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2.19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마27.유다의뉘우침.빌라도의심문_군병들의고문_백성들의JC반대_십자가형판결_군병들의희롱.십자가에달리심_수모_운명_장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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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마27장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기다

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유다가 목매어 죽다

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예수를 넘기다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15.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군병들이 예수를 희롱하다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영혼이 떠나시다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무덤에 넣어 두다

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경비병이 무덤을 지키다

62.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63.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65.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66.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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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7장 (개요)

본 장(章)에는 우리 주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매우 애절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사건 자체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보다 더 비극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다. 평범한 사람들은 무죄하고 훌륭한 사람이 이와 같이 욕을 당한 것을 보고 마음이 녹아질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의 계획과 열매를 고려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우리의 허물을 인하여 고난 가운데로 넘겨지신 것은 복음이며, 좋은 소식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보다 더 영광스럽게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본 장(章)에서 몇 가지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Ⅰ. 그는 어떻게 박해를 당하여나 ?

1. 그리스도를 빌라도에게 넘겨 줌(1,2).

2. 유다의 실망(3-10).

3. 그리스도께서 빌라도 앞에서 심문과 고난을 당하심(11-14).

4.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백성의 외침소리(15-25).

5. 선고된 판결. 그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 줌(26).

Ⅱ. 그는 어떻게 집행되었는가 ?

1. 그는 야만적으로 희롱을 당하셨다(27-30).

2. 집행 장소로 끌려가심(31-33).

3. 그는 거기에서 갖은 모욕과 비난을 당하셨다(34-44).

4. 하늘이 그에게 험상궂은 얼굴을 지었다(45-49).

5. 그의 죽음에 수반된 여러 가지 두드러진 일들(50-56).

6. 그는 장사되었고 파숫군이 무덤을 지킴(5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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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가 뉘우침(마 27:1-10)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붙잡히셔서 공의회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그들의 이빨만을 드러내 보였을 따름이다. 

이 일이 있기 약 2년 전에 로마인들은 주요한 형벌집행에 대한 권한을 유대인들에게서 빼앗아 버렸다. 그들은 누구도 사형을 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아침 일찍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위하여 또 다른 회의가 소집되고 있다. 

그들이 두 세 시간을 자면서 곰곰히 생각하고 난 다음에 그 아침 회의에서 어떤 일이 행해졌는가를 우리는 여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Ⅰ. 그리스도가 빌라도에게 넘겨진 것은 빌라도로 하여금 그들이 내린 사형 언도를 수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유다 나라는 이 일이 있기 약 100년 전에 폼페이에 의해 정복이 되었고 그 이래로 로마에 예속되어 있었으며 또한 최근에는 수리아 지방에 예속된 영토가 되어 수리아의 총독의 지배를 받았으며, 수리아의 총독 아래에는 주로 "세금" 받는 일을 관장하였던 몇몇 "집행관"들이 있었는데, 종종 특별히 빌라도와 같이 모든 일을 주관하는 전권을 가진 자도 있었다. 이것은 야곱의 예언대로 "홀이 유다에서 떠나고" 지금은 "실로가 와야만 하는" 분명한 증거였다(창 49:10). 

그 당시의 로마인 저술가는 빌라도가 거칠고 교만하며 사악하고 무자비하고 또한 큰 탐욕을 가지고 있고 억압적인 사람이라고 특징을 지우고 있다. 

유대인들은 그에 대하여 큰 적개심을 품고 있었으며 또한 그의 통치에 피곤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빌라도를 그리스도를 거스리는 그들의 사악함에 대한 한 도구로 사용하였다.

1. 그들은 예수님을 "결박하였다." 

그는 맨 처음 붙잡히셨을 때 결박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공회 앞에 섰을 때 이러한 속박들을 풀어 주었었으나 지금 다시 그를 결박하였던 것이다. 

그가 유죄임이 선고되었으므로 그들은 흔히 죄수들에게 하듯이 그의 손을 뒤로 묶었다. 그는 이미 사람에게 대한 사랑의 줄로 묶이었으며 또한 그 자신의 임무의 줄에 묶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곧 삼손이 했던 것처럼 이러한 속박들을 즉시 끊어버리셨을 것이다. 

우리는 "불법의 차꼬"에 채워졌으며, 우리의 죄의 줄에 묶이었다(잠 5:2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범죄의 멍에"를 주 예수님의 목에다 매셨다(애 1:14). 

이는 우리로 하여금 "그의 채찍으로 말미암아 나음"을 입은 것 같이 그의 속박으로 말미암아 해방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2. 그들은 의기양양하게 "도살장으로 끌고 가는 양과 같이" 그를 끌고 갔다.

이와 같이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다"(사 53:7, 8). 

가야바의 집에서 빌라도가 있는 곳까지는 거의 일마일 정도가 되었다. 그들은 그를 세상의 조롱거리로 삼기 위하여 아침에 사람들이 법석거리기 시작할 때 예루살렘 거리를 지나 요소 요소를 거치면서 그를 끌고 갔다.

3. 그들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종종 그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은 다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모두 "죄 아래 놓여져 있음이 판명되었다."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세주가 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다같이 심판을 하시려고 오셨으며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은 그의 사망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타락한 교회 지도자들은 국가의 통치자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불의한 법령들을 수행하도록 하며 또한 "불의한 말을 기록하도록 하였다"(사 10:1). 

(이와 같이 교황권에 속한 자들은 이단자로 낙인찍은 자들이 옳건 그르던간에 자신들의 편견대로 판결해 버린 다음, 지상의 왕들이 전쟁의 칼이나 공의의 칼로 그들을 제거하는 수고를 맡아 하도록 책임을 떠 넘겼다.)

Ⅱ. 그들이 그리스도를 파는 대가로 지불하였던 돈은 그에 의하여 도로 그들에게로 넘겨졌으며, 또한 유다는 실망한 나머지 목매어 죽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그리스도를 박해하디 위해 그의 제자가 그리스도를 자기들에게 팔도록 매수하였다. 그러나 지금 박해를 진행하는 도중에 그 끄나플(유다)은 그들에게 실망을 주었고, 유다 역시 [무죄한 자를 넘겨주었다고 고백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무죄함을 나타내는 "증인"이 되었으며 또한 하나님의 공의의 기념물이 되었다. 이것은,

1. 그리스도께서 박해를 받고 있는 도중에 그를 영광스럽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또한 유다에게 들어갔던 사탄을 정복한 것을 나타내는 조짐이 되었다.

2. 그의 박해자들에게 경고를 주고 그들로 하여금 더욱 변명할 수 없도록 하였다. 

만일 그들의 마음이 이러한 악을 행하는 데 완전히 굳어있지만 않았다면,(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유다가 말하고 행한 것을 보고 자신들의 박해를 마땅히 멈추었어야만 할 것이다.

(2) 여기에서 유다가 어떻게 "뉘우쳤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뉘우치고 믿고 용서받은 베드로와 같지는 않았다. 아니 그는 뉘우치고 실망하고 멸망을 받았다. 여기에서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① 무엇이 그로 하여금 뉘우치게 하였는가?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께서 정죄됨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유다는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그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최소한 그가 재판정의 정죄판단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변명하실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명예를 얻고, 유대인들은 수치를 당하나 그는 돈을 벌게 되고, 그밖에 아무런 해됨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유다의 이러한 기대는 사실상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종종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것을 (직접)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미리 여러번 그리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그렇게 되리라 예상하였지만, 그 일이 자기의 상상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불가항력의 피할 수 없는 거센 물줄기가 그리스도에게 몰아쳐서 그를 휩쓸어 가버리는 것을 보았을 때 두려움과 경악 가운데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의 법을 따름보다는 (육적 지레짐작과 추측으로 섣부르게) 행동한 바, 나타난 결과로  행동의 가치를 재단하려는 자들은 자신들의 추정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죄의 길은 내리막길이다. 만일 그 내리막길에서 섣불리 행동하기전에 우리가 자신들을 멈추지 못한다면, 함께 죄악된 길로 나섰던 다른 사람들조차 멈추게 할 수는 없다.

그는 "스스로 뉘우쳤다." 즉, 그는 자신이 행했던 일을 회상해 볼수록 스스로 화가 나고 슬픔과 고뇌와 분노가 차오를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주님을 배반하도록 유혹을 받았을 때, "포도주가 붉을 때 컵에 그러한 색깔을 띠게 하는 것과 같이" 은 삼십은 매우 훌륭하고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그 일이 걷잡을 수 없게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대가로 받은 그 은(銀)은 쓰레기가 되었으며, 그것은 "뱀과 같이 그를 물었고 독사처럼 쏘았던 것이다." 

이제 그의 양심은 그에게 정면으로 대들었다. "내가 무엇을 했던고 ! 이러한 사소한 일 때문에 나의 주님과 그 안에 있는 나의 모든 위로와 행복을 팔아버리다니 나는 얼마나 어리석고 나쁜 사람인가 ! 그에게 행해진 이러한 악행과 모욕을 이제 내가 받아야만 한다(나에게 책임이 있다). 그가 결박을 당하고 정죄를 받고 침뱉음을 당하고 희롱을 당하신 것은 나 때문이다. 내가 그 악한 계약을 맺었을 때 나는 이러한 일이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나는 어리석고 무지하며, 짐승과 같은 자였구나."

이제 그는 자신이 가지고 다니는 돈주머니와 그가 좋아하던 돈과 그가 상대한 제사장들과 그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있다. 그가 그렇게도 비열하게 내버렸던 자신에게 대한 주님의 선하심과 그가 걷어차 버렸던 자비의 그릇들, 그가 업신여겼던 명확한 경고 등을 생각하면 그의 죄책감은 더욱 커져만 갔으며, 더욱 마음을 찔렀던 것이다. 이제 유다는 그의 주님의 말씀들이 진리임을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 죄는 즉시 그 맛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그것이 "맛있는 음식물"과 같이 "혀 밑에 감춘다" 할지라도 뱃속에서는 "독사의 쓸개"가 될 것이다(욥 20:12-14). 이것은 요한 2계시록(계 10:9)에 있는 것과 같다.

② 그의 뉘우침의 표식은 어떤 것이었는가?

첫째, 그는 받은 돈을 반환하였다. 

유다는 그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에게 도로 가져다주었다." 

지금 그 돈은 그의 양심에 화인 맞게 했던바, 그가 그 돈을 받았을 때  그것은 이미 병들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악하게 얻어진 것은 그것을 얻은 자에게 결코 좋은 것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렘 13:10; 욥 20:15). 

만일 그가 그리스도를 팔기 전에 뉘우치고 그 돈을 도로 가져왔더라면, 그는 즐겁게 그 일을 행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길에서 사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도로 물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으며, 그는 아무일 없던 것처럼 되돌릴 수는  결코 없다. 그래도 유다는 그것을 도로 가져왔다(약 5:3).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불의하게 얻어진 것을 성소에 결코 넣어둘 수는 없기에 원주인에게 반드시 반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범죄를 계속하는 것과 다름없으며 그것을 자백하는 것이 회개 하는 것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이 그것을 취하였던 자에게로 도로 가져다 준 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계약한 것을 뉘우친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데 조력을 하거나 권고를 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케 하실 때  죄에 동참했던 자들에게 회개케 하는 수단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바로 그 자신이 그것을 고백하여 권고함으로써 알게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둘째, 그는 고백을 하였다(4절).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1.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그는 그의 피가 "무죄하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어떤 죄악된 행동을 범하였다면, 그의 제자인 유다는 분명히 그것을 알았을 것이며, 배반자인 그가 분명히 그것을 찾아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그리스도에게 정죄한 자들에게 그가 무죄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2. "자신의 수치"를 무릅쓰고 유다는 자신이 이 무죄한 피를 팔음으로써 범죄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고 있으며, "너희가 나를 그렇게 하라고 시킴으로써 범죄하였도다."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 그는 그 모든 죄가 자신에게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내가 그 일을 함으로써 범죄하였도다." 

이와 같이 유다는 회개에로 많이 접근하여 갔지만 그것이 "구원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그는 제사장과 장로들에게 가서 죄를 고백을 했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나아간 것이 아니었으며 하나님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얻었습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았다. 그는 비록 무죄한 피를 팔았다고 고백을 하였지만 이러한 악행의 뿌리가 되었던 돈에 대한 사악한 사랑까지를 고백하지는 않았다. 

한편, 그리스도를 배신하고도 자신이 의롭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유다만도 못한 자들이다.

(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유다의 회개를 듣고 어떻게 대하였는가? 

그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고 말하였다. 그는 (어리석었다!!)그들을 자신의 참회의 대상자로 삼았으며, 바로 이 말이 그들이 그에게 "면제"를 해 준 내용인 바, [네가 당하라!!는 말을] 곰곰히 그 뜻을  되새겨본다면 그들은 [중보의 역할을 담당허는] 거룩하신 산 하나님의 제사장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마귀의 제사장들과 흡사하다는 느낌을 나타내고 있다 할 수 있다.

① 그리스도를 배신한 것에 대하여 그들은 얼마나 경솔하게 말을 하였는가? 

유다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피가 무죄한 피였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하였다. [실상은 그들이 마음으로부터 그리스도를 잡아죽이려느려 했었던 바 먼저] 그들이 이 피에 굶주렸기에 수소문하였던 바 유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팔도록 종용하였고 지금 그 피를 불의하게 흘리도록 정죄를 하고서도 그것이 그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진정 유다의 고백이 그들로 하여금 그를 더 이상 불의한 자로 몰아 죽게 하는 죄악을 멈추도록 하는 데 거리낌을 불러 일으키거나 또는 이 의로운 사람에게 이러한 악행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경고가 될 수는 없는가? 

보라, 이와 같이 심중에(목전에) 하나님이 없는 어리석은 범법자들은 악행을 하고서도 마치 전혀 해악이 행해지거나 그럴 위험조차 없었던 것처럼 오히려 범죄 사실을 비웃는다. 

이와 같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와 그 감찰하심을] 경시(소홀)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범죄케 만든다. 함정에 빠져든 유다, 그리고 묵묵히 십자가를 담당하시는 그리스도ㅡ 그가 이러한 일들을 당한 것이 그들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② 유다의 범죄에 대해 그들은 얼마나 경솔하게 말하고 있는가? 

유다는 "내가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우리들에게 말한 네 죄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죄, 특히 우리가 어느 정도 접근해 있거나 또는 관여하고 있는 그러한 죄들을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실로 어리석은 일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모욕을 당하시며 영혼들이 상처를 입되, 사탄이 만족하게 되고 그의 이해 관계가 충족되는 바, 우리가 그것을 거들고 선동한 사실이 우리와 아무런 상관도 없단 말인가? 

만일 이스르엘의 장로들이 이세벨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나봇을 죽였다면 그것은 아합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가? 그렇다. 아합, 그는 "재물을 탈취하기" 위하여 "나봇, 그를 죽였다."(왕상 21:19). 죄를 범한 것은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변경시킬 수는 없다. 

만일 그리스도를 죽이는 그 일이 도중에 잘못되었더라면, 그들은 분명히 유다에게 그것을 "책임지라"고 했을 것이다.

첫째, 왜냐하면 그가 그들에게 주님을 팔아 넘겼기 때문이다. 

그의 죄는 실로 "큰 죄"(요 19:11)였다. 그렇다고 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들의 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의 죄가 더욱 커짐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의 죄가 경감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 속임수로 가득차 있다는 하나의 좋은 본보기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진리로 행해지며, 비교에 의해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누구나 하나님앞에서는 단독자로 서야 한다!!]

둘째, 왜냐하면 유다는 그가 무죄하다는 것을 알고 믿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무죄하다고 하면 우리가 아는 것보다는 너나 그것을 알도록 하라. 우리는 그가 유죄하다고 선고하였으며, 그러므로 그를 이와 같이 박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주님보시기에 당연히] 사악한, 죄된  행위들은 [세상의] 사악한 원칙들, 즉 "죄는 그것이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죄인 것이다" 라는 [세상] 원칙들에 의해서만 지지가 된다고 세인들은 말하고 싶어한다. 다시 말하자면 아무리 선한 사람도 [세상이] 악인으로 [설령 오해함으로써 세상이 잘못] 생각한다면 (판단한다면)그를 박해하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니라는 이론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하나님을 조롱하려고 생각하는 자들은 자신을 속이고 파멸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③ 그들은 유다가 당하고 있는 죄책과 두려움과 후회에 대해 너무도 무관심하게 말하고 있다. 

그들은 죄를 짓게 하는 데는 그를 기꺼이 이용하려고 하였으며, 그 때에는 그를 매우 좋아하였다. 

유다가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고 말했을 때 그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자신이 놀라고 있는 지금에 이르러 그들은 그에게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었으며, 오히려 그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을 외면하고 말았다. 

왜 그는 그의 우울한 상상을 가지고 그들을 괴롭게 하려고 찾아 왔는가? 그들은 유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보다 더 시급히 해야할 일들을 가지고 있었다. 

왜 그들은 꽁무니를 빼려고 했는가?

첫째, 아마도 그들은 유다가 회심한 것이 하나의 불티가 되어 그들에게로 다가와 그 자신의 양심에 불을 붙이게 될까봐 두려워하였으며, 또한 그의 신음소리가 그들의 죄책감에 대한 하나의 경종이 될까봐 두려워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완고한 죄인들은 죄를 깨닫게 될까봐 조심을 하며 또한 완고하게 회개치 않으려는 자들은 회개한 자를 멸시한다는 사실이다.

둘째, 어쨌든 그들은 유다를 후원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유다를 덫에 걸리게 했을 때 그대로 내버려두었으며, 오히려 비난과 조소로 냉대하였다. 반역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반역자를 미워한다는 것은 흔히 있을 일이다.

(3) 이로 말미암아 유다는 완전히 실망하게 되었다. 

만일 대제사장들이 박해를 중단하겠다고 약속했더라면 그것은 어느 정도 그를 위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미가 보이지 않으므로 그는 완전히 실망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5절).

① "그는 은을 성소에 던져 넣었다."

대제사장들은 그 돈을 취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렇게 함으로서 범죄의 책임을 전적으로 그들이 지게 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돈을 받고 그리스도를 넘겨준 책임을 유다가 지기를 원하였지만, 유다는 그것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돈조차 그에게 너무나 뜨거운 것이어서 도저히 그것을 가지고 있을 수도 없었다. 따라서 유다는 제사장들이 그것을 받듣지, 안받든지 간에 그들의 손에 떨어지도록 하기 위해 성전에 던져 놓았다. 

범죄가 덧붙여지거나 그렇게 생각이 될 때 그 돈은 얼마나 큰 마약이 되고 말았는가 !

② "그는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첫째, 그는 "물러갔다". 

그는 귀신에 의해 광야로 이끌려 갔던 귀신들린 사람(눅 8:29)처럼 한적한 곳으로 물러갔다. 실망하여 홀로 있는 자에게는 화가 미칠 것이다. 만일 유다가 그리스도나 또는 제자들 중의 어떤 사람에게로 갔더라면 아마도 그는 비록 그 처지가 좋지 못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구출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제사장에게서 실망을 느꼈을 때 유다는 완전히 자신을 포기하고 말았다. 유다를 죄 가운데로 빠지게 하는 일에 있어서 제사장들을 조력했던 바로 그 마귀는 역시 그를 도와 절망 가운데로 빠지게 하였다.

둘째, 그는 그 자신의 집행관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그는 슬퍼서 "질식하였다"고 하몬드 박사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휘트비 박사는 우리의 번역이 옳다고 말한다.) 

유다는 죄를 "알고 느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불법으로 파리해졌다." 

아마도 그의 죄는 원래부터 용서함을 받지 못하는 죄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죽이는 데 가담한 사람들 중에도 구원받은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는 가인처럼 자신의 불법이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비보다는 차라리 마귀의 자비에 호소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유다는 주님의 피를 판 것보다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하여 "실망"하는 죄를 범하였다고 하였다.)

