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4.07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행9.사울의 회심_치유._복음증거.베드로(룻다애니아의중풍치유_욥바도르가의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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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9장

===사울이 회개하다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사울이 다메섹에서 전도하다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사울이 피신하다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다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베드로가 중풍병자를 고치다

32.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33.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34.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35.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베드로가 도르가를 살리다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38.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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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9장 (개요)

본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Ⅰ.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복음에 대한 무서운 박해자에서 뛰어난 복음의 고백자요 전도자로 회심하는 유명한 내용이 수록되고 있다.

1. 그가 다메섹으로 박해의 소임을 맡고 갈 때 그리스도께서 직접 그에게 나타나심으로 그가 어떻게 깨우침을 받아 변화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잠시 어떤 조건 아래서 이 확신과 두려움의 능력 아래 사로잡혀 있었는가를 기록하고 있다(1-9).

2. 그가 하늘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아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음에 대하여(10-19).

3. 그가 즉시 어떻게 복음의 사자가 되어 그리스도 신앙을 전하였고 그가 전한 것을 어떻게 입증하였는가에 대하여(20-22).

4. 그가 박해를 받고 겨우 도망친 사건에 대하여(23-25).

5.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에게 어떻게 인정을 받고 복음을 전하였으며 거기서도 박해를 받았는가에 대하여(26-30).

6. 이후 얼마 동안 교회에 찾아온 평온함(31).

Ⅱ. 베드로가 중풍병으로 오래 누워있던 애니아를 고침(32-35).

Ⅲ. 다비다가 베드로의 기도를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3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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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이 회개하다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울의 회심(행 9:1-9)

우리는 스데반에 대한 기사 가운데서 두 세 번 사울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는 성서 기자가 사울에 대하여 빨리 논하고자하는 열망 때문이었다. 

이제 우리는 사울에 대하여 논하게 되는데 그는 베드로 대신 활약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그대로 유대인의 사도로 활약하듯이 바울은 주로 이방인의 사도로 택함을 받는다. 

히브리어로 그의 이름은 사울 즉 "묻다, 구하다"는 뜻이었다. 

그와 이름이 같은 사울 왕이 키가 크고 당당한 데 비해 그는 체구가 두드러지게 작았다. 

어떤 고대인은 그를 불러 키가  4.5 피트(137.2센티미터)에 불과한 자라 하였다. 

그러나 로마 시민으로서의 그의 이름은, 바울 즉 "작다"는 뜻이었다. 

그는 로마의 자유시인 길리기아 지방의 도시 다소에서 출생하였고 그 자신은 로마시민, 자유민이었으며 그의 부모는 모두 토박이 유대인들이었기에 자기를 가리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다소에 있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또 아덴에서 잠깐 교육을 받았는데, 거기서 그는 희랍의 철학과 시를 숙달하게 되었으며, 그후  예루살렘에 있는 대학교에 들어가 저명한 바리새인 가말리엘 수하에서 신학과 유대 율법을 연구하였다. 

그는 비범한 재질이 있었고 배움에 깊이 몰두하였다. 그는 또한 수공업을 배웠는데)천막 제조업 기술을 습득함) 이것은 유대인들 가운데 학자로 육성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흔히 있는 일이었다[라이트푸트 박사(Dr. Lightfoot)도 이같이 말한다]. 그리고 직업을 갖는 것은 생계 유지를 위하고 게으르지 않으려는 뜻에서였다.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이 본문에 기록된 대로 놀라운 변화를 일으켜 놓은 젊은이이다. 때는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후 1년 또는 그보다 약간 경과하였을 시기였다. 본문을 통하여 다음 같은 내용을 고찰해 볼 수 있다.

Ⅰ. 그가 회심하기 전에 매우 사악하였으며 얼마 전까지 그는 기독교에 대한 철저한 원수였고 이 신앙을 품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박해함으로써 최선을 다하여 기독교를 근절시키려 하였다. 

다른 점에 있어서 그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 즉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비난하는 사람이요, 기독교인들의 박해자로서 각각 많은 피해를 끼쳤다(딤전 1:13). 

이와 같이 잘못된 선입견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적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하였기에(26:9).  이렇게 하는 것이 그에게는 욥기 16장 2절에 예언된 바와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 여겼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고 있다.

1. 기독교 신앙에 대한 그의 일반적인 적개심과 분노(1절).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다"고 기록되고 있다. 

박해받은 사람들은 주님의 제자들이었다.  바로 사울이 미워하는 인물 밑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미워하고 박해하였다. 박해하는 일은 위협하고 또 죽이는 것을 말한다. 

위협하는 박해가 있다(4:17, 21). 그들은 영혼을 공포에 떨게 하고 무찌르려고 한다. 사람들은 협박을 당하고도 오래 산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사울이 그들을 위협하여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게 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설득되지 않았다면 그는 자기가 위협한 자들을 살해하고 죽을 때까지 박해하였을 것이다(22:4). 

그가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다는 말은 박해하는 것이 그에게는 당연지사요 계속 해야 할 일로 여겨졌다는 말이다. 그는 이 일이 자기에게 필연적인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열렬히 원한에 가득 차서 날뛰었다. 

그의 숨결은 독을 지닌 동물들이 독을 뿜어내는 것처럼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는 그가 가는 곳마다 기독교인들에게 죽음을 뿜어댔고 교만에 가득 차 그들을 비웃고(시 12:4, 5) 노하여 그들에게 독을 뱉았다. 사울이 아직도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다는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을 의미한다.

(1) 그가 아직도 박해하려는 마음 가운데 살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는 그가 살해한 자들의 피에 만족하지 않고 아직도 "내게 피를! 내게 피를 달라"고 부르짖는다.

(2) 그가 곧 다른 마음이 될 것을 뜻한다. 

아직 그가 위협과 살기를 숨쉬며 살고 있지만 그가 이러한 생활을 오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호흡은 곧 끊기어지는 것이므로 살기를 호흡하던 것도 멈춰지게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2.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사울이 특별한 계획을 함. 

거기에도 스데반의 죽음으로 시작된 박해를 피하려 도망간 자들에 의해 최근에 전하여진 복음이 있었으며,  이들은 거기는 안전하고 조용하리라 생각하였다.  거기서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들과의 사이에 묵계가 이루어졌었다. 

그러나 사울은 기독교인이 한 명이라도 편히 있음을 알고서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따라서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편케 지낸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을 방해할 결심을 한다. 

이 일을 수행하려고 그는 대제사장에게 다메섹에 가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한다(1, 2절). 대제사장에게 기독교인 박해를 허용해 달라고 떼를 쓰지 않아도 실상 대제사장이 앞장 서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젊은 사울이 나이 많은 대제사장 보다 박해하는 일에 더욱 열성적이었다. 

죄를 짓게 하는 자들이 가장 사악한 죄인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교화된 사람들은 서기관 바리새인들보다 칠 배나 더한 지옥의 자녀 노릇하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사울은(22:5) 그가 임명받은 것이 장로회의에서 인준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 광분하는 고집쟁이에게 있어서 대산헤드린이 인준하고 직접 그에게 지시한 임명장은 자랑스러운 것이었다. 이 임명장으로 말미암아 그에게는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이 회당과 모임에서 그들 가운데 이 새로운 이단인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있는지 여부를 심문할 수 있는 권력이 그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을 발견하면 남녀 무론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교도소로 끌어다가 거기 대회의에 의해 결정된 율법을 따라 고소할 수 있다.

다음 사실을 생각하여 보자.

(1) 본문에 기독교인을 가리켜 "이 도를 좇는 사람들"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이 도를 좇는 사람들"이란 이들이 철저한 신앙인들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리스도가 길이시므로 때로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을 이렇게 불렀던 것 같다. 또는 이들이 자기들의 고향에 아직 당도하지 못하고 길에서 있을 뿐이란 뜻에서 불리워졌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기독교의 박해자들이 이 길이란 말을 빗대어 곁길, 파벌, 당파로 간주하는 뜻에서 사용한 것도 같다.

(2)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은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회당이 유대 국가라는 행정적인 통치 기구에 속하여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모든 회당들을 통하여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다른 의무금을 지불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주권 행사에 대하여 로마 총독들은 이 사실을 강력히 입증하지는 못하였지만 이를 유대총독의 행위라고 주장한다.

(3) 이 위임을 통하여 유대교 지도자들이 이단이라고 부르는 그들 이외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실상 이들이야말로 본래의 유대교 정통이었지만 남녀무론하고 기소받게 되었다. 

이러한 경우에 사면을 받거나 적어도 동정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는 예외가 되지 못하였다. 

이같이 천주교에 속한 박해자들도 약한 여성에게 잔인하여던 것이다.

(4) 그는 기독교인들을 가장 중대한 범죄인들처럼 예루살렘에 묶어 압송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들은 중죄인으로 취급함으로 기독교인들에게 공포감을 주려고 하였고 따라서 이 권한을 쥔 사울을 더욱 위엄있게 하게 되었다. 

그는 그들을 압송하기 위하여 군대의 지휘권을 가졌으며 마음대로 위협하고 죽을 수 있는 기회도 허용되었다.

이와 같이 사울이 박해에 착수하려 할 때 하나님의 은총이 그를 완전히 변화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무리 흉악한 죄인들도 회개시키시어 다시 새롭게 하시는 은총에 대하여 낙심치 말자. 

또한 아무리 큰 죄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의심치 말자. 왜냐하면 바울 자신도 은총을 입어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딤전 1:13).

Ⅱ. 그에게 이 변화가 주어진 것은 갑작스럽고도 이상한 일이었다. 

어떤 평범한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 일은 기적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바울의 회심은 교회의 기적 중 하나라 하겠다. 본문에는 다음의 사실이 기록되고 있다.

1. 이 일이 일어난 장소와 시기.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거기서 그는 그리스도를 만났다.

(1) 그는 여행하는 중이었다. 

성전이나 회당 또는 기독교인들의 집회에 참여했던 것도 아니요 노상에 있었다. 

교회가 일반적으로 공적인 치리가 이루어지는 곳이지만 회개의 역사는 교회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잠자다가 새로워지기도 한다(욥 33:15-17). 또 어떤 이는 홀로 노상에서 여행하던 중 변화된다.

 사색이라는 것은 어디서나 자유로우므로 침상에서와 마찬가지로 길 위에서도 우리의 마음을 열어 교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는 있는 법이다. 

거기서도 성령은 역사하신다. 성령의 바람은 뜻하는 대로 불어온다. 어떤 이들은 사울이 야외에서 소리를 들었으므로 그가 이 사건을 조작했다든지 사기하였다는 혐의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2) 그는 다메섹 가까이 당도하여 여행을 끝내고 시리아의 중요 도시로 막 들어가려고 하던 중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가 이방인의 사도로 불리움을 받았으므로 이방인의 나라에서 그리스도 신앙으로 회심하였다고 생각한다. 

이전에 다메섹은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일로 악명의 높았었다. 그들은 철 탈곡기로 탈곡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다(암 1:3). 그리고 이제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날 순간이었다.

(3) 그는 악랄한 방법으로 다메섹의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려는 계획을 추구하였고 또 거기 새로이 탄생한 기독교인들을 멸절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스스로 만족하였다. 

때때로 하나님의 은총은 죄인들이 가장 완악하여졌을 때 또 그들이 치명적인 악한 목적을 열렬히 추구할 때 그들에게 역사하심을 기억하자.

 이러므로 하나님의 긍휼과 그의 능력이 더욱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

(4) 그가 행한 잔인한 포고령이 집행될 시기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이 일이 효율적으로 저지되고 있다. 이 문제를 생각하여 보자.

① 이 사건은 다메섹에 있는 불쌍한 성도들에게는 대단히 고마운 일이었다. 

아나니아의 말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이들은 그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13, 14절) 그들이 받을 위험에 대하여도 깨닫고 굶주린 늑대 앞에 어린 양처럼 떨고 있었다. 

