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1.13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요18.체포.재판. 베드로의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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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요18장

===잡히시다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2.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3.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다

1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14.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베드로가 제자가 아니라고 하다

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16.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18.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묻다

19.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2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22.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24.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베드로가 다시 제자가 아니라고 하다

25.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26.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27.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빌라도 앞에 서시다

28.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29.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30.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31.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십자가에 못 박도록 예수를 넘겨 주다

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39.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40.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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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B]요18장

1.  When Jesus had spoken these words, He went forth with His disciples over the ravine of the Kidron, where there was a garden, into which He Himself entered, and His disciples.

2.  Now Judas also, who was betraying Him, knew the place; for Jesus had often met there with His disciples.

3.  Judas then, having received the [Roman] cohort, and officers from the chief priests and the Pharisees, *came there with lanterns and torches and weapons.

4.  Jesus therefore, knowing all the things that were coming upon Him, went forth, and *said to them, "Whom do you seek?"

5.  They answered Him, "Jesus the Nazarene." He *said to them, "I am [He.]" And Judas also who was betraying Him, was standing with them.

6.  When therefore He said to them, "I am [He]," they drew back, and fell to the ground.

7.  Again therefore He asked them, "Whom do you seek?" And they said, " Jesus the Nazarene. "

8.  Jesus answered, "I told you that I am [He]; if therefore you seek Me, let these go their way,"

9.  that the word might be fulfilled which He spoke, "Of those whom Thou hast given Me I lost not one."

10.  Simon Peter therefore having a sword, drew it, and struck the high priest's slave, and cut off his right ear; and the slave's name was Malchus.

11.  Jesus therefore said to Peter, "Put the sword into the sheath; the cup which the Father has given Me, shall I not drink it?"

12.  So the [Roman] cohort and the commander, and the officers of the Jews, arrested Jesus and bound Him,

13.  and led Him to Annas first; for he was father-in-law of Caiaphas, who was high priest that year.

14.  Now Caiaphas was the one who had advised the Jews that it was expedient for one man to die on behalf of the people.

15.  And Simon Peter was following Jesus, and [so was] another disciple. Now that disciple was known to the high priest, and entered with Jesus into the court of the high priest,

16.  but Peter was standing at the door outside. So the other disciple, who was known to the high priest, went out and spoke to the doorkeeper, and brought in Peter.

17.  The slave-girl therefore who kept the door *said to Peter, "You are not also [one] of this man's disciples, are you?" He *said, "I am not."

18.  Now the slaves and the officers were standing [there,] having made a charcoal fire, for it was cold and they were warming themselves; and Peter also was with them, standing and warming himself.

19.  The high priest therefore questioned Jesus about His disciples, and about His teaching.

20.  Jesus answered him, "I have spoken openly to the world; I always taught in synagogues, and in the temple, where all the Jews come together; and I spoke nothing in secret.

21.  "Why do you question Me? Question those who have heard what I spoke to them; behold, these know what I said."

22.  And when He had said this, one of the officers standing by gave Jesus a blow, saying, "Is that the way You answer the high priest?"

23.  Jesus answered him, "If I have spoken wrongly, bear witness of the wrong; but if rightly, why do you strike Me?"

24.  Annas therefore sent Him bound to Caiaphas the high priest.

25.  Now Simon Peter was standing and warming himself. They said therefore to him, "You are not also [one] of His disciples, are you?" He denied [it], and said, "I am not."

26.  One of the slaves of the high priest, being a relative of the one whose ear Peter cut off, *said, "Did I not see you in the garden with Him?"

27.  Peter therefore denied [it] again; and immediately a cock crowed.

28.  They *led Jesus therefore from Caiaphas into the Praetorium, and it was early; and they themselves did not enter into the Praetorium in order that they might not be defiled, but might eat the Passover.

29.  Pilate therefore went out to them, and *said, "What accusation do you bring against this Man?"

30.  They answered and said to him, "If this Man were not an evildoer, we would not have delivered Him up to you."

31.  Pilate therefore said to them, "Take Him yourselves, and judge Him according to your law." The Jews said to him, "We are not permitted to put anyone to death,"

32.  that the word of Jesus might be fulfilled, which He spoke, signifying by what kind of death He was about to die.

33.  Pilate therefore entered again into the Praetorium, and summoned Jesus, and said to Him, "Are You the King of the Jews?"

34.  Jesus answered, "Are you saying this on your own initiative, or did others tell you about Me?"

35.  Pilate answered, "I am not a Jew, am I? Your own nation and the chief priests delivered You up to me; what have You done?"

36.  Jesus answered, "My kingdom is not of this world. If My kingdom were of this world, then My servants would be fighting, that I might not be delivered up to the Jews; but as it is, My kingdom is not of this realm."

37.  Pilate therefore said to Him, "So You are a king?" Jesus answered, " You say [correctly] that I am a king. For this I have been born, and for this I have come into the world, to bear witness to the truth. Everyone who is of the truth hears My voice. "

38.  Pilate *said to Him, "What is truth?" And when he had said this, he went out again to the Jews, and *said to them, "I find no guilt in Him.

39.  "But you have a custom, that I should release someone for you at the Passover; do you wish then that I release for you the King of the Jews?"

40.  Therefore they cried out again, saying, "Not this Man, but Barabbas." Now Barabbas was a rob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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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장 (개요)

지금까지 본서의 복음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하여는 많은 사실을 기록하지 아니하였다. 있다면 다만 그의 교훈을 유도하기 위해 필요한 사실만을 기록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죽으시던 장면을 서술함에 있어서는 그의 고통 받으시던 상세한 내용까지 그는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생략한 것을 그는 기록하고 있는 부분도 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 십자가를 부끄러워하고 그를 따르던 사실을 은닉하려고 애쓰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말과 글로써 이제는 이 사실을 선포하고 자랑으로 여기게 된 것을 볼 수가 있다. 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그리스도께서 동산에서 잡히시던 모습과 스스로 자신을 죄인으로 내 주시던 과정(1-12).

Ⅱ. 대제사장의 뜰에서 그가 조롱을 받으시던 모습과 이 사이에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던 사실(13-27).

Ⅲ. 그가 빌라도 앞에서 박해를 받으시던 사실과 그에게서 심문을 받던 사실, 그리고 빌라도가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바라바와 예수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고 한 사실과 백성들이 바라바를 놓아 주게 한 내용(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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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 동산의 그리스도(요 18:1-12)

이제 고통을 당하심으로 완전케 되신 우리의 구원의 주님께서 적에게 잡히시는 순간이 다가왔다.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께서 스스로 자신을 내 주심을 볼 수 있다. 이 날은 그의 마음 속에 이미 보상의 날로 정해져 있었다. 그를 통한 새로운 구원의 때가 이르렀고 또 그의 팔로 구원을 이루실 때가 임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이 위대한 광경을 생각하여 보자.

Ⅰ. 우리 주 예수는 용맹스러운 투사처럼 싸움터(겟세마네 동산을 말함)를 먼저 점령하신다(1,2절). "예수께서 말씀을 하시고" 즉 말씀을 전하시고 기도를 하심으로 그의 증언을 마치신 후 그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시고 즉시 집에서 나와 달빛을 받으시면서 성을 빠져 나오셨다. 달빛을 받으시며 나오셨다는 근거는 유월절은 달이 완전히 떠오른 후에 지키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리스도는 11제자들과 함께(11명인 것은 유다가 엉뚱한 속셈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이었다)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셨다." 이 시내는 예루살렘과 그의 기도처가 있는 올리브 산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아마 이 기도처는 무명의 인사가 그리스도에게 사용을 허락한 곳인 것같이 보인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우리 주님 예수는 "이 말씀을 하시고"(마 26:1 에서도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라고 하였다) 수난을 받으러 나아가셨다. 이 말씀이 뜻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우리 주님 예수는 자기에게 주어진 직무를 모두 이루셨다는 사실이다. 제사장의 직무는 가르치고 기도하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제사장의 직무는 가르치고 기도하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이제 그리스도는 가르치는 일과 기도를 마치신 후 자신을 속죄물로 드리신다. 그리스도는 예언자로서의 자신이 전할 말씀을 다 전하셨다. 또한 이제 그는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감당하시기 위하여 "죄를 위한 속죄물로 자신을 드리신다." 그리고 이 제사장의 직무를 완성하신 후 그는 그의 왕적 임무를 수행하고자 하늘나라로 가셨던 것이다. 즉 그는 제사장, 예언자, 왕으로서의 사명을 모두 이루시었다.

(2) 시련의 때를 위하여 그의 제자들을 말씀으로 준비시키시고 또 기도로 시련을 맞을 자신을 위하여 준비하신 다음 그는 용감하게 시련을 맞이하려 나가셨다. 그는 갑옷을 입으시자 스스로 도전하셨고 그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계시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선한 이유 때문에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고난을 당해야 한다는 사명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자들은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위로를 받기를 바란다. 즉 그리스도는 그에게 속한 사람들을 무작정 시련 가운데로 몰아 넣으시지 않으시며 먼저 저희로 시련에 대처할 수 있기 위하여 필요한 것들을 준비시키신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위로와 지시를 받아들인다면 또한 그의 중제하심에 우리를 맡긴다면 우리는 확고한 결단으로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는데 가로 놓인 아무리 엄청난 고난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2. "그가 제자들과 함께 가셨다"는 사실이다. 유다는 그가 성 안의 어떤 집에 거하는지를 알았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는 그 집 안에 계시다가 거기서 잡히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지 않은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1) 그는 그의 종전의 관습대로 하셨고 때가 이르렀다고 하여서 십자가를 지거나 기피하기 위하여 그의 관습을 변경하시지는 않았다. 그가 예루살렘에 거하실 때는 낮에는 가르치고 병을 고치는 일을 하시고 밤에는 올리브 산에 거하시던 것이 그의 습관이었다. 그는 성의 변두리에 위치한 그곳을 숙소로 정하고 계셨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성의 중심가에 있는 궁전에 그를 위하여 쉴 자리를 마련해 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그의 습관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의 고통을 예견하시고 그의 관습을 바꾸시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니엘이 정한 시간 대로 가도하였듯이 그도 그대로 하셨다(단 6:10).

(2) 그는 그의 적들로 인하여 백성들 가운데서 소요를 피우시기를 바라시지 않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평소에 그는 소란을 싫어하셨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가 성 안에서 잡히심으로 소란이 야기된다면 사건이 확대되어서 많은 사람이 상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변두리로 물러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고난에 얽매이게 될 때 다른 사람도 우리와 함께 고난당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가 아무런 항거 없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수치가 되지 않는다. 인간으로부터 영예를 얻으려는 사람들은 그들의 생명을 포기할 경우에 할 수 있는 대로 값있게 죽으려고 한다. 그러나 저희의 피를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여기시며 또 저희가 흘린 피 한 방울도 헛되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런 수고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3) 그는 수난을 맞이하시면서 수난 마지막 순간이 그리하셨듯이 우리에게 세상에서 물러나는 본을 보여 주고자 하신다. "그런즉 우리도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3). 만일 우리가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귐을 갖기를 원한다면 이 세상의 도성(都城)들 그것이 비록 거룩한 성이라 할지라도 그곳의 무리들과 염려 그리고 위로를 뒤에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

3. 그는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셨다." 그가 감람 산으로 가시기 위해서는 이 시내 건너야만 했다. 그러나 저자가 이 사실을 특별히 기록한 데는 적어도 여기에 의미심장한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일은 다음의 사실을 예시한다.

(1) 메시야에 관한 다윗의 예언에(시 110:7) "그가 길가의 시냇물을 마시리라"는 말씀이 있는데 본문은 그 말씀을 지시해 준다. 기드론 시내는 "검정물"이란 뜻을 지닌 말로써 그렇게 불리우게 된 것은 그 시내가 통과하는 골짜기가 오염되었거나 아니면 성에서 흘러나오는 하수구 물과 혼합되어 물이 변색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이 기드론 시내가 뜻하는 것은 그에게는 영광이요 우리에게는 구원이 되는 그 길로 나아가는 데는 고통의 시냇물을 지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이 개울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길가에 놓여 있을 때 이 개울물을 마시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그는 그의 머리를 드시며" 우리의 머리를 돌리신다"(영광 받으신다는 뜻).

(2) 그가 메시야의 타입으로서 다윗의 패턴을 따르시고 계심을 나타내 준다. 다윗이 압살롬을 피하여 달아날 때에 왕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 울며 감람 산으로 올라갔고" 또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들이 그와 함께 울며 따라간 사실이 특별히 기록되고 있다(삼하 15:23, 30). 마찬가지로 "다윗의 아들" 그리스도는 그를 저희의 통치자로 삼지 않으려는 유대의 반도들에게 쫓김을 당하여(그리고 아히도벨이 다윗에 대한 반역 음모에 가담하였듯이 유다의 배신을 받으시고) 진심으로 애통하는 무리들을 수행하시고서 수치와 겸비함을 입으시고 그 시내를 건느셨던 것이다. 또한 유다의 경건한 왕들은 그들이 기드론 시냇가에서 발견한 우상들을 불사르고 파괴한 사실을 볼 수 있다(아사왕의 경우는 대하 15:16 , 히스기야는 대하 30:14 , 요시야는 왕하 23:4, 6 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개울에 가증한 것들을 사람들이 가져다 버렸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대신 죄를 지시고" 즉 죄를 폐하여 없이하시려고 바로 이 시냇물을 건너심으로 수난의 첫 걸음을 디디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시작된 감람 산은 예루살렘 동편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의 고난이 끝난 곳인 갈보리 산은 예루살렘 서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두 산에서 그는 동서로부터 몰려오는 많은 구속받을 무리들을 맞이하신다.

4. 그는 동산으로 들어가셨다. 그리스도의 수난이 동산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요한 복음서 기자만이 기록하고 있다(여기서 동산이라 함은 영어의 garden으로 다른 가지들은 감람 산이라고 한데 비하여 요한 기자는 garden이라 특기한 것을 일컬은 것임:역주). 죄가 시작한 곳 또한 동산 에덴에서였다. 거기서 저주가 선언되었고 구속자를 보내신다는 사실이 약속되었다. 그러므로 이 동산에서 약속의 씨이신 주님은 옛 뱀과의 접전을 벌이신 것이다. 그리스도가 묻히신 곳 또한 동산이었음을 기억하자.

(1) 우리가 우리 정원을 산보할 때 그리스도께서 동산(정원)에서 수난당하셨음을 생각하자. 우리가 우리의 정원에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도 그가 거기서 수난당하신 덕분이다. 그가 여기서 고난을 받으셨으므로 인간으로 인한 땅에 대한 저주가 제거된 것이다.

(2) 우리가 재산을 소유하고 또 그것을 즐길 때 언제 닥칠지 모르는 고난을 경계하자. 왜냐하면 우리의 기쁨이 머무는 정원은 눈물의 휘장 안에 있어 우리의 기쁨이 언제 슬픔으로 변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5. 그는 제자들을 함께 데리고 가셨다.

(1) 그가 제자들을 데리고 가신 것은 기도하러 가실 때 그가 늘 하시던 관례에 의한 것이었다.

(2) 또 한 이유는 저희가 그의 고난과 고난에 대한 그의 인내의 증인들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저희가 더 큰 확신과 열정을 가지고 세상에 그의 수난을 전하고(눅 24:48) 또 스스로도 고난받을 준비를 하도록 그리하여 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3) 저희를 위험 속에 인도하심으로 저희의 충성에 대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저희가 나약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음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였다. 때때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역경 가운데로 이끌어 가시고 또 그들을 구해내심으로 스스로의 위엄을 나타내신다.

6. 배반자 유다는 "이곳을 알고 있었다."그는 예수께서 밤이면 이곳으로 오시는 것을 알았다. 또는 어쩌면 그리스도께서 하신 몇 말씀을 듣고 그가 더 좋은 곳이 없으시므로 그 밤에 거기 머무시려고 작정한 것이라고 짐작한지도 몰랐다. 한적한 동산은 명상과 기도를 위한 가장 적절한 곳이다. 또한 유월절 후는 시기적으로도 개인적인 봉헌을 위해 적당한 때였다. 유다가 이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1) 유다의 죄를 한결 무겁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유다는 그토록 예수를 친밀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승을 배반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려는데 본문의 의도가 있다. 오히려 유다는 그리스도와의 친숙함을 그를 배신하는 기회로 악용하였던 것이다. 생각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짓은 비열한 짓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이러한 경로를 밟아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앙은 그 어떤 다른 곳에서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니라 친근한 사람끼리 모이는 곳에서 욕을 당하신 것이다. 많은 배교자들 가운데 그들이 신앙을 몰랐더라면 차라리 이런 반역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이 성서의 말씀과 규례를 몰랐다면 그것을 조롱하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배신자가 그를 찾으러 그리로 올 것을 알았지만 "그의 때가 이른 줄을 아셨으므로" 그에게 발각되기 위하여 그리로 가셨다. 이로써 그는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려 하셨음을 보여 주신다. 그가 하신 일은 억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었다. 한 인간으로서 그는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지만 한편 중제자로서 그는 "내가 당신의 뜻을 이루고자 왔나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가 동산으로 가신 것은 늦은 밤이 되어서였다(아마 8시나 9시경이 되어서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간은 일반인들에게는 식사가 끝나고 휴식을 취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그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은 잠을 자는 시각에 기도를 하시며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Ⅱ. "우리 구원의 주"께서 전쟁터(동산)에 이르시자 원수도 즉시 그곳에 와서 그를 공격한다. 유다는 대제사장들의 허락을 받아 그 하속들을 데리고 그리로 왔다. 그들 중에는 특별히 그리스도의 가장 강력한 적들인 바리새인들이 있었다. 본 복음서 기자는 그리스도가 괴로워하시던 모습은 기록하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세 복음서 기자가 이 사실을 자세히 기술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곧 예수를 잡으러 온 유다와 그의 동료들을 소개한다. 다음의 내용을 고찰해 보자.

