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1.10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요10.양의우리_참목자비유.수전절_솔로몬행각 논쟁.베다바라에서의 영혼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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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요10장

===양의 우리 비유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선한 목자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19.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20.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21.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유대인들이 예수를 돌로 치려 하다

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39.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40.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42.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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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B]요10장

1.  "Truly, truly, I say to you, he who does not enter by the door into the fold of the sheep, but climbs up some other way, he is a thief and a robber.

2.  "But he who enters by the door is a shepherd of the sheep.

3.  "To him the doorkeeper opens, and the sheep hear his voice, and he calls his own sheep by name, and leads them out.

4.  "When he puts forth all his own, he goes before them, and the sheep follow him because they know his voice.

5.  "And a stranger they simply will not follow, but will flee from him, because they do not know the voice of strangers."

6.  This figure of speech Jesus spoke to them, but they did not understand what those things were which He had been saying to them.

7.  Jesus therefore said to them again, "Truly, truly, I say to you, I am the door of the sheep.

8.  "All who came before Me are thieves and robbers, but the sheep did not hear them.

9.  "I am the door; if anyone enters through Me, he shall be saved, and shall go in and out, and find pasture.

10.  "The thief comes only to steal, and kill, and destroy; I came that they might have life, and might have [it] abundantly.

11.  "I am the good shepherd; the good shepherd lays down His life for the sheep.

12.  "He who is a hireling, and not a shepherd, who is not the owner of the sheep, beholds the wolf coming, and leaves the sheep, and flees, and the wolf snatches them, and scatters [them.]

13.  ["He flees] because he is a hireling, and is not concerned about the sheep.

14.  "I am the good shepherd; and I know My own, and My own know Me,

15.  even as the Father knows Me and I know the Father; and I lay down My life for the sheep.

16.  "And I have other sheep, which are not of this fold; I must bring them also, and they shall hear My voice; and they shall become one flock [with] one shepherd.

17.  "For this reason the Father loves Me, because I lay down My life that I may take it again.

18.  "No one has taken it away from Me, but I lay it down on My own initiative. I have authority to lay it down, and I have authority to take it up again. This commandment I received from My Father."

19.  There arose a division again among the Jews because of these words.

20.  And many of them were saying, "He has a demon and is insane. Why do you listen to Him?"

21.  Others were saying, "These are not the sayings of one demon-possessed. A demon cannot open the eyes of the blind, can he?"

22.  At that time the Feast of the Dedication took place at Jerusalem;

23.  it was winter, and Jesus was walking in the temple in the portico of Solomon.

24.  The Jews therefore gathered around Him, and were saying to Him, "How long will You keep us in suspense? If You are the Christ, tell us plainly."

25.  Jesus answered them, "I told you, and you do not believe; the works that I do in My Father's name, these bear witness of Me.

26.  "But you do not believe, because you are not of My sheep.

27.  "My sheep hear My voice, and I know them, and they follow Me;

28.  and I give eternal life to them, and they shall never perish; and no one shall snatch them out of My hand.

29.  "My Father, who has given [them] to Me, is greater than all; and no one is able to snatch [them] out of the Father's hand.

30.  "I and the Father are one."

31.  The Jews took up stones again to stone Him.

32.  Jesus answered them, "I showed you many good works from the Father; for which of them are you stoning Me?"

33.  The Jews answered Him, "For a good work we do not stone You, but for blasphemy; and because You, being a man, make Yourself out [to be] God."

34.  Jesus answered them, "Has it not been written in your Law, 'I SAID, YOU ARE GODS'?

35.  "If he called them gods, to whom the word of God came (and the Scripture cannot be broken),

36.  do you say of Him, whom the Father sanctified and sent into the world, 'You are blaspheming,' because I said, 'I am the Son of God'?

37.  "If I do not do the works of My Father, do not believe Me;

38.  but if I do them, though you do not believe Me, believe the works, that you may know and understand that the Father is in Me, and I in the Father. "

39.  Therefore they were seeking again to seize Him, and He eluded their grasp.

40.  And He went away again beyond the Jordan to the place where John was first baptizing, and He was staying there.

41.  And many came to Him and were saying, "While John performed no sign, yet everything John said about this man was true."

42.  And many believed in Him t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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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장 (개요)

본 장(章)에서 우리는 다음을 본다.

Ⅰ. 그리스도가 자신을 양 우리의 문으로, 그리고 양의 목자로서 비유한 설교(1-18).

Ⅱ. 거기에 대한 사람들의 여러 가지 태도(19-21).

Ⅲ. 그리스도가 수복절에 유대인과 가졌던 논쟁(22-39).

Ⅳ. 거기서부터 방방으로 떠나가심(4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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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목자 예수(요 10:1-18)

이 설교가 22절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겨울의 "수복절"에 행하여졌는지의 여부는 확실치가 않다. 그러나 수복절 전후에 있었을 것이다. 

((***성전수복봉헌절 = 하누카..마카비혁명 통해  맛다디아제사장과  그의 아들들이 유대땅에 대한  셀류코스 왕조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예루살렘성전을 수복- 봉헌한 것을 기념..대개 12월8일부터8일간..샤마이방식이 아니라 힐렐방식의 촛불점화의식인 메노라를 시행...유대력으로 기슬레월<11월말~12월초>)) 

---그리스도는 양의 비유(26,27절)를 설교하셨다. 따라서 여기 나타난 설교와 동시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이 설교가 앞장에 나오는 ((가을:초막절 예루살렘 방문))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의 계속이었는지도 확실치가 않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교회의 목자들"이기 때문에, 자기들로부터 아무런 위임도 받지 않은 예수는 하나의 침입자요 사기꾼이어서, 자기들이 예수에게 반대한다고 했다. 또 그래서 사람들도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자기들에게 붙어야 한다고 보았다. 

---여기에 대해, 그리스도는 누가 거짓 목자였고, 누가 진실 된 목자였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 자신에 대한 판단은 그들 자신에게 맡기셨다.

Ⅰ. 여기에 비유 혹은 은유가 있다(1-5절). 

---그것은 양을 경영하는 그 나라의 관습에서 취한 것이다. 거룩한 진리를 제시해 주기 위해서 사용될 비유들은 가장 익숙하고 평범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을 밝혀 주어야 할 것이 오히려 흐리게 해서는 안 된다. 

---이 설교의 서문은 엄숙하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멘, 아멘." 이러한 격렬한 선언은 그가 말하는 것의 확실성과 비중을 암시해 주고 있다. 우리는 교회의 찬양과 기도 속에서 이중 "아멘"을 본다(시 41:13; 72:19; 89:52). 만일 우리가 하늘에서 우리의 "아멘"이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아멘"이 이 땅을 지배하게 하자.

1. 이 비유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게 된다.

(1) 양떼들에게 위험이 되고 주인에게는 해가 되는 도둑과 강도가 있다(1절). 

.....그들은 합리적인 방법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이 아닌 다른 곳" 곧 창문이나 벽을 타고 들어간다. 사악한 사람들은 [***한 목자, 참목자는 Q의 선하심-인자하심-진실하심, 곧 생명과 사랑의 지고지선의 풍성한 유익을 양들에게 끼치기 위해서 Q이 친히 보내신 바, Q의 성령으로 기름부어 인치심으로 그분의 권위를 위임받은 Q의 대리자임!!] 악한 일을 하는 데 얼마나 부지런한가! 

.....그들은 사악한 음모를 위해서 온갖 어려움을 감수하며, 위험을 무릅쓴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나태하고 비정한 우리들을 부끄럽게 해 준다.

(2) 양떼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그들을 돌보고 있는 정당한 주인을 밝히 구별한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권위를 가지고 있는 자처럼 당당하게 "문으로 들어간다"(2절). 

.....그는 "다친 것을 싸매주고," "병든 것을 강하게 해 주는"(겔 34:16) 따위의 좋은 일을 해주기 위해서 들어온다. 양은 인간의 보호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가로 인간에게 봉사하게 된다(고전 9:7). 그들은 자기들을 입혀 주고 먹이를 공급해 준 자들에게 옷감과 먹을 것을 제공해 준다.

(3) 목자는 준비된 입구를 발견한다. "그가 들어오도록 목자에게는 문지기가(성령께서 친히) 문을 활짝 열어 준다"(3절). 

.....옛날에는 대문 안에 양우리가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그들에게 곧바로 들어올 수는 없고 문지기가 열어 주거나 집주인이 열쇠를 주어야만 했다.

(4) 그는 양을 보호하고 관리한다. 

.....개나 말에게 하는 것처럼 주인이 양들에게 친근히 말할 때, 또 그 목자가 양들이 있는 우리로 들어올 때, "[참되고 선한 목자인]그의 음성을 양들은 듣는다." 

.....더구나 그는 "[자기에게 속한] 자기의 양의 이름을 부른다." 그들에 대한 주의, 그들에 대한 정성이 그토록 정확하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우리에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그들을 밖으로 몰고 나왔을 때, 그는 그들을 뒤에서 몰지 않고(이것은 당시의 습관이었다) 그들이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어떠한 위험이나 해를 막아 주기 위해서 "그들보다 앞서 가고," 그렇게 습관 됨으로써 양들은 안전하다.

(5) 양이 이상하게도 목자를 따름. "그들은 [Q의 성품 그자체로 가득한]그의 목소리를 알고 있다." 

.....그것으로 그의 마음을 분별하고, 낯선 사람의 음성과도 구별한다(소도 자기의 주인을 안다. 사 1:3). "그들은 낯선 자를 따르지 않는다." 의심스러운 일이 있을 때는 달아나게 된다. "그의 목소리," 곧 목자의 음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 비유이다. 우리는 그것에 대한 열쇠를 가지고 있다(겔 34:31). "너희 인간들은 나의 양떼이며,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2. 이 비유를 잘 살펴보자.

(1) [Q을 믿고 그 분의 어떠하심을 알며 깊은 감격으로 따르는 바, 보혈로 씻긴] 선한 사람은 적절하게도 양에 비유되고 있다. 

.....창조주에게 의존되어 있는 피조물인 인간들이 "그의 목장의 양"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JC를 믿어 거듭난 바 새로운 피조물인 선한 사람들은 양의 좋은 성품을 가지고 있어서, 양처럼 "해를 끼치지 않고" 비공격적이다. "온유하고" 조용하며 시끄럽지가 않다. 도살꾼 과 털깎는 자의 손아래서도 양처럼 "인내하며" 목자에게 "유용하고" 유익하며, 서로 잘 "어울리고," 제물로도 많이 사용된다.

(2)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열방에 흩어졌던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드는""양의 우리"이다(11:52). 

.....그 안에서 그들은 연합되고 하나가 된다. 그것은 좋은 우리이다(겔 34,14 ; 미 2;12를 보라). 이 우리는 튼튼하다. 하나님 자신이 "불 성벽"과도 같이 지키시기 때문이다(슥 2:5).

(3) 이 양의 우리는 도둑과 강도들의 침입을 당할 수 있다. 

.....곧 파괴하고 먹어 삼키는 잔인한 가해자들, "포악한 늑대들"(행 20:9), 또는 그리스도의 양을 훔쳐서 악마에게 제사지내고 양의 먹이를 빼앗아 죽이려드는 도둑들이 범접한다. 다시 말하면 양의 옷을 입은 "늑대들"(마 7:15)이다.

(4) 양의 목자장은 양떼들과 거기에 속한 모든 것을 훌륭히 보살핀다. 

.....하나님은 목자장이시다(시 23:1; 80:1). 그는 자기 양을 아시며, 하나하나 이름을 들어 그들을 부르며, 그의 표시를 해 두신다.(인치신다) 그리고 풍요한 초장으로 그들을 인도하고, 거기서 그들에게 먹이와 휴식을 제공하며, 그들에게 부드럽게 이야기해 주고, 자기의 섭리로 그들을 지켜 주고, 성령과 말씀으로 그들을 인도하며 "자기의 발걸음을 따르게 하기 위해서" 그들보다 앞서서 간다.

