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1.13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요19.수난.십자가.숨거두심.장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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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요19장

1.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2.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3.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4.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5.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6.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7.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8.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9.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10.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12.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13.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14.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15.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16.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

17.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18.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23.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영혼이 떠나가시다

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다

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2.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35.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36.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37.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새 무덤에 예수를 두다

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41.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42.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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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B]요19장

1.  Then Pilate therefore took Jesus, and scourged Him.

2.  And the soldiers wove a crown of thorns and put it on His head, and arrayed Him in a purple robe;

3.  and they [began] to come up to Him, and say, "Hail, King of the Jews!" and to give Him blows [in the face.]

4.  And Pilate came out again, and *said to them, "Behold, I am bringing Him out to you, that you may know that I find no guilt in Him."

5.  Jesus therefore came out, wearing the crown of thorns and the purple robe. And [Pilate] *said to them, "Behold, the Man!"

6.  When therefore the chief priests and the officers saw Him, they cried out, saying, "Crucify, crucify!" Pilate *said to them, "Take Him yourselves, and crucify Him, for I find no guilt in Him."

7.  The Jews answered him, "We have a law, and by that law He ought to die because He made Himself out [to be] the Son of God."

8.  When Pilate therefore heard this statement, he was the more afraid;

9.  and he entered into the Praetorium again, and *said to Jesus, "Where are You from?" But Jesus gave him no answer.

10.  Pilate therefore *said to Him, "You do not speak to me? Do You not know that I have authority to release You, and I have authority to crucify You?"

11.  Jesus answered, "You would have no authority over Me, unless it had been given you from above; for this reason he who delivered Me up to you has [the] greater sin."

12.  As a result of this Pilate made efforts to release Him, but the Jews cried out, saying, "If you release this Man, you are no friend of Caesar; everyone who makes himself out [to be] a king opposes Caesar."

13.  When Pilate therefore heard these words, he brought Jesus out, and sat down on the judgment seat at a place called The Pavement, but in Hebrew, Gabbatha.

14.  Now it was the day of preparation for the Passover; it was about the sixth hour. And he *said to the Jews, "Behold, your King!"

15.  They therefore cried out, "Away with [Him], away with [Him,] crucify Him!" Pilate *said to them, "Shall I crucify your King?" The chief priests answered, "We have no king but Caesar."

16.  So he then delivered Him to them to be crucified.

17.  They took Jesus therefore, and He went out, bearing His own cross, to the place called the Place of a Skull, which is called in Hebrew, Golgotha.

18.  There they crucified Him, and with Him two other men, one on either side, and Jesus in between.

19.  And Pilate wrote an inscription also, and put it on the cross. And it was written, "JESUS THE NAZARENE, THE KING OF THE JEWS."

20.  Therefore this inscription many of the Jews read, for the place where Jesus was crucified was near the city; and it was written in Hebrew, Latin, [and] in Greek.

21.  And so the chief priests of the Jews were saying to Pilate, "Do not write, 'The King of the Jews'; but that He said,' I am King of the Jews. '"

22.  Pilate answered, "What I have written I have written."

23.  The soldiers therefore, when they had crucified Jesus, took His outer garments and made four parts, a part to every soldier and [also] the tunic; now the tunic was seamless, woven in one piece.

24.  They said therefore to one another, "Let us not tear it, but cast lots for it, [to decide] whose it shall be"; that the Scripture might be fulfilled, "THEY DIVIDED MY OUTER GARMENTS AMONG THEM, AND FOR MY CLOTHING THEY CAST LOTS."

25.  Therefore the soldiers did these things. But there were standing by the cross of Jesus His mother, and His mother's sister, Mary the [wife] of Clopas, and Mary Magdalene.

26.  When Jesus therefore saw His mother, and the disciple whom He loved standing nearby, He *said to His mother, "Woman, behold, your son!"

27.  Then He *said to the disciple, "Behold, your mother!" And from that hour the disciple took her into his own [household.]

28.  After this, Jesus, knowing that all things had already been accomplished, in order that the Scripture might be fulfilled, *said, "I am thirsty."

29.  A jar full of sour wine was standing there; so they put a sponge full of the sour wine upon [a branch of] hyssop, and brought it up to His mouth.

30.  When Jesus therefore had received the sour wine, He said, "It is finished!" And He bowed His head, and gave up His spirit.

31.  The Jews therefore, because it was the day of preparation, so that the bodies should not remain on the cross on the Sabbath (for that Sabbath was a high [day]), asked Pilate that their legs might be broken, and [that] they might be taken away.

32.  The soldiers therefore came, and broke the legs of the first man, and of the other man who was crucified with Him;

33.  but coming to Jesus, when they saw that He was already dead, they did not break His legs;

34.  but one of the soldiers pierced His side with a spear, and immediately there came out blood and water.

35.  And he who has seen has borne witness, and his witness is true; and he knows that he is telling the truth, so that you also may believe.

36.  For these things came to pass, that the Scripture might be fulfilled, "NOT A BONE OF HIM SHALL BE BROKEN."

37.  And again another Scripture says, "THEY SHALL LOOK ON HIM WHOM THEY PIERCED."

38.  And after these things Joseph of Arimathea, being a disciple of Jesus, but a secret [one,] for fear of the Jews, asked Pilate that he might take away the body of Jesus; and Pilate granted permission. He came therefore, and took away His body.

39.  And Nicodemus came also, who had first come to Him by night; bringing a mixture of myrrh and aloes, about a hundred pounds [weight].

40.  And so they took the body of Jesus, and bound it in linen wrappings with the spices, as is the burial custom of the Jews.

41.  Now in the place where He was crucified there was a garden; and in the garden a new tomb, in which no one had yet been laid.

42.  Therefore on account of the Jewish day of preparation, because the tomb was nearby, they laid Jesus t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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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9장 (개요)

지금까지 본서의 복음서 기자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에 의하여 기록된 내용들은 기록을 생략하여 왔지만 이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내용에 이르러서는 그의 스승이 착고에 채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이 사실을 기록한다는 것이 그의 생애에 오점이나 되는 것처럼 수난 사실을 간과하고 지나쳐 버리지 않고 전에 기록되었던 사실을 더욱 확대하여 자세히 기록한다. 그는 오직 그가 그리스도이시며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기를 원치 않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에서는 영광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수난 기사를 기술하고 있다. 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빌라도의 그리스도에 대한 재판이 계속 기술된다. 그것은 소란스럽고 걷잡을 수 없는 재판이었다(1-15).

Ⅱ. 선고 확정 및 형의 집행(16-18).

Ⅲ. 십자가에 붙여진 명패(19-22).

Ⅳ. 그의 옷을 찢어 나누어 소유함(23,24).

Ⅴ. 예수의 어머니에 대한 배려(25-27).

Ⅵ. 예수에게 신 포도주를 드림(28,29).

Ⅶ. 예수의 유언(30).

Ⅷ. 창으로 옆구리를 찌름(31-37).

Ⅸ. 장례(38-42).

이 모든 사실들을 고찰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임하는 당당한 자세와 그의 고난에 대한 연민을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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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 앞에 서신 그리스도(요 19:1-15)

본문에는 그들이 우리 주님 예수에게 행한 부당한 재판 과정이 계속 설명되고 있다. 대 혼란 가운데 기소자들은 백성들을 자기편으로 매수하였고 한편 재판관은 그 나름대로 마음 가운데 큰 번뇌를 느꼈다. 이 두 상황이 교차되면서 이야기가 진행되므로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므로 본문의 내용을 따라서 차례로 고찰해 보기로 하자.

Ⅰ. 재판관은 죄수가 무죄하심을 선포하였고 그 까닭에 기소자들을 무마하려고 하였으면서도 한편 죄수에게 형을 가한다. 만일 채찍으로 때린 그의 근본 취지가 선한 데 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야비한 진행 절차는 결코 정당하시킬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히 부당한 행위였다.

1. 그는 예수를 범인을 다루듯이 채찍질하라고 명령하였다(1절). 빌라도는 백성들의 광분함을 보고서 백성의 힘에 의하여 그를 석방하려는 계획이 좌절된 것을 의식하고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였다." 즉 태형을 집형하려고 빌라도 옆에 시위하고 있었던 태형관에게 이 일을 명하였다. 배데(Bede)씨는 빌라도가 자기 손으로 직접 예수를 채찍질하였다는 견해를 주장한다. 왜냐하면 본문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직접 때린 것은 호의를 보여가면서 때리려 했기 때문이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의 형이 확정된 후 채찍질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형이 확정되기 이전에 채찍질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 누가는 빌라도가 "때려서 놓겠노라"는 제안을 한 사실을 전해 주고 있는데 이로 보아 형 선고 이전에 채찍질한 것이 맞는 것으로 보여진다. 예수에 대한 이 채찍질은 오직 유대인들을 무마하려는 뜻에서였다. 이로써 빌라도는 기소자들의 의견을 존중하였음을 나타내 보이려고 하였다. 즉 자신의 판결과는 관계 없이 그가 그들의 말을 따랐음을 효시하려고 하였다. 로마의 법에 의한 채찍질은 아주 가혹한 것으로 유대인들의 경우처럼 40대 이상 치지 못하도록 하는 제한이 없었다. 그런데 이 고통과 치욕을 그리스도는 우리로 인하여 감당하신 것이다.

(1) "이는 성서의 예언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성서에 보면 "그가 찔리고 상함을 입으시며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릴 것이라"(사 53:5) 하였고 그가 그의 등을 때리는 자들에게 맡기신다(사 50:6)고 했으며 밭가는 자가 그의 등을 갈았다(시 129:3)고 말씀되었다. 또한 예수님 자신도 이에 대하여 예언하셨다(마 20:19; 막 10:34; 눅 18:33).

(2) "그가 채찍을 맞으심은 우리의 나음을 위해서였다." 정작 채찍과 전갈로 괴로움을 당해야 할 것은 우리였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 그것이 그에게 가해지지 않도록 우리가 많은 채찍을 맞아야 옳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채찍을 감당하셨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진노의 몽둥이를 대신 감당하셨다(애 3:1). 빌라도가 그에게 채찍질을 한 이유는 그가 사형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계획은 효과가 없었다. 다만 이 일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분명히 해 주었을 뿐이었다. 정녕 그가 채찍을 맞으심이 우리로 사유함을 얻게 하기 위하신 것이었다면 우리가 그의 고난에 참여하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자. 의사가 채찍을 맞음으로 환자가 치유되는 것이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었다.

(3) 그가 채찍을 맞으심은 그를 따르는 자들로 성별됨을 입고 쉼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이는 그들로 같은 수치를 당해도 그 가운데서 기뻐하게 하려 하심이었다(행 5:4; 16:22, 25). 이 때문에 바울도 수 없이 매를 맞고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다(고후 11:23). 그리스도의 채찍을 맞으심으로 그를 따르는 자들은 그 채찍의 소는 아픔을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맞으심이 그를 따르는 자들을 윤택하게 하였다. "우리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은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고전 11:32).

2. 빌라도는 예수를 병정들에게 넘겨 주어 바보처럼 놀림감이 되게 하였다(2, 3절). 총독의 생명을 보호하는 임무를 띤 병사들은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에게 씌웠다." 그들은 이러한 왕에게는 가시 면류관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그들은 그에게 자색 옷을 입혓다." 그것은 다 닳아빠진 붉은색의 코트로써 그들은 이 옷만으로도 그의 왕권을 상징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들은(백성들이 왕에게 하듯이)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조롱하며 "손바닥으로 때렸다."

(1) 본문에서 빌라도의 천박함과 불의를 살펴 보자. 그는 자기도 흠없는 사람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한 사람을 괴롭혔고 존귀한 분을 자신의 부하들에게 맡겨 능욕하고 짓밟게 하였다. 법에 의해서 체포된 사람들은 또한 법의 보호라 보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법으로 보호함으로 사회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와는 반대로 다음과 같이 하였다.

① 그는 재판을 엄숙하게 진행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를 그의 군병들이 노리개감으로 삼게 하였고 가지도 그 일을 즐거워하였다. 빌라도는 군병들과 함께 헤롯도 잠시 전에 같은 짓을 하였었다(눅 23:11). 때는 마침 축제의 시기였으므로 그들이 예수를 희롱하기에 시기적으로도 알맞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희롱하듯이 예수를 희롱하였다.

② 빌라도는 예수를 유대인들의 잔인한 유희거리로 여기게 하였고 그러므로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 시켰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온갖 가능한 모욕과 최대의 무례를 그에게 가하려고 열망하였었다.

(2) 본문에서 군병들의 난폭함과 오만함을 살펴 보자. 그리고 그들이 모든 정의감과 인도적 정신을 어느 정도로 내버렸는가도 살펴 보자. 그들은 한 사람을 곤경에 몰아 넣고 승리감을 맛보았다. 더구나 그들이 모욕을 가한 분은 지혜와 영예로 명성이 있었고 그러한 대접을 받을 만한 어떤 잘못도 없으신 분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곤경을 겪으셨던 것처럼 그의 거룩한 종교도 나쁘게 왜곡되고 나쁜 인간들에 의하여 희롱거리가 되며 멸시와 경멸의 대상이 되어 왔던 것이다.

① 그들은 그에게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혔다. 그들은 예수의 재판을 재미꺼리로 삼았고 가열된 상상력과 미친 듯한 환상에 의하여 그를 치장하였다. 본문에서 그리스도가 가짜 왕으로 대우 받으셨듯이 그가 창설한 신앙도 허식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영혼, 죄, 의무, 하늘나라, 지옥 같은 말들을 망상으로 간주해 버리고 만다.

② 그들은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에게 씌웠다. 이로써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완전한 고행이요 세상에서 최대의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임을 무의식 중에 나타내 주고 있다. 또한 하나님과 양심의 제재 아래 복종하는 것이 머리를 가시덤불 속에 집어 넣는 것처럼 괴로운 일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의 결과는 이러한 것은 아니다. "독선적인 삶에서 조롱과 괴로움이 따르나 신앙의 삶에서 장미와 월계수가 안겨진다."

(3) 본문에서 우리 주님 예수께서 우리를 위한 고난을 당하심에 있어서 보여 주신 놀랄 만한 겸양을 살펴 보자. 위대하고 관대한 정신을 지닌 사람들도 모욕과 괴로움과 이유 없는 손실은 참기 어려운 법이다. 그런데 우리의 위대하고 거룩하신 예수는 우리를 위하여 이 모든 것까지 견디셨다. 여기서 경탄할 만한 그리스도의 면모를 살펴 보고 넘어가자.

① 그리스도의 고통에 대한 비할 바 없는 인내. 그는 우리에게 자족, 용기, 평정, 영혼의 유일하심의 본을 보여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의무를 행함에 있어서 아무리 큰 곤경을 당하더라도 그리스도가 보이신 본을 따르도록 하자.

② 구세주의 비할 바 없는 사랑과 우의. 그는 이 모든 것을 기꺼이 또한 단호하게 견디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를 위하여 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감당하셨다. 이로써 그는 자기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되 어리석은 자와 같은 지경에까지 이르시어 죽으셨다.

첫째, 그는 고통을 참으셨다. 십자가의 죽음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기는 하였지만 그는 이 죽음이 고통만 견디셨던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는 부족하기나 하듯이 달리시기 이전의 온갖 수모의 고통도 당하시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고 가르치시기 위하여 자기를 낮추사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이 같은 학대를 당하셨는데 우리의 자존심을 손상시켜 준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의 육체의 가시와 다른 사람이 가하는 학대에 대하여 불평할 수 있겠는가?(고후 12:7).

둘째, 그는 수치를 견디셨다. 곧 그를 조롱하기 위하여 그에게 입힌 옷의 수치와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이다"라는 말 속에 숨은 조롱기어린 경의의 모욕을 감당하셨다. 만일 우리가 바른 일을 하는대로 조롱하는 자가 있다면 언제든지 그것을 수치로 여기지 말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자. 왜냐하면 이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조롱의 의도 속에 던져진 영예를 참으셨으므로 예수는 참 영예로 보상받으셨다. 우리도 주를 위하여 참을성있게 고난을 견디면 이러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Ⅱ. 빌라도는 죄수인 예수를 능욕한 후 기소자들 앞에 나타났다. 그는 기소자들이 그가 예수에게 가한 능욕으로 만족히 여겨 기소를 취소하기를 바랬다(4,5절). 그는 그들에게 두 가지 사실을 숙고하도록 제안한다.