사울의 회심은 우선 그들에게 안전을 주었다. 그리스도는 경건한 자를 시험에서 건지시는 여러 방법을 알고 계신다. 

때로 이 일은 그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이 변화됨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즉 그들의 격노한 심정이 제어되거나(시 76:10) 한동안 가라앉게 된다. 

구약의 사울이 그와 같은 사람으로 그는 한 번 이상 다윗에 대하여 뉘우쳤다(삼상 24:16; 26:21). 또는 본문의 신약의 사울과 같이 박해자들의 영혼이 새롭게 되어 지속적인 효과를 거두는 경우도 있다.

② 사울이 그의 악한 계획을 실현에 옮기지 못한 것은 자신에게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 길로 계속 나아갔다면 그의 불법을 채울 수밖에 없었으리라. 

만일 하나님께서 내적인 은총으로 임하시든가 외적인 섭리로 임하시므로 우리로 하여금 앙한 목적을 계획하고 수행하는 것을 막으신다면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로 알고 귀하게 여겨야 함을 기억하자(삼상 25:32).

2.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그에게 나타나심. 

본문에는 다만 "하늘로써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7절을 보면 주 예수께서 빛 가운데 계시사 길 위에 있는 그에게 나타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바로 의로운 분을 보았다(22:14). 26장 13절을 참조하라. 

그가 스데반처럼 멀리 즉 하늘에 있는 그를 보았는지 더 가까이 공중에 나타나신 것을 보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신다는 말씀이 있다고 그 분이 이 같은 특별한 경우에 개인적으로 찾아오시어 잠간 동안이라도 이 세상에 오셨다는 가정과는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3:21). 

사울이 사도가 되기 위해서는 그가 주님을 뵈옵는 일이 필요했고 또한 사실 그는 주님을 뵈었다(고전 9:11; 5:8).

(1) 빛이 "홀연히" 그에게 비추었다. (

이것을 바울은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고 사전의 그러한 경고도 없었다. 

가난한 영혼들에게 그리스도가 자신을 나타내실 때는 대개 갑작스럽고 경이로운 때가 많다. 그는 아름다운 축복을 준비하시고 그들을 기다리신다. 그리스도께서 부르신 제자들에게서 우리는 이 사실을 발견한다. 또는 "나 같은 자라도 아신 바 되었노라"는 말씀과 같다.

(2) 그것은 빛의 근원인 하늘에서 비추인 빛으로 빛의 아버지이신 하늘 아버지로부터 온 빛이었다.

 그것은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었다(26:13). 왜냐하면 그 빛이 대낮에도 보이었고 태양의 절정에 이른 강열한 비추임을 가능하였다(24:23).

(3) 빛이 "저를 둘러 비추었다." 

즉 그의 얼굴뿐 아니라 그의 사방을 두루 비추었다. 만일 그가 주위를 둘러 보았다면 그가 빛에 휩싸인 것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빛이 비추인 것은 그로 하여금 놀라게 하여 주위를 집중케 하려는 뜻이 있었을 뿐 아니라(그가 이렇게 기이한 일을 보게 되었을 때 또한 무언가 들리기를 바라 귀를 기울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지식으로 그의 이해를 밝게 하심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악마는 어둠 속에서 영혼에게 찾아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빛 가운데 찾아오신다. 그 자신이 세상의 빛으로 스스로 밝고 은혜롭게 빛을 발하시며 빛처럼 우리에게 은혜롭고 유익하게 임하시기 때문이다. 

새로운 창조에서도 제일 처음 있는 것은 세상이 창조될 때 그러하셨던 것처럼 빛이다(고후 4:6). 그러므로 모든 기독교인들은 "빛과 낮의 자녀들이라" 일컬어진다(엡 5:8).

3. 그리스도께서 사울을 사로잡으시고 구별하심. 

"그가 땅에 엎드려졌다"(4절). 어떤 이들은 그가 걷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때에 이 빛이 아마 천둥 소리를 수반하고서 비추어 그를 두렵게 하였으므로 그는 더 이상 서 있지 못하고 보통 때는 찬탄의 표시로 고개를 숙이지만 지금은 너무 놀라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마도 그는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갔을 때처럼 말을 탔을 것이며 발람보다 더 당당하게 행하였을 것이다. 

이제 사울이 공적인 지위에 있었고 갈 길이 바빴고 여로가 멀었으므로 그가 도보로 여행하였을 것 같지는 않다. 

갑작스러운 빛이 그가 탄 짐승을 놀라게 하여 사울이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가 떨어져서도 몸에 상처가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섭리의 덕택이었다. 

이는 천사들이 그를 특별히 책임지고 있었으므로 뼈 하나 상함이 없이 몸이 보존될 수가 있었다. 26장 14절에 보면 그와 함께 있던 모든 사람이 사울처럼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에게는 섭리가 있었다. 그에게 섭리가 있음은 다음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1)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심과 그를 둘러 비춘 빛을 보아 사울에 대한 특별한 섭리를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영혼들에게 자신을 겸손하게 나타내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그리스도 앞에 있는 자들은 자신을 천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복종한다는 표시로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러므로 욥은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나이다"라고 말하였고 (욥 42:5) 이사야 선지자는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하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는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를 뵈었음이로다"(사 6:5)(한글 개역과는 다소 틀림 - 역자 주)라고 말하였다.

(2) 그가 무릎을 꿇게 된 것은 더 큰 일을 맡기려는 계획 때문이었다. 

그는 기독교인이 되도록 예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의 종이요 위대한 사도로서 예정되어 있었고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땅에 내침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가장 영예로운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계획하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처음에는 겸비한 자리에 있게 됨을 기억하자. 

지식이나 은총에 있어서 남을 능가하도록 계획된 사람들은 처음에는 일반적으로 그들 자신의 무지와 죄에 대한 인식 때문에 겸손히 처신한다. 

하나님께서 쓰고자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쓰여지기에는 부족함을 깊이 의식할 수 있어야 한다.

4. 사울에 대한 책망. 

그가 땅에 떨어진 것은 구금당한 것과 같은 형국이었다. 이렇게 갈 길을 저지당한 채로 그는 한 목소리를 들었다[이 소리는 오직 그만이 분별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으나(7절)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였다(22:9)]. 그 소리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책망이었다.

(1) 사울은 하늘로부터 빛을 보았을 뿐 아니라 하늘로부터 음성도 들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 나타났고 그의 말씀이 하늘로부터 들리어졌다(출 20:18). 이 현상은 모세에게도(민 7:89) 예언자들에게도 있었던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는 결코 모습만 나타내시지는 않는다. 그는 언제나 말씀하시며 나타나시는데 이는 그가 말씀을 자신의 칭호보다 더 귀히 여기시기 때문이요 나타난 바 되어진 것은 언제나 후에 말씀하실 것을 위한 준비로써 계획된 것이었다. 

사울은 음성을 들었다. 믿음은 들음으로 나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것은 듣고 믿음으로 된 것이라고 갈라디아 3장 2절에 기록되었다. 

그가 들은 음성은 그리스도의 음성이었다. 이는 "저의 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행 22:14)하는 말씀과 같다. 

우리가 음성을 들을 때 그것을 그리스도의 음성으로 듣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함을 기억하자(살전 2:13). "그것은 내 사랑하는 자의 음성이라." 

오직 그의 목소리만이 마음을 울릴 수 있다. 보는 것과 듣는 것은 배우는 두 개의 감각기관이다. 그리스도는 본문에서 이 두 관문을 통하여 사울의 마음에 찾아오셨다.

(2)그가 들은 것은 매우 자극적인 것이었다.

① 그의 이름이 두 번씩이나 연이어 불리워졌다. 

바로 "사울아 사울아"라는 부름이었다. 어떤 이는 그가 이렇게 불리워진 것은 그의 이름과 같은 다윗을 크게 핍박한 자를 암시하고자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그는 제2의 사울이었다. 앞의 사울이 다윗의 적이 되었던 것같이 뒤의 사울은 다윗의 아들에게 원수가 되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은 그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는 것이었다. 이사야 45장 4절에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는 말씀과 같다. 출애굽기 33장 12절을 참조하라. 

그를 이름으로 부른 것은 그의 신념을 다시 할 수 없도록 막으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일반을 향하여 말씀하신 것도 우리가 그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면 우리에게 유익하다. 

또 하나님이 우리 이름을 부르신 것처럼 일반에게 말씀하신 교훈과 약속에도 자신의 이름을 삽입하여 듣는 것이 유익하다. 

그가 "오, 너희 모든 사람들이여"라고 부르실 때 그것은 "사무엘아, 사무엘아" 또는 "사울아, 사울아" 부르신 것처럼 구체적인 부름을 뜻하는 것이다. 

사울의 이름을 두 법이나 부른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첫째, 사울이 깊은 잠에 빠져 있음을 의미한다. 

그는 필요하실 때 부르시고 또 부르신다. 예레미야 22장 29절에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라고 부르신 것이 그 한 예이다. 

둘째, 복되신 예수께서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과 그가 새롭기를 바라시는 따뜻한 배려를 가지고 계심을 의미한다. 

그는 진지하게 말씀하신다. 이 부름은 "마르다야, 마르다야"(눅 10:41) 또는 "시몬아, 시몬아"(눅 22:31) 또 "오 예루살렘이여, 예루살렘이여"(마 23:37)라는 부름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사울이 절박한 위기에 직면한 것처럼 부르신다. 그는 사울이 낭떨어지에서 막 떨어지려는 사람을 부르듯 부르신다. 즉 이런 말이다. 

"사울아, 사울아, 너는 지금 네가 어디로 가는지 또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

② 사울에 대한 책망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책망이었다. 

이 말씀을 생각하여 보자.

첫째, 사울은 성자가 되기 전에 그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큰 죄를 지은 죄인임을 알아야 했다. 이제 그는 전에는 그가 결코 보지 못하였던 자기 속에 있는 악을 보게 되었다. 즉 죄는 살고 그는 죽었던 것이다. 죄에 대한 겸손한 인식은 죄를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는 첫 걸음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둘째, 그가 알아야 할 특별한 한 죄가 있었다. 

이 죄는 가장 가책을 느껴야 할 죄로서 이 죄를 스스로 정당화시켰으므로 다른 모든 죄도 합법화되었다.

셋째, 그가 지운 죄는 그리스도를 그가 박해한 것이었다. 

그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 충고는 돌과 같은 마음도 녹일 수 있는 열렬한 충고였다.

1. 죄를 지은 사람. 

"네가 박해를 하였다. 너는 무지하고 거칠고 무사려한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었다. 군중들은 그들이 들은 것은 무엇이고 악평을 한다지만 너는 개방적인 학문을 배웠고 훌륭한 임무와 소양을 갖추지 않았는가! 또한 성서에 대한 지식도 있으니 그것을 충분히 연구하면 자신의 어리석음도 깨닫게 될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그대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악한 것이다."

2. 그가 죄를 저지른 대상. 

"네가 미워한 것이 바로 나였다. 나는 너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았고 네게 선을 베풀기 위하여 하늘에서 왔으며 얼마전에는 너를 십자가의 처형도 받았었다. 이만하면 또 무엇이 부족한가? 내가 다시 너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야 할까."

3. 죄의 종류와 계속 죄를 지음에 대하여. 

그의 죄는 박해한 것이었다. 이번에도 그는 이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너는 박해를 하였으되 가장 열심히 하였고 또 그 일을 계속하였도다." 

이번에는 그가 아직 아무도 옥에 가두거나 살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에 온 것은 바로 이 사명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 그 일을 계획하고 있었고 그 일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기뻐하였다. 악을 계획하는 사람들도 하나님 편에서는 악을 행한 것으로 간주됨을 기억하자.

4. 그에게 주어진 질문에 대하여.

 "왜 네가 그 일을 행하는가."

(1) 그것은 호소하는 듯한 어조였다. 

