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4.07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행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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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3장

===바나바와 사울을 보내다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바나바와 사울이 구브로에서 전도하다

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7.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8.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도하다

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4.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8.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19.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20.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21.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24.  그가 오시기에 앞서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25.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26.  형제들아 아브라함의 후손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28.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29.  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30.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31.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그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의 증인이라

32.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33.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34.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35.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37.  하나님께서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40.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41.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42.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51.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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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3장 (개요)

지금까지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대로  복음이 본격적으로 폭넓게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파되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물론, 베드로가 고넬료와 그의 친구들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그 문이 열리기는 하였지만  그 후에도 일정기간까지는  여전히 복음은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전파되었다(11:19). 

언뜻 보면 이방 세계에 비치기 시작한 빛이 사라진 느낌까지  든다. 그러나 본 장에 보면 그 위대한 선한 사업이 수 년 내에 다시 활발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유대인들이 복음의 첫 열매가 되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대다수가  이를  거절하므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행위의 대가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본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Ⅰ. 하나님의 지시에 의하여 바나바와 바울을 엄숙하게 안수하여 주변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위대한 사명을 맡긴다. (아마도 다른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명을 받아 같은 사명을 띠고 제각기 흩어진 것 같다(1-3).

Ⅱ. 그들이 구브로에서 복음을 전한다. 

그리고 거기서 마술쟁이 엘루마의 훼방을 받는다(4-13).

Ⅲ. 바울이 비시다아 안디옥의 가들의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우리는 이 가르침의 서두를 보아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대체 무엇을 전하였는지 짐작하게 된다(14-41).

Ⅳ. 복음을 이방인들의 요구에 따라 그들에게 전한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변박하므로 사도들은 유대인들이 품고 있던 불쾌한 생각에 대하여 자신들을 정당화한다. 하나님이 사도들과 함께 하신다(42-49).

Ⅴ. 신앙이 없는 유대인들이 사도들에게 끼친 고통.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다른 장소로 옮긴다(50-52).

---이와 같이 13장은 사도들의 얼마나 신중하게 또 점진적으로 또 상당한 근거 아래 복음을 이방 세계에 전하고 이방인들을 교회에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대단히 불쾌한 일이었다. 그리고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부지런히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정당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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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바나바의 설교(행 13:1-3)

본문에서 바나바와 사울에게 이방인들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라는 신의 사명이 수여되고 있으며 금식과 기도를 한 후 안수함으로 그들에게 사명이 주어지는 내용이 수록되고 있다.

Ⅰ. 본문에는 개척되었던 안디옥 교회의 현재의 상황에 대한 설명이 있다(11:20).

1. 안디옥 교회에는 훌륭한 사역자들이 고루 갖추어져 있었다. 거기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다"(1절) 하였으니 이 말은 은사와 은혜와 봉사에 뛰어난 사마들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시면서 혹은 선지자로 혹은 교사로" 사람들을 세우셨다(엡 4:11). 안디옥에 이 두 요소가 다 갖추어 있었다. 아가보는 선지자요 교사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언자가 아닌 교사들이었다. 그러나 여기 언급된 사람들은 때로 신의 영감을 받기도 하였고 특별한 경우에는 직접 하늘의 지시를 받았다. 그러므로 예언자란 칭호도 그들에게 주어졌다. 게다가 그들은 교회의 교사로서 신앙적인 모임에서 성서를 해석하며 그리스도교리를 적절히 적용하여 가르치는 일을 맡아 하였다. 이들은 모두 예언자요 서기관이요 교사였다. 이 은사는 그리스도께서 주기로 약속한 것으로(마 23:34) 이와 같이 여러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교회를 섬길 수 있는 자질이 주어졌다. 안디옥은 대단히 큰 도시였고 또한 그곳에 기독교인들도 많았다. 따라서 그들은 한 곳에 모두 모일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각 집회처마다 머물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해 줄 많은 교사들이 절대 필요했던 것이다. 바나바의 이름이 처음 기록된 것은 그가 제일 연장자였기 때문이요, 사울이 맨 끝에 언급된 것은 아마 그가 제일 젊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후에는 나중된 자가 앞서므로 사울은 교회에서 더욱 뛰어난 인물이 되었다. 다른 세 사람이 나온다.

(1) "시므온" 또는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다. 그는 다른 시몬과 구별짓기 위하여 그의 머리 색깔을 따라 "니게르" 즉 "검둥이 시몬"이라 불렀다.

(2) 구레네 사람 "루기오"이다. 어떤 이는 루기오를 사도행전을 쓴 누가와 동일 인물로 생각한다(라이트푸트 박사에게 그런 경향이 있다). 누가는 본래 구레네 사람이었고 구레네 대학 아니면 예루살렘에 있는 회당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였다.

(3) "마네아"로서 그가 "분봉왕 헤롯과 함께 양육되었고" 같은 우유를 먹고 자랐고 같은 학교에서 같은 선생에게서 배웠으며 더 나아가 그의 계속적인 동료가 되었던 것 같다. 이같이 그는 지체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교육을 받는 데 있어 헤롯의 친구였고 따라서 관계에 진출하는 길이 그에게 넓게 열려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 모든 희망을 포기하였다. 그는 모세가 "자라서 비로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워지기를 거절하였듯이" 그의 영화로운 생을 포기하였다. 그가 자기와 함께 자라난 헤롯과 합세하였다면 그도 블라스도의 지위와 같은 지위를 얻었을 것이었고 그의 궁내대신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폭군과 함께 사귀며 박해자가 되는 것보다 성도들과 사귀며 고통당하는 자가 되는 길을 택하였다.

2. 그들은 주를 위하여 충성하였다(2절). "그들은 주를 섬겨 급식하였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부지런하고 신실한 교사들은 참으로 주님께 충성한다. 이들은 기독교인들을 가르치므로 그리스도를 섬겼다. 그들은 진실로 그의 영예를 높였고 그의 나라를 위하여 일했다. 기도하며 가르치는 일로써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은(두 가지 의무가 본문에 한 가지로 다루어지고 있다) 곧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교회의 종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목회의 목표를 그에게 두었고 또한 상급도 그에게서 받을 것이다.

(2) 어떤 방법으로든지 주를 섬기는 것은 교회와 교회에 속해 있는 교사들이 해야 할 고정된 임무가 되어야 한다. 이 일을 위하여 시간이 배정되어야 하며 매일 얼마를 이 일을 위하여 우리는 봉사해야 한다. 기독교인들과 교역자들에게 있어서 "주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보다 큰 일이 어디 있겠는가"(골 3:24; 롬 14:18).

(3) 신앙적인 금식은 주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의 겸손의 표시며 금욕의 수단이 된다. "신랑이 그들과 함께 있었으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처럼 금식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랑이 떠난 후에 그들은 자기를 부정하고 괴로움을 견디기로 공부한 사람들처럼 금식을 많이 하였다.

Ⅱ.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구분해 세우실 것을 명하셨다. 나머지 사람들이 매일의 일과를 수행하는 동안 성 안에 있던 몇몇 사역자들이 모여서 금식하고 기도하는 일에 힘썼다. 그 때에 성령께서 하늘로부터 직접 말씀하셨든지 또는 성령께서 예언자였던 이들의 마음을 강하게 자극하심으로써 알게 하셨든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는 말씀이었다. 성령께서 그 임무를 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바나바와 바울은 이전의 부르심을 통하여 그 의미를 알았다. 특히 사울에게 있어서는 "그가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해야 한다는 것과"(9:15), "그가 이방인들에게 보냄을 받아야 한다는"(22:21) 사명이 주어졌다. 이 문제는 이에 앞서 예루살렘에서 그들 사이에 결정된 것이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같은 사람들은 할례받은 자들 가운데 복음 전하는 사명을 맡았고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들에게 가도록 결정되었었다(갈 2:7-9). 바나바도 자기가 바울과 마찬가지로 이 사명을 위하여 택하여진 것을 알았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추수하라는 명령을 받기까지는 추수할 것이 많았지만 이방인들을 추수하려고 나이가지 않았다. 요한계시록 14장 15절에 이르기를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라고 기록되었다. 명령은 "나를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는 것이었다. 이 명령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1.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역자들을 임명하신다.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하여 그들은 그를 섬기는 일에 자격을 갖추게 되며 복음을 사랑하고 복음에 합당하지 않은 모든 염려를 벗어버리게 된다.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을 위하여 구별하신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성전을 섬기는 일을 위하여 바쳐지고 또 기꺼이 자신들을 드린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듯이 구별된다. 이들에게는 지시가 주어지며 판단할 수 있는 충분한 재능과 진지성이 나타난다. "그들을 성별하라"하신 말씀을 기억하자.

2.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주님과 성령을 위하여 구별된다. "그들은 나를 위하여 구별하여 세우라" 하신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업을 위하여 불리움을 받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세워진 것이다.

3.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의 사역자로서 구별된 모든 사람들은 일을 시키기 위하여 택하여진 것이다. 그리스도는 게으른 종들을 보호하지는 않으신다. "감독으로 택함을 받은 자는 선행을 할지니"라고 말씀되었듯이 구별되어진 자는 "말씀을 전하며 가르치는 일에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안정된 생활을 위하여 택함받은 것이 아니라 고난을 당하기 위하여 택하여진 것이다.

4.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의 할 일은 - 이 일을 위하여 그들은 구별된 것으로 - 이미 착수된 사업이었다. 모든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이 일을 위하여 택함을 받았고 외적인 부르심에 의하여 방향이 설정되고 택정된 것이다.

Ⅲ. 그들에 대한 안수는 계통에 준한 것이었다. 그들은 일반 사역자로 불리워진 것이었다. 그들은 일반 사역자로 불리워진 것이 아니라(바나바와 사울은 이미 전부터 둘 다 주의 사역자들이었었다), 특별한 사명을 위한 것이었다. 이 일에는 특수성이 있었고 그러기에 새로운 위탁이 요구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번에 이 사명의 위탁이 "예언자들과 요사들의" 손에 의하여 전달되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기셨다. 교회에 이렇게 지시를 하신 것은 교사들이 교사들을 안수함으로(이제 예언자들을 기대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사명을 전수함으로 후손들을 위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디모데 후서 2장 2절에도 이르기를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라 하였다. 그리하여서 본문에서는 당시 안디옥 교회의 신실한 교사들인 시므온과 루기오와 마나엔이 "금식하며 기도한 후에 바나바와 사울에게 안수하여 그들을 파송한 것이다"(3절). 그리고 이는 성령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그들은 두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주의 일군들이 선한 일을 하려고 나갈 때 그들의 같은 동역자요 군사된 형제들에게 특별히 성별된 기도를 받는 것이 좋다.

2. 그들은 다른 주의 일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금식하며 기도하였다(3절). 그리스도는 스스로 철야를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이러한 본을 보이셨다. 그가 사도들을 보내시기 전날 밤 그는 기도로 밤을 지새우셨다.

3. 그들은 두 사람에게 안수하였다.

(1)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안디옥 교회에서의 두 사람의 현재의 임무를 그만 두게 하고 그들이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정당한 것이며 허락되어진 것임을 알리고 또 그들을 영예롭게 보내려 하였다.

(2) 그들은 그들의 현재의 복음사업에 축복이 임할 것을 간구하였고 하나님이 두 사람과 함께하셔 그들이 성공할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였다. 또한 이 일을 위하여 그들이 일하는 데 있어서 "그들에게 성령이 충만할 것을" 구하였다. 14장 26절에 보면 바로 이 사실이 설명되고 있다. 거기 바울과 바나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안디옥은 원래 온 교회가 하나님의 은총을 빌어 주는 가운데 두 사도가 임무를 맡은 곳이더라." 바나바와 사울은 그들과 대등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거나 또는 그보다 못한 사람들의 안수에 순복함으로 자신들의 겸손을 나타냈다. 또한 다른 교사들은 바나바와 사울이 그들보다 앞서서 영예를 얻게 된 것을 시기하지 않고 그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함으로 기꺼이 그들에게 사명을 위임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갈아 엎어야할 묵은 땅이 있는 나라들에 대한 염려로 "그들을 급히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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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루마가 장님이 됨(행 13:4-13)

본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었다.

Ⅰ. 바나바와 사울이 유명한 구브로 섬에 도착한 데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주어지고 있다. 아마 그들이 발걸음을 그쪽으로 먼저 옮긴 것은 바나바가 이 지방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4:36). 바나바는 그의 새로운 사명에 따르는 그의 수고의 첫 열매를 그들에게서 얻기를 바랐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성령을 통하여 그들이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이 이 사업을 하는데 있어 그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4절). 성령께서 그들을 보내셨다면 또한 그는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에게 힘을 주시며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며 성공을 주시리라. 그러므로 그들은 이민족을 두려워하지 않고서 기꺼이 안디옥을 출발하여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로 나아갔다. 그런데 이제 구브로는 그들에게 아주 조용한 항구가 되었다.

