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06.25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하가1.- 네오스_카이노스, 아나네오오, 쉼모르포스(그리스도의 체현<주님 복사확장인>교회)..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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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WHO AM I) 시리즈

....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 것인가, 나의 인생을 살 것인가?

@@본격적으로 하가(HAGAH)를 공부하고 싶다면...

....하가(HAGAH) 기초 – 가나안을 향한 하나님의 전략(1)

....하가(HAGAH) 실전 – 가나안을 향한 하나님의 전략(2)


[[하가란 무엇인가]]

>>나를 알려면… 묵상이 아니라 하가다!

***나를 알려면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한다 ---*** 하나님을 알려면 ‘계시’가 필요하다 ---*** 계시가 있으려면 ‘잠잠한 시간’이 필요하다 ---*** 잠잠한 시간을 갖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묵상’이다  ---*** 묵상이 아니라 ‘하가’다


===1. 나를 알려면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Knowing About God)’과 ‘하나님을 아는 것 (Knowing God)’은 다르다. 

공부와 설교를 통해 얼마든지 ‘하나님에 관해(About God)’ 알 수 있다. 심지어 사탄도 ‘하나님에 관해’ 잘 안다. 

하지만 ‘하나님에 관해’ 많이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생명이며 인격이다. 생명과 인격은 지식으로 아닌 관계로 알아야 한다. 

아이들이 화책에 나오는 강아지 그림을 보고 ‘강아지에 관해 아는 것’과 실제 강아지를 품고 그 생명과 관계를 맺으며 ‘강아지를 아는 것’은 다르다.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도 그 이상 큰 차이가 있다.

1.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르다

많은 크리스천이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통찰과 깨우침이 클 수록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생명과 생명의 교감이 없는 ‘앎’은 ‘~에 관해 안다’ 생각하는 것을 ~을 안다 여김, 곧 ‘착시현상’ 일 수 있다.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의 차이를 알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그 ‘아는 것’만큼 변화가 있는지 보는 것이다. 

그 변화란 내 자신은 줄어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만큼 나타나느냐 바로 그 것이다. 

예수님 생명이 내 삶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에 관해 아무리 탁월하게, 깊이, 많이 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닐 수 있다. 

크리스천으로 인해 세상이 변화되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에 관해 아는’ 크리스천만 많아서 일 것이다.

한 사람을 진정 사랑하면 더 알고 싶어진다. 친밀해질 수록 서로 영향을 미친다. 가까워질 수록 서로 닮아 간다. 그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하나님과의 사랑은 교과서로 배우는 지식이 아닌 실제다. 거듭난 자 안에 하나님의 ‘진짜 생명’이 내주하신다. 

이 생명은 내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 만큼 실제다. 만일 내게 변화가 없다면 생명과 생명의 접촉이 없다는 방증이다.

2.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망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의 중요성을 호세아를 통해 말씀하신다.

"내 백성이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망하고 있다… (호세아 4:6上)..My people are being destroyed because they don’t know me… (NLT)”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파멸의 길로 가고 있다고 얘기한다. 

개역개정은 이 부분을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로 번역했다. 

이때 ‘지식’의 히브리어 원어는 ‘다아트’다. 이 단어는 ‘알다’를 뜻하는 어근 ‘야다’에서 온 명사형이다. 

‘야다’는 단순히 ‘아는 것(to know)’만이 아닌 훨씬 더 깊은 의미를 포함한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창세기 18:19) For I know him… (KJV)”

개역개정은 ‘택하였나니’로 번역했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어는 ‘알다’를 뜻하는 ‘야다’다. 그래서 KJV 버전은 ‘I know him’으로 번역했다. 

특급 기밀을 요하는 중요한 일을 맡길 때 몇 번 봐서 아는 사람을 ‘택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된 사람을 ‘택하지’ 않는다. 

자신이 직접 겪고 경험하여 ‘아는(야다)’, "정말 신뢰하는" 사람을 ‘택할 것’이다. 

창세기 18:19 KJV 버전은 내가 아브라함을 ‘안다(야다)’로(I know him) 시작한다. 아주 중요한 일을 맡길 만큼 <지켜 보이 왔고 지금도 살펴 알며 관계 맺고 있으며 신뢰하기에>  ‘알기(야다)’때문에 ‘택하였다(야다)’고 번역한 것이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통해 ‘아브라함에 관해 아는 것’이 아닌 직접 사귀고 교제하고 경험하고 겪어서 ‘아브라함을 아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로 창세기 18:19 앞 구절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창세기 18:17)”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야다(사랑하는 사람이 서로를 아는 것처럼)’로 안다. 그렇기때문에 주님이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이와 같은 ‘야다’의 관계다. 하나님이 말씀에서 ‘나를 알라’고 말씀하실 때는 이 정도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

3. ‘야다’는 부부간의 단어이기도 하다

결혼한 부부가 하나가 되는 과정을 통해 ‘아는 것’이 ‘야다’다. 하나님이 ‘나를 알라’고 하실 때 ‘야다’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이 정도의 친밀한 관계를 의미한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세기 4:1)..And Adam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from the LORD. (KJV)”

개역개정은 ‘동침하매’로 번역했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어는 ‘야다’다. KJV 버전은 이 부분을 ‘아담이 이브를 알았다(Adam knew Eve)’로 번역했다. 

‘야다’는 단순히 ‘~에 관해서 아는’ 정도가 아님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야다’는 부부만이 알 수 있는 이 정도의 친밀한 관계를 포함한다. 

이런 근원적 의미를 알 때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내 백성이 지식(야다)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신 마음을 제대로 알 수 있다.

4. ‘손’과 ‘아는 것’은 깊은 관련이 있다

히브리어로 손을 뜻하는 ‘야드’는 ‘야다’와 어원이 같다. ‘손(야드)’으로 어떤 물건을 자주 만지고, 잘 다루면 그 물건과 친밀하여 잘 ‘안다(야다)’는 의미다. 

그래서 ‘야다’에는 ‘잘 알아 ~을 잘 다루는(be skillful in)’이란 뜻도 들어 있다. 

‘야드’는 기념물로도 번역을 한다. 사랑하던 사람의 ‘손(야드)’ 때 묻은 물건은 남은 자에게 귀중한 기념물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사56:5)"

하나님은 ‘손(야드)’으로 우리를 창조하셨다. 에베소서의 이 부분을 NLT 버전은 ‘우리는 하나님의 명작이다(we are God’s masterpiece)’로 번역했다. 

그렇다. 우리는 주님의 ‘손’ 때 묻은 ‘명작(masterpiece)’이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에베소서 2:10)..For we are God’s masterpiece… (NLT)”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야다’로 아신다. 우리는 주의 손바닥에 새길 만한 ‘기념물(야드)’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야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야다)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야다)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야다)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편 139:1~4)”

5. 예수님도 ‘아는 것’의 중요성을 말씀하신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기노스코)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마태복음 7장 23절의 ‘알다’는 헬라어로 ‘기노스코’다. 히브리어 ‘야다’를 헬라어로 번역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마태복음 7장 21~23절에서 예수님은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자에게 도무지 알지(기노스코, 야다)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수많은 예배, 기도, 찬양, 성경공부, 제자훈련, 헌신, 순종, 충성, 전도, 선교, 귀신 쫓음, 방언, 예언, 각종 은사 행함, 심지어 순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야다) 없이 종교적으로 행해질 수 있음에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런 일들이 예수님 당시에만 벌어진 것이 아니라 구약에도, 초대 교회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종교’의 형태를 띠고 벌어지고 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야다)을 원하노라 (호세아 6:6)..I want you to show love, not offer sacrifices. I want you to know me more than I want burnt offerings. (NLT)”

하나님을 ‘아는 것’은 부부 만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생이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기노스코..야다)’,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기노스코)’이라고 단언한다. 

영생은 죽음 이후 누리는 삶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영원한 생명과 관계를 맺는 것(야다)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야다(또는 기노스코)’로 아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 생명에 연결되는 것이다. 

이 영원한 생명에 ‘야다’로 연결된 자가 영생한다. 현재 영생하는 자가 죽어서도 영생한다. 

이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될 때 그 생명으로 인한 변화가 있다. 이 변화가 바로 ‘성화(聖化)’다.

피조물은 스스로를 정의할 수 없다. 그래서 나를 알려면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 비례하여 자신을 안다. 

바울은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본다고 했다. 주의 영광을 보려면 수건이 벗겨져야 한다. 

가리고 있던 수건이 벗겨지는 것. 그것이 곧 계시다. 계시를 통해 주의 영광을 볼 때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른다.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아 가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것. 모든 신앙 여정의 핵심이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린도후서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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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지혜는 두 가지로 이뤄진다.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이 없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면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도 없다....True wisdom consists in two things: Knowledge of God and Knowledge of Self. Without knowledge of self there is no knowledge of God.  Without knowledge of God there is no knowledge of self.


===2. 하나님을 알려면 계시가 필요하다===

**나를 알려면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럼 ‘하나님’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각종 기독교 서적과 신앙 자료를 연구하면 될까? 훌륭한 목사님들의 설교와 놀라운 이적을 체험한 분들의 간증을 많이 들으면 될까? 신학교를 들어가면 해결될까? 알고 있는 것을 많이 실천하면 될까? 

...이 모든 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에 도움을 준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얻은 감동과 깨달음이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생명만 나타나도록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면 그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닐 수 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관계다. 관계는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아는 데서 시작한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은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들을 우리에게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모든 것을 찾아내셔서 하나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사람의 생각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생각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2:10~11)...But it was to us that God revealed these things by his Spirit. For his Spirit searches out everything and shows us God’s deep secrets. No one can know a person’s thoughts except that person’s own spirit, and no one can know God’s thoughts except God’s own Spirit. (NLT)”

하나님의 영을 통해 감춰져 있던 하나님의 깊은 마음이 드러나 ‘알게’되는 것이 곧 ‘계시(啓示)’다. 

