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06.29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하가4.SOAR.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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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가 실전....정의와 실행]]

WEEK 1 – SOAR란 무엇인가? ...HAGAH OF THE LESSON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16:8) ..I have set the LORD always before me; because he is at my right hand, I shall not be shaken. (ESV)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힘을 얻으리니 독수리ㅇ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사40:31)....Those who hope in the Lord will renew their strngth. They will SOAR on wings like eagles;"

@KEY QUESTION

*상황을 해석하는 힘이 관점(觀點)에 달렸고 관점이 고도(高度)에 달렸다면 이 고도를 어떻게 높일 것인가?

하나님이 알려주신 묵상 방법인 ‘하가’에 관해, 이 ‘하가’를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지, ‘하가’의 축복이 무엇인지 살펴봤습니다.

하나님께서 ‘하가’를 권면하신 이유는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觀點)을 하늘의 관점으로 바꾸기 원하셨기 때문인데요. 

지금부터는 요셉과 마리아와 다윗의 사례를 통해 관점의 고도(高度)를 높이는 것이 왜 중요한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셉

요셉과 다윗 모두 주님이 높여 주시는 자리에 이르기까지 혹독한 시련을 거쳤습니다. 

형들에게 배신당한 요셉.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매일 매일 죽음의 위기에서 주님 한 분만을 붙들고 살아가던 때문이었습니다.

#요셉. 세상은 그를 노예로 믿었지만 주님은 요셉을 성공한 자로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 한 분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던 요셉에게 주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는 성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창 39:2, NASB 번역)..The LORD was with Joseph, so he became a successful man. (NASB)”

자신이 밟고 있는 땅에서 자기를 바라보면 실패한 노예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이 보고 계신 보좌 위로 올라가 바라보면 그는 성공한 자였습니다. 

현실에서 총리라고 하는 성공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주님은 언제나 앞서 보시는(여호와 이레) 분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가나안 정복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을 메뚜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객관적인 자료로 분석하면 이스라엘 백성의 고백이 합리적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실 때 거인을 삼키는 자로 믿으셨습니다. 유일하게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하나님이 믿고 계신 것을 믿음으로 취한 자들입니다. 

한 편은 자신이 밟고 있는 땅에서 자기를 바라봤지만, 또 다른 한 편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하나님이 보고 계신 그대로 자신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갈렙은 가나안 땅 거인들을 향해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믿음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나라에서 태어나고, 어떤 가정에서 태어날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많은 일이 내 통제 밖에서 벌어집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내게 일어난 사건이나 현재 상황이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 지가 중요합니다. 

이 해석을 좌우하는 것은 관점(觀點)이며 그 관점은 현재 내가 밟고 있는 고도(高度)가 좌우합니다. 문제와 함께 서 있으면 문제가 커 보입니다. 

하지만 하늘 보좌 위로 오르기만 한다면 주님이 커 보일 뿐 그 문제는 아무 영향도 못 미칠 정도로 작게 보입니다. 사건을 바라보는 해석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노예로 간 것은 자신의 선택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 그런 사건이 발생했죠. 어떤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평생 형들을 원망하며 우울증 가운데 생을 마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건과 상황에만 초점을 맞추면 그렇게 됩니다. 하지만 요셉은 자신과 함께 하는 하나님을 항상 의식했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임재 가운데 있으려 했습니다. 

여러 시련을 겪는 가운데 요셉은 날마다 자신의 고도를 높입니다. 그런 어느 날 자신을 배반했던 형들이 눈앞에 섰습니다. 

벌어진 사건과 상황에 매몰되어 있었다면 형들을 원망하며 앙갚음을 하려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충분히 그럴만한 위치에 있기도 했고요. 하지만 요셉은 문제와 함께 서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해석을 달리합니다.

"창 45:4~5, 7~8..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내게 벌어진 사건이나 상황이 아닙니다. 인생을 좌우하는 것은 해석에 달려 있습니다. 

온전한 해석은 관점에 달려 있고, 이 관점은 자신이 밟고 있는 고도에 달렸습니다. 요셉은 주님 한 분을 앙망(仰望)하며 바라봤던 자입니다. 

성경은 주님을 앙망하는 자에게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SOAR) 같을 것이라 말합니다. 

주님을 앙망할 때 상황을 해석하는 고도가 올라갑니다. 이렇게 고도가 올라간 자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의 상황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사 40:31) Those who hope in the LORD will renew their strength. They will SOAR on wings like eagles; … (NIV)”

#마리아..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처녀 상태에서 잉태하여 아이를 낳을 것이란 소식을 듣습니다. 벌어진 사건에 초점을 맞추면 염려하며 좌절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관점은 달랐습니다. 관점이 다른 마리아는 벌어진 사건 해석을 달리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마리아는 주님 한 분만을 앙망하며 찬양합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눅 1:46~47) And Mary said, My soul does magnify the Lord, And my spirit has rejoiced in God my Savior. (KJV)”

‘찬양하다’에 해당하는 KJV 번역은 ‘확대하다’를 의미하는 ‘magnify‘를 사용했습니다. 문제를 확대하면 좌절이 오지만, 주님을 확대할수록 찬양과 기쁨이 넘칩니다. 

내가 ‘무엇을 확대하는가’는 고도의 문제입니다. 벌어진 사건은 내가 선택할 수 없지만 무엇을 확대할 것인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다윗.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이방 땅 가드로 피신합니다. 

사람들이 다윗을 알아보자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가드 왕 아비멜렉 앞에서 침 흘리며 미친 척을 합니다. 

다윗 인생에 있어 얼마나 수치스러운 장면이었을까요? 다윗이 그런 모욕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와 ‘과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가’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 다윗이 돌아와서는 주님 한 분만을 앙망하며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시34:1)"

시편 34편 부제를 찾아보면,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고 나옵니다. 

다윗은 자신의 상황과 문제를 확대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확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시편에서 연이어 이렇게 선포합니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시 34:3) O magnify the LORD with me, and let us exalt his name together. (KJV)”

‘광대하시다’에 해당하는 KJV 번역은 마리아의 고백과 마찬가지로 ‘확대하다’를 의미하는 ‘magnify‘ 입니다. 다윗은 언제나 그랬습니다. 

다윗이 지은 시편의 상당수가 이런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신 이유는 다윗이 언제나 상황을 보지 않고 찬양을 통해 고도를 높여 주님과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하가와 SOAR(순서)

사건을 일으킨 문제가 커 보이는 이유는 그 문제와 눈높이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와 눈높이가 같으면 그 문제의 영향을 받습니다. 

고도를 높이려면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 에너지를 자기 자신에게서 취하려면 실패합니다. 언제나 이 자원은 하늘로부터 와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들어 옵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하가’를 강조하신 이유는 ‘하가’를 통해 고도를 높일 수 있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이 밟고 있는 땅에서 상황을 바라보지 않고 하늘의 관점에서 상황을 해석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S]STILL&SYNC(기도)..WHO..누구에게 초점을 맞출 것인가?

[O]OUTLI&OBSER(관찰/해석)..WHAT..무엇을 말씀하시는가?

[A]ALIGN&AUTHO(적용)..HOW...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R]REFLE&RESPO(계시)...WHY..왜 나는 이 땅에 존재하는가?

#방법도 중요하지만

데일리하가는 하가를 통해 관점의 고도가 비상(飛上)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SOAR 관점(觀點)을 제시합니다.

‘하가’를 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하가를 어떻게 하면 잘할까?,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삶에 잘 적용할 수 있을까?’와 같은 질문의 정답을 찾는 것은 아닐 겁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때로는 위로를, 때로는 깨달음을, 때로는 지식을, 때로는 문제 해결을 얻고 싶어 하죠. 너무나 정상적입니다. 주님도 우리가 이렇게 누리길 원하실 겁니다. 

하지만 말씀이 단순히 읽는 대상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이요 인격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아, 말씀이신 주님과의 교감과 교제는 빠진 채 뭔가를 일방적으로 얻고만 싶어했구나…’란 생각에 가슴 철렁할 때가 있습니다. 

사귐의 대상이 분명히 있는데 일방적으로 나만 생각하는 접근이 었던 거죠. 이런 경향이 남아 있어 우리는 계속 말씀을 읽으려고만 합니다. 

그런 활동을 통해 뭔가를 얻고만 싶어하죠. 하지만 이 아름다운 사귐의 균형을 위해서는 말씀이 우리를 읽을 기회도 반드시 드려야 합니다. 

진짜 사랑하면요,.... 요구하기 전에 먼저 듣고 싶어합니다. 더 가까워지고, 더 알고 싶고, 더 교제하고 싶은 마음. 

바로 이 마음으로 말씀이신 주님에게서 들으려 할 때 그 과정에서 때로는 위로를, 때로는 깨달음을, 때로는 지식을, 때로는 문제 해결을 부산물처럼 얻는 거죠. 

....사랑하는 관계에서는 이게 자연스럽습니다. 방법론을 적용해가며 사랑하는 것은 어색합니다. 사랑은 방법을 이깁니다. 진짜 사랑하면 창의적인 방법까지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하가를 하는 말씀은 분석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입니다. 내가 말씀을 소중히 여길수록 그 말씀이 나를 또한 존중합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삼상 2:30) …Those who honor me I will honor… (NIV)

....결혼 후 태어난 첫째 아이와 처음 마주하는 순간은 얼마나 소중할까요? 모두에게 시간은 다 동일하게 주어지지만 이렇듯 특별하고 소중한 시간도 존재합니다. 

이 시간의 질을 좌우하는 것은 마음의 태도입니다. 결국, 태도가 경험의 질을 좌우하죠.

....하가를 하는데 있어서도 하가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방법론이 아닌 말씀을 향한 마음 중심의 태도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매개로 우리와 친밀하게 교감하고 관계를 맺기 원하십니다. 사랑은 생산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결과를 생각하기 이전 사랑하기 때문에 그냥 말씀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먼저입니다. 사랑은 모든 제약을 극복하게 합니다.

그렇다고 어떤 관점이나 방법론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첫 단추의 문제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온 편지의 행간 마저 알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도구와 방법론이 그 사랑을 더 넓고 풍요롭게 해줍니다. 이미 마음 중심에 너무나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죠. 이런 태도를 갖춘 사람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도구와 방법론을 (선결요건으로서, 선제적으로!!) 사용하려들지는 않습니다. 

다만(!!!) 더 알고 싶고, 더 사랑하고 싶어 도구와 방법론에 관심을 두는 겁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어떤 방법론이 결코 그 사람을 틀에 가두지 못합니다.

하가를 좀 더 잘하기 위한 어떤 방법이나 도구에 몰입하다 보면 정작 관계의 대상을 잊고 맙니다. 본말(本末)을 전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면 안 되겠습니다. 

정상(頂上)에 오르는 길은 아주 다양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길도 다양합니다. SOAR는 데일리하가가 정상을 오르며 개척했던 길 중 하나일 뿐입니다. 길이 익숙해질 때까지 참고하되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과감히 버리시고 언제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시길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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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가 실전] WEEK 1 – HOW SOAR(1) – STILL & SYNC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16:8) ..I have set the LORD always before me; because he is at my right hand, I shall not be shaken. (ESV)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힘을 얻으리니 독수리ㅇ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사40:31)....Those who hope in the Lord will renew their strngth. They will SOAR on wings like eagles;"

방법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대상을 향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도구와 방법을 이깁니다. 

주님의 생명을 접촉하려는 갈망만 있다면 서툴러도 은혜가 넘칩니다. 이런 마음이 있을 때야 비로소 도구와 방법은 유용합니다. 

방법에 몰입하다 보면 정작 대상을 잊고 맙니다. 본말(本末)을 전도하는 거죠. 이점을 꼭 명심한 가운데 방법이 주님을 향한 사랑을 가리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습니다. 

정상(頂上)에 오르는 길은 다양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길도 다양합니다. SOAR는 데일리하가가 정상을 오르며 개척했던 길 중 하나를 제시할 뿐입니다. 익숙해지면 언제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시길 권장합니다.

@1.KEY QUESTION

*WHO | 누구를 볼 것인가? 누구에게 초점을 맞출 것인가?

존재의 중심엔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코기토 에르고 숨, Cogito, ergo sum)’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이 생각을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으로 나눕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6)”

나의 존재가 애굽이 아닌 가나안 땅에 서 있으려면 육신의 생각이 아닌 영의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하가’를 강조하신 겁니다. 하가를 통해 영의 생각을 활성화하기 위함이죠.

하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묵상하려는 그 순간에도 어느새 내 생각은 말씀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영의 생각을 하는 것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님을 봅니다. 의식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내가 말씀을 관찰하고, 내가 말씀을 해석하고, 내가 말씀을 취사선택하고 있습니다. 

의식하지 않으면 말씀을 읽으면서 ‘나’의 깨달음, ‘나’의 감정, ‘나’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려 합니다. 말씀이 나를 읽을 기회를 주지 않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나의 이성(理性)은 내 안에 내주하고 계신 보혜사 성령님의 존재를 쉽게 인식하지 못하고 알아도 쉽게 자리를 내드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가의 첫 단계는 내가 말씀을 읽으려는 태도를 내려놓는 겁니다.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Still). 

영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지(Sync)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주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이 나를 읽을 수 있습니다.

하가의 첫 단계는 내 이성을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고 그 자리에 ‘영(靈)’을 모시는 겁니다. 그때야 비로소 영의 영향을 받는 영의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주신 모든 감각과 재능은 오직 성령님의 통제 아래 있을 때만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靈, spirit)은 자아(自我,ego) 즉 지정의(知情意)로 대표되는 혼(魂, soul)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아는 데 필요한 것은 탁월한 지성(知)과 뛰어난 감각(情)과 불굴의 노력(意)이 아닙니다. .

...영계(靈界)는 우리가 속한 물질계(物質界)와 완전히 차원이 다릅니다. 저차원(低次元)의 지정의(知情意)로 고차원(高次元)의 영을 알려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접근입니다. 인간에 속한 그 어떤 것으로 주님을 알려 하는 것의 끝은 결국 탁월한 종교에 불과할 뿐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영을 통하는 것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고전 2:10~11)”

이 하나님의 영과 연결(Sync)되려면 무엇인가 깨달으려 하고, 무엇인가 노력하려는 나의 자아를 가만히 있게(Still) 해야 합니다.

Still & Sync (스틸 & 씽크) 단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태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편 46:10)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KJV) Cease striving and know that I am God… (NASB)”

Still & Sync (스틸 & 씽크) 단계 때 아래 예와 같은 기도가 도움됩니다.

**믿습니다! – 요청하기만 하면 기꺼이 도와주실 하나님의 영 보혜사(保惠師) 성령님이 바로 내 안에 실재(實在)하심을 믿고 확신합니다.

**존중합니다! – 내 안에 실재하시는 성령님은 친밀한 교제가 가능한 인격입니다. 그분을 인식하고,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에 비례하여 그 존재는 점점 더 분명해집니다. 인격과의 사귐은 서로에게 귀 기울이려는 존중에서 시작합니다.

**바라봅니다! – 예수님은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시며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내 안에 영원(永遠)과 맞닿은 바로 그 지점을 바라보며 ‘주님~’을 길게 부릅니다.

**확인합니다! – 내 마음 중심으로 주님의 영과 연결되기를 바라는 갈망이 있는지 수시로 확인합니다. 나의 자원(資源 – 경험, 지식, 노력…) 사용하던 것을 멈추고 오직 주님의 자원(資源 – 오직 성령님의 기름부음)만 사용할 것을 수시로 결단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 7:38~39)"

#STILL & SYNC 기도

영이신 하나님. 이 시간 제가 주님께 연결되기를 소망합니다. 당신과의 연결을 가로막는 나의 모든 자아적 속성을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나를 돕기 위해 내주하고 계신 성령님. 내 마음의 문을 엽니다. 저를 긍휼히 여기시고 도와주세요. 내 모든 이성과 감정과 의지가 주의 영에 굴복되었음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말씀이 나를 주장하옵소서. 말씀이 승리하옵소서. 육신의 열매가 아닌 영의 열매를 거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와 같은 기도가 익숙해지면 길을 가다가도 ‘주님~’이라고 길게 부르면서 이 기도에 담긴 마음을 ‘주님’이란 단어에 모두 압축하여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영과의 연결은 한 순간입니다. 내주하고 계신 성령님을 인식하고, 존귀히 여기고, 그 성령님께 모든 것을 통제받으려는 마음이 진심일 때 영과의 연결은 ‘주님~’이라고 부르는 고백 하나로 족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영과의 연결은 한 순간입니다. 자기 자신을 내려놓지 못한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도 이 단계가 쉽지 않은 반면 매 순간 자기 자신을 내려놓으려 하는 사람에게는 이 단계는 잠깐의 고백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는 것입니다.

#STILL & SYNC - 하가를 위한 구별된 시간을 가질 수 있을 때

하가의 핵심은 일상에서 말씀을 입에 올려 중얼거리는 것을 통해 말씀의 영향을 받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풍성한 하가 시간을 위해서는 하가 재료를 준비하는 별도의 시간을 갖는 것도 유익합니다. 

구별된 주님과의 교제 시간을 하루 15분~30분 가질 수 있는 분들은 아래 내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프러포즈하러 가는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특별할까요? 시간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지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특별한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듯 마음의 태도는 시간의 질(質)을 좌우합니다. 하가는 말씀을 매개로 주님과 만나며 교제하는 시간입니다. 

주님은 인격이요 실재(實在)입니다. 주님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의 태도가 경험의 질을 결정합니다. 

내 삶의 가장 소중한 그분과의 만남을 위해 어떤 시간, 어떤 공간, 어떤 마음을 준비해야 할까요?

때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특별한 만남을 위해 향초를 켜고 배경 음악을 준비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과 교제를 시작하는 Still & Sync 시간을 특별하게 해줄 나만의 의식(儀式, ritual)을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예를 들면, 그 시간만의 배경 음악, 그 시간만의 장소, 그 시간만의 노트와 필기구를 준비하는 것과 같은 거죠. 이런 시간과 의식을 통해 주님과의 추억이 쌓이는 겁니다.

Still & Sync 단계의 초점은 주님과의 거리를 좁히는 겁니다. 내 합리적 사고와 고정 관념이 성령님의 활동을 막아선 안 되겠습니다. 

