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06.27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하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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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알려주신 <성경적, 히브리적> 묵상, 하가HAGAH)]] 

@1.KEY QUESTION.....하나님은 가나안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왜 ‘하가(HAGAH)’를 강조하셨을까요? (1)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땅을 이미 점령하고 있던 원주민과 전쟁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백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끕니다. 분명 두려움과 부담이 있었을 것입니다. 

온통 눈앞에 닥친 현실에 매몰되어 있던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전쟁 비책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전쟁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묵상’ 얘기를 꺼내셨습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 1:8)”

여기에 사용된 ‘묵상하다’가 바로 히브리어로 ‘하가(HAGAH)’입니다. 성경에서 ‘하가’란 단어가 처음 사용된 곳이기도 합니다. 

이 당시 여러 언어가 존재했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을 알리기 위해 선택한 언어는 히브리어였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앞두고 있던 여호수아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히브리어 단어 중 ‘하가’란 단어를 선택하셨습니다. 

여호수아에게 ‘하가’가 필요했다면 오늘날 약속의 분깃을 향해 전진하는 우리에게도 ‘하가’가 필요할 것입니다. 

‘하가’란 단어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아는 것이 중요해 보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묵상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자기계발 분야에서도 묵상을 강조합니다. 일반적으로 묵상이란 단어를 들으면 소리 없이 깊이 생각하는 것을 떠올립니다. 

국어사전에서는 묵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묵상(默想)=눈을 감고 말없이 마음속으로 생각함))

하지만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하가’는 눈을 감고 말없이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가’는 입을 움직이고 중얼거려 소리를 내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단어입니다. 

만일 아무 소리 없이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기 원하셨다면 ‘하가’ 대신 다른 단어를 선택하지 않으셨을까요? 

이미 ‘묵상’이란 단어가 가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강조하시려던 의도에 초점을 맞추고자 히브리어 ‘하가(HAGAH)’를 그대로 사용할 예정입니다.

가나안...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나안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골 1:12~14......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가나안은 좋은 땅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약속의 땅입니다. 바로 이 땅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분깃(portion, 할당받은 땅)이요 기업이었습니다. 

그들은 흑암의 권세가 붙들던 애굽을 탈출하여 좋은 땅으로 옮겨졌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를 쓰면서 모형론(模型論, typology)에 근거하여 바로와 애굽으로 예표된 ‘흑암의 권세’에서 좋은 땅(가나안)으로 예표된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성도를 언급하며 그들에게 할당된 ‘기업의 부분’이 있음으로 인해 감사하기를 원했습니다.

다른 말로 얘기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약속한 분깃이 있듯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모든 것을 포함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분깃이 있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분깃을 얻기 위해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하가’가 매우 중요한 것임을 말씀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알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약속의 분깃은 그들만의 얘기가 아닌 나에게도 해당하는 얘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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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을 머금은 말씀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측량할 수 있을까요? 만일 말씀이 식상하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말씀이 아닌 내 마음이 식상해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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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KEY QUESTION...가나안에 들어오기를 더 원하신 분은 주님이었지요. 그런 주님이 가나안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지키기 어려운 것(하가)을 강조하셨을까요?

1. 하가의 첫 단추

말씀을 통해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태도입니다. 

때로는 위로를, 때로는 깨달음을, 때로는 지식을. 하지만 ‘하가’는 지식과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가의 과정에서 얻는 부산물일 뿐. 사랑한다면 상대방을 통해 얻으려고 하는 게 먼저가 아니죠. 

더 가까워지고 싶고, 더 알고 싶고, 더 교제하고 싶은 마음이 첫 번째일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상대방을 통해 무언가를 얻는다면 그것은 부산물일 뿐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하가도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은 말씀이요 인격입니다. 말씀이신 주님과 더 가까워지고 싶고, 더 알고 싶고, 더 교제하고 싶어 ‘하가’를 할 때 그 과정에서 위로와 깨달음과 지식이 따라올 수 있습니다.

말씀이신 주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이 내 안에 거하게 하고, 그 말씀이 내게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려는 태도. 이 태도가 모든 방법을 넘어서게 합니다. 

진짜 사랑한다면 모든 제약을 넘어서듯이요. ‘하가’가 어렵다고 한다면 말씀을 교제의 대상이 아닌 자신에게 도움을 줄 그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누군가와 교제하려면 배려하고, 존중하고,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배려해야 하며, 존중해야 하며, 내가 추구하던 가치관과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하며, 함께 하는 시간을 갖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말씀이 인격인데, 어찌 이런 과정 없이 친해질 수 있겠습니까? 

말씀과 교제하고 싶은 마음만 있다면 결코 ‘하가’는 어렵지 않습니다. 먼저 사귀기를 원하는 주님이 결코 어렵게 만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만 돌이킨다면요.

2. 하가는 되새김질하는 것입니다

되새김질하는 동물을 반추동물이라 부릅니다. 

‘젖소’는 대표적인 반추동물이죠. 사람과 달리 위가 4개나 있습니다. 젖소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리지 않고 최대한 먹어 둡니다. 

4개 위 중 첫 번째 위에 이렇게 먹은 것을 보관합니다. 보관하던 음식을 입안으로 끄집어 올려 되새김질한 후 다시 다른 위로 보냅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여 젖소는 풀에 있던 진액을 영양가 있는 우유로 바꿉니다. 소는 풀을 잘 먹고 다시 끄집어 올려 되새김질할 뿐인데 그 결과로 우유를 얻습니다. 

우유를 얻으려면 되새김질을 해야만 합니다. 되새김질은 ‘하가’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비유입니다. 

말씀이 처음부터 우유로 바뀌지 않습니다. 영양가 있는 우유를 얻으려면 기회 있을 때마다 말씀을 듣고 보관해야 합니다. 

‘하가’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재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재료를 보관하고 있고, 많이 안다고 해서 말씀으로부터 우유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말씀을 듣고, 은혜도 많이 받았음에도 삶이 쉽게 변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말씀을 되새김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되새김질 없이는 평안, 기쁨, 건강, 형통과 같은 우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 순간 큰 감동이 있었던 말씀도 되새김질을 하지 않으면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그 말씀이 내 삶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하지만 감동이 있던 말씀을 계속해서 되새김질을 한다면 그 말씀은 내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나를 변화시키는 것은 되새김질하여 우유로 바꾼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운전 중입니다. 길이 꽉 막혀 있습니다. 약속 시각에 늦을 것 같아 마음이 불안합니다. 

멈춤 신호가 켜지기 전에 교차로를 건너야겠단 생각에 속도를 내고 있는데 바로 내 앞에서 멈춤 신호가 켜졌습니다. 늦었다는 불안함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불편함이란 일차적 감정이 먼저 올라온 상태에서 신호등이 빨리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신호등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엇을 보게 되면 반드시 무엇을 한다’처럼 ‘어떤 상황에 부닥치면 반드시 하가를 한다’와 같은 하가를 위한 트리거(trigger)를 설계해 보란 글을 읽고 ‘신호등을 볼 때마다 하가를 해야지’ 결심했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 주간에 ‘하가’하던 말씀은 시편 23편이었습니다. 

불편한 마음 가운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중얼거려 봅니다. 

시편 23편1절 전체도 아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부분만 끄집어 올려 입안에서 데굴데굴 굴리며 되새김질했습니다. 

이미 하가하던 말씀을 끄집어 올려야겠다 생각했을 때부터 불편한 감정이 말씀 앞에 머리를 숙이고 더는 나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신호가 바뀌고 계속 운전을 하며 가는 동안에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몸은 운전하고 있지만, 불현듯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아… 그렇지… 주님이 나의 목자이신데… 다른 사람의 목자가 아닌 바로 <나>의 목자이신데… 내가 어떤 상황에 있든 내 상황을 가장 잘 아시는 <나>의 목자이신데…’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길이 막혀 비록 약속에 늦는다 할지라도 바로 <나>의 목자이신 주님이 그 어떤 부족함 없이 나를 이끄시리란 믿음이 들어오자 한순간 평안함이 밀려 옵니다. 

길은 여전히 꽉 막혀있지만, 그 상황과 상관없는 평안을 경험합니다. 말씀을 되새김질하여 평안이란 우유를 얻은 예입니다.

3. 되새김질하는 것, 그게 사랑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친밀히 교제하기 원한다면 따로 시간을 내 함께 만나 추억과 재료를 쌓아야 합니다. 그 재료의 질이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칩니다. 

너무 소중했던 시간을 되새김질하는 것만으로 충만한 감정을 가져다줍니다. 이 감정이 충만할수록 그 어떤 것도 사랑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하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따로 시간을 내 말씀과 함께 좋은 추억과 재료를 쌓아야 합니다. 그 재료의 질이 하가의 질을 결정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길을 걷다가도, 설거지를 하다가도, 사람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다가도, 신호가 멈춘 그 짧은 순간에도 너무 소중했던 재료를 끄집어 올려 되새김질을 계속 해야 말씀을 통한 사랑의 결과를 경험합니다.

말씀 안에 이미 결과가 들어있지만, 되새김질 없이는 그 결과를 경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실 ‘하가’는 이게 전부입니다. 

인격이신 말씀이 너무 소중해서 아주 평범한, 아주 사소한 일상의 특정 한 시점에 그 말씀을 끄집어 올려 되새김질하는 것. 그게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나를 변화시킵니다.

가나안에 들어오기를 더 원하신 주님이 여호수아에게 주야로 ‘하가’할 것을 강조하셨다면 그것이 어려운 것은 아닐 겁니다. 

만일 ‘하가’가 어렵다면 그것은 인격이신 말씀과의 친밀한 사귐이 없기 때문이겠죠. 

가나안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주야로 하가할 것을 강조하신 이유는 결국 중얼거리는 행위가 아닌 말씀을 향한 마음 중심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주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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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KEY QUESTION...하나님은 수 많은 히브리어 단어 중 왜 소리를 강조한 '하가'를 선택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히브리어 ‘하가’에는 ‘생각하다, 사색하다’의 뜻도 들어 있긴 합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중얼거리다(murmur, mutter)’ 혹은 ‘신음을 내다(moan)’로 더 많이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즉 소리와 깊은 연관이 있는 단어입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말없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묵상의 국어사전 정의와는 사뭇 다릅니다. 

