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1.08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요6장.갈릴리벧세다(디베랴)_5천명먹이심.바다위를 걸어오심.가버나움에서 생명의 떡_영생의말씀강화.
첨부파일 :

개역개정]요6장

===오천 명을 먹이시다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바다 위로 걸어오시다

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생명의 떡

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23.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24.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41.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42.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4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46.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52.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영생의 말씀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

NASB]요6장

1.  After these things Jesus went away to the other side of the Sea of Galilee (or Tiberias).

2.  And a great multitude was following Him, because they were seeing the signs which He was performing on those who were sick.

3.  And Jesus went up on the mountain, and there He sat with His disciples.

4.  Now the Passover, the feast of the Jews, was at hand.

5.  Jesus therefore lifting up His eyes, and seeing that a great multitude was coming to Him, *said to Philip, "Where are we to buy bread, that these may eat?"

6.  And this He was saying to test him; for He Himself knew what He was intending to do.

7.  Philip answered Him, "Two hundred denarii worth of bread is not sufficient for them, for everyone to receive a little."

8.  One of His disciples, Andrew, Simon Peter's brother, *said to Him,

9.  "There is a lad here who has five barley loaves and two fish, but what are these for so many people?"

10.  Jesus said, "Have the people sit down." Now there was much grass in the place. So the men sat down, in number about five thousand.

11.  Jesus therefore took the loaves; and having given thanks, He distributed to those who were seated; likewise also of the fish as much as they wanted.

12.  And when they were filled, He *said to His disciples, "Gather up the leftover fragments that nothing may be lost."

13.  And so they gathered them up, and filled twelve baskets with fragments from the five barley loaves, which were left over by those who had eaten.

14.  When therefore the people saw the sign which He had performed, they said, "This is of a truth the Prophet who is to come into the world."

15.  Jesus therefore perceiving that they were intending to come and take Him by force, to make Him king, withdrew again to the mountain by Himself alone.

16.  Now when evening came, His disciples went down to the sea,

17.  and after getting into a boat, they [started to] cross the sea to Capernaum. And it had already become dark, and Jesus had not yet come to them.

18.  And the sea [began] to be stirred up because a strong wind was blowing.

19.  When therefore they had rowed about three or four miles, they *beheld Jesus walking on the sea and drawing near to the boat; and they were frightened.

20.  But He *said to them, "It is I; do not be afraid."

21.  They were willing therefore to receive Him into the boat; and immediately the boat was at the land to which they were going.

22.  The next day the multitude that stood on the other side of the sea saw that there was no other small boat there, except one, and that Jesus had not entered with His disciples into the boat, but [that] His disciples had gone away alone.

23.  There came other small boats from Tiberias near to the place where they ate the bread after the Lord had given thanks.

24.  When the multitude therefore saw that Jesus was not there, nor His disciples, they themselves got into the small boats, and came to Capernaum, seeking Jesus.

25.  And when they found Him on the other side of the sea, they said to Him, "Rabbi, when did You get here?"

26.  Jesus answered them and said, "Truly, truly, I say to you, you seek Me, not because you saw signs, but because you ate of the loaves, and were filled.

27.  "Do not work for the food which perishes, but for the food which endures to eternal life, which the Son of Man shall give to you, for on Him the Father, [even] God, has set His seal."

28.  They said therefore to Him, "What shall we do, that we may work the works of God?"

29.  Jesus answered and said to them, "This is the work of God, that you believe in Him whom He has sent."

30.  They said therefore to Him, "What then do You do for a sign, that we may see, and believe You? What work do You perform?

31.  "Our fathers ate the manna in the wilderness; as it is written, ' HE GAVE THEM BREAD OUT OF HEAVEN TO EAT. '"

32.  Jesus therefore said to them, "Truly, truly, I say to you, it is not Moses who has given you the bread out of heaven, but it is My Father who gives you the true bread out of heaven.

33.  "For the bread of God is that which comes down out of heaven, and gives life to the world."

34.  They said therefore to Him, "Lord, evermore give us this bread."

35.  Jesus said to them, "I am the bread of life; he who comes to Me shall not hunger, and he who believes in Me shall never thirst.

36.  "But I said to you, that you have seen Me, and yet do not believe.

37.  "All that the Father gives Me shall come to Me, and the one who comes to Me I will certainly not cast out.

38.  "For I have come down from heaven, not to do My own will, but the will of Him who sent Me.

39.  "And this is the will of Him who sent Me, that of all that He has given Me I lose nothing, but raise it up on the last day.

40.  "For this is the will of My Father, that everyone who beholds the Son and believes in Him, may have eternal life; and I Myself will raise him up on the last day."

41.  The Jews therefore were grumbling about Him, because He said, "I am the bread that came down out of heaven."

42.  And they were saying, "Is not this Jesus, the son of Joseph, whose father and mother we know? How does He now say, 'I have come down out of heaven'?"

43.  Jesus answered and said to them, "Do not grumble among yourselves.

44.  "No one can come to Me, unless the Father who sent Me draws him; and I will raise him up on the last day.

45.  "It is written in the prophets, 'AND THEY SHALL ALL BE TAUGHT OF GOD.' Everyone who has heard and learned from the Father, comes to Me.

46.  "Not that any man has seen the Father, except the One who is from God; He has seen the Father.

47.  "Truly, truly, I say to you, he who believes has eternal life.

48.  "I am the bread of life.

49.  "Your fathers ate the manna in the wilderness, and they died.

50.  "This is the bread which comes down out of heaven, so that one may eat of it and not die.

51.  "I am the living bread that came down out of heaven; if anyone eats of this bread, he shall live forever; and the bread also which I shall give for the life of the world is My flesh."

52.  The Jews therefore [began] to argue with one another, saying, "How can this man give us [His] flesh to eat?"

53.  Jesus therefore said to them, "Truly, truly, I say to you, unless you eat the flesh of the Son of Man and drink His blood, you have no life in yourselves.

54.  "He who eats My flesh and drinks My blood has eternal life, and I will raise him up on the last day.

55.  "For My flesh is true food, and My blood is true drink.

56.  "He who eats My flesh and drinks My blood abides in Me, and I in him.

57.  "As the living Father sent Me, and I live because of the Father, so he who eats Me, he also shall live because of Me.

58.  "This is the bread which came down out of heaven; not as the fathers ate, and died, he who eats this bread shall live forever."

59.  These things He said in the synagogue, as He taught in Capernaum.

60.  Many therefore of His disciples, when they heard [this] said, "This is a difficult statement; who can listen to it?"

61.  But Jesus, conscious that His disciples grumbled at this, said to them, "Does this cause you to stumble?

62.  ["What] then if you should behold the Son of Man ascending where He was before?

63.  "It is the Spirit who gives life; the flesh profits nothing; the words that I have spoken to you are spirit and are life.

64.  "But there are some of you who do not believe." For Jesus knew from the beginning who they were who did not believe, and who it was that would betray Him.

65.  And He was saying, "For this reason I have said to you, that no one can come to Me, unless it has been granted him from the Father."

66.  As a result of this many of His disciples withdrew, and were not walking with Him anymore.

67.  Jesus said therefore to the twelve, "You do not want to go away also, do you?"

68.  Simon Peter answered Him, "Lord, to whom shall we go? You have words of eternal life.

69.  "And we have believed and have come to know that You are the Holy One of God."

70.  Jesus answered them, "Did I Myself not choose you, the twelve, and [ yet] one of you is a devil?"

71.  Now He meant Judas [the son] of Simon Iscariot, for he, one of the twelve, was going to betray Him.

========

요한복음 6장 (개요)

본 장(章)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본다.

Ⅰ. 떡의 기적(1-14).

Ⅱ. 그리스도가 물위를 걸으심(15-21).

Ⅲ. 무리가 가버나움으로 따라감(22-25).

Ⅳ. 떡의 기적으로 인해 야기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함. 

여기서 그는 육적인 양식을 찾는 그들을 책망하신다. 또 그들이 영적인 양식을 위해 어떻게 노력해야 하며(26-29), 영적인 양식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면서(30-59), 그들에게 영적인 양식에 대해 가르쳐 주신다.

Ⅴ. 그가 말씀하신 것에 대한 그들의 불만과 그 불만을 이유로 그가 그들에게 준 책망(60-65).

Ⅵ. 그에게서 많은 사람들이 떠나감.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 자기를 떠나지 말라는 교훈(66-71).

=======

오천 명을 먹인 기적(요 6:1-14)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가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시는 기사를 취급하게 된다. 

이 기적은 그리스도의 생애의 활동에 대해서는 네 복음서 기자들 모두가 기록한 유일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다른 기자들이 기록한 것은 대체로 이야기하지 않던 요한도 이것은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뒤따라 나오는 교훈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관찰해 보자.

Ⅰ. 이 기적이 행해졌던 "장소" 와 "때"에 대해 보자. 

-- 그런데 이 장소와 때는 그 이야기의 사실성에 대한 더 큰 증거가 된다. 그 기적은 옛날에 행해진 것이고 그 기적이 행해진 장소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하지 않고, 세부적인 사정을 말했다. 그래서 답사를 해 볼 수도 있는 정도였다.

1. 그리스도가 계셨던 지방(1절). 

-- 즉 그는 체제하고 계시던 마을에서, 여기서는 "디베랴 바다"로 불리 웠고, 다른 경우에서는 "게네사렛 호수"라 불린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다." 그런데 헤롯이 디베리우스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여 그렇게 불리워졌고, 아마 그곳을 그의 도시로 만들었던 것 같다. 

-- 그리스도는 이 내해(內海)를 직접 건너가지 않고, 동일한"연안" 여행을 하셨다. "육지로'갈 수 있는 곳에서도 "해상으로" 가는 것이 편리할 때는 그 편을 택하는 일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결코 "그의 하나님을 시험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마 4:7).

2. 그리스도를 수반했던 일행. 

--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랐다. 그 것은 그들이 그가 행하시는 기적들을 보았기 때문이다"(2절). 여기서 몇 가지 유의해 보면

(1) 우리 주님 예수께서 "선한 일"을 하시면서 다니셨을 동안에는 계속해서 "군중들" 가운데서 사셨는데, 그건 그에게 명예보다는 고통을 주었다. 

-- 선하고 유용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들을 섬기면서, 일거리가 많다고 불평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할" 세상에 가면 우리 자신들을 즐길 여유를 많이 누리리라.

(2) 그리스도의 기적들이 많은 사람을 "그에게로"이끌게 했지만, 결과적으로  기적들로인해 그에게 "(자원함으로) 복종에 이른 자는" 많지 않았다. 

-- 그들은 신기한 기적들을 통해 자신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켰었는데, 그들의 양심은 그 기적들의 능력으로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그들을 잘 맞이할 준비를 갖추신 그리스도(3절). 

-- 그가 편리하게 되고 그를 따라 온 군중들에게 잘 들리도록 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셔서," "제자들과 함께 앉으셨다." 이것은 "자연스런" 강단이었지, 에스라의 경우처럼 "일부러" 만든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이제 "들판의 설교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말씀은 언제나 들을 만한 것이었다. 그는 선생들이 자리를 잡고 가르치듯 "앉으셨다." 그는 편하게, 또는 당당하게 앉으셨다. 그러나 그는 권위를 가지고 있는 자처럼 앉으셨고, 그에게 가해졌던 청원을 받아들일 자세로 앉으셨다. 누구든 원하는 자는 나아와 그를 만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앉으셨다." 그는 황공하게도 "그들과 함께 앉는다." 그리고 군중들 앞에서 그들을 존중했다. 또 그들이 곧 그와 함께 누릴 영광의 전조를 그들에게 준 것이다. 우리는 "그와 함께 앉는다"고 했다(엡 2:6).

4. 이러한 일이 있었던 "때." 

-- "그 후에"라는 첫 말은, 전 장에서 나은 사건에 곧 바로 뒤따라 나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이후는 시간이 길었기 때문이다. 단지 시간의 과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때가 "유월절이 가까워 왔던" 때라고 했다(4절). 이것을 여기서 주목해야 한다.

(1) 제자들을 순회하는 설교자들로 내보냈다가 절기를 지키기 위해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갈 수 있도록 하여 제자들이 모두 모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2) 유대인들은 일종의 의식적 절차를 따라 유월절  "30일" 전부터  미리 준비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 아주 오래 전부터 그들은 그 절기를 염두에 두고, 필요한 경우에는 도로를 재정비하고, 교량들을 수선했다. 그리고 유월절과 그 유월절의 제정에 관해 이야기를 가졌다.

(3) 유월절이 가까와 왔기 때문인 것 같은데, 그 때에는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았다. 그리고 잠시 동안 부재중이었으므로 군중들은 그를 더욱 따라 다녔다. 

-- 기회를 잃을 것을 예상하면 일을 두 배의 근면으로써 하게 된다. 엄숙한 의식들이 가까와 오고 있을 때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제함으로써 그 기회들을 준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Ⅱ. 기적 그 자체에 대해서 여기서 몇 가지를 관찰해 보자.

1. 그리스도는 자기와 함께 한 군중들을 유의해 보셨다(5절). 그는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셨다." 

-- 의심할 바 없이 그 무리들은 특히 먼 외딴 곳에서 온 가난하고 천하고 평범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천한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 공손히 대하도록 가르치기 위해 그들이 참여한 것을 기뻐하는 자기 자신을 보여 주었고, 그들의 행복을 위해 관심을 쏟으셨다. 또한 그리스도는 그들을 개떼들과 놓으시지 않고, 그들을 자기의 어린양들과 함께 두셨다. 그리스도에게는 가난한 자의 영혼은 부한 자의 영혼만큼 귀한 것이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될 것이다.

2. 그들에게 먹을 것을 줄 궁리를 하셨다. 

-- 그는 빌립에게 지시하셨는데, 빌립은 첫 번째로 복을 받은 제자였고, 또한 그의 모든 기적을 본 제자였는데, 기적 중에서도 특히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보았던 자이다. 그러므로 빌립이 "주여 당신이 하실 수 만 있다면 그들 모두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라고 말하리라 기대됨직도 했다. 

-- 이스라엘처럼, 그리스도의 업적들을 목격했고, 그 업적들의 혜택을 누렸던 자들이, "그가 광야에서 양식을 줄 수 있을까?"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용납이 불가능하다. 

-- 빌립의 고향은 베데스다였는데, 그 마을 근처에 그리스도는 지금 와 계셨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그리스도는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다가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고 물으셨다.

(1) 그리스도는 그들 모두가 자신과 "함께 음식을 먹어야"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한다. 

-- 어떤 자들은 그가 그들을 가르치며 병을 고쳐 주었으니, 이제는 그들이 보답할 차례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무리들 가운데 어떤 자들은 "부자"였을 것이고, 우리가 확신컨대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은 "가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려고 애쓰고 계시다. 