(5) 하나님의 양떼들을 먹이도록 위탁받은 다양한 부류의 작은 목자들은 그 책임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 

.....정치인들은 그들의 모든 세속적인 권익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목회자는 그들의 영적인 권익에 봉사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가르치며 복음적 의식을 올바로 집전하여 "그들의 영혼에 먹여야" 한다. 그들은 정규적인 서임이라는 철저한 영적 검증을 거쳐서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인증받은 다음, [유일한, 바로 그 보혈의 문] "문으로 들어가야 하고," 그런 이들에게 "문지기가 문을 열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은 [친히 문지기가 되사] "그들 앞에 열린 문을 두며," 교회에서 그들에게 권위를 주고, 그들의 가슴속에는 확신을 줄 것이다. 

.....목회자는 맡겨진 바 자기 양떼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알아야 하고, 그들을 지켜보아야 한다. 그리고 솔선하여 공중 예배의 목장으로 그들을 인도해야 하며,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입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입이 되어야 한다. 자신들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도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6) 참으로 그리스도의 양인 자들은 그들의 목자에게 대단히 유순할 것이며, 낮선 자들에 대해선 대단히 조심하고 피할 것이다.

① "그들은 그들의 목자를 따른다." 왜냐하면 분별하는 귀와 복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이다.

② "그들은 낯선 자로부터 도망하고," 그를 따르기를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음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음성"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자들, 곧 "그리스도 신앙"으로부터 우리를 [제멋대로의, 자기소견에 옳아보이는 바]"그리스도에 관한 환상"으로 오도하려고 하는 자들을 따른다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뿐만아니라, 직접 거룩한 진리의 효능과 권능을 체험한 자들, 그리고 그것의 황홀함, 매혹되고 매료됨의 맛과 재미를 참되게 아는 자들은 사탄의 간계를 발견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Ⅱ. 이 설교의 흐름과 의미를 유대인들은 몰랐다(6절). 

---"예수는 비유를" 그들에게 말했다. 상징적이나 현명하고, 우아하고, 교훈적인 이야기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무슨 뜻으로 말씀하는지 깨닫지 못하였다." 그가 의미하는 "도둑과 강도들," 그리고 "선한 목자"가 누구인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수치요 죄다. 그들은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일반 사물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따라서 비유와 그것이 계시하는 바를 비교해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지식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졌다.(더 이상 배우려 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그 자부심의 근본바탕이 의문시되어야 한다는 것을 침을 수 없었다. 

---그러하기에, 예수가 말씀하신 사실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임은 그들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처럼 빈번히 그 가장 위대한 지식인으로 자처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일에는 가장 무지한 자들이 된다.

Ⅲ. 이 비유의 특색을 충분히 보여 주면서, 그것에 대해 설명하셨다. 

---주 예수의 말씀 속에 어떤 난점들이 있어 보이더라도, 만일 우리가 그를 기꺼이 이해하려 한다면, 그리스도는 자신을 기꺼이 드러내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한 성귀가 다른 것을 해석해 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령은 거룩하신 예수의 통역자와 문지기 역할을 담당하신다. 그 비유에서 그리스도는 "문으로 들어간다"는 점에서 도둑과 다르다고 구별하셨다. 

그런데, 그 비유에 대한 설명을 보면, 그는 자기 자신을 목자가 들어가는 "문"으로도, 그리고 그 문으로 들어가는 "목자"로도 이야기하고 있다. 비록 똑 같은 사람을 문과 목자, 두가지 모두에 비유한다는 것은 수사학에 있어서 어법 위반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는 스스로의 생명을 가지고 계시기에, 자신에게서 권위를 이끌어내더라도 그의 신성에서 보면 결코 어법 위반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자신"은 "그 자신의 피"를 문으로 하여 "성소에 들어가신다."

1. 그리스도는 "문"이다. 

---"의를 찾는다"고 주장하나 소돔 사람처럼 "문을 발견하기에 지쳐 있었던" 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다. 그들은 문을 발견할 수 없는 곳에서 찾았다. 그는 또 그것을 하나님의 유일한 양들이라고 자부하던 유대인들과 그들의 유일한 목자들이라 생각하던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양의 우리의 "문이다" 즉 교회의 문이다.

(1) 일반적으로 말해 보면 이렇다.

① 그는 들여보내기에 적합하지 않은 도둑과 강도들을 막기 위해 "닫혀진 문"과 같다. 

.....문을 닫는 것이 곧 집의 안전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가 자신과 그 적 사이에 주 예수의 개입과 그의 지혜, 권능, 선보다 더 커다란 안전을 어디서 얻을 것인가?

그는 통행과 상호 소통을 위해 "열린 문 = 소통과 교통 위한 통로"과 같다.

첫째, 문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의 양떼로의 입장을 허락 받게 된다(14:6).

둘째, 우리는 그에 의해 도움을 받고, 그에게 용납되면서 그의 이름에 의해, 그 안에서 걸어가면서 신앙 생활을 한다(슥 10:12).

셋째,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교회를 방문하시고, 자기를 알리신다.

넷째, 문이신 그에 의해 양떼들은 마침내 하늘의 왕국으로 들어갈 허락을 받게 된다(마 25:34).

(2)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그리스도는 또한 "목자들"의 문이기도 하기에, 그를 통해[그리스도 영접함의 신앙통해 양의 우리에] 들어오지 않고는 아무도 "목자'로 간주할 수 없다. "도둑들과 강도들이다"(그들이 목자들인 척한다 해도 소용없다). 

.....양은 거짓목자인 도둑과 강도들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도망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에 있는 목자들, 곧 정치인이든 사역자건 메시야에 대한 생각도 없이 혹은 그들의 육적인 관심이 제시한 다른 기대를 가지고 공적 직무를 (어쩌면 현재, 지금까지도 수행하고 있거나) 수행했던 모든 사람들을 [강도요 도둑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 그들에게 주어진 성격을 살펴보자. 

.....그들은 "도둑들"이고 "강도들"이다(8절). 시간적으로 말하면 "그에게 앞서 갔던 자들"중 많은 자들은 충실한 목격자들이었다. 

.....그러나 자기들의 위임을 "미리 앞질렀고," 그가 보내기 전에 간 모든 자들(렘 23:21). 적 그리스도처럼 "자기 자신을 높이고," 그리스도보다 뛰어난 척한 모든 자들이 강도와 도둑이다(살후 2:4).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대제사장들, 심지어 내 앞에 왔던 많은 사람들까지 포함하며 나를 반대하는 편견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나의 권세를 애써 방해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가 들어 갈 자리를 남겨두지 않으려는 모든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도둑이요 강도들인 것이며, 그 정당한 주인을 속이면서 아무런 권한도 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고 있다." 

.....그들이 오히려 우리 주님을 도둑이요 강도로 저주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들과 어떤 계약도 없었고, 그를 문으로 삼아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리스도는 그들이 자기로부터 위임을 받았어야 했고, 자기를 뒤따라야 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뒤따르지 않고, 오히려 "앞서기" 때문에, "도둑들"이요 "강도들"이었다. 그들은 그의 제자들로서 오지 않았다. 따라서 횡령자로서 정죄받았고, 그들의 가장된 위임은 박탈되었다. 그리스도의 적들은 그의 교회의 강도이지만 스스로 목자들인 척하고. 더욱이 "목자들 중의 목자"인 체한다는 사실을 유의하라.

둘째, 그들로부터 양을 보호하기 위해 취해진 보호를 보자. 

....."양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참 경건의 향기를 지닌 신령하고 거룩한 자들, 하나님과 그 거룩성에 성실히 헌신했던 자들은 (Q의 사랑과 생명, 성령과 생명의 풍성한 공급을 제한하려 하여 억지로 많은 군더더기들을 추가한 바) 선조들의 전통을 인정할 수 없었고, 그들의 형식을 즐기지도 않았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의 선생으로부터 어떤 지시가 없는한 손을 닦지 않은 채 식사하거나 안식일에 밀을 따거나 하는 일에도 개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바리새주의보다 참기독교에 반대되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며, 더구나 그들의 위선적인 예배보다 영혼을 더 진정으로 어둡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② 그리스도는 "양"의 문이다(9절). 

.....양처럼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디 에무’ - 즉 문으로써의 나를 통과하여...곧 JC를 영접함의 믿음을 발휘함 통해 그분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함으로써 보혈을 통과하여!!) 양 우리로 들어오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는 도둑으로부터 안전할 뿐만 아니라, 그가 들어오나 나가나 만족할 것이다.

첫째,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방법에 대한 분명한 방향이 제시되어 있다. 

.....우리들은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여"들어가야 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위대한 중재자이신 그에 대한 신앙, 곧 영접함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에 들어가고, 그와 교통하고 그분안에 거함의 안식과 평강을 누리게 된다.(belief/confidence-->communion-->complacency!!) 그리스도의 교회에로 들어가는 길 외에는 하나님의 교회로 들어갈 수 없다. 구주의 은혜와 통치에 기꺼이 복종하기를 원하는 자 외에는 사람들 중에 있는 하나님의 왕국의 일원으로 간주될 수 있는 자가 없다. 

.....우리는 "신앙의 문"을 통하여 들어가야 한다(행 14:27). 왜냐하면 "무죄"의 문은 우리에게는 닫혀있고, 그 "길"은 통과할 수 없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창 3:24).

둘째, 이러한 명령을 준수하는 자들에게 대한 귀중한 약속들이 있다.

a. 그들은 "이로부터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가정의 특권이다." 이러한 양들은 죄악에 대한 거룩한 정의의 심판에서 구원받을 것이고, 그들의 위대한 목자가 손해를 보상할 것이며, 으르렁대는 사자의 먹이가 되는 것으로부터 구원받게 되며, 그들은 "영원히 만족하게"될 것이다.

b. 그러는 동안에 "그들은 들어오고 나가며 꼴을 발견한다." 

이것이 그들의 "길"의 특권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서 살아갈 것이고, 각자의 집에서 인간으로서 살게 될 것이며, 거기에서 "자유스러운 입장과 퇴장, 그리고 귀환"을 누리게 될 것이다. 

참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편히 있다. 그들이 나가도 낯선 자처럼 쫓겨나지 않고 자유롭게 다시 들어온다. 그들이 들어올 때는 침입자처럼"들어와 갇히지" 않고 또 나갈 자유를 가진다. 그들은 아침에 들로 나가고 밤에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 어디서나 목자가 그들을 인도하고 지켜 준다. 어디서나 그들은 꼴을 발견한다. 들에서는 풀을 우리 안에서는 먹이를 얻는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그들은 대화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고, 그 말씀에 의해서 그들의 영적인 생은 부양 받고 영양을 공급받게 되며, 그 말씀으로부터 그들의 귀중한 소망이 이루어진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의 재물로 부요해진다.

2. 그리스도는 "목자"이다(11절 이하). 

그는 구약 성서에도 하나의 "목자"로 예언되었다(사 40:11; 겔 34:23; 37:24; 슥 13:7). 

신약 성서에서도 그는 "위대한 목자"(히 13:20), "목자장" 그리고 "우리 영혼의 목자요 감독"으로 이야기되고 있다(벧전 2:25). 

하나님은 우리의 대 주인이요, 우리는 창조에 의해서 그 초장의 양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를 우리의 "목자"로 보내셨다. 그리고 거듭거듭 그는 그 관계를 인정하셨다. 

그는 선한 목자가 양떼를 다루는 것처럼 그의 교회와 신자들 모두를 보호하며, 목자들이 그들의 양떼들에게 기대하듯 교회와 온 신자들의 참여와 복종을 기대하신다.

(1) 그리스도는 "문으로 들어오지 않았던" 도둑이 아니라, "목자"이다. 다음 사실을 유의하자.

① 도둑의 사악한 계획(10절). 도둑은 선한 목적으로 "들어오지 않으며."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온다.

첫째,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목장으로부터 신자들의 마음과 애정을 "훔치고," 그들은 영적으로 "죽이고 파괴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몰래 가지고 들어오는" "이단설들"은 유해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혼의 기만자들은 영혼의 살인자들이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말로 성서를 보존함으로써 그것을 훔치는 자들은 그들을 "죽이고 파괴한다." 무지와 우상 숭배는 파괴적인 것들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양떼로부터 훔쳐내지 못할 양들은 박해하고 학살함으로써 몸을 "죽이고 파괴하려고" 한다. 도적 당하지 않을 자도 살해의 위험은 있는 것이다.