"왜 네가 나의 제자들을 이같이 부당하게 다루며 불친절히 대하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핍박당하셨을 때도 본문에서 그의 제자들을 핍박하였을 때처럼 그렇게 호소하시지는 않았다. 그는 박해가 사울의 죄였음을 말하신다. 

"어찌하여 네가 자신과 하나님을 향하여 원수맺는 일을 행하는가?" 

죄인들의 죄는 주 예수에게 대단히 근심스러운 짐이 됨을 기억하자. 저는 그들의 완악함을 근심하셨고(막 3:5) 그 죄를 짊어지셨다(암 2:13).

(2) 또 확신어린 어조였다. 

"왜 이렇게 하였는가? 무슨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우리는 자주 우리가 왜 그렇게 행하였는지 이유를 스스로 묻는 것이 유익하다. 그러므로 죄란 것이 얼마나 모순된 것임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죄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죄처럼 모순되고도 그 이유를 댈 수 없는 죄도 없다. 특히 그리스도를 박해난 일이 그대로 들어나면 어찌 변명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백성을 먹으려는 사람들은 무지한 자들이다(시 14:4).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그가 가난하고 약하고 어리석은 사람들 중의 하나를 핍박한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핍박한 사람은 바리새인들에게 눈의 가시오, 모독적인 존재였다. 계속해서 멸시만을 당해왔던 그가 하늘에 계신 분이었다는 것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였다. 

사울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그는 확실히 영광의 주님을 박해하지 않았을 것이리라.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들은 곧 그리스도 자신을 핍박하는 것임을 기억하자. 그가 성도들에게 행한 짓은 곧 그리스도에게 행한 잘못이요 따라서 큰 환란의 란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5. 사울의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답변(5절).

(1) "주여 뉘시오니이까?" 라고 그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질문을 한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 스스로 죄됨을 알았으므로 그를 향하여 제기된 고소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회피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추궁하시면 우리는 그 천의 하나도 답변하지 못하리라. 특히 박해를 한 죄이랴, 어떻게 답변하겠는가? 죄가 강력한 세력으로 인해 양심에 비추어질 때 죄에 대한 확신이 생겨 모든 변명과 자기 정당화를 침묵케 한다.

 "내가 의롭다 할지라도 내가 변명할 수 없나이다"란 말씀과 같다. 

그러나 사울은 그를 심판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알기를 바란다. 그가 "주여"라고 부른 일은 잘한 일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욕하였던 그가 그리스도를 그의 주님이라고 말한다.

 "주여 뉘시오니이까"라는 질문을 적절한 것이다. 

이 사실은 그가 아직도 그리스도를 몰랐음을 뜻한다. 그는 주님의 양떼들이 주님의 음성을 알 듯 그의 음성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사울은 주님과 사귀기를 원하였다. 

그는 그를 둘러싼 빛을 보고 그에게 말하는 음성이 하늘에서 오는 것임을 확신하였다. 또 그는 하늘로부터 나타난 모든 것을 경외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주여 뉘시오니이까?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라고 묻는다(사 13:17; 창 32:29). 예수 그리스도와 대화가 오갈 때 그 사람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2) 그리스도께서는 즉시 그에게 답변하신다. 

이 답변을 통하여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① 그리스도께서 사울에게 은혜스럽게 나타나심. 그는 언제나 그와 사귀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진지한 질문에 답변하고자 하신다. 

고로 그는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응답하신다. 

예수의 이름을 그가 모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 이름에 대하여 여러번 마음으로부터 저항을 느꼈다. 그리고 기꺼이 그것을 망각해 버렸다. 그는 그것이 그가 핍박하던 이름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가 이 이름을 하늘에서 들으리라고는 거의 생각지 못하였다. 

또한 그를 두루 비추는 이 같은 영광 가운데서 들으리라고도 생각지 못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심으로 사람들로 자기와 사귀게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첫째, "나는 세상을 구원할 예수로다." 

또 22장 8절에 기록된 대로 "나는 나사렛 예수라"고 답변하신다. 사울은 전에 예수를 멸시해서 부를 때는 늘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다. 즉 예수의 답변은 이와 같았다. "

나는 네가 경멸조로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던 바로 그 예수다." 이같이 답하심으로 그는 자신이 지금은 영광 중에 예시지만 그에 대한 모욕도 부끄러워하지 않음을 보이려고 하신다.

둘째,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러므로 네가 이 악한 짓을 계속하면 결국 너의 파멸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죄인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데는 그 죄가 그리스도에 대한 반역이요, 그를 모욕하는 일이요, 그의 섭리에 역행하는 일임을 보여 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② 주님의 사울에 대한 부드러운 책망.

" 네가 바늘이나 막대기를 걷어찰 수 없도다"(한글 개역에는 없으나 AV에는 이 내용이 있음-역자). 

즉 바위의 돌출부를 걷어찰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물질들은 단단하다. 즉 그 자체로써 이미 박해는 불합리하고 악한 것이므로 그것을 하는 사람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막대기를 차는 사람들은 곧 양심의 고소를 질식시키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진리와 율례를 저항하는 행위이며 섭리를 거스리는 것이요, 주의 종들을 박해하고 막는 것을 말한다. 

이들이 주의 종들을 박해하는 것은 주의 종들이 그들을 책망하고 그들의 말이 막대기나 못처럼 그들을 찌르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 또는 막대기로 얻어 맞으면 더욱 반항하며 책망받는 것을 분하게 여기며 그들을 책망하는 사람들을 피하여 그 찌르는 말씀을 도외시하고 많은 말로써 항거하려고 한다.

6. 사울이 결국 주 예수께 자신을 포기함(6절).

(1)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개입해 오셨을 때의 그의 마음 상태(그가 떨며 놀랐다는 말씀이 AV에는 기록되어 있다-역주).

① 그는 대단히 놀란 사람처럼 떨었다. 

은혜로운 성령의 인도로 되찾게 된 강한 확신은 잠에서 깨어난 영혼으로 떨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하자. 영원하신 하나님이 그들을 공격하고 모든 피조물이 그에게 항거할 때 그리고 그들의 영혼은 파멸의 직전에 처하게 될 때 저희들이 떨 수밖에 없지 않는가.

② 사울은 그가 새로운 세계에 인도되어 어디가 어딘지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경악하게 하였다. 

그리스도의 확신케 하시며 회개케 하시는 역사는 일깨워진 영혼을 놀라게 하며 경탄하게 한다.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일은 무엇이며 또 그는 앞으로 어떻게 행하실 것인가?"라고 그들은 물을 수밖에 없다.

(2) 이런 마음으로 사울이 예수께 답변함. 

그는 "주여 내가 어떻게 하리이까?"라고 묻는다(사울이 여수께 묻는 내용도 AV에는 있으나 한글 개역에는 없다-역자 주). 이 말은 다음의 뜻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① 그리스도께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을 진지하게 묻는 태도이다. 

"주여 나는 내가 지금까지 바른 길에서 벗어났음을 알았나이다. 주께서 나의 잘못을 보여 주셨나이다. 나를 바른 길로 이끄소서. 당신이 내게 죄를 지적하셨으니 용서와 평안을 얻는 길도 내게 알려 주소서"라고 요구한다.

 이 요구는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떻게 할고?"라는 질문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시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그 영혼 속에 시작된 선한 역사의 증거임을 기억하자.

② 또한 이 말씀은 주 예수의 지시와 다스림에 자신을 맡기려는 진지한 자세를 보여 준다. 

이 말은 바울이 발한 최초의 은혜스러운 말이었다. 이제부터 영적인 삶이 시작된다. 주 여수여 "당신은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나이까?" 

과연 그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던가? 그에 대한 임명장이 품 속에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명령을 집행하는 일만이 남아 있는 일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이 명령을 집행하는 일만이 남아 있는 일이 아니었던가? 

아니다. 그는 전에 이미 이 일을 많이 하였다. 이제 그는 다른 주인을 섬길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보다 선한 일에 힘쓰게 되기를 바랐다. 이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시킨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악한 본성과 정열이 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어떻게 하리이까?" 하는 말은 회개함으로써 그의 의지에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뜻하는 말이요, 자기 의지를 그리스도의 뜻에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3)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구체적인 지시를 함. 

그의 물음에 대하여 주님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신다. "네가 일어나" 네가 지금 가까이 당도한 "다메섹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이 말씀은 더 많은 교훈이 그에게 주어질 것을 약속한 표시로 여기기에 충분하였다.

① 그러나 그는 아직 이 교훈을 얻지 못하였다. 

이 지시는 그가 그 일을 행하기 직전에 알려지게 된다. 다만 현재로써는 그에게 말씀되어진 것을 생각하여 보고 이 일에 착수해야 했다. 

그는 잠시 동안 그가 그리스도를 박해하면서 행한 것을 생각하고 이 일로 깊이 뉘우쳐야 했고 그 다음에야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말씀되었던 것이다.

② 하늘에서 음성이 들린 것을 보면 그가 지금까지 행한 대로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가 이 일을 그대로 수행하지 못할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는 떨고 놀랐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자기와 같은 사람에 의해서 해야 할 일을 지시받아야 했다.

 인간의 공갈이 그를 두렵게 하지 못하였고 그를 제압하지도 못하였다. 

이스라엘은 시내산 기슭에 있을 때 인간이 그들을 억압하여 다스리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사울은 그와는 달랐다. 또한 이 말씀은 그리스도가 앞으로 다른 시간에 자신을 그에게 더 보이실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즉 그가 보다 마음이 안정되고 지금 같은 놀라움이 끝났을 때 이 교훈은 주어질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에게 자신을 점차로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그가 하고자 하는 것과 주께서 그들이 하기를 바라시는 것들은 그들이 당장은 모른다고 할지라도 앞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7. 그와 같이 여행하던 무리들은 전혀 이러한 감화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면 그들이 받은 인상은 무엇이었는가? 그들도 사울이 한 것처럼 땅에 엎드렸다. 그러나 그들은 지시를 받지 못하고 일어났다. 

사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그에게 지시가 있을 때까지 엎드려 있었다. 이제 "일어나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욱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리들도 일어났다. 그들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1) 그들은 당혹한 사람들처럼 "말을 못하며 서 있었다"(7절).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 

그들도 바울과 같은 악한 사명을 띠고 있었고 그와 마찬가지로 악의로 가득 차서 그들에게 허용된 권력을 최선을 다하여 핍박하려고 했다. 그들도 빛을 보았고 그 빛에 얻어 맞아서 벙어리가 된 듯 엎드려 있었지만 그들 중 아무도 회개한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없다. 

외적인 수단도 성령과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영혼의 변화를 스스로 일어나게 할 수는 없다. 이것이 선택된 자와 그 외의 사람들의 차이이다.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남아있는 것과 같다. 그들은 "말을 못하고 서 있었다." 그들 중에 아무도 바울처럼 "주여 당신은 뉘시오니이까? 또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오리이까?"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무도 벙어리로 태어나지는 않는다.

(2) 그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들었으나 그가 말하는 상대는 보지 못하였다. 또한 그가 바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도 명백히 알아듣지 못하였다.

 이러한 정황은 후에 바울이 22장 9절에서 이 사건에 대하여 말한 것과 일치한다. 기록되기를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그들도 빛을 볼 수 있었으나 바울처럼 빛 가운데 있는 분은 보지 못하였다.)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하였다. 

바울의 말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이같이 하여 바울이 교회를 핍박하는 일을 도우려고 온 사람들이 바울에게 임한 하나님 능력의 증인으로 쓰여지게 된다.

8. 이 사건 후의 사울의 동정(8, 9절).

(1)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명하셨을 때 도움을 받아서 "땅에서 일어났다." 

그가 본 환상이 그를 약하게 하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그는 벨사살과 같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때에 그의 뼈 마디 마디가 물러나고 무릎이 서로 부딪쳤다. 

그 환상을 보았을 때 그는 다니엘과 같이 그에게 아무런 기력도 남지 않았음을 알았다(단 10:16, 17).