-- 그리스도의 영적인 은사들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그 "값"을 치러야 하는 대신에, 그 은사들을 받아들인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의 영혼들을 생명의 떡으로 먹이신 그리스도는 또한 그들의 육신을 "충분한 양식"으로 먹이신다. 이는 주님이 육신을 귀히 여기심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고, 우리에게도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할 용기를 주기 위해서이며, 또한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한 표본을 우리에게 설정해 주기 위해서이다(약 2:15, 16).

(2) 그의 질문은 "우리가 어디서 이 떡을 살 것인가?"이다. 

-- 어떤 자들은 그의 빈궁함을 고려하여, 그가 차라리, "우리가 이 떡을 살 돈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 것인가?"라고 물어야 할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부족한 것 이상으로 그는 가진 모든 것을 내놓으려 하신다. 그는 주기 위해(음식을) 사실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줄 수 있도록 "일해야" 한다(엡 4:28).

3. 이러한 질문을 하신 의도. 그것은 빌립의 믿음을 시험해 보기 위한 것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하려 했던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6절). 여기서 몇가지 유의해 보자.

(1) 우리 주님 예수는 어찌할바를 몰라서 그런 의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 그 경우가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는 해야 할 바가 무엇이고 어떤 과정을 취해야 할 것인가를 알고 계시다(행 15:18). 그는 자신이 그의 백성을 향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알고 계시다(렘 29:11). 그리고 그것은 불확실한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알지 못할 때도 그는 스스로 그가 행할 바를 알고 계시다.

(2)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들을 "당황케"하는 일을 즐거워하실 때 그것은 오직 그들을 "시험하기" 위한 의도에서이다. 

-- 그 질문은 빌립을 난처한 입장에 놓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빌립이 "주여 만일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당신의 권능으로 그 일들을 하실 수 있고, 우리는 떡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려 했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그런 질문을 하셨다.

4. 이런 질문에 대한 빌립의 대답. 즉 "이백 데나리온어치의 떡으로도 부족합니다"(7절). 

-- "주님 그들을 위해 떡을 살 생각은 마십시오. 왜냐하면 마을에 그렇게 많은 떡이 있을 리 없고, 또한 우리가 그렇게 많은 돈을 내놓을 여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돈 보따리를 가지고 다니는 유다에게 물어 보십시오." 

-- 그들의 "이백" 데나리온은 "영국" 돈으로는 "6"파운드 정도에 달한다. 그래서 만일 그들이 한꺼번에 그만한 돈을 내놓는다면, 그들의 자금이 고갈되어 그들을 파산시킬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은 굶어 죽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로티우스(Grotius)는 이백 데나리온어치의 떡을 이천 명에게 나누어 주기에도 불가능할 것으로 계산한다. ***

-- 그러나 빌립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하려 했다. "각 사람에게 조금씩" 할당하려 했다. 이러한 모습에서 빌립의 믿음의 연약함을 보라. 마치도 그 가정의 주인(예수)이 "평범한 사람"이 었던 것인 양, 그는 "평범한 방식"으로만이 떡을 공급할 것으로 기대했다. 

-- 그리스도는 자신이 그 후에 했던 것처럼 그에게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즉 "빌립아 내가 그렇게 오랜 동안 너와 함께 있었는데 너는 아직도 나를 알지 못했느냐?" 혹은 마찬가지 경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주님의 손이 짧아졌느냐?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우리는 눈에 보이고 평범한 수단들을 행하지 못할 때 하나님의 권능을 불신하기 쉽다. 즉 우리가 그를 볼 수 있는 그 이상으로는 그분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기 쉽다.

5. 다른 제자에게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양식에 관해서 정보를 받았다. 그 제자는 여기서 "시몬 베드로의 형제"로 "안드레"였다. 

-- 비록 안드레가 제자됨에는 베드로보다 선배였고, 베드로를 그리스도에게 데려 오는 역할을 한 자였지만, 여전히 베드로는 그 후에 안드레보다 훨씬 빛났던 자였기 때문에 안드레는 베드로에 대한 친척 관계로써 서술되어 있다. 안드레는 그들이 손가지고 있었던 것을 그리스도에게 알려 주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을 알 수 있다.

(1) 주님이 염려하는 자들에 대한 그의 "강한 사랑." 

-- 그는 주님이 그랬던 것보다 더 잘 그들의 양식을 절약하는 자인 체하여 가진 것을 숨기려고 하지 않고, 정직하게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에 한 "어린 소년"이 있는데, 그는 팔 물건들을 가지고 모인 사람들을 좇아 다니는 장사군들처럼 음식을 팔려고 무리들을 따르던 소년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가 무리들을 위해 가지고 있었던 것을 전해 들었다. 그런데 그것은 "보리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였다.

① 그 음식물은 "거칠고," "평범한" 것이었다. "보리 떡"이었다. 

-- 가나안은 "밀의 산지"였다(신 8:8). 그곳의 주민들은 늘 가장 질이 좋은 밀을 먹었다(시 81:16). 그러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은 "보리 떡"으로도 만족해하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도 그런 거친 음식만 먹어야 한다거나, 거기에다 신념을 두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좋은 음식을 주실 때는 그것을 받고 감사하자). 그러나 우리가 성찬을 탐내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잠 23:3). 

-- 비록 우리가 나쁜 음식을 다시 먹게 된다 할지라도 투덜거릴 것이 아니라 만족해하고 감사하고 그런 음식에 잘 순종해야 한다. 보리떡은 그리스도가 "드셨던" 떡이고, 우리가 받기에는 오히려 감당치 못할 만한 떡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양식을 나누어 주셨는가를 기억하면서, 가난한 자의 초라한 음식을 경히 여기지 말고 멸시하지 말아야 한다.

② 그나마 너무도 "적은"것이었다. 떡은 "다섯 덩이" 뿐이었다. 너무도 적어서, 한 어린 소년이 다 먹어 치울만한 것이었다. "떡 이십 덩이"와 그 외의 다른 음식들을 모았더라도 기적 없으면 일백 명을 먹일 수 없을 것이라는 기사를 찾아 볼 수 있다(왕하 4:42, 43).

-- 물고기는 "두 마리" 뿐이었는데, 그것도 너무 작아, "한 입"에 들어갈 정도였다. 고기는 "소금에 절이거나" "간장에 절인" 것이리라. 요리할 불이 그들에게 없었기 때문이다. 떡의 양도 적었는데, 물고기의 양은 떡에 배해 볼 때 더욱 적었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양의 딱딱한 떡을 고기 없이 먹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으로도 만족해하고 있었다. 떡은 배고픈 자에게는 좋은 음식이다. 그러나 고기를 달라고 투덜거리는 자들은, "그들이 탐욕대로 식물을 구하였다"는 말을 듣게 된다(시 78:18).

-- 그런데 안드레는 그 음식이 자라는데 까지는 사람들이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모자랄 것이라는 공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베푸는 사랑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2) "그러나 그것이이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 이것을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준다는 일은 그들을 조롱하는 일뿐입니다"라는 말속에서, 그의 "믿음의 연약함"을 본다. 

-- 빌립과 안드레는 그리스도의 권능을 고려해야 했었다(그들은 그 권능에 대해 큰 체험을 가졌었다). 광야에서 장막에 거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누가 먹이셨느냐? "한 사람으로 하여금 수천명을 쫓아 버리게" 하실 수 있었던 분은 떡 한 조각으로 수천 명을 먹일 수 있다.

6. 그리스도께서 군중들을 앉히도록 제자들에게 지시하셨다(10절). 즉 "비록 너희가 그들 앞에 내놓을 것이 아무 것도 없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나를 믿고, 사람들로 앉게 하라." 이것은 "시장"에 "섭리를 보내," 돈 없이 사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저들의 순종을 시험하시려 했다.

(1) 식당을 마련했다. 비록 사막지대였지만, "거기에는 많은 풀이 있었다." "산에 풀이 자라게 하니," 자연은 얼마나 은혜가 풍부한가를 보라(시 147:8). 이 풀은 먹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넉넉히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도 주신다. 그리스도가 설교하고 계셨던 이 곳에는 풍부한 풀이 있었다. 복음은 다른 축복들도 부수적으로 가져온다. "그 때에 땅이 그 소산을 낼 것이다"(시 67:6). 이렇게 많은 풀은 땅에 않아야 했던 자들을 위해 더욱 편리한 장소로 만들어 주었고(그들이 식탁에 앉아 있었던 바를 회상했던 것처럼 에 1:6), 그들에게 방석이나 침대 대용으로 편의를 제공하였다. 들의 풀에 대해서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볼 때(마 6:29, 30), 이 자리는 아하수에로 왕의 침실을 능가했다. 자연의 화려함이 가장 찬란한 것이다.

(2)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수효이다. 그 수효는 "약 오천명"이다. 이는 복음서의 연회를 대변해 주는 커다란 잔치이고, 만민을 위한 연회이고(사 25:6) 찾아오는 자 모두를 위한 연회이다.

7. 음식의 분배(11절). 여기서 몇 가지를 관찰해 보자.

(1) 그 분배는 감사로써 행해졌다. "그는 축사(감사)를 하셨다." 이 점에서 우리는 몇 가지 유의해 보자.

① 우리는 우리의 음식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음식을 갖게 되는 것은 하나의 은총이고 또한 그 음식은 하나님 손길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로써 음식을 받아야"한다(딤전 4:4, 5). 우리가 "물질"을 공급받는 것은 피조물이 주는 위로의 향기이며, 그런 이유에서 거기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② 비록 우리의 음식이 거칠고 소량이라 해도, 또한 우리가 풍부하지도 않고 맛있는 것도 아닌 음식을 대한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2) 떡과 물고기는 그리스도의 손길로부터 그의 제자들의 조력에 힘입어 분배되었다(11절). 여기서 유의할 점은,

① 우리의 모든 위안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손길로부터 온다. 그 위안을 누가 가져오든 그 위안을 보내시는 자는 그이시다. 그가 우리에게 분배해 줄 제자들에게 주신다.

②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생명의 떡을 분배하는 데 있어서, 근 즐거운 마음으로 그의 제자들의 봉사를 이용하신다. 그들은, 때가 오면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음식을 줄" 그리스도의 식탁 시중군들, 즉 그의 가정의 관리인들이다.

(3) 분배는 모든 사람들에게 만족하게 행해졌다. 그들은 각자가 조금씩 먹은 것이 아니었고 그들 "모두가 원하는 만큼 많이"먹였다. 부족한 식사가 아니라 풍성한 식사였다. 그들이 오랜 동안 주렸고, 식욕에 잠겨 앉아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기적적인 식사는 그 일상적인 식사 이상으로 즐거운 것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원하는 만큼 또한 무료로 먹었다.

그리스도는 자기가 생명의 떡을 먹이는 자들에게 주기를 아끼시지 않는다(시 81:10). 단지 조그마한 "물고기 두 마리"밖에는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원하는 만큼 충분히 그 고기를 먹었다. 그는 신분이 더 나은 사람들을 위해 물고기를 보관 해 놓지 않으셨다. 가난 자에게는 마른 떡만 주지 않으셨다. 그는 그들 모두를 똑같이 취급하셨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똑같이 환영받았기 때문이다. 물고기를 먹는 것을 "끊으라"고 요청하는 자들은 여기서 그리스도가 베푸셨던 완전한 향연이었던 이 연회를 비난하는 것이다.

8.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모으도록 했다.

(1) 그리스도께서 그 부스러기에 관해서 지시하심(12절). 

-- 그들이 배불리 먹었을 때, 그리고 각 사람이 기적의 진리에 대한 뚜렷한 증거를 받았을 때, 그리고 각 사람이 기적의 진리에 대한 뚜렷한 증거를 받았을 때, 그리스도는 자신이 고용한 종들인 제자들에게 그 부스러기를 줍도록 명하셨다. 

--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 가운데 그 어느 것이라도 낭비하지 않도록 항상 유의하자.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들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무리 풍족하더라도, 멋대로 낭비하는 것만은 제외한다는 조건부로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 우리가 낭비하는 것을 결핍케 만드시는 하나님은 정당하시다. 유대인들은 떡이 땅에 떨어져 밟히지 않도록 매우 주의를 하였다. 떡을 업신여기는 자는 가난의 심연에 빠진다. 비록 그리스도께서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고 양식을 공급하도록 명할 수 있었지만, 부스러기들을 주워 모으도록 했다. 우리가 배불리 먹었을 때도, 다른 사람들이 결핍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자선할" 것을 가지려는 자들은 "검소한"자가 되어야 한다.

-- 만일 이 부스러기 떡 조각이 풀 위에 그냥 있었다면, 짐승들과 새들이 그것을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을 위한 음식으로 적절한 것들을 짐승들에게 던져 주게 된다면, 그것은 낭비요 손실이 된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이 배를 채운 다음에 비로소 부스러기를 모으도록 명하셨다. ***여기서 박스터(Baxter)씨는 언급하기를, "그러할진대,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이나 도움, 우리의 시간 따위의 위대한 자비들을 잃지 않도록 얼마나 애써야 할 것인가?"라고 했다.***

(2) 이러한 명령은 지켜졌다.(13절), 즉 그들은 부스러기로 열두 광주리를 채웠는데 이것은, 그들이 환상으로써 아닌 참된 양식으로써 배를 채웠다는 기적의 진리에 대한 증거였을 뿐만 아니라(남아 있는 것들이 증거한다) 또한 그 진리의 위대성에 대한 증거였다. 

-- 그들은 자기들의 배를 채웠을 뿐만 아니라 그 잔을 넘치게 하신다. 우리 아버지의 집에는 여분을 둘 만큼 충분한 떡이 있다. 부스러기는 열두 광주리를 채웠는데, 남은 광주리가 제자들만큼 있었다. 그들은 이처럼 공익을 위해서 가지고 있었던 것을 기꺼이 나누어 가진 대가로 그 익을 되돌려 받았다(대하 31:10 을 보라). 

--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음식을 먹고 났을 때, 식후의 축복이 임하게 하기 위해 식탁 위에 떡 부스러기를 남겨 놓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하나도 남김이 없이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악한 자에 대한 저주이다(욥 20:21).

Ⅲ. 여기에 그런 은혜를 맛보았던 자에게 이 기적이 끼쳤던 영향이 있다.(14절). "그들은 이분이 참으로 그 예언자라고 말했다." 여기서 몇 가지 유의해 보자.

1. 통속적인 유대인들도 큰 확신을 갖고 메시야가 세상에 올 것으로 기대했고, 그 메시야는 "위대한 예언자"일 것으로 기대했다. 

-- 여기서 그들은 확신 있게 그의 오심을 이야기한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들을 "율법을 알지 못하는자"라고 경멸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것보다 더 잘 "율법의 목표"이신 그분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2. 그리스도가 행하셨던 기적들은, 그가 바로 약속된 메시야이고,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요, 위대한 예언자였음을 분명하게 증거해 주었고, 오셔야 할 분은 바로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줄 수밖에 없었다. 

