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1.09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요7.초막절.예루살렘.생수의강설교.니고데모의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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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요7장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하다

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9.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명절을 지키러 올라가시다

10.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

11.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12.  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13.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

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15.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23.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예수를 잡고자 하나

25.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26.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27.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2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30.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31.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32.  예수에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내니

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35.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36.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41.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43.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44.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믿지 않다

45.  ○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46.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47.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48.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50.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52.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음행중에 잡혀온 여자가 용서 받다

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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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B]요7장

1.  And after these things Jesus was walking in Galilee; for He was unwilling to walk in Judea, because the Jews were seeking to kill Him.

2.  Now the feast of the Jews, the Feast of Booths, was at hand.

3.  His brothers therefore said to Him, "Depart from here, and go into Judea, that Your disciples also may behold Your works which You are doing.

4.  "For no one does anything in secret, when he himself seeks to be [known] publicly. If You do these things, show Yourself to the world."

5.  For not even His brothers were believing in Him.

6.  Jesus therefore *said to them, "My time is not yet at hand, but your time is always opportune.

7.  "The world cannot hate you; but it hates Me because I testify of it, that its deeds are evil.

8.  "Go up to the feast yourselves; I do not go up to this feast because My time has not yet fully come."

9.  And having said these things to them, He stayed in Galilee.

10.  But when His brothers had gone up to the feast, then He Himself also went up, not publicly, but as it were, in secret.

11.  The Jews therefore were seeking Him at the feast, and were saying, " Where is He? "

12.  And there was much grumbling among the multitudes concerning Him; some were saying, "He is a good man"; others were saying, "No, on the contrary, He leads the multitude astray."

13.  Yet no one was speaking openly of Him for fear of the Jews.

14.  But when it was now the midst of the feast Jesus went up into the temple, and [began to] teach.

15.  The Jews therefore were marveling, saying, "How has this man become learned, having never been educated?"

16.  Jesus therefore answered them, and said, "My teaching is not Mine, but His who sent Me.

17.  "If any man is willing to do His will, he shall know of the teaching, whether it is of God, or [whether] I speak from Myself.

18.  "He who speaks from himself seeks his own glory; but He who is seeking the glory of the One who sent Him, He is true, and there is no unrighteousness in Him.

19.  "Did not Moses give you the Law, and [yet] none of you carries out the Law? Why do you seek to kill Me?"

20.  The multitude answered, "You have a demon! Who seeks to kill You?"

21.  Jesus answered and said to them, "I did one deed, and you all marvel.

22.  "On this account Moses has given you circumcision (not because it is from Moses, but from the fathers), and on [the] Sabbath you circumcise a man.

23.  "If a man receives circumcision on [the] Sabbath that the Law of Moses may not be broken, are you angry with Me because I made an entire man well on [the] Sabbath?

24.  "Do not judge according to appearance, but judge with righteous judgment."

25.  Therefore some of the people of Jerusalem were saying, "Is this not the man whom they are seeking to kill?

26.  "And look, He is speaking publicly, and they are saying nothing to Him. The rulers do not really know that this is the Christ, do they?

27.  "However, we know where this man is from; but whenever the Christ may come, no one knows where He is from."

28.  Jesus therefore cried out in the temple, teaching and saying, "You both know Me and know where I am from; and I have not come of Myself, but He who sent Me is true, whom you do not know.

29.  "I know Him; because I am from Him, and He sent Me."

30.  They were seeking therefore to seize Him; and no man laid his hand on Him, because His hour had not yet come.

31.  But many of the multitude believed in Him; and they were saying, "When the Christ shall come, He will not perform more signs than those which this man has, will He?"

32.  The Pharisees heard the multitude muttering these things about Him; and the chief priests and the Pharisees sent officers to seize Him.

33.  Jesus therefore said, "For a little while longer I am with you, then I go to Him who sent Me.

34.  "You shall seek Me, and shall not find Me; and where I am, you cannot come."

35.  The Jews therefore said to one another, "Where does this man intend to go that we shall not find Him? He is not intending to go to the Dispersion among the Greeks, and teach the Greeks, is He?

36.  "What is this statement that He said, 'You will seek Me, and will not find Me; and where I am, you cannot come'?"

37.  Now on the last day, the great [day] of the feast, Jesus stood and cried out, saying, "If any man is thirsty, let him come to Me and drink.

38.  "He who believes in Me, as the Scripture said, 'From his innermost being shall flow rivers of living water.'"

39.  But this He spoke of the Spirit, whom those who believed in Him were to receive; for the Spirit was not yet [given,] because Jesus was not yet glorified.

40.  [Some] of the multitude therefore, when they heard these words, were saying, "This certainly is the Prophet."

41.  Others were saying, "This is the Christ." Still others were saying, " Surely the Christ is not going to come from Galilee, is He?

42.  "Has not the Scripture said that the Christ comes from the offspring of David, and from Bethlehem, the village where David was?"

43.  So there arose a division in the multitude because of Him.

44.  And some of them wanted to seize Him, but no one laid hands on Him.

45.  The officers therefore came to the chief priests and Pharisees, and they said to them, "Why did you not bring Him?"

46.  The officers answered, "Never did a man speak the way this man speaks."

47.  The Pharisees therefore answered them, "You have not also been led astray, have you?

48.  "No one of the rulers or Pharisees has believed in Him, has he?

49.  "But this multitude which does not know the Law is accursed."

50.  Nicodemus *said to them (he who came to Him before, being one of them),

51.  "Our Law does not judge a man, unless it first hears from him and knows what he is doing, does it?"

52.  They answered and said to him, "You are not also from Galilee, are you? Search, and see that no prophet arises out of Galilee."

53.  {And everyone went to his 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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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장 (개요)

우리는 7장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Ⅰ. 그리스도가 유대에 공공연하게 나타나기를 때로 거절함(1).

Ⅱ.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그리스도의 계획, 또한 이 절기에 올라가실 일에 관해 갈릴리에서 친족들과 이야기함(2-13).

Ⅲ. 절기 때 성전에서 공공연히 한 그의 설교.

1. "절기 중간 때에"(14,15) 일어난 일. 유대인들과 그는 다음 사실에 관해 이야기하셨다.

(1)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관해서(16-18).

(2) 그가 안식일을 파기하였다는 비난에 관하여(19-24).

(3) 그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느냐는 문제 즉 그 자신에 관하여(25-36).

2. 절기 마지막 날에 일어난 일.

(1) 불쌍한 영혼들을 부른 자비로우신 초대(37-39).

(2) 그 초대에 대한 반응

① 많은 사람들이 그 초대에 관하여 논쟁함(40-44).

② 대제사장들은 그 사실을 이유로 예수를 곤경에 몰아 넣고자 함. 

그러나 처음엔 저들의 하속들로 인해 실망했고(45-49), 다음에는 저들의 법정의 한 사람으로 인해 그들의 의도가 좌절됨(5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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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친족들의 불신(요 7:1-13)

Ⅰ. 그리스도께서 유다에서 보다는 갈릴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신 이유가 있다(1절). --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 즉 유대인들이 예수께서 안식일에도 병자를 치유했다는 이유로 "그를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5:16). 그가 예루살렘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어느 다른 지방에 줄곧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 그들은 군중들의 소란으로나 합법적인 고발로 인해 그를 죽일 것을 생각했다. 

--그가 유대인 가운데로 "감히 다닐 수 없었다"고 하지 않고 그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두려움이나 겁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신중"을 기하여 안 다니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 복음의 빛을 일부러 끄려고 애쓰는 자들에게 대해서는, 복음의 빛을 "취소해" 버림은 당연한 일이다. 

-- 그리스도는 자기를 내쫓으려는 자들에게서 멀어져 가실 것이고, 침뱉는 자들에게서 그는 얼굴을 돌릴 것이다. 그리고 발로 걷어차는 자에게는 밥 그릇을 빼앗아 버리신다.

2. 위험이 임박한 때에 [주님의 준비하신 뜻과 때가 아니라면] 우리 자신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 도망치고 뒤로 물러나는 일, 또한 가장 위험성이 없는 예배 장소들을 택하는 일들은 허용될 수 있는 것이고 권고될 만한 것이다(마 10:23). 

-- "그 때도" 우리가  죄인들레게서 벗어날 수 없다면 우리는  생명을 내 놓아야 한다.

3. 만일 하나님의 섭리가 상받을 자들을 미천한 곳으로 던진다 하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그것이 우리의 주님 그 자신의 운명이었다. 

-- 모세의 보좌 중 가장 높은 곳에 앉으시기에 충분하신 분이 기꺼이 갈릴리의 서민들 가운데 걸어 다니셨다. 

-- 우리는 그가 갈릴리에 계속 앉아 계시지도 않으셨고, 자신을 그곳에다 생매장하지도 않으셨으며, "다니셨다"는 점을 주목하자. 그는 선을 행하시면서 여기저기 다니셨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원하는 바를 할 수 없을 때조차도 할 수 있는 바를 행해야 했다.

Ⅱ. 모든 남자들의 참석을 요하는 3가지 절기중의 하나인 초막절이 가까워 왔다(2절). 이 절기의 제정에 관해서 레위기 23장 34절을 보라. 그리고 오랫동안 오용되어 온 후 이 절기가 회복된 것에 대해선 느헤미야 8장 14절을 보라. 이 절기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장막에 거했던 상태를 "기념"하고, 현 세계에서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 장막에 거하는 것이 거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 수백 년 전에 제정되었던 이 절기는 여전히 경건히 준수되었다. 신적인 제도들은 결코 옛 것이 아니고, 시기적으로 쇠퇴해 버리는 것도 아니다. 또한 광야에서의 은총이 결코 잊혀져서도 아니 된다. 그러나 이 절기는 "유대인들의 절기"로 불리워지고 있다. 이유는 이 절기가 그저 유대인의 행사에 불과하게 되어 곧 폐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Ⅲ. 어머니 쪽인지 아버지 쪽인지 확실치 않으나, 그의 "형제들" 곧 그의 친척들이 그리스도에게 한 이야기. 

-- 그들은 예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척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의 행위에 대해 충고하고 나섰다.

1. 예수가 실제 이상으로 일반 사람들에게 알려지도록 하려는 저들의 욕심과 헛된 영화. "당신이 행하는 일을 형제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다로 가소서"(3절).

(1) 그들은 이런 충고에 대해 2가지 이유를 내세움.

① 예수를 존경했던 예루살렘과 그 주위에 있는 자들에는 격려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 왜냐하면 그의 세상 나라를 기대하면서 그의 보좌는 반드시 예루살렘에 있게 될 것이라고 단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별히 예루살렘에 제자들이 있기를 원했다. 그들은 예수가 갈릴리에서 보내는 시간이 낭비라고 생각했고,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그의 기적들을 보지 못한다면 그 기적들은 아무런 값어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 혹은 "여기에서처럼 몇 명이 아니라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드는 제자들이 모두 당신의 일을 보게 하소서"라는 뜻이다.

② 주의 이름이나 명예의 증진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 만일 스스로가 공공연히 알려지려고 애쓰는 사람이라면 비밀리에 일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스스로 알려지려고 애씀이 당연한 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의 기적들을 숨기는 일은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졌다. 

-- "당신이 이런 일들을 행한다는 것을, 또한 기적을 행하고 널리 모험을 감행함으로써 통치자들의 인정을 받고 사람들의 칭찬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이시오. 이러한 여러 가지 믿을 만한 일이 뒷받침되면 반드시 인정을 받을 것이오. 그러므로 이 시기는 관심을 일으켜 주고, 큰 인물로 부상할 좋은 시기요."

(2) 이러한 권고에 어떤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는 그것은 저들의 불신앙의 증거라고 언명한다. "그의 형제들이 그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5절). 만일 그들이 믿었다면 이러한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관찰해 보자.

① 그리스도의 친척이 된다는 것은 명예다. 그러나 "구원을 주는" 명예는 아니다. 

-- 그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들이 그가 소중히 여기는 친족들이다. 그리스도의 가문일지라도, 은혜는 피를 타고 유전되지 않는다.

② 그리스도는 어떤 세속적인 이권에다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증거다. 

-- 왜냐하면 그랬다면 그의 친족은 그와 협상하기를 바랐고, 그는 먼저 그들은 안전하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③ 그리스도의 혈족 중에서도 그를 믿었던 자들이 있고, 믿지 않은자들도 있다. 

-- 동일한 외형적인 특권과 이점을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일하게 사용치 않는다.

(3) 그러면 이들이 그리스도에게 준 충고에는 어떤 언짢은 점이 있었는가? 대답하자면,

①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어떤 수단을 강구하도록 명령하고 가르치는 가소로운 이리다. 

-- 이것은 그가 자기들을 지도할 수 있다고 믿지 않은 징표였다. 그때 그들은 그분이 지도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②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 하고 있는 그때에 유대로 가라고 권유했으니, 그들은 그의 안전성에 대해 아주 경솔했다. 

-- 그를 믿고 그를 사랑했던 자들은 그가 유대로 가는 것을 막았다(11:8).

③ 만일 그의 기적들이 예루살렘에서 행해졌다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것들을 시험해 보았을 것이고, 그들의 불신앙을 정당화시킬 어떤 구실을 거기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했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다. ***휘트비(Whitby) 박사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④ 아마 이들은 갈릴리에서는 그의 동료에 대해 싫증을 느꼈을지도 모른다(왜냐하면 "이 모두가 갈릴리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상 이것은 그가 "저들의 지방에서 떠나가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⑤ 그들은 그분이 자기 제자들을 돌보지 않았고, 그가 행하는 일을 보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즉 신앙에 도움을 주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⑥ 그들은 그가 위인들의 반열에 끼지도 못하고, 공적인 활동 무대에 나서지도 못하는 비천한"자라고 교묘하게 비난한다. 

-- 만일 그가 용기를 갖고 있고 "위대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식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겸손한 행위, 그리고 그의 종교가 세계 안에서 일상적으로 만들었던 조그마한 표상은 그리스도와 그의 행위를 비난하는 구실이 되어 왔다.

⑦ 그들은 그가 행한 기적들의 진실성에 대해 의문을 품은 것 같다. 

-- 말하자면 "만일당신이 이러한 일들을 행한다면, 또한 그 행위들이 법정에서 공적으로-세밀한 검사에도 불구하고 흠이 없는 것이라면-보이시오" 하는 것이다.

⑧ 그들은 그리스도를 자기들과 같은 한 인간, 자기들과 같이 세상 사람의 정책에 지배 받는자, 또한 자기들처럼 "육신적으로 잘 보이기"를 바라는 자로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은 그는 인간들에게서 명예를 구하지 않았다.

(4) 이기심이 모든 것의 근저에 있었다. 

-- 그들은 만일 그가 자기 자신을 위대하게 하려 한다면 그의 혈족인 자기들이 그의 명예를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 기억할 점은 

첫째로, 많은 세 속의 인간들이 공공의 종교 행사에 참여하나 오직 "자기들이 "멋지게 보이게" 하려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명예를 구하는 듯 한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이러한 식에서 자기 자신들을 찾고 그 영예가 자기 스스로에게 오게 만든다는 점이다.

2. 주 예수의 신중하심과 겸손하심이 형제들의 충고에 대한 대답에서 나타났다(6-8절). 그들의 비열한 모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온화하게 말씀하셨다. 

-- 여기서 기억할 점은 타당치 못한 말에도 역정냄 없이 대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1) 그는 자기 자신과 그들간의 차이점을 보여 준다.

① 그의 "때"는 "지정"되어 있었다. 그들의 때는 그렇지 않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너희의 때는 이미 준비되어 있다." 

== 절기를 지키러 올라 갈 때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라. 그들이 올라가는 그 시기는 그들에게는 아무래도 좋다. 왜냐하면 그들이 어디에 있었든, 어디로 가든,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시각각으로 그리스도의 때는 귀중한 것이었고, 그 때마다 해야 할 특정한 일이 있었다. 

