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1.11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요11.베다니.죽은나사로를 살리심.예수를죽이기로결단한공의회.3번째유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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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요11장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다

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다

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49.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53.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54.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

55.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56.  그들이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57.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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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B]요11장

1.  Now a certain man was sick, Lazarus of Bethany, the village of Mary and her sister Martha.

2.  And it was the Mary who anointed the Lord with ointment, and wiped His feet with her hair, whose brother Lazarus was sick.

3.  The sisters therefore sent to Him, saying, "Lord, behold, he whom You love is sick."

4.  But when Jesus heard it, He said, "This sickness is not unto death, but for the glory of God, that the Son of God may be glorified by it."

5.  Now Jesus loved Martha, and her sister, and Lazarus.

6.  When therefore He heard that he was sick, He stayed then two days [ longer] in the place where He was.

7.  Then after this He *said to the disciples, "Let us go to Judea again."

8.  The disciples *said to Him, "Rabbi, the Jews were just now seeking to stone You, and are You going there again?"

9.  Jesus answered, "Are there not twelve hours in the day? If anyone walks in the day, he does not stumble, because he sees the light of this world.

10.  "But if anyone walks in the night, he stumbles, because the light is not in him."

11.  This He said, and after that He *said to them, "Our friend Lazarus has fallen asleep; but I go, that I may awaken him out of sleep."

12.  The disciples therefore said to Him, "Lord, if he has fallen asleep, he will recover."

13.  Now Jesus had spoken of his death, but they thought that He was speaking of literal sleep.

14.  Then Jesus therefore said to them plainly, "Lazarus is dead,

15.  and I am glad for your sakes that I was not there, so that you may believe; but let us go to him. "

16.  Thomas therefore, who is called Didymus, said to [his] fellow disciples, "Let us also go, that we may die with Him."

17.  So when Jesus came, He found that he had already been in the tomb four days.

18.  Now Bethany was near Jerusalem, about two miles off;

19.  and many of the Jews had come to Martha and Mary, to console them concerning [their] brother.

20.  Martha therefore, when she heard that Jesus was coming, went to meet Him; but Mary still sat in the house.

21.  Martha therefore said to Jesus, "Lord, if You had been here, my brother would not have died.

22.  "Even now I know that whatever You ask of God, God will give You."

23.  Jesus *said to her, "Your brother shall rise again."

24.  Martha *said to Him, "I know that he will rise again in the resurrection on the last day."

25.  Jesus said to her,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who believes in Me shall live even if he dies,

26.  and everyone who lives and believes in Me sha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 "

27.  She *said to Him, "Yes, Lord; I have believed that 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God, [even] He who comes into the world."

28.  And when she had said this, she went away, and called Mary her sister, saying secretly, "The Teacher is here, and is calling for you."

29.  And when she heard it, she *arose quickly, and was coming to Him.

30.  Now Jesus had not yet come into the village, but was still in the place where Martha met Him.

31.  The Jews then who were with her in the house, and consoling her, when they saw that Mary rose up quickly and went out, followed her, supposing that she was going to the tomb to weep there.

32.  Therefore, when Mary came where Jesus was, she saw Him, and fell at His feet, saying to Him, "Lord, if You had been here, my brother would not have died."

33.  When Jesus therefore saw her weeping, and the Jews who came with her, [also] weeping, He was deeply moved in spirit, and was troubled,

34.  and said, "Where have you laid him?" They *said to Him, "Lord, come and see."

35.  Jesus wept.

36.  And so the Jews were saying, "Behold how He loved him!"

37.  But some of them said, "Could not this man, who opened the eyes of him who was blind, have kept this man also from dying?"

38.  Jesus therefore again being deeply moved within, *came to the tomb. Now it was a cave, and a stone was lying against it.

39.  Jesus *said, "Remove the stone." Martha, the sister of the deceased, *said to Him, "Lord, by this time there will be a stench, for he has been [dead] four days."

40.  Jesus *said to her, "Did I not say to you, if you believe, you will see the glory of God?"

41.  And so they removed the stone. And Jesus raised His eyes, and said, "Father, I thank Thee that Thou heardest Me.

42.  "And I knew that Thou hearest Me always; but because of the people standing around I said it, that they may believe that Thou didst send Me."

43.  And when He had said these things, He cried out with a loud voice, " Lazarus, come forth. "

44.  He who had died came forth, bound hand and foot with wrappings; and his face was wrapped around with a cloth. Jesus *said to them, "Unbind him, and let him go."

45.  Many therefore of the Jews, who had come to Mary and beheld what He had done, believed in Him.

46.  But some of them went away to the Pharisees, and told them the things which Jesus had done.

47.  Therefore the chief priests and the Pharisees convened a council, and were saying, "What are we doing? For this man is performing many signs.

48.  "If we let Him [go on] like this, all men will believe in Him, and the Romans will come and take away both our place and our nation."

49.  But a certain one of them, Caiaphas, who was high priest that year, said to them, "You know nothing at all,

50.  nor do you take into account that it is expedient for you that one man should die for the people, and that the whole nation should not perish. "

51.  Now this he did not say on his own initiative; but being high priest that year, he prophesied that Jesus was going to die for the nation,

52.  and not for the nation only, but that He might also gather together into one the children of God who are scattered abroad.

53.  So from that day on they planned together to kill Him.

54.  Jesus therefore no longer continued to walk publicly among the Jews, but went away from there to the country near the wilderness, into a city called Ephraim; and there He stayed with the disciples.

55.  Now the Passover of the Jews was at hand, and many went up to Jerusalem out of the country before the Passover, to purify themselves.

56.  Therefore they were seeking for Jesus, and were saying to one another, as they stood in the temple, "What do you think; that He will not come to the feast at all?"

57.  Now the chief priests and the Pharisees had given orders that if anyone knew where He was, he should report it, that they might seize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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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장 (개요)

본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 직전에 행하신 놀라운 기적에 대한 기사를 대하게 된다. 그것은 나사로를 살리신 내용으로써 오직 본서의 기자만이 그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다른 세 복음서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주로 거하셨던 갈릴리에서의 예수의 역사를 전해 주는데 주력하고 있고, 수난 주간 이전의 예수의 예루살렘에서의 활동은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반면에 요한은 예수께서 주로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일들을 전해 주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장의 내용은 요한에 의해 기록되게 된 것이다. 어떤 이들은 다른 세 복음서 기자들이 복음서를 집필할 때 나사로는 생존해 있었고, 나사로가 죽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던 당시의 정황에서 그가 살아난 기사를 쓴다는 것은 그의 안전에도 해로왔고 또 그의 겸비한 성품에도 일치하지 않는 것이기에 기록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사로의 부활 기적은 그리스도의 다른 기적들보다 더 상세하게 기록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기적의 여러 장면 가운데 교훈적인 요소가 많이 있었고 또 이 기적 자체가 그리스도의 사명을 강력하게 증거해 주기 때문이었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그 어떤 전조보다도 으뜸 되는 전조였기 때문이었다. 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이 주 예수께 전해짐. 이 소식에 대한 예수의 태도(1-16).

Ⅱ. 예수께서 나사로의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그의 가족을 방문하심. 방문에 대한 그들의 환영(17-32).

Ⅲ. 나사로가 죽음 가운데서 살아남(33-44).

Ⅳ. 이 기적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4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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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의 죽음(요 11:1-16)

Ⅰ. 본장의 내용과 주로 관련되는 당사자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1, 2절).

1.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절기에 참석하러 오실 때면 묵곤 하시던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베다니"라는 마을에 살았다. 

본문에서는 베다니를 "마리아와 마르다의  마을"이라고 칭하고 있다. 그것은 벳세다를 "안드레와 베드로의 동네"라고 칭한 것과 같은 것이다(1:44). 

어떤 이들은 마르다와 마리아는 그 읍의 소유자들이었고 그 남은 이들은 그들의 소작인들이었다고 하나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2. 여기에 나사로라 불리우는 한 형제가 있었다. 

그의 히브리 이름은 아마 "엘르아살"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의 접두사가 생략되고 거기에 희랍어 접미사가 붙어서 나사로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외로운 자는 죽은 후 즉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는 축복을 받는다는 비유를 말씀하셨었다. 거기서 주님은 그 비유의 등장 인물을 나사로(물론 이것은 실제 인물인 나사로가 아니라 가상 인물이었다)로 칭하셨는데 아마도 본장에서 같은 기적이 나사로에게 있을 것을 예상하시어 그가 그렇게 칭하신 것으로 보여진다(눅 16:22).

3. 여기 두 자매 마르다와 마리아가 등장한다. 

그들은 주로 집안 살림을 맡아서 하였던 것 같다. 한편 나사로는 생활 전선에서는 물러나 연구와 명상에 몰두하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아름답고 행복하며 조화가 이루어진 한 가족을 보게 된다. 이 가족과 예수 그리스도는 무척 친하게 지내셨다(본문에 나타나는 바에 의한다면). 그들 중에 결혼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남매들끼리 마음을 합하여 살면서 좋은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4. 자매 중의 하나는 "주께 향유를 붓던 마리아"라고 특별히 묘사되고 있다(2절). 

어떤 이들은 그녀는 우리가 누가복음 7장 37.38절에서 읽은 여인과 동일 인물로 그녀는 죄인이었고 나쁜 여자였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본문이 누가 복음 7장 37절의 기사를 언급한 것이 아니고 본서 12장 3절의 기사를 언급한 것으로 본다(12장 3절을 보면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향유를 붓는 모습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복음서 기자들은 다른 복음서 기자가 기록한 기사를 결코 인용하는 법이 없으며 요한은 한 곳에서 자신의 기록한 기사를 다른 곳에서 흔히 참조를 잘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일념에서 나온 특별히 경건스러운 봉헌의 행위들은 그에 의해서 받아드려질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좋은 평판을 얻을 것이다(마 26:13). 그런데 바로 그녀의 형제 나사로가 병이 들었던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플 때 우리는 같이 아픔을 느낀다. 우리가 친구들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빈번하게 우리들은 이와 같은 동정에 의한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또 그들이 사랑스러우면 사랑스러운 만큼 그들의 아픔을 통해 전달되는 고통도 큰 것이다. 

친구가 많으면 그들을 통하여 많은 위로를 받게 된다. 그러나 위로가 증가되는 반면 그들에 대한 근심과 고통도 늘어나게 마련인 것이다.

Ⅱ. 나사로가 아프다는 기별이 우리의 주 예수께 전하여졌다(3절). 

그의 자매들은 예수께서 요르단 건너 큰 길에 계시는 것을 알고 일부러 사자(使者)를 보내어 그를 가족의 재난을 예수께 알려 드렸다. 이 사실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1. 그들이 그들의 형제에 대해 가졌던 애정과 관심. 

그의 재산이 그가 죽은 후면 그들에게 돌아갈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의 생명을 진심으로 소중히 여겼다. 또 그것은 형제들간에 마땅히 있어야 할 자세였다. 

이제 그가 병이 들자 그들의 깊은 사랑이 표현되었다. 형제의 진가는 어려움이 닥쳤을 때 나타난다. 자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친구들이 기뻐할 때 그들과 함께 기뻐하는 것처럼 그들이 울 때 그들과 함께 같이 울 수 있어야 한다.

2. 그들이 주 예수께 품었던 존경. 

그들은 그에게 그들의 모든 생활을 의논하고는 하였었다. 그리고 입다와 같이 그들의 모든 소원을 예수께 아뢰고는 하였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모든 원하는 바와 비탄과 걱정들을 아시지만 그는 우리가 이 모든 일들을 직접 그에게 아뢰기를 원하신다. 또한 우리가 그에게 모든 사정을 아뢰는 것을 통하여 그는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들이 전한 소식은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그들의 메시지는 "간청"의 뜻을 담은 것이 아니었고 다소라도 명령적이거나 더군다나 예수의 오실 것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간절하게 그들이 처한 정황을 아뢰었을 뿐이었다. 즉 그들은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나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그라고 말하지 않고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그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아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과 그의 은총을 힘입으므로써인 것이다. 그들은 "주여 보소서, 당신을 사랑하는 그"를이라 하지 않고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그"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요구되는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그 사랑이기 때문이다"(요일 4:10). 

우리의 그이에 대한 사랑은 말로 표현할 만큼 값어치가 있는 것이 못되나 그이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큰 것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주 예수님께는 그가 다른 누구보다 특별히 사랑하신 몇몇 친구들과 추종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열두 사도 가운데에도 예수께서는 한 사람을 특별히 더 사랑하셨었다.

(2)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자들도 병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이 없으시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질병은 닥치는데 이러한 신체적인 이상을 통해 그들의 죄악이 교정되고 믿음이 연단되는 것이다.

(3) 우리가 아플 때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안이 된다는 사실이다.

(4) 만일 우리가 병든 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 병자가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임을 알게 되면 큰 용기를 얻게 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고 가호해 주시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이다.

Ⅲ. 그의 친구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태도를 취하셨는가 하는 사실이 설명된다.

1. 그는 그의 병든 것과 또 그 병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미리 아셨다. 

그리고 그는 나사로의 자매들에게 일부러 늦게 가심으로써 그가 이미 이 모든 사실을 알고 또 그 결과가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지 알고 계심을 전하고자 하신 것처럼 보인다. 그가 예견하신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점이었다.

(1) "이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 병은 죽을 병이었고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나사로가 나흘간 죽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① 나사로에게 병이 주어진 것은 그를 죽게 하는데 뜻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병은 대부분의 중병처럼 나사로를 무덤에로 집어넣기 위한 병은 아니었다. 이 병에는 그 이상의 뜻이 들어 있었다. 또는 그 병이 나사로의 생명을 앗아가는데 있었다 해도 그의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은 이러한 병의 의도를 물리쳤다.

② 이 병은 그의 죽음으로써 끝날 사건은 아니었다. 

그는 죽었다. 그럼에도 그는 죽지 않았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factum non dicitur quod non perseverat - 즉 영구적인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 행위를 가리켜 이미 끝난 것처럼 말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이 세상에의 영원한 작별 인사이다. 그것은 우리가 돌아올 수 없는 길이다. 그리고 이 의미에서 나사로의 병은 "죽을 병"은 아니었던 것이다.  나사로의 지금의 무덤은 그의 "영원한 집" 또는 "영원한 쉴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살리시려는 한 여자아이를 가리켜 "그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주의 백성이 겪는 질병은 그것이 아무리 중병이라고 하더라도 "죽을 병"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어떤 병도 우리를 "영원히 죽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의 육체의 죽음은 다른 세상에서의 영혼의 탄생을 의미한다. 

우리들이나 우리의 친구들이 병들었을 때 우리는 한결같이 그가 곧 나을 것이라는 말로 위로를 한다. 그러나 나으리라는 기대는 실망으로 끝나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기초 위에 우리가 서는 것이 지혜있는 태도이다.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으면 아무리 최악의 사태가 닥친다고 하여도 "두번째의 죽음"(영혼의 죽음)은 그들이 겪지 않을 것이요, 그렇다면 첫번째 죽음이야 가볍게 맞을 수 있는 것이다.

