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2.19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마28.부활하심_여자들에게보이심.파수병들의보고.갈릴리에서제자들에게나타나심_사명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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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마28장

===살아나시다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경비병의 보고

11.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1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13.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14.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15.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제자들에게 할 일을 분부하시다

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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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8장 (개요)

앞 장(章)에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의 대장이 흑암의 권세들과 교전하시고, 그들의 공격을 받으시고, 또한 그들을 맹렬하게 공격하신 것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승부는 막상막하인 것처럼 교전 당사자들 사이를 떠돌아 다녔다. 그러나 드디어 승리는 적군 편으로 기울어졌으며, 우리의 챔피온은 그들 앞에 쓰러지고 말았다. 

보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을 사로잡히게 하셨고 그의 영광을 원수의 손에 넘겨주셨다. 무덤 속에 계신 그리스도는 다곤의 신전 속에 있는 법궤와 같다. 흑암의 권세는 마음대로 세도를 부릴 것처럼 보여졌다. 그 때에 주님께서는 자다가 깬 자같이, 포도주로 인하여 외치는 용사같이 깨어나셨다(시 78:61, 65). 

본 장(章)에서 우리의 화평의 왕은 또 다시 전렬을 가다듬고 무덤에서 나오고 계시며, 정복자 아니 정복자 이상이신 그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계시다. 법궤는 일개 죄수이지만 다곤은 그 앞에서 쓰러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누구도 거룩하신 주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종교의 한 주요한 근원이 되므로 우리는 그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반드시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증거는 사복음서에 다 기록이 되어 있는데 본 장(章)에 나오는 것은 그 중 적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보다 더욱 많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사실을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보면,

Ⅰ.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천사의 증거(1-8).

Ⅱ. 그리스도께서 친히 여자들에게 나타나심(9, 10).

Ⅲ. 파수를 보고 있던 원수들의 보고(11-15).

Ⅳ. 그리스도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또한 그가 그들에게 주신 사명(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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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부활(1)(마 28:1-10)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로써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부활에 관하여 "천사"와 "그리스도" 자신이 증거 하신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만일 그 일이 그렇게 일어난 것이라면, 백성들이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던 것처럼, 많은 증인들이 참석하여 천사에 의해 돌이 굴러지고 죽은 시체가 다시 살아났더라면 그 사실은 논쟁할 여지가 없는 절대적인 것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들로 하여금 "일어나신"(risen) 그를 보게 하시고 "일어나는"(rise) 그를 보게 하지 않으신 무한하신 지혜에 대해 따지러 들지 말자. 

그의 성육신은 신비였다. 마찬가지로 이 "두 번째 성육신"(만일 우리가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즉 그리스도의 몸을 존귀한 신분으로 "새롭게 만든"이 부활도 신비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은밀하게 행해졌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과 그가 "하신 말씀"에 의해 확인된 그의 부활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셨다(눅 24:6, 7 -44 ; 막 16:7) ; 막 16 : 7). 

이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해야만" 한다. 내용별로 살펴본다면,

Ⅰ. "신실한 여자들"이 "무덤에 옴."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그들은 "언제"왔는가?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왔다(1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시간을 결정하고 있다.

(1) 주님은 그가 죽으신 지 "삼일 만"에 살아나셨다. 

그 시간은 그가 종종 말씀하신 바로 그 시간이었으며, 또한 그는 그 시간을 지키셨다. 

그는 제 6일 저녁때에 장사되었고 다음주 첫날 새벽 아침에 살아나셨다. 그러므로 그는 무덤에 약 36시간 내지 39시간 동안 머물러 계셨다. 

그가 그렇게 오래 머물러 계셨던 것은 그가 실제로 그리고 참으로 죽으셨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더 이상 머물러 계시지 않으신 것은 그로 하여금 "썩음을 보지"않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가 삼일만에 살아나신 것은 선지자 요나의 모형에 부합하시고(마 12:40), "여호와께서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로다"(호 6:2)라는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다.

(2) 그는 "유대인의 안식일 이후에" 살아 나셨으며, 그것은 유월절─안식일(passover-sabbath)이었다. 

그 날 종일을 무덤에 머물러 계셨던 것은 유대인의 절기와 의식적인 법의 다른 부분들을 폐지하시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의 백성들은 이러한 규례들을 지키지 말아야 하며, 그가 "무덤에 계실"때 하셨던 것 이상으로 유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엿새 되던 날"에 그의 일을 마치셨다. 그는 "다 이루었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레 되는 날에 그는 휴식을 취하셨고, 다음 주 첫날에 말하자면 새로운 세계를 시작하셨고 새로운 역사를 수행하셨다. 그러므로 "새 달"(new moon)이나 "유대교적인 안식일"과 관련하여 우리를 판단하지 말게 하자. 

이러한 것들은 실로 장차 올 좋은 것들의 그림자에 불과하였다. 그 "본체"는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더욱 성도들이 무덤에 누워있는 시간이 그들에게는 안식일임을 살펴 볼 수 있다(이와 같이 유대인의 안식일은 육체적으로 쉬는 날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안식일에 "자신의 일에서부터 쉬었다"(욥 3:17). 또한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기인되고 있다.

(3) 그는 "첫날"에 살아나셨다. 

첫날에 하나님께서는 "빛이 흑암에서부터 빛날 것을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이 날에 세상의 빛이신 그는 무덤의 흑암에서부터 빛났다. 

제 칠일 안식일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으므로 그것은 "주의 날"로 불리운(계 1:10) 제 일일 안식일에[곧 일요일 새벽] 다시 일어났으며, 그 이후로 신약 전체에서 이날 이외의 다른 날이 언급되지 않았으며, 그 이후로 신약 전체에서 이날 이외의 다른 날이 언급되지 않았으며, 또한 이 날은 종종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기독자들이 경건한 모임에서 모든 교회가 함께 기념, 준수하고 있다(요 20:19, 26; 행 20:7; 고전 16:2).

만일 이스라엘이 북방 나라로부터 구출된 사실이 애굽에서 구출된 사실에 대한 기억을 말소시켰다고 한다면(렘 23:7, 8), 하물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우리의 구속은 하나님께서 이전에 하신 역사의 영광을 무색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보라, 안식일은 창조 역사의 "완성"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제정되었다(창 2:1). 사람은 그의 반역에 의해 "완전하신" 역사를 깨뜨렸으며, 이 완전하신 역사는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시고 "천지"가 다시 "끝나게"되고 그들 중의 무질서한 "무리"들이 새롭게 형성되고, 이 일이 행해진 날이 "복되고 거룩케 되어지며" 또한 그로 말미암아 제 칠일이 그렇게 될 때까지 결코 완전히 교정되지 않았다. 그 날에 살아나신 바로 그분에 의하여(by), 그분을 위하여(for) 만물들은 처음에 창조되었고 지금 새롭게 창조되었다.

(4) 주님께서는 그 날이 "되려는 미명에" 살아나셨다.

"셋째 날"이 되었다고 말해질 수 있는 시간, 즉 그의 부활을 위해 정해진 바로 그 시간에 그는 "살아나셨다." 

그의 백성들에게서 물러가신 후 그는 적당한 "속도"로 돌아오고 계시며 또한 될 수 있는 대로 "일을 짧게 줄이고" 계시다. 

주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비록 잠시 동안 그들은 "그를 보지 못하게 될"것이지만 "잠시 후"에는 "그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따라서 그는 가능한 그 잠시 동안의 기간을 준수하셨다(사 54:7, 8). 

그리스도께는 "날이 새려는 미명에" 살아나셨다.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또 다시 비취었다(눅 1:78). 

그의 수난은 밤에 시작되었다. 그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해는 어두워졌었다. 그는 저녁 미명에 무덤에 놓여졌었다. 그러나 그는 해가 막 떠오르는 찰라 무덤에서 살아나셨다. 왜냐하면 그는 "광명한 새벽별"(계 22:16), 즉 "참 빛"이시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찍이 기독자의 안식일(주일)을 지키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또한 "내가 이른 아침에 그를 찾으리라." 말한 다윗의 본보기를 따른 것이다.

2. 무덤에 왔던 자들은 누구인가?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인데, 그 두 여자는 주님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전에 "십자가를 향해 앉았던" 것처럼 "무덤을 향하여 앉아 있었던 자들"이었다. 

여전히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들의 신앙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여전히 그를 갈망하여 찾고 있었다. 

동정녀 마리아가 그들과 함께 있었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그녀를 자기의 집에서 돌보았던 "사랑하는 제자"(요한)가 "그 무덤에 통곡하러 가려고 하는"것을 만류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무덤안에까지 그리스도를 따라 들어가서 장사됨을 확인하였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무덤 "에"(to), 또한 무덤 "안에"(in)까지 따라 온 것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마다 "어두운 무덤 가운데 놓여져 있을"때 그가 그들을 동일하게 돌볼 것임을 나타내 주고 있음을 기억하라. 

무덤 속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사랑을 받은 것처럼 "무덤 속에 있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과 무덤은 그들 사이에 있는 사랑의 줄을 약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3. 그들은 그 새벽 미명에, 무엇을 "하려고 왔는가?" 

