있게 될 것이다. 

-- 그가 그와 같은 예배자들을 "찾는다'는 것은, 그가 사람들을 그와 같이 "만들고" 있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제까지 모든 세대에 걸쳐서 "영으로 드리는 예배자들"을 자기에게로 모으고 계신다.

c.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선포하시려고 오셨으며(1:18). 이 말씀이 하나님에 관한 그의 선포였다. 그가 이 말을 불쌍하고 초라한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했다. 그것은 가장 비천한 자도 하나님을 알려하기 때문이며, 이런 의도로써 예배에 관한 몇의 오류들을 고쳐 주고,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에 공헌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a)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그는 영원하고 불멸하시며, 이성적인 존재이며, 일시적이 아니고, 물질적이 아니고, 보이지 않고 타락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다라고 말하기 보다 ××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게 쉽다. 영은 "육과 뼈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 "누가 성령의 방법을 알겠는가?" 만일 하나님이 "영"이 아니시라면 "불완전하고," 제한되어 있고, 영원하시지 않고, 독립적이 아니고, 영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

(b) 신성(神性)이 영성(靈惺)이라는 것이 영적 예배의 아주 좋은 근거이다. 

...만일 우리가 영이신 하나님에게 예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 수 없으며, 예배 행위를 할 수 없고, 그의 은혜와 용납하심을 차지할 소망을 가질 수 없고 예배의 목적을 잃게 될 것이다(마 15:8, 9).

4. 여자와의 마지막 대화 주제는 메시야에 관한 것이다(25,26절). 이제 자세히 살펴본다면,

(1) 메시야를 기다렸던 여자의 믿음을 보자.

--  "나는 메시야가 와서,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 해 주리라고 믿습니다." 여자는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어떠한 것도 반대하지 않았다. 여자는 잘은 모르지만, 그의 이야기에서 그가 기다렸던 메시야임을 추측했고, 그러한 암시를 받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제까지의 자기 고집을 중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겼다. 

--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은 "자기 손안에 있는 것의" 값을 알지 못한다(잠 17:16). 왜냐하면 그들은"눈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며, 현재 그들이 무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① 여자가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냐? "나는 메시야가 오실 줄을 알고 있습니다." 

--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비록 심한 적대 관계에 있지만, 메시야와 그의 나라가 오심을 서로 기대하고 있었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의 법전들을 받아서, 선지자들과 유대 나라의 소망에 대해서는 낯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메시야가 오셨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메시야에 대한 기대는 일반적이었고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유대로부터 주권이 나누어져, 다니엘이 예언한 기간이 거의 만기가 되었기 때문에) 이전보다 더 다가왔다. 그래서 여자는 메시야가 오실 뿐만 아니라 그가 바로 오실 메시야라고 생각했다.

-- 메시야는 그리스도라고 불리워진다. 비록 그가 히브리말인 메시야로(여자가 존경으로써 거룩한 말로 사용하며, 유대 교회에서도 그 말을 친숙하게 사용한다) 불리어지지만, 이방인들에게도 사용토록 적은 복음 기자는 같은 의미인 그리스말로써 메시야를 그리스도로 표시하고 있다. 이 그리스도란 말은 사도들의 규례에 따라 주어진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으로,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거나 제나라 말로 불려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해석을 해 주어야 한다(고전 14:27, 28).

② 여자가 그에게 기대했던 것은 무엇인가? 

-- "그는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하나님에 대해, 예배에 대해서 모두 이야기해 줄 것이며, 우리의 결점들을 충족시켜 주고, 우리의 잘못들을 확인시켜 주어서, 우리의 논쟁들을 모두 끝나게 해 죽 것입니다. 또한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충분하고 분명하게 말해 주어서 어떠한 것도 밝혀 줄 것입니다."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첫째, 이미 발견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 미흡하고 온전하지 못하며, 그들의 예배 규칙도 그러하다. 

...게다가 "예배의 규칙만으로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종교 문제에 있어서 어떤 큰 개선과 향상 즉 개혁의 시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둘째, 이런 변화를 일으키는 메시야의 능력에 대하여, 

..."그는 알려고 하는 바 즉 우리가 무지 속에서 논쟁하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말하여 줄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진리로 인도해서 잘못의 안개를 걷히게 함으로 평화를 줄 것입니다." 

...이것은 어두움 속에서 빛이 말하는 것으로써, 선한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당황해서 방황한다면, 그들에게 "메시야가 오셔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말씀해 주실 것이라"는 말에 만족을 느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에게 그의 재림에 관한 말씀과 같다. 우리는 지금 거울을 통하여 보지만,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로" 대하게 될 것이다.

(2) 그 자신을 여자에게 알리는 우리 주 예수의 은혜, "네가 말하는 내가 그 사람이다" (26절). 

-- 그리스도는 천한 사마리아 여자에게, 또 소경에게(9:37)서 처럼, 그렇게 분명히 자신을 그리스도로 직접적으로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불쌍하고 경멸받는 사람들을 존중해 주셨다. 이 여인에게는 그 당시에는 일반적이었던 확증의 방법인 그리스도의 기적을 볼 기회도 없었다. 하나님은 복음의 빛을 "얼굴에"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라고 "그 마음에는" 받게 해 줄 수가 있다. 그리스도는 겸손한 마음으로 당신께 가까이 오려는 자에게는 당신을 드러내신다. "네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니라."

--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그 여인에게 얼마나 친근하셨나를 보라. 그런데 그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 몰랐다(창 28:16).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부재를 탄식하며, 그의 출현을 고대한다. 그러나 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 말씀하시는 중인데도 그러한 그의 출현을 고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심"으로써 당신을 우리에게 알리신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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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의 복음(요 4:27-42)

Ⅰ. 제자들이 돌아옴으로써 "대화가 중단되었다." 

-- 얘기가 한참 절정에 이르렀을 "그때에 제자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여자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으며, 여자와 단독으로,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을 때의 처지를 다 잊어버리고서 그리스도께서 저렇게 비천한 여자하고 상대할 수 있을까 하고 의혹을 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잠자코 있었다. 그들은 필경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무엇하십니까?" 혹은 "왜 여인과 이야기합니까"하고 묻는 자가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언행은 다 좋은 것이다. 저들은 "생각"이 구구했겠지만 "아무말"도 안했다.

Ⅱ. 여인이 자기 이웃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알린 것을 볼 수 있다(28,29절).

1. 그녀는 "우물에 온 이유를 잊어버렸다"(28절). 

-- 그녀는 "제 길로 갔다." 그녀는 그리스도께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식사할 겨를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그와의 대화를 즐거워했다. 그러나 "무례"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예수께서 여행을 계속할 것이며, 따라서 급히 이웃 사람에게 알려야겠음을 알았다. 그녀가 시간을 얼마나 잘 쓰는가 보라. "선을 받을" 기회가 없어졌을 때에는 "선을 행할"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

-- 그녀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갔다는 사실이 지적되었다. 아마 그리스도에게 친절을 베푸는 뜻에서, 그리스도께 식사 때에 물을 들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혹은 마을을 빨리 달려가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또 물동이를 신경 안 쓴다는 듯 내버리고 간 것은 더 중대한 일을 알았기 때문이다.

2. 그녀가 "마을에 대한 심부름"을 얼마나 잘 했는가 보자. 그녀는 "마을로 들어갔다." 가서 "사람들에게"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했다. "와서,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는 분을 보십시오. 그가 그리스도가 아닐는지요?"

(1) 그녀는 자기 친구들과 이웃들이 그리스도를 알기를 몹시 바랐다(눅 19:9 참조). 

-- 그녀는 그들이 자기와 함께 기뻐하고, 동참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영광을 주셨는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도 그를 아는 영광을 누리도록 하자. 우리 자신이 더 큰 영광을 누리리라 기대하지 말자.

-- 이 여인은 사도가 되었다. 모든 내 이웃들이 내가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거하지만 특별히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어야 할 "책임"이 더욱 크다. "나무가 쓰러지면," 거기다 두고 이용하도록 하자.

(2) 그 여인이 이 나그네를 소개하는데 얼마나 정당하며 지혜로운 가를 보라. 그녀는 자기가 그를 경탄하게 된 이유를 솔직히 말해 주었다. "그는 내가 한 모든 일을 알아맞혔습니다." 

-- 그가 그녀의 남편에 대해 들려 준 이야기는 모두가 사실이었다. 그는 그녀의 양심과 하나님만 아시는 일을 그녀에게 해 주었다. 특별히 두 가지가 그녀를 움직였다.

첫째, "그의 지식의 범위"였다. 

-- 우리는 한 일조차 모두 기억해 낼 수 없다. 그러나 예수는 인생들의 모든 것을 아신다(히 4:13 참조).

둘째, "그의 말의 권능"이었다. 

-- 그것이 그녀를 크게 감동시켰다. 즉 그가 그녀의 "은밀한 죄"를 말해 주었다는 점이었다. "내 죄를 죄다 말해 주던 그 사람을 와 보십시오." 흔히 생각하기로는 그녀가 다시 입에 오르내리기를 부끄러워할 것 같은 사실을 그녀는 오히려 강조했다.

-- 우리를 겸손케 해 주고 죄를 깨닫게 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지시(앎)은 가장 건전하고 구원을 주는 것이다.

-- 그녀는 "와서 보라"고 그들을 초청했다. 그저 "와서 구경하라"는 것이 아니다(그녀는 그들에게 어떤 구경거리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니다). "와서, 그와 이야기하고 그의 지혜를 들으라. 내가 했던 식으로 하라는 이야기다. 그녀는 자기가 설득 받게 된 그 논증을 펴서, 남들도 설득시키려고 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진리의 증거를 보았다 해서 모든 사람들이 남들에게 그것을 보게 해 줄 수는 없다.

-- 그때 그리스도는 마을의 끝에 있었다. "지금 와서 보시오." 예언자들과 왕들이 보고 싶어했던 그분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그냥 넘길것인가? 그녀는 "그들에게 호소"하기로 결심했다. "이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그녀는 날들에게 자기의 믿음을 강요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제시만 했다. 이와 같이 정당하고 설득력 있는 호소는 때때로 본인들이 알기도 전에 그 양심을 차지해 버리기도 한다.

(3) 그녀는 이 초청에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사람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왔다"(30절). 

-- 그들이 그에게 나왔다. 사람을 불러 그를 마을로 들어오라고 하지 않고, "그들이 갔다."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곳에 가야 한다.

Ⅲ. 여인이 없는 동안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하신 대화를 살펴보자(31-38절). 주께서 "시간 절약"에 얼마나 민감하신가 보라. 우리도 이토록 시간의 부스러기를 주워 모은다면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하는 것이다. 이 대화에서는 두 가지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1. 그리스도께서 자기 일을 얼마나 즐겁게 하는가를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전적으로 일에 사로잡힌 그런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

(1) "그는 일을 위해서 식음을 잊으셨기" 때문이다. 

-- 예수는 우물가에 않아 있을 때 피곤하여 휴식이 필요한 처지였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기회가 오자, 그는 피곤과 시장기를 잊어버리셨다. 그리고 그는 "음식"을 별로 생각지 않았으므로, 그의 제자들이 식사를 하시라고 당부해야 될 정도였다. "선생님, 청컨대 잡수십시오." 이것은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사랑의 일면이다. 그러나 더욱 큰 것이 있다면, 이것은 영혼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단면도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도 음식 생각을 안하시므로, 제자들은 자기가 없는 동안에 누가 음식을 많이 가져다 준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39).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을까?" 그리스도께서 너무도 식욕을 보이지 않으시므로, 이미 배불리 먹은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2) 그는 "자기의 일을 음식 삼았다." 

--여자에게 교훈을 주면서 그가 "한" 일, 사마리아인들에게 "해야 할" 일, 이것이 그에게는 성찬을 좋아한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단지 영혼을 구제하는 선한 일의 기회를 요구했다.

-- 사실 이것은 제자들도 "알지 못하던 음식"이었다. 선한 일의 기회를 요구했다. 선한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으리라. 그들은 남들이 알지 못하는 음식을 가지고 있고, 어떤 나그네도 간섭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그 식사를 한다.

-- 예수의 이 같은 말이 그들에게 질문을 가져 왔다. " 누구 그에게 먹을 것을 가져 왔을까?" 그의 일이 그의 음식이었던 이유는 그것이 아버지의 일이요,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내 음식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34절).