-- 그는 그 지방을 떠나기 전에 아직도 갈릴리에서 행할 일이 있었다. 그의 친족들의 이런 거동과 그가 절기에 "올라가는"것, 그 둘 사이에는 70제자 파송의 사건이 있음을 복음서 대조를 통해 알 수 있다(눅 10:1 이하). 이것은 대단히 중대한 일이었다. 그이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것을 먼저 해야 하기 때문이다. 

-- 헛된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이 항시 "때를 준비하여" 있다. 그들은 마음대로 올 수도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의무"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은 "어느 때라도" 할 수 있는데, 이들은 시간이 없다. 

--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하나님의 종 된 자들, 또 모든 유용한 자들이 그렇듯이 스스로 모든 자의 종이 된 자들은 스스로 "자기들의 시간의 주인"이 되려 해서는 안 된다. 일에 억류되어 있는 것이 일이 없어 자유로운 것보다도 수천 배 더 낫다.

== 또는 이것은 그가 예루살렘에 공공연히 나타날 때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모든 인간과 만물을 알고 계시는 그리스도는 나타날 최적의 때가 절기 중간쯤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 무지하고 소견이 좁은 우리들은 그리스도가 백성들을 해방시켜야 하고 그래서 그 자신을 지금 보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고 또 그렇게 규정하기 쉽다. 현재는 "우리의" 시기다. 그러나 그는 판단하시기에 가장 적합한 분이시다. 그리고 그의 때는 아직 오직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 그의 백성은 아직도 구원받을 준비를 하고 있지 못하고, 그의 적들이 파멸되는 기회도 무르익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때를 인내로써 기다리자. 그것은 그가 행하시는 모든 것은 그 알맞는 때에 가장 영화롭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② "그의 생명"은 위협되고 있었으나 그들의 생명은 그렇지 않았다(7절). 

-- 그들은 자신들을 세상에 "내보이고" 싶어하면서도 자신들을 노출시키지 않았다. 즉 "세상은 너희를 미워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너희들이 세상의 사람이고 그 자녀들이며, 그 종들이고, 또한 세상사에만 관심하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의심할 바 없이 세상은 그 자신의 것을 사랑할 것이다"(15:19 참조). 

-- 거룩하신 하나님은 더러운 영혼을 "미워할 수 없으나" 악한 거짓을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세상에 보여 주시고 있는 그리스도는 자기를 가장 위험한 곳에 드러내셨다. 왜냐하면 "세상이 그를 미워하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세상은 그분을 알지 못했다) 무시당했을 뿐만 아니라, 마치 그분이 세상에 해를 끼쳤던 것처럼 미움을 받았다. 이처럼 그분은 악을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갚았다. 

-- 점점 세도를 부리는 죄는 그리스도에 대한 반감과 원한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 왜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했는가? 그분이 알렉산더 대왕처럼 세계를 정복한다는 명목하에서 세계를 황폐케 했었는가? "그렇지 않다. 다른 이유에서다." (그가 말씀하시기를) "증거 하건대 세상의 행사가 악하기 때문이다."

첫째, 악한 세상의 행사들은 악한 것들이다. 

-- 나무가 악하면 열매도 그런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어두운 세상이요, 배신한 세계이다. 그리고 그 행사들은 암흑과 배반의 행사들이다.

둘째, 우리 주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과 제자들을 통해서 사악한 세상의 악한 행위들을 밝혀내며 증거 하셨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세째, 세상의 행사가 악함이 드러나는 것은 세상에는 커다란 불안이요 도전이다. 

-- 부도덕하고 사악한 자들이 거룩한 말씀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미덕과 경건의 영광이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들의 양심이 죄 안에 타락해 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고 죄에 뒤이어 나오는 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네째, "주장"이야 무엇이든, 세상이 복음을 증오하는 "실제" 원인은 그 복음이 죄와 죄인들을 고발한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 그리스도의 증거들은 세상에 거하는 자들을 "고문한다." 그러므로써 매우 잔인하게 대접받는다(계 11:10). 그러나 세상 풍조를 따라 감으로써 세상의 쾌락을 얻기보다는 세상의 사악함을 증거함으로써 세상의 미움을 사는 편이 더 낫다.

(2) 그는 갈릴리에서 잠시 머물러 있기로 작정하고, 그들을 올려보낸다(8절). "너희는 이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리라."

① 비록 그들은 세속적이고 위선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그는 그들이 절기에 올라가는 것을 허락하신다. 

-- 여기에서 참된 사랑과 신실한 의도를 가지고 거룩한 의식에 나가지 않는 자라도 방해를 하거나 실망을 시켜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들이 거기서 점차 발전될지 누가 아는가?

② 그리스도는 그들이 세속적이고 위선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절기를 지키러 올라갈 때 함께 가기를 거절하신다. 

-- 허세로나 이런 세속적인 목적으로 절기에 올라가는 자들은 그리스도 없이 간다. 따라서 급한 걸음으로 갈 것이다. 이런 사람의 처지는 얼마나 슬픈가? 즉(출 33:1-3 에서처럼) 자칭 예수의 친족이라 하나 그가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이다. "그런 행사에 올라가라. 가서 기도하고, 말씀을 경청하고 또한 성례를 받으라.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 너희는 가라.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타내 보여라. 그러나 나는 너희를 위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다면 무슨 목적으로 우리가 올라가는가? "너희는 올라가라. 난 올라가지 않겠다." 

-- 우리가 거룩한 행사를 위해 가거나 오고 있을 때, 우리는 선한 사랑의 연료가 부패한 교재를 통해서 냉각되지 않도록 친구들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헛되고 세속적인 것을 피하는데 주의해야 한다. "나는 이번 절기에는 올라가지 않는다." 그는"나는 전혀 가지 않을 것이다"고 하지 않았다. 단지 그때만 올라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 여기에서 어떤 의무는 연기할 수 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의무란 빼먹어서는 안 된다(민 9:6-11). 그가 제시하는 이유는 "내 때가 아직 완전히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가 자신의 때를 알고 지키는 점에 있어서 매우 정확하다는 것을 본다. 그 때는 "정해져"있듯이, 또한 "최상의" 때였다.

3. 그리스도께서 그의 완전한 때가 올 때까지 갈릴리에 계속 체제하심(9절). 

-- 그분은 이러한 사실들을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타우타 데 에이폰’ - 즉 갈릴리에 머물러 계셨다. 이 설교를 하신 이유 때문에 그는 계속 거기에 계셨다. 왜냐하면,

(1) 명예를 구하라고 충고한자들에게서 영향을 받지 않으시려 했고 그분을 유명한 자로 만들려는 자와 어울려 다니지도 않으시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들의 유혹에 맞장구를 치지 않으려 하셨다.

(2) 자기 자신의 목적에서 이탈하려 하지 않으시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분명한 예견과 성숙한 사고의 기반에서 그가 이절기에 올라가지 않고 갈릴리에 계속 머물 것임을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이와 같이 침착하고 경박하게 배웅하지 말아야 한다.

4. 그분은 때가 이르자 절기에 올라가심.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관찰해 볼 수 있다.

(1)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셨다"는 사실을 살펴보자. 

-- 그분은 그들이 그를 세상에 내보여 준다는 구실하에 소란과 혼란을 일으킬까 보아 그들과 함께 올라가지 않으셨다. 그런데 "놀래지도 않고 외치지도 아니하며 그의 소리가 거리에 들리지 않게 하였다"는 예언은 그의 생각과 일치했다(사 42:2). 그러므로 그분은 그들을 뒤따라 올라가셨다. 

-- 우리는 우리가 아직 친밀하게 사귀거나 이야기 나누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동일한 종교 의식의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지 우리의 동료 예배자들의 은혜에 힘입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분의 세속적인 형제들은 먼저 올라갔고 그 후 그분이 올라가셨다. 

--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외형적 이행에 있어서는 형식을 추구하는 위선자들이 신실한 자들보다 앞장설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유의하자. 많은 사람들이 먼저 성전에 오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허영에 의하여 그곳에 오며 누가복음 18장 11절의 사람처럼 의롭게 되지 못한 채 그곳을 떠난다. 그러므로 "누가 먼저 오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진심을 가지고 나온다면 우리 앞에 누가 먼저 갔느냐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2) 그가 어떻게 올라가셨는가?를 살펴보자. 

-- ‘호스 엔 크륍토’ - 즉 자기를 숨기시는 것처럼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올라가셨다는 자긍하지 않으려 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절기에 가는 일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선을 행하는 기회였기 때문에 올라가셨다. 그러나 그는 지도층을 자극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비밀리에 올라가셨다. 

-- 하나님의 일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최소한으로 잡음을 없애면서 일을 하는 것임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눅 17:20). 우리는 하나님의 행사를 은밀히 행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 일을 거짓으로 행하여서는 안 된다.

5. 예루살렘의 유대인들 중에 그분이 계시리라는 커다란 기대(11-14절). 

-- 전에 그가 절기에 올라오셔서 많은 기적을 행하심에 의해 자신을 나타내셨으므로 그분은 자신을 많은 이야기와 대화의 주제가 되게 만들었다.

(1) 그들은 그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11절). 그러므로 본문에 "유대인들이 절기에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에 있는가"고 물었다는 말씀이 기록되었다.

① 군중들은 그곳에서 예수를 보기를 갈망했는데 그들이 예수와 예수의 기적들을 봄으로써 자기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를 원해서였다. 

-- 그들은 갈릴리까지 가서 예수를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갈릴리에 간다고 해서 손해볼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명절이면 예수가 예루살렘에 오실테니 그 때 그를 보기를 바랬다. 만일 그리스도와 친밀하게 될 기회가 온다면 좋겠다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절기 때 그를 찾았다." 

-- 우리가 거룩한 의식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 우리는 이 의식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고, 복음의 잔치에서 그분을 찾아야 한다. 절기 중에 그리스도를 보기를 원하는 자들은 거기서 그 분을 찾아야 한다. 혹은 본문을 다음과 같이도 생각할 수 있다.

② 아마도, 적들이 그를 잡을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만일 가능하다면 그분의 일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기회를 찾기 위해 그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 그들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 ‘푸 에스틴 에케이노스’(7:11) - 즉 그 자가 어디에 있는가? 라는 뜻이다. 이같이 그들은 그분에 대해 경멸적이고도 비열하게 말하였다. 반면에 이 사실은 저들의 마음이 얼마나 그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고, 저들의 생활 주변에서 그분에 대해 얼마나 많이 얘기가 되고 있는가를 넌지시 암시해 주기도 한다.

-- 그들은 그분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아도 서로 잘 알았기에 이름을 부를 필요가 없었다. 이 절기를 하나님 섬기는 기회로 환호하며 받아들여야 할 그들이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기회로 그 절기를 즐기고 있었다. 

-- 이처럼 사울도 달초(月初)에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삼상 20:27). 종교의식을 위한 엄숙한 집회에서 죄를 저지를 기회를 찾는 자들은 극도로 하나님을 더럽히고 그가 있는 곳에서 그분을 무시하는 자들이다. 그것은 법정 안에서 사람을 치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2) 그분에 대하여 백성들의 심정은 여러 가지로 달랐다(12절). 그러므로 "무리 중에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림이 많았다." 

-- 그리스도에 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원한, 그리고 그분에 대한 그들의 질문은 그분으로 하여금 더욱 많은 얘기를 하도록 유발시켰고 백성들 중에 그를 더욱 드러나게 하였다. 그리스도 복음이 반대에 부딪침으로 오히려 설 자리를 얻게 된 것이다. 더욱 더 많은 질문이 행하여지고 모든 곳에서 그분에 대한 반대의 말이 오감에 따라 복음은 곳곳으로 파급되었고 이런 방법에 의해 더욱 더 멀리 퍼져 나가게 되었다. 또한 그가 주장하는 것의 진가가 더욱 탐구되어지게 되었다. 

-- 본문의 수군거림은 그리스도에 반대하여 그런 것은 아니었고 그분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수군거림이었다. 유대 지도자들이 그분을 지지해 주거나 격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자들은 그들에 대해 불평을 터뜨렸다. 또 다른 자들은 그들이 그를 잠잠케 하거나 속박치 않는다고 그들에게 대해 수군거렸고, 또 다른 자들은 그분이 예루살렘에서 너무 관심이 없다고 수군거렸다. 

--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종교가 많은 논쟁과 논란의 주제가 되어 왔고 또 그렇게 될 것임을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눅 12:51, 52). 만일 모든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써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이기로 약속한다면 거기에는 완전한 평화가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자는 빛을 받아들이는데 비해 다른 자들은 그 빛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할 때 거기엔 수군거림이 있게 될 것이다. 

-- 골짜기에 있는 뼈들이 죽어 말라 있는 한에서는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러나 살아나라!고 그들에게 외쳐질 때에는 떠들썩한 소리와 요란한 진동이 있었다(겔 37:7). 그러나 분명 자유에서 오는 일의 소란과 논쟁은 감옥의 고요와 의견일치보다는 나은 것이다. 자 그러면 그분에 대한 백성들의 감정은 어떠했었는가? 살펴보자.

① 어떤 자는 "그분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하나의 진리였다. 그러나 전체의 치리에 비해 볼 때 이 말은 너무도 부족한 것이었다. 

-- 그분은 좋은 사람만이 아니라 인간 그 이상이었고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리스도를 악하게 생각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도 그를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다. 비록 그분에 대해 좋게 얘기한다 해도 아직도 그분에 대하여 거의 존경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를 충분히 존경하여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정말로 그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은 그의 영광이었고 그분을 박해하는 자들에게는 불명예가 되었다. 한편 그분을 메시야로 믿으려 하지 않는 자들까지도 그가 좋은 사람임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② 어떤 사람들은 "그분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백성을 미혹하게 한다"고 말했다. 

-- 만일 이것이 사실이었다면 그는 아주 나쁜 사람임에 틀림이 없었으리라. 그러나 그분이 가르친 교리는 건전한 것이었고 논쟁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분의 기적들도 참된 것이었고 반박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분의 대화는 분명히 거룩하고 선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저변에는 발견되지 않은 어떤 속임수가 있으리라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이것이 그분을 반대하고 그분을 넘어뜨리려는 대제사장들의 생각이었다. 

-- 그리스도에 대해 유대인들 중에 있었던 것과 같은 수군거림이 아직도 우리들 중에 있다. 소시니안스(Socinians)는 "예수님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나 그 이상은 말하지 않는다. 미신론자들은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도 허용치 않는다. 그들은 그가 그 "백성을 미혹하게 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어떤 자는 그를 얕보고, 또 다른 자들은 그를 비난한다. 그러나 진리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③ 그들은 그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면 집권자들이 싫어할까 보아 두려워하였다(13절). 그러므로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고 본문에 되어 있다.

첫째, 그들은 감히 그분에 대해 공공연하게 좋게 말할 수 없었다. 그를 책망하고 비난하는 것은 누구나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분을 감히 나서서 변호하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면 

둘째, 그들은 그분에 대해 아무 말도 드러나게 얘기할 수 없었다는 말로 볼 수도 있다. 그분에게는 흠을 잡아 말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전혀 그분에 대해 얘기하지 않음으로 공연히 고통을 당하는 일은 피하려고 하였다. 

--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처벌대상이었다. 이처럼 많은 자들은 쓸 데 없는 논쟁은 피하라는 명목 하에 진리를 압제하는 일을 자행한다. 그들은 신앙 그 자체를 잊게 하여 장사지내려는 목적으로 신앙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입다물게 하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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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절에 참석하신 그리스도(요 7:14-36)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성전에서의 그리스도의 대중 설교(14절). 그분은 예루살렘에 계셨을 때에 흔히 하시던 것처럼 "성전으로 올라 가셔서 가르치셨다." 

-- 그분의 직책은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었다. 이 일을 그분은 군중들이 모여 있는 모든 장소에서 행하셨다. 그의 설교가 기록되지는 아니하였다. 왜냐하면 그 교훈이 갈릴리에서 선포했던 동일한 취지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 갈릴리에서의 설교는 다음 복음서기자가 수록하였다. 또한 복음서가 명료하고 세련된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그 시기가 절기 중간쯤이었다는 점이다. 즉 8일 간의 절기 중 4일이나 5일째였다. 그분이 절기 중간 때까지는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않으셨는지 아니면 절기 초기에 왔는지(비밀리에 이루어진 것이라) 확실치 않다. 그러면 왜 그분이 말씀을 선포하러 조금 더 빨리 성전에 올라가시지 않았는가? 그 대답은 다음과 같다.