(2) 이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즉 그 기회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권능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는 말이다.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고난을 그들에게 은혜로 보여 주시기 위한 기회로 삼고자 하셔서 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감미로운 은혜와 가장 커다란 감격은 고난을 당한 사람들만이 그 맛을 아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고 위로를 삼아야 한다. 즉 어떠한 고난도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영혼이나 실패나 손해도 다 그렇다. 이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다면 우리들은 만족히 여겨야 한다(레 10:3). 

나사로의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병은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받기 위한 병이었기 때문이다. 즉 그 병은 주님에게 "사망으로부터 나사로를 소생시키는"영광스러운 기적의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전에 장님으로 태어난 사람을 고치시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위하여 장님으로 태어난 것이라고 하시었었다(9:3). 마찬가지로 나사로도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주님으로 영광받으시게 하기 위하여 병이 들고 죽어야만 했던 것이다. 

온갖 시련을 겪는 사람들은 그들의 고난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알고 위로를 받아야만 한다. 즉, 고통 가운데 있는 그들을 도우시고 또 안위하심으로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이 영광 중에 나타나게 하고자 하시어 먼저 고난을 그들에게 부여하시는 것이다. 고린도 후서 12장 9, 10절을 참조하라.

2. 그리스도는 그의 병자를 방문하시는 것을 지체하셨다(5,6절). 

그들은 "주여 당신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읍니다"라고 호소하였다. 그 호소는 맞는 호소였다(5절). 참으로 "예수께서는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셨다." 

이같이 믿음의 간구는 하늘나라에서도 귀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을 깨닫자.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예수께서 그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즉시 서둘러서 나사로에게 가셨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가 그들 남매를 사랑하셨다면 이제야말로 그들에게 속히 가심으로 자신의 그들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시는데 정반대의 방법을 취하셨다. 본문에 보면 그는 그들을 사랑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간을 지체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본문은 그가 그들을 사랑하였고 "그러므로" 그는 지체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그가 그의 친구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빨리 달려가는 대신에 "그가 있던 같은 곳에서 이틀 간이나 머무르셨던" 것이다.

(1) "그는 그들을 사랑하셨다." 즉 다른 말로 마르다와 마리아를 귀하게 여기셨다. 

그는 그들의 지혜와 위에서 받은 은총과 신앙과 인내를 그의 제자들이 지닌 것들 보다 더 귀하게 여기셨다. 그러므로 그가 그들에게 더디 가신 것은 그들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들의 시련이 마침내 찬양과 영광으로 끝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2) 그는 그들을 사랑하셨다. 이 말은 또 다른 말로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크고도 비범한 일을 행하고자 계획하셨다. 

그는 그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행하신 것과 같은 이러한 기적적인 역사를 그의 다른 동료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행하신 적은 없으셨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나사로가 자신이 가시기 전에 죽어 장사 지내게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가시기를 더디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즉시 가셔서 아직 살아 있는 나사로의 병만을 치유하셨다면 그것은 그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하셨던 치료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이었었으리라. 또한 만일 그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그의 생명을 소생시키셨다면 그것은 그가 몇 사람들에게도 행한 것과 같은 정도의 기적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가시는 것을 오래 지체하시므로 그가 죽은 지 오래되게 하셨고 그러므로 그는 나사로가 그 누구도 받지 못했던 영광된 기적의 대상이 되게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을 지연시키시는 데에도 은혜로운 의도를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사 54:7, 8; 49:19 등). 그리스도께서 베다니에 있는 친구들의 어려움을 아시고도 서둘러 가시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가 그들을 잊고 계셨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세속적인 것이거나 영적인 것이거나, 공적인 것이거나 사적인 것이거나 구원의 역사가 지체되는 것은 오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만사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다."

Ⅳ. 베다니에 있는 그의 친구들을 방문하려 하시면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나눈 담화(7-16절). 그와 그들과의 대화는 시종 자유롭고 친밀한 것이었다. 그 대화의 정경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친구로 삼고자 불렀노라"고 하신 말씀을 실증해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가 그들과 나눈 대화의 주제는 자신이 당할 위험과 나사로의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1. 유대에 가심으로 그가 겪으실 위험(7-10절).

(1) 본문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유대와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자신의 목적을 말씀해 주고 계신다. 그의 제자들은 또한 그의 의논 대상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에게 "비록 유대에 있는 자들은 자기의 방문과 같은 특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이들이지만 유대로 다시 가자"고 말씀하신다(7절).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때로 그들을 거절하는 이들에게 그의 두터운 자비를 되풀이하여 행하신다.

① 그가 유대로 가시고자 한 것은 베다니에 있는 그의 친구들을 돕고자 해서였다고 하겠다. 그는 자세히 전해들은 것은 아니었으나 친구들의 고통과 사태의 악화되어 감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비록 육체로 함께 계시지 않더라도 영혼으로는 어디서나 항상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그들이 극도의 고난에 처하게 되었고 또 나사로가 마지막 임종의 인사를 누이들에게 하였을 때 "유대로 다시 가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에게 "그들을 위한 가장 적절한 시기에" 또는 "정한 때가 이르렀을 때" 은혜를 베푸신다. 최악의 순간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은총을 베풀고자 정하신 순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할 그때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리니 이로써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고 하였던 것이다(겔 37:11, 13). 

극심한 고통에 이르러 있을 때 주님은 우리를 절망의 구덩이에서 끌어내신다. 즉 인간에게 있어서 위기는 하나님에게는 구원의 기회인 것이다. 바로 여기에 "여호와이레"의 참 뜻이 있다고 하겠다.

② 그가 유다로 가자고 하신 것은 제자들의 용기에 대한 시험으로 볼 수도 있다. 

그들은 최근에 자기들의 주인의 생명이 위협 당하는 것을 보고 대단히 두려워했다. 그들은 주님의 생명이 위협을 받으면 자기들도 위태롭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런 위험이 도사린 유대까지 그들이 자기를 따르려는지를 시험해 보고자 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최근에 그들은 유대에서 극히 어려운 일을 당하였던 것 같다. 본문이 우리에게 그러한 정황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나는 여기서 쉬고 있을 터이니 너희들이나 유대에 가라"고 하시지 않고 "다같이 가자"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자신이 그들과 동행함이 없이 위험 속에로 보내시지 않는다. 그는 그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을지라도"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다.

(2) 이 여행에 대한 그들의 반대(8절). 

그들은 "주님, 유대인들이 들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라고 말한다. 이 말을 통해,

① 그들은 얼마 전에 그곳에서 그가 겪은 위험을 그에게 상기시킨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찮게 여기시는 고난도 큰 것으로 생각하고 또 그런 고통을 더 오랫동안 기억한다. 그는 도전을 받으셨었으나 그것이 끝나고 지나가 버리자 그것을 곧 잊어 버리셨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그것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마치 그 일이 그날 일어나기나 했던 것처럼 ‘뉜’(3568) - 즉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실상 그 일은 적어도 두 달 전에 있었던 일이었지만 그 공포의 순간은 그들의 마음에 아주 생생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② 그들은 그가 그곳에 다시 가려고 한다는데 놀라와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당신은 바로 당신을 쫓아 낸 자들에게 마음도 좋게 또 가시려 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가볍게 여기시는 태도를 우리는 흉내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그래 당신을 죽이지 못하여 안달하고 있는 자들에게 또 가시렵니까" 그들이 당신을 그렇게 학대했는데도 말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주인의 안전을 대단히 염려하는 태도를 본문에서 보이고 있다. 전에도 베드로 역시 그를 염려하여 "주님 그리하지 마옵소서"라고 말했었다. 당시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고난에 자신을 맡기고자 하신다면 다른 제자들에게 주님을 그러시지 못하게 막으라고 말하기보다는 자기가 직접 주님을 제지하고자 하여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그의 안전을 염려하는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면들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첫째, 그들의 염려 이면에는 그의 권능에 대한 불신이 있었다. 

주님은 전에도 그들이 위험에 부딪쳤을 때 그 위험을 물리치셨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전과 같이 유대에서 그 자신과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실 수 없으리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그의 권능의 팔이 짧으신 것처럼 생각했다. 그리스도의 교회와 왕국의 안전이 염려되는 상황에서라도 우리는 주 예수의 지혜와 능력을 믿고 안심해야 한다. 그는 늑대들의 무리 가운데에서도 양떼를 보호하시는 방법을 알고 계신다.

둘째, 그들의 그에 대한 염려 이면에는 그들 자신이 고난을 받을지 모른다는 은밀한 두려움이 작용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만일에 주께서 고난을 받으신다면 그들도 고난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들 스스로의 개인적인 이해(利害)가 공적인 문제와 함께 얽히어 발생하게 될 때, 우리는 만군의 여호와의 일로 자기들이 근심하는 것처럼 가장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리스도의 일을 추구한다는 구실 아래 우리는 속으로는 자신의 부(富)와 명예와 안일과 안전과 같은 자신의 일을 추구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내면의 생각을 바르게 직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3) 이 이의(異意)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9,10절). 

그는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라고 반문하셨다. 유대인들은 낮 시간을 열두 시간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그 날들의 길이의 변화에 따라서 시간의 길이를 조정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한 시간은 낮시간의 십이분의 일을 뜻하는 것이었다. 또 유대는 영국보다 더 남쪽에 위치하여 있으므로 그들의 낮의 길이는 영국보다 길어 우리의 시간으로 해도 거의 12시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섭리를 통하여 우리에게 일할 수 있도록 밝은 낮을 주신다. 또 그 시간을 일하기에 부족하지 않도록 허용하신다. 일년을 통하여 모든 나라는 밤만큼 낮을 또 석양의 시간까지 계산하면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은 훨씬 늘어난다. 

인간의 생명이란 한낮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낮을 길게도 하시고 짧게도 하시듯이 인간에 따라 그 낮의 길이와 상태와 기회를 각각 다르게 정하신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한 시간도 거져 보낼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만일 한 "낮"이 열두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 매 시간은 우리의 의무를 감당하는데 쓰여져야 하며 결코 한 순간도 그대로 낭비되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인생살이 가운데 부딪치는 고난을 가볍게 생각하게도 해 준다. 그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일을 마치고 증언하는 일을 완수하면 우리의 날도 곧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이것을 그의 경우에 적용시키고 왜 그가 유대에 가야만 하는지의 그 이유를 보여 주신다. 그것은 그가 그곳에 가라는 명백한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말씀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교훈을 우리에게 주신다.

① 그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보편적으로 요구되고 또한 특별히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각자에게 주어진 의무의 길을 수행해 나간다면 마음에 위로와 만족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 주신다. 

그는 본문에서 "사람이 낮에 다니면 실족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했다. 즉 이 말은 한 인간이 그의 의무에 충실하고 그 의무를 늘 마음에 두며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그의 규례로 삼고 모든 하나님의 계명을 공경한다면 당황하지 않고 당당하고 확신있게 거룩한 신뢰를 지니고 생활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낮에 다니는 사람은 실족하지 아니하고 그의 길을 확실하고 즐겁게 걸을 수 있다. 왜냐하면 빛이 그의 길을 밝혀 줌으로 그가 그 빛에 의해 길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선한 사람은 방심하거나 사악한 데 뜻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규례로 의지하고 그의 종국의 목표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두 개의 위대한 빛을 보며 그의 눈은 그것들을 항상 주시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모든 의심의 구렁텅이에서로부터 진실한 안내를 받으며 모든 위험의 골짜기에서도 강력한 호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갈 6:4; 시 119:6).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어디로 가시던지 낮에 다니셨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른다면 우리도 낮에 다녀야 하는 것이다(역주: 낮에 다닌다 함은  육을 따라 자행자제함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따름으로써  하나님 보시기에 옳고 바른 삶을 사셨다는 말이다).

② 그는 사람이 이 율례에 의하여 걸어가지 않을 때 고통과 위험이 닥침을 보여 주신다(10절). 그러므로 그는 "밤에 다니는 사람은 실족하느니라"고 하셨다. 즉 만일에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판단과 이 세상의 코스를 따라 행한다면 또한 그가 하나님의 영광과 그 뜻하심보다 자신의 육적인 욕망을 채우고자 한다면 그는 유혹과 함정에 빠질 것이요 대단한 불편과 두려운 상황에 부딪칠 것이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떨 것이요 아무도 좇아 오지 않는데도 달아나리라는 말씀이다. 

반면에 정직한 사람은 창(槍)들의 번쩍거림을 비웃으며 만명의 군사들이 쳐들어와도 겁내지 않고 버틸 수 있다(사 33:14-16 참조). 사람이 실족하는 것은 "빛이 그 사람 안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자연의 빛이듯이 우리로 정직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은 마음의 빛이다. 빛이 그 마음에 없으면 그는 신실할 수 없고 그의 눈은 악을 좇게 마련이다. 이 말씀을 하심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유다로 가시는 그의 목적을 밝히셨을 뿐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두려움 없이 그를 따라 갈 수 있도록 격려하셨다.

2. 나사로의 죽음이 여기에서 그리스도와 제자들 사이에 이야기된다(11-16절).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그리스도는 나사로의 죽음을 그의 제자들에게 알리고 그가 유다로 가시는 것은 나사로를 도우시려는 것임을 말씀하신다(11절).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적들이 우굴거리는 위험스러운 곳에로의 여행을 준비시키신 후에 그들에게 다음의 내용을 말씀하신다.

① 그가 나사로의 죽음에 관한 분명한 통지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의 죽은 것을 알고 계심을 그들에게 알리셨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고 말씀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어떻게 부르시며 신도의 죽음을 어떻게 여기시는지를 알 수 있다.

첫째, 그는 신자를 그의 친구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 친구 나사로"라 말씀했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a.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에는 우정의 계약이 체결되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이 계약을 충실히 지키시사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와 교류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것을 인정하고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는 의인과 함께 사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b.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그의 친구들로 여기시는 사람들을 그의 제자들 또한 자기들의 친구로 여겨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친구"라고 나사로를 일컬었는데 이는 그가 그들 모두의 친구임을 나타내시고자 하신 것이라고 하겠다.

c. 죽음이라도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에 맺어진 우정을 깨뜨리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나사로는 죽었으나 그럼에도 주님은 그를 가리켜 "우리 친구"라고 하셨다.

둘째, 그는 신자의 죽음을 "잠"으로 여기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는 "나사로가 잠들었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죽음을 잠 정도로 가볍게 부를 때 우리는 죽음을 덜 두려워하게 되며, 보다 친숙하게 느끼게 된다. 나사로의 죽음은 야이로의 딸의 죽음과 같이 독특한 의미에서의 "잠"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다시 곧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결국은 다시 살아날 것이라면 죽음이라는 것이 뭐 그리 문제가 되겠는가? 영생에로의 부활을 믿음으로 소망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죽는다는 것은 옷을 벗고 잠을 자는 것과 별다를 바가 없는 일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실한 사람은 죽는다 해도 그것은 다만 잠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그는 지난 낮 동안의 노동으로부터 휴식하고 다음 날 아침을 위해 그 자신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즉 죽음은 잠과 같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 길이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죽는다고 영혼이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더욱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육체는 아무 두려움도 동요도 없이 혼란이나 방해 받음이 없이 잠을 잔다. 