내 천연적 기질은 줄어들고 내 안에 살아계신 성령님은 늘어나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내가 줄어든다는 것은 내 안에 실존(實存)하시는 성령님께 모든 것을 사로잡히려는 열망이 확산하는 것입니다.

#STILL & SYNC -바쁜 일상에서

길을 걷고 있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거나, 잠깐의 휴식 시간이거나,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일상에서 Still & Sync를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구별된 주님과의 교제 시간을 통해 Still & Sync 단계를 훈련한 사람은 바쁜 일상에서 Still & Sync를 갖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Still & Sync는 결국 ‘나’에게 맞춰진 초점을 ‘주님’께로 돌려 주님의 영과 연결되려는 시도입니다. 

이것은 흩어졌던 마음을 주님께로 돌리려는 순간 즉시 이뤄질 수도 있습니다. 단계로 나눠 설명해서 그렇지 Still & Sync는 결코 복잡한 과정이 아닙니다. 

내 안에 실재하시는 성령님의 영향을 받으려는 태도를 보이는 순간 Still & Sync는 쉽게 이뤄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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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가 실전] WEEK 1 – HOW SOAR(2) – OUTLINE & OBSERVE

STEP2. OUTLINE & OBSERVE :: 전체를 조망하고 집중할 것에 주목하라 –관찰/해석

@2. KEY QUESTION

*WHAT |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가? 무엇에 집중할 것인가?

‘하가’를 하기 위한 말씀 분량은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요? 일상생활에서 언제, 어디서나 보지 않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려면 한 절(節)에서 많아야 두 세절 정도가 적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한 절만 떼서 보다 보면 전체 맥락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가를 할 때는 항상 그 절(節)을 포함하고 있는 전체 맥락을 미리 파악하여 윤곽을 그리고 있는 것(Outline)이 좋습니다. 

전체 윤곽을 파악했다면 하가할 구절을 보지 않고 중얼거릴 수 있을 정도로 소리 내 반복합니다. 

이때 중간중간 멈춰주는 것이 좋습니다. 기계적으로 암송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멈춤(pause) 버튼을 누른 후 ‘성령님~’을 찾으십시오. 

내가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읽기 바라는 마음을 항상 유지하십시오. 

성령님이 도와주실 것이란 믿음을 갖고 해당 구절의 단어와 구(句)를 깊이 주목하며 관찰합니다(Observe).

관찰 중에 특별히 감동을 주신 단어나 구가 있다면 그것을 반복하며 음미(吟味)합니다. 

마치 입안에서 사탕을 데구루루 굴리듯 그 단어나 구를 입에서 반복하여 읊조리며 그 맛을 감상하는 겁니다. 단어나 구를 반복할 때도 중간중간 기다리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 23편 전체를 파악한 후(Outline) 1절 말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부분을 하가하기로 했다고 가정해봅시다. 

1절 말씀 중에서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부분에 감동이 있어 이 부분을 반복하며 읊조립니다. 이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입안에 한 번 올려 중얼거린 후 영의 흐름을 의식하며 기다립니다. 이런 식으로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영의 흐름을 의식하며 기다리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입은 중얼거려도 마음은 영원에 맞닿기를 바라며…) 여호와는 나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목자시니… (말씀과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의식하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렇게 단어와 구절을 반복하는 사이사이 성령님을 의식하며 기다리는 겁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연이어 반복하지 않고 잠시 머무는 이유는 성령님이 개입하실 시간을 갖기 위함입니다...이 부분이 익숙해지면 기계처럼 한번 중얼거리고 한번 기다리는 방식이 아닌, 내 중얼거리는 소리 위에 성령님이 운행하신다는 임재의식과 함께 하가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내 입은 그 구절을 계속 반복하여 중얼거리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성령님의 개입을 갈망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말씀은 영의 소리입니다. 태초에 수면 위에 운행하셨던 하나님의 영이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는 소리를 타고 일하셨죠. 

믿음으로 말씀 속 영의 소리를 중얼거리며 생수를 퍼 올릴 때 성령님이 그 위를 운행하시며 영의 소리를 타고 일하시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어떨까요? 

...계시(啓示, Revelation)는 운행하시는 성령님이 말씀을 타고 빛을 창조하시는 순간입니다

암송이 목적이 아니기에 입에서만 말씀을 기계적으로 중얼거리는 것으로 끝내선 안 됩니다. 입은 중얼거리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말씀과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소중히 여기며 갈망하는 마음을 유지할 때 구절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빛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구절을 반복하며 중얼거리는 이유는 주님의 주권 아래 한순간 임하는 성령님의 계시를 받기 위함입니다. 이 계시가 바로 하늘의 믿음을 산출합니다.

Outline & Observe 단계의 초점은 하가를 하면서 전체 맥락(숲)을 파악한 후 집중하여 반복할 특정 단어나 구절(나무)을 찾는 데 있습니다. 

하가를 하는 이유는 말씀을 매개(媒介, medium)로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의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주님과 함께 관심 깊게 주목할 특정 단어나 구절을 찾는다면 이 재료들은 하가를 하는데 있어 훌륭한 매개체(媒介體) 역할을 합니다. 

성령님은 어떤 질문도 환영하시는 인격입니다. 이때 이런 매개체는 상호 교제의 훌륭한 거점(據點, base)역할을 합니다.

#OUTLINE & OBSERVE - 하가를 위한 구별된 시간을 가질 수 있을 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말씀을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고 밤낮으로 묵상(하가)하라’고 하셨습니다. 

시간, 장소,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가를 최우선 순위로 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를 위해서는 15~30분 정도의 구별된 주님과의 교제 시간을 통해 하가 재료를 준비하는 것이 도움됩니다. 

어떤 과목을 공부할 때도 아예 모르면 재미가 없지만, 공부를 어느 정도 해서 그 과목과 관련한 재료가 충분히 쌓이면 그 과목 수업이 기다려지고 그 공부가 재밌어지지요? 

하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구별된 시간을 통해 하가할 말씀을 기록한 사람은 누구인지, 기록할 때의 상황은 어땠는지, 그때 저자의 마음은 어땠는지, 이 구절은 전체 어떤 맥락 가운데 나온 것인지, 또 다른 성경 번역본은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각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이 구절과 연관 있는 또 다른 구절은 없는지 등의 재료를 준비한 사람과 이런 재료가 없는 사람은 일상에서 하가를 할 때 경험의 질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은 그 자체로 진리이지만 그 안에 감춰진 생명을 경험하려면 미련하게 보이는 껍질을 벗겨야 합니다. 

‘계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칼륍시스’는 껍질을 벗겨 속에 있는 생명 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껍질을 벗기려면 재료와 도구가 필요합니다. 요리는 성령님이 하시지만, 재료와 도구 준비는 우리 몫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요리사라도 도구와 요리할 재료가 빈약하면 최고의 요리를 선보이기 어려운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걸어 다니는 일상의 어느 한순간 마치 우연처럼 깨닫는 놀라운 감동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준비한 재료로 성령님이 요리한 결과입니다.

이런 시간을 통해 재료를 준비할 때 이런 연구가 지식과 깨달음을 얻는 하나의 활동으로 변질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하가의 목적은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이 첫 번째 목적도 아닙니다. 지식이나 깨달음이나 감동 같은 것은 하가를 진행하며 얻는 부산물일 뿐입니다. 

이런 사전 연구를 권장하는 유일한 이유는 주님과의 교제를 풍성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모든 활동은 주님과의 교제와 주님의 영향을 받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OUTLINE & OBSERVE - 바쁜 일상에서 

구별된 시간을 통해 준비한 재료가 빛을 발하는 순간은 운전 중에, 걸어 다니면서, 설거지하면서, 회의하는 중간중간 등 일상의 모든 순간에 시간과 장소와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가를 시도할 때입니다. 언제나 인생의 획을 긋는 것과 같은 특별한 감동과 계시는 이 일상의 어느 순간 우연처럼 찾아옵니다.

이런 재료가 있는 가운데 바쁜 일상 중 하가 말씀을 반복 중얼거리다 보면 이전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 도드라지게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잘 메모하거나 기억해뒀다가 구별된 시간을 통해 재료로 연구하고 다듬습니다. 

요리에 있어 재료가 중요한데 일상에서의 Outline & Observe는 마치 길을 가다 생각지도 못했던 귀중한 재료를 발견하는 기쁨과도 같은 시간입니다. 

다른 단계도 마찬가지지만 Outline & Observe 단계 역시 구별된 시간과 일상의 교차 실행을 통해 훌륭한 시너지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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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가 실전] WEEK 1 – HOW SOAR(3) – ALIGN & AUTHOR...말씀에 내 모든 삶을 정렬시키고 믿음을 표현하라 – 적용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16:8) ..I have set the LORD always before me; because he is at my right hand, I shall not be shaken. (ESV)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힘을 얻으리니 독수리ㅇ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사40:31)....Those who hope in the Lord will renew their strngth. They will SOAR on wings like eagles;"

방법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대상을 향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도구와 방법을 이깁니다. 

주님의 생명을 접촉하려는 갈망만 있다면 서툴러도 은혜가 넘칩니다. 이런 마음이 있을 때야 비로소 도구와 방법은 유용합니다. 

방법에 몰입하다 보면 정작 대상을 잊고 맙니다. 본말(本末)을 전도하는 거죠. 이점을 꼭 명심한 가운데 방법이 주님을 향한 사랑을 가리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습니다. 

정상(頂上)에 오르는 길은 다양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길도 다양합니다. SOAR는 데일리하가가 정상을 오르며 개척했던 길 중 하나를 제시할 뿐입니다. 익숙해지면 언제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시길 권장합니다.

@3.KEY QUESTION

*HOW | 어떻게 말씀을 살아낼 것인가? 어떻게 믿음을 표현할 것인가?

말씀은 능력 그 자체입니다. 말씀은 만물을 붙들고 있습니다.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히 1:3) and upholds all things by the word of His power… (NASB)”

AMP 번역은 이 ‘만물’을 ‘물리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를 포함하는 모든 것 (all things – the entire physical and spiritual universe)’으로 번역합니다. 

헬라어 원문은 이 부분을 ‘타 판타(ta panta)‘로 적고 있는데요. 사전은 이 부분을 ‘모든 것을 포함하면서 그 어떤 것도 예외일 수 없는 완전한 전체(to include everything and exclude nothing)‘로 정의합니다. 

즉, 주님이 말씀으로 모든 것을 붙들고 계시는데 이 모든 것은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이전의 것, 앞으로 생길 것을 포함한 그 어떤 것도 빠져나갈 수 없는 전체를 뜻합니다. 당연히 내 삶도 여기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내가 하는 일, 상황도 여기서 예외일 수 없음을 뜻합니다.

삶과 신앙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신앙 따로 내가 살아가는 세상 따로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의식하지 않으면 어느새 세상을 따라갑니다. 심정은 말씀을 삶의 중심에 놓고 싶지만, 현실은 세상이 삶의 모든 기준이 돼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씀이 모든 것을 붙들고 있다고 명확히 얘기합니다. 즉, 내가 그렇게 살든 살지 못하든 상관없이 모든 것의 기준(다림줄, plumb line)은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하가를 하는 이유는 말씀을 매개(媒介)로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의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의 모든 영역이(타 판타, 그 어떤 것도 예외 없이…) 말씀을 기준으로 정렬(整列, Alignment)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하가를 강조하신 이유도 일상의 모든 삶이 말씀에 붙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 환경, 문제뿐만 아니라 내 생각, 태도, 행동까지 지금 ‘하가’ 하고 있는 말씀에 정렬시키는(Align) 훈련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가를 하다보면 그 말씀이 지금 내 문제, 내 상황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죠. 당연히 자주 발생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꼭 기억하고 믿음으로 붙드십시오.

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말씀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가장 사소하다고 느껴지는 말씀조차 나의 가장 큰 문제를 능가합니다.

그 어떤 연관성도 없어 보이는 말씀조차 성령님이 빛을 비추시면 현재 상황을 돌파(突破, breakthrough)하게 하는 놀라운 물맷돌이 됩니다.

상황에 맞는 말씀을 찾는 것은 내 이성(理性)도 할 수 있습니다.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말씀에서 빛을 얻어 놀라운 반전을 일으키는 것은 내 이성(理性)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내 모든 상황을 정렬시키려는 자에게 허락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입니다.

말씀이 삶에 영향을 못 미치는 것은 말씀의 문제가 아니라 내 태도와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 어떤 말씀도 내 삶에 놀라운 영향을 미칠 수 있으리란 믿음으로 하가를 하며 삶을 말씀에 정렬해 나갈 때 내 상황에 맞는 계시가 풀립니다. 

내 상황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던 말씀이 내 믿음을 타고 역사한 성령의 빛 비추심으로 연관성을 찾게 될 경우 그 말씀은 내 삶을 변화시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살아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가’의 관점에서 보면 일상의 모든 삶을 지금 하가하고 있는 말씀에 정렬시키는 겁니다.

내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말씀이 없으리란 믿음을 붙들고 말씀을 중얼거리며 그 말씀으로 내 삶을 조명할 때 보이지 않게 안에서 내 삶을 붙들던 말씀이 실재가 되어 드러납니다. 말씀이 내 삶에 영향을 미쳐 그 말씀 앞에 정렬되는 삶. 말씀이 내 삶에 실재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말씀을 살아내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기록으로 남기셨습니다. 그 기록이 바로 말씀이죠. 말씀은 하나님의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생각과 믿음을 표현하시고 기록하시는 것을 즐기셨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첫 아이를 낳고 그 소중한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마음 담아 일기를 쓰던 부모처럼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보배로운 생각을 다 기록해오신 분입니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시 139:16~17)”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말 3:16)”

하가하는 말씀에 모든 상황을 정렬시키다(Align) 보면 의외의 말씀이 내 상황과 결합하여 놀라운 계시를 풀어낼 때가 있습니다. 이때 역사를 일으키는 믿음이 함께 옵니다. 이런 특별한 감동이 있을 때 놓치지 말고 기록하십시오(Author). 

아무리 뜨거운 계시와 감동도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지고 맙니다. 믿음은 표현될 때 그 기름부음이 배가(倍加)됩니다. 기록 역시 표현의 한 부분입니다. 

이런 감동과 말씀을 살아낸 과정을 기록하는 것을 저널링(Journaling)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런 기록이 어느 한 곳에 쌓이다 보면 인생의 궤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 인생을 향한 주님의 계획을 더 잘 알게 되는 것은 물론 나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Calling)을 찾아가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신 후 가장 먼저 주신 미션(Mission)은 이름을 짓는 것(Author)입니다.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은 고도의 창조적, 영적 활동입니다(원어적으로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후 생기를 불어넣은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 땅의 권위(Authority)를 주신 것의 첫 번째 활동이 이름을 짓는 것(Author) 이었습니다(Author에게 Authority가 있으니까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기대하는 것은 이 땅에서 이름 짓는 자(Author)의 사명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고도의 영적, 창조적 활동을 통하여 하늘의 권위(Authority)를 회복하고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에 권위(Authority)가 있음을 믿고 그 말씀의 저자(Author)에게 내 모든 생각, 태도, 행동, 관점, 상황, 환경, 문제 등 모든 것을 정렬하고자(Align) 할 때 내 삶에 맞는 계시가 풀리고 상황을 이겨낼 믿음이 들어 오기 시작합니다. 이 계시와 이 믿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Author) 훈련을 해야 합니다. 

때로 기록으로, 때로 순종으로, 때로 도전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을 살아내는 과정이며 이런 과정을 통해 내 인생을 향한 권위(Authority)가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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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가 실전] WEEK 1 – HOW SOAR(4) – REFLECT & RESPOND

STEP4. REFLECT & RESPOND ...살아낸 말씀으로 나는 누구인가 묻고 CALLING에 반응하라 – 계시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16:8) ..I have set the LORD always before me; because he is at my right hand, I shall not be shaken. (ESV)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힘을 얻으리니 독수리ㅇ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사40:31)....Those who hope in the Lord will renew their strngth. They will SOAR on wings like eagles;"

@4. KEY QUESTION....

*WHY | 나를 향한 주님의 믿음은 무엇인가? 나는 이 땅에 왜 존재하는가?

가장 많이 알려진 묵상 방법은 ‘①기도, ②관찰, ③해석, ④적용’입니다. ‘①기도’는 ‘STEP 1의 Still & Sync’와, ‘②관찰 & ③해석’은 ‘STEP 2의 Outline &Observe’와, ‘④적용’은 ‘STEP 3의 Align & Author’와 관련 있습니다. 

개인의 삶에 포커스를 맞춰 일상에서 하가를 진행할 때는 Still & Sync(기도) → Outline &Observe(관찰 & 해석) → Align & Author(적용) 순서를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상황에 맞게 진행하면 크게 문제없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삶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내 인생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놓치기 쉽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거울을 통해 나를 비추고(Reflect) 나를 향한 하나님의 믿음을 회복하여 주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려는(Respond) 삶의 여백이 필요합니다.

말씀은 소리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자신을 비추며(Reflect) 내면의 소리(calling)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려(respond) 할 때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에 반응하는(Respond)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부르심의 자각은 나의 노력에 달렸지 않습니다. 이 부르심은 마치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처럼 인생의 어느 한순간 알게 되는 주님의 주권에 속한 영역입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하가는 STEP 1 ~ STEP 3까지 만으로도 충분하나 인생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하가는 STEP 4가 필요합니다. 

STEP 4는 STEP 3 이후 진행하는 단계라기보다는 언제 어느 순간 찾아올지 모르는 주님의 부르심에 열린 자세로 귀 기울이려는 단계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STEP 4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래 질문에 관한 건강한 답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나의 믿음이 아닌 말씀에 비춰(Reflect) 떠오르는 내면의 반응(Respond)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나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가?

**나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를 향해 어떤 믿음을 갖고 계시는가?

**내 인생을 향한 주님의 약속은 무엇인가?

**어부였던 시몬을 향해 베드로라고 부르셨던 주님은 나를 향해 뭐라 부르실까?

**모든 생명이 존재 이유가 있다면 이 땅에서의 내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나를 향한 주님의 믿음

‘십자가’는 하늘의 비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밀을 처음부터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 비밀을 얘기할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죽음을 제자들에게 처음 알린 것은 두 가지 질문을 던진 후였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였습니다. 이 질문에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에 해당하는 답을 갖고 살아가는 시기죠. 부모님이 믿고 있는 주님, 목사님이 얘기하는 주님, 책이나 다른 간증자가 고백하는 주님을 지식적으로 알고 믿으려는 단계입니다. 