2. 그들은 구브로 건너편에 있는 항구인 실루기아에 들려서 거기서 배를 타고 구브로로 갔다. 이 섬에서 그들이 처음 간 성은 섬의 동편에 있는 살라미시였다(5절). 거기서 그들은 복음의 씨앗을 뿌린 후 "섬 가운데로 지나서"(6절), 서해안에 위치한 바보에 이르렀다.

3. 그들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자기들이 잘났다고 생각하고 있던 유대인들도 제외시키지는 아니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변명할 수 없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그들을 모으려 했으나, 그들이 원치 않았다." 그들은 남모르게 활동하지 않았으며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메시야를 전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교리를 공개하여 회당 지도자들의 비판을 받았고 그들이 할 말이 있으면 복음을 반대하여 논쟁하도록 하였다. 또한 그들은 별도로 행동하지도 않았고 유대인들이 자기들을 그들과 그들의 회당에서 쫓아내지 않는 한 그들과 협조하려 하였다.

4. "그들은 요한을 그들의 수종자로 두었다." 그러나 그는 막일하는 심부름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있어 그들의 조력자였다. 그는 그들이 가려고 계획한 곳으로 가는 길을 돕거나 또는 그들이 복음 전파를 시작한 곳에서는 그들의 복음 전하는 일을 도왔다. 그는 그들이 공중을 향해 설교할 때 한 사람씩 개인적으로 접촉하여 복음을 설명해 주었다. 이와 같이 그는 그들에게 여러 가지로 유용하였다. 특히 낯선 지방에서는 더욱 큰 힘이 되었다.

Ⅱ. "박수 엘루마"와의 만남에 대하여 특별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들은 그를 총독이 거하는 바보에서 만났다. 이곳은 비너스를 위하여 세워진 전각으로 유명한 곳으로 이 때문에 이곳을 파피안 비너스(Paphian Venus)라고도 불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전파되어 악마의 소행들을 파괴하는 데는 더 할 수 없이 좋은 곳이었다.

1. 거기에 서기오 바울이라 칭하는 이방인 총독이 있었는데 그가 사도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그들의 메시지를 듣고자 하였다. 그는 로마 황제 밑에 있는 이 지방의 총독이었다. 그는 성격이 신중한 사람이었으며 지혜있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감정이나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이성으로 사리를 판단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바나바와 사울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는 바나바와 사울을 초청하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였다." 우리가 듣는 것이 하나님께 우리를 인도해내는 성격의 것이라면 더 들으려고 사모하는 것이 바른 자세임을 기억하자. 이들은 아무리 이 세상에서 어리석은 사람 취급을 당한다 할지라도 현명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추구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위대한 인물이었고 또 권력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복음 전도자들은 뛰어난 인물이 못되었다. 그렇다 하여도 그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려 한다면 그 메시지가 무엇인지 그에게 알릴 필요가 있고 그렇다면 그도 그 메시지를 받아들일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2. 거기서 유대인 박수 엘루마가 그들을 반대하여 온갖 수단을 다하여 그들을 저지하려고 했다. 이 유대인이 그들을 향하여 너무도 악의를 품었으므로 이것이 동기가 되어 사도들이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계기가 이루어졌다."

(1) 이 엘루마는 "예언의 은사"를 받은 것처럼 꾸미는 자요, "박수"며 "거짓 선지자"이며 거룩한 자로 여김을 받는 지였다. 왜냐하면 그는 거룩한 것으로 꾸미는 재주가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점쟁이로서 사람들의 길흉을 점치며 과거의 일을 알아 맞추었다. 아마 그는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마귀와 연합한 자인 것 같다. 그는 여수아의 아들로써 이름이 바예수였다. 여수아의 아들이라 함는 구원의 아들이란 뜻을 의미한다. 그러나 시리아어로 그는 바르쇼마라 칭하여졌는데 그 뜻은 "자랑스러운 아들" 또는 "교만한 아들 - filius inflationis -"이란 뜻이었다.

(2) 그는 그 지방의 총독에게 의존하며 지냈다. 총독이 바나바와 사울을 초청한 것처럼 그를 초청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는 억지를 부려서 총독을 수중에 넣고 그에게서 돈을 갈취하려고 하였다.

(3) 그는 바로의 궁정에서 애굽의 술사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대적하였듯이 바나바와 사울에게 대적하는 일을 일삼아 하였다(딤후 3:8). 그는 자칭 하늘에서 온 사자라고 하였고 그들은 아니라고 부정하였다. 또한 그는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고"(8절) 총독이 복음을 받아들이려는 눈치를 채고 그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사단은 특별한 방법으로 위대한 인물들이나 권력있는 자들이 신앙을 지니지 못하도록 애쓴다는 것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그들은 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든지 많은 사람들에게 본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방법으로든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진리와 도에서 떠나도록 조장하는 사람들은 악마의 일을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4) 사울(본문에서 처음으로 바울이라고 불리워지는데)은 이 일에 대하여 거룩한 분노로써 그를 공박하였다. 본문에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라고 칭하여지고 있다(9절). 사울은 히브리인으로서 또한 베냐민 지파로써 그에게 주어진 이름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 시민으로서의 그의 이름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유대인들 가운데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유대식 이름으로 불렀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방인들에게 보냄을 받았으므로 로마식 이름으로 불렀었다. 이는 바울루스란 이름이 로마인들 가운데 대단히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로마의 도시들 가운데서 그가 일하기 용이하도록 명칭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그가 서기오 바울을 그리스도 신앙으로 회개시킨 때를 바울이라고 부르게 된 계기로 생각한다. 즉 그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써 얻은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바울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로마인들 가운데는 그가 어떤 지방을 점령하면 그가 그 지방의 이름을 따서 자기 이름을 짓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예를 들면 "게르마니쿠스라든가 부리타니쿠스라든가 아후리카누스"라든가 하는 이름이다. 서기오 바울은 그가 사울에 대한 우정과 존경의 뜻으로 바울이란 자기 이름을 그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베스파시안 황제도 그의 이름인 플라비우스를 유대인 요세푸스에게 하사하였던 것이다. 이제 바울에 대한 기록을 살펴 보자.

① 그가 "성령으로 충만하였다"고 했다. 즉 그는 그리스도의 원수노릇하는 것을 본업으로 삼는 자를 대항한 거룩한 열심히 충만하였다. "불타오르는 영"도 성령의 은사의 하나이다. 그는 능력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그에게 퍼부었다. "심판의 영"도 성령의 은사의 하나이다. 그는 보통 때보다 강한 정열을 마음 속으로 느꼈다. 그는 미가 선지자가 "여호와의 신으로 채움을 얻었을 때"(막 3:8)와 마찬가지의 모습이었고 또한 에스겔 선지자가 "그의 얼굴이 화석보다 더 굳어졌음같이 되었다"(겔 3:9) 했을 때의 그러한 모습이었다. 또 이사야 49장 2절에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셨다" 함과 같았다. 바울이 말한 것은 어떤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 아니었고 성령께서 그의 영혼을 강하게 충동하셨으므로 우러나온 것이었다.

② 바울이 "엘루마를 주목하였다." 즉 그의 사악한 수작에 대처하여 정면으로 그를 위압하였고 또한 거룩한 용기를 표시하였다. 그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길이 그를 향하고 있음을 표하려는 듯 그를 주목하여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여호와의 얼굴이 그를 대면하고 있었던 것이다"(시 34:16). 또한 그는 엘루마가 자기가 행한 행위에 대한 후회의 표정이 있는가를 그의 안색에서 분별해 보려고 그를 주목하여 바라보았다. 만일 그에게서 자책의 기미라도 발견하였다면 저주를 받는 것을 면했을 것이다.

③ 바울은 엘루마의 참 면모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인간의 정으로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알기 보다 더 그들을 잘 아시는 성령으로 그러하였다(10절). 그는 엘루마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첫째, 마귀의 자식이라 하였다. 악한 자의 소생으로 악마의 화신인 가인이 그의 형제를 살해한 이후 지옥은 이 세상에 존재하여 왔었다(이 세상은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터였다"). 그가 동생을 죽인 것은 "그의 행위는 악하였는데 그의 형제는 의로웠기 때문이었다." 이 엘루마는 비록 바예수 즉 "예수의 아들"이라고 불리워지기는 하였지만 그는 참으로 "마귀의 자식"으로 그의 탈을 쓰고 마귀의 욕망에 사로잡혀 악마의 이익을 위하여만 일하였다(요 8:44). 어린이가 그 아버지를 닮듯이 그는 두 가지 점에서 마귀를 닮았다.

1. 간교하다는 점이다. "뱀이 땅의 어떤 짐승보다 간교하였더라"(창 3:1). 이같이 엘루마도 참된 지혜는 결핍되어 있었지만 "모든 궤계로 가득 차" 인간들을 속이고 그들에게 부담을 지게 하는 데 익숙해 있었다.

2. 잔인하다는 점이다. 그는 "악행이 가득한 자"요 악의로 가득찬 심술궂은 인간으로 하나님과 선에 대하여는 돌이킬 수 없는 대적자였다. 간교와 악행이 가득차면 드디어 그는 악마의 자녀가 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그는 하늘에 대한 적이었다. 그가 악마의 자식이라면 악마가 그러하듯 그도 "모든 의의 원수가 되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모든 의에 대해서 원수가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의가 종합되어 완성되기 때문이다.

④ 그는 엘루마의 현재의 잘못을 지적해 주고 그것에 대하여 타일렀다. "주의 바른 길을 굽히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주의 바른 길을 왜곡시켜 거짓되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 사람들로 바른 길로 들어서서 그 길에서 행하지 못하게 한다"고 말하였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첫째, 주의 길은 바르다는 사실이다. 주의 길은 바르지 않은 것이 없고 또한 완벽하다. 주 예수의 길은 바르다. 그 길이야말로 하늘 나라와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바른 길이다.

둘째, 이 바른 길을 그르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스스로 그 길에서 벗어나 방황할 뿐 아니라(엘리후가 참회하여 말하기를 "내가 바른 길을 그르쳤고 그것으로 내 유익을 삼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다), 다른 이들도 잘못 인도하여 그들에게 이 길과는 반대되는 불의한 길을 제시해 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불확실한 것이며 보잘 것 없고 또한 그리스도의 법은 이해할 수 없으며 비실제적이며 또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은 불쾌하고 아무런 유익도 없다고 말한다. 이것아야말로 주의 바른 길을 부당하게 그르치는 행위요, 주의 길이 굽은 길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짓이다.

셋째, 주의 바른 길을 그릇되게 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 마음이 굳어져 주의 길이 바르다는 사실이 강력하고도 명백한 증거에 의해 밝혀진다 하여도 그들은 악행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Etsi Suaseris non persuaseris - 즉 네가 충고할지라도 결코 설득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악한 길을 자기의 길로 삼는다. "그들은 낯선 사람을 좋아하며 그들을 따라 가려고 한다."

⑤ 그는 엘루마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 당장 눈이 멀 것이라고 선포하였다(11절). "보라, 이제 주의 손 곧 의로운 손이 네 위에 있도다. 하나님이 너를 사로잡아 정죄하려 하신다. 왜냐하면 네가 그를 향하여 대적하였음이로다. 그러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이 심판은 그의 범죄를 입증하기 위한 것이요, 또한 주의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않는 그의 악함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즉 그것은 주의 바른 길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행하여진 기적이었고 동시에 그의 범죄에 대한 처벌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당연한 형벌이었다. 그는 복음의 빛을 보지 않으려 눈을 감았다. 즉 마음의 눈을 감았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의 육신의 눈도 멀어서 태양의 빛을 보지 못하도록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는 총독으로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려했다(그는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는 이 세상의 신의"대리자였다. 고후 4:4). 그러므로 그는 저주를 받아 장님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관대한 처벌이었다. 단지 눈이 먼 것에 불과하지만 그는 마땅히 저주를 받아 죽어야 했던 것이었다. 또한 "얼마 동안"이라고 하였다. 즉 그가 회개하고 신앙을 고백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다시 시력이 회복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가 회개하지 않아도 시력이 회복되었으리라고 볼 수는 없다. 하나님의 심판의 의해서이든지 그의 자비에 의해서든지 그를 회개케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⑥ 이 심판은 즉시 이루어졌다. 즉 소돔인들이 롯을 핍박할 때와 시리아인들이 엘리사를 핍박할 때에 그랬던 것처럼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었다." 이 사건은 즉시 그를 잠잠케 만들었다. 그는 당황하였다. 또한 이 사건은 그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항하여 말한 모든 것에 대한 효과적인 공격이 되었다. 자신이 벌을 받아 장님이 되었기에 이제 더 이상 자기가 총독의 양심의 안내자인척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만일 그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더욱 큰 화를 불러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의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유 13절). 이제 엘루마는 자신을 통하여 참된 기적을 경험하였다. 이제 그는 "인도할 사람을 두루 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가치있게 여기던 마술로도 스스로의 길을 찾아갈 수도 없었고 또 그에게 친절히 길을 안내해 줄 친구도 찾지 못하였다.