② 목자의 은혜로운 계획. 그가 오신다.

첫째, "양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다." 

죽이고 멸망시키는 도둑의 계획(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계획이 없던)에 반대하여, 그리스도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온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a. "그들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다. 

그는 무리들, 곧 교회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왔다. 교회는 지금까지 양떼로 뒤덮인 초장과 같다기보다는 오히려 마른 뼈들이 가득 찬 골짜기같이 보였었다. 

그리스도는 거룩한 진리를 변호하고 거룩한 계율들을 깨끗하게 하고 불평의 원인을 제거하고 없어진 열심을 일깨우며, 그의 무리 중 잃어버린 자들을 찾고, "상한 자들을 감싸주기 위해서"(겔 34:16) 오셨다. 그리고 이것은 죽은 자에게 대한 생명과 같은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으며, 위협적인 죽음의 반대이다(창 2:17). 우리는 용서받은 범죄자처럼, 치유된 병자처럼, 부활한 죽은 자처럼, "생명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의롭게 되고, 성화 되고, 결국 영화롭게 될 것이다.

b. 그들로 "생명을 보다 풍성히" 누리게 하기 위해서다. 

본문은 비교급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죄로 말미암아 박탈당한 생명보다 훨씬 "더 풍부한," 그리고 모세의 율법에 의해 약속되었던 생명보다 "더 풍부한," 그리고 우리가 "묻거나 생각할 수"있는 것보다 휠씬 더 풍성한 생명을 얻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풍성히 갖게 되리라"라고 원급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는 생명과 ‘테릿손’-즉 보다 많은 무엇, 보다 "나은" 무엇, 곧 유익한 삶을 주기 위해 오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도 편안하게 풍성하게 기쁘게 살 수 있다. 풍부한 생은 "영원한 생명"이요, 죽음이나 죽음의 공포가 없는 생명이요, 훨씬 "더 알찬" 생명이다.

둘째, "양들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바치기 위해" 오셨다. 

그가 "그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함이다(11절). "선한 목자는 자기의 생명을 양을 위해 바친다."

a. 양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내놓는 것이 모든 선한 목자들의 특성이다. 

야곱이 그가 피곤을 무릅쓰고 양들에게로 갔을 때 그러했다(창 31:40). 다윗이 "사자와 곰을 죽였을"때 그러했다. 성 바울도 그랬다. 그러나

b. 그의 무리를 보호하고 침입을 막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고, 자기 피를 흘려 깨끗하게 하고 잘못을 보상하는 것은 위대한 목자의 특권이었다.

(2) 그리스도는 삯군이 아니라 "선한 목자"이다. 

양을 죽이고 짓밟으려는 것을 목적하고 있는 도둑들은 아니지만, 보통 목자로 통하나 의무를 담당하는데 부주의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무관심 때문에 많은 양떼들이 해를 입었다. "어리석은 모자들," 게으른 목자들"이다(슥 11:15, 17). 이런 것에 반대하여

① 그리스도는 "자기를 선한 목자로 부르고" 있다(11절). 

그리고 다시 14절에서 ‘호 포이멘 호 칼로스’ - 즉 목자, 곧 선한 목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목자라 부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목자들 중 최고이며, 영혼의 통찰력을 지니는데 있어서 세상에서 제일이며 그처럼 기술적이고 그처럼 신앙적인이며, 그처럼 부드러운 자는 아무도 없다. 그가 했던 것처럼 공급해 주고, 인도해 주고, 영혼을 보호해 주고, 고쳐 주는 자는 아무도 없음을 유의하라.

② 그는 모듬 삯군과는 달리 "신실하다"(12-14절). 거기서 다음을 생각해 보자.

첫째, 충성스럽지 못한 목자의 부주의성(12,13절). 

삯군, 종으로 고용되어 그 노력의 대가를 받는 자, 곧 "자기 양이 없는 자," 양으로 인해서는 이득도 손실도 없는 자마다 늑대가 오고 있거나 다른 위협적인 것이 오는 것을 보면 그 늑대에게 양을 내버려두고 달아난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는 "그들을 돌보지"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거짓 목자의 태도에 대한 분명한 구절이 있다(슥 11:17). 악한 목자들 곧 악한 정치인과 성직자들의 나쁜 원칙과 나쁜 행위가 묘사되고 있다.

a. 그들의 "나쁜 원칙들." 곧 그들의 나쁜 행위들의 근원이다. 

조용한 시간에는 생각지도 않다가 시련의 시기에는 왜 영혼을 담당한 자들이 임무를 저버릴까? 그들을 거짓되게 그리고 이기적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a) 그것은 그들이"삯군"이요 "양을 염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목자의 임무를 그리스도를 섬기고 선행하기 위한 기회로써가 아니라 살기 위한 방편 및 부유해지려는 수단으로 맡았다. 그들을 이끄는 것은 돈에 대한, 그리고 그들 자신의 배에 대한 사랑이다. "제단에서 일하며 거기서 나오는 것으로 먹고사는 자들"이 삯군인 것은 아니다. 일군은 음식을 먹을 자격이 있다. 그리고 미천한 생계는 그 맡아 하는 일까지 미천하게 만들게 된다. 

일보다도 임금, 곧 삯을 더 사랑하는 자들이 바로 "삯군"이다(신 24:15; 삼상 2:29; 사 56:11; 미 3:5, 11 등을 보라).

(b) 그들은 일에 별로 관심이 없다. 

그들은 "양을 중히 여기지 않는다." 즉 타인의 영혼에 관심이 없다. 그들의 임무는 그들 형제의 보호자요 협조자가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형제들의 주인이 되려는 데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만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디모데와 같이 "영혼들의 상태를 자상히 보호하려"하지 않는다. 

그들이 늑대가 올 때 달아나리라는 것 외에 기대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는 "양들을 염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양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점에서 보면, 하급 목자들은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양을 갖고 있지 않으며" 양에 대해 지배권과 재산권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내 양을,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셨다). 그러나 정성과 사랑의 관점에서 보면, 하급 목자들은 양들을 "자기들 양"으로 여겨야 한다. 

바울은 그가 "사랑하는 자들 또는 바라던 자들"을 자신의 사람들로 간주하였다. 교회의 관심을 진심으로 지지하지 않는 자, 그것들을 그들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 자들의 충성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b. 그들의 "나쁜 행실." 이것은 나쁜 원칙들의 결과이다(12절).

(a) 삯군이 늑대가 오는 것을 볼 때, 그가 근본적으로 자기의 임무를 어떻게 버리는가 보라. 거기서 그를 가장 필요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양을 버리고 달아나고 있다. 임무보다 자신들의 안전을 더 신경 쓰는 자들은 사탄의 유혹에 쉽게 먹이가 된다.

(b) 그 결과는 얼마나 치명적인가! 

삯군은 양들이 스스로 잘 처신하겠지 생각하나, 사정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늑대가 그들을 잡고," "양들을 흩는다." 끔찍한 살상이 무리들 가운데 자행된다. 

이 모든 것은 신뢰할 수 없는 목자에게 모두 책임이 있다. 죽어 가는 영혼들의 피는 부주의한 목자의 손에서 찾아야 한다.

둘째, 여기서 선한 목자의 은혜와 부드러움이 예언된 대로(겔 34:21, 22 등) 전자에 반대하여 놓여져 있음을 보라. 

"나는 선한 목자다." 이것은 교회와 교회의 모든 권속들에 대한 위안의 말이다. 그러나 교회는 삯군의 사기와 계약 파기 때문에 해를 입고 위험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주 예수는 언제나 선한 목자이다. 목자의 선함에 대한 두 가지 중요한 예들이 여기에 있다.

a. 자기 양떼 및 거기에 속한 모든 것을 "잘 아신다."

(a) 그는 선한 목자처럼(3,4절) "현재 그의 양떼들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그리스도와 참 신자들 사이에는 상호 사귐이 있고 서로 잘 알고 있다. 앎은 사랑을 뜻한다.

[a] 그리스도는 "그의 양들을 안다." 

그는 "분별하는" 안목으로 누가 그의 양들이고 누가 아닌가를 알고 있다. 

그는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는 양들과 그럴 듯한 위장을 하고 있는 염소들을 알고 있다.

 그는 "친근한" 눈으로 실제로 그 자신의 양떼들인 자들을 알고 있다. 그는 그들의 상태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고, 그들은 위해 자신을 관계시키고 그들을 향한 부드러움과 애정을 지니고 그들을 중재하면서 끊임없이 그들을 생각한다.

 그는 그들을 성령으로 내방하며 그들과 교제를 한다. 그는 그들을 "알고 있다." 곧 그는 그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시 1:6; 37:18; 출 33:17),

[b] 그는 "그들을 알고 있다." 

그는 우호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그리고 그들은 그를 신앙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스도가 양을 아는 것이 그들이 그를 아는 것보다 앞서 놓여 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를 먼저 알았고 사랑했기 때문이다(요일 4:19). 그리고 우리의 행복은 우리가 그를 아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가 우리를 아시는 것이다(갈 4:9). 

그러나 "그들이 그를 알고 있다"는 점이 그리스도의 양들의 특성이다. 그들은 그를 모든 위선자들과 침입자와 구별하여 알고 있다. 그들은 그의 마음을 알고 있고, 그의 음성을 알고 있고, 그의 죽음의 위력을 경험함으로써 모두를 알고 있다. 그리스도는 마치 여기서 그가 자기 양떼들에게 자기를 알려주는 것이 영광이라도 되며, 그들의 존경이 자기에게 명예를 준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 때를 즈음하여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자신의 상호인지를 언급하고 있다(15절). "아버지께서 나를 아신 것처럼 나도 아버지를 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를 유지시켜 주는 친밀한 사귐과 관계의 근거이다. 

이 관계의 결속끈인 은혜의 계약이 아버지와 아들사이의 구 속의 계약 속에 터를 닦고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그 문제에 있어서 서로 완전히 잘 이해하고, 거기에는 어떤 불확실성이나 위험을 초래할 만한 실수라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주 예수는 "그가 선택한 자들을 알고 있고"(8:18) 그들은 "자기들이 믿는 자를 알고 있다"(딤후 1:12). 그 모든 것의 근거는 아버지와 아들이 "화평의 계약을 맺을 때" 서로의 마음에 지니고 있는 완전한 지식인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에 있는 친밀성울 보여 주고 있는 하나의 비유라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그것은 그 앞의 말과 관계될 수 있다. 곧 "아버지가 나를 알고 또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처럼,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또 양들이 나를 안다." 17장 21장과 비교하라. 

아들이 "양처럼 도살자에게 인도될"때도 아버지가 그를 알았고 사랑했고, 고통 중에도 그를 인정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도 그들이 "홀로 있을 때," 그들을 부드러운 눈으로 지켜보면서 그들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

또 아들이 아버지를 알았고 그를 사랑했고 복종했으며, 아버지가 그를 저버린 것같이 보였을 때조차도 그를 자기의 하나님으로 확신하면서 언제나 아버지를 기쁘게 했던 것처럼, 믿는 자들도 복종적이고 굳은 신앙의 생각을 가지고서 그를 알고 있다.

(b) 그는 "앞으로 그의 양떼에 속할 자들도 알고 있다(10절)."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을 내가 가지고 있다." "내게는 다른 양들이 있다." "그들도 역시 내가 인도하리라." 다음을 살펴보자.

[a] 그리스도는 가련한 이방인들을 주목하셨다. 

그는 때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을 향한 그의 특별한 관심을 표명했었다. 사실 그 자신의 선교는 그들에게 한정되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양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시간이 흘러 그리스도를 믿게 될 자들, 그리고 이방인들 가운데서 그에게 복종할 자들도 여기서 "양"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그들이 아직 "부름을 받지 않았고," 그들 중 대부분이 "태어나지도 않았으나" 그들은 하나님에게 선택되었고 영원부터 거룩한 사랑 속에서 그리스도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그 자신의 구입에 의해 아직 소유하지 못한 많은 영혼에 대해서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아직 그들이 사악한 상태로 있었지만 그는 고린도의 "많은 사람들"을 가졌다(행 18:10). 