하지만 이때 주님은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란 두 번째 질문을 던지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믿고 있는 나 말고 너 자신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란 질문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지식만 있으면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질문은 깨달음과 확신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이 곁에서 지켜보며 깨닫고 확신한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란 자신만의 고백을 합니다. 

이 고백은 베드로의 마음 중심에서 나온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 중심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알게 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다’라고요. 다른 말로 하면 계시(啓示, revelation)를 통해 베드로가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하늘의 비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신 주님은 아주 중요한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란 고백입니다. 

이것은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믿음입니다.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신앙 고백이죠. 천박한 어부 시몬(Simon, 베드로의 본명)을 향한 세상 사람들의 신앙 고백은 ‘너는 어부라. 배우지 못하고 아주 천한 시몬이다!’였습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주님을 향한 자신만의 신앙 고백을 계시적으로 했을 때, 주님은 베드로를 향한 자신의 신앙 고백을 이렇게 하신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너를 뭐라 부를지 모르지만, 너는 베드로다. 너는 반석이다.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 계시로 믿음을 표현한 바로 그 자리에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 이것이 너를 향한 나의 믿음이다!’라고요. 

세상 사람들은 베드로의 현재 모습을 보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베드로의 존재 이유를 보셨고 그 믿음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이 누구인지 눈을 뜬 순간입니다. 

이때 두 번째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처음으로 ‘십자가’의 비밀을 말씀하신 겁니다

베드로가 자신이 누구인지에 관한 주님의 믿음을 알게 됐을 때 하늘의 비밀을 비로소 알려주신 거죠. 

베드로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십자가의 비밀을 처음 알게 된 근간에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믿고 있는 주님이 아닌 말씀을 통해 들어온 계시를 통해 알게 된 나만의 주님을 신앙 고백하기 시작할 때 나를 향한 주님의 믿음과 감추셨던 하늘의 비밀을 풀어주기 시작하십니다. 

세상은 자신의 노력으로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주님이 누구인지를 알 때 비로소 거기에 비친 자기 자신을 알게 됨을 암시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땅에서 자신을 찾지만, 땅은 하늘의 투영일 뿐입니다. 하늘에 비친(Reflect) 나를 볼 때 비로소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 때 하늘의 부르심에 반응할 수(Respond)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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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가 기초] WEEK 1/DAY 5 –일반 묵상과는 이렇게 다릅니다 

DailyHagah는 일반 묵상과 어떤 부분이 비슷하고 어떤 부분이 다를까요? 

가장 다른 부분은 역시 암송을 전제로 중얼거려야 하는 데 있습니다.

1. 중얼거려야 합니다

‘하가’가 일반 묵상과 가장 다른 부분은 소리를 내 중얼거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하기그 from 하가) 때에 불이 붙으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시편 39:3) My heart grew hot within me, and as I meditated, the fire burned; then I spoke with my tongue: (NIV)”

마음 속에 불이 붙은 뜨거운 감동으로 중얼거리며 말씀을 읊조릴 때 자아를 붙드는 고집센 나의 이성이 잠잠해집니다. 

그 중얼거리는 말씀을 재료삼아 성령님의 계시가 임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2.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가’는 시간을 정해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QT 시간, 기도 시간, 성경을 펴 놓는 시간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의 모든 순간이 ‘하가’를 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가)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 1:8)”

감동 받은 말씀을 되새김질 하지 않으면 받은 감동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감동을 유지하고 더 큰 계시를 사모한다면 그 구절을 ‘하가’하여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걸어 다니면서, 회의 전에, 설거지하면서, 버스 안에서, 신호 대기 중에, 잠자기 전에, 일어나자마자와 같은 일상의 모든 순간이 ‘하가’할 만한 순간입니다. 

심지어 상대방과 대화를 하다 발생하는 아주 짧은 몇 초의 공백 마저도 ‘하가’를 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늘 의식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모든 순간이 하가의 대상입니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주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이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고 하신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마음이 간절한 사람에게는 ‘시간’과 ‘장소’가 ‘하가’의 장벽이 될 수 없습니다.

3. 암송해야 합니다

일반 묵상은 암송이 필수는 아닙니다. 하지만 ‘하가’는 암송을 기본 전제로 합니다. 

‘시간’과 ‘장소’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나 ‘하가’하려면 말씀을 암송하고 있는 것이 훨씬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운전하면서 성경책을 펴고 묵상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말씀을 암송하고 있다면 그 말씀을 운전하면서 중얼거리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암송하고 있으면 화장실에서도 잠깐 ‘하가’를 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건널목 건너기 전 신호를 기다리면서도 말씀을 ‘하가’할 수 있습니다. 

암송하고 있는 구절의 한 단어만 갖고도 중얼거리며 훌륭한 ‘하가’를 누릴 수 있습니다. 암송이 ‘하가’는 아닙니다. 하지만 암송이 ‘하가’의 시작은 맞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암송을 통해 토라 말씀을 세대에서 세대로 전했습니다. 암송은 ‘하가’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시작 지점입니다.

예수님은 ‘하가’란 단어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일상 속에서 혼자 말씀을 중얼거리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말씀과 함께 사셨던 예수님이 공생애 시작 전 마귀의 시험을 받습니다. 이 때 세 번 모두 신명기 말씀을 끄찝어 올려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마귀의 공격이 있을 때 성경책을 펴가며 말씀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평소 하가하던, 암송한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말씀을 암송하고 있다면 어떤 특정 상황에서 성령님이 적절하게 꺼내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가 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음을 기억해야 겠습니다.

4. 말씀을 기도로 연결해야 합니다

‘하가’의 목적은 깨닫고 많이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가’를 통해 감춰져 있던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주님이 내게 나타나 주님의 마음을 알고 내 마음이 뜨거워져 반응할 수 밖에 없는 것. 모든 시작이 주로부터 말미암기를 갈망하는 마음. 이것이 하가를 하는 이유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말씀을 수시로 중얼거리다 보면 어느 순간 ‘하가’하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이 훅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기도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기도는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암송하고 있으면 암송한 말씀을 기도로 풀어내기가 훨씬 쉽습니다. 

말씀을 기도로 풀어내며 중얼거리는 것. 이 자체가 훌륭한 ‘하가’입니다. 내 생각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녹여 그것을 기도로 올릴 때 계시가 풀어집니다. 

이렇듯 ‘하가’는 말씀과 기도와 계시를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5. 깊이 사색해야 합니다

‘하가’를 피상적으로 하다 보면 암송하는 것으로 끝날 때가 있습니다. 중얼거리다 말고 어느새 끝납니다. 

영의 깊은 영역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길어 올리려면 ‘하가’의 깊이도 더 깊어져야 합니다. 이전 ‘하가’에서 누리던 만족으로 하나님의 깊이를 제한하면 안됩니다. 

‘하가’의 끝은 어디일까요? 하나님 마음의 거리만큼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어느 정도 깊이일까요? 영원 만큼이나 깊습니다. 

‘하가’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다고 단정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영원 앞에, 말씀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내가 조금 아는 자라고 생각했지만 영원을 머금은 말씀의 계층적 깊이를 경험할 때 그 어떤 것도 모르는 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가’의 삶이 깊어질 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말씀 조차도 ‘하가’를 하다보면 완전히 새로운 각도에서 깨달음을 얻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말씀도 이미 안다고 생각하며 ‘하가’를 해선 안됩니다. 이미 알고 있는 말씀 조차도 마치 처음 보는 말씀처럼 대해야 합니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은 낡아지지만 성령님은 늘 새롭습니다. 그 성령님이 날마다 말씀으로 나를 새롭게 하기 원하십니다. 

익숙한 말씀을 하가할 때 조차 이 말씀에 무엇인가 더 깊은 것이 있다는 믿음으로 깊이 사색해야 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한 단어 혹은 짧은 한 문장만으로 하루 종일 ‘하가’하며 사색할 수도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 어떤 것도 그냥 기록된 말씀은 없습니다. 이미 안다고 생각한 것에 더 깊은 보물이 숨어있을 수 있음을 의식해야 합니다.

 ‘하가’를 통해 이런 보물을 길어 올리려면 계란 프라이 요리같이 빨리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몇날 몇 일을 푹 고아야 깊은 맛이 우러나는 곰국같이 한 말씀을 갖고 오랜 시간을 붙들고 있어야 할 때도 있음을 기억해야 겠습니다.

6. 감동을 기록합니다

소리는 사라집니다. 생각도 쉽게 사라집니다. ‘하가’하며 받은 감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가’를 하며 받은 감동이 있다면 꼭 기록으로 남기는 습관을 가지십시오. 

받은 계시와 감동을 한 곳에 기록하고, 모아놓은 기록을 정기적으로 살펴보다 보면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던 점과 같은 기록들이 어느새 서로 연결되어 내 인생을 이끌고 계신 하나님의 궤적을 보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만일 기록하지 않았다면 결코 알기 어려웠을 내용들입니다. 

또한 하가하는 구절과 그 감동을 기록하다 보면 중얼거릴 때와는 또 다른 계시가 풀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런 기록을 데일리하가에서는 ‘저널링(Journaling)’이라고 부릅니다.

7. 감동을 나눕니다

‘하가’는 말씀에서 생명을 길어 올리는 과정입니다. 생명의 영역은 나눌 때 고갈되지 않고 늘어납니다. 

하가를 하며 받은 감동을 겸손과 온유와 절제 아래 다른 사람과 나눌 때 그 감동은 배가 됩니다. 

특별히 같은 커뮤니티에 속한 사람들끼리 동일한 구절로 한 주간 ‘하가’를 한 후 서로 만나 일상에서 경험한 은혜를 나눌 때 그 말씀이 더 풍성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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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묵상하는 것을 아는 배우지 못한 사람이 묵상하는 것을 모르는 많이 배운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압니다. ...An unschooled man who knows how to meditate upon the Lord has learned far more than the man with the highest education who does not know how to meditate. – Charles Stanley –

시하 sihah (깊이)숙고하다 ---->하가 hagah (먹을 거리 얻고 그 것을 기뻐하며  그 맛 상상하며 즐거운 생각으로) 으르렁거리다 구구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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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언(대언)의 실행]]

성경

히 1:1-2상, 요 1:1, 창 1:6-7, 9, 11, 14-15, 시 33:6상, 9, 요 5:24, 14:10하, 민 11:29하, 고전 14:31, 살전 5:20, 암 2:12하, 7:12-13, 렘 11:21, 15:19, 시 73:28상, 25:14, 73:13, 행 6:4, 살전 5:16-20, 골 3:16, 행 19:6

Ⅰ.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심

우리의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자녀들인 우리도 그분을 따라 말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말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애적 자기 연민으로 원망-비난-저주하거나 한담하는 방식으로 말해서는 안 되며 대신에 거듭난 이의 영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예비해 두신, 생명의 말씀을 말해야 한다(빌 2:16).

히브리서 1장 1절부터 2절 상반절 까지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말한다. 

옛적에 하나님은 선지자(신언자)들 안에서 선조들에게 말씀하였지만 지금은 그 분의 아들 안에서 말씀하고 계신다. 

실제로 2절에서 언급한 “아들”은 영생하시는 그리스도, 내주하시는 성령 따라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살며, 그분을 살아내는 거듭난 핫 새 사람,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 그대로 자라거며 그리스도의 증가와 확대인 몸으로서 머리이자 맏형이신 그리스도를 사는, 단체적인 아들이다. 오늘날 믿는 이들인 우리도 이 아들의 한 부분이다. 

하나님은 여전히 아들 안에서 말씀하신다. 과거 20세기 동안 많은 이들이 신약 성경과 그 원칙에 따라 주님을 말해낸 것은 아들의 말씀하심이었다. 신약에서 사도 바울의 말함은 아들의 말함의 한 예이다. 

우리는 신약 성경 전체가 사도들의 가르침이라고 강조하였다(행 2:42). 

그러므로 우리가 신약이 가르치는 것과 동일한 것을 가르친다면 우리의 가르침도 사도들의 가르침의 한 부분이다. 

분열을 일으킨 어떤 자들은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또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을 가르치라고 한 사복음서만이 사도들의 가르침이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요한복음 16장에서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2-13절)고하신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였다. 

의심할 바 없이 주님께서 선포하신 “많은 것”은 서신서에 기록되어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사복음서에서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만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사복음서 이후에 사도행전과 서신서와 계시록에서 말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라고 믿지 않는다. 

골로새서 1장 25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완성하는 위임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바울의 글 이전에 성경의 거룩한 말씀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룩한 말씀은 하나님의 경륜과 그리스도의 비밀에 관하여 아직 완전하지 않았다.

Ⅱ. 심지어 하나님께서 말씀이심

심지어 하나님께서 말씀이시다(요 1:1). 우리 자신도 또한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하심이 되기 위해 은혜를 받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하심이 되기 위해 은혜를 받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라며 조롱할지 모른다. 

그들이 조롱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이같이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죄인들을 방문할 때 우리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들을 방문하러 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또한 그들을 방문하러 가는 것이다. 죄인을 방문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속한 것을 그들에게 말해야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하기를 배워야 한다.

Ⅲ. 하나님은 말씀하심으로 옛 창조를 창조하심

하나님은 말씀하심으로 옛 창조를 창조하셨다(창 1:6-7, 9, 11, 14-15, 시 33:6상, 9). 시편 33편 9절은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며 견고히 섰도다”라고 말한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그분의 말씀은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하시매 빛이 있었다“(창 1:3). 

시편 33편 6절은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말씀하심으로 역사하신다.

Ⅳ. 하나님은 새 창조 또한 말씀하심으로 창조하심

하나님의 새 창조 또한 말씀하심으로 창조하셨다. 요한복음 5장 24절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한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거듭나게 된다. 즉, 그들은 새 창조가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10-절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서 일하셨음을 가리키셨다. 이와 같이 그분의 말씀하심이 아버지의 일하심이다. 아버지는 아들의 말씀하심을 통하여 일하셨다.

주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여행을 하시면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그러나 사복음서에서 주님의 말씀하심은 그분이 행하신 기적보다 더 뛰어난 것이다. 마태복음 여섯 개의 장에는 적어도 세 가지 문제에 관한 주님의 긴 말씀이 있다. 5장부터 7장까지는 산에서의 주님의 가르치심을 다룬다. 13장은 바닷가에서주님께서 가르치신 일곱 비유를 다룬다. 그리고 24장과 25장은 주님께서 감람산에서 하신 예언을 다루고 있다. 또한 공관복음인 마가복음과 누가 복음에도 주님의 탁월한 말씀이 있다.

요한복음의 거의 모든 장에는 주님의 말씀이 있다. 그중에서 14장부터 17장까지의 주님의 말씀하심은 매우 특별하다. 14장부터 16장까지에는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날 밤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기록되었고, 17장에는 그분이 아버지에게 하신 기도가 기록되었다.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매우 심오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계시해 준다. 하나님의 깊은 것들은 기적이 아닌 그분의 말씀하심을 통하여 볼 수 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그분은 주로 말씀하심을 통하여 그분의 일을 수행하셨다. 오늘날 죄인을 구원하고 성도들 교화하고 성도를 온전케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신약의 일 또한 말씀하심을 통하여 수행되고 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 할 수 있도록 합당한 성경 해석이 필요하다. 요엘서에는 네 종류의 메뚜기가 나온다(1;4). 합당한 해석이 없다면 누가 이러한 메뚜기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구약의 예언서를 공부하려면 역사적인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다니엘 2장은 거대한 인간형상을 계시한다. 다니엘 7장 3절과 4절의 첫 번째 짐승과 일치하는 금으로 된 인간형상의 머리는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을 의미한다. 7장 5절의 두 번째 짐승과 일치하는 은으로 된 가슴과 팔은 메대-바사 제국을 상징한다. 7장 6절의 세 번째 짐승과 일치하는 동으로 된 배와 허벅지는 헬라 제국을 상징한다. 7장 7절에서 8절의 네 번째 짐승과 일치하는 철로 된 다리와 철과 진흙이 섞인 발은 로마제국과 로마제국의 마지막 열 명의 왕을 상징한다. 계시록 18장에서 로마제국은 큰 바벨론으로 언급된다. 큰 형상의 머리와 발이 바벨론을 상징하기 때문에 전체 인간 형상은 네 제국 또는 네 단계의 바벨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요엘서의 네 종류의 메뚜기 또한 네 제국을 언급한다. 이들 제국 모두는 요엘서에서 “여호와의 날”이라 불리는 주님의 심판을 수행한다(1:15, 2:11, 31, 3:14). 이와 같이 다니엘 2장의 거대한 인간형상의 네 부분, 다니엘 7장의 네 짐승, 요엘의 네 종류의 메뚜기는 모두 같은 것을 언급한다. 바벨론 메뚜기, 메대-바사 메뚜기, 헬라 메뚜기, 로마 메뚜기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는 평화를 가질 수 없다.

나는 합당한 해석이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러한 것을 여러분과 교통하였다. 

사도행전 8장에서 에티오피아 내시는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었다. 빌립이 그에게 읽고 있는 것을 이해하느냐고 질문했을 때, 그는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라고 대답하였다(8:31). 이것은 또 다시 우리에게 해석된 말씀이 필요한 것을 보여준다. 신언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합당하게 해석함으로 주님을 말해내는 것이다.

Ⅴ.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신언자가 되기를 원했음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신언자가 되기를 원했다(민 11:29하).

Ⅵ. 사도 바울은 우리 모두가 신언할 수 있다고 가르침

사도 바울은 우리 모두가 신언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고전 14:31). 하나님은 믿는 이들 모두가 신언하기를, 즉 주님을 위하여 주님을 말해내기를 원하신다.

Ⅶ. 바울은 신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명령함

바울은 우리에게 신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살전 5:20). 오늘날 주님의 사역, 주님의 말씀하심을 거절하는 자들은 신언을 멸시한다. 어떤 반대자들은 회복역이나 라이프 스터디의 도움 없이도 성경 자체만을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러한 방식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성경에서 많을 것을 얻을 수 없다. 성경은 신성한 삼일성에 관하여 말했던 교부들부터 시작하여 과거 이천 년 동안 추구하는 성도들에 의항 해석되어졌다. 그들이 해석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삼일성을 이해 할 수 있겠는가? 삼일성과 삼일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교부들은 삼일성의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 방면에 관한 그들의 업적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그리고 수세기를 거쳐 그들의 해석은 우리에게까지 이르렀다. 이같이 우리에게는 해석된 말씀이 필요하다.