사악한 자에게 있어서 무덤은 감옥과 같다. 그들에게 있어서의 수의는 처형당하도록 된 범죄인이 찬 착고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무덤은 침상과 같으며 평안하게 잠들게 해 주는 요람인 것이다. 육체는 비록 부패하지만 아침이 되면 그것은 마치 절대로 부패하지 않았던 것과 같은 모습으로 깨어날 것이다. 죽음이란 우리가 부활하여 참석하게 될 결혼의 날과 대관식날 입을 옷을 수리하고 깁기 위하여 잠시 벗는 것과 같은 것이다(사 57:2:살전3:14 참조). 그러므로 희랍인들은 그들의 매장터*를 - 즉 공동침실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② 그가 나사로에게 베풀려는 호의에 대하여 그는 제자들에게 특별히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말씀한다. 

그는 그 일을 벌써 끝마치실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나사로에게 가는 일을 뒤로 미루시었었다. 또한 그가 죽어가고 있던 사람을 멀리에서도 고치실 수 있었다면(4:20) 이미 죽은 자를 멀리 떨어져 계시면서도 일으키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기적을 무덤가에서 이루심으로 기적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그를 깨우러 가노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잠이란 죽음과 유사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다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듯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부활할 것이다(욥 14:15). 그러므로 이르기를 "주께서는 나를 부르실 것이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라고 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친구가 잠들었다"고 말씀하시고 곧 "내가 그를 깨우러 가노라"고 덧붙여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는 어떤 나쁜 일을 그의 백성에게 알리실 때에 그는 그와 동시에 그 일을 그가 쉽고도 신속하게 복구하실 것도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유다에 가시려는 의도가 나사로를 살리시려 하시는데 있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심은 거기에 그와 함께 가는데 대한 그들의 두려움을 제거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즉 예수께서는 유다에(성전) 공적인 일로 가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사적인 일로 가시려는 것이었고 그렇다면 그나 그들이 유다에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아도 되리라는 것을 제자들은 알았다. 

더군다나 그가 하고자 하신 것은 그들로 모두 좋아하는 한 가정을 위해 호의를 베풀고자 하는 데 있음을 알았을 때 그들은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2) 그들의 예수의 말씀에 대한 오해와 또 말씀을 듣고 저지른 실책(12,13절). 그들은 예수의 말씀에 대하여 "주여 그가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말했다. 이들의 말이 뜻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① 그들이 그들의 친구 나사로에게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가 회복되는 것을 원하였다. 즉, 나사로가 치명적인 병에서 ‘소데세타이’ - 즉 구원받기를 바랐다. 아마도 그들은 그가 아프다는 소식을 가져 온 사자의 말을 지금 나사로가 앓고 있는 병의 가장 염려되는 징후의 하나가 불안으로 잠을 잘 수 없는 것이라고 이해할 것 같고 이제 예수께서 그가 잠들었다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나사로의 열이 떨어지고 중대한 고비를 넘긴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잠은 때로는 좋은 의사 노릇을 한다. 그것은 약하고 피곤한 힘을 소성케 하여 준다. 죽음의 잠 역시 마찬가지이다. 훌륭한 기독교 신자가 이렇게 잠을 잘 자고 나면 그는 이 세상에 있던 것보다 저 세상에서는 훨씬 더 좋아질 것이다.

② 그러나 그들은 그들 자신에 관하여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사로가 잠들었으면 낫겠다"는 것을 이유로 그리스도께서 나사로에게로 가시는 것이 필요 없음을 넌지시 비추었고 그러므로 예수 자신과 그들이 적들과 마주치는 기회를 피하려고 하였던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가 잠들었다면 그도 곧 좋아질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차라리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렇게 우리 인간들은 무슨 일을 하는데 위험이 있다면 우리가 해야 할 그 일을 자신이 하지 않아도 저절로 잘 되기를 바라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떤 다른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질 것을 원한다.

(3) 그들의 오해를 교정하시다(13절). "예수는 나사로가 죽은 것을 말씀하셨다."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① 아직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이해가 얼마나 우둔하냐 하는 사실이 나타난다. 

제자들까지 예수의 말씀을 오해한 사실을 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오해하는 모든 사람을 마치 이단자들인 것처럼 정죄하는 태도를 버려야 하겠다. 형제들의 실책들을 액면보다 더 나쁘게 보는 일은 좋지 못하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제자들의 우둔함은 사실 심각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구약에서 흔히 죽음을 잠이라고 칭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그러한 오해는 쉽게 예방될 수 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서적인 용어를 빌려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단지 자연적인 잠에서 친구를 깨우기 위하여 그들의 주인이 이 삼 일이나 걸리는 여행을 하려 하신다고 생각한 것은 상식밖의 일이었다. 사실 이것은 누구보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시려는 일은 어떤 위대한 그리고 비범한 일이요, 그 자신의 가치를 나타내시는 일임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② 복음서 기자는 신중하게 이 잘못을 바로 잡는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는 구절을 부연하였다. 알아 듣지 못할 말로 말하거나 비사를 이용하여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말의 뜻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오해를 막기 위하여 그러한 말들을 해석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4) 예수께서 나사로의 죽음과 베다니로 가시려는 그의 결심을 명백하게 선언하심(14,15절).

① 그는 제자들에게 나사로의 죽음을 알리신다. 

그는 전에는 모호하게 말씀하셨던 것을 이제는 명백하게 말씀하신다. 즉 "나사로가 죽었느니라"(14절)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는 그의 성도들의 죽음을 아신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죽음은 그가 귀중히 여기시는 것이기 때문이다(시 116:15).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죽음을 그가 기억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중하게 여기지 않고 또 그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기지 않을 때 기뻐하시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자상하신 스승이신지, 또한 그가 상도(常道)를 벗어난 인간들에게 얼마나 자기의 지체를 낮추시어 접근하시는지를 깨닫도록 하자. 또한 그는 지나쳐 버린 어려운 문제들을 뒤에서 하시는 말씀이나 행위를 통하여 설명해 주신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자.

② 그는 제자들에게 왜 그가 그를 보러 가시기를 그리 오래 지연하였는지의 이유들을 말씀하신다. 

그는 본문에서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한다"고 하셨다. 만약 그가 나사로에게 일찌감치 가셔서 나사로의 병을 치료하고 그의 죽음을 미리 막았다면 그것은 나사로의 가족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었을 것이나, 그러나 그렇게 될 때 그의 제자들은 그들이 가끔 보아 온 것 이상의 그의 권능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신앙도 발전을 가져 오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지금에야 가셔서 죽은 그를 살리셨으므로 전에는 그를 믿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게 되었고(45절), 또한 믿음이 적은 자들(제자)로 하여금 완전한 믿음으로 나가게 하는데 큰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가 목적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다시 본문에서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하신 것이다.

③ 예수께서는 지금 베다니에 가실 것과 그의 제자들도 그와 동행시킬 것을 결정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그에게로 가자"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의 자매들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로하자"(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는 이 정도에 그칠 수 밖에 없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로 가자"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죽은 자에게도 기적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모든 우리의 다른 친구들로부터 격리시키고 우리를 그들과에 관계로부터 제거시키는 죽음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다. 또한 그의 부르심을 우리가 듣지 못하게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는 티끌과 같은 인생과 맺은 계약을 지속하시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그는 티끌로 돌아가 버린 자들을 방문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는 "나사로는 죽었다.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고 말씀하실 것이다. "만일 그가 잠을 잔다면 갈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한 제자들이라면  "그가 만일 죽었다면 갈 필요가 없습니다"라고도 능히 말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의견을 물어 봄이 없이 "가자"고 단안을 내리셨던 것이다.

(5) 그들의 주인과 행동을 같이 하도록 도마는 그의 동료 제자들을 선동한다(16절). 본문에 그를 가리켜 "디두모라 하는 도마"라 하였다. 히브리어로는 도마이며 희랍어로는 디두모라고 불리우는 그의 이름의 뜻은 "쌍둥이"라는 뜻이다. 구약에서 브리가에게 "그녀의 태 안에 쌍둥이가 있도다"고 말씀되었는데(창 25:24) 거기서 쌍둥이라는 단어는 토밈(Thomim)이라는 히브리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아마 도마는 쌍둥이였던 것 같다. 도마는 그의 동료, 제자들에게(아마도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에게로 가자"라고 말씀하셨을 때 두려움으로 가득 차 서로 얼굴만 쳐다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용감하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하였다. 도마의 이 말은 다음의 여러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① 방금 죽은 나사로와 함께 죽으러 가자는 말로 볼 수 있다. 

몇몇 사람들이 본문을 그렇게 해석한다. 나사로는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에게 다 같이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친구였다. 그리고 아마도 도마가 특별히 그와 친하였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만약에 그가 죽었다면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말하였으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도마의 심정은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우리가 살아 있다고 하여도 나사로가 없으면 어떻게 앞으로 살아가겠는가?"라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나사로는 그들을 위해서 많은 훌륭한 일을 했던 것 같다. 그는 그들에게 숙소와 먹을 것을 제공하였던 것 같다. 나사로는 그들에게 자기들의 눈(眼)보다 더 중한 존재다. 그러므로 이제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도 그와 함께 죽는 것이 차라니 낫겠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생명을 우리에게 귀중한 사람들의 생명과 동일시할 때가 흔히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을 잃었을 때에도 홀로 살 것을 또한 편한 마음으로 살 것을 가르치신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이상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둘째, 즉 "우리가 죽는다면, 우리는 그와 함께 행복하게 지낼 수 있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했으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죽음 저편에서의 축복스런 삶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또한 나사로나, 그들이 은총을 힘입어 그 나라에 참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이 함께 가서 그와 함께 죽는 것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우리의 신앙의 동지가 세상을 떠날 때 그들이 없으므로 메마르게 된 세상에 남아 있는 것보다 그들이 가 있으므로 더욱 보람있을 저 세상으로 우리도 죽어 그들을 따라 가는 것이 좋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우리의 친구들이 하나씩 이 세상을 등질 때마다 우리의 이 세상에 대한 미련 또한 하나씩 끊어지는 것이며 그러기에 우리의 마음은 더욱 하늘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죽음이란 다만 옷을 벗고 침상으로 가는 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이기에 성도들은 죽음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기꺼이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마의 말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② "주님이 죽음을 무릅쓰고 유대로 가시려고 하니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는 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나는 도마의 말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한다. "주께서 위험 속으로 가신다면 우리도 나를 따르라 하시던 그의 명령을 따라 가서 그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자"라고 한 것이라 하겠다. 도마는 그리스도에 대한유대인들의 대단한 적의(敵意)를 알았고 또한 주님께서 그들에게 자신이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종종 말씀하신 것을 기억했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께서 이제야 말로 죽으러 가시고자 한다고 생각했고 또 그것은 그럴 듯한 가정이었다. 이 말을 통하여 도마는 그의 마음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첫째, 그는 후에 14장 5절과 20장 25절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신앙은 약했지만 주님에 대한 강렬한 애정을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기꺼이 죽을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그의 말 속에서 "당신이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을 것입니다"(룻 1:17)라고 한 룻의 말을 상기하게 된다.

둘째, 그의 동료 제자들도 같은 마음을 품게 하려는 그의 열심있는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만일 그들이 주님을 돌로 치면 우리도 그 돌로 맞아 잠들자, 주님이 사실 수는 도저히 없을 터이니 말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어려운 시기에 그리스도인은 서로를 격려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각자 서로 "주와 함께 죽자"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도 언제든지 기꺼이 죽을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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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니에서의 그리스도(요 11:17-32)

그리스도께서 유대로 가시는 것과 제자들이 그와 함께 동행하기로 결정이 되자 제자들도 마음을 돌이켜 여행에 임하였다. 

이 여행 중에 여러 가지 사건들 곧 여리고에서의 장님의 치유와 삭개오의 개종과 같은 사건들이 있었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전해 주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노라면 우리의 분야가 아닌 일에 개입하여 선을 이룰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의무를 탈선한 행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역주: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다니로 가시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도중에 선을 행하실 필요가 있을 때 그것을 행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한 선한 임무를 수행한다고 하여 다른 선한 임무를 소홀히 해서도 안 된다. 마침내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5리쯤 되는" 곳에 있는 베다니에 오셨다(15절). 

본문에서 베다니가 예루살렘에서 오리쯤(1리=대략 392.7미터)  된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은 곧 이 기적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은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이는 예루살렘을 존귀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말씀이라 하겠다. 

그리스도께서는 갈릴리에서 더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었다. 그러나 뛰어난 기적들은 주로 예루살렘이나 그 근처에서 행하셨다. 예루살렘에서 그는 38년 간을 병으로 시달린 사람을 치유하셨으며 나흘 동안이나 죽어있던 자를 소생시키셨던 것이다. 베다니에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Ⅰ. 예수의 눈에 비친 베다니의 그의 친구들의 모습. 그가 그의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헤어졌을 때 그들은 유쾌하고 건강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의 그들의 모습은 그렇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들의 친구와 헤어져 있을 때 (그리스도는 아시지만) 우리가 서로 만날 때까지 우리나 또 친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1. 그는 그의 친구 나사로가 "무덤에" 있음을 와서 보셨다(17절). 

그가 마을 가까이 오셨을 때 그 마을의 묘지 근처에서 나사로의 이웃들이나 또는 그가 만난 사람들을 통하여 나사로가 장사된 지 나흘이 지났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사자(使者)가 예수께 전하러 온 같은 날에 그가 죽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문의 나흘을 그가 지체하신 이틀과 여행하는데 소요된 이틀을 합산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나는 예수께서 "우리 친구가 잠들었다. 그가 지금 지금껏 자보지 못한 잠을 잔다"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때 나사로가 죽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죽어서 장사될 때까지 소요된 시간과(유대인들의 장례 기일은 대단히 짧다) 그가 무덤에서 있었던 4일간을 합한 모든 사일 동안 예수께서는 여행을 하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스도께서 서둘러서 여행하시지 않고 볼 일을 다 보시면서 여행하신 것을 감안할 때 그것은 무리가 가는 생각은 아니다. 즉 그는 여리고를 통과하시고 또 삭개오의 집에서 쉬시기도 하셨던 것이다. 약속된 구원은 틀림 없이 임하기는 하지만 흔히 더디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하자.

2. 그는 그의 친구들의 깊은 슬픔 속에 빠져 있음을 와서 보셨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그들의 오빠의 죽음으로 인하여 슬픔에 차 있었다. 본문의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위문하러 왔다"는 말씀을 보아 그들의 슬픔이 어떠한 것이었는가가 짐작이 된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일반적으로 죽음이 있는 곳에는 슬픔이 따른다는 사실이다. 

특별히 서로의 관계가 친밀하고 마음이 맞는 사이일 때 또한 그 죽은 자가 그 시대를 위해 유익한 사람일 때 슬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게 된다. 그러기에 장례가 생긴 집을 가리켜 "눈물의 집"이라고 하신 것이다(전 7:2). 