1. 그가 예수에게서 로마 당국의 비위를 거슬리는 일을 하였다는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고 하였다(4절). 본문에 보면 그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다. ‘우데미안 아이티안 유리스코’ - 즉 나는 그에게서 적은 결점이나 또는 고소당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추가 심문을 한 후에도 그는 앞서 선언한 선고를 반복하고 있다(18:38). 이 결과 그는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가 예수에게서 아무 결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면 왜 예수를 채찍질하고 그가 능욕을 당하도록 묵인했는가 말이다. 불의를 저지른 사람들 이외에는 처벌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신앙에 대하여 희롱하고 믿는 자들을 괴롭힌다.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신앙에서 아무런 잘못도 발견하지 못하면서도 그런 잘못을 자행한다. 빌라도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만일 그가 예수에게서 잘못을 발견할 수 없었다면 어째서 예수를 기소자들 앞으로 데리고 나가 마땅히 할 일을 하는 것처럼 의연하게 그를 즉시 놓아 주지 아니하였단 말인가? 만일 빌라도가 스스로 자기의 양심의 판단에 따라 결정했다면 그는 그리스도에게 채찍질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지도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는 사태를 무마시키면서도 백성들을 만족시키기를 바라서 그는 그리스도에게 채찍질을 하였고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지 않으므로 자기 양심에 먹칠하는 일을 면하려고도 아니하였다. 그는 이 두 가지 점을 다 이루려 하였다. 사실 만일 그가 예수를 처음부터 십자가에 처형하기로 결심하였다면 구태여 예수에게 채찍질을 할 필요는 없었으리라. 적은 죄를 감행하므로 더 큰 죄악을 면하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 두 가지 죄를 다 저지르게 마련이다.

2. 자신이 예수에게 그가 다시는 유대인들과 로마 당국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도롤 필요한 조치를 취하였음을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5절). 그는 예수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게 하여 그를 유대인들 앞에 내세웠다. 그리고 "너희가 그렇게 질시하는 이 사람을 보라"고 말하였다. 이 말의 뜻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너희가 예수의 대단한 인기를 두려워하고 있으나 내가 너희 나라를 치리하는 이상 염려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예수를 노예처럼 다루고 능욕당하도록 처우함으로 그들의 염려를 저지할 수 있다는 실례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이렇게 예수에게 모욕을 가하였으니 이후로는 백성들이 예수를 존경하지 않을 것이고 예수도 다시 는 그의 명예를 회복할 수 없으리라 여겼다. 빌라도는 후대의 가장 위대한 사람들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 수난당하신 사실조차도 대단히 경의롭게 기념될 것이라는 사실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다. 실상 예수는 빌라도가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영원하고도 잊혀질 수 없는 모욕이 되리라로 생각했던 십자가와 매맞으심을 통하여 영광을 얻으셨던 것이다.

(1) 본문에서 우리는 우리 주님 예수께서 온갖 치욕을 입으셨음을 스스로 나타내 보여 주시고 계심을 고찰하여 보자. 그는 기꺼이 구경거리가 되고 조롱의 대상이 되시기 위하여 앞으로 나오셨다. 그는 이러한 모습으로 나오시게 되었을 때 이미 자기가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눅 2:34) 그가 세움 당하실 것임을 아셨다. 이같이 그는 우리가 받을 욕을 짊어지시고 나아가셨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능욕을 지고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3).

(2) 빌라도가 어떠한 모습으로 예수를 내세웠는지를 살펴 보자.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에는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로 되어 있다. 그러나 보다 원문에 가까운 희랍어 사본에는 빌라도 대신 다만 "그가 저희에게 말하되"로 되어 있다. 따라서 여기서 "그"란 빌라도가 아닌 예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즉시로 가능해지게 된다. 필자는 이 말씀이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즉 예수께서 "너희가 그토록 격분하고 있는 이 사람을 보라"고 말씀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몇몇 희랍어 사본과 또 대다수의 반역자들이 본문을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것처럼 변형시키어 놓은 것이다. 즉 빌라도가 유대인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목적으로 "이 사람을 보라"고 말했다고 본다. 이 말을 그가 한 것은 예수에 대한 그들의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려는 뜻 못지 않게 그들의 그에 대한 시기심을 가라앉히려는 의도에서 한 말이었다. 곧 "이 사람을 보라. 너희가 그를 동정할 만하지 않는가!"란 뜻이 있는 동시에 "이 사람을 보라. 너희가 혐의를 둘 만한 대상이 못되지 않는가!"란 뜻이 내포된 말이었다. 즉 "이 자에게 무슨 두려움을 품고 있단 말인가. 그가 쓴 관은 보잘 것 없는 가시관이며, 땅바닥에 던져진 것이며, 이제 앞으로 전 인류가 그를 조롱하게 되고 말 것이 아닌가"라는 뜻의 말이었다. 어쨌든 "이 사람을 보라"는 말은 매우 감동적인 용어임에 틀림이 없다. 사실 우리들 각자 모두가 믿음의 눈으로 고난을 당하시는 사람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봄이 유익한 일이다. "그를 바라 보자. 그리고 그의 모습을 통하여 마음의 뜨거움을 얻도록 하자. 그를 바라 보자. 그리고 주님 때문에 통곡하는 기회를 가져 보자. 그를 바라 보자. 그리고 그를 사랑하자, 언제나 예수 바라 보기를 쉬지 말자."

Ⅲ. 빌라도의 종용에 의하여 기소자들은 무마되기는커녕 한층 더 격분해하였다(6,7절).

1. 본문에서 그들의 소란과 광분을 고찰해 보자. 폭도들의 선두에 선 대제사장들이 미칠 듯한 분노로 외쳤고 대제사장들이 외치는 대로 따라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 대제사장들의 하속과 종들도 합세하여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쳤다. 일반 대중들은 빌라도의 예수에 대한 무죄 선고에 따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지도자들과 제사장들이 "저희를 과오를 저지르도록 충동하였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저희의 그리스도에 대한 악의를 파악하게 된다.

(1) 저희의 그리스도에 대한 악의는 불합리하고 모순된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에 대하여 정당성을 띤 고소도 하지 못하였고 그에 대한 빌라도의 재판 결과에 대하여 변변한 항의도 못하였다. 그들은 그가 무죄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십자가에 처형당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2) 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악의는 만족할 줄도 모르는 매우 잔인한 것이었다. 그가 당하신 참기 어려운 태형, 그의 형에 임하시는 묵묵한 태도, 재판관의 그들을 진정시키려는 부드러운 호소. 이 어떤 것도 그들을 조금도 진정시키지 못하였다. 또한 빌라도가 저희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하여 던진 가벼운 농담도 아무 효과가 없었다.

(3) 그들의 악의는 격렬하고 또 매우 단호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뜻을 관철시키려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총독의 신망, 성의 안녕, 심지어는 자신들의 신변의 안전까지 희생하기를 마다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이 그토록 격렬하게 우리 주님 예수를 없이하려 하여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쳤다면 우리는 이에 반하여 더욱 용기있게 열심히 그의 이름을 높이어 "그에게 면류관을 드리자. 그에게 면류관을 드리자"라고 외쳐야 하지 않겠는가? 저희의 주님에 대한 증오가 그를 대적하려는 저희의 열심을 그토록 가열시켰다면 우리는 그를 사랑하니까 주님과 그의 나라에 대한 우리의 열심을 소생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2. 죄수의 무죄를 근거로 하여 빌라도가 저희의 분노를 저지하려 했던 시도를 살펴 보자. 본문에 보면 그는 "만일 이 예수가 처형되어야 한다면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하였다. 이 말은 풍자적인 뜻에서 한 말이었다. 그는 저희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도 없었고 감히 그런 엄두도 내지 못하리란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 말은 또 "너희가 너희의 악의에 나를 말려들게 하지 말라. 나는 양심에 부끄러움을 의식함이 없이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다. 만일 그가 그대로 관철하려고 했다면 이 결심은 좋은 결심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에게 아무 잘못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는 기소자들과 계속해서 협상하기를 원치 아니하였다. 죄로부터 안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유혹에 대해서는 귀머거리가 되어야 한다. 그랬다면 그는 죄수를 저희의 악의에서 구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 권세가 주어진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그것은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었는가? 총독직을 맡은 사람들은 또한 정의에 대한 파수군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의 양심에 따라서 행동할 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의 소심함이 그를 함정에 걸려들게 하고 말았다.

3. 기소자들이 그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제시한 또 다른 구실들을 살펴 보자(7절).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형을 집행할 권한만 있다면 우리에게 법이 있는데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하고 지나가자.

(1) 그들은 로마서 2장 23절에 유대인에 대한 바울의 힐난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면서도" 율법을 자랑하고 있다. 확실히 그들은 다른 나라의 법령이나 재판 절차를 훨씬 능가하는 우수한 법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이러한 나쁜 목적에 남용하였으니 그들의 율법에 대한 자랑도 헛된 것에 불과하였다.

(2) 그들은 우리 주님 예수에 대하여 불안과 끊임없는 악의를 느꼈다. 그들이 예수가 자칭 왕이라고 한다는 말로 빌라도로 예수를 대적하게 만들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예수가 자칭 하나님이라고 한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이같이 저희는 주님을 제거하려고 갖은 수단을 당하였다.

(3) 그들은 율법을 악용하여 저희의 악의를 관찰시키려는 도구로 삼았다. 어떤 이들은 저희가 그리스도를 없이하려고 옳던 그르던 형을 집행시킬 수 있는 법을 만들고 그 법을 근거로 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까닭에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는 자들"에 대한 저주의 말씀이 있음을 볼 수 있다(사 10:1; 미 6:16 참조). 그러나 본문에서는 저희가 모세의 율법에 대하여 한 말이라고 보는 것이 옳은 것같이 보인다. 그리고 그들이 모세의 율법에 호소한 것이 사실이라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① 율법에 의하면 신성 모독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사형을 당해야 했다. 누구든지 거짓되게 하나님의 아들이라 사칭하면 그는 신성 모독죄를 범한 것이 된다(레 24:16).

② 그러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처럼 가장하였다는 말은 거짓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그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증거를 보이라고 요구하는 일이었다. 만일 그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였고 또 그의 가르침의 경향이 백성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로 이끌어 주며 또한 만일 그가 그의 사명과 가르침을 기적을 행하심으로 확고히 하셨다면 그들은 그들의 율법에 의해 예수에게 순종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신 18:18, 19). 그리고 그들이 따르지 않는다면 제거될 사람은 예수가 아니라 바로 그들이어야 옳았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므로 그것은 그리스도에게는 영예인 동시에 그들에게는 축복이 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빛에 거하는 생활을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를 범죄자로 뒤집어 씌웠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죽으셔야 했다. 그리고 만일 그가 그들의 율법에 의하여 처형되신다고 한다면 그는 십자가에 의한 죽음을 맛보시지 않아야 했다. 왜냐하면 십자가 형은 그들의 율법이 규정하는 형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Ⅳ. 유대인들의 새로운 고소로 인하여 재판자는 죄수를 다시 법정으로 끌고 갔다. 다음의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1.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보인 관심(8절). 그는 그의 죄수가 왕권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을 지녔다고 주장한다는 소리를 듣고 더욱 두려워하였다. 이 소리에 그는 전보다 더욱 당황하여 했고 그는 양 틈에서 더욱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1) 만일 그가 예수를 방면한다면 백성들을 자극하게 되리라는 위험이 더욱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백성들이 얼마나 열성적으로 유일신 신앙을 수호하려 하며 다른 신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피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짜왕을 향한 저희의 분노는 가라앉힐 수 있으리라고 바랬지만 자칭 하나님이라 하는 자에 대한 저희의 분노는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만일 이것이 소요의 근본적 동기라면 이 문제를 가벼이 넘겨버릴 수는 없겠군"이라고 빌라도는 생각하였다.

(2) 만일 그가 예수를 정죄한다면 자신의 양심으로 범죄를 저지르게 하는 대단히 위험한 시련이 또한 도사리고 있었다. "과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하면 또 무엇으로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단 말인가? 또 내게는 어떤 결과가 안겨질 것인가?" 이렇게 빌라도는 생각하였다. 자연적 양심마저도 인간이 하나님을 거스려 싸우는 일이 두려운 것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이방인들은 신들이 육의 몸을 입고 비천한 모습으로 때때로 나타난다는 신화를 믿고 있었다. 또 누구든 그 신을 잘못 대우하면 응분의 처벌을 받는다고 믿었다. 빌라도는 자신이 이러한 영을 당담할까봐 두려워하였다.

2. 그 까닭에 그는 우리 주님 예수를 더욱 상세히 심문한다(9절). 그는 기소자들 앞에 명분있는 재판을 했음을 보여 주기 위하여 심문을 다시 시작하였고 그리하여 재판정으로 들어가 "너는 너디로서냐"하고 물었다. 다음 사실들을 생각하여 보자.

(1) 빌라도가 심문하기 위하여 선택한 장소에 대하여. 그는 비밀의 유지를 위하여 또 무리의 소동을 피하고 문제를 더욱 상세히 다스리기 위하여 "관정으로 들어갔다." 이같이 예수에게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발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편견이 지배되는 시끄러운 장소를 벗어나 그리스도와 단독으로 담화할 수 있는 재판정 같은 곳으로 저리를 택해야 한다.

(2) 그가 예수에게 물은 질문에 대하여. 본문의 질문의 뜻은 이러하였다. "네가 어디로서냐? 네가 인간에게서인가, 하늘로부터인가? 땅 밑에서 왔는가, 위에서 왔는가?"라고 묻는다. 그는 전에는 직접 "네가 왕이냐?"라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직접 묻지를 아니하였다. 이는 그가 신적 사실에 주제넘게 관여하지 않고자 하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므로 그는 돌려서 "네가 어디로서냐. 네가 이 세상에 오기 전에 너는 어디에 있었으며 네가 있었던 곳은 어떤 곳이었는가?" 하고 물었다.

(3) 이러한 식의 질문을 받았을 때 우리 주님 예수께서 시종 침묵하신 사실에 대하여 고찰해 보자.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고 하였다. 이것은 재판을 경멸하는 뜻의 심술스러운 침묵은 아니었다. 또한 그가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서 답변 못한 것도 아니었다.

① 예수의 침묵은 인종(忍從)의 침묵이었다. 그것은 "털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사 53:7)는 성서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 침묵은 그에게 현재의 고난을 주시는 아버지의 뜻에 대한 그의 복종을 웅변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다. 이 같이 그는 자신을 고난에 적응시키셨고 고난을 감당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셨다. 그가 침묵을 지키신 것은 자신의 고난을 피하려고 말할 필요를 느끼시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왕이라고 공언하셨듯이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명백히 밝히셨다면 빌라도가 그를 정죄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왜냐하면 기소자들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고소를 두려워한 것을 보아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힐 때 그가 더욱 두려워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로마인들은 그들이 정복한 민족들의 왕들에게는 승리하였지만 그 민족들의 신들에 대하여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고후 2:8 참조).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예수께서 영광의 주님이심을 알았다면 그를 십자가에 못박지는 아니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었겠는가?

② 예수의 침묵은 사려 깊은 침묵이었다. 대제사장들이 그에게 "네가 복을 주시는 분의 아들이냐?"라고 물었을 때 그는 "내가 그로라"고 대답하셨었다. 왜냐하면 그는 저희가 메시야에 대하여 말씀한 구약 성경 구절을 알고 그 구절을 들먹이고 있음을 아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빌라도가 그에게 물었을 때 예수님은 빌라도가 자기가 묻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아셨다. 빌라도는 메시야 개념과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에 대하여 아무런 지식도 없었다. 이같이 그의 머리가 이교적 신학으로 가득 찬 자에게 대답해야 할 아무 목적도 예수는 발견하지 못하셨다. 만약 예수께서 답변하신다 해도 빌라도는 자기의 이교적인 입장에서 그의 말을 이해하리라는 것을 주님은 아셨다.

(4) 예수의 침묵의 대한 빌라도의 성급한 재촉에 대하여(10절)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네가 침묵으로 내게 도전하려는 것인가? 내가 이 지방의 총독으로서 내가 합당하다고 생각하면 너를 못 박을 권세도 있고 또 너를 놓아 줄 권세도 있음을 네가 알지 못하는가?"라고 그는 재촉한다. 본문에 대하여 몇 가지 고찰하여 보도록 하자.

① 빌라도의 허세와 자신의 권위에 대한 자랑. 그는 느부갓네살이 "임의로 죽으며 임의로 살리는" 권세를 자랑한 것 못지 않게 자기를 자랑하였다(단 5:19). 권좌에 앉은 인간들은 자신들의 권세를 자랑하기 쉬운 경향이 있다. 그 권세가 절대적이고 독단적일수록 그들은 더욱 기들의 오만을 드높이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무고하다고 선언한 자도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다고 자랑하므로 자기의 권세를 터무니 없는 정도까지 높이고 있음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방백이나 군주라 할지라도 그에게 잘못을 자행할 권한까지 주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Id possumus, quod jure possumus - 즉 우리는 오직 정당한 행위만을 행해야 한다.

② 빌라도가 우리의 복되신 구세주를 어떻게 마구 다루는지를 살펴 보자. 본문에 의하면 그는 "네가 네게 말하지 아니하느냐"라고 예수께 물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예수를 다음과 같이 다루고 있다.

첫째, 빌라도는 예수께서 말해야 할 것을 하시지 아니하였다고 해서 그를 권세를 지닌 자에게 의무를 불이행하고 권력자를 무시하고 있는 자처럼 취급하였다.

둘째, 빌라도는 예수를 당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에게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취급하였다. 이런 뜻의 질문이다. "너를 석방하려고 애쓰는 내게 네가 대답하지 않으려는가?"