라이프 스터디와 함께 과거 이천년 동안 추구하는 성도들이 해석해 온 거룩한 말씀에 대하나 이해의 정수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전체 성경의 라이프 스터디를 가져야 한다는 부담을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창세기의 어떤 부분을 이해할 수 없다면 도움을 받기 위해 창세기 라이프 스터디를 읽을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소신지서를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소선지서가 합당하게해석 되면 우리는 이 책들에 있는 신성한 사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Ⅷ. 신언을 금지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임

신언을 금지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이다(암 2:12하, 7:12-123, 렘 11:21). 제사장 아마샤는 아모스에게 말하는 것 즉 신언을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이것 때문에 아마샤는 저주를 받게 되었다. 주님은 아모스를 통하여 아마샤의 부인은 창기기 되며 그의 자녀들은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암 7:16-17). 도한 예레미야의 신언을 중지시키려 했던 자들도 재앙을 겪게 되었다(렘 11:21-23).

Ⅸ. 신언하는 것은 기능에 있어서 왕이나 제사장이 되는 것보다 더 높음

신언하는 것은 기능에 있어서 왕이나 제사장이 되는 것보다 더 높다.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하나님은 오직 세 가지 종류의 사역-신언자의 사역, 제사자장 사역, 왕의 사역-만을 정하셨다. 창세기 20장 7절에서 아브라함은 신언자라고 불리었다. 그 당신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왕이나 공식적인 제사장이 없었다. 아벨, 노아, 심지어 아브라함도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의 기능을 하였지만(창 4:4, 8:20, 12;7, 8)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급에서 시내산으로 인도할 때까지 제사장 직분은 제정되지 않았다(출 19:6). 왕의 직분은 사무엘 시대까지 제정되지 않았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먼저 신언자의 기능을 인정하셨고 그 다음이 제사장의 기능이며 마지막으로 왕의 기능을 인정하셨고 그 다음이 제사장의 기능이며 마지막으로 왕의 기능을 인정하셨다.

신약에서 거듭난 모든 믿는 이들은 제사장이자 왕이다(벧전 2:5, 9, 계 1:6). 우리는 왕가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며 왕의 자녀들로서 또한 왕들이다. 믿는 이들인 우리는 모두 제사장과 왕으로 태어났지만 신언자가 되는 것은 우리의 추구함에 좌우된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은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신언)을 하려고 하라”고 말한다. 간절히 신언하기를 갈망하고 추구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신언자가 될 수 없다. 신언하기를 사모하는 자들은 제사장으로 섬기기 위해 자원하여 자신을 주께 분별한 구약의 나실 인과 같아야 한다(민 6:1-21).

신언자와 제사장과 왕의 세 가지 기능 중에 신언자의 기능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세가 기능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에 달여 있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의 왕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림과 둠빔이 있는 흉패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받았다. 그러나 신언자는 심지어 구약시대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았다. 그러므로 신언자들은 왕들을 책망하고 지시하고 가르칠 수 있었으며(삼하 12:1-14) 제사장들로 가르칠 수 있었다(학 2:10-19, 말 1:6-2:9).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었기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기능은 가장 탁월한 것이었다.

구약에서 예레미야와 스가랴는 제사장이었으나(렘 1:1, 느 12:1, 1`6) 결국 신언자가 되었다. 신언자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았다. 어느 날 예레미야가 어머니와 아애기 하는 동안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셔서 그분의 말씀을 말씀하셨다(렙 15:10-11). 처음에는 예레미야와 그의 어머니만 서로 대화 했지만 결국 제삼자인 여호와께서 이 대화에 개입하였다. 제 삼자인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을 사용하셔서 그분의 말씀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신언자 예레미야에게 직접 임하셨음을 보여준다.

우리 모두는 제사장과 왕으로 태어났지만 또 다른 기능인 신언자의 기능이 아직 남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기능에 참여하려면 우리는 이것을 추구해야한다. 우리는 이 기능을 출생에 의해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태어나면서 자동으로 신언자가 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기능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추구해야한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 “사모하다”라는 단어는 강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말하고자 하는 갈망을 가져야 한다. 신언자와 제사장과 왕의 기능에서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가장 유용한 기능은 신언자의 기능이다. 우리는 제사장으로서도 분명히 교회를 건축할 수 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4장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건축하는 가장 유용한 기능은 신언하는 것이다(3-5절).

신약에 따르면 신언에는 세 가지 종류의 신언-에베소서 2장에서 언급된 신언, 사도행전 21장에서 언급된 신언, 고린도 전서 14장에서 언급된 신언-이 있다. 에베소서 2장 20절은 “너희는 사도들과 신언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자라 그리스도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고 말한다. 또한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12절은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신언자로, 혹은 복음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언급된 신언자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안배한 자들이다. 두 번째 종류의 신언자는 빌립의 딸들같이 예언하는 자들이다(행 21:8-9). 세 번째 종류의 신언자는 교회건축을 위해 교회 집회에서 하나님을 위해 말하고 하나님을 말해 내는 자들이다(고전 14:3-5).

하나님은 첫 번째 종류의 신언자들을 특별히 안배하셨다. 모든 믿는 이들이 이러한 신언자는 아니다. 이러한 종류의 신언자에 관하여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29절에서 “다 신언ㅇ자겠느냐”라고 말한다. 모든 믿는 이들이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안배하신 신언자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믿는 이들은 세 번째 종류의 신언자는 될 수 있다(고전 14:1, 5, 31). 고린도 전서 14장 31절은 “(너희는 모두)하나씩하나씩 신언할 수 있느니라”고 말한다. 12장에서는 모든 믿는 이들이 신언자가 아니라고 말했으나 14장에서는 모든 믿는 이들이 신언자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여러 종류의 신언자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신언자에 대한 명백한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

신언하는 것은 다만 예언하는 것이 아니다. 웨스트는 그가 번역한 신약 성경에서 신언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를 “다른 사람에게 신성한 계시를 분배하는 것”으로 해석했다(고전 14:4하). 신언은 신성한 계시를 다른 사람에게 분배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능은 왕이나 제사장보다 더 높은 것이다. 신언자는 하나님 말씀을 직접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이러한 말씀을 유기적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건축을 위하여 말해낼 수 있다.

Ⅹ. 신언자의 자격

A.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함

신언자의 자격은 천한 것 또는 가치 없는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하는 것이다(렘 15:19). 하나님은 예레미아에게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서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할 것 같으면 너는 내 입같이 될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ㅁ말하려면 우리는 천하고 가치 없는 모든 것에서 귀한 것들을 취해야 한다. 우리는 귀한 것들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귀한 것들을 천한 것에서 분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입이 되는 위치를 잃어버릴 것이다.

B.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가까이 하며 주님과 하나 됨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가까이 하며 주님과 하나 되는 것은 신언자의 또 다른 조건이다(렘 1:8-9, 시 73:28상). 모든 선지자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매우 가까우며 주님과 하나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언자들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체험을 가져야한다.

C. 여호와의 친밀한 권고함이 그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속하고 그분의 언약이 그들에게 알려짐

여호와의 친밀한 권고함이 그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속하고 그분의 언약은 그들에게 알려진다(시 25:14). 신언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해야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친밀하기 때문에 느슨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우리는 친밀함에 걸맞은 경외함을 가져야 한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입이 될 자격을 갖춘다.

D.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간 후 깨닫게 됨

시편 73편에서 시편 기자는 악인의 번영에 관한 문제로 번민에 빠져다(3절). 그러나 17절에서 그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즉 하나님을 접촉한 후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을 떠나서 어떤 문제도 해결하기를 원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그는 하나님에게서 말씀을 받게 되었다.

E. 말씀의 사역을 위하여 기도함

사도행전 6장 4절에서 베드로는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고 말한다. 신언하려면 말씀의 사역을 위항 기도해야한다. 기도가 없다면 말씀의 사역은 살아 있거나 강화될 수 없다.

F.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신언의 영을 소멸치 않음

신언자의 또 다른 자격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신언의 영을 소멸하지 않는 것입니다(살전 5:16-20). 몇 자매들은 여성적인 기질에 따라 조용히 있음으로 그 영을 소멸시킨다. 그러나 형제자매 모두 동일하게 너무나 자주 그 영을 소멸시킨다. 우리 가운데서신언하는 것은 처음에는 소음을 내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좋은 질서대로 말하는 소리를 음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처음 말할 때의 소리는 음성이 아닌 소음이다. 우리는 먼저 소음을 내기를 훈련해야한다. 그러면 점차적으로 좋은 순서로 말함으로 소음이 음성이 될 것이다.

우리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말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른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는데 어려움이 거의 없지만 어떤 사람은 말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할 때 조화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말해야한다. 이기고 승리하며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은 대부분 말하는 사람이다. 여러분이 더 말할수록 더 이기게 된다. 우리 모두가 함께 모이는 목적은 우리 모두가 말하기 위한 것이다.

G.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가르치며 권면하고 마음의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노래함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모든 지혜로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함

신언하기 위하여 우리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가르치며 권면하고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노래함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모든 지혜로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해야 한다(골 3:16).

H. 그 영으로 충만함

신언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 영으로 충만해야 한다. 사도행전 19장 6절에서 에베소서의 믿는 이들은 외적으로 그 영의 충만을 받을 때 신언하기 시작했다. 신약 중국어 번역에는 이 구절의 신언하다는 전파하다를 의미한다고 말하는 각주가 있다. 신언하는 것은 하나님을 말해 내며 신성한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분배하는 것이다.

Ⅺ. 신언의 실행

신언의 실행에는 영을 훈련함, 입을 열어서 말함, 들릴 수 있게 말함, 적당한 속도로 말함, 정제되고 정확한 말로 말함 등 적어도 다섯 가지가 포함된다. 여러분은 입을 열어서 분명한 방식으로 영을 훈련해야한다. 들릴 수 있도록 말하려면 전체 회중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말해야 한다. 적당한 속도로 말하려면 너무 느리거나 빨리 말하지 않아야한다. 정제되고 정확한 말로 말하는 것은 필요 없는 말을 하지 않음으로 장황한 이야기를 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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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언의 실행---배우고 훈련하고 실행함 

성경 고전 14:1, 3, 4, 엡 4:12, 16, 고전 12:7

오늘날 하나님은 아들 안에서 말씀하신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신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서 하나님은 아들 안에서 말씀하신다(히 1:2). 

오늘날 이 아들은 머리와 몸으로 된 단체적인 아들이다(고전 12:12). 단체적인 아들에는 신약의 모든 신언자들이 포함된다. 그러므로 단체적인 아들은 신약의 신언자들의 총체이다. 첫 번째 신언자는 한 아들이었지만 그 이후의 신언자들은 그 아들의 지체, 즉 그 아들의 몸의 지체들이다. 

히브리서 1장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맏아들로 제시된다(5-6절).그 후 히브리서 2장 10절은 하나님께서 많은 아들들을 영광 안으로 이끌고 계신다고 말한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아들 안에서 말씀하심은 단지 개인적인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들 안에서 말씀하신다는 강한 근거가 된다. 

하나님께서 단체적인 아들 안에서, 즉 많은 아들과 함께 있는 맏아들 안에서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시다(요 1:1).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분은 우리 또한 그분의 말씀, 그분의 말씀하심이 되게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의 한 부분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며 또한 말씀자체이시다. 오늘날 그분은 우리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그분의 말씀의 한 부분인 우리는 항상 그분을 말하고 표현하고 설명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말씀의 한 부분이 되게 하셨다. 우리가 말씀을 말할 때 그 말씀은 신탁의 말씀이 된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며 또한 신탁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대적은 기독교를 사용하여 교회의 대다수의 지체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아 갔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말하는 것은 더 이상 성도들 가운데 있는 단체적인 신탁의 말씀이 아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특정 전문가들의 일이 되었다. 이러한 전문가는 학위를 얻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여 신학교에 다닌다. 

졸업을 하면 그들은 설교자의 직업을 갖는다. 결국 성직자와 평신도가 있는 계급제도가 설립되는 것이다. 성직자는 말하는 계급이고 평신도는 말 못하는 계급이다. 

이런 식으로 사탄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의 기능을 말살 시킨다. 

오늘날 우리는 주의 회복으로서 서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기독교적인 배경과 상황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렇게 강한 배경과 압도적인 상황을 이기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배경과 상황의 한 가지 예로 한 사람만이 말하는 집회를 들 수 있다. 지금 이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 중에도 여전히 한사람이 말하는 집회를 선호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 전략상 중요한 문제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말하지 않는다면 주님께 무용하게 된다. 

메시지를 전하기 전에 나는 나의 말에 대하여 많이 기도한다.  나는 교회집회에서 단지 한 사람만 말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해 왔다. 모든 사람은 하나씩 신언해야한다(고전 14:31). 그러나 내가 모든 사람이 말하는 상호성의 교회 집회를 말한 이후로 8년이 지났지만 아직 이 실행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기독교는 유기적인 몸의 지체들의 기능을 무효화하였기 때문에 주님에게 큰 손실을 가져다주었다. 계시록 3장은 그리스도께서 교회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신다고 말한다.(20절). 

보러, 어쩌면 오늘날 그리스도는 문 밖에 계신다. 계시록 17장은 로마 천주교가 큰 음녀임을 계시한다(1-6절). 

결국 로마천주교는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심판으로 적그리스도에 의해 소멸될 것이다.(16-17),

주님의 권익을 위한 것이 과연 있는가를 생각해보라..중대한 요점, 열쇠는 우리의 말이다. 주님의 의도는 사람들을 구원하여 그들로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말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중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또 어떤 이들은 야심이 있기 때문에 항상 말할 기회만 엿본다. 이렇게 야심 있는 자들은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남용한다. 

그들은 많이 말할 필요가 없다. 최근 소위 은사 있는 자들이 신언 사역을 거절한 이유는 하나님의 정하신 방법대로 모이던 그들이 매주 집회 때 강단에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기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신언 사역 활성화의 의도가 모든 선지자들을 말살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대로 모이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여러분에게 더 많은 분량과 역량이 있다면 더 많이 말해야 한다. 그러나 말할 수 있는 기회를 탐내서는 안 된다. 

모든 교회 집회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야심 있는 사람은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또 합당하고 올바르게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많은 성도들은 말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여러분이 침묵하면 사탄이 주님을 이기게 된다.

시편 8편에서 주님은 그분의 반역자, 대적, 원수인 사탄에게 그분께서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찬송을 영구히 세우셨다며 자랑하셨다(2절). 

주님은 그분의 구속된 백성 가운데 가장 어린 자들, 가장 작은 자들, 가장 연약한 자들의 찬송을 완성하고 세우심으로 대적을 저지하셨다. 

그러나 오늘날 주님의 백성 대부분이 잠잠하다. 우리가 잠잠하면 주님은 사탄에 대한 그분의 승리를 전시하실 수 없다. 

우리는 함께 모일 대 왜 한 사람 한 사람씩 말하지 않는가? 두 시간 동안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말한다면 얼마나 놀랍겠는가? 

그러면 하늘에 앉아 계신 주님은 “사탄, 나를 위해 말하는 교회의 성도들을 보아라. 그들의 말이 나의 승리이다!”라고 말하실 것이다. 

우리는 신언해야 하는 우리의 의무를 완수해야한다. 우리는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은) 최선을 다하여 삼분 이내에 주님을 위해 무언가를 말해내도록 연습해야 한다. 

여러분에게 말할 것이 더 있다면 그 영께서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는 시간을 더 주실 것이다.

Ⅰ. 신언을 실행하는 유익

신언을 실행하면 많은 유익이 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말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여러분 또한 자신의 말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여러분은 침묵을 미워해야 한다. 

민수기 11장 29절에서 모세는 주님의 모든 백성이 신언자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4장 31절에서 바울은 우리 무두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신언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분명히 모세와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주님을 위하여 말하는 집회를 이 땅에서 보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 상황은 한 시간도 못되어 할 말이 바닥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면 장로들을 무엇을 말해 야할지를 생각해야 한다(17절). 

이백 명이 함께 모였는데 한 시간도 못되어 말할 것이 바닥났다면, 이것이 주님께 부끄러움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신언하기를 노력해야 한다.

A. 주님을 섬기는 일에 믿는 이들의 관심이 증가됨

신언을 실행하는 것은 주님을 섬기는 일에 믿는 이들의 관심을 증가 시킨다(고전 14:1). 

때때로 우리는 성도들에게 억지로 말을 해보라고 하지만 이러한 것은 자원하여 말하는 것만큼 믿는 이들의 관심을 분발시키지 못한다. 

여러분이 자원하여 말한다면 더 많이 말하도록 분발될 것이다. 여러분이 집회에서 말한다면 그 집회에서 여러분은 삼층천에 있을 것이다. 

여러분이 집회에서 말하지 않는다면 형제자매들이 그 집회에 대해 물어볼 때 그 집회는 형편없었다고 말할 것이다. 

여러분이 집회가 형편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집회에서 말한다면 그 집회는 삼층천에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더욱 여러분이 집회에서 다만 “아멘”이라고 세 번 말한다면 그 집회에서 여러분은 삼층천에 있게 된다. 

집회 처음에, 중간에, 마지막에 “아멘”이라고 세 번 말한다면 여러분은 분발될 것이다. 

그러나 집회에는 참석했지만 “아멘‘을 하지 않고 다만 앉아만 있다면 여러분은 집회가 형편없다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말하고 신언하는 실행이 주님을 섬기는 일에 믿는 이들의 관심을 증가시킨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여러분의 관심을 분발시키며 또한 다른 이들의 관심도 증가시킨다.

B. 믿는 이들의 신성한 생명의 역량이 발전됨

신언을 실행하는 것은 또한 신성한 생명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이 역량을 발전시킨다(계발한다). 한 소년이 출생하면서 많은 역량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침대에만 누워있게 하면 그의 역량은 계발될 수 없다. 우리가 신언을 실행하면 우리에게 있는 신성한 생명의 역량이 계발되고 발전된다.