‘하가’를 사용한 다른 성경 구절을 살펴보면 하가의 근원적 의미를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하가)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Seek unto them that have familiar spirits, and unto wizards that peep, and that mutter:

…길하레셋 건포도 떡을 위하여 그들이 슬퍼하며(하가) 심히 근심하리니…for the foundations of Kirhareseth shall ye mourn; surely they are stricken.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하가) 때에……Like as the lion and the young lion roaring on his prey…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하가)…Like a crane or a swallow, so did I chatter: I did mourn as a dove:…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하가)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And my tongue shall speak of thy righteousness and of thy praise all the day long.

'하가'를 사용한 성경 구절 보기...

‘하가’를 사용한 다른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이사야 8:19 - 속살(중얼)거리는 * 이사야 16:7 - 슬퍼하며  * 이사야 31:4 - 으르렁거릴  * 이사야 38:14 - 슬피 울며 * 시편 35:28 - 말하며

위 구절들에서 ‘중얼거리다(mutter), 슬퍼하다(mourn), 으르렁거리다(roar), 슬피 울다(mourn), 말하다(speak)’의 히브리어는 모두 ‘하가’입니다. 

묵상과 어울리지 않는 사자와 비둘기 울음소리에도 ‘하가’를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강조하신 묵상(默想)은 눈감고 조용히 말씀을 깊이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자가 먹이를 움켜잡고 으르렁대듯이, 사자처럼 말씀을 움켜잡고 으르렁대며 중얼거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가’입니다.

‘하가’를 사용한 다른 성경 구절을 통해 ‘하가’가 소리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을 봤습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묵상에 있어 ‘소리’가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만일 아무 소리 없이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기 원하셨다면 ‘하가’ 대신 다른 단어를 선택하셨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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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KEY QUESTION...하나님은 가나안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왜 '하가(HAGAH)'를 강조하셨을까요? (2)

1. ‘하가’할 말씀 안에는 하나님의 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 

‘소리’로 세상을 창조하신 거죠. 세상을 창조하셨던 하나님의 그 ‘소리’가 말씀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하가는 이 하나님의 소리를 풀어내는 작업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중얼거릴 때 처음부터 감동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음을 믿고 딱딱한 말씀을 씹듯이 계속 중얼거립니다. 

내가 하가를 하면서 중얼 거리는 소리 진동이 말씀 안에 감춰져 있던 하나님의 소리가 갖고 있던 고유 진동수와 일치하는 어느 한순간 공명이 일어납니다. 

이때 단단한 말씀 껍질을 깨고 말씀 안에 있는 영과 생명이 새어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영과 생명이 새어 나올 때 말씀 안에 있는 계시가 풀립니다. 그 계시가 곧 영의 생각입니다.

* 딱딱한 코코넛 껍질과 딱딱한 말씀 껍질?..* 딱딱한 코코넛 껍질.. * 코코넛 안에 있는 생명..*딱딱한 말씀 껍질..* 말씀 안에 있는 생명

코코넛은 아주 단단한 껍질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껍질을 깨지 않는 이상 코코넛을 맛볼 수 없습니다. 

내가 코코넛을 맛볼 수 없다고 해서 단단한 껍질로 둘러싸인 이 코코넛을 코코넛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코코넛입니다.

2. ‘하가’를 강조하신 이유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여러 차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대안을 주신 게 아니라 ‘하가’를 강조하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일반적으로 자아는 생각의 주도권을 쉽게 내려놓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곧 자아니까요. 생각을 내려놓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상황과 사건을 해석하는 생각이 바뀔 때 두려움이란 감정도 바뀌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렇듯 생각이 바뀌면 감정과 태도와 해석과 행동 모두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생각이 누구에게도 쉽게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이 생각이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면 고개를 숙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하가’를 강조하신 이유는 두려운 감정을 일으키는 생각에 말씀이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소리를 머금은 진리 그 자체지만 딱딱합니다. 이해하기도 어렵고 소화하기도 어렵습니다. 

여호수아에게 ‘하가’하라고 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갖고 믿음으로 순종하여 딱딱한 말씀을 소리내 중얼거립니다. 

감동이나 깨달음이 없어도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음을 믿고 계속 중얼거리며 녹여낼 때 말씀 자체의 소리가 내 ‘이성(理性)’에 부딪힙니다. 

처음에는 아무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계속 말씀 그 자체의 소리가 이성에 충격을 가할 때 어느 한순간 이성이 말씀 앞에 굴복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두려움에 놓인 사람이 있습니다. 상황이 자신의 감정을 압도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믿음으로 말씀 한 구절을 택하여 계속 ‘하가’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두려움의 감정이 말씀보다 컸습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상황을 밀어내겠다는 마음으로 ‘하가’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가’하는 말씀을 입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계속 중얼거리는 어느 한순간 말씀의 한 부분이 툭 튀어나와 내 심령에 부딪힙니다. 

뻣뻣하던 내 생각이 한순간 그 말씀 앞에 복종함을 경험합니다. 이성이 말씀 앞에 굴복하는 순간 감정을 붙들고 있던 두려움도 사라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예를 들면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를 시종일관 입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중얼거리던 어느 한순간 지식처럼 알고 있던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란 말씀이 나를 멈춰 세우고 나와 함께 하고 계신 주님의 실제를 강한 확신처럼 느끼게 하는 식입니다. 말씀을 ‘하가’하는 사람에게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조용히 한두 번 묵상하는 것만으로는 경험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일상생활에서 그 말씀을 입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계속 중얼거려보지 않는다면 마치 우연처럼 빛을 드러내는 말씀을 경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후 주야로 말씀을 ‘하가’할 것에 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가’를 통해 말씀이 생각에 영향을 미칠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하가’는 기록된 말씀(로고스)에서 직접 퍼 올린 소리(레마)입니다. 말씀 안에 담긴 하나님의 음성을 내 이성에 들려주는 것과 같습니다. 

욥기 37장 2절은 ‘하가’를 다음과 같이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음성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헤게, from하가)를 똗똑히 들으라(욥37: 2)"

모든 죄와 시험은 생각에서 비롯합니다. 생각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말씀을 씹는 것입니다. 

딱딱한 말씀을 되새김질하듯 중얼거리며 말씀을 씹을 때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풀려 내 생각을 적십니다. 

이 ‘하가’의 소리가 감정과 행동과 태도에 영향을 미치는 육신의 생각을 잠식할 때 비로소 영의 생각이 활성화됩니다.

보이지 않는 생각에서 승리해야 물리적인 가나안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가’하라고 강조하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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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하가’하며 풀어낸 기도야 말로 하나님께 가장 잘 상달됩니다. Prayer that is born of meditation upon the Word of God is the prayer that soars upward most easily to God’s listening ears. – R.A. 토레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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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KEY QUESTION....그렇다면 '하가(HAGAH)'는 일반 묵상과 어떤 부분이 비슷하고 어떤 부분이 다를까요?

기존 ‘묵상’이란 단어가 가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던 ‘하가(HAGAH)’란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가는 일반 묵상과 어떤 부분이 비슷하고 어떤 부분이 다를까요? 가장 다른 부분은 역시 암송을 전제로 중얼거려야 하는 데 있습니다.

1. 중얼거려야 합니다

‘하가’가 일반 묵상과 가장 다른 부분은 소리를 내 중얼거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하기그 from하가) 때에 불이 붙으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시편 39:3) My heart grew hot within me, and as I meditated, the fire burned; then I spoke with my tongue: (NIV)”

마음 속에 불이 붙은 뜨거운 감동으로 중얼거리며 말씀을 읊조릴 때 자아를 붙드는 고집센 나의 이성이 잠잠해집니다. 

그 중얼거리는 말씀을 재료삼아 성령님의 계시가 임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2.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가’는 시간을 정해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QT 시간, 기도 시간, 성경을 펴 놓는 시간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의 모든 순간이 ‘하가’를 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가)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 1:8)”

감동 받은 말씀을 되새김질 하지 않으면 받은 감동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감동을 유지하고 더 큰 계시를 사모한다면 그 구절을 수시로 ‘하가’하여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걸어 다니면서, 회의 전에, 설거지하면서, 버스 안에서, 신호 대기 중에, 잠자기 전에, 일어나자마자와 같은 일상의 모든 순간이 ‘하가’할 만한 순간입니다. 

심지어 상대방과 대화를 하다 발생하는 아주 짧은 몇 초의 공백 마저도 ‘하가’를 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늘 의식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모든 순간이 하가의 대상입니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주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이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고 하신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마음이 간절한 사람에게는 ‘시간’과 ‘장소’가 ‘하가’의 장벽이 될 수 없습니다.

3. 암송해야 합니다

일반 묵상은 암송이 필수는 아닙니다. 하지만 ‘하가’는 암송을 기본 전제로 합니다. 

‘시간’과 ‘장소’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나 ‘하가’하려면 말씀을 암송하고 있는 것이 훨씬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운전하면서 성경책을 펴고 묵상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말씀을 암송하고 있다면 그 말씀을 운전하면서 중얼거리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암송하고 있으면 화장실에서도 잠깐 ‘하가’를 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건널목 건너기 전 신호를 기다리면서도 말씀을 ‘하가’할 수 있습니다. 

암송하고 있는 구절의 한 단어만 갖고도 중얼거리며 훌륭한 ‘하가’를 누릴 수 있습니다. 

암송이 ‘하가’는 아닙니다. 하지만 암송이 ‘하가’의 시작은 맞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암송을 통해 토라 말씀을 세대에서 세대로 전했습니다. 

암송은 ‘하가’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시작 지점입니다.

예수님은 ‘하가’란 단어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일상 속에서 혼자 말씀을 중얼거리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말씀과 함께 사셨던 예수님이 공생애 시작 전 마귀의 시험을 받습니다. 이 때 세 번 모두 신명기 말씀을 끄찝어 올려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마귀의 공격이 있을 때 성경책을 펴가며 말씀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평소 하가하던, 암송한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말씀을 암송하고 있다면 어떤 특정 상황에서 성령님이 적절하게 꺼내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가 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음을 기억해야 겠습니다.