다른 복음서 기자는 그들이 죽은 몸에 기름을 바르기 위하여 왔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마태는 그들 떠나 있는 동안 무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려고 왔다"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그들은 대제사장들이 거기에 파숫군을 두었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아 그것을 보려고 왔을 것이다. 

그들이 간 것은 그들이 존경하고 사랑하였던 주님을 또한 번 방문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자신들의 남은 정성을 나타내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그의 부활 약속말씀에 대해 어떤 생각도 전혀 없이 무덤에 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께서 전에 그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무덤을 찾는 것은 기독자들에게 매우 유용하며, 또한 그 무덤이 그들에게 친근하게 하는데 도움을 줄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공포를 제거하는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특별히 주 예수님의 무덤을 찾는 것이 그런 도움을 줄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죄가 매장되어버린 것과 우리의 성화에 대한 모본, 그리고 그 "흑암의 땅"에서까지 찬란히 빛나는 구속의 사랑에 대한 위대한 증거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Ⅱ. 그들에게 주의 천사가 나타남(2-4절).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방법에 대한 기사를 찾아 볼 수 있다. 즉 우리가 알아야만 할 부활의 방법만이 여기에서 설명되고 있다.

1. "큰 지진"이 있었다. 

그가 운명하셨을 때 "그를 받아들였던" 땅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가 살아나신 지금 "그를 단념하였던" 땅은 그가 존귀하게 되실 때 기뻐 뛰었다. 

이 지진은 사망의 줄을 "풀고" 무덤의 쇠사슬을 "떨쳐버리며" 또한 "만국의 보배"를 소개하는 것처럼 진동하였다(학 2:6, 7). 그것은 그리스도의 승리의 "표식"이었다. 

이로써 "하늘이 즐거워할" 때 "땅"도 역시 "즐거워"한다는 사실이 유의되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부활 때에 땅에 주어지게 될 "전조"였으며, 그 때에 땅이 더 이상 "살인자들을 덮어두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산들과 섬들이 옮겨지게 될 것이다. 

에스겔서의 기록을 보라,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할" 때에 골짜기에서는 "소리가 나고 움직였다"(겔 37:7). 

지금 세워진 바 된 그리스도의 왕국은 땅을 진동시켰으며, "그것을 무섭게 흔들었다." 

성결하게 되고 이로써 영적인 생명에로 일으킴을 받은 자들은 그것이 행해지는 동안 "두렵고 놀랐던" 바울처럼 자신의 가슴속에 지진이 일어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천사들은 종종 우리 주 예수님의 탄생 때나 그가 시험받을 때, 그가 고민하실 때 종종 그를 보살폈다. 그러나 십자가 상에서는 그를 보살피는 천사를 찾아 볼 수 없다. 

그의 아버지가 "그를 버리셨을"때, 천사들은 그에게서 물러가 버렸다. 그러나 땅의 기초가 있기 이전에 그가 가지셨던 영광을 다시 찾으신 지금, 보라,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를 섬기고 있다."

3. 천사는 와서 돌을 문에서부터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다. 

우리 주 예수님은 그 자신의 힘으로 능히 "그 돌을 굴려낼 수 있으셨다." 그러나 그가 천사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하신 것은, 그가 그에게 전가된 우리들이 죄를 대속하실 임무를 가지셨고 또한 그러한 전가된 죄 때문에 사로잡힌 바 되셨으므로 그는 감옥을 부수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하늘로부터 당연하면서도 "법적인 해제(discharge)"를 하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그는 감옥을 부수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수종드는 천사가 "돌을 굴려내고" 감옥문을 열도록 보내심을 받았다. 이 일은 만일 그가 "완전하신 대속"을 이루지 않으셨다면 결코 행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우리 대신 내어 줌을 당하셨으므로 그는 "또 다시 우리의 의로움을 위하여 살아나셨던"것이다. 

그는 우리의 빛을 지불하기 위하여 죽으셨으며 또한 우리의 채무가 소멸되었다는 증서를 주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 

우리의 죄의 ''돌"은 우리 주 예수님의 무덤문에 "굴러져" 있었다(큰 돌을 굴리는 것은 "범죄"를 나타내는 것이다. 삼상 14:33). 

그러나 그 신적 공의가 만족되었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천사는 그 돌을 굴려버리라는 사명을 받았다. 천사는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하여 그 무덤으로부터 "돌을 치웠던" 자들 이상으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와 같이 함으로써 천사는 그의 해방에 대한 하늘의 승낙과 그로 말미암은 하늘의 기쁨을 암시하였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바벨론과 같이 "그의 죄수들의 감옥을 열어 주지" 않으려고 그 돌을 인봉하였다. "약탈한 물건을 전능자에게서 탈취할 수 있느냐?" 왜냐하면 이 때는 "그들의 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망과 흑암의 모든 권세는 빛과 생명의 하나님의 통제 아래에 있다.

하늘로부터 온 천사는 비록 그것이 "이스라엘의 위대한 인봉"(역주:아마 그들은 산헤드린 공의회의 인을 쳤을 것이다)이었지만, "그 인봉을 깨뜨릴" 권세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비록 그들이 그렇게 큰 권력자의 모임 그 자체였고 무덤입구의 돌에 찍힌 인은 그 권력을 표상했지만, 천사는 "[인봉된] 그 돌을 굴러내 버릴"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권능자의 속박들은 제거되고 있다." 천사가 "돌을 굴러내 버리고" 그 위에 앉은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며, 또한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장애물들을 완전히 제거하고 승리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 

천사는 거기에 앉아 있으면서, 또 다시 무덤에 놓여있는 돌을 굴리기 위하여 지옥의 모든 권세들에게 도전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원수들의 반대에 대항하여 그의 휴식의 보좌와 심판의 자리를 일으켜 세우고 계시다. "여호와께서는 홍수 위에 앉아 계신다." 

천사는 마치, 원수들의 "사나운" 파숫꾼들을 놀라게 하면서 무덤을 지키는 파숫꾼처럼 앉아 있었다. 그는 여자들을 기다리면서 앉아 있었고 그들에게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4. 그의 "형상은 번개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었다"(3절). 

이것은 "색깔의 차이"를 알 수 없는 보이지 않는(invisible) 세상의 영광들"의 볼 수 있는(visible) 현현이었으며, 이것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찬란하고 눈부신"것이라고 부를 수 있다. 수직자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마치 "번개 불"과 같았다. "그는 번개를 번득이사 그들을 흩으신다"(시 144:6). 

그의 옷이 "흰" 것은 순결의 상징이었을 뿐만 아니라 즐거움과 승리의 상징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하늘의 궁전은 "깊은 슬픔에 잠겼으며" 이것은 "해가 어두워지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그가 살아나셨을 때 그들은 또다시 "찬미의 옷"을 입었다. 

이 천사의 영광은 지금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변화하실 때 그에 대해 표현되었던 것과 동일한 묘사이기 때문이다(마 17:2).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후 그의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셨을 때 그는 그 영광의 베일을 벗으셨다. 그것은 성도들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이 되는 부활 시에 나타나게 될 영광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5. "수직하던 자들은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4절). 

그들은 "군인들"로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만큼 담대한 자들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천사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무서워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심판하려고 일어나셨을 때 강퍅한 마음을 가진 자는 탈취를 당하게 되었다"(시 76:5, 9).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친구들에게는 즐거움이 되지만, 그의 원수들에게는 두려움과 혼란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떨었다." ejseivsqhsan 이라는 말은 2절에서 “지진”이라는 말에 사용된 것과 동일하다. "땅"이 흔들릴 때에, 거기에서 살고 있는 이러한 "땅의 자녀들도 마찬가지로 흔들렸다."  한편 위에 있는 일들에서 자신의 행복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비록 땅이 옮겨진다고 할지라도 두려움이 없게 된다." 

수직하던 자들은 그들이 지키던 자가 살아났을 때 또한 그들이 파수를 보던 자들이 그와 함께 일어나게 되었을 때 "죽은 자"와 같이 되었다. 

그들은 이 곳에서 수행하고 있었던 자신들의 임무가 실패로 돌아 간 것을 알고는 심히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무덤에 있는 죽은 사람을 지키도록" 이 곳에 배치되었다. 이 일은 분명히 전에 자신들이 맡았던 일들 중에서 가장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일이 그들에게 매우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을 두려워하여 곧 무서워 "떨며 죽은 자"와 같이 되어 버릴 연약한 마음을 가진 겁쟁이들에게 공격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들 자신도 감히 얼굴을 바라볼 수 없는 "전능한 천사"에 의해 공격을 받은 것을 알았을 때 심히 놀라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원수들을 "두렵게"함으로써 그들을 "쳐부수신다"(시 9:20).

Ⅲ. 이 천사가 여자들에게 전한 소식(5-7절).

1. 그는 "그들에게 무서워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다"(5절). 

특별히 조용하고 쓸쓸하게 무덤 가까이 이른다는 것은 그 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닐 수 없다. 하물며 무덤에 앉아 있는 천사를 그들이 본다는 것은 실로 여자인 그들에게는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천사는 즉시 그들을 "무서워 말라"는 말로 안심시키고 있다. 