한 사람이 그의 영원한 집으로 가면, "연관자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애곡한다"(전 12:5). 그렇지 않으면 슬픔에 겨워 홀로 앉아서 침묵을 지키거나 할 것이다. 여기 하나님을 경외하고 또 그의 축복이 주어진 한 집이 있다. 그 집은 마르다의 집이었다. 그럼에도 이 집 역시 "눈물의 집"으로 변모되어 있었다. 구원의 소망이 있다고 해서 당장의 헤어짐의 슬픔을 억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2) 슬퍼하는 자들이 있는 곳에는 위로자들이 마땅히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슬픔 속에 있는 사람의 슬픔을 같이 하여 주고 그들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그들과 함께 하는 우리의 애도는 그들에게 얼마의 위안이 될 것이다. 슬픔을 막상 당하고 나면 전에 우리가 기억하고 있던 이런 경우에 위로가 되는 말을 흔히 잊게 된다. 그럴 때 그들에게 이 위로를 상기시켜 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슬픔 속에 있을 때 우리에게 위로의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슬픔 속에 있는 사람에게 위로를 상기시키는 것이 또한 우리의 의무인 것이다. 유대의 현학자들은 이것을 대단히 강조하였다. 즉 그들은 제자들에게 죽은 사람을 장례한 후 슬퍼하는 자들을 위로할 것을 깨우쳐 주었다. 

이제 본문의 조문객들은 "그 오라비의 일로"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였다. 즉 그들은 그가 오점없이 죽었으며, 뿐만 아니라 그가 축복된 나라로 갔다는 말로 자매들을 위로했다. 

믿음이 깊은 친족들이나 친구들이 우리를 떠나갈 때 그들을 잃고 뒤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순간에 우리 앞서간 그들이 더 이상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축복된 곳에 거하리라는 것을 생각하고 위로를 삼아야 한다. 

마르다와 마리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방문을 보아 나사로의 가정이 지체가 있고 저명한 가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것은 나사로의 가정이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 준다. 

그러므로 나사로의 일가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를 존경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그들을 정중하게 대하였던 것이다. 많은 유대인들이 위문을 오게 된 데에도 섭리는 있었다. 즉 많은 유대인들이 (아마도 대부분이 유대 부인들이라고 생각되지만) 때맞추어 슬퍼하는 자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함께 오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들은 기적에 대한 예기치 않았던 증인들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들 유대인들이 이 자리에 참석함으로 그들이 그리스도와 비교할 때 얼마나 초라한 위로자들인가도 생각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에게 그의 기적의 증언을 금하시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적은 보지 않은 누구나 믿을 수 없는 그러한 종류의 기적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이 우연히 그리스도와 만나게 하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이 일을 목격하게 하시려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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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주님과 유족들 간에 나눈 담화의 내용.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늦게 오셨기 때문에 더욱 반갑게 그를 맞이하였다. 그리스도가 안 계실 때 우리는 그의 오심을 더욱 사모하게 된다. 또한 그의 부재(不在)는 그의 함께 하심이 얼마나 귀중한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1. 그리스도와 마르다 사이의 오고간 대화.

(1) 그녀가 "나가 주님을 맞았다"고 본문은 전해 준다(20절).

① 마르다는 그리스도의 도착을 열렬히 고대하고 있었고 또 수시로 그가 오셨는지의 여부를 사람들에게 물었던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녀는 그가 오시는 가를 알아보도록 사람을 동구 밖에 세워 기다리게 하였거나 또는 사람들에게 "나의 경애하는 예수님을 보았는가?"라고 자주 물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 주님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그녀에게 달려가서 그 기쁜 소식을 그녀에게 알렸다. 여하간 그녀는 주님께서 도착하시기 전에 그가 오심을 들었다. 그녀는 오랫 동안 기다려 왔고 또 자주 "그가 오셨습니까?"라고 물었었다. 그러나 아무런 소식도 전해 듣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침내 오랫 동안 찾던 주님이 오셨다.

② 예수께서 오셨다는 기쁜 소식을 듣자 마르다는 모든 일을 내던지고 "나가 주님을 맞아들였다." 그것은 가장 진심어린 뜨거운 환영이었다. 

그녀는 그녀를 방문하러 온 유대인들을 접대하는 일을 다 내버려 두고 서둘러 나가 예수를 맞이하였다. 하나님께서 그의 은총 또는 섭리에 의하여 우리들에게 은혜와 위로를 베풀고자 오실 때 우리는 믿음과 소망과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아가 그를 맞이하여야 한다. 

어떤 이들은 마르다가 동구 밖까지 예수를 맞이하러 나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녀가 주님에게 자기들 집에 주님을 미워하는 유대인들이 있으니 그들이 싫으시다면 그들을 피하시도록 하고 하기 위해 미리 나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정에 불과할 따름이다.

③ 마르다가 예수를 만나러 갔을 때 "마리아는 여전히 집에 앉아 있었다." 

어떤 사람은 마리아가 거실에서 조객들을 접대하느라고 그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집안 일을 위해 밖에 있었던 마르다가 미리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마 마르다는 먼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영예를 누리려는 욕심에 그의 동생에게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을 알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Sancta est prudentia clam fratribus clam parentibus ad Ehristumesse conferre - 즉 성령께서는 우리의 부모 형제들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신다(Maldonat in locum). 

또 다른 이들은 마리아가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너무나 슬픔 속에 압도되어 기동을 할 수 없었고 그러므로 체념하고 울면서 그의 가련함만을 한탄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는 "울게 내버려 두라"고 하였다고 생각한다. 

이 내용을 누가복음 10장 38절 등에서 보여 주는 내용과 비교해 보면, 우리는 이 두 자매의 기질의 차이를 볼 수 있다. 또한 각각의 장점과 단점도 보게 된다. 

마르다는 본래 성격이 활동적이고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녀는 왔다 갔다 하며 모든 일을 끝맺어 놓는 면이 있었다. 그녀의 성격은 때로 그녀의 단점이 되기도 했다. 즉 이러한 성격 때문에 그녀는 매사에 참견하고 또 방해가 되기도 했을 뿐 아니라 봉헌의 행위를 방해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같은 슬픈 날에 있어서는 그녀의 활동적인 기질의 슬픔을 좀더 쉽게 잊게 하였고 그러므로 그녀는 먼저 그리스도를 맞을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동생보다 빨리 예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한편 마리아의 본래의 기질은 사색적이고 수동적이었다. 그러한 그녀의 기질이 전에는 그녀에게 유익이 되었었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당시 그녀는 그리스도의 발 밑에서 그의 말씀을 들었고 또 마르다에게 말씀의 장애가 되었던 잡다한 일에 신경씀이 없이 그리스도를 시중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같은 고통의 날에 이 기질은 그녀에게 단점이 되었다. 즉, 이러한 성격 샅으로 그녀는 그녀의 비통으로 부터 쉽게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고 그녀를 우울에 빠져 있게 하였던 것이다. 

이 사실은 본문의 "그러나 마리아는 아직 집에 있었다"는 말씀으로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들의 성격적 결함으로 인해 초래되는 시험을 주의 깊게 경계하고 또 우리의 성격이 지닌 장점을 잘 선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임을 깨닫게 된다.

(2) 본문에 그리스도와 마르다 사이에 오간 대화의 내용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① 마르다의 그리스도에 대한 인사말(21,22절).

첫째, 그녀는 그리스도의 오랫 동안의 부재(不在)와 지체하심을 불평한다. 

그녀는 그녀의 오라버니의 죽음뿐 아니라 불친절하게 보이는 주인의 처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유감을 품고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불평을 토로하였다. 그녀의 말을 통해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본다.

a. 그녀에게도 어느정도 신앙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녀는 그녀의 오라버니의 병이 심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치료하실 수 있고 그래서 그를 죽음에서 건질 수도 있었음을 믿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자비를 믿었다.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나사로의 심한 병을 보시기만 했다면 또 나사로의 가족들이 눈물로 그리스도를 맞는 것을 보기만 하셨다면 그가 나사로를 동정하사 그 병을 고치심으로 슬픔을 제거하시리라는 것을 믿었다. 왜냐하면 그의 사랑이 그들을 결코 저버리지 않을 줄 그녀는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b. 그녀에게 유감스럽게도 불신앙의 일면도 발견된다. 

그녀의 신앙은 진실한 것이었으나 상한 갈대처럼 약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주께서 여기에 계셨다면"이라고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권능을 한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주께서 멀리 떨어져서도 치료할 수 있고 그의 은총의 작용들이 그가 계시는 곳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했었다. 

그녀는 주님께서 그들이 사람을 보냈을 때 즉시 오시지 못한 것을 그리스도의 지혜로우심과 친절하심에 비추어 생각해 보고 이런 결론을 내렸다. 즉 그가 일을 제때 마치실 수 없어서 이렇게 늦게 오신 것이고 또 이렇게 늦으신 것을 보아 오실 수 없는 상황에 처하셨던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에게 지금 무슨 도움을 받으리라고는 거의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분이라는 점을 생각하고 마음을 고쳐먹고 스스로 위로를 삼고자 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녀의 주인을 책망한 것과 주께서 너무 늦게 오셨다고 불평한 것을 곧 스스로 질책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사태가 절망적이긴 하지만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하였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a. 그녀의 소망의 끈질김을 볼 수 있다. 

비록 그녀는 예수께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 주실 것을 구할 용기는 가지지 못했지만(아직까지 그처럼 오랫 동안 죽어 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의 관례가 없었으므로) 가장 분별력 있는 청원자처럼 그녀는 주 예수의 현명함과 연민에 자기들의 처지를 겸손하게 의탁하였다. 

우리들이 특별히 무엇을 요구할지 또는 기대할지 알지 못할 때에는 그저 우리 자신들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하나님께서 좋게 생각하시는 대로 하시기를 간구하도록 하자.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Judiciitui est, non praesumptionis meae - 즉 나는 나의 문제를 나의 억측에 맡기지 않고 당신의 판단에 맡기나이다(Aug in locum)라고 하였던 것이다. 

우리들이 무엇을 간구할지 알지 못할 때에도 위대한 중재자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구해야 할지 아시며 항상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b. 그녀의 신앙이 얼마나 약한 것인가를 볼 수 있다. 

그녀는 "주여, 주께서 하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단지 "주께서 무엇이든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녀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있음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가 그 스스로의 권능에 의해서 기적을 베푸실 수 있음을 잊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스스로 능력을 행하실 수 있음과 또 하나님께 중재하실 수 있는 이 두 가지는 다 배제될 수 없는 것들이다. 

이 두 가지는 다 우리의 믿음과 소망에 힘이 되는 것들이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대해 지배권을 지니시며 하늘나라에 대해서는 중재권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한 손에는 황금의 홀장을 가지고 계시며 다른 한 손에는 황금의 향로를 가지고 계신다. 그의 권능은 항상 뛰어나고 그의 중재는 언제나 유효하다.

② 그리스도께서 마르다에게 주신 위로의 말씀. 

그것은 그녀의 애처로운 말에 대해 주신 그의 답변이었다(28절). 본문에는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하신 말씀이 기록되고 있다. 

마르다는 "그리스도께서 거기 계시지 않았던 것"을 돌이켜 생각하며 그가 계셨었다면 지금은 그의 오빠가 살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도 이러한 경우에 "……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 걸"이라는 상상을 함으로 스스로 자책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이러이러하게 했다면 또는 이러한 의사를 불러 왔다면 나의 친구는 죽지 않았을 터인데"라고 상상을 하므로 자책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우리의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상상을 해 보아야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하나님의 뜻이 실행될 때 다만, 우리의 할 일이란 그에게 복종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마르다에게 또한 그녀를 통하여 우리에게 앞을 바라보고 앞으로 이루어질 것만을 생각하도록 명령하신다. 왜냐하면 미래의 문제야말로 우리가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요, 거기서만이 위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로 미래의 일 "즉,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첫째, 이 말씀은 특별한 의미에 있어서 나사로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었다. 

즉 나사로가 그 즉시 부활하리라는 뜻의 말씀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 사실을 흔히 읽을 수 있는 일로 대범하게 말씀하셨다. 또 그는 자신이 그를 살릴 것이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셨다. 

이같이 주 예수는 그가 이루신 일을 말씀하실 때 겸손하게 말씀하신다. 또한 그는 나사로를 지금 곧 살게 하실 것인지 아니면 마지막 날에 살리실 것인지 분간이 안 되게 불확실하게 말씀을 하셨다. 그가 이렇게 하신 것은 그녀의 신앙과 인내를 시험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둘째, 이 말씀은 모든 성도(聖徒)들의 마지막날의 부활에 적용되는 말씀이다. 

우리가 우리의 사랑하는 친구들과 친족들을 장례할 때 그들이 다시 살아아니라는 기대는 우리에게 위안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육체가 죽으면 영혼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전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육체도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보관되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너희들의 부모와 아이들 그리고 너희의 배우자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 마른 뼈들이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③ 마르다의 반신반의(24절).

첫째, 그녀는 이 말을 "그가 마지막날에는 다시 살리라"는 틀림 없는 사실을 말씀한 것으로 생각한다. 

부활에 대한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완전히 증명될 수 있었지만 마르다는 이미 그가 말씀하신 대로 부활을 확실하게 믿었다(행 24:15).

a. 그녀는 마지막 날이 있을 것이라는 것과 이 날에는 역사의 모든 날들이 총 결산되고 끝날 것을 믿었다.

b. 그녀는 이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의 부활이 있을 것과 그때 땅과 바디는 그 품에서 죽은 자들을 토해 놓을 것을 믿었다.

c. 그녀는 개인 개인의 특별한 부활이 있을 것을 믿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나는 내가 다시 살아날 것과 나에게 사랑스러웠던 갑(甲)이나 을(乙)이 살아날 것을 안다"고 말하였다. 그 날에 뼈가 서로 결합되듯이 또한 친구와 친구가 서로 만날 것이다.

둘째, 그러나 그녀는 이 말씀이 지금의 자기의 슬픔을 가라앉히는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마지막날에 다시 그가 살 줄을 아나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지금 당장 좋아지는 것은 없지 않습니까?"라고 말하였다. 그녀는 마치 영생 부활에 대한 위로의 말씀은 들을 필요도 없는 것이고 현재의 그녀의 슬픔을 달래 줄 충분한 것이 못되는 것처럼 말하였다. 

우리는 믿음의 목적인 영원한 것들보다 이 세상의 감각적인 것, 즉 세상의 슬픔과 기쁨에 의해 더 압도적인 영향을 받는다. 얼마나 연약하고 어리석은 것이 인간인가! 그녀는 "그가 마지막날 부활에는 다시 살 것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이면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이 충분하지 않다는 듯이 말하고 있다. 

이같이 현재 지고 있는 십자가에 대한 불만 때문에 인간은 우리의 미래의 소망은 형편없는 것으로 무시해 버리기를 잘한다.

④ 주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더욱 계속 교훈과 격려를 주신다. 왜냐하면 그는 꺼져가는 등들도 끄지 않으시며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다(25,26절). 그리스도께서는 현재의 고통속에서 그녀가 믿어야 할 두 가지 조건을 제안한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우리도 마찬가지로 고난을 당할 경우 믿어야 할 것들이다.

첫째, 그리스도는 그의 권능, 곧 그의 주권을 그녀에게 말씀하신다. 

본문에서 그는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즉 그가 생명의 원천이며 부활의 첫 열매요, 근원이심을 말씀한다. 

마르다는 그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그에게 주실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이제 주께서는 그녀에게 자신이 말씀에 의하여 어떤 일도 하실 수 있음을 알게 하려 하신다. 또한 마르다는 마지막 날의 부활을 믿었다. 

그러나 한걸음 더 그리스도는 그녀에게 자기 자신이 부활시킬 권능을 가지고 계심을 알리셨다. 그리고 죽은 자가 "그의 음성을 들을" 것을(5:25) 알리셨다. 