(2) "그가 눈을 떴으나" 시력을 잃은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였다." 그는 그와 함께 있으면서 방금 수선을 떨기 시작한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다. 그 때의 번쩍이던 빛이 - 즉 그의 눈에 충격을 주어 어둡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도 시력을 잃었을 것이다. 그에게 이러한 결과가 일어난 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한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같이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믿음으로 보게 되면 지상 세계에 있는 모든 것들은 눈에 안 뜨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바울에게 자신과 자신의 복음을 더욱 알려 조시려고 다른 것들을 볼 수 있는 시력을 빼앗으셨다. 그가 오직 예수만을 보기 위하여 육신의 시력은 상실되어야 했던 것이다.

(3) "그는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다." 

그가 공회당으로 들어갔는지 친구의 집에 머물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예루살렘으로 잡아다 옥에 넣으려던 그가 그리스도의 죄수와 포로가 되어 다메섹으로 인도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그리스도의 은총이 그의 영혼을 온갖 진리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를 배우게 되었다(육신의 눈이 멀므로 실수하기 쉬웠듯이 영혼의 눈이 멀 때 어떻게 될 것을 알았다).

(4) 그는 "보지 못하고" 누워 있으며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였다"(9절). 

나는 이 때에 그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가 고린도 후서 12장에서 말한 삼층천에 올라 갔을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이 시기 동안에 그는 지옥의 가장 중심부에 거하면서 이제 그가 밝힌 보게 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 고통을 받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 

그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영적 상태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고 죄로 인해 받은 영혼의 상처가 너무 커서 마음 편하게 식사를 하며 마실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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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사울이 다메섹에서 전도하다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보내심을 받음(행 9:10-22)

"하나님의 일은 온전하사 시작하시면 이루시나니" 이 말씀과 같이 사울이 그리스도의 발 아래 인도되고 "주여 내가 어찌하리이까?" 고백한 후에 사울에게서 놀라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리스도는 그의 앞에 인도된 자를 결코 그대로 버려두시지 않는다. 사울이 사흘 동안 장님이 되어 누워있었던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나 아직 그가 버림을 받지는 않았다.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직접 그의 손으로 그를 돌보신다. 상처를 입은 자는 치료를 받을 것이요 매맞아 깨진 자리는 붕대로 동이신다. 이를 믿는 자에게는 위로가 있을 것이다.

Ⅰ. 아나니아에게 가서 사울을 돌보고 치료하고 도우라는 지시가 내림. 

왜냐하면 애통하는 자는 긍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1. 이 일에 채용된 사람은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였다." 

그는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쫓겨온 사람이 아니라 다메섹의 본 주민이었다. 22장 12절에 보면 그는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이었다. 그는 얼마 전에 복음을 받아들였고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드렸다. 

그가 사도 직위 안수를 받았을지는 나타나있지 않지만  지금의 경우에는 그가 주의 종으로 임무를 수행한 것같이 보인다. 

그러면 이 큰 사건에 어찌하여 예루살렘으로부터 사도 중 한 사람이 파송되지 않았는가. 또는 최근에 내시에게 세례를 베푼 빌립을 성령의 역사로 잠간 동안에 데려오지 않았던가?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는 특별한 일에 여러 방법을 이용하시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영예는 소수의 사람에게 독점될 수 없다. 그가 뜻밖의 사람에게 일을 맡기므로 이 일을 맡은 사람에게 영광이 되게 하며 그러므로 보잘 것 없고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용기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은 주의 종들이 많아서 비록 이르이 탁월한 인물은 못된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주어진 곳에서 자비를 옷 입어 신실하게 되기를 바라신다.

2. 아나니아에게 주어진 자시는 이러 이러한 집 - 아마 여관인 것 같은데 - 에 가서 "다소 사람 바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환상 가운데 아나니아의 이름을 부르신다(10절).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능하신 이의 환상을 본 것은 이것이 첫 번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태연하게 대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당신이 나를 보내는 곳에 가서 명하시는 것을 행할 준비가 되었나이다"라고 그는 답변한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어기서 나그네들이 쉬어가곤 하였다)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찾고자 하는 사람이 아무리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하여도 어디에 있는지 잘 아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들의 친척들은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늘의 친구가 있어서 그들이 어느 거리에 있는지 누구의 집에 있는지 또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아신다. 그는 그들의 영혼이 당하는 역경을 아신다.

3. 그가 왜 가서 이 나그네를 찾아야 하는지 또 그에게 도움을 주여야 하는지 두 가지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1) 그가 기도하고 있고 그러므로 아나니아가 사울을 찾아가는 것은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 가지 이유이다.

① 그가 사울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13, 14절에 보면 아나니아는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그가 기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참으로 회개한 것이 틀림 없음을 말씀하신다. 

"그가 기도하는 것을 보아서"(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역주)란 말씀은 그의 회심의 확실성을 나타낸다. "그러니 의심치 말고 가서 그를 보라"고 말씀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이 기도하는 것이 너무 기뻐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리기를 원하셨다. "나와 함께 기뻐하자. 이는 내가 잃은 양을 찾았음이로라"는 말씀과 같다. 

"보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다"[보라(Behold)란 말이 이 곳에서 계속 해석되고 있는데 한글 개역에는 이 단어가 생략되었다.]란 말씀은 그의 기도가 전혀 뜻밖임을 의미한다. 

즉 "보라 이상하지 않은가. 전날에는 위협과 살기만을 내뿜고 다니던 그가 이제는 전혀 기도에만 힘쓰고 있으니"라는 뜻의 말씀이다. 

그러나 사울이 기도한 것이 정말 이상한 일이었는가? 그는 바리새인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도 다른 바리새인들과 같이 회당과 길 모퉁이에서 오래 기도하였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랬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때에는 기도문을 읊조리었나 이제는 진심으로 기도하였다. 

중생케하는 은혜는 사람들로 기도하게 함을 기억하자. 사람이 숨쉬지 않고 살아갈 수 없듯이 살아있는 기독교인이라면 기도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호흡이 끊어지면 생명도 끊어지듯이 기도가 끊어지면 은총도 끊어진다.

② 아나니아가 지체없이 사울을 찾아가야 할 이유. 

그것은 "그가 기도하고 있기 때문에" 망서릴 이유가 없었다. 어린 아이가 울 때 상냥한 유모라면 급히 그에게 달려갈 것이다. 

사울은 에브라임과 같이 또는 멍에에 익숙하지 않은 수소가 빗장을 걷어차듯이 신음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하신다. 

"오 그에게, 빨리 가거라. 가서 그에게 그가 사랑스러운 아들이요, 기쁨을 주는 자녀임을 말해 주어라. 그가 나를 박해함으로 인하여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렘 31:18-20) (한글 개역과 다소 차이가 있음-역자 주) 하신다. 

이제 사울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생각하여 보자. 그는 죄에 대한 확신으로 떨며 놀라고 있었다. 우리 앞에 죄를 하나씩 열거할 때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다. 

그는 육체적인 고통을 당하였다. 그는 눈이 멀었고 병을 앓고 있었다. 그러므로 "괴로운 일이 있는가, 저는 기도할지니라"고 말씀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앞으로 그가 해야 할 일을 더 말씀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6절). 그러므로 그는 그를 지도해 줄 사람을 보내달라고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위하여 우리는 기도해야 함을 기억하자. 아나니아는 이런 이유 특히 신의 지시를 전하기 위하여 청함을 받고 있었다.

(2) 또 하나의 이유는 사울이 환상 중에 한 사람이 그에게 와서 그의 시력을 되찾게 해 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나니아가 그에게 가는 것은 그의 꿈에 대한 응답이었고 또한 하나님의 지시였다(12절).

 "저가 환상 중에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즉 그에게 안위를 주기 위하여 아나니아와 같은 사람이 오는 것을 보았다는 말이다. 

이제 바울이 본 이 환상을 고찰해 보자.

① 이 환상은 그이 기도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의 표시였고 하나님과의 교제의 지속을 의미한다. 

기도를 통하여 그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이루었다. 그는 기도로써 하나님 앞에 자신의 비참한 경우를 아뢰었고 하나님께서는 곧 나타나사 그에게 그의 은총의 뜻을 친절히 알려 주셨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을 안아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② 이 환상은 또한 그의 기대를 고무하고자 또 아나니아가 그에게 올 때 그를 더욱 환영하게 하도록 계획된 것이었다. 

그는 환상을 통하여 그에게 그러한 이름을 지닌 사람이 올 것을 사전에 알았으므로 아나니아를 하나님이 보낸 사자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영적인 의사와 그의 환자가 동석하였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생각해 보자. 이를 위하여 본문에는 두 번의 환상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환상이 없이 상한 심령에게 사자를 보내어 천에 하나 정도 있는 영적인 해석자로 그의 바른길을 사람에게 보여 줄 때 감사함으로 이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Ⅱ.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가라는 주님의 명에 반대를 표시한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반대에 대하여 답변하신다. 주님께서는 그의 종이 제기하는 이유를 얼마나 겸비하게 인정해 주시는가를 살펴 보자.

1. 아나니아는 이 사울이 그리스도의 제자를 핍박하는 악명 높은 박해자였음을 주님께 호소한다(13, 14절).

(1)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그렇게 행하였었다. 

아나니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여, 내가 이 사람에 대하여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아주 잔인한 원수라는 것이었습니다. 최근의 박해로 흩어진 모든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다메섹에 왔는데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옵고 박해자들 중에서도 가장 독살스럽고 난폭한 자요, 악행의 장본인이라 하더이다. 그가 교회에 행한 위력이 어떠하였는지 사람들은 사울보다 더 무서워하는 사람이 없나이다. 심지어 대제사장보다 이 사울을 더 무서워하나이다"라고 아뢴다.

(2) "이번에 그가 다메섹에 온 것은 우리 기독교인을 박해하는 사명을 띠고 온 것입니다.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또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자들을 중범으로 다스리도록 권한을 받았나이다"라고 그의 말은 계속된다. 

어째서 아나니아는 이렇게 반대하였는가? 즉 사울이 이와 같은 박해자이므로 "내가 그에게 봉사할 책임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불의를 행하고 또 계획하고 있는 그를 어째서 친절히 대하여야 하는가요"라고 아나니아는 묻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교훈도 가르치셨다. 그것은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것이요,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또한 만일 그가 이 같은 기독교인의 박해자라면 아나니아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가.

①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가는 것이 안전할까? 

그가 그에게 간다는 것은 사자의 입에 양고기를 집어넣는 것과 같은 결과가 아닐까? 만일 그가 이런 고통에 자신을 몰아넣는다면 그는 무분별하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리라.

② 또한 그에게 가는 것에 무슨 목적이 있을 수 있는가?

 이같이 강퍅한 마음이 부드러워질 수가 있을까. 에디오피아인이 그의 피부를 희게 할 수 없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를 변화시키려는 것은 전혀 무모한 일이리라.

2.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반대를 설득시키신다(15,16절). 

"너는 그가 전에 악하였다고 내게 말하지 말라. 나도 그것을 잘 아노라. 다만 속히 가서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베풀어라. 그는 나를 위하여 택한 그릇 또는 도구이다. 내가 그를 믿기로 작정하였으니 네가 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도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복음이란 보물이 담길 그릇으로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정된 것이었다. 그는 질그릇에 불과하였으나(고후 4:7) 택함받은 그릇이었다.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그릇은 그가 직접 택하신다. 그리고 그가 사용할 도구를 택함에 있어서 자신이 택하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요 15:16). 

"네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를 선택하였도다" 한 말씀과 같다. 그는 명예로운 그릇이었다. 그러므로 현재와 같이 버려진 상태에 내버려둘 수 없었고 깨져서 못쓰게 된 그릇처럼 버려서도 안 되었다. 또한 그는 그 안에 쾌락이 없는 그릇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목적을 위하여 불리워졌다.

(1) 그는 뛰어난 섬김을 위하여 택하여졌다. 