셋째, 그는 예수께서 어리석은 분인 것처럼 취급하였다. "너는 너의 입장을 밝혀 주려고 하는 자에게 분명한 사실을 왜 말하지 않으려 하는가?"라고 그는 묻는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생명을 구하실 마음이셨다면 지금이야말로 말씀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하실 일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시는 일이었다.

(5) 빌라도의 재촉에 대한 그리스도의 적절한 답변에 대하여(11절).

① 그리스도께서는 빌라도의 불손을 담대히 꾸짖으시고 그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신다. "네가 위대한 자처럼 자신을 과시하여 말하고 있으나 위에서 권세가 주어지지 아니하였으면 나를 해할 권세 곧 내게 채찍질하거나 나를 못 박을 권세도 없었으리라"고 하신다. 그리스도는 빌라도가 다소 교만기를 보였을 때는 대답하지 않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기셨다(어리석은 자의 우매한 질문에 답변하지 말라. 이는 너도 같이 어리석어질까 함이라). 하지만 빌라도의 교만이 지나친 정도에까지 이르자 그리스도는 대답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셨다. 즉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소리엔 같은 말로 대꾸해 주어라. 그래야 지혜로운 체하지 못한다"(잠 26:4, 5)는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셨다. 빌라도가 그의 권세를 행사할 때 그리스도는 그의 권세에 묵묵히 복종하셨다. 그러나 그가 지가 권세를 앞세워 교만해지자 그리스도는 빌라도로 자신을 알게끔 하시었다. 그러므로 "네가 가진 모든 권세는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신다. 이 말씀은 두 가지 뜻으로 받아드릴 수가 있다.

첫째, 이 말씀은 빌라도를 총독으로서의 그의 권세란 한계성 있는 권세로 하나님이 그에게 허용하신 이상의 권력 행사를 할 수 없음을 상기시키려는 뜻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권력의 원천이시며 권력은 그에 의하여 제정된 것이고 그에게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그러므로 권력은 그에게 예속되어야 한다. 저희의 권세란 하나님의 율법이 그들에게 지시한 범위 이상을 넘지 못한다. 또한 저희의 권세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허용된 이상을 초과하지 못한다. 권세는 하나님의 손이요 그의 검이다(시 17:13, 14).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는가" 그것은 도구에 불고한 것이다(사 10:5, 15). 오만한 압제자들로 그들의 연한을 계수하시는 그들보다 더 높으신 분이 있음을 알게 하자(전 5:8). "보라, 여호와이시로다"라는 말로 박해당하는 자들의 불만을 해소시켜 주자. 시므이에게 다윗을 저주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압제당하는 자들로 그들을 기소하는 자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용한 이상의 것은 할 수 없음을 기억하고 위로받게 하자(사 51:12, 13 참조).

둘째, 이 말로써 예수는 자기를 대적하는 빌라도의 권세와 그 권세를 행사하려는 그의 온갖 시도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예지하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리시고자 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행 2:23). 빌라도는 자신이 위대하다는 상상을 지금 이상으로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되는 사람을 죄수로 재판하기 위하여 자기가 앉아 있고 또 이토록 위대한 사람의 운명이 자기의 처분에 따라 좌우될 수 있는 형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에게 그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연장에 불과한 것으로 하늘의 정하신 뜻 아니고서는 자신을 대적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리신다(행 4:27, 28).

② 그는 이 일의 주모자들(대제사장의 무리들)의 죄에 비교하시면서 빌라도의 죄를 낮게 평가하시며 경감시켜 주셨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도다. 왜냐하면 총독으로서의 너는 위로부터 권세를 부여받아 그 자리에 앉은 것이나 저희는 시기와 악의에 의하여 너로 권력을 남용하게 하였으니 저들의 죄가 너의 죄보다 큰 것이라"고 하신다.

첫째, 이 말씀은 빌라도의 행위가 죄된 것임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그를 재판석에 억지로 앉혀 예수를 재판하게 하였다고 해서 빌라도가 의롭다 여김 받을 수는 없음이 밝혀지고 있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그의 양심을 일깨우고 그가 지금 느끼는 두려움을 증가시키려는 뜻의 암시를 하시고 계심을 우리는 보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죄가 크다고 우리의 죄가 무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 심판 날에 다른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나쁘다고 말해 보아야 아무런 유익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에 비교하여 재판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죄는 각각 담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그렇지만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 준 자들의 죄는 더욱 큰 것임을 이 말씀은 보여 준다. 이 말씀을 통하여 모든 죄가 다 같지는 않다는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 어떤 죄는 다른 죄보다 더 사악한 경우도 있다. 모기 정도에 해당되는 죄가 있는가 하면 낙타에 해당되는 죄가 있고 어떤 죄는 눈 속에 든 티 끝에 불과한가 하면 어떤 죄는 들보에 해당되기도 한다. 또 일원짜리 정도의 죄가 있는가 하면 1000원짜리 정도의 죄가 있는 법이다. 그럼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빕라도에게 넘겨 준 자"는 누구를 말함인지 살펴 보자.

a.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라고 외친 유대인들로 볼 수 있다. 그들은 빌라도는 보지 못하였던 기적을 보았었다. 또한 메시야가 보내진 것도 우선 그들에 대해서였다. 그들은 그의 백성이 되어야 마땅했다. 그리고 현재는 노예 상태에 있는 그들에게 구속자는 그 어디서보다 환영을 받으셔야 했다. 그런데도 그들이 그를 대적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빌라도보다 한층 나쁘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b. 아니면 예수께서는 여기서 그리스도를 모함한 우두머리요 그를 처형하도록 최초로 종용한 가야바를 특별히 뜻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11:49, 50). 가야바의 죄는 빌라도의 죄보다 엄청나게 컸다. 가야바는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에 대한 순전한 원한 때문에 필사적인 살의를 품고 그리스도를 기소하였다. 빌라도는 단순히 백성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를 정죄하였고 이런 결판을 내린 것은 그가 문제를 냉각시킬 만한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c.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유다를 뜻하고 하신 말씀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유다가 빌라도의 손에 예수를 직접 넘긴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예수를 배신하고 빌라도에게 예수를 넘겨 줄 자들에게 예수를 넘겼기 때문이었다. 사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유다의 죄는 빌라도의 죄보다 큰 것이었다. 빌라도와 그리스도는 서로 남남의 사이였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의 친구요 그의 추종자였었다.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아무 잘못도 발견하지 못하였다는 식으로 예수를 잘 알지 못하였으나 유다는 예수에게서 상당히 훌륭한 면모를 많이 알고 있었다. 빌라도는 편벽되기는 하였으나 뇌물을 받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유다는 무고한 자를 고소함으로 보상을 받았다. 또한 유다의 죄는 원인죄(leading sin)로써 그로 인하여 많은 죄를 유발시켰다. 그는 예수를 잡으려는 자들을 안내하였다. 유다의 죄가 이같이 컸으므로 그의 죄를 사해 줄 아무런 도리도 없었다(행 28:4).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는(아니면 이 말씀을 하신 직 후) 그는 영원히 그가 가야할 곳으로 가고 말았다.

Ⅴ.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손에서 예수를 구출해 내려고 투쟁을 하나 그러나 헛수고로 끝나고 말았다. 우리는 이후로는 빌라도와 예수 사이에 대화가 오고 간 것을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 이제 남은 문제는 빌라도와 기소자들간의 의견 절충이었다.

1. 빌라도가 예수를 석방하려고 전보다 더욱 애쓴 것처럼 보인다(12절).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답변을 해 주었으므로 이 때부터 그는 예수를 놓으려고 더욱 힘썼다. 비록 예수의 답변에는 그에 대한 비난의 요소가 섞여 있었으나 그는 그 말을 호의로 받아들였다. 또한 그리스도는 빌라도의 잘못을 지적하였음에도 그는 계속 그리스도에게서 잘못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를 놓으려고 애를 썼다." 즉 예수의 석방을 바랐고 또 이를 위해 노력하였다. 본문은 "그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다"고 하였다. 즉 그는 이 문제를 멋있고도 안전하게 처리하려고 애를 썼다. 그는 예수를 놓는 동시에 제사장들의 비위도 거스리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려는 결단이 사건을 어떻게 하면 그럴 듯하고 간편하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방면에 압도당할 때 우리의 결단한 것은 결코 잘 수행되지 못한다. 만일 빌라도의 정의감이 그에게 그의 정책보다 우선적이었다면 예수를 석방하려고 그가 노심초사하지 않고 즉시 그를 석방하였으리라. Fiat justitia ruat coelum - 즉 하늘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정의는 실현되어야 한다.

2. 유대인들은 전보다 더욱 광분으로 날뛰었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안간힘을 다하였다. 아직도 그들은 그들이 계획을 전처럼 소란을 피움으로 관철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도 그들은 외쳤다. 그들은 군중 모두가 그를 제거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빌라도로 생각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대중의 외침을 통하여 그를 넘어뜨리고자 시도하였다. 폭도를 규합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정당한 방법을 사용하였더라면 대다수의 백성들은 그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리라는 것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소수의 미친 서들이 다수의 현인들을 현혹하는 법이다. 또한 저들 소수의 말이 한 국가 또는 전 인류의 뜻인 양 상상력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사실인가!). 그렇다고 백성들이 잘못을 범하는 것이라 깨우쳐서 그들의 의사를 반영시킨다는 것 또한 쉬운 것은 아니다. 더구나 지금은 그리스도는 그의 원수들의 수중에 잡혀 있으셨고 그의 친구들은 수줍고 말이 없었으며 숨어서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를 대적하는 무리들은 앞장 서서 자신들을 과시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대제사장들로 하여금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전 유대인들의 일치된 의사라고 주장하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 소요를 통하여 그들이 추구한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었다.

(1) 그들은 예수를 가이사의 적으로 누명을 씌우려고 하였다. 예수는 이 세상의 왕국과 이 세상 나라의 영광을 거절하였다. 그리고 그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선포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가 "가이사를 대적하는 언동을 하였다"고 조작하였다. 저희들은 ‘안틸레게이’ - 즉 저가 가이사를 반역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곧 예수가 가이사의 존엄과 통치권을 침해하였다고 하였다. 신앙에 대한 적들은 신앙이 왕들이나 방백들에게 큰 유익이 되는데도 그것이 더욱 그들에게 해로운 양 조작하는 것이 관례이다.

(2) 그들은 재판관에게 겁을 주기 위하여 그를 살려 두면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본문의 내용을 부연하면 다음과 같다. "만일 당신이 이 사람을 놓는다면 즉 이 사람을 처벌하지 않고 살려 보낸다면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당신의 그에 대한 충성이나 맹세도 모두 거짓이며 결국 당신은 황제의 미움을 받게 될 것이며 당신의 서약이 모두 거짓임이 판명되리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를 밀고하여 해고시키겠다고 협박을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빌라도의 가장 취약적인 부분을 건드렸다. 사실 유대인들이 가이사에게 충성을 가장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들은 가이사와 그의 정권에 대하여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들 자신이 가이사와 상대적인 관계에 있었으므로 그들이 가이사의 충신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위선이었다. 이와 같이 보다 작은 선에 열심을 꾸미는 것은 보다 큰 일에 대한 악의를 은폐하는데 흔히 기여를 하는 법이다.

3. 다른 조치들이 실패로 끝나자 빌라도는 저희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림으로 광분된 분위기를 식히려 하나 오히려 그의 저의가 저희에게 발각되므로 사태를 더욱 진전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13-15절). 그는 한동안 이 문제를 자기 의견대로 고수하여 저희의 공격에 촌치도 양보할 수 없는 것처럼 행동하였으나(12절) 그는 결국 비열하게 굴복한다. 다음의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1) 빌라도가 저희의 말을 듣고 받은 충격(13절). "빌라도가 이 말 곧 그가 예수를 죽이지 않으면 그가 가이사의 명예로 위하는 것도 아니며 또 가이사의 신임도 사라질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는 이 때야말로 자신의 문제를 돌이켜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들이 지금까지 한 모든 말 곧 그리스도는 행악자요 그러기에 빌라도는 그를 정죄할 의무가 있다는 말은 빌라도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였다. 그는 그때까지도 그리스도의 무죄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를 정죄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이해 관계가 결정된다는 말에 그는 굴복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인기에 의하여 그들의 행복이 좌우되는 사람들은 쉽게 자신들을 사탄의 유혹의 먹이로 내어 주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 이 사건에 대한 확정 선고를 하기 위한 준비에 대하여 살펴 보자. "빌라도는 예수를 끌고 나와서 자기는 거드름을 피우며 의자에 앉았다." 우리는 그가 위대하게 보이기 위하여 자기 관복을 가지고 오라고 시켰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런 다음 그는 "재판석에 앉았다."

① 그리스도는 정식으로 격식이 갖추어진 가운데 형을 선고받으셨다.

첫째, 이는 그가 우리를 하나님의 법정에서 구해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믿는 자들은 현세에는 심판을 당하지만 하늘의 법정에서는 방면될 것이다. 둘째, 이는 그의 추종자들이 그를 인하여 처하게 될 어마머아한 심판대가 주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자신이 본을 보이신 것이다. 바울은 그의 주님이 빌라도 앞에 서셨던 것을 기억하고 가이사의 재판석 앞에 더욱 담대히 설 수 있었던 것이다.

② 때와 장소에 대하여 본문에 언급되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형이 선고된 장소. 본문에 의하면 그곳은 "박석(히브리 말로 가바다)이란 곳"이었다. 아마도 이곳은 빌라도가 소송 사건이나 형법상의 죄를 다스리기 위하여 앉았던 곳 같다. 어떤 이는 가바다란 사방이 밀폐된 장소를 뜻한다고 본다. 즉 사람들의 훼방을 막기 위하여 울타리를 친 곳이라고 본다. 이렇게 방비를 함으로 그는 백성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재판할 수 있었다. 이외의 다른 곳들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높은 곳에 설치되고 있었다.

둘째, 시기(14절). 이 때는 유월절 예비일로 약 6시경이 되어서였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자.

a. 날에 대하여. 이 날은 유월절 예비일 곧 유월절의 안식일과 무교전병을 먹는 그 주간을 성수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날이었다. 이 날에 이 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누가복음 23장 54절의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는 말씀을 보아서도 확실하다. 즉 이 예비일은 안식일을 위한 예비일이었다. 유월절 전에 예비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특별이 이 날을 명기한 것은 그리스도를 악의와 분노로 가득 차서 박해하는 저희들의 죄를 더욱 명백히 나타내려는 뜻에서였다. 사실 이 날은 유월절을 예비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은 다 제거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이 좋은 날에 그들은 더욱 잔악한 행위를 감행했던 것이다.

b. 시간에 대하여 본문에 의하면 "제 6시쯤 되었더라"고 되어 있다. 어떤 고대의 희랍 및 라틴어로 된 사본들은 3시경으로 전해 주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마가복음 15장 25절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마태복음 27장 45절에 기록을 보면 그가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6시 이전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시간을 기록한 것은 무슨 정확한 시간을 전해 주려는데 본래의 뜻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아니한다. 그 뜻은 그들이 엄숙한 날인 예비일 그것도 그 날의 3시부터 6시 사이에(이 시간은 우리의 관습에 의하면 예배 시간처럼 그들에게는 성별된 시간이 있다) 기소를 강행시켰다는 사실을 강조하므로 그의 기소자들의 죄를 더욱 명백히 밝히려는 데 있었다. 그들은 이토록 거룩한 시간을 악한 일에 종사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제사장들이었지만 이 날에는 성전의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6시까지 그리스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고 어둠이 걷히기 시작해서야 서둘러서 갈 길을 갔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본 복음서 기자가 전해 주는 6시라는 시간을 로마식 시간 계산법에 따라 계산하여 유대인들에게는 한 날의 첫 시간으로 통용되는 아침 6시라고 본다. 아마 이 말이 맞는 말인 것 같다. 빌라도의 그리스도에 대한 재판이 절정에 이른 것이 아침 6시경이었고 그 후 얼마 있어서 동이 텄던 것이다.

(3) 빌라도와 유대인들과의 제대면. 그는 형을 확정하기 전에 제사장들과 백성들을 만나서 저희의 분노의 기세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허사였다.

① 그는 유대인들에게 "보라 너희 왕이로다"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이 예수가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는 저희의 교묘한 모함의 모순됨과 악랄함을 견책하기 위하여 한 말이었다. 즉 다음과 같은 말이다. "보라 너희 왕이로다. 너희가 이 사람을 왕을 사칭하는 자라고 고소하였도다. 그래 이 사람이 정부에 위험스러운 인물처럼 보인단 말인가? 내가 확신하건데 그는 그런 인물이 못되니, 너희도 그렇게 여기고 그를 풀어 주기를 바란다"는 뜻의 말이다. 어떤 이들은 빌라도가 이 말로써 저희의 가이사에 대한 은밀한 불만을 견책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 사람이 가이사를 대적하여 반역하는 일에 앞장 섰다면 너희가 이 사람을 너희 왕으로 삼으면 잘 되지 않았느냐? 라는 뜻으로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빌라도가 이런 뜻으로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저희에게 그의 말은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려서 아마 마음이 찔렸으리라. 이제 그리스도는 왕이 대관식 때하듯이 왕관 곧 가시관을 쓰고 백성들 앞으로 끌려갔다. 빌라도의 말은 신앙적으로 해석할 때 의미있는 말이었다. "보라 너희 왕이로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산 시온에 세우신 왕이로다"는 말로 유대인들이 받아들여야 마땅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승인하는 기쁨의 환호로 빌라도의 말에 대답한 대신 예수를 대적하는 말로 항의하였다. 하나님이 택하신 왕을 받아들이려 하지 아니하였다.