하늘에 속한 영적인 것들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어리석게 보일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려면 계시가 필요하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고린도전서2:14)”

‘육에 속한 사람’은 헬라어로 ‘프쉬키코스’, 즉  ‘자아(혼, soul)가 강한’이란 의미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 하나님을 알게 하는 계시의 빛이 임하기 전 이성과 감성이 그것을 차단한다. 

그러면 영적인 일들이 어리석게 보인다.

‘어리석게’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모리아’다. 어근은 ‘뮈스테리온’. ‘뮈스테리온’은 신비를 뜻하는 영어 단어 mystery(미스테리)의 어원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신비’의 영역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하나님의 영을 통하지 않으면 이 신비의 영역을 알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어리석게 보인다. 

‘뮈스테리온’의 사전적 정의에는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it is what can only be known through revelation)’이란 의미가 들어 있다. 

‘영’에 속한 것은 드러나지 않고 감춰져 있다. 비밀이요 신비의 영역이다. 이성으로 알려 할 때 어리석게 보이는 영역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 어리석게 보이는 영역 속에 숨어 계신다. 

그래서 마귀는 감춰진 하나님의 마음(복음)이 드러나지 않게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 복음을 가리려 애쓴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린도후서 4:3~4)”

‘가리다’의 헬라어는 덮다(to cover)를 뜻하는 ‘칼륍토’다. 명사형은 ‘칼륍시스’다.  

만일 무엇인가 귀중한 보물을 ‘칼륍시스’하고 있다면 무엇인가 보물을 덮고 있어 발견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 ‘칼륍시스’ 앞에 ‘벗겨내는(off, away)’ 의미를 갖는 헬라어 접두사 ‘아포 apo’를 붙이면 ‘아포칼륍시스’가 된다. 

이 단어는 계시를 뜻하는 영어 단어 apocalypse(아포칼립스)의 어원이다. 원어 의미대로 보자면 ‘덮여져 있는 것을 벗겨내는 것(to uncover)’이 계시다. 

즉, 덮여져 있던 베일(veil)을 벗겨 낼 때 비로소 그 안에 감춰진 것이 드러남을 의미한다. 

계시를 뜻하는 또 다른 단어, 영어 단어로 revelation이 있다. 동사는 ‘reveal’이다. 어원적으로 보면 ‘베일로 가렸던 것을 벗겨내다(to unveil)’ 즉 re(un, ~의 반대편) + veal(veil, 베일로 가리다) 이다. apocalypse와 동일한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은 모든 환난과 죽음의 순간에도 자신의 사명과 존재 이유를 명확히 아는 자였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아는 자라고 밝힌다. 

무엇을 통해 비밀을 아는가? 계시를 통해서였다.

"곧 계시(아포칼륍시스)로 내게 비밀(뮈스테리온)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에베소서3:3~4)”

하늘에 속한 비밀은 육에 속한 자에게 어리석게(뮈스테리온) 보인다. 본질을 알지 못하도록 무엇인가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에 속한 자가 계시(아포칼륍시스)를 통해 덮고 있는 것을 벗겨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될 때 그것은 비밀 중의 비밀(뮈스테리온)이 된다. 

바울은 이 비밀을 깨달은 자였다. 바울은 이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야다) 자가 되었다. 

그래서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 ‘계시의 영’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구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에베소서 1:17)”

나를 알려면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영이시기 때문이다. 

영은 이성과 감정과 의지를 초월한다. 오직 성령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이 성령님이 무지한 내 지각의 영역에 말씀을 재료로 빛을 비추실 때 비로소 깨달음과 믿음이 들어온다. 이 과정이 계시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은 육에 속한 자들에게 가리어 있다. 하나님의 깊은 것 까지도 통달하고 계신 성령님이 열어 주셔야 ‘계시’적 지식이 임한다. 

이 계시적 지식이 들어와야 주님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베일을 가린 신부의 면사포를 벗겨 신부의 아름다움을 보고 기뻐하는 것과 같다. 

주님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길 때 비로소 자신의 삶을 내려 놓고서라도 기꺼이 자원하여 기쁨으로 신랑을 따르는 헌신의 삶을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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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계시는 그것을 꾸며주거나 더 강화시켜주기 위해 인간의 천재성이라는 빛도, 인간의 문화라는 세련됨과 능력도, 인간의 사상이라는 탁월함도, 인간의 두뇌라는 힘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단순함, 온순함, 겸손함, 그리고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만을 필요로 한다.– E.M. 바운즈


===3. 계시가 있으려면 "잠잠한 시간"이 필요하다.===

[나를 알려면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한다-->하나님을 알려면 계시가 필요하다]...이제 계시가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하나님은 영이다. 하나님의 영 외에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내 탁월한 지성, 뜨거운 열정, 의지적 노력은 보조적 수단일 뿐이다. 하나님의 영이 딱딱한 말씀을 벗겨 우리 이성과 감정에 빛을 비춰주실 때 계시가 임한다. 

예수님이 이미(!!!) 명확히 말씀하셨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새번역..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육은 아무 데도 소용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이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63 It is the Spirit who gives life; the flesh conveys no benefit [it is of no account]. The words I have spoken to you are spirit and life [providing eternal life]. "

말씀이 곧 영이요 생명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영으로, 생명으로서 오는 것, 말씀 안에서 주님의 감춰진 마음을 뜨겁게 아는 것, 바로  이것이 계시다.

계시는 영과 영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온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다.

1. 가만히 있어 BE STILL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야다)… (시편46:10)...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KJV)Cease striving and know that I am God… (NASB)”

시편 기자가 말한다. 가만히 있으라. 잠잠히 있으라. 그리고 내가 하나님임을 알지어다.

NASB 버전은 ‘노력하는 것을 멈추라 (Cease striving)’고 번역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노력을 멈춰야 한다. 가만히 있어야 한다. 이성(理性)이 잠잠해야 영(靈)이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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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가만히”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라파(rapha, רפה)”이며, “풀어주다, 버리다, 내어주다, 넘겨주다” 등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저 조용히 있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염려를 내어 버리고 친히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고 말씀하신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그분의 일깨우며 깨우치시며 깨닫게 하는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경청-순복하여 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분이 우리의 근원이시며 그분이 어려움 속에서 우리를 도우신다.

===

‘가만히 있으라’는 어떤 의미일까?

‘가만히 있으라 (Be Still)’의 히브리어는 ‘라파’다. ‘치료하다’로 유명한 ‘여호와 라파’의 ‘라파’와 발음이 같다. 어원도 동일하다. 다만 히브리어 단어 철자에서 마지막 한 글자만 다르다. ((***여호와 라파(Jehovah Rophe) : יהוה רפא....)) 

‘라파’를 사전에서 찾아 보면 ‘가만히 있고, 잠잠하다’란 의미 외에 ‘가라앉다, 떨어지다, 약하게 하다’란 의미를 갖고 있다. ‘라파’란 단어의 느낌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예다.

"…이 성에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나이다(라파) (예레미야 38:4 下)....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 함을 듣고 손의 맥이 풀렸고(라파)… (사무엘하 4:1).......우리가 그 소문을 들었으므로 손이 약하여졌고(라파) (예레미야6:24)....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라파) 보임이니라 (잠언 24:10)”

‘가만히 있으라’의 원어적 의미는< 여태껏 살아오면서 형성된, 주 보시기에 왜곡되고 혼돈- 고집불통인 옛자아의 생각-관점-신념-세계관의 틀과 그 영향력을 상대화 하여 사용하기를 멈춤/일시 정지, 주 임재 앞에 내려놓고, 죽음에 넘겨줌> 곧 ‘힘이 점점 빠져 약해지는 것’과 관련 있다. 심지어 계속 약해지면 그 끝은 죽음일 수 있다. 그래서 이 단어에서 파생한 단어 중 발음은 똑같고 철자만 다른 ‘라파’란 단어가 또 있다. 이 ‘라파’는 죽은 자를 가리킬 때 사용한다.

"… 땅이 죽은 자들(라파)을 내놓으리로다 (이사야 26:29 下)”

‘가만히 있으라’가 내 근간을 이루는 세계관을 그대로 유지한 채 마음의 평안을 위해 잠잠히 있으라는 것이 아니다. 

‘가만히 있으라’의 원어적 의미는 ‘힘이 점점 빠져 약해지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내 이성의 틀 안에 갇혀져 있던 확신, 관점, 생각의 영향력을 점점 약하게 하라는 것이다. 

내 열심과 노력의 힘을 빼는 것이다. 내가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마음 중심으로부터 성령님의 교정을 받으려는 태도다. 내 자아의 힘을 빼는 과정이다. 

합리적 사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옛사람에 속한, 아니 옛사람의 생각 자체인)) 이성의 힘이 약해질 때 이성을 초월한 영의 소통이 수월해진다. 그 교제 안에 계시의 빛이 임한다.

((존재에 있어서 최고의 이성은 영적 이성인 바,  주님으로부터 일깨워지는 영적 지식-영적 논리-영적 이성이다))

‘가만히 있으라’의 ‘라파’와 치료하다의 ‘라파’는 ‘라프’라는 동일한 어근을 가진다. ‘라프’는 물리적, 정신적으로 상처 받기 쉬운 상태와 관련 있다. 

십자가를 기준으로 죽음 쪽에 가깝게 가는 것의 의미를 강화시킬 때 ‘가만히 있으라’의 ‘라파’가 되고, 십자가를 통과하여 그 상처를 극복하는 쪽의 의미를 강화시킬 때 ‘치료하다’의 ‘라파’가 된다. ...시편 46:10 말씀처럼 내 열심과 노력을 멈추고, 내 자아의 힘을 약화시켜 내 자아를 죽음에 이르게 하면(라파) 하나님을 아는 계시의 빛이 임하고 그 빛은 내 심령을 치료할 것(라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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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어...be still>은 히브리어 "하르푸"인데, 그 근원은 동사 라파 רפה에서 파생되었다... (잠잠하다, 침잠하다, 자의적 노력을 멈추다, 자유롭게 하다, 놓아주다, 약하게 하다, 넘겨주다, 내어주다, 내려 놓다, 비우다) ....주 앙망함으로써 <자아의 힘을 빼는 과정 안으로, 자신의 전 존재를 내어드릴> 그 때, <십자가로 처리하심>을 거쳐서 치유하시는 여호와 YHWH ROPH-EKHA이심을 알게 될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히브리어로 '치유하다'를 의미하는 동사는 <라파 רָפָא>..로프-에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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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KNOW THAT I AM GOD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편 46:10)..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KJV)”

Be still and Know(잠잠히 있으라 그리고 알라)로 되어 있는 이 구절을 히브리어 문법적으로 보면 이중 명령형이다. 