1. 백성들이 그의 말씀을 들을 여유가 많이 있을 때 그들에게 감으로 그들이 그의 말을 들을 마음이 더욱 생기기를 바라셔서였다. 즉 그들이 장막절에 행하는 관습에 따라 여러 날을 초막에서 보낸 후에 가시고자 한 것 같다.

2. 그분은 자기 친구들과 적들이 다 같이 그분을 찾고 있을 때 나타나기를 바라는 순간을 택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 그러므로 한밤중에 그가 나타날 것의 한 유형을 보여 주고자 하신다(마 25:6). 그러나 왜 그가 지금은 이처럼 공공연하게 나타났는가? 그것은 분명히 자기를 박해하는 자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였다.

(1) 비록 그들이 그분에 대해 매우 잔인했지만 그들과 그들의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보여 줌으로 그들에게 수치감을 느끼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사 1:7, 8 참조).

(2) 그들의 업무를 그들의 손에서 빼앗아 자신이 수행하시므로 그들이 수치를 느끼게 하려고 하셨다. 

-- 그들의 직업은 성전에서(특히 장막절에는) 백성들을 전혀 가르치지 않았다(느 8:17, 18). 그러나 그들은 백성들을 전혀 가르치지 않았고 가르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들의 계명이나 가르쳤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자신이 성전에 올라 거셔서 백성들을 가르치신다. --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자기들이 몰봐야 할 양떼들을 먹이로 삼아 먹어치울할 때 그 때야 말로 약속된 대로 목자장이 나타날 시기인 것이다(겔 34:22, 23; 말 3:1).

Ⅱ. 유대인과의 담화. 그 내용은 세 가지 주제로 요약될 수 있다.

1. 예수의 교훈.

(1) 그의 교훈에 대한 유대인들의 감탄(15절). 고로 본문에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는가?"라고 기록되고 있다. 여기서 관찰할 점은 다음과 같다.

① 우리 주님 예수는 예언자들의 학파에서나 또는 율법사 밑에서 배움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그분은 철학자들처럼 배우기 위해 여행을 다녀본 적도 없고 그가 살던 지방에 있는 학교나 전문학교를 이용하시지도 않았다. 모세는 애굽인의 지식을 터득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지식을 그렇게 많이 배우지 않았다. 그분은 측량할 수 없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으로부터 또는 인간에 의해" 어떤 지식도 받을 필요가 없었다. 

-- 그리스도가 출현했던 시대에는, 이 시대를 전후한 그 어느 때보다도 로마 제국과 유대인 교회에서 지식이 범람했었다. 이 같이 탐구가 왕성한 시대에 그리스도는 자기의 교회를 설립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가 무지한 시대를 택하시지 않은 것은 복음이 세계를 현혹하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그분 자신은 당시 유행하는 지식을 배우시지 않았다.

② 그는 배운 적은 없었지만 글을 알고는 있었다. 

-- 그는 율법 학자를 교사로 모신 일은 없었지만 성서에는 대단한 실력이 있으셨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도 그리스도처럼 지식을 갖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처럼 영감으로 지식을 갖기를 기대하여서는 안 되고 평범한 방법으로 지식을 얻어야 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피나는 고통도 감수해야 한다.

③ 지식을 배운 적이 없었으면서 그리스도가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분을 진정 훌륭하고 놀랍게 만들었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그의 지식을 이상하다는 투로 말하고 있다.

첫째, 어떤 이들은 그분의 지식을 그의 명예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 그들은 배운 것도 없는 그가 이토록 놀라운 지식을 지닌 것을 보고 그는 틀림없이 지식을 부여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둘째, 또 어떤 자들은 그에 대한 경멸과 멸시로 이 말을 한 것으로도 여겨진다. 

-- 그가 지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참된 지식이 있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높은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었고 학원를 취득한 일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세째, 또 어떤 이들은 그가 마술적인 술책으로 또는 불법적인 여러 수단으로 그 지식을 얻은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그분이 박식하게 된 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분을 마술사로 생각한 것이다.

(2) 저들의 견해에 대한 예수 자신의 확신. 그것은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① "자신의 가르침은 신적인 것이라는 확신이다"(16절). 그러므로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고 말씀한다. 그들은 그가 결코 배운 적도 없으면서 가르친다는 사실에 화가 나 있었다. 이에 답하여 그는 그의 교훈이 그처럼 배워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한다. 그의 교훈은"신의 개시였다." 그는 아버지와 동등한 하나님 자신이셨기 때문에 "내 교훈은 나의 것이요, 동시에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다"고 당당히 말씀하실 수 있었다. 

-- 그러나 지금은 겸손한 상태에 있는 자요, 중재자시며, 하나님의 종으로 있으셨으므로 겸손하게 "나의 교훈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과 중재자로서의 나의 교훈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다. 그 교훈은 나 자신에게서 기원된 것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나를 보내신 이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씀한다. 

--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대언케 할 위대한 예언자에 관하여 약속 하셨었다(신 18:18).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교훈이 신적인 것이라는 사실은 그의 말씀을 포용하는 자들에게는 위안이 되고 그의 교훈을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저주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지 인간에게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② 그리스도의 교훈의 신실됨과 신적인 권능을 지녔다는 사실을 가장 잘 판단할 사람들은 신실함과 곧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바라고 애쓰는 자들이라는 확신이다(17절).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즉 자기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으려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아니면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몇 가지 고찰하여 보자.

첫째, 그리스도의 교훈에 관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느냐 아니냐 또는 그의 복음이 하나님의 계시인지 아니면 사기에 불과하냐는 점이다. 

-- 그리스도는 자신의 교훈이 하나님에게서 왔는지 아닌지 사람들의 관심을 갖는 것을 기꺼이 여기신다. 그렇다면 그의 사역자들은 더욱 더 기꺼이 그에 대하여 탐구를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에 근거하여 행동하고 있는가를 관심을 갖고 늘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속임을 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비참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누가 이러한 탐구에 성공할 것이냐가 문제이다. 그것은"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 적어도 그 뜻을 행하기를 열망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a. 이러한 탐구에 성공하는 자들은"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자들이다. 

--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관하여 정당하게 질문하는 자들이요, 그리고 사욕이나 이권에 치우치지 아니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은 은혜로 인해 결단을 내린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밝혀내면 그것에 순응한다. 그들은 이와 같이 하나님에 관해 정직한 원칙을 세운 자들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자들이다.

b. 이런 자들은 그리스도의 교훈의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다.

(a) 그리스도는 이런 자들에게 지식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는 "그가 알 것이다"고 말씀하셨고 그가 그들에게 이해할 수 있게 하겠다고 하신다. 

-- 그들이 지니고 있는 빛을 향상시키는 자들과 그것에 의해 조심스럽게 사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파멸적인 실책에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다.

(b) 그들은 그 지식을 받아들이기를 원하고 또 위하여 준비한다. 하나님의 계명의 질서에 순종하고 싶어하는 자는 하나남의 빛의 광선을 받아들일 생각이 있는 자이다. 

--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그 빛은 주어질 것이다. 좋은 이해심을 가진 자들은 곧 그 분의 계명을 행하는 자들이다(시 111:10). 하나님을 닮는 자들은 그분을 가장 가깝게 이해한다.

③ 교사로서 그리스도는 자신에게 속한 말을 하지 않으셨다는 확신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8절).

첫째, 본문에서 현혹자의 특성을 살펴보자. "그는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자이다." 

-- 이것이 스스로에 대하여 말하는 자의 한 징표다. 거짓 그리스도인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그러하였다. 본문에 속이는 자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 말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위탁이나 교훈을 받은 적이 없는 자들이다. 그들 자신의 의지외에는 보증이 없고 그들 자신의 상상과 그들 자신의 정책과 교활한 술책 이외에는 아무런 영감도 받지 못한 자들이다. 

-- 대사들은 스스로 말하는 사람은 아니다. 이러한 대사로서의 사역자들은 스스로 말하는 사람은 아니다. 이러한 대사로서의 사역자들은 스스로 말함으로 영광을 취하려는 행위를 포기한다. 그러면 속이는 자에 대하여 더욱 고찰하여 보자. 그들의 위선은 그들이 순수하게 그들 자신의 영광을 도모한다는 사실을 통하여 그릇됨이 증명된다. 

-- 이기주의자란 자기 자랑을 하는 자들이다. 하나님께로서 말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말하기를 바란다. 자신의 출세와 이익을 목표로 하는 자들은 그들이 하나님께로서 아무런 임무도 받은 것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 만다.

둘째, 그리스도는 속이는 자와는 대조적으로 자신과 그에게서 나오는 가르침을 남을 위해서 주신다. 그러므로 그는 "나와 같이 그를 보내신 자의 영광을 구한 자는 진실한 자다"고 말씀하신다.

a. 그는 "하나님에게서 보내심을 받았다." 

--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 이러한 교사들과 사람들만을 우리가 용납하고 환대해야 한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져오는 자들은 특수한 계시로나 규칙적인 제도에 의하여 자신의 메시지가 신적 사명에 근거한 것임을 입증해야 한다.

b.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셨다." 

--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것이 그분 교훈의 경향이고 그분의 전 말씀의 방침이었다.

c. 그가 자신과 또 그의 교훈을 선용하기 위해 주셨다는 사실이 그가 진실된 분이며 불의가 없다는 증거였다. 

-- 거짓 교사들은 가장 불의한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름으로 그에게 부정을 저지르는 자들이고 인간의 영혼들에게 부정을 강요하므로 곧 인간에게 불의한 자들이다. 이것보다 더 큰 불의한 점이 없었고, 그의 교훈에는 허위가 없었으며 우리를 다루는데 있어서 허위와 기만이 없었음을 나타내 보이셨다.

2.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비난. 그들은 그리스도가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고 병자로 하여금 자리를 갖고 가라고 명령하신 것을 그의 죄라고 간주하여 그에게 책임을 추궁한다. 그것을 이유로 해서 그들이 이전에 그분을 박해했고 그것이 그분에 대한 자기들의 적개심의 핑계였다.

(1) 그는 "비난조"로 저들을 책망하신다. 그는 저들의 더 사악해진 행실을 견책하신다(19절). 그들 자신들이 모세의 율법을 파기한 이름난 자들이면서 어떻게 그가 모세의 율법을 파기했다고 그를 비난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이렇게 반문한다. -- "모세가 너희들에게 율법을 주지 않았는가?" 사실 그들이 그 율법을 가졌다는 것은 그들의 특권이었다. 또 그런 율법을 가진 민족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율법을 지키지 않고" 그 율법을 가진 배신하였고, 그 율법에 역행하여 살았다는 것은 저들의 사악함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 율법을 갖고 있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 율법에 대한 그들의 태만은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들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 

-- 그들은 율법을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할 자들이었다. 그러나 실상 그만한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또 그들은 율법을 가장 잘 복종해야 할 자들이었으나 복종하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그 율법을 자랑했고 그 율법에 열성이 있는 것처럼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가 율법을 어긴 것처럼 생각하고 그에게 화를 내었다. 그럼에도 그들 중에는 아무도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교회를 위한다고 말하면서 교회에는 나가지 않는 자들이다. 율법을 어긴 것처럼 앞질러사 생각하고 그에게 화를 내었다. 그럼에도 그들 중에는 아무도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교회를 위한다고 말하면서 교회에는 나가지 않는 자들이다. 

-- 율법을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서 그리스도가 율법을 파기했다고 박해하는 것을 저들의 사악함을 더욱 악화시켰다. 고로 "너희들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왜 너희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다는 이유로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고 말씀한다. 

-- 다른 자들을 가장 잘 비판하는 자들은 대부분 그들 자신들에게 가장 큰 결점이 있는 자들임을 유의하자. 이같이 위선자들은 형제들의 누에서 티끌 하나를 끄집어내기를 바라면서 자기들 눈에 대들보가 있음을 깨닫지는 못한다. "왜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  어떤 이들은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한 사실은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은 증거로써 내놓는다. "너희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 만일 너희들이 그 율법을 준행 했다면, 너희들은 스스로 선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나를 죽이려고 하지 않고 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했을 것이다." 

-- 그들이 무엇을 자처하듯 박해와 폭력으로써 자신들과 자신들의 이익을 구하는 자들은 (비록 그들이 자기들을 모세가 양손에 든 법전들의 수호자라고 일컫고 있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아니다. ***켐니티우스(Chemnitius)는 율법이 죄를 방지하는데 불충분하기 때문에 이 말씀에 의거하여 모세의 율법을 복음서로 대치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고 이해한다. 

-- 주님은 이렇게 말씀한다. "모세는 너희들에게 율법을 주었다. 그러나 너희는 그 율법을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장 커다란 악으로부터도 율법에 의해 지킴을 받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더 밝은 빛과 더 나은 율법이 필요하다. 너희들은 내가 더 나은 율법을 소개했다고 해서 어찌 나를 죽이기를 꾀하느냐?" 

-- 여기까지 말씀하자 백성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난폭하게 중지시켰다. 그리고 그가 말씀하신 것에 도전하였다(2절).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이 말의 암시하는 뜻은 다음과 같다.

① 백성들이 그들의 지배자들에 대하여 좋게 생각하고 있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배자들이 그를 죽이는 것 같은 잔인한 일은 시도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아니면 무리들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그들에게 무죄한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맹세를 받아 두겠다는 말로 볼 수도 있겠다. 

-- 아마도 지배자들은 백성들 내(內)에 백성들을 이렇게 선동하도록 첩자를 풀어논 것처럼도 여겨진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지배자들이 음모하고 있던 악을 부인하다. 잔인한 일은 시도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장로들이나 대제사장들이 무죄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겠다는 맹세도 할 수 있을것이라고 여길 정도로 백성들은 그들을 존경하였다.

② 그들이 우리 주님 예수에 대해 가졌던 나쁜 견해. 고로 "당신은 귀신 들렸도다. 당신은 거짓 영을 가지고 있고,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나쁜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는 다음과 같은 뜻으로 그들은 본문의 말을 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당신은 우울증 환자요 연약한 자다. 당신은 스스로 원인도 없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데 꼭 우울증 환자와 같소이다." -- 발작적 광란이나 말이 없는 우울증들은 일반적으로 사탄의 권세로 인한 것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보고 "당신은 미쳤고 병적인 머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가장 훌륭한 사람들에게 가장 나쁜 모략이 씌워진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자. 이러한 비열한 모략에 대해 우리 구세주는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개의치 않으셨다. 

--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모욕도 참아야 하고 그들에게 가해진 경멸과 상해도 관대히 넘길 수 있어야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또한 그들에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고 그들에게 가능한 적개심을 표하지 말며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보복할 생각을 말 것을 기억하자. 그저 나는 귀머거리요라는 식으로 귀 기울이지 말라. 그리스도가 그를 책망하시면 그가 다시는 우리에게 도전하지 못하리라.

(2) 그는 호소와 해명의 방법으로 변론하신다.

① 그는 이러한 기적에 대한 그들의 솔직한 심정에다 호소하신다. 즉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를 인하여 괴이히 여기는도다(21절). 너희들은 이 기적이 참으로 대단하며 초능력적이라는 사실에만 놀라는가! 이 한 가지일 뿐만 아니라 내가 행하는 모든 일에 너희는 경이로움을 느끼고 믿어야 한다"고 말씀한다. 

-- 또는 이런 뜻의 말이다.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였을 뿐인데 거기서 무슨 결점을 들추어내려고 야단인데 앞으로 내가 다른 일을 행할 터인데 너희가 이를 보고 내가 어떤 흉악하고도 극악한 범죄를 행한 것처럼 화를 내고 불쾌히 여기겠도다."