--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예언자가 그분이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진심으로 그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교훈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타락하고 정결치 못한 영혼의 능력들 사이에는 그런 불행한 모순과 변덕스런 생각이 들어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리스도는 참 예언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그에게 귀를 막는 일이 가능하다.

---------

물 위로 가심(요 6:15-21)

Ⅰ. 예수가 군중들에게서 물러가심.

1. 무엇이 그를 물러가게 했는가를 관찰해 보자. 그 이유는 그를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로 인색했던 자들이 와서는 억지로 데려다가 그를 임금으로 모시려고 하는 것을 그가 아셨기 때문이다.(15절). 이제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실례를 본다.

(1) 그리스도를 따르던 자들 중에 어떤 자들의 변칙적인 열성. 그들은 "그를 왕"으로 삼으려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지 않았다.

① 이것은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유대인 교회가 그에게 했던 경멸에 반대하는, "하나의 열성 행위"였다. 

-- 그들은 세상에 대해 그렇게 훌륭한 은혜를 베풀어 주었는데 그가 거의 세상에서 존경받지 못한 사실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므로 왕이란 칭호가 가장 화려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 이래로, 그들은 메시야가 당연히 왕이 되었어야 함을 알았기에, 그를 왕으로 모시려고 했다. 고귀한 하늘의 진찬으로 향연을 베푸셨던 그리스도의 향연을 받은 자들은 그의 호의에 대한 답례로 그를 "자기들의 왕"으로 삼으려 해야 한다. 우리를 "먹이셨던"자로 하여금 우리를 "다스리게"라라. 그러나 "먹이셨던" 자로 하여금 우리를 "다스리게"하라. 그러나

② 그것은 "변칙적인" 열성이었다. 그 이유는

첫째, 그리스도의 왕국의 성격이 마치 이 세상의 나라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래서 그는 머리에 왕관을 쓰고 군대를 거느리는 외적인 영화를 지니고 나타나야 한다는 오류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인조 금은 보석이므로 그의 영광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올바른 생각은 그 왕국을 진전시키는 올바른 방법을 갖도록 지켜 줄 것이다.

둘째, 그것은 육체의 사랑으로 인해서 흥분된 것이었다. 그들은 수고하지 않아도 아주 풍족하게 자기들을 먹일 수 있었고, 또한 얼굴에 땀을 흘려야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저주로부터 자기들을 해방시켜 줄 수 있었던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

세째, 그것은 "세속적인" 계획을 이행하려는 것으로 의도되었다. 그들은 이것이 싫증을 느끼고 있었던 로마의 속박을 벗어나려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희망했다. 만일 그들이 한 가족을 위해서 분배 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싸게 군대를 먹일 수 있었던 그들을 지배할 자 한 사람을 가졌었다면, 그들은 전쟁의 힘을 북돋을 수 있었고 성공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의 옛 자유를 회복할 수 있었을 것으로 확신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는 때때로 세속적인 이익으로 악용된다(롬 16:18).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예수는 늘 자신을 위해 찾아지지 않고 누군가 다른 사람을 위해 찾아진다"고 했다.**

네째, 그것은 소란하고 선동적인 시도였고 공공 평화를 어지럽히는 일이었다. 규율이 없는 열의는 그 마을을 전쟁의 중심지로 만들려 했고 로마의 세력에 대한 원한으로 그 열의를 드러내려고 했다.

다섯째, 그것은 우리 주님 예수 자신의 정신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원하건 원치 않건 그들은 그를 강요하여 임금을 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도움을 요구하지도 않으셨는데도 억지로 그리스도를 존경하는 자들은 그를 불쾌하게 하고 가장 큰 모욕을 그에게 주는 것임에 유의하자. 아볼로와 게바편을 드는 자들에 반대하여(역시 이들도 그리스도를 당의 우두머리로 세우려했다) "나는 그리스도편"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예수 자신의 마음과는 상반되게 그를 억지로 데려다가 임금으로 모시려 한다.

(2) 그들이 그를 임금으로 모시려고 했을 때, 그가 그들에게서 떠나셨던 것은 주 예수의 겸손한 자기 부정의 한 증거이다. 그는 그 의도가 장려하는 일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런 의도는 파기하였다. 이 점에서 그는 한 증거를 남겨놓았는데,

① 세상적인 명예에 대한 야심과 열정에 반대한다는 증거였다. 

-- 그것에 대해 그는 완전히 억제했고 또한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쳐 주셨다. 만일 그들이 와서 그를 억지로 죄수로 만들려했다면, 그들이 임금으로 삼으려 했을 때처럼 그렇게 부지런히 도망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군중들의 우상이 되기를 갈구하지 말고, 헛된 영화를 탐내지도 말라.

② 당쟁, 선동, 배신, 반란, 왕들과 귀족들의 평화를 혼란시키려고 하는 모든 것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 이것을 볼 때, 그는 황제에게 적이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자기의 일군들로 하여금 선동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나 선동을 향하는 모든 것을 버리도록 하려했고, 오직 자신들의 일의 이익만을 위해 일을 하지 못하게 했다.

2. 그가 "어디로" 물러가셨는지 관찰해 보자. 즉 그는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는데, 그 산에서 그는 설교를 했었고(3절), 사람들을 먹이시기 위해 그 산에서 평지로 내려 오셨었다. 이제는 혼자 있으려고 홀로 그곳으로 되돌아가셨다. 

-- 비록 군중들이 모인 곳에 있는 것이 유용한 일이었지만 그리스도는 때때로 홀로 있기를 택하셨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 자신들도 세상에서 떠나가도록 가르치시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또한 우리 자신의 영혼이 더 자유롭게 대화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은, "홀로 있을 때 가장 홀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공적 예배가 개인의 신앙 생활을 밀어내어서는 안 된다.

Ⅱ. 여기에는 바다에서 제자들이 재난을 당하는 기사가 있다. "바다로 내려가서 배를 띄우는 자들은 주님의 행사를 보나니, 이는 그가 바다의 물결을 일으키시기 때문이다"(시 107:23, 24). 이것을 이 제자들에게 적용시켜 보자.

1. 여기서 그들은 "바다로 내려가" 배를 탄다(16,17절). 즉 "날이 저물어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을 생각할 시간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배를 타고 가버나움을 향해 가고 있었다. 

-- 그들은 예수를 임금으로 모시려고 했던 자들을 지지하려는 유혹에서 그들을 벗어나게 해 주려는 의도를 내린 특별한 지시를 받아 이와 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2. 여기에는 "폭풍"이 일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시키고"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었는데, 이제는 각자 자신들의 의무를 이행할 때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하여 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이것을 불안해하고 있었다. 

-- 현재의 모험과 고난은 그리스도와 그의 중재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아주 잘 일치될지도 모른다. 그들은 얼마 전에 그리스도의 식탁에서 향연을 가졌었다. 그러나 위안의 황혼 후에는 폭풍이 예상된다.

(1) 이제는 "밤이 되었다." 이 어두운 밤은 폭풍울 더욱 사납게 하고 불안하게 하였다. 때때로 하나님의 백성은 곤란에 처하고 그들이 나갈 길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그 고난의 원인과 의도와 결과에 대해 염려하고 있었다.

(2) 예수는 "그들에게 오시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폭풍에 처했을 때"(마 8:23 등)는 예수가 "그들과 함께 계셨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의 사랑을 받는 예수가 물러나 계셨다. 그리스도의 부재는 기독교인의 고통을 가장 크게 악화시킨다.

(3) "바다는 큰 바람이 불어 물결이 일어났다." 그들이 바다로 나갔을 때는 바다가 고요했고 물결은 잔잔했다(그들이 폭풍치는 바다에서 배를 타고 갈 만큼 그렇게 외람된 자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바다에 들었을 때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 고요한 시간에 우리는 고난을 예비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의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 그 고난은 일어나기 때문이다. 선한 백성들이 바다에서 폭풍을 만날 때, 그리스도의 제자들보다 더 악화된 것은 아니었다. 구름과 어둠이 때로는 빛의 자녀와 낮의 자녀를 에워싼다.

3. 그들이 이 같은 위기에 처했을 때 그리스도는 시간적으로 알맞게 접근하신다(19절). "그들은 노를 저어 5km 정도 갔다"(그들이 노를 저어 가는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와 억지로 가고 있었다). 이 거리에 대해 성령은 정확하게 확인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거리는 부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기자의 추측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그들이 바다에서 좋은 길을 벗어나고 있었을 때, "예수가 바다 위로 걸어오는 모습을 본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1) 그리스도는 자연의 법칙들과 관례들을 지배하는 권능을 가지고 계시고, 자신의 뜻대로 그러한 것들을 통제하고 면하게도 하시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점이다. 

-- 무거운 몸이 물 속으로 가라앉는 일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마른 땅 위를 걷듯이 물위를 걸어다니셨다. 이것은 모세가 물을 갈라서 물을 통과하여 걸어가는 것보다 더한 일이었다.

(2) 그리스도는 재난 중에 있는 제자들에게 관심을 가지신다는 점이다. "그는 배에 가까이 오시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신 것처럼" 그가 바다 위를 걸으셨기 때문이다(신 33:26). 그

-- 들이 사나운 물결로 인해 동요되고 불안해 하는 모습으로 있을 때, 그들을 위로하지 않고 내버려두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들이 먼 곳으로 유배되어 버릴 때(요한처럼) 혹은 폐쇄된 곳에 감금되어 있을 때도(바울과 실라처럼) 그는 그들에게 접근하실 것이고, 그들과 가까이하실 것이다.

(3) 그리스도는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는 위안을 주신다. 

-- 그들은 바람과 파도를 무서워하기보다는 유령을 "더욱 무서워했다."(그들은 그가 유령인 것으로 추측했기 때문이다). 거세게 파도치는 바다와 싸우는 것보다 이 세상의 어둠의 권세들과 싸우는 것이 더욱 무서운 일이다. 그들은 유령이 자기들을 흘리게 했던 것으로 생각했고, 그 유령이 폭풍을 일게 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때 자신들이 처한 그 이상으로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거기에서 자연적인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보지 않았다. 몇 가지 유의해 보자.

① 우리의 진정한 고난은 자주 우리 자신의 환상의 소산들인 상상적인 것들로 인해 더욱 증가된다.

② 위안과 구원이 다가오는 것도 오해되어 때때로 두려움과 혼란의 원인이 된다. 우리는 자주 실제 이상으로 더욱 무서워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곧 "도움을 받을" 그런 때에 가장 두려워 말라"는 자비로운 말씀으로써 그들의 두려움을 잔잔케 하셨다(20절). 

-- "나는 너희가 박해하는 예수이다."라는 말씀보다 더욱 강력하게 죄인들을 납득시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는 너희를 사랑하는 예수다.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의 선을 찾는 자는 바로 나다. 나를 무서워 말고 폭풍을 무서워 말라." 이 말씀보다 성도들을 더욱 힘있게 위로해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고난이 가까이 있을 때는 그리스도도 가까이 계신다.

4. 그들은 가야 했던 항구에 신속히 도달한다(17절).

(1) 그들은 그리스도를 배 안으로 "환영하였고," 기꺼이 그를 영접했다. 어느 것보다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을 중히 여기는 제자들은 잠시 동안 떠나셨던 그가 돌아오니 더욱 더 그를 사모한다는 사실에 유의하자(아 3:4 참조).

(2) 그리스도는 그들을 안전하게 해변까지 인도하셨다. "어느덧 배는 그들이 가려고 했었던 땅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유의할 점.

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들의 모든 것을 싣고 타고 있는 교회라는 배는 더욱 잘 파괴되고 조난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배는 결국 항구로 안전하게 갈 것이다. 바다에 던져졌으나 잃지 않았고, 넘어뜨렸으나 파멸되지 않았고, 불에 탔으나 없어지지 않았다.

② 교회의 임금의 권능과 그 존재는 교회의 구원을 촉진시키고 용이하게 할 것이고, 교회의 다른 동료의 모든 기술과 노력을 낭패케 했던 난점들을 극복케 할 것이다. 

-- 제자들은 고되게 노를 저었다. 그러나 그들이 배 안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까지는 그들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없었다. 그 때에 일이 "갑자기"이루어졌다. 만일 우리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기꺼이 그를 받아들였다면, 비록 어두운 밤이 되고 바람이 높아진다 해도 우리는 우리가 곧 해변에 도달하게 될 것이고,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로써 우리 자신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

군중이 찾아 옴(요 6:22-27)

Ⅰ. 사람들이 조심스레 그리스도를 찾았다(23,24절). 그들은 제자들이 바다로 가는 것을 보았고, 그리스도가 잠시동안 홀로 있기를 바란다는 암시로 산으로 물러가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가슴은 그를 "임금으로 모시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길목에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열의는"그 다음 날"도 계속되었다.

1. 그들은 그분에 대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가셨는데, 그들은 그분이 어떻게 되었는지 몰랐다. 그들은 제자들이 타고 가 버린 것 외에는 거기에 "배가 없음"을 알았다. 바다로 그가 걸어오는 기적을 확증시키시 위해, 섭리가 그렇게 명하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그가 타고 갈 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그들은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가시지 않았고" 그들이 있었던 호수쪽에 그를 남겨놓고 제자들만이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찾으려는 자들은 부지런히 그의 거동을 관찰해야 하고, 그들이 사정에 따라 적절히 처신할 수 있도록 그가 있는지 없는지의 증거들을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2. 그들은 "매우 부지런히" 그를 찾고 있었다. 그들이 여기저기 장소들을 조사해 보았고, 예수나 제자들이 거기에 계시지 않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다른 곳을 찾아보기로 작정했다. -- 그리스도를 찾으려 했던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없이 사느니 보다는 차라리 그 말씀을 구하기 위해 부지런히 찾는 일을 해야 하고, 그들이 찾을 때까지 찾아다녀야 하고, 호수에서 호수로 다녀야 함을 유의하라. 그리스도가 주는 생명의 떡을 받은 자들은 그를 향한 진지한 욕구에서 그들의 영혼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그리스도와 많은 친교를 가진 자들은 더 가지게 될 것이다.

(1) 그들은 그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기로 작정했다. 거기에는 그가 늘 거주했던 본거지가 있었다. 그의 제자들도 거기로 갔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가 제자들에게서 오랫동안 떨어져 있지 않을 것으로 알고 있었다.

(2) 하나님께서는 가장 빠른 길인 바다를 통해 그곳으로 가는 기회를 은혜로 그들에게 베푸셨다. 왜냐하면 "디베랴에서 온 다른 배들이 왔기" 때문이다. 디베랴는 같은 해변이지만 상당히 떨어진 곳이었다. 그런데 거시서 배가 "가까이"왔다. 비록 그들이 "떡을 먹었던" 장소와는 그렇게 가깝지 않았지만 거기서 그들은 곧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갈 수 있었다. 아마도 그 배들은 그리로 가려던 중인 것 같다.