히브리어에서 이런 구조의 명령형 문장일 경우 앞의 명령형보다 뒤의 명령형에 강조점이 있다. 

이 문장을 히브리어 문법 관점에서 보면 아래와 같이 번역할 수도 있다.

"Be still in order to know that I am God…(내가 하나님 됨을 알기 위해 가만히 있을지어다)”

하나님 됨을 아는 것. 이것이 이 문장의 핵심이다. 하나님 됨을 알기 위해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다. 

내 관점이 하나님을 아는 것에 방해가 된다면 그 힘을 약화시켜야 한다. 

내 입장, 내 세계관, 내 철학, 내 감정, 내 의지, 내 생각, 내 취향, 내 기호, 내 자아의 모든 것을 약화시키는 것. 나를 붙들고 있던 모든 복잡한 부유물이 가라앉은 것처럼 잠잠히 있게 되는 것. 그것이 원어적으로 ‘가만히 있는 것(라파)’이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 됨을 알려주시는 계시의 빛이 비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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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구하기 전에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라. 그것이 가장 먼저 할 일이다. 그리고 영광 가운데 주님을 예배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이 어떤 위치인지, 어떤 특권을 갖고 있는지 생각하고 위대한 것을 바라라! Each time, before you intercede, be quiet first, and worship God in His glory. Think of your place and privilege in Christ, and expect great things! – 앤드류 머레이 –


===4. 잠잠한 시간을 갖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묵상'이다.===

*나를 알려면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한다-->*하나님을 알려면 계시가 필요하다--*계시가 있으려면 잠잠한 시간이 필요하다

--><잠잠한 시간을 갖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가만히 있으라(be still)’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알려주신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묵상’이다.

1. 묵상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이다

모세가 죽고 그 뒤를 이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천 명의 인원을 이끌고 수련회를 가도 어려운데 장정만 육십만 명인 이스라엘 백성을 책임지고 이끌어야 했다. 

심리적 압박이 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이 가나안으로 들어갈 비책을 말씀하시거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신 것이 아니다. 

강하고 담대하라고 세 번이나 말씀하시지만 강하고 담대할 만한 자원을 공급해 주신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달랐다. 가나안 땅 정복을 위한 하나님의 비법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것이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 1:8)”

여호수아 1장 8절은 가나안 땅을 앞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히브리서 3:17~18)”

히브리서 3장과 4장은 구약의 말씀을 재해석하면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곧 ‘안식’에 들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히브리서4:11)”

히브리서 4장 11절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주장한다. 히브리서 주장에 의하면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이 곧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이다.

‘안식’과 ‘가만히 있는 것’은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안식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할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 묵상이 바로 가나안 즉 안식으로 들어가기 위한 하나님의 핵심 전략이다. 

묵상을 통해 안식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히브리서 4장 11절 다음 구절에 안식에 들어간 결과가 나온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브리서 4:12~13)”

묵상을 통해 가나안 즉 안식에 들어가면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한다. 그 말씀은 혼과 영을 찔러 쪼갠다.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할 만한 말씀의 빛이 임한다. 그 안식 가운데 비춰진 계시의 빛은 우리로 ‘하나님 됨을 알게’ 한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편 46: 10)”

2. 묵상(MEDITATION)은 심령의 약(MEDICINE)이다

묵상을 의미하는 meditation(메디테이션)과 약을 뜻하는 medicine(메디씬)은 같은 어원이다. 

피부에 상처가 생길 때 상처를 아물게 하는 연고를 바르듯, 묵상을 통해 말씀을 내 심령에 바를 때 그 말씀이 스며들어 내 상처를 치료한다. 

medicine이 몸의 약이라면, meditation은 영혼의 약이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마르페)이 됨이니라 (잠언 4:20~22)...For they are life unto those that find them and medicine to all their flesh.(Jubilee Bible 2000)”

잠언 4장 22절은 말씀에 주의하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을 떠나게 하지 말며 말씀을 마음 속에 지키고 말씀을 얻는 자에게 그것이 곧 건강이 된다고 설명한다.

JB 2000 버전은 ‘건강’을 ‘medicine’으로 번역했다. 이 구절에서 ‘건강’의 히브리어는 ‘마르페’다. 마르페를 또 다른 구절에서는 양약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마르페)과 같으니라 (잠언 12:18)”

3. 묵상은 믿음을 가져온다

<자기 스스로 불러 일으킨, 자기분발적인> 의지적 믿음은 오래가지 못한다. <하나님이 말씀 하시는 바, 참된 존재적>변화를 일으키는 믿음은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17)...Consequently, faith comes from hearing the message, and the message is heard through the word of Christ. (NIV)”

믿음은 내가 의지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어 버전은 ‘믿음은 오는 것(Faith Comes From…)’이라고 번역했다.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란 얘기다. 

말씀 앞에 자복하며 큰 감동을 받고 (이미 온통 자신의 모든 영광<이름-성품-실제_실재_실체, 그 모든 것>을 기울여 말씀 안에 넣어  말씀우에로 불러주신 분께, 전존재 열어드림으로 듣는 그 상호교통에 자신을 개방함, 바로 그 때에) 믿음은 ‘들어 오는 것’이다. 어디서 오나? 바울은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온다.

예수님은 말씀 그 자체다. 히브리서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라고 설명한다. 

이 부분을 헬라어 원어로 확대 해석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그러하시니) 믿음의 ‘시작’이요 ‘끝’이신 예수를 바라보자…로 해석할 수도 있다. 

즉,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의 시작이요 끝이자 믿음의 원천이다. 이 말씀이신 주님이 내 심령을 터치할 때 말씀과 함께 믿음이 들어 오는 것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12:2 上)”

앞서 살펴봤던 잠언 4장 20절 말씀을 보면 ‘내 말에 주의하며’란 표현이 나온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카샤브)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잠언 4:20)..My son, pay attention to what I say; listen closely to my words. (NIV)”

주의한다는 것은 집중하여 관심을 기울이는 것(pay attention to)이다. 

관심을 기울이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그 대상의 숨겨진 마음마저 알게 된다. 

그래서 ‘주의하다’의 히브리어 ‘카샤브’에는 ‘주의하다’란 의미 외에 ‘귀를 기울여 듣다’란 의미도 있다. 시편 10편 17절 말씀은 ‘카샤브’를 ‘듣다’로 번역한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카샤브) (시편 10:17)”

묵상은 말씀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카샤브, pay attention to)이다. 말씀에 깊은 관심을 기울일 때 말씀 이면 심연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다. 

말씀을 통해 영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때 믿음이 들어온다. 이 믿음을 가지고 오는 것이 바로 ‘계시’다.

4. 묵상은 ‘영의 생각’을 돕는다<도우며 성령의 생각=구주의 생각=하나님의 생각..거듭난 그대의 영의 생각> 상승-변화의 선순환을 불러 일으킨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영적 존재’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서 8:9)”

‘영적’이란 말을 들으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경건한 사람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것은 ‘영적’인 것의 결과일 뿐이다. 

‘영적’이란 말은 삶의 주도권과 관련 있다. 영적인 것은 내 생각, 이성, 감성, 의지, 경험이 삶의 주도권을 갖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내주하는 그리스도의 영이 삶의 주도권을 갖는 것이 ‘영적’이다. 

다른 말로 얘기하면,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내 감정이 즉각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내주하는 영에 의해 감정이 통제되어 반응하게 될 때 그것이 바로 ‘영적’인 것이다. 

그래서 ‘영적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코스’는 ‘영에 의해 통제되어지는(spiritcontrolled)’으로 번역할 수 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에 대해 얘기한다. 내주하는 영을 따를 때(영적일 때) 영의 일을 생각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5-7)...For those who are according to the flesh set their minds on the things of the flesh, but those who are according to the Spirit, the things of the Spirit.  For the mind set on the flesh is death, but the mind set on the Spirit is life and peace, because the mind set on the flesh is hostile toward God; for it does not subject itself to the law of God, for it is not even able to do so,(NASB)"

생각은 감정과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감정과 태도는 내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행동의 반복이 내 삶을 결정한다. 삶을 바꾸려면 결국 생각을 바꿔야 한다. 

이 생각에는 육신의 생각이 있고, 영의 생각이 있다. 육신의 생각으로 살아갈지, 영의 생각으로 살아갈지는 내가 선택해야 한다. 

영의 생각은 영에서 온다. 영과 연결해야 한다는 의미다. 영은 지성소에 상응한다. 안식의 영역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안식이 곧 가나안 땅임을 알려준다. 영과 연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묵상이다. 

가나안 땅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알려주신 비법이 바로 묵상이었다. 말씀을 주야로 입에서 떠나지 않게 중얼거릴 때 영의 생각이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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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여호수아에게 칼 사용법을 알려주신 것이 아니다.  대신 어떻게 주님을 주야로 묵상할지, 그 결과 어떤 위대한 성공을 거둘 것인지에 대해 알려주셨다.....The Lord didn’t show Joshua how to use the sword, but He told him how he should meditate on the Lord day and night, and then he would have good success.  – D.L. 무디


===5. 일반개념의 "묵상"이 아니라 성경적 "하가"이다===

가나안 땅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거창한 전략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전쟁 승리에 도움이 될 전략을 주신 것도 아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죽은 후 백 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을 책임져야 했다. 그런 그에게 가나안 전쟁을 앞두고 신신당부하신 것이 ‘묵상’이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비중을 두고 말씀하신 ‘묵상’의 원형적(原型的) 의미는 무엇일까?

1. 성경적 묵상은 ‘소리’가 중요하다

다른 종교도 묵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기계발 분야에서도 묵상을 강조한다. 