② 그는 다른 예로 그들 자신의 신앙적 관습에 호소하시다. 즉 "나는 안식일에 한가지 일을 행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한마디 말로 쉽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너희는 종교인이 감히 그런 일을 행하는 가하여 대단히 기이하게 여기고 놀라고 있도다. 하지만 너희들은 수없이 안식일에 더욱 더 해서는 안 될 것을 저지르지 않는가! 할례가 그 경우다. 만일 그 할례가 너희에게 합법적인 것이라 한다면, 또 그 할례가 행하여질 날이 우연히 안식일이라면 그날에 한 어린이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이 너희의 의무이고 그 의무를 행하는 것이 문제가 안 되듯이 안식일에 내가 병자를 고치는 일은 더욱 더 합당하고 선한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관찰할 점은

첫째, 할례의 발생과 기원이다. 이에 대해 본문에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고 그 할례에 관계된 율법을 주었다"고 하였다.

a. 할례는 주어진 것으로 말씀된다(23절).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받은 것으로 말씀되고 있다. 

-- 할례는 하나의 멍에로써 그들에게 부여된 것이 아니었고 그것은 하나의 징표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하나님이 주신 의식들과 그리고 특히 계약의 약속이 인봉된 상징들은 인간들에게 은사로써 주어진 것이고 은사로써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b. 모세가 그것을 주었다고 언급된다. 왜냐하면 할례는 모세에 의해 주어졌던 율법중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만나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처럼(6:32) 모세가 그들에게 할례를 준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다. 그리고 할례는 먼저 모세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었다(22절). 비록 그것이 모세의 법령에 흡수되었다 하더라도, 이미 할례는 오래 전에 규정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믿음의 의로움에 대한 하나의 징표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율법이 주어지기 430년 전에 약속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갈 3:17). 

-- 신앙자들의 집합체인 교회는 모세나 또는 그의 율법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율법과 함께 타락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족장들에게서 유래된 것으로 지파 교회에 기원을 두고 있고 아브라함의 축복에 일부를 이루었다가 이방인에게까지 미친 것이었다(갈 3:14).

둘째, 유대인의 교회의 관습에 따르면 안식일에 대한 율법 조항보다 할례에 대한 율법 조항에 더 많은 경의가 주어지고 있었다. 유대의 율법학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circumcisioet ejus sanatio pellit sabbatum - 즉 할례와 할례로 인하여 정결하게 되는 예식이 안식일보다 우선한다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가 안식일에 출생하면 다음 안식일에는 어김없이 할례가 주어졌다. 또한 안식일에 휴식해야 된다는 점이 아무리 강조되던 때라도 할례 예식은 in ordine ad spiritualia - 즉 신앙을 보존하는 행위로 용인되었다. 

-- 하물며 안식일에 휴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는 복음 시대에서 안식일에 선행은 더욱 용납되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셋째, 위의 사실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입증한다(23절).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을 폐기하지 아니하려고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지 않는가?"라고 말씀하신다. 어떤 사본에는 난외주에 "율법을 깨뜨리지 않으려고"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주로 안식일에 대한 계명을 지칭하는 것으로 할례를 행하는 것이 안식일에 계명들은 서로 일치가 되도록 해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 주님은 계속 말씀하신다. "만일 할례를 너희들 스스로 허용하면서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한다면 너희들은 스스로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이지 않는가." 

-- ‘에모이 콜라테’(“너희가 날을 노여워하느냐”)란 말씀은 여기에서만 사용되고 있는데 이 말은 colhv - 즉 잔인, 원한에서 유래한 말로 "내게 노를 품느냐"는 말씀이다. 그들은 가장 큰 분노로써 그에게 노여워하고 있었다. 그 노여움은 악의에 찬 것이었고 원한이 담겨진 노여움이었다. 

--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의롭게 하려는 목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일은 매우 부당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일임을 유의하자. 여기서 안식일에 "한 아이에게 할례를 하는" 저들의 행위와 안식일에 "한 사람을 치유하는 자신의 행위 사이"를 그리스도께서 비교하신 내용을 관찰해 보자.

a. 할례는 하나의 의식적인 제도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은 태초부터 유래된 것이 아니었고 조상들로부터 유래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행한 선행은 할례를 선한 일로써 인정을 받았다.

b. 할례는 피를 흘리게 하는 의식으로 몸에 상처를 내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행한 것은 치유였고 몸을 온전케 하는 일이었다. 율법은 고통을 일으킨다. 만일 고통을 주는 율법의 일 곧 할례가 안식일에 행해져도 된다면 평화를 만들어 내는 복음의 일은 더욱 행해져야 할 것이다.

c. 특히 생각할 점은, 그들이 한 아이에게 할례를 행했을 때, 그들의 관심은 할례를 한 그 부분만을 치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잘 되어질 수 있지만 여전히  다른 질병들의 상태에서는 놓여나지 못한다. 그러나 이에 반해 그리스도는 이 사람을 "전신을 건전케 하셨다. 

-- 사본에는 ‘홀론 안드로폰 휘기에’(7:23) - 즉 나는 그 사람의 전신을 건강하고 건전하게 하였다로 되어 있다. "그는 전신이 치유되었다." 왜냐하면 질병이 그의 전 몸을 감염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질병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을 정도의 완전한 치유였다. 아니, 그리스도는 후에 주신 경고에 의해 그의 몸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까지도 고쳐 주셨다."가라, 그리고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고 주님은 말씀했던 것이다. 그래서 정말 전신이 강건케 되었다고 해도 틀림이 없었다. 왜냐하면 영혼이 인간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데 이 영혼까지 치유되었기 때문이다. 

-- 할례의 본래 의도는 영혼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고 전신을 본래대로 온전케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할례를 악용했고 단순히 세속적인 의식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외적인 치유에다 내적인 은혜를 함께 하셨다. 그러므로 전신은 신성한 것이 되었고 전신이 치유된 것이다.

-- 그는 다음과 같은 법을 선포함으로써 이 논쟁을 결론 지으신다(24절).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이 말씀은 다음의 두 가지 의미 중에 한 뜻이라고 볼 수 있겠다. 

-- 하나는 좁은 의미로써 그들이 율법의 파기하고 대들고 있는 예수께서 하신 행위를 공의로 판단하라는 뜻으로 볼 수 있겠다. "너희가 편파적으로 판단하지 말라. ‘카트 옵신’(“외모로”) - 즉 인간을 보고 또는 신명기 1장17절 대로 옮긴다면 "안면에 의해서 판단하지 말라"는 뜻의 말씀이다. 우리와 외견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상대방을 범죄자로 간주하여 책망하는 것은 관용의 원칙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공의의 율법에도 위배된다. 우리가 우리와 같은 파(派) 또는 같은 길과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대하듯이 반대편의 생각에도 너그러움을 표할 수 있어야 한다. 

-- 또 다른 자들에 있어 또는 넓은 의미에서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가르침 전체에 대하여 공의로 판단하라는 말씀으로 볼 수 있겠다. 지금까지 예수의 인격과 교훈들은 침해를 받고 나쁜 선입관 아래 판단되었었다. 거짓된 것 또는 인간에게 강요하려고 음모된 것들은 "그것들이 외모에 따라 판단될 때는" 가장 좋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그것들은 Prima facie - 즉 슬쩍 스쳐보기만 하고 지나쳐 버리면 가장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바리새인들이 인기와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원리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옳게 보이려고" 애를 쓴다(마 23:27, 28). 그리고 무리들은 그들을 외모로 판단했고, 바로 여기에 백성들이 범한 실책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겉모양이 성자처럼 보인다고 그런 자들을 다 진실한 성자로 너무 신뢰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 예수 자신을 고찰해 볼 때 그의 외모로서는 그에게서 참된 위엄과 우수함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종의 형체"를 스스로 입으셨고(빌 2:7) 또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고(롬 8:3)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사 53:2). 그러므로 그의 "외모에 의하여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려고 했던 자들은 올바른 판단하려고 했던 자들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외모는 화려하고도 장엄할 것이라고 기대했고 세속적인 온갖 의례를 갖춘 분으로 개대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그런 원칙에 의해 판단하자니 저들의 판단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게 오는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권능이 그와 함께 하였고 하나님께서 그를 증거 했고 또한 성서는 그분 안에서 성취되었다면 비록 그의 외모가 그렇게 초라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그분을 영접하고 외모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판단해야 옳았었다(사 11:3; 삼상 16:7 참조). 

--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과 행위는 의로운 판단 외에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만일 진리와 의에 의해서만이 판결이 이루어진다면 그리스도와 그의 주장은 햇빛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실도 그들의 외모로나 그들의 명칭에 의해 또는 인간들이 부각시켜 놓은 위인이나 그들의 아첨어린 과시에 의해 판단해서는 안 된다. 오직 그들 안에 있는 내적인 가치와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와 은혜로써 판단해야 한다.

3. 그리스도의 자신에 관한 설명. 그리스도는 "자신에 관하여" 곧 자신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었는가에 관해 그들과 담론하신다(25-36절).

(1) 그가 오신 곳(25-31절).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음의 문제들을 고찰하여 보자.

①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자들 중 일부가 예수의 출생지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표명하였다. 예루살렘 주민들이 다른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장 편견이 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25절). 

-- 우리는 지식과 신앙의 중심지에서 살았던 그들이 메시야를 받아들일 준비가 가장 잘되어졌으리라고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도리어 정반대라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일반적으로 풍부한 지식과 은혜를 얻을 기회가 많은 사람들이 만일 이러한 지식과 은혜에 의해 더 좋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더 악하게 되는 것이 상례이다. 

--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기대를 많이 걸어야 할 자들에게 대부분 멸시를 받곤 하셨다. 그러므로 "교회에 충실하면 할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어진다"는 격언이 생기게 되었던 것도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무리가 아니었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다음의 방법으로 저들의 악의를 보여 주었다.

첫째, 당국자들에게 맞장구를 치는 방법에 의하여 악감을 나타냈다. 침묵을 지키고 그를 홀로 내버려둠으로 일어난 현상이었다. 그러므로 무리들은 이는 저희가 죽이려고 하는 그 사람이 아니가?"라고 서로 묻는다. 절기를 지키려고 지방에서 올라 온 무리들은 그분을 대적하는 모종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지도 못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합니까?"라고 말했다(20절).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은 그 계략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 계략을 실행으로 옮기도록 저들의 지배자들을 자극하였다. 그러므로 "저희가 죽이려고 하는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 왜 그들은 그 계획을 시행하지 않는가. 누가 그들을 방해한단 말인가?"라고 말한다. 

-- 그들은 그를 제거할 생각을 갖고 있노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대담하게 말하는 데 그들은 아무런 답변도 못한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줄 알고 있는 제 아닌가"(26절)라고 무리들은 말하였다. 여기서 그들은 당국자들을 자극하여 그리스도를 박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간교하고도 악랄하게 두 가지 사실을 교사한다. 사실 그들은 구태여 자극을 줄 필요도 없었다.

a. 무리들은 예수의 설교를 근거로 당국자들로 모멸감을 획책하였다. "산헤드린에 의해 사기꾼으로 고발된 자가 대담하게 말하는데 아무런 방해나 반대도 없단 말이가? 이렇게 되면 산헤드린의 권위가 무엇이 되겠는가. 만일 당국자들이 짓밟힘을 당하면서도 참으려 한다면 사람들이 결국 그들이나 그들이 집행하는 법을 무시해 버린다고 해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 여기서 우리는 가장 악랄한 박해가 권위와 정권을 지켜야 한다는 명목 하에 수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유의하자.

b. 그들의 판단에 의하여 회의를 표명함으로 그들은 집권자들을 자극하였다. 그러므로 무리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줄 아는 모양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실과 다르게 비꼬아 표현한 말이었다. 그들은 계속 말한다. "어떻게 저희의 마음이 변했는가? 무슨 새로운 사실이라도 발견한 것인가? 그들은 자기들도 이 사람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인상을 줄까봐 이런 혐의를 벗어버리려고 그를 맹렬하게 반대하는 척하고 있는데 불과한 것이 아니냐"라고 말한다. 

-- 이와 같이 백성들을 그리스도에 대해 원한을 갖도록 만든 집권자들은 그들을 따르는 그들의 교인들을 "저희보다 칠 배나 더한 지옥의 자녀들로 만들었다"(마 23:15). 주목하라..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그에 대한 고백이 사회적으로 인정되지 못하고 결국 박해의 대상이 될 때 많은 사람들은 함께 기독신앙인들을 반대하고 박해하고 싶은 강한 유혹을 받는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에게 호의를 보인다거나 그들을 두둔하려 한다는 인상을 받고싶어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조상은 좋으나 타락한 자손들과 신앙의 배신자들이 때때로 다른 사람보다 더 악해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들은 이렇게 하므로 신앙인이었다는 오점을 씻어버리려고 한다. 

-- 그런데 이처럼 자극을 받은 집권자들이 그리스도를 체포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그가 저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지는 않더라도 저희로 감탄하게 함으로 저희의 손을 잡아 매두실 수 있으신 분이다.

둘째, 그의 그리스도됨을 반대하는 이의(異意)를 제기하므로 저희의 반감을 표시하였다. 그것은 대단한 악의가 표출된 것이었다(27절). 그들은 다음처럼 말한다. "만일 당국자들이 그를 그리스도라고 생각한다고 하여도 우리는 그분이 그리스도임을 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렇게 믿으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럴 만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올 때에는 그가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고 하지 않았는가?" 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 논제에 모순이 있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 주장이 서로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a. 만일 그들이 그분의 신성을 말한다면 그리스도가 올 때 그가 어디서 오는지 아무도 아는 자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가문 없이 그의 근본이 상고에서, 태초에서 나온 멜기세텍의 질서를 뒤따른 한 제사장이기 때문이다(미 5:2). 그렇지만 신의 아들로서 그가 어디서 왔는지 그들이 알고 있다는 것은 거짓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분을 인간으로 여겼고 그분의 신성을 알지도 못했고 또한 어떻게 말씀이 육신이 될 수 있는지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b. 만일 그들이 그분의 "인성"을 말한다면, 그들이 그가 어디서 왔고 그의 어머니는 누구이고, 그가 어디서 자랐고 하는 사실들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는 진실이다. 

-- 그렇지만 메시야가 어디서 오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말은 거짓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어디서 태어날 것인가라는 문제는 이미 알려졌기 때문이다(마 2:4, 5). 여기서 몇 가지 관찰할 점이 있다.

(a)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분을 몹시 경멸하였다는 사실이다. 친분이라는 것은 멸시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 우리는 그 기원을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하여는 그 유용성을 경멸해 버리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사실 그리스도의 고향인들은 그를 받아드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과 친밀하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그분을 사랑했어야만 했고 그리고 그들의 민족과 세대가 그분의 출현으로 존경받게 되었다는 점에 감사했어야 했던 것이다.

(b) 그들은 자기들의 편견의 근거를 성서에서 찾으려고 부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 사실 그들이 성서를 솔직한 심정으로 대할 때 그를 흠잡을 근거는 아무 데도 없었다. 사실로 성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잘못 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② 이러한 이의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28,29절).

첫째, 그분은 자유롭고도 대담하게 말씀하셨다. 본문에 보면 "그가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말씀하셨다"고 하였다. 즉 그는 다른 교훈을 하실 때보다 더 크게 말씀하셨다.

a. 저들의 마음이 완고함을 슬퍼하시면서 자신의 진실함을 표현하셨다. 참지 못하고 흥분하여 날뛰는 방법을 쓰지 않으면서 진실함을 표현하셨다. 참지 못하고 흥분하여 날뛰는 방법을 쓰지 않으면서 진리를 대적하는 적의가 작용할 수도 있다. 여하간 우리는 온화하고 유순한 마음으로 반박자들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할 것이리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 고 있다. 너희는 내가 너희들 자신의 민족에서 유래하고 또 너희 자신들 주의 한 사람임을 안다"고 말씀한다. 

--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는 상식적으로도 알 수 있는 가장 평범하고도 보잘 것 없는 진리일지라도 얕잡아 보시는 것이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저들의 지식이라면 우리도 유대인들이 어디서 왔는지 말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b. 예수 대해 편견을 가졌던 제사장들과 무리들은 그의 교훈을 들으려고 좀 더 가까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로 하여금 듣도록 하려고 보통 이상으로 더 큰 소리로 외치셔야 했다. 들을 귀를 가지고 있는 자는 누구든지 이 말씀을 들었으리라.