--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찾고 그와 대화할 기회를 찾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그들이 추구하는 것을 얻게 되고 도움을 받는다.

-- 그들이 "불어난" 떡을 먹은 것에 관해 언급할 기회를 가졌던 복음서 기자는, "주님께서 축사하신 후에"라는 말씀을 첨가시켰었다(11절). 제자들은 자기들의 주님이 축사하심에서 너무도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으로 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그 너그러운 말씀들을 기억하기를 좋아했다. 이것이 그 식사의 은총이요 아름다움이었다. 그리고 그 식사를 놀라운 것으로 만들었다. 그들의 가슴은 타고 있었다.

3. 그들은 그 기회를 손에 넣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갔다." 

-- 그들은 "호수 건너쪽에서" 그를 다시 보기를 바라는 희망에서, 망설이지 않았다. 그들의 확신은 강했고 그들의 욕구는 뜨거웠기 때문에 즉시 그를 따랐다. ...좋은 활동도 "즉시 시행되지 않아서" 자주 꺾이고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왔다. 본문을 항해를 했다. 그런데 신실한 제자들은 격하고 폭풍적인 사건을 치렀다. 이런 악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낭패한다 해도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와서 예수를 찾고 있다." 그리스도를 찾아 위안을 얻으려는 자들은 기꺼이 고생을 감수해야 하고, 우리를 찾고 구원해 주기 위해서 하늘에서 지상으로 오신 그분을 찾고 섬기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다녀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Ⅱ. 이런 추적의 성공. 즉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를 만났다"(25절). 

-- 그리스도는 언제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서 발견될 것이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마지막에 가서야 그를 찾아낸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찾으려고 호수를 건너고, 아니 호수에서 호수로 다니고 강에서 지구 끝까지 다니는 일은 값어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 사람들은 그후에 건전치 못한 자들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 이 사람들은 그후에 건전치 못한 자들임이 드러났고, 선한 원리로써 행동하지 않았음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들은 대단해 열광적이었다. 위선자들도 하나님 예배에 열심히 참예할 수 있음을 기억하자. 만일 사람들이 설교와 기도에 열중하고, 좋은 설교에 대해 욕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 말고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보일 것이 없다면, 그들은 이들 "열렬한 군중"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고 보아도 된다. 그러나 비록 이 사람들이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아셨지만, 여전히 그는 기꺼이 그들을 만나셨고, 자기와의 교제를 허락하셨다. 그 고백은 그럴싸하나 위선자들임을 우리가 알더라도, 우리의 교제에서 그들을 제외시켜서는 안 된다. 하물며 그들의 심정을 잘 모를 때는 말할 것도 없다.

Ⅲ. 그들이 예수를 만났을 때 그에게 내놓은 질문. "선생님, 언제 여기에 오셨습니까?" 이 질문은 그들이 회당에서 그를 만났을 때 한 질문과(59절) 비슷한 것 같다. 그들은 이것이 그리스도를 찾는데 가장 가능성 있는 장소였음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공공집회에 참석하는 일이 "그의 습관"이었기 때문이다(눅 4:16). 

--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의 회중에서, 또한 그의 의식이 집전되는 곳에서 찾아야 하고 또 거기서 만나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공공예배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참석하고 자기 자신을 계시하는 은혜를 베풀기 위해 택하신 것이었다. 

-- 거기에서 그들은 그를 만났다. 그리고 그들이 그에게 "선생님 여기에 언제 오셨습니까?"하는 것이 할 수 있는 말 전부였다. 그들은 그가 임금으로 세움을 받지 않으려 한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것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단지 그를 "랍비," 즉 자기들의 선생이라고만 불렀다. 그들의 질문은 가가 그곳에서 온 "때"를 언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방법"을 언급하고 있다. "언제," 또 "어떻게 여기에 오셨습니까?" 왜냐하면 그에게는 타고 올 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질문하면서도 그리스도의 거동에 관해서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이 자신의 거동을 살피는데 관심을 쏟지 않았다.

Ⅳ.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하신 답변. 그들의 질문에 직접하신 것이 아니라(언제 그리고 어떻게 그가 이 곳에 오셨는가라는 질문) 그들의 생각에 대답하셨다.

1. 그는 자기를 따라오는 그들의 "타락된 원리"를 발견하신다(26절).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나는 마음을 알고, 사람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안다. 나는 아멘이요 참되신 증인이다(계 3:14, 15). 너희가 나를 찾는 일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선한  의도에서 찾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무엇"을 행하고 "왜" 그것을 행하는가를 알고 계신다. 그리스도를 따라왔던 이들은

(1) 그의 교훈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 "너희는 기적들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기적들은 그의 교훈에 대한 훌륭한 확증이었다. 니고데모는 그 기적들 때문에 그를 찾았다(요 3:2). 그리고는 그의 활동들의 권능에서부터 그의 말씀의 진실성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너무 어리석고 지각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이를 고려하지 않았다.

(2) 그들이 찾아온 것은 그들 자신의 배를 위해서였다.

--  "너희가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들을 가르쳤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들을 먹이셨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들에게 주었던 것은,

① "넉넉한" 음식이었다. 

-- 즉 그들은 "먹고 배를 채웠다." 아마도 그들 중에 어떤 자들은 너무도 가난했기 때문에, 그들이 먹고 남을 만큼 충분했음을 한참 후에야 비로소 알았을 것이다.

② "맛있는" 음식이었다. 

-- 기적으로 만든 포도주가 가장 질이 좋은 술이었던 것처럼, 아마 기적으로 만든 이 양식은 보통 이상으로 만족할 만한 것이었던 것 같다.

③ "값싼" 음식이었다. 

-- 그들은 한 푼도 지불하지 않았고, 계산서도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떡을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사랑을 위해서는 그를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이와 같은 자들은 세속적인 이익을 목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고, 이런 교묘한 것으로 인해 그들이 그 특혜를 얻었기 때문에 떡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이 사람들은 "랍비"하는 칭호로 그리스도에게 찬사를 표했고, 그에게 훌륭한 존경심을 보여 주었다. 

-- 그리고 그는 그들의 위선에 대해 신실하게 말씀하셨다. 그런 까닭에 그의 종들은 아첨하는 자에게 아첨하지 않는 것을 배워야하고, 자기들에게 "랍비"라고 하는 모든 자들에게 "매수되어" "평화"를 외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책망을 받을 필요가 있는 자들에게는 신실한 책망을 주어야 한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더 나은 원리들을 가르쳐 주신다(27절). "영원한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 그는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할때 물을 비유로 해서 영적인것들을 이야기하였다. 여기서 그는 그들이 먹었던 떡을 근거로 말씀하신다. 그분의 의도는 이렇다.

(1) 세상적인 추구를 절제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 

-- 이것은 알맞는 양식을 얻기 위해서 하는 정직한 노동을 금하는 것이 아니다(살후 3:12). 단지 이 세상의 일들을 우리의 중요한 걱정과 염려거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점을 유의해 보자.

① 세상의 것들은 "썩어진 양식"이다. 

-- 세상적인 부귀, 영예, 쾌락등이 이처럼 썩어질 양식이다. 그것들은 "공상을 자라게 하며" "배를 채운다." 이러한 것들은 "배고픈 자들이 찾는 양식들"이고, 생활 방편이 되리라. 그러나 그것들은 "썩어 없어지는" 성질의 것이며, 저절로 쇠퇴해 버린다. 또한 그것들은 수천의 불행한 사건을 맞는다. 세상적인 일들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의 죽을 때는 그것들을 분명히 버리고 가야 됨을 확신할 뿐이다.

② 그러므로 우리가 과도하게 그것들을 추구하며 일하는 것은 어리석다.

첫째, 우리는 신앙에 있어서 이런 썩어져 버리는 양식을 목적으로 수고해서는 안 되고, 또한 이런 일을 행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세상적인 관심에 보존적인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고, 신성한 행사를 세속적인 이익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잠 23:4, 5).

(2) 그의 의도는 우리의 유익한 추구들을 북돋기 위한 것이다. 즉 "더 나은 목적으로 수고하고 영에 속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 그 점에 대해 그가 보여 주는 것은 다음과 같다.

① 그것은 "말할 수 없이 바람직한" 것이다. 그것은 "영생에 이르는" 양식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기만 하면 지속될 행복이고, 영원히 지속될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까지 우리를 길러 줄 것이다. 

-- 새 계약의 축복들은 영원한 생명을 위한 우리의 예비이고, 영원한 생에 대한 우리의 예방이며,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요 전조이다.

②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영원하도록 지속될 양식을 위해 땅의 모든 소산들과 세상의 모든 보화들을 샅샅이 뒤질 것인가? 아니다. "바다가 말하기를," 모래 속에 숨겨져 있는 모든 보화들 가운데 "영원한 생명은 내 안에는 없다." "금으로도 살 수 없다." 그러나 "인자가 줄 것이다." 여기서 관찰할 점은,

첫째, 이 양식을 주는 자는 훌륭한 가장이요 창고 주인인 인자(人子)이다. 그는 인간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왕국을 통치하도록 위임받은 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의 모든 재산, 그 왕국을 위한 준비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줄 권능을 가지고 있는 자이다. Di Iaboribus omnis vendunt - 즉 신들은 열심히 일하는 자에게는 유익을 판다고 이방인이 말했듯이, 마치 영원한 생명을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얻게 되고, 또 신중히 사들여야 할 것처럼, 그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일하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위해서 아무리 많이 일해도, 우리는 그것을 "삯" 받지는 못한다. 그럴 자격이 없다. 인자가 그것을 "주신다." 

-- 은사보다 더 값없이 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인자가 주신다는 것은 격려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을 찾고 그것을 위해 일하는 "인간의 아들들"이 그것을 반드시 누리게 되리라 희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가 관찰해야 할 것은 그가 영원한 생명을 주어야 하는 권한에 대해서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봉인하셨다." 또는 "아버지께서는 그가 하나님이 되게 봉인하셨다." 어떤 자들은 이처럼 이해한다. 

-- 그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됨을 권능으로써 언명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인증하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사자요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자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관계할 완전한 권능을 입증하셨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권위"를 주셨기 때문에, 그가 우리에게 그것을 "확증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무한한 권능"을 위탁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 권능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주셨다. 

-- 그래서 그가 확신을 갖고 우리를 위한 과업을 계속 수행해 나갈 수 있었듯이, 우리도 확신 있게 그에 대한 우리의 복종을 계속해 나갈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에 의해 또한 표적들과 기사들을 증거로 주셨다.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 안에서 완성되고, 그 안에서 "환상"과 "예언"은 "봉인된다"(단 9:24). 그에게 대해 모든 신도들은 그가 참되시다고 "인치고" (3:33), 그 안에서 그들은 모두 "인침받는다"(고후 1:22).

----------

생명의 떡(요 6:28-59)

그리스도는 당시 가버나움 회당에 계셨는데, 이 이야기가 가버나움 사람들과였는지 아니면 호수 건너편에서 온 사람들과였는지는 확실치 않고 또한 자료도 없다. 그러나 그가 그들의 질문을 허락하셨고 훼방을 모욕으로 여기지 않은 것은, 아니 자기와 직접 관계되는 제자들은 아니었지만 그의 일반 청중들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으신 것은 그리스도의 겸손에 대한 하나의 본보기이다. 

-- 가르치려고 하는 자들은 신속하게 들어야 하고 대답할 것을 연구해야 한다. 적절치 못하고 유익이 없는 질문을 받을 때, 유익한 대답을 할 기회를 이용하여, 질문을 거절하더라도 그 요청만은 들어주는 것이 가르치는 자의 지혜이다.

Ⅰ. 그가 양식을 위해 "일해야"한다고 그들에게 말씀하자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질문했다. 이에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대답하신다(28,29절).

1. 그들의 "질문"은 아주 "적절한"것이었다(28절).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 어떤 자들은 그것을 건방진 질문으로 이해한다. 즉 "우리가 모세의 율법에 복종하여 하는 일보다 더욱 많이 그리고 더욱 훌륭하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그러나 나는 그 질문이 그들에게는 적어도 현재로서는 신한 마음에서 하려는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기꺼이 자기들의 의무를 알고 행하려는 겸손하고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추측하건대 "무엇을" "어떻게"를 물었고(30절), 요청을 했던 자들(34절)은 수군거렸고(41,42절), 논란했던(52절) 자들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트집잡기 위해서 유다에서 온 "유대인들"이라 분명히 했고, 이 사람들은 갈릴리 출신자들이고, 배우러 왔던 자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 질문이 암시해 주는 점은 영원한 양식을 얻으려 하는 자들이

(1) 무엇인가 위대한 일에 목표로 두어야 함을 확신했다는 것이다. 

-- 고상하게 기대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기를 바라는 자들은 높은 것을 위해 노력해야 하고 "하나님의 일"을 행하기를 연구해야 한다. 그 일은 세상적인 자들이 추구하는 세상적인 일과는 구별된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들을 외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하나님의 일을 행해야 한다.

(2) 어떤 일이든지 기꺼이 해야만 한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주님, 비록 육신을 불쾌하게 하는 경우라도, 나는 주님이 지명하는 것 모든 것을 행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행 9:6).

2. 그리스도의 답변은 아주 평범한 것이었다(29절).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다음과 같은 점들을 유의해 보자.

(1) 믿음의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 그들은 많은 "일들"(보수)에 대해서 염려하면서, 많은 것을 걱정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필요한 것 한 가지 일만을 그들에게 지시하신다. 즉 그것은 "너희가 믿는"일인데, 이것은 의식적인 율법의 모든 일들을 능가한다. 또 이것은 모든 다른 일들을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하는데 필수적인 일이요, 그런 다른 일들을 가능케 하는 일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또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 안에서 그가 하시는 일"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것은 우리에게 작용하는 하나님의 일에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작용하는 하나님의 일에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작용하는 하나님의 일에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작용하는 하나님의 일에다 영혼을 종속시키고, 그 영혼이 "그를 위해" 일하도록 고무시킨다.

(2) 그리스도와 가까이하고 그를 의지하는 믿음은 곧 하나님의 일이다. 

그 믿음은 그를 "하나님이 보내신"자로 "믿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평화롭게 하는 위대한 일을 행하라고 하나님 또한 위임한 자로 믿는 것이다. 그에게 의지하는 것이고, 그에게 우리자신들을 "내맡기는" 것이다(14:1 참조).

Ⅱ. 그리스도는 "인자가 이 양식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인자에 관해 질문을 하고 그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신다.