그 수직하던 자들은 무서워 떨며 죽은 자와 같이 되었지만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시온에 있는 죄인들로 하여금 무서워하게 하라. 왜냐하면 그렇게 두려워할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러나 "아브라함"이나 아브라함의 신실한 자손들은 "무서워하지 말라." '선을 행하는" 사라의 딸들은 어찌하여 "놀라 무서워하느냐?"(벧전 3:6). "너희는 무서워 말라.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을 듣고 놀라지 말라. 이는 너희가 전에 너희 주님이 살아나리라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듣고 무서워하지 말라. 이는 그의 부활이 너희의 위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떤 해를 가하거나 좋지 못한 소식을 전할까봐 무서워하지 말라. 너희는 무서워 말라. 이는 너희가 예수를 찾는 줄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 나는 그 때문에 너희가 친구들임을 알고 있다. "내가 온 것은 너희를 놀라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예수를 찾는 자"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만일 그들이 그를 부지런히 찾으면 "그를 찾게 될" 것이며 또한 그가 그들의 "인자하신 보상자"이심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열심히 찾는 그 믿음을 하늘은 살피시고 유의하신다. "나는 너희가 예수를 찾는 줄 아노라." 또한 분명하게 이러한 말씀과 같이 "선한 말과 위로하는 말씀으로" 응답을 받게 될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구나."천사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칭찬하기보다는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언급하고 있다. "너희는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셨지만 여전히 그를 찾는구나,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호의를 간직하고 있구나." 

여기에서 유의할 것..., 참된 신자들은 "비록"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셨을지라도 그를 사랑하고 찾으며 또한 그가 그렇게 못박히셨기 " 때문에" 그를 사랑하고 찾는다는 사실이다.

2. 천사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사실에 대해 확증하고 있다." 

그 말은 그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히기에 충분하였다(6절). "그가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그가 여기에 계시지 않다"는 말은 만일 거기에 "살아나셨다"는 말이 첨가되지 않았다면 그를 찾는 자들에게 좋은 소식은 되지 못할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그가 살아나셨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찾는 자들에게 위로가 되지만 그들이 기대하는 곳에서 그를 찾는 것은 실망케 하는 일이 된다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위로 가운데서 그를 찾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는 살아나셨다." 

우리는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고 말하는 자들을 경청하지 말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는 "여기에도" 계시지 않고 "저기에도"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을 때는 그가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살아나신" 자이신 그를 찾아야만 한다.

(1) 그에 대해 "육적"인 생각을 가지고 그를 찾아서는 안 된다. 

"육체를 따라 그리스도를 안 자"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를 더 이상 그렇게 알지 아니한다(고후 5:16). 

그가 육신을 가지셨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육신은 이제 "영광스럽게 된 몸"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이나 그림을 만드는 자(역주:천주교처럼)들은 "그가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우리가 그와 함께 교제하는 것은 그의 말씀 안에 있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것이 되어야만 한다(롬 10:6-9).

(2) 우리는 큰 "존경심"과 "겸손한 마음," 그리고 그의 영광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그를 찾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는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이 들어올리셨으며 그에게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그러므로 모든 무릎과 모든 영혼은 "그 앞에 꿇어야만" 한다.

(3) 우리는 그를, 하늘에 속한 마음 곧 "천적(天的)인 마음"을 가지고 찾아야만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우리의 집을 만들려고 하면서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할 때, 우리 주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자.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여기에 두지 말고 "역시 일어나서 위에 있는 것들을 찾도록 하자"(골 3:1-3; 빌 3:20).

천사는 이 여자들의 신앙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들어 두 가지 사실을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다.

① "그의 말씀"은 이제 "성취되었으며," 그들은 이것을 "기억해야만"한다. 

즉 "그는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천사는 이것을 신앙의 적절한 목적으로 단언하고 있다. "그는 전에 그가 살아가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또한 너희는 그가 진리 그 자체이심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살아나실 것이라는 사실을 기대할 수 있다. 어찌하여 너희는 그가 너희에게 장차 될 것이라고 말한 사실을 믿기를 주저하고 있느냐?" 

그리스도의 말씀은 "현재의 고난"이나 장차 "나타나게 될 영광"이거나 간에 우리의 기대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결코 이상하게 생각지 말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바를 기억한다면, 그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대해 덜 놀라게 될 것이다. 

이 천사는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이 이미 받은 것 이외의 다른 복음을 그가 전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천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를 입증하는데 충분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② 그들은 지금 "빈 무덤"을 들여다보려고 하였다.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너희가 들었던 바와 너희가 본 바를 함께 놓고 비교해 보라. 그러면 너희는 믿게 될 것이다. 너희는 그가 여기에 계시지 않은 것을 보면서 그가 말씀하신 바를 기억하고 있다. 너희는 그가 살아나셨다는 사실에 만족하게 될 것이다. 와서 그 곳을 보라. 그러면 너희는 그가 여기 계시지 않은 것을 보게 될 것이며, 그가 거기에서 도적질 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너희는 그가 살아나셨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와서 신앙의 눈으로 "주님의 누우셨던 곳을 보는"것은 우리에게 퍽 유용하며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를 위해 그렇게 자신을 낮추신 그의 사랑의 표식을 살펴 보라. 

그는 얼마나 "쉽게 그 자리(누우신 곳)"를 만드셨고 또한 우리를 위해 거기에 누우심으로써 얼마나 "영광스럽게" 되셨는가를 살펴 보라. 

우리가 누워야만 할 무덤을 바라볼 때, 그것에 대한 공포를 없애기 위하여 주님이 누우셨던 무덤을 들여다보도록 하자. 수리아 사본에는 "우리의 주님"이 누우셨던 곳이라고 되어 있다. 천사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를 "그들의"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들은" "그에게서 이름이 명령되기" 때문이다.

3. 천사는 "그들에게 그 소식"을 그의 제자들에게 "전할 것을 명령하고" 계시다(7절).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하라." 

그들은 무덤을 보고 천사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여기에 있는 것도 좋은 일이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다른 임무가 부여되었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었다"(왕하 7:9). 비록 그들이 위로에 대한 "선(先) 점유권," 즉 그것을 "처음 맛본 자"이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그것에 대해 "점유권"을 가져서는 안 되며 문둥병자(왕하 7:9) 이상으로 자신들의 안일만을 도모해서도 안 된다. 그들은 "제자들에게 말하러 가야만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는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를 즐기는 것에 앞서 다른 사람에 대해 공적으로 유용한 일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이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맨 처음으로 "그 소식을 들어야"만 한다. 

그 소식을 듣고 "당황하게 될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말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원수들이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의 성도들의 즐거움을 기대하고 계신다. "그의 제자들에게 말하라." 그들에게 무엇을 말하든지 간에 그들은 너희의 보고를 믿을 것이다.

① 이는 현재 슬픔 가운데 여러 곳으로 흩어져 있는 그들에게 용기를 주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때는 그들에게 있어서 슬픔과 두려움에 가득 찬 실망의 때였다. 그들은 "그들의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뻐하게 될 것인가 !

② 이는 그들로 하여금 그것에 대해 더욱 질문하도록 만들 것이다. 

이러한 소식이 그들에게 전해진 것은 그들이 사로잡혀 있었던 어리석은 행동으로부터 그들을 일깨우며 또한 그들로 하여금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를 찾게 하고, 그가 그들에게 나타날 것을 준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일반적인 암시는 보다 밀접한 탐구를 조장시킨다. 그들은 이제 그에 대하여 듣게 될 것이지만, 머지 않아 그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점진적"으로 나타내고 계시다.

(2) "그 여자들"은 그 소식을 그들에게 전하기 위해 파송되고 있으며, 따라서, 말하자면 "사도들 중의 사도들"로 임명되고 있다. 

이것은 십자가와 무덤에까지 꾸준하게 그를 따라간 그들에게 대해 주어진 영예와 보상임과 동시에 그를 버린 제자들에게 대한 책망이기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연약한 것들을 택하시고 계시며, 또한 "흙으로 만든" 질그릇에 뿐만 아니라 "연약한" 그릇에도 보배를 담아두신다. 

"여자"가 악한 천사의 꾀임에 빠져 "먼저 죄에 빠진 것"(딤전 2:14)처럼, 이 여자들은 선한 천사의 명령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범죄로부터 구원되었다는 것을 먼저 믿게 되었다. 이는 이와 같이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써(이것은 그들의 영원한 칭송이다) 그들의 성(sex)에 대한 비난을 없애도록 하기 위함이다.

(3) 그들은 이 심부름을 "빨리 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왜 서둘러야만 했던가? 그 소식이 시들해지거나 아무 때라도 그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인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제자들, 그들은 지금 슬픔 가운데 빠져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서둘러서 이 기쁜 소식을 그들에게 전해 주려고 하였다.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인하여 자신을 낮추고 있었을 때 가브리엘 천사는 위로의 소식을 가지고 "빨리" 날아가도록 명령을 받았다(단 9:21). 우리는 언제나 준비를 갖추고 (그리스도의 지시를 따라) 나아가야만 한다.

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하여(시 119:60).

② 우리의 형제들에게 선행을 베풀기 위하여 또한 고통을 당하는 자와 같은 자들에게 위로를 주기 위하여. 