이제 전능자의 두려움은 유다를 대적하기 위하여 정렬을 하였다.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들은 그에 관하여 미리 예언된 것처럼(시 109:18, 19). "물같이 그 내부에 들어가며 기름같이 그 뼈에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지옥"을 피하기 위하여 피신을 하려고 했으며 완전히 이 두려움과 실망에 둘러싸여 있어서 그 곳을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다 쓰려고 했다. 그는 불꽃을 피하기 위하여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사람이 안락을 위해 지옥으로 가야만 하는 것은 실로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1. 사단이 들어간 사람, 

특히 돈을 전적으로 사랑한 사람의 비참한 말로를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파멸에 이르게 된 동기이다(딤전 6:9, 10). "귀신이 들어간" 돼지나 또는 배신자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기억하도록 하자. 그리고 "귀신(마귀)에게 거처할 곳을 주지 말도록 하자."

2. 하나님의 진노가 경건치 못한 자와 불의한 자에게 하늘로 쫓아 나타나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롬 1:18). 

베드로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죄인이 회개할 때 하나님의 선하심과 또한 그리스도의 은혜의 승리를 찾아 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유다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죄인들이 타락할 때 하나님의 엄격함과 또한 그리스도의 능력과 공의가 승리하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사탄이 들어간 유다가 이와 같이 "목을 매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마귀가 "무력해 지도록 무장해제 시키시고" 정사와 권세를 십자가로 이기시고 사로잡아 구경거리로 전락시켜 버리시고(골 2:15).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되심을 나타내셨다.(골2:10)

3. 실망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살펴 볼 수 있다. 

실망은 종종 사람으로 하여금 자살하게 만든다. 죄에 대한 "근심"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하지 않는다면 가장 처참한 "사망을 이루게 된다"(고후 7:10). 

"누가 상처받은 심령을 견딜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우리가 죄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할 수 있는 대로 죄에 대하여 나쁘게 생각하도록 하자. 

우리 스스로는 도움을 줄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도움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자신의 생명을 끊음으로써 자신의 양심을 편안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제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하여금 최악의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자살하는 것은 비록 이방의 도덕주의자들 중의 어떤 사람에 의해 기술되었지만 병이 아무리 악화된 것이라 할지라도 분명히 그 병보다 더욱 나쁜 치료약이다. 공황발작의 입구인 바, 우울증이 시작되는가를 면밀히 살피도록 하자. 그리고 주여,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도록 하자.

(4) 유다가 도로 가져 온 돈을 처분함(6-10절). 

그 돋은 "토기장이의 밭"이라고 불리우는 밭을 사는데 사용되었다. 그렇게 불리운 것은 어떤 토기장이가 그것을 소유했던지, 아니면 그 근처에 살았던지, 또는 토기 그릇이 그곳에 버려졌기 때문이다. 이 밭은 나그네, 즉 유대교의 개종자를 위한 매장지였었는데, 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었지만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죽은 자들이었다.

① 그들이 "나그네의 묘지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그들의 인간성의 한 실례를 보여 주는 것 같다. 

그것은(사도 바울이 행 24:15 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그들이 인정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우리가 죽은 몸(시체)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것이 이성적인 영혼의 거주지가 될 뿐만 아니라 또 다시 살아 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② 그들이 이방의 나그네들을 자신들의 매장지에 묻을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별도의 매장지에 묻으려 한 것은 그들의 인간성이 결여된 한 실례이다. 

나그네들은 살았을 때나 죽었을 때나 먼 거리감을 두고 떨어져 있어야 했으며, 또한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사 65:5)라는 원칙이 무덤에까지 함께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헷 자손들은 비록 아브라함이 그들 가운데 우거하는 나그네였지만 그에 대하여 호의를 가졌으며, 그들의 최상의 묘지를 그에게 드렸다(창 23:6). 그러나 "주님과 연합한 나그네의 후손들"은 비록 별도로 묻혔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자들과 더불어 함께 일어날 것이다.

이 토기장의 밭을 사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그 날에 있지는 않았다(그들은 그 때에 오직 그리스도를 넘어뜨리는 것 이외에는 마음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그 일이 있은 후 오래지 않아 그 밭을 사는 일이 있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그리스도께서 승천한 후 바로 즉시 그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실이 여기에 기록된 것은,

첫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위선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들은 사악하게 예수님을 핍박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1. 그들은 그들이 배신자를 고용할 때 사용하였던 돈을 성전금고 또는 "고르반"에 넣어 두기를 주저하고 있다. 

아마도 그들은 공공의 유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성전고에서부터 그 돈을 꺼내었으며, 또한 그들은 "고르반"에 대해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었으며 또한 나라의 모든 재산을 그리로 끌어 모으려고 애를 썼던 자들이었지만, 그들은 피의 대가였던 그 돈을 다시 성전고에 넣어두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배신자의 임금이 창녀의 임금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또한 행악자의 가격(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이것을 적용하였다)은 개의 가격과 맞먹는 것이며, 이상의 것들은 어느 것이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올 수"(신 23:18) 없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성전에 대해 큰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는 구실을 붙여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백성들에게 큰 신망을 얻으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자들"이었다.

2. 그들은 비록 자신들이 한 일은 아니었지만 나그네를 위해 묘지를 마련해 주는 공적인 선행을 베품으로써 자신들의 한 일에 속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무지의 때에는 사람들이 번쩍이는 교회건물을 세우고 수도원에 기부금을 희사하는 것이 부도덕성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었다.

둘째, "나그네"와 이방의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도되었던 호의를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의 피의 대가로 죽은 후에 그들을 위한 휴식처가 마련되었다. 이와 같이 많은 고대인들이 이 뜻을 이 구절에 적용하고 있다. "무덤"은 토기장이의 밭이었는데, 여기에는 시체들이 보잘 것 없는 깨진 그릇처럼 내던져졌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피로써 자신을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는 "나그네"로 고백하는 자들을 위하여 그것을 "매입하셨다." 그는(매입한 자들이 하는 것처럼) 그 소유권을 변경하셨으며, 따라서 그 시체나 묘지나 휴식처는 우리의 것이다. 

독일 사람들은 묘지를 "하나님의 밭"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한 알의 밀알"처럼 "심으시기" 때문이다(요 12:24)(호 2:23; 사 26:19 참조).

셋째, 그리스도의 피를 사고 판 자들의 파렴치한 행동을 영구히 보존시키기 위함이다. 

이 밭은 흔히 "아겔다마," 즉 "피밭"이라고 불리웠다. 이렇게 불리운 것은 자신들의 죄를 다시 기억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이 묘지에다 매장하기를 원하였던 대제사장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대제사장은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았지만 유다가 무죄한 피를 팔았던 사실을 인정하였던 사실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 밭에 대한 이 이름을 in perpetuam rei memoriam ─ 즉 영구적인 기념으로 고정시켰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신적인 섭리는 비록 자신들의 수치를 가리려고 할지라도 "영구적인 비난을 받는" 위인들의 사악한 행위에 대해 여러 모양으로 불명예스러운 칭호를 첨가한다는 사실이다.

넷째, 우리로 하여금 성경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보여 주기 위함이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도다." 

이 인용된 말씀은 스가랴의 예언(슥 11:12)에서 발견된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그런데, 어찌하여 이 말씀이 여기에서 예레미야에 의해 말해진 것으로 인용된 것인지 이것은 하나의 큰 난문제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훈에 대한 신임도는 그것에만 의존되지는 않는다. 비록 그 저자의 상황에 따라 약간의 인간적인 것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은 그 자체가 완전히 신적인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고대 수리아역에는 누구의 이름을 언급하지 아니하고 단지 "선지자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라고 읽고 있는데, 그 점에 있어서 어떤 사람은 단어"예레미야"가 어떤 서기관에 의해 [실수로] 첨가된 것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선지서들이 전체적으로 한 권의 책으로 모아졌으며 그 중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맨 처음에 있었으므로 "필사자"(currente calamo)가 그의 이름으로 그 모든 책의 구절들을 인용하였다는 것은 수긍이 갈 만한 견해라고 생각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종종 "예레미야의 영혼이 스가랴에게 있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한 선지자였다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그것은 "예레미야가 말했고" 스가랴가 이를 기록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는 예레미야가 스가랴서 9-10장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선지서에 있는 이 구절은 유대인들 가운데서 볼 수 있는 대로 하나님에 대해 큰 멸시를 했던 것을 나타내는데, 오히려 보잘 것 없이 보였던 것이 큰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정되고]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거기에서는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 여기에서는 실제적으로 적용이 되었다. 돈의 총계가 똑 같다. 즉 "은 삼십"이다. 그들은 그에 대해 매긴 값대로 "그를 파는 대가로" 이것을 달아 주었다. 즉 적절한 가격이었다.  또한 이것은 "여호와의 집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져졌다." 이것은 여기에서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가 성경의 언어와 문자에 대하여 더 잘 알고 있다면 섭리의 사건들도 더 잘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달리는 자도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러한 것들도 때로 섭리의 뜻에 대하여 분명하게 기록되기 때문이다. 

다윗이 비유적으로 말한 것(시 92:7)을 요나는 이를 문자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즉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욘 2:3).

그에 대한 정가된 금액을 그를 위해서가 아닌 "토기장이의 밭을"사는 데 준 것은,

1. 그리스도에게 주어져야만 하는 높은 가격을 나타낸다. 

그 가격은 그를 위하여 주어지지는 않았다. 아니 그것이 그에게 주어졌을 때 무한히 그의 가격을 낮춘 것처럼 불명예스럽게 도로 그에게로 반환되었다. 주님은 "오빌의 금으로도 비교될" 수 없으며, "돈으로 산" 이러한 말할 수 없는 선물로도 비교될 수 없다.

2. 그에게 매겨진 낮은 가격을 나타낸다. 

"이스라엘 자녀들"은 이상하게도 주님을 과소평가 하였으며, 그에 대한 가격은 쓸모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토기장이의 밭을 겨우 살 수 있는 정도의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이렇게 값어치 없이 팔릴 정도로 낮은 신분의 사람임을 나타내는 일종의 비난이기도 하였다. 스가랴에 있는 것처럼, "그것은 토기장이에게 던져라." 즉 값있는 것들을 취급하는 상인이 아닌, 보잘 것 없는 사소한 행상인에게 던지라.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그를 값어치 없이 여겼다. 그들이야말로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더 잘 알고 있었던 그 자신의 백성들이었으며, 또한 그는 그들에게로 맨 처음 보냄을 받았으며 그들에 대하여 그는 높이 평가하여 매우 소중하게 사들인 자들이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왕의 속량물과 부요한 나라들("그는 그들을 존귀하게 여겼다." 사 43:3, 4), 즉 애굽과 구스와 스바를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에 대하여 노예의 속량물(출 21:32 을 보라)을 주었고 토기장이의 밭에 해당하는 가격 정도로 평가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사신 그 피는 발아래 짓밟혀졌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주님께서 명하신 바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같이 이 사건에 상징된 예언적인 환상은 "하나님의 정하신 섭리와 미리 아심에 의한"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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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빌라도의 법정에 서심(마 27:11-25)

우리는 여기에서 훌륭하신 예수님이 아침 일찍이 빌라도의 법정에 끌려오셔서 어떤 일을 당하셨는가를 살펴 볼 수 있다. 비록 재판날은 아니었지만, 빌라도는 즉각적으로 그 앞에서 사실을 심문하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를 살펴 볼 수 있다.

Ⅰ. 그리스도께서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으심.

1. 그의 심문. 

예수님은 재판관 앞의 죄수처럼 "총독 앞에 섰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죄인이 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서거나 그의 면전에서 우리의 얼굴을 들 수가 없었을 것이다. 주님께서 심문을 받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해방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어떤 사람은 이 사실이 그의 용기와 담대성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들의 분노에도 겁내지 않았으며 요동하지도 않으셨다. 그가 이와 같이 이 법정에서 심판을 받기 위해 서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는 나봇처럼 심문을 받으실 때 "사람들 가운데 높이 세움을 입었으며' 구경거리가 되기 위하여 세워졌다.

2. 그이 기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유대인들은 로마의 세력의 지배 아래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엄격한 감시 아래에 놓여져 있었다. 그들은 로마 세력에 대해 몹시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들의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척하였다. 

그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새삼스럽게 인정하는 것 이외에는 그에게 다른 고소할 증거를 찾을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예수님이 가이사에게 원수라고 고소하였다(눅 23:2). 

그들은 생각하기를 그리스도가 누구였든지간에 그는 "유대인의 왕"이 틀림이 없었으므로 그들을 로마의 세력에서 구출해 주어야만 하며 또한 그들에게 일시적인 통치권을 회복시켜 주며 그들로 하여금 이웃들을 짓밟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 자신의 이러한 망상에 의해 그들은 그를 로마의 멍에에 반대하여 유대인의 왕으로 만듬으로써 고소하였다.  한편 주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셨지만 이와 같은 그리스도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를 오해함으로써 그것을 반대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거짓된 구실을 붙여 이를 반대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를 그리스도로 만들고 유대인의 왕으로 만든다면 그 총독은 틀림없이 그가 국가를 전복시키고 지배권을 뒤엎으려고 한다고 생각할 것으로 확신하였다. "네가 왕이냐?" 

그가 실제적으로(de facto)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하였다. "그렇다면 너는 어떤 지배권을 주장하거나 유대인을 다스릴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 마치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가 왕이나 군주를 해하려고 하거나 또는 그둘의 특권을 취하려 하는 것처럼 오해하고 착각하여 국가의 권력들이 사리에 맞지도 않은데 부당하게 의심하려 드는 것은 기독교가 직면한 어쩔 수 없는 힘든 상황이었다는 사실이다.

3. 그의 변명.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네가 말하였도다. --나는 네가 말하는 그러한 뜻에서의 왕은 아니지만 네 말대로 분명히 유대인의 왕이다. 나는 왕이지만, 네가 추측하고 있는 바 그러한 왕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그는 빌라도 앞에서 훌륭한 고백을 하셨으며, 비록 그것이 어리석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자신을 왕이라고 인정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또한 이 때에 그것이 위험한 것이었지만 결코 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4. 그 증거(12절). 

그는 "대제사장에게 고소를 당하였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에게서 아무런 잘못도 찾지 못하였다." 아무리 그들이 (꾸며) 말한다 해도 그것이 결정적인 (반역의) 증거가 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그 일에 부족한 것을 그들은 소리와 난동으로 메꾸려고 했으며 앞서 제시한 고소 조건들을 계속적으로 반복하였다. 반복함으로써 그들은 총독으로 하여금 믿도록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중상하는 것"(fortiter calumniari)을 체득하였다.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오히려) 중죄를 지은 것으로 고소를 당할 때가 종종 있다.

5. 박해자들의 고소에 대해 죄수는 침묵을 지킴.

 "그는 한 마디도 대답하시지 않으셨다."

(1) 그렇게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해 논박할 만한 어떠한 것도 결코 입증되지 아니하였다.

(2) 주님께서는 지금 자신도 그렇게 의도하고 있는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에 응답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려고 하였던 그의 아버지와 그 사이에 놓여 있는 큰 중대한 일에 마음이 끌려 있었으며, 그들이 자기를 거스려 하는 일에는 조금도 마음이 가있지 않았다.

(3) 그의 때가 왔으며 그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을 하려고 하였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는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으므로 조용히 의롭게 판단하시는 그에게 자신을 의탁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구주예수님이 하셨듯이 침묵함으로써 우리의 목숨을 쉽사리 내던져버려서는 결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처럼 우리의 생명을 주관할 수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며, 또한 우리는 주님이 미리 아셨던 것처럼 우리의 때가 이르렀는지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을 받되 대신 욕하지 않기"를 배워야만 한다.(벧전 2: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그런데,

① 빌라도는 그에게 어떤 대답을 할 것을 강요하였다(13절).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이것이 무엇이었는지 누가복음 23장 3, 5절과 요한복음 19장 7절로부터 함께 종합하요 보면 알 수 있다. 

빌라도는 주님께 대하여 아무런 원한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그가 결백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으며 또한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기를 원하였고 또한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듣지 못하느냐?" 

그렇다. 주님께서는 들으셨다. 지금도 그는 그들이 자신의 진리와 길에 거스려 부당하게 증거 하는 모든 것을 듣고 있다. 그러나 그가 잠잠하신 것은 그것이 그의 인내의 날이기 때문이며, 또한 대답지 아니하신 것은 그가 머지 않아 잠잠치 아니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시 50:3).

② 빌라도는 그리스도의 침묵을 기이히 여겼다. 

이것은 법정에 대한 멸시(법정 모욕죄)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그것에 대해 성을 내지 않고 오히려 매우 이상한 일로 그것을 "기이히"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빌라도는 그가 무죄하다는 사실을 믿었으며, 아마도 "그와 같이 말하는 자가 없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께서 자신에 대해 한 말씀도 하시지 않는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였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Ⅱ.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강요하면서 격분하며 난동을 부림. 대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서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대제사장들을 "랍비, 랍비"라고 불렀으며, 또한 그들과 그들의 말한 모든 말들을 우상시하였다. 그들은 이것을 그리스도를 대적하는데 이용하였으며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은 부량배들을 시켜서 목적을 달성하였다. 

여기에는 그들이 저지른 두 가지 불법행위가 기록되어 있다.

1. 그들은 예수님보다는 바라바를 더 낫게 여겼으며, 그를 해방시키는 것보다는 바라바를 놓아주기를 원하였다.

(1) 아마도 유대인의 의견에 따라 유월절에 한 사람의 죄수를 놓아주는 것이 로마 총독에게 전례가 되어 왔던 것 같다(15절). 

그들은 이것이 그 절기를 더욱 영예롭게 하는 것이며 또한 그들이 구출된 날을 기념하는 것에도 합치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 자신이 고안해 낸 것이지 신적으로 제정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관습이 그들이 로마 제국의 한 영지가 되기 이전에도 유대인의 왕에 의해 옛날부터 지켜져 내려왔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것은 좋지 못한 습관이며, 공의에 대해 거침돌이며, 사악한 자에게는 용기를 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복음적 유월절은 "땅에서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자에 의해 죄수들이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2) 우리 주님과 맞서 비교된 죄수는 바라바였다. 

그는 여기에서 "유명한" 죄수라고 불리워지고 있다(16절). 

그는 태어날 때 특별히 어떤 유명한 신분에 속하여 있었던지 아니면 그가 어떤 두드러진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웠다. 그가 "유명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호의나 간원을 받게 되었는지 또는 그가 "유명했기" 때문에 그들의 격분을 사게 될 수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떤 사람은 후자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빌라도는 그들이 바라바보다는 그 밖의 다른 사람을 틀림없이 원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언급하였던 것이다. "민란과 살인, 강도"는 공의의 칼에 의해 대개 처벌을 당하는 세 가지 큰 죄이다. 그런데 바라바는 이 세 가지를 다 범한 사람이었다(눅 23:19; 요 18:40). 바라바는 실로 "유명한 죄수"로서 그의 죄는 복잡한 것이었다.

(3) 그 제안은 총독 빌라도에 의해 제시되었다(17절).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재판장은 두 사람을 지명하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을 백성들이 "선택"하였던 것 같다. 빌라도는 그들에게 예수를 "놓아 줄" 것을 제안하였다. 

그는 예수가 무죄하다는 것을 확신하였으며 또한 그 박해는 사악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도 그를 놓아 줄 수 있었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으며, 그를 백성의 선택에 의해 놓아주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양심"과 "백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려고 하였다. 