"나는 다른 양들을 가지고 있다"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나는 그들을, 나의 심정을 다해 가지고 있고, 나의 눈 속에 그들을 가지고 있고, 마치 내가 이미 그들을 소유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스도는 "다른 양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 "작은 무리들"만 가지고 있다는 경멸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선한" 목자가 아직은 "가난한"목자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욱 많은 양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둘째, 유대인들이 자기들에게서만 메시야가 양을 모으게 된다고 생각한 그 자존심과 공허한 자랑을 꺾어버리기 위해서이다. 

"아니다. 너희들은 그들을 너희 양떼의 개들과 함께 두는 것도 거절하지만 나의 양떼의 어린양들과 함께 둘 다른 양들이 있다"고 그리스도는 말하고 있다.

[b] 그들에 관한 그의 은혜의 목적과 결의.

 "나는 그들 역시 인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집으로, 교회 안으로 그리고 이것은 위해 잃어버린 양처럼 그리고 그들의 방황에서부터 되돌이켜야 한다"(눅 15:5). 그러나 왜 그가 그들을 인도 "해야"하는가? 그 필요성은 무엇인가?

첫째, "그들의 처지의 필요성"이 그것을 요구했다. 

"나는 데려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끝없이 방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양과 같이, 그들은 결코 그들 스스로 되돌아오지 못할 뿐 아니라, 아무도 그들을 데리고 올 수도 또 데리고 오려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 자신에 대한 "그 자신의 계약의 필요성"이 그것을 요구했다. 

그는 그들을 데려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생각이나 계획에 충성스럽지도 진실하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나의 것이고, 내가 데려 왔고, 내가 값을 지불했다. 따라서 나는 그들을 무시하지도 그들이 멸망하도록 버려 두지도 아니한다." 그는 그를 믿었던 자들을 자기의 명예를 걸고 데려가야 한다."

[c] 다음 두 가지가 그 행복한 효과와 결과이다.

첫째, "그들은 나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나의 목소리가 그들 가운데 들리게 될 뿐만 아니라(그들이 듣지 못했고, 그래서 믿지 못했지만, 앞으로 복음의 소리가 지상 끝까지 울려 퍼질 것이다) 그 소리가 그들에게 들리게 될 것이다. 나는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듣도록 하리라." 

신앙은 들음을 통해서 온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목소리에 대한 우리의 근면한 준수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그를 통해 하나님에게로 나아가게 되는 수단과 증거인 것이다.

둘째, "한 우리와 한 목자가 있을 것이다." 

한 명의 목자가 있듯이, 우리도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신앙에로 되돌아오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모두가 하나의 교회로 통합될 것이고, 차별 없이 특권을 나누어 갖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두 지팡이들이 주님의 손 속에서 하나가 된다. 한 명의 목자는 하나의 우리를 만들고, 한 분 그리스도는 한 교회를 만든다는 사실을 유의하라. 교회가 그 구성에 있어서 하나인, 한 머리에 복종하고 성령에 의해 생명이 불어넣어지고 하나의 법칙에 의해 인도되는 것같이, 교회의 구성원들도 사랑과 애정 속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엡 4:3-6).

b. 그리스도가 "그의 양들을 위해 자신을 바치심"이 그가 선한 목자라는 또 다른 증거이며, 여기서 그는 "그의 사랑을 더욱"드러내신다(15, 17, 18절).

(a) 그는 "그의 무리를 위해 죽는" 것이 목적이라고 선언한다(15절). "

나는 양떼를 위해 나의 생명을 버리노라." 그는 자기의 생명을 그들을 위해 모험에 걸뿐만 아니라(이 경우에는 목숨을 "구하려는" 소망이 그것을 "잃는 데"서 오는 "공포를 상쇄할 것이다") 생명을 실제적으로 "버렸고," 우리를 구하기 위해 죽음의 필연성에 복종하였다.

‘티데미’(5087) - 즉 하나의 저당물, 혹은 담보물로 "내가 그것을 네 놓았다." 구입자가 지불한 돈과 같은 것이다. 

도살되도록 지명된, 희생되도록 준비된 양이 목자의 피로 대속된 것이다. 그는 착한 양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들을 대신해서 그의 생명을 버렸다. 

수많은 양들이 속죄의 제물이 되어 그들의 목자들을 위하여 희생 제물로 바쳐져 왔다. 그러나 놀랍게도 거꾸로 목자가 양들을 위해 희생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목자, 다윗이 죄를 졌을 때 파괴적인 천사가 양떼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그때 다윗은, "이 양들이 무슨 나쁜 짓을 하였습니까? 차라리 나를 치소서"하고 간청하였다(삼하 24:17).

그리고 다윗의 자손 예수는 죄가 없고 흠이 없었다. 반면에 그의 양떼들이 나쁜 일을 했다. 그런데도 예수는"당신의 손으로 나를 치소서"하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스가랴 13장 7절를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칼아, 깨어서 나의 목자를 치라." 목자를 치는 것이 현재로서는 양떼를 "흐트러뜨리기" 위한 것이나, 결국은 그들을 모으기 위한 것이었다.

(b) 그는 다음 네 가지 면으로, 많은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는 십자가의 혐오성을 벗겨 버리신다.

[a] "양떼들을 위해 그가 생명을 내어놓음"은 그가 존귀를 받게 되는 조건이요 과정이었다(17절). 

"내가 내 생명을 버리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이런 조건으로 중재자인 나는 아버지의 용납과 인정과 영광을 받게 되리라. 즉 내가 선택된 남은 자를 위한 회생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외아들로서 그가 영원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인(神人)으로, "임마누엘"로서 그가 "양들을 위해 죽기" " 때문에" 그는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따라서" 하나님은 선택된 그를 기뻐하셨다. 이 일에 대해서는 그가 하나님의 "충실한 종"이었기 때문이다(사 42:1). 따라서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아들을 더욱 사랑하시니,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큰가? 양떼들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버려야 하는 하나님의 뜻에 자기 자신을 복종시켰으니, 아버지의 사랑을 얼마나 귀중하게 보았는가! 그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모든 봉사와 고통을 보상해 준다고 생각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위해서 너무 적다고 생각할 것인가?

 "아버지께서 나를" 곧 나와 모두를 "사랑 하셨다." 즉 신앙으로 나와 하나가 된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다.

[b] 그가 자기의 생명을 버림은 그것을 다시 받기 위해서였다. "나는 생명을 버리노라. 그것을 다시 얻기 위해서."

첫째,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의 효과였고, 그의 승귀의 첫 단계이며, 사랑의 결실이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기 때문에, "썩음을 보지" 않아야 한다(시 16:10). 하나님은 그를 너무 사랑하셨기에 그를 무덤에 남겨둘 수 없었다.

둘째, 그는 자기의 부활에 의해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신을 힘있게 선언할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의 생명 포기에서 염두에 두었었다(롬 1:4). 

하나님의 전략으로(아이왕 앞에선 여호수와 같이. 수 8:15), 그는 마치 죽음 앞에서 매맞은 사람처럼 죽음에 굴복했다. 그러나 그것은 보다 영광스럽게 죽음을 정복하고 무덤을 승리하기 위해서다. 

그는 "치욕의" 몸을 내던졌다. 마치 하나의 밀알처럼(12:24) 이 세상에 맞는 생명을 포기하여, 저 세상에 맞는 생명을 입으시는 것이다.

[c] 그는 그의 고난과 죽음을 완전히 자원하였다(18절).

 "아무도 내 뜻 없이는 나의 목숨을 빼앗아가지 못하고, 또 그럴 수도 없다 그러나 나는 내 생명을 자유로이 포기하는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의 행동과 행위로써 바친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을 버릴 권세와 다시 얻을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무도 못가진 권세이다.

첫째, 여기서 생명의 주님, 특별히 그 자신의 생명의 주(主)로서의 그리스도의 권능을 본다.

그는 모든 세상과 맞서 "자기의 생명을 지킬"권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생명은 그 자신의 동의 없이는 빼앗아 갈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폭풍으로 빼앗긴 것처럼 보였을 때도 실제로는 보존되었다. 그것은 침해되지 않았고 결코 빼앗기지 않는다. 

주 예수는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박해자들의 손으로 넘겨진 것이 아니라, 그의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에 그들의 손에 자신을 맡겼던 것이다. "아무도 나의 생명을 빼앗아 갈 수 없다." 이것은 가장 용감한 영웅에게도 결코 주어지지 않았던 하나의 도전이었다.

또 그는 그의 생명을 버릴 권세를 갖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가 원하면 영혼과 육체 사이의 결합을 풀 수 있었고, 아무런 강압이 없이도 영혼과 몸을 서로 갈라놓을 수 있었다. 몸을 자발적으로 취한 그는, 그것을 자발적으로 다시 버릴 수 있었다. 이것은 그가 큰 소리로 외쳤을 때 나타났다.

또 그는 그것을 할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잔인한 수단, 곧 그것으로 우리 자신의 생명을 끝낼 수단을 발견할 수 있다 해도, "우리는 합법적으로 행할 수 있을 때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생명을 포기할 자유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권한을 가졌다. 그는 (우리가 그렇듯이) 생명이나 죽음에 대한 채무자가 아니라 완전히 그것들을 넘어섰다.

그는 "생명을 다시 가질" 권세를 가졌다. 우리은 그렇지 못하다. 한 번 버려진 우리의 생명은 "땅에 엎어진 물과도" 같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생명을 버리고도 다시 회복할 수 있다.

둘째, 여기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본다. 

아무도 법률에 의해 그의 생명을 요구할 수 없고, 그 생명을 강제로 빼앗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스스로 생명을 내놓았다." 그래서 구주가 되셨다. "보라, 내가 여기 있다." 

그리고 우리의 사정이 또한 그것을 요구한다. 그가 그를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한다. "여기에 내가 있다. 이들을 보내라. 이 뜻을 따라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히 10:10). 그는 제사를 드리는 자요, 동시에 제물이었기에, 그 자신을 바쳤다.

[d] 그는 아버지의 생명과 약속을 표현하기 위해 이 모두를 행하였다. "이 계명을 내가 내 아버지로부터 받았다." 

이에 대한 그의 결의는 단호하다. 그런데 그것은 그의 자발적인 실행보다 앞서, 하나님이 필수적이게끔 만들어 놓은 그러한 계명이 아니다. 이것은 중재의 율법이며,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새겨 두신"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것을 "즐거이" 행한다(시 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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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투는 유대 사람들(요 10:19-21)

여기서는 앞에 나온 설교의 내용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해서 사람들의 의견들이 엇갈리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에게 "분열"이  생겼다. 그들은 서로 의견을 달리 하였다. 상이한 그 의견들은 그들을 격노와 파벌로 번져버렸다. 그와 같은 요소를 그들은 이전에도 가지고 있었다(7:43; 9:16). 

한 번 분열이 있었던 곳에는 조그만 사건들이 다시 분열을 만들게 된다. 고치는 것보다는 찢기가 쉽다. 이러한 분열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계기가 된 것이다. 

혹자는 그 말이 그들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연합시켰으리라고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예견했듯이 그 말은 그들을 분열시켰다(눅 12:51). 그러나 연합해서 죄를 짓기보다는 그리스도의 교리에 관해서 "갈라지는" 것이 낫다(눅 11:21). 그 논쟁을 살펴보자.

Ⅰ. 이에 어떤 사람은 너무 분개해서 사람들의 면전에서 공개적으로, 혹은 자기들끼리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들을 헐뜯었다. 그들은 말했다. "그는 악마요, 미쳤다. 어찌하여 너희는 그의 말을 듣는가?"

1. 그들은 그를 악마에 잡혔다고 비난했다. 