"가서 다시 오라. 그러면 내일 내가 주리라고 말하지 말라." 지금 빨리 주라.

(4) 그 여자들은 "갈릴리에서 그를 뵈오리라"는 말을 제자들에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갈릴리"에서 그들을 만나기 전에 그들에게 (몸소) 나타나셨다. 이것은 갑작스럽고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 일반적인 약속 장소는 예루살렘에서 80내지 100마일 떨어진 갈릴리로 지정되었다.

① 이는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못하고(아마도 올라올 수 없었던). 갈릴리에 머물러 있었던 그의 제자들에게 대한 "친절"이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거기에 있는 그의 친구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려고 그 곳으로 가려고 하셨다. "나는 네 행위와 네가 거하는 곳을 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거하는 곳을 아시며, 그 곳에 방문하실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그리스도의 승귀(exaltation)가 그로 하여금 그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비천하고 초라한 제자를 잊어버리게 할 수는 없으며 또한 많은 은혜의 방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자라고 할지라도 그는 그들에게 은혜스럽게 "자신을 나타내실"것이다.

② 이는 아직도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면서" 감히 대중 앞에 나타나려고 하지 않았던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제자들의 연약함을 고려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만남의 장소는 갈릴리로 옮겨졌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두려움을 아시고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또한 가장 위험이 적은 곳을 지정하셨다.

마지막으로 천사는 엄숙하게 자신이 그들에게 말했던 것이 진리임을 확증하고 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너희는 그것을 확증할 수 있고 그것을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거짓을 말하지 않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느니라." 

"천사들로 하신 말씀은 견고하게 되었다"(히 2:2).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율법을 수여하실 때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 그의 뜻을 백성들에게 알게 하셨다. 그러나 그는 복음 시대에 그러한 전달 방법을 철폐하려고 하셨으므로(왜냐하면 "하나님이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려고" 하지 않으셨으며[역주:히 2:5 참조], 또한 그들을 복음 전파자로 임명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이 천사는 "지금"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증시키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으며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실을 세상에 전하도록 그들 손에 내맡기었다(고후 4:7).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고 말할 때 그는 마치 그들이 이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이 그로 말미암아 비난을 받게 되는 것과는 자신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그것을 그들에게 내맡기고 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임무를 다 수행하였다. 즉 나는 신실하게 나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이제 너희는 그것을 들어다 보며, 또한 위험할 때에 그것을 믿어라. 너희가 그것을 듣던지 또는 멀리하던지 간에 나는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 자신의 임무를 신실하게 이행한 하나님의 사자들은 그 성과가 어떠하든지 간에 그에 대한 위로를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행 20:26, 27).

Ⅳ. 그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무덤을 떠남"(8절).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그들은 어떤 마음과 기분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떠났다." 즉 같은 시각에 같은 마음에 무서움과 기쁨이 엇갈린 이상야릇한 마음을 가지고 떠났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는 말을 들은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무덤 속으로 인도되고 그 천사를 보고 그것에 관하여 그들과 더불어 말한 것은 무서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것은 좋은 소식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너무도 "좋은" 것임으로 진실이 아니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기쁨이며," "큰 기쁨"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즉 그것은 그들의 큰 "무서움"이었다고 말해지지는 않고 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거룩한 두려움은 기쁨을 수반하고 있다. 

주님을 "경외함"으로 섬기는 자는 그를 "즐거움"으로 섬긴다.

(2) 영적인 기쁨인 두려워 떠는 것과 혼합되어 있다(시 2:11).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완전한 사랑과 즐거움뿐이다.

2. 그들은 어떻게 서둘렀는가? 

"그들은 달려갔다." 그 무서움과 기쁨은 그들의 발걸음을 더욱 민첩하게 하였다. 

그 천사는 그들에게 "빨리 갈" 것을 명령하였으며 그들은 "달려갔다." 하나님으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은 자는 머뭇거리거나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 좋은 소식으로 "마음이 부풀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명령의 길로 급히 달려나가야"만 한다.

3. 그들은 어떤 임무를 가지고 있었는가? 

그들은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뛰어갔다. 

그것이 그들에게 즐거운 소식이 될 것임을 의심치 않으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동일한 위로를 가지고 그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달려나갔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늘과 더불어 가졌던 그들의 아름다운 교제의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데 앞장을 서야만 한다. 즉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위해 행하시고" 말씀하셨던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야만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기쁨은 오른손에 가지고 있는 연고와 같이 그것을 노출시키게 될 때 그 연고가 발라진 소마다 향기를 내게 될 것이다. 삼손은 꿀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그의 부모에게 가지고 갔다.

Ⅴ. 그리스도께서 천사의 증거를 확증시키시려고 그 여자들에게 나타나심(9, 10절). 

이 열심 있는 선한 여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그 소식을 맨 처음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처음으로 보았다. 

천사는 그리스도를 보려고 하는 자들에게 갈리리로 갈 것을 명령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이르기 전에, "여기에서도" 그들은 살아계셔서 그들을 보고 있는 "그를 찾았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예수 그리스도는 종종 그의 말씀보다 더 나으며 결코 더 나쁘지는 않으시다. 종종 그의 백성들의 신앙적인 기대를 원하시지만 결코 실망하지는 않으신다. 여기에 보면,

1. 그리스도께서 그 여자들에게 나타나심. "그들이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쌔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가 의무를 수행할 때에 은혜스럽게 찾아와 만나 주시며, 또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자들에게 더 많은 것을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이러한 상봉은 전혀 예기치 못한 것이며 "그들이 일찍이 알지 못하던" 것이었다(아 6:12). 

여기에서 유의할 것...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가까이 그들에게 접근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붙잡으려고 "깊은 곳으로 내려 갈"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또는 "하늘로 올라 갈"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승천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가까이" 계셨으며 또한 여전히 "말씀 가운데서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다."

2. 주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인사. 

caivrw ─ 즉 평안하뇨.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건강"하기를 기원하는 옛 "영어의 인사하는 형"을 사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평안하뇨"의 뜻이 바로 그것이며 또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히브리의 인사에 해당되는 헬라의 인사하는 형이 여기에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1) 주님께서 그의 승귀의 신분에 들어가신 때에까지 우리와 우리의 행복에 대하여 선한 뜻을 가지고 계심을 나타낸다. 

그는 비록 존귀하게 되셨지만, 이전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선한 뜻을 가지고 계시며 또한 우리를 위로하는 데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

(2)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교제를 가지실 때 사용하셨던 자유스러운 태도와 고상한 친근감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들을 "친구들"이라고 부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헬라어의 의미는 "너희는 기뻐하라"이다. 그들은 "무서움"과 "기쁨"에 싸여 있었다.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의도는 그들의 기쁨을 고무시키며("너희는 기뻐하라." 9절) 또한 그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히시기("무서워 말라." 10절) 위함이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뜻은 그의 백성들이 매우 즐거워하는 백성이 되며 또한 그의 부활이 그들에게 풍성한 즐거움을 가져다주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3. 그 여자들이 주님에게 드린 사랑에 넘치는 존경.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와 같이 그들은,

(1) 주님을 위하여(for)가지고 있었던 "존경과 영예"를 표시하였다. 

그들은 그의 발아래 엎드려 존경의 자세를 취하였으며 또한 지금은 존귀하게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를 겸손과 경외심을 가지고 "경배하였다."

(2) 주님께 대하여(to) 가지고 있었던 "사랑"과 "호의"를 표시하였다. 

그들은 그를 "붙잡았으며" 또한 "그를 놓지 않았다"(아 3:4). "주 예수님의 발"은 그들에게 얼마나 "아름다운"것이었는가!(사 52:7).

(3) 그의 부활에 대해 더 큰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지금 그들이 "즐거움에 도취"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우리는 복음 가운데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해야만 하며, "경외"함으로 그의 발에 엎드려야만 하며, 믿음으로 그를 "붙잡아야"만 하며, 사랑과 즐거움으로 그를 우리의 마음에 가까이 모셔야만 한다.

4.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하심(10절). 

우리는 그들이 주님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환영하는 마음과 존경심을 충분히 나타내었을 것이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던 것도 천사가 말했던 것 이상은 아니었다(5, 7절). 왜냐하면 그는 "그의 종의 말을 응하게 하실 것이기"(사 44:26)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로하시는" 방법은 그들이 전에 "그의 천사들," 즉 사역자들로부터 들은 동일한 것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하여 그들의 마음속에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

(1) 주님께서는 그들이 두려움을 어떻게 책망하고 계시는가.

 "무서워 말라." 그들은 그의 부활에 대해 여러 번 반복하여 듣고 보았으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죽은 자가 살아났으므로 어떠한 해를 입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소식은 비록 이상한 것이기는 하지만 "참되고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은 그이 백성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히기 위함이시며 또한 그 사실은 그들의 두려움을 충분히 가라앉힐 수 있다는 사실이다.

(2) 그는 어떻게 그들의 메시지를 되풀이하고 계시는가?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갈 채비를 하라고 말하라. 거기에서 그들은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영혼과 그리스도 사이에 어떤 교제가 있다고 하면 "그 만남을 약속하시는" 분은 바로 그이시며 또한 그는 그 약속을 지키실 것이다.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영예를 상실하였다. 그 성은 "소란"하였기 때문에 그는 갈릴리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시고 계시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함께 가자"(아 7:11). 