한편 그에게서 아무런 흠점도 찾지 못하였으므로, 그는 그를 "재판에 회부"하거나 "그의 생명을 위험한 지경"에로 밀어 넣으려고 하지 않았다. 기회주의적 태도를 취하거나 또는 양심과 세상을 동시에 좋게 하려고 이러한 기교나 속임수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자들의 공통적인 행동이다. 

빌라도는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어떻게 하랴"고 말했다. 빌라도는 그가 놓아주기를 제안했던 이 "예수"가 그들 중의 어떤 사람에 의해 메시야로 여겨지며 또한 그가 메시야라는 함축성 있는 증거를 제시하였다는 사실을 그들로 하여금 생각나도록 하고 있다. "너희 민족이 이렇게 기대해 온 자를 거절치 말라." 

빌라도가 이와 같이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한 것은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18절). 그들이 성을 낸 것은 그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선하셨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빌라도는 그가 백성들에 의해 방면이 되며 그들이 그를 놓아주기를 "희망하였다." 다윗이 사울의 "시기를 받았을" 때 그는 "백성들의 칭송"을 들었다. 그리스도께서 며칠 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호산나"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던 어떤 사람은 그도 그렇게 했으며 또한 그를 대적하는 유명한 무뢰한이 일어났을 때는 이 사실을 자치 단체에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름이 입증되었다.

(4) 빌라도가 그 문제에 고심하고 있을 때 그는 그의 아내가 그에게 보낸 경고의 전갈을 듣고 예수를 정죄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더욱 굳혔다(19절).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대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아마도 이 전갈은 그 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정도로 공공연하게 빌라도에게 전해진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빌라도 뿐만 아니라 모든 박해자들에게 경고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몇 가지로 살펴 본다면,

① 빌라도의 아내에게 이 꿈을 현몽시킨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 

빌라도의 아내는 아마도 그리스도에 대해 꿈을 꿀 만큼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즉각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왔다. 아마도 그녀는 "경건하고 품위가 있는 여자들" 중의 한 사람이며, 어떠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에게와 같이 종교심을 가지지 않은 자에게도 자신을 현몽하신다. 

그녀는 이 꿈에서 "애를 많이 먹었다." 그녀가 무죄한 자에 대한 잔인한 고문에 대해 꿈을 꾸었든지 아니면 그를 죽인 자들에게 떨어진 심판에 대한 꿈을 꾸었든지 또는 이 둘을 꾸었든지간에 그것은 아마도 무서운 꿈이었거나 또는 그녀의 생각이 그녀를 "무섭게"(단 2:1; 4:5)했던 것 같이 보인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영혼들이 아버지에게서 여러 가지로 사람들의 영혼들에게 접근하시며 또한 "꿈에나 밤의 이상 중에 인치듯 교훈하실 수" 있으시다(욥 33:15, 16). 

그러나 기록된 말씀을 가진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대게 "깊은 잠이 들어 있을 때" 꿈으로 말씀하시는 것보다는 깨어 있는 침상에서 의식을 통해서 말씀을 하신다.

② 남편에게 이러한 경고를 한 빌라도의 아내의 보살핌과 배려.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첫째, 이것은 비록 예수님이 가장 악한 행악자로 박해를 받고 있을지라도 그가 옳은 사람임을 입증하는 고귀한 증거이다. 

주님의 친구들이 그를 변호하러 나타나기를 두려워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이요 원수인 자들을 통하여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 말을 하도록 했다. 

베드로가 그를 부인했을 때 유다가 그를 시인하였다. 

대제사장들이 그가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범하였다고 선고하였을 때 빌라도는 그에게서 "아무런 죄도 발견치 못하였노라"고 선포하였다. 

그를 사랑하였던 제자들이 멀리 서 있을 때 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였던 빌라도의 아내가 그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께서는 원수들에 의해 중상 모략을 당하고 그의 친구들에 의해 망신스럽게 버림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그로 하여금 진리와 공평을 증거할 증인 없이 홀로 있게 내버려두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둘째, 그것은 빌라도에게 당한 정당한 경고였다. 

"그에게 아무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하나님께서는 죄인들로 하여금 죄를 짖지 못하도록 막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가지고 계시다. 신실한 친구나 또는 우리들의 양심으로부터, 하나님의 섭리로부터 이러한 저지를 받는 것은 큰 은혜이다. 그것들을 경청하는 것은 또한 우리의 임무이다. 

"주께서 미워하시는 이러한 일을 행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가 자칫 잘못하여 시험 가운데 빠지게 될 때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말씀이다.

빌라도의 아내는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이러한 경고를 그에게 하였다. 그녀는 그녀에게 속해 있지 않은 일에 간섭한다고 그에게서 책망을 들을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기를 바라면서 그녀는 이 경고를 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가 친구나 친척들을 참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죄에서 멀리 떨어지도록 최선을 다 하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친근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들에게 더욱 애정을 가져야 하며, 또한 더욱 그가 죄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지 않게 되기를 소원하여야 할 것이다(레 19:17). 

최선의 우정은 영혼에 대한 우정이다. 빌라도는 이 말을 농담으로 여긴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가 이 옳은 사람에 대해 심문을 계속하는 동안 그것을 유의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와 같이 신실한 경고는 그것들이 죄에 대한 경고로 주어질 때 경시되기가 쉽다. 그러나 그것들이 죄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으로써 나중에 회상해 볼 때 쉽사리 무시될 수는 없다.

(5)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이 때에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하도록 설득하는 데 분주하였다(20절). 

그들은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게"하려고 그들과 그들의 부하들을 무리들에게 보내어 "권하였다." 이 예수는 사탄과 연합한 사기꾼이며 그들의 교회와 성전에 대한 원수라고 말하였을 것이며 또한 만일 그를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그들의 처소와 나라를 빼앗을 것임을 설득했을 것이다. 

또한 바라바는 비록 나쁜 사람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이 가졌던 중요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그렇게 큰 손해를 보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설득시켰다. 

이와 같이 그들은 다른 때에는 예수님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무리들을 권하였으며 또한 만일 그들이 제사장들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면 바라바를 예수님보다 더 앞세우는 이러한 터무니없는 일은 결코 행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서,

① 우리는 이 사악한 제사장들을 불쾌하게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율법에 의하면, "서로 피를 흘린 일로 다투는 송사에 있어서" 그들은 제사장들의 판결을 받았으며 또한 그들이 하라는 대로 행하였다(신 17:8, 9). 그들에게 위임된 이 큰 권한을 그들은 야비하게 남용하였으며 또한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그들로 하여금 잘못되게 만들었다.

② 우리는 미혹된 백성들을 애석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주님께서는 무리들이 이와 같이 악을 행하는 데 맹렬하며 또한 성직자에게 횡포를 당하며 "소경된 인도자"와 더불어 함께 웅덩이에 빠지는 것을 볼 때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고 말씀하셨다.

(6) 이와 같이 제사장들에게 위압을 당하였으므로 그들은 마침내 선택을 하였다(21절). 

빌라도는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려는 자신의 계획이 성취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를 놀라게 한 것은 그들이 "바라바"를 달라고 한 것이었다. 마치 바라바의 죄가 더 적으며 따라서 그는 "사형을 받을 죄"가 없는 것처럼 그들은 바라바를 달라고 하였다. 바라바를 달라는 외침은 대다수가 한꺼번에 한 것이기 때문에 후보자 사이에 투표를 요구할 필요가 없었다. 

"오, 하늘이여, 이 사실에 놀랄지어다. 땅이여, 소스라치게 놀랄지어다 !" 일찍이 이성이나 종교를 가진 것처럼 행세한 사람들 중에 이렇게도 놀라울 정도로 미치고 소름끼치게 사악한 사람이 있었던가 ! 

베드로는 이 사실을 들어 그들을 책망하였다. "너희는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원하였다"(행 3:14). 그들이 지도자를 인하여 하나님보다는 세상을 선택한 무리들은 이와 같이 "그들 자신들의 허망한 것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2. 그들은 열심히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를 것을 주장하였다(22, 23절). 

그들이 바라바를 선택한 것에 놀란 빌라도는 그것이 예수를 시기해서 선택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를 좋아한 데서 비롯된 것이기를 원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 너희 명절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그를 놓아주랴? 아니면 그를 나에게 그대로 놓아두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이 십자가에 처형되기를 원하였던 것은 그것이 가장 수치스럽고 극악한 형벌로 보여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그를 따르는 자들로 하여금 그를 인정하거나 또는 그와의 관계를 시인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도록 하려고 하였다. 

그들이 재판장에게 그가 어떤 선고를 내리도록 명령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악과 격분은 질서와 예의의 모든 규범들을 잊어버리게 하였으며 또한 공의의 법정을 "폭동과 소란과 선동의 장소"로 바꾸어 놓았다.

이제 진리는 거리에 떨어졌으며, 공평은 관여를 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서 "심판하는 것을 보려고 한"자는 가장 사악한 "압제를 보았다"(역주:하박국서 참조). 

공의를 보려고 했는데,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사악한 외침을 보았다. 아마도 전날에 "호산나"를 외치던 사람이 이와 같은 외침을 했을 것이다. 잠시 동안에 군중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살펴 보라. 그가 예루살렘으로 "나귀를 타시고 개선"하셨을 때 "모두"가 한가지로 "칭송"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대적"하는 자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가 빌라도의 법정에 "당당하게" 끌려 왔을 때 적개심에서 나온 "외침"이 "일반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전혀 "지지자"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천국으로 향하는 우리의 길이 놓여져 있지만, 변화하는 이 세상에는 우리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영광과 욕됨,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고후 6:8)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변화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칭찬을 받고 사랑을 받게 될 때 "별들 가운데 보금자리를 펴고 그 속에 죽게 되는 것"처럼, 영광으로 말미암아 들어올림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는 우리가 멸시를 받고 짓밟힘을 당할 때 우리가 "구속이 없는" 지옥에로 짓밟힘을 당하는 것처럼 욕됨으로 말미암아 실망하거나 용기를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Uides tu istos qui te lavdant; omnes aut sunt hostes, aut (quodin aequo est) esse possunt ─ 즉 너를 ~이시어 하며 칭송하는 자를 조심하라. 그들은 너의 원수들이나 또는 그와 비슷한 자들이며, 또한 그러함이 드러날 것이다(Seneca de Vita Beat).

그런데 우리는 이 요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더욱 살펴 볼 수 있다.

(1) 빌라도는 그것을 어떻게 반대하였는가?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우리가 일상 대화에서 어떤 사람을 비난하기 전에 질문하는 것은 당연하다. 더욱이 재판장이 사형 선고를 내리기 전에 질문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 주 예수님은 비록 악행자로 고난을 받으셨지만 그의 재판장이나 박해자들이 그가 악을 행한 사실을 찾지 못하였다는 것은 그의 영예를 한층 더 높여 준다는 사실이다. 

그가 "하나님을 거스려"악을 행한 일이 있었는가? 아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만을 행하였다." 그가 "세상 통치자"를 거스려 악을 행한 일이 있었는가? 아니다. 그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칠 것"을 그 자신도 몸소 행하셨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그는 "공공적인 평화"를 거스려 악을 행한 일이 있는가? 아니다. 그는 "다투거나 외치지" 않으셨으며, 그의 나라가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라고도 하지 않으셨다. 그는 특별한 사람들에게 악을 행하였는가? "그가 누구의 황소를 취하였으며 누구를 속였는가?" 아니다. 그는 그러한 일과는 정반대로 "선행을 베푸시며 다니셨다." 

그의 무죄함에 대한 이러한 주장들은 그가 다른 사람들이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만일 그가 이렇게 상처를 입으신 것이 우리의 범죄 때문이 아니었다고 하면, 그가 내어 줌을 당하시고 그들을 위해 대속하시기 위해 이를 자발적으로 취하신 것이 우리의 허물 때문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까지 결코 언급되거나 행해지지 않았던 이러한 사람에 대한 지나친 고난들이 세상을 지배하며 마침내는 그렇게 하도록 이것을 "허락한" 섭리의 공의와 공평에 의해 화해될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2) 그들은 어떻게 그것을 "주장"하였는가? 

"저희가 더욱 소리 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그들은 그가 저지른 악행을 보여 주려고 하지 않고 옳든지 그르든지 간에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 전제에 대한 증거를 주장하지 않고 단지 결론만을 내기로 결정하였으며, 또한 소리를 지름으로써 부족한 증거를 채우려고 하였다. 

이 불의한 재판관은 주님께서 비유로써 하신 이야기에 나온 재판관처럼 끊임없이 조르는 것에 못이겨(눅 18:4, 5) 불공평한 판결을 하였으며, 그 재판은 순전히 소란 가운데서 행하여졌다.

Ⅲ.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피흘린 "범죄"의 대가를 "백성들과 대제사장들"에게 지우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1. 빌라도는 자신이 이것을 면하려고 하고 있다(24절).

(1) 그는 "논쟁하는 것이 소용이 없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가 말한 것은,

①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는 아무런 효험도 얻지 못하였다." 빌라도는 그가 무죄하다고 믿으며 그들이 죄지은 것을 찾지 못하는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이치에 닿지 않은 불의한 일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이해시킬 수가 없었다. 종종 정욕과 분노의 시냇물이 얼마나 거센가를 살펴보도록 하라. 권위나 이성이 그 흐름을 저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② 그것은 "해를 주는 것" 같이 보였다. 

그는 오히려 "민란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았다. 

이 거칠고 야만적인 백성들은 더욱 소리를 높였으며 만일 그가 그들에게 만족 할 일을 해 주지 않는다면 그에게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고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제사장들, 즉 그러한 방화범들이 붙여 놓은 불길은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 ! 

빌라도가 자신의 양심을 거스려 그리스도를 정죄하기를 무서워했던 유대인들의 이러한 난폭한 소란을 피우는 기질은 머지 않아 그 나라를 파멸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잦은 폭동은 비록 진압은 되었지만 로마인들로 하여금 멸망케 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또한 그들 사이에서 야기되는 고질적인 분쟁들은 그들의 원수들에게 먹히는 미끼가 되었다. 이와 같이 그들의 죄는 그들을 파멸시켰다.

우리는 일반 대중들의 경향에서 얼마나 쉽사리 오해를 하게 되는가를 살펴보자. 제사장들은 "명절에" 그리스도를 "붙잡는다면" 민요가 날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빌라도가 그를 "놓아주려고" 한 것이 그 날에 민란이 나게 하였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이와 같이 군중의 감정은 불확실한 것이다.

(2) 이것은 그를 그 자신의 마음의 평안과 성읍의 평화 사이에 있는 "큰 해협"으로 그를 몰아 놓고 있다. 

그는 무죄한 사람을 정죄하는 것을 싫어하고 있지만 백성들을 "거스리는 것"이나 곧 진정시킬 수 없는 소동을 일으키는 것을 싫어하고 있다. 그가 재판관이 마땅히 해야만 하는, 공의의 성스러운 법을 굳건히 그리고 단호하게 고집하였더라면 그는 당황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잘못된 것"을 찾지 못한 사람은 어떤 구실로든지 십자가에 못 박아서는 안 되며 또한 세상에 있는 어떤 사람이나 집단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불의한 일이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하고 의논의 여지가 없다. 

그 근거는 곧 결정이 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합쳐진다고 하더라도 "공의가 행해지도록 하라" Fiat justitia, fuat caelum ─ 즉 만일 악행하는 자가 악을 계속적으로 행한다면, 그들이 비록 제사장이라고 할지라도 "내 손이 그와 함께 않으리라."

(3) 빌라도는 그 일을 절충해 보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과 자신의 양심을 함께 만족시키려고 하였다. 

즉 그 일을 "행하면서" 동시에 그는 그것을 "그만 두려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의 죄책감도 "심하지만," 자신의 타락이 "더욱 심한" 자들이 이러한 어리석고 자가당착적인 일들을 한다(사도 바울이 롬 14:22 에서 말한 것처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또는 자기의 "책하는" 바로 자기를 "옳다 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런데 빌라도는 그 범죄에서부터 자신은 깨끗하기를 원하고 있다.

① "표식"으로써, 그는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그가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를 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이 일에 있어서 지은 죄가 있다면 백성들 앞에서 다 버린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그는 "그 일이 행해진다면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해 달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그는 이 예식을 살인한 자를 찾지 못하였을 때 그 범죄를 인하여 성읍을 깨끗이 하는데 사용하도록 한 율법(신 21:6, 7)에서 "차용하였다." 

빌라도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은 무죄한 피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더욱 그들에게 알리려고 하였다. 아마도 폭동자들의 소리가 너무도 컸기 때문에 만일 그가 그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이러한 표식을 하지 않았다면 그의 의도는 저들에게 전달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② "말"로써.

첫째, 그는 자신을 "깨끗이 하고 있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무죄하다." 

그를 정죄하고서도 그의 피에 무죄하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넌센스인가 ! 사람이 어떤 일에 반대하면서도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자신들이 양심에 대해 죄를 짓고 있다고 선포하는 것에 불과하다. 빌라도는 그의 무죄를 고백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범죄하였다고 말씀하신다(행 4:27).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손"이 범죄하지 아니하였다고 변명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윗은 암논의 자녀의 칼로 죽이고 있으며 아합은 이스르엘의 장로들의 칼로 죽이고 있다. 빌라도는 그의 "마음"이 행동하는 데 있지 않았다고 변명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정받을 수 없는 증언에 불과하다. Protestatio non valet contra factum ─ 즉 그가 동시에 범한 행동에 대하여 쓸 데 없이 항거하고 있다.

둘째, 빌라도는 그것을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던지고 있다. 

"너희가 당하라. 만일 그 일이 행해진다고 하면 나는 그것을 할 수 없으며 너희가 하나님과 세상 앞에서 그것에 대해 응답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 죄는 누구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선머슴(brat)이라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비난할 것을 찾지 못한다면 비난을 받지 않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들어 자신들을 속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범죄 사실을 변경(전가)시킨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질병에 감염된 사람의 상태는 다른 사람에게서 병균을 옮아 왔거나 다른 사람에게 병균을 감염시키기 때문에 덜 위험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죄에 "유혹"을 받을 수는 있지만, "강제로"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제사장들은 그것을 유다에게 던졌다. "네가 당하라." 이제 빌라도는 그것을 그들에게 던지고 있다. "너희가 당하라." "너희가 헤아린 그것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

2.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 범죄를 자신들이 떠맡을 것에 "동의하였다." 

그들은 모두가 한가지로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우리는 그를 사형에 처하는 것이 죄이거나 위험한 일이 아니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기꺼이 그러한 위험을 자초하려고 한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마치 그 범죄가 그들이 그들의 자손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것처럼 말하였다. 그들은 죄에 대한 두려움이 빌라도를 주저하게 만들었으며 또한 그는 그것을 전가함으로써 이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하였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다. 

그로 하여금 주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또한 그러한 추측에서 확신을 주기 위하여 그들은 더욱 격렬하게 소리를 높여 그들이 손아귀에 쥐고 있는 미끼를 잃는 것보다는 거기에 동의를 하였으며, "그의 피를 우리들에게 돌리소서"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런데,

(1)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빌라도에게 책임을 면하게 하려고 하였다. 

즉 그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기 위하여 신적인 공의에 적절히 묶어 놓음으로써 그 자신이 스스로 죄를 면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도록 하게 하였다. 그러나 파산자나 거지가 된 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담보물로 인정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보석 보증인으로 취해질 수도 없다.

 그 누구도 자신이 죄를 가지지 않은 사람 이외에는 다른 사람의 죄를 자신이 떠맡을 수는 결코 없다. 어떠한 피조물이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죄인으로 묶이우는 것은 대담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2)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자신들과 자신들의 후손에게 진노와 보복이 임하기를 빌었다. 