신언을 배우는 첫 번째 단계는 준비하는 것이다. 매주 주일 아침에 모든 성도들은 함께 모여 신언을 실행해야 한다. 여러분은 무엇을 신언할지 고려해야 한다. 

나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매번 개요를 준비한다. 때때로 나는 일주일 전에 개요를 준비한다. 그리고 한가한 시간이 조금만 있으면 개요를 들고 읽는다. 

나는 이런 식으로 메시지를 준비한다. 또한 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메시지를 준비하기 위해 개요를 읽는다. 

그러면 밤중에 잠이 깬 후 다시 잠이 들지 않을 경우 계속 메시지를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기 위해 준비하는 동안 어떤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면 나는 그 단어의 용법이 적합한지 알아보려고 사전을 참조한다. 

아는 이러한 방식으로 말하기 위해 준비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신언하기 위해 수고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는 신성한 생명의 역량을 참되게 계발한다.

교파의 많은 믿는 이들이 기도하는 방법조차 모르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다. . 거듭난 성도들의 역량이 억눌려 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는 신성한 생명의 역량이 발전되거나 거의 계발되지 못한다.

C. 믿는 이들의 영적인 기능을 나타내어 주님의 경륜 안에 있는 교회의 봉사를 풍성하게 함

말하는 것은 믿는 이들의 영적인 기능을 나타내어 주님의 경륜 안에 있는 교회의 봉사를 풍성하게 한다(고전 12:7). 

믿는 이들이 말하지 않으면 교회의 봉사가 풍성하게 될 길이 없다. 성도들이 말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몸의 부유함은 나타나거나 사용될 수 없다. 

주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는 말함으로 믿는 이들의 영적인 기능을 나타내어ㅣ 주님의 경륜 안에 있는 교회의 봉사를 풍성하게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은 교회의 봉사에 매우 유용한 형제들과는 다르며 그들은 스스로 유용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드러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상 유용하든 유용하지 않든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는 것이 더 유익하다. 

어떤 사람이 다소 약한 모습으로 드러나면 온전케 할 수 있는 지체들이 그가 유용하게 되도록 그에게 더 많은 시간을 드릴 것이다.

전시간 훈련에서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일을 한다. 우리는 말하는데 약한 지체들을 변화시켜 강한 지체들이 되도록 수고하고 있다. 

훈련생들이 와서 말할 때마다 온갖 종류의 실수를 범하고 그들의 약함은 다 드러난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종류의 약을 처방해야 할 지를 알게 된다. 

결과적으로 모든 훈련생은 달라진 사람으로 각지 교회로 돌아가게 된다. 그들이 일어서서 말할 때 온 교회는 그들의 기능에서 유익을 얻게 된다.

D. 생명과 진리로 믿는 이들을 건축함(교화함)

신언을 실행하는 것은 생명과 진리 안에서 믿는 이들을 건축(교화)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종류의 말에는 어느 정도 생명과 진리가 있다. 

침묵은 누구에게도 생명과 진리를 사역할 수 없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님을 위하여 주님에 의해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무엇인가를 말하면 여러분이 말한 것에 생명과 진리에 속한 것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것이 성도들을 교화하는 것이다.

E. 믿는 이들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으로 건축함

신언하는 것은 믿는 이들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으로 건축한다(고전 14:4). 

건축형장을 보면 여러 종류의 건축 자재들이 주변에 널려 있다. 이 자재들은 건물과 유사한 것이지만 아직 건물로 건축되지 않았다. 

여러분이 교회집회에서 말하지 않는다면 아직 그리스도의 몸으로 건축된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합당하게 주님을 위하여 더 말한다면 몸으로 더 건축될 것이다.

F. 몸에서 떨어지지 않고 몸 안에서 살도록 믿는 이들을 지켜줌

말함으로 우리는 몸 안으로 건축된다. 또한 말함으로 우리는 몸에서 떨어지지 않고 몸 안에서 살도록 지켜질 수 있다(엡 4:16상). 

우리 중 많은 성도들이 몸에서 떨어져 있다.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몸에서 떨어지게 된다. 많은 이들이 말하지 않기 때문에 붙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말하기를 훈련해야한다.

G.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해 하나님의 정하신 길을 수행함

Ⅱ. 신언을 실행하지 않을 때 입는 손실

우리는 신언을 실행할 때 얻는 유익을 보았다. 이제 우리는 신언을 실행하지 않을 때 입는 손실을 볼 것이다.

A. 주님을 섬기는 일에 믿는 이들의 관심이 식어짐

신언을 실행하지 않으면 주님을 섬기는 일에 믿는 이들의 관심이 식어지게 된다. 나는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집회를 두려워한다. 이러한 집회는 청중을 내쫓는다. 조용한 집회에 온 사람들은 낙심하여 다음 집회에는 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침묵으로 인해 그들이 식어졌기 때문이다. 침묵을 차갑게 만들지만 말하는 것을 분발시킨다.

B. 믿는 이들의 신성한 생명의 역량이 상실됨

한 사람은 말하고 나머지 사람은 듣는 실행은 믿는 이들에게 있는 신성한 생명의 역량을 상실 시킨다. 모든 생명에는 역량이 있다. 모든 믿는 이들에게 신성한 생명이 있을지라도 그들이 말하지 않으면 그들의 역량은 발전될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의 상황이 가련한 것이다.

C. 믿는 이들의 영적인 기능이 매장되어 주님의 경륜 안에 있는 주님을 향한 교회의 봉사가 빈곤하게 됨

신언을 실행하지 않으면 믿는 이들의 영적인 기능이 매장되어 주님의 경륜 안에 있는 주님을 향한 교회의 봉사가 빈곤하게 된다.

D. 믿는 이들의 생명이 자라지 못하고 무지함으로 교화되지 못함

신언을 실행하지 않을 때 입는 또 하나의 손실은 믿는 이들의 생명이 자라지 못하고 무지함으로 교화되지 못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를 양육할 때 그들에게는 항상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발육이 부진하고 무지한 상태에 있게 된다. 말하기를 실행하지 않으면 성장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더 말할수록 그들은 더 배우며 부모의 교육을 더 받게 된다.

E. 믿는 이들로 건축되는 그리스도의 몸을 좌절시키고 심지어 허물어뜨림

그리스도의 몸은 믿는 이들로 건축된다. 모든 믿는 이들이 말하지 않는 것은 건축을 허물어뜨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말하지 않는 것은 믿는 이들로 건축되는 그리스도의 몸을 좌절시키고 허물어뜨리는 것이다.

F. 믿는 이들이 개인주의로 인해 흩어져 있음

신언을 실행하지 않으면 믿는 이들은 개인주의로 인해 흩어지게 된다. 나는 개인주의로 서로 떨어져 있는 형제들을 보면 그들에 대하여 깊이 염려하게 된다. 그들은 매주집회를 참석하지만 여전히 개인주의에 머물러 있다. 장로들은 그들이 얇은 유리컵같이 약하고 쉽게 깨지기 때문에 감히 그들에게 손대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누구도 손대지 못하는 개인주의에 남아 있게 된다. 여러분이 누구도 손대지 못하는 개인주의에 남아 있다면 몸으로부터 분리된 것이다. 이러한 질병에서 구출되는 유일한 길을 말하는 것이다.

C. 그리스도의 몸의 기능을 말살하고 그리스도의 몸 대신 계급제도를 세운 하락한 기독교의 역사를 되풀이 함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몸의 기능을 말살하고 그리스도의 모 대신 계급제도를 세운 하락한 기독교의 역사를 되풀이 하게 된다. 성도들이 침묵하면 야심있는 자들은 자신을 성직자 계급으로 만들어 계급을 형성할 것이다. 성직자는 단지 계급제도이다.

우리가 말한다면 여러 유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다면 손실이 많을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말하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말하기를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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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언의 실행-배우고 훈련하고 실행함

성경 딤전 2:4, 히 5:12, 벧후 3:18, 벧전 2:2-3, 엡 4:13-14

하나님은 여러 가지 목적을 위해 우리의 입을 창조하셨다. 우리는 호흡하고 마시고 먹기 위하여 입을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의 입의 근원적인 용도는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말에는 세 가지 범주가 있다. 첫 번째 범주는 신언하는 것이다. 두 번째 종류의 말은 합당하고 올바른 말이다. 세 번째 종류의 말은 악한 말이다. 여기에는 잡담, 비난, 시비, 다툼, 분냄 등이 포함된다. 

신언은 하늘에서 온 말이며, 합당한 말은 땅에 속한 말이며, 합당은 게헨나에서 온 말이다(마 5:22). 오늘날 사회의 대부분의 말은 땅에서가 아니라 게헨나에서 온 것이다.

Ⅰ. 배움

우리 가운데는 첫 번째 부류의 말, 즉 하늘에서 온 말이 있어야 한다. 신언하는 것은 이러한 종류의 말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말하는 것, 하나님을 말해내는 것, 그리스도를 사람들 안으로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풍성을 다른 사람의 존재 속으로 사역하기 때문에 가장 높은 종류의 말하기이다. 그러나 신언하기 위하여 우리는 배워야 한다. 모든 종류의 말을 배움에서 온다. 합당하게 말하는 것을 합당한 배움을 필요로 한다.

신언하는 것은 가장 높은 말하기이므로 가장 높은 배움이 필요하다. 가장 높은 언어를 배우지 않고는 가장 높은 말을 할 수 없다. 

한 면에서 나는 이 훈련 집회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신언하기를 격려하고 재촉하고 명령한다. 

그러나 다른 한 면에서 나는 신언하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성도를 동정한다. 

신언하는 것은 가장 높은 말하기이다. 한담하거나 화를 내는 것은 쉽다. 그러나 신언하는 것은 준비가 요구된다. 

사회에서도 좋은 연설가가 되려면 많이 배워야 한다. 어떤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이 교육 수준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이 30세이지만 중등 교육밖에 받지 못했다면, 그의 능력을 제한 될 것이다. 능력과 역량에는 차이가 있다. 역량은 타고난 것이지만 능력은 타고난 것에 배움과 훈련과 실행이 더해진 것이다.

A. 진리

나는 이 메시지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스물두 가지의 주요 진리들의 요점을 제시할 것이다.

1. 하나님의 인격에 관하여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하는 첫 번째 항목은 하나님의 인격에 관한 진리이다. 이 진리는 성경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a. 엘로힘, 복수의 하나님, 신실하시면 전능하신 분

b. 삼일 하나님 아버지, 아들, 성령

   1) 신성한 삼일성의 신격

   2) 본질적인 삼일성

   3) 경륜적인 삼일성

2. 하나님의 창조에 관하여

a. 사람이 중심임

b. 사람은 세부분-영과 혼과 몸-으로 창조되었음

c. 하나님을 생명으로 취하는 사람

d. 사람은 증가되어 배필을 얻게 됨

3. 사람의 타락

4. 하나님의 구속에 관하여

우리는 또한 예표(창 3:20-21, 4:4)와 예언 (12:3, 22:18)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에 관한 진리를 배워야 한다. 

창세기 12장과 2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안에서 그의 씨를 통하여 모든 나라가 축복을 받는 다고 예언하였다. 아브라함의 씨는 그리스도였다(갈 3:16). 

갈라디아서 3장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신 것은 그에게 구속에 관한 복음을 전파하신 것이었다(8절).

이제 나는 여러분이 신언하기 위해 시간을 들여 연구해야할 진리의 항목을 더 제시하고자 한다.

5. 그리스도에 관하여

6. 그리스도의 구속에 관하여

7. 성령의 거룩케 하심에 관하여

8. 하나님께서 죄들을 용서함에 관하여

9.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에 관하여

10. 믿는 이들이 하나님과 화목케 됨에 관하여

11, 성령이 믿는 이들을 거듭나게 함에 관하여

12.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에 관하여

13. 성령이 믿는 이들을 거룩케 하고 새롭게 하고 변화시키는 것에 관하여

성령의 거룩케 하심에 관한 진리에는 두 방면이 있다. 많은 교사들이 성령의 거룩케 하심에는 한 방면만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성령의 거룩케 하심의 첫 번째 단계는 사람이 회개하기 이전에 이루어진다(벧전 1:2). 사람을 거룩케 하고 분별시키는 성령의 움직임이 없으면 누구도 회개할 수 없다. 

우리가 회개하고 거듭난 이후에 성령은 계속 거룩케 하시는 일을 하신다(롬 6:19, 22). 이것이 거룩케 하심의 두 번째 단계이다. 

거룩케 하심의 두 번째 단계는 새롭게 하심과 변화의 단계로 계속된다. 새롭게 됨과 변화됨도 우리가 연구할 항목이다.

14. 믿는 이들의 같은 형상이 됨과 영화롭게 됨에 관하여

15. 그리스도의 몸, 새사람,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왕국인 교회에 관하여

16. 하나님의 경륜과 신성한 분배에 관하여

17. 믿는 이들의 휴거, 대환난, 주님의 다시 오심에 관하여

18. 그리스도의 심판대와 장차 올 왕국에서 믿는 이들의 보상과 징계에 관하여

19. 왕국, 천년왕국, 회복의 시대에 관하여

20. 왕국은 천년왕국이며 천년왕국은 회복의 시대이다.

21. 성경의 원칙에 관하여

성경의 원칙에 관하여 도움을 받으려면 시편 라이프 스터디의 메시지 6번을 읽을 것을 권한다.

22. 진리의 말씀을 곧게 자르는 방법에 관하여

우리는 또한 진리의 말씀을 곧게 자르는 방법에 관한 진리를 배워야 한다. 디모데 후서 2장 15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곧게 자르라고 말한다. 

말씀을 곧게 자르는 것은 목수가 나뭇조각을 자르는 것과 같다. 숙련된 목수는 나무를 설계도와 동일한 모양으로 자를 수 있다. 

우리가 말씀을 해석할 때 말씀을 왜곡하지 말고 말씀의 여러 방면을 정확하고 올바르게 열어주어야 한다.

B. 생명의 체험

신언을 실행하기 위하여 진리를 배워야 할 뿐 아니라 생명의 체험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신언은 많은 진리와 생명의 체험으로 풍성해져야 한다. 우리는 배워야 할 생명의 체험의 스물두 가지 항목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죄인들을 회개케 하는 성령의 거룩케 하심

생명의 체험의 처음 단계는 죄인들을 회개케 하는 성령의 거룩케 하심을 체험하는 것이다.

2. 회개하고 죄들을 자백함

성령의 거룩케 하심에 더하여 우리는 회개하고 죄들을 자백하는 체험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구원받아 거듭났을 지라도 한 번도 철저히 죄를 자백하지 않을 수 있다. (형제 중 하나가 특별한 인도하심 가운데서, "그리스도에 의해 승리하는 삶을 사는 공과를 배우도록" 우리를 격려하고 분발시켰다. 머지않은 어느 날 아침 나는 주님과 시간을 갖기 위하여 집회소에 갔었던 그 장소에서 나는 무릎을 꿇고 자백하기 시작했다. 10년 전에 구원받았고 그때에도 나의 죄를 자백했었으나 주님과 함께 따로 시간을 가진 그 날, 주님께 자백한 것은 훨씬 더 깊고 넓고 철저했었다. 그때의 자백은 내 안에 있는 더러운 모든  먼지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씻어 주었다. 이퍼럼,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죄를 자백하는 체험이 필요하다.

3.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죄들을 씻음

이렇게 철저한 자백을 한 후에 나는 철저히 용서받고 씻겨졌다. 이러한 체험을 가졌기 때문에 나의 신언에는 회개의 요소와 죄들을 자백한 요소가 있을 수 있다.

4.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하나님의 칭의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하나님의 칭의를 체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칭의와 구속의 의미와 차이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구속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그분이 흘리신 피를 통하여 성취된 것이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우리에게 적용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시어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신 것이다.

5. 칭의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됨

6. 그 영의 거듭나게 하심

우리는 사람들에게 거듭남의 교리를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거듭남의 체험을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한다.

7.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

신언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체험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부분적인 구원이 아니라 완전한 구원이다.

8. 구원의 확신과 과거를 청산함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모른다. 그들은 구원의 확신을 체험하지 못했다. 구원의 확신에 근거하여 우리는 과거를 청산하는 체험을 해야 한다.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 이것에 대해 분명한 확신이 있다면 반드시 과거를 청산해야 한다.

9. 위치적인 거룩케 됨과 성령에 의한 기질적인 거룩케 됨

우리는 또한 위치적인 거룩케 됨과 그 영에 의한 기질적인 거룩케 됨을 체험해야 한다. 우리의 위치가 거룩케 되는 것은 객관적인 것이며 기질이 거룩케 되는 것은 주관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체험해야 한다. 그때 우리의 신언은 풍성해질 것이다.

10. 그 영에 의해 새롭게 됨과 변화됨과 같은 형상이 됨

우리는 그 영에 의해 새롭게 됨과 변화됨과 같은 형상이 됨을 체험해야 한다. 그 영은 우리를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게 만들 것이다(롬 8:29).

11. 죄, 세상, 육체, 자아, 타고난 생명, 타고난 힘을 처리함

12. 소극적인 것을 죽이는 그리스도의 주관적인 죽음과 생명을 분배하는 그리스도의 부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체험하고 또한 생명을 분배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해야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소극적인 것을 죽이기 위한 것이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생명을 분배하기 위한 것이다.

13.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주님과 교통하며 그 영의 인도를 받음

14. 본질적인 영의 내적인 충만과 경륜적인 영의 흘러넘침

15. 그 영에 의해, 그 영을 따라 살고 행동함

16. 기도와 중보

17.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이해하며 성경에서 빛 비춤 받음

18. 하나님께 복종하고 순종하며 겉 사람이 부서짐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한 적은 있을지 모르나 순종한 적은 없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하고 순종하며 겉 사람이 부서진 체험이 있어야 한다.

19. 그리스도의 몸을 알고 체험함

이것은 우리가 체험해야 할 매우 중요한 공과이다.

20. 한 지방에서의 교회생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압교회 생활이 없다. 우리는 한 지방에서 교회 생활을 체험해야 한다.