"이 사람은 이방인들 앞에서 내 이름을 증거할 사람"이라는 말씀은 그가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이방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맡았음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모든 사람들이 보고 모일 깃발이다. 

그 이름 아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군사로 징집된 것이다. 그리고 사울은 기수가 되어야 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왕들 앞에서 즉 아그립바왕과 바로 가이사의 앞에서까지 증거해야만 하였다. 또한 그의 주변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수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도 복음을 증거해야 하였다.

(2) 그는 특별한 고난을 당하기 위하여 택하여졌다(16절).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신다. 

지금까지 박해자 노릇을 하였던 그가 이제 스스로 박해를 받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이 사실을 그에게 보여주신 것은 주께서 그에게 이 시련을 겪게 하실 것을 알려 주신다는 의미가 있다. 이는 시편 60편 3절의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란 말씀과 같다. 또한 사전에 이를 알게 하신 것은 그를 박해하는 자들이 사울을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 십자가도 지게 될 것을 각오해야만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스도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은 흔히 그를 위하여 최대의 고난을 당하는 일에 부름을 받기도 한다. 사울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 사실은 젊은 개정자에게 반갑지 않은 위로가 되리라고 흔히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대담하고 용감한 정신을 지닌 병사들에게만 말씀되는 것이며 일단 징집되면 그는 전쟁터에 나아가 즉시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울이 당한 고통은 그리스도의 영예와 교회 수립에 달하기까지 높은 것으로 영적인 위로로 고통을 견디게 하시며 영원한 영광으로 보상하셨다. 

그러므로 그가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할 것인가를 알게 된 것은 결코 낙담할 일은 아닌 것이다.

Ⅲ. 아나니아가 곧 그리스도의 사자로서 사울에게 가고, 가서 좋은 결과가 이루어진다. 

그는 사울에게 가는 것을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그리스도의 응답을 듣고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고 더 이상 주장하지 않았다. 곤란이 제거될 때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할 일을 착수하는 것이요 고집을 세워 반대하지 말아야 한다.

1.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주의 뜻을 전하였다(17절). 

아마도 그는 침상에 누워 있는 사울을 발견하고 그를 환자로 여겼을 것이다.

(1) "아나니아가 그에게 안수하였다." 

믿는 자들에게 따를 기적의 하나로써 그들이 환자에게 손을 얹으면 그들이 치료되어진다는 것이 약속되었다(막 16:18). 이러한 목적으로 아나니아도 그에게 안수하였다. 

사울은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에게 폭력의 손길을 뻗치려 하였으나 본문에 주의 한 제자는 치료를 돕는 손을 그에게 얹는다. 

"피에 주린 자는 의인을 싫어하나 의인은 그의 영혼을 구하나이다"한 말씀과 같다.

(2) 그는 사울을 "형제"라고 불렸다. 

왜냐하면 사울이 아직 세례를 받지는 못하였지만 하나님의 은총의 참여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하나님에 대한 모욕자였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박해한 자였지만 아나니아가 그를 형제로 받아들인 것은 하나님이 그를 아들로 여기신 것을 뜻한다.

(3) 사울은 이제 도중에서 그를 사로잡았고 지금도 그를 주장하고 있는 주님의 손에 의하여 임명장을 받는다.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어 주를 핍박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알게 하신 바로 그 예수께서 그대를 위로하기 위하여 나를 보내신 것이요"라고 아나니아는 말한다. "- 즉 주님의 상처를 입은 손은 치료의 능력이 있는 것이요. 그에게서 비추인 빛이 당신의 눈을 멀게 하였으나 그가 나를 보내어 그대로 다시 보게 하려 하시는 것이요. 주님의 계획은 당신의 눈을 멀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잠시 눈의 기능을 혼돈케하여 그대가 다른 빛을 통하여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게 하려는 것이요" 

그대의 눈에 흙을 칠하여 어둡게 하신 그가 나를 보내어 그 흙을 씻기고 눈이 완쾌되도록 하시려는 것이요." 아나니아는 계속하여 예언자의 말씀을 적절히 인용하며 사울에게 메시지를 전하였을 것이 틀림 없다(호 6:1, 2).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찢으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사울에게서 징벌은 끝나고 이제 주님이 그리 치료하신다.

(4)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그가 시력만을 회복할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할 것을 알려 주었다. 

사울 자신이 사도가 되어야 했으며 또 12사도와 동등한 위치를 지니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사도들의 중재로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직접 성령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사울이 세례 받기 전에 아나니아가 그에게 안수한 것은 성령을 수여하고자 한 것이었다.

2. 아나니아는 자기의 사명이 좋은 결과를 이룰 것을 알았다.

(1) 그는 그리스도께서 사울을 사랑하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나니아의 말이 떨어지자 사울은 구속된 데서 해방되어 시력을 회복하였다. 왜냐하면 감옥에 갇힌 자를 옥에서 풀어내는 그리스도의 사명은(사 61:1) 눈먼 자를 보게 한다는 말씀으로 설명되고 있다(눅 4:18; 사 42:7). 

그리스도의 사명은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요, 갇힌 자를 옥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사울은 시력이 회복됨으로 구속의 영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18절). 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진 것이 바로 이를 의미한다.

 비늘이 떨어진 것은 순간적이었고 이와 함께 치료도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이 사실은 치료가 기적적임을 보여 준다. 이 사실은 그가 다음과 같은 것에서 치료되었음을 뜻한다.

① 회개치 않은 어둠의 상태에서의 회복이었다. 

그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고 바리새인들의 정신과 생활 방식을 따랐을 때 그는 눈이 멀었었다. 그러므로 그는 율법이나 복음의 의미로 보지 못하였었도다(롬 7:9). 

그리스도께서는 자주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이 소경이므로 그들이 복음을 깨닫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예수의 말씀에 대하여 "우리도 소경인가?"라고 반문하였다(요 9:41). 

사울은 이제 복음을 깨닫게 됨으로 바리새적인 소경의 상태에서 구원을 받았다. 회개케하는 은혜는 영혼의 눈을 뜨게 해 주며 눈에서 비늘을 벗기므로(26:18) 눈이 열리어 어둠에서 빛으로 향하게 하신다. 

사울이 이방인들 가운데 보냄을 받은 것은 바로 복음을 전파해서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그가 먼저 이 일을 경험해야 되었던 것이다.

② 현재의 공포스러운 어둠에서, 양심에서 소리치는 죄책감에서, 그리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서의 회복이었다. 

요나가 사흘 동안 지옥과 같은 고기 배 속에서 겪었던 것과 같은 공포가 사흘 동안 어둠 속에 생활하는 그를 엄습하여 당황케 하였다. 그러나 이제 비늘이 그의 눈에서 벗겨나갔고 구름은 흩어지고 의의 태양이 그의 영혼 위에 떠올랐다.

(2) 사울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세례를 받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속하게 되었고 자신을 그리스도의 은총에 맡기었다. 

이같이 하여 그는 그리스도의 학교에 입학하였고 그의 가족의 일원이 되었으며 그의 깃발 아래 군대가 징집되었고 좋은 일이든지 궂은 일이든지 그와 연합하게 되었다. 

사울은 인정을 받았고 문제는 해결되었다. 이제 사울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일을 멈추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을 섬기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데 자신을 전적으로 바쳤다.

Ⅳ. 사울 안에서 시작된 좋은 사업이 놀랍게 진행되었다. 

이 새롭게 출생한 기독교인은 태어난 과정에 비하여 곧 성숙하게 된다.

1. 그는 육신의 건강을 되찾았다(19절). 

그는 삼일을 금식하였다. 그동안 그의 영혼을 힘있게 짓누르던 짐 때문에 그는 몹시 쇠약해졌었다. 그러나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졌다"(19절). 

주님은 인간의 몸도 귀하게 여기신다. 그러므로 건강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몸의 건강을 유지함으로 그 영혼이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신다(빌 1:20).

2. 사울은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관련을 가지고 잘 융화하였다. 

그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집회에도 참석하며 그들과 사귀는 일에 힘썼다. 그는 조금 전까지 그들에게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으나" 이제는 그들과 사랑과 우정을 나누게 된다. 

이제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게 되었다"(사 11:6). 

하나님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모시는 사람들은 그의 백성도 그들의 백성으로 용납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사울이 제자들과 사귐을 가진 것은 그들의 친절과 우수함을 알고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들과 사귐으로 자기의 지식과 은총을 개선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 예수의 제자인 사람들과 교제한다는 것이 이를 입증해 주었다.

3. "그는 회당에서 그리스도를 전하였다"(20절). 

이 일을 위하여 그는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고 또 비범한 능력도 갖추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아들을 그 즉시 계시하여 주셨으므로 그가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었다(갈 1:15, 16). 

그는 그리스도로 충만하였으므로 "그의 안에 계신 성령이 그를 강권하므로" 그는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밖에 없었다. 

사울도 엘리후와 같이 "내가 말을 발하여야 시원할 것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심정이었다(욥 32:20).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그가 전한 장소. 그가 전한 곳은 유대인들의 회당이었다. 

유대인들은 그가 가는 곳에서 제일 먼저 회당을 찾아가기 때문이었다. 회당은 그들의 집회소로써 거기서 그들은 서로 만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교리를 전하고 주의 제자들을 처형하였다. 

바로 이 장소에서 바울 자신도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처형하였다"(26:11).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적들이 가장 애호하는 회당에서 사울은 이들과 마주치게 되었고 전에는 그가 복음을 반대하던 그 곳에서 공개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고백한다.

(2) 그가 전한 내용. "그는 그리스도를 전하였다." 

그는 전도자가 된 후 그리스도만을 전한다는 이 원칙을 그는 끝까지 고수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곳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지 않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니"라고 고백한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전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과"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그의 기쁘심을 입은 자요 그의 안에서만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전하였다.

(3) 그의 전도에 사람들이 받은 감화(21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그런데 바로 그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할 것을 설득하며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돕다니 어찌된 일인가"라고 하며, 의아해하였다. "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사울도 예언자들 가운데 있느뇨? 라는 말씀을 기억하게 되는도다. 그가 여기 온 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을 찾아 결박하고 결박하여 대제사장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라고 반문한다. 

확실히 그랬었다. 당시에는 누가 지금처럼 그가 그리스도를 전하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확실히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 진리가 확고부동한 것임을 보여 주는 사건으로 간주되었다. 그리스도를 가장 악독하게 핍박하던 그가 갑자기 변하여 해박하며 불굴의 투지를 지녔고 능력있는 복음 전도자가 되다니 이것은 놀라운 사건이었다. 

이와 같이 사람의 내면적인 기적적 변화는 인간의 육체에 일어나는 기적보다 더욱 감동적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다른 마음을 주는 것은 인간들에게 방언을 하게하는 것보다 더 가치있는 일이다.

4. 사울은 그리스도의 교리를 반대하는 자들을 당황케 하였다(22절). 

그는 복음 전하는 일에서 뿐만 아니라 학식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진리를 가르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리를 전할 때 그것을 주장하고 또 변호할 수 있는 초능력적 재능을 나타냈다.

(1) 그는 더욱 능력이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복음도 더욱 잘 알게 되었고 그의 경건의 능력도 더욱 강하게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수호하는 데 있어서 더욱 대담하여졌고 결의가 굳어졌다. 

그는 그를 낙담케 하는 요소들이 많을수록 "힘을 더 얻었다." 그의 새로운 친구들은 그가 과거의 박해자였음을 비난하였고 그의 옛 친구들은 그를 변절자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사울은 그의 회심에 대한 갖가지 비난 앞에서 낙심한 것이 아니라 그러기에 더욱 담대하여졌다. 그들이 그에게 가장 악독하게 말할 때에라도 충분히 답변할 수 있는 자신을 보고 그는 용기를 얻었다.

(2) 그는 그의 적대자들을 물리치고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다." 

그는 그들의 입을 막았고 수치를 느끼게 하였다. 그는 그들의 반대에 답하여 누구나 다 만족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답변할 수 없는 설법으로 그들을 설득하였다. 