② 그들은 대단히 분노하여 ‘아론 아론’ - 즉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라고 부르짖었다. 저들의 말에는 악의 뿐만 아니라 혐오감도 뒤섞인 말이었다. "그를 없이 하시오, 그는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자요. 우리는 그를 우리 동족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오. 그런데 우리의 왕이라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요. 우리는 그를 존경하지도 않고 또 동정하지도 않소. 그를 어서 우리 눈에서 보이지 않도록 해 주시오." 이는 다음과 같은 구약의 예언 곧 "그는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라"(사 49:7)는 말씀과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다"는 말씀(사 53:2, 3)을 이루게 하고자 하심이었다. 또한 후에 일어난 일이지만 사도행전 22장 22절에도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고 하였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첫째, 이 사실은 그리스도가 아니었더라면 하나님의 법정에서 우리도 이렇게 취급당하였으리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우리는 죄에 의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설 수 없는 자가 되었다. 즉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신다"(합 1:13). 그리하여 그의 공의는 "저희를 없이 하소서, 저희를 없이 하소서"라고 부르짖는다. 이같이 우리 역시 하나님의 공의의 칙면에서 볼 때 혐오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를 대하여 "저희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저희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법대로 저희의 형을 집행하시요"라고 외치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중제하시사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에게 싫어버린 바 된 자가 되었으리라.

둘째, 이 말은 우리가 우리 죄를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우리는 흔히 성경에서 우리 죄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합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씀을 듣는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예수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이 일을 실행하였다. 그들이 불경건한 분노로써 우리를 위하여 죄를 대신하신 분을 살해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경건한 분노로써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없이하여야 한다. 참된 회개자는 그로부터 죄악을 제거해 버리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죄를 향하여 "저희(죄를 의미함)를 없이 하소서. 저희를 없이 하소서"(사 2:20; 30:22). "저희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저희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성토해야 한다. 죄악이 우리 영혼 안에 거한다는 것은 합당하지 못한 결과이다(호 14:8).

③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하기를 원하였으나 그렇지 않고 만일 처형하게 된다면 그것을 그들의 소행으로 전가시키기를 바라서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고 묻는다. 그의 이러한 질문의 의도가 무엇이냐는 문제는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겠다.

첫째, 그 어느 때 보다 그들에게 왕이 필요한 시기에 스스로 저희의 왕이 되겠다고 제의한 사람을 저희가 거부한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가를 보여 줌으로 저희의 입을 막으려 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뜻의 말이리라. "그래 너희는 너희가 노예 신세라는 것을 모르는가? 그래 자유에 대한 열망도 없는가? 너희를 해방시키려는 자가 귀중히 여겨지지도 않는가?"라는 뜻의 말이다. 그 자신은 예수에게서 그를 경계할 아무런 이유도 발견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들은 예수에게 무엇인가 기대할 만한 이유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였다. 얻어터질 대로 터졌고 물에 빠져 익사 직전에 있는데 무엇인들 한 번 잡아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둘째, 빌라도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의도로 볼 수도 있다. 빌라도는 이렇게 생각하여 본다. "이 예수가 왕이라고 한다면 그래 이 예수가 다만 유대인만의 왕이라고 하면 저희들에게 그의 문제는 맡겨버리고 말지, 혹시 저희가 그를 거절하고 저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한다면 그렇게 하라지 내가 왜 걱정을 하는가?" 그는 지금까지 그들이 메시야로 기다리는 어리석음을 조롱해 왔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정작 메시야인 것같이 여겨지는 자를 죽이는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이 난처한 입장에 처한 사실을 잊으려고 하였다.

④ 대제사장들은 효율적으로 그리스도를 배격하고 빌라도로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게 하기 위하여 비록 마음은 대단히 아팠으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고 외쳤다. 이 말이 빌라도를 기쁘게 해 주리라는 것을 그들은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가이사와 그의 정권을 싫어하면서도 그들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그렇게 외쳤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다음의 사실을 예고해 주는 예표들이었다.

첫째, 저희의 말은 이제 나타나겠다던 메시야의 시대가 이르렀음을 보여 주는 명백한 암시였다. 실로가 오셔서 영적인 왕국을 세우기까지는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49:10)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즉 그들이 가이사 이외에 왕이 없다고 말한 것은 그들이 떠났다는 말이고 홀이 떠났다는 것은 실로 곧 메시야가 오셨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둘째, 하나님께서 얼마 오래지 않아서 로마인들을 시켜 저희들의 나라를 멸망시키신 것이 의로우신 처사였음을 이 말은 나타내 준다.

a. 그들은 가이사를 추종하였다. 그러므로 저희가 가이사의 소유물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곧 그들에게 신물이 날 정도로 로마의 황제를 모시게 만드셨다. 요담이 비유한 대로 나무들이 포도나무나 감람나무를 제외하고 가시나무를 저희의 왕으로 삼은 것은 저희 가운데 악령이 임했다는 증거라 했는데 지금 유대인들이 그러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참으로 진지하게 처신하였다면 이러한 말이 결코 나올 수 없기 때문이었다(사 9:12, 19). 이 말과는 상반되게 그들은 차후 가이사에 대한 반란을 시도하였고 가이사는 가이사대로 그들을 폭력으로 다스렸다. 결국 저희의 반란은 민족적인 멸망으로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우리가 그리스도보다 더 좋아하는 것 그것으로 우리에게 채찍과 온역이 되게 하시는 것이 공의의 하나님의 섭리이시다.

b. 과연 그들은 가이사 이외에 자기의 왕을 섬겨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 날에 이르기까지 나라가 없이 지내게 되었다. 과연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군도 없이 지내리란"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호 3:4). 다만 다른 민족들의 왕이 그들을 지배하였다. 가이사 이외에 우리에게 왕이 없다고 저희가 말하더니 과연 그 말대로 저희의 운명이 그리 되고야 말았다. 이 운명은 그들 스스로가 결정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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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에 대한 형의 집행(요 19:16-18)

본문에서 우리는 우리 주님 예수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와 곧 이어 이에 따라 형이 집행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빌라도는 양자의 틈바구니에서 한 양심의 갈등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정의를 향한 의지가 꺾이고 불의에 굴복하고 만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보다 인간에 대한 두려움에 더욱 크게 지배당하였다.

Ⅰ. 빌라도가 자기 양심에 위배하여 죄를 범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수 없이 반복하여 예수의 무죄를 선언하였었다. 그렇지만 결국 그는 예수를 죄인으로 정죄하였다. 빌라도는 총독이 된 이래 여러 차례 유대 민족을 격노케 할 일들을 자행하였었다. 빌라도는 거만하고 거친 성격의 인물이었고 또 대단히 변덕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성전세(Gorban)를 가로채서 그것을 수도(水道) 설치하는데 충당하기도 하였다. 언제인가 그는 예루살렘 성으로 가이사의 상이 새겨진 방패를 들여 왔는데 이 사건은 특히 유대인들을 격노케 하였다. 그는 그의 결의를 변경하지 않으려고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희생시켰다. 이 사건들과 그외의 여러 가지 사건 때문에 그를 향한 원성이 높았고 이를 두려워한 빌라도는 태도를 누그러뜨려 유대인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유대인를 거스리는 결정을 한다면 사태가 악화될 것은 확실하였다. 만일 그가 온순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로서 현재의 강한 대세에 그가 굴복하였다고 하면 그의 현재의 결정을 좀 너그러이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다른 일에는 대단히 간교하였고 또 이러한 류의 일을 처리하는데 대단히 단호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번 결정은 그가 간악한 인물임을 더욱 분명히 한 결과가 되었다. 그는 사태를 어렵게 만들기 보다는 양심에 거리끼는 어려움을 감당하는 것을 낫게 생각하였다.

2. 그가 유대인들에게 죄를 전가시키려고 애썼다는 사실이다. 그는 예수를(전에 하던 관습대로) 그의 부하들에게 넘긴 것이 아니라 기소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넘겼다. 이로써 그는 이 일에 대한 양심의 거리낌을 면하려고 하였다. 즉 자기는 어쩔 수 없이 수락한 잘못밖에 없다. 그가 그리스도를 죽인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자행하는 자들의 잘못을 묵인했을 따름이다는 식의 책임 전가를 획책하였다.

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를 대신 지셨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정죄를 받아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정죄당하시였다. 이는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을 재판하시지 않기 위하여 그의 아들로 재판을 받으시게 하셨다.

Ⅱ. 형이 선고되자 그후 형의 집행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그들의 뜻을 관철시킨 기소자들은 혹 빌라도가 마음이 변하여 형 집행을 유예시키지 않도록 일을 서둘러서 진행시켰다(얼결에 우리로 죄를 짓게 하고 우리에게 우리가 잘못한 것을 철회할 여유도 허용하지 않는 적, 이들이 우리 영혼의 가장 무서운 적인 것이다). 또한 그들은 백성들 가운데서 그들의 결정에 반대하는 소요가 일어나 결국 계략을 써서 자기 편으로 매수한 사람보다 더 많은 반대하는 무리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일을 속히 진행시켰다. 선한 사업도 마찬가지로 속히 서둘러서 하는 것이 좋다. 지체하면 그만큼 어려운 일만이 더할 뿐인 것이다.

1. 그들은 죄수를 서둘러서 끌고 갔다. 대제사장들은 그들이 그토록 오랫 동안 기다려왔던 먹이를 향하여 게걸스럽게 덮치었다. 이제 먹이가 그들의 그물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여기서 그들이라고 한 것은 형을 집행하기 위하여 시위하고 서 있던 병사들로 보여진다. 이 병사들이 예수를 인수받아서 끌어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오늘날처럼 그가 수감되었던 곳으로 일단 데리고 들려 갔다가 형장으로 끌고 간 것이 아니라 형장으로 직접 데려갔다. 그러니까, 병사들과 제사장들이 합세하여 그를 데려간 것이다. 이제 "인자가 사람들의 손" 곧 사악하고 무지한 인간들에게 "넘겨지신 것이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기소자들이 동시에 형 집행자가 되도록 되어 있었다(신 17:7). 그리고 여기 제사장들은 그 직책이 주어진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의 끌려가시는 모습 속에서는 반항의 기세라고는 조금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는 성서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한 것으로 그는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우셨다"(행 8:32). 사실 그가 아니라 우리가 형을 받을 범인의 입장으로 불법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끌려가야 마땅했던 것이다(시 25:5). 그러나 우리를 피신시키시기 위하여 그가 우리 대신 끌려가신 것이다.

2. 그들은 예수의 비참함을 한결 가중시키고자 로마인들의 관례를 따라 그의 힘이 자라는 한 자기 십자가를 메고 가게 하였다(17절). 이 때문에 로마인들에게 Furcifer - 즉 십자가를 진 자 치욕을 뜻하는 명칭이었다. 저희들이 사용하던 십자가는 현대의 교수대처럼 형장에 항상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땅에 눕혀놔야 사형수를 거기다 못 박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다음 십자가는 세워지고 에 박힌 말뚝에 붙잡아 메어서 고정시켰다. 그리고 형이 끝나면 십자가는 옮겨져서 대개는 시체와 십자가를 함께 매장하였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처형당한 모든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십자가를 가져야 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던 모습을 고찰하여 보자.

(1) 그의 고난에는 십자가를 지신 일도 한 부분을 차지하였음을 기억하자. 그는 철저히 십자가를 감당하셨다. 그가 지신 십자가는 이러한 용도에 적절한 길고도 두꺼운 목재였었다. 어떤 이는 이 목재는 건조시켰거나 또는 다듬은 것이 아닌 통나무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 주님 예수의 축복 받으신 몸은 이러한 짐을 감당하시기에는 너무나 연약하시었다. 특히 그의 몸은 최근에 괴롭힘을 당하시어 지쳐있는 상태였다. 또한 그들의 채찍을 맞아 매듭들은 그의 통증을 새롭게 하였고 또 그의 머리에 씌워진 가시관을 때때로 건드려 상처를 새롭게 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참을성 있게 이 모든 것을 견디셨다. 그러나 이것은 고통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2) 그가 십자가를 지심은 그의 앞서 사람들이 십자가의 모형을 지신 유형에 대한 응답이었다. 이삭도 자신이 재물로 받쳐지는 순간에 그 위에 자신이 묶이어 화형을 당할 나무단을 지고 갔었다.

(3) 십자가를 지심은 그의 세상에서의 사명을 상징해 주는 심볼이었다. 아버지께서는 그에게 "모든 사람의 불의를 지우셨고"(사 53:6) 그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신 것이다"(벧전 2:24).

(4) 그의 십자가를 지심은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 이로써 우리 주님은 모든 그의 제자들로 그들의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를 것을 가르치셨다. 그가 우리에게 어느 때 어떤 십자가를 지우시던지 간에 우리는 그가 먼저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과 그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서 죽음의 십자가를 벗기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가 십자가를 지셨으므로 "그의 멍에는 쉽고 그의 짐은 가볍게 된 것이다." 그는 거기 저주의 패가 붙은 십자가를 최후로 지셨다. 이 십자가는 대단히 무거운 것이었다. 이로써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로 인하여 그들의 짐이 가벼웁고 일순간에 끝나는 축복의 부름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3. 그들은 예수를 형장으로 끌고 갔다. 그는 스스로 그곳으로 나아오셨다. 즉 억지로 끌려 가신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고난을 향하여 나아가셨다. 그는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위하여(히 13:12)(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역주) 성 밖으로 나가셨다. 저희들은 그의 고난에 더 큰 치욕을 안겨 주기 위하여 일반 범죄인들의 한 사람처럼 서민들의 처형 장소인 "해골의 곳" 그들 말로 골고다라고 불리우는 곳에서 형을 당하시었다. 이곳에다 유대인들은 죽은 사람들의 해골이나 뼈를 내다 버리기도 하였고 또는 교수형을 당한 죄수들의 머리도 이곳에 갖다 버리곤 하였다. 한 마디로 부정한 곳, 거기서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하셨다. 이는 "우리의 양심을 죽은 행실로부터 또한 죽은 행실로 인한 해독으로부터" 깨끗이 하기 위하여 우리 대신 죄를 그가 담당하셨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교부들의 전승을 모은 책을 살펴 보면 이 곳에 관하여 고대의 많은 저술가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1) 아담이 여기에 묻혔다는 전설을 찾아 볼 수 있다. 이곳에 그의 해골이 묻혀 있으며, 첫째 아담에 대하여 죽음이 승리를 얻은 곳에서 둘째 아담이 첫째 아담을 극복하시고 죽음에 대하여 승리하셨다고 그들은 전한다. 게하르트(Gerhard)는 이 전승에 대하여 오리겐(Ooigen), 싸이프리안(Cyprian), 에피파니누스(Epiphanius), 오스틴(Austin), 제롬(Jerome)등등을 인용하고 있다.

(2) 이곳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려 하였고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 양 한 마리를 대속물로 주신 모리아의 땅의 바로 그 산이라고 하는 설이 또한 있다.

4. 거기에서 그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그와 함께 다른 행악자들도 처형당하였다(18절). 그러므로 본문에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라고 하였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1) 그리스도가 어떠한 죽음을 당하셨는가를 살펴 보자. 그가 당하신 죽음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유혈이 낭자하고 고통과 치욕으로 넘치는 저주받은 죽음이었다. 그는 제단에 받쳐진 희생물로써 또한 그의 사업을 위하여 선택된 구세주로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그는 하나님을 영원히 섬기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문설주에 못 박힘을 당하시었다. 그는 구리뱀처럼 높이 들리우셨고, 그가 사늘과 땅 사이에 걸려 계셨던 것은 바로 우리가 하늘과 땅 사이에 무가치한 존재요, 그 양자에게 버림을 받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양 손을 벌림을 당하고 죽으신 것은 우리를 초대하고 포옹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여러 시간 나무에 달리셔서 의식도 분명하고 말씀도 하실 수 있는 상태에서 서서히 죽음을 당하시었다. 그는 실제로 자신을 희생물로 완전히 내맡기시었다.