21. 하나님께서 정하신 네 단계의 길을 실행함

하나님께서 정하신 네 단계의 길을 실행하는 것이 우리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 첫 번째 단계는 신약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죄인들을 구원하여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게 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가정 집회에서 새로운 믿는 이들을 소중히 품고 먹이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그룹집회를 통하여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소그룹 집회가 아니라 그룹 집회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작다라는 표현은 여기에서 필요하지 않다. 사실상 그룹 집회는 작아서는 안 된다. 가정 집회는 한 면의 새로운 믿는 이를 독ㄹ보기 위해 두세 사람 정도만 모일 수 있다. 그러나 그룹 집회는 한 무리의 믿는 이들을 돌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는 교회의 건축을 위해 교회 집회에서 신언하여 그리스도의 몸의 유기적인 건축을 완결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력하여 지방 교회를 건축해야 한다. 결국 이 건축은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으로 완결될 것이다.

22. 대환난 전에 휴거 되도록 깨어서 준비하며 샛별 같은 주님의 비밀스런 나타나심을 기다리며 예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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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언의 실행(-배우고 훈련하고 실행함

성경 눅 1:47, 시 16:9, 108:1, 행 2:26, 고전 14:7-11, 행 6:10, 7:55, 4:31

이 메시지에서 우리는 신언에 관한 실행을 계속 교통할 것이다. 신언하는 것은 주님을 위해 말하고 그분을 말해내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말해야 한다. 그러나 말하는 것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한 면에서 대부분의 성도들은 너무 조용하고 다른 면에서 일부 성도들은 너무 풀어져 있다. 너무 풀어져 있는 성도들은 자신의 말을 제한하기를 훈련해야 한다. 

이렇게 훈련하면 여러분은 더 이상 지나치게 말함으로 교회에게 어려움을 주지 않을 것이다. 

다른 면에서 조용한 사람들은 그들의 침묵이 교회 집회를 죽일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말을 해야 한다.

신약의 원칙에 따르면 성령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그분을 위해 말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신다(고전 14:1, 31). 

그러나 사탄은 항상 주님을 좌절시키려고 그분의 움직이심을 따라다닌다. 

하나님은 모든 백성이 말하기를 원하시지만 기독교는 말하는 계급인 성직자와 말하지 않는 계급인 평신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오늘날 주의 회복은 성직자-평신도 조직을 뒤엎어야 한다.

과거 몇 년 동안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해 모든 성도들이 신언하는 실행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어떤 사람에게 집회에서 왜 말하지 않느냐고 물어 보면 그들은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고 말할 것도 없고 또 말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저는 교회 생활에서 단정한 지체가 되고 싶지 느슨하게 말하는 지체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할지 모른다. 이것이 많은 성도들을 집회에서 말하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다.

일반적으로 나는 많은 성도들이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싶다. 그러나 긴 안목에서 보면 어떤 성도들이 계속 담대하게 말하는 것은 다른 성도들의 흥미를 죽일 수 있다. 

여러 성도들이 어떤 성도들의 담대한 말에서 그리스도의 풍성을 듣거나 합당한 빛 비춤을 받지 못하면 그러한 사람의 말에 흥미를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방식의 말 때문에 다른 성도들은 말하는 것에 흥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것이 집회에서 모든 성도들이 말하는 것을 좌절시키는 또 하나의 요소이다. 

우리 가운데 소수의 성도들은 그들의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전혀 관심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그들에게 중단하라고 요청해도 그들은 여전히 계속 말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단지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즐기게 된다. 그들에게는 집회에서 말하는 것이 그들의 장난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도들이 집회에서 과도하게 말하는 것은 좋은 형상이 아니다.

Ⅱ. 훈련함

이전 메시지에서 우리는 신언하기 위하여 진리와 생명의 체험을 배워야한다고 말하였다. 진리와 생명의 체험을 배우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말할 것이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수고해야한다. 로마서 12장과 고린도전서 12, 14장에 따르면 기능을 발휘하는 주님의 몸의 지체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우리 모두는 말해야 하고, 말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 

더욱이 우리가 진리와 생명의 체험을 배웠을지라도 우리가 신언하는 데 다른 문제들이 여전히 있을 수 있다. 

우리가 말할 때 우리의 영과 입과 목소리와 말의 속도와 몸짓과 억양이 문제가 될 수 있다.

A. 영을 훈련함

여러분의 영을 훈련할 때(눅 1:47, 시 16:9) 반드시 여러분의 입과 목소리를 동시에 훈련해야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면서 영을 훈련할 때 큰 소리로 외쳐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단지 외치는 것이 영을 해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여러분은 말할 때 반드시 가장 깊은 존재를 훈련하기를 배워야 한다. 화를 내는 것이 영을 해방하는 좋은 예이다. 

어떤 생각이나 두려움이나 고려함 없이 화를 낼 때 여러분은 자동적으로 영을 해방하게 된다.

B. 입(혀)과 목소리(소리)를 훈련함

여러분은 신언할 때 입(혀)과 목소리(소리)를 훈련해야 한다(시 108:1, 행 2:26, 고전 14:7-11). 

여러분은 집회에서 말을 할 때 전체 회중에게 말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은 자신에게나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입과 목소리를 훈련해야 한다. 메시지를 전한 후 간증 시간에 나는 성도들에게 크게 말하라고 자주 강조한다. 

나는 이 문제를 거듭 강조했지만, 수년 동안 성도들이 개선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

우리는 집회에 올 때 말하기 위해 집회에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도 일종의 말하기이다. 심지어 “아멘”하는 것도 일종의 말하기이다. 

집회소 입구를 지날 때마다 우리는 영을 훈련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집회에 올 때마다 우리의 영을 훈련하고 우리의 입을 훈련하는 것이 우리의 직무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함께 모일 때마다 반드시 영을 훈련해야 한다. 

집회소 입구에 들어설 때 뿐 아니라 집에서부터 시작하여 집회에 가는 도중에도 우리의 영을 사용하고 주님께 말하고 찬미하고 기도하고 찬송해야 한다.

시편에서는 “오, 여호와여”라는 어구에서처럼 “오”라는 감탄사가 자주 사용된다(3:3, 7, 5:1, 3, 8). “오, 여호와”와 “여호와”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여러분이 “오”라고 말할 때 여러분의 영은 즉시 일어선다.

여러분은 집회에 가는 도중에 차를 운전하면서 훈련하는 방식으로 “오, 주여! 아멘! 할렐루야!”라고 말하면 여러분의 영을 분발될 것이다.

우리는 말할 때 영의 훈련에 부합되도록 우리의 입도 훈련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배우고 실행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집회에 올 때 우리의 일과 의무는 말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목사를 고용하여 전체 회중을 위해 말하고 기도하게 하는 기독교 안에 있지 않다. 

심지어 어떤 교파에는 모든 사람을 위해 노래하는 일을 담당하는 소위 음악 사역자가 있다. 이러한 종류의 실행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은 모든 믿는 이가 집회에서 말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집회에서 말하기를 훈련한다면 그 집회는 삼층천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영을 사용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면 그 집회는 죽게 되고 모든 사람도 죽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집회에서 말하지 않는 것은 사실상 집회를 죽이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집회는 과도하게 말하는 사람에게 넘어 간다. 그러면 집회는 죽을 뿐 아니라 무질서하게 된다. 결국 집회 전체는 폐지되어 없어질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영과 입고 목소리를 훈련해야 한다. 우리는 말할 때 목소리를 합당한 방식으로 사용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목소리를 합당하게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말을 할 때 분명한 방향과 명확한 요점 없이 머뭇거리게 된다. 또한 말을 할 때 많은 요점들이 분명치 않게 된다. 

우리가 합당한 목소리와 어조를 말하기를 훈련하면 집회는 차갑게 되지 않고 오히려 분발될 것이다.

교회 집회에서 말하는 것은 가장 높은 수준을 요구한다. 집회에서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영과 입과 목소리와 말의 속도와 몸짓과 억양을 합당하게 사용해야 한다. 

이에 비하면 야구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작은 일을 위해서도 선수들은 매일 수 시간을 훈련하고 연습해야 한다. 

하물며 집회에서 말하기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더 훈련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은 최고의 사업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집회에는 높은 실행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주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교회생활을 멸시한다. 

우리는 함께 모이거나 사람들을 방문하여 만날 때 왕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왕-구주이신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고 명하셨다. 

우리가 사람들을 접촉할 때 우리의 말하는 방식조차도 아버지의 하늘에 속한 부르심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사람들 접촉할 때 결과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가름한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에 따라 교회생활을 실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말하기를 배워야 한다.

어떤 사람은 신약 성경이 우리에게 어떻게 말하는지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에베소서 5장 19절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말하며)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타고난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타고난 방식으로 말하는 것은 영적인 목적을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훈련된 방식으로 말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교회를 건축하도록 주님을 위하여 말하는 것을 멈추지 말고 계속 배워야 한다. 

나는 메시지를 전한 후에 여러 번 나의 말이 합당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에 대해 많이 애통해 했다. 

((1933년 우리가 치푸에서 주의 상 집회를 가진 후 이 년째 되던 해에 니 형제님이 우리를 방문하셨다. 교파에 있던 어떤 사람들이 니 형제님의 방문 소식을 듣고 자신들의 집회에서 말씀을 전해 달라고 형제님을 초청했다. 니 형제님은 그 집회에 가서 말씀을 전했다. 나는 니 형제님이 메시지를 잘 전했다고 느꼈지만 집회 후 그가 나의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모습이 그렇게 밝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말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말했다. ))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주님을 위하여 집회에서 말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공적으로 주님을 위해 말할 수 있다면 교회는 부흥될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방식은 매우 중요하다. 찬송에서 리듬은 가사보다 더 중요하다. 이것은 말에서도 동일하다. 

어떤 형제는 좋은 목소리를 가졌지만 그의 말에 리듬이 부족할 수 있다. 합당한 리듬이 없다면 말은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목소리를 사용해서 말을 할 때 몇 개의 “셀라”즉 쉼표가 필요한 것이다.

이 메시지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가장 효과적으로 말하기 위해 교육과 배움과 훈련이 필요함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이 메시지의 모든 요점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의 집회는 대단히 풍성해질 것이다. 

우리가 타고난 방식으로 말한다면 집회는 좌절되고 차가워지고 죽게 되고 폐해질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 메시지에서 지적한 결점들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 지를 배워야 한다. 

또한 우리는 교회를 건축하도로 주님을 위해 말하기 위해 우리의 전 존재를 훈련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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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언의 실행-배우고 훈련하고 실행함

성경 눅 1:47, 시 16:9, 행 2:26, 고전 14:7-11, 행 6:10, 7:55, 4:31

지난 육년 동안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에 관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이 길은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길을 합당하게 실행하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에 관한 가르침을 감상하고 높게 평가하지만,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실행을 합당하게 지도하는 것이다. 

모든 운동 경기에서 코치는 선수들에게 강의를 해야 하지만 강의 후에는 선수들과 함께 운동장에 가서 그들 지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을 실행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합당한 지도이다. 

여러분을 지도하기 위해 나 자신이 먼저 지도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나 또한 실행해야 한다.

코치는 선수들을 지도해야한다. 그러나 선수들이 경기를 하면 코치보다 훨씬 잘 할 수 있다. 

나는 여러분이 내가 지도하는 것을 실행할 때 나보다 훨씬 잘 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대부분의 코치는 유명한 운동선수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그들이 지도를 받아서 유명한 운동선수가 되었다. 

코치는 선수들을 가르칠 수 있으나 선수들만큼 운동을 잘할 수는 없다. 나는 누군가가 나의 가르침과 지도를 받고 그것을 실행하여 최고의 선수가 되기를 기대한다.

Ⅱ.훈련함

이전 메시지에서 우리는 신언을 실행할 때 우리의 영과 입(혀)과 목소리(소리)를 훈련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여러분은 그 메시지에서 받은 지침들을 훈련해야한다. 여러분은 모든 집회에서 영과 입과 목소리를 훈련할 필요가 있다.

신약 성경, 특히 바울 서신은 실행의 필요성을 언급한다. 디모데전서 4장 7, 8절에서 바울은 훈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8절에서 바울은 육체의 훈련을 말한다. 의심할 바 없이 바울 시대에는 올림픽 경기가 널리 유행했기 때문에, 여기서 훈련은 올림픽 경기에 참여하는 운동선수의 훈련을 언급하는 것이다. 누구도 훈련받지 않으면 올림픽 선수가 될 수 없다. 

여러분은 우리는 평범한 사람이고 죄인이며 하나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받으셨기 때문에 다만 현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우리는 변해야 한다. 단지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방식이 아니라 성경에 일치하도록 모든 것에서 변해야 한다.

우리는 마치 경기를 준비하는 운동선수처럼 모든 집회에 가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집회에 갈 때 성경을 가져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또 대부분 집회에 일찍 오지 않는다. 

집회 시작 시간이 7시 30분으로 정해지면 집회 시작 30분 전인 7시에 집회에 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집회에 일찍 와서 스스로 훈련하여 주님께 기도하고 찬미하고 찬양한다면 집회는 불타게 될 것이다. 

집회 시작 시간이 되어 열 성도가 집회에 올 때 집회 분위기는 이미 삼층천에 올라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영은 올려지고 , 사람들의 내적 존재는 분발되며, 집회 장소는 사람들을 불태우는 “용광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집회에 온 모든 사람들은 심지어 가장 차가운 사람도 활기를 찾을 것이다. 이것이 합당한 길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j에서 가장 중요하고 주된 일은 모이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모이는지를 모른다면 합당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이는 방식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고린도 전서 14장 전체는 모이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이 장에 따르면 합당한 집회를 갖기 위하여 우리는 배워야 한다(1, 12, 31, 39). 

우리의 집회는 식탁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부터 집회에 갈 준비를 해야겠다. 교통 체증이 심할 수도 있으니까 식사를 빨리 해야지. 그러면 집회 시간보다 더 일찍 집회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우리의 영을 예비하고 집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필요해“라고 생각해야 한다. 

만일 우리 모두가 이렇게 실행한다면 집회는 살아있고 높여질 것이며, 사람들은 우리가 모이는 방식에 의해 책망 받고, 굴복되고 사로잡힐 것이다. 

우리가 합당한 방식으로 모여야만 많은 적극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우리는 집회에서 연기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연기자의 삼과 연기는 서로 다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집회는 우리가 사는 방식과 동일해야 한다. 

우리가 집회에서 처신하는 방식은 집에서 처신하는 방식과 동일해야 한다. 이것은 그룹 집회, 가정 집회, 새 신자 양육, 복음 전파에 모두 적용된다. 

우리가 활동하고 일하고 움직이고 사는 모든 방식은 동일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바뀌어야 한다. 이렇게 바뀌는 것은 변화의 한 부분이다. 

우리의 활동하는 방식, 움직이는 방식, 일하는 방식, 말하는 방식, 처신하는 방식, 모이는 방식이 모두 변화될 필요가 있다.

B. 입(혀)과 목소리(소리)를 훈련함

여기에서 나는 목소리를 훈련하는 것에 관하여 더 말하고 싶다. 여러분은 말을 약하게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처음부터 강하게 말해야 한다. 

우리가 약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하면 처음부터 빈곤하게 된다. 

우리는 말하기 시작할 때 목소리를 사용하기를 배워야 한다. 말하기 시작할 때 목소리는 커야 하며 말의 속도는 다소 느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지 외치기만 할 것이다. 

우리의 말의 시작은 매우 달콤하고 유쾌해야 한다.

어떤 성도들은 “아멘”이라고 말하면서 말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 그것은 무익한 말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의 귀에 거슬릴 수 있다. 

합당한 방식으로 말을 시작하는 것을 시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영을 훈련하고 우리의 혀와 입을 준비한 후에야 무엇인가를 말할 때가 온 것이다.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을 발언이라고 한다. 우리는 발언할 때 좋은 목소리로 시작할 필요가 있다.

메시지를 전할 대 가장 어려운 일은 주제를 찾는 것이 아니라 말을 시작하는 가장 적합한 방식을 찾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이 처음에 말을 잘못 시작하면 전체 메시지에서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 이것은 차를 운전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운전을 시작할 대 고속도로에 올바로 들어서도록 주의해야 한다. 고속도로에 잘못 들어서면 되돌아오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곤혹스럽게 된다. 

말하는 사람이 좋은 출발을 가지면 전체 메시지에서승리를 거둘 것이다.

심지어 기도에서도 첫 문장이 매우 중요하다. 19091년 버지니아 레스톤에서 있었던 추수감사절 집회에서 네 번째 집회가 시작되기 전에 나는 기도할 부담이 있었다. 

나는 어떻게 기도를 시작하며 계속할 지에 대해 주님과 대화 하였다. 메시지를 전하기 전에 나는 매우 살아 있고 유력한 기도를 하였다. 

나는 “주여, 이 아침에 우리는 당신께 간구합니다. 우리에게 보이는 환경에서 보이지 않는 장면으로 옮겨 주는 황홀경을 허락하소서”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하였다. 

기도를 마친 후에 나는 그리스도의 몸의 내재적인 조망을 보기 위하여 우린 신성한 황홀경 안에 있을 필요가 있다는 말로 메시지를 시작하였다(그리스도의 몸의 내재적인 조망, 제 4장 참조). 황홀경 안에서 우리는 일반적인 방식이 아닌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질적인 우주에 있지 않고, 보이는 장면 뒤에 보이지 않는 장면에 있는 것을 본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말과 기도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를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치푸, 상해, 대만 그리고 이곳 아나하임에서도 많은 대 기도 집회의 분위기가 높지 않았다. 그때 나는 단지 짧은 기도를 하였고 즉시 집회는 높이 올려졌다. 

때로는 기도 집회가 죽어 있을 때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집회를 죽은 상태에서 부활 안으로 이끄는 방식으로 기도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강한 목소리와 합당한 생각으로 말과 기도를 시작해야 한다. 주의 상 집회에서 어떤 성도들은 여섯 번 내지 일곱 번 주님을 찬미할 수 있다. 

주의 상 집회에서 여섯 내지 일곱 번 주님을 찬미하는 것은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지만, 그러한 찬미는 전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훈련하는 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우리가 주의 상 집회에서 여러 번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를 시작하며 어떻게 계속 기도할지를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는 매번 집회에 짐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횟수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방법과 기술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구원은 간단하지 않다. 

나는 어렸을 때 하나님과 관련된 것은 모두 단순한 줄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과 더 오랜 시간을 보낸 지금 나는 하나님께서 간단한 분이 아님을 깨달게 되었다. 