그러나 여기에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그가 그의 제자들을 "그의 형제들"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이다. 가서 "내 형제들," 즉 그와 가까이 있었던 그들뿐만 아니라 나머지 모든 사람들(왜냐하면 그들로 모두 그의 형제들이기 때문이다, 마 12:50)에게 말하라. 

주님께서는 여기에서와 요한복음 둘째 장 17절 이외에는 그가 부활하실 때까지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신 적이 없으셨다. 

그는 부활하심으로써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며, 또한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모든 자녀는 "그의 형제"로 선포되었다. "죽은 자로부터 처음으로 살아나셨으므로 많은 형제들 중의 맏형"이 되셨으며, 그의 부활의 형상 가운데 함께 심기워진 모든 자들의 "맏 형"도 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죽으시기 전에 하셨던 것처럼 그의 제자들과 지속적으로 또한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지 않으셨다. 그들이 그에게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는 "내 형제들에게 가라"고 사랑스러운 칭호를 붙이고 있다. 

이는 그의 존귀한 신분을 얻는 것에 대하여 "내가 당신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리이다"는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다. 

그들은 수치스럽게도 그가 고난을 받을 때 그를 "버렸다." 그러나 그가 이를 용서하고 잊어버릴 수 있으며, 또한 우리에게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하여 그는 계속적으로 그들을 "만나려고" 의도하시며 그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모두가 "그의 형제"이므로 그들도 서로가 "형제"이었으며 또한 형제로서 사랑해야만 한다. 그들을 그의 형제로 인정하심으로써 그는 그들에게 큰 존귀를 더하셨으며, 동시에 그 존귀 가운데서 겸손의 실례를 보여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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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부활(2)(마 28:11-15)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더욱 증거해 주는, 파수보던 원수들의 고백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증거를 더욱 확고히 해 주는 두 가지 고백을 찾아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그들(파수꾼들)은 "목격자"였으며 또한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부활의 영광을 직접 보았다. 또 한 가지는 그들은 그의 부활을 저지하고 방해하도록 그 곳에 배치되었던 "원수들"이었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Ⅰ. 이 증거는 어떻게 대제사장들에게 "고해졌는가"(11절). 
그 여자들이 "제자들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 주게"될 소식을 가지고 그에게 "가고 있을 때," 그 군병들은 "대제사장의 얼굴을 부끄럽게 할" 동일한 소식을 그들에게로 가지고 갔다. 
주요한 직책을 맡았을 것으로 여겨지는 "파수꾼 중 몇"이 "성에 들어가" 그들을 채용했던 자들에게 그들을 실망케 할 보고를 드렸다.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였다." 
즉 지진이 일어난 일, 천사가 내려와 돌을 굴려낸 일, 예수님의 몸이 무덤에서 살아서 나온 일들을 낱낱이 고하였다. 
이와 같이 선지자 요나의 "표적"은 가장 명백하고 확고하게 대제사장에게 보고되었다. 그와 같이 죄책감을 깨닫게 하는 마지막 수단이 그들에게 제공되었다. 
우리는 그 사실이 얼마나 그들을 수치스럽게 하였고 또한 유대의 원수들과 같이 얼마나 그들을 "낙담시켰는가"(느 6:16)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들은 마땅히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죽인 것에 대하여 회개했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그들의 불신앙 가운데서 강퍅하게 되었고, 그러므로 그 불신앙아래에 인봉되고 말았다.
Ⅱ. 그 사실은 그들에 의해 어떻게 일축되고 억제되었는가? 
그들은 회의를 소집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하였다. 
그들 편에서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실을 믿지 못하게 하고 또한 그것을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오는 수치감을 막아 보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를 죽게 하였다. 또한 그의 부활의 증거가 나타났으므로 그들이 한 일에 대하여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그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사악한 일을 자행했던 그들은 또 다른 죄를 궁리하였으며, 그리스도의 박해자들의 저주의 일부분인 "죄악에 죄악을 더"하는 죄에 스스로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시 69:27).
그들이 토의한 결과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군병들에게 뇌물을 주어 이야기를 입밖에 내지 말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1. 그들은 "군병들에게 돈을 주었다." 
사람이 돈을 받고 무슨 사악한 일을 하지 못하겠는가? 그들은 아마도 유다에게 주었던 것보다 "더 많은 돈을 군병들에게 주었던" 것 같다. 
이 대제사장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돈을 사랑하였으며 그것을 나누어주기를 몹시 싫어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항하는 사악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들은 그 돈을 마구 썼다. 아마도 그들은 군병들이 요구하는 대로 그들에게 돈을 주었을 것이며 또한 그들은 그들의 특권을 이용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에는 그들이 거짓말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을 진척시키기 위하여 "많은 돈"이 지불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의인의 부활 시에 보상을 받는다는 약속을 가지고 있었지만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진척시키기 위해서는 적은 돈도 매우 아까워하였다. 우리는 나쁜 동기를 위해 그렇게 많이 쓰여지는 것을 보게 될 때 좋은 동기를 위해 인색하지 말도록 하자.
2. 그들은 "그들에게 거짓말하도록 시켰다"(13절).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하라." 
서투른 임시 변통은 전혀 안하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이것은 실로 서투른 임시 변통이었다.
(1) 그 속임수는 "우스꽝스러운" 것이었으며, 그 자체가 혼동되는 것이었다. 
만일 "그들이 잠을 잤다면" 어떻게 그 일에 대해 알 수 있었겠으며, 또한 누가 왔었는지를 말할 수 있었겠는가? 
만일 그들 중의 "어떤 사람"이 "그것을 보려고" 깨어나 있었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을 막기 위하여" 모두를 깨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맡은 유일한 임무였기 때문이다. 
보잘 것 없이 연약하고 비겁하고 의기소침한 사람들(제자들)이 죽은 사람의 시체를 구출하는 것과 같은 무모한 일을 성취시키기 위해 감히 나서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그러면 왜 그 제자들이 살고 있었던 집을 열심히 수색하거나 또는 그 시체를 찾기 위하여 다른 수단들을 동원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사람들도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는 얄팍한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그 거짓말이 그럴 듯한 것이었다면,
(2) 이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 군병들에게 그들의 양심을 거스리면서 고의적인 거짓말을 하라고 시킨 것은 사악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고의적인 죄를 짓도록 끌어들이는 자는 자신들이 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양심을 타락시키며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출입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3) 이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위대한 교훈을 전복시키려고 한 것이었음을 고려할 때 이것이야말로 마지막 치유를 거부한 죄였으며, 결과적으로 "성령의 능력에 의해 행해진 것"을 제자들의 못된 짓으로 돌림으로써 "성령을 거스린" 모독죄였다.
그러나 군병들이 "파수를 볼 때 조는 것"에 대한 로마법(이것은 매우 엄한 죄였다. 행 12:19)에 의해 형벌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은 총독에게 중재할 것을 약속하였다.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우리는 그가 그 사실에 관심을 가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또한 그들은 근래에 총독을 얼마나 쉽게 움직일 수 있었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만일 그들이 세상으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것과 같은 일, 즉 실제로 이 군병들이 잠을 잤고 제자들이 예수를 훔쳐 갔다면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분명히 그 제자들의 비행을 엄중히 처벌해 줄 것을 총독에게 건의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군병들을 안전히 보살피겠다는 말은 분명히 거짓말임이 입증되고 있다. 
그들은 빌라도의 공의의 검으로부터 그들을 안전하게 지킬 수는 있었다. 그러나 거짓말을 좋아하고 이를 실행하는 자들은 목을 겨누고 있는 하나님의 공의의 검으로부터 그들을 지킬 수는 없었다. "그들"은 자신이 수행할 수 있는 한계 이상을 약속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 음모는 짜여졌다. 그 음모는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① "속이기를 즐겨한" 자들은 돈을 받고 그들이 가르친 대로하였다.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행하였던 것처럼 그리스도와 그의 기독교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전혀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기독교가 넘어지는 것을 보기를 기뻐하며, 필요하다면 그것을 넘어뜨리는 데 협조를 한다.  그들은 "돈을 받았다." 그들이 목표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것뿐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돈은 사악한 유혹을 하는 데 미끼가 된다는 사실이다. 돈을 벌려고 고용된 사람은 돈을 위하여 진리를 팔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근거는 그의 부활이며 또한 그 누구도 이 군병들이 가졌던 것보다 더 확실한 부활의 증거를 가질 수 없다. 그들은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돌을 굴려내는 것을 보았으며, 소수라치게 놀라지만 않았더라면 그리스도의 몸이 무덤에서 나오는 것을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보고 죄책을 느끼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왜곡하도록 시킴을 받았으며 또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아무리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증거라 할지라도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책을 깨닫게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② 미혹 받기를 즐거워하는 자들은 그 군병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신임하였고 또 그것을 널리 퍼뜨렸다.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들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그 속임수는 충분히 그 목적을 성취하였다. 