-- 죄인을 구원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요, 그 구원을 위해 그들을 가르치는 것은 "아버지의 일"이다. 예수는 이 일을 자기의 임무와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의 몸이 음식을 필요로 할 때, 그의 마음은 자기가 목마른 자들과 갈급한 자들, 즉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자들을 잊고 있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는 "열심으로," "철저히" 그 일에 임했고, "그의 일을 완수하신다." 그는 결코 도중에 물러나지 않으리라고, 결심을 했다. "다 마쳤다"는 말을 할 수 있기까지는 결코 일을 집어치우는 일을 하지 않을 각오였다.

--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출발하나 마지막까지 열심을 내어 일을 다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2. 또한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일에 근면해야 됨을 주지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은 "그와 함께" 일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를 닮은" 일군들이어야 한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복음 전파"였다.

-- 그리스도는 그 일을 여기서는 "추수"에 비교하고 있다(35-38절). 추수 때는 "바쁘다." 그때는 모든 일손이 등원된다. 추수란 그 때에 맞는 때에 해야 되는 일이며, 때가 지난 다음에는 소용없는 일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3가지 일에 열심을 내라고 암시하신다.

(1) 그것은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부지런히 깨달으라는 것이다. 

-- 때가 절박하다(35절). "너희는 아직 추수 때가 넉 달이 남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들이 이미 희어졌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말씀이었다.

-- 하나님은 매년 추수를 약속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추수의 기간"을 지정해 주셨다. 따라서 언제쯤이면 추수를 해야 되는지 알 수 있다.

-- 그런데 그리스도는 지금 "복음의 추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보라. 들이 이미 희어져서, 추수를 기다리는도다." 여기에서, 지금 "그가" 해야 할 추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음식을 권했다(31절). 그러나 그는 말씀하셨다. "먹어라. 나는 해야 할 다른 일이 있는데, 그것은 더 긴요하다. 보라, 이미 복음을 받으려고 준비하고서 이리로 오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라." 

--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앞을 다투어 모여들 때, 주의 일군들은 더욱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을 내어 복음을 전하게 된다. 들의 곡식이 다 익어서 수확을 기다리듯, 이미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 들이 "추수를 위해서 희어졌다," 사실 지금이 그 일을 할 저기라는 표정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그만큼 열심히, 용기 있게 해 나갈 수 있다. 

....세례자 요한은 "주를 위해서 사람들을 준비시켰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기 시작하자, "모든 사람들이 그리로 들어가기를 힘쓰고 있다"(눅 16:16). 따라서 지금이야 말로 "낫을 댈"때다. 지금 일해야 될 "필요"가 있다. 익은 곡식을 추수하지 않고 그냥 두면 "알곡이 떨어져" 도망간다. 뉘우치고 있는 영혼들에게 즉각적인 도움이 없으면, 그들의 좋은 시작도 무위로 끝나게 된다.

(2) 제자들 스스로도 득을 보게 되는 그 일은 "유익하고" "좋은"것 임을 말해 주셨다. "

-- 수확하는 자는 삯을 받는다" (36절). 그리스도의 추수군은 자기들이 엄한 주인을 만났다고 말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의 일에는 "그 자체의 삯"이 있다. 그리스도의 추수군들은 "열매"를 갖는다. "그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열매를 거두게 된다." 즉 그는 자신을 구할 뿐 아니라 그의 말을 듣는 자들까지도 구원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실한 일군들의 보람이다. 즉 그들의 일이 귀중한 영혼을 영원한 생명에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 그들은 "즐거움"을 누린다. "씨를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리라." 선한 사업을 시작한 행복한 도구가 되었던 목회자가 바로 "씨뿌리는 자"이다. 그리고 그 일을 수행하고 완성시키는 목회자가 바로 "거두는 자"이가. 그런데 그들이 다 줄거워하리라. 수확하는 자는 "추수의 기쁨"에 참예한다.

(3) 그것은 "쉬운"일이다. 이미 앞서간 사람들이 절반해 놓은 일이라고 했다. "한 사람은 뿌리고, 한사람은 거둔다"(37,38절). 

-- 모세, 예언자들, 세례 요한 등등이 복음에 이르는 길을 "닦아 놓았다." "나는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것을 거두게 하려고 너희를 보낸다." 이것은 구약 성서의 목회의 두 가지 일을 암시해 준다.

첫째, 구약의 목회는 신약의 목회에 비해서 대단히 미흡하다. 

-- 모세와 예언자들이 씨를 뿌렸으나 "거두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들의 저작이 오히려 그들이 한 전도보다 더 많은 유익을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둘째, 구약의 목회는 신약의 목회에 대단한 "이바지"를 하였다. 

-- 그 길을 마련한 셈이다. 예언자들이 씨를 뿌려 놓지 않았더라면, 이 사마리아여인이 "우리는 메시야 올 줄 압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목회에 대한 "두 가지"를 암시한다고 볼 수도 있다.

첫째, 그것은 "열매 있는" 목회이다. 그들은 풍년에 추수를 하는 자들이다.

-- 또 그것은 예언자들의 글에 의해서 잘 "촉진되어 온"일이다. 예언자들은 "눈물로 씨를 뿌리면서," "우리는 공연한 짓을 했도다"하고 탄식했다. 

-- 그런데 사도들은 즐거이 거두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는 항상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 주십니다"고 말한다. 죽어 저 세상으로 간 목회자들의 수고로 인해서 뒤에 남아서 그들을 계승한 목회자들이 많은 유익한 결실을 얻는다.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우리 앞서 간" 사람들을 인해서 주님께 감사해야 됨을 깨닫는다. 우리는 "그들의 수고에 들어간다."

Ⅳ. 이 그리스도의 방문이 사마리아인들에게 끼친 "좋은 영향"을 살펴보자(39-42절). 그들은 어떤 인상을 받았는가?

1. 그리스도에 대한 "그 악인의 증연"은 무엇을 주었는가? 그런데 그녀의 증언이란 바로 이것이다. "그는 내가 한 모든 일을 알아맞혔소!" 두 가지를 보자.

(1)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신용"하게 되었다. "그 동네에서 온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 여인의 말을 인하여 그를 믿었다"(39절)고 했다.

-- 그를 믿은 자들은 누구인가? "많은 사마리아인들"이었다.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집 자손들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들의 신앙은 이방인들의 "신앙의 전조"였다 하겠다.

-- 또 어떤 계기로 믿게 되었는가? "그 여자의 말을 인해서"이다. 이 점을 살펴보자.

첫째, 하나님은 때로는 아주 연약하고 가망없는 자를 도구로 살아서 선한 일을 시작케 하시고 진행시키기를 아주 즐겨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작은 불씨가 얼마나 큰 것을 태우는가를 본다. 

...우리 구주는 한 가련한 여인을 가르침으로써 온 마을에 당신의 교훈을 전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목회자는 그들의 설교를 "부주의"하게 하지 말 것이며, 아무도 그들의 설교를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말을 듣는 자들 역시 설교를 "업신여기지"를 말아야 한다. 그들의 말을 듣는 자들이 수가 "작고," "미천하다" 해도 상관없다. "그들에게" 선을 행하면, 그 결과로 "많은 이"들에게 선을 행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를 자기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그대로 증거 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를 엿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영혼을 위해" 하신 일을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자들이 가장 훌륭한 주님의 종들이 될 수 있다.

(2) 그들은 "그에게 머물러" 달라고 청했다(40절). 

-- 그들은 예수께로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해"달라고 청했다. 그들은 그 여자의 말을 믿고 그가 예언자라고 믿었고, 그래서 "그에게 왔다. 그리고는 그를 "보고," 그를 예언자로 존중했다. 그들은 그가 자기들에게 머물러 있어서 자기들이 "그를 존경한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또한 그러면 그들은 그에게서 더 많은 교훈을 얻을 수도 있었다. 

-- 사람들은 흔히 자기들의 "장래(운수)"를 말해 주는 사람에게 떼지어 몰려든다. 그러나 이 무리들은 자기들의 "과오"를 이야기해 주는 사람에게 몰려들었다. 유대인들은 그를 내쫓았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은 그를 초대하였다.

-- 복음의 성공의 "증거"는 언제나 그 "가망성"에 달려 있지 않으며, "기대한"것과 그 결과가 항상 일치하지도 않는다.

-- 그리스도는 그들의 청을 수락했다. 그는 "거기서 머물렀다." 그는 선을 베풀 기회가 주어지자 "거기에 머문"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41,42절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무슨 말, 무슨 행동을 했는지는 언급이 없다. 그는 아마 자기가 메시야라는 것을 그들이 믿을 수 있도록 언행을 했을 것이다. 일군의 노고는 그 결실이 잘 입증해 준다. "이제 그들이 직접 그를 보았다." 그리고 결과는 이것이었다.

① 그들의 수가 늘어났다(41절). "더 많은 사람이 믿었다"라고 했다.

② 그들이 "이제는 그녀의 말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42절). 이러한 그들의 신앙 성장속에서 세 가지를 찾아보자.

첫째, 신상의 내용의 성장이다. 

-- 그들은 그 여자의 말만 들었을 때는 그를 예언자로 믿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직접 그와 대화를 나누었으므로 "그리스도" 곧 "기름부음 받은 자," "메시야," "구세주"라고 믿고 있다. 그들은 그가 유대인만의 구주가 아니라 "세상"의 구주라는 것을 믿는다.

둘째, "확신"의 상징이다. 

-- 그들의 신앙은 이제 완전한 확신에 도달했다. "우리는" 이 분이 정말 "그리스도"인줄 "압니다."

세째, 그 신앙의 근거의 성장이다. 

-- "이제 우리는 그녀의 말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보았기 때문이오." "우리가 직접 그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믿습니다. 우리는 이 분이 그리스도라는 것에 아주 만족하여 자신합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들음"에서 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믿음은 "사람들의 보고"를 들음으로써 "시작된다." 부모와 설교자들의 교훈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친근해지게 한다."

-- 믿음은 그리스도 자신의 증거를 들음으로써" 성경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의 말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영생을 발견했기에 믿는다. 우리의 신앙은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에서 산다"

이리하여 사마리아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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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에서의 제2의 기적(요 4:43-54)

Ⅰ. 그리스도께서 갈릴리에 "들어오셨다"(43절). 

-- 그들을 떠난 "이틀 후"였는데, 그것은 "다른 동네에도 복음을 전파해야"했기 때문이다(눅 4:43). "그는 갈릴리로 들어가셨다."

1. 그리스도가 가신 곳은 어디냐? 갈릴리이다. 그러나 그의 "고향"나사렛은 아니었다. 

-- 여러 마을을 두루다니셨지만, 나사렛에 가시기는 꺼렸다. 여기에 예수께서 자신을 변호하신"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가까운 친척들이 그리스도를 가장 경멸적으로 말했다(7:5). 

-- 인간은 교만하고 시기하는 존재라, 한때 자기들과 같은 학교에 다녔거나 같이 놀던 자들에게서 배우게 되는 것을 싫어한다. 하나님이 자기의 종들을 업신여기는 동네에 복음을 전하지 않으시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전달자를 멸시하는 자들은 그 전달자가 가져 올 메시지를 알지 못하게 되고, 그것이 줄 혜택도 못 누리게 된다.

2. 그가 마을로 들어갔을 때 갈릴리 사람들은 그를 환영해 주었다(45절). 그들이 "그를 영접했다"고 했다. 

--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이 공연히 보내어지지는 않는다. 그들은 어떤 자들에게서 존경을 받지 못하게 되더라도 다른 어떤 자들에게서는 받으리라.

-- 여기에 보면 왜 갈릴리인들이 그렇게 그리스도를 잘 받아들였는가에 대한 이유가 나와 있다. 즉 그들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행한 기적들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다(45절). 그들도 절기를 맞아 예루살렘으로 갔다. 곧 "유월절을 맞아 갔고," 그래서 그리스도와 친숙해진 것이다. 공중 예배 의식에 부지런히 참례하는 자들은 때로 자기들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영적 혜택을 입게 된다.

-- 예루살렘에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보았다." 그 기적들은 예루살렘에 있던 자들을 위해서 행한 것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 대상자들이었던 예루살렘 사람들보다도 갈릴리 사람들이 더 유익을 얻게 되었다. 이와 같이 "혼합된 군중"에게 전파된 말씀은 정규적인 청중 이외에 "우연히 참여한"자들을 감동시킬 수가 있다.

3. 그는 어느 동네로 가셨는가? 그는 갈릴리 가나를 선택하셨다. 그곳은 바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곳이었다(46절). 

-- 이 기적이 여기에서 다시 언급된 사실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역사를 "일단 보았으면" 그것을 잘 기억해 두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Ⅱ. 거기서 "귀족의 아들"을 고쳤다. 이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다.