1. 그리스도를 체포하기 위하여 동원된 사람들. 그들은 논문에 의하면 "유다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이었다."

(1) 여기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위하여 고용된 무리들이 있다. 그들은 ‘스페이라’(spei'ra) - 즉 하속들과 연대 병력의 로마 군사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군대"(regiment, cohors)란 말을 근거로 그 군사의 수효가 500명이라고 보는 이도 있고 또 1,000명이라는 사람들도 있다. 여하간 그리스도에게 친구들은 적었고 적들은 많았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계신다면" 우리는 악을 행하는 무리들을 따르지 말며 우리를 향하여 음모를 꾀하는 무리들을 두려워하지도 말자.

(2) 여기 여러 부류의 무리들이 몰려왔다. 이 일군인 사람들 가운데는 이방인들과 그리고 폭동을 방지하기 위하여 시내의 안토니아 진영에 주둔하고 있는 수비병들 가운데 파견된 로마 군사들, 또한 "대제사장들의 하속들"이 있었다. 대제사장들이 가정에서 부리는 종들이나 성전 뜰에서 수종하는 하복들은 유대인들이었다. 여기 모인 무리들은 서로 적대적인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저희를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여 하나가 되게 하려고 오신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위하여 합세하고 있었다.

(3) 이 무리들은 일시적 감정 때문에 몰려온 폭도가 아닌 사전의 계획에 의해 몰려온 무리들이었다. 대제사장들이 그들에게 직접 명령할 수는 없었다. 이 예수가 위험 인물이라고 대제사장들이 총독에게 신고를 하였고 이 신고에 의하여 총독이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체포해 오라는 영장을 발부한 것처럼 보인다. 총독이 이렇게 한 것은 "백성들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은 이와 같이 적들에게 쌓여 있었고 또 이 적의 교권(유대교)과 정권이 합세하여 그리스도의 무리들을 핍박하였다(시 2:1, 2). 이미 이렇게 될 것을 그리스도는 말씀하셨고(마 10:18) 그리고 말씀 대로 된 것이다.

(4) 이 모든 것은 유다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그는 이 무리들을 받아들였다. 아마도 그는 이 불의를 행함으로 돈을 받은 수 있다는 욕심을 부린 것과 마찬가지로 이 음모의 총지휘자의 명예를 누리려는 야망이 있었고 그러기에 이 일을 위해서는 많은 군대가 필요하다고 강력히 주장을 했을 것이고 그리고 이 요구가 수락되어서 이들이 파견된 것처럼 보인다. 그는 못난 자기의 스승과 동료 111명 모르게 오는 것보다 수백 명의 당당한 무리들의 앞에 서서 오는 것을 놀라우리 만치 자연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는 전에 결코 이처럼 각광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 기회가 무위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다짐하였다. 그는 이번 일이 잘 성사되면 관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서 커미션을 받는 것은 물론 더 좋은 수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2. 그들이 예수를 잡기 위해 갖춘 준비작업. 본문에 의하면 그들은 "등과 훼와 병기를 가지고" 왔다.

(1) 그리스도가 도망할 것를 염려하여 그들은 달빛이 비추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을 준비하셨다. 그러나 그들이 등을 준비할 필요는 없었다. 첫째 아담과 같이 둘째 아담은 두려움이나 또는 수치 때문에 달아나 "동산 나무들 가운데" 자기를 숨기시지는 않는다. 곁에 있는 태양을 찾기 위하여 촛불을 켠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2) 그리스도가 저항할 것을 염려하여 그들은 무기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주님의 전쟁 무기는 영적인 무기였다. 이 영적인 무기를 가지시고 그는 그들에게 종종 패배를 안겨 주었고 그리고 그들을 잠잠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은 다른 무기 곧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아 왔다.

Ⅲ. 우리 주님 예수는 적의 첫 공격을 멋있게 격퇴하셨다(4-6절). 내용을 더 자세리 고찰해 보자.

1. 그는 그들에게는 최선의 부드러우심으로 또 더 말할 수 없이 온화한 심정으로 그들을 맞이하셨다.

(1) 그는 그들을 맞이하시고 매우 부드럽고 온유하게 질문을 던지신다(4절). 그는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그러기에 이러한 일에도 조금도 놀라시지 아니하고 놀라울 만한 용기와 동요되지 않은 마음의 평정을 가지고 그들을 맞으러 나가셨다. 그리고 그는 전혀 무관심한 것처럼 부드럽게 물으셨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도대체 무슨 일인가? 밤도 깊었는데 이 소란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물으셨다. 다음사실을 생각해 보자.

① 자신이 고통받을 것에 대한 그리스도의 예견. 그는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이 고난을 당하시고자 스스로 작정하고 계셨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것과 같은 앞 일을 내다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우리 앞에 어떠한 일이 닥칠지 미리 알고 싶어하여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다만 우리의 고통만을 재촉하는 결과밖에는 이루어 놓는 것이 없다.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한 것이다." 만일 무슨 기대를 건다면 앞날에 고난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정작 고난에 직면할 때 "그것은 내가 예측했던 것이야 어디 무슨 손해가 났는지 앉아서 생각해 보자"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② 고난에 대한 그리스도의 과감한 도전. 그는 고난을 피해 달아난 것이 아니라 고난을 맞이하러 나아가셨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 쓴 잔을 취하셨다. 백성들이 억지로 그에게 왕관을 씌워 갈릴리에서 왕으로 삼고자 하였을 때 그는 물러가 자신을 숨기셨었다(6:15). 그러나 그들이 그에게 십자가를 지우려 하여 왔을 때 그는 자신을 그들에게 내 주셨다. 왜냐하면 그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고난을 당하시기 위한 것이요, 저 세상에 가셔서 다스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행동하셨다고 우리도 자신을 필요 없이 고난에 내맡기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때가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죄를 짓지 아니하고는 고난을 피할 수 있을 때는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 설혹 고난이 우리에게 이와 같이 임한다고 할지라도 이 고난이 우리를 동요시키지 못하게 하자. 왜냐하면 어떠한 고난도 우리를 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는 그들이 찾는 사람이 그리스도임을 그에게 말했을 때 매우 침착하고 부드럽게 대답하셨다(5절). 본문에 의하면 그들은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하였고 이에 대하여 그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답변하셨다.

① "그들이 그를 보았으나 그를 알지 못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실상 많은 로마 병사들이나 적어도 성전에서 일하는 하속들만이라도 그들이 호기심 때문에 자주 그를 보았을 것이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고하간에 같이 있던 유다가 그를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그들 중에 아무도 "네가 바로 우리가 찾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이 그를 보고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는 그들이 자기를 알아 볼 수 있도록 불 빛 앞으로 나아가셨다. 본문을 통하여서 우리는 그가 적들이 악행을 저지르려고 할 때 하고자 하신다면 적들의 궤교를 손쉽게 교란시키시므로 그들의 얼의 빼놓으실 수 있음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② 그들은 그를 찾으면서 그를 "나사렛 예수"라고 칭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그에 대하여 알고 있는 유일한 칭호였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온 영장에도 그를 이와 같이 칭한 것처럼 보인다. 이 칭호는 그의 메시야 되신 증거를 없이하려고 주어진 모독적인 칭호였다. 이를 보아서도 그들은 그가 누구인지 또 왜 오셨는지 알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를 알았다면 그를 박해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③ 그는 그들에게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바르게 답변하신다. 그는 엘리사처럼 그들이 자기를 알아 보지 못한다는 이점을 그들을 대적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았다. 엘리사는 시리아인들이 볼 수 없게 되자 "이는 그 길이 아니요 이는 그 성도 아니니 나를 따라 오라"(왕하 6:19)고 그들에게 말하여 그들을 유인했던 것이다. 다만 그리스도는 이러한 현실에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자 고난을 감수하심을 보여 주는 기회로 삼으셨다. 또한 그들은 그를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지만 그 부름에 대답하심으로 자신이 그들의 모욕을 무시하고 있음을 보여 주셨다. 사실 그는 "베들레헴의 예수"였기 때문에 "나는 너희가 찾는 사람이 아니라"고 답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얼버무려서 문제를 넘겨버리려고 하지는 않으셨다. 이로써 그는 우리에게 그를 믿는 일이 큰 대가를 치루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하여도 그를 믿어야 할 것을 가르치신다. 즉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 것"과 비록 어려운 시기일지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남자답게 그의 기치 아래서 싸울 것을" 가르치신다. ‘에고 에이미’(I am he)(18:15) - 즉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는 말씀은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신 영광스러운 이름이다(출 3:14). 그런데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은 이 명예로운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자신을 호칭하시고 계신다.

④ 본문은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는 사실을 특별히 명기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있었던 그가 이제는 그를 대적하는 무리들과 함께 있는 것이다. 본문은 한 배교자의 모습을 소개해 준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바꾼 인물이었다. 그는 예수를 따르면서도 그의 마음은 늘 세속적인 무리들에게 있었다. 이제 그는 드러내놓고 그 무리들과 떼를 지어 몰려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장차 심판날에 저희와 함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리라.

첫째, 이 사실을 기록한 서은 유다의 건방짐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그가 자신이 배신한 스승을 맞대면할 담보를 어디서 얻었는지 또 그가 어떻게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낯하나 붉히지도 않고 그리하였는지 의아함을 느끼게 된다. 아마 사탄이 매춘부와 같은 뻔뻔스러움을 기의 마음에 심어 주었는가 보다.

둘째, 이 사실을 기록한 것은 침략자들을 낭패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하신 "내가 그로라"는 말씀이 지닌 능력이 특별히 유다를 목표로 하신 말씀임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배신자의 양심을 겨냥하고 쏜 화살로써 순간에 그의 마음을 꿰뚫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임재와 그의 울려퍼질 음성은 다른 어떤 죄인보다 배교자와 변절자에게 더욱 두려움을 안겨 줄 것이다.

2. 그의 말씀은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었고 그리하여 저희는 뒤로 물러갔다(6절). 본문에 의하면 그들은 벼락을 맞은 사람들처럼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졌다." 그러나 그들이 엎드러진 것은 그의 앞에 겸손히 부복하는 표시로 앞으로 엎드러진 것이 아니라 끝까지 굽히지 않으려는 듯이 뒤로 자빠진 것처럼 보인다.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벌레처럼 짓밟힘을 당하실 때조차도 인간 이상의 의연한 자세를 보이셨음을 선포해 주고 있다. "내가 그로라"하신 본문의 말씀은 그의 제자들을 소생시키고 용기를 가지게 하였으나(마 14:27) 그의 적들에게는 치명타가 되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다음의 점들을 분명히 나타내 주고 있다.

(1) 본문은 그가 그들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계심을 보여 주었다. 그가 그들을 엎드러지게 하였다는 사실은 그가 그들을 쳐서 죽게 하실 수도 있었음을 나타내 준다. 또한 그가 말씀으로 그들을 엎드러지게 하셨다는 사실은 그가 그들을 말씀으로 지옥에 던지실 수도 있으시며 고라의 자식들처럼 멸망하게 하실 수도 있으심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시지 아니하였다.

① 그 이유는 그의 고난에 때가 이르렀고 자신이 그것을 물리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는 누구도 그의 생명을 그에게서 탈취해 갈 수 없음을 보여 주고자 하셨다. 그들이 그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면 그전에 그가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을 그가 내주심으로써만이 가능함을 보여 주고자 하셨다.

② 그 이유는 그가 가장 악한 사람들에게라도 용서와 관용을 베푸시며 원수까지도 참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엎드러지게 하고 더 이상 손을 대지 않으신 것은 저희를 회개하기를 바라셔서 회개할 여유를 주시고자 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이 강퍅하여서" 이 모든 수고는 허사가 되고 말았다.

(2) 본문에서 취하신 조치를 앞으로 그는 끝까지 자기를 대적하는 모든 원수들에게 취하실 것이다. 이들 대적들은 그에게 영광을 돌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그의 앞에서 도망하며 엎드러질 날이 이를 것이다. 이로써 "네가 저희를 돌아서게 함이여"(시 21:12)란 말씀과 시편 20편 8절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앞으로도 계속 성취될 것이다. 그리하여 "주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악한 자를 죽이실 것이다"(살후 2:8; 계 19:21).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Qui d judicaturus faciet, qui judic a ndus hoc facit? - 즉 예수께서는 자기가 세상에 오사 심판받으실 때 이러한 벌을 내리셨으니 장차 그가 심판하기 위하여 오시면 그가 어떠한 일을 행하실까?

Ⅳ. 그의 원수들에게 일격을 가하신 다음 주님은 제자들의 신변을 안전하게 해달라는 조건을 그들에게 제시하신다(7-9절).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그는 그들의 광분하는 분위기에 계속 자신을 맡겨 버리신다(7절). 그들은 오랫 동안 넘어져 있지는 아니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허락으로 다시 일어났다. 하나님의 심판이 영원한 것은 오직 저 세상에 가서이다. 그들이 엎드러졌을 때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피해 버릴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일어났을 때도 그들이 어쩔 수 없이 그에 대한 추격을 포기하리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는 다른 그들의 태도를 보게 된다.

(1) 그들은 여전히 그를 극성스럽게 체포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회복되고서도 당황하고 어링둥절하였다. 그들은 무슨 힘이 그들을 괴롭히고 땅에 넘어지게 하였는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이유를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보지 않고 다른 데서 찾으려고 하였다. 죄로써 마음이 강퍅해진 사람들은 그 무엇으로도 그 마음을 변화시키거나 교정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 그는 여전히 그들의 체포하려는 의도를 용납하셨다. 그들이 그의 앞에서 넣어졌을 때 그는 그들을 모욕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이 어쩔 줄 모르는 것을 보시고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는 같은 질문을 던지셨다. 그러자 그들은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는 같은 답변을 하였다. 그는 같은 질문을 반복하심으로 그들이 자기들의 소행에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를 바라셨다. 즉 이런 뜻의 말씀이다."너희가 찾는 사람이 누구인지 너희가 모르는가? 그래 너희는 너희의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고 당하지도 못할 내게 대항하려고 하는가? 이만하면 충분히 깨달았을 터인데 아직도 나를 잡으려 한다는 말인가? 도대체 하나님을 대적하여 그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도 잘된 사람이 누가 있기에 너희가 이렇게 하는가?" 한편 그들은 같은 대답을 반복함으로 악에 대한 저희의 고집스러움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은 앞서처럼 "나사렛 예수"라고 그를 칭함으로 그에게 모욕을 준다. 그리고 유다도 다른 무리와 같이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 죄의 길로 몇 발자국 잘못 들여 놓음으로 "우리의 마음이 강퍅해지지 않도록"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하자.

2. 그는 그의 제자들을 저희의 광란으로부터 보호하려고 애쓰셨다. 그는 적들이 엎드러진 호기회를 그의 제자들을 보호하는데 이용하셨다. 그는 "내가 그로라고 너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는 말씀을 하심으로 자신의 용기를 보여 주신 다음 그는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에 대한 그의 관심을 보여 주신다. 그는 이 조건을 그들과 함의하려는 자세로 내세운 것이라기보다 명령조로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긍휼을 입어야 할 사람은 주님이 아니고 바로 그들이 주님의 긍휼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저희에게 "권세를 지닌 자처러"경고하신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너희가 저희를 건드리는 것는 오히려 너희에게 해를 초래할 뿐이니라"고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이 사랑은 제자들이 그를 버린 죄 특히 베드로가 그를 부인한 죄가 얼마나 큰 가를 더욱 분명하게 해 준다. 그리스도는 저희의 안전을 이와 같이 보장해 주셨는데도 그들은 그의 보호를 의지할 만한 용기도 믿음도 없었고 다만 그들의 안전을 위하여 비열하고도 슬프게 줄행랑을 쳤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하신 말씀에는 다음의 숨은 의도가 있었다.