옛 창조에서 하나님은 어떤 것도 행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단지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자, 빛이 있게 되었다(창 1:3). 그분은 말씀하셨고,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졌다(시 33:9).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구원에서는 그 간단한 길을 포기하셨다.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하여 우리는 옛 창조에서의 하나님의 방식이 매우 단순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호할지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온 세상이 구원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디모데전서 2장 3, 4절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한다. 

때때로 나는 생각한다. “하나님, 이것이 당신의 갈망이기 때문에 당신이 다만 그렇게 되라고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당신이 ‘모든 사람이 진리의 충만한 지식에 이르라’고 말씀하시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구원시키거나 진리를 가르치려고 훈련이나 집회를 세우기 위해 수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새 창조 안에서 모든 것들은 간단하지 않다.

새 창조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첫 번째 단계는 성육신이다.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자유로우시며 어떤 제한도 받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분은 의도적으로 인성 안으로 들어오셔서 인성의 껍질 안에 자신을 감추셨다. 그분은 아홉 달 동안 여자의 태속에 머무셨다. 태어난 후에는 한 사람으로서 30년을 사시면서 외관상으로 주목받을 만한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삼 년 반 동안의 사역 후에 십자가에 가셔서 만유를 포함한 단순하지 않는 죽음을 죽으셨다. 그분은 죽음 안으로 들어가셨고 그곳에 머무셨다.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나오셔서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분의 부활 안에서 마지막 아담, 즉 육신 안의 한 사람이신 그분은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고전 15:45하). 그분은 이러한 과정의 ‘터널’에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는지!

이뿐 아니라 하나님께는 수백, 수천만의 천사들이 있다. 게다가 모든 천사들은 능력이 대단하다. 왜 하나님은 천사들을 지구 곳곳에 보내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지 않으시는가? 천사들에게는 교통수단이 필요 없다. 그들은 자동차나 열차가 필요 없고 언어도 배울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쉬운 길을 택하지 않으신다. 복음 전파를 위하여 하나님은 천사들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느리게 행동하고 잘 배우지도 못한 우둔한 사람을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함께 모일 때마다 한 팀으로 운동 경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모인 성도의 수가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참석한 모든 사람은 팀의 구성원이다. 

우리 중 누구도 자신을 감추는 관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집회에 갈 때마다 변화된 사람으로서 활동하고 행동하고 움직여야 한다. 

어떤 성도들은 매우 영리하게 태어났다. 이렇게 영리한 사람은 집회에서 자신을 감추기를 좋아한다. 다른 성도들은 좀 어눌하게 태어났다. 결국 집회에서 활동하고 외치는 사람은 어눌한 자들이다.  실제로 어눌한 자들은 자신의 활동을 제한하기를 배워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어눌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위해 이렇게 하였다.

나는 70년 이상 영어를 사용해 왔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영어는 형편없다. 나는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오셔서 그분의 말씀을 말하는 위임을 주셨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자주 “주님 당신은 나의 영어가 형편없다는 것을 아십니다”라고 그분께 기도한다. 결국 나는 이것이 주님께 속한 것임을 깨달았다. 만일 내가 영어를 능숙하게 말했다면 나의 사역을 달라졌을 것이다. 나의 사역의‘특색’과 무게가 달라졌을 것이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말이 어눌한 자를 택하였다.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우리의 말재주에 달려 있지 않다. 말을 잘하는 것과 진리를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다. 

여러분은 설득력 있고 날카롭고 탁월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말한 후에 진리를 해방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매우 어눌한 자도 메시지를 전할 때 진리를 매우 잘 제시할 수 있다. 나의 메시지를 듣고 나서 한 젊은 형제가 일어서서 “그렇습니다. 이 형제님은 달변가는 아니지만 그분의 말씀을 들은 후에는 항상 어떤 진리에 대한 분명한 조망을 갖게 됩니다.”라고 말하였다. 

비록 우리가 태어나면서 어눌한 자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실 것이다. 우리가 어눌한 자임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그렇게 많이 또 쉽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배우기를 갈망하고 노력해야 한다.

또한 태어나면서 총명한 자들은 그들의 총명을 죽음에 넣는 것을 배워야 한다. 복합적인 영은 주님의 죽음을 우리에게 적용하신다. 

총명한 모든 자들에게는 주님의 죽음을 그들의 총명함에 적용하는 복합적인 영이 필요하다. 

어떤 총명한 자들은 집회에서 자신을 감춘다. 그들은 자신이 “스타”가 될 것이라고 확신할 때까지 행동하거나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총명한자도 사용하시며 또한 우둔한 자도 사용하신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종결된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는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고 십자가에서 끝나야 한다. 

총명한 자와 우둔한 자 모두 처리 받는 것일 필요하다. 총명한 자들이 그들의 총명이 십자가에서 끝나도록 허락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집회에서 배우같이 연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단순하고 정상적인 방식으로 살고 활동하고 움직이고 일할 것이다.

집회에 갈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연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변화된 사람으로서 움직여야한다. 

배우는 연기할 때 평상시의 자신의 모습과 다르게 옷을 입고 행동한다. 젊은 배우가 늙은 사람의 배역을 밭으면 늙은 사람같이 보이고 움직이고 행동하고 말하기 위해 자신의 외모를 바꾸어야 한다. 이것이 연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짓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단순히 우리의 어떠함 그대로 있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 안에서의 어떠함 안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변화된 우리의 어떠함 안에 머물러야 한다. 

이전에 우리는 항상 자신을 감추는 총명한 사람이었을지 모르나 주님은 우리를 변화시켰기 때문에 지금은 몸 안에서 변화된 지체로서 활동하고 움직이고 행하고 일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집회에 올 때 활동적이어야 한다. 이것은 단지 우리의 의무이자 책임일 뿐 아니라 본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훈련받는 것이 필요하다.

내성적인 사람들은 신언할 때 그들의 소심함에서 나와야 한다. 그런 담대하게 말하는 것이 일종의 연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항상 담대하게 행동해야 한다.

어떤 성도들은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라는 말로 신언을 시작하기를 좋아한다. 이것은 회복 안에 구호가 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피해야 한며 특별히 우리의 말을 시작하는데 있어서 더욱 그래야 한다. 말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주어로서 적절한 명사와 술어로서 합당한 동사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말이 더욱 의미 있게 된다.

다음의 말은 신언을 합당하게 시작하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모든 것에서 변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전에 우리는 집회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변화되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집회 하는 방식에서 더 많이 변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좋은 시작이다. 이렇게 합당하게 시작하면, 남은 말에서 많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나올 것이다.

때로는 우리의 생각 속에 말하려고 하는 합당한 문장이나 요점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생각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작문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말에서 시작하는 말은 뒤따라 나오는 전체 말을 통제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개요를 사용하여 말을 한다면 말하려고 일어설 때 개요를 보기 위해 고개를 숙이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 우리의 말을 죽이게 된다. 

1974년 이전에 나는 말을 할 때 개요를 사용하지 않았다. 나는 라이프 스터디 훈련 집회를 인도할 때부터 개요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매 훈련마다 개요를 작성했다. 

어스틴 스팍스는 항상 노트에 적은 요점에 따라 말하였다. 나는 그가 대만에 방문하는 동안 그를 우해 통역을 해 주었는데, 그때 그가 노트에 적은 요점에 따라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노련하게 노트를 사용했기 때문에 멀리 앉아있던 사람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개요를 가지고 말할 때, 말하기 전에 고개를 숙여서 개요를 쳐다보는 것을 피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천연적인 방식을 가지고 있고 또 자신의 천연적인 방식으로 활동할 뿐 아니라 자신의 천연적인 방식을 신뢰한다. 

우리는 어떻게 모이는 지를 배울 때 끊임없이 자신의 천연적인 방식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을 배워야 한다. 

천연적인 방식으로 모이는 것은 쉽다. 이렇게 하는 데는 배움이나 처리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으로 모이려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천연적인 방식이 처리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천연적인 방식을 내려놓고 천연적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을 십자가에 못 박을 필요가 있다. 그러면 우리는 변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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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언의 실행---배우고 훈련하고 실행함

성경 눅 1:47, 시 16:9, 108:1, 행 2:26, 고전 14:7-11, 행, 6:10, 7:55, 4:31

기도 : 주님, 우리의 모든 것이신 당신을 경배하며 이 시간 우리 모두가 함께 모여 당신의 말씀 안에서 당신을 추구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온 세상이 세상적인 일로 바쁘지만, 우리는 당신께 분별되었습니다. 이 어떠한 특권이며 축복이며 누림인지! 우리는 주님의 축복을 신뢰합니다. 주여 우리를 축복하소서. 주님의 축복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임재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우리에게 추구하는 마음을 주소서. 주여, 총명한 생각과 열린 영을, 당신 자신과 당신의 길과 경륜과 말씀하심에 열린 영을 주옵소서. 말을 할 때 우리를 도와주소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의 임재가 없으면, 당신의 기름 바름이 없으면, 우리는 죽은 사람입니다. 그르나 우리 안에 기름 바름이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이것을 신뢰합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말씀, 최신의 말씀을 주시고 우리의 말이 주님의 유익과 주님 자신과 주님의 풍성과 주님의 비밀과 주님의 경륜과 주님의 분배로 충만하게 하소서. 주여, 우리와 함께 하소서, 대적을 부끄럽게 하소서. 아멘.

하나님의 경륜은 먼저 성육신의 원칙으로 어떤 것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은 하나님이셨고 사람은 사람이었다. 

비록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영으로서 사람을 방문하기 위해 오시고 사람위에 임하셨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홀로 계셨고, 사람 역시 홀로 있었다. 

그러나 성육신을 통하여 하나님은 신성을 인성 안으로 가져오셨다. 

우리 모두는 신성을 인성 안으로 가져옴이라는 말을 배워야 하고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우주 안에서 비범한 “과업”, 곧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 성취되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가! 우주의 역사는 아홉 개의 주요 항목들로 구성된다. 

첫 번째 네 항목은 삼일 하나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 사람, 하나님과 사람을 연합시킨 성육신이다. 

성육신의 결과는 두 본성을 지니신 놀라운 분, 하나님-사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나는 이 하나님-사람이 온 우주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은 십자가에 가셔서 만유를 포함한 놀라운 죽음을 성취하여서 모든 옛것들을 종결하고 새 창조를 발아시켰다. 

하나님-사람이신 예수그리스도와 그분의 만유를 포함한 죽음이 우주 역사의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항목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 후에 부활을 성취하셨다. 요한복음 11장 25절에서 그분은 “나는 부활이요”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는 죽음 이전에도 이미 부활이셨다. 

그러나 그 부활은 과정을 거쳐서 완결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죽음 후에 교회를 산출하는 완결된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이 교회는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교회, 새 예루살렘은 우주 역사의 마지막 주요 세 항목이다. 

우리는 이 역사를 배우고 최선을 다하여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해 주어야 한다.

먼저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사람과 하나 되게 하는 놀라운 일을 하셨다. 그 이후로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에 관하여 사람을 떠나서는 어떤 것도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결코 혼자서는 어떤 것도 하지 않으신다. 심지어 사람이 없다면 “하나님은 절름발이며 걸을 수도 없고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성육신의 원칙 안에서 행하신다. 구약은 여호와의 영이 신언자들 위에 임하셨다고 말하며(삼상 10:6, 19:20, 대하 20:14-15, 겔 11:5). 

여호와의 말씀의 부담이 그들 위에 임하였다고 말한다(슥12:1). 

오늘날 오순절주의자들은 신언을 실행할 때 구약의 본을 따른다. 그들이 집회에서 누군가가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말하는 것을 쉽게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도 바울도 결코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7장 12절은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고 말하며, 40절에는 “내 뜻에는 …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 말한다. 

비록 바울은 그의 의견을 말하였지만 우리는 바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우리는 기독교 전체가 한 가지 기본적인 원칙에서 잘못되어 왔고 여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은 신약 경륜이 성육신에 근거한 경륜임을 깨닫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분의 신약 경륜 안에서 사람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시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만유를 포함한 죽음과 우리를 위해 대속하는 죽음을 죽으신 하나님-사람에 의해 성취된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은 단지 사람만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으며, 단지 하나님 만일 아니라 사람이셨다. 이것이 성육신이며, 이 분이 성육신 되신 분이다.

오늘날 성육신되신 하나님-사람은 그분의 완결된 부활 안에 계신다. 

50년 전에 한 동역자는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에 여전히 인성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분명하게 나에게 말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인성을 무덤에 남겨두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세마포를 무덤에 남겨 두셨지만(요 19:40, 눅 24:12) 그분의 인성은 무덤에 남겨두지 않으셨다. 그분은 부활의 날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제자들이 손가락을 만질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오셨다(요 20:27). 

더욱이 스데반이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그는 한 사람, 심지어 인자이신 그리스도를 보았다(행 7:56). 

계시록 1장 12, 13절에서 요한은 부활하고 승천하신 인자께서 금 등대 사이를 거닐고 계심을 보았다. 

주님은 심문을 받으실 때 대제사장들에게 인자가 전능자의 우편에 낮을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그들이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6:64). 

그리스도는 이 땅에 다시 오신 이후에도 영원토록 그분의 인성을 지니고 계실 것이다.

Ⅱ. 훈련함

신언하는 것은 성육신의 문제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발람의 당나귀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은 기적적인 일로 만들어버렸다(민 22:28-30).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디모데전서 4장 13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명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러한 것을 실행하기 위해 자신을 훈련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말은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라는 원칙이 아니라 성육신의 원칙으로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열네 서신에서 하나님의 영이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 위에 임하였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바울은 “내가 엄히 명하노니 … ”(딤전 5;21, 딤후 4:1) 또는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이라고 말한다(딤전 1:3). 

이같이 신언하거나 하나님을 위하여 말하는 것이 성육신의 원칙을 따르는 것은 바울 서신에서 분명히 보여진다. 

바울의 서신이 없었다면 신약에서 이 문제에 관한 분명한 조망을 갖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성육신의 원칙으로 말하는 문제는 단지 몇 명의 은사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고린도 전서 14장 31절은 “모두 하나씩 하나씩 신언할 수 있느니라”고 말한다. 

여러분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인 한, 모두 신언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은 모든 것을 성육신의 원칙으로 수행한다. 여러분이 어떤 것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멈추셔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우리는 너무나 지쳐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무 가련하다. 네가 없으면 나는 끝나고 만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무능력하게 되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상황이다. 하나님은 기독교에 의해 ‘불구자‘가 되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는 모든 성도들이 성육신의 원칙 안에서 말함으로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할렐루야! 사탄아, 나에게는 은사는 없지만 입과 혀와 영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할 수 있다”라고 외쳐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이다.

지난해에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셔서 러시아에 가는 것을 빨리 결정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결정을 빨리 내렸다 해도, 그 결정은 전시간 훈련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었다. 

훈련이 없었다면 6개월도 안되어 60명의 형제, 자매를 러시아에 보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러시아에 보내진 몇 사람만이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사람은 집회에서 말하였다. 그러나 60명 모두가 밖에 나가서 사람들을 방문하여 개개인에게, 가족에게, 모임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러시아의 믿는 이들은 매우 친밀하다. 그들은 단지 한 시간 동안만 그들을 방문하러 온 성도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성도들이 반나절 동안 그들의 집에 머물기를 원한다. 

이 시간 동안 그들은 성도들이 성경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되는 교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한다. 

우리는 이천 명 이상의 새로운 믿는 이들에게 침례를 주었다. 지금은 수백 명이 교회 집회를 참석하며 교회 생활을 하고 있다. 

이 새로운 믿는 이들에게 많이 말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주중의 집회나 주일의 집회는 적합하지 않다. 새로운 사람에게는 그들에 집에 가서 계속 말해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는 말에 은사가 있는 사람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는 러시아에 갈 때 그런 길을 취하지 않기로 결정했었다. 우리는 수천 명이 모이는 대규모의 집회를 선호하지 않는다. 모스크바와 세인트 피테스버그에는 단지 30명의 전시간 봉사자들이 교회를 섬기고 있다. 어떻게 이렇게 적은 수가 수천 명의 새로운 믿는 이들을 돌 볼 수 있는가? 

그러나 오히려 많은 수는 좌절을 주게 된다. 우리가 선호하는 것은 적은 수의 성도들을 침례주고 그들을 일으켜서 교회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을 통하여 현재 모스크바 교회에는 천 명 이상의 성도들이 있다.

나는 사랑하는 성도들 모두가 주님께는 여러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기 바란다. 

주님께는 그분과 함께 살고 그분에 의해 살고 그분 안에서 살고 그분과 하나 되어 사는 여러분이 필요하다. 여러분은 하나님-사람이다. 

여러분은 매일 성경에 있는 진리를 배워야 한다. 이 진리는 주로 하나님, 그리스도, 그 영, 생명,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교회와 관련된다. 그 밖에 다른 것을 말하지 말라. 

하나님, 그리스도, 그 영, 생명, 교회에 관한 지식 이외의 것은 사망을 가져오는 지식나무에서 온 선과 악의 관한 지식이다.

오늘날 회복 안에서 분열을 일으킨 많은 이들이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이 형제가 어떤 문제에서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내가 어떤 문제에서 잘못되었을지라도, 이것이 그들이 분열을 일으키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반대자들은 속임 당하였고 또한 다른 사람을 속이는 요소가 되었다. 

그들은 나의 일이 지금 조직이 되었기 때문에 성도들이 이 조직에서 나오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종류의 말을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이 아닌 “다른 교훈”이라고 불렀다(딤전 1;3-4).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 그리스도, 그 영, 생명,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되는 교회로만 이루어진다. 우리 모두는 이런 것들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여러분이 이 모든 진리들을 알고 어떻게 성육신의 원칙 안에서 자신을 훈련하는지를 안다면, 여러분은 어디에서나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관한 것을 끝없이 말할 수 있다. 그분은 삼일 하나님-아버지, 아들 성령-이시며 아들은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러분은 “그 영의 인도하심을 느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한 말씀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늘 아침 저는 공허합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사실, 여러분은 공허한 것이 아니다. 그 영의 인도에 관하여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 여러분이 최고로 영적인 될 때, 사실 여러분은 참되게 영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는 그 영의 인도가 있다. 이 인도하심은, 복합적인 관유인 내주하는 영이 우리 안에 끊임없이 움직이고 기름 바르고 분배하시는 것이다. 