계속적으로 불신앙을 고집하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논쟁하려고 할 때는 언제나 "그이 제자들이 와서 그를 훔쳐가 버렸다"고 대답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엄숙한 대화문이 작성되었는데(져스틴 말터는 유대인 티포와의 대화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것은 산헤드린 공의회가 이 일에 관하여 흩어져 있던 모든 유대인들에게 보낸 것인데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대해 강경하게 반대할 것을 자극하고 있다. 즉 그 내용은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를 매장하였을 때, 그 제자들이 밤에 와서 그를 무덤에서부터 훔쳐갔다"는 것인데,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진리를 전복시키고 그의 제자들이 본래부터 악인인 것처럼 꾸밈으로써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한번 거짓말이 행해졌을 때, 그 누구도 그 거짓말이 얼마나 멀리 퍼지며 얼마나 오래 지속이 되며 그것이 얼마나 해를 끼칠 것인가를 아무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이 "이 말이 두루 퍼지니라"는 구절을 다른 의미로 생각하고 있다. 즉, "이와 같이 백성들을 속이려고 한 대제사장들의 간계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군병들 사이에 있었던 공모 사실과 거짓말을 하도록 돈이 주어졌다는 소문들이 두루 퍼졌으며, 유대인들 가운데 이야기되었다.)  왜냐하면 어느 모양으로도 진리는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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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에게 사명이 주어짐(마 28:16-20)
이 복음서 기자는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 기록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몇 가지 일들을 그냥 지나쳐 버리고 이 사실을 서둘러 기록하고 있다. 
이 사실은 다는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엄숙한 것으로써 그가 죽으시기 전과 부활하신 후에도 거듭 거듭 약속되고 명령된 것들이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Ⅰ. 제자들은 어떻게 그 명령을 따라 주님이 나타나신 곳에 모였는가?(16절) 
"그들은 갈릴리로 갔다." 즉 그리스도를 한번 뵙기 위하여 먼 여행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보람된 일이었다. 
그들은 주님을 예루살렘에서 몇 번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갈릴리로 가서 그를 보려고 하였다.
1.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명하셨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 본 주님을 갈릴리까지 가서 뵈온다는 것은(특히 그들은 승천 전까지 예루살렘으로 곧 돌아와야만 하였다) 불필요한 일인 것 같이 보였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을 순종하고 그것들을 거스리지 않으려고 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유지하려고 하는 자는 그가 약속하시는 장소까지 그를 따라가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예루살렘에서 주님을 뵈온 자는 갈릴리까지 가야만 한다.
2. 왜냐하면 그것은 공적이요 일반적인 모임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을 보았고 사사로이 그와 더불어 대화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기 위하여 모여 있었던 엄숙한 모임에 참석하는 구실이 될 수는 없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들이 행한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가 우리가 기회가 있을 때 공중예배에 참석하지 않게 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며," 우리도 그렇게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장소는 "갈릴리에 있는 산"으로써, 그가 변화되셨던 바로 그 산이 아닌가 한다. 그들은 거기에서 은밀하게 만났으며, 아마도 이것은 그가 존귀하게 되시고 윗 세상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Ⅱ. 그들은 그리스도의 현현으로 말미암아 어떤 감동을 받았는가(17절). 
이 때는 그가 "일시에 오백여 형제에게 보이신"(고전 15:6)때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맨 처음에 먼 거리에서 공중 위에 계신 그를 보았다고 생각한다. ejvfqhv  ejpavnw ─ 즉 그는 오백여 형제에게 위에서 보여졌다 :: 그들은 이 원문을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가까이 나아올"때까지 어떤 사람에게 의심을 주었다(18절). 그 후에 그들은 만족하게 되었다. 여기에 보면,
1. 그들은 "그를 경배하였다."
 그들 중의 대부분이 그를 경배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모두가 그에게 엄숙히 영광을 돌렸다. 이것은 존경하는 외적 표식에 의해 표현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신앙의 눈으로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는 "그를 경배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이다.
2. 그러나 "어떤 사람," 즉 그 때 거기에 참석하였던 자들 중에 어떤 사람은 "의심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경배"하는 자들 중에도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다. 
신실한 자들의 신앙은 매우 약하고 흔들릴 수 있다. 
그들은 ejdivstasan ─ 즉 의심하였다. 즉 어느 것이 무거운지 말하기 어려울 때 평형 저울과 같이 "어떻게 결말이 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의심들은 후에 없어졌으며, 그들의 신앙은 완전한 확신에까지 성장하였으며, 또한 제자들이 "믿기 전에 의심하였다"는 사실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존귀를 한층 더 높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쉽사리 믿어버렸다거나 또는 미혹을 받았다고 말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먼저 "질문하였고 만사를 시험해 보았으며" 그 후에야 비로소 "참된"것을 "굳게 붙잡았으며,"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Ⅲ.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가?(18-20절).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비록 의심하는 자들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 때문에 그들을 거절하지는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멀리 서 계시지 않고 가까이 "나아 오셨으며" 흔들리는 저울을 고정시키시고 그들의 신앙이 의심을 정복케 할 수 있는 확실한 부활의 증거를 제시하셨다. 
그는 "나아 오셨으며" 또한 친구가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듯이 친근하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맡기려고 하는 사명에 완전히 만족할 수 있게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를 위해 말씀드리려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신" 주님은 그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전해 주기 위하여 우리들에게 "가까이 나아 오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세상에 있는 그의 나라의 위대한 헌장을 나누어 주셨으며, 그들을 그이 대사로 파송하셨다. 
여기에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신임장을 교부하고 계신다.
이 대헌장을 개봉함에 있어서 우리는 두 가지 일들을 살펴 볼 수 있다.
1. 우리 주 예수님이 아버지에게서 직접 받은 사명. 
누군가가 어떤 권세로 그 일을 하며 누가 그 권세를 주었느냐고 묻게 될 때를 대비하여 그들에게 "권세를 부여하려고" 사실 때 여기에서 그는 우리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이 말씀은 매우 위대하신 말씀이며, 그 이외에는 누구도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이로써 그는 기독교의 위대한 근원인 중보자로서의 그의 우주적인 통치를 강조하고 계시다. 그는 "모든 권세"를 가지셨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그는 "어디서부터" 이 권세를 받으셨는가? 
그는 그 권세를 스스로 취하거나 빼앗지 않으셨다. 그 권세는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는 모든 존재의 근원, 따라서 모든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분에게서 합법적으로 물려받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왕으로 세우시고"(시 2:6), 그에게 관을 씌우셨다(눅 1:32). 그는 아버지와 동등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권세는 본래적으로 또한 필수적으로 "그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중보자이시며 신인(神人)이시기 때문에, "모든 권세는 그에게 주어졌다" 
한편으로는 그의 사역의 "보상"으로써(그가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놓이셨다"), 또 한편으로는 그의 목적을 "따라" 주어진 것이다. 
그에게 이 "권세가 주어진 것"은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여생을 주게 하려 하심이다"(요 17:2). 즉 보다 효과 있고 완전하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에게 권세가 주어진 것이다. 
이 권세는 그의 부활시에 더욱 두드러지게 맡겨졌다(행 13:33). 그는 이전에 "죄를 사하시는 권세"(마 9:6)를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이제 "모든 권세"는 그에게 주어지고 있다. 
그는 이제 "친히 나라를 물려받기 위하여"(눅 19:12), 즉 "오른편에" 앉기 위하여 가실 것이다(시 100:1). 그것을 매입하셨으므로 이제는 소유한 일만이 남아 있다.
(2) 그는 이 권세를 "어디에"가지고 계시는가? 
즉 우주로 생각할 수 있는 "하늘과 땅"에 가지고 계시다. 그리스도는 오직 유일하신 우주의 왕이시며 "만물의 주"이시다(행 10:36). 
그는 "하늘에 있는 모든 권세"를 가지셨다. 그는 천사를 지배하시는 통치권을 가지셨다. 천사들은 그의 겸손한 종들이다(엡 1:20, 21). 주님께서는 그의 속죄와 대속을 인하여 그의 아버지께 중재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셨다. 그는 공급자로서가 아니라 요구자로서 간구하신다. "아버지여, 주옵소서." 
그는 또한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다. 대속 제사로써 하나님을 설득하시고 나서 그는 화해의 역사로써 사람들을 설득하시며, 권세를 가진 자로서 그들을 대하신다. 그는 실로 모든 주장(causes)들과 인격(persons)에서 최고의 중재자와 통치자가 되신다. "그로 말미암아 왕들은 통치를 한다." 
모든 영혼은 그의 것이며, "모든" 마음과 "무릎"은 그에게 "엎드려야만" 하며, "모든 혀"는 그가 "주님이심을 고백해야만 한다." 
우리 주 예수님이 그들에게 이것을 말씀하신 것은, 그가 그들에게 맡기신 권위에 대해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며, 또한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사명을 수행케 하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거치는 것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이와 같이 영광스럽게 되신 주님"을 볼 때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해 부끄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
2. 그가 파송하시는 자에게 맡긴 사명. "그러므로 너희는 가라." 이 사명은,
(1) 본래 "사도들," 즉 그리스도의 왕국에 있는 주요 장관들, 다시 말하면 교회의 기초를 놓은 건축자들에게 주어지고 있다. 