(1) 그의 제자들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은 고난을 받고자 하시면서도 제자들은 고난을 면케 하시었다. 이는 그들이 아직 고난을 받아들이기에 적당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믿음도 약하였고 그들의 영혼도 저급한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현재 그들에게 고난을 받게 하기에는 그들의 영혼이나 생명이 너무도 아까운 것이었다.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해야 할 과업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가야 할 길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온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파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저희가 축복의 사자가 되어야 하겠기에 저희를 멸하지 말라"고 명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하여,

① 그리스도는 그를 따르는 우리에게 큰 용기를 주신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에게 고난을 할당해 주시기는 하였지만 그는 우리의 믿음의 상태를 고찰하여 십자가를 져야 할 시기를 정해 주시며 우리의 힘에 맞는 십자가를 지우시며 또 "경건한 자를 그 시험 밖으로 건지시거나" 또는 그 시험을 받아 극복하도록 도우시기 때문이다.

② 그는 우리에게 우리의 형제를 사랑할 것과 그들의 안녕에 관심을 가지도록 좋은 본을 보여 주신다. 우리는 자신의 평안과 안전만을 도모해서는 안 된다.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남을 생각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 이상으로 남의 입장을 돌아보아야 한다. 관대하고 영웅적인 사랑을 우리가 지닌다면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요일 3:16).

(2) 그는 메시야로서의 자신의 사업에 대한 본을 보여 주고자 하신다. 그가 스스로 고통과 죽음을 감당하신 것은 우리를 구해내시기 위해서였다. 그는 우리의 속죄물이시다. 그는 "내가 여기 있노라"고 말씀하시는 동시에 이삭 대신에 바쳐진 양처럼 "이 사람들의 사는 것을 용납하라"고 하신다.

3. 그는 이로써 그가 방금 전에 하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이다"(17:12)란 말씀을 입증하셨다. 그는 현재의 특별한 사항에서 앞서 하신 말씀을 성취하심으로 그가 보전하시리라는 말씀이 지금 그와 함께 있는 자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말을 통하여 앞으로 그를 믿을 모든 사람들에게도 확실히 이루어질 것을 입증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보전하시겠다는 말씀은 죄짓는 일과 비교하는 일에서 저희의 영혼을 보호하시겠다는 말씀이지만 이 말씀은 본문에서는 저희의 육체의 생명도 보전해 주신다는 뜻으로 적용되고 있다. 실상 우리의 신체는 그리스도의 책임과 가호 아래 속하여 있는 것이니까 본문의 말씀은 타당한 것이다. 그는 "마지막 날에 우리의 몸도 일으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영과 혼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도 보존해 주신다(살전 5:23; 딤후 4:17, 18). 그리스도는 우리의 육체의 목숨도 그것이 이루어야 할 사명을 다하기까지는 보전해 주실 것이다. 육체의 목숨도 사실 그가 쓰시도록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육체의 생명을 통하여 받으실 섬김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는 육체의 생명이 "살든지 죽든지" 이를 통하여 영광을 받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생명이 어떤 유용한 일에 쓰여지기까지 생명은 부지될 것을 믿자.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그들의 증거가 완수되기까지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의 보호가 육신의 보호로 끝난다는 말은 아니다. 제자들에 대한 육신의 보전은 영혼의 보장까지 연장되는 것이다. 현재 그들은 믿음이나 결단력이 약한 상태에 있었다. 이럴 때 만일 그들에게 고난이 강요된다면 저희는 자신들이 제자된 것과 또 그들이 주님을 스승으로 삼은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 틀림 없었다.

그리고 그들 중 몇 명 곧 그 중 연약한 자들은 주님을 배신할 것도 확실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 중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그들의 안전을 도모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시련을 이길 힘을 은혜로 주신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믿음의 강건함에 비례하여 시련도 주신다. 이것은 그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성도들은 이 신의 은혜와 섭리에 의하여 안전히 보전되는 것이다.

Ⅴ. 제자들의 안전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신 후 그는 제자 중 한 사람의 난폭성을 꾸짖으시고 그를 박해하는 자들의 폭력을 무력하게 하신 것과 같은 뜻으로 그의 추종자들도 폭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신다(10, 11절). 본 단원에서 우리는 아래의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베드로의 폭력 사용. 그는 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당시의 점잖은 신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한 개의 검을 늘 착용한 것 같지는 않다. 그들 가운데 검은 모두 두 자루였다(눅 22:38). 그리고 그 중 하나를 맡아 가지고 있던 베드로가 그 검을 뽑았다. 그는 이 때야말로 검을 사용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가장 선두에 나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대제사장의 하속들중 한 사람을" 검으로 쳤다. 그는 목을 짜르려는 의도로 칼을 내리쳤으나 빗나가는 바람에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게 되었다." 본문에는 이 사실의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종의 이름"이 기록되고 있다. 그의 이름은 말고였다. 그런데 느헤미야 10장 4절에는 이와 비슷한 말룩이란 이름이 나오고 있다.

(1) 우리는 본문에서 베드로의 생각이 나쁜 것은 아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는 비록 생각을 잘못하였지만 주님에 대한 충성스러운 열심히 있었다. 그는 최근에 주님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약속하였고 이제 그는 그 약속을 실천에 옮기려고 하였다. 아마도 베드로는 이들 무리의 선두에 유다가 선 것을 보고 더욱 격분한 것 같다. 유다의 비열함이 베드로의 용기를 자극하였다. 나는 본문을 읽으면서 베드로가 칼을 뺐을 때 어째서 배신자의 목을 치지 않았는지 의아심을 품게 된다.

(2) 그렇지만 우리는 베드로의 행실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의 취지의 정당성은 인정되지만 그렇다고 그의 행위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① 그가 행한 일은 주님의 의도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병사들은 그의 명령의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그의 말씀이 있기 전에 행동하여서는 안 된다. 그들이 어려운 문제를 향하여 부딪칠 때는 그들의 입장이 옳은지 또한 이 일을 그들이 하는 것이 마땅한지를 검토해 보아야만 한다.

② 그는 자신의 위치에서 지켜야 할 임무를 벗어나 나갈 권세에 항거하였다. 그리스도께서도 이 권세에 대하여 결코 맞서시지 아니하셨고 다만 우리에게도 대항할 것을 금하시며 "악한 자에게 대적하지 말라"(마 5:39)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③ 그는 그의 주님이 고난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에 반대하였다. 전에도 베드로는 이런 문제로 주님께 힐책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자신이 고통받으셔야만 하며 그의 때가 이제 이르렀다고 말씀해 주셨는데도 전처럼 "주여 그렇게 하지 모옵소서. 주께서 고난을 당해야 한다니 말이나 됩니까"라고 말흐듯 종의 귀를 친 것이다.

④ 그는 주님이 바로 직전에 원수들과 맺은 조건부 항복을 무시하였다. 주님이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는 말씀에도 그들의 안전에 대한 그의 배려가 적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평안히 피할 수 있도록 그들이 행동을 삼가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베드로도 이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이다. 나서라고 요청될 때 겁을 먹고 물러서는 것도 죄이지만 또한 물러서 있으라고 할 때 앞으로 나서는 것도 죄인 것이다.

⑤ 어리석게도 그는 자신과 동료 제자들을 광분한 무리들의 분노 아래 노출시키었다. 만일 그가 말고의 귀를 짜른 것이 아니라 그가 뜻했던 대로 그의 머리를 베게 되었다면 병사들이 모든 제자들에게 덤벼들어 난도질을 해버렸을 것이고 그랬다면 그리스도도 바라바보다 결코 나은 점이 없는 인물로 평가되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과잉으로 보전하려는 열심 때문에 결국 자기를 파멸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⑥ 이 일 후에 베드로가9그의 주님을 부인하는 겁장이 노릇을 한 것을 보아 우리는 그가 주님께서 저희를 땅에 엎드러지게 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주님이 하신 일을 보고서야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이 스스로 자신을 그들에게 맡기시는 것을 보았을 때 그의 용기는 꺾이고 말았다. 그러나 참된 용맹스런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도가 사람들의 인기를 차지할 때 뿐만 아니라 그것이 쇠퇴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가 싸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설혹 옳은 것이 상승세에 있지 아니하더라도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옳은 편에 설 수 있어야 한다.

(3) 우리는 베드로가 그의 귀를 짜른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귀만 짤리고 더 이상의 해를 입지 않는 것도 다 섭리에 의한 것이다. 이로써 그는 불구가 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리스도가 그 상처를 치료하시게 함으로 그의 권세와 선하심을 나타내는 계기가 되었다(눅 22:51). 이로써 그리스도께서 비난을 받으실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 적들에게 둘러싸인 중에서도 그의 명예를 드높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2. 주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심(11절). 본문에 보면 "검을 집에 꽂으라"고 하셨다. 주님은 가볍게 베드로를 꾸짖으셨다. 왜냐하면 그로 분별력까지 잃게 만든 것은 주님에 대한 열심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는 저지른 일에 대하여 책임을 추궁하시지 않고 앞으로 더 이상 그렇게 하지 말도록 명령하셨다. 많은 사람들은 슬픔과 당혹에 쌓여서 주변의 사람들에게 저지른 점잖지 못한 행동은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본문에서 고난 가운데서도 온유하게 처신할 것을 우리에게 본보여 주시고 있다. 베드로는 칼을 빼지 말아야 했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위탁된 것은 육에 속한 전쟁 무기가 아니라 능력있는 성령의 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침입자들을 넘어뜨리심으로 베드로에게 그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한" 말씀으로 무장해야 할 것을 보여 주셨다. 실상 베드로는 이 일이 있은 얼마 후 말씀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여 그의 발 아래 엎드러지게 하였던 것이다.

3. 그에 대한 책망의 이유. 그 이유는 본문에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는 말씀에 나타나고 있다. 마태는 그리스도께서 책망하신 다른 이유에 대하여 전해 주고 있다. 그러나 요한은 마태가 생략해버린 본문의 사실을 전해 주고 있다. 이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다음의 사실을 가르쳐 주신다.

(1) 그리스도께서는 이로써 자신이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복종하셨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베드로가 엉뚱하게 저지른 실수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 점은 그의 때가 이르렀는데 베드로가 자신이 받으실 수난에 방해가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은 "베드로야 네가 나설 시기가 아니지 않는가? 사탄이 내 뒤로 물러나라"고 말씀하신다. 만일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시고 운명하시도록 작정된 것이라면 베드로가 이를 저지르는 언행을 하는 것은 격에 맞는 것일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네가 그런다고 "잔을 내가 미시지 않겠느냐?" 고 말씀하신다. 본문의 표현은 그의 단호한 결의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그의 의사에 상반되는 어떤 생각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결의를 보여 준다. 그는 그의 잔이 쓴 쑥과 담즙을 섞은 쓴 잔이었고 두려움의 잔이요 유혈의 잔이었으며 "여호와의 분노의 큰 잔"이었지만(사 51:22)이 잔을 기꺼이 마시려고 하였다.

그가 이 잔을 마신 것은 우리의 손에 구원의 잔이요 위로의 잔이며 축복의 잔을 들려 주시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그는 기꺼이 이 잔을 마시려고 하셨다. 왜냐하면 "이 잔은 그의 아버지께서 그의 손에 들려 주신 잔"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께서 뜻하신 것이기에 그가 마시는 것이 최선책이었고 그러기에 그는 마셨던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이로써 우리와 관련된 매사에 있어서 우리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라는 좋은 본을 보여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마신 잔으로 그리스도와 서약해야만 하며(마 20:23) 우리도 그 잔을 미시기로 응락해야 한다.

① 그것은 한 잔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것이 이루어 논 결과에 비하면 사소한 일이었다. 그가 마신 것은 바닷물도 홍해도 사해도 아니었다. 그가 받으신 고난은 영벌에 비하면 순간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오히려 그것은 빛이었던 것이다.

② 이 잔은 우리에게도 주어진 잔이다. 고난도 때로는 은사일 수 있는 것이다.

③ 이 잔은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잔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권위를 지니셨으며 그리고 이 잔은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이 잔은 아버지의 사랑의 표시로 우리를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

Ⅵ. 그리스도는 신의 섭리에 자신을 맡기신 후 조용히 나아가 저희의 죄수로 결박을 당하신다. 그가 잡히신 것은 물론 도피할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하지 않으려 하셨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주님이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 주셨으므로 저희가 관대하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저희는 아무런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안셀름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Maledictus furor, quem nec majestas miraculi nec pietas beneficii confringere potuit - 즉 저주 받은 분노, 그것은 장엄한 기적으로 가라앉힐 수 없으며 부드러운 친절로도 달랠 수 없다. 다음의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1. 예수의 잡히심. "그들은 예수를 잡았다." 그에게 손을 댄 것은 불과 몇 사람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책임은 그들 모두에게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는 예수를 잡은 동료들을 돕고 선동하였기 때문이었다. 모반에는 종범(從犯)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 모두가 주범(主犯)인 것이다.

이로써 과연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쌌다"(시 22:12)는 말씀과 "저희가 벌과 같이 나를 에워쌌다"(시 118:12)는 말씀이 또한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가 저희 함정에 빠졌다"(애 4:20)는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 그를 잡으려던 저희의 시도는 여러 번 좌절당하였었다. 이제 주님을 저희 손아귀에 넣을 수 있게 되자 그들이 독수리처럼 주님을 덮쳤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2. 예수께서 결박당하심. "그들은 예수를 결박하였다." 수난 내용 중에 그리스도께서 묶이시는 장면을 전해 준 것는 요한 복음서의 기자뿐이다. 그들은 그를 잡자 움직이지 못하도록 단단히 결박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저희가 그를 어찌나 난폭하게 묶었던지 그의 손가락 끝마디 피가 터져 흘렀다. 그리고 그의 손을 모두어 등에 묶었고 그의 목을 쇠사슬로 묶어 그 끈을 잡아 끌고 갔다."

(1) 본문은 박해자들이 그에게 품은 원한을 보여 준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저의(底意)로 그를 결박하였다.

① 그를 괴롭히고 고통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불레셋 사람들이 삼손에게 고통을 주려고 그를 묶었듯이 말이다.

② 그에게 모욕과 수치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자유인이었음에도 노예가 묶이듯이 묶이셨다.

③ 그의 도주를 막기 위해서였다. 또한 그를 단단히 묶으라고 부탁한 것은 바로 유다였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잠시 후면 그 전능성이 확증될 능력의 예수를 묶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④ 그들은 그를 심판도 하지 않고서 선고받은 죄인처럼 묶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그를 사형에 처하고자 마음먹고 있었다. 그들은 그를 미련한 자의 처형 방식으로 죽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를 행악자로 취급하듯이 결박한 것이었다(삼하 3:33, 34).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의 권세로 그를 박해하는 자들의 양심을 결박하였다. 그것 때문에 그들은 괴로워하였다. 이에 대하여 복수를 하려는 듯 그들은 그를 단단히 묶었다.

(2) 그리스도의 결박당하심은 매우 의미있는 것이었다. 다른 사실과 마찬가지로 이 속에도 숨은 비의(秘意)가 있다.

① 그들이 그를 묶기 전에 주님은 중제자로서의 자신의 직책에 의하여 스스로를 결박하시었다. 그는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의무의 밧줄로 자신을 제단의 첨단에 묶으셨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희의 밧줄이 그를 묶지 못했으리라.

② "우리는 우리의 불법의 사슬과"(잠 5:22) 또 "우리의 좌악의 멍에로"(애 1:14)묶이웠다. 죄는 영혼을 구속하는 사슬이다. 이 죄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부패도 우리의 영혼을 구속하는 사슬이다. 이 부패로 인하여 우리는 사탄의 권세 아래 사로잡힌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쇠사슬에서 자유하게 하시려고 대신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묵묵히 결박을 당하시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우리가 손과 발이 묶이어 흑암의 동굴에 갇히었을 것이다. 그가 묶이심으로 우리가 자유롭게 되었으며 그가 갇히심으로 우리는 석방된 것이다. 이와 같이 아들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

③ 구약에서 나타난 모형과 예언이 여기서 성취되고 있다. 이삭도 제물로 드려지기 위하여 결박되었었다. 요셉이 결박을 당하고 "그 몸이 쇠사슬에 메였었다"(시 105:12). 이는 그가 옥에서 놓임을 받고 다스리는 자가 되는데 필요한 과정에서였다. 삼손은 그가 살아 있었던 때보다 더 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기 위하여 결박당하였다. 그리고 메시야가 죄수처럼 대접을 받으리라고 예언되어 있다(사 53:8).

④ 그리스도께서 묶이신 것은 우리를 주님에 대한 의무와 복종에 결박하시기 위해서였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구속이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그를 영원히 사랑하고 섬길 책임이 부과된 것이다. 바울이 그의 친구들에게 문안을 하셨듯이 그리스도도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문안하신다.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골 4:18). 나의 매인 것을 기억하여 모든 죄에서 자유를 얻으며 모든 의무에 대하여는 충성하라."