둘째, 저들의 말의 일부를 긍정함으로 답변하신다. 적어도 그들은 그의 육신의 기원을 알고 있거나 또 알 수 있으므로 그리스도는 계속 말씀하신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너희는 나를 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너희가 나를 목수의 아들이고 나사렛에서 태어난 자로 알고는 있으나 그러나 그 이상은 모른다는 사실이다."

b. 또는 그는 그들의 말을 부정하는 답변도 하신다. 그는 그들이 그를 보았고 알고 있으며 모르는 것이라고는 거의 없다는 생각을 부인하신다. 그들은 외모로서만 판단할 뿐 그 이상을 내다보지는 못하였다. 그들은 아마도 그가 어디서 왔는지 또 그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누가 그를 보냈는지"는 그들이 알지 못하고 있음을 얘기하신다.

(b) 그가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이 사실은 두 번 언급된다. 즉 "그가 나를 보내셨다"고 한 다음 그리고 또 다시 "그가 나를 보내셨다. 그가 나로 말할 바를 지시하시고 내가 행할를 바를 지시한다"고 말씀하신다. 

-- 이 사실은 그분 스스로 확신하고 있었고 또 그의 아버지가 그에 대해 증거할 것도 아셨다. 우리도 역시 그것을 확신한다는 것은 좋은 것이고, 우리가 그분에 의해 하나님에게 나아감을 거룩한 마음으로 신뢰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c) 그가 아버지께로서 왔음을 그들은 몰랐다. 그러므로 그는 ‘파라 아우투 에이미’(7:29) - 즉 나는 그에게서 온 자이다라고 말씀한다. 그는 그의 주인으로부터 종으로서 보내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출생에 의하여 아버지에게 출생한 아들로서 보내심을 받았고 태양에서 빛이 나오듯이 본질적으로 세상에 발산되시었다.

(d) 그를 보내신 아버지는 참된 분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다. 하나님은 메시야를 주기로 약속하셨었다. 그리고 비록 유대인들이 그 약속을 거부했었고 그 약속을 하신 그분은 아직도 참되시어 그 약속을 이행하셨다. 그는 그 메시야가 그의 열매를 소유할 것이며 그의 사업을 성취하리라고 약속하셨었다. 따라서 비록 유대인들의 대다수가 그분과 그분의 복음을 거부한다 해도 여전히 그분은 참되시다. 그리고 이방인들을 부르심으로 그 약속을 성취하실 것이다.

(e) 유대인들이 믿지 않음은 아버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임을 그들은 몰랐다. 그러므로 "나를 보내신 이를 너희는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 지식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많이 있다. 바로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한 참된 이유도 저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의 속성과 구원의 업적에는 조화가 있고 또 자연 종교와 계시 종교 사이에는 놀랄 만한 일치가 있어서 전자에 대하여 바른 지식을 갖고 있으면 후자가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자는 후자를 이끄는 도입이 되기 때문이다.

(f) 우리 주님 예수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친밀하게 알고 계셨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다. 아버지께서는 그를 너무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의 사명 수행 여부에 관해서 전혀 의심하지 않으셨고 완전히 그의 사명수행에 대해 확신을 갖고 계셨다. 하나님은 아들이 행해야 했던 일에 관해서 전혀 부지중에 계신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완전하게 알고 계셨다(마 11:27).

③ 이것이 그의 반대자들을 격분케 함. 그들은 그가 "진리를 말씀하셨기 때문에" 미워하였다(30절).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를 잡아서" 그에게 폭행을 가하려고 하였다. 그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도 그를 죽이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권능의 제지로 그런 일은 방지되었다. 아무도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하였다.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그것을 행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 자신에게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 일의 진행을 저지하셨다. 여기서 몇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첫째,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신실한 설교자들은 비록 그들이 스스로 신중하고 온유하게 처신한다고 해도 그들의 증거에 의하여 고통을 받았다고 여기는 자들에게서 미움을 받게 되고 박해를 받게 될 것을 예상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계 11:10).

둘째,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을 사슬로 속박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 그들이 아무리 악행을 저지르고자 하여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참고 허용하신 이상의 것을 그들은 하지 못한다. 박해를 가하는 자들의 악의는 그 악의가 가장 맹렬히 표현될 때조차 무기력할 수 있으며 사탄이 저들의 마음을 가득 채우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행위를 제재하신다.

세째, 하나님의 종들은 때때로 눈에 띄지 않는 설명될 수 없는 여러 가지 통로로 놀랍게도 보호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 그들의 적들은 그들이 꾀한 악한 행위를 실행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이유를 그들 자신이나 어떤 다른 사람일지라도 왜 그들이 하지 못하는가 하는 이유를 밝히지는 못한다.

네째,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때를 설정해 놓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 그의 마지막 때는 지상에서의 그의 생활과 활동이 끝나는 시기였다. 마찬가지로 모든 그의 백성들과 모든 그의 사역자들에게도 그 때가 있다. 그 때가 이를 때까지 적들이 아무리 그들을 대적하려고 하여도 헛되이 끝나 버린다. 또한 그들의 생명은 그들의 주인이 그들을 통하여 행할 일이 있으실 동안은 연장 될 것이다. 그들이 그들의 증언을 마칠 때까지는 지옥의 모든 권세들과 땅의 모든 권세들도 이들을 이길 수 없다.

④ 이런 반발에도 불구하고 일부 청중들에게 그리스도의 교훈이 끼친 좋은 효과(31절). -- "무리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다." 그는 어떤 자들은 떨어지게 하시기 위하여 세움을 받으신 동시에 또한 다른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시기 위해 세움을 받으셨다. 복음이 난관에 부딪치는 곳에서라도 거기서 선한 일이 많이 일어날 수 있는 거시다(살전 2:2). 여기서 몇 가지 고찰해 보자.

첫째, 그들은 믿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소수의 인원이 아니고, 많은 인원이었다. 물결이 아주 강하면 둑이 터져 다른 길로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 ‘에크 투 오클루’-즉 무리들 곧 하류층의 백성들로 사람들이 군중, 오합지졸이라고 부르는 자들 중에 그들은 속해 있었다. 

-- 우리는 복음 전파의 성공 여부를 위대한 자들 가운데서 그 복음이 얼마나 널리 전파되었는가 하는 측정에 의해 평가해서는 안 된다. 또한 사역자는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순전히 가난한 자들뿐이고 평범한 자들이라 해서 헛되게 수고하고 있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고전 1:26).

둘째, 그들을 믿도록 이끈 요인. 그것은"그가 행한 기적들이었다. 

-- 이 기적들은 구약 성서의 예언들의 성취였을 뿐만 아니라(사 35:5, 6) 신적인 권능을 입증해 주는 것이었다. 하나님 이외에는 행할 수 없는 일인 자연의 세력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일을 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그분은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이 세운 분이었고 그의 법은 양심을 다스리는 법이요, 그의 계약은 생명을 주는 계약인 것이다.

셋째, 저들의 믿음의 나약함. 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적극적으로 이분이 정말 그리스도임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그리스도가 오시더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겠는가?라고 말하는데 그쳤다. 

-- 그들은 본문의 사실을 앞으로 그리스도가 오셔서 많은 기적들을 행하실 것이라는 말씀으로 간주한다. 또는 그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하면 이분이 메시야가 아닌가? 이분에게서 우리가 기대했던 모든 세상적인 영광은 우리가 발견할 수 없다 하더라도 메시야가 나타나시면 갖고 계시리라고 믿었던 모든 신적인 능력이 그에게 있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이분이 바로 메시야가 아니겠는가?" 그들은 위의 사실을 믿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일 용기는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연약한 믿음일지라고 참된 믿음일 수 있으며 작은 것을 무시하지 않는 주님 예수에 의해 참된 믿음으로 용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유의하자.

2) 그가 가실 장소(32-36절). 여기서 우리는 다음 사항을 관찰해 보자.

①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 그를 대적하여 꾸민 계략(32절).

첫째, 백성들 가운데는 첩자가 있어서 백성들 가운데 그를 믿으려는 자들이 있음을 저희에게 알렸고 저희는 이로써 화가 났다. 이 첩자들은 자진해서 교묘하게 백성들에게 이야기를 걸었고 그들은 자기들의 충성하는 주인들에게 가져 갈 자료들을 수집했다. 그들이 입수한 정보는, 그들 모두가 그 자를 추악한 자로 생각하게 행동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그분을 존경하고 귀하게 여겼던 자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과, "예수에 대하여 백성들 중에 수군거림이 많았다"는 이 두 가지 사실이었다. 

-- 비록 백성들이 이러한 일들을 수군거렸을 뿐이요, 과감하게 외부에 말을 하지 않았으나 바리새인들은 그 사실에 격분하였다. 군중들의 알아들을 수 없는 비밀스러운 여러 가지의 불평을 알아차리고 그것에 의하여 영향을 받은 다른 사람들은 당국의 공정성에 대하여 의심을 품고 있었다. 

-- 이같이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상당히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고 만일 그리스도의 영향력이 커지면 자기들의 인기는 하락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둘째, 그들이 꾸며놓은 계획은 예수를 체포하고 감금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를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편을 들어 두둔함으로 자기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은 잡으려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무리를 흩어지게 하는 최상의 효과적인 방법은 그들의 목자를 죽이는 일이었음을 그들은 알았다. 바리새인들은 기소하는데는 주모자 역할을 하였으나 권력은 없었으므로 대제사장들과 교회 재판정의 재판원들을 포섭하였다. 이들은 바리새인들과 합세하기 위해서 충분한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그러기에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은 자연 종교에서 가장 커다란 실책의 죄를 지었던 것처럼 유대인 교회는 저들의 지혜로써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고 그러기에 그들의 가장 훌륭한 율법 학자들은 그분에 대해서는 가장 무지한 자들이었고 그분에 대한 가장 철두철미한 적들이었다. 이러한 악한 당국자들에게는 부릴 수 있는 하속들이 있었다. 이들은 교회를 관리하거나 관청을 관리할 일을 맡고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잡기 위해 이 관원들을 이용했고, 또한 악한 심부름이라 해도 이들은 그들의 심부름을 행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사울은 그들을 죽이기 위하여 도엑을 이용한 것처럼 악을 실행할 하수인들은 언제나 있는 법이다(삼상 22:17, 18).

② 우리 주님 예수의 교훈(33,34절). 그는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간다.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고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구름과 불기둥처럼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다.

첫째, 이 말씀은 우리 주님 예수의 입장에서 볼 때는 밝은 면을 지닌다. 또한 자신과 그의 명예를 위해서 어려움과 위험을 맞는 그의 전 추종자들에게 풍부한 위로의 말씀이 되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세 가지를 들어 스스로 위로를 삼으셨다.

a. 그가 이렇게 고난 많은 세상에 거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그는 이 세상 속에서 조용한 날을 가지기를 결코 바라시지 않았다. 그가 소망하신 최선의 것은 그의 싸움이 곧 성취되는 것이었고 더 이상 이 세상에 머물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17:11).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함께 하고 있는 자가 누구든지 친구이건 적이건, 우리가 그들과 함께 할 시간은 잠시뿐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세상에 속한 자가 되지 않고 잠시 세상 안에 머물러 가는 것이라 믿는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된다. 

--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 의해 미움을 받고 또 그들도 세상을 싫어한다. 그들은 항시 세상에 있지 않고자 하며 오랫동안 그 속에 살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우리는 쿡쿡 찌르는 찔레와 슬프게 하는 가시들이 있는 세상과 잠시만 함께 있으면 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잠시만 있을 것이고 그후에는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이 접근하지 못할 곳에 있게 해 주신 데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자. 우리의 일생이란 험악한 가시밭 길이며 이 날들이 잠시면 끝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b. 그가 이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떠나게 되면 자기를 보내신 분에게 가게 된다는 사실이다. 

-- 그러므로 "나는 간다"고 하신다. 그는 "나는 강제로 쫓겨간다"고 하시지 않고 이제 사명을 완수했으니 자진해서 나는 가노라. 나는 내게 사명을 맡기신 분에게로 돌아간다. "내가 나의 일을 마칠 때까지는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나 그후에는 더 이상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할 것이다. 나는 나를 보내신 이에게 간다. 그는 나를 영접해 주실 것이고 내게 사랑을 베푸실 것이다. 마치 대사들이 임무를 끝내고 돌아갈 때 환영을 받듯이 말이다"라고 말씀한다. 

-- 그에 대한 저들의 분노가 그분 앞에 설정된 영공과 기쁨을 그가 차지하지 못하게 방해하지도 못하였고 뿐만 아니라, 그 방해 때문에 그 영광과 기쁨에 빨리 도달하고자 그가 애쓰시지도 않았다. 그리스도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이 사실을 기억하고 위로를 받게 하자. 즉 그들에게는 가야 할 목적지로 하나님이 있으며 지금 그에게로 가고 있고, 그와 함께 영원히 거하기 위하여 빨리 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위로 받게 하자.

c. 비록 그들이 여기서는 그가 가는 곳마다 따라 다니며 그를 박해했지마는, 아무도 하늘까지 따라 와 그를 박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는 "너희들이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하리라"고 하신다. 그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 그의 제자들에 대한 저들의 원한을 생각해 볼 때 만일 그들이 그에게 갈 수만 있었다면 따라가 거기서도 그를 박해하려 했다는 사실이 나타난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가 이 성전에 들어 올 수 있는 것처럼 저 성전으로 들어 올 수는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 그가 앞으로 계실 곳을 "나 있는 곳에"라고 현재형으로 표현하신 것은 그가 비록 땅에 거하시나 그의 신적인 본질과 신적 사랑에 의하여 하늘에 계신 것과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신 것이다(3:13). 혹은 이 말씀은 그가 거기에 있으셨던 것처럼 곧 거기에 있게 될 것 임을 의미하는 말일 것이다. 곧 거기에 있게 될 것임을 의미하는 말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악과 모든 악한 도구의 세력에서 벗어났을 때 성도들에게 주어질 영광스러운 행복을 기억하도록 하자.

둘째, 이 말씀들은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박해했던 악한 유대인들에게는 암담한 측면을 지닌다. 그들은 지상에서 벗어났을 때 성도들에게 주어질 영광스러운 행복을 기억하도록 하자.

-- 이 말씀들은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박해했던 악한 유대인들에게는 암담한 측면을 지닌다. 그들은 지상에서 그를 제거하기를 열망하였다. 즉 "세상에서 그를 없애 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기억해야 할 사실들이 있다.

a. 저들의 선택에 의하여 그들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라는 점이다. 

-- 그들은 구분을 자기들에게서 쫓아버리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들의 죄과는 처벌될 것이다. 그는 그들을 오랫동안 괴롭히지 않으실 것이요 잠시 동안이면 그들을 떠나실 것이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을 부담으로 여기는 자들을 내버려두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에 합당한 일이다. 그리스도에 대해 싫증을 느끼는 자들을 비천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들의 욕구인 것이다.

b. 그들은 이미 때가 늦었을 때에야 자기들의 선택에 대해 분명히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a) 그들의 메시야의 임재에 대한 희망은 무산되고 말 것이다. 

-- 그러므로 즉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 또 너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그리스도를 보기를 바라나 보지 못할 것이요, 너희는 결코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신다. 메시야가 왔을 때 글 거부했던 자들은 오지도 않을 메시야에 대한 불행하면서도 끝없는 기대감에 빠지게 되었다. 혹은 이 말씀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호의와 은혜에 죄인들의 참여가 거부된다는 사실을 말씀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지금 그리스도를 찾는 자들은 그를 만나게 될 것이나 지금 그를 거부하는 자들은 그를 찾으나 만나지 못할 때가 올 것이라는 말이다. 잠언 1장28절을 보라. 