이제 거듭나서 그리스도를 따른 자들은 "보좌에 앉히우셨다"(눅 22:30). "너희는 가라." 이 말씀은 "아들아, 일하라 가라"와 같이 명령의 말씀일 뿐만 아니라, 격려의 말씀, 즉 "가라, 그리고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를 보내지 않았느냐?" 가서 이 일을 실행하라. 
그들은 "나라를 취하거나" 또는 자기에게 모이라는 명령을 국가에 선포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은 가서 복음을 그들의 문전에 전해야만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육신적인 임재"를 보고 이에 탐닉하여 거기에 매달렸으며 그들의 모든 즐거움과 소망을 그 위에 세웠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더 이상 그를 따르지 못하도록 그들을 떼어놓으시고 다른 일을 수행하도록 그들을 두루 보내고 계시다. 
"마치 독수리"가 제 새끼를 날도록 하기 위하여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는 것"처럼(신 32:11),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전 세계로 흩어 보내시기 위하여 그의 제자들에게 어지럽히신다.
(2) 이 사명은 그들이 계승자들, 즉 복음 사경자들에게 주어지고 있는데, 그들의 임무는 시간적으로 세상 끝날까지 복음을 시대적으로 이어가면서 전달하는 것이며 또한 장소적으로는 세상 끝까지 나라에서 나라로 나아가하는 것이며 둘 다 필수적인 것이다. 
복음사역에 대한 구약의 약속은 계승되도록 이루어져 있다(사 59:21). 이 약속도 그와 같은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까지 그들과 더불어 항상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승천 시에 사도나 선지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목사와 교사들"에게 주셨다(엡 4:11). 이제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① 그의 사명은 얼마나 멀리에까지 넓혀지고 있는가? 
즉 "모든 족속들," 가서 "모든 족속"2으로 제자를 삼으라. 그들은 각처로 함께 모여 가서는 안 되며, 이의 없이 복음의 빛을 가장 잘 "퍼칠" 수 있는 방법으로 흩어져야만 한다. 이것은 분명히 다음과 같이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임을 나타내고 있다.
첫째, 유대인과 더불어 맺어진 언약은 이제 폐지되고 취소되어야만 한다. 
이 말씀은 오랫동안 보이는 지상교회로부터 이방인들을 배제해온 중간 담을 깨뜨렸다. 한편 사도들은 처음 보내심을 받았을 때 이방인의 길로 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모든 족속들"에게로 파송되고 있다.
둘째,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졌으며, 불신앙과 패역으로 말미암아 내어쫓김을 당한 사람 이외에는 그 누구도 내어 쫓김을 당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이 전파하였던 구원은 "보편적인 구원"이었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와서 "죄사함"의 특권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 기독교는 국가의 조직에 연관이 되어져야만 한다. 
이는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며, 그 왕들은 교호의 양부(養父)들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② 이 사명의 주요 의도는 무엇인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것이다. 마데튜사테 - 즉 그들을 제자들로 삼으라. [그럼으로써]최선을 다해 그 나라들을 기독교 국가들로 삼으라.(되게 하라)" "나라들에 가서, 요나가 니느웨에 한 것이나 다른 구약 선지자들이 한 것처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라"(비록 그들은 그들의 사악함 때문에 그러한 심판을 받으리라는 기대를 해야 하지만)가 아니라, "가서 그들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셨다.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왕국을 세우심으로써 족속들을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며, 학교를 세우심으로써 족속들을 그의 학생으로 삼으시며, 흑암의 권세를 대항하시려고 전쟁을 수행할 군대를 모으심으로써 땅의 모든 족속들을 그의 군기 아래로 징집하신다. 
사도들이 해야만 할 일은 각처에 기독교를 세우는 일이었으며, 그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세상의 강한 영웅들의 성공은 이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족속들(나라들)을 정복하였으며,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였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족속들을 정복하였으며 그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다.
③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그들이 해야할 임무(가르침).
첫째, 그들은 "세례를 줌"으로써 "제자들로 삼아야만" 한다. 
"모든 족속들에게로 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그들 가운데서 이적을 행하며, 그들로 하여금 자진해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나오도록 설득하며, 그들이 자녀들을 데리고 나오도록 하라. 그 후에 그들을 물로 씻음으로써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교회에 들어오도록 인정하여라." 
그들을 물 속에 들어가게 하든지 또는 물을 붓거나 뿌리도록 함으로써 그렇게 하라. 아마도 물을 붓거나 뿌리는 것이 더 적절한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일은 대부분 그렇게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내가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부으리라"(사 44:3)와 "성령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딛 3:5, 6) "내가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리리라"(겔 36:25). "그가 열방에 뿌릴 것이다"(사 52:15) 등이 있다. 이것들은 "족속들에게 세례를 주는" 이 사명에 대한 예언처럼 보여진다.
둘째, 이 세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시행되어야만 한다. 즉,
1. "사람에게서"가 아닌, "하늘로부터 온 권위로써" 시행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의 사역자들은 우리의 "창조"와 "구속"에 한 가지로 참예 하셨던 삼위격(三位格)으로부터 온 권위에 의해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천국의 큰 인치심(seal)을 받은 사명을 맡고 있는데, 그 인치심은 비록 육적인 눈으로는 이를 제정한 자와 같이 "형상이나 용모"를 보지 못하지만 그 규례에 대해 존귀를 더해 주고 있다.
2.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시행되어야만 한다. 
매사는 기도에 의해, 특별히 세례의 물에 의해 성결케 되어야만 한다. 믿음의 기도는 성례식과 더불어 그 광채요 아름다움, 즉 그 사명과 효능이 되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능케 할 수 있다. 그러나,
3. 이 세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행해져야만 한다. 
이것은 기독교와 세 계약의 첫째 원리의 "요약"으로 삼아졌으며, 이것을 따라 옛 선조가 작성되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엄숙하게,
(1)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관한 성경 계시에 "동의함"을 고백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며, "한 분 하나님"이 계시며, 위격 가운데는 "태어나게 하신(begets) 아들"과 이 둘의 거룩한 "영"(성령)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신앙 고백을 해야 한다. 
우리는 "이름들"(names)로 세례를 받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name)으로 세례를 받는다. 이것은 분명히 "이 셋은 하나"이며 "그들의 이름은 하나"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이 이곳의 "기독자의 세례"와 "기독자의 축복"(고후 13:14)에서 "삼위"가 분명히 구별되게 언급된 것은 삼위일체 교리의 분명한 증거이며 교리의 모든 역사를 통해 그것이 순수하고 온전하게 보존되었다. 왜냐하면 기독자의 "모임"에서 이 두 사실(세례와 축복)보다 더 위대하고 장엄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2) 하나님,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의 계약 관계에 대한 우리의 "동의"를 고백하게 된다. 
세례는 "성례식," 즉 "맹세"이다. 세례식은 "맹세하여 말하는" 예식이다. 세례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속에 보좌를 차지하려는 하나님과의 경쟁자인 세상과 육신을 포기한다는 "단념"의 맹세이다. 
또한 세례는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그의 것"으로 맡겨버리는 것, 즉 우리의 "몸"과 "혼"과 "영"을 그의 뜻에 의해 지배받도록 하며 또한 그의 은혜 가운데서 행복을 누리게 되도록 맡겨버리는 "충성"의 맹세이다. 
"우리는 그의 사람들이 되었으며," 따라서 관례상 충성의 맹세가 드려지는 것이다. "세례"는 "토지권"이나 "양도권"이 집과 토지에 대해 주어지는 것처럼 "사람"에게 적용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드려진" 것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① 세례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시행된다. 
즉 그의 "영원히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왜냐하면 여기에서 주요하게 의도된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로 믿으며, 우리의 창조자이시요, 보존자이시요, 은혜자이신 "우리의 아버지"로 믿으면서 시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격려하고 움직이시는 "우리의 소유자"이신 그에게 우리 자신들을 맡길 수 있으며, 우리를 지배하시는 우리의 최고 "통치자"이시며 또한 우리의 "최고 선"이요 "최종"의 목적이신 그에게 자신들을 맡길 수 있다.
② 세례는 "아들," 즉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으로 시행되며, 아버지와 "관련"이 되어 있다. 
세례는 특별히 "주 예수의 이름으로"시행되었다(행 8:16; 19:5). 세례 가운데서 우리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동의"를 나타낼 수 있으며 또한 도마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요 20:28)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동의"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선지자와 제사장, 왕으로 삼으며,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구원받으며 지배를 받도록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다.
③ 세례는 "성령"의 이름으로 시행된다. 
성령의 위격(位格)과 우리의 구속을 수행하시는 그의 직분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성화자(sanctifier)요 교사요 인도자요 위로자이신 그의 행동과 역할에 자신을 내어 맡길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이와 같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제자 가운데 등록이 된 자는 가르침을 받아야만 한다(20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것은 두 가지 일들을 나타낸다.
1. "제자들," 즉 세례를 받은 "모든 기독자들"의 의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지켜야만 하며 또한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가 보내신 자들의 가르침에 순응_순종해야만 한다. 
우리들이 보이는 교회(지상 교회)에 들어감을 얻게 된 것은 보다 더 많은 일들을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제자들"로 삼으셨을 때 그는 "우리와 함께 행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군사들"을 그의 봉사를 위해 "훈련시킬 수"있도록 "모집하고 계시다."