이같이 말씀하심을 통해 주께서는 억겁을 걸쳐 죽어 온 모든 인간들을 실리실 수 있는 자신이 단지 나흘 동안 죽어 있던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은 쉬운 일임을 알리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이며 생명이시요, 또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과 생명을 주시리라는 사실은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할 수 없는 위안이 된다. 

부활은 다시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생명 부활의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 자의 부활과 장차 올 세계에서의 삶을 바란다. 그리스도께서 생명과 부활의 주관자요 주인이시며, 우리의 소망의 근거가 되시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는 그녀에게 새 계약의 내용을 말씀한다. 

이 새 계약의 "우리가 살 것이라"는 희망의 또 하나의 근거인 것이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a. 새 계약을 약속받을 사람들.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와 교통의 유일한 중재자로서 동의하고 신뢰하며 하나님이 그의 아들에 관하여 주신 말씀의 기록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신실하게 살아가며 그 말씀의 모든 뜻하심에 따라 사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이 약속의 조건으로 "살아서 나를 믿는 자"라는 말씀이 주어지고 있다. 이 말씀은 다음의 뜻 중의 한 뜻을 지닌 말씀일 것이다.

(a) "살아서"란 말씀은 "육체의 생명이 있는 동안"이라는 말씀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즉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그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또 그가 어느 곳에 살고 있든지 예수를 믿기만 한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히 살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볼 수 있겠다. 

이 말씀을 이같이 볼 때 여기는 기회가 제약을 받는다고 하겠다. 즉 "살아서" 곧 그가 이 고난의 상황 속에 처해 있는 동안 "나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인하여  생명의 복을 얻을 것이나 죽음 뒤에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복을 얻을 기회는 닫히고 만다는 뜻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살아서 믿는 자"란 뜻은  JC믿음으로  JC께서 그안에 사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요(갈 2:20) 그의 전 생활이 믿음의 영향 아래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b) "살아서"란 말은 "영적으로 살아서"란 말씀으로도 볼 수 있겠다. 

즉 "살아서 믿는 자"란 믿음으로 중생하여 하늘에 속한 삶을 이미 살고 있으며 Q의 뜻에 의거한 삶을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의 안에 사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즉 "살아서 믿는 자"란 그리스도를 그의 영혼의 생명으로 받아들인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b. 새 계약의 내용(25절). 

그것은 "JC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부활생명의 영광된 몸으로 살아남) ...또 살아서 JC를 믿는자는  (이미 부활생명 JC로 살고 있기에)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라"(26절)는 것이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 양자의 복된 삶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약속하신다.

(a) "몸"에 대한 약속. 

본문에는 몸의 축복된 부활이 약속되고 있다. 비록 몸이 죄 때문에 죽을지라도(그것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 몸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였다. 

본문에는 죽음이 지니고 있는 온갖 곤란한 문제들이 무시된다. 또 그러한 어려움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된다. 

비록 인간에게 죽임이 선고된 데는 정당한 이유가 있으며 또 죽음의 결과가 절망적인 것이며 또 죽음의 끈이 강하며 또 죽으면 매장되고 썩어지고 썩은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 인간의 형체조차 없어져 그를 찾아 낼 수 없으며 그러기에 이 강렬한 죽음 앞에 모든 인간이 굴복하여 미래의 소망을 버리지만 그럼에도 "다시 살 것이라"는 사실을 본문은 우리에게 확고하게 선언하고 있다. 몸은 영광된 몸으로 다시 일으킴을 받을 것이다.

(b) 영혼에 대한 약속. 

본문에는 축복된 불멸에 대한 약속이 주어지고 있다. "살아서  JC를 믿는 자" 곧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와 하나되고 그 하나님을 힘입어 사는 자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또한 영적인 생명은 절대로 소멸되지 않고 영원한 부활생명으로 승화된다. 영혼이 그 영적 특성 때문에 불멸이듯이 만일 영혼이 믿음에 의해 영적 생명을 살고 또 영혼의 특성에 합당하게 산다면 그 영혼이 받을 축복 또한 불멸의 것일 것이다. 

"영혼은 결코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영혼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안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육신의 생명은 끊겨지나 영혼의 생명은 중단되지 않는다. 몸은 한 번 죽었다가 마지막에 생명에 의해 삼키운 바 될 것이다. 그러나 영혼의 생명은 즉 믿는 영혼의 생명은 육체가 죽을 때 즉시 불멸의 영으로 될 것이다. ‘에이스 톤 아이오나’ - 즉 그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싸이프리안(cyprian)은 본문을 라틴어로 인용하고 있다. Non morietur in aeternum - 즉 몸은 죽되, 영원히 죽지 않는다. 그것은 가시적 세계가 있는 동안만 죽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마침내 세상의 역사가 종식되고 이 시간의 계수가 완료되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생명이 그 죽은 몸 안으로 들어 올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영혼은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또한 믿음에 의해 "첫번째 부활에 참여한 자" 곧 그가 바로 부활이신 그리스도안에 참여한 자 그에게는 거룩한 복 곧 축복이 주어진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에게는 "둘째 죽음" 곧 영원한 죽음이 그 세력을 잃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6:40 참조). 

이제 그리스도는 "이것을 네가 믿느냐? 네가 진심으로 이 말을 수긍할 수 있느냐? 네가 나의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라고 물으신다. 

이같이 우리가 다른 세계에서 되어질 위대한 일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향하여 진지하게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과연 내가 이 말씀을 믿고 있는가? 이 진리의 말씀의 내용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과연 믿는가? 이같이 많은 난제가 포함된 말씀을 그대로 믿으며 내 삶에 적용하고 있는가? 나의 믿음이 나로 하여금 성서의 내용을 깨닫게 해 주며 말씀에 대한 확증을 내 영혼에 주고 있는가? 그러므로 나는 내가 이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이러저러하게 이 말씀을 믿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지 심각하게 물어야 한다. 

마르다에게 그녀의 오빠가 이 세상에서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베푸시고자 주님은 미리 마음을 작정하고 계셨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녀에게 이 소망을 말씀해 주시기 전에 먼저 그녀의 마음에 저 세상에서 주어질 변화된 생명을 깨우쳐 주시었다. 즉 그리스도는 그녀에게 "내가 이 세상에서 죽은 자를 살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차 올 세상에서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 권한을 지녔음을 믿게 하려 하노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실 우리가 마땅히 믿어야 하는 영원한 것들을 믿기만 한다면 이 세상에서의 고난이나 위로 정도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웃어넘길 수 있을 것이라 하겠다.

⑤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것에 대한 마르다의 진실어린 믿음(27절). 

우리는 여기에서 그녀가 증언한 훌륭한 신앙 고백을 대하게 된다. 그것은 베드로가 한 것과 같은 고백으로(마 16:16, 17) 가장 훌륭한 믿음의 고백인 것이다.

첫째, 본문에는 그녀의 신앙의 지침이 제시되고 있다. 그 지침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수정하거나 가감함이 없이 그 전부를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그녀는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답변했다. 

이 말은 그녀가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말씀의 전체의 뜻과 세부적인 말씀까지 말씀하신 의미 그대로" 전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메아리이며 그분이 주신 말씀을 그대로 받아서 고백하며 그 말씀대로 살기를 결심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엘리자벳 여왕도 "주여 그러하오이다. 말씀에 그렇게 기록되었사오니 내가 그대로 믿으며 그대로 살겠나이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둘째, 그녀의 신앙의 근거. 그 근거는 곧 그리스도의 권위였다. 

그녀는 이 말씀을 하신 분인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또한 그 말씀도 믿었다. 그녀는 깨달을 수 있는 신앙의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리스도의 권위에 전적으로 의존하였다. 

그러기에 그녀의 ‘페피스튜카’ - 즉 내가 믿나이다라는 말은 "나는 당신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기 때문에 이 말씀도 믿나이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a. 그녀가 예수에 관하여 믿고 고백한 내용. 그것은 세 가지로써 모두 같은 의미를 지니는 고백들이다.

(a) 그가 그리스도 또는 메시야임을 고백하였다. 

즉 그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명칭과 또 그러한 의미로써 약속되고 대망되어 온 분이심을 고백하였다.

(b)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였다. 

메시야라는 이름이 하나의 직능의 의미를 지닌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면(시 2:7) "하나님의 아들"이란 고백은 예수의 본성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겠다.

(c) 그가 이 세상에 ‘호 에르코메노스’ - 즉 오시기로 약속된 분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녀는 교회가 그토록 오랫 동안 미래에 오실 분으로 기다렸던 축복 중의 축복을 지금 오신 분이 바로 그분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b. 그녀의 고백의 의미. 

그녀가 예수는 그리스도임을 고백하였다는 말은 그가 부활과 생명임을 믿는다는 말과 같다. 그 이유는 그분이 그리스도이시라면,

(a) 그는 빛과 진리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그의 모든 말씀을 신실하고 신적인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그리스도라면 그는 곧 우리가 모든 일에서 그의 음성을 들어야 할 선지자이신 것이다.

(b) 그는 생명과 축복의 원천이시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진실과 마찬가지로 그의 능력에 의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흙으로 돌아간 몸이 다시 살아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우리 영혼과 같이 꽉 막히고 혼탁한 영혼이 영원히 살 수 있겠는가?  우리가 만약 이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이 스스로 자존하시며 우리의 생명을 주장하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지 않는다면 이 모든 일 또한 믿을 수 없는 것이다.

2. 그리스도와 다른 자매 마리아의 만남.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마르다는 그녀에게 그리스도가 오심을 알려 준다(28절). 

"이 말을 듣고" 그녀는 더 이상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가서 그 형제 마리아를 불렀다."

① 그리스도로부터 교훈과 위안을 얻은 마르다는 이와 같은 교훈과 위안을 마리아도 맛보게 하기 위하여 그녀의 동생을 불렀다. 

전에 마르다는 너무 많은 일을 하는 자기를 마리아가 와서 도와 주기를 원하여 그리스도로부터 그녀를 떼어놓으려던 적도 있었다(눅 10:40). 그러나 지금 마르다는 그때의 마리아를 떼어놓으려 한 실수를 보상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마리아에게 달려가 그녀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였다.

② 그녀는 마리아를 "은밀하게" 불렀다. 즉 이 사실을 그녀의 귀에 대고 가만히 말하였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그리스도와 적대적인 유대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고 그들에게만 주어지는 은밀하고 특별한 초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잔치 자리에 참여하게 된다. 그들은 세상이 맛보지 못하는 음식을 먹으며 낯선 자가 방해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본다.

③ 그녀는 그리스도의 지시에 의해서 그녀를 불렀다. 

본문에 보면 그는 그녀에게 "그녀의 동생을 가서 불러올 것"을 명하셨다. 그 부름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보내어진 것이라면 전달하는 사람이야 누구이든 간에 순복해야 한다. 본문에 보면 마르다는 마리아에게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라고 전하고 있다.

첫째, 그녀는 그리스도를 ‘디다스칼로스’(11:28) - 즉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주로 그렇게 불렀고, 또 주님은 그 명칭으로 그들에게 통용되었다. ***죠지 허버트(George Hexbert)씨는 항상 그리스도를 "나의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를 즐겨한다.

둘째, 그녀는 그리스도의 도착을 기쁨으로 전하였다. 

그녀는 "선생님이 오셨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우리들이 오랫 동안 원하고 기다리던 분이 오셨다. 그분이 오셨단 말이야"라고 말한다. 이 말이야말로 고통 중에 있는 그녀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마르다의 말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숨겨 있었다. "나사로 오빠가 죽어 슬픔을 의지할 곳이 없어졌으나 이제 선생님이 오셨어. 그분은 우리에게 가장 귀한 친구보다 더 귀한 분이 아니냐? 그는 분명히 우리의 손실을 넘치는 것으로 갚아 주실 거야. 우리의 선생님이 오셨으니 그분은 우리에게 슬픔 속에서 오히려 유익한 것을 얻는 길을 가르쳐 주실 거야(시 94:12). 그분이 우리를 가르치시고 또 위로하실 거야"라는 것이다.

셋째, 그녀는 그녀의 동생에게 가서 주님을 영접하라고 하였다. 

"주님께서 너를 부르신다. 네 안부를 묻고 계신다. 너를 찾고 계신다"라고 말하였다. 

우리의 선생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그는 우리를 부르신다. 그는 그의 말씀과 예배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신다. 또한 그는 우리를 말씀과 예배에로 부르시며, 그것들을 통하여 자신에게 오라고 부르신다. 그는 특별히 그대를 부르시되 "이름"을 불러 찾으신다(시 27:8). 그리고 그가 너를 부르신다면 그는 너를 치료하실 것이고 너를 위로하실 것이다.

(2) 마리아는 그녀에게 전하여진 이 통지를 받고 급히 서둘러 그리스도에게 나아간다(29절). 그녀는 이 좋은 소식 곧 "선생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급히 일어나 예수께로 나아간다. 그녀는 주께서 그녀에게 얼마나 가까이에 계신지는 거의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이같이 주께서는 그들이 생각했던 것 보다 더 가까이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 가까이 계신다. 이제 그녀는 주께서 가까이 계신 것을 보고 멈칫 놀라 선 다음 기쁨을 억제치 못하며 달려가 그를 맞이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찾아 오신다는 소식은 신앙에 생기를 부여한다. 그 소식은 우리로 즉시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한다.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① 그녀는 상주의 체면을 내동댕이치고 달려 나갔다. 

그녀는 이러한 경우를 당하여 갖추어야 예의나 관례를 잊고, 그리스도를 맞으러 밖으로 달려 나갔다. 체면이나 예모를 차리느라고 그리스도와 사귀는 기회를 놓치는 잘못을 범하지는 않도록 하자.

② 그녀는 그녀의 옆 사람들 즉 "그녀를 위로하기 위하여 찾아와 있는 유대인들"과 의논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을 내버려 두고 그에게 갔다. 또 그녀는 그들의 충고를 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보고 자리를 비어 달라고 하거나 또는 그녀의 무례함에 대해 용서를 빌지도 않았다.

(3) 그녀가 주님을 발견한 곳(30절). "그는 아직 베다니로 들어오시지 않고 마르다가 주님을 맞던 그곳" 즉 마을의 입구에 아직 계셨다. 다음사실을 고찰해 보자.

① 자신의 사명에 충성하신 그리스도. 

그는 무덤이 있는 곳 가까이에서 머물러 계셨다. 이는 그 무덤으로 즉시 가시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신이 하기 위하여 오신 일을 마치기 전까지 여행의 피로를 씻기 위하여 마을로 가시려 하지 않으셨다. 또한 그가 마을로 들어가시지 않은 것은 자신이 많은 구경꾼들을 끌어들여 자신의 기적을 과시하려 한다는 또 그가 오만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였다.

② 마리아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여전히 그녀는 주님을 대단히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늦게 오신 것을 불쾌히 여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결코 주님을 탓하려 하지 않았다. 이같이 우리도 "영문 밖으로"(히 13:13) 그리스도를 맞으러 나가자.

(4) 마리아와 같이 있던 유대인들은 그녀가 급히 알았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오해를 하였다(31절). 