1. 그들의 질문은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이다(30절). "당신이 무슨 표적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 여기까지는 그들이 옳다. 그가 그들에게 자기를 "믿으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그는 자기를 믿도록 하는 그 표징을 보여 주어야 하고, 또한 그가 하나님께로서 왔다는 것을 기적으로써 증거해야 한다. 모세도 "표적"으로써 자신의 사명을 확증시켰기 때문에, 의식상의 율법을 폐기시키기 위해 온 그리스도도 자신을 확증시키기 위해서는 그와 비슷한 기적들을 필수적으로 행해야 한다. "당신은 무슨 일을 행하시겠습니까? 당신은 무엇을 할 셈입니까? 하나님의 권능의 어떤 영원한 속성을 당신의 교훈에 부여하려는 것입니까?" 여기서 그들은 잘못을 범했다.

(1) 그들은 이미 보았었던 많은 기적들을 잊었다. 

-- 결국 그의 신적인 사명에 대한 풍부한 증거들인 많은 기적을 그가 행했음을 간과한 점이다. 어떻게 그 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었을까? 그가 매우 많은 훌륭한 일들을 행하셨고, 그의 직책과 과업의 매우 중요한 기적들을 행했었던 기적의 중심지인 가버나움에서! 또 그로 인해서 기적적인 양식을 먹었던 날이 바로 그 전날인데? 

-- 일부러 보려고 하지 않는 자들만큼 캄캄한 맹인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태양이 자기들의 얼굴에 비칠 때도 낮인지 아닌지를 묻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가 행하셨던 모든 기적들보다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기적적으로 먹인 사건을 그들이 더 좋아했다는 점이다.(31절). 

-- "우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리고 이 같은 반대 의견을 강화시키기 위해, 그들은 그것에 적합한 성서를 인용한다. "모세는 하늘에서 떡을 내려 그들에게 주었고" (시 78:24), "그들에게 하늘의 양식을 주었다." 그들이 여기서 언급한 이 이야기가 얼마나 선하게 사용될 수 있었던가! 그것은 자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에 대한 기억할 만한 본보기로 진술되었다(느 9:20, 21).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 말씀을 얼마나 악용했는가를 보라.

① 그리스도는 그들이 기적적인 떡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을 책망하셨고, 그들이 "썩어질 양식"에 마음을 두지 않도록 명령하셨다. 

-- 그들은 말한다. "왜 배를 채우기 위한 양식이 하나님이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었던 좋은 선물이었던가? 그렇다면 왜 우리가 그런 양식을 위해 일해서는 안 되는가? 만일 하나님께서 그것을 중히 여기셨다면, 왜 우리에게 중시되는 그것을 위해 일해서는 안 되는가?"

② 그리스도는 보리 떡 다섯 덩어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고, 그것을 자기가 하나님께로서 보냄을 받은 자임을 입증하는 하나의 표적으로 주셨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의 기적들을 찬미한다는 핑계하에 그리스도의 이 기적을 교묘하게 과소평가하고 그 증거를 회피한다. "그리스도는 몇천 명을 먹이셨으나 모세는 몇만 명을 먹이셨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단 한 번 먹이셨고 계속 먹기를 바라면서 자기를 따랐던 자들을 책망하셨으며, 영적인 양식의 교훈으로써 그들을 피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40년 간 자기 추종자들을 먹이셨고, 그가 행한 기적들은 그들의 진품이 아닌 그들의 일용한 떡이었다. 그리스도는 땅에서 나는 보리떡과 바다에서 나는 물고기로 그들을 먹이셨다. 그러나 모세는 천사의 양식인 하늘에서 내려온 떡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셨다." 이처럼 이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먹었던 만나에 관해 자랑했다. 그러나 그들의 조상들은 그들이 지금 보리떡을 먹었던 만큼, 그 만나를 사소한 것으로 여겼었고, 만나를 "박한 양식"이라 불렀다(민 21:5). 

-- 이와 같이 우리는 조상들이 들려 준 기적들을 찬미하려고 꾀하는 동안, 우리 자신에게 내린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의 출현을 사소하게 여기기 쉽고 간과하기 쉽다. 그리스도의 "이" 기적은 모세의 기적보다 뛰어나지 못하다 치자. 그러나 모세의 기적들보다 더 빛나는 그리스도의 기적들이 많이 있다. 이외에도, 모든 참된 기적들은 신적인 교훈임을 입증하고 비록 상황마다 동등하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 기적들은 요구했던 경우에 따라 다양하게 주어지곤 했다. 

-- 만나가 보리떡을 능가했던 만큼, 그리스도의 교훈은 모세의 율법을 더욱 능가했고, 그의 거룩한 제도는 구약 시대의 의식들보다도 훨씬 났다.

2. 여기에 이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응답이 있다. 그 대답 안에서

(1) 그는 "예형적인" 만나에 관한 그들의 잘못된 관심을 "교정시켜" 주신다. 그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① 그들에게 만나를 주었던 자는 모세가 아니었다. 그는 도구일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세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모세가 그 만나를 위해 하나님께 그렇게 많이 기도했다는 것을 찾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가 바위에서 물을 내야 합니까?"라고 말했을 때, 그는 분별없이 말했다. 모세가 그들에게 그 떡이나 그 물을 주었던 것이 아니다.

② 그것은 그들이 상상했던 때로 "하늘"에서부터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고, "구름"에서 내려와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만나는 그들이 생각했던 만큼 땅에서 난 것보다 그렇게 우월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그들에게 하늘에서 떡을 내려 주었다고 성서가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 만나가 하늘의 떡이었다든가 또는 영혼이 자양분이이 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서의 언어를 오해하면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도 많은 오류를 야기시킨다.

(2) 그는 그들에게 그 예형이 가리키던 "참" 만나에 관해서 "알려 주신다." 즉, "그러나 나의 아버지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된 떡을 내려 주신다." 그 떡이야말로 참으로 "하늘로부터 내려 온 떡인데, 만나는 단지 이것의 그림자요 상징이다. 그리고 그 참된 떡이 "지금 주어진다." 그 떡은 죽고 사라져버린 "너희 조상들에게" 주어지지 않고, 이 세대에 살고 있는 너희에게 주어진다. 그가 너희에게 참으로 "하늘에서 내려 온 떡"을 주고 계신다."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단연 하늘의 구름보다 위에 있듯이, 영원한 복음 위 영적인 떡도 만나를 크게 능가한다. 그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부름으로써 자신이 보세보다 더 훌륭한 자임을 선포하신 것이다. 모세가 종으로서 신실했지만, 그리스도는 "아들로서 신실했기 때문이다(히 3:5, 6).

Ⅲ. 그리스도는 그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나서, 만나에 관한 그들의 이의에서, 떡을 비유로 자신에 관한 교훈을 한다. 또한 "먹고 마시는" 것에서 "믿음"을 이야기했던 식이다.

1.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위대한 "은사"와 "참떡"으로 말씀하시고(32절), 우리로 그 사실을 올바로 알도록 하기 위해,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시고 "확인"하신다.

(1) 그는 여기서 자신이 곧 "참된 떡"임을 보여 주신다. 이 점을 그는 여러 차례 반복하신다(33,35,48-51절). 여기서 관찰할 점은

① 그리스도가 영혼을 위한 떡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의 소재이다." 

-- 복음서의 교훈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즉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이고, 우리의 평화이고 의이며 우리의 구원자임을 말한다."이러한 것들로써 인간은 살고 있다." 

-- 그리스도가 없는 우리의 영혼보다도 양식이 없는 우리의 육신이 더 잘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 "떡 만드는 곡물"은 "파쇄된다"(사 28:28). 그리스도는 그러했다. 그는 "떡집,"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진설병"으로 상징되었다.

② 그가 "하나님의 떡"(33절), 거룩한 떡이라는 것이다. 

-- 그는 "하나님께 속한" 분이시고(46절), 그 떡은"나의 아버지가 주신"것이다(32절). 그가 그 떡을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되게 만드셨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식구의 떡, 곧 그의 "자녀들의 떡"이 되셨다. 레위인적 제물을 "하나님의 떡"이라 했다(레 21:21, 22). 그리스도는 위대한 제물이다. 그리스도는 말씀과 규례를 통해서, 그 제물로 벌이는 "잔치"가 된다.

③ 그가 "생명의 떡"이라는 것이다(35,48절). 

-- 에덴 동산에 있던 생명 나무와 같다. 그는 "생명의 떡"이다. 이 생명 나무가 아담에게는 "먹고 살라"고 한 계약의 징표였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이다. 왜냐하면 그가 "생명 나무"의 과실이기 때문이다.

첫째, 그는 "살아 있는"떡이다(그분 자신이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51절). "나는 산 떡이다." -- 떡 그 자체는 생명이 없는 사물이고, 살아 있는 육신의 기능들의 도움 없이는 자양분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자신은 "살아 있는 떡"이고, 그분 자신의 권능으로써 자양분을 주신다. 

-- 만나는 죽은 사물이었다. 만일 하룻밤만 지나면 만나는 부패되고, 벌레가 생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곰팡이도 끼지 않고 점점 낡아버리지도 않는 여전히 살아 있고 영원한 떡이다.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교훈은 믿는 자에게는 과거에 그랬던 만큼 지금도 힘을 주고 위로를 준다. 그리고 그의 중개는 그 어느때 보다 더욱 가치 있고 효능이 있는 것이다.

둘째, "그는 세상에 생명을 주신다"(33절) 

-- 곧 영적,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고 또 하나님과 화합하고 교제하는 영혼의 생명이고, 장차에는 하나님을 보게 될 영혼의 생명이다. 그 생명은 모든 행복들을 포함하는 생명이다. 

-- "만나"는 단지 생명을 유지시키고 도움을 주었지 생명을 영속화시키고 계속 유지시켜 주지는 못한, 더구나 생명을 저장하고 있지는 못한 그런 떡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에 죽었던 자들에게 생명을 "주신다." 만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서만 수여되었지만,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어진다. 이 떡을 먹을 수 있는 이 권에서 제외된 자는 아무도 없다. 단지 스스로 거기서 제외되는 자가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는 인간들의 마음속에 생명을 주입하러 오셨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일들을 할 수 있는 원리들을 주입하러 오셨다.

④ 그가 "하늘에서 내려 온 떡"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여기서 자주 반복되어 나온다(33,50,51,58절). 이것이 뜻하는 바는,

첫째, 그리스도의 신성이다. 

-- 하나님처럼 그는 하늘에 계셨던 존재였고, 거기에서 우리의 본성을 입으러 오셨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 왔노라." 우리는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그의 "태고성"을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하늘은 권능의 궁창이기 때문에, 그의 "능력"을 추론할 수 있다. 또 그는 거룩한 사명을 받고 오셨다. 그래서 그의 "권위"를 추론할 수 있다.

둘째, 우리에게 흘러들어 오는 모든 선한 것의 거룩한 원천이다. 

-- 그는 "내려오신 자" 일 뿐만 아니라 "내려오시는 자"이다. 그는 지금도 내려오고 계신데, 이것은 만나가 매일 내려왔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게서 믿는 자들에게 빛과 생명과 사랑을 계속적으로 보냄을 말한다(엡 1:3 을 보라). Omnia desuper -즉 만유 위에서 온다.

⑤ 만나가 상징하던 "그 떡"이다. 

-- 그가 그러한 떡이시고 참된 떡이시라는 것이다(32절). 그들이 바위에서 물을 내어 마셨는데 그 바위가 그리스도였던 것처럼, 그들이 먹었던 만나도 "영적인 떡"에서 나온 것이다(고전 10:3, 4). 만나는 이스라엘에 주어졌는데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영적인 이스라엘에 주어진다. 그들 모두를 먹일 수 있을 만큼 만나는 충분히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신자들을 위한 은혜가 충만하다. 

-- 이런 "만나를 많이 모아 두는" 자는 그가 그 만나를 사용하려 할 때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또 조금만 모아두는 자도 그의 은혜가 영광 중에 완전하게 될 때, "부족함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 "만나"는 아침에 수거해야 했다. 그리스도를 만나려고 하는 자들은 "일찍 찾아야 한다." 만나는 달콤했다. "솔로몬의 지혜서" 저자가 우리에게 말하듯이 (지혜서 16:20) 모든 사람의 미각에 맞았다. 믿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가 "귀중하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가나안에 도착할 때까지 만나를 먹고 살았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시다. 법궤에는 만나 기념물이 보존되어 있었다. 역시 영혼의 양식인 주님의 만찬 속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이 깃들어 있다.

(2) 여기에서 그는 자기의 일이 무엇이며 세상에 온 사명이 무엇이 나를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은유로 하시지 않고, 또 격언으로 말씀하시지도 않고 분명한 말로 설명하신다(38-40절).

① 전체적으로 보면, 그는 자신이 "아버지의 일을 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38절). "자신의 뜻을 행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보내신 그분의 뜻을 행하러" 오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 오셨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가 자기 아버지와 경쟁에 설 어떤 뜻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할 자들에게 그는 말씀하신다. "아니다. 나 자신의 뜻은 내가 행동하는 원천이 아니고 내가 의지하는 법칙도 아니다. 나는 나를 보내신 자의 뜻을 행하기 위해 온 자이다."

첫째, 그리스도는 "사인"(私人)의 자격으로서 자기 자신을 위해 활동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공적인 사명"을 띠고 대사나 전권 대사로서 남을 위해 활동하러 오셨다. 그는 하나님의 훌륭한 대리자로서 세상의 위대한 의사로서 세상에 오셨다. 그를 이곳으로 데려왔던 것은 어떤 개인의 일이 아니었다. 그는 바로 위대한 창조자와 전 피조물계 사이의 사건들을 해결하러 오셨다.

둘째, 그리스도는 세상에 계셨을 때도, 어떤 사적 계획을 수행하시지 않았다. 이웃들의 관심과는 동떨어진 어느 별개의 관심을 가지시지도 않았다. 그의 전 생애의 내용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인간에게 선을 행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결코 자기 자신의 편함, 위안 또는 평온을 고려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생명을 버려야 했을 때, 비록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성(人性)을 지니셨지만, 그는 그러한 생각을 버리고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바꾸셨다.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② 그는 특히 자신이 행하러 오신 아버지의 뜻을 우리에게 자세히 알려 주셨다. 여기서 그는 "법령을 선언하신다." 즉 그가 추구해야 했던 지시 사항이다.

첫째,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사적인 지시"는 그가 선택받은 모든 남은 자를 확실히 구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구원의 계약"이다(38절). "이것은 아버지의 뜻인데,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다. 이것은 내가 위임받은 책임인데, 그 책임은 모든 사람들 중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유의해 보자.

a.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보라고, 또 그에게는 명성이 되고 찬미가 되도록, 또한 그에게 "유업"으로 "주신" 일정한 수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처지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그들을 위해 해야 한다. 그들을 가르치고, 고쳐 주시고, 그들의 빚을 갚아 주시고, 그들의 명분을 변호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그들의 명분을 변호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준비시키는 이런 모든일에 그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 아버지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그러한 일들을 처리하실수 있었다. 즉 피조물이 그들의 생명과 존재를 그에게서 "받았듯," 죄인들의 생명과 존재를 그에게서 "빼앗기게" 할 수 있다. 또 그는 자신의 정의의 만족을 위해 그것들을 희생시킬 수도 있었고, "고문자들에게" 넘겨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자비로움에 대한 기념물로 삼으셨다. 그래서 그것들을 구원자에게 인도하셨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들이 되도록 택하셨던 자들을 그리스도의 손에 맡기셨다.

b. 예수 그리스도는 이처럼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한 사람도 잃지 않아야" 한다. 