세례를 받은 자들은 다음과 같은 일을 하도록 되어 있다.
(1) 그리스도의 명령을 그들의 규율로 삼는 일. 
"신앙의 법"이 있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 아래에" 있다고 말해진다. 우리는 세례에 의해 이 법에 "매여"지며 또한 그것을 "순종해야"만 한다.
(2)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바를 "유의"하는 것. 
그리스도의 명령에 대한 적절한 "순종"은 꾸준한 주의를 필요로 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잘 유의"를 하지 않는다면 실수하는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순종할 때에 우리는 그 명령을 바라보아야만 하며 또한 주님에게 하듯이 행해야만 한다.
(3) 예외 없이 그가 명령하신 "모든 일"에 유의하는 것, 즉 "도덕적"인 모든 의무들과 "제정된" 모든 규례들에 유의를 해야만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 만일 보편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면 "신실한" 것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그의 온전하신 뜻 가운데에 완전히 서야"만 한다.
(4)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명령에 잡아매며 그 명령에서부터 "감소" 시키거나 또는 그 명령에 "첨가"시키지 말 것.
(5) 그가 그의 학교에서 교사로 임명한 자들로부터 그리스도의 법에 의한 자신들의 의무에 대하여 배울 것.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학교에 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그의 사역자들의 의무. 
그것은 즉 그리스도의 명령을 "가르치며," 그의 제자들에게 그것들을 해석하며, 순종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명령들을 특별한 경우에 적용시킬 때 그들을 도와주는 일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창작품을 가르쳐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기독자는 "그것들"의 지식 안에서 "단련"을 받아야만 한다. 
이로써 "주요한" 사역이 교회에 "제정"되고 있으니, 이는 "우리가 다 온전한 사람을 이루기까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르치기" 위함이다(엡 4:11-13). 
하늘의 상속자들은 그들이 장성하기까지 "가정 교사와 관리자 아래" 있어야만 한다.
3. 여기에는 이 사명을 수행할 때 주님께서 그들에게 영적으로 함께 임재하실 것이라는 보장이 기록되어 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위대하고 고귀한 약속은 "볼지어다"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의 믿음을 강하게 하며 그들로 하여금 그것에 유의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에 유의하라. 너는 그것에 대해 확신할 수 있고 과감히 신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그들에게 약속된 호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내가 장차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I will be)가 아니라 "있으리라"(I am).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내가"라는 이름으로 그의 사도들을 보내셨다. 왜냐하면 그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동일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그들을 떠나려고 하셨다(계 1:8 참조). 그의 육신적인 임재는 이제 그들에게서 옮겨지려 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을 슬프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육신적인 임재보다 더욱 그들에게 편리한 "영적인" 임재를 보장하고 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즉 "나의 영이 너와 함께 있으리라." 
즉 보혜사가 너희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요 16:7). 나는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며 너희를 거스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군(prince) 미가엘이 했다고 말해지는 것처럼(단 10:21) 나는 너희의 편이 되어 너희를 굳게 하리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며, 너희를 떠나거나 멀리 있지 아니하리라. 나는 큰 도움이다(시 46:1).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그들을 이 세상에서 그의 나라를 세우도록 하기 위하여 보내셨는데, 이것은 매우 큰 임무였다. 그 때에 그는 적절하게 그가 그들과 함께 하리라는 약속을 하셨다. 이는,
①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직면하게 될 난관 가운데서도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나는 너희를 후원하기 위하여 너희를 변호하기 위하여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너희가 봉사하거나 고난 중에 있을 때 위로하고 존귀케 하기 위하여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너희가 불이나 물을 통과할 때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강단이나 감옥에서도 불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② 이는 이 위대한 임무를 "성취시키기" 위함이다.
 "볼지어다. 내가 족속들을 제자로 삼는 일, 즉 사탄의 강한 사슬을 끌어내리고 주 예수님을 위해 보다 강한 고리(holds)를 만들기 위한 너희의 사역을 효과 있게 만들기 위하여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그들이 종교적으로 국가적인 규례들을 뜯어고치며 오랜 관습의 흐름을 바꾸는 일은 가망성이 없는 일처럼 보였다. 즉 그들이 시대의 사조(경향)에 직접적으로 반대가 되는 교훈을 "설정"하며 백성들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제자가 되도록 설득하는 것은 도저히 가망이 없는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볼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2) 그 호의의 계속성. 즉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
① 그들은 그의 "영구적"인 임재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항상", 즉 "매일," 날마다 "나는 안식일이나 그 외의 날들, 좋은 날이나 궂은 날, 겨울이나 여름날에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우리 주 예수님은 한 날, 한 시 동안도 그의 교회나 사역자들에게서 떠나지 않으신다. 만일 그가 떠난 그러한 날이나 시간이 있었다면, 그들은 버림을 받았던 것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이후로 그는 그들에게 "가끔" 나타나셨으며, 아마도 한 주에 한 번이나 전혀 나타나지 않으신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중단 없이 그의 영적인 임재를 계속적으로 체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장해 주고 계시다. 
우리가 있는 곳은 어디에서나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의 입에"까지도 가까이 임하며,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의 마음에"까지도 가까이 임하신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즉 "구원자"는 종종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사 45:15)이시다. 그러나 결코 영영 자신이 떠나버리시는 하나님은 결코 아니다. 종종 "흑암 가운데" 계시지만 "멀리" 계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② 그들은 "세상 끝 날까지," 즉 그의 영구적인 임재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 앞에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세상이 놓여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기간을 향하여 재촉되고 있다. 그 때까지 기독교는 이 세상의 일부분에서나 다른 부분에서 "보존될"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도 계속적으로 그의 사역자들에게 임재하실 것이다. 
나는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즉, 곧 죽을 그들과 함께 있지 않고,
첫째, "너희와 너희의 저서"와 함께 있으리라. 
신약 성경에는 그것들을 존재케 하고 그것에 의해 오묘한 결과를 낳게 하는 신적인 능력이 수반되어 있는데, 그러한 일들은 세상 끝 날까지 지속이 될 것이다.
둘째, 너희와 "너희의 계승자들"과 함께 있으리라. 
즉 너희와 교회의 몇 세대에 걸친 모든 복음 사역자들과 함께 있으리라. 이 사명이 확장되는 모든 사람들, 때 맞추어 부르심을 받고 보내심을 받아 이와 같이 "세례를 받고 가르친" 모든 사람들과 함께 있으리라. 
"세상 끝"에 오고 그 나라가 아버지 하나님께 넘겨질 때 사역자들이나 그들의 통치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때까지 그들은 계속될 것이며 또한 성직 임명의 위대한 의도는 이행될 것이다. 
사도들에게 말씀되었던 "내가 너희를 남겨두거나 버리지 않겠노라"는 말씀이 그리스도의 모든 신실한 사역자들에게 말씀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큰 용기를 준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두 가지 엄숙한 작별 인사를 하신 것을 찾아 볼 수 있으며, 그 작별 인사는 각각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있다. 
그 한가지는 여기에 있는 것처럼 그가 제자들과 더불어 개인적인 대화를 마치려고 하실 때 하신 것으로써, "볼지어다.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나는 너희를 떠나가지만, 여전히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또 하나는 그의 사랑하는 제자의 펜(pen)에 의해 성경 말씀을 마치려고 하실 때 하신 것으로써,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나는 잠시 동안 너희를 떠나지만 또 다시 속히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계 22:20). 
이 말씀을 보면 그는 성을 내면서 헤어지지 않고 사랑하면서 헤어지신 것과 또한 우리가 그와 더불어 교제를 계속하고 그를 기대하는 것이 그의 뜻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한 단어가 더 남아 있는데, 그것은 "아멘"이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책 끝에 있는 "끝"(finis)과 같이 결어(結語)를 의미하는 부호가 아니라 의미심장한 뜻을 가지고 있다.
1. 이 말은 "볼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이 약속에 대한 확증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의 "아멘"으로써, 그 안에서 모든 약속은 "예(Yes)와 아멘"이다. "진실로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며, 또한 있을 것이다. 나는 아멘이시요 충성된 증인이다. 너희는 이 사실에 대해 확신하도록 하라." 또는,
2. 이 단어는 교회가 그들의 소원과 기도와 기대에 있어서 그것과 일치함을 나타낸다. 
그것은 복음 전도자의 "아멘"이다. 즉 주님, "그렇게 되기를 빕니다"이다. 그리스도의 약속에 대한 우리의 "아멘"은 그것들을 기도로 돌리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사역자들과 함께 하며 그의 말씀 가운데 임재하시며 또한 두 세 사람이 그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있을지라도 그의 백성의 모임에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으며,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하리라고 약속하시지 않았는가? 
진심으로 그것에 "아멘"이라고 말하도록 하자. "그렇게 되어질 것이며" 또한 "그렇게 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도록 하자. 
주여, "당신께서 우리로 하여금 소망하게 하신 이 말씀이 당신의 종들에게 기억되도록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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