가장 나쁜 성격을 가장 좋은 사람에게 함부로 붙여버렸다. 그는 산만한 사람, 헛소리하고 정신 착란에 빠져 정신 병원에 있는 사람 외에 아무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사람이 저 세상에 대해서 진지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설교하면, 그는 열광주의자같이 말한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행동은 공상과 가열된 두뇌와 광적인 상상력으로 흐르고 있다고 욕을 먹게 될 것이다.

2. 그들은 예수의 청중들을 가소롭게 여기고 있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그의 말을 듣느냐? 어찌하여 그가 자기 말을 스스로 살펴보도록 하지 않는가?" 

사탄은 말씀과 규례(의식)에 싫증을 내게 만들고 거기에 참예하는 것을 연약하고 어리석은 일이라 하여 많은 사람을 파멸시키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의 일용할 양식을 그런 식으로 업신여기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더 긴요한 것은 웃어넘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신앙을 갖는 자는 곧 "그들이 어찌하여 그의 말씀을 듣는가"에 대한 훌륭한 해명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Ⅱ. 다른 사람들은 그와 그의 설교를 방어하는 편에섰다. 

물살이 세었어도 그것을 거스려 감히 헤엄쳐 나갔다. 그들이 그를 메시야로 믿지는 않았다 해도 그와 같이 색다른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그에 관해 그 이상은 말할 수 없었지만, 이것만은 말하려 했다. 그가 지혜 있는 사람이고, 귀신들려 있지 않았고, 무감각한 것도 무례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경우가 다르다면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해 아무런 애착을 못 가졌을 사람들도 부조리하고 가장 비합리적인 비난이 퍼부어지는 것을 보면, 그리스도와 복음을 의해서 분기하게 된다. 그들이 주장했던 두 가지 일들.

1. 그리스도 교리의 우수성.

 "이것은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다. 그것은 빈 말들이 아니다. 미친 사람은 이런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악마에 꽉 사로잡힌 사람의 말도 아니고, 악마와 결탁한 사람의 말도 아니다." 

기독교는 만일 참 종교가 아니라면 확실히 세상에 아직 없었던 가장 위대한 속임수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그것은 모든 거짓말의 아버지인 악마의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리는 악마의 교리가 아닌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직접적으로 악마의 나라에 거슬리는 것이기 때문이며, 사탄은 그 자신과 맞설 만큼 죄가 많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그리스도의 말씀들 속에 있는 거룩성이 너무 현저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며," 따라서 하나님이 보내신 자의 말씀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지옥으로부터가 아니라 결국 하늘로부터의 말씀이다.

2. 그의 기적들의 권능. 

귀신들린 자 곧 악마가 "장님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는가?" 미친 자나 행악자가 기적을 행할 수는 없다. 

악마들은 그와 같은 기적들을 행할 만한 자연의 힘을 장악하고 있지 못하다. 또 그들은 자기들이 할 수 있다 해도 사람들이 그와 같은 일을 행하도록 허락해 줄 좋은 친구들도 아니다. 

귀신들은 사람들의 눈을 열어 주기보다는 닫히게 할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귀신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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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사람을 피하신 예수(요 10:22-38)

여기서는 성전에서 그리스도와 유대인들이 다시 만남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온 은혜로운 말씀과 그들의 악의 있는 말 중 어느 것이 더 이상한 것인가를 말하기는 어렵다.

Ⅰ. 이러한 모임이 있었던 시기를 생각해 보자. 

"그때는 수전절이었고, 겨울이었다." 성전이 모독되고 제단이 파괴된 후에, 유다마카비혁명에 의해서 이루어진 성전의 새로운 제단 봉헌과 정화를 기념하기 위해서 매년 준수된 절기였다. 마카비가(家)의 역사에는 그것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마가비상 4장). 또 그것에 관한 예언도 있다(단 8:13, 14). 

그 축제(하누카절기)들에 대해서 자세한 것을 알려면 마카비하 1장18절을 보라. 그들의 자유 회복은 그들에게 있어선 죽음으로부터의 삶과 같은 것이었고, 그것을 기억하면서 매년 기슬루월 25일, 곧 12월초에서 시작하여 그후 7일 간  계속지켰다. 

이 축제는 거룩한 축제들처럼 예루살렘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장소에서 모두 지켰다. "거룩한 시간"(이것은 "날"을 정화할 수 있는 유일한 거룩한 제도이다)으로써가 아니라 부림절과 같이(에 9:19) "좋은 시간"(즐거운 시간)으로 지켰다.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에 가려고 계획하셨다. 축제에 참가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 축제는 꼭 참가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 8일 간을 위해 이용하려고 해서였다.

Ⅱ. 그것이 있었던 장소(23절). "예수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행각을 걸으셨다." 

소위 솔로몬 행각(행 3:11)., .현재 성전위치는 약간 서쪽으로 이동된상태이다...솔로몬에 의해 건축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제1성전에 그의 이름을 붙였던 바로 그 장소에  세워진 행각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 운다. 그리고 그 이름은 성전에 대한 보다 큰 명성을 위해서 보존되었다. 그리스도는 바로 그곳을  걸으셨다. 

그것은 거기에서 열리는 대(大) 산헤드린회의의 과정을 지켜보기 위해서다(시 82:1). 그는 자기가 지켜야 할 것을 듣고, 거기에 맞게 봉사할 준비를 하시고 계셨다. 아마 "홀로" 걸으셨을 것이다. 그는 성전의 멸망을 예견하면서 시름에 잠긴 채 걸으셨다. 그리스도에 대해 할 말이 있는 자들은 성전에서 그를 발견하고 거기서 그와 함께 걸을 수 있다.

Ⅲ. 거기에 있었던 회의 내용을 보자.

1. 어려운 질문을 유대인들이 그에게 던졌다.(24절). 

그들은 그를 시험하기 위해, "그의 주위를 둘러쌌다." 그는 그들에게 친절을 행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은 그를 해할 기회를 잡았다. 

선한 의도에 대해 악의를 품는 일은 흔한 일이다. 그는 성전이나 아버지의 집에서도 조용한 시간을 즐길 수 없었다. 그들은 그를 포위 했다. "벌떼처럼 그를 둘러쌌다." 

그들은 만족시켜야 할 공동의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듯 그 주위로 나왔다. 종합적이고 끈질긴 진리 추구를 가장하면서, 우리 주님을 공격할 의도로 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유대인들의 입을 대신하는 것처럼, 자기 민족의 생각을 이야기하려 했다. "당신이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의심케 하시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인지를 우리에게 말해 주시오."

(1)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가 지금까지 자기들에게 모호한 주장을 했다는 듯이 그리스도와 싸우고있다. 

‘텐 프쉬켄 휘몬 아이레이스’ - 즉 언제까지 당신은 우리의 마음을 몰래 훔치시렵니까? 혹은 "우리의 영혼을 빼앗아 가시렵니까?"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것을 이렇게 해석했다. 곧 압살롬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훔쳤던 것처럼, 그가 우회적인 방법을 가지고서 정당치 못하게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차지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유혹자처럼 "단순한 사람들"을 속이고 "그들을 따르는 제자들을 내어쫓는" 것으로 보고 있다(롬 16:18; 행 20:30). 

그러나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그것들을 우리처럼 이해하고 있다. "언제까지 당신은 우리를 서스펜스 속에 두시렵니까? 언제까지 우리는 당신이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어야 합니까?"

① 주 예수가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충분히 입증했는데도, 아직 의심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불충실과 억센 편견의 영향이었다. 

그들은 쉽게 납득-만족할 수 있을 때에도 의도적으로  받아드리기를 주저했다. 그 싸움은 저들이 기대하던 그런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해 주는 타락성 사이의 싸움이었다. 

회의자가 되기로 작정한 자들은 그들이 원한다면 저울을 움켜잡아 가장 올바른 논점도, 가장 사소한 반대를 물리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그래도 저울의 눈금은 여전히 평형을 가리킨다.

② 그들은 마치 그가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함으로써 자기들을 "의심하게 만들었다"는 식으로 불경스럽고 위선적인 비난을 했다. 

그러나 사실은 자신들의 편견들을 스스로 노출시켰을 뿐이다. 만일 지혜의 말씀들이 의심스럽게 보인다면, 그 결점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눈에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이해하는 자, 이해하려는 자에게는 아주 평이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려 하셨는데, 우리는 스스로 의심한다.

(2) 그들은 그가 메시야인지 아닌지를 직접적이고 단호하게 대답하려고 그에게 도전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믿듯이,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나는 세상의 빛이요 선한 목자이다. 하는 비유식으로가 아니라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해 주시오. 당신도 세례 요한처럼 그리스도가 아닙니까?"(1:20) 

이러한 강력한 질문은 "선한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마치 진리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듯이, 진리를 열망하고 있는 척하였다. 그러나 그 질문은 "실제로는 나빴고," 옳지 않은 계획으로 짜여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만일 자신이 그리스도였다고 그들에게 분명하게 이야기해야 했다면, 로마 정부의 더없는 질투와 가혹성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메시야는 왕이 되어야 했고, 따라서 메시야인 체하는 자는 누구나 사기꾼으로서 박해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이 그들이 노리고 있던 일이었다. 또 그가 자기는 그리스도였다고 아주 분명하게 말하면, 그들은 "당신이 당신 자신에 대해 증거 한다"고 곧장 말했을 것이다(8:13).

2. 이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을 보자.

(1) 그는 자기가 그들의 배신과 회의에 대한 부속물이 전혀 아님을 밝혔다. 그러면서 다음을 지적했다.

① 그가 이미 말하였던 내용을 지적했다. "내가 말했노라."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자였으며, 스스로 생명을 가졌으며, 심판의 권위 등등을 가졌다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이분이 그리스도가 아닌가? 

그는 그들에게 말했으나 그들은 믿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단지 그들의 호기심 충족을 위해 그들에게 다시 언급해야 하는가? 

그들은 자기들이 의심만 했던 것처럼 가장했으나, 그리스도는 그들이 믿지도 않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종교에 있어서 회의주의는 형편없는 불신보다 나을 바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러 이렇게 가르치셔야 한다고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룩한 계시를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이것을 믿지 않으면, 그것이 우리의 기질에 잘 맞아도 안 믿을 것이다.

② 그는 완전히 순수할 뿐만 아니라 큰 유익도 주었으며 그의 교훈의 일부이기도 했던 것, 곧 그의 삶을 실증하는 그의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특별히 그의 교훈의 확증을 위해 사용했던 그의 기적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이 같이 하지 않는 한, 그와 같은 기적들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2) 그는 가장 평범하고 강력한 논증으로 그들을 확신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하는 그들의 완강한 불신을 비난했다. 

"너희는 믿지 않았다. 너희는 믿지 않았다. 너희는 언제나 그랬듯이 너희의 불신을 완강히 고집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고 있는 이유는 대단히 놀랍다. "너희는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믿지 않았다.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희는 나에게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① "너희는 나의 양으로 지정되지 않았고, 유순히 교육받을 기질도 없고 메시야의 교리와 법을 받아들일 성향도 가지고 있지 않다. 너희는 내 양떼의 무리가 되지 않을 것이고, 와서 보거나, 와서 내 음성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들은 죄악과 배신이 합쳐진 묶음들이다.

② "너희들은 내 일군들이 되려 하지 않는다. 너희는 은혜와 영광을 가져오도록 하기 위해 내 아버지가 나에게 준 자들이 아니다. 너희는 선택된 자들이 아니다. 그리고 너희가 그것들을 주장한다 해도, 너희의 불신은 너희들이 선택된 자 중에 들지 않았다는 분명한 증거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신앙의 은혜를 주지 않은 자들은 결코 하늘의 행복을 얻을 수 없음을 유의하라. 솔로몬이 부도덕에 관해 한 말은 불신에도 맞는 말이다. 그것은 "깊은 함정이고, 주의 진로를 당하는 자는 거기에 빠지리라"(잠 24:14). 

선택된 자속에 포함되지 않음은 온당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우연한 이유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예정의 결과이다."

(3) 그는 이 기회를 자기 양떼들인 사람들의 은혜로운 처지와 행복한 상태를 모두 묘사한다. 왜냐하면 지금은 "그들이" 그렇지 못하다 해도, 그와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① 그들이 자기 양떼가 아니었음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그는 그들이 그것을 듣도록 계획하였다(16절). 