1. 간청하러 온 사람과 돌보아 달라고 간청하는 그 환자는 "귀족(귀인)"이었다. "왕의 신하 한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

...아버지는 왕의 신하로서 귀인이었지만, 그 아들은 앓고 있었다. 관작과 명예로운 칭호자라도 질병으로 인한 죽음의 공격에서 면제될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는 15마일이었다. 우환을 당한 이 가정은 15마일이나 되는 먼 곳에 있었지만 사람을 보내어 그리스도를 청했던 것이다.

2. 그 탄원자는 의사에게 "자기의 처방"을 지시했다. 그는 직접 예수께 가서 "가버나움으로 내려오셔서 제 아들을 고쳐 주십시오"(47절). 

...물론 여기에는 자기 아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깃들어 있다. 아들을 돕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고도 아끼지 아니할 것이다. 또 우리 주 예수께 대한 지대한 존경심도 엿볼 수 있다. 그가 직접 예수께 나아왔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에게 간청했다"고 했다. 그는 관직을 가진 사람이라서 명령을 내릴 수도 있는 그런 처지에서 말이다.

...한편 그가 이런 사명을 띠고 온 데는 "신앙"도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 안에는 "신실성"이 들어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가 자기 아들을 고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약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멀리서는 고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오셔서 고쳐 달라고 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우리가 처방까지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자유는 없다. "주님 나를 고쳐 주십시오. 그러나 말씀으로든, 만져서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해야 한다.

3. 그는 예수께 점잖은 꾸중을 들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표적을 보지 않았더라면 믿지 않을 것이다.' 하셨다." 

-- 그는 비록 "귀족"이고 지금 아들 때문에 "근심"에 쌓여 있지만, 그리스도는 그를 책망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그의 좌와 약점을 지적하시어서, 자비를 받을 준비를 시킨 다음에 부탁을 들어 주셨다. 

--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총애"를 내려 주려 하는 사람에게 먼저 "분노"를 보이사 "겸손"케 만드신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다른 곳에서 행하였던 기적에 대해서 신빙성 있는 보고를 들었다. 따라서 자기들 눈으로 그 같은 기적을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존경을 받아야"하고, "기분을 맞추어 주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선생이라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여러 가지 기적들을 이미 보았다. 그런데도 표적과 기적에 의해서 "할 수 없이" 믿게 되기 전에는 믿으려 들지 않는다.

-- 말씀의 "신령한 권능"은 "그들을 감동"시키지 않았다. 그들에게 "매력을 끌지" 못했다. 단지 기적의 가견적(可見的)권능만이 그들에게 소용이 있었다.

4. 그의 말에는 계속 성급함이 깃들어 있다. "선생님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49절). 

-- 그는 책망을 인내심 있게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그리스도에게 정중히 말했다. 마치 그 책망을 불쾌히 여기지 않았다는 듯, 그는 그 책망을 부정적으로도 생각지 않았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요구를 내놓았다. 될 때가지 씨름할 판이었다. 그는 자기 아이의 문제로 깊이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밖에 다른 믿음은 연약했다. 그리스도가 자기 집까지 내려가 주어야 되겠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자기 아들에게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 그는 그리스도께서 "병든"아이를 고칠 수 있음을 믿었다. 그러나 "죽은"아이까지 살릴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너무 늦으면 죽을 줄 알았다. 그는 엘리야와 엘리사가 죽은 어린아이를 살렸다는 사실을 잊었다. 혹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그들의 권능만 못하다는 것인가? 그의 서두는 태도를 보라.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마치 그리스도께서 시간을 낭비할 위험이라도 있다는 식이다.

5. 그리스도께서 이에 대해 평화스런 대답을 주셨다(50절). "집으로 돌아가라 네 아들이 살리라." 

-- 그리스도는 여기서 당신의 "권능"의 실례를 보이셨다. 즉 당신은 병든 자를 살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쉽게 살릴 수 있음을 보이셨다. 여기에 무슨 "말"이나 "한"일, 혹은 하라는 "명령"도 없다. 그러나 치료가 되었다. 이 신하는 "그리스도께서 내려 와서, 자기 아들을 고쳐 주기"바랐으나, 그리스도는 그의 아들을 내려가지 않고 고치셨다.

-- 또 이렇게 치료가 빨리 됨으로써, 그 신하는 자기의 실수를 고쳤다. 그리고 신앙을 돈독히 했다. 이렇듯 매사에 그리스도의 방식이 더 우수하다.

-- 우리가 구한 것을 그가 부인하실 때는, 우리의 유익에 더 큰 것을 주신다. 그는 신하가 아들의 일로 "고통 중에" 있음을 보시고 책망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아이가 살아나리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가 "그 자식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는지"를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6.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그 신하의 믿음을 보라. 그는 "믿고" 갔다. 

-- 그는 그리스도가 취하신 방식에 만족했다. 당시 그는 "아무런 기적이나 표적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적이 일어났다고 믿었다. 그리스도는 말씀하셨다. "네 아들이 살리라." 그리고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었다." 그리스도는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라." 그리고 그는 믿음의 정직성을 입증리라도 하려는 듯, 그대로 "집으로 갔다."

7. 그의 하인이 돌아와 하는 보고와 비교함으로써, 더욱 그의 신앙이 돈독해졌다. 

-- 그의 신하들은 그를 만나서, 그의 아들이 회복되었다는 좋은 소식을 주었다(51절). 그리스도께서는 "네 아들이 살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제 종들이 같은 말을 했다. 좋은 소식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희망을 둔 자들을 즐겁게 해주리라.

-- 신하는 그 아이가 언제부터 회복되었는지 그 시간을 물었다(52절). 그는 자기의 신앙을 더 굳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일과 말씀을 부지런히 비교해 보면 우리의 신앙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이것이 바로 그 신하의 대답의 과정이다. "그는 종들에게 아이가 낳기 시작한 때를 물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대답했다. "어제, 제7시에, 열이 떨어졌습니다." 그때 회복되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갑자기 다 나아버렸다. 그래서 "그 아버지는 그 때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그 때임을 알았다." 두 가지가 그의 신앙을 돈독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첫째, 아이의 회복이 "순식간"에 된 일이라는 점이다. 

-- 그들은 그 정확한 시각을 말해 주었다. "어제, 제7시" 언제 "쯤"이라 말하지 않았다- 그 때 "열이 떨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의사처럼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의사에게는 수술 시간과 효과를 걷는데 걸리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치료를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말씀하시면, 그대로 된다." 그가 "말씀하시고" 다시 얼마간의 일이 필요한 그런 사건이 아니다.

둘째,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던 시간과 똑 같았다는 점이다. 

-- 같은 시기의 일들이 섭리의 조화미를 더욱 북돋운다. 사람의 일에서는, 거리의 차이가 시간과 일을 지연시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일에는 그런 법이 없다.

8. 이 사건의 행복 된 결과를 보라. 

-- 한 식구의 치료가 가정 전체의 구원을 가져 왔다. 그 신하 "자신도 믿었다." 전에도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리스께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현세적" 자비를 내려 주시사, "더 좋은" 것을 대비하게도 하신다.

-- 또한 "그의 집안"이 모두 믿었다. 그들은 모두가 이 기적과 관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적이 그 가정의 "희망"을 되살려 놓았던 때문이다. 그 기적이 그 가정의 "희망"을 되살려 놓았던 때문이다. 

-- 이 사건이 그들 모두에게 감동을 주었고, 그리스도를 그 모두가 사랑하게끔 했다. 이 사람은 "왕의 신하"였으므로 "큰 집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의 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그는 그들 모두를 동료로 삼았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한 아이의 질병이 이런 일을 가져오다니! 이래서 우리는 환란이 와도 견디게 된다. 우리는 그 환란에서 어떤 유익을 얻을지 모른다.

9. 이 치료 사건에서 복음서 기자는 한 말이 나와 있다. "이것은 두 번째 기적이다"(54절). 2장 11절과 관계된 구절이다. 

-- 유대 지방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그러나 갈릴리에는 처음 기적이 있었다. 갈릴리에서도 여러 기적을 행했다. 어떤 곳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환영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은 원한다면 "자기집"을 닫아서 햇살이 못들어 오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햇살을 "이 세상에서" 차단시킬 수는 없다.