이것은 얼마나 비참한 말인가 ! 그들은 실로 그 말의 무서운 의미에 대하여 거의 생각하지 못하였으며 또한 얼마나 비참한 결과가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에게 미치게 될 것인가를 알지 못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근래에 그들에게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지상에서 흘려진 모든 의로운 피"가 돌아가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것도 모자란 듯이 그들은 여기에서 모든 것보다도 더욱 귀중한 피흘린 범죄, 즉 더욱 무거운 범죄를 자신들에게 돌릴 것을 간구하고 있다. 

오 사악한 죄인들의 대담한 주제넘음이여, 그들은 "목을 굳게 하고 하나님을 치려고 달려가며" 또한 그의 공의에 반항을 하고 있다(욥 15:25).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① 그들은 얼마나 "잔인하게 저주"를 빌었는가.

그들은 이 죄에 대한 형벌을 자신들뿐만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신들의 "자녀들"에게로 돌리 것을 간구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형벌을 "삼 사대"까지 제한하시기를 기뻐하시지만 그들은 이러한 제한도 두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이 이러한 형벌을 자신들에게 임하도록 끌어내린 것은 미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그들의 자녀들에게까지 전가시킨 것은 극도의 잔인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정녕 그들은 타조와 같았다. 그들은 마치 "어린 새끼"가 "자기의 새끼"가 아닌 것처럼 "그 새끼에 대하여 어려움을 끼쳤던" 것이다. 

이러한 범죄와 진노를 그들과 그들 자손에게 영원히 전가시킨 것이나 또한 그들 자신의 "행동과 행위"인 것처럼 "만장일치로"(nemine contradicente) "동의"한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이것은 확실히 "나는 너와 네 후손에게 하나님이 될 것이라"는 옛 언약을 상실하고 반항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그들이 메사야의 피에 대한 저주를 자신들에 돌림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 즉 그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들"이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에 의한 그 피에 대한 축복의 상속권을 "그들의" 가족으로부터 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사악한 사람은 그들의 자녀가 가족에게 원수가 된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자신의 영혼을 저주하는 자들은 그들과 더불어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지옥으로 가게 되는가를 유의하지 않는다.

② 하나님께서는 이 간구대로 보응하시는 데 있어서 얼마나 의로우셨는가? 

그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소서"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저주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그들에게 그렇게 되었다. 그 버림받은 백성들의 비참한 후예들은 오늘날까지 그것을 당하고 있다. 그들이 이 피를 자기들에게 돌리라고 간구한 이후로 그들은 완전히 멸망하여 놀라움과 조롱거리가 될 때까지 계속적으로 심판을 당하게 되었다. 그들 중의 어떤 사람이나 그들의 후손들 중의 어떤 사람에게 대하여 이 피는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려고 왔다. 

신적인 자비는 그들의 회개와 믿음에 근거하여 이러한 저주의 상속권을 철회해 버렸으며, "그 약속"은 또 다시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 대하여 더욱 관대한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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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채찍질과 조롱을 당하심(마 27:26-32)

우리는 이 구절들에서 우리 주 예수님을 못박기 위한 "예비적인 준비"를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에 보면,

Ⅰ. 판결이 내려지고 집행해도 좋다는 명령이 발하여짐. 

이것은 "즉각적으로" 동시에 행해졌다.

1. 유명한 죄수인 바라바는 석방되었다. 

아마도 바라바가 백성들의 호의를 받아 그리스도와 비교된 경쟁자가 되지 못하였다면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사형을 당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 죄가 자신의 석방되는 수단이 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정죄를 받으신 것이 죄인의 괴수라고 할지라도 "놓임을 받도록 하기"위한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가 "내어 줌을 당하신"것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신적인 섭리의 "보편적인 실례"는 "악인의 의인의 대속이 되고 궤사한 자는 정직한 자의 대신이 되는 것"(잠 21:18; 11:18)이다. 

신적인 은혜의 "비할 데 없는 실례"는 "정직한 자"는 "궤사한 자"의 대속이 되고 의인은 악인의 대신이 되는 것이다.

2. 예수니께서는 "채찍질"을 당하셨다. 

이 형벌은 특히 마흔 번 이상 때리는 것을 금한 유대인의 율법의 온건한 절제를 모르는 로마인들에 의해 가해진 것이었으므로 실로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잔인한 형벌이었다. 

이 형벌은 사형 선고를 받은 자에게 무모하게 가하여졌다. "막대기"에는 도끼가 끼워 있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이상이었다. 이로써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으니, "밭가는 자가 내 등을 갈았도다"(시 129:3). "나를 때리는 자에게 내 등을 맡겼다"(사 50:6).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그가 "채찍으로 맞으신 것"은 우리가 영원히 "전갈로 맞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셨다.

3. 그 때에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게 내어 줌"을 당하였다. 

보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치우쳐 벗어남)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죄는 타겟에 이르지 못함+빗나감, 악은 생명-진리-말씀 없음 곧, 하나님을 대적/거역함)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상함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사53:5-6)...

그가 매맞으신 것은 우리의 죄악과 허물 때문이며, 그가 죽으심은 죄로 죽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속량하고 하나님과 화목케 하기 위함이었던 바, "그의 십자가의 피"가 아니면 결코 화평이 있을 수 없다(골 1:20). 그러므로 채찍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더 나아가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져야만"한다. 

십자가는 로마인들 가운데만 있었던 사형대였다. 아마도 그 방법은 가장 무섭고 비참하게 죽도록 하기 위하여 끝까지 매달아 놓는, 이른 바 기지(wit)와 잔인성이 복합되어 고안된 것처럼 보여진다. 

십자가는 손과 발에 못을 박아 땅 위에 세워 놓았으며, 몸이 고통 중에서 죽을 때까지 그 못에 매달려 있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정죄를 받아 이러한 죽음을 당하신 것은 그가 장대 위에 높이 매달린 구리뱀의 상징에 부합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피흘리는 죽음이었으며,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우며 저주받은 죽음이었다. 그 죽음은 매우 비참한 것이었기 때문에 동정심이 있는 통치자들은 법에 의해 십자가형을 받도록 되어 있는 자들을 먼저 교살시킨 후 십자가에 못박도록 명령하였다. 

쥴리어스 시져도 어떤 폭도들을 그렇게 처형하였다(Sueton, lib. 1). 

맨 처음 기독자인 황제 콘스탄틴은 칙령을 내려 로마인들 가운데서 이 십자가의 사형 방법을 폐지시켰다(Sozomen, Hist. lib. 1. ch.8). Ne salutare signum subserriret ad perniciem ─ 즉 이는 구원의 상징이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되지 않도록 하2기 위함이다.

Ⅱ. 그리스도를 집행할 준비를 하면서 군병들이 그에게 가한 야만적인 행동. 

그가 정죄를 받으셨을 때, (보통의 관례를 따르면) 형의 집행을 앞둔 그에게는 자신의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약간의 시간이 허용되어야만 했었을 것이었다. 이미 디베리우스 당시에 아마도 이러한 비이성적으로 무리하게 내려진 사형언도에 대한 불평, 또는 그것이 섣부르고 경솔하게 결정되었다는 불평의 여지를 없애기 위하여 판결 후 죄수의 형집행을 최소한 "열흘" 동안 연기될 수 있도록 로마 총독에 의해 제정된 법이 이미 있었다(Sueton in Tiber. cap. 25). 

그러나 우리 주님에게는 한시의 여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주변상황은 숨가쁘게 돌아갔으며 그는 그 때에 숨쉴 겨를조차도 없으셨다. 그것은 하나의 "고비"였으며, 그에게는 "고요한 한 때"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사태는 더욱 긴박하고 험악해져 갔으며," 폭풍은 그치지 않고 계속적으로 휘몰아쳤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어 줌을 당하셨을 때," 그 정도만으로도 족하였었다. "몸을 죽이는" 자들은 그들이 더 이상 가할 것이 없음을 인정하고 그 외의 일을 행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더 이상 더 가하려고" 하였으며, 만일 가능하다면 천 개의 시체들을 그 위에 하나로 쌓아 놓으려고 하였던 것 같다. 

빌라도는 그가 무죄하다고 선포하였지만, 그의 군병들과 호위병들은 "그에 대한" 명령권자의 증거보다는 "그를 대적하는" 백성들의 소동과 분노에 의해 영향을 받고 요동되어 그를 사정없이 모욕하였다. 

유대인 "불한당"들이 로마 군병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입김을 불어넣었거나 또는 아마도 그들이 이와 같이 모욕을 준 것은 그에게 원한이 있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를 놀리려고 했기 때문인 것 같이 보인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면류관을 쓰고 싶어하는 것"으로 이해를 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불행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모욕하거나 어떤 사람의 재난을 놀림감으로 삼는 것은 비열하고 야비하고 천박한 사람들임을 나타내는 증거가 된다는 사실이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이 일은 어디에서 행해졌는가?

 "관청"에서 행해졌다. 잘못을 범한 자와 모욕을 당한 자에게 피난처가 도어야 할 "통치자의 집"이 잔학한 행위를 자행하는 도장이 된 것이다. 

그렇게 의로운 사람이 피흘림을 피하기를 원하였던 총독이 이와 같은 일을 "그의 집"에서 행해지도록 했는가는 의심스럽다. 아마도 그는 그것을 행하도록 직접 명령하지는 않았으며, 단지 그것을 묵인하였을 것이다.

자신의 수중에 있기에 최대한 배려하고 존중해야할 바, 자기가 그는 분명히 무죄하다고 여기는 자에 대한 모욕을 묵인한 채 그저 수수방관해 버리는 것은, 비록 자신이 그 일을 직접 명령하거나 실행하지 않았더라도 그 누가 보든지간에 그가 그 "일을 하거나 지시한 것"으로 간주할 것은 당연하다. 가정의 주인들은 그들의 집이 어떤 사람에게 모욕을 주는 장소로 사용되도록 해서는 안 되며 또한 다른 사람들의 죄나 불행, 종교에 대해 자신의 종들이 조롱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2. 여기에는 "누가" 관여되었는가? 

그들은 그를 조롱하기 위하여 형을 집행하려고 모여있던 "온 군대"를 모았다(최소한 그 수는 500명이 된다. 어떤 사람은 1,2000 내지 1,3000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구경거리"가 되셨다고 한다면 그를 따르는 기독자들 또한 그분처럼 세상의 모욕하는 바 구경거리가 되는 것을 이상스럽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전 4:9; 히 10:33).

3. 그에게 특별히 가해진 모욕이 어떤 것이었는가?

(1) 그들은 "그의 옷을 벗겼다"(28절). 

벌거벗은 것에 대한 수치감은 죄와 더불어 왔다(창 3: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죄에 대한 요구를 만족케 하며 그 죄를 없이 하려고 오셨을 때 "우리에게 입혀 줄 흰 옷"(계 3:18)을 준비하시기 위하여 "자신이 벌거벗음을 당하셨으며" 또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이에 순종하셨다.

(2) 그들은 "홍포"를 입혔다. 

즉 왕들이나 황제가 입었던 홍포를 모방하여 로마 군병들이 입고 있었던 낡은 주홍색 외투를 입혔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그들은 "왕"이라고 불리운 것에 대한 모욕을 가하였다. 

그리스도의 용모에는 비열함이나 비천한 모습이 없었지만 그들은 거짓으로 그를 존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꾸밈으로써 더욱 "조롱"을 받는 구경거리로 나타내 보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오묘"한 신비가 내포되어 있었다. 이 분이 바로 "홍의를 입고 나타나신 자"(사 63:1, 2)였으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빤"(창 49:11) 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홍포"를 입으신 것은 수치스럽게 나무에 달리시면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옷을 씻고 그것들을 희게 만들기 위함인 것이다.

(3) 그들은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웠다"(29절). 

이것은 그를 "거짓 왕"으로 놀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단지 "모욕"을 주려고만 했다면 "지푸라기나 골풀을 엮어 씌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에게 고통을 주려고 하였으며 "문자 그대로"(그 면류관은 비유적인 것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가시로 엮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모욕을 줄 것을 제안한 자는 아마도 그러한 일을 고안한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한 오묘한 신비가 담겨져 있다.

① 가시는 죄와 더불어 이 땅에 생겨났으며 또한 죄의 소산물이었던 저주의 일부분이었다(창 3:18).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시고 우리에게서 저주를 옮기시기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가시들의 찔림과 고통을 당하셨으며, "면류관처럼 씌워지셨다"(욥 31:36). 왜냐하면 우리를 위한 그의 고난은 "그의 영광"이었기 때문이었다.

② 이제 그는 "가시덤불"에서 붙잡혀 이삭 대신에 제물로 드려진 아브라함의 수양(창 22:13)의 전형에 일치되셨다.

③ 가시는 고통을 의미한다(대하 33:11). 

그리스도는 이러한 가시로 엮어진 "면류관"을 쓰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기독자들을 "환난 가운데서 영광스럽게" 하며 그것을 영광의 중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들에게 속해 있는 이러한 고난들을 자기 것으로 만드셨다.

④ 그리스도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신 것은 "그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으며," 그 영광이 세속적인 영광이 아님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 영광이 "나타나게 되는" 동안에는 여기에 속박과 고통이 수반되고 있다.

⑤ 희생 재물에 월계수로 엮어진 관을 씌우고 제단으로 가져오는 것은 몇몇 이방 나라들의 관습이었다. 이 가시는 이 위대한 희생 제물이 관으로 엮어 씌워지는 데 사용된 월계수였다.

⑥ 이러한 가시들은 아마도 그의 머리로부터 피를 흘리도록 잡아채었을 것인데, 그 피는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그리스도께서 바친 그의 피를 상징함)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내린 것"(시 133:2)과 같이 흘러내렸다. 

이와 같이 그가 그의 사랑하는 자, 그의 비둘기, 즉 그의 정결한 교회와 약혼을 맺으려고 오셨을 때 그의 "머리에는 이슬이, 그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아 5:2).

(4) 그들은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웠다." 

그들은 그 갈대를 "거짓 홀"로 삼아 그를 조롱하기 위한 또 하나의 "표식"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마치 이것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것으로써(마 11:7) 이러한 왕에게는 어울리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에게 들리워 주었다. 

다시 말하면 연약하고 흔들리며, 시들고 보잘 것 없는 홀이나 나라와 같이 여겼다. 그러나 그들은 완전히 오해를 하였다. 왜냐하면 그의 보좌는 "영원 무궁하며" 또한 "그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기 때문이다(시 45:6).

(5) "그들은 그 앞에서 무릎을 끊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하였다. 

그를 가짜 왕으로 만들었으므로 그들은 이와 같이 그를 존경하는 흉내를 내며 조롱하였으며, 마치 요셉의 형제들이 "네가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창 37:8)고 말한 것처럼, 그의 지배권에 대한 주장을 비소하였다. 

그러나 요셉의 형제들이 후에 그에게 순종하게 됨으로써 그의 꿈이 실현된 것처럼, 여기에서도 그들은 이후에 즉시 "그이 이름으로 모든 무릎을 끓게 하시고" 그 앞에서 깨뜨리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오른편에 존귀하게 앉게 되실 그리스도에게 조롱 삼아서 무릎을 끓었다. 그것은 머지 않아 도래하게 될 것에 대한 그릇된 조롱이었다.

(6) 그들은 "그에게 침을 뱉었다." 

이와 같이 그는 대제사장의 뜰에서 모욕을 당하셨다(마 26:67). 백성은 존경을 바칠 때 복종하는 표시로써 통치자에게 입을 맞추었다. 이와 같이 사무엘도 사울에게 입맞추었으며, 또한 우리들에도 "아들에게 입맞추라"는 명령이 주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입맞추는 대신에 거짓으로 존경을 다하면서 그의 얼굴에 침을 뱉았다. 햇빛이 무색할 정도로 빛나며 천사들이 그 앞에서 얼굴을 가리는 그의 훌륭하신 얼굴은 이와 같이 더렵혀졌다. 

사람들의 자녀들이 이러한 "잔학 행위"를 저질렀으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이러한 "모욕을 당하셔야만"했던 것은 이상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7) 그들은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쳤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그의 왕권을 조롱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을 "자신들의" 난폭한 행동과 "그에게 고통"을 주는 실제적인 도구로 삼았다. 아마도 그들은 더욱 더 깊은 상처를 내기 위하여 "가시 면류관"을 때렸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 면류관이 머리에 더욱 박히도록 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그의 고통을 최대의 즐거움으로 삼았던 그들에게 더욱 놀림감이 되었다. 

이와 같이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가 되었다. 그가 이러한 간고와 수치를 겪으신 것은 우리를 위해 영원한 생명과 즐거움, 그리고 영광을 마련해 주시기 위함이다.

Ⅲ. 그리스도를 집행 장소로 끌고 감. 

그들이 흡족하다고 생각될 때까지 그를 조롱하고 때린 다음에 그들은 "그에게서 홍포를 벗겼다." 이는 그에게 입힘으로써 나타냈던 모든 왕적인 권위를 빼앗아 버리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다시 그의 옷을 입힌 것은 그것이 집행하기 위해 선발된 군병들의 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홍포를 벗겼지만 "가시 면류관"을 벗겼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흔히 그는 그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추측할 수 있다(그러나 그것은 확실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가 보좌에 앉으신 제사장이신 것처럼, 그는 십자가 위에서 왕이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옷을 입으신 채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위해 끌려가신 것은 그가 "자신의 몸으로 나무에 달리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에 보면,

1.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그를 끌고 나갔다." 

그는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 즉 제단에 드릴 제물처럼 끌려갔다. 우리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귀중한 피로 자신들의 잔인한 분노를 충족시키는데 어떤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가능한 빨리 그를 재촉하면서 끌고 갔으리라는 사실을 쉽사리 상상할 수 있다. 

아마도 그들은 지금 그를 조롱하고 비웃으면서 그를 만물의 찌끼같이 취급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그를 "성 밖으로" 끌고 나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케 하기 위하여 마치 예루살렘에서 "구속을 기다렸던" 자들의 영광이었던 그가 그들 가운데 살 만한 가치가 없었던 것처럼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히 13:12). 

그는 비유로 자신이 "포도원 밖으로 내어 쫓김을 당할 것을" 말씀하실 때(마 21:39) 이것을 목표로 하셨다.

2. 그들은 구레네 시몬으로 하여금 강제로 "그의 십자가를 지도록"하였다(32절). 

아마도 맨 처음에 그는 마치 이삭이 자신을 불사를 번제단의 나무를 지고 간 것처럼 그 자신이 "십자가를 지셨던"것 같다. 이것은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고통과 수치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 그들은 그에게서 십자가를 내려놓았다." 이것은,

(1) 그를 동정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그 십자가가 그에게 너무도 큰 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이 이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거의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이 백성들의 "체질을 생각하시며" 또한 "감당치 못할 시험을 받는 것을 허락치 아니하심을"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약간의 숨돌릴 여유를 주신다. 그러나 그들은 십자가가 되돌아올 것이며, 고요한 한 때는 다음의 것을 준비할 수 있는 여유를 주기 위한 것임을 기대해야만 한다. 그러나,

(2) 아마도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그들이 원하는 만큼 빨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3) 그들은 그가 십자가에 짓눌려 힘이 빠져 죽게 됨으로써 그에게 더 큰 해악을 끼치려고 하는 일에 방해를 받게 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악한 자의 온유한 자비"(그것은 그렇게 보여 진다)는 실제로 "잔인한 것이다." 