그들은 "그녀가 곡하러 무덤으로 간다"고 말하였다. 마르다는 고통을 잘 견디었으나 마리아는 부드럽고 다감한 여인이었으므로 슬픔을 잘 감당하지 못했다. 마리아는 성품이 본래 그러했다. 이러한 성품의 사람들은 특별히 우울증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또 주변 사람들은 그들을 동정하고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이들 위로자들은 그들의 형식적인 위로가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녀의 슬픔을 더하게 한 줄로 알았다. 그러므로 그녀가 나갔을 때 그들은 그녀가 "무덤에 곡하러 가는 줄"로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서

① 상주들이 자주 저지르는 어리석음과 잘못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슬픔을 더욱 악화시키고 더 심하게 만들려고 애쓴다. 우리는 이러한 경우에 자신을 자학하는데서 묘한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죽도록 슬프게 울어야 잘하는 짓인 것으로 여긴다. 

우리는 고통을 더해 주는 것에 자꾸 집착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우리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오히려 이를 통하여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자 마음을 달래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왜 상주는 곡을 하고자 무덤을 찾아 가는가? 어째서 그들은 죽은 사람이 소망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울려 하는가? 상을 당하면 슬픈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나 그렇다고 슬픔을 더욱 조장하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② 조객의 의무가 무엇이며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지혜로운 처신인지를 보게 된다. 

그것은 지나치게 슬퍼하는 사람들, 즉 울어야 할 이유를 찾아서 더욱 섧게 우는 자들을 울지 않도록 억제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유대인들은 마리아를 좇아 갔고 그 결과 그들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되었으며 그이의 가장 영광스러운 기적의 증인들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와 깊은 교제를 가지는 사람이 슬픔에 잠겨 있을 때 그와 함께 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그를 찾아 오신 주님을 더욱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5) 마리아가 우리 주 예수에게 드린 호소(32절). 

그녀는 자기를 따라오는 많은 조객들과 함께 와서 격정적인 슬픔에 압도된 사람처럼 그의 발 앞에 쓰러져서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주여,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제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바로 마르다도 이렇게 말하였었다. 그들의 말이 일치한 것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그들이 서로 그런 얘기를 자주 주고 받았기 때문이었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① 그녀의 태도는 매우 겸손하고 온순했다. 

분문에 보면 "그녀가 그의 발 앞에 엎드리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태도는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할 수 있었던 마르다가 취한 행동보다 더 겸손한 행위였다. 그녀는 절망적인 상주로서 그 앞에 꿇어 엎드렸다. 그러나 그녀는 또한 겸손한 간구자로서 그의 앞에 엎드렸다. 마리아는 전에 "주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발 밑에 앉은 적이 있었다"(눅 10:39). 

그러나 본문에서 우리는 전과는 다른 형편으로 무릎꿇은 그녀를 발견하게 된다. 평온한 때에 그리스도의 발 앞에 앉아 그의 교훈을 받은 사람들은 고난의 때에 그의 위로를 바라며 믿음을 가지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녀는 그리스도의 전에 이루신 일에 순종하는 자의 입장에서 또한 이제 그가 자기에게 행하실 뜻에 자기를 맡기는 입장에서 그의 발 아래 무릎을 꿇었다. 우리는 슬픈 일을 당할 때 통회하는 눈물과 죄에 대해 자책하는 심정으로 또한 우리 자신을 신의 처분에 맡긴다는 자세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발 아래 자신을 던져야 한다.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발 아래 무릎꿇은 것은 그녀의 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표시였다. 이같이 신하들은 그들의 왕과 군주들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에 습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상의 군왕처럼 세속적인 영광 가운데 나타나시지 않은 우리 주님 예수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사람들은 인간 이상의 분으로서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 따라서 그에게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을 드려야 하는 것이다. 무릎을 꿇음으로써 마리아는 마르다가 했던 것처럼 진실하게 기독교 신앙을 고백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사실 주님에게 무릎꿇는 것은 "당신이 그리스도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는 고백과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무릎을 꿇는 것"과 "입으로 그에 대하여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다 동등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롬 14:11; 빌 2:10, 11). 

그녀는 자기와 자기 가족에게는 친구이지만 그리스도에게는 더 없는 적들이었던 유대인들이 그녀를 보고 있는 앞에서 그리스도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또한 자신이 그렇게 하므로 이웃과 친구들에게 비난받을 것을 조금도 개의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이 자기의 행위를 싫어할 테면 싫어하라고 내버려 두고 그의 발 아래 무릎을 꿇었다. 만일 이러한 행위로 인해 그들이 자기를 나쁘게 여긴다면 그녀는 더욱 그리스도를 존경함으로 더 나쁘게 여겨지기를 오히려 바랐다. 아가서 8장 1절을 참조하라. 

우리가 섬기는 주님은 조금도 부끄러워할 곳이 없는 분이시다. 또한 그분께서 우리의 섬김을 열납해 주신다면 인간들의 비난과 중상을 우리가 당하는 것쯤은 충분히 보상되는 것이다.

② 그녀의 말은 매우 애처로운 것이었다.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리스도께서 늦게 그곳에 오신 것은 모든 일을 최상의 결과로 끝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사실은 곧 입증되었다. 그럼에도 두 자매는 그의 늦으심에 대하여 격에 맞지 않게 섭섭함과 비난의 말을 하였고 또 그들의 오빠의 죽음이 주님에게 책임이 있는 듯이 말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되풀이되는 그들의 힐난에 대하여 의당 분개하심이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당신께서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이상의 일을 하시고자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말씀하심이 옳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러한 한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때가 되어 깨닫게 되기까지 기다리셨다. 그는 그들의 상처받은 심정을 기억하셨다. 그리고 오빠를 잃은 그들이 자기에게 무엇인가 할 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거친 환영을 관대히 생각하셨다.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러한 경우를 당했을 때 온유해야 한다는 본을 보여 주심을 볼 수 있다. 

마리아는 마르다가 한 것처럼 더 이상 길게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된 설명을 통하여 보건대 그녀는 우느라고 목이 메어 말을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마르다처럼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으나 더 많이 울었다. 

사랑에 넘치는 눈물은 말 이상의 호소력을 지니는 법이다. 그것은 그 어느 말보다 호소력있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울려 그리스도를 울렸다...  눈물이야말로 가장 놀라운 웅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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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의 무덤에 오신 그리스도(요 11:33-44)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상처받은 자매들에게 품은 그리스도의 따뜻한 동정. 그것은 세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1. 그의 심령으로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신 모습 속에서 그의 동정을 볼 수 있다(33절). 본문은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전해 주고 있다. [[** 민망 : (마음심+위문할민)憫 민망할 민 -- (마음심+그물망) 惘 멍할 망 = 너무나 딱하고 불쌍하여  안타까움/슬픔으로 가슴이 먹먹함(동감/동정/동참/체휼)  **연민 : 불쌍히여질연/이웃린 (마음심+불꽃린)    ---민망할민 (마음심+위문할민)]]...심금 울림...나는 성령의 근심을 느껴   알며 통회하고 있는가!?!

본문은 주변의 사람들이 마리아와 그의 친족들이 우는 것을 보고 같이 우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 세상이란 얼마나 눈물 흘릴 일이 많은 세상인가! 그런데 기독교는 우리에게 유대인들이 마리아와 함께 운 것처럼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가르친다. 

친구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과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어야 한다. 사실 사랑의 교통(알아주고 인정하며 동감/동정으로 깊이 느낌을 공유함>공감)이 없다면 우정이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본문은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지니신 풍성한 은혜와 곤궁을 당한 자들을 향하신 연민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구약에 이르기를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사 63:9)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우는 모습을 보았을 때"심령에 통분히 여기셨다." 이 말씀은 인생이 당하는 재난과 죽음이 세력에 대한 그리스도의 느낌을 표현해 주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는 죽음과 무덤의 권세에 감연히 도전하심으로 스스로 죽음과 대결하려 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또한 슬픔에 잠긴 그의 친구들에 대한 따뜻한 동정의 표시이기도 하였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정도로 그치신 것이 아니라 "심령에 통분히 여기셨다." 그는 이 일을 보시고 내심 진정으로 마음의 감동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그는 괴로운 한숨을 길게 토하셨다. 

또한 "그는 민망히 여기셨다"이다. 본문을 정확히 번역하면 "스스로 민망히 여기셨다"=: 민망함 그안으로 스스로 들어가셨다 " 이다. 이 말씀은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말씀이다. 즉 그는 인간들과 같이 괴로워하지는 않으신다. 그러나 그는 그 우는 모습을 보자. "스스로 자신을 괴롭게 하셨다." 그는 자주 스스로 괴로워하신다. 그러나 그 괴로움에 의하여 불안케 되시거나 평정을 잃으시는 일은 결코 없으시다.

2. 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동정은 그의 "관심어린 질문"을 통하여 나타난다(34절). 

본문에 보면, 그는 "그를 어디 두었느냐"라고 물으셨다. 이같이 하여 그리스도는 그의 슬퍼하는 친구들의 슬픔을 진정시키고자 하였다. 즉 그들에게 무언가 큰 일이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을 가지게 하므로 그들의 슬픔을 진정시키려 하셨던 것이다.

3. 그의 동정은 또한 "그의 우심"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 시체가 어디에 묻혔노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와서 보시기를" 희망하였다.

(1) 무덤으로 가시면서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35절) 

대단히 짧막한 내용의 말씀이나 본문은 여러 가지 유익한 교훈을 담고 있다. 

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 그리고 참으로 인간이셨다는 점이다. 그 역시 기쁨과 슬픔의 느낌을 맛보셨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모습을 두 가지 보여 준다. 

첫째 그도 인간이시므로 우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는 동정심이 많은 분이시기에 "울려고 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신성을 나타내시기 전 자신의 인간됨의 면모를 먼저 보여 주셨던 것이다. 

그는 예언되었듯이(사 53:3) "눈물의 사람이었고, 슬픔을 아는 분"이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웃으셨다는 말씀을 성경에서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러 번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자비의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눈물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닮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눈물에 대한 여러 가지 다른 견해. 

어떤 이들은 그의 눈물을 선의로 해석하였다(36절). 본문에 보면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라고 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친척도 아닌 사람에 대하여 그토록 강력한 애정을 품으셨다는 것을 이상히 여겼던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이러한 본을 따라 우리의 친구들에게, 그들이 살았든지 죽었든지 간에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의 눈물이 죽은 자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눈물은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해 주는데 도움이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나사로를 기억하시고 잠시 우셨을 뿐인데도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라고 하였다. 이 사실을 보건데 우리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보라 그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다른 이들은 그의 눈물을 비꼬인 심정으로 부당하게 받아들였다(37절). 그리하여 그들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라고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나사로를 죽지 않게 할 능력이 있었다면 그를 죽지 않게 이미 하였을 터인데 이제 그가 나사로를 살릴 수 없으니까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암시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정말 소경의 눈을 뜨게 할 것인지도 의문이다라고 논리를 비약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기적을 행하시지 않고 있음을 보고 그의 먼저번의 기적까지 거짓된 것으로 몰아버리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나사로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 이를 수근거리는 자들의 의혹을 일소시키시었다. 

즉 그는 그들에게 자신이 소경을 고친 것보다 더 위대한 일 곧 죽음도 정복하실 수 있음을 보여 주셨던 것이다.

Ⅱ.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접근하심.

1.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한 번 통분해 하셨다. 이에 대하여 본문은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셨다"라고 하였다(38절).

(1) 그가 통분히 여기신 것은 그의 능력에 대하여 의심조로 말하는 사람들의 불신 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나사로의 죽음을 저지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대한 터무니 없는 비난하는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다. 이같이 그리스도는 인간들의 죄와 어리석음에 대하여는 통분해 하셨으나 자신의 수고와 고난에 대해서는 결코 비통해 하신 일이 없으셨다.

(2) 그가 통분히 여기신 것은 슬퍼하는 자매들을 보시고 새로운 설움이 북바치셨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들이 무덤으로 가까이 다가와서 애처롭게 우는 것을 보시자 부드러우셨던 그의 마음은 다시 한 번 슬픔을 느끼셨다. 주님께서 사역자들을 이 땅에 두심은 그들의 복음 전파를 통하여 죽은 영혼들을 일으키시기 위해서이다. 이런 목적에 의해 보냄 받은 사역자들은 그들이 복음을 전해 주기 위해서 기도하는 자들의 가련한 상태에 대해 마음의 슬픔을 느낄 수 있고 그 참담함을 생각하며 통분해야 한다.

2. 나사로가 누워있는 무덤이 본문에 묘사되고 있다. 

"그것은 굴로써 돌로 막혀 있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후에 장사되신 것과 같은 그러한 무덤이었다. 유대인들은 장례식의 맨 마지막 순간에 돌을 굴려다가 무덤을 막는다.

3. 그리스도께서는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하셨다(39절). 

본문에 보면 그는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신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돌을 옮기시고자 한 것은 그렇게 함으로 곁에 서 있는 모든 사람들이 시체가 무덤에 뉘어 있는 것을 보게 하시고 또한 그 시체로 살아나 입구로 걸어나오는 것을 보이심으로 그 걸어나오는 것이 유령이나 또는 그들의 착각에 의한 환상이 아니고 진짜 나사로임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에게서 말씀에 대한 편견이 옮겨지고 말씀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의 길이 뚫릴 때, 그 때야말로 영혼이 영적 생명으로 부활하게 되는 첫 단계가 되는 것이다.

4. 마르다는 무덤 문을 여는 것을 반대하였다. 

본문에 의하면 그녀는 "주여 죽은 자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그들이 돌을 옮겨 놓을 때 그녀는 시체의 썩는 냄새를 맡았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같이 외쳤으리라.

(1) 인간의 몸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를 여기서 볼 수 있다. 

나흘이란 짧은 시간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 짧은 기간 동안에 나사로의 몸은 크게 부패되었던 것이다. 이 "부패됨을 겪지 않으시려고" 그리스도는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이다.

(2) 어떤 이들은 그녀가 그렇게 말한 것은 시체에 대한 세심한 배려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녀가 자기 오빠의 시체가 모든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다른 이들은 그녀가 그리스도에 대한 배려 때문에 이같이 말하였다고 생각한다. 즉 그녀는 그녀의 선생님이 악취나는 것에 접근하시지 않게 하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악취를 견디실 수 없을 만큼 비위가 약하신 분은 아니었던 것이다. 만일 그가 그렇게 약하신 분이었다면 죄로 인해 악취가 넘치는 인간 세상에 오시지 않으리라. 그러나 다음 구절에 그리스도께서 그녀에게 답변하신 내용을 보아서는 그녀의 이러한 말은 불신으로 인한 것으로 보여진다. 즉 그녀의 말의 뜻은 "주님 지금은 너무 늦었습니다. 이 썩은 시체를 이제 실린다는 것은 불가능입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나사로의 처지를 아무런 희망도 없는 그러기에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으로 포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러한 불신의 대답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기적을 도욱 돋보이는데 기여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하겠다. "그를 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그녀의 말은 나사로를 살리신 그리스도의 명예를 한층 높여 주는 결과를 낳았다.

5.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에게 하신 부드러운 책망(40절). 

본문에서 주님는 그녀에게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진실되게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축복이 안기워진다는 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인식시키려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의지하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요 또 그것을 봄으로 무한한 희열을 맛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자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격려하시기 위해 하신 확실한 약속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을 일깨워 주시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도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내가 이 모든 사실을 너에게 얘기하였는데 너는 모든 것을 잊고 있구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6. 마르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덤은 열리었다(41절). 