4. 말씀을 기도로 연결해야 합니다

‘하가’의 목적은 깨닫고 많이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가’를 통해 감춰져 있던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주님이 내게 나타나 주님의 마음을 알고 내 마음이 뜨거워져 반응할 수 밖에 없는 것. 모든 시작이 주로부터 말미암기를 갈망하는 마음. 이것이 하가를 하는 이유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말씀을 수시로 중얼거리다 보면 어느 순간 ‘하가’하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이 훅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기도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기도는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암송하고 있으면 암송한 말씀을 기도로 풀어내기가 훨씬 쉽습니다. 

말씀을 기도로 풀어내며 중얼거리는 것. 이 자체가 훌륭한 ‘하가’입니다. 

내 생각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녹여 그것을 기도로 올릴 때 계시가 풀어집니다. 이렇듯 ‘하가’는 말씀과 기도와 계시를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5. 깊이 사색해야 합니다

‘하가’를 피상적으로 하다 보면 암송하는 것으로 끝날 때가 있습니다. 중얼거리다 말고 어느새 끝납니다. 

영의 깊은 영역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길어 올리려면 ‘하가’의 깊이도 더 깊어져야 합니다. 이전 ‘하가’에서 누리던 만족으로 하나님의 깊이를 제한하면 안됩니다. 

‘하가’의 끝은 어디일까요? 하나님 마음의 거리 만큼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어느 정도 깊이일까요? 영원 만큼이나 깊습니다. 

‘하가’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다고 단정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영원 앞에, 말씀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내가 조금 아는 자라고 생각했지만 영원을 머금은 말씀의 계층적 깊이를 경험할 때 그 어떤 것도 모르는 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가’의 삶이 깊어질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말씀 조차도 ‘하가’를 하다보면 완전히 새로운 각도에서 깨달음을 얻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말씀도 이미 안다고 생각하며 ‘하가’를 해선 안됩니다. 이미 알고 있는 말씀 조차도 마치 처음 보는 말씀처럼 대해야 합니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은 낡아지지만 성령님은 늘 새롭습니다. 그 성령님이 날마다 말씀으로 나를 새롭게 하기 원하십니다. 

익숙한 말씀을 하가할 때 조차 이 말씀에 무엇인가 더 깊은 것이 있다는 믿음으로 깊이 사색해야 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한 단어 혹은 짧은 한 문장만으로 하루 종일 ‘하가’하며 사색할 수도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 어떤 것도 그냥 기록된 말씀은 없습니다. 

이미 안다고 생각한 것에 더 깊은 보물이 숨어있을 수 있음을 의식해야 합니다. 

‘하가’를 통해 이런 보물을 길어 올리려면 계란 프라이 요리같이 빨리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몇날 몇 일을 푹 고아야 깊은 맛이 우러나는 곰국같이 한 말씀을 갖고 오랜 시간을 붙들고 있어야 할 때도 있음을 기억해야 겠습니다.

6. 감동을 기록합니다

소리는 사라집니다. 생각도 쉽게 사라집니다. ‘하가’하며 받은 감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가’를 하며 받은 감동이 있다면 꼭 기록으로 남기는 습관을 가지십시오. 

받은 계시와 감동을 한 곳에 기록하고, 모아놓은 기록을 정기적으로 살펴보다 보면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던 점과 같은 기록들이 어느새 서로 연결되어 내 인생을 이끌고 계신 하나님의 궤적을 보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만일 기록하지 않았다면 결코 알기 어려웠을 내용들입니다. 

또한 하가하는 구절과 그 감동을 기록하다 보면 중얼거릴 때와는 또 다른 계시가 풀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런 기록을 데일리하가에서는 ‘저널링(Journaling)’이라고 부릅니다.

7. 감동을 나눕니다

‘하가’는 말씀에서 생명을 길어 올리는 과정입니다. 생명의 영역은 나눌 때 고갈되지 않고 늘어납니다. 

하가를 하며 받은 감동을 겸손과 온유와 절제 아래 다른 사람과 나눌 때 그 감동은 배가 됩니다. 

특별히 같은 커뮤니티에 속한 사람들끼리 동일한 구절로 한 주간 ‘하가’를 한 후 서로 만나 일상에서 경험한 은혜를 나눌 때 그 말씀이 더 풍성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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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묵상하는 것을 아는 배우지 못한 사람이 묵상하는 것을 모르는 많이 배운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압니다.  An unschooled man who knows how to meditate upon the Lord has learned far more than the man with the highest education who does not know how to meditate. – Charles Stanle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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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가 실행, 어떻게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1. KEY QUESTION...'하가'가 무엇인지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요?

하가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우선 이것만 기억하셔도 되겠습니다. 하가는 얼마나 많은 구절을 암송하느냐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한 절의 말씀이라도 그 말씀이 내 삶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데일리하가는 한 절의 말씀으로 일주일 사는 것을 돕는 과정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시편 16편 8절 말씀 한 절로 일주일 동안 ‘하가’한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16:8) I have set the LORD always before me; because he is at my right hand, I shall not be shaken. (ESV)”

우선 이 말씀을 틈나는 대로 암송합니다. 그리고 암송한 말씀을 일상에서 언제 어디서든, 어떻게든 수시로 중얼거립니다. 

말씀이 익숙해질수록 아래와 같은 상상과 활동을 해보세요. 말씀을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묵상하라고 하신 주님의 권면을 살아내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가(HAGAH)....말씀 구절을 암송하고 일상에서 수시로 중얼거린다

^*상처난 곳에 연고를 잘 스며들게 바르듯 내 심령에 말씀을 잘 스며들게 바른다는 생각으로 중얼거려 보십시오.

^*연고를 바를 때 직선 방향으로 한 번 바르고 끝내지 않습니다. 손가락을 원형 모양으로 돌려가며 잘 스며들 때까지 바릅니다. 말씀도 잘 스며들게 바르려면 이런 방식으로 중얼거려야 합니다. 시편 16편 8절 말씀을 예로 들면,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한 번 쭈욱 바르고),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가 여호와를 항상(말씀을 원형 모양으로 돌린다 생각하며 반복하고), 항상…항상… 항상… (특정 단어에 감동이 있으면 집중적으로 그 단어를 반복하며 스며들게 합니다)’

^*내게 너무 익숙한 말씀일지라도, 내게 너무 어려운 말씀일지라도, 내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말씀일지라도 그것은 나의 편견일 뿐입니다. 

그 어떤 말씀도 그 말씀 자체에 내 생활을 변화시킬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이 있습니다. 내가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해서 내 삶에 적용하려는 시도를 멈춥니다. 내가 비록 이해를 못 할지라도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기에 그저 순종하는 마음으로 계속 중얼거립니다. 내 지각과 감정과 상관없이 하가를 멈추지 않는 어느 순간 그 말씀이 내 삶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빛을 비춰주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말씀을 언제, 어디서든 암송하며 중얼거립니다. (더 자세한 내용 보기)

^말씀을 어떻게든 암송하며 중얼거립니다. (더 자세한 내용 보기)

^하가를 더 풍성하게 해줄 재료를 확보합니다. (더 자세한 내용 보기)

###FOCUS

하가의 기본은 암송입니다. 하지만 암송 자체가 하가는 아닙니다. 하가에 있어 말씀을 암송하며 중얼거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말씀을 중얼거리기만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하가를 제대로 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가를 하면서 말씀을 암송하고 중얼거리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말씀을 매개로 성령님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실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가를 할 때마다 이 말씀을 매개로 인격이신 말씀과 교제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암송하며 중얼거리기를 소망합니다.

하가에 있어 암송이 왜 필요할까요? 하가의 성공은 일상의 모든 순간에 말씀이신 주님을 모시는 여부에 달렸습니다. 

걸어 다니는 것과 같은 일상에서 하가를 하기 위해 성경책을 펼 수는 없습니다. 일상에서 말씀을 하가하려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암기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 말씀을 보지 않고 어느 정도 입술로 풀어낼 수 있을 정도로 암송하고 있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도 말씀을 암송하셨을까요? 예수님도 일상에서 말씀을 중얼거리셨을까요? 유대인이셨던 예수님은 하나님이 왜 여호수아에게 ‘하가’를 강조하셨는지와 ‘하가’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를 정확히 알고 계셨을 겁니다. 예수님은 ‘하가’를 어떻게 하셨을지 궁금하다면 아래 글을 읽어 보세요.

***하가’를 하신 예수님***예수님도 하가를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공생애를 앞두고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십니다.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 주리신 예수님께 마귀가 나아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 덩이가 되게 하라’고 시험합니다. 예수님의 일상에 마귀가 기회를 엿보고 공격한 것입니다. 마귀를 물리치기 위해 예수님은 성경책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암송하고 있던 신명기 8장 3절 말씀을 입으로 끄집어 올려 마귀의 공격을 무력화시키십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 8:3)"

이후에도 두 번의 공격이 더 있었지만 모두 신명기 말씀을 끄집어 올려 마귀의 공격을 물리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지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마귀의 시험을 받으십니다. 하지만 다른 것으로 이 시험을 이기신 게 아니라 늘 암송하며 중얼거리며 하가를 하셨을 그 말씀으로 물리치신 것이 아닐까요? 

(이런 상상도 해 봅니다.... 마귀의 시험이 있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 주간 예수님은 신명기 말씀을 중심으로 하가를 하고 계셨습니다... 하가를 하던 말씀이 마귀의 공격에 대응하는 말씀이라고 전혀 생각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하며 삶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음을 믿고 말씀이 내 삶을 해석하고 기회를 얻기 바라는 마음으로 하고 계셨을 당시 마침 마귀가 예수님을 공격한 겁니다. 예수님이 하가하던 말씀이 순간 영감을 줍니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십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 주간에 신명기 말씀이 아닌 다른 말씀을 하가하고 계셨다면 그 다른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치 않으셨을까요? 물론 어디까지나 상상입니다)

하지만 어떤 말씀이라도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음을 믿고 순종하며 하가하는 자에게 자주 일어나는 일이기에 그런 상상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하가 실행의 단계들==

하가의 유익은 일상에서 드러납니다. 말씀을 인식하는 것만큼 말씀이 내 삶에 기회를 얻기 때문입니다. 일상에서 언제, 어디서나, 어떻게든 하가를 하고자 할 때 기억하면 도움이 될 4단계를 소개합니다. 하가를 하기 위한 자세한 방법이라기보단 하가의 중심을 잡아줄 4가지 단계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일상에서 ‘하가’를 하기 위한 4단계 ::: 인식하고, 올리고, 씹고, 기다린다!