-- 이것이 "두번째 기적"이라고 지목되어 있다. 처음 기적을 상기시키려 했을 것이다. "새로운" 은총은 이전의 자비를 상기하는 계기가 되어야 하며, 이전의 자비를 상기하는 계기가 되어야 하며, 이전의 자비는 앞으로의 자비를 기대할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 아마 이 환자는 귀인이었던 고로, 많은 사람들이 따라 왔을 것이다. 지체 높은 사람들은 착하기만 하다면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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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길과 진리, 생명]
proskunevw(4352, 프로스퀴네오) 예배하다, 경의를 표하다, 경배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프로스퀴네오는 프로스(prov", 4314: ~에, ~을 향하여)와 퀴네오(kunevw: 입 맞추다)에서 유래했다. 따라서
(a)  프로스퀴네오는 '입 맞추다'를 의미한다(대부분의 학자들의 견해).
접두사는 헬라 역사 이전 시대에 행해진 제의 의식과 관련 있음을 보여준다. 이집트의 조각들에는 예배하는 자들이 신에게(프로스) 입맞춤을 위해 손을 쭉 뻗고 있다.
(b)  헬라인들 사이에서는 이 동사가 신들을 경배하는데 사용되던 전문용어로서, '땅에 엎드리다, 부복하다, 무릎을 꿇고 경배하다'를 의미한다. 아마도 땅(즉, 지신)이나 신상에 입을 맞추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바닥이 엎드려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를 가진 것 같다.
(c)  후에 프로스퀴네오는 통치자를 신격화하는 것과 로마 황제 숭배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d)  프로스퀴네오는 예배에서의 꿇어 엎드리는 외적인 행위 이외에도 경외심과 겸손을 나타내는 내적인 태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프로스퀴네오는 70인역본에서 200회 이상 나오며, 거의 대부분 히브리어 샤하의 힛파엘형(절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사람 앞에서 절하는 경우나 또는 예배에 다 같이 사용된 말이다(창 18:2; 창 19:1; 창 22:5; 창 23:7, 창 23:12; 출 4:31; 레 26:1; 민 22:31; 신 4:19; 수 23:7, 수 23:16; 삿 2:12, 삿 2:17, 삿 2:19; 룻 2:10 등). 그리고 프로스퀴네오는 세기드(신하의 예를 다하다, ~에 경의를 표하다, 단 2:46; 단 3:5이하, 단 3:10이하, 단 3:14, 단 3:18, 단 3:28), 주아(부들부들 떨다, 전율하다, 단 6:27), 카라(무릎을 꿇다, 에 3:2; 에 3:5), 나샤크(입 맞추다, 왕상 19:18), 아바드(섬기다, 시 97:7)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프로스퀴네오는 신약성경에서 6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오로지 하나님 혹은 예수 그리스도(마 18:26에서조차 왕은 하나님의 상징적 표상)에게 드리는(혹은 드려야만 하는) 예배만을 전적으로 의미하는 것 외에는 구약성경의 의미가 채택되어 보다 발전되었다. 행 10: 25이하; 계 19:10; 계 22:8이하에서는 예배란 하나님 한 분에게만 드리는 것이지, 사도나 천사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따라서 예수님 앞에 절할 때마다, 예수님께서 왕이시며(마 2:2), 주이시며(마 8:12), 하나님의 아들이시며(마 14:33), 전지전능하신 분(보기: 마 14:33; 막 5:6; 막 15:19)이시라는 사상을 명백하게 혹은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절한다는 것은 종종 심한 어려움 속에서도 도움을 요청하는 것과 연결된다.
한편, 절하는 것은 강하게 요청하는 것을 나타내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또한 도와주시는 주님에 대한 믿음, 구속자에 대한 믿음,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확신에 찬 믿음의 표시이다(예: 마 8:2; 마 9: 18; 마 15:25).
요 9:38에서 절하는 것은 신앙이 외적으로 반영되어 나타난 행동과 다름없다. 즉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며, 그분을 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분에게 왕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경배하는 것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께 특히 합당한 것이다(마 28:9, 마 28:17; 눅 24:52).
사단이 만물의 참된 질서를 뒤집어 놓으려고 예수님에게 절하라고 요구했을 때, 사단은 바로 이러한 행위로써 자기 자신이 하나님 한 분에게만 합당한 권위를 빼앗으려 했으며(마 4:10; 눅 4:8),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명령을 모두 팽개쳐 버린 하나님의 대적임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b)  절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종교적 본성의 표시이다. 그의 예배(절)는 그의 신이 누구인지, 곧 진정한 하나님인지 혹 우상이나 귀신인지, 아니면 사단인지를 나타내는 것이다(참조: 계 9:20; 계 13:4, 계 13:8, 계 13:12). 왜냐하면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주로 예배, 무엇보다도 기도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에로의 부름은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나타낼 수 있다. "하나님께 예배하라!" 즉 이것은 전능하시고 영광되신 그분을 창조자이며 심판자로 받아들이고 그 유일하신 주권을 인정하며 너를 주장한다는 것이다(계 14:7).
(c)  프로스퀴네오는 독립적으로 사용되는 곳에서 '공중예배에 참여하다, 기도들을 드리다'(예: 요 12:20; 행 8:27; 행 24:11)를 의미한다. 이로부터 유래하여 요한계시록에서는 프로스퀴네오가 특수한 종류의 기도, 주로 경배하는 것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것의 특징적인 용례는 요한계시록 전반에 걸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경배 찬송의 표현에 나타나 있다(계 4:8-11; 계 5:8-10, 계 5:12-14; 계 7:10-12; 계 11:15-18; 계 12:10이하; 계 15:3이하; 계 16:5-7; 계 19:1-7). 이는 하나님(혹은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이며, 전 세계에 걸쳐 있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존재(즉 감사하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선물에 관련된 것이 아님)와 그 역사하심(참조: 계 4:8-11; 통치, 계 15:3이하; 계 16:5-7; 구속, 계 5:8-10; 종말, 계 11:15-18)에 관련되는 것이다. 찬송은 다양한 언어와 사상들을 사용하며 하나님의 존엄함을 찬양할 새로운 표제들을 끊임없이 찾아내며 그의 이름에 합당한 말들을 찾아 최고로 찬양 받으실 공로와 속성(영원하심, 전능, 경의, 지혜, 거룩, 능력 등)을 주님께 돌리는 것이다. 이러한 찬송은 자주 더할 나위 없는 찬사의 형태를 취한다: "~이 합당하오니"(계 4:11; 계 5:9; 계 5:12), "구원하심"(계 7:10). 여기에는 감탄하는 기도들이 군데군데 삽입되어 있다("할렐루야", "아멘" 계 7:12; 계 19:1, 계 19:3, 계 19:4). 이러한 모든 찬송들에는 범우주적인 선율이 화려하게 흐르는데, 이와 같은 경배 앞에서는 인간의 기원과 감사가 침묵 속으로 사라질 뿐이다(참조: 마 6:13). (참조: H. Schonweiss; C. Maurer;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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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eu'ma(4151, 프뉴마) 바람, 호흡, 생명, 영, 성령....히브리어 [루아흐(영), 네샤마(호흡, 숨)::>: 동의어 네페쉬(영혼)//레브는 정신-이해력-의지+마음(속사람)]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프뉴마(Aeschyl., Hdt. 이래)는 프네오(pnevw, 4154: 바람이 '불다', 숨쉬다)에서 유래했으며, 다음의 의미를 지닌다.
(a)  '바람'. 이 단어의 어근은 공기의 기류로서의 역할을 하는 활력을 의미한다. 이 어근의 의미를 근거로 하여 프뉴마는 첫째로 바람을 의미한다. 이 바람은 폭풍, 일반적인 바람, 미풍, 심지어는 수증기일 수도 있다. 바람은 기후, 건강, 성격에 영향을 미치며, 자연적인 것으로도 간주되고 신적인 것으로도 간주된다.
(b)  '호흡'. 프뉴마는 숨을 쉬는 호흡을 의미한다. 여기서 호흡은 콧김을 내뿜는 것에서부터 헐떡이는 호흡에 이르기까지를 포함한다. 프뉴마는 시적으로 사용될 때는 피리 등을 불므로 인간의 호흡이 내는 소리를 의미한다.
(c)  '생명'. 호흡은 생명의 표시이다. 프뉴마는 생명의 호흡이라는 개념에 의해 생명이나 생물을 의미한다.
(d)  '영혼'. 프뉴마는 생명의 원리로서 프쉬케(yuchv, 5590: 영혼)와 매우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프뉴마는 생명을 지니고 있을 때는 몸 안에 제약되어 있고, 마지막 숨과 더불어 몸을 떠나 천상의 영역으로 돌아간다.
(e)  전이된 의미로 '영'. 프뉴마는 전이된 의미로 상호간의 관계에서 오가는 영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된다. 따라서 이 단어는 한 성읍의 정신이나, 신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영향력이나, 다양한 형태의 자극을 의미하기도 한다.
(f)  예언적인 '영'. 예언과 예언적인 시에서 프뉴마는 자극시키고 열심을 내게 하며, 채워주고, 영감을 주는 영이다(참조: 제사장들, 시인들, 선지자들). 프뉴마는 또한 고상한 웅변술의 언어, 연사의 사로잡는 힘 등을 가리킬 수도 있다.
(g)  신적인 '영'. 근본적이며 통제할 수 없는 프뉴마는 신적인 것으로 생각한다(예: 종교 음악에서). 그러나 헬라 세계에는 인격적인 성령의 개념이 없다. 신적인 영은 내재적인 것이다.
(h)  신과 '영'. 스토아주의에서 프뉴마는 우주적 능력이나 실체이다. 따라서 프뉴마는 신 자체의 존재나 현현을 의미한다.
(i)  프뉴마의 의미의 비헬라적 발달. 유대교의 영향과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아 프뉴마는 두 가지 의미로 발전되었다. 한편으로 프뉴마는 자연으로부터 단절되어, 적극적인 우주론적 또는 구원론적 영이나 신으로 의인화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프뉴마는 주술사들이 선하게 또는 악하게 조작하는 악마적인 주술적 세력을 뜻하게 되었다.
2.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프뉴마는 신약성경에서 379회 나오며,
(a)  '바람',
(b)  '숨, 호흡, 생기',
(c)  '영, 영혼', 육체에 생기를 불어 넣는 생명의 원리.
(d)  '육체를 떠난 인간의 영혼',
(e)  '인간보다 높고 하나님보다 낮은 영',
(f)  '귀신이나 더러운 영',
(g)  '성령'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참조: F. Hauk;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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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lhvqeia(225, 알레데이아) 진리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알레데이아(Homer 이래)는 어원적으로 '가리워져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보여지거나, 지적되거나 표현된 정도(범위)의 상태나 사태, 그것도 이러한 보임과 지적과 표현에서 나타내지거나 그 자체 사실 그대로 나타낸 정도의 상태나 사태를 지적하며, 물론 그것은 숨겨지거나 위조되거나 왜곡되거나 생략되거나 은폐될 수도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알레데이아는 사건의 진상(full or real stale of affairs)을 의미한다. 이것은
(a)  사법에서 여러가지 진술에 대항하여 지지될 수 있는 사건의 진상,
(b)  역사에서 신화와 완전히 구별되는 실재적 사건,
(c)  철학에서 절대적 의미의 참된 것 등을 의미한다(R. Bultmann).
그러므로 알레데이아는 일반적으로 거짓이나 거짓말에 반대되는 '진실'을 의미한다.
2.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 
(a)  에메트와 의미와 그 역어 알레데이아.
알레데이아에 상당하는 히브리어는 에메트이다. 구약성경에서 에메트는 126회 나오는데, 85회 알레데이아로 번역되었다.
에메트는 아멘, 곧 확고한, 확실한, 신실한 것으로 생각되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진실한 것을 의미한다. 인격에 대해 사용될 때 그것은 때때로 주로 그의 말, 행동, 사상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을 표현한다. 이쉬 에메트는 그의 행위가 진리의 규범에 지배를 받는 사람이며, 그러므로 성실한 사람이다. 하나님께 적용될 때, 특별히 그의 신실성에 대해 사용된다. 이 단어는 '확고하다'를 뜻하는 어근 'mn에서 파생된 것으로 학자들은 이해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구약성경 학자들은 히브리 저술가들이 말하는 '진리'란 의미상 '불변성'(stability), '확고함'(firmness) 혹은 '확실성'(reliability)이란 개념을 시사해주는 '신실성'(faithfulness)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예프센(Jepsen) 기록을 요약해서 말한다면, '에메트는 신뢰할만한 것으로 입증되어야 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영어로 이 개념을 전달하는 데에는 'Reliability'(확실성)가 가장 포괄적인 단어일 것이다. 에메트는 다른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고 했다. 예프센은 이것을 인간의 진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적용시키는 것으로 말을 맺는다. 진리의 하나님으로서 "여호와는 ... 그의 말씀과 사역 안에서 우리가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TDOT Ⅰ313).
이런 견해를 근거로 하여 구약성경에서 진리는 단순히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성에 근거한 것이라는 주장이 종종 있어 왔다. 만일 이 견해를 받아 들인다면, 이것은 진리에 대한 히브리적 개념과 헬라적 개념 사이의 근본적으로 분명한 대조를 보여주는 요인이 될 것이다. 볼트만(R. Bultmann)은 쉽사리 알레데이아의 헬라어 용법이 셈어적 용법과 대조된다고 말한다(TDNT Ⅰ238). 이 이론에 따르면, 고전 헬라어에서 알레데이아는 단순한 현상과 대조되는 '진리'(truth)를 의미하는데 반해, 히브리어에서 이에 병행되는 단어는 '불변성'(stability) 혹은 '신실성'(faithfulness)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런 대조가 어느 점에서는 타당성을 지니는 반면, 이 주장들이 조심스럽게 한정되지 않을 경우에는 잘못될 수도 있고, 지나치게 단순화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에메트는 그 사용된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나타낸다. 에메트가 에메트로 간주되고, 에메트에 의해 지적되는 독특한 사실들을 항상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우에 이 단어는 법률적 영역을 넘어가는 불확정한 일반적인 타당성이나 정당성을 지적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진실이나 사실(reality)로 인정하기를 항상 요구하는 사실(facts), 신과 인간의 질서에 일치하여, 존중을 받는 정상 상태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유사하게 미쉬파트(4941: 공의, 심판)의(6666: 의), 샬롬(7965: 완전, 평화)과 같은 관련 용어에 반영되어 있다. 그 의미와 일치하여 그것은 전혀 일반적으로 진리나 진실(truth)로, 심지어 정상적 개념으로서 '진실성'(veracity)으로 번역할 수 있다.
요약하면 알레데이아는 70인역본에서 히브리어 에메트의 의미를 따라, '신실(성), 성실(성), 충실, 진리나 진실, 확실한, 정직한, 진실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b)  에메트/ 알레데이아의 법률적 용법.
에메트는 기본적으로 가장 확실히 법률 용어에서 '사실상의 과정이나 인과의 진실을 묘사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 22:20에 "그 일이 참되어(에메트/ 알레데이아)..."라는 표현에서 앞의 경우와 같이 "그 일이 비방거리에 근거하지 않고 확실한 사실들, 곧 진실에 근거한다면"이란 의미를 읽는다.
삿 9:16(삿 9:19)의 "너희의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라는 말에서 에메트/ 알레데이아는 의와 관련되며, 그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따지고 있는 것이다.
삿 9:15에서는 "참으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메트가 사물에 적용되는 경우에 법률 용어의 비유적 용법을 보게 된다.
창 24:48에 "바른 길"이 데레크 에메트(알레데이아), 즉 제시되는 많은 길들 중에 확실히 성공하는 길이다.