-- 그가 "영광으로 인도해야"할 "많은 자녀들"은 모두가 준비될 것이고,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잃지 않게 될 것이다(마 18:14), 그들 중 아무도 길을 잃게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얻을 보상이나 그들을 깨끗케 할 은혜가 모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그 죄를 지리이다"(창 43:9).

c. 그에게 주어진 자들을 몸의 부활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일이다. "내가 그것을 마지막 날에 다시 일으킬 것이다." 이것은 먼저 간 모든 자들을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면류관이 되며 완성을 가져오리라. 

-- 몸은 인간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구입해서 책임지는 내용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구입해서 책임지는 내용의 한 부분이다. 그것은 약속들과 관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잃음을 당치 않을" 것이다. 그가 "아무도," 즉 "한 사람"이라도 잃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가 "어떠한 것"도, 즉 인격의 어떤 부분이나 몸의 어떤 부분도 잃지 않는 것이 그의 과업이란 뜻이다. 그리스도의 일은 부활 때까지는 결코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그가 아버지께 제시할 수 있게끔, 성도들의 영혼과 몸이 재결합되어 그리스도에게로 모이게 될 것이다. "나와 및 당신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을 보옵소서"(히 2:13; 딤후 1:12).

d. 이런 모든 것의 원천과 근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다. 그의 의도이다. 이것에 의거해서 그리스도가 이런 모든 일을 행하신다. 이는 하나님이 아들에게 주신 계명이었다. 그래서 아들은 그것을 항상 유의하였다.

둘째, 어떤 방법으로든, 무슨 표현을 써서라도, 인생들이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주어야 했던 "공적인 지시"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은총의 계약"이다.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비밀이다. 주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우리가 알아낼 수 없는 자기의 자녀들을 알고 계신다. 그러나 비록 그들의 이름들이 감춰진다 해도 그들의 특성은 공표 된다.. 

-- 복음적 조건에 근거하여 생명과 행복이 제공된다. 즉 그리스도에게 주어졌던 자들은 이에 의해서 그에게 인도되나, 다른 자들은 변명할 수 없게 되는 조건이다(40절). 곧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들을 보고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고, 내 그들을 일으키리라. 이것이 나를 보내신 자의 계시된 뜻이고 그 뜻에 근거해서 일한다." 이것이 참으로 "복음"이고 기쁜 소식이다. 이것을 들으면 힘이 소생하지 않는가?

a. 만일 우리 자신이 잘못하지만 않는다면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된다.

첫째, 아담의 죄로 인해 "생명 나무로 가는 길"이 막혔으나, 제2의 아담의 은혜로 인해 그 길이 다시 열려진다. 영광의 면류관은 우리가 높은 요구의 상으로써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

b. 모든 자가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 이 복음은 선포되어져야 하고 제공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것은 나에 속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어야 한다(계 22:17).

c. 이 영원하도록 있는 생명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보증되는데, 꼭 이들에게만 보증된다. 아들을 "보고" "믿는 자"는 구원받을 것이다. 어떤 자들은이 "본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계시를 가지고 있고 그의 은혜가 작용하고 있는 자들만 구원이 해당된다는 "한계"로 이해한다. 그리스도와 친숙하게 되는 기회를 가져, 그것을 이용하여 그를 믿는 자들은 모두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처럼 복음 전파를 받아 "보았으나" 믿지 않았고,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으나 신뢰하지 않은 자들만이 불신앙인이라 정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차라리, 여기에 "본다"는 것은 믿는 것과 동일 한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왜냐하면 본다는 것이 눈의 시력을 의미하기 보다는 (36절에 너희가 나를 보았다 - ‘헤오라카테 메’- 는 말씀처럼) "마음의 응시"를 의미하는 ‘데오론’(2334) 이기 때문이다. 아들을 보는 자 즉 그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믿음의 눈으로써 그를 본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에 관한 복음서의 교훈을 충분히 알게 되고, 그 교훈으로 감동을 받게 된다. 

-- 그것은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리뱀을 쳐다보듯이 그리스도를 응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요구하시는 것이 눈먼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기꺼이 눈을 떠 그를 따라야 한다. 또한 우리는 그를 보아야 하고 무엇에 의거해서 판단해야 하는가를 믿음으로 보아야 한다.

d. 영원한 생명을 가지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의 권능에 의해 마지막 날에 일으킴을 받을 것이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 책임을 맡아 가지고 계신다(39절). 

-- 그래서 그는 엄숙하게 자기 자신의 일을 밝히신다. "내가 그를 일으킬 것이다." 이것은 몸에 생명이 돌아옴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전인(全人)"이 약속된 영원한 생명을 충만하게 소유하게 됨을 의미하기로 한다.

2. 그리스도는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 온 "생명의 떡"이라 설교하셨다. 이제는 그 떡에 대해 청중들이 한 말을 알아 보기로 하자.

(1) 그들은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떡"에 대해 들었을 때 그들은 진심으로 그 떡을 달라고 기원한다(34절). "주님, 이 떡을 언제나 우리에게 주십시오." 

-- 나는 이 말이 대부분의 해석자들이 이해하는 것처럼 조롱하는 식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즉 "만일 당신이 하실 수 있다면 이와 같은 떡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떡 다섯 덩이로 먹이는 것처럼 단 한 번만이 아니라 언제나 그 떡으로 먹여 주소서" 하는 식의 해석이다. 이것은 마치 뉘우치지 않는 강도의 기도보다 더 나은 기도가 아니었던 것 같다. 강도는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했다. 

-- 나는 이런 요구가 무리하게 이루어지긴 했지만 정직하게 된 것으로 이해하고 또한 나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를 "주님"이라 부르고, 그가 무엇을 뜻하든 그가 "주는" 바를 받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 신성한 사물들에 대한 막연하고 혼동된 생각들은 육적인 마음에 일종의 욕망과 욕구를 산출해 낸다. 이는 "의로운 자가 죽기를 바라는" 발람의 소원과도 같다. 거룩한 사물들에 대해 뚜렷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자들은, 나무가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았던 자와 같은데, 영적인 축복들을 위해 "불분명한" 기도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것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천국을 "좋은 장소"로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들을 차지하고 싶어할 수밖에 없다. 한편, 그들은 전자나 후자의 필수적인 그 신성함에 대해서는 전혀 소중하게 여기지도 않고 욕구하지도 않는다. 실은 이것이 우리의 영혼의 소망이 되게 해야 한다. 

-- 주님이 자비로우시다는 것을 우리가 맛보았으며, 하나님의 말씀, 또한 그 말씀 가운데서 그리스도로 잔치를 대접받았는가?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자 . "주님 우리에게 이 떡을 언제나 주십시오. 생명의 떡이 우리의 일상의 양식이 되게 하시고, 하늘의 만나가 우리의 계속적인 잔치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가 그 떡에 대해 결핍을 모르게 하소서."

(2) 그러나 이 생명의 떡이 예수 자신을 의미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을 경멸하였다. 여기 이들이 그 떡을 달라고 기도했던 바로 그들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동료들이었는지는 나타나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저 "유대인들"이라 불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에 대해 수군거렸다"고 했다(41절). 이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구원에 대해서 그 자신의 사명을 엄숙히 선언한 바로 직후에 나오고 있다(39,40절). 

-- 이것은 분명히 주님 예수의 입에서 유래했었던 말씀 중에서 가장 위엄 있고 너그러운 말씀이었고, 가장 신실할 말씀이었고, 가장 가치 있는 말씀이었다.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별"하셨다는 소식을 그들이 들었을 때, 차라리 "머리를 숙여 경배했어야"했다고 혹자는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은 수군거렸고,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을 가지고 논란을 벌였다. 그리고 비록 그들이 그 말씀을 공공연히 반대하고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그 말씀을 경멸하면서 은밀히 수군거렸고, 서로 서로의 마음속에 그 말씀에 대해 편견을 품게 하였다. 공공연하게 그리스도의 교훈을 거부하려 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도(그들의 트집들은 너무 약하고 근거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그 트집을 부끄러워하거나 혹은 트집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것을 두려워한다) 여전히 마음속으로 "그 교훈을 좋아하지 않는다."

① 그들을 화나게 했던 것은 그리스도가 자기는 "하늘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41,42절).

--  "나는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말이 어떻다는 것인가? 그들은 천사들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사람이 내려온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그가 인간 이상이라는 것에 대해 보여 주었었던 증거들을 잊고 있었다.

② 그들이 그 점에 대해 자신들이 정당했다고 생각한 것은 그가 지상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가? 그의 부모는 우리를 알고 있지 않는가?" 그가 부모에게서 난 자이면서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한 점에 대해 그들은 오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의 거룩한 이름 예수에 대해 하찮게 말하고 있다. "이는 예수가 아닌가?" 그들은 "소문"대로 요셉이 실제로 그의 아버지임을 당연시하고 있다. 

--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서 마치도 그가 단순한 한 인간이었던 것처럼 생각하며 평범한 방식으로 잉태되어 탄생된 것으로 생각하는 오류는 그의 교훈과 직책에 대해 모욕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유의하자. 부모를 아는 다른 인간의 아들들과 그분을 동일한 수준에 놓는 자들은 그의 속죄의 명예와 그의 일의 신비로움을 훼손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 또 그런 자들은 여기 유대인들처럼 "마지막 날에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라는 약속에 대해 수군거린다.

3. 그리스도는 신앙이 "하나님의" 중대한 "일"이라 말하고 나서(29절), 이 일에 대해 자세히 부언 한다.

(1) 그런데 그것은 곧"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했다. 내게 "오는" 자는 "나를 믿는" 자와 동일하다(35절). 또한 "내게 오는"라는 말이 37,44,45절에도 나온다. 

-- 하나님을 향해 회개함은, 그를 우리의  최고 선과 최상 목표로 삼고 그에게로 "나아감"이다.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란 것도 그를 우리의 왕, 구주로 삼고 그에게 나아감이다. 그가 지상에 계셨을 때는 그가 계신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 신앙이었다. 따라서 이제는 그의 말씀과 규례로 나아가는 것이 신앙이다.

-- 또 신앙이란 "그리스도를 먹는 것"이다(51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전자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하는 것이요, 후자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가까이 함을 뜻한다.

(2) 그리스도를 믿음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보여 주었다. 

-- 우리가 "그를 먹으면" 무엇이 유익한가. "결핍"과 "죽음"이란 우리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먹는 자들은 결코 부족이 없다. "주림과 기갈이 없으리라"고 했다(35절). 그들에게도 결코 부족이 없다. "주림과 기갈이 없으리라"고 했다(35절). 그들에게도 소망은 있고, 진실한 욕망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너무도 풍족히 채워지기 때문에, 불안과 고통을 초래하는 주림과 기갈이란 것을 모른다.

-- 그들은 또한 "죽지 않는다." 즉 영원히 죽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진다"(47절). 그리스도와 연합,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교통, 이것은 이미 시작된 "영생"이다. 만나는 "먹고도 죽었으나," 그리스도는 그것을 먹는자가 다시는 죽지 않는 그런 떡이다(49,50절).

① 예형적인 만나의 불충분성을 보라. 천사의 음식인 만나는 그것을 먹은 자들도 남들처럼 죽었다. 많은 자들은 물론 그들의 불신앙과 불평 때문에 죽었다. 만나를 먹였다는 사실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사실과는 달리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그들은 보호해 주지 못했다. 그리고 만나를 먹은 나머지 사람들은 자연시했다. 그들의 시체는 그들이 죽은 광야에 쌓였다. 따라서 만나란 자랑할 것이 못된다.

② 참 만나의 넉넉성을 보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 온 떡이다. 이 만나는 그것을 먹는 자가 죽지 않으리라." "죽지 않는다." 즉 망하지 않는다. 거룩한 가나안에 못들어가는 일이 없다.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51절). 이것이 바로 "죽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이다. 그는 비록 "죽음"으로 내려가지만, 그것을 통과해서 "다시는 죽음이 없는" 세상에 도달하게 되리라. "영원히 산다"는 것은 그저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행복"하다는 것이다.

(3) 그는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용기를 돋우어 주었다. 그리스도는 본문에서 "자기를 보고도 믿지 아니한" 사람 얘기를 했다(36절). 

-- 신앙이 "본다"는 것의 결언적 구절은 아니다. 군병들도 그의 부활의 목격자들이었으나 보고 믿기는커녕 "거짓 선전을 했다." 

-- 여기에 신앙을 독려하는 두 가지가 있다. 아들은 자기에게 나오는 모든 자를 환영한다는 것이다(37절). "내게 오는 자를 결단코 물리치지 않으리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접을 받는다는 이 말은 우리의 영혼에게 얼마나 환영되겠는가? 요구되는 의무는 순수한 복음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오라." 그러면 우리는 그에 의해서 하나님에게 나아가게 된다. 그의 미(美)와 사랑은 반드시 우리를 그에게로 "이끌리라." 따라서 우리는 필요와 두려움에서 그에게 "나아가자."

-- 여기의 약속은 순수한 복음적인 것이다. "나는 결단코 물리치지 않으리라." 여기에 많은 뜻이 깃들어 있다.

-- 우리는 그가 우리를 "쫓아내지" 않을까 두려워해야 한다. 응당 그가 우리에게 노하시고 문을 닫아 버리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 같은 공포를 다음과 같은 확증으로 물리쳐 주셨다. 결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비록 우리는 죄 많은 자들이지만 거부되지 않을 것이다.

-- 그런데 겉보기 보다 더 큰사랑이 숨어 있다. 우리를 쫓아 내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우리를 영접하시겠다는 뜻이요, 구하는 모든 것을 주리라는 뜻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그에게 맡긴 모든 자를 때가 되면 그에게로 나오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첫째, 그는 여기에서 이것이 이루어지리라는 "사실"을 "확증"시키고 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자가 내게로 나오리라" (37절). 

-- 그리스도는 자기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불평을 토로했다(36절). 그리고 나서는 "그들의" 깨우침을 위해서 이런 말씀을 더 하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세상과 육신에 내어 준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 스스로에게 주셨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또 예수는 "자신"의 위로와 용기를 위해서 이런 말을 더하셨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자들이 내게고 오리라."

a. 우리는 여기서 "선택"을 본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자를," 그리고 그들에게 속한 모든 것, 그들의 모든 예배와 권익에 대한 설명이다. 