그들은 그에게서 십자가를 빼앗아 구레네 시몬으로 하여금 총독이나 제사장들의 권세로 강요함으로써 그것을 "억지로"지게 하였다. 그것은 치욕된 일이었으며, 강제로 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그것을 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이 시몬은 그리스도의 제자였으며, 적어도 그를 사모하는 자였으며, 또한 그들도 이를 알았기 때문에 십자가를 그에게 지웠다고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시인하는 자들은 "그의 십자가를 지고"(마 16:24), 그 "능욕을 지고"(히 13:13) 그리스도를 뒤따라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를 위한 그의 고난의 친교"를 알아야만 하며, 꾸준히 우리의 사명인 그를 위한 모든 고난에 순종해야만 한다. 그의 "잔"을 마시고 "그의 세례"를 받는 자는 그와 함께 그이 나라에 앉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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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1)(마 27:33-49)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주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히신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Ⅰ. 우리 주 예수님이 사형을 당하신 곳.

1. 그들은 예루살렘에 근접해 있는 "골고다"라고 불리우는 곳에 이르렀는데, 아마도 여기는 대개 집행 장소로써 사용된 것 같다. 

만일 예루살렘에 주님의 집이 있었다면 아마도 그들은 더욱 망신을 주기 위하여 그의 문 앞에 그를 못 박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죄수들이 국가의 공의에 희생 제물이 되었던 바로 그 장소에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희생제물이 되셨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 장소가 "해골의 곳"이라고 불리운 것은 그곳이 해골 안치소였기 때문이며, 죽은 사람들의 뼈와 해골들이 사람들이 이것을 만짐으로 부정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모여져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사람들의 많은 자녀들에 대한 죽음의 승리의 트로피가 놓여졌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사망을 타파하려고 하셨을 때 그는 사망을 이기신 그의 승리에 대한 영광에 이 장소를 첨가하셨다.

2.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35절). 

즉 먼저 그의 손과 발에 못을 박고 그것을 세움으로써 그가 거기에 매달리도록 하였다. 왜냐하면 로마인들은 그렇게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이었다. 

우리 주님께서 참으신 무서운 고통을 마음에 느끼도록 하자. 그리고 이와 같이 [ 나의 죄를 인하여] 찔리우시고 통곡하신 그를 바라보도록 하자. 

그가 슬퍼한 것처럼 슬퍼한 적이 있는가? 우리가 그가 어떻게 죽으셨는가를 바라볼 때 "그가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가?" 바라보도록 하자.

Ⅱ. 그들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그를 야만적이면서도 잔인하게 취급하였다. 

마치 그렇게 위대한 죽음이 당연히 행해져야 하는 것처럼 그들은 거기에다가 쓰라림과 두려움을 더하여 주려고 애썼다.

1. 그들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그에게 마시울 것을 준비하였다(34절). 

솔로몬이 "죽게 된 자에게 독주를 주라"(잠 31:6, 7)고 명령한 것과 같이 사형에 처하게 된 자에게는 대개 한 잔의 신포도주가 주어졌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마시우려고 한 포도주에는 더욱 쓰게 만들기 위하여 "쓸개"를 섞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1) "독초(쓸개)와 쑥의 뿌리"인 "사람의 죄"를 나타낸다(신 29:18). 

아마도 죄인은 그것을 맛있는 음식물처럼 혀 밑에 놓고 굴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에게는 그것이 "쓸개 포도"가 된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실 때 그에게 쓸개 포도가 되셨으며 또한 머지 않아 죄인 자신에게 "사망보다 독한 것"(전 7:26)이 된 것이다.

(2)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 그의 아버지께서 "그의 손에 주신"잔, 즉 "저주가 되게 할 쓴 물"과 같이 실로 쓴잔을 의미하였다(민 5:18). 그들은 문자적으로 예언된 것과 같이 (시 69:21) 이 마실 것을 그에게 주었다.

① 그는 "이것을 맛보셨으며" 또한 자신의 입으로 그 쓴맛을 취하셨다. 

그가 금지된 과일을 불법적으로 맛을 본 우리들의 죄를 대속하려고 하셨을 때 그 쓴잔을 마시지 않고 그대로 지나가게 하지 않으셨다. 이제 그는 완전히 쓰디쓴 죽음을 맛보셨다.

② 그는 "그것을 (맛보셨으나) 마시고자 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이용하여 자기가 당하셔야 할 고통을 감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당하고 순응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즉 "그는 스스로 죽음을 맛보시려고" 하셨으므로 자신의 고통을 늦추게 할 진정제와 같은 것을 마시려고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그의 고난받는 일 가운데서 "해야 할 일들을 많이" 가지고 계셨다.

2. 그들은 그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35절). 

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그들은 그의 겉옷들, 적어도 그의 "상의를 벗겼다." 

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수치스럽게 벌거벗음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하심으로써 그는 우리를 가리워 줄 흰옷을 우리를 위해 구입해 주셨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인하여 우리의 위로가 벗김을 당하였다면(고통 받는다면, 그리스도를 생각함으로써) 그것을 꾸준히 참도록 하자. 그는 우리를 위해 벗기심을 당하셨다. 원수들은 기독자인 우리의 "옷들"을 벗길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의 "최상의 위로"를 벗기지는 못한다. 우리들에게서 "찬미의 옷들"을 벗기지는 못한다. 

사형을 집행 당하는 자들의 옷은 이를 집행한 자의 것이 된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데는 네 사람의 군병이 선임되었다. 그들은 각자가 그것들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다. 그의 웃옷은 만일 그것을 나눈다면 누구에게도 쓸모가 없게 되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제비 뽑는데" 동의를 하였다.

(1)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그 옷은 매우 훌륭하고 좋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려고 다툴 만큼 가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가난함과 일치되지 않는다.

(2) 아마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옷 가를 만짐으로써 병 고침을 받은 사람에 대하여 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 옷이 마술적인 효력을 가지고 있는 값비싼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또는,

(3) 그들은 이러한 성스러운 유물을 이용하여 그의 친구들에게서 돈을 벌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또는,

(4) 그들은 우습게도 그것을 왕의 옷과 같이 값어치 있는 것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또는,

(5) 그것은 오락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죽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에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그 옷을 놓고 노름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의도로 그 일을 하려고 했든지간에 하나님의 말씀은 여기에서 성취되고 있다. 

유명한 "시편" 중에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인용하신 첫마디 말씀은 "저희가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시 22:18)이었다. 이 말씀은 실로 다윗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다윗이 영으로 말했던 그리스도에 대해 "본래부터" 언급된 말씀이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장애물은 끝이 나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결정적인 섭리와 미리 아심" 에 의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광에서 벗기심을 당하신 것은 그것들을 우리들에게 나누어주시기 위함이다.

그들은 이제 "거기 앉아 지켰다"(36절). 의심할 여지없이 대제사장들은 여전히 서서 그를 경외하고 있던 백성들이 일어나서 그를 구출할까 봐 이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그렇게 하도록 명하셨으니, 곧 그를 "지키도록" 명령을 받았던 자는 이로써 그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완전한 증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들을 수 있었으므로 그들에게서 위대한 신앙고백, 즉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54절)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3. 그들은 그의 머리 위에 "죄패"를 써붙였다. 

공공적인 공의를 변호하며 집행되는 죄인에게 더 큰 수치를 주기 위하여 그 사람이 고난 당하는 죄목을 그 앞에서 선포자가 큰 소리로 외치거나 또는 그들의 머리 위에 써 놓는 일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이와 같이 그들은 그리스도의 죄목을 알리기 위하여 그의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써 붙였다. 그들은 그를 모욕하기 위하여 이것을 써 붙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를 번복시켜 그의 명예에 도움이 되게 하셨다. 왜냐하면,

(1) 여기에는 그를 비난하는 죄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가 거짓 구세주요 자칭 왕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그러한 사람이었다고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요 19:21). 

오히려 "이는 구세주 예수"라고 쓰여지고 있다. 분명히 그것은 죄가 아니었다. "이는 유대인의 왕이다." 이것도 죄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메시야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재판장이었던 그의 원수들도 그는 "악을 행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2) 여기에는 그에 관하여 주장된 매우 영광스러운 진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유대인의 왕," 즉 유대인들이 그를 기대하고 그에게 순종해야만 하는 왕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죄목은 곧, 그는 세상의 참 메시야이며 구세주이셨다가 된다. 

발람은 그가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보냄을 받았을 때 오히려 전적으로 그를 축복하였으며 그것도 세 번씩이나 한 것처럼(민 24:10), 빌라도는 그리스도를 죄인이라고 고소하기보다는 그를 "왕"이라고 선포하였으며 그것도 세 가지 명패에 "세 번씩"이나 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목적에 이바지하도록 하신다.

4. 그들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38절). 

"두 강도가 그와 함께" 같은 때, 같은 장소에서, 같은 감시 아래에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 말이 원래 의미하는 것처럼 두 사람의 노상 강도가 못 박혔다. 아마도 이 날이 바로 그들을 처형하는 날로 지정되었던 것 같다. 그들이 아침에 서둘러 그리스도를 박해한 것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그를 처형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빌라도가 이와 같이 하도록 명령한 것은 이러한 강도들을 처형하는 하나의 필수적인 공의가 그리스도를 정죄한 그의 불의를 대속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 주님의 고난을 더욱 치욕스럽게 만들기 위하여 그렇게 하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다"(사 53:12)는 성경 말씀이 성취되었다.

(1)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그에 대한 모욕이었다. 

그는 살아 계실 때 "죄인들에게서 구별되셨지만" "그들은 그들의 죽음에서 나뉘어지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는 마치 그들의 죄 가운데 동참한 자와 같이 그들의 저주 가운데 가장 사악한 죄인과 함께 동참하게 되어졌다. 왜냐하면 그는 유리를 위해 범죄자가 되셨으며 "죄 있는 육체의 모양"을 취하게 되셨기 때문이다. 그가 죽으실 때 범죄자로 헤아림을 당하시고 사악한 자와 동참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죽을 때에 "성도로 헤아림을 받으며 선택된 자와 함께 참예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2) 그가 마치 셋 중에서 가장 사악한 자, 즉 우두머리 행악자인 것처럼 "그들 가운데," 즉 "그들 사이에" 못 박히신 것은 더욱 모욕을 가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셋" 중에서 "가운데"는 우두머리를 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마치 위대하신 구세주가 그 누구보다도 "가장 큰 죄인"이나 되는 것처럼 그에게 더욱 모욕을 주기 위하여 행하여졌다. 또한 그것이 의도된 것은 아마도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는 이 행악자들의 비명과 신음과 저주를 듣고 그의 마지막 순간에 애를 태우며 괴로움을 당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고난을 당하셨을 때 그들의 비참한 것을 친히 맛보려고 하셨다.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나 안드레와 같은 제자들은 후에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와 함께" 못 박히지는 않았다. 

이는 그것이 마치 그들이 사람의 죄를 대속하는 데 있어서 그와 함께 수행하는 자로나 또는 생명과 영광을 함께 사들인 자인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죽음에 아무런 공헌도 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던 두 행악자 사이에 못 박히셨다. 왜냐하면 그는 친히 "자기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5. 그들은 십자가에 달려 있었던 그리스도에게 갖은 욕설과 비방을 퍼부었다. 

우리는 그들이 그와 함께 못 박혔던 강도들에게 어떤 욕설을 퍼부었다는 기사를 찾아 볼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그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그들은 온갖 잔악한 행위를 마음껏 그에게 가하였다고 한다.)

만일 죄수가 칼집(역주:칼이 든 판자를 죄수에게 씌우는 것)이나 마차에 실리는 처벌을 받는다면, 그것은 사형보다는 가벼운 형벌이기 때문에 이러한 모욕적인 언사가 퍼부어지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악명 높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동정심을 가지고 대해져야만 한다. 그것은 실로 죽는 것만으로는 만족될 수 없었던 "위대한 죽음"이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의 겸손을 완전케 하기 위하여 또한 그가 죽으시면서도 그것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그는 "불의를 참으셨으며," "그러한 비난을 몸소 받으셨다." 

드러난 바로는, 그 전날에 그에게 "호산나"를 외친 그의 친구들 중의 그 누구도 그에게 존경심을 나타내기 위해 감히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1) "지나가면서 그를 모욕한" 일반 "백성들," 

그의 극도의 고통과 그것에 대한 모범적인 인내가 그들을 누그러지게 하거나 측은하게 생각하도록 만들지 못하였다. 고함을 질러 그리스도를 오도록 만든 그들은 이제 마치 그들이 "그를 정죄한 것이 좋은 일"이나 되는 것처럼 그에게 비난을 퍼부음으로써 그것을 행한 자신들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그를 "모욕하였다."(39절). 

"모독"이란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과 동등하다[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심으로써]는 것이 강도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한" 사람에 대해 악평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몇 가지로 살펴 본다면,

① 그를 모욕한 사람들. 

그들은 "지나가는 자들," 즉 길을 따라 걸어가던 여행자들이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기브온으로 통하는 큰길이었다. 그들은 대제사장의 하수인들의 퍼뜨린 소문을 듣고 그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각처에 퍼져" 이야기되고 있는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좋은 의견을 가진다는 것은 힘든 일이며 또한 평상시보다 더 큰 열심과 결심을 요구한다. 

모든 사람은 다수의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말하게 되기 쉬우며 또한 악명이 있는 자에게 돌을 던지게 되기 쉽다. Turba Remi sequitur fortunam semper et oeit damnatos- 즉 로마의 하층의 천민들은 사람의 변동적인 운명에 (쉽사리 흔들려) 동요를 받으며, 침체에 빠진 자들을 반드시 내리누르고 만다(Juvenal).

② 그들이 그리스도를 모욕하면서 취한 몸짓. 

그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었다." 이것은 그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의기양양하게 으시대면서 그를 모욕하는 것을 나타낸다(사 37:22; 렘 18:16; 애 2:15). 그 말은 "아하, 소원 성취하였다"(시 35:25)였다. 

이와 같이 그들은, 블레셋인들이 그들 나라의 파괴자인 삼손에게 행했던 것처럼, 그들 나라의 구세주였던 그를 모욕하였다. 이러한 몸짓은 예언되어 있다. 즉 "그들은 나를 보며 머리를 흔들었다"(시 22:7).

③ 그들이 말한 비소와 조롱. 이것들이 기록되어 있다.(시 109:25 참조)

첫째, 그들은 그가 "성전을 헐겠다"고 말하였다고 비방하였다. 

재판장(재판을 맡았던 대제사장 가야바)도 그가 그것에 대해 말한 것이 와전되었음, 곧 잘못 이해되었다는 시실을 알고 있었다(막 14:59 에 나타난 대로). 그러나 그들은 그를 "악평"하기 위하여 그가 성전을 헐려고 했다고 사람들에게 열심히 (와전된) 소문을 퍼뜨렸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스스로 "거짓이며 불의한"것인 줄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들을 믿도록 한 유일한 기회만은 아니었다. 

"크고 단단한 건축물인 성전을 헐겠다고 한 자여, 이제 그 십자가를 뽑고, 그 못을 빼냄으로써 네 힘을 시험하라. 그리하여 네 자신을 구원하라. 만일 네가 네 힘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한다면, 지금이야말로 그것을 발휘라고 증명할 수 있는 최상의 시간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추측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유대인들에게 대한 "거침돌"로 만들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그것이 메시야의 "능력"과 일치되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 그는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후 13:4). 또한 그것은 그들에게 그와 같이 여겨졌다. 그러나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둘째, 그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들어 그를 조롱하였다. 

그들은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 그들은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시험한 마귀의 입에서부터 나온 그의 말을 인용하고 있으며(마 4:3, 6), 또한 동일한 공격을 되풀이하고 있다. 

즉 "만일 네가 하나님이라면"이라고. 그들은 지금이나 또는 앞으로도 그는 반드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그가 자신이 행한 기적, 특히 죽은 자를 일으킴으로써 그것을 입증하셨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또한 그가 종종 자신과 그들에게 언급하였던 그 자신의 부활로써 그것을 완전히 증명하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만일 그들이 주께서 죽은자를 살리신 바 그것을 보고 유의했더라면, 십자가의 반격을 기대했을 것이다. 이것은 "지나간" 것에 대해 적절히 기억하거나 또는 "앞으로 더욱 일어나게 될"것에 대해 꾸준히 기대하지 않고 다만 현재의 상황만을 보고 판단하는 데서 연유된다.

(2) 교회의 지도자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국가의 지도자인 "장로들"은 그를 조롱하였다(41절). 

그들은 그렇게 조롱하기 위해 불량배들을 불러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였으며 스스로 그 자신들이 직접 그리스도에게 모욕을 가하고 조롱을 하였다. 

실상, 그들은 성전에서 그들의 임무를 수행했어야만 하였다. 왜냐하면 그날은 "성회"(레 23:7)로 모이는 무교절의 첫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 예수님에게 침을 뱉으면서 집행 장소에 있었다. 이 얼마나 품위 없고 야비한 행동이었는가! 그 무엇이 이것보다 더 백성들 앞에서 천시하고 멸시하는 행동일 수가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간교하게도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죽였으면서도 될 수 있는 대로 앞에 나서서 조롱하지 않고 뒤에 쳐져서 이를 조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처럼 야비한 일은 없다. 그들이 이렇게 그리스도를 멸시하기 위하여 욕을 하였다면, 우리는 "그를 영화롭게 하는 무리들과 함께 모여 이것이 사악한 일이라면 나는 더 사악한 일을 하였다"라고 말함으로써 그를 비방하기를 두려워해야만 하지 않을까?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두 가지 일을 들어 그를 비방하였다.

① 즉, 그는 "그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42절). 

주님께서는 이전에 그의 예언자와 왕의 직무에 대해 모욕을 당하셨는데, 지금은 구세주로서의 그의 제사장의 직무에 대해 모욕을 당하셨다.

첫째, 그들은 그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가 주장하는 바 구원하는 권세를 가지지 못하였다고 단정하였다. 

실제로 그는 그 때에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셨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그는 남들을 구원하였다. 그러므로 그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 만일 그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둘째, 그들은 빗대어 말하기를, 이제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구원한다는 말은 한낱 허망되고 우스운 것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 행해질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적의 진리는 이의 없이 표현되었던 것이다.

셋째, 그들은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사실을 들어 비난하였다. 

그들은 메시야의 외적인 위엄과 권세를 꿈꾸었으며, 따라서 십자가는 이스라엘의 왕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며 또한 그 특성에도 일치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만일 그가 "십자가에서 내려오기만" 한다면, 만일 그들이 아무런 고통을 받지 않고 그의 나라로 "들어 갈" 수만 있다면,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모시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일은 결정적이다. 즉 십자가가 없으면, 그리스도도 없고 면류관도 없다. 그와 함께 왕 노릇 하려고 하는 자는 그와 함께 기꺼이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함께 못 박혔기" 때문이다.

넷째, 그들은 그에게 "십자가에서 내려 올 것"을 요구하였다. 

우리의 구속과 구원은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만일 그가 이러한 조롱 때문에 마음이 움직여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고,"그리하여 그의 임무를 "끝내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영원히 "버림"을 당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불변적인 사랑과 결심이 이 시험을 극복하시고 이기셨으며, 그러므로 그는 "실패하시거나 용기를 잃지" 않으셨다.

다섯째, 그들은, 만일 그가 "십자가에서 내려온다면 믿겠노라"고 약속하였다. 

즉 그가 메시야라는 증거를 제시한다면 그를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전에 표적을 요구하였을 때 그는 그들에게 자신이 주려고 하는 표적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더 큰 능력의 한 실례인 "무덤에서 살아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이 사실에 대하여 이 삼일 동안을 참지 못하였던 것이다. 만일 그가 "십자가에서 내려 오셨다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이 밤중에 그를 훔쳐갔다"고 말한 것처럼, 군병들이 그를 못 박을 때 어떤 술책을 꾸몄을 것이라는 이유를 붙여 말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활용하지 않으면서 이러 이러한 신앙의 수단과 동기를 가진다면 믿겠노라고 약속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속이는 엄청난 실례이며 또한 완고한 불신앙의 "속임수"에 불과하다.