유대인들과의 변론에서 그는 "이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의 기름 부음받은 자로 조상들에게 약속된 참 메시야임을 입증하였다." 그는 그것을 증거하고(-즉 그것을 확인하고 굳게 하라) 가르쳐 설득시켰다. 

우리는 그가 다메섹에서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 신앙으로 돌아오게 하고 그곳에 교회를 세우는 도구 역할을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본래 그는 이 복음을 궤멸시키려고 거기 간 것이었었다. 그러므로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사 14:14)는 말씀이 이에 합당한 말씀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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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이 피신하다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다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사울이 사도들에게 인정받음(행 9:23-31)

누가는 본문에서 바울의 아라비아 여행에 대하여 기록하지 않고 있다. 

이 사실은 바울 자신이 갈라디아서 1장 16, 16절에 볼 수 있듯이 그의 회심 직후 술회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안에 그리스도께서 역사하게 하시자 곧 "그는 그리스도를 전하였다"(다른 개종자들이 하듯이) 사도들에게 지시를 받기 위하여(이는 주의 사역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기는 하다)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다. 

그는 아라비아에서도 갈아 엎어야 할 밭을 발견하였다. 그러므로 그곳에서도 그는 가르치는 일을 하였고 배움의 기회는 얻지 못한 것 같다. 

그 후 그는 다메섹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거기서 즉 회심한 3년 후에 본문에 기록된 사건이 있는 것 같다.

Ⅰ. 그는 다메섹에서 곤경에 부딪쳤고 겨우 죽음을 면하고 그 곳에서 탈출하였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그가 당한 위험의 정도(23절).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기를 공모하였다." 

그들은 다른 복음 전도자들에 대한 것 이상으로 그에게 원한을 품었다.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능력있고 열심히 성공적으로 전하였을 뿐 아니라 과거에 그가 유명한 복음 잔해자였고 따라서 그러한 그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치명적인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24절에 보면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켰다"고 기록되었다. 

그들은 총독에게 아첨하여 그를 위험스런 인물로 중상하였고 그러므로 총독은 사울을 알아볼 수 있는 파수군을 세워 그의 출입을 감시하게 하였다(고후 11:32). 

이제 그리스도는 바울에게 "그가 그의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인가를 보여 주신다. 

본문에 총독부가 그를 대비하여 보초를 세웠다는 것은 대단한 사실이었고 이후 그가 고통을 당할 때마다 그는 이 사실을 기억하였다. 

사울은 기독교인이 되자마자 곧 전도자가 되었고 전도자가 되자마자 곧 수난자가 되었다. 

이와 같이 그는 아주 빨리 정상에까지 도달하였다. 하나님의 은총이 큰 곳에 시련도 강하게 역사하는 것을 기억하자.

2. 그의 탈출 경위.

(1) 사울에 대한 음모가 발각되었다. 

하늘로부터였는지 사람에게서 였는지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정보를 통하여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졌다."

(2) 제자들이 그를 피신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다만 낮에는 그를 숨겼다가 밤에 성문을 파수군이 지키므로 문으로 나가지는 못하고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렸다." 

이 사실은 바울 자신도 후에 언급하고 있는데(고후 11:33) 이렇게 하여 여 그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났다."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길로 들어서면 시험에 예상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사실은 우리에게 "주님은 경건한 자들을 시험에서 건지는 길을 아시며 시험 가운데서도 피할 길을 열어 주신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믿고 지체하여서도 안 되며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도 아니 되는 것이다.

Ⅱ. 그는 예루살렘에 처음 갔을 때 거기서 어려움을 당한다(26절). 

이제 그는 예루살렘에 당도하였다. 

이때에 예루살렘에 간  것이 자신이 갈라디아서 1장 18절에서 말한 예루살렘 여행이었던 것같이 생각될지 모른다. 

"삼 년 후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 오일을 유하였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나는 본문의 여행이 바울이 말하던 여행 이전의 있었던 여행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가 출입하며……전하고……변론하는 데는"(28, 29절) 십 오일의 체류만으로는 부족한 것같이 보여지기 때문이다(갈라디아서는 15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를 위하여서는 보다 장기간의 체류가 필요했을 것이고 게다가 지금의 경우는 전혀 낯선 사이로 보이는데 갈라디아서에서는 그가 "베드로와 의논하려 갔다"(이스토레사이‘ 2477)고 말한 것으로 보아 이미 서로 친한 사이인 것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갈라디아서의 여행과 이 여행이 같을 수도 있음은 인정해야 한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예수의 제자들은 그를 두려워하였다(29절).

"그가 예루살렘에 가서" 그는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에게 가지 않고(그는 오래 전에 그들과 관계를 끊었다.) "제자들과 사귀고자 하였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자신을 천대받고 핍박받는 백성의 하나로 자처하였고 그들과 사귀었다. 

이제 그들이 그의 눈에는 "땅에서 가장 큰 자요 그들 안에서 그가 참 기쁨을 발견할 수 있는 자들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들과 사귀기를 바랐고 그들의 공동체 속에 가입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의심스럽게 여기고 그들에게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그들이 그를 두려워하였으므로" 그가 곁에 있을 때는 어떤 신앙적인 행사도 진행시키려하지 않았다. 

이제 유대인들은 그를 포기하고 또 박해하였고 기독교인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바울은 스스로 위기에 처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같이 그는 여러 시험에 빠지므로 의의 갑주가 필요하게 되었다. 

우리도 좌우에 의의 갑주를 입으므로 우리 원수들의 부당한 대우나 또는 우리 친구들의 불친절한 대우에 의하여 낙심하지 말아야겠다.

(1) 그들이 그를 의심한 원인은 무엇이었나 살펴 보자. 

그들은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않고" 그가 제자로 가장하고서 그들에게 들어와 간첩이나 정보 제공자 노릇을 할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그가 얼마나 가혹한 박해자인가를 알았고 얼마 전에는 노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으로 간 것도 알았다. 그 이후 그들은 그에 대하여 아무 소식도 듣지 못하였고 그러므로 그들을 양의 옷을 입은 이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과 교제하고자 하는 무리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모든 영을 믿지 말라"는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뱀과 같은 지혜가 있어서 극단적인 혐의를 품거나 반면에 지나치게 신뢰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그러나 의심을 품는 것보다 자비를 베푸는 편이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 해도 더 안전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가라지가 곡식 가운데 자라나는 것이 가라지를 뽑으려다 오히려 곡식까지 뽑아 던져버리는 것보다 낫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2) 사태가 어떤 경과를 거쳐 호전되었는가를 살펴 보자(27절). 

본문에는 "바나바가 그를 데리고 사도들에게 갔다"고 하였다. 이 바나바는 하위의 제자들처럼 그렇게 세심하게 바울을 경계하지는 않았다. 

그는 처음으로 바울을 자기가 데리고 있으려 하였고 그들에게 그를 소개하였다.

① 그리스도가 바울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설명하였다. 

즉 주께서 길에서 자기를 바울에게 보이신 것과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설명하였다.

② 그 이후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행한 것을 설명하였다.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였다. 

"바나바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바울이 경험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는지 기록되지는 않았다. 바나바가 다메섹에 거하였었는지 또는 다메섹에서 편지를 받고 알았는지 또는 그 성의 사람들과 대화를 통하여 알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또는 바나바는 전에 바울이 희랍의 회당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지도 모르며 가말리엘 문하에서 같이 배웠는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서로 믿을 만한 사이였으므로 바울로부터 그의 회심에 대한설명을 듣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떠한 경위를 통하였든지 간에 바나바는 바울을 믿을 수 있었고 사도들도 그를 신뢰하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가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로부터 아무런 증거물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은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가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후 3:1).

 젊은 개종자를 신앙인들의 공동체에 소개한 것은 매우 큰 공헌이었다. 우리도 기회가 있을 때 소개할 수 있는 준비가 갖추어있어야 한다.

2. 그는 적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1) 바울에게 제자들과 사귈 수 있는 길이 열리었다. 

이 사실은 그의 적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사울이 그리스도가 승리한 상패로써 또한 그의 은총의 포로로써 여겨진다는 것은 믿음이 없는 유대인들에게는 불안을 주었다. 

지금까지 그들을 대변하는 참피온이었던 그가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그를 칭찬하며 또 사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듣는 것이 원수들에게는 괴로운 일이었다(28절).

(2) 그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담대히 증거하였고 이는 그들을 더욱 자극시켰다(29절). 

그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들은 담대히 말할 필요가 있음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그들은 증거할 만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를 위하여 우리가 증거하면 나중에 그가 자신을 위하여 또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변호하실 것이다. 

희랍화한 유대인들 또는 헬라파 유대인들도 대부분 사울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와 변론을 벌였으나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사울을 감당할 수 없었다. 

어떤 순교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 여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변론을 할 수 없으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을 수는 있다고. 그러나 바울은 이 두 가지를 겸비한 사람이었다. 

주 예수께서는 사울에게 갖추어진 전도인으로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셨다. 

사울이 모르고 믿음이 없었을 때 타고난 민첩함과 그의 열성적인 정신이 신앙에 대하여 고집불통의 열렬한 박해자로 만들었으나 이제 같은 이 요소들이 변하여 가장 열성적이고 용기있는 신앙의 수호자로 그를 변화시켰다.

(3) 이러한 정신은 그를 생의 위험 속에 몰아넣었다. 

거기서 그는 겨우 탈출하였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논쟁으로는 그들이 승산이 없는 것을 알고 다른 방법을 써서 그의 입을 막으려 하였다. 

그들은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것을 능히 당치 못하자 그를 죽이려고 했듯이"(6:10) 사울을 "죽이려고 힘썼다." 

마지막의 변론이 박해를 받게 된 치명적인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 모의도 사전에 알 수 있었고 따라서 이 젊은 복음의 수호자를 보호하려는 효율적인 운동이 전개되었다(30절). 

"형제들이" 그에 대한 음모를 알고 "그를 가이사랴로 데라고 내려갔다." 

그들은 스데반이 헬라파 유대인들과 변론하므로 결국 죽임을 당하고 이 사건이 어떻게 극심한 박해의 시작이 되었었는가를 기억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분위기가 다시 조성될 것을 두려워하여 서둘러서 바울을 출발시켰다. 피한 곳에서 그는 다시 싸울 수도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피신한 그는 그의 고향인 다소에서 주의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주의 제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그곳으로 보내서 그곳에서 그가 예루살렘에서 보다 안전하게 일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가 22장 17, 18절에서 자신에 대하여 말했듯이 그가 이번에 예루살렘을 떠난 것은 하늘로부터의 지시이기도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어 "예루살렘을 재빨리 떠날 것을" 명하시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방인들에게" 보냄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15절). 

하나님께서 일을 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일이 완수될 때까지 모든 원수들의 "그들을 향한 음모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다."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그들의 증언을 완수할 때까지"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

Ⅲ. 이제 교회에는 자유와 평화의 서광이 비친다(31절). 

본문에는 "교회가 평안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사울이 개종하게 되자 즉 박해자가 사라지게 되자 그가 선동하던 사람들도 조용하게 되었고 또 그가 괴롭히던 사람들도 휴식을 찾게 되었다. 

또는 그가 예루살렘에서 떠나자 헬라파 유대인들의 광기도 약간 수그러졌고 이제 그들은 사울이 길을 떠났으므로 다른 전도자들을 쫓아내려고 힘쓰게 되었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1. "교회가 평안하였다." 

폭풍이 지나면 고요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언제나 고난의 시기를 만나게 되지만 그 날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지 않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시기는 주의 제자들에게 숨을 돌릴 수 있는 시기였고 다음 번 도전을 위한 준비시기이기도 하였다. 

이미 설립된 교회들은 대부분 가나안 경내인 유다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에 위치하여 있었다. 

이들은 그리스도 자신이 그 기초를 세운 첫 번째 기독교인들의 교회였다.

2. 그들은 이 축복된 시기를 선용하였다. 