-----인식합니다!

((태도))

하가의 성공은 ‘언제, 어디서든, 어떻게든’에 달려 있습니다. 인격이신 주님을 존중하는 첫 번째는 말씀으로 나와 함께 하고 계심을 인식하는 겁니다. 의식하지 않으면 말씀이신 주님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가의 첫 단추도 나와 함께 하고 계신 말씀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말씀이신 주님은 연인(戀人)만큼이나 실제입니다. 모든 관계는 상대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실행))

길을 걷다가도, 전철을 타고 목적지를 향해 가다가도,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다가도, 회의하다가도,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가도 하가를 떠올려야 합니다. 가장 사소하고 평범한 순간일지라도 내가 인식하는 그 자리에 주님은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인식이 하가의 ‘반(半)’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경험하는 첫 번째는 존재의 인식과 믿음입니다.

----올립니다.

((태도))

되새김질의 기본은 안에 있는 것을 입으로 끄집어 올리는 겁니다. 하가하려는 말씀을 입까지 올리지 못하면 하가는 할 수가 없습니다. 받은 은혜(여물)를 생명의 실제(우유)로 바꾸는 것은 되새김질(하가)입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하가하고 있는 말씀을 인식하는 것과 그것을 입까지 끄집어 올리는 것이 가장 큰 영적 전쟁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실행))

하가의 기본은 암송입니다. 완벽하게 외우지는 못하더라도 보지 않고 그 말씀이 의미하는 것을 자신의 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안에 들어와 있는 말씀을 되새김질하듯 입까지 끄집어 올립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말씀을 인식하고 그 말씀을 입까지 끄집어 올리는 것이 곧 말씀이신 주님을 내 앞에 모시는 것입니다(시편16:8).

----씹습니다.

((태도))

되새김질을 통해 우유를 만들려면 한번이 아닌 계속 씹어야 합니다. 씹을수록 말씀에서 물이 흐릅니다. 그 어떤 말씀도 무한하고 영원하며 능력이 있습니다. 지금 하가하고 있는 말씀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이 믿음으로 멈추지 않고 중얼거리며 씹고 있는 어느 한순간 성령님이 기회를 얻어 빛을 비춰주십니다. 그때의 감동과 계시가 역사를 일으키는 믿음을 산출합니다. 

((실행))

단단한 껍질 안에 있는 코코넛 생명의 물을 마시려면 그 껍질을 깨야 합니다. 단단한 말씀 껍질을 깨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생명의 물이 나올 때까지 계속 반복하여 중얼거리며 씹는 것입니다.

말씀 자체가 능력이며 내가 이 말씀을 계속 씹을 때 그 안에 있는 물이 나올 것이란 확신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때 선형(線型)적으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이렇게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여호와는 나의, 여호와는 나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내게,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와 같이 단어와 구를 반복하며 그 각각에 잠시 멈춰 음미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려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반복하며 감동이 있을 때 자연스레 그 말씀을 풀어 기도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기다립니다!

((태도))

(1) 말씀을 인식하고, 끄집어 올리고, 계속 씹는 것을 통해 큰 감동이 있다 할지라도 그 모든 주체는 여전히 ‘나’일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깨닫는 것이 클수록 주어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래서 계속 중얼거리며 하가를 하다가도 잠시 멈춰 영이신 주님이 주어의 자리에 서시도록 기다리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내가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와 내 상황을 읽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주체가 되면 나의 한계만큼만 역사하지만, 말씀이 주체가 되면 내 한계를 초월한 말씀의 역사를 경험합니다.

((실행))

예수님을 내 삶의 모든 영역에 주인(the LORD)으로 모시려는 시도가 주되심(LORDSHIP)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가장 실제적인 실천 중 하나가 말씀을 주어로 모시는 삶입니다. 내가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읽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말씀을 하가한 후 기다리는 과정이 필요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가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주님과 사귀고 주님의 마음을 알기 위함입니다. 그러려면 내가 해석한 말씀이 아닌 말씀이 내 삶을 해석한 것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주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란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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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KEY QUESTION...일상에서 '하가'를 하는 구체적인 예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1)

언제든(WHEN) 어디서나(WHERE) – 시간과 장소 상관없이...%%안으로 들어온 말씀을 삶 속에서 녹여내는 과정

하가의 핵심은 말씀을 입에 그림자처럼 달고 다니면서(Shadowing)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며 성령님께 주도권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하가는 특정 시간에 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 될 때마다, 특정 장소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든, 지겹거나 하기 싫다고 생각이 들 때면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이런 훈련 과정을 통해 여호수아처럼 말씀을 입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주야로 하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아닐까요? 그래야 내 생각으로 살지 않고 말씀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생각과 지혜로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언제든(WHEN) 어디서나(WHERE) – 시간과 장소 상관없이

1. 일어나자마자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은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전환입니다. 

매일 아침 눈뜰 때마다 이 세상에 없던 새로운 하루가 창조되어 눈앞에 나타납니다.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요. 

이 하루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주님께 아침마다 감사와 찬양으로 높여 드립시다. 모든 과거의 부정적인 것은 다 떨쳐 버리십시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아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말씀을 중얼거리며 하루를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지요? 내 숨이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말씀의 숨이 세상을 향해 던져지게 하는 것은 어떨지요? 

이번 주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시편 16:8 말씀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를 반복해서 중얼거리며 하루를 시작해 보십시오. 이 훈련을 며칠 하고 나면 말씀을 중얼거리며 깨는 자신을 보고 놀랄 것입니다. 말씀이신 주님과 함께 잠에서 깨는 것, 생각만 해도 행복하지 않습니까?

2. 잠자기 전에

오늘 하루가 행복했습니까? 아니면 힘들었나요? 좋은 것들만 추려 선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실패와 수치와 낙망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찬양합시다.

잠자기 전 모든 것을 주님의 발 앞에 내려놓읍시다. 그날의 수고와 근심과 염려는 물론 그날의 은혜와 기쁨과 영광까지도요. 

잠자기 전 나만의 ‘리츄얼(ritual, 儀式)’을 계발하는 것은 어떨까요? 

하루를 마감하며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염려가 나를 붙들지 않도록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리셋(reset)시킨다고 고백해 봅시다. 

그리고 새로운 날에 대한 소망을 품어 봅니다. 틀림없이 그날 그날 족한 은혜를 주실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리고 한 주간의 말씀을 ‘하가’하며 잠들어 보십시오. 

복잡한 생각과 함께 잠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중얼거리며 잠드는 겁니다. 

말씀이신 주님과 함께 잠들고 꿈에서도 말씀이신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을 상상해보세요.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시편 내용을 보면 다윗은 이렇게 말씀을 읊조리며 잠이 든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말씀의 능력을 경험해 보십시오. 잠을 자는 동안에 상한 마음과 몸까지 치유시키실 주님을 기대해 보십시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3. 걸어 다닐 때

‘하가’를 하기 가장 좋은 시간은 걸어 다닐 때입니다. 성경 암송대회에 나가려고 말씀을 암기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성경책을 보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말씀 자체를 중얼거리며 묵상할 수 있기 때문이겠죠. 

출퇴근할 때, 사람을 만나러 나갈 때, 식사하러 가면서, 산책하면서 암기한 말씀을 중얼거리고, 읊조리며, ‘하가’해 보십시오. 

발걸음 리듬에 맞춰 ‘하가’할 때 심장 박동과 함께 혈액을 타고 말씀이 흐르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말씀에서 갓 짠 보혈이 내 천연적 피를 덮을 것입니다. 

걸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혼자가 아님을 의식하십시오. 말씀이신 주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하기 원하십니다. 

걸으면서 ‘하가’를 한다는 것은 말씀이신 주님과 동행(同行)하는 것입니다. 업무 중, 집안일 중, 공부 중일 때 일부러라도 잠시 짬을 내 걷는 시간을 가져 볼 것을 꼭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목적을 정해 두고 바쁘게 걷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말씀이신 주님과 교제하고 싶은 갈망으로 걸어보십시오. 

걸으면서 말씀을 입에 올립니다. ‘저는 정말 주님과 친밀히 교제하고 싶어요. 주님을 더 알고 싶어요.’란 마음으로 입에 올린 말씀을 중얼거립니다. 

말씀을 중얼거릴 때 영적인 에너지가 흘러나옵니다. 걸으면서 ‘하가’를 하는 것은 몸과 영혼 모두에 건강이 될 것입니다.

4. 미팅 직전에

하루에도 수많은 만남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과의 미팅일 수도, 믿지 않는 사람과의 미팅일 수도 있고, 공식적인 미팅일 수도, 편한 사람들과의 미팅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의 모든 순간순간에 부모는 관심을 기울입니다. 주님도 이런 마음으로 나의 모든 것에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당연히 내가 만나는 모든 만남에도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모든 만남 전에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주님… 제가 주님을 이 만남에 모십니다…’라고 하가하며 고백해 보십시오. 

이렇게 말씀을 하가하고 기도하는데 10초도 안 걸립니다. 영의 영역은 내가 믿는 만큼 실재입니다. 

아주 짧은 고백이지만 주님은 들으시고 그 만남 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5. 일하는 중간마다

일에 몰입해 있으면 성령님이 개입할 틈이 없습니다. 원고를 쓰다가도, 문서 작업을 하다가도, 디자인에 몰두하다가도, 설거지하다가도, 아이들을 가르치다가도 중간중간 말씀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 짧은 순간은 사실 몇 초도 되지 않습니다. 내 물리적인 눈으로는 여전히 컴퓨터를 보고 있고, 그릇을 보고 있고, 아이들을 보고 있지만, 마음의 눈은 언제든 주님을 향할 수 있습니다. 훈련만 된다면, 어렵지 않습니다. ‘주님을 이 자리에 모십니다’란 고백은 아주 순간적이지만 영원(永遠)과 맞닿게 합니다. 하가를 통해 일상의 멈춤(pause) 버튼을 누를 수 있다면 주님이 내 시간의 보좌 위에 ‘주(主, Lord)’로 좌정하실 것입니다. 주를 향한 마음의 갈망을 품고 이 멈춤의 시간을 훈련한다면 일하는 중간중간 하가를 하는 것이 어렵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모든 것의 ‘주되심(Lordship)’을 인정하는 태도를 배웁니다.