묵상이란 단어를 들을 때 가장 먼저 마음의 평안을 위해 조용히 생각하는 것을 떠올린다. 

국어 사전에서는 묵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묵상(默想) : 눈을 감고 말없이 마음속으로 생각함....

하지만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묵상은 이와 전혀 다르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 1:8)”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묵상의 히브리어는 ‘하가(HAGAH)’다. 하가란 단어에 ‘생각하다, 사색하다’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더 근원적인 의미는 ‘중얼거리다(murmur, mutter)’ 혹은 ‘신음소리를 내다(moan)’이다. 

즉 소리와 깊은 연관이 있는 단어다. 조용히 눈을 감고 말없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묵상의 국어 사전 정의와는 분명히  다르다. 

하가를 사용한 다른 구절을 더 살펴보면 하가의 근원적 의미를 잘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하가)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이사야 8:19)…Seek unto them that have familiar spirits, and unto wizards that peep, and that mutter:

…길하레셋 건포도 떡을 위하여 그들이 슬퍼하며(하가) 심히 근심하리니 (이사야 16:7)…for the foundations of Kirhareseth shall ye mourn; surely they are stricken.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하가) 때에… (이사야 31:4)…Like as the lion and the young lion roaring on his prey…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하가)…(이사야 38:14) Like a crane or a swallow, so did I chatter: I did mourn as a dove:…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하가)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시편 35:28) And my tongue shall speak of thy righteousness and of thy praise all the day long.”

위 구절들에서 ‘중얼거리다(mutter), 슬퍼하다(mourn), 으르렁거리다(roar), 슬피 울다(mourn), 말하다(speak)’의 히브리어는 모두 ‘하가’다. 

묵상과 어울리지 않는 사자와 비둘기 울음소리에도 ‘하가’를 사용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강조하신 묵상(默想)은 눈감고 조용히 말씀을 깊이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다. 

먹이를 움켜잡고 으르렁대며 씹듯이 중얼거리는 사자와 같이 말씀을 씹고 읊조리며 중얼거리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하가’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모든 영광의 성분과 요소가 담긴, 곧 영과 생명이신 주님 자신이 입을 통해 음성으로 말해 내신] 소리가 말씀 안에 들어 있다. 

말씀은 그 자체로 영이요 생명이다. 

하가는 말씀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소리를 이 땅 가운데 풀어내는 것이다. 

딱딱한 말씀을 씹듯이 읊조리며 계속 중얼거릴 때 어느새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소리가 영과 생명으로 새어 나온다. 

이렇게 영과 생명이 새어 나올 때 말씀 안에 있는 계시가 풀린다. 그 계시가 곧 영의 생각이다.

하나님은 왜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시며 다른 대안을 주시지 않고 ‘하가’를 강조하셨나? 

일반적으로 자아는 생각의 주도권을 내려 놓지 못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여전히 생각의 주인은 ‘나’이기 쉽다. 

내 생각의 주도권을 내려놓지 못한 가운데 조용히 사색하듯 생각하는 것은 ‘자아’만 더 강화시킬 뿐이다. 생각이 깊은 사람일수록 자아가 강한 이유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이성(理性)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내주하는 그리스도의 영과 연결하여 그 ‘영’을 강화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말씀이 들어가야 한다. 말씀은 진리 그 자체이지만 딱딱하다. 이해하기도 어렵고 소화시키기도 어렵다. 

이 딱딱한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여 소리로 중얼거리며 녹여낼 때 말씀 자체의 소리가 내 ‘이성(理性)’과 부딪힌다. 

처음에는 아무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계속 말씀의 소리로 이성에 충격을 가할 때 어느 한 순간 이성이 말씀 앞에 굴복한다.

....두려움에 놓인 사람이 있다. 상황이 자신의 감정을 압도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믿음으로 말씀 한 구절을 택하여 계속 ‘하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두려움의 감정이 말씀보다 컸다. 그러나 말씀으로 상황을 밀어내듯 ‘하가’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럴 때 미처 깨닫지 못했던 말씀의 한 부분이 툭 튀어나와 내 이성과 부딪힐 때 한 순간 이성과 감정이 그 말씀 앞에 굴복함을 경험한다. 

이성과 감정이 말씀에 굴복하는 순간 감정을 붙들고 있던 두려움은 사라진다. ...이 현상은 말씀을 ‘하가’하는 사람에게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주야로 말씀을 ‘하가’할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하가’를 통해 말씀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칠 기회를 얻는 것이다.

하가는 이렇듯 딱딱한 말씀을 중얼거리는 소리로 계속 녹여 내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내 이성과 감정 가운데 풀어내는 것이다.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생각이다. 이 생각의 주도권을 말씀에 넘기는 과정이 ‘하가’다.

‘하가’는 기록된 말씀에서 직접 퍼 올린 소리다. 말씀 안에 담긴 하나님의 음성을 내 이성에 들려주는 것과 동일하다. 

그래서 욥기 37장 2절은 ‘하가’를 다음과 같이 사용한다.

"하나님의 음성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똑똑히 들으라.(욥37:2)"

모든 죄와 시험은 생각에서 비롯한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언 23:7). "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나느니라.(잠4:23)"

생각을 지키는 [하나님이 제시하고 있는]가장 좋은 방법은 말씀에 집중함으로써 그 말씀을 씹는 것이다. 

되새김질 하듯 중얼거리며 말씀을 씹을 때 그 소리가 육신의 생각을 막는다. ‘하가’를 통해 말씀의 소리를 풀 때 영의 생각이 활성화된다. 

생각에서 승리해야 가나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가’하라고 강조하신 이유다.

2. ‘하가’의 핵심은 ‘기록된 말씀’과 ‘소리’와 ‘마음 중심’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하가’는 조용히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속삭이고, 중얼거리고, 슬퍼하고, 으르렁거리고, 구구 거린다. 

이 ‘하가’ 소리의 공통점은 굳이 문법이나 문장 규칙을 엄격히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령이 갈급할 때 문장 규칙을 따져 소리내지 않는다. 포효하듯 ‘주여~’ 외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 소리에 마음 중심이 실리기 때문이리라. 

문법, 철자, 논리, 완벽한 문장은 이성이 좋아하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에 신경 쓰다 보면 영의 본능은 사그라질 수 있다. 

때로는 논리에 맞지 않지만 부르짖는 마음 중심의 소리가 영을 일깨운다. 

하나님이 ‘하가’를 말씀하신 이유는 이성을 강화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철저하게 말씀의 소리를 통해 ‘영’을 활성화하기 위함이다. 

깨닫고 나면 무릎을 칠만한 하나님의 전략이다. 

사람들은 머리로 말씀을 이해하려 한다. 가슴으로 말씀을 느끼려 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말씀이 영이요 생명임을 기억하자. 

영과 생명에 접근하는 것은 머리와 가슴이 아니다. 믿음이 실린 마음 중심이 먼저다. 

기록된 말씀을 입으로 씹으며 마음 중심이 실린 소리로 발산할 때 그 소리를 타고 말씀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때 그 영이 내 생각에 영향을 미치고, 내 삶의 주도권을 갖는다. 말씀이 내 삶에 영향력을 미칠 기회를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는 계시의 빛이 임할 확률도 함께 높아진다.

3. ‘하가’의 주 목적은 하나님 마음을 아는 것이다

나를 알려면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알려면 계시가 필요하다. 계시가 있으려면 잠잠한 시간이 필요하다. 잠잠한 시간을 갖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묵상이다. 묵상의 성경적 원형은 하가다. 

결국 하가를 하는 주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 아는 것을 통해 나를 아는 것이다. 

피조물인 사람들이 믿고 있는 ‘나’가 아니라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믿고(알고) 있는 ‘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먼저다.  하가는 말씀을 계시의 빛으로 변환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고, 말씀에 비친 나를 알게 하는 도구다.

탁월한 신학적 지식이, 뜨거운 열심이 ‘하나님을 알게’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성령님은 언제나 말씀을 ‘도로(road)’ 삼아 움직이신다. 

딱딱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도 하루 종일 씹고 중얼거리고 되새김질할 때 그 위에 성령님이 운행하신다. 

말씀을 재료로 빛으로 바꾸시는 것은 한 순간이다. 그 순간의 빛이 마음을 비출 때 심령이 새로워진다. 그것이 참 영의 양식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나의 어떠함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과 내 마음 중심과 소리가 성령님과 함께 만나는 유기적 활동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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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하가’하며 풀어낸 기도야 말로 하나님께 가장 잘 상달된다...Prayer that is born of meditation upon the Word of God is the prayer that soars upward most easily to God’s listening ears. – R.A. 토레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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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23장7절...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For as he thinks in his heart, so is he [NKJV]))

<오직 주 말씀에 근거하여 주 말씀 안에서, 주님 일깨우심따라, 주님 바라봄 통해 내린 결론으로서, 그렇게 살기로 결단하고 주께 맡겨드리며 기도하고 기대하며 기다림으로서 !!지금 그대의 상황-처지-환경-형편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오직 주 말씀따라 전존재로 복창하며 그대 존재를 울려 깨울 때...그렇게 그 위치-균형-질서를 자각하며 주께서 준비시키심따라 주와 함께 내어딛는 <절대 긍정-절대 기쁨-절대 신뢰의>발걸음을 [적즉적으로 한걸음씩 힘차게] 내딛도록 하라...

"나는 승리자야!"..그런 생각을 하면 그러한 위인인 것, 

나는 언제나 기쁠 수 있어 그러한 생각을 하면 그러한 위인인 것, 

나는 마음의 부자야 그러한 생각을 하면 그러한 위인인 것이니..

"나는 할수 없어, 나는 못해"..이러한 부정적인 생각들을 버리고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승리한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

우리 모두 긍정적인 생각을 하여 그러한 위인들 됨 이루어 드리라..