렘 23:28의 "내 말을 받는 자(선지자)는 성실함으로(에메트/ 알레데이아) 내 말을 말할 것이라"는 말에서, 에메트는 그 자체 꿈으로가 아니라 실제적 역사(operation, 29절)를 나타내는 사실(a fact)을 가리킨다. 단 8:26에서(이상이 확실하니) 에메트/ 알레데이아는 그 계시가 실제로 일어날 명백한 것임을 확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사 59:14, 15에서 진실이 부족하다는 불평은 13절 상반절에 "배반하는 것"에 관한 언급이 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 이스라엘의 불신실성에 대한 언급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좀 더 세밀하게 검토해 보면, 불평의 참된 원인은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마찬가지로 예레미야도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혀로 거짓말 하기를 가르친다"고 불평하였다(렘 9:5). 틀림없이 이런 일 때문에 결국 어느 누구도 자기 형제를 신뢰할 수 없는 것 같다(4절). 그러나 여기에서 주요 문제는 거짓말 그 자체이다.
스가랴도 이와 같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을 베풀고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특별히 에메트/ 알레데이아의 개념에 있는 평결(judical finding)과 재판의 기준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
시편의 세 구절들에서 진리는, 많은 학자들이 오로지 헬라 문헌에서만 발견된다고 주장하는 거의 그런 의미에서, 은폐(concealment)와 대조하여 나온다. 시 43:3에서 기자는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라고 기도한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계실 것을 바라는 기도가 아니라 "간사한 자"(1절)의 유혹적인 말에 직면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건의 진상을 보여주기를 원하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그는 진리와 빛을 필요로 한다. 진리란 그를 어둠에서부터 벗어나게 하여 사건들이 있었던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시 45:4에서 왕은 진리의 옹호자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염두에 둔 것은 왕의 확실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의심스럽고, 부정하고, 공정치 못하거나 거짓된 것은 무엇이든지 기꺼이 다 드러낼 그의 마음 자세이다. 왕의 고통 당하는 자들의 고통의 원인을 공공연하게 드러냄으로써 그들을 옹호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시 51:6의 "중심에 진실함을"이라는 유명한 언급은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앤더슨(A. A. Anderson)은 여기에서 에메트가 '신실성'(faithfulness)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Psalms, Ⅰ, 396). 그러나 이 개념은 시편 기자가 충실함을 간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기만으로부터의 해방을 간구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인 것 같다. 이 시편의 주제는 고백이며,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보신 그대로 사건들의 상태의 진실됨을 시인하는 것이다. 이 해석은, 만일 우리가 "중심"(inward parts)을 계시의 필요와 관련되어 있는 "덮여 있는 것"을 의미하고(E. A. Leslie, The Psalms, 1949, 400), 이 시편의 주제를 여호와께서 공정하시다라는 것으로 이해한다면(S. Mowinckel, The Psalms in Isreal's Worship, 1967,Ⅰ, 214), 훨씬 더 적합할 것이다.
그리고 잠언에서 진리와 거짓말(혹은 속임수) 사이의 대조를 배경으로하여 에메트/ 알레데이아가 사용된다. 지혜가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잠 8:7)라고 말할 때, 그 요지는 지혜가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을 기만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혜는 교육과 지식을 통해서 그에게 모든 것을 드러낼 것이다. 잠 22:21에서는 진리가 참된 대답이 행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즉 그곳에 거짓이나 허위가 없도록 하기위해 드러내어 진다.
(c)  에메트/ 알레데이아의 종교적 용법.
① 법률적 영역에서 중요한 다른 표현과 같이, 진리의 개념은 특별히 구약성경의 종교적 용어에 그 자리를 잡고 있다. 에메트의 종교적 용법은 항상 비유적으로 이해하지 아니하지만, 종교적 이해(통찰)에서 생겨날 수도 있다. 어쨌든 많은 경우에 그것은 법률적 용법에 의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종교적 사실을 오로지 의미한다. 때때로 사법적으로 의인으로 묘사된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태도를 명백한 진리의 사실에 근거하며, 진리가 하나님 자신의 행위와 말씀 안에 있는 토대인 것 같이 진리를 행한다. 하나님의 진실함은 인간의 진실함을 요구한다(시 51:6). 여호와의 성산에 거하기에 합당한 자는 그 마음에 에메트("진실")를 말하는 자이며(시 15:2),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생의 질서라는 의미에서 진리에 전념하는 마음을 가진 자이다. 이 마음은 사회 생활에서 실제적으로 표현된다(참조: 겔 18:8).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한다(참조: 18:9). 하나님은 그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라고 명하신다(왕상 2:4).
호세아가 호 4:1에서 이 땅에 진실(에메트)이 없다고 불평할 때, 진실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즉 생의 모든 영역에서 진실함은 하나님의 뜻을 틀림없이 아는데서 성장하고, 이러한 앎은 그것에 관한한 진실함의 실현이라는 것이다.
지혜 문학에서 문맥은 셰켈(허위, 거짓)이나 아울라(불의)와 대조시키므로, 진실의 개념을 강조하는 한편(말 2:6; 잠 11:18; 렘 9:4; 참조: 잠 12:19), 악과 대조는 더욱 명확히 종교적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느 9:33): "우리의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는 진실히(에메트: 신실하게) 행하셨음이니이다."
② 에메트는 자주 신실성이란 의미로 특히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시 31:5에서 하나님을 "진리의 하나님"으로 부른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으로서 일반적으로 의인과 사람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으실만 하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으로서 항상 신실하게(에메트) 대하신다. 하나님은 영원히 진실함의 규범을 지키신다(시 146:6).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진리를 확립하고 그 자체 진리인 법, 곧 진정한 율법(토로트 에메트)을 수여하셨다(느 9:13).(참조: Quell).
에메트는 보통 "내가 주의 에메트를 찬양하리이다"(시 71:22)와 같은 특징적인 구절들에서 '신실성'이란 의미로 나온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영원히 지속된다(시 117:2). 앤더슨(A. A. Anderson)은 시 119:43에 나오는 "진리의 말씀"이란 어구조차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에 관한 기록이란 의미로 해석했다(The Book of Psalms). 시 30:9에서 하나님의 에메트에 대한 증거의 개념이 훨씬 더 두드러지게 나오는데, 스올(Sheol)이 하나님의 신실성을 선언하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신자에게 하나님의 신실성을 새롭게 증거해 줄 계속적인 경험이 중단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그들에게는 그들이 호소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기 때문이다(시 30:9; 참조: 사 38:18).
③ 에메트가 '신실성'(faithfulness)이란 의미로 사용될 때 자주 헤세드(변함없는 사랑)와 병행되어 나오다. 이런 경우에 에메트가 '신실성'을 의미하는 문맥과 '진리와 진실'을 의미하는 문맥을 구별해야 한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에게 헤세드와 에메트를 보여주기를 브두엘과 라반에게 요청하는 대목에서(창 24:49), 이 두 단어의 의미를 '충성'(loyalty)과 '성실'(fidelity)로 볼 수 있겠지만 개역 표준 성서(RSV)에 따라 정직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다라는 의미의 "deal loyally and truly"(충성스럽고 진실하게 대하다)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같은 장(창 24장)의 앞 부분에 나오는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맨처음 만나는 대목에서 엘리에셀을 "헤세드와 에메트를 끊이지 않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 뜻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약속에 충실하고 신실했다는 것이다(창 24:27). 창 32:10에서 야곱은 아주 똑같은 방식으로 그가 하나님의 모든 신실하심(에메트)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창 32:10).
그 특징은 시편에서 찬양과 기도가 모두 하나님의 신실성을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에메트의 용법 중 반수 이상이 이런 의미를 지닌다. 시편 기자가 "여호와의 모든 길은 ... 인자와 진리로다"(시 25:10)라고 외칠 때,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가 언약에 대한 충성으로 특징 지워지기 때문에 아주 신뢰할 만하다고 증거하는 것이다(M. Dahood). 에메트가 시 57:3, 10; 61:7; 69:13; 108:4; 115:1에서 헤세드와 결합되어 나올 때, "신실성"(faithfulness)이 에메트의 의미로 나온다. 흠정역 성서에 나타나 있듯이, 이런 의미에서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난다"(시 85:10)라고 번역된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은 그의 신실성에 대한 하나의 표현으로 명시된다. 그리고 알레데이아는 '충실, 성실'을 뜻하는 에무나(시 88:11-49), '신실한, 신뢰하는'을 뜻하는 에문(시 12:1; 시 31:24), '확실한, 진실한'을 뜻하는 야칩(3330; 단 2:8), '정직한'을 뜻하는 야샬(3474; 욥 23:7), '완전, 성실'을 뜻하는 톰(8537, 잠 28:6), '진실'을 뜻하는 케쇼트(7187; 단 2:47), '진실로'를 뜻하는 옴나(욥 9:2; 19:4), 우림(신 33:8)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④ 우리가 에메트가 사용된 여러가지 측면들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매우 많은 문맥들에서 진리가 단순히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말씀으로만 아니라 행위로 자기의 진리를 드러내시며, 이 진리는 사실상 그의 백성의 체험 속에서 입증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진리에 대한 존중을 추상적인 이론으로가 아니라 그들의 이웃에 대한, 그리고 그들의 구두상의 상업적 거래에 대한 일상적인 증언으로 나타낸다.
시 119:142에서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단순한 실존적인 진리 이상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신자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보여줄 등이요 빛이다(105절). 여기에서 그는 사실상 그와 관련될 때의 사건의 진상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내발 ... 내길").
⑤ 이러한 진리는 신뢰할 만하며 또한 확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통찰이 오로지 신학적 기초 위에서만 도달되는 것이 아니다. 확실히 신자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에메트, 헤세드, 에무나)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그에게 의지할 것이다. 그러나 에메트의 이런 특별한 용법이 이 단어의 모든 용례들의 배후에 있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인들은 다른 사람들도 인정했던 논리적 진리, 곧 참된 말은 그것이 실제와 일치하기 때문에 믿을만하다는 점, 그리고 진리의 하나님에게 있어서나 진실한 사람에게 있어서 언행이 일치한다는 점을 인정하였다(참조: 수 24:14; 시 145:18). 진리를 말과 행동의 일치로 보는 개념이 신약성경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3. 알레데이아의 신약성경의 용법. 
신약성경에서 알레데이아는 109회 사용 중, 바울 서신과 요한의 기록에서만 9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a)  알레데이아는 "확실성과 힘을 지니는"(has certainty and force)"에 대해 사용되었다(에메트의 의미로).
① 타당한 규범. 알레데이아는 엡 4:21; 엡 4:22에서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이 진리는 지적 진리에 대한 단순히 이론적인 감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복음에서 나타날 때는 진리에의 위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와 만남으로써, 결국 삶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고, 이 변화를 통해서 신자들은 과거의 속임수에서 벗어나게 된다.
갈 2:5에서도 알레데이아는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함이라". 여기서 바울은 유대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문제가 된 것은 완전히 "복음의 진리"라고 선언하였다. 바울의 판단에 따르면, 복음을 더럽히도록 유혹하는 것은 곧 진리(타당한 규범)를 더럽히도록 유혹하는 것이요, 그 반대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유혹에 굴복한다는 것은 그 자신의 성실의 의미에서나 구원사에서의 현재 있는 그대로의 실제 상황이라는 의미에서도 진리 곧 타당한 규범을 부인하는 것이다.
갈 2:14에서 알레데이아 역시 같은 의미를 가진다: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게바는 복음의 타당한 규범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고후 13:8의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라는 바울의 언명에서 진리는 복음의 진리인 동시에, 더 나아가서 이 언명은 아마도 진리의 개방에 의해(그 결과야 어쨌든간에) 진리의 능력이 그리스도의 주의와 복음을 오직 보급시킬 수 있다는 사상을 전달하는 것이다. 진리는 타당한 규범이다. 하나님의 요구는 롬 2:8과 롬 2:19에서 알레데이아이다.
② 올바름, 정직. 알레데이아는 에메트와 같이 '올바름, 정직'이라는 보다 약한 의미를 가진다. '진리를 좇는 것(행하는 것)'이란 표현에서 나타난다(요 3:21; 요일 1:6). 유사하게 요이 1:4; 요삼 1:1 이하에서 "진리에 행하는 것"은 정직하게 행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같은 맥락을 따라 알레데이아는 아디키아(ajdikiva, 93: 불의)의 반대이다(고전 13:6; 롬 1:18). 이 단어는 또한 디카이오쉬네(dikaiosuvnh, 1343: 의)와 결합하며(엡 4:24; 엡 5:9; 엡 6:14), 아마도 때때로 그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약 3:14; 약 5:19).
(b)  알레데이아는 '진술의 사실'(truth of statement)에 대해 사용되었다. 행 26:25에서 바울은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고 하였다. 여기서 "참된 ... 말"(레마타 알레데이아스)은 환상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사실에 기초한 것이다. 엪 알레데이아스라는 문구는 일반적으로 '사실과 일치하여'나 '사실대로'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막 12:32; 눅 4:25; 눅 22:59에 나온다. 따라서 엪 알레데이아스를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 사건의 사실을 정확하게, 혹은 바르게 진술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눅 4:25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서 중요하다. 예레미아스는 주장하기를 이 문구는 예수님이 자기의 말씀을 강화하고 자기 권세를 나타내고 자기 메시지의 확실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하신 것이라고 한다(J. Jeremias, New Testament Theology).
(c)  알레데이아는 드러난 '사건의 실상이나 진상'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롬 1:18("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서 확신하는 것은 이 경우에서 알레데이아를 하나님의 요구하는 것으로나 의(디카이오쉬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롬 1:19의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는 말을 보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된 사실(revealed reality)"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롬 1:25("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단순히 프슈도스(yeu'do", 5579: 거짓, 허위), 즉 우상에 반대되는, 참된 또는 실질적인 하나님을 의미하지 않으면 위와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Bultman).