3. 엘루마가 "총독으로 믿지 못하도록"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또 이 기적은 박수 자신도 신앙으로 인도하는 계기가 되었다(이것은 마치 "애굽의 술객들로 독종으로 인하여 모세 앞에 서지 못하였다"는 말씀과 같다). 총독은 매우 지각이 있는 사람이었고 일어난 사건들을 통하여 본래 신적인 비범한 점들을 관찰하였다.

(1) 바울의 설교에서 그는 비범성을 보았다. 그는 "주의 가르치심" 곧 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기이히 여겼다." 바울이 가르친 내용은 주님에게서 온 것으로 주께서 아버지에 대하여 발견하신 사실들과 주님 자신에 관한 것 즉 그의 인격, 본성, 직능, 사업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 안에 놀랄 만한 것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가 복음을 알수록 더욱 복음에 대하여 기이히 여기게 되며 놀라게 된다.

(2) 이 기적에서 그는 기이한 것을 발견하였다.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또한 바울의 능력이 박수보다 훨씬 강하며 또 엘루마가 낭패하여 당황하는 것을 보고 그는 믿었다. 그가 세례를 받고 완전한 개종자가 되었다는 내용은 없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바울은 그의 사명을 행함에 있어서 어중간하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위하여서는 그는 완벽하였다." 총독이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그가 관직을 물러났거나 방향을 전환하지 않았다. 그는 신앙이 있는 총독답게 그의 영향력을 발동하여 그 섬에 기독교를 전하는 일에 큰 힘이 되었던 것 같다. 카톨릭 교회 전승은 교친을 확립하려는 의도로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만나는 모든 뛰어난 개종자들에게 감독직을 수여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서기오 바울을 프랑스 나르본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고 본다. 그들에 의하면 바울이 스페인으로 여행하면서 그를 거기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Ⅲ. 구브로 섬을 떠나다. 그들은 기록된 것보다 더 많은 일들을 한 것 같다. 다만 기록된 것은 총독의 회심 같은 비범한 사실들만이었다. 그들이 임무를 완수하였을 때 그들은 어떻게 하였는지 생각해 보자.

그들은 이 지방을 떠나 "버가로 갔다." 일행은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와 동행하기를 원한 것 같고 그러므로 구브로에서 그 수효가 증가된 것 같다. ‘아나크덴테스 호이 페리 파울론’(13:13) - 즉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를 떠났다. 즉 그의 열심히 새로운 친구들이 생겼고 그들은 선한 사업을 위하여 결코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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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시디아 안디옥에서의 바울(1)(행 13:14-41)

밤빌리에 있는 버가는 유명한 곳이었다. 특히 다이아나 여신을 위하여 세워진 신전으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가 거기서 무엇을 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다만 "저희가 거기를 지나갔다"(13, 14절)고만 기록되어 있다. 사도들의 여행에 대한 기록은 그리스도의 여행에 대한 기록처럼 기록되어야 할 많은 가치있는 내용들이 빠졌다. 그것은 "만일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하겠기 때문이었다." 다음으로 그들이 간 곳은 또 다른 안디옥이었다. 이곳은 그들이 맨 처음 출발한 시리아에 있는 안디옥과 구별하기 위해서 비시디아에 있는 안디옥이라고 칭하고 있다. 비시디아는 밤빌리아를 경계로 하는 소아시아의 지방이었다. 이 안디옥은 비시디아의 대도시였던 것 같다. 많은 유대인들이 거기 살았고 그들에게 "복음이 처음으로 전파되었다." 바울이 그들에게 한 설교가 본문에 수록되어 있다. 이 설교는 사도들이 각처에서 유대인에게 일반적으로 전하였던 설교와 그 본질이 같은 것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을 취급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들이 받아들일 신앙이 그들이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이를 위해 열성적인 구약과 얼마나 정확하게 일치하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Ⅰ.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집회에 참석함(14절). 최근에 그들은 로마인 총독을 회개케 하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들이 안디옥에 이르러서는" 그 지방의 장관을 찾아가거나 그의 협조를 요청하지도 않고 유대인들에게 갔다. 이 사실은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더욱 열심히 있었고 또 그들의 안녕을 바란 좋은 증거였다.

1. 그들은 유대인들이 예배드리는 날인 그들의 안식일을 지켰다. 그들끼리 있을 때는 주(週)의 첫 날을 기독교인의 안식일로 지켰다. 그러나 그들이 유대인과 만나게 될 때에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다. 그들은 이 같은 경우에는 때때로 편리한 방법대로 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형식적인 율법이 사장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율법이 묻힌 예루살렘의 폐허 속에서도 율법은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제 4 계명의 정신이 완전히 주일날로 의미가 전기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유대인들의 예배에 그들과 함께 참여하는 것이 잘못될 것도 없는 것이다.

2. 그들은 유대인들의 예배처인 "회당에서" 그들을 만났다. 안식일은 경건한 집회에서 거룩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안식일은 주로 공중예배를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안식일은 거룩한 날이다." 그러므로 이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과 바나바는 나그네들이였으나 예배처를 찾아갔다. 우리도 어디를 다든지(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신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모든 성도들과 교제하기를 바라는 사람으로서 그들의 예배에 참여해야 한다. 그들은 나그네들이었지만 회당에 입장하도록 허락을 받고 들어가 앉았다. 공중예배처에서는 나그네들의 편의를 배려해야 한다. 그들이 가난한 자들일 경우에도 그렇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그들도 귀중한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혼 때문에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Ⅱ. 그들에게 말씀 전할 기회가 주어짐.

1. 회당에서의 일상적인 예배 절차가 진행되었다(15절). 즉 그날을 위하여 배정된 "율법과 선지자의 글들이 읽혀졌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러 모일 때는 기도와 찬송으로만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음으로도 예배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시오 계명을 주신 분으로서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리는 것이 된다."

2. 이 일이 끝난 다음에 "회당장들이" 그들에게 설교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15절). 회당장들은 사자를 보내어 그들에게 정중하게 부탁하였다.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아마 회당장들이 그들을 만난 다음 그들끼리 사전에 합의를 한 것 같다. 그들은 복음에 대한 열의는 없었다 하여도 호기심을 가지고 바울이 말하려는 것을 듣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회당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였을 뿐 아니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으면" 하도록 간청하였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집회에서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말씀은 해석되고 백성들에게 말씀이 주는 교훈을 전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그물을 치는 것이요 백성들에게 말씀이 유익이 되도록 필요한 것을 공급하므로 그들을 돕는 것이다. 즉 말씀을 그들의 삶에 적용하도록 돕는 것이라 하겠다.

(2) 집회를 주관하고 통솔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모이면 언제나 그들에게 권교의 말씀을 전할 준비를 해야 한다.

(3) 때로 낯선 교역자들에게서 들은 권교의 말씀이 그들이 잘 준비하여 전할 때 백성들에게 대단히 유익이 된다. 바울은 회당장들이 청하지 않았을 때도 "자주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였다." 그는 자주 그들과 다투면서라도 말씀 전할 기회를 만들었다(살전 2:2). 그러나 본문의 경우를 보면 일반적으로 다른 회당장들보다 이 회당장들은 더 고귀하고 관대하였다.

Ⅲ. 회당장들의 청에 응하여 바울이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행한 설교. 그는 그의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할 기회가 그에게 주어졌을 때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는 자기는 나그네이므로 이 일은 자기가 할 일이 아니라고 거절하지 않았다. 또한 유대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마지 못하여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마치 준비라도 한 사람처럼 "일어서서 손짓하여" 저희들에게 들을 자세를 갖추도록 하였다. 그가 연사처럼 손을 흔든 것은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지한 태도를 보여 줌으로 들으려는 열의를 불러 일으키려는 데 있었다. 아마 그들에게 말씀 전할 기회를 준 데 대하여 회당 안에서는 회당장들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이들은 바울이 설교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따라서 자칫하면 소동이 일어날 판국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점잖게 손짓을 해서 이런 움직임을 제지하려고 했다. 또한 그는 그들이 편견을 갖지 않고 참고 들어 주기를 바라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태어날 때부터 유대인인 이스라엘 사람들아 또 유대 신앙으로 개종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잠깐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시오. 내가 여러분들에게 영원한 평안에 관하여 말할 것이 있오. 그러니 내 말을 헛되이 듣지 말라"고 한다. 이 뛰어난 설교가 기록된 사실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들도 처음에는 유대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켜 그들에게 안위를 주기 위하여 대단히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유대 민족들에 대하여 전혀 편견을 없었다. 그들이 멸망하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돌이켜 살 수 있기를 바랐다." 설교 내용 하나 하나는 심판의 확실성을 보여 주며 유대인들의 감정을 상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약속된 메시야로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세심한 배려가 깃든 것이었다.

1. 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던 백성임을 상기시킨다. 이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은 자기와 특별한 관계를 갖게 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던 것이다. 아마 다른 나라에 살면서 타민족과 혼합될 위험을 안고 살았던 "흩어진 유대인들은" 본토에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 더 그들의 특이성을 지키려는 열심히 강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바울도 본문에서 그들의 영예를 높여 주기 위하여 매우 주의깊게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1) "온 땅의 하나님이" 특별한 방법으로 "이 백성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사" "그들과 계약을 맺으셨으며" 또한 그들에게 "다른 민족이나 백성들에게는 결코 알리시지 않은" 그의 마음과 뜻을 알려 주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그들의 이웃 민족들보다 구별되고 또 품위를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즉 특별한 교훈에 의하여 통치되어야 하며 특별한 약속에 의지해야 될 것이라고 말한다.

(2)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을 그의 친구로 선택하셨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리워졌다. 또한 그들의 조상들을 예언자들로 삼으시고 그들을 통하여 그의 뜻을 그의 교회에 나타내셨으며 그가 교회와 맺은 계약의 보증인으로 삼으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도 없고 또 이를 잘못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그들의 조상들과 맺으신 선택에 충실하셨기 때문이었다(신 7:7, 8). 그러므로 로마서 11장 28절에는 "저희가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기록하고 있다.

(3)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높이시고" 그들이 많은 영예를 얻게 하셨으며 그들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셨으며 "그들이 애굽 땅에서 나그네로 있을 때에" 진토에서 그들을 세우셨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아무런 조건도 없었지만 그렇게 은총을 베푸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채무자일 수 없음을 고백해야 한다. 그들에게 은총을 베푸신 것은 단순히 ex mero motu - 즉 그의 기쁨을 위한 것이었지 그들에게 적은 가치라도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들에게 신의 은총을 베푸신 것이 그의 뜻에 따른 것이었으므로 그가 원하신다면 이를 폐지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선민이라고 하는 울타리를 제거하신다고 하나님이 잘못하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그에게 빚진 자들이었고 그러기에 그들은 그는 그의 뜻대로 사실 것을 알고 그 뜻을 받아들여야 하며 또 그가 그의 교회에 이방인들을 더하실 계획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4) 하나님께서 "큰 권능으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다"고 말한다. 거기서 그들은 나그네였을 뿐 아니라 노예였으나 많은 기적을 베푸심으로 즉 그들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그들의 압제자들에게는 심판을 행하셨고("기사와 이적" 신 4:34) 또 많은 생명을 희생시키심으로 그들을 인도하셨다. 즉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이시고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 던지셨도다.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주리라"(사 43:3, 4).

(5)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약 사십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셨음을 말한다(18절)(‘에트로포레센5159’). 어떤 이는 본문을 ‘로포포레센(에트포포레센)’ - 즉 그가 그들을 교육하셨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70인 역에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돌보듯이 돌본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신 1:31). 두 가지 뜻이 다 포함되었다고 보겠다. 왜냐하면

①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사십년 동안 그들을 위하여 많은 양식을 공급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기적으로 빵을 먹이셨고 또한 기아에서 그들을 보호하셨다. "그들은 어느 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다."