첫째, 그들은 "그것이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라"는 것을 안다(아 2:8). 

그들은 그것을 기뻐하고, 그들이 그의 말을 듣기 위해 그의 발아래 앉아 있는 것이 그들의 생리에 맞는다. 그들은 그것에 따라서 행한다. 그리고 그의 말을 규칙으로 삼는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부름에 귀가 먹고 그 호소를 듣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 양떼로 보지 않을 것이다(시 58:5).

둘째, 그들은 "그를 따른다." 

그들은 그의 모든 명령에 기꺼이 복종함으로써 그리고 그의 정신과 행동 양식에 기쁜 마음으로 순응하고 그의 안내를 따라간다. 명령의 말씀은 언제나 "나를 따르라"가 된다. 

우리는 그를 우리의 지도자요, 대표로 보아야 하고, 그의 발자취를 밟고 그가 걸었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의 말씀의 규정, 그의 섭리의 상징들, 그의 정신의 방향들을 따라야 한다. 그 "어린양(곧 "양떼들의 리더")을 따라가야 한다." 

우리가 "그를 따르지"않는다면, 우리는 그의 목소리를 건성으로 들을 것이다.

② 그리스도의 양떼들이 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커다란 불행이요 비참이었음을 그들에게 확신시켜 주기 위해서, 여기서 축복 받은 상태와 그런 자들의 경우를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가난하고 경멸받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양떼가 아닌 자들의 힘과 위세에 대한 부러움을 막아 줄 것이다.

첫째, 우리 주 예수는 그의 양떼를 "식별하신다." 

그들은 "나의 목소리를 듣고, 나는 그들을 알고 있다." 그는 그들을 다른 자들로부터 구별하고(딤후 2:19), 개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는다(시 34:6). 

그는 그들의 소원과 바람을 알고 있다. 역경 속에 있는 그들의 영혼들을 알고 있고 그 속에서 그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알고 있다. 그를 다른 자들은 멀리서 아나 그들은 가까이 알고 있다.

둘째, 그는 그들에게 알맞는 행복을 공급해 왔다.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라"(28절).

a. 그들에게 내려진 재산은 풍부하고 가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이요 영생이다. 사람은 살아 있는 영혼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본성에 알맞게 공급된 행복은 생명이다. 사람은 불멸의 영혼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같이 움직이는 행복이요 영생은 "불멸의 영혼"의 행복이요 가장 좋은 선이다.

b. 전달 방법은 "자유스럽다"(무료다). 

나는 그것을 그들에게 "주노라." 그것은 바겐세일 하는 것도 비싸게 파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로운(값없이 주는) 은혜에 의해 주어지고 있다. 

주시는 분은 그것을 줄 권세를 가지고 있다. 생명의 근원이신 분, 영원하신 아버지는 그리스도가 영생을 줄 권위를 허락하셨다.(17:2). 

나는 그것을 앞으로 "줄"것이 아니라 지금 주고 "있다." 그것은 현재의 선물이다. 그는 그것에 대한 확신을 주고 있다. 그것의 담보와 성실성, 그것의 처음 열매와 시식, 곧 씨앗 속에서, 발아 속에서, 그리고 싹 안에서, 하늘에서 시작된 "영원한" 생명인 "영적" 생명을 준다.

셋째, 그는 이 행복에 대한 그들의 안전과 보존을 위해 일해 왔다.

a. 그들은 영원한 파멸로부터 구출을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은 결코 영원히 망하지 않을 것이다." 문자적 뜻은 그러하다.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처럼 영원한 파멸도 있는 것이다. 영혼은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파멸되는" 것이다. 그것의 존재는 계속되지만 위로와 행복은 없다. 모든 믿는 자는 이 파멸로부터 구함을 받게 된다. 그들이 어떤 십자가를 지든, 그들은 "저주에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그가 지옥에 서야 완전히 파멸된다. 그들은 그곳으로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많은 양떼들을 가지고 있는 목자들은 때로 어느 것을 잃어버리거나 또 죽음을 당하게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의 양떼 중 아무 것도, 단 한 마리도 죽지 않게 하리라고 약속했다.

b. 그들은 그들의 "영원한 행복"에서 쫓겨날 수 없다. 

즉 그것을 그들에게 주고 있는 그가 그것을 보존할 것이다

(a) 그 자신의 권세가 개입한다. 

"아무도 그들을 내 손으로부터 빼앗을 수 없으리라." 이 양떼들에 관한 강력한 경쟁이 여기서 상상되고 있다. 목자는 그들을 그의 우리 안에 뿐만 아니라 그의 눈 아래 두고 있다. 그러나 "그의 손에서" 그들은 그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모든 그의 거룩한 자들은 당신 손안에 있나이다."신 33:37). 

구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적들은 아주 과감하기에, 그들은 그의 손에서 빼앗으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양들은 그의 것이고, 그들은 곧 그의 보호이어서, 적들은 그것을 할 수도 없고 하게도 되어 있지 않다. 안전한 자들은 주 예수의 손에 있음을 유의하라. 거룩한 신자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구원은 그들 자신의 보호 속에 있지 않고 그 중재자의 보호 속에 있다. 

바리새인들과 통치자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의 제자들을 비난하고 위협함으로써 제자들을 겁주려고 온갖 일을 다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이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b) 마찬가지로 그의 아버지의 힘이 그들에의 보호를 위해 약속되고 있다.(29절). 

그리스도는 지금 약하게 보였다. 따라서 그의 안전성이란 "보잘 것 없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는 아버지를 보다 더 큰 안전의 방어자로 모셔 오고 있는 것이다.

[a] 아버지의 권능 "내 아버지는 모든 자보다 크시다." 

교회의 다른 모든 "친구들"보다 위대하고 모든 다른 목자들보다 위대하며, 정치인과 성직자보다 위대하며, 그들이 할 수 없는 것도 하실 수 있다. 

그와 같은 목자들은 게으르고 졸기 쉬워서 양떼들을 잃기 쉽다. 그러나 그는 그의 양떼를 밤낮으로 지키신다. 또 그는 모든 교회의 적들보다 위대하며, 교회의 권세에 반대하는 모든 것보다 위대하며, 그들의 해(害)로부터 자신을 보존하실 수 있다. 또 그는 하늘과 땅의 힘을 합한 모든 것보다 위대하다. 

그는 악마보다 위대하다. 비록 악마가 그 교활함이 뛰어나다 해도 그렇다. 또 붉은 용보다 힘이 세다. 그의 이름이 "군대"이며 그가 "공중 권세와 권력자들"을 좌우 할 수 있다 해도 그렇다. 악마와 그의 천사들이 많이 도전했으나 아직도 이기지 못하였다(계 12:7, 8). "높은 데 계신 주님이 보다 힘세다".

[b] 양떼들에 대한 아버지의 관심. 

이것을 위해 이 힘이 그들에게 개입되고 있다. "그들을 내게 주신 것은 내 아버지시며, 그가 그의 선물을 명예를 다해 지키시고 있다." 

그들을 아들에게 맡겨 다스리도록 하신 아버지는 그들을 계속 돌보실 것이다. 그 모든 하나님의 권능이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위해 개입되고 있다.

[c] 이 두 가지로부터 추론된 성도의 안정이 나온다. 

그렇다면 아무도(사람이거나 악마이거나) 그들을 아버지의 손으로부터 빼앗아갈 수 없고, 그들이 지니고 있는 은혜를 빼앗을 수 없고 그들에게 주도록 되어 있는 영광을 감추어 버릴 수 없으며, 그들을 하나님의 보호로부터 제외시킬 수 없으며, 그들을 다스릴 수 없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지지하고, 강화해" 주시는 그 아버지의 권세를 스스로 경험했었다. 따라서 그의 신자들을 모두 아버지 손에 맡기신다. 

구속하는 자의 영광을 확보했던 아버지는 구속받는 자의 영광도 확보할 것이다. 더구나 그리스도의 양떼들이 강한 위로를 받도록 그 안전성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그는 두 계획자의 일치성을 주장하고 계신 것이다.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다. 그리고 주를 따르는 자들과 그들의 안전을 보호해 주기 위해 공동으로 빈번히 일하여 왔다." 이것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사업으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었던 조화나 동의 또는 선한 이해 그 이상의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모든 선한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협동하는 한 그와 하나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말은 아버지와 아들의 "본성의 일치"를 의미함이 분명하다. 그분들은 본질에 있어서 똑 같고 힘과 영광에 있어서 동일하다. 

교부들은 그 인격들의 다름과 복수성를 주장하기 위해, 즉 아버지와 아들은 둘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사벨리안 주의자들에게 반대하였고, 동시에 그 본성의 하나임을 주장하여 이 두 분이 "하나"임을 말하기 위해서 아리우스 주의자들에게도 반대하였다. 

그 말의 뜻에 대해 우리가 침묵을 지키면 유대인들이 그를 향해 던졌던 그 돌들이라도 소리칠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도 그를 여기서 하나님 자신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며(33절), 그리고 그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도 "자기 손"으로부터 양떼를 빼앗을 수 없으니, 그것은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기 때문이라 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본질과 기능에서 하나가 아니라면 이 말은 의미가 없어진다.

Ⅳ. 이 설교가 야기시킨 유대인들의 분노와 격분을 보자. 

"유대인들은 다시 돌을 들었다.(31절). 그것은 이전에 사용된(8:59) 단어가 아니다. ‘에바스타산 리두스’ - 즉 그들은 돌들을 날랐다. 즉 커다란 돌들, "짐짝"과 같은 돌들, 마치 범인들에게 사용하던 것과 같은 돌들을 가져온 것이다. 

그들은 마치 어떠한 사법 과정도 없이 처형해도 된다는 듯, 얼마 떨어진 곳에서 돌을 "가져 왔다." 그가 확증을 보였기에 더 이상 재판도 필요 없게 되었다는 식이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에게 가했던 치욕의 불합리성은 우리가 다음을 고려할 때 잘 드러나게 될 것이다.

1. 그들은 그가 그리스도였는지 아니였는지를 명백하게 말하라고 "오만하게" 도전하였다. 

그리고 그가 "자기"는 그리스도라도 말했을 뿐 아니라 그렇게 자신을 입증했으나, 그들은 그를 사기꾼으로 정죄 했다. 

진리의 전파자들은 "겸손하게" 말하면 겁장이로 낙인찍힐 것이다. 만일 "용감하게" 그렇다면, 무례한 사람으로 낙인찍힐 것이다. 그러나 "지혜는 자녀들(경과)에 의해서 입증된다"(마 11:19).

2. 그들이 유사한 시도를 행하기도 전에 그것은 허사로 돌아갔다. "그는 그들 사이로 피하셨다"(8:59).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사악한 시도를 반복한다. 뻔뻔스런 죄인은 하늘에 돌을 던지려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자기들 머리에 떨어진다. 그리고 그들은 일찍이 그에 대하여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잘된 자 없건만, 전능하신 분에 대항하려고 굳게 무장한다.

Ⅴ. 이 격분의 상황에 있는 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부드러운 충고(32절). 

"예수는 그들에게 답하셨다." 우리는 그들이 어떤 것을 말했는지 모른다. 그들이 군중을 선동하여, 그들이 자기들과 함께 예수 주위에 모이도록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면서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돌로 그를 치라, 돌로 그를 치라." 

나중에는, "십자가에 그를 못 박으라"고 했듯이 그가 하늘의 불로 엄하게 그들에게 대답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내가 너희에게 나의 아버지의 권능으로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보여 주었는데 그 중 어떤 일들 때문에 너희가 나를 돌로 치려하느냐?" 

말씀들이 그토록 부드러웠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의 돌과 같은 마음이 녹았을 것이라 생각하리라. 그의 적대자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그의 사업들, 즉 그의 "선한 사업들," 훌륭한 그리고 위대한 사업들을 예로 들어 논증한다. "선한" 사업이란 "좋은" 일과 "훌륭한"일을 모두 뜻한다.

1. 그의 일을 지니고 있는 거룩한 힘은 그들이 가장 완고한 배신자임을 밝혀 준다. 