교회가 전성기에 이르러 안전만을 추구하고 방종에 젖던 것과는 달리 그들은 더욱 의무에 충실하였고 그들에게 주어진 평온을 잘 이용하였다.

(1) 그들은 "든든히 서 갔다." 즉 가장 거룩한 신앙을 확립하였다. 

그들이 자유롭고 지속적인 즐거움으로 지식과 은총에 접하게 되자 그들에게 지식과 은혜가 더욱 증가하였다.

(2) "그들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을 하였다." 

즉 그들은 거룩한 하늘 나라의 교제를 자신들의 삶을 통하여 나타냈다. 그들이 이와 같이 살았으므로 그들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확실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백성들을 지배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3) "그들은 성령의 위로 속에서 생활하였다." 

그들은 신앙 안에서 신실하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기쁘게 살았다. 그들은 주님의 길만을 바라보고 노래하며 나아갔다. 

"성령의 위로"야말로 그들의 위로가 되었으며 이것이 그들의 기쁨의 전부였다. 

그들은 고통과 환란을 당하는 때뿐만 아니라 평안과 번영이 있는 시기에도 성령의 위로에 의지하였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생활하였다. 

그들은 이 세상의 즐거움과 자유를 가장 만족하게 누릴 때도 성령의 위로 없이는 이들 땅의 위로를 무가치하게 여겼다. 

성령의 위로와 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연관시키셔 생각해 보자. 즉 그들은 "주를 두려워하는 생활을 하였고" 그 다음 "성령의 위로 안에서 살았다." 

가장 유쾌하게 사는 사람들은 또한 늘 조심성있는 생활을 해야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시므로 그들의 수가 증가하였다. 

본문에는 "수가 더 많아지니라"고 기록되었다. 

때로 교회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애굽에서 있었을 때처럼 박해를 받을 때 더욱 증가한다. 언제나 그럴 수만 있다면 지존자의 성도들은 결코 피곤함이 없으리라. 어떤 때는 교회의 평안이 성장에 도움을 준다. 그것은 전도의 기회가 많아지며 처음에 고통을 두려워하여 믿지 못하던 사람들도 교회로 오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생활하니 수가 더 많아졌다"고 하였다. 

말씀의 증거로 녹아지지 않는 사람들은 신앙의 대화들을 통하여 마음이 녹아질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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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중풍병자를 고치다

32.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33.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34.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35.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애니아의 병을 고침(행 9:32-35)

본문에는 다음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Ⅰ. 베드로는 제자들이 흩어져서 새롭게 세운 교회들을 방문하였다(32절).

1.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였다." 

사도로서의 그는 한 교회에 정착하여 일하는 목사가 아니었고 여러 교회를 편력하는 순회전도자였다. 

그는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한 전도자들에게 신앙을 확고히 해 주었고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었으며 안수하여 주의 종을 삼았다. 

그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였다"했는데 이는 31절에 기록된 유대와 갈릴리아 사마리아의 교회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의 스승과 같이 항상 뛰어다니며 "선한 일을 행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그의 활동의 중심지는 예루살렘이었다. 12장에 보면 그가 예루살렘에서 투옥되는데 이를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2. "그는 룻다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다." 

이 룻다는 역대상 8장 12절, 에스라 2장 33절에 기록된 베냐민 지파의 성 롯과 동일한 성으로 생각된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성도"라고 불리웠다. 성 베드로나 성 바울 같은 특별히 뛰어난 인물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신앙을 성실히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성도이다. 이들이 곧 시편 16편 3절에 있는 땅 위의 성도들이다.

Ⅱ. 베드로가 팔 년이나 침상에 누워있었던 애니아의 병을 고쳤다(33).

1. 그의 병세는 비참했다. 

그는 "중풍병을 앓고 있었다." 아마 전신 중풍이 걸려 말도 못하는 죽은 상태와 다름 없는 상태였던 것 같다. 

그가 침상에 누워서 지낸 것을 보면 그의 병은 위중하였다고 보겠다. 그것은 또한 환자가 팔 년 동안 누워 있었던 것을 보아 고질적인 질병이었다. 

환자 자신과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가 치료될 것을 체념하고 있었고 이렇게 누워 지내다가 죽을 수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이러한 환자를 택하신다. 

그리고 그들을 고쳐 주심으로 타락한 인간의 상태가 얼마나 절망적인가 하는 것을 보여 주신다. 

우리도 이 가련한 사람과 같이 힘이 없을 때 "그는 말씀으로 우리를 고쳐 주신다."

2. 그의 치료는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34절).

(1) 베드로는 이 경우 그리스도를 의지하였고 그가 애니아를 고치시게 하였다.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가 너를 낫게 하신다"고 그는 명하였다. 

베드로는 자기 힘으로 스스로 이 일을 하는 것처럼 가장하지 않았다. 오직 이 일은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셔야만 된다고 선언하여 애니아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도움을 바라도록 지시한다. 

그를 바람으로 치료가 임할 것을 애니아에게 확신시킨다. "그가 너를 낫게 하실 것이다"가 아니라 "그가 너를 낫게 하시니"라 하였다. 즉 완전한 치료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가 너를 좀 편케 하시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너를 온전케 하신다"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기도함으로 그리스도가 애니아를 온전케 하시기를 간구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처럼 또 그의 마음을 알고나 있듯이 그리스도가 그를 온전케 하였다고 선언한다.

(2) 그는 애니아에게 용기를 가지고 즉시 활동할 것을 명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네가 완전히 치료된 것을 알도록 일어나 자리를 정돈하라"고 말한다. 

그의 은총의 능력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고 할 의무도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케 하시었지만 은총을 받은 그가 일어나야 하며 그가 준 은총을 사용해야 되기 때문이다.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너의 자리는 더 이상 병석이 되지 말고 휴식처가 될지어다"는 말이다.

(3) 이 말씀과 함께 능력이 나타났다. 

그는 즉시 일어났고 틀림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침상을 정돈하였으리라.

Ⅲ. 이 사건이 많은 사람에게 끼친 영항(35절). 

"룻다와 사론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갔다." 

우리는 이 지방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이 기적을 인식하고 이로 말미암아 개종하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즉 룻다와 사론 지방에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개종하게 되었다. 

사론은 샤론이라고도 부르며 비옥한 평야 또는 골짜기가 자리잡은 지역이다. 

이곳에 대해서 이사야 65장 10절에 "샤론은 양떼의 무리가 되겠고"라고 예언된 말씀이 있다.

1. 그들은 모두 기적이 참인가를 확인하려 하였고 무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가 치료된 것을 보았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능력과 그의 이름을 통하여 역사된 기적적인 치료인 것을 알았다. 

이 사건은 이제 세계 각처에 전파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굳게 하고 그 옳음을 입증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었다.

2. 그들은 모두 기독교 가르침에 신의 역사가 깃들고 있음을 증명한 이 확실한 증거에 복종하였고 "주께로" 즉 주 예수께로 돌아왔다. 

그들은 유대주의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그의 규례에 복종했으며 그에게 방향을 전환하여 그의 다스림을 받고 가르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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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도르가를 살리다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38.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다비다가 다시 살아남(행 9:36-43)

본문에 베드로가 행한 다른 기적이 소개되고 있다. 

이것은 복음을 굳게 하기 위한 것으로 전에 있었던 기적보다 더 놀라운 것이었다. 즉 다비다가 얼마 동안 죽어 있다가 다시 소생하게 된다.

Ⅰ. 이 기적을 체험한 다비다의 죽음과 그리고 그 여자의 면모(36,37절).

1. 이 여지는 욥바에 살았다. 

욥바는 난 지파에서 분할된 항구도시로써 이곳에서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으며 지금은 "얍보"라고 불리운다.

2. 이 여자의 이름은 "다비다"였다. 

이 이름은 히브리 이름이고 헬라식으로 발음하면 "도르가"였다. 둘 다 상서로운 동물인 암사슴을 의미하였다. 

"납달리 지파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암사슴으로 비유되었고 친절하고 상냥한 남편에게 아내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즐거운 노루로 비유되고 있다"(잠 5:19).

3. 이 여자는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은 제자였다. 

뿐만 아니라 특별히 구제하는 일에 있어서 모든 사람보다 뛰어났다. 이 여인은 선행으로 그의 신앙을 나타냈으며 이 일에 그녀는 풍성하였다. 이 여인의 머리는 어떻게 하면 선행을 할 수 있을까하는 궁리로 가득 찼다. 이 여인은 "고명한 일을 도모하였다"(사 32:8). 

그녀의 손은 아름다운 일을 하는 데 분주하였고 그녀는 선한 사업을 하며 결코 게으르지 아니하였고 선한 일을 힘써 배워 행하였다(딛 3:8). 또한 이 일을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힘썼다. 그녀는 열매가 잔뜩 열린 나무처럼 "선행이 심히 많았다." 

말로는 선한 것 같아도 행위로는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비하여 다비다는 위대한 행동가였지 말만 하는 수다쟁이는 아니었다. 

진리는 지껄이지만 말고 진리대로 살라는 격언은 그녀에게 해당되는 말이었다. 

여러 선행 가운데 그녀는 "구제하는일"에 뛰어났다. 그녀는 그 자체가 선행이며 또 믿음의 열매이기도 한 경건한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자비를 베풀고 남에게 유익을 주었는데 이는 그녀의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세상을 가볍게 여기는 거룩한 생활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그녀가 구제로써 뿐만 아니라 선행으로도 천거될 만한 것을 생각하여 보자. 

재산이 없어서 구제를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손으로 또는 발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부자이면서도 구제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아무리 선한척하여도 선행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녀는 선행으로 분주하였다. 헬라어 본문은 ‘에델렌 규사스다이’(10:10) 라 했는데 이는 그녀가 실행하였다는 말이다. 

즉 그녀가 선행한 것이 강조되고 있는데 이는 그녀가 남을 도울 수 있는 일을 발견하면 힘을 다하여 했고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한 일들은 선행이었다. 이러한 일들을 특별히 계획한 것도 아니고 이런 일을 할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다만 행하였다. 

또 이런 일을 착수한 데 불과하지 않았고 행하되 철저히 행하였다. 그녀는 고린도 후서 8장 11절과 9장 7절의 말씀대로 행동하였다. 

그녀의 생활과 성격이야말로 모범적인 제자로서 부족함 없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도 이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으면 참으로 그의 제자가 된다(요 15:8).

4. 그녀는 병들어 죽음으로 남에게 유익을 끼치는 삶도 끝나게 되었다(37절). 

"그 때에 병들어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결코 병들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님은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되" 그들의 영혼을 강건케 하시며 "저의 병 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므로" 병중에도 편안케 하신다(시 41:1, 3). 그들이라고 죽지 않는 것은 아니다(다비다가 그러했듯이 긍휼을 베푸는 남자도 여자도 데려감은 당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날에 주의 긍휼을 얻기를 바랄 수 있는 것이다(딤후 1:18).

5. 그녀의 친구들과 이웃들은 관례를 어기고 그녀를 즉시 장사지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와서 다시 그녀를 소생시켜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관례에 따라 "시체를 씻었다." 

따뜻한 물로 씻었다고 했는데 이는 혹 생명이 붙어있을 경우 다시 회복되기를 바라서였다. 

그러므로 그녀의 시체를 씻어 뉘었다는 것은 그녀가 정말 완전히 죽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녀를 살게하려고 할 있는 방법을 다 사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즉 이제 그들은 최후의 수단을 강구하였다. 

그들은 그녀를 수의를 입혀 "다락에 뉘웠다.

라이트푸트(Dr. Lightfoot) 박사는 이 다락방이 그 지방의 신자들을 위한 공적인 집회처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그들은 시체를 뉘웠다. 그리고 베드로가 오면 그 장소에서 보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를 살릴 수 있기를 바랐다.

Ⅱ. 그녀의 교회 친구들은 베드로가 속히 오도록 사람을 보냈다. 