② 즉, "그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그를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다"(43절). 

즉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는 그를 신뢰한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는 말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자신들을 "그의 자녀들"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그를 신뢰한다는 고백을 해야만 한다(시 9:10). 

그가 "하늘의 귀여움을 받는 자"라고 말하였지만 이제 그들은 그를 자신과 다른 사람을 속인 자라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만일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면(욥의 친구들이 그에 관하여 말한 것처럼), 이러한 "고통 가운데로 내버림을 받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윗이 불평한 대로 "뼈 속에 들어있는 칼"(시 92:10)이었다. 그것은 "좌우에 날 선" 검이었다. 왜냐하면 그 의도는,

첫째, 그를 "중상하며" 또한 구경꾼들로 하여금 그를 사기꾼이나 미혹하는 자로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이 이제 실제적으로 "입증되지" 못한 것처럼 그를 비방하였다.

둘째, 그를 "두렵게" 하며 또한 그로 하여금 그의 아버지의 능력과 사랑에 대하여 불신하고 실망하도록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이것은 "그가 두려워하여" 기도한 제목이며 또는 그는 "이것에서 구원함을 받았다"(히 5:7)고 한다. 

다윗은 그의 박해자들이 "자신의 보좌를 흔들거나" 또는 그의 나라에서 그를 내몰려고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의 믿음을 흔들며" 그를 하나님께 대한 소망에서 내몰려고 하는 것에 대하여 불평하고 있다. 그들은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시 3:2). 또는 "하나님이 저를 버리셨다"(시 71:11)고 하였다. 

여기에서도 그는 다른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표상이 되고 있다. 아니 그리스도에 대한 유명한 예언들 중에서 다윗이 언급한 바로 이 말씀은 그의 "원수들"에 의해 언급되고 있으니 곧 "제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시 22:8)이다. 

분명히 이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그들의 시편기자를 잊고 있었거나 또는 그 모형과 예언에 부합되는 동일한 말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성취되어져야만 한다."

(3) 그 비난을 완전히 하기 위하여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강도들"에게는 마치 그에 비하여 그들이 성자나 되는 것처럼 비방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함께 고난을 받는 자들인 그들이 그의 박해자들과 합세하여 "그를 비방하였다." 

그들 중의 하나는 "만일 네가 그리스도라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비방하였다(눅 23:39).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들 중에서 이 강도는 가장 그리스도를 비방할 이유가 없었으며 또한 그러한 생각을 가지지 말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함께 고난을 받는 사람들은 비록 그 동기가 다른 것이라고 할지라도 대개 서로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법이다. 그들이 전에 어떤 일을 했다고 할지라도 마지막까지 비방하면서 죽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큰 몸의 고통과 또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비열한 질책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스스로 영혼의 타락을 억제하거나 사악한 자의 죄악성을 억누를 수 없다.

이와 같이 우리 주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그의 명예를 손상시킨 범죄를 인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려고 하실 때, 그는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그의 명예"를 높이셨다. 즉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실 뿐만 아니라 가장 사악한 사람에게 가해지는 극도의 모욕을 받으심으로써 그렇게 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를 위해 범죄자가 되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의를 인하여 비방을 받고 거스려 말하는 악담을 듣게 될 때에 우리 대신 비난을 받기 위하여 이와 같이 저주를 받으신 것이다.

Ⅲ.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주 예수님이 사람으로부터 이러한 중상들과 모욕을 받고 있을 때 하늘은 찡그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에 관하여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이것은 어떻게 표시되었는가?- 

"세 시간 동안"(45절) 계속된 예외적이고 기적적인 일식(elclipse)에 의해 표시되었다.  온 땅(세상)에는 어두움이 임하여 있었다. 우리의 번역본에는 그것을 "땅"만으로 제한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번역자들은 "세상"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고대의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생겼던 이 특별한 일식이 잘 알려진 일로써 그 당시의 세계의 각처에 큰 일로 주시되었을 것임으로 이를 국가의 연대기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이는 마치 히스기야 시대에 태양이 뒤로 물러갔던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알려진 바로는 에집트의 헬리오풀리에 있는 디오니시우스(Dionysius)가 이 어두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Aut Deus naturae patitur, aut mundi machina dissolvitur-즉 자연의 하나님이 고통을 하고 있거나 세상의 기계가 못쓰게 되고 있다. 

특별한 빛이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심을 알렸으므로 특별한 어두움이 그의 죽음을 알린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님에게 가해진 모욕은 "하늘을 놀라게" 하였으며, 또한 "매우 두렵게" 하였으며, 더욱이 무질서하고 혼란 되게 만들었다. 태양은 이와 같은 사악을 이전에 본 일이 결코 없었으며, 따라서 뒤로 물러서서 이것을 보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 놀라운 어두움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를 비방하고 있던 모독자들의 입을 막으려고 하였다. 아마도 그 어두움은 지금 그들을 매우 두렵게 하였으므로 비록 그들의 마음은 변화되지 않았지만 "세 시간" 후 어두움이 걷힐 때까지 조용히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의심하면서 서 있었으며 또한 그 후에(47절에 나타난 대로) 온역이 끝났을 때 바로가 했던 것처럼 자신들의 마음을 강퍅케 하였다. 그러나 이 어두움이 원래 의도한 바는,

(1) 그리스도께서 "어두움의 권세와 싸우시는 것"을 나타낸다. 

이 세상의 통치자와 그의 권세들, 즉 "이 세상의 어두움의 주관자들"은 내어 던짐을 당하였으며, 못쓰게 되고 추방을 당하였다. 

그의 승리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그들의 터전에서 그들과 더불어 싸우고 계신다. 즉 그들에게 이 흑암으로써 대적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시며 또한 그들에게 "바람"과 "태양"을 취할 수 있도록 하셨지만, 그것들을 꺾으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승리자보다 더 영광스러운 분이 되고 계신다.

(2) 그가 지금 하늘의 위로를 받지 못하고 계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 어두움은 우리 주 예수님이 영혼이 지금 처해 있는 어두운 구름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태양이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에게 빛나도록 하신다. 그러나 태양 빛도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죄인"이 되셨을 때 그에게서 물러나고 있다.

 "눈을 가지고 태양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영혼은 극도의 슬픔에 차 있으며 하나님의 불쾌함의 잔은 완전히 그에게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태양빛도 무색하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땅이 그에게 냉수 한 방울을 거절하였을 때 하늘도 그에게 한 줄기의 빛을 거절하였다. 우리를 "완전한 흑암"에서 구출하기 위하여 그는 최하의 고난 가운데 계셨으며, 어두움 가운데 행하였으며 빛을 가지지 못하셨다(사 50:10). 

이 어두움이 계속되었던 "세 시간" 동안 그는 "한 마디의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 시간을 지금은 고통 가운데 있는 그 자신의 영혼에 고요히 은거하시면서, 어두움의 권세와 싸우시면서, 그 자신 때문이 아닌 사람의 죄(지금 그는 "그의 영혼"을 죄에 대한 번제물로 드리셨다)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싫어버림을 당하시면서 이 시간을 보내셨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을 창조하신 이래로 이와 같이 어둡고 무서운 장면이 세 시간이나 계속된 일이 결코 없었다. 즉 그것은 사람의 구속과 구원의 위대한 사건의 "고비"(crisis)였다.

2. 그는 그 일에 대하여 어떻게 불평하셨는가?(46절) 

그 일은 오랜 침묵 가운데서 싸우고 난 후 날씨가 개이기 시작한 "제 구시" 즈음에 일어났었다.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그들이 통용하고 있었던 아랍어와 연관이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이중적으로 주목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며 또한 그의 원수들이 "엘리"를 "엘리야"로 잘못 해석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그는 이 말씀을 어디로부터 인용하셨는가? 

즉 시편 22편 1절에서부터이다. 아마도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는 시편 전부를 낭독하시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모든 시편이 그에게 적용되며 또한 다윗은 영으로 거기에서 그의 비천과 승귀의 신분에 대해 말한 것을 나타내셨다. 

이 말씀과 또한 다른 말씀, 즉 "내 영혼을 당신께 의탁하나이다"라는 말씀은 그가 다윗의 시편에서 인용한 것으로써 (비록 다윗은 자신의 말로 이것을 말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며, 또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 줄" 기도 가운데서 성경적인 표현을 쓸 것을 권장하고 있다.

(2) 그는 그것을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의 고통과 고뇌의 극치, 즉 그에게 남아 있는 본성의 힘과 또한 이 간구에서 그의 영혼의 큰 열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제 요엘 3장 15,16절에 있는 말씀이 성취되었으니, 곧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그 빛을 거두리로다.. 나 여호와가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발하리로다." 다윗은 종종 그가 기도 가운데서 "큰 소리로 부르짖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시 55:17).

(3) 그 불평의 말씀은 어떤 것이었는가?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우리 주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이상한 불평이다. 그는 우리가 확신하기로는 "하나님께서 마음에 기뻐하는 택한 사람"(사 42:1)이며, 그가 언제나 즐거움이 되셨던" 자였다. 아버지께서는 지금도 그를 사랑하셨다. 아니, 그는 "자신이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그런데 그가 고통 중에 있을 때 그에게서 버림을 받았다는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정녕 그 고통을, 완전히 죄가 없으므로 자신에게는 두려움이 있을 수 없는 분에게서 그러한 불평이 나오지 않을 수밖에 없을 만큼 큰 고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은 그 자신의 괴로움을 알고 계셨다. 이와 같은 불평이 땅을 진동케 하고 바위로 쪼갠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를 듣는 자의 귀를 울리게 하며" 또한 큰 존경심을 가지고 말해지기에 충분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① 우리 주 예수님은 고난 중에서 잠시 동안 "아버지에게서 버림을 받으셨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허물이 없으셨던 그분이 스스로 그렇게 말씀을 하셨다. 신적인 성품과 인간적인 성품 사이의 연합이 극도로 약화되거나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는 "지금 영원하신 영으로써 자신을 드리고" 계셨다. 

또한 이것은 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나 아버지에 대한 그의 사랑이 감소된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그의 은혜에 대해 실망하거나 지옥의 고통과 같은 것이 없으셨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버리셨다.

첫째, 아버지는 그를 원수의 손에 내어 주셨고 그를 그들의 손아귀에서 구출해 주시려고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는 어두움의 권세로 하여금 그를 대적하도록 내버려두셨으며 또한 그들로 하여금 욥에게 했던 것보다 더 악랄하게 그를 대적하게 하였다. 이제 성경 말씀이 성취되었으니 "하나님이 나를 경건치 않은 자에게 붙이시며 악인의 손에 던지셨구나"(욥 16:11). 그를 구출하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천사가 파송되지 않았으며, 세상에 있는 어떤 친구도 그에게 나타나도록 일으킴을 받지 않았다.

둘째, 아버지께서는 그를 위로하시던 온화한 감정을 철회하셨다. 

"그의 영혼"이 맨 처음에 "고통을 받으셨을" 때 그는 자기를 위로하는 "하늘로부터의 음성"을 들으셨다(요 12:27, 28). 그가 동산에서 고민하고 있었을 때 하늘로부터 천사가 나타나 그를 도왔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서 자신이 얼굴을 감추셨으며, 잠시동안 음침한 골짜기에서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회수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사울처럼 끝없는 절망 가운데로 그를 내버리시지 않으시고 종종 다윗을 버리신 것처럼 잠시 동안의 낙망 가운데 내버리셨다.

셋째, 아버지께서는 그의 영혼을 죄 때문에 사람에게 대해 가지는 그의 분노의 괴로운 감정에로 내버리셨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죄인"이셨으며,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아들로서 사랑하셨지만, 담보물인 그에 대하여 얼굴을 찡그리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표정을 기꺼이 "인정하셨으며," "그가 능히 하실 수 있으셨던" 그것들에 대한 "저항"을 단념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이를 피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일들에서와 같이 이 임무에 순응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②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버지에게서 버림을 받으신 것은 그의 고난 중에서 가장 비참한 것이며, 이에 대하여 그는 크게 불평하셨다. 

여기에서 그는 가장 비참하게 강조를 하고 있다. 그는 "내가 왜 매맞아야만 합니까? 왜 침 뱉음을 당해야만 합니까? 왜 십자가에 못 박혀야만 합니까?"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또한 그는 제자들이 자기에게서 등을 돌렸을 때 "어찌하여 너희는 나를 버리느냐?"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의 아버지가 멀리서 계셨을 때 그는 이와 같이 부르짖으셨다. 왜냐하면 이것은 고통과 비참한 것에 독초와 "쓴 쑥을 넣은"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혼에 물들을"흘려 보냈다(시 69:1-3)

③ 우리 주 예수님은 그가 이와 같이 그의 아버지에게서 버림을 받았을지라도 그를 아버지로 붙들고 계셨다.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비록 나를 버리셨을지라도 당신은 "나의 아버지"입니다. 그리스도는 구속의 사역을 수행할 때에 하나님의 "종"이셨으며, 그를 기쁘시게 하셨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임무를 완수하셨고 관을 쓰셨다. 그 때문에 그는 그를 "그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시고 계시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그의 뜻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극심한 고통 중에서라도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그를 도와주었으며, 또한 그로 하여금 참을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그는 이 사실을 굳게 믿고 붙잡으려고 결심하고 계시다.

(4) 그의 원수들이 이 불평에 대하여 야비하게 비웃고 조롱하였는가를 살펴 보라(47절).

 "그들은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라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로마 군병들의 무식한 오해였다는 것이다.)

로마 군병들은 엘리야와 또한 유대인들이 엘리야가 올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들었으나 "엘리, 엘리"의 뜻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하여 이와 같이 창피스러운 해석을 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백성들이 떠드는 소리 때문에 그가 하신 말씀의 후반부를 듣지 못하였던 것 같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많은 비난들은 큰 오해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신적인 진리들은 성경 말씀의 언어와 문제에 대해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종종 왜곡되어진다. 불완전하게 들은 자는 그들이 들은 것에 대하여 왜곡을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것은 어떤 유대인들이 고의적으로 범한 오해였다고 한다.)

그들은 그가 말씀하신 것에 대해 잘 알았지만 이를 왜곡함으로써 그들 자신과 동료들을 즐겁게 해 주려고 하였으며 또한 그를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게 되자 피조물을 의지하려고 하는 자로 생각하도록 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메시야로 자처하던 그가 이제는 메시야의 선구자로 기대되었던 엘리야의 신세를 기꺼이 지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려고 했던 것 같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훌륭한 사람들의 최상의 경건한 기도가 참람한 조롱자에 의해 비웃음을 받고 조롱을 당한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또한 만일 기도나 설교 가운데서 좋게 말해진 것이 왜곡되고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비난이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그와 같이 왜곡되었다.

Ⅳ. 그의 원수들은 다른 일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고통 중에 있는 그에게 싸늘한 냉대를 하였다.

1. 그 중에 한 사람이 "그에게 신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48절). 

이러한 힘든 고통을 당하는 그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고 시원하게 할 수 있는 감로주를 주는 대신에 그들은 그를 비난하2려고 할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께서 "그의 손에 들려 주셨던" 공포의 쓴잔을 고의적으로 내어 줌으로써 그를 더욱 괴롭게 하였다. "그 중에 한 사람"이 그것을 가지려고 "달려간 것"은 그에게 친절을 보이려고 한 것같이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그를 모욕하고 비방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을 기뻐하였고 또한 그 누군가가 그것을 자신의 손에서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2. 다른 사람들도 그를 비방하고 조롱할 목적으로 엘리야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49절).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오라. 그를 홀로 내버려두어라. 그의 처지는 절망적이다. 하늘이나 땅도 그를 도울 수는 없다. 그의 죽음을 서두르거나 그것을 지체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말자. 그는 엘리야에게 호소하였으니 엘리야가 저를 구원하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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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2)(마 27:50-56)

우리는 여기에서 드디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사실과 이에 수반된 몇 가지 주목할 만한 구절들에 대하여 살펴 볼 수 있다.

Ⅰ.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두신 "모습"(50절). 

제 삼시와 제 육시 사이에, 즉 우리의 계산 대로는 9시에서 12시까지 사이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또한 제 구시 후에, 즉 3시에서 4시 사이에 그는 "운명하셨다." 그 때는 저녁의 희생 제사가 드려진 시간이었으며 또한 유월절 어린양이 죽임을 당한 시간이었다. 

우리의 유월절이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희생의 제물이 되셨으며 또한 저녁에 하나님께 향내나는 제물로써 드려졌다. 그 날은 가브리엘 천사가 다니엘에게 메시야에 대하여 영광스러운 예언을 한 바로 그날 그때였다(단 9:21, 24 등).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천사가 그것을 말했던 바로 그 날부터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 시간까지는 꼭 70주간이 되는데, 하루를 일 년이라고 한다면 490년이 된다고 한다.) 

이는 430년 말기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날과 "비슷한 날"(출 12:41)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모습에 대하여 두 가지 특이한 사실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

1. 그는 앞에서와 같이(46절) "크게 소리를 지르셨다." 그런데,

(1) 이것은 그가 모든 고통과 고역을 치른 후에도 그의 생명은 "온전"하였으며 또한 그의 본성은 "강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죽어가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힘이 없어 가느다란 소리를 낸다. 숨을 헐떡거리면서 더듬는 말소리로 가까스로 몇 마디의 말을 하며 더욱 들리지 않는 말을 중얼거린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숨을 거두시기 전데 "온전한 힘을 가진" 사람처럼 말씀하셨다. 이는 그의 생명이 억지에 의해서가 아닌, "그 자신의 행동과 행위"로써 아버지의 손에 자발적으로 "맡기신" 것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죽으실 때 이와 같이 소리를 지를 수 있는 힘을 가지신 그리스도는 자신이 처해 있던 속박에서부터 해방하실 수 있으며 또한 죽음의 권세들을 대항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희생 제물이시며 제사장에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하신 영으로써 자신을 드리신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크게 소리를 지르셨다."

(2) 그것은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이 "큰 소리"는 불굴의 용기와 또한 그의 근거가 확실하고 싸움에서 용감한 것을 나타내는 담대한 각오로써 우리의 영적인 적들을 공격하셨음을 나타낸다. 그는 이제 "정사와 권세들을 타파"하셨으며 또한 "구원하기에 능한"자가 "정복하기 위해 크게 외치는 것"처럼 이러한 큰 소리를 지르셨다(시 63:1; 사 42:11, 14 비교). 

이제 그는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게 하소서"라고 말했을 때(삿 16:30)처럼 온 힘을 다하여 자신을 굽히셨다. Animamamque in vulnere ponit- 즉 그리고 그의 생명을 버리셨다. 그가 운명하실 때 크게 소리를 지른 것은 그의 죽음이 모든 세상에 선포되고 알려져야만 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모든 인류는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유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큰 소리는 희생 제물에 대해 불어진 나팔소리와 같은 것이었다.

2. 그 후에 그는 "운명하셨다"(영혼이 떠나셨다). 

이것은 죽는것에 대해 흔히 쓰는 완곡적인 표현법이다. 이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이 그가 처해 있던 극심한 고통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그리고 당연히 죽으신 것을 나타내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그의 "영혼"은 그의 "몸"으로부터 분리되었으며, 따라서 그의 몸은 실제로 그리고 참으로 죽은 상태가 되었다. 그가 "죽으신 것"은 확실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반드시 죽으셔야만 하기 때문이다. 

"신적인 섭리"의 "마지막 두루마리"와 "신적인 예언"의 "특허 등기부"에 그것은 이와 같이 기록되었으며 따라서 그는 이와 같이 "마땅히 고난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죽음은 첫 계약을 깨뜨린 데 대한 형벌이므로("네가 정녕 죽으리라") 새 언약의 중보자는 "죽음으로써" 속죄를 해야만 하며, 그렇지 않으면 사하심이 없다(히 9:15). 