-- 그들은 "주여 주여 우리를 위하여 문을 열어 주소서"라고 헛되이 부르짖을 것이다. 또는 이 말씀은 일부 유대인들이 절망에 빠질 것을 말씀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자들은 그의 말씀이 옳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개심을 하지 않은 자들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보기를 원했고 그의 교훈을 또 다시 듣기를 원할 것이나 허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은혜의 때는 이미 지나고 말 것이다(눅 17:22).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b) 그들은 하늘에 거할 곳을 구할 것이나 그 기대는 헛될 것이다. 

-- 주님은 "내가 있는 곳에 모든 믿는 자들은 함께 있을 것이나 너희는 함께 거하지 못하리라"고 말씀한다. 그들이 그와 함께 할 수 없는 이유는 심판주의 옳고도 거역할 수 없는 선고에 의하여 그들이 추방될 것이기 때문이요, 새 예루살렘의 문마다 천사들이 검을 들고 서서 "생명 나무의 길로 가는 길"을 지킬 것이고 "들어갈 자격이 없는 자들을" 못들어가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의 불의와 불신에 의하여 무력해졌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바라지 않기 때문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있기를 싫어하는 사람들, 지상에서 그의 말씀과 법도에 거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가 하늘나라에서 그의 영광 중에 계실 때 그가 계신 곳에 참석하기에 부적당한 자로 여기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나라는 그들에게는 더 이상 하늘나라가 될 수 없겠고 불경건한 영혼들은 그러한 지복스런 상태에 오히려 혐오감을 의식할 것이기 때문이다.

③ 이러한 교훈에 대한 저들의 논평(35,36절). 본문에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되고 있다.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그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다음의 사실들을 생각하여 보자.

첫째, 저들의 완고한 무지와 맹목성. 그는 분명하게 그가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해 - 즉 자기를 보내신 자, 곧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에게로 간다고- 말씀하셨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그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이 말이 무슨 말인가?"라고 물었다. 

-- 보려고 하지 않고, 유의하려고 하지 않는 자들만큼 지독한 소경도 없으리라. 그리스도의 말씀들은 이해하려는 자에게는 쉽고 시비하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어려운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를 위협하려는 저들의 당돌한 시도. "너희들은 나를 찾으려 하지만 나를 만나지는 못한다"는 무서운 말씀에 떨지도 않고서 그들은 그의 말을 막고 농담으로 흘려버린다. 그들은 두려움을 비웃고 그 재난을 놀라지 않는 전형적 죄인들의 짓을 자행하고 있었다(사 5:19; 암 5:18).

세째, 그리스도에 대한 저들의 완고한 원한과 분노. 그들은 모두 그의 떠남이 그가 저들의 권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고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그가 어디로 가든지 우리가 그를 찾아내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말인가?" 만일 그가 땅위에 있기만 하면 우리는 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나 우리는 샅샅이 뒤져서라도 그를 찾아내고 말 것이다"라고 말한다. 아합이 엘리야를 찾기 위하여 그렇게 하였었다(왕상 18:10).

네째, 저들은 이방인들에 대해 오만스럽다. 그들은 이들을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그가 희랍인들 중에 외국으로 흩어졌던 유대인들을 의미하는 것으로(약 1:1; 벧전 1:1) 그가 이를 어리석은 백성들 중에 가서 인기를 얻으려고 한다는 뜻에서 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니면 그들은 그가 유대인들과 구별하여 전 세계에 흩어진 이방인들에게 가서 그들을 한 교회 한국가로 통합하여 다스리려고 하는가라는 뜻으로 이 말을 한 것 같다.

다섯째, 이방인들에게 그가 호의를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데서 온 근거 없는 저들의 질투, 그들은 "그가 가서 이방인들을 가르칠 것인가? 그가 그들에게 교훈을 전달할 것인가?"라고 서로 물었다. 아마도 그들은 그의 나사렛에서 행한 설교와 백부장의 경우와 가나안 여인의 경우에 의하여 나타난 그의 이방인에 대한 사랑을 포용한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 신앙의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자기들의 명목만을 독점하려고 안간힘을 쓴다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그가 이방인들을 가르치러 가는 것인가라는 말로 조롱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일을 하신 것이 아니었고 얼마 안 되어 그의 사도들과 목자들을 통하여 매우 진지하게 그 일을 이루시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흩어진 자들을 모으셨고 이일은 유대인들을 몹시 분노케 했다(롬 10:19). "악한자에 대한 두려움이 그에게 엄습해올 것이다"는 솔로몬의 말은 참으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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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초대(요 7:37-44)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다음 사항을 대하게 된다.

Ⅰ. 그리스도의 교훈과 그 교훈에 대한 해석(37-39절). 

-- 이 구절들에는 그가 상술한 복음이 요약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들 속에는 전 복음서의 대의가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그리스도에게 오도록 하는 복음의 초대가 있다. 그리고 복음은 그 안에 위안과 행복을 약속한다. 이제 우리가 관찰해야 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그가 초청하신 때. 그는 장막절 축제 "마지막 날" 곧 "큰 날"에 이 초대를 말씀하셨다.

(1) 그가 초청하신 때. 그는 장막절 축제 "마지막 날" 곧 "큰 날"에 이 초대를 말씀하셨다. 

-- 절기가 끝나는 날인 여덟째날은 "성회"로 엄수되었다(레 23:36). 바로 이 날에 그리스도는 이러한 복음의 초청장을 발표하셨다.

(1) 왜냐하면 많은 백성들이 함께 모여 있었고 만일 많은 사람들에게 초청을 하면 그 중에 몇 사람이라도 초대에 응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잠 1:20). 

-- 집회가 많을수록 좋은 결과가 일어날 기회도 많아지는 것이다.

(2) 이제 백성들은 각기 저들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복음을 그의 전송사로써 그들에게 주시려했다. 

-- 커다란 집회가 해산되고 흩어지게 될 때, 아마도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그들 모두 이 세상에서는 또 다시 함께 모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인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올라가도록 돕기 위해 무엇이든 말하거나 행하고자 한다면, 그 시기를 미루어서는 결코 안 된다. 집회의 마지막 순간이 활기로 넘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리스도는 절기 마지막 날에 이 말씀을 제공하셨다.

① 이 성스러운 주간이 다 끝날 때까지도 그의 교훈에 대하여 귀머거리 노릇을 해온 자들에게 그는 이 말씀을 하셨다. 

-- 그는 그들을 감화시키려고 한 번 더 기회를 베푸시었다. 만일 그들이 그의 음성을 듣기만 한다면 그들은 살아날 것이다.

② 이미 그의 말씀으로 변화된 사람들에게 그는 이 말씀을 주셨다. 

-- 그들은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자들이었다. 또 다른 절기가 있게 되기에는 앞으로 반년이 남아 있었는데 그동안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무덤에 있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보라. 지금이 은혜 받을 때로다"라고 외친 선지자의 말씀을 기억하자.

2. 그가 이러한 초대를 하신 방법. "예수께서 서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본문이 의미하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1) 그분의 위대한 신실하심과 집념을 나타내 주고 있다. 

-- 그의 마음은 불쌍한 영혼들을 자기에게 돌아오도록 하는데 집중되어 있었다. 그의 몸을 똑바로 일으키시고 음성을 높이신 것은 그의 마음의 열정을 나타내신 것이었다. 영혼들을 사랑하면 그의 설교는 활기로 넘칠 것이다.

(2)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초청을 유의하고 이해하기를 바라는 그분의 소망을 나타내 주고 있다. 

-- 그는 더 잘 들리도록 하기 위해서 일어나 큰소리로 외치셨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귀를 가지고 있는 각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들어야 할 말씀이기 때문이었다. 복음의 진리는 시련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구석진 곳을 찾지 않는다. 이교도의 시련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구석진 곳을 찾지 않는다. 이교도의 경전은 비밀리에 사적으로 전파되었었다. 그러나 복음의 말씀은 일어서서 큰 소리로 외친 한 사람에 의해 공개적으로 선포되었다. 

-- 행복해지려고 몸부림쳐대는 인간들의 경우가 얼마나 서글픈가!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주시고자 자신을 괴롭게 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는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그는 "자, 모든 사람들아 오라"고 부르신다(사 55:1).

3. 초대의 대상에는 모든 사람들이 포함되고 있었다. 

-- 만일 목마른 사람이면 누구나 그가 귀하든 천하든 가난하든지, 부하든지, 젊든지, 늙든지, 또 자유자이든 매인자이든지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그리스도는 초청하신다. 

-- 이 초대는 또한 매우 은혜스러운 것이었다. 즉 "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 와서 마시라. 정말로 어느 사람이라도 참되고도 영원히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내게 의탁하고 나의 지도를 따르라. 그러면 내가 그들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다"고 하신다.

(1) 초대된 사람들, 그들은 목마른 자들이었다. 목마르다는 말씀은 다음 두 가지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① 그들의 빈곤한 정황을 뜻한다고 보겠다. 

-- 즉 외적인 상태나 내적 상태의 빈곤을 뜻하는 말씀으로 볼 수 있겠다(만일 어느 사람이 이 세상의 삶에 위로를 잃어버렸다거나 생활의 십자가로 인해 피곤하다면, 그의 가난과 상처를 그리스도 앞으로 가져오게 하자. 그러면 그가 평안을 줄 것인데 그것은 세상이 줄 수도 또 빼앗을 수도 없는 평안이다). 또한 만일 어떤 사람이 영적인 축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내가 그에게 그 축복을 주겠다는 말씀이다. 또는

② 영적인 행복에 대한 저희의 영혼의 열망을 뜻한다고 보겠다. 

-- 만일 어떤 사람이 의에 배고프고 목마르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며 그 안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역사의 결과이다.

(2) 토대의 내용. 그것은 "내게로 오라"는 것이었다. 

-- 그를 형식적인 율법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게 하라. 그것은 마음에 평화도 주지 못하며 양심을 정결케 하지도 못하며 "나아오는 자들을 온전케 할 수도 없는 것이다"(히 10:1). 또한 그들 이방의 철학을 향해 나아가지도 못하게 하라. 이방의 철학은 사람들을 기만할 뿐이요 방향도 알 수 없는 숲속으로 그를 끌어다가 거기에 내버려둔다. 

--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게 하라. 그의 교훈에 순종하게 하고 그의 주시는 연단을 받아들이게 하며 그를 믿게 인도하라. 그로 하여금 생수의 원천이 되시고 모든 위로의 공급자이신 그분에게 나아오게 하라.

(3) 만족을 얻은 것에 대한 약속. 그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로 와서 마시게 하라. 그는 바라던 것을 갖게 될 것이고, 더욱 풍성하게 얻게 될 것이다. 그를 새롭게 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것으로 그를 채워 줄 것이다. 그러나 행복하기를 바라는 영혼은 내게로 나오라"고하신다.

4. 이러한 은혜로운 부름에 부가된 은혜로운 약속(38절). 즉 "나를 믿는 자는 그의 배에서 생수가 흘러나리라"고 하신다.

(1) 여기서 보아야 할 점은 그리스도에게 나오는 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가 하는 사실이다. 

-- 그것은 성서에 말씀한대로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 일어난다. 그가 복음서에서 설명되고 있는 그대로 그를 받아들이고 영접하는 일이 일어난다. 우리는 우리의 상상에 따라 그리스도의 모습을 조작해서는 안 되고 성서대로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2) 그리스도에게 나아온 목마른 영혼들이 어떻게 마시게 되는가 하는 점이다. 

-- 모세를 믿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위에서 흘러나온 물을 마셨다. 그러나 신약성도들은 저들 안에 있는 바위 곧 저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게서 넘쳐나는 물을 마신다. 그분은 생명수의 샘으로 믿는 자들 가운데 거하신다(4:14). 저들의 현재의 만족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저들의 계속적이고도 영속적인 위안을 위해서 양식이 준비되고 있다. 여기에

① 넘쳐흐르는 생명수가 있다. 

-- 물은 히브리어에서 살아있는 것으로 칭하여진다. 그 이유는 그 물이 계속 움직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혜와 위안은 생명수(이 말은 곧 흐르고 있는 물을 의미한다)와 비교된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혜와 위로는 영적 생활을 소생시키는 활력적인 원리들이고 영원한 삶의 전조며 시작이기 때문이다(렘 2:13 참조).

② 생명수의 강은 풍성함과 지속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 위안이 강같이 풍성하고도 영원히 흐르며 흐르는 냇물처럼 강열하게 의심과 두려움의 적들을 묻어버린다. 은혜의 그리스도 안에는 은혜가 늘 충만해 있다.

③ 이것들이 그의 배에서 흘러나온다. 

-- 즉 성령이 활동하시는 중심지요, 그의 통치의 근원인 그의 마음 또는 영혼에서 흘러나온다는 말이다. 거기에 이 은혜로운 원리들이 뿌리를 내리고 그의 마음에는 성령이 거주하므로 거기서 "생명의 근원"이 넘쳐흐른다(잠 4:23). 거기에는 하나님의 위안이 자리잡고 있고 "외인이 간섭할 수 없는 기쁨이 기거한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자는 자기 마음속에 이 증거를 가지고 있다"(요일 5:10). Sat Lucis intus -즉 빛이 그의 안에 풍성하게 거한다. 더욱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사실은 영혼 안에 있는 은혜와 위안의 샘으로부터 은혜와 위로가 냇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라"고 했다.

첫째, 은혜와 위로의 증거가 그에게 나타날 것이다. 

-- 훌륭한 정열은 훌륭한 행동을 산출하며, 거룩한 마음은 거룩한 삶을 통해 나타나는 법이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아서 알 수 있고 샘은 그 줄기를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은혜와 위로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타인들에게도 전달 될 것이다. 

-- 선한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끼친다. 그의 입은 "생명의 샘"이다(잠 10:11). 우리 자신의 물통에 있는 물을 우리만 마시는 것으로 즉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의 위로를 우리만 차지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샘을 사방으로 넘쳐흐르게" 해야 한다(잠 5:15, 16). 

-- 이러한 말씀들을 "성경에 이름과 같이"라는 말씀을 통해 엿볼 수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이러한 약속들은 구약 성서에 많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부어 주시리란 말씀(여기서 그것이 물로써 비유되고 있다) (잠 1:23; 욜 2:28; 사 44:3; 슥 12:10), 

또한 마른땅으로 샘 근원이 되게 하시리란 말씀(사 41:18), 

사막에 강이 있게 될 것이며(사 43:19), 은혜를 입은 영혼들은 샘의 근원과 같이 될 것이고(사 53:11), 교회는 영생수의 샘이 될 것이라(아 4:15)는 등의 말씀이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다. 또한 본문은 에스겔서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염두에 둔 말씀으로 볼 수도 있다(겔 47:1; 계 22:1 비교; 슥 14:8 참조). 

***라이트푸트(Dr Lightfoot)박사와 여러 다른 사람들은 장막절의 마지막 날에 행하는 Libatio aquae - 즉 물을 붓는 의식은 유대인들의 관례로 전승에 의해 전해져 온 것이라고 전해 주고 있다.  ::: 그때 그들은 금으로 만든 물그릇에다 실로암 연못의 물을 떠다가 나팔소리와 그 외의 다른 의식을 행하면서 제단으로 그것을 운반했고, 제단위로 가지고 올라가서는 가능한 모든 기쁨을 표현하면서 주님 전에 그 물을 부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사람들 중의 어떤 저술가들은 이 물이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며 이사야 12장3절, 55장1절을 그 증거로 들고 있다. 또 어떤 자들은 그 예식에 부어진 물이 "성령"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본문에서 우리 구세주가 이러한 관습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 믿는 자들은 연못에서 떠 온 물그릇에서 비롯되는 위안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에서 강물처럼 흘러나는 위안을 맛 볼 것이다 율법이 주는 기쁨, 이를 의미하는 물의 부음은 구원의 샘 안에 있는 복음의 기쁨과 비교할 수 없다.

5. 이 약속에 대한 복음서 기자의 해석(39절). 

-- 그는 "이는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다"고 해석하고 있다. 곧 이것은 믿는 자들에게 생기고 있는 어떤 외형 적인 특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이들은 그를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 성령의 은사와 은혜와 위로를 말하는 것이다. 성서가 성서에 대한 가장 훌륭한 해석자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도록 하자.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셩령을 받게 될 것"이 약속되고 있다. 