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묶이심은 그를 위해 사는 우리의 삶이 쉬웁도록 하기 위한 배려에서였다. 또한 어느 때나 우리가 그를 위한 고난에 불리움을 받을 때 우리의 받는 고난을 성별하시고 가볍게 하시며 그 고난을 받음으로 명예롭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이 때문에 바울과 실라가 착고에 채여서도 노래할 수 있었고 이그나티우스(Ignatius)가 자기의 그리스도를 위해 당한 결박을 영적인 진주라 칭할 수 있었던 것이다(Epist. ad Ep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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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스와 가야바 앞에 선 그리스도(요 18:13-27)

우리는 본문에서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받으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과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생략한 거기서 일어난 몇 가지 사건이 설명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또한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사실이 수록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이 사실만 독립된 이야기로 소개하는데 비하여 본 복음서는 이 사실을 다른 사건들과 관련시켜서 소개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죄목(罪目)은 신앙에 관계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종교 재판소의 판사들이 시 사건을 심리(審理)하였다. 또한 후에 그리스도는 이방인들에게서도 재판을 받으신다. 이와 같이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같이 그를 체포하였고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각기 그를 심문하고 정죄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양쪽의 죄 때눈에 죽으셨기 때문이었다. 이제 이 내용을 차려뢰 감토해 보자.

Ⅰ. 그를 체포하자, 그들은 "그를 먼저 안나스에게 끌고 갔다." 이 일은 그를 맞이하기 위하여 가야바의 집에 설치해 놓은 법정에 그가 끌려 가시기 직전에 있었던 일이었다(13절).

1. 저희가 "그를 끌어 갔다." 그들은 그를 그들의 승리의 기념품으로 의기양양하여 끌고 갔다. 그리고 느헤미야 3장 1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양문을 통과하여 "도살장으로 양을 끌고 가듯이"끌고 갔다. 그들은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으로 갈 때에는 바로 이 문으로 통행하였다. 그들은 마치 그가 악질적인 범행자인 것처럼 폭력을 써서 황급히 데라고 갔다. 전에 우리는 자신의 충동적인 욕망에 의하여 이끌려 다녔고 사탄의 포로가 되어 그의 뜻대로 끌려 다녔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이 끌려 가셨던 또한 사탄의 대행자들이요 끄나풀인 자들에게 포로가 되셨던 것이다.

2. 그들은 저희를 보낸 그들의 우두머리에게 그를 데려갔다. 이 때는 자정 전후한 시간이었다. 이때라면 그들이 그리스도를 구류하거나(레 24:12) 재판정을 열 규정 시간이 되기까지 감옥에 가두는 것이 상식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황급히 끌어다가 예외적인 재판을 하였다. 그리고 그를 재판할 자들은 공정한 입장을 지킬 수 있는 자들이 아니라 그를 정죄하고자 벼르고 있는 자들이었다. 이와 같이 불법적으로 기소를 감행한 것은 우선은 그를 구출해 가지나 않을 까 두려워서였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일을 서둘러 진행시켰고 또 폭력까지 동원하였다. 또한 그들이 그를 이렇게 불법적으로 서둘러 기소한 것은 "먹이를 앞에 둔 독수리처럼" 그들이 그리스도의 피에 굶주렸기 때문이었다.

3. 그들은 먼저 그를 안나스에게 끌고 갔다. 아마도 그의 집은 그들이 가는 도중에 있던 것 같았다. 그러므로 그곳은 그들이 잠간 들려 쉬어 가기에 편리한 곳이었다.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이 그들의 수고에 대한 대가를 받으러 갔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내가 보기에는 안나스는 늙고 약하여 한밤중에 다른 사날들과 재판에 참석할 수는 없었고 그러나 그들의 먹이가 된 예수를 보기를 간절히 바람으므로 그들이 그곳에 들른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이 성공했음을 노인은 알고 그가 잠을 잘자게 하기 위하여 또한 이 일로 그에게 칭찬을 듣기 위하여 그르은자기들의 포로를 그의 앞에 끌고 갔다. 늙고 병이 들어서 이제는 전처럼 죄를 지을 수 없는 사람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죄악을 즐기는 것응 본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런데 라이트푸트(Dr. Lightfoot) 박사는 안나스가 재판에 참석할 수 없는 이유를 그가 아침 일찍이 그날 받쳐지는 제물에 흠이 있는가 없는가를 조사하기 위하여 성전에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이 옳다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앞에 나가신 것은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즉 큰 제물이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앞에 나아가셨다가 다시 재판정으로 끌려 가신 것은 곧 그가 제단에 받쳐질 제물로 준비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요 또한 제물로 합격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4. 이 안나스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이었다. 결혼으로 맺어진 이러한 친분 때문에 가야바는 안나스에게 죄수를 최초로 상면할 호의를 베푼 것이요, 또 안나스가 가야바가 그렇게 관심이 있는 문제에 자신도 관심이 있는 문제에 자신도 관심을 보이므로 가야바를 격려하려 한 이유이기도 했다. 이같이 악한 자들은 서로 친분을 맺음으로 자기들이 저지른 악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를 바라는 것이다.

Ⅱ. 안나스는 그들을 오래 지체시키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도 그들 모두와 마찬가지로 그 기소가 신속히 강행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를 결박한 그대로 가야바에게 보냈다. 그런데 그가 주님을 이런 경우에 산헤드린 회의 장소로 지정된 가야바의 집으로 직접 보냈는지 아니면 대제사장들이 재판을 하는 성전의 지정된 장소로 보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가 주님을 가야바에게 보냈다는 사실은 한참 뒤인 24절에 가서야 나온다. 그러므로 어떤 번역자들은 난외주에 24절에 가서야 나온다. 그러므로 어떤 번역자들은 난외주에 24절의 내용이 13절에 들어와야 타당하다고 한다. 다음의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가야바가 지닌 권력이 암시되고 있다(13절). 그러므로 본문에 그는 "그 해의 대제사장이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대제사장직은 평생직이었다. 그러나 권리를 잡은 자들의 성직 매매 술책의 일환으로 대제사장은 자주 바뀌게 되었고 이때는 거의 일년직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대제사장직의 종언을 고하는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즉 그들이 부정하게 돌아가며 대제사장 노릇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폐하시고 마땅히 그 권리를 차지해야 할 주님을 임명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가야바는 메시야가 처형당하신 같은 해에 대제사장으로 있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점을 보여 준다.

(1) 하나님의 예지(豫知)에 따라 대제사장이 악을 행하여야 할 때에 하나님의 섭리는 악한 인간으로 그 자리에 앉게 하여 그 역할을 수행하게 하셨다.

(2) 하나님은 악인의 심중에 도사리고 있는 부패성을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그를 권좌에 앉게 하셨고 그를 이용하여 악을 자행할 유혹과 기회를 가지게 하셨다. 그 해에 가야바가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은 그에게 치명적인 경과를 초래하였고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를 처형하는데 주모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가 만일 대제사장으로 승격되지 않았다면 이런 불명예스러운 일의 주모자가 되지 않았으리라.

2. 가야바가 그리스도에게 품은 악의. 그것은 그가 11장 50절의 사건 가운데서 말한 말 즉 그리스도가 옳든 그르든 또는 죄가 있든지 무죄하든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라는 말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이 말이 14절에 다시 인용되고 있다. 이 사실을 본문에 다시 인용한 의도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그가 얼마나 악한 자인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공정한 규례를 무시하고 부정한 편법으로 사생활이나 교회의 문제를 다스린 자가 바로 가야바였던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재판정에서 어떻게 부당한 취급을 받으셨는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의 재판은 재판 과정에서 사건이 진술되기도 전에 형이 선고되었고 그러므로 그들은 그를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문제 곧 "그를 죽여야만 한다"고 이미 결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심문은 형식적인 쇼에 불과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원수들은 그의 복음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말살해버리고자 결심한 것이다.

(3) 그것은 우리 주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사실을 주님의 가장 악한 대적 중 하나가 입으로 증거한 증언이었다. 이 대적은 주님이 공익을 위해서 희생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주님이 죽으심이 옳다고 한 것이 아니라 "유익하다"고 하였다.

3. 그리스도를 기호하는 일에 있어서의 안나스의 협조. 그는 스스로 이 죄에 참여자가 되었다.

(1) 그는 천부장과 하속들과 한 가지로 이 범행에 참여하였다. 안나스에게는 법에 대한 존경도 자비를 베풀려는 마음도 없었다. 이 사실은 주님께서 범행을 저지른 것도 아니요 도망갈 생각도 품지 아니 하셨으므로 그가 주님을 풀어 드릴 수 있었는데도 그를 결박한 대로 끌고 가게 한 사실을 통해서 입증된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악행을 시정하여 본래대로 돌이키지 못한다면 우리도 ex post facto - 즉 그 사건에 대하여 방조자가 되는 것이다. 실상 병사들보다 사리에 분별력이 더 많은 안나스가 주님을 계속 결박한 채로 끌고 가게 한 것보다는 주님을 묶은 무지한 병사들이 더 죄가 가볍다고 볼 수 있겠다.

(2) 그는 대제사장과 공회와 합세하여 주님을 정죄하고 사형에 처하도록 기소하였다. 이 안나스는 그들과 함께 재판에 참석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이 일이 속히 진전되기를 바랐고 또한 "저희의 악행의 참여자"가 되었다.

Ⅲ. 시몬 베드로가 그의 스승을 부인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가야바의 집에서였다(15-18절).

1. 많은 수고 끝에 베드로는 법정이 개설된 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사실이 15,16절에 설명되고 있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1) 그리스도에 대한 베드로의 사랑(결국 그의 사랑은 시시한 것이었음이 판명되었지만). 두 가지 사실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였음이 나타나고 있다.

① "예수께서 끌리어 가실 때 베드로가 예수를 따랐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처음에는 그도 다른 제자들과 같이 도망하였지만 그가 주님에게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를 따르겠다고 한 약속을 상기하고서 조금 마음을 가라 앉히고서 멀리서 주님을 따라갔다. 그리스도께서 백성들의 호산나 찬미 가운데 명성을 얻으셨을 때 그를 따르며 그 명성을 함께 나누어 차지하던 자들은 주님이 치욕을 당하실 때도 그를 따르고 그와 함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를 존귀하게 여기는 자들은 어떤 어려움이 주님에게 닥쳐도 그를 따라야 한다.

② 베드로는 적들 가운데 둘러싸여 계시는 예수에게까지 접근할 수 없었으므로 더 가까이 가려고 애쓰면서 또 들어갈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고 들어가려고 "문 밖에 서 있었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그와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어서 어떤 반대에 봉착한다고 하여도 우리의 선한 뜻은 보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베드로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 노력을 끝까지 버티어낼 만한 힘도 용기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잠시 후에 고찰하겠지만 비웃음을 받으며 도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전체적으로 생각하여 볼 때 그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베드로보다 더 그를 잘 아셨던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가는 곳에 지금은 네가 따라 올 수 없다"(13:36)고 강조하여 말씀하셨고 그가 자기를 부인할 것을 반복해서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서야 베드로는 그를 버림으로 자신의 나약성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힘에 부치는 모험을 감행함으로 또한 무리하여 고난스러운 일에 개입함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은 조심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다만 우리의 소명이 확실한 일이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그를 영예롭게 하실 수 있으리라고 바라도 좋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부끄러움에 내버려 두시지나 않을지 두려워 해야 한다.

(2) 다른 제자가 베드로에게 베푼 호의. 그러나 그것도 후에 증명되는 바이지만 참된 호의는 아니었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여러 번 자신을 가리켜 다른 제자라고 하였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사실에 근거하여 본문에 나오고 있는 다른 제자를 요한이라고 가정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가 어떻게 대제사장과 교분이 있었는지를 저렇다니 밝히려고 여러 가지 가정을 세운다. 그들 중 제롬(Jerome)이나 에비답(Epitaph), 마르셀(Marcel) 같은 사람은 요한이 그의 형제 야고보보다 나은 귀족 출신인 것처럼 propter generis nobilitatem - 즉 귀족 태생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요한이나 야고보는 다 같이 어부 세베대의 아들들인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요한이 그의 재산을 대제사장에게 팔았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며 어떤 이들은 그가 대제사장의 가족에게 생선을 공급하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생각은 가능하지 않은 가설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는 이 다른 제자를 구태여 요한이나 또는 12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 있지 않은 양들도 소유하고 계셨다. 이렇게 볼 때는 이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으며 예루살렘에 우거하고 생활기반이 잡힌 자로, 시리아 사본에 기록된 대로 unus ex discipulis aliis - 즉 다른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봄이 옳을 것 같다. 즉 대제사장이 그를 알고는 있으면서도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줄은 미쳐 몰랐을 사람들은 아리마대의 요셉이나 니고데모였을 것이다. 제자들인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은 많은 자들이 있는 것처럼 참 제자이면서도 실제로는 제자처럼 보이지 않은 많은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좋은 사람들이 대중 속에도 섞여 있듯이 법정에도 나타나지 않은 채로 있었고 심지어 네로의 궁전에도 그들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적으로 알려진 자들과 교제하며 생활한다고 하여서 그를 그리스도의 친구가 아니라고 단순히 결정지어서는 안 된다.

① 그가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 다른 제자는 베드로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그는 베드로를 안으로 들어오게 함으로 그의 주님에 대한 사랑과 사건의 진행을 알려고 하는 호기심을 채워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럴 기회가 있으면 심판을 받으시는 그의 스승을 도울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스도가 그의 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성격이 수줍음을 잘 타고 또 환경이 불리하다고 하여도 그들의 믿음이 진실하면 그들이 주의 일에 불리움을 받았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그 길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아마 베드로가 전에 이 제자를 그리스도에게 소개하여 그와 사귀도록 알선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이 제자가 베드로에게 은혜를 갚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비록 베드로가 꺾인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었지만 아무 부끄러움도 없이 그를 안으로 인도하였다.

② 그러나 이 호의는 진정한 호의는 못되었고 반면에 못된 행위도 아니었다. 베드로를 대제사장의 뜰에 들어오게 하였으므로 그는 베드로에게 시험 당할 기회를 부여하였고 그 결과는 좋지 않은 것이었다. 친구들이 베푼 우의가 자칫하면 우리에게 함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 베드로는 들어가자 즉시 유혹의 기습을 받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한다(17절).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그 공격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를 공격한 사람은 우매한 처녀로서 문을 지키기 위하여 세워놓은 여종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그에게 도전을 하였다. 그녀는 지나치는 말로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라고 물었다. 아마도 그녀는 그가 수줍은 표정으로 겁을 먹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의심을 품은 것 같았다. 이러한 일을 당해서 우리가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얼굴 표정을 밝게 가지면 쉽게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만일 말고가 그를 붙잡고서 "이 녀석이 내 귀를 자른 놈이다. 내가 그 대가로 네 목숨을 받아야겠다"라고 말하였다면 그가 경계할 만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물은 것은 한 하녀에 불과하였다. 이 질문에 대하여 그는 아무 두려움 없이 "내가 그의 제자라면 어쩌겠느냐?"고 들이댈 수 있어야 했었다. 하지만 그는 종들이 그를 희롱하고 모욕할 것이 두려워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렇게 답변하지 했던 것이다.

(2) 베드로의 신속한 패배. 그는 자신을 돌이켜 볼 겨를도 없이 "나는 아니라"하고 돌발적으로 대답하였다. 만일 그가 사자같은 용맹을 지니었었다면 "나는 자랑스러운 그의 제자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또한 그가 뱀 같은 지혜라도 지녔다면 이럴 때는 그거 잠잠히 있기만 하면 되었다. 왜냐하면 때가 악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안전에만 몰두한 나머지 단호히 부인하지 않고서는 안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자기가 제자됨을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제자직을 경멸하였고 오히려 그녀의 질문을 모욕이나 되는 것처럼 받아넘겼다.

(3) 그는 더욱 깊은 시험에 빠져 들어간다. 본문에 보면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고 하였다(18절).

① 먼저 종들이 자신들을 아끼는 모습을 살펴 보자. 밤이 추웠으므로 그들은 뜰에 불을 피웠다. 그들은 자기들의 대장들을 위하여서가 아니라(이들은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일에 하도 열심이어서 추위도 잊고 있었다) 자신들을 따스하게 하려고 불을 피웠다 종들은 그리스도가 어떻게 되든지 거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생각은 앉아서 어떻게 하면 몸을 따뜻하게 보존하느냐는 것이었다(암 6:6).

② 베드로는 그들 중에 끼여들어 그들의 한 사람으로 행세하려고 하였다. 고로 본문에 그도 "함께 앉아서 불을 쬐었다"고 하였다.