그는 자신의 영혼을 "죄에 대한 번제물"로 삼으셨다, 그는 "운명하실 때" 그렇게 하셨으며, 자발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단념하셨다.

Ⅱ. 그의 죽음에 수반된 이적들. 

그의 생전에 "그로 말미암아" 수많은 이적들이 행해졌으므로 우리는 그가 운명하실 때 이적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이름은 "기묘자"이시기 때문이다. 그가 엘리야처럼 "불병거"로 태워 올리워졌다면, 그 자체로도 충분한 이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지도록 보냄을 받으셨으므로 그의 비천하신 신분에는 반드시 신적인 영광의 어떤 두드러진 광채가 수반되어야만 할 것이다.

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 

이 사실은 "보라" (역주: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어있지 않음)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다. "돌이켜 이 위대한 광경을 보라. 그리고 그것에 놀랄지어다." 

우리 주님이 운명하신 시간과 저녁 제사를 드리던 시간이 꼭 같았으므로 그 때에 성전에서 직무를 수행하고 있던 제사장들은 보이지 않는 능력에 의하여 "성전 휘장이 찢어지는 것"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였을 것이다. 

그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을 구분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가 "내가 이 성전을 헐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하였으며 그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함으로써 그를 정죄하였다. 이제 주님께서는 그의 능력을 이와 같이 나타내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만이 그가 원한다면 그의 말을 성취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셨다. 

이 이적에도 그리스도의 다른 이적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묘한 신비가 내포되어 있다.

(1) 그것은 지금 기력이 없어진 그리스도의 몸이 성전과 일치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완전하심"이 거주하시는 참된 성전이었다. 그리스도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셨을 때," 그리하여 그 성전을 해체하셨을 때 문자적인 성전은 "그 휘장이 찢어짐"으로서 그 소리에 화답하였고 그 외침에 응답하셨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죽음은 우리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는 육체의 휘장을 찢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러하였으며, 참된 기독자의 죽음이 그러하다.

(2) 그것은 구약의 신비적인 것들을 계시하고 들어내는 것을 의미하였다. 

성전의 휘장은 모세의 얼굴을 가리웠던 것처럼 가리기 위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덮는 휘장"이라고도 불리웠다. 왜냐하면 대제사장 이외에는 누구든지 지성소의 장식품들을 보는 것은 가장 큰 형벌이었기 때문이다. 

대제사장도 일 년에 단 한 번 큰 예식을 갖추고 짙은 연기 사이로 그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그 율법 시대의 어두움을 나타내었다(고후 3:13).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지금, 모든 것은 공개되었고 그 신비들은 벗겨졌으며, 따라서 달리는 자도 그 의미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시은소는 위대한 "대속물"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만나" 항아리는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거울(이것은 휘장이 가리워져 있을 때 그것을 보는 데 도움을 준다)에서 보는 것처럼 주님의 영광을 면전에서 볼 수 있다." "우리의 눈은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

(3)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의식적인 법이었던 그들 사이에 가로 놓여 있던 벽이 제거됨으로써 연합하게 됨을 의미하였다. 

유대인들은 이 벽으로 다른 백성들과 구별하였으며(담울로 두른 정원처럼), 다른 사람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안" 그들은 하나님에게로 가까이 갔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으로써 의식적인 법을 폐지하셨으며, "손으로 쓴 의문의 증서"를 도말 하셨으며, 그것을 꺼내어 그의 십자가에 못박으셨으며, 그리하여 "분리하는 중간 담을 깨뜨리셨다." 또한 그러한 규정들을 폐하심으로써 "원수 된 것을 폐하셨으며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입게 하셨으며"(막힌 담을 허심으로써 두 개의 방이 하나로 되고 또한 크고 빛나는 방이 되었다), 그리하여 "화평하게 하셨다"(엡 2:14-16).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가로막는 모든 휘장을 찢으시고 하나로 만들기 위함이시었다(요 17:21).

(4) 그것은 하나님에게로 들어가는 "새로운 생명길"을 개봉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 휘장은 "쇄키나"(영광)가 있었던 지성소로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러나 그것이 찢어진 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에게로 가는 길을 여신 것을 나타낸다.

① 그는 "스스로" 이 일을 하셨다. 

이 날은 위대한 "속죄 일"이었으며, 그때에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 표로써 휘장이 찢어졌던 것이다(히 9:7)등). 바깥뜰에서 그의 희생 제물이 드려졌으므로 이제는 휘장 안에 있는 시은소에 그 피가 뿌려졌다. 그러므로 "문들아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왜냐하면 영광의 제사장이신 "영광의 왕이 들어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가까이 가서 그에게 접근하게 되셨다(렘 30:21). 비록 그는 40여일이 지날 때까지 손으로 만들지 않는 성소에로 몸소 올라가시지 않으셨지만 그는 즉시로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셨으며 실질적인 허가서를 가지고 계셨다.

② 그는 "그 안에서 우리를 위해" 그 일을 하셨다. 

사도는 그와 같이 이를 적용하고 있다. 즉,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니"(히 10:19, 20), 

그가 죽으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에게로 데려가기 위함이며, 이를 위하여 우리와 그 사이에 가로 놓여있던 범죄와 진노의 휘장을 찢으셨다." 즉, "그룹들"과 "화염검"을 없이 하시고 "생명나무에로의"길을 여셨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금 마음대로 은혜의 보좌와 시은소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으며 또한 이 후에 영광의 보좌에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히 4:16; 6:20). 

휘장이 찢어진 것은(고대의 찬송가가 특별히 그것을 나타내고 있듯이)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쓰라림을 극복하시고 하늘 나라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여셨음"을 나타낸다. 

휘장이 찢어졌기 때문에 그 어떠한 것도 우리가 하늘 나라로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좌절시킬 수 없다. "문은 하늘에서 열려져 있다"(계 4:1).

2. "땅이 진동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못박히신 갈보리 언덕뿐만 아니라 "온 땅"과 인접한 나라들이 진동하였다. 이 지진은 두 가지 일을 나타내었다.

(1) "그리스도를 못 박은 자들"의 "소름끼치는" 죄악. 

땅은 이러한 짐 아래에서 흔들림으로써 박해를 당하였던 분의 무죄성과 그를 박해하였던 자들의 불경건에 대하여 증거를 하였다. 전에 모든 피조물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짐이나 또는 그를 못 박은 죄악스러운 고통 아래에서 결코 신음하지 않았다. 

그 땅은 이전에 받아들여 그 때문에 "저주"를 받았던 아벨의 피(창 4:11, 12)보다 더욱 고귀한 그리스도의 피를 "받아들이려고 그 입을 여는 것이 두렵기나 한 것"처럼 "진동하였으며" 또한 마치 보다 경한 죄 때문에 다단과 아비람을 삼켰던 것처럼 그를 죽게 한 그러한 반역자들을 삼키려고 "입을 열려는 것"처럼 "진동하였다." 

선지자가 악인의 사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큰 불쾌감을 나타내려고 할 때 그는 "이로 인하여 땅이 떨지 않겠느냐?"고 묻고 있다(암 8:8).

(2)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영광스러운" 성취. 

이 "지진"은 강력한 충격, 즉 이제 마귀의 왕국에 주어진 치명적인 타격을 의미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극악무도한 권세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퍼부으셨으므로(옛날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 처럼) "땅이 진동하였다"(삿 5:4; 시 68:7, 8). 

하나님께서는 모든 나라들의 소망(그리스도)이 도래할 때 모든 국가들을 진동시키고 계시다. 아마도 이 진동에 대해 언급한 "또 한 번이 진동"이 있다(학 2:6, 21).

3. "바위가 터졌다." 

땅 중에서 가장 단단하고 견고한 부분이 강력한 충격을 느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아이들이 "호산나"를 외치는 것을 중단한다면,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이라"고 하셨다. 

이제 실제로 그 바위들은 그렇게 하였으니 고난받으시는 예수님의 영광을 선포하였으며, 머지 않아 보좌에 앉으신 자의 얼굴에서 자신들을 숨기기 위하여 "굴과 산 바위틈에" 숨으려고 할 강퍅한 유대인들보다 더욱 그에게 행해진 그릇된 처사들에 대해 잘 알았다(계 6:16; 사 2:21 참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 것이다"(나 1:6). 예수 그리스도는 "반석"이시다. "이러한" 바위들이 깨어진 것은 "그" 바위가 깨어진 것을 의미하는데,

(1) 이는 모세가 호렙에 있는 바위틈에 숨었던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그 틈에 "숨도"하기 위함이다. 

즉 우리로 하여금 모세가 했던 것처럼 거기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볼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출 33:22). 그리스도의 비둘기는 "바위틈"에 숨기워져 있다고 말해진다(아 2:14).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들이 암시하듯이 깨어진 바위, 즉 우리 주 예수님의 상처 속에 보호되어 있다.

(2) 이는 모세가 "쳤던"(출 17:6) 또는 하나님께서 가르신(시 78:15) 바위로부터 생수가 흘러나오듯이 그 틈으로부터 생수가 흘러나오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 바위는 그리스도였다"(고전 10:4).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기념할 때 우리의 돌같이 강퍅한 마음은 "깨어져야만" 한다 ─즉 옷이 아니라 마음이 깨어져야만 한다.

 "굴복하거나 녹아지려고"하지 않는 마음은 바위보다 더 단단한 마음이며, 거기에서 그리스도는 "분명히 못 박히신 것이 나타내 보여지고 있다."

4. "무덤들이 열렸다." 

이 사실은 우리가 의심하는 바를 충분히 설명해 주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은 그것을 만족시켜 주려고 의도도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바위를 깨었던 지진과 같은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육신의 "잠"에 불과하며, "무덤은 잠자는" 침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주 예수님의 권능에 의해 일깨워졌으며,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53절).

(1) 우리는 그것에 관하여 우리가 풀 수 없는 많은 의문들을 제기하게 될 것이다.

① "일어난" 이 "성도들은 누구"였는가? 

어떤 사람은 "옛날의 족장"들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들은 가나안 땅에 장사되었으며 아마도 이러한 초기 부활의 특권을 믿음으로 내다보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최근에 족장들의 실례를 들어 부활의 교리를 입증하였다(마 22:32). 또는 이것은 그의 의논에 대한 조속한 확증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일어났던 이 사람들은 육체로 계셨던 그리스도를 보았지만 그보다 먼저 죽었던 "최근의 성도들"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그의 아버지 요셉, 사가랴, 시므온, 세례 요한 등과 같은 사람들로서, 그들은 살아 있을 때에 제자들로 알려져 있었으며, 따라서 후에 "불가사의한 현상"에 있어서 그것들에 대한 증인이 되기에 합당하였다. 그들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진리를 자신들의 피로 인쳤던 자들로서, 이와 같이 "존귀하게 되고 위엄 있게 되었다"고 추측한다면 어떨까? 그리스도께서는 특별히 그들을 그의 선구자로 지적하고 있다(마 23:35).)

또한 우리는 계시록 22장 4,5절에서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이 "나머지 죽은 자들보다" 먼저 일으킴을 받았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은 자들은 "먼저" 그와 함께 왕노릇하게 될 것이다.

②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일으킴을 받아 다른 곳에서 거하였으며, 그가 부활하실 때까지 "성으로 들어가지"않았는지 또한(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비록 그들의 "무덤들"("바리새인"이 그것을 "세우고" "꾸몄다." 마 23:29)은 지진에 의해 산산히 부서져 버렸지만(하나님께서는 그 외식적인 존경에 관심을 갖지 않으셨다), 그들은 주님께서 부활하실 때까지 "소생"하거나 "일어나지" 않았는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여기에서는 간결하게 "무덤이 열렸다"고만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만이 확실한 것이다.

③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그들은 다만 그들이 나타난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증거를 하기 위하여 일어났으며 그들이 증거를 마쳤을 때 또다시 무덤에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그들의 영예를 위해 우리는 "입증"할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이 "추측"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것이 될 것이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하여 "더 이상 죽지 않았으며,"따라서 그와 함께 영광스럽게 승천하였다. 분명히 첫째 부활에 참예하였던 그들에게 "둘째" 사망은 무력한 것이었다.

④ 그들이 나타난 자들에게(분명히 "모든 백성"이 아닌 "많은 사람"에게 이다), 그것이 원수였든지 친구였든지간에, 어떻게 나타났으며, 얼마나 자주 말하고 행동하였으며, 어떻게 사라졌는가는 우리들에게 해당되지 않은 은밀한 일들이다. 

우리는 "기록된 것 이상으로 현명"해지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 사실이 그와 같이 간략하게 언급된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의 신앙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그 방법에 대해 골몰하지 말 것을 분명히 암시해 주기 위함이다. 우리는 더욱 확실한 예언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 누가복음 16장 31절을 보라.

(2) 우리는 이것에서부터 많은 좋은 교훈들을 배울 수 있다.

①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에 살았고 죽었던 자들까지도 지금 살아있던 자들과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이셨으며, 앞으로도 "영원하실"것이기 때문이다(히 13:8).

②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으로써 죽음을 정복하셨으며, 제거하셨으며, 무력케 하셨다. 

부활한 이 성도들은 "사망"의 권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의 트로피였으며, 그는 이와 같이 "공개적으로 그것을 나타내 보이셨다." 

사망의 권세를 가진 자를 몸소 죽으심으로써 파멸시키셨으므로, 그는 이와 같이 "사로잡은 자를 사로잡으셨으며," 또한 이러한 "도로 빼앗은 상급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며, 이로써 "내가 무덤의 권세로부터 그들을 속량하리라"는 말씀이 성취되었다.

③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모든 성도들의 육신은 때가 찰 때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마지막 날에 있게 될 일반적인 부활의 확실한 보증이었으니, 그때에 "무덤에 있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아마도 예루살렘이 여기에서 "거룩한 성"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일반적인 부활 때에 성도들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성은 실로 이름과 모형에 있어서 "거룩한 성"(계 21:2)이 될 것이다.

④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힘입어 또한 그것에 일치하여 "죄의 사망"에서 "의의 생명"에로 부활하게 된다. 

그들은 신적이며 영적인 생명에로 "그와 함께 일으킴을 받고"있다. 그들은 "거룩한 성으로 들어가서," 그 "시민"이 되어 거기에서 교제를 가지며,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고 있다."

Ⅲ. 집행을 하기 위해 고용되었던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죄책을 깨달음(54절).

 이것은 다른 이적에 못지 않은 이적적인 사실로 간주 될 수 있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죄책을 느낀 사람들. 

그들은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었다. 즉 이 집행을 감시하던 대움직이과 그의 부하들이었다.

(1) 그들은 "군인들"로써, 그들의 직업은 대개 고된 것이었으며, 또한 그들의 마음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처럼 두려움이나 동정에 대하여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깨뜨리고 낮추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하여 담대함을 가질 수 있는 마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2) 그들은 이제 비로소 성취된 성경 말씀은 전혀 알지 못하는 "로마인들과 이방인들"이었다. 

그들은 단지 죄책감만을 느꼈다. 이는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문맹"(소경됨)의 슬픔 조짐(presage)으로써, 그 때에 복음은 이방인들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로 전하여졌다. 여기에서 이방인들은 "부드럽게" 되었고, 유대인들은 "강퍅하게" 되었다.

(3) 그들은 그리스도를 박해한 자들이며, 누가복음 23장 36절에 나타난 대로 직전에 그를 비방한 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양심을 지배하시는 그의 능력으로써 얼마나 급속도로 그들의 언어를 바꾸셨으며 또한 얼마나 빨리 "협박과 살상,"모독밖에 모르던 그들의 입으로부터 그의 진리에 대해 영광스러운 고백을 하게 만드셨는가 !

2. 그들의 죄책감을 느끼게 된 동기(수단). 

그들은 자신들을 놀라게 한 "지진"을 보았으며, 또한 "행해진" 그 밖의 "일들을" 보았다.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실 때 그의 영광을 입증하기 위하여 행해졌으며 또한 그 밖에 어떤 목적을 가졌든지 간에 이 군인들을 목표로 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가운데서 두렵게 나타나시는 것은 종종 죄인들을 뉘우치게 하고 일깨우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이다.

3. 이 죄책감은 두 가지로 표현되고 있다.

(1) 그들에게 "임하였던 두려움." 

그들은 "심히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어두움 가운데 묻히게 될까봐 또는 지진 가운데 삼킴을 당하게 될까봐 두려워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께서는 쉽사리 그의 대적들의 용감성을 놀라게 하실 수 있으며 또한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단지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도록 하신다는 사실이다. 

범죄는 사람들을 두렵게 한다. 불법이 성할 때 "경계심"을 가지고 "항상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심판이 행해질 때 경악심을 가지고 "심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땅이 옮겨질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들도 있다(시 46:1, 2).

(2) 그들에게서 "나온 증거." 

그들은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가"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고상한 신앙 고백이다. 베드로는 이 때문에 축복을 받았다(마 16:16, 17). 그것은 미해결로 남아있는 문제이며, 그와 그의 원수들이 "논쟁하였던" 요점이었다(마 26:63, 64). 

그의 제자들은 그것을 믿었다. 그러나 이 즈음에 그들은 감히 그것을 고백하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 주님 자신은 "어찌하여 너희는 나를 버렸느냐?"고 질문하도록 유혹을 받았었다. 유대인들은 그가 지금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므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한 기정사실로 믿어버렸다. 왜냐하면 그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 백부장과 군병들은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자발적으로 기독자의 신앙 고백을 하고 있다. 

가장 훌륭한 제자도 이전에 이보다 더 훌륭한 신앙 고백을 할 수 없었으며 또한 이 때에도 그들 제자들은 이와 같이 말할 만한 신앙과 용기를 가지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영예스러움이 깨어지고 파멸되는 것처럼 보여질 때에라도 그것을 유지하고 입증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위대하며, 승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Ⅳ.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증인이었던 그의 친구들이 참석(55,56절). 몇 가지로 살펴 보면,

1. 그들은 누구였던가? 

"갈릴리에서부터 좇아 온 많은 여자들"이었다. 그의 제자들(다른 곳에는 요한만이 십자가 곁에 서 있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요 19:26)은 실의에 빠져 있었으며, 동일한 정죄를 받게 될까봐 두려워하여 감히 나타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나머지 제자들이 야비하게 그를 버리고 도망갔을 때 그에게 "담대하게" 나온 자들은 사람들이 "단순하다"고 부르는 여자들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연약한 성을 가진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신앙 가운데서 강해질 수 있으니, 그리스도의 힘은 연약함 가운데서도 온전케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거기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용기와 결심을 가진 것 때문에 유명한 여자 순교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 여자들은,

(1)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그가 설교하시는 것을 들으려고 "갈릴리에서부터 좇아 온 자들"이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오직 남자들만이 절기를 지키려고 올라오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80 내지 100여 마일이 되는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까지 이렇게 먼 여정을 그를 따라 왔으므로 그들은 이제 그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가 이전에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하고 고난을 받은 것은 신실하게 끝까지 그를 따르기 위한 논거가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렇게 "멀리" 그리고 오랫동안 그를 뒤따르고, 그렇게 많은 일들을 그를 위해 행하였는데, 이제 와서 그를 버려야 할 것인가?(갈 3:3, 4)

(2) 그들은 자신들의 물질을 드려 그의 생계를 "돌보았다." 

만일 그들이 허락만 받는다면, 지금이라도 그를 기꺼이 섬기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므로 그들은 지금 "그를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우리가 하려고 계획하려는" 일을 억제 당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봉사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한다. 

지금 그는 우리의 "봉사"가 미치지 않는 "하늘 나라"에 계시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곳에 계시지는 않으신다.