-----천막교회 시절 그 어느 목사님은  <적은 무리를 두고> 1000명 앞에서 설교하듯이 <우렁차게, 전존재로> 설교하셨다고 합니다. 마치 1000명이 앞에 있는 것처럼...그런데, 그 시절 앉아서 예배보시는 아주머니가 "사람도 적은데 왜그리 소리를 질러가면서 설교를 하느냐"고 야단을 쳤다고 하죠...그러나 (오직 주 앞에 임재 의식 붙들고, 주께 충성함의 신실과 진실로) 위축됨 없이 계속 그 태도와 자세를 견지하셨답니다. 후에는 정말 1000명 넘어 그 이상 목회하시는데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당장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싶지 않으면 그래도 괜찮다고 말한다. 단지 마음속에 있는 모든 부정적인 생각은 모두 버리라고 한다. 그러면 좋은 것만 남게 된다<보브 로텔러>

작은 사람은 작은 생각으로 이루어져있다.<빅토르 위고>

좋은 생각과 행동은 결코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없다. 나쁜 생각과 행동은 결코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없다.<제임스 알렌> 

행복한 일을 생각하면 행복해진다. 비참한 일을 생각하면 비참해진다. 무서운 일을 생각하면 무서워진다. 질병을 생각하면 병이 들고 만다. 실패에 대해서 생각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자기를 불쌍히 여기고 (자포자기하여) 헤매게 되면 남에게 반드시 배척당하게 된다.<데일 카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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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노스(새로운<질적>, 생명과 본질이 <십자가부활로 거듭남 통해서> 완전히 새로워진, 바로 그) 부대에 담는 네오스(새로운<시간적>,날마다 다함없는, 늘 새로운 생명열정 가득한 주님 자신의, 새롭게 하신 열정의 바로 그 새) 포도주를 채우되, 위에 계신 구주의 그 어떠함의 완전함에 이르도록 ((구주께서 이 땅에 사실 때 그리하신 것처럼, 거듭난 자의 마땅한 바, 그대 생각의 모든 패러다임을 말씀 안의 영과 생명으로 채우고, 성령따라 동행함으로써)) 날마다 새로와짐 인해 그분의 복사판 됨((쉼모르포스, 이것이 본받음이자 복사판 됨이다 ....타락 이전의 사람은, 믿는이마다 구주의 복사판, 곧 그분의 찍혀진 사진 그 자체였음을 기억하라!!)) 살아내라]]

[엡4..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네오스 안드로포스(주님 열어주신 새 시대의 새사말으로서의 교회), 카이노스 안드로포스(생명과 본질이 새로워진 주님 담는 그릇), 아나네오오(주님의 어떠하심 바로 거기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더욱 새로와 짐)===

새롭게 창조함 받은 유기적 공동체인 구주의 몸인 교회마다, 영원한 젊은이 JC, 바로 그분의 부어주시는 사랑의 열정의 기름부음으로 날마다 점점 더 충만케 하심을 새로이 받을지니, 보좌 위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의 어떠함 바로 그대로에 이르기까지 더욱 더 새롭게 자라갈지어다!! 

-새 사람, 곧 하나님을 따라 그 실재의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은 것입니다.(엡4:24) :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And put on the new man, which was created according to God in righteousness and holiness of the reality. -και ενδυσασθαι τον καινον ανθρωπον τον κατα θεον κτισθεντα εν δικαιοσυνη και οσιοτητι της αληθειας

성경에는 새 사람을 언급한 구절이 세 군데 있는데 엡2:15, 엡4:24, 그리고 골3:10입니다. 

그 가운데 엡2:15와 4:24에서는 '새(new)'라고 번역되는 헬라어로 καινος [kainos ; 카이노스]가 사용되었고, 골3:10에서는 νεος [neos ; 네오스]가 사용되었습니다.

카이노스는 '본성이나 품질에 있어서 새로운, 익숙하지 않은, 사용해보지 않은' 등을 뜻하는 반면, 네오스는 '시간상으로 새로운, 최근의, 새로 소유한' 등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카이노스는 성질상으로 새로운 것을 뜻하고 네오스는 시간상으로 새로운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엡2:15와 엡4:24의 새 사람으로 번역된 헬라어 καινος ανθρωπος [kainos anthropos ; 카이노스 안드로포스]는 우리가 이전에는 접해보지 못하였기에 새롭게 체험할 필요가 있는, 그러니까 우리가 아직 입어보지 못하여 새롭게 입어야 하는 신선한 <생명,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실재를 말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성질상, 본성상 새롭게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그에 반하여 골3:10의 새 사람인 νεος ανθρωπος [neos anthropos ; 네오스 안드로포스]는 시간적으로 점차 새로워지는 새 사람으로서 매일 더욱 더 새로워지는 새 사람을 말합니다.

복음서에서도 동일한 표현이 나옵니다.  마9:17과 눅5:37에서 새 포도주와 새 가죽부대가 나오는데 새 포도주의 "새"는 네오스이고 새 가죽부대의 "새"는 카이노스입니다. 새 포도주는 활력으로 가득 차서 열광하게 만드는 새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새 가죽부대는 새 포도주이신 그리스도를 담는 그릇인 각 지방의 교회들 안에 있는 교회생활을 의미합니다.

또한 엡4:24 앞 절인 23절에서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롭게 되어'의 새롭게 되다란 말은 헬라어로 ανανεοω [ananeoo ; 아나네오오]입니다. 

아나네오오는 위에, 상부를 뜻하는 접두어 ανα [ana ; 아나]와 이미 언급한 네오스가 합성된 동사형 단어입니다. 

우리에게 참된 윗 부분인 아나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 삼층천이지요. 따라서 헬라어 어원으로 본 엡4:23~24는 "생각의 영 안에서 보좌를 향하여 [더욱 더] 새롭게 되어 가는 새사람을 입다"가 되겠지요.

이제, 종합적으로 함께 연결해 보면, 마9:17과 엡4:23~24 간 대비, 곧 '네오스 포도주'와 '카이노스 가죽부대', 그리고 '생각의 영 안에서 보좌를 향해 네오스 되다'와 '카이노스 사람을 입다'가 완벽하게 댓구가 됩니다. 

<영적 의미를 생각해보면> 카이노스 가죽부대와 카이노스 안드로포스는 새롭게 체험하고 누려야하는 교회 생활과 교회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엡4:24의 새 사람, 새 가죽부대, 카이노스 안드로포스는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그 분의 단체적인 몸인 교회입니다. 

새 가죽부대가 우리가 접해보지 못하여 매일 새롭게 체험해야 하는, 본질에서 새로운 교회 생활이듯이 새 사람 역시 아직 입어보지 못하여 언제나 새롭게 입어야 하는 신선한 교회의 실재인 것입니다.

[oi+no" (3631 오이노스 : 포도주) nevo" (3501 네오스b) ..kainov"(2537, 카이노스) ajskov"(779, 아스코스 : 가죽 부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새 포도주 부대의 특성, 탄력적인 특성과 늘어나는 특성으로 인해  낡은 부대보다  더 많이 담을 수 있고 더 오래 저장 가능, 새 포도주는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 안에 거함, 곧  평생 그분과  붙어 하나됨의 교통 통해  맺힌, 그리스도의 어떠함을 그대로 담고 있기에 용도적 특징이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림과 헌신의 전제로 쓰임


카이노스라는 단어는 그래서 저에게 깊은 느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매일 새롭게 전진하지 않으면 오래된 가죽부대가 되어버리는 교회 생활.. 

어제는 이기는 생활을 했더라도 오늘은 그 이기는 방식을 다시 적용했다간 실패할 수 밖에 없기에 매일 새롭게 입어야 하는 카이노스 안드로포스.....

카이노스의 새 사람은 일상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증거를 짊어지고 그리스도를 [날마다] 새롭게 살아내는 [유기적 공동체인 단체적]사람인 것입니다. 

나의 배경이나 출신이 무엇이며 어떠한지, 내가 속한 곳의 문화가 어떤 것인지, 새 사람 안에는 구별이 사라지고 더 이상 없습니다. 

오직 주만 보이며, 주만 봅니다. 그 안에는 그 어떤 차별도,  차별이란 그 아무것도 남김없이 다 사라지고 그 흔적조차 없습니다. 

다만 만유를 포함하신 그리스도 한 분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는 것, 이것이 카이노스의 새 사람의 일상인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 말씀에서 언급하신 실재의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 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새롭게 지으심 받은, 새 사람!!] 사람은 하나님의 복사판 사진(寫眞)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분 자신의 사진을 찍으셨습니다. 

사진이 존재하는 의의는 사람을 표현하는 것인데 사탄에 의해 더럽혀진 이후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일이 불가능해진 사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8:4-6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사람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둘째 사람이 오실 것을 알씀하십니다. 

둘째 사람이신 주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사람으로서 계실 때 하나님을 완전하게, 완벽하게 표현하셨습니다.((이것을 "체현 =: 몸으로 나타내심" 이라 함..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구주 예수님의, 그 능력의 표현이심)) 그분은 하나님의 참된 사진이셨습니다. 이제 <주 예수님의> 이 사진이 복사되었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 오신후로 [매일] 우리는 모두 주 예수님의 복사된 사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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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orfov"(4832, 쉼모르포스) ...같은 모양의 conformed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쉼모르포스(Ps. - Lucian, Amor.)는 쉰(suvn, 4862: 함께, ~와 함께, ~와 더불어)과 모르페(morfhv, 3444: 모양, 형상, 외형)에서 유래했으며, '같은 모양을 가진, 같은 모양의'를 의미한다.

2.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는 신약성경에서 2회, 로마서와 빌립보서에만 사용되었다.

(a)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구절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임을 전제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실제로 임재하고 계신다. 여기서 쉼모르포스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닮거나 비슷할 뿐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권세의 영역 안에 들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실체와 동일시될 것이며 그리스도와 똑같은 본질적 성품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계에서 그리스도는 독립된 개성(identity)을 지니고 계신다. ("많은 형제들 중의 장자', 참조: 고후 3:18).

(b)  빌 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who will transform the body of our humble state into conformity with the body of His glory, by the exertion of the power that He has even to subject all things to Himself.