6. 식사하면서

식사 전후는 ‘하가’하기 좋은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자신과 관계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은 영의 양식입니다. 육신의 욕구를 채울 때 영의 갈망도 함께 떠올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먹은 것이 곧 육신의 ‘나’입니다(You are what you eat!). 

무엇을 먹는지가 내 육신의 성분을 결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후 하나님은 애굽의 음식에 길든 그들의 식성을 다루셨습니다. 

그리고 광야 생활 내내 ‘말씀’을 상징하는 ‘만나’를 먹게 하셨습니다. 

육은 땅의 음식이 필요하지만, 영은 하늘의 음식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말씀의 능력으로 강건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식사 시간마다 ‘하가’하는 말씀이 나를 둘러싼 모든 염려와 스트레스를 삼켜 버리는 상상을 해보십시오. 

식사 전 빵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루에 몇 번이나 기도하시는지요? 적어도 식사 시간 때만큼은 ‘하가’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짧은 시간이라도 ‘하가’하는 말씀을 통해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어 달라고 기도해 보십시오. 

수련회 가면 식사 전 성경 암송을 해야 밥을 먹었습니다. 이제는 시켜서가 아니라 주님을 너무 사랑하여 자원하는 기쁨으로 식사 전 하가를 하지 않으면 밥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해보는 것은 어떨지요?

7. 어려운 상황 중에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든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10:13)”

문제를 바라보지 않고 문제 위에 계신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바라볼 때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으나 자신을 삼킬 것 같은 파도를 바라볼 때 물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물 위에 계십니다. 

나를 삼킬 것 같은 문제 위에 계십니다. 문제를 바라보면 문제에 빠지지만, 주님을 바라보면 그 문제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말씀이신 주님을 하가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하가하며 영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불안과 염려와 걱정을 제압하시며 그 위를 걷고 계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문제를 내가 해결하려 하면 그 문제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주님께 맡기면 그 문제에 대한 책임은 주님이 지십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베드로전서 5:7)”

내가 밟고 있는 땅의 관점으로 문제를 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계실까요? 하늘 위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고 계신 하나님의 믿음을 구하십시오. 나의 믿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믿음이 들어올 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언제 들어옵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옵니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로마서 10:17). 말

씀을 통해 그 문제를 이길 수 있는 믿음이 들어 오도록 소리로 중얼거리며 하가하십시오. 그 하가의 소리를 타고 한순간 문제를 푸는 믿음의 열쇠가 들어올 것입니다.

8. 운전 중에

운전을 정기적으로 한다면, 자동차 안 만큼 하나님과 교제 나누기 좋은 장소는 없습니다. 큰 소리로 찬양하고 기도해도 뭐라 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입니다. 

자동차는 내 태도에 따라 가장 최상의 예배 장소로 만들 수 있는 곳입니다. 자동차 안에서 하가하는 말씀을 큰 소리로 선포해보십시오. 

그 소리에 마음 중심을 실어 보십시오. 그 소리가 자동차의 공기를 바꿀 것입니다.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하가 소리를 타고 그 자리에 풀릴 것입니다.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것만큼 좋은 기도는 없습니다. 말씀 자체를 소리 내 풀면 그것이 가장 좋은 기도입니다. 

자기 생각으로 기도하기보다 암송하고 있는 여러 말씀을 계속 선포하십시오. 선포하는 중에 감동 주시는 것이 있으면 그 감동을 고백과 기도로 바꿔 보십시오. 

이런 흐름을 타고 목적지 도착 전까지 하가로 계속 기도하다 보면 자동차가 곧 지성소임을 경험합니다. 자동차는 하나님과 나만의 추억을 쌓는 가장 귀한 예배 장소입니다. 

신호 대기 중에 우두커니 기다리지 마십시오. 멈춤 신호가 켜지면 ‘하가’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항상 모십니다’ 고백해 보세요. 자동차 핸들은 내가 붙들고 있지만 내 인생의 핸들은 주님이 붙들고 계심을 깨달을 것입니다.

9. 가장 사소한 일 가운데

예수님의 이름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그 뜻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만유에 편재(遍在, omnipresence)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누추한 우리 안에 거하기로 하셨습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심을 의미합니다. 그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영의 이름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내가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어떤 상황에서든 나와 함께 하십니다. 

임신한 여인은 모든 상황에서 조심합니다. 임신 초기 태동이 없어도 자신이 임신한 것을 의식합니다. 

자신과 언제나 함께 하는 태중의 생명을 늘 인식하기 때문에 먹는 것, 말하는 것 등 모든 상황에서 조심합니다. 

거듭난 자 안에 하나님의 생명(조에, zoe)이 있습니다. 생명을 품은 자는 생명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 생명을 인식하는 것이 곧 생명의 통제를 받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영에 통제를 받는 것을 ‘영적(프뉴마티코스, 靈的)’이라고 합니다. 

임신한 여인이 모든 순간 태중의 생명에 통제를 받듯, 하나님은 내 인생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생명의 영에 통제받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삶입니다. 

이 생명의 영에 통제를 받는 순간 하나님이 임마누엘로 드러나십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사소한 일을 떠올려 보십시오. 

신문 보는 일? 손톱 깎는 일? 드라마를 보는 일? 설거지? 화장실에 앉아 있는 일? 과연 이런 일에도 주님이 함께 하실까 하는 바로 그곳에 주님은 함께 하십니다. 

그동안 인식을 못 했을 뿐입니다. 인식하는 만큼 나타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화초에 물을 주며 왜 하가할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지요? 손톱을 깎으며 왜 하가할 생각을 못 해봤는지요? 자신이 생각할 때 가장 사소하다고 여겨지는 일 중에 태중의 생명을 인식한 여인처럼 하나님의 생명을 인식하며 하가하는 훈련을 의도적으로 해보십시오. 이런 훈련을 통해 가장 사소한 순간에도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10. 모든 시간 속에서

나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영과 영의 연결은 한순간입니다. 

이성적으로, 감정적으로 준비하고 노력해서 절차에 따라 연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마음 중심을 꿰뚫어 보십니다. 

주를 향한 마음속 갈망이 주님을 터치할 때 주님은 나의 마음을 터치하십니다. 

주님이 아니고서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자인 것처럼 마음 중심으로 ‘주님~’이라고 부를 때 영과 영의 연결은 0.5초도 안 걸릴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내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나와 함께 하십니다.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란 마음 중심의 고백에 반응하기 위해 언제나 대기 중이십니다. 말씀을 입에서 떨어뜨리지 말고 주야로 ‘하가’하라고 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나를 귀찮게 하려고 하신 말씀이 아닐 겁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해 하신 말씀이 아닐 겁니다. 나를 도와주고 싶으셔서입니다. 내가 ‘하가’할 때 영이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시간 속에서 ‘하가’하길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내 심령 가운데 부어지길 기도합시다. 말씀 자체가 내 모든 시간과 삶 전부를 주장할 때 하나님은 나의 삶을 형통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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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KEY QUESTION....일상에서 '하가'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하가의 핵심은 말씀을 입에 그림자처럼 달고 다니면서(Shadowing)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며 성령님께 주도권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하가는 특정 시간에 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 될 때마다, 특정 장소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든, 지겹거나 하기 싫다고 생각이 들 때면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이런 훈련 과정을 통해 여호수아처럼 말씀을 입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주야로 하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아닐까요? 그래야 내 생각으로 살지 않고 말씀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생각과 지혜로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든(HOW) – 형편과 상황 상관없이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쉬지 말고 ‘하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언제까지 순종했을까요? 며칠 열심히 하다 그만뒀을까요? 여호수아는 백십 세까지 장수하며 큰 축복을 누렸습니다. 하가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되고 형통하리라고 한 하나님의 약속이 그대로 여호수아에게 이뤄졌습니다. 여호수아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시간과 장소 상관없이 말씀을 중얼거리며 하가했을 것이란 상상이 무리일까요? 여호수아라고 매 순간 하가하는 것이 즐겁지는 않았을 겁니다. 여호수아 역시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말씀을 하가하기 위한 자신만의 노하우를 갖고 있었을 것이라 상상해 봅니다. 시편 1:2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편 1:2)”

시편 저자는 ‘즐거워하여’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일을 해도 어떤 사람은 모든 것에 불평하고, 어떤 사람은 모든 것에 즐거워합니다. 그 일을 대하는 태도가 감정을 결정합니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못 이기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못 이깁니다. 

말씀이 ‘즐거워하여’라고 했으면 내가 즐거워할 수 있음을 믿고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감정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믿으면 감정이 따라옵니다. 말씀을 끊임없이 내 입술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그림자처럼 붙어 있게(shadowing) 할 만한 자신만의 방법들을 꾸준히 찾아보십시오. 다음은 몇 가지 예 입니다.

1. 부착물

포스트잇이나 종이에 ‘하가’하려는 말씀을 써보십시오. 컴퓨터, 냉장고, 문 앞, 화장실 등 보이는 곳곳에 붙입니다.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받습니다. 눈에 보일 때마다 하가를 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해보십시오. 눈에 보이는 부착물에 정성을 쏟으면 그만큼 애착이 가기도 합니다. 부착물을 만드는 시간도 하가와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만드는 과정 자체가 귀한 시간일 수 있는 겁니다.

2. 스마트폰 배경화면

‘하가’하려는 말씀을 스마트폰 배경화면으로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스마트폰만큼 접근성이 좋은 것도 없을 겁니다. 하가 말씀을 배경 화면으로 하면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습니다. 포토샵과 같은 프로그램을 활용해도 좋고, 종이에 쓴 것을 사진 찍어 배경화면으로 활용해도 좋겠습니다.