② 그는 오랫 동안 그들을 참으셨다. 그들은 도전적이고 불평이 많고 믿음이 없는 백성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참으사 그들의 행위대로 갚지 아니하시고 노를 오랫 동안 참으시되 모세의 기도와 중재를 통하여 노를 돌이키셨다. 우리 각자가 이 세상에서 사는 연수가 여러 해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상냥하신 아버지로 모셔야 한다. 그는 우리에게 부족한 것을 공급해 주셨으며 "이 날까지 오랫 동안 우리를 먹이셨으며" 우리에게 하나님의 관용을 베푸셨고(그가 이스라엘에게 그리하셨듯이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신다. 느 9:17) "우리가 잘못한 것을 그대로 갚지 않으셨다." 그래도 우리는 그의 인내를 시험하였고 지칠 줄 모르고 그렇게 하였다. 유대인들도 그들의 선택의 특권을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이 특권을 수없이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6)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다(19절).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시고"(이들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뽑힘을 당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그들의 소유가 되게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는 징표이며 또한 그들에게 영예를 수여하신 증거이다. 그는 이 영예를 조금이라도 훼손시키려 하지 않으셨다.

(7)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능력을 부여받은 사람들을 일으키셔서 백성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또 가나안에 정착한 후 그들을 핍박하였던 자들의 손에서 그들을 자유케 하셨다(20,21절).

① 그는 그들에게 "사사를 세우셨다." 이들은 공직을 수행할 자격을 갖춘 사람들로서 pro re nata - 즉 사건이 생겼을 때 영혼에 부딪쳐 오는 호소를 따라 부름에 응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반역적인 백성이었지만 그들을 노예가 되지 않게 하셨고 설혹 죄로 말미암아 노예가 될지라도 그들이 간구하면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셨다. 성서 비평가들은 "약 사백 오십년 간"이란 기간을 계산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애굽에서 해방된 후에 다윗이" 여부스 족속을 시온에서 추방한 때까지가 "사백 오십년이 된다."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므로 이방 족속들을 완전히 추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는 주로 사사들이 통치하였다. 또 다른 견해가 있다. 즉 여호수아가 죽은 때부터 엘리가 죽은 때까지의 사사들의 통치 기간이 "삼백 삼십 구년이었다." 그러나 이 기간은 실상 사백 오십년이 되어야 옳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그들을 압제하던 몇몇 민족들의 노예로 있던 시기가 사사시대에 포함되기는 하였지만 역사에 기록되기는 마치 이 기간은 사사들이 통치하던 때와는 구별되는 것처럼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압제받던 시기를 합치면 "일백 십 일년"으로 "삼백 삼십 구년"에다 이를 더하면 사백 오십년이 된다고 본다. 그러나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② 그는 예언자 사무엘을 통하여 그들을 다스리셨다. 사무엘은 신의 영감을 받은 자로서 백성들의 문제를 다스렸다.

③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므로" 그들의 요구에 따라 "기스의 아들 사도"를 왕으로 세우셨다(21절). 사무엘의 통치와 그 후에 계속된 사십년은 신정통치에서 왕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④ 드디어 그는 다윗을 그들의 왕으로 세우셨다(22절).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폭정 때문에 그를 폐하시고 "다윗을 그들의 왕으로 세우시고" 그와 "그의 자손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시리라는 계약을 세우셨다." 그가 한 왕을 제하시므로 이스라엘을 목자 없는 양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곧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우셨다. 그를 세우시되 천하고 낮은 지위에서 일으켜 "높이 세우시었다"(삼하 23:1). 바울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증거를 인용한다.

첫째, 하나님의 선택은 거룩하였다. "내가 다윗을 세웠다"(시 89:20). 즉 하나님 자신이 그를 세우신 것이다. 발견하셨다 함은 그가 찾으셨음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그의 목적에 합당한 사람을 찾으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샅샅이 찾으셨고 그래서 발견한 것이 다윗이었다.

둘째, 다윗은 신적인 성품의 소유자였다.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이 바라던 자란 뜻이요 그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이 기뻐하신 자요 그가 합당히 여긴 자였다. 이러한 성격은 그가 처음으로 기름부음 받기 전에 그에게 수여된 것이었다(삼상 13:14).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였다"했으니 즉 그가 바라는 자임을 뜻한다.

셋째, 다윗의 행동이 거룩하였고 그는 신의 지시에 따라 행하였다. "그가 나의 뜻을 다 이룰 것이라." 즉 그는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기를 사모하였고 또 그 뜻대로 행할 능력이 있었으며 그 일에 임명되자 이를 철저히 행하였다. 이 모든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을 보여 줄 뿐 아니라(이런 사실을 인정하므로 이스라엘이 감사하는 심정이 되기를 사도는 바랐다) 그가 계획하고 있던 또 다른 성격의 사랑을 보여 주신다. 이제 그것은 복음이 전파됨으로 그들에게 제시되었다. 그들의 애굽에서의 석방과 가나안 정착은 "장차 올 좋은 것들의 표상이었다." 이스라엘의 정권의 교체는 그것이 완전한 것이 못됨을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영적인 메시야 왕국이 대두되어 이제 세워지고 있다. 그리고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그 나라를 수긍하고 그 나라에 복종하면 영적인 메시야의 왕국은 "그들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복음이 유대 교회의 우수성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는다면 그들이 복음 전도에 대하여 시기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2. 바울은 다윗으로부터 다윗의 자손에 걸쳐 설명하면서 우리 주 예수에 대하여 완벽한 설명을 그들에게 하고 있다. 또한 이 예수는 다윗에게 약속된 자손임을 보여 준다(23절). "이 사람의 씨에서" 즉 "이새의 자손으로부터" 또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속에 따라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였다." 그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 구원이 있게 된다.

(1) 이 소식이 그들에게 전해졌을 때 이것은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전파가 어떻게 환영되고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① 이 복음은 "그들의 원수의 손에서 그들을 해방시켜 준 구세주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옛날의 사사들이 원수의 손에서 그들을 건졌으므로 "구원자들"이라고 불리웠다. 그러나 이 구세주는 역사에 의하여 입증된 바와 같이 사사들이 할 수 없었던 일 즉 그들의 가장 큰 적인 죄에서 그들을 구원해 주신 분이다.

② 하나님은 구세주를 세우시고 그에게 하는 뜻을 이루도록 의탁하셨다.

③ 먼저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를 구세주로 세우셨다. "그는 그들에게 복을 빌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다." 복음이 이스라엘을 거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다시 모으려고 시도된 것이다.

④ 옛 왕가인 "다윗의 씨로부터" 구세주를 세우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윗을 영광으로 여겼다. 그러나 다윗 왕가는 현재 기억에서 망각되어 가므로 전 민족의 수치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음은"(눅 1:69) 그들에게 큰 기쁨인 것이다.

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구세주를 세우셨다. 이 약속은 다윗에게 주신 것이요(시 132:11) 후대에는 구약 교회에게 주신 약속이다.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렘 23:5) 하셨고 또 "이 약속은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바라던 것이었다"(26:7). 그러면 어째서 유대인들은 복음이 그들에게 주어졌을 때 이를 냉혹하게 받아들였는가를 후에 고찰하게 될 것이다.

(2) 이 예수에 관하여 바울은 그들에게 말한다.

① 모든 사람들이 예언자라고 인정한 위대한 인물 세례 요한이 그의 선구자였다. 앞서 세례 요한을 보낸 것은 백성들로 메시야의 내림이 너무 돌발적이었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같이 "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그들에게 이에 대하여 충분히 경고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영접할 것인지 여부에 대하여 생각할만한 여유가 있었다. 요한은 두 가지 일을 하였다.

첫째, 그는 몇몇 택한 제자들이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전파함으로 그의 오심을 예비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죄를 보여 주었고 "임박한 진노에 대하여 경고했으며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촉구하였다." 그리고 그는 엄숙한 의식이나 또는 세례의 표시에 의하여 구속되기를 바라는 이들에게 세례를 줌으로 그들에게 확실성을 안겨 주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백성들에게 주 예수를 위한 준비를 하게 하였다." 이같이 그들이 자신을 알게 되었으므로 그들은 메시야를 받아들여야 마땅하였다.

둘째, 요한은 메시야의 임박성을 알렸다(25절).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즉 그가 한참 정열적으로 그의 사명을 수행하고 또 한참 놀라울 만한 성공을 거두었을 때 그는 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는 그의 설교를 경청하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너희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너희는 어떤 견해를 지니고 나를 대하고 또 내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너희는 내가 너희가 기대하는 메시야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너희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나는 그가 아니다(요 1:20 을 보라). 바로 그가 문 밖에 서 있다. 보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그는 모든 점에서 나보다 뛰어나신 분이다. 나는 그의 가장 천한 직분 하나도 감당할 가치가 없는 자로다.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니 너희는 오실 분이 어떤 이인지 생각할 수 있으리라."

② 그를 환영하고 앞장서서 즐거이 그의 신실한 백성이 되어야할 유대인들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그의 핍박자가 되고 살인자들이 되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를 "구세주"라고 전파할 때 그는 그리스도의 치욕적인 죽음을 감추고 은폐시키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언제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전하였다." 그는 그의 백성 즉  거룩한 성이요, 왕의 도성이요, 그들의 통치자들이 거하는 곳인 "예루살렘에 거하는 자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셨다(27절).

첫째, 그들의 죄는 아래와 같은 것이었다. "저들이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으나" 즉 입증할 만한 죄도 없었고 의심할 만한 죄도 없었지만(그를 심문한 재판관까지도 그들이 그를 거스려 한 모든 말을 들은 후에 "그에게 아무 죄도 발견할 수 없노라"고 선언하였다.) "그들은 빌라도에게 그를 죽여 달라 하였다"(28절).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미친 듯이 비난함으로써 빌라도로 하여금 그를 처형하도록 강요하였다. 실상 빌라도는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았고 오히려 그의 양심에 거리낌을 느꼈다. 그들은 그에게 적은 죄도 적용시키지 못했지만 "참혹한 죽음을" 그에게 선고하였다. 바울은 베드로처럼 청중들에게 그 죄를 문책하지는 않는다(2:23). "너희가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죽였다"고 베드로는 책망한다. 그러나 바울이 그와같이 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유대인이더라도 그 사건이 일어난 곳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책임을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과 지도자들에게 돌렸다. 그러므로 그는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민족성에 대하여 긍지를 느낄 이유가 없음을 보여 주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와 같은 범죄를 자초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이 그렇게 학대한 메시야에게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지 않고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의 전파가 먼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게 하셨다.

둘째, 그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이유는 "그들이 그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27절). 그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고 그가 무슨 사명을 띠고서 세상에 왔는지도 알지 못하였다. "만약 그들이 이를 알았더라면 그들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사실 때문에 그들의 죄에 대하여 이해하실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저들이 그 하는 바를 알지 못하도다"라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알지 못하여 그리하였도다"라고 베드로도 말한다(3:17). 그들은 매 안식일마다 예언자들의 말씀이 낭독된 것을 들었지만 그것을 깨달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메시야가 고난을 겪으리라고 예언된 것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생각도 못했다. 그랬다면 그들은 결코 그의 수난의 도구 노릇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언서를 읽는 많은 사람들은 예언자들의 말씀을 알지도 또 성서의 의미를 이해하지고 못하고 읽는 경우가 많음을 기억하자. 그들은 복음의 말씀을 귀로 듣기는 하나 그 의미를 머리로 생각하지도 않고 마음 속으로 그 맛을 음미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미리 증거한" 예언자들의 음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였고 그 말씀을 어떻게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킬지도 몰랐다.

셋째, 하나님이 구약 예언의 성취를 위하여 그들을 다스리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상하지 말라는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정죄함으로써 성경 말씀을 응하게 하였다." 왜냐하면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단 9:26)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성서의 말씀을 어기므로 즉 그리스도를 박해하듯이 특히 교회를 박해하므로 인간이 성서의 예언을 응하게 할 수도 있음을 기억하자. 성서의 예언이 때로는 불분명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만약 예언이 분명하다고 하면 그 때문에 예언이 성취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본문에서 "저들이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선지자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반대로 그들이 예언의 말씀을 이해하였다면 그들이 예언을 성취시키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넷째, 메시야의 고난에 관하여 예언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29절).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즉 그가 목마르실 때 신 포도주를 마시라고 준 것에서 그의 장례에 관하여 예언된 것까지 다 성취되었다. 그들이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니" 이 말씀을 본문에 언급한 것은 부활을 더욱 부각시키려는 뜻에서였다. 그리스도는 무덤에 묻힌 사람들이 이 세상과 아무런 관계도 없고 또 세상도 그들과 관계가 없듯이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에서 완전히 떠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은 산 채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됨을 기뻐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그를 무덤에 누이고 그를 붙잡아 두었다고 생각하였다.