-- 그가 가진 모든 것이 "그들의 것"이듯,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은 "그의 것"이다. 당시 하나님은 "그에게 이방인들을 그의 유업으로 주시려" 하셨던 참이다(시 2:8). 유대인 중에는 그를"보고"도 "믿지 않은" 자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그에게로 "나아오리라" 고 하셨다. 이 우리(유대인) 안에 들지 아니한다는 양들이 그에게 "나아오리라"(10:15, 16).

b. 그 선택의 효과가 약속되어 있다 "그들이 내게 오리라." 이것은 약속이라기 보다는 "예언"이다. 

-- 그 누구라도 선택된 자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곡식은 알곡이 하나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들이 천성적으로는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갔고," 그에게 모반했으나, 그대로 "오리라." 그에게 "끌려오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이 "자발적으로" 오게 되리라.

둘째,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자들은 어떻게 그에게 나오게 되는가? 이를 위해 두 가지 일이 된다고 했다(45,46절).

a. 그들의 "이해력"이 "계발" 될 것이다. 이것은 약속이다(45,46절). 예언서에도 씌어 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배우게 될 것이고, 모두가 나를 알리라."

--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해 배우는" 것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우리에게 거룩한 계시가 있어야"된다. "자연(본성)까지도 가르쳐 주는"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에 나아가게 되기 위해서 더 고차적인 빛이 필요하다. "우리의 거룩한 역사"가 일어나고 한다.

-- 우리에게 이성을 주신 하나님은 "땅의 짐승들" 이상으로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그러나 신앙을 주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를 "자연인" 이상으로 가르치셨다. 그러한 모든 자는 "순수하고," "하나님을 안다." 그가 교육을 맡으신다. 따라서 "아버지에 대해 듣고 배운 모든자는 그리스도에게 나아온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45절). 

-- 하나님이 은총으로써 우리 마음을 밝히시고,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은혜를 베푸사 "듣게" 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가르치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배우게 하신다. 아버지에 대해서 "듣고," "알지" 못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 오지" 않는다. 그들이 듣고 알았다면, 분히 그리스도에게 나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아는" 척한들 무슨 소용이랴?

-- 그러나 혹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눈으로 보겠다는 생각을 꿈에라도 할까봐, 그는 이런 말을 더하셨다(46절). "아무도 아버지를 보지는 못했다." 하나님이 사람의 눈을 열고 마음을 여는 것은 영적인 방식으로 하시는 일이다. 

-- 영들의 아버지는 사람의 영이 알지 못하게 다가와서 감화를 일으킨다. 얼굴은 보지 못했어도 그의 권능은 알 수 있다. "아버지를 아는" 자는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그분만이 아버지를 보았다.

b. 그들의 "뜻"은 "굽혀져야" 한다. 타락한 인간의 영혼 속에는 오성(이해력)의 올바른 방향을 거역하는 의지(뜻)의 모반이 있다. 따라서 본문에 "이끌어 주시다"라고 한 바 의지에 대한 은총의 역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44절).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 

--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교훈에 불평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내 교훈에 대해서 너희가 싫어하는 이유를 서로에게 전가시키지 말라.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너희의 반감은 너무나 강하므로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고는 그것을 꺼꾸러뜨릴 수 없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44절).

(a) 그 일의 성질을 보자. 그것은 "이끄는" 것이다. 이것은 의지에 대한 "강제"가 아니다. 의지의 "변화"를 뜻한다. 영혼에 새로운 경향성이 생겨, 하나님을 향하게 된다. "사람의 영을 조성하신" 분이 영혼을 재창조하는 법도 알고 계신다.

(b) 그 일의 필요성. 이 연약하고 무력한 처지에서는 "아무도" 그 도움 없이는 그리스도에게 나갈 수 없다.

(c) 그 일의 저작자. "나를 보내신 아버지라." 하나님 아버지가 공연히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영혼을 구하라고 그리스도를 보냈으나, 분명히 그리스도는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d) 이 일의 면류관과 완성.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일으키리라." 이 말씀이 본문 설교에 4번이나 나와 있다 그는 분명 하시리라. 마지막 날을 위해 간직된 행복을 계속 기대하자.

4. 더 자세히 말하면, 그리스도는 자신의 무엇이 이 떡인가를 밝히셨다. "내가 줄 떡은 내 살이다"(51절). "살(고기)은 진정한 음식이다. 그리고 그의 피는 진정한 음료이다"(53절). 우리는 "인자의 살과 그의 피를 마시게 되리라"(53절). 또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56,57절), 그는 곧 "나를 먹는"자이다.

(1) 그리스도의 이 말씀이 어떻게 곡해되었나 보자. 속된 "유대인들"이 곡해하였다(52절). "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할 수 있을까 하고 논란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기의 살을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고난과 죽음을 뜻하셨다(51절). 그러나 그들은 살을 주어서 먹게 하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오해를 했다. 즉 임종 때 성찬을 받으면, 반드시 천국으로 간다고 생각한 것이다.

(2) 그러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보자.

①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뜻하는 것. "인자의 살과 피"라 했다(53절). "세상의 생명 을 위해 주는"것이라고 했다. 즉

첫째, "세상의 생명 대신에" 주는 것이다. 그것은 죄로 인해서 발탁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살을 우리의 대속물로 주신다.

둘째, 세상의 생명을 "위해서"이다. 즉 온 세사의 영원한 생명을 총괄적으로 "구입해 주기"위해서이다. 그래서 인자의 "피와 살"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뜻하며 그에 의해 이뤄지는 구속을 뜻한다.

-- 계약의 약속과 영원한 생명을 바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라고 했다. 그 같은 이유는, 그것들을 구입하기 위해서 그의 몸이 파괴되고, 피가 흘려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 그것들이 우리의 영혼의 양식과 음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전에는 자신을 그가 "떡"에 비교했다. 떡은 필수적인 음식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살"에 비교했다. 그것은 "참 양식이고, 음료이다."

② 그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의 의미.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를 믿음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이 "먹고 마시는"것인데, 거기에는 4가지가 함축되어 있다.

첫째, 그리스도에 대한 "욕구"이다. 이 영적인 먹고 마심은 "주림과 갈함"에서 시작된다(마 5:6). "내게 그리스도를 다오. 아니면 나는 죽는다."

둘째, 그리스도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킴이다. 그냥 "보기만"한 양식은 영양이 될 수 없고 "먹는" 양식만이 영양이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되,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킬 만큼 받아들여야 한다.

세째,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을 "즐거워함"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교훈이 우리에게 "양식과 음료"가 되어, 가장 큰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

네째, 그것은 그에게서 오는 "영양분"을 뜻한다. 즉 우리의 영적 삶을 지지해 주고 위로해 주는 것이 그를 의지함에서 온다. 또한 새로운 인간의 힘, 성장, 활력이 또한 그에게서 나온다. 우리가 음식을 먹고 살 듯이, 그를 먹고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 나중에 어떤 가견적(可見的) 표징을 제정하시어 그의 죽음에서 오는 이득을 우리가 "교환"할 수 있음을 나타내시고자 하셨을 때, "먹고, 마시는" 표징들을 선택하셨고, 그것을 "성례전적"행동으로 삼으셨다.

(3) 그리스도의 담화의 이 대목을 총괄적으로 해설했으니 세부적인 것을 보자. 두 가지 제목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① "그리스도를 먹어야" 되는 우리의 "필요성"(53절).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이 없느니라."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첫째, 그리스도를 향한 "욕망"과 그에게 대한 "즐거움"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신령한 "생명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상징해 준다. "주림"과 "기갈"을 모르는 영혼은 죽은 것이다.

둘째, 또한 신앙에 의해서 그리스도에게 생명을 얻어오지 않는 한, 우리는 절대로 신령한 "생명"을 누릴 "수 없음"을 말해 준다. 몸이 음식 없이 못 살 듯 우리 영혼은 그리스도 없이 못산다.

② 거기서 오는 "혜택"과 "이득." 두 가지로 살펴 볼 수 있다.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56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서 산다." 그리고 나도 그 안에 산다." 

-- 신앙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밀접하고 친밀한 연합을 이룰 수 있다. 그가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그분 안에" 있다.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연합이란 이런 거시다. 그는 그들의 근심 걱정에 동참하고, 그들은 그의 은총과 기쁨에 동참한다. 그는 그들의 쓴 풍을 함께 "먹으며," 그들은 "그의 진수성찬"을 "함께 먹는다."

둘째, 우리는 "그에게 의해서 살게 되고," 영원히 살게 된다. 우리는 "그에 의해 살리라"(57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살 듯이, 나를 먹는 자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 참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덕분으로 이 거룩한 삶을 받는다. "나를 먹은 자는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리스도를 "먹고" 사는 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리스도를 "먹고" 사는 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가 살았으니, 우리도 살리라. 우리는 "영원히"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54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원한 삶을 누린다." 그런 자는 "영원히" 산다(58절).

끝으로, 복음서 기자는 유대인들에게 이런 설명을 "어디서" 그리스도께서 하셨는지를 말하고 끝맺는다(59절). "그가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 이것은 그의 담화에서 처음 나오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심문을 받을 때에 이 사실을 호소하셨다(18:20). "나는늘 회당에서 가르쳤다."

----------

생명의 말(요 6:60-71)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효과에 대해 살피게 된다. 어떤 자는 분개했고, 어떤 자는 순화되었다. 어떤 자는 "그에게서" 떠나게 되었고, 어떤 자는 "그에게" 더 가까이 가게 되었다.

Ⅰ. 혹자에게는 그것이 "사망에서 사망에 이르는 향기"가 되었다. 예수와 그의 교훈에 노골적으로 대적한 유대인들 뿐 아니라 "그의 제자들" 중 상당수에게도 그러했다. 이런 제자들은 그의 말을 자주 들었고, "공공연히" 추종하던 자들을 말한다.

1. 그들은 자기들이 들은 교훈 때문에 수근거렸다(60절).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말에 걸려 넘어졌다. 씨앗을 받은 땅 중에서 겨우 4분의 1만 열매을 냈다고 했다. 그들의 말을 보자(60절). "이 말은 어려우니, 알아들을 자가 있겠는가"고 했다.

(1) 그들이 좋아하지 않은 것이다. "무슨 소리지?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이 말을 상징적으로 이해했더라면, 못 알아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말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그리스도에게 "이 비유를 설명해" 달라고 간청했다면, 그는 설명해 주었을 것이고, 그들은 이해가 갔을 것이다. "그는 약한 자는 그들 식으로 가르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의 해설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 말을 거부할 "이 핑계를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어렵다"는 것이 핑계였다.

(2) 아무도 그 말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알아듣겠는가? 물론 아무도 없다." 언제나 종교를 경멸하는 자들은 온 인류가 자기들과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믿는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도무지 그리스도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라 결론지었다. 

-- 그들은 자기들이 "고문 받기"를 싫어했기 때문에 아무도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누가 들으랴?" 하나님께 감사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것이 쉽고 즐거울 뿐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양식"임을 알게 되었도다.

2. 그리스도는 그들의 수근거림을 비난하셨다.

(1) 그는 그들의 투덜거림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61절). 구석에서 속삭였지만,

①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것을 "아셨다." 그것을 보았고, 또 들었다. 그리스도는 대범한 죄인들의 공개적 모독을 아실 뿐만 아니라, 속된 위선자들이 비밀리에 그의 교훈을 멸시하는 것도 알아차린다.

② 그는 "스스로" 아셨다. 전해 듣고 알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지 하신 능력으로 파악하셨다. 그는 바로 "사람의 심중의 생각을 헤아리시는" 저 본질적인 말씀이시다(히 4:12, 13). 생각도 그리스도에게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말만이 아니라 생각까지도 조심해야 한다.

(2) 그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이 너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느냐?" 그리스도의 교훈이 별 이유도 없이 수많은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은 놀랄 만도 하다. 그리스도께서도 이상한 듯이 말씀하신다. "이것이 너희를 넘어지게 하느냐?"

① 그는 하늘로 승천할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그것은 그의 교훈의 진리성을 완벽하게 실증하려는 뜻에서이다(62절). "인자가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너희가 보면 어떻게 하겠는가?"

첫째, "이런 말을 하면 너희가 분명 더 불쾌하게 여길 것이고, 나의 과장이 심하다 할 것이다. 이 말이 너희에게 어렵다면, 내가 내려왔던 하늘로 다시 간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3:12 참조)

둘째, "너희가 인자가 올라가는 것을 보면, 더욱 내게 걸려 넘어 지리라. 그렇게 되면 지금 너희의 생각 이상으로, 내 몸은 먹을수 없게 될테니까?" 이것은 휘트비(Whitby) 박사의 해석이다.

세째, 그것을 보면 너희가 믿게 될 것이다. 너희가 지금은 내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해서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투덜댄다(42절). 그러나 내가 하늘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생각이 어떻게 될 것인가?" "올라 간다면" 분명 그는 "내려온" 자이다(엡 4:9, 10). 이렇듯 그리스도는 종종 "귀결적" 증거를 잘 대신다(1:50, 51; 2:14; 마 12:40; 26:64).

② 그는 자기의 이 이야기와 이와 비슷한 다른 비유적 이야기를 이해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육은 아무 소용이 없다"(63절). 

-- 하나님의 성령이 거기에 작용하지 않는다면, 단순히 규례(의식)에 참여한다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없다." 성경이 그것을 통해서 영혼에 생명을 줄 때 유익이 있다. 말씀과 의식은 거기에 성령이 같이할 때 산 사람에게서의 양식과 같은 구실을 한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 하지 않으면, 죽은 사람에게 양식과 같은 격이 된다.

--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심에 대한 교훈은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의 영적 의미가 영혼을 살리고, "살아 있게" 한다. 

--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이요 생명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는 것, 그 교훈에서 힘과 위로를 받는 것, 이것이 그 말의 "영과 생명"이다. 이렇게 해석할 때 비로소 그 말이 훌륭한 말이 된다.

-- 그리스도의 말을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유는 그것을 "잘못" 알기 때문이다. 비유의 문자적 의미는 소용없다. 이에 대해서 우리도 더 지혜로울 수 없다. "육은 아무 소용없다." 그러나 "영은 살린다." 

--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에서 흠을 찾았다. 그러나 실은 그 흠이 그들 자신의 것이었다. 신령한 것이 "무의미"해지고 "무의미" 해지는 것은 오직 "욕된"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그렇다. 사실 신령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즐거움"이 된다(고전 2:14, 15).

③ 그는 자기가 그들을 잘 알고 있음을 알리셨다. 그들이 자칭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 하지만, 그는 그들에게서 신통한 것을 기대하지 않으신다 했다(64,65절). 

--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에 대해 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 "누가 우리의 보도를 믿었느냐?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냐?"(사 53:1) 이 두 가지를 그리스도가 주목하셨다.