3. 말씀 카드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 말씀을 암송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은 역시 말씀 카드였습니다. 디지털 기술이 점점 더 발전해 가고 있지만, 손으로 쓴 말씀 카드는 또 다른 감성을 제공합니다. 말씀 카드를 만드는 동안 외울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하가를 하며 떠오르는 소중한 사람에게 말씀 카드를 만들어 선물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4. 말씀을 음성으로 듣기

성경 말씀을 들을 방법이 많아졌습니다. 하가를 진행하는 구절들만 따로 음성 파일로 만들어 보십시오. 출퇴근이나 이동 중에 반복해서 들으면 효과적으로 암송할 수 있습니다. 음성 파일을 구하기 어렵다면? 자신이 직접 녹음해서 듣고 다니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내 안에 성우 본능이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5. 알람 활용

의식하지 않으면 흘러가는 대로 삽니다. 하가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어도 바쁘게 살다 보면 생각조차 못 하고 하루를 마무리할 때도 있습니다. 다니엘은 하루 세 번 시간을 정하여 창문을 열고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처럼 하루 세 번 시간을 정해보면 어떨까요? 나만의 하가 시간을 정하여 알람을 맞춰 보십시오. 알람과 함께 나만의 하가 시간을 갖고 짧게 기도한다면 시간의 주권을 주님께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6. 함께 하기

하가를 할 때 가장 좋은 것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같은 구절로 하가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가를 진행하며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눌 때 말씀의 힘은 배가 됩니다. 또한, 서로를 통해 하가를 계속하게 하는 큰 동기부여를 받습니다. 특별히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이라면 식사 시간 등의 특정 시간을 정하여 함께 암송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7. 자신만의 트리거(TRIGGER) 계발

개에게 먹이를 주기 직전 종을 치면 나중에 종만 쳐도 침을 흘립니다. 이를 ‘조건반사’라고 하죠.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가’를 하려 할 때 이 조건반사 원리를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어떤 특정 조건일 때 반드시 ‘하가’를 하는 겁니다. 무엇인가를 일으키는 특정 조건을 트리거(trigger)라 부릅니다. ‘하가’에 대한 자신만의 트리거(trigger)를 설계해보십시오. 예를 들어 ‘이빨을 닦을 때’, ‘샤워를 할 때’, ‘버스를 탈 때’, ‘일하기 싫을 때’ 등의 조건을 설정하고 그런 조건이 발생하면 무조건 ‘하가’를 하겠다고 마음먹는 것이죠. 이런 특정 조건에서 무조건 하가를 하는 훈련을 일정 기간 반복하다 보면 그런 조건일 때 ‘하가’를 하지 않으면 스스로 어색함을 느낍니다. 어느새 습관이 됐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습관을 바꾸기 위한 훈련 방법으로 트리거 설계를 많이 이용합니다. 자신만의 트리거를 설계해보십시오. 매우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습니다.

다음은 트리거 설계 샘플입니다.

8. 하가 트랙커(TRACKER) 활용

자신만의 트리거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습관으로 정착시키려는 방법으로 ‘트랙커(tracker)’를 많이 이용합니다. 트랙커는 설계한 트리거를 일자별로 잘 수행하고 있는지 한눈에 보이도록 관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설거지를 하면 무조건 하가를 한다’고 트리거를 설계했으면 일자별로 잘한 날에 스탬프를 찍거나 예쁜 스티커를 붙여 줍니다. 3일 정도 열심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빈칸을 채우다 보면 약간의 고비를 만나도 채워진 칸을 보며 일주일을 끝까지 도전해봐야겠단 도전 의식을 갖게 됩니다. 빈칸을 다 채운 후에는 스스로를 칭찬하고 자신에게 작은 선물을 주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다음은 하가 트랙커 샘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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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내려놓으면 오히려 얻을 것입니다. 기꺼이 죽으십시오.

야망과 소망과 전 존재에 대해 매일 죽으십시오. 그러면 영생을 발견할 것입니다.

어떤 것도 남기지 마십시오.포기하지 않는 그 어떤 것도 진정 당신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죽음을 통과하지 않은 그 어떤 것도 그 죽음으로부터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열심히 추구해보십시오. 

그러면 결국 증오와 외로움과 절망과 격렬한 분노와 파멸과 부패를 찾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추구하면 결국 그 안에 던져진 다른 모든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Lose your life and you will save it. Submit to death, death of your ambitions

and favorite wishes every day and death to your whole body in the end:

submit with every fibre of your being, and you will find eternal life.

Keep back nothing. Nothing that you have given away will be really yours.

Nothing in you that has not died will be raised from the dead.

Look for yourself,

and you will find in the long run only hatred, loneliness, despair, rage, ruin, and decay.

But look for Christ

and you will find Him, and with Him everything else thrown in. – C. S.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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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KEY QUESTION....언제, 어디서든 '하가'를 지치지 않고 계속 하려면 뭐가 필요할까요?

일반 묵상과 다른 ‘하가’의 가장 큰 특징은 1) 소리 내 중얼거리고 2) 암기하고 3)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어야 하고 4) 말씀을 기도와 고백으로 바꿔야 하며 5) 말씀을 계속 되새김질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깊은 사색을 하는 것입니다.

일상에서 ‘하가’를 진행할 때 1) 하가를 풍요롭게 할 재료 확보 과정과 2) 확보한 재료를 삶 속에서 녹여내는 과정을 나눠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가를 풍요롭게 할 재료 확보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말씀을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고 밤낮으로 묵상(하가)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1) 언제(when) 2) 어디서나(where) 3) 어떤 방법(how)을 사용해서라도 ‘묵상(하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시간, 장소,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가를 최우선 순위로 두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가나안을 향해 전진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주신 하나님의 전략이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방법으로든 ‘하가’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딱딱한 껍질 같은 것으로 둘러싸인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입안에서 중얼거리고 굴려 가며 녹입니다. 어느 순간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이 연고처럼 흘러나와 심령을 바르기 시작합니다. 그 심령을 바른 말씀이 나를 치료하고 살립니다. 얼마나 멋진 상상인지요?

이렇게 말씀 안에 감춰진 생명의 빛이 새어 나오려면 가리고 있던 껍질을 벗겨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 껍질을 벗길 수 있는 재료와 도구가 필요합니다. 요리는 성령님이 하지만 재료와 도구 준비는 우리 몫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요리사라도 도구와 요리할 재료가 빈약하면 최고의 요리를 선보이기 어려운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방법으로든 하가를 하려면 어느 정도의 재료를 준비해야 할 이유입니다.

시편 16편 8절 말씀 한 절로 일주일 동안 ‘하가’한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16:8)  I have set the LORD always before me; because he is at my right hand, I shall not be shaken. (ESV)”

시편 16:8 말씀 자체를 외우고 묵상하는 것만으로도 말씀 자체가 주는 힘이 있어 큰 유익을 얻습니다. 하지만 반나절, 하루만 지나도 계속 같은 구절로 암송하며 묵상하는 것이 식상해지기 시작합니다. 맛있는 김치찌개도 매일 먹으면 질리잖습니까? 이 한 절의 말씀을 어떻게 일주일 동안 입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반복하며 ‘하가’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러려면 좀 더 풍성한 요리 재료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 16편을 기록한 사람은 누구인지, 기록할 때의 상황은 어땠는지, 그때 저자의 마음은 어땠는지, 시편 16:8은 어떤 맥락 가운데 나온 것인지, 또 다른 성경 번역본은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각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이 구절과 연관있는 또 다른 구절은 없는지 등의 (관심 있게 그 출처를 궁금해 하며, 의미있게 만듭니다) 재료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하가의 질이 다를 겁니다. 즉, 관찰과 해석에 도움을 줄 다양한 재료를 준비하고 있다면 성령님은 그 재료를 이용하여 질리지 않는 다양한 요리를 선보이실 수 있습니다. 그런 재료를 준비하는 것을 통해 그런 재료가 없었다면 결코 경험할 수 없었을 성령님의 풍성한 감동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하가는 시간(when), 장소(where), 방법(how) 등 어떤 상황도 가리지 않고 하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또한, 하가를 풍성하게 해줄 재료 준비를 위한 별도의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렇게 준비한 재료가 빛을 발하는 순간은 운전 중에, 걸어 다니면서, 설거지하면서, 회의하는 중간중간 등 일상의 모든 순간에 하가를 시도할 때입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함에 따라 인생을 바꿀만한 계시를 한순간 만나기도 합니다.

주재료는 기록된 말씀 하나로 족합니다. 성령님은 그 재료 하나만으로도 능히 사람을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균형있게 지속해서 성장하려면 그 말씀을 여러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재료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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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KEY QUESTION....어떻게든 '하가'를 하기 위해 노력해 봅니다만 계속 실패합니다.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가)하는 것이 축복의 비결임을 지식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크리스천이 이것을 살아내지는 못합니다.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고,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신앙 서적을 읽고, 큐티를 열심히 하는 사람조차 말씀을 입술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주야로 ‘하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며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시편1:1~2, 여호수아 1:8)”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을 즐겨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즐겁지 않으면 형식적이고, 율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의 의식과 의무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니 부자연스러울 수밖에요. 

즐거워하면 틀에 박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1편은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꿀송이 보다 더 단 말씀의 즐거움을 경험하지 못하면 ‘하가’는 형식적이고 맙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이제 막 사랑을 하게 된 뜨거운 커플이 그 먼 거리도 찾아갈 수 있는 이유는 정말로 행복하기 때문이죠. 

하가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하가에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즐거움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저자는 ‘즐거워하여’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일을 해도 어떤 사람은 마지못해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즐기며 합니다. 그 일을 대하는 태도가 감정을 결정합니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못 이기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못 이깁니다. 

우리는 하가를 하면서도 이미 심리적으로 말씀은 재미없을 것이란 태도를 은연중에 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이 ‘즐거워하여’라고 했으면 ((진짜 그런 것인데... 다만 무엇인가 가리워졌음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요..그 돌파는 바로!!)) 내가 즐거워할 수 있음을 믿고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은 감정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믿으면 감정이 따라 오는 겁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즐거움은 바로 이 관계 안에서 영적 갈망이 채워지는 겁니다.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을 자신이 직접 길어 올릴 때, 그리고 그 말씀이 내 삶에서 실재가 될 때 즐거움은 배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주야로 중얼거리려면 말씀이 주는 즐거움이 내게 실재가 되어야 하가를 지속해서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참 즐거움은 감춰진 보화와 진주를 발견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 가치가 실재인 것에 눈뜰 때 비로소 자기 소유를 다 팔고, 자기가 누리던 모든 즐거움과 기꺼이 맞바꿉니다. 