(3) 그들 중 어떤 여자는 특별히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자를 "영화롭게"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여자들에 대하여 "이전에" 종종 성경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마지막"까지 그들에 대해 찾아 볼 수 잇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실로 큰 영예가 아닐 수 없다.

①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그들이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또는 그들의 원수들의 분노 때문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쨌든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자와 친구들이 그의 상처를 멀리하고 서 있는 것"은 그의 고난을 더욱 쓰리게 만들었다(시 38:11; 욥 19:13).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하려고만 한다면 가까이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사람은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 그들의 친한 친구들이 그들에 대해 부끄럽게 여긴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지 말아야 한다. 

바울에게 위험이 닥쳤을 때, "그 누구도 그의 곁에 있지 않았다"(딤후 4:16).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이 이상하게 여겨진다면, 우리 주님께서 이전에 그와 같은 일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자.

② 그들은 거기에서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과 호의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에게 사랑을 수행하는 일이 금지되었을 때 사랑의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③ 그것은 "슬픔에 젖은" 눈길이었다. 

그들은 지금 창에 찔리우시고 "신음하셨던" 그를 바라보았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은 그를 보고 "괴로워하였다." 

이러한 고통 중에 있는 그를 바라보면서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애가 탔는지를 우리는 쉽사리 알 수 있다. 그들의 눈에서는 홍수처럼 눈물이 흘러 내렸다. 신앙의 눈으로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바라보도록 하자. 그리하여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의 위대하신 사랑을 느끼도록 하자. 그러나,

④ 그것은 단지 바라보기만 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를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돕지" 못하였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노리스(Norris)씨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실 때 그의 가장 훌륭한 친구도 단지 관망자에 불과하였으며, "수호 천사들도 곁에 서서 떨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포도주 틀을 홀로 밟으셨으며"또한 백성들 중의 그 누구도 그와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의 자신의 팔로 구원을 이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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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장사(마 27:57-66)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매장"되신 기사와 또한 그 방법과 상황에 대해 읽어볼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1. "그를 무덤에 넣은" 그의 제자들의 "호의"와 "선의,"

2. 그를 거기에서 지키려고 했던 그의 원수들의 "악의"와 "사악함"에 대해 살펴 볼 수 있다.

Ⅰ. 그의 제자들(친구들)은 그를 "훌륭한 묘지"에 장사지냈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간단히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매장되셨다." 

그의 고귀하신 영혼이 낙원으로 가셨을 때 그의 훌륭하신 몸은 무덤의 묘실에 넣어졌다. 이는 요나의 모형에 일치하며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시키기 위함이다.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다"(역주:사 53:9 참조). 

이와 같이 그는 만사에 있어서 죄만을 제외하고는 "그의 형제와 같이" 되셨으며 또한 "그는" 우리와 같이 흙으로 "돌아가셔"야만 하였다. 그가 매장되신 것은 그의 죽으심을 확실하게 하며 또한 그의 부활을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함이었다. 

빌라도는 그가 완전히 죽었다고 확신하기까지 그의 몸을 매장하도록 내어 주지 않았다. 증인들이 "매장되지 않는" 동안에는 그들에게 어떤 희망이 있었다(계 11:8). 

그러나 위대한 증인이신 그리스도는 "무덤 속에 놓여있는 죽은 자"같이, 즉 "죽은 자들 가운데 한가하게" 놓여져 계셨다. 그가 "매장"되신 것은 무덤의 공포를 제거하시고 우리들에게 안심을 시키시며, 우리들의 싸늘하고 불쾌한 침대를 따뜻하고 향내나게 하시며 또한 우리가 "그와 함께 장사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2. 그의 매장에 대한 특별한 상황이 여기에서 언급되었다.

(1) 그가 매장되신 시간. 

그것은 "저물었을 때"였다. 그가 죽으신 바로 그날 저녁, 해가 지기 전이었는데 대개 이 시간에 행악자들을 매장하였다. 그 일은 다음날까지 연기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날은 "안식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죽은 자를 매장하는 것은 안식일과 같이 휴식하는 날이나 즐거운 날에 적합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2) 무덤에 관해 관심을 가졌던 자는 아리마대 요셉이었다. 

그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 버렸으며, 그 누구도 그들의 주님에게 이러한 존경심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나타나지 않았다.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이 목베임을 당한 후에 "그의 몸을 거두어 장사함으로써"(마 14:12) 그들의 주님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었었다.] 

그리스도를 좇았던 여자들은 그것을 감히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훌륭한 사람을 감동시켜 그 일을 하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실 때 그것을 행할 도구를 찾으신다. 요셉은 이 일을 하기에 매우 적합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① 그는 부자였으므로 그 일을 할 만한 자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마을로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매우 어울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귀족"을 필요로 하였던 한 봉사를 위해 채용하기로 준비된 "부자"가 있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즉, 세상적인 부귀는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길을 가는 데 있어서 방해물이 되지만,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에 쓰여지게 될 그것은 특권과 기회가 되며 또한 만일 진심으로 그 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려고 한다면 그것을 가진 자에게 그것은 좋은 것이 된다.

② 그는 우리 주 예수님에게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주님의 제자"였으며, 비록 그것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지 않았지만 그를 믿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은밀한 제자들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에도 칠천 명이나 되었다.(롬 11:4).

(3) 빌라도가 그 시체를 내어 주라고 분부함(58절). 

요셉은 빌라도에게 "갔다." 빌라도는 시체를 처분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통치자의 권세가 관계되어 있는 일에 있어서는 그 권세에 대해 적절히 유의가 되어야만 하며 그것을 함부로 깨뜨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행하는 선행은 소란하지 않고 평화스럽게 행해져야만 한다. 

빌라도는 무죄한 사람을 정죄함으로써,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그 죄를 속죄할 수 있는 구실을 마련하기 위하여 그 시체를 훌륭하게 매장할 수 있는 사람에게 기꺼이 내어 주려고 하였다. 요셉이 그것을 청원하고 빌라도가 이를 내어 주려고 함으로써 그리스도에게 "영광"이 돌려졌으며, 그의 "고결함"에 대해 증거가 되어졌다.

(4) 시체를 값비싼 옷으로 두름(59절). 

요셉은 영예스러운 통치자(역주:그는 공의회 회원이었음)였지만 그는 치욕되고 저주스러운 나무에서(아마도 팔로 안고) "내렸다"(행 13:29).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 대한 참된 사랑이 있는 곳에 너무 천박하기 때문에 그에게 꾸부려 봉사할 수 없는 일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을 취한 후에 그는 "정한 세마포로 쌌다." 왜냐하면 세마포로 싸서 매장하는 것이 그 당시의 일반적인 관습이었으며, 요셉은 이를 본뜨고 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훌륭한 사람들의 시체는 잘 간수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부활 때에 그들을 위해 예비된 영광이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부활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확증해야만 하며 또한 보다 더 나은 곳을 위하여 시체를 감싸야만 한다. 이러한 인간성의 일반적인 행동은 만일 "경건한 종류"를 따라 행해진다면 바람직한 기독교의 일부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5) 그 시체를 묘실에 넣어둠(60절). 

세상의 귀족이 그 위엄과 장엄함을 "무덤에로 가져가거나 거기에 둘 수는"(욥 21:32) 결코 없다. 개인적인 무덤은 그 나라가 볼 수 있게 임하지 않았던 그에게는 가장 어울리는 것이었다.

① 그는 "빌린" 무덤, 즉 요셉의 무덤에 놓여졌다. 

그는 살아 생전에 "그이 머리를 둘" 자신의 집을 가지고 있지 못하셨으며, 마찬가지로 그가 죽으셨을 때도 "자신의 몸을 둘" 무덤을 가지고 있지 못하셨다. 이것은 그의 가난의 한 실례였다. 

여기에는 어떤 신비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 무덤은 "죄인들"의 특별한 상속물이다(욥 24:19). 우리의 죄와 무덤 이외에는 참으로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는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시 146:4). 

우리가 무덤으로 갈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처소로 가는 것이다. 자신의 죄가 없으셨던 우리 주 예수님은 그 자신의 무덤을 가지고 있지 않으셨다.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죽으셨으므로 그는 당연히 "빌린' 무덤에 장사되어야 마땅하였다. 

유대인들은 "그의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도록" 하였다. 즉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과 함께 묻히도록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좌절시키심으로써 "그 묘실(혹 죽은 후에)이 부자와 함께 되도록" 하셨다(사 53:9).

② 그는 요셉이 아마도 "그 자신을 위해" 준비하였던 "새 무덤"에 두어졌다. 

어쨌든 그 무덤은 그렇게 빨리 일어나셨던 그가 잠시 누워 있기에는 "결코 나쁜 곳"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그 무덤을 "휴식의 침상," 아니 "향료의 침상"으로 바꾸심으로써 무덤의 소유권을 변경하시고 실로 그것을 "새로운"것으로 만드신 그가 누워 있기에는 "매우 훌륭한" 것이었다.

③ 그는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두어졌다. 

예루살렘 근방의 땅은 대개 바위로 되어 있었다. 셉나는 그의 묘실을 "바위"에 팠다(요 22:16). 하나님의 섭리는 그리스도의 묘실을 견고한 바위에 있게 되도록 명하셨다. 이는 제자들이 그 몸을 훔치기 위하여 땅 속으로 파들어가거나 그 뒤에 있는 벽을 깨었다고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거기에 들어가려면 감시하였던 그 문 이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④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았다." 

이것도 역시 나사로의 무덤에 대한 묘사에 나오는 것과 같이(요 11:38), 죽은 시체를 묻는 유대인의 관습에 의한 것인데, 이는 죽은 자가 "산 자들"고 "구별되고" 또한 그들에게서 "끊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만일 무덤이 그의 감옥이었다면, 지금 문에는 열쇠가 잠기고 빗장이 찔러졌을 것이다. 무덤 어귀에 돌을 굴려 놓은 것은 그 매장이 완료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침묵과 슬픔 가운데서 우리 주님의 귀중하신 몸을 "모든 사람을 위해 예비 된 집" 인 무덤에 두고 난 후 그들은 아무런 예식도 치루지 않고 "떠나가고 말았다." 

우리가 기독자된 형제들의 시체를 어둡고 조용한 무덤에 두고 뒤돌아 서서 집으로 갈 때 그것은 매우 우울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 슬프도다. "집으로 가고 그들을 뒤에 남겨둔 것"은 우리가 아니다. 아니, 더 나은 본향으로 가고 우리를 뒤에 남겨 둔 것은 죽은 그들이다.

(6) 그 장례식에 수행했던 무리들. 그것은 매우 "적고 초라하였다." 

여기에는 시체를 따라가면서 애곡하는 친척들도 없었고 그 엄숙함을 더욱 빛나게 할 예식들도 없었다. 다만 참된 애곡자들이었던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56절)가 있었다. 이들은 "십자가"에까지 그를 뒤따라갔을 뿐만 아니라 "무덤에"까지 따라왔다. 마치 슬픔이라도 가라앉히려는 듯이 그들은 "무덤을 향하여 앉았다." 이는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가를 보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눈물의 강으로 흘러가기 위함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에게 대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그를 따르게 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죽음 그 자체는 신적인 불길을 꺼버릴 수 없다(아 8:6, 7)

Ⅱ. 그의 원수들은 온 힘을 기울여 그의 부활을 방해하려고 하였다. 

그들이 이 이을 한 것은 "예비일 다음 날인 이튿날"이었다(62절). 그 날은 유대인의 "안식일"인 제 칠일이었다. 이제 그 날 이후에 시작되었던 기독자의 안식일을 제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 그 날 하루 종일 그리스도는 무덤에 놓여져 있었다. 

엿새 동안에 그의 모든 역사를 행하셨으므로 제 칠일에 그는 "휴식하시고 원기를 회복하셨다."

2. 그 날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지난주에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면서 예배를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빌라도와 더불어 무덤을 지키는 문제를 논의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죄에다 더욱 큰 모반을 더하였다." 

그 날에 큰 자비를 베푸는 문제 때문에 종종 주님과 논쟁을 벌였던 그들은 큰 악행을 저지르는 일에 몰두하였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그들이 "빌라도"에게 한 말.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그것을 훌륭하게 장사하겠다고 한 자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에 불암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렇게 된 이상 그들은 그 무덤을 지킬 것을 원하였다.

① 그들의 요청은 "저 유혹하던 자(진리의 본체이신 그를 그들은 이와 같이 불렀다)가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리라"고 했다고 서두를 꺼내고 있다. 

그는 그렇게 말씀하셨으며 또한 그의 제자들도 자신들의 신앙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그 말씀들을 "기억하였다." 그러나 그의 박해자들은 그들의 분노와 사악함을 더욱 분발시키기 위하여 그 말씀들을 기억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동일한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향기가 되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냄새가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유혹하는 자"라고 부르면서도 빌라도에게는 "주"라는 호칭을 붙였다. 이와 같이 선한 사람에 대하여 가장 사악하게 중상하는 자들은 대개 "권력 있는 사람"에 대해 야비하게 아첨하는 자들이다.

② 그것은 그들의 질투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살아났다."고 하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첫째, 그들이 "참으로" 두려워한 것은 그의 "부활"이었다. 

그리스도의 최고 영광과 그의 백성들의 최고 기쁨이었던 것이 그의 원수들에게는 가장 두려운 것이 되었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악으로 몰아 넣은 것이 그를 일으키는 전조가 되었으며 또한 그를 통치하는 조짐이 되게 하였다(창 37:8). 그들이 요셉에게 대하여 행하려고 목표했던 것은 그것을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그를 죽이고 그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고 하였다. 

이와 같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마치 다윗의 원수들이 그에 대해 "이제 저가 눕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시 41:8)고 한 것처럼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예언을 말소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만일 그가 일어나신다면, 그것은 그들의 모든 조처를 깨뜨리고 말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이 또다시 수포로 돌아가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제사장들은 저명한 관원이었던 요셉과 니고메모가 그리스도의 시체에 대해 존경을 나타내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으며 그것을 불길한 징조로 보았을 것이다. 또는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이 당황하였던 "죽은" 나사로를 그가 살리셨던 사실을 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둘째,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갈까봐" 두려워하였다. 

이것은 거의 일어날 수 없는 희박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1. 그들은 마땅히 참된 봉사를 드렸어야 할 그의 생전에도 그를 인정할 만한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의 죽음이 이러한 겁쟁이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었을 리 만무하였다.

2. 그들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도적질함으로써 그가 살아났다고 백성들에게 어떻게 약속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으심으로써 그 자신이 유혹하던 자임이 입증된다면, 저 세상에서의 보상을 의지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렸던 그의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앞장서서 그 사기꾼 때문에 고난을 받으려고 하거나 또는 그의 이름을 인하여 처음 던지는 돌에 맞으려고 할 것인가? 

그의 몸을 도적질하여 가서 "그가 살아났다"고 말하는 것과, 자신들을 속이는 일을 그들이 함으로써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만일 그가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비천한 자들"이 아니겠는가? 

대제사장들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교훈이 다시 한번 전파되고 믿어진다면, "나중 형편(잘못)이 처음 형편보다 더욱 나빠지게 될"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염려하였다. 이 격언적인 표현은 단지 우리가 모두 추방되고 내어 쫓김을 당할 것임을 나타내고 그들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그의 설교와 이적을 묵인한 것이 "그들의 잘못"이었다고 생가하고 있다.  즉 그들은 마땅히 그를 죽임으로써 이를 미리 "시정했어야만" 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만일 백성들이 그의 부활을 믿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면" 그의 대한 관심사는 그와 더불어 다시 일어나게 되고 그를 잔인하게 죽였던 그들은 매장되어야만 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반대하는 자들은 그들의 시도가 좌절될 뿐만 아니라 자신이 흔들리고 당황하게"되며, 그들의 잘못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심하며 다른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최악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시 2:4, 5).

③ 이상의 사실을 고려하여 그들은 야비하게 삼일까지 무덤을 지킬 파수꾼을 둘 것을 제안하고 있다. 즉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빌라도는 여전히 그들을 도와주는 자였다. 즉 그의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힘은 그들의 사악함을 돕는데 이용되었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죽은 죄수는 감시할 필요가 없으며 그 무덤은 그 자체로써 충분한 감옥이 된다고 한다.)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은 자를 반대함으로써 자신의 "허물과 무기력함"을 깨달은 자들이 어찌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 이 요구에 대한 빌라도의 답변(65절). 

"너희에게 파수꾼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빌라도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그의 시체를 내어주고 또한 그의 원수들에게 그것을 지키게 함으로써 그 둘을 동시에 만족시켜 주려고 하였다. 아마도 그 때에 그는 한 사람의 시체를 놓고 이와 같이 왈가왈부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웃었을 것이며, 한편의 소망과 다른 한편의 두려움을 다같이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너희에게 파숫꾼이 있다." 그는 안토니아 영내에서 지켜지던 항구적인 수비대를 의미하고 있으며 그 수비대에서 그들이 원하는 만큼의 파숫꾼을 파견할 것을 허락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이러한 일에 개입되는 것이 수치스러운 듯 그는 그 지휘권을 그들에게 이양하고 있다. "힘대로 굳게 하라"는 말은,

① 그들의 "두려움"에 대한 조롱인 것처럼 보여진다. 즉 "죽은 사람에 대해 굳게 감시하라." 또는,

② 그들의 "소망"에 대한 조롱인 것처럼 보여진다. "멋대로 행하라. 끝까지 너희들의 지혜와 힘을 다해 보아라. 그러나 만일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너희들과 너희들의 파숫꾼이 아무리 지킨다고 하더라도 그는 살아날 것이다." 

아마 이 때에 빌라도는 그가 주저하면서 정죄하였던 "옳은 사람"인 그리스도에 대해 그가 어떻게 죽었는가를 부하인 백부장에게서 들었을 것이며, 또한 백부장은 그에게 자신이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결론지었던 그에 대하여 자세히 일어난 일들을 말하였을 것이다. 

빌라도는 그리스도를 "유혹하던 자"라고 불렀던 악의에 찬 천명의 제사장들보다는 오히려 백부장을 더 신임하였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렇게 바위를 쪼개고 땅을 진동시킨 그리스도의 무덤을 지키려고 생각하는 그들의 계획을 소리 없이 비웃었을 것이다. (*터틀리안은 빌라도가 한 말에 대하여 논평하기를, Ipse jam pro sun conscientia Christians ─ 즉 그의 양심으로는 그는 기독자였다고 하였다.  그는 능히 백부장의 보고를 듣고 이러한 죄책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그립바나 벨릭스 이상으로, 철저하게 기독자가 되리라는 생각을 가지지 못하였다. )

(3) 무덤을 지키기 위하여 그들이 취한 철저한 감시(66절). 

"그들은 돌을 인봉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산헤드린의 큰 인장을 가지고 인봉하였으니, 그들은 이 일에 자기들의 권력을 개입시켰다. 누가 감히 그 공적인 인봉을 깨뜨릴 것인가? 

그것을 완전히 믿을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파숫꾼"을 거기에 두었다. 이는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도적질해" 가거나 또는 가능하다면, "그"가 무덤에서부터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들의 의도는 그러한 것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선용하셨으니, 즉 그의 부활을 "막기" 위하여 지키는 자들은 이로 말미암아 그것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으며 그들이 본 바를 대제사장에게 말하였으며, 그들은 이로 말미암아 변명할 여지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죄수인 그리스도를 지키기 위하여 땅의 모든 권세와 마귀의 세력이 집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때가 이르렀을 때 그들의 수고는 헛것이 되고 말았다. 

사망과 또한 사망의 모든 후손들과 상속자들은 그 때에 더 이상 그를 붙잡아 두거나 그를 지배할 수 없었다.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제자들을 못들어오게 하기 위하여 무덤을 지킨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항하여 그것을 지키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익"하고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현명하게 일을 처리하였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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