좀 더 설명하면, 바울은 알레데이아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자기 의지의 계시나 혹은 심지어 율법을 통해서든 어느 순간에는 창조를 통해서든 자기 존재의 계시를 나타낸다. 이런 용법은 로마서의 처음 두 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은 사악함으로 인하여 "진리를 막고"(롬 1:18),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꾼다(롬 1:25). 그러므로 진리에 순종치 않는 자에게는 진노가 있을 것이다(롬 2:8). 반대로 율법 그 자체는 지식과 진리의 구체화이다(롬 2:19)("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 여기서 문제가 되는 진리는 근본적으로 복음의 진리가 아니다. 바울은, 요한의 경우와 같이 사람들이 메시야를 알아볼 수 있는 지식을 받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창조주요 심판자이신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거부하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바울은 모든 이방 세계가 고의적으로 복음-진리를 거부하였다고 말하지 않고 이 세계가 창세로부터 하나님과 그의 주권적인 주장들에 대해서 고려될 수 있는 것, 즉 분명히 보여진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롬 1:20)을 고의적으로 은폐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된 사실'이다.
유사하게 알레데이아는 다음과 같은 전치사와 함께 '실제적으로(real)'를 의미한다. 골 1:6(엔 알레데이아)에서 실제적인 경험을, 행 10:27과 행 10:34(엪 알레데이아)에서 실제적인 행위를 표현한다. 한편 롬 2:2에서 카타 알레데이안을 '사실과 일치하여, 사실대로'를 의미하며, 롬 2:11에 프로소포렘프시아(편파적임, 불공정)와 반대되는 것이다.
요일 3:18에서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는 대조는 헬라에서는 흔한 표현이다. "행함과 진실함으로"는 '실제적 행위로'를 뜻한다.
또한 고전 헬라어의 표현 '진실을 말하다'는 70인역본에서 뿐만 아니라(대하 18:15; 잠 8:7), 신약성경에도 나온다. 막 5:33에서 알레데이아는 "사실"을 의미한다. 무리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만진 혈루증 앓는 여인은 "모든 사실"을 고하였다. 즉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사실을 말했다. 롬 9:1에서 참말을 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과 반대이며,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고후 12:6에서 참말을 하는 것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요 8:40; 요 8:45 이하; 요 16:7에서도 역시 '진리를 말하는 것'이 나오는데, 여기서 알레데이아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듣거나 본 사실들, 곧 하나님의 계시로 해석할 수 있다.
(e)  알레데이아는 '믿거나 의지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① 신뢰성이나 신뢰할만함, 롬 3:3 이하; 롬 15:8.
② 성실, 진실, 진심. 알레데이아는 '거짓말, 은폐, 속임수'와 반대되는 '진실' truth이라는 의미를 지니거나 '성실' sincerity의 의미로 나온다. 마 22:15 이하(막 12:14)에서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을 올가미에 걸리게 하려고 다음과 같은 말로 이 질문을 시작한다: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알레데스) 참으로써(엔 알레데이아)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여기에서 요점은 예수님이 그 말을 함으로써 얻어질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진리를 감추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그는 자기 견해를 피력하는데 정직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고후 7:14("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 우리의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고후 11:10("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에도 나타난다. 따라서 그것은 고전 5:8에서 에일릭리니아(명확, 순수, 성실)와 연결되어 있으며, 빌 1:18에서 프롭하시스(편파적임, 불공정)와 반대된다. 때때로 헨디아디스의 형태로 친족어와 관계되어 있다: "믿음과 진리"(딤후 2:7). 요이 1:1과 요삼 1:1에서 이 용법이 사용되었다: "참으로 사랑하는 자",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를 가리킨다.
(f)  알레데이아는 복음, '참된 가르침 또는 믿음'에 대해 사용되었다.
① 고후 13:8: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여기서 알레데이아는 (a)①의 의미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다른 복음(에테론 유앙겔리온)(참조: 고후 11:4)과 대립되는 참된 교리를 의미한다.
② 이런 이유로 고후 4:2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반적으로 그의 활약으로분명히 나타낸 알레데이아로 부르기도 한다("진리의 나타냄"). 이 경우에 알레데이아는 앞에 나온 말 로고스 투 데우("하나님의 말씀")의 개념을 포함시킨다(참조: 고후 2:14; 골 4:3 이하; 딛 1:3).
③ 갈 5:7에서 바울은 마치 "복음을 순종치" 아니했다고 말한 것처럼(참조: 롬 10:16). "진리를 순종치" 않는 것에 대해 말한다.
④ 벧전 1:22에 의하면 기독교의 믿음은 "진리를 순종함"이라고 할 수 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참조: 벧전 1:21 이하).
⑤ 또한 복음의 설교(전도)는 진리의 말씀이다(고후 6:7; 골 1:5; 엡 1:13 등).
⑥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진리를 아는데 이르는 것"이며(딤전 2:4; 딤후 3:7; 딤전 4:3; 히 10:26; 요이 1:1).
⑦ 살후 2:10-살후 2:12에서는 알레데이아는 "거짓"(yeu'do", 5579)과 "불의"(ajdikiva, 93)라고 불리는 적그리스도의 계시에 대립되는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⑧ 딤전 3:15에서 에클레시아(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 묘사된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⑨ 벧후 1:12에서 알레데이아는 단순히 기독교 신앙이다.
⑩ 알레데이아가 '참된 가르침'이라는 것은 특히 그릇된 교훈과 반대된다.
딤전 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딤후 2:18,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딤후 3: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알레데이아는 순종할 의향에 의해 결정되는 피스티스의 개념처럼 "권위있는 교훈"이다.
딤후 4: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딛 1:14,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g)  알레데이아는 또한 "진짜임", "하나님의 실체", "계시"를 의미한다.
① 계 8:44에서 신적 능력으로서의 알레데이아와 반신적인(anti-divine) 것으로서의 프슈도스(거짓)가 대조되어 있다. 알레데이아와 프슈도스는 인간 존재의 본질이라기보다는 진정한 가능성들로 이해된다. 이것은 말씀과 말씀의 경청에 대한 생각에 의해 결정되는 계시에 의해 보존되므로, 우리는 또 다시 진정한 존재의 가능성을 지닌다. 알레데이아는 하나님의 실체,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짐으로, 즉 죄로 말미암아 구성된 인간 존재와는 반대되고 가까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실체이며, 계시는 하나님과 조화되지 않는 존재가 도달할 수 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기적 사건이다. 계시에서 그의 고유한 존재의 참된 가능성이 그에게 드러나며, 그 때, 그와 만나는 계시의 말씀에 직면하여 그는 항복할 것을 결심한다. 그러므로 알레데이아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성이나 비교(esoteric)의 지시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정신적인 각오와 연습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순종하는 믿음 속에서 일어난다.
② 요 8:44에서 하나님의 실체와 반신적 실체 간의 대조가 나타난다: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그러나 이것은 간접적으로 알레데이아가 생명을 주며, 알레데이아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은 것은 죽음으로 인도된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 말씀은 또한 알레데이아가 있을 때에 알레데이아는 그 자체가 구체적인 행위를 이루는 결정적인 힘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 뒤따르는 말씀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은 "거짓말" 또는 "허위"라는 첫 번째의 잠정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그 문맥은 명백히 첫째, 신성한 실체와 악마적인 실체가 모두 말로 표현되었다는 것과, 둘째, 이들 실체들이 존재의 활동 방식인으로서의 현실이라는 것, 또는 역으로 하나님의 또는 악마적인 실체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의 모든 활동 방식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요일 1:8과 요일 2:4에서 하나님의 계시된 실체로 인한 존재의 결정이 지적되어 있다: "진리가 그 속에 있지"(않다). 이것은 또한 그러한 결정이 구체적인 행위로 그 자체를 나타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③ 이런 이유로 요한복음에는 특유의 다의성(ambiguity)이 생겨난다. 예수님께서 알레데이아를 말씀하실 때에 이것은 첫 번째로 "진리를 말하다"라는 표면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또한 "말씀으로 계시하다"를 의미한다(요 8:40; 요 8:45; 요 8:46, 반대의 개념인 프슈도스[yeu'do", 5579] 대신에 더 일반적인 하마르티아[aJmartiva, 266]가 사용된 곳, 특히 요 8:47, 알레데이아 대신 하나님의 말씀[타 레마타 투 데우]이 쓰여진 곳).
④ 이 단어가 세례(침례) 요한에 대해 말해질 때 같은 이중의 의미가 나타난다: 그가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요 5:33). 그것은 요 18:37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여기서 빌라도의 질문이 그 말씀을 강조하고 계속되는 말씀에서 알레데이아가 스스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실체라는 것과 그것의 이해는 자유로운 존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실체로 말미암은 존재의 결정에 기초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⑤ 계시로서 알레데이아는 기노스케인(아는 것, 요 8:32; 요이 1:1, 요일 2:21)의 대상이다. 첫번째로 표현되는 것은 이해될 수 있는 말씀(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과 같은 계시의 결정적인 능력의 특성이다.
알레데이아는 본질적으로 질문한 사실의 표면적인 진실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것을 일반적이고 표면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크게 오해하는 것이다. 엘류데리아(ejleuqeriva, 1657: 자유)가 인간 의지의 자유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참조: 요 8:34), 의미하는 바는 일반적인 지식이 아니라 계시에 대한 지식이다.
요 17:17; 요 17:19의 진리도 마찬가지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즉 아버지에 의해 예수님께 위탁된 선언),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하려 함이니이다"(요 17:19). 계시의 말씀은 말 또는 사상의 집합체도 아니고, 구체적인 마주침으로 성취되는 말씀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예수님 개인과 그의 역사에서 성취하신 사건들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해 드러난다(요 17:17-요 17:19). 그는 단순히 그의 말씀에 의한 전달로서가 아니라 알레데이아를 위하여 자신을 거룩하게 함으로 알레데이아를 가져오므로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러므로 계시는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수단인 동시에 목적(조에: 생명)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신성이 나타날 때에 진정으로 받아들여진다. 하나님께서 계시로 나타나신다는 것은 요 1:14; 요 1:17에 나오는데, 거기서 "독생자의 영광"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으로, 즉 하나님의 실체는 그것 안에 나타난다고 묘사되었다.
⑥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에 대한 요구(요 4:23 이하)를 같은 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요한에게는 알레데이아 뿐만 아니라 프뉴마도 인간과 완전히 구별되는 신성의 본질과 출현의 영역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참된 예배는 영성과 의인화된(anthropomor- phic) 개념이 제거된 하나님의 개념에 기초한 순수한 지식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본질 즉 프뉴마에 의해 결정될 때에 일어난다. 알레데이아가 더해진다면 이것은 그러한 예배는 오직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계시(요 4:25)에 의해 결정될 때에, 따라서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신 계시자(요 1:18; 요 14:6)에 의해 결정될 때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⑦ 세상을 떠나시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는 요 14:17; 요 15:26; 요 16:13에서 "진리의 영"이라고 해석되며, 이것이 요한복음이 이 공동체에 주어진 "성령"의 전통적인 개념을 이해하도록 의도한 방식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참조: 특히 막 13:11; 행 1:8). 바로 그분 자신이 요 14:16에서 보혜사라는 용어를 선택하신다. 프뉴마 테스 알레데이아("진리의 영")가 단순히 하나님의 성령만을 의미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 알레데이아 만큼이나 하기오스에 의해서도 표시되기 때문이다(참조: 요 17:17-요 17:19). 그러나 그 단어가 프뉴마에 대해 말할 때에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요 16:13)는 우리에게 요한에게 하나님의 진리는 항상 계시 안에서 작용하므로, "진리의 영"으로서 역사하시는 파라클레토스(보혜사)의 역할은 공동체에서 계속 역사하는 계시로 묘사되고, 요일 5:6에서 증거하시는 프뉴마는 바로 알레데이아와 같다. 같은 의미로 요일 4:6에서 "미혹의 영"과 대조되는 "진리의 영"에대한 언급이 있으며, 어떤 것이 하나님에 속한 것인지 아니면 불경한 세력에 속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기준은 실제적인 행위, 즉 공동체 안에서 선포된 말씀을 듣는가 또는 안듣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레데이아는, 그것이 선포된 한은, 옳은 교리이며 프슈도스(거짓, 거짓말)는 잘못된 것이다(요일 2:21). 한편 요삼 1:3의 알레데이아가 계시에 의하여 결정되는 삶의 방식을 나타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요일 1:6의 "진리를 행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과 반대되는 삶의 방식(-->242)을 나타낸다. 참으로 요삼 1:12에서 어떤 사람이 "뭇 사람에게" 가졌다는 증거는 "진리에게도"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계시는 공동체를 결정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요삼 1:8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공동체가 훈계,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함이니라"로 그것의 구체적인 기독교적인 행위에 동기를 부여한다. 이 결정이 개개의 신자들을 결속시킨다. 그 때문에 요한이서의 저자는 편지의 표현을 사용하여 그의 지도자들에 대해서 말한다: "1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2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요이 1:1-요이 1:3).(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Bultman; A. C. Thisel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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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Jdov"(3598, 호도스) 길 way, road, 대도 highway, 생활 방식 way of lif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기본어 호도스는 호머(Homer)로부터 나타나며,