본문에 보면 사람들이 "돌을 옮겨 놓았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대하려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들어 가시도록 길을 마련해 두려야 한다. 

"그들은 돌을 옮겨 놓았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겨우 돌을 옮겨 놓는 일이다.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오로지 그리스도뿐이시다.

Ⅲ. 기적의 발생.

1.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하늘 아버지께" 호소하신다. 그가 취하신 자세는 매우 의미있는 것이었다. 

본문에 보면 그는 "눈을 들어 우러러 보셨다." 기도란 바로 영혼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다. 기도란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다.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셨다. 

그는 나사로가 누워 있는 무덤에 신경을 쓰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그는 무덤을 봄으로써 생길 수 있는 모든 불가능하리라는 생각들을 물리쳐 버리셨다. 

그의 아버지를 향한 말씀은 확신에 가득 찬 것이었다. 그는 본문에 보면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하셨다. 그는 이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가르쳐 주신다.

첫째,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둘째, 기도할 때 하나님을 찬양할 것과 또한 이전에 그가 베푸신 은총에 대하여 감사할 것을 가르치신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그리스도의 감사는 좀 더 특수한 것으로 앞으로 있을 기적의 확실성을 의심치 않고 믿는다는 표시였다. 그는 이 기적을 자신이 행할 것으로 말씀하셨었다(11절). 그러므로 그는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본문에서 자신이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것은 기도를 통하여 주어지는 것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내 말을 들으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이 기적이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가능한 것임을 말씀한다.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는 기도의 존귀성를 강조하신다. 그는 기도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의 창고를 여는 열쇠로 생각하신다. 이제 그리스도는 그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을 확신했으므로 다음과 같이 고백하신다.

(1)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신데 대한 그리스도의 감사. 

본문에서 그는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승리가 주어지기 전에 미리 승리를 기뻐하신다. 

이같이 우리도 약속이 이루어지기 전에라도 믿음에 의하여 그것이 이루어질 줄 알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기도가 응답될 때 우리는 특별히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또한 우리는 그러한 은총을 입을 때 자신이 은총을 받았음을 시인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고 우리의 부족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 주신 것은 하나님의 나에 대한 특별한 은총으로 여기고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부르기 전에 자비를 베풀어 우리의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신다. 따라서 우리는 또한 그가 허락해 주시기 전에 그것을 주실 줄 믿고 찬양을 드려야 되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것을 그리스도는 확신한다(42절).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이러한 뜻이라. "이 일을 들어 주심에 대하여 내가 미리 감사드린 것은 당신이 내 모든 간구를 들으시는 줄을 믿기 때문이다"라는 뜻이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항상 들어주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중재하심에 맡기고 있으며 우리의 간구를 그리스도께 의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다. 

또한 본문의 "내가 알았나이다"라는 말씀 속에서 그가 지니고 계시는 확신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그가 지니신 것과 같은 특별한 확신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그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들어 주신다"는 것이다(요일 5:14, 15). 

그러나 어째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기적이 기도를 통하여 자신에게 주어졌음을 모든 사람으로 알게 하셨을까? 그 이유는 다음 절에 명시되고 있는데 그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라는 것이었다.  

그가 그리하신 것은 그의 적들의 반대를 제지하시기 위해서였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악마와 제휴하여서 기적을 행하는 것이라는 모독적인 말을 하였었다. 이제 그리스도는 그들의 생각이 틀린 것을 입증해 주기 위하여 공개적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셨던 것이다. 즉 눈을 뜨고 목소리를 높이어 자신이 하늘 아버지를 의지하고 있음을 고백하셨던 것이다. 

또한 그는 이같이 하시므로 자기를 믿고자 하는 자들의 믿음을 촉구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다. 즉 인간들의 생명을 파괴하고자 하셔가 아니라 구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내신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땅으로 열리게 하여 사람들을 집어 삼키게 하였었다(민 16:31). 엘리야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기 위하여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사람들을 사르게 하였다. 그 이유는 율법의 통치는 공포와 죽음을 통한 통치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죽은 사람을 부활시킴으로 자신의 사명을 증명하셨다.

2. 그는 죽은 나사로에게 말씀하신다. 본문에 보면 주님은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셨다.

(1) 그는 자신의 능력을 은밀하게 행하심으로 나사로를 살리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큰 소리로 나사로를 부르신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① 나사로를 살리실 수 있는 그의 능력을 강조하시기 위해서였다. 

즉 그가 어떻게 "이 새로운 일을 이루셨는가?"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가 말씀하시자, 그 일은 이루어졌다. 그가 크게 외치신 데는 이와 같이 이 역사의 위대함과 이 일을 이루는데 얼마나 큰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시려는 의도가 있었다. 

또한 그가 외치신 것은 군인들이 함성을 질러 원기를 북돋우려는 것처럼 죽음의 세력에 도전하시는 자신의 힘을 새롭게 하시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나사로에게 말씀하실 때 "큰 소리로 말씀하신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불러내야 할 나사로의 영혼이 먼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유대인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무덤을 배회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들의 세계인 음부(Hades)를 옮겨짐을 당한다. 우리가  먼 데 있는 사람을 부를 때 큰 소리로 부르듯이 그리스도께서도 마찬가지 원리로 큰 소리로 부르신 것이다.

둘째, 소환되어야 할 나사로의 몸이 잠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잠든 사람을 깨울 때는 흔히 큰 소리로 외친다. 그가 큰 소리로 외치신 것은(사 45:19) "나는 흑암한 곳에서 은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다"는 성경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② 그가 큰 소리로 외치신 것은 이 기적으로 다른 기적들의 표본을 삼기 위해서였다. 

특히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질 다른 부활들의 표본을 삼기 위해서였다. 이 큰 소리의 부름은 다음 사실을 표상한다(역주: 여기서 다른 기적 또는 다른 부활들이라 함은 죄로부터의 부활 및 말세에 있을 부활을 말하는 것이다).

첫째, 복음의 부름을 표상한다. 

이 복음의 부름에 의해 죽은 영혼들은 죄의 무덤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죄의 무덤으로부터의 부활에 대해서는 전에(5:25) 말씀하셨었다. 그리고 죄의 무덤에서 영혼을 살리는 것은 "말씀"이다(6:63). 

이제 그리스도는 이 부활의 한 실례를 보여 주신다. 그는 이같이 영혼들에게도 "말씀"을 통하여 "살지어다"라고 말씀하신다. 실로 그는 죄의 무덤에 있는 자들에게 "살지어다"(겔 16:6)라고 하시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엡 5:14)고 하신다. 에스겔이 죽어 말라버린 뼈들에게 예언의 "말씀"을 하였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의 영이(생기) 뼈들 속으로 들어 갔었다(겔 37:10). 

우리는 "너희가 돌이키면 살리라"는 계명을 통하여 인간에게는 자신을 뉘우치고 새롭게 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추론하게 된다. 그러한 추론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본문에 있는 나사로에 대한 그리스도의 부르심 속에서 그리스도에게는 스스로 부활하실 수 있는 힘이 계시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마지막 날에 있을 천사장의 나팔 소리를 표상한다. 

이 소리를 듣고 땅 속에서 잠자던 자들은 깨어나 대심판관 앞에 소환될 것이다. 그때 그리스도께서는 본문에서처럼 "내 앞으로 나아오라"고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부르시면서 강림하심 것이다(시 50:4). "그는 그 백성을 판단하시려고 윗 하늘과 아래 땅에 거하는 각 영혼들을 불러 모으실 것이다."

(2) 이 커다란 외침은 짧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덤(죽음)의 요새를 무너뜨리는 하나님을 통하여 나오는 강력한 능력이었다.

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곤히 잠든 사람을 깨울 때 그 이름을 불러 깨우듯이 나사로라고 이름을 부르심으로 그를 깨우셨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당신 자신의 그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내가 네 이름을 아노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그가 본문에서 나사로의 이름을 부르심은 마지막 날에 죽었던 사람마다 다시 부활할 것을 의미하고 있다.

 "수많은 별들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그 이름으로 별들을 부르시는" 그는 또한 땅의 진토 속에 있는 그의 별들(영혼)을 각각 그 이름을 기억하사 일일이 이름을 들어 부르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의 하나도 잃으시지 않을 것이다.

② 예수께서는 그를 "무덤에서 나오라"고 부르셨다. 주님께서는 나사로가 이미 살아 있어서 다만 그를 무덤 밖으로 불러내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부르시고 계심을 볼 수 있다. 

주님께서는 나사로에게 "살지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다만 주님은 그에게 "움직일 것"을 명령하셨다. 

이같이 우리도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하여 영적인 생명을 얻었을 때 떨쳐 일어나 "움직여야"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소생시키신 사람들에게 죄의 무덤인 이 세상은 거할 것이 못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뻐서 "나와야"만 하는 것이다.

③ 기적의 예수님이 뜻하셨던 바대로 성취되었다. 이에 대하여 본문은 "죽은 자가 나왔다"고 전해 주고 있다(44절).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비롯된 능력은 나사로의 몸과 영혼을 재결합시켰다. 그러자 그는 무덤에서 나왔다. 

본문에 보면 이 기적은 우리의 호기심을 채워 주기 보다는 우리의 믿음을 확고하기 위한 의도에 따라 기술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 기적은 나사로의 무덤에서 일어나는 것을 묘사하지 않고 나타난 결과, 즉 그가 나오는 모습만 묘사하고 있다. 

이 나흘 동안 나사로의 영혼은 육체와 분리되어 어디에 가 있었을까? 본문은 이 사실을 전해 주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보건대 그 영혼은 낙원에 있으면서 "기쁨과 축복"을 누리고 있었으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하게 된다. "그의 영혼이 낙원에 거하고 있었다면 그를 다시 몸의 감옥에 돌아오게 한다는 것은 그 영혼에 대하여 오히려 불친절한 일이 아니었는가?" 그렇다고 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의 부활이 그리스도의 명예를 위하는 일이요,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하여 유익한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그가 다시 살아난 것이 결코 그에게 해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성 바울도 자기는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욱 좋은 줄 아나 이 세상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유익한 줄 알았기에 계속 몸 안에 거하노라고 하였던 것이다. 만일 누가 나사로에게 그가 부활한 후 "네 영혼이 몸을 떠났다가 다시 몸으로 돌아 올 때까지에 대하여 그리고 네가 저 세상에서 본 것에 대하여 설명해 보라"고 요구했다면 나는 나사로가 이 일을 설명할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는 바울이 말하였던 것처럼 "내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말할 수 없노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가 보고 들은 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강요될 수도 없고 또한 가능하지도 않은 것이었다. 

감각적인 세상에 살도록 되어 있는 우리 인간들에게는 영계(靈界)란 확실히 알려질 수 없는 곳이요, 또 그 세상에서의 일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이상의 것을 알려고 욕심내지 말도록 하자. 본문에 나사로의 부활에 대하여 기록되어진 것도 다만 "죽은 자가 나왔다"는 내용 뿐이었던 것이다. 

성경을 보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여러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들은 다시 살아난 후 분명 사람들과 친숙한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이들 부활한 사람들이 말한 것을 한 마디도 기록하지 않았다. 오직 우리 주 예수께서 부활 후 하신 말씀만이 수록되고 있는 이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저 세상에 대하여 쓸 데 없는 호기심을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3) 이 기적은 다음과 같이 일어났다.

① "신속하게" 기적은 발생하였다. 

그는 예수께서 "나오라"고 하시자 곧 "나왔다." 그가 살리려고 하시자 그는 곧 살아났다. 이같이 마지막 날 부활 때도 "순식간에 홀연히" 모든 것이 변할 것이다.

② "완벽하게" 기적은 이루어졌다. 

나사로는 완전히 기운이 소생하여 마치 자다가 침상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처럼 튼튼한 모습으로 무덤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생명을 찾았을 뿐만 아니라 온전한 건강도 되찾았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살리신 것은 그를 다른 사람들처럼 살게 하시기 위해서였고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시기 위하여 그를 순간만 살게 하신 것은 아니었다.

③ 그는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왔다. 

그것은 또 하나의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수의를 입고 있었고 "수족은 베로 결박되어" 있었으며 "얼굴은 수건에 싸여 있었다"(이렇게 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장례 관습이다). 그런데 그는 그가 장사되었던 때의 모습 그대로 같은 모습을 하고 나왔다. 

이 사실은 지금 걸어 나오는 사람이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나사로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이요, 또한 그가 살았을 뿐 아니라, 건강하고 그러기에 수의를 입고도 걸어 나올 수 있음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얼굴이 수건에 싸였다"는 것은 그가 완전히 죽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만일 산 사람을 수건으로 싸서 그렇게 들여 놓았다면 그 사람은 얼마 안 있어 질식해서 죽고 말았을 것이었다. 또한 그가 이러한 모습으로 나온 것은 주변 사람들이 그의 결박한 것을 풀면서 만져 보고 바로 그가 나사로임을 확인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확인한 그들로 이 기적의 증인을 삼기 위해서였다.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첫째, 우리가 이 세상을 하직할 때 가지고 가는 것이 무엇이냐는 점이다. 

그것은 한 벌의 수의와 관뿐이다. 무덤에서는 옷을 갈아입을 수가 없다. 오직 한 번 입으면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둘째, 우리가 무덤에 어떠한 모습을 하고 누워 있겠느냐는 점이다. 

눈이 감겼으니 거기서 무슨 지혜나 계략이 생길 수 있겠는가! 그런데 바로 이 무덤으로 우리는 가고 있는 것이다. 나사로가 수의가 걸리적거려 뒤뚱거리며 나오는 것을 보고 무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대단히 놀랐으리라. 만일 우리가 죽은 사람이 살아 나오는 것을 본다면 그래 놀라지 않겠는가! 

이제 그리스도는 그들의 놀라움을 멈추게 하기 위하여 주변의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신다. 그는 "풀어 놓으라. 또 그의 수의를 느슨하게 풀어 주어라. 그러면 그는 안내자나 부추겨 주는 사람이 없어도 혼자 집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수의는 집에 당도할 때까지는 입고 있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시었다.

구약 시대의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은 장차 있을 성도들의 승천에 대한 하나의 시위였다. 한 승천 사건은 족장 시대 중기(中期)에 일어났고 또 한 사건은 모세의 율법 시대에 일어난 것이었다. 이제 신약에서의 나사로의 부활은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확증해 주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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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들의 모의(요 11:45-57)

우리는 본문에서 이 기적으로 인하여 파급된 결과들이 설명되는 것을 보게 된다.

Ⅰ. 이 기적에 의하여 어떤 이들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의 사신 일을 보고 저를 믿었다." 그들은 그가 기적을 행하신다는 소식을 자주 들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기적의 진실성을 의심하면서 믿기를 기피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직접 이 기적을 목격하게 되자 불신을 버렸다. 이들 믿게 된 유대인들은 마리아를 위로하기 위하여 찾아 온 유대인들 중의 일부였다. 이와 같이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면 그 선을 행하는 도중에 하나님께로부터 은총을 받게 된다.

Ⅱ. 또 다른 무리는 기적을 보고 오히려 불쾌하게 여겼고 더욱 완악하게 불신을 고집하였다.