첫째, 베드로가 그의 주님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그가 주님이 심판을 받으시던 곳인 뜰의 상층부로 그를 수행하려고 나서지 않았다는 것은 베드로의 대단한 과오였다. 그는 주님을 위한 증인이 되어서 만일 그의 주님이 요청하시는 경우라면 주님을 대적하여 서원하는 거짓 증인들을 상대로 맞서야 옳았었다. 적어도 그는 주님의 증인이 되어서 어떻게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지 세심히 살펴서 이 재판을 주시하러 들어오지 못한 다른 제자들에게 그 과정을 전해 주어야 했었다. 그는 그의 주님이 보이신 본을 본받아 그가 고난을 당해야 할 차례가 되면 그도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배웠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양심도 또는 그의 호기심도 그를 움직여 재판정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다만 그는 갈리오(Gallio)가 그랬던 것처럼 이 모든 일에 아무 관심도 없는 듯이 비켜 앉아 있었다. 물론 그의 마음이 슬픔에 가득 차 있었으리란 사실과 재판에 대하여 최대의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에 정면으로 부딪칠 용기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여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말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둘째, 베드로가 주님의 원수 노릇을 한 하속들과 자리를 같이 하여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는 것은 더 나쁜 일이었다. "그는 그들과 함께 서서 몸을 녹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과 자리를 합세한 빈약한 구실에 불과하였다. 모닥불이 좋아서 나쁜 무리들 곁에 갔다면 사람들마다 쉽게 나쁜 무리들과 어울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의 주님에 대한 열심히 얼지 않고 불과 몇 시간 전에 그리하였던 것처럼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면 지금처럼 불을 쬐느라고 부끄러움을 무릅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점 때문에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a. 그가 악한 무리들과 어울려 그들의 동무 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틀림 없이 그들은 그리스도를 야밤중에 습격한 무리들 가운데 속해 있었던 자들로서 그리스도가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에 대하여 비웃고 또 그를 정복하였으므로 신나고 의기양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베드로가 과연 어떻게 행동하였겠는가? 만일 그가 그들의 말에 맞장구를 치거나 또 묵묵히 듣고 있으므로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시켰다면 그도 그들과 같은 죄를 저지른 것이 된다. 또 그렇지 않고 반론을 제기한다면 당장 의심을 받아 위험에 직면할 것이다. 만일 베드로가 그의 주님을 위하여 공공연히 나타날 용기가 없었다면 모퉁이에 숨어서 기도나 하든지 주님의 고통당하심과 자기가 그를 버린 죄책감 때문에 남 모르게 울었어야 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선을 행할 수 없었다면 주님께 해로운 짓을 하는 기회는 피했어야 옳았다. 목적도 없이 나타나거나 또는 나쁜 목적으로 나타나는 것보다 도망하는 것이 차라리 잘하는 일이었으리라.

b. 그가 자신이 그들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지기를 바랬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의 제자의 한 사람으로 혐의를 받을까 두려워하였다. 즉 "이 사람은 베드로가 아니냐?"는 소리를 듣기를 두려워해서였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영혼을 죄인들과 함께 거두지 마소서"란 모든 경건한 사람들의 기도와 얼마나 상반된 행동이었는가? 사실 사울이 예언자들과 함께 있었던 것이 다윗이 이방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거한 것보다 훨씬 다행스러웠었다. 그러므로 저주받을 운명을 면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저주받을 자와 자리를 같이 할 기회를 피해야 한다. 우리를 불살라버릴 위험이 있는 자들과 동석하여 몸을 녹인다는 것은 나쁜 짓임을 알자(시 141:4).

Ⅳ. 그리스도의 친구인 베드로가 그를 부인하기 시작하였을 때 그의 원수인 대제사장들은 그를 고소하기 시작한다. 아니 어느 면에서는 고소하기보다 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고 하였다(19-21절). 그들의 첫 번째 시도는 예수를 미혹시키는 자, 또는 거짓 교훈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몰려고 한 것처럼 보인다. 본 복음서 기자는 그러한 뜻으로 본문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이 죄목을 씌우는데 실패하자 그들은 그를 신 모독죄로 고소하였다. 이 사실은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전해 주고 있다. 그리고 다른 복음서가 이 사실을 전해 주므로 본 복음서는 이 내용을 생략하였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1.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심문받으신 정황"(19절).

(1) 불법적인 재판 절차. 그들이 재판은 모든 율법을 무시한 공정성이 없는 재판이었다. 그들은 그를 범인으로 체포하였으나 그에게 죄라고 할 만한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본래는 검사가 기소를 하고 죄수는 그 기소 내용을 인정하든 부정하든 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당시의 재판은 모든 공평성과 타당성을 무시하고 예수 자신의 실수로써 그를 고소할 기회만을 그들은 엿보고 있었다.

(2) 재판의 내용. 먼저 심문을 시작한 것은 대제사장이었다(본문의 ou+'n 이란 접속사는 14절의 내용과 연결시키려는 뜻으로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영어 성서에는 이 접속사가 "then"으로 번역되고 있으나 한글 개역에는 생략되고 있다:역자 주). 그는 그리스도를 공익이라는 미명 아래 그러나 실상은 사적인 원한으로 처형하려고 굳게 결심하고 그를 심문하여 사형죄에 해당할 조서를 작성하려고 하였다.

① 그는 그의 제자들에 관하여 그를 심문하였다. 이것은 그를 선동죄로 몰기 위해서였다. 또한 그를 유대교 뿐만 아니라 로마 정부에도 위험한 인물로 규정하려는 뜻에서였다. 그는 주님에게 그의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이고 그 수효는 몇 명이며 어느 지방 출신이며 그들의 이름과 성격은 각각 어떤지를 물었다.

이러한 질문은 그에게 그의 제자들이 실은 군병으로 쓰기 위하여 모집된 것으로 유사시에 실력 행사를 할 수 있기 위해 모집한 것이 아니냐는 뜻의 둘러치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또 이 질문이 다음과 같은 뜻의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너의 제자들이 모두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은 어디에 있으며 왜 나타나지 않는가." 그리고 이 질문은 그를 버린 그들의 비겁함을 들어 그를 조롱하고 주님의 마음에 상처를 주려는 것이라고 한다. 여하간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부르시고 또 데리고 다니신 것은 심문의 첫 조항으로 한 데는 의미가 있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제자들 때문에 주님이 자신을 거룩하게 하시고 또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② 그들은 그의 가르침에 관하여 심문하였다. 이는 그를 이단으로 몰아서 거짓 선지자에게 가라는 율법이 규정한 형벌을 그에게 주기 위해서였다(신 13:9, 10). 이단죄를 심문하는 것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의 법정에서 취급할 수 있는 것이었다(신 17:12). 따라서 예언자들은 이 법정을 개정할 수 있는 예루살렘 이외에서 처벌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에게서 아무런 거짓된 가르침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의 말에서 꼬투리를 잡아 그의 견해를 뒤집어 어떤 말을 근거로 범죄자로 몰아버리려고 하였다(사 29:21). 그들은 그가 행하신 기적에 관해서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였다. 그가 행하신 기적은 사람들에게 대단한 유익을 주었고 또 그의 가르침이 모순없음을 입증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기적에 관하여는 아무런 꼬투리도 잡을 수 없었다. 이같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은 그가 가르치신 진리에 대하여는 부지런히 논쟁을 벌리면서도 그 가르침의 증거인 기적에 대하여서는 의식적으로 피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 심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

(1) 그의 제자들에 관한 질문에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 질문이 타당성을 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의 교훈이 건전하고 훌륭하다면 그가 그 내용을 전수해 줄 제자를 갖는다는 것은 유대의 교법사들이 실행하는 것과 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만일 가야바가 제자들을 잡아들여 고통을 주려는 계획으로 그들에 관하여 주님께 물었다면 그리스도는 이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아도 되었다. 왜냐하면 전에 그는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허락을 받으셨기 때문이었다.

또 만일 가야바가 제자들의 비겁 때문에 주님을 책망하려는 뜻으로였다면 주님이 아무 말씀도 안했다고 기이할 것은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Rudet haec opprobria nobis, Et dici potuisse, et non potuisse refell - 즉 물리칠 수 없는 공격을 받았을 때 수치스러운 일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라는 격언 대로 주님은 저희를 정죄할 말을 하실 입장도 못되었고 또 저희를 정당화시킬 만한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2) 그의 교훈에 대해서도 그는 특별히 말씀하실 필요가 없으셨다. rmfjafrdegdmh mp oku 들은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하여 물어보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저희의 양심상으로도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떳떳하셨기 때문이었다(20,21절).

① 주님은 말없는 가운데 그를 재판하는 자들에게 그들의 불법적인 재판 진행에 대하여 경고하신다. 그는 백성의 치리자들의 저지르는 악에 대하여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고" 또 지금도 유대의 지배 계급에 있는 자들에게 "악한 것은 너희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다만 그들이 그를 정당하게 취급하는지를 저들의 재판 관례에 의하여 항변하신다. 즉 "너희가 정직하게 판단하느냐?"란 뜻의 말씀이다. 이런 뜻에서 그는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고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주님은 재판 과정에서의 두 가지 모순점을 말없이 다음의 뜻으로 항변하신다.

첫째, "너희가 이미 나의 가르침에 대하여 정죄하고서 새삼 그것에 관하여 무엇 때문에 내게 묻는가?"라는 뜻의 말씀이다. 그들은 이미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출교하기로 결의하였다(9:22). 그리고 그를 체포하라는 포고를 이미 행하였었다. 그런데 이제 그의 교훈이 어떤 것이냐고 묻는다는 것은 웃으운 짓이었다. 이와 같이 그의 가르침과 그의 입장은 공개적으로 청문되지도 않고 그는 정죄되었다.

둘째, "어찌하여 내게 묻는가? 그리고 너희가 나에 대한 고소의 이유를 잡지 못하는데 내가 스스로 내 죄를 고백하라는 말인가"란 뜻의 말씀이다.

② 주님은 그가 가르침을 공개적으로 행하셨음을 들어 자신의 입장의 정당성을 주장하신다. 율법에 의하여 산헤드린 회의가 조사하도록 규정된 범죄는 위험스러운 교훈을 남몰래 선포하여 사람들을 비밀리에 현혹시키는 일이었다(신 13:6).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자신있게 자신의 떳떳함을 밝히신다.

첫째, 그의 가르침의 방법의 정당성을 밝히신다. 그는 parjrJhsiva - 즉 자유롭고도 분명한 말투로 공개적으로 말하였다. 그는 아풀로(Apollo) 신이 신탁을 내릴 때처럼 모호하게 말씀을 전하지 않았다. 진리를 손상시키며 부패한 개념을 전파하는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하고 난문제를 끄집어내며 확신시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이 은밀한 선동에 의하여 그들의 목적을 성취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란 말씀에서와 같이 확신있는 어조로 말씀하셨다. 그의 책망은 막힘이 없고 과감하였고 그의 증언은 그 시대의 부패성에 대한 증언이었다.

둘째, 그가 가르친 사람들을 그는 떳떳하게 밝히신다. 그는 세상을 대상으로 들을 귀있는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고귀한 사람이든 천한 사람이든 학식이 있거나 무식하거나 유대인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친구이든 원수이든 가의 말씀을 듣기를 즐겨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는 여러 무리들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르침을 전파하셨다. 또한 그는 (진귀한 발명을 한 사람들이 흔히 그러는 것처럼)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의 교훈을 전하지 않으려 하시지도 않았다. 다만 태양이 그 광선을 골고루 비취듯이 자기의 교훈을 공개적으로 전하시었다.

셋째, 그는 가르치신 장소에 대하여서도 떳떳하심을 말씀한다. 그가 지방에 계셨을 때 그는 주로 예배를 위한 집회처인 회당에서 모임이 있는 시간인 안식일에 가르치셨다. 그리고 그가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는 유대인들이 각처에서 몰려드는 각종 절기에 성전에서 같은 교훈을 전파하셨다. 또한 그는 그가 전하는 말씀이나 예배가 성전이나 회당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개인 집이나 산, 해변가에서 가르치시기도 하였지만 그가 사사로이 가르치신 것도 그가 공개적으로 전파한 것과 똑같이 떳떳한 내용이었다. 순수하고 또 분명히 전파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라도 전하는데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그의 교훈에는 거기에만 독특한 힘과 아름다움이 풍기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들이 전하는 내용은 전 세계가 즐거이 귀 기울일 것이다. 지혜가 광장에서 외쳐지는데 그 누가 아니듣겠는가?(잠 1:21; 8:3; 9:3).

넷째, 그의 교훈의 내용의 정당성을 그는 확신있게 말씀하신다. 그는 자신이 공개적으로 말씀하신 것과 반대되는 내용을 은밀하게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진리에 미심쩍은 점이 있거나 나쁜 의도가 감추어지거나 한 듯 "은밀히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음"을 반하여 강조하신다. 그는 외관상 두려울 것이 없었으므로 은밀한 곳만 골라 다니지 않으셨고 수치를 당할 만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는 자기들에게 은밀히 하신 말씀은 그들에게 집 꼭대기에서 선포하라 명령하셨다(마 10:27). 하나님도 자신에 대하여 "내가 은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노라"고 말씀하신다(사 45:19). 또한 그의 계명도 감추어진 것이 없으셨다(신 30:11).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義)도 이런 식으로 말씀한다(롬 10:6). Veritas nihil metuit nisi absconde - 즉 진리는 자신이 은폐당할까 하는 두려움 외에는 두려워하는 것이 없다.

③ 그는 그의 효훈을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들이 그가 전한 교훈에 대하여 저희를 통하여 알아 보고 그들이 추측하는 것처럼 위험스러운 경향이 있는지 알아 보기를 희망하신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내 교훈을 들은 자들은 이 법정에도 있겠고 또 자는 자들 중에도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말한 자들은 자기에 대하여 좋게 말을 할 그의 친구들이나 추종자들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듣고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에게 아니면 너희의 하속들에게라도 물어 보라고 하신다.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본문에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고 하신 것은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제껏 없었다"(7:46)고 보고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런 내용의 말씀이다. "너희가 한 번 여기 모인 사람 중에 들은 사람이 있는지 물어 보라. 아마 그들 가운데도 내 말을 들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 흠잡을 것이 없으므로 잠잠한 것이리라." 이를 보아 그리스도의 교훈은 그것을 아는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준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거기에는 타당성이 있으므로 공정히 그것을 판단하려는 사람들은 그의 교훈이 옳은 것임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Ⅴ. 판사역을 하는 대제사장이 그를 심을 수가 고 있는 동안 곁에 섰던 종들은 예수를 능욕하였다(22, 23절).

1. 하속들 중의 하나가 그에게 비열한 짓을 하였다. 주님은 조용하게 또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말씀하셨지만 이 무례한 녀석은 일반적으로 법정에서 난폭한 짓을 하는데 익숙하기나 한 것처럼 "손으로 예수를 쳤다." 아마 손바닥으로 주님의 머리나 뺨을 친 것 같다. 그러면서 "내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고 힐난하였다.

(1) 그가 "예수를 쳤다"는 ‘에도켄 라피스마’ - 즉 그가 예수에게 일격을 가하였다는 뜻의 말씀이다. 어떤 이는 rJavbdo"란 어원을 근거로 하여 그가 주님을 막대기로 때렸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아니면 그의 직책 수행에 수반되는 곤봉으로 때렸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로써 구약의 ‘에이스 라피스마’(4475) - 즉 내가 나의 뺨을 때리라고 그들에게 내밀었다(사 1:6 , 70인역 참조)는 말씀이 성취되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본문에 인용되고 있다. 또한 미가 5장 1절에는 "그들이 막대기로 이스라엘 제단자의 뺨을 치리로다"는 말씀과 욥기 16장 10절의 "무리들은 나를 천대하여 뺨을 치며"라는 말씀이 성취되고 있다. 사실 아무 말도 없고 또 무슨 실수도 없었던 사람을 때리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또한 천한 종이 정당한 피고를 때린다는 것도 무례한 짓이었다. 또한 손이 묶여있는 자를 때리는 것은 비겁한 짓이었다. 그리고 법정에 선 죄수를 치는 것은 야만적인 행위이기도 하였다. 이런 행위는 법정의 체모를 손상시키는 행위였으나 재판자들은 이를 묵인하였다. 이런 일을 우리가 당한다면 안색이 당장 변하고 말았으리라.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 모욕을 감수하신다. "그래! 저주와 수치는 내가 감당하리라." 이렇게 그는 말씀하신다.