③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서" 썩음을 당하지 않으셨다. 이 사실은 우리가 전해야 할 위대한 진리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주요 기둥이고 이 기둥에 의하여 복음이라는 전 건축물이 지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사실을 중대하게 다루고 있다.

첫째, 그는 하나님의 승낙으로 부활하셨다. 그가 우리 죄로 인하여 무덤에 갇히셨을 때 자기 자신이 옥을 깨뜨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가 체포되신 멍에에서 정당하고 법적인 절차에 의하여 풀려 나오셨다(30절). "하나님이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는 천사를 보내사 무덤을 막았던 돌 문을 제거하시고 예수께서 죽으시면서 그의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셨던 영혼을 그에게 돌려 주셨다. 그리고 성령으로 그를 소생케 하셨다. 그의 적들은 그가 언제나 무덤에 누워있기를 바라서 그를 그곳에 두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단연 거부하셨다. 그리고 그의 목적과 그들의 목적 어느 것이 이루어질 것인가를 나타내셨다.

둘째, 그가 부활하셨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었다(31절). 그는 그를 친숙하게 잘 아는 사람들에게 여러 곳에서 여러 가지 경우에 "여러 날 보이셨다." 그들은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로," 그를 끝까지 수종하였고 이제는 "백성 앞에서 그의 증인들이었다." 그들은 증인으로 임명받았고 여러 번 그 일을 증거하였으며 늘 그런 준비를 갖추고 지냈다. 그리고 같은 목적을 위하여 그들은 죽었다. 바울 자신이 그를 보았다고 증언한 곳은 없다. 그가 고린도 전서 15장 8절에서 언급한 것은 환상이었던 것 같다. 이 환상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났던 것보다 그에게는 더욱 확실한 것이었다.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족장들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였다. 그것은 참된 소식이었을 뿐 아니라 좋은 소식이었다. "우리가 이를 전파하되 기쁜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는도다(32, 33절). 이 소식을 특별히 너희 유대인들은 받아야 하는도다. 우리가 이 교리를 전함으로써 너희를 비방하려는 것도 또 너희에게 잘못을 행하는 것도 아니라. 만약 너희가 이를 바르게 받아들이고 옳게 이해한다면 큰 영예가 되며 만족을 줄 것이라.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으므로 너희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이 너희에게 이루어졌도다"라고 말한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약속이 주어진 것은" 그 민족의 품위를 높여주는 것임을 인정한다(롬 9:4). 또한 그들은 처음 약속이 주어진 조상들의 자손들이므로 그들이 약속의 후예임도 인정한다. 구약에서의 위대한 약속은 메시야에 대한 것으로 "그를 통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복을 받을 것이었다."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에게서 일어났다는 것은 그 가족의 특별한 명예이기는 하지만 축복은 아브라함의 가족에게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의 다 같은 이익을 위해서였다. 이같이 그는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세움을 받으셨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하나님께서 "예수를 세우셨다는 사실이다. 그는 예수를 높이셨다"(본문에). 저를 "다시 살리셨다 함은"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뜻한다. 우리는 두 가지 의미로 다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세례를 베품으로 예언자로 세우셨고 그의 죽으심으로 죄를 속하는 제사장으로 세우셨으며 그의 승천으로 모든 사람을 통치하는 왕으로 세우셨다. 또한 "죽는 자들 가운데서 그를 세우심"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 모든 일을 맡기신 확인이요 비준이었고 하나님께서 그를 이러한 직책에 봉하신 증거였다.

2. 이것은 조상들에게 행하신 약속, 즉 메시야를 보내시겠다고 한 약속의 성취이다. 또한 그를 통하여 그와 함께 맛보게 되는 모든 축복과 이익에 대한 약속의 성취이기도 하였다. "이 사람이 오시리라고 하신 바로 그분이라. 비록 너희가 바라던 대로는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메시야를 통하여 주시겠다고 한 약속이 모두 이룬 것이로다." 바울은 이 약속이 성취된 유대인들 가운데 자기도 속해 있음을 말한다. "우리가 그들의 자손들이라." 이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민족의 원수로 여기는 대신에 "이 좋은 소식을 전하였다면" 그들은 복음 전하는 사람들을 그들의 절친한 친구로 받아들이고 두 손으로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야 마땅하였다. 왜냐하면 만일 유대인들이 약속을 그토록 귀중히 여긴다면 그만치 그 약속대로 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것 때문에 유대인들이 가장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그들에게 행한 약속 자체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온 세상 사람들이" 메시야를 통하여 축복을 받으리란 말씀이 성취될 수 없는 것이다.

넷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이며 시편 2편에 있는 말씀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란 말씀을 확인해 주고 있다. 죽은 자로부터 그리스도가 부활한 사실을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로 제시하려고 하였다는 것은 사도의 다른 글을 보아서도 명백하여진다(롬 1:4).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도다." 그가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에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그에 관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마 3:17) 선언하셨다. 이 말씀은 시편 2편에 있는 "너는 내 아들이라"는 말씀을 명백히 인용한 것이다. 이 말씀 속에는 상당한 진리가 숨겨있다. 즉 이 예수는 "만물이 창조되기 전에 아버지에게서 출생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출산되었으므로 그의 인격이 표현된 형상이었다." 그는 영원한 마음에 대해 영원히 사모하는 마음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의 몸에서 잉태된 분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눅 1:35) 칭하여진 것이다. 그는 세상을 창조하고 통치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대행자였고 세상을 대속하시고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셨다. 그는 "그의 집의 아들과 같이 성실하셨으며" 그러므로 "만물의 후사가 되셨다." 그리스도께서 세례받으실 때에 선포되었고 다시 그가 변형되실 때에 확약되었던 이 모든 사실이 부활에 의하여 부정할 수 없이 명백히 증거되었다. 이미 오래 전에 선언되었던 선서가 확실히 나타났다. 그리고 죽음이 그를 가둘 수 없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러므로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생명을 묻어 두실 수 없고 다시 회복하셨다. "그의 영원한 출생이 언급되었다고 해도"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는 말이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계시므로 그에게는 하루도 영원한 날에 속한다. 이 말씀은 부차적 의미에 있어서 그의 부활에도 적용된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도다. 오늘날 내가 네게 준 바 모든 것을 낳았도다"라고 이해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기록되기를(벧전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 즉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 하였기 때문이다.

다섯째, 그가 썩음을 당하지 않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셨으며 다시는 부패할 수 있는 것이 되지 않기 위하여 즉 다시 산 사람들이 다시 죽을 수밖에 없는 것같이 죄시지 않기 위하여 하늘의 생명을 입으셨다는 사실은 더욱 그가 약속된 메시야임을 확증하는 것이다.

(1) 그는 부활하사 더 이상 죽지 않게 되셨다. 로마서 6장 9절에는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며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암이로다"라고 말씀되고 있다(욥 17:14). 나사로는 무덤에서 나올 때에 그의 수의를 입은 채로 나왔다. 왜냐하면 그가 다시 수의를 입어야 되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다시는 수의와 관계가 없으셨으므로 그것들을 무덤에 남겨 두시었다. 이 사실도 성서의 성취로 이루어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를 주리라"고 기록되었다(사 55:3). 여기서 ‘타 호시아 다비드 타 피스타’(13:34) - 즉 다윗에게 허락된 거룩한 것 곧 확실한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다윗에게 하신 약속과 또 그에게 그리스도에 대하여 하신 약속에 대하여 하나님의 신실성이 대단히 강조되고 있다(시 89:1, 2, 5, 25, 33). 하나님은 이 일에 대하여 "그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셨다(시 89:35). 그들에게 은혜를 공급하실 책임을 맡은 그가 사시고 다시는 죽지 않으신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큰 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영원히 사셔서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며 그가 우리를 위해 베푸신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지켜 보신다. 만일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시지 못했다면 또는 그가 부활하셨어도 다시 죽을 수밖에 없었다면 우리는 확실한 은혜를 상실하게 되거나 적어도 은혜를 확신하지 못하고 말았으리라.

(2) 그가 죽은 후 곧 다시 사셨으므로 그의 육체가 썩음을 당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삼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시체가 부패되기 때문이다. 이 사실도 다윗에게 약속되었다. 즉 이것도 "다윗에게 허락된 확실한 은혜"의 하나로 시편 16편 10절에 그에 관하여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이다"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35절).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의 자손 가운데서 메시야를 세우시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이 되셨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과 같이 그는 썩음을 당하지 않으신다. 이 약속은 다윗에게서 성취될 수 없었고 그리스도를 바라고 주어진 약속이었다.

① 이 약속은 다윗 자신에게서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36절). 왜냐하면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즉 그를 왕의 자리까지 이르게 하신 그분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조상 다윗의 생애와 죽음과 그의 장사에 대한 설명과 그가 계속 죽음의 세력 아래 놓여있다는 설명을 대하게 된다.

① 그의 생애. 죽음의 잠을 자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기의 시대를 섬겼다." 다윗은 유익하고도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세상에서 좋은 일을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그의 통치를 통하여 실현시켰다. "그는 자기 시대를 섬기므로써" 이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겼다. 그는 헌신적이며 또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인물이었다(그러므로 삼하 3:36 에는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였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는 계속 하나님의 신실한 종으로 자기를 지킬 수 있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을 보라. 그는 인간의 선을 이루기 위하여 섬겼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를 따라 섬기지 않았다. 또한 그는 이를 명하시고 또한 공직을 수행할 자격을 부여하시고 그 일에 부르신 하나님의 섭리의 뜻에 의하여 "자기 세대를 섬겼다."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모든 피조물은 우리에게 관활할 책임이 주어진 것이다. 다윗은 그가 살던 시대를 위하여 큰 축복이 되었다. 그는 그의 세대를 위한 종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세대에 대하여 자주와 온역과 멍에 노릇을 하였다. 낮고 천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그들이 "자기의 세대를 섬기기 위하여" 산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선행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어야한다"(고전 9:19).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공동체의 일원들로서 이 공동체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만 다윗과 그리스도 사이에는 이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다윗은 오직 그의 세대만 섬겼다. 즉 그가 살고 있는 세대만 섬겼고 그러므로 그가 할 일을 다 마쳤을 때 또 그가 기록할 것을 다 기록하였을 때 그는 죽어 무덤에서 계속 갇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다윗과 같이 다만 기록된 자신의 글이나 말씀만 아니라 그의 인격적인 능력으로도) 모든 세대를 섬기셨고 영원히 사셔서 다윗과 같이 사십년 동안만 아니라 야곱의 집을 영원히 통치하실 것이며 태양과 달이 계속 존재하는 한 모든 세대를 섬기실 것이다(시 89:29, 36, 37). 그의 보좌에 좌정하신 연수는 천상의 날과 같은 것이요 모든 세대가 그에게서 축복을 받게 된다(시 72:17).

② 그의 죽음. "그가 잠들다"라고 하였다. 죽음은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과 또 그들의 세대를 위하여 섬기느라고 수고한 사람들에게는 잠 곧 평안한 휴식이다. 그가 그의 세대를 섬기기를 마치기까지 즉 하나님이 그를 세우신 바 그 일을 다 완료하기까지 그는 잠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종들은 그들에게 위탁된 일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한 날의 일과를 다 마치기 전에는" 쉼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의 증인들은 그들이 그들의 증언을 완료하기까지 결코 죽지 않는다. 그런 다음에야 "땀 흘린 자의 휴식인" 잠 곧 죽음에 이르게 된다. 다윗에게는 성전 건축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를 마쳤을 때 - 이 일을 위하여 그는 택하여졌는데 - 그는 잠들고 솔로몬에게 일을 물려 주었다.

③ 그의 장사. "그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묻혔다." 그가 "다윗성에 장사되고"(왕상 2:10) 베들레헴에 있는 그의 아버지 이새의 묘실에 묻히지 않았지만 "그가 조상들과 함께 누웠다"라고 말씀되고 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무덤은 우리 앞서 간 사람들 곧 우리 조상들의 거주지이기 때문이다(시 49:19).