(a)  그 일차적 요소는 동작(action)의 요소이다. 즉 행동으로서 '도보', 육지에서의 '여행'이나 바다에서의 '항해, 출발', 군대의 '행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b)  그리고 지역적, 공간적 의미에서, 이 단어는 사람이나 차량이 다니거나 행진하는 장소인 '길(way), 작은 길(path), 도로(road)', 강 '줄기(course)', 그리고 또한 배의 '항로'를 의미한다(Homer 이후로, 그리고 비문과 파피루스에 나옴).
(c)  이 단어는 초기에 벌써 회화적이면서 비유적인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길을 이용하거나 그 길로 가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호도스는 어떤 것에 도달하거나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 방책, 절차, 무엇을 행하거나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의미를 얻게 되었다. '삶의 길' 또는 '삶의 양식'이라는 문구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삶(인생)은 때때로 길에 비유된다(Democritus, Frag. 230). 개개의 경우에 있어서 옳지 못한 행동은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이라고 묘사되었다(Thuc., 3, 64, 4). 전문적인 철학적 용법에서 이 단어는 '질문 방법'이나 '인식 방법', '순서나 절차'(method)를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d)  헬라 문헌에서 두 길에 대한 묘사가 자주 발견된다. 악으로 가는 길과 선으로 가는 길, 경건한 자를 위한 장소에 이르는 오른편 길과 불의한 자들을 위한 형벌의 장소로 이끄는 길에 대해 언급한다.
호도스가 종교적인 관점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의가 깊다. 죽음 이후에 인간이 가는 두 길이 있다는 것은 일반적인 사상이다.
진리의 길, 지식을 가진 인간을 인도하는 길로서 하늘의 빛에 이르는 길,
길로서 그노시스, 지식 있는 자가 가고 있는 생명의 길 또는 완전한 길에 대한 언급이 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호도스는 70인역본에서 약 880회 나오며, 18개의 히브리어 상당어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주로 히브리어 데레크(1870: 길, 도로, 거리, 여행, 방식, 방법 등)의 역어로 나타난다(약 600회 이상).
구약성경에서 데레크/ 호도스는,
(a)  걸어다니는 길로서 '생명 나무의 길'(창 3:24), 술로 가는 길(창 16:7), 중요한 대로(민 20:17; 민 21:22), 해변의 길(사 9:1).
(b)  '여행'(창 45:23; 수 9:13; 창 24:21).
(c)  '활동, 행위'(시 1:6; 창 6:12).
(d)  '여호와의 길'(창 18:19; 신 9:16).
(e)  '태도, 습관'(창 19:31; 창 31:35).
(f)  '창조의 역사'(욥 40:19; 잠 8:22; 욥 26:14)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호도스는 신약성경에서 102회 나오며, 주로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바울 서신 6회, 히브리서 3회, 야고보서 3회, 베드로후서 4회, 유다서 1회, 요한계시록 2회 사용되었다.
(a)  ① 호도스는 문자적 의미로 '다니는 길, 도로'에 대해 사용되었다. 마 2:12; 마 7:13 이하; 마 13:4; 마 13:19; 막 4:4; 막 4:15; 막 10:46; 눅 8:5; 눅 8:12; 눅 10:31; 눅 18:35; 눅 19:36; 행 8:26; 행 9:17; 약 2:25 등.
"길에서". '노중에서, 길의 도중에서, 길가면서', 눅 10:4; 행 8:36; 행 25:3; 행 26:13.
② 마 10:5에서 "이방인의 길"(호도스 에드논)은 이방적인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지역 바깥의 이방인 지역으로 통했던 길을 의미한다.
③ 눅 2:44에서 헤메라스 호도스("하룻길")는 사람이 하루에 걸어가는 거리, 즉 하룻길을 말한다.
행 1:12에서 사바투 호도스("가기 알맞은 길")는 출 16:29의 계명(참조: 민 35:5)을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안식일에 유대인에게 허락되었던 보행 거리를 의미한다. 이 거리는 약 880미터였다.
(b)  호도스는 문자적 의미에서 '여행의 길, 여정, 노정, 여행'에 대해 사용되었다. 여행 중에, 마 5:25; 마 15:32; 마 20:17; 막 8:27; 막 9:33; 막 10:32; 막 10:52; 눅 12:58; 눅 24:32; 눅 24:35; 행 9:27; "여행 중에"(여행 길로부터), 눅 11:6; "여행을 위하여", 눅 9:3; "길을 가다"(여행하다), 가던 여행길을 계속하다, 행 8:39.
(c)  호도스는 '길'이라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구약의 용법에서처럼, 일부는 '하나님의 행위와 구원 사역을 뜻하는 말로(예: 롬 11:33; 계 15:3; 히 3:10), 또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말로(예: 마 22:16; 막 12:24; 눅 20:21; 마 21:32) 사용되었다.
구약의 인용구 중에서도 매우 자주 나타나며(행 2:28; 참조: 시 16:11; 시 13:10; 호 14:9; 롬 3:17; 시 36[35]:1; 눅 1:79; 사 9:2), 생활 방식을 의미한다(행 14:16; 롬 3:16; 고전 4:17; 약 1:8; 약 5:20).
(d)  마 3:3과 그 병행구 막 1:3; 눅 3:4(참조: 요 1:23)에서는 주를 위하여 길을 예비하라는 부름과 아울러 사 40:3을 인용한다. 퀴리오스("주")라는 칭호가 예수께로 전이됨에 따라, 세례(침례) 요한의 사역을 구약성경 말씀의 성취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요한은 선구자로서, 예수님의 오심을 알리어 회개를 촉구하고 세례(침례)를 줌으로써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였다(참조: 막 1:2에서 인용된 말 3:1; 참조: 마 11:10; 눅 1:17; 눅 1:76; 눅 7:27).
주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가지고 우리 마음에 도달할 수 있는 그런 길이다. 눅 1:79의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라는 표현에서 호도스는 '방법, 수단'을 의미하기보다 '길'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들과 평화를 이루며 사는 것을 말하고 있는 사 59:8(참조: 롬 3:17)과는 대조적으로, 여기서의 평강은 메시야적인 '구원'을 일컫는다.
(e)  마 7:13; 마 7:14에서 두 길의 상징을 사용한다: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첫번째 말씀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뒤이어지는 길에 대한 병행 은유법처럼 보인다. 의의 길이 넓은 길이라는 다른 기록들과 대조하여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처럼 협착하다. 여기서는 문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입구(눅 13:24에서 처럼)로 생각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길은 넓은 악의 길과 대조되는 의미로서 경건한 좁은 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의도하는 바는 그리스도인, 곧 제자가 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은 좁고 이 길은 어렵다. 그러나 이외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다른 길은 없다. 이 길에 들어서는 자가 적다면 이 길이 너무 좁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더 쉬운 길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길은 제자들의 삶의 길(방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기대하는 그 무엇이다. "문"과 마찬가지로 "길"도 들어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목적지는 이미 밝혀져 있다. 즉 멸망이 아니라 생명이다. 14절의 "찾는"이라는 문구는 여러 개의 길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거나 어려운 형국에서 길을 발견하려고 애쓴다거나 아니면 오랜 탐사 끝에 좁은 문으로 찾아 들어온다는 의미가 아니다. 좁은 길은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역사가 없이는 찾을 수 없는 길이며 찾는 자가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길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길이며 이 길로 들어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시다.
마태복음에서는 특히 천국에 들어가는 것(예: 마 5:20), 생명에 들어가는 것(예: 마 18:8 이하) 또는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예: 마 25:21; 마 25:23)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마 7:13 이하의 말씀도 이 범주에 속한다.
(f)  히브리서에서 호도스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에 대해 사용되었다.
-히 9: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위의 두개 구절에서 호도스는 상호 관련되어 있다. 히 9:8의 호도스는 분명히 위치상 성전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히 10:19에 비추어 볼 때 '길'이라기보다는 '들어감, 접근, 나아감'이며, 에이소도스(ei[sodo", 1529)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확실한 언급은 없지만 이 길은 명백히 하나님(과의 교제)께 나아가는 길이다. 이러한 논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관한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가신 분(참조: 히 6:20) 또는 인도자(참조: 히 2:10; 히 12:2)로서, 미증유(未曾有)의 살아있는 접근로(living way of access)를 열어 놓으셨다. 이것은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위해 길을 예비하는 구속자에 관한 영지주의적(gnostic) 논재와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히브리서의 사상은 희생 제물로서의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휘장을 갈라 놓으심으로써 그 길을 예비하셨는데, 이 휘장은 그의 육체이다. 영지주의적 견해에 의하면, 이것은 하늘의 세계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물질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성경적 견지에서, 예수님께서 자기의 살(과 피)을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드렸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갈라 놓은 것은 물질이 아니라 죄라는 점이 명백해진다. 악한 양심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참조: 히 10:22; 롬 5:1; 엡 2:18 이하; 엡 3:11 이하). 히브리서의 배경에 깔려 있는 표상은 속죄제(참조: 레 16장)이다.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 희생의 피를 가지고 부지중에 지은 백성의 죄들을 속(贖)하였다. 옛 언약 하에서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여호와께 그와 같은 접근을 할 수가 있었다. 벧후 1:11도 이러한 문맥에 속한다.
(g)  요한복음에서 호도스는 예수님의 인격에 적용되었다(요 14:1-6). 이는 신약성경의 독특한 용법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어디로 떠나 가시는지 그 장소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또한 그 길도 알지 못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바로 아버지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밝히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의 목적지는 아버지와 함께 거하는 곳이다(요 14:6b와 요 20:17). 또한 이를 통하여 그 제자들의 길이 열린다.
(h)  사도행전에서의 호도스.
① 행 2:28,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여기서 호도스는 '수단, 방법' 혹은 부활의 '가능성'을 가리킨다.
② 행 16:17,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여기서도 호도스는 '방법, 수단'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③ 행 14: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여기서 호도스는 '처세'(walk), '행동(위)'을 의미한다.
④ 행 13:10에서 '길'은 그에 병행되는 단 3:27과 호 14:9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역사, 또는 하나님의 행동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명하신 행동의 뜻으로 볼 수도 있다.
⑤ 행 9:2; 행 19:9; 행 19:23; 행 22:4; 행 22:14; 행 22:22 등에서 호도스는 성도의 교제로 표현된 삶의 양태를 의미한다. 여기서 단수형으로 사용된 호도스는 다른 사람들(특히 적대적인 유대인들)이 하이레시스(ai{resi", 139, 참조: 행 24:14)라고 부른 것과 동등한 그리스도인 편에서의 개념이다. 이 길은 다른 사람들은 비난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옳은 길이라고 믿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⑥ 행 16:17("구원의 길")은 기독교의 메시지와 분명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행 18:25("주의 도")과 행 18:26("하나님의 도")은 예수님에 관한 선포와 관련되어 있다.
⑦ 행 22:4에서 바울은 "도"를 핍박하였다고 말한다: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여기서 "도"는 십자가에 못박힌 자의 부활에 관한 기독교의 메시지와 아울러 기독교 공동체까지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길"이, 가르침과 기독교 공동체 중 어느 하나만을 의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잘못된 양자택일을 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용어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으며 또한 두 의미가 함께 속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독립적으로 사용된 "길"의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독교인의 말씀 선포 및 기독교인들에 대한 칭호로 이해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길"은 이러한 말씀 선포가 특별한 생활 양식 또는 삶의 길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포괄하고 있다.
(i)  고전 12:31 하반절에서 바울이 말한 "제일 좋은 길"은 사랑(아가페)에 의해 지배되는 삶을 의미한다. 이 사랑은 영적 은사들에 대한 모든 열망 위에, 그리고 그에 우선하여 위치한다(참조: 고전 14:1; 빌 2:1 이하). 우리는 고전 12:31 하반적의 "길"(way)을 고전 4:17과 함께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