(2) 그는 거칠고 오만한 태도로 주님을 제제하였다. 그러므로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고 힐문한다. 그는 마치 축복의 근원이신 예수께서 저의 두목에게 말하는 태도가 불손한 것처럼 또는 윗사람에게 무식하게도 말하는 예법을 모른다는 듯 예수에게 대하였다. 그리고 예수를 상스럽고 무지한 죄수로 간주하여 간수가 제재를 자하여 어떻게 처신할지를 가르치는 것이 마땅한 줄로 알았다. 어떤 옛 선배들은 이 하속을 그리스도에게 귀를 치료받고 생명을 구원받은 말고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은혜를 악으로 보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하간 그가 누구이었든 이런 행위는 대제사장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한 행위였고 그에게 아첨하려는 행위였다. 왜냐하면 종의 한 말은 대제사장의 위엄을 높이려는 뜻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악한 통치자들에게는 악한 종들이 있는 법이다. 그들은 그들의 두목이 박해하려는 자들을 앞질러 상해를 가하는 자들이다. 후에 이 대제사장을 이어받은 한 대제사장도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령하였었다(행 23:2). 어떤 이들은 이 하속을 그리스도께서 자기에 대하여 증언해 줄 사람으로 지목한 자 중의 하나라고 여긴다. 아마도 그는 예수를 위한 증인 노릇을 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고 그리고 그는 주님을 좋게 평할 하속 중의 한 사람이었으리라는 것이다(7:46). 그런데 그는 위험을 느끼고 지금 자기가 예수의 남이 모르는 친구라는 인상을 씻어버리기 위하여 솔선하여 주님을 때림으로 원수로 행세하였다고 한다.

2. 그리스도는 놀랄 만한 온유와 인내로 이 모욕을 견디셨다(23절). 그는 이렇게 답변하신다. "내가 지금 말한 것 가운데서 잘못한 말이 있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그 사실을 재판관에게 고하여 저희로 그것을 판단하게 하라. 그러나 내 말이 옳다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그리스도께서는 진노의 기적으로 그에게 보응하실 수도 있었고 그는 기적으로 그를 귀머거리가 되게 하든 또는 쳐서 죽일 수도 있었다. 또는 그를 치려던 두 손을 병신이 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때는 그가 인내하고 고통을 당해야 할 시기였다. 그는 그를 친 자에게 "지혜에 의한 온유함으로" 갚으심으로 우리에게 스스로 원수 갚지 말 것과 분을 분으로 갚지 말며 비둘기같이 온순함으로 해를 참을 것을 가르치신다. 또한 우리 주님이 그리하셨듯이 뱀같이 지혜로울 필요가 있을 때도 우리는 저희의 불의를 깨우쳐 주고 저희를 다스릴 관헌에게 호소할 것을 가르치신다.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다른 뺨을 돌려대지 않으셨다. 이 사실은 마태복음 5장 39절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말 것을 깨닫게 해 준다. 실상 사람이란 다른 뺨을 드리대면서도 마음은 상대방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찰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훈과 행적을 비교하면서 다음 사실을 배울 수가 있다.

(1) 위와 같은 입장에 처할 때 우리가 스스로 보복을 한다거나 자신의 입장에 의해서 상대방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싸움만 격화시키는 결과만 초래하도록 상대방을 두 번 치기 보다는 차라리 맞는 것이 낫다. 그러나 복수는 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정당방위도 용인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공공의 평화를 유지하고 악행자들을 제어하고 그들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국가의 관리로 우리의 보수자가 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롬 13:4).

(2) 우리에게 가해진 상해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언제나 합리적이어야 하며 결코 감정이 우선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본문의 그리스도가 그러하셨다. 그는 고통을 당하시되 상대방을 위협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잘못됨을 설득하셨다. 그는 자기에게 상해를 가한 자를 공정하게 타이르셨다. 우리도 그렇게 하자.

(3) 우리에게도 고통이 닥쳐 올 때를 대비하여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단련하며 또 우리에게 무례한 행위가 가해지면 또 다른 무례함이 안겨질까 준비 태세를 갖추고 그 순간을 최선으로 대처할 준비를 해야 한다.

Ⅵ. 하속들이 주님을 이같이 능욕하고 있는 동안 베드로는 계속 주님을 부인하고 있었다(25-27절). 이 사실은 슬픈 이야기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적은 몫도 감당치 못하였다.

1. 그는 주님을 부인하는 죄를 두 번 박복하였다(25절). 그가 종들 가운데 한 사람인 것처럼 그들과 섞여 불을 쬐고 있을 때 저희가 그에게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네가 우리들 틈에 섞여서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고 물었다. 베드로는 아마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 관하여 심문을 당하시는 것을 듣고 그도 잡힐까 두려워하여 또는 최소한도 주님처럼 매라도 맞을까 보아 단호하게 이 사실을 부인하여 "나는 아니라"고 답변하였다.

(1) 베드로가 자기와의 어울리지도 않고 또 그들에게 속수무책인 무리들과 계속 한 데 있으면서 유혹을 자초하였다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는 불을 쬐려고 거기 있었다. 그러나 악행자들과 섞여 몸을 녹기는 자들은 착한 사람들과 선행에는 점차 냉담해지게 된다. 그리고 악마의 불곁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는 지옥에 던져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법정에 서신 주님 곁에 서 있어야 했다. 그리고 여기보다는 차라리 주님의 사랑의 온기로 몸을 녹여야 했을 것이다. 주님의 사랑이야말로 많는 물로도 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그의 주님을 향한 열심(사랑)으로 또한 그를 박해하는 자들에 대한 분노로 몸이 불타올라야 했었다. 그러나 그는 박해자들에 대한 분노로 자신을 태운 것이 아니라 저들 무리에 편승하여 몸을 덥히는 길을 택하였다. 그러나 혼자 어떻게 몸을 덥힐 수 있었겠는가?(전 4:11).

(2) 그가 다시 시험에 말려들어갔다는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빠져나올 것을 거대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있는 곳은 유혹이 도사린 장소요 그 시기는 유혹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재판자가 그리스도에게 그의 제자에 관하여 물으셨을 때 하속들이 낌새를 느끼고 베드로를 제자들 중의 하나로 간주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너의 이름을 대라"는 식으로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① 악마의 간교함. 악마는 이제 비틀거리는 사람을 보자, 그에게 온 힘을 다 가하여 그를 넘어뜨리려고 한다. 이제는 한 계집 종을 통해서가 아니라 모든 종들을 통하여 악마는 베드로를 넘어뜨리려 하였다. 첫 유혹에 굴복하면 따 다른 아마도 더 강한 유혹을 불러들이는 계기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가 사탄에게 설 자리를 주면 그는 더 강한 힘으로 공격해 온다.

② 나쁜 동료를 통하여 받는 위험.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귀고자 선택한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힘쓴다. 우리는 그들의 칭찬에 민감하며 그들의 마음에 들기를 바란다. 시실 우리가 사람을 선택할 때 우리는 사람보다 그 사람의 칭찬을 선택하고 거기에 자신이 지배될 때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 친구를 사귈 때 신경을 써야 하며 하나님을 불쾌하시게 하지 않고서는 저들을 기쁘게 할 수 없는 무리들과 어울리지 말아야 한다.

(3) 베드로가 시험에 져서 "나는 그의 제자 중의 하나가 아니라"고 한 것은 베드로의 나약함에 기인한 것으로 대단히 악한 행위였다. 그는 자신의 명예가 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고 또 그 명예를 위해서 고통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지금까지 그는 예수를 그의 큰 명예로 여겨오고 있었다. 사람이 두려움을 품으면 쉽게 덫에 걸리고 만다. 그리스도께서 칭송과 사랑을 받고 존경을 받으셨을 때는 베드로도 신이 났고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의 주님이 받으시던 명예의 한몫을 차지하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신앙이 널리 통용이 될 때는 그것으로 명성을 얻으려던 많은 사람들이 신앙으로 인한 비난은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을 사태가 호전되거나 악화되거나 막론하고 지녀야 한다.

2. 그는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하는 죄를 짓는다(26, 27절). 이번에 그를 공격한 것은 하속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말고의 친척이었고 베드로가 스스로 자기가 예수의 제자임을 부인하는 것을 듣고 베드로가 거짓을 말함을 확신을 가지고 지적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는가? 내 친척 말고의 귀가 그 증거다." 이 말에 대하여 베드로는 그리스도나 동산 또는 사건의 전말에 대하여 전혀 아는 것이 없는 것처럼 다시 부인하였다.

(1) 이 세 번째의 시험의 습격은 전보다 더 구체적으로 닥쳐 왔다. 전에는 그가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으리라는 사실이 다만 의심된 정도였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가 예수와 함께 있었고 또 예수를 보호하려고 그가 칼을 뽑아든 것을 본 사람에 의해서 그의 제자됨이 저렇다니 밝혀지고 있다. 죄를 지면서라도 고난을 면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더욱 고난에 빠져 어쩔 줄 모르게 되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오직 진리임이 판명된 것을 위하여 용감하도록 하자. 우리가 거짓으로 진실을 감추려 하면 공중의 새가 그 사실을 말하게 될 것이다. 이 종이 말고의 친척이라는 사실이 특별히 언급되고 있다. 이는 상황이 베드로에게 더욱 불리해졌음을 나타내주는 말이다. 이를 듣고 베드로는 "이제는 나도 끝장이다. 그리고 내일도 끝이로구나. 이렇게 되었으니 무슨 다른 증인이나 고소자가 없더라도 꼼짝 없이 걸렸구나"라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일을 잘 마무리 질 수 있는데도 어떤 사람을 특별히 적으로 만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그의 친척 중 누구로부터 우리가 도움을 입어야 할 때가 있을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친구가 필요하다면 적을 삼는 일은 피해야 한다. 한편 본문에는 베드로에게 불리한 충분한 증거가 있었고 또 베드로가 그 기소를 부인한 데 대한 충분한 반증도 있었지만 베드로는 어떤 해도 당치 아니하였고 그를 해하려는 계획도 없었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키자. 실상 우리는 근거 없고 부질 없는 두려움 때문에 죄에 빠지는 일이 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러한 우려는 실제 일어나지도 않을 것에 대한 염려로 약간의 지혜와 결단력만 발휘해도 없이할 수 있는 것이다.

(2) 베드로의 비굴함은 전에 못지 않았다. "그는 다시 부인하였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① 죄의 일반적 성격. 히브리서 3장 13절에 보면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된다"고 하였다. 이 말씀대로 베드로는 돌연히 이상스러울 정도로 뻔뻔스러워진다. 그리하여 적의 반증에 대하여 담대하게 거짓말로 응수한다. 이와 같이 "죄의 출발이라는 것은 물보가 터지는 것과 같아서" 일단 둑이 무너지기만 하면 사람들은 쉽사리 점점 악으로 빠져들게 마련이다.

② 거짓말하는 죄의 특별한 특징. 이 죄는 씨앗과 같은 성격의 죄이다. 왜냐하면 이로써 여러 죄가 맺히기 때문이다. 한번 거짓말을 하면 이를 감추기 위해서 연방 다른 거짓말을 하게 되고 만다. 사탄의 전략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다. Mal facta mal factis tegere, ne perpluant - 즉 죄가 발각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죄로써 죄를 은폐한다.

(3) 그가 번뜩 양심의 일깨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적절하고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것은 곧 닭이 울었기 때문에 온 깨달음이었다. 그의 참회에 대한 본문의 기사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에 의해서도 기록되고 있다. 닭 울음은 베드로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상기시켰고 이로써 그는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① 그리스도의 자기 백성에 대한 보살핌. 그의 돌보심은 그들의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베풀어졌다. 이 보살핌 때문에 비록 그들이 넘어져도 아주 못 일어나지 않으며 완전히 버림당하지도 않는다.

② 신실한 깨우치는 자들이 우리 옆에 있으므로 주어지는 유익. 그들이 이미 우리가 아는 것 이상을 알지는 못한다고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알면서도 이미 잊어버린 것을 다시 상기시켜준다. 다른 사람들에게 닭의 울음이 우연한 일이요 별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있어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또한 그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상기시켜 줌으로 그의 양심을 일깨워 준 복된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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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 앞에 서신 그리스도(요 18:28-40)

우리는 본문에서 그리스도가 프래토리움(Praetorium:이는 희랍어에서 유래된 라틴어이다) 곧 총독 관저 또는 법정에서 빌라도에게 심문당하시는 과정을 대하게 된다. 그들은 예수가 로마 법정에 의해서 정죄함을 받고 로마의 권력에 의해 처형되도록 하기 위하여 서둘러 그를 그곳으로 끌고 갔다. 그를 처형할 작정을 하고 그들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밟았다.

1. 그들은 그를 합법적으로 처형하려고 하였다. 즉 그들 나라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현 정권의 헌법에 따라 그를 처형하려고 하였다. 즉 스데반의 경우처럼 군중을 선동하여 돌로 쳐서 처형하는 것이 아니라 현행법 절차에 따라 처형하려고 한 것이다. 이같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악인의 처우를 받으신 것이었다.

2. 그들은 더욱 보장된 방법을 통하여 주님을 처형하려고 하였다. 즉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로마 당국을 이 일에 개입시킴으로 소요의 위험을 극소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3. 그들은 주님 자신에게 더 모욕을 가하여 처형하려고 하였다. "십자가 형"은 로마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한 처형법으로 가장 불명예스러운 처형 방식이었다. 그들은 주님을 이 십자가 형에 처함으로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오명을 남기기를 바랬고 그리하여 그의 명성이 영원히 사라지기를 바랬다. 그러므로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한 말을 귀찮을 정도로 되풀이한 것이다.

4. 그들은 그를 처형하는데 있어서 자기들은 적은 비난을 받고서 일이 처리되기를 바랬다. 세상에서 많은 좋은 일을 행한 사람을 처형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비난을 살 만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오명을 로마 당국에 전가시킴으로 로마 당국에 대한 백성의 반감을 고무시키려 하였고 반면 자기들은 그 비난을 면하기를 바랬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죄된 행동보다 그 나쁜 행위로 인한 세평(世評)을 두려워한다. 사도행전 2장 28절을 참고하라. 본문에서 기소에 관하여 두 가지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기소자들은 일찍이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제 그들의 소송처리 정책이 어떠한가를 살펴 보자. 예수를 유대인들이 고소한 것은 "새벽이었다." 어떤 이들은 새벽 두세시 경이라고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대여섯시 경이라고 한다. 여하간 이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어 있을 시간이었다. 이 시간을 택한 것은 그래야 그리스도를 따르는 백성들로부터의 반대의 위험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동시에 자기들은 선동군들을 동원하여 예수에게 불리한 말들을 외치게 함으로 일을 신속히 처리하려고 하였다. 이 일에 그들이 얼마나 신경을 썼으며 소송이 얼마나 야비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그들은 그를 손아귀에 넣자 그를 십자가에 달기까지 촌시도 방심하지 아니하여고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하여 잠도 자지 않았다(미 2:1 참조).

(2) 그들의 미신적 관습과 추악한 위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죄수를 대동하고 이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하였다. 그들은 관정이 할례받지 아니한 이방인의 건물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기 위하여 그곳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문 밖에 서 있었다. 그들이 유월절 잔치에 참여하려면 몸을 더럽히지 말아야 했던 것이다. 이 유월절 잔치는 유월절 어린 양을 먹지 않았고(이것은 유월절 전날에 먹는다) 제 15일에 바쳐지는 희생 제물을 가지고 차리는 유월절 잔치를 말하는 것이다. 유월절에 드리는 황소에 대해서는 신명기 16장 2절 역대하 30장 24, 35장 8,9절에 언급되고 있다. 기들은 바로 이 소고기를 들려고 한 것으로 이 때문에 이방인들과의 접촉을 두려워하여 그들은 법정에 들어가지 아니하였다. 이같이 그들은 율법에 충실했기 보다는 관습상의 불결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이것은 그들이 꺼리면서 한편 그리스도를 사형에 처하도록 기소함으로 전율법을 어기는 것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그들은 작은 미물은 토해내고 약대는 삼켰다." 이제 관정에서 일어난 일을 살펴보자.

Ⅰ. 빌라도와 기소자들 사이의 회담. 빌라도는 기소자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었고 기소자들은 그럴 듯하게 죄수를 고소하는 발언을 하였다(29-32절).

1. 빌라도가 먼저 저희에게 기소의 내용을 묻는다. 그들이 관정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그들을 찾아 나가서 관저 앞에서 그들과 담화를 나누었다. 총독으로서의 빌라도에게는 세 가지 본받을 만한 점이 있다. 이같이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서 각기 그들이 지닌 정당성을 볼 줄 알아야 한다.

(1) 그의 직무에 대한 충실성. 그는 직무에 충실하였고 업무는 미루지 않고 처리하였다. 만일 업무가 보람있는 일이었다면 그는 일찍이 재판이 요청되었다 해도 기꺼워하였을 것이다. 공직을 맡은 사람들은 일신상의 평안을 탐닉하여서는 안 된다.