감춰진 보화와 진주를 산 사람은 그 흥분과 설렘의 감정이 실재입니다. 자신의 전 재산을 파는 것에 절대 슬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나 즐거워하겠죠. 이전 즐거움을 팔아 더 큰 즐거움을 사기 때문일 겁니다. 

말씀 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참 즐거움이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실재가 될 때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말씀을 주야로 묵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흐3:16, 17, 18)"

말씀의 즐거움을 가리는 ‘수건’이 있습니다.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감춰진 보화를 발견하려면 계시의 영이 임하여 이 수건을 벗겨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3장 16절의 ‘수건이 벗겨지리라’의 원어적 의미는 ‘계시가 열린다’입니다. 감춰진 것 안에 있는 참된 가치와 즐거움에 눈을 뜨려면 수건이 벗겨져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수건이 벗겨질까요? 바울은 그 비결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하나님은 마음 중심을 보십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 그 일은 마음 중심에서 먼저 일어납니다. 그 마음 중심이 주님께로 돌아간 순간 주님은 정확히 아십니다. 그때 수건이 벗겨집니다. 율법적인 노력은 즐거워하는 일을 이길 수 없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말씀을 즐거워한다고 알려주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자녀에게 어려운 것을 얘기하는 분이 아닐 겁니다. 말씀에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으므로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 있는 사람입니다. 복 있는 우리는 말씀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말씀 안에서 진정한 즐거움을 찾게 합니다. 마음 중심이 이 믿음을 향해 돌아설 때, 성령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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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가"를 실행하는 믿는이에게 약속하신 언약적 축복, 그 누림]]===
@1. KEY QUESTION...하나님은 가나안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왜 ‘하가(HAGAH)’를 강조하셨을까요? (3)
가나안 입성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강조하신 것은 "하가"였습니다. 전쟁에 승리하기 위한 비법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전쟁을 앞둔 백성들에게 강조하신 것은 전쟁과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일종의 말씀 암송, 그러나 그 놀라운 살아 생동하는, 영과 생명 공급하는 말씀을!...주 임재 앞에 있는 자의 - 생생한 신전 의식 안에서- 암송자의 전존재 기울여 기록된 말씀 암송함!, 하나님 <지금 내게 여기서, 친히!..이 원칙 적용하여> 말씀하신 그대로-영존하시는 창조주하나님의 모든 영광 부어 말씀하신 바를 기록한 바로 그 말씀을, 하나님이 나의 전 존재에 그 말씀 친히 들려주심으로 알아 듣는 가운데, 기록된 말씀을 >주님 심정으로, 그 열정으로, 그 참됨으로> 말해냄으로서의> 말씀 암송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가’를 강조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가’는 하늘의 은혜를 이 땅 가운데로 내리는 통로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 1:8)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1:1~3)”
여호수아 말씀도 그렇고, 시편 말씀도 그렇고 묵상이 형통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묵상과 축복의 연관 관계를 이미 히브리어 원어 ‘하가’에 숨겨 놓으셨습니다.
히브리어는 글자마다 고유의 뜻이 있습니다.히브리적 묵상 의미하는 단어 "하가",  ‘하가(גהָה‘(ָ의 경우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가 은혜를 상징하는 ‘헤이(ה‘(이고, 가운데 글자는 낙타를 상징하는 ‘김멜(ג‘(입니다. 낙타는 그 시대, 그 지역의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자 부와 번영을 상징했습니다
이 ‘하가’의 히브리어 글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주야로 중얼거리며 씹고 녹여 그 안에 있는 생명의 양식을 취할 때마다 하늘의 은혜(헤이 ה(가, 부와 번영(김멜 ג(을 실은 낙타(김멜 ג(를 통해 땅의 은혜(헤이 ה(로 내려오는 상상을 해볼 수 있습니다. 
‘하가’는 이미 이뤄진 하늘의 은혜가 하가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통해 이 땅의 실재가 되게 하는 중요한 통로요 수단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어 단어를 설계하실 때 이미 ‘묵상(하가)’의 결과가 바로 형통이요 은혜라는 것을 숨겨놓으신 거죠.
눈에 보이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던 사람들은 가나안 전쟁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전쟁과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하가’를 얘기하실 때 마음이 불편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장 눈앞에 드러난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전쟁이 하나님께 속했고, 하나님이 이 전쟁에 은혜를 베푸시려면 하늘의 은혜를 이 땅 가운데 실재가 되게 하는 사람들의 ‘하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가에서 생명의 양식을 취할 때 거인을 이길 믿음이 들어오기 때문이요, 그 믿음이 하나님을 움직이게 합니다.
요셉의 예를 보겠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을 때 요셉은 인생에 있어 가장 비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겁니다. 
이런 상태의 요셉을 보고 그 누구도 요셉을 성공한 자라 할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상태의 요셉을 보고 하나님이 <단정지어!!>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창39:2)...주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성공한 자가 되었습니다. (창39:2, NASB 번역)...The LORD was with Joseph, so he became a successful man. (NASB)”
이 구절은 요셉이 (후에) 총리로 성공했을 때의 평가가 아닙니다. 요셉은 (감옥에 있을 그 당시) 인생의 가장 바닥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주님 이외에 그 어떤 것도 붙들 수 있는 것이 없었던 상태입니다. [그러나, "하가"함으로써 ]주님 한 분만을 유일한 소망으로 삼은 요셉에게 주님은 함께 하셨습니다. 세상은 요셉을 노예로 볼지 모르지만, 주님은 자신이 함께 하는 요셉을 형통한 자, 성공한 자로 평가하신 겁니다. 
즉, 성공의 기준은 무엇을 많이 가졌는가, 무엇을 많이 이뤘는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기준이죠. 주님이 함께 하시느냐가 형통의 기준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주님이 함께 하는 것[임마누엘]의 실제<참 형편의 어떠함>는 무엇일까요? 
물론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언제나 함께 하고 계신 그 주님이 내게 실제로 인식되는 순간은 다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주님을 말씀(the Word)이라고 부릅니다. 이때의 말씀은 글자가 아닌 인격!!. 네, 그렇습니다. <정말!!>주님은 인격(personality)이신 말씀입니다
글자 상태였던 말씀이 내게 인격으로 다가오려면 말씀을 입술에 올려야 합니다. 그 말씀의 소리가 (영과) 생명을 부릅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던 ‘하가’입니다. 
하나님이 입에서 말씀을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하가’하라고 하신 이유는 결국 말씀이요 인격이신 주님이 함께 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는 것이 형통이요, 성공입니다. 주님이 함께 해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창39:2)’란 말씀은 ‘(하가를 통해 인격이신) 말씀이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내가 형통한 자가 되어…’로 바꿔서 적용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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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여호수아에게 칼 사용법을 알려주신 것이 아닙니다. 대신 어떻게 주님을 주야로 묵상할지, 그 결과 어떤 위대한 성공을 거둘 것인지에 관해 알려주셨습니다. The Lord didn’t show Joshua how to use the sword, but He told him how he should meditate on the Lord day and night, and then he would have good success. – D.L. 무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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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KEY QUESTION....하나님은 가나안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왜 ‘하가(HAGAH)’를 강조하셨을까요? (4)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입에서 말씀을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하가’하라고 하신 이유는 결국 말씀이요 인격이신 주님이 함께 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는 것[임마누엘!!]이 형통이요, 성공입니다. 주님이 함께 해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겁니다. 
‘하가’가 이런 형통을 산출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믿음이 들어오고 영의 생각을 출산하게 하는 원천이 바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1. ‘하가’는 믿음을 가져옵니다
의지적인 믿음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변화를 일으키는 믿음은 언제나 들어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17)  Consequently, faith comes from hearing the message, and the message is heard through the word of Christ. (NIV)”
믿음은 내가 의지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믿음은 오는 것(Faith Comes From…)‘이라고 번역합니다. 
(정말 명심하고 세심하게 잘 분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한 믿음을 오게 하는 것, 하나님의 전능한 믿음의 공급 창구는 바로 "하가"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참 믿음은 주께 속한 것입니다..그러기에 주님은<오직 주님만이!!> 믿음의 주님이십니다....<연약한 인생인 바, 나의 결단으로 붙드는 믿음, 곧 <내> 의지를 사용한 믿음은 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그 자체로서는 부족하기 그지 없으나, 그래도 주님은 격려-칭찬해 주시며, 이것도 분명히 중요하다 하시며, 큰 점수를  주십니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 <곧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전능한 믿음....이것은 [모든 문제 해결에 있어서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은 하늘(말씀)에서 와야 합니다. 글자였던 말씀이 인격으로 다가와 그 인격 앞에 자복하며 큰 감동을 받고 순복할 바로 그 때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믿음, 전능의 참 믿음, 바로 그> 믿음은 ‘들어 오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12:2 上)”
어디서 옵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오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예수님은 말씀 그 자체입니다. 히브리서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을 헬라어 원어로 확대 해석하면, ‘믿음의 <시작>이요 <끝>이신 예수를 바라보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즉,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의 시작이요 끝이자 믿음의 원천인 것입니다. 이 말씀이신 주님이 내 심령을 터치할 때 말씀과 함께 믿음이 들어 오는 것입니다. 
잠언은 믿음의 원천인 ‘말씀에 주의하라’고 말합니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카샤브)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잠언 4:20) My son, pay attention to what I say; listen closely to my words. (NIV)”
‘주의하다’를 NIV는 ‘집중하여 관심을 기울이는 것(pay attention to)’으로 번역했습니다. 관심을 기울이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입니다. 
그 대상의 숨겨진 마음마저 알게 됩니다. 그래서 ‘주의하다’의 히브리어 ‘카샤브’에는 ‘주의하다’란 의미 외에 ‘귀를 기울여 듣다’란 의미도 있습니다. 
시편 10편 17절 말씀은 ‘카샤브’를 ‘듣다’로 번역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카샤브) (시편 10:17)”