④ 그가 계속 무덤에 머물러 있음. "그는 썩음을 당하였다." 확실히 그는 다시 살아나지 못하였다. 베드로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2:29).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썩음을 당하였고 그러므로 이 약속이 그의 안에서 성취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② 이 사실은 주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37절).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다." 왜냐하면 그의 안에 확실한 은혜가 우리를 위하여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삼일만에 부활하셨고 그러므로 당시에 썩음을 맛보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는 부활하신 후 다시 죽지 않았으므로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예수에게서만이 약속은 이해되어야만 하고 다른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3) 바울은 그들에게 주 예수에 대하여 설명한 후 이 사실을 그들과 관련시킨다.

① 설교 도중에 그는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하여 청중들에게 그들도 모두 이 일에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였다(26절). "이 구원의 말씀을 너희에게 먼저 보내셨도다"(한글 개역과 다소 다름. 역자 주). "만약 너희가 너희 불신앙으로 이 말씀은 너희의 구원을 위하여 너희에게 전해진 것이로다. 그러므로 너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는 너희의 잘못이로다"라고 말한다. 그들이 이 말씀은 그들이 교제도 하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것이지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라고 핑계하지 못하게 되기를 그는 바랐다. 그러므로 먼저 그들을 위하여 복음은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이 복음은 바로 너희에게 전해진 것이지 타락한 천사들을 위한 것은 아니로다. 살아있는 인간인 너희를 위한 것이지 죽은 자나 저주받는 자를 위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생명은 이미 끝난 것이로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에게 부드럽게 경의를 가지고 말한다. "여러분 형제들이여"라고 그는 서두를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복음의 말씀이 그들에게도 전하여졌으므로 우리와 같이 큰 구원을 위한 기회에 동참한 모든 사람들을 우리도 존경해야 한다. 이제 바울이 하늘의 지시에 따라 본문에서 "구원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자.

① 순수한 혈통의 유대인들로서 바울 자신처럼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들이었다. "아브라함의 후예들이여 너희가 비록 타락하였다 하더라도 너희에게 전해졌으니 죄에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고 말한다. 좋은 가문 출신이란 것은 대단히 유익한 일이다. 반드시 구원의 말씀만은 먼저 그들에게 전파된다. "아브라함이 그의 자녀들과 가족들에게 그를 따르라고 명하였다"함과 같다.

② 개종자들로서 본래 이방인이었으나 유대교로 전향한 사람들이었다. 본문에는 이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너희가 자연종교에 대하여 지식이 있고 또 자연법에 복종하였으며 그 신앙의 위로를 의지하였도다. 그러한 너희에게 구원의 말씀이 전하여졌노니 이제 더욱 계시 종교에 대하여 알고 그 취지를 깨달아 준비를 갖추자. 그리고 이 법도를 기쁘게 받아들여 유익함을 얻도록 하라"고 말한다.

② 설교를 끝내면서 그는 그가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씀한 것을 청중들에게 적용한다. 그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하여 오랜 시간 말하였다. 그러면 이 모든 말씀이 과연 그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제 그는 이 관계를 그들에게 명백히 말해 준다.

① 만약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이 구원의 말씀을 믿으면 말할 수 없이 유익하리라고 한다. 복음이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위험에서 그들을 자유케 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을 범죄로부터 자유케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이것을 알지니 우리는 너희에게 이것을 전하도록 사명을 받았도다. 또한 너희는 이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불리어졌도다." 그는 그들 앞에 공연히 서서 설교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회개시키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들을 위하여 설교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성을 지닌 피조적 존재요 그러기에 설득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나누고 상대할 수 있는 형제들이었다. 더구나 같은 본성을 지녔을 뿐 아니라 같은 민족이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청중들을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이같이 친숙하게 부름으로 그들의 번영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들이 전하는 복음에 대하여 그들은 동등한 입장에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 알려 줄 두 가지 사실이 있다. 하나는 이 말씀이 왕 중 왕이 자기의 왕위와 왕권을 더럽히고 반역한 인간들에게 허락된 사면장이란 사실이다. 이 은총의 법령이 통과되고 선포된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중재를 서신 때문이었다(38절).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 사람을 힘입어 너희에게 죄의 사유가 전파된 것이라(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역자 주).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말하는도다. 너희 죄가 아무리 많고 크다 하여도 용서될 것이라. 하나님의 영예를 손상시킴이 없이 죄사유는 이루어질 것이며 너희도 이를 얻게 되리라. 우리가 죄사유를 위한 회개와 또한 회개와 죄사유를 주시는 신의 은총을 전하는도다. 이 사람을 힘입어 죄가 사유된다. 그의 공로로 그것은 구입된 것이며 그의 이름으로 제공되었고 그의 권위에 의하여 그것은 수여되었도다. 그러니 너희가 그를 사귀고 그와 친해지는 일에 관심을 갖자.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 죄사유를 전하는도다. 그것은 우리가 너희에게 소개하는 구원이요, 하나님의 말씀이라. 그러니 너희는 우리를 친구로 또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자로 맞아 영접하는 것이 합당하도다.

둘째, 복음이 모세의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하여 열심이었다. 왜냐하면 율법이 속죄와 화해의 희생제를 명령하며 여러 가지 순결의 제사를 지시해 주기 때문인데 이를 통하여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상상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단연코 "아니다"라고 말한다. "의인(義認)은 그리스도를 하여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그 외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더러운 죄에서 의롭게 되지 못한다.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는도다"라고 말한다(39절). 그러므로 그들은 복음을 환영하고 영접해야 하며 복음에 반대되는 율법을 추종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율법에 대한 완성이지 율법의 폐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첫째는 죄인은 의롭다함을 얻고 죄에서 용서를 얻으며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을 최대의 관심사로 여겨야 한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참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은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는 사실이다. 만일 죄가 조금이라도 있어서 그를 추궁한다면 그는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 죄인이 의롭게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모세의 도덕법으로 우리는 완전히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그것을 어겼고 날마다 그것을 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해 주는 대신에 우리를 정죄한다. 모세의 정결법으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씻기지 못하며 하나님의 손상된 의를 만족시키거나 죄인의 상처받은 양심을 평정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만 의식적이고 형식적인 제도일 뿐이었다. 히브리서 9장 9절, 10장 1, 4절을 참조하라. 넷째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우리가 완전한 의롭다하심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를 통하여 죄에 대한 완전한 속죄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삼판자로서의 예수를 통하여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義)이신 그분을 통하여 즉 "의로우신 주님"을 통하여 의롭게 된다. 다섯째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의지하며 자신을 포기하여 그의 통치 아래 자신을 맡기는 모든 사람들은 그에 의하여 의롭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외에 그들이 의롭게 될 길은 없다. 여섯째는 "율법이 연약하므로 할 수 없는 그것을" 그리스도의 복음이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과 그 제도의 명예를 높이려는 열심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과 더 완벽한 제도를 정하려는 계획에 대하여 시기심을 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②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고 그들에게 제시된 선물에 등을 돌려댄다면 그들에게 가장 큰 불행이 될 것이라고 한다(40, 41절). "그런즉 주의하라. 이제 너희에게 귀한 초청장이 주어졌도다. 그러니 자신을 돌아보아 그것을 소홀히 여기거나 반대하지 않도록 하라" 한다. 복음을 전해 받은 그들은 시험을 받으셨으되 선을 행하신 분에게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주어진 은총을 거절한 자들로 발견되지 않도록 관심을 가지고 주의해야 한다. "너희가 믿는 자에게 주어지리라고 예언서에  말씀된 축복을 잊어버릴까 주의하라. 또한 불신을 고집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리라고 예언서에 예언된 운명에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너희는 선지자들에게 말씀된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조심하라." 위협은 경고를 위한 것임을 기억하자. 완고한 죄인에게 오리라고 말씀된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닥치지 않도록 경고하여 우리를 일깨우고자 한 것임을 기억하자. 하박국 1장 5절에 예언의 말씀이 수록되어 있다. 거기에는 갈대아인들이 유대 민족을 파멸하되 족히 비교할 유폐가 없을 정도로 파멸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제 이 말씀은 로마인들을 통하여 이 민족에게 닥친 파멸에 대해 적용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사도는 칠십인역을 사용하고 있다. 거기에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라고 기록되었다(히브리판에는 "보라 이방 가운데 있는 너희여"라고 되어 있음). 왜냐하면 칠십인역이 그의 사용 목적에 더 잘 부합됐기 때문이었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첫째는 "예언서에서 말씀된 죄악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즉 복음과 복음의 전달자를 멸시하며 솔선하여 복음에 참여하려는 이방인들을 멸시하는 죄를 범하지 말지어다.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이란 말씀이 너희에 대한 말씀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이다. 신앙을 멸시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패망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들은 신앙을 그들 수준 아래의 것으로 취급하고 신앙에 고개 숙이는 것을 기쁘게 여기지 않는다. 둘째는 "예언서에 말씀된 심판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즉 너희가 놀라고 망하되 완전히 망하리라. 너희의 파멸에 자신도 놀라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놀라리라"는 뜻이다. 기이히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받지 않는 사람들은 놀라고 멸망할 것이다. 교회에서 특권이나 누리고 이러한 특권들로 자기들은 구원받을 거라고 스스로 속이는 사람들은 그들의 헛된 자만이 폐기되고 그들의 특권 의식이 더욱 그들을 용서받을 수 없도록 정죄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놀랄 것이다. 불신의 유대인들이 기대할 것은 하나님이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는 사실뿐이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예언으로 볼 수 있다. 한 가지 가능성은 그들의 죄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의 우대한 업적 곧 그리스도를 통한세상 구원이 그들에게 가장 엄숙하게 선포되었다 할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의심이 많다. 그러므로 이사야 53장 1절에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라고 말씀되어 있다. 그것이 못하실 일이 없고 그의 선포에는 거짓이 없는 하나님의 이루신 일이었지만 그들은 믿으려 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들의 시대에 이 일을 이루셨으므로 영예와 특권을 지닌 그들이었으나 그것을 믿을 수 있는 은혜는 없었다. 다른 가능성은 이것이 그들의 파멸에 대한 예언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유대 국가 조직이 해체되고 하나님 나라가 그들에게서 취한 바 되어 이방인에게 넘겨지고 그들의 성전과 거룩한 성이 파괴되며 백성은 흩어지리란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하늘의 사랑을 받은 민족인가를 생각할 때 이러한 일이 그들에게 일어나리라고 믿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에게 미친 재난은 전에 있던 어떤 백성에게도 결코 있어보지도 못한 것이었다(마 24:21). 갈대아인들에 의하여 그들이 망하리라는 말씀이 예언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멸망을 보면 그것이 사실로 입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갈 줄은 세상 열왕과 천하 모든 백성이 믿지 못하였도다"(애 4:12)라 하였고 "행악자에게는 재앙이 아니겠느냐"라고 말씀되었다(욥 31:3). 특히 그리스도를 경멸하는 자들이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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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시디아 안디옥에서의 바울(2)(행 13:42-52)

이 내용은 사도들 특히 바울의 변명이 그 중심이 되고 있다(로마서 11장에서도 그는 자세히 자기를 변명한다). 이 사건은 그가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한 데 대한 유대인들의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바울은 신중하게 깊이 생각하고 이 일에 대처하고 있음을 본문에서 보게 된다.

Ⅰ. 유대인들 중에는 이방인에게가 아니라 자기들에게 복음이 증거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격노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복음을 참고 듣지 않고 바울과 그의 가르침을 경멸하고 또 청중들을 훼방하려는 목적으로 바울이 설교하는 동안 "회당에서 나갔다"(42절) (42절의 내용은 AV와 한글 개역 간에 차이가 많으므로 AV 내용을 소개한다.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나가니 이방인들이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그들에게 전해 줄 것을 간구하더라." 역자 주). 그들은 서로 수근거리며 뜻을 합하여 그를 비난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행위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입증하였다.

1. 그들의 공개적인 불신앙이다 .복음을 듣는 것이 신앙인데 비하여 이것은 명백한 불신앙의 고백이었다. 그들은 공공연히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과 법도에 대한 경멸을 표하였고 또 이를 부끄러히 여겨 낯을 붉히지도 않았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복음에 대한 편견을 주입하려고 애썼다. 그들은 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이 악독한 행위에 끌어드렸다.

2. 완고한 불신이었다. 그들이 회당을 나가므로 그들은 복음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타내려 하였고 나아가서 믿지 않으려고 결심했기 때문에 그들을 설득시키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나간 것이었다. 그들은 귀먹은 살무사가 되려는 듯 귀를 틀어막았다. 그들은 자진하여 복음에서 떠났다. 그들은 누가 그들을 내보내지도 않았는데 교회 밖으로 나갔다. 그러므로 복음이 그들을 지나쳐 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들이 그를 떠나기 전에는 결코 먼저 떠나시지는 않는다.