(2) 그와 함께 죽임을 당한 자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본문에 보면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있더라"고 하였다. 아마도 이 두 명은 예수의 처형되시던 같은 시각에 처형되도록 예정되어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은 우리 주님 예수의 죽음에 욕을 더하기 위하여 대제사장들이 특별히 요청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들 중 하나가 예수를 비방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사실 예수 때문에 저희의 죽음이 앞당겨졌기 때문이다. 만일 대제사장의 무리들이 예수의 제자 중 두 사람을 택하여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다면 그것은 예수에게는 영예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제자들이 고난에 그와 함께 강제라도 동참할 기회가 마련되었다면 마치 제자들이 기꺼운 마음으로 예수의 고난에 참여한 것처럼 보여졌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대제사장의 무리들은 예수와 함께 죽음을 당할 사람들은 최고의 나쁜 죄인들로 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런데 실상 이 일의 결과는 그가 우리의 잘못을 담당하시려고 죽으셨다는 사실과 공로는 오직 그에게만 있음을 나타내 주기 위한 것이 되었다. 강도들과 그가 못 박히셨으므로 그에게는 백성들의 모욕과 증오가 더 많이 가하여지었다. 일반 대중이란 사람들은 한꺼번에 판단하고 그들을 하나씩 구분하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가 행악자들과 함께 못 박혔으므로 그도 행악자의 한 사람으로 취급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저희 가운데 못 박히셨으므로 세 명 중 제일 악한 자로 여기었다. 그러나 이같이 하여 "저가 죄인들 중 한 사람같이 여긴 바 되었도다"란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 그는 제단에서 희생물들에 둘러싸여 죽음을 당하신 것도 아니었고, 그의 피를 황소나 염소의 피에 혼합시키시지도 않으셨다. 다만 그는 죄인들 가운데서 죽으셨고 그의 흘리신 피는 죄인들의 피와 섞여지었다. 다만 그는 죄인들 가운데서 죽으셨고 그의 흘리신 피는 죄인들의 피와 섞여지었다. 이같이 그는 공공의 정의를 위하여 희생당하시었다.

이제 잠시 숨을 돌리고 신앙의 눈으로 예수를 바라보도록 하자. 그가 당한 비애와 같은 비애를 당한 사람이 있었을까? 영광으로 옷 입으시었던 분이 이 모든 옷을 벗김을 당하시고 치욕의 옷으로 입히워진 사실을 생각해 보자. 천사들의 찬양을 받으시던 그가 인간들의 비난을 당하셨음을 생각하자.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영원한 희락과 기쁨을 누리며 지내셨던 그가 이제는 고통과 괴로움의 절정에 처하게 되었음을 생각하자. 그가 피 흘리심을 바라보고, 그가 괴로워하심을 바라 보자. 죽어가시던 그를 바라 보자. 그를 보고 그를 사랑하자. 그를 사랑하고 그를 위하여 살자. 그리고 무엇으로 보답한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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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위의 명패(요 19:19-30)

본문에는 전보다 더욱 상세히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시던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은 그리스도와 그가 못 박히시던 장면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도움이 될 것이다.

Ⅰ. 십자가 위에 붙인 명패(名牌).

1. 그 비문은 빌라도 자신이 쓴 것으로 예수가 못 박히신 이유를 공표하기 위하여 그가 부하들에게 십자가 상단에 부착시키라고 명령한 것이었다(19절). 마태는 그것을 aijtiva - 즉 죄패라고 칭하였다. 그리고 그 내용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것이었다. 빌라도가 이 패를 붙인 것은 예수를 모욕하려는 뜻에서였다. 즉 그는 "이 자가 나사렛 예수를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자라"고 알리고자 하였다. 또한 이렇게 하므로 가이사의 위신을 높이려 하였고 이를 통하여 빌라도는 가이사에게 자신을 잘 보이려고 하였다. 빌라도는 그의 않으면 안 명예와 이권에 대단히 민감한 인품이었다. 이번에도 빌라도는 예수를 명목상의 임금, 즉 비유적인 임금으로 취급함으로 실상 예수를 가장 악한 행악자로 인식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이 비문을 통하여 우리 주님 예수의 무죄심이 앞으로 증거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죄패라고는 하지만 기록된 내용 그대로 범죄의 사실을 아무 것도 지적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 죄패가 그가 받아야 할 죄책의 전부라면 확실히 그는 사형되실 또는 구속될 만한 잘못이 없었음이 분명해진다.

(2) 이 비문을 통하여 예수의 위엄과 명예를 나타내시려는 하나님의 숨으신 뜻이 있었다. 이 분이 바로 구세주 예수요, 하나님을 위하여 성별된 Nazwrai'o" - 즉 축복받으신 나사렛 사람이었다. 또한 이 분이 발람이 예언한 것처럼 "우대인의 왕이요,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일어날 홀(忽) 곧 메시야이셨다." 또한 그는 가야바가 우연히 미리 말하였듯이 그의 백성의 유익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셨다. 이 같이 모두 악인인 세 사람 곧 발람, 가야바, 빌라도는 본의 아니게 그리스도의 왕되심을 증언했던 것이다.

2. 이 비문에 대하여보인 백성들의 관심(20절).

본문에 의하면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었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 다른 나라에서 절기를 맞아 예배하러 온 나그네들과 개종자들도 이 비문을 읽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읽었다. 그리고 읽은 사람에 따라 천태만상의 반응의 불러 일으켰다. 또 그리하여 그리스도 자신이 명패인 셈이기도 하였다. 이 명패가 많이 읽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 비록 성 밖이었지만 성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형장이 상당히 먼 거리에 있었다면 무리들은 호기심이 있더라도 그곳까지 가서 그 광경을 보고, 또 그 비문을 읽으려 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를 문 가까이서 사귈 수 있는 기회가 허용된다는 것은 대단히 유익한 일이다.

(2) 비문이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라틴어로 쓰여졌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비문은 모든 사람들에 의해 쉽게 읽혀질 수 있었다. 그들 모두 이들 언어 가운데 한두 가지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처럼 일반적으로 자녀들에게 읽기 교육을 철저히 시키는 백성은 흔하지 아니하였다. 비문이 세 가지 언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더 맑은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누구나 다 한번씩은 이 비문이 가장 널리 알려진 세 나라 말로 철저히 공표된 것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호기심을 가지고 서로 물었다. 이 언어들이 유명한 것은 히브리어로는 하나님의 계시가 기록되었기 때문이고 희랍어로는 철학자들의 지식이 그리고 라틴어로는 대제국의 법령이 기록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말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왕이라고 선포되었다. 그의 안에 계시와 지혜와 능력의 온갖 보화가 감추어 있었다. 하나님은 이 비문이 가장 잘 알려진 세 나라 말로 쓰여지도록 경륜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들에게 구세주가 되심을 나타내고자 하시었다.

또한 모든 민족으로 각각 그들의 언어로 구속자의 놀라운 일을 듣게 하고자 하셨다.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는 당시 세계의 이쪽 지역에서 널리 통용되던 대중적인 언어였다. 그러므로(천주교도들이 주장하는 대로) 성서가 지금도 이 세 가지 언어로만 활용되어져야 한다는 얘기는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 언어는 당시의 가장 대중적인 언어였기 때문이며 오히려 이 사실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각 나라 말로 번역되어 각 민족에게 보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이는 각 민족들로 하여금 그들이 각기 이웃과 자유로이 대화를 나누듯이 성서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3. 명패 문제에 있어서 기소자들이 취하였던 잘못된 입장(21절). 그들은 그 명패에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내용이 삭제되기를 바랬다. 그것은 다만 예수가 자신을 가리켜 "내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한 것에 불과한 것이지 사실은 아니지 않느냐고 하였다. 여기서 기소자들은 저희들의 본심을 드러내 보인다.

(1)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매우 악의를 가지고 대하였다. 그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아서 그의 이름까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하였다. 저희들은 자신들이 그를 이렇게 부당하게 대우한 것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그에게 나쁜 죄명을 붙이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가 꿈도 꾸지 못할 명예와 권세를 찬탈하려 한 자로 공표하려고 하였다.

(2) 그들은 어리석게도 자기 민족의 영예인 분을 시기하였다. 그들은 피정복된 노예화된 백성이었지만 그들의 명예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고 그리하여 그들은 이 사람이 그들의 왕이라고 칭하여지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3) 그들은 빌라도에게는 매우 무례하고도 귀찮은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그의 뜻일랑은 아랑곳하지 않고서 어떻게 해서든지 빌라도를 설득하여 그리스도를 정죄하려고만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소한 문제까지도 들고 나와 그들은 계속 그를 괴롭히려 들었다. 그러나 저희의 입장이 난처했던 것은 그들이 그가 자진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다고 그를 고소하였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증거할 증거도 없었고 또 그가 그들에게 그렇게 말한 일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4. 명패의 내용을 그대로 고수하려는 재판관의 결의. 본문에 의하면 빌라도는 "나의 쓸 것을 썼다. 이제 그것을 내 손으로 변경하여 일을 그르치지 않겠노라"고 말하였다.

(1) 이것은 아직도 그를 좌지우지하려던 대제사장들에게 주어진 모욕적인 언사였다. 빌라도의 말투로 보아 그가 저희들에게 굴종한 것이 대단히 불쾌한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들이 그에게 이번 일을 강요한 데 대하여 그들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좌절시키려는 결심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비문을 통하여 다음의 사실을 암시하려고 하였다.

① 저희들이 위선된 가식에도 불구하고 저희의 가이사와 그의 나라에 대한 열성이 진실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이려고 하였다. 만일 마음에 맞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그 사람을 세울 가능성은 충분하였다.

② 이 예수가 비록 초라하고 경멸을 당하고는 있지만 유대인의 왕이 될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음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그리고 로마 세력에 감히 저항하려는 자의 운명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려고 하였다.

③ 예수에게서 아무런 잘못도 찾을 수 없었는데 이 사람을 기소했다는 것은 그들이 불의하고 무지하기 때문임을 보여 주려고 하였다.

(2) 이로써 주 예수에게는 영예가 되었다. 빌라도는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었다는 사실을 고수하려고 하였다. 그가 쓴 내용은 처음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것으로 그가 그것을 변경할 수는 없었다. 예수의 죽음을 예고하고 다니엘 9장 26절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의 참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가 죽으신 것은 이스라엘의 왕이 죽되 이같이 죽어야만 하였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그를 자기들의 왕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때 한 이방인인 빌라도는 그가 왕이심을 고소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메시야의 나라에 복종할 때 본 민족 유대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이 나라에 반역하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고 이는 한 징조였다.

Ⅱ. 형 집행자들이 그의 옷을 나누어 가짐(23,24절). "저희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곧 그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를 십자가에 부착시켜서 십자가를 세우는데 네 명의 군사가 동원되었다. 오늘날에도 죄수를 처형시키고 나면 할 일이 없는 것처럼 그들도 그를 십자가에 단 후에는 그가 극심한 고통을 통하여 쇠진해 죽는 것을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의 옷을 나누어 가지려 하였다. 각기 같이 나누어 가지기를 원하였으므로 군사마다 한 몫을 받을 수 있도록 될 수 있는 대로 정확히 네 등분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등으로 짠 것으로" 진귀한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그것을 제비를 뽑아 당첨되는 사람이 갖도록 동의하였다. 다음의 사실들을 고찰하자.

1. 그들이 우리 주님 예수께 입힌 수치. 그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그에게서 옷을 벗기었다. 벌거벗음에 대한 수치를 의식하게 된 것은 아담이 죄를 지은 때부터서였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하여 죄를 담당하신 그가 수치도 담당하시므로 우리의 수치를 제거해 주셨다. 그는 우리를 "흰 세마포로" 입하시기 위하여(계 3:18) 벗김을 당하셨다. 또한 우리가 입을 옷이 없으나 "벗은 몸으로 발견되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벗김을 당하셨다.

2. 그리스도를 못 박은데 대한 대가로 병사들이 스스로 취한 수고료, 그들은 그의 낡은 옷을 받는 것만으로 이 일을 기꺼이 수행하였다. 어떠한 일도 이렇게 나쁘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사소한 대가를 받고 악한 일을 행하는 나쁜 인간들도 많은 법이다. 아마 그들이 그의 옷을 취함으로 단순히 옷을 얻는다는 이득만을 바란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들은 그의 옷가를 만짐으로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리를 들었음으로 그런 효과를 바랐거나 아니면 예수를 좋아하는 어떤 사람이 그 옷을 대가로 돈을 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3. 그들이 그의 꿰매지 않고 통으로 짠 속옷을 두고 벌린 내기. 우리는 예수께서 이것 이외에 어떤 가치 있거나 뛰어난 것을 가지고 계시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없다. 이것도 무슨 부자들이 입는 것이라기보다 특색이 있었다는 것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속옷이 외양상 두드러진 특색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다만 평범하게 디자인한 것이었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의 어머니가 그것을 짜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어리셨을 때 이 옷을 그를 위하여 만드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옷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서 입은 옷처럼 "헤어지지 아니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승은 근거 없는 상상에 불과한 이야기다. 이 옷을 나누려면 찢어야 되는데 병사들은 이 옷을 찢는 것은 아깝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그것은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또 조각으로 나누어 본 대야 아무런 소용이 없겠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옷을 놓고 제비를 뽑았다. 그리스도께서 고통 중에 죽어가시고 있었는데 그들은 희희덕거리며 그에게서 얻은 노획물을 나누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통으로 짠 속옷을 나누지 않고 보존한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분쟁을 일으켜 나누지 말도록 하기 위하여 보여 준 배려로 흔히 언급되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병사들이 그리스도의 속옷을 찢지 않은 이유는 그리스도에 대한 조그마한 존경심 때문이 아니고 각기 자기가 옷을 통채로 갖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모든 부와 권세를 혼자 독차지하기 위하여 본열을 반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로마 교회에서의부터 분리를 반대하였던 사람들은 tunica inconsutilis - 즉 이 통으로 짠 옷에 대하여 강조하다. 이들 중에 어떤 이들은 이 사실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Inconsutilistae - 즉 꿰멘 데가 없는 자라고 불리워지기까지 하였다.

4. 이 일을 통하여 이루어진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 다윗은 영감에 의해서 시편 22편 18절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있었던 바로 이 장면을 예언하였다. 사건이 예언에 따라 일치하게 일어난 것은 다음의 사실을 증명한다.

(1)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이다. 성서는 아주 오래 전에 그리스도에게 일어날 우발적 사건들을 예언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예언에 따라 이루어졌다.

(2) 예수가 참 메시야이시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예수에게서 메시야에 관하여 있어진 구약의 모든 예언이 완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예언을 이루기 위하여 이 일을 행하였던 것이다.

Ⅲ. 예수께서 불쌍한 어머님에게 베푸신 보살핌.

1. 예수의 어머님은 그의 죽는 순간까지 그와 동행하셨다(25절). 본문에 의하면 "그의 모친은 그의 친척과 친구들 몇 사람과 함께 그들이 할 수 있는 대로 십자가 가까이에 접근하여 서 있었다." 본문의 말씀대로 처음에는 그들은 십자가 가까이에 서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 마태나 마가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처럼 병사들이 그들을 멀리 내쫓은 것같이 보인다. 아니면 그들 스스로가 가까이에서 물러섰는지도 모른다.

(1) 고통 중에 계신 우리 주 예수에게 경건한 여인들이 보인 아름다운 사랑을 본문에서 살펴 보자. 요한을 제외한 그의 모든 제자들이 예수를 버렸으나 이 여인들은 계속하여 그를 수종하였다.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다"(슥 12:8)는 말씀이 여기서도 이루어짐을 보게 된다. 그들은 원수들의 분노함이나 또는 그 광경에서 풍기는 공포감에도 불구하고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은 그를 구출하거나 편하게 해드릴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를 수종함으로 그들의 선한 뜻을 나타내 보여 주였다. 어떤 천주교의 저술가들은 다음과 같은 불경하고도 신성 모독적인 글을 발표하였다. 즉 동정녀 마리아가 십자가 곁에 서 있었으므로 예수의 속죄 행위 못지않게 죄를 대속하는 일에 공을 세웠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주장함으로 그들은 그녀를 우리 구원의 공동 중제자인 동시에 공동 협력자라는 설을 확립하고 있다.

(2) 이렇게 혹독한 취급을 받는 예수를 보는 이 가련한 여인들이 받은 마음의 상처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우리가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특히 복되신 그의 모친의 심정은 어떠하였겠는가. 그러나 이로써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하리라"는 시몬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눅 2:35). 그의 고통이 곧 그녀의 고통이었다. 그가 십자가 위에 계신 동안 그녀는 고문대 위에 있는 심정이었다. 그의 상처를 보는 그녀의 마음 또한 피가 흘렀다. 그리고 병사들이 그에게 가한 모독이 곧 그를 수종하던 자들의 모욕이 되었다.

(3) 우리는 이러한 극심한 시련 속에서도 이들 여인들 특히 그의 모친 마리아를 지탱케 하신 신의 은총의 능력을 찬양할 뿐이다. 우리는 그의 모친이 비통으로 안타까이 손을 부여잡았다거나 그녀의 머리카락을 쥐어 뜯었다거나 그녀의 옷을 찢었다거나 비명을 지르셨다는 내용을 본문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놀라울만한 침착으로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은 십자가 곁에 서 있었다.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기까지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은 신의 능력에 의하여 힘입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동정녀 마리아는 다른 그 누구보다 그의 부활할 것을 확신을 가지고 기대하였다. 그리고 이 기대가 그녀를 견디게 해 주었다. 우리가 시련을 받을 때 얼마나 참아야 하는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하신 분을 알기에 우리는 만족한 마음으로 견뎌야 하리라.