여기서 사용된 용어들은 빌 2:6이하를 생각나게 한다. 여기에 내포된 사상은 본질적 품성을 덮는다는 의미의 의복에 관한 것이 아니라 낮은 몸이 영화로운 몸인 완전히 다른 몸으로 본질적으로 변화된 것에 관한 것이다. 

쉼모르포스는 '~와 같아지거나 유사하거나 동등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 자신의 소마 방식이 우리 자신의 인격을 해체시키지 않고도 우리 안에 스며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존재를 의미한다(참조: E. Guttgemanns, J. Jervell). 

그리스도와 우리 자신들은 현대의 인간 이해에 의거하여 개별적으로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권능의 영역 안에서 우리의 존재를 소유하는 것이다.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G. Brau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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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무나 = 믿음, 충성, 신실함> 아만, 아멘, 피스티스, 피스튜오 == 피스튜오 에이스(다른데서는 모두 believe in(피스튜오 엔)을 쓰지만 오직, 요1:12에서만 believe into를 쓰고 있음)

@@@m'a;(539, 아만) ...확실하게 하다, 지지하다, 충실하다, 믿다<<아멘의 출처>>

아만(동사)은 기본어근이며 '확실하게 하다, comfirm, 지지하다, 기르다 support, 충실하다, 신실하다, 성실하다 be faithful, 믿다, 신뢰하다 believe, trust'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10회 나오며, 칼, 니팔,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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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교리에서 매우 중요한 이 단어의 개념은, 이 단어에 대한 많은 대중적 개념과 대조 구별되는 '믿음'(faith)의 성경적 의미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제공해 준다. 이 어근의 의미는 핵심에는 '확실성'(certainty)의 개념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히 11:1 나타나 있는 신약성경의 믿음에 대한 정의에 의해서 확증된다. 이 어근의 기본적인 개념은 '확고함'(firmness)이나 '확실성'(certainty)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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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칼형에서 이 단어는 '지지하다, 양육하다, 기르다'를 의미한다.

왕하 18:16에서 이 단어는 '버팀 기둥'을 묘사한다. 에 2:7에서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자기 딸같이 양육했다. 민 11:12에서 "양육하는 아비", 룻4:16에서 아기의 "양육자"를 묘사한다.

2. 히필형에서 이 단어는 '확실하게 하다' 혹은 '~에 대해 확신하다', '보증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런 점에서, 히필 동사 변화에서의 이 단어는 '믿다'를 의미하며, 성경에서의 믿음은 '보증' assurance, '확실성' certainty이다 (이는 믿음을 있음직하고, 아마도 참되긴 하지만 확실치 않은 어떤 것으로 보는 현대의 개념과 대조되는 것임을 보여준다.)...이로부터 이 단어는 '확립된 사람' 혹은 '굳혀진 사람' 즉 '충성된 자'(삼하 20:19, 시 12:1, 시 31:23)라는 수동적인 의미로 사용된 칼의 수동 분사형으로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3. 니팔형에서 '확립(확정)되다'를 의미한다(삼하 7:16, 대상 17:2, 대상 17:3, 대하 6:17, 사 7:9).

'신실하다, 충실하다, 확실하다, 신뢰할만 하다'를 의미하며, 분사형에서 신자들을 나타낸다(민 12:7, 삼상 2:35, 느 9:8). 이 어형은 또한 모든 확실성의 근거가 되는 것, 즉 하나님 자신(신 7:9), 그리고 그의 언약(시 89:28)을 묘사하는데도 사용된다.

'믿음'과 '견고한 것' 사이의 관게에 관한 흥미있는 한 가지 실례는 사 7:9에서 발견된다: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라도 육십 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아하스는 만일 그가 믿지(히필형) 않는다면, 그가 견고히 서지(니팔형) 못한다. 즉 믿음이 없이는 그가 안정되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런 파생어들도 확실성과 신빙성에 대한 똑같은 개념을 반영해 준다. 파생어 아멘(진실로 verily)은 신약성경에서 아멘이란 말로 받아들여져서 오늘날의 영어 단어 'amen'이 되었다. 예수님은 어떤 문제의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하셨다(마 5:18, 마 5:26 등). 이 히브리어 어형과 헬라어 어형은 기도와 찬양송의 끝에 온다(시 41:13, 시 106:48, 딤후 4:18, 계 20:20 등). 이것은 우리의 기도에서 이렇게 사용된 이 용어가 우리가 기도드리는 주님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는 것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참조: J. B. Scott;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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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emunah이다. 이 단어는 예를 들어 하박국 2:4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에 나타나는데, 기본적인 뜻은 신실, 충성, 한결같음이다.((실지적 실행의 측면에서는, <그분의 이름-성품-어떠하심을 배워 참되게 깨닫고 (그분을 주관적으로 살아냄의 체험적 간증 얻음을)추구하며 신뢰함으로써, 결코 요동함 없이 주님을 붙들고 붙들어 믿어 들어가서 (신실하신) 그분을 생명 삼고 <주님 뜻대로, 주님의 때에 온전히 이루시기를> 바라고 앙망하며 기도-기대-기다림으로써, 발휘하는 생생한 믿음을 의미할 것)) 

이런 가치는 기본적으로 그 주체가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보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평생을 한결같이 살아내는 여정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신약성서에 사용된 믿음에 대한 그리스어는 pistis이다. 이 단어의 뜻 역시 신실함, 충성, 헌신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살아냄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보여주신 분이다(롬3:21-26). 바울 역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보여주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믿는자들이라면, 이들 역시 아브라함과,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보여야 한다. 

믿음에 해당하는 라틴어는 fides인데 기본적인 뜻은 신뢰, 보호, 의존이다. 

믿음(faith)에 해당하는 이런 단어들은 어떤 일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믿는 인식론적 동의를 뜻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faith)은 그러한 인식론적인 믿음(belief)에 행동이 더하여진 개념으로서, 한번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에 그치는 믿음(belief)이 아니라 평생 일관되게 사는 삶을 뜻한다. 

믿음(faith)을 영어로 번역하는데 어려운 점은 이 단어를 동사로 표현할 때 거기 알맞는 영어 단어가 없다는 점이다. 

믿음에 대한 그리스어 동사는 pisteuo인데 여기 해당하는 영어 단어가 없다는 말이다. 가장 가까운 영어 단어는 "믿음을 실천하다" "믿는대로 살다"라는 뜻을 지닌 faithize가 아닐까 싶다

영어 성경은 그리스어 동사 pisteuo를 "to believe"로 번역한다. 그런데 이 동사는 belief의 동사이지 faith의 동사는 아니라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스어pisteuo를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영어동사가 없기 때문에 여러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 중 하나는 "믿음"을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갖는 지속적인 신뢰 관계를 표현하는 원래 의미를 잃어버리고, 특정 교리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의미로 이해되는데 그친 것이다. 적어도 그리스어 pisteuo를 "believe"가 아니라 "faithize"로만 이해한다 하여도, 이러한 번역상의 위험성을 많이 줄일 수 있다. 

물론, "faithize"조차도 pisteuo의 의미를 충분히 살린 단어라고는 볼 수 없지만, pisteuo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단어가 없는 상황에서는 그나마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제2 바울서신이나 목회 서신에서 사용된 pistis나 pisteuo는 여기서 말하고 있는 faith이 아니라 belief의 의미로 사용되어, 어떤 교리나 가르침을 <실행할 바 참 진리로서>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용법은 분명 복음서나 바울의 진정성 있는 서신에서 사용된 용법과는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제2 바울서신이나 목회 서신에 나타난 pistis는 belief로 번역해도 무방하다.

((개인적 소견을 더함))...한편, 이 문제는 pisteuo를 to believe into = be life into로, 곧 "그리스도 안으로 믿어 들어가 그분의 모든 영광(이름-성품-풍성부요충만능력의 어떠하심) 그대로 나타내시도록 나의 참 생명 삼음"으로 정의하면 될 것...(Q을 <성경 말씀 그대로> 참되게 일며 사랑하며 섬기며 절대적으로 신뢰하기에, 나의 짐을 그분께 가지고 나아가 <그분이 처리-해결해 주시도록> 맡겨드림[바로 이 <상호 거함-맛봄-누림-기업-소유-붙듬 됨 통해, 참되게 아는 바 그 Q께, 신뢰함으로써 전적으로 맡겨드림이 아만이자 피스튜오가 될것> + (그분의 때에 그분 뜻대로 참되게 이루시기를 구함으로써) 그분 안에 머무름 + 기도/기대/앙망/신뢰 ==>그분이 이루어 주신 바를 증거함의 선순환으로 나아감이라 할 수 있을 것..

====2. 성경이 말하는 ‘믿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의미

......내 짐을, 내 모든 사정을 완전히 통찰하여 알고 계시는 여호와 Q께, 그분을 신뢰하여(의뢰하여) <온전히> 맡겨 (넘겨) 드림 통해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 하나되어 머무르며, 맡아주신 그분이 (말씀하시는 그대로, 이미 말씀하신) 그대로 <항상 신실하사, 지고지선의 진복 이루시는 그분의 뜻따라 최선이 되도록> <그분의 때에> 이루어 주실 것을 확실히 하고 일깨워드리며, 바라고 앙망하며 기도-기대하며 기다림

===구약의 경우

구약에서 '믿음'으로 사용된 된 단어가 히브리어로 '아만'(aman)이란 동사이다. 여러분들이 여기서 ‘아멘’이란 말이 나온 것 기억하는가? 아멘이 바로 이 단어에서 나왔다.

----‘아만’은 본래 뜻이 ‘굳게 하다, 흔들리지 않게 견고하게 하다’는 뜻이다. 

영어로 confirm이란 말로 주로 번역된다. 그래서 이 ‘confirm' ’굳게 한다’는 동사, 우리말로는 그것을 사역형동사라고 한다. 사역형, 뭘 ‘누구한테 맡겨서 그렇게 하게 한다’는 이 단어를 ‘아만’이라는 사역형동사로 바꾸어 놓으면 그것을 거의 대부분이 우리말에 ‘믿는다’ 라는 말로 번역을 했다.

최초로 구약에  '아만'의 사역형 동사가 처음 나오는 곳이 창세기 15장 6절이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하신  저 유명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원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성경 절인데 거기 그런 표현이 실제로 사용되었다. 