Ⅱ. 이방인들은 거칠고 불평이 가득찬 유대인들이 복음을 듣지 않으려고 나간 것과는 대조적으로 기꺼이 복음을 들으려 하였다. "그들이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이같이 능력있는 말씀을) 전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안식일은 "다음 주간 사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왜냐하면 주간 중 둘째 날과 다섯째 날을 어떤 회당에서는 강론을 위한 날로 정하고 지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함께 모인 것은 다음 안식일이었다(44절). 그들은 다음과 같이 간구하였다.

1. 유대인들에게 전했던 것과 같은 말씀을 그들에게도 전해 달라고 정하였다. 지금까지 바울은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들에게만 구원의 말씀을 증거하였고 이방인들에게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그런 것처럼 그들에게도 그리스도를 통한 죄사유를 전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유대인들이 버리고 짐스럽게 여긴 것을 그들은 동경하였다. 이제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초청을 받은 것처럼 그도 초청을 받았으므로 바울은 그들에게 떳떳이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누가 그토록 간절히 먹을 것을 구하는 자에게 생명의 떡을 나눠 주기를 거절할 수 있는가. 또한 식탁에서 자녀들이 먹는 떡이지만 문 밖에서 구걸하는 그들에게 어찌 나눠 주기를 거절하겠는가?

2. 같은 교훈이 그들에게도 전해지기를 바랐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들었었다. 그러나 한 번 들어서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또 그들이 들은 것을 모두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다시 복음을 전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복해서 듣는 것은 좋은 일임을 기억하자. 우리는 들은 것이 우리 속에 깊이 뿌리가 내리고 제자리에 단단히 박힌 못과 같이 되기 위하여 다시 듣기를 바라야 한다. "같은 말을 듣는 것이" 수고로움이 없고 안전하기 때문이다(빌 3:1). 이방인들이 그들 유대인들이 다시는 듣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다시 듣기 바랐으므로 유대인들의 감정이 상하였다. 유대인들이 그들에게 보여 준 나쁜 본을 좇지 않은 이방인들의 훌륭한 성품을 찬양하는 바이다.

Ⅲ. 얼마의 유대인들과 또 많은 이방의 개종인들이 복음 전도를 듣고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복음을 전도함으로 유대인의 특권을 부인하는 행위라고 공격하는 자들은 그들이 늘 그랬던 것과 같이 "그들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버리는도다"라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바울은 "일이 그렇지 않도다. 오히려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 아나에서 생활한다"고 반박하였다. 바울 자신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롬 11:5). 또한 본문에도 이렇게 기록되고 있다.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았고" 그들로부터 더욱 교훈과 고무적인 말씀을 듣고자 하였다.

1.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에 복종하였고 복음이 주는 이익과 위로를 허용받았다. 이 말은 그들이 계속하여 가르침을 받는 생활을 한 것을 의미하였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좇았다." 그들은 두 사람의 제자들이 되었고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그리스도에게 귀의시킨 사람들은 또한 그의 종들에게 자신들을 소속시키고 그들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는 비록 이방인들에게 보냄을 받았지만 유대인들 중에 즐거이 그들의 교훈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환영하였고 또한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 모두에게 호의를 보였다.

2. 그들이 기독교 교훈을 받아 그 안에 거하도록 그들을 격려하였다. 자유스럽게 그리고 할 수 있는 우정을 표하여 그들에게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였다." 또한 그들이 받은 것을 굳게 잡고 은총의 복음을 계속하여 믿으며 은총의 성령을 의지하고 은총의 방법에 의지할 것을 권고하였다. 하나님의 은총 속에 계속 살려는 사람들에게는 그 은총이 결코 사라짐이 없을 것이다.

Ⅳ. "다음 안식일에도" 복음 전도를 모두 즐거이 들었다(44절). "온 성이 거의" (일반적으로 이방인들이 거하는 곳을 말함)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였다."

1. 바울과 바나바는 주간 중에도 태만히 지내지 않고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며 그에 대한 기대를 불러 일으키려고 온갖 기회를 다 이용하였다(어떤 이들은 이방인들이 복음 듣기를 바랐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공적인 설교를 하였을 뿐 아니라 사적인 강론을 통해 또는 대화를 나눔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회당에서뿐만 아니라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과 성문 곁에서 지혜는 전파되었다(잠 1:20, 21).

2.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안식일에 수다한 무리가 모였다. 어떤 이는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있나 하는 호기심 때문에 모였고 또 어떤 이들은 유대인들이 두 번째의 복음 전파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는가 보기를 원하여 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간 들었던 많은 사람들은 더욱 말씀을 듣기 위하여 왔고 또 그 말씀을, 그것에 의하여 우리가 다스림을 받고 심판을 받게 되는 "인간의 말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기 위하여 왔다. 이러한 정당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전도하였고 또 그는 그들 가운데 열심있는 청중들을 만나게 되었다. "추수할 때가 되어 밭이 희어졌으니" 그가 낫을 들어 추수하여야 했던 것이다.

Ⅴ. 유대인들이 이 모습을 보고 격노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들으러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보고 분이 가득 찼다(45절). "유대인들이 무리를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비둘기 떼가 그 집 문을 향하여 날아들 듯이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고 바울이 얼마나 힘을 얻을까 하는 점과 또한 이 많은 무리들 가운데 몇 사람 아니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을까 하는 염료를 하였다. 이 때문에 그들은 "시기로 가득 찼다."

1. 그들은 사도들이 백성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리고 사도들이 증거하려고 할 때 회당이 가득찬 것을 보고 초조하게 되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에게 품었던 심정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 것을 보고" 마음이 철렁하였다. 하늘 나라가 열려졌을 때 그들은 자기들만 들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남들이 들어가려고 하는 것도 못마땅하게 여겼다.

2. 그들은 사도들이 전한 가르침을 반대하였다. 그들은 "바울이 말한 것을 변박하고" 그들을 트집잡았으며 - 즉 변박하고 비방하면서 바울이 말한 모든 점에 대하여 시비를 따지며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양심과 분노를 가득 품고 대들었다. 그들은 사도들의 모순됨을 주장하였고 아무도 그들을 말릴 수 없었다. 그들은 공격을 위한 공격을 했고 가장 명백한 것을 부정하였다. 그리고 반대의 기색이 없는 것을 알자 온갖 악한 말로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비난하면서 공박했다. 하나님의 성령에 속한 것들을 받지 못하고 따라서 그것을 비난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은 그들의 말로써 처음을 시작하나 곧 악마의 화신인양 말을 하며 불경스러운 말을 지꺼린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비난을 시작하면 결국 신을 모독하는 말을 지껄이게 된다.

Ⅵ.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사도들은 유대인들에 대한 자기들의 책임을 벗게 되었다고 엄숙히 선언한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잠잠한 틈을 이용하여 자유로히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말씀을 전하였다. 이제 유대인들은 사도들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책임을 사도들에게서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자신들이 그렇게 행하였으므로 영구히 불평할 수 없었다. 여기서 그들이 행한 짓은 영구히 하나님 나라에서 그들을 분리시키는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속담에 이른 바대로 "전하여졌는데도 거절하는 것은 그들의 책임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복음을 전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였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다고 불평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였다"고 기록된다(46절). 지금까지 그들은 유대인들의 비위를 상케해서 복음전하는 일이 방해될까 두려워하여 유대인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전하였으나 이제는 담대히 전하게 되었다. 복음 전도자들은 때에 따라서 사자처럼 용감할 줄도 알아야 하며 뱀처럼 지혜롭게도 하며 비둘기처럼 순결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비방자들이 잠잠해지는 것은 복음 변호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다소의 희망이 있다면 그들에게 "부드럽게 가르쳐야 하지만"(딤후 2:25),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면 담대히 증거해야 하며 그들의 반대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그들에게 알려야 한다. 복음의 적들의 몰지각한 행위는 복음전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는커녕 더욱 용기있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기들의 정당성을 확실히 알고 있고 또 누구에게 증거해야 하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이제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들에게 은총의 복음을 전한 다음 이방인들에게 복음전하는 정당한 이유를 제시한다(이는 바울이 롬 11:14 에서 말한대로). "이는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키게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었다."

1. 그들은 유대인들이 먼저 복음 전함 받을 자격이 있음을 인정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약속에 주어졌고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들이요 또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먼저 보냄을 받은 너희에게 먼저 전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리스도께서 복음 전도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시작하라"고 명하신 것은 유대인에게서 시작하여 다른 지방으로 가라는 전략적인 지시였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주어졌기 때문아" 복음 전파로 먼저 그들에게 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7장 27절의 "자녀로 먼저 먹게 할지니"란 말씀과 같다.

2. 그들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한 데 대하여 책임을 지웠다. "너희가 스스로 버렸다." 너희가 제공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대적하였다고 말한다. 만약 인간들이 그들에게서 복음을 제외시키려 한다면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복음을 취하여 버리신다해도 마땅한 일이다. 만나가 싫어서 그것을 "하찮은 떡"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만나를 줄 필요가 없으며 또는 복음의 특권을 버리고 "다윗에게 붙어 봐야 돌아 올 몫은 없다"(삼하 20:1 , 공동 번역 참조)고 말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억지로 떠맡길 필요가 있겠는가. 이렇게 하여 그들은 스스로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여 버린다. 다음과 같은 뜻에서는 우리가 영생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우리 안에는 또는 우리가 행한 것으로는 아무 것도 우리가 이것 때문에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춘 것이라고 주장할 만한 것이 없다는 뜻에서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 입장이 다르다. "너희는 영생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도다. 너희는 모든 너희의 권리를 포기하고 말았도다. 너희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영생을 맡기신 분의 손에서 그것을 받기를 거절하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는 자로 자처하였노라. 오직 그리스도 한 분에 의해서 영생은 수여될 수 있는데 너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를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그러므로 너희가 절대 영생을 소유하지 못할 것은 분명하도다"라고 말한다.

3. 이 사실에 근거하여 그들이 무할례자들에게 복음전하는 이유로 삼는다. "너희가 영생이 전하여졌는데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너희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이 받아들일 것이다. 결혼식에 먼저 초빙을 받은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면 결혼식장을 손님으로 가득 채워야 하므로 큰 길과 모퉁이에 서서 참석하기를 원하는 자로 초청하리라. 친척이라도 친척의 할 바를 못한다면 다른 사람이 그것을 차지할 것이요 그렇다고 그들이 불평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룻 4:4).

4.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전하는 것이 신의 명령이라고 정당화시킨다(47절).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셨도다. 주 예수께서 먼저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그의 증인이 되라고 명하시고 다음 땅 끝까지 가서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고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으라 지시하셨도다." 이것은 구약에서 예언된 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메시야가 유대의 불신을 예상하고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도다"라고 말할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소리를 듣는다. "이스라엘이 모이지 않는다 하여도 그는 영광을 받으리라." 또한 그가 헛되이 피 흘린 것도 아니요 몸을 헛되이 구속물로 준 것도 아니요 헛되이 말씀을 전하거나 그의 성령을 주신 것도 아님이 말씀된다. "내가 너를 세워 이방의 빛으로 삼았노라. 또한 잠간동안 비추이는 빛이 되게 하여 네가 땅 끝까지 구원이 되도록 하리라" 하신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그리스도는 구세주이실 뿐 아니라 자신이 구원이시다. 그 자신이 우리의 의(義)시며 생명이요 힘이시다.

(2) 그리스도께서 구원이 되도록 예정된 곳에서는 어디서나 그는 빛이 되시어 사람들의 눈을 밝히시며 영혼을 구원하신다.

(3) 그는 땅 끝까지 이르러 이방의 빛과 구원이 되신다. 그는 모든 민족들을 환영할 것이요 모든 민족이 그에 대한 소식을 들을 것이다(롬 10:18). 그리고 모든 나라가 결국은 그의 왕국이 될 것이다. 이 예언은 그리스도의 왕국이 우리의 섬 나라 영국에 이루어지므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영국은 아는 바대로 땅 끝이요, 세계의 한 모퉁이인 것이다. 때가 되면 그리스도의 왕국은 더욱 완성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와야 하기 때문이다"(롬 11:25).

Ⅶ. 유대인들이 경멸조로 거절한 복음을 이방인들은 기쁘게 받아들였다(48, 49절). 상속자가 없어서 땅을 물려 주지 못하는 경우는 없는 법이다. "유대인들이 넘어지므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렀고… 저희의 넘어짐으로 세상의 화해를 이루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된다." 이 사실을 바울은 로마서 11장 11, 12, 15절에 광범위하게 다룬다. 본 가지인 유대인들이 잘리웠으므로 들감람나무 가지인 이방인들이 접붙임을 받는다(롬 11:17, 19). 이제 본문은 이방인들이 그들에게 복음의 차례가 온 것을 얼마나 기뻐하였는가에 대하여 전해 주고 있다.