(2) 백성들의 관습에 대한 그의 양보 정신, 백성들의 관습을 인정하고 빌라도는 자신이 양보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그들이 내게 오지 않고 건방을 떤다면 저희 집으로 돌아가라고 해라." 우리라도 같은 규례를 적용하여 "기소자가 총독에게 고개 숙이기 싫어한다면 구태여 그의 기소를 들어 줄 필요는 없는 것이야"라고 말하게 되리라. 그러나 빌라도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들을 너그러이 용납하여 자기가 그들에게 나아갔다. 우리도 그것이 좋은 일을 위한 것이라면 모든 사람에게 다 좋게 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 재판 규칙에 대한 빌라도의 철저한 준수. 그는 기소가 악감 때문에 날조된 것은 아닌가하여 기소 내용을 말하도록 요구한다. "너희가 무슨 일로 잉 사람을 고소하느냐? 이 사람에게 무슨 죄가 있어 고소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 죄에 대한 무슨 증거라도 있는가?" 빌라도가 적용한 법은 자연법으로써 후에 발레리우스 퍼블리콜라(Valerius Publicola)가 이 법을 로마법으로 제정하였다. 발레리우스가 정한 바에 의하면 Ne quis indicta causa condemnetur - 즉 피고의 진술을 듣지 않고 그에게 형을 선고하지 못한다(행 25:16, 17 참조). 영장에 기제된 사실에 대한 충분한 증거도 없이 사람에게 형을 가하는 일은 모순이다. 더욱이 그 사람에 대한 고소장도 없는데 한 사람을 체포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2. 기소자들은 주님이 악인이라는 극히 막연한 주장을 함으로 주님에게 불리한 재판을 내려 줄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그를 사형에 처하거나 구속할 만한 뚜렷한 증거도 없었고 내세울 만한 이유도 없었다(30절). 그러므로 그들은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이 사람을 정죄하도록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연하게 대답한다.

(1) 이 사실을 통하여 볼 때 저희는 빌라도에게 매우 무례하고 거칠게 대하였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당국의 지배를 경멸하기를 즐겨하는 기질이 나쁜 무리들이었다. 빌라도가 겸손히 그들을 나와서 마중한 데 비하여 그들은 그를 아주 불쾌하게 대하였던 것이다. 또한 빌라도는 그들에게 마땅히 물어야 할 질문을 가장 조리있게 물었다. 그러나 만일 그가 합당치 않은 질문을 하였다면 그들은 그를 멸시하여 답변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2) 그들은 우리 주님 예수에게는 악의와 심술로 대하였다. 주님이 옳든 그르든 상관없이 그들은 주님을 행악자로 몰아서 그러한 사람으로 처단하려고 하였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한 사람의 죄가 판명되기까지는 그를 무죄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자신이 죄 없음을 입증하실 수 있는 분을 죄인으로 몰기를 바랬다. 그들은 주님을 사기군이나 살인자 또는 흉악한 중범이나 질서 파괴자로 몰지 않고 행악자로 몰고 있다. 신을 행하며 다니신 주님이 행악자라니! 그가 고쳐 주시고 먹이시고 가르치신 사람들, 그가 악마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고 죽음에서 일으키신 사람들을 불러다가 주님이 행악자인지 아닌지를 저희에게 물어보게 하자. 그러면 사실이 명백하여질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푼 사람들이 가장 흉악한 행악자로 누명을 쓰고 처단되는 것이 새로운 사실이 아님을 기억하자.

(3) 그들은 스스로 오만을 부리며 자신들을 기만하였다. 그리고 한 사람을 행악자란 막연한 범행의 성격으로 규정지어 판단한 그들의 판단이 공안을 유지하는 총독이 그에게 형을 선고하게 하는데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여겼다. 이보다 더 건방진 처사는 아마 어디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3. 총독은 예수를 유대인들의 법정으로 돌려 보낸다(31절).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그리고 그의 문제로 나를 괴롭히지 말라." 빌라도가 예수를 돌려보낸 뜻은 무엇인가.

(1) 어떤 이들은 빌라도가 그들의 잠재적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으므로 그들로 그들의 권세를 행사하라는 뜻으로 돌려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도 범죄의 과소에 상관 없이 죄인들에게 "회당에서 채찍질하는 것과 같은" 태형을 가할 수 있었다. 빌라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 율법이 허용하는 한 최대로 벌을 내리라. 설혹 도가 지나치는 일이 생기더라도 그냥 묵과해 주겠다." 이 말로 보아 빌라도는 유대인들을 만족시키기는 바랬으나 그들이 요구하는 일을 하는 것은 바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 어떤 이들은 그가 그들을 희롱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로써 그들의 현재의 약함과 예속됨을 깨닫게 하여 책망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죄에 대하여 유일한 재판자 노릇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말한다. "바라건대 너희가 이 문제를 다스리기를 원한다면 시작한 대로 계속 추진하라. 그에게 죄를 선고한 것도 너희 법률을 따른 것이었으니 이제 너희 율법에 의하여 그를 처벌하기를 원한다면 그에게 형을 내리라"고 한다. 실상 힘도 없고 예속 상태에 있으면서 남의 지배를 받아야 할 주제에 권력을 행사하려 하며 자기들의 지혜를 자랑하려는 사람들보다 어리석고 남의 공격을 자초하는 경우는 없다. 어떤 이들은 이 사실에 대하여 빌라도가 로마법에서는 결코 허용하지 않는 피고의 얘기도 들어보지 않고 재판을 하는 것을 모세의 율법에서는 허용하는 것으로 여겨 그 법에 호소하라고 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너희 법으로는 이러한 재판이 허용되는 모양이다. 우리 법으로는 허용될 수 없어"란 뜻으로 한 말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의 타락이 하나님의 율법에 모욕을 돌리게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도 우리의 잘못으로 욕을 당할 수 있음을 기억하자.

4. 그러나 그들은 재판하는 권이 자기들에게 있음을 부인한다. 그리고 (사실 마땅한 얘기이지만) 그들은 고소자의 입장에 처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한다. 이제는 그들의 교만도 다소 수그러지고 보다 순종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그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이 없나이다. 또한 아무리 적은 형이라도 우리가 집행하는 것은 위법입니다. 그런데 이 자는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어도 그럼에도 마땅히 죽어야 할 행악자입니다."

(1) 어떤 이들은 그들이 생사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그들의 재판권을 부주의로 망각하고 당시의 불법의 권력 앞에 소심하게 굴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라이트푸트(Dr. Lightfoot) 박사는 ‘우크 엑세스틴’(18:31) - 즉 그 누구에게도 사형을 선고하는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당장 폭동이 일어나고 말 것입니다"라고 해석한다.

(2) 다른 이들은 로마 당국이 그들의 권력 행사를 제재하였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 권한을 올바로 행사하지 못했기 때문이든지 아니면 피정복민이며 반항적인 민족의 수중에 이러한 대권을 주는 것은 지나친 호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이 사실을 수긍한 것은 빌라도에게 아첨을 하려는 뜻에서 그리고 자기들의 무례를 속죄하려는 뜻에서였다(30절).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유다가 통치권을 상실하였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금 메시야가 오신 것이었다(창 49:10). 만일 유대인들이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다면" 왕권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렇지만 그들은 "실로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지 아니하였다(실로는 지명이나 여기서는 왕권을 의미함:역주).

(3) 그들이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어서였던 또는 이번 사건에는 이 권한을 행사하지 않으려 하였던 간에 그들이 그를 처형하지 않으려는 데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문에 의하면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였다"(32절).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① 넓은 의미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말씀에 패배를 안겨 주려고 했던 사람들까지도 결국은 그들의 뜻을 초월한 하나님의 통치의 섭리에 의하여 그의 말씀들이 이루어지는데 기여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하신 어떠한 말씀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 없음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는 결코 남을 기만하지도 않으시며 또 기만당하시지도 않으신다. 대제사장들은 예수를 박해하여 사기군으로 누명을 씌우면서도 그들의 영혼은 결국 그가 진실하심을 입증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그들이 다른 방법에 의하여 주님의 예언을 폐하려고 하였다고 여겨지는 때에도 말이다. 하지만 "그의 뜻은 그들과 같지 아니하였던 것이다"(사 10:7).

② 좁은 의미로 볼 때 그리스도의 이러한 말씀은 그가 자신의 죽음에 관하여 하신 말씀을 이룬 것으로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율법을 따라 그를 재판하는 것을 기피함으로 그리스도가 그의 죽음에 관하여 하신 두 말씀이 성취되었다.

첫째, 그가 "이방인에게 넘겨지겠고 그들이 그를 사형에 처하리라"는 말씀이 성취되었다(마 20:19; 막 10:33; 눅 18:32, 33).

둘째, 그가 하신 "들려서"(3:14; 12:32) 처형되리라(마 20:19; 26:2)던 말씀이 성취되었다. 만일 유대인들이 그들의 율법에 의하여 그를 재판하였다면 그는 돌에 맞아서 돌아가셨을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화형, 교수형, 단두형(斷頭型)도 경우에 따라서 집행하였다. 그러나 로마인들에 의하여 처형당하신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이로써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나무에 달리셨다"(갈 3:14)는 말씀과 "그의 손과 발을 관통당하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 베들레헴에 나신 것도 로마 당국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이제 십자가의 형을 받으심도 로마인들에게 받으시게 된다. 이로써 두 경우 다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가 어떻게 죽은지" 아직은 모르지만 그 죽음의 방법은 미리 작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은 우리를 죽음에 관한 모든 기우로부터 자유롭게 해 줄 것이다. 다만 우리는 "주여 당신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어느 때 이루고자 예비하셨는지 그대로 이루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Ⅱ. 죄수에 대한 빌라도의 심문(33절 이하).

1. 죄수가 법정에 서다. 빌라도는 문 앞에서 대제사장들과 협상한 후 관정으로 돌아와 예수를 끌어 오라고 명하였다. 그는 군중 앞에서 그를 심문하려 하지 않았다. 이는 시끄러움에 의하여 방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그를 관정으로 데려 오라고 명하였다. 또한 그리스도는 이방인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기를 꺼려하지도 않으셨다.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와 형벌을 대신 담당하시고 죄인으로 체포당하시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게 하시려고 주님이 빌라도에게 심판을 받으신 것이다.

2. 빌라도의 심문.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주님을 기소한 자들이 "예수가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을 금하고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죄명으로 그를 기소하였다고 전해 준다. 이제 본문에도 이러한 전제하에 질문이 주어지고 있다.

(1) 본문에 예수에게 빌라도가 한 질문은 그를 함정에 빠뜨려서 기소할 만한 죄명을 찾아 내려는 의도에서 던진 질문이었다. "에가 유대인의 왔이냐? 그래 네가 많은 이야기를 낳게 하고 또 기대감을 불러 일으킨 유대인의 왕(호 바실류스) 메시야냐? 과연 그러한가? 공연히 네가 그인 척 해보는 것은 아닌가? 네가 스스로 그렇게 칭하니까 사람들이 너를 그렇게 여기는 것이 아닌가?" 그가 이렇게 질문한 것은 예수가 그러한 인물이라고 여기기에 또 그러한 의구심을 품기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들은 빌라도가 비난과 경멸이 섞인 어조로 이 질문을 던졌다고 생각한다. 즉 이렇게 질문하였으리라고 한다.

"도대체 네가 왕이라니! 누가 너 따위를 그런 인물로 부상시켰는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니? 아니 바로 그 유대인들이 너를 증오하고 핍박하지 않은가? 로마 황제가 실권을 쥐고 있으나 당연히 왕될 사람은 너라는 말인가?" 빌라도는 예수께서 지금까지 그러한 말씀을 하셨다는 근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께서 지금도 자기가 왕이란 말을 자제하고 안하는가 하여 그 고백이 나오도록 유도한 것이다.

(2) 그리스도는 이 질문에 대하여 다른 질문으로 응수하신다. 이는 대답을 회피하려는 뜻에서가 아니고 빌라도에게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또 어떠한 근거로 그가 이 일을 진행하는지 각성하도록 하기 위하여 던지신 질문이었다(34절). "이는 네가 심중에 의심이 생겨서 스스로 하는 말이뇨,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라. 그에 대한 책임 때문에 마지 못하여 묻는 것이뇨?"

① 이 말씀 속에는 "네 스스로 이러한 질문을 던질" 이유는 없는 것이 명백하다는 뜻이 내포되고 있다. 빌라도는 직책상 로마 정부의 이권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빌라도는 우리 주님 예수의 어떤 말씀이나 행동 때문에 로마 당국의 이권(利權)이 위협받는다거나 손실을 입었다고 말하지 아니한다. 실상 예수님은 세속적인 오만함을 부리며 나타나시지 않았고 어떤 세속적인 권세를 취하려 하지도 않았으며 재판자나 재산분배자로 행세하지도 않으셨다. 그는 결코 반역적인 언행을 하신 일이 없었고 최소한의 혐의를 품을 만한 행위도 하신 일이 없었다.

② 이 말씀에는 "만일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가 격노하게 하려고 네게 한 말이라면 너는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 그리고 무슨 속셈으로 저들이 그러는지 또 나를 가이사의 적으로 모는 저희가 정말 가이사의 적은 아닌지 그리고 내게 이러한 누명을 씌우는 것은 저희의 흉계를 은폐하기 위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시요. 만일 그렇다면 이 문제는 정의를 구현해야 하는 재판자로서의 당신의 입장에서 이 문제는 신중을 기해야 하리다"란 뜻이 포함되고 있다. 만일 빌라도가 의당 그래야 했던 대로 이 문제에 대하여 보다 깊이 추궁했더라면 대제사장들이 예수에 대하여 분을 낸 참된 이유가 그가 로마 정권을 타도하고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려는데 있지 않았음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만일 예수께서 모세가 애굽인들의 손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인도해냈듯이 유대인들을 기적으로 로마의 속박에서 해방시키셨다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대항하여 로마인들의 편이 되었을 리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를 자기들의 왕으로 삼고서 그의 지휘아래 로마인들에 항거하여 싸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요구에 일치하지 않게 되자 그들은 자기들도 많은 잘못을 범한 바로 당국에 그를 고소한 것이 있다. 실상 그들은 현 정부를 싫어하였고 전복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3) 빌라도는 그리스도의 대답을 마땅치 않게 받아들이고 그리고 좋지 않게 여긴다(35절). 35절의 말씀은 34절의 그리스도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었다.

① 그리스도는 빌라도에게 지금 묻는 말이 자신의 물음인가를 묻는다. 이에 대하여 빌라도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유대인이냐? 어찌하여 네가 나를 그대에 대한 음모에 가담한 것으로 의심하는가? 나는 메시야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다. 또한 알고 싶지도 않으며 누가 메시야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 휩쓸리고 싶지도 않아, 내게는 누가 메시야이든 상관 없는 일이야." 빌라도의 "내가 유대인이냐?"란 질문에 어떠한 경멸이 숨겨 있는지 생각해 보자. 여러 가지 점에 있어서 유대인들은 영예로운 민족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하나님의 계약을 파괴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모든 백성 앞에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셨다"(말 2:8, 9). 그러므로 지각이 있고 긍지가 있었던 인물이라면 누구나 이 사실을 유대인의 오점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이름을 지닌 사람이 악하기 때문에 이름까지 수난을 꺾는 경우는 허다한 것이다. 만일 터어키인이 자기가 그리스도인으로 여겨지는 것을 불명예로 간주하여 "무엇이라고? 네가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여기는가"라고 하게 된다면 이 얼마나 서글픈 일이냐?

②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말해 주었는가를 물었다. 이에 대하여 빌라도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그렇다. 누구든지 그대 편을 들리라 생각할 수밖에 없는 네 나라 사람과 그들의 증언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할 제사장들의 말에 의한 것이다. 너희 규례대로 한다면 in verbum sacerdotis - 즉 제사장의 말이라 하면 그것은 틀림 없는 진리임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나는 그들의 정보대로 일을 진행할 도리밖에 없노라"고 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그의 신앙 때문에 같은 동족 하물며 제사장들에 의하여 고난을 겪으신다. 이들 제사장들은 주님에 대하여 신앙을 고백해야 했는데도 그들의 해야 할 직책과는 너무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것이다.

③ 그리스도께서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을 우선 기피하셨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보다 구체성을 띤 다른 질문을 그에게 던진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가 너의 민족 특히 제사장들에게 어떤 못할 짓을 하였기에 저희가 네게 이렇게 난폭하게 구는가? 사태가 조용히 끝날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군.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라고 물었다.

(4) 그리스도는 다음 답변에서 빌라도의 앞 질문 즉 "네가 왕이냐"라는 질문에 구체적이고 완전한 대답을 하신다. 그는 여기서 그가 어떤 의미에 있어서 왕인가를 설명하신다. 그가 로마 정권에 위험을 끼친다는 뜻에서의 왕 곧 세속적 왕이 아님을 말씀한다. 그가 품으신 뜻을 이루는데 세속적인 방법은 아무 도움도 될 수 없었다(36절).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① 그리스도 왕국의 본질과 구조. "그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이 말씀이 부정적으로 기술된 것은 그 나라에 관한 당시의 오해를 제거하시려는 뜻에서였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다른 말로 "내 나라는 하늘 나라로" 저 세상에 속한 것이라는 뜻의 말씀이다. 그리스도는 왕이시며 나라를 소유하고 계신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리는 아니다.