이 ‘아만’이란 동사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런 것이다. ‘믿는다’라고 번역했을 때, 그 뜻은 자기스스로가 설수 없기 때문에, 굳게 설수 없기 때문에, 그대로 서 있어야 하는데 자꾸 넘어지기 때문에, 누구의 손에 (자신을) 맡겨서(의뢰/의탁해서) 결과적으로 그 손이 와서 ‘굳게 세워준다. 견고하게 한다’는 뜻이다. 자기 스스로 굳게 서는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맡겨서 굳게 서게 한다’ 는 그 뜻이 ‘믿는다’라는 것이다. 이 ‘아만’이란 동사에서 능동형 소위 기본형으로 쓰는 단어로는 ‘믿는다’라고 번역된 말이 없다.   

<조심하라, 본래의 뜻과 용도를 견지해야 한다, 오용해서는 결코 안된다...우리가 종종 ‘내가(내 스스로가) 믿는다’ 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히브리말에는 그런 (재귀족) 용도로 사용된 적이 없다. 즉, ‘내가 스스로 혹은 내 힘으로 무엇을 믿는다’ 그런 개념이 없다.>

<‘아만’은 ‘(누군가에게 자신을) 맡겨서 굳게 한다, 견고하게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 견고하게 한다, 굳게 선다’ 그런 말이 아만이란 동사에 쓰인 일이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는다’라는 말을 이해할 때 아주 중요한 말이다. 정말로 중요한 얘기이다. 이것을 모르면 진리에서 빗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은 여기서부터 샘의 근원이 달라지면서 딴 샘이 나온다. 딴 샘이 생기는 것이며 전혀 다른 물이 나오는 다른 샘이 생길 수밖에 없다. >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

역대하 20장 20절에 이 단어가 사용된 예를 함께 찾아보겠다.

“이에 백성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신뢰하라’는 말씀을 주목하라. 이 말은 ‘아만’이라는 동사에 사역형동사이다. 그 다음을 보자.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여기 ‘견고히 서리라’는 말이 '아만'의 수동형 동사이다. 시키는 것은 사역형이다.  ‘빨간 물속에 옷을 집어 넣었더니 그 빨간 물이 옷을 빨갛게 만들어서 옷이 빨갛게 되어 진다’는 이 예문에서 누군가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수동형 동사이다.

다시 이 말씀을 잘 보자. 똑같은 ‘아만’이란 동사인데 앞에 것은 사역형 동사이고 뒤에 것은 수동형 동사이다. ‘견고히 서리라’ 이 말은 자기가 견고하게 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맡겨서 하나님께서 나를 견고하게 해주셔서, 내가 견고하게 서게 되어 진다는 수동형이다. 

'나'라는 존재가 나 혼자는 도저히 서있을 수가 없다. 자꾸 넘어진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 그러면 결과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붙드셔서 내가 견고하게 서 지는 것이다. 그것이 이 ‘아만’이란 동사의 두 가지 모습이다.

그런 예들이 성경에 아주 많이 나온다. 하나만 더 보자. 이사야 7장 9절 끝에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라도 육십오 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그리고 끝에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여기서 ‘믿지 아니하면’은 ‘아만’의 사역형 동사이다.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에서 ‘서다’ ‘정확하게 굳게 세워진다’ 그것은 아만의 수동형 동사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손에 맡기지 아니하면 견고하게 세워지지 못 한다’는 뜻이다. 자기가 스스로 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붙잡아서 세워주심으로 세워진다. 그렇지 않으면 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니까 자기 혼자는 넘어진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견고하게 세워진다.

----사단의 거짓진리를 조심하라

‘믿음’에 대해서 개념정리를 잘 해야 한다. 왜냐하면 마귀가 6천년동안 우리인간에게 뭐라고 말했는가하면 ‘네가 스스로 열심히 노력해서 무엇인가를 이룩하라. 신앙이든지 무엇이든지’다 그렇게 가르쳤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아주 익숙해 있다. 우리가 늘 하는 이야기 있지않은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그 말이 어떤 면에선 진리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전혀 진리가 아니고 진리의 반대이다. 이 개념이 서지 않으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이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구원을 베푸신다는 사상을 마귀가 계속 주입시켜 왔다. 실제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얻어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이 땅에서 사다리를 놓아가지고 하늘 끝까지 사람이 올라가서 우주의 중심까지에 닿는 것이 가능한가? 영원히 해도 불가능하지만 반대로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사다리를 내려가지고 땅에 닿게 하면 아무 일도 아니다. 야곱의 사닥다리를 기억하는가?

사닥다리를 누가 내리는가? 하나님께서 사닥다리를 내리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다리를 놓아 가지고 달나라까지 가겠는가? 태양 끝까지 가겠는가? 우주의 끝을 어떻게 가겠는가? 그것은 불가능 하다.

그래서 사단은 끊임없이 안 되는 일을 시킨다.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게 하는 것이 사단이 하는 방법이다.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하게 하고 발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사단의 술책이다.

====신약의 경우

신약성경에는 ‘믿음’을 '피스튜오'(pisteuo)라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했다.

이 단어가 번역된 것을 보면 아주 흥미로운데 번역된 것을 함께 찾아보도록 하자

먼저 요한복음 2장 23절 24절에 “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23절의 '믿었으나’ 는 헬라어로 '피스튜오’라는 동사이다.

24절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거기 ‘의탁지’라는 단어도 역시 피스튜오라는 동사이다. 23절에는 ‘믿었다’라고 번역했고, 24절로 와서 ‘의탁’즉 ‘맡기다’란 말로 번역했다. 본래 ‘믿는다’는 말이 가진 의미가 바로 ‘맡긴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굳은 믿음

좀 더 확실하게 번역한 구절이 있다.

누가복음 16장 11절에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라고 기록 되어 있는데 여기 ‘맡기겠느냐’ 이 단어가 ‘피스튜오’이다.  여기는 아주 정확하게 우리말로 ‘맡긴다’라고 번역 되었다. 그러니까 이 ‘믿는다’는 동사의 헬라어나 히브리어에서 동일하게 가르치고 있는 기본적인 의미는 ‘맡긴다’이다. 자기 스스로 설수 없기 때문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로마서 3장 1절-2절에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고 기록되었는데 여기 ‘맡았다’는 말이  '피스티오’의 수동태로 되어있다.  우리말로는 ‘맡았음’이라고 되어있다.  마치 유대인들이 성경을 자기들이 떠 맡았다, 끌어 앉았다 이런 의미가 아니라,  ‘맡겨졌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맡겨졌다’가 본래 뜻이다.

그래서 ‘피스튜오’라는 동사나 ‘아만’이란 동사가 구약이나 신약에 공히 ‘맡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게 성경의 원래 뜻이다. 여기서 약간의 말의 형태가 변형된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인 의미는 바뀐 일이 없다. 정리하면 이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 하셨다 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믿는다’ 라고 표현 할 때는 무슨 의미냐 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그 사실에 자신을 ‘맡긴다’ 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지적으로 머리로 동의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생각과 존재를 거기다가 ‘맡긴다’가 본래 뜻이다. 

‘믿음’의 주체는 근원적으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믿는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런 말이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견고하게 해주시도록 나를 ‘맡긴다’라는 말을 할 수 있지 내가 스스로 ‘믿는다(굳게선다)’ 이런 말은 아예 없다. 이게 중요한 진리이다.

----'믿음' 곧 맡기는 것에 대한  실생활에서의  예

어떤 어머니가 있었는데 그 어머니에게 결혼을 앞둔 딸이 있었다. 그 딸은 같은 교회에 다니는 어떤 청년과 결혼을 목표로 교제를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 남자 청년이 사위 감으로 영 못 마땅했다. 그래서 딸에게 교제를 중단할 것을 종용했는데 그 딸의 입장은 어머니와 전연 달랐다. 너무나 그 남자 청년이 좋은 것이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말씀에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며 계속 교제를 했다. 시간이 흘러도 중단하기는커녕 계속하니까 어머니는 딸의 장래가 불안했고 그만큼 딸을 압박했다. 딸도 양보할 수가 없다보니 모녀 사이가 갈등관계로 변해 갔다. 드디어는 어머니도 딸도 양보할 수 없는 상태까지 되자 감정싸움이 심각하게 되어 이 어머니가 이럴 경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연락을 했다.

그래서 그 어머니에게 '그 남자 청년과 딸이 결혼하면 행복할 것인지, 불행할 것인지 하나님보다 어머니가 더 잘 알 수 있습니까? 라고 물어보니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하나님보다 미래를 더 잘 알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딸의 마음을 바꿀 수가 있습니까?'  '딸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불가능 하다'고 했다. 그러면 더 이상 그 교제를 참견하지 마시고 그 결혼문제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겨보라고 조언했다.

하나님께 어떻게 맡기는지 가르쳐달라고 해서 기도로 맡기라고 하며 기도할 내용 '아버지 저는 그들의 이후의 미래를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 생각대로 반대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사이좋던 딸과의 관계가 매우 험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제 생각을 버리고, 제가 그들을 헤어지게 하려고 했던 생각과 노력을 버리고 잠언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하신 약속의 말씀 속에 들어가서 그 약속의 말씀 속에 계신 아버지 발 앞에 저의 이 염려와 문제를 내려놓고 아버지께 맡기겠사오니 그 교제가 아버지의 뜻이면 이루어지게 하옵시고 아버지 뜻이 아니면 헤어지게 해 주옵소서! 저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이 문제를 맡아 주셔서 아버지의 뜻대로, 아버지의 시간표대로, 아버지의 방법대로 해결해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해 보라고 했다.

1주일 뒤에 다시 연락이 왔는데, 그 기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불안하고  그 남자 청년을 보면 웬지 밉고, 보기 싫고, 딸에게는 계속 잔소리를 하게 되는데  그것이 왜 그렇게 안 되느냐고 질문했다.