2. 예수는 죽음에 임하여서도 그의 어머니를 부양할 대책을 세우셨다. 그녀의 남편인 요셉은 오래 전에 죽었고 그녀의 아들 예수가 그녀를 부양해 왔던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그녀의 생계를 유지하는 데는 예수가 꼭 필요하였다. 그런데 그가 죽음에 처해지게 되었으니 그녀의 심정이 어떠하였겠는가? 예수는 곁에 서 있는 그녀를 보고 그녀의 염려와 슬픔을 아셨다. 그리고 그는 요한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것도 보았다. 그들을 보고 예수는 그의 사랑하는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 사이에 새로운 인연을 맺어 줄 것을 결정하셨다. 그리하여 그는 그녀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저가 아들이 되었으니 이후로는 그에게 모성애를 베풀어 주십시요"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요한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 그러니 그녀에게 자식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결코 잊을 수 있을 수 없었던 "이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었다." 본문의 내용 중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1)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베푼 배려. 그는 그의 친구들을 모두 잊어버릴 정도로 고통에 대한 의식에 사로잡혀 계시지는 아니하셨다. 그는 그에게 베푼 그들의 염려를 그의 마음에 두고 계셨다. 어쩌면 그의 어머니는 그가 당하는 고통에 마음이 아픈 나머지 앞으로 그녀가 어떻게 될 것인가는 생각조차 못하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 생각을 할 여유가 있으시었다. 그는 은이나 금을 남겨 놓으신 것도 아니었고 재산이라든가 후손을 남기시지도 아니하셨다. 그의 옷은 병사들이 빼앗아 버렸고 돈을 맡고 있었던 유다가 자살을 한 후 그가 지녔던 전대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전하여진 바가 없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의 어머니를 친구에게 의탁하는 것 이외에 그녀를 돌볼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는 본문에서 이 일을 이루시었다.

① 그는 그녀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여인"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그녀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이미 슬픔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고 있는 그녀에게 어머니란 말이 더 큰 상처를 주지나 않을까 염려해서였다. 마치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아버지"라고 불렀을 때 그가 상처를 입었듯이 말이다. 그는 이제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있지 아니할 사람으로 이 세상에서 그에게 귀하게 여겨졌던 모든 것에 대하여 이미 죽은 사람처럼 말씀하였다. 그가 그의 어머니에게 외견상 냉담한 어조로 말씀하신 것은 그가 전에도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천주교가 그녀에게 부여한 당치도 않은 숭배를 예견하시고 이를 미연에 방지하고 저지하시려고 시도하신 말씀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천주교도들은 그녀가 구속자의 영예를 누림에 있어서 예수와 함께 대가를 지불한 자인 것처럼 여기고 있다.

② 그는 그녀에게 요한을 그녀의 아들로 생각하라고 당부하신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세요. 저기 당신 곁에 서 있는 자가 바로 당신의 아들입니다. 그에게 어머니가 되십시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자.

첫째, 하나님의 선하심의 실례를 여기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사실이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한 위로를 빼앗아 가실 때,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도 않던 곳에서 다른 위로를 우리를 위하여 마련하신다. 우리는 교회가 자녀들을 잃고 난 후 다른 자녀들을 얻게 될 것에 대한 말씀을 알고 있다(사 49:12). 그러므로 한 번 고인 물이 말라버렸다고 물이 영영 없어진 것으로 생각지 말게 하자. 왜냐하면 같은 샘의 근원에서 다른 물이 흘러 그곳을 채울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가족 부양의 의무에 대한 실례를 여기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우리가 본받을 사실이다.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자녀들에게 그들의 힘이 다하기까지 연로한 부모들을 편안하게 부양해 드릴 것을 가르치셨다. 다윗도 환난 중에 있을 때 그의 부모들을 보살폈으며 그들을 위하여 안식처를 제공하였다(삼상 22:3). 본문에 보면 다윗의 자손인 예수도 그렇게 하셨다. 자녀들은 아직도 부모들이 살아 있어 그들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데 자신은 죽음을 앞에 맞이하게 되면 자신의 능력에 따라 양친을 부양할 대책을 세워두어야 한다.

(2) 사랑하는 제자에 대한 그의 신뢰. 그가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그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즉 "내가 그녀를 너에게 부탁하니 그녀의 아들처럼 그녀를 보살펴 달라는 말이다"(사 51:18). 그리고 "그녀가 연로하게 되었을 때도 그녀를 버리지 말라"(잠 23:22)고 한다.

① 예수께서 이런 부탁을 하신 것은 요한에게는 영광이었다. 이것은 요한이 사려가 깊고 신실하다는 증거였다. 만일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요한이 그를 사랑하는 것을 염두에 두시지 않았다면, 그를 자기 모친의 후견인으로 삼지는 않았으리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용되고 세상에서 그를 위한 무슨 일이 부과된다는 것은 최대의 영예이다.

②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요한에게 염려와 책임의식을 가지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로써 당할 곤란이나 경비, 자기의 가족도 돌보아야 할 자기의 책임 또 이 일로 인하여 초래될 가정의 불만도 개의하지 않는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에게 사랑받는 자들은 그나 그에게 속한 분을 위하여 섬길 수 있는 기회가 허용되면 이를 기뻐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한 교회사(Nicephoras's Eccl, Hist, lib, ii, cap. 3)는 동정녀 마리아가 요한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11년 간을 산 다음 죽었다고 한다. 또 다른 재료들에 의하면 그녀는 요한과 함께 에베소를 이사하기까지 살아 있었다고 한다.

Ⅳ. 성서의 성취뿐 이는 그에게 신 포도주를 마시게 함으로 이루어졌다(28,29절).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얼마나 귀중하게 여기셨는가를 본문에서 볼 수 있다(28절). 본문에 보면 그는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그가 고통 중에 마실 것이라고 말씀된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신다. 즉 그가 마신 것을 요청하셨던 것이다.

(1) 그가 목마르셨던 것은 전혀 이상한 사실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가 여행 중에 목마르셨던 것을 알고 있다(4:6, 7). 이제 그는 인생의 여정이 끝나는 순간에 처하셔서 또한 목마름을 느끼셨다. 그는 자신이 착수하셨던 모든 일을 갈급한 심정으로 서둘러서 완수하시었다. 다만, 이제 그는 죽음의 고통 가운데 처하여 계시면서 순전히 극한적인 고통과 피 흘리심으로 인하여 숨이 끊어지는 상태에서 목마름을 느끼셨다. 우리는 "한 방울의 물을 떨어뜨려 자기 혀를 시원하게 해달라던" 부자의 간구 속에서 지옥의 고통이 격렬한 갈증에 의하여 표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도 정죄를 받아 그 영원한 갈증에 거하여야 했으리라.

(2) 그러나 예수께서 마실 것을 요청하신 이유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게 된다. 외관상으로 그가 하신 이 말씀은 외적인 고통에서 온 갈구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저희들이 그를 채찍질하고 그에게 가시관을 씌였을 때는 "아이구 머리야!"라든가 "아이구 등이야!"라고 부르짖지 아니하신 것을 보아 본문의 의도는 보다 깊은데 있다고 하겠다. 그러면 그가 "내가 목마르다"고 외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① 그는 이같이 하여 "그의 영혼의 진통"을 표현하고자 하셨다(사 53:11). 그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과 우리의 구원사업을 이루는 일을 추구하는데 갈급하셨다. 이 두 가지가 그의 사업의 최대 목적이었다.

② 이같이 하여 그는 성경이 성취되는 것을 보려고 하였다. 지금까지 모든 성경은 성취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이루어진 것은 그가 이것을 이루려고 계속 주의 깊은 관심을 가져온 결과라는 것도 알았다. 지금도 그는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이 있음을 기억하셨다. 그리고 이때야말로 그것을 수행하는데 적절한 시기인 것을 아셨다. 이 사실에 의하여 즉 그의 안에서 성경이 정확히 성취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 의하여 모든 사실을 엄밀히 예견되었다는 사실에 의하여 그가 메시야이심이 나타난다. 또한 이 사실에 의하여 "진리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고" 그가 행한 모든 일에 함께 하셨음도 나타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정확하게 행하셨다. 그는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려 온 것이 아니라 성취하러 오신" 것이다.

첫째, 성경이 그의 갈증을 예언하였으므로 그는 스스로 이 일과 연관을 맺으셨다. 왜냐하면 지금 이외에는 "내가 목마르다"라는 말씀이 알려질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편 22편 15절에 보면 그의 혀가 그의 입 천장에 붙으리라고 예언되었다. 그리스도의 탁월한 모형이었던 삼손도 "블레셋 사람들을 무더기로 죽였을 때" "심한 갈증을 느끼셨다"(삿 15:18). 그리스도도 십자가 위에 달리사 "모든 정사들과 권세들을 폐하실 때"도 이렇게 목마르셨다.

둘째, 성경은 그가 목마르실 때 그에게 마시울 신 포도주가 주어지리라는 것이 예언되었었다(시 69:21). 그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기 전에 신 포도주를 마시라고 주었었다(마 27:34). 그러나 그때에 그것을 맛보시면 예언이 정확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때 그가 갈증을 느끼신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에서야 그는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다시 그것을 달라고 청하시는 말씀이다. 그때는 그가 그것을 마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것을 받으셨다. 그리스도는 예언이 성취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모욕을 자칭하는 길을 택하셨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다면 그 어떤 시련 아래서도 우리가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2. 예수의 기소자들이 어느 정도 그를 경멸하였는지를 본문에서 볼 수 있다. 거기에는 아마도 이러한 성격의 모든 형의 집행을 위해 관습상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는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이 신 포도주 그릇이 "죽을 사람을 속히 죽게 하기 위하여" 그들이 이용하였던 포도주 잔 대신에 그리스도를 능욕하기 위하여 그들이 계획적으로 가져다 놓은 그릇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 신 포도주를 "해융에 적셨다." 이는 그들이 그에게 잔을 허용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 해융을 우슬초" 곧 우슬초 줄기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었다. ‘휫소포 페리덴테스’ - 즉 그들이 해융을 우슬초에 싸 매달았다는 뜻이다. 또는 어떤 이들은 그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 즙에 섞어서 이것을 그가 갈증을 느끼셨을 때 그에게 마시라고 주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신 포도주 한 모금보다는 물 한 방울이 차라리 그의 혀를 시원하게 하였으리라. 그런데 그는 이것까지도 우리를 위하여 견디시었다. 이로써 "우리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이가 시었다"함이 이뤄졌다. 우리가 모든 위로와 시원함을 박탈당하였으므로 이 위로와 시원함이 그에게 제지되었다. 하늘이 그에게 한 줄기의 빛도 허용하지 않은 동시에 땅은 그에게 한 방울의 물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 대신 신 포도주가 그에게 주어졌다.

Ⅴ. 유언을 하시고 영혼이 떠나셨다(30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마신 후" 이로써 충분하다고 생각하신 것처럼 "다 이루었다"고 그는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셨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1. 그가 하신 말씀의 뜻. 우리는 그가 승리감과 환희감을 느끼시며 이 말씀을 하셨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희랍어인 ‘텔텔레스타이’ - 즉 다 이루었다로써 이는 포괄적이고도 안도감이 풍기는 용어이다.

그러면 "다 이루었다"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1)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그를 기소한 자들의 악의와 원한이 최악에꺼지 도달하여서 끝났음을 뜻하는 말씀이다. "그들이 그에게 준 신 포도주를 마심으로" 그들의 최후의 분노까지 받아들이셨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것이 너희가 내게 행할 수 있는 최후의 악행이다. 이제 나는 너희가 손댈 수 없는 곳 악인이 행세할 수 없는 곳으로 가노라."

(2)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그의 고통에 관한 아버지의 뜻과 명령이 이로써 성취되었다는 뜻의 말씀이었다. 그가 당한 고통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말씀의 일점 일획까지 이루어지는 것을 깊이 깨달으셨다(행 2:23). 그는 고통이 임박한 순간에 "아버지여 당신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였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기쁨으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곧 그의 "양식"이었다(4:34). 그러기에 그들이 담즙을 탄 신 포도주를 그에게 주었으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것, 곧 그의 양식이 그에게 새로운 원기를 공급하였다.

(3) "다 이루었다" 함은 메시야의 수난을 가리킨 구약의 모든 유형과 예언이 성취되고 응답되었다는 뜻의 말씀이었다. "그들이 그에게 신 포도주를 주었으므로" 구약의 어떤 말씀이 성취되는 것인지 그는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삼으시었다. 또한 이로써 그 말씀은 성취되었다. "그가 은 삼십에 팔리우리라"는 말씀, "그의 손과 발이 찔림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 "그의 옷을 원수들이 나누리라"는 등의 말씀이 이루어졌듯이 이제 신 포도주를 마시는 일도 행하여졌으므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이다.

(4) "다 이루었다"함은 형식적인 율법과 그 율법을 지킬 의무가 주어진 시기가 폐지되었다는 말이다. 이제 본체가 오셨으므로 그림자는 물러간 것이다. 때 마침 "휘장이 찢긴"것같이 그는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고"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까지 폐하시었다(엡 2:14, 15). "더 나은 소망에게 길을 내어 주기 위하여" 모세의 체제는 무너져야 했던 것이다.

(5) "다 이루었다"함은 "영원한 의를 세상에 오입하심으로" 허물이 마치며 끝나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다니엘 9장 24절의 말씀을 언급한 내용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어린 양은 세상의 죄를 없이 하시려고 자기를 희생 제물로 드리셨다"(히 9:26) 이제 이 일이 완성된 것이다.

(6) "다 이루었다" 함은 그의 고난 곧 그의 영혼과 육신의 고난이 끝났다는 말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폭풍우도 끝났고 최악의 시련도 지나갔다. 또한 그의 고난과 고뇌도 마지막 순간에 이르렀다. 이제 그는 낙원에 거하시게 될 것이며 "그의 앞에 전개될 기쁨"을 누리시게 될 것이다. 이제 모든 사람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게 하자." 그리고 그들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잠시 잠간 후면 "다 이루었다"고 말할 때가 있음을 그들로 알게 하여 스스로 위로를 받도록 하자.

(7) "다 이루었다"함은 그의 일생이 끝났다는 말이었다. 이제 그는 최후의 숨을 쉬고 계셨다. 그리고 "이제 그는 이 세상에 더 이상 있지 않게 될 것이었다"(17:11). 복된 바울 사도도 같은 뜻의 말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딤후 4:7).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곧 나의 경주를 다 달리고 나의 잔을 비웠도다. 이제 나의 날이 mene, mene - 즉 계수되고 끝났도다." 우리도 모두 머지 않아 이렇게 말하게 되리라.

(8) "다 이루었다" 함은 그의 사업의 최후의 순간이 끝나므로 인간의 그런 구속과 구원의 역사가 이제 완성되었다는 말이다. 그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켰으며 사탄의 세력에게는 치명타가 되었고 영원히 흐르는 은혜의 샘을 터지게 하고 결코 끊임이 없는 평화와 행복의 샘을 흐르게 하는 능력이 되었다. 그리스도는 철저히 그의 사업을 위해 사셨으며 또 "그 일을 이루시었다"(17:4). 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가 이루신 사업은 완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내가 시작하였으니, 또한 이루리라"고 말씀하신다. "좋은 사업을 시작하신 그가 또한 그 일을 이루신 것이다." 그는 속죄의 대가를 치룸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구속을 실천하심에 있어서도 모든 것을 이루시었다. 이와 같이 이제도 하나님의 신비는 언제인가 이루어지고 말게 되리라.

2. 그가 하신 일. "그는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셨다." 그는 자진하여 죽음에 임하셨다. 그 이유는 그가 희생 제물일 뿐만 아니라 제사장이시오, 재물을 드리는 예배자이셨기 때문이었다. animus offerentis - 즉 예배자의 정신 이것이 희생에 있어서 가장 귀중한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그의 고난을 통하여 자기 의지를 나타내셨고 또 "그의 이러한 의지에 의하여 우리는 의롭게 된 것이다."

(1) "그의 영혼이 돌아가셨다." 누구도 그의 생명을 강제로 빼앗을 수는 없었다. 다만, 그가 죽으신 것은 자진하여 생명을 내놓으셨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러한 행위의 취지를 표현하여 "아버지여 당신에게 나의 영혼을 의탁하나이다"라고 말하였다. 즉 자신을 "많은 사람을 위한 구속물로" 드리겠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에 따라서 그는 영혼을 우리를 위하여 주셨다. 이로써 그는 아버지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생명을 주신 대가를 아버지에게 치루신 것이다.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이것이 그의 행위의 목표였다.