1. 참여자들 가운데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불신의 무리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산헤드린 회의에 이 모든 일을 밀고하였다(46절). 본문은 이에 대하여 "그 중에 어떤 자들은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였다"라고 전해 주고 있다. 그들은 예수를 기소하는 일을 주춤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선동하려는 음흉한 계획을 가지고 밀고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기억하고 지나가자. 즉 가장 강력한 증거가 주어졌는데도 믿기를 거절하는 것은 제일 무서운 불신이라는 점이다. 또한 그러한 거절은 가장 무서운 적대감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사실 그들은 그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을 아직 좋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이 기적을 보고 마음이 누그러져 그를 기소하지 말도록 바리새인들을 권고했어야 옳은 일이었다.

2. "눈 먼 지도자들"인 산헤드린의 재판관들이 믿지 않았다. 그들은 밀고자들의 보고를 듣고 몹시 분개하였다.

(1) 긴급회의가 소집되고 개최되었다(47절). 

이에 대하여 본문에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았다"라고 전해주고 있다. 이 회의는 모의를 위하여서 개최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 더욱 그리스도에 대한 분노를 부채질하기 위해서였다.

(2) 사건의 경위가 보고 되었고 심각하게 논의되었다.

① 토론의 초점은 어떻게 하여 이 예수를 잡아들이느냐는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기적이 사실이라는 것과 또 그가 많은 기적들을 행한다는 것은 인정했다. 따라서 그들이 지금 그리스도에 대해 모의를 한다는 것은 자기들의 양심을 속이는 행위였다.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 그의 메시야로의 자격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메시야임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책을 협의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효율적으로 즉각 제거하지 못한 자신들을 책망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받아들일 것이냐 아닐 것이냐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를 적으로 정해 놓고 어떻게 하던 거를 없앨 것인가만을 궁리하였다. "어떻게 할까? 매일 말뿐이고, 정작 실행한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는가?"라고 그들은 말하였다.

② 그들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취급한 것은 혹시 이 예수로 말미암아 그들의 나라와 종교가 로마인들로부터 피해를 입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해서였다(48절). 

그들은 "우리가 그를 제거하지 못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믿는 자들이 그를 새 왕으로 삼고자 한다면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고 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과신하고 있었다. 마치 그들은 자기들이 묵인해 주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활동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그들은 죽음을 정복하신 주님을 정복할 힘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믿었다.

첫째, 그들은 예수를 자유롭게 활동하시도록 내버려 둔다면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믿을 것"으로 예측하였다. 전에 그들은 그들의 다른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일을 경멸하여 "당국자들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라고 말하였었다(7:48). 그러나 지금 그들은 예수의 도의 인기를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 취급함을 볼 수 있다. 사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사람들이 "그를 믿게 되지나 않을까"하는 점이 있었다.

둘째, 그들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를 추종하게 되면 로마인들이 그들을 공격하리라는 점을 예측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을 빼앗아 가리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의 비겁함을 보게 된다. 만일 그들이 정신이 똑바른 무리들이었다면 로마 사람들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과 같은 말들을 본문에서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사람들이 믿음을 잃게 되면 용기도 잃는 법이다. 

사실 그리스도의 복음의 파급이 로마인들을 자극하여 그들로 유대 나라를 공략하게 만들리라는 예측은 거짓된 예측이었다. 오히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황제에게 세금을 바칠 것과 또 그에게 저항하지 말 것을 가르치셨다. 예수를 재판한 로마 총독도 예수에게서 "아무 잘못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남을 해하기 위하여 상대방을 위험 인물로 몰아버리는 일은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리스도가 그의 복음에 대한 대적자들은 그들이 마치 공익을 위하여 또 공공의 안전을 위하여 기독교가 해롭기 때문에 박해한다는 식의 그럴 듯한 이유를 내세웠던 것이다. 또한 그러한 이유를 들어 그리스도의 사역자들과 선지자들을 "세상을 소란케 하는" 자들로 낙인 찍었던 것이다. 

인간들이 하는 통치는 흔히 정의에 입각하여 이루어지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부당한 방법(죄)에 의하여 재난을 피하려하므로 오히려 재난을 급속히 자신에게 불러 들이는 잘못을 범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3) 가야바는 회의 석상에서 악의에 찬 발언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담고 있는 신비한 발언이었다.

① 그의 발언이 악의에 의한 것이었음을 첫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것이었다(49,50절). 

그는 대제사장이었으므로 이 문제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하였다.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속담에 이르기를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하였다.

첫째, 발언자는 "그 해에 대제사장인 가야바"였다.

둘째, 그의 발언의 요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즉 예수는 어느 모로 보나 처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야바는 예수로 공적 활동을 못하게 막아버리자는 것이 아니고 "예수께서 죽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셋째, 그는 예수를 처형할 것을 간접적으로 발언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현명함을 과시하였다. 그는 경멸하는 어투로 "너희가 제사장들이면서도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말하였다. 이같이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은 자기들이 현명하다는 명색을 내세워 부당한 지시를 밑의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법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장 현명하고 또난 최상의 인물이니까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의 말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가야바는 예수를 처형하느냐 하는 문제는 너무나 자명한 것으로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여긴다. 이같이 권력에 의하여 이성과 정의가 무시되는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들어가지 못하는도다"(사 59:14)라고 하였다. 즉 권력이 부패하면 이에 의하여 "성실과 정직"도 무시되고 마는 것이다. 

그는 예수를 처형할 것을 정치학적인 금언을 들어 주장한다. 즉 개인의 안녕보다 공공의 안녕이 우선한다는 원리를 들어 자기의 주장의 정당성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도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말한다. 

가야바는 교묘하게 문제를 이끌어 간다. 즉 최대의 최상의 인물이라도 그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버리는 것은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논의되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곧 공공의 안녕을 위한다는 명복 때문에 무고한 피를 흘리는 죄를 범하는 것이 자신들과 또한 자기 국가를 위하여 유익할까라고 그들은 생각했어야 옳은 것이었다. 

인간적인 판단에 의한 정치는 부당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공공에 유익을 줄 수 있다면 된다고 생각하나, 그러한 생각이 결국은 모든 사람을 파멸로 이끌고 말게 된다.

② 가야바의 발언 가운데 감추어진 숨은 뜻은 첫 번에는 식별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도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그 사실을 주목케 한다(51,52절). 즉 "이 말은 가야바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면서 이 말을 통하여 "예수께서 이 민족을 위하여 죽으셔야 할 것"을 예언하였던 것이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완악한 악의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해내는 귀한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원리에 입각하여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을 선의로 해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원칙에 근거하여 사람들의 말이나 행위 속에 숨겨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어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변화시키시기 위하여 악인들을 들어 쓰신다면 그들은 우리를 교훈하고 또 우리에게 믿음을 주려는 하나님의 도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의 마음을 다스리시며, 또한 그들의 혀를 다스리사 그 입을 통해 자기 뜻을 이루신다.

(4) 복음서 기자는 가야바의 말을 설명하고 또 보충한다.

① 복음서 기자는 가야바가 말한 내용을 설명한다. 

즉 "가야바가 자기 생각으로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가 공회를 선동하여 예수를 해하려고 했다는 관점에서 볼 때 지금의 발언은 그의 생각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선언하는 계시였다는 면에서 볼 때 그것은 가야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발언이었던 것이다.

첫째, 그는 예언을 하였다. 

그리고 예언하는 사람들은 결코 자신의 생각에 의하여 예언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가야바도 선지자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을까? 확실히 그도 단 한 번 선지자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라고 하겠다. 하나님은 자주 악한 사람들을 자기의 목적을 이루시는 도구로 사용하신다. 그러나 악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고 자기들의 계획을 추진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속는 것이다. 

본문을 통하여 입으로 그럴 듯하게 신앙을 고백한다고 하여서 (또는 예언을 한다고 하여서) 곧 진실된 신앙의 소유자라고는 할 수 없다 한다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였나이다"라고 탄원을 하나 그 예언대로 살지 않은 사람들은 주님에 의해 쫓겨날 것이다.

둘째, 그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언하였다. 

이 말은 그가 대제사장이었으므로 그에게 예언할 자격이 부여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가 대제사장이므로 그의 말이 사람들에게 더욱 주의 깊게 들려지리라는 생각에서(또는 대제사장이 말했는데도 이 말씀을 주의 깊게 듣지 않은 사람은 더욱 가혹히 다루시고자)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이 말씀을 하시지 않고 가야바를 통해 이 의미깊은 말을 하게 하셨던 것이다.

셋째, 그의 예언의 내용은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여 죽으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야바는 "백성을 위하여"라고 한 말은 곧 유대교에 맹종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가 "그 민족을 위하여"라고 한 말은 곧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추종자가 되려는 사람들을 의미한 말이었다. 

본문의 예언 즉 예수께서 죽으시되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으실 것이고 또 이 다른 사람들의 위익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들을 대신하여 죽으실 것이라는 예언은 의미 깊은 것이다. 

이 말은 만일 유대 민족 전체가 일치하여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이 구원을 받아 영생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로마의 압제로부터도 구원된다는 뜻을 지닌 말씀인 것이다.

② 복음서 기자는 가야바의 말에다 다음의 사실을 덧붙여 설명한다(52절). 

즉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라고 덧붙여 말한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는가를 생각해 보자. 

그는 오직 유대 민족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아니었다. 그는 또한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서도 죽으셔야만 했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씀을 당시에 이방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 즉(흩어진 믿는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포함하여) 각 나라에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를 예배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이해한다. 

확실히 그리스도께서는 이들을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셨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이 말씀을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아 그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들 즉 인류의 역사를 통털어 하나님을 경외한 모든 사람들을 뜻하는 말로 받아들인다. 이 말씀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도 포함되는데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되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리스도의 죽으심에는 이 모든 사람들을 대속하시려는 의도가 있다. 그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고 또한 죽으셨다.

둘째, 그의 죽으심의 목적과 취지. 그가 죽으신 것은 방황하는 사람들을 모으시고 흩어진 사람들을 모아 하나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a.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로 하여금 그에게 나아갈 수밖에 없도록 강력하게 우리를 이끄신다. 그는 우리를 그에게 모으시기 위하여 높이 달리셨다. 우리를 위하여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으신 그의 사랑을 볼 때 우리는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b.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를 하나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들을 모아 하나가 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각처에 흩어져 있으며, 또한 전(全) 세대를 통하여 존재하던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5) 이 논쟁의 결과(53절). 이에 대하여 본문은 "이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고 전해 준다. 

이제 그들은 서로의 심중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들 모두가 "예수는 죽어야만 한다"는 같은 생각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에는 그들 각각 나름대로 예수를 죽이려는 생각을 품었었으나 이제는 단결하여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이같이 그들은 악한 일을 위하여 결속한 것이다. 악인들은 서로 상대방도 같은 악의를 품었음을 확인하므로 자신의 악의로 더욱 굳히게 또 용기를 얻게 된다. 그들은 상대방도 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됨으로 전에는 감히 실행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던 악행을 가능한 것으로 보게 되고 뿐만 아니라, 가볍게 추진하게 되는 것이다. 

전에도 그들은 예수를 죽이려 하였으나 그럴 구실을 찾지 못하였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예수를 처형해도 좋다는 그럴 듯한 이유를 찾아 내게 되었던 것이다.

(6) 이 까닭에 그리스도는 숨어서 다니셨다(54절). 본문은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셨다"고 전해 주고 있다. 

이제 그는 인적이 드문 곳으로 물러나셨다. 그가 그렇게 하신 것은 원수들과의 접촉을 피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는 "빈들 가까운 곳으로" 가셨다. 그곳은 바로 에브라임이었다. 그의 제자들도 그와 함께 그곳으로 갔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홀로 고독하게 남겨 두려고 하지도 않았고 또 그를 위험 가운데 남겨 두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왜 이때부터 숨어 다니셨을까? 그 이유는 그가 적들의 세력을 두려워하셨기 때문이거나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셨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가 숨어 다니신 것은 첫째, 예루살렘과 유대 백성들을 그가 기뻐하시지 않은 때문이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거절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그들을 떠나시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신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그가 예루살렘을 피하신 것에는 예루살렘에 파멸이 곧 닥칠 것이라는 슬픈 전조가 암시되고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미쳐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그가 예루살렘을 떠나신 데는 둘째로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적개심을 더 이상 변명할 수 없게 하시려는 처사였다. 그는 자신이 숨어 다니시므로 그들의 분노가 가라앉게 되지는 않을까를 시험해 보셨다. 그러나 이 악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빼앗지 않고는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숨어 다니신 셋째 이유는 그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위험을 피하시기 위해서였다. 

또한 넷째의 이유는 그의 숨어 다니심으로 인해 그의 예루살렘으로의 입성이 보다 분명한 의미를 지니게 하고 널리 알려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오랜만의 공적인 나타남은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기쁨을 배가시키었다.

(7) 예수에 대한 저희의 수색(55-57절).

①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유월절이 가까워 올 무렵에 일어났다. 

그들은 예수께서 유대의 관례대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오시리라고 기다리고 있었다(55절). 본문은 이에 대하여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유월절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절기였다. 이 유월절이 다가오자,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케하기 위하여 시골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이들 가운데는 죄를 범하였으므로 성결례를 행할 의무가 있어서 올라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또한 어떤 이들은 금식 기도나 또는 신앙의 의식에 참석함으로 죄는 없으나 자기를 성결케 하고자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 유월절에 참석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은 유월절 전에 예루살렘에 와서 머물렀다.

② 예수에 대한 저희의 수색은 대단히 극심한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 너희 생각은 어떠하뇨. 저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라고 수군거렸다."(50절). 어떤 이들은 위와 같이 말하면서 그를 찾은 사람들은 예수를 좋게 생각하고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성결케 하기 위하여 일찍이 고향을 떠나 온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대단히 열망하였을 것이고 또 그런 기대 때문에 보다 일찍 왔으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에 대하여 무슨 소식을 듣지 못하였는가? 라고 물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를 찾고자 한 사람들은 예수의 적들이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아마도 대제사장의 무리들은 그들의 의무에 따라 성결케 하기 위하여 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집례하면서 그리스도의 향방을 성결케 되기 위해 온 사람들에게 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볼 때 그들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저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뜻으로 볼 수 있겠다.

첫째, 그리스도를 비난하려는 저의에서 나온 말이었다. 

즉 예수가 나타나기를 꺼려하여 여호와의 절기에 참예하는 일을 생략하려 한다고 모함하려는 말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둘째, 그들의 음모가 좌절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비롯된 질문이었다. 

그들은 "저기 명절에 오지 않으려는가?" 만일 "그가 오지 않는다면 우리 계획은 수포가 되고 말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였다.

③ 그를 체포하라는 지시는 매우 엄격한 것이었다(57절). 

대 산헤드린 회의는 포고문을 발표하여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첫째, 저희가 예수를 사로잡고자 얼마나 치밀하게 노력했는가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둘째, 그들이 남들까지 자기들의 범행에 끌어들이는 것을 얼마나 기뻐했는가 하는 사실을 생각해 보고 지나가자. 악한 통치자들은 자기들 수하에 있는 사람들까지 자기들의 불의에 도구를 삼고자 하므로 자기들의 죄를 한층 더 악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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