-- 어떤 자들은 그에게서 기적을 행하는 은사를 받았다(막 16:17, 18). 그리고 누구나 다 그의 성결케 하시는 은혜를 받았다. 성령의 은사는 새 계약 안에서 약속된 가장 큰 축복들 중의 하나이다(행 2:39). 그리고 약속되었으니 그 계약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행될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2) 믿는 자들 안에 거하고 활동하고 있는 성령은 늘 흐르는 생수이다. 

-- 성령은 시내처럼 풍성하게 흘러나와 물처럼 시원하게 하고, 깨끗하게 하며, 물처럼 부드럽게 하고, 축축하게 적시며, 믿는 자들에게 풍성한 결실이 있게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기쁨을 준다(3:5 참조).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처럼 흘러나리라"는 말씀이 성취되어 성령이 사도들의 입을 열어 주셨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일들을 아주 유창하게 말했고(행 2:4) 또 신적인 능변으로써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기록하였다.

(3) 이러한 풍부한 성령의 유출은 아직도 약속된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 왜냐하면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아직 성령이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다."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① "예수가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 그분이 영광을 받아야 한다는 것, 또한 모든 영예를 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분은 아직도 모욕과 경멸을 받는 상태에 계셨다. 그렇다고 그가 전 세상 앞에서 그가 가졌었던 영광을 몰수당하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더 큰 영광을 받을 공적을 이루어 놓으셨다. 즉 그에게 상속되는 명예 말고도 중재로서의 영광의 면류관을 얻을 자격을 성취하시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모든 것들은 유보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지금까지 예수는 하나님의 붙들어 주심을 입었고(사 42:1) 만족도 맛보시었으며(사 53:11)의롭다함도 받으셨다(딤전 3:16). 그러나 그는 아직도 영광을 받지 않으셨다. 

-- 그리스도가 그의 영광을 위해서 기다리셔야 했다면, 우리의 영광에 대한 기다림이 너무 지루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② "성령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 희랍어 사본에는 ‘우포 가르 엔 프뉴마’, 즉 성령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성령은 영원부터 계셨다. 태초에 그는 "수면을 운행하셨다." 그는 구약 성서 예언자들과 성도들 중에 계셨고, 또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둘다 "성령으로 충만해 있었다." 

--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약속되었고(욜 2:28)성취되었고(행 2:1 등) 성령이 뛰어나고 풍부하게 그리고 누구에게나 주어진다는 말씀으로 이해되어져야만 한다. 

-- 성령은 약속된 대로 보이는 길을 통해 아직 주어지지 아니하였다. 만일 우리가 성령 강림절 이후의 그리스도 제자 자신들의 명확한 지식, 열렬한 은혜와 성령 강림절 이전에 저들의 암담함과 연약함을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현재의 저들에게 성령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고 했는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성령의 전조와 첫 열매들은 주어졌다. 그러나 완전한 추수는 아직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  "성령의 분배"라고 가장 적절히 불리워진 그것은 아직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 

-- "성령의 분배"라고 가장 적절히 불리워진 그것은 아직 착수되지 아니하였다. 이방 세계까지 덮어버릴 만한 생수의 강으로써의 성령이 아직 주어지지는 않았다. 아마 이 약속은 근본적으로 방언의 은사를 말하고자 한 것으로 보여지는 데 이 방언의 은사로서도 성령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

③ "성령이 주어지지 않은 이유"는 예수가 아직 영광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첫째, 그리스도의 죽음은 때때로 그의 영광 받음으로 일컬어진다.(13:31). 왜냐하면 그는 그의 십자가상에서 죽음을 정복하고 승리하셨기 때문이었다. 

-- 이제 성령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피는 그것에 근거하여 약속이 허용될 수 있을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값이 지불될 때까지(비록 많은 다른 은사들은 그 값이 지불될 것으로 보장만 되어도 수여되었지만) 성령은 주어지지 않았다.

둘째, 그리스도가 지상에 계시는 동안에는 성령의 필요가 그렇게 절실한 것은 아니었다. 성령은 그가 가시고 난 다음에 생긴 공백을 채우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었다.

셋째, 성령의 수여는 그리스도의 중재의 약속에 대한 구체적인 실현의 의미가 있었다(14:16). 또한 그의 통치의 실현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영광 받고 중재와 통치를 시작할 때까지 성령은 주어지지 않는다. 

넷째, 이방인들의 개종은 예수의 영광을 더하는 일이었다. 

-- 어떤 희랍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묻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제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도다"고 하셨다(12:23). 복음이 민족들에게 전파되어야 할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생수의 강"인 "방언의 은사"가 주어질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성령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는 약속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아버지가 주신 약속"이었다(행 1:4). 비록 그리스도의 은혜의 선물이 오랜 동안 연기된다고 하여도 여전히 그것들은 보장되고 있는 것이다. 

-- 우리가 좋은 약속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우리는 그 약속에 의지하여 살아간다. 그 약속은 진실되며 거짓이 아닌 약속이다. 거짓말하지 않을 것이다.

Ⅱ. 이러한 교훈의 결과. 이 설교에 대한 반응은 어떠했는가? 

-- 일반적으로 그것은 여러 가지 반응을 야기 시켰다. 그러므로 "무리 가운데서 예수로 인해서 쟁론이 되었다"고 하였다(43절). 말씀과 같이 그들 가운데는 견해의 차이가 있었다. 즉 여러 가지의 견해의 차이가 있었고 이러한 견해 차이는 의견의 격돌을 불러 일으켰다. 여러 가지 감정이 엇갈렸다. 

-- 우리는 그리스도가 평화를 주러 왔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그의 복음을 아무 이의 없이 포용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그의 복음의 전파의 결과는 모두 같지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자들은 복음을 중심으로 규합되는 반면 또 다른 자들은 그것에 반대하여 규합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결과는 본문처럼 큰 소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체내의 병원(病原)이 되는 요소를 제거해 주기 위하여 약을 투입하고 그 결과 진통이 주어진다고 해서 약을 원망할 수 없듯이 그러한 소동을 복음의 탓이라고 할 수는 없다. 논쟁의 내용이 어떠했는가를 살펴보자.

1. 어떤 자들은 "그를 받아들였고" 그에게 좋은 영향을 받았다. 

-- 무리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사랑과 친절로써 죄인들을 초청하는 말씀으로 경청했고,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 것을 약속하는 권위 있는 말씀으로써 경청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그분을 높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1) 그들 중 어떤 자는 말하기를, "오, 이자야 말로 참 예언자, 모세가 선조들에게 말했던 그 예언자이고 이분이 모세와 같은 자 일 것이다"라고 했다. 또 어떤 이들은 전통적 유대교의 개념을 따라 "이분은 메시야의 선구자가 되며 선지자가 된다"고 말했다. 또는 "이분은 참으로 신의 영감을 받고 하나님에게서 보내심을 받은 한 선지자라"고 말했다.

(2) 다른 자들은 더 한층 나아가 말하기를, 이분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자가 아닌 바로 메시야 자신인 그리스도라 하였다(41절). 

-- 당시에 유대인들은 보통 때 이상으로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그들은 조금 특출난 인물만 나타나도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에 있다. 아니다 그가 저기에 있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 본문의 저희의 반응도 그를 슬쩍 훑어 본데서 야기된 일시적이고 유동적인 개념들이 혼선을 빚은 것처럼 보여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사람들이 그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좋은 견해만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열렬한 신앙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은 그 이상 더할 수 없는 좋은 말로 그리스도를 평한다. 본문에 나오는 자들도 "이분이 바로 그 선지자이다." 또는 "그리스도이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를 만큼 마음이 설득되지 않고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증언은 단지 그들 자신들의 태도와는 반대되는 증언에 불과한 것이었다.

2. 어떤 자들은 그분에 대해 나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위대한 진리가 사람들에 의해 처음 언급되자마자 곧 그것에 반대되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즉 그의 출생지가(그들은 이 주장이 설득력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갈릴리였다고 하는 사실이 그가 그리스도라는 주장을 반박할 만한 충분한 논거가 된다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나" 주장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자.

(1) 성서에 대한 저들의 훌륭한 지식. 

-- 그들이 메시야는 이 새의 줄기에서 나와야 한다는 (사 11:1) 생각과 베들레헴에서 한 통치자가 나오리라고 생각한 것은(미 5:2) 대단히 옳은 것이었다. 이 사실은 일반 백성들까지도 저들의 서기관들이 준 전통적인 해석의 방법을 통하여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마도 그리스도를 반박하려고 이 성서를 이용하였던 백성들은 성경의 또 다른 부분에 대하여는 알고 있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 아마도 이 말씀은 저들의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백성들의 반대를 조장하려고 백성들에게 교사한 것같이 여겨진다. 어떤 잘못된 개념들을 신봉하고 그런 생각들을 변호하는데 저들의 열의를 소비하는 많은 사람들도 저들의 근거를 성서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실상 왜곡된 가르침 이외에는 성경을 거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 우리의 주님 예수에 대한 저들의 완고한 무지. 

-- 그들은 "예수가 갈릴리에서 낳았다는 사실"을 확실하고도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는 투로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 자신이나 그의 어머니 또는 그의 제자들에게 물어봄으로써, 또는 다윗 가문의 계보를 조사해봄으로써, 그들은 그가 다윗의 아들이었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차라리 모르는 것을 그들은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 사실 잘못된 선입관과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사람 또는 사건에 관하여 사실과는 전혀 다른 거짓에 사로잡혀 생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들은 여론의 당사자가 살고 있으며 당사자가 살고 있으며 그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같은 시대에 살므로 사실을 사실대로 쉽게 규명할 수 있는데도 이러한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3. 또 어떤 자들은 그분에 대해 화를 내며 또한 그를 잡으려고 하는 자들도 있었다(44절). 그가 말씀하신 내용은 대단히 감미롭고 은혜스러운 것이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그 말씀 때문에 그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 이처럼 우리의 주님은 좋은 말씀과 행위로 인해 고통을 당하셨다. "그들은 그를 붙잡으려고 했다." 또한 그들은 누구든지 그를 붙잡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만일 아무도 그에게 "손을 대지는 못했다." 그들은 어떤 보이지 않는 권능에 의해 제지를 받고 있었다. 그건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대적들의 악의가 항상 불합리한 것인 것처럼 때때로 저희가 악의를 실행으로 옮기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상태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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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속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요 7:45-53)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본문에 보면 그리스도를 어떻게 억압할 것인가 하는 은밀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 

-- 비록 이 날은 절기 중 가장 중요한 날이었지만, 그들은 그날의 종교적인 의식들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 의식을 무지한 군중들에게 맡겨 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처럼 지위가 높은 성직자들이 봉헌의 업무를 무지한 서민들에게 양도하고 넘겨주는 일은 보통 있는 일이었다. 반면에 그들은 교회 정치에 관여하는 것이 더 잘하는 일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 그들이 예수를 잡으라고 부하들을 보내 놓고 그리스도가 죄인으로서 자기들에게 잡혀오기를 기다리면서 의회실에 앉아 있었다(32절). 이제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대하게 된다.

Ⅰ. 그들과 하속들 사이에 주고받은 대화. 하속들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re infecta - 즉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다. 다음 내용을 살펴보자.

1. 그들이 하속들에게 영장대로 명령을 집행하지 못한데 대하여 책망함. 그들은 "어찌하여 잡아오지 않았느냐?"고 힐문한다. 

-- 그는 공공연하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백성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싫어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속들이 그를 잡으려고 했다면 그들을 도왔을 것이다. 이 날은 "절기 마지막 날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런 또 다른 기회를 마련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어찌하여 너희들은 너희 임무를 게을리했느냐?"고 책망한다. 그들은 자신의 앞잡이들이요. 그들에게 종속된 자들이 자기들이 믿고 있었던 그들이(저희의 마음에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나쁜 편견을 주입해 놓았던 것이다) 자기들을 실망케 하였다는 사실에 그들은 화가 났다. 

-- 악의를 품고 있는 자들은 자기들이 실천시키려 하였던 악행을 수행할 수 없게 되면 초조해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시 112:10; 느 6:16).

2. 관원들이 그들의 명령을 시행치 못한데 대해 제출한 이유. 그것은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다"는 것이었다(46절).

(1) 이것은 매우 훌륭한 진리였다. 

-- 이러한 진리를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과 지혜와 은혜로써, 확신을 줄만큼 명쾌하게 매혹될 만한 아름다움으로써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선지자들 중에도 이런 사람은 없었고 모세 자신도 그렇지 못하였었다.

(2) 그를 잡아오도록 보냄을 받은 바로 그 관원들은 이분의 말씀에 사로잡혔고 또 그의 말을 수긍하게 되었다. 

-- 비록 그들에게는 재빠른 지각이나 달변도 없었고 또한 예수를 좋게 생각할 하등의 이유도 없었지만 그리스도의 자기 증거를 듣고 모세의 자리를 계승한 모든 사람들보다 그분을 더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악인들의 양심에라도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에 의하여 보호를 받았다.

(3) 그들은 이것을 자기들의 지배자와 주인들에게 말했는데, 이들은 그리스도를 존경하는 듯한 어떤 말이라도 참고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 말을 어쩔 수 없이 들을 수밖에 없었다. 

--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이 말씀이 그들에게 전해졌고 또한 이 말은 저들의 죄로 인하여 저들이 괴로움을 당하게 하였고 저희의 죄를 약화시키었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리라고는 도저히 여겨지지 않는 관원들이었는데 그들이 당국자들과 상반되는 증언을 하였다.

--  저들의 이러한 증언으로 보아 저들은 스스로 자성의 기회를 가졌던 것으로 볼 수 잇다. "우리가 저렇게 놀랍게도 훌륭한 말을 하는 자를 미워하고 박해하면서 우리의 행위를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고 저들은 생각하였다.

3. 바리새인들은 저희의 이익을 위해 관원들을 자기편으로 확보하려고 애섰고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나쁜 편견을 갖도록 애를 썼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은 저들의 관원들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좋은 감동을 받기 시작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두 가지 사실을 제시한다.

(1)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포용한다면, 그들도 미혹을 당한 것임을 제시한다(47절), 그러므로 "너희도 미혹되었느냐"고 묻는다. 

-- 기독교는 처음 발생 당시부터 세상을 현혹하는 종교로 선전되어 왔었다.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사실은 이제야 그들이 잘못을 깨닫기 시작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혹된 자로 취급되었다. 외형적인 위엄을 띠고 나타날 메시아를 기대한 자들은 가난과 치욕 중에 나타나신 메시아를 믿는 자들을 현혹된 자들로 생각했다. 그러나 사건은 메시아를 통하여 세상의 부귀와 세속적인 통치권을 얻게 되리라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던 자들보다 더욱 수치스럽게 기만당한 자들은 일찍이 없었고 그들 스스로 속임수에 빠져든 자는 없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 바리새인들이 이 관원들에게 준 허울 좋은 찬사가 무엇인지 관찰해 보자. 즉 "너희도 홀린 것이 아니야? 그래 너희들도 넘어갔단 말인가? 너희는 지각과 생각과 이치가 뚜렷한 자들이 아닌가? 너희는 현학자로서 돌팔이 교사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기에는 그들보다 지식이 더 많은 자들이 아니냐"라고 말한다. 그들은 이들에게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므로 그리스도에 대하여 나쁜 편견을 갖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2) 그들이 그리스도를 포용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임을 제시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앙 문제까지도 고관들의 본을 따르고 그들에 의해 지도 받기를 기꺼워한다. 그러므로 이 하속들은, 저희의 부추김에 우쭐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① 바리새인들은 하속들에게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면, 높은 지위와 명성을 기지고 있는 자들과 상반되는 길을 가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어디 있느냐? 너희도 알다시피 그들을 믿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너희들도 그들의 판단에 따라야 하며 너희의 상관의 뜻에 따라 믿고 행해야 한다. 너희가 그들보다 현명하지 않은가?" 