(2) "그는 머리를 숙이셨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은 죽는 순간에 숨이 막히므로 숨을 몰아서 쉬느라고 고개를 추켜든다. 그러나 그리스도도 자신의 죽음을 재촉하기 위하여 마치 잠이라도 청하시기나 하는 것처럼 숨이 지기 전에 먼저 "머리를 숙이셨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불의를 그에게 담당시키셨고 이 아름다운 희생 제물의 머리 위에 감당시키신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가 머리를 숙이신 것이 모든 불의의 무거운 짐이 그에게 지워졌음을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시 38:4; 40:12 참조). 여하간 확실한 것은 그의 머리 숙이심은 아버지의 뜻에 대한 복종과 죽음에 대한 복종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는 야곱이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죽었듯이"(창 49:33) 마찬가지로 죽음에 순응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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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처형(요 19:31-37)

그리스도가 죽으신 후 그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다는 기사는 본 복음서 기자만이 기록하고 있다.

Ⅰ. 유대인들의 미신적 관습을 먼저 고찰하여 보자. 본문의 사건은 이 관습이 동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본문에(31절) "이 날은 안식일을 위한 예비일이었다. 그런데 이 안식일은 유월절 주간에 속하여 있었으므로 그들은 특히 이 안식일에 경의를 표하여 큰 날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이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않기를 바랬다. 그리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눈에 띄지 않게 묻어 달라고 하였다"고 기록되고 있다. 결국 이러한 조치는 필연적인 것이었으나 이같이 서두룬 것은 잔인스러운 조치였다. 본문을 통하여 아래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자.

1. 그들은 다가올 안식일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였다는 소리를 사람들에게 듣고 싶었다. 왜냐하면 이 날은 누룩을 먹는 날들 가운데 한 날이었고 첫 소산물을 드리는 날이기도 하였다. 모든 안식일이 다 거룩한 날이요 즐거운 날이었으나, 이 날은 ‘메갈레 헤메라’ - 즉 큰 날이었다. 유월절 기간 중의 안식일은 큰 날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성례 집행 주일, 성만찬 일은 큰 날들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날들을 위해서는 보다 정성된 준비가 있어야 한다. 이는 이 날들이 "하늘 나라에서의 날들처럼" 우리에게 진실로 큰 날이 되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2. 만일 시체가 십자가에 메달린 채 남아 있으면 이 날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본래 유대인의 법에 따르면 시체는 당일에 장사하도록 되어 있었다(신 21:23). 그러나 이 경우에 유대인들은 이 날이 비범한 날이 아니었더라면 로마인의 관습대로 따르려고 하였었다. 하지만 이 날에는 각처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드는 날이었고 그러기에 시체를 남겨두면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나 않을까 저희는 생각하였다. 그리고 각처에서 모인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린 모습을 참고 볼 수도 없으리란 점을 알았다. 그들의 양심이 화인맞지 않은 한 그들의 분노의 열기가 진정되면 자기들을 비난할 것을 대제사장들은 알았다.

3. 그들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저희들의 시체를 치워 달라고 빌라도에게 간청하였다. 그들은 저희를 목 베거나 목을 졸라서 죽이기를 바라지 않았다. 이는 마치 불란서인들이 마차 바퀴에 매달아 돌려서 찢어 죽이는 형을 당하는 사람에게(이른바 블란서인들이 부르는 명칭대로) coup de grace - 즉 자비의 최후의 일격을 가하므로 죽는 자를 편안하게 해 주듯이 저희를 그들의 비참함에서 속히 놓여나게 해 주는 인정심 많은 행동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장 격렬한 고통 속에서 저희들이 죽도록 저희의 다리를 꺾어서 치워 달라고 청하였다. 다음 사실들을 기억하자.

(1) "악인이 베푸는 자비는 친절을 위장하지만 실상은 잔악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 위선자들의 허위된 거룩함은 가증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들 유대인들은 사람들로부터 자기들이 안식일을 대단히 존경한다는 소리를 듣기를 원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정의와 의(義)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죄 없으시며 훌륭한 분을 십자가에 매다는데 아무 거리낌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시체를 십자가에 매달아 두는 일은 주저하였다.

Ⅱ.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의 처분(23절). 빌라도는 아직도 유대인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여 그들의 요구대로 명을 내렸다. 그러자 "병사들이 와서" 애석한 마음을 감추고 모진 각오를 가지고 "두 강도의 다리를 꺾었다." 다리를 꺾을 때 강도들은 단발마의 비명을 질렀다. 훗날 잔인한 성격의 네로가 흔히 하였듯이 병사들은 죽는 자들이 스스로 죽음을 의식할 수 있도록 형을 가하였다. 이 강도들 중의 한 사람은 회개한 사람이었고 그리스도로부터 그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자였다. 그럼에도 그도 다른 강도와 같은 고통을 느끼며 비참한 가운데 죽어갔다.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똑같이 이루어졌다"는 말씀과 같다. 사실 하늘 나라에 간 많은 사람들도 죽음이란 운명을 면하지 못하고 영혼의 비통 속에서 죽어갔다. 하지만 죄악의 고통스러운 죽음도 죽음 저편에 준비된 생생한 위로에 거룩한 영혼들이 들어가는데 장애가 되지는 못한다. 그리스도는 죽어 낙원으로 가셨다. 그리고 그는 거기까지 그를 경호해 줄 한 호위병으로 이 강도를 임명하셨다. 하늘 나라로 가는 대는 먼저 "첫 소산물이시며 첫 주자(走者)이신 그리스도가 서시고 다음 그리스도에게 소속된 자들이 그 뒤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Ⅲ. 그리스도의 죽음 여부를 가리려는 검증 및 그가 죽으셨다는 확실한 판결.

1. 그들은 그가 죽은 것으로 단정하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였다"(33절).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예수는 못 박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죽는 것보다 일찍 돌아가셨다. 그의 몸의 구조는 아마 비범하게 섬세하였으므로 고통을 받으시자 더 빠르게 부서지고만 것으로 보여진다. 아니면 이 사실은 그가 스스로 생명을 포기하셨다는 것과 비록 그가 손에 못이 박혀 움직일 수는 없었으나 원하실 때 죽으실 수 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보여 진다. 그는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셨고 결코 죽음에 정복당하지는 아니하셨다.

(2) 그는 원수들은 그가 참으로 죽은 것을 알고 만족해 하였다. 형장 곁에 서서 형이 효율적으로 집행되는 것을 보던 유대인들은 그에게 형을 가할 필요가 없다는 확신이 서기까지는 이 잔학스러운 짓을 계속하려고 하였다.

(3) '인간이 심중에 무슨 계획을 하든지 여호와의 뜻은 설 것이라"는 것이다. 그의 다리를 꺾으려는 것은 완벽한 계획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다른 데 있었으므로 그 일은 저지되고 말았다.

2. 그들은 그가 죽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으므로 논쟁의 여지가 없도록 그의 몸을 검증해 보려고 하였다. 실은 이미 "병사 한 사람이 창으로 그의 심장을 겨누고 찌른 것이 그의 옆구리를 찔러 거기서 피와 물이 흘러 나오기까지 했던 것이다."(34절).

(1) 그 병사는 예수의 죽음의 여부를 알아내려고 마음 먹었다. 하지만 예수는 그의 옆구리에 난 명예로운 상처 때문에 저희가 다른 두 명에게 취하였던 수치스러운 처리 방법을 면할 수 있었다. 전승에 의하면 이 병사의 이름은 "롱기누스(Longinus)"였다고 한다. 그는 눈에 병이 걸려 있었는데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몇 방울의 피에 의하여 그 병을 즉시 고침을 받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신빙성만 확립될 수 있다면 이 사건은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2)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실을 통하여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점을 나타내시려는 경륜을 가지고 계셨다.

① 그가 진실로 죽으셨음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더 나아가 그의 부활의 확실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만일 그가 실신 또는 기절하신데 불과하였다면 그의 부활은 허위일 것이다. 그러나 이 검증에 의하여 그가 죽으셨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왜냐하면 창이 그의 생명의 근본을 격파시켰기 때문이다. 자연의 법칙과 질서에 의하면 이같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또 거기서 그만큼 피를 흘리고 인간의 신체가 살아 남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② 그의 죽으심의 경륜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죽음에는 많은 신비가 있었다. 이 사실은 같은 상처에서 "피와 물"이 명백히 분리되어 흘러 내렸다는 기적적인 사건을 통하여 그의 죽음의 신비는 엄숙하게 입증되었다. 적어도 그것은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요한 사도는 요한 5장 6,8절에서도 매우 괄목할 만한 사간으로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첫째, 그의 옆구리가 뚫렸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었다. 우리가 우리의 신실성을 입증하려 할 때, 우리 마음의 생각과 의도가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 마음에 창(窓)이 있기를 바랄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옆구리에 열린 이 창문을 통하여 우리는 그 마음을 들여다 보고 거기서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 타오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또한 거기에 우리의 이름이 쓰여진 것을 보게 되리라. 어떤 이들은 이 일을 무죄한 아담의 옆구리가 열린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제2 아담이 신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깊은 잠(죽음)이 드셨을 때, 그의 옆구리가 관통당하였고 그 열린 틈에서 그의 교회가 유래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스스로 교회와 혼인 관계를 맺으셨다. 에베소서 5장 30, 32절을 참조하라. 신앙이 깊었던 시인 죠지 하버트(Mr. George Herbert)씨는 "가방"(The Bag)이라는 그의 시에서 우리 구세주가 옆구리를 찔리셨을 때 그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감명 깊게 서술한다.

"너희가 나의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있는가?

또는 그에게 아뢸 사연이라도 있는가?

(나는 전할 우편 가방은 없노라. 그러나 여기 그것을 수용할 구멍이 열려 있으니)

(나를 믿고 거기 넣으라)

그러면 하나님께 도착되리라.

나는 너희의 전언을 기억해 두겠고

나의 심장 한편에 간직하리라.

또한 앞으로 나의 친구될 모든 이들이여

나를 이러한 일을 위한 문으로 사용하리라.

그 문은 언젠가 열릴 것이다.

또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을

너희에게 전달하리라.

아니 그 이상 넘치게 주리라.

하나님 영광을 가리움없이

너희의 모든 탄식들을 그에게 전하리니

무엇이든 고하라.

그리고 절망일랑 멀리 가 버리거라."

둘째, 그곳에서 "피와 물"이 흘렀다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었다.

a. "피와 물"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얻게 될 두 가지 아름다운 이익을 의미한다. 즉 우리에게 의인과 성화가 주어짐을 뜻하는 것이다. 피가 사면을 뜻한다면 물은 중생을 의미하며 또 전자가 구속을 뜻한다면 후자는 순결을 뜻하였다. "피와 물"은 율법 아래서도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범죄는 피에 의해서만 사해질 수 있었다. 또한 더러운 것은 "순결의 물"에 의해서만이 씻겨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항상 병존해야만 했다. 그래서 바울도 "너희가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이 두 가지를 함께 연합하셨다. 고로 우리도 이 두 가지를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안 된다. 이 두 가지는 우리 구세주의 관통된 옆구리에서 흘러 나왔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는 우리가 의롭게 되는 특권을 받았으며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성령과 은혜를 받았다. 우리에게 전자(의롭게 됨)가 필요한 것처럼 후자도(거룩하게 됨)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다(고전 1:30).

b. "피와 물"은 세례와 주의 만찬 이 두 가지 아름다운 규례의 전조가 되었다. 이 두 규례에 의하여 믿는 자들에게 여러 가지 유익함이 주어지고 보장되고 믿는 자들로 유익함을 얻기에 적합하게 해 준다. 그런데 이 규례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 것이요, 그를 통해서만이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를 "씻어서 다시 나게 해 주는" 물은 그리스도의 정면이 아닌 측면에서 흘러 나왔다. 또한 양심을 회복시키고 영혼을 새롭게 하는 것은 포도즙으로 상징되는 피가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인 것이다. 이제 반석이 갈라졌고(고전 10:4) 샘물이 터졌다(슥 13:1). 이제 구원의 우물이 파진 것이다(사 12:3). 그리고 여기 "우리 하나님의 성을 기쁨으로 채울 시내"와 강이 있는 것이다.

Ⅳ. 이 사실이 참됨은 목격자(3절), 곧 본 복음서 기자 자신에 의해 입증되었다.

1. 그가 이 사실에 대하여 증거한 증거는 충분한 것이었다.

(1) 그가 기록하여 전한 내용은 직접 그가 본 것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풍문을 통하여 들어서 또는 자신의 추측에 의하여 기록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이 일의 목격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한 것이라"(요일 1:1; 벧후 1:16)하였고 누가는 "그 모든 일을 자세히 미루어 살폈다"(눅 1:3)고 하였다.

(2) 그는 본 것을 신실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신실난 증인으로서 그는 진실을 말하되, 진리 전체를 말해 주었다. 그는 입의 말로써 이 사실을 증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in perpetuam relmemoriam - 즉 영원한 기념이 되기 위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3) "그의 기록"은 틀림 없는 "진실"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 사실을 자신의 개인적 지식과 관찰을 통하여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이끄시는 진리의 성령의 지시에 의해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4) 그는 자기가 기록한 것의 진실성에 대하여 스스로 확신을 지고 있었다. 그는 자기는 믿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믿도록 설득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자신이 진실을 말하였음을 확신하였다."

(5) 그는 이 사실들을 "우리를 믿게 하기 위하여" 증거하셨다. 그는 자신의 만족이나 그의 친구들의 사적용도만을 위해 단순히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아니하였고 세계에 전파하려고 기록하였다. 또한 그는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거나 자신의 지혜를 스스로 즐기려한 것이 아니고 사람들로 자신들의 영원한 번영을 위하여 복음을 믿게 하려고 기록하였다.

2. 이 특별한 내용을 기록하는 일에 본 복음서 기자가 보인 깊은 배려. 그는 우리로 그리스도의 죽음의 진실성을 확신케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심장의 피 곧 그의 생명의 피가 흘러 나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 사실을 증거하여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두려움을 몰아내자. 그리고 "그들이 불의할지라도 멸절당하지 아니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소망을 고무해 주자. 우리가 멸절되지 아니할 것은 그리스도의 관통된 옆구리에서 흘러 나온 물과 피가 우리를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누가 "이 사실을 어떻게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을 본 자가 기록하여 전해 주었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Ⅴ. 이 모든 사실 속에 이루어진 성서의 성취(36절). 그러므로 본문에 "이 일이 이룬 것은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다. 이로써 구약의 영예가 보존되고 신약의 진실됨이 확고해지게 된다. 본문에 성서가 성취된 두 가지 사실이 기록되고 있다.

1. 그의 다리가 꺾이지 않고 보존됨으로 성서의 약속이 성취되었다. 즉 "그의 뼈가 상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

(1) 이 약속이 모든 의인들에게 주어진 약속이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의인(義人)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라고 말씀된 것이다(시 34:20). 다윗도 성령으로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요"라고 말한다(시 35:10).

(2) 유월절 어린 양에서 본문의 유형이 나타나고 있다. 본문에서는 특별히 이 어린 양을 말하려고 한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 인용된 말씀은 출애굽기 12장 46절로써 거기서 "뼈를 꺾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고 이 내용이 민수기에서 반복되어(민 9:12) "너희는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라"고 하였다. 이 율법을 만든 분의 의도는 율법 자체ㅏ 당신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이 유형은 한 원형을 지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고린도 전서 5장 7절에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으니라" 하였고 그는 곧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1:29)고도 하였다. 그는 참된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그의 뼈는 꺾이지 않고 보존된 것이다. 고로 이 계명은 요셉이 자기 뼈에 대하여 미리 말한 것처럼(히 11:22)예수의 죽으실 때 그의 뼈에 관하여 주어진 말씀인 것이다.

(3) 이 사건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몸의 힘은 뼈에 있다. 히브리어로 뼈는 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뼈가 하나도 꺾임을 당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그가 연약함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하셨지만" 구원하는 그의 힘은 손상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죄는 그것이 다윗의 뼈를 상하게 하였듯이(시 51:8) 우리의 뼈를 상하게 한다. 그러나 죄가 그리스도의 뼈를 상하게 하는 못하였다. 그는 무거운 멍에를 메고도 확고히 서실 수 있었으며 구원하는 능력을 이루시었다.

2. "그의 옆구리를 찌름으로 성경이 응하였다"(37절). 고로 본문에 "저희가 그 찔리운 자를 보리라" 하였다. 스가랴 12장 10절에도 같은 말씀이 쓰여지고 있다. 거기 보면 은혜의 성령을 부어 주시고 또한 바로 거룩한 예언자들의 하나님이 "그들이 나를 바라 보리라"고 하셨는데(한글 개역에는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로 되어 있다) 이것이 본문에서 그리스도에게 적용이 되어 "저희가 그를 바라 보리라"고 하였다.

(1) 스가랴의 말씀은 본문에서는 메시야가 찔림을 당할 것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말씀은 여기서 "그의 손과 발이 찔린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이상으로 성취되고 있다. 그는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의 거민들에 의하여" 찔림을 당하셨고 스가랴 13장 6절의 말씀처럼 "그의 친구들의 집에서 상처를 받으셨다."