와서 장례식에 참여하라고 통지한 것이 아니요, 할 수만 있으면 그녀가 살아서 장례를 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서였다(38절). 

베드로가 지금 머물고 있던 룻다 지방은 욥바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욥바에 있는 제자들은 베드로가 룻다에 있다는 소식과 그가 오랫 동안 앓고 있던 애니아를 고쳐 주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편지가 보다 유의되어지기를 바라서 두 명의 제자들을 보내 그가 지체말고 오기를 간청하였다. 

그들은 그가 죽은 자를 일으키려 가야한다는 중압감 때문에 오기를 회피할까 두려워하며 그 사건은 그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다. 

그가 오기만 하면 그에게 모든 문제를 맡겨버리려 하였다. 그들의 친구가 죽었다. 이제 의사를 청하기에는 시기가 너무 늦었다. 

그러나 베드로를 청하는 데는 아직 늦지 않았다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 즉 죽은 후에 의사를 부르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죽은 후에 사도를 부르는 것은 경우가 달랐다.

Ⅲ. 베드로가 그를 찾아온 사람들을 보고 취한 행동(39절). 

본문에는 "베드로가 저희와 함께 갔다"고 했다. 

그들은 그에게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말하지 않았지만 상당한 이유가 있어서 그를 청하였을 것이라 믿고 기꺼이 그들을 따라 갔다. 

신실한 사역자라고 하면 그들의 재능이 허용하는 한 모든 사람들의 요구에 응하는 일을 싫어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모는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고전 9:19)고 했다. 

이제 베드로는 다락방에 시체가 뉘워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교회에서 같이 교제를 나누었던 그녀의 친구들이라 여겨지는 가난한 과부들이 시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1. 죽는 자를 조문하는 일은 좋은 일이다. 

죽은 자들에게서 참으로 칭찬할 만한 것과 본받을 만한 가치있는 것이 있을 때 조문하는 것이 그러하단 말이다. 

조문하는 일은 정중하고 엄숙하게 해야한다. 유족들에게 아첨하듯이 또는 악의를 갖고 조문해서는 안 되며 순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덕이 되고 경탄할 만한 본을 보여 그들에게 일깨움을 주여야 한다. 

다비다는 그녀의 덕으로 칭송을 받았고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그녀는 덕을 보였다. 

본문에는 그녀에 대한 웅변조의 찬사도 없고 그녀를 기념하기 위한 조시 낭독도 없었다. 그러나 과부들은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였다." 

욥은 생전에 그의 양털로 가난한 자들의 몸을 덥혀서 그들로 그를 축복하게 하였던 것을 위로로 여겼다(욥 31:20).

 그리고 본문에서는 다비다가 죽자 뒤에 남은 과부들이 다비다가 그들을 위하여 만든 겉옷을 내어 보이며 그녀를 칭찬하여 그녀의 덕의 징표가 되었다. 

확실히 다른 사람이 무엇이라고 하든지간에 그 행한 일 자체가 아름다우면 가장 높이 찬양되어지게 마련이다. 

노쇠한 과부들에게 필요한 겉옷과 속옷을 입히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그들을 도와준 사람들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그들을 찬양하리라. 

이것이 게으른 마부들에게 화려한 제복을 입히는 것보다 낫다. 이들 마부들은 주인의 등 뒤에서 그들에게 옷을 입혀 준 사람들을 욕할지도 모르는 것이다(전 7:21). 이같이 구제하는 일을 모든 현명하고 선량한 사람들은 쾌락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선이야말로 참으로 위대한 것이요, 곧 아름답게 빛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생각하여 보자.

(1) 어떤 방법으로 그녀는 구제를 하였는가? 

틀림 없이 그녀가 한 다른 구제도 있을 것이나 여기서는 그녀가 가난한 과부들을 위하여 손수 겉옷과 속옷을 지어 준 일이 소개되고 있다. 

이들 가난한 과부들은 일을 해서 먹고 살 수는 있으나 옷을 사 입을 만큼 수입이 없는 자들이었던 것 같다. 

확실히 "벗은 자를 보면 입히는 것"은 아름다운 구제 행위라 하겠다(사 58:7).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않으면서 "네 몸을 덥게 하라"고 말만 하면 족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약 2:15, 16).

(2) 그녀의 친절에 대하여 가난한 이들이 보인 감사의 표시. 

그들은 그녀의 신세로 옷을 입게 된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자기들의 속옷을 보여 주었다. 본문에서 이 과부들이 행한 것처럼 자기들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이 행한 친절을 공개하므로 그 친절을 최소한도라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몰염치한 일이다. 

구제를 받는 사람들은 구제한 사람들이 해야하듯이 구제받은 일을 감추려해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에게 인정이 없고 인색한 사람이라고 평하기 전에 자기자신을 돌아보아 다른 사람의 주의에 자신이 감사할 줄 모르는 생활을 하지 않았나 돌이켜 보아야 한다. 

그들이 도르가가 만든 겉옷과 속옷을 보임으로써 그녀의 자애로움만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부지런함도 찬양되어졌다. 

덕스러운 부인다웁게 그녀는 물레질을 하거나 바느질을 하였고 또 손을 뻐쳐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았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였다. 

이 모든 것을 그녀가 스스로 일해서 공급하였다. 이같이 남을 돕는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 자기 의무를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잠언에는 이런 여자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는 자기를 위하여 아름다운 방석을 지으며 세마포와 자색옷을 입는다" 하였다(잠 31:19-22).

2. 그들은 그녀를 사별하게 되어 슬퍼하였다. 

그들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었다. 자비를 베풀던 사람이 데려감을 당하자 특별히 도움을 받던 사람들의 감회가 대단하였다. 

그들이 그녀를 위해 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악을 면하게 될지도 모르며 또한 그녀는 삶에 수반되는 수고와 땀 흘리는 노동에서 쉼을 얻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라면 그녀가 뒤에 남겨놓은 사람들이 문제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과 자기들의 자녀를 위해서 울었다. 그들은 곧 이와 같이 좋은 부인이 떠난 것을 아쉬워하게 될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그녀의 친구들을 다른 사람에게 위탁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 그녀가 행한 아름다운 일을 새삼 기억하였음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그들에게서 떠나갔고 이 사실이 그들의 슬픔이 되었다. 자애로운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늘 그들과 함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동정적인 사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는 빛이 잠간 동안 우리와 함께 있을 때 그 빛을 선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빛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는 것도 아니며 장기간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사라질 때,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을 당시 그들이 무엇을 하였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여기서 빛은 훌륭한 인물을 상징한 말이다-역자 주). 

과부들이 베드로의 앞에서 운 것은 그의 동정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즉 그가 아직도 무엇인가 할 수 있다면 베드로가 그들을 동정하여 도와 줌으로 그들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을 살려 줄 수 있기를 바란 것같이 보인다. 

오늘날 선행을 잘하는 사람이 죽는다면 그들을 다시 살려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병들었을 때는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회복을 위해 기도할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라면 병든 사람도 죽음에서 놓여나 좀 더 세상을 살 수 있겠기 때문이다.

Ⅳ. 그녀가 소생하게 된 경위.

1. 이 일은 은밀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그녀는 그들이 공중 집회를 갖곤 하였던 다락방에 뉘워있었다. 그리고 시체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가를 보려고 한 것 같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람을 다 내어보냈다." 즉 모든 슬퍼하는 과부들을 내어보냈다. 

그리고 가족들 가운데 몇몇 친척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함께 기도할 제자들이 필요했던 것처럼 그와 함께 기도할 교회 지도자 몇 명을 남겨놓았다(마 9:25). 

이와 같이 베드로는 허영이나 겉치레가 될 만한 것들은 다 물리쳤다. 그들은 구경하려고 왔으나 그는 구경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가 무든 사람을 물리친 것은 보다 더 자유스럽게 이 사건을 앞에 놓고 하나님 앞에 영혼을 기울여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들이 잡담과 소란스러운 통곡으로 말미암아 방해받기를 원치 않았다.

2.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애니아를 치료할 때 그는 간접적인 기도를 하였다. 그러나 이제 보다 큰 문제를 놓고 그는 그리스도께서 나사로를 일으키실 때 그런 것처럼 엄숙하게 정성을 기울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아들의 권위로 기도하여 그가 원한 사람을 소생시킨 데 비하여 베드로는 지시에 따라 복종하려는 종과 같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3. 이 말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 말씀은 소생케하는 말씀으로 말씀이 곧 영이요, 생명이다. 그는 시체를 향하여 돌아섰다. 

이 말은 그가 기도할 때에 시체의 모습이 그의 신앙을 낙심케하지 않도록 시체에서 돌아서서 기도하였다. 그는 우리에게 다른 방법을 가르쳐 준다. 

즉 그는 아브라함과 같이 "바랄 수 없는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소망을 지녔으며" 앞에 놓여있는 어려움은 무시하였다. 

그는 이제 죽어버린 시체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는 우리가 약속에 흔들리지 않으려 할 때 필요한 방법이다(롬 4:19, 20). 

그러나 그는 기도를 끝마친 후 "시체를 향하여" 주님의 이름을 빌어 주님께서 하신 본을 따라 다음같이 말하였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다시 소생토록 하여라"라고 명한다. 이 말씀과 함께 능력이 나타났고 그녀는 살아나 죽음으로 말미암아 감겨졌던 눈을 떴다. 

이와 같이 죽은 영혼이 영적 생명을 다시 얻을 때 산 첫 번째 표시는 마음의 눈이 열리는 것이다(26:18). 

그녀는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다. 이러므로 그녀가 참으로 다시 산 것이 입증되었다.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일으켰다"(41절). 

이는 그녀가 쇠약해져서 일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아니고 그녀가 다시 산 것을 환영하는 뜻의 표시인 것 같았다. 

또한 이것은 그녀가 단절되었던 살아있는 사람들과의 교류를 다시 시작하였다는 상징도 된다.

마지막으로 그는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였다." 

그들은 모두 그녀의 죽음으로 슬퍼하였는데 이제 그들에게 그녀의 산 것을 보임으로 그들을 위로하고자한 것이었다. 

특히 그녀의 죽음으로 마음에 상처가 컸던 과부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41절). 

베드로는 엘리야나(왕하 17:23) 엘리사나(왕하 4:36) 그리스도가(눅 7:15) 죽은 아들들을 살려 그들의 어머니에게 주었듯이 그녀를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죽 은 자가 다시 살아서 사람들은 큰 기쁨과 만족을 표명하였다.

Ⅴ. 이 기적이 가져온 효과.

1. 이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진리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확신하고 주님을 믿게 되었다(42절). 

"온 욥바 사람이 이 일을 알았다." 

이 사실은 곧 입에서 입으로 전하여졌고 이곳은 더구나 뱃사람들이 사는 마음이었으므로 이 사실이 다른 지방에까지 곧 퍼졌다. 

개중의 얼마는 이 사실을 전혀 염두에도 두지 않으려 했지만 이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게 되었다. 

신의 계시를 확실히 입증하는 것 이것이 기적을 통하여 시도되는 목적이다.

2. 베드로는 간청에 못이겨 얼마 동안 이 성에 머문다(42절). 

거기서 그를 위하여 전도의 문이 열리어진 것을 알고 그가 다른 곳에 보냄을 받을 때까지 여러 날 동안 이곳에 머물렀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 용무가 있으면 그곳으로 갔다. 그는 다비다가 부유했지만 자기가 우쭐대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하여 그녀의 집에서 유숙하지 않았다. 

그는 평범한 장사꾼에 불과한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접에 숙소를 정하였다. 이는 그의 겸양과 겸손의 표시였다. 

이로써 그는 우리에게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할 것을" 가르친다(롬 12:16). 

이렇게 해서 베드로는 바닷가 피장의 집에서 빛도 보지 못하고 묻혀있는 것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바로 이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고귀한 종으로 삼으신 것이다. 이 사실은 다음 장에 기록되어 있다. "스스로 낮은 데 처하는 자는 높아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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