‘하가’는 인격이신 ‘말씀’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카샤브, pay attention to)입니다. 말씀에 깊은 관심을 기울일 때 인격이신 말씀이 속삭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오는 것이 바로 ‘계시’입니다.
2. ‘하가’는 ‘영의 생각’을 돕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영적 존재’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서 8:9)”
‘영적’이란 말을 들으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경건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것은 ‘영적’인 것의 결과일 뿐입니다.
‘영적’이란 말은 삶의 주도권과 관련 있습니다. 
아무리 새벽 기도를 열심히 하고 헌신을 한다 해도 내 생각, 이성, 감성, 의지, 경험이 삶의 주도권을 먼저 갖는다면 그것은 ‘영적’인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내주하고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내 삶의 주도권을 갖는 것이 ‘영적’인 것입니다.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내 감정이 즉각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내주하는 영에 의해 감정이 통제되어 반응하게 되는 것, 바로 그것이 ‘영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코스’는 ‘영에 의해 통제되는(spiritcontrolled)‘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에 관해 얘기합니다. 내주하는 영을 따를 때(영적일 때) 영의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로마서 8:5~7)”
생각은 감정과 태도에 영향을 미칩니다. 감정과 태도는 내 행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행동의 반복이 내 삶을 결정합니다. 삶을 바꾸려면 결국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이 생각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 그리고 영의 생각. 육신의 생각으로 살아갈지, 영의 생각으로 살아갈지는 내가 선택해야 합니다. 
영의 생각은 영에서 옵니다. 영에서 온 생각. 예수님은 말씀(레마)이 곧 ‘영’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요 6:63)”
즉, 영의 생각은 영에서 오고, 그 영은 곧 말씀입니다. 글자였던 말씀이 ‘하가’를 통해 인격으로 다가올 때 그것은 영의 소리를 동반한 생각으로 나타납니다. 
이때의 생각이 영의 생각이요 이 생각이 믿음을 산출합니다.
이 믿음과 영의 생각이 있을 때, 상황을 자신의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육신의 생각에 갇혀 있으면 거인 앞에서 자기 자신을 메뚜기로 보게 되지만 영의 생각과 믿음이 활성화되면 나 자신이 아닌 내 안에 계신 만군의 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생각이 결국 모든 영역의 형통으로 이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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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KEY QUESTION....'하가'와 '형통'이 깊은 연관이 있다면, '하가'를 했을 때 나타나는 '형통'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나요?
성경은 곳곳에서 ‘하가’와 ‘형통’을 연결합니다. 구체적으로 여호수아 1장 8절 말씀이 그랬고요. 시편 1편도 마찬가지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가)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 1:1~3)  …Whatever he does prospers. (NIV) …in all he does, he succeeds. (TLB)”
시편 1편은 ‘하가’하는 자가 바로 복 있는 사람인데 그가 무엇을 하든지 번성할 것이고(NIV), 그가 하는 모든 일에 성공을 거둘 것(TLB)이라고 설명합니다.
‘형통하다’의 히브리어는 ‘찰라흐‘입니다. 사전적 정의는 ‘돌진하다 (to rush)‘입니다. 
씨앗 안에는 이미 열매가 들어 있습니다. Destiny(시작, 씨앗) 안에는 Destination(목적지, 열매)이 들어 있습니다. 
씨앗의 생명은 목적지인 열매를 향해 전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 ‘형통(찰라흐)’은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지(열매, 사명의 완수, 하나님 뜻의 성취)를 향해 거침없이 가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자신의 유일한 소망이요 목적인 사람을 통해 자기 뜻을 거침없이 이뤄나가시는 것. 그것이 형통이요 성공(찰라흐)입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를 노예 상태에 있었던 요셉은 주님 이외에 그 어떤 것도 붙들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오직 주님 한 분만이 유일한 소망이요 목적이었던 요셉을 향해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찰라흐)… (창 39:2)  주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성공한 자가 되었습니다. (창39:2, NASB 번역).. The LORD was with Joseph, so he became a successful man. (NASB)”
말씀이신 주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요셉은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찰라흐).
야곱이 창세기 끝에 열두 아들을 축복할 때 요셉을 향해 ‘샘 곁의 무성한 가지’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는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을 얘기하며 언급한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다르지 않습니다. 
말씀이신 주님이 함께 하셨던 요셉은 풍성한 열매를 맺는 시냇가에 심은 무성한 나뭇가지였습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창 49:22) Joseph is a fruitful bough, A fruitful bough by a spring; Its branches run over a wall. (NASB)”
‘무성한’의 히브리어 ‘파라‘는 ‘열매를 풍성히 맺다‘란 뜻입니다. 샘 곁에 있으니 무성할 수밖에요. 
예수님은 열매를 풍성히 맺는 비결을 말씀하시면서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란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즉,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의 다른 표현으로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요 15:4~5,7)”
‘찰라흐(to rush)’란 단어를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씨앗 안에 있는 생명이 점점 자라 영향력이 그 외부로 드러나며 열매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는 것(to rush)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하가를 통해 우리 안에 심어져 그 말씀 속 생명이 영향력을 발휘하며 거침없이 주의 뜻을 이루는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to rush), 이것이 주님이 보시는 형통(찰라흐)이요 성공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때로 ‘열매를 맺다’, ‘무성하다’, ‘형통하다’ 등의 여러 표현으로 사용하는 거고요.
구약에서만 ‘하가’와 ‘형통’을 연결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던 ‘하가’란 단어를 잘 알던 사람입니다. 영적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딤전 4:15)  이것들을 ‘하가‘하십시오; 네 자신의 전부를 그것에 드리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이윤(형통)이 모두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KJV 번역)  Meditate upon these things; give yourself wholly to them; that your profiting may appear to all. (KJV) Be diligent in these matters; give yourself wholly to them, so that everyone may see your progress. (NIV) ”
개역 개정 번역은 원어 표현을 잘 살리지 못했습니다. 
‘전심전력‘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멜레타오‘입니다. ‘하가’란 단어를 잘 알고 있던 바울은 그 당시 웅변가들이 방에 들어가 웅변 연습을 할 때 중얼거리는 것을 의미하는 ‘멜레타오‘를 선택한 것입니다. 헬라어 ‘멜레타오’는 히브리어 ‘하가’를 가장 잘 표현한 단어입니다. 
또한 ‘성숙함‘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로코페‘입니다. ‘프로콥토’란 동사의 명사형입니다. ‘프로콥토’의 사전적 정의는 ‘앞으로 전진하다(to go forward, to advance, to proceed)‘인데요. ‘찰라흐(to rush)’란 히브리어를 잘 알던 바울이 이와 가장 유사한 ‘프로콥토’란 헬라어를 선택한 것입니다. 
즉, 바울 역시 ‘하가’와 ‘형통’이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을 잘 알던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가’를 통해 어떤 실제적인 ‘형통’을 누릴까요?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라’고 하나님께 직접 얘기 들은 여호수아는 평생 ‘하가’를 유념했을 겁니다. 
평생 ‘하가’를 했을 여호수아는 어떤 형통함을 누렸을까요?
1. 건강(장수)
여호수아는 건강했고, 장수했습니다.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수 24:29)”
성경에서 얘기하는 건강은 영과 혼과 몸의 모든 온전함을 의미합니다. 육체적인 건강도 당연히 포함하고요. 잠언에서 솔로몬은 ‘말씀’에 주의하고(카샤브, pay attention to) 귀를 기울이는 것이 생명이 되며 온 육체의 ‘건강’이 된다고 말합니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마르페)이 됨이니라 (잠언 4:20~22)  For they are life unto those that find them and medicine to all their flesh.(Jubilee Bible 2000)”
묵상을 의미하는 meditation(메디테이션)과 약을 뜻하는 medicine(메디씬)은 같은 어원입니다. 
잠언 4:22에서 사용한 ‘건강’의 히브리어는 ‘마르페’입니다. 이 단어를 JB 2000 영어 성경에서 ‘medicine(메디씬)’으로 번역했습니다. 
‘마르페’란 단어는 실제 성경에서 ‘양약’으로 번역하는 단어입니다.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마르페)과 같으니라 (잠언 12:18)”
즉, 말씀을 묵상하고(to meditate) 하가를 하는 것은 온 육체의 약(medicine, 마르페)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피부에 상처가 생길 때 상처를 아물게 하는 연고를 바르듯, 하가를 하며 중얼거리는 그 말씀이 내 심령을 바를 때 그 말씀이 스며들어 내 상처를 치료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하가를 하면서 건강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2. 부귀
여호수아가 기업으로 받아 그 성읍을 세우고 거주하며 마침내 죽어서 장사된 지역 이름이 ‘딤낫 세라’입니다. 
"그들이 그를 그의 기업의 경내 딤낫 세라에 장사하였으니 딤낫 세라는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이었더라 (수 24:30)”
폿츠(Potts)가 발행한 성경 고유 명사 사전에서 ‘딤낫 세라‘를 풍부한 땅, 열매가 풍성한 기업(Portion of abundance, fruitful portion)으로 묘사합니다. 실제 그 땅이 그랬고 ‘세라’에 해당하는 원어 자체가 풍성함과 연관 지어 해석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즉, ‘하가’를 유념했던 여호수아의 삶이 빈곤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여호수아 1장 8절에서 한글 성경은 ‘찰라흐(to rush)’를 ‘평탄하게 될 것’으로 번역했습니다. 한글 성경에서 ‘형통하리라’로 번역한 히브리어는 ‘사칼’입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찰라흐)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사칼) (여호수아 1:8)”
‘사칼’은 ‘지혜롭게 행하다’란 뜻입니다. 잠언에서 지혜는 ‘부귀’와 밀접한 연관 관계가 있는 단어입니다. 
또한, 지혜는 ‘말씀’과 긴밀한 연관 관계가 있는 단어고요. 즉, 하가로 말미암은 형통에는 풍성함, 부유함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유업
건강과 부귀는 자기 자신에게 해당하는 형통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형통은 다른 사람에게 좋은 것을 남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형통으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 이것이 진정한 형통입니다.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뿐만 아니라 그가 죽은 뒤에도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여호와를 섬겼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tn24:31)"
여호수아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도 진정으로 주님을 섬기도록 영향을 미친 자였습니다. 
남길 수 있는 가장 귀한 유업이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진정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형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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