(2) 스가랴 서에 "성령이 그들에게 부어지면 그들이 그를 바라보고 애통할 것"이 약속되고 있다. 이 말씀은 그를 배반한 자들과 죽은 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그를 믿게 됨으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또한 이 말씀은 자비 속에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받게 될 때" 더욱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 또한 불신앙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진노 가운데 "그들이 찌를 그를 볼 것이요, 또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라"(계 1:7)과 하였다. 이 경우는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이같이 우리 모두가 주 예수를 찌른 죄를 지었으므로 애정을 가지고 그를 바라보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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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장례(요 19:38-42)

본문에는 우리 주 예수의 복된 몸이 장례되는 내용이 설명되고 있고 일반적으로 위대한 인물들의 엄숙한 장례식은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 본다. 반면에 사랑하는 친구들의 장례식에 참여할 때 사람들은 슬픔과 관심 속에서 거기 참여한다. 그런데 여기 독특한 한 장례식을 와서 보라! 결코 이러한 장례식은 일찍이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와서 보라! 무덤을 정복하고 죽음을 종식시킨 장례를! 또한 모든 신자들을 위하여 죽음을 미화시키고 죽음을 무력하게 한 장례를! "이제 우리도 곁에 서서 이 놀라운 광경을 바라 보자."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Ⅰ. 예수의 시체에 대한 요구(83절). 이 요구는 "라마 또는 아리마대의 요셉"의 배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전 신약 성서의 내용 중에 그에 대하여 언급된 곳은 모든 복음서 기자들이 기록한 그리스도의 장례에 대한 기사밖에서 찾아 볼 수 없다. 본문에서는 이 요셉이 주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1. 요셉의 특성. 그는 예수의 제자였다. 그러나 incognito - 즉 은휘된 제자였다. 하지만 그는 기꺼이 그의 제자임을 공언한 사람들 이상으로 그리스도에게 가까운 친구였다.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명예로 알았다. 저명한 인사들로서 나쁜 자들과 불가피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요셉과 같은 사람들이 여러 명이 있다. 그러나 그가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해야 했을 때, 이를 감추려고 하였음은 그가 연약하였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그는 비록 그리스도를 고백하므로 그의 지위를 상실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했어야 했을 것이다. 제자들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혀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은휘되었지만 성실히 그의 제자 역할을 감당한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계셨다. 사실 요셉보다 철저히 은휘된 보다 좋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어려움이 있을수록 더욱 강하고 담대해졌다. 작은 시련에는 소심하나 시련이 커질수록 더욱 용감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요셉이 그러한 인물이었다. 그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곧 그들이 그를 회당에서. 최초로 산헤드린에서 출교할까봐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애정을 감추었다. 그것이 유대인들이 그에게 취할 수 있는 조치의 전부였다. 그는 총독 빌라도에게는 "담대하게 나아갔느냐" 아직도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였다." 현명하고 지혜있는 사람들도 비난과 악담과 소요밖에 부리지 못하는 자들의 무기력한 악의를 우리가 생각하기 보다 더 무서워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2. 이 사건에서 그가 담당하였던 역할. 그가 빌라도에게 나아가 요구한 것은 시체 처분을 자기에게 맡겨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어머니나 가까운 친척들은 이러한 일을 계획할 만한 정신이나 또 관심도 없었다. 그의 제자들은 여기에 없었다. 그러니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유대인들이나 또는 병사들이 그를 강도들과 함께 매장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신사를 세워서 이 일을 처리하게 하셨다. 또한 이로써 성서를 응하게 하셨다. 또한 예절있는 그를 세워 예수의 다가오는 부활을 옹호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일을 하고자 하실 때는 그 일을 감당할 적당한 인물을 찾으시며 또 감당할 힘을 그들에게 주신다. 이 사실을 그리스도의 겸비의 한 실례를 생각해 보자. 한 이방의 재판관에 의해 그의 시체는 좌우되어야 하는 입장에 있었고 또 이를 장사지내기 위해서는 그에게 간청을 해야만 하였다. 또한 요셉도 총독에게 요청을 하여 그이 허락이 떨어지기까지는 그리스도의 몸에 손을 댈 수 없었던 것이다. 관권이 관련된 이러한 문제에 직면할 때 우리도 관권에 경의를 표해야만 하며 온건하게 그것에 복종해야만 한다.

Ⅱ. 예수의 시체의 방부 보존을 위한 준비(39절). 이 일에 대한 준비는 또 다른 실력가이며 공적 지위에 있는 니고데모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는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져 왔다. 어떤 이들은 이 물건이 시체를 보존하기 위하여 매우독한 성분을 지닌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다른 이들은 시체에 향기를 내기 위하여 이 물건이 향기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라.

1. 니고데모의 특징. 그의 특징은 대부분 요셉의 경우와 유사한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추종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은밀한 친구였다. 처음에 니고데모는 "밤에 그를 찾아 왔었다." 그러나 지금은 7장 50,51절에서처럼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의 편임을 자처하고 나섰다. 처음에는 상한 갈대와 같이 내리던 은혜가 단단한 백향목처럼 되었고 떨던 어린 양이 "사자처럼 용감하여졌다." 로마서 14잘 4절을 참조하라. 그런데 이렇게 관심이 있었던 요셉과 니고데모가 일찍 이 일에 개입하여 빌라도가 그리스도를 정죄하지 말도록 간청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특별히 빌라도가 이 일에 손대기를 꺼리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사실 예수의 생명을 구하려고 간청하는 것이 그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보다 더 고귀한 봉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그의 때가 이르렀을 때 그의 친구들 중 누구도 그의 죽음을 방해하기 위한 시도를 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였을 것이었다. 또한 그의 기소자들이 성경을 성취하려고 할 때,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자들이 그것을 저지하지 말아야만 했던 것이다.

2. 니고데모가 베푼 호의. 그의 호의는 요셉의 경우와는 다른 성격의 것이었지만 주목할만한 것이다. 요셉은 그의 부동산으로 그리스도를 섬겼고 니고데모는 돈으로 그를 섬겼다. 아마도 그들은 서로 한 사람은 빌라도의 허가를 또 한 사람은 향수를 준비하도록 합의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시간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이 일을 서둘러서 하였다. 그러면 왜 그들은 그리스도의 시체 처리에 수고를 이끼지 아니하였는가?

(1) 어떤 이들은 이 사실 속에서 그들의 신앙의 연약함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가 삼일만에 살아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면 이러한 염려와 희생을 그들이 치루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이러한 확고한 신념은 모든 향료보다 더 기쁘게 주님에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무덤에 오래 거해야 할 시체라면 옷을 입힐 필요가 있었으리라. 그러나 여행자처럼 "하루 이틀 밤 묵고" 떠나야 할 분에게 이러한 무덤의 치장물이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는 생각이다.

(2) 여하간 우리는 이 사실 속에서 그들의 사랑의 힘을 명백히 볼 수 있다. 그들은 그의 인격과 교훈에 크게 가치를 두었다. 그리고 그들의 그에 대한 존경은 십자가의 능욕에 의하여서도 경감되지 아니하였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모독하고 그의 명예를 진흙 속에 짓밟아 버리려고 부산을 떤 저희들은 저희의 수고가 헛된 일이란 사실을 미리 알았어야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고난 가운데 있는 그를 명예롭게 하셨고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심지어 훌륭한 사람들까지 그를 명예롭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장사하는데 관대한 경의를 표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위층들에게도 명예로운 경의를 보여 주었다. 이것을 한 것은 그들에게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그의 부활도 믿고 바라야 했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부활에 대한 믿음과 기대 속에서 이 일을 했어야 했었던 것이다. 하여간 하나님이 예수의 몸을 높이려고 했기 때문에 그들이 그의 사체에 경의를 표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도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우리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리고 남는 문제는 하나님에게 맡겨 자신의 방식과 시간 계획 속에서 그의 약속을 실현시키시게 하자.

Ⅲ. 예수의 시체의 인수(40절). 그들은 인접한 한 집으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갔다." 그리고 시체에 묻은 피와 먼지를 씻어 낸 다음 "세마포로 정성스럽게 싸아서" "유대인들의 장례의 관습에 따라" 또는 (하몬드 박사가 말한 것처럼) 미이라화하기 위하여 그 시체를 말려서 연고로 만든 향유 속에 담구었다.

1. 그리스도의 시체에 대한 배려를 고찰해 보자. 그들은 "예수의 시체를 세마포로 쌌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입은 옷 가운데서 수의까지도 입으셨다. 이는 우리로 가벼운 마음으로 수의를 입을 수 있게 하시기 위하여 또 우리가 수의를 태연하게 혼인 예복이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친히 그것을 입으셨다. 그들은 예수의 시체와 그의 수의까지 "몰약과 침향 향기로 진동하도록 향품을 넉넉히 사용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향품은 "상아궁"에서 나온 것이었다(시 45:8)고 한다. 그리고 바위를 쪼아 만든 무덤이 곧 상아궁으로 이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었다. 시체와 무덤은 불쾌하고 해로운 것이었다. 그 까닭에 죄가 "시체"와 "열린 무덤"에 비유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희생은 하나님에게 향내나는 제물로써 우리의 지닌 독을 제거하여 준다. 그리스도의 죽으신 몸의 아름다운 향기는 믿음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풍기는 것으로 어떠한 향료도 구세주의 무덤에서 풍기는 향기 이상으로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해 주는 것은 없다.

2. 이 본을 따라 우리도 그리스도인들의 시체를 정성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그렇다고 그들의 유골을 안치하고 숭배하라는 말은 아니다. 저명한 성자나 순교자의 유골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이다(어떤 시체에 대하여서도 그리스도 자신의 시신에 대하여 행한 것처럼 하여서는 아니 된다). 다만 시체는 조심스럽게 다루어 먼지는 먼지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마치 성도들의 시체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가 마지막 날 예비된 영광과 불멸에 참여함을 믿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성도들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시체를 장사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례를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죽으셨으나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라"라고 말씀할 것이기 때문이다(사 26:19). 우리의 죽은 자를 장사함에 있어서 모든 면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장례를 모방할 필요는 없다. 우리도 세마포에 싸여야 하고 동산에 묻혀야 하며 그처럼 방부처리되어 장례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오히려 그리스도가 "유대인의 규례"대로 장례되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이러한 일을 당할 때 미신적인 관습은 제외하고는 우리가 사는 지방의 관습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Ⅳ. 무덤의 선정. 그 무덤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곳 매우 가까이 있는 아리마대 요셉에게 속하여 있었던 동산에 있는 것이었다. 거기 필요할 때 쓰기 위하여 준비된 그러나 아직 사용되지는 않은 아치형 무덤이 있었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그리스도가 성 밖에 묻히셨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의 관습에 의하면 시체는 성 안에 묻지 아니하였다. 회당에 묻는 일은 더우기 없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방법이 우리의 매장 관습(교회뜰에 묻는 구라파 교회의 관례를 말함)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유대인의 관습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무덤을 만지는 것이 율법상 부정이 된다고 그들은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이 무덤의 성격을 변형시키셨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무덤의 부정됨을 제거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시의 관례를 지금도 고집할 필요도 없고 또 무덤을 멀리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사실 죽은 교우들이 교회 뜰에 묻혀 살아있는 형제들에게 둘러싸여 지낸다는 우리의 관례가 더 개선된 좋은 관례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들이 죽어간 이후로 "생의 한복판에 있다고는 하나 죽음을 벗어나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다." 미신으로써가 아니라 신앙으로 예수의 거룩한 묘지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먼저 이 세상의 소요에서 벗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동산에 장사되었다는 점이다. 다음 사실들을 생각해 보자.

(1) 요셉이 자기 정원에 자신의 묘지를 마련하였다는 점. 그가 이 일을 계획한 것은 자신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다.

① 살아있는 동안 스스로에게 경고를 삼고자 하여 묘를 준비하였다. 즉 그가 동산에서 유쾌한 시간을 보내게 되던가 동산의 소출물을 거둘 때 그것을 보고 자기가 죽은 것을 생각하고 서둘러 죽음을 준비하게 하려해서였다. 동산이란 명상을 위하여 적절한 곳이다. 거기 묘지가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적절한 명상의 주제를 제공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와 같은 필부들은 이런 것을 만들어 놓고 즐거운 분위기를 깨뜨리려 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② 그는 자기가 죽었을 경우를 대처 자기의 후손들과 후계자들을 위해 이 무덤을 준비하였다. 우리가 "조상의 묘지"를 자주 찾아 보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가 그들의 묘지와 친근해질수록 죽음을 덜 무서워하게 될 것이다.

(2) 동산에 있는 묘지에 그리스도의 몸이 장사되었다는 점이다. 죽음과 무덤이 처음 자기들의 세력을 장악한 곳은 에덴 동산이었다. 그리고 죽음과 무덤이 정복되고 무장해제를 당하며 패배당한 곳도 동산에서였다. 그리스도의 수난이 시작된 곳도 동산(겟세마네)이었고 그가 부활하고 승천하실 곳도 바로 동산이었다. 그리스도는 "한 알의 밀알로써" 땅에 떨어지셨다(12:24). 이는 그가 씨앗들이 있는 동산 안에 심겨지셨다는 뜻도 된다. 또한 "주의 이슬은 (동산의) 빛난 이슬이라"고도 하였다(사 26:19). 그는 "동산의 샘"이신 것이다.

3. 그리스도가 새 무덤에 장사되었다는 점이다.

(1)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예를 위하여 정해진 것이었다. 그는 범인이 아니시었다. 그러므로 아무 흙에나 묻어서는 아니 되었던 것이다. 처녀의 태에서 태어나신 그는 또한 새 무덤(virgintomb)에 장사되셔야 했던 것이다.

(2) 이것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사실을 확실히 입증하기 위해 예정된 것이었다. 즉 부활하신 것은 예수가 아니라 그가 운명하실 때 여러 성자들이 부활했는데 바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있었다 오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고 또한 엘리사의 유골을 만지므로 부활했던 한 사람처럼 다른 사람의 능력에 의해서 예수가 부활한 것이지 자기 능력으로 일어난 것이라는 생각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신" 그가 새로 만든 무덤에 우리를 위하여 묻히신 것이다.

Ⅴ. 장례식의 엄숙한 집행(42절). 그들은 "예수를 거기에 두었다." 곧 예수의 시체를 거기 안치하였다. 어떤 이들은 본문에서 시체라 하지 않고 예수하고 부른 것은 그의 신성과 인성의 분리될 수 없는 합일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시체라도 그는 "예수 곧 구세주"라는 말이다. 다른 말로 그의 죽으심이 곧 우리의 생명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는 언제나 같으시다는 뜻이다(히 13:8). 그 날은 예비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거기에 두었다.

1. 유대인들이 안식일과 예비일의 차이점을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고찰해 보자. 유대인들은 유월절 중에 끼인 안식일의 전 날을 준비를 위한 엄숙한 날로 지켰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은 자기들이 곧 교회라고 생각하였으므로 이 날을 제대로 지키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이 날은 유대 교회 내에서는 위험한 인물로 낙인 찍힌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의해 준수되었다. 이러한 경우는 흔히 일어나는 법이다.

(1) 그들은 안식일까지 장례를 끌고 가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거룩한 안식의 날이요, 기쁨의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날에 장례를 치루고 슬퍼하는 일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생각하였다.

(2) 그들은 안식일을 위한 예비일 늦게까지 이 문제를 끌고 가려 하지 아니하였다. 안식일전날 저녁 전에 이 일을 저희가 끝낸 것을 보고 이는 안식일을 굳게 지키라는 뜻이라든지 또는 안식일에 일을 할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비약시켜 해석할 필요는 없다.

2. 그들이 편리한 대로 인접한 묘지를 이용했다는 사실을 고찰해 보자. 본문에도 그들이 이용한 묘지가 "가까이" 있었다고 하였다. 만일 그들에게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그를 베다니로 옮겨 거기 그의 친구들 가운데 그를 장사 지냈을 것이다. 나는 예수가 어떤 유대 왕들 못지 않게 다윗 후손들의 묘지에 묻히실 권리가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예수를 가까이 있는 묘에 모시도록 결정된 것이다.

(1) 그 이유는 예수께서 여관에 머무시듯 무덤에 잠시만 머무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처음 제공된 묘지에 장사되셨다.

(2) 본문은 우리의 묻히는 장소에 대해 우리가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지 말 것을 가르쳐 준다. 나무가 뿌리가 뽑힌 그 자리에 누워 있듯이 그리스도도 가까이 있는 묘지에 장사되었다. 족장들이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고 후손들에게 유언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에 대한 믿음을 지시해 주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제 이 약속은 더 좋은 약속에 의하여 대치되었으므로 그러한 수고도 불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같이 예수의 몸은 조촐한 가운데 냉냉하고 고요한 무덤에 누여지셨다. 자! 여기 우리의 빛을 감당하시고 붙들려 대신 죽 시신 분이 있으시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석방되시면 그에 대한 사면은 우리에 대한 사면도 될 것이다. 여기 잠시 누워 계신 의로운 태양이 있으시다. 그러나 그는 큰 영광 중에 다시 부활하사 다으는 무덤에 머물지 않으실 것이다. 여기 죽음에게 노예가 되신 것처럼 보이는 분이 누우셨다. 그러나 그는 죽음의 참된 정복자이시다. 왜냐하면 여기 죽음 자체가 죽임을 당하여 누워 있고 무덤이 정복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에게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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