첫째, 그들은 "그의 보도를 믿지" 않았다. "나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한 자들 중에도 나를 믿지 않는 자들이 있도다." "전파된 말씀이 그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도 이 이유 때문이다. 즉 "거기에 신앙을 섞어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히 4:2). 그들은 그를 메시야로 믿지 않았다. "초학자는 스스로의 말씀을 떠나야" 하는 법이다.

a. "명목상의 기독교인들" 중에는 "실제로 불신앙인들"이 있다.

b. 위선자의 불신앙은 세상에 드러나기 이전에 그리스도의 눈앞에 먼저 드러난다. 그는 "처음부터" 누가 "믿는" 자이며, 또 12중 누가 자기를 배신할 자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의 행동이 백일하에 드러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는 그들의 "중심"을 아신다. 따라서 다음을 알 수 있다.

(a) 신앙을 장기간 동안 그럴싸하게 고백해 오던 자들의 변절은 그들의 일관된 위선을 말해 주는 확실한 증거이며,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참 신자들의 총체적이고 종국적인 변절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 여기서 말하는 것은성도들의 타락이라 하지 않고 위선자들의 발각이라 해야 한다(요일 2:19). Stella cadens non stella fuit - 즉 떨어지는 별은 별이 아니었다.

(b) "마음을 아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권이다. 그는 "믿지 않는" 자들이 믿는 척하고, 교회의 빈자리를 채우며, 의식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용하나, 세상에서는 좀처럼 발각되지 않는 자들이 누구인지 아신다. 교회란 그런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이 구별되는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이 마음을 판단하겠다고 나선다면, 그리스도의 보좌에까지 침범하고 그의 심판을 대신하는 격이 된다.

둘째, 그의 보도를 그들이 믿지 않았던 이유는 "주의 팔"이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65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지 않은 자는 내게 올 수 없다." 44절과도 관계된다. 

--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그의 일이므로,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모두 아들에게 알려질 수밖에 없으므로, 그리스도는 누가 믿고 안믿는지를 알 수밖에 없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는 자는 올 수 없다"는 말을 했었다. 여기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지 않으면..."이라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은총과 힘을 주시어서 영혼을"이끄시며," 올 마음을 주어서 사람을 인도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 없이는 불가능하니, 타락한 인간은 도덕적으로 불능자이기 때문이다.

3. 여기서 그리스도로부터 완전히 떠나고 마는 그들의 변절을 보게 된다. "그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떠나가고, 그를 따르지 않았다"(66절). 

-- 우리가 그리스도의 역사와 말씀을 듣고 은근히 싫어하게 되면, 그때 "시험에 들게" 된다. 그것은 " 뒤 돌아 봄"이요, 이것은 은총이 막아 주지 않으면 "뒷걸음질"로 되고 만다. 변절은"그 시초를 조심해야 한다."

(1) "제자들의 뒷걸음질"을 보라. "그들 중 많은 자들이 되돌아갔다." 즉 집, 가정, 직업 등등에로이다. 어떤 자는"농터"로 갔다. 또는 오르밧처럼 동족에게 "돌아갔다"(룻 1:15). 

-- 그리스도의 학교에 등록을 해 놓고, 되돌아간 것이다. 실로 놀라운 일이지만, 그리스도 제자들도 그리스도를 떠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이에 이상한 생각을 갖지 말자. "많은"자가 "돌아갔다." 마치 전염병처럼 몇몇의 뒷걸음질이 남들까지 유인한 것이다.

(2) 뒷걸음질의 계기. "그 때부터," 즉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생명의 떡"이라고 설교한 그 때부터이다. 이렇듯 타락한 인간은 종종 가장 큰 은총의 기회를 범죄의 기회로 삼는다.

-- 그리스도는 이들이 걸려 넘어질 것을 아시면서도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분명하고 진실 된 말씀은 신실하게 증거 되어야 하며, 그 말에 걸려 넘어지는 자들이 있을 경우에는 그러해야 한다. 사람의 기질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야 하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기호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3) 그들의 변절의 정도. "그들은 다시는 그와 동행하지 않았다." 다시는 그를 따르지 않았다. "한 번 계몽을 받아, 하나님의 선한 믿음을 맛본"자들이 "타락하면 다시 회개하기란" 지극히 어렵다(히 6:4-6)

Ⅱ. 이 말씀이 어떤 자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향기"가 되었다. "많은 자들이 돌아갔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모두 가지는 않았다. "열두" 제자도 그대로 있었다. 비록 "몇몇의 신앙이 전복"되더라도, "하나님의 기초는 든든히 서 있다." 여기서 이런 것을 살펴보자.

1. 그리스도는 열두 제자들에게 다감한 질문을 하셨다. "너희도 가려느냐?"(67절) 그는 가는 자들에게 아무 소리도 안하셨다. "불신자들이 떠난다면, 떠나게 두라." 그들을 한 번도 "가지지" 아니한 그분에게는 그것이 "손해"가 안 된다. 쉽게 온 자 쉽게 간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 기회에 12제자에게 신앙을 돈독케 하는 말을 하신다. "너희도 가려느냐?"

(1) "가든 말든 그것은 너희가 선택할 일이다. 떠나고 싶으면, 지금이 좋은 기회다. 많이 그렇게들 했다. 또 지금은 유혹의 때다. 돌아가고 싶으면 지금 가라." 

-- 그리스도는 싫은 사람은 아무도 붙잡지 않는다. 그의 군사는 압제받는 자들이 아니라 지원병이다. 이리하여 예수는 12제자에게 자기들의 길을 재고할 충분한 기회를 주셨다. 아무도 할 수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수 24:15; 룻 1:15).

(2) "간다면 너희에게 위험이 있을 것이다." 사람의 심중에 예수를 떠나고 싶은 은밀한 생각이 들면,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그런 생각을 막아 주신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들은 쉽게 갈 수 있었고, 느슨하게 매달려 있었지만 너희도 그렇다고 생각지 말라. 그들은 너희처럼 그렇게 나를 잘 보지 못하고, 내게 사랑을 그렇게 많이 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갔다. 그러나 너희도 가려느냐?" 우리가 그리스도를 오래 따라 다녔고, 오랫동안 은총을 받았다면, 우리의 배신은 그만큼 더 큰 죄가 된다.

(3) "내 생각에 너희는 안 갈 것으로 안다. 아니 너희도 가려느냐? 난 이제 전보다 더욱 너희를 붙잡겠다. 나는 너희에게서 더 좋은 것을 기대했다(히 6:9). 너희는 계속 나와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눅 22:28)." 

-- 혹자의 변절이주 예수를 근심케 하듯이, 어떤 자의 항구여일함은 그에게 기쁨을 준다. 그리스도의 신자들은 너무 서로를 잘 알기 때문에 어떤 괴로움이 와도 헤어질 수 없다.

2. 신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가 이에 대답한다(68,69절). 그리스도가 질문을 하셨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택을 하라고 요구했듯이, 떠날 것인지 있을 것인지를 약속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같은 효력을 발생했다.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 베드로는 항상 "대변자"였다. 그가 남보다 주님의 귀에 더 귀중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가 남보다 말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은 때로 긍정되고 때로 부정되었다(마 16:17, 28). 대개 입빠른 자들은 이런 일을 다 안다. 그런데 여기서는 놀랄 만큼 멋지게 말했다. 아마 그의 동료 제자들의 지시와 합의에서 말했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그들의 뜻을 알았을 것이다. 유다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랬을 것이다.

(1) 그리스도에 단호히 붙어 있겠다는 결의가 있다. 떠나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라는 식이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리이까? 더 좋은 곳이 없는데 당신을 떠나면 그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런데, 주님, 우리는 가장 잘 선택했기 때문에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 그리스도를 떠나는 자는 자기들이 어디로 갈지 생각해야 된다. 어디서 평화를 찾을지 알아보아야 한다(시 78:27, 28; 호 2:9). "우리가 어디를 갈까? 세상을 벗삼을 것인가? 그것은 반드시 우리를 속일 것이다. 죄를 짓는 데로 갈까? 그것은 반드시 우리를 자멸시킨다. 터진 웅덩이 때문에 생명수의 샘에서 떠날 것인가?"

-- 제자들은 계속 생명을 추구하기로 작정하고, 그리로 인도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안내자로 삼았다.

-- "우리가 이방 철학자들에게 가서, 그들의 제자가 될 것인가? 그들은 허황한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현자인 양하지만, 실은 종교에는 바보들이다. 그러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문하생이 될까? 그들이 무슨 유익을 주겠는가? 모세에게 갈까? 그는 아마 주님께로 되돌려 보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복의 길을 찾았다면, 그것은 주님께 계속 헌신하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성결한 종교를 다른 제도들과 견주어 볼 때 그 위대한 장점이 드러난다. 이 종교에서 결점을 본 자들은 이것을 떠나기 전에 더 좋은 어떤 것을 발견해야 한다. 신령한 스승을 만나야 한다면, 그리스도보다 더 훌륭한 스승을 만나랴? 신령한 계시가 꼭 필요하다면, 성경 말고 어디서 그것을 찾을 것인가?

(2) 이런 결심을 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맹목적인 결정이 아니라 심사숙고한 결과였다. 그 이유는

① 그들이 그리스도에게서 얻으리라 생각한 "이득" 때문이다. "당신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 그들도 그리스도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십자가의 진리는 아직도 수수께끼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로, "그가 영생의 말을 지니고 있는" 것만은 확신했다. 즉

첫째, 그것은 "영생"의 길을 보여 주고,

둘째, 그의 "판결"의 말은 영생을 제공하나고 확신했다. 그가 영생의 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영생을 줄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17:2).

앞의 제목에서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영생"을 확증해 주었다. 그래서 이 제자들은 이 명백한 구원에 확고히 서서, 남들은 어렵다고 생각하고 이를 무시했으나, 그들은 따르기로 각오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 있는 모든 신비, 곧 모든 애매성을 다 설명해 낼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생명의 말씀이고, 그것에 의해서 죽고 산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버리면 "스스로 자비를 버리는" 격이기 때문이다.

② 그에 대한 그들의 확신 때문이었다(69절). "우리는 당신이 구세주임을 확실히 믿습니다." 그가 약속된 메시야라면, 그는 "영원한 의를 가져다" 줄 것이고(단 9:24), 따라서 영생의 말씀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의는 영생을 누리기" 때문이다(롬 5:21).

-- 그러면 그들이 믿은 "가르침"은 무엇인가? 선조들에게 약속되었고,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야가 예수라는 사실, 그리고 그는 단지 사람일 뿐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 "너는 내 아들이다"(시 2:7)고 한 바로 그분임을 말하는 것이다. 

-- 변절의 유혹이 있는 시기에는 우리의 처음 원리를 회상하고 거기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 "논쟁거리 없이" 확실한 것에 굳게 머물러 있는다면, 아무리 의문스런 논쟁이 벌어져도 진리를 "발견" 할 수 있고 "지킬" 수 있다.

-- 또 그들의 신앙의 정도는 어떠했나? "우리가 확신합니다." "경험으로" 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일 좋은 지식이다. 남들이 동요할 때는 오히려 더욱 굳건히 서서, 진리에 거하는 기회를 잡아야 한다. 우리가 누구를 믿는지 알고, 그분에게 우리의 영혼을 걸고 담대히 신앙하면, 어떤 것이 닥쳐와도 겁이 없다.

3. 베드로의 답변에 대한 예수의 우울한 언질(70,71절). "내가 12를 택하지 않았느냐? 너희 중 하나는 악마다." 그리고 기자는 누구 얘긴지 말한다. "이것은 가롯 유다를 가리키는 말이다." 

-- 베드로는 자기들 모두가 주님께 성실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베드로의 자비심(최선을 희망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을 책망하지 않았지만, 그의 신념을 수정해 주신다. 우리는 항상 과신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 것을 아시나, 우리는 모른다. 여기서 알아두자.

① 위선자와 그리스도 배신자는 바로 악마나 다름없다. 유다 속에 악마가 "들어갔을" 뿐 아니라 그가 곧 "악마이다." 너희 중 하나는 "거짓 고소자" 이다는 말이다. "악마"란 말이 때로는 그런 뜻을 지닌다(딤후 3:3). 

-- 유다가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에게 판 것은, 그가 악마의 대변자로서 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행동을 변명한 것이다. 이것은 "거짓 고소자"란 말이 비유로 말해 준다.

-- 그러나 이렇게 볼 수도 있다. "그는 하나의 악마다." 성육신한 악마, 타락된 사도와 같다. 마치 타락한 천사처럼...... 그는 사탄이다. 그리스도의 대적이다. 그는 아바돈, 그리고 멸망의 아들 아볼리온이다. 그는 자기의 조상 악마처럼 자기의 욕심을 따랐다. 거기에 그의 관심이 있었다. 그는 바로 가인의 후예다(요일 3:12).

-- 몸이 악마에게 붙들린 자는 "악마"라 하지 않는다("악마 들린 자"라고는 하나 악마는 아니다). 그런데 사탄이 그 마음을 점령한 유다는"악마"라 했다.

(2) "겉보기"에는 성도인데 "실제는" 악마인 자들이 많다. 유다도 외견상으로 많은 제자들처럼 훌륭했다. 그의 독액은 독사처럼 아름다운 가죽으로 덮여 있었다. 그는 "악마를 내쫓았다." 악마의 나라의 대적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완전히 악마였다. 앞으로 그리될 뿐 아니라 이미 악마였다.

-- 그것은 "이상한" 일이고,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리스도께서도 이상한 듯이 말했다. "내가.... 하지 않았느냐?" 그것은 "슬프고," 또 슬퍼해야 할 만한 일이다. 모든 기독교인이 악마의 가면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3) 그러나 사람을 속이는 위선자의 가면이 그리스도를 속일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신령한 시선"은 모든 영을 분별할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라 자칭하는 자들을 "악마"라고 부를 수 있었다.

(4) 그리스도께서 특별한 임무를 위해 불렀으나, 결국엔 거짓된 자임이 드러나고 마는 자들도 있다. "나는 너희를 사도로 뽑았다." 그러나 유다를 영생으로 내정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13:18). "너희 중 하나는 악마이다." 

-- 교회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구원의 은총을 보증하지 않는다.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예언했습니다."

(5) 이 세상에서는 아무리 "정선한" 단체에서라도 죄악이 있게 마련이다. "성육신한 신(神)"과 친하게 지낸, 선정된 12중 하나가 "성육신한 악마"였다. 복음서 사가는 이 점을 강조했다. 즉 유다가 구별된 "열 둘 중 하나"였다는 점이다. 

-- 그러나 "그들 중 하나가 악마"라 하여 열 둘을 모두 파문해서는 안 된다. 하나가 그렇다고 모두 위선자라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자에게만 그런 비난을 하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자들, 섞여 있는 자들에게는 그런 비난을 말라.


이전글 : 요5장.두번째유월절예루살렘베데스다연못.38년된중풍병자.산헤드린에서의JC의 자기증거
다음글 : 요7.초막절.예루살렘.생수의강설교.니고데모의변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