그 일들은 자연의 한계와 과정을 크게 뛰어 넘어서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일임을 말해준다. 이런 일들을 그가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는 그것들을 구석에서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행하였다. 

그의 일들을 그 시험을 거쳤고, 가장 호기심 많고 냉철한 방관자들에게도 그 자체를 증거해 주었다. 그는 오직 전시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그런 촛불 밑에서 그의 일들을 보여 주지 않고, 세계 앞에서 백주에 보여 주었다(18:20; 시 106:6 을 보라). 

그의 일들은 그렇게 부정할 수 없도록 밝혀졌기 때문에, 아버지의 위탁의 타당성에 대한 논쟁할 수 없도록 밝혀졌기 때문에, 아버지의 위탁의 타당성에 대한 논쟁할 수 없는 "시위"가 되었다.

2. 그의 일들이 지니고 있는 거룩한 은혜는 그들이 가장 배은망덕한 자임을 선고하였다. 

그가 그들 가운데서 행했던 사업들은 기적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비였기도 했다. 그들을 놀라게 하는 기적의 일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복을 주었고, 그들에게 사랑을 받게끔 되었다. 

그는 병자를 고쳐 주셨다. 앉은뱅이를 낫게 하셨고, 귀신들을 쫓아 버렸다. 그 혜택은 고침을 받은 당사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대중에까지 퍼졌었다. 이런 일을 그는 반복했다. "이제 이것들 중 어느 것 때문에 너희가 나를 돌로 치려하느냐?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어떤 해(害)를 끼쳤다거나 혹은 너희를 성나게 하였다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너희가 내게 시비를 건다면, 그것은 내가 너희에게 해 준 선한 일 때문일 수밖에 없다. 어느 것 때문인지 내게 말하라." 다음을 유의하자.

(1)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항하는 우리의 죄악 속에 깃들어 있는 무서운 배은망덕이 그 죄를 더 악화시킨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얼마나 강하게 역설하는가 보라(신 32:6; 렘 2:5; 미 6:3).

(2) 우리는 이유 없이 우리를 미워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랑 때문에 우리의 적이 된 사람들을 만나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시 35:12; 41:9). 

그리스도는 "어느 것 때문에 나를 돌로 치려느냐?"고 물었다. 이것은 자신의 무죄성에 크게 만족하고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또 이것은 수난 시대의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 또 그는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에게 그 진짜 적대감의 이유를 생각해 보라고 하신다. 

이웃을 박해하는 자는 모두 이런 질문을 물어야 한다. "왜 우리가 그를 핍박하는 가?" 욥이 그 친구들에게 준 충고와 같다.(욥 19:28).

Ⅵ. 그들이 그리스도를 해치려 했던 것에 대한 그 이유를 보자(33절).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맹렬한 박해자들 조차도 그들 스스로를 위해 변명할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무슨 죄인들 그 자체를 덮어 줄 무화과 잎사귀를 못 찾겠는가?

1. 그들은 선한 사업을 한 그를 박해하는 자기들 나라의 원수로 생각하기는 싫었다. "선한 일 때문에 우리가 당신을 돌로 치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그들은 그와 같은 그의 사업들 중 어느 것도 좀처럼 선하다고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불치의 병자(5절)와 장님(9장)에 대한 그의 치료는 도저히 그 마을에 대해 선한 일들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이 안식일에 행해졌다하여 오히려 죄가 무거워졌다. 

그러나 그가 그와 같은 어떤 선한 일들을 행했었다면, 물론 이것들이 실제로 그들을 가장 격노시켰던 일이라 해도 "그것들 때문에" 그를 돌로 친다고 인정하지는 않았다(11:47). 따라서 아무리 터무니 없다해도 그들은 스스로의 부조리성을 시인할 수 없었다.

2. 그들은 신성모독 때문에 그를 핍박하려 하므로 하나님과 그의 영광에 대한 친구들로 생각되기를 바랐다. "사람인 당신이 당신 자신을 하나님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오." 여기서 이런 것을 볼 수 있다.

(1) 율법에 대한 거짓 열심이다. 

그들은 겉보기에는 하나님의 엄위를 크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에게 비난이 퍼부어지면 참을 수는 없다는 듯이 보였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자는 "돌로 쳐" 죽임을 당해야 했다(레 24:16). 그들은 마치 사도행전26장9절과 같이 자기들이 시도하였던 일을 이 율법이 정당화해 줄뿐만 아니라 거룩하게 해 준다고 생각했다. 

비열한 행동들은 때로 그럴듯한 위선들로써 가리워진다. 잘 훈련된 양심보다 더 "용기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잘못된 양심보다 더 격노하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사 66:5; 요 16:2 참조).

(2) 복음에 대한 실제적인 증오가 있다. 

그리스도를 신성 모독자로 묘사하는 것보다 복음에 대한 더 커다란 무례는 없다. 가장 나쁜 자들이 가장 좋은 사람을 가장 악질적으로 대하는 일은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니다.

① 그에게 부과된 죄과는 하나님을 "모독한"것이다. 

하나님 자신은 죄인들의 비난을 받을 수 없고, 어떠한 해도 입을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증오는 그 이름에 대한 원한을 내뱉는 것이고, 따라서 앙심을 보여 주는 것이다.

② 그 죄과의 증거. 

"당신은 사람이면서 자기를 하나님이라 했고." "그가 하나님인"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데, 우리가 그를 우리 자신과 하나로 여긴다면 그 영광을 빼앗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이 또 그의 영광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와 같이 우리 자신이나 어떤 피조물을 그와 함께 묶을 때에 그로부터 그 영광을 유린하는 것이 되고 만다.

첫째, 따라서 그들이 그가 한 말은 자기가 하나님이라 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은옳았다. 그는 자기가 "아버지와 하나"였으며, "영생을 주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저들의 말을 부정하지 않고 있다. 그것이 잘못 추리되고 있는 것이면 그리스도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둘째, 그들은 그를 "단순한 사람"으로 간주했을 때 많은 실수를 범하게 되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으로 나타난 자가 자기를 메시야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아들에게 갈 최고의 명예를 주장하는 것은 불합리하고 불경하다고 했다. 다음을 유의하라.

a. 예수는 단지 "하나의 인간"이며, 소시니안주의자들처럼 " 피조된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그를 사실상 신성모독자로 보는 것이나, 그것을 스스로 입증하지는 못하고 있다.

b. 사람인 자, 죄 많은 자, 그러면서 자신을 마치 교황처럼 신으로 만들어 놓는 자, 거룩한 권세와 특권을 외치고 있는 자는 의심할 바 없이 "모독자"요, "적 그리스도"이다.

Ⅶ. 그들의 고발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그걸 모독자(34절)로 욕했던 것을 선용하셨다. 거기서 그는 자신을 다음 두 가지 주장을 통해 모독자가 아니라고 증거 한다.

1.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의 논증. 

그는 그들의 율법 곧 구약성서에 "기록되었던" 것을 호소했다. 그리스도에 반대하는 자는 누구나 성서를 "자기편"이라고 한다. 기록된 바(시 82:6) "나는 너를 신들이라고 말하노라." 

이것은 aminore ad majus - 즉 보다 작은 것에서 보다 큰 것에로의 논증이다. 그들이 신들이었다면, 나는 더구나 그렇다. 다음을 살펴보자.

(1) 그 본문(35절)을 설명하였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를 신들이라 하셨고, 또 성경은 폐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탁의 말씀이 사사들처럼, 그들의 직무에로 그들을 지시하면서 그들에게 왔고, 결국 그들은 신들이라 불리워진다.(출 22:28). 

모세와 같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은 직접적으로 왔다. 다른 사람에게는, 제도화된 규례의 방법으로 왔다. 정치 제도는 거룩한 기구이다. 그리고 그 치리자들은 하나님의 위탁자들이다. 따라서 성서는 그들을 신들이라 불렀다. 그리고 성서는 폐할 수 있거나 갈라지거나 결점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옳다."(마 5:18).

(2) 그는 그것을 적용하였다. 

일반적으로 많은 것이 손쉽게 추론된다. 곧 그들은, 아직도 그들 자신도 통치자들을 그렇게 부르고 있을 때, 그리스도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은 것에 대해 그를 모독자로 저주한 것은 경솔하고 비이성적이었다. 그 점에서는 성서가 그들을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그 논증은 좀더 진전한다(36절). 만일 정치인들이 국가의 정의를 다스리도록 위임되었기 때문에 신들이었다고 불리워졌다면,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여 보내신 자들을 어찌하여 모독죄를 진자라 말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주 예수에 관계된 두 가지 일들을 보게 된다.

① 그를 영광스럽게 하신 "아버지"에 의해 그에게 이루어진 명예. 

아버지는 "그를 거룩하게 하셨고," "세상에 보내셨다." 

치리자들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왔을 뿐이며, 정치의 영이 마치 사울에게처럼 어느 정도로만 그들에게 왔을 뿐인데도,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리워졌다. 그러나 우리 예수는 그 자신이 "말씀"이시고, "측량할 수 없이 영"을 가지고 계셨다. 

치리자들은 특별한 지방, 시, 나라를 위해 구성되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우주적인 전권을 지니신 채 "세상에" 보내졌다. 아버지는 "그를 거룩하게 하셨다." 곧 그를 임명하셨고 그에게 중재자의 직무를 맡겼다. 그를 "거룩하게 하심"은 그를 "인 찍는" 것과 똑같다(6:27). 

아버지께서는 보내는 자를 또한 거룩하게 하며, 거룩한 목적들을 위해 계획하신 자에게 거룩한 원리와 정신을 주신다. 거룩한 하나님은 보상하실 것이고, 따라서 그가 발견하여 거룩하게 한 자들만 고용할 것이다. 

아버지의 거룩하게 하심과 그를 보내심은 여기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스스로 일컬은 것에 대한 하나의 충분한 근거로써 보증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거룩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워 졌기 때문이다(눅 1:35; 롬 1:4 를 보라).

② 유대인들이 끼친 치욕을 규탄한다. 

그들은 아버지가 그처럼 높이신 자를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었다 해서 "모독자"였다고 불경하게 말하였다. 

"그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가? 감히 그렇게 말하는가? 감히 하늘을 거역하여 네 입술을 두려는가? 그가 진리를 속인다고? 가장 의로운 그를 저주하려 애쓰는가? 나의 얼굴을 보고, 할 수 있으면 말하라. 자! 하나님의 아들을 모독자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가 정죄하러 온 그 악마가 그에 대해 그렇게 말했었다면, 그것은 그리 이상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르치고 구하러 온 사람들이 그에 대해 그렇게 이야기해야 했다면, 가르치고 구하러 온 사람들이 그에 대해 그렇게 이야기해야 했다면, 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있을 수 있는가! 

완고한 불신의 언어가 무엇인지를 보라. 사실 그것은 거룩한 예수를 "모독자"로 부르고 있다. 하나님의 입김으로 숨쉬는 인간들이 아직도 그와 같은 일들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과, 그와 같은 일들을 이야기해 왔던 사람들이 아직도 하나님의 입김으로 숨을 쉬도록 되어야 하는 것, 이 둘 중 어느 것이 더 놀랄 만한 것인지 모르겠다. 

인간의 사악함과 하나님의 참으심을 비교해 보라. 어느 것이 더 "놀라운가?"

2. "그 자신의 말씀"으로부터 논증했다(37,38절). 

먼저번에서는 그는 반론을 논박함으로써 모독자라는 비난에 대해 답변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그 자신의 주장을 하고 있고 그와 아버지가 하나님을 입증하고 있다(37,38절).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지 않는다면 나를 믿지 말라." 그가 그와 같은 모독적인 말을 치료불능으로 버려둘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것들에 대해 이유를 확실하게 밝혀 주고 있다. 다음을 유의하라.

(1) 그가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보자. 

그가 종종 그의 신용장으로 보증했었고 그의 위임에 대한 증거들이 되었던 그의 일들이다. 그가 자신의 일들의 "거룩성"을 통해 하나님이 보내셨음을 스스로 입증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기독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동맹되었음을 우리 스스로 입증해야만 한다.