1. 그들은 복음의 위로를 받아들였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였다." 그들이 의례적인 율법에 복종하고 유대교로 개종하는 것보다 더 명백하고 가까우며 나은 방법에 의하여 하나님과 계약을 맺고 그와 교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좋은 소식이 되었다. 이제 분리의 벽은 무너지고 그들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메시야의 왕국의 특권을 누리도록 영접되었고 유대인에게 굴종하지 않고서도 약속을 나누어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온  백성에게 미치는 기쁨의 가장 큰 소식이었다." 우리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주어졌다는 것과 그것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기뻐해야 할 문제임을 기억하자. 이방인들은 그들에게도 은혜가 주어졌다는 것을 듣고 은혜의 말씀이 그들에게 전파되고 은혜받는 방법들이 그들에게 알려지기만 하였는데도 "기뻐하였다." 이는 그들에게도 소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기뻐해야 할 때 그들이 과연 그의 안에 있는지 어떤지를 의심하므로 슬퍼한다. 황금홀은 이미 그들에게 내밀어졌고 와서 그 끝을 만지도록 허용된 것이다.

2. 그들은 이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였다." 즉 그리스도를 깊이 이해한 표시가 되는 것이다. 또는 복음을 찬양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들이 복음에 대하여 알수록 그들은 더욱 복음에 대하여 경탄하였다. 복음에는 얼마나 놀라운 빛과 능력과 보배가 따르는가. 그 진리와 사상과 약속들은 얼마나 훌륭한 것인가! 그것은 다른 모든 제도들을 훨씬 상회한다. 그리고 그 유래는 명백하게 신적이고 천상적인 것이다. 이같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찬양했다."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높게 하셨음이요"(시 138:2) "그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셨기 때문이다"(사 42:21). 그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찬양하였다.

(1) 이제 복음에 대한 지식이 널리 확산되고 유대인에게만 제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광채는 퍼져나갈수록 더욱 밝게 빛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것은 촛불 같지 않고 태양과 같아서 멀리까지도 강력하게 빛을 발한다.

(2) 이제 복음에 대한 지식이 그들에게도 이르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영광을 돌리는 길은 그것을 경험하고 말할 때이다. 즉 자기 자신이 그 능력에 의하여 압도당하고 그 인자함으로 위로를 받을 때 그렇게 할 수 있다.

3. 수다한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였을 뿐 아니라 신앙에 복종하였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영원부터 영원에 이르는 행복을 주시기로 약정한 자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참된 신앙을 주신다.

(1)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믿을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에 대하여 그는 은밀하고 능력있는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시키신다.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는 것은 아버지께서 그들을 이끌어내셨기 때문이요 성령이 그들에게 복음이 능력있게 역사하도록 도우셨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며(골 2:12)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바로 그 능력에 의하여 와진 것"이라고 말씀되고 있다(엡 1:19, 20).

(2) 하나님께서는 이 믿는 은혜를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에게 다 주셨다. 이는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신 것"이라 하겠다(롬 8:30). 또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라 함은 그들의 영원한 상태가 어떠한가 관심을 가지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확신하려는 목표를 지닌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 가운데 하나님은 영생을 보존케 하신다(요일 5:11). 그리스도는 영생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며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가 임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고레스 왕의 유대에 대한 해방 선포는 포로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으나 그것을 따른 자들은 다만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도록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사람들"뿐이었다(스 1:5). 그의 은총에 의하여 영생을 얻도록 작정된 자들은 그리스도 앞에 인도되어 믿도록 해야하며 이를 목적하고 살도록 도와야 한다.

4. 그들이 믿게 되자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자식과 그의 복음을 이웃들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49절).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복음이 시의 중심지에서 이의없이 받아들여지자 곧 그 지방 각처로 퍼졌다. 새로운 개종자들은 자진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 가운데 충만한 것을 전하려 하였다.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소식을 공포하는 자들이 큰 무리라"(시 68:11)(한글 개역에는 공포하는 여자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그리스도를 알게 또한  사람들은 자진하여 다른 사람들도 그를 알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노력을 하였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크고 부요한 성에 살면서도 학문이나 철학의 경우처럼 자기가 자진 것에 탐닉하려고 하지 않았다. 복음은 보다 정중하고 고상한 사람들에게 계속 전파되고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그 즐거움을 같이 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처럼 구원되어야 할 영혼을 지닌 가난하고 무식한 평민들이 사는 지방에도 복음을 전하려고 최선을 다하였다.

Ⅷ. 바울과 바나바는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다른 곳에도 교회를 세우려고 그곳을 떠났다. 우리는 그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굳건히 하려고 또 그 진리를 백성들에게 확신시키려고 기적을 행하였다는 내용을 볼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확신시키려고 기적이라는 방법을 흔히 사용하시지만 때로는 그것 없이도 그의 일을 하신다. 성령의 직접적인 감화를 통하여 믿음을 낳는 것 자체가 그것이 일어난 자들에게는 가장 큰 기적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기적도 행하였다. 그들은 다음 번 간 장소에서 기적을 행한다(14:3).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찾을 수 있다.

1.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그 지방에서 사도들을 좇아냈다. 처음에 그들은 사도들에게 등을 돌려대고 다음에는 "그들을 내좇아 버렸다"(50절). "그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였다." 그들은 군중을 선동하여 그들이 거리를 지나갈 때 그들의 인격에 모욕을 줌으로 핍박하도록 하였고 관리들을 선동하여 그들을 투옥하고 처벌함으로 사도들의 하는 일을 핍박하였다. "사도들이 지혜롭게 성령이 충만하여 말하는 것을 당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오만한 불신앙자들의 최후의 보루인 이러한 야만적인 방법들을 이용하였다. 사단과 그의 종들은 복음 전도자들이 성공적으로 복음을 전할 때 가장 격노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박해하고야 만다. 이리하여 세계의 위대한 많은 인물들이 좋은 일을 하고도 부당하게 처우를 받으며 그들이 인류를 위하여 한 선행이 찬양되는 대신에 핍박을 받게 되는 운명에 처한다.

(1) 유대인들이 사도들을 괴롭힌 방법.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사도들을 핍박하게 하였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이렇다할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내에 있는 지체있는 부인들을 이용하였다. 이 부인들은 유대교에 감화를 받은 자들로 그 교에 귀화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경건한 귀부인들"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이 부인들은 여자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그들의 추구하는 교에 대하여 열심이었고 또 독선적이었다. 그러므로 감언이설로 그들을 유혹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이 다른 모든 종교를 파괴하는 것처럼 설득하여 그것을 대적하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실상 복음은 다른 종교를 온전케 하는 것이었다. 경건한 부인들이 헌신적이고 신앙적 예배에 잘 참석하는 것을 보는 것은 감동적인 일이다. 그들이 세상 일을 멀리할수록 그들은 더욱 자기 영혼을 위해서 일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사귀는 일에 시간을 더욱 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 열심인 것 같으나 본문에 기록된 사람들처럼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적의를 품을 때는 참으로 슬픔을 느끼게 된다. 여성 박해자라니! 그들은 여성 고유의 상냥함과 연민도 잊어버렸단 말인가! 도대체 이들이 귀부인이라니!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짓을 행함으로 그들의 영예를 더럽히고 자신에게 모욕적인 일을 하며 천박하게 구는 것인가? 그들이 귀부인이라 할 때 이는 정말 격에 맞지 않는 짓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종들을 죽이려 하면서 그래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열심히 있는 자들에게는 지식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꼴 필요하다. 이 경건한 귀부인들 외에도 그들은 "그 성내 유력자들도" 선동하였다. 즉 그들의 손에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총독과 관리들로서, 그들을 이용하여 사도들을 박해하게 하였다. 이들 유력자들은 "자기들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악한 본성을 지닌 무리들의 도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인식하지 못했다.

(2) 그들은 사도들이 "그 지경에서 나가기까지" 박해를 계속 하였다. 그들은 사도들을 추방하였다. 그들은 사도들이 그들의 영내에서 압박을 못이겨 나갈 때까지 그들을 핍박하도록 경비병들에게 명령하였다. 즉 사도들이 좇겨난 것은 두려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노골적인 폭력에 의한 것이었다. 박해는 교회의 처음 개척자들이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의 한 수단이기도 하다. 마태복음 10장 23절 말씀대로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이러므로 너희가 이스라엘의 모든 성들을 다 돌게 될 것이 아니야"는 말씀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착한 사람들을 통하여 사도들에게 온정을 베풀도록 기회를 만드시기도 한다. 박해를 받는 자들에게 동정이 간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부당하게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더욱 그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도우려하게 되는 것이다. 사도들을 그들의 지경에서 추방하므로 사람들은 무슨 나쁜 짓을 유대인들이 사도들에게 행하였는가를 알아 보려하였고 사실을 알고는 그 경내에 남아있는 자들을 무시하려하지 않고 오히려 친절하게 대하였다.

2. 사도들이 불신하는 유대인들을 포기하였다(51절).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버렸다." 사도들은 성을 나서자 성문에 앉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렇게 하였다. 또는 그들이 그 지방의 경계선을 벗어났을 때 그들이 그 지방에서 완전히 떠났나 확인하기 위하여 보낸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이 행위의 뜻은 무엇인가?

(1) 이렇게 해서 사도들은 더 이상 그들과 관계없는 것을 선언하였다. 즉 그들의 것은 아무 것도 받은 것이 없다는 표시이다. 실상 사도들이 구한 것은 무슨 재물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영혼이었다. 그들은 티끌과 같은 존재들이었고 그러므로 그들의 티끌은 자기들이 소유하라고 한다. 그것이 사도들에게 묻어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2) 이렇게 해서 사도들은 그들의 불신에 대한 혐오감을 표시하였다. 그들은 본래 유대인 출생이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므로 사도들의 눈에는 이방인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지 그들이 믿기만 하면 동등하게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선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마찬가지로 더러운 것이 된다.

(3) 이렇게 함으로 사도들은 그들에게 도전하였고 또한 그들과 그들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경멸을 표시하였다. "너희가 아무리 악하게 굴어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섬기고 신뢰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고 하겠다.

(4) 이렇게 함으로 사도들은 자기들이 복음의 은총을 그들에게 전한 증거를 남겨 놓았다. 심판날에 이 사실은 그들에 대한 고소가 될 것이다. 이 티끌은 복음 전도자들이 그들에게 갔었으나 그들이 저들을 추방하였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는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리라고 명하신 것이다(마 10:14; 눅 9:5). "사도들은 그들을 떠나서 이고니온으로 갔다." 이는 안전을 위한 도피가 아니라 일을 찾아가는 행진이었다.

3. 사도들이 안디옥에 남겨논 새로운 신자들의 상태(52절). "제자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그들에게 행하여진 불의를 참았을 뿐 아니라 용기있게 기쁜 마음으로 그들의 일을 계속 수행하는 것을 보고 마찬가지로 용기를 얻었다.

(1) 그들은 기쁨이 충만하였다. 바울과 바나바가 그들의 지경에서 추방되고 또 그들이 돌아오지 못하도록 금지되었으므로 제자들이 슬픔과 두려움에 쌓여있을 것이라고 흔히 기대하게 된다. 기독교를 이식시킨 사람들이 떠나므로 그 ala은 것이 곧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까 염려할 수 있는 일이었다. 또는 다음 차례로 그들이 추방되지나 않을까 염려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이곳은 바로 그들의 고향이기 때문에 더욱 슬픔을 안겨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슬퍼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이 충만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서 역사하시며 그의 사업을 완성하고자 하심을 의심치 않고 믿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고통에서 보호하시며 또는 고통을 참고 견디게 해 주실 것을 믿었다. 그들의 모든 두려움은 믿음으로 오는 기쁨에 의해 완전히 추방되었다.

(2) 그들은 어떤 어려움에 직면한다 하여도 그리스도를 붙잡으리라고 결심하였다. 그리고 용기백배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들에게 "성령이 충만하였다는" 말씀의 의미일 것이다. 베드로가 용기를 얻어 복음을 전할 때도 같은 표현이 사용되었다(4:8). 또한 스데반과(7:55) 바울의 경우도(13:9)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을수록 우리는 경건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우리의 심령이 용기로 충만할수록 우리가 경건한 신앙 고백을 통해서 부딪치는 난관에 잘 대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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