-- 사실은 당국자들 중에 어떤 자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마 9:18; 요 4:53). 그리고 그분을 더욱 더 믿었다. 그러나 그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할 용기는 없었다(요 12:42). 그렇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세상에서 낮아질 때 그리스도의 적들은 기독교인들은 실제 상태보다 더 적은 것으로 주장하는 일은 보통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 중에 극소수만이 믿었다는 것은 더할나위 없는 사실이었다.

첫째, 당국지들과 바리새인들 중에 그리스도의 편에서 그를 옹호한 경우는 지극히 드물었다는 사실이다. 그 주장은 세속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고 세속적인 이익을 꾀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높은 사람들에 의해 유혹 당하지도 않고 그들을 유혹하지도 않았다. 자아 부정과 십자가는 "당국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는 어려운 교훈이었다.

둘째, 위의 사실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한 저들의 편견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었다. 그리고 당국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친구로 여긴 적이 없었음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 세속적인 인간들이 영적인 사실들에 대하여 영적인 인간들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체해야 그게 어찌 통할 것인가? 또한 그들이 종교를 연구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자들보다 무엇을 더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일 당국자들과 바리새인이 그를 믿지 않는다면, 그를 믿는 자들은 세상의 출세와는 담을 싼 사람들일 것이다. 이처럼 군중들이란 바보스럽게도 영원한 문제를 처리하는데 외형적인 동기들에 의해 동요를 받으며 시대풍조 때문에 영원히 저주받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며 당국자들과 바리새인들의 부추김에 들뜬 상태로 지옥으로 가는 것도 서슴치 않으려 한다.

② 그들이 만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된다면 자기들을 비열하고 저속한 류의 사람들과 연분을 맺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그들은 하속들을 설득하였다(49절). 그러므로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반은 자로다"라고 저희는 말하였다. 여기서 저주를 받은 자란 특히 그리스도의 교훈에 의해 좋은 영향을 받았던 자들을 의미하고 있다.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관찰해 보자.

첫째, 당국자들은 경멸적이고도 거만하게 믿는 자들에 대해 말하였다. 그들은 "이 무리"라고 말하였다.

-- 여기서 "무리"란 말은 성직자들과 구분하는 뜻에서 laov" - 즉 평신도란 말이 아니었고 ‘오클로스 우토스’(7:49) - 즉 어중이 떠중이 곧 가련하고 문제만 일으키는 악당들이란 뜻의 말이었다. 그들은 믿는 자들을 "양떼를 지키는 개들과 자리를 함께 할 자들"이라고 경멸하였다. 만일 그들이 "무리"란 말을 통하여 "유대의 일반대중"을 뜻하고자 한 것이라면 신앙인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과 계약 관계를 갖고 있는 자도 받아들였어야 옳았고 그러한 치욕적인 언사로 기독교인들을 칭하지 않았을 것이다. 

-- 교회의 어느 한 기관이 다른 기관을 비천하고 비열한 것으로 취급할 때 교회의 공통적인 이익은 깨지고 마는 법이다. 만일 당국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무리"란 말로써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의미하고자 하였다면, 이를 그의 제자들이 보잘 것 없는 평민들이더라도 그들이 그리스도를 소유하므로 지혜로와지고 총명스러워졌으며 하늘이 내리는 사랑에 관심을 갖게 되었음을 발견하고 이들 제자들을 참으로 훌륭하고 주목할 만한 자들로 여겼어야 옳은 일이었다. 하나님의 지혜가 자주 천한 것들과 업신여김을 받는 것들을 택하신 자들을 업신여기고 경멸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둘째, 당국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자라는 부당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마치 자기들로부터 율법을 전수 받은 자들 외에는 아무도 율법을 모른다는 식이요 또한 저들에게서 나오지 않은 성서에 대한 지식은 유통되지 못하게 막았다. 또한 마치도 저들의 정경과 전승들을 엄수하는 자 외에는 율법을 아는 자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이처럼 경멸했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율법을 알고 있었던 자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선지자들 역시 그들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 그리스도의 평범하고 정직하고 무식한 많은 제자들이 영상과 체험과 기도, 특히 순종에 의하여 모든 기지와 지식을 가진 어떤 위대한 학자들보다 더 명확하고 건전하고 유익한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얻는다. 마찬가지로 다윗도 이같이 하여 노인들과 모든 그의 스승들보다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시 119:99, 100). 만일 일반 백성들이 율법을 알지 못했다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에게 율법을 모른다고 꾸짖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과실은 그들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을 더 잘 가르졌어야 하는 저들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르치는 대신에 저희는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 버렸던 것이다(눅 11:52).

세째, 그들은 고압적 태도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죄를 선고하였다. "그들은 저주받은 사람들이고 하나님과 모든 현인들의 증오의 대상들이다. ‘에파라토스’(1884a)(ejpikatavrato",TR) - 즉 저주받을 백성이다"라고 저희는 말한다. 저희의 저주의 말이 제자들에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근거 없는 저주는 임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 어느 특정한 사람들에게 또는 어느 백성의 무리에 대해 저들이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가혹한 것이기에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정죄하는 일은 적합치 않다. 우리의 할 의무는 "축복하는 일이지 저주하는 일이 아니다." 

-- 어떤 이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백성들은 현혹되기 쉽고 우롱당하기 쉽다는 이상의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추악한 뜻으로 이 말을 하였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또 하속들로 그들과 어떠한 관계라도 갖지 못하도록 위협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을 저주하였다. 이처럼 세속적인 시대에세는 지옥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이 난무하는 법이며 저희는 조금만 불쾌한 일에도 저주하고 정죄하고 불만을 터뜨린다. 

-- 이러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설득으로 하속들에게 생겼던 믿음은 좌절되고 질식되고 말았다. 이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더 이상 탐구할 수가 없었다. 당국자나 바리새인에게서 나온 한 마디는 참으로 진실한 것들 또 저들, 영혼에 가장 귀중한 것들, 그 이상의 힘을 가지고 하속들을 동요케 하였다.

Ⅱ. 그들과 그들 자신의 회원의 하나였던 니고데모 사이의 대화(50절).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찰할 수 있다.

1. 니고데모가 저들의 행동에 대해 제기한 정당하고도 합리적인 이의(異意). 

-- 저들의 부패하고 사악한 산헤드린에서도 하나님은 저들의 악의에 대항할 한 증언자를 자기를 위하여 세우셨다. 이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반대 투표가 nemine conttadicente- 즉 만장일치로 통과되지 못하게 되었다. 다음 사실을 생각하여 보자

(1) 그들을 반대하여 나타난 사람 그는 곧, 니고데모로서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자였다(50절). 니고데모에 관해서 몇 가지 관찰해 보자.

① 그가 비록 예수와 함께 있었었고 그를 자기 선생으로 여겼지만, 여전히 그는 의회에 몸담고 있었고 그들 가운데 투표권을 소지하고 있었다. 어떤 자들은 이런 점을 그의 연약성과 겁 때문이라 비난한다. 그리고 그가 자기 위치를 버리지 않았던 것은 그의 과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결코 말씀하시지 않으셨었다. 아마 그리스도가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다른 사람들처럼 그도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랐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자기의 지위를 곧바로 포기하지 않은 것은 차라리 그의 지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그곳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의 유익을 도모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그곳에 있으면서 유대인들의 격분하는 추세에 저항하고자 하였다. 그는 아마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저들에게 항거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거기서 압살롬의 참모들 중에 후새와 같은 역할을 하였고 저희의 계획을 어리석은 것으로 변모시키는 도구의 역할을 하였다. 비록 우리가 어떤 경우에서도 우리의 주님을 거부해서는 안되지만 그럼에도 가장 유리하게 주님에 대하여 신앙 고백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는 것도 뜻 있는 일이다. 

-- 하나님께서는 모든 부서 중에 남은 자를 소유하고 계시고, 가장 악한 장소와 사회속에도 다소의 선을 존재하게하여 필요할 때마다 이용하신다. 그 예로 느부갓네살의 궁정에는 다니엘이 있었다. 아닥사스다 왕의 궁정에는 느헤미야가 있었던 것이다.

② 비록 그가 처음에는 알려지는 일이 두려워서 밤에 예수께 왔고 그 까닭에 여전히 그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자기가 필요하게 되자 그는 담대히 그리스도를 변호하며 나타났고 그분에 대항하고 있었던 전 의회에 대하여 반박을 가하였다. 이 같이 처음에는 겁이 많고 "흔들리는 잎을 보고도 도망가려고 하는" 많은 신도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점점 용기를 지니게 되며 니고데모처럼 위급한 경우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점점 용기를 지니게 되며 "창칼이 번쩍이는 것을 보고도" 웃을 수 있게 까지 된다. 

-- 니고데모처럼 위급한 경우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담대히 나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한 누구도 니고데모의 본을 빙자 삼아 신앙을 위장하지 못하도록 경계하자. 왜냐하면 니고데모는 여기서 그의 신앙의 산 증거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었다(요 19:39).

(2) 그가 그들의 행위에 반대하여 진술한 내용(51절). 

-- 그는"우리의 율법은 사람의 말을듣고 또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단하는가"라고 힐난였다. 결코 문명화된 민족의 법률은 그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해 보자.

① 그는 그들의 율법 조항에 의거하여 또한 거역할 수 없는 정의의 법칙에 의거하여 그 누구도 변명할 기회를 주지도 않고 정죄 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신중하게 주장한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의 교훈의 우수성이나 그의 기적들의 명백성을 주장했거나, 또는 그들에게 그분이 자기에게 전했던 신적인 교훈을 반복했었다면(3장) 그것은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형국과 다름없이 되어 그들이 발로 진주를 짓밟고 돌이켜 니고데모까지 상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러한 시도는 하지 않았다.

② 그런데 여기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백성들 특히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에게 율법에 대해 무지한 자라고 책망했었는데 이에 반하여 그는 여기서 교묘하게 저희를 반박하여 그들이 율법의 으뜸 되는 원리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가를 보여 주며 따라서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일이 매우 부적합한 일임을 보여 준다.

③ 본문에서 율법은 "듣고 행한 것을 알아보고 판단하는" 기능을 지닌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 관리들도 율법에 의거하여 율법을 다스릴 때 "들어보고 알아보고 판단해야 할 것으로 말씀되고 있다." 이같이 관리들도 율법을 따라야 율법의 입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 그들이 율법에 따라 묶고 푸는 것은 무엇이든 율법에 의해 묶여지고 풀려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④ 공정한 재판에 의하여 진상을 자세히 검토해 보기까지는 아무도 율법에 의거한 형을 언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대단히 타당한 것이었다. 

-- 재판관은 그들이 고소자의 불평을 받아들일 때 항시 고소당한자의 입장을 옹호할 여지를 마음속에 남겨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양측의 입장을 다 들으라는 뜻에서 귀가 두 개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례는 로마인들의 재판법이라고 말씀되었다(행 25:18). 현재 우리의 재판법은 Oyer and Terminer - 즉 듣고 그 다음 판결하는 법이다.

⑤ 사람들은 그들에 대한 여론이 어떠하냐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행하느냐에 의해서 재판되어져야 한다. 우리의 법은 그들이 무엇을 행하느냐에 의해서 재판되어져야 한다. 우리의 법은 그들에 대해 사람들의 여론이 어떠한가, 혹은 그들에 대한 원망 소리가 어떠한가를 묻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재판 받을 만한 무슨 공적 행위를 저질렀는가를 묻는다. 

-- 형의 선고는  진술되고 입증되는 바에 따라 내려져야 한다. 재판은 얼굴을 보아서가 아니라 사실에 입각하여 재판되어야 한다. 정의의 "검"을 빼기 전에 정의의 "저울"이 사용되어야 한다. 니고데모가 이점에 대해 의회소에서 행한 주장을 통하여 우리는 그가 예수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자신과 자신의 교훈에 대하여 설명해 줄 것을 바란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그들이 부당하고 편견으로 가득 찬 남의 말만 듣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자신을 보여 주시므로 그들이 그에게 호감을 갖기를 바랐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비록 그들 중 누구도 그의 제안을 실행으로 옮기는 것은 후원하려고 하지 않았다.

2. 이러한 이의에 대한 저희의 반응. 

-- 본문에 이 이의에 대하여 주어진 직접적인 대답은 없다. 그러나 그들이 그의 강력한 주장을 반박할 수 없었을 때 그들은 그와 싸움을 벌렸다. 이성으로 추구해야 할 것을 그들은 폭언과 비난으로 대신하였다. 

-- 사람들이 이치에 합당한 말을 듣기를 싫어하고 옳은 말하는 사람을 싫어할 때 그 안에 무슨 흑막이 있다는 징표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치에 맞는 말을 거부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 논리가 자기들의 경우에는 합당치 않다는 이유를 내세운다. 

-- 이제 그들이 그를 어떻게 힐책하는가를 생각해 보자. 그들은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52절)라고 힐문하였다. 어떤 이들은 그가 그리스도의 적들로 여기었던 자들 가운데는 니고데모를 좋게 여기는 자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니고데모가 그리스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흉악한 어떤 범죄자를 위해서도 "본인의 변명을 들어보지도 않고 정죄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할지라도 그 얘기가 지지를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가 "이 예수에 관해서 나는 스스로 그분의 말씀을 들었고 또한 그분이 하나님에게서 오신 선생인 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그분에게 대항하는 것은 하나님과 대항하여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라고 말했었다면(실은 그렇게 말해야 옳은것이었지만) 그는 그리스도에 대해 그가 베푼 지금의 적은 친절로 말미암아 겪었던 치욕 이상의 것을 당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니고데모에게 말한 것에 대해 우리는 몇 가지 관찰할 수 있다.

(1) 저들의 주장의 근거의 허위성. 그 이유로는

① 그들은 그리스도가 갈릴리에서 태어났다고 가정한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은 사실이 아니었다. 만일 그들이 편견 없이 사실을 조사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그리스도가 갈릴리에서 태어났다는 가정이 거짓이었음을 알았을 것이다.

② 그의 제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갈릴리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 제자들 모두가 갈릴리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유대 출신의 제자도 많이 있었다.

③ 그들은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온 일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사실에 근거하여 니고데모에게 재고할 것을 호소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도 역시 거짓이었다. 

-- 요나는 가드-헬퍼 출신이었고 나훔은 엘코쉬트 출신이었는데 이 두 곳 다 갈릴리 지방에 속한 것이었다. 이처럼 그들은 "거짓말을 자기들의 도피처로 삼았다."

(2) 거짓 위에 근거된 저희들의 주장의 불합리성. "당국자들과 바리새인"의 처지로 거짓말을 자기들의 논거로 삼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① 재산과 덕망이 겸비된 사람이 자기 지방의 빈곤과 미천함을 들먹이는 것은 덕스러운 일이 못된다. 갈릴리 사람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었고, 야만인들과 시리아인들은 아담의 자손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가 한 아버지의 자손이지 않는가?

② 갈릴리에서 나왔던 선지자가 하나도 없었다고 가정하고 있지만 선지자가 거기에서 태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 만일 엘리야가 길리아드 지방 출신의 첫 선지자였고 (아마 이것은 사실인 것 같다) 반면 길리앗인들이 도망자들이라 불려졌다면 그렇다고 그가 선지자라는 사실이 의심되어야 하겠느냐는 말이다.

3. 성급하게 재판을 연기함. 

-- 그들은 당혹하여 서둘러서 의회를 해산해 버렸다." 그들은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박해하기 위하여 함께 모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의 헛된 일을 구상한 것뿐이었다. 

--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고 조소했을 뿐만 아니라 지상에 있는 우리로 한 사람의 평범하나 가장 정직한 한 마디 말이 모든 은밀한 음모를 조각조각 부셔버리는 것을 보며 그들을 조소하게 된다. 

-- 그들은 니고데모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에게 답변할 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자.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지속해 보아야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가 결석하는 경우와 같은 더욱 편리한 시기가 올 때까지 논쟁을 연기하였다. 이처럼 여호와의 섭리는 인간들의 마음속에 숨은 계략에도 불구하고 성취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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