고전 4:17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길들"("그리스도 ... 안에서 나의 행사"-한글판 개역성경)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거기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조화되는 삶의 길에 관해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삶의 길을 그는 각처에서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위 속에서도 이것이 뚜렷하게 증거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명사 "나의 길들"("나의 행사"-개역)이라고 말할 수 있었고, 신도들에게 자기를 "본받는 자"되라고, 즉 그리스도와 조화되게 살라고 촉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j)  약 1:8에서 '처세'나 '행동'을 의미한다: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약 5:20에서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k)  베드로후서에서는 거짓 교리와 이단의 교사들을 논박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진리의 도"(벧후 2:2; 참조: 약 5:19 다른 읽기), 그리고 "의의 도"(벧후 2:21)라고 부른다. 이 길은 새로운 도덕성을 가져오며 또한 도덕성을 요구하고(참조: 벧후 2:20 이하, "거룩한 명령"). 나아가서는 그것에 의해 이교 사상과 구별이 된다. 바로 이러한 새로운 도덕성이라는 입장에서 살펴볼 때, 이 "길"의 의미가 선명히 드러난다. 거짓 교사들은 수치스러운 행위와 함께 "바른" 길(즉, 하나님께서 지시하시고 원하시는 길)에서 떠나 "발람의 길"(벧후 2:15)을 좇음으로써 기독교의 평판을 떨어뜨렸다. "발람의 길"과 "가인의 길"(유 1:11; 참조: 창 4:3-8; 민 22-24장)이라는 표현은 구약의 입장(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행위)에서보다는 후기 유대 전승에 준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후기 유대 전승에서는 구약의 입장을 고수하여 가인과 발람을 모든 방탕자와 이단자들의 조상과 스승으로 보고 있다(참조: Philo, Post.).(참조: W. Michaelis; G. Ebel;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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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whv(2222, 조에) 생명 lif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조에(Homer 이래)는 '생명(life)'을 의미한다.
(a)  조에는 헬라에서 유기적 존재들, 동물, 사람, 식물의 물리적 생명력을 의미한다. 생명은 물건이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을 특징 지우는 생명성(vitality)이다.
각 개개인 뿐만 아니라 전 우주까지도 살아있는 유기체, 또는 영혼을 갖고 있는 세계로 생각되었다.
(b)  헬라인들은 세 번째의 성분, 곧 이성 Reason, 정신 mind, 이해력 understanding(nou'", 3563)이 인간의 생명을 특징 지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마(sw'ma, 4983)와 또한 다소간 프쉬케(yuchv, 5590)가 자연적 생명을 구성하는 반면 누스(nou'", 3563)는 외부로부터 인간 생명으로 들어가 이 생명을 자연적 생명, 즉 동물의 생명 이상으로 향상시키고 여러 가지 양자택일을 할 수 있는 하나의 존재의 유형을 생산해내는 신적 요소인 것이다.
(c)  만약 신의 조에가 누스와 관련되어 있다면, 이것은 조에가 자연의 생명력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초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최고 가능성은 또한 누스이며, 누스는 육체와 분리될 수는 없지만, 육체와 구별함으로써만이 그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따라서, 참된 인간의 조에는 사람이 그것을 통해 몸과 혼을 결합함으로 조온이 되는 조에가 아니다. 프쉬케는 물질에 있어서 생명력의 원리이지만, 이것은 또한 물질과 대조되는 것인 인간의 자아(selfhood)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조에는 자연의 현상으로서의 생명이지만 또한 특별히 인간의 생명이기도 하다. 이 인간의 생명의 가능성은 유기적인 본질에서 성취되지 않으며 이것은 종(species)의 영속화를 넘어선 의미를 지닌다. 인간의 생명은 그 자체의 운명을 가지며, 행복과 불행을 알고, 그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명은 그것에 고유한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2. 70인역본의 용법 
조에는 70인역본에서 약 260회 나오며, 거의 대부분 히브리어 하이('살아있는' 것)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조에는 무엇보다도 생명의 길이나 질병, 죽음과 구별되는 생명력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때리시고 치료하시는 생명과 역사의 주인이시다. 후에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참조: 마카베오사서 18:18). 고대의 비문들은 지상의 생명에 대해 언급을 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조에는 신약성경에서 13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조에는 자연적 생명을 나타낸다.
① 조에는 자연적 죽음과 구별되는 자연적 생명을 가리킨다.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고전 3: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② 눅 16:25에서 '살아있는 동안'을 묘사한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눅 12:15; 행 8:33에서도 마찬가지이다.
③ 고전 15:19에서 이 세상에서 '삶을' 표현한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딤전 4:8에서도 같은 의미를 가지며, "내 생"과 대조되어 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④ 약 4:14에서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생명을 묘사한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⑤ 히 7:3에서 '생'의 끝을 묘사한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⑥ 계 11:11에서 '생'기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참조: 창 6:17; 창7:15).
(b)  조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초자연적 생명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이 생명은 신자들이 미래에 받을 것이지만, 이 땅에서 지금 향유하는 것이다.
① 요일 5:20에서 하나님은 참 생명, 곧 영생이시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요 5:26a에서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요 12:50에 의하면 하나님의 명령은 영생이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② 요 5:26b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셨다.
요 1:14에서 "그 안에 생명이 있다". 요일 5:11에서도 이를 증거한다. 그는 "생명의 주"이시며(행 3:15), "생명의 말씀"이시다(요 1:1). "이 생명이 인간에게 나타내시게 된 것이다"(요일 1:2). 그는 "생명의 떡"이다(요 6:35; 요 6:48; 요 6:33). 그는 단순히 "생명"이란 말로 표현되었다(요 11:25; 요 14:16). 그는 "우리의 생명"이시다(골 3:4). 그 안에 있는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며(요 1:4b) 따라서 사람들은 그를 따름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빛을 얻는다(요 8:12).
(c)  조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얻는 신자들의 생명을 나타낸다.
① 이 생명은 은혜와 거룩의 생명이다.
롬 6:4에서 우리는 "세례(침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된다.
엡 4:18에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들을 묘사한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② 이 생명은 구원과 영광의 생명이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며(딤후 1:1), 그의 말씀과 복음의 전도로 말미암아 효력을 발한다, 요 6:68; 요 6:63; 행 5:20; 빌 2:16; 딤후 1:10; 고후 4:12. 사도들은 복음의 전도로, 사람들을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게" 한다(고후 2:16).
③ 성령은 생명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신다, 롬 8:2; 롬 8:6; 롬 8:10; 요 6:63.
④ 그리스도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계명(엔톨레)도 생명에 이르게 한다, 롬 7:10.
⑤ 이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로 간주되었다, 딤후 1:1에서 "썩지 아니할 것"과 함께, 벧후 1:3에서 "경건"과 함께, 롬 8:6에서 "평안"과 함께 나타난다.
⑥ 진실로 생명의 에클레시아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생명, 곧 은혜의 선물의 상속자들이다, 벧전 3:7.
⑦ 이 생명은 그들이 육체로 거하는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 있다, 골 3:3.
⑧ 그의 생명을 상실 당한 자는 누구든지 영광의 생명에서 제외된다. 행 11:18; 행 13:46; 행 13:48.
⑨ 특별히 요한복음에 따르면, 하나님의 생명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자는 생명(요일 5:12), 곧 영생을(요 6:40; 요 6:47) 소유하였고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 5:24; 요일 3:14).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영생은 사랑과(참조: 요 15:17), 기쁨(참조: 요 16:20-요 16:24) 안에서 그 모습을 나타낸다. 요일 3:14에 따르면 형제간의 사랑은 참 생명의 척도가 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에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비록 요한의 생명에 대한 견해에 많은 점들이 영지주의자들의 관점과 일치한다고 할지라도 요한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지주의자들은 영생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거의 도달하기 어려운 세계로 옮겨 버린 반면에 요한은 영생을 바로 현재로 가져오며 또한 그리스도의 말씀과 계명과 인격에 굳게 닻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요 17:3). 이 영생을 지금 이곳에서 소유하는 신자들은, 사망과 심판이 더 이상 생각할 요소들이 아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요 5:24; 요 11:25). 왜냐하면 영생은 그 안에 영원의 씨앗들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4:14; 요 6:27; 요 12:25).
(d)  조에는 종말의 복된 시대에서 누릴 생명에 대해 사용되었다: 요 3:15.
① 내세의 영생, 마 10:30; 눅 18:30; 막 19:29.
② 영생에 대한 질문, 막 10:17; 눅 18:18; 눅 10:25; 마 19:16이하.
③ 마지막 심판의 결과, 마 25:46; 롬 2:7; 마 7:14; 마 18:8이하; 막 9:43, 막 9:45; 롬 5:17이하, 롬 5:21; 롬 6:22이하.
④ 죽은 상태에서 나온 자들의 생명, 롬 11:15; 갈 6:8; 딤전 1:16; 딤전 6:12, 딤전 6:19; 벧전 3:10.
⑤ 이 생명은 참 생명으로 불리워진다, 딤전 6:19; 딛 1:2; 딛 3:7.
⑥ 생명 책, 빌 4:3; 계 3:5; 계 13:8; 계 17:8; 계 20:12, 계 20:15; 계 21:27.
⑦ 생명의 나무, 계 2:7; 계 22:2; 계 22:14; 계 22:19.
⑧ 생명의 면류관, 계 2:10.
⑨ 생명수, 계 21:6; 계 22:1; 계 22:17; 계 7:17.
(참조: Walter Bauer; H.G.Link; R.Bult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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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함]]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왜 예수께서 그 말씀을 하셨을까...
[마 22:37-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막 12:28-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누구나 다 이 가르침을 순종-실행이 복되다는 것에 동의하며 그렇게 살아보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나보다 연약한 자를 돕고, 가난한 자 구제하며, 병든 자를 돕는 일에 열심을 낸다. 
그런데....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나보다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고, 병든 자를 위로하며, 불쌍한 자들을 돕고, 심지어 약자 편에 서서 동성애자들을 이해하고 용납-관망하는 것일까? 
물론 그렇게 사는 것은 어찌 보면  일리가 있다.....무엇이 생명으로 사는 삶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없이, 갈등없이 분란을 피하고 ((피상적으로 말씀을 읽고 따름이 아닐까??)) 그렇게 사는 삶으로 인해서도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칭찬하는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리는 시종일관 진리임을 잊지말자!!  
그런데....예수께서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고 하신 말씀은 그런 뜻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관통하는 핵심이 있는 것 같다. 
예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레위기 19:11-18절 말씀을 새롭게 더 깊은 본 뜻을 재언급하신 것 아닐까... 
JC는 그리스도(메시야), 곧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지혜외 지식이시요, 창조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바 된 생각되어진 말씀이시며, 동시에 하나님의 생각이 말로 표현된 바, 참되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시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안에 기록된 바 그 모든말씀의 고갱이(관통하는 핵심적 생명) 그 자체이시다!!))
레위기 19장은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웃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고 살 것인가에 대한 말씀으로, 몇가지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도적질하지 않는 것 ♡ 속이지 않는 것 ♡ 거짓말 하지 않는 것 ♡ 거짓 맹세하지 않는 것 ♡ 이웃을 학대하지 않는 것 ♡ 남의 것을 억지로 뺏지 않는 것 ♡ 일꾼의 품삯을 하룻밤 넘기지 않는 것 ♡ 청각장애자와 시각장애자를 괴롭히지 앟는 것 ♡ 재판을 공정하게 하는 것 ♡ 남을 헐뜯지 않는 것 ♡ 이웃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 것 ♡ 형제를 미워하지 않는 것 ♡ 사람과 맺힌 것이 있으면 푸는 것 ♡ 원수를 갚지 않는 것 ♡ 앙심을 품지 않는 것 
예수께서는 위에 열거한 것을 지키는 것을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자기자신의 지고지선, 최상의 진복이 바로 구원영생의 영복누림과 JC안으로 참여함이라면, 바로 그렇게 자신의 구원영생의 영복누림과 JC안으로 참여함을 추구하고 진력한다면, 이 모든 것을 지켜 행함은 궁극적으로 최우선적으로 다른 사람을 선대함(구원영생누림+JC안으로 참여함으로써 섬기는 빛과 소금됨으로 보내심 받은 자리에서 섬김)...곧 JC의 영이신 성령따라 행함으로써 이웃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여기에 더 나아가 참생명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함으로써 영생구원에 이르게 하려 함이 아닐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8-10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로마서 13:8-10]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탐내지 말아라" 하는 계명과, 그 밖에 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우선순위를 바꾸지 않도록 주의하자!! 간음하는 것, 미워하는 것, 횡령하거나 도적질 하는 것, 탐욕을 부리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해야 힐 것 같다. 
[잠 4: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베풀고, 나눠주고, 봉사하고, 약자 편에 서는 어떤 거창한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JC안에서!! -->소극적 측면에서 보자면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것--->적극적 측면에서는 주님과 하나됨 안에 거함으로써 그분의 모든 풍성부요충만능력을  누림이 먼저요동시에 자신을 주께 드리고, 주께서 주신 Q사랑에 인침받고 공급 받은대로 이웃과 나누고, 이웃에게 베풀고, 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며,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 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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