매 분, 매 초마다 인도하심이 여기에 있다. 그분은 준비되셨으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가 말할 때 그분은 분명히 기뻐하실 것이다. 

우리의“동반자”가 우리와 함께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끝없이 그분을 위하여 말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을 위하여 말하기 위해자신을 훈련한다면, 우리의 말이 온 세상을 바꿀 것이다. 

우리가 침묵하면 하나님은 불구가 되신다. 우리가 말할 때 그분은 사슴같이 펄쩍 뛰시면서 행복해 하실 것이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9절에서 바울은 “성령을 소멸치 말고”라고 말한다. 그 영은 우리의 영과 은사를 불타게 한다(롬 12:11, 딤후 1:6).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영을 꺼뜨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거의 매일, 매주, 매달 우리는 그 영을 소멸시킨다. 

그 영은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분은 말씀하시는 영이시지만 우리는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우리는 자주 그 영을 소멸시킨다. 

나는 우리 가운데 조용한 성도들이 매 집회 때마다 말하고 심지어 여러 번 말하기를 격려한다. 

반 년 동안 매 집회에서 여러 번 말한 후에,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도록 자신을 말을 줄일 수 있다.

C. 말하는 속도를 훈련함

이전 두 메시지에서 우리는 신언을 실행할 때 우리의 영과 입(혀)과 목소리(소리)를 훈련할 필요가 있음을 보았다. 

신언할 때 우리는 또한 말하는 속도를 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말을 할 때 자신을 조정해야 한다. 

우리는 너무 빨리 또는 너무 느리게 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적절한 억양과 적당한 속도로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성도들은 말을 너무 빨리한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어떤 형제는 말을 할 때 어떤 시점에서 “셀라” 즉 쉼표를 삼입하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듣는 사람에게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적절한 기회를 주게 된다.

D. 몸짓을 훈련함

신언할 때 우리는 또한 몸짓을 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60년 이상을 말해 왔지만 여전히 합당한 동작으로 말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고 느낀다. 이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합당한 동작을 배우는 것은 일생 훈련하는 것을 요구한다. 합당한 몸짓은 우리의 말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거의몸짓이 없거나 전혀 몸짓 없이 말한다면, 우리의 말은 부자연스럽고 생명력 없이 보이므로 다른 사람을 매혹시키지 못할 것이다. 

동작이 너무 많으면 우리의 말은 유별나게 보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매우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말하기를 배울 필요가 있다.

E. 강조하기를 훈련함

신언할 때 우리는 또한 강조하기를 훈련하는 것일 필요하다. 

우리는 말을 할 때 핵심적인 단어로 표현하는 핵심적인 요점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 요점을 강조해야 한다. 

크게 외치는 것은 우리의 말을 강조하는 적절한 방법이 아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도록 핵심적인 요점을 매우 천천히 말해야한다. 

우리는 말을 할 때 억양이나 속도뿐 아니라 강세에도 주의해야한다. 우리는 성도들이 모든 말을 잘들을 수 있도록 적절한 억양과 강세로 말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말을 할 때 다른 사람의 귀를 관심해야한다. 합당한 속도와 몸짓과 강세를 훈련하는 것은 우리의 말에 큰 도움이 된다.

Ⅲ. 실행함

배우고 훈련하는 것에 더하여 우리는 또한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A. 거룩한 말씀의 한 부분을 기도하며 읽음

우리가 실행해야할 첫 번째 것은 거룩한 말씀의 한 부분을 기도로 읽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말씀을 읽기만 하거나 기도만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거룩한 말씀을 기도하며 읽어야 한다.

B. 성경의 짧은 부분을 자신의 말로 바꾸어 봄

우리는 또한 성경의 짧은 부분을 자신의 말로 바꾸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한다. 

이 문장에는 독립된 세 개의 절이 있다. 이 세 개의 절을 신언하려면 먼저 기도하며 읽어야 한다. 

“주님, 태초에, 아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오, 말씀! 얼마나 놀라운지요. 말씀, 말씀, 말씀이 태초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기도하며 읽은 것이다. 이것은 또한 성경을 자신의 말로 바꾼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며 읽을 때 말씀을 조금 설명할 수 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감사합니다. 주님, 당신은 하나님과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심지어 영원 과거에도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지나치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와서 ”주님,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은 하나님이셨습니다“라고 기도해야한다.

최근 몇 년 동안에 나는 아침 부흠을 위해 거룩한 말씀의 한 부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의 여러 부분을 기도하며 읽고 정독하는 것은 많은 성도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많은 사람이 간증하기를, 과거에 그들은 어떤 부분을 신언할지 알지 못했고 영감 있는 특별한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집회에 와도 신언하거나 주님을 위하여 말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을 사용한 이후로 그들에게는 기도로 읽고 먹고 소화하고 자신의 말로 바꾸어 본 어떤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영은 분발되고 그들의 생각에는 영감이 있게 되어서 이제는 말할 수 있는 어떤 주제가 있게 되었다. 

성경을 읽을 때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은 성경을 자신의 말로 바꾸어 보는 것이다. 

소선지서에 대한 훈련 집회 개요를 작성할 때 나는 각권의 주제와 중심사상과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를 적어야 했다. 

나는 각 권을 합당하게 이해하는 최상의 방법은 그 책을 나의 말로 바꾸어 보는 것임을 발견하였다. 

내가 모든 책의 모든 자의 모든 절을 나의 말로 바꾸어 볼 때 빛이 왔다. 

말씀 자체는 빛이다. 시편 119편 105절은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하며, 130절은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라고 말한다. 말씀 안으로 들어가 빛 비춤을 받는 가장 탁월한 길은 말씀을 자신의 말로 바꾸어 보는 것이다. 성경 말씀의 단어들을 동일하게 반복하는 것은 큰 도움이 안 된다. 우리는 자신의 말로 바꾸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오, 주님, 태초에, 오 태초에, 주님, 태초에 당신은 말씀이셨습니다. 오, 말씀, 주 예수여 당신은 말씀이셨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말로 바꾸어 보는 것이다. 이것은 빛을 비추기 위해 ”스위치“를 켜는 것과 같다. 우리가 자신의 말로 바꾸어 성경을 읽은 것이 ”스위치‘를 켜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이해하고 빛을 얻고 신언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C. 신언을 실행하기 위해 우리의 영감을 짧은 메시지로 작문하여 우리의 말하기를 준비함

우리는 또한 신언을 실행하기 위해 우리의 영감을 짧은 메시지로 작문하여 말하기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성경의 한 부분을 기도로 읽고 자신의 말로 바꾸어 본다면 분명히 어떤 영감을 받을 것이다. 

내가 성경을 나의 말로 바꿈으로 훈련 메시지 개요를 작성할 때 새로운 빛이 빠른 속도로 나에게 왔다. 

말씀을 기도로 읽고 자신의 말로 바꾸어 보는 것은 영감을 받는 최상의 길이다.

구약에서는 말씀을 묵상하는 실행이 여러 번 언급된다(수 1:8, 시 1:2, 119:15, 23, 48, 78, 97, 99, 148). 

그러나 신약에는 구약의 방식으로 성경을 묵상한다는 언급이 없다. 

구약의 성도들은 내주하시는 영을 갖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쓰여진 말씀을 묵상해야 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손에는 성경이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안에 또한 내주하시는 영이 있다. 

말씀을 기도하며 읽을 때 우리는 우리의 영을 사용하게 되며, 내주하시는 영은 우리의 기도로 말씀 읽기에 의해 분발된다. 

동일한 것이 우리가 말씀을 자신의 말로 바꿀 때에도 발생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가 앉아서 말씀을 묵상한다면 오래지 않아 졸게 될 것이다. 

우리가“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와 같은 말씀을 묵상한다면 이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생각만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태초에, 오, 주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아멘, 말씀, 할렐루야, 말씀!”이라고 말한다면, 우리의 영은 분발될 것이다. 

그때 내주하시는 영은 우리 안에서 뛰어 오를 것이며, 우리는 영감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가 받은 영감을 적을 수 있도록 작은 수첩을 항상 가지고 다니는 것도 매우 좋은 것이다. 우리는 영감을 받은 즉시 적어야 한다. 

만일 많은 것을 적을 시간이 없다면 핵심적인 몇 단어만 적어도 나중에 기억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 후에 우리는 신언을 실행하기 위해 우리가 받은 영감을 삼 분 정도의 신언으로 작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의 신언이 삼 분보다 더 길면 줄일 수 있다. 그리고 너무 짧다면 어떤 것을 추가할 수 있다. 또한 다른 성도들과 함께 준비하면서 신언을 실행하고 배울 수도 있다.

주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그녀의 친척인 엘리사벳을 보러 갔을 때(눅 12:39-55). 마리아의 신언은 구약 성경에서 인용한 짧은 구절들로 구성된 것이었다. 

이것은 마리아가 구약의 역사와 말씀과 요점에 매우 익숙했음을 증명한다. 그녀의 말은 즉각적인 “영감”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그녀의 존재 안에 축적된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같이 우리에게도 축적된 말씀이 있다면, 우리가 말하는 동안 우리 안에 저장된 모든 것이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도록 우리의 존재 안에서 솟아나올 것이다.

D. 신언하기 위해 작성한 메시지를 가지고 기도함

우리는 신언하기 위해 작성한 메시지를 가지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 신언을 위해 메시지를 작성한 후에는 우리가 작문한 것을 기도하며 읽을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함으로 우리가 쓴 것이 우리 존재 안으로 조성된다. 그때 우리는 집회에 가서 신언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준비한 신언은 매우 좋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E. 그 영의 내적인 충만과 부어짐을 간구함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는 우리의 신언이 충격력이 있도록 그 영의 내적인 충만과 위에서부터 능력으로 우리 위에 임하는 그 영의 부어짐을 간구해야한다.(행 6:19, 7:55, 4:31). 

이를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기도해야한다. 

집회 안에 있는 동안에도 한 면에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만 다른 한 면에서 그 영으로 충만되고 우리의 능력과 권위가 되시는 그 영이 우리 위에 부어지도록 간구해야 한다. 

이 메시지에서 나는 신언을 배우는 나의 방법을 여러분에게 제시하였다. 

나는 여러분이 집에 가서 이 요점에 따라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신언을 실행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여러분이 이렇게 한다면 여러분의 말은 나보다 더 탁월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성도들 안에 저장된 모든 풍성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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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Prophet) ‘말하도록 부르심 받은 자’]]

명칭과 역할: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아(렘 1:5;암 7:12)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을 말한다(렘 1:6-7, 9). 

히브리어로는 ‘나비’(nabi)로 ‘말하도록 부르심 받은 자’하는 뜻이다. 

선견자라고도 불렸고(삼상 9:9), ‘하나님의 사람’(삼상 9:6; 왕상 12:22; 렘 35:4), ‘하나님의 종, 여호와의 종’(왕상 14:18; 18:36; 왕하 9:7)으로도 불렸다. 

선지자직은 제사장과는 달리 세습되지 않았다. 

헬라어로는 ‘프로페테스’(prophetes)로 이 단어는 ‘어떤 신의 대변자로서 그의 뜻을 사람에게 해석해 주는 사람’을 의미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선지자는 신의 말씀을 해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만을 해석이나 가감 없이 그대로 선포하는 사람이었다(신 18:18). 

때로는 자기의 의지와 주변의 환경이 말씀과 반대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그는 그 말씀을 들고 나가서 선포해야만 했다. 

그 때문에 미움과 고난, 환난을 당했다(렘 38:1-6).

하나님의 참 선지자는 길흉을 말해주고 복채를 받는 이방 예언자들과 달랐다. 이스라엘 선지자는 단순히 길흉을 말해주는 미신적인 행위와는 달리 현 상황을 진단하고 백성들의 죄를 꾸짖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왕하 17:13-14; 슥 1:4). 미래에 대한 예언(신 18:20-22)은 이차적인 사명이었다.

---선지자들의 메시지: 구약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지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 관한 메시지였다. 선지자들이 전한 메시지는 ‘그때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게 선포되었다는 특징이 있다(겔 3:17; 암 4:12). 그들의 메시지에는 미래에 대한 예언이 들어있지만 선지자들의 말씀은 ‘그 당시 현재’를 겨냥하여 전해진 것이었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우선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사실을 깨우치려는 내용이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와 부패, 신앙이 있는 체 하는 외식 아래 들어 있는 불의를 지적하면서 회개를 촉구하였다.

---선지자들의 메시지에는 미래에 대한 예언도 들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를 위해서 주어진 것이었고, 그들에게 회개와 격려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미래에 관한 메시지는 심판의 메시지이든 구원의 메시지이든 그 당시의 메시지를 듣는 청중을 변화시키기 위해 선포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만일 이 같은 메시지가 선포되었는데도 사람들이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기를 계속 거절한다면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예고한 심판을 받을 것이고, 회개하여 주께로 돌아온다면 하나님은 심판을 멈추시고 그 대신 구원의 복을 백성들에게 부어주신다는 것이었다(렘 7:5-7; 18:7-8; 겔 18:23; 욘 3:4; 4:2).

마지막으로 선지자들이 선포한 메시지는 궁극적으로 장차 오실 메시아와 그의 나라에 관한 것이었다(사 2:2-3; 7:14; 42:4; 62장; 65:18-25; 렘 23:5; 겔 34:23-24; 37:24-25).

>>예레미야의 ‘참 선지자’ 구별법

----도덕성 테스트: 참 선지자는 영적인 권위와 함께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어야 한다(렘 23:13-14).

----영향력 테스트: 선지자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지자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렘 23:14).

----복음 테스트: 십자가와 회개의 메시지 없이 무조건 ‘평안하다’는 메시지만을 전한다면 그 사람은 거짓 선지자이다(렘 23:16).

----영성 테스트: 어떤 사람도 비밀한 장소에서 하나님과의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참된 선지자가 될 수 없다(렘 23:18-22).

----신학적인 테스트: 하나님의 친밀한 모습과 엄위한 모습을 둘 다 균형있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렘 23:23-24).

----메시지 테스트: 하나님은 꿈이나 환상으로도 말씀하시지만 선지자들 마음에 메시지를 주셔서 말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말씀을 전달하게 하신다(렘 23:25-32).

[[선견자(Seer)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꿈, 환상, 이상을 보고 예언하는 사람]]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꿈, 환상, 이상을 보고 예언하는 사람을 말한다(삼상 9:9). 히브리어로는 ‘로에’(roeh), ‘호제’(chozeh)로 ‘보는 자’, ‘미리 보는 자’라는 뜻을 담고 있다. 선견자는 선지자와 같은 의미로 쓰였으나(삼하 24:11; 왕하 17:13; 사 29:10; 30:10; 암 7:12; 미 3:7) 선견자는 계시를 받는 방법을 강조하는 단어이다. 후대까지도 선견자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대하 16:7, 10; 사 30:10; 암 7:12).

성경에 나오는 선견자들로는 사무엘(삼상 9:19), 갓(삼하 24:11), 헤만(대상 25:5), 잇도(대하 9:29), 하나니(대하 16:7), 아삽(대하 29:30), 여두둔(대하 35:1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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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에서 고린도전서 14장 '예언, prophecy'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그 문자적 의미 자체는 주로 예고나 예견(foreseeing...미리 앞서서 본다 = 선견)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에서 주된 의미는 예고나 예견(foreseeing)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 오히려 "Q의 말씀을 그분의 감동을 입은 자가 대언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득이하게 예고-예견-선견과 구분하기 위해 신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신언은 다음의 것들을 뜻합니다. 첫째, 위하여 말한다. 즉 다른 사람을 위하여 말하는 것 .....둘째, 말해 내다. 즉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 것. .....셋째, 미리 말하다. 즉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말하고 예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첫째-둘째 것만을 따로 떼어낸 개념으로서의 "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언이란 단어 대신 신언이란 단어를 쓸 때, 신언은 미리 말하는 것으로 구성되었을 뿐 아니라 어떤 것을 말해 내고, 위해서 말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서가 예견적인 예언을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책에 있는 대다수의 예언이나 말은 하나님을 대신한 선지자의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언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주로 “위하여 말하는 것"과 무엇을 말해 내는 것"입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감동아래 하나님을 위해 말하는 것입니다. 

마빈 빈센트 Marvin Vincent는 그의 신약에 나타난 말씀 연구(Vol. 3. P. 156)에서 신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약에서의 예언은 구약에서와 같이 예견이 아니라 경고와 권면과 교훈과 판단과 그 마음의 비밀을 나타낸 것을 영감으로 받아 전한 것이다. 고린도 전서 14장 3절, 24절 25절을 보라. 신약의 선지자들은 직접적인 영감 아래 말하기 때문에 교사들과는 구별된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난 예언에 대한 주된 사상은 예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영감 아래 하나님을 위해 말하는 것입니다. 

 신언을 하는 것은 초기 교회시대에 모든 믿는 이들이 실행하던 은사이었습니다. 하여,고린도 전서 14장에서는 (14:1,31)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교회가 하락하면서 특별한 사람들만 성경을 읽고 그것을 전달해 줌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지체들의 ((주님을 말해냄의))기능 발휘를 점점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신언하는 것은 이것을 회복하는 것이고 다만 주일 집회에서만 신언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사람들에게 주님을 위해 주님을 말해 낸다면 그것도 참된 신언입니다. 

주일 아침 신언 집회에서 모든 성도들이 모여 신언하는 것은 주중의 생활의 표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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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전장에 걸쳐서, 진정으로!! 질서 있게 한 사람씩 고린도교회가 [각자가 집에서 Q과의 독대를 통해서 주로부터 받은 바, 교회의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함을 위해] Q의 감동을 따라 예언(신언(申言..거듭 말함))하기를 힘쓰도록 권고하는 것을 봅니다.((이것은 목회자 1인만 강단에서 설교하는 현재의 예언의 실행 패턴과는 전혀 다릅니다)) ....

[고전14:3..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But one who prophesies speaks to men for edification and exhortation and consolation.] 

[고전 14:31.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For you can all prophesy one by one, so that all may learn and all may be exhorted;..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씩 신언(申言..거듭 말함)할 수 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배우고 모든 사람이 격려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For you can all prophesy one by one that all may learn and all may be encoura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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