① 그의 주장은 대단히 유력하다. 

왜냐하면 그가 행했던 일들은 "그의 아버지의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만이 오직 행하실 수 있었던, 그리고 자연의 정상적인 과정 속에서는 행해질 수 없는 것, 자연의 하나님의 주권으로 통치하시는 권세에 의해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Opera Deo propria - 즉 하나님에게만 독특한 일들 그리고 Opera Deo digna - 즉 하나님에게 가치가 있는 일들, 하나님의 권능의 일들이었다. 자신의 권능으로 자연의 법칙들을 조정하고 변경하고 통치할 수 있는 자는 확실히 그와 같은 법칙들을 처음으로 만드시고 실현하셨던 절대군주인 것이다. 

사도들이 그의 권능에 힘입어 그의 교리를 확인해 주기 위해서, 그의 이름으로 행했던 기적들은 이러한 주장을 확증했고, 또 그가 떠나가신 후에도 그것에 대한 증거를 계속했다.

② 그것은 아주 정당하고 명료했다.

첫째,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지 않는다면 나를 믿지 말라." 

그는 맹목적 신앙, 옹졸한 신앙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가 증거 했던 것 그 이상의 거룩한 일에 동의하는 것도 필요가 없다. 그는 자신을 사람들의 동정에 휘감기게 하지 않았고, 교활한 암시로 그들을 휘감아 버리지도 않았으며, 과감한 주장에 의해 그것들의 확실성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가장 정당한 방법으로 그들의 신앙의 모든 요구들을 포기시켰다. 

그리스도는 논증에 있어서 심지 않은 곳에서 풍성을 거두리라고 기대하는 그런 완고한 주인은 아니다. 신빙성이 충분한 계기가 없어서 못 믿는 불신으로 인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무한하신 지혜 그 자체가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러나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한다면, 그리고 거룩한 교리를 확인하기 위해, 부정할 수 없는 기적들을 행한다면, 너희가 나를 못믿겠더라도 너희가 의심이 많아 나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해도, 그 일만은 믿으라. 너희 자신의 눈들과 너희 자신들의 이성을 믿으라. 사실은 스스로 말하느니라." 

창조주의 불가시적인 일들도 그의 창조 사업과 일반 섭리에 의해 분명히 보여지고 있는 것처럼(롬 1:20), 구속자의 불가시적의 일들도 그의 기적들에 의해 보여졌던 것이다. 

그것은 권능과 사랑의 일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일들을 믿지 않는 자들은 "변명할 여지"조차 없다.

(2) "왜" 논증하는가. 그것은 "너희로 알고 믿게" 하기 위해서다. 

즉 그것을 생각하고 믿게 하기 위해서다. " 즉 그것을 생각하고 믿게 하기 위해서다.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음"을 분명히 알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는 말(30절)과 같다. 

아버지가 아들 속에 있었기 때문에, 아들 안에는 "하나님의 충만이 거했다." 그리고 그가 기적들을 행했던 것도 바로 하나님의 권능에 힘입은 것이다. 또 아들이 마찬가지로 아버지 속에 있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완전하게 알고 계신다. 이 점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알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왜냐하면 우리가 조사함으로써는 그것을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알고 "믿어야"한다. 우리는 그 밑바닥을 발견할 수 없을 때에 오히려 그 깊이를 깨닫고 경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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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강 건너로 물러나심(요 10:39-42)

우리는 여기서 유대인들과의 담판의 결과를 보게 된다. 혹자는 그것이 그들을 확신시키고 감동시켰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완고해졌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을 듣게 된다.

Ⅰ. 그들이 강제로 그를 공격했다. "그들이 다시 그를 붙잡으려 했다"(39절).

1. 그가 그들의 모독 시비를 완전히 대답했고, 그 비방을 물리쳐 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부끄러워서도 그를 돌로 치려는 시도를 다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를 붙잡아, 국가에 대한 범법자로 처벌하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군중의 폭동으로 자기들의 시도가 좌절되자 법을 핑계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려 했다.(계 12:13 을 보라). 혹은

2. 그가 그 자신에 대해 똑 같은 주장을 했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 앙심으로 나오려 했을 것이다. 이전에 말했던 것을 그는 사실상 다시 말하였다. 왜냐하면 "신실한 증인"이 한 번 말했던 것과 달리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똑 같은 분노를 가지고 그들은 그 동일한 분개를 표명하고, 그를 잡으려는 또 다른 시도로써 돌로 그를 치려 했던 그들의 시도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박해하는 자의 기질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것이 그 정략이다. male facta male tegere me per plunt - 즉 새로운 악행으로 과거의 악행을 덮으려 한다.

Ⅱ. 그는 그들을 피해 빠져나갔다. 

인간적인 어떤 약점들이 있는 졸렬한 후퇴가 아니라, 거룩한 권능이 넘치는 영광스러운 피신이었다. 그는 "그들의 손으로부터 피신하였다." 

어떤 친구의 도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지혜를 통해 그들로부터 안전함을 얻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베일을 쳤다. 혹은 그들의 눈앞에 연막을 치셨다. 혹은 그들의 손을 묶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을 변경시키지는 않았다. 

우리 주 예수에 대항하는 무기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유의하라(시 2:4). 그는 피신하셨다. 그가 겪을 고통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그 자신을 "구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자는 어떻게 "자신들을 유혹으로부터 구하며" 그들에게 "피할 길을 마련할 지"를 아신다.

Ⅲ. 그는 피신 속에 어떻게 하셨는가?

 "그는 다시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셨다"(40절). 우리 영혼의 감독자는 한 곳에 고정하여 있으려고 오시지 않았다. 여기 저기 두루 다니며 선행을 하시러 오셨다. 

이 위대하신 시혜자(施惠者)는 결코 길을 잃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가 어디로 가든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이 궁성이었다 해도 그는 시골을 방문하셨다. 그는 자신의 고향 갈릴리뿐만 아니라, 다른 곳, 심지어는 요단강 너 가장 먼데에 있는 곳까지도 방문했다. 다음을 관찰하자.

1. 그가 거기서 발견한 "은신처"는 무엇인가. 그는 그 지방의 조용한 지역으로 가셨고, 그는 "거기서 유했다." 거기서 그는 예루살렘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어떤 휴식과 고요함을 얻었다. 

박해자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세상에서 추방시킬 수는 없었음을 유의하라. 예루살렘은 모아지지 않았고, 그렇게 되려 하지도 않았으나, 그리스도는 영광을 받으셨고 또 그렇게 되실 것이다. 

요단강 건너편으로 그리스도가 가심은 유대인들로부터 하나님의 왕국을 취하시는 일의 상징이었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은 현명하고 힘세고 고귀한 도시인보다 평범한 시골 사람에게 보다 더 큰 지지를 얻어왔다(고전 1:26, 27).

2. 그는 거기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단지 그 자신의 안전만을 위해 가지 않았다. 거기서 선행을 하시기 위해 가셨다.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를 주던 곳(1:28)을 선택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요한의 선교와 세례에 대한 어떤 감명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때는 요한이 세례를 주고, 그리스도 자신이 이곳 베다바라에서 세례를 받은 지 3년이 안 된 때였다.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의 수고의 열매가 무엇인지, 또 그들이 듣고 얻을 것을 어떻게 유지하고 있는지를 보기 위해 그리로 가셨다. 그런데 어느 정도는 그 기대에 맞았다.

(1) 그들이 그를 떼지어 따랐기 때문이다(41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왔다." 은총의 방편이 중단되었다가 다시 시작되면 대개 사람들은 더 애착을 갖게 된다. 

어떤 이들은 예수가 "베다바라" 곧 "여인숙"에 묵으러 갔다고 생각하고 있다. 거기에는 요단강을 건너온 나룻배가 있었고, 그래서 말씀을 들으러 길을 떠나려 하지는 않으나 자기들에게 들르면 말을 들으려는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기회가 왔을 것이다.

(2) 그들은 또 좋게 생각하였고, 예루살렘에 있었던 자들은 할 수 있는 대로 그를 멀리하려 했지만 그들은 그의 주변에 가까이 가려고 애썼다. 

그들은 대단히 지혜롭게 말했다. "요한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으나 요한이 이 사람에 대하여 한 말은 모두 참이다." 그들이 요한으로부터 보고 들었던 것을 다시 종합하면서 그것을 그리스도의 선교 사업과 비교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두 가지를 생각했다.

①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의 힘을 휠씬 능가하셨다. 

왜나하면 "요한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으나" 예수는 많은 것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가 요한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을 추측하기란 쉬운 일이다. 

그리고 만일 요한이 위대한 예언자였다면 이 예수는 얼마나 더 위대한가!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 봄으로 가장 잘 알 수 있다. 요한이 엘리야의 영과 권능으로 왔다 해도 엘리야가 한 것과 같이 기적을 행하여 자기와 예수 사이에서 군중들의 마음이 혼동케 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기적 사업의 명예는 예수의 월계관을 위해서 보류되었다. 

따라서 그가 요한보다 나중에 왔지만 요한을 훨씬 능가하였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는"일이다.

②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의 증거를 정확히 이루셨다. 

요한은 그리스도로부터 민중을 갈라놓을 기적을 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그리스도에게로 가도록 역설했다. 그리고 그들을 견습공으로 보냈다. 이것이 "지금" 그들의 마음에 떠올랐다. "요한이 이 사람에 대해 말했던 모든 것," 곧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어야 하고,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는 것 등이다. 

세례 요한이 그에 대해 말했던 위대한 일들이 그들의 기대를 일으켰다. 그래서 그들이 그를 쫓아 그가 있는 지방으로 갈 만한 열심을 지니지는 않았지만 그가 자기들에게 왔을 때, 그래서 그들의 마음속에 그의 복음을 자져 왔을 때, 그들은 그를 요한이 말했던 것과 같이 위대하다고 인정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 친근감을 얻을 때, 그리고 경험적으로 그를 알게 될 때, 우리는 성서가 그에 대해 말한 모든 일들이 참임을 알게 된다(왕상 10:6, 7). 그리고 실제로 기록을 오히려 초과하고 있음을 볼 것이다. 

세례 요한은 이제 죽었고 사라졌으나, 그의 청중들은 그들이 이전에 들었었던 것에 의해 유익을 얻었다. 그들이 보았던 것과 들었던 것을 비교해 봄으로써 그들은 이중의 유익을 얻었다. 곧

첫째, 그들은 "요한을 하나의 예언자," 곧 그와 같은 일들을 예언했고 예수의 시작이 그토록 작았지만 그가 도달할 큰 일들에 대해 말했던 예언자였다는 믿음을 굳게 하였다.

둘째, 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였음을 곧 믿게 되었다. 

그 속에서 그들은 요한이 예견했던 일들이 성취되었음을 보았다. 

이것에 의해 우리는 그 선포된 말씀들의 성공과 효능은 선포자의 생애에 국한되지 않음을 보게 된다 그것들은 선포자와 같이 죽지 않는다. 땅에 엎지러진 물과 같이 보였던 것이 후에 다시 모아질 수 있다(슥 1:5, 6 을 보자).

(3) 거기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었다. 

요한의 예언들이 실현되는 그와 같은 기적들을 행하는 그는 자신의 주장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으면서, 그의 제자들이 되었다(42절). 여기에 강조됨이 있다.

① 그를 믿었던 사람들에 대해서이다. 

그들은 "많았다." 예루살렘에서 그의 교훈을 얻고 받아들였던 자들은 포도밭의 포도부스러기처럼 있었던 반면, 그를 시골에서 믿었던 자들은 큰 수확이 되었다.

② 이것이 있었던 장소에 대하여이다. 

그것은 요한이 가르쳤었고 세례를 주었었던, 그리고 큰 성공을 거두었던 곳이었다. "거기서"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를 믿었다. 

회개의 교리에 대한 선포가 가장 유력하게 퍼져나가고 있는 곳이다. 요한이 받아들여진 곳에는 예수가 안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자기들이 죄 때문에 속죄일에 괴로워했던 자들에게는 희년의 나팔 소리가 즐겁게 울려 .퍼진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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