첫째, 그 나라는 이 세상에 근거를 둔 나라가 아니다. 인간들의 왕국은 "바다와 육지에" 근거를 두지만(단 7:3; 계 13:1, 11) "거룩한 성은 하늘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계 22:2). 그의 나라는 계승되는 것도 아니요 선거에 의하여 또는 정복에 의하여 좌우되는 나라도 아니다. 오직 신의 뜻과 섭리의 직접적이고 특별한 배려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둘째, 그 나라의 성격은 세상적이 아니다. 이 나라는 사람들 중심에 이루어지는 나라로(눅 16:21) 그들의 마음과 양심 가운데 세워진다(롬 14:17). 그 부(富)는 영적인 부요 그 권세도 영적인 권세다. 또한 모든 그의 영광은 내적인 것이다. 또 그리스도의 나라의 장관들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다"(고전 2:12).

셋째, 그 나라에 대한 방비와 지원도 이 세상적인데 의지되지 않는다. 그 나라의 무기는 영적 무기이다. 그 나라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세속적 군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또한 그 나라는 왕과 영주들을 해하면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시키지 않는다. 이 나라는 방백들의 횡포나 그들의 신하들의 소유물에 의하여 털끝만치도 간여당하지 않는다. 이 나라는 세속적인 성격의 나라 건설을 변개하려 하거나 세상 어떤 나라를 싫어하지 않는다. 이 나라가 개입하는 것은 오직 죄와 사탄으로 인한 것일 뿐이다.

넷째, 그 나라의 목적과 향방도 이 세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이 이 세상의 위대한 인물들이 되어 세력을 누리며 도도히 되는 것을 목적하지만 않고 또 그들의 이러한 시도를 용인하시지도 않았다.

다섯째, 그 나라의 신하들은 비록 지금은 그들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만 이 세상적이지 않다. 그들은 세상에서 부름을 받았고 선택되었다. 또한 저 세상에 태어날 것이며 저 세상을 위하여 현재도 살아간다. 그들은 이 세상의 생도들도 아니요 세상이 좋아하는 인물들도 아니다. 또한 세상의 지혜에 의하여 지배되지도 않으며 세상의 부에 탐닉하지도 않는 것이다.

② 그리스도의 왕국의 영적 본질을 보여 주는 증거. 만일 예수께서 로마 정권에 대한 전복을 계획하셨다면 그는 제자들로 각기 무기를 들고 나아가 싸와 무력은 같은 무력으로 격퇴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시도를 하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중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그리고 그렇게 하면 나의 나라도 그들에 의하여 짓밟히지 않았으리라"고 하신다. 그러나 사태는 이와는 정반대였다.

첫째, 예수의 추종자들은 싸우려 나서지 아니하였다. 그를 구출하려는 무슨 시도나 소요도 없었다. 비록 예루살렘 성내는 그의 친구들이며 동향인들은 갈릴리 사람들로 가득 했지만 말이다. 그들은 보통 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당한 예수의 제자들의 평화로운 행동은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한 짓을 진작 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둘째,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싸우라고 명령하시지 아니하였다. 이 사실은 그가 세상적인 도움에 의지하지 않으셨다는 좋은 증거였고(만일 그가 하시려고 하였다면 군단 규모의 천사들을 소집하셨을 것이고 이 일은 그의 나라가 위에 속하여 있음을 입증해 주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또한 그가 세상적인 반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그는 그의 나라가 수립되고 발전하려면 세상 나라는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아시는 것처럼 기꺼이 유대인들에게 잡히셨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결론을 맺으신다. 그의 나라는 이 세상 안에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한 나라는 아니었던 것이다.

(5) 빌라도의 다음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보다 직접적으로 답변하신다. 37절에 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① 빌라도의 명백한 질문.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너는 네가 왕국을 가지고 있노라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너는 왕이 아닌가? 네가 이렇게 주장할 무슨 근거가 있는가?"

② 우리 주님 예수께서 이에 대한 답변으로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증거하신 고백(딤전 6:13). 그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그 이유는 내가 진리로 증거하러 왔기 때문이다."

첫째, 주님께서는 비록 빌라도가 의도한 바와는 본질상 차이가 있지만 자신이 왕이심을 인정하신다. 메시야는 왕의 특징 곧 메시야 왕의 모습으로 나타나시리라고 기대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가야바 앞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주장하였고 이러한 주장과 일치하여 빌라도에게도 그가 왕이심을 부인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체를 입으셨지만 그럼에도 그가 왕의 영예와 위엄을 주장하심은 마땅한 조치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둘째, 그는 자신에 대하여 설명하신다. 그리고 그가 어찌하여 왕이실 수 있는가를 보여 주신다. 그것은 "그가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하심"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는 진리의 능력에 의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통치하시는 분이시다. 만일 그가 자신을 세상적인 군왕으로 선포하려고 마음 먹으셨었다면 그는 "나라들을 지배하고 임금들을 정복하고 나라들의 소유물을 취하기 위하여 바로 이런 목적 때문에 내가 태어났고 이러한 이유로 내가 세상에 온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증인이 되시려고 곧 세상을 주관하는 죄의 세력에 도전하는 증인이 되려고 세상에 오셨다. 그는 자신의 증거의 말씀에 의하여 그의 나라를 세우시고 또 보존하신다. 그가 백성들에게 증인이 되며 또 백성들의 인도자와 명령자가 되실 것이 예언되고 있다(사 55:4).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 안에서 진리가 힘을 잃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사 59:14 , Qui nescit dissimulare, nescit regnare - 즉 위장할 수 없는 사람은 다스리는 방법도 모른다). 아니 그의 나라는 그 안에서 진리가 영원히 지배적인 저 세상에 속하여 있다.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사명 그리고 그의 본분은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었다."

a. 진리를 드러내어 세상으로 진리를 발견케 하기 위하여 그는 오셨다. 그렇지 않았다면 세상은 하나님도 그의 뜻도 인간들을 향하신 그의 선하신 뜻도 알 수 없었으리라(1:18; 17:26).

b. 진리를 확고하게 하시려고 그는 오셨다(롬 15:8). 그는 기적을 행하심으로 신앙의 진실됨과 신의 계시의 참과 하나님의 완전하심, 그의 섭리, 그의 약속과 계약의 참됨, 또한 모든 사람이 그를 통하여 믿을 수 있음을 증거하셨다. 이제 이 일을 행하심으로 그는 왕이 되시며 또한 왕국도 이루시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a) 그리스도의 나라의 기초, 권세, 정신 및 기풍은 진리 곧 신의 진리이다. 사실 그가 "나는 진리라"고 말씀하신 뜻은 "나는 왕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진리의 확고한 증거에 의하여 세상을 정복하신다. 또한 그는 진리의 전권적인 능력에 의하여 통치하신다. 그러므로 시편에 "왕은 진리를 위하여 위엄있게 하고 승전하소서"(시 45:4)란 말씀은 주님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세상을 심판하실 것인데 바로 그의 진리로 하실 서이다(시 96:13). 진리는 그의 나라의 홀(scepter)이다. 그는 우리에게 계시하신, 또한 진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가 받아들인 진리로 사람의 깊은 마음을 감찰하신다. 이 같이 하여 그는 사라는 의 생각을 복종시키셨다. 그는 세상에 빛으로 오셨으며 낮은 태양처럼 다스리신다.

(b) 그는 나라의 신하들은 진리에 속하여 있는 사람들만 자격이 있다.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거짓의 아버지의 세력에서 구출받고 진리를 받아드리려는 마음과 또 진리의 권세와 영향 아래 복종하려는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어야 하며, 그의 신하가 되어야 하며, 믿음을 지니고 생활하며, 예수에게 충성을 다 바쳐야 한다. 참된 종교에 대한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기독교 신앙을 영접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므로 그들은 그의 나라에 속하게 된다. 그리고 주님은 진리의 권세에 의하여 그들로 기꺼이 그를 따르게 하신다(시 110:3).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다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으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진리보다 더 위대하고 좋고 확실하고 달콤한 진리는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은혜와 진리는 바로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 세상에 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으므로 우리가 진리에 속하여 있는지를 알게 된다(요일 3:19).

(6) 여기서 빌라도는 예수에게 훌륭한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그는 대답을 들으려고 머물러 있지는 아니하였다(3절). 본문에 의하면 그는 "진리가 무엇이냐?"하고 묻고 "즉시 다시 유대인에게로 나갔다."

① 그의 질문이 훌륭하였음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 질문에 비견할 만한 답변을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진리란 인간 정신이 바라고 추구하는 가장 귀중한 가치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고정되어 있을 수 없고 다만 가치를 의식함에서 그것이 진리라고 말할 수 있든지 아니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성서를 찾아 보고 말씀의 전후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말씀이 구성된 것을 보게 된다. 즉 '진리가 무엇이냐?" 란 물음을 던져놓고 그 다음에는 "나를 당신의 진리 곧 모든 진리로 인도하소서"라는 간구로 이어짐을 보게 된다. 즉 진리에 대한 물음에는 그것에 대한 끈질긴 희구가 따라야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은 던져놓고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 갖추어야 할 충분한 인내와 끈기를 갖지는 못한다. 또한 그들이 진리를 발견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겸손과 성실함은 갖추지 못한다(딤후 3:7). 이 같이 많은 사람들의 진리에 대한 갈구는 마음뿐이요 행동으로 옮겨지지는 못한다. 그들은 요긴한 질문 곧 "내가 누구인가?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그 답을 얻으려고 충분히 시간을 할애하지는 아니한다.

② 빌라도가 무슨 의도로 이 질문을 하였는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첫째, 아마도 그는 그리스도를 좋게 여겨 경외감을 가지고 배우는 자의 입장에서 예수께서 미리 신앙하시며 배우신 것 가운데서 새로운 점을 알려는 마음으로 이런 질문을 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헤롯이 기적을 보기를 원하였듯이 빌라도가 예수에게서 새로운 소요와 난동을 부렸으므로 이야기를 중도에서 그만 두고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둘째, 어떤 이들이 빌라도가 재판관의 입장에서 예수가 그의 앞에 끌려온 이유를 좀 더 케기 위하여 이러한 질문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즉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본다. "이 신비로운 사실을 내게 알리라. 이 일의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 사건의 전말의 참 진상이 무엇인지를 내게 말하라." 만약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대제사장들이 싫어서 박해하였고 또 그리스도께서 지금 그것을 위하여 증거하시며 고난받으시는 영원한 복음인 대진리(大眞理)를 조롱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모든 종교를 희롱하는 것을 낙으로 여기는 무신앙인들처럼 그는 예수도 그를 박해하는 자들도 조롱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신 것이다. 이는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은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지 말며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는 말씀과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러므로 빌라도에게는 진리가 무엇인지 답변하지 않으셨지만 제자들에게는 대답하셨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도 전함을 받는다(14:6).

Ⅲ. 기소자들과 죄수들과 각각 회담한 후 있어진 두 가지 결과(38-40절).

1. 재판관은 예수의 친구로 나서서 그에게 호의를 보였다.

(1) 빌라도는 공개적으로 예수가 무죄함을 선언하였다(38절). 전후 사정을 종합해 보고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고 그는 말한다. 빌라도는 이것을 예수와 유대인들 사이의 신앙적인 분쟁으로 인한 것이라고 보았고 그런 점에서라면 그들이 옳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처럼 예수의 주장에도 타당성은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예수에게서 범죄될 만한 것을 찾지 못하였다. 그리스도의 무죄에 대한 빌라도의 이 엄숙한 선언이 뜻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① 이 선언은 주님, 예수의 의로우심과 영예를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이 선언에 의하여 예수를 그들이 가장 악한 행악자로 취급하였지만 그는 결코 이렇게 여겨질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이 들어났다.

② 이 선언은 예수의 죽음의 본래의 목적이 어디 있는가를 설명해 준다. 그는 재판관도 인정한 봐와 같이 자신의 죄 때문에 죽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희생물로 죽으셔야 했다. 이 사실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합당하다"(11:50)은 기소자를 자신들의 판단 속에서도 이미 암시되고 있다. "폭력을 사용하시지도 않았고 그 입에 궤사도 없었던 분이" 바로 예수시였다(사 53:9). 그리고 그는 우리를 위하여 "끊어져 없어지셨고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셨다"(단 9:26).

③ 이 선언은 그를 격렬하게 고소하는 유대인들의 죄를 명백히 나타내 주었다. 죄수에 대한 심판이 공정하고 또 범죄에 대한 올바른 재판을 집행하는 자들에 의하여 죄수를 방면하기로 결정되었다면 그리고 재판관들이 죄수에게 특별한 호의를 베풀었다고 의심될 만한 점이 없다면 기소자들도 죄수의 무죄를 인정하고 방면에 동의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는 죄가 없으심이 판명되었는데도 행악자로 모함을 받으셨고 무리들은 그의 피를 마시려고 몸부림하였다.

(2) 빌라도는 예수를 방면하기 위하여 한 계략을 마련하였다(39절).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이 유대인의 왕을 놓아 주도록 할까?"라고 묻는다. 그는 이 계획을 대제사장들에게 제안한 것이 아니고(그는 이들이 이 제안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무리들에게 하였다. 이 제안은 마태복음 27장 15절에도 나타나는 것처럼 백성들에게 호소했음이 명백하다. 아마 빌라도는 이 예수가 얼마 전만해도 백성들의 호산나 소리에 둘러싸여 입성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가 무리들에게는 인기가 있으셨고 이 때문에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시기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백성들이 예수의 석방을 요구하리라 믿었고 백성들이 이렇게 강하게 나오면 기소자들도 입을 다물 것이며 그러면 모든 것이 잘 해결되리라 생각하였다.

① 그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해방을 기념하는 유월절을 뜻 깊게 하기 위하여 오래 전서부터 한 규칙을 세워 이 날에 사람을 방면하는 관례로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관례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없는 것이었으나 하나님이 정하신 해방 기념식인 유월절 행사로는 말좆할 수 없다는 듯이 후에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추가하여 제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관례는 자비의 행위는 될 수 있어도 공의에는 저촉되는 것이었다(잠 17:15).

② 빌라도는 무리들에게 관례를 따라 예수를 석방하겠다는 제안을 한다. 만일 빌라도가 재판관이 갖추어야 할 정직과 용기가 있었다면 무흠한 사람을 악명 높은 범인과 경쟁자가 되도록 지명하는 일은 안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예수에게서 결점을 찾을 수 없었다면 그는 양심에 의하여 예수를 방면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 문제를 교묘히 다룸으로 양편을 모두 만족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는 정의의 원칙보다 세상적인 지혜의 지배를 받는 그러한 인물이었다.

2. 백성들은 그의 적으로 처신하여 예수에게 몰인정한 태도를 보였다(40절). "저희가 모두 소리 지르며 이 사람이 아니라. 이 사람을 석방하지 말라. 바라바를 놓으라"고 말하였다. 다음사실들을 생각해 보자.

(1) 그들의 난폭함과 광분. 빌라도는 저희가 성인이란 점을 고려하여 조용히 이 문제를 그들에게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 문제를 열띤 감정을 폭발시켜서 처리하기로 결심하였고 그리하여 소란과 소요를 일으켜 최대의 무질서 상태로 사태를 몰아갔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앙에 대한 원수들은 이 신앙을 소요로 기를 죽여서 아주 말소해 버리기를 바랐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에베소에서는 소요도 그 한 예이다(행 19:34). 사태를 좀더 악화시키고 사람을 괴롭히려는 생각을 지닌 자들은 자기들의 존재 방식을 단순히 이런 방법으로 표현하므로 상대방에게 사고할 기회도 주지 않으며 마음도 흔들리게 만든다. 그러므로 대중의 소요를 통하여 목적을 이루려는 자들에게 이성과 정의감이 결핍되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의심할 만한 일이다.

(2) 무리들의 어리석음과 불합리성. 본문에 보면 예수 대신 살리라고 그들이 내세운 자에 대한 짧은 설명이 있는데 이를 미루어 이들 무리의 우매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바라바라 하는 자로 "강도"였다.

① 바라바는 하나님의 율법을 파기한 자였다. 그런데 그들은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오만, 탐욕, 횡포를 견책한 사람은 정죄하고 강도는 살려 주라고 하였다. 바라바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강도였으나 예수는 그들에게 모세의 신앙이나 그들의 전통을 빼앗으려고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② 그는 공공의 안녕과 개개인의 번영에 대한 적이었다. 예루살렘은 강도들로 늘 불안하였고 이들을 처형하라는 소란은 항상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욥 30:5에도 "무리가 도적을 향하여 외치듯이 그들에게 외쳤다"는 말씀이 있다) (그들은 본문에서 강도를 뜻함. 주:도적만큼이나 강도가 흔하였다는 뜻으로 이해된다:역자 주).

그런데 본문에도 한 강도가 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보다 그들의 죄를 더 사랑하는 사람들도 강도와 같다. 죄는 곧 강도와 같은 성격의 것이며 모든 천박한 욕망도 강도와 같다. 그리고 참으로 우리를 풍요하게 해 주는 그리스도 이외에 것을 택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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