그래서 마음이 불안한 그러한 상태는  아직은 맡기지 않은 증거이고, 맡겨지면 하나님이 견고케 하시므로 마음에  평강을 주신다고 하면서 예레미야 29장 13절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라는 말씀대로 전심으로 마음을 다해 기도할 뿐 아니라 믿음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그 약속을 믿고 맡길 수 있도록, 견고히 서도록, 믿음 달라고 다시 기도하라고 했다. 그렇게 해 보겠다고 했다. 

다시 1주일 정도 지났는데 연락이 와서는 '이제는 마음에 평강이 있고, 딸에게도 잔소리가 나오지 않고 그 남자 청년을 봐도 미운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것이, 그런 상태가 바로 하나님이 견고케 해 주신 상태인 믿음 곧 맡기는 것이라고 말해주며 이제는 하나님께 맡겼으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문제를 처리하시는지 그때까지 기다려 보시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마귀는 어떤 문제든 염려든 죄든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게 방해 할 뿐만 아니라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여 맡긴 일에 대해서 반드시 시험을 하되 그 문제의 해결이 지체될 때 또 다시 염려하게 하여 내가 해결하고자 하는 시험을 한다고 조언했고 그리하여 맡기는 것 곧 믿음을 견고케 하지 못하게 방해하는데 이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이 어머니는 주의하고 계속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렸고 약 3개월 이후에 연락이 왔는데 딸이 그 남자 청년과 헤어졌다고 하며 너무 기뻐하고 감격해 했다. 맡기는 것이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너무 좋은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 '믿음'은 마음으로나 생각에서 동의하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실제로 행동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로 인하여 맡겨서 하나님이 견고케 해 주셔야,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야 우리가 맡기게 되고 더욱 믿음을 받고 더욱 더 많이 맡기게 되어 "믿음에서 믿음으로"성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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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믿는 믿음

이제 예수님의 믿음에 관한 헬라어의 문법을 따른 목적격 소유격,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 예수님을 우리가 믿는 믿음, 예수님 자신의 믿음이 아니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함께 생각해 보자. 

요한계시록 14장 12절에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성도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님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고 말씀하신다. 그 예수님의 믿음은 그 문맥 자체에서는 성도가 가진 믿음이기 때문에 성도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보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하셨던 그 믿음이 분명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어느 한쪽만 강조해서는 안 되고 이 두 가지가 성경에 다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손가락이 다섯 개이지만 손바닥 하나에 붙어있다. 손가락이 하나씩 따로 놀지 않는다. 마치 그러한 손가락처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가지셨던 믿음이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다 성경 안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나중에 우리가 종합적으로 다시 한 번 살펴보겠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관한 이야기는 성경에 아주 많이 기록이 되어있다. 첫 번째로 요한복음 1장 12절, 이 말씀은 아주 독특한 헬라어 표현이다. 여기 말씀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11절 말씀에 아무도 영접하지 않았지만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하신다. 

그런데 그 ‘영접하는 자’를 가리켜서 ‘그 이름을 믿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믿는다’는 동사는 ‘피스튜오’라는 동사이다. 여기 그 이름을 ‘~을’이라고 말한 이 전치사는 ‘에이스’라고 말씀드렸다. ‘피스튜오 에이스’이다. 이 ‘에이스’는 ‘속으로 들어가’는 뜻이다. 영어의 표기 중에 ‘believe in’이라는 말이 있다. 이 영어가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는 모른다. 영문학자들은 아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believe in God” 혹은 “believe in Christ”라고 우리가 흔히 말할 수 있는데, 여기 ‘in’이라고 하는 전치사가 붙어 있는 것처럼 옛날 헬라어는 ‘피스튜오’(‘믿는다’ ‘맡긴다’) ‘엔’이다. ‘엔’은 아마도 영어의 ‘in’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경에 쓰인 이 헬라어는 일반 헬라어에 있는 이 ‘피스튜오 엔’은 영어의 ‘believe in’이란 말이 아닌 다른 동사구, 이미 보셨지만, ‘피스튜오 에이스’이다. 맡기되 ‘속으로 들어가 맡긴다’는 뜻이다. ‘into’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believe into’라는 말은 영어에도 없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은 없다. 

---하나님 안에 자기를 맡기는 믿음

그런데 이 ‘believe in’이 아니고 ‘believe into’라고 쓴 이 ‘피스튜오 에이스’라고 쓴 동사구는 성경 외의 일반 헬라어 문장에는 없다. 성경에만 나온다. 성경에도 그것도 다른 복음서에는 한두 번 나온다.  나머지 20여 번의 ‘피스튜오 에이스’라는 동사구를 요한이 요한복음과 요한이 쓴 편지서에 이 문구를 사용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이다.  ‘피스튜오’라는 이 단어의 구약원어는 ‘아만’이다. ‘맡긴다’ ‘견고하게 한다’는 뜻이다.

그 다음에 ‘in’은 ‘베’라고 하는 히브리어 전치사를 썼다. 창세기 15장 6절에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할 때 직역을 하면 ‘여호와 안에 맡겼다’는 뜻이다. ‘베’는 ‘in’ ‘속에’이다. ‘속에 맡겼다’ ‘여호와 속에 맡겼다’ 영어로 ‘commit’ ‘believe’이다. 하나님 안에 자신을 맡기는 그래서 하나님에 의해서 견고하게 되어 지는 상태, 즉 견고하게 되어지도록 맡기는 것을 ‘믿는다’고 표현했는데, 이 이야기를 신약성경의 헬라어로 표현할 때는 일반적으로 그 말 그대로 갖다 옮긴다면 ‘피스튜오 엔’ 즉 ‘believe in’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이 ‘in’을 쓰지 않고, ‘into’ 즉, 헬라어 ‘에이스’라는 전치사를 썼다. ‘피스티오 에이스’ 즉 ‘속으로 들어가서 맡긴다’고 표현했다. 요한은 헬라어를 사용해서 자기의 말을 만들어서 표현하고 있다. 일반 헬라어 문장에 나오지 않는다. 이런 동사구가 없다. 또한 70인 역이라는 성경이 있다. 구약성경 즉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이다. 당시에 요즘 같으면 영어같이 쓰이던 로마제국의 공통 공용되어지던 말이다. 

LXX 헬라어로 구약 히브리어 성경을 70명이 번역했다고 해서 70인역(LXX)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70명이 번역했다고 하는 헬라어 성경에도 ‘피스튜오 에이스’라고 하는 동사구는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오직, 특별히 요한이 만들어 쓴 동사구이다. 흥미로운 것이다. 요한이 왜 이런 동사구를 만들어서 썼을까? 그것은 이 믿음에 대한 생생한 표현을 하기 위해서이다. 

‘영접한다’는 것은 모셔 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을 방에 모셔 들이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설명하기를 모셔 들이는 것은 밖에서 모셔 들이는 것이지만 모셔 들인 다음에 각방을 쓰는 것이 아니라, 신부가 신랑을 영접한 다음에 그 신부가 신랑 속으로 들어간다. 서로 하나가 된다. 그것이 ‘믿는다’는 말씀을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영어를 배울 때도 직역을 하는 습관을 가져보면 영어를 조금 더 빨리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어떤 언어든지 그렇다. 직역하는 습관을 가져보는 것은 좋은 것이다. 예를 들어서, 성경에 ‘ark’라고 하는 영어 단어가 있다. 그것은 법궤를 가리킬 때도 쓰는 말이고 노아 방주를 가리킬 때도 쓰는 말이다. 본래 말은 ‘상자’이다. 그런데 상자 모양으로 생긴 법궤나, 상자 모양으로 생긴 노아가 탔던 방주는 실제로 ‘ark’이다. 그래서 영어식 표현으로 ark 라는 말을 쓰는 것처럼 우리도 성경 원어가 가지고 있는 본래 말을 그대로 직역해보는 연습은 성경을 조금 더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이다. 

---생명을 만드는 공식

여기 분명히 예수님을 영접한 다음에, 신랑을 모셔드린 다음에 신랑은 신랑대로, 신부는 신부대로 따로 있는 그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그 이름 속에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성품에, 그분의 인격 속에 자신을 맡기는 것을 믿음이라고 표현했다.  이 믿는다는 말이 생명을 만드는 공식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면 ‘피스튜오 에이스’라는 똑같은 동사구를 사용하고 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말씀했던 똑같은 동사구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랑이다. 그런데 신부가, 죄인이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즉, 속에 들어가서 맡긴 자 마다라고 할 때에  ‘피스티오 에이스’ ‘into’이다. 아주 생생한 표현이다. 이 ‘피스티오 엔’이라고 기록한 곳은 요한복음 3장 15절이다. 물론 요한이 기록했지만 예수님께서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는 ‘피스티오 엔’ 즉, ‘believe in’인데, 이때는 아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유는 “저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을 맡기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다시 반복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사랑’이다. 자신을 주시는 것보다 더 훨씬 큰 일 즉, 자기 아들 주신다. 신랑을 주신다. 이 때에 이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을 맡기는 자마다,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신랑이 자기를 주었을 때 신부가 그 신랑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을 맡기면 자식이 나온다. 생명이 탄생한다. 사랑 + 믿음은 영생이다. 이것이 영생의 공식이다. 이것이 첫 번째 믿음의 의미이다. 우리가 다 주님 속에 들어가서 죄 된 우리 자신을 완전히 맡길 때, 우리 죄로 인해서 예수님의 심장은 터지고 그리고 우리 죄는 용서되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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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9)..29 For those whom He foreknew, He also predestined to become conformed to the image of His Son, so that He would be the firstborn among many brethren;.//..29 For those whom He foreknew [and loved and chose beforehand], He also predestined to be conformed to the image of His Son [and ultimately share in His complete sanctification], so that He would be the firstborn [the most beloved and honored] among many believers.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18 But we all, with unveiled face, beholding as in a mirror the glory of the Lord, are being transformed into the same image from glory to glory, just as from the Lord, the Spirit. //18 And we all, with unveiled face, continually seeing as in a mirror the glory of the Lord, are progressively being transformed into His image from [one degree of] glory to [even more] glory, which comes from the Lord, [who is] the Spirit.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I love those who love me; And